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2-2

3학년2반 | 2022.02.05 07:37:22 댓글: 0 조회: 499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678
┌────────────────────────────┐
│ 4.파리의 방랑자 │
└────────────────────────────┘

유무화는 황표가 중고차를 한 대 사주겠다는 것을 차일피일
뒤로 미루었다. 오래 전부터 예쁜 차를 한 대 갖고 싶었지만
그것은 간절한 소망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막상
이루어 지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던 것이다.
기쁜 마음에 앞서 왠지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저절로
굴러들어온 먹이를 덥썩 깨문다는 것이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이리저리 굴려 보고 재보고 나서 먹어도 괜찮다는 판단이 섰을
때 가서 마음놓고 먹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은 황표라는 인물의 호의에 대해서 뭐라고 판단이
서지지가 않았다. 그의 호의를 가슴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기에는
그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호의받아들였다가 그가 쳐놓은 악마적인 올가미에 걸려들어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정말 큰 일 아닌가.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마적인 올가미가 무엇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호의에서는 순수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무엇에 쫓기는 듯 초조하고 불안해 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아무리
해도 순수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긴 50안팍의 사나이에게서 순수한 것을 찾으려는 생각부터가
잘못인지도 모른다.
그가 사업때문에 파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열흘 가까이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가 느낌으로 알아낸
것이었다.
사업차 파리에 왔다면 누구를 만나야 할 일도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누구한테 전화라도 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전혀
그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녀는
그가 누구를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어디다 전화를 거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모든 시간과 스케줄을 전적으로 그녀한테
맡긴 채 그녀의 뒤만 쫄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러한 그를 보고
그녀는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고, 마치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와 함께 지내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의 재력때문이었다. 그는 물쓰듯이 달러를 뿌리고
다녔고, 그녀에게 함께 지내주는 댓가로 일당 2백 달러씩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곤궁한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대단한 유혹이었다.
일당 2백 달러는 현재의 그녀에게는 아주 많은 돈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도 하루에 그만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계속 상대한다는 것이 굴욕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굴러들어오는 돈을
뿌리치기에는 형편이 너무 어려웠고 또 그 유혹에 견뎌낼만한
의지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일당 2백 달러 외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 그녀에게 이것저것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싫다고해도 막무가내로 안겨주는
바람에 그녀는 그와 함께 지낸 지난 며칠간이 마치 꿈속에서
지낸 것처럼 아리송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가 돈을 물쓰듯이 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동안 보고 싶었던
것을 볼 수 있었고 먹고 싶었던 것도 먹을 수 있었다.
돈을 물쓰듯이 하는 그를 옆에서 관찰하면서 그녀는
한편으로는 그가 그녀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헤프게 쓰는 게
아닌가 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럴 때는 그렇게 돈을
함부로 쓰지 말아달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말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툼한 수표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끊어서
사용하곤 했다. 아무리 사업가라고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달러를 가지고 있기에 저렇게 돈을 물쓰듯이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한번도
묻지는 않았다. 그의 신상에 대해 의문이 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의문은 그가 정말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일까 하는 점이었다.
3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기를 무역회사 대표라고
그녀에게 소개했었다. 그때 그가 준 명함을 그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삼진상사(三進商社)라는 회사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대표자로 박혀 있었고 전화번호도 몇개 실려
있었다. 두번때 만났을 때까지도 그녀는 명함에 실린 내용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사실 그때만 해도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파리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의 관광 안내를 맡으면서
수없이 명함이라는 것을 받아왔었는데 거기에 실린 내용이야
어떻든 오히려 그런 것에 역겨움 같은 것을 느껴왔던 터였다.
따라서 황표가 그녀에게 주었던 명함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뒤늦게 이제 와서 그 명함에 대해서 구체적인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 정말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 의문은 황표의 언행을 며칠 동안 가까이서
관찰하게 되면서 알게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는 도무지
사업가다운 데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정체불명의 인물이라는 느낌만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항상 무엇엔가 쫓기는 것 같은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 불안의 정체를 알고 싶었지만 굳이 그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와 처음 관계를 갖던 날, 그러니까 그를
세번째 만나던 날 그는 호텔 침대 위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지금 자기는 죽음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그것이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려 그것과 싸우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 말을 들은 그는 쿡쿡 웃으면서
자기는 매우 건강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쫓기고
있다고 대답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말을 받아 누구나 다
죽음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고, 그러자 그는 자기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녀는 더이상 말하는 것을
삼가했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고 있는 불안감은 현실감있게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본능적이면서도 막연한 불안감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그
불안감의 정체는 솔직히 말해 범죄자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혹시 한국에서 죄를 짓고 도피중인게 아닐까. 파리
같은 외국의 대도시에는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될 것이
두려워 도망쳐나와 방황하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일수록 거액의 외화를 지니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었다. 황표라는 인물도 그런 종류의
사람일까.
그녀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지만 왠지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에게 그런
것을 물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궁금증만
더해갔다.
그와 함께 그가 돈을 헤프게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것과
비례해서 그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녀 역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싹터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더이상 돈을 낭비하기 전에, 그와의 관계가 더이상 깊어지기
전에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도
그녀는 계속 그에게 말려드는 자신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비둘기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창문으로는 아침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겨울
날씨답지 않게 맑고 푸른 하늘을, 침대 위에 누운 채 창문을
통해 바라보다가 시트를 젖히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시트 밖으로 상체를 드러낸 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9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는 기름이 흐르고 있었고, 고뇌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밤새 괴롭히다가 잠이 든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는 갈수록 섹스에 탐닉하고 있었다. 섹스에 탐닉함으로써
불안감을 잊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행위보다는 비정상적인 행위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얻으려고
했고, 그녀는 그의 그와같은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가 첫 남자가 아니었다.
몇 남자가 그녀를 거쳐갔지만 그들과 비정상적인 섹스 행위를
가졌던 기억이 그녀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황표라는 인물은
그녀에게 전혀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비정상적인 요구에 응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를 결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는 그가 가해오는
새로운 자극과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 기막힌 쾌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자극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보고 어젯밤
그는 이런 말까지 했었다.
너는 섹스를 위해서 태어난 여자야.
사실 빈약한 몸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큰 젖가슴과 잘
발달된 탄력있는 엉덩이는 섹스를 즐기기에는 아주 훌륭한
육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극에 아주 민감한
편이었다. 손바닥을 쓰다듬기만 해도 몸을 바르르 떨 정도였다.
결렬한 환희의 밤이 지나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환멸과 자책감뿐이었다. 그녀의 몸 어느 구석에도 쾌락의 파문은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담배를 한 대 피워물고 창가로 다가선다. 커튼에 몸을
반쯤 가리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파도처럼 퍼져 있는
도시의 지붕들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에펠탑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도시의 온갖 소음과 정기를 하늘 높이 빨아올리는 것 같다.
어디에서 보아도 에펠탑은 보인다. 그녀는 에펠탑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좋아하는 것에는 거리감이 있다.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남의 나라 것이기 때문이다. 저것이 우리의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비쳐드는 햇빛에 비친 나체의 부분과 햇빛때문에 그늘이 진
부분 사이에 명암이 교차하면서 육체의 곡선이 보다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엉덩이를 한쪽으로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허리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선이 너무도 육감적인 나머지 환상적이기조차 하다.
젖가슴은 앙상한 어깨뼈와 팔에 어울리지 않게 묵직하게 밑으로
쳐져 있는 듯이 보인다. 명암이 교차하고 있는 얼굴의 옆모습은
유난히도 차가운 인상을 보이고 있다. 오른손은 허벅지께에
늘어뜨려져 있고, 그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는 담배연기는 마치
햇빛 속에 갇힌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띠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담배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굴러 떨어진다.
그녀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는 담배를 한 번 더 빨고 나서
한숨과 함께 연기를 후우하고 내뿜는다. 연기는 창문에
부딪쳤다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녀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처음 대하는
남자의 손길처럼 섬뜩하게 느껴진다. 검은 빛을 띠고 있는
젖꼭지에 갑자기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S자형 곡선이 조금 흐트러진다. 그녀는 창문을 닫는다.
뒤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한 번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나서 탁자
쪽으로 다가가 그 위에 놓여 있는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끈다. 남자는 게스츠레한 눈으로 여자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다.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시선이지만 볼 것은 다 보고 있다.
더 주무세요. 전 집에 좀 다녀오겠어요.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연분홍색 삼각팬티을 집어
들면서 그녀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집에 다녀오겠다구?
그의 두 눈이 더욱 가늘어진다. 그는 그녀의 검게 그늘이 진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집에 가서 옷도 갈아입고 우편물이 왔나 보고 오겠어요.
저녁때 만나요.
그녀는 팬티에 한쪽 다리를 끼었다.
이리 와봐.
그가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해 보였다. 마치 손가락
하나로 마음대로 조종되는 여자인 것처럼.
담배도 하나 가져다줘. 불 붙여 가지고.
이젠 완전히 반말이다. 그녀가 자기의 소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 말에 고분고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녀 자신도 느끼고 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빤 다음 그것을 들고 침대로
다가가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드러누운 채로 입을 벌려 담배를
받는다.
이리 와봐. 오늘은 유난히도 섹시해 보이는데.
그는 손을 뻗어 팬티로 가려진 부분을 쓰다듬다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버린다. 그녀는 엉덩이를 뒤로 내밀면서 그의 손을
물리친다.
푹 주무세요. 다녀오겠어요.
아침 인사도 없이 가는 법이 어딨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자 그녀는 마지못해 상체를 굽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춘다. 기회를 놓칠세라 그는 위에서 물결치는
젖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애무하다가 검푸른 젖꼭지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아이, 이젠 그만해요.
그녀는 낯을 찡그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다가 그만 그의
몸위로 무너져버린다.
정말 지독해요.
그가 팬티를 쉽게 벗길 수 있게 하체를 들어주면서 그녀는
눈을 흘겼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의 자극에
자신의 몸뚱이가 이미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남자의 얼굴을 젖가슴으로 덮었다.
나를 유혹하니까 그렇지.
언제 유혹했어요?
옷을 벗고 창가에 서있는 모습이 아주 근사했어.
남자는 밑에서 그녀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위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마치 아침운동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깐 뿐이었고, 그녀는 이내 숨가쁘게 온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은 채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편하게 즐기려는 그가 너무 밉다고 무화는 생각했다.
창가에 꾹꾹꾹 하는 소리가 났다. 얼굴을 들어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아 있었다. 놈은 꾹꾹꾹 하면서 부리로
창문을 쪼아대고 있었다.
어머나 저기 보세요.
무화는 움직임을 멈추고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뭐야?
누가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 말에 황표는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비둘기가 보고 있어요.
그녀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그는 성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도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창백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온하던 그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뛰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몹시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위에서 하체를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끝나신 거예요? 하다가 그만두는 법이 어딨어요.
하고 말했다.
저리 가. 무거워.
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녀를 밀어냈다.
그녀는 옆으로 내려와 앉으면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이마는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땀까지 흘리시네요.
그녀는 욕실로 가서 타월에 물을 적셔가지고 왔다.
타월로 이마에 번진 땀을 닦아주자 황표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돌린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어요?
아니야.
고개를 힘없이 젓는다. 무화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뭘 말이야?
그는 그녀를 힐끗 올려다보고 나서 이마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팔때문에 얼굴이 가려서 남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무화는 물어볼까 망설이다가 내친 김에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마음을 정한다.
선생님은 파리에 도착하셨을 때부터 무엇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였어요.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 것 같았어요. 제가 그때 그
점을 지적했더니 선생님은 죽음의 공포에 쫓기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선생님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면 무슨 뜻인가요?
황표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냥 해본 말이었어.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화는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손에 힘을 가했다.
아니예요. 그냥 해본 말씀이 아니었어요. 조금 전에 놀라신
것만 보아도 선생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게 분명해요.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 말이에요.
그 말에 남자는 기묘한 소리로 웃었다.
흐흐흐...... 생각하는 건 자유니까 맘대로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거기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마. 내 문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마.
웃음소리가 가라앉으면서 목소리에 엄숙한 감정이 밴다.
무화는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침대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결심한 듯 다시 묻는다.
한 가지만 묻겠어요. 괜찮겠어요?
그래. 한 가지만 물어봐.
선생님은 도피중이신가요?
그는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굴에서 팔을 치우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마에 팔을 내리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보이나? 내가 그렇게 보여?
네 그렇게 보여요.
잘못 봤어. 난 그렇지 않아.
정말이세요?
정말이야.
그녀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연분홍색
팬티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녀가 옷을 입는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머플러를 목에 두른 다음 숄더백을
집어들었다.
다녀오겠어요.
빨리 와. 될수록 빨리 와.
그가 비로소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해 보인 다음 잠자코 밖으로 나갔다.
호텔 에트왈을 나온 무화는 바사노 거리를 빠져나와 샹젤리제
거리로 들어섰다.
아침인데도 오랫만에 비치는 햇살을 즐기려는 듯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카페 앞 보도 위에는
어느 새 탁자와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렇게 꾸며진
노천 카페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포근히 내려쬐는 햇살을 즐기고
있었고,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거리를 흘러가는 차량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동양인, 아무래도 일본인으로 보이는 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 거의는 미국인들 같았다. 달러가 갑자기 강세를
보이는 바람에 미국인 관광객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콩코르드 광장 쪽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찬 공기를
마시면서 걸어가자 코끝이 몹시 시려왔다. 그녀는 털장갑을 낀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눈에 띄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노천카페에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한 다음
그녀는 건너편 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맞은편에 전화국 간판이
눈에 띄었다.
웨이터가 커피를 가지고 와서 그녀 옆에 섰다. 그녀가
탁자위에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커피잔을
내려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웨이터가 마드모아젤
...... 하고 불렀을 때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탁자에서 팔을
내렸다.
커피는 몹시 진했다. 그녀는 조금씩 커피 맛을 음미하면서
다시 길 건너편에 보이는 전화국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굳었던 몸이 완전히 풀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갔다.
전화국 안은 한산했다. 그녀는 카운터 옆으로 다가서다가
주춤하고 돌아섰다. 전화번호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면서
국제전화를 걸려고 전화국에 들어오다니. 그녀는 나사가 풀린 것
같은 자신의 행동에 쓴 웃음이 나왔다.
전화국을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셍 제르멩 데 프레
거리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그 거리의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낡아빠진 집의 다락방을 빌어쓰고 있었는데 그 방은 일년
내내 햇볕이 들지 않아 언제나 우중충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그 방을 싫어했다. 그러나 방값이 싸기 때문에 그대로
눌러 앉아 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만한 거리에서 그만한 방을
빌어 쓰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쪽에 속한다. 그 거리에서 방을
구하기란 몹시 힘들기 때문이다.
초인종을 누르자 주인 노파가 문을 열어준다. 노파는
노리끼리한 눈으로 무화를 노려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회색빛이다. 그녀는 결코 웃는 법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노려보듯이 하면서 사람을 쳐다본다. 그녀는 러시아 태생인데
파리에 와서 산 지는 30년이 넘었다고 했다.
전화기는 아래층 거실에 놓여 있는데 노파의 감시가 심해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잘 바꿔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어디다 전화를 걸 경우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통화요금을 지불해야만 한다. 국제전화는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어 있다.
노파의 집에는 방이 아홉 개 있는데 그녀는 여덟 개의 방을
학생들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그 집에 세들어 사는 학생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무화의 방은 다락방이었기 때문에 층수로 따지면 3층에 있는
셈이었다. 계단은 좁고 가파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간 다음 거기서
일단 숨을 몰아쉬고 나서 더욱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워낙
오래 된 집이라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방문을 열면 거의 언제나처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책상 앞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오유린은 코트를 뒤집어쓴 채 책상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책상 위 스탠드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전등 밑에는 책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보아도 똑같은 모습이다.
유린은 인기척이 나도 얼른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공부를
방해하는 침입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두꺼운 안경 너머로 침입자를 노려본다. 그녀는
노크 소리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방 안에 들어갈 때는
소리없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길쭉한 얼굴은 앙상하다 못해 해골 같다. 숱이 적은 긴
머리카락이 그 얼굴을 감싸고 있지 않다면 정말 해골처럼 보일
것이다. 쌍꺼풀진 두 눈은 동그랗고, 그 눈을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이 보호하고 있다. 안경 테는 가늘고 검다. 눈빛은 언제
보아도 차갑다. 앞으로 꺾어져 있는 길고 가는 목이 머리카락
사이로 유난히 희어 보인다. 다락방인데도 방 안이 어둡기
때문에 책을 볼려면 불을 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처음
보는 듯 안으로 들어서는 무화를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보기만해도 역겨운 얼굴이라고 무화는 생각한다.
요즘 재미가 좋은가봐. 외박을 다하고 말이야.
유린이 책에다 눈을 박은 채 불어로 빈정거린다. 그녀는 같은
한국 사람을 상대할 때에도 상대방이 불어를 알아듣는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불어만 사용한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프랑스인이 되어야 하고 그 나라 말을 철두철미 익혀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무화는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피부병이 있는 사람과 함께
살을 비비며 자는 것만큼 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은 2년 전에 함께 생활하기로 하고 그 방을 얻었던
것이다.
아침 먹었어?
무화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국말로 묻는다. 그녀는 유린이
불어로 말하면 거기에 대한 반발로 한국말로 응수한다.
어디서 잤어?
무화의 묻는 말은 묵살한 채 따지 듯 묻는다.
열차에서 잤어.
무화는 담배를 꺼내문다. 라이터불을 붙이기도 전에 창문이
열린다. 유린은 그녀가 담배를 피우려고 하면 창문부터 연다.
담배 연기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무화는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어디를 다녀왔는데......?
칸느......
그 말에 어깨를 들썩한다.
그 사람 아직도 가지 않았어?
언제 갈지 몰라.
잘 하다가는 일년 먹을 것 벌겠는데.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황표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대강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아직
소개시켜 주지는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무화
자신도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혹시 몸도 마음도 주는 것 아니야?
상대방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린다. 그것도
돌아앉은 채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이다. 무엇이 저 여자의
콧대를 저렇게 높여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무화는 그녀의
뒤통수를 쏘아본다.
주게되면 주는 거지 뭐.
그러다가 콜걸이 돼서 돌아가는 거 아니야?
차라리 콜걸이나 되고 싶어.
흥, 타락했군.
타락이 뭔지 배우고 싶어. 지금까지는 너무 고고한 것만
배웠거든.
배울 것도 많군.
남이야 뭘하든 상관하지 마. 제발......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발딱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주방이라야 빈약하기 짝이 없다. 취사 도구 몇 가지와
조그마한 냉장고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방과 주방의
경계도 없다. 무화는 둥근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접시에서 빵을
하나 집어들었다. 껍질이 두껍고 딱딱한 빵이었다. 그것을
반으로 자른 다음 거기에다 잼과 버터를 발랐다.
커피 끓여줄까?
유린이 어느 새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묻는다. 남의 화를 잔뜩 올려놓고 나서 나중에 언제
그랬냐는 듯 어루만지는 것이 그녀의 수법이다. 무화는 더욱
화가 나서 빵을 꽉꽉 씹는다.
화 났어?
커피나 끓여.
딱딱하던 빵이 입 속에서 가루가 되면서 비로소 고소한 맛이
느껴진다.
그 빵은 파리에 오던 날부터 씹던 빵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씹으면서 눈물깨나 흘렸었다.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이
건조하고 삭막하던 그 느낌에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6년동안 씹어보니 이제는 그 맛에 길들여져 있었고
아침 식탁에서 그것을 천천히 씹으며 하루 일과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유린이 커피 두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커피
끓이는 솜씨는 탁월하다. 물을 펄펄 끓이지 않고 적당히 물이
데워졌을 때 커피를 탄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는다. 책에다 눈을 박은 채 커피를 마신다.
무화도 되도록 상대방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커피를
입속에 넣는다.
그들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함께 살고 있는 이유는 단지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상대방에게 정이 떨어진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함께 붙어서 살고 있었다.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마치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그런 생활이 2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오유린은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녀가 파리에 온 것은 무화보다 2년
늦은 4년전이었다. 나이는 무화와 같은 동갑나기였다. 그들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대학은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거의 서로 만나지
못하고 지내왔는데,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수년 후
파리에서였다. 그 전에 유린은 이미 파리에 와있는 무화에게
한국에서 편지를 보냈었다. 파리에 유학하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무화는 유린이
입학하고자 하는 대학의 입학원서를 구해서 보내주었고, 파리에
유학올 경우에 부딪치게 될 여러 가지 애로사항과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도 자세히 적어 보내주었다.
처음 2년 동안 유린은 함께 유학온 약혼자와 함께 방을 얻어
동거 생활을 했었다. 무화에게는 그들 커플의 생활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부러웠었다. 유린의 약혼자는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호화판으로 유학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유린의 약혼자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뿐이지
공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건달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파리의 유학생 사회에 염문을 뿌리기 시작했고 유학생들 사이에
공부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바람둥이 부잣집
아들로 통하게 되었다. 재빨리 파리 지리를 익힌 그는 빨간
스포츠카를 하나 구입해서 주로 아가씨를 태우고 다니는데
그것을 사용했다.
그 건달이 엽색행각을 벌이는 동안 유린은 철저히 버림받은
입장에서 혼자 방을 지켰다. 약혼 관계도 이미 깨진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녀는 그 건달이 언젠가는 자기 곁으로 돌아와 줄
것이라 믿고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보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고 하루하루가 고뇌의 연속일 뿐이었다.
건달은 무화에게도 손을 뻗었었다. 무화야말로 그의 첫번째
표적이었던 셈이었다. 무화는 별로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채
그에게 당했고, 그리고 버림받았다. 그 사실은 그들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지만 무화는 죄책감과 함께 유린이 그 사실을
알게될까봐 몹시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유린은 두사람 사이에
그런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건달은 파리 시내만 돌아다니는 것이 갑갑했던지 대담하게도
스포츠카를 몰고 국경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상에서 트레일러와
정면 충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옆
자리에는 한국 아가씨가 타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건달의 죽음이 유린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상체받은 몸 그대로 귀국한다는
것은 더욱 처참한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학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무화였다. 의지할 데가 필요했던 유린은 건달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를 비워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거기서
나오고 싶어했기 때문에 무화는 그녀와 합류하기로 하고
셍제르멩 데 프레 거리에 있는 지금의 다락방을 함께 얻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부터 유린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
같았고, 그러한 그녀에 대해 무화는 죄책감과 함께 측은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얼마 동안은 그녀의 존재에
대해 별로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존재가 차츰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린은 자폐증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깥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은 채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고, 오로지
책에만 파묻혀 지냈다.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문밖 출입을
삼가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폐쇄성은 공부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다락방 속에 틀어박혀
있다보니 무엇엔가 집념을 쏟을 거리가 필요했고, 그래서 택한
것이 책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렇지
못한 무화가 볼 때 부럽거나 대견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자신의 피를 말려 죽이려드는 자폐증 환자로 보였다.
그녀는 적을 두고 있던 파리대학에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학위논문을 제출했다가 통과되지 못한 그녀는 더욱 폐쇄적인
생활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때까지 파고들었던 알베르 카뮈를
그만두고 갑자기 앙드레 말로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말로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학위논문 준비를 다시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 것 같은 그런
태도였다.
그녀는 어느 날 문득 무화에게 자기는 소설을 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도 불어로 써서 프랑스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만일 소설을 쓴다면 특이한 것을 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무화도 인정하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다락방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말라갔고, 그 생활이
2년이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팔다리는 너무 말라 흡사 마른 나무가지 같았고, 노파처럼
어깨까지 꾸부정해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노파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책상 위에 꾸부정하게 앉아 있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에서 노파 같은 모습을 보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음습한 날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면 마치 책상 앞에 귀신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서 섬뜩한 기분을 느끼는 때도 있었다.
한밤중 문득 잠에서 깨어나 그때까지 책상 위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혹시 저대로 앉아서 말라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방안은 불기 하나 없이 추웠다. 스팀 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아 있으나 마나였다. 춥기 때문에 그들은
코트를 그대로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멋져?
책에 눈을 박은 채 유린이 묻는다.
무화는 빈 커피잔을 손에 든 채 고개를 젓는다.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키스해 보지 않았어?
아아니......
커피잔을 내려놓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인다.
믿어지지 않는데.
안경 너머로 무화를 힐끗 쳐다본 다음 다시 책 위로 눈을
박는다.
무화는 그녀 쪽으로 담배 연기를 확 내뿜는다. 유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어 연기를 쫓는다.
그렇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데 아직까지 키스를 하지
않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유린은 조소하는 눈길로 무화의 왼손을 바라본다. 무화는
왼손에 담배를 끼고 있었다. 그녀의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게는 모두 새 것인데다 값나가는
것들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선물로 받은 것들임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무화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붉어진다. 그녀는 담배를 비벼끄고
유린을 쏘아본다.
선물 같은 거 받은 적 없어! 이걸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이것들은 내 돈 주고 산 거야!
아, 그래. 갑자기 돈이 생긴 모양이지. 그렇다면 내 빚부터
갚아야 하지 않아?
여전히 조롱하는 것 같은 말투다.
무화는 발딱 일어나 책상 위에 놓아둔 숄더백을 집어들더니
탁자로 돌아와 그것을 열어젖힌 다음 그 안에서 달러뭉치를
꺼낸다.
그것을 보는 유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화는 3백 달러를
그녀 앞에 밀어놓는다.
그 동안 잘 썼어.
웬 돈이 그렇게 많지? 도대체 하루 얼마씩 받는 거야?
말하고 싶지 않아.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무화는 백을 닫고 나서 정색을 하고 유린을 쳐다본다.
더이상 나를 모욕하는 말 하지마. 또 그러면 때려줄 거야.
유린은 어깨를 으쓱한다.
난 네가 타락할까봐 그러는 거야. 도대체 넌 공부도 하지
않고 뭐하는 거니? 파리까지 와서 뭐하고 있는 거야? 관광안내나
해주고, 자존심 구겨가면서 용돈이나 받아쓰고 남 보지 않는데서
뭘하는지 누가 알어. 널 볼 때마다 난 수치스러워. 뭐 칸느에
다녀왔다고? 거짓말치고 아주 그럴듯 해. 네가 늙은 남자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어젯밤 본 사람이 있어. 나한테
전화가 걸려왔단 말이야. 너 같은 콜걸하고 함께 있다는 게
수치스러워. 네가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뺨에서 철썩하며 소리가
났다.
썅년!
무화는 발딱 일어났다. 유린은 얻어맞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는데 그 표정에는 여전히
노골적으로 조소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흥, 드디어 발작 개시군. 나를 때려? 어디 다시 한 번
때려보시지.
그러면서 그녀는 맞지 않은 쪽 뺨을 내밀었다.
못 때릴 줄 알아?!
무화는 그녀의 양쪽 뺨을 거푸 철썩철썩 갈겼다. 연달아 두
대를 얻어맞은 유린의 얼굴빛이 드디어 굳어졌다. 그녀는 굴러
떨어진 안경을 집어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하고 헤어지려던 참이었어! 더이상 네꼴 볼
수가 없어! 이 방에서는 귀신이 나올 것 같아! 혼자 잘 해봐!
나하고 함께 있는 게 수치스럽다고?!
무화는 유린을 노려보다가 홱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유린은
겁먹은 눈으로 쳐다본다.
무화는 가방에다 필요한 옷가지만 대강 담았다. 나머지
물건들은 나중에 와서 가져갈 생각이었다. 책상 서랍을 열고
명함 뭉치를 풀어내 그 중에서 황표의 명함을 찾아냈다.
그 말 취소할께. 잘못했어.
어느 새 유린이 뒤로 다가와 겁먹은 표정으로 말한다. 무화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잘못했단 말이야. 가지 마.
유린의 목소리가 울먹이는 소리로 변해 있다. 무화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그녀는 계단을 내려갔다.
가지 말란 말이야!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유린이 울음 섞인 소리로 불렀지만 무화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노파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한국 아가씨들을 쳐다보았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찬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무화는 느꼈다.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마치 어두운 방 속에 오랫동안
갖혀 있다가 풀려나온 느낌이었다.
그녀는 택시를 타고 샹젤리제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볼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슬픔 감정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유린의 말대로 정말 콜걸일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녀는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 나는 절대로 콜걸이 아니야.
마드모아젤, 왜 울고 있죠? 멋진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어때요? 커피는 내가 살께요.
건널목 앞에서 택시가 섰을 때 젊은 운전사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전형적인 파리의 건달같은 청년이었다.
무화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운전사는 계속 뭐라고 지껄여댔지만 그녀는 샹젤리제 거리에
닿을 때까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샹젤리제 거리에서 택시를 내린 그녀는 아침에 보아
두었던 전화국을 찾아갔다.
전화국 안은 아침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로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신청한지 15분쯤 지나 여직원이 서울이 나왔다고 하면서 9번
부스를 가리켰다. 무화는 얼른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그녀는 약간 흥분해서 상대방을 불렀다.
네, 말씀하십시오.
남자의 긴장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거기 서울 삼진상사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황사장님 계신가요?
왜 그러시죠?
저기 뭣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뭘 알아볼려고 그럽니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저기 황표라는 분이 그 회사 사장님인가요?
상대방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지더니 황표씨 말인가요? 하고 되묻는다.
네, 황표씨 말입니다.
거기 어딥니까?
다급하게 물어온다.
무화는 뭐라고 대답할지를 몰라 머뭇거리는데 상대방이 다시
물어왔다.
전화 거시는 분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전화 걸겠습니다.
무화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아 잠깐! 이 전화 파리에서 걸고 있는 겁니까?
아마 파리 전화국의 교환원이 신호가 떨어질 때 파리라고
일러준 것 같았다.
네, 그래요.
그 자는 삼진상사 대표가 아닙니다.
목소리가 갑자기 살벌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뭔가요?
그자는......
상대방은 말 끝을 흐리면서 머뭇거리다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자를 만나 게 언제였습니까? 마지막으로 그자를 만난게
언제였나요? 그리고 어디서 만났어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전화 끊겠어요.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그자를 찾고
있습니다. 찾는데 협조해 주시면 만족할 만한 돈을
드리겠습니다. 협조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상대방은 천박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무화는 반사적으로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왜 그 사람을 찾고 있죠?
그 자는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도주했습니다. 아주 거액을
해먹고 도망쳤기 때문에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럼 경찰에서도 찾고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협조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협조해 주신다면
원하는 대로 돈을 드리겠습니다. 그자는 지금 파리에 있나요?
무화는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상대방은 계속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그녀를 불러댔다.
무화는 숨을 죽인 채 있다가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국을 나서면서 그녀는 괜한 것을 알아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만났을 때가 훨씬 부담감이 적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문제가 달라졌다. 계속 모른 체하고 그를
만나야 할 것인가.
무화는 전화국 앞에서 한동안 망설이며 서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얼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애트왈 호텔이 있는
바사노 거리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정말 공금을 횡령하고 도망중인 사람일까? 거액을
횡령했다는데 과연 얼마를 횡령했을까? 그가 정말 그런 짓을
자행한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그한테서 받은 돈도 그 횡령한
돈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이건 꽤 심각한 문제인걸.
그녀는 길을 건너 아침에 들렀던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그
카페 앞 보도에 줄지어 내다놓은 탁자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점령되어 있었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하게 내려쬐는 햇볕을
즐기며 그들은 끝없는 대화의 흐름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카페의 이름은 마농 이었다. 무화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실내는 마치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한곳에서 부딪쳐 흩어지는 것 같은 상쾌한
소리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창가에 앉고 싶었으나 거기에는
빈 자리가 없었다. 그녀는 맨 안쪽의 비어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황표의 행동거지나 말하는 것, 그리고 돈 씀씀이로 보아 조금
전에 통화했던 남자의 말대로 거금을 횡령했을 가능성은 많았다.
그가 죽음의 공포 운운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거금을
횡령했으나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자살을 생각하면서 파리의 한 호텔 방에 누워 있는
사나이!
갑자기 황표라는 사나이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무화는
생맥주를 쭉 들이켰다. 경찰에 쫓기고 있는 도망자와 놀아나다니
나도 참 한심한 년이구나. 이제 어떡 하지?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물쭈물할 것 없다. 지금 그에게 가서 더이상 가이드를
해줄 수 없다고 말하고 돌아나오면 되는 거다. 그 다음에 어디로
가지? 귀신이 앉아 있는 다락방에는 정말 가기 싫다. 그녀는
담배를 비벼끄고 남은 생맥주를 깨끗이 비웠다. 아직 마음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하여간 그대로 죽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카페를 나와 개선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전동차가 철도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굉음이
되어 울려왔다. 그 굉음이 사라지자 이어서 무수한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들려왔다.
그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가 마치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오랜 연륜으로 볼품없이 때에 절어 있는 지하철역의 벽에
기대서서 오가는 전동차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는
마침내 아무 것이나 집어탔다. 그리고 세 구역을 지나서 내렸다.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문득 배가 고팠다. 그녀는 모퉁이에 있는
스낵코너에 들어가 진열장 안에 있는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샌드위치 한 조각과 쥬스잔을 들고 카운터 앞에 선 채로 먹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매우 간편하고 자유스러운
식사방법이었다. 그녀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더 시켜서 먹어치운
다음 밖으로 나왔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발길은 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강가에 닿았다.
세느강의 탁류 위로 유난히도 맑은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아름다운 다리 아래로 관광객을 가득 태운
유람선이 막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강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시테섬 저쪽으도 다른 유람선 한 척이 막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강물 위에 다리 그림자가 선명하다 배가 지나가자 다리
그림자가 출렁거린다. 강 양켠으로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는 다리 밑 보도는 마치 장엄한 화랑의 내부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걷는 그 자체를
즐기는 듯 느릿느릿 오가고 있다. 강 건너 계단에는 젊은 연인
한쌍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며 앉아 있다. 저 켠 철교 위로
전동차가 요란스러운 금속성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있다. 탁류
쪽으로 불어오는 퀴퀴한 냄새를 마치 맑은 아침 공기처럼 깊이
들여마셔본다. 금속성 소리가 유난히도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양철과 슬레이트 지붕들 위로 불쑥 솟아 있는 에펠탑을
잠시 바라본다. 오늘 벌써 몇번째 그것을 본지 모른다.
나무 타는 냄새에 그녀는 고개를 돌린다. 청소부 복장을 한
늙은 남자가 강가에서 나뭇잎을 태우고 있다. 그녀는 다리
옆으로 나있는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황표가 지금쯤 자살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계단 위에 서서, 시트에
덮여 방에서 실려나오고 있는 황표의 시체를 생각하고는
현기증을 느꼈다
나뭇잎을 태우던 청소부는 가버리고 없었다. 나뭇잎은 한줌의
재로 변해 이제는 가는 연기만을 피우고 있었다. 무화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재를 헤집었다. 따뜻한
온기가 그녀가 앉아 있는 쪽으로 전해져 왔다. 그녀는 두 손을
불에 쬐면서 마주 비벼댔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기다림에 응해야 할 의무는
나에게 없다. 그런데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상한 일이다.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 아무래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지가 않는다. 왜 그럴까. 한 가련한 사나이를 버려둔다는
것이 그렇게도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일까.
그녀는 거액의 돈을 횡령하고 도망중인 사나이가 어쩐지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가 야비하다거나 도둑놈 같이 생각되지가
않고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국제전화를 통해 그가
거금을 횡령하고 도망중인 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와 함께
잘못하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관광객을 가득 태운 유람선이 엔진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지나갔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키스를 보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상관할 필요없지 않을까. 나는 단지
가이드일 뿐이다. 그를 안내해 주고 안내료만 받으면 되지
않을까. 그의 속사정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은 횡령한 돈이겠지만 그것이 나에게
건너오면 아주 귀중한 생활비가 된다. 나에게 일단 들어온 돈은
더러운 돈이 아니다. 그는 나를 필요로 하고 있고 나는 돈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타산적으로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타산적으로 되지만은 않는데 문제가 있다.
그녀는 다리 밑을 지나갔다. 머리를 길게 기른 집시 거지가
성기를 꺼내놓고 오줌을 누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는 웃으며
그것을 보라는 듯 흔들었다. 그것은 마치 큼직한 소세지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리 밑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자 공중전화 부스가 두 대
나란히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트왈 호텔 전화 교환원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소리 같았다. 그녀는 512호실을
부탁했다.
한참 신호가 가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교환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무화는 걱정이 되었다.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
방안에 죽어 있는 게 아닐까. 제기랄, 내가 알게 뭐람!
그녀는 다리 위로 올라와 다리를 건너갔다. 시테섬을
바라보면서 곧장 걸음을 옮겼다.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이 밝은
햇빛 속에 떨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의
하나이자 프랑스 예술의 극치로 알려져 있는 건축물이다. 한국의
심산 유곡에 자리잡고 있는 절들과 비교할 때마다 그녀는 혼란을
느낀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꾸만 비교가 된다. 분명한 것은 노트르담 성당은 성당이기에
앞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세느강을
사이에 두고 시테섬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광장으로 들어선다.
셍미셸 광장이다. 그곳 일대에는 명물이 많다. 술집만 해도 수백
년이나 된 것들이 여러 군데 있다. 술집마다 관광객들로 빈
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녀는 지하 술집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중세때 감옥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술집으로 개조되어 흘러간 옛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꾸불꾸불 내려가자 사람들이 토해내는
온갖 소리들이 음악소리와 뒤엉켜 귀를 멍멍하게 했다. 누렇게
퇴색된 회벽과 거칠게 깎아 만든 까맣게 때에 절은 통나무
탁자와 의자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웃는 얼굴들,
그런 것들을 시야에서 밀어내면서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가
카운터 앞에 걸터 앉았다. 그녀의 옆에는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붉은 포도주를 한 잔 청했다. 콧수염을 기른 바텐더는
돼지 같은 턱살을 꿀룩이면서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포도주는 첫키스처럼 달콤했다. 한 잔을 금방 마셔버리고 나서
그녀는 또 한 잔을 청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금발 머리 남자의 허벅지가 그녀의
허벅지에 가만히 와닿았다. 그녀는 두 잔째의 포도주를 반쯤
비우고나서 바텐더에게 전화기를 좀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바텐더는 선선히 전화기를 그녀 앞에 갖다놓았다.
그녀는 에트왈 호텔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512호실에선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녀는 프런트로 전화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곧 프런트맨이 나왔다. 그녀는 512호실 손님이 방안에
있는 지 없는 지 알아봐 달라고 말했다.
512호실 손님은 외출하고 없습니다.
열쇠가 분명히 거기 있나요?
네, 열쇠를 맡겨놓고 나갔습니다.
그녀는 맥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금발 머리 남자의 허벅지는 이제 그녀의 허벅지에 밀착되어
있었다. 허벅지의 근육이 안타깝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금발 머리는 회색 털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를 말아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쇠 같은 팔뚝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구리빛으로 그을은 팔뚝에는 해골을 본뜬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무화는 옆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보기가 겁이 났다.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있는 두 손은 마디가 굵고 억세보였다. 그것은
펜대를 쥐는 손이 아닌, 힘든 육체 노동을 견뎌내고 있는
손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금발이 입고
있는 색바랜 청바지의 허벅지께가 찢어질듯 팽팽했다.
혼자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이 그 역시 혼자인 듯했다. 무화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옆사내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흡사 짐승처럼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덮여
있었다. 수염 역시 금빛이었고 꿈꾸는 듯 아래로 향하고 있는 긴
속눈썹도 같은 색깔이었다. 하도 몸집이 커서 그녀의 앉은 키는
그의 어깨에도 못미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존재가 압박하듯 다가왔다. 그녀는 그만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인가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대로 죽치고 앉아 있었다.
저쪽에 가서 한 잔 하지 않겠소?
갑자기 금발이 고개를 돌려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몸집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작게 들려왔다. 마치 멀리서 속삭이는 것같이.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는 갈쿠리 같은 손으로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는 구석진 자리를 가리켰다.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남녀가 막 자리를 뜨고 있었다.
남의 눈을 의식한다든가 하는 따위는 있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자기 감정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만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자신의 팔을 움켜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서 엄청난 힘에 끌려가고
싶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외국인치고는 보기드문 추남이었다. 정면 보다는 옆모습이 훨씬
좋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너무 못생겼기 때문인지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테이블에 옮겨 앉을 때까지 그는 그녀의 팔을 놓지
않았다.
선원이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무화는 금발의 가슴에 손을 댈듯이 하면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금발이 서툰 불어로 물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마치
석양의 놀처럼 붉게 타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눈을 내려뜨면
속눈썹이 길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금방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이걸 보고 알았어요.
그녀는 금발의 가슴에 달라붙어 있는 고기 비늘을 떼어냈다.
그것을 탁자 위에 떨어뜨리자 금발은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잘 보았어요. 난 선원이요. 프랑스 사람은 아니고 노르웨이
출신이지요.
그런데 불어를 잘 하시던데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어릴 때 프랑스에서 한 동안 살았거든.
그랬군요.
그녀는 이제 그가 그녀의 국적을 물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물어오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고 마치 무슨 물건을
들여다보듯 한동안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쁘군. 인형 같아. 서양 여자들은 너무 커.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벽 쪽에 붙어 있었고, 그 테이블은
통로 쪽에 서있는 기둥이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는
다른 곳보다는 은밀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무섭나?
아뇨.
그녀는 생글생글 웃었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그 쪽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에 그녀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상체는 완전히 남자의 품 속에 들어 있었다. 그는
병아리를 품듯이 그녀를 품고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녀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편안한 느낌을 가져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은 바위 같았고,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대지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 같았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더듬는 듯하다가 차츰 뜨겁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얼한 기분과
함께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겨우 입술을 빼내
한숨 돌리고 나서 키스를 받아들이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인간의 냄새라고는 할
수 없는, 차라리 짐승의 냄새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그런 냄새를 풍기며 여자를 안는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무례하게 나왔던 것이고, 그녀는
그에게서 예의 같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의 무례함에서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고, 거기에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몸을 함부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욕정에 속이
상했다.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이러지 말아요. 누가 봐요. 우리 술이나 마셔요.
너를 보는 순간 강간하고 싶었어.
그는 그녀의 귓가에다 입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그의
한쪽 가슴은 그의 큼직한 손아귀 속에 들어 있었다.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그것을 만져대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죽인 적이 있지.
어떻게요?
그는 어깨를 감싸고 있던 그녀의 가늘고 긴 목을 쥐었다.
그녀의 목은 그의 억센 손아귀 속에 들어가 있었다. 흥분과
공포가 교차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필리핀에 갔을 때였어. 어린 창녀를 하나 샀는데 돈을 많이
주고 샀어. 숫처녀였기 때문에 그런 거야. 내가 옷을 벗자 그
창녀는 내 그것을 보고 무서워서 벌벌 떨기 시작했어. 나는 그때
많이 취해 있었어. 오랜 동안 여자에 굶어 있었고, 본전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 동안 밀린 것까지 합쳐서
말이야. 그 어린 창녀는 그러니까 나한테 잘못 걸린 거야. 나는
마치 결투를 하는 기분으로 그애한테 달려들었지. 그애가
저항할수록 나는 흥분했어.
그는 무화의 손을 잡더니 자기 바지의 가장 중심의 되는 부분
위에 그것을 올려 놓았다. 그 부분은 안타깝게 위로 불록하게
솟아 있었다. 무화는 그 부분을 손으로 가만히 덮어 눌렀다.
그 애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한손으로 목을 누르고 옷을 찢었어.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밀어붙였어. 해머를 내려찍는 기분으로 말이야. 그건 완전히
강간이었지. 나는 그렇게 흥분해 보기는 처음이었어. 그런데
정신없이 하다가보니 창녀가 죽어 있었어. 너무 충격을 받았던가
아니면 질식했겠지. 그러나 나는 멈출 수가 없었어. 그대로 계속
했지. 창녀는 이미 죽어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 말을 듣고도 그녀는 그가 추해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 다음 어떻게 됐어요?
도망쳤어. 그리고 끝난 거야. 그런데 그 다음부터 내 자신이
싫어졌어. 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게 싫어졌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배타는 것도 지긋지긋해졌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졌어. 빌어먹을.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는 갈증이 나는지 생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문득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그 대신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가만 생각하니까 그 창녀 때문이었어. 그 창녀가 자꾸만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고 있어. 꿈에 나타나는데도 실제로 나타나는
것 같아. 나는 귀신 같은 거 믿지 않지만 그 어린애가
무서워졌어.
그의 짐승 같은 얼굴에 땀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나는 돈이 없어. 배를 타지 않은 지 1년이 넘어. 더이상 배는
못타겠어. 죽기보다 싫어. 가지고 있는 돈도 다 써버렸어. 배가
타기 싫어 여기에 그대로 주저앉았어. 나는 지명수배를 받고
있어.
불록하게 솟아 있던 중심부분은 어느 새 꺼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손을 치우지 않았다.
그녀를 죽였기 때문이야. 국제 경찰이 나를 쫓고 있어. 나를
고발해도 괜찮아. 누가 고발해 주기를 오히려 난 바라고
있으니까. 나를 고발해 주지 않겠어?
그런 짓은 싫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져. 돈이 없어서 그래. 그 대신 당신 몸을 한 번 사랑
할 수 있게 해줘.
그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뽑아 그녀 앞에 놓았다.
무화는 그것을 집어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백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윗부분에 해골 모양이 붙어
있는 특이한 반지였다. 그리고 닳고 닳은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
된 것인 듯했다.
옛날 해적이 끼던 반지래. 우리 조상은 해적이었지. 그때부터
집안에 물려오던 반지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나한테
물려준 거야.
그러니까 가보이군요.
글쎄, 그런 건 모르겠어. 팔아도 얼마 받지 못할 거야.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그거라도 받아 둬.
무화는 그것을 손가락에 끼어보았다. 다섯 손가락에 모두
끼어보아도 헐렁헐렁했다.
나한테는 맞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건 여자 반지도 아니고
남자 반지잖아요.
그래도 받아둬. 공짜로는 하기 싫으니까.
그는 반지를 집어 그녀의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주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창녀로 알고 있는 것 같아 곤혹스러웠다.
나는 창녀가 아니예요. 사람을 잘못 봤어요. 제가 창녀처럼
보여요?
모르겠어. 아무러면 어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여자는 다
마찬 가지야. 난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
그럼 왜 반지를 주는 거예요?
그녀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공짜는 싫다고 했잖아. 여자한테는 창녀이든 창녀가 아니든
그걸 하고 싶으면 돈이나 선물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빚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
당신은 묘한 취미를 가졌군요. 이름이 뭐예요?
그런 거 없어. 선원들은 나를 악어라고 불렀지. 악어처럼
생겼다고 말이야. 나는 악어를 제일 싫어해. 가자고, 우리 집에.
빨리 가서 하자고.
집이 어디예요?
샹 라자레 정거장 근처에 있어. 싸구려 여관에 세들어 있지.
그는 테이블 위에 술값을 꺼내놓고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무화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주 오래 전부터 그를 알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와 나란히 서서 거리를 걸어갔다.
걸음을 옮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상한 사람들,
이를테면 쫓기고 있는 남자들하고만 만나고 있다.
왜 그런 남자들만 걸려들까. 나한테는 그런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무슨 매력이라도 있는 걸까. 한 사람은 공금 횡령범이고 또
한 사람은 살인범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주춤
거리자 악어가 뒤돌아보았다.
내 이름 알고 싶지 않아요?
알고싶지 않아. 난 이름같은 거 금방 잊어버려.
그는 따라올테면 따라오라는 식으로 홱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으로 보아 그는 정말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가물가물 사라지려 할 때 쯤에야 그녀는 서둘러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걸음이 몹시 빨랐기 때문이 종종
걸음을 치지 않으면 그를 놓칠 것만 같았다.
지하철 역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그를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할딱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게 가버리는 법이 어딨어요? 만일 내가
따라오지 않으면 어떡 할려고 그랬어요? 우리는 그대로 헤어지는
거 아니예요?
따라올 줄 알았어.
그는 막 도착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무화도 지하철에
올랐다.
그녀는 굴욕감에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악어 같은 사나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의 갑작스런 무표정과 무관심에
그녀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남자와는 빨리 헤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시 말을 건 것은 그들이 지하철을 내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반지를 돌려주려고 따라온 거예요. 자, 받으세요.
그건 당신 거야. 나하고 상관없는 거야. 더이상.......
그는 그대로 계단을 두개씩 올라갔다.
받지 않으면 던져버릴 거예요!
계단을 다 올라와 그녀는 우뚝 섰다. 그리고 반지를 던지려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가 힐끗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그
쪽으로 반지를 던진 다음 잽싸게 몸을 돌려 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계단 중간쯤에서 그녀는 악어에게 팔을
붙잡혔다.
놔요!
그녀는 그를 뿌리쳤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아귀 힘은 어찌나 센지 그녀는 팔이 아파
얼굴을 잔뜩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으로 그를 후려쳤지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녀는 창피를 무릅쓰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리고 더 세게
그의 얼굴을 백으로 후려쳤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서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그녀를 놓아주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그 사이로 경찰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입니까?
경찰관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악어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무화는 그가 하는 대로 인형처럼 몸을 내맡겼다. 얼떨떨한
순간이 지나자 그녀는 가슴이 물결치는 것을 느꼈고,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사람
하나 없는 숲 속의 바위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바위에 얼굴을 비비면서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들이 포옹을 풀었을 때 경찰관도 보이지 않았고 구경꾼들도
이미 흩어지고 없었다. 악어가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었고,
그녀는 그의 팔짱을 끼었다.
갈 데가 없지?
하고 그가 물었다.
네, 이제부터 구해야 해요. 친구하고 싸우고 나왔어요.
안됐군. 갈 데가 없으면 나하고 함께 있어도 괜찮아.
고마와요.
샹 라자레 정거장은 혼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웅장한 아치형의
천장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차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들은 광장을 벗어나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골목에는 싸구려 여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거리는
지저분했고,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초라해
보였다. 여기저기 현관 입구에는 화장을 짙게한 늙은 창녀들이
담배를 꼬나문 채 서있었는데 그녀들은 악어를 보자 휘파람을
불어대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어디서 애송이를 하나 낚았군.
일본 아이 같은데.......
부서질지 모르니까 살살 다뤄. 나한테 하는 식으로 하면
곤란해.
무화는 얼굴이 화끈거려 그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골목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부랑아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들은 꿈이 깨진 예술가들,
탈영병, 마약중독자, 그밖에 자질구레한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가장 더러운 뒷골목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펠탑, 개선문, 노트르담 사원 등 파리의 예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더러운 음지에 발을 들여놓게 된데 대해 그녀는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가급적 더러운 곳은
피해서 아름답고 깨끗한 이름난 명소들만 보아왔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왔었다. 여기가 진짜 파리의 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인생에 실패한 얼굴들을 훔쳐보았다.
악어의 방은 어느 싸구려 여관의 이층에 있었다. 그녀는 여관
입구에서 돌아설까 하다가 악어가 가방을 들고 먼저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핑계로 여관으로 들어섰다.
악어의 방은 한 마디로 쓰레기장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잔뜩 널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은 작았지만 베란다에 면해 있었기 때문에 꽤 밝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방은 혼자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방에는
낡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한 쌍의 남녀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섹스를 즐기고 있었던 듯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더러운 시트가 그들의 하체를 조금 가려주고 있었다.
내 침대를 또 더럽혔군. 이 아랍 촌놈!
악어는 화를 벌컥 내면서 아랍 청년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아, 그러지 마. 더럽히지 않았어.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시트가 벗겨지면서 두 사람의
하체가 드러났다. 여자는 앳되게 생긴데 비해 몸뚱이는 놀랄만큼
풍만했다.
이 자식아, 네 자리는 침대가 아니라 여기란 말이야!
몇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악어는 침대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닳아빠진 카핏이 깔려
있었다.
미안해. 새 애인때문에 그랬어. 소개할께. 이집트
출신의.......
시끄러! 소개 같은 거 필요없어! 당장 꺼지란 말이야!
다시 후려갈기려고 하자 아랍인은 침대에서 뛰쳐나와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앳되게 생긴 이집트 아가씨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서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악어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다분히 유혹하는 눈길이었다.
빨리 꺼져!
악어는 그녀의 넓적한 엉덩이를 철썩 후려갈겼다. 그녀는 하도
커서 밑으로 처진 젖가슴을 덜렁거리면서 욕실로 뛰어 들었다.
조금 있자 욕실 안에서 쉬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화는 출입구 한쪽에 꼼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그렇게 지저분한 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이기만 했다.
두 사람만 남자 악어는 방 안에 혼자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옷을 벗어던졌다. 그의 육체는 온통 근육으로 다져져 있었고,
그의 남근은 묵직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 앞을 지나
욕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화는 낡아빠진 의자에 가서 앉았다.
침대가 접해 있는 벽 위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위로 올라갈 듯하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밑으로
내려가더니 침대 시트 사이로 사라졌다. 조금있자 아까 그놈보다
두 배쯤 더 큰 놈이 침대에서 기어나와 위쪽으로 달려간다.
무화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가방을 들고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여관을 빠져나올 때까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쿵쿵
뛰었다.
지하철을 타면 아무래도 악어가 쫓아올 것 같아 택시를
집어탔다. 그리고 샹젤리제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악어의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데 대해 가슴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일 악어와 관계를
가졌더라면 돌아오는 길은 몹시 참담하고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택시를 내린 그녀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에트왈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황표는 그때까지도 방에
돌아와 있지 않았다. 지친 그녀는 로비의 소파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 시간에 황표는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성당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돌려
뒤늦게 신자가 되기 위해 성당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들어와보니 장엄한 실내 분위기에 압도된 탓인지 마음이
안정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고 자기를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곳이야말로
마음놓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구석진 곳에 앉아 경건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가끔씩 정면 제단 위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지곤 했다.
얼마 후에 그는 뒤로 비스듬히 기대앉아 잠이 들었다. 깊이
잠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소리에도 놀라 깨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곤 했다. 그렇게
서너 번 자다 깨다 하다가 나중에는 한 시간 남짓 깨어나지 않고
잠들 수가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어두운데다가 기둥에 가려져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가 않았다. 신부가 그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의 잠든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지나쳐 갔다.
나중에 신부가 그를 깨운 것은 그가 갑자기 코를 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황해서 일어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나와 언덕에 올라갔다.
발길 닿는 대로 한참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북적대는 떼르뜨르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무명 화가들의 거리였다.
아무렇게나 차려 입은 남루한 차림의 화가들이 시장바닥 같은
곳에 캔버스를 놓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이
그런 그들을 상품처럼 구경하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무명 화가들은 자기 자리에 소품들을 진열해놓고 그것들을
팔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관광객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하면서 마치 물건을 강매하듯 관광객들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황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시장바닥 같은 그곳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고 나섰다. 그가 고개를 내젓자 어떤
화가는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스케치북에다 그의 얼굴모습을
그리기까지 했다. 그가 걸음을 빨리 하자 그제서야 그 화가는
그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곳은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주위에는 카페도 있었다. 그러나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도 귀찮게 구는 바람에 황표는 그곳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거기서 조금 떨어진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한국 분이시죠?
황표는 힐끗 뒤돌아보았다.
턱수염을 수북히 기른 한 젊은이가 스케치북을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황표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국 분인 줄 알았습니다. 한국 사람은 어딘가 표가
나거든요.
젊은 화가가 가까이 다가와 다시 말을 걸었다.
저도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 사람을 보면 반갑습니다. 제가
커피 한 잔 사겠습니다.
아니, 내가 사겠소.
황표는 웨이터에게 커피 두 잔을 시켰다.
화가는 황표에게 자기 소개를 했는데, 이름이
장석오(張錫五)라고 했고, 파리에 온 지는 10년이 넘는다고
했다.
저 자리도 돈을 주고 산 겁니다. 아무나 저기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죠. 저는 주로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일 벌이가 낫죠.
장석오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에 관한 것을 스스럼 없이
털어놓았다. 반면 황표는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듣기만 했고 가끔씩 간단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아주 멋진 생활을 하는군요. 나도 과거에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멋진 생활이라구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갈 데까지 간 사람들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두 실패작들만
모여 있습니다.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고, 그래서 아무 희망도 없이 단지 입에 풀칠 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뿐이죠. 여긴 그리고
세계 각국의 인종 전시장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피카소가 되기
위해 왔다가 죽도 밥도 안 되자 창피해서 그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파리 분위기에 정도 들고해서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장석오는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새 황표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계속 지껄여대면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황표는 장의 수완에 내심 놀라면서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윽고 장석오는 스케치북을 한 장 북 찢어 황표에게
내밀었다.
이건 여기 오신 기념 선물로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죠. 그냥은 받을 수 없습니다.
황표는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진짜 모습보다
훨씬 젊고 잘 생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그를
즐겁게 했다.
하나 더 부탁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그리겠습니다.
그것이 끝나자 다음에는 정면에서 얼굴을 그리는 작업이 계속
되었고, 거기에 이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 따위가 그려졌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모두 여섯 장이나 되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
150달러만 주십시오.
황표는 백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내놓고 잔돈은 받지 않았다.
그들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장석오는 기분이 좋았다. 한 사람한테 무려 여섯 장이나
초상화를 그려주기는 처음이었다.
2백 달러나 벌었기 때문에 그는 여느 때보다 일찍 자리를
거두었다. 그에게 2백 달러나 주고 그를 기분 좋게 해준 그 한국
남자의 인상은 아주 뚜렷하게 그의 머리 속에 남았다. 그렇게
심어진 인상은 당분간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헤어질 때 장석오는 명함이라도 한 장 달라고 하자 그
사나이는 명함이 없다고 하면서 장의 스케치북에 이름을 적어
주었는데 김상호(金相浩)라는 이름이었다.
황표는 무슨 마음으로 초상화를 여섯 장이나 그려달라고
했는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것들을 둘둘 말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그는 언짢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에트왈 호텔로 돌아오니 로비에 유무화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 옆에는 조그마한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오래 기다렸나?
거기에는 대꾸하지 않고 무화는 화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황표는 그녀의 트렁크를 들고 먼저 프런트로 가서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이건 뭐지?
엘리베이터 속에서 황표는 트렁크를 가리켰다.
집에서 나왔어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그녀는 자신의 안내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황표가 늦게까지 혼자 돌아다니다 온데 대해 은근히 화가
나있었다. 그 동안 함께 지내다보니 그는 자기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어느 새 몸에 밴 탓일까. 그녀는 그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가 왔는지 몹시 궁금했다.
황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그녀에게 초상화를
꺼내주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펴보면서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뭣하러 초상화를 이렇게 많이 그렸어요?
그녀는 어이없어 하다가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모르겠어. 공짜로 그려주는 줄 알고 가만 있었더니 그렇게
여러 장 그리더라고.
얼마 주셨어요?
2백.
어머, 바가지 썼어요.
한국 청년이었어.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면 그리지 않았을
거야.
얼굴에 수염 기른 남자였죠?
그래, 아는 사인가?
네, 좀 알아요.
장석오라고 했어.
네, 맞아요. 몽마르트르에서 초상화 그려주고 그걸로 먹고
사는 화가예요. 그 사람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어요. 하긴 저도
마찬가지지만.......
그가 성당에서 잠자다가 신부에게 쫓겨났다고 말하자 무화는
다시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왜 집을 나왔지?
친구하고 다퉜어요. 그 집에는 정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럼 방을 하나 구해 보지 그래.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에요.
내가 방을 구해 주지.
그 말에 그녀는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혼자서 방을 구한다는 것이 아직은
벅찬 일이었다. 그것이 이번 기회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기대를 은연 중에 황표에게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녀는 속으로 놀랐다.
이리 들어와.
황표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욕실로 들어가면서 그녀를
불렀다.
그의 살찐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화는 마지못해 옷을 벗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니 그는 선 채로 샤워물을 받고 있었다.
나를 좀 씻겨줘.
무화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서 거기에다 가만히 얼굴을
갖다댔다. 따뜻한 물이 그의 등을 타고 그녀의 머리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돌려 그의 중요한 부분부터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
│ 5.로마의 여인 │
└────────────────────────────┘

같은 날 밤 로마.
그녀는 얼른 보기에 기숙사의 사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안팎 정도 되어 보였다. 중키에 약간 마른
인상이었는데 얼굴 빛은 병자처럼 누르스름했다.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단정한 것이 예의바른 동양인 같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뒤로 정갈하게 빗어넘겨진 채 한데 묶여져
있었다. 그녀는 검은 코트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고, 크트
밑으로는 회색의 스커트 자락이 조금 나와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조금 커 보이는 검정 백을 들고 있었고, 발에는 굽이 낮은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두 다리를 가리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색깔의 스타킹이었다.
콜론나 광장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광장을 가로 질러가면서 불빛 속에 높이 솟아 있는
콜론나를 검은테의 동그란 안경 너머로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게르만인
및 터키인과의 싸움에서 이긴 전승 기념으로 건립한 원형
기둥이다.
광장을 바쁜 걸음으로 가로질러 간 그녀는 광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백화점 리나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백화점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보석상 코너로 갔다.
보석 코너에서는 온갖 보석들이 불빛을 받아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보석들을 감상하다가 한 코너
앞에서 한참 동안 서있었다.
필요하신 것 없습니까?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이탈리아말로 물었다.
이걸 한 번 감정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녀는 백 속에서 조그마한 보석함을 꺼내 진열대 위에
놓았다. 그녀의 이탈리아말은 아주 능숙해서 얼굴을 보지 않고
말소리만 듣는다면 이탈리아인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이게 뭐죠?
다이어먼드에요. 한 번 봐주세요.
콧수염이 뚜껑을 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몇 캐럿이죠?
9캐럿이에요.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감정해 주세요.
여인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콧수염은 그것을 들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감정하는데는 불과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콧수염은
함을 그녀에게 돌려주면서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진짜가 아닌데요.
그럼 가짜란 말인가요?
여인이 끼고 있는 안경이 번득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함을 집어 백속에
집어넣고 휙 돌아섰다.
다음에 그녀가 찾아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변기 위에 걸터앉아 소변을 갈긴
다음 백 속에서 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다이어먼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드러내고 밑바닥을 들어올리자 거기에 하얀
분말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비닐봉지는 모두 해서 다섯 개였다.
백화점을 나온 그녀는 광장 한쪽에 주차해놓은 노란색의 소형
피아트 승용차에 올랐다.
그녀는 시동을 건 채 한 동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의 모습은 기숙사 사감 같은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쥐새끼의 그것처럼 잔뜩
경계를 띤 채 반짝이고 있었다.
이윽고 노란색 피아트는 광장을 한 바퀴 돌아 동쪽으로 뻗어
나간 차도로 들어섰다.
차가 달리는 동안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자주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혹시 미행당하고 있지 않은지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될수록 천천히 차를 몰았다. 대로를 벗어나 돌이 깔린
좁은 길로 들어서자 때에 절은 고도(古都)의 음산함이 전해져
왔다.
좁은 길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차들만이
띄엄띄엄 서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차의 속도를 줄이면서 보도 쪽으로 접근하다가 가만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 헤드라이트를 두번 켰다껐다 했다. 저만치
경사진 길의 위쪽에서도 헤드라이트 불빛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냈다. 저쪽에서도 그것을 받아
신호를 보내왔다.
그녀는 기다렸다.
경사진 길의 위쪽으로부터 한 대의 승용차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천천히 굴러내려오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것은 점점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다가 이윽고 길 맞은 편 쪽에
굴러와 조용히 멎었다.
그것은 백색의 고급 승용차로 이탈리아제는 아닌 것 같았다.
차 속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사람은 운전석에, 다른 한 명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더니 뒷좌석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그는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살핀 다음 길을
건너왔다. 바람에 코트 자락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길을 건너온 중절모의 사나이는 노란색 피아트의 뒤를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거침없이 차 안으로 들어온 그는 상대가
여자인 것을 알고는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물건은 가져왔겠지?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하면서 물었다.
그보다 먼저 암호를 말해 줘요.
여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콜롯세움의 밤.
베니스의 뱃사공.
여자가 손을 내밀자 중절모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세어보지 않아도 되겠죠?
물론.......
사내가 끄덕였다.
여인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백을 열었다. 먼저 함을 꺼낸
다음 봉투를 백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함을 중절모에게
건넸다. 사내는 뚜껑을 열어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하고는 뚜껑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여인은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노란색 피아트는 마치 쫓기기라도하는 듯 경사면을 빠른
속도로 올라가 대로로 흡수되듯 들어갔다.
차가 달리는 동안 그녀는 계속 백미러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테르미나역을 지나 에제트라 광장에 이르자 일부러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광장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서는 물이 나오고
있지 않았지만 분수대 주위에 서있는 정교한 대리석 조각품들은
무지개빛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광장을 빠져나온 노란색 소형 피아트는 베네트 거리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커브를 그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10분쯤 지나 노란색 피아트는 다시 에제트라 광장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 그녀는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
차를 세워놓고 차에서 내려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 주위에는 거대한 원통형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대리석
건물들이 광장을 에워싸듯이 하면서 병풍처럼 서있다. 시커멓게
때에 절은 그 건물들의 정면은 긴 화랑을 이루고 있었고, 그
화랑 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건물들은 각종 사무실과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화랑의
한쪽 끝에 베레모를 쓴 군인 두 명이 기관단총을 든 채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광장으로 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바람에 거리는 지저분하게
널려 있던 휴지조각같은 것들이 낙엽처럼 휩쓸렸다.
그녀는 코트깃을 세우고 어깨를 움츠리면서 화랑으로 통하는
계단을 재빨리 올라갔다.
그 건물에는 두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두곳에서 모두 포르노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표를 구입한 뒤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또래의 여인이 무표정하게 표를 받았다.
검은 코트 차림의 동양 여인은 이층을 올라가 관람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층의 관람석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불과 몇 명의
관객들만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뒷줄
맨 오른쪽 구석자리에 가서 앉았다.
화면에서는 한 금발 여자가 두 남자를 상대로 일을 치르고
있었다. 남자들중 한 명은 흑인이었다.
화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전원 풍경과 함께 10대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창고로 들어서다가 멈칫한다. 중년 남자가
건초 위에 바지를 풀어내린 채 열심히 수음을 하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창고 안으로 들어선다.
가져왔나?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 동양 여인은 고개를 홱 돌린다.
그녀의 옆자리에 어느 새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금테안경을
낀 중년의 동양인이다. 그에게서는 향수 냄새가 났다. 그는
정장차림이었다. 깔끔한 차림에 항상 향수 냄새를 풍기는 그
남자를 그녀는 가끔씩 만나고 있었다.
동양인 신사는 그녀가 말없이 내놓은 봉투를 받아 슈트케이스
속에 넣었다.
세어보지 않아도 되겠지?
언제나 같은 물음이군요.
수고했어.
지폐 몇 장이 그녀의 손에 놓여진다. 그녀는 그것들을
움켜쥐었다가 코트 주머니 속에 쑤셔넣었다.
부탁이 있어.
동양인 신사가 이탈리아 말로 속삭였다. 여인은 긴장한 얼굴로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즉시 파리로 가주어야겠어. 아주 급한 일이야.
그 일이라면 당분간 좀 쉬고 싶어요. 몸도 좀 안 좋고......
누가 꼭 미행하는 것만 같아서 이제는 자신이 없어요. 좀 쉬게
해줘요.
여인은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아니야. 좀 다른 일이야.
무슨 일인데요?
사람을 찾는 일이야. 한국 남자인데 파리에 있어. 그 사람을
급히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그런 일이라면 더욱 자신없어요. 사람 찾는 일은 정말 자신
없어요. 더구나 그 넓은 파리에서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건
도저히 자신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한테 떨어진 거야. 한국
사람이 찾아야 빨리 찾을 수 있어. 꼭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야.
자신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자신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한때 파리에
살았고 해서 거기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친구들이 많을 거야.
그들을 이용하면 그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잘못 판단하셨어요.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는 파리에
별로 없어요. 있다고 해도 도움을 청하고 싶지도 않고요.
리나, 거절해서는 안 돼. 이건 명령이야. 나는 명령을
전할뿐이야.
명령따위는 이제 지겨워요.
리나라고 불린 여인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남자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리나는 거세게 그손을
뿌리쳤다.
남자가 두번째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남자는 중국인이었다. 그는 여인의 무릎 위에 가만히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 속에 그 사람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어.
여인은 그의 말을 묵살한 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소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잘 알 수는 없지만 배신자야. 조직의 돈을 가지고 도망친
모양이야.
액수가 큰 모양이군.
여인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아마 평생 물쓰듯이 써도 다 쓰지 못하고
죽을만큼 많은 돈인 것 같아. 조직에서는 그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그 사람을 찾으면 어떡 하죠?
연락을 해줘.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것만 알려주면 돼.
파리에 있는 게 틀림없는가요?
틀림없다기보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겠지. 나로서는
더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어. 아무튼 파리에 가서 그자를
찾아보라는 명령이야.
1월 9일 오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찬 바람이 마구 불어대는데다 눈발까지 날리고 있어
몽마르트르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에는 그날따라 별로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오후에 접어들자 불우한 화가들은 늦게까지 죽치고 있어봐야
별로 재미를 못볼 것 같다고 판단했던지 하나 둘씩 화판을
걷어들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털보 장석오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오페라좌 거리에 가서 멋진 카페에
앉아 점심식사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심사가 편치 않았다. 일년 동안 동거하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그를 떠났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있었고,
그것을 달래려고 매일 밤 폭음하고 있었다. 폭음때문에 머리는
지근지근 아팠고 눈을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동거했던 아가씨는 한국 유학생이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프랑스 남자의 품에 가서 안긴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가 언제까지고 자기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희망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아픔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그를 휘청거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짐을 챙겨들고 막 자리를 뜨려는 그 앞에 누군가가 다가섰다.
그는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검은 코트
차림의 중년 여인이었다. 그는 입을 벌리며 아...... 하다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미라 누나.......
오랜만이에요.
여인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털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뚫어지게 그녀를 응시했다.
하나도 안 변했군요.
우리 따뜻한 데로 가요. 내가 점심을 사겠어.
그들은 조금 걸어가다가 택시에 올랐다.
꼭 10년만에 나타났군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10년만에 나타나셨군요.
털보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원망어린 투로 말했다. 여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
오페라좌 거리에서 택시를 내린 그들은 어느 2층 카페로
올라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 점심을 사겠다고 옥신각신하다가 남자쪽에서
점심을 사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털보가 과거에 신세진 것을
갚겠다는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여자 쪽에서 양보한
것이다.
제가 테르트르 광장에서 일하고 있는 거 어떻게 알았죠?
그거야 파리에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
아니야? 어느 한국 식당에 가서 물었더니 거기로 가보라고
하더군.
부끄럽습니다. 이젠 밥벌이나 하는 버러지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누님을 만나니까 정말 제 존재가
부끄럽습니다.
그는 정말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밑으로 떨구었다.
그런 말하지 말아요.
털보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은 냉정했다. 그녀가 지난 10년
사이에 얼마나 냉정한 인간으로 변했는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10년 전 장석오가 파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녀는
촌뜨기 같은 그에게 접근하여 친절을 베풀었던 여인이었다. 돈도
없이 오직 혈기만을 믿고 파리에 온 그에게 그녀는 구세주 같은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교제했던 기간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관계로
발전했었다. 처음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를 누님이라
불렀는데, 그녀와의 사이가 연인 관계로 발전한 뒤에도 계속
그녀를 누님이라 불렀다.
처음부터 김미라(金美羅)는 자신을 베일 속에 감추어둔 채
그를 상대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녀는 어느 돈 많은 늙은 아랍인의
애첩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몽파르나스 거리에서 한국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의상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에 왔다가 본래의 뜻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들어섰다고
했다. 장석오는 그녀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것으로 파리 생활의 어려움을 어렵지 않게 견뎌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관계를 맺은 지 6개월 쯤 지났을 때 미라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식당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미 넘어가
있었고, 장석오는 그날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고, 자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떠나간 그녀를 몹시 원망했다.
그러고 나서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리고 그녀가 떠날
때처럼 홀연히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식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마주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10년의 세월은 과거에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뜨거운 감정을
고갈시키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그들은 지금 과거의 그런
감정을 안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강한 호기심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수년 전 로마에서 누님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로마에 좀 있었지.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말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리스본에 있어. 하지만 거기서도 곧 떠날 거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그건 곤란해.
10년 전과 똑같군요. 누님은 언제나 자신을 숨기고 있었어요.
저한테까지도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녀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마. 내가 자진해서
말하기 전에는 말이야. 정말 미안해.
왜, 왜 그래야 합니까? 이유가 뭡니까?
말할 수 없어.
그녀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가만히 흔들었다.
계속 저를 놀라게 하고 정신없이 만드시는군요.
정말 미안해. 이해해 줘.
그녀가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그들의 대화는 더이상 계속
되기가 어려워졌다. 장석오는 그들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느끼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그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그것도 수소문해서 말입니다.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니시겠죠?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
그녀는 그를 외면한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는 눈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는 그녀가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사람을 찾는 일인데 좀 도와줘요. 한국 사람인데 내가 찾아
다니기가 뭣해서 그래. 수고비는 충분히 주겠어.
아주 사무적이군요.
그는 화가 났기 때문에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여기에 그 사람 사진이 있어. 그 사람에 대한 인적 사항도
메모해 놨어.
그녀는 그 앞에 봉투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 그것을 힐끗
내려다보고 나서 다시 빈정거렸다.
이런 일때문에 저를 찾아오셨군요.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고.......
보고 싶었지만 참았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녀가 갑자기 빠른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그놈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라는 게 뭡니까?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발 묻지 말아. 이대로가 나한테는 좋으니까 제발 묻지
말아.
만일 제가 부탁을 들어줄 없다면 어떡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갈 수밖에 없어.
그녀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누구의 부탁인데 제가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고마와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알아봐 줘.
어떤 사람이가요?
그건 나도 몰라.
파리에 사는 사람인가요?
그렇지는 않은가 봐. 잠시 파리에서 머무르고 있는가 봐.
그 사람을 왜 찾는 겁니까?
그런 것을 알 필요 없어.
그녀는 봉투를 또 하나 꺼냈다.
5백 달러야. 우선 비용으로 써요.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받을 수가 없어요. 돈 받고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받아둬. 그냥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 받아. 그 일에 매달리면
당분간 몽마르트르에 나갈 수도 없잖아. 돌아다니려면 비용도 꽤
들거야.
싫다니까요!
털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두 사람은 사납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나도 부탁할 수 없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거야.
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털보가 돈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다음에 그는 서류 봉투를 집어들고 그것을 뜯으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미라가 말렸다.
여기서 뜯지 말고 집에 가서 뜯어봐요.
그는 잠자코 그것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연락은 어떻게 할까요?
나폴레옹 호텔 505호에 방을 얻어 두었어.
그녀는 나폴레옹 호텔 안내카드를 꺼내 장에게 주었다.
12시, 3시, 6시, 9시...... 이렇게 세 시간 단위로 전화를
걸어주면 받을 수 있어. 밤에도 마찬가지야. 거기 전화번호는?
그녀는 턱으로 장을 가리켰다. 털보는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부탁해.
그녀는 사무적으로 인사하고 나서 먼저 일어섰다.
먼저 가십시오. 난 좀 있다 가겠습니다.
그녀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털보는 식어빠진 음식에
포크를 가져갔다.
그는 천천히 음식을 씹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수록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지면서 그녀의 존재가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꺼기 하나 없이 말끔히 그릇을 비운 그는 커피를 시켰다.
조금 후에 웨이터가 커피를 갖다놓고 가자 생각난 듯 가방
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냈다. 세장의
컬러 사진과 메모지가 나왔다. 세 장의 컬러 사진은 손바닥만한
크기로 한 사람을 세 방향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그는 멈칫했다. 그 얼굴은 그가 그저께
몽마르트르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에서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바로
그 인물이었던 것이다. 초상화를 자그마치 여섯 장이나 그려주고
2백 달러나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 얼굴을 너무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세 장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메모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국 이름은 황표(黃彪). 나이는 49세, 중키에 뚱뚱하며
안경을 끼었음.
그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한 장씩 바삐 넘기다가 이윽고 그
사람의 초상화를 찾아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은 미세한
부분은 생략한, 간결한 터치로 그려진 초상화였다. 그는 자기가
초상화를 그려준 인물의 얼굴을 기념으로 스케치해 두곤 했는데,
그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거기에는 한쪽 구석에 金相浩 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직접 쓴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름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름 같은 거야
얼마든지 거짓말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틀림없이 이 사람의
얼굴을 그려주었다!
그는 얼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3시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 필요없이 호텔로 직접 그녀를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폴레옹 호텔은 몽파르나스 거리에 있었다. 10년 전 그는
미라와 함께 그 호텔에 드나든 적이 있었다.
나폴레옹 호텔은 10년 전이나 별로 다름이 없어보였다.
프런트로 다가간 그는 먼저 구내 전화로 505호실을 불렀다.
미라는 방안에 있었다.
아니, 웬 일이지?
그가 호텔까지 찾아온데 대해 그녀는 꽤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분히 경계심도 서려 있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리지 못하고 온 겁니다. 그
사람에 관한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와요.
그가 505호 실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눈을 맞았더니 머리가 다 젖었어.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며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타월로 몸을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와 몸에는 물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몸에서는 김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물에 젖어 뒤로 쓸어넘겨진 머리카락과 함께 안경을 벗은 화장기
없는 얼굴은 밖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앉더니 그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마른 인상과는 달리 적당히 살이 오른 어깨와
팔은 중년여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탄력이 있어 보였다.
털보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누님이 찾고 있는 그 사람...... 그저께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머리를 빗다 말고 상체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몸에 두르고 있던 타월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왼쪽
젖가슴이 살짝 드러났다. 그녀의 가슴은 어린 소녀의 가슴처럼
작아 보였다.
놀리지 마. 그런 장난은 싫어. 장난할 일이 아니야.
그녀는 정색을 하고 몸을 바로했다.
놀리는 게 아닙니다. 누님이 나간 뒤에 사진을 꺼내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진의 얼굴은 제가 그저께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저는 그 사람한테 초상화를
여섯 장이나 그려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사람입니다.
그는 스케치한 것을 흔들어보였다.
여인은 타월로 몸을 다시 감싸면서 침대 쪽으로 다가와 그가
보여주는 초상화를 숨을 죽이고 들여다보았다.
김상호라는 이름은 그 사람이 쓴 겁니다.
이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그건 모릅니다. 초상화 그려주고 나서 그냥 헤어졌으니까요.
그는 그저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소상히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다가 거기서
타월을 걷어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으면서
그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니까 누님은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털보는 그녀의 나체를 감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육체는 남자를 흥분케 할만큼 그렇게 매력적이지가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여성다움이 남아 있었다. 그는 10년 전의 추억들을 되살리려고
애쓰면서 그녀의 몸 속에 자신을 담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10년 전하고 모든게 똑같군요.
그는 옷을 벗으면서 손가락 끝으로 장난치듯 여인의 젖꼭지를
건드렸다.
그렇지 않아. 이젠 늙었어.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손놀림을 흥미있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놀림이 교묘해지자 비로소 몸을
조금씩 뒤틀기 시작했다.
옷을 다 벗은 털보는 갑자기 그녀를 침대 위로 떠다 밀어 눕힌
다음 서둘러 일을 치르려고 했다.
아이, 왜 이렇게 성급하게 그러지?
그녀는 오래 즐기고 싶다는 듯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흥분해버린 그는 그녀의 감정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그녀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를 받아들이면서 여느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감촉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동안 그는
어느 새 일을 치르고 나서 그녀를 떠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옷을 입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 사람 꼭 찾아내겠습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누운 채 싸늘한 눈으로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닫히자
망할 자식.......
하고 중얼거렸다.
조금 후에 그녀는 로마로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그리고 로마가
나오자 빠른 이탈리아 말로
그 사람이 파리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어요.
하고 보고했다.
파리 어디? 주소를 말해 봐.
아직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그 사람을 목격했다는 사람을
조금 전에 만났습니다. 파리에 있는 것이 확인된 이상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봐요.
빨리 찾아내.
그녀는 상대방이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그녀는 몸 속에 괴어 있는 남자의 끈적거리는 정액을
씻어내기 위해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그대로 잠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될수록
자극을 피해 왔지만 일단 불이 당겨진 육체는 활활 태워버리지
않으면 결코 잠들지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면서 떨고 있다가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도저히 방안에 그대로 처박혀 있을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 그녀를 태워버릴 수 있는 멋진 남자를
찾아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럴려면 여학교 사감 같은
모습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머리를 묶지 않고 길게 풀어헤쳤다. 40대의 주름살을
가리기 위해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다. 눈에도 아이새도우를
짙게 바르고 입술도 핏빛으로 칠했다. 시야가 침침하지만 안경을
끼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10년은 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주색의 자라목 셔츠를 입고 그 위에 녹색의 세무점퍼를
걸쳤다. 밑에는 치마대신 청바지를 입었다. 이렇게 차리고 혼자
거리에 나가면 틀림없이 따라오는 남자가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준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장석오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부터 먼저 더듬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곳이면 아무래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같은 데밖에 없을 것 같다. 미라도 그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유럽에서 한국 식당이 제일 많은 곳이 파리이다. 식당 경영이
적은 자본으로 해볼만한 가장 안전한 사업인지는 몰라도
교포사회에서 생겼다 하면 한국 식당이다. 현재 파리 시내에만도
한국 식당이 서른 군데가 넘는다는 말을 그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장사가 잘 된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
그는 자주 들르는 신라(新羅)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신라는
한국 식당 가운데 제일 오래된 식당으로 루브르 박물관 부근에
있다.
지하철을 타고 그쪽으로 가면서 그는 미라와 가졌던 정사를
생각하고는 금방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공허한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뿐이었다. 과거를 되살려 보려고
했던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그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겉모습은 10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그는 감상적으로 그녀를 대했던 자신을 준열히 꾸짖으면서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는 그의 선배가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선배 역시 화가로
대성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돈이나 벌자고 식당을 차렸던
것이다.
아직 식사 시간이 되려면 한 두 시간쯤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식당 안은 종업원들과 선배의 부인만이 식사준비를 하고 있을 뿐
손님 하나 없이 텅비어 있었다. 선배는 외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종업원은 두 명으로 한 명은 선배의 사촌 남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프랑스 청년이었다.
선배의 부인은 그를 보고도 별로 반가와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별로 환영받을 만한
손님이 못되기 때문이었다. 그의 선배나 종업원들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그를 반갑게 맞아들이곤 했지만 선배의 부인만은
외상값이 적잖게 밀려 있는 그를 좋지 않은 내색으로 대하곤
했다.
털보는 선배의 사촌 동생을 한쪽으로 불러 그에게 황표의
사진을 꺼내보였다.
이런 사람 혹시 여기 오지 않았나? 자세히 좀 봐줘.
선배의 사촌 동생 구봉기(具奉基)는 스물댓 살 정도
되어보이는 청년으로 털보를 몹시 따르고 있었다.
보지 못했는데요. 이 사람 누굽니까?
급히 찾아야 할 사람이야.
무슨 일로 그럽니까?
그럴 일이 있어.
여기 왔다면 제가 봤을 텐데......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좀 도와줘야겠어.
사진 한장을 저한테 주십시오. 다른 친구들한테도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친구들이란 한국 식당에 근무하고 있는 종업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끼리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나지 않게 은밀히 알아봐줘. 내가 찾는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돼. 이름은 황표라고 해.
알겠습니다.
로마에서 온 여인은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꼭 끼는
청바지에 가려진 하체를 흔들며 몽파르나스 거리를 걸어갔다.
눈은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고, 그래서 차도며 보도도 온통
젖어 있었지만 거리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가 젖는 것을 막기 위해 노란색의 조그마한 우산을
하나 샀다.
몽파르나스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관광객들이다. 대로변에는 카페며 레스토랑, 극장, 옷가게, 같은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추상화파 화가들의 요람지로 예술의 중심지였다.
불우했던 천재화가 모딜리아니가 배회했던 곳도 그곳이었고
카페르돔이나, 쿠폴, 로통드 같은 곳에는 지금도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우르틸로 같은 화가들의 스케치 복사나 이름이
적힌 메뉴가 남아 있다. 모네나 세잔느 등 인상파 화가들도
그곳에 드나들었고, 막스 자콥, 장 곡토 같은 문인들도 그곳
단골 손님이었다. 단골 손님들 가운데는 레닌도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파리 망명 시절의 낮 시간을 대부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이 진을 치고 있던 시절은 지나가고,
지금의 몽파르나스가는 관광객들로 흥청대는 유흥가일 뿐이다.
그녀는 가능한 한 20대의 젊은 청년을 유혹하고 싶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미남 청년이 그녀의 구미에는 맞았다. 그것도
동양인은 싫고 유럽 출신 청년이어야 한다고 그녀대로의 원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유럽 출신의 미남 청년이라면
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청년은 좀처럼 걸려들지 않는다. 흰 얼굴에
콧날이 우뚝 서있고 검은 눈썹이 선명한 푸른 눈의 키 큰
청년들은 적지 않게 눈에 띄지만 그런 청년들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어느 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그러나 혼자 카페에
들어가 청승맞게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카페 앞 처마 밑에 서있는데 청년 한 명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녀는 긴장했다. 곁눈질로 얼른 쳐다보니 윤곽이
뚜렷한 청년이었다. 그는 지적인 마스크를 하고 있었고,
옷차림이 훌륭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대학생
같았다. 그가 떠나기 전에 얼른 말을 걸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미소를 던졌다. 청년도
그녀에게 목례를 보냈다.
호의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담배불 좀 빌릴까요?
하고 이탈리아말로 물었다.
청년은 이탈리아말을 모르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쳐들어보였다.
미안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청년은 정중하게 프랑스어로 말했다.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성냥을 구해 오겠습니다.
청년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더니 휴대용 성냥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친절하게 담뱃불을 붙여주면서
프랑스말을 모르십니까?
하고 물었다.
조금밖에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일부러 서툴게 프랑스말로 말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국적은 일본이고요.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말하기는 정말 싫었다. 그녀가
마음 속으로 한국을 버린 지는 벌써 오래 전부터였다.
아, 일본인이군요. 일본은 정말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입니다.
프랑스 청년은 잔뜩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이쪽에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자 그녀는 좀더 대담하게 나가보았다.
한 잔 안 하시겠어요? 제가 살 테니까.
청년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잠시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혹시 아가씨하고 데이트 있는 거 아니예요?
카페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그녀가 불어로
서툴게 물었다.
청년은 씨익 웃었다. 치아가 고르고 깨끗해 보였다. 거기서
그녀는 싱싱하고 건강한 젊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실은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닙니다. 맞은 편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일찍 왔기
때문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직 20분이나
남았습니다.
그는 맥주를, 그녀는 포도주를 한 잔씩 시켰다.
미인인가 보죠?
아닙니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아니고 중년 여자입니다.
어머나, 그럼 나하고 비슷하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청년의 표정이
진지한 것으로 보아 거짓말로 그러는 것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랑하니까 그 여자를 만나는 거 아닌가요?
그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만나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경우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그건 정말 따분하고 우울한 일이죠. 사실은 아까
왜 이 앞에 서있었느냐 하면 오늘 그 여자를 만날까 말까
생각하느라고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그녀는 진한 눈길을 그에게 보내면서 물었다.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어떤 여자예요?
살찐 돼지라고 하면 적당할 그런 여자죠.
그녀가 눈을 흘기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이 그런걸요. 한 가지 장점은 돈이 많다는 거죠.
돈 많은 과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여자한테 용돈을 얻어 쓰나요?
그게 함정이죠. 함정인 줄 알면서.......
그의 이름은 알랭 마파르라고 했다. 소르본느 대학에
재학중이고 법률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로마에서 온 여인은
자기를 요코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술 한 잔씩을 더 청했다.
만나기 싫은데도 만나야 하다니, 우울한 이야기이로군요.
불쾌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파르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그 여자를 만날 건가요?
글쎄요. 파리에서 도망치기 전에는 그 여자를 만나야겠지요.
로마로 오세요. 보호해 줄 테니까.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마파르는 미소를 지었다.
말씀만 들어도 황홀한데요.
진심으로 말하는 거에요.
감사합니다.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마파르, 가지 말아요. 나 파리 지리 잘 몰라요. 안내해 줘요.
안내비는 충분히 드리겠어요.
청년은 주춤하고 도로 앉았다.
가지 말아요.
그녀는 호소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스쳐갔다.
가야 합니다. 가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가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그 여자를 만나서 되도록 빨리
헤어지도록 하죠. 요코, 당신이 계신 곳을 알려주면 있다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이 정도면 큰 수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파르, 당신을 본 순간 난 반하고 말았어요.
저도 반했습니다.
꼭 와야 해요.
그녀는 자신이 투숙하고 있는 호텔 이름과 방 번호를 그에게
일러주었다.
마파르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한 번 샤워를
하고 나서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마치 신부나 된 것처럼.
앞으로 있을 정사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것은 생각만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차임벨 소리가 난 것은 8시 조금 전이었다.
그녀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알랭 마파르.
그녀는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마파르의 웃는 얼굴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그녀는 감격에
겨워 방문을 활짝 열었다.
마파르는 그녀를 밀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라
건장하게 생긴 남자 두 명이 들어섰다.
그녀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마지막으로 들어선 자가 안으로
문을 잠갔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비로소 공포를 느꼈다.
내 친구들을 데리고 왔어요. 인사해요.
마파르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껌을 씹고 있는 그의
모습은 몽파르나스가에서 보았던 그 예의바른 소르본느 대학생의
모습이 아닌 완전히 건달 같은 모습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다르게 변신할 수 있다는데 대해 그녀는 사뭇
놀랐다.
낯선 두 명은 험상궂은 인상들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흑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랍인 같았다. 그들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란제리 바람이었기 때문에 거의 알몸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탐욕스럽게 훑어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재빨리 코트로 몸을 가리려고 했다. 그러자
아랍인이 달려들어 그것을 낚아채 던져버렸다.
그대로가 좋단 말이야.
하고 말하면서 그는 히죽 웃었다.
그녀는 마파르를 얼른 쳐다보았지만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마파르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혼자 오지 않고 이 사람들을
데려왔어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서 물었다.
섹스에 굶주린 당신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지. 나 혼자서는
당신 배를 실컷 채워줄 수 없을 거란 말이야. 이 친구들도 많이
굶주렸기 때문에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거야. 당신을 위해서
데려온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마파르가 눈짓을 보내자 아랍인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는 순간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
소리쳤다.
손대지 말아요!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빨리
나가요!
그러나 그들은 웃기만 했다. 그녀의 반항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전화통 앞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랍인의 갈쿠리 같은
손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녀는 한 바퀴 빙그르 돌아
아랍인의 품에 안겼다. 그녀가 몸부림치자 아랍인은 그녀의
란제리를 거칠게 잡아 찢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버렸다.
아랍인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히히덕거렸다. 그녀가 악을
쓰자 마파르가 다가와 재크 나이프를 펴들었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혀를 잘라버릴 테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마파르의 눈초리에서 잔혹한 빛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행동거지로 보아 마파르가 왕초인 듯했다. 다른 두 명은 그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로 끌려가 눕혀졌다. 아랍인과 흑인은 옷을
벗고 한꺼번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반항하려다가 턱을
세차게 한 대 얻어맞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마파르는 의자에 앉아 웃으며 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그 짓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즐기는데 만족하려는 것 같았다.
아랍인과 흑인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그녀를 유린했다.
그녀는 시체처럼 누워 온갖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들이 일을 끝냈을 때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까스로 침대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장석오한테서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려고 하자 마파르가
말했다.
전화 받지 마!
그는 그녀의 백 속을 뒤져 돈을 모두 꺼냈다. 백 속에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꽤 놀라는 것 같았다.
재미있게 놀아줬으니까 이 정도의 돈은 내야하지 않겠어,
요코?
마파르는 그녀의 뺨을 토닥거려 주고 나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두 명에게 돈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를 찾을 생각 같은 거 하지 않는 게 좋아. 경찰에 신고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그들은 그녀를 카핏 바닥에다 눕힌 다음 그녀의 손발을 묶고
입에다 테이프를 붙였다. 그러고 나서 줄 한 끝을 침대 다리에다
감았다.
이윽고 그들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나가는
것도 동시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전화통 쪽으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침대 다리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악을 쓰고 싶어서 몸부림쳤지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테이프는 너무 단단히 붙어 있었다.
전화벨은 한참 동안 울리다가 멎었다. 그녀는 다시 몸부림쳐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분노로 씩씩거리던 숨소리가 추위를
느끼면서부터 살려고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숨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거벗고 있는데다 방 안에는 별로 온기가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손발에 감겨 있는 줄을 풀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녀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라디오에 부착된 전자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벨의 소리가 끊어지자 그녀는 다시 미친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침대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발에 힘을 주고
끌어당기자 침대가 조금 끌려오는 것 같았다. 발목이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는 엎드린 채 온 힘을 다해
다리를 구부렸다. 침대가 조금씩 끌려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오래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때문에 터뜨린 울음이었다. 그러나
울음소리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녀는 침대를 다시 끌어보았다. 사력을 다해 끌었더니 방의
중간쯤까지 그것을 끌어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더이상은 힘이
들어 끌어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다시 잠이
들었다.
장석오는 화가 잔뜩 나있었다. 어제 저녁 때부터 나폴레옹
호텔 505호실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 9시에 맞춰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는 더이상 전화만 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을 나와 나폴레옹 호텔로 향했다.
나폴레옹 호텔 프런트로 다가서면서 먼저 맞은편 벽에
설치되어 있는 열쇠박스부터 훑어보았다. 505번 박스에는 열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505호실 손님 체크아웃했나요?
마담 미라 말씀이군요. 체크아웃하지 않았습니다.
금발 아가씨가 웃으며 말했다.
505호실에 전화를 좀 걸어 주시겠습니까?
금발은 구내 전화로 505호실을 불렀다. 조금 후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데요. 외출했나 보죠.
털보는 열쇠함을 가리켰다.
열쇠가 없지 않습니까.
금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깊이 잠이 든 모양이죠.
어제부터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아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한 번 올라가 보겠습니다.
금발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윽고 505호실 앞에 이른 그는 차임벨을 마구 눌러댔다.
한참 눌러대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문을 쿵쿵 두드려댔다.
미라! 나예요! 문 열어요!
그때 안쪽으로부터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아래 쪽에
무엇이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도 문을 두드리며 미라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문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털보는 불길한 생각에 급히 아래 층으로 내려가 상황을
설명했다.
벨보이가 505호실 문을 열었을 때 미라는 문 앞에 얼굴을
처박은 채 온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침대는 문 가까이까지
끌려와 있었다. 털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녀는 천천히 얼굴을 쳐들었는데, 그 얼굴은 깨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젖어 있었다. 입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어내자 그녀는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후 그것은 울음소리로 변했다. 털보와 벨보이는 그녀의 손발을
결박한 줄을 풀어낸 다음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녀가 몹시
떨어댔기 때문에 털보는 담요를 여러 장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빨리 앰뷸런스를 불러줘요!
털보가 벨보이에게 소리치자 미라가 손을 들어 저었다.
부르지 말아요. 괜찮아요.
경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을 부를까요?
하고 벨보이가 물었다.
부르지 말아요. 나가줘요.
벨보이가 나가자 털보는 꼬냑 한 잔을 그녀의 입 속에
흘려넣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마시고 나서 또 심하게 기침을 했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습니다.
괜찮아. 감기에 불과해.
어떤 놈들이 이랬습니까?
그녀는 말하기 싫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거야.
그녀는 시트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소리를 죽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 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조금 후에
울음을 그치더니 모든 것을 잊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털보에게
담배를 한 대 달라고 말했다.
어떤 놈들입니까? 아는 놈들이 그러지는 않았겠죠?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경찰에 신고해서 놈들을 잡아야 하지 않아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그녀는 차갑게 내뱉았다.
그게 어째서 바보 같은 소리입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말아. 그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그러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온 겁니다. 아무리 전화를 여러
번 해도 받지 않더군요. 그 사람을 목격했다는 여학생인데
있다가 12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아가씨를 만나보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황표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사람은 한국 식당 신라의
종업원인 구봉기였다. 구봉기는 마침 신라에 들른 한국
유학생에게 황표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 여학생은
대뜸 그 사람을 알아보더라는 것이었다.
미라는 나폴레옹 호텔을 나와 파리 동북 쪽에 있는
벨레비르가로 향했다. 털보는 그녀와 함께 거기까지 가서
피레네라는 조그마한 호텔에 방을 잡아주고 시간에 맞춰
샹젤리제가로 나갔다.
만나기로 약속한 여학생은 이미 카페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서른이 넘은 노처녀로 파리에 온 지는 4년쯤 되었는데
장식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못생겼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기를 결혼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결혼하는 것이 소원인 그런 여자였다. 턱이
뾰족하게 생긴 그녀는 수다스럽고 질투심이 많았다. 시력이 몹시
나빠 안경을 끼어야 하는데도 못생긴 얼굴을 더욱 못생기게
할까봐 안경을 끼지 않고 그대로 버티는 바람에 사람을 볼 때면
언제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털보가 갑자기 만나자는 바람에 잔뜩 기대를 걸고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털보의 이야기를 듣고는 금방 안색이 홱
변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오다가다 만나면 인사나 나누는 정도의 관계였던
것이다.
데이트 신청인 줄 알고 뛰어나왔던 그녀는 적이 실망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그의 말에 잘 대꾸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전화로 물어볼 수도 있지 않아요. 바쁜데 사람을
이렇게 나오라고 해놓고 겨우 그런 거나 물어보고. 이럴 수가
있어요?
털보는 그녀의 납작코를 바라보면서 아무리 못생겨도 이렇게
못생길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 미안해요. 전화로 간단히 물어볼 일도 아니고 해서
만나자고 한 거죠. 그대신 점심 멋지게 살 테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좋아요. 그대신 아주 비싼 거 시켜 먹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그녀는 그를 흘겨보고 나서 정말로 아주 비싼 식사를
주문했다. 그것은 좀처럼 먹기 힘든 값비싼 가재요리였다.
털보는 속이 뒤틀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신은 양고기 식사를
주문했다. 그들은 식사가 나오기 전에 와인 한잔 씩을 청해
마셨다.
이 남자가 유무화하고 다니는 거 틀림없이 봤어요?
봤으니까 봤다고 하죠. 보지도 않은 걸 가지고 거짓말 할까봐
그래요? 난 거짓말 안 해요.
그녀는 털보가 내놓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혹시 잘못 본 건 아니겠지?
그는 그녀의 시력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분명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잘못 보다니요. 지나치면서 인사까지 했는데요. 두번이나
봤다구요. 한번은 여기 샹젤리제에서 봤고 또 한번은 백화점에서
봤어요. 무화 그 애는 너무 건방져요. 얼굴이 반반하다고 너무
콧대가 세요. 모두 제 멋에 살지만 그 애를 볼 때마다 난 비위가
상해서 토할 것 같아요.
털보는 유무화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은 호의적인 정도를 넘어 일찌기 연정으로까지
발전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콧대를 세우고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감정은 그대로 가슴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버렸었다. 그러고 나서 4년인가 5년이
흘렀는데 그 전과 같은 그런 감정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만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무화하고 그 남자하고는 어떤 사이인가요?
드디어 자신이 해야할 말을 찾아냈다는 듯이 강주미(姜周美)의
흐릿하던 눈이 빛났다.
잘은 모르지만 처음에는 가이드와 관광객 사이로 만난 것
같아요. 남자는 한국에서 온 돈 많은 사장족인 것 같은데,
이번이 처음 만난 게 아닌가 봐요. 파리에 오면 꼭 무화만 찾는
게 보통 사이가 아닌가 봐요. 그 사람이 파리에 있는 동안
밤낮으로 붙어 다니고 있대요. 얼굴이 반반하고 콧대깨나 세우고
다니더니 결국 늙은이한테 붙어서 얼굴값한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잖아요.
그렇게 소문이 자자하나요?
그럼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어요.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걸요.
그렇군요.
털보는 끄덕이면서,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그녀가 일부러
지어낸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화가 그 남자하고 밤낮으로 붙어다닌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무화하고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애가 그러는데 그 사람이
파리에 오고부터는 무화가 숫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외박만 하고
있대요.
무화하고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사람이 누구죠?
오유린이에요. 오유린 몰라요? 도깨비 같이 생긴.......
아, 알아요.
오유린하고 나하고는 좀 통하는 데가 있거든요. 그 애가
그러는데 무화가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갑자기 못 보던 것들을
많이 가지고 다닌대요. 반지, 귀걸이, 목걸이, 핸드백 같은
것들이 전부 비싼 것들뿐이래요. 무화가 째지게 가난하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어디서 났겠어요. 그 남자가 사준거
뻔하잖아요. 그런데 참 무화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세요?
무화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입을 잘못 놀리고
있는지 모르겠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무화가
아니라 이 남자예요.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황표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사람한테 왜 관심이 있어요?
그럴 일이 있어요. 누구한테 부탁을 받았는데 그 사람의
소재를 알아달라는 부탁이에요. 내가 그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은 비밀로 해줘요.
맨 입으로 되는 게 어딨어요.
알았어요. 어느 날 저녁 술 한 잔 멋지게 살께요. 그 남자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마 호텔에 있겠죠 뭐. 그렇게
아니라 무화를 만나보시지 그래요.
어디 가면 무화를 만날 수가 있지?
집에 연락해 보시겠어요?
그녀는 생제르멩 데 프레 거리 뒷골목에 있는 유무화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제가 알려줬다는 말 절대 해서는 안 돼요.
그러면서 그녀는 유무화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털보에게
알려주었다.
무화는 아마 집에 없기 쉬울 거에요. 무화가 없으면
오유린한테 물어보세요.
고마와요.
강주미가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털보는 카페를 나와 미라가
기다리고 있는 피레네 호텔로 달려갔다.
그녀는 강간당한 흔적을 지우려는 듯 그때까지도 욕실의 욕조
속에 앉아 있었다.
털보는 욕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가 알아낸 정보를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 정도 가지고는 곤란해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난 그녀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유무화라는 아가씨 주소가 아니라 황표의 소재를 알아달란
말이야.
황표의 소재를 알려면 결국 유무화를 만나봐야 하는데 난 그
아가씨 그런 일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 아가씨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아는데...... 감정도 있고 해서 그런 일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자존심 상하니까.
미라는 그를 힐끗 올려다보고 나서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 과거의 여인이었나 보지?
아니예요. 그런 관계는 아니고. 아무튼 그 아가씨를 만나는
건 곤란해요. 그 정도 알려줬으니까 누님이 직접 시도해 보시는
게 어때요.
털보의 태도가 완강하자 그녀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는
눈치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수고 많았어.
그녀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물에 젖은 여자의 나체를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오유린은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얼른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화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화는 나흘 전에 짐을 챙겨들고 나간 뒤 지금까지 소식도
없었고 두 번 다시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 이틀 동안 유린은 무화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
기다림은 사흘째 접어들면서부터는 미움과 원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무화가 나타나면 다시는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고 집안에 받아들이지도 앉을 것이라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등 뒤에 느껴지는 인기척이 어째 낯선 것 같아 그녀는 뒤늦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웬 남자가 거기에 서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잿빛머리의 서양인이었다.
그녀가 놀라서 소리치려고 하자 남자의 가죽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잔뜩 쉬어빠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면 목을 분질러버릴 테다!
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목을 움켜쥐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의 젖가슴을 눌렀다. 그녀는 눈에서 눈물이
나왔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섭고 괴로왔기 때문에
그녀는 저항을 포기한 채 떨기만 했다.
또 다른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안으로 문을 잠그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다 동양인 같았는데, 그중 한 명은 여자였다.
그녀는 검은 코트 차림이었고,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잿빛머리의 서양인은 유린의 젖가슴을 보다 확실히 움켜잡기
위해 그녀의 옷을 헤쳤다. 조그맣고 말랑말랑 하면서도 건포도
색깔의 젖꼭지가 유난히 커보이는 젖가슴이 드러났다. 거친
인상에 표정이 없는 잿빛머리는 그녀의 젖가슴을 잡아 뜯을 듯이
움켜쥐고 동양인 남자를 돌아보았다. 유린의 젖가슴 밑으로
드러난 앙상한 갈비뼈가 애처러울 정도로 할딱거리고 있었다.
고급 회색코트 차림의 동양인 남자는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기름이 잔뜩 발라진 머리는 가지런히 빗질이 되어
있었고, 코 위에는 금테안경이 걸려 있었다.
그는 주방 쪽에서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걸터앉은 다음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동양인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이 남자 어디 있지?
유린은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국말에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 남자 어디 있느냐고!
여인이 사진을 흔들어댔고 그와 함께 젖가슴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늘어졌다. 유린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렸다.
그녀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잿빛은 주먹으로 그녀의 턱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그녀의 얼굴에서 안경이 떨어져나갔다.
잿빛은 그것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주먹으로 그것을
산산조각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유리조각을 하나 집어들더니
그것으로 거침없이 그녀의 젖가슴을 그었다. 하얀 젖가슴 위로
피가 솟아오르자 유린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목에
잠겨 밖으로 나오다가 말았다.
검은 코트 차림의 여인이 그녀의 눈앞에 다시 사진을
디밀었다.
이 사람 어디 있지?
안경이 없어진 유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의 얼굴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뭔가 잘못 된 것 같다.
이들이 뭔가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몰라요. 그런 사람 몰라요.
피에 젖은 젖가슴이 뒤틀렸다. 유린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기
위해 상체를 뒤틀었다.
정말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름이 뭐지?
오, 유린이에요.
유무화는 어디 있지?
모르겠어요. 싸우고 나갔어요.
언제 나갔지?
지난 7일에 나갔어요.
이 사람은 유무화의 안내를 받고 있는 한국 남자야. 이름은
황표라고 해.
무화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그녀는 왜 자기가 이렇게 낯선 사람들한테 잔인한 고문을
당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화때문이라고 생각하자 그녀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그 남자 여기 오지 않았어?
오지 않았어요.
그럼 밖에서라도 보지 않았어?
검은 코트는 날카로운 어조로 묻고 있었다.
보지 못했어요. 난 바깥에는 거의 나가지 않아요. 그 사람에
대해서 대강 이야기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어요.
두사람은 지금 함께 있겠지?
네, 그럴 거예요.
어디 숨어 있지? 넌 알고 있을 거야.
몰라요. 무화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가위가 필요한데 어디 있지?
가슴이 다시 뒤틀렸다. 유린은 책상서랍을 가리켰다.
검은 코트는 서랍 속에서 가위를 집어들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그것을 가져갔다.
시간이 없어. 우리는 급하단 말이야. 무화가 있는 곳을
말해봐.
몰라요. 알면 왜 알려주지 않겠어요. 정말 몰라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그녀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검은 코트의 여인은
마치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사정없이 가위질을 해댄다.
싹둑거리는 가위질 소리 사이로 유린의 흐느낌이 간간이
흐러나왔다.
머리가 모두 잘려나간 유린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기이해 보이기도 했다.
유린은 계속 흐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화는 어디 있지?
살려주세요. 정말 몰라요.
동양인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유린은 자기 앞으로 다가서는
그를 공포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자코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왼손으로 집어들었다.
그것을 보고 잿빛머리가 가죽 장갑 낀 손으로 유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동양인 남자가 시가를 한 번 깊이 빨아들이고 나서 그 끝으로
유린의 검푸른 젖꼭지를 건드렸다. 유린은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질렀다. 시가의 끝에 밀려 젖꼭지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살이
타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조금 후 유린은 고개를 밑으로 떨구면서 의자 아래로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무화는 돈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황표의 돈으로 아파트를 하나 얻으면서 느낀 것이었다.
황표가 서슴없이 돈을 내놓는 바람에 그녀는 멋진 아파트를
금방 얻을 수가 있었고, 그밖에 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전화며
집기류, 가전제품 같은 것들을 모두 새것으로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놓으면서 그녀는 새삼스럽게
돈의 위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표와의 관계가 그 정도에 이르자 그녀는 그전처럼
사양한다거나 하지 않고 그가 주는 대로 거침없이 받아 챙겼다.
그런 행동의 배경에는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리도 없지 않아
깔려 있었지만, 아무튼 그를 상대하면서부터 갑자기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새 아파트는 개선문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나온 포쉬 거리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울창한 불로뉴숲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거지역으로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녀가 세든 아파트는 15평쯤 되는 것으로 혼자 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화가 황표와 함게 에트왈 호텔을 나와 새 아파트로 숙소를
옮긴 것은 1월 10일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마치 신혼살림을 차림 것처럼 새로운
기분으로 이틀 밤을 보냈다. 무화는 아파트를 얻어준데 대해
황표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비스했고, 황표는
그녀를 거리낌없이 밤낮으로 탐닉했다.
12일 오후 황표는 어딘가 전화를 걸더니 로마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짐을 챙겼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로마에 가서 전화하겠다고
하면서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사뭇 흥분해서 서두르는 것이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황표가 사라지자 무화는 해방감과 함께 심한 피로감에
빠져들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제발 그가 다시 나타나주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어느 새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런 것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에 대해 구역질을 느끼면서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침대에 뛰어들어 오랜만에 기분좋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캄캄한 밤중이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담배를 피워물다 말고 문득
유린이 생각났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몹시 궁급했다.
그러지 않아도 다락방에 놔두고 온 책이며 그밖의 자질구레한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오려면 어차피 한 번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담배 한 대를 모두 태우는 동안 유린에 대해 품었던
감정들을 모두 버리기로 했다. 그것은 15평짜리 공간을
확보한데서 온 느긋한 마음가짐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생활 공간을 확보하고 보니 그녀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그래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싶었던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선 그녀는 벌거벗은 채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방 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갑자기 전화통 앞으로 다가서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유린에게 먼저 전화를 걸고 나서
그곳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파는 한참 벨이 울리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무화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한참 동안 수다를 늘어
놓은 뒤에야 유린에게 전화를 넘겨주었다.
그 집의 각 방에는 수신용 전화기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그것은 전화를 받는데만 사용할 수 있는 전화기였다. 전화를
걸려면 노파의 방으로 가서 요금을 지불한 다음 노파의 감시하에
전화를 걸도록 되어 있었다. 밖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일단
노파가 받은 다음 방으로 연결시켜 주어야만 받을 수가 있었다.
수화기를 통해 유린의 목소리를 들은 무화는 적지 않게
놀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
나좀......살......려......줘......나좀......나좀.......
아니, 왜 그러는 거야? 어디 아파?
아파 죽겠어......아무 것도 못 먹고 있어...... 병원에
데려다 줘...... 빨리 좀 와줘.......
알았어 곧 갈께.
무화는 재빨리 외출복을 입으면서 지금이야말로 유린에게
자신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유린에게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귀신처럼 웅크리고 앉아 책만
보더니 결국 탈이 나고 말았어.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애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황폐되었어. 좀 쉬어야 해. 술도
마시고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해야 해. 그 애는 자신을 너무
학대했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과일과 마실 것을 준비한 다음 택시를 타고 셍 제르맹
데 프레 거리로 달려갔다.
그녀는 유린이 병이 나서 누워 있다는데 대해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노파와 마주쳤다. 그녀는
노리끼리한 눈으로 무화를 노려보았다. 화가 나서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무화는 노파의 볼에
입을 맞춘 다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이윽고 다락방 문 앞에 멈춰선 그녀는 곧바로 방안으로
들어서기가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문에 귀를 대고
방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강요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때처럼 노크하지 않고 그녀는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유린의 책상이었다. 눈에 익은 모습,
그러니까 책상 앞에 귀신 같은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어야할
유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유린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 끝까지 시트를 뒤집어 쓴
채 떨고 있었다. 무화는 침대 쪽으로 곧장 다가갔다. 괴로운
신음소리가 시트 속에서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린아!
하고 부르면서 무화는 유린의 머리에서 시트를 홱 벗겨냈다.
거의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는 어머! 하고 놀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유린은 기묘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녀의 머리부터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던 머리는 남자처럼 짧게 잘려 있었는데, 그것도 가지런히
잘린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싹둑싹둑 잘려 있었기 때문에 몹시
흉칙해 보였다. 거기에다 그녀는 벌거벗기운 채 손과 발이 가는
나일론 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발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녀는 옆으로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몸을 홱 돌리자 잿빛머리의
건장한 사나이가 다리를 벌린 채 방문 앞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두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엇다.
생명이 없는 것 같은 그 눈을 보는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살인자의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때 욕실문이 열리면서 금테안경을 낀 남자가 또 한 명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이번에는 검은 테의 안경을 낀 동양인
여자가 나왔다.
무화를 소리를 질러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그녀에게 돌아올 결과가 두려웠다. 구원을
받기도 전에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누구예요?
그녀는 겨우 이렇게 물었다.
우린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여학교 사감처럼 생긴 여자가 불어로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몹시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무화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 건 알 필요없어.
검은 코트의 여인이 내뱉듯이 말했다.
무화는 문 쪽으로 돌진했다. 문 앞에 버티고 있는 남자를 치고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남자의 우악스런
손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를 들어
던졌다. 무화는 방바닥에 굴러떨어져 한 번 구른 다음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는 의식이 몽롱해졌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
여자가 이번에는 한국 말로 말했다. 무화는 더욱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한국 사람이군요.
무화는 호소하듯 말해 보았다.
검은 코트의 동양 여인은 코웃음쳤다.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난 한국인이 아니고 세계인이야.
세계를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코스모폴리턴이야.
원하는 게 뭐예요?
네 이름을 먼저 말해 봐.
무화는 바른 대로 이름을 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경숙이라고 해요.
검은 코트가 눈짓을 보내자 잿빛머리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는 거침없이 주먹으로 무화의 턱을 후려갈겼다. 턱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옷을 벗어.
여인이 말했고, 잿빛머리는 묵묵히 주먹만 휘둘렀다. 그는
먼저 무화의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마치 샌드백을 두드리듯
닥치는 대로 그녀를 후려갈겼다.
고통에 견디지 못한 무화는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될수록 빨리 옷을 벗어던졌다. 옷을
벗으면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유린의 몸뚱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유린의 몸뚱이는 성한데 하나없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불에 덴 자국과 피멍으로 끔찍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무화는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었다.
금테안경이 다가왔다. 그의 지시에 따라 무화는 방바닥 위에
누웠다. 등에 와 닿는 닳아빠진 카핏 바닥의 감촉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금테안경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는
막대기 끝으로 그녀의 몸을 건드렸다. 그러다가 그 끝으로
배꼽을 찔렀다.
네 이름이 뭐지?
여인이 물었고, 금테안경은 막대기에 힘을 가했다. 무화의
배꼽은 깊숙이 들어갔고, 조금 더 힘을 가하면 배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무화는 입에 물린 재갈을 손으로 가리켰다.
잿빛머리가 그녀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냈다.
우린 별로 시간이 없어. 묻는 대로 빨리 대답해 줘야겠어.
유무화라고 해요.
마침내 무화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진작 바른 대로 말할 것이지. 우린 너 같은 거 아주 쉽게
처치해 버릴 수 있어. 파리보다 더 간단히 죽일 수 있어.
여인이 말하고 있는 동안 금테안경은 호주머니에서 재크나이프
같은 것을 꺼내더니 철컥하고 날을 폈다. 그리고 그것을 무화의
얼굴 가까이 들이 댔는데, 그것은 칼날이 아니고 톱날이었다.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릴 거야. 열
손가락 모두 잘리기 전에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검은 코트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소리 같았다.
잿빛머리가 구둣발로 무화의 오른 손목을 힘껏 밟았다. 그러자
금테안경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무화의 오른손 장지를 잡고
거기에다 톱날을 갖다댔다. 그는 여차하면 정말 그것을 썰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말하겠어요.
무화는 걷잡을 수 없이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외쳤다.
조용히! 황표는 지금 어디 있지? 네가 안내해 주고 있는 그
뚱뚱한 사람 말이야?
여인이 무화의 눈앞에 황표의 사진을 디밀었다. 무화는 비로소
그들이 왜 그곳에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 로마로 떠났어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갑자기 떠났어요.
로마 어디야? 주소를 말해 봐.
거기까지는 몰라요. 로마에 가서 연락해 주겠다고 했어요.
금테안경이 다시 그녀의 오른손 장지를 움켜잡았다. 그는
거침없이 톱날로 그녀의 손가락을 그었다.
날카로운 톱날이 살갗을 헤치고 손가락 뼈를 갉아대자 무화는
몸을 뒤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잿빛머리의
구둣발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구둣발로 그녀의 입을
짓이겼다.
무화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보면서 그것이
잘리지 않고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로마의 어디야? 그쪽 주소를 말해 봐.
검은 코트의 여인은 더욱 표독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정말 몰라요. 모르는 걸 거짓말로 말할 수는 없잖아요.
무화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몇 번 더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었고, 무화는 그때마다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면 손가락이 잘릴지도 모르는 판에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녀에게는 잔인한 고문을 견뎌내면서까지 황표를
보호해주어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를 지켜줄만큼 그렇게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점을 그녀는 그들에게 호소했고, 그녀의 그 같은 눈물겨운
호소가 받아들여졌는지 그들은 그녀의 손가락을 자르려던 짓을
그만두고 그대신 그녀에게 이상한 짓을 강요했다.
지금부터 너는 개가 되는 거야. 개처럼 기어 다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갔다가 오는 거야. 멈추면 안 돼. 쉬지
말고 계속 왔다갔다 하란 말이야.
그런 짓을 시킨 사람은 검은 코트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런
괴이한 짓을 보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어느 새 그녀의
손에는 가죽 허리띠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손에다 한 번
감더니 그것으로 머뭇거리고 있는 무화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하겠어요.
무화는 얼른 개처럼 웅크렸다. 그녀의 엉덩이에 철썩하고
채찍이 날았다. 무화는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벌거벗고
기어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극도의 수치심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 짓이 계속되는 동안
그런 감정은 어느 새 사라지고 그대신 어떻게든 살아서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그자를 찾아야 해.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어. 그 자를
찾는데 협조할 거야 안 할 거야?
협조하겠습니다.
그녀는 무릎이 아파왔다.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자 잿빛머리의
사나이가 구둣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는 꼬꾸라졌다가
다시 일어나 기었다.
그 자와의 관계를 말해 봐.
무화는 황표를 알게 된 경위와 지금까지 그와 함께 어떻게
지내왔는지, 묻는 대로 숨기지 않고 이야기해 주었다.
검은 코트의 여인은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얼마나 거대하고
무서운 존재인가를 설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화가 잔뜩 겁을
집어먹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황가는 우리 조직을 배신했어. 우리는 배신자를 그대로 두지
않아. 황가가 너한테 준 돈은 모두 우리 조직의 돈이야. 그는
조직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거든.
밤이 깊어갔다.
자정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무화에 대한 가혹 행위를 그만 두지
않았다.
무화의 무릎은 벗겨져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기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칠대로 지쳐 쓰러지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몸뚱이 위로 채찍과 구둣발이 날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일어나 기어야만 했다.
그들은 그녀를 협박하고 회유함으로써 결국은 그녀를 세뇌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여러 시간에 걸쳐 고통을 당한 무화는 그들 조직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었고, 거기에 저항함으로써 목숨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나약해지고 비굴해진 자신을 발견했지만
거대한 벽 앞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유린을 인질로 데려가겠어. 유린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네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 네가 황가를
우리한테 넘겨주면 유린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어. 그렇지 않고
황가를 빼돌리거나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유린은 살아서 돌아 올
수 없을 거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더이상 파리에 있을
수도 없고 그 몽뚱이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을거야.
잘 알겠습니다. 제발 더 이상...... 좀 쉬게 해주세요. 아파
죽겠어요.
그녀의 양쪽 무릎은 모두 벗겨져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좋아. 그만 하면 됐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무화는 검은 코트의 여인에게 매달려
호소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유린만은 풀어주세요.
친구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제 친구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제발
부탁해요. 유린은 너무 몸이 약해서 저러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녀의 호소는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은
코트의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유린을 인질로 삼은 것은 네가 우리 명령을 듣지 않을까봐
그런 거야. 너는 우리 손에서 풀려나면 자유로운 몸이 돼. 그런
너를 붙잡아 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린을 인질로 삼는 것밖에
없어. 넌 설마 유린의 생사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겠지. 너를
인질로 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황가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너를 풀어줄 수밖에 없어. 너는 황가와 우리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해야 하거든. 하지만 풀려났다고 해서 딴 마음을
먹어서는 안 돼. 너는 우리의 감시하에서 우리 지시를 받아야
해. 경찰에 신고하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건 아주 어리석은
짓이야. 유린의 죽음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짓이란 말이야.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서 유린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일단 유린이 인질이 되면 유린이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몰라. 유린은 우리 손을 떠나 다른 사람들의 감시를 받게
돼. 우리 족직은 철저하게 점조직이기 때문에 경찰이 우리를
체포한다 해도 유린을 찾아낼 수는 없어.
경찰에는 절대 말하지 않겠어요.
자, 이제부터 모두 여기를 조용히 빠져나가는 거야.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탁상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 6.유괴 │
└────────────────────────────┘

1월 13일 밤 충무.
남화가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충무의 친정집은 그녀가
태어나서 자란 고가였다. 넓은 터에 지은 지 수십 년이 지난 그
기와집은 적은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컸다. 그래도 낮에는 어린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사람이 사는 것 같지만 밤이
되어 아이들도 잠들고 나면 집 안은 쥐죽은 듯 적막감에 휩싸여
기침소리 하나 내는 것조차 신경에 거슬린다.
그 집은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따뜻한 햇볕 속에 있기 때문에 넓은
터에는 겨울인데도 소나무, 동백나무 같은 상록수들이 짙푸른
잎들을 드리우고 있었다.
남화는 안방에서 조금 떨어진 방을 아들과 함께 쓰고 있었다.
안방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조카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친정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부터 그녀는 밤마다 거의 잠을
못이루고 있었다. 남편의 일이 걱정되고 앞날이 두렵고 불안해서
단 하룻밤도 마음 놓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도 잠을 못이루고 뒤척이다가 그녀는 밖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아 밤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 공기가 차가왔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기 때문에 별로
추운 것 같지가 않았다.
바다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이즈러진 하현달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기둥에 머리를 기댄채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때문에 별들이
눈앞에서 마구 떨다가 자꾸만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참 후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섬돌 밑으로 내려섰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몸에 와 감기는 정적이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화장실은 마당 한쪽에 있었다. 배설 자체를 귀찮게
생각하면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소변을 보고 막 밖으로 나오는데 시커먼 것이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고 못한 채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때 뒤에서 팔이 뻗어와 뱀처럼 그녀의 목을
휘어감았다. 앞에 서있던 시커먼 것이 그녀의 복부를 후려쳤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무릎을 꺾었다.
조용히 해! 떠들면 죽인다!
시리도록 차가운 것이 목에 와닿았다.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모두 두
명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아랫목에는 꿈에 볼까 두려웠던
사내, 그녀를 강간했던 바로 그 사내가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그는 그 전처럼 캡을 눌러 쓰고 있었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남화는 먼저 아들을 찾았다. 아이는 이불 속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방 안으로 끌고 왔던 두 명은 눈만 나오는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또 만났군.
캡의 사나이가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화는 증오에 찬 눈으로 캡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캡이 재크나이프를 꺼내 그것을
인하의 목에 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바들바들 떨었다.
안 돼요! 애한테 손대지 말아요!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응해.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의 생명은
여기서 끝장나는 거야.
그것은 지옥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소리였다.
두 명이 그녀의 손과 발을 준비해온 철사로 묶었다.
이 집에는 너하고 또 누가 살고 있지?
어머니하고 조카 두 명이 있어요.
그밖에는?
없어요.
모두 어느 방에 있지?
안방에 있어요. 우리 어머니한테는 손대지 말아요.
시끄럽게 굴면 귀찮아. 조용히 해놓고 와.
캡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
남화는 묶인 발을 앞으로 뻗은 채 뒷짐을 지고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악에 받쳐 있다는 건 잘 알겠지?
알고 있어요.
남화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
깊게 대꾸했다.
모두가 추동림 탓이야. 이걸 보라구. 네 남편이 도끼로
찍은거야.
캡은 코트를 열어 붕대에 감긴 어깨를 보여부었다.
추동림은 도끼로 나를 찍어 죽이려고 했어. 하지만 이런건
아무래도 좋아. 당신 남편은 우리의 귀중한 물건을 훔쳐갔어. 그
물건이 뭔지 알겠어?
모르겠어요. 전 아무 것도 몰라요.
그렇다면 알려주지. 추동림은 헤로인을 훔쳐갔어.
2킬로그램이나 되는 헤로인을 훔쳐갔어. 헤로인 2킬로그램이면
싯가 얼마인 줄 아나? 1천만 달러...... 한국 돈으로 90억
원이야. 돌려 달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어.
우리는 국제적인 조직이야. 우리 조직에 해를 끼치는 자는
철저하게 보복을 받아. 당신 남편은 큰 잘못을 저질렀어.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했어.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그 물건만
돌려주면 없었던 걸로 하겠어. 남화, 네 가정의 행복이
필요하나, 아니면 헤로인이 필요하나?
헤로인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요. 그이를 설득시켜 물건을
돌려드리도록 하겠어요. 약속하겠어요.
추동림은 어디 있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가끔씩
안부 전화만 오고 있어요.
물건을 이 집에 숨겨놨지?
아니예요. 그런 건 보지도 못했어요. 그이는 이 집에 오지도
않았어요.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군. 정신차리게 해줄까?
그때 문이 열리고 두 사내가 들어왔다. 남화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했어요?
조용하게 해놨어. 입에 재갈을 물려놨으니까 걱정할 건
없어.
세 명은 모두 구두를 신은 채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아이를 묶어. 소리지르지 못하게 입도 막아.
캡이 지시하자 두 사내는 재빨리 자는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아이한테 손대지 말아요!
남화는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앉은 채로 아이 쪽으로 다가가자 캡이
주먹으로 그녀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녀는 뒤로 힘없이 벌렁
나동그라졌다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조용히 하란 말이야. 시끄럽게 굴면 아이가 죽어.
조용히 할 테니까 아이한테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그건 안 돼. 난 물건을 찾아야 하거든. 아이하고 물건을
맞바꾸는 게 어때?
짐짝처럼 거칠게 다루어지는 바람에 아이는 놀라 깨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이 테이프로 발라져 있었기 때문에
울음소리는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발버둥치는 아이의
손발을 사내들이 철사로 무자비하게 묶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아이를 가지고 온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아이는 자루 속에서 몸부림쳤다.
남화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목숨을 버릴 수 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남편도 버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안타까와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냉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무서운 자들이라는 것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한 명이 자루를 둘러메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도
따라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손발이 묶여 있어 겨우 문 쪽으로
굴러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녀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따라가고 싶은가?
안 돼요! 우리 아들을 돌려주어요!
우리한테는 아이보다도 헤로인이 더 귀중해.
캡은 그녀의 발을 묶은 철사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손을 묶은
것은 풀어주지 앉았다. 그들이 떠다밀기 전에 그녀는 아들을
찾으려고 뛰어나갔다. 밖에는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사내가 자루를 차 트렁크 안에 던져넣고 나서 문을 쾅하고
닫았다.
그녀는 뒷좌석에 처박혔다. 그녀의 양쪽에 사내들이 올라탔다.
우리 아이, 질식해 죽는단 말이에요!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에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옆구리로 팔꿈치가 들어왔다.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는 것 같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차는 빠른 속도로 바닷가 쪽으로 달려갔다.
밤 늦은 시간이라 거기에는 다니는 차량이나 사람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얼마 후 차는 바닷가에 이르러 조용히 멈춰섰다.
주위에는 인가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포장된 도로의 한쪽은
바다였고 다른 한쪽은 야산이 시커먼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도로는 만을 따라 곡선을 이루며 달리고 있었고, 바다의 수면은
도로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앞에는 섬들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는 파도 하나없이
흡사 호수처럼 잔잔했다.
남화는 차에서 밖으로 끌려내려졌다. 차 트렁크 속에 들어
있던 아이도 밖으로 끌어내졌다. 자루가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는 질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자, 마지막 기회다. 만일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자루를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 헤로인은 어디 있지?
캡이 구둣발로 자루를 건드리며 물었다.
정말 몰라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전 정말 몰라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몸을 굽혀 얼굴을 자루에다 비벼댔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껴 울었다.
추동림은 어디 있지?
몰라요.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요.
캡의 사나이는 자루를 집어들더니 그것을 거침없이 바다
물속에 처넣었다.
그것을 보고 남화는 비명을 질렀다. 바다로 뛰어들려는 그녀를
사내들이 붙잡았다.
캡은 자루를 물 속에 처넣었지만 자루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그는 자루 끝을 붙잡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헤로인이 있는 곳을 말해. 네 남편이 있는 곳도 말해. 그렇지
않으면 이걸 놓아버릴 거야.
말하겠어요!
캡은 자루를 물 속에서 끌어냈다. 자루 속에서 아이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자루에서는 바닷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캡이 그것을 길바닥 위에다
내려놓았다.
헤로인은 어디 있지?
그대로 두면 얼어 죽어요! 빨리 아이를 꺼내줘요!
헤로인은 어디 있지?
저기...... 집에 있어요. 천장에 숨겨놨어요.
그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
드러날 거짓말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 집에 있다는 거야?
부산 집에 있어요.
거짓말 마! 그 집에는 지금 경찰이 진을 치고 있어. 그런
곳에다 놨을 리가 없어.
경찰이 올 줄 모르고 거기에다 숨겨놨던 거예요.
그렇다면 좋아. 경찰이 찾고 있는 건 남편이지 너는 아니야.
경찰은 네가 사람을 치어 죽이고 뺑소니쳤다는 것 아직 모르고
있어. 내가 경찰에 아직 신고하지 않았으니까 너는 그 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 너는 지금 바로 부산집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어. 헤로인이 아직 거기에 안전하게 있는지 확인해
봐. 아이는 우리가 데려간다. 헤로인이 내 손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 아이를 내줄 수 없어.
말을 마친 캡은 자루를 다시 차 트렁크 속에 처넣고 쾅하고
닫았다. 그들은 남화를 그곳에 남겨두고 자기들만 차에 올랐다.
남화는 죽을 각오를 하고 차 앞으로 가로막았다.
거짓말이었어요! 부산집에는 헤로인이 없어요!
캡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남화의 멱살을 움켜잡더니 미친 듯
흔들어댔다.
추동림한테 그대로 전해라! 물건을 돌려주지 않으면 아이를
삶아 죽이겠다고! 부산집으로 연락할테니까 이제부터 넌 그곳에
가있어!
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길 한켠으로 내동댕이쳤다. 뒤로 손이
묶인 그녀는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박히면서 몇 미터 저쪽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고통 같은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들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발버둥치며 몸을 일으켰을 때 차가
엔진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막 출발했다.
인하야! 인하야!
그녀는 울부짖으며 차를 쫓아갔다. 맹렬히 뒤쫓아 갔지만
차와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다가 나중에는 빨간 불빛만 보이더니
이윽고 그것마저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숨이 턱에 닿은 그녀는 더이상 뛰어갈 수가 없었지만 계속
울부짖으며 차가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울부짖음은 점점 구슬픈 가락으로 변하면서 어두운
허공 속으로 흩어져 갔다.
갑자기 그녀의 뒤쪽이 환해지더니 클랙션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를 정신없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키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트럭을
올려다보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차 안의 남자들은 꽤 놀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를
산발한 여인이 맨발에 뒤로 손이 묶인 채 차도 한가운데서
울부짖고 있으니 아무리 강심장인 남자들이라 해도 놀라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자정이 막 지난 시간이었다.
그 트럭은 공사장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온통
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낡은 트럭만큼이나 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더럽고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눈들은 순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 저거 귀신 아니야?
중년의 운전사가 술냄새를 풍기며 물었다.
진짜 사람 같은데요.
조수석의 청년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다 내던졌다.
살려달라고 하는데요.
내려가 봐.
운전사는 엔진을 끄지 않은 채 대기했다.
조수는 내키지 않는 듯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 귀신 같은
여인에게 접근했다.
살려주세요! 어떤 놈들이 우리 아이를 납치해 갔어요! 우리
애를 구해 줘요! 조금 전에 저쪽으로 갔어요! 빨리 구해
주세요!
조수는 그녀를 부축해서 차에 태웠다.
그녀의 말을 듣고 운전사는 차의 속력을 높였다.
차가 질주하는 동안 조수는 남화의 손목에 감겨 있는 철사를
풀어주었다.
트럭이 시내에 진입할 때까지 아이를 납치해 간 차는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는 트럭을 세우고 남화를 돌아보았다.
늦기 전에 경찰에 신고하세요. 차 번호 알고 있어요?
네, 알고 있어요.
아, 저기 마침 경찰차가 오는군.
저만치 앞에 경찰 페트롤카가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천천히
굴러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운전사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깜박이자 경찰차는 트럭 앞으로 다가와 섰다.
경찰은 한밤 중에 엄마가 보는 앞에서 어린아이가 납치된
사실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다. 평화롭기만한 지방도시에
일찌기 그런 사건이 없었는데다 사건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신고를 받은 즉시 충무 일원에 비상망을 펴고 남화가
일러준 번호판을 단 승용차를 수배했다. 그러나 날이 샐때까지도
그런 차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그 차가 이미 충무를 빠져나갔을 것으로 보고 전국
일원으로 비상망을 확대했다.
그 차를 찾는 한편으로 경찰은 납치된 아이의 어머니인
남화로부터 사건에 대한 진술을 자세히 청취하기 위해 애를
먹어야 했다. 애를 먹게 된 것은 남화가 어쩐지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범인들이
한밤중에 굳이 그녀의 집에 나타나 아이만 납치해간 사실을 보고
경찰은 틀림없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보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 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해
보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들이 왜 자기 아들을 납치해 갔는지 자기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실성한 듯한 얼굴로 울면서 아들 이름만
불러대는 것이었다.
남화로서는 경찰의 힘을 빌어서라도 한시 바삐 아들을 찾아야
하면서도 아들이 납치된 이유를 경찰한테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괴롭기만 했다.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그 이유를 한사코 숨기고 있었다.
경찰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납치된
아이의 아버지 이름이 추동림이란 것을 알게된 경찰은 그것이
현재 전국에 수배중인 살인범의 이름과 일치한 것을 발견하고는
수배전단에 실린 사진을 남화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이 인하 아버지 맞습니까?
그렇게 들이대는데야 남화는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네, 맞아요.
지방 경찰은 현재 추동림을 쫓고 있는 서울의 수사팀에게
납치사건을 보고할 필요성을 느꼈다.
노인배 경감이 연락을 받고 급히 충무에 나타난 것은 1월 14일
12시경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연락을 받고 비행기편으로
부산까지 날아와 다시 배를 타고 충무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습니다.
남화를 보자 그는 이렇게 첫마디를 꺼냈다.
우리보다 먼저 범인들이 나타났군요. 인하를 빨리 찾고
싶으면 우리한테 적극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놈들은 잔인무도한
놈들입니다. 아이 하나 죽이는 것쯤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게 하는
놈들입니다.
빨리 우리 애를 구해 주세요.
남화는 울먹이면서 몸을 떨었다.
당신 남편은 마약조직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헤로인 2킬로를 가지고 도망중입니다. 그것때문에 사람까지
죽였지요. 우리는 조직간의 암투로 보고 있습니다.
노경감은 그녀에게 신문기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녀도
읽은 바 있는 남편에 관한 기사였다.
남화는 신문을 던지고 경감을 쳐다보았다.
부산 집으로 가야 해요! 그 사람들이 그리로 연락하겠다고
거기에 가있으라고 했어요!
납치범들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네, 그랬어요.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경감은 남화를 데리고 연안부두로 나갔다. 그들 뒤를 마형사와
오갑자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출발 시간까지는 20분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해서 경감은 대합실 한 구석에서 남화에게 말을 걸었다.
수사에 협조해야만 인하를 빨리 찾을 수 있습니다.
납치범들이 뭐라고 했나요?
헤로인을 돌려주지 않으면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했어요. 인하를 자루 속에 넣어...... 바닷물 속에
처넣었어요...... 그들은 악마였어요.......
그녀는 떨면서 소리를 죽여 울었다.
헤로인을 어디다 숨겨 놨나요?
그걸 알면 제가 왜 그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았겠어요. 그것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우리 아이보다 중하지는 않아요.
네, 그러실 테죠. 결국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길은
추동림씨한테 달려 있군요. 부군께선 인하를 귀여워 하는가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버릴 분이에요. 아이가
납치된 사실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추동림씨를 은밀히 만나보았으면 좋겠는데. 좀
도와주시겠 습니까?
경감은 남화의 눈치를 살폈다. 남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이가 어디 있는지 전 몰라요. 위험하다고 하면서 저하고
아이를 친정에 맡겨두고 떠났어요.
어디로 간다고 하면서 떠났습니까?
그런 건 저한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남편이 해외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연락은 오고 있습니까?
네, 가끔씩 안부 전화가 왔었어요.
하루 빨리 자수시켜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부산 가는 쾌속정이 부두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경감은
남화를 부축해서 배 안으로 들어갔다.
선실 안에는 승객들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이 눈부셨다. 배가 부두를 빠져나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파도가 창문을 덮쳐왔다.
경감은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 흉악범의 아내치고는 선량하고
아름답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도 조직에 관계되어
있을까. 그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광복동에 있는 의상실은 형식적으로 차려놓은 건가요?
남화는 미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차려놓은 게 아니예요.
그렇다면 양쪽에서 돈을 벌었군요. 의상실에서 돈을 벌고
마약에서도 돈을 벌어들이고 말입니다.
그 말에 남화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눈물에 젖은 그녀의 두 눈은 검은 빛으로 빛났다. 경감은
차가운 운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사람은 겉만 보아 가지고는
모른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해온 터였다. 여자의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정체를 벗기고 싶은 충동에 그는
사로잡혔다.
그렇지 않을 리가 있나요. 이렇게 모든 게 드러났는데도
거짓말을 할 건가요? 거짓말을 하는 이상 아이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 수사를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내가 사람을 치어죽이고 도망친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것만 밝히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다른 말로
대신했다.
거짓말한 게 아니예요. 우리는 마약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지금까지 그런 것은 보지도 못했어요.
우리가 아니겠지요. 부인께서는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을
몰랐다는 말이 되겠지요. 사람을 살해하고 헤로인 2킬로그램을
가지고 도주한 사실을 뭘로 설명하시겠습니까? 추동림씨는
일정한 직업없이 집에서 놀고 있었지요?
네, 그래요. 놀고 있었어요. 하지만 마약조직에 관계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관계했다면 제가 왜 몰랐겠어요.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그이는 정말 깨끗한 분이에요.
그녀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안타까운 눈으로 경감을
바라보았다.
경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그이가 왜 사람을 죽였는지,
그리고 왜 헤로인 같은 것을 가지고 도망 중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틀림없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이는 절대 마약조직에 관계할 사람이 아니예요. 그이는 깨끗한
사람이에요. 제 남편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니예요.
그이는 어떤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이를
이해해 주세요...... 그이를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그이는
착한 사람이에요.......
남화는 흐느껴 울었다.
경감은 흐느끼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이것은 연기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기라면 이 여자는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났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
헤로인을 봤습니까? 남편이 가지고 있는 헤로인 말입니다.
보지 못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필요한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거짓말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동림씨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있었나요?
네, 그랬어요.
부인이 출근하고 나면 하루종일 집을 지키면서 애나 봤다
이거군요?
네, 그랬어요.
그럼 생활비는 부인이 벌었나요?
남화는 고개만 끄덕였다.
추동림씨는 왜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그 물음에 대해 그녀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직장생활 같은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얼른
이해가 가시지 않겠지만...... 그분은 너무 비현실적인 데가
많은 사람이에요. 구속이나 규칙 같은 것을 싫어하고, 사람
사귀는 것도 싫어하고, 그래서 친구 하나 없어요. 아무 구속도
받지 않고 혼자 자유스럽게 지내는 것을 좋아해요.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 살아갈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아마 혼자 내버려두면 자기 입에 풀칠도
못할거예요. 저 아니면 아무도 그분을 이해할 수 없어요.
부인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마약조직과 손을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그분은 저한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아요.
생활능력이 없는 남편에 대해서 불만은 없었나요?
아니요. 전혀 없어요. 저는 그분을 사랑해요.
그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가장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주로 그이,
그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부르는 말투 속에는 남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담겨 있는 듯이 보였다.
만일 추동림씨가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것
같습니까?
그걸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범인들이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범인들은 헤로인을 돌려주기만
하면 아이를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니까 그분은 틀림없이 헤로인을
그들에게 돌려줄 거예요.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런데 부인, 추동림씨가 범인들과 협상하는 건 좋지만 그
전에 우리와 꼭 상의했으면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아이도 찾고 범인 일당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몰래
그들과 협상하면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남화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분을 체포할 거 아닌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이를 구해내는데 도움이 된다면
아이를 구할 때까지 만이라도 체포를 늦출 수 있습니다. 살인범
체포보다는 아이를 구해내는 게 급한 일이니까요. 아무튼 우리는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아이를 못 구해낼지도 모릅니다. 부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알겠어요. 그분한테서 전화가 오면 그렇게 이야기해
보겠어요.
꼭 부탁합니다.
배는 어느 새 부산 연안부두로 들어서고 있었다.
추천 (0) 선물 (0명)
IP: ♡.99.♡.87
23,55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2-19
0
359
3학년2반
2022-02-19
0
335
3학년2반
2022-02-18
0
378
3학년2반
2022-02-18
0
425
3학년2반
2022-02-18
0
391
3학년2반
2022-02-18
0
456
3학년2반
2022-02-18
0
770
3학년2반
2022-02-17
0
470
3학년2반
2022-02-17
0
391
3학년2반
2022-02-17
0
517
3학년2반
2022-02-17
0
361
3학년2반
2022-02-17
0
520
3학년2반
2022-02-16
0
619
3학년2반
2022-02-16
0
656
3학년2반
2022-02-16
0
659
3학년2반
2022-02-16
0
556
3학년2반
2022-02-16
0
909
3학년2반
2022-02-15
0
907
3학년2반
2022-02-15
0
695
3학년2반
2022-02-15
0
480
3학년2반
2022-02-15
0
955
3학년2반
2022-02-15
0
329
3학년2반
2022-02-14
0
348
3학년2반
2022-02-14
0
380
3학년2반
2022-02-14
0
477
3학년2반
2022-02-14
0
334
3학년2반
2022-02-14
0
378
3학년2반
2022-02-13
0
335
3학년2반
2022-02-13
0
419
3학년2반
2022-02-13
0
339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