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미로의 저쪽 5

3학년2반 | 2022.02.07 07:05:19 댓글: 0 조회: 63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962

다음날 오후.
면도날은 민들레 다방에 나왔다. 다방까지 오면서도 그는 줄곧 뒤쪽을 조심했는데 아무리 봐도 미행자는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주인 마담을 기어코 정복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들어섰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이 든 레지를 손짓해 불렀다.
"주인 마담 어디 갔나?"
"잠깐 다녀온다고 나갔어요."
레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면도날이 날카롭게 물었다. 언젠가 하룻밤 그는 그 레지를 데리고 논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았는데, 레지는 그게 아쉬워서 항상 그가 다시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레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머뭇거렸다.
"뭔데 그래? 빨리 말해 봐."
"저기...... 그 여자 이상해요."
"그 여자라니, 누구 말이야?"
"주인 여자 말이에요."
"강마담 말이야?"
"네......."
그녀는 무슨 큰 비밀이나 되는 듯 끄덕였다.
"그 여자가 어째서?"
"아무래도 이상해요."
그녀가 주인 마담을 눈의 가시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질투이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가짜 같아요."
"가짜라니, 뭐가?"
면도날의 눈에 비로소 긴장이 서렸다.
레지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머리에 쓴 거 가발이에요. 머리가 그렇게 하얗지 않아요. 아주 젊은 여자라구요."
"그거 확실해?"
면도날은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화장실에서 머리를 고쳐 쓰는 걸 얼핏 봤어요. 분명히 가발이었어요. 왜 그렇게 변장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음...... 그러고 보니까 손 같은 게 젊은 여자처럼 고왔어. 늙은 여자치고는 어딘지 어색한 데가 많았어. 네가 눈치챈 거 그 여자가 알고 있나?"
"알고 있어요. 화장실에서 저하고 눈이 마주쳤는걸요."
"아무 말 안 해?"
"그저께 그랬는데 퇴근할 때 저를 따로 불러 10만원을 주더군요. 그러면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못 본 걸로 해달라고 그랬어요."
"못 본 걸로 해달라......."
"네, 그랬어요. 사장님도 모른 체하세요."
그러는데 문이 열리고 오월이 들어왔다.
오월의 눈이 재빨리 두 남녀의 표정을 훑었다.
레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구, 강마담!"
면도날은 손을 들어 보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제 오셨어요?"
오월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벌써 와서 기다렸지."
면도날은 웃는 얼굴 뒤로 날카롭게 그녀를 주시했다.
"하루 사이에 더 예뻐졌는데......."
"어머, 그래요? 고마워요."
"고마우면 한턱 내야지."
"또 도망치시려구요."
그녀는 곱게 눈을 흘겼다.
"아니야,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아. 오늘은 한가해."
"사장님이 한턱 내세요. 보시다시피 물 장사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좋아. 내가 멋지게 한 잔 사지. 에또, 어디가 좋을까?"
"조용한 데로 가요."
그녀는 요염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조용한 데가 있어. 7시 30분에 차를 가지고 올 테니까 다방 앞으로 나와요."
"네, 그렇게 해요."
그녀가 너무 선선히 응했기 때문에 면도날은 약간 당황한 기분이었다.
당황하기는 오월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를 잡기 위해 응하긴 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했다. 당황하던 레지의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함정에 걸려든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 끝에 레지를 불렀다.
레지는 각오했다는 듯이 콧대를 세우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 그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오월은 조용히 물었다.
레지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하나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 이야기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알고 싶은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럼 아까 왜 그렇게 나를 보고 당황했었지?"
"당황하긴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월은 집요하게 늘어붙어 캐물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 봐요. 분명히 나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아니래두요. 왜 그렇게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세요?"
"관심이 많은 게 아니야. 난 미스 박이 약속을 어기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그런 거야."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만일 제가 이야기했으면 성을 갈아도 좋아요. 정말 말하지 않았어요. 약속을 했는데 왜 이야기를 하겠어요?"
"약속했지만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지. 원래 입이란 가볍기 마련이니까."
오월은 10만원짜리 자기앞 수표를 꺼내 그녀 앞에 가만히 내놓았다. 레지는 그것을 흘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이었으나 동요의 빛이 역력했다.
"넣어둬. 어려울 텐데 쓰라구."
레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욕망을 억제하려고 애쓰고 있음이 얼굴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건 필요 없어요.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안심하세요."
"정말이야?"
오월은 무서운 눈으로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레지는 찔끔하는 표정이다가 이내 도전적으로 나왔다.
"네, 정말이에요. 말했으면 성을 간다니까요."
"그렇다면 고마워. 거기에 대한 표시니까 받아둬."
레지는 이래도 돈이 생기고 저래도 돈이 생기자 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슬그머니 돈을 받아 챙겼다.
"앞으로도 부탁해."
"염려 마세요. 헌데 왜 그러세요?"
"뭘 왜 그래?"
"왜 그러고 다니세요? 남들은 젊어 보이려고 그러는데 왜 일부러 그렇게......."
오월은 손을 내저었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까 묻지 마. 괴로워."
레지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일어섰다.
오월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5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 반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레지로부터 몇 번씩이나 다짐을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면도날이 레지로부터 귀띔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어떻게 할까. 이번이야말로 그를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가 모르고 있다면 말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를 영영 놓칠지도 모른다. 얼마나 어렵게 마련한 기회냐.
한편 면도날은 자못 흥분해 있었다.
"그년이 틀림없나요?"
젊은 여자가 물었다. 살쾡이처럼 날쌘 것이 특징이었고 그래서 살쾡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틀림없다니까!"
면도날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흰 창이 많은 눈을 휘번덕거리고 있었다.
"민들레에 그렇게 출입하시면서 왜 지금까지 몰랐어요?"
"변장했으니까 몰랐지. 넌 알았어?"
"전 가끔 거기에 갔고......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았거든요."
"아주 교묘하게 변했기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어. 그리고 그 여자를 본 게 언제야. 지난 1월...... 그것도 밤중에 정신 없이 보았거든."
"붙잡아다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에요?"
"저녁에 만나 조용한 데로 가서 한 잔 하기로 했으니까 그때 확인해야겠어."
그는 지갑 속에서 신문지 조각을 꺼냈다. 그것을 뒤집자 오월의 얼굴사진이 보였다. 신문에 난 사진을 오린 것이었다.
"맞아. 이 얼굴하고 닮았어."
"확인한 다음에는 어떡하시겠어요?"
살쾡이는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어떡하긴....... 없애 버려야지."
면도날은 거미처럼 생긴 사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거미는 끄덕였다. 눈에 흰 창이 더 많이 드러나 있었다.
"내가 유인할 테니까 맡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거미는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비틀었다.
"저 따라가면 안 되나요?"
여인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럼 함께 처리해. 옆에서 거들면 한결 쉬울 거야."
거미는 곁눈질로 여인을 흘기면서,
"새디스트......."
하고 중얼거렸다.
"7시 반에 그 여자를 차에 태우고 부둣길을 달리다가 전번에 우리가 한 놈 해치웠던 그 창고로 가겠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자를 인수해."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시체를 거기 남겨 두면 안 돼. 푸대에 담아 바다 속에 가라앉히든지 맘대로 해."
"지금 가서 장소를 한 번 둘러봐야겠습니다. 혹시 그 동안 출입이 금지됐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둘러보고 나서 나한테 빨리 연락해 줘."
거미와 여인이 사라지자 면도날은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었다. 그는 면도칼을 잘 쓰는 편이었다.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그것을 사용할 줄을 알았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잠시 후 그는 전화로 벨맨을 불러 가장 비싼 식사를 주문했다.
"방으로 갖다 주게."
큰 일을 앞두고 그는 언제나 든든히 먹어두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비싼 걸로,
얼마 후 식사가 들어왔다. 최고급 프랑스 요리였다. 천천히 식사를 들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거밉니다."
음울한 목소리가 말했다.
"음, 어때?"
"괜찮습니다.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럼 준비하고 기다려. 7시 30분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차질이 없도록 미리 대기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실수 없이 하라구."
"실수란 있을 수 없습니다."
거미는 틀림없는 놈이다. 그 놈은 믿을 만한 놈이다. 면도날은 반쯤 들다 만 식사를 치우고 일어섰다.
오월은 7시 30분에 다방에서 나왔다.
다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회색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차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차 속은 어두웠다. 앞쪽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녀는 차 속을 들여다보았다.
면도날이 운전석에 앉아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어서 와요."
그것은 소름끼치는 악마의 소리였다. 차 속에는 그 혼자만 타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
"상쾌한 밤이야."
"네, 그래요."
"자, 가볼까?"
그가 엔진을 걸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그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조용한 데로 가기로 했잖아?"
"조용한 데가 어디예요?"
"따라와 보면 알아요."
"저 오늘 좀 일찍 들어가야 해요.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오늘 스케줄은 나한테 모두 맡겨요."
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면서 앞을 주시했다.
차가 궤도를 잡아 달리기 시작했을 때 면도날이 느닷없이,
"재혼할 생각은 없소?"
하고 물었다.
장난인가 하고 쳐다보았더니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웃었다.
"생각할 수도 없어요."
차가 건널목 앞에 정차했다.
남자의 손이 미끄러져 오더니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땀에 젖은 끈끈한 손이었다.
"이 세상에 생각해 볼 수 없는 건 없어요. 그건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야."
그녀는 손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자신의 문젠데 적극적으로 생각해 봐야지 왜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젊을 때 고생했으면 이제 즐겨야 하지 않아요."
"이렇게 즐기고 있지 않아요."
"우리 결혼합시다."
차가 앞으로 움직였다. 그는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녀는 움찔하고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 말 안 들려?"
그가 큰 소리로 물었다.
"들려요!"
그녀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왜 대답 안 해? 결혼할 거야 안 할 거야?"
차가 왼쪽으로 길게 커브를 그었다.
"모르겠어요."
"오늘 가부를 결정해 줘야겠어."
"아이, 어린애처럼 보채기는요."
"난 성미가 급해. 우물쭈물하는 건 싫어."
"그런 문제를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나요."
"난 즉흥적으로 말한 게 아니야."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차는 달렸다.
부둣가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휘황하게 불들을 밝히고 있었다.
차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고 있었다. 만일 도망쳐야 할 경우 차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왔었지. 이젠 여생을 좀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 당신 같은 여자와 함께 말이야."
이 자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래, 다음 기회를 잡아두는 것도 좋겠지. 오늘 실패하면 다음 기회에 없애는 거다.
"저도 좀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요. 든든한 남자의 아내로서 말예요. 비록 늙긴 했지만 마음은 처녀나 같아요."
"당신은 늙지 않았어. 당신을 아내로 삼고 싶어. 정말이야."
"저 같은 거 받아주신다면......."
"받아주고말고!"
"고마워요."
그녀는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 갑자기 차가 오른쪽으로 돌진했다. 헤드라이트도 끈 채 창고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왜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사내의 오른팔이 그녀의 목을 휘어감았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했다.
차는 캄캄한 창고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차가 급정거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발길에 채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불빛 사이로 칼을 든 사내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플래시를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 같았다. 강렬한 불빛이 계속 오월을 따라왔다.
그녀는 무릎 걸음으로 기어가다가 벽에 부딪쳤다. 이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이 그녀를 포위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벽에 기대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불빛에 번쩍이는 칼날이 마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원하는 게 뭐예요?"
"지랄하지 말고 가만 있어."
대머리가 시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왜 나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까. 어리석게도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도사렸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눈을 날카롭게 굴렸다. 그러나 그녀는 연약한 여자였고 무기도 없었다.
"네 정체가 뭐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부인, 끝까지 부인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정체가 탄로난 이상 부인하고 싶지가 않았다. 공포 대신 증오에 서린 무서운 빛이 그녀의 눈에 나타났다. 그녀의 눈빛에서 섬뜩한 것을 느꼈던지 그들은 주춤했다.
"가면을 벗겨!"
대머리가 거미 같은 사나이에게 지시했다.
거미 같은 사나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자진해서 머리에 쓴 가발을 벗어 집어던졌다. 안경도 집어던지고 완전히 가면을 벗었다.
"그러면 그렇지!"
면도날은 탄성을 질렀다.
오월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일었다.
"짐승보다 못한 놈들!"
"네년이 우리를 죽이겠다는 거냐!"
"모두 죽이고 싶어! 갈가리 찢어죽이고 싶어!"
그녀는 미친 듯이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하하하...... 발악해 봐야 소용없어. 넌 우리 쪽 사람을 한 명 죽였어. 아주 잔인하게 말이야. 그러고도 모자라서 우리를 쫓아 다니는 거냐?"
"모자라고말고! 네 명 모두 죽이지 않고는 포기할 수 없어!"
"우리가 너를 먼저 죽일 텐데?"
"그러면 귀신이 돼서라도 복수할 거야."
"무서운 년이구나! 없애 버려!"
면도날은 시거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거미 같은 사나이는 칼을 들고 다가왔다.
오월은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 창고 바닥은 모래로 덮여 있었다. 짓다가 말고 버려진 창고였기 때문에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모래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힘껏 뿌렸다.
"어?"
사내가 주춤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한테도 모래를 뿌렸다.
갑작스런 기습에 그들은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플래시가 떨어져 뒹굴었다. 그녀는 그 틈을 이용해 여자 쪽으로 돌진했다.
"잡아! 놓치면 안 돼."
면도날이 길길이 뛰며 소리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눈에 모래가 잔뜩 들어갔는지 허둥대고 있었다.
"출입구를 막아!"
계속 악쓰는 소리가 창고 안을 울리고 있었다.
오월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솟았는지 몰랐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 집어들었다. 손가락 굵기의 쇠막대였다. 그것을 마구 휘두르면서 출입구 쪽으로 접근했다.
"어이쿠!"
탁하고 부딪쳤는가 하더니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면도날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그녀는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가 쇠막대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쇠막대를 놓아 버렸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한쪽 팔뚝을 잡혔다.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 날카로운 칼 끝이 옆구리를 건드렸다.
"안 돼!"
그녀는 처음으로 악을 썼다. 무릎이 후들거려 왔다.
이번에는 섬뜩한 것이 얼굴을 스쳐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상대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맥이 탁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무릎으로 기어갔다. 기를 쓰고 기어갔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눈을 뜰 수만 있었다면 그녀는 창고를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몹시 어두웠고 거기다가 그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창고를 빠져나왔다. 사람 살리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지는 않았다.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깨닫고 있었다. 차도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헤드라이트에 드러난 자신의 피투성이 모습을 보고 그녀는 경악했다. 차들이 멈칫하다가 그대로 달려가 버리곤 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차도로 나서서 손을 흔들었다.
요란스럽게 달려오던 더러운 트럭 한 대가 그녀 앞에서 급정거했다.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운전석에서 건장한 사내가 내려왔다. 때에 절은 런닝셔츠 바람이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려 줘요."
그녀는 중얼거리고 나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십여 미터 저쪽 어둠 속에 사내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운전사는 비로소 사태를 짐작한 것 같았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올렸다.
여자의 팔다리가 길게 늘어져 흐느적거렸다. 그는 여자를 운전석 옆자리에 올려놓은 다음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의 더러운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운전사는 엑셀을 힘주어 밟았다.
그들이 채 다가오기 전에 트럭은 거센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개새끼들."
운전사는 중얼거리며 침을 칵 뱉었다. 백미러로 계속 뒤를 감시했지만 따라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가다가 어느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여자를 안아내렸다. 비로소 그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불빛에 드러난 여자의 얼굴은 칼에 찢겨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 세상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레슬러처럼 목이 굵고 얼굴은 구릿빛이었다. 찢어진 눈매가 자화상을 이루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건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응급실로 운반되어 들어갔다. 그곳은 조그만 개인 외과 병원이었는데 응급 처치에 앞서 보증금을 요구했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고 더구나 보호자도 없는 판에 무턱대고 치료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운전사는 눈을 부릅뜨고 병원 직원을 노려보다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돈이었다.
"급한 대로 우선 이걸로 하시오."
직원은 돈을 헤아려 보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걸로는 부족한데요."
"이봐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거요? 내가 보증을 선단 말이야."
그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직원은 더는 말 못하고 돈을 받았다.
트럭이 출발하고 나서 5분쯤 지나서야 면도날은 차를 창고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들 중 그래도 그가 눈을 뜰 수가 있었고 다른 두 명은 거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에 모래가 너무 많이 들어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요."
여자가 발을 굴렀지만 면도날은 트럭이 사라진 방향으로 차를 몰아갔다.
"병원이 문제가 아니야. 그년을 찾아야 해."
그러나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트럭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거 무슨 망신이람. 여자한테 당하다니."
"그년이 그렇게 나올 줄 몰랐어요."
여자가 말했다.
"거미, 네가 실수한 거야. 빨리 처리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
거미라 불리운 사내는 아무 대꾸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년한테 오히려 당한 거야. 빌어먹을!"
그는 이를 갈며 부어오른 이마를 문질렀다. 오른쪽 눈두덩으로부터 이마까지 피에 젖은 채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거미 같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콧잔등이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코밑, 입 주위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어. 살아서 도망쳤단 말이야! 바보 같으니, 여자 하나 못 죽여?"
거미 같은 사내는 굳이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
"여자라고 너무 얕잡아 본 게 탈이었어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수건을 눈에 대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에도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에 잠겼다. 그것이 그들의 모습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그들은 안과 의원으로 몰려 들어갔다.
병원에 입원한 지 두 시간쯤 지나 오월은 눈을 떴다. 몹시 답답한 느낌이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오른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왼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안 돼!"
격렬한 외침이 터져나오다가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외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에 누워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까지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발악적으로 저항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어서 트럭을 세우던 일도 기억해 냈다. 그 다음은 생각나지 않았다. 트럭 운전사가 나를 구해 줬을까. 하여간 죽지 않고 살아났구나. 천만다행이야. 상처는 어느 정도일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의 여기저기를 어루만져 보았다. 허리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오른팔도 그랬다.
병실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11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녀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몇 번 그렇게 소리치자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어머, 정신 차리셨군요."
간호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병원인가요?"
"네, 병원이에요."
"누가 나를 여기까지......?"
"어떤 트럭 운전사가 안고 왔어요. 자기가 보증을 서고 돈을 내고 갔어요."
"가버렸나요?"
"네, 갔어요."
"언제 다시 온다는 말도 없이?"
"내일 아침 다시 오겠다고 했어요. 모자란 돈을 가져오겠다고 하면서 갔어요."
"주소와 이름을 알고 있나요?"
"네, 적어놨어요."
그녀는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내 상처는 어느 정도인가요?"
"심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어느 정도 입원해 있어야 하나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나한테는 그게 문제예요. 언제까지 입원해 있어야 하나요?"
"한 달 이상은 입원해 있어야 한대요. 수십 바늘 꿰맸어요. 수혈하면서 수술했어요. 얼굴이 문제예요."
그 부분에 와서 간호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얼굴이 어째서요?"
"상처가 심해요."
"갈가리 찢겼나요?"
그녀가 남의 일처럼 묻자 간호사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목숨을 건졌으니까 괜찮아요."
"어쩌다가 그랬어요?"
"......."
"경찰에 연락하려다가 깨어난 다음에 하려고 기다렸어요."
"경찰은 부르지 말아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간호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가족들에게 연락해 드릴까요?"
"가족은 없어요."
간호사의 부드럽던 표정이 금방 굳어졌다.
"어쩌다가 그랬어요?"
"......."
"칼로 마구 찔린 것 같던데......."
"말하기 싫어요."
"성함하고 주소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오월은 거짓말로 둘러댔다.
"입원비 내실 수 있어요?"
"내일 내겠어요."
간호사는 의심스러운 듯 환자를 쳐다보았다.
"담배 한 대 얻을 수 없을까요?"
간호사는 당황한 표정이다가 담배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조금 후 그녀는 담배를 한 개비를 들고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이 아시면 야단맞을 거예요. 선생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그녀는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로 환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오월은 아주 맛있게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모두 태우고 나자 갑자기 맥주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죽은 듯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붕대가 질퍽하게 젖어들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막으려고 기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참 울고 나자 속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병원은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문득 조민기가 보고 싶어졌다.
오월은 깜박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인기척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한 사람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건장한 몸에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중년의 남자였다. 첫눈에도 그가 트럭 운전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운전사가 말했다. 힘이 배어 있는 저음이었다. 사납게 생긴 눈이 선한 빛을 띠고 웃고 있었다.
"선생님이 저를......?"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 난 운전수요. 목숨을 건졌으니까 다행이오. 어쩌다가 그런 일을 당했소?"
"......."
"그 놈들은 누구요?"
"......."
"내가 쓸데없는 말을 물었군. 자, 몸조리 잘해요."
그는 병실을 나가려고 했다.
"선생님, 잠깐!"
그녀는 남자를 급히 불렀다.
운전사는 나가려다 말고 주춤 섰다.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운전사는 쑥스러운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 손을 내흔들었다.
"생명의 은인은 무슨 생명의 은인......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몸조리나 잘해요. 난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참, 입원비는 마련할 수 있어요?"
"네, 입원비는 있어요. 선생님께 진 빚도 갚고 싶어요. 연락처를 적어 주세요."
그는 몇 번 사양하다가 종이 쪽지에다 연락처를 적어놓고 나갔다.
조민기는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오부인과의 연락이 갑자기 두절됐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녀의 마지막 전화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두번째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말하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것이다.
승우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민기는 욕실로 가서 오른손으로 얼굴을 씻었다. 한 손으로 생활하자니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세수를 막 하고 나자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뛰어나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조민기 씨예요?"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였다. 오월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의 간호사가 걸어온 전화였다.
30분쯤 지나 그는 오월이 들어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붕대로 온통 얼굴을 감고 있는 오부인의 모습은 무서웠다. 표정도 알아볼 수 없었다.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만이 그녀가 오부인임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 왔군요."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에 민기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는 달려가 붕대를 감지 않은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병원이라 큰 소리는 낼 수 없고 그는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만 울어요. 조금 다쳤을 뿐이니까 괜찮아요."
그녀 쪽에서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민기는 울음을 삼키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만 하면 됐으니까 제발 이젠 그만두십시오. 깨끗이 잊어버리고 새 삶을 개척하십시오. 정말 더 이상 옆에서 못 보겠습니다."
갑자기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 있자 마치 생명 없는 미이라 같았다.
"부인, 부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잡힌 손을 빼내었다.
"부인을 보호해 드리고 싶습니다!"
민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부인과 저 사이에 대해 그 동안 줄곧 생각해 봤습니다. 결과는 절대 부인을 떠날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부인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붕대에 가려진 표정을 볼 수가 없어 민기는 안타까웠다.
"부인한테는 제가 필요합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까처럼 손을 빼지는 않았다.
"부인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절망으로부터!"
그녀가 마침내 움직였다.
"나는 절망하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괴로운 듯 신음처럼 말했다.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부인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의 화신이 되어 계속 그들을 쫓고 있는 겁니다! 복수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나요? 복수는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법을 무시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행하는 복수야말로 야만적이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 역시 상대와 똑같이 죄악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가 신음소리를 내며 도로 드러누워 버렸다.
"나가요! 내 걱정 할 필요 없으니까 나가요!"
그녀는 낮게 부르짖었다.
"나가지 않을 겁니다! 절대 부인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부인의 복수를 방해할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결심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말예요......."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줄은 몰랐습니다!"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요. 단지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아니, 그렇지 않아요. 학생은 일을 너무 복잡하게 꾸며요. 그리고 너무 깊이 개입하려고 해요. 그건 아르바이트 학생의 태도가 아니에요. 나는 그런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요. 단순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 필요해요."
"부인이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저도 고집을 피우겠습니다. 아무리 부인이 뭐라 해도 전 부인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절대......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오부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 저녁, 트럭 운전사 주상호는 한 청년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운전사로 중동에 나가 고생 끝에 몇 백만원을 모아 귀국하자마자 트럭을 한 대 사서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고 있었다. 요즘은 매립지에 흙을 퍼나르고 있었는데 위인이 호탕해서 돈을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쓰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방문객은 공사판으로 직접 그를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짐을 부리고 현장 사무소로 들어가자, 거기에 그 방문객은 앉아 있었다. 왼손을 붕대로 감아 목에 걸친 청년이었다.
"무슨 일로......?"
주씨는 의아한 눈길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주상호임을 확인하고 나서,
"저기......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고 말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이어서 그는 청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바다 저쪽에서는 비를 몰고 오려는지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 쪽으로 얼마쯤 걸어가다가 멈추었다.
"말해 보시오."
"다름이 아니고 어젯밤에 구해 주신 여자는 제 누님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그것 때문에 온 거요?"
운전사는 웃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목숨은 건졌으니까 다행이지만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얼굴에 흉이 안 져야 할 텐데...... 도대체 여자한테 그런 짓을 한 그 놈들은 누구요? 당신 누이를 죽이려고 했어요."
"어떤 놈들이 그랬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누님이 입을 다물고 있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어서 누이한테 가 보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누님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건 누님이 드리는 겁니다."
봉투를 내밀자 그는 뿌리쳤다.
"아니, 이게 뭐야? 이런 거 받자고 그런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대납해 주신 것을 갚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만 받지."
그는 봉투 속에 든 것을 꺼냈다. 불빛에 비춰 보니 자기앞 수표였는데 동그라미가 여섯 개나 되었다. 그는 놀라서 청년을 쳐다보았는데, 청년은 이미 어둠 저쪽으로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이봐! 이봐! 이봐요!"
그러나 청년은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그는 망연히 서 있다가 사무소로 들어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다른 운전사 두 명이 따라 들어오며 물었다.
주씨는 수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야, 백만원짜리 수표 아니야!"
한 운전사가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가 주씨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야, 한턱 내야겠는데...... 이 불황에 백만원이 어디야!"
"쓴 소주라도 한 잔 사겠지."
"소주 가지고 되겠어?"
"일차로 소주 마시고 이차로 니나노집에 가면 될 거 아니야."
하루 일과가 끝나고 출출하던 판이라 모두가 술 생각들이 간절했고, 그래서 제각기 한마디씩 떠들어댔지만 정작 본인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아니야, 이 돈은 돌려줘야 해."
그는 수표를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고 낡은 비닐 가방을 챙겨들었다.
"돌려주다니, 굴러들어 온 돈을 돌려준단 말이야?"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이건 돌려줘야 해. 받아서는 안 돼."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렵쇼. 술 안 사려고 술수 쓰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돈이야?"
"그럴 일이 있어."
"그럴 일이 뭐야? 말해 봐."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몇몇이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언제나 그는 술집에 갈 때는 앞장을 서 왔다.
"그럴 일이란 게 뭐야?"
"알 필요 없어."
"그럼 술이나 사."
"오늘은 안 되겠어."
"한 잔만 사고 가라구."
그는 포장마차로 밀려 들어갔다.
"딱 한 잔만 사는 거야."
그는 친구들에게 다짐한 후 삐꺽거리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들이 소주를 한 잔씩 돌리고 났을 때 포장을 들치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30대의 미끈하게 생긴 남자였다. 무늬가 야단스러운 남방에 쌀 빛깔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소주 반 병만 주시오. 안주는 저걸로."
그는 오징어 삶은 것을 가리켰다.
트럭 운전사들은 새로운 손님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나서 자신들의 화제로 돌아갔다. 말이 한 잔이지 마시다 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고, 그렇게 빈 술병은 늘어만 갔다.
"자, 이제 이야기해 봐. 어떻게 생긴 돈인데 돌려주려고 하는 거야?"
사내들은 백만원의 출처에 대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집요하게 물어댔다.
"돌려줘야 할 돈인지 아니면 꿀꺽해도 되는 돈인지 어디 한 번 들어 보자구. 내 듣고 나서 결정을 내리지."
"그래, 그렇게 하자구. 자, 이야기해 봐. ×를 팔았으면 팔았다고 시원히 이야기하라구. 이 친구, 오늘은 왜 이렇게 말이 없지?"
얼큰해진 주씨는 졸리다 못해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개구리 새끼들, 소리 한 번 요란하다. 이 돈은 안 돌려줘도 돼. 하지만 난 돌려줘야겠어. 왜 그러냐 하면, 아, 내가 계집돈을 먹겠어? 이거 봐. 아무리 빌어먹어도 난 계집돈은 안 먹는다구."
"뭐? 기집애 돈이라구? 그러면 그거야말로 먹어 잡숴야지."
한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말하는 바람에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들어 봐. 계집돈이라고 하지만 아무 계집이 아니야. 어젯밤에 부둣길을 달려오는데 누가 앞에 뛰어들지 않겠어. 여자였는데 처음엔 미친 년인 줄 알았지?"
"옷을 홀랑 다 벗었어?"
옆에서 방정맞게 끼어드는 바람에 또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다. 주씨는 손을 흔들었다.
"옷은 벗지 않았는데 갈가리 찢어지고 온 몸이 피투성이야. 나를 보고 살려달라는 거야. 다른 차들은 서지 않고 그냥 달려가더라고, 사내 새끼가 여자가 살려달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어? 차를 세우고 내려가 보았지. 난 처음에는 차 사고당한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까 그게 아니고 칼에 난자당한 거야."
사내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쪽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젊은 사내가 주씨 쪽으로 시선을 한 번 힐끗 던져왔다.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래서?"
주씨는 담배를 피워물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니까 이건 말도 아니야. 짓이겨져서 온통 새빨갛더라고. 여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기절했지. 그런데 저만치서 남자 두 놈이 달려오더라고. 아마 그 놈들한테 당한 모양이야. 한 번 얼러볼까 하다가 맨손으로는 무리일 것 같아서 여자를 싣고 달렸지. 다행히 놈들은 따라오지 않았어. 병원에 데리고 가 입원시키려는데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안 해주는 거야. 보호자도 없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치료를 할 수 있느냐는 거야. 가지고 있는 내 돈 다 털어냈지만 부족하다는 거야. 아침에 갖다 주기로 하고 간신히 응급 처치를 하게 했지. 여자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생명이 위
독했어. 아침에 나머지 돈을 가지고 가봤더니 다행히 죽지는 않았더군. 어찌나 기쁘던지. 내 생전에 좋은 일 해보기는 처음이야. 돈 아까운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더라구. 여자가 하도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조르기에 사무소를 가르쳐 줬지. 찾아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럼 아까 그 청년은 그 여자가 보낸 거야?"
"음, 그 여자 동생이야. 그 편으로 돈을 보낸 거야."
"야아, 이걸 보고 바로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왔다는 거야. 입원비 몇 푼 도와주고 백만원이나 받다니 정말 장사 한 번 잘했는데......."
그 말을 받아 다른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백만원이 많기는 뭐가 많아. 목숨을 건져줬는데 백만원이 문제야. 천만원 받아도 싸다구. 그 여자 아주 깍쟁인데......."
"그래, 그러고 보니까 깍쟁인데. 이봐, 주형, 그 돈을 돌려줄 필요 없다구. 그런 돈은 세금 한푼 없는 거니까 그야말로 멋지게 꿀꺽하는 거야.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받았는데 돌려주긴 왜 돌려줘."
"그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왜 돌려줘."
그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주씨는 말했다.
"아니야, 이건 돌려줘야 해. 이 돈을 받으면 모처럼 내가 좋은 일 한 번 한 거 물거품이 돼. 돈 받고 한 꼴이니 치사한 짓이 된단 말이야. 그럴 수는 없어. 너희들은 돈독이 오른 놈들이니까 내 말뜻을 모를 거야."
주씨는 술값을 치르고 일어섰다. 친구들이 왜 벌써 가느냐, 돈을 돌려주면 안 된다느니 하고 법석을 떨었지만, 그는 그들을 뿌리치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차도 쪽을 향해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잠깐 봅시다!"
주씨는 돌아섰다. 그리고 하품을 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혼자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던 젊은 사내였다.
"나 말이오?"
주씨는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덤빌 테면 덤벼라. 너 같은 놈 하나쯤은 식은 죽 먹기다. 그는 유도 유단자였다. 상대방의 몸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가를 가늠하면서 긴장해 있는데,
"실례합니다."
하고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꺼내 보인다.
"경찰입니다. 시경 수사과에 있습니다."
"어디 봅시다."
주씨는 상대방의 신분증을 빼앗아 들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춰 보았다.
"맞긴 맞군. 헌데 무슨 일이오?"
주씨가 신분증을 돌려주면서 물었다.
"나를 잡아가려구요? 난 잘못한 거 없는데......?"
"아, 그게 아닙니다. 잠깐 여쭤볼 게 있어서......."
미끈하게 생긴 사나이는 씨익 하고 웃었다.
"아까 포장마차에서 하신 말씀 정말입니까?"
"뭐 말이오?"
"어떤 여자를 구해 준 거 정말입니까?"
형사는 수첩과 볼펜을 꺼내들었다.
"네, 정말입니다. 그게 뭐 잘못된 겁니까?"
"아니요, 잘하셨습니다. 그 여자 어떻게 생겼던가요?"
"모릅니다."
"구해 줬다면서요?"
"구해 주긴 했지만 피투성이라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나중에 갔을 때는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젊은 형사는 여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 이름, 사고가 일어났던 지점,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끝으로 주씨의 주소와 직업을 묻고 나서 급히 사라졌다.
주씨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아차 싶었다.
"이러면 내가 의리 없는 놈이 돼 버리는데. 돈까지 받고 경찰에 고자질하는 셈이 돼 버리는데. 지금 그 친구 병원에 달려갔을 거야. 안 되겠다. 내가 한 수 더 빨리 놔야지."
그는 중얼거리다가 근처 다방으로 뛰어들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병원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간호사로 생각되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거기 입원해 있는 환자한테 급히 연락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좀 바꿔 주시오!"
"성함을 말씀해 주세요."
"이름은 몰라요!"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바꿔요?"
여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는 벌컥 화를 내려다 꾹 참았다.
"에또, 어젯밤에 칼에 찔려서 입원한 여자 환자요. 2층에 입원해 있어요."
"그 환자는 움직일 수 없어요."
"이봐요, 아가씨. 간호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오? 그 사람이라도 바꿔 줘요."
"기다려 보세요."
한참이 지나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신가요?"
"아, 나 운전수요. 전화 받은 사람은 누구요? 환자 동생되는 사람인가?"
"아, 네네, 그렇습니다."
"아까 나 찾아왔던 청년이오?"
"네, 그렇습니다. 아까는 실례 많았습니다."
"예끼! 어찌 그럴 수가 있소? 난 이 돈 필요 없단 말이야! 남의 호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문제가 생겼소. 급해서 이렇게 전화를 거는 건데, 에또, 내가 입을 잘못 놀렸나봐. 술집에서 친구들한테 한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될 친구가 들었단 말이야. 난 모르는 친군데 말이야."
그는 다방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 속에 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무슨 말씀인지?"
답답하게도 상대방은 그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형사가 거기를 방문하겠다는 거야! 조금 있으면 거기에 도착할 거니까 잘 대접해 드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는 소리를 질러 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형사가요?"
"그래!"
"왜 형사가...... 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옳지, 이제야 알아들었군. 휴우."
그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 가 앉아 "쌍화차!" 하고 소리쳤다.
민기는 다급해졌다. 오부인을 경찰에 넘길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은 순간적으로 스쳐간 생각일 뿐 사실은 그 정반대로 움직여졌다. 그는 입원실로 뛰어들었다.
"야단났어! 형사가 이리 오는 모양이야!"
마침 와 있던 승우는 벌떡 일어났다.
오월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형사가 오다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트럭 운전사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형사가 이리로 오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오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사가 어떻게 알았지?"
승우가 물었다. 민기는 시트를 젖히고 오부인을 안았다. 왼팔이 욱신거렸지만 상관하지 않고 꽉 끌어안았다.
"빨리 나가자고! 지금 그런 거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내가 부인을 모시고 갈게 넌 계산을 치러! 빨리!"
민기는 부인을 안고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계단에서 간호사와 부딪쳤다.
"아니, 무슨 일이세요?"
민기는 버럭 화를 냈다.
"퇴원하려구요!"
"왜요?"
"이 병원에는 더 이상 못 있겠어요!"
"아니, 왜요?"
간호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몰라서 묻는 거요? 비켜요!"
민기는 간호사를 밀어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간호사가 따라오며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여, 여보세요! 허락도 없이 그렇게 나가는 법이......."
"허락이 무슨 필요가 있어. 지금까지의 치료비 내면 될 거 아니야. 불결하고 불친절해서 더 이상 여기다 환자를 못 두겠어."
"어머나!"
"이미 계산하러 갔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이거 놔요."
간호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친절한 간호에 감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민기는 병원을 나오자 바로 택시를 잡았다. 승우도 뒤쫓아 나왔다.
"어디로 갈까요?"
운전사가 백미러로 그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성형 외과 병원으로 가요."
오월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떠나고 난 지 30분쯤 지나자 병원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제일 먼저 장완수 형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미끈하게 생긴 형사가 다른 형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여기에 어젯밤 칼에 찔려 입원한 여자 환자 있지요? 어느 방에 있나요?"
장형사는 간호사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간호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어, 어디서......?"
"아, 경찰이오."
장형사는 수첩을 펴 보였다.
"어머, 그 환자...... 조금 전에 퇴원했는데요."
간호사는 사색이 되어 말했다.
"뭐라구요? 방에 가봅시다!"
간호사는 허둥지둥 형사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연락을 받고 의사도 달려왔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시트가 구겨진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사진을 한 번 봐줘요."
장형사는 오월의 사진을 내보였다.
그것을 들여다본 간호사가,
"네, 바로 이 여자예요!"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장형사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실까요?"
나이 많은 의사는 콧잔등 위로 안경을 밀어올렸다.
"네, 상처가 아주 심합니다. 어젯밤에 왔을 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독했습니다. 수혈을 하고 수십 바늘을 꿰맸지요."
장형사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어디를 그렇게 많이 다쳤나요?"
"얼굴과 어깨, 옆구리, 팔...... 그밖에 상처가 많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얼굴을 많이 다쳐 성형 수술을 하지 않으면 보기가 흉할 겁니다."
"무얼로 그렇게 다쳤던가요?"
"예리한 흉기로 다친 것 같았습니다. 환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예리한 흉기라면 칼 말인가요?"
"네, 칼부림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퇴원했지요?"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달 이상은 입원을 해야 하는데 왜 갑자기 퇴원했는지......."
의사는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간호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떤 청년들이 데려갔어요. 동생이라고 하면서 갑자기 데려갔어요. 전화를 받고 나서 갑자기......."
"전화요?"
"네, 밖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한 청년이 그 전화를 대신 받았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환자를 안고 나갔어요. 제가 안 된다고 하니까 되레 화를 냈어요. 병원이 뭐 불친절하고 그래서 더 이상 못 두겠다고 하면서 데려갔는데, 그건 핑계 같아요. 사실 우리가 불친절하게 군 거 하나도 없거든요."
"혹시 그 여자를 강제로 데려간 건 아닌가요? 여자가 가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납치하다시피 말입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까?"
장형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병원으로 갔을 거예요."
"택시를 타고 갔나요?"
"네, 택시를 타고 갔어요."
"택시 넘버 혹시 알고 있습니까?"
"자세히 보지를 않았어요. 초록색 택시였어요."
"두 명의 청년들에 대해서 아는 대로 좀 말해 줘요."
"나쁜 청년들 같지는 않았어요. 한 청년은 가방를 들고 있었는데 대학생 같았어요. 또 한 청년은 ...... 그 청년은 왼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그 팔로 여자를 안고 내려갔어요. 그 청년이 바로 그 여자 동생이라고 했는데 서로 닮았어요."
장형사는 두 청년에 대한 인상 착의를 수첩에다 자세히 적었다.
트럭 운전사 주씨는 한밤중에 자다 말고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키가 크고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형사가 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인사한 다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주씨는 아는 대로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을 것은 거의 다 물었다 싶었을 때 초저녁에 만났던 그 미끈하게 생긴 형사가 끼여들었다.
"당신이 병원에 전화를 걸었지?"
천성이 거짓말을 못하는 주씨는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우리가 그 병원에 도착하니까 전화 연락을 받고 조금 전에 퇴원했단 말이오. 당신 아니면 우리가 거기에 갈 거라는 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이 전화했지?"
"......."
주씨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전화했어, 안 했어?"
형사는 다그쳤다.
"해, 했습니다."
주씨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 양반이 정신이 있어, 없어? 그 여자가 어떤 여잔 줄 알고 전화 연락을 해 주는 거야. 당신 그 여자하고 공범 아니야?"
"아, 아닙니다."
"그 여자 있는데 알고 있지?"
"모, 모릅니다."
"거짓말 마라. 그럼 왜 전화를 했지?"
"사실은 저...... 그 여자 동생이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누님을 구해줘 고맙다고 하면서 백만원을 주고 갔습니다."
"그건 알아. 나도 그건 들어서 알고 있어."
"돈까지 그렇게 주고 갔는데 내가 입을 잘못 놀려서 결과적으로 경찰에 고자질한 것처럼 되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준 겁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골탕을 먹는다구! 정신 좀 차려야겠어."
젊은 형사가 끌고 갈 듯이 잡아당기자 그는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장형사는 젊은 형사를 밀어냈다.
"됐어, 당신이 한 짓은 이해할 수 있소. 지금 수고스럽지만 어제 당신이 처음 그 여자를 태워 줬던 장소로 우리를 안내해 주겠소?"
"네, 그러지요."
그는 순순히 응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자, 운전사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장형사는 창고 쪽으로 가보았다.
"이건 짓다 만 창고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젊은 형사가 대답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창고 안으로 그들은 들어섰다. 뒤따라 온 차가 헤드라이트를 비쳤다.
"구석구석을 비쳐 봐요."
"저기 뭐가 있습니다!"
운전사가 뛰어가 무엇인가 집어들고 왔다.
"노인들이 쓰는 가발입니다."
장형사는 그것을 받아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이거 그 여자가 쓰던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이거 보십시오."
이번에는 젊은 형사가 칼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었는데 끝이 날카롭게 생긴 단도였다. 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먼지를 닦아내자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장형사는 벽 쪽으로 걸어가 뭔가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여자용 핸드백이었다.
차로 돌아와 백을 열어 보았다. 먼저 재크나이프가 하나 눈에 띄었다. 다음에는 조그만 플래스틱 케이스가 보였다. 뚜껑을 열자 주사기와 앰플이 나왔다. 앰플에는 '애플톤'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게 뭐죠?"
형사 하나가 물었다.
"마취제야."
그밖에 만원짜리 한 다발이 들어 있었다. 백만원인 것 같았다. 잔돈 몇 푼도 있었다. 신분증 같은 것은 없었다. 선글라스·립스틱·휴지·담배·라이터 따위가 차례로 집혀 나왔다.
"음......."
장형사는 낮게 신음하면서 그것을 백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오월의 백이 분명했다. 재크나이프와 마취제를 본 순간 그는 그녀의 독기를 쐬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했다. 놈들을 해치려다가 자신이 당했음이 분명했다.
이번에 이렇게 당했으니까 포기하지 않을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텐데. 지금 자수하면 정상 참작이 될 수 있을 텐데. 어디로 숨어 버렸을까.
그는 창고에서 나왔다.
"먼저들 가요."
그는 형사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트럭 운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돌려 보내요."
그는 부두에 정박 중인 배들을 바라보았다. 배들은 불을 휘황하게 밝히고 있었다. 거의가 외국에서 돌아온 선박들이었다. 개중에는 엄청나게 큰 배들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인부들이 하역 작업을 하느라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밤을 새면서 일하는 그들이 안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통을 벗어붙인 채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창고 안에서 살해됐다면 어땠을까. 누가 그녀의 복수를 해줄까. 복수란 과연 필요한 것일까. 법으로는 물론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전혀 법 따위를 개의치 않고 있다. 법을 오히려 혐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 앞에서 법은 아주 무력하다. 법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법의 한계란 너무도 분명하다. 법은 과연 인간을 다스리지 못한다. 인간은 법망을 피해 갈 뿐이다.
"저기......."
운전사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왜 아직 가지 않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말인가요?"
"저기...... 그 여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요?"
"그건 알아서 뭐하려구요?"
"아니,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이렇게 찾고 있는 걸 보니까 나쁜 짓을 해도 단단히 한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여자가 아주 선량해 보이던데......."
"네, 선량한 여자였지요."
장형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트럭 운전사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없는 입장입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선량하다 해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반해서 행동할 수가 있는 거죠. 만일 말입니다."
장형사는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만일...... 주선생의 부인이 악한에게 강간 살해당했다면 주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악한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주씨는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경찰에 넘기지 않고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그렇죠. 그게 정상적인 생각이지요. 그 여자는 그러니까 지금 그런 입장입니다. 그러나 나는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여자를 잡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그 여자한테서 받은 이 돈은 어떻게 하지요? 주소를 모르니 돌려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보관할 수도 없고, 참 난처합니다."
장형사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도 팔자시군요. 그 여자가 감사한 마음으로 드린 거니까 기쁜 마음으로 쓰십시오.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받으니까 영 불편해서 죽겠습니다."
"괜찮대두요. 부담을 느낄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걱정 마시고 쓰십시오."
"그것 참......."
운전사는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다음날 아침 오월은 젊은 의사와 단둘이 수술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형 외과 전문의는 여자처럼 섬세하고 자상한 인상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 상처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웬만한 상처라면 흉터를 제거하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할 수 있는데 이건 너무 심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의사는 끄덕였다.
"수술을 해도 본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본래의 모습은 싫어요! 딴 얼굴로 만들어 주세요!"
"전혀 다른 얼굴로 말입니까?"
"네, 사람들이 몰라보게 말이에요."
그녀는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일부러 그럴 필요까지 없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는 정직하게 물었다. 오월은 시트를 얼굴 위로 뒤집어썼다.
"제가 바라는 대로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부탁은 내가 하고 싶은데요. 외국 여자처럼 코를 높이고 쌍꺼풀 수술을 해달라는 거 아닙니까. 거기에다 머리칼을 노랗게 물들이면 서양 여자처럼 보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
"사실 말이지 그런 수술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
의사는 갑자기 화가 난 투로 말했다.
"그렇게 수술한다고 해서 외국 여자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지요.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이지 결코 외국 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쌍꺼풀 수술하고 코를 높이는 짓 따위는 원숭이 흉내나 다름없습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여자들이 모두 그런 수술을 바라고 있으니 내 눈에는 그들이 모두 원숭이처럼 보입니다. 국적 없는 얼굴...... 썩어빠진 정신의 산물...... 한심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의사는 매우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손님들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요?"
"아니오,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한테만 합니다.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다가는 손님 다 내쫓는 셈이 되지요. 어떤 뚱뚱한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듣더니 별꼴 다 보겠다고 하면서 나가 버렸습니다. 곰곰 생각하니까 화가 났던지 나중에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야, 네가 뭔데 사람을 뭘로 알고 그 따위 말을 하는 거야. 이렇게 욕을 해대더군요."
"당연한 반응이죠."
오월은 시트를 젖히고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냉소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주문하는 대로 해 주고 돈이나 벌 것이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손님을 내쫓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돈이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럼 코를 높이는 수술부터 해드릴까요?"
"아니오."
그녀는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그럼?"
"제가 언제 코를 높여 달라고 했나요? 쌍꺼풀 수술을 해달라고 했나요?"
"그럼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완전히 다른 얼굴로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은 아주 미운 얼굴로 만들어 주세요.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의사는 그녀가 제정신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것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하자는 게 아닙니다."
"네, 저는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수술하겠다는 겁니까?"
"이유를 알려고 하시지는 마세요. 주문하는 대로 해주시기만 하면 돼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의사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그렇게 침묵을 지킨 것이다.
한참 후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수술은 할 수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바른 말을 해주십시오."
"바른 말을 한 거예요."
의사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휑하니 나가 버렸다. 그는 복도 끝에 있는 창가에 기대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두 청년에게 다가갔다.
발소리에 그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부인이 의사와 긴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나 좀 봅시다."
의사는 그들을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저 여자 환자하고는 어떤 관계인가요?"
의사는 화난 듯이 물었다.
"제 누님입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청년이 대답했다.
"이쪽은?"
의사는 다른 청년을 가리켰다.
"제 절친한 친굽니다."
붕대로 감은 청년이 대신 얼른 대답했다. 승우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야기해도 되겠군."
"네, 말씀하십시오."
그들은 긴장해서 의사를 바라보았다.
"환자가 이상한 주문을 했어요. 정상적인 주문이 아니라서 그냥 나왔는데......."
의사는 미간을 모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슨 주문인데요?"
"성형 수술이란 미운 것을 아름답게 고치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헌데 저 환자는 자기 얼굴을 그전과는 달리 완전히 바꾸어 달라는 겁니다. 당신 누나는 상당한 미인 아닌가요?"
"네, 미인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꿔 달라는 겁니다. 물론 상처가 심하긴 하지만 잘만 하면 그 얼굴을 그대로 살릴 수가 있어요. 그전만 못 하겠지만 어느 선까지는 살릴 수가 있어요."
다음 말을 재촉하는 듯 두 청년은 정색을 하고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이어서 말했다.
"거기까지는 좋다고 합시다. 헌데 환자는 아주 밉상으로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은 얼굴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생각해 봐요. 그런 주문도 있을 수 있나요?"
그들은 당황했다. 당황한 나머지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의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까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면 그런 요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주문은 처음입니다. 나는 그런 수술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담배 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봐요. 어떻게 나쁜 쪽으로 수술을 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의사의 양심상 도저히 그런 수술을 할 수가 없어요. 특별한 이유가 또 있다면 몰라요......."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고 승우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환자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나요?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말입니다. 동생되는 분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민기한테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른 대답하려 들지를 않았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그런 말을 했겠지요."
승우의 말이었다. 그는 오부인의 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럴 듯하게 꾸며대고 있었다.
"그런 것하고는 달라요. 자포자기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가까운 사이니까 잘 알겠지요."
의사는 턱으로 민기를 가리켰다.
민기는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내뱉듯이 말했다.
"아마 진심으로 한 말일 겁니다."
승우는 정색을 했고 의사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님은 허튼 말을 한 게 아닙니다. 누님은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서 말씀드린 걸 겁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의사는 의혹에 찬 시선을 던져왔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누님은 엉터리가 아닐 겁니다. 누님을 만나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의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기는 승우와 함께 그곳을 나왔다.
"나도 설마했는데 그게 정말일까?"
승우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가서 알아봐야지."
"만일 정말이라면 어떡하지?"
"막아야지."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월은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깨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그녀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의사를 만나 봤나요? 의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네, 의사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는 매우 흥분하고 있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그녀는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감은 붕대가 갑갑한 듯 손으로 그것을 쥐어뜯으려고 했다.
"이, 이유가 뭡니까?"
민기는 흥분해서 물었다.
"이유는 묻지 말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난 입씨름할 힘도 없어요. 제발 나가 줘요."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민기는 더 바싹 다가섰다.
"놈들이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바꾸려는 거지요?"
민기는 흥분해서 물었다.
"그래요. 그들에게 접근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실로 무섭고 엄청난 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원한과 집념의 정도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이었다.
청년들은 한동안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나를 이해해 줘요. 그리고 의사를 이해시켜 수술을 시작하도록 힘써줘요."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승우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복수를 해야겠습니까?"
그녀는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응대하려고 들지를 않았다.
"얼굴을 바꾼다는 것, 그것도 나쁘게 바꾼다는 것은 자기 생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특히 여자들은 자신을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할 때, 아니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더 자신을 해치려고 할 때는 그것은 바로 자살 행위나 마찬가집니다. 왜 자신을 그렇게 학대하십니가? 왜 자신을 스스로 해치려고 하십니까?"
그래도 그녀는 꼼짝하지 않는다.
민기는 극단적인 말을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살해 버리시죠. 그게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비로소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살아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겠어요."
"그럼 귀신인가요?"
"네, 악귀예요."
그녀가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부르르 떨더니 도로 뒤로 벌렁 쓰러졌다.
"기절했어!"
승우가 소리쳤다. 민기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려온 의사는 그들이 그녀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한 것을 알고는 그들을 나무랐다.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는데 자극적인 말을 하면 어떡해요?"
민기는 화장실로 갔다. 거울에 비쳐 보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오월은 다행히 한 시간쯤 지나 깨어났다.
"빨리 수술해 줘요."
그녀는 앵무새처럼 되뇌였다.
방안에는 그녀와 민기만 있었다. 민기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10 이상한 형사
일주일쯤 지난 날 오후, 오월이 입원해 있는 병원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간호사가 전화를 받았다.
굵은 남자 목소리가 울려왔다.
"네, 그렇습니다."
"S성형 외과 병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간호사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원장 선생 계신가요?"
"어디신가요?"
"예...... 경찰입니다."
간호사는 긴장했다. 조심스럽게,
"무슨 일로......?"
하고 묻자 무조건 바꾸란다.
"다른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바꿔 줘요."
목소리가 갑자기 근엄해져 있었다.
간호사는 원장실로 가서 환자를 진찰하고 있는 원장에게 귀엣말을 했다.
원장은 청진기를 걷어치우고 일어섰다.
경찰은 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늘어놓았다.
"전화로 미안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협조해 주십사 하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젊은 여자인데 일주일 전에 자상을 입고 입원했을 겁니다. 아마 다른 데서 일차로 응급처치를 받고 입원했으리라 보는데, 혹시 그런 여자 거기에 없습니까? 전화로 이거 실례 많습니다."
젊은 원장은 바싹 긴장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그렇지만 나이가 젊은 것치고는 사려 깊은 데가 있었다.
상대방이 경찰이라고 했지만 전화상으로 그런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환자는 없습니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아, 그래요? 틀림없겠지요?"
"네, 틀림없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경찰을 빙자해서 전화를 걸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런 환자가 들어오면 전화 연락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상대가 불러 주는 것을 메모지에 갈겨쓰고 나서 원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창가로 걸어갔다.
"무슨 전화예요?"
간호사가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원장은 고개만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는 일단 상대가 경찰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금 가르쳐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장완수 형사를 부탁합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는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 상대가 경찰인 것이 확인된 셈이다. 어떻게 할까. 도대체 왜 그 여자를 찾는 것일까.
원장은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경찰에 협조해야 한다는 데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이얼을 돌릴 때는 누구를 배반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S성형 외과 병원입니다. 아까 전화 걸어오셨지요?"
"네네......."
몹시 반색하는 목소리였다.
"아까는 생각할 필요가 있어서 바른 대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그런 환자가 있나요?"
"네, 그런 환자가 우리 병원에 한 명 있습니다. 찾고 계시는 환자인지는 몰라도 일주일 전에 우리 병원에 그런 환자가 입원했습니다. 칼에 맞은 환잔데 다른 곳에서 일차로 응급처치를 받고 우리 병원에 왔습니다."
"그 환자 이름이 뭐죠?"
"양영자입니다."
"나이는?"
"서른 둘로 되어 있습니다."
"그 환자 지금 거기에 있죠?"
"네, 있습니다."
"혼자인가요?"
"청년 두 명이 교대로 보살피고 있습니다. 한 청년은 동생이라고 합니다."
"병원 위치를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원장은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한 시간 이내로 거기에 갈 테니까 좀 만나ㅂ으면 합니다."
"환자를 말씀입니까?"
"아뇨, 원장님을 말입니다."
"네, 그렇게하시죠."
원장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환자한테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물론 그 청년들도......."
"네, 알겠습니다."
그 형사는 한 시간도 못 되어 병원에 나타났다. 그는 명함을 내밀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협조해 줘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지금 그 환자를 좀 볼 수 없을까요? 본인 몰래 말입니다."
"그 환자를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형사는 몹시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보신다 해도 알아보실 수 없을 겁니다."
"왜요?"
"수술을 했거든요. 그리고 얼굴을 눈, 코, 입만 내놓고 붕대로 감아놓았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환자가 알아볼 텐데요?"
"환자가 잠든 틈에 가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원장은 간호사를 병실로 보내 양영자가 잠들어 있는지 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돌아와 그녀는 깨어 있다고 말했다.
"청년도 함께 있나?"
"네, 동생하고 같이 있어요."
"수면제를 갖다 먹여. 눈치 못 채게...... 그리고 환자가 잠드는 대로 나한테 알려줘."
간호사는 의아한 듯 남자들을 번갈아보다가 밖으로 사라졌다.
"그 여자...... 수배 인물인가요?"
원장이 장형사에게 물었다.
형사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수배 인물은 아닙니다. 어떤 중요한 사건의 참고인입니다."
"어떤 사건인가요?"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형사는 거기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다. 대신 이렇게 덧붙여 말하는 것이었다.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여잡니다. 낯선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합니다."
"누가 해치려고 하는 모양이죠?"
"네, 나쁜 놈들이 그녀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놈들이 그 여자를 칼로 찔렀나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 여자를 살려두면 자기들이 불리하거든요."
"헌데 그 여자는 경찰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오히려 피하는 인상이던데요?"
"그럴 겁니다. 그 여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입장이니까요."
원장이 듣기에는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캐물을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퇴원할 때까지만이라도 잘 보호해 주십시오."
"왜 경찰이 직접 보호하지 않습니까?"
경찰이 병실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우리도 물론 그 여자를 보호하겠습니다만 멀리서 그 여자가 눈치를 못 채게 보호해야 합니다. 그 점이 우리의 애로점입니다."
"왜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사건 성격상 그렇습니다."
들을수록 애매한 말이었다. 원장은 정말 형사의 말을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간호사가 들어와 환자가 잠들었다고 보고했다.
"그 청년을 어떡하죠?"
원장이 형사를 살피듯 하면서 물었다.
"상관없습니다. 가운을 하나 빌릴 수 없을까요? 의사로 행세해야겠는데......."
원장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여분의 가운을 장형사에게 내주었다.
가운은 그에게 작았다. 그는 원장보다 키가 훨씬 컸기 때문에 소매 밖으로 팔목이 쑥 나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그는 두 손을 주머니 안에 쑤셔넣었다.
"괜찮습니까?"
"코메디언 같은데요."
원장은 미소하면서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장형사는 주머니에서 손을 뽑아 뒷짐을 졌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이윽고 그들은 양영자라는 여인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안경 낀 청년 하나가 창가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얼른 보기에도 눈빛이 신선한 것이 대학생 같아 보였다. 왼팔을 다쳤는지 목에다 걸어 고정시켜 두고 있었다.
보고 있는 책은 겉장을 종이로 쌌기 때문에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었다. 청년의 눈이 새로 나타난 키 큰 의사의 아래위를 훑었다.
장형사는 청년을 묵살한 채 침대 가로 다가서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원장의 말대로 환자의 얼굴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오월이란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만일 오월이 아니라면? 장형사는 곤혹스러웠다.
환자는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저 청년을 잠깐 내보내십시오."
장형사는 원장에게 재빨리 귀엣말을 했다.
원장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잠깐 자리를 비켜 주시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청년은 망설이다가 병실을 나갔다.
장형사는 재빨리 창가에 놓아둔 책을 집어들었다. 겉장을 넘겼다. 속표지에 책명이 나와 있었다. <형법 총정리>였다. 볼펜 글씨로 <B대학 법학과 3학년 조민기>라고 적혀 있었다.
장형사는 책을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원장이 환자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장형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시겠지요."
"붕대를 저렇게 감아놓았으니 내 여편네라도 못 알아보겠는데요."
"아마 붕대를 풀어도 못 알아보실 겁니다."
장형사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원장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대수술을 했거든요. 본래의 얼굴을 지우고 완전히 다른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밉상으로 말입니다."
"아니 어째서?"
"본인의 희망이었습니다."
병실 안에서 자세히 캐물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형사는 원장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원장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본인의 희망이라고 그런 수술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장형사는 따지듯이 물었다.
원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네, 저도 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워낙 간청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렇게 수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을 노리고 한 짓은 결코 아닙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장형사는,
"그 여자는 미인이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원장은 초조하게 안경을 벗어 닦았다.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는 모양이지만 저로서는 알 수가 있어야죠."
"어느 정도로 변했나요?"
"아직 붕대를 풀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얼굴이 될 겁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방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장형사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원장을 들여다보듯이 하면서 말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건 꼭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가능하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원장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닙니다. 그 환자의 지문을 찍어 주십시오. 환자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모르게 말입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지문 대조를 해봐야겠습니다."
"그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어떻게 찍으면 됩니까?"
"인주로 양쪽 엄지손가락만 찍으면 됩니다."
"기다려 보십시오."
원장은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인주와 메모지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5분도 못 되어 돌아왔다.
그가 내놓은 메모지에는 두 개의 지문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장형사는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언제 퇴원 예정입니까?"
"열흘 후에는 퇴원해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만일 그 환자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즉시 연락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그 길로 장형사는 시경에 들러 지문 감식을 부탁한 다음 B대학으로 달려갔다.
학생처에 찾아가 용건을 이야기하자 직원은 학적부를 꺼내 주었다. 거기에서 장형사는 법학과 3학년 조민기의 카드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거기에 붙어 있는 사진은 분명히 아까 병원에서 보았던 그 청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는 몇 가지를 적고 나서 그곳을 나왔다.
캠퍼스는 짙은 녹음에 싸여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학생들의 오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여학생 한 명이 박스 안에서 웃으며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학생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학생이 나오자 안으로 들어갔다. 지문 감식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그것은 오월의 지문이 틀림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왔다.
오월의 소재를 파악한 이상 그녀를 체포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냈다는 것을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날이 저물 때까지 할 일 없는 실업자처럼 시내를 배회하다가 그는 다시 오월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찾고 있는 여자의 지문과 일치합니다."
그는 원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말해서는 안 됩니다."
7월 초 오월은 붕대를 풀었다. 붕대를 푸는 자리에는 조민기와 신승우도 함께 있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가 붕대를 푸는 동안 그들은 손에 땀을 쥐고 오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 조용히 앉아 있어서 명상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마지막 붕대 끝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속으로 '아!' 하고 신음을 토했다.
침대 위에는 전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오부인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느 구석에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여자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는 눈꼬리는 풀어져 있었고 얼굴 전체가 찐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한쪽 뺨에는 불에 덴 듯한 흉터가 있어서 흉한 모습이었다. 솟아 있던 콧날은 가라앉아 있었고 입술은 유난히도 두터웠다. 한마디로 정떨어지는 얼굴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원장의 눈에 당혹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수술하긴 했지만 너무도 변해 버린 그 모습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민기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서 있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지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우도 재빨리 그 뒤를 따라나섰다.
"너무해."
민기는 복도에 서서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놀랐어."
승우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수가 없어. 저렇게 변해 버리다니. 너무했어."
"하지만 자청해서 그런 걸 이제 와서 어떡해."
"난 그 여자를 더 이상 차마 못 보겠어."
민기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흐느껴 울었다. 입밖으로 미어져 나오려는 울음 소리를 집어삼키느라고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동안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는 울면서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병실에서 마침 오월이 눈을 뜨고 있었다. 간호사는 차마 그녀에게 거울을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원장이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완전히 달라졌나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원장을 바라보았다.
"한 번 보십시오."
의사는 간호사로부터 거울을 받아 오월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거울을 받아들고 잠깐 얼굴을 비쳐 보더니 거울을 치웠다.
"잘 됐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활짝 웃었다.
그것을 보고 원장과 간호사는 오히려 당황했다. 울며불며 얼굴을 물어 내라고 악을 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돼 먹은 여자인가. 제정신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장완수 형사는 병원에서 세 사람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병원 맞은편에 있는 구멍가게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청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문을 나서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는 심한 전율을 느꼈다. 아니, 저 여자가 오월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잘못 본 거야. 아무리 수술했다고 저렇게 달라 보일 수 있는가!
세 사람은 곧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장형사는 병원으로 뛰어가 오월이 들어 있던 병실문을 벌컥 열었다. 거기에는 환자는 없고 간호사만 있었다. 간호사는 침대를 정리하다 말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방 환자 퇴원했나요?"
"네, 방금 퇴원해서 나갔는데요."
그는 휙 돌아서서 원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원장은 거칠게 들어서는 그를 당황한 기색으로 맞았다.
"퇴원했더군요."
장형사는 분노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네, 조금 전에...... 못 보셨습니까?"
"숨어서 봤죠."
"알아보시겠던가요?"
"전혀......."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완벽하게 수술하셨더군요. 귀신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로 빈정거리는 투의 말이 나왔다.
원장은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저도 결과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렇게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네, 그렇긴 합니다만...... 막상 변한 모습을 보니까 저도 기분이 안 좋습니다."
"난 놀랐습니다. 이만저만 놀란 게 아닙니다.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게 옳을 겁니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대다가 괴로운 한숨을 후우하고 내쉬었다. 그를 따라 원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장형사는 일어서며 물었다.
원장의 얼굴에는 괴로운 표정이 나타났다.
"웃으면서 잘 됐다고 하더군요."
장형사는 인사도 하지 않고 원장실을 나왔다. 그는 차를 타지 않고 무턱대고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더웠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금방 땀투성이로 변했지만 그는 그늘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걷기만 했다.
한참 그렇게 걷다가 그는 어느 다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사이다를 시킨 다음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았다.
"웬 땀을 그렇게 흘리세요?"
사이다를 가져온 레지가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을 걸어왔다.
심사가 사나와 있는 중이라 그는 쏘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나 뭐 좀 생각할 일이 있으니까 혼자 있게 내버려 둬요."
레지가 입을 삐쭉하며 일어서서 가버렸다.
장형사는 천천히 사이다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기분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왜 나는 그 여자를 잡지 않았을까.
이건 분명히 직무 유기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렇게 쫓아다녔으면서 막상 부딪치자 내 스스로 그녀를 피하지 않았는가. 왜 그 여자를 피했지?
그 여자의 변한 모습을 알고 있는 수사관은 나 혼자뿐이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한 그녀는 결코 잡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그녀를 잡아라. 조민기라는 학생을 미행하면 그녀의 은신처를 쉽게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내 손아귀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무슨 이유로 그러는 것일까. 왜 나는 나에게 하나도 이익이 안 되는 일을 자청하는 것일까.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을 알면 나는 즉각 파면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그녀를 체포하기 싫다. 비록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체포해서 재판정에 세우기는 싫다. 정말 싫다. 얼굴까지 바꿔 가면서 복수하려는 그녀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녀를 체포할 것이 아니라 그 악당들을 체포해야 한다. 아니, 그 놈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들을 제거하는 것만이 그녀를 하루 바삐 구하는 길이다.
그녀는 이미 한 놈을 처치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변신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변한 것이 틀림없었다.
창문으로 어둠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불도 켜지 않은 방에 앉아 있었다. 누구 한 사람 일어나 불을 켜려고 하지를 않았다. 세 사람 모두 빛을 싫어하고 있었다. 마치 박쥐처럼.
"그들은 어떻게 됐나요?"
오랜 침묵 끝에 오월이 물었다. 청년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하고 승우가 말했다.
"며칠째 보이지 않습니다. 위험을 느끼고 갑자기 사라진 게 분명합니다."
민기가 말했다.
"그럼 어디 가서 그들을 찾지?"
조용하지만 나무라는 투로 그녀가 물었다.
청년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방안은 어두워져 있었다.
"승우 씨는 틈나는 대로 남포동에 있는 '로댕의 집'이라는 데 나가 봐요."
"'로댕의 집'이라구요? 뭐 하는 덴데요?"
"스낵바예요. 그곳은 내가 처음 발을 디뎠던 곳이에요. 거기서 일했다는 게 아니고 거기서부터 추적을 벌였어요. 거기는 그들의 줄이 닿고 있는 곳이에요. 아직도 손대식이라는 자가 경영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들 사이에 연락이 이루어지고 있을 거예요. 손대식이라는 자가 거기 사장인데 배광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해요. 암호명은 플레이보이구요. 키가 크고 잘생겼어요."
"같은 일당인가요?"
"일당이에요. 하지만 그 자는 복수의 상대는 아니에요. 살인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저도 함께 나가 보겠습니다."
민기가 팔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면서 말했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그는 팔을 흔들어 보였다.
"안 돼요. 민기 씨는 얼굴이 알려져서 안 돼요."
"그래, 넌 안 돼."
오부인과 승우가 이구동성으로 반대하고 나서자 민기는 강력히 반발했다.
"그럼 난 언제까지 처박혀 있으란 말이야? 얼굴이 알려지기는 그 놈이나 나나 마찬가지야. 그 놈도 나를 무서워할 것이 틀림없어."
"무서워한다고? 너를 말이야? 웃기는군. 그 놈이 어떤 놈인데 너를 무서워해? 아마 지금쯤 너를 잡으려고 눈이 시뻘개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너를 발견하는 대로 작살내고 말걸."
승우의 말에 민기는 전율을 느꼈다. 어느새 등골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청사포의 횟집에서 그 자와 싸우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자기를 내려다보던 그 사팔뜨기는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머리를 흔들며 벌컥 화를 냈다.
"누구를 겁쟁이로 아나? 그 놈이 작살내게 내가 가만 있을 줄 알아? 이래봬도 그 놈과 싸워서 난 지지 않았어."
"그 놈을 상처낸 게 오히려 잘못이었어. 병으로 눈을 찔렀으니 그 놈은 거의 미쳐 있을 거란 말이야. 널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작살낼거야. 그러니까 넌 가만히 있는 게 나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란 말이야?"
"그 놈이 죽을 때까지......."
그러면서 승우는 오부인을 바라보았다.
오부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승우 씨 말이 맞아요. 그 자가 죽을 때까지 민기 씨는 몸조심해야 해요."
"변장하고 가면 안 될까요?"
"변장이 그렇게 쉬운가요. 하여간 승우 씨 혼자 먼저 '로댕의 집'에 가봐요."
"지금 당장 가보겠습니다."
승우는 바람처럼 뛰어나갔다.
방안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오월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일어섰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한동안 말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민기도 일어서서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열린 창으로는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돌아가세요. 혼자 있게 내버려 둬요. 앞으로는 직접 만나지 말고 모든 걸 전화로 처리하도록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부인!"
민기는 그녀의 손을 놓고 대신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물러섰다.
"이러지 말아요."
"부인!"
민기는 다가서서 다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번에는 놓지 않고 꽉 끌어안았다.
"부인! 너무합니다!"
"내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요. 우리는 가까워져서는 안 돼요."
그는 오부인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왜 가까워져서는 안 됩니까?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돼요. 그래서는 안 돼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흔들었고, 그럴수록 마침내 그는 오부인을 쓰러뜨렸다.
"부인! 사랑합니다!"
"안 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외치면서 상대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한 청년은 난폭할 정도로 거칠게 그녀를 위에서 타고 눌렀다.
"나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절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부인을 사랑할 겁니다! 부인은 내 것입니다."
"그건 착각이에요."
그녀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몸을 섞은 것도 착각인가요?"
그는 위에서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한 번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래요. 난 벌써 잊었는데......."
"뭐라구요? 그럼 불장난으로 그랬다는 건가요?"
"그래요. 불장난이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기는 사정 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후딱 몸을 일으켰다.
"위선자! 더러운 여자!"
오월은 엎드렸다. 더 맞고 싶다고 생각했다. 따귀를 한 대 맞고 나자 마치 맥주를 한 컵 들이킨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청년의 순진성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이를 어쩌나, 이젠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녀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를 잡아서는 안 된다.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는 그의 갈 길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발작적으로 일어났다.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가로등 불빛에 민기의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민기 씨!"
그녀는 정신없이 그를 불렀다. 그가 몸을 돌려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왔다.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부둥켜안았다. 여자도 울고 남자도 울었다.
"용서해 줘요."
그들은 서로 용서를 빌었다.
"이 추한 여자를 깨끗히 당신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서웠어요."
"아닙니다. 부인은 추하지 않아요."
그는 부인의 옷을 벗기면서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오월도 대학생의 몸에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그들은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 절박한 섹스였기 때문에 두 사람 다 집요하게 상대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어느 쪽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오직 섹스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거리는 바캉스의 열기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부산은 여름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다. 여름이 오면 부산은 작열하는 태양과 넘실대는 푸른 바다 사이에서 용광로처럼 끓어오른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계절에 버스를 타고 혹은 열차를 타고 항도 부산으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리하여 한 계절의 사랑과 낭만이 활기차게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부산에 바다가 없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척박한 땅에서 살려고 할 것인가!
장형사는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걸음을 옮긴다. 부산에 내려온 지 벌써 달포가 지났다. 여관 생활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런데도 떠나기가 싫다. 바다를 떠난 사람이 미어 터지는 살인적인 도시 서울로 들어가기가 싫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말을 보지 않고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저만큼 앞에 신승우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남포동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장형사는 걸음을 좀 빨리 했다.
얼마 후 승우의 모습이 어느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로댕의 집'이라는 스낵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승우는 의자에 무너질 듯 주저앉았다. 책을 보고 있던 처녀가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렸지?"
"30분이나 늦었어요. 가버리려다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긴 머리채를 뒤로 넘기며 곱게 눈을 흘겼다.
"미안해. 오다가 아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좀 늦었어."
그는 탁자 위로 슬그머니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려다가 그대로 가만 있었다. 그녀는 승우가 '로댕의 집'에 출입하기 위해 갑자기 급조해 낸 새 애인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승우는 '로댕의 집'에 다섯번째 오는 것이다. 그 때마다 언제나 그녀와 동행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들어오면서 벌써 실내를 훑어 보았지만 그가 찾는 인물은 오늘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답답함을 느꼈다. 냉방도 되어 있지 않아 실내는 무더웠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대생은 키만 멀쑥하게 클 뿐 좀 바보스러웠다.
"바캉스 안 가세요?"
여자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바캉스? 글쎄...... 가긴 가야겠는데 바빠서......."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방학이면 시간 많을 거 아니에요?"
"공부해야지 놀러 다닐 시간이 어딨어."
그는 제법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왜 웃어?"
"귀, 귀여워서요."
"뭐? 내가 귀엽다구?"
"네, 콱 깨물어주고 싶어요."
승우는 입을 벌리고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사내였다.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승우는 안색이 홱 변하면서 몸이 굳어졌다. 중키에 피부가 검고 얼굴이 네모진 사내. 그는 분명히 민기와 격투를 벌인 바 있는 족제비였다.
사내는 왼눈으로 실내를 사납게 훑어보더니 스탠드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여급을 째려보면서,
"사장 어디 갔어?"
하고 물었다.
"식사하러 가셨는데요."
여급은 두려워하는 빛이었다.
"맥주 한 잔 줘."
"안주는 뭘로 할까요?"
"맥주 달란 말이야."
사납게 쏘아붙이자 여급은 끽소리 못하고 맥주 한 병을 내놓았다.
"여기 얼마나 있었어?"
"한 달 조금 더 됐어요."
"형편 없구만. 사람도 볼 줄 모르고 몇 살이야?"
"스물한 살이에요."
"이름은?"
"미스 한이에요."
"미스 한? 이게 누굴 놀리나? 이름 물었지 성을 물었어?"
"한승희예요."
애꾸눈의 사나이는 당장이라도 잡아 먹을 듯이 그녀를 쏘아보다가,
"여기서 굴러먹으려면 잘 알아서 기어."
하고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승우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갑자기 그러세요? 제가 귀엽다고 해서 기분 나쁘세요?"
"아아니, 점심을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 오는데."
승우는 배를 어루만졌다.
"약 사올까요?"
그녀가 일어설 듯이 하면서 물었다.
"필요 없어.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스탠드에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승우는 그만 숨이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얼른 시선을 돌려 딴청을 부렸다.
"바캉스 가고 싶어?"
"네, 가고 싶어요. 좀 데려가 줘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로 가고 싶어?"
"제주도요."
그때 미끈하게 생긴 사내가 나타났다.
승우는 몇 번 이곳에 출입한 관계로 그 자가 이곳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구,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로댕의 집' 주인은 반색을 하며 스탠드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족제비는 냉정했다.
"아니, 형님?...... 눈은 왜 그러십니까?!"
플레이보이는 족제비 곁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좀 다쳤어."
족제비는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니, 어쩌다가 다치셨습니까?"
"음, 그럴 일이 있었어."
"많이 다치셨습니까?"
족제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형님들은 어디 계십니까?"
"모두 서울로 갔어. 당분간 만나지 못할 거야. 연락은 이쪽으로 하기로 되어 있어. 나는 계속 부산에 남아 할 일이 있어."
"저쪽으로 가시죠."
플레이보이는 그를 룸으로 안내하면서 술을 가져와라, 에어콘을 틀라하며 부산을 떨었다.
"자, 우리 나가지."
승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여자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따라왔다.
"어디 가는 거예요?"
그는 배를 싸쥐고 얼굴을 찌푸렸다.
"배가 더 아파 오는데......."
"그럼 약국에 가서 약 사먹어요."
"난 의사의 처방 없이는 절대 약 안 사먹어."
"그럼 병원에 가요."
"병원에 가는 건 질색이야."
"그럼 어떡해요?"
"집에 가야겠어. 내일 6시에 여기서 만나. 빨리 화장실에 가야겠어."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허둥지둥 걸어가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자 얼른 다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화장실에 들어가 오줌을 갈기고 나서 그는 오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틀림없나요?"
"틀림없습니다! 그 자를 한두 번 봤나요. 눈에 안대를 대고 있는 것이 아마 애꾸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자가 어디 있나요?"
"'로댕의 집'에 있습니다.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다른 두 놈은 서울로 갔답니다. 그 자는 부산에 남아 할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로댕의 집'을 연락처로 한답니다."
"그 자의 거처를 알아내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그는 갑자기 바빠진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로댕의 집'에 들어갔을 때 룸에서 거친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보라구! 난 완전히 한쪽 눈을 잃었어! 애꾸가 됐단 말이야! 그 새끼를 잡기 전에는 부산을 뜰 수가 없어!"
"어디 가면 그 새끼를 잡을 수 있습니까?"
플레이보이의 목소리였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당장 달려가 때려잡지."
"얼굴은 기억하고 계신가요?"
"얼굴은 알고 있어. 하지만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단 말이야."
"오월이란 년을 잡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년도 보통이 아니야. 입을 열게 하려면 사로잡아야 해."
"제가 그년한테 당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립니다. 하지만 그년의 색은 일품이었습니다. 그렇게 근사한 년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닥쳐! 지금 그 따위 소리 하자는 게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두 연놈이 어디 있는지 그걸 알아내야 해. 나는 요즘 그 새끼 찾는 것밖에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혀."
"바닥이 좁으니까 언젠가는 부딪칠 때가 있겠지요."
"그렇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내 생각에는 그 놈이 대학생 같았어. 방학에 들어가기 전에 대학에 가서 찾아봐야겠어. 손이 부족하니까 두 명만 차출해."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느 대학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부산에 대학이 수십 개는 안 되지 않아. 오래지 않아 다 끝나."
"알겠습니다. 두 명을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승우는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조금 후 애꾸눈이 나왔다.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한쪽 눈만 가지고는 시야가 확 트이지 못한다. 시력이 갑자기 떨어져 안개가 낀 듯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바로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의 눈은 무수히 깜빡거리기도, 부릅떠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해도 모든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눈이 잘 보여야 그 놈을 찾을 수가 있는데 조금 먼 거리의 것은 도통 흐려서 보이지가 않는다.
그의 뒤를 멀찍이서 승우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승우 뒤를 장형사가 미행하고 있었다. 장형사는 얼마 가지 않아 청년이 누구를 미행하고 있음을 알았다. 상대가 누구인가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중키에 애꾸눈을 가진 사나이를 미행하고 있었다.
애꾸눈이 택시를 잡는 것이 보였다.
승우도 부리나케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장형사도 택시를 잡아탔다.
세 대의 택시가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20분쯤 지나 애꾸눈은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자리잡은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장형사는 멀리서 택시를 내려 복덕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복덕방 노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장형사는 신분증을 내보였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애꾸눈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
신승우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얼마 후 승우는 가게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장형사는 더 이상 그를 미행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새로운 사나이를 조사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승우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민기는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우는 오부인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 자의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그는 너무 흥분했기 때문에 목소리까지 떨려나오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어디에요?"
"M아파트 3동 301호입니다. 그 앞에 있는 가겟집 여자한테 물어서 알았는데, 그 자의 아파트에 배달을 몇 번 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M아파트면 어디쯤에 있나요?"
"S동 쪽입니다. 저하고 함께 가시죠."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자세히 가르쳐만 주세요."
승우는 그곳 위치를 상세히 말해 주었다.
"혼자 살고 있나요?"
"아닙니다. 어떤 여자하고 있답니다. 부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민기가 들어왔다.
그를 보자 승우는 대뜸,
"너 큰일 났다."
하고 말했다.
"뭐가 큰일이라는 거야?"
민기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 자를 찾아냈어."
"그래에?"
그는 숨을 죽이고 승우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찾아냈어. 낮에 그 자가 '로댕의 집'에 들어오지 않겠어. 헌데 완전히 애꾸가 된 것 같아. 한쪽 눈에 안대를 대고 있었어. 플레이보이하고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까 오른쪽 눈을 완전히 잃었다는 거야."
"저런!"
"그 놈은 너를 찾으려고 헤매고 있어. 내일부터 학교마다 뒤질 생각인 모양이야. 너 학교 가서는 안 돼. 보기만 하면 널 찢어죽일 거다. 말하는 거 들으니까 무시무시하더라."
승우는 어깨를 추스렸다.
"학교에 안 갈 수 있나. 시험인데......."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승우는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 방법이 있을 거야."
승우는 시험이 끝나 한가한 편이었다.
"그 자의 집까지 알아냈어."
"일 많이 했구나."
"오부인한테 보고했어."
이야기를 듣고 난 민기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로서는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뭐라고 그래?"
한참 후 그는 가만히 물었다.
"위치를 자세히 물었어."
11 잠입
아파트 출입구로부터 한 여자가 나왔다. 화장을 짙게 해서 나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러나 젊은 것만은 분명한 여인이 유난스레 몸을 흔들며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흰 바지에 빨간 남방을 입고 있었는데 앞단추를 가슴께까지 풀어헤쳐 대담하게 가슴 부근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한 손에 손지갑을 달랑거리며 껌을 짝짝 씹어대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가정 생활에 충실한 여자 같지는 않아 보였다.
"왜 머리는 저렇게 달달 볶았지."
장완수 형사는 역겨움을 느끼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욕실에서 막 빠져 나온 그녀의 머리는 기름에 젖어 있었고 까치집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키는 크고 호리호리했다. 쌍꺼풀 수술을 했는지 눈두덩이 서양 여자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돈과 쾌락만을 쫓는 즉물적인 갈보의 전형적인 타입이었다.
"바로 저 여잡니다."
하고 경비원이 말했다.
장형사는 바싹 긴장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장 경비실 쪽으로 다가왔다.
젊은 경비원은 모자를 벗어 꾸벅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매니큐어를 바른 하얀 손이 경비실 안에 있는 책상 위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가 책상 위에 떨어트린 아파트 열쇠였다.
"우리 그이 오면 내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가려다가 도로 돌아서서 신문에 눈을 박고 있는 장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경비원에게 껌을 내밀었다.
"껌 하나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경비원은 두 손으로 껌을 받았다. 그는 여자가 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껌을 접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쌍년, 엉덩이 되게 굴리네."
하고 중얼거렸다.
"허리가 기막히게 가늘군."
장형사도 거들었다.
"동거 생활하는 것 같은데 남자를 꼭 우리 그이라고 하거든요. 도대체 끼가 있는 것들은 창피한 줄도 몰라요."
경비원은 그녀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장형사는 손을 내밀었다.
"방금 그 열쇠...... 좀 빌립시다."
경비원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뭐 하시려구요?"
"안에 한 번 들어가서 조사할 일이 있어요."
경비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시는 건 좀 곤란한데요."
"이봐요. 날 믿을 수 없다는 건가? 난 형사란 말이오. 수사상 필요해서 그러는 거니까 열쇠 좀 빌려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도 없는데...... 그러다가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면......."
장형사는 서랍을 열고 열쇠를 꺼내들었다.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염려하지 말아요. 표 안 나게 들어갔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주인이라도 돌아오면 어떡합니까?"
"인터폰으로 연락해 줘요."
장형사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특히 주인이 알게 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니까 절대 비밀을 지키도록 해요.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경비원은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장형사는 경비실을 나와 3층으로 올라갔다. 301호 문을 따고 들어가는 데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20평도 채 안 되는 조그만 아파트였다. 그런데도 안은 살림이 거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안정된 보금자리라기보다는 임시로 기거하는 곳임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방은 두 개였는데 큰 방에는 이부자리가 그대로 펴져 있었다. 여기저기 옷가지가 되는 대로 널려 있었고 먹다 만 과일이며 술병들이 뒹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포르노 잡지가 쌓여 있었고 그와 함께 흥분제로 보이는 약들이 흩어져 있었다.
밀폐된 방안에는 비릿한 내음이 깔려 있었다. 그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그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의 눈은 재빨리 방안을 훑었다.
다른 곳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누워서도 잘 이용할 수 있게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인터폰으로 잘못 알고 그것을 집을 뻔했다. 전화벨은 한참 울리다가 멎었다. 다이얼 중간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수첩에다 그 번호를 적어넣었다. 그의 시선은 감색 보스턴백에 가서 멎었다. 백 속에는 옷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안벽에 붙은 지퍼를 열고 손을 밀어넣어 보았다. 손에 집혀 나온 것은 사진이었다.
컬러 사진들로 남녀 한 쌍이 해운대를 배경으로 찍은 것들이었다. 여자는 아까 경비실에서 본 그 갈보같이 생긴 여자였다. 남자는 가만 보니 애꾸눈의 그 사나이였는데 눈에 안대를 대지 않은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밑에 찍힌 날짜를 보니 5월로 되어 있었다.
장형사는 그 중 두 장을 골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왜 그자는 눈에 안대를 대고 다닐까. 변장일까, 아니면 눈을 다친 것일까. 눈을 다쳤다면 5월 어느 날, 혹은 그 이후가 된다.
옷을 들추자 백 바닥에 콜트 45구경 피스톨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안에는 탄환이 들어 있었다. 여분의 탄창도 세 개나 있었다.
그는 총 넘버를 수첩에다 적었다. 그 밖에 서류 봉투가 하나 있었다. 안에 든 것을 꺼내 보니 여권이었다. 그는 여권을 펴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있는 사진을 노려보았다.
컬러 사진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었는데 이름은 서정수였다. 장형사는 필요한 인적 사항을 적은 다음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넣고 백을 닫았다. 아파트를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꼭 20분이 걸렸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그는 경비실로 들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경비원에게 열쇠를 돌려 주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던가요?"
경비원이 물었다.
"아니오. 생각했던 것보다는 간단하게 해놓고 살더군요."
"이사올 때 맨몸으로 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왜 조사는 하나요? 그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질렀나요?"
장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조사 단계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내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비밀을 지켜 달라는 거요. 내가 여기에 온 것, 그리고 집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 등을 누구한테도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큰일나니까. 알겠소?"
그는 무서운 눈으로 경비원을 쏘아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경비원은 그의 시선을 슬슬 피하면서 대답했다.
장형사는 경비실을 나오려다 말고 멈칫했다. 50미터쯤 떨어진 저쪽에 오월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란 자가용에서 막 내리고 있었다. 차 속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 자신이 차를 몰고 온 것 같았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보고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녀의 변한 모습에 놀랐었지만 두번째 보니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놀라서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아름답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못생긴 탈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복덕방 노인은 친구와 함께 장기를 두고 있다가 젊은 여자를 맞았다. 여자는 진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옷 입은 맵시는 세련되어 보이는데 생긴 것은 정말 형편이 없었다. 쯔쯧, 저 정도면 시집가기도 어렵겠는데...... 아마 혼자 사는 여자겠지. 노인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잔기침을 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손님은 다소곳이 목례를 보낸 다음,
"아파트를 하나 구할까 해서 왔는데요."
하고 말했다.
"아, 그래요? 이리 앉으시지요."
여자는 노인이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하나 구입하시려구요?"
"아뇨, 아파트 살 돈은 없고...... 세로 하나 빌리려구요."
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세 같은 거 소개해 봤자 손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안 된다.
그러나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표정을 다시 밝게 했다.
"전세도 요새는 비쌉니다."
"가능하면 사글세로 빌렸으면 하는데요."
"사글세도 비싸요."
"얼마나 가나요?"
"층수 좋은 건 17평짜리가 40만원 정도가 되지요. 40만원이라야 전세 2천만원에 대한 2부 이자밖에 안 되지요?"
"오늘이라도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가 있나요?"
"있지요."
그는 아파트로 도면을 꺼내 놓고 몇 군데를 가리켰다.
손님은 자세히 그것을 살피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이쯤이면 좋겠는데......."
"3동 302호 말인가요?"
오월은 끄덕였다.
"네, 302호 아니면 301호가 좋겠어요."
"301호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거기는 안 되고, 302호가 비어 있기는 한데 사글세는 안 놓을 겁니다. 거기 말고 여기는 어떤가요?"
노인은 2동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자 손님은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3동 302호를 굳이 고집했다.
"더 좋은 위치도 많은데 하필이면 거기를 찾으십니까?"
"전 거기가 좋아요. 꼭 좀 얻어 주세요."
"아마 사글세로는 안 놓을 겁니다. 하여간 전화나 걸어봅시다."
노인은 아파트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노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결과를 이야기했다.
"정 사글세로 들겠다면 50만원씩 내랍니다. 보증금 3백만원을 걸구요."
노인은 손님이 그만둘 줄 알았던 모양인지. 그녀가 좋다고 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딴 데 비해 아주 비싼 데도 들겠다는 겁니까?"
"네, 계약하겠어요. 내일 들어오겠어요."
복덕방 노인은 머리를 흔들다가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장형사는 오월이 사라지고 난 뒤 10분쯤 지나 그 복덕방에 들어갔다. 30분 후 그는 복덕방을 나와 급히 시경으로 달려갔다. 급히 알아볼 몇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아파트에서 훔쳐온 컬러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조사였다. 두번째는 콜트 45구경 피스톨에 대한 조사였다. 세번째는 서정수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 여권의 진위를 가리는 일이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장형사는 M아파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경비원의 양해하에 빈 아파트에 들어가 잠복했다. 그 아파트는 2동 402호로 맞은편 3동의 301호와 302호를 마주 내려다볼 수 있는, 감시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곳은 주인이 서울로 갑자기 이사하면서 미처 팔지 못해 비워둔 아파트였다.
아파트 내부는 의외로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소파며 침대, 장롱 같은 큰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경비원의 말로는 조만간에 주인이 내려와 모두 가져갈 거라고 했다. 전화까지 있어서 장형사로서는 더없이 다행스러웠다.
그는 인스턴트 식품을 잔뜩 사다 놓고 창가에 앉아 맞은편 두 곳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301호는 밤이 깊어서야 불이 켜졌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 여자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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