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1-1

3학년2반 | 2022.02.04 07:46:11 댓글: 0 조회: 833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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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열차 살인사건(상) │
│김성종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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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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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어떤 죽음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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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선 그리고 악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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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누군가 보고 있다.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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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캡의 사나이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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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파리의 도망자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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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황금의 초생달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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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헤로인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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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고독한 殺人者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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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몽타지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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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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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구례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71년 현대문학 시 소설 추천 완료
1974년 한국일보 최후의 증인으로 장편소설 당선 - 작품으로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Z의 비밀>, <안개 속으로
지다>, <제5열>, <불타는 여인>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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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어떤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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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는 죽음의 냄새 같은 것이 불어오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가로수 가지가 꺾일 듯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발이 앞면 차창에 어지럽게 날아와 부딪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여름밤에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날벌레들 같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아스팔트의 검은 노면이 환상의 스크린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노면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땅에
부딪히자마자 그대로 녹아버리고 있었다.
이 지방에는 겨울철에 거의 눈이 오지 않는다. 반도의 동남단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바닷바람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눈이 내릴 때도 있긴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 눈은 쌓이지 않고 땅에 닿자마자 그대로 녹아버린다. 그것을
보는 아이들의 천진한 두 눈에는 아쉬운 빛이 감돈다.
아쉬워하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그 시간의 차도에는 차량의 통행이 거의 끊기고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만이 감돈다.
남화(南禾)는 거의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달리면서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검은 옷 또는 흰 옷을
입은 사신이 차창 앞으로 덮쳐들 것만 같은 불안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공포감으로 변하고, 그러면 그녀는 그것을
잊지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는다.
교통순경도 보이지 않고 다른 차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시야는 넓게 트여 있었다. 속도계가 마침내 100에 육박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어서 빨리 가고
싶다.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을 것이고 그이는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는 독서광이다. 아내보다도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속도계의 바늘이 드디어 100을 넘어서고 있었다. 낮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그녀는 속도를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액설러레이터에서 발을 뗐다.
저만치 앞에 P호텔이 보였다.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설치해
놓은 오색등이 쉴새없이 점별하고 있었다. 어젯밤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까 그저께가 되는 셈이다.
크리스마스 치장이 요란스럽다. 그 요란스러운 것이 그녀는
싫다. 크리스마스 열풍에 그녀는 역겨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제 커브길이다. 급커브이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었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커브를 무서운 속도로 돌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뚱이가 한쪽으로 쓰러질 듯 쏠렸다.
그녀는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운전대에 매달리면서
얼결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차는 속력을 줄이기는 커녕 더욱 세찬 기세로 앞으로
달려갔다.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엉겁결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것이다.
검은 사신이 달려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흡사
박쥐처럼 차창 앞으로 달려들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거의 동시에 차체가 무엇에 심하게 부딪쳤을 때 나는 충격음과
급브레이크에서 파생되는 긴 비명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아아, 제발...... 오, 하느님...... 이것이 꿈이기를......
제발 꿈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녀는 운전대를 꽉 쥔 채 그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눈을 뜨면 꿈이 깨질 것
같았다. 꿈이 깨지면서 나타날 사신의 그 일그러진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느님은 그녀를 구원해 주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것 같았다.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운전대 위에 묻고 있던 얼굴을 가만히 쳐들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올리고 얼굴을 더 쳐든 다음 다시 똑똑히
쳐다보자 그제서야 저만치 불빛이 끝나는 곳에 검은 물체 같은
것이 길게 놓여 있는 것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부딪친 순간 그 물체는
수미터 앞으로 튕겨져 나간 것 같았다.
아니야. 저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머리를 흔들면서 얼빠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사신에 이끌리듯 물체가 누워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이윽고 물체라고 생각되던 그것이 불빛에 환히 드러났다.
그것은 물체가 아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누워 있었다.
남화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혹시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까 해서 찬찬히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호텔 쪽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밝은 편이었지만 반대쪽 소나무 숲 속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이 시간에 그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문을 열었다. 밖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몸뚱이는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날카롭게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녀는 모자가 달린 검정색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반코트
아래에는 회색 바지 차림이었다. 목에 걸치고 있는 녹색
머플러가 바람에 너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쪽으로 길게
흘러내려 있었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목에서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조금 큰 키를 지니고 있었다. 몸매는
늘씬한 편이었고 차림새와 움직임에서는 세련미가 풍기고
있었다.
처음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포로 굳어버린 몸을 끌다시피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헝클어진 머리 위로 코트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녀는 누워 있는 남자 위로 감히 상체를 굽힐 수가 없었다.
하물며 손을 뻗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져본다는 것은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두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서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는 그 남자는 중년쯤 되어보였다. 검은
양복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것을 보면 화이트칼러
같았다. 충격 때문인지 얼굴은 보라빛이었고, 두 눈은 흰 창을
드러낸 채 잔뜩 부릅떠져 있었다. 베이지색 코트는 앞이
풀어헤쳐진 채 몸 밑에 깔려 있었다.
그녀는 전율했다.
얼굴을 할퀴며 지나가는 바람 속에는 해운대 백사장 모래가
섞여 있었다.
공포로 얼어붙은 그녀의 두 눈은 이윽고 시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뒹굴고 있는 안경 위에 머물렀다. 남자가 끼고 있던
안경인 듯 그것은 부러지고 깨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임자를 잃고 형체마저
잃은 그것은 더없이 참혹한 모습으로 그녀의 손 위에서 떨고
있었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그것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누워 있는 사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그 남자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살아 있다면 그렇게 무서워할 것까지는 없다. 죽기전에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자 곁으로 다가섰다. 허리를 구부리고
손을 뻗어 남자의 옷깃을 잡았다.
저,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에서는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취객이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이번에는 좀더 대담하게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취객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라빛으로 변한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얼굴 한쪽이 피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보일
수는 없었다. 문득 잘 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다시 공포가 엄습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데서오는 공포였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취객의 맥을
짚어본다거나 하는 짓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둘러본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그 사실에 그녀는 격심한 혼란을
느꼈다. 기를 쓰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가려는 사신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내맡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손길에서
그녀는 벗어나고 싶었다. 잘못은 취객 쪽에 있다고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생각했다. 술에 취해 차도를 무단횡단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었다. 그녀는 사고에 대한 처리를 법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법이란 언제나 피해자 쪽에 서게 마련이다.
때문에 가해자는 일방적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그것은 곧 파멸을
의미한다.
파멸--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체를 차에 싣고 간다는 것은 곧 파멸을 안고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이미 그는 숨이 끊어졌다. 병원에 싣고 가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녀는 시체를 버리기로 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차 속으로 잽싸게 뛰어들었다.
그때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녹색 머플러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차문을 쾅 닫았다. 차에는
그때까지 시동이 걸려 있었다.
1단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아터를 꽉 밟자 차가 앞으로
튕겨나갔다. 오른쪽으로 핸들을 급히 꺾어 시체를 피해나갔다.
엔진소리가 몹시 거칠었다.
그녀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차를 몰아갔다.
해운대 바다 저쪽에는 불을 휘황하게 밝힌 큰 배가 떠있었다.
어둠 속에서 파도가 허옇게 일어섰다가 사라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한참이 지난 것 같지만 사실 사고가 일어나고 그녀가
도망치기까지에는 불과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몇분
사이에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잘못된
생각이 불행의 씨가 되어 보다 엄청한 사건으로 확대될줄이야
그녀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데 좀더 용기를 발휘했다면,
아니면 그 수분 사이에 지나가는 차량이나 행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주황색 차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소나무 숲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길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였다. 캡을
깊이 눌러쓰고 있었고, 코밑에는 수염이 달려 있었다. 한쪽
손에는 수츠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캡의 사나이는 주황색 차가 커브를 돌아 어둠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남자가 누워 있는 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맥을 짚어보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의 구둣발이 녹색 머플러를 밟았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서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때 멀리서 불빛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캡의 사나이는 머플러를 목에 걸고 나서 얼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바람을 일으키며 커브를 돌아온 차는 사람이 누워 있는 앞에서
끼익하고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했다. 택시였다. 먼저 운전사가
내기고 뒤이어 한 쌍의 남녀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누워 있는 남자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차에 치인 모양인데요.
운전사가 말했다.
모래 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여자 승객은 질겁을 하고 도로
택시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병원에 싣고 가야하지 않습니까?
남자 승객이 물었다.
운전기사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누워 있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보았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이미 죽었어요. 병원에 싣고 가봐야 소용없어요. 경찰에
신고나 합시다.
택시는 시체를 그대로 길바닥에 내버려둔 채 떠나버렸다.
다시 한번 눈과 모래가 섞인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몰려왔다 사라졌다.
불을 휘황하게 밝힌 큰 배는 수평선 저쪽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택시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아까의 그 캡의
사나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길을 돌아
P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호텔 로비는 호텔 직원들만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을 뿐 손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로비로 들어선 캡의 사나이는 구석에 놓여 있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호주머니 속에서 서둘러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첩을 펴서 빈칸에다 이렇게 적었다.
<부산 1바 573× 주황색 G카 12월 26일 0시 40분 해운대 P호텔
옆>
이윽고 그는 프런트 데스크 쪽으로 걸어가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더 속으로 사라졌다.
추동림(秋東林)은 아내가 걱정되었다.
오늘따라 여느때보다 귀가시간이 좀 늦는 것 같았다. 밤늦게
차를 몰고 귀가하는 아내를 그는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야말로 열심히 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그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의 아내는 광복동에서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었다. 의상실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그대로 딴 南禾 였다.
그녀는 의상실 주인겸 디자이너였다.
시장터 같은 그 바닥에다 의상실을 차린 것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참신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해서 그녀의 의상실은 불황에도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 일을 끝내고 가게를 정리한 다음 가게 문을
나서는 시간은 대개 밤 11시 30분경. 늦어도 0시 반까지는 집에
도착한다.
그런데 0시 50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동림은 창가에 서서 수평선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는 큰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배는 불을 휘황하게 밝히고 있어서 아까부터 그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의 아파트는 5층에 자리잡고 있어서 해운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되어 몹시 낡은데다 크기도 스무 평이
채 안 되는 볼품없는 것이지만 시야 가득히 펼쳐지는 해운대
바다가 그러한 단점들을 커버해 주고 있었다.
그도 그의 아내도 해운대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파이프에 담배 가루를 새로 눌러담은 다음 다시 창가에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아내의 차가 주차장을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겁에 질린 나머지 아파트 앞을 그대로 지나쳤다가 멀리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동림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차에서 얼른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아내의 차라는 것은 색깔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 주황색 G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뿐이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윽고 아내의 모습이 차 밖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지친 듯 몹시 느린 걸음걸이로 아파트 건물 쪽으로
걸어왔다.
동림은 미리 문을 따놓고 나서 현관에 서서 아내를 기다렸다.
조금 후 아내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내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창백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날씨가
추운 탓일까, 아니면 너무 피곤한 탓일까.
춥지?
그는 아내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왜 이렇게 손이 차지?
그의 따뜻한 물음에 그녀는 대답대신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손을 뺐다.
다른 때 같으면 그녀는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기한테
달려간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기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기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아기는 이제 세 살이었고 아들이었다. 동림은 그 아들을
데리고 해운대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아내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가 그녀의 표정이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멈칫했다. 사랑스런 몸이지만 지금은 어쩐지
손을 대기가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내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면서 몸을 떨었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그녀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있었다.
무서워요!
남화는 낮게 외치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동림은 놀라서
그녀를 껴안았다.
아니, 왜 그래?! 뭐가 무섭다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아내는 젊은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침착성을 유지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공포에 질려 몸을 떨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림은 가슴을 파고드는 아내를 힘주어
껴안았다.
자, 마음을 놓아. 뭐가 무섭다는 거야.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뭐가 무섭다는 거야.
그는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들어다보았다. 아름다운 두 눈은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고 언제나 젖어 있는 입술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젖히고 이마에 손을 대보니 열이 있었다. 놀라도
너무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아내의 답변을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남화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떨면서 입을 열었다.
사, 사람이 죽었어요.
누가 죽었다는 거야?
비로소 동림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남화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누군지는 몰라요.
그녀의 숨결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기......P호텔 있는데......커브를 막 도는데......그
사람이 갑자기 어둠
속에서......뛰어나왔어요......남자였어요.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마침내 울음을 떠뜨렸다.
동림은 아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거 봐! 울지 말고 똑똑히 말해 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사, 사람을 치었어요. 무서워요!
동림은 아내의 어깨를 움켜잡았던 손을 가만히 풀었다.
이거 봐. 그러니까 우리 차에 사람이 치였다는 거야?
남화는 흐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 너머에서 동림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언제?
조금 전에요. P호텔 있는 데서 그랬어요.
동림은 테가 굵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더구나 테의 색깔이
검은 색이기 때문에 거기서 풍기는 인상이 강렬했다. 안경은
무거웠기 때문에 항상 밑으로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동림은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밀어올렸다.
주, 죽었어요.
남화는 남편을 보기가 두려운지 갑자기 창 쪽으로 돌아앉았다.
병원에 싣고 갔나?
아뇨.
머리를 흔드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설어 보인다고
동림은 생각했다. 아내가 그렇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 있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그녀는 더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떨림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왔단 말이야?
남화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동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아무리 무섭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현장에 다른 사람이
있었어?!
아무도 없었어요.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경찰에는 연락했나?
아, 아뇨.
동림은 창백한 얼굴로 아내를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도망쳐 왔단 말이군?!
남화는 온몸을 떨며 고개를 밑으로 꺾었다. 자신이 이렇게
비참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남편이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그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을 치어놓고 어떻게 도망칠 수가
있어!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사람을 치었으면 빨리 병원에 싣고
가야할 거 아니야?!
동림은 거실 한 가운데에 서서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는데......이미 죽어 있었어요.
남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게 확실해?
네, 그런 것 같았어요.
어떻게 죽은 걸 알았지?
그렇게 보였어요.
맥을 짚어봤어?
아뇨.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동림은 아내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그것을 허락치 않고 있었다.
어리석기는! 보기만 해가지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안다는 거야! 충격으로 기절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죽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제가 잡아
흔들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치인 사람이 남자였단 말이지?
네, 중년 남자였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동림은 아무래도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의 가족들은 지금쯤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 아니야.
거기에 대해서 남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빨리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안 돼!
동림의 말은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냉정해 보였다. 그녀는 괜히 남편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고 후회했다.
그리고 사고현장에 가서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즉시
병원에 입원시켜야 해!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남화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속으로만
그렇게 부르짖었을 뿐 그 말이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무엇인가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남화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대신 경찰에 전화를 걸어주세요. 전 못걸겠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차갑게 부딪쳤다. 그것은 섬뜩하도록 차가운
시선이었다.
전화기는 장식장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동림은 그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고, 남화는 남편의
움직임을 겁에 질려 지켜보고 있었다.
동림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파커를 입었다.
어디 가시려구요?
남화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사고현장에 가봐야겠어. P호텔 옆이라고 했지?
네, 커브길이에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서 확인해야겠어. 살아 있으면 병원에
입원시키겠어.
가지 마세요. 지금쯤 사람들이 와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도 가겠어요.
안 돼! 집이나 보고 있어!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동림은 밖으로 나갔다.
그도 운전할 줄을 알았지만 사고를 내고 도주한 차를 지금
끌어내 타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차도로 나서자 경찰 퍼트롤카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P호텔
쪽으로 질주하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퍼트롤카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빈 택시를
향해 손을 쳐들었다. P호텔까지는 걸어가도 되는 길이었지만
현장에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 택시를 잡은 것이다.
어둠은 갑자기 공포의 베일로 그 앞에 다가와 있었다. 사고를
낸 것은 그의 아내였지만 그는 남편으로서 아내 이상으로 놀라고
있었다.
안 돼! 내 아내를 희생시킬 수는 없어!
그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고현장에는 경찰 퍼드롤카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정차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몰려 서있었다. 한쪽 차선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대쪽 차선 쪽으로 피해가야 했다.
교통경찰이 수신호기로 차량의 통행을 유도하고 있었다.
현장 가까이 접근하자 운전사는 택시의 속도를 줄였다.
동림은 재빨리 창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길바닥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였다. 남자는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추운 겨울밤에 길바닥 위에 사람이 자는 듯이 누워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다는 느낌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저 사람이 아내의
차에 치인 사람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믿고 싶지가
않았다.
또 사고 났구나.
운전사가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경찰관까지 합쳐 거기에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해서 대여섯
명쯤 되었는데, 하나같이 추운지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주차해 있는 차는 경찰 퍼트롤카뿐이었다.
운전사는 교통경찰 앞에서 차를 세우고 창을 내렸다.
뭡니까?
사고야.
무슨 사고?
교통사고지 뭐긴 뭐야.
그들은 아는 사이이기라도 한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가 없는데?
운전사가 사고 차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교통경찰은 수신호기를
흔들며
뺑소니야. 하고 말했다.
죽었나요?
동림은 턱으로 길바닥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교통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즉사한 것 같아요. 사고 즉시 싣고 갔으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경찰은 아쉬움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받아 운전사가 농담 삼아 엉뚱한 말을 지껄였다.
뺑소니친 친구...... 누군지는 모르지만 똑똑한데요.
그따위 소리하지 말아요! 빨리 차빼요!
경찰이 눈을 부라리며 정색을 하고 말하자 운전사는 멋적은지
히히하고 웃었다.
우리 구경좀 하고 갑시다. 기다리는 값은 드릴 테니까.
차가 출발하자 동림이 말했다.
더 구경하시려구요? 구경할 게 뭐 있어서. 아뭏든 좋습니다.
나야 급할 거 없으니까요.
중년의 운전사는 차를 길 한켠에 주차시켰다.
동림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아까부터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럴 경우 도망친 사람이 체포되면 어떻게 되나요?
그야 감옥에 가지요.
운전사는 엔진을 끄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감옥에 가는 건 아는데 어느 정도 처벌을 받나요?
뺑소니에 대해서는 특별범죄 가중처벌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감옥에서 몇년은 썩어야 할 겁니다. 뺑소니치면 일단 잡히지
말아야지 잡혔다 하면 그건 인생 끝나는 거예요. 제일 좋은
방법은......사고 안내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거죠. 히히.......
운전사는 자기말에 만족한 듯 빠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시체가 누워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구경꾼들이 몇 사람 있었기 때문에 동림은 그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가 있었다.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는
가까이서 아내의 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는 두렵고 불안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으려고
애쓰면서 조심스럽게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조심해야 해. 죽으면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구.
아무리 조심해도 갑자기 덮치면 불가항력이라구. 개죽음
당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야.
구경꾼들의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며 동림은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은 준수해 보였다. 얼굴 한쪽이 피에 젖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잘 생긴 얼굴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나이는 마흔 댓쯤 될 것 같았다. 옷차림으로 보아 여유있게 살고
있는 신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다 세부적인 데에
시선을 돌렸다.
죽은 사람은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복 오른쪽 조그만
윗주머니 속에는 세모꼴로 접은 손수건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색깔의 줄무늬로 이루어진 손수건이었다. 양복 안에는
역시 검정색의 조끼를 받쳐입고 있었다. 와이셔츠는 눈처럼
희었다.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것은 푸른 줄이
그어진 넥타이였다. 그 모든 것은 신사다운 멋을 이루는데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더렵혀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가슴으로부터 배 있는 데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음식물 찌꺼기 같았다.
아마 사고를 당하기 전 토한 것이 옷에 그대로 달라붙은 것
같았다. 밤 늦게까지 마신 술을 토한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경찰관 한 명이 시체 위로 허리를
굽혔다가 일어서면서
술 냄새 지독하군. 술깨나 마신 모양이야. 그러니까 사고를
당했지. 하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빼낸 지갑이 들려 있었다.
이윽고 그는 지갑 속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들었다. 동림은 바로
그의 곁에 서있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그것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경찰관은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거기에다 플래시를
비쳤다. 金明基 라는 이름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동림은
주소란에서 Y동 이라는 글자를 재빨리 읽어냈다. 그밖의 것들은
경찰관이 주민등록증을 도로 지갑 속에 집어넣어버렸기 때문에
읽어내리는데 실패했다. 그 대신 경찰관은 이번에는 명함을
꺼냈다. 명함에는 金明基 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직함은
명진상사(明進商社)대표였다. 경찰관이 불을 껐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니 그것은 금방 큰
소리로 다가왔다. 사이렌 소리를 싣고온 것은 앰뷸런스였다.
앰뷸런스에서 흰 가운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뛰어내리더니
들것에다 시체를 올렸다. 그들은 거침없이 들것을 차에다
밀어넣고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았다. 다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앰뷸런스는 출발했다. 그 모든 것이 하도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에 동림은 멍한 표정으로 앰뷸런스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경찰 퍼트롤카도 앰뷸런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시체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흰 줄이
그려져 있었다. 경찰이 그려놓은 것이었다.
┌────────────────────────────┐
│ 2.선 그리고 악 │
└────────────────────────────┘

남화는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결혼하고 1년만에 낳은 아기였는데 이제 세 살로 한참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의상실에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너무 적었고, 바로 그 점을 제일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녀보다는 동림 쪽이 오히려 아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늦장가를 들어 서른 아홉에야 자식을 본 그는 아들을
끔찍이도 귀여워했다. 단순히 귀여워하는 정도를 넘어 아들의
성장과정을 유심히 관찰했고, 남화를 대신해서 직접 육아일기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그 육아일기는 따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일기에 덧붙여 쓰는 것이었지만 매우 정성들여 꼼꼼이
기록되고 있었다.
남화는 남편의 일기장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육아일기를
쓰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기는 자랄수록 남편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큼 아기도 사랑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기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시킬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아기를 껴안았다. 그 바람에 아기가 놀라 깨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기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볼을
비벼댔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우리 아기를 떼어놓고 감옥에
갈 수는 없어.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자수해서는 안 돼. 절대
안 돼.
귀여운 아기와,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은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릴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은 파멸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내 인생도 끝나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야심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강물처럼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둑을 막아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강물을 흘려보내고 싶었고, 그 물로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마음껏 재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기초를 다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터에 그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서다니,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기는 그녀의 품 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그녀는 또
임신중이었다. 매월 규칙적으로 나오는 것이 나오지 않아
산부인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임신 3개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것이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두번째 임신만은 2,3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잠자리에서
이성을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어서 그만 아차하는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녀는 그 실수를 기쁨으로 받아 들이기로 했다.
동림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들 부부는 누구도
임신중절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튕기듯
일어났다.
문을 열자 동림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찬 바람을 몰고 온
것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자 남화는
자신도 뻣뻣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동림은 집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입을 꼭 다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남화는 남편의 무거운 침묵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는지 말씀해 주세요.
침착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떨려나오고 있었다.
동림은 파이프에 담배를 다 재고 나서야 그녀를 쳐다보았다.
가니까 이미 경찰이 와있었어. 그 사람은 죽었어. 경찰이
앰뷸런스에 싣고 갔어.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화는 온몸을
떨었다.
경찰이 하는 말이......즉시 병원에 싣고 갔으면 목숨은
건졌을 거라는 거야. 이름은 김명기......명진상사
대표......주소는 Y동......이것이 내가 알아낸 죽은 사람에
관한 거야.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남화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동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아직 신고하지 못했어.
그럼 어떻게 죽은 사람에 관한 것을 아셨어요?
경찰관 옆에 서서 구경하고 있다가 우연히 알게 됐어. 그
경찰관이 죽은 사람 주민증하고 명함을 꺼내보기에 옆에서 몰래
훔쳐봤어.
당신 말대로 차를 사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차를 산게
후회돼요.
밤늦게 귀가하는 그녀에게는 차가 필요했다. 그녀는 결혼전에
이미 운전면허증을 따놓았었다.
국산 차가 쏟아져 나오면서부터 자가용 운전은 여성의
허영심을 최대로 자극시켜 놓았다. 미국 영화에서만 보아오던 그
멋진 모습을 자신이 직접 실현하게 되자 여자들은 황홀했다.
실제로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남편을 출근시켜
준다는 이유로, 시장에 가기 위해, 헬스크럽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너나 할
것없이 다투어 운전을 배웠고 운전대를 잡았던 것이다.
남화에게도 그런 허영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남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았다.
남에게 무엇 하나 지기 싫어하는 그녀가 현대 여성의
필수조건이라고 하는 자가용 운전을 외면할 리 없었다. 매일 밤
늦게 귀가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고, 거기에다 여성으로서의
허영심이 어느 정도 동원되어 그녀는 마침내 월부로 차를
구입했던 것이다. 차는 국산으로서는 최신 모델인 주황색
G카였다.
동림은 그녀가 차를 구입하여 손수 운전하고 다니겠다는데
대해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지만 내심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아내가 손수 차를 운전한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던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불안은 3년 전 차를 구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불안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어떡 하죠?
남화가 동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동림은 말없이 파이프를 빨다가 허공을 쳐다보고 말했다.
택시 운전사한테 물어보았는데...... 사람을 치어죽이고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인가 뭔가가 적용되어
아주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는 거야. 감옥에서 몇년은 썩을
거라는 거야.
몇년 정도 살아야 하나요?
자세한 건 모르겠어. 자수하면 좀 참작이 되겠지.
자수한다고 죄가 없어지나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붙잡히는 것보다야 낫겠지.
붙잡히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것은 실로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었다.
동림은 놀란 눈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하고 그의 눈은 묻고 있었다. 붙잡히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하는 말은 자수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아내의 양식을 의심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붙잡히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을 죽여놓고 당신이
과연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야.
저는 버텨낼 수 있어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신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바를 분명히 표시했다. 동림은 파이프를 쥐고 있는
손을 흔들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당신은 틀림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와 할 거야. 이건 양심의 문제란 말이야.
남화는 차마 남편을 마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를
외면한 채 그녀는 말했다.
양심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예요. 제가 그걸 어디다
팔아먹었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동림은 파이프를 놓고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남화는 갑자기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신이 나가고 난 뒤 자수하는 문제를 생각해
봤어요. 하지만 도저히 자수는 못하겠어요. 감옥에 가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에요. 당신과 아기때문이에요. 저는 당신과
아기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요. 이 집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요. 제가 떠나면 당신과 아기는 누가 보살피죠?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피해자 유족들에게는 평생 고개를 들 수 없을
거예요. 그들은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할 것이고, 그것때문에
우리는 평생 시달리며 살 거예요. 결국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에요. 저와 당신 사이도 결국은 끝장이 나고 말 거예요.
죄송해요. 막 돼먹은 여자처럼 말해서 죄송해요. 당신이
보기에는 제가 양심도 없는 여자일지 몰라요. 그렇게 보셔도 할
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수는 못하겠어요.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그녀의 흐느낌은 격해지고 있었다.
동림은 마구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 위에 여전히 손을 올려
놓은 채 말이 없다. 그의 침묵이 그녀에게는 반대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이 꼭 자수하라고 권하신다면......
자수하겠어요.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더욱 슬피 울었다. 마치 자신이
피해를 당하기나 한듯이.
실제로 그녀의 기분은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잘못으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고는 그녀가 커브길에서 너무 과속으로 차를 몰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잔뜩 술에 취해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따진다면...... 저한테는 잘못이 없어요. 그 사람이
술에 취해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미처 브레이크를
밟을 틈이 없었어요.
아뭏든 사람이 죽었어. 그리고 당신은 도망쳤고,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거야.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야.
그는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남화는 고개를 돌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동림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요. 당신이 자수하라고 하면
자수하겠어요. 제가 감옥에 가있는 동안 우리 아기를 잘
길러주세요.
남화는 손으로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더니 아기가 자고 있는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아기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
바람에 아기가 놀라 깨어 울기 시작했다.
동림이 뒤따라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우는 아기를
아내한테서 빼앗아 대신 안았다.
당신은 이 애하고 절대 떨어져서는 안 돼. 당신은 이 집에서
잠시도 떠나서는 안 돼. 당신은 언제나처럼 의상실에 나가야 해.
당신 말대로 만일 당신이 감옥에 가게되면 우리 가정은
파멸이야. 당신은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할 사람이야.
남화는 눈물을 거두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말은
자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의 분명한 말에 남화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남편만 이해해 준다면 그녀는 영원히
자수하지 않고 버텨볼 생각이었다. 남은 문제는 죽을 때까지
경찰에 체포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그럴 자신이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경찰수사가 완벽하다 해도 목격자가 없는 이상
주황색 G카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불안할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것이다. 불안한 생각때문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수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결정을 내려준 남편이
고마웠다.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일었고 남편이 오늘따라 더없이 믿음직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녀가 여자치고는 좀 큰 편인데 비해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연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가 믿고 의지하기에는 어쩐지
연약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같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태도에는 의외로 단호하고 강한 데가 있었다. 남화는
남편의 새로운 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그녀를
바짝 긴장시켰다.
그렇다고 자수를 안 할 수는 없어. 체포되고 안 되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돼.
그럼 어떡 하시겠다는 거예요?
동림은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말했다.
당신 대신 내가 자수하겠어.
남화는 큰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대신 자수하겠단 말이야.
남화는 두 손을 쳐들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건 말도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되는 소리야.
그런 법이 어딨어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곰곰 생각해 봤는데......아무래도
당신보다는 내가 자수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할 일없이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감옥에서 얼마쯤 지내도 괜찮아. 나는
가정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니니까 당신 대역으로 몇년쯤 살고
나와도 괜찮단 말이야. 당신만 협조해 준다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
남화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발딱 일어섰다.
당신은 저를 잘 몰라요.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동림을 쳐다보다가 거실로
나갔다.
동림이 아기를 내려놓고 뒤따라 나갔을 때 남화는 현관에서
신을 신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그래?
자수하러 가려구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는 그녀를 동림은 다급하게
움켜잡았다.
미쳤어?!
이거 놔요!
남화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이 이렇게 격하게 부딪쳐
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정말
경찰서로 달려가 자수해버릴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불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런 성격을 어루만져
지금까지 충돌을 피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동림의 부드러움
때문이었다.
동림은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문을 잠갔다.
왜 붙잡는 거예요?!
남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림에게 대들었다.
말했잖아. 당신은 자수해서는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당신이 제 대신 자수하는 것을 제가
가만히 두고 볼 줄 아셨어요?! 저를 그런 여자로 보셨다면 정말
유감이에요! 그럴 수가 없어요!
우리는 부부야. 부부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남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부부니까 더욱 그럴 수 없는 거예요.
당신이 제 대신 감옥살이를 하시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저는 감옥에 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예요. 차라리 제가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제가 사고를 냈으니까 제가 책임을
지겠어요! 당신이 십자가를 메실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안 돼! 절대 안 돼!
그럼 당신도 안 돼요!
자수를 안 할 수는 없어. 누군가가 해야 해.
그렇다면 제가 하겠어요. 제가 저지른 일이니까 제가
처리하겠어요! 제발 막지 마세요.
안 돼! 당신은 절대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 안 된다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임신중이야! 감옥에서 아기를 낳겠다는 거야?!
그 한 마디에 남화는 더 이상 대들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는 멍하니 동림을 쳐다보았다. 동림은 그녀의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남화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크게 감동하고 있었다. 감동한
나머지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옥살이를
하겠다는 남편의 말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아무리 남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하고 많은 남편들중 아내를 위해 이렇게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말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닥치면 슬그머니
뒤꽁무니를 뺄 것이다. 직장, 명예, 미래를 모두 버리고 과연
아내를 대신해서 철창 속에 갇힐 수 있는 남편이 있을까. 아마
있다해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남화는 그런 남편을 두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감동이 큰
만큼 남편의 제안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일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대신 교도소에 가는 것은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만일 임신한 여자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 교도소에서
아기를 낳을까? 아기를 낳은 뒤에는 어떻게 할까? 교도소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아기와 함께 생활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낳자마자 아기와 헤어지는 걸까? 그 어느
쪽도 비참한 일이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제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한쌍의 남녀가 꼭 껴안은 모습으로 종종
걸음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너머 바다는 온통 검은
빛이었다. 깊고 긴 밤의 장막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는
파도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바다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편의 체온이 뒤에 느껴졌다. 그의 두 팔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가만히 감아왔다. 그의 한쪽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당신은 안 돼. 이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어서 안 돼.
감옥에서 아기를 낳게 할 수는 없단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괴어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림은 그녀의 젖은 볼에
자신의 볼을 갖다댔다. 그리고 다짐하듯 말했다.
안 돼. 알았지?
당신도 안 돼요. 만일 당신이 가겠다면...... 저는 배 속의
아기를 떼고서라도 자수하러 갈 거예요.
남화의 단호한 태도에 동림은 한 발 물러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고 있었다. 남편은 두 손을
쳐들다가 말았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무서워요.
동림은 눈빛을 부드럽게 고쳤다.
그런 말이 어딨어. 어떤 경우에라도 배 속의 아기는 건드리지
마.
중얼거리듯 낮은 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남화는 거기서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을 느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일단 끝이 났다. 그 문제에 대한 어떤
결정도 보류한 채 거기에 대한 더 이상의 대화를 삼가하고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남화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의상실로
출근했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동림이 떠밀다시피 해서 보냈던
것이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출근하긴 했지만, 출근하는데 있어서
여느 때와는 좀 다른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점이란 매일 몰고가던 주황색 G카를 버리고 택시를
이용한 점이었다. 겁이 나서 운전대를 못잡겟다는 그녀의 말에
동림도 그렇다면 택시를 타고가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차의 범퍼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차에는
이상잉 없었다.
살얼음을 밟는 것 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불안한
아침이었다.
밤새 소용돌이치던 날씨는 아침이 되자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바다는 빙판처럼 잔잔했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푸른 빛이 그대로 바라들 푸른 색으로
물들여 놓고 있었다.
아파트는 남향이었고 앞에 가린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거실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세살박이 동림의 아들은 햇볕 속에 앉아 장난감에 집착하고
있었다.
주방 쪽에서는 가정부 여인의 설겆이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화가 아침을 지어 가족과 함께 식사를 끝내고
출근하면 9시 경에 가정부가 나타난다.
그녀는 30대 후반의 유부녀인데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한푼이라도 벌어보려고 동림의 아파트에서 시간제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하는 시간은 아침 9시경부터 오후 5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저녁까지 지어놓고 돌아가면 동림은 7시쯤에 아들과
함께 둘이서 식사를 하곤 했다.
남화는 귀가 시간이 늦기 때문에 가게에서 아예 저녁을 먹곤
했다.
밤이 되면 잠이라도 자지만 아침이 되면 동림은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는 매일 자유로운 시간의 바다
속에서 그 자유로움을 주체하지 못해 허우적거린다. 그는 자신이
시간의 바다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전공하고 있는 분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공분야가 없으니 직업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지금 마흔 한 살이었다. 그에 대한 이력은 주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아내도 그의 과게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별로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결혼한 것은 4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서른여덟
살이었고 남화는 스물다섯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무려
열세 살이나 되었지만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림은 직업을 가져보려고 해봤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어느 직장에도 적응하지
못하는데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나 하는 듯 그의 주위에는 친구가 없었다. 사실
그에게는 찾아올 친구도, 그 자신이 찾아보고 싶은 친구도
없었다.
그는 하루종일 세살박이 아들하고만 놀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는 온화하고 부드럽고 예의바르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떤 문제도 없을 것
같은, 겉보기에 아주 평범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볼
때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직장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나름대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몇번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실패만
거듭했고, 그래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특히 그의 아내에게는
그는 무엇을 하든 잘 안 되는 사람 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무엇을 하든 잘 안 되는 사람한테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이라는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 논리에 따라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자유로운 시간의 바다
속에 마치 난파선처럼 침몰해 있었다.
그는 이제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고,
과거에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람은 꼭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마저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든가 아니면 아들과 노는 것으로 하루 해를
보냈다. 그가 읽는 책들은 그 범위가 다양해서 닥치는 대로
읽는다고 보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는 책에서 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남화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아내보다도 책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 날은 책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책을 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11시경이었다.
저예요. 별일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아무 일 없어.
그는 무뚝둑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거기......제 머플러 있어요? 좀 봐주세요.
무슨 색이지?
녹색이에요.
동림은 집안을 휘둘러보고 나서 없다고 대답했다.
녹색 머플러가 가게에 있는 줄 알고 왔는데 가게에도 없어요.
집에도 없다면 어디에선가 잃어버린 게 분명해요.
아무래도.......
아무래도 지난 밤 사고 현장에서 그것을 떨어뜨린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괜찮을 거야. 내가 갔을 때 그런 건 보이지 않았어.
누가 집어갔을 수도 있잖아요. 머플러에 상표가 붙어
있어요.
상표에는 南禾 라는 상호가 명기되어 있었다.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아들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장난감을 버리고 손을
들어 바다를 가리켰다. 이제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바닷가에 데리고 나가면 아들은 언제나 그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게
아장아장 걸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워 그는 시종 미소를 머금은 채
아들 뒤를 천천히 따라붙는다.
그러나 오늘, 아들 뒤를 따라가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해면에 쏟아져내리는 햇빛이 눈부셨다.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바다를 바라보다가 모래밭으로 통하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아들은 이미 모래밭을 가로질러 물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산책로는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모래밭으로부터 2미터쯤 높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군데군데 모래밭으로 내려갈 수 있게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우울한 눈빛으로 아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계단 위쪽 산책로 한켠에 공중전화박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박스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전화를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계단에서 일어나 아들 쪽으로 걸어갔다.
아기는 물에 젖은 모래를 두 손으로 파헤치고 있었다. 아기의
손은 추위로 빨개져 있었다.
인하야,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놀고 있거라. 아빠, 저기서
전화 걸고 올께. 알았지?
아기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전화박스 안에서도 아기가 노는 모습은 잘 보였다.
그는 전화번호를 뒤적여 변호사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법률사무소는 수십 개나 되었다.
그중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이윽고 다이얼을 돌렸다.
먼저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고, 그가 용건을 이야기하자 다른
사람한테 전화를 넘겼다. 상담에 응한 사람은 변호사였다.
목소리로 보아 젊은 사람인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잘 아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일으켰는데...... 도망을 쳤습니다. 사람을 치고 도망을 쳤는데
차에 받힌 사람은 죽었습니다. 만일...... 도망쳤다가 체포되면
어느 정도의 형을 받게 됩니까? 죄송합니다. 전화로 이런 걸
물어봐서.......
에또...... 그건 경우에는 특별범죄 가중처벌법이 적용돼서
사형 아니면 무기입니다.
네에? 아니, 그렇게 무거운 형을 받습니까?
동림은 놀라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치어죽이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건
살인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악질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극형을 적용합니다.
변호사는 거침없이 말했다.
만일 자수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극형만은 면하게 되죠.
어느 정도 형을 받게 됩니까?
그건 일률적으로 어떻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일단
사람이 죽었고 도망친 사실도 있기 때문에 중형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중형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걸 알고 싶으면 직접 와서 물어보세요.
변호사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례인줄 압니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형이라면 몇년 정도를
말하는가요?
5년 이상...... 많으면 10년 이상도 받을 수 있어요.
변호사는 투덜거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박스에서 나오면서 동림은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잠시 서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지만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하얀 빛뿐이었다.
만일 자수하지 않겠다면......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체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포되면 사형
아니면 무기형이다. 자수하지 않으려거든 체포되지 마라.
그는 하얀 빛 속에서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형
아니면 무기라니,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형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자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떳떳한
방법이다. 하지만 임신한 아내를 교도소에 가게할 수는 없었다.
저 아이는 또 어떡 하고. 하얀 빛이 스러지면서 모래밭을 헤집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공중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가 아까처럼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관할경찰서 교통계를 찾았다.
교통계는 교통사고반이 따로 있었다. 전화를 받은 순경은
그것을 사고반장에게 돌렸다.
교통사고반 김반장입니다.
오늘 새벽......그러니까 자정 조금 지나서 P호텔 부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해서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전화
걸었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김반장이라는 사람은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사고 차 주인입니다.
네? 그럼 사고를 낸 본인이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반장의 흥분한 말소리에 동림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괜히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하는데 반장이 말했다.
사고를 내고 도주하셨더군요.
네, 그만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고를 당하면 누구나 그러기 마련이죠. 사고를
당해서 제정신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 만나서 이야기해 봅시다.
경찰은 그럴 듯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상대방은
아주 노련한 것 같았다.
그보다도 먼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명진상사 대표 김명기씨가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그분, 사망했습니까?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중상이긴 하지만 목숨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동림은 반장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의심이 많으시군요. 솔직히 말씀드린 겁니다. 김명기씨는
지금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니 다행이군요. 전 그 사람이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전화로 이러지 말고 우리 일단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리는 법 아닙니까?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아직 경찰을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자수를 할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선생님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수는 빨리 할수록
좋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기를 놓치면 영영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동림은 생각했다.
주저하지 말고 자수하십시오. 뭘 주저하십니까?
자수하면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습니까?
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생각보다는 훨씬 가벼운 처벌로 끝나니까요. 선생님의
경우에는 자수하시게 되면 피해자가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하니까 집행유예 정도로 풀려나올 수 있습니다. 전과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집행유예로 풀려나옵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종합보험에 가입하셨습니까?
네, 했습니다.
통화시간이 다 된 것을 알리는 예비신호음이 삐익삑 들려왔다.
동림은 동전을 더 집어넣었다.
공중전화군요. 보험에 가입하셨다면 보상문제도 걱정하실거
없고...... 지금 바로 자수하십시오.
만일 자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동림은 자신의 어리석은 질문에 스스로 쓴 웃음이 나왔다.
만일 자수하지 않고 있다가 체포되면.......
반장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가고 있었다.
......특별범죄 가중처벌법이 적용되어 엄벌을 받게됩니다.
뺑소니 차주들은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이면 열 모두 붙잡힙니다.
저는 진심으로 선생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 세상을 떳떳이 살려고 하지 않고 숨어서.......
좋은 말씀 고마왔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동림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기는 일어서서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에 낮게 떠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다시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명진상사를 찾아보았다.
명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는 다섯 개나 되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본 끝에 네번째 그가 찾던 회사가 나왔다. 대표
이름이 김명기냐고 묻자 여직원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사장과는 학교 동창입니다. 소식을 듣고 전화 걸었는데
김사장이 교통사고를 당한 게 정말입니까?
네.......
여직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다쳤나요?
여직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돌아가셨어요. 하고 대답했다.
네에?! 그게 정말입니까?!
네, 정말이에요.
이럴 수가....... 시신은 어디 모셨나요?
S병원 영안실에 모셨어요.
동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밖에 젊은 여자 두 명이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동림은 밖으로 나왔다. 여자들중 한 명이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는 다시 모래를 파헤치고 있었다.
관할경찰서 교통계 교통사고반장은 김명기가 살아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경찰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동림을 자수시키기 위해 거짓말한 것이었다.
여자가 박스에서 나왔다. 동림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번호부에는 김명기라는 이름이 의외로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Y동에 살고 있는 김명기는 한 명뿐이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남자였다.
수화기를 통해 여인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온 집안이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듣자 동림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실례합니다만 김
명기씨 댁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도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소식듣고 전화거는 겁니다. 김명기 사장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데 정말입니까?
네, 정말입니다.
많이 다치셨나요?
상대방은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그 말씀 정말입니까?
네, 정말입니다. S병원 영안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매우 훌륭한
분이었는데.......
상대방은 이쪽 신분에 대해서는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장례식은 언제 어디서 있을 예정입니까?
30일 아침 S병원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김명기라는 사람이 사망한 것은 이제 의심할 나위없는 엄연한
사실로 밝혀졌다. 동림은 그 사실을 더이상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박스에서 나오면서 그는 갑자기 아내한테 가보고 싶어졌다.
아내와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가 의상실로
아내를 찾아가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바다에 떠있는 배들의 위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기의 바지와 소매자락은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아기는 모래를 파헤치는데 정신이 없었다.
인하야, 엄마한테 가지 않을래? 엄마한테 가서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하자.
아기의 검은 눈망울이 천진스럽게 반짝였다. 아기는 손을 털고
일어나 아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안아달라고 칭얼거렸다.
동림은 아들을 데리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 젖은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가정부한테는 5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문을 잠그고 돌아가되 열쇠는 경비실에 맡기라고 일렀다.
동림은 주차장에서 주황색 G카를 끌어냈다. 택시를 타고 갈까
생각했지만 갑자기 생각을 바꿔 자가용을 몰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그의 운전 솜씨는 뛰어났다. 그의 운전 경력은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의 아내는 결혼 전에 운전면허를 취득했지만 그녀가
시내에서 운전할 수 있게끔 그녀한테 운전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 그는 아내한테 운전을 가르쳐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앞자리에 앉히고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한 다음
페달을 가만히 밟았다.
┌────────────────────────────┐
│ 3.누군가 보고 있다. │
└────────────────────────────┘

광복동 거리는 겨울에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따뜻하다.
땟국이 자르르 흐르고 있는 이 조그마한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생활의 리듬과 속삭임이 있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포근하게 감싸준다.
아직 점심때가 채 되지 않았는데 거리는 어느 새 많은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연말이라 모두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택시가 한 대 광복동 입구에 정차하더니 캡을 눌러쓴 뚱뚱한
사나이 한 명을 내려놓았다. 그 사나이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고 코 밑에는 수염까지 달고 있었다. 겉에 걸치고
있는 것은 누런 코트였는데 그 안에 목에 두르고 있는 녹색
머플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느린
걸음으로 거리의 흐름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그는 앞만 보지 않고 거리를 여유있게 관망하면서 걸어갔다.
얼른 보기에 타지에서 온 여행자 같았다.
이윽고 그는 어느 의상실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쇼윈도에는 여자들의 옷가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아내에게 줄 옷가지를 고르고 있는 것처럼.
그 의상실의 이름은 김마리 였다. 그는 돌아설 듯하다가
갑자기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가게를 지키고 있던 아가씨가 손님인줄 알고 반갑게 다가왔다.
캡의 사나이는 목에 두르고 있던 녹색 머플러를 풀어냈다.
실례합니다. 남화 의상실이 어디쯤 있습니까?
몸집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가늘게 흘러나왔다.
남화요?
아가씨는 안색을 바꾸면서 물었다.
네, 남화 의상실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나이는 머플러에 붙어 있는 南禾 라는 상표를
가리켜보였다.
저쪽으로 가보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 여인이 안쪽에서 턱을
치켜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녀는 탁자 앞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들고 있는 왼손 손가락에는 반지가 여러 개 끼어 있었다.
저쪽 어디쯤입니까?
쭈욱 가다가 보면 오른편 쪽에 R제과점이 있어요. 그
제과점을 끼고 골목이 있는데 그 골목으로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사나이는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기분 나빠. 선글라스를 끼고 말이야.
사나이가 밖으로 나가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캡의 사나이는 녹색 머플러를 다시 목에 두르고 갈음을 빨리
했다.
R제과점은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여인의 말대로 제과점을
끼고 골목이 있었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조금 걸어가자 南禾 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녹색바탕에 노란 글씨의 예쁜 간판이었다.상호
밑에는 전화번호도 있었다.
캡의 사나이는 그 의상실 앞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여자들이 몇 명 있었다.
캡은 얼마쯤 걸어가다가 돌아섰다. 그는 다시 남화 쪽으로
걸어갔다.
남화 맞은 편 이층에는 오래된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는 잠시
서서 그 카페를 올려다보았다. 길 쪽에 나있는 넓은 창은
밀폐되어 있지 않았다. 카페 이름은 가로등 이었다.
이윽고 그는 좁은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실내가 넓고 장식 또한 중후하게 꾸며진
카페였다.
그는 남화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헀다.
남화 의상실 쇼윈도에는 마네킹들이 서있었다. 그 마네킹들은
갖가지 독창적인 의상들을 입고 있었다. 그 마네킹들 사이로
여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캡의 시야에 주황색 차가 들어왔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황색 차를 주시했다. G카였다.
그 차는 뒤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
오느라고 몹시 조심하고 있었다. 그 골목은 차가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넓이였지만 행인들이 많아 차량의 통행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뒤로 진입해 오던 G카는 이윽고 남화 의상실 앞에 서
멈추었다.
캡은 번호판을 주시했다. 그는 수첩을 꺼내 거기에 적어놓은
차 번호와 의상실 앞에 멈춰선 G카의 번호를 대조해 보았다.
부산 1바 573×. 두개의 번호는 일치했다.
의상실에서 먼저 젊은 미모의 여인이 뛰어나왔다. 운전석에서
안경 낀 남자가 내렸다. 젊은 여인은 반대쪽으로 돌아가더니
차문을 열고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녀는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의상실 안으로 사라지자 캡의 사나이는
수첩에다 의상실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주황색 G카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그가 찾고 있던 차였다.
그것이 제 발로 눈 앞에 굴러들어 오다니, 그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것을 자꾸만 내려다보았다.
실내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잔에 남아 있는 코피를 마저 마시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쉽게 자리를 뜰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잠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소변을 본 다음 거울 앞에
서서 캡을 벗었다. 머리 둘레에만 머리카락이 남아 있었고
모자에 가려져 있던 부위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대머리
오른쪽에는 흉한 상처가 나있었다. 그 상처를 손가락으로 긁은
다음 캡을 다시 눌러썼다.
그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의상실에서 아까의 그 두
남녀가 아이를 앞세우고 밖으로 막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턱으로 캡이 앉아 있는 카페 쪽을 가리키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조금 후 그들의 모습이 카페에 나타났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흘깃 본 다음 캡은 얼른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들은 캡의 뒤쪽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캡은
미소를 지으면서 담배 연기를 후우하고 내뿜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남화가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납빛이었다. 동림은 겁에 잔뜩 질려 있는
아내의 모습이 더없이 가엾어 보였다.
아무 일 없었어. 아직까지는 아무 일 없었어. 그냥 갑자기
오고 싶어서 왔어.
갑자기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머플러를 못찾으셨어요?
음, 없던데.......
차에도 없어요?
동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어디다 흘렸는지 생각이 안
나요. 가게에도 집에도 없다면......사고현장에서 잃어버린 게
틀림없어요. 거기서밖에 차에서 내리지 않았으니까요. 경찰이
혹시 집어가지 않았을까요?
경찰이 들고 있는 것을 못봤어. 경찰 손에 들어갔다면 벌써
경찰이 의상실에 찾아왔을 거야.
그럼 그게 어디 갔죠?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동림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은 점심으로 양식을 시켰지만 식사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동림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자기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던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김명기라는 사람이 죽은 것은 확실해. 자수를 하지
않으려거든.......
그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잡히지 말아야 해. 잡히면 사형 아니면 무기니까
말이야.
그는 사형 아니면 무기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자수하면 극형은 면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몇 년은
살아야 할 거야.
동림은 이제 굳이 자신이 자수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결심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도 그의
아내도 기회를 잃고 있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비굴한 점에 화가 났다.
자수하는 것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흔들리면서 이제는 주춤거리고 있는 것이다.
굳이 아내한테 자신이 자수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말을 듣고 아내가 그럼 그렇게 하라고 동의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내는 그보다 먼저
경찰서로 달려갈 것이다. 그는 아내의 불같은 성격을 알고
있었다.
당신하고 사전에 약속해 둘 게 있어. 미리 이야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뭔데요?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불안과 공포의 빛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림은 앞으로 상체를 구부렸다.
만일 말이야. 자수하지 않고 있다가 경찰이 수사 끝에 우리
차가 사고를 냈다는 걸 알고 찾아오게 될 경우...... 그 경우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단 말이야.
그의 강한 어조에 그녀는 고개를 젖는 것을 그만 두었다.그가
다시 말했다.
만일 경찰에 발각되면 당신은 부인하란 말이야. 당신은 절대
앞에 나서지 말고 뒤로 물러나 있어. 경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떻게 하실려구요.
내가 책임을 지겠어. 당신은 가만 있어.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그러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만일의 경우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니까 반대하지마. 그것까지 반대할 건 없잖아.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처음보다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당신은 내 말을 너무 안 들어. 한번쯤 내 말에 순종하란
말이야.
그가 노기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밑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의견에 따르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경찰 수사는 아주 치밀할 거야. 거기에 대응하려면 말을
맟추지 않으면 안 돼. 당신과 나는 시내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오다가 사고를 냈다고 말해야 할거야. 물론 운전은 내가 한
것으로 해야 해.
동림은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나갔다. 그러나
남화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캡의 사나이는 마치 소가 새김질하듯 천천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식사를 시킨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에 관심이 없을 것은 당연했다.
뒤쪽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실내에 흐르고 있는 음악의 볼륨을 낮게 해 달라고 부탁한 다음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역시 들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그들이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그들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캡의 사나이는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고 있다가 그들의 모습이 문 저쪽으로 사라지자 그것들을
천천히 접시 위에 내려놓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가 먼저 차 속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아기를 안고 볼에다
두어 번 입맞춤을 한 다음 운전석 옆자리에 아기를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차가 움직이자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차가 골목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의상실 앞에 서있었다.
캡의 사나이는 웨이터를 불러 케이블을 치우게 했다.
다 드셨습니까?
반 이상이나 남은음식을 보고 웨이터가 주저하며 물었다.
음,다 먹었어.
맛이 없나 보죠?
아니야. 아침을 늦게 먹었더니 별로 당기지 않는데.
디저트는 뭘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주게. 저 여자 참 미인인데.......
턱으로 창 밑을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한 마디 하자 여드름이
더덕더덕 난 웨이터도 밖을 내다본다.
아, 저 여자 말이군요. 방금 식사하고 나간 분이에요. 남편은
못생겼는데 저 여자는 정말 미인이에요.
부부가 자주 여기서 식사하나 보지?
자주 하지는 않고 가끔 한번씩 함께 들르죠. 저 여자는
혼자서 여기 잘 옵니다. 식사보다는 코피를 즐겨 마시죠.
자네 혹시 짝사랑하는 거 아니야?
아,아닙니다.
웨이터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모습이 의상실 안으로 사라졌다.
의상실에서 일하나 보지?
의상실 주인이죠. 그래 뵈도 사장님이죠.
그래? 대단하군. 남편은 뭘 하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캡은 끄덕이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이상 그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웨이터가 아이스크림을 가져오자 그는 석간신문을
가져다달라고 말했다. 그 카페에서는 마침 지방지인 B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그는 대충 신문을 훑어본 다음 마지막으로 자질구레한
광고란에다 한참동안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그는 수첩을
꺼내 거기에다 무엇인가 적어넣었다.
실내에는 흑인 올훼 의 주제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캡의 사나이는 카페를 나가면서 웨이터에게 미소와 함께 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얼마쯤 걷다가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수첩을 꺼내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30분쯤 지나 그는 어느 다방에서 서른 가까이
되어보이는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은 깡마른 얼굴에 검정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는 흥신소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아까 전화 걸으셨던......?
청년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캡과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대머리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소. 자 앉으시오.
대머리는 캡을 집어 머리 위에 올려놓고 나서 코피 두잔을
시켰다.
무슨 일인가요?
이 차에 대해서 좀 알아봐주시오.
캡은 메모쪽지를 내놓았다. 거기에는 자가용 차번호가 적혀
있었다. 가죽점퍼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사고 차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구체적으로 뭘 알고 싶으신가요?
그 차의 차주에 대해서 우선 알고 싶소. 차주의 주소도
알아봐주시오. 내가 직접 경찰에 알아볼 수도 있지만 귀찮아서
그러는 거니까 대신 좀 알아봐주시오.
단지 그것뿐입니까?
싱겁다는 듯이 청년이 물었다.
또 있어요. 차주 자신은 물론 그 집안 식구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주시오. 직업, 나이 등등 알아볼 수 있는 한 상세히
알아봐주시오.
알겠습니다.
우선 그 정도만 알아봐줘요. 그 다음에 또 부탁할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오.
언제까지 알아야 합니까?
빠를수록 좋아요.
내일 모레까지 알아놓겠습니다.
좋아요. 얼마요?
건당 10만원입니다.
꽤 비싸군.
┌────────────────────────────┐
│ 4.캡의 사나이 │
└────────────────────────────┘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것 같은 불안한 하루가
지나갔다.
첫째 날은 일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둘째 날에도 별일은 없었다. 남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세째 날, 그러니까 12월 28일 그녀는 두번 다시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던 생각을 고쳐먹고 G카를 주차장에서 끌어냈다. 동림은
사고 후 처음으로 차를 몰고 출근하는 아내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 날도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초저녁 때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 8시경에 걸려온
전화는 마치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전화를 먼저 받은 사람은 의상실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종업원이었다.
남화씨 좀 부탁합니다.
어디신가요?
집입니다.
집이라는 말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수화기를 남화에게
넘겼다.
집에서 전화왔어요.
남화는 남편이 걸어온 전화인 줄 알고 얼른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목소리는 남편의 목소리가 아닌,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남화씨 되십니까?
남자 목소리치고는 가늘었다.
네, 그런데요.
남화는 불길한 생각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응답했다.
반갑습니다.
능청스러운 말소리에 그녀는 당황했다.
누구신가요?
누구냐구? 흐흐.......
남화는 피가 머리 끝으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웃음소리는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여보세요. 도대체 누구세요?
누구냐구? 흐흐흐...... 나를 알고 싶으면 지금 바로 나와요.
당신 차를 몰고 말이야. 그 주황색 G카는 당신한테 잘 어울리는
차야. 정말 썩 잘 어울려.
상대는 거의 반말로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쪽의 약점을
쥐고 아주 자신 만만하게 나오는 말투였다.
남화는 가슴이 막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게 숨을 몰아쉬었다.
전화를 잘못 거신 모양인데...... 정신 차리고 전화
끊으세요.
흐흐흐......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난 분명히 남화씨한테
전화를 건 거라구.
용건이 뭐예요? 누구신데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는 거예요?
그녀는 무너지기 싫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볼 심산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는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껄인다구? 건방진 년, 감옥에 가서 콩밥 먹고 싶나?
그 한마디에 그녀는 옴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주황색 G카 부산 1바 573×번을 몰고 지금 나와. K호텔
앞으로 8시 30분까지 나와. 조사할 게 있으니까. 추동림씨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상대방은 그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남화는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작업실은 조그마했다. 한쪽 구석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밖에 있는 전화기와 같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화기였다.
그녀는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보라빛으로 변해 있었다. 현기증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집어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떨어지면서 남편의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추동림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상대방의 말소리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조사할 게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그렇다면 경찰이란 말인가?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눈을 감았다.침착하려고
했지만 온몸이 걷잡을 수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경찰 수사에 걸렸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줄 알았으면 자수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감옥에 가서 콩밥 먹고 싶나? 상대방의 반말이
다시 귀를 때렸다. 그녀는 그 소리를 지우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경찰의 호출이라면 도저히 안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안 가면
붙잡으러 올 것이다. 그녀는 도망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내저었다. 도대체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8시
8분이었다. 지금 나가면 8시 30분까지는 K호텔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니까 시간되면 퇴근들해요.
그녀는 종업원들에게 이렇게 이르고 밖으로 나왔다.
마치 혼자서 호랑이 굴 속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밖은 몹시 추웠다. 바람까지 불고 있어서 더욱 추운 것
같았다.
차 속으로 들어가 엔진을 걸면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돌아올
길 없는 먼길로 떠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남편과
아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녀는 차에서 도로 내려 의상실로 들어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별일 없으세요?
음, 별일 없어.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걸었어요. 인하는 뭐하고 있어요?
자려고 누워 있어.
좀 바꿔줄래요?
아이와 통화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삼켰다. 아이는 엄마한테
빨리 집에 오라고 몇번씩이나 말했다.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그 눈물은 차를 몰고 달리는 동안 이내 공포감으로 얼어
붙어버렸다.
K호텔 앞에 이르렀을 때는 8시 5분이 초과해 있었다. 그녀는
길 한켠에 가만히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 앞에는
택시를 잡으려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차 쪽으로 접근해 오지는 않았다.
8시 40분이 지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8시 50분이 지났다. 그녀는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들은 하나같이 불을 휘황하게 밝히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른쪽 뒷문 쪽에 누가 바싹 다가서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잠긴 문을 열었다.
문이 홱 열리면서 한 남자가 찬바람을 몰고 들어왔다. 캡을
눌러쓰고 있었고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불을 꺼. 그리고 뒤돌아보지 마.
가는 목소리가 말했다. 전화에서 들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실내등을 껐다.
자, 이제부터 드라이브나 하지.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자신이 안고 있는 공포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고 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
뭘 조사하겠다는 거예요?
바보 같으니! 그 만큼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할 게 아니야.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으면서 왜 그렇게 둔해.
무슨 말씀인지......?
흐흐...... 사람을 치어죽이고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넌 살인범이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듣기에도 그녀의 말소리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래도 부인하겠다는 거야?
캡의 사나이가 두 손을 뻗어왔다. 잔뜩 움츠린 그녀의 목에
머플러가 걸렸다. 그녀는 반대 방향에서 뻗쳐 온 헤드라이트빛에
그것이 자신이 잃어버린 녹색 머플러임을 알고는 흑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나이는 그것을 도로 홱 채서 가져가 버렸다.
다음에는 쇠붙이 같은 것이 쩔렁거리면서 그녀의 목덜미에
와닿았다. 섬뜩한 느낌에 그녀는 목을 움츠렸다. 그것은
수갑이었다.
어때?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아니면 지금 손목에 수갑을
차고 바로 경찰서로 직행할 거야?
그녀는 비참한 모습으로 오돌오돌 떨어대기 시작했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봐줄 수도 있어. 모든 수사는 다 끝났어.
내 단독으로 한 거야. 단독으로 했기 때문에 네가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야. 아니, 또 한 사람
있긴 있지. 네 남편인 추동림 말이야. 하지만 그건 문제될 게
없겠지. 남화씨, 내 가벼운 입을 막고 싶은 생각 없나?
어두운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목소리는 악취처럼 그녀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주소가 해운대 S아파트 3동 508호지? 빨리 일을 끝내고
귀여운 아들을 보러가고 싶지 않나?
남편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아들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의 말로 이미 수사를 다 끝낸 모양이라고 남화는 생각했다.
이봐, 남편도 당신이 사고낸 것 다 알고 있지?
그녀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만난다는 거 이야기했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잘했어. 우리 사이의 일은 앞으로 비밀로 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거야. 이건 약속이야.
그는 우리 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자, 드라이브나 하지. 드라이브하면서 이야기하자구.
도시고속도로로 해서 해운대로 가.
그녀는 지금까지 그렇게 권위있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명령에 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떨면서 물었다.
목격했지. 이 두 눈으로 말이야. 해운대 P호텔 옆 커브길에서
26일 0시 40분에 정확히 목격했지. 당신은 차에서 내려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차를 타고 도망쳤지. 그때 이 머플러를 떨어뜨리고
갔어. 덕분에 내가 잘 사용하고 있지.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금까지 수사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남화는 생각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안심하고 있었던 자신이
더없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남편은 만일 경찰이 알게 되면
자기한테 책임을 미루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목격자는 이미 누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눈 앞이 캄캄한 어둠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운전을 못 하겠어요. 손이 떨려서.......
엄살부리지 마. 도망은 잘 치던데 그래. 도망칠 때처럼
가봐.
그녀는 앞을 노려보다가 엔진 키를 가만히 돌렸다.
일단 차가 구르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어둠이 조금 걷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 사실을 이 사람 혼자 알고 있을까. 혼자 알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 입을 막아야 한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오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업무에 충실한 경찰관이라면 당연히
피의자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연행해가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임무에 충실한 것 같지 않았다.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봐줄 수도 있다지 않은가!
부두길로 접어든 차는 도시고속도로를 향해 제법 속력을 내어
달려갔다.
정말 우연한 사고였어요. 그 사람이 술에 취해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였어요. 너무 무서워서 지금까지
신고도 못하고 있었어요.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신고하려는 참이었어요.
그녀는 호소하듯 말했다.
사나이는 코웃음쳤다.
한발 늦으셨군 그래.
정말이에요. 용서해 주세요.
내가 어떻게 용서해 주나? 모든 것은 법에 따라 처리되는
건데 참 죽은 그 사람이 누군줄 알아?
모르겠어요.
누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환각을 유발시키는 조명등처럼 휙휙
지나가도 있었다.
그 사람은 김명기라는 사람인데...... 무역회사 대표야.
대단한 부자야. 그런 사람을 죽였으니 만일 당신이 체포되면
당신한테 요구하는 위자료도 엄청나게 많을거야. 평생가도 갚지
못할 만큼 말이야. 그리고 지금 그쪽 사람들도 당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돈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수단 방밥을
가리지 않고 잡으려 들 거야. 내일 모레가 장례식이지. 아마
5일장을 치르는가 봐.
남화는 인간의 목숨에 대해서 문득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나
자신이 지금 달고 있는 목숨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부두길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나고 있는 아스팔트 노면이 눈 앞으로
확확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화는 속력을 줄이면서
핸들을 꽉 움켜 잡았다. 핸들을 잡은 손이 계속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처럼.
고속도로 위로는 어쩌다 차가 달릴 뿐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더없이 황량한 느낌이었다. 캡의 사나이는 차의
속도를 높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당신 남편은 왜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
그것은 그녀가 가장 대답하기 힘든 물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그런 대답이 어딨어?
정확한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전공도 없고...... 취직을 해도
얼마 못가서 나오곤 해요. 적응을 못하나 봐요.
이젠 나이가 많아 어디 취직하려 해도 할 수도 없다--라고
말하려다가 그녀는 그만 두었다.
괴상한 친구군. 그럼 당신이 먹여 살리나?
남화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을 먹여살린다 라는
말이 남편을 모욕하는 말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28세......그리고 추동림이라는 사람은
41세......무려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결혼생활은
어때? 행복하나?
조사를 해도 철저히 조사를 했구나 하고 남화는 생각했다.
네, 그런 편이에요.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해운대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런 편이라구? 연애결혼했나 아니면......?
연애결혼이었어요.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에 떠있는 배들이 밝히고
있는 불빛들을 보고 거기가 바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해운대에 가자는 것일까. 혹시 우리 집에 가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어둠에 잠긴 바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오른쪽에 밤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난 바다가 좋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가 뚱딴지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은 바다가 좋지 않아?
좋아요.
그래서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고 있지 않은가!
P호텔이 다가왔다. 그리고 커브길이었다. 바로 거기서 죽음의
사신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남화는 속도를 줄였다. 커브를 돌자
사내가
잠깐 차를 세워. 하고 말했다. 정확히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남화는 차를 세우면서 전율했다.
바로 여기서 사고가 났었지? 안 그래?
사나이는 남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앞에 그 남자가 누워 있었고...... 당신은 차를 그 앞으로
몰고가 차에서 내려 시체를 내려다보았지. 아, 그 전에 안경을
집었던가 그랬었지. 깨진 안경을 집어들고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내던지고 그 남자를 잡아 흔들었지. 잡아 흔들면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신차리세요 하고 말했지. 그 사람이 움직이지 않자
당신은 그대로 도망쳤어. 머플러가 떨어진 것도 모른 채
말이야.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의 말은 너무도
정확하다. 사고 당시 현장을 목격하지 않고는 이렇게 정확한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남화는 비로소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라는 그 사나이의 말을 믿었다.
자, 출발해.
그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겠지. 그러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목격자가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당신은 감사해야 할거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다시 커브를 돌자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속력을 늦추었다.
저 아파트에 당신 집이 있지?
남화는 5층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바라보았다. 집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가 미치게 그리웠다.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뛰어가고 싶었다.
머뭇거리지 말고 그대로 가. 송정쪽으로 가란 말이야.
가운데로 질러가지 말고 바다 쪽으로 해서 가.
남화는 차를 세웠다. 엔진은 끄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뭘 바라시는 거예요?
곧 알게 될 테니까 빨리 가. 멋대로 차를 세우지 마. 내 말에
거역하고 싶으면 지금 집으로 들어가도 좋아. 그대신 그것으로
당신은 끝장이야.
남화는 아파트를 한번 올려다본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만 가면 외지고 으슥한 길이 나온다. 산 허리를 끼고 송정
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진 아스팔트길로 낮에는 지나다니는 차들이
꽤 많지만 날이 저물면 거의 차들이 다니지 않는다. 길 양켠은
숲으로 우거져 있고, 오른쪽 경사진 숲 아래에는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날씨가 맑을 때 차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짙은 남빛이기도 하고 짙푸른 청색이기도 하다. 그
바다를 볼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그 길을 달맞이 길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달맞이 길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그녀에게 공포의 길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는 계속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오른쪽 아래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검다는 느낌만이 와닿았다.
왼쪽으로.
그녀는 속력을 줄이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차는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캡의 사나이는 그곳의 지리에 익숙한 것 같았다.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외진 곳으로 계속 방향을 유도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차가 덜컹거려다. 공포감이 극도에 달한 나머지 제대로 운전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커브를 돌자 막다른
곳이었다. 수 미터 앞에 축대가 높이 솟아 있었다. 택지로
조성해 둔 곳이었다. 그것은 밀폐된 곳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사각지대로 바람까지도
차단시켜주는 아늑한 곳이었다.
불을 꺼.
그녀는 시키는 대로 차의 모든 불을 껐다.
모든 것이 갑자기 정지되어버린 것 갚았다. 자신의 몸뚱이가
어둠 속에 침몰되어 어둠의 바다 속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소리뿐이었다. 바람소리는 조금 높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사고능력마저
정지되어버린 냉동인간처럼 생각되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을
벗는 것 같았다.
이윽고 사나이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그는
여전히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냉동인간처럼 얼어붙은 그녀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옮겨 앉아.
사나이의 가늘고 조그만 목소리에는 거스릴 수 없는 위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운전석 오른쪽 자리로 옮겨 앉았다.
사나이의 두 손이 뒤로부터 그녀의 양 어깨 위로 올라왔다.
남화는 부르르 떨었다. 두 손이 그녀의 길고 갸냘픈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마치 개처럼 킁킁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코를 갖다댔다.
음, 머리 냄새 좋군.
두 손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 이러지 마세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왜 이러냐고? 몰라서 묻나? 그대로 가만 있어. 넌 가만
있기만 하면 돼.
한 손이 밑으로 내려가더니 가슴을 움켜잡는다. 그녀의
몸뚱이에 경련이 일었다.
아, 안돼요!
그녀는 격렬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가만 있으라니까. 어떤 것이 너한테 이익이 되는지 잘 생각해
봐. 넌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살인자야. 알았어? 넌 살인자란
말이야. 살인자를 체포하면 제일 먼저 수갑을 채우도록 되어
있어.
수갑을 꺼내는지 쩔거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갑을 채워야지 안 되겠어.
사나이의 우악스런 손이 그녀의 팔을 뒤로 비틀었다. 손목에
철컥하고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드디어
살인범으로 체포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나이는 나머지 한쪽
팔도 뒤로 비틀어 돌닌 다음 거기에도 마저 수갑을 채웠다.
그녀는 두 팔을 앞으로 돌리려고 해보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팔이 잘려나간 것 같은 허전함이 가슴 가득히
전해져왔다.
갑자기 의자의 등받이가 뒤로 젖혀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상체도 뒤로 눕혀졌다. 놀란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려하자 사나이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그대로 있어. 그대로 가만히 있어.
그것은 허공에서들려오는 악마의 소리였다. 악마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한번만
봐주세요...... 봐주신다면 요구하는 대로 다드리겠어요.......
난 이 몸이 필요해.
가슴으로부터 복부로, 그리고 다리 사이로 뱀이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등에 깔린 두 손에 고통이 오기
시작했다.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전 지금
임신중이에요...... 그것만은 안 돼요...... 그것만 빼놓고
뭐든지 들어 드리겠어요...... 돈이 필요하면 돈을
드리겠어요.......
돈 같은 건 나도 많아.
전 지금 임신중이에요. 살려주세요!
거짓말 마!
사나이는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건너오더니 그녀의 몸을 덮쳤다.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몇번 도리질을 하다가 남자의
흡인력에 완전히 빨려들어갔다.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 꼼빡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저항을 잃은 상태였다.
네 운명은 내 손에 달려 있어. 얼마나 내 말을 잘 듣느냐에
달려 있어. 내 말을 잘 들으면...... 너는 감옥에 안 갈 수도
있어. 영원히 비밀로 해줄 수도 있다 이 말이야.
사나이의 입이 그녀의 입으로부터 귀로 이동했다. 그는
위협적이면서도 달콤하게 속삭였다.
살고 싶나 죽고 싶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줄 테니까 가만 있어.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이게 목숨보다 귀하단 말이야? 이게 뭔데?
사나이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면서 그녀를 난폭하게
다루었다.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살고
싶은 욕망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말로는 끝없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몸은 이미
저항력을 상실한 채 열어놓고 있었다.
사람을 치어죽이고 도망쳤을 때 이미 이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상대가 악마인 줄 알면서도 그녀는 살기
위해 그와 타협하고 싶었다. 살기 위해 타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가 육체를 요구하면 그것을 던져서라도 목숨을
구하고 싶었다. 남편도 그것만은 이해해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구름 사이로 달이 나타났다. 둥근 달이었다. 달은 구름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마치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나 한 것처럼.
목석 같군.
이윽고 사나이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처음의 맹렬하던
기세와는 달리 그는 잠깐 사이에 일을 치르고 나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남화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왔다. 달도 구름도 보이지 않고
캄캄한 어둠이 시야를 덮쳐왔다.
사나이가 옷을 주섬주섬 입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어둔 채 있었기 때문에 찬 바람이 몰려들었다. 비로소
그녀는 아랫도리에 차가움을 느끼고는 다리를 움츠렸다. 그때
사나이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불을 켰다. 불빛에 드러난
그녀는 걸레처럼 짓이겨진 모습이었다.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고 웃도리는 헤쳐져 젖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가릴 수가 없었다.
수갑좀 풀어주세요. 옷을 입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여자의 목소리치고는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캡의 사나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잠자코 수갑을
풀어주었다.
구름이 걷히고 다시 달이 나타났다. 구름이 모두 흘러가버린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높이 떠서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캡의 사나이는 달빛 속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바다 쪽을 향해 서 있었다.
저 아래 바다 위로는 달빛이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바다는
온통 고기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옷을 모두 입고 난 남화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남자의 침묵이 견딜 수 없는 중압감과 함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다짐을 받고 싶었고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문득 그 남자가 경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까는 경황중에, 그가 수갑을 꺼내보이면서
연행하겠다느니 어쩌니 해서 정말 경찰관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과연 경찰관이 피의자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소리없이 다가섰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정말 경찰관이세요?
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경찰이 아니죠?
사나이가 피우던 담배를 내던졌다. 그것을 구두 끝으로 짓밟는
것을 보면서 남화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경찰이 아니죠?
사나이가 돌아봤다. 두 눈은 여전히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었고, 그 위에다 캡을 눌러쓰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스치는 것을 남화는 볼 수 있었다.
내가 언제 경찰이라고 했나? 난 내 입으로 경찰관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착각하지 마.
남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포와 당혹감으로 그녀는
어쩔 바를 몰랐다.
꽤 웃기는 여자군.
아무튼 좋아요. 경찰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세요?
그런 건 알 필요없어.
남자는 싸늘하게 말했다.
요구를 들어줬으니까 약속은 지키시는 거죠?
입을 다물어달라 이거지?
사나이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나타났다.
제발 부탁이에요. 돈이 필요하면 돈을 드리겠어요. 저한테는
세 살짜리 아들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정말 임신중이에요.
그래서 자수할 수 없었던 거예요. 부탁이에요!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 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사나이는 측은한 듯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면서
그래. 약속한 거니까 약속은 지키지. 하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구두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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