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71회) 나는 여전히,
요즘의 채이는 매일 같이 외출했다.
오늘도 밖에 나간 그녀가 언제 돌아오는지 걱정되던 차에 도어락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은은 뭐에 홀린 것처럼 현관까지 뛰어나갔다.
“어디 갔다 왔어?”
소은이 물으면, 채이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그냥 잠깐 여기저기…“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채이는 그저 웃으며 넘겨버렸다. 그 애매한 태도에 소은의 근심은 점점 커졌다.
외출 중인 채이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오늘도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미안, 걷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었다.
누가 봐도 실컷 울고 들어온 모습인데,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사이, 채이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 안 했지? 오랜만에 밖에서 먹을까?”
그녀는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채이는 소은과 함께 평소라면 잘 찾지 않을 가게에 들어섰다. 가게는 동네에서 제법 유명한 일식 이자카야였다.
이 술집의 가장 큰 매력은 오픈된 자리는 당연하고, 아늑한 개별 룸들도 마련되어 있어, 번잡함을 피해 조용하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방송에 나온 적도 있어 그런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메뉴판을 펼친 채이는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을 하나둘 시켰다.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닌지 모르겠네.“
주문을 마친 후에서야 살짝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채이를 보며, 소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나를 몰라? 대식가인 나를 너무 얕보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제 배를 툭툭 두드리는 소은을 보며, 채이도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먼저 나온 간단한 안주와 하이볼.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들이켰다.
입안에서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넘긴 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일할 때 손님들이 하이볼을 그렇게 많이 사 가더라고. 난 늘 소맥만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셔보니까 하이볼도 꽤 괜찮네.”
풋콩을 집어 조용히 씹으며 괜찮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은 말없이 하이볼을 비웠다.
평소의 채이라면 일부러 이런 술집을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굳이 이런 곳에 오자고 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소은은 묵묵히 채이를 바라보았다.
어제도, 그제도 채이는 외출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집에 돌아온 적은 없었다.
채이의 얼굴을 살피던 소은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린 그녀의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이미 보았다. 그녀의 왼쪽 손목에 있던 타투 스티커가 깔끔하게 사라진 것을.
소은이 말없이 채이의 손목을 바라보자, 채이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전부터 궁금했거든. 이게, 어떤 상처였는지.”
잠시 고요가 흘렀다.
소은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고, 채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채이였다.
“나 요즘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지 궁금했지? 언니한테 바로바로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은 하이볼 때문인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채이는 조용히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사실, 어디를 가겠다고 정해둔 건 아니었어. 그래서 딱히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웠고… 그냥 몸이 가는 대로, 문득 떠오르는 곳들을 찾아갔어. 잊고 있던 거리와 풍경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봄바람처럼 가볍다가도 어느 순간 겨울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리곤 했어. 그런데도 멈추지 못했어. 하루하루 같은 걸음이 반복됐어.”
말 그대로 그녀의 몸은 잊힌 기억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오늘은 꼭 여기에 가야지’ 같은 계획도, 특별한 의미도 없었다. 그저 이끄는 대로 걸었을 뿐. 그래서 소은에게도 뚜렷하게 어디에 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온종일 그렇게 헤매고 나면 몸은 녹초가 됐고, 그럴 때면 아무 말도 할 힘 없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미안해.”
조용히 듣고 있던 소은의 눈가가 붉어졌다. 자책으로 가득 찬 슬픈 눈으로 채이를 바라보았다.
“너의 잃어버린 기억… 어쩌면 더 빨리 되찾을 수도 있었어. 그냥… 그냥 내가, 내 멋대로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거절해 버렸어.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잊고 사는 게 차라리 너한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 의사도 묻지 않고, 그냥…”
말을 잇지 못한 채, 소은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채이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된 소은에게 휴지를 건네고, 조용히 점원을 불러 소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정확한 비율을 끝내는 제대로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그에게서 어깨너머로 배운 대로 소맥을 섞으며 채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그때 잘한 거야. 덕분에 난 잠시라도 숨 돌릴 시간이 생겼으니까.”
만약 언니가 아니었다면, 또다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겠지.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도, 그걸 잊은 채 혼자만의 슬픔에 갇혀 허우적대기만 했을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난 오히려 언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채이는 조용히 소맥을 담은 잔은 소은 앞에 밀었다.
“난 역시 소맥이 더 좋은 것 같아.”
싱긋 웃는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져, 소은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언니 덕분에 알게 됐어. 힘들다고만 생각했던 내 삶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발목이 불편할까 봐 틈만 나면 앉아서 쉬라고 했던 편의점 사장님… 그리고 편의점에 자주 오던 동네 손님들…”
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떠오르는 얼굴들을 하나씩 생각해 냈다.
“그리고… 비록 뻥- 차였지만,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 줬던 수호 오빠와 그의 어머니도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
그들이 어디에 있든,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예전처럼 큰 걱정 없이, 따뜻한 나날을 보냈으면 했다.
비록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함께한 소중한 기억만큼은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든, 부디 잘 지내기를.
“그래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걱정해주고 힘이 되어준 언니라는 것도…, 언니, 난 언니가 정말 고마워.”
자신은 크게 한 일도 없는데 자꾸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소은은 가슴 깊은 곳이 알싸하게 저리는 기분이었다. 잔을 들어 소맥을 한 번에 마셨다. 맥주의 톡 쏘는 기운과 소주의 알콜 향이 섞여 목을 타고 넘어가자, 막혔던 가슴이 펑 하고 뚫리는 것만 같았다.
“나 오늘은 엄마를 만나고 왔어.”
잔을 매만지던 채이가 말했다.
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눈이 발개서 집에 들어온 이유를.
“어머니가 좋아하셨겠네. 많이 이야기했어?“
소은은 부드러운 얼굴로 채이를 바라보았다.
“응. 이런저런 이야기들, 길게 나눴어. 수다스럽게.”
채이는 낮은 목소리로 답하다가 소맥을 다 비우며 잔을 내렸다.
“언니.”
“응.”
“나 있잖아…”
채이는 문득 말끝을 흐리며 망설였다. 하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심호흡을 하며 다시 어려운 말을 꺼냈다.
“나 오늘 엄마한테 가서 많이 빌었어. 나 때문에 일찍 떠나신 우리 엄마한테, 또다시 못 박는 짓을 할 거라서.“
“채이야…”
“엄마가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 알아.”
“…….”
혼자 욕실에 틀어박혀 생을 포기하려던 그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소은이가 자취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딸이 또 나쁜 생각을 가질까 봐, 늦게 귀가하는 게 걱정되어 밤길에 서서 기다리다가 변을 당한 엄마.
그 모든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엄마는 언제나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딸 자랑을 멈추지 않던 분이었다.
정말 따뜻하고 착한 분이셨는데…
엄마를 떠올리자, 채이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나 때문에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나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미워해야 하는데.
평범했던 일상을 무너뜨리고 흔들어놓은 그 사람을 원망해야 하는데.
“언니, 미안해… 언니 가게까지 접게 만든 사람인데… 미워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런데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나, 그 사람한테 가고 싶어.”
“……채이야.”
소은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채이를 조용히 불렀다.
“건물을 달라고 했어.”
소은이 말을 잇기 전에 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야. 내가 미웠겠지. 증오했을 거야. 무슨 일이 발생하든 절대 손을 놓지 않겠다고 했는데... 난 정작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그 집에서부터 대가를 받고 떨어져 나갔으니까…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겠어.”
"......"
"그러니까, 언니... 제발 그 사람 너무 미워하지 마. 내가, 내가 어떻게든 언니가 잃은 걸 대신할 방법을 찾을게..."
잘못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했다.
그 사람은 억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을 거다. 설령 그런 방식이라도.
"채이야."
소은이 재차 채이를 불렀다.
"지금 넌… 내가 걱정되는 거야?"
"그게… 언니…"
채이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난 알아. 언니가 나를 단순히 아는 동생이 아닌, 가족 이상으로 아껴준다는 거.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감싸주는지… 그래서, 너무 잘 알아서."
채이는 망설이다가도 결국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언니가 안 된다고 하면 난… 포기할 수 있,"
소은은 고요히 채이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 속에서 채이는 말을 매듭지었다.
"…을 수 있을 것 같아."
"...거짓말."
소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말없이 소주병을 들어 채이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눈물이 맺힌 채이를 힐끗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자신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난 말이야."
긴 침묵을 깨고 소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네 말대로, 네가 다시 예전처럼 영혼 없이 살아간다면, 나는 기를 쓰고라도 막을 거야. 어머니를 대신해서라도 그래야 하니까. 하지만..."
소은은 손가락 끝으로 소주잔을 톡톡 건드렸다.
"네가 정말 행복해지는 길이 그 사람한테 다시 가는 거라면… 난 널 붙잡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언니…"
소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네가 좋다면야, 누가 널 말려. 너 생각보다 고집 엄청 세거든."
그러면서 두 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 모습에 채이는 결국 웃고 말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마워, 언니."
"아, 됐어.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그리고 말은 이렇게 해도, 강유하 그 인간… 곱지 않아. 너를 반쯤 미치게 만든 사람 아니냐. 그때 욕지도 여행... 너를 데려갔던 걸 정말 많이 후회했어."
"언니이…"
채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미안한 얼굴을 하자, 소은이 얼른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얼마 전까진 그랬다는 거야. 지금은… 생각을 좀 바꿔보려고 해."
소은의 눈동자 속에서 잔잔한 물결이 이는 듯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었다. 난 생각보다 그렇게 실패한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언제 갈 건데?"
"응?"
채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소은을 바라보았다.
"요즘 그 집안, 난리도 아니던데. 뉴스에서 도대체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알겠더라."
소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너, 이렇게 나랑 술이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혹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러면서 그녀는 입꼬리를 당긴 채, 턱짓으로 가게 출입문을 가리켰다.
채이는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소은을 돌아보았다. 소은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결심이 선 듯, 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안해, 언니. 그리고… 고마워."
망설임 없이 룸을 뛰쳐나가는 채이의 뒷모습을 보며, 소은은 가볍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엔 제대로 잘 해봐. 한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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