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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를 찾아서(제13회)

별꽃구름달 | 2011.12.11 16:27:17 댓글: 18 조회: 1159 추천: 1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1580282

13.

모델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한적한 오후 시간이었다.촬영일정이 없는지 이진희가 대기실에서 잡지를 뒤적이는게 보였다.인기척소리를 듣고 머리를 든 그녀는 부장의 뒤를 따르는 나를 발견하자 눈을 치켜떴다.

 

그 회사는 비서가 없나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녀의 말에 부장이 하는 대답은 내가 듣기에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내가 힐끗 그를 바라보자,그는 마른 기침을 한번 한후 다시 이진희에게 말했다.

 

아직 점심전이면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밥 한끼로 절 공략하려구요?”

 

이진희는 피씩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말과는 달리 탈의실쪽으로 걸어간 그녀는 얼마 안지나 바로 외출옷을 갈아입고 나왔다.부장이 앞장서고 내가 제일 뒤에 섰다.이진희는 부장의 뒤에 바싹 붙으며 약간은 들뜬 어조로 떠들었다.

 

이 부근에 참치회 맛있는데 있는데.”

참치 안먹는 사람 있습니다.”

 

다행이다.부장의 식성이 우연히 나와 같아서.나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진희는 부장의 말에 풀이 죽은듯 보였다.

 

참치 안먹는 사람도 다 있어요?”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다시 하이톤으로 말했다.

 

그럼 인도요리는 어때요?차로 이동하면 10여분밖에 안걸려요.”

 

부장이 문득 멈춰섰다.그는 약간은 난감한 기색으로 이진희를 돌아보다가 머뭇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그럼 진희씨 차로 가는게 어때요?”

오늘 운전 안하고 왔어요?”

그게 아니라요즘 기름값이 올라서…”

 

나는 웃음이 터져나오는걸 참느라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저런 어설픈 대사는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몰랐지만,그 한마디가 이진희에게 가져다준 충격이 결코 작지는 않은듯 했다.그녀가 어정쩡해 서있는 시간이 조금은 길게 느껴졌다.그러다가 그녀가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에이어울리지 않게 왜 그래요.월급 많이 받잖아요.”

 

갑자기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는데 웬지 위화감을 느꼈는지,그녀는 이런 말로 얼버무리면서 대기실로 돌아가 차키를 챙겨들었다.그런 그녀의 얼굴에 이유 모를 짜증이 살짝 묻어나 있었다.나는 아무 말 없이 부장을 따라 그녀의 차에 올랐다.불과 10분도 채 가지 않아서 인도 레스토랑이 눈에 띄였다.그녀가 차를 주차시키는 사이 우리는 안에 들어가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기요.”

 

내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부장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그리고는 빠른 솜씨로 몇가지 요리를 주문했다.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이진희가 좌석에 다가왔을 때에는 이미 첫번째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벌써 시켰어요?”

 

테이블위에 올라온 카레밥을 보다가 이진희가 살작 이마를 구기고 물었다.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채 부장은 카레 소스를 숟가락으로 퍼담기에 여념이 없었다.그러다가 이진희가 고개를 돌려 웨이터를 부르자,부장은 그제야 그녀쪽으로 머리를 들었다.

 

소고기,닭고기,양고기 골고루 시켰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음료수는요.”

 

이진희가 올리치미는 역증을 가까스로 참는게 느껴졌다.그녀는 카레밥을 자기앞으로 끌어다놓는 부장을 보다가 그만 시선을 돌려버렸다.

 

전 바나나라씨가 먹고싶었단 말이에요.”

그런거 좋아하면 살쪄요.그냥 물을 마시는게 어때요.”

 

부장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그녀는 화가 난듯 눈섭을 곤두세웠다.하지만 잠시 뭔가에 생각이 미친듯 그녀가 금세 구겨진 표정을 폈다.다만 비딱하게 팔짱을 낀 자세로,그녀가 부장을 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이렇게도 제가 싫나요?”

 

카레 소스를 퍼담던 부장의 숟가락이 허공에 멈췄다.나는 눈을 들어 이진희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쳐들었다.꼭 마치 이까짓 눈가림수로는 그녀를 속일수 없다는듯한 눈빛으로 그녀가 빈정거렸다.

 

그렇게 본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저를 멀리하고싶나요?정부장님.”

이진희씨.”

 

부장은 숟가락을 놓고 똑바로 그녀를 보았다.더이상 어설프고 민망한 느낌이 아닌,예의 그 정직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그가 이진희에게 말했다.

 

저는 진희씨를 멀리하고싶지도,가까이 하고싶지도 않습니다.다만 진희씨가 제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면,저는 앞으로 진희씨를 상대할 동안 줄곧 아까처럼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건 왜요?”

 

그녀가 이해 안된다는듯 눈섭을 찡긋했다.그리고는 스스로도 답답했는지 담배 한대를 꺼내들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

솔직히 진희씨가 회사에 와서 야단치는것을 상대하기보단 덜 피곤합니다.”

제가부장님께 그 무슨 피해라도 끼쳤나요?”

정신적인 부담도 피해가 아닐까요.진희씬 제가 진희씨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게 좋나요?”

 

부장의 차분한 말에 이진희는 푸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바로 그때 웨이터가 다가오자,그녀는 눈치를 챘는지 바로 담배를 비벼껐다.그리고는 어딘가 절망섞인 표정으로 부장을 보았다.

 

그럼이젠 과도한 관심은 보이지 않을테니,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대해주실래요?”

 

그녀의 말이 웬지 쓸쓸하게 들려왔다.분명 내가 합석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한다는건,그녀가 얼마만한 용기를 냈고 또 얼마나 부장을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수 있는 일이었다.나는 더이상 앉아있을수 없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화장실로 가는척 하고 걸음을 옮기는데,부장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딱딱하게 들려왔다.

 

그럴순 없습니다.”

 

이진희가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는게 느껴졌다.머리를 돌려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파르르 떨며 가방을 챙겨들고 있었다.그리고 내가 미처 어쩔 사이 없이 그녀가 급급히 레스토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부르려다 말고 급히 부장에게로 다가섰다.

 

뭐해요빨리 나가보세요.”

내가 왜요.”

 

부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나는 억이 막혀 발을 굴렀다.이때의 나는 아까 부장과 한 말을 깡그리 잊고있었다.내 뇌리속에는 오로지 금방 이진희가 입술을 떨던 모습만 맴돌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나쁜게 아닙니다.그런 마음엔 상처를 줘선 안되는거에요.”

“먼저 분위기 깨는 모습을 보이다가,진희씨가 의심해서 물으면 딱 잘라 말하라면서요.순수한 비지니스 관계로 남으려면,공과 사를 뒤섞지 말게 진심을 터놓고 말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부장이 이해 못하겠다는듯 나를 보았다.나는 바보같은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멍해있다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 도가 지나쳤어요.아시겠어요?마지막 한마디는 진짜 불필요한 말이었어요.진희씨가 그정도까지 나왔는데 그럴수 없습니다?누가 당신더러 나라를 팔라고 했나요?부모를 배신하라고 했나요?너무한거 아닙니까?”

이 회사는 대체 아래위가 있는겁니까?상사보고 당신이라니요?아무리 신입이라도 너무한거 아닙니까?”

 

부장도 확 언성을 높였다.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잠시후 고개를 들었더니 부장은 여전히 노기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머리를 한번 가로저은후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부장님은 연애를 해본적 있으세요?”

 

부장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대답도 않은채 나를 외면했다.나는 고개를 흔들며 내 말을 정정했다.

 

이렇게 묻는게 아니었어요.부장님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해본적 있으세요?”

“…”

만일 그런 경험조차 없다면,이제부터 길거리 잡지라도 사서 여자의 마음을 읽기에 노력해보세요.아무리 인정하지 않아도 오늘 부장님은 인간적으로 너무하셨어요.”

그래도 한정아씨보단 나아요.”

 

그가 불쑥 내뱉는 말에,나는 의아해져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뭐라구요?”

한정아씨야말로 누구를 진심으로 좋아한적 있나요?한 회사에 마음 붙이는것마저 그토록 인색한 사람이 하물며 사람에게 마음을 붙이겠어요?”

 

뭔가조각같은 저 얼굴에 스치는 저 경멸어린 표정은나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를 주시했다.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수 없었다.편견이란 얼마나 무서운건가.왜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사람의 색안경은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걸까.나는 눈앞의 상황에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부장님,제게 그 어떤 오해가 있으신것 같은데…”

우리사이가 오해가 생길만큼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깔끔하게 우리 사이 관계를 요약해 주었다.나는 차거운 숨을 들이켰다.분명 오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진희를 대처할 방도를 그에게 대줄만큼 가까워졌다고 착각하던 터였다.하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나의 이런 착각이 얼마나 우스운건지 낱낱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저 먼저 회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레스토랑 문을 나서면서 나는 깨달았다.이 회사에서,정동현부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미 상사에게 찍혔으면 영원히 되돌이키기 어렵다는것을.그리고 이미 선입견을 가진 그와 도리를 따지기 보다는 죄송하다고 말하는쪽이 더 쉬운 길이라는것을 터득했다.어쩌면 그동안 부장이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자,좀은 관계개선이 된듯 싶어 발칙했던 내자신에게 후회가 들기도 했다.터벅터벅 회사로 돌아오면서 나는 허한 웃음을 지었다.부장이 있는한,그리고 그가 나를 싫어하는한 내가 이 회사에 몸붙일수 있는 날도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것이다.

 

하지만 내 예감은 의외로 빗나가 버렸다.그로부터 한달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상담팀의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대신 그의 업무를 대체해줄만큼 내 업무능력도 엄청 숙련되어 있었다.다만 내 업무가 고객을 상대하는 일이 아닌,상담팀과 회사와의 뉴대관계를 적절한 수위에서 조정해야 하는 슈퍼바이저로서의 역할이어서,가끔 회사내부 복잡한 인간관계에 시달려야 한다는것을 빼면 그런대로 무난한 회사생활이었다.

 

이 한달동안 나는 주영진과도 퍽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사내식당에서 매일 같이 밥을 먹어도 숙덕공론을 할 사람들이 없을만큼,그와는 만남이 잦은 편이었다.그는 내가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마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도와주었고,가끔 내가 다른 부서에 업무 협조를 구하다가 생경한 인간관계에 시달릴 때면 선뜻 나타나 중개자 역할도 해주었다.만일 회사생활이 줄곧 이렇다면,한 회사에서 몇년을 견디는것쯤은 문제가 아닐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입사해서 한달하고도 열흘이 지난 날이었다.느닷없이 상담팀에 걸려온 한통의 전화는,편안한 내 회사생활을 산산히 부셔놓고도 남음이 있었다.하긴 그날 일후로 웬지 부장이 가만있는다 싶었다.항상 지시를 내릴 때에도 권혜경을 통해서 내게 일을 시키던 부장이,그날따라 내선전화를 걸어와 나를 바꾸게 한것부터 일이 심각해보였다.오랜만에 듣는 부장의 목소리가 어쩐지 약간 낯설게 들려왔다.

 

한정아씨,전무님이 곧 오신다는걸 압니까.”

 

전무라면언젠가 대표가 나를 불렀을 때 부장과 대표사이에 오갔던 대화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그러고보니 대표가 오래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는것에도 주의가 갔다.하지만 그런 전무가 왔다고 해도 나랑 무슨 상관이람내 침묵에 답답했는지 부장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전무님 오시게 되면 당분간 전무님의 임시비서직을 한정아씨가 맡게 됩니다.”

?제가 왜요?”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가 나갔다.비서라니?그것도 전무의 비서라니대체 뭐가 뭐란말인가.

 

이의가 있습니까.”

 

수화기 저쪽의 부장의 목소리에 잔뜩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대체 이인간은 무슨 정서파동이 이리도 심한지.평소 같으면 이렇게 궁시렁거릴만도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부장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든 나는 눈앞에 직면한 상황을 똑똑히 확인해야 했다.

 

부장님,죄송하지만 저는 비서직으로 입사한것이 아닙니다.”

임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와 계약을 맺을때 회사측의 사정에 따라 직무 변동이 있을 경우 직원은 회사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분명 기재했을텐데요.”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부장의 말이 틀린데 없지만,나는 전무의 비서라는 새로운 직함에 웬지 거부감이 들었다.솔직히 겨우 체계가 잡혀가는 상담팀을 떠나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것에 나는 그닥 자신이 없었던것이다.비서비서라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건지.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부장이 간단하게 말했다.

 

복잡한건 없습니다.매일 전무님의 일정을 체크해드리고 평소 그분이 요구하는대로 업무적으로 처리해드리면 됩니다.”

…”

그럼 일단 S시에서 여기까지의 티켓을 예약하고,전무님께 전화를 드리십시오.한정아씨 내선 번호도 전무님께 알려드렸습니다.그리고 이제부터는 상담팀 내선 전화를 한정아씨가 받으십시오.권혜경씨에게도 얘기해 놓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부장이 불러주는 전무의 전화번호와 이름,주민번호를 메모한후,나는 수화기를 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머리를 돌려보니 상담팀 직원들은 저마다 게시판을 들여다보며 맡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그들의 무관심이 부러웠다.권혜경이 관심어린 시선을 보내왔지만,내가 직면해야 할 일은 그녀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티켓을 예약하려고 컴퓨터 앞에 되돌아왔는데 다시 내선 전화가 울렸다.권혜경이 전화를 받아 내게 넘겨주자 나는 몇초동안 잠시 어정쩡해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장이 지시한 일이 바로 현실로 다가오게 되자,그것을 이해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정아입니다.”

전화기를 들고 말하기까지 무슨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가.”

 

부장인줄 알았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부장처럼 딱딱한,아니,부장보다도 훨씬  까칠하게 느껴지는 웬 중년남자의 음성이었다.얼핏 목소리만 들어서는 4,50대 되는 사람 같아 보였다.정체 모르는 목소리의 질책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어,죄송하지만 전화 잘못 거신것 같습니다.”

뭐라,퀸즈 화남지역 본사 전화가 아닌가?”

퀸즈는 맞습니다만…”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뒤이어 내 말을 자르며 그 목소리가 한결 높게 들려왔다.

 

대체 정부장은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가.이게 비서 직통 전화가 아니였나?”

…”

 

나는 삽시에 이마에 식은땀이 돋았다.전무였다.이렇게 빨리 전화가 올줄은티켓은 아직 예약도 못했는데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가차없이 자르며 전무가 냉랭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거 얼마 안돼서 잘 모르는거 같은데앞으로는 내 전화를 받으면 바로 대답할것.아주 간단해.내가 전화한다.자네가 받는다.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급히 머리를 끄덕였다.수화기 저쪽의 전무에겐 전혀 보이지 않지만,그렇게라도 내 긴장된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졌다.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추긴후 나직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전무님.”

자 그럼 됐어.시간낭비는 이쯤하면 충분해.티켓은 예약했나?”

오늘 금방 부장님 지시를 받아서…”

거 참 말귀를 못알아듣는군.난 과정을 듣고싶지 않아.결과만 말해.예약했나?”

아직예약하지 못했습니다.”

 

전무가 잠시 침묵했다.나는 숨이 한줌만해서 수화기를 틀어쥐었다.권혜경이 일을 하다말고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왔다.분명 내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있을거라고 나는 생각했다.아닌게 아니라 내 귀청을 째는듯한 높은 목소리로 전무가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일을 그따위로 처리해?지금이 언젠데 티켓도 예약 안하고!당장 예약해!제일 빠른걸로!”

.”

 

나는 황급히 대답하며 컴퓨터가 있는쪽으로 달려갔다.그러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다시 권혜경에게 달려가서 수화기를 넘겨주었다.그리고는 서둘러 그녀에게 말했다.

 

“S시로부터 여기까지 비행기 티켓 예약하려는데,아는 여행사 있으면 좀 같이 예약해주세요.”

.”

 

권혜경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고,나도 인터넷으로 티켓 전문대행을 찾기 시작했다.그렇게 어렵사리 당일 티켓이 있는곳으로 찾아 예약을 했다.그리고 나는 급히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오늘저녁 아홉시 비행기입니다.항공편은…”

아홉시?내가 밤비행기는 타기 싫어한다는걸 모르나?”

 

대체 당신의 그런 이상한 취미들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고 전무에게 되묻고 싶은것을 나는 가까스로 참았다.그리고는 최대한 공손하게 그에게 물었다.

 

그럼 몇시로 해드릴까요?전무님?”

몇시 몇시가 있어?”

그건…”

몇시 몇시에 항공편이 있는가 다 확인해서 나한테 전화해.”

 

.하고 전화가 끊겼다.나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눅잦히고 아까 그 회사에 전화해서 티켓을 취소시킨후 다시 이곳저곳 전화를 걸었다.그리고는 그 시간들을 메모해서 전무에게 전화를 넣었다.

 

전무님비행기 시간들을 알려드릴께요.아침 8 40분부터 저녁 9시까지 다섯개 항공편이 있습니다.각각…”

 

전무는 내가 말하는 시간을 한참 듣더니,드디어 결정한듯 말했다.

 

저녁 아홉시걸로 해.”

 

나는 눈앞이 아찔해 지는감을 느끼며 부르르 손을 떨었다.이럴바엔 왜 아까 티켓을 취소시켰던가.부랴부랴 그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다행이도 표가 남아있었다.다시 예약을 넣고 전무한테 전화를 했더니 문득 생각났다는듯 들려오는 한마디.

 

일반석 아닌 비지니스석으로 예약했지?”

일반석인데요.전무님.”

 

나는 또다시 폭풍이 쏟아질것을 각오하면서 심장을 졸였다.하지만 전무는 의외로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빨리 바꿔.”

.”

 

나는 여공불급하게 전화를 끊고 다시 대행회사에 전화를 걸었다.한참 싱갱이질 해서 겨우 비지니스석으로 바꾸고 더이상 변경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한후 나는 전무에게 전화를 넣었다.하지만 전무는 늠름하게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저녁 아홉시에 비지니스석에 앉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어차피 내가 싫어하는 밤비행기니까 대충 가면 되겠지.일반석으로 하되 창문옆이 아닌 통로쪽으로 달라고 해.”

 

나는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한 살인의 충동이라는건 이처럼 쉽게 일어날수도 있다는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차라리 퀸즈 회사를 항공사로 바꾸시지요 하는 말이 입끝까지 나오는걸 도로 배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으며 나는 소리없이 웃었다.인내의 한계에 달한 웃음이었다.

 

,알겠습니다.전무님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수화기를 집어던졌다.부장이 이겼다.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그는 전무라는 칼을 이용해서 나를 손쉽게 처리해버렸던것이다.일순간 머리속이 하얗게 비었다가 다시 차갑게 식었다.오히려 극도에 달한 분노로 인해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기까지 했다.이제는 더이상,털끌만치도 이 회사에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한 나는 좀씩 떨리는 손으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전히 짤막한 부장의 말에,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잠시 제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정동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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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 (♡.93.♡.14) - 2011/12/11 22:50:59

정부장하곤 뭔가 오해가 있는듯한데요..
잘 읽고 갑니다.

빙점 (♡.120.♡.218) - 2011/12/11 23:00:12

갑자기 먼가 떠오르지 않아 멍때리고 있었네요.
정부장은 정아에 대해 먼가 알고 있나요?
왠지 왜곡된 감정으로 대한다는 느낌!

바이러스3 (♡.160.♡.2) - 2011/12/12 12:15:39

당사자로서는 음...빙하에 서있는 느낌이겠죠?

아....전무를 보니 갑자기 그거 생각나죠?(穿PRADA的恶魔)....

이런 변태같은 전무라니....인간저질이야..이건 상사로서..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16:53

문제없어님,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나님,그러게요,그 오해가 왜 생겼는지 풀어나가야 할것 같습니다.

빙점님,뭔가 알고있는게 아닐까요?저도 면접 갔을때 상사가 저를 알고있는 유사한 경험이 있어서요.ㅋㅋ

바이러스3님,맞아요.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렸어요,저도.ㅋㅋ그리고 현실에서도 똑같이 저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답니다.생각하면 열받네요.^^

겨울국화 (♡.19.♡.216) - 2011/12/12 13:45:33

참 !급좀 췄다고 아래사람하게 하는 꼴 보면ㅉㅉ
보는 내가 머리 피줄이 일어서는 감이네요 ㅋㅋ
정부장은 혹시 정아에게 첫눈에 반해가지고
우정 자신의 감정이 드러날가봐 그렇게 날카롭게 구는게 아닐가요 ???
그래도 인젠 하나둘씩 정아편이 생겨서 다행이예요

이번집도 너무 재밋게 읽었구요
다음집도 좀 빨리 올려 주셨으면 하는 기대감이예요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18:00

겨울국화님,정부장은 한정아를 어느정도 알고있는 느낌이 드네요.저 전무라는 캐릭터는 전무후무할것 같습니다.다음회가 너무 늦어져서 죄송한 마음뿐이랍니다.ㅠㅠ

노벨과개미 (♡.194.♡.57) - 2011/12/12 14:01:12

잠시 제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정동현씨.”ㅋㅋㅋ 이 한마디에 속이 시원해지네요..악덕부장에 악덕 전무 ..근데 부장이랑 전무랑 다 정아에게 무슨 사연잇을것 같은 예감은 어디서 올가요 ...다음집도 기대합니다 ..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18:38

노벨과개미님,그 한마디가 한정아의 결심을 말해주고있죠.^^사연이 있을지도 모르죠.담집에서 뵙겠습니다.

강니 (♡.214.♡.34) - 2011/12/12 15:34:56

저도 노벨과 개미님처럼 마지막 말에 속이 시원...세상에 이런 변덕쟁이도 있는거구나.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19:03

강니야,저것보다 더한 변덕을 봤다면 믿으려나?

해피투데이 (♡.70.♡.3) - 2011/12/13 20:06:34

아~ 이진희를 골탕먹이는 방법이 요런거였구만요 ㅋㅋ
근디 왜 갑자기 저런 변.태같은 전무가 나타났답니까 휴~~
어느 장단에 맟추면 되겠는지요...
마지막 “잠시 제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정동현씨.” 이 한마디는
회사 때려치겠다는 각오로 말한거겠죠~
이번회도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23:21

해피투데이님,전무라는 캐릭터가 나타나서 심심하지는 않을거 같네요.마지막 한마디는 님 말대로 그 각오를 한거랍니다.글 업뎃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리사오롱 (♡.43.♡.53) - 2011/12/14 11:55:08

리사오롱은 무조건 추천이얌 ..ㅋㅋ 추천 확 때리고 감다. 흐흐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23:46

리사오롱님,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향기바람이 (♡.149.♡.239) - 2011/12/14 17:48:42

밀린글들 보고갑니다 몰입도 최고입니다 ^^
여주는 진작 저 회사를 나왔어야 했는데 온갖 일을 겪고 결심했군요
퀸즈회사의 사람들 여태 보면 인간다운 사람이 없는데
여태 버틴것만 해도 여주한테 기립박수를 보내고싶습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든 회사와 연결이 되어 나오지 못하겠죠?
근데 도대체 누가 남주입니까? ㅜㅜ 정동현 부장? 주영진?
전 착하고 매너있는 주영진한텐 호감 안가고
까칠한 남자 매력있긴 한데 정부장은 도통 속내를 알수 없군요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동현씨, 여주를 너무 힘들게 해서 마이너스 점수에욧!
정동현씨, 이따 여주한테 잘해야 돼요 지켜보겠어요 ㅋㅋㅋㅋㅋ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25:53

향기바람이님,시간이 좀 너무 디테일하게 가죠?여주 인내도 꽤 끈질긴가 봅니다.퀸즈 사람들이 인간성 없어보이지만 그런 역경도 버텨나가는게 인간이 아닌가 싶구요.남주는 부장이 아닐까요?저 자신도 부장한테 애정을 가지고 쓴답니다.^^여주 힘들게 하긴 하지만 가끔 여자들은 나쁜 남자한테 더 끌리니까요.ㅋㅋ

사랑아안녕 (♡.234.♡.38) - 2011/12/22 20:16:09

부장은 어쩜 마음에 한정아란 여자를 이미 담아놓은것 같습니다.
이진희입장은 제맘이 후련할 정도루 표현이 잘된것 같구요.
몸두 춥구 마음두 시린데 부장이랑 여주의 냉정하구 특이한 사랑얘기 기대하구 싶습니다

별꽃구름달 (♡.8.♡.206) - 2012/01/07 15:27:44

사랑아안녕님,항상 독특한 견해를 갖고 계신데 그게 마음에 와닿아요.^^부장도 한정아도 서로를 의식하는게 보입니다.다음회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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