톡너를 망가뜨릴 시간 (69회) 잃어버린 기억
채이는 연락이 끊긴 지 3일 만에 핸드폰을 충전하고, 소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수백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고, 그중에는 강유하에게서 온 전화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느 작은 모텔에 숨어 있던 채이를 찾아간 건 소은이었다. 며칠 동안 무엇을 먹기나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모텔 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채이를 본 소은은 가슴이 먹먹해지며,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3년 전, 갑작스럽게 채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현장에 있었던 채이는 그 자리에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깨어났을 땐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유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 다시 깨어난 그녀를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채이는 그저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슬퍼하고 힘들어했을 뿐이었다.
[일시적일 수도 있고, 오래 지속될 수도 있지만, 치료를 받으면 기억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은은 채이의 담당 의사가 하는 치료 권유를 거부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채이한테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보다 바로 앞에 닥친 슬픔을 더 잘 이겨내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가족을 잃은 그 슬픔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겨운 채이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채이에게는 다행인 일이었을지도 몰랐기에.
소은의 바람대로, 채이는 그를 완전히 잊고 일상을 살아갔다. 아직 어린 남동생을 보살피며, 그녀는 정말 열심히 살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소은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만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제 손목에 팔을 그으며 스스로 죽으려고 하지도 않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었기에 채이가 잃은 기억 따위, 무시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떡하지.
채이야, 너 혹시 기억을 찾은 건 아니지?
자꾸만... 불안이 엄습해 와 밤잠을 설치면서도 소은은 선뜻 물어보지 못했다.
기억을 찾았다고.
그런데 왜 여태 기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냐고, 왜 치료를 받지 못하게 외면했냐고 따질까봐 무서웠다.
똑 똑,
꾹 닫힌 채이의 방을 두드리며 소은은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채이야, 밥 다 해놨는데..."
침대 옆 화장대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채이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닫고 말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던 채이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네가 좋아하는 거 잔뜩 해놨는데,"
채이의 시선이 소은에게로 옮겨지자, 소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밥 먹을까?"
할 말이 많았지만, 결국 꺼낸 말은 단순히 밥 이야기가 전부였다.
"응."
몇 초 더 소은을 바라보던 채이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돌려 소은과 마주 선 채이의 얼굴은 예상보다 어두운 기색이 없었다.
조용한 점심식사 속에서 소은은 밥을 먹으면서도 온통 채이의 얼굴만을 살피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닌지, 아니면 왜 이렇게나 말이 없는지, 여러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채이에게 얘기했습니다. 기억을 잃은 건 내가 아니란 것을.]
강유하와의 통화 중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채이가 정확히 언제부터 기억을 잃은 건지, 왜 잃은 건지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과거의 일들을 다시 말해주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채이가 그때 얼마나 힘들어했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자를 찾아 맨날 울지 않았던가.
저 자신도 몸도 마음도 다쳐 놓고서ㅡ
자신 때문에 그자가 죽은 거 같다고 반은 미쳐있었지.
헤어지라고 할 때 헤어질걸, 그러면 다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을 텐데,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의 비극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 채이는 저 자신을 채찍질해 댔었다.
"채이야."
소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용히 채이를 부르며 입을 열었다.
마침, 식사를 마친 채이가 마지막으로 물잔을 들고, 조용히 소은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행이야. 며칠 동안 네가 연락이 안 돼서 정말 놀랐어..."
"미안해요, 언니."
"아, 아니야. 사과하라고 말한 건 아닌데..."
소은은 급히 팔을 가로저으며 말을 멈추었다. 이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팔을 식탁 아래로 내려놓고는 작은 숨을 쉬었다. 채이의 큰 눈망울을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한테 전화해 줘서 고마웠어."
텅 빈 눈빛으로 소은의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이는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초연한 미소였다.
식사를 마친 후, 채이는 설거지를 끝내고 소은에게 산책하러 가겠다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걱정하는 소은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고 나서야 따라 나오겠다는 그녀를 떼어낼 수가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익숙했던 그 길에 들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도로 양옆에 길쭉하게 뻗은 벚꽃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초록색으로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가을을 맞이하며 서서히 본래의 색깔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봄이 되면 화사한 벚꽃잎이 날리던 거리였다. 온통 핑크빛으로 물든 벚꽃잎이 흩날릴 때면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붕 뜨기 일쑤였다.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춰올렸다. 조용히 그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딱 저 나무였지. 저 나무 아래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저 간단한 하얀 티에 청바지만 입은 그를 보고 설레서 죽을 것만 같았던 그날이 다시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벚꽃 나무 거리를 천천히 걷던 채이는 갑자기 떠오른 다른 생각에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이번에는 조용한 골목길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용하면서도 정겨운 동네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낡은 주택들이 늘어선 이곳은 6년 전, 잠시 살았던 자취방이 있던 곳이었다. 채이는 무작정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골목길에 발을 들여놓자, 몇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르던 계단, 그리고 그 계단 중간쯤에서 보던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스무 살의 채이가 유하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따라오자 채이는 깡충 뛰어 몇 단을 먼저 올라갔고, 다시 그와 마주 서서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까 키가 비슷하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졌고 행복해했다.
그래, 행복, 정말 행복한 얼굴을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계단을 오르던 그날, 내 마음은 어땠던가?
그때도 지금처럼 동네 곳곳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었다.
어느덧 익숙한 자취방 건물 앞에 다다랐다.
낡은 4층 건물, 그 안에 나와 그의 작은 쉼터가 있었다.
그곳을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던가.
[유하 오빠, 또 뭘 사 온 거야? 집이 터질 것 같아! 그만 좀 사라고~]
온 집 안이 유하가 사들인 물건들로 가득 찼고, 나는 타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지.
[그러니까 큰 집으로 이사 가자니까.]
그때 나는 그를 평범한 직장인이라 생각했기에 나 때문에 돈을 낭비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고, 괜히 더 좋은 집을 구하는 것도 사치라며 설득하려 했다.
아마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어도, 내 감정이 쉽게 사라질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나는 그를, 상상 이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아이를 잃었을 때 그렇게까지 절망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가 사라진 뒤,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하룻밤 사이에 그가 사라졌고 찾을 길이 없었다.
사고로 발목이 부러졌고, 이제 4주 남짓했던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아들한테서 떨어져라'는 냉혹한 말을 내뱉던 그의 무서운 아버지를 찾아갔다.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얼굴만 보고 가겠습니다. 제발요.]
그의 아버지가 듣든 말든, 나는 인터폰을 붙잡고 애원했다.
부러진 발목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채, 나는 매일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러다 결국, 저택 앞에서 나오는 고급 승용차를 가로막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겼다.
위엄 있고 든든해 보이던 그의 아버지도, 전과는 달리 한층 수척해져 있었다. 그 역시 하루 아침에 무너진 아들을 보며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주세요.]
나는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산산이 부서진 그의 몸은 이미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것을.
난 이제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
5년 전
"임신입니다. 4주 되었네요."
채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산부인과를 나섰다.
임신이라니. 내가 아이를 가졌다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멍한 상태로 아직 나오지도 않은 아랫배를 감싸안았다.
스물한 살.
아직 학생 신분인 자신에게 이 소식은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어떡하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장 유하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었지만, 곧 다시 화면을 꺼버렸다.
아이를 가졌다는걸, 유하는 기뻐할까?
아니면... 부담스러워할까?
그의 아버지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이 소식이 유하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허락받지도 못한 관계인데... 이 사실을 알면, 유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며칠이 지나도록 유하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채이는 고민에 휩싸였다.
과 모임을 피했고, 술을 마시자는 친구를 거절했다.
가방 깊숙이 숨겨둔 초음파 사진을 몰래 꺼내 볼 때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생명이 내 안에 있을까?
신기하면서도, 나중에 배가 불러오면 학교는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나 유하야. 폰이 망가져서 그러는데 그냥 이 주소로 와줘. 거기서 만나.>
유하는 보통 문자보다는 전화를 먼저 하는 성격이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다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아, 지금 전화받기 곤란해. 내 전화가 아니라서. 오면 얘기하자.>
채이는 아무 의심 없이 메시지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한적한 곳에 도착해 유하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방금 온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
도착했어.>
잠시 후 짧은 답장이 왔다.
<알았어.>
금방 오겠지.
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축복아, 아빠가 곧 올 거야. 오늘 아빠한테 네 존재를 알리려고 해. 엄마가 조금 떨리긴 하는데, 네가 엄마한테 용기 좀 줄래?"
행복한 미소를 짓던 순간,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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