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제 4장 : 통합의 장

3학년2반 | 2021.12.04 07:31:23 댓글: 0 조회: 152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29936
제 4장 : 통합의 장


무림은 무림맹주 무극검황 옥청학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를
호위했던 30명이 넘는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사들까지 함께 사라졌기에 구구
한 억측과 유언비어가 나도는 가운데 정파는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했다. 맹주
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무림맹은 청성(靑城), 점창(點蒼), 무당
(武當), 아미(峨嵋), 소림(小林), 곤륜(崑崙), 종남(終南), 화산(華山), 공
동(空洞)의 구파와 개방( 幇), 또 남궁세가(南宮世家), 악양세가(岳陽世
家), 서문세가(西門世家), 종리세가(鍾里世家),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오대
세가가 연합한 단체인 만큼 그들은 맹주의 실종과 함께 자파에서 맹주직을 차
지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미, 소림의 경우 승려들로 이루어 졌기에 맹주직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고 무당과 곤륜은 도인들로 이루어 졌기에 권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또
개방의 경우 거지떼로 이뤄졌기에 거지의 특권인 무소유, 무욕에 상반되기에
맹주직을 노릴 가능성은 없었다. 악양세가의 경우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는 있
었지만 의가(醫家)였기에 무림의 장악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15개의 거대세력 중 6개의 세력을 뺀 9개의 문파가 문제였다.
그들은 각파의 장문인 내지는 뛰어난 고수들을 앞세워 맹주직을 노렸다. 하지
만 사실상 맹주가 될만한 인물은 몇사람 되지 않았다. 우선 옥청학의 아들 옥
진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맹주였기에 맹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잡
고있는 인물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옥청학은 맹주이
자 공동파의 전대 장문인이었으며 그의 아들 옥진호에게 공동파 장문인의 직
위를 넘겨주고 맹주에 취임했었다. 하지만 옥진호 장문인의 무공은 그의 경쟁
자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게 흠이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이 서문세가의 가주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
(西門吉制)였다. 가전의 뇌전도법을 10성이상 성취한 유일한 인물로 120세에
이르는 화경의 고수였다. 서문세가의 힘이 오대세가의 수위에 오르는 만큼 서
문길제가 맹주로 등극할 확률은 지극히 높았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은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이었다. 사
실 그녀는 구파일방에도, 오대세가에도 들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무림 최고
의 정보단체 무영문을 운영하는 여걸인 만큼 무림맹의 정보력에 지대한 공헌
을 하고 있는게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공헌도를 내세워 맹주직위
를 노린다면 딱히 무림맹에서 거절하기 힘들다는게 세인들의 평이었다.

그 외에 무당파의 태극검제(太極劍帝)와 곤륜파의 곤륜무제(崑崙武帝)라는 거
목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200세에 가까운 노고수들로 화경에 이른 인물들
이었다. 물론 그들이 맹주의 직위를 노린다면 다른 인물들보다 우선권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둘은 세상의 명리를 따지지 않는 도인들에다가 은거를 선
언한지 수십년이 지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직접 나설 가능성은 거
의 없었다.

또 맹주의 선출에 무림맹 자체의 이권도 있었다. 만약 무림맹은 뇌전검황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그를 무조건 맹주로 세웠을 것이다. 제자수 200여명
정도의 제령문 같은 작은 문파에서 그렇듯 고강한 무예를 지닌 인물이 나온게
놀라울 정도였지만 사실상 칠룡사봉에 뇌전검황의 대제자도 아닌 서진(徐眞)
이라는 제자가 들어간 것만 봐도 제령문의 저력을 옅볼 수 있었다. 거기에 뇌
전검황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기에 다른 인물들의 반발도 없을테지
만 사실 무림맹에서 그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이유는 딴데 있었다. 뇌전검황
은 유일하게도 삼황오제에 들어가는 초절정 고수들 중 가장 기반이 약한 인물
이었던 것이다. 문도수 겨우 200여명. 그렇다면 기존무림맹의 골격이 바뀔수
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파에서 맹주가 나오면 그 맹주는 약 2-3천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모든 중요 직책들에 그의 심복들을 집어넣게
된다. 하지만 뇌전검황은 그럴만한 인재를 보유하지 못했기에 그를 맹주에 세
운다 하더라도 공동파는 계속적으로 무림맹의 요직을 독점... 장기적으로 무
림을 주무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뇌전검황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고 공동파가 내세울 유일한
인물은 옥진호 장문인 뿐이었다. 만약 맹주선출이 시작되면 옥진호 장문인이
맹주가 될 확률은 거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행방불명
사실을 공포하고, 어딘가에 맹주가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차기맹
주를 선출하지 않고 옥진호 장문인을 맹주대리로 앉히고 맹주를 찾아내는 작
업을 우선시 하려고 공작을 펼치는 중이었다.

거기에다 무림맹이 맹주의 실종으로 난리가 나버려 제기능을 상실하자 급기야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태껏 무림맹의 중제로 충돌하지 못하고 있던 남궁세
가와 서문세가가 구휘대협의 무덤을 기화로 정면충돌했던 것이다. 거기에 엎
친데 덮친격으로 사파의 다섯 개 방파와 정파의 7개 방파까지 무덤을 빌미로
충돌을 벌여 이제 사태는 거의 구휘대협의 무덤을 중심으로 정과 사, 사와
사, 또 정과 정의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추악하게도 무공비급과 보물을 놓고 싸움질을 하고있는 것이
다.

거기에 세상은 진천왕의 반란으로 인해 그를 진압하려는 황제와 반란을 일으
킨 왕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소란스러웠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귀주
성과 사천성에는 전쟁통에 수백만이 넘는 피난민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그덕
분에 대사마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는 서둘러 요를 정벌한 후 요 정벌에
커다란 도움을 준 여진의 족장들과 회담을 하여 송화강 동쪽을 여진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처음에는 여진까지 싸
그리 정벌해 더 이상 화근거리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본국에
내전이 터졌는데 한가로이 야만족들 정벌한다고 대군(大軍)을 변방에 놔둘수
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계략이 송화강 동쪽을 여진에게 주는 것이었다. 일부
러 그들은 각 족장들과 송이 여진에 공여하는 송화강 동쪽의 영토를 여러등분
하여 그 토막들의 경계선을 불분명하게 하고 두명, 혹은 세명의 족장들에게
중복하여 같은 영토를 줌으로 해서 여진족들끼리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도록
머리를 써버렸다. 그리고 그 전과에 따라 대송 황제가 내리는 벼슬도 함께 내
렸는데... 일부러 작은 부족의 족장에게 높은 벼슬을, 또 큰 부족의 족장에게
낮은 벼슬을 내렸다. 거기에 한술 더떠서 어떤 큰 부족은 부족장 보다 그 수
하 용사가 더 높은 벼슬을 받은 곳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여진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난 후 대송의 주둔군이 철수하고 나자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의 계략대로 여진족 내에서 지독한 내전이 벌어졌다. 하지
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 내전은 아골타라는 뛰어난 젊은 족장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는 카막투이 부족의 일개 젊은 족장이었지만 요 정벌에
서 송의 군대와 함께 싸우며 집단전의 기법을 배우게 되었고, 거기에 사방에
서 지독한 부족간의 갈등이 생긴점을 이용해 각종 모략과 술수를 동원하여 빠
른 시간안에 여진족을 통합해버렸던 것이다.


길지(佶止)는 오늘도 정연(鄭蓮)이 년하고 만나기 위해 '달 구경'을 하러 나
왔다. 사실 오늘 달은 떠있지도 않았지만 군데군데 밝혀진 외등(外燈)에 비춰
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그의 달구경 행각에 대해 아무도 의심조차 하지 않
았다. 사실 그가 이놈의 '달 구경'을 명분으로 정연이 년하고 밤마다 놀아나
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전에 타주 암살미수사건 덕분에 몇몇 살기를 풍기는 마인들을 보고 혼줄이 났
을만도 하건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정연이란 하녀와
산책을 즐겼다. 아무튼 하인, 하녀들의 경우 독방은 주어지지 않고 적게는 4
명에서 많게는 2-3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방에서 집단생활을 하는지라 오붓
한 공간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젊을수록 큰방에 왕창
때려넣는 것이다.결혼을 한 하인, 하녀들의 경우 한 방에서 지내게 배려하지
만 총각, 처녀들의 경우 그정도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게 이 장원 주인의
신념인지 집단생활은 변하지 않고있었다.

사실 집단생활을 하게되면 하녀들의 경우 훨씬 더 정조를 지킴에 있어 유리하
다. 많은 여자들이 있는 곳에 침입해서 강간할만큼 간큰자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게 되려면 그 많은 여자들을 모두 다 비명도 못지르게 제압해야 한다는 선
제조건이 지켜져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12명의 젊은 하녀들이 자는 방에 6
명의 하인들이 침입했다가 비명소리에 출동한 무사들에게 그 하인놈들이 반죽
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지 않는가? 12명을 동시에 제압하는 것은 그만큼 힘
든 일이었다. 하지만 정조를 지키는데 유리함은 있었지만 배우자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불리한게 또 집단생활이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남자들은 남자들
끼리...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낮에는 도저히 만날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밤에라도 오붓하게 만나 대화로서 정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럴 공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연이는 아주 운이 좋게도 길지라는 성실한 남편감이 생겼고 또 그들
은 밤마다 달구경을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내놓기도 힘든 외모
때문에 '이러다가 결혼도 못해보고 죽는게 아닌가' 하고 가졌던 정연이의 불
안감은 매일 계속되는 달구경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목석같은
길지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혼인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 둘의 달구경 행각은 거의 5개월이 가까워 오고 있었던 것이다.

길지가 정연이를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가벼운 입맞춤은 이제
제법 농도짙은 입맞춤으로 바뀌어 있었고 길지의 손은 어느결에 정연이의 말
캉하면서도 탄탄한 유방을 주무르고 있었다. 야밤에 으슥한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서로에 대한 달콤한 애무를 멀찍이서 보고있던 김석(金奭)은 입맛을 다
시며 옆에있던 동료 장경(張莖)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뭔가 할것같지 않냐?"

그러자 김석과 같이 검은 옷으로 잘 위장하고 낮게 엎드려있던 장경은 저쪽
풍경은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시큰둥한 어조로 속삭였
다.

"뭘? 저러다가 또 그냥 돌아가겠지. 병신같은 녀석... 완전히 밥이 다 익었는
데다가 뜸까지 다 들었는데 거기에 또 시간을 끈단 말이야. 저러고 앉아있다
가 죽쒀서 개주지...."

김석은 두 하인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다가 또다시 낮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거 같은데?"

"저 병신같은 녀석은 오늘도 못할거야. 한달 전부터 저 하녀 유방을 주물러대
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 더 이상 진도가 안나는거 보면 오늘도 글렀어."

"그래도..."

"아. 글세 보초나 제대로 서. 저 년놈들 하는거 보려면 반년은 더 있어야 할걸?"

"흐흐흐... 그래도 보초서면서 유일한 낙이 저거 구경하는거 아니겠냐? 저것
들은 우리가 보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그덕분에 여기서 보초서려면
얼마나 경쟁이 심한데? 네놈도 그거 혹시나 구경할 수 있을까 해서 이리 온거
잖아."

"어쨋든 오늘도 아닐걸?"

"아냐. 어쩌면 오늘 할지도 몰라."

"나는 저것들이 안한다는데 10냥 걸지."

"나는 한다에..."

"10냥 벌었군. 흐흐흐..."

김석과 장경은 이곳 외당과 내당의 사이에 있는 12곳에 투입된 24명의 보초들
중의 한 조였다. 5개월 쯤 전부터 시작된 하인과 하녀의 달구경은 이곳에 보
초를 서고있는 자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놈의 사내녀석이 어지간히 숫기가 없는지 마냥 진도 느려터져서는 구경하는
사람 복장에 열불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은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만 만났고 꽤 으슥한 곳이기는 했지만 그게 또
제8조가 초보서는 부근이었기에 고것들이 하는 행동이 자세히 보였다. 거기에
보초서는 인물들은 마교에서 뼈가 굵은 우수한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정도 어
두움은 그들의 안력으로 봤을 때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했고, 행여 바람까지
잘 만나면 그 둘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그 때문에 초기에
그 둘이 언제 할건지에(뭘?) 대한 내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사내녀석이 미적
거리는 통에 얼마 안있다가 사고(?)친다는 쪽에 걸었던 자들은 모두 다 피같
은 돈을 날려야만 했다.

이윽고 거의 2각(30분) 정도 지난 후 두 연놈들의 하는 짓거리를 감상중이던
김석이 장경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장경이 바라보니 그 둘이 자리를 옮기
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하는 짓거리가 이상했다. 앞으로 한 한시
진(2시간) 정도는 더 쑥덕거려야 정상인데 벌써 일어서다니? 진짜 오늘 하려
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 그 둘은 조금 더 이동하더니 좀 더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다. 그쪽에는
뒤쪽으로는 아예 벽으로 막혀있고 앞쪽에는 물건이 야트막하게 쌓여 이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오늘따라 뭔가 하려나? 제길... 10냥 잃었군. 이렇게 된거 구경이
라도...'

그 사내녀석이 여자를 끌고 간 곳은 이번에 물건을 다 꺼내서 비어버린 창고
였다. 물건이 없으니 문을 닫아놓지도 않았으니 둘이 숨어들어가기에는 아주
좋았다. 거기에 아늑한 둘만의 공간일테니... 그 둘은 이제 별빛마저 비치지
않자 자그마한 등에 불을 붙여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환기가
잘 되어야만 저장할 수 있는 물품들을 넣어두기에 제법 넓직하게 뚫려있는 창
문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은 창호지를 발라놓은 것이 있었지만 속에 물건이
없으니 그 창문마저 다 열어놔서 안에서 하는 짓거리를 보는데는 아무런 지장
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사내녀석이 계집을 꼭 껴안으
며 주저앉아버리자 둘의 대가리 윗부분만 보일 뿐 뭔 짓꺼리를 하는지 알 재
주가 없다. 오늘은 그런대로 풍향이 좋아서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긴 하지
만 무슨소린지도 명확하지도 않았다.

보초를 서던 둘이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청각에 온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한
다. 이것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냥의 돈이 주인을 뒤바꾸는 불행한 사
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계집이 살며시 일어섰다. 옆에 있는 등불의 약
한 불빛 때문에 계집의 표정까지 다 보일정도... 이때 놀랍게도 계집은 천천
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옷!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둘이서만 볼수도 없는 노릇... 하여튼 저 연놈들
의 행동에 걸린 내깃돈이 엄청난 액수였기에 그 둘의 행동은 모든 보초들의
공통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김석은 살며시 신호를 보내 주위에 있던 동료들
에게도 관음(觀淫)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살짝 보낸 신호였지만 주위에 퍼져
있던 녀석들은 모두 다 모였는지 곧이어 김석의 주위에는 8명 정도의 동료들
이 더 늘어나 있었다. 모두들 입을 헤 벌리고는 얼굴은 별로였지만 통통한 몸
매에 봉긋한, 탄력이 있을 것 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유방이 드러나는 광경을
군침을 삼키며 정신없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곳에 보초들이 집중되면서 벌어진 틈을 이용해서 유유히 진법을 돌파
중인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보초들은 한곳에 집중된 듯 주위에 인기
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능력으로 조용히 돌파할 수도 있겠지만 사
실 보초들만 지킨다면 손쉽게 통과가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진법이었다. 그는
진법에 있어서는 완전히 깡통과 다름없었기에 아주 서서히 돌파해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잘못하다가는 보초들에게 들킬 우려도 많았다. 보초들이 매복하
는 장소들이 진법이 돌파가능한 생문(生門)의 위치일 것이라는 것은 진법의
왕초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생문은 보초들이 막고있으니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속이고 들어간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죽이고 들어가면? 상
대의 실력을 봤을 때 아마 대단히 힘들 것이다.

전에 들어왔다가 돌아가신 자객도 그게 불가능함을 알고 수면제를 풀어서 모
두들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헤매게 만든 후 들어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똑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 중상을
입은 줄 알고 이 호기를 놓칠수는 없어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뚫고 들어가려
고 했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하기도 전에 위에서 비밀리에 '아무래도 뭔가 수
상한 점이 많으니 좀더 사태를 관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실 그가 그정도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면 그의 적들이 아직까지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는 조
금 더 지난 후 이곳 주인이 단지 조금 장기간 외출을 했을뿐, 멀쩡하다는 걸
알아냈고 이제서야 자신의 계획을 조심스레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외당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첩자들이 활동하는게 분명했다. 이번 비무대회를
통해 2000여명을 선발하자마자 그에게 곧바로 진법의 침투경로가 자세히 그려
진 지도가 살며시 도착했을 정도니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진법을 통과하여 내당으로 들어선 후 파해법이 담겨진 종이를 완전히 찢
어 입속에 넣은 후 꼭꼭 씹어 가루를 만든 다음에 꿀꺽 삼켜버렸다. 자신이
통과해 온 백영환혼진(魄影還混陣)은 살상용 진법이 아닌 환영을 통해 외당에
서 내당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저지하는 진법이다. 대신 내당에서 외당으로 통
과하는 것은 아예 진법이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그냥 가면 되도록 설계되어있
다. 철저히 외부에서 침입은 힘들게, 내부에서 외부로의 진출은 쉽게 된 아주
강력한 고수들을 내부에 많이 보유한 곳만이 설치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그가 어두운 곳에 몸을 감춘 후 보초들이 제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얼핏 느껴
졌다. 이곳으로 통과하기 위해 무려 5개월을 공을들인 계집이다. 그의 최면술
에 걸려 그와 정사(情事)를 벌이는 줄 착각하고 학학대다가 아마 지금쯤은 탈
진해서 뻗은다음 내일 아침까지 잠들어 있을게 뻔했다. 보초들도 이제 정사를
나누는 계집의 간드러진 신음소리가 멈추니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제자리로 돌
아가서 또다시 보초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게 분명했다.

그는 조용히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분타주의 방이 어딘지는 대단히 알아내
기 힘들었다. 내당에 들어있는 하인들은 대단히 믿을 수 있는 인물들만 뽑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살며시 내당 내부의 사정이 퍼
져나갔고 거의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되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는 현경의 고수
다 보니 다른 일부 귀찮은 목표물들처럼 방을 옮기지도 않았다. 하여튼 대단
한 자신감이었다. 그덕분에 지금 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그정도 약점도 안드러내면 죽일 방법이 없지...'

그는 살며시 건물의 마루쪽으로 다가갔다. 건물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더더욱
자신의 기척에 신경을 썼다. 최소한의 기만을 끌어올려야 했기에 그의 행동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은잠술을 극도로 사용하여 소리라고는 정말 낙엽떨어지
는 소리 정도도 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마루 아래, 즉 두짝의 신발이 놓
여있는 섬돌 뒤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에는 서서히 귀식대법
(鬼息大法)까지 운용하기 시작해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일반적인 경우 기환술 따위를 이용해서 몸체를 아예 땅속에 숨기는 방법도 사
용할 수 있지만 괜히 그런 내공이 많이 사용되는 고급 기술을 써먹으면 오히
려 뛰어난 고수에게는 발견될 확률이 높았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최대
한 기척을 없애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가 가사상태로 들어가기 직전 최후로 한 일은 허리에 꼽아뒀던 비장(秘藏)
의 쇠꼬챙이를 손잡이를 꼭 쥐고서 자신의 배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고 목표물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 * *

"타주님. 의뢰하신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호오... 수고하셨소. 어디 봅시다."

"화경에 이르는 일부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아주 어려워서
2500명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그 명단과 그들의 상세한 내력입니다."

묵향은 설무지가 건네준 서류뭉치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흐음... 일단 무림에 그 실력으로 인해 드러난 인물들의 경우 첩자일 가능성
이 없어서 좋지. 문제는 이놈들을 어떻게 포섭하느냐 하는것이로구만."

"그렇죠. 그래도 그들의 경우 어떤 뚜렷한 파에 귀속되지 않은 걸출한 인물들
이니 먼저 잡는사람이 임자라고 봐야겠죠."

"그런데 여기 가장 첫 번째에 올려진 이녀석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가?"

"불계불황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삼황 오제 사천왕을 모르십니
까? 그는 누가 뭐라해도 삼황(三皇)의 수위를 차지하는 괴물인지라..."

"사천왕하고 두명의 황(皇)은 잘 알지. 한사람은 내가 죽였고... 한놈은 내가
필히 죽여야 될 놈이니까. 그 외에는 잘 몰라. 그런것에 신경을 쓴적이 없으
니까... 그런데 그런 고수가 왜 이토록 세력이 없는가?"

"그거야 그자가 천성적으로 도당(徒黨)을 형성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남을 부리는 것도 싫어하지만 남에게 귀속당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불계? 이녀석은 파계승인가?"

"예. 그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공공(空空) 대사라면 현 무림의 전
대 장문인이었던 공지(空知) 대사의 사형이지요. 그는 소림의 대부분의 무예
에 통달한 소림이 자랑하던 기재였는데... 너무 무공에 힘을 기울이다가 주화
입마를 당하는 바람에 마기가 뇌수에 뻗어 완전히 돌아버렸죠."

그러자 묵향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미쳤다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가?"

"헤헤... 그것도 완전히 미쳐야 되는데 아주 조금... 적당히 미쳐버려서 인간
성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 더 큰일이죠. 음탕, 호색한데다 탐욕이 목구멍까
지 차서 지금은 소림에서도 아예 자사(自寺)에서 배출한 고수라는 것을 숨기
기에 급급할 정도니까요."

"그럼 더 이상 먹칠하기 전에 없애버리면 될텐데... 왜그렇게 신경을 쓰나?"

"그게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그렇죠. 타주께서도 어떤면에서 보면 그와 비슷한
입장이 아니십니까?"

"흐음... 그렇군. 그럼 이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지?"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산속에 토룡문(土龍門=지렁이)이라는 문파를 하나 세워놓고는 수하 백여명을
거느리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쾌락 속에 파묻혀 살고있죠. 말은 문파인데
깡패소굴이나 다름없이, 별의 별 불법적인 사업들을 벌여 주변에서 금전을 훑
어 들여 그 비용을 조달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반반한 계집들을 납치까지
하는데도 누구도 못건드리는 것은 그놈의 무공이 원체 강한지라..."

"도대체 어느정도인가?"

"모두들 그를 삼황의 우두머리로 취급할 정도입죠. 하는 짓과는 달리 아직도
불문의 정통무공을 기억하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아예 미치지는 않은 것이 확
실하죠. 역근신공(易筋神功)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흐음... 구미가 당기는 인물이군. 그런데 두 번째로 기록된 만통음제(萬通音
帝)는 또 뭔가? 오제에 들어가는 인물인가?"

"예. 어쩌다 한번씩 나타나는 신비한 척 하는 인물인데 하는 짓은 공명정대한
데 성질이 더럽고 손속이 잔인해서 정사의 중간에 놓이는 인물입니다. 이자도
아마 뚜렷한 단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음공(音功)의 고수지요."

"이놈도 탐이나는군. 이놈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도록!"

"존명!"

묵향은 그 서류뭉치들을 뒤적이다가 갑자기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녀석 명호가 걸작이군. 비사비협(非邪非俠)이라..."

"명호에 비해서 아주 뛰어난 인물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뭔가?"

"중원인이 아닙니다."

"새외무림의 인물인가?"

"예. 한번씩 무공자랑을 한다고 중원에 나오기는 하는데 요즘은 어디로 숨었
는지 잠잠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써져있는 인물들 중에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인물은 몇
명인가?"

"800여명 정도죠. 대부분이 떠돌이 고수들입니다."

"그렇다면... 으음... 실력이 어중간한 녀석들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들
에게 맏기기로 하지."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정도는 믿을 수 있어. 만약 그자들 중에서 첩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이리 오지도 못했을거야. 그러니 그녀석들의 영입은 여지고 수석장로에게 맏
기기로 하고 여지고 장로에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배반에 철저히 대비하라
고 지시하게."

"존명!"

"사실 그녀석들을 확실히 믿기는 좀 어려우니까... 아예 외부에 일거리를 줘
서 보내버리는 편이 좋을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밤도 깊었는데 이만 가보게. 내일 마저 얘기하기로 하지."

"예."

"참. 홍진 막주에게 연락해서 포섭할자들의 위치를 더욱 세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하도록. 겨우 800명 정도만 위치를 알아서야 뭘 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묵향은 설무지가 나간 후 방의 중앙에 좌정하고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이제
서서히 꼬리가 잡히기 시작한 대지의 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시도때도없이 하
고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하면 깨닳음을 얻을 수 있을것만 같았기에 그는
요즘들어 1각 정도의 잠조차 자지않고 있었다.

* * *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는 누군가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세한 대지의 진동... 그는 조금씩 자신의 육체가 깨어나도
록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깨어나면 안된다. 아주 조금만... 약간씩의
움직임 정도만 가능할 정도로...

그런다음 그는 배위에 올려놨던 쇠꼬챙이를 천천히 위로 들어올렸다. 곧이어
다리 두 개가 보였다. 물론 상대는 마루에 걸터앉아 편안한 자세로 가죽신을
신고있었다. 지금!

푹!

그의 쇠꼬챙이는 곧장 마룻장을 뚫고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반응이
있었다. 사람의 육체를 뚫고 들어가는 그 미세한 감각이...

사람의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니 호신강기(護身剛氣)니 하면서 수련할수록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가진다. 특히나 공력이 높은 고수일수록 그 보호의 벽은
두터워서 왠만한 보검으로도 깊은 상처를 입히는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자신의 몸을 보호할때의 얘기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진기의 유통이 막
혀있을때는 보통의 살이요 가죽이었고 또한 뼈다구다. 절대로 강철과 같은 강
도(强度)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묵향은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신다가 엉덩이에 구멍이 뚫리는 황당한 경우를
처음 당했다. 육체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 몸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덕
분에 깊은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치(6Cm) 깊이의 구멍이 뚫린 것이
다. 상처는 별것도 아니었다. 묵향이 본능적으로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사이,
마루 아래에서 엄청난 예기를 뿜어내는 2척 길이의 보검을 들고 검은 복면을
한 인물이 뒤로 물러서는 묵향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묵향은 일단은 상대의 하는 짓거리가 꽤나 재미있었기에 천천히 죽일 생각으
로 그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손 치
더라도 이미 물건너간 사실이었다. 이제 묵향은 놈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
대가는 아주 작은 상처 하나일 뿐이었다. 묵향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맨손과 상대의 짧은 보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튕겼다. 묵향은 일부러 그를
한껏 밀어붙여 서로간의 간격을 벌였다. 상대는 튕겨나서 거의 1장 반 정도
뒤로 밀린 다음에 다시 중심을 잡고는 검을 겨누며 아직도 상대를 죽일수 있
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못 버리고 묵향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놈은
현경의 고수를 상대로 이제 본격적으로 정면대결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간이
큰건지... 자신의 실력을 믿는건지...

"크흐흐흐... 제법 간뎅이가 큰 놈이군. 그리고 실력도 대단하고... 본좌의
이목을 속이고 엉덩이에 구멍을 뚫다니, 그대의 실력을 높이 사 편히 저세상
에 가게 만들어 주지."

묵향은 급할게 없다는 듯 이제서야 천천히 묵혼검을 뽑아들었다. 어떤 무공으
로 저놈을 토막을 칠까 궁리를 하면서... 하지만 그는 곧이어 뭔가 자신의 몸
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신이 핑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묵향이 말했다.

"도대체 뭐냐? 독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히 독이 아니죠. 만독불침인 현경의 고수에게 독을 쓰는놈이 있겠소? 독
한 몽혼약( 昏藥)에 춘약(春藥)도 좀 섞었고... 산공분(散功粉)도 좀 석었죠.
어때요? 뿅 가는 기분 아니오?"

묵향은 핑핑도는 정신에 억지로 정신을 차려 또박또박 말했다.

"흐흐흐... 내 몸에 약기운이 퍼질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군. 누가 올지도 모르
는 이 상황에 자네의 그 배포는 인정해 주지. 하지만 실력도 그정도 되는지
궁금하군..."

마룻바닥이 부숴지고 초반의 격돌로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도 눈치채지 못
할정도로 미련한 인물은 이곳에 남아있지 않았다. 묵향의 개인 호위들과 분타
에 남아있던 천랑대의 고수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곧이어 묵향의 앞에 검을 들
고 서있는 흑의복면인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뽑아들고 그 복
면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곧이어 그들의 움직임은 묵향의 목소리에 제지(制
止)되었다.

"멈춰라... 본좌를 찾아온... 손님이다."

흑의복면인은 의외로 묵향이 직접 손을 쓰려고 들자 약간은 놀라움이 앞섰다.
상대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인지, 몸의 상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
게 직접 손을 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지.'

"흥! 아마 지금쯤 정신이 없으실텐데 무리하는거아니요?"

하지만 복면인의 속셈은 말과 달리 조금 비꼬는 듯한 어조에서 확실히 드러났
다. 여기서 탈출은 불가능. 그렇다면 목표물이라도 확실히 죽여야 할텐데 딴
사람이 끼어들면 그것도 불가능하니 슬슬 긁어서 상대가 직접 손쓰기를 바라
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의 실력을... 한번 보고싶어."

묵향이 검을 천천히 위로 끌어올렸다. 급속도로 공력이 흩어지고 있는건 저따
위 살수를 상대하는데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놈의 몽혼약과 춘
약... 온 몸의 혈관이 계집을 찾아 불타오르고 있었고 점점 더 의식이 흐릿해
져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묵향 자신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묵향은 그대로 상대를 향해 몸을 날리며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 묵향의 눈에
는 상대가 두 개가 되었다 네 개가 되었다 하는 것이 상대와의 거리조차 잡기
어려웠다. 곧이어 상대의 검이 여러개가 되어 자신을 향해 덮쳐왔다. 평상시
라면 문제될 거리도 없었지만 묵향은 그것들 중에서 어느것이 진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묵향은 그대로 몸속의 공력을 모아 터뜨리며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반월형의 푸른 검강이 형성되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상대는 공격해 들어오다가 그 강력한 공격에 놀라 혼신의 공력을
쏟아부어 방어에 들어갔다.

펑!

네다섯 걸음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견딜만 한지 상대는 입 주위로 피
를 흘리면서도 재공격을 시도했다. 묵향은 처음에 그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내
며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묵향이 그놈의 약기운 덕분에 마지막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려다 잠시 주춤한 사이 흑의복면인은 미세한 기회를 포
착하고 검을 묵향의 심장에 틀어박는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묵향에게서 뿜
어나온 반탄강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의 엄청난 기운...

펑!

흑의복면인은 그 강대한 기운에 튕겨서 2장여를 쭉 밀린다음 벽에 부딪친 다
음 피를 토하면서 뻗어버렸다. 묵향은 이제 두 번째로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
을 잠시 바라봤다. 모든게 자신의 자만심 탓이니 누굴 탓할수도 없었다. 그렇
기에 묵향이 천천히 쓰러지면서 내뱉은 말은 이거였다.

"제길... 약기운 정말 쎄군... 아주 뿅가는데..."

묵향이 쓰러지고 나자 무모한 묵향의 행동에 대해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수하들은 인근에 유명하다는 의생을 부르러 가는 패거리, 뻗어버린 살수의 몸
속에서 자살용 독약을 꺼낸 후 감옥에 집어넣는 패거리, 또 쓰러진 묵향을 방
안으로 조심스레 옮기는 패거리, 하여튼 순식간에 발생한 일로 북적대기 시작
했다.

* * *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발 뒤쪽에 있는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

"뭔가요?"

"장인걸이 교주가 되는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설마... 한영성 교주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데... 그리고 그는 결
코 장인걸 보다 하수가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죠. 문제의 발단은 아무래도 무림맹주의 실종과 관계가 있는 것 같
습니다. 마교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무림맹주 옥청학까지 지하
감옥에 갖혀있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발 안쪽의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입을 열었다.

"흐음... 그렇다면 교주는 맹주를 비밀리에 만나기 위해 마교를 벗어났다가
기습당했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주가 장인걸에게 당할 가능
성은 처음부터 거의 없었으니까요."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어가는군요. 하지만 그래도 장인걸이 교주가 되기에는
세력기반이 약한데..."

"정보로는 교주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독수마제의 간섭을 물리치는데 성공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후로는 장인걸과 독수마제간의 대립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사료(思料)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그렇다면 묵향쪽은 어떤가요? 그도 이렇게 좋은 기회
를 버릴 인물은 아닐텐데..."

"글세요. 그쪽에도 어쩌면 교주가 바뀐 정보가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첩자들
의 보고에 의하면 이상할만큼 조용하답니다. 만약 묵향쪽에서 장인걸을 공격
한다면 아직 장인걸이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자리잡기 전인 지금이 최적의
시기인데 말이죠."

그러자 발 속의 여인은 좀 더 오랜시간 생각에 잠긴 후 답했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군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본녀에게
조속히 연락해 주세요."

"예. 그러면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참. 영인이는 돌아왔나요?"

"예. 맹주의 실종으로 회합이 취소되었기에 3일 전에 돌아오신걸로 들었습니
다. 그런데 돌아오시자 마자 곧바로 연공관으로 가신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럼 총관이 직접 가서 그 아이를 좀 데려오시겠어요? 긴히 할 얘기가 있다
고 전하세요."

"예."

잠시후 매영인이 들어왔다. 매영인은 4봉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지
니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장난기가 있는 것 같은 발랄한 표정을 지니
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전 구휘대협의 무덤에 얽힌 각 문파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 마련한 회합에 참여하기 위해 문을 나섰었지만 돌연한 맹주의 실종으로
회합이 취소되었기에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자 마자 연공관에 처박힌
이유는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을정도로 엄청난 차원의 고수를 이번 여행의 도
중에 만났었기에 그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7룡 중에서 아마도 최강의 무공을 지니고 있을거라 추측되는 황룡문의 부문주
비천검 혁련운. 그의 무공은 정말이지 철부지 매영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43세란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검강을 자유로이 구사
하다니... 하지만 그런 그를 간단히 패대기 치던 묵향이란 인물... 고차원적인
경공과 초식의 절묘한 조화. 묵향이란 인물의 말마따나 '자신에게 걸리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간다'고 하지 않았나? 무시무시한 무공에 또 그
에 걸맞는 비뚤어진 것 같으면서도 외모와는 달리 패기가 넘치는 성격. 그때
그 마교의 부문주는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녀는 그 두 고수의
비무를 보고 뭔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고 그
렇기에 여태까지와는 달리 할머니의 강압이 아닌 자율적으로 연공관에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총관이 위치했던 밖이 아닌 발 안쪽으로 들어왔다. 발 안에는 묘령의
아릿따운 청순한 미모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할머니."

"오냐. 어서 오너라."

"다녀온 다음 직접 인사 못드려서 죄송해요. 뭔가 할게 있어서 연공관으로 바
로 갔거든요."

"총관에게 들었다. 이리 와서 앉거라."

"예."

그 두 조손(祖孫)이 한자리에 앉았지만 얼핏 보아서는 도무지 그 둘의 나이차
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매영인도 제법 높아가는 내력으로 인해 31살의 나이와
는 달리 발랄한 20살 정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면 그녀의 할머니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화경에 든 여인, 그 고차원적인 내공
으로 인해 20대 중반 정도의 청순한 미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둘은 할머니와
손녀가 아닌 자매로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 한가지 상의할 일이 었어서다."

"뭔데 그러세요?"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니까 결혼하고 싶다든지 뭐 그런식의
마음에 품고있는 상대가 있느냐 하는 거야."

그러자 매영인의 안색이 약간 붉은색이 되긴 했지만 그건 숨겨놓은 남자가 있
어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이런식으로 노골적으로 남자의 유무를 물어보기는 이
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매영인은 천하에서 정보력으로 치면 두 번째가면
서럽다는 무영문의 금지옥엽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어렸을때부터 떠받들여 키
워져 남자보기를 돌같이(?) 여기며 자기 잘난맛에 여태껏 살아왔는데 그녀의
마음에 찰만큼 그럴듯한 상대가 있을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그 대부
분이 무영문 소속의 무사들) 그녀에게 남성미를 뽐내기 보다는 아부와 존경만
을 보내니 그녀의 마음에 새겨질 만한 인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뇨. 아직 없습니다."

"내가 지금 물어보는 것은 너를 내가 원하는 어떤 남자와 결혼시킬까 하고 생
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건 아주 중요한 거야. 만약 네 마음속에 이
미 다른 남자가 자리잡고 있다면 결혼 후의 네 생은 아주 비참해지기 때문이
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다시 잘 생각해 보렴."

그러자 옥영인은 조금 놀란,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할머니에게 따졌다.

"할머니께서 원하는 어떤 남자라니요? 그러면 저에게 정략결혼(政略結婚)이라
도 시키실 생각이에요?"

그러자 옥화무제(玉花武帝)의 청순한 얼굴은 잠시 슬픔에 물드는 것 같았지만
곧이어 원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무림의 대세를 무영문이 잡
기 위해서는 아무리 아끼는 손녀라 해도 정략결혼의 재물로 써야 하는 것이
다. 또 결혼 상대들도 사실 말이 정략결혼이라서 그렇지 어디하나 손색이 있
는 인물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의 뛰어남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영문의 첩보
력이 보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녀로서는 그걸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매영인의 선택인데... 그녀가 반려자로 삼고싶은 어떤 인물
이 이미 있다면 이것은 안되는 것이다. 옥화무제 자신도 여인이었기에 이미
상대를 마음속에 품고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살아야 한다는게 얼마나 큰 고통
인지 잘 알기에 손녀에게 그점을 꼬치꼬치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정략결혼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상대는 대단히 뛰어
난 인물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네게 이미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지 하는 거야.
만약 있다면 나는 이 계획을 포기해야만 하지. 그건 계획보다도 네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에 네게 이
렇게 물어보는 거란다."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야 할말이 있을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뚜렷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것도 아니었고...

"저... 아직은 없어요. 없는 것 같아요."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냐. 그렇다면 잘 됐구나. 뭐 상대가 괜찮은 남자라면 살면서 정이들고 사
랑이 싹트는 것이니까 이제 네 선택만 남았구나.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옥화무제는 한쪽으로 가서 몇장의 종이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네게 권하고 싶은 남자는 이 둘이다. 둘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라."

옥화무제가 매영인 앞에 펼쳐놓은 두장의 그림. 그건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초상화였다. 개개인의 특징이 아주 자세히 그려진 것으로 둘 다 얼굴만이 아
닌 서있는 자세 그대로 전신(全身)을 세밀하게 그려놓은 것이었다. 매영인은
두장의 그림이 자신의 앞에 놓였을 때 잠시 숨을 죽였다. 둘 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했던 그림에 그려져 있는 상대는...

"이사람은 누구에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묵향이란 인물이다. 추정되는 나이는 70세 정도. 하지만
그는 무림에서 두 번째로 기록되는 현경의 고수. 그렇기에 겨우 70세란 나이
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란다. 영인이의 남편감으
로 빠지지 않는 인물이야. 다만 성격이 좀 거칠다는거지만... 뭐 살다보면 어
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냐? 수하들의 정보로는 그는 수양딸이 한명있고 또 그
와 과거 동거생활 비슷한걸 했던 여인도 한명 있었다. 낙양분타에서 그가 근
무할때인데... 그게 밝혀진 것은 그가 무당파와 약간의 충돌을 일으켰고 그걸
파고들다 보니까 새어나온 정보니까 아주우연히 알게된 것이지. 그 모녀와의
생활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꽤나 정이 많은 인물인 것 같아. 그 수양딸을 위해
교주와의 충돌을 무릎쓰고, 수양딸이 제자로 있는 대력도패(大力刀覇) 진양
(振揚)이 이끄는 천지문과의 화해를 주선한 인물이지. 아마 그때가 '부교주
묵향'이란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었을 거야."

"그렇지만 마교의 인물이잖아요."

그러자 옥화무제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말은 마교지만 지금 그는 마교와 싸우고 있다. 또 그가 지금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도 엄청난 숫자지. 해체된 찬황흑풍단의 세력까지 흡수했을 정도로 뛰
어난 인물이야. 현재 무림에서 그 만큼 무공이 뛰어난 인물은 없고, 또 그는
현 무림에서 10손까락 안에 들어가는 강력한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단다. 본문
이 무림에서 더욱 커나가기 위해서 아주 필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가 마교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잖아요. 아무리 마교와 싸우고
있다고 해도... 그게 소문이 나면..."

"그건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란다. 사실상 그가 주로 익힌 것은 마공이 아니
니까. 그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고 또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
도 마교와 직접적으로 싸우기에는 아무래도 좀 역부족이지. 그래서 그도 정신
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이번 정략결혼을 거절하지는 못할거야. 그가 너를 매
개체로 본문과 손을 잡게 된다면... 본문은 어쩌면 무림에서 최고, 최강의 세
력으로 탈바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느냐?"

"예."

"그리고 이 사람은 너도 잘 알다시피 서문세가의 벽력도객(霹靂刀客) 서문길
(西門佶) 공자다. 현재 나이 29세. 너보다 두 살 어리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
니지. 그는 현재 가문의 비전(秘傳)인 뇌전도법을 5성 이상 익힌 대단히 뛰어
난 청년이야. 그리고 그가 태어난 서문세가는 현재 5대세가의 으뜸이지. 8천
에 이르는 식솔을 거느리고 있으며 아마 다음 맹주는 수라도제(修羅刀帝) 서
문길제(西門吉制)가 될 확률이 높단다. 현 무림 최고의 명가라 볼 수가 있지.
서문세가와 맺어져도 본문은 더욱 강대한 세력을 지닐 수 있게 될거야. 본문
은 이제야 겨우 4000의 식솔을 거느린 그럴듯한 방파로 성장했단다. 암살따위
나 하던지, 기방, 도박장, 전당포, 밀수 등 온갖 불법적인 사업으로돈을 벌
어들이던 하류문파로서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지만 우리 무영문은 그 과거
를 딛고 일어서 이제 정부에서 허가받은 국경무역과 전방, 표국 등 각종 떳떳
한 사업채와 수많은 상권을 가지고 어엿하게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 오히려
지금에 들어서는 정보의 거래로서 들어오는 돈보다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한 각
종 상거래가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만큼 본문이 성장해온 것도
시기를 잘 읽고, 또 그 시기를 이용했기 때문이지. 그러니 영인이 네가 이 할
머니를 좀 도와주지 않겠느냐? 어려운게 결코 아니란다. 그 둘중 하나만 선택
해서 결혼하면 된단다. 둘 다 남주기 아까울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냐?"

* * *

등에 4척이나 되는 장검을 네 자루나 짊어진 6척(181Cm) 장신의 무사가 장인
걸의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
물로 강렬한 안광(眼光)과 더불어 강렬한 마기가 전신에서 뿜어나오고 있었
다. 그는 평상시와 같이 검붉은 핏빛이 도는 구역질이 날듯한 빛깔의 낡은 옷
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이미 말라붙은 군데군데 묻은 피는 묻었는
지 안묻었는지 별로 표시도 나지 않았다. 그 피들중 일부는 자신의 피이기도
했다. 표시는 나지 않지만 그도 또한 몇군데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꿋
꿋하게 마지막 보고를 위해 서 있는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는 두자루나 한자
루 정도의 장검만을 휴대하지만 직접적인 전투에 나설때는 네자루의 장검을
사용했다. 마교 최강의 무력단체인 천마혈검대를 책임지고 있는 이인물은 마
교에서도 흔치않은 검의 고수였고, 또한 어기동검술의 대가였기 때문에 다수
의 검을 휴대했다.

"이제 더 이상 교주께 불복하는 놈들은 본교 내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흠... 수고했네. 제갈천 장로는 어디있나?"

그러자 구양운 장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쨋든 멸절신장 제갈천은
마교서열 8위의 인물이었지만 장인걸이 거느린 반란세력으로 봤을때는 서열 2
위의 고수였다. 물론 마교서열 6위의 혁무상 장로가 있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 두뇌를 높이사 높은 서열을 받은 것이지 무공은 아무래도 좀 떨어졌다. 그
렇기에 장인걸로서는 그의 안부가 대단히 중요했던 것이다.

"황노각 대호법에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중상을 입혔기에 속하가 손
쉽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흠... 어쨋든 자네혼자 돌아온 것은 정말 유감이군. 황노각(黃老角) 대호법
은 어떻게 했나?"

"수급을 잘라왔는데 보시겠습니까?"

"아닐세.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여 본좌에게 반역하는 놈들은 어떻게 되는지
모범을 보이게나."

"예."

"어쨋든 벅찬 상대였을텐데 잘 해줬네."

"과찬이십니다. 묵향 부교주와 합류를 시도했던 호법원과 혈마대의 잔존세
력, 한중길 교주 직속의 천살대, 지살대, 인살대는 아무리 본교에서 최 정예
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모두 없애는데 성공했습니다. 그중 40여명은 비록 중상
자 들이긴 하지만 잡아다가 지하감옥에 넣어 뒀습니다."

"참. 피해는 어떤가?"

"환영대는 전멸, 천마혈검대는 전사 32명, 중상자 43명, 나머지는 모두 경상
입니다. 그 외에 지원해주신 수라마참대 100명도 태반이 전사했습니다. 나머
지는 한달정도 치료하고 쉬면 괜찮아 질겁니다. 마지막 한녀석까지 저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결과없습니다."

의외로 피해가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장인걸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인
걸이 권력을 차지하자 호법원의 수장이었던 마교서열 7위, 흑풍마령 황노각이
주축이 되어 이번 내전(內戰) 중 살아남은 호법원의 고수 200여명과 교주직속
원거리 호위대인 혈마대의 잔존세력 50여명, 그 외에 교주직속 무력단체 천살
대, 지살대, 인살대의 초절정고수 50여명을 이끌고 묵향 부교주의 세력에 합
류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불행스럽게도 장인걸이 그 사실을 포착했고 자신의 오른
팔이라 할 수 있는 교내 서열 7위 제갈천 장로와 서열 10위 구양운 장로에게
수라마참대 100명까지 증원해주며 급파했다. 아직 교내의 기반이 안정되지 못
한 관계로 더 이상의 수하들을 보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긴 했지만 장인걸은
나름대로 그들만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제갈천 장로는 무영대
(無影隊)라 불리는 30여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구양운 장로는
천마혈검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손쉬운 싸움은 되지 않더라도 그리 큰 피해
는 없을거라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제갈천 장로는 아예 돌아오
지도 못했고 무영대는 전멸. 그렇기에 그 모든 경과를 구양운 장로가 보고하
고 있는 것이다.

"피해가 그럴게나 크다니... 과연 교주 직속의 무력단체로군. 사실상 한중길
교주가 항상 그들을 데리고 있었다면 본좌는 반역을 꿈도 못꿨을 텐데... 하
여튼 자네가 본좌를 도와줬기에 이번에 용단을 내릴 수 있었다네. 정말 자네
에게는 감사하게 생각한다네."

"과찬이십니다. 속하는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룩하는데 가장 최선의 길을
택한 것 뿐입니다."

"그만 돌아가서 치료부터 받게."

"예."

미세한 혈향(血香)을 풍기며 서있던 환영비마(幻影飛魔) 구양운(丘陽雲)장로
가 자리를 뜨자 장인걸은 호화로운 태사의에 푸근히 몸을 가라앉히며 밖에 대
고 말했다.

"차(茶)를 가져 오너라."

"예."

아름다운 시비가 들어와 태사의 옆에 마련된 자그마한 탁자 위에 차를 올려
놓고는 살며시 인사한 후 나갔다. 장인걸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이제 나에게 반역하는 놈들은 원로원 뿐이군. 이제 독수마제를 어떻게 없애
야 할까...'

이때 밖에서 음산한 마기를 뿌리는 인물이 들어선 후 예를 올리며 말했다.

"교주를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혁무상 장로가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라."

"예."

그가 나간 후 혁무상 장로가 들어왔다. 그는 이번 모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교내의 정보를 완전히 장악하여 장인걸을 도운 1등공신이었다. 혁무
상 장로는 예를 올린 후 장인걸에게 서류뭉치를 건네준 후 태사의 앞에 정중
한 자세로 서서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작성한 본교의 재편성 계획입니다. 빨리 시행하셔서 하루라도 빨리
세력을 다지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이번 모반에서 너무나 많은 고수들을 잃은 것은 참으로 유감일세."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자네가 보기에 어느정도 세력감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보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설명을 올릴까요?"

"묵향 부교주가 있을 때부터!"

"예. 묵향 부교주가 본교에 있을때가 본교의 최고 전성기라 볼 수 있습니다.
한중길 교주 조차도 그를 놀려두지 않고 적절히 잘 써먹었을 정도니까요. 그
혼자만으로도 천마혈검대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왠만한 일은
그 혼자만 투입해도 모든게 끝이났었죠. 그가 본교를 빠져나감으로 해서 본교
는 1할(10%)의 힘을 상실했다고 보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후 본교는 묵
향 부교주를 없애기 위해 투입했던 능비계 부교주와 천랑대, 염왕대를 잃었습
니다. 그들만 해도 2할 5푼(25%)은 넘어가는 힘이죠. 거기에 이번 내전으로
한영성 교주와 그가 이끌던 모든 세력을 없애야만 했습니다. 이들을 합한다면
2할(20%)은 넘어가는 전력입니다. 거기에 그들을 없앤다고 교주께서 상실한
전력이 있습니다. 그게 1할(10%)은 됩니다. 물론 이번에 소모하신 강시는 다
시 만들 수 있으니 예외로 하구 말이지요. 그러니 그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
금 남은 전력은 3할 5푼(35%)쯤? 그정도로 생각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중길
교주가 묵향에게 선물한 분타들의 세력은 뺏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하수들과
대결하는데나 쓸만할까... 거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혁무상 장로의 솔직한 답변에 장인걸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얻은
자린데... 또 얼마나 원했던 자린데... 이제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흐음... 정말 그때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전력이 많이도 깎였구만... 겨우
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했어... 겨우 그걸로 무림통일을
생각할수나 있을는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어떻게?"

"우선 태상교주만 잘 처리해서 원로원의 힘을 얻는다면 3할(30%)의 힘을 얻
으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리 한다면 교주께선 6할 5푼(65%)의 힘을, 묵향
부교주는 3할(30%)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충분히 묵향 부교주를 제압하
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묵향 부교주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죽도 밥도 안돼죠.
교주께선 묵향 부교주를 핍박했던 그 모든 과거의 일을 한중길 교주 단독행동
으로 덮어씌운 후 묵향 부교주와 손을 잡으셔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와 완전
히 합치시면 안되구요, 그를 이용해서 무림맹을 없애야만 합니다. 아마도 묵
향 부교주는 정파와의 싸움중에 사망할 확률이 높죠. 그가 탈마의 고수라도,
또 그가 현재 지닌 힘이 현재 무림에서 다섯손까락 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 정파에서 묵향 부교주를 없앤다면 그만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야만 할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무림은 교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그렇게 움직여 줄까?"

장인걸의 회의적인 반응에 혁무상은 단정적으로 답했다.

"움직이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알겠네. 우선 본교의 남은 세력을 재편성하는 동안 그대는 묵향 부교주를
무림맹과 함께 소멸시킬 계획을 세워보게나."

"존명!"

"참. 그 외에 감옥에 갖힌 자들은 어찌되었나?"

"지금 열심히 설득 중입니다. 그들이 교주님께로 전향한다면 대단한 힘이 될
것이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알겠네. 수고하게나."

혁무상 장로가 정중히 예를 올린 후 나가자 장인걸은 시비를 불렀다. 시비는
재빨리 다가와 그의 앞에서 다소곳이 허리를 숙이고 하명을 기다렸다. 장인걸
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 미성년가 독서불가 요건에 의한 자체 심의삭제.^_____^>>-----


현재 마교의 지하감옥에는 거의 500여명이 넘는 고수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언제나 권력을 찬탈했을 때 그에 거부하는 세력은 있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
는 것이었지만... 한명이라도 고수가 아쉬운 때라서 속마음 같아서는 몽땅 목
을 잘라 전시해버렸으면 속이 풀리겠지만 어쩔 수 없이 전향시키기 위해 회유
와 설득을 거듭하고 있었다. 호법원의 경우 호법원의 수장인 황노각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놓쳐버렸기에 세력을 동원하여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외의
마교서열 18위 묵인겁마(墨刃劫魔) 초진걸(楚眞杰)이나 19위 은편패왕(銀片覇
王) 여문기(呂文起)같은 경우 중상을 입긴 했지만 내전중 포획하는데 성공했
던 것이다.

아마도 장인걸이 잡아들이는데 가장 고생했던 인물들 중의 하나가 수라혈신
(修羅血神) 북궁뇌(北宮雷) 내총관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중길 교주가 대단히
신임했던 서열 9위의 고수였고 또 그만큼 잡아들이는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야만 했었다. 그리고 수라마참대를 이끌던 인도(人屠) 동방뇌무(東方雷武)의
경우 장인걸에게 가장먼저 포획된 인물이었는데 그가 만약 수라마참대를 동원
하여 저항했다면 아마 장인걸은 승리를 거뒀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껍데기도
못건질것이 분명했기에 가장먼저 미혼약을 동원하여 포획한 후 수라마참대를
장악했던 것이다.

장인걸로서는 높은 서열에 있는 인물들 중 상당수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교란 본래 약육강식의 세계. 지금 태상교주가 존재하기에 그들이 그
나마 의리를 찾고 있지만 아마도 태상교주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무조건 장인
걸에게 충성을 다할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묵향이란 변수가 있긴 했지만...

장인걸은 하체를 좀 더 앞으로 들이밀며 태사의에 좀 더 깊숙히 몸을 묻으면
서 생각에 잠겼다. 하체로부터 강렬한 쾌감이 전해져 오고 있었지만 그의 생
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하체를 시비에게 맏긴 채 편안하게 쾌감
을 즐기며 생각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한중길 교주는 너무 꿈이 없는 인물이었어. 마교 최고 전성기의 전력으로
무림통일을 할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이 혈교니 뭐니 하면서 그런것들을 제압
할 생각만 하다니... 거기에 무림맹주와 밀월관계까지... 마교는 마교일 뿐.
그런 일은 정파놈들한테 맏겨도 충분했는데 말이야... 마교의 본업은 피의 역
사를 창조하는 것. 그때 내가 교주였다면 중원의 반은 차지했을거야. 멍청한
녀석... 어쨋든 그 때문에 불만을 품은 여러 고수들을 회유할 수 있었지만...
피해가 너무 컸어. 그 멍청한 한중길 교주의 입김이 그렇게도 강했던가... 어
쨋든 이제 곧 있으면 재편성이 끝나게 될거야. 그렇다면... 슬슬 혁무상 녀석
을 십분 이용하여 천천히 중원을 장악해 나가야지. 지금은 송과 요가, 또 황
제와 진천왕이 다투는 난세가 아니던가? 잘만 한다면 무림통일 만이 아니라
황제 자리도 꿈이 아니지. 흐흐흐흐... 혁무상 녀석은 그 시각을 무림에만 국
한시키고 있지만 왜 무림인이 황제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런 난세는 영웅을
만드는 것. 천운이 나와 함께하고 있음이지... 참. 혁무상 저녀석은 너무 똑
똑해... 위험한 놈이지.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구. 절대로 놈에게 실권을 줘선
안돼. 아주 조심조심해서 이용해먹다가 나중에는 흐흐흐흐...'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장인걸을 교주로 옹립한 천마신교는 전격적인 세력 재편
성을 완료한다. 어쨋든 상층부 고수들의 대량 사망 내지는 투옥으로 마교내의
서열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었고 또 그로인해 각 단체의 축소 내지는 통폐합이
불가피해졌다. 장인걸은 9명의 장로였던 장로원을 5명으로 줄인 후 교주 직속
의 호법원이 그 덕분에 한중길 교주편을 들어 전멸한 덕분에 새로이 재편성하
고 절정고수 50명, 고수 1000명을 주어 서열 5위로 그 서열이 급상승한 흑수
천마(黑手千魔) 여진(呂震)에게 맏긴다. 그외에 이번에 피해가 없었던 자성만
마대를 4000명으로 줄여 서열 6위로 뛰어오른 무영신마(無影身魔) 장영길(張
影吉)에게 맏겼고 과거 자성만마대의 수장이었던 삼면인마 소무면을 서열 4위
로서 이제 400명으로 축소된 수라마참대를 지휘하게 했다.

제갈천 장로의 사망으로 일약 서열 2위로 뛰어오른 환영비마 구양운 장로는
장로원의 수장으로서 약간의 인력이 보충되어 80명이 된 천마혈검대를 계속
맏았다. 그리고 장인걸 교주의 교주 독립호위대로 초절정고수 10명, 원거리
호위대 수마대(守魔隊)는 절정고수 50명으로, 그 외에 교주 직속으로 사사혈
시마대 1000명을 존속시킨 후 서열 17위로 떠오른 학살인도(虐殺人屠) 박용
(朴龍)에게 맏겼다.

어쨋든 그런대로 아쉬운대로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개편이긴 했지만 약간 불
만족스런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혁무상이었다. 제갈천이 죽었기에 자신
이 이번 반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을 들어 2인자의 직위로 오르지 않을
까 생각했었지만 그 자리는 구양운 장로에게 뺏겼고, 거기에 자신이 가진 삼
비대(三秘隊)는 이비대(二秘隊)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반론을 제기
할 수 없었던 것이 이번 내전에서 엄청난 고수를 잃었기에 삼비대 중 유일한
전투집단이라 할 수 있는 비마대(秘魔隊)를 해산하여 각 집단의 전력강화에
사용한다는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쨋든 이번 개편으로 장인걸의 의도대로 혁무상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
다. 비마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지로는 10명에 이르는 초절정 고수와
40명에 이르는 절정고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몽땅 털렸으니 당연
히 세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주 세력이 이탈해버린 혈화궁의 경우 마화단으로 그 지위가
하락했다. 첩보, 암살 등 각종 임무를 수행하던 외부지단이 떨어져 나가고 총
단에 남아있던 마교내 고수들에게 성과 향락을 제공함으로서하층 고수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던 자들만 남게 되었으니 그건 당연한 조처였다. 마화단의
단주로 서열 458위 흑미요요(黑眉夭姚) 진란(辰蘭)이 선택되었고 그녀들의 주
임무는 별볼일 없는 성적 노리개 생활이었다.

또 구 만악궁의 총단에 남아있던 잔존세력으로 만마단(萬魔團)이 새로이 재
편되었다. 이들 또한 외부지단의 이탈로 어쩔수 없이 새로이 돈줄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 만악궁 시절 수입의 2할(20%)밖에 차지하지 못하던
소작농들로부터 거둬들이던 수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9할(90%)을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만마단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총단에 소작농들에
게 대여한 토지의 대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마단의 단장은 서열
347위 마뇌자(魔腦子) 전길(田佶)이 뽑혔다. 이로서 고수의 숫자 총 7천이 넘
는 거대한 전투력을 과시하는 장인걸이 거느린 천마신교는 새로운 미래를 개
척해 나가기 시작하게 된다.

* * *

가을 햇살이 따사로운 광채를 뿌리고 있고 주위의 수목들은 저마다 붉은색,
노란색 등등 가지각색의 색깔로 예쁘게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질 수
없다는 듯 저마다 화초들도 예쁜 꽃들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이때, 잘 가
꿔진 화단을 둘러보며 한 젊은이가 걸어가고 있다. 대개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주위의 화초들을 보는 듯 마는 듯 즐기며 걸어갔지만 그도 나름대로 가을이란
계절을 느끼고 있었다.

아름다운 비단으로 곱게 만들어놓은 청의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이 청년
은 서문세가가 자랑하는 차세대의 고수, 벽력도객(霹靂刀客) 서문길(西門佶)
이다. 그의 허리에 차여진 폭넓은 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서문세가는 정통적
인 도의 명가였다. 그는 이제 29세란 젊은 나이에 뇌전도법을 5성이나 성취한
기재로서 그의 실력은 무림 초출에 포악하기로 이름높았던 하남광마(河南狂
魔) 여춘길이란 악당을 베어버렸기 때문에 벽력도객이란 명호를 얻었다.

여춘길은 광마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미치광이 짓거리를 하는 나아쁜 놈
이었지만 그의 무공이 원체 높아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사실 여춘길
은 광마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진짜 미친놈은 아니었고 또 멍청한 바보도 아니
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가 자기를 없애기 위해 오면 줄행랑을 쳤다가 그
가 찾다가 찾다가 지쳐 포기하면 겨울잠을 마친 곰마냥 어슬렁거리며 다시 나
타나 자신보다 하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남의 불행
은 곧 나의 행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실수를 했는데, 그것이 서문길이란 애송
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늘상 있어왔던 일처럼 공
명심이나 영웅심에 머리가 반쯤 돌아버린 애송이가 악을 퇴치하겠답시고 찾아
온 것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상대했다가 머리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때
그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여춘길이 상대를 깔보지만 않았다면 최소한 양패
구상이라도 가능했었겠지만 '꾸르르르...' 하는 낮은 뇌성(雷聲)을 흘리며 상
대의 도(刀)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을때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쨋든 여춘길이라는 공갈, 협박, 살인, 강도, 강간 등 무수한 악행을 저질
러오던 희대(稀代)의 악당을 없애며 그는 화려하게 등장했고 곧이어 무림 최
고의 신랑감들의 집단이라는 '칠룡'에 들 수 있었다. 칠룡에 들어가자면 아주
조건이 까다롭다. 첫째, 못생겨도 용서하지만 사봉과는 달리 무조건 남자여야
했다. 둘째, 미혼이어야 했고 홀아비도 안된다. 그렇기에 결혼한 인물들이 빠
져나가면서 새로 참신한 인물들로 물갈이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결혼할 수 있
는 몸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뛰어난 소림의 후기지수라도 승려나, 도
사(道士)의 경우 미혼(未婚)이라도 그 미혼을 영원히 지켜야 하기에 칠룡에는
들지 못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뛰어난 무공실력, 다섯 번째는 그 가문과 혈
통이었다. 그렇기에 비사비협(非邪非俠) 모용명(慕容鳴)이나 비천검(飛天劍)
혁련운(赫蓮運)의 경우 원체 무공이 높아 끼인 것이지 사실상 다섯 번째 조건
을 엄밀히 따진다면 들어오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칠룡중
에서 최강의 무예실력을 자랑하는 인물들로 손꼽히고 있었다.

이번에 무림맹에서 벌어진 회합에 가는 길에 백씨세가에서 모였던 모든 젊은
이들은 단 한명을 빼고는 회합이 취소된 다음 자파에 돌아가 모두 연공실로
직행했다는 기이한 행동을 벌였는데 그도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연공실에 들
이박혀 있다가 가주인 서문길제(西門吉制)의 부름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들
리는 후문으로는 그때 연공실로 직행하지 않은 인물은 혁련운 뿐이었다고 하
며 그는 황룡문에 도착하는 그길로 자기 방에 들어가 늘어지게 며칠동안이나
잤다나... 어쨋다나...

아무튼 서문길은 아버님의 호출 덕분에 무공수련을 포기하고 우선 며칠동안
씻지도 않았기에 목욕하면서 때도 좀 밀고, 뿌숭뿌숭하게 돋아난 수염도 깨끗
이 밀어버렸다. 그런다음 오랜만에 땀에 절어 냄새나는 속옷도 뽀송뽀송한 새
걸로 갈아입은 후 산뜻한 청의로 갈아 입고서는 부친의 처소로 부랴부랴 걸음
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준비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인 것
같다는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의 부친은 딴건 다 좋은데 말보다 행
동이 앞서는게 흠이라고 할까나... 재수없으면 혹하나 생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늦게 결혼한데다가 거기에 뒤늦게 얻은 아들이었지만 부친의
지론에 따르면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라도 매를 아끼면 인간이 안된다
나? 하여튼 그 이론을 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소자(小子) 대령했습니다."

"들어오너라."

"예."

방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무서운 아버지는 호피가죽을 깔고 앉아서는 그의 애
도인 묵룡도(墨龍刀)를 비단 천으로 닦고 있었다. 서문길은 조심스레 부친의
정면 1장(3m)앞에 앉았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정작 아들을 불러놓고는 일언반
구도 없이 계속 도를 열심히 광내고 있었다.

슥슥슥... 슥슥...

서문길은 무릎을 꿇고 앉아 이제나 저제나 질문이 날아올까 천천히 기다렸지
만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애도에 광택내기 바빴다. 조용히 기다리던 서문길의
인내심은 무려 4각(1시간)이 흐른 다음에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다. 그는 내심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것을 억누르며 약간 노성(怒聲)이 가미된 어조
로 말했다.

"아버님.부르셨으면 말씀을 하셔야 할거 아닙니까?"

"으음..."

그제서야 서문길제는 도를 집에 꼽아넣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실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다."

"..."

"네 나이 이제 스물 아홉이 아니더냐? 좀 이르기는 하다만 결혼에 대해 어떻
게 생각을 하느냐?"

"저어... 지금 물어보시는 건 제 의견을 반영하실 생각이 있으신 것인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물어보시는 것인지..."

그러자 서문길제는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물론 형식적인 것이지. 아직 새파란 네 의견이 감히 이 집안일에 끼어들수
있다고 보느냐?"

풀이죽은 서문길의 말대꾸...

"그럼 의논 하실것도 없는데 왜 부르셨습니까?"

"험... 그래도 일단 가문의 절차상 '의논'은 해야 하는 것이지. 그래 결혼하
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자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수련도 끝나지 않았사온데 어찌 지금 결혼
을 하겠습니까? 수련이 끝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문길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혼약(婚約)을 한 참한
색시감이 있었다. 그녀는 종리세가(鍾里世家)의 금지옥엽인 종리옥란(鍾里玉
蘭)이었다. 그녀는 올해 28살이었고 그녀가 12살이 되었을 때 서문길제가 종
리세가에 방문했을 때 그 깜찍한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보고 며느리감으로 점
찍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종리영우에게 넌지시 말했고 종리영우도 찬성하
여 나중에 장성(長成)하면 혼인시키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오대세가 중에 최
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게 서문세가라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문파가
종리세가였다. 서문세가나 종리세가는 둘 다 도의 명가들이었고 그렇기에 그
들의 말을 빌리면 '겉멋만 잔뜩 든 검을 쓰는 놈들'보다는 그들끼리 잘 통하
는지도 몰랐다.

서문길은 부친이 말하는 상대가 종리옥란인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
단 부친이 질문을 했으니 그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으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흐음... 길아."

"예. 아버님."

"너는 무영문의 '매영인'이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 하지만 저는 이미 옥란 소저하고 혼약이..."

"흐음... 선약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은 없지. 그 약속은 그렇게 중요한게 아
니다. 사실 아주 어릴 때 그아이를 한번 보고 서로간에 구두로 약속한 것이
지, 정식으로 매파가 오간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네가 옥란이하고 한번 만난
후 네 취향이 아니라고 한마디 넌지시 하면 자연스레 넘어가는 문제지. 네 대
답을 듣고 옥란이라는 아이가 충격받고 몸져눕던 어쨋든 그건 결혼이라는 가
문의 중대사에 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종리세가나 무영문이 본가에 어느정
도 보탬이 되느냐 하는 것이야. 그리고 아울러서 며느리감의 됨됨이도 중요한
것이고. 어제 무영문에서 매파(媒婆)를 보내왔다. 혹시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구."

자신이 직접 가서 거절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니... 서문길은 '솔직히 소저는
내 취향이 아니오.'하는 말을 듣고는 까무러치는 여자를 상상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문길이 물
었다. 뒷수습이 어려울 때 아버지라는 편리한 울타리가 있지 않던가?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쩍 팔밀이를 하는 아들놈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면서 서문길제가 대답했다.

"네 어머니와도 상의를 해봤고... 또 가신(家臣)들과도 상의를 해봤지만 서
로간에 일장일단이 있다보니 의견 통합이 잘 안되더구나. 종리세가야 패도적
인 도법을 자랑하는, 어떤 면에서는 본가와 비슷한 문파다. 문도수가 6천에
이르는 명문이지. 본가와 힘을 합친다면 두려울게 없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다 이말이야. 그리고 또 패도 종리영우는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와 의형제
를 맺은 관계가 아니더냐? 제갈세가까지 보탬이 된다면 그 힘은 대단한거지.
그에 비해 무영문은 문도수 4천정도... 옥화무제가 있지만 사실 무영문의 무
공은 종리세가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대단한게 못된다. 옥화무제라는 뛰어난
인물이 태어남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한것이지. 하지만 무영문은 정보단체인
만큼 양(陽)으로는 보탬이 안되어도 음(陰)으로는 아주 보탬이 되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의논이 분분한거야.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데리고 살 여자니까
너의 의견도 조금은 들어보고 싶어 부른 것이다."

'으음... 파혼선언을 하고 새로운 여자를 잡아 정략결혼을...? 으윽... 전에
만나보니 매영인이란 소저도 그런대로 괜찮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략결혼
이란 것이... 거기다가 약속이 중요한게 아니라니... 그래놓고는 약속파기를
나보고 그 패도 어르신 한테 직접가서 하라고? 나를 죽이려고 들텐데..?'

"아버님께서는 예전부터 약속의 중요성을 논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전의 약속이라도 그걸 하찮은 이유로 깰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옥란 소저가 무슨 신체나 정신상 문제가 있는것도 아니구요."

"그렇다면 너는 옥란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거냐?"

그러자 서문길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가 왜 이렇게 돌아오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흐음... 그렇다면 조만간 날을 잡아 함께 종리세가를 방문하자꾸나. 일단
옥란이를 한번 보고 하자가 있다면 말하거라. 곧장 매영인으로 바꿔줄테니.
알겠느냐?"

그러자 서문길은 좀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오간 대화는 논리가 정연한 것
같았는데...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약간 들었기 때문이다.

"예."

"이만 가보거라."

"그럼. 소자 물러가겠습니다."

고집센 아들이 나가고 나자 서문길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차를 가져 오너라."

"예."

시비 한명이 다소곳이 차를 놓고 나가자 서문길제는 천천히 찻잔을 들고 다
향을 음미하며 빙긋이 미소지었다.

'클클클... 이번에도 당했지. 옥란이하고 혼약을 시킨다고 하면 저놈이 자신
의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하겠다고 전처럼 길길이 뛸 것 같기에 매영인이를
슬쩍 동원한 것 뿐이야.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갔지.'

"휴우... 하나뿐인 아들놈이 머리가 커가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듣는지...
아들놈을 꼬신다고 별의별 잔머리를 다 굴려야 하다니... 에구 내 팔자야."

원래가 서문길제와 종리영우는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아니다. 어릴때부터 맺
어진 서문길과 종리옥란과의 혼약도 다분히 정략결혼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서문길제는 아들에게 넌지시 오래전에 혼약을 한 참한 색시감이 있으니 딴데
다가 한눈팔지 말라고 말했고 서문길은 그에대해 어렸을때의 혼약은 지킬 필
요없다고 반박하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색시감을 자기가 강호에 나가 직접 구
하겠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문길은 스물 여섯이라는 명문의 자제
들 치고는 대단히 젊은 나이에 강호초출을 했고 그때 벅찬상대하고 싸워 간신
히 이긴 후 정신차리고 연공실로 다시 들어갔던 것이다. 덕분에 칠룡의 서열
에 들긴 했지만...

그래서 서문길제는 종리옥란과의 혼약문제에 이번에 매파가 들어온 매영인을
끼워넣은 것이다. 둘 다 정략결혼이지만 하나는 예전의 약속이요, 하나는 이
번에 들어온 청혼이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온게 좀 더 정략적인 냄새를 풍기
니까 말만 잘 하면 새 것 보다는 과거 것을 택하게 되는게 사람의 심리. 서문
길제는 일부러 처음에 오랜시간 뜸을 들여 기다리도록 해서 아들의 심기를 흔
들어놓은 후 교묘한 화술로 딴 여자는 끼워넣지 않고 그 약속을 위반하는 것
에 대한 도의적인 것에대한 반발을 느끼도록 유도하면서 둘중 하나를 택하도
록 만들었으니 서문길이 자신의 처지는 잊고 얼떨결에 종리옥란을 택한 것이
다. 원래 그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

* * *

"실패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중원 최고의 정보집단과 혼약을 맺자는 제의를 양쪽에서 다
거절했다는 건가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서문길제의 경우 아들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
다면서 정중히 거절을 해오더군요. 그거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서문길이 정략결혼이 싫어 뛰쳐나갔던 걸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결과라 할 수
있죠. 종리옥란과는 달리 아가씨께서는 사봉에 들어가는 최고의 신부감인데
말이죠. 그리고 백씨세가에서 서로 만나기까지 했었구요. 조금 이해가 가지않
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결혼이란 것이 상대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거니까...
그렇다면 묵향은?"

"그쪽은 더 지독한 대접이었죠. 본인은 만날 수조차 없었고, 군사인 설무지
라는 인물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청혼을 설무지가 정중히 거절하더군요. 지
금은 혼사따위 논할때가 아니라면서 말이죠."

"만날 수도 없었다면, 설마... 그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게 아닐까요?"

"아닐겁니다. 보고에 의하면 전 중원에 퍼져있던 마교의 분타들이 지하로 잠
적했습니다. 또 섬서분타에서 벌이고 있던 위사사업이나 표국, 전장, 기루 등
에 파견나가있던 모든 고수들이 섬서분타로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보
면 지금 마교의 모든 전투세력들은 두곳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지요. 하나는 총단이고 또 하나는 섬서분타입니다. 조만간에 둘간에 전면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둘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누가 승리하게 될까요?"

"그건 지금 알 수 없다고 봅니다. 전체적인 전력은 총단쪽이 높지만 섬서분
타는 묵향이 있습니다. 그 혼자의 힘은 왠만한 문파급과 맞먹습니다. 그가 이
번에 어느정도 활약을 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겠죠. 아마도 장인걸은 묵
향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는데 최선을 다할것으로 사료됩니다."

"좀 더 정확한 결론은 불가능한가요?"

"유감스럽게도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총단은 얼마전에야 내분으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예전부터 정보를 빼내기가 아주 힘들었던 곳이죠.
이번에 장인걸이 집권한 후 마교를 완벽히 장악한 후에는 약간씩 흘러들어오
던 정보조차 완전히 막혔습니다. 또 섬서분타의 경우 이번에 무사모집을 대대
적으로 하기에 꽤 기대를 했었는데... 10명이나 첩자를 넣었지만 모두들 외곽
에서 허드렛일이나 할 뿐 안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알 수 없었습니
다. 양쪽 다 첩보건 암살이건 최악의 조건일 정도로 대비가 철저하기 때문이
죠."

"섬서분타 내부의 규모는?"

"정보에 따르면 약 4천명이 기거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것으로 알고있습
니다."

"4천명이라... 그렇다면 식량 소모가 대단하겠군요. 그렇죠?"

"예. 엄청난 량의 식량이 안으로 반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식량 반입
에 투입되는 호위병들의 무공이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에 그쪽에 수작을 부릴
수는 없을겁니다. 그 외에 방대한 량의 병장기들도 매입하고 있죠. 근처에 중
경(=장안)이 있으니 뭐 구입이야 순조로운 것으로 수하들에게 보고받았습니다."

"섬서분타의 자금사정은?"

"보고된내용으로는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교도들이 원래
가족들을 거느리고 높은 봉록을 받는자들이 아니니 그걸로도 충분하겠죠. 총
단도 마찬가집니다. 전면전을 벌이기에 앞서 분타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지
하로 숨긴걸 보면 둘 다 몇 년은 외부 지원없이 싸울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아... 방금 4천명 규모의 시설이라고 했죠?"

"예."

"그러면 숫자가 좀 안맞는 것 같은데...?"

"예?"

"천랑대와 염왕대를 흡수했으니 약 3천명.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흑풍단이
적게 잡아도 3천명. 그렇다면 6천명의 식솔이 되지 않나요?"

"흐음... 예. 그렇지요."

"총관은 섬서분타 내부로 유입되는 식량, 건초(乾草), 의류, 병장기의 량을
좀 더 정확히 조사해 보세요. 특히 식량 등 인원파악에 도움이되는 확실한 물
품 말고 의류라든지 신발 따위의 소모량에 중점을 맞춰요. 만약 위장이라면
그런쪽이 의외로 허술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일부의 세력이 섬서분타가
아닌 딴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게 진짜 섬서분타의 주력일지도..."

"알겠습니다."

* * *

음산한 마기를 뿜어대고 있는 흑의인은 그 주변에 모여든 여러 흑의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2, 3대는 진령문을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라."

그러자 두명의 흑의인이 그에 답했다.

"존명!"

"제 1대는 정면을 맡는다. 상대의 이목을 최대한 그쪽으로 집중시켜라."

"존명!"

"제 4대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곳을 맡아라. 최대한 많은 인질을 재빨리 확보
하여 끌고 나오라."

"존명!"

"제 5대는 본좌와 함께 행동한다."

"존명!"

"될 수있다면 살상은 최대한 억제하라. 이따위 문파 잡아먹어 봐야 별것도
아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이곳은 곧 포기할거니까... 알겠느냐?"

"존명!"

"자... 행동을 시작하라."

흑의인들이 저마다 수하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령문에서는 "적이다!" 하는 비명성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곳곳에
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령문(振逞門)은 정파계열의 문파로서 주변의 평이 좋았고 그 문주인 막충
(莫忠)이 정인검(正仁劍)이란 명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광명정대한 인물
이었다. 그는 살아가면서 원수진 일도 없었고 또 원수질만한 일도 한 적이 없
었다. 그렇게 사람좋은 인물이다 보니 진령문을 그의 대에 확대하지는 못했지
만 주위 많은 문파들의 지지를 받는 위치에는 올라설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날밤의 기습은 정말이지 막충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막충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근에서 꽤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자신의
문파를 공격해 들어온 하룻강아지들을 응징하기 위해 재빨리 옆에 놓인 검을
줏어들고 뛰쳐나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속옷차림으로 그나마 상의는 입지도
않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을 시간도 아까와 재
빨리 맨발로 뛰어나간 후 정문쪽에 위치한 담을 뛰어넘어 들어온 200여명의
흑의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챙챙챙...

검을 일단 섞어본 후 막충은 상대방의 실력에 정말이지 놀랐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것으로 보아 어디 소속인지는 대강 감이 잡혔고, 또 만약 그의 예상이
맞다면 상대의 실력이 이정도로 뛰어나다는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마교가 이
런 시골구석까지 와서 자신의 문파를 핍박할 이유가 없었다. 어제 아침에 마
교에서 그들이 노리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라는 서
신을 가지고 온 놈이 있긴 했다. 물론 그는 정도를 걷는 무인으로서 그것을
거절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빨리 손을 써올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200여명의 흑의인들에 대해 진령문에서 동원된 무사의 수는 거의 200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담을 등지고 아주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었기에 포위를 할 수가 없으니 그 숫자는 말짱 헛거였다. 오히려
많은 숫자로 인해 서로가 방해가 되어 뒤에 있는 자들은 푹 쉬고 있었으니
까...

이때 나지막 하지만 음성이었지만 충분한 내력을 담아 싸우는 와중에도 들려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멈춰라. 막충! 인질들의 목숨이 소중하다 생각한다면 검을 버려라."

순간적으로 막충이 뒤돌아봤을 때 뒤쪽에는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 또 하인,
하녀들, 각 무사들 중 진령문 내에 살림을 차리고 있는 아녀자들과 자식들이
쭈루미 무릎꿇고 앉아있었고 그 주위에는 거의 400여명의 흑의인들이 검을 뽑
아들고 서 있었다.

"빨리 검을 버려라. 본좌가 본보기를 보여야만 무기를 버리겠는가?"

그러더니 옆에 있던 흑의인에게 말했다.

"10명만 무작위로 끌고 나와 베어버렷!"

"존명!"

그와 동시에 흑의인들 중 10명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자신의 손에 잡히는 가
까운 사람을 하나씩 잡아서는 일렬로 쭉 세웠다. 그런다음 그들의 검이 싸늘
한 광채를 뿌리며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멈추시오! 항복 하리다."

막충 또한 이따위 무리들과 타협을 하거나,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겨우 200여명을 잡고 2000여명이 모여 한명도 죽이지를 못
했는데... 거기다 상대는 본격적으로 살수를 쓰지 않았기에 상대의 월등한 실
력에도 부상자는 꽤 많았지만 죽은자는 없는 것을 보아 상대방은 처음부터 인
질로 승부를 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가 거
절한다면? 저 마교도들은 그야말로 진짜 손을 쓰기 시작해서 피바다를 만들
게 분명했다. 저놈들이 한다고 했으면 분명히 해낸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
지 않는가... 200명도 어떻게 하지 못했는데 600명이라면 분명히 해내고도 주
리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또 밖에는 얼마나 많은 숫자가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지 알수도 없지 않는가?

진령문의 문주 정인검 막충이 검을 버리자 그의 문도들도 하나하나 억울함과
원통함이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땅에 버리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대관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대들과 원수진일이 없
거늘 이래도 되는 거요?"

"잘 생각해 보시게나. 오늘... 아니군. 지금이 인시(寅時) 초(새벽 3시)니까
어제군. 어제 아침에 본좌는 그대에게 본교에서 움직일만한 거점이 되어줄 것
을 정중히 부탁했지. 자네는 거절했고... 그래서 발생한 결과지."

"마교에서 정파를 건드리면 주위의 문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우두머리는 싱긋이 웃으며 품속에서 편지 몇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걸 말하는 모양이군. 물론 이걸 가지고 가던 녀석들은 모두 다 본좌가 잡
아뒀네.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제 한동안은 같은 길을 걸을
사람들끼리 처음부터 나쁜 인상을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지 않겠나? 어쨋든
자네의 연락을 받고 이쪽으로 뛰어올 문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게 좋겠
지."

그러자 막충의 얼굴에서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원하는게 뭐요?"

"진령문은 이제부터 본교가 어떤 일을 하기위한 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될거
요. 물론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조용히 물러나 드리겠소. 또 이곳을 본교가 장
악하고 있다는 것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이곳은 곧장 전쟁터가 될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철수하면 그만이지만 아마 그날로 진령문은 문을 닫게 될거요.
아시겠소?"

"외부에 알려지면 왜 우리가 피해를 입는다는 거요? 그대들이 피해를 입겠
지."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적은 정파가 아니오."

그러자 막충의 의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마교가 정파와 안싸우면 누구와 싸워?'

"본타는 본교 총단과 투쟁을 벌이고 있소. 이곳 진령문은 총단 공격의 보급
기지가 될거요."

그러자 막충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말도 안돼는 말 하지 마시오. 마교끼리의 싸움이라니..."

그러자 흑의인의 우두머리는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믿건 안믿건 그대의 자유. 하지만 본좌는 그대에게 경고를 했고 그 경고를
어겨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그대에게 있소."

우두머리는 주위를 보며 외쳤다.

"병장기를 한곳에 모으고 인질들을 한곳에 가둔다음 철저히 감시해라. 그리
고 동쪽에 있는 수련장 건물에 저자들을 수용한 후 감시하라."

"존명!"

"막충! 자네는 이리 오게."

막충이 상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에 이러나 하면서도 수하들에게 주눅든
모습을 보이지 않게 주의하며 당당히 걸어왔다.

"왜 그러시오?"

"한 문파의 문주라면 그래도 약간은 나은 대접을 해야지. 또 그대가 할 일도
하나 있고..."

"무슨..?"

"주위에 얼굴이 잘 알려진 인물 2명을 뽑게. 본좌가 마기가 안풍기는 녀석 2
명을 붙여줄테니 이제부터 진령문 밖에 나가 주위의 민가들을 돌며 안심시키
러 다녀야지. 물론 자네가 직접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테고... 오히려 자네가
돌아다니면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자네의 수하들을 보내자는 거야. 알겠나?"

"알겠소."

"두명에게 주위를 다니면서 오늘밤 기습이 있었지만 물리쳤다고 안심하고 자
라고 선전하라고 말하게."

"알겠소."

막충이 흑의인들에게 끌려가고 있던 문도들 중에서 두명을 불러 이제부터 해
야할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흑의인의 우두머리도 마기가 비교적 들풍기는 녀
석 둘을 차출했다. 그런다음 상관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들은 진령문
밖으로 진령문의 안전함을 선전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우두머리는 이제 모든 지시를 다 해놨는지 느긋하게 마루에 걸터 앉더니 수
하에게 술을 찾아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조금 지나 수하 한명이 주방에서
찾아낸 술과 약간의 안주를 가지고 오자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자네도 이리 오게. 오늘 밤 속쓰리는 일도 많을텐데... 한잔 하게나."

"마시기 싫소."

그러자 일부러 염왕적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벌써부터 본좌의 명을 거절할건가? 안돼겠군. 몇 명 잡아다가 목을..."

그러자 재빨리 막충은 상대의 앞에 앉아서는 술을 자신의 잔에 따른 다음 목
구멍 안으로 털어넣었다.

'제기랄...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똥씹은 얼굴로 억지로 술을 털어넣는 모습을 보며 염왕적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본좌가 오늘 그대 문파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
다는 걸 아나?"

"....."

"사실 지금 내가 끌고온 수하들은 본좌 휘하에 있는 수하들의 반이야. 나머
지 반은 군사가 어디에 쓴다고 빌려갔지만... 그렇지만 그 반만해도 이정도
시골문파따위 2각이면 시체의 산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네. 하지만 군사가
쓸데없이 피를보지 말라고 부탁을 했기에 노부도 조심한거지. 왜그런고 하니
후속부대의 지휘관이 이런일에는 좀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거든..."

"누군데 그러시오?"

"조금 지나면 알게 될거야. 아마 본타에서 그대에게 신세지는 것도 몇 년 되
지 않을거야. 과연 얼마나 신세지게 될지 아직은 알수가 없어. 하지만 이것
하나는 그대에게 약속하겠네. 그대와 그대의 문파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함세. 대신 그대도 이 비밀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게나."

서로 가벼운 말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한 반시진 정도 흘렀을까? 흑의인들의
우두머리가 세병째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미세한 진동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왔군."

그러자 막충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온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일각여가 지난 후에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흑의인들이 정문을 열었고 그걸 통
해서 천여명의 기병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마을 외곽에서 미리 준비해온
두터운 헝겁으로 말발굽을 몇겹으로 감싸놨기에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이다. 먼저 들어온 거대한 흑마(黑馬)에서 두터운 갑주(甲胄)를 걸친 인물이
뛰어내렸다. 그런다음 우두머리에게 다가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염왕적자(閻王笛子) 대장."

"어서 오시지요, 관지공(公). 일이 벌써 끝나버려 미안하군요. 이쪽은 신세
지게 될 진령문의 정인검 막충이외다."

막충은 똥씹은 얼굴로 중무장을 갖춘 인물에게 간단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이정도 중무장을 갖춘 인물이 수하들을 천여명이나 끌고 들어오는 걸 보니 아
마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 모양인게 확실했다. 그러면 재수없으면 정말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관지라 하오. 잘 부탁하오."

한중평이 관지에게 관지공이라고 높여주는 것은 그의 무공 고하를 떠나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긴 했지만 관직에 머물렀던 뛰어난 장군이었기 때
문이다. 찬황흑풍단의 천인장이라면 장군계급이었다.

"대단히 빨리 끝내셨군요."

"겨우 이따위 시골문파, 염왕대 100명만 해도 쑥밭으로 만들 수 있지요. 그
래 오는길에 문제는 없었나요?"

"흔적이 눈에띄지 않게 이리저리 돌아온다고 늦었습니다."

그러면서 관지가 염왕적자를 향해 조금 꺼림직한 시선을 보내자 염왕적자는
곧이어 눈치채고는 막충을 자신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딴 사람이 들어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충이 멀어져 가는 것
을 보며 관지가 입을 열었다.

"타주의 몸도 안좋은 이때 움직이는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요."

"타주는 본교 최고의 고수지요. 상대는 타주의 몸상태를 모르니 죽지만 않았
다면 무슨짓을 해도 상관이 없지요. 언제나 보이는 적보다는 안보이는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그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된다 이말입
니다. 참, 그런데 나머지는?"

"분산해서 이동했으니까 조금 지나면 모두들 도착할 겁니다."

"자자... 그럼 수하들이 도착할때까지 술이나 한잔 하지요. 여기 괜찮은 술
이 좀 있더군요."

"예."

어둠이 걷히고 동이틀때쯤 되자 관지가 거느리는 흑풍대 4천여명이 도착을
완료했다. 흑풍대는 묵향과 합류하는 시점에서 말과 갑주 등 모든 장비들을
버렸었다. 하지만 흑풍대의 구성원들은 개개인의 무공은 마교의 인물들보다
훨씬 떨어졌지만 기마전에 능한 인물들이었고 또한 군인들이었었기에집단전
에 능했다. 그렇기에 설무지는 그들에게 뛰어난 준마(駿馬)와 군용으로 납품
되던 두터운 전투용 중갑주, 그 외에 두터운 방패 등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모
두 다 장만해 주었다. 거기에 어느정도 시일이 지나 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과거 이탈했던 흑풍단의 인원들까지 가세해 4천명으로 증강되어 있었다. 그렇
기에 지금에 이르러 넓은 평지에서의 전투력은 염왕대와 막상막하의 수준에까
지 와 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관지는 염왕적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제 갑주를 벗
고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오늘 밤 해가 지면 출발 할거에요. 또 한곳의 문파를 부숴야 하거든요. 밤
에만 움직이자니 죽을 노릇이군요."

"아무리 마교와 전쟁을 한다고 해도 이런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파를 부숴도
상관 없을까요?"

"관지공은 아직 무림을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무림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이 지켜지는 곳이지요. 아무리 정이니 협이니 해대도 힘없으면 말짱
헛거지요. 과연 정파라 자처하는 무리들이 협이란 걸 지키는지는 아무도 모르
는 사실이지요. 사실 본좌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본 정파란 것들 중에서도 쓰
레기들을 많이 봐왔고 또 사파나 마교라 불리는 인물들 중에서도 협의 정신을
지키는 인물들을 봤지요. 물론 노부가 그렇다는 말은 절대 아니구요. 문제는
정이냐 사냐 그런게 아니라 지금 관지공처럼 협을 지키고자 하는, 또는 생각
하는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거지요. 관지공은 군에서 오래 있어 봤으니 잘 알
겁니다. 적군을 대할 때 어떤 행위를 하나요?"

순간 관지에게는 이민족들을 해치웠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별로 유쾌
하지는 않은 기억. 야만족들이라는 단 하나만으로 살인, 강간, 폭행, 약탈을
자행했었지 않은가... 가깝게는 몽고전에서부터 멀게는 자신이 처음 흑풍단에
입단했을 때 있었던 투르판 원정까지....

"....."

"군대란 아주 재미있는 단체지요. 같은편은 목숨을 바쳐 보호하고 반대편은
살인, 강간, 폭행, 약탈을 해도 오히려 높은 공로를 세웠다고 녹봉과 벼슬을
올려주며 칭찬하지 않나요? 무림도 같은 거지요. 협이니 뭐니 따질 필요가 없
어요.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이지요. 물론 이 문파는 우리의 적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들의 문주는 우리와 행동을 같이할 것을 거절했고, 그
렇다면 이들은 우리의 행동에 지장을 주는 적이 되는거지요. 적을 무참히 없
애버렸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어느정도 이해는 되는군요."

"지금 우리들의 행동은 기밀이 아주 중요합니다. 진령문은 이제 총단을 점령
하는데 있어 보급기지로서 아주 소중히 쓰일 곳이지요. 또 필요한 병력을 숨
겨두기도 그만인 곳이고... 왜 우리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시골문파를 박
살냈겠나요? 그러니 내일부터는 관지공이 이곳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때 사
소한 인정을 보인답시고 물컹하게 대했다가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이런 작은 문파는 본교가 보이지 않게 살며시 지원
해주면 급속히 다시 힘을 회복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이들에게 인정을 배푸는
것은 총단을 박살낸 후에 해도 상관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며칠 후면 관지공은 아마도 또 이동하게 될겁니다. 군사께 들었는지 모르지
만 이번 길 개척은 노부가 거느린 염왕대가 맡았지요. 노부가 부수고 들어가
면 관지공이 뒷수습을 하는 식으로... 300리(91Km) 단위로 하나씩 문파를 부
숴 나갈겁니다. 여기서 대산까지는 삼천리길... 앞으로도 9개의 문파를 더 부
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아마 흑풍대의 뒤로 본타의 주력이 따라올겁니
다. 그런다음 비밀리에 총단 부근에서 집결하여 혈전을 벌이게 될테지요. 또
길 개척이 끝날 때 쯤에는 그분의 상처도 회복될테니 승산이 있는 싸움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좀 보이더라도 참으세요."


그날 이후 막충은 인질들 때문에 할수없이 협조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정말
문파간의 싸움도 이정도로 규모가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닳을 수 있었다. 보
통 문파간의 싸움은 상권 등의 잇권을 놓고 다투는 것으로 상대방을 멸망시키
기 위한 전면전 보다는 각 지역을 놓고 제한적인 싸움을 하게 된다. 많이 동
원되어야 천여명, 보통이 500여명도 안되는 무사들이 검이나 창 등 개인이 휴
대할 수 있는 병장기들로 무장하여 하루정도 투닥거리고 나면 싸움이 끝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마교도들에게 점령당한 후 진령문의 창고에는 어디 전쟁에라도 쓸건
지 몸통정도를 가릴 수 있는 약식 갑옷과 활, 화살, 쇠뇌, 창, 투석기, 방패
등 별의별 물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진령문에 주둔중인 흑풍대라 불
리는 마교의 집단은 개개인의 무공은 흑의인들보다는 약한 듯 보였지만 그 무
장에 있어 아무래도 정규전을 교육받은 것 같은 특이한 인물들로 보였다. 무
림인들이 잘 다루지 않는 마상용 무기를 아주 능숙히 다룰뿐아니라 쇠뇌나 투
석기 등을 수리, 정비하는데 옆에서 구경해봐도 아주 많이 다뤄봤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관지라는 우두머리가 떠난 후 진령문은 관석(關析)이란 자가 300여명의무리
를 이끌고 주둔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각종 무기와 식량 등속이 진령문을 통
해 어디론가 흘러간다는 걸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
만 그쪽에서 아마도 피바람이 불어오리라...

* * *

"어서 오십시오, 천도왕(天刀王) 수석장로님."

여지고 수석장로가 들어오자 방금 기별을 받았는지 설무지 군사가 뛰어나오
며 반가이 맞이했다. 아무리 설무지가 군사라는 직위에 있지만, 수석장로와
차석장로의 지위는 군사라는 직위보다 낮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이외다. 군사."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사혈천신(蛇血天神) 장로님은?"

"그는 부교주님이 명하신 포섭자 명단을 들고 고루혈마, 지옥혈귀와 함께 돌
아다니고 있소. 몇 명 포섭했다는 보고를 들었소."

"그러면 각 분타에서 쓸만한 무사를 뽑는 임무는 누가 맡고 있습니까?"

"음희와 사망혈매가 하고 있소. 사망혈매는 혈화궁 출신이니 정보에 뛰어나
아마 제대로 된 선발을 기대할 수 있을거요."

"몇명정도 뽑으실건지요?"

"3천명 정도로 하라고 지시해 놨소. 어쨋든 장인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들만 추려뽑았지만 그 안에도 끼어든건 어쩔 수가 없소. 주의할 수 밖에..."

"홍진 막주가 이미 거처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쪽으로 이동시켜
주십시오. 또 한가지 좀 주의해 주실게 있는데..."

"뭔가?"

"우외총관은 이쪽으로 절대 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지고 장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으응? 꼭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그와 원수를 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초류빈이라는 자가 그분의 수하로 들어
와 있습니다. 잘못하면 칼부림이 날수도..."

"알겠네. 외총관에게 주의를 주지."

"허허... 수하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들이 확실히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만 있다면 그래도 쓸곳은 아주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새로이 정비된 조직에서 만묘서생이 보내오기 시작한 돈은 엄청난
액수가 아니오?"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죠. 참, 부교주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부교주님의 상처는?"

"거의 치료된 상황이긴 하지만... 호승심만 앞세울뿐, 너무 자신의 안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시니 천도왕 수석장로께서 말씀좀 잘 해주십시오. 수석장
로님 외에는 그분께 직언을 올릴만한 인물이 그분의 과거 흑풍단 시절의 친구
들 뿐이라..."

"알겠네. 지금 어디 계신가?"

"후원에 계십니다. 참,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아마도 도움이 될겁니다."


천도왕 여지고 수석장로가 흰 도포자락을 날리며 후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
어섰을 때 묵향은 후원에 핀 꽃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마화는 묵향의 시커먼 등판을 향해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오게나."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격식을 따지지 않는 강자의 밑에 있을 때는 편리한 점이 많이 있다.
마교에서는 교주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할 때 무기를 꼭 풀어놓아야 하지만 이
정도 무공 차이가 나는 경우 그 법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또 상대도 막강
한 자만심으로 그걸 따지지 않기도 했고... 또 원체 예절방면으로는 무지한
인물이기에 다소 격식에 어긋나도 그걸 보아넘겨 주는 것이다. 그것 또한 그
런것에 무지한것도 있지만 그걸 포용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묵향은 언제나와 같이 묵혼검을 비스듬이 등뒤로 차고 깨끗이 세탁한 흑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그 흑색옷의 사이로 가슴을 칭칭 감고있는 하얀 붕대
(繃帶)가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 평상시와 조금 다른 복장이라고 할까... 묵향
은 여지고 장로를 이끌고 마루로 올라서며 말했다.

"반가운 친구가 왔는데, 차를... 아니, 술을 좀 가져와라."

그러자 마화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몸도 안좋으시면서 무슨 술이에요? 차를 드세요. 수석장로님도 차를 드실거죠?"

살기와도 같은 무형의 압력을 느끼며 여지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식의 수하로부터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본 마교의 고수는 없었다.
여지고 장로는 마화가 수하지만 묵향을 어느정도 깊게 생각하고 있음을 느끼
며 어떤 면에서는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란 공포와 광기에 의해
유지되는 단체... 도대체가 수하들로부터 공포를 통한 존경은 받을 수 있을지
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은 받는다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화가 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묵향이 입을 열었다.

"제길... 상처는 거의 다 나았는데 저 야단이야."

"그래도 노부는 부교주님이 부럽소이다."

그러자 묵향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말로만... 침대에서 눈을 뜬 다음 저녀석의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줄 아
나? 거기에다 중간중간에 대답을 해야하는 질문을 던져대니 청각을 마비시킬
수도 없고... 으윽... 호위를 좀 바꿔달라고 관지한테 부탁하던지 해야지
원... 요즘은 저놈의 잔소리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마누라도 아닌게 잔소리
만 늘어가지고... 요즘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구. 거기다 본좌가 더 신경질
나는건 마화의 행태를 좌우의 모든 놈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거야. 직접 말하
면 될걸 가지고 왜 마화가 잔소리를 하도록 옆에서 충동질하냐 이말이지...
제길..."

여지고 장로는 묵향의 푸념을 들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
연 묵향의 성질머리를 알고있는 인물들 중에 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강
심장인 사람이 본교에 존재할까? 이번 암습에 대해 직접 말은 못하겠고 속에
서 열불이 끓기는 끓으니 대신 마화를 충동질 하며 응원한 것이겠지. 그런면
에서 성질이 괄괄하고 화통한 여걸인 마화는 묵향과 합류한 마인들에게 아주
유명했고 꽤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이었다. 원래가 이런 잔소리는 부인이
해야만 하지만 부인이 없으니 어쩔수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거기에 묵향은
마화의 말은 웬만하면 참고 견뎌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침공 작전은 어찌 되고 있소?"

"지금까지 4개의 문파를 비밀리에 복속시겼습니다. 오랜만의 일거리라서 그
런지 한중평이 완전히 신이난 모양이더군요. 또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일거리기
도 했구요."

"관지는?"

"그런대로 잘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잘 되었군. 흑풍대는 기병대니까 평지에서는 대단히 큰 전력이 될 수 있소.
거기에 집단전을 교육받은 것은 흑풍대 뿐이잖소? 총단을 공격하는데 있어 큰
힘이 되어줄 것이오."

묵향은 품속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내며 말했다.

"이 편지를 한번 읽어보시겠소?"

"......."

"그대가 읽어보기에는 어떻소?"

"군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물론 이간책이라고 하지. 장인걸이 잔머리를 굴려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이
확실해."

"그럼 저에게 원하시는 답은 뭡니까? 저는 이런쪽으로는 잘 모릅니다. 그냥
단순한 무인일 뿐..."

이때 마화가 돌아왔고 그녀를 뒤따라 시비가 두잔의 차를 공손히 놓고 돌아
갔다. 여지고 수석장로는 찻잔의 뚜껑을 열고는 향기를 감상(感想)하면서 한
잔 음미해 본 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용정차로군요. 대단히 잘 끓인... 부교주님의 취향이 날로..."

"무슨 소리야? 용정차는 또 뭐고... 차는 그냥 대강 마시면 되지 뭔 잔소리
가 그렇게 많아. 자네도 마화를 닮아가나? 원..."

묵향은 퉁명스레 한소리 한 후 차를 한모금 입속으로 밀어넣은 후 그대로 꿀
꺼덕 삼켜버렸다. 이런 무식한 인물이 마시기에는 너무 좋은 차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마화가 뒤쪽에서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또한 좀
무식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장군가의 여식이다. 오랜 군무덕분
에 그놈의 예절이 많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은 남아있는 것이다.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마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지고 장로는 마화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부교주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알겠습니다."

마화가 자리를 뜨고 나자 여지고 장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흐흐흐... 차 말고... 혹시 이거 드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와 동시에 여지고 장로의 품속에서 나오는 술은 독하디 독하기로 소문난
백일취(百日醉). 원래 술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그 은은한 국화향이 감도는 독
한 술은 한약재까지 일부 들어가 있어 마시고 나면 뱃속까지 찌르르르 울리는
게 특징이다. 여지고 장로가 술병을 꺼내자마자 묵향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곧장 찻잔속의 용정차를 화원에다가 부어버린 다음 곧바로
잔을 들이밀었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흐흐흐... 역시 수석장로는 본좌의 마음을 잘 아시는구려."

"뭘요. 저는 심부름꾼 정도밖에 안됩니다. 원래는 군사가 준비한 거니까요.
군사가 좋아하실거라면서 드리라고 하던데요?"

"역시... 노부가 수하들은 아주 제대로 얻었지. 크... 저엉말 좋은 술이군."

"그런데 부교주님."

"왜그러나?"

"앞으로는 좀 몸을 생각해 주십시오. 온몸에 춘약과 산공분, 거기에 몽혼약
까지 중독이 된 상태에서 적을 상대하려 드시다니... 부교주님께 의지하고 있
는 저희들을 생각하신다면 적어도 그런 행동은 하시는게 아니죠."

"자네같으면 조금 힘들겠지만 이길 수 있을거 같은데 포기하겠나?"

"......."

"포기 하겠냐구."

"속하야 포기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저한테야 딸린 식구가 없습니다. 부교주
님께는 수천명이 널려있는 상태구요."

"알겠네. 앞으로는 주의하지. 하지만... 그때 일을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야.
아주 재미난 대결이었다구."

"그 자객으로부터 알아내신거는? 듣기로는 생포하셨다고..."

"아... 그녀석 지금 지하감옥에 떡이되어 뻗어있지. 좀 살살다루라고 했는데
수하놈들이 영 말을 안듣는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한잔 더 줘."

"예. 너무 급하게 드시지 마십시오."

* * *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주(隊主)의 손에 작은 전서구에 다는 종이쪽지가 들
려있는 것을 보고 장지가 물었다.

"이번 임무는 뭡니까?"

"뭐 별 임무는 아닌 것 같군. 패진문(覇晉門)에서 요즘 용병을 모으고 있는
데 그들을 도와주라는 지시야."

"패진문이라고요? 패진문은 별로 대단한 문파도 아닌데 거기를 왜?"

"우리가 의문을 제기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내 생
각에는 패진문하고 싸우고 있는 천마문(天魔門)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인 모양
이야."

"천마문이라면 8천의 문도를 거느리는 대 문파인데 그들과 싸운다구요?"

"과거에는 강대했지만 오래전에 있었던 권력다툼으로 쓸만한 상층부 인물들
이 대거 물갈이 되어버려 요즘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하지만 이
번에 새로 권력을 확실히 잡은 호진이란 인물이 대단히 뛰어난 인물인 모양이
더군. 그자가 천마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날뛰는 모양인데 우리는 거기
가서 천마문의 전력을 약화시키기만 하면 되는거야."

"흐음... 떡잎부터 자르자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그럼 수하들에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알겠네. 내일 출발할테니까 천천히 차근차근 준비하라 이르게."

"예."

패력검(覇力劍) 막야(幕惹)는 맹호대(猛虎隊)라 불리는 강력한 용병대의 대
장이다. 사실 그도 과거에는 공동문의 뛰어난 후기지수로서 존경과 찬탄을 받
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용병이라는 이런 말도 안되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무림에는 수많은 용병대가 있었고 용병들도 있었다. 용병(傭兵)이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일해주고 돈받아먹고 사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
기에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용병의 경우 인간시장 같은 곳을 통해 자신을 원하
일자리를 찾거나 어딘가에서 난리가 났다면 그쪽으로 가서 자신을 써주지
않을건지 타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용병대는 다르다. 우두머리를 중심으
로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씩 뭉쳐다니며 일거리를 찾아 다니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을 다 고용하지 못할때는 일정 수만 고용되기도 한다. 이때 잇점
은 만약 유명한 용병대의 경우 꽤나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고 또 용병대의 대
장들의 경우 대단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인물들이 많았기에 그 수하들이 살아
남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맹호대는 꽤나 이름난 실력있는 용병대였다. 그 수는 2
백여명으로 이루어 졌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대단했고 또 별볼일 없는 무공을
지닌 자를 받아주지도 않는 뼈대 있는 용병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용병대
가 공동문이 만든 것이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이들은 과거에는 공
동문을 위협하는 다른 문파와 또 다른 문파가 대결을 벌였을 때 공동문에서
상대를 겉으로 도울수는 없는 노릇이니 파견하는 일종의 지원병 같은 역할을
해냈었다. 하지만 지금 공동문에서 무림맹을 차지한 이래 그때부터는 공동문
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무림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쨋든 천마문 같
은 사파계열의 문파가 팽창하는 것은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 무림의 거대 명가들의 경우 이런 이름난 용병대를 소유하고 있거나 끈이
닿아 있었다. 과거 사천성에서 일어났던 문파중에 태원문(太元門)이 있었다.
태원문은 원래가 뛰어난 상인으로서 넓은 상권을 차지하고 있던 혁련의 아들
혁소가 세운 문파였다. 혁소는 소림외가의 인물로 소림에서 무공을 익힌 후
소림을 등에 엎고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세력팽창에 놀란
몇몇 문파에서 그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사령방이란 작은 문파를 전폭적으
로 지원해주겠다며 꼬셔 정면대결을 붙였다. 이때 사령방은 약체인 전력을 보
충하기 위해 용병을 대대적으로 사용했고 그때 그 문파들의 비밀 용병대들이
가담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때의 대규모 결전을 끝으로 태원문은 엄
청난 피해를 입었고 보유하고 있던 고수들의 8할을 잃은 후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용병대 중에서 크지는 않지만 강력한 고수들을 다수 보유한 곳들은
아마도 어떤 문파와 줄이 닿아 있을것이라는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어
떤 용병대가 어떤 문파와 관계있는 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또 다수의 문파
가 이 방법을 쓸 정도로 용병대의 활용은 대단한 성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맹호대는 패진문에 도착했다. 맹호대의 대원들이 짐을 풀
고 숙소를 배정받고 있는 동안 패력검 막야는 패진문의 문주와 함께 제반사항
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어서오게. 뭐 필요한게 있다면 말해주게나."

"별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께서 문주를 도와드리라고 특별히 당부를 하
셔서 도와드리는 것이지요. 저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그분께서 해결해
주시니 문주께서는 그런 작은 일에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총관에게 지시해서 신선한 고기와 술을 좀 보내주겠네. 오느라
수고했을테니 그걸로 피로나 좀 푸시게나."

"감사합니다."

"이리 앉게."

"예."

"전황은 어떻습니까?"

"어떻고 말고가 있겠나? 원체 천마문이 강대한 문파다 보니 어려움이 많을
뿐이지. 며칠 후에는 대영산 부근에 천마문이 구축해놓은 분타를 공격할 예정
이지. 그때 좀 도와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타의 전력은 어느정도인가요?"

"1500여명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걸로 알고있네. 그들도 반수 정도는용병이야."

"이쪽은?"

"그대들 외에 파황대(破荒隊)와 본문의 현무대를 보낼 생각이네. 나머지 상
세한 작전지시는 갈조에게 듣게나."

"알겠습니다."

여기서 현무단(玄武團)은 천마문과의 전쟁이 시작된 후에 급조된 단체로서
패진문의 뛰어난 고수인 갈조(葛鳥)가 그 대장이었다. 현무단은 단장과 부단
장 2명을 제외하고 전원 용병으로 구성된 단체로 파황대나 맹호대같은 용병대
들도 원칙상 현무단에 포함되었고 또 현무단 단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
다.

그로부터 삼일 후 패진문은 천마문의 분타를 공격하기 위해 무사들을 출동시
켰다. 말은 패진문이 가진 세 개의 단 중 하나인 주작단. 하지만 주작단은 모
두 다 용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주작단 중에서도 주력은 맹호대와
파황대였다. 파황대도 맹호대와 같이 어떤 문파와 뒷줄을 대고 있었고, 200여
명으로 구성된 용병대였는데 무림맹에서 슬며시 요청한 덕분에 맹호대와 함께
파견된 단체였다.

새벽에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는 강력한 고수들을 거느린 맹호대와 파황대가
상대의 후방을 포위, 공격함으로서 대단히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적들
도 그냥 항복한 것이 아니라 죽자고 저항했기에 주작단의 피해 또한 컸다. 그
날 저녘때 즘에서야 상대가 분타를 포기하고 도주하면서 전투가 일단락 되었
고 주작단의 단주는 이번에 얻은 승리에 대단히 만족한 듯 했다. 이 분타를
차지함으로서 분타 부근 30리내의 천마문 세력을 쫓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
다.

모두들 천마문의 분타를 격멸한 후 희희낙낙하고 있을 때 전령이 도착했다.
그 전령은 특급서신을 지참하고 있었고 그는 곧이어 현무단장 갈조에게 그 서
신을 전달했다. 갈조는 그 서신을 읽고나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
만 휘하의 대장들을 집합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파황대 대장 공륜의 질문에 갈조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본문으로 모두 다 회군하라는 지시야."

그러자 공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곳은 아주 중요한 위치입니다. 여기를 포기한다면 천마문을 공격하기에
아주 힘들..."

"누가 그걸 모르나? 이번 일에 마교가 개입했으니 곧 돌아오라는 문주님의
지시일세."

"마교라구요?"

"그렇네. 마교에서 문주에게 자신들의 일에 동참하라는 서신을 오늘 아침에
보냈어. 지금 곧 돌아가야 겠네. 무슨짓을 할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그럼 거절한 겁니까?"

"아닐세. 아직 거절하지는 않았어. 우리들이 모두 돌아간 후 거절할 모양이
야. 그동안 시간을 끌어야 할 것 아닌가?"

"이곳은 마교 총단에서 근 1500여 리(455Km)나 떨어져 있는 외지입니다. 그
런데 왜?"

"난들 알겠나? 어쨋든 천마문이나 마교 모두 사파니까 천마문에서 마교에 지
원을 요청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천마문은 마교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왜 겨우 늑대를 물리치는데 호랑이를 불러들여 호위병을 삼겠습니까? 여기 같
은 경우도 천마문이 총력을 다하지 못할 뿐, 그들이 총력을 다한다면 곧이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글세... 이론상으로는 자네의 의견이 맞는데 뭔가 또다른 일이 있을지도 모
르지. 빨리 수하들에게 지시하게. 회군한다고."

"알겠습니다."

* * *

"놈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놈은 뭐라던가?"

"패진문 문주의 말로는 그런 사안을 자신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으니 장
로급들과 의논하기 위해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했습니다."

"흐흐흐... 그렇게 시간을 달라고 해놓고는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군."

"예. 아주 치졸한 놈입니다."

"좋아. 먼저 지금 돌아오는 그놈들부터 박살낸다. 이쪽에서 힘을 보여주면
그 능구렁이의 생각이 조금 바뀌지 않겠나?"

"하지만 놈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할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밀이 누설될지
도..."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냐? 단 한놈도 살아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한다."

"존명!"


마교도들은 정파의 인물들과 달리 특이한 마기(魔氣)라는걸 풍기기에 매복공
격이 매우 힘들다. 아무리 잘 숨어있어도 그 기운이 풍겨나오는 걸 막기 힘들
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교는 매복보다는 기습을 선호한다. 멀찌감치에 집결
해 있으면서 상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고 최고로 빨리 적에게 접근해 가서
박살내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하면 마기를 걱정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마교도들이 멀찌감치에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현무단이 그들 주위
에 나타났다. 낮의 격전(激戰)으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긴급 회군지시 때문
에 그날 밤에 출발하여 이동해왔기에 모두들 피로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전
쟁을 마치고 곧바로 그날 저녘에 이동할 것이라고는상대가 생각하지 못할것
이라는 생각에 한 결심이었지만, 오히려 마교가 그걸 알아내버렸기에 자기 무
덤을 판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염왕적자는 거의 천오백명에 육박하는 상대방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제 어슴
푸레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그 여명아래 피곤에 찌든, 밤새 행군해온
목표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뒤에는 부상자들이 절뚝거리며 따라오고 있
었고, 가장 뒤에는 우마차를 이용해서 중상자들이 실려오고 있었다.

염왕적자의 손짓에 따라 400여명의 흑의인들이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
다. 남은 200명은 사방에 퍼져서 도망치는 녀석들을 도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
다. 수하들이 모두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염왕적자도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교시절에는 고수들이 직접 하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뛰는 경우는 없
었지만, 지금은 한명이라도 무사가 필요한 때… 자신이 나서서 싸우면 한명이
라도 부상자가 적을수 있기에 그는 요즘 들어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곧이어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요란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핏빛 여명
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아침노을이 붉게 물드는 그때 대지또한 피로서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강력한 용병단들의 경우 그들끼리 뭉쳐서 꽤나 강한
저항을 해왔다. 하지만 그들 사이로 백인장급 실력의 뛰어난 마인들이 파고들
면서 칼부림을 일으키자 그들의 진세도 뭉개지기 시작했다.

맹호대주(猛虎隊主) 패력검(覇力劍) 막야(幕惹)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의 500여명의 흑의괴한들… 그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은
파황대는 지금 거의 전멸한 상태였고 파황대를 뭉갠 흑의인들은 이제 맹호대
로 달려들고 있었다. 온 몸에 짙은 마기를 풍기는 인물들… 그들이 어디서 왔
는지는 알아보지 않아도 뻔하다. 저정도 마기를 뿜을 정도로 수련한 인물들은
마교 외에는 키울만한 단체가 없었다. 또 그 마교에서도 저정도 고수들이라면
아마도 윗줄에 놓이는 실력자들일 것이다.

옆에서 부대주(副隊主) 장지가 부하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막야의 머
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의문 뿐이었다. 이런 시골문파들간의 격전에 왜 마교의
정예가 가담했느냐 하는 것, 만약 천마문을 돕기위해 파견한 고수들이라면 너
무 실력이 뛰어났다. 왠만한 고수들 천여명 보내서 지원해줘도 패진문이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사실 처음 벌어진 싸움 자체가 천마문의 멸망이 아닌
세력감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마교가 이렇듯 천마문을 전폭적으로 지
원하는 것인가? 왜?

막야는 부하들에게 호령하고 있는 장지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무래도 여기서 살아돌아갈 확률은 없다. 우리는 지금 수하들의 진세속에
있기에 밖에서 이쪽을 보기는 어려울거야. 귀식대법을 사용하게. 자네만이라
도 살아서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맹주께 이번 일을 잘 보고해주기 바라네. 알
겠나?>

막야는 장지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잠깐 준 다음 그대로 자신
의 검으로 장지의 몸을 꿰뚫었다. 매우 치명적인 상처처럼 보이게, 아주 상처
가 깊긴 하지만 출혈도 적게 주요 혈도를 비켜서 베는 그의 솜씨는 정말 대단
했다. 장지는 방금 한 대주의 말로 자신을 베는 이유를 알았기에 그대로 귀식
대법을 시전하며 쓰러졌다.

"한놈이라도 더 죽여랏!"

막야는 부하들을 이끌고 죽자고 저항했지만 한 흑의인이 단신으로 30여명의
수하들을 베면서 접근해 들어왔고 곧이어 그의 검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막
야를 베어버린 상대는 곧장 악귀처럼 사방으로 검을 날려갔다. 피를 흠뻑 덮
어써서 흑의가 이제는 검붉은 색으로 바뀐 이들은 거의 악귀와같이 사람을 죽
이고, 또 죽여나가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한녀석의 목이 잘려나가는 걸 보고있던 염왕적자의 뒤에서 그의 수하
가 물었다. 염왕적자나 그나 둘다 피로 목욕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몰라서 묻냐? 이 멍청아."

"예? 그럼 죽이라는 말씀?"

"부상자들 데려다가 어디다 쓸거냐? 모두 죽여버렷!"

"존명!"

피의 축제는 해가 완전히 떠오른 후에는 끝이나버렸고, 천여명이 넘는 시체
가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염왕적자는 이제 검에묻은 피를 시체의 옷깃에 닦으
며 검집에 넣고있는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죽은척 하고있는 놈이 있는지 철저히 확인하라. 한놈도 살아있어서는 안돼!"

염왕적자와 그의 졸개들이 이름하야 확인사살이라는 귀찮은 작업까지 마치고
난 그곳은 이제 시체냄새를 맡은 까마귀들과 까치들이 모여들여 오랜만에 배
터지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염왕적자가 새들에게 푸짐하게 모이를 나
눠준 그날 저녘에 패진문은 봉문을 선었했고, 천마문주에게 손이 발이되도록
빌고 푸짐한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왜 천마문의 분타를 박살낸 패진문이 오히려 저자세로 나가는
지 궁금해했지만 그건 당사자인 패진문주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
었고 소문만 무성하다가 살살 그 소문마저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
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 맹호대 부대주 장지의 보고로 무림맹은 그 진실을
어느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아내기가 힘들기에 패진문 주위에
첩자들을 배치하여 감시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여기를 뭉개라."

갑작스런 묵향의 말에 수하들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묵향이 묵혼검
을 뽑아 가리킨 지도상의 한 점. 모두들 경악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약간은
정신을 차린 천리독행이 말했다.

"저… 거기는 태정문(太政門)입니다. 그들을 치신다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특히나 태정문주 한과는 청성파의 제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
심이……."

그말에 묵향이 피식 웃으면서 설무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군사가 설명하게나."

"예. 이번에 태정문을 치는 이유는 총단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입니다. 지
금 총단에서 새로이 교주로 등극한 장인걸은 본타와 제휴를 맺기를 소망해 왔
습니다. 그래서 부교주께서는 그들의 청을 수락하셨죠."

그 말에 수하들이 쑤근거리기 시작하자 묵향이 탁자를 가볍게 탁 치면서 말
했다.

"할말이 있더라도 다 듣고난 다음에 질문하라."

"장인걸의 말은 이렇습니다. 부교주님을 핍박했던 한중길 교주나 무림맹주
옥청학은 자신이 처치했으니 이제 손을 잡고 무림일통을 하는게 어떻느냐구
요. 더 이상 원수진 인물도 없는데 왜 마인들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만약
그렇게 우리끼리 싸운다면 혈교와 정파 좋은일만 시키는게 아니냐? 만약 함께
무림일통을 한다면 양자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눠 이 중원을 나눠먹자는게
그 요지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천리독행이 말했다.

"부교주께서는 장인걸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아닐쎄. 손을 잡는 척 할뿐이지. 무림맹과 한판 하는 척할거야. 그러기 위
해 선택된 문파가 태정문이지. 우리가 태정문을 박살내고 또 정파와 싸움을
시작하면 이쪽에서도 장인걸에게 할말이 생기지. 우리는 계약대로 했는데 왜
너희들은 가만히 있느냐? 그러면 장인걸도 손을 쓰기 시작할거야. 물론 본교
의 분타들은 모두 내가 흡수했으니만큼 장인걸이 외부에 투입할 세력은 알짜
들이겠지. 그렇게 된다면 총타를 치는게 더욱 쉬워지지 않겠나?"

"흐음… 좋은 계책이십니다. 하지만 일단 무림맹과 전쟁이 붙고나면 전력을
빼기도 만만지 않을 것입니다. 마교 단일의 힘으로도 힘든 일인데… 믿지도
못할 두 연합세력이 정파와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무리는 있지. 하지만 자네는 한가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군. 그들과 전
쟁이 붙은 후 총단을 치기위해 전력을 뺀다. 어디서 뺀다는 것이지?"

"그야 무림맹과의 전쟁터죠."

"그 전쟁터는 어딘가?"

"그… 그거야 중요한 요충지나… 점령한 문파…"

"아니지. 우리는 그곳을 점령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네. 박살낼 뿐이지. 사실
우리가 지킬 곳은 없어. 우리들이 지금 대화하고 있는 이곳도 허울만 좋게 만
들어놓은 미끼일 뿐이고 말이야. 또 우리들 중에서 가족을 가진 자들이 있나?
우리에게는 놈들이 자르고싶어도 자를 뿌리가 없지. 물론 이 상태로 오래갈수
는 없어. 우리의 뒤를 이을 새로운 고수들을 키우지 않고있다는 것은 매우 위
험한 일이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덕분에 생기는 잇점도 있다 이거야. 부평
초처럼 떠돌면서 놈들의 문파를 박살낸다. 물론 그러는 도중에 여기도 공격당
하겠지. 하지만 때가 될 때까지는 이곳을 지킬거야. 그러다가 기회가 왔을 때
본타는 총력을 다 기울여 총단을 박살낸다. 물론 여기는 쑥대밭이 되건 말건
그건 상관없는 일이고… 알겠나?"

"예."

"천리독행!"

"예."

"본좌는 그대에게 이번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 그대의 의향은?"

묵향의 질문에 천리독행이 자신감있게 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수하들은 얼마나 끌고갈까요?"

"천랑대의 2개 백인대를 주겠다. 그정도면 충분하겠는가?"

천랑대는 과거 10개 백인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묵향과의 충돌로 4개 백인대
가 소멸한 지금 6개 백인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2개 백인대라면
현 천랑대 전력의 삼분지 일을 준다는 말이었다.

"옛!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상대를 괴멸시키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우리쪽의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어야
한다. 또 괴멸시킬 수 있다고 해도 괴멸시키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이 소문을
퍼뜨려야 하기 때문이야.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떠나라."

"존명!"

천리독행 철영이 예를 올린 후 나가자 묵향은 수석장로를 호명했다.

"여지고 수석장로!"

"예."

"그대에게도 천랑대 2개 백인대를 줄테니 대맹문(大猛門)을 격파해 주겠소?"

"예. 지금 떠날까요?"

"그러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지고 장로가 예를 올린후 곧장 밖으로 나간 후 묵향은 설무지를 불렀다.

"군사!"

"예."

"천랑대의 전 세력이 떠나도 본타의 수비에 문제는 없겠소?"

"예. 충분합니다. 아마도 적은 한동안은 본타에서 수작을 부린줄은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애궂은 마교에 대한 감시만 강화되겠지요."

"홍진 막주!"

"예."

"본타의 주력들이 거의 자리를 비우고 있는 만큼 가장 큰 변수라고 할 수 있
는 혈교에 대한 정보수집에 좀 더 힘을 써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본좌는 남은 천랑대 2개 백인대를 거느리고 등룡문(登龍門)에 다녀올
테니 그리 알도록. 아마 열흘 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중이니 나머지 사소한
일은 군사가 알아서 하게."

"존명."


그로부터 4일후 묵향은 저 멀리 등룡문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서있었다. 경
공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호위무사들을 떨어뜨려 놨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
다. 이번 전투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한 문파를 학살하러 가는 것이었기에 마
교의 물을 먹지 않은 인물들에게서 반발이 나올 것은 뻔하기에 섬서분타에 떼
놓고 온것이다. 묵향이 서있는 산 꼭대기의 저편에서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점점 해가 낮아지면서 서편의 붉은 핏빛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듣던 것 보다는 제법 큰 문파군."

그러자 묵향의 옆에 시립해있던 흑의무사가 답했다.

"예. 검을 쓸 수 있는 자가 팔백여명은 되니까요. 하지만 그들 중에는 쓸만한
인물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이 가족이거나 하인 또는 고용인들이지요. 지금
시작할까요? 어두워지기 전에 끝날것입니다."

"아니. 밤에 시작하기로 하지. 그래도 기습하러 왔는데 밝을때 쳐들어가서야
되겠나? 밤에 해야지 아녀자들이 숨은걸 우리쪽에서 모른척 하면서 지나쳐 줄
수도 있잖아. 낮에 하면 도망갈 틈이나 있겠나? 모두들 잠시 쉬었다가 밤에
기습하라고 일러라. 대신 살기(殺氣)를 버리고 숨은자들은 그냥 모른척 해주
라고 해."

"존명!"

흑의인이 재빨리 신형을 날려 사라진 후에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서편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품속에서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
이 이런 작은 문파를 부수기 위해 올 필요도 없었고, 그냥 천랑대 1개 백인대
만 보내면 손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온 이유는 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하고싶어서였고, 그 이유에 가장 올바른 답은 마화라는 '잔소리
꾼'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였다.

감히 부하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거침없이 직언(直言)할 수 있는 수하가 있
다는 것이 나쁜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어떤면에서는 좋은 일이었
다. 수하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묵향처럼 높은위치에 그것도 철혈을 사랑하는 마교도들의 우두머리인 경우 수
하들의 불만사항을 듣기는 힘들었다. 묵향의 경우 그 불만사항이 마화나 수석
장로, 군사에 의해 자신에게 잘 전달되고 있었고 그중에 마화의 경우 전달통
로의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군사나 수석장로도 꺼내기 어려운 말
을 마화는 호위이기에 앞서 '안주인' 비슷한 위치에서 떠들어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묵향은 눈을 새파랗게 뜨고는 잔소리를 퍼붓는 마화의 얼굴을 얼핏 떠올리면
서 피식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무덤을 내가 파고있는 건지도 모르지. 처음에는 들어줄만 했는데 요즘은
점점 심해지니까 듣고있기 피곤해……."

묵향은 저 밑에 보이는 등룡문 내의 건물들 사이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과 한
참 일하고있는 남녀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면서까지 복수를 해야만 하는 것
일까? 저렇게 죽은 놈들의 복수는 누가 해주지? 또 오늘은 몇 명이나 죽여야
하나? 그냥 몽땅 다 때려치우고 산에 들어가서 검술이나 더 익힐까? 그리고
혈마 선배도 한번 만나보고싶은데…….'

이리저리 묵향이 생각하고 있을 때 해는 완전히 저버렸고 어둠이 밀려들기 시
작했다. 묵향이 마지막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있는데 등룡문쪽에서 요란한 종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시작된 모양이군.'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등룡문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횟불들이 밝혀진 가운데 검붉은 피가 뿌려지자 그게 피인지 그냥 검은 물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얼마나 되는지 알수도 없는 흑의인들의 기습에 등룡문의 무
사들은 저항도 거의 못해보고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칼부
림을 보며 여자들은 아이들을 끌고 사방에 숨기 시작했고 개중에는 채 숨지도
못하고 사로잡혀 넓직한 연무장 중간에 끌려나왔다. 또 일부 무사들은 사태가
완전히 글러버린 것을 깨닫고 어두운 저편을 향해 죽자고 도망치는 인물들도
있었다.

"이게 다냐?"

묵향이 사로잡혀와 연무장 중간에 앉아있는 100여명의 남녀노소들을 보며 말
하자 그 옆에서 따라오던 흑의인이 재빨리 답했다.

"옛. 어떻게 처리할까요?"

"흐음… 갈길도바쁘니까 모두 다 죽여버려라."

묵향은 일부러 멀리서도 그 소리가 들리도록 조금 큰 소리로 대답해줬고 흑의
인도 마기를 풀풀 풍기면서 그 명령을 즉시 이행했다.

"존명! 모두 참해랏!"

명령이 떨어지자 흑의인들 몇 명이 뛰어들어 무차별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
고 잠시 후에 그곳에는 이미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든 시체들만이 널려있었다.
이때 밤하늘을 헤치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울려퍼졌고 흑의인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흑의인 한명이 묵향에게 외쳤다.

"급한 일인 듯 합니다. 여기 숨은 자들도 많을텐데 빨리 하명을!"

"제길……! 흔적이 남아도 할수없지. 돌아가자. 불을 질러라."

"존명!"

그들은 주변에 보이는 횟불들을 방안으로 날리며 밤하늘의 어둠 속으로 사라
져갔다. 방안은 아직 수색을 안했기에, 방안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여자나 아
이들이 숨어있을 것이고 아마도 불은 그들이 다 끌것이 분명했다. 묵향일행은
남은 등룡문의 잔당들을 꼭 죽일 필요는 없었기에 한바탕 연극을 한 후 재빨
리 등룡문에서 빠져나갔다.

* * *

세상은 안그래도 진천왕(眞天王)의 반란으로 인한 내전으로 민심이 흉흉한 판
에, 진천왕과 함께 또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혈교(血敎)가 무림을 놀라게 하
고있었다. 거기에 때맞춰 발견된 구휘대협의 무덤에 얽혀 지금 그 권리를 놓
고 암중다툼이 치열해지고 있는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무림맹주까지 실종
되다 보니 무덤에 얽힌 갖가지 사건의 중제가 어려워 지금 무덤을 두고 대규
모 혈전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다가 이번에는 마교의 행
위로 짐작되는, 정파에 소속된 문파 세 개가 묵사발이 났으니…….

"흉수는 알아냈나요?"

발 뒷편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에 중년인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게… 흉수가 너무 분명하기에 문제입니다."

"흉수가 너무 분명하다? 무슨 말인가요?"

"이번에 의문의 혈겁을 당한 세 개 문파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모두 똑같습니
다. 200명 정도의 흑의괴한들, 이상하리만큼 강한 무공, 혈겁을 당한 문파는
셋 다 정도 계열의 문파, 흑의괴한들은 모두 마기를 풍기를 음산한 분위기의
인물들……. 생존자들의 증언은 세 문파 모두 똑같습니다. 이런 증언이면 의
심할 것도 없이 마교의 소행이지요."

"……."

"하지만 너무 마교 냄새가 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세곳 다 생존자가 있
다는 것도 문제구요. 마교에서 손을 쓴다면 몽땅 다 죽여버렸을게 뻔한데…
아무리 밤이었다고 하지만 한둘도 아니고 생존자가 너무 많습니다."

"생존자의 수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자 거의 다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덤
비지 않은자들하고, 미처 숨지 못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살았습니다.
하다못해 실내 수색도 안했다는 것은 좀……."

"그러면 누구일 것 같나요?"

"속하의 생각으로는 혈교의 소행일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마교와 정파간에 싸
움을 붙이는 거죠. 만약 정마간의 대전쟁이 벌어진다면 정파는 현재 관부에
파견했던 무사들까지 불러들이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혈교와 혈
교의 지원을 받는 진천왕에게는 더없는 호재로 작용할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군요. 혈교쪽에 좀 더 조사를 해봐요. 하지만 의외로 마교일
수도 있으니 마교쪽에 대한 조사도 병행해서 하세요."

"존명!"

"그건 그렇고 전에 말한 것은 조사가 끝났나요? 섬서분타의 소모품 사용현황
말이에요."

"예. 내부로 들어가는 식량 및 의복 등 모든 소모량이 6천여명의 고수가 사용
하기에 적절한 양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뭔가요?"

"흑풍단에 관계된 소모품의 사용량은 이상합니다."

"자세하게 설명해봐요."

"무림인이라면 기름이 거의 필요 없죠. 자신의 무기는 언제나 세심하게 손질
해서 깨끗하게 유지하니까요. 하지만 흑풍단이라면 갑옷을 사용할게 분명하고
전에 받은 보고에도 수량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량의 중갑주를 구입해갔
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갑주들에 칠하려면 기름이 꽤 많이 들어갈텐
데, 기름의 소모가 거의 없습니다. 또 말도 거의 구입하지 않았고, 더불어 말
먹이의 반입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는 분명하군요. 흑풍단은 섬서분타에 없어요. 그렇다면 어디
에 있을까요? 그걸 조사해 봐요."

"존명!"

"그리고… 묵향 부교주와 비밀 면담을 주선해 주세요."

"비밀… 면담을 말입니까?"

"예. 그가 원하는 장소, 시간에."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자의 성격은 뱀과 같이 잔인하고 교활하며 또
성질대로 행동하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그가 문주님의 도움따위 필요없다고
결정한다면 바로 그 순간 문주님의 생명은 보장할 수가……."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서문길제 가주에게도 비밀 면담을 주선하세요. 당
금 무림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가장 큰 문파는 그 두곳입니
다. 그러니 둘중 한곳이라도 우리편으로 만들어 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무림맹은 어떻게?"

"옥청학 맹주가 사라진 지금 무림맹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마찬가지… 뚜렷
한 구심점이 나타나지 않는 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그쪽은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또 마교는 너무 신뢰성이 떨어지는 단체라서 싫고… 무슨 말인지 알
겠어요?"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 *

"그녀석을 끌고와."

"옛!"

잠시 후 흑의인 몇 명은 거의 만신창이가 된 한 인물을 끌고왔다. 얼마나 고
문을 당했는지 온 몸이 엉망진창이기는 했지만 묵향의 엄명으로 혈도는 다치
지 않았기에 정양만 잘 한다면 무공을 회복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초췌
한 얼굴을 하고있는 남자가 묵향의 앞에 놓이자 묵향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
했다.

"자… 자네가 잡혀온지도 꽤 된거같은데 나한테 뭐 할말있나?"

하지만 그 남자는 증오에 불타는 시선을 묵향에게 던지며 짤막하게 답했다.

"없다. 죽여라."

"그렇게 죽고싶나? 아무리 무인의 삶이 죽음과 가깝다고 해도 일부러 죽으려
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내가 아직까지 자네를 살려두는 이유는 단 하나. 자
네의 실력이 아깝기 때문이야. 몸에 구멍이 나긴 했지만 꽤나 재미있었지. 나
를 그정도까지 재미있게 한 인물은 요 근래들어 거의 없었거든? 자네는 기회
가 한번 더 온다면 그때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암습할 수 있나?"

"뿌드득! 당연하지. 기회가 한번 더 있다면 그때가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 말에 주위에 서있는 흑의인들이 꿈틀 했지만 묵향의 제지로 움직이지는 못
했다.

"좋아. 기회를 한번 더 주겠다. 대신 조건이 몇가지 있다. 첫째,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자네의 배후와 연락하는 걸 금한다. 둘째, 나를 죽이지 못하는 한은
내가 시키는 일을 몇가지는 해줘야 하겠지? 밥값은 해야 할테니까……. 셋째,
나를 암살하는데 무슨 짓을 다 해도 상관없지만 내 수하들을 죽이는 것은 안
된다. 동의하나?"

잠시 생각하던 그 남자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나를 포섭하려는 거요?"

"그렇지. 나는 강자를 좋아한다네. 뒤에서 못된 짓이나 꾸미는 놈은 별로 좋
아하지 않지만 무인의 그 단순함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일단 조건을 말했어.
자네는 곰곰히 생각해보고 일주일 후에 답해주기 바라네. 데리고 가라."

"존명!"

* * *

섬서성 남단 화음현에 위치하고 있는 화산(華山)은 그 뛰어난 절경으로 유명
한 곳이다. 또 화산은 그 수려한 경치를 보고 모여든 도인(道人)들이 창건한
화산파(華山派)가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화산파는 정도의 가장 큰 문파들인
구파일방 5대세가에 들어가지만 도인들의 수련장인 만큼 무림사에 깊게 개입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때마다 솔선수범하여 도왔
기에 소림사 처럼 따돌림을 받고있지는 않았다. 소림의 땡중들이야 살계(殺
戒)를 범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굵직한 사건, 즉 피해가 클만한 사건이 터지면
잘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어쨋든 저 멀리 그 유명한 화산이 바라다 보이는 경치좋고, 전망좋은 곳에 화
진루(華瑨樓)라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음식점이 있다. 화산에서는 너무 멀
리 떨어져있기에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그렇고 또 음식솜씨가 좋은것도 아니었
기에 그렇게 손님이 많은편도 아닌 이 음식점에 색다른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
냈다.

"자리 있나?"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을 걸어오는 푸른 옷을 입을 무사의 질문에 점소이
의 눈이 그 무사의 눈과 왼쪽 허리에 꼽혀있는 호화로운 검을 재빨리 훔쳐본
것은 당연했다. 이곳은 화산파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고 또 부
근에는 길상표국(吉祥慓局)이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감히 어중이 떠중이가 돌
아다니며 시비를 걸지는 않는 곳이다. 거기다가 이곳 루주는 길상표국의 국주
와 꽤나 친분이 돈독하기에 왠만한 불량배가 와서 사건을 일으키면 포졸보다
는 표사를 불러들이는 것이 일이 더 빠를뿐더러 조용히 해결되었다.

점소이가 그들의 복장과 무장을 재빨리 훔쳐본 것은 당연했다. 상대의 직위하
든지 금전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고, 또 상대의 실력을 낮은 안목이나마 평가
를 해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썩 고수인 것 처럼 보이
지도 않았지만 옷은 제법 괜찮은 천으로 만든 것이었고, 검집도 썩 괜찮은 걸
로 보아 나중에 돈을 받는데 있어 무리는 없을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소
이의 눈은 무사들에 대한 관찰보다는 그 무사들과 함께 온 묘령의 아름다운
소저들을 훔쳐보기 위해 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정말 가만히 있어
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뻤던 것이다. 하지만 점소이는 철저한 직업정신으로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소저들로부터 간신히 시선을 거두며 재빨리 말
했다.

"이리 오십시오, 나으리들."

일단 점소이는 손님들을 재빨리 조용하면서도 경치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무
림인들의 대부분은 되로 받으면 말로 주려는 성질이 강한 인물들이기에 친절
을 베풀면 운 좋으면 수고료가, 불친절을 베풀면 바로 주먹이 날아온다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에한번 맞아보고 뼈속까지 찌르르 울리는
그 감명깊은 교훈을 잊지않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섯명의 손님들은 점소이가 권한 자리에 모두 앉지 않았다. 점소이가
권한 자리에는 두명의 여자만이 앉았고, 나머지 무사 두명과 시녀인 듯한 여
자 한명은 딴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그걸 보면 여자들의 신분이 매우 높은것
처럼 생각이 되었기에 점소이는 더욱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그 말에 약간 어려보이는 소저가 대답했다.

"술과 간단한 안주 몇가지를 가져와요."

상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점소이는 재빨리 대답
하고는 주방으로 갔다.

이 이색적인 손님들은 2각(30분)이나 기다려서야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을 만
날 수 있었다. 짙은 눈섭에 강인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전체적으로 근육이
많이 붙지않은 호리호리한 체형이기에 무술을 익힌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지
만 허리에 검은색의 짧은 검을 비스듬이 차고있는 인물이 네명의 수하들을 거
느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걸어들어와 음식점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곧장 그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점소이에게 말했다.

"야."

"예?"

"술잔 하나 더 가져와."

네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온 것으로 보아 이녀석도 약간은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한 점소이는 재빨리 잔을 가져다가 건네면서 말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요? 나으리."

"술이나 한병 더 가져와."

"예."

아무 말 없이 여자들이 마시던 술병을 집어들고는 잔에 가득 채워서 한잔 마
시고는 또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걸 보면서, 상대의 무례함에 바짝 약
이오른 약간 젊게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통성명이라도 하는게 예의가 아닌가요?"

그 말에 남자는 여자를 쏘아보며 냉냉하게 말했다. 그 소녀도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그 남자를 노려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때 그의 안광 깊숙이 감추어
져있던 폭발적인 기운이 잠시 드러나자 상대방은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나도 상대가 누군지 알고, 그쪽도 나를 알텐데 궂이 그런게 필요할까?"

그 남자는 소녀가 완전히 쫄아버리자 피식 미소지은 후, 이번에는 그 옆에 앉
아있는 여자를 향해 무심한 듯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본좌를 보자고 한 용건은?"

그 말에 상대는 한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말했다.

"듣던 것 보다 더 무례하군요. 그래도 약간의 예의는 필요한게 아닐까요?"

"그따위것 필요없어. 용건이나 말해. 만나자 마자 검을 뽑지 않은 것으로 나
는 할만큼 예의를 다했으니까……."

"당신은 언제나 그런식인가요?"

"언제나는 아니지."

그 남자는 두 여인을 노려보듯 쭉 훑어본 다음 조금 어려보이는 여인이 공포
를 필사적으로 참고있는 걸 보고는 무심한 듯 말했다.

"저 아이는 이 자리에 끼일 자격이 없으니 저쪽에 가서 앉으라고 해."

그러자 그 여인은 이제서야 동행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의 모
든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있었기에 그 여자에게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
이다. 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저기 가있거라."

그러자 소녀는 불안한 시선을 남자쪽에 한번 던지더니 마지못한 듯 일어섰지
만 무사들이 앉아있는 탁자로 걸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이 꽤나 경쾌한 것으로
보아 여기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 아이의 인상은 어떤가요?"

"글세……."

"묵향 부교주도 이제 결혼을 생각해 보시는게 어때요? 어느정도 기반도 잡았
고, 또 무공도 천하제일이 아닌가요?"

"훗… 비밀회담이란게 중매를 말하는 거였나? 무영문의 옥화무제(玉花武帝)도
요즘 매우 할 일이 없어진 것 같군."

묵향의 말에 옥화무제의 심기가 잠깐 뒤틀렸다. 왜냐하면 상대는 자신이 옥화
무제의 대리인이 아닌 옥화무제 당사자라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묵향
의 나이가 많이 봐줘서 70세 정도라면 자신의 나이는 그 두배에 달하는 140여
세에가 아닌가? 대선배의 입장을 봐서 존대어를 쓸만도 하련만 툭툭 반발짓거
리를 던져대고 있으니 슬며시 약이오른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걸 꾹꾹 눌러
서 참았다. 무림이 아무리 연배가 중요하다 해도 그건 실력이 받쳐질때의 말
이었다. 현경의 고수를 상대로 신경질 내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었다.

"뭐… 겸사겸사 해서지요. 저 아이는 당금 무림의 칠룡사봉에 들어가는 매영인
이라는 아이지요. 제 손녀랍니다. 서른 하나면 아직 꽃다운 나이가 아닌가요?"

"본좌는 결혼따위 생각해본 일이 없으니 그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그
외에는 무슨 말은 하고싶소?"

"본문과 손을 잡고싶은 마음은 없나요? 무영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최고
의 정보단체, 그쪽은 무력은 다섯손까락 안에 들어가겠지만 정보력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구요. 어때요?"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야. 하지만 본좌는 이런 말을 들은적이 있지.
옥화무제는 뱀처럼 지혜롭고 여우처럼 약싹바르다고… 본좌는 지금 혼자서도
해낼 수 있지. 그런데 왜 밖에있던 우환덩어리를 안으로 끌어들여서 더욱 일
을 꼬아놓겠나?"

그러자 졸지에 우환덩어리가 되어버린 인물이 반박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당금 무림은 매우 얽히고 섥히고 한치앞도 보기 힘든
구조지요. 진천왕의 반란, 혈교의 등장, 마교 교주의 교체, 무림맹주의 실종,
구휘대협 무덤의 발견, 요 근래 일어나고 있는 갑작스런 혈겁. 눈앞에 놓여진
많은 함정들을 피해가려면 우수한 정보력이 있는게 좋지요."

"갑작스런 혈겁?"

궁금증을 약간 드러내고 있는 묵향의 질문에 매향옥이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산서성과 사천성에 있던 정도계열의 문파 셋이 무너졌죠."

매향옥은 묵향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태정문(太政門), 대맹문(大猛門), 등룡문(登龍門)이 거의 동시에 무너졌어
요. 흉수는 마교로 짐작되죠. 직접 일을 벌리셨을테니 잘 알고 계실텐데 왜
물으세요?"

순간적으로 묵향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는 거의 무표정한 표정을 잘 짓기에
그건 거의 표시가 나지도 않았다. 묵향은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는 일부러 살
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본좌는 모르는 일이야. 아마도 장인걸의 장난이겠지."

"아니지요. 장인걸은 얼마전에 교주직에 올랐지만 지금 마교의 힘은 매우 약
화된 상태에요. 그런때에 정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바보가 아니지
요. 혈교도들이 뿜어내는 요기와 마교도가 뿜어내는 마기는 얼핏 비슷하기에
혈교쪽도 이미 조사를 완료했어요. 혈교의 소행도 아니더군요. 그렇다면 범인
은 하나 뿐이죠. 부교주는 지금 짐짓 섬서분타에 모든 세력을 집결해놓은 것
처럼 꾸며놓고는 알맹이 세력들은 모두 다 밖에 슬며시 꺼내놨으니 빈집 털려
봐야 아쉬울 것도 없을테고… 어때요? 본문의 정보력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옥화무제를 마주 바라보며 묵향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생각을 슬며시 희
석시키며 말했다.

"그 정보력이란 게 사람을 이리저리 찔러보고 그 반응을 보고 얻어내는 것이
라면 그쪽의 정보력도 그리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

"상대에 따라 다른거죠. 이쪽의 실력을 잠깐 보여드렸는데… 생각이 있으신가
요? 본문과 손을 잡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그 정보들을 마교와 무림맹에 고액
의 돈을 받고 팔아버릴 거에요. 그렇게 되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실
텐데… 어때요?"

"크흐흐흐… 겨우 그따위 협박으로 본좌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닐테고,
또 다른 비장의 술책이 있소? 그렇지 않다면 그따위 입을 나불거려 자기 무덤
을 깊게깊게 파고있을 정도로 바보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 말과 동시에 음식점 내의 모든 인물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신경을 건드리는 음산한 느낌이 묵향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살기(殺氣)라는
걸 알고있는 사람은 긴장한 채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무림인들 뿐이었지만 말
이다. 하지만 그 강맹한 살기를 한몸에 받고있는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만약 그걸듯한 패를 꺼내지 못한다면 내일 태
양이 뜨는걸 보는 건 두 번째치고 오늘 태양이 지는걸 볼수도 없을 것이 분명
했다.

"호호호… 자신의 마음을 매우 직선적으로 드러내시는군요."

그녀는 다음 말을 어기전성(御氣傳聲)으로 보내왔다.

<본문의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귀하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거에요. 한가지 자그마한 예를 들어드리죠. 지
금 귀하가 꾸미고 있는 일을 거의 대부분 파악하고 있죠. 바로 마교 기습작전
의 전모를 말이에요. 300리 거리로 문파를 비밀리에 잡아먹는다고 고생하셨겠
지만 본문의 이목을 속이기는 어렵죠.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총관이 여태껏
섬서분타에 대해 조사한 모든 자료를 무림맹, 마교, 혈교, 황궁에 넘길 거에
요. 호호호… 그렇게 눈을 부라리니 무섭군요. 자… 내가 하고싶은 제안은 이
거에요. 귀하가 마교를 삼키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어요. 지금 전체적인
세력은 마교가 섬서분타보다 더 강하다는 걸 잘 알고계시겠죠? 그러면 승패는
정보력이 아닐까요? 대신 귀하가 이쪽에 해줄일은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에요.
본문이 좀 더 세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뿐이니까……. 어때요?>

잠시 생각해보던 묵향이 살기를 거둬들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본좌가 어떻게 당신들을 믿을 수 있을까?"

"저 아이를 인질로 드리죠. 어때요?"

"하! 인질이라… 저 아이가 당신의 손녀라는 걸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지?
또 문파간의 격돌에서 인질따위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는 건 나도, 그대도모
르는게 아닐텐데? 손녀쯤이야 죽으면 다시 하나 더 낳으면 그만이니까……."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봐 인명을 천시하는 그 습관은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나는 저 아이를 아주 사랑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거에요."

"좋아. 한번 믿어보기로 하지. 하지만 한가지! 본좌가 교주의 자리를 차지했
을 때, 그대가 약속을 잘 이행했다면 본좌는 그리 싼 보상을 주지는 않을거야."

묵향의 말은 약속이 이행되었을 때 신경써줄 정도로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
이니 만약 배신한다면 그 후환은 미루어 짐작해 보라는 협박이었다.

"명심 하죠. 영인이는 지금 데려가시겠어요?"

"흐음… 어떻게 할까?"

묵향이 잠시 궁리하는 사이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섰다.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린 묘령의 세 여인과 그들의 시녀로 보이는 여인 세명, 그리고 무사 8명이
저마다 각각의 무기를 들고는 음식점 안으로 슬며시 들어선 것이다. 그들이
점소이의 안내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우루루 앉았다. 면사 여인 셋은 그 자리
에 앉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딴 자리에 앉았기에 그 주종관계를 간단히 알아볼
수 있었다. 묵향은 그들이 자리에 앉는 걸 보면서 어기전성으로 말했다.

<저건 무슨 뜻이지?>

<예?>

<갑자기 이런 변두리 음식점에 고수라고 부를만한 녀석 셋이 나타난 건 무슨
뜻이냐고 묻는거야.>

"호호호… 의심도 많으셔라. 저들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또 당
신을 기습하는데 겨우 저따위 애들 가지고 가능했다면 왜 모두들 고심을 했겠
어요? 우연히 음식을 먹자고 들렀겠죠. 이곳이 화산파로 들어가는 통로들 중
하나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죠?"

"글세… 나는 우연이란걸 여태껏 믿지않고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말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묵혼검의 손잡이를 쓰다듬고 있는걸 보면서 옥화무제
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설마 여기서 저들을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필요하다면!"

묵향이 한마디 내뱉은 다음 술잔을 들어올려 쭉 마신다음 그 잔을 옆에 놔두
고 차가 들어있던 잔을 들어올려 차를 바닥에다 쫙 뿌려버린 다음 이제 빈잔
이 되어버린 그 찻잔에 술을 따랐다. 만약에 제법 실력있는 무림인이라면 그
런 무식한 방법보다는 내공을 이용해서 찻잔속의 차를 날려버리겠지만 상대는
이상하게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작은 잔은 감질나서 못마시겠군. 꿀꺽!"

옥화무제는 묵향의 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
었다.

"당신의 무공이라면 간단히 찻물을 날려버릴텐데 왜 바닥에 그걸 붓죠?"

"본좌는 무공을 쓸데없이 쓰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유가 되었나?"

무림인이란 존재는 항시 생명이 왔다갔다는 삶을 살아가기에 상대의 움직임에
매우 예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에 찻물을 쏟아붓는 걸 모두들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 독극물 종류를 바닥에 뿌려뒀다가 슬며서 떠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잔에 술을 따뤄먹는 걸 보고 모두들 다시 저마다
떠들어대기 시작했지만 면사를 한 여인중 하나가 이쪽 탁자쪽을 계속 바라보
고 있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옥화무제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일행의 눈길을 뒤로 받으며 정중하게 옥화무제에게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옥화무제 선배님이 아니신가요?"

그 말에 옥화무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잘못봤군요. 저는 그런사람 아니에요."

"실례했습니다."

면사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행에게 돌아가려다가 그 옆자리에 앉아있는 매
영인을 보게되었다. 반가운 김에 아는척을 하려다가 방금 전 옥화무제가 자신
을 모른척 했다는 것이 떠올랐고 뭔가 사연이 있다고 짐작한 그녀는 슬며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영인이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본 후 일어서서 물었다. 매영인은 옆의 시녀하고 몇마디 말을
하느라 할머니와 그녀 사이에 오간 말을 거의 듣지 못했기에 약간의 실수를
하고 말았던것이다.

"혹시… 소소(素昭)언니 아니에요?"

소소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아는체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으…응, 영인이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언니.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응, 친구들하고 화산에 가다가 들렀어. 그런데 너는?"

"손님하고 만날 일이 있어서요. 친구들 소개나 시켜줘요."

매영인이 그쪽 탁자로 걸어가서 인사를 나누며 떠들어대는 걸 보면서 옥화무
제가 그보란 듯이 말했다.

"봐요, 내가 불러들인게 아니라니까요."

"그렇다고 해두기로 하지. 나도 쓸데없는 살생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말이야."

묵향이 갑자기 일어서자 옥화무제가 말했다.

"돌아갈건가요?"

그 말에 묵향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약간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비밀 이야기
도 아닌데 목소리 낮출 필요가 있나?

"더이상 할말이 있나?"

"저 아이는 언제 데려갈 거죠? 아니면 내가 그리로 보내 줄까요?"

그 말에 묵향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런 멍청한 애를 데려다가 어디다가 쓰려고? 윗사람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하는 멍청한……."

"그렇게 멍청한 애는 아니에요.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구요."

"말을 하다보니 이상하군. 왜 저 아이를 인질로 주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

"서로간의 신뢰를 위해서죠. 나도 인질을 주는 편이 당신이 나를 더 믿어줄거
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게 되잖아요."

"말은 되는 것 같은데… 꼭 찝어내기는 좀 그렇지만 약간 이상하군."

"이상할 거 없어요. 지금 데려가요."

"싫어. 돌아가자!"

묵향의 수하들이 쭉 일어서는 걸 보면서 옥화무제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쟁취해낸 것 같은 승리자의 미소를 말이다. 그런다음 매영인에게
서둘러 말했다.

"빨리 돌아가자."

"예? 할머니 잠시만요. 아직 얘기가 다 안끝났……."

그 말에 옥화무제는 재빨리 전음으로 말했다.

<빨리 돌아가자. 저사람 생각 바뀌기 전에.>

어벙한 표정으로 매영인이 밖으로 끌려나갔다. 옥화무제는 따라나오며 인사를
건네는 후배들을 간단한 손짓으로 답례를 한 후 재빨리 돌아가는데 한 2리는
왔을까? 이미 그들의 앞에는 언제 따라왔는지 묵향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있었
다.

"무슨 일인가요?"

"이봐. 생각이 바뀌었어."

묵향은 상대의 미소와 서둘러 떠나는 모양새를 보고는 이것도 계략인 것으로
판단했다. 천하제일의 정보단체니 자신의 성격은 거의 파악해 놨을테고 권하
면 마다하는 성질을 이용해 감히 인질도 안주고 자신의 신뢰감을 받아내려고
잔머리를 굴리다니……. 거기다가 현경의 고수 앞에서 전음을 쓰면 그걸 못들
을 줄 알았나? 어기전성의 경우 순전히 기로 의사를 통하기에 옅들을 수 없지
만 전음은 음성을 기로 실어나르는 거였기에 충분히 가능했다.

"예?"

"아무래도 그 아이를 인질로 잡아야겠어."

'인질'이란 말이 나오자 매영인의 안색이 파래졌다. 이때 매영인은 할머니가
저쪽에서 이 무례한 인물과 쑥덕거린 결과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올
필요도 없는데도 함께 화산 구경이나 하자고 꼬셔오지 않았던가? 이게 다 인
질로 써먹기 위해서였다니……. 배신감에 파랗게 질리다 못해 눈물까지 찔끔
나왔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반항은 생각도 못하고 애처러운 시선으로 할머
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옥화무제는 매정하게도 외면해
버렸다.

인질이란 말이 나오자 주위의 호위무사들이 검을 뽑아들었지만 곧 그들의 행
동은 옥화무제에게 제지되었고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은 묵향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옥화무제는 매영인의 말고삐를 순순히 묵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인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아시겠죠? 그럼 영인이를 부탁해요."

살짝 옆으로 지나가는 옥화무제의 표정이 미소를 짓고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묵향은 또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계집이라서 표정이 저리 잘
바뀌는 건가? 도대체가 알수가 없군. 옥영인이 탄 말의 고삐를 쥐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수하들을 기다리면서 묵향은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 * *

인질이란건 상대를 제압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나 상대
와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또 그 상대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인물일수록
인질로서의 가치는 상승한다. 하지만 인질을… 그것도 공식적인 인질을 잡을
때는 매우 귀찮은 문제가 많이추가된다. 절대 인질이 죽어서는 안된다는 사
실이다. 만약 갑(甲)이 을(乙)의 자식 병(炳)을 인질로 잡았는데 그 병(炳)이
죽었다면 그게 병이나서 죽었건(자연사), 단식투쟁을 하다가 죽었건(자살),
갑(甲)이 성질나서 죽였건(타살유형 1), 을이 보낸 자객이 죽였건(타살유형
2), 제 3자가 갑과 을이 치고박으라고 자객을 보내 죽였건(타살유형 3)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질을 보호하지 못한 갑으로서는 입이 열 개가 있
어도 변명할 수 없는 공개적인 개망신이었고, 을로서는 갑을 공격할 최고의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인질을 잡았을때는, 그
것도 공식적인 인질을 잡았을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인질을 잡은
게 최악의 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완전히 체념을 했는지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말 위에 앉아있는 소녀를 힐
끗 바라보며 묵향은 인질을 어디에다가 모셔둘까(?) 생각중이었다. 정말이지
공식적인 인질이라면 자신의 딸보다도 소중하게 모셔야만 했다. 정기적으로
의생을 불러 건강관리도 시켜줘야 하고, 운동부족에 안걸리게 정기적으로 운
동도 시켜야 하고…….

"이봐."

"……."

"야! 귀먹었냐?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 할거 아냐?"

"저… 말인가요?"

"그래. 너 혹시 도망칠 생각이 있냐? 그것부터 확인해 보자구. 솔직하게 말
해. 그래야 나도 뒷처리를 어떻게 할까 궁리해 보지."

그 말에 소녀는 우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도망칠 수 없죠. 나는 당신과 할머니 간의 약속의 증표잖아요. 내가 도
망치면 그 약속도 깨진다는거 잘 알아요."

"좋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소저군. 마화!"

"예."

"시비(侍婢)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분타에 돌아갈때까지는 너가 책임져라."

"예. 그런데… 영인 소저의 무장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놔둬. 자신을 지킬 무기가 하나쯤은 있는것도 좋겠지."

"예."

묵향일행이 중촌(中村)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
다. 방 둘, 하나는 매영인과 마화, 나머지 하나에는 모두가 다 들어가는 배치
였다. 모두들 식사를 마치고는 한방에 쉬고있을 때 매영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성격이나 상하관계, 또 출신내력 등을 따져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
하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이란 인물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천하의
대마두로서 그 마교라는 속성에 따라 수하들을 공포로서 억누르고 있는 살인
귀여야 했다.

하지만 그때 백씨세가에서 봤을때도 그리 살인귀로 보이지는 않았었지만, 공
포적인 위압감과 매우 어울리기 힘든 강한 위화감(違和感)이 느껴졌었다. 하
지만 오늘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농담도 조금씩 하면서 수하들과 술잔을 나
누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수도 없었는데…….

"그때 대장님은 정말 대단했었다구요."

묵향이 얼떨떨 해서 대답했다. 기억도 없는데 궁지렁거리니 별 수 있나. 하지
만 그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기에 이런 자리를
즐겼다.

"내가 뭘?"

"하부르하고 참 잘 어울리셨었는데……. 몽고 애긴 했지만 참 예뻤죠."

그 말에 임충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까 만나고 싶군. 몽고원정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어. 그렇게
지독하게 학살을 해댄건 몽고원정이 처음이었으니까……."

임충의 말에 차임이 찬성했다.

"맞아. 나도 그때 흑풍단에 들어간걸 후회했지. 하지만 덕분에 대장을 만났잖아."

"하지만 흑풍단 해체때 너무 많은 좋은 사람들이 죽었어."

정상이 말하자 그 뒷말을 이은 마화.

"흥! 하지만 그… 공지 녀석은 잘죽었어. 그런 놈은 벌써 그렇게 죽어야 마땅
했다구."

"공지 대장 대단했지. 아무리 계집에 굶주렸다지만 몽고계집들을, 큭큭……."

"대장은 무슨 얼어죽을… 아무나 보면 덮치는 그런 놈은 대장소리 들을 자격
도 없어. 변태같은 자식!"

"그래도 그사람 무술은 대단했잖아. 특히 참마도(斬馬刀) 쓰는 솜씨가 일품이
었지."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고야 매영인은 그들이 역모에 걸려 풍지박살
이 난 찬황흑풍단 소속의 무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얼핏 할머니에게 듣
기로 묵향은 기억을 상실했을 때 흑풍단에서 일했다고 했으니 그건 당연한 건
지도…….

인질로 잡힌 오후부터 계속된 정신적인 긴장으로 인해 매영인은 매우 피곤했
지만 술자리는 끝이 날줄을 몰랐다. 약간의 풍이 가미된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저 넷은 몽고병쯤은 파리잡듯 때려잡는 괴물같은 고수였고, 묵향은 몽고
병 만명쯤은 개미를 짓밟듯 순식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진짜 괴물이었다. 하
지만 어느덧 잡다한 얘기가 화기애애하게 오가는 그 소음이 오히려 매영인의
긴장을 풀면서 자장가가 되어 약간씩 끄덕끄덕 졸 무렵 갑자기 터져나온 여자
의 음성으로 매영인의 잠은 달아나 버렸다.

"얏! 닥치고 옆방으로 안갈래?"

"그래도……."

"저 아이 피곤해서 조는거 안보여? 이 멍청아. 대장도 빨리 가요. 상을 뒤집
어 엎어버리기 전에."

"제길 알았다구."

묵향은 수긍하고 옆방으로 건너갔지만 임충은 그냥은 절대로 못간다는 듯 한
마디 던졌다.

"너… 그 성깔 못고치면 아무도 안데려간다."

퍽!

"아구구… 몽고들판의 전우 엉덩이를 차다니. 너는 여자도 아냐."

"죽어랏!"

"히익!"

마화가 성질나서 달려들자 임충은 재빨리 술병을 들고 옆방으로 도망쳤다. 남
자들을 모두 쫓아내버린 다음에 마화는 침상으로 다가온 다음 부드럽게 말했
다.

"피곤하지. 편히 쉬어."

마화는 매영인을 이끌어 침상에 눕혀주고 이불을 끌어올려주며 말했다.

"피곤했으면 빨리 말을 하지. 술자리는 옆방에서 벌여도 되는데……."

"괜찮아요. 오히려 술자리를 보고 안심이 되던데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무서
운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가 있죠?"

그 말에 마화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답했다.

"이래 뵈도 내가 좀 둔하거든. 처음 만났을 때 대장은 저렇지 않았어. 정말
누구나 한눈에 반할정도로 멋있는 무인이었지."

마화는 눈빛이 더욱 따뜻해지며 말을 이었다.

"고강한 무공을 지녔지만, 약자를 사랑하고 보호할 줄 아는 진짜 사나이였다
구. 우리 다섯은 그때 잘 어울려 다니며 술도 많이 마셨지. 그런데 다음에 대
장을 만났을때는 사람이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예전에 했던
대로 그를 대했어. 하지만 그가 별로 싫어하지는 않더라구. 그래서 그냥 그렇
게 지내고있는거야. 사실 그렇잖아? 계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힘과 권력은 강
해지겠지만 외로운… 읍!"

마화는 그대로 픽 쓰러져버렸다. 매영인이 놀라서 쓰러지는 그녀를 잡았다.
매영인 또한 무공이 약하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일이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있
었다. 마화는 혈도가 제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방안에 슬며시 사람이 나
타났다. 낮에 봤었던 그 면사여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소소 언니?"

"응. 그런데 선배님은 어디 가시고?"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여기에…?"

"선배님의 행동이나 이들의 행동이 이상해서 일행과 헤어져 뒤따라 온거야.
어떻게 된 일이니?"

"저… 말할 수 없어요. 그냥 빨리 여기서 나가요. 안그러면 큰일나요."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도저히 알 수 없구나. 선배님이 계셨으니 납치된 것
은 아닐테고, 설마… 인질?"

그 말에 매영인이 슬픈듯한 안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하의 무영문이 손녀까지 줘가면서 손잡고 싶은 대상이 있을 리가?"

"언니, 제발 빨리 돌아가요. 그가 눈치채면 언니도 봉변을 당한다구요. 그리
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제발 비밀로……."

매영인이 말은 끊은 이유는 소소라고 불린 면사여인이 갑자기 픽 쓰러졌기 때
문이었다.

"언니!"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문을 열고 묵향이 들어왔다. 그는 쓰러져있는 면사여인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쥐가 한 마리 있었군. 낮에 너가 만났던 사람이지?"

매영인은 그 섬뜩한 눈초리에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본 후 묵향이 천천히 검을 뽑는걸 보고는 매영인이 너무 놀란 나머지 크게 소
리치지도 못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짓을 하려는 거죠?"

"보면 몰라. 본좌도 무영문과 본타의 합작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
다는 말이지. 그게 알려지면 무영문이 본타를 돕기는 매우 힘들어질 것은 뻔
하니까 말이야."

그 말에 매영인이 쓰러진 면사여인과 묵향 사이를 몸으로 막으면서 외쳤다.

"안돼요. 언니를 죽이면 안돼요. 풀어주는게 어려우면 함께 데려가요. 나도
말동무가 필요하다구요. 제발……."

잠시 생각해보던 묵향이 싸늘하게 말했다.

"저런 계집 도망치는 것 까지 감시할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못해. 비켯!"

묵향에게서 풍겨나오는 상당히 공포스러운 기운을 느꼈지만 매영인은 필사적
으로 떨리는 몸을 참고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식당에서 잠시 봤던 그 공포스
런 기운이 이제 묵향의 온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니 감히 무력을 동원해 상대
를 막아볼 생각은 물론,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 조차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럴수는 없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도망 못가게 막을게요. 예?"

"좋아.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탈출이나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한다면 곧장 죽
여버릴테니까 명심해."

"예."

묵향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밖으로 나가버렸고 어느결에 해혈을시켰는
지 쓰러져있던 마화가 부시시 일어섰다.

"으응? 내가… 왜?"

그러다가 마화는 방 가운데쯤에서 쓰러져있는 왠 여인을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는 매영인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그 여자는 누구지?"

"제가 아는 언니에요. 저를 구해주러 들어왔다가 그만……."

그러자 화들짝 놀란 마화가 상대에게 다가가서 맥을 짚어본 다음 안도하며 말
했다.

"뭐야? 나는 죽은줄 알았는데, 살아있잖아. 괜찮아. 그냥 혈도만 제압된 거
야. 대장이 그랬어?"

"예."

"조금 비켜, 엇차!"

마화는 쓰러진 여인을 안고는 침상에 눕혀주고는 매영인도 끌어다가 그 옆에
눕게 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편히 쉬어. 저 여자덕분에 내 편안한 잠자리는 날아가 버렸군. 옆방에 가서
술이나 마실까……."

그러면서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매영인에게 말했다.

"나도 근래에 알았는데 대장은 밖에 나오면 거의 안자거든. 내 말은 도망은
생각도 말라는 거야. 오히려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니까 말이야. 나중에 일
어나면 그녀한테 전해. 아마 모든 일은 1년 안에 끝날거야. 그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야."

"저… 그러면 1년이 지나고 나면 동맹은 깨지는 건가요?"

그 말에 마화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깨진다고 널 죽이지는 않을거야. 1년 후에는 너가 무영문으로 돌아갈 수 있
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그럼 잘자."

마화는 방을 나와서는 옆방에서 술판을 또다시 벌이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 끼
어들었다.

"어라? 너 감시당번 아니었냐?"

"도망칠 생각도 안하는데 감시가 필요해? 또 도망쳐 봤자지. 그건 그렇고 대
장. 그 여자는 어떻게 할겁니까?"

묵향은 술잔을 비운 다음 마화에게 말을 하면서 임충에게 빈잔을 내밀었고 임
충은 거기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기는? 말동무가 하나 필요하다고 하니까 데리고 가야지. 몇 년 갇
혀 있으려면 친한 말동무가 하나 있는게 좋겠지."

"하지만 그러면 납치가 된다구요."

"상관없어. 살인보다는 낫겠지. 꿀꺽꿀꺽"

큼지막한 잔으로 마시고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마화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죽는 것 보다야 살아있는게 나을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면사여인은일찍이 잠에서 깨어났다. 한참 단꿈을
꾸고있는데 매영인이 깨웠기 때문이다.

"아응… 조금만 더 자자… 응? 여기는?"

"쉿!"

"영인이구나. 내가 여기서 지금 뭘?"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지 다급하게 물어보는 면사여인에게 조용히 하라는
행동을 취해보이며 매영인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조용히좀 해요. 이제 글렀어요, 언니. 언니는 나하고 같이 가야 돼."

"어디를?"

"마교의 섬서분타요."

"마교… 읍……."

놀라서 면사여인의 목소리가 커지자 매영인은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잠시 기척을 살핀 후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쉿! 제가 가려던 곳이 거기니까요. 만약 언니가 같이 간다면 1년쯤 후에는
풀어줄거에요. 그때쯤 되면 잡아둘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그전에 도망
을 치거나 어떤 표식을 하려고 한다면 언니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면사여인은 자신의 공력을 잠시 운기해본 후 자신있게 말했다.

"내공도 그대로인데 내가 도망 못칠 줄 아니? 아무리 악양세가 출신이지만 나
도 꽤 무공이 강하다구. 내공만 있다면 도망치는 건 문제도 아니야."

그 말에 매영인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어제 언니의 혈도를 짚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악양소소도 할말이 없어졌다. 혈도가 어떻게 제압당한지도 모르게 그
냥 정신을 잃었으니 그 흉수를 알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글쎄……."

"엄청난 고수에요. 당금 무림에서 다섯 손까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을 가진 인
물이고, 천하 제일의 고수죠."

"흥! 천하제일? 말도 안되는……."

면사여인이 말도 안된다는 듯 말하자 매영인은 황급히 상대의 입을 막으며 속
삭였다.

"좀 조용히 해요. 그는 지금 중원에 1명 뿐인 현경의 고수라구요."

매영인에게 입이 막혀 소리는 못냈지만 상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현
경이라고?

"20년 전에 뇌전검황 노선배님을 죽인 사람이라면 이해를 하겠어요? 그가 어
제 말했다구요. 도망치기만 하면 무조건 죽여버리겠다구요. 같이 가서 1년만
있으면 되요. 그러니까 딴생각 하지 말아요."

"내가 거짓말 하는거 봤어요? 좀 믿으라니까요."

그러자 그 면사여인은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너 거짓말 많이 했잖아. 동정호에서도 했고… 으음… 또 본가에 들러서도 했
고… 또…."

"기억력도 좋아, 하여튼…….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이라니까요. 이건 실
제상황이라구요."

여자들이 쏙닥거리는데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마화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깼으면 준비하고 밖으로 나와. 식사한 다음에 출발해야 하니까."

묵향은 납치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게 마차까지 1대 장만해 오라고 임충에게
지시해서 모두들 마차에 타고는 섬서분타를 향해 출발했다. 동맹의 묵계에 의
해 절대적으로 믿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손녀를 살려두고 싶다면 무영문이 여
러 가지 정보전을 대신해서 펼쳐줄 것이었다.

사실 무영문의 최고 수뇌부는 벌써부터 중원지도를 앞에두고 쑥덕공론을 시작
하고 있었다. 화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만들어져 있는 무영문의 비
밀분타에는 상황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벌써부터 수뇌부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옥화무제가 도착함과 동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꼭 작은 아씨를 그런 무뢰배한테 인질로 맏기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문주님이시라면 충분히 아씨를 안맏기고도……."

"호호호… 일부러 준거에요."

"예? 일부러 라니요?"

"영인이도 그리 멍청한 아이가 아니니 인질로 받아들여서 애지중지 보살피다
보면 그 아이의 장점들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
히 정이 싹트게 될테고… 그래서 만약 그게 결혼으로만 이어진다면 본문은 다
섯손까락 안에 들어가는 무력을 지닌 단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지요. 사실 그
것 때문에 그 설무지라는 구렁이가 혼사문제를 가로막은 거겠지만……. 혼사
를 거절했으니 이런식으로라도 밀어붙어야죠."

"오오… 그것도 대단히 좋은 계책입니다. 당연히 서열상 사위가 장모의 말을
어느정도는 들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또 두 문파가 혈연으로 맺어진다면
그만큼 좋은일도 없구요. 그런데 서문세가에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쪽도 제안에 응했어요. 이제 말들은 어느정도 갖춰진 셈이니 그들을 잘 다
루기만 한다면 본문의 판도는 몇 곱절이 늘어나게 될 거에요. 문제는 장인걸
의 처리인데… 장인걸이 별로 반항도 못하고 묵향의 손에 떨어진다면 묵향을
저지할 단체는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게 문제에요. 장인걸을 거의 무림공적(武
林共敵)으로 만들어 그 세력을 소모시키면서, 묵향 또한 정파에게 어느정도 전
력이 손실되도록 힘써야 해요. 그런 다음 그 둘을 붙여 또다시 대판 싸운다면
묵향이 나중에 교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
의 세력으로 축소되겠죠."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그 정파의 선봉은 서문세가를 시켜야 해요. 서문세가는 지금 욱일승천(旭日
昇天)의 기세를 타고 있어요. 뛰어난 가주와 그 후계자를 가진 강대한 문파
죠. 그들과 마교가 마주친다면 서문세가 또한 어느정도 힘을 상실하게 될거에
요. 지금 때는 난세에요.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이간질을 해 최소한 50년 이상
은 그 누구도 무림통일을 꿈도 못꾸게 해야 합니다."

"존명!"

"정파의 세 개 문파를 박살낸 것은 마교에서 행한 짓으로 확정지어 선전하세요."

"존명!"

"섬서분타에서도 별 신경쓰지 않고 전멸시킨 용병대들 중에 무림맹과 연줄이
닿아있는 맹호대에 생존자가 있으니 이 또한 하늘이 우리를 돕는 거에요. 비
밀리에 무림맹에 섬서분타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세요. 섬서분타와 무림
맹이 충돌을 일으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섬서분타가 마교
를 차지할 때 쯤에는 무림맹이 섬서분타를 향해 전면공세를 할 수 있도록 공
작을 하세요. 그래야만 섬서분타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
어요.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그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겁니다."

"존명!"

이때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한 중년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문주님. 수도에서 온 전갈에 의하면 황제가 죽었다는……."

그 말에 옥화무제는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인가요?"

"모든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요 근래 2년 넘게
병치레를 하고 있었고 거의 40여년을 집권하셨으니 죽을때도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황제의 붕어(崩御) 사실이 지금 비밀로 된 이유중의
하나가 진천왕과의 내전에도 있지만 후사문제 때문이죠. 황제는 후계자로 이
제 13살인 오황야(五皇也) 지(智)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 전 황후의
아들들이 4명이나 있으니 아마 그들을 모두 처치한 후에 붕어 사실을 발표할
모양입니다. 지금 전선에 나가있는 2명의 황자들을 불러들였고 아직 미확인된
정보지만 도성내에 남아있던 삼황야(三皇也)와 사황야(四皇也)는 벌써죽임을
……"

"놀라운 정보군요."

"예. 그 다음 대국(大局)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건지?"

"만약 황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그들이 승리할 확률은 어느정도 되나
요? 오히려 거기서 분란이 벌어진다면 진천왕이 승리할 확률이 더 올라가는게
아닐까요?"

"예. 아직 정벌에 나간 군대가 회군을 하지 못했으니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진천왕과의 전선에서 군사를 뺄테죠. 그렇다면 매우 진천왕에게 유리하게 돌
아갈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방관하게 된다면 근래에 황후로 책봉된
엄귀비나 간신 엄승의 세상이 될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잘 해나갈지 그것도
의문이죠."

"원정군은 언제 돌아오나요? 지금 거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모양이니까
최소한 2개월 정도 걸릴것으로 사료됩니다."

"2개월이라……. 너무나 긴 시간이군요."

"예. 사천성 남쪽에서 시작된 전쟁이 지금은 사천성 북쪽까지 밀렸으니 잘못
하면 천도라도 해야할 지경이죠. 하기야 각 성(省)에는 지금 지원병을 모집한
다고 난리고, 향방군까지 대량으로 동원되는 실정이니 이런식으로 간다면 가
을의 추수가 문제가 되겠죠."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어쨋든 진천왕이 승리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문제
는 진천왕이 아니라 그를 지원중인 혈교에요. 진천왕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무림은 혈교가 장악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이 사실을 무림
맹에 알리고 최대한 정파가 진천왕과의 전쟁에 지원을 해줄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야만 합니다."

"존명!"

"그리고… 총관!"

"예."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일황야 정(晶))과 이황야 진(璡) 중에서 누가 낫다고
생각하나요?"

"그야 당연히 이황야가 낫죠. 이황야는 멍청한 편은 아니지만 주색(酒色)을
매우 좋아합니다. 또 성격도 과격한 편이구요. 일국의 황제감은 아니죠. 그에
비하면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의 일황야가 황제 감이기는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다면 세상이 너무 안정되어버려 본문이 돈벌이하기는 별로 좋지 못합니다."

"호호홋… 좋아요. 그럼 이황야를 빼돌리세요. 일황야는 엄승의 손아귀에 들
어가서 죽도록 놔두세요. 괜히 일황야가 살아있다면 황위쟁탈전밖에 안벌어지
니까 엄승이 죽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 후 이황야는 회군해 오는 정벌군 사령
관 진길영 원수에게 인계하세요. 그러면 정예군을 가진 이황야는 곧이어 진천
왕을 토벌할 수 있을테고 또 우리에게 신세를 진 이황야는 본문의 성장에 많
은 도움을 줄테죠."

"존명!"

* * *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두 여자들은 묵향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별로 대화하
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는지, 깨어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숨막히는 것 같은 이 부자연
스런 분위기 때문에 두 여자들은 처음에는 닥치고 있었지만 매영인이 나중에
더 이상 참지못하고 소소에게 소근거렸고 소소가 맞장구치며 소근거렸지만 묵
향이 딱히 반응을 보인건 아니었기에 두 여인이 소근거린는 가운데 여행은 종
착역에 다다랐다.

매영인과 소소가 섬서분타에 도착해본 다음 느낀 것은 의외로 실력있는 고수
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딱히 마교도 같지도 않
았다. 그냥 불량배들 잡아다가 훈련시켜놓은 정도? 그정도로 그들에게는 마교
로서의 기본적인 향기가 없었던 것이다.

묵향 일행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수문(守門) 무사들은 말위에 타고있는 네명
을 보고 곧장 그 마차에 타고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그들은 재빨리 문
을 연 다음 마차가 지나갈때까지 인사를 했다. 그녀들이 마차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봐도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하인들과 무사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왠만한 문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여태껏 그녀들이 상상해오던 마교적
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마교라고 해서 좀더 살벌한 뭔가를 상상해왔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차는 계속 달려들어가 두 번째 문에 도착했고 그 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그
래도 좀 실력이 나아보였다. 움직임이 꽤 절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면서 그녀들은 뭔가 진법이 주위에 쳐져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확
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뭔가 약간의 반감(反感)이 느껴진다고 할까? 미세한
살기나 예기(銳氣) 조차 없는걸로 보아 살상을 위한 진법은 아니었지만 어쨋
든 진이 쳐져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세 번째 문에 다다르면서 그녀들은 이곳이 마교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
었다. 세 번째 문을 지키는 무사는 정말이지 몸에서 풀풀 마기를 풍기고 있었
으니까 말이다. 묵향 일행이 통과하자 세 번째 문은 곧장 닫혔고 그녀들은 묵
향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돌아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모두
들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여기가 섬서분타인가요?"

하지만 매영인의 물음에 묵향은 대답하지 않고 마화를 불렀다.

"마화."

"예?"

"이 아이들을 숙소에 안내해라."

묵향은 지시를 끝낸 후 천천히 萬惡殿(만악전) 쪽으로 군사를 만나러 걸어가
기 시작했고, 뭔가 말을 걸었기에 손해본 것 같은 기분을 가지게 된 매영인과
소소를 마화가 안내하여 그녀들이 머물만한 처소로 갔다.

"이 방과 저방을 써."

제법 괜찮은 방이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들의 마음을 안정
시켜 줬다.

"좀 있다가 시녀 두명을 골라 줄테니까 그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면 되고, 식
사는 시녀를 시켜 식당에서 가져다가 여기서 먹어. 여기있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마. 저 사람들도 너희들에게 신경쓰지 않을거니까. 그리고 모두들 무기
는 다 가지고 있을테니 만일에 위급한 일이 닥치면 알아서 해결해. 솔직히 대
장이 하는 걸 보니까 너희들 목숨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질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다니."

"원래 그런 사람이야. 사실 무영문과 싸우게 되더라도 별 신경 안쓸 사람이거
든. 서로가 수준이 비슷해야 인질이 소중한 법이지, 격차가 심할때는 그게 아
니지. 언제든지 한판해도 좋은데 왜 인질을 소중히 여기겠어? 그러니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지. 또, 너희들은 저쪽 담 밖으로 나가면
안돼. 그걸 넘어간 후에 발생할 모든 사태는 너희들이 책임져야할거야."

"하지만 저 담을 넘어가도 섬서분타 안이잖아요."

"아니. 섬서분타라 하면 저 담 안을 말하는 거야. 나는 설명해 줬으니까 나중
에 딴소리 하지마. 나는 이만 바빠서……."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손쉽게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
었다. 그녀들을 괴롭히는 인물들도 없었고, 또 모두들 그녀들에게 친절했다.
먼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섬서분타의 내벽 내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점만
지킨다면, 그녀들에게는 매우 폭넓은 자유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녀들이 한번
씩 산책할 만한 매우 아름다운 꽃밭도 몇군데 있었기에 그것이 그녀들의 마인
들에 대한 선입관을 약간 고쳐주는데 일조를 했다. 마인들도 사람인만큼 아마
도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호(嗜好)는 같은 모양이었다.

그중 한 꽃밭에는 국화만 심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들은 아직 피지 않은
국화밭에 서있는 묵향을 한번씩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따스한 표정
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마화도…….

"저 마화라는 여자, 부교주와 어떤 사이일까요?"

"글쎄… 여기와서 느낀 분위기로는 안주인정도? 하지만 대화라든지 뭐 그런걸
들어보면 결혼은 하지 않은 모양이던데?"

"맞을거에요. 할머니도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꽤 어울
리는 한쌍이네요. 하지만 군부와 무림은 별로 어울리는 관계가 아닌데……."

이때 문쪽에서 흑의무사 한명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더니 묵향의 앞쪽에 부
복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묵향은 그를 따라 달려갔
고, 마화도 그를 따라가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약간 멈칫거리다가 건물
한쪽 구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녀들을 발견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마화는 그녀들을 향해 걸어와서는 방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때? 지내볼만해?"

"예."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렇게 숨어서 보지마. 아예 당당하게 눈에 띄는 곳에서
바라보던지… 부교주는 숨어서 자신을 관찰하는걸 아주 싫어하거든. 이번같은
경우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알고도 그냥 모른체 해줬겠지. 너
희들은 그의 수하가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게 반복되면 아무리 너희들이
라도 무사하지 못할지도 몰라."

"알겠어요. 조심할께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응. 부교주의 딸이 돌아왔어."

"딸이라구요? 부교주가 결혼을 했었어요?"

"아니. 양녀(養女)야. 그녀는 지금까지 마교의 뇌옥에 갖혀있었는데, 이번에
마교하고 모종의 교섭을 진행하면서 풀려난거지."

"부교주의 양녀라면 대단한 고수겠네요."

그 말에 마화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사실 그녀는 오래전에 부교주하고 헤어졌었거든. 부교주는
그녀가 무림에 몸담기를 원하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무림인이 되어있
더라고 하더군. 낙양에 있는 천지문의 제자야. 사실 무공도 그리 대단하지 않고……."

"그럼 같이 가서 만나보시지 그래요?"

그녀들의 말에 마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갈까 하다가 그만 뒀어. 오랜만에 부녀간에 만나는건데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 또 끼어들 이유도 없고……."


"어서오시오. 소저."

묵향의 퉁명스런 인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당당하게 서있었다. 꽤나 고급옷
을 입고있는 것을 보면 장인걸이 꽤나 선물의 포장(?)에 신경을 쓴 모양이었
다. 하지만 오랫동안 뇌옥에 갖혀있었던 탓에 창백한 안색에,어렸을때의 밝
고 약간은 토실토실했던 소녀의 영상을 기억하고 있는 묵향은 가슴이 약간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소연은 지친듯한 표정이었고, 사실 먼 마교 총타에서 이곳까지 오느라고 많이
피곤한것도 사실이었다. 갑자기 뇌옥에서 꺼내서는 목욕에다가 좋은 옷으로
단장까지 시킨 후, 잡혀 들어갈 때 압수당했었던 무기류도 돌려받았다. 그녀
는 '마교'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를 모를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사실 천지
문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었던 마교가 자신을 납치해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는 단일세력으로는 최강의 방파였기에
도움의 손길 따위는 기대할수도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용해먹고는 더 이
상 쓸모없어지면 죽임을 당할게 뻔했다. 그것도 자신이 어디에 이용되는지도
알 수 없다는게 더욱 그녀로서는 황당했지만 말이다.

어쨋든 그녀는 이곳에 왔고,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한 무사들은 총타로 돌아갔
다. 그 다음에 그녀가 만난게 바로 이사람이었다. 매우 젊고 강인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만난듯도 하다는 게 좀 이상했다. 하지만 마인들
중에서 이렇듯 젊은 사람을 자신이 알고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착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천마신교 섬서분타지요. 우선 여기서 하루동안 머무신 후 내일 천지
문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안내해 드려라."

묵향의 사무적인 말투에, 묵향의 뒤에 서있던 수하가 재빨리 답하며 그녀를
데리고 처소로 걸어갔다. 묵향은 이제 완숙미(完熟美)를 뿜어내는 30살이 넘
어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과거 티없이 밝고 귀여웠던 그녀를 회상
했다. 세월이란 것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가는 것인 모양이다.

"나도 늙었나? 이렇게 감상적이 되다니 말이야……."

묵향은 소연이가 돌아오자 마자 혹시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당했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자신의 내공을 뿜어넣어 소연이의 몸속 구석구석을 살폈고, 혹시나
심령이 제압당했다든지 뭐 그런 짓에 걸렸을까봐 특히나 철저히 조사했기에
그 조사작업은 거의 1시진이나 걸렸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잠든 후에 행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그걸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장인걸이 뒷꽁무니로 헛짓거
리는 안했다는 걸 알아낸 후 묵향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다음날 수하들에게
일러 그녀를 천지문으로 돌려보냈다.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생각도 없었고, 이
제 그 나이가 되었으니 죽든 살든 그건 사실 묵향과는 별로 상관도 없었기 때
문이다. 대신 그녀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 아니기를 염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묵향 부교주는 양녀를 인수받은 다음날 그녀를 곧장 천지문으로 돌려보
냈습니다."

"흐음… 의외로군. 본좌는 그가 데리고 있으면서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장인걸의 말에 옆에 서있던 혁무상이 말했다.

"그만큼 그의 딸을 아낀다는 말이겠지요.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
둬야 적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또 그 둘은 사는 세계가 다
르기에 대놓고 보호할수도 없으니까요. 그녀를 심문해봤을때도 묵향이란 이름
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걸 보면 최후의 최후에나 그녀를 써먹을 수 있을까,
섣불리 써먹지는 못합니다. 전 교주는 그녀를 너무 빨리 써먹었기에 낭패를
당한 것이죠."

"좋아. 그건 그렇고 무영신마(無影身魔)는 출발했나?"

"예. 자성만마대를 이끌고 2시진(4시간) 전에 출발했습니다."

"정보공작은?"

"충분히 하고있습니다. 섬서분타가 본교의 무림재패를 이루는데 있어 그 핵심
세력이라고 충분히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무영신마 장영길(張影吉) 장로에게
도 자신들이 섬서분타의 핵심세력임을 기회가 나는데로 은밀히 선전해 두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그리고 자성만마대는 지금부터 섬서천마대(陝西闡魔隊)로
이름을 바꾸고, 앞으로 그들에게 가는 모든 전문(傳聞)에는 섬서분타에서 보
내는 것임을 적도록 지시해 뒀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략을 해대면 아마도 섬
서분타와 조만간에 정면전이 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크크크… 괜찮은 생각이군."

"예. 지금 묵향 부교주는 정파와의 전쟁에 천랑대를 투입중인 것이 밝혀졌습
니다. 시체들에 나있는 각종 상흔으로 봤을 때 천랑대의 무사들임이 확실합니
다. 또 첩자가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각 분타로부터 약간씩의 고수들을 뽑아
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외에도 이리저리 긁어모은 고수들도 꽤 되는 것
으로 보입니다. 그 모든 증거를 종합해볼 때 묵향 부교주는 우리들의 의도대
로 진짜 정파와 한판 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좋아. 수고 했네. 이제 그만 가보게나."

"예."

* * *

묵향은 소연이 타고있는 마차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오랜시간 그쪽
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쓸데없는 감상
에 빠져있는 자신을 일깨웠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 다시는 볼수 없을지도
몰랐고, 또 그 아이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양녀라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
인의 입장에서 보면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일 뿐이었다.

마화는 그가 천천히 걸어서 국화밭으로 향하는 걸 멀찍이서 본 후 그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매우 감정이 절제된 이별, 자신이 양부라는 것을 밝히지
도 않았지만 제법 오랜시간 묵향과 함께 지낸 마화로서는 그의 마음이 매우
불안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수있었다. 이런때 묵향은 자신에게 상대가 말을 걸
어오는 걸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옆에 아무도 없는 것 보다는 마화가 그냥
옆에서 조용히 있어주는 걸 묵향이 더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마화는 그를 따
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국화밭을 바라보며 서있는 묵향을 마화는 끈기있게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의 품속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어 묵향에게 건넸다.
묵향은 뒤에서 툭 치는 걸 보고 뒤로 시선을 돌렸을 때, 마화가 술병을 들고
있는 걸 보고는 아무말 없이 그 술병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비우기 시작했다.
묵향이 매우 좋아하는 천일취(千日醉)였다. 물론 아무리 술한병 마셨다고 그
취기가 천일이나 갈까마는 천일취는 정말 무지하게 독한 술이었기에 원래이름
이었던 국일주(菊溢酒)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모두들 천일취라고 불렀다.

마지막 한방울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넣은 후 묵향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마
화에게 물었다.

"더 없냐?"

"없어요. 이제 궁상 그만떨고 들어가세요. 오랜만에 양녀를 봤고, 또 그녀가
무사한걸 알았잖아요. 그러면 된거 아닌가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녀를 대장이 걱정해줄 이유는 없잖아요."

"그건 그래. 이미 둥지에서 떠난… 하지만 이 경우는 내가 먼저 둥지를 떠난
것이기에 조금 아쉬움이 남는군. 임충은 어디있지?"

"숙소에 있을겁니다."

"좋아. 그럼 그녀석과 한잔 하기로 하지."

묵향의 쓸쓸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바라보던 마화는 품속에서 병
을 하나 더 꺼낸 후 곧장 자그마한 입속에 들이부었다. 몇모금 꿀꺽거린 후
그녀는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천일취는 묵향같은 괴물이나 좋아하는 술이지
보통의 여자보다 체력이 조금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인 그녀에게는 너무 독
했던 것이다. 지독한 술냄새와 그 지독한 술기운때문인지, 천일취가 뿜어내는
아련한 국화향기 속에서 그녀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살짝 닦
으며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묵향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한 말을 살짝 내
뱉었다.

"바보……"


며칠 후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이제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소
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문을 벌컥 열리면서 시커먼 옷
을 입은 사람이 검을 차고는 들어왔으니 그녀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
지만 뛰어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마화였고, 그걸 알고 그 둘은 저으기 안심
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짜증스러움을 듬뿍 내포한 말에 온 정신이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까지 준비 안하고 뭐하고 있는거야?"

"예?"

"야행(夜行) 준비하라는 지시 못들었어? 그리고 짐은 꾸렸어? 이런… 짐을 하
나도 안꾸려놨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마화는 다짜고짜 그녀들이 이곳에 와서 장만한 몇가지 되지도 않는 옷가지 등
을 품속에서 꺼낸 시커먼 보자기 위에 쌓으면서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정확히 1시진 후에 모두들 섬서분타에서 떠날거야. 그런데 왜 준비를 하나도
안한거야?"

"예? 떠나다뇨?"

아직도 멍한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마화의 얼굴
이 뭔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시뻘겉게 달아오르며 맹렬한 분노를 뿜어내기 시
작했다. 하지만 마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않고 짐을 재빨리 챙긴 후 그녀들에
게 차갑게 말했다.

"야행복(夜行服)은?"

"……"

"하기야, 야행복을 지급해줬을 리가 없지. 잔말말고 따라와."

아닌게 아니라 그녀들이 밖에 나왔을 때 평상시와 상당히 다른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소리없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대부분 인기척이
나지않게 하지만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흑색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마화는 그녀들을 데리고 일단 창고쪽으로 간 다음 두벌의 야행복을 받은 후
근처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 중 하나에 무턱대고 걸어가더니, 방문을 확 열어
본 후 아무도 없자 야행복을 그녀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어. 그리고 이 보자기에 너희들이 입던 옷을 넣
어가지고 와."

싸늘한 냉기를 풀풀 날리는 사무적인 어조…… 그녀들이 여태껏 보지못했던
마화의 또다른 일면이었다. 그녀들은 감히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해보지도
못한 채 안으로 들어가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주머니에 보면 두건이 있을거야. 두건도 써."

두 개의 눈구멍이 뚫려있는 두건까지 쓰자 그녀들은 이제 주위를 바쁘게 돌아
다니고 있는 무사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 후 마화는 그녀들의 옷차림
새를 찬찬히 훑어본 후 말했다.

"이동하면서 아무 얘기도 하지 마. 그리고 보따리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뒤만 따라와야 해. 알겠어?"

"예."

"가자."

마화가 그녀들을 이끌고 간 곳은 입구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한 건물의
지하였다. 그 건물은 지금 전형적인 야행복이라 할 수 있는 흑의복면을 한 인
물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빨리빨리 나가. 이봐, 다음 조 들어오라고 해."

아닌밤중에 계속되는 해괴한 사건으로 반쯤 얼이 빠져버린 매영인과 악양소소
가 자신들의 자리를 재빨리 찾아 이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7평(坪)정도
될까 하는 좁은 지하실에서 이리저리 걸리적거리자 한 흑의복면인이 짜증을
부렸다.

"야, 거기 두놈. 좀 빠릿빠릿하게 못움직여? 빨리빨리. 다음!"

그의 지시에따라 지하실 한쪽 구석에 뚫려있는 지름 3척(91Cm)정도의 동굴속
으로 재빨리 사람들이 기어 들어갔다. 이윽고 마화도 그 동굴속으로 들어갔고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알 지 못하고 마화의 등만 따라다니던 두
여자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 동굴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겨우 동굴의 높이가 3척이 될동말동했기에 일어서서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녀들은 열심히 기어서 마화의 뒤를 쫓았지만 이놈의 동굴은 도대체가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앞에서 "사사사삭"하는 옷이 땅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니까 사람이 있는 줄 아는 것이지 동굴 속은 칠흙과 같이 어두웠
고, 고개를 조금만 들면 동굴 천장이 머리 위에 닿였다.

영문도 모르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어두운 공간을 기어가자니 그녀들
은 서서히 공포심이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한참 기어갈 때 갑자기 저
어둠 속에서 칼이라도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 또는 귀신이라도 튀어나오는게
아닌가 하는 망상까지 들었지만 그것도 차츰 시간이 지나자 다른 것으로 대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예로 단련된 육체라고 하지만 2각(30분)정도 전력을 다해 기고 나니
까 삭신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었는지 손바닥, 발바닥 아픈 것은 물
론이요, 무릎도 까졌는지 쓰라리고 아파왔다. 하지만 가장 지독한 통증을 호
소해 오는 곳은 허리였다. 원래가 사람은 기어 다니는 동물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그 상태로 1각정도 더 기고나자 숨이 턱 끝에 차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눈앞에 별이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야, 앞에녀석! 빨리 안기어?"

"벌써 숨이 턱 끝에 닿다니, 도대체 수련 안하고 뭐한거야? 어디의 누구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빨리 안기어? 뒤로 층층히 밀리잖아!"

앞에 가던 그녀들이 꿈지럭거리자 뒤에서 지독한 욕설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마화의 지시도 있었기에 감히 대꾸는 못하고 지독한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며 죽자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고 하지만 대부분
의 경우 무예의 수련을 하다보면 쓰이는 근육만 계속 쓰게 마련이다. 그렇기
에 그녀들이 평생 이렇게 오랜시간, 장거리를 기어다닐 일이 없었기에 쉽사리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뒤에서 줄기차게 따라오는 녀석들을 보면 아무래
도 평상시에 이런 암굴을 기어 다니는 훈련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쨋든 그녀들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장장 1시진을 기어가서야 동굴은 끝이났
다. 원래 동굴의 중간중간에 작은 방들이 붙어있어, 혹시나 모를 외부로부터
의 침입자를 막을 수 있게 되어있고, 또 그곳에서 동굴의 외부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강철문들이 달려있었다. 하지만 동굴 속이 무지무지하게 어두웠다
는 이유도 있었지만 딴곳에 신경쓸 정신이 없을 정도로 지쳤기에 그녀들은 그
런 것을 눈치도 못채고 그냥 동굴을 통과했다.

가까스로 동굴을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수많은 흑의복면인들이 득실거리고 있
었다. 어느정도 복면인들이 모이자 그곳에 있던 한 흑의복면인이 나직히 말했다.

"제6대, 인원 이상없나?"

"예."

"출발."

흑의복면인의 질문에 답했던 또다른 흑의복면인이 약 100명은 되어보이는 무
리를 이끌고 조용히 출발했다.

"제 7대, 정렬하라."

한 흑의복면인이 그 말을 하자 마화가 재빨리 그녀들을 이끌고 정렬한 인물들
속으로 들어가서 섰다.

"응?"

두 번째로 흑의복면인들의 수를 세고있는 흑의복면을 보면서, 흑의복면인 한
명이 말했다.

"왜 그러나?"

"그게, 이상하게 두사람이 더 많습니다."

"뭐야?"

그와 동시에 그는 살기를 피워올리며 나직히 외쳤다.

"모두들 복면 벗어. 첩자가 있다."

그 말에 재빨리 마화가 복면을 벗은 후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제가 두명 데리고 왔어요. 미리 말씀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 좋아. 출발!"

흑의복면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출발 명령을 내렸다. 마화가 신분을
증명하는데야 그가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기때문이었다.

흑의복면인들의 무공은 대단히 뛰어났다. 사실 그들은 더욱 빨리 목적지에 갈
수도 있었지만 마화 등 무공이 약한 인물들이 많이 섞여있었기에 적당히 쉬면
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 때문에 제7대는 제법 일찌감치 떠났음에도 새벽이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요새(要塞)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성(城)이라
고 하기에는 좀 작았고, 요새라고 하기에는 약간 컸다. 하지만 흑의복면인들
과 함께 요새 안으로 들어간 후 그녀들은 그 첫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아채는데 별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이건 거의 성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처음
에 그걸 느끼지 못한 것은 절벽 안에 동굴을 파서 구축해놓은 부분이 교묘하
게 위장되어 있어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3장(9m)은 되어보이는 높은 담장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 뚫려있는 문은 2
중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철로 되어있었다. 또 벽에는 줄
기가 가느다란 덩굴식물들이 우거져 있어 외부에서 그것을 잡고 성벽을 오르
기는 어려웠고, 또 그 식물들에 의해 멀직이서 보면 요새가 있는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녀들은 마화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기에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마화 또한 그
녀들에게 말을 한마디도 걸지 않고 묵묵히 일행들을 따라서 이동했다.

마화는 그녀들을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해준 후 급히 요새 깊숙한 곳으로 걸어
갔다. 이제 더 이상 감추고 자시고 할것도 없었기에 그녀는 복면을 벗에 품속
에 집어넣은 후 조금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갑자기 거의 천여명에
달하는 식구가 새로이 늘어났기에 복도는 흑의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화는 암흑대전(暗黑大殿)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방까지 걸어간 후 그 앞에
서있는 무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군사를 뵙게 해줘요."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흑의무사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싸늘한 표정을 짓고있는 마화를 알아보고
는 정중하게 말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조금 있다가 밖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마화의 표정은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싸늘하게 바뀌었다. 아니, 들어가면
서 바뀌었다는 것 보다는 군사를 보고나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갑자기 마화가 냉기를 펄펄 날리면서 다짜고짜 말하자 설무지는 약간 당황해
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인질로 잡고있던 아이들을 그곳에 남겨두려고 했잖아요?"

"그건…… 설마, 자네가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

설무지의 어색한 대응을 보고 더욱 확신을 굳힌 마화는 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데려 왔어요. 왜요? 뭐 잘못되었나요? 그 아이들을 그 위험한 곳에 일부러
놔두고는 정파가 기습했을 때 죽인 후 그걸 이용해서 뭔가 꾸밀 생각이었죠?"

마화의 예리한 추리에 설무지는 김빠지는 듯한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얼버
무렸다.

"하하…… 억측이 너무 심하군, 마화."

"억측이 아니에요. 만약 그 아이들을 죽일게 아니라면 왜 거기에 놔두려고 했
죠? 조만간에 쑥대밭이 될게 뻔한데……"

"흐음…… 기왕에 데려왔으니 하녀 한명을 붙여주기로 하지. 나는 일이 많아
서 바쁘니까 이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말아요. 제 생각이 맞죠? 도대체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그녀들은 공식적인 인질이잖아요. 인질을 받았을 때 그녀들을 보호해
준다는 무언의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요?"

그녀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설무지는 작은 한숨을 쉰 후 마음의 준비
를 갖추고는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알고있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부교주님의 허락이 내려진 일인가요?"

"물론. 그분의 허락이 있었으니까 일을 시작했지."

그 말에 경악한 마화. 그녀는 묵향이란 인물을 믿고 있었기에 충격이 조금 컸
다.

"어떻게 그럴수가……"

"무림이란 곳은 먹고 먹히는 곳이야. 철저한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상이지. 부
교주의 적들은 너무나 강한자들 뿐이고, 그들을 없애려면……"

"하지만 그 아이들은 그렇게 강하지도 않잖아요. 또 그 아이들의 배후도 그렇
게 강대한 문파는 아니잖아요?"

"물론 무력은 약하지. 하지만 무영문은 정보력이, 또 악양세가는 정보력도,
무력도 약하지만 오랜세월 인술(仁術)을 베풀어 왔기에 대단히 높은 신망(信
望)을 받고있어. 만약 그녀들이 우리들의 인질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악양세
가도, 무영문도 정파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되겠지. 그만큼 그들의 입지
가 약화된다는 말이야. 또 우리는 그녀들을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분타
가 무너지는 통에 그녀들의 보호는 어쩔 수 없었다. 죄는 그녀들을 죽인 정파
에 있다. 뭐 이런식으로 밀고나가면 잘하면 정파 안에서 자중지란(自中之亂)
도 가능했지. 그래서 부교주도 허락한 것이고……"

설무지는 한참 말을 하다가 마화의 눈속 저 깊은곳에서 흘러나오는 비난을 감
지하고는 말을 중단했다. 설무지는 마화의 저 자부심 높은 무인의 눈을 바라
보면서 자신의 말을 이해못하는 마화가 답답하게도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순수한 무인의 눈을 언제까지고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큰일 났습니다."

그 말에 묵향은 천리독행에게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뭐냐?"

"그게…… 그녀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들?"

"예. 악양세가와 무영문의……"

"도망쳤나? 도대체 감시를 어떻게 했기에 도망친단 말이냐? 보초(步哨)들은
뭐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보초들은 밖으로 나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고 딱 잡아떼는
판이라서 그게…… 그리고 밖으로 나간 그 어떤 흔적도 없구요."

천리독행은 묵향이 소중한 인질들의 실종에 대단한 짜증을 낼 줄 알고 조심스
럽게 변명을 섞어 말했지만, 의외로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운좋게 도망쳤다면 된거지. 그냥 놔둬라. 어차피 소모품으로나 쓸 생각
이었으니, 없어도 상관없지. 그래, 철수작업은 순조롭게 끝마쳤나?"

"예. 모두들 조용히 떠났습니다."

"몇명이나 남았나?"

"천랑대 제3대, 100명입니다."

"만약에 정면 공격을 받는다면 자네 인솔하에 충분히 탈출은 가능하겠지?"

묵향이 더 이상 그일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또 자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을 물어보는 것을 알고 천리독행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이런식으로 수하가
해내고도 주리가 남는 일을 물어보는 것은 더 이상 앞에 있었던 과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는 말이었기에 천리독행은 속으로 저으기 안심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대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튀는건데
화경의 고수가 온다해도 겁 안납니다."

"좋아. 이제 무대 준비가 거의 끝났으니, 배우들만 불러들이면 되겠군. 하하
하하하"

"흐흐흐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빨리 그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묵향이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는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나를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물론 이 말을 여태껏 대화하고 있던 천리독행에게 한게 아니었으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렇기에 대답또한 들리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
답하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왠만한 사람이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의 수하가 되는 조건중에 하나였으니까요."

이 대답을 하는 인물은 과거 묵향을 거의 죽일뻔 했었던 살수 흑월야사(黑月
夜死) 전룡(全龍)이었다.

"자네에게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묵향의 말에 약간의 궁금증을 나타내는 예의 그 목소리.

"무슨 부탁이신가요?"

"앞으로 3개월동안만 내 딸을 부탁하네."

"예?"

"딸말일세. 얼마전에 왔을 때 봤을텐데? 내가 정파의 제자였기에 아는 척을
안했지만 말이야. 바로 그 아이가 내 딸이라네."

"그녀가 딸이었습니까?"

"내 양녀지. 물론 딸아이가 죽는다 해도 자네에게 책임은 없네. 자네는 자네
의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게나. 대신 자네가 막을 수 없
는 상대가 나타난다면 그 아이를 보호할 생각 하지말고, 그냥 지켜본 후 배후
인물만 나에게 알려주게. 그것 때문에 은잠술에 뛰어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
니까 말이야. 해줄 수 있겠나?"

"정말 양녀가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상관 없네. 그 아이의 무공은 형편없어. 만약 무리하게 보호한다고 날뛰다가
자네가 죽어버린다면, 딸아이의 목숨은 그걸로 끝장이지. 또 나는 그 배후조
차 알 수 없어진다네. 그 아이를 대놓고 보호할 수 없으니, 복수는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정말 냉정한 분이시군요."

"별로 냉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이 그랬는데 없던
정이 하늘에서 떨어지겠나? 어쨋든, 부탁을 들어주겠나?"

"예. 그럼 3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그 이후에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묵향이나 천리독행에게는 뭔가
가 이동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묵향과 천리독행의 차이는 묵향은 그 기
척이 느껴지기도 전에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천리독행은
상대가 움직인 지금에야 눈치챘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군대(軍隊)란 무리들은 한없이 특이한 무리들이다. 강한 상대 앞에서는 순한
양떼와 같이 겁이 많고, 약한 상대 앞에서는 굶주린 늑대와도 같이 포악하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만, 그 상관의 위엄이 손상되었을 때는 가
차없이 상관을 베어버리기도 한다. 원래가 외적(外敵)을 막기위해 그들을 키
우지만, 오히려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는 외적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로 둔갑하는 것이 바로 군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 군대라는 것들이 아무리 폭도(暴徒)로 화했다고 해도 그들을 이끄
는 사람은 꼭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쨋든 대규모의 무리가 효과적으로 움직이
기 위해서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인물은 필수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기 때문
이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군대라는 이 양면성을 가진 무리들을 효과적으
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가장 윗부분의 계급 몇 명만을 족치면 그 무리가 전체
적으로 통제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진리였다. 하지만 대송제국은 지금 그
진리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대송제국은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대가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해야만 했다. 무려 112만에 달하는 어림군(禦臨軍;중앙군)을 유
지해야만 했고, 각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200만에 달하는 향방군(鄕防
軍;지방군=경찰과 같은 역할)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때
를 대비해 겨울철의 농한기(農閑期)에 600만이 넘어가는 대비군(對備軍;예비
군)을 소집하여 무예를 가르쳐야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거져되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112만의 어림군 병졸들이
굶지 않게 밥만 줘도 거기에 소모되는 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는 것이
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거금을 들여 키운 이 군대라는 것이 지금은 대송제
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대송제국이 요를 정벌하기 위해 투입한 군사력은 무려 103만 대군(大軍). 물
론 이중에서 실질적인 주력 전투군은 35만과 향방군 15만이었다. 하지만 이
50만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려 50만이 넘는 대비군이 차출되어 보급선
을 유지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이번 전쟁을 도와준 고
려와 여진, 정안국에다가 어떤 형식으로든 약간의 사례는 해야 하는 것이었기
에 송으로서는 몇 년에 걸쳐 비축해둔 금,은을 탕진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재물(財物) 따위가 아니었다. 엄청난 군사력이 국외로 원정나
간 틈을 이용해 진천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거기에다가
엎친데 겹친 격으로 이 중요한 때에 황제폐하까지 갑자기 붕어(崩御)하다 보
니 대송제국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를 이용해서 권력의 전면
(前面)에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호화로운 넓은 방의 윗쪽에 마련된 의자는 그 방의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크
면서도 호화로웠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 역시 그 넓은 의자에 어
울릴 정도로 비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살이 뒤룩뒤룩 찐 인물은 그
살덩어리에 묻혀서 얼굴의 윤곽을 많이 상실했지만, 아직도 제법 준수한 생김
새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이 찌기 전에는 대단한 미남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팔(八)자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작고 교활한 눈을 반짝이면
서 말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그 돼지같은 인물의 옆에 서있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재빨리 귀속
말로 주인의 물음에 답했다. 그 사내의 말이 시작되었을 때 활짝 웃던 그 돼
지는 갑자기 수하의 멱살을 그러쥐면서 외쳤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예…… 이황야가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지금 백방으로 수색하는 중이온데
……"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퍽!

"쿠엑!"

그 돼지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쓰러진 수하의 멱살을 그러쥐고 일으켜 세우면
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짙은 살기를 띄고 있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찾아내라. 10일의 시간을 주겠다. 만약 그때까지 이
황야의 목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네녀석의 목이 대신 잘릴 것이다."

살벌한 상관의 말에 수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이제 졸지에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어버린 수하는 촌각이 아까운 듯 재빨리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준비절차로서 문 옆에 풀어놓은 자신의 장검을 회수하는 것을 잊지는 않
았다.

돼지는 멀어져가는 수하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꽉 쥔 주먹을 바라봤다. 무
의식중에 그의 꽉쥔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방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이번 계획은 거의 10여년 전에 수립된 것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이 황제
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급상승하기 시작한 부귀(富貴)와 권세(權勢). 하
지만 여인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바보 멍청이는 없다. 그
만큼 이성간의 사랑은 빨리 불타 오르지만 빨리 식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황제의 총애를 지속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
듭했고 15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황제의 총애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들어 황제는 새로운 여자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정말 60세가 넘은
늙어빠진 노인네가 노망이 났는지 이제 갓 15세도 되지 않은 예쁜 궁녀(宮女)
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때 돼지는 이제 자신이 오래전에 계획한 일을
실행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 궁녀의 오라비 또는 동생이 자신을 대
신해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엎고 젊잖치 못한 짓들을 벌일 것은 분명한 일
이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당연히 연적인 돼지의 여동생을 숙청하는 것도 끼어
있을 것은 뻔했다. 돼지 또한 과거에 그런 짓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돼지는 궁녀쪽에서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돼지가 황제
를 죽이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강력한 정력제를
황제께 바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해결되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일일(一
日) 사용량을 조금 과하게 아뢴 것 외에는 그에게 죄가 없었다. 덕분에 황제
는 총애하는 궁녀의 방에서 복상사(腹上死)를 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말
이다.

일단 황제의 승하와 동시에 돼지는 민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무리하게 자신의 심복을 금의위의 대영반에 올려놨었고, 황제의 오른팔
이라고 할 수 있던 옥영진 대장군을 처치했었던 것이다. 그가 옥영진 대장군
을 처치하고 나자 그의 권세에 경악한 수많은 인물들이 돼지에게 머리를 조아
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심복들을 중요한 관직에 올리기도 하고,
또 자신의 파벌을 굳건하게 구축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돼지는 황제를 죽인 후 자신이 구축해놓은 파벌을 움직여 뒷마무리를 시
작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자신의 동생이 낳은 오황야를 황위에 올려놔야
만 했던 것이다. 뛰어난 황제의 재목(材木)이었던 일황야, 그리고 준수한 얼
굴의 삼황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사황야가 그런 이유로 돼지의 심
복들의 손에 이승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황야가 살아서 도망친
것이다.

돼지는 자신의 주먹에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고(至高)한 자리는 진천왕처럼 한낫 무력에 의지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
지. 모략과 술수…… 그리고 약간의 행운만 함께 한다면…… 흐흐흐……"

한참 밤하늘을 쳐다보며 히죽거리던 돼지는 갑자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거의 혼자말 처럼 말했지만, 돼지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는 있었다. 뭔가 음산
한 듯한 목소리였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예."

"이유는?"

"상대보다 더욱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모략이나 술수을 쓰는 것
보다 단순히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흠. 그렇다면 노부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나?"

"엄승 대인의 경우는 모략과 술수를 쓰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
직까지는 대인의 가장 큰 적이 누구인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군부(軍部)의 꽉 막힌 노장(老將)들이나, 중신
(重臣)들은 이미 힘을 잃었어. 군부의 영감들은 진천왕과 싸운다고 딴곳에 한
눈 팔 시간적 여유가 없지. 그리고 알량한 지식에 의존해 권세나 탐하는 영감
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붕어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지. 그런데 본좌에게 이제
적이라고 부를 만한 자가 남아있다는 말인가?"

"엄승 대인께서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실겁니다."

한참을 궁리하던 엄승이 답했다.

"진길영 원수?"

엄승의 물음에 예의 음산한 목소리는 약간은 핀잔을 주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답했다.

"크흐흐흐…… 진길영 원수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만리(萬里)길
밖에 있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 쯤이면 모든 일은 끝난 후겠지요."

"그렇다면 진천왕?"

"진천왕 또한 정북원수부의 이태진(李太眞) 원수에게 걸려 한눈 팔 시간이 없
습니다."

"그렇다면…… 흐음…… 그럼 설마 진성왕(眞誠王)이?"

엄승의 말에 예의 그 목소리는 또다시 음산한 웃음소리를 곁들이며 들려왔다.

"흐흐흐흐…… 예. 진성왕 또한 숨겨진 적들 중의 한명이지요. 진성왕이 뭔가
흑막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동남원수부의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성왕 또한 동남원수부를 슬쩍
장악하고는 권좌(權座)를 노리고 있겠죠. 하지만 진짜 강한 적은 진성왕 따위
가 아닙니다."

"끄응…… 그렇다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무림에는 혈교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의 힘을
대인께서 얕보고 계실지도 모르시겠지만, 과거 혈교의 분타 하나를 부수는데
흑풍단 전력의 반이 무너졌습니다."

엄승은 신음성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흑풍단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을 때, 그 사건은 대외적으로 기밀에 속했기에 엄승은 아직 모르고 있었
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민족들을 억누르고, 반역세력을 억누르고 있던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흑풍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우선 이민
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엄승 정도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것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승 자신이 그당시 힘을 상실해버린 흑풍단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엄승이 흑풍단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품기 시작한 것은 몽고원정 후부터였기에 그전에 흑풍단의 힘이 어떠했었는지
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정도나 강한가?"

"예. 하지만 다행히도 혈교는 있는대로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정파(正派)들을 견제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현
무림에서 최강의 세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파니까 말입니다. 물론 정파가
그렇게 강대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대한 적이 나타났을때는 얘기가 다르죠."

"좋은 지적이군. 그렇다면 혈교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그건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을 밖에 드러내기는 힘들겠지만 상대편의 중요한
인물들 몇 명을 암살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혈교는 사이한 술법을 잘 쓰고,
또 대단한 고수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엄승은 "암살"이라는 말에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자신의 저택에도 많
은 사병(私兵)들이 있었지만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인물이 이
집을 제집 드나들 듯 하고 있었지만 눈치채는 녀석은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
다. 이때 엄승의 표정을 보고 상대도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의 신변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교의 고수 20명이 물샐틈 없는 경
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험험…… 그런가?"

"예."

"이제 숨어있는 적은 다 말했나?"

"아닙니다. 그 외에 정파에서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뛰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정파의 문파들 중에서도 그런 야심을 가질만큼 강대한
문파는 몇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또 정파들은 지금 그런것에까지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본교에서 그들이 황궁에까지 신경을 돌리지 못하
게 공작 중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엄승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대인께서도 지켜주셔야 합니다. 무림의 일에는 당분간은
절대로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파에서는 대인
을 없애기 위해 궁리를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단 한동안은 정파에서 황궁
쪽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만 합니다. 무림과 황궁은 불가침의 영역이니 어지간
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정파에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줄 것입니다."

"알겠네. 그건 지켜주지."

"감사합니다. 대인."

"참,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예. 교주님의 전갈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지금 본교에서는 정파 무림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곳 저곳에서 무림인들이 칼부림을 할것이
니 좀 규모가 지나치다 싶으시더라도 진천왕의 반란 진압을 핑계로 묵인해 달
라고 하셨습니다. 또 정파 또한 본교와 싸운다고 황궁쪽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알겠네. 내 그렇게 하지. 교주에게 나중에 노부가 권세를 잡은 후 결코 섭섭
하지 않게 대우하겠다고 전해주게."

"감사합니다. 대인.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음산한 목소리가 작별인사를 해오자 엄승는 또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름달의 휘황한 광채 아래 드러나 있는 화려한 정원은 주인의 시선을 끌어잡
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엄승는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조카를 황위에 올려야 해. 그런 후…… 흐흐흐…… 내가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에게 반대할 만한 모든 세력을 없애
는게 우선이지. 우선은 군부(軍部)를 장악하고, 그 다음은 무림을…… 흐흐흐
……'

엄승의 그 투실투실한 뺨이 달빛에 희게 빛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
옥로조상풍수림 (玉露洞傷機構林)
무산무협 기소삼(重山基岐휈誘森)
강간파랑겸천용(江間波浪춽天酒)
새상풍운접 지음(基ヒ風雲接地陰)
총국양개타일루(業菊雨開他 ? 深)
고주일계고원심(孤命-繫故토,7,)
한의처처 최도척(索依歲鹿催71尺)
백제성고급모침(き帝城高?暮貼)
(옥 같은 이슬 맞아 단풍 숲 시드니
무산 무협 에는 가을 기운 쓸쓸하다.
강물의 파도 하늘로 용솟음치고
변방 위의 바람,구름 땅을 덮어 음산하다.

국화 더미 두 차례 피어 나니 지난날이 눈물겹고
외로운 배 한결같이 매어 둔 것은 고향 생각 때문이라.
겨을 옷 만드는 곳마다가위,자바삐 놀리고
백제성 저 높이 저녁 다듬이 소리 급하다. )
아련한 금음(率音)을 타고 쓸쓸한 노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
다. 기을의 흥취(秋興)7라는 제목의 이 시는 당나라의 대 시인 두보
의 걸작 중 하나다. 하지만 두보는 그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
고,젊었을 때부터 전쟁에 쫓겨 타지로 타지로 방황하다가 객사(容烈
한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들 중에는 고향을 그리는
서글픈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끝낸 매영인은 금(率)에서 살며시 손을 떼며 가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 사이
에서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시를 지은 두보의 심정이 자신과
같았뜰쳤 두보는 전쟁통에 쫓겨 이리저리 떠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나마도 없는 것이다.
새장 안에 갇힌 새. 어쩌떤 이것은 어려운 때에 태어난 여자들의 숙명
인지도몰랐다.
1년만 지나면 돌려보내 준다고 하지만 그걸 믿기는 힘들었다. 처음
마교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인질이 되었을 때는 1년 내에 돌아갈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여자 이기 전에 '무림인'이었기 때문이
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 에요, 언니 "
"너 또 집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마화 언니가 1년 후에는 돌려보내
준다고 했잖아. 건년은 금방 지나간단다. 조금만 참아라."

악양소소는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매영인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토닥
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매영인의 마음을
잡기 힘들었다.

"언니는 그 말을 믿어요? 이곳에 온 후에도 언니는 그 말을 믿느냐구
요. 척 봐도 곧 뚜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잖아요. 마
교와 정파 사이 에 전쟁이 벌어 진다떤 우리가 과연 이들에게 무슨 필
요가 있을까요? 또 필요가 있다고 해도 그건 필히 우리 가문에 해가
되는 것일 게 분명한데."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마. 최악의 경우에는·"
악양소소는 허리에 매여 있는 검 손잡이를 살며시,하지만 나중에
는 꼭 그러쥐었다.
"너는 무영문의 자랑스러운 제자잖니? 인내 심을 가시고 기다려."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똑똑. ..
"들어오세요."
할 수 있는 한 예의 에 어긋나지 않게 악양소소가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거의 생기(生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들의 미래
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태라면 자신들의 앞날
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물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마화가 웃음띤 얼굴
로 들어왔다.

"요즘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구나. 미안해."
"괜찮아요, 언니."
마화는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 가는 매영인의 얼굴을 측은한 듯이
바라봤다. 마화 또한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
해 상당히 고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마화도 짐작할 수 없었다. 예전엔,그러니까무
림인들, 정확하게 말하면 마교도들의 생리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분
명하게 말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그녀는 서서히
그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마화는 일부러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언니 ."
"그건 그렇고,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술이나 한잔 할까?"
"예."
그녀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심을 날려 버리기 위해 일부러
쾌활한 척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한결같이 밝은 미래와
또 과거의 즐거웠던 시간들을 재잘거렸지만, 현실을 직시한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리라. 마화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도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집을 풀지 않았다.

* * *

한편 그들과 마찬가지 처지에 놓인 여인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진영 공주. 과거 묵향을 혼내 주려다가 오히려 혼찌검이 났던 장본인
이다.
"여봐라,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그녀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그녀를 호위해 왔던 무장
은고개만 푹 숙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냐? 아니면 골육 상쟁(骨肉相爭)이라도 벌어진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왜 본녀가 이 별궁에 구금된 것이며,또 별궁을 포위
하고 있는 저 군사들은 또 무엇이냐?속 시원히 대답을 해 보거라."
공주가 계속 채근하자무장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2황야께서 모반을 꾀하셨다 하더이다.
폐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역심을 품고 1황야와 3황야,4황야를
암살하셨는데, 엄승 대감께서 이를 포착하시고 보호하시어 5황야만
은 생명을 부지하신 줄로 아옵니다. "
무장의 말에 공주는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사력을 다해 옆에 놓인 탁자에 몸을 의지하며 억지로나마 의연한
척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짙은 회의訓裵疑)가 드러나 있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모반을?"
공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무장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자
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하는수 없이 말을 이었다.
"예,그 때문에 지금 2황야를 지지하는 반역도의 무리들을 응징하기
위해 엄승 대감께서 각 장군들에게 격문(格文)을 돌리고 계십니다. "
"설마, 그럴 리가‥‥‥‥ 둘째 오라버니는 절대 모반 같은 것을 꾀할
분이 아니야. 네가 잘못 안 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공주 마마 가중스럽게도 2황야는 모반에 실패하자자
취를 감추었사온데 , 아마도 ‥‥‥‥
무장이 잠시 말을 끊자 공주는 그 뒷말을 채근했다.
"아마도?"
"아마도 2황야를 따르는 군부의 장군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옵니다. "
"그렇다면 곧 토벌 당하시겠구나 ‥‥‥‥"
공주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무장은 그녀의 말에 정직하게 답했다.
"아니옵니다,공주 마마. 지금 전 군사력은 진천왕의 반란에 투입되
어 있사옵니다. 그런 형편이기에 토벌군을 곧 편성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2황야의 반란이 성공할지도 모르옵니
다. 그 때문에 엄승 대감께서는 각 장군들에게 2황야 토벌의 격문을
보내고, 각지에서 추가로 군사를 모집하고 계십니다만, 어쩌면 천도
를 해야 할지도‥‥‥‥
무장의 말에 공주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천도? 천도라고 했느냐?사태가 그 정도로 위증하단 말이냐?"
"예."
마지못한 무장의 대답에 공주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심란한 마음
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마음속과는 너무
도 다르게 아름답게 빛나는 밤 하늘.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을 때는하 .
늘도 함께 찌푸려 줄 듯도 하건만, 하늘은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그
유치한 짓거리들은 자신의 구경거리도 안 된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
가고 있었다.
진영 공주는 한껏 밤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밤 하늘이 그 해괴한
무림의 고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누
구와도 타협하지 않으며,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 마교의 고
수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일행에게 위협이 닥칠 때마다
유유히 헤쳐 나갔던 그의 모습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제
일 마지막에 개맞듯이 맞은 것까지도‥‥‥
"괘씸한‥‥‥‥"
그녀의 중얼거림에 무사는 재빨리 귀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물러가거라." .
"예, 마마."
물러가는 무장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공주는 창문을 통해 궁
을 포위한 병사들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 사태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
고 있는지 병사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유추해 보았다. 병사들은 외부
의 침입자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외부로 도망
가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봐도 이번 일이 어떻게 돌
아가는 것인지 알수 있었다.
"그때는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했고, 또 돌아갈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구나 어쩌면 이다지도 의지할 만한 인물이 없을까?"
공주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한탄에 답하는 자신감
넘치는목소리가 있었다.
"하하하, 이 세상에 널린 것이 대송의 백성들인데, 왜 사람이 없다고
탓하시옵니까?'
그 목소리는 남자답지 않게 맑고 청아했다. 하지만 공주는 외간 남
자가자신의 처소에 잠입했다는 것에 놀라우선 몸을 사렸다. 곧 정신
을 차린 그녀는 창 밖을 훑어봤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컸기에
밖을 지키고 있는 군졸들이 눈치챘을까 하는 우려감 때문이었다.
"누구냐?"
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정체 불명의 괴한은그 목
소리에 답하듯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야행(야행을을 하는 주제에 눈
에 잘 뛰는 밝은 청의 를 입은 준수한 사내였다 .사내는 천천히
공주의 앞에 부복했다.
"공주마마를 죄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상대의 준수한 외모나 복장, 그리고 깍듯한 예의를 보고 그가 도저
히 악한으로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공주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상대
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소인은 수황련의 우호법 왕길이라 하옵니다."
왕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푸른 옥으로 세밀하게 용의 무늬를
아로새긴 자그마한 패를 품속에서 꺼냈다 수라는 웅혼한 필
치의 글자가 가운데 쓰인 아름다운 물건이었는데, 그는 것을 공주
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부복한 채 자신의 머리맡에 양손으로 바쳤다.
그패를 잠시 바라본 공주는 황궁 내에서 비밀리에 구전하는
수황련으 표식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재차 물었다.
"수황련이라 했느냐?"
"예."
깊숙이 부복하는 왕길을 바라보며 공주는 사내의 말을 믿어야 하
나,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엇다. 수황련은 황가를 지
키는 비밀 수호 단체로써 태조께서 창건하셨다고 알려져 있었
다. 하지만 여태껏 수황련의활동은 미미했고, 그나마 1백 년쯤 전부
터는 아예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왕련의 무사가 지금, 그것도 자시느이 앞에 모습
을 드러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아무리 패가 있다고 해도 그것 어느
정도 그 모양에 대해 주워 들은 것만 있다면 누구든지 모조품을 만들
수 있고 , 또 수황련이 모습을 감춘 후1백 년동안 그 누구도 그패를
구경하지 못했다.
"공주 마마께서 속하를 의심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옵니다. 수황련
은 황가를 지키기 위해 존속하는 단체.요 근래에는 태평세월이었기
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사오나, 작금의 정세를 판단해 보건대.
속하들은 도저히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고 중지를 모았사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대에게 본녀가 한 가지 묻겠다."
"예."
"본녀는 구중궁궐 에 갇혀 있는 처지. 현 상황이 어찌 돌아
가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대가 속 시원히 답해 보라."
공주의 질문에 왈길은 잠시의 지체도 하지 않고 답했다.여기서 망
설이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면 공주가 자신을 의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 먼저 간신 업승이 자신의 혈족을 황위에 올릴 욕심으로 대부분
의 황자전하들을 암살했사옵니다. 이때 속하들도 포착하지 못
한 제3의 세력이 2황야 전하를 탈출시켰사온데. 그로 인해 혈족간의
쟁투가 벌어지려 하옵니다."
왕길의 입에서 혹시나 하고 추리하던 줄거리가 그대로 튀어 나오자
정작 놀란 것은 공주였다.
"그........ 그대의 말이 사실인가?"
"추호도 거짓이 없나이다. 태조 폐하의 뜻은 대송의 번영과 황
실의 융성. 속하들은 더 이상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
고 행동을 개시 하였사옵니다."
공주는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왕길의 등짝을 얄미운 듯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노기를 머금은 눈에서는 곧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
다. 왕길이 이렇듯 정곡을 찔러 말하지 않아도, 공주는 현재 돌아가는
궁내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충'이럴 것이
다' 하고 생각하는 것과 상대의 입에서 확실한 답을 듣는 것은 엄청
난 차이가 있다. 아마도 호위 무장에게서 대력적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공주는 상대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공주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형게간이 골
육 상쟁은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끼여있다는 점이 운이 없을 뿐이었다.
공주는 온 정신을 쏟아 마음을 바로잡으며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
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더욱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짖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예, 2황야께서는 아마도 엄승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때 그분께서 마음 편히 싸우시려면 엄승의 수중에 인질이
없어야 하옵니다. 다른 분들께옵서도 허락하셨사오니 마마께서
도........"
왕길은 의도적으로 뒷말을 살짝 흐리게 말했다. 오리혀 그편이 더
욱 상대에게 호소력이 클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고, 대충 말해도 못 알
아들을 만큼 멍청한 공주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본녀가 갈 곳은?"
"예, 정석대로라면 2황야 전하께로 모셔야 하겠으나, 지금 전하의 행
방이 묘연하시기에 행적이 밝혀질 때까지는 저희들이 모셔야만 하겠
사옵니다. 시간이 별로 없사옵니다. 서둘러 주기시를......."
"잠시 기다리거라."
공주는 돌아서며 습관적으로 궁녀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는 재빨리 자신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억눌렀다. 이런
일일수록 비밀은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그녀는 궁녀를 부르는 대신 자신이 직접 짐을 꾸렀다. 하지만 그녀
혼자 가야 하는 만큼 그 분량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패물들 중에서 몇몇 아끼던 것들만을 챙겨 넣었다.
왕길은 그녀가 자그마한 주머니 속에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몇 가지
물건들을 서둘러 집어 넣는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보닥 천천히 몸
을 일으켜 창 밖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왕길이 속한 단체는
실패를 용서치 않는 강대한 단체. 그렇기에 왕길은 더욱 조심스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공하기 위햐여........
어두운 밖을 관찰하기 위해 왕길은 기를 끌어모아 시력을 돋우
었고, 그이 눈동자에서는 잠시자만 은근한 마기가 살짝 풍겨 나왔다.
왕길은 눈에 저편에서 자신의 신호를 기다리는 수하들의 모습이 어
렴풋이 보였다.
몇몇 황족들의 실종은 당연히 엄승 나으리에 의해 비밀리에 처리되
었다. 그따위 사실을 발표해 봐야 자신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이란 곳 자체가 존귀하신 분들이 사는 곳이기에 그 비
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중신들이라도" 황후 마마께서는 폐하의 승하 이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슬퍼하시어 만나 뵐 수 없다."는 한마디면 해결
되었다.
그 말을 떠들어 대는 놈들이 엄승의 수하들이었기에 의심을 품는
인물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감히 그것을 확인하려고 모험
을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지체 높은 집안의 안주인을 외간 남자가
만나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일국의 황족이 싫다는데도 만나려도 드
는 간 큰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든 고관 대작들은 저마다 어느 쪽에 가담하는 편이 좋을지 궁리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황위를 찬탈하다시피 한 엄승 나으리는
재빨리 자신이 수중에 넣은 암행 감찰 기관인 금위위를 십분 활용해
서 반대 세력 축출에 전력을 기울이는 형편이었기에 딴 곳에 한눈 팔
정신은 더욱 없었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어느 정도 필요에 의해 정보
수집 활동을 하던 무림이라는, 고도의 무예를 쌓은 위험 인물들이 모
여 있는 집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틈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기습에기습

모종의 기습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회의가 한창 진행되는 중 뛰어
들어온 흑의인이 급보를 전했다.
"홍진막주에게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섬서 분타를 향해 무
림인으로 보이는 여섯 개 집단, 6천여 명이 이동중이랍니다. 상대방
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접근중이며, 그 선발대 2천이 빠르면 일주일
후 , 늦어도 10일 후에는 도착할 것이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
명해 주십시오!"
보고를 들은 상관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속마음은 들끓기
시작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무슨 일이란 말인가?상대가 행동을 개
시한 이상,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흑의인의 말이 끝나자
긴탁자의 끝에 앉아 있던 묵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사의 생각은?"
설무지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원래 계획대로 한다면 섬서 분타를 버려야 옳겠습지요. 어디까지
나 섬서 분타는 미끼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
빠를니다. 그 집단이 정파의 정예라면 섬서 분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너무 빨리 섬서 분타가 무너진다면 장인걸이 눈치채겠지요."
묵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어찌자는 것이지?"
"지원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섬서 분타를 지켜낼
수 있는‥‥‥ 총타 공격은 늦어도 15일 후에는 시작됩니다. 공격이 시
작되기 전까지 섬서 분타의 알맹이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눈
치채지 못하게 해야만 합니다. "
군사의 말을 듣고 있던 만묘 서생 진천악(진천악)이 수염을 쓰다듬
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진천악은 과거 마교 수입의 5할 이상
을 거둬 들이던 만악궁을 책임졌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
다. 그리고 교주 명령에 의해 묵향의 세력에 합류하면서 서열 10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전력(전력)을 투입해야
하고, 정작 총타를 공격할 때 그 전력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원래 계
획대로 섬서 분타는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흥, 그 말도 옳군."
묵향의 어정정한 대답에 설무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무지가 막
뭔가 말하려 할 때 다혈질인 천리 독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
소리에는 노기가 섞여 있었다.
"지금은 섬서 분타를 버릴 때가 아닙니다. 섬서 분타가 무너진다면
수하들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습니다. 마교가 1천 년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총단이 무너진 적
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천리 독행의 말에 만묘서생이 반박했다.
"그거야 총단이 천험의 요새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섬서 분타는
요새도 뭣도 아닙니다 그냥 날파리들을 물러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지 않습니까? 접근중인 무림인이야 보나마나 장인걸의 꽝에 속
아 버린 멍청한 정파녀석들이겠죠.
아마도 정파 놈들은 장인결의 꾕에 자극받아 엄선한 정예를투입했
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큰일을 앞두고 구태여 백도의 정예와 드잡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총타의 전력은 엄청납니다. 전력을 분
산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됨니다. "
만묘 서생의 말을 듣고 있던 고루 혈마 옥관패(옥관패)가 절충안을
내놨다.
"꼭 그들과 정면 충돌을 벌일 필요는 없겠지만,놈들에게 너무 손쉽
게 무너지는 것도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교 분타들의 고수들
이라면 상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최소한 1천여 명은 족히 모을 수 있
을 겁니다. 그들을투입하는 것이‥‥‥"
하지만 옥관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무지가 반박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장인걸의
끄나풀이 섞여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전 마교 분타들
에 금족령을 내려놨는데,그걸 풀 수는 없습니다. 정파에서 정예를 투
입했다고 해도 그늘들은 맹주도 없는 상태에서 모인,우두머리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죠. 그들을 막기 위해 분타의 힘까지 빌린다면, 장
인걸은 우리들의 주력(주력)이 어디에 있는지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
다. "
한참 벌어지는 수하들의 말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던 묵향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들은 말다툼을 중지하고 묵향을 바라봤다. 어쨌거나
최후의 결정은 우두머리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 * *

섬서 분타로부터 1백 리(약47킬로미테 정도 떨어진 허름한 관제묘,
바로 이곳이 섬서 분타를 괴멸시키기 위해 투입된 정파의 수뇌부들
이 집결 장소로 잡은 곳이었다. 이들은 장인 걸측에서 퍼뜨린 거짓 정
보에 속아서 집결하게 된 몇몇 정파에서 차출된 정예 무사들이었다.
다섯 개 문파에서 파견된 이들은 각각 그들의 문파를 출발하여 비밀
리에 이동해 이곳에서 합류한 것이다.
"이 정보는 정확한가요?"
밝은 빛깔의 청의(청의)를 입은 여인이 너무 자세하게 그려져 있기
에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지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여인
의 말에 황의(황의)를 입은 사내가 반박했다
"하하하, 이(이) 소저는 본파의 능력을 너무 얕보시는 듯합니다. 이
지도는본파에서 매우 고생하여 입수한 것이오."
"하지만 이건 너무 자세한 것 아닌가요?아무리 정보 능력이 우수하
다 해도, 이 정도로 정확한 지도와 자료라면‥‥‥‥함정일 가능성도 생
각할수 있죠."
이 소저의 말에 청의(청의)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만으로 함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죠. 이 지도를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외부는 이상하리만큼 상세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내
부는 자세한 것 같지만 필요한 것은 다 빠져 있다, 이 말이오. 그리고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이 진세에 대한 자료를 보면, 살상용
진법이 아니고 사람을 현혹시켜 내부로 들어가는 것만을 막는다고
되어 있소.
살상용 진법이 아닌 만큼 공격해 들어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리한
것 같이 보이는 게 사실이오. 하지만 그 말은 안에서 밖으로 공격해
나을 때도 진세가 걸리적거리지 않아서 매우 빠른 공격이 가능하다
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 진세를 사용하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 단 한
가지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소. 안에 엄청난 힘이 감춰져 있을 때!즉
내부의 고수들이 언제든지 밖으로 돌격해 나가는 데는 최적의 진법
이라고 할 수 있소."
청의를 입은 사내가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끊자,또 다른 청의의 사
내가 독촉했다.
"그렇다면?"
"여기 자료를 보면 외부에 거의 4천에 가까운 수비 무사와 하인, 하
녀들이 거주하고 있소. 또 곳곳에 서 있는 망루(망루) 덕분에 기습하
기도 까다롭죠. 여기저기 보루(보루 .화살따위를 쏠 수 있는작은 요새)
의 세밀한 구조를 따져 보면, 이건 흡사 무림의 문파가 아닌 병영을
그려 놓은 것 같소. 이걸 보면 느끼는 것 없소? 이 각각의 보루들은
상호 협조하여 어떤 방향에서 적이 쳐 들어오더라도 화살이나 쇠뇌를
날릴 수 있소. 그 말은‥‥‥‥"
청의를 입은 남자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이 소저가 뭔가 깨달았다
는 듯 탄성을 올리며 그 말을 이었다.
"아! 외곽을 지키는 무사들 가운데는 고수가 거의 없다는 말이 되겠
군요."
"바로 그거요, 이 소저. 이 자료들은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소. 정작
중요한 내부는 자세하게 안 나와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잘만 이용
한다면 상대의 외곽 방어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
런데 문제는 외곽 방어선을 돌파한 후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
는 내부에 어느 정도 수준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요. 여기 있는 자료에 의하면 마교의 정예라고 되어 있소. 정예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수준이죠? 이 자료를 입수하신 언소협?"
언 소협이라고불린 황의를 입은 인물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정예라고만 한다면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죠. 마교가 자랑하는자성
만마대가 포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염왕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소."
"만약에 염왕대가 있다면 이 공격은 너무 무모해요. 염왕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수라 도제 어르신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이 소저의 말에 모두 수긍하는 눈치 였다. 염왕대는 2천여 고수들로
이루어진 마교의 최고 정예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보다 윗
줄에 놓이는 전력(전력)을 지닌 단체들도 있지만 무림에 공공연히 돌
아다니며 마교의 강대한 힘을 과시한 것은 염왕대까지가 한계였다.
그렇기에 여기에 모인 이들도 염왕대를 최악의 상황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너무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자 청의를 입은 인물이 주의를 환기
시키려고 애썼다.
"자자, 신중하게 생각해 봅시다. 본인은 염왕대가 이곳에 있을 가능
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염왕대를 거느리는 염왕 적자 한
중평은 마교 서열 8위의 뛰어난 고수죠. 그런 인물이 이런 분타에 얽
매여 있을 리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서열 9위의 삼면.인마가 여
기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구요. 있다면 자성 만마대의 일개 지단정도가
고작이겠죠.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본인도 육 소협과 같은 의견이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생각
하오. 이 일대 모든 마교의 혈겁이 바로 이곳 섬서 분타를 기지로
해서 벌어지고 있소. 하지만 혈겁을 당한 곳은 모두 다 작은 군소 방
파들뿐이토. 그 말은 이곳에 그렇게 강한 전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본
인은 생각하고 있소. 아마 있다고 한다면 자성 만마대 1천여 명 정도
일 것이라는 게 가장 신빙성 있은 추측이 아닐까요?"
청의를 입은 사내의 말에 백의를 입은 준수한 얼굴의 사내가 고개
를끄덕였다.
"본인의 의견도 장소협과 같소."
상당수가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는 듯하자, 육 소협은 좌중을 훑어
본후 말했다.
"간단하게 탐색전(탐색전)을 벌여 봅시다. 상대의 대응을 보고 결정
하는 게 좋겠소. 적의 힘이 생각 외로 강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수라
도제 어르신과 합류하기로 하죠."
널찍하게 발이 쳐 있는 실내. 그 덕분에 발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발 뒤편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부복한 채 공손히 뭔가를 아뢰고 있는 사내. 발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의 반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뭐라고요?"
발 속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면서,짜증을 더해
가자 사내는 식은땀을 흘렸다. 발 뒤편의 여인은 매우무서운 사람이
었기 때문이다
"예, 그것이‥‥‥‥ 젊은 것들이 공명심(공명심)에 눈이 멀어 가지고."
"아이고, 머리야‥‥‥‥"
발 뒤쪽에서는한동안아무런 기척이 없더니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묵향이 그곳에 없는 것은 분명하겠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사내는 머리를 더욱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
했다.
"옛!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는 파악하기 힘들지만,대략 세 군데
정도로 압축됩니다. 그에게 연락을 보낼까요?"
"아니, 연락을 보낼 필요는 없어요. 묵향이 섬서 분타에 없다는 것이
그나마 그 녀석들에게 다행스런 일이군요."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건지 하명해 주십시오."
"지금본문에 여력(여력)이 좀 있나요,?"
"에‥‥‥‥그러니까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3할은 지금 군부
의 동향을 감시하는 중이고 1할은 묵향을, 1할은 장인걸,3할은 혈교,
남은 1할이 무림의 대략적인 정보를 모으고 있죠. 그 덕분에 이번 일
을 알아내는 게 늦었습니다. "
"여력이 거의 만다‥‥‥ 그렇다면, 그냥 되는 대로 놔 두세요. 그런
꼬맹이들 몇 죽는다고 해서 본문에 영향이 미치는 것은 없으니까 말
이죠. 장인걸이 하는 짓에 장단을 맞춰서 무림맹을 자극하고 서문 세
가의 세력을 소모시킬 생각이었는데‥‥‥
멍청한 놈들! 마교가 요즘 원체 조용하다 보니 실력도 없는 것들까지
마교를 우습게 보는 게 문제예요. 수라 도제와 .합류해야 할 놈들이,
그의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앞서 가서는 섬서 분타를 공격하려고
하다니‥‥‥‥ 그런 놈들은 죽어도 싸요!그건 그렇고 수라 도제는?"
"예,수라 도제는 서문 세가의 정예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무림맹 및 9
파 1방,그리고 나머지 4대 세가에서 파견한 주력 3천과 합류하여 비
밀리에 이동중입니다. 물론 수라 도제가 이번 정사 대전(정사대전)에
서 대승을 거두기를 무림맹은 원하지 않습죠. 그 때문에 뛰어난 고수
들의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수라 도제는 젊은 것들을 기다리다가 그들이 앞서 갔다는 것을 눈
치채고 뒤늦게 이동을 시작했기에, 섬서 분타에는 15일쯤 후에 도착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
"15일 후라‥‥‥ 그때가 기대되는군요. 묵향이 과연 어떤 식으로 대
처할지 말이에요. 참!요즘 혈교의 동태는 어떤가요?"
"무림맹에서는 초기에 파견한 2천여 명의 정예 무사 외에도 3천여
명을 추가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지휘자는 공동파의 장문인
옥진호지요. 옥진호는 이번 혈교와의 전투를 무림 맹주에 즉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각 문파에서 뛰어난
고수들을 지원받아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는 것이죠. 벌써 3백이
넘는 강시를 없애 버렸고,6백여 명의 혈교도들을 주살(주살)했다고
합니다. "
총관은 이 보고를 듣고 상관이 혹시나 짜증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안에서 들려 온반응은 정반대였다.
"호오,그 녀석도 꽤 의욕적으로 덤비기 시작했군요. 그런 식으로 좀
더 공을 쌓는다면,맹주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죠,호호호."
발 뒤편에서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오자,사내는 미간을 약간 찌
푸리며 반박했다.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분명 섬서 분타는 젊은 것들이 만만
히 볼 상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보에 의하면 그곳은 주력이 빠져 나
간 빛 좋은 개살구고, 덕분에 수라 도제는 정사 대전의 초반을 압승으
로 장식하며 명성을 높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옥진호 또한 지금
상태로 나간다면 차곡차곡 공을 쌓게 되겠죠. 어느 쪽도 문주님께는
불리한 전개입니다. "
"걱정하지 말아요. 섬서 분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
까 말이에요. 총관이 생각하듯 마교라는 단체는 그렇게 물컹하지 않
아요. 그건 그렇고 다음 수(수)는 어떤 게 좋을까? 호호호."

* * *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희 설약벽(설약벽)의 물음에도 상대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음희는 상대가 입
을 열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지옥 혈귀! 이 무서운 명호의 주인공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마교의 검도 고수(검도고수) 철진악(철
진악)이었다 천진악은 오랜 옛날부터 그녀의 상관이었고, 지금도 그
러했기에 그녀는 끈기 있게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다.
1각(1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냉막해 보이는 그의 입술을 뚫고
얕은 한숨과 함께 억양이 없는 무뚝뚝한 말이 흘러나왔다.
"매복 기습을 하기로 하지. 지금 타에 있는 정예는 처음부터 주둔하
던 염왕대 1개 대(대)와 우리가 데려온 2개 대뿐이다 그 인원으로 방
어만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소녀가 이끌까요?'
음희의 제안에 천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본좌가 하기로 하지. 그대는 상황을 잘 살피고 있다가 안에서
치고 나오도록!"
지옥 혈귀 천진악과 음희 설약벽은 과거 마교가 분열되기 전에도
정파 문도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실력 있는 고수들이다. 하
지만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고 또 그들에게 3백 명의 염왕대가
있다고 하지만, 수라 도제가 거느린 6천에 달하는 적을 지금의 인원
으로 완전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염왕대 2개 대와 함
께 파견되어 온 것은 섬서 분타가 무너지는 시간을 좀더 늦추기 위함
이었지 적의 섬멸은 바라지도 않았다.
"자네는 여기에서 음희를 돕도록."
천진악의 지시를 받은 제13대주 곽철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옛."
염왕대 제13대주 곽철은 제5대주 염상(염란)과 제9대주 왕정왕7방
을 이끌고 나가는 천진악의 믿음직스러운 등판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곽철은 한 시진(2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지휘하던 섬서 분타를
향해 6천의 적이 이동중이라는사실때문에 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는 우두머리가 아니었다.자신과 동급
의 인물 둘과 상관 둘이 한 시진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좀더 홀가분한 마음으로싸울수 있게 된 것이다.

정사 대전

정사 대전의 서막은 정파의 선발대 2천이 섬서 분타를 기습한 것으
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기습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그들
이 올 걸 알고 준비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진하랏."
군데군데 찢어진 청의를 입은 젊은이가 검을 휘두르며 수하들을 독
려했지만,그에 응하는자는 거의 없었다. 매우 교묘하게 위치를 선정
하여 어떤 곳에서 적이 침입해 오더라도 화살이나 연노(연노)를 발사
할 수 있게 구축된 보루들 때문이었다.
연노에 장착되는 화살은 길이가 짧고 가늘기 때문에 강노(강노)처
럼 사정 거리가 길지도, 또 파괴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수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 탓에 침입자들은 거의 움직
이기가 힘들 정도로 화살 세례를 받고 있었다.
폭포처럼 퍼부어 대는 화살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
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기습 전에 수집한 정보로 모두
널찍한 나무 방패를 하나씩 구해 둔 덕분이었다. 무림인들은 원래 이
렇게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간밤에 각자 나무를
잘라서둘러 만든 것이 이렇듯 도움이 되고 있었다.
급조(급조)한 방패라서 방어력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뛰어난 무공
을 지니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 정도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각자가 들
고 있는 방패에는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수십 개씩의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와 같은 형상이었다.
청의를 입은 젊은이 장 소협의 독려에 힘입어 수하들은 수십 개의
화살이 박힌 방패를 의지하여 천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
고 장 소협이 거느린 선발대를 뒤따라 각각의 젊은이들이 거느리는
무사들이 속속 진격했다.
"적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모두 힘을 내라! 이보게 육 소협!자네는
오른편 보루를!그리고 이 소저는 왼편 보루를 맡아 주시오. 자,돌격
하라."
공격자들은 각 문파의 젊은 기재들인 만큼 왕성한 혈기로 밀어 붙
이며 전투를 점차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쏟아지는 화살 덕
분에 뛰어난 고수가 아닌 자들은 운신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적을 압박해 들어갔다.
공격자들은 각 보루에서 엄청난 화살비가쏟아지는 것에 대해 오히
려 마음을 놓고 있었다. 마교란 원래 힘을 숭상하는 단순 무식한 단체
였다. 교묘한 진세나 모략을 잘 모르는 단체. 그렇기에 그들에게 강력
한 힘을 지닌 조직이 있다면 초반부터 그들을 투입해 왔을 것이 분명
했다. 그럼으로서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고,또 적에게는 더 큰 피해를
입히려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 거의 2각(37분)이 지나도록 상대는 각
각의 보루를 중심으로 완강한 저항을 하고.있을 뿐,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서서히 밀어 붙이던 공격자
들은 이제는 아예 총력을 기울여 돌진해 들어갔다. 백도의 젊은이들
이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자 두텁게 보이던 각 보루의 문짝이 파괴되
고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
아지던 화살의 양도 점차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쩝,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이제 어떻게 하지?)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방의 방패에다가 일부러 화살을 쏘던 황의를
입은 인물이 전음(전음)으로 역시 옆에서 화살을 날리고 있는 동료에
게 물었다. 이곳 섬서 분타의 외곽 방어대는 청, 황, 백,흑색의 네 가
지 색상의 옷을 입었다. 각 색깔에 따라 방어하는 방위(방위)가 달랐
기에 유사시에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또 자신들이 맡은 영역에
서 이탈하는 것을 파악하기 쉬웠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기회를 봐서 슬쩍 후퇴해야지. 그건 그
렇고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위쪽에서는 지시가 없는 거지?)
(그러게 말일세. 설마 여기서 죽으라는 것은 아닐 테지?)
그는 자신들을 이곳 섬서 분타에 밀정으로 박아놓고는 이 위급한
때에 아무런 연락도 없는 얄미운 상관에 대해 욕지거리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이때 옆에서 동료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말을 건네
왔기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봐,저 녀석 좀보라구!)
동료가 가리키는 곳에는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품은 듯 은근슬쩍
힘에 밀리는 척 후퇴하는 놈이 있었다. 그 황의인은 세 백도인의 공격
을 여유 있게 막아 내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뒤로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저놈은 어디에서 들어온 놈이지?)
(제길!알 게 뭐야. 지금 남 걱정하게 생겼어?지시가 아직도 없는 걸
보면 적당히 패잔병에 섞여서 이동하라는 말이겠지 뭐. 자,빨리 후퇴
하세. 어쨌든 여기서 살아 남아야 마교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지 알 거 아닌가?)
황의인이 화살을 하나씩 날리면서 슬슬 엉덩이를 뒤로 빼기 시작했
을 때,그들은 갑자기 전세(전세)가 뒤집히는 경이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상대의 주력이 섬서 분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후에야 천진악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원래 이런 식으로 머리를 써야하는 전술을 마교
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건 상대보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
에 있을 때 일이었다.
천진악의 명령에 따라 2백여 명의 혹의 인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안으로 기어들려고 발악을 하는 백도인들의 됫통수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곧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면서 지독한 살
육전이 벌어졌다. 마침내 정파의 젊은 공격 자들이 우려하던 일,즉 마
교 쪽에서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해 왔던 것이다.
이제 공격 자들은 자신들이 보루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항아리와 같
은 형상으로 개척해 놓은 통로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앞은 진세, 좌우
는 상대방의 보루, 뒤에는 악귀와도 갚은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 화
살이 간간이 쏟아지는 가운데 벌어진 육박전은 처절했다. 공격자들
은 자신들의 뒤통수를 향해 들이닥치는 상대의 공격 때문에 처음의
계획대로 후퇴를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자고 발악하는 것뿐
이었다.
거의 2각에 걸친 접전이 벌어진 후에 음희 설약벽이 거느리는 염왕
대 제13대가 가세했다. 그들은 백도인들에게는 장벽이었던 진세를
매우 간단하게 헤치고 밖으로 돌격해 나왔다. 완전히 포위되어 사기
는 땅에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발악을 하던 백도인들의
힘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물론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상대방이 거느린 고수의 수가 3백
여 명 정도뿐이라는 것이었다. 힘을 뭉쳐 한곳을 뚫고 나간다면, 일부
는 살아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두 번에 걸쳐
앞뒤로 기습을 당한 초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눈에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대부분이 이런 대규모 살상극에 익숙하지 않은 애
송이들이라는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휘 체계
를 유지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우왕좌왕하며 발악을 하다가
죽어 갈 뿐이었다.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모든 게 문주님의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
허겁지겁 총관이 달려 들어오며 외치자, 실내의 화초들을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고 있던 옥화 무제 매향옥은 살짝 미간에 주름살을 지
었다. 하지만 평소에 무게 있는 행동을 하던 총관이 저렇게 허둥대는
것을 보면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점잖치 못한
행동에 주의를 주지는 않고 천천히 발 뒤편에 가 앉으면서 약간 짜증
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
"뭐가 말인가요?'
옥화 무제가 자리에 앉자 총관은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문주님의 예상대로 정파의 선발대는 전멸했습니다!그 소식을 접한
수라 도제는 진격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
예상 외의 정보였다. 옥화 무제는 묵향이 없는 섬서 분타를 접수하
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고 상당한 피해를 보리라고 예측했다. 이런 식
으로 초전부터 섬서 분타 쪽이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전멸?섬서 분타의 피해는?'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사상자가 5백여 명 정도라고‥‥‥
"사상자가 5백뿐이라고?본녀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예상을 한 적은
없어요. 최소한 그 배는 넘는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묵향은 도대체 섬서 분타에 어느 정도의 전력을 놔 두고 간
거죠?"
"예,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천진악과 설약벽, 그리고 3백여 명의
흑의 고수들이 접전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
"음‥‥‥‥그게 묵향이 섬서 분타에 남겨 둔 전력의 전부라고 해도,그
로서는 상당히 무리를 한 게 분명하군요. 천진악과설약벽. 그리고 그
흑의 고수들은 아마도 천랑대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염왕대일 가능
성이 크겠죠?'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첩자에게 그 부분을 더욱 자세히 알아
보라고 지시할까요?'
"아니,그럴 필요는 없어요. 염왕대만 해도 본녀로서는 상상 이상이
니까 말이에요. 묵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그렇게
큰 전력을 뺀다면 이제 벌어질 총단 공격에 커다란 틈이 생길지도 모
르는데‥‥‥‥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옥화 무제가 약간은 짜증스럽게
말하자,총관은 자신의 추측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아마도 그 정도 전력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아닐까요?'
"글쎄요‥‥‥‥
섬서 분타가 정사 대전의 초전에서 능력 이상의 대승을 거두자,그
에 충격을 받은 정파는 두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만반의 대
비를 했다. 섬서 분타가 웬만한 무림의 분타들과 달리 의외로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각종 방어 장비들이 현지의
대장간에서 관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제작되어 정파에 납
품되었다
방어 장비라고 해 봐야 철판을 덧댄 대형 방패라든지, 얄팍한 갑옷
따위가 전부였지 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무림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만큼 정 파에서는 수천의 정예 무사가 모여 있음이 확실
하다고 생각되는 마교의 전진 기지 섬서 분타를 우선적으로 초토화
시키는 것이 이번 정사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
었다.
정파에서 자신들의 계획대로 섬서 분타 쪽에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
자 신이 난 쪽은 마교 총단의 수뇌부들이었다. 이제 어부지리(어부지
리)를 남에게 뺏기지 않도록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
문이다.
"상황은 대단히 고무적 입니다, 교주님 ."
마교 총단의 대 회의실 중간에 놓인 탁자에는 세세하게 그려진 중
원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지도 위에는 빽빽하게 뭔가가 꼽혀 있었
다 혁무상 장로는 길쭉한 지휘봉을 들고 신이 나서 지도의 이곳저곳
을 가리키며 떠들어 댔다.
"정사 대전의 초반을 압승으로 장식한 섬서 분타를 없애기 위해 정
파의 각 문파들은 숨겨 뒀던 정예 무사들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비영
대의 최신 정보에 따르면 무당(무당), 화산(화산), 당문(당문), 종남(종
남)에서 5백여 명의 정예를 추가로 차출하여 파견했습니다. 그들의
전진 속도가 엄청난 것으로 볼 때 6일 후에는 수라 도제의 주력과 합
류할 것입니다. "
"좋아,자네는 이번 회전에서 묵향과 정파가 공멸(공멸)할 수 있도록
최선을다해 보게나."
"예, 지금 각지에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이간책들을 동원하고 있
습니다. 정파는 섬서 분타를 본교에서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건설한
교두보(교두보)라고 굳게 믿고 있죠. 게다가 묵향이 초전을 대승으로
장식했으니, 그곳에 본교의 중원 침략을 위한 정예가 주둔중이라는
것을 공포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일은 더욱 쉽게 풀리고 있습니
다. 다만 한 가지‥‥‥‥
"뭔가?'
"예, 구휘의 무덤에 꼬인 날파리들은 이번 정사 대전에서 빠졌다는
게 홈이지요. 그들은 지금 구휘의 무덤을 두고 심각한 대결 구도를 취
하고 있기에 정사 대전 쪽으로 신경쓸 겨를이 없는 모양입니다. "
"크크크, 괜찮아. 송사리 몇 마리쯤 빠져 나갔다 해도 대어(대청.)만
놓치지 않으면 상관없지. 이제 중원이 눈앞에 다가온고 있군. 지금이
중요한 때야. 이 기회를 헛되이 넘기면 두고두고후회하게 되겠지. 자
네의 의견은 어떤가?'
"예,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속하의 얕은 생각으로는 이때를 이용
해서 본교의 고수들을 선동하여 마교 천하를 이룩하기 위한 성전(성
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무림 통일은 본교 무사들의 꿈이니 만
큼,현 상황이 얼마나 본교에 유리한지를 잘 설명한다면 원로원도 지
지해 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본교 내부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여 내부로는 더욱
단합을 굳건히 하고, 외부로는 본교가 중원을 제패할 수 있는 주춧돌
을 놓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현재 중립을 지키는 세력들을 충동질하
여 묵향을 더욱 압박하면서,그에 응하지 않는 단체들은 없애 버려야
하지요. 물론 이것은 묵향이 한 짓이라는 충분한 증거 또한 남겨 두어
야 할 것입니다. "
"좋은 생각이야. 그대들의 의견은 어떤가?'
장인걸의 말에 수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속하들도 같은 의견입니다!"
어느 정도 소란이 가라앉자 혁무상은 말을 이었다
'교내의 여론이 일치되면 우선적으로 몇몇 원로원의 노 고수들을 교
외로 내보내야 합니다. "
"응? 원로원은 왜 ?'
"물론 독수 마제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죠. 본교의 모든 이목이 무림
통일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혈수라(혈수라)와 지령 마객(지령마객)에
게 각각 임무를 주어 교외로 보내는 겁니다. 본교 최대의 숙원을 이루
려는 성전이 선언된 마당에 원로원 전체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
수 몇 명만을 쓰겠다는 데, 독수 마제도 반대할 수는 없겠죠. 그들이
가버린 후 홀로 남은 독수 마제를‥‥‥‥ 크흐흐흐흐."
혁무상은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리며 음흥한 웃음을 터뜨렸다. 물
론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멍청이는 없었기에 이곳에 모인 고수들
도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장인걸을 실질적인 힘의 중심으로
마도 천하의 꿈을 이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
있는 수하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장인걸은 찬찬히 살펴봤다. 구양
운,소무면, 여진,장영길,진란‥‥
핵심 고수들의 표정을 훑어 가던 그의 시선은 혁무상의 얼굴에서
멈췄다. 혁무상은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일이 되어 가자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교주에게 칭찬을 받은 데다가 동료 고수들도 자신의
의견을 지지했기에,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현재 혁무상은 그만큼 장인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그
래서 그런지 장인걸의 얼굴은 다른 수하들처럼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혁무상을 향한 그의 시선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투와 계책



수천 구도 넘는 시신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붉은 놀 덕분에
대자연조차도 그들의 주검에 피눈물을 흘려 주는 듯 보일 정도였다.
황혼을 타고 시체를 배불리 업아 먹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등지로
날아가는 것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내. 저녁놀의 빛을 받아서
그런지 사내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벌어
진 이틀간에 걸친 격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오늘이 그 날이군."
검붉은 피가 엉켜 붙어 산뜻하던 청의가 여기저기 찢어진 흑의가
다 되어 있었지만,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믿음직스러운 사내
의 넓은 등을 보며 웃음 짓던 음희는 시선을 돌려 멀리 포진한 정파의
본거지를 바라보며 그의 혼자말에 대꾸했다.
"예, 오늘이죠."
하지만 그녀가 애써 생기 있게 보이려 해도 전신에서 퍼져 나토는
피로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내는 잠시 할말을 잊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음희와 세 명의 수하 무사들을 자랑스러운 듯 바라봤다. 모두 몰
골이 말이 아니었지만,사내의 눈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늠름
하고 또 가장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노부조차도 수라 도제를 상대로 이토록
오랫동안 분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으니 말이다. "
"수라 도제 쪽에서도 피해를 줄이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이죠."
수라 도제는 선발대 역할을 한 젊은이들 덕분에 상대방에 대해 상
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라 도제가 알기에 그 젊은이도 개개인
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젊은이들이었지만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
다. 그것은 섬서 분타에 상당한 수준을 갖춘 마교의 정예가 주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구사 일생으로 살아 도망친 몇몇 젊은이들
에게 받아 낸 진술과 섬서 분타에 첩자를 파견해 둔 문파들에게서 입
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필승을 얻기 위해
수라도제는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방패와 갑옷 등 상대의 화살에
서 무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들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는 이미 4
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주야로 작업했지만 겨우 몇 안 되는 대
장간들을 이용해서 2천여 개의 방패와 갑옷을 만들어야 했으니,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이 수라 도제는 섬서 분타에 집
결되어 있는 마교 세력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대비했다. 이
제 눈앞에 있는 먹이를 최소한의 대가만 지불하고 포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노회(노회)한 수라 도제는 섬서 분타 전투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았
다. 그로서는 확실한 승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설서 분
타 외곽을 1천 5백여 고수들로 넓게 포위하고 3천 명의 고수를 집중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처음 젊은 아이들처럼 너무 깊숙
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포위당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착실하게 퇴로를 유지하면서 한 개씩 한 개씩 보루들을 침몰시켜 나
갔다.
그 때문에 분타의 의당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별로 시간
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제 마교 총타에서 구원병이 도
착할지,그것만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잘못하면 마교의 지원 부대에
게 역으로 포위당해서 괴멸당할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라 도제가 천천히 압박해 들어온 덕분에 천진악은 자신에게 부여
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해 낸 지금 수천에 이르는
의당을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 모두 죽거나 항복했으며 염왕대 고수
40여 명이 전사했고, 거의 대부분이 약간씩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천
진악에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총단을 공격하기 전까지 섬서 분
타가 함락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완수해 낸 뒤의 희열만이 있을뿐,
천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둠이 내리는 밤 하늘을 올려다봤
다. 이런 밤에 전서구 따위는 날릴 수 없다. 섬서 분타에서 묵향의 세
력이 패퇴했다는 사실을 첩자가 총단에 보고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점심때쯤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악전 고
투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철수하자?'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딱딱한 음성에 음희 이하 세 명의 대주
들은 재빨리 응답했다.
"옛 ?'
세 명의 대주들은 각기 자신의 수하들을 인솔하기 위해 그들이 포
진하고 있는 구역으로 몸을 날렸다. 1각도 채 지나지 않아 염왕대의
무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섬서 분타에서 탈출하
기 시작했다.
"교주님."
"아니,지금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 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혁무상장로의 목소리와 그를 말리는 호위 무사들의 목소리
에 장인걸은 잠에서 깼다. 그의 옆에는 한중길 전 교주의 손녀인 한영
영이 거의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장인걸은 이불을 끌어다가
그녀의 몸을 덮어 주고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며 약간은 짜증스런 목
소리로물었다.
"뭔가?'
혁무상은 교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급하게 말했다.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기에 늦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찾아뵈
었습니다. "
혁무상이 이렇듯 허등대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므로,교주는 불호령
을 내리려다가 노기를 억눌렀다.
"말해 보라."
혁무상은 교주의 심기가 어떻든 또렷한 어조로 자신이 온 목적,즉
이비대를 통해 수집한 정보 중에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
는 것을 설명했다. 섬서 분타는 거의 3천여 리(약 1천 2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정보가 도착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데다,또 그
것을 취합해서 뭔가 알아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기에 혁
무상은 이렇듯 늦은 시간에 교주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예,섬서 분타 건인데 말입니다. 섬서 분타에는 천랑대와 염왕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투력은 교주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
다. 섬서 분타는 근본적으로 내당과 의당으로 나뉘어 있고, 그 둘의
경계점은 백영 환흔진(백영 환흔진)이죠.
백영 환혼진(백영환혼진)의 장점은 내부의 강력한 세력을 즉시 외부
로 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묵향 쪽에
서 주력의 투입을 꺼리고 있습니다. 겨우 수라 도제 따위가 며칠씩이
나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서 분타의 전력은 약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거의 대등한,또는 우세한 전투를 펼쳐야 정상이죠.
자신의 모든 힘을 투입한다면,수라 도제까지 포함하여 겨우 5천여
고수들쯤은 하루 저녁에 끝장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묵향이 방
어만하면서 전면전을 망설이고 있느냐하는 거죠."
어느 정도 교주의 흥미를 끄는 주제였기에, 그의 어조는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음,자네의 의문이 당연하군. 왜 그럴까? 자네의 생각을 말해 보게."
"예,그에 대해서 몇 가지 추리를 해 볼수 있습니다. "
"뭔가?'
"어떤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가정을 하나 세울 수 있습니다. 전면
전을 벌인다면 피해가 너무 크니까 상대의 마음이 헤이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죠."
"좋아. 그럴 듯하군. 그리고?'
'또 하나는 주력이 섬서 분타에 없기에 물리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주력이 없다?'
"예, 어딘가에 주력이 빠져 나가 있다고 볼 수 있죠. 천랑대와 염왕
대,둘을 합해 봐야 3천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모두 무공이 뛰어나니
기척도 없이 움직이기 딱 알맞은 숫자죠."
이제 교주는 짜증스러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혁무상의 말에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목표는 정파의 후방을 기습하여 재빨리 전투
를 완결짓는 겁니다. 무림맹은 지금 여러 곳에 고수들을 투입했기에
거의 빈 집이나 마찬가지죠. 그 정도 전력을 투입한다면 간단히 승리
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정파가
어떤 한 사람을 구심점으로 두고 움직인다면 매우 효과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추리는 정파의 핵심 문파 몇 군데를 기습하
여 괴멸시키려 한다는 것이죠. 본거지를 공격당한 각 문파의 고수들
은 자연적으로 수라 도제의 전력에서 이탈할 것이고, 결국은 수라 도
제가 이끄는 서문 세가만 남을 겁니다.
또 정예가 다 빠져 나간 서문 세가를 공격하여 괴멸시키려 할 가능
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라 도제는 과연 섬서 분타를 계속 공
격할까요?아니면 서문 세가의 정예들만을 이끌고 서문 세가로 달려
갈까요?'
장인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는 추리야. 어떤 식이 되든 수라 도제는 당황할 것이고,
묵향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후퇴하는 정파의 뒤를 치겠지."
'그렇게 된다면 묵향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수라 도제를 격파
할수 있을 겁니다. 저희로서는 별로 탐탁치 않은 전개입니다. "
"좋아.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걸로 끝인가?'
"아닙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그것을 아뢰기 위해서
찾아뵌 겁니다. "
"뭔가?'
"어찌 면 일부 수하들만을 놔두고 총타를 기습하려고 할지도‥‥‥‥
혁무상의 말에 장인걸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첫 번째
의견에 비해 두 번째 의견은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장인걸은 혁
무상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 말을 하자 돌연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상대는 혁무상 장로였다. 나중에는 없애 버
려야 할 테지만 지금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짜증을 억누
르며 자신이 할수 있는 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되네. 묵향이 정파와 전투
를 벌인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 아무리 그가 방어만 하고 있
다고 하지만 본거지를 놔 두고 총타를 치기 위해 주력을 빼돌렸을 가
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네, 섬서 분타는 묵향의 본거지. 섬서 분타
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잃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나?
자네의 그 비약적인 상상력은 좋지만,그렇게 최악의 상황으로 몰
고가는 비생산적인 상상까지 할 필요는 없네, 여태껏 그 어떤 문파들
이 본거지를 비워 두고 싸웠나?
또 섬서 분타와 총타와의 거리는 거의 3천 리.만약 묵향의 세력이
이동을 시작했다면 자네가 거느리는 이비대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대충 싸우는 것도 아니고 총단을 공격하는데 만반의 준비가 없
을 리는 없겠지.그렇다면 여러 가지 장비와 무기들을 지녔을테고,그
런 무리가 3천이나 3천 리를 이동하는데 흔적을 남기지 않을 리가 있
을까?"
교주의 말에 혁무상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사실 묵향에게 기
습 공격을 당한다면 자신의 책임이 매우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묵향
의 대부대가 3천 리를 이동해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챘다면,그것은 이
비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
만 혁무상은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추궁당하더라도 대를 위해서 총
단이 기습당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말했다.
"그래도혹시 모르니 어느 정도 대비는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좋아.자네의 그 성실함에 답하기 위해서,내 신경쓰기로 함세.아침
에 날이 밝으면 소무면 장로와 여진(여진)장로에게 본좌가 보자고 하
더라고 전해 주게."
혁무상은 교주가 자신의 생각을 망상쯤으로 치부해 버리자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교주가 묵향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경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기에 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자신이 생각해도 총단이 기습당할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아무
리 마교의 정보력이 멸어진다고는 하지만,이비대는 정파 최강이라는
는 무 영문에는 뒤질지 몰라도 개방보다는 앞선다고 혁무상은 자부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교주님. 미천한 속하의 말에 신경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안녕 히 주무십시오."
"자네도 잘 자게나."
교주는 혁무상을 돌려보내고 한영영의 옆에 누워 그녀를 슬며시 끌
어안았다. 이제 그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한영영은 잠결에도
익숙한 몸짓으로 그의 품에 안겨 왔다. 부드러운 여체를 느끼며 장인
걸의 언짢았던 마음은 약간 풀어졌다. 그리고 곧 그는 깊은 수면의 세
계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의 수면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총타 공격

마교의 총타가 있는 곳은 대산(대산)이었다. 십만 대산(십만대산)이
라고도 불릴 정도로 수많은 봉우리를 가진 대산은 매우 험악한 산세
를 자랑한다. 그 산세에 의지하여 대산 깊은 곳에 마교가 똬리를 튼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마교는 대산 곳곳에 수많은 함정과 기관,
진세를 설치했고, 중요한 교통로에는 요새들을 건설했다. .오늘에 이
르러서 십만 대산은 그야말로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수많
은 명문 정파들이 한번씩은 자신의 집구석을 털려 보았지만 마교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데,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난공 불락의 요새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무리가 있었
다. 혹의를 입고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에 자그마한 흰색 천을 붙인
무리들이었다. 각자가지고 있는 검(검)은 그을음을 묻혀서 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았다.
그들은 개개인이 대단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듯 그 움직임은 매우
재빨랐고,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몇몇 보초들은 거의 순간적으로 목
숨을 내주어야 했다. 그들이 통로를 개척하자 그들보다 무공이 조금
떨어지는 무리가 그 뒤를 이어 이동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는 도저히 무림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
천의 무리가 뒤따랐다. 중후한 갑주를 걸치고, 달빛에라도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자 혹색의 펑퍼짐한 옷을 갑주 위에 입고 있
었다. 그들은 갑주의 무게 때문인지 경공술을 쓰는 대신 거대한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말발굽에는 두꺼운 천을 덧대어 발굽 소리가 거의 들
리지 않았다.
"술을 ‥‥‥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설무지의 조심스런 물음에 묵향은 입에 대고 있던 술병을 내려 놓
으며 씩 웃었다.
"바야흐로 오랫동안준비해 왔던 복수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인데,축
배(축배)가 빠질 수는 없지. 장인걸 녀석, 뒤통수 얻어 맞은 걸 깨달으
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 녀석도 나를 함정에 밀어 넣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까?흐흐흐‥‥‥‥"
묵향이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을 때 산봉우리 쪽에서 빨간 불빛
이 세 번 반짝이고 사라졌다 웬만해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희미했지만 묵향도 설무지도 그 불빛을 놓치지 않았다. 설무지는 바
위 위에 앉아 뭐가 좋은지 흔자 지득거리는 묵향을 향해 공손하게 말
했다.
"세 번째 목표인 마천령(마천령)을 점령했다는 보고입니다. 아직까
지도 조용한 걸 보면 천리 독행 장로님이 상당히 분투하고 계신 모양
입니다. "
"수석 장로는 어디로 갔나?"
"예,차석 장로님과 함께 천랑대 제5대를 거느리고 총타 반대쪽으로
가셨습니다. 잘하면 그분께서 가장 큰 공을 세우실 수 있을 겁니다. "
"도주로를 차단하러 갔군."
"예."
"하지만 쓸데없는 일이야. 도망치려고 하는 극마에 오른 고수를 그
정도 인원으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수하들도 분투하고 있는
데, 이제 슬슬 본좌도 가 봐야겠군. 자네는 여기 있게나. 전체적인 대
국(대국)을 바라보며 인원을 움직일 인물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묵향의 말에 설무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부교주님 ."
묵향이 앞으로 달려가자 주위에 서 있던 10여 명의 흑의인들이 그
의 뒤를 좇았다. 이들은 묵향의 호위들로 천랑대에서 뽑은 정예였다.

* * *

"무슨 일이냐?"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경악한 장인걸은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부서질 듯 문을 열고는 호위 무사를 향해 외쳤다. 장인결의 문
앞에 서 있던 호위 무사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옛,제1급 비상 신호음입니다. 교내에 적이 침입한 모양입니다. "
"적이라고? 제길!어떤 미친 녀석이 감히 1천 년 동한 한 번도 외인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이곳을 넘본단 말아냐? 지금 당장 혁무상 장로
를불러라."
"옛 ?"
급히 답한 호위 무사는 재빨리 혁무상장로의 거처로 뛰어갔다.
호위 무사가 달려나간 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엄청난 마기를 뿜어
내는 인물이 장인걸 앞에 나타났다. 교주 독립 호위대의 대장인 마혈
검귀 왕천이었다. 왕천은 도착과 동시에 3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독립 호위 대원들을 불러 모았고,교주의 원거리 호위대인 수마대에
특급 경계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학살 인도 박용
이 거느리는 교주 직속의 무력 단체인 사사혈시마대에도 전령을 보냈다.
교내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천마 혈검대가 교내에 없으니, 두
번째 전투력을 지닌 수라 마참대는 아마도 소무면 장로의 지휘 아래
적이 침입한 곳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전투력을
지닌 사사 혈시 마대를 불러 들여 교주가 기거하는 천마 대전을 호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이 팔장을 끼고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도 사
태는 매우 급박하게 움직였다. 박용이 끌고온 사사혈시마대가 천마
대전의 외곽에 포진했고, 흑수천마 여진이 거느리는호법원의 고수들
이 재빨리 장인걸의 가족들을 천마 대전으로 모아 들였다.
장인걸은 두 명의 처와 열두 명의 첩을 거느렸고,서른 명에 가까운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이 있었다. 그들을 빠른 시간 내에 끌어 모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호법원의 고수들은 눈깜짝할 사이
에 그 일을 완수해 냈다.
그러는사이 장인걸에게 전령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적의 주력은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6진부터 3
진까지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진입중입니다. 속하가 달려올 때 삼면
인마 장로께서 수라 마참대를 직접 거느리고 그곳으로 직행하고 계
셨습니다. "
전령은 혁무상 장로에게 몇 가지 지시를 받고 전장으로 다시 달려
갔다. 첫 번째 전령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내일 아침이 되면 이번
습격을 잘 막아 낸 소무면 장로에게 보검을 한 자루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무면 장로가 거느린 수라 마참대라면 상대를 충분히 격
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채 반각도 지나지 않아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북동쪽71서 자성 만마대와 적이 충돌했습니다 "
혁무상은 신중한 태도로 전령의 보고를 들으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놈들이 양동 작전(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군."
"놈들의 수는?"
"옛! 대략 7천 정도입니다. "
"뭣이,7천? 이런 험준한 요새를 향해 7천이나 투입했다는 말이냐?
정파놈들이 아무리 대가리가 굳은 놈들이라고 해도, 변변한 방어 장
비도 없이 그 정도 인원을 이런 험준한 곳에 투입할 정도로 멍청하지
는 않을 텐데‥‥‥‥"
무림인들은 원래가 갑주나 방패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둘의
사용 방법이나 효능을 몰라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걸리적 거
리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것을 가지고 이동한다면 관군이 가만히 있
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표준 장비는 장식용으로 인정되는 검(검)이나
도(도) 정도가 한계였다. 창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보통 서너 토막 친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적이 나타났을 때만 연결해서 사용했다.
아무리 무림의 일을 관이 묵인해 준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무림인인 척하고 중무장을 한 군대가 침입해 올 가능성이 있
는 한무림인은 절대로 전투용 중장비를휴대할 수 없었다.
전령은 곧 혁무상의 의문에 답했다.
"무영 신마 장로께서는 상대가 아무래도 무림인이기보다는 군대(군
대)인 것 같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
십시오."
"군대 ?"
"옛! 강노(강노)와 강궁(강궁)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매우 치밀한 움
직임을 보입니다. 거대한 마상용 장도(장도)에 중갑주를 입은 것으로
보아 무림인은 아닌 듯 생각됩니다. "
한밤의 기습이었기에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는 힘들
었다. 하지만 무림인들과 관군들은 그 싸우는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
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군대는 기계 장치를 이용해 수 개에서 수십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장치인 노(노)라든지, 투석기, 충차(충차 . 성문을 부수는 데 애용됨) 등
의 효과적인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했고, 개개인의 무술 실력보다는
집단적인 힘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각종 진법(진법)이나 병법(병법)
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전체적인 틀보다는 개개인의 두술 실력을 중시
했다. 칠성 검진 따위의 각종 진세가 발전하기도 했지만,군대의 진법
과는 달리 개개인의 무술 실력에 따른 융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
대방이 혼자서만 움직인다면 몰라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이 이동하면
서 전투를 한다면 서로의 차이점을 분간해 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
었다.
상대는 수천 명이었고, 또 그들이 집단적으로 공격해 오는 모양새
를 보고 무영 신마는 곧 그들이 군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의문에 빠져 들었다.
"군대가 왜‥‥‥?"
장인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혁무상은 재빨리 혓바닥을
놀렸다.
"이 알을 ‥‥ 너는곧장 원로원에 보고하라.본교의 사활이 걸린문
제다. "
"옛 !"
전령이 원로원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겨를도 없이 혁무상은 짙은
수염을 길러설지 퇴폐적인 인상을 지닌,50대 초반의 인물에게 고개
를 돌렸다.
"박용 대주는 사사 혈시 마대 5백 명 정도를 거느리고 가서 무영 신
마 장로를 도와주시오. 상대가 관군이라면 귀혼 강신 대법을 익힌 사
사 혈시 마대가 더 효과적일 것이오."
"알겠습니다. "

* * *

갑작스런 기습으로 마교 총타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마교의 중심부
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해 들어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을 막
아서는 인물들이라고 해 봐야 총타 외곽 호위 무사들 정도로,그 실력
이 많이 떨어졌기에 이들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기습해서 들어오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호위 무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정예들. 어디에 기관 장치가 있고,또 어디가 매복하기 좋은지를 환히
알고 있었다. 또 외팍 호위 무사들이 경계를 위해 주둔한 위치까지도.
그렇기에 외곽 호위진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무너져 버렸고, 침입
자를 포착한 것은 적이 중심부에 근접해 들어왔을 때였다. 서둘러 출
동한다고 했지만, 소무면 장로의 수라 마참대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
하기도 전에 적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맹렬한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소무면
장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가 정파의 무공이 아닌 마교의,그
것도 상승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소무면 장로는 제발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짐작은 점점 현실로 나타났다. 저쪽에서 자신도 익히 잘 아는 인물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색 옷을 입은,적당히 마른 체구
의 인물. 격전이 벌어지는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왔지만,그를 막는자
는 없었다.
어쩌다 병장기나 강기의 파편이 그쪽으로 날아갔지만 그의 몸에 어
떤 피해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검을 날렸던 사람들의 무기가 뭔가에
막힌 듯 튕겨 나가며 자세가 허물어졌고, 여태껏 싸우던 상대방에게
목숨을 날렸다.
"부,부교주님 ."
경악감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소무면 장로의 입술사이로 새
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소무면 장로를 놀리는 듯 부
드러웠다.
"오랜만이군, 소무면 장로."
"어떻게, 어떻게‥‥‥‥"
도저히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기에 소
무면 장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아군일 때는 매우 든든하지
만,그 반대로 적일 때는 최악의 상대. 마교 1천 년 역사를 통틀어 최
강의 고수가 자신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소무면 장로가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자 묵
향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는 본교의 율법을 바로 세우려고 왔다. 자네는 본교의 율법을
수호해야 할 아홉 명의 장로 중 하나. 선택은 자네에게 달려 있네. 어
떻게 할 텐가?"
소무면 장로는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묵향을 바라봤다.
소무면 장로와 눈이 마주치면서 묵향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은 죽음을 각오
한 눈빛이었다.
"기어이 피를 볼 생각인가?"
묵향은 상대가 먼저 손을 써 오기를 기다렸지만,소무면 장로는 검
을 뽑는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율법을 바로 세운다 하시면 어떤 뜻입니까?"
소무면 장로의 말에 묵향은 나지 막하지만 힘있게 답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비열하게 암습을 해서 본좌를 해치고,또 교주
를 해친 인물을 척살하고자 한다. "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그것은 엄연한 개인적인 복수. 개인
적인 복수를 가지고 율법을 운운하실 수는 없습니다. 복수 후에는 어
쩌실 겁니까?"
"강자지존(강자지존)!"
묵향의 대답은 단 한마디.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는 많은 뜻을 내포
하고 있었다.
소무면 장로의 머릿속에는 마교에서 자라면서 뿌리 깊이 박힌 하나
의 이상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힘,순수한 힘에 대한 열정이었다. 마
교에서 가장 인망이 높은 소무면 장로가 장인걸의 독주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도, 마교의 이상에 전대 교주였던 한중길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중길 교주가 소무면이 지닌 이상에 맞
게 행동했다면,마교는 일찌감치 그 강대한 무력으로 마도 천하를 이
룩하기 위한 어떤 행동에 들어갔어야 했다.
묵향은 다른 의미에서 소무면 장로의 이상에 맞지 않았다. 묵향은
힘을 추구하기는 하되,오로지 개인적인 힘에 국한시켰다. 사람이 발
휘하는 힘은 하나 더하기 하나를 했을 때 열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
던가?그런데도 묵향은 집단의 힘을 등한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수련
에만 빠져 들며,마교가 추구하는 힘의 율법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묵향이 지금 '강자지존'을 들고나왔다 그말은 곧 마교라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뜻. 그가 교주가 된다면 더 이상 마교
내의 반목은 있을 수 없었고, 또 그를 중심으로 마교도들은 빠른
시간 안에 단합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단합된 힘을 이용하며 마도
천하를 이룩할 가능성이 최소한 장인걸보다는 높았다. 그는 강했기
때문이다.
"전투를 중지하랏!"
웅후한 음성으로 외친 소무면 장로의 몸은 마치 힘이 다해 버린 듯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소무면 장로는 무릎을 꿇고 검을 뽑아 무릎
앞쪽 땅 속 깊이 박아 넣었다. 그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포권하는 듯
한 형상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본교의 장로로서 율법을 바로 세우지 못한 죄,처분을 기다립
니다. "
깊은 공력이 내재된 소무면 장로의 음성은 벼락치듯 아수라장을 관
통했고,곧 싸움을 멈췄다. 수라 마참대 소속의 고수들은 그들의 대주
인 삼면 인마 소추및 장로의 행색을 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재
빨리 눈치챘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싸움을 원하지 않는 것
이다.
그들은 약간 허탈한 표정 이 었지만 묵묵히 소무면 장로와 같은 행동
을 했다. 상대가 검으로 친다면 조용히 죽어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었다. 하지만 묵향이 거느린 고수들은 재빨리 무릎 꿇은 그들의 옆을
지나쳐 들어갔다. 처음부터 묵향이 노린 목표물은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 상자들을 돌보라. 그들은 이렇듯 헛되이 피를 흘리도록 키워지지
는 않았다. 그들은 장차 본교를 위해 더욱 값진 피를 흘릴 수 있을 것
이다. "
묵향은 소무면 장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돌아서서 수하들을
뒤따랐다. 묵향이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소무면 장로의 숙여진 고개
는 들릴 줄을 몰랐다.
"소무면 장로께서 개선하시는 모양입니다. "
멀리서 엄청난 마기를 피워 올리는 고수들이 달려 올라왔다. 그것
을 보고수마대의 고수하나가 내뱉은 말이었다.

* * *

닭들이 모인 곳에 오리 한 마리가 있다면 금세 알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묵향이나 장인걸 둘다 마교의 중추적 인물들
이었고 그들의 수하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정파라면 그 풍기는
기운이나 무공 따위를 보고 적이라는 것을 곧 알아챘겠지만 엄청난
경공술을 발휘하며 돌진해 오는 인물들은 틀림없는 마교의 무공을
썼고 또 막강한 마기를 뿜어 냈다.
소무면 장로가 거느린 수라 마참대의 고수들은 천랑대의 무사들보
다 한 끗발 높은 실력을 가졌다. 그 때문에 천랑 대원들이 뿜어 내는
마기는 약간 미약하겠지만, 그래도 수라 마참대와 구분하기 힘들 만
큼 엇비슷했다. 따라서 상대가 적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너무나 힘
들었다.
천랑대가 접근해 올 때 박용은 5백여 명의 사사 혈시 마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자성 만마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발하고 있었다. 개선해서
도착한다고 생각하던 무리와 이제 전장으로 떠나는 무리는 한순간
섞일 수밖에 없었고,바로그때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사사 혈시 마대 대원들이 기습 공격을 받고 허무
하게 머리통이 깨져서 뒹굴 때에야 장인걸 쪽에서는 그들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사사 혈시 마대 5백여 명과 천랑대 8
백여 명은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다.
"뭣들 하는 짓이냐?"
정말이지 고막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
때문에 몇몇 무공이 약한 시비들이 기절해 버렸을 정도였지만, 이곳
에는 그 정도에 타격을 받을 만큼 나약한 인물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괴성 속에 내재된 막강한 마기에 모두 움찔 했고,혼전으로 치달으려
던 싸움이 일순 멈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쪽에서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10
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건 뭣 하는 짓이야?겨우 집안싸움 때문에 본좌를 부른 것이냐?"
사내는 매서운표정으로 장인걸을 쏘아보며 외쳤다. 하지만 장인걸
은 사내에게 고개를 돌릴 정신이 없었다. 저 멀리서 히죽 웃고 있는
흑의 사내를 쏘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좌의 말이 말같이 안 들리는가,교주?"
"예?예,태상교주님."
장인걸은 시간을 끌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머릿속은 너무나 혼란스러웠
고,조금이라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험험, 원로원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변절자를 처리해 달라는 부탁
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
"본교의 율법에 따라 원로원은 본교의 흥망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테지?'
이때 혁무상 장로가 재빨리 끼여들었다.
"예,그러니까 원로원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지요. 태상 교주님,본교
내의 권력 다툼에서 원로원이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속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묵향 부교주측에서 군대를 동원했다면 말이 다르
지 않겠습니까?본교의 일에 외부 세력을 개입시키는 자는 율법에도
나와 있듯 참형(신형)에 해당합니다. "
"어디에 군대가 있다는 말이냐? 본좌의 눈에 외인(외인)은 보이지
않는데?'
"맹호령(맹호령) 쪽에서 약 7천의 군세를 무영 신마 장로가 막고 있
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외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냐?'
태상교주의 말에 묵향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반쯤은."
"네놈은 외세를 개입시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
"아니,군대를 끌어 들였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지. 내 수하들의 상당
수는 해체된 찬황 혹풍단의 무사들이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고, 태상
교주는 빠지지오. 이건 장인걸과 본좌사이의 일이니."
묵향의 반말 짓거리에 분노를 터뜨린 것은 태상 교주가 아닌 그를
수행하여 함께 온 두 노인들이었다.
"닥쳐라, 은퇴하셨다고는 하지만 네녀석이 얕잡아 볼 정도로 태상
교주님의 권세가 낮지는 않다. "
하지만 그들의 노성은 태상 교주에 의해 가로막혔다.
"조용해야 할 것은 자네들이야. 본교의 율법은 바로 힘 저 아이의
무공이 본좌보다 강하니,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찬황 흑풍단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단체 그들을 흡수했다면 외세를 개입시킨 것은
아니지. 원로원은 중립을 선언하겠으니 둘이서 잘 해결해 보게나."
태상 교주는 마치 그곳에서 지독한 악취가 품기기나 하는 듯 서둘
러 떠나 버렸다.
이제 방해자는 없어졌지만 장인걸의 수하들과 묵향의 수하들은 서
로 병장기를 들고 상대를 노려볼 뿐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하지는 않
았다. 이때 묵향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수하들을 쓸데없이 희생 시키느니 1대1 대결이 좋지 않겠소?"
묵향과의 거리는 10장(30미터).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암습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서로간의 거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장인걸은 묵
향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자 한숨을 푹 쉬면서 어기 전성(어기전성)으
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의 여지를 남겨 두기
위해서 였다.
(대결할 필요도 없이 본좌가 졌네. 사실 자네가 이렇듯 빨리 손을 써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지. 나는 율법에 따라 은퇴하겠네. 패자에
게 더 이상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겠나?)
묵향은 장인걸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쉽게 발을 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본좌를 건드린
이상 저세상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구."
그와 동시에 묵향의 몸이 날아올랐다.
장인걸은 천마 혈검대도 없는 상황에서 묵향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
는 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것은 다만 말
뿐, 이 상황을 넘기기만 한다면 구양운 장로와 합류하여 다음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인물에게 더 이상 위해를가
하지 않았기에, '은퇴 선언 은 장인걸이 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
지만 묵향은 자신을 놓아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니 장인
걸로서는 또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쳐랏!"
"우와아아아아아."
장인결의 명령에 따라 마교의 고수들이 묵향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장인걸이 묵향을 상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사투를 벌
이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묵향은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
오는 고수들을 베면서 장인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장인걸은 묵
향과 정면으로 검을 섞으려고 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달
려오는 묵향을 향해 최대한 공력을 끌어 모아 흑살 마장(흑살마장)을
한방 날린 후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자의 자리

거대한 연무장(연무장)에는 높은 단상이 마련되었고, 그 중간에 호
화로운 호피 의자를 놓았다. 단상 앞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무릎을 꿇
고 앉아 있는데,그 중 일부는 튼튼한 강철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외
에 부 상자들은 그들의 뒤에 앉아 있었고, 무릎 꿇고 앉을 수 없을 정
도로 중상을 당한 인물들은 제일 뒤쪽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포위하듯 또 다른고수들이 무장을 한 채 양옆에 도열해 있었다.
묵향은 검은 비단에 황금빛 용과 은빛 호랑이가 싸우는 형상이 수
놓인 호화로운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나와 단상 위의 호피 의자에 앉
았다. 이 호화로운 옷은 마교의 교주가 즉위식을 할 때 단 한 번 입는
옷으로, 식이 끝나면 불살라져 그 짧은 생명을 마쳤다. 이 값비싼 옷
을 태우는 것은,마교의 교주가 되기 위해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피를 흘렸지만 이제 더 이상의 혼란은 없기를 바라는,상징적 의미를
지닌 행위 였다.
"삼면 인마 장로,!"
소무면 장로는 부름을 듣고 천천히 일어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대는 본좌를 도와 마도 천하의 길을 함께 할 것으로 믿네. 검을
가져오라."
수하 하나가 소무면 장로가 평소에 애용하던 검, 즉 그가 장로로 즉
위하면서 교주에게서 받았던 검을 가져와 묵향에게 바쳤다. 예로부
터 마교에서는 교주의 신물(신물)인 수라 마검(수라마검)만은 못하지
만 그에 준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검 아홉 자루를 선택하여 장로의
신물로 삼았다.
그것은 교주가 즉위할 때,또는 새로운 장로가 임명될 때마다 다시
받게 된다 새로운 교주가 즉위할 때가 되면 장로들은 자신이 가진
검을 반납했고, 그 검은 즉위식 때 다시 지급되었다. 이때 해로운 교
주에게서 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장로에서 해임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소무면 장로는 새로운 교주에게서 검을 받아 들어 그것을 소중히
허리에 찼다 묵향은 그 모습을 잔잔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자네에게는 예전과 같이 수라 마참대를 맡기겠네."
"감읍할 따름입니다. " '
묵향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소무면 장로에게서 시선을 돌려 무영
신마를 바라봤다. 무영 신마는 장인걸이 집권한 후 두각을 나타내어
자성 만마대의 대주가 된 신진 고수였다. 무영 신마는 개인적인 무공
의 성취에 있어서는 조금 떨어졌지만 병서를 많이 읽은,마교 고수로
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이번에 벌어진 집단 전투에서 상당
한 전과를 올렸다. 물론 그 때문에 묵향 쪽에서는 고생을 단단히 했지
만 말이다.
무영 신마는 장인걸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기 직전까지 외곽호위
무사들과 자성 만마대를 통솔하여 흑풍대와 혈전을 벌였다. 자성 만
마대 개개인의 무공은 흑풍대보다 훨씬 윗줄이었지만, 흑풍대는 각
종 공격 및 방어 장비를 충분히 갖춘 상태였기에 간신히 수평을 이를
수 있었다.
좀더 오랜 시간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인원과 개개인의 무공이 월등
히 우세한 무영 신마 쪽의 승리로 결판이 났겠지만,현실은 그렇지 못
했다. 치열한사투 끝에 어느 정도우위를 차지했을 때 장인걸이 탈출
했다는 보고를 접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전투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수하들을 이끌어 재빨리
전장을 이탈했다. 무릇 정예라는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 무리는 그
진격과 후퇴 ,특히 후퇴할 때의 속도가 엄청나다. 관지는 상대가 총공
세를 취할 듯 진을 전개하다가 어느 순간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일순
당황했다. 그들이 후퇴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관지는 재빨리 묵
향에게 전령을 보냈다.
묵향은 무영 신마가 거느린 자성 만마대를 포획하기 위해 재빨리
천랑대를 파견했고, 힘들게 그들을 찾아냈다. 만약 자성 만마대보다
윗줄에 놓이는 천람대를 파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사히 장인걸
과 합류했을지도 몰랐다.
묵향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영 신마를 바라봤다. 장인걸의 탈출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앞에 포박되어 있는 무영 신마였
던 것이다. 자성 만마대를 잡기 위해 묵향은 천랑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장인걸을 추격하는 포위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
던 것이다. 그사이로 장인걸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무영 신마는 묵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
과 어쩌면 수하들의 목숨까지도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장인걸 교주를 향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좋아. 관지와 천리 독행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자네 덕분에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말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
묵향은 빙긋이 웃더니 그에게도 검을 건넸다.
묵향은 정통 마공을 익힌 인물들은 대부분 받아들였다. 혁무상 장
로만 빼고. 그는 오마 분시(오마분시)당하는 것으로 긴 생애를 마쳤다.
장인걸이 탈출에 성공했기에 사사 혈시 마대를 비롯한 장인걸이 키
운 고수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그리고 장인결의 혈족들 또한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혈족을 살려 두지 않는 것이 마교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교주의 탄생으로 인해 부와 권력이 상승한
인물들도 있었지만,목숨을 바친 자또한 수없이 많았다.

* * *

쭈글쭈글한 피부,하나뿐인 정한 눈동자. 어디를 봐도 이제 죽을 날
이 가까운 초로의 노인이었다 이렇듯 한눈에 보기만 해도 아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인물의 비파골에는 청직한 쇠사슬이 꿰어 있
었고,하나뿐인 다리에도 굵직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허약해 뵈는 노인을 꼭 이렇게나 학대를 할 필요가 있을까?하지만
그의 지나온 삶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조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 이구 동성으로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중원 최강의 문파
인 마교의 전 교주였기 때문이다.
묵향은 한때 태산과 같이 거대하고 태양처럼 강한존재로 우러러봤
던 한 무인의 비참한 말로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묵
향은 일부러 더욱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려,교주."
교주는 환골 탈태(환골탈태) 했을 정도로 엄청난 수련을 쌓은 육체
를 지니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공이 상실되면서 급속하게 노화가
진행되었다. 교주는 하나뿐인 눈을 반쯤 감고 있다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쿨룩쿨룩,자네로군. 이꼴이 된 나를 보니 꽤 기분이 삼삼할 거야.
안 그런가?"
묵향은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교주 한때는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기도 했지만 말
이오."
"크흐흐흐,쿨룩쿨룩!자네는 언제나 정직했지. 그런 자네를 믿었어
야 했지만,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네 쿨룩, 왜냐하면 나 자신이 거짓
투성이였기에 상대방도 거짓 투성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남을 언
제나 속이는자는 남을 절대로 믿지 못하지,쿨룩."
묵향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교주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알고 있던
교주는 배신의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정직했소."
"크흐흐,쿨럭쿨럭!그래서 자네는 좀더 배워야 하는 거야. 인간이란
것들은 간사하고 거짓을 좋아하지.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을 것 같으
면 배신을 밥먹듯하는 거야. 지금의 내 꼴을 보면 알지 않나?"
"최소한 내가 보기에 교주는 그렇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교주의 자리를 나에게 물려 주려고까지 했으면서
나를 경계했느냐는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
았을 텐데‥‥‥‥"
그 말에 교주는 피식 웃었다.
"그걸 이해 못 하다니, 멍청한 친구군. 쿨룩! 나는 처음부터 자네나
장인걸에게 교주 자리를 물려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자네나
그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을 뿐이지.
자네는 처음부터 교주가 될 욕심이 없었지만,쿨룩쿨룩! 장인걸 녀
석은 교활하게도 나를 멋지게 속였지. 카악!그놈이 교주 자리를 욕심
낸다는 사실을 본좌가 미리 알았다면 이 자리에 묶여 있을 놈은 장인
걸이었을 거야. 대답이 되었나?"
"어느 정도는."
"이제 궁금증이 풀렸다면 나에게 안식을 주게나. 그리고 저 친구에
게도."
교주는 사슬에 묶인 왼팔을 슬쩍 들어 자신 못지 않게 참혹한 모습
으로 묶여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더 이상 삶을 연장한다는 것은 나나, 저 친구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야."
"교주는 살고 싶지 않소?그 전의 내공을 되살려 줄 수도 있소. 물론
신체적인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겠지만 팔이나 눈, 다리가 없는
무사들도 알다시피 매우 많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교주에
게 달린 것이겠지요."
교주는 허옇게 변해 가는 머리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아니, 다 필요 없네. 백수의 왕 호랑이는 호랑이의 삶을 살아야 행
복한 거야. 나에게 더 이상 구차한 삶을 강요하지는 말아주게나."
"장인걸은 죽지 않고 도망쳤소. 복수를 하고 싶지 않소?'
교주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건 자네에게 떠넘기기로 하지. 나를 교활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나. 이 정도 세상을 살다보면 생겨나는 지혜니까 말이야, 쿨룩쿨룩.
이제 말하기도 힘들군. 마지막은 자네의 손으로 해 주겠나?"
"잘 가시오, 교주."
"자네도 잘 있게나."
교주의 죽음은 순간적이면서도 평온한 것이었다. 묵혼검은 주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얼기설기 얽혀 있는 쇠사슬과 함께 교주의
머리를 깨끗하게 몸통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묵향은 묵흔검을 검집에 집어 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연히 한쪽
구석에 떨어진 머리를 바라봤다. 잠시 후 묵향은 더욱 딱딱해진 음성
으로 뒤에 서 있는 수하들에게 명했다
"율법대로 교주에 대한 예를 다하여 성대히 장사지 내도록,"
"존명."
"그리고 저분에게도 안식을 드려라. 한때 정도 무림의 주인이셨던 분
이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처리하도록."
"존명."
묵향이 돌아서서 세 발자국도 걷기 전에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제자리 찾기

당황,당혹, 황당.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 수라 도제의 마음을 표현
하기는 힘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다하여 총공격을 가하고 보니 상대
는 이미 오래 전에 도망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황하기는 질문을 받은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연히 가주인
수라 도제보다는 책임감의 무게를 덜 느꼈기에 그들은 어느정도 정
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말라붙은 검붉은 피가 군데군데
묻었지만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옅은 청의를 입은,50대 중반쯤 되는
인물의 대답은 왜나 빨리 튀어나왔다.
"적의 간계에 걸린 것 같습니다. 가주님,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놈들에게 역으로 포위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
수라 도제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혹의를 걸친,날카로운 인상의 나
이든 무사에게 소리쳤다.
"자네는 파마대(파마대)를 이끌고 반경 1백 리(약 40킬로미터) 이내를
철저히 수색하라."
"존명!"
"그리고 자네는 파사대(파사대)를 이끌고 반경 3백 리까지 철저히 수
색하라."
"존명"
각기 2백여 명의 무사들로 이루어진 파사대와 파마대는 파요대(파
요대)와 함께 서문 세가 최고의 정예였다. 사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이
곳에 어떤 함정을 마련해 놓고 외곽으로 빠졌다가 다시 외곽에서부
터 압박해 들어온다면 상당한 타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네는 각 문파들에게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고 전해 주게."
"예."
"놈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했을 줄이야‥‥‥‥"
자책 어린 가주의 혼자말에 나이든 노신(노신)들은 몸둘 바를 몰랐
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허
무하게 당하는 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수라 도제의 명령으로 그들은 적의 외습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
리고 내부에 있을 함정, 예를 들면 독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내부로
진입했던 모든 무사들을 재빨리 철수시키고 몇몇 뛰어난 고수들을
보내어 샅샅이 수색을 시작했다.
모두 독에 대비하기 위해 즉시 운기 요상(운기요상)까지 해 봤지만
독 따위는 없다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그리고 곧 독 따
위를 살포하기 위한 그 어떤 기관 장치도 없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안
으로부터의 우환거리는 없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외
곽을 정찰하기 위해 나갔던 파마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마교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수라 도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들의 속셈은 뭐지?더욱 아리송하군."
"혹시 이곳 섬서 분타의 전투는 뭔가 또 다른 큰일을 벌이기 위한 미
끼가 아니었을까요?'
"미끼?그럴지도 모르지. 자네는 개방에 연락을 보내게나 혹시나 맹
(맹)이 공격당했을 수도 있고,어쩌면‥‥‥‥"
서문길제는 말을 여기서 끊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차마 그것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굳어진 서문길제의 표정을 보고 노신들은 노가주가 무슨 말
을 하려 했는지 눈치채고는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 버렸다. 화경의 경
지에 이른 노가주가 저렇듯 굳어진 표정을 짓게 만들 만한 일은 몇 가
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본가에 빨리 전서구를 띄워라."
한 노신의 우렁찬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문길제는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놈들이 본가에 노부가 없는 틈을 노린 것이었다면, 마교도의 씨를
말려 줄 테다. "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가주님."
"너무 오랜 시간 떠나 있었다. 첫 목표는 달성되었으니 돌아가기로
하지. 각 문파에 연락해라. 노부는 떠나겠다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
수라 도제 서문길제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들이 마교
와 같은 강대한 단일 집단이어서 본가를 수비할 만한 충분한 세력이
남아 있다면,결코 그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만약 서문 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그저 높은 지위를 차지하
고 있는 노신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문
세가의 가주였고,또 서문 세가의 거의 모든 정예를 끌고 전장에 나왔
기에 빈 집을 털릴 걱정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서문길제는 나중에야 마교 내의 권력 다툼에 대한 정보를 주워 들
었고, 또 그때 섬서 분타에 수백 명 정도의 고수를 투입한 것도 대단
히 무리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땅을 치며 통곡하
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그때 서문길제가 마교의 형편을 알고 있었다면 섬서 쪽에 퍼져 있
는 모든 마교 세력은 완전히 근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무
영문의 할망구는 일부러 알려 주지 않았고,모든 기회가 지나가 버린
후에야 그것을 넌지시 알려 주어 서문길제의 속만 벅벅 긁어 왔던 것
이다.
"정보력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어요?호호호호." 하고 비
웃으면서 말이다.

* * *

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덩굴의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매영인은 나지
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무공,무영문의 금지 옥엽이라는 튼
튼한 배경,무공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그리고 할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아름다운 얼굴.
모든 무공을 익히는 소녀들의 목표이자,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인 4
봉에 들어 있는 그녀가 한숨을 내쉴 이유는 전혀 없을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휴우우."
그녀의 방은 마화의 지시로 시녀들이 정성을 쏟아 단장을 했기에
째나 예쁘게 꾸며지기는 했지만,조금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없
었다.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 벌써 보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높은 무공을 익혀 심신이 튼튼하지 못했다면,또 악
양소소와 마화라는 대화 상대가 없었다면 벌써 미쳐 버렸을 정도로
답답한 시간이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니?"
"요즘 들어서 뭔가 더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뭐가?"
"갑자기 방에 가둬 두고,또 하녀가 음식을 가져오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 마화 언니가 들어을 때 힐끗 보면 문 앞을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
고‥‥‥‥ 이 모든 게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잖아요?혹시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저들을 보세요."
매영인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여러 명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예전에는 경비를 서는 무사들이 도저히 경비 무사라고 생각되지 않
을 정도로 엄청난, 뭔가 모를 숨막히는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 댔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그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저는 그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요."
"괜찮아.괜찮아. 다 좋아질거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응?"
소소가 매영인의 어깨를 토박이면서 위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동시에 그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험
상궂은 마인이 서 있었다. 마인이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방금
전 경비 무사에 빗대어 표현했던 엄청난 마기를 뿜는 고수였기 때문
이다.
악양소소는 상대의 막강한 마기에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끼며 억지
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녀는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상대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고갯짓
을 했다.
"따라와라."
상대의 으스스한 등판을 보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들은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이제 드디어 처형되는 것은 아닐까? 아닐 거야. 그럴 거라면 무기를
그냥 휴대하게 놔 뒀으려고, 아니면 마화 언니가 불러서?아니지,그
언니라면 자신이 찾아오지 저런 무례한 인물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
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 새 널찍한 방에 도착했다.
그 방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매서운 눈
초리의 사내가 커다란 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거기 에 앉아라."
사내의 말에는 상상하기 힘든 위압감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찍소리
도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숨막힐 듯한 괴이한 기운. 자신들을 안내했
던 인물도 엄청난 마기를뿜었지만 저 인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너희들의 이름이 매영인과 악양소소가 맞나?"
조용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기에 잔뜩 긴장한 매영
인은 하마터면 검을 뽑으며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그래
도 연륜과 침착성이 앞서는 소소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게 답
했다.
"예."
"흠......."
사내는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을 잠시 노려봤다. 사내
의 눈이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느꼈다.
"너무 마른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거야, 아니면 밥을 제대로 주지 않
은 거야?"
"원래 날씬한 거예요."
자신의 몸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자 매영인이 발끈해서 답했다.
공포심을 그녀의 자부심 섞인 분노가 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당
돌한 태도에 사내는 역시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잠시 쏘아보
더니 이죽거렸다.
"그래?그런대로 물품의 상태는 괜찮은 것 같군. 왕각!'
"옛 ! 대주."
뒤에서 답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밥을 안 준 게 아니냐
는 질문의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라 뒤에 서 있는 왕각이란 인물이었
음을 알았다.
"확실하게 돌려주고, 인수증(인수증)을 받아오도록."
'인수증?웬 인수증?'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사이도 없이 그녀들은 왕각이란 사내에게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고, 목적지가 어딘지 묻지도 못한 채 10일간이
나 끌려 다녀야만 했다. 정춘각(정춘각)이라는 음식점에 닿았을 때 왕
각은 매영인과 악양소소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
리더니 옥화 무제가 들어섰다. 매영인은 할머니를 보고는 갑자기 눈
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느꼈다.
"할머니!"
"오냐,오냐. 고생이 심했지?"
매영인의 언니뻘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옥화 무제는 매영인을 부드
럽게 안으며 토닥거렸다. 이때 왕각이 품 속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며
조손 상봉의 분위기를 망쳐 버렸다.
"상봉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고, 여기 서명부터 해 주시죠."
왕각의 손에는 '매영인 및 악양소소를 무사히 돌려 받았음을 증명
합니다' 하는 글자가 또렷하게 쓰인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손
녀를 품에서 떼어 놓고는 종이 조각을 받아들었다.
"자네, 일 처리를 아주 철저하게 하는군."
"감사합니다. "
하지만 왕각의 얼굴은 전혀 감사를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네 직책이 뭔가?"
"그건 밝히기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자신이 염왕대의 제12대 소속 무사라고 말한다면, 영리한 옥화 무
제는 그 한마디에서 염왕대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도 있었다. 또 현
마교의 상황까지도 잘하면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기에 왕각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을 거절했다. 하지만 옥화 무제는 왕각이 그런 식으
로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서명한 종이를 건네 주었다.
"여기 있네. 손녀를 무사히 넘겨 줘서 고맙다고 교주에게 전하게나."
교주라는 말에 왕각의 눈썹이 꿈틀했다. 총단에서 매우 조용히 일
어났고, 또 수습된 일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중원 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 무영문의 수뇌답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교주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라 하셨
습니다. "
"좋아. 한 달 후,그곳에서 "
왕각은 '그곳' 이 어디를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물어 보
지는 않았다. 자신은 다만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교주가 알
아서 할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중히 포권하는 왕각의 몸가짐에는 정과 마를 떠나서 위대한 무인
에 대한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는 것과 또는 것

묵향의 세력 재편성은 놀랍도록 빨랐다. 물론 그 모든 게 설무지가
해치운 것이었지만 말이다. 뇌옥에 갇혀 있던 많은 고수들은 묵향이
교주가 되면서 복권되었다. 그들은 장인걸이 어떻게 해서든 회유하
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었기 에 그들의 합류는 묵향으로서
는 뜻하지 않았던 횡재였다.
묵향은 5대 무력 세력을 통솔하는 막중한 자리인 내총관에 동방 뇌
무를, 그리고 외부 분타를 통솔하는 외총관에는 소무면을 임명했다.
그리고 9대 장로에는 천도왕 여지고,수라 혈신 북궁뇌, 천리 독행 철
영,고루 혈마 옥관패, 염왕 적자 한중평,삼면 인마 소무면,지옥 혈귀
천진악,홍진,관지,무영 신마 장영길을 각각 임명했다.
차석 장로였던 사혈 천신 호계악은 대호법으로 임명하고,초진걸과
여문기를 붙여 절정 고수 2백여 명을 통솔하게 했다. 또 천리 독행에
게는 고르고 고른 2백 명의 고수를 주어 새롭게 혈랑대(혈랑대)를 만
든 후 그 대주에 임명했다. 혈랑대는 장인걸이 가진 유일한 무력 단체
인 천마 혈검대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루 혈마 옥관패는 수라 마참대를, 염왕 적자 한중평에게는 천랑
대를, 섬서 분타 대전(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천진악에게는 염왕대
를,그리고 뛰어난 지략으로 묵향을 상당히 애 먹였던 무영 신마 장영
길에게는그 지휘력을 높이 사서 자성 만마대를 맡겼다.
설무지는 전체적인 세력을 재편성하면서 내적인 단결에도 힘을 쏟
았지만, 원래 마교라는 단체가 강자지존의 법칙이 확실하게 통하는
곳이었기에 그의 노력은 별 필요 없는 것이었다. 모두 묵향을 존경하
며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 몰라라 하는 묵향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며 설무지
가 천마 신교의 세력 재편에 정신 없을 때,그는 홀로 조용히 총타를
떠났다. 무영문의 문주 옥화 무제와 약속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내의 모든 크고 작은 일은 군사 설무지에 의해 입안(입안)되었고,
수석 장로 여지고를 통해 실행되었다. 여지고는 총단의 일은 내총관
동방 뇌무를,외부의 일은 외총관 소무면을 통해 지시했다.
내총관은 5대 무력 세력을 통솔할 수 있는 지위였고,외총관은 모든
분타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의 직속에는 그 어떤
무력 세력도 없었기에 실세라고는 보기 힘든 위치였다. 묵향은 무공
은 뛰어나지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그들을 한
직으로 돌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도와 거사를 행했던 사혈 천신 호계악,천리 독행,고
루 혈마, 염왕 적자, 지옥 혈귀에게는 각기 독립적인 세력을 주어 그
들에 대한자신의 신뢰감을 표시했다.
묵향은 교주가 된 후 원칙적으로 교주가 지니고 있던 막대한 권한
의 상당 부분을 수하들에게 이양해 버렸다. 그 덕분에 교주의 명령을
중계하는 역할이었던 내총관의 권력은 많이 축소되었고, 대신 장로
원의 힘이 급속히 부상했다. 마교는 원칙적으로 아홉 명의 장로를 거
느렸고, 그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세력을 거느렸다. 그렇기에 마교의
장로가 되려면 교주의 신임이 두터워야 했다.
묵향은 일부러 장로원의 권한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해 놓
으면 자신이 없어도 아홉 명의 장로가 모여 설무지나 내총관, 외총관
의 견제를 받으며 마교를 이끌어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잘 돌아가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충분한 자유 시간을 가
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묵향에게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
다. 그렇기에 묵향은 흘가분하게 총타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일부러 호위 따위도 거느리지 않았다. 호위란 것은 자신과 같은 상
상을 초월한고수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었다.
천천히 말을 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묵향은, 말안장에 검이랑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막대기 같은 것이 꽃혀 있었지만 평범한 체형
덕에 영락없이 할 짓 없는 서생처럼 보였다. 마화가 억지로 입혀 놓은
밝은 빛깔의 청의가 그의 섬세한 하얀 피부와 굵직한 선을 지닌 얼굴
에 잘 어울렸다.
말안장에 매달아 뒀던 술병을 풀어 입을 축이던 묵향은 약간은 쓸
쓸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술병을 안장에 달아 준 인물도 마화였
고, 그 안에 독한 천일취를 넣은 장본인도 마화였다. 불현듯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묵향은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잔소리가 너무 심해."
"어서 옵쇼!"
점소이가 반갑게 맞이했지만 묵향은 일언 반구도 없이 점소이를 밀
치고는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순간 옆 탁
자에 앉아 있던 사내들의 손이 검을 움켜쥐려고 움찔거렸지만,곧 청
의를 입은 사내가 자신들의 문주가 기다리던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
고는 모르는 척 딴전을 피웠다.
"오랜만이군요."
"우선은 교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런데 만나자고 한 용건은
뭐죠?"
옥화 무제는 짐짓 흥미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반짝이
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 단순한 인물이,너무나 단순하고 무식하게 생
각하는 바람에 오히려 파악이 불가능한 사내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대답은 하지 않고 품 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재빠른 동
작으로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챠릉!
순간적으로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네 사내들의 검이 반쯤 뽑혔다가,
묵향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이 무기류가 아닌 것을 알고는 황급히
다시 들어갔다. 원래가 이런 무인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의식적으로 천천히 이루어진다. 언제, 어느 순간에 서로
암습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건 뭔가요?"
"여태껏 본좌에게 협조해 준 데 대해 자그마한 성의를 보이는 것이
지. 그야말로 작은 성의니까 너무 적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받아."
옥화 무제가 그의 손에서 받아 쥔 종이는 전표(전표),그것도 상당히
신용도가 놀은 대륙 전장(대륙전장)에서 발행한 무려 금화 5백 냥 짜
리 전표였다
금화와 은화의 비율은 20대 1이니 이것은 은화 1만 냥이었고, 일가
족의 1년 생환비가 은화 다섯 냥 정도라면 2천 가구(가구)의 1년 생활
비 였다. 이때는 일가족이 보통 아홉 명 정도의 대가족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려 1만 8천 명의 1년 생활비 였다. 물론 풍족하게 쓸 수
는 없이 그저 대충 먹고 입는 데 들어가는 돈이었지만 말이다.
"자그마한 성의는 아닌 것 같은데요?하지만 마교의 교주라면 좀더
근사한 것을 준비했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녀가 파장되게 아쉬운 표정을 짓자,묵향은 씁쓸히 웃더니 딱딱
하게 말했다.
"과욕은 화(복)를 부르지."
"나중에 재앙을 받더라도 욕심은 내 보고 싶은데요"
옥화 무제는 일부러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도대체가 1백
40여 세에 이른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자태였다.
"후회하지 않을까?"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아요."
"좋아. 말안장에 매여 있으니까 가져가라구. 딴 건 건드리지 말고 말
이야."
"본녀는 도둑질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주니까 받는 거지요."
"좋을 대로. 그건 그렇고 장인걸은 어디에 있지?"
묵향의 질문에 옥화 무제는 일부러 방글방글 웃으며 시선을 돌려
창 밖의 화산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웠다
"본좌의 힘으로 찾으라는 건가?"
"영인이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정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
닌가요?'
"할말 없게 만드는군 그럼 다음에 보자구."
묵향이 일어서자 옥화무제도 따라 일어서며 그의 뒤를 쫓았다.
"왜 쫓아오는 거지?더 이상볼일은 없을 텐데?"
옥화무제는 생글거리며 답했다.
"선물을 받지 못했잖아요."

* * *

묵향이 이렇듯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그곳에서 3천여 리
떨어진 어두운 밀실 안에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적에서 동지로 변화
를 도모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호오, 이번에 큰 고생을 치루셨다구요."
"허허헛!뭐 그까짓 것이 고생이겠소?본좌에게는 아직 몇 곳의 비밀
분타가 남아 있고,또 천마 혈검대가 있는 이상 재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외다. "
그는 상대가 호탕한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재기라는 것이 너무나
도 어련다는사실을잘알았다. 그자신이 저 '웬수' 같은마교라는
단체 덕분에 너무나 오랫동안 음지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만큼 쉽지는 않을 거요. 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지요. 안
그렇소이까?'
"하지만 희망은 있소."
"어떤 희망말이오?'
"흐흐흐, 그것은 본좌가 마인이라는 것이지요. 묵향만 없어진다면
다시 교주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본좌에게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소."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은?"
"타로 그것이오. 그 녀석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 버린다
면 만사는 본좌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있고,그렇지 못한 상대가
있소. 또 죽일 수 없는 상대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배경
이 너무 튼튼한 인물이라든지,아니면 그를 죽인 것이 들통났을 때 너
무나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든지,또는 너무 강해서 죽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자도 있소.
본좌도 그를 없애려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지만, 마지막으로 내
린 결론은 그를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
아수 혈교(아수혈교)는 오래 전 묵향이란 인물과 단 한 번 충돌한
후,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그 결과 그 정
체 불명의 인물이 마교의 부교주 묵향으로 밝혀졌고,또 그의 무공 수
위까지 파악하고는 아예 응징을 포기해야만 했다.
마교라는 벽은 혈교가 힘을 떨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주는 걸림돌
이 되려고 작정을 한 듯 보였고,또 그것을 하늘이 도와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상대도,또 상대의 배경도 혈교로서는 간단히 무너
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혈교 교주가 자신 없는 듯 말했는
데,장인걸은 상대의 말을 가볍게 가로막았다.
"아아, 이론과 실제는 다르지요. 물론 물리적인 힘만으로 그를 상대
한다면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계책을 쓴다면 다르지요. 그대도 강
자고 본좌도 마찬가지요. 본좌가 가만히 궁리를 해 보니 강자에게는
독특한 성질이 하나 있더라 이거지요. 뭔지 아시겠소?"
"글쎄요."
"타로 자부심이란 것이외다. 자신의 적이 중원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허점이 생기는
것이지요. 만약자신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모른다면,그는 자신
의 호위에 만전을 기할 것이고 또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하겠지만,그
는 그렇지 않소. 그건 본좌가 같은 방법을 이용해서 한중길을 해치웠
기 때문에 자신할수 있소이다. "
"어떤 계책이라도?'
"오래 전부터 본좌가 그놈을 해치우기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소. 물
론 계획을 세우고 준비 작업을 시작한 것은 한중길 교주였지 만,본좌
가 그를 없애 버린 후에 보강 작업을 해 왔지요.
그 작업에는 본좌가 가장 신임하는 수하들만을 투입했고,2개월 전
에 모든 것이 완성되었소. 그 함정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던 장인(장
인)들은 모두 다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으니 비밀이 밖으로 샜을 가능
성은 아예 없소. 이제 그 함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하는 것만 남았을
뿐이오."
"흐흐흐,그대가 이렇듯 본좌를 믿고 비밀을 털어 놓으니,본좌도 한
가지 알려 드리리다. 그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없애 버릴 수는 있소."
"없애다니요. 그게 죽인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오?서로간에 말장
난은 하지 맙시다. "
"본좌의 말은 그야말로 없애 버린다는 말이요. 본교에는 대단히 강
한 술법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 것이오. 그 중에서 특히
강한 술법이 있소. 그걸 사용하면 죽일 수는 없지만 없앨 수는 있소."
"호오, 없앤다구요?"
"그렇소. 말 그대로 없애는 거요. 진세를 발동시키기가 어려워서 그
렇지, 진세만 발동되면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오. 본교에서는
그걸 묵령 시분술(묵령시 분술)이라고 부르지오. 그야말로 시체조차
분해되어 찾을 수가 없는 최고의 술법이오."
"호오 그런 게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데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소. 진법을 가동시
키는 데 약 반 각(8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요. 그 시간을 벌어
줄 자신이 있소?"
"반 각 정도라면 충분하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겨우 반 각
쯤이야, 하하하하."

* * *

"정말 아름답군요. 멀리서는 몇 번 욕지만 이렇듯 자세히 보기는 이
번이 처음이에요."
옥화 무제는 어린애가 새로운 장난감을 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맑
고투명한 검신에 새겨진 수룡을 바라보았다.
"문주님,그 따위 검 한자루에 감탄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
"호호홋! 그 따위 검 한 자루가 아니에요. 이건 무림 맹주의 신물인
빙백 수룡검(빙 백수룡검). 이게 본녀의 손에 들어온 이상,무림 맹주를
향해 남들보다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고 보는 게 옳겠죠. 총관은 그렇
게 생각하지 않나요?'
"물론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낱 껍질뿐인 무
림맹의 맹주자리를 노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우리에게는 2황야가
있고, 또 그는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총력을 기울여 그를 도와 준다면 나중에 크나큰 보상을 받을 수 있습
니다. 진길영 원수가 정벌군을 이끌고 돌아온 후에는 너무 늦다 이 말
씀입니다. "
"진길영 원수는 대요 전쟁에서 쉽게 발을 벨 수 없어요. 요가 거의
멸망한 지금 그 엄청난 땅덩어리가 전리품으로 남았어요. 그걸 탐욕
스런 여진족과 미련한 정안국 국왕,그리고 고려국 왕에게 적당히 배
분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요?여기서 배분이 잘못되면 곧장 아귀다툼
이 벌어질 것이 확실한데."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에요. 진길영 원수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2개월 이내
로는 돌아오지 못해요. 즉 두 달 동안 2황야를 주무를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동안 2황야를 주무르면서, 그를 우리 쪽
의 입맛에 맞도록 길들이는 것이 중요하겠죠."
"참,문주님. 중요한 보고가 있습니다. "
"뭔가요?'
"장인걸이 문주님과 제휴를 원하고 있습니다. "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보겠군요. 그와 제휴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어디에 있다고."
"있습니다. 여기 이것을 읽어 보십시오."
총관이 품 속에서 꺼내어 두 손으로 바친 종이는 천천히 날아 발 안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 속에
서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뭐죠?묵향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려 준
다고 해도 묵향을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
르지는 않을 텐데요?"
"하지만 조건이 근사하지 않습니까? 죽이는 방법이야 장인걸이 생
각해 낼 문제고,그 대신 본문에서 얻게 되는 것은 1천 냥의 금화와
실종되었던 진영 공주의 행방입니다. "
"흠, 역시 진영 공주는 장인결의 손아귀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좋아
요. 묵향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본녀가 원하는 게 아니죠. 장인
걸과 묵향이 피 터지게 싸울수록 본녀에게는 유리하니까 말이에요.
그러다가 혹 장인걸이 그를 암살하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막대한
희생을 치른 후의 장인걸을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즉시 시
행하세요."
"존명."

사라진 탈마의 고수

묵향의 여행은 그야말로 한동안의 휴식이었다. 그럴듯한 장소가 있
으면 남들이 한번씩은 해 보는 낚시도 했고,아름다운 산이나 색다른
구경거리가 있다면 한가롭게 관광을 하는 시골 서생처럼 그곳을 찾
아갔다. 또 맛깔스러운 요리가 있다면 일부러 시켜서 먹기도 했다
장인걸이란 거대한 적을,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하게 장대한 세력을
지닌 적을 제압하는 것은 단순한 무공 대결과는 달리 묵향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상대를 기만하고,모략하고,놈의 속임수에 속는
척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 뒤꽁무니로는 놈을 향한 함정을 준비하
고‥‥‥‥
묵향이 이번에 이렇듯 손쉬운 승리-거의 세 시진(7시간)에 걸친 사
투를 통한 것이었지만-를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천마 혈검대가 총단
에 없었던 덕분이었다. 천마 혈검대가 총단에 남아 있었다면 더욱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천마 혈검대는 장인걸이 지닌 세력 중
유일하게 묵향을 붙잡아둘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동안 해온 일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혹사였
기에, 묵향은 한가하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피곤해진 마음에 산
뜻한 휴식을 제공했다. 모략이나 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무인이었던
묵향으로는 요 근래 1년여가 매우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한가하게 떠돌던 묵향은 어떤 식당에 앉아 그곳 특산물인 황사(양
사)로 만든 탕에 곁들여 죽엽청을 비우다가 험상궂은 다섯 명의 무림
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적이나 시장했던 듯 오리당과 오리구이 다섯
마리를 시켜 정신없이 들이키고는 재빨리 식당을 빠져 나갔다. 그리
고 묵향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묵향이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에 상당한 흥
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한 이야기라고는 식당 안에서 음
식을 달라고 한 것과 대금이 얼마냐고 물은 것이 전부였지 만,묵향의
귀에는 또 다른 음성도 들려 왔다. 물론 이것은 전음으로 나눈 대화였
기에 식당에 앉아 있던 다른사람들은 들을수 없는 내용이었다.
(대형 , 그게 사실일까요?)
(물론이지,네녀석은 내가 한 번이라도 허튼소리 하는 것 봤냐?)
(하지만 구휘 대협의 무덤은‥‥‥‥)
(그러니까 그게 혈교놈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라니까, 진짜는 따
로 있어. 원래 구휘 대협은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은 아니었지. 그런
그가 재물을 잔뜩 모아 놓은 거대한 무덤을 건축 했겠냐?)
(그건 그렇지만‥‥‥‥)
(그의 무덤에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자취를 감춘 무림에서 사라진 10
대 기병의 최고라는 흑묵검(흑묵검)과 북명 신공이 있을 뿐이라구.)
여기까지 들은 묵향은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북명 신공은 자신의
손에 있었다. 한중길 교주에게서 장인걸에게로, 그리고 이제 총타의
주인이 된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험상궂은 사내의 다
음 말을 들은 후에는 더 이상쓴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북명 신공이라구요?)
(그렇지. 북명 신공은 두 권이야. 하나는 구휘 대협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아들 구천 대협에게 맡겼지만, 또 한 권은 언제나 품 속에 지
니고 있었지. 아마 그것은 흑묵검과 함께 있지 않을까?)
"한 권이 더 있다구?"
묵향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놈들은 음식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가 말을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덩치도 좋았고 다리도 길
고 쭉 뻗은 것이 대단히 뛰어난 명마들이었기에 묵향이 재미삼아 구
입해서 끌고 다니는 말과는 속도와 지구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묵향은 반 시진도 안 되어 그 차이를 느끼고는, 필요한 짐들을 재빨
리 말안장에서 꺼내어 대충 품 속에 넣은 후 경공술을 펼쳐 운아가기
시작했다. 시간도 많았고,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검 따위는 필요 없
지만 두 번째 북명신공만큼은 한번 읽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주에게서 강탈하다시피 얻어내서 읽어 본 북명 신공은 묵향의
무공 성취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묵향으로서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만사를 제쳐 두고 그들을 뒤따랐을 텐데, 지금은 다행히
시간까지 꽤 많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묵향은 상대가 또 다른 북명 신공을 찾아낼 때까지 조용히 뒤따라
가다가 조용히 말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물리력을 행사할 예정이었다. 묵향은 상대가 그것을 찾아
내는 것이 관심사였을 뿐,그들에게서 그걸 어떻게 얻어 내느냐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쫓아오는데요?)
(흐흐흐,놈의 저 나약한 몸매로 봐선 무영문의 정보가 영 미덥지 않
더니만,진짜일 줄이야. 놈이 추격을 시작했으니 더욱 조심해라 언행
에 신경을 쓰고,특히 우리끼리 주고받는 말은 어기 전성이 아니면 안
돼. 알겠나?)
(옛!흑마 대주님.)
그들은 묵향이 뒤따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삼광(삼광)에
들러 이것저것을 조사했다. 그리고는 뭔가 단서를 찾아 낸 것처럼 태
행산(태행산)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두툼한 책자한 권과 오래된 듯 너
덜거리는 양피지 한 장에 의지해서 길을 갔다. 물론 이 둘은 다 대어
를 낚기 위해 고심해서 제작한 미끼 였다.
묵향은 놈들의 뒤를무려 10일이나 끈기 있게 따라가 철우산(철우
산)에 도착했다. 과연 철우산은 구휘 같은 인물이 만년에 무공을 연마
하고 생을 마감할 생각을 했을 법한,너무나도 아름다운 산이었다. 산
세가 너무 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완만하지도 않은 데다가,군
데군데 기암 괴석이 드러나 있어 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그들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묵향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미약하지만 군데군데에서 마기(마기)와 사기(사기)가 느껴졌던 것이
다. 하지만 묵향은 발걸음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자신을 제압할 만한
고수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았고, 최악의 경우 혈마
와 같은 엄청난 인물이 있다고 해도 그와 정면 대결이 아니라면 도망
치는 것은 손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이리저리 모습을 숨기며 앞서가는 인물들의 뒤를 따르던
묵향이 이제 아예 대놓고 천천히 다가오자 숨어 있던 무리들은 묵향
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
"휘이 이 익 !'
긴 휘파람 소리가 심후한 내공을 싣고 울려 퍼지자 곧 묵향 좌우의
땅 속에서 암습자들이 튀어 나왔다. 묵향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엄청
난 속도로 튀어나오는 녀석에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일장을 먹
였다. 하지만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 반탄력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
다. 쓸 만한 실력을 쌓은 암습자 정도로 생각하고 날린 일장이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즉사했을 텐데도 나자빠졌던 상대는 비실거리며 일어
섰다.
"크아아아."
"쿠르르륵."
"이런,강시들이었군. 그런데 무슨 강시들이 이렇게 빠른 거야?들은
것하고는 좀 다른데?"
저마다 괴성을 지르며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강시들은
묵향이 익히 알고 있던 혈교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 아니었다. 혈교의
강시 제조법이 장인걸 패거리에게 전해진 후 더욱 연구를 거쳐 개발
된 천령 강시였다. 이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강시와 달리 이 녀석은 충
분히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강시처럼 피리 소리 따위로 조종
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예전의 한중길 교주는 묵향을 제거하기 위해 보통의 강시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고,더욱 강인한 천령 강시를 3천 구나 제작해 두었다. 그
들 상당수는 장인걸이 한중길 교주를 없애는 과정에 투입되어 소모
되었다 그러나 그 소모분을 장인걸이 적절하게 채워 놓았기에 이곳
에는 3천 2백 구의 천령 강시 대부대가존재했다.
묵향은 처음 한방 맞았던 천령 강시가 비실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검을 뽑았다. 놈들이 자신을 상대하
기 위해 어느 정도 전력을 감춰 뒀는지 모르니,자신의 장기인 검술로
상대하는 편이 공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슈걱!
공력의 소모가 큰 검강 종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어검술만
을 이용해서 묵향은 천령 강시 대군을 상대했다. 검 푸른빛으로 이글
거리는 묵후검이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무쇠보다도 단단하
다고 알려진 천령 강시의 몸은 토막이 났고, 검붉은 약재에 전, 죽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천령 강시를 제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의 8할이
독 종류였기에 그 피가 튄 묵향의 옷에는 곧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만독 불침(만독불침)을 자랑하는 그의 신체에는 타격을 줄수 없었다.
검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뽑아 내기에 그 어떤 고급 검술보다도 공
력의 소모가 작은 어검술만을 사용했으므로 한꺼번에 많은 수의 천
령 강시들을 토막칠 수는 없었지만 묵향은 한 번에 하나나 둘, 어떤
때는 셋씩 착실하게 강시들을 분해해 나갔다.
극마에 이른 고수였던 흑마 대제 한중길이나 무림 맹주였던 화경의
고수 무극 검황 옥청학까지 어느 정도 궁지에 몰아넣은 천령 강시였
지만, 탈마의 고수인 묵향에게는 그 어떤 해도 주지 못하는 듯 보였
다. 그 때문인지 4백여 구의 천령 강시가 분해되어 버리자 당황한 듯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대천악 마나진(대천악 마나진)을 펼쳐랏!"
대천악 마나진. 마교의 1천 년 역사에서 단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
았던 전설적인 진세가 서서히 발동되었다. 온 사방에서 마기가 짙게
깔리며 천령 강시는 더욱 힘을 얻은 듯 미쳐 날뛰었다.
원래가 대천 악마 나진은 마기와 요기를 지닌 인물에게는 더욱 힘
을 보태어 주고,그렇지 못한 인물들은 그 힘에 압도되어 평상시 힘의
반도 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 진세를 이용하여 천하 제일문이 멸문
당했을 때,그 강대한 힘에 놀란 마교의 고위급 고수들에 의해 오히려
사용이 제한되었을 정도로 지독한 진세 였다.
천령 강시들이 대천 악마 나진의 그 강력한 진세 속에서 미쳐 날뛰
기 시작했을 때 그와 비슷한 현상이 묵향의 몸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혈관을 격동시키는 힘의 이동. 묵향은 자신의 피가 끓어 오르는 듯
하며 온몸에서 힘이 펄펄 솟는 것을 느꼈다. 마의 극한을 뛰어넘었기
에 도저히 마인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묵향 역시 마인이었기에 대
천 악마 나진에서 힘을 얻어 내고 있었다. 이것으로 묵향의 내공 근원
이 정인지 마인지는 자연스레 유추해 볼수 있을 것이다.
대천 악마 나진이 펼치지고 난 후 묵향은 더욱 강맹한 어검술을 구
사하며 천령 강시들을 베어 갔고, 이제 천령 강시의 수가 수백 구 정
도로줄어들었다. 장인걸은 입술이 바싹말라 왔다.
후퇴할 것인가?아니면 천마 혈검대를 투입할 것인가?
자신이 믿었던 함정은 묵향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음이 드
러나 버렸다. 과거 화경이나 극마에 이른 한중길이나 옥청학도,끝마
무리는 자신이 했지만 그래도 천령 강시 덕에 꽤 많은 힘을 기기에 혹
시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그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있었다. 3천 구
가 넘는 천령 강시를 반조각 내고도 묵향은 아무런 피로감도 보이지
않았다. 한중길이나 옥청학은 이때쯤 헥헥대며 제대로 실력을 발휘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자신은 있는 거요?"
상대는 장인걸이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는 듯 장인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들의 선조가 제작한 최
고의 강시인 천령 강시가 저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에는 엄청
나게 충격을 받았다.
"물론이오. 하지만 반 각(8분)이 필요하오."
"그렇다면 빨리 준비하시오. 저놈이 천령 강시를 몽땅 조각 내 버리
기 전에."
핏빛과 같은 적포를 입고 있는 인물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수
하들도 묵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령 강시들처럼 묵
향을 향해 돌진하는 대신 상당한 거 리를 두고 포진한 상태 였다.
그들은 모두 해골 모양이 새겨진 긴 지팡이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
을 외웠다. 그들이 모두 같은 주문을 외우지는 않았다. 혈교 교주를
따라 도열한 이들 3백여 명의 혈교 고수들 중 1백여 명만 교주와 비슷
한 유의 주문을 외웠고, 나머지 2백여 명은 목표물이 도망치지 못하
도록 옭아매는 주문을 외웠다.
묵향은 이제 약 5백여 구밖에 남지 않은 천령 강시를 상대로 싸우다
가 과거에 상당히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어떤 느낌
을 받았다. 뭔가 끈적한 것에 갇힌 느낌, 아차하는 순간 주위를 둘러
봤을 때는 이미 예전에 자신을 꽤나 고생하게 만들었던 해괴한 해골
모양 지팡이를 든 놈들 3백여 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경
험으로 깨달았던 묵향은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갔다. 엄청난 검기가
사방으로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그의 검기는 대천악 마나진의 도움
으로 더욱 막강해 졌으나,요기를 뿜어 대는 혈교의 마술도 그 힘을 배
가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겨우 아홉 명이 자신을 향해 술법을 시전했
지만,지금은 스물두 배나 많은 인원이 묵향을 향해 대라 혈망진(대라
혈강진)을 펼치고 있었다.
퍽적!
사방으로 뿜어 나가는 검강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자 혈의를 입은
인물들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겨우반각. 반 각을 버티
는 게 이렇게 힘들었다 묵향이 첫 번째로 혈의 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강기를 사방으로 뿜어 댔을 때,그 한방에 수백의 천령 강시들이 토막
토막 잘려 파괴되는 것을 본 그들은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주문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다가
정신이 흐트러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시간이 가기만을 죽자고 기다리면 시간은 더욱 안 간다. 대라 혈망
진은 상대의 진기를 뺏는 효과도 가졌지만, 대천악 마나진 안에 들어
와 있는 묵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이 난다는 듯 괴력을 발휘했
기에 혈의 인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혈교의 무리들은 마기와는 관계
없이 요기를 띄고 있었기에 그 진세의 영향을 받아 힘을 낭비하지는
않았지만,그렇다고 그들의 능력이 배가된 것 또한 아니었다. 어쨌든
아무리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도,또는 아무리 시간이 늦게 지
나가기를 바란다 해도 시간은 일정하게 지나갈 뿐이다.
혈교의 교주,그리고 그와 함께 주문을 외워 대던 1백 명의 혈교 고
수들이 어느순간 손을 쭉 뻗자 암혹의 기운이 묵향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태껏 전력을 다해 술법에 정신을 쏟던 2백여 명
이 자신들의 할 일이 가까스로 끝난 것을 느끼고 허물어졌다 그들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으면서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장본인
이 분해되는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야말로 혈교가 최고, 최강의 주문으로 생각하는 묵령 시분술의
위력에 의해 그놈의 시체까지도 갈가리 분해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
는 장면을 꼭 봐야지만오늘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이었다.
검은 기운은 곧 사라졌지만 묵향의 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혈의
인들의 믿음대로 묵향은 시체마저도 분해되어 버린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그를 이곳에서 '없앤 것만은 확실했다.
모두 지독한 공력 소모와 오랜 시간의 정신 집중으로 몸을 가누기
도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혈교의 교주는 부하들보다는 훨씬 더 우
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었지
만, 그의 얼굴에서도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 역
시 엄청나게 지쳤음은 당연했다.
장인걸이 혈교의 교주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과연,없앤다는 것이 바로 이런 말이었구려."
"...'.
장인걸은 묵향이 입었던 검은 옷과 땅바닥에 뒹구는 묵혼검을 지그
시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묵령 시분술이라. 정말 대단한 술법이었소."
이때 묵혼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줄에 매달려 끌려오듯 천천
히 날아올라 장인결의 손에 들어왔다. 장인걸은 묵혼검을 차근차근
훑어 봤다 자신이 사용하는 검에 비해 매우짧았다. 하지만 거무튀튀
한 묵광을 발하는 검신은 매우 깨끗했고, 또 날카로워 보였다.
"좋은 검 이군."
그와 동시에 장인걸의 손에 들려 있는 묵혼검이 허공을 갈랐다.
슉!
장인걸이 노획 물품을 감상하는 줄 알고 마음을 놓고 있던 혈교 교
주는 그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우두머리의 곤경을
본 혈교의 고수들이 장인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곧이어 나
타난 천마 혈검대에 가로막혔다.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혈
교의 고수들은 장인걸과 그가 거느린 천마 혈검대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모두 너무나도 지쳐 있었던 것이다.
장인걸은 묵흔검의 짧은 검신 덕분에 죽음은 면한 채 신음하고 있
는 혈교 교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묵혼검을 내려 놓았다.
"역시 이 검은 묵향에게나 어울릴까 본좌의 손에는 맞지 않는구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대에게 고통을 오랜 시간 선사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오. 이제 곧 편안하게 해 주겠소. 잠시만 기다리시구
려,흐흐흐."
장인걸은 신음하고 있는 혈교 교주의 곁에 서서 공력을 있는 대로
오른손에 끌어 올렸다.
"대단한 술법이기는 했지만,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술법이었소. 잘
가시오."
그리고 장인걸의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퍽!
혈교 교주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대송 제국의 숨막히는 격변기. 그때를 즈음하여 진천왕의 세력은
확실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를 뒤에서 지원하던 혈교가 3
백여 명의 고급 고수들과 교주를 잃은 후 복수의 이빨을 갈며 지하로
잠적해 버렸기 때문이다.

추천 (0) 선물 (0명)
IP: ♡.221.♡.159
23,56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1-06
0
407
3학년2반
2022-01-06
0
387
3학년2반
2022-01-06
0
528
3학년2반
2022-01-06
0
373
3학년2반
2022-01-06
0
354
3학년2반
2022-01-05
0
339
3학년2반
2022-01-05
0
447
3학년2반
2022-01-05
0
400
3학년2반
2022-01-05
0
360
3학년2반
2022-01-05
0
523
3학년2반
2022-01-04
0
394
3학년2반
2022-01-04
0
489
3학년2반
2022-01-04
0
486
3학년2반
2022-01-04
0
511
3학년2반
2022-01-04
0
466
3학년2반
2022-01-03
0
376
3학년2반
2022-01-03
0
311
3학년2반
2022-01-03
0
427
3학년2반
2022-01-03
0
445
3학년2반
2022-01-03
0
440
3학년2반
2022-01-02
0
755
3학년2반
2022-01-02
0
861
3학년2반
2022-01-02
0
557
3학년2반
2022-01-02
0
425
3학년2반
2022-01-02
0
358
3학년2반
2022-01-01
0
426
3학년2반
2022-01-01
0
384
3학년2반
2022-01-01
0
338
3학년2반
2022-01-01
0
599
3학년2반
2022-01-01
0
56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