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3-1

3학년2반 | 2022.03.03 07:14:08 댓글: 0 조회: 458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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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1 장 호접곡의 비화(秘話)


기인기사(奇人奇事)라는 말이 있듯이 괴팍한 사람만이 괴팍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 모양이다.

호청우도 괴팍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장무기에게 허리를 깊숙이 꺾어 읍을 했
다.

"장형제,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부득이 자네에게 무례를 저질렀
으니 제발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게."

장무기는 조롱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 분연히 말했다.

"난 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입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요."

호청우는 난데없이 자신의 뺨을 철썩철썩 갈겼다.

"장형제, 자네는 나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네. 난 아내의 안
위가 염려되어 조금 전에 자네에게 몹쓸 짓을 한 걸세."

장무기는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이 여인이 호 선생님의 부인이란 말입니까?"

호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만약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으면 다시 내 뺨을 때
리게. 아니면 내가 자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겠네. 자네가
날 구해 준 것은 별게 아니지만 집사람의 생명까지 자네가 구해
준 걸세."

호청우는평상시 매우 근엄했다. 그가 스스로 뺨을 때린다는 것
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무기는 그가 진정으로
자기에게 사과를 하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이 여인이 그의 아내
라는 것을 알자 끓어올랐던 분노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뭣을 숨기겠는가? 집사람의 성을 왕(王)
이며 이름은 난고(難姑)라고 하네. 우린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
을 배운 동문이라네. 나는 스승님으로부터 무공 이외에 의술을
배웠지만, 집사람은 독술을 배웠지. 그녀의 말을 빌리면,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살인을 하기 위함이므로 독술과 일맥상통한다고
하네. 오히려 독술을 상당한 경지로 터득하면 그 용도가 무공을
능가한다고 했네. 의술은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게 목적이
니 만치 무공에는 위배된다는 걸세. 난 집사람의 심오한 이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녀의 생각이 나보다 열 배는 더 깊
다는 걸 솔직히 시인하네. 하지만 난 워낙 의술에 대해 깊은 흥
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네. 지
금 와서 생각해도 그녀의 진심어린 충고를 거역한 게 후회스럽기
만 하네....."

호청우의 말은 계속이어졌다.

"우리 두 사람은 비록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서로 깊이
사랑했네. 스승님께서도 우리가 결합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우린 순조롭게 부부가 될 수 있었네. 나중에 우린 강호로 나와
각자 명성을 얻게 되었지. 나를 의선이라 일컫는 사람이 있듯이
집사람을 독선(毒仙)이라 칭했네. 그녀의 독술이야말로 타의 추
종을 불허했네. 그녀는 자신의 독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
게 만성적인 독약을 복용시켰네. 중독된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
치료를 의뢰했지. 그런데 난 어리석게도 그들의 독을 치료해 주
었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불충이라는 것도 모르고 오히려 득의
양양했으니, 나보다 더 어리석고 미련한 놈이 세상 천지에 또 있
겠는가?"

기효부와 장무기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매우 못마땅
하게 생각했다.

호청우는 자신의 괴론을 다시 펴나갔다.

"그녀는 늘 나에게 온순했으며 정감이 두터웠네. 이 세상에 그
녀보다 더 좋은 여잔 또 없을 걸세.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거듭
하여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네 그녀에게 중독된 사람을 계
속 치료해 주었으니 말일세. 나중에 난 내 자신이 저지른 과오가
너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게 독을 당한 사람이라면
절대 치료해 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네. 세월이 흐르자 난 자연
히 <견사불구>라는 외호가 생기게 되었지....."

호청우의 괴론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
다는 듯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내는 내가 과오를 뉘우치자 그 동안 속상했던 일을 잊고 날
용서해 주었네. 그런데 개과천선한 지 몇 해가 되지 않아 아주
해괴한 독을 당한 환자를 만나게 되었네. 그 증상으로 미루어 아
내의 짓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네. 치료를거부하기
로 작심했네. 그러나 증상이 워낙 특출하여 손을 써보고 싶은 짜
릿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네. 결국 며칠 동안 이를 악물고 참은
보람도 없이 그만 자제력을 잃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그 자
를 완치시켜 주었네....."

여기까지 들은 장무기는 혀를 내둘렀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
히 납득할 수 없는 예기였다.

호청우는 표정마저 울적하게 변해 말을 계속했다.

"그 일로 인해 아내는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훌쩍 호접곡을
떠나고 말았네. 나는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네. 그러나 병을 치료하는 게 유일
한 취미인지라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강요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괴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만 했네. 내가 치료해 준 사람들 중에는 아내의 작품도 섞여
있었네. 단지 그녀의 수법이 갈수록 절묘해져 난 쉽게 알아내지
못한 채 치료를 해 준걸세. 그러니 갈수록 우리 부부의 정이 멀
어질 수 밖에....."

여기까지 말한 호청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아내를 마음 상하게 하여 끝내 집을 떠나
도록 만들었으니, 나보다 더 나쁜 남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강
호는 험악한 곳인데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혹시나 누구한테 해를
입지나 않을까, 그 동안 얼마나 염려를 했는지 하늘만이 내 마음
을 알 걸세."

기효부는 침상에 누워 있는 왕난고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내심
중얼거렸다.

'이 호 부인이 독선이라 일컬어질 만큼 독술이 뛰어났는데, 누
가 감히 그녀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녀가 남을 해치
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녀 역시 장무기와 마찬가지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우습기까지
했다.

호청우는 줄기차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난 명교의 사람이 아니면 치료를 해 주지 않겠다는 맹세
를 하기에 이른 걸세. 아내가 심혈을 기울여 창출한 걸작품을 파
괴하는 따위의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굳은 신념에서 비롯
된 맹세였지. 우리 부부는 모두 명교의 제자이므로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명교 제자를 시험물로 삼지 않기 때문일세."

기효부와 장무기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명교의 제자가 아니면 치료를 해 주지 않으려고 했군.'

호청우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했다.

"칠 년 전에 한 쌍의 노부부가 극독을 당해 나를 찾아왔네. 그
들은 동해 영사도(靈蛇島)의 주인인 금화파파와 은엽선생(銀葉先
生)이었네. 그들은 예의를 갖추어 나를 깎듯이 대했네. 그러면서
도 금화파파는 은근히 한 가지 절세무공을 보여 주었네. 나는 그
녀의 무공에 질려 감히 치료를 거부할 수 없었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과거의 죄악을 씻고 개과천선한 몸이 어찌 재범을 할 수 있
겠는가? 나는 일단 그들의 맥을 짚어보고 나서, 노도주는 워낙
독이 심해 구제할 약이 없지만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며,
노부인은독증이 깊지 않아 자신의 심후한 내력으로 스스로 독을
배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네."

장무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들도 호 부인에게 독을 당한 겁니까?"

"아닐세. 서역의 한 벙어리 두타에게 당했다고 하더군. 물론 아
내와는 상관없지만 명교의 제자가 아니니 내 어찌 자신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저버릴 수가 있겠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난
그 맹세를 지켜야만 했네. 그들 부부는 나에게 강압적인 수단을
전개하지 않고 암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네. 나는 그와 유사한 일
들을 많이 겪었네. 그 바람에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부부 사
이가 금이 가서야 되겠나? 자네도 아마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걸세."

기효부와 장무기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호청우의 이런 견사불
구의 주장을 찬성할 수 없었다.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최근 아내는 은엽선생이 드디어 독이 발작돼 죽고 금화파파가
화풀이를 하기 위해 날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를 돕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걸세. 이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날
생각해 주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을 걸세. 그녀는 집에 생소한 사
람이 있는 것을 보고 암암리에 미약을 풀어 무기를 깊은 잠에 빠
지게 만든 걸세."

장무기는 비로소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져 이튿날 오후에서야 깨
어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호청우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내가 돌아오자 그는 하늘이라도
날을 듯이 기뻤다. 왕난고는 그에게 천연두에 감염된 것으로 위
장하라고 했다. 함께 방에 틀어 박혀 강적을 상대할 궁리에 몰두
하기 위함이었다.

그 며칠 후에 설공원과 기효부 등이 연이어 왔다. 호청우는 그
들의 상세에서 금화파파가 자기를 시험해 보려 한다는 속셈을 이
내 알아차렸다. 과연 맹세했던 대로 명교의 제자가 아니면 치료
를 해 주지 않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호청우는 제
각기 다른 열 다섯 가지 괴질에 대해 상당히 구미가 당겼으나,
감히 시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무기가 치료 방법을 물어오
자, 그는 무당제자로서 자기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것을 특
별히 강조한 연후에 비로소 치료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한데, 왕난고는 그의 치료법이 효과를 거두자 내심 못마땅하게
느껴져, 매일밤 각자의 음식에 독약을 풀었다. 호청우와 계속 시
합을 해보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호청우에 대한 호
의이기도 했다. 장무기가 만약 그들을 모두 완치시킨다면 금화파
파가 그 책임을 호청우엑 돌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가
기효부의 움막으로 가서 어깨를 흔들어야만 그녀가 깨어났던 이
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왕난고는 기효부의 병세가 갈수록 호전되는 것을 보자 처음엔
자신의 독술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곧 장무기의 소행임을 알아냈
다. 그러자 왕난고는 장무기에게 독수를 전개하기로 작심했다.
호청우는 아예 상관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무
기가 자기를 찾아와 멀리 피신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그의 갸륵
한 마음에 감동되어 별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약방문을 말해
준 것이다. 당시 왕난고가 바로 곁에 있어 직접적인 말을 할 수
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난고는 영특한데다가 약성에 대해 전
혀 모르지 않으므로, 그 약방문에 숨겨진 진의를 알아차렸다. 그
녀는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호청우를 밧줄로 묶고 스스로 몇
가지 독물을 복용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 당신과 나는 부부가 된지 이십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까지도 나의 목숨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군요. 내가
무슨 독을 전개해도 늘 그 독을 풀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내 스
스로 극독을 복용했어요. 당신이 정말 내가 복용한 독까지 완치
시킬 수 있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독을 전개하지 않겠어요."

호청우는 이 말에 혼비백산하여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다. 그
러자 왕난고는 그가 더 이상 말을 못하게 입에 자갈을 물린 것이
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바로 장무기와 기효부가 직접 겪은 것
들이었다.

기효부와 장무기는 호청우의 말을 듣고 나자, 부화가 치밀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호청우가 아내에 대해 병적으로 편파
적인 사랑을 품고 있다는 건 그런 대로 이해가 가지만, 왕난고가
남편의 콧대를 꺾기 위해 자신을 시험물로 삼아 스스로 극독을
복용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내 무슨 도리가 있겠나? 이번에도 내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완치한다면 내 솜씨가 그녀를 능가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녀가 평생을 두고 우울해 할 게 아니겠
는가? 그렇다고 해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세상을 떠나
게 될 테고....."

그는 장탄식을 했다.

"난 단지 금화파파가 빨리 나타나 날 죽여 주길 바랄 뿐이네.
그러면 영원히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게다가 근
래에 이르러 그녀의 독술은 눈부신 발전이 있어, 난 도저히 그
독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네."

"호 선생님의 의술은 신기라 일컬어지는데도 사모님께서 무슨
둑을 복용했는지 알아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녀의 독술을 이제 나의 의술을 훨씬 능가하네. 난 머리가 깨
진다 해도 이젠 그 치료 방법을 생각해 낼 재간이 없네. 내 추측
으론 세 가지 독충과 세 가지 독초를 섞어서 복용한 것 같은데,
그 여섯 가지 독물을 어떻게 배합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
네."

호청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탁자에다 약방문을 적었
다. 이어 손을 내두르며 힘주어 말했다.

"이젠 나가 주게. 만약 아내가 죽으면 나도 혼자 살아남진 않을
걸세."

기효부와 장무기는 입을 모아 진지하게 말했다.

"부디 경솔한 생각 마시고, 사모님이 생각을 달리 하게끔 잘 설
득해 보십시오."

"이젠 소용없을 걸세.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을 걸세."

여기까지 말한 호청우는 그만 목이 메이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기효부와 장무기는 곧 물러났다.

호청우는 우선 아내의 등과 허리 부위의 혈도를 찍었다.

"여보, 내가 무능해 도저히 당신의 독을 치료할 수 없으니, 저
승에서나마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함께 이승을 떠나겠소."

그는 곧 왕난고의 품속을 뒤져 몇 봉지의 가루약을 꺼냈다. 과
연 그가 예측했던 대로 세 가지 독충과 세 가지 독초를 배합해
만든 독약이 있었다.

왕난고는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다
급하게 소리쳤다.

"여보! 독을 복용하면 안 돼요!"

호청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오색찬란한 독가루를 모조리 입
안에 털어넣었다.

왕난고는 대경실색했다.

"그렇게 많이 복용하면 어떻게 해요? 그 분량이면 세 사람을 독
살하고도 남는단 말예요!"

호청우는 담담하게 웃으며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밑에 앉았다.
삽시간에 예리한 비수로 오장육부를 난도질하듯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이것은 여섯 가지 독물 중에 단장초(斷腸草)가 가
장 먼저 발작한 것임을 호청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나머
지 다섯 가지 독물도 연달아 발작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
다.

왕난고는 안타깝게 소리쳤다.

"여보! 그 여섯 가지 독물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
요!"

호청우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나.....난 믿을 수 없소. 이제 곧..... 죽게 될 것이오."

"여보! 어서 우황혈갈단(牛黃血竭丹)과 옥룡소합산(玉龍蘇合散)
을 복용하고, 침술로서 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세요!"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제가 복용한 독은 소량이기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당신은 너
무 많이 복용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죽게 될 거예요."

"난 성심 성의껏 당신을 위해 살아왔는데, 당신은 한사코 호승
심을 앞세워 나하고 우열을 겨루려 하니 이젠 사는 게 무의미해
졌소. 차라리 죽는 게..... 아이구..... 악!"

그는 신음에 이어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흡사 수백 마리의 독충이 오장육부를 갉아먹는 것 같아 정신이
차츰 흐릿해지더니 끝내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왕난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은 절대 죽으면 안돼요! 다
시는..... 다시는 당신과 겨루지 않겠어요!"

그들 부부는 비록 이십 년 동안 암투를 벌여 왔지만 정감만은
어느 부부 못지 않게 두터웠다. 왕난고는 남편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자기를 살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오히려 남편의 죽
음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혈도가 찍혀 꼼짝할 수 없
는 그녀로선 당황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장무기는 왕난고의 울음소리를 듣고 얼른 방 안으로 뛰쳐 들어
왔다.

"사모님, 사부님을 구할 방도가 있겠습니까?"

왕난고는 그를 보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했다.

"어서 우황혈갈단과 옥룡소합산을 복용시키고, 금침으로 용천혈
과 구미혈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에서 갑자기 기침소리가 들려
왔다. 조용한 야밤에 난데없이 들려온 기침소리는 으시시한 느낌
마저 들었다. 순간 기효부가 뛰쳐들어와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
으로 말했다.

"금화파파가.....!"

순간, 한 줄기의 미풍이 이는 듯 싶더니 등이 구부정한 노파가
열 두세 살 가량의 소녀를 데리고 방 안에 나타났다. 그 노파가
바로 금화파파였다. 금화파파는 호청우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
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안색이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것을 보자
그가 곧 죽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절로 멍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호청우는 사지가 축 늘어지며 눈
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왕난고는 통곡을 했다.

"여보! 이렇게 죽으면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금화파파가 이번에 영사도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것은, 남편을
죽게 한 원흉을 수소문하는 일 외에 호청우를 찾아와 화풀이를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호청우가 극독을 복용할 줄이야! 금화파
파도 독에 관한 일가견을 갖고 있는지라 호청우와 왕난고의 안색
에서 독성이 이미 깊어져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걸 단숨
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호청우가 자기를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
을 끊기 위해 독을 복용한 것이라 간주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수단을 전개할 수 없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업자득이군! 자업자득이야.....!"

그녀는 소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문을 나서자마
자 그녀의 기침소리가 십여 장 밖에서 들려왔다. 그 빠른 신법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장무기는 황급히 호청우의 심장에 손을 얹었다.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아직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우황혈갈단과
옥룡소합산을 복용시키고 용천혈과 구미혈에 금침을 놓았다. 이
어 왕난고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시술을 해 나갔다.

반 시간 가량이 지나자 호청우는 간신히 깨어났다. 왕난고는 기
쁨으로 인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장형제, 자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
네."

이어 장무기는 약방문을 적어 약동으로 하여금 탕약을 달여 두
사람에게 복용시켰다. 왕난고의 해독 방법은 신통한 것이 아니었
다. 그녀의 방법에만 의존했다면 독을 말끔하게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무기는 오늘 일이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금화파파는 호 선생이 이미 독을 복용해 죽은 걸로 알고 있
으니, 한 가지 큰 우환을 덜게 된 셈이군요."

금화파파의 유령 같은 신법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
졌다.

왕난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금화파파는 오늘 순순히 떠났지만 나중에 틀림없이 진상을 알
게 될 걸세. 우리 부부는 즉시 떠날 테니, 수고스럽지만 무덤을
두 개 세워 묘비에 우리 부부의 이름을 새겨 주게."

장무기는 그녀의 청을 승락했다. 왕난고는 곧 짐을 챙겼다. 약
동 두 명에게는 제각기 은자를 나누어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는, 나귀가 끄는 수레에 휘장을 두르고 부부는 야밤을 틈타 호접
곡을빠져 나갔다. 장무기는 그들을 골짜기 밖까지 전송해 주었
다. 그들은 이 년 동안 함께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막상 헤어지
게 되자 아쉬움이 앞섰다. 호청우는 자기가 직접 지은 의서를 꺼
내 장무기에게 내주었다.

"무기, 내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의학이 여기에 수록돼 있
네. 예전엔 이 책만큼은 자네에게 보여 주지 않았네. 이젠 자네
에게 주겠네. 자네가 당한 현명패천장의 음독을 제거해 주지 못
한 게 마음에 걸리네. 자네가 이 의서를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그 음독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길 바라네. 그럼 우린 나중
에 또 만날 수 있을 걸세."

장무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의서를 받았다. 이번에는 왕난
고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우리 부부의 생명을 구해 주었고 또한 화해를 시켜줬으
니, 뭘로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내가 평생 쌓아 올린 독공
을 전수해 주고도 싶지만, 자네가 배워도 쓸모없는 것들이니 아
무튼 하루 속히 완쾌되길 바랄 뿐이네."

장무기는 그들을 태운 수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가 돌아왔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초옥 앞에는 두 개의 무덤이 새워졌다. 장
무기는 골짜기 밖으로나가 비석 두 개를 만들어 왔다.

----- 접곡의선호선생지묘

----- 호부인왕씨지묘

설공원 등은 내막을 몰라, 호청우 부부가 죽음을 같이한 걸로
알고 모두 탄식을 했다.

왕난고가 떠나가자 더 이상 암암리에 독을 전개하는 자가 없었
다. 각자의 병세는 장무기의 치료로 날이 갈수록 호전되어 열흘
도 채 못 되어 모두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기효부 모
녀는 뚜렷이 갈 곳이 없어 골짜기에 남아 장무기를 도와주었다.

장무기는 틈 나는 대로 호청우가 중 의서를 탐독했다. 그 내용
은 과연 방대하고 심오해의선의 걸작다왔다. 불과 열흘정도 읽
었는데도 의술에 커다란 진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내에 응결돼 있는 음독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눈꼽만치
의 단서도 찾아 낼 수 없었다. 그는 거듭하여 정독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치료 방법이 있었다면 호 선생이 왜 나를 치료해 주지 않았겠
는가? 그도 치료 방법을 모르는데 그가 지은 의서에 그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지막 한가닥 희망은 물거품으로 변했
다. 그는 의서를 덮어놓고 밖으로 나가 두 개의 가묘를 우두커니
쳐다보며 장탄식과 함께 울적한 심정에 빠졌다.

'나도 머지않아 땅 속에 묻히게 되겠지. 내 묘비에는 어떠한 글
을 새겨야 할는지.....'

바로 이때 등 뒤에서 홀연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금화파파가 그 예쁘장한 계집애를 데리고
곧 쓰러질 듯 위태스러운 모습으로 몇 장 밖에 서 있었다.

금화파파가 대뜸 그에게 물었다.

"꼬마야, 넌 호청우와 어떤 관계나?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한숨
을 쉬고 있느냐?"

장무기는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었다.

"저는 현명패천장에 당해 그 음독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금화파파는 바람처럼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현명패천장이라고? 세상에 정말 그런 장력이 있단 말이냐? 누
구에게 당했느냐?"

"몽고 병사로 변장한 사람인데 정체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호
선생에게 병을 치료받으러 왔지만 명교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저의 증
세는 더욱 치료받을 길이 없어져 우울함에 젖어 있는 겁니다."

금화파파는 그가 영준하고 똑똑하게 생긴 것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애통한 일이군. 아까와....."

장무기는 남에게 동정받는 것은 원치 않아 앙연히 말했다.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땅
속에 묻힐 것이며 그것이 이르고 늦는 차이뿐이죠!"

금화파파 앞에 서 있는 소녀는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지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장무기와 금화파파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금화파파는 남편의 죽음이 되살아나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서 태어나 다시 죽음으로
귀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는 아름답지
않겠느냐?"

장무기는 금화파파가 흉악하고 잔인한 인물로만 생각했었다. 전
에는 언뜻 보아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얼룩지고 무표정하여 자신
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
만은 소녀처럼 맑고 부드러움마저 담겨져 있었다.

"애야, 너의 아버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느냐?"

"저의 아버님은 성이 장이며 이름은 취자 산자로서, 무당파의
제자입니다."

그는 아버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네가 무당 장오협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그 악인이 현
명패천장을 전개한 것도 너에게서 금모사왕과 도룡보도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는 온갖 혹형을 가했지만 저는 목숨을 걸고 절
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겠구나?"

"네. 금모사왕은 저의 의부이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행방을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

금화파파는 갑자기 그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 즉시 장무기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한 갈래의 얼음장같이 차
가운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 한기는 현명패천장의
음독과 성질이 다르지만 역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금화파파의 음성이 유난히 부드럽게 변했다.

"애야, 너는 착한 애니까 나한테 사손의 행방을 솔직히 말해 주
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의 음독을 제거해 줄 뿐 아니라 천하 무
적의 무공도 전수해 주마."

장무기는 고통으로 인해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의 부모님은 의부의 행방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끊
으셨는데, 내가 부모님의 그 귀중한 뜻을 저버릴 사람처럼 보입
니까?"

금화파파는 빙긋이 웃었다.

"좋아! 네가 얼마나 버티나 두고 보자!"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장무기는 비명대신 버럭 소리를 질렀
다.

"차라리 내 귀에 수은을 붓고 독침, 독충 따위를 삼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사 년 전 내가 어린애였을 때도 온갖 악형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겁장이가 됐다고 생각합니
까?"

금화파파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라고 생각한단 말이냐? 하
핫..... 하핫.....!"

그녀는 광소를 터뜨리며 장무기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장무기
의 손은 이미 검붉게 변색돼 있었다.

예쁘장한 소녀가 얼른 장무기에게 눈짓을 하며 한 마디 던졌다.

"어서 파파에게 구명지은을 감사드려라."

장무기는 냉소를 날렸다.

"뭘 감사드리라는 거냐? 차라리 날 죽였다면 저승에 가서 고맙
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토라진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거들 떠 보지도 않을 거야!"

소녀는 정말 몸을 획 돌려 버렸다. 그러나 곁눈질로 다시 장무
기의 표정을 살폈다.

금화파파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아리(阿離)야, 혼자서 섬에 있기가 심심하지? 이 꼬마 녀석을
잡아가 너의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단지 고집이 황
소 같아서 걱정이구나."

소녀는 이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아요. 잡아갔으면 좋겠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파파께서 말
을 듣게끔 혼을 내주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다급해졌다. 금화파파가 당장 자
기를 죽인다면 별문제지만, 만약 영사도로 잡혀 간다면 도저히
그 모욕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금화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날 따라와라! 우린 우선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 일을
마무리짓는 즉시 영사도로 돌아가도록 하자꾸나."

장무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오! 난 절대 따라가지 않겠소!"

금화파파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영사도에는 모든 것이 다 구비 돼 있다. 네가 마음껏 뛰
어놀 수 있게끔 해줄 테니, 아무 생각 말고 순순히 날 따라오도
록 해라."

장무기는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한 걸음을 내
딛자 마자 금화파파가 이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가 어느 방향
으로 달아나도 번번이 앞이 막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얘야, 고집부리지 말고 우리와 함께 가자."

장무기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향해 힘껏 일장을 뻗어냈다. 금화
파파는 살짝 옆으로 피하며 그의 손을 항해 후! 하고 입김을 불
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장무기는 손이 검붉게 변색돼 통증이 심
했는데, 입김을 쐬자 손 전체가 산산 조각으로 갈라져 나가는 것
같아 펄쩍펄쩍 뛰었다.

양불회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무기 오빠,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효부가 그녀를 데리고 수풀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산보
를 나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효부는 금화파파를보자
질겁을 하며 이내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파파, 그 애를 괴롭히면 안 돼요!"

금화파파는 기효부를 한 차례 노려보더니 냉소를 쳤다.

"넌 아직도 죽지 않았느냐?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할 생각 말아
라. 왜 오늘까지 죽지 않았는지 자세히 보고 싶으니 좀 더 가까
이 오너라!"

기효부는 무림제자 출신으로 담력이 컸다. 그러나 어린 딸의 안
위가 염려되어 경거망동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딸애의 손을 잡
고 도리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나직하게 외쳤다.

"무기야, 어서 이쪽으로 와라!"

장무기는 달아나려 했으나 아리라는 소녀가 잽싸게 그의 팔뚝
부위 삼양락(三陽絡)을 나꿔잡았다.

"달아나지 못할 거야. 너는 성은 장이고 이름은 무기라 하지?"

삼양락이 잡히자 장무기는 이내 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놀람과 함께 화가 치밀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어서 이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이때, 홀연 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효부야, 왜 그렇게 겁이 많아졌느냐? 좀더 가까이 가 주려무
나!"

기효부는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경악과 기쁨이 엇갈려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스승님!"

그러나 등 뒤엔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유심히 살피니
비로소 회색 장포를 입은 여승이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였다. 그녀 뒤에는 정민
군과 패금의 두 제자가 따르고 있었다.

금화파파는 그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용모를 똑똑히 볼 수 없
었지만 지척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으로 미루어 내력이 얼마나 심
후한지 짐작이 갔다. 멸절사태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그녀를 모
르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하산을 하지 않으므로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 걸어옴에 따
라 용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나이는 사십 중반으로서 빼어난 용
모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눈썹끝이 비스듬히 아래로 처져, 염라
부의 사자처럼 으시시한 느낌을 주었다.

기효부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멸절사태의 음성은 표정만큼이나 차가왔다.

"너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기효부는 무릎을 꿇은 채 감히 일어나지를 못했다. 정민군의 입
가에 번진 냉소에서 스승님께 자기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비방을
했는지 짐작이 가므로, 절로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멸절사태가 다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저 노파가 네가 왜 아직도 죽지 않았는지 가까이서 확인해 보
고 싶다고 하니, 가까이 가보도록 해라."

"네."

기효부는 감히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금
화파파 앞으로 걸어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화파파, 나의 스승님께서 오셨으니 이젠 그 광태를 보리지
않는게 좋을 거예요!"

금화파파는 기침을 두어 번하고 나서 멸절사태를 노려보며 턱을
끄덕였다.

"음..... 당신이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이군. 내가 당신의 제자
를 때렸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오?"

멸절사태는 칼날처럼 잘라 말했다.

"그것 잘 됐군. 때리고 싶으면 더 때려도 좋소. 그를 죽인다 해
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오."

기효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스승님!"

하고 소리치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스승님이 평상시
제자에게만은 얼마나 편파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억지를 써서라도 옹호해 주
곤 했다. 한데,스승님의 입에서 이렇게 매정한 말이 나올 줄이
야! 자기를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금화파파는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미파와 원한이 없으니 그녀를 한 번 때린 것으로 충분
하오. 아리야, 이제 우리는 떠나자꾸나."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한편, 정민군은 금화파파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병색이
완연한 할망구가 사부님께 무례한 언동을 하자, 혼을 내줄 심산
으로 즉시 몸을 번뜩여 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사부님께 사죄를 하지 않고 그냥 떠날 생각인가요?"

그녀는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려는 듯 검을 절반 가량 뽑았다.

다음 순간, 금화파파는 질풍처럼 손을 뻗어 두 손가락으로 검집
을 살짝 집더니 이내 놓으며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그런 썩은 쇠붙이로 누굴 겁 줄 생각이냐?"

정민군은 화가 치밀어 즉시 검을 뽑으려 했다. 한데 그녀가 아
무리 힘을 주어도 검이 뽑혀지지 않았다. 아리가 까르르 웃으며
한 마디 내뱉었다.

"썩은 쇠붙이가 아예 녹슬을 모양이군요."

금화파파가 검집을 살짝 집는 순간, 그 웅후한 내력으로 검과
검집이 서로 달라붙게 만든 것이다. 정민군은 검을 뽑을 수 없게
되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매우 낭패스러워했다.

멸절사태가 보다못해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 세 개로 검집을 집
자, 검집이 수박 쪼개지듯 두 쪽으로 갈라지며 검날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이 검은 보검이라 할 수 없지만 쇠붙이는 아니지. 금화파파,
당신은 영사도에서 호강이니 하지 않고 무엇하러 중원으로 들어
왔소?"

금화파파는 그녀가 손가락 세 개로 검집을 쪼개는 것을 보고 내
심 흠칫했다.

"소문대로 실력이 만만치 않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늙은 짝이 죽어 혼자 섬에 머물러 있자니 하도 적적하여, 혹시
마음에 드는 떠돌이 화상이나 도사가 있으면 데려가기 위해 중원
으로 들어온 것이오."

그녀는 일부러 화상과 도사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상대방
이 여승이면서 멋대로 쏘다닌다는 것을 비꼰 것이다.

멸절사태의 눈에 한 가닥의 살기가 번뜩였다. 그녀는 장검을 비
스듬히 들어올려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기를 뽑으시지!"

정민군과 기효부 등은 스승님이 누구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
었다. 특히 기효부는 금화파파의 무공이 고심막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염려가 되었다.

아리는 여전히 장무기의 팔을 잡고 있었다. 장무기는 갈수록 상
반신이 더욱 마비되었다.

"어서 놓지 못하겠느냐! 날 붙잡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아리는 기효부가 옆에서 아무래도 출수할 것 같아 마지못해 그
의 팔을 풀어 주었다.

"달아나진 못할 거야!"

한편, 멸절사태의 눈을 응시하는 금화파파의 입가에 엷은 웃음
이 번졌다.

"왕년에 아미파의 조사이신 곽양 여협의 검법이 천하를 진동시
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대(二代) 제자 때에 이르러 그 검법
이 얼마 정도 보존됐는지 모르겠군."

멸절사태의 음성은 음침했다.

"설령, 일성(一成)이 남았다 해도 소탕군마 하기엔 충분할 것이
요."

금화파파의 시선은 그녀의 눈에서 손에 쥔 장검의 검 끝으로 옮
겨졌다. 돌연 그녀는 수중의 괴장을 들어올려 질풍처럼 찍어갔
다. 멸절사태의 장검이 파르르 떨리는 듯 싶더니, 그녀의 어깨를
향해 찔러갔다. 금화파파의 기침이 터진 것은 바로 이때이며 괴
장을 가로 쓸었다. 멸절사태의 몸이 검과 혼연 일치가 되어 전광
석화같이 상대방의 등 뒤로 미끄러져 갔다. 자연히 검 끝이 금화
파파의 등심을 노렸다. 금화파파는 몸을 회전시키지 않고 괴장을
뒤로꺾어 검날을 향해 맞부딪쳐 갔다. 두 사람이 서로 몇 초식
을 주고받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멸절사태의 장검이
두 동강이로 부러졌다. 장검과 괴장이 정면으로 맞부딪치자 장검
이 절단된 것이다.

관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리를 제외한 모두는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괴장은 영사도 연안 해저
의 특산인 산호금(珊瑚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특이한 금속으로 혼합된 산호로서 바다 깊숙한 곳에서 천만 년의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무쇠를 두부 베듯이 하니 제아무리
예리한 병기라 해도 일단 맞부딪치면 절단되는 게 당연했다. 금
화파파는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괴장에 몸을 의지한 채 기침
을 연발했다. 기효부, 정민군, 패금의는 행여나 스승님이 부상을
입었을까 봐 황급히 멸절사태의 주위를 에워쌌다.

아리는 선뜻 손목을 뻗쳐 다시 장무기의 손목을 나꿔잡았다.

"이젠 달아날 생각을 못하겠지?"

그녀의 뜻하지 않은 출수에 장무기는 다시 맥문이 잡혀 상반신
이 마비되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냅다 발을 날려 아리
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아리가 손에 힘을 가
하자 장무기는 도중에서 맥없이 발을 내려야만 했다.

"어서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아리는 얄미울 정도로 생긋이 웃었다.

"놓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장무기는 망연히 고개를 숙여 다짜고짜 그녀의 손등을 깨물었
다. 그의 거침없는 행동은 완전히 발악이었다. 아리는 극심한 통
증에 비명을 질렀다.

"아앗!"

그녀는 오른손을 푸는 즉시 왼손으로 장무기의 얼굴을 할키며
덤벼들었다. 장무기도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한 발 늦어 오른
쪽 뺨에 한 줄기의 핏자국이 그어졌다. 아리의 손등은 삽시간에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고통으로 인해 눈물을 찔끔 흘렸다.

두 어린애가 한쪽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금화파파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멸절사태는 반 토막난 검을 버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은 내 제자의 검이니 고수의 일격을 감당해 내기가 어렵겠
지.'

그녀는 등에 짊어지고 있는 길쭉한 봇짐을 풀어 넉 자 남짓한
한 자루의 고검을 꺼냈다. 그 순간, 금화파파는 검집에 한줄기
푸르스름한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한 가지만 보아
도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검집에 새겨
진 금색창연한 두 글자를 보자 금화파파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앗! 의천검(倚天劍)!"

멸절사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의천검이오!"

금화파파는 안색이 변했다. 그의 뇌리에 즉시 무림에 나돌고 있
는 여섯 마디가 떠올랐다.

-----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 의천불출 수여쟁
봉! -----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의천검이 아미파의 수중에 들어갔군."

멸절사태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리며 짤막하게 외쳤다.

"각오를 하시오!"

그녀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그러나 검집에서 검을 뽑지
는 않았다. 그녀는 검집채로 금화파파의 가슴팍을 향해 뻗어왔
다. 금화파파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괴장으로 맞이했다.

찍!

쌍방의 무기가 허공에서 맞부딪치자 흡사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미미한 음향이 들리며 금화파파의 신병기인 산호금의 괴장이 두
토막으로 잘라져 나갔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의천검이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위력이 이 정
도이나, 과연 명불허전이군.'

그녀는 의천검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멸절사태, 그 검날을 한 번 보여 줄 수 있겠소?"

멸절사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 검이 검집을 벗어나면 필히 피를 보아야만 하오."

두 사람은 말뚝처럼 굳어진 채 한참 동안 서로 응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금화파파는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에 못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초식의 오묘함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지만, 멸절
사태가 아미파의 장문인이란 점을 감안하여 범상치 않다는 것만
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하의 보검으로 알려진 의천검
까지 갖고 있으니, 어느 모로 보나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
다. 금화파파는 곧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몸을 돌려 아리의 손
을 잡고 표연히 떠나갔다.

아리는 떠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외쳤다.

"장무기! 장무기!"

그녀의 외침은 차츰 멀어졌다.

정민군 등은 스승이 강적을 쫓아 버린 것을 보자 크게 기뻐했
다. 정민군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스승님, 그 할망구는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
니 결국 꼬리를 감추고 달아났군요."

멸절사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앞으로 강호에서 그 노파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멀찌감치 피하
도록 하라."

그녀는 조금 전에 보검으로서 상대방의 괴장을 절단시켰지만,
출검과 동시에 전개했던 아미구양공(峨嵋九陽功)이 마치 망망대
해에 빠진 바늘인 양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온갖 심혈을 기울여 쌓아올린 아미구양공
으로도 그녀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가
슴이 서늘했다. 그 웅후한 내력과 엄청난 팔힘이 할망구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
각해도 그 점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멸절사태는 하늘을 우러러 잠시 넋빠진 사람처럼 깊을 생각에
잠겼다. 홀연 기효부에게 시선을 던졌다.

"효부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기효부 등 세
사람은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양불회도 엄마를 부르며 쫄랑쫄
랑 따라 들어가려 했다.

기효부는 사부님이 자기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는 것
을 알고 딸애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넌 밖에서 혼자 놀고 있어라."

한편, 장무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정민군이란 여인은 심보가 좋지 않아, 틀림없이 자기 스승님에
게 기 아주머니에게 불리한 나쁜 말만 과장해서 늘어 놓았을 거
야. 그날 밤의 일은 모두 저 독수야초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다
시 터무니없는 말로 기 아주머니를 모함한다면 내가 나서서 변명
해 주어야지!'

그는 살며시 초옥 뒷쪽으로 돌아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방
안은 조용할 뿐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식경이
경과되었다. 멸절사태의 차가운 음성이 침묵을 깼다.

"기효부야, 네 자신의 일이니 네가 먼저 변명을 해 보아라."

기효부는목매인 음성으로,

"스승님... 저는..... 저는.....!"

하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민군아, 네가 직접 물어보아라!"

정민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대답을 했다.

"네. 기사매, 우리 문중에 세 번째 금기가 무엇이지?"

기효부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사방탕(淫邪放蕩)입니다."

"맞았어. 그럼 여섯 번째 금기는 무엇이지?"

"사문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그 계율을 어기는 자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하지?"

기효부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멸절사태를 향해 말했다.

"스승님, 제자에게 말하기 어려운 고충이 있습니다. 정사저께서
스승님께 말씀드린 것과는 다릅니다."

멸절사태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좋다. 여기엔 외부 사람이 없으니 자세히 말해 보아라."

기효부는 오늘 일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리 만치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스승님, 그 해 천응교가 왕반산도에서 도룡도의 위력을 과시하
다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스승님께선 제자를 열 여
섯 사람을 하산시켜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을 알아 보라고 분부하
시지 않았습니까? 당시 제자는 서쪽으로 방향을 택해 천서(川西)
대수보(大樹堡)로 가는 도중에 흰 옷을 입은 중년 남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 자는 제자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왔습니
다. 제자가 객점에 머물면 그도 객점에 유숙하고, 제자가 일부러
걸음을 늦추면 그도 따라서 걸음을 늦추곤 했습니다. 제자는 처
음에 그를 외면했지만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질책을 했습
니다. 그 자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
이는 바람에 제자는 검을 뽑았습니다. 그 자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무공이 고절하여 세 초식만에 제자의 장검을 빼앗아 갔
습니다....."

기효부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당황하여 달아났습니다. 그 자는 뒤쫓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깨어나 보니, 장검이 바로 저의 베갯머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서둘러 객점을 떠났습니다. 뜻
밖에도 그가 다시 저의 뒤를 쫓아왔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의 적
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애원을 했습니다. 서로 생면부지
인 처지이고 게다가 엄연히 남녀유별이거늘 자꾸만 뒤쫓아 오는
속셈이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무공으로 적수
가 되진 못하지만, 만약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아미파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생사결단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멸절사태는 턱을 끄덕이며 수긍을 하는 듯 했다.

기효부는 시선을 떨구었다.

"제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피하려 했으나,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붙잡혀......"

그녀의 음성은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멸절사태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기효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제자는 도저히 그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어 몸을잃었습니다.
제자는 죽고 싶었으나 그의 감시가 워낙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
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와 원한이 있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제자는 그 기회를 틈타 도망쳐 나왔는데, 얼
마 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자는 감히 스승님께 알
릴 수 없어 몰래 어린 것을 낳았습니다."

"여지껏 말한 게 모두 사실이냐?"

"제자가 천만 번 죽는다 해도 어찌 감히 스승님을 기만 하겠습
니까?"

멸절사태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불쌍한 것, 이게 어디 너의 잘못이겠느냐?"

정민군은 스승님이 오히려 사매의 입장을 딱하게 여기는 것 같
자, 독기가 서린 눈으로 기효부를 노려보았다.

멸절사태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적정이냐?"

기효부는 눈물을 흘렸다.

"제자는 본디 아버님의 뜻에 따라 무당 은육협과 혼약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변을 당했으니 삭발을 하여 불문에 귀의하고 싶
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멸절사태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음.....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고약한 남자는 누구냐?"

기효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는..... 성이 양(楊)이며, 이름은 외자로서 소(소)라고 합니
다."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멸절사태는 펄쩍 뛰었다. 동시에 소맷자
락을 떨치자 우지끈 하며 앞에 놓여 있던 탁자가 박살이 났다.
밖에 숨어서 엿듣고 있던 장무기는 물론이거니와, 기효부 등 세
사람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멸절사태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양소라고 했느냐? 바로 그 마교의 대마두이며 일명 광명좌사자
(光明左使者)라는 양소란 말이냐?"

기효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는 명교의 인물로서 신분이 좀..... 높은 것 같았습
니다."

멸절사태는 노기만면하여 호통을 쳤다.

"명교는 무슨 얼어 죽을 명교냐?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잔인무
도한 악마의 집단이다. ......그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곤륜산
(崑崙山) 광명정(光明頂)에 숨어 있느냐?"

기효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명교는....."

"닥쳐라! 명교가 아니라 마교다!"

"네. 그의 말에 의하면 마교의 총단은 원래 광명정이었는데, 몇
년 전에 교내에 불화가 생겨 그는 광명정을 떠나 곤륜산 좌망봉
(坐忘峯)에 은거한다고 했습니다. 스승님, 그 사람은..... 본문
의 원수입니까?"

멸절사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피맺힌 원한이 있다! 너의 대사백되시는 고홍자(孤鴻子)가 바
로 그 대마두 양소로 인해 울화통이 터져 생죽음을 당했다."

기효부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딸애의 생부가 대단한 인
물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대사백이신 고홍자는 왕년에 천하에
명성을 날린 고수였는데, 그로 인해 생죽음을 당했다니..... 기
효부는 자세한 것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멸절사태는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다시 한 번 이를 부드득 갈
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양소, 양소.....!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하더니, 결국 나의 수
중에 걸려들게 되다니....."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기효부에게 말했다.

"좋다. 네가 몸을 더럽히고, 팽화상을 감싸기 위해 정사저를 궁
지에 몰아넣은 일, 스승을 기만하고 사생아를 키운 죄..... 내
모두 용서하마! 그 대신 한 가지 일을 해 줘야겠다. 그 일을 무
사히 성공시키고 돌아온다면, 의천검을 너에게 주는 동시에 본파
의 장문 계승인으로 내세우겠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정민군의
눈에선 질투의 빛이 이글거렸다.

기효부는 정중하게 말했다.

"스승님의 분부라면 제자는 있는 힘을 다해 거행하겠습니다. 하
지만 스승님의 의발진전을 이어받기엔 제자의 덕행과 무공이 너
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그런 망상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멸절사태는 더 이상 여러 말 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녀는 기효부의 손을 잡아 다짜고짜 초옥 밖으로 데리고 나가
우측에 펼쳐진 언덕 위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황급히 잡초가 무
성한 곳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았다.

멸절사태는 언덕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 살피더니 기효부를 가까
이 불러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누구도 들어서는 절
대 안 될 기밀임이 분명했다. 기효부는 스승님의 귀속말을 듣고
나서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다가 끝내 단호하게 고개를 좌
우로 내둘렀다. 스승님의 명을 거역하는 듯 싶었다. 멸절사태는
발끈하여 손을 번쩍 들어올려 내리치려다가 도중에서 거두었다.
기효부가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만약 멸절사태가 일장을 내리친
다면 기효부는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눈을 똑바
로 뜨고 안타깝게 기효부를 응시했다. 기효부는 갑자기 스승 앞
에 무릎을 꿇며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내둘렀다. 그러자 멸절사
태의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기효부는 그 자리
에 쓰러져 몸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경악과 비통으로 인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
다. 그는 잡초더미 속에 몸을 도사린 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바로 이때 양불회가 살금살금 그의 등 뒤로 덮쳐왔다.

"잡았다! 잡았어!"

그녀는 초옥 밖에서 뛰놀다가 장무기가 잡초더미 속에 몸을 도
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자기와 숨바꼭질하는 걸로 생각하고
살금살금 다가와 갑자기 등 뒤로 덮친 것이다. 장무기는 황급히
그녀를 끌어안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나
직하게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나쁜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큰일난다."

양불회는 창백한 그의 안색과 잔뜩 겁먹고 있는 얼굴을 보자 역
시 깜짝 놀랐다.

멸절사태는 서둘러 언덕배기에서 내려와 정민군에게 말했다.

"가서 그녀의 씨앗을 없애 화근을 남기지 말아라!"

정민군은 스승님이 잔인한 수법으로 기효부를 죽인 것을 보자
내심 기뻐했지만 겁이 나기도 했다. 지금 스승님의 명을 받자 얼
른 사매의 장검을 빌려 초옥 주위를 뒤졌다.

장무기는 양불회를 끌어안고 감히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정민
군은 초옥을 한 바퀴 돌았으나 양불회를 찾아 내지 못했다. 그녀
가 다시 찾으려는데 멸절사태의 꾸지람이 들려왔다.

"이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계집애 하나를 찾아내지 못하고
쩔쩔 매느냐!"

패금의는 평소 기효부와 친분이 두터웠다. 지금 스승님이 기효
부를 죽이고 다시 어린 딸까지 죽이려 하자 차마 지켜보고만 있
을 수가 없어 얼른 입을 열었다.

"그 애가 골짜기 밖으로 달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스승님의 불 같은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골짜기
밖으로 나가 찾아 내지 못한다면, 다시 골짜기 안으로 되돌아오
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의지할 곳이 없는 어린애가 혼자 살아간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민군의 검을 맞고 죽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멸절사태는 눈을 부라렸다.

"왜 진작 예기하지 않았느냐!"

그는 곧 앞장서 골짜기 밖으로 달려갔다. 정민군과 패금의도 뒤
따랐다.

양불회는 어머니가 큰 변을 당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어리둥절해 했다. 장무기는 잡초더
미에 엎드려 세 사람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연후에 황급히 양
불회의 손을 잡고 언덕 위로 달려갔다.

양불회는 천진무구하게 생긋이 웃었다.

"무기 오빠, 나쁜 사람들이 전부 떠났어요? 이젠 우리 산에 올
라가 놀아도 되는 거죠?"

무기는 대답없이 그녀를 기효부에게 데려갔다. 양불회는 비로소
어머니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엄마! 엄마!"

그가 기효부의 맥을 짚어 보니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맥박
은 이어지고 있었으나, 두개골이 쪼개져 설령 호청우가 온다 해
도 목숨을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기효부는 힘없이 눈을 떠 장무
기와 딸애를 보자 입술을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말
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단지 구슬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뿐이었다.

장무기는 얼른 품속에서 금침을 꺼내 그녀의 신정, 인당 등 혈
도에 꽂았다. 기효부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애를..... 아버지에게..... 데려가..... 부탁..... 그 사람
을..... 해칠 수..... 없어....."

그녀는 왼손을 가슴으로 들어올려 무엇을 꺼내려다 갑자기 목이
꺾이며 숨을 거두었다.

양불회는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엄마! 엄마!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요!

기효부의 몸은 차츰 식어가는데, 그녀는 계속 울부짖으며 어디
가 아프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왜 움직이지 않으며, 왜
자기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지 몰랐다.

장무기도 큰 비통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참사를 당한
일이 되살아나 역시 시신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울
고 또 울어도 가슴 밑바닥에 응어리진 한이 풀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장무기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내심 생각했다.

'기 아주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나더러 불회를 그녀의 아버지에
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불회의 아버지는 이름이 양소고, 명
교의 광명좌사자이며 곤륜산 좌망봉에 산다고 했으니, 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불회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야한다.'

그는 곤륜산이 수만 리 밖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기
효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가슴을 더듬던 일이 생각나 만져 보
니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그 목걸이에 연결된 시커먼 철패(鐵
牌)에는 금색으로 불길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풀어 양불회
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는 곧 초옥 안에서 쇠삽을 갖고 와 구덩
이를 판 후 기효부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이 무렵 양불회는 울다가 지쳐 풀밭에 쓰러져 새근새근 잠을 자
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후 장무기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하늘
나라로 갔으니 오래오래 있다가 다시 하늘에서 내려와 그녀를 만
나러 올 것이라고 거짓말을 꾸미느라 진땀을 뺐다. 장무기는 밥
을 지어 양불회와 요기를 하고 나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작은 괴나리봇짐을 두 개 챙겨 호청우가 남겨 준
은자를 갖고 양불회와 함께 기효부의 무덤 앞에 재를 올리고, 그
들은 서서히 호접곡을 떠났다.

장무기는 양불회의 고사리 손을 꼭 쥐었다. 그는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기효부의 유언에 따라 불회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리라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강호는 험악한 곳, 강호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는 두 어린 것의 모습은 광풍노도가 휘몰아치는 망망
대해의 일엽편주처럼 안스럽기만 했다.


----- 제 3 권 1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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