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망가뜨릴 시간 (73회) 끝이 곧 시작. /완결.
[한참 동안 서재에서 나오지 않으셔서 들어가 보니 쓰러져 계셨습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테이프 레코드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던 터라 우선 그것부터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서는 망연자실한 유하에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그에게 지시했던 일들, 그가 보고했던 사건들에 관해 설명했다.
사고 이후, 유하의 의식이 돌아왔지만 며칠 동안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했고, 그 모습을 담은 영상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걸로 인해 더욱 큰 절망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잃은 슬픔과, 자신을 잊은 남자… 그 모든 것이 쉽게 넘길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라며,
사건의 발단인 강교남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고 신고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저희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자신을 찾아왔을 때 전무님을 완전히 끊어내려고 일부러 대가를 요구했던 것 같더라고요.]
스스로 삶을 끝내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던 그녀가 결국 어머니의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한 뒤 기억을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가슴이 옥죄어왔다. 나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결국, 나 역시 너를 향한 온갖 비난 속에 휩쓸려 있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아버지에게서만 찾는 게 맞을까. 정작 나는 제대로 해낸 게 하나라도 있긴 한 걸까.
나는 왜 너를 믿지 못했을까,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떠날 사람이 아니란 걸 왜 몰랐을까,
나는 자신을 피해자라 여겼고,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전부라고 믿었고, 그것이 곧 진실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아보니, 그 어리석은 확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상처받은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가장 깊은 고통 속에 갇혀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닌, 채이였다.
쓰디쓴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무작정 찾아가 잘못했다고 빌면 모든 게 끝날까.
아니, 난 애초에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야. 처음부터 난 네 앞에 다시 서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아 정말 미안하다.
채이야, 난 네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정말 나쁜 사람이야. 정말 미안해.
그런데도,
나는 네가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우면 어떡하는 거지.
미친 거지. 단단히 미친 거지.
어두운 하늘처럼 어디론가 깊이 사라지고 싶다. 너의 고통에 비해 내 슬픔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너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다.
이기적인 나는 아직도 너의 존재가 그리워.
차가운 바람이 살을 파고들 듯 불어왔지만,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기엔 오히려 제격이었다.
"안 추워요?"
문득, 또렷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설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현실을 부정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 아니니까 떠봐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녀와 마주쳤다.
한없이 맑으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
순간 모든 소리가 멎었다.
이렇게 마주하면 안 되는 사람을 본 듯, 유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올라오는 설움을 삼키며, 채이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것 좀 봐. 이렇게 얇게 입고, 이 새벽에 혼자 청승맞게 서 있으면 어떡해요."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즘… 많이 힘들죠?"
그녀의 다정한 물음에도, 여전히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저... 많이 늦은 거 아니죠? 유하 오빠."
채이의 눈에 머물렀던 눈물이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유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끄, 끄윽."
봉인된 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졌다. 억지로 참아보려 했지만, 그 모든 감정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미안함과 후회,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것이, 그 모든 것들이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어 마구 찔러댔다.
채이는 아무 말 없이 유하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그를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
"......."
"........"
새벽의 차가운 기운 속, 유하는 테라스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었다. 눈물이 어느 정도 잦아들며 방에 들어왔고, 유하는 채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리며 딴 곳을 쳐다봤다.
그러나, 채이도 그를 마주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고 나서, 유하와 처음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 그녀 역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고심하고 있었다.
"저..."
"채이..."
서로 동시에 말을 꺼냈고, 그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섰다. 몇 초간의 침묵 후,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둘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무리… 잘하셨어요?”
채이의 목소리엔 조심스러운 염려가 배어 있었다.
유하는 조용히 시선을 떨궜다.
마무리.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번에도, 5년 전처럼 너에게 상처 입히고, 위협했던 사람.
피로 이어진, 끊을 수 없었던 고리.
“……응.”
짧은 대답과 함께, 마음 한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채이는 말없이 유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작은 손길 하나였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그 다정함이 마치 용서 같아서, 오히려 더 가슴이 조여왔다.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가슴 한편을 찔렀다.
“……미안해.”
감정이 목을 막았다. 유하는 겨우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부서질 듯 아팠다.
채이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빠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말에 유하는 고개를 들어 채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잔잔했다.
어떤 비난도, 원망도 없이 오직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넌 언제나 그대로였는데… 나는 그걸 보지 못하고, 너를 오해하고… 미워했어. 네가 받은 상처 중에 나도 포함이어서, 난 그걸 너무 늦게 알아서, 나는, 정말…”
떨리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이는 유하의 손을 더 꼭 감쌌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여섯 살이나 어리고, 나보다 훨씬 작았던 너는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가 너였다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용서라는 걸… 그 깊고 조용한 마음을 나는 따라갈 수 있었을까.
옹졸한 나는, 아마 평생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너의 삶을 망쳐버린 거야. 한채이.”
유하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탓하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채이는 말없이 눈을 감고, 고요한 숨을 들이켰다. 긴 침묵 끝에 숨을 내쉬고 나서야 그녀는 조용히 눈을 떴다.
“나만 그런가요. 오빠도… 나를 만나고부터 엉망이 됐잖아요.”
“그래도 나는 너보다—”
“그만요.”
채이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끝자락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말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그의 어깨가,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채이는 여전히 그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우리, 서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했어요.”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가, 그를 향해 조용히 웃었다.
“이젠… 조금씩 내려놔요. 같이.”
유하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원망도, 아픔도 아닌
오직 ‘함께’라는 말만이 고요히 맴돌고 있었다.
정말 가능할까.
우리가 아무 일 없던 듯,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내가, 그저 나 하나 좋자고 너를 다시 곁에 붙잡아도 되는 걸까.
나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수없이 되묻는 마음속 질문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런데—
그 모든 소란은 채이의 단단한 눈빛 앞에서 허무하게 잠잠해졌다.
“채이야…”
내 욕심을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망설였는지 모른다.
사실은, 나는 네가 필요한 것 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너 없이는 안 되겠어.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게 두려웠다. 그저 염치없게만 느껴졌으니까.
“기회 줄 때… 도망가.”
지금이라면, 네가 고개를 돌리고 등을 보인다면 나, 널 보내줄 수
있어.
네가 더는 나와 함께할 용기가 없다고,
나를 보는 게 이제는 아프기만 하다고 말한다면—
그래, 그럼… 나, 물러날게.
그게 너를 위한 길이라면.
하지만 지금 아니면, 안 돼.
내 마음이 너를 단단히 감아버릴 거야.
벗어나려 해도,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을 만큼, 널 나에게 묶어둘 거야.
지금을 놓쳐버리면 그땐 나도, 널 놓을 수 없어. 내가 싫다고 울부짖어도, 그 어떤 말로 나를 밀어내도 절대로…
절대로 널 보내지 못할 테니까.
잠시, 공기가 멈춘 듯 고요했다.
그러다—
“도망가긴요.”
채이가 작게 웃었다.
“어차피 또 따라올 거잖아요. 오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빛이 아른거렸다.
“나는 오빠를 잡으러 온 건데… 오빠는 나를 놓을 생각이예요?”
입술을 삐죽이며 웃어 보인 채이의 말에 가슴이 저릿하게 울렸다.
“이번에도… 나는 잘못 찾아온 건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그녀.
그 순간, 나는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고, 내게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채이의 눈. 조용한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 안에서
유하는 분명히 들은 거 같았다.
안심해요. 나, 떠나지 않아요.
그 따뜻한 고백에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유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잘 찾아왔어.”
가슴속에 파도처럼 밀려든 말,
고맙다. 정말, 고맙다. 이렇게 다시 와줘서. 다시 날 믿어줘서.
이제는, 너를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어떤 순간에도.
***
“이게… 정말 제 거라고요? 진짜로요?”
소은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에 들어서자,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두 눈은 끝없이 커지고, 입술은 자꾸 말을 더듬었다.
“네,”
유하가 조용히 대답했다.
“미안했던 것도 있고… 고마웠던 것도 있어서. 작지만, 마음을 담아 준비했어요.”
소은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은한 조명이 반짝이는 나무 바닥 위로 그녀의 발걸음이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벽면에 기대어 놓인 캔버스들과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드로잉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이곳은 유하가 몇 개월 동안 준비하고 마련한 아틀리에 카페였다.
낮에는 조용한 카페처럼 운영되어, 사람들이 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공간.
하지만 오후가 지나면, 소은만의 색으로 채워지는 작은 예술 작업실로 변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과 타투, 그녀만이 할 수 있는 감정 드로잉 클래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손끝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소은이라는 사람 자체를 믿고 존중하는 마음이 담긴 장소였다.
소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떴다.
“…나, 여기서 진짜 괜찮을까…”
“그럼, 언니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직이 묻는 목소리에 유하 곁에 있던 채이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인생이라는 게 참,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더니. 요즘 들어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들이치는 창 너머,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웃고 있는 채이와 유하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듯, 소은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채이야.
그래, 네가 제자리를 되찾은 것 같아 정말 다행이야.
그걸 이렇게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참 고맙고, 기뻐.
“우와, 여기가 진짜 소은 누나 가게예요?”
쾌활한 목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활짝 열리는 문 너머로 들어선 건, 얼마 전 수능을 마친 채이의 남동생, 서준이었다. 스무 살의 봄을 막 맞이한 청춘답게, 해사한 얼굴엔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서준은, 한때 유하가 채이와의 관계를 오해하게했던, 그 사진 속 인물이었다.
“어, 누나랑 매형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서준의 말에 순간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웃음이 퍼졌다.
매형이라니.
세상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동생 덕분에, 괜히 분위기가 한층 더 따뜻해졌다.
소은은 조용히 웃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렇게, 이 끝이 새로운 시작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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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참 재밌게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