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1-2

3학년2반 | 2022.02.04 07:47:36 댓글: 0 조회: 560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502
┌────────────────────────────┐
│ 5.파리의 도망자 │
└────────────────────────────┘

12월 29일 런던 히드로 공항.
공항 광장에 서 있는 탑시계가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7시)를 막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검은 색깔의 오스틴형 택시가 대합실 입구 앞으로 굴러
와 멎더니 동양인 한 명을 내려놓았다. 택시는 곧 출발했고, 그
동양인은 출입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짐도 없는지
누런 가죽 가방만을 한개 달랑 들고 있었다. 중키에 중후한
몸집을 가진 50 전후의 남자로 회색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브라운 빛이 도는 안경을 끼고 있어서 얼굴 모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동양인 신사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베이지 색의 코트 앞을 열어
놓고 있었다. 넥타이는 단정하게 조여져 있지 않고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얼굴빛은 거무스레했다. 코트 안에 입고 있는
양복은 회색 저고리와 검정 바지의 콤비였다. 넥타이가 걸린
와이셔츠는 체크 무늬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에 걸친 짙은
자주색 머플러의 양쪽 끝이 앞으로 길게 흘러 내려와 있었다.
브라운 안경으로 가려진 두 눈이 대합실 안을 불안한 듯
훑어보더니 이윽고 중절모의 사나이는 각 항공사의 카운터가
늘어서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대합실 안은 사람들로 와글거리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 위로 가방을 끌고 가는 소리가
마치 기계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중절모는 걸어가면서도 주위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에어 프랑스 카운터 앞에 멈춰섰다. 몇 사람이 그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맨 뒤에 붙어
서서 비행기표를 꺼내들고 초조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었다. 이미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좌석 배정만 받으면 되었다. 금발의 여직원이 표를 받아들더니
영어로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치실 짐은 없나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발은 표를 뜯어낸 다음 그에게
좌석번호가 적힌 보딩패스를 내주었다.
출발시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대합실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는 대형 전자게시판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게시판에는
각항공사의 편명(便名)과 출발시간, 목적지, 탑승구 번호 등이
나와 있었다. 그가 타야 할 비행기는 AF811번 기였다.
출발시간은 11시 30분. 그는 보세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출국심사대 쪽으로 다가갔다.
허리에 권총을 찬 보안요원들이 출국심사대에 앉거나 혹은
서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엑스선 투시기가 설치되어
있는 검사대 위에 올려놓은 다음 심사대 앞으로 바싹다가섰다.
심사대 위에 여권과 보딩패스를 올려놓으면서 보안요원의 표정을
살폈다. 여권 표지에는 대한민국 여권 이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보안요원이 컴퓨터를 두드렸다. 수배인물이라면
화면에 금방 드러나고 말 것이다. 중절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경을 벗어보실까요?
보안요원이 영어로 물으면서 손으로 안경을 가리켜보였다.
한국 여권을 가진 사나이는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조심스럽게 안경을 벗었다.
불안하고 피곤에 젖은 두 눈이 나타났다. 눈꼭지가 쳐져
있었고 눈가에는 주름이 많았다. 눈빛은 흐려보였다.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보안요원은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과 실제 얼굴을 대조해 보고
나서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여권의 빈칸에다 스탬프를
쾅하고 찍었다.
중절모는 출국심사대를 통과해 보세구역으로 들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무겁고 지쳐 있는 듯이 보였다. 엑스레이 검사대를
통과한 가방을 들고 그는 홀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스낵코너가 있었다. 코너 주위에는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는 스탠드 위에 파운드화 동전을 꺼내놓고 굳이
종이컵에다 커피를 따라달라고 부탁했다.
커피가 나오자 그는 그것을 들고 맞은편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는 길게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홀 쪽을 등지고 앉았다. 거기서는 공항 활주로가 훤히
내다보였다.
그는 중절모를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고 이마에 번진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더워서 흘린 땀이 아닌 식은땀이었다.
이마는 넓었고 기름을 바른 머리는 가르마 없이 올백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는 활주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튼튼하게 생긴 턱 주변은 면도자국이 시퍼렇게
나있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다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거기다 바람까지 몹시 불어대고
있었다. 흐린 하늘 저편 아득한 곳으로부터 안개 같은
희끄무레한 것이 밀려오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윽고 눈발이 되어
나타나 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는 품 속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들어 있던 사진 한 장을
빼냈다. 그것은 컬러로 된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미치게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그의 아내는 고생에 찌들고 늙은 모습이었다.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그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거의 밖으로만 싸돌아다녔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혼자 살림을 꾸려 가느라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구김살 없이
모드들 잘 자라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들 둘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 맏이는 어느 새 소년티를 벗어나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버려두었던 그 찌들고 늙은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그렇게도 그리워 보기는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아이들보다도 그녀가 더 보고 싶었다. 만일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내를 아끼면서 살아야지. 시골에다 집을
하나 사서 아내와 함께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지.
그러나 그는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신세이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이 미치게 그리운지도
몰랐다.
집과 고국을 떠나 외국으로만 떠돌아다닌 지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전에도 해외 나들이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랐다.
그 전에는 일거리가 있어서 외국 여행을 했지만 지난 1년
동안은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은 그야말로 아무 하는
일없이 마치 부평초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보복이 두려워 줄곧 도망
다녔다고 보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도망다니는 데도 지쳐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나이
50이 가까와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그가 지난 1년
동안 외국으로만 떠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충분한 돈이 없었다면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에게는 많은 돈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도망다니기에 충분한 막대한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을 느끼기는 커녕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오히려 돈 많은 부자보다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죽어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데.......
그는 종이컵을 구겨쥐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생각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죽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힘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양쪽에서 쫓기고 있었다.
조직이 그를 쫓고 있었고, 경찰 또한 그를 찾고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공항에서 맞아죽든가 경찰에 체포될 것이
뻔했다.
그는 경찰보다도 조직을 더 무서워 하고 있었다. 국제조직인
만큼 그들이 손을 뻗을 수 있는 영역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지구에 생존해 있는 한 말이다.
그들은 지구 어디에나 손을 뻗칠 수가 있었고, 바로 그 점을
그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한국 경찰에 대해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는 한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을 아주 놓을 수는 없었다. 한국 경찰이
인터폴(국제경찰)과 손을 잡고 수사를 전개한다면 그를
못잡을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공항의 출입국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보면 인터폴은 그의 존재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안았다.
11시 30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 811번기를 기다리는
손님들께서는 5번 게이트로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11시 30분발.......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 다음 그것을 품 속에
집어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5번 게이트로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그도 그들 속에 섞여
보딩패스를 보이고 게이트를 통과해 비행기에 연결되어 있는
브리지 위를 걸어갔다.
비행기의 출입구에 서있던 두 명의 금발 미녀가 그를 향해
미소를 던졌다.
그중의 한 명은 가슴이 너무 풍만해 스튜어디스 제복의 맨
윗단추가 풀어져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앉은 그는 벨트를 매자마자
이내 졸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비행기 타는 것도 이제 지겨운 일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어느 호텔 화장실의 변기 위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뒤로부터 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이 무쇠 같은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기는 커녕
숨이 막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팔뚝을 손톱으로
할퀴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그것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돈을
내놔. 돈을 어디다 두었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목을 분질러
버릴 테다. 이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말하고 있었다. 몰라.
돈이 지금 없어. 돈은 은행에 들어가 있어. 스위스 은행.......
그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막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악스런 손이 그의 뒤에서 왼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팔에 감겨 있던 그의 목이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으악!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옆에 앉아 있던 노파가 놀라서 일어나려고 했다. 앞자리의
흑인이 껌을 씹으면서 뒤돌아보았다. 흑인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복의 윗단추가 벗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노파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빈 자리로 옮겨앉았다. 그는 식은 땀을 닦으면서 목을
어루만졌다. 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신사숙녀 여러분, 드골 공항에 곧 착륙하겠으니 벨트를
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스먼트를 듣고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
20분.
10분후 AF811기는 비행을 끝내고 드골 공항 활주로 위를
굴러갔다. 히드로 공항을 출발한 지 꼭 한 시간만이었다. 그는
현지시간에 맞춰 시계바늘을 한 시간 빠르게 돌려놓았다.
입국심사대 앞에 앉아 있는 프랑스 관헌은 그에게 안경을
벗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여권에다
입국해도 좋다는 스탬프를 찍었다.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와 홀을
가로질러 가면서 그는 유리벽 저편에 몰려 서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가 찾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몰려 서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길게 목을 빼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흔들어댔다. 그것은
책이었다.
홀로 나서자 젊은 그녀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담뿍
미소를 담은 채.
오랜만이에요.
머리를 잘랐군. 그는 오랜만에 자신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마한 그녀의 손은 병아리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잘라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희었고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그녀는 푸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그 코트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괜찮아. 무겁지 않아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어요.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에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데 서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대요.
그는 끄덕이면서 잠시 무표정하게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
공항 광장을 바라보았다.
공항 건물은 광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세워져 있었다.
채 녹지 않은 눈을 뒤집어쓴 차들이 물을 튀기면서
일방통행로를 따라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택시를 집어탔다. 그녀가 능숙한 불어로
뭐라고 말하자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차를 출발
시켰다.
광장을 빠져나온 택시는 파리 시내를 향해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중년의 운전사는 아스팔트 노면이
진눈깨비로 젖어 있는 것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2년만이죠?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음, 그렇지. 벌써 그렇게 됐나? 세월 참 빠르군.
그는 가능한 한 웃어보이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얼굴 표정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여름이었다. 그때 그는
일거리가 있어 파리에 왔다가 어느 한국 식당에 들렀었다.
식사를 하면서 한국인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 주일쯤
관광안내를 맡아줄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웃으면서
가능하면 여자가 좋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그날 저녁 한국인 여자
유학생 한 명을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것이 그들의
첫대면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무화(柳霧花)라 했다. 그녀는 건축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파리에 온 지 3년이 된 아가씨였다. 여느
유학생들처럼 그녀도 시간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한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관광안내를 맡고 있었다.
그때 말이 그녀는 집에서 부쳐주는 돈이 너무 적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근근히 유학생활을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에게 적은 돈이나마 부쳐주는
그녀의 아버지는 시골 국민학교 교장이었던 것이다. 가정형편을
보아 도저히 유학할 형편이 못되었지만 그녀는 고생할 각오를
하고 떠나왔다고 하면서 지금은 언어장벽을 어느 정도 극복했기
때문에 차차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일 주일 동안 안내를 해준 댓가로 그는 정해진 액수의 배가
되는 달러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놀란 그녀가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다음 번의 안내비를 미리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그녀의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었다.
1년 후, 그러니까 2년 전 가을 그는 파리에서 두번째로 그녀를
만났다. 그때에는 닷새쯤 머물다 갔는데 그때에도 그는 적지
않은 달러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떠났었다. 그러고나서 이번에
세번째로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귀중한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공부는 잘 돼가요?
네, 그럭저럭.......
그녀는 공부에 시달린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좀 야위었어. 헤어스타일도 바뀌고 말이야.
2년 전 그녀는 지금처럼 야위지는 않았었다. 머리도 길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귀찮아서 잘라버렸어요. 머리에 신경쓰지 않으려고요.
그녀는 예쁜 여자는 아니었다. 결코 미녀라고 할 수 없는데도
그녀에게서는 미녀 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연약해
보이면서도 연약하지 않았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한
개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옆얼굴을 보면 차가운 느낌이었다. 눈빛은 맑았다.
선생님, 피곤해 보여요.
음, 돌아다녔더니 좀 피곤한데.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모자 쓰신 게 어울려요.
다행이군.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호텔에 예약해 놨어요.
고마워요.
웅장한 개선문이 앞으로 다가왔다. 차는 개선문이 서있는
에트왈 광장을 오른쪽으로 돌아 콩고르드 광장을 향해 샹젤리제
대로를 조금 굴러가다가 멈춰섰다.
폭 1백 10미터의 넓은 거리 양쪽에 있는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가지들은 잎 하나없이 눈을 뒤집어쓴 채 앙상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눈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거리는 지저분했다.
황표(黃彪)는 길을 건너갔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호텔에 먼저 가서 짐을 풀어야 하지
않아요.
무화가 뒤따라 오면서 물었다.
짐 풀 것도 없어요. 짐이 있어야 풀지. 우선 어디가서 커피나
한잔 합시다.
네, 그래요. 이쪽으로 가요.
그녀가 그를 앞질렀다.
조금 후 그들은 르 콜리세 로 들어섰다. 그곳은 파리 최대의
카페였다.
날씨가 나빴기 때문에 카페 안은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마침 창가에서 한 쌍의 남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쪽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으니 샹젤리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모자를
벗어 탁자 한쪽에 올려놓았다.
흰 머리가 많이 생겼어요.
그녀가 그의 머리를 유심히 살피면서 말했다.
나이는 못 속이지. 이젠 늙었어.
늙으시기는요. 이제 한창이신데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음, 덕분에 잘 지냈어요.
그녀는 그를 사업가로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무역회사
대표로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그렇게 알 수밖에 없었다.
무화는 스푼으로 커피를 여러번 저었다. 황은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희고 조그만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들의 관계는 관광객과 가이드의 관계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 쪽에서 조심하고 있다기보다는 여자 쪽에서
워낙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가 가이드 이상의
관심을 자기한테 보여주었으면 했지만 지난번까지 그러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세번째 만났으니 이번에도
그녀가 자신을 지켜낼지 의문이었다.
파리에 온 지 이제 얼마나 됐지요?
6년 됐어요.
꽤 됐군.
네, 스물 세살 때 왔는데 어느 새.......
그녀는 말 끝을 흐렸다.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는데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흑인 백인 황인종이 뒤섞여 걸어가고 있었다.
유무화는 스물 아홉이었다. 그 나이인데도 그녀는 결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집에는 몇번 다녀왔어요?
작년 여름에 한번 다녀왔어요.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래요?
그는 약간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어요?
거기까지는 물어보는 게 예의였다.
그녀는 담배를 뽑아 물었다.
소뿔에 가슴을 받혔나 봐요.
저런 어쩌다가.......
먹이를 주는데 갑자기 달려들었대요.
그녀는 남의 일처럼 가볍게 말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그전에도 가끔씩 피우긴 했어요. 선생님 앞에서는 피우지
않았지만.......
작년에 한국에 갔다면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지?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시간도 없었지만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어요.
코밑 수염을 기른 웨이터가 빈 잔을 거두어갔다.
런던에는 무슨 일로 가셨어요?
아, 회사일로 갔다가 무화가 보고 싶어서 이리로 방향을 바꾼
거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얼마나 계실 거예요?
보름 아니면 한 달.......
이번에는 오래 계시네요.
음,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미스 유한테 신세를 질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인데.......
신세는 언제나 제가 지고 있는 걸요.
요즘 시간은 어때요?
방학이라 시간은 많아요. 여기서 하실 일이 많으신가 보죠?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는 당황해서 말했다. 당황한 것을 감추려는 듯 그는 얼른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여기 온 지 6년이 됐으면 이제 고국에 돌아갈 때도 됐지
않나요?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네, 언제 돌아가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꼭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공부도 아직 안 끝났고요.
참 학위는 받았나요?
못받았어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녀의 맑은 눈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창 밖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파리에서는 3년 안에 학위를 따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3년이
지나면 학위 따기가 어렵다는 말이죠. 파리를 너무 속속들이
알게돼 공부하는 데 지장을 많이 받거든요.
황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기도 했다.
파리에 막 와서 아무 것도 모를 때 후다닥 공부해서 학위
따가지고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고 지체하다 보면 갈수록 학위
받기가 어려워져요. 파리에 젖어들다 보면 주위의 유혹을 많이
받게 되고...... 결국 공부보다는 다른 데 더 신경을 쓰게 되죠.
저같이 학위도 못받고 세월만 잡아먹고 있는 유학생들이 꽤
많아요. 전...... 학위다운 학위를 받고 싶어요. 트뢰지엠 시클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아요. 그런 건 받으려고 했으면 벌써
받았을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서리고 있는 것을 그는 얼핏 볼 수
있었다.
트뢰지엠 시클? 그게 뭐지요?
여기에는 두가지 종류의 박사학위가 있어요. 하나는 방금
말한 트뢰지엠 시클이고, 다른 하나는 독토라 데타라고
국가박사가 있어요. 트뢰지엠 시클은 외국인에게 주로 내주는
학위로 우리 유학생들도 대부분 그걸 받아가고 있어요. 3년만에
후다닥 따가지고 가는 게 대부분 그거예요. 하지만 그 학위는
프랑스 국내에서는 권위가 없어요. 그걸 여기서는 별로 알아주지
않아요. 여기서 그 권위를 인정해 주는 건 국가박사예요. 하지만
그건 따기가 몹시 어려워요.
그녀는 단숨에 말하고 나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샹젤리제의 흐름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가로수
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미스 유가 노리고 있는 게 바로 국가박사인가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절박하게 갈구하지는 않아요.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집어치울 거예요.
다르게 사는 방식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건 상당히 타협적인 말인데.......
네, 그래요. 전 6년 동안에 많이 달라졌어요. 극한투쟁하는
것처럼 제 자신을 질책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는
사랑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그리고 술도 마시고
싶어요. 차도 한 대 사고 싶어요.
운전 할 줄 알아요?
면허증은 벌써 땄어요. 친구 차로 시내 운전도 여러 번
해봤어요. 서울보다 운전면허가 훨씬 쉬워요. 서울 사람들은 왜
그렇게 결사적으로 운전을 하죠? 서울에 굴러다니는 차들은 차가
아니라 살인도구 같아요. 운전하는 사람들은 여유도 없고 품위도
없어요. 마치 촌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차라는 것을
사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같이 자기
괴시욕으로 차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땅은 좁은데
차가 크고 사치스러울 수밖에요. 보세요. 저기 굴러다니는
차들치고 반반한 차 있어요? 하나같이 날고 볼품없는 차들을
굴리고 있어요. 괴시욕이란 조금도 없어요. 필요하기 때문에
굴리는 거예요. 하지만 거리를 굴러가는 차량의 흐름은 멋지지
않아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는 그위에
자기 손을 가만히 얹었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고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쓸만한 중고차라면 값이 얼마나 되나요?
천 달러 정도면 살 수 있을 거예요.
내가 하나 사주지.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입을 다물고 손을 빼냈다.
내일 나하고 차를 사러 갑시다.
그는 잔에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선생님은 가끔씩 저를 놀라게 하세요. 그때마다 저는 여간
불편하지가 않아요. 차를 사주시겠다는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그런 선물을 받아야할 명분이 없잖아요. 그런 말씀은 없었던
걸로 해요.
그럴 수는 없지. 자, 호텔로 갑시다.
그가 먼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차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중고차를
한 대 사줘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건너 바사노
거리로 들어섰다. 골목길을 얼마쯤 걸어간 곳에 조그마한 호텔이
하나 있었다.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나.
그는 호텔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무화는 얼굴을 붉혔다.
깨끗하고 비싸지도 않아서 여기를 예약했어요. 들어가보시면
괜찮을 거예요. 굳이 비싼 호텔에 가서 달러를 없앨 필요는
없잖아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설교하려고 하지는 말아요.
그는 앞장 서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에토왈이라는
호텔이었다.
그녀가 프론트로 다가가 뮤스 황이라는 이름으로 예약했다고
하자 프론트맨은 예약자 명단을 체크해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황은 여권을 내놓았다. 프론트맨은 여권을 찬찬히
살피면서 필요 항목에 적고 나서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빈 칸에 사인하고 나서 열쇠를 받아들었다.
샤워하고 좀 쉬세요. 7시 쯤에 제가 이리로 오겠어요.
그가 방으로 함께 올라가자고 말하기전에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긴 그 전에도 그녀는 호텔 방까지 따라들어 오지는
않았었다.
그럼 이따 7시에.......
몇 호실이에요?
512호실.
그는 얼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겉에서 보기보다 깨끗하고 고급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호텔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그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유무화가 큰 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무화씨!
그는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뒤돌아보자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해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지 말고 이이 올라와요!
그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주춤하면서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후에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여자답게 조심스러운
노크소리였다. 그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넥타이를 뽑아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유무화가 코트에 두 손을 찌른 채 경계의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이리 들어와요.
그는 그녀가 들어올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자 긴장이 풀리는지 소퍼에 털썩 주저 앉는다. 왜
불러들였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부른 거요.
그는 가방 속에서 위스키병을 꺼내들었다. 노란 액체가 병의
중간 정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갑고 이지적이던 옆모습은 담배를 입에 물자 데카당한
모습으로 변했다.
탁자 위에는 컵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컵에다 노란
액체를 조금 따랐다.
자, 한잔 들어요. 얼음도 없고 안주도 없으니까 그냥
스트레이트로 들어요.
그녀는 그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술잔을 받아들었다.
황표는 잔이 없었기 때문에 병째 나발 불었다.
그가 병째 술을 마시는 것을 무화가 흥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가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렇게 드러누운 상태에서 술을 들이켰다.
코트 벗어요.
그가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화는 앉은 채로 코트를 벗어
빈 의자에 던져놓았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그렇게 묻고 나서 그녀는 위스키를 입 속에 흘려넣었다.
그 물음에 대해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있는 그 점이 그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선생님, 그전 같지가 않아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전 같지가 않고 어떻다는 거지?
그는 자신의 모습에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피로해 보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사실이야. 나는 지금...... 죽음과 싸우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늙은이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그가 불치의 병에라도 걸려 그것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물음이었다. 황은 쿡쿡거리고 웃었다.
몸은 건강하지.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쫓기고 있어.
누구나 다 죽음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닌가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듯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리 와요. 이리 와서 슬 한잔 더 받아요.
무화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으며 빈 술잔을
내밀었다.
술을 따라주는 그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술이 있어서 다행이야. 여자가 있으면 금상첨화인데 말이야.
저는 여자가 아닌가요?
그녀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이기 전에 가이드이지.
가이드이기 전에 전 여자예요. 제가 선생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그녀는 술이
엎질러지지 않게 술잔을 든 손을 높이 쳐들면서 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조금 후
그녀는 상체를 일으킨 다음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파리에는 유학생이 5천명쯤 될 거예요. 출국하기가
쉬워지면서 어중이 떠중이 다 몰려들었죠. 그중 진지하게 학업에
열중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빌빌거리면서
세월만 잡아먹는 거예요. 저도 그 나머지에 속하는 빈혈증
환자죠. 유학생이 많기 때문에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아요.
누구하고 데이트만 한번 하면 소문이 다 돌아요. 처음에는 그런
소문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을 썼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지금은 그런 거 묵살해 버려요.
그녀는 검정색 폴라셔츠를 뒤집어 뽑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옷벗는 모습을 뒤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브래지어를 걷어냈다. 살결이 유난히
희었고 어깨뼈가 앙상히 드러난 약간 야윈 모습이었다. 그녀는
벗은 옷들을 소파 위로 훌훌 집어던졌다. 거추장스럽다는 그런
태도였다.
처녀가 옷을 벗지 않으려고 몸을 빼고 하는 따위의 짓거리
같은 것은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망설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가 놀랄 정도로 거침없이 옷을 벗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그는 오히려 시원하고 깨끗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던 헝겊조각을 마지막으로
벗겨냈다. 전체적으로 야윈 모습인데도 엉덩이 부분만은
탄력있게 살이 올라있었다. 그녀가 그 쪽으로 돌아서자 젖가슴이
흔들렸다. 놀랍도록 큰 가슴이었다. 야윈 몸매와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것은 묘한 느낌으로 그를 자극했다.
아직 처녀인가?
저는 스물 아홉이에요.
그는 드러누운 채 옷을 벗었다.
제 행동에 놀라셨죠?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일단 마음 정하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음을 정할때까지가 문제지요. 섹스자체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나는 흥분이 잘 되지 않아.
저도 그래요.
창문에 커튼을 치는 게 그런 일을 하는데 좋은줄 알면서도
아무도 일어나 커튼을 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큰 젖가슴 사이에서 흥분했다. 그는
아이처럼 그녀의 가슴에 입을 갖다댔다.
임신시키지 말아요.
남자를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 벌써 허덕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자기를
다스릴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임신시키지 말아요.
그녀가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임신을 하건 말건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파리를 떠나버리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는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그런 식의 삶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무화는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눈송이가 거기에 달라붙었다가 이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현실을 잊어갔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버스를 타고 덜컹덜컹 흔들리며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었고, 그리고 가난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있었다. 정년을 1년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몸을 가누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교장직도 내놓아야 했고 설살가상으로 그녀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4남매의 막내였다. 위로 오빠 둘과 언니가 있는데
오빠들은 서울에서 살고 있었고 언니는 고향 남자와 결혼해서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아 살고 있었다.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오빠들은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꺼려 했고 그녀의 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 형편이라
친정 아버지까지 모실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80이 다 된 할머니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역시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할머니는 먼저 죽었으면
이런 꼴을 보지 않을 텐데 하면서 60이 넘은 아들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손수 밥을 지어 입 속에 떠넣어주었다.
지난 여름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가보았을 때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보다도 아버지의 처지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몇번이나 자신에게 타일렀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키우는데
전생애를 바친 몸이었다. 자신들을 교육시키느라고 모든 수입을
써버렸기 때문에 집에는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자식된 도리로서
누군가 한 사람쯤 아버지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마땅했다. 이제
자신이 아버지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뿐이었고, 결국 그녀는 도망치다시피 고향집을
떠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고향과 아버지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떠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때문에 학업을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대신
성취욕에 사로 잡힌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껏이
지나쳐 지금은 학업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었고 갑자기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비틀거리는 빈혈증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몸져 누우면서부터 적은 돈이나마 송금도 끊겼기
때문에 그녀는 당장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파리
유학생으로서의 긍지나 낭만 같은 것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공항에 마중나가 황표를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전과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카페 르
콜리세에서 그가 그녀의 손을 만졌을 때 그녀는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몸을 내맡기는 행위는 사실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 앞에서 그런
다는 것은 냉정한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존심을 꺾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 위에 헐떡거리며 자신의 몸뚱이를
짓이기고 있는 그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그녀가 좋아할 타입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장점은 돈 쓰는
것이 헤프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돈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그 위력을 가지고 불안해 하고 있는 그 남자만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이 몸 속으로 분출하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는 자신의 욕구를 발산했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옆으로 벌렁 눕는 것을 보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싫은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는 그래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느낌까지 들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배 위에 끈적거리는 남자의 땀을 시트로 닦아내면서
임신하면 어떡 하죠? 하고 물었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내쉴
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그런 것을 물었다고 후회했다.
담배 한 대 주겠어?
한참 후 그가 말했다.
그녀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담배와 성냥을 집어들었다.
두개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하나는 그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피웠다.
두 사람이 뿜어대는 담배 연기로 방안은 금방 뿌옇게
흐려졌다.
무화는 아주 멋진 여자야.
그가 팔을 뻗어왔다. 그녀는 그의 팔안에 안기면서 그의
끈적거리는 땀이 자신의 몸으로 배어드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이야말로 멋지신 분이에요.
그녀는 울고 싶었다.
샤워좀 하고 오겠어요.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그 밑에 서서 물을 맞으면서 그녀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했다. 한번 터져나온 울음은 쉽게
그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그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르바이트로 파리에 들르는 한국인들의 관광안내를 맡으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몸을 허락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단호하게 물리쳐왔었다.
이제 그 둑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자신의 처지가 가여웠다. 북받치는 슬픔을 입술로 깨물면서
그녀는 벽에다 얼굴을 갖다댔다.
┌────────────────────────────┐
│ 6.황금의 초생달 │
└────────────────────────────┘

전화벨이 울렸다.
젊은 직원이 전화를 받더니 영어로 몇 마디 지껄인 다음
창가에 앉아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는 듬직한 체구의 중년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경감님, 홍콩에서 전화왔습니다.
외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에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경감에게 쏠렸다.
노인배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부하 직원이 갖다주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귓가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꽤
나이들어 보였지만 실제의 나이는 외모처럼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그는 지금 마흔 다섯 살이었다.
네, 노인배입니다.
그는 좀 거친 발음이지만 능숙하게 영어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저음에다 허스키였다.
안녕하십니까? 나 홍콩 경시청의 진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들은 영어로 수인사를 나누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홍콩 경시청의 중국인 수사관인
진시한(陳時漢)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마약관계
수사를 전담하고 있는 고참 수사관으로 노경감과는 몇번 만난
적이 있는 50대의 사나이였다. 그는 서울에서 마약관계 수사를
위해 인터폴 회의가 있을 때마다 홍콩 대표로 참석했고, 또 그
회의가 홍콩에서 개최될 경우에는 노경감이 그곳으로 출장하곤
했기 때문에 두 사람 관계는 자연 국경을 뛰어넘는 두터운
친분관계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정보교환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이 수사를 의뢰해 오면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처리해줄 정도였다. 범죄가 국제화됨에 따라 그들 사이의
정보교환과 수사의뢰도 날로 빈번해지고 있었다.
중요한 부탁이 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중국인 수사관이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노경감은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내일 CPA기편으로 다량의 헤로인이 서울로 운송됩니다. 두
시간 전에 정보를 입수했는데 믿을만한 정보입니다.
몇시 비행기입니까?
노경감은 볼펜을 집어들고 메모할 자세를 취했다.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는 CX410번기입니다. 서울 도착은
13시 10분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진은 돼지처럼 뚱뚱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땀을 흘리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손에는 항상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헤로인 운반자의 이름은 왕창(王昌), 홍콩인입니다. 헤로인을
어떻게 운반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왕을 체포할 수도 있지만
접선자를 잡기 위해 그곳까지 우리 요원 두 명이 미행을 할
겁니다. 이번은 아주 대어입니다. 헤로인 2킬로그램이라니까
아주 큰 거래가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그 판매대금으로 무기를
구입할 계획이랍니다. 잘 부탁합니다. 내가 직접 가고 싶지만 내
얼굴은 너무 잘 알려져 있고 또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부하들을
대신 보냅니다.
잘 알겠습니다. 더이상 없습니까?
아, 또 있습니다. 놈의 암호는 제3의 브로커...... 그리고
놈이 접선할 상대방의 암호는 황금의 초생달입니다.
노인배는 메모지에다 재빨리 휘갈겨 쓴 다음
알겠습니다. 대책을 세운 다음 그쪽으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거무스레한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마에 깊이 주름이
잡혔다는 것은 그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투박스럽게 생겼으면서도 매너가 세련되어 있었다. 얼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큼직한 주먹코는 딸기처럼 우둘우둘하게
생긴데다 한쪽으로 살짝 비틀어져 있어서 그의 인상을 강렬하고
특징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 그는
코보 라는 별명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입에 술이라도
들어가면 빨갛게 홍조를 띠기 때문에 그야말로 더욱 딸기처럼
보인다. 길게 찢어진 그의 두 눈은 일이 없을 때나 휴식을 취할
때는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이지만 일단 사건이 터져 정신없이
쫓길 때는 맹수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이제 금년도 내일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하필 12월 31일에 올 게 뭐람. 뭐 암호가
제3의 브로커라고? 그리고 접선할 이쪽 상대는 황금의
초생달이라고? 나쁜 놈들. 일망타진해서 본때를
보여줘야지.그러나 저러나 신년 연휴를 쉬기는 글렀다. 그는
연휴를 맞아 가족들을 데리고 온천에나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는 마약 관계 수사의 베테랑이었다. 그 관계 수사를 거의
도맡다시피 해온 지 이미 10년이 넘고 있었다.
그는 마약범죄를 매옴처럼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범죄로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속성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는 범죄였다.
아무리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것은 아무리
단속하고 단속해도 흡사 비 온 뒤의 죽순처럼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자라고 있었다. 최대의 마약조직을 일망타진하고
두목을 잡아넣어도 조금 후에는 후계자가 나타나고 또 다른
조직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마약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한번쯤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그것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준다. 보통 그것은 한
단계 건너 뛸 때마다 10배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 이를테면 1억
원에 구입한 물건이라면 그것이 국경을 넘어 다른 조직에
넘어가면 10억을 호가하는 것이었다. 열배의 장사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 엄청난 수익을 생각할 때 그것은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 계속 그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이고, 바로
거기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범죄로서 인간의 악마적 속성에 그
뿌리르 깊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마약 범죄는 그 어느 범죄보다도 국제성을 띠고 있다. 마약에
손을 대는 조직은 거의가 국제범죄조직이고 거기에 대응하는
수사 역시 국제간의 협력 수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제적인 수사는 아직은 협력 체계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으례 지지부진하게 끝나기 일쑤이고, 거기에 비해
국제범죄조직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양자간의 대결은 거의가 수사 쪽의 패배로 끝나곤 한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해서 오늘날 마약 범죄는 지구상의 전인류를
상대로 마치 전염병처럼 무섭게 창궐하고 있다.
자그마치 헤로인이 2킬로그램이나 된다는 거야. 어디다
숨겨가지고 오는지 궁금한데.......
코보는 자기 코를 매만지며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2킬로면 싯가로 얼마인가요?
너무 말라 피골이 상접해 보이는 사나이가 물었다. 그는
코보가 제일 아끼는 부하로 이름이 마대섭(馬大燮)이라 했다.
조금 큰 키에 얼굴이 길쭉하고,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1킬로면 싯가 5백만 달러. 2킬로면 1천만 달러.
그렇다면 우리 돈으로 90억 원이란 말인가요?
모두가 눈을 휘둥그럽게 뜬 채 코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들같이 가난한 수사관들로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액수였다.
대단한 액수이지.
노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실내에는 노경감을 포함해서 사복차림의 일곱 명이 제각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일곱 명 가운데 두 명은 여자였다.
노경감은 홍콩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여섯 명을 골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여섯 명의 부하들은 금방 어두운
표정이 되면서 잠잠해졌고, 내일 밀반입되는 헤로인의 값이 한국
돈으로 환산해 90억 원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오순경은 내일 공항에서 홍콩 수사관들을 맞도록 해요.
애인처럼 상냥하게 맞으라구.
코보의 말에 오갑자(吳甲子)순경은 얼굴을 붉혔고 나머지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오갑자는 얼굴이 둥그스럼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순경으로, 맏며느리감으로 적격일 것 같은
25세의 처녀였다.
수사관 두 명이 온다니까 그들을 안내해서 택시 정류장으로
가요. 택시 정류장에서는 마반장이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차를 타도록 해요. 그들을 만나면
제3의 브로커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저쪽에서 오순경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빨간 코트에 흰 베레모를 쓰고 있으면 어떨까요?
그거 좋겠군. 오순경은 그들과 접선이 되는 대로 즉시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으로 바꿔입어야 할 거야. 박형사는
오순경과 행동을 같이 해요.
박문호(朴文鎬)형사는 남자들 가운데 제일 나이가 어린, 아직
채 서른이 안 된 깨끗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김형사와 최형사는 승용차를 국제선 터미널 출입구 앞에
대기시켜 놓고 있어요. 브로커가 터미널 앞에서 택시 정류장으로
가지 않고 바로 승용차편으로 출발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즉시 미행하도록 해요.
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먼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작달막하게 생긴 김만주(金萬周)형사가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말했다.
범인을 똑똑히 알아보려면 놈이 입국심사대를 거칠 때까지
기다려야 해. 시간이 촉박하겠지만 연락이 갈 때까지 차 속에서
대기하고 있어.
한국에서 놈을 체포할 겁니까?
최원달(崔元達)형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깐깐하고 소심한 인상의 자그마한 30대 후반의 사나이였다.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깔끔한 샌님 같았다.
그건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홍콩측과 협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니까 명령없이는 절대 체포해서는 안 돼요. 일당이
모두 드러날 때까지는 아마 손댈 수 없을 거야.
목적지가 한국인가요?
마반장이 물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국이 목적지는 아닐 거야.
통과지역에 불과할 거야. 이번 목적이 헤로인을 판 대금으로
무기를 구입하는 거라니까 천만 달러어치 무기를 사려면 미국
같은 나라에나 가야겠지. 그리고 한국은 시장이 좁아 90억
원어치나 되는 헤로인을 구입할만한 조직도 없어.
코보는 말을 마치고 조미혜(趙美惠)순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활달하고 부지런한 아가씨였다. 오순경보다 두 살이 더 많은
그녀는 언제나 단발머리였고,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 개성이
뚜렷해서 남자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조순경은 나하고 함께 행동해요. 지휘차는 봉고차야. 그 차도
터미널 입구에 대기시켜 놓도록 해요. 필요한 인원은 그때그때
사정을 봐서 보충할 테니까. 그렇게들 알고 실수 없도록 해요.
질문은?
제3의 브로코는 혼자 오나요?
조미혜가 단발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혼자 오는지 아니면 동행이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황금의 초생달에 관한 정보는 없습니까?
마대섭이 퀭한 눈으로 코보를 쳐다보며 물었다. 코보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어떤 인물인지 아는 바 없어.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대상은 바로 황금의 초생달이야. 브로커가 황금의 초생달과
접선할 때까지 우리는 미행을 계속해야 할 거야. 브로커를
감시하고 있으면 결국 황금의 초생달이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내겠지. 마반장, 지금 모두 준비를 해두지. 경비대와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협조를 부탁해야 할 거야. 세관에도 물론이고.
세관에는 어떻게 할까요?
헤로인을 발견하더라도 모른 체하고 통과시키라고 해.
브로커의 짐을 붙들고 오래 질질 끌면 놈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여섯 명의 남녀 수사관들은 마반장의 인솔하에 모두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노경감은 홍콩 경시청의 진시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중국인 수사관은 노경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가 받았다.
우리 쪽에서는 예쁜 여자 순경이 마중나갈 겁니다. 빨간
코트에 머리에는 흰 베레모를 쓰고 있는 아가씨를 찾으면
됩니다.
진시한은 제3의 브로커를 미행하게될 자기부하들의 이름이
주평하(朱平河)와 장계명(張啓明)이라고 일러주면서 범인의
모습에 대해서는 변장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뭐라고 딱잘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미행만 할까요, 아니면 체포할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사태가
매우 유동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종 목적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물건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에는
노새들(운반책)의 모습이 상당수 드러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들 모두를 일망타진하고 싶습니다만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거기에 많이 좌우되리라
믿습니다. 체포 여부에 대해서는 한국에 파견되는 우리 요원들의
의견을 참작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요원들이 거기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물건은 어떻게 운반되는가요?
미안합니다. 거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운반해 가는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까다로운 한국 세관검사대를 통과하려면 매우
교활한 방법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밖에 참고가 될만한 정보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코보는 동남아산 마약이 한국을
통과하는 경우가 부쩍 증가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동남아산 마약의 최종 목적지는 거의가 미국과 일본이다. 미국과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동남아산 마약이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황금시장으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마약이
그곳으로 직송되지 않고 일단 한국에 들렀다가 다시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 대해 코보는 나름대로 이렇게 보고 있었다. 동남아에서
직접 운송되는 화물에 대해서 미국과 일본은 엄격한 검사를
실시한 후 통과시킨다. 따라서 마약을 무사 통과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마약에 거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기껏해야 히로뽕이나 대마초
정도가 소량 거래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이 마약에 대해서
비오염지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마약에 대한
단속과 단죄가 엄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은
한국에서 오는 화물에 대해서만은 까다로운 검색을 피하고
형식적인 검사만으로 통과시켜준다. 마약 밀매자들은 바로
이점을 노린 것이다. 한국 세관만 통과할 수 있다면 미국과
일본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체포된 어느 외국 마약 밀수범이 증언한
말이기도 했다.
한국 세관도 까다롭기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다. 그러나 마약에 대해서만은 까다롭지가 못하다. 마약에
대해서 관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마약에
오염되지 않은 지역이다보니 거기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고, 그 결과 검사에 필요한 최신시설과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마약수색을 위해
최신 시설과 전문요원들이 총동원되고 있고, 그것도 부족해
고도로 훈련된 경찰견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한국은
마약범들에게는 아직까지 천국이나 다름없는 나라인 것이다.
노경감은 치안본부 국제형사과 소속으로 외사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중대는 밀수와 밀반출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특히 마약밀수 소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약 밀수범에 대해서 그는 손톱만큼도 온정을 베풀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 그는 냉혹할이만큼 비정했다. 그의 그같은
비정함은 마약범들 사이에서도 화제거리가 될 정도였다.
거의 같은 시각.
동림은 창가에 서서 모래바람이 일고 있는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고 파도는 높이 일고 있었다. 높이
일어선 파도가 모래밭을 훑으며 물러섰다가 다시 몰려오는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아이는 바닷가에 나가자고 칭얼거리며 그의 손을 잡아당기곤
했지만 그는 모래바람 속으로 아들을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 들어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동림씨 계십니까?
그것은 작고 낮은 목소리였다.
네, 제가 추동림입니다만.......
낯선 목소리에 동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추동림씨, 반갑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누구십니까?
동림은 갈매기떼를 눈으로 쫓으며 물었다.
에또, 누구라고 해도 모르실 겁니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추선생을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죠, 흐흐.......
말 끝에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은 불쾌한 감정과
불길한 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는 앞으로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은데.......
잘못 걸다니요. 천만에 말씀을. 남화씨의 남편인
추동림씨한테 나는 분명히 전화를 건 겁니다.
아내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고 동림은 비로소 바싹
긴장했다. 갈매기떼는 날아가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용건이 뭡니까?
흐흐...... 그러니까 서로 협조하자 이거지요. 요즘 세상은
서로 협조하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에서 동림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땀냄새 같은 것을 느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빨리 신분을 밝히고 말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화를 끊겠습니다.
뭐 그렇게 서두를 것까지는 없습니다. 추선생한테 한 가지
부탁드리려고 전화건 겁니다. 추선생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나도 비밀을 지켜드리죠,
흐흐.......
전화 끊겠오.
동림은 수화기를 철컥 내려놓았다.
담배를 한 대 피워물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이거 봐. 내 허락없이 멋대로 전화 끊지 마. 건방지게 굴면
당신한테 손해야.
아까의 그 목소리가 말했다.
완전히 반말이었다. 상대방의 위압적이고 돌변한 태도에
동림은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누군데.......
닥쳐! 네 마누라를 살리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는
네 마누라가 사람을 치어 죽이고 도망친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이제 알겠어?
거친 바다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 보였다. 동림은 담배를
비벼껐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부인해도 소용없어. 시간낭비일 뿐이야. 지난 26일 0시 40분,
해운대 P호텔 옆 커브길에서 당신 마누라가 몰고가던 부산 1바
573× 주황색 G카가 김명기라는 남자를 치어 죽이고 도망쳤어.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줄 알지만 딱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목도했단 말이야. 바로 내가 봤지. 이래도 부인하고 싶은가?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기 싫다면 남화 의상실로 전화를 걸까?
그, 그건 안 됩니다. 나하고 이야기합시다.
내 이야기를 인정하나?
전 아직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듣고 싶습니다.
이거 봐. 이런 이야기는 일단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쉽게
풀리는 법이야.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서 내가 물러설 줄 아나?
당신, 그렇다면 경찰하고 이야기하고 싶나? 경찰을 불러줄까?
체포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동림은 숨쉬기가 불편했다. 높이 일어선 파도에 그는 얼굴을
세차게 후려맞은 기분이었다.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그는 간신히 말했다.
만날 필요까지는 없어. 전화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어.
동림은 혹시 가정부가 엿들을까봐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뒤쪽
베란다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당신 이야기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내 아내가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운전하다가 그렇게 된
겁니다. 잘못은 저한테 있습니다.
흐흐흐...... 아내를 보호하려는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어.
가상한 생각이야. 나는 당신 아내가 떨어뜨리고 간 녹색
머플러를 가지고 있지. 사고 당시 그 차안에는 당신 아내 혼자
타고 있었어.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아. 당신이 했건 당신
아내가 했건 나한테는 아무래도 좋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그건 안 돼. 당신 앞에 내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용건이 뭡니까?
부탁이 하나 있어.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 입을 다물어
주겠어. 그러니까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내 말 알아 듣겠어?
네, 알겠습니다.
동림은 치욕을 느꼈다. 그와 함께 분노를 느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야. 아주 간단한 일이야.
말씀하십시오.
상대방이 돈을 요구해올 것이라고 동림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물건을 하나 운반해 줘야겠어. 아주 간단한 거야.
무슨 물건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마.
동림은 침묵하고 있다가 물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입을 다물어준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요? 당신이 약속을 지킨다는 어떤 보장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하는데요.
이거 봐. 그럼 내가 각서라도 쓰란 말인가? 이런 건 서로
믿고 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당신은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파렴치한인데 내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지요?
흥, 대단히 웃기는 친구군. 사람을 치어 죽이고 뺑소니친 건
파렴치한 짓이 아닌가? 당신이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야. 경고해
두는데 나는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니까 내 감정을 건드려서
화나게 하지 마.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동림은 자신의 무력함에 다시 한번 치욕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심부름은 단
한번만으로 그치는 거겠지요?
물론.
더이상 다른 협박은 하지 않겠지요?
물론. 그런데 협박이란 말이 귀에 거슬리는데. 이건 협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탁이야.
알겠습니다. 부탁은 단 한번만으로 그치는 것이고, 그대신
당신은 영원히 입을 다물어줘야 합니다. 당신은 그 사건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을 때는 어떡 하겠어?
당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나를 죽일 건가?
그럴 수도 있죠.
상대방은 킬킬거리고 웃었다.
당신은 사람을 꽤나 웃기는 재주도 갖고 있군. 좋아. 아뭏든
좋아. 약속을 지키지.
내가 할 일을 말해 보시오. 구체적으로.
우선 출장 준비를 해줘야겠어. 그리고 내일 낮 12시까지
서울에 있는 K호텔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 K호텔 커피숍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내가 전화하겠어. 구체적인 것은 그때가서
알려주겠다.
서울까지 가란 말인가요?
그래 12시까지야.
그건 곤란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동림은 꾹 참았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사정을 들어줄 리 만무한 것이다.
고기잡이 배 한 척이 높은 파도에 흡사 가랑잎처럼 떠가는
것이 보였다. 멀리 오륙도가 수평선 위에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을 지켜야 해.
알겠습니다.
참 내 소개를 잊었군. 본명은 가르쳐줄 수 없고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미스터 Y라고 불러. 미스터 Y...... 알았지?
흐흐흐.......
그렇게 말해놓고 무엇이 우스운지 그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동림은 창백한 표정으로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잘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서 아무도 나를
잡을 수가 없지. 당신도 그러니까 나를 찾을 생각 같은 거
하지도 마. 자, 그럼 내일 12시에 K호텔 커피숍에서......
그리고 참, 다신 아내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좋을거야.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거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남자들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여자를 끌어들여 득될
건 하나도 없지. 알았어?
알겠소.
수화기를 내려 놓으면서 동림은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목덜미가 잡혀 평생
그 마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한 몰골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 속 깊이 들어와 박혔다.
미스터 Y는 단 한번만으로 잊어주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런
자의 말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자들의 말이란 결코
믿을 수가 없는 것이거늘!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무엇인가
노리는 자들이란 으례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아무런 양심도 정의감도 없는 그런자들에게 약속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 지닌 약점인 것이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릴까. 과연 알릴 필요가 있을까.
주저하면서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이는 칭얼거리다가 거실의 카피트 바닥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천진스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다이얼을
눌렀다.
남화는 그의 전화를 받고 긴장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아니, 그냥 걸었어.
그는 아내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길 수 있는
데까지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비로소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별일 없어?
네, 아무 일 없어요.
별일 없느냐는 것이 요즘 그들 부부 사이의 인사말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일을 마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그들은 먼저
서로 별일 없었느냐고 묻고 나서 다른 일상적인 화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하는 뭐하고 있어요?
자고 있어. 바닷가에 나가자고 조르다가 내가 안 들어 주니까
잠이 들었어. 지금 바닷가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어.
바람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어.
잘 하셨어요.
저기 당신 오늘좀 일찍 들어올 수 없어? 9시쯤 말야?
무슨 일 있으세요?
영리한 아내가 눈치를 챌까봐 그는 몹시 조심했다.
음, 갑자기 일이 있어서 밤차로 서울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아.
전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잔뜩 긴장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데요?
친구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나봐. 조금 전에 서울서
연락이 왔어. 연락을 받고 안 갈 수가 있어야지.
그가 친구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에게
친구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또 그가
친구를 만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를 찾는 친구의
전화 같은 것도 걸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가 그가 친구의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의아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떤 친구인데요?
옛날 친구야.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야.
그는 더이상 거짓말하기가 힘들었고,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제 오실 거예요?
내일 내려와야지.
알겠어요. 이따가 9시에 들어가겠어요.
아내가 궁금증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거기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 것을
피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편으로 상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나빠 비행기가 연발하거나 결항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열차편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난 남화는 아무래도 꺼림칙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다. 사고가 난
이후 지금까지 잠시도 불안한 감정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의 불안은 좀 더 새로운 것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제 닷새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동안 그녀는 그 사고를 목격했다는
정체불명의 남자한테 끌려가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기까지 했었다. 물론 그 치욕은 남편한테는 비밀로 돼
있었다. 앞으로도 그것은 비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그것은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는 치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언제 다시 전화를
걸어올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두번 다시 전화를 걸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런 자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하루하루가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 집안이
쑥대밭이 될지 알 수 없는 이 판에 남편이 집을 비우고 서울에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비록 하룻밤 집을 비우는 것이긴 하지만
그녀는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한 나머지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그의 등을 밀어서라도 여행을 권했을 것이다.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아이나 보고 있는 남편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남편을
생각하면 안스러운 느낌이 드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틈 있을 때마다 바람도 쐴겸 혼자서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권하곤 했지만 그는 한번도 그러지를 않았다. 도대체
그는 집을 떠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혹시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만큼 그녀의 눈에 비친 동림은 가정밖에 모르는 착하디 착한
남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착한 남편이 거짓말할 리는 없을 것이다 라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결론이었다. 그녀가 모르는 옛날 친구로부터 부친상을
당했다는 연락이 왔다면 그 집에 가보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웬만하면 가지 않을 텐데 저렇게 자진해서 가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과거에 꽤 가까왔던 친구인 것 같다.
남편의 과거--그것은 그녀에게 아직 안개 속의 과거로 남아
있었다. 남편이 대학을 중퇴하고 월남을 다녀왔다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남편의 과거를 모르니 그의 과거 친구들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굳이 남편의 과거를 알려고 하지를 않았다.
남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혼자 여행이니 여비나 충분히 보태드려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6시 조금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동림은 아내가 권하는 대로 침대칸을 타고 가기로 했다.
서울행 마지막 열차는 11시 정각에 있었다.
동림은 10시에 집을 나섰다.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 남화는
그의 지갑에 돈을 넣어주었고, 그는 뭘 그렇게 많이
주지. 하면서 액수도 묻지 않고 그것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외에 남화는 남편에게 통장과 도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남편
이름으로 된 은행 예금통장이었다.
오늘 새로 만든 통장이에요. 백만 원이 예금되어 있으니까
여비가 모자라면 꺼내쓰세요. 도장도 새로 하나 팠어요.
동림은 그것을 받아들고 잠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빈틈없는 행동에 그는 자못 감동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 여자가 없으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겠지.
이 여자를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 절대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된다.
고마워.
생각과는 달리 가볍게 한 마디 하고 난 그는 아기를 안아들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조심하세요.
남화가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따라나와 말했다. 아래층까지
따라오려는 그녀를 말리고 그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가 엄마 품에서 두 팔을 내저으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밖에는 몹시 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그는 조그마한 여행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코트는 회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무수히 박힌 두툼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좀 크고 헐렁한 것이었지만 그는 굳이 그것을
즐겨입곤 했다. 그것은 10년 전에 구입한 것으로 낡고
구식이었다. 아내가 새로 사준 멋진 새코트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입지 않고 언제나 그 낡은 코트를 입고 다녔다.
그는 오랜만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그는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택시가 굴러와 멎었다. 택시 안으로 들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아내는 아파트 창가에 붙어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내가 손을 흔들었다. 아기의 손을 잡고
함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택시가 출발했다. 그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하는 기분이었다.
바다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바다에 떠있는 불빛들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코트깃을 세우면서 턱을 묻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홀로 유배지에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구원을 청할 수도 없고 혼자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내를 지켜야 한다. 내가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부산역을 향해 달리는 택시 속에서 자신에게 그렇게
다짐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일 수 있느냐는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서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동차의 불빛들이 서로 엇갈릴 때마다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곤 했다. 빛과 어둠이 무수히 교차하는 그 사이사이로
그는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비정한 도시의 밀림 속으로 함몰되어가는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울부짖으며 밀림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한낱 절망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울부짖음은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일그러진 얼굴과
함께 밀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차는 어느새 역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캔맥주 두개를 사서 가방에 집어넣은 다음 대합실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11시 15분 전에 개찰구를 통과해 플랫폼으로
나가 열차에 올랐다. 침대칸은 협소했지만 그런대로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었다.
열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그는 비스듬히 누워 캔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통로에는 술에 취한 승객이 승무원과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맥주를 입속에 흘려넣었다.
도심의 건물과 초라한 집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런 것들이 점점 소멸되어 가면서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강을 보았다. 낙동강이었다. 흐린 날씨가
개었는지 강물 위로 달빛이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강물은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갑자기 산기슭을 휘어돌면서 그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산 그늘에 가려 강물이 어둠 속에 잠겼을 때
다시 그 일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그 얼굴은 어두운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싶었다.
그때 메콩강 위에도 달빛은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때 그곳의 달빛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었다. 그것은 향수에
젖은 사나이들의 가슴을 밤새도록 축축하게 적셔주는 이슬 같은
달빛이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은 날이 갈수록 감상적이 되어가더니 막판에
가서는 달빛을 보고 울기까지 했다. 그때는 월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9년 경이었다.
배창우(裵昌宇)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
모습만 떠오른다.
그때 그들은 특수부대 요원으로 취약지구에 잠입하여 첩소를
수집해 오는 아주 위험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월남어를 익혔고 월남 출신 정보원들을 확보해 두고
있었다. 그들은 월남인 복장에 권총과 단검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죽음과 싸워야 했다. 확실히 그것은 적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죽음과의 싸움이었다.
동림은 대학 4학년 2학기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갑자기 군에
자원입대했었다. 대학에서 그는 조각을 전공하면서 한편으로
ROTC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내부에 변화가 일었다. 모든 일상적인
것들과 남들과 같이 자로 잰 듯한 미래의 설계가 역겹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대학생활도 싫었고 장교가 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대학을 중퇴하고 자원입대하여
월남의 전쟁터로 떠났던 것이다.
그에게는 형이 한 사람 있었다. 그리고 노모가 있었다. 그보다
다섯 살 위인 그의 형은 이른바 수재로서 엘리트 코스를 거쳐
관계(官界)에 진출해 있었다. 그는 동림의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해 몹시 화를 냈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마저 중퇴하고
전장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몸져눕고 말았다.
너 같은 건 동생으로 생각지도 않아. 난 그래도 지금까지
너를 제대로 사람 구실하게 하려고 대학까지 보내주었고 학비도
대주었는데 결국 너는 내 기대를 저버리고 이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말았어. 그것도 네 자신이 자청해서 말이야. 그런
너에게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해주겠어.
그의 형은 동림이 월남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 이렇게 절교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 형 옆에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형수의 모습은 오래도록 그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남자와 결혼한 일류대학 출신의 형수는 그의
형과 아주 비슷한 데가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들은
결혼했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동림이 월남에서 실종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뒤늦게야 어머니가 그때문에 놀라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배창우는 언제나 몸 속에 유언장을 지니고 다녔지만 동림은
그렇지를 않았다. 배창우는 두 사람에게 유언장을 써놓고
있었다. 한 장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애인에게였다. 그는 그 두 장의 유언장 중 애인 앞으로 써놓은
것을 동림에게 자주 보여주곤 했었다. 자주 보여준 이유는 그가
그것을 자주 고쳐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오면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애인 앞으로 써놓은
유언장을 고쳐쓰는 것이었다. 고쳐쓴 다음에는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 동림은 그전보다
내용이 잘 됐다고 그를 칭찬했고, 그 말을 들은 그는 기분이
좋아져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써가지고 다니지만 사실 써먹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이걸 쓸 때만은 진지한 기분이 되거든. 그런데 넌 왜 유언장을
쓰지 않지?
쓰고 싶지 않아서.......
왜?
글쎄, 이유는 없어.
넌 편지도 안 쓰거든. 네가 편지 쓰는 거 나 한번도 못봤어.
왜 편지를 안 쓰지?
쓰기도 싫고...... 쓰고 싶은 상대도 없어.
그럼 내가 여자 하나 소개시켜 줄까? 이 여자 어때? 이번에
새로 부쳐온 사진이야.
그러면서 그는 동림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 컬러
사진에는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한 사람은 20대 처녀였고 또
한 사람은 나이어린 소녀였다. 처녀 쪽은 그동안 배창우가 하도
자랑을 늘어놓고 사진을 보여주곤 했기 때문에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 처녀는 창우의 애인인 남지(南知)였다.
창우의 남지에 대한 자랑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남지 같은 여자를 애인으로 둔데 대해 긍지까지 느끼고
있었고, 그녀야말로 자기 희망의 모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였다. 그가 자랑할만도 한 것이 그녀는 아주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때 그녀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 애는 누구지?
동림은 남지 옆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있는 어린 소녀를
가리켰다. 그것이 훗날 운명적인 만남이 될 줄이야 그 자신도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남지 막내 동생이야. 지금 열두 살인가 열세 살이지.
국민학교 6학년이래. 이름은 남화라고 하고...... 크면 아주
미인이 되겠어. 그 집은 딸만 넷이야. 어때? 예쁘지?
음, 귀엽게 생겼군.
소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남지와 남화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었다. 여름철에 찍은 것인
듯 남지는 코발트색의 원피스 차림이었고 남화는 빨간 티셔츠에
하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소녀는 한손에 검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든 채 수줍은 듯 웃고 있었다. 그들이 서있는 뒤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그보다 더 뒤쪽에는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있었다. 그곳은 충무였고, 그리고 그녀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 애를 애인이라 생각하고 편지를 쓰면 어때?
창우의 짓궂은 말을 동림은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리고 그
소녀에 대한 것은 곧 잊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녀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창우가 그녀한테 편지를 보내 동림
앞으로 편지를 띄우라고 시킨 것이었다. 소녀는 창우가 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낸 사진에서 동림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면서
앞으로 펜팔을 맺고 싶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소녀다우면서도
진지했다. 그때부터 동림은 틈틈히 그 소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소녀도 자주 편지를 보내왔다.
동림은 그 소녀에게 보낸 편지에 전쟁에 관한 것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풍물, 날씨, 사람들, 역사, 문학,
예술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썼다.
열차가 섰다. 밖에는 어느 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시야에
드러난 대지는 온통 흰색으로 덮여 있었다. 플랫폼에 서있는
게시판에 김천 이라는 지명이 쓰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큼직한 보따리를 인 아낙이 철길을 가로질러
바삐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 뒤에는 형제로 보이는 어린
아이 두 명이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었다.
동림은 조금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캔 두개는 비어
있었다. 제복 차림의 아가씨가 서비스카를 밀며 통로를
지나갔다. 서비스카 위에는 커피통이 놓여 있었다.
동림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커피 한 잔을 청했다. 그녀는
종이컵에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를 따라주었다. 동림은
설탕을 타지 않고 프림만 약간 넣은 다음 그것을 천천히 마셨다.
코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커피를 마시고 났을 때 열차가 움직였다. 그는 침대칸 밖으로
나가 소변을 보고 나서 찬 공기 속에 한참동안 서서 담배를
피우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북쪽으로 갈수록 눈발은 더욱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이제
달은 보이지 않았다.
동림은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머리 속은 더욱 맑아지기만
했다. 어느 새 일그러진 얼굴 대신 소녀의 웃고 있는 모습이
그를 과거의 추억 속으로 다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 소녀의
모습은 단절된 세계의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소녀는 그에게 편지와 함께 가끔씩 자신의 사진을 동봉해
보내곤 했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차츰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의 기억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연히 별 뜻도 없이 시작되었던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건조하고 살벌한
생활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는 소녀의 편지를 몹시 기다리게 되었고, 소녀 역시 마음을
졸이며 그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1년쯤 계속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사정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편지를 보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그는 배창우와 함께 정글을
지나 어느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밀림을 지나 초원에 이르러
땀을 식히기 위해 쉬게 되었을 때 창우는 자신이 남지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신이 나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고게 말이야. 줄 듯하면서 안 주는 거야.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데는 정말 미치겠더라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간할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여자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건 절대
불가능해. 여자가 밑에서 살짝만 틀어도 그건 안 되는 거야.
이건 경험을 통해서 안 거야. 여자란 남자가 위로 올라가 옷을
벗기려고 들면 으례 아이, 이러시면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안
돼요, 어머머머, 어쩌고 하지만 그건 다 쇼란 말이야. 그렇게
쇼를 하면서 강간당하는 척하고 벌려주는 거야. 하지만 그건
엄격히 말해 강간이 아니고 화간이지. 난 남지가 주지 않고
자꾸만 골탕을 먹이니까 화가 나기도 하고 초조해 지더라고.
이러다간 다른 놈한테 뺏기는 게 아닌가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더란 말이야. 여자란 정말 별난 것이어서 10년 동안 사귀어온
애인한테는 단 한번도 그것을 주지 않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한테는 바로 그날로 그것을 주어버린단 말이야. 그게 바로
여자의 묘한 점이고 속성이란 말이야. 남지라고 안 그럴 거라는
보장이 있어? 말로는 날 사랑한다고 하지만 육체를 가지지
못하니까 어쩐지 그 말이 거짓말 같고 허공에 뜬 구름 같더란
말이야. 육체를 가지지 못하니까 도무지 그 여자가 내 여자란
기분이 안들어.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 같아야 비로소
내꺼라는 기분이 드는데 그 여자는 그렇지가 않고 언제라도
날아가버릴 것 같더란 말이야. 그래서 에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내 하숙방에서 약을 먹였지. 커피에다 흥분제를 타
먹였더니 어럽쇼 조금 있으니까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어.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면서 자리에 눕기에 보니까 눈초리가
가물가물해지는 것이 이미 제 정신이 아니더라고.
히히......그때의 그 기분 넌 모를 거다. 난 하여간 그 여자를
내꺼로 만들면 됐으니까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어.
땀을 식히고 난 그들은 초원을 가로질러갔다. 걸어가는
도중에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마을에 도착해 어느 움막 같은 집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월남인 정보원이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베트콩의
동향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베트콩
대부대가 다섯 시간 전에 서남 쪽으로 이동해 갔는데 내일쯤에는
월맹군 대부대의 이동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월맹군 부대는
그 마을을 통과해 동남 쪽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그 정보가
확실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들은 그날 밤을 그 집에서
묵기로 했다. 월맹군들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상부에 보고하기가 꺼림칙했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상관은 확인 보고를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정보원의 말만을
믿지 말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위험부담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배창우는 폭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에 비해 동림은 조금밖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별로 술을 많이 마시지 못했다. 술에 취하자
창우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건 완전히 내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거야.
평소에는 그렇게 내 손을 뿌리쳤는데 그때는 웬걸, 오히려 내
손을 잡아당기는 거야. 내가 몸에 손을 대니까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바르르 떨면서 내 품에 안겨오는 거야. 아이구, 웬
떡이냐 싶어 그대로 안아버렸지. 헤헤...... 그렇게 얌전하던
아가씨가 일단 흥분이 되니까 적극 공세로 나오더라구. 그
흥분제라는 것이 묘한 것인가 봐. 그걸 먹고 흥분하니까 수치심
같은 것도 없어지나봐. 이건 완전히 내가 놀라 자빠질
정도라니까. 서너 번 하고 나서 내가 먼저 뻗었지. 그날 밤 결국
그 아가씨는 집에 못돌아가고 내 하숙방에서 잤는데, 아침에
정신을 차려가지고 자기가 벌거벗고 있는 걸 알고는 막 우는
거야.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
숫처녀였나?
그럼, 진짜 숫처녀였지. 어떻게나 서럽게 울던지 달래느라고
혼났어. 그러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한테 매달리는 거야.
그전처럼 빼지도 않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 그때부터 내
자가용이 된 거지. 헤헤......멋지고 든든한 자가용을 둔 기분이
어떤지 알아?
동림은 소변을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집 뒤로 돌아가 소변을
보고난 그는 달빛이 너무 좋아 한동안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밤이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동안 길들여진 예민한
감각으로 분위기가 어쩐지 살벌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숲 속 여기저기에서 분명히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방
안으로 뛰어들어간 그는 창우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 이상하다!
귀에다 대고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곯아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댔지만 폭음한 탓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우린 포위됐어!
뭐 포위됐다구? 포위됐으면 포위된 거지 뭐 그렇게 걱정이야.
포, 포위됐으면 뚫으라구. 난 한숨 잘 테니까 네가 뚫어봐.
동림은 그를 일으켜 세웠지만 손을 놓자 그는 자리에 도로
드러누워 버렸다. 정신을 차린다해도 이미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취해 있었던 것이다. 동림은 문을 박차고 혼자
뛰쳐나가려다가 돌아섰다. 그때 혼자 도망쳤더라면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몸이나 가벼웠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우는 거구였다. 부축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쓰러지곤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등에 들쳐업고 겨우 문 밖으로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월남어로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나와라! 5분 내에 나오지 않으면
집을 폭파시키겠다!
동림은 방 안에서 시간을 지체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일어나! 항복한다!
그는 분통이 터져 창우를 힘껏 걷어찼다. 그제서야 창우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항복하면 안 돼.
그는 쓰러진 채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동림도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굴하게 죽음을 조금 연장할 뿐이고 더욱 비참한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가를 그는 자주 목격해왔던 터였다.
그들이 목이 잘리거나 팔다리가 절단된 상태로 또는 눈과 코가
도려내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림은 죽음이라는 그 불가사의한 세계 속으로 먼저
자진해서 뛰어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음이라는 위협
앞에 부딪칠 때까지 부딪쳐 보고 싶었다.
그는 문을 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뒤에서 창우가 권총을
빼들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술에 취해 쏜것이라
총알은 엉뚱한 데로 날아갔다.
손을 높이 들어!
그것은 월남인 정보원의 목소리였다. 여기저기에 검은
그림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림은 창우가 나올 때까지 집 앞에서 손을 들고 서있어야
했다.
창우는 방 안에서 총을 난사했다.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다가 나중에는 권총을 집어던지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자 검은 복장의 사나이들이 일제히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며 두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처음에는 많은 숫자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불과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다섯 명이라면 상대해 볼만한 숫자였다.
겨우 다섯 명 아니야! 내가 뭐라고 했어!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
창우가 땅바닥에 앉아 동림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그들이 고용했던 정보원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달려들어 한국인들을 묶었다. 동림과 창우는 팔이 뒤로 꺾여
결박당한 다음 무릎을 꿇리웠다. 그들은 한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보원이 다가오더니 동림의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다. 동림이
피하려 하자 뒤에 서있던 자가 총검으로 그의 등을 찔렀다. 칼
끝이 옷을 뚫고 살갗에 와닿았다. 동림은 숨을 흑하고
들이키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비리고 따뜻한 오줌 줄기는 그의
얼굴 위로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때까지
참았다가 쏟아놓는 것처럼 굵고 힘있는 오줌발이었다.
정보원은 창우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얼굴 위로 오줌이
쏟아지자 창우는 가만 있지 않았다. 개새끼! 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머리는 곧장 상대방의 사타구니를 들이받았다.
정보원은 비명을 지르면서 나뒹굴었다. 그 위로 창우의 몸뚱이가
덮치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총검으로 창우의 등판을 사정없이
내려 찍었다. 동림은 비명을 듣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
소리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귓 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계속되는
비명소리에 달빛까지 떨리고 있었다. 검은 옷은 무자비하게
창우의 등판을 찍어대고 있었다. 창우는 몸을 뒤틀다가 하늘을
보고 누웠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타구니를 누르고 있던 정보원이 검은
옷으로부터 총검을 높이 치켜들면서 내려다보자 그것을
올려다보는 창우의 얼굴이 공포로 잔뜩 일그러졌다. 흰 창이
드러날 정도로 그의 두 눈은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입까지
벌어지고 호흡이 일순 정지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안 돼!
동림아!
하고 외쳤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바람 한점 없는 숲속을
흔들었다. 비명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길게 이어지다가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정보원은 한쪽 발로 창우의 가슴을 누르면서 그의 가슴에 깊이
박힌 총검을 뽑아냈다. 동림은 창우의 가슴에서 분출하는 검은
피를 보는 순간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음은 내 차례라고
생각하자 제일 먼저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소녀의 얼굴은 마치 달빛 속에 피어난
야생화처럼 이슬을 머금고 그 앞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사진 속의 그 얼굴은 언제나 웃고
있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서로
죽이고 죽는 인간의 비극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 같았다. 아저씨,
용기를 가지세요. 제가 아저씨를 도와드리겠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내 차례라고 생각한 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정보원은 창우와 동림을 연결한 밧줄을 칼로 끊었다. 그의
지시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순순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계급이 꽤 높은 것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를
정보원으로 이용하고 있었으니, 스스로 죽음의 함정을 파온
셈이었다.
일어서. 출발한다!
정보원은 동림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그리고 개처럼 그를
끌었다.
부탁이 있다!
뭐야! 죽여달라는 건 아니겠지?
정보원은 밀림을 헤쳐나가는데 사용하는 칼 끝을 그의 목에
들이대면서 물었다. 그 칼로 나무가지를 치면 흡사 무우처럼
잘려 나간다. 하물며 사람 목이야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날아갈
판이었다. 동림은 아직 붙어 있는 자신의 목숨이 문득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을 갖자 좀 대담하게 입을
열어 말할 수가 있었다.
내 친구의 유품을 내가 간직하고 싶다. 다른 건 필요없고
유서와 사진, 그리고 인식표만 간직할 수 있게 해달라.
그게 어디 있지?
목에 걸려 있다.
정보원은 창우의 시체 쪽으로 다가가더니 목에서 가죽으로 된
납작한 주머니와 인식표를 벗겨냈다. 그 가죽 주머니에는 튼튼한
가죽끈이 달려 있었다. 창우는 자나깨나 그것을 인식표와 함께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추고 다녔다. 그리고 농담처럼 만일 자기가
죽으면 유서를 거두어 처리해 달라고 동림에게 말하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 진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월남인은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유서와
사진은 젖에 젖지 않게 비닐봉지 속에 들어 있었다. 월남인
정보원은 플래시로 그것을 비춰보더니 그것을 도로 가죽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다음 인식표와 함께 동림의 코앞에 디밀었다.
살아서 이걸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동림은 끄덕였다. 월남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네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떤지
어디 두고 보자.
손이 뒤로 결박당해 있었기 때문에 동림은 물건들을 받을 수가
없없다. 월남인은 그것들을 동림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목에 옭아맨 줄을 잡아끌었다.
자, 출발한다. 따라오면 넌 살 수 있다. 하지만 가다가
주저앉으면 그 자리에서 이 칼로 목이 잘린다.
그때부터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는 길고 긴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소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새 열차가 서있었다. 김천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굵어보이는 눈송이들이 몸부림치듯 바람에 날리며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불빛 속으로 쏟아지는 빛을 받아 끊임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복 차림의 아가씨가 서비스카를 밀고 지나갔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또 주문했다. 그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를
종이 컵에 따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잠시 동안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느낌을 맛보았다.
통로는 내리고 타는 손님들로 잠시 어수선했다. 플랫폼
한쪽에서는 승객들이 눈을 맞으며 우동을 먹어치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우동을 먹으면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다녀와서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커피잔을 창틀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자주
소변이 마려웠다.
소변을 보고 자리에 돌아오자 열차가 출발했다.
어둠 속으로 조그맣게 소멸되어가는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커피를 조금씩 입 속에 흘려넣었다.
새벽에 눈을 뜬 남화는 격심한 복통으로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기 힘들 정도로 배가 아팠다. 불을 켜고보니
이부자리가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기다시피 화장실로 가서 피에 젖은 팬티를 벗고
아랫도리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그러나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패드로 거기를 막고 그 위에 새 팬티를 입고 나서 먼저
인터폰으로 경비실을 불렀다.
가까운 산부인과에 전화를 걸어 앰뷸런스를 빨리 좀
불러줘요. 걸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아니, 어디 아프십니까?
놀라는 경비원에게 그녀는 빨리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다시
재촉했다. 다음에 그녀는 가정부 집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집으로 빨리 좀 와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녀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었다. 임신 3개월의 몸으로 자동차 사고를 일으키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괴한한테 치욕까지 당했으니 조만간 몸에 이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불안해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불안해 하면서도
굳은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 내려고 입술을 깨물며 모질게 자신을
지탱해 왔는데 이제 그것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뺨
위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댓가라면 달게 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정부가 먼저 도착했다. 남화는 그녀의 도움으로 옷을
입으면서도 이렇게 맒했다.
만일 그분한테서 전화가 오면 병원에 갔다는 말 하지 마세요.
우리 아기 잘 봐주세요.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후 그
소리가 멎고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가정부가 인터폰을 받고
나서 남화에게 말했다.
차가 도착했답니다.
남화는 가정부에게 아이를 안아오게 했다. 아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남화는 아이의 자는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아이를 한번 껴안아보고 나서 도로 가정부에게 안겨주었다.
그들이 현관을 나서려고 하는데 간호원이 들어섰다. 남화는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함께 가실 분 안 계신가요?
엘리베이터 속으로 간호원이 물었다. 남화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거기에 들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화는 들것 위에 드러누웠다. 간호원이 그녀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남자 직원이 앞에서 들것을 들고 간호원이 뒤에서 그것을
거들었다. 그것을 보고 아파트 경비원이 달려들어 들것을
들어주었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앰뷸런스에 실리면서 그녀는
새로운 불안에 휩싸였다. 그것은 혹시 자신이 영영 돌아올
수없는 길로 지금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나왔다.
차가 달리는 동안 그녀는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는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마지막 고통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병원은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그 5분 동안 쉬지 않고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는 마치 차가운 냉기처럼 그녀의 뼈 속까지
스며들어 그녀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제발 저 소리 좀
꺼주세요. 차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병원 현관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6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월 31일이었다.
젊은 남자 의사는 잠이 덜 깬 모습으로 하품을 하고 있다가
환자를 맞았다. 그의 입에서는 지난 밤에 폭음한 술냄새가
풍겼다. 그는 금테안경 너머로 무표정하게 남화를 바라보다가
수술대 위에 올라가 누우라고 말했다.
수술실은 불기 하나 없이 썰렁했다. 수술대 한쪽 선반 위에는
수술 기구들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득이며 놓여 있었다.
옷을 모두 벗고 누워요.
간호원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남화는 의사 앞에서 옷을 모두
벗고 나서 간호원이 내주는 환자복을 입었다.
그곳은 수술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슨 창고 같은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환자가 안심하고 누울 수 있는 따뜻하고
안온한 분위기는 조금도 없었다. 을씨년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살벌한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수수대 위에 올라가 누운 그녀는 의사가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두 다리를 넓게 벌렸다.
의사는 고무장갑을 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상체를 굽혔다. 그는 거침없이 환자복 자락을 걷어내면서
그녀의 알몸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가만히
눌렀다.
아프나요?
남화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더 밑으로 내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어루만졌다. 남화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사는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두번이나 하품했다.
무슨 쇼크 받은 일이 있나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유산인데요.
그 소리는 아주 멀리서 바람에 실려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수술해야겠는데요.
남화는 비로소 눈을 떴다.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바보 같은 소리인 줄 알면서도 그녀는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의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속에 죽어 있는 태아를 긁어내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알 텐데 그래요.
의사는 간호원에게 수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수술 기구들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다. 마치 살아 있는
괴물처럼.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나때문에 한 사람이
죽었다. 그 댓가로 앞으로 태어날 나의 아기가 죽은 것이다.
아기는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 아아, 불쌍한 것!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밤새에 내린 눈이 쌓여 얼어붙는 바람에
길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차들은 속도를 줄여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사람들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동림은 한국에서 서울이라는 곳을 제일 싫어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아예 무시되거나 파괴된 곳이 바로
서울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 환경은 하루 이틀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수십 년에 걸쳐 서울을
열심히 파괴해 왔던 것이다. 소달구지가 굴러가는 거리, 그래서
길바닥에 쇠똥이 말라붙어 있는 거리, 가끔씩 전차가 땡땡
종소리를 울리며 달려가는 거리, 처마가 낮은 초가들과
기와집들이 섞여 있는 거리, 그런 거리가 그는 그리웠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도 차도 너무 많아 보기만해도
숨이 컥컥 막힐 지경이었다.
서울 생활을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간 것은 전적으로 그의
주장때문이었다. 결혼하자마자 그는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이사가자고 말했고 반면 남화는 서울에 눌러앉아 활동했으면
했다. 그러나 동림이 워낙 서울을 싫어한데다 그녀 역시
나중에는 남편의 뜻에 동화되어서 서울을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에 별 갈등없이 부산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월 31일이었기 때문에 거리는 오후가 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실내는 더욱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동림은 12시 10분 전에 K호텔로 들어섰다. 지은 지 오래된
조그마한 호텔인데도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 커피숍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가득 차있었다.
동림은 5분쯤 서성거리다가 간신히 빈자릴ㄹ 찾아 앉을 수가
있었다.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실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가 앉아 있는 쪽에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식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12시 15분이었다.
12시 20분이 되었을 때 그를 찾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추동림씨 계시면 전화 받으십시오.
그는 급히 일어나서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여자 종업원이
가리키는 수신용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추동림입니다.
아, 기다리고 있었군. 늦어서 미안해요. 참, 암호를
말해보겠오?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던 그 목소리였다.
미스터 Y.......
아, 좋아요. 그 전화로는 오래 통화할 수 없으니까 지금 바로
그 호텔에 방을 얻어 들도록 해요. 방은 내가 전화로 예약해
놓았어요. 물론 당신 이름으로 말이야. 이름을 바꾸면 안 되니까
그렇게 알아요. 조금 후에 방으로 다시 전화를 걸겠어.
동림은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커피숍을 나와 프론트 데스크로 가니 과연 그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요금을 치르고 열쇠를 받아들었다.
513호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문득 자신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발길을 돌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513호실은 고급스런 방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메우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판들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전화가 걸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문득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었다.
가방 속에서 담배 쌈지를 꺼내 파이프에 담배 가루를 재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된 나머지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는 그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밖에서는 5백 원짜리 담배를 사피웠지만 실내에
혼자 있을 때는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웠다.
파이프에 막 불을 붙이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아까의 그 목소리가 명령조로
이름을 말해 봐요. 하고 말했다. 굳이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신중을 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추동림입니다.
동림은 공손히 말했다.
누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지?
미스터 Y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됐어. 당신 암호를 지어줄테니까 앞으로 이름 대신
그걸 사용하라구. 당신 암호는 황금의 초생달...... 어때
암호치고는 근사하지 않나?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 말해 봐.
황금의 초생달.......
동림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됐어. 그 암호를 잊으면 안 돼. 그리고 앞으로 당신이 만나야
할 사람의 암호를 말해 주겠다. 그 사람의 암호는 제3의
브로커......제3의 브로커란 말이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게될 장소와 시간은 다음에 알려주겠어. 제3의
브로커를 만나면 반드시 당신 암호를 대야해. 그리고 물론 그
사람의 암호도 확인해야 하고. 암호를 대지 않거나 암호가
틀리면 물건을 인수할 수가 없고 목숨이 위태로와진다. 그리고
방을 나가서는 안 돼. 내가 언제 전화를 걸지 모르니까 밖에
나가지 말고 기다려. 필요한 것은 시켜 먹으면 될 거야.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동림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황금의 초생달 이란 말인가. 그는 갈수록 자신이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의
암호는 제3의 브로커 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모종의 물건을 인수할 것이라 했다. 도대체 그 물건이란
무엇일까? 그 물건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알려고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 눈을 피해 매우 은밀히 그것을 인수하려는 것을 보면
그것이 불법적인 물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매우
고가의 물건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같은 날 오후 1시 25분.
홍콩발 CPA CX410기는 예정보다 15분 늦게 김포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그 시간에 노인배가 지휘하는 수사진은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제3의 브로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공항에서
배치를 끝낸 것은 이미 두 시간 전이었다.
제일 먼저 입국심사대에 나타난 사람은 홍콩 경시청 형사인
장계명이었다.
입국심사대에서 그의 패스포드를 받아 든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거기에다 스탬프를 찍은 다음 그것을 본인에게
돌려주면서 메모지를 슬쩍 끼워 넣었다. 중국인 수사관은
심사대를 통과하면서 패스포드는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메모지만 펴보았다. 메모지에는 영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미스 오가
당신을 안내할 것입니다. 미스 오는 빨간 코트에 흰 베레모를
쓰고 있고 손에는 책을 들고 있습니다. 미스 오를 만나는 즉시
이 메모지를 돌려주십시오. 당신의 명함과 함께.
출국장에는 원형 컨베이어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크게 붐비고 있었다. 장계명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빨간 코트에 베레모를 쓰고 있는 아가씨는 금방
눈에 띄었다. 그녀는 출국장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고, 마치 방금
입국한 사람처럼 카트 위에 가방을 한 개 올려놓고 컨베이어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승객들의 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책이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홍콩 수사관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하며
미스 오입니까? 하고 영어로 물었다.
오갑자 순경은 반색을 하며 역시 영어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장입니다.
홍콩인은 자신의 명함을 꺼내 메모지와 함께 그녀에게
내밀었다. 될수록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그들은
악수를 나누는 것을 피했다. 오순경은 명함을 들여다보고 나서
물었다.
미스터 주는 오지 않나요?
곧 올 겁니다. 뒤에서 미행해 오느라고 좀 늦습니다. 나는
먼저 나왔지요.
장계명은 중키에 얼굴이 희고 둥근 30대 중반의 사나이였다.
첫 인상이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는 양복 차림에 감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아, 저기 오는군요. 안경을 끼고 목에 빨간 머플러를 걸친
놈이 제3의 브로커입니다.
장이 가리키는 사나이는 짙은 밤색 세무 반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앞이 열려 있는 반코트 안으로 검정 털셔츠가 보였다.
자주색의 머플러를 목에 걸치고 있는 것이 멋져 보인다고
오갑자는 생각했다. 키는 조금 큰 편이었고, 머리는 기름을 발라
깨끗이 빗어 넘기고 있었다.
그는 껌을 짝짝 씹으며 컨베이어 주위에 몰려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보다 서너 걸음 떨어져 다가오던 금발의
아가씨도 컨베이어 앞으로 다가섰다. 브로커와 금발사이에는
다른 사람 두 명이 끼어 있었다. 얼른 보기에 브로커와 금발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듯했다.
저 금발도 일행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서로 모른 체하고
있는데 계속 행동을 같이 하고 있어요.
홍콩인이 오순경에게 말했다.
금발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림은 남루해 보였고
마치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각국을 여행하는 아가씨 같았다. 조금
뚱뚱한 편으로 꼭 끼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나마 닳고
닳아 허옇게 물이 빠져 있었다. 위에는 때에 절은 노란색의
파커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흰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목에는
일제 캐논 카메라 한 대가 걸려 있었다. 바지를 금방이라도 찢을
것 같은 그녀의 크고 팽팽한 엉덩이를 오순경이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장이 컨베이어 저쪽에 나타난 중년의 뚱뚱한
사나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함께 온 미스터 주입니다. 내 직속 상관이죠.
주평하는 이쪽을 향해 목례를 보낸 다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실업가 타이프로 금테안경을 끼고 있었고 값비싸
보이는 누런 오버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오갑자와 장계명이 먼저 세관 검사대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노인배와 박문호가 그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잠시 후 그들은 컨베이어 쪽으로 이동했다. 코보가 제3의
브로커와 금발을 감시하고 있는 동안 박문호는 입국심사대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금발이 먼저 짐을 찾아 카트 위에 싣고 세관 검사대 쪽으로
다가갔다. 짐은 파란 색의 등산 배낭 한개뿐이었다. 그것은
유난히 커보였다. 조금 떨어져서 제3의 브로커도 카트를 밀고
그녀 뒤를 따랐다. 그의 카트 위에는 중간 정도 크기의 트렁크와
수츠케이스가 실려 있었다.
세관 검사대는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금발은 5번
검사대로, 브로커는 6번 검사대로 들어갔다.
5번 검사대의 세관 직원은 배낭 속의 물건들을 꺼내놓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손에 집혀 나오는 것들 거의가
때에 절은 옷가지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옷가들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금발
아가씨는 얼굴을 붉혔다.
외국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한국에는 물이 많고 좋으니까 좀 빨아 입으세요.
세관 직원은 영어로 핀잔을 주고나서 마지막으로 견고하게
생긴 나무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 속에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조그만 도자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서 다른 물건들과 함께 배낭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것은 다분히 형식적인 듯하면서도 사실은 세밀한 검사였다.
헤로인 같은 것은 없었다.
6번 검사대의 세관 직원도 헤로인을 발견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긴 헤로인을 발견했다 해도 모른 체하고 그냥
통과시켰을 것이다. 검사를 끝낸 승객들이 빠져나가자 그는
보고하기 위해 다른 직원과 교대했다.
코보는 출국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보안실로 급히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금발과 브로커의 짐을 검사했던 세관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헤로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6번 검사대를 맡았던 세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트렁크 내벽을 뜯어 봤나요?
아뇨. 뜯지 않았습니다.
코보는 5번 검사를 맡았던 세관원을 쳐다보았다.
배낭 속에는 냄새나는 옷가지와 함께 조그만 도자기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도자기가?
네,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식 전문가가
아니라서 어느 정도 값이 나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출국장 밖에서는 마대섭 반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김만주와
최원달, 그리고 조미혜도 사람들 틈에 끼여 기다리고 있었다.
홍콩 경시청 형사들은 일단 출국장을 빠져나오자 그들이
그때까지 미행해온 자들을 한국 형사들에게 인계했다.
오갑자는 먼저 장계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올랐다. 뒤이어 박문호가 달려와 운전석으로 뛰어들어
시동을 걸었다. 그때 뒷좌석으로 주평하가 올라왔다.
마반장과 세 명의 형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브로커와 금발을 따라 움직였다. 브로커는 한국에 여러 번 와본
듯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터미널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서는 것을 보고 조미혜는 건물
입구에 대기시켜놓은 봉고차에 뛰어올랐다. 봉고차 안에는 이미
코보가 타고 있었다.
그는 종이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박문호가
일국심사대에 가서 가져온 것으로 외국인이 입국할 때
제출하도록 되어 있는 입국신청자 카드였다. 지금 그의 손에는
브로커와 금발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카드에는 제3의 브로커의
이름이 왕창(王昌)이라고 적혀 있었다. 국적은 홍콩이었고,
나이는 40세였다. 한편 금발 아가씨는 국적이 캐나다로 되어
있었다. 나이는 25세, 이름은 화니 아로라.
조미혜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코보는 택시 정류장 쪽을
바라보았다. 김만주와 최원달이 승용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대섭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2호차! 먼저 출발해!
코보는 무전기로 승용차에 지시를 내렸다.
김만주와 최원달이 탄 검은 색 승용차는 택시 정류장을 지나
천천히 굴러갔다. 브로커와 금발은 함께 택시를 타지 않았다.
금발이 먼저 택시를 타고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낯선 남자 한
명이 앞자리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택시는 멈칫하다가 그대로 굴러갔다. 브로커는 그 다음 택시를
탔다. 마대섭이 차도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금발 아가씨의 이름은 화니 아로라...... 브로커의 이름은
왕창...... 그들은 제각기 따로 택시를 탔다. 2호차는 아로라를
따라라! 그 차 안에는 의외의 인물이 타고 있다. 합승 손님인지
공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아로라가 타고 있는 택시는
3579!
무전기로 명령을 내리면서 코보는 봉고차를 출발시켰다.
1호차는 브로커를 미행하라! 차번호는 5348번! 확인됐나?
확인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1호차와 2호차에서 동시에 응답이 왔다.
노인배는 조미혜에게 3579번 택시를 오른쪽으로 추월하라고
지시했다.
곧게 뻗은 김포가도를 차들은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조미혜의 운전 솜씨는 탁월했다.
5분쯤 지나 그녀가 모는 봉고차는 화니 아로라가 타고 있는
택시를 오른쪽으로 천천히 추월했다. 봉고차가 택시를 추월하는
동안 코보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인상이 날카롭게 생긴 사나이였다. 나이는 서른 안팎
정도로 보였고, 검정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화곡동 입구에 이르렀을 때 지휘차는 1호차와 임무를
교대했다. 1호차는 뒤로 처지고 봉고차가 대신 브로커가 타고
있는 택시를 따라갔다.
브로커가 타고 있는 택시는 아로라가 타고 있는 택시를 20m쯤
간격을 두고 따라가고 있었다.
강변으로 접어들자 노인배는 1호차로 하여금 아로라가 타고
있는 택시를 따르게 하고 2호차에게는 브로커가 타고 있는
택시를 따르라고 지시했다. 곧 봉고차는 2호와 임무를 교대한
다음 뒤로 빠졌다.
김포가도를 벗어나면서부터 차들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노폭이 좁아진데다 길 위에 쌓인 눈이 강바람에 얼어붙는 바람에
노면이 몹시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강바람에 가로수 가지 위에 붙어 있던 눈송이들이 마치
벚꽃잎처럼 우수수 날리고 있었다. 강물은 아직 얼어 있지
않았다.
이윽고 차들은 강변 도로를 벗어나 빌딩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봉고차는 앞으로 달려가면서 1호차에게 지시를 내렸다.
1호차! 지휘차와 교대한다! 2호차는 M경찰서 앞에서 1호차와
교대하라!
검정 가죽점퍼의 사나이는 아로라가 타고 있는 택시 속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두 대의 택시와 그것들을 미행하는 세 대의 차는 J신문사 앞을
지나면서부터 차량의 홍수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차도에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밀려 있었다. 차들은 얼어붙은
노면 위에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봉고차는 앞으로 나가려다가 그만두었다. 빈틈없이 들어찬
차들 속에서 다른 차를 추월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로라가 탄 택시가 시청 앞 광장 쪽으로 굴러가는 순간
신호가 바뀌었다. 조미혜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대로 달려!
코보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위험한데요.
조미혜가 주저했다.
빨리 달리라니까!
코보는 상체를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조미혜는 이미
광장으로 진입하고 있는 택시를 쫓아 액설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봉고차는 세종로와 남대문 쪽에서 밀려오는 차들 사이로
돌진했다. 양쪽에서 밀려오는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 서있던 교통순경이 호각을 불어대면서
봉고차 쪽으로 달려왔다. 교통순경은 봉고차 운전수한테 빨리
차를 세우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조미혜는 그것을 묵살하고
을지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교통순경은 택시를 타고 쫓아왔다.
아로라가 탄 택시가 을지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H호텔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코보는 길가에 차를 세우게
했다.
빨리 따라가 봐!
그는 조미혜의 등을 떠다밀었다.
그녀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려 호텔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가자
교통순경이 탄 택시가 봉고차 앞으로 굴러와 멎었다. 교통순경은
성난 표정으로 택시에서 내려 다가왔다. 운전석이 비어 있자
그는 코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와 차문을 열고 고개를
디밀었다.
이 차 운전사 어디 갔어요?
미안하게 됐오. 공무집행 중이라 이렇게 됐어요.
노경감이 신분증을 보이고 사유를 설명하자 순경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코보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물러갔다.
그때 브로커가 탄 택시가 H호텔 쪽으로 커브를 도는 것이
보였다. 조금 있자 2호차가 그 뒤를 따라 호텔 쪽으로 사라졌다.
1호차는 봉고차 뒤에 다가와 멎었다. 차에서 마반장과 박형사가
뛰어내려 호텔 쪽으로 뛰어갔다. 오갑자는 홍콩 수사관들과 함께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흰 베레모도 빨간
코트도 벗어버리고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수수한 베이지색 코트로
갈아입고 있었다.
노인배는 맨 마지막에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호텔 로비는 마치 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
아로라는 프론트 데스크에 기대 서있었다. 그 양쪽에 브로커와
가죽점퍼가 조금 떨어져 서있었다.
형사들은 제각기 적당한 위치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프론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로라의 남루한 모습은 특급호텔에는 영 어울리지가 않아
보였다. 그런대로나마 그녀가 금발의 외국인이라는 점이 그녀의
그같은 모습을 어느 정도 커버해 주고 있었다.
잠시 후 아로라는 배낭을 지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뒤를 가죽점퍼가 조금 떨어져서 주위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따라갔다. 그는 아로라와 일행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형사들의 눈에는 그런 것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이번에는 브로커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뒤를 벨보이가 짐을 들고
따라갔다.
브로커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마반장과 박형사가 프론트로 달려들었다.
노인배는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부하들이 프론트
데스크에서 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마반장이 그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아로라는 2538호실에 투숙했고, 브로커는 2539호실에
투숙했습니다.
가죽옷을 입은 자는?
그 자는 방을 얻지 않았답니다.
그렇다면 아로라와 같은 방을 사용한다는 건가?
코보는 2538호실과 2539호실 가까운 곳에 방 두개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마반장이 다시 프론트로 다가가 수속을 밟는 동안 코보는
담배를 피워물고 일어서서 로비를 거닐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왔다갔다 했다. 갑자기 새로 등장한 가죽점퍼---바로 그가
황금의 초생달이 아닐까. 세관검사에서 발견되지 않은 헤로인은
과연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헤로인은 정말 있는 것일까.
┌────────────────────────────┐
│ 7.헤로인 │
└────────────────────────────┘

호텔방 안에 갇힌 동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그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불안한
나머지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았다.
한 시간쯤 지나도 미스터 Y로부터는 전화가 없었다. 동림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아내에게 전화나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산의 남화 의상실로 시외전화를 부탁했다. 그 시간에 아내는
의상실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의상실에 있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아가씨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동림은 이상한 느낌에 다그쳐
물었다.
어디 갔나요?
저기.......
언제 돌아오나요?
오늘은 못들어 오실 거예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동림은 다그쳐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나요?
의상실 아가씨는 만일 동림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더라도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받았지만 막상
동림의 전화를 받고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저기......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뭐라고요?
그녀는 남화가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병원 이름과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얼른 적고 나서 동림은
전화를 끊었다. 산부인과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보아 아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는 병원에 전화를 걸기 전에 먼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인하 엄마 집에 있습니까?
안 계시는데요.
병원에 입원했다면서요?
네, 갑자기 새벽에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가정부는 당황해서 말 끝을 흐렸다.
인하는 뭘하고 있습니까?
자고 있어요.
잘 부탁합니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거듭되는
불행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 심정으로서는 그것을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막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미스터 Y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침묵하고 있었다.
암호를 말해 봐.
상대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금의 초생달.......
동림은 치욕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래. 언제나 먼저 암호를 말하란 말이야. 잘 있는지
알아보려고 전화를 건 거야. 다시 전화할 테니 나가지 말고
기다려.
잠깐! 난 가야겠오!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야?
집에 전화 걸었더니 내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답니다. 유산한
것 같습니다. 지금 병원에 가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소리 마! 가면 안 돼!
가야 합니다.아내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웃기는군. 이 친구, 정말 숙맥이군. 여자가 유산하는 건 보통
있는 일인데, 유산 정도 했다고 죽을 것 같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일을 좀 늦출 수는 없을까요? 비행기편으로 갔다오면 금방
다녀올 수 있읍니다. 다녀와서 그 일을 틀림없이
해드리겠읍니다. 부탁합니다.
동림은 애걸했지만 미스터 Y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안 돼! 꼼짝 말고 방안에 그대로 있어! 이유는 달지 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미스터 Y,당신은 그야말로 악랄하기 짝이 없군요.
그런 말하지 마. 난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야.
나에게는 목적만이 존재해.
난 가야 합니다. 부산에 다녀와서 하겠습니다.
가고 안 가고는 당신 자유야. 하지만 당신이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당신 아내는 경찰에 체포될걸. 마음대로 하라구.
미스터 Y는 그렇게 말한다음 여유만만하게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다시금 심한 무력감과 패배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말했지만 단 한 발짝도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울안에 갇힌 맹수처럼 방안을
서성거리며 혼자 병원에 쓸쓸히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왜
모든 것들이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 지난 4년 동안 그의 가정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행복했었다. 너무나도 평온해서 오히려
두려움은 느낄 정도였었다. 그런 가정이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는 몸서리치는 전율을 느꼈다.
밖으로 나가는 대신 그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를 받은 남화는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흐느껴
울었다. 그것은 비탄과 절망에 찬 흐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에 짓눌린 울음이기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바보처럼 물었다.
빨리...... 빨리 좀 와주세요.......
울지 말고 말해 봐. 유산한 거야 ?
아내의 흐느낌에 그는 뼈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몸은 어때? 의사가 뭐래?
괜찮대요. 빨리 좀 오세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너무 슬퍼하면 몸에 해로와.마음을
굳게 먹으라구. 그만 울어.
흐느낌은 작아져갔다. 그녀는 그에게 빨리 내려오라고만
말했다. 언제 보아도 자신에 차있고 생활력이 넘치던 아내였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나약해지다니! 그는 아내의 돌변한 모습에
그저 당황하기만 했다.
내려가고 싶지만 지금은 안 돼. 미안해. 끝나는 대로 내려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마음을 굳게 먹어. 늦으면 밤차로
내려가겠어. 12월 31일 밤은 당신하고 지내려고 했는데......
정말 미안해.
늦으면 비행기 타고 내려오세요. 그러면 오늘 밤 함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조금 있다가 집으로 갈 거예요.
안 돼. 내가 갈 때까지 그대로 병원에 있어. 완쾌될 때까지
움직이면 안 돼.
싫어요. 병원에 더이상 못있겠어요. 의사 말이 퇴원해도
된다고 했어요.
방안에 들어선 금발 아가씨는 남자가 보는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브러지어도 팬티도 모두 벗어던지고 난 그녀는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천진스런 미소를 던졌다.
부끄러워 한다거나 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좀 바보스러운
웃음이었다. 통통히 살이 찐 복스럽게 생긴 얼굴에는 유난히도
주근깨가 많았다. 살이 쪄서 허리통도 굵은 편이었고 거기에
어울리게 젖가슴도 엉덩이도 하도 커서 몸 전체가 비게덩이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샤워좀 하고 오겠어요.
그녀는 남자를향해 다시 한번 천진스런 미소를 던지고 나서
엉덩이를 흔들며 욕실로 들어갔다.
특급 호텔이라 욕실도 고급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무엇을 두려워 한다거나
불안해 하는 기색 같은 것은 조금치도 없었다. 오직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캐나다 남서부의 밴쿠버 출신이었다. 그녀가 집을 떠난
것은 1년 전이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이 유난히 강한 나머지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정처없이 여행길에 나선 것이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점원으로 일하면서
결혼이라는 것도 한번 해보았는데 6개월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자유분망한 그녀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어느 날 갑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처럼 부자유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남편이란 작자는 사사건건 그녀의 하는 일에 간섭하려
들었고 그녀를 마치 소유물처럼 취급하려고 했다. 그녀는
결혼생활 중에도 임신하는 것만은 피했기 때문에 아무 미련없이
결혼생활을 청산할 수 있엇다. 3년 동안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쓰고 남은 돈이 얼마간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에
사표를 내고 은행에 예금해 두었던 돈을 모두 찾은 다음
밴쿠버를 떠나 세계 여행길에 나섰다. 천성이 쾌활하고 명랑한
그녀는 새로운 발견을 찾아 새로운 기쁨을 맛보기 위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무슨 특별한 인생철학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기쁨을
맛보고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을 철저히 즐기려는 의식이
본능처럼 몸에 배어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집을 떠난 지 두 달만에 가지고 있는 돈도 바닥이 나서 그녀는
아르바이트 일로 여비를 벌어가며 여행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여비를 버는 것이 신통치 않을 때는 몸을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몸을 파는 짓을 그녀는
조금도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짓 자체를 즐거운
마음으로 소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대체 그녀에게는
부도덕한 것에 대한 비판 능력이 부족했다. 그런 능력이 부족한
점에서는 백치나 다름없었다. 정조관념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섹스라는 것을 즐거운 스포츠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육체관계를 맺곤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돈을 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녀는
히피는 아니었지만 히피들의 사고방식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그녀는 남자들과 빈번이 육체관계를 가지면서도 그들을 결코
사랑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의 감정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그런 감정을 간직한다거나 거기에 몰두한다거나 그럴줄을
몰랐다. 육체는 성숙할대로 성숙했지만 그녀의 정신 연령은 아주
낮았다. 그녀의 표정이 천진스러운 것도 정신 연령이 낮은데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가 홍콩에 도착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그
어느 곳에서 보다도 즐겁고 여유있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홍콩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는 날 한 홍콩 청년이 그녀에게
접근해 왔는데 그녀가 천진스런 미소를 보이자 그는 그녀를
벤츠에 태워 구룡반도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화판 호텔에
데리고 가 투숙시켰다. 그때부터 한 달 가량은 그야말로 꿈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녀는 호화판 식사에다 마음대로 술을 마실 수
있었고, 그가 운전하는 벤츠를 타고 구경을 다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성적욕구도 충족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일 주일 전 그 청년은 그녀에게 조그마한 도자기
하나를 한국으로 운반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것은 높이가
2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겉보기에
평범한 도자기였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다루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매우 값나가는 물건 같았다. 그의 입으로도
그것은 매우 진귀한 도자기라고 몇번씩이나 강조하곤 했다.
그것을 한국까지 운반해 주는 댓가로 그는 5천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동안 받은 환대를 생각하면 공짜로도 운반해 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그 제의를 쾌히 수락했다. 다만
그것이 혹시 밀반출되는 물건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그런 것은 숨길 수도
없으려니와 세관 검사를 받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했다.
그것은 웬만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견고한 나무상자 속에
포장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떠나는 날 다시 가져오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도로 가져갔다.
그녀의 출발일자는 그녀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청년에 의해
조정되었다. 출발이 하루 이틀 지체되다가 마침내 그녀가
떠나기로 한 날 그는 크고 낡아빠진 배낭을 한개 가져왔다.
그리고 그녀의 배낭 대신 자기가 가져온 배낭을 가지라고
말했다. 그녀의 배낭 역시 낡기는 했지만 별로 크지 않고, 지난
1년 동안 사용해온 것이기 때문에 몸의 일부분처럼 애착이 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몸에 맞지도 않고 남이 쓰던 것과 바꾸자니
그녀는 심히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 청년의 부탁을 거역할 수
없어 그녀는 그가 가져온 배낭을 택하기로 했다. 그 도자기는 그
배낭 속에 들어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 배낭이야말로 그
도자기를 운반하는데 가장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반드시 그 배낭 속에 그 도자기를 넣어 운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는 그 배낭이 도자기 운반에
가장 적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가 보는데서 자기
배낭 속에 들어 있는 때에 절은 옷가지들을 큰 배낭 속에 옮겨
넣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배낭 속에서 도자기를 절대 꺼내서는
안된다로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만일 세관 직원이 그걸 꺼내보면 어떡하지요?
그런 경우에는 할 수 없지. 아믛든 그 도자기를 언제나 배낭
속에 간직해 두도록 해요.
그밖에 조건이 또 있었다. 매우 귀중한 물건을 운반하는만큼
그녀에게는 동행이 따라붙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에게 왕창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왕창과
동행하지만 절대 일행인 체하지 말 것, 일단 홍콩을 떠나면
왕창의 지시에 따를 것 등을 그녀는 당부받았다.
김포 공항 택시 정류장에서 한 낯선 남자가 그녀가 탄 택시에
뛰어들었을 때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왕으로부터 이미
언질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를 팽이라고만
소개했다. 그 역시 왕과 함께 홍콩에서부터 아로라를 감시하며
따라온 것이었는데 왕과는 달리 아주 조심스럽게 미행했기
때문에 그녀는 김포 공항에 내릴 때까지 전혀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날카로운 인상의 팽은 왕이 자주 웃는 것과는
달리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웃을 줄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아로라는 따뜻한 물 속에 두 다리를 쭉 편 채 드러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감미로운 느낌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30분쯤 그렇게 누워서 따뜻한 물의 감촉을 즐기다가 그녀는 대충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팽은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아로라를 쏘아보았다. 아로라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다가
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남자는 그대로 꼼짝하지 않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아로라는 상체를 그의 얼굴 위로 구부렸다. 그녀의 큼직한
젖가슴이 그의 얼굴 위에 마치 박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상체를 더 굽히자 젖꼭지가 그의 입술에 닿았다. 비로소 그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입이 조금 열리더니 그 속으로 젖꼭지가
빨려들어 갔다. 금발의 캐나다 아가씨는 두 손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감싸쥐더니 그것을 자기 쪽으로 바싹 끌어안았다.
남자보다도 여자가 더 적극적이었다. 팽은 별로
움직이려들지를 않았고, 그런 그를 아로라는 기분내키는 대로
다루면서 그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나갔다.
내가 해야할 일은 이제 다 끝난 거지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기분이 좋은지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면서 대답했다.
금발이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언제 끝날 건가요?
곧 끝날 거야.
그는 눈을 감으며 위에 실려 있는 여자의 살찐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전신에 퍼지는 감미로운 희열을 조금씩 음미하며 더
이상 물어보기 싫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아로라의 몸놀림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팽이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자 그녀는
안돼요! 하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노크 소리가 더욱 거칠게 들려왔다. 한번 두드리고 이어서
세번 연속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상관하지 말아요. 그대로 계속해요.
아로라가 허덕거리며 말했다.
비켜!
팽은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아로라는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팽은 바지만 얼른
주워입고 문 쪽으로 가서 구멍을 통해 밖에 서있는 사람을
확인한 다음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왕이었다.
빨리 문 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역정을 내며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카피트 바닥 위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아로라를 보고는 쿡하고 웃었다.
잘들 논다. 내가 방해했나?
괜찮습니다.
팽은 다시 안색이 굳어지면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로라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이 여자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왕이 발 끝으로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며 물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어요.
정신을 잃었나본데.......
이 봐, 일어나!
팽이 잡아 흔들었지만 아로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난폭하게 젖꼭지를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그녀는 용수철처럼 튀어일어나면서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보고 두 사람은 어이없어
했다.
약간 모자라는 애야.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게 왕이 중국말로 말하자 팽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잘 감시해야 해.
알겠습니다.
팽이 깍듯이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왕은 그에게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시내 구경나가요.
금발이 팬티를 집어들며 말했다.
안 돼! 여기 있어야 해!
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는 마흔쯤 된 사내였다. 부드러운
표정 뒤에는 교활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럼 나 혼자 나갔다 오겠어요.
제약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아로라는 어떻게든 답답한
방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 했다.
안 돼. 혼자 행동하면 안 돼!
여기서 뭘 해요? 너무 심심하잖아요. 어머나, 저 봐요! 눈이
오고 있어요!
그녀는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찬탄의 눈으로
눈오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밖에는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눈을 맞으며 오가는
무수한 사람들과 차량들의 모습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멋있어요. 우리 나가요! 나가서 데이트해요! 오늘이
31일이잖아요!
그러나 남자들은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눈오는 것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얌전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5천 달러 주지
않을 거야.
그 말에 그녀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3시가 지났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미스터 Y의 전화였다.
지금 그곳을 나와 S호텔 쪽으로 50미터 걸어가면
광명사진관이 있을 거야. 거기서 명함판 컬러사진을 찍도록 해.
30분만에 뽑을 수 있는 즉석 사진을 찍으란 말이야. 스무장
뽑아놓으라고 해. 사진을 찍은 다음에는 그걸 찾지 말고 바로
호텔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어.
뭣때문에 사진을 찍으라는......?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동림은 마치 무엇에 홀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사진을 찍으라는 것일까? 사진을 찍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상대방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으련만 만날
수가 없으니 꼼짝없이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Y는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채 모든 것을 전화로만 지시하고
있었다. 용의주도한 놈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동림은 10분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미스터 Y의 말대로 S호텔 쪽으로 걸어가자 광명사진관이
보였다. 30분 안에 사진을 뽑아준다는 설명이 붙은 문구가
쇼윈도에 걸려 있었다. 직원 두 명이 한가한 모습으로 난로가에
앉았다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맞았다. 동림은 명함판
컬러사진을 30분 안에 스무 장 뽑아달라고 주문했다.
뭣에 쓰실 건가요? 여권용인가요?.
예쁘장하게 생긴 여직원이 물었다.
동림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보 같은 대답에
여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묻지 말고 그냥 찍어줘요. 내가 쓸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쓸
거예요.
남자 직원이 그를 흰 벽 쪽으로 데리고 가 의자에 앉게 했다.
동림은 흰 벽을 등지고 앉아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일제 니콘이었다. 불빛이 두번 번쩍한 다음 그는
일어섰다. 여직원이 영수증에 그의 이름을 적고 나서 요금을
모두 선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림은 요금을 지불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시간의 흐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자신만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의 기분은
고독을 일부러 찾아나선 것과는 아주 다른 기분이었다.
사진관 바로 옆에 구두닦이가 앉아 있었다. 동림은 그 앞을
지나치다가 돌아서서 비어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것은
그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그는 구두통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구두닦이는 두 명이었다. 두 명 다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어린 소년 두 명이 구두를 날라오고 있었다. 청년 두명은
베니어판 칸막이 안에서 연탄불을 쪼이며 구두를 닦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구두약으로 시커멓게 절어 있었지만 생기에
차있었다.
동림은 담배를 피워문 다음 말을 걸었다.
간단한 일거리가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물론 보수는
후하게 주지.
턱이 뾰족한 청년은 그를 힐끗 올려다보고 나서 침을 탁
뱉았다.
무슨 일인데요?
누구를 미행하는 일이야.
누구를요?
청년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누군지는 나도 잘 몰라. 사진관 사람이 그 사람을
알려줄거요.
미행만 하면 되는 겁니까?
다른 구두닦이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끼어들었다. 그는
소년이 물어다준 구두를 닦고 있었다.
미행해서 그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걸 좀 알아봐줘요.
그 사람에 대해서 가능한 한 많이 알아낼수록 더 좋아요.
가능할까?
구두닦이들은 서로 한번 쳐다보고 나서 씨익하고 웃었다.
돈만 많이 주면 한번 해보죠.
얼마면 될까?
5만 원은 주셔야죠.
좋아, 10만 원을 주지. 5만 원은 선금이고 나머지는 일을
끝내고 나서 주겠어. 실패하면 잔금을 줄 수 없어.
동림은 즉시 5만 원을 꺼내 턱이 뾰족한 청년에게 내밀었다.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돈을 받았다.
이러다가 잘못 되는거 아닙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동림은 웃으며 수첩에다 호텔 전화번호와 방호수를 적은 다음
그것을 찢어 청년에게 내밀었다.
나는 이 호텔에 묵고 있으니까 이리로 연락을 해줘요.
알겠읍니다. 사진관에서 그 사람을 알려준다고 했죠?
동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구두는 아직 다 닦이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더이상 거기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남자 직원이 뒤에서 여직원을 껴안고 있다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부탁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찍은 사진 말입니다. 이따가
다른 사람이 찾으러 올 텐데 그 사람한테 그 사진을 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죠.
말상처럼 생긴 30대의 직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동림은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진을 찾아가지고 나가면 밖에 있는
구두닦이한테 즉시 좀 알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죠?
말상이 비로소 그를 바로 쳐다보았다.
내 사진을 찾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걸 밖에 있는
구두닦이에게 알려주라 그 말입니다. 구두닦이한테는
말해뒀으니까 알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직원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그들은 미처
판단을 못내리고 있었다. 동림은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이건 수고비입니다. 부탁합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그들을 묵살한 채 그는 탁자 위에 돈을 놓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되든 안 되든 한번 시도해본
짓이었다.
호텔방으로 돌아온 그는 초조하게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렸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전화가 몹시
기다려졌다.
방으로 들어온 지 30분쯤 지났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구두닦이가 걸어온 전화가 아니었다.
사진 찍었어?
네, 시키는 대로 찍었습니다.
그는 미스터 Y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요없는
말까지 덧붙였다.
30분 이내로 스무 장 뽑아달라고 했습니다. 요금은 모두
지불했습니다.
수고했어. 당신이 쓴 비용은 나중에 다 갚아주겠어. 비용뿐만
아니라 수고비도 충분히 주겠어. 일에 대한 보상은 당연한
거니까 말이야.
보상은 필요치 않습니다. 빨리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기다리고 있어. 인내심을 갖지 않으면 불행해져.
미스터 Y는 마치 훈계조로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어처구니가 없어 멀거니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힘없이
내려놓고 다시 창가로 가서 기대섰다.
길을 메우다시피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있자니 자신도 그속에
섞여 할 일없이 걷고 싶은 생각이 문득 일었다. 그것은 그
전에는 없던 생각이었다. 그 전에는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한사코 떨어져 있으려고 했었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 살게 된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는 소파로 돌아와 탁자 위에 상체를 구부린 채 파이프에
담배가루를 담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미스터
Y의 전화를 받고 나서 30분쯤 지난 시각이었다. 그는 전화벨이
세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구두닦이가 걸어온 전화였다. 동림은 갑자기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됐지? 그 사람 나타났나?
네, 나타났읍니다! 사진관 아가씨가 알려주었습니다!
구두닦이 청년은 꽤나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제 친구를 딸려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따라갔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고마워.
그는 정말로 구두닦이 청년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전화걸겠습니다. 계속 거기에 계실 겁니까?
그럼. 되도록 빨리 연락해 줘요.
알겠습니다.
동림은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한 가지 더 물었다.
참, 그 사람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지?
여자이던데요.
여자라구?
네, 여자였습니다. 40대 부인 같았습니다.
시간은 5시가 가까와오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저물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다시 초조해졌다. 그는 오늘중으로 집에
가야만 했다. 집에서 새 생명을 잃은 아픔에 몸져 누워 있을
아내를 위로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12월 31일이 아닌가. 그는 새해아침을
아내와 함께 맞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새해아침의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고 싶었다. 엄마의 뱃속에서 죽은 아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영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문인지 별로
슬픈 감정 같은 것은 일지 않았다.
6시가 지나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미스터 Y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오늘중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6시 15분이 되었을 때 구두닦이로부터 두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그 사람 집까지 알아내느라고 아주 혼났습니다.
직접 미행을 했던 청년이 흥분해서 말했다.
지금 K호텔 커피숍으로 와주지 않겠나? 잔금도 받아갈겸
말이야.
10분 후에 동림은 커피숍에 내려가보았다.
커피숍에는 이미 구두닦이 청년 두 명이 와있었다. 그들은
말쑥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동림은 코피 석 잔을 시켰다.
누가 그 사람을 미행했나?
제가 했습니다.
턱이 뾰족한 청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자라고 했지?
네, 여자였습니다. 아주 잘 차려 입은 여자였습니다. 나이는
마흔 서넛쯤 된 것 같은데...... 미인은 아니었습니다. 차려입은
것으로 보아 돈 많은 여자 같았습니다.
일행은 없었나?
혼자였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가기에 할 수 없이 저도 택시를
타고 따라갔지요. 자가용도 아주 고급이었습니다. 여기에 자가용
번호하고 집 주소가 있습니다.
청년은 동림 앞에 메모지를 꺼내놓았다. 동림은 그 청년의
치밀하고 미첩한 행동에 자못 놀랐다.
고마워요. 정말 수고 많았군.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나서 동림은 잔금 5만 원에다 2만 원 더
얹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고개를 꾸벅하고 나서 돈을 받아 챙겼다.
주소를 보니까 아파트인데 어떻게 주소를 알아냈지?
아파트 입구에 편지함이 있었어요. 각 편지함에는 호수가
적혀 있었는데 그 여자가 805호 주인이니까 그걸 열지
않았을까요?
동림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여자의 주소는 서대문에 있는 <B아파트 202동 805호>였고,
차번호는 <서울 마541×>번이었다.
그 여자의 특징 같은 것을 말해 줄 수 있겠나?
자세히 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안경을 끼고 있었고 다리를 조금 저는 것 같았읍니다.
고맙네.
청년들과 헤어지면서 동림은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이런 일이라면
누워 떡 먹기보다 쉬우니까요.
청년들이 호텔 밖으로 사라지자 동림은 로비에 있는 공중
전화로 걸어가 사진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자 직원이었다.
추동림입니다. 제 사진을 찾아 갔는지요?
아, 네. 어떤 여자분이 오셔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대로 구두닦는 청년한테 알려 줬습니다.
동림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513호 실로
다가갔을 때 방안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복도에까지
들려왔다. 그는 급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미스터 Y가 걸어온 전화였다.
내가 방에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왜 나갔지?
그는 잔뜩 화가 나있는 것 같았다.
답답해서 잠시 밖에 나갔다 왔습니다.
밖에서 뭘했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혼자서?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물론 혼자 마셨습니다.
허락없이 밖으로 나가지 마.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멋대로
밖에 나가지 말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꼭 부산에 내려가야만 합니다.
오늘 일을 끝낼 수 없다면 부산에 다녀와서.......
안 된다고 했잖아!
미스터 Y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동림은 깜짝
놀랐다.
그럼 오늘 부산에 내려갈 수 없나요?
내려갈 수 없어!
오늘 내려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는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내 말 잘 들어. 지금 밖으로 나가 등산복 차림을 준비하도록
해. 백화점이 문을 닫기 전에 준비하란 말이야. 파커, 등산모,
등산 바지, 등산화 정도만 준비하면 될 거야. 배낭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 그것들을 준비해 가지고 다시 호텔로 와서 대기하고
있어.
왜 그런 것을 준비해야 합니까?
이유는 묻지 마.
찰칵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동림은 눈이 빠지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오늘중으로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해서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남화는 퇴원해서 집에 있었다. 동림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정말 미안해. 내일은 틀림없이 내려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 하고 있어요.
당신이 거기에 꼭 계셔야 하나요?
그녀는 그가 초상집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오늘 함께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아. 장례식은 내일 있거든.
그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뭐. 몸조심하세요.
아내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보다도 당신 몸조리에나 신경을 써. 슬퍼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야 해. 아기는 또 가질 수 있지 않아. 당신이 굳세게
일어서지 않으면 우리 가정은 불행해진다는 걸 알아야해. 아기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도록
해요.
알겠어요. 내일은 꼭 내려오셔야 해요.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어.
호텔에서 백화점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백화점은 사람들로 미어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금발의 아로라가 밖으로 나왔다.
그 뒤에 팽이 있었다.
팽은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아로라 곁으로 다가서서 걸었다.
로비에 잠복해 있던 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어떻게 할까요?
마반장이 턱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노경감에 물었다.
미행해.
코보는 읽고 있던 책에 다시 눈을 주었다.
아로라는 숄더백 하나만을 달랑 어깨에 걸친 간편한
차림이었다. 팽 역시 빈손이었다. 아마 밤거리 구경이라도
나가는 모양이라고 노경감은 생각했다.
마반장은 조미혜에게 신호를 보냈다. 저편 구석진 곳에 서있던
조미혜가 고개를 끄덕하고 아로라 일행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조금 후 마반장도 거리로 나섰다.
호텔을 나선 아로라와 팽은 호텔 바로 옆에 있는 S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아로라는 백화점에 와글거리는 사람들과 거기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상품들을 보고 사뭇 놀라는 것 같았다.
한국에 이렇게 크고 훌륭한 백화점이 있는 줄 몰랐어요.
상품도 모두 훌륭해 보여요.
그녀는 계속 지껄여대고 있었지만 팽은 굳은 표정을 풀지않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로라가 빨리 일을
마쳐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급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마반장과 조형사는 따로 따로 떨어져서 그들을 미행했다.
백화점 안에는 워낙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고
미행하는데는 안성마춤이었다.
아로라와 팽이 걸음을 멈춘 곳은 5층에 자리잡고 있는
등산용품 코너였다.
아로라는 그곳에서 배낭을 골랐다. 마침 그곳에는 추동림도
와있었다. 파커와 등산모, 그리고 등산 바지를 골라낸 그는
마지막으로 등산화를 신어보고 있었다. 그는 코너로 들어서는
금발의 외국 아가씨를 한번 무심코 힐끗 쳐다보았다.아로라도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것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시선에
불과했고, 그들은 두번 다시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 형사들도
동림을 보긴했지만 그들 역시 무심코 그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
이내 아로라와 팽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동림이 먼저 필요한 것들을 사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아로라는 한참동안 이것저것 살피다가 빨간 색의 배낭을
골라냈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그녀는 몹시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호텔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보고 마반장은 구내 전화로
2519호실을 불렀다.
두 사람 방금 위로 올라갔어.
연락을 받은 김만주 형사는 문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있자 아로라와 팽이 2538호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반장은 5분쯤 지나 형사들이 잠복해 있는 2519호실로
들어섰다.
아로라는 백화점에 가서 빨간 배낭을 한 개 새로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배낭을 샀다고?
코보는 코를 어루만지며 의아한 표정으로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배낭이 있는데 왜 또 배낭을 샀지? 다른 쇼핑도 했나?
아닙니다. 다른 건 구경만하고 지나쳤습니다. 산 것은
배낭뿐입니다.
왜 배낭을 샀을까?
코보는 다시 한번 부하들에게 물었다. 거기에 대해 아무도
선뜻 대답하려 들지 않았는데 나중에 마반장이 자신없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로라가 가지고온 배낭은 아주 낡은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새것으로 바꾸려고 새로 산 게 아닐까요?
그럴까.
코보는 중얼거리고 나서 거기에 대해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2520호실로 들어갔다. 그 방은 2519호실과 통해 있었다.
노경감은 홍콩 형사들에게 아로라가 새 배낭을 사가지고 온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도 납득이 갈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로라가 새 배낭을 구입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 역시 헤로인이 어디 있느지는 모르고 있었다. 만일
브로커 일당이 정말 헤로인을 가지고 들어 왔다면 그것은
브로커의 트렁크가 아니면 아로라의 배낭 속에 들어 있을것이
틀림없었다. 혹은 양쪽에 나누어 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
세관검사에서는 헤로인이 발견되지 않았다. 정밀검사가 아닌
형식적인 검사였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2킬로그램의 헤로인은 교묘한 방법으로 숨겨져
들어왔음에 틀림없다. 수사관들은 브로커 일당이 방을 비울 경우
그들의 방에 들어가 짐을 수색해볼 계획이었지만 그들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로라가 팽과 합께 외출했을때 기회를
엿보았지만 브로커가 2538호실을 지키고 있었다. 배낭은 그방에
있었고 그의 트렁크는 그 옆방인 2539호실에 있었다. 2539호실에
들어가 트렁크를 검사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마로 옆방에 있는
브로커가 금방이라도 자기 방으로 들어설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런데 아로라와 팽이 돌아올 때까지 브로커는 2538호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간이 약 한 시간 가량 되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2539호실에 들어가볼 걸 그랬다고 코보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1천만 달러어치의 헤로인이라면 그들 일당은 그 곁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겠지요? 하고 코보는 홍콩 사나이들을
쳐다보며 영어로 물었다.
그 물음에 외국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코보는 밖을 감시하고 있는 오갑자 순경에게 질문을 돌렸다.
브로커는 아직도 2538호실에 있나?
네,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2539호실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나?
네,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노경감은 다시 홍콩인 수사관들을 쳐다보았다.
브로커는 아로라가 방을 비운 사이 한 시간 동안 2538호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로라가 돌아온 뒤에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방에 있는
트렁크에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탓이 아닐까요?
트렁크에 헤로인이 숨겨져 있다면 그렇게 오래도록 방을
비워두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을 듣고보니 그렇군요.
실업가처럼 생긴 주평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에
이어 장계명이
그렇다면 브로커는 38호실에서 배낭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군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그들은 배낭이 들어 있는 방을
한번도 비우지 않았습니다.
코보는 아까보다 좀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배낭 속에는 도자기와 더러운 옷가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세관 직원은 그밖에 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대섭이 퀭한 눈으로 노경감을 쳐다보며 말했다. 코보는
창가에 기대섰다.
배낭 속에 뭔가 있을 거야.
저는 도자기에 신경이 쓰이는데요.
그 도자기가 헤로인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 상당히 귀중한 도자기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아직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가 감정해 봐야 알겠지만 밀반출해야 할 정도로 값이
나가는 보물은 아닐 거야. 그 정도의 물건이라면 세관에 걸리게
그렇게 배낭 속에 담아가지고 다니지는 않을 거야.그건 어쩌면
위장일지도 몰라.
위장이라니요?
주의를 딴데로 돌리게 하려는 위장 말이야.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마반장이 전화를 받아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홍콩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진시한이었다. 주평하는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화니 아로라에 대한 보고인데요. 그 여자는 여권에 적힌 대로
밴쿠버 출신으로 1년 전에 집을 떠나 여행중이라는군요.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백화점 점원이었답니다. 캐나다 경찰에서 직접
연락이 온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노경감이 물었다.
그렇지요. 브로커 일당이 그 여자를 운반책으로 이용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인물이지요. 돈만 듬뿍 집어주면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 세관에서도 그런 아가씨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지요. 브로커 일당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기 때문에 절대
직접 물건을 나르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하신대로 트렁크보다는
아로라의 배낭 쪽에 더 신경을 써야할것 같습니다.
그때 밖을 내다보고 있던 오갑자 순경이 낮게 소리쳤다.
보세요!
노경감은 오순경을 밀치고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2538호실 문이 열려 있었고, 가죽점퍼가 복도에 나와 있었다.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방 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먼저 브로커가 나왔고 뒤이어 아로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처음
올 때 가져왔던 낡은 배낭을 등에 지고 있었다.
브로커가 가죽점퍼에게 뭐라고 지껄이더니 급한 걸음으로 먼저
사라졌다.
아로라와 가죽점퍼는 느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만 남고 모두 미행해!
노경감의 지시에 마반장은 아래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최원달을 구내 전화로 불렀다.
브로커 일당이 내려가니까 준비해. 로비에는 박형사만 남도록
해.
최원달은 조미혜 쪽으로 급히 다가갔다.
놈들이 드디어 모두 움직였어. 박형사한테 가서 이리 오라고
해요.
조미혜는 주차장 쪽으로 달려갔다. 박문호는 봉고차 속에 앉아
못 부르는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있다가 조미혜가 뛰어오는 것을
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박문호가 로비로 들어섰을 때 제3의 브로커가 로비를
가로질러오는 것이 보였다.
조미혜가 봉고차의 시동을 걸었다. 최원달이 조수석으로
들어와 앉았다.
브로커는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아로라와 팽이 나타나자
호텔 밖으로 나갔다.
아로라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소담스럽게 떨어지고 있는 눈송이를 잡으려고 손을 벌렸다. 팽이
콜택시를 잡았다. 아로라는 짐을 조수석에 올려놓고 뒷좌석에
팽과 함께 올라앉았다. 그들이 탄 택시가 굴러가자 브로커도
콜택시를 집어탔다.
마반장과 김만주가 허둥지둥 호텔 밖으로 나왔을 때 봉고 차가
막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반장은 대기시켜 놓은
택시에 뛰어오르고 김만주는 승용차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택시를 타고 빠져나갔습니다.
박문호는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25층에 있는 노경감에게
보고했다.
방에 들어가 볼 테니까 나타나면 연락해줘. 지배인한테
부탁해서 방 열쇠를 좀 갖다줘.
두 방 다 들어가보실 겁니까?
그래.
방 안에는 노경감과 오갑자 순경, 그리고 홍콩 형사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 있자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벨맨이
들어왔다. 그는 열쇠 두개를 내놓았다.
방 주인들이 맡기고간 열쇠인가?
아닙니다. 따로 보관해 놓은 보조키입니다.
조금 있다 돌려줄 테니까 가봐요. 수사에 필요해서
들어가보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지배인님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알았어요. 잘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벨맨이 돌아가자 노경감은 홍콩인들을 데리고 먼저 2538호실로
들어가보았다.
방 안은 아로라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가지와 잡동사니들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새로 구입한 배낭은 한쪽 구석에 딩굴고
있었다. 배낭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도자기가 보이지 않는데요.
노경감은 옷장과 욕실까지 살펴보고 나서 홍콩인들에게
말했다.
주평하와 장계명은 아로라의 옷가지들을 들쳐보고 있었다.
장계명은 그녀의 분홍색 팬티를 손가락에 걸고 두어번 돌리더니
그것을 코에 대어보고는 눈쌀을 찌푸렸다.
별난 취미도 다 있군.
주평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브래지어를 집어들었다.
그건 그야말로 초대형인데요.
코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실업가처럼 생긴 홍콩인은 그
속에 혹시 헤로인이 들어 있지 않나 해서 그것을 주물러 댔다.
가슴이 아주 큰 모양이에요.
주평하는 브래지어를 집어던졌다.
그들은 물건들을 처음 있던 그대로 놓은 다음 그 방을 나와
옆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의 시트만 흐트러져 있을 뿐 방안은 사용하지 않은 듯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수츠케이스는 탁자 옆에 놓여 있었고 트렁크는 옷장 속에 들어
있었다. 수츠케이스는 잠겨 있었다. 장계명이 철사조각을 꺼내
열쇠구멍에다 집어넣고 돌리자 수츠케이스는 찰칵하고 부드러운
금속성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안에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을 뿐 시선을 끌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서너 권의 포르노 잡지가 잠시 그들의
시선을 끌었을 뿐이었다. 수츠케이스의 바깥 쪽에는 가죽이
입혀져 있었고 그 안쪽은 단단한 플래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안과 밖을 더듬어 보았지만 가죽과 플래스틱이 밀착되어 있는
사이에서 헤로인의 감촉을 느낄 수는 없었다. 트렁크는 잠겨
있지 않았다. 주평하가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안에는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트렁크의 외벽과 내벽은 플래스틱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벽은 밤색의 빌로드 천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헤로인 2킬로그램을 감출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내벽을 뜯어 내보고 싶었지만 그것을 원상대로
만들어 놓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노경감은 가지고 온 조그마한 플래스틱 곽 속에서
피하주사기를 꺼냈다. 그것으로 트렁크 내벽을 여기저기
찔러보았다. 안에 헤로인이 들어 있다면 주사바늘 끝에
먼지만큼이라도 묻어나올 것이다. 그러나 수십 번을 찔러도 바늘
끝에 헤로인은 묻어나오지 않았다.
없어요. 여기에는.......
노경감은 주사기를 곽 속에 집어넣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거기에 대해 홍콩 수사관들은 이의를 달지 않았다.
헤로인을 가지고 온 게 틀림없다면 아로라의 배낭 속에 들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물건을 전해 주려고 나간 것 같은데...... 경감님
부하들이 실수없이 잘해낼 수 있을까요?
주평하가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이며 말했다.
노경감은 오른손을 펴보였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우리 요원들은 훈련이
잘 돼 있으니까요.
그들이 2539호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자 오갑자 순경이 마침
들어온 무전신호를 수신하고 있다가 무전기를 코보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마반장이 보내온 신호였다.
지금 서울역에 막 도착했습니다.
서울을 떠날 셈인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기차 여행을 하게 되면 인원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행선지를 알려줘. 적당한 곳에서 지원을 해줄 테니까
그러나 마반장의 그러한 보고는 빗나갔다.
서울역에 도착한 브로커 일당은 열차를 타지 않고 서부역
쪽으로 빠지는 통로로 들어서더니 그 입구벽에 설치되어 있는
물품보관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서 그들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다. 가죽점퍼가 뒤로 댓걸음 물러서고 대신 브로커가
아로라 곁에 바싹 붙어섰다. 그들 곁에서 한 중년 신사가 함
속에 짐을 넣고 있었다.
마반장의 지시를 받고 깐깐하게 생긴 최원달은 봉고차 속에서
큼직한 종이 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새로 구입한 석유난로
박스였다. 집안이 추워 아내의 부탁을 받고 이틀전에 구입한
것이었는데 일에 쫓겨 허둥대다보니 아직까지 집에 가져가지
못하고 있었다. 물품보관함에 접근하려면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럴 듯한 짐을 들고 가야 했기 때문에 그는 급한 김에
그 박스를 들고 물품보관함 쪽으로 다가갔다.
아로라는 박스 속으로 막 배낭을 밀어넣고 있었고, 브로커는
그 곁에서 잠자코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형사는
큼직한 박스를 든 채 그들 곁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아로라가 보관함 문을 닫았다. 최형사는 문 위에 붙어있는
23번이라는 숫자를 흘낏 본 다음 17번 문을 열었다. 박스를
들어서 함 속에 넣으려고 했지만 짐이 너무 커서 들어가지
않았다. 아로라를 대신해서 브로커가 구멍 속에 백 원짜리
동전을 집어넣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세번 들려왔다.
최형사는 짐을 넣을 수 없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짐을
들고 돌아섰다. 브로커는 열쇠를 돌려 문을 잠근 다음 그것을
뽑았다. 그는 여러 번 문을 잡아당겨 그것이 분명히 잠긴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돌아섰다. 열쇠는 아로라한테 가지 않고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최형사는 아로라와 브로커 사이를 통과하면서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브로커는 가죽점퍼에게 뭐라고 몇 마디 지껄인 다음 아로라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최형사는 브로커가 가죽점퍼에게 지껄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팽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찬바람을 피하려고
어깨를 웅크린 채 벽에 몸을 가리고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23번 박스에 배낭을 집어 넣었습니다. 열쇠는 아로라한테
주지 않고 브로커가 가졌습니다.
최형사가 눈에 띄지 않게 멀리 돌아와서 마반장에게 보고했다.
김만주와 조미혜는 이미 브로커가 아로라를 따라가고 있었다.
브로커와 아로라는 택시 정류장으로 가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김만주와 조미혜는 봉고차 속에 들어가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반장은 택시 속으로 들어가 무전기로 코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가죽점퍼를 감시하기 위해 최형사와 함께
서울역 광장에 잠복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놈은 보관함 속에 넣어둔 배낭을 지키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보관함이 못미더워서 지킬 정도라면 배낭에
물건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놈이 그것을 지키고 있다면 놈은 물건을 인수할 황금의
초생달이 아니야. 놈은 물건을 지키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만으로는 벅찰 것 같습니다.
알았어. 지원조를 보내주겠어.
가죽점퍼는 금방 그곳을 떠날 것 같지 않았다. 담배를 계속
피워대면서 손목시계를 연방 들여다보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 대째 불을 붙였습니다.
최형사는 가죽점퍼가 담배 피우는 것을 헤아리고 있었다. 택시
속에 장치해 놓은 무전기에서 신호음이 들려왔다. 마반장은
수신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노경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로커와 아로라가 방금 호텔에 도착했어. 지원조 두 명을
보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수신기의 스위치를 끄고 나서 10분쯤 기다리고 있자 지원조 두
명이 탄 승용차가 그들 곁을 조금 지나 멈춰섰다.머리가 벗겨진
우경식(禹京植)형사가 차에서 내려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직 마흔도 안 되었지만 머리가 벗겨진 바람에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였다. 그가 차 속으로 들어오자 최형사는 지원조가
타고온 승용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승용차 안에는
이종창(李鍾昌)형사가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린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인상이 하도 험해서 불독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경찰이 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말하면서도 1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경찰직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밤에 집에도 못들어가고 이게 무슨 짓이야.
집에서는 빨리 들어오라고 아우성인데 말이야. 이러다간 1월1일
아침도 청진동 해장국으로 때우는 거 아니야?
최형사는 선배의 불만에 잠자코 있었다. 그는 가죽점퍼가 일곱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추동림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9분 전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미스터 Y.......
황금의 초생달.......
이제 물건을 인수하러 가야 한다. 등산복 차림으로 지금 바로
H호텔로 가서 2539호실을 방문해. 거기에 제 3의 브로커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사람한테 암호를 대야 문을 열어줄
거야. 그 사람의 지시를 받도록 해.
알겠습니다. 물건을 인수한 다음에는 어떡 하죠?
그건 다음에 알려줄 테니까 우선 H호텔로 가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움직여. 물건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돼. 그 물건은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물건이야. 만일 그걸 잃게 되면 당신도 끝장이란 걸
알아야 해.
동림은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10분쯤 지나 그는 호텔을 나왔다. 시킨 대로 그는 등산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새로 사입은 파커는 안에 오리털이 있어 따뜻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밤에 아내와 함께 눈을 맞으며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
어린 아들은 얼마나 좋아할까. 나는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그는 먼 거리를 달려온 사람처럼 숨이 가빠졌다. 잠시 서서
사람들의 흐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H호텔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걸어가기로 했다. 모퉁이를
돌자 쇼윈도의 밝은 불빛에 눈이 부셨다. 잡화점 같은 가게로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거의가 값비싼
외제품들이었다. 그는 그 앞을 지나치다가 돌아섰다. 시선을
끄는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손잡이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칼이었다. 한번쯤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만큼 날카롭게
생긴 칼이었다.
그에게는 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지금까지 수집해 놓은
칼들은 모두해서 스무 개쯤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쇼윈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취미를 살리기
위해 그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처지에서 취미삼아 칼을
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맨손이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경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두 손뿐이었다. 그 두 손에
그는 자신이 없었다. 하는 일없이 배회하러 나왔다면 또 문제가
다르다. 그렇지 않고 그는 어떤 평범하지 않은 일을 위해
서울까지 올라온 것이고, 지금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밤거리에
나온 것이다. 상대가 결코 얼굴을 보여주는 법없이 전화로만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단순히 평범하지 않은 정도를
벗어나 매우 위험하고 불법적인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만나러가는 제3의 브로커도
위험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 준비도 없는 빈 손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지금 정글 속에 갇혔다고 생각했다.
적들은 정글 속에 숨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단점이 있었고 권총과
개머리판이 없는 M3 자동소총도 있었다. 총 안에는 30발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30명은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적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잠자리에서조차 무기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맨손이었다. 분명히 적이 실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칼을 보고 있는 동안 월남을 떠난 이후 소멸되었던, 아니
의식의 저 밑바닥으로 침몰되었던 짐승 같은 본능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정글 속에서 길러진 맹수의 본능이었다. 그것은 적이
나타났을 때 절망하지 않고 거기에 즉각 대응하는 짐승 특유의
본능이었다.
마침내 그는 가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던 30대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자코 쇼윈도에 놓여 있는 칼을 가리켰다.
저 칼 말인가요?
여인이 의외라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끄덕였다.
그녀가 칼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찬찬히 살펴보았다.
손잡이에 용의 무늬가 화려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손에
잡히는 느낌이 묵직하면서 안정감이 있었다. 손에 맞지 않는
무기는 실패를 부를 수가 있었다. 안정감 있게 손에 잡히는
무기는 자신감을 안겨준다. 그는 그런 것을 원했다.
용의 무늬가 있는 그 칼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접어 먼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여인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5만원이에요. 일제이기 때문에 좀 비싸요.
그는 두말하지 않고 5만 원을 내놓고 가게를 나왔다.
가게 주인은 그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동림은 H호텔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는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머리와 쌓인 눈을 털고 나서 그는 스윙 도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구석진 곳에 서서
한동안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서자 그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그는 방향을 바꾸어 구내 전화기가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방으로 일단 전화를 걸어보고 나서 올라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방향을 바꾼 것이다.
교환에게 방 번호를 일러준 다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신호가
떨어지면서 헬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목소리였다.
그가 침묵하고 있자 이번에는 여보세요. 하고 한국말로
응해왔다.
연락을 받고 지금 도착했습니다.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작고 연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황금의 초생달.......
아아, 올라오십시오.
당신의 암호는?
제3의 브로커...... 됐습니까?
올라가겠습니다.
동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형사들이 잠복하고 있는 방의 전화벨이 불이나케 울려댔다.
오갑자 순경이 전화를 받아 수화기를 노경감에게 넘겼다.
교환실에서 전화입니다.
방금 황금의 초생달한테서 브로커한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미 호텔에 도착해서 건 전화였습니다. 지금 2539호실을
방문하겠다는 전화였습니다.
그것은 교환실에서 전화를 도청한 형사의 보고였다.
경감은 문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황금의 초생달이 나타났다고 연락해.
그는 구멍을 통해 복도를 내다보면서 오순경에게 지시했다.
조금 있자 등산복 차림의 한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코보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숨을 죽였다. 방 안에 긴장이 흘렀다.
옆방의 출입문에는 홍콩 경시청의 장계명이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등산복 차림의 사나이는 머뭇거리면서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이윽고 2539호실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중키에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등산모를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 모습을 뚜렷이 알아볼
수는 없었다.
동림은 왼손을 뻗어 차임벨을 눌렀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곳까지 와서
지금 누군가를 만나려한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문이 열렸다. 그러나 문은 다 열리지 않고 안에서 철제고리에
걸려 있었다. 얼굴의 반쪽이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시죠?
그것은 한국말이었다.
황금의 초생달.......
철제고리를 벗기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동림은 어둠침침한 방 안에 시선을 던졌다. 장식장 위에 놓여
있는 스탠드의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방 안을 비치고 있었다.
그는 입구에 서서 상대방 남자를 눈여겨 쳐다보았다. 마침내
누군가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 Y는
아니다. 미스터 Y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놈은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대방 남자는 부지런히 껌을 씹어대고 있었다. 그는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키는 조금 큰 편이었고
포마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검정 털셔츠를 입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암호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림은 나직히 중얼거렸다.
아, 그렇군. 난 제3의 브로커라고 합니다.
그는 동림이 들어올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동림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브로커는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동림은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방 가운데 서있었다.
브로커는 혼자 술잔울 들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죠.
동림은 머뭇거리다가 의자에 사내와 마주보고 앉았다. 빨리
그곳을 떠나기보다는 시간을 끌면서 뭔가 알아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얌전하게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브로커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몹시 긴장하고 있는 것 같군요.
네, 일이 일이니만큼.......
동림은 더듬거렸다. 브로커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여유
있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런데 당신은 실수를 저질렀더군요.
실수라니요? 나는 연락을 받고 곧장 이리로 왔는데.......
당신은 곧장 오지 않았어요. 호텔에 도착해서 내 방으로 일단
전화를 걸고 나서 올라왔지 않아요?
네, 그렇습니다. 그게 뭐 잘못됐나요?
당신은 전화를 걸지 말고 올라왔어야 했습니다. 만일 누가
우리 전화를 도청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는 그런 점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중요한 전화는 밖에 나가
공중전화를 이용합니다. 함부로 내 방에 있는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나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도 당신처럼 부주의하게 함부로
전화를 걸어오지 않습니다.
동림은 두 손을 비비면서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브로커는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었다.
별 일은 없겠지요. 앞으로 조심하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당신을 여기로 보낸 분이 그런 주의를 하지 않던가요?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다.
브로커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글라스를 흔들었다.
얼음조각들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매우 뜻깊은 밤이군요.
시간의 흐름을 즐기는 사람처럼 브로커가 말했다. 동림에게는
상대방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새해입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11시 26분. 브로커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국말을 잘하는 편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외국인 냄새가 난다고 동림은 생각했다.
당신은 외국에서 오셨나요?
브로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동림을 쳐다보기만 했기 때문에 방 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물어본 것뿐입니다. 어쩐지
외국에서 오신 것 같아서.......
그런 질문은 금기로 되어 있는 줄 아는데요. 상대방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게 상식 아닌가요?
홍콩인이 힐난하듯 말했다. 동림은 두 손을 비볐다.
미안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물어본 것 뿐입니다. 외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한국말을 잘 하시기에.......
홍콩에서 왔다는 걸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요. 한국말을 잘
하는 것은 과거에 한동안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셨군요.
동림은 먼저 물건을 인수하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면서 브로커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브로커가 거기에 대해 말을 꺼냈다.
물건을 가지러 오셨죠?
네, 그렇습니다.
물건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동림은 의아해서 물었다. 얼음 조각들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물건은 보다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브로커는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내 그것을 탁자 위로
던졌다.
열쇠고리에는 열쇠와 함께 23 이라는 숫자가 적힌 노란
플래스틱 조각이 달려 있었다. 동림은 그것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 속에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보관되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서울역 광장입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서부역 쪽으로 빠지는
입구 왼쪽에 보면 물품보관함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바로 거기
23번 함 속에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큰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그곳으로 가서 물건을 찾아가도록 해요. 그리고
물건을 찾기 전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대로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
이 사람을 바꿔달라고 해요.
홍콩인은 메모지를 꺼내놓았다. 거기에는 전화반호와 함께
강유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 이제 할 이야기도 끝난 것 같군요. 빨리 가보시죠.
브로커가 먼저 일어섰다.
실례 많았습니다.
동림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2539호실을 나왔다.
노경감이 신호를 보내자 오갑자 순경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노경감은 아래 층에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황금의 초생달이 내려가니까 미행 할 준비를 해!
황금의 초생달은 오순경보다 댓 걸음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오갑자는 앞에 걸어가는 남자의 걸음걸이가 매우 단정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는 얼른 시선을
피하면서 내처 걸었다. 남자도 그대로 걸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네 대의
엘리베이터 중 하나의 문이 열렸다. 남자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잠자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당신이 먼저 타십시오
하는 무언의 양보였다. 갑자는 목례를 보내면서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남자가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갑자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자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신선한 바람이 가슴을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남자의 투명한 눈빛을 본 순간 느낀 감정이었다.
중년 남자의 눈빛치고는 그것은 너무도 투명한 느낌이었다. 검고
굵은 테의 안경은 지식인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쩐지 말수가 적고 조용한 느낌이 드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흉악범일수록 위장은 철저한 것이다 라는 선배들의 말을
그녀는 상기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이었다. 황금의 초생달은 또 그녀에게 양보했다. 갑자는
미소띤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황금의 초생달은 로비를 가로질러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오순경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 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조미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오갑자는 로비에 남고 세 명의 형사가 동림을 쫓아 급히
밖으로 나갔다.
호텔을 나온 동림은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 보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는 시청
쪽으로 걸어갔다. 서두르지 않고 보통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갈 생각이었다. 그 편이 더 빠르고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하철 승차권 매표구는 닫혀 있었다. 안에는 불도
꺼져 있었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지하철
운행시간이 이미 지난 것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지하도를 나와 10분 남짓 기다린 끝에 겨우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그것도 이미 남이 타고 있는 택시에 편승한 것이었다.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내려 광장에 들어서면서 그는 먼저 역사
위에 걸려 있는 대형 디지틀 시계를 쳐다보았다. 23시 54분.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선 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굵은 눈송이가 얼굴 위로 계속 떨어지는
바람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대로 멀거니 서있었다. 그의
머리 속은 아내와 아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1984년이
끝나고 1985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 나는 왜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가. 왜 무슨 이유로 나는 여기
서울역 광장에 혼자 서서 눈을 맞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당혹하고 참담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참담한 기분으로 시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기를 잃은 그녀의 심정은 나보다 몇배 더 참담할 것이다. 그는
문득 몇 달 후에 태어나기로 되어 있었던 아기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아들이었을까 아니면 딸이었을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그 아기가 태어나기를 몹시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그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앞세우고 해운대 바닷가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얼마나 즐거워 했던가. 그런데 그러한
즐거운 상상은 이제 두번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그의 아이는 그의 상상 속에 남아 비통한 추억이 되려하고
있다.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는 눈송이들이 마치 그 아이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뿌우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디지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하나로 포개지는 것이 보였다. 0시였다.
1985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공중전화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시간의 공중전화 부스는 텅비어 있었다. 그는 브로커의
말대로 메모지를 보면서 전화를 걸었다.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거기가 어딥니까?
목마 살롱인데요.
거기 혹시 강유탁이라는 사람 있습니까?
잠깐 기다려 보세요.
잠시 후 강유탁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다름 아닌 미스터
Y였다. 그는 동림의 암호를 확인하고 나서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보관함을 열어보면 배낭이 있을 거야. 그걸 당신이 투숙하고
있는 K호텔로 가져가는데 한 사람이 따라 붙을 거야. 앞으로 그
사람하고 행동을 같이 해야 해.
어, 어떤 사람인가요?
가죽점퍼를 입은 사람이야. 암호는 매독환자. 실제로 그는
매독을 앓고 있어. 당신은 절대 혼자 행동해서는 안 돼. 그리고
배낭에서 떨어져서도 안 돼. 배낭 속에는 도자기가 들어 있는데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해. 그 도자기는 반드시 그 배낭 속에 들어
있어야 해. 다른 데 옮겨담거나 해서도 안 돼. 내 지시가 없을
때는 매독환자의 지시를 받도록 해.
매독환자와 함께 같은 방에 투숙하는 겁니까?
물론 당신이 현재 투숙하고 있는 방에 함께 들어야 해.
동림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물품보관함에 물건을 보관해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당신한테 맡기는 거니까 실수없이 잘 지키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네, 알았습니다. 매독환자는 어디 있습니까?
가까이에 있을 거야.
동림은 부스에서 나와 주위를 휘둘러 보았지만 그 근방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기 때문에 광장도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서부역으로 빠지는 통로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 왼쪽 벽에 물품보관함이 늘어서 있었다. 주위를 휘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찬 바람을 타고 눈보라가
몰려들어 왔다. 그는 23번 함 앞으로 다가서서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왼쪽으로 열쇠를 돌리자 문이 찰칵하고 열렸다.
안에는 파란색의 배낭이 들어 있었다. 그는 배낭을 꺼내면서
미스터 Y가 왜 그에게 등산복 차림을 하라고 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꺼내보니 배낭은 꽤 큰것이었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라도
안이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한 손으로 힘들이지 않고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배낭을 어깨에 졌을 때 언제 나타났는지 2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검정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준비가 됐으면 K호텔로 갑시다.
가죽점퍼의 사나이가 능숙한 한국말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동림은 상대방을 경계하면서 물었다.
매독환자요.
진짜 매독환자인가요?
쓸데없는 건 묻지 말아요. 가능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떨어져서 걸어요. 내가 충분히 따라갈 수 있게 천천히 행동해요.
택시 정류장으로 가서 택시를 타는데 먼저 내빼지 말고 내가
탈때까지 기다려요.
동림은 매독환자가 시키는 대로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택시 정류장에는 서너 사람들이 웅크리고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림은 맨 뒤로 다가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매독환자는 좀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거의 20분이나 지나서야 동림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배낭을 들고 뒷좌석에 올라앉자 저만치
떨어져서 서있던 매독환자가 달려와 앞자리로 뛰어들었다.
K호텔로 갑시다.
동림이 말했다.
추천 (0) 선물 (0명)
IP: ♡.221.♡.247
23,55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2-19
0
359
3학년2반
2022-02-19
0
335
3학년2반
2022-02-18
0
378
3학년2반
2022-02-18
0
425
3학년2반
2022-02-18
0
391
3학년2반
2022-02-18
0
456
3학년2반
2022-02-18
0
770
3학년2반
2022-02-17
0
470
3학년2반
2022-02-17
0
391
3학년2반
2022-02-17
0
517
3학년2반
2022-02-17
0
361
3학년2반
2022-02-17
0
520
3학년2반
2022-02-16
0
620
3학년2반
2022-02-16
0
656
3학년2반
2022-02-16
0
659
3학년2반
2022-02-16
0
556
3학년2반
2022-02-16
0
909
3학년2반
2022-02-15
0
907
3학년2반
2022-02-15
0
696
3학년2반
2022-02-15
0
480
3학년2반
2022-02-15
0
955
3학년2반
2022-02-15
0
329
3학년2반
2022-02-14
0
348
3학년2반
2022-02-14
0
381
3학년2반
2022-02-14
0
477
3학년2반
2022-02-14
0
334
3학년2반
2022-02-14
0
378
3학년2반
2022-02-13
0
335
3학년2반
2022-02-13
0
419
3학년2반
2022-02-13
0
339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