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서울의 만가 4

3학년2반 | 2022.01.31 07:49:13 댓글: 0 조회: 554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061
11.
황홀
"마야, 나이도 어린데 어쩌다가 이런 데서 일하게 됐지? 한국이라면 몰라도 더구나 일본에서 말이야?"
네로는 그것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이라도 좀 들었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십대 소녀에 불과한 한국 출신의 어린 여자가 긴자의 유명한 술집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는 것이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처음 그녀와 자리를 같이했을 때에도 그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그 점을 물었었다.
그러나 마야는 미소만 지을 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신비스런 미소만 떠올리고 있을 뿐 그의 질문에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네로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야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네로는 그녀의 손만 잡았는데도 소년처럼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첫사랑의 여인한테서 느꼈던 그런 떨림이 그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첫사랑의 연정을 품었던 여인은 그보다 세 살이나 많았었다.
그녀는 친구의 누나였는데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그는 고등학교에 재학중이었다.
그녀는 동생의 친구로서 그를 귀여워해 준 것뿐이었는데 그는 그렇지가 않고 그녀를 짝사랑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사랑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림으로써 끝이 났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그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지금까지 그는 재력에 힘입어 숱한 여인들과 손쉽게 잠자리를 같이 해봤지만 온몸이 떨릴 정도의 신선한 충격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돈을 보고 달라붙은 여인들한테서 신선한 감동을 느끼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린 소녀한테서 옛날에 잃었던 그 신선한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나? 물론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겠지. 그 사정을 내가 좀 알면 안 될까? 난 일본 사람이 아니고 너하고 같은 한국인이란 말이야.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너 같이 예쁜 애가 이런 데서 일본놈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프단 말이야. 같은 한국인끼리 사정을 털어놓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 난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하고 있지만 같은 한국인으로서 너 같은 애를 도와 줄 수 있는 힘은 있어."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손을 잡힐 때처럼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이 아가씨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과연 알고 있을까? 사전에 손님의 신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룸에 들어올 텐데, 그녀는 전혀 이쪽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상대한 여자들은 그의 신분을 알고 나서는 하나같이 자진해서 그의 품에 안겼었다.
그녀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가 좋아서라기보다 그의 재력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명함을 한 장 꺼내 마야에게 주었다.
"나를 소개하지."
명함을 받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표정이 마치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W그룹이라는 게 뭐하는 데예요?"
그녀가 천진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정말 기대 밖의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반응을 보인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W그룹을 모르다니! 그는 모욕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한테 인생을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난감함을 느꼈다.
아무튼 설명을 해주되 그녀가 놀란 나머지 입이 딱 벌어지게 설명해 주어야겠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W그룹이란……에또……그러니까 여러 큰 회사가 한 사람의 소유 속에 있는……다시 말해 한 사람이 여러 큰 회사를 가지고 있는데……그것들을 뭉뚱그려서 그룹이라고 하는데……쉽게 말하면 재벌 회사를 말하는 거지. W는 내가 가지고 있는 회사들을 한데 묶어서 부를 때 부르는 이름이지. 회사 종업원들만 해도…… 수만 명이나 되지."
그는 이야기하면서 그녀를 살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감동하는 빛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말도 다 듣겠다는 듯 신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럼 부회장이란 것은 뭐예요?"
그녀가 명함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부회장이란 것은 에또 그러니까 그룹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를 말하는 거지. 지금 우리 그룹은 내 외삼촌이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실제 회장은 나야. 삼촌은 월급받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면 언제든지 내놓을 사람이지. 내가 나이도 어리고 해서 임시로 외삼촌이 맡고 있는 거야."
그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젠가는 회장이 되시겠네요?"
"그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맡을 수 있지. 하지만 그걸 맡으면 그 대신 골치 아픈 게 많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야. 이렇게 놀러 다닐 수도 없고 매일 일에만 붙어 지내야 하지. 인생이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사는 거라고 나는 봐. 일만 하다가 죽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 왔다.
머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한참 동안 맡고 있으면 취할 것 같았다.
그는 속이 달아올라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그녀를 사로잡고 싶었다.
그녀가 자기한테 매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상대해 온 여자들하고는 다른 것 같았다.
"지금 제일 가지고 싶은 게 뭐야? 뭐든지 말해 봐. 다 사줄 테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없어요."
"가지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네, 없어요."
"이런 곳에 나오는 이유가 뭐야? 돈을 벌기 위해 나오는 거 아니야?"
"글쎄요."
"돈 많이 벌고 싶어서 나오는 거잖아, 안 그래?"
"아뇨. 많은 돈 가져서 뭐하게요. 전 여기서 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가 거짓말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표정에 욕심 같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꼭 돈 때문에 이런 데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지?"
그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미있어요. 재미있어서 나와요."
"재미로 나온다구?"
그녀는 갈수록 어이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 기대 밖의 대답이 그의 마음을 또 사로잡았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게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참, 언제 한국에 돌아가실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난 주로 도쿄에서 지내고 있어. 서울은 싫어. 여기서도 일을 볼 수 있거든. 여기에도 우리 회사 지사가 있어. 넌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 네가 제일 예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몇 번 도리질하다가 그의 입을 받았다.
감미로운 입맞춤에 네로는 온몸이 녹아 들 것 같았다.
그는 난생 처음 여자하고 입을 맞추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너무 아까워. 이런 데 있기에는 너무 아깝단 말이야."
한참 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 그가 한 말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그가 너무 빨아댔기 때문에 빨개져 있었다.
"왜놈들한테 손도 못 대게 해야겠어."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국에 가고 싶지?"
"아뇨, 가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 보고 싶지 않아?"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이 잠시 허공을 더듬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안 계세요."
"그럼 고아란 말이야?"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는 가여운 생각에 그녀를 다시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내가 이 소녀의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그 날 그가 그녀에 대해 알아낸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얻은 것이 있다면 자신이 그녀를 너무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가슴이 벅차 올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에도 그는 세브리느를 찾았다.
그는 완전히 소년처럼 들떠 있었고, 마야를 보는 눈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 날 그는 어느 때보다도 기쁜 모습으로 세브리느를 나왔다.
그는 마야한테 자신의 아파트를 방문해 달라고 청했는데, 그녀가 의외로 순순히 그의 초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녁 식사에 맞추어 그녀를 초대했던 것인데, 그녀는 그 초대에 응하기 위해 그 날 저녁 세브리느에 나가는 것도 포기했다.
변태수의 호화 맨션 아파트는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마야가 오기로 되어 있는 날 오후 다섯 시경 그는 약속 장소로 자신의 자가용인 푸조 505를 보냈다.
운전사가 푸조 505를 몰고 약속 장소에 나가 십 분쯤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백색 벤츠 승용차가 그 앞에 다가와 멈춰 섰다.
벤츠 운전사가 뛰어나와 뒷문을 열어 주자 안에서 눈처럼 흰 드레스 차림의 마야가 드레스 자락을 쥐고 밖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그녀는 챙이 넓은 흰 모자를 쓰고 있었고, 눈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이 가려지지는 않았다.
길 가던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야는 뒤에 주차해 있는 푸조 쪽으로 걸어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운전사는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가 차 옆에 다가와 서자 그제서야 차에서 후닥닥 내렸다.
"저기, 변 회장님과 약속하신 분이신가요?"
그는 변 부회장을 서슴없이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네, 그래요."
마야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사는 재빨리 뒷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마야는 예의바르게 인사하면서 푸조의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변태수의 맨션 아파트는 70평짜리 아파트 두 채를 그 사이의 벽을 터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초호화 아파트였다.
그러니까 그의 아파트는 1백 40평짜리인 셈이다.
구조를 보면 한쪽 아파트는 완전히 그의 전용으로 되어 있었다.
거실은 파티도 열 수 있을 만큼 커보였고, 두 개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사우나 시설이 갖추어진 욕실이 있었다.
베란다가 또한 넓어서 거기에는 의자와 탁자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다른 쪽 아파트에는 가정부 두 명과 경비원, 그리고 개인 비서가 있었다.
회사에 관계되는 사람들과 그 밖의 일반 방문객들은 그쪽 아파트에서만 만났다.
두 아파트 사이의 벽에는 조그만 철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것이 두 아파트를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 문은 변태수가 기거하는 아파트 쪽에서만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다.그리고 두 아파트에는 제각기 다른 출입문이 달려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오 층으로 올라간 마야는 변태수가 기거하는 아파트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변태수는 검정 바지 위에 흰 저고리를 받쳐입고 있었다.
목에는 자주색의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마야에게 가볍게 키스한 다음 그녀의 목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술잔을 들고 건배했다.
실내에는 조용한 무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창문으로는 황혼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황혼의 빛 속에 앉아 있는 마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춤에 자신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춤을 청했다.
마야는 스스럼없이 일어나 그에게 몸을 맡겼다.
마주 서니 그녀의 키가 남자보다 더 컸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춤을 추었다.
그녀의 능숙한 춤 솜씨에 그는 속으로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야, 세브리느에 나가는 거 그만둘 수 없어?"
춤을 추면서 네로는 그녀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여기서 나하고 함께 지내면 어때? 세브리느에서 버는 것, 내가 다 주겠어. 그것보다 두 배 더 주겠어."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럴 수 없어요."
그 정도면 그의 제의를 받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네로는 그만 무안한 표정이 되었다.
"왜? 왜 그럴 수 없다는 거지? 거기에 나가서 마야한테 도움이 되는 게 뭐야?"
"제 생활에 간섭하지 말아요."
그녀는 가만히 말했지만 그 한마디에 그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한참 후 자신의 체면을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마야의 사생활을 간섭하려는 게 아니야. 마야를 위해서…… 마야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보호해 주기 위해서 그런 거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전 지금 생활이 제일 즐거워요."
"마야!"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애타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절하지 마. 몸을 한 번 보고 싶으니까 거절하지 마."
그녀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겨 나갔다.
여름철이라 옷을 많이 입은 것도 아니었다.
지퍼를 내리자 흰 드레스가 껍질을 벗듯 아래로 스르르 흘러내렸고, 곧장 브래지어와 조그만 삼각 팬티로 가려진 반라의 육체가 드러났다.
황혼빛 속에서 그 육체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에서 마지막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
네로는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소녀의 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까지 벌리고 있는 것이 완전히 넋 나간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는 마치 잘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상이 거기에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이걸 만들었을까? 미켈란젤로의 작품일까? 아무리 미켈란젤로라 해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이런 걸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는 손을 뻗어 조각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턱, 어깨, 가슴, 배, 허리, 엉덩이, 허벅지 순으로 만지다가 맨 마지막 부위에 이르러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거기에다 입을 맞추었다.
"마야, 사랑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마야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마야, 사랑해!"
그는 아이처럼 말했다.
"사랑해 주세요."
그녀가 어른스럽게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녀는 침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놀라서 서 있는 그를 쳐다보면서 침대 위로 올라가 그를 향해 비스듬히 누웠다.
침대 위에 누워서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은 더 이상 십대 소녀의 모습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완숙된 여인의 농염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릴 수도 없었다.
그럴 수 없다고 뒷걸음질로 물러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서 있다가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벌거벗은 몸은 자신이 보기에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똑바로 서지 못하고 옆 모습을 보이면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가 마야를 품었을 때 그는 그녀가 여느 여자들과는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피부의 감촉이 보드랍고 매끄러우면서도 거기에는 마치 상대방을 흡수하는 것 같은 접착력 같은 것이 있었다.
피부가 닿는 순간 이상하게 전신이 착 감기면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입을 맞출 때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비하면 옷을 입고 있을 때 그녀와 가졌던 키스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녀의 혀놀림은 기막힐 정도로 섬세하면서 공격적이었다.
그는 입속이 얼얼해지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품었다기 보다는 그 자신이 그녀에게 안겼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는 그녀의 두 팔과 다리에 감겨, 온몸이 테이프에 접착된 것 같은 기분 속에 빠지며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마침내 그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 네로는 자신이 여자한테 강간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주 새로운 기쁨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한없이 휘둘리는 동안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녀와 결혼해야 한다! 이 소녀야말로 바로 지금까지 내가 찾던 여자야!' 그녀는 그를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네로는 울고 싶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마야, 우리 결혼해. 너를 여왕처럼 해줄게."
마야는 위에서 그를 타누르면서 차갑게 웃는다.
"왜 웃지? 난 정말로 말하는 거야. 나하고 결혼해 줘."
"싫어요!"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고, 네로의 입에서는 '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무너지고 해체된 모습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위대하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하고 결혼해, 마야."
"안 돼요."
"사랑해, 마야."
"사랑해요."
그녀는 옆으로 달라붙더니 그의 귀를 깨물었다.
"부인이 있잖아요?"
"별거중이야. 이혼한 거나 다름없어."
"그럼 먼저 정식으로 이혼하세요."
그녀는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12.
비바람치는 밤 불과 두서너 번밖에 만나지 않은 소녀한테 반해서 결혼 신청을 했다는 것은 시쳇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남자 쪽의 정신 상태를 감정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당사자인 변태수는 진지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확신을 품었고, 그래서 결코 잘못된 생각이라고 여기지를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그 같은 결정이 남아다운 쾌거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기어코 성사시키고야 말겠다고 스스로 다짐할 정도였다.
아직 채 스물도 안 된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면, 그것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면 틀림없이 큰 반대에 부닥칠 것이고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그 자신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오히려 반대도 없고 화젯거리도 없다면 그거야말로 싱거운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차제에 그녀와의 결혼이 화제의 초점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랄 정도였다.
엉뚱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괴팍한 성격을 지닌 그인지라 만난 지 서너 번밖에 안 된 소녀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마야는 애정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그의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애완동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소유욕을 그는 단지 애정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소유해 왔었고, 따라서 마야라는 애완동물도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난히 작은 키에 도수 높은 안경까지 낀 그는, 소유하고 싶은 것을 모두 소유하고 그것을 세상에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멋진 사나이로 보이게 하고 싶은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은 자기에게 그러한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마야가 그의 아파트를 방문한 다음 날 아침, 그는 드디어 별거중인 아내에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이혼 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때라고 마음을 다져 먹고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마야를 맞이하려면 지금의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던 것이다.
마야는 나이가 어린 것치고는 그런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자기와 결혼하고 싶으면 본부인과 정식으로 이혼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아내와 의례적인 이야기를 끝낸 다음 그는 본론에 들어갔다.
"집에 언제 오실 거예요? 아이들이 보고 싶어해요."
임순애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좋은 기회다 싶어 마침내 이혼 문제를 끄집어냈다.
"우리 사이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서울에 가지 않을 거야. 서울에 가더라도 집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어차피 헤어질 거 질질 끈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니고……빨리 매듭 짓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거라고 생각해. 나도 더 이상 이대로 혼자 지낼 수는 없어."
"좋은 아가씨가 생긴 모양이군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왜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나는 엄연히 당신의 아내예요."
"아내 좋아하네! 그런 형식적인 걸 가지고 붙들고 늘어지지 마. 구질구질한 여자 같으니!"
"새파란 계집애하고 재미 보니까 나 같은 거 안중에도 없나 보군요? 정 그러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새파란 계집애라니, 무슨 개떡 같은 소릴 하는 거야?"
"흥, 여기 있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아세요? 여기 있어도 당신이 어떻게 하고 다니는 줄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보고 있어요. 긴자에서 당신이 네로 황제처럼 돈을 뿌리고 다니는 거 다 알고 있단 말이에요. 당신의 별명이 네로 황제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변태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놈의 여편네가 어떻게 그런 걸 알았을까.
내 주위에 스파이를 심어 놓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는 화가 치밀었다.
"아주 많은 걸 알고 있군. 이젠 여기다 스파이까지 심어 놓았군. 그렇게까지 나를 감시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런다고 우리 사이가 좋아지는 건 아냐. 갈수록 멀어진다는 걸 알라구!"
"멀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난 당신이라는 사람을 저주하고 증오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 증오할 거예요. 이혼해 달라고요? 흥, 어림없어요! 그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마얀가 뭔가 하는 계집애한테 폭 빠져서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제정신이 든 다음에 이야기해요. 제정신 아닌 사람하고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오라질 년!"
네로는 씩씩거리면서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내가 마야와의 관계는 물론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야를 알게 된 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아내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 있는 건 분명히 스파이가 있어 그때그때 보고를 한 게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와 함께 그 스파이를 잡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이렇게 된 이상 물러날 수는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서울로 다시 국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신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내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오자 그는,
"건방지게 누가 전화 끊으라고 했어!"
하고 소리쳤다.
"소리지르지 말아요! 간 떨어지겠어요."
"잘 들어! 넌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야. 지금까지 아내 대접을 해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참, 기가 막혀서. 당신은 내 남편될 자격이 있는 남자였나요?"
"얼마 필요해?"
"위자료 말인가요?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아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도장을 찍어 줄 수는 없어요. 도장을 찍을 바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죽어 버리겠어요."
"뭐가 어째?"
그는 펄쩍 뛰었다.
그는 아이들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아내한테는 정나미가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아이들한테만은 갈수록 뜨거운 부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죽겠다니,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내 자식이니까 내가 데리고 죽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어째서 네 자식이야, 내 자식이지!"
"아이들을 낳고 키운 건 저예요. 남자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책임하게 그걸 쏘아대지만 여자는 그렇지가 않아요. 여자들이 피눈물 나게 자식을 키워 놓으면 나중에 가서 뻔뻔스럽게 애비 노릇하려고 드는 게 남자들이에요. 당신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어요. 법적으로는 아버지일지 모르지만 엄밀히 따져 아버지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갈보 같은 것!"
"갈보라고 어미될 자격이 없나요?"
말싸움에서는 결코 아내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가 이렇게 거세게 저항하고 나서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도 막판에 몰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본색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게 아닌가.
"결혼하기 전에 딴 남자와 동거 생활까지 한 년이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에 남겠다는 거야? 뻔뻔스런 년 같으니!"
마침내 그는 그녀의 가장 아픈 점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전 같으면 억울하다고 울면서 매달릴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모르는군요. 거울을 한번 보세요. 당신이 남자처럼 생겼는지 자세히 한번 보세요.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 난 불행한 여자였어요. 한번도 당신한테서 성적으로 만족을 못 느꼈으니까요. 당신은 그 점에서 국민학생 수준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난 참아 온 거예요.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당신은 나한테 감사해야 할 거예요."
그것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최대의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 악을 썼다.
"뭐뭐, 뭐가 어째? 야! 야! 이년아, 뭐가 어쩌고 어째? 말이라고 다하는 거야? 야!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당장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가서 죽여 버리고 말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세요."
아내의 당당한 말에 그는 수화기를 동댕이쳤다.
너무 울화가 치미는 바람에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 아내를 요절내고 싶었다.
머리채를 끌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도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당장 서울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마야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란 마야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기로 한 것이었다.
어제 이야기 끝에 우연히 그녀가 디즈니랜드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받아 네로는 즉시 내일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일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고 그와 헤어졌다.
이유인즉슨 내일 일이 있기 때문에 약속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전화를 걸겠다고 했는데, 네로는 그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전화를 기다렸지만 그녀로부터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외출하지 않고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는 오후에도 내내 충실하게 전화통을 지켰다.
혹시 전화가 고장나지 않았나 해서 수화기를 들어 귀에다 대보기까지 했는데, 전화는 정상이었다.
저녁때가 되어도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이제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전화를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불어대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밖에는 불빛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멀뚱히 천장만 쳐다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일어나 세브리느에 전화를 걸었다.
마야를 찾자 대신 마마가 나왔다.
"어머, 회장님, 웬일이세요?"
호들갑 떠는 그 일본 여자가 그는 싫었다.
"마야 바꿔 줘요."
그는 시무룩해서 말했다.
"이제 오시지도 않고 전화만 거시는 거예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거기 못 가겠어."
"어제도 안 오셨잖아요."
"마야 좀 바꿔 줘요."
"정말 너무해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마야만 찾으시기예요? 정말 해도 너무하셔요."
앙탈 같기도 하고 괜히 한번 그래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야 좀 바꿔 달라니까!"
그가 역정을 내자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마야는 오늘 나오지 못한대요."
"왜?"
"몸이 불편한가 봐요."
"어디가 아프대?"
"모르겠어요."
"집이 어디야?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줘."
그는 당장 꽃을 들고 문병이라도 가야겠다는 듯 말했다.
"전화 번호는 몰라요."
"거기 나오는 호스티스의 전화 번호를 모른다니, 그게 말이 되나?"
"모르는 걸 어떡해요. 본인이 한사코 가르쳐 주지 않으면 할 수 없잖아요. 그 애는 비밀이 많은 애예요."
불성실한 대답에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전화를 끊었다.
화가 나 안절부절못하면서 창문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여러 번 울린 뒤에야 돌아서서 수화기를 집으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어디 가서 술이라도 퍼마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외출하기 위해 양말을 신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마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세브리느에 전화를 걸었더니 몸이 아파서 못 나온다고 하잖아. 전화 걸기로 하고 안 걸면 어떡하는 거야? 하루 종일 전화 기다렸어."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왜 전화 안 걸었어?"
"아파서 그랬어요."
"어디가 아파서 그래?"
"머리가 아파요. 하루 종일 누워 있었어요. 지금은 좀 괜찮아요. 보고 싶어서 전화 걸었어요."
보고 싶어서 전화 걸었다는 말에 그는 그만 간장이 녹아 드는 것 같았다.
"나도 보고 싶어.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에요. 드라이브하고 싶어요. 교외로 단둘이 드라이브하고 싶어요. 비 오는 날은 저는 꼭 드라이브해요."
"운전할 줄 알아?"
"전 서툴러요, 태워 줘요. 운전할 줄 모르세요?"
"운전이라고 하면 끝내 주지. 하지만 운전사한테 맡기는 게 더 안전하고 편하지 않을까? 난 지리도 잘 모르니까."
"싫어요! 운전사 없이 손수 운전하고 나오세요. 우리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는 건 싫어요."
"알았어. 내가 직접 운전하고 나가지."
"경호원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도 달고 나오지 마세요. 그 사람들 정말 싫어요. 그 사람들 보는 데서 어떻게 쑥스럽게……."
"아, 알았어! 나 혼자 나갈 테니까 염려하지 마."
"아홉 시 정각에 신주쿠 역 지하 광장에서 만나요. 거기에 오시면 오아시스라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거기서 우리 저녁 먹고 나서 드라이브해요."
"좋아, 가지."
그는 창문을 흔드는 비바람을 보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날씨에 드라이브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드라이브 자체보다도 마야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 더 급했다.
그는 베이지색 바지 위에 노란 티셔츠와 녹색 점퍼를 걸치고 여덟 시 이십 분에 아파트를 나섰다.
나가면서 아무에게도 나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푸조 505를 몰고 나가자 아파트 경비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야에게는 운전이라고 하면 끝내 준다고 했지만 사실은 운전 솜씨가 서툴렀다.
아슬아슬하게 그것도 굼벵이처럼 차를 몰고 가자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는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차를 직접 몰고 나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런 대로 사고 없이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 아홉 시 오 분경이었다.
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허둥지둥 지하 광장으로 내려갔다.
오아시스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꽤 큰 대중 음식점이었다.
고급 식당만 이용해 온 그는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야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보자 그녀는 수척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다른 데 가서 식사하자고 했지만 그녀가 그곳이 좋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레스토랑을 나선 것은 아홉 시 삼십 분 조금 지나서였다.
지하 광장을 벗어난 그들은 길가에 세워 둔 푸조에 올랐다.
마야는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았다.
네로는 처음부터 진땀을 흘렸다.
그녀한테 운전을 잘 한다고 자랑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전대를 놓은 지 하도 오래 돼서 잘 안 되는데……."
고개를 연방 갸우뚱하면서 가까스로 차를 몰아 나가는데 얼굴에 땀이 비오듯 했다.
"어머나, 무슨 땀을 그렇게 흘리세요?"
옆에 앉은 마야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자 그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었다.
"이쪽으로 가요. 이쪽에는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요."
얼마쯤 가다가 그녀는 어둠침침한 좁은 길을 가리켰다.
도쿄의 환락가에만 익숙할 뿐 그 밖의 지리에 대해서는 어두운 그는 금방 방향 감각을 잃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
단지 마야가 가자는 대로만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갔다.
갈수록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그야말로 캄캄한 거리였다.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 앞에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내처 차를 몰아갔다.
실내등을 모두 켜고 음악도 크게 틀어 놓았다.
시내에서 멀리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불빛에 나뭇가지가 비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비로소 그는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다.
"여긴 어디지?"
"공원이에요. 불을 꺼요."
그녀가 그의 팔짱을 끼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머리 냄새가 향긋했다.
그 냄새에 취할 것 같았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그는 흥분했다.
캄캄한 숲속이라 좀 무서웠지만 카 섹스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인 것 같았다.
그는 소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감미로운 느낌이 전신에 퍼져 갔다.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옷 벗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부신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너무 강렬한 빛이었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엔진소리와 함께 불빛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멈춰 서는 소리가 났다.
엔진소리는 그대로 들려 왔다.
차에서 몇 사람이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보닛에 쿵 하는 충격이 왔다.
검정 운동모를 쓴 자가 도끼를 높이 쳐들더니 보닛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네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리 하나 지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어대면서 자기 차가 비참하게 찌그러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얼핏 마야를 보니 그녀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문을 잠궈!"
그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급히 엔진을 걸었다.
그러자 앞창 유리로 도끼가 날아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엔진을 꺼!"
고함소리에 그는 클러치에서 발을 뗐다.
다른 한 명이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와서 도끼로 창문을 깨고 문을 열어젖히더니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홱 잡아 끌었다.
그 바람에 그는 젖은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재빨리 진행되었다.
먼저 그의 턱과 복부에 격심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는 서너 번 땅바닥에 뒹군 다음 무서운 말을 들었다.
"소리내지 말고 잠자코 있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도끼로 머리를 갈라 놓을 테다!"
입에 재갈이 물렸고, 두 손은 뒤로 꺾여 수갑이 채워졌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줄로 그의 두 발목을 묶더니 머리에서부터 자루를 뒤집어씌웠다.
조그만 몸뚱이인지라 자루 속에 통째로 들어갔다.
그들은 자루를 묶은 다음 그를 그들의 차 뒤 트렁크 속에 처박았다.
그때 여자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그것은 틀림없는 마야의 웃음소리였다.
트렁크 문이 쾅 하고 닫히자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조금 후 차가 덜컹 하고 움직였다.
그는 머리를 들어 트렁크 문을 받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어두웠다.
작은 빛이라도 보였으면 하고 그는 바랐다.
13.
국화와 칼 도쿄에 있는 변태수의 아파트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 것은 한밤중이었다.
변태수의 개인 비서 김인회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변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밤 말없이 혼자 나간 변태수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 연락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변태수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아직 미혼인 그는 자기의 고용주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
그의 그 같은 믿음과 실천이 고용주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도쿄에까지 따라와 고용주의 비서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는 비서라기보다는 하인에 가까웠고, 그 자신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인처럼 주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주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교활한 처세술을 몸에 익혀 두고 있었다.
막후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태수의 모친 김복자한테도 그는 신임을 얻어 두고 있었다.
그를 제일 먼저 신임해서 발탁한 사람이 바로 김복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이 걱정되어 김인회를 도쿄에 보냈던 것이고, 그에게 태수를 잘 보호함은 물론 그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하도록 단단히 일러 놓았던 터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김인회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부터 보았다.
벽시계는 새벽 두 시 십육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부회장의 전화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온 소리는 여인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변태수 씨 댁입니까?"
그것은 일본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인회는 정중히 대답했다.
"실례지만 전화 받으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김 비서입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혹시 부회장이 술집 호스티스와 함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 그럼 김인회 씨인가요?"
자기 이름까지 대는 것을 보고 그는 어리둥절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회장님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여인은 비음이 섞인 소리로 웃었다.
그 말에 그는 그만 감동했다.
"아, 그렇습니까. 회장님 지금 거기 계십니까?"
거기가 어디인 줄도 모르면서 그는 지레짐작으로 물었다.
"네, 함께 있어요."
"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네, 잠깐 기다리세요."
조금 후 섬뜩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틀림없는 부회장의 목소리였다.
인회는 어리둥절했다.
처음에는 장난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난치고는 그것은 너무 처절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그런 소리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이고……아이고……아이고……."
"회장님! 회장님!"
"나 좀 살려 줘……김 비서……아이고……나 좀 구해 줘 ……아이고, 나 죽는다……."
"회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김인회는 놀라서 물었다.
"몰라…… 나 좀 살려 줘……."
둔탁하게 때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김인회는 당황한 나머지 덮어놓고 부회장을 불러대기만 했다.
"이야기 다 하셨어요?"
태수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조금 전의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기 어딥니까? 회장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변태수는 우리가 데리고 있어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납치했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김인회는 얼어붙은 모습으로 침묵했다.
"여보세요, 내 말 안 들려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전화 거는 당신은 누굽니까?"
그때까지도 그는 반신 반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좀 큰소리로 물을 수가 있었다.
"여기는 국화와 칼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회장님을 다시 바꿔 주시오."
"바꿔 줄 수 없어. 변태수는 우리가 억류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도 좋고 신문사에 알려도 좋아. 국화와 칼이 변태수를 납치했다는 것만 분명히 알아 둬."
그가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전율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막상 어디다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할지를 몰라 그는 망설이다가 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소문은 무섭게 퍼져 나갈 것이다.
어디다가 전화 한 통화만 해도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갈 것이다.
그 전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정체 불명의 여인의 말대로 부회장님이 정말 납치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국화와 칼이라고? 그게 뭐지? 무슨 이름 같기도 한데 그런 이름치고는 좀 묘하다.
그는 방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경호원을 두드려 깨웠다.
그 경호원은 한국에서 데려온 어깨였다.
경호원은 두 명인데 다른 한 명은 재일 교포로 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이봐! 국화와 칼이 뭐야?"
덩치만 컸지 미련스럽게 생긴 경호원은 하품을 하면서 조그만 두 눈을 끔벅거렸다.
"국화와 칼이 뭐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들은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반말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 말 들어 보지 못했어?"
"아니, 모르겠는데……."
경호원은 다시 하품을 하고 나서 뒤늦게 생각난 듯,
"회장님 오셨어?"
하고 물었다.
김 비서는 그를 흘겨보았다.
"경호원이면 회장님한테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어디 가셨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한심하다 한심해!"
"몰래 나가셨는데 난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말이야. 아직도 안 오셨어?"
"안 오셨어.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아."
그 말에 경호원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사고?"
그는 거실 쪽으로 따라 나가면서 김 비서의 팔을 낚아챘다.
"아직 자세한 것은 몰라. 이상한 전화가 걸려 왔었어."
"무슨 전화?"
김 비서는 머리를 무겁게 흔들면서 거기에 대해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경호원은 무슨 일이냐고 거듭 캐물었지만 그는 그 정도로만 알고 있고 다른 데 소문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김 비서의 지시에 따라 경호원은 재일 교포 경호원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나오자 경호원은 수화기를 김 비서에게 넘겼다.
재일 교포 경호원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김 비서는 일본말로 물어야 했다.
"국화와 칼이 뭐야? 국화와 칼 말이야."
상대방은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건 왜 묻지?"
"글쎄, 그럴 일이 있어서 그래."
"국화와 칼은 테러 단체야. 아주 잔인하기로 소문난 단체야."
"좀더 자세히 말해 봐."
"그 이상은 몰라. 그들을 건드리면 결과가 좋지 않아."
재일 교포 경호원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태도만 보아도 그 단체가 공포의 대상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김 비서는 그 단체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생각 끝에 그는 지사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사장은 일본에서 오래 생활한 데다 뉴스 감각이 뛰어나고 나이도 지긋하기 때문에 그 단체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을 것 같았다.
국화와 칼이라는 말에 그도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이 밤중에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그럴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국화와 칼은 정체 불명의 테러 단체야. 베일에 싸여 있는 신흥 단체인데 확실한 것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는 거야. 어린애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할 만큼 잔인 무도한 단체야. 극우 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어. 일본 정신을 저해하는 것은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된다고 선전하고 있어. 그리고 대일본제국 건설을 외치고 있어.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화신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미치광이들의 단체인 것만은 분명한데 경찰은 손을 못 쓰고 있어. 일본인들 가운데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있는 것 같아. 놈들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의 입 같은 데 국화를 꽂아 놓는 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어. 그래서 더욱 유명해졌어. 그런데 왜 거기에 대해 묻는 거야? "
사실은 저기……회장님이 어젯밤에 혼자 나가셔서 아직까지 소식도 없고 집에도 안 들어오시기에 걱정하고 있는 참이었는데……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 김 비서는 통화 내용을 그대로 지사장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지사장은 신음소리를 냈다. "
틀림없이 국화와 칼이라고 했나?
" "
네, 틀림없습니다.
" "
이거 큰일났군!
" "
어떡하면 좋죠? 서울에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
기다려! 곧 갈 테니까!
" 조용하던 아파트 안이 갑자기 긴장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김 비서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변태수 부회장님 댁입니까?
" 남자가 재빠른 어조로 물어 왔다. 일본말이었다. "
그렇습니다만…….
" "
Y신문입니다.
변태수 씨가 납치당했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 김 비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
아, 아닙니다.
누, 누가 그러던가요?
" "
납치했다는 측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 "
누가 납치했다는 겁니까?
" "
국화와 칼이라는 조직입니다.
자기들이 변태수 씨를 납치했다고 하면서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변태수 씨 계시면 좀 바꿔 주십시오.
" "
그,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에…….
" "
정말입니까?
" "
네, 정말입니다.
" "
알겠습니다.
" 상대방은 자신 있게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김 비서는 수화기를 들기가 겁이 났다. 한참 있다가 수화기를 가만히 집어 들자, "
경찰입니다.
" 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상대방은 방금 신문사에서 걸려 온 전화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김 비서는 그것을 부인하느라고 진땀을 빼야 했다. 경찰은 신문사처럼 쉽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 "
숨기시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일수록 경찰에 빨리 신고하셔야 합니다.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해결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 김 비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완강히 부인을 못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또 어디서 걸려 온 전화일까. 그가 두려운 눈으로 전화통을 바라보자 경호원이 수화기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수화기를 김 비서에게 내밀었다. "
서울이야!
" 김 비서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
김 비서입니다.
" "
김 비서, 어떻게 된 거야?
"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고함치듯 들려 왔다. 그것은 변태수의 어머니 김복자의 목소리였다. 김 비서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
아, 회장님…….
" 그녀는 명예회장이었다. 그러니 김 비서로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다. "
어떻게 된 거냐니까!
" 덮어놓고 고함치는 바람에 그는 어쩔 줄을 몰라 머뭇거리기만 했다. "
무슨 말씀인지…….
" "
부회장 어딨어? 내 아들 어디 있느냔 말이야!
" 김 비서는 그만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서울서 벌써 이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
왜 대답을 못 하는 거야! 김 비서, 그게 사실이야? 부회장이 납치됐다는 거 사실이야?
" "
지, 지금 확인중입니다만…… 사, 사실인 것 같습니다.
" "
뭣이!
" "
국화와 칼이라는 단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 "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너희들은 도대체 뭘 했지? 그 애가 납치되는 것도 모르고 뭘 했어! 멍텅구리 같은 놈들!
" 그녀가 길길이 뛰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초인종 소리가 나고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자 지사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
국화와 칼이라는 게 뭐하는 데야?
" 김복자는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김 비서는 들은 대로 그녀한테 이야기했다. "
이걸 어쩌면 좋아.
그놈들이 왜 그 애를 납치했지?
" "
아직 아무것도 요구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돈일 겁니다.
" "
김 비서, 부회장을 잘 보살피라고 했었지? 그런데 이게 뭐야, 뭐냔 말이야!
" 그녀가 마침내 울부짖기 시작했다. "
돈이 문제가 아니야!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느냐 말이야! 그렇게 무자비한 놈들이라면 틀림없이 그 애를 그대로 두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 "
회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놈들하고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놈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그놈들이 너 같은 거 상대할 줄 아니?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소문내지 않았지? 소문내면 안 돼! 이런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해결해야 돼.
" "
신문사와 경찰 쪽에서 조금 전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놈들이 전화를 해준 것 같습니다.
" "
뭐라고? 이를 어쩌면 좋지?
" "
회장님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시게 됐습니까?
" "
그놈들이 나한테도 전화를 걸어 왔어.
" 문이 열리더니 신문사 기자로 보이는 자들 세 명이 들이닥쳤다. "
일본 신문사 기자들이 방금 집에 들어왔습니다.
" "
안 돼! 신문에 나면 안 돼! 어떻게든 막아! 날이 새는 대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김 비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 플래시가 터졌다. 집 안은 갑자기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 졌다. "
마나님 전화였습니다.
놈들이 서울에도 전화를 걸어 마나님이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 김 비서의 말에 지사장은 사색이 되었다. "
큰일났군.
" "
날이 새는 대로 오시겠답니다.
신문에 나면 안 된다고 어떻게든 저지하라고 하셨습니다.
" "
큰일이군.
이미 알고들 왔는데 어떡하지?
" 그들의 귀엣말이 끝나자 기자들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금 있자 경찰이 나타났다. 사복 두 명과 제복 차림의 경찰관 두 명이었다. 뒤이어 또 신문사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거짓말한다고 해서 틀어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정 부인하시면 우리 임의대로 기사를 쓰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 지사장이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돈 봉투를 하나씩 돌렸다. "
당분간 기다려 주십시오.
신문에 내면 안 됩니다.
인사는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 기자들은 냉소를 흘리면서 돈 봉투를 밀어냈다. "
우린 그런 걸 혐오합니다.
" 새파랗게 젊은 기자가 말했다. 탁자 위에 놓인 돈 봉투를 향해 다시 플래시가 터졌다. 14. 떠도는 소문 'W그룹 부회장 변태수 씨 도쿄에서 피랍!' 이것은 날이 새자 한일 양국 조간 신문에 대서 특필된 기사의 제목이었다. 양쪽 신문들은 그것을 모두 크게, 그리고 센세이셔널하게 다루고 있었다. 기사의 초점은 변태수의 생사와 함께 그를 납치했다고 주장하는 국화와 칼에 모아지고 있었다. 도대체 국화와 칼은 무슨 단체이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국화와 칼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한국 신문들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국화와 칼은 아직 아무런 요구도 해오지 않고 있었다. W그룹 부회장인 변태수가 도쿄에서 납치되었다는 보도는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에게 특히 큰 충격을 주었다. 변태수는 W그룹 후계자라는 사실과 함께 그 기행(奇行)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외국에서 납치된 데 대해 동정보다는 호기심이 더 발동,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앞으로의 결과를 몹시 궁금해 했다. 도쿄 경시청 소속 형사 두 명이 긴자 거리의 클럽 세브리느에 나타난 것은 신문에 납치사건이 대서 특필된 바로 그 날 저녁때였다. 형사들은 변태수의 경호원들을 통해 그가 세브리느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특히 요즘 들어 세브리느의 한 호스티스에게 열을 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를 아파트에까지 초대했었다는 것 등을 알아냈던 것이다. 형사 두 명은 여러 모로 달라 보였다. 우선 나이 차이가 많아 보였다. 오오에라는 형사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몹시 병약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거기다 도수 높은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그에 비해 가토라는 형사는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혈기 왕성해 보이는 데다 체격도 우람했다. 그는 학생시절 유도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기 때문에 몸집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초저녁이었기 때문에 클럽에는 아직 손님이 없었다. 가토는 입구를 지키는 웨이터가 가로막자 그의 귀에다 대고 '경찰이다. 마담한테 안내해!' 하고 속삭인 다음 그를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위압적인 서슬에 웨이터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한 채 그를 마담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
어머나!
" 허벅지를 드러내 놓고, 또는 브래지어만 걸친 채 멋대로 앉아 있던 아가씨들이 기겁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
누구예요? 무슨 일이에요?
" 그래도 마담 요코가 책임자답게 매서운 눈으로 침입자들을 쏘아보면서 물었다. "
아, 미안해요.
조사할 게 있어서 왔으니까 이야기 좀 합시다.
" 가토가 신분증을 내보이자 요코를 비롯한 아가씨들의 표정이 변했다. "
이쪽으로 오세요.
" 요코가 형사들을 다른 방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오오에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
아, 그럴 필요 없이 여기가 좋겠어요.
우린 가급적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요.
" 형사들은 빈자리에 걸터앉았고, 이윽고 가토가 긴장해 있는 아가씨들을 둘러보며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호스티스들은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변태수가 납치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어제 변태수라는 사람 여기에 오지 않았나요?
" "
오지 않았어요.
" 요코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
마야라는 아가씨가 누구지?
" 오오에가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여자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여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
변 씨가 마야라는 아가씨한테 열을 내고 있었다는 거 다 알고 왔어요.
숨김없이 이야기해 줘요.
마야가 누구예요?
" "
그 아가씨 요즘 안 나와요.
그저께도 안 나왔고 어제도 안 나왔어요.
오늘도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어요.
설마 그 아가씨하고 함께 납치된 건 아니겠죠?
" "
그건 우리도 몰라요.
그 아가씨 연락처를 가르쳐 줘요.
" 가토가 수첩을 펴드는 것을 보면서 요코는 머리를 흔들었다. "
연락처는 우리도 몰라요.
" 연락처뿐만 아니라 마야에 관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이제 나이가 겨우 17,8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뿐이었다. "
아, 이제 생각나는데 어제 저녁 네로 황제한테서…… 우리는 변 회장님을 그렇게 불러요…… 본인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그 사람 별명인걸요.
어제 저녁 네로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마야를 찾았어요.
마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까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연락처를 알아야죠.
" 요코의 말에 이어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호스티스가 입을 열었다. "
그 애는 정말 정체를 알 수 없는 애예요.
어떻게 해서 여기 들어 왔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모든 게 비밀에 싸인 애예요.
" "
생긴 건 어때요, 미인이에요?
" 가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
얼굴이나 몸매는 정말 뛰어난 애예요.
우리 집에서 제일 인기가 있었으니까요.
" 마야가 세브리느에 들어온 지는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보름 정도의 짧은 기간에 그녀는 그곳에다 강한 인상을 심어 놓은 것 같았다. 형사들은 마야의 사진이라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런 것이 클럽에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한국 이름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변태수가 그녀에게 단단히 반해 클럽에 올 때마다 그녀를 찾았다는 것, 아니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 클럽에 왔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형사들은 더더욱 그녀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베일 속에 가려져 그 모습을 드러내 놓지 않았다. 그 날 밤 형사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혹시나 마야가 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정이 다 될 때까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클럽의 부장과 사장을 만나 마야가 클럽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알아보았는데 그들의 대답이라는 것이 신통치가 않았다. 먼저 부장을 만났을 때 그는 사장의 특별 지시로 그녀를 채용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장을 만났더니 그는 몹시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자기도 어쩌다가 그녀를 채용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
그 애가 저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왔지요.
한번 자기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전화 번호는 물론 제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예쁘고 맹랑하다 싶어 한번 만나 보았지요.
생각보다는 훨씬 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선처럼 아주 싱그러웠습니다.
두말 않고 그 애를 채용했지요.
" 가네마루 사장은 제법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했는데 형사들로서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그렇다면 사장님께서는 그 여자의 신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겠군요?
" "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부끄럽게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애가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그렇다면 굳이 알 필요도 없겠다 싶어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요.
사무직이라면 당연히 이력서 같은 것을 받겠습니다만 호스티스 자리라는 게 철새처럼 돌아다니는 게 돼 놔서 굳이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 사장이 그렇게 말하는 데야 형사들로서도 달리 물어 볼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이 마야에 대해 한 가지 집어낸 것은 그녀의 배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막강한 조직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은 호스티스와 웨이터들 사이에서 흘러 나온 소문이었는데, 어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떠도는 소문이면서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마야가 출퇴근하면서 이용했다는 고급 외제 승용차 건이 있었다. "
출근할 때는 빨간색 볼보를 타고 오고 퇴근할 때는 백색 벤츠를 타고 갔어요.
운전사도 한 사람이 아니고 볼보 운전사와 벤츠 운전사가 각기 달라요.
운전사들은 그 애를 마치 공주처럼 모셨어요.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애였어요.
그런 차를 타고 다닐 정도라면 굳이 술집 같은 데 나올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 형사들도 듣고 보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야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그녀가 더 이상 세브리느에 출현하지 않은 점이 그녀가 변태수의 피랍사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 마야에 대한 소문은 정작 세브리느에서보다는 밖에서 더욱 무성했다. 자정이 지나서 세브리느를 나온 형사들은 그 부근에 있는 몇 군데 클럽을 들러 보았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마야에 관한 것들을 더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거의가 떠도는 소문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그 중에는 들을 만한 것들이 꽤 있었다.그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긴자의 술집 거리는 마야가 나타나면서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공주처럼 출근할 때는 볼보를, 퇴근할 때는 벤츠를 이용하는 그녀는 이제 불과 열일곱 살인 데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로 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긴자 거리를 술렁이게 한 것은 그녀의 미모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삽시간에 거리에 퍼져 긴자에 찾아오는 한다 하는 플레이보이들의 구미를 당겼고, 그 바람에 세브리느를 제외한 다른 술집들은 고급 손님들을 많이 빼앗기게 되었다. 별로 인기가 없던 세브리느에는 그녀가 나타나면서부터 이른바 유명인사들, 이를테면 기업가·배우·탤런트·가수·의사·변호사 등등 각 방면의 실력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방송국의 실력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음 날 사람을 보내 그녀를 탤런트로 쓰고 싶다고 말했고,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는 그녀를 패션 쇼에 모델로 초청하고 싶다고 제의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제의는 그녀에 의해 한마디로 거절당했고, 그래서 그녀의 주가는 갈수록 치솟기만 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그렇게 많은 일류 플레이보이들이 몰려 들었으면서도 그녀를 손에 넣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들이 결국 어린 소녀 하나 정복하지 못하고 헛물만 켜고 만 것이다. 긴자 거리에 떠도는 소문들 가운데서도 마야의 배후에는 무시 못 할 조직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형사들은 그 조직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해보았지만 알아낼 수가 없었다. 국화와 칼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확인될 수 없는 그 한마디 말이 수사팀한테는 심증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마야라는 이름의 한국 여자를 변태수 납치사건과 관련된 중요 인물로 보고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세브리느에서 일하는 웨이터 가운데 다행히 마야가 타고 다니던 두 대의 고급 외제차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숫자를 외우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개의 번호를 추적한 결과 그것은 가짜로 드러났다. 수사진은 마야의 몽타주를 만들었다. 목격자가 많았기 때문에 몽타주는 비교적 실물과 가깝게 만들어질 수가 있었다. 그녀의 몽타주는 즉시 신문에 실렸고,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일본 전역에 방영되었다. 그녀가 일본을 빠져 나갈 것에 대비해 공항과 항만에는 그녀의 몽타주를 소지한 경찰관들이 이십사 시간 감시 체제에 들어갔다. 마야의 몽타주는 다음 날 한국 신문에도 실렸다. '변태수 부회장과 함께 사라진 한국 소녀……납치 조직의 일원인가 아닌가.' 이것은 몽타주와 함께 실린 각 신문들의 공통적인 기사 제목이었다. 그녀의 몽타주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장미의 부모와 일 년 전 그녀의 행방을 쫓던 경찰 수사팀 이었다. 장미의 부모는 그즈음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장미가 실종된 후 그들은 단 하룻밤도 편히 자본 적이 없었고, 날이 갈수록 장미 생각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집안은 완전히 쑥밭이 되었고, 김종화는 대학교수직도 그만둔 채 여전히 딸을 찾는 데 시간을 거의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딸을 찾는 데 많은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었다. 먼저 그를 제약하고 있는 것은 법적인 문제였다. 일 년 전 오지애 살해, 그 밖에 폭행 혐의로 체포된 그는 정상 참작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 난 터였기 때문에 행동상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집행 유예 기간 동안에는 한국을 떠날 수가 없으므로, 장미가 일본으로 납치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면서도 일본에 건너가 직접 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일본에 보낼 수도 없었다. 일본말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는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종화는 일본말에 능숙하고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는 후배 한 사람을 수사팀과 함께 일본에 보내 봤지만 경비만 많이 들었을 뿐 딸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법적인 문제로 제약을 받고 있는 외에 그는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 되어 있었다. 차에 치어 대수술을 받고 난 끝에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걸어다니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만은 장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걸어서라도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하나 문제되는 것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재산을 거의 다 날리게 된 점이었다. 장미를 찾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수입은 없었고, 지출만 늘어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 달 후면 아파트도 비워 주어야 할 판이었다. 돈이 바닥이 났기 때문에 복덕방에 아파트를 내놓았는데 부동산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빨리 팔렸던 것이다. 그의 아내 양미화는 시름시름 앓더니 자다가도 딸의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를 하는 때가 많아졌고, 서너 달 전부터는 딸을 찾는다며 밖으로 나가서는 실성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런 때는 옷이 찢겨 있기도 하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기도 하는 것이어서 종화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두 달 전에 그녀를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보인 다음 병원에 입원시켰었는데 한 달쯤 지나자 눈에 띄게 차도가 보여 도로 집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녀는 도로 실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전보다 그 증세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제인 양은화가 자나깨나 그녀 곁에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신문에 실린 마야라는 여자 몽타주를 처음 발견한 것은 은화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간 신문을 펼쳐 든 그녀는 장미와 비슷하게 생긴 몽타주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기사를 읽은 다음 형부한테 달려갔던 것이다. "
형부!
" 악몽에서 깨어난 종화는 마야의 몽타주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기사를 읽어 보고 나서는, "
장미가 틀림없어.
"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양미화는 그 몽타주를 보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
이러고 계시면 안 되지 않아요?
" 아침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담배만 피워대고 있는 종화를 보고 처제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종화는 담배를 비벼 끈 다음 형사 여봉우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그는 출근 전이었다. "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습니다.
저도 그 기사를 봤습니다.
" 종화의 말을 듣고 난 여봉우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 우리 장미가 틀림없다고 보는데…….
" "
네, 나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만 아직 단정을 내리기는 이르고 확인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목격자가 많으니까 장미의 사진을 보이면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일본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 "
제발 좀 부탁합니다.
" "
만일 장미가 틀림없다면…… 문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만…… 아무튼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이 급하겠죠.
" "
장미가 틀림없습니다.
이건 제 직감입니다! 그 애가 살아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 종화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15. 5천만 달러 김장미 양 납치사건 수사본부는 사건 발생 일 년이 지난 지금 이미 해체되고 없었다. 그 대신 형식적으로 수사 전담반만이 남아 시간만 잡아 먹고 앉아 있었다. 여봉우는 여전히 그 수사 전담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전담반 요원은 그를 포함해서 네 명뿐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장미 양을 찾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패배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기는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 깊은 분노가 호수처럼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인륜의 타락과 악에 대한 분노였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지금 장미의 몽타주가 실린 신문 기사를 대하자 그 동안 가슴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분노와 패배감이 되살아 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그것은 놀라움으로 변해 갔다. 그가 먼저 생각한 것은 그 몽타주의 주인이 과연 장미 양일까 하는 점이었다. 장미 양이 틀림없을 경우 어떻게 해서 그 어린 소녀가 일 년 사이에 그렇게 변신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지 형사에게 이야기한 다음, "
아무래도 일본에 다녀와야겠어.
출장 신청을 해줘.
" 하고 부탁했다. 그의 상사는 마땅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못해 그 신청을 받아 주었다. 그의 출장에는 김종화도 동행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형 집행 유예 중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딸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해 있었다. 여봉우는 출발하기 전에 먼저 도쿄 경시청으로 전화를 걸어 변태수 납치사건 담당자와 통화했다. 일 년 전의 김장미 양 납치사건을 대충 이야기해 준 다음 그녀의 모습이 몽타주와 흡사하다고 말하자 오오에라는 형사는 당장 만나자고 했다. "
우리가 서울로 갈까요?
" "
아닙니다, 우리가 도쿄로 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사건이 발생했으니까요.
사진을 가지고 가서 목격자들에게 먼저 확인시키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 "
네, 그렇죠.
공항으로 마중 나가겠습니다.
몇 시 비행기로 출발하십니까?
" 여봉우가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의외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그는 어리둥절했다. 오오에 형사와 악수를 나누는데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따라왔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 오오에가 기자들을 물리치면서 말했다. "
사진을 좀 보여 주실까요?
" 어느 기자가 여봉우 앞을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몸집이 큰 가토 형사가 그 기자를 밀어내면서 여봉우를 승용차에 태웠다. 수사본부는 경시청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거기에는 마야의 얼굴을 알고 있는 여러 증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봉우가 꺼내 준 장미 양의 사진들을 오오에가 받아 증인들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내놓았다. 사진은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모습으로 담은 것들로 열두 장이나 되었다. "
마야가 틀림없어요.
" 맨 처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세브리느의 마담 요코였다. 세브리느 사장 가네마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아가씨가 틀림없군요.
" 세브리느의 호스티스 한 명과 웨이터도 똑같이 증언했다. 오오에는 변태수의 비서와 경호원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
당신들은 어때요?
" "
네, 맨션에 왔던 아가씨가 틀림없습니다
" 변태수의 비서 김인회가 먼저 증언했다. 뒤이어 경호원들도 이구 동성으로 마야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 시간 서울 W그룹 본사 빌딩 통신실의 전화 교환 아가씨는 이상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W그룹 본사냐고 물은 다음, "
김복자 씨 좀 바꿔 주세요.
" 하고 말했다. 그것은 아주 앳된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끝에 가서 장난치듯 낄낄거리고 웃는 것이었다. 교환 아가씨는 불쾌했지만 감정을 누르고 물었다. "
어느 부에 계시는 분인가요?
" "
김복자 씨도 몰라요? 교환 아가씨가 돼 가지고 명예회장 이름도 몰라요?
" 나무라듯 내뱉는 당돌한 말투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 회장 댁 아이가 걸어 온 전화가 아닐까 해서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
어디신가요?
" "
그건 알 필요 없어요.
빨리 바꿔요.
" 이젠 명령조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장난치듯 낄낄거리는 것이었다. 교환 아가씨는 하는 수 없이 비서실로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비서실의 여직원은 교환 아가씨보다는 똑똑했다. 명예회장을 바꾸라는 말에 그녀는 상대방에게 먼저 신분을 밝히고 용건을 이야기하라고 요구했다. "
바꾸라면 바꿀 것이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요, 잔소리 말고 빨리 바꿔요.
" 여비서는 장난 전화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이거 봐요, 여긴 장난 전화질 할 데가 아니에요.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전화를 하는 거예요?
"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
전화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는 법이 어딨어? 그렇게 건방진 짓을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 "
아가씨, 도대체 누군데 이러는 거예요? 용건을 말해야 될 거 아니에요? 말하지 않으면 다시 전화 끊겠어요.
" "
흥, 웃기지 말아요.
변태수 부회장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전화를 바꿔요.
" 여비서는 긴장했다. 그녀는 이제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
뭐라고 그랬어요?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 "
변 부회장을 살리고 싶으면 전화를 바꾸란 말이에요! 아이, 신경질나!
" 그것은 마치 십대 소녀가 전화에 대고 신경질을 부리는 것 같았다. 여비서는 어이가 없어 전화를 끊지도 못한 채 한참 망설이다가, "
잠깐 기다려 보세요.
" 하고 말한 다음 명예회장실로 들어갔다. 김복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었다. 회사 간부들과 경찰 관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경찰 관계자들은 이쪽에서 요청한 것도 아닌데 신문을 보고 달려온 것이었다. 여비서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게 김복자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
어떤 여자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변 부회장님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답니다.
장난 전화 같기도 한데…… 회장님과 직접 통화하고 싶답니다.
" 김복자는 요란스럽게 치장하고 있었다. 쉰다섯 살인 그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우선 화장부터가 젊은 여자들처럼 진했다. 머리도 퍼머를 해서 곱슬곱슬하게 볶았고, 목걸이며 귀고리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옷도 원색이 들어 있는 것을 좋아해 지금 드럼통 같은 몸에 걸치고 있는 투피스만 해도 빨강과 파랑이 물결 모양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거기다 그녀는 갈색 빛깔의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괴이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비서의 말을 듣고 그녀는 두말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여보세요!
" "
김복자 씨 되시는가요?
" 앳된 목소리가 당돌하게 물어 왔다. "
네, 그래요.
내가 김복자예요.
누구신가요?
" "
난 마야라고 하는데, 변태수 씨하고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댁의 아드님은 지금 제 곁에서 돼지처럼 쿨쿨 자고 있어요.
" 앳된 목소리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
뭐라고! 너 이년, 너 누구니?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김복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악을 썼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장난치듯 말하는 것이었다. "
변태수 씨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지 않다면 전화 끊겠어요.
아마 두 번 다시 아드님을 보지 못할걸요?
" "
아아니, 이이…….
" 김복자는 헐떡거리며,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장난스럽게 거는 전화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중요하고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아들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그녀를 완전히 주눅들게 만들었다. "
아드님 보고 싶지 않으세요?
" "
내 아들 어디 있지? 거기 어디야?
" "
당신 아들은 내가 잘 보호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면 난 당신 아들을 보호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보호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당신 아들은 죽어요.
쥐가 뜯어먹을 거예요.
수백 마리의 굶주린 쥐들이 당신 아들을 뜯어먹고 싶어서 울부짖고 있어요.
" "
너너……너 누구야? 누구야?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 아들 어딨어, 내 아들 어디 있느냐구?
" 김복자는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었다. 그대로 두면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의 남동생이자 현 회장인 김동기가 전화를 받으려고 했다. "
비켜!
" 김복자는 회장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계속 수화기에 매달렸다. "
김복자 씨, 좀 침착하게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예의를 지켜요.
계속 반말을 해대면 전화를 끊을 거예요!
" "
아, 알았어.
알았어요.
" 김복자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
아들 목소리 들어 보겠어요? 잠깐 기다려요.
" 조금 있자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고통을 못 이겨 내는 소리였다. "
……아이고……아이고…… 어머니……어머니…… 나 좀 살려 주세요…….
제발 나 좀 살려 주세요…….
부탁이에요…….
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저를 살리고 싶으면 제발 시키는 대로 하세요…….
어머니…… 쥐가 뜯어먹을려고 해요…….
으악!
" 비명소리에 그녀는 넌더리를 치면서 손으로 귀를 막았다. 비명소리에 섞여 쥐들이 찍찍대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다가 아들의 이름을 미친 듯 불러댔다. "
태수야! 태수야! 거기 어디니? 태수야! 어디 있는지 말해 봐!
" 아들의 비명소리가 사라지더니 다시 앳된 여자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
잘 들었죠? 감상이 어때요? 들을 만해요?
" "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 봐요.
왜 내 아들을 납치했어요? 이유가 뭐야?
" "
네로를 납치한 건…… 참, 아줌마! 당신 아드님 별명이 네로 황제라는 거 알고 계시죠? 네로 황제처럼 황당무계하고 돈을 물쓰듯이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네로 황제 폐하를 납치한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예요.
우리 조직이 국화와 칼이라는 거, 그리고 어떤 조직이라는 건 그 동안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알고 있죠?
" "
네, 알고 있습니다.
" 김복자는 갑자기 공손해졌다. "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내 아들을 돌려보내 줘요.
내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 "
우리는 돈이 필요해요.
변태수의 목숨에 해당하는 돈이 필요해요.
" "
네, 알겠습니다.
얼마가 필요한가요?
"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김복자를 쳐다보았다. 김복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
오 천이 필요해요.
" "
오, 오천만 원 말입니까? 당장 보내 드리겠습니다.
" "
아줌마, 내 말은 아직 안 끝났어요.
한국 돈이 아니라 달러로 필요해요.
" "
그럼 얼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
오천만 달러!
" 그녀는 두 눈을 꿈벅거렸다. 오천만 달러라는 말이 얼른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이 혼미해져 왔기 때문에 그것을 얼른 한국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었다. "
잠깐 기다려 주세요.
"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그녀는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얼빠진 모습으로, "
오천만 달러면 얼마지?
" 하고 물었다. "
사백억입니다.
" 빼빼 마른 비서실장이 냉큼 대답했다. "
아이구, 맙소사!
" 김복자는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비틀비틀 일어나다가 카펫 위로 풀썩 쓰러졌다. 놀란 사람들이 그녀를 소파 위에 눕히고 의사를 부르는 등 소동을 벌이고 있는 동안 김동기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
나하고 이야기합시다.
나는 회장 김동기라고 합니다.
명예 회장님께서는 너무 쇼크를 받아 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저렇게 의식을 잃으셨나요?
" "
돈이 좀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변태수 씨를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데…… 돌려보내는 대가로 오천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사실 부회장 목숨값치고는 싸지 않아요?
"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처럼 말하는 앳된 목소리에 김 회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대머리에 김복자처럼 뚱뚱했다.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고 나서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천만 달러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돈으로 무려 사백억이 넘는 돈입니다.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액수를 말씀하셔야지 그렇게 무리한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협상이 되겠습니까?
" "
재벌 회사에서 그까짓 액수를 가지고 그렇게 떠는 거예요? 변태수 씨의 목숨이 필요하지 않은가 보지요?
" "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 "
이거 봐요, 아저씨! 사백억이면 조그만 호텔 하나 값이에요.
조그만 백화점 하나 값도 못 돼요.
부회장을 정말 살리고 싶으면 그 정도는 내놔야 하지 않아요?
" "
그, 그래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재벌 회사라고 하지만 현찰 오천만 달러를 마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
여러 말 할 필요 없어요.
오천만에서 한 푼도 깎을 수는 없어요.
이건 물건을 놓고 흥정하는 게 아니에요.
8월 10일까지 그 돈을 마련하세요.
아직 날짜는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 동안에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전달받는가 하는 것은 나중에 연락하겠어요.
잘 생각해서 하세요.
김복자 씨한테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 "
여보세요!
" 김 회장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그 전화에는 녹음 장치가 되어 있었다. 경찰 간부가 녹음된 것을 뒤로 돌렸다가 작동 버튼을 누르자 통화 내용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
팔 분이군.
" 통화가 끝났을 때 경찰 간부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두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김복자는 금방 깨어났다. 그녀가 일어나 앉으며 통화 내용을 다시 한 번 듣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경찰 간부는 다시 한 번 녹음 테이프를 틀었다. "
이걸 어떡하지? 이걸 어떡하면 좋지?
" 녹음소리가 끝나자 김복자는 어쩔 줄 모르며 사람들을 쳐다보았지만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시경에서 온 경찰 간부였다. 그는 과장이라고 했다. 경찰관은 그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
한국 아가씨 같은데……아주 어린 목소리입니다.
" "
스무 살도 채 못 된 것 같은데요.
" 계장이라는 경찰관이 말했다. "
그런 애의 입에서 오천만 달러라는 말이 나오다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한 게 아닐까요?
" 다른 계장의 말이었다. "
일본에서 걸려 온 전화인지 알아봐.
" 과장의 말에 계장 한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국내 전화라도 통화 시간이 팔 분 정도나 되면 발신처를 알 수 있지 않나요?
" "
알 수 있지요.
" 과장이 비서실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장이 그 말을 받아서 보충했다. "
그러니까 팔 분 이내에 알아내야지요.
통화가 끝나기 전에 말입니다.
전화국에 부탁해 놓으면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통화 시간이 너무 짧으면 알아내기가 어렵지요.
" "
방금 그 전화는 체크되지 않았나요?
" "
미처 준비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곧 감시 체제로 들어가도록 해 놓겠습니다.
국제 전화도 감시하도록 조처를 취해 놓겠습니다.
" "
만일 돈을 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 김복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
놈들은 잔인 무도하다니까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오천만 달러나 요구한 걸 보니까 미리 계획적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납치한 것 같아요.
" 그녀의 남동생인 김동기가 말했다. 경찰 간부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끄덕였다. "
전화가 걸려 오면 될수록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협상을 해야 합니다.
될수록 시간을 많이 벌어 두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한테는 유리하니까요.
"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호텔 하나 값밖에 안 되는데 뭘 그러느냐고 하는 데는 난 질리고 말았어요.
" 비서실장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
그거야 누가 시켜서 앵무새처럼 지껄인 것에 불과하겠지요.
" 과장이 답답하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
조금 전의 그 전화는 일본에서 걸려 온 게 아니었습니다.
" 전화국으로 전화를 걸었던 계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그렇다면 한국에도 일당이 있다는 말이군.
" 과장이 중얼거렸다. "
김 회장!
" 김복자가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동생을 불렀다.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실내에 긴장이 흘렀다. "
돈을 준비할 수 있는 데까지 준비해요! 빠른 시간 안에! 한시가 급하니까.
" 그 말에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들을 짓는데 과장이 입을 열었다. "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생각입니까?
" "
우선 사람을 살려야 할 거 아니에요!
" "
그들의 요구대로 모두 지불하실 생각이십니까?
" "
이야기를 해봐서 안 된다면 하는 수 없잖아요.
오천만이 아니라 일억이라도 줘야지요.
" "
그건 안 됩니다! 경찰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놈들에게 돈을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 "
그럼 어떡하라는 겁니까?
" "
그들을 체포해야지요.
" "
제발 체포하세요.
그리고 우리 아들도 구해 주세요.
하지만 난 경찰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어요.
놈들을 체포하고 안 하고는 경찰이 할 일이고 난 내 아들을 구하는 게 제일 급해요.
그들은 잔인한 놈들이라니까 돈을 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내 아들을 해칠 거예요.
쥐소리 들으셨죠?
" 그녀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실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김복자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범인들이 요구하는 거액이라도 내겠다는 데야 아무도 할 말이 없었다. 잘못 반대 의견이라도 제시했다가는 그녀한테 욕을 얻어먹을 것 같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사실 오천만 달러라는 거액은 인질의 몸값치고는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금액이었다. 더욱이 그런 거액을 나이 어린 여자가 전화를 통해 요구해 왔기 때문에 문제의 미묘함이 있었다. 그런데 김복자는 앞뒤 따져 보지도 않고 아들을 살려내고 싶은 일념에서 그런 거액이라도 서슴없이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
이게 만일 밖으로 알려지면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오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몸값으로 지불한 예가 세계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과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어도 할 수 없어요.
난 내 아들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해요.
그까짓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당신들은 부모 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난 혼자서…….
"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김 회장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
돈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16. 달러를 긁어라 여봉우는 서울의 김종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
확인한 결과 장미 양이 틀림없습니다.
여러 목격자들이 장미 양의 사진을 보더니 하나같이 장미 양이 틀림없다고 증언했습니다.
" "
믿을 수가 없는 일이군요.
" 김종화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 "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떻게 해서 우리 아이가 그런 일에 휘말리게 되었나요?
" "
그건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이곳 경찰도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조직이 매우 잔인한 테러 조직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장미 양이 어떻게 해서 그 조직과 연관되어 변태수 씨 납치에 관계했는지 그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 "
우리 애가 변 씨 납치에 관계된 것은 틀림없나요?
" "
여러 가지 정황 증거로 보아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변 씨를 유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 "
나는 그 애가 그런 짓을 했다고 절대 믿지 않습니다.
그 애는 이제 열일곱 살입니다.
그런 애가 어떻게 어른을 납치한단 말입니까?
" "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미 양이 한 게 아니라 놈들이 장미 양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
나는 장미가 살아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살아 있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 애가 다치지 않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 "
그 애가 정말 긴자에 있는 술집에서 일했습니까?
" "
네, 그건 사실입니다.
함께 일한 아가씨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애가 술집에 나갔다니…… 그것도 긴자에 있는 술집에 나갔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 "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 "
어떻게 그럴 수가…….
" "
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 김종화와 통화를 끝낸 여봉우는 기분이 착잡했다. 그는 오오에 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변태수 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 관심은 오로지 마야한테만 있습니다.
그 애의 장래를 위해서 본명은 사용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애는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았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무사히 부모의 품에 안겨 주어야 합니다.
인도적인 견지에서도 말입니다.
" 오오에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 갔다. "
우리 입장에서는 변태수 씨에게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에서 납치되었으니까 그 사람을 구해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야가 유괴된 것은 정말 안된 일입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경찰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마야는 변태수 씨 납치 조직의 일원으로서 구해 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우리가 체포해야 할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지요.
" 그것은 필요하면 사살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었다. 여 형사는 상대방의 비정한 말에 화가 치밀었다. "
난 인도주의는 국경을 초월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야는 체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애 역시 피해자입니다.
조직에 강제로 억류된 상태에서 본의 아니게 납치 행위를 도와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점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오오에는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
정상을 참작한다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나 필요한 것이지요.
지금 단계에서 우리는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수배 대상으로서 마야를 빨리 찾아내고 싶을 뿐입니다.
" 오오에의 논리는 단순 명쾌했다. 그는 복잡한 것은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
간단 명료한 생각만 가지셨군요.
" 여봉우가 화를 억누른 채 말하자 오오에는 이렇게 대꾸했다. "
난 인도주의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될수록 간단한 게 내 취미에는 맞습니다.
난 간단하게, 아주 간단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건 도대체가 골치 아프니까요.
" 여우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서울에서는 변태수 납치사건을 전담할 수사진이 급히 구성되었다. 피랍된 인물이 워낙 비중이 큰 데다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그 밖에도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 사건을 아주 중요시했고, 그래서 상급 기관에서 직접 그것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여우가 일본에 있는 동안 장미 양 납치사건은 변태수 납치사건 전담반에 보고되었고, 그러고 나서 조금 후에는 두 사건이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는 판단 아래 장미 양 수사팀이 변태수 사건 전담반에 자동적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여우는 국제 전화를 통해 그런 통보를 받았다. 그는 두 개의 사건을 별개의 사건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휘하던 수사팀이 비록 유명무실해졌다 해도 상부 기관의 수사팀에 통합 흡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상부의 결정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사본부에서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그보다는 윗자리에 있는 상관이었다. 그는 김 씨 성을 가진 과장이었다. 김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
놈들이 오천만 달러를 요구해 왔어요.
변태수의 어머니인 김복자 씨한테 직접 전화가 걸려 왔는데 변 부회장의 몸값으로 오천만 달러를 요구해 왔어요.
오천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사백억이야.
천문학적인 숫자야.
그런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나이 어린 소녀였어.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 여자의 목소리를 녹음해 두었는데 알아봤더니 일본에서 걸려 온 게 아니고 한국 내에서 걸려 온 거였어.
" "
그럼 이쪽에서 벌써 놈들이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건가요?
" "
그랬을 가능성도 있고……다른 하나는 한국 내에 놈들의 조직이 침투해 있어 가지고 전화를 걸어 온 것인지도 모르지.
" 여 형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값으로 사백억 원을 요구하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액수였다. "
그쪽 상황은 어때요?
" "
아직 아무 진전도 없습니다.
김장미 양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천만 달러를 언제까지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 "
8월 10일까지라고 했는데…… 전달 방법은 나중에 연락해 주겠다고 했어요.
별일 없으면 돌아오도록 해요.
"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도쿄에 머물러 수사 상황을 지켜본다는 것은 따분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우는 즉시 공항으로 향했다. 여우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밤 열 시가 지나서였다. 곧장 새로 마련된 수사본부에 가서 일본에서 가져 온 정보를 보고한 다음 녹음되어 있는 범인의 목소리를 들어 보았다. 어린 소녀가 장난치듯 오천만 달러를 요구하는 것을 듣고 그는 경악했다. "
혹시 장미 양 아버지한테 이 녹음을 들려줬습니까?
" "
아니, 들려주지 않았어요.
" 김 과장이 대답했다. "
한 번 들려줘 보죠.
혹시 아는 목소리일지도 모르니까요.
" "
아는 목소리라면 장미 양의 목소리라는 건가?
" "
전 장미 양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 애 부모한테 한번 들려줘 보죠.
" 연락을 받은 김종화는 즉시 달려왔다. 그리고 녹음된 목소리를 들어 본 그는, "
이건 장미 목소리가 틀림없습니다.
" 하고 소리쳤다. "
속단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 경찰은 그에게 두 번 더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
틀림없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종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래도 그는 대학교수 출신답게 자기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았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흥분해서 떠들어대지는 않았다. "
그 애 목소리가 틀림없습니다만 이건 누가 시켜서 한 게 분명합니다.
그 어린것이 어떻게 이런 전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 "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하고 여우가 말했다. "
이건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장미 양이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 깔끔하게 생긴 김 과장이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
일본에서는 지금 장미 양을 잡기 위해 비상망이 퍼져 있는데 용케 빠져 나왔군요.
" 여우가 덧붙여 말했다. "
이번 기회에 우리 아이를 구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 종화가 애걸조로 말하자 김 과장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은 변태수 씨입니다.
" "
장미는 납치되어 저렇게 된 겁니다.
변태수 씨도 구해 내야 하겠지만 우리 장미도 구해 내야 합니다.
" 종화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김 과장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녹음 들어 보지 않았어요? 당신 딸은 인질범이란 말이야! 몸값을 오천만 달러나 요구한 인질범이란 말이야! 범인을 체포해야지 구해 내는 건 말도 안 돼!
" 옆에서 듣고 있던 여봉우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김 과장의 말이 오오에 형사의 말과 너무나 흡사한 데 그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편을 들 수 없는 입장이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김종화가 비틀거리며 비통에 잠긴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자 여우는 그 뒤를 따라가 그를 위로했다. "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잘 해보겠습니다.
김 과장은 장미 양 사건을 직접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사람 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 그들은 길가에 서 있었다.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의 굴러가는 소리가 너무나 시끄러웠다. "
내 딸이 인질범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열일곱 살 어린 소녀가 어떻게 성인 남자의 인질범이 될 수가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도저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 김종화는 분해서 몸까지 떨어 댔다. "
그건 그러니까 자의든 타의든 놈들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겁니다.
경찰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드러난 것을 제일 중요시하니까요.
" 김종화를 보내 놓고 나서 여우는 한참 동안 길가에 서서 질주하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본부로 돌아왔다. 수사본부에서는 장미 양과 김복자의 통화 내용을 녹음해 놓은 것을 틀어 놓고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들은 변태수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장미는 김복자와 통화 도중 변태수를 잠깐 바꿔 주었는데, 그렇다면 변태수도 장미와 같이 국내에 와 있는 게 아니냐는 게 수사관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부는 그것이 녹음해 놓은 것을 들려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들어 보고 의견을 나누어 보았지만 얼른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변태수가 한 마디라도 김복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든가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면 문제가 간단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고 일방적으로 살려 달라고 애걸하다가 소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확인이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애걸하는 소리 사이사이로 들려 오는 쥐들의 찍찍대는 소리는 몇 번을 들어도 끔찍스럽기 짝이 없었다. "
여 형사는 어떻게 생각해요?
"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우한테 쏠렸다. 그는 무표정하게 과장을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
제가 보기에는 다른 데서 녹음해 가지고 와서 들려준 것 같습니다.
" "
어째서?
" "
장미 양이 말하고 있을 때의 배경음이 변 씨가 말하고 있을 때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장미 양이 말하고 있을 때에는 희미하게 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공중 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만…… 그와는 달리 변 씨가 말할 때는 배경음으로 쥐새끼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들이 같은 곳에 있었다면 배경음이 같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같은 곳에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 "
듣고 보니 그렇군.
"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재벌 그룹이라고 하지만 미화 오천만 달러를 일시에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련한다 해도 그것을 만일 해외로 유출시킬 경우에는 외환 관리법을 위반하게 된다. 그만한 액수의 외화를 소지하고 있는 것도 위법이다. 그러나 김복자는 그런 것 저런 것 따지려고 들지 않았다. 오로지 자식을 구하고 싶은 일념에서 남동생인 김동기 회장과 비서실장을 불러 은밀히, 그러나 강경하게 지시를 내렸다. "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천을 준비해! 기한 안으로 준비해 놔!
" 지시를 받은 두 남자는 안색이 변했다. 비서실장이 우물쭈물하며 김동기의 눈치를 살폈다. 김 회장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그만한 돈을 현찰로 모은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은행에 예금해 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복자는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탁자를 후려쳤다. "
넌 시키는 대로 해! 태수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야! 사람이 죽게 됐는데 그까짓 돈이 문제야? 불가능하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 넌 네 새끼가 납치되지 않았으니까 내 심정 모르겠지.
있는 대로 모두 긁어 봐.
부족하면 빚을 내서라도 채워! 암시장에도 가보고.
해보지도 않고 없다면 말이 돼!
" "
알겠습니다.
나중에 부작용이 생기면 누님이…….
" "
그래! 내가 책임지겠어! 내 아들 살리려고 그러는 것인데 뭐가 어쨌다는 거야!
" 다시 탁자를 두드려대자 김동기는 머뭇머뭇 일어섰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비서실장이 듣는 데서 투덜거렸다. 그는 실권도 없이 월급만 받는 회장의 비애를 새삼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누나 김복자에 의해 명색이 회장 자리에 앉게 된 몸이었다. 매형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김복자는 어린 아들을 회장 자리에 앉힐 수가 없어 임시 방편으로 남동생을 그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말이 회장이지 그는 뒷전에 물러나 있었고, 명예회장인 그의 누나가 모든 것을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했다. 그래서 못마땅한 나머지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둘 듯이 말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선뜻 사표를 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슬그머니 돌아서서 회전의자에 돌아가 앉아 다시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었다. 아무리 실권이 없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회장이라는 자리는 역시 놓치기 싫은 자리였던 것이다. "
에이! 정말 더러워서 못 해먹겠어.
아들 하나 때문에 회사를 거덜 낼 셈인가? 오천만 달러가 어느 정도 큰돈인지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야.
" 그의 불평에 빼빼 마른 비서실장이 맞장구를 쳤다. "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지만 달러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오천만 달러를 긁어 모으게 되면 금방 소문이 퍼지게 되고 암시장도 아마 마비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좀 사정을 말씀드려서 생각을 고치시도록…….
" 김동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
먹혀 들지가 않아.
완전히 돌았어! 오로지 그 잘난 아들 생각뿐이야.
먹혀 들어간다면야 백 번이라도 말하지.
하지만 도무지 먹혀 들지가 않아.
실장이 가서 다시 한 번 말해 봐.
" "
아이구, 제 말은 듣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제일 효과가 큽니다.
" 그들은 서로에게 미루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결국은 달러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으자는 데 의견의 접근을 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비밀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공개적 으로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지시를 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먼저 비서실장이 각 계열 회사 사장실에 전화를 걸었고, 사장이 자리에 있어 전화를 받으면 그는 수화기를 회장에게 넘겼다. "
나, 회장인데…… 부회장 문제 때문에 그래요.
문제는 놈들이 요구해 온 돈 때문인데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요?
" "
그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오천만 달러를 요구한 건 현실을 모르고 한 소리입니다.
놈들과 협상을 벌이다가 놈들을 체포하는 게 상책입니다.
" "
누가 그걸 모르나요.
그렇게 되면야 제일 좋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명예회장께서는 돈을 마련하라는 엄명을 내렸어요.
" "
네에? 그 돈을 전액 말입니까?
" "
그래요, 전액을 빨리 마련하라고 했어요.
" "
그건 도저히…….
" "
오로지 아들 구하고 싶은 생각뿐이니까 아무리 말씀드려도 통하지가 않아요.
거기서 꺼낼 수 있는 달러가 얼마나 되나요?
" "
잘 아시겠지만 외화를 보유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모두가 빈털터리라는 건 회장님께서 잘 아실 겁니다.
"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17. 아버지와 딸 김복자의 명령이 워낙 추상 같았기 때문에 W그룹 간부들은 오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마련한다는 것의 무모함을 그녀 앞에서 드러내 놓고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반대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곧 목이 잘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천만 달러를 현찰로 마련할 것이냐 아니면 수표로 준비해도 되느냐, 현찰로 마련할 경우 소액권으로 준비할 것이냐 또는 고액권으로 준비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간부들은 설왕 설래했지만 아무도 딱 부러지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김복자도 거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릴 수가 없었다. 수표로 준비한다면 액수를 채우는 데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범인들은 추적이 가능한 수표는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찰을 요구할 터인데 부피가 작은 것일수록 좋을 것이라는 점에서 고액권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접근되는 성싶었다. 그러나 범인들 쪽에서 구체적인 요구가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고액권은 소액권보다는 준비하기가 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축내고 있는데 장미 양으로 생각되는 소녀로부터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 첫번째 전화가 걸려 온 뒤 이틀이 지나서였다. 경찰은 거기에 대비해서 이미 전화에 도청 장치를 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발신처도 즉각 알아낼 수 있도록 전화국에도 단단히 부탁해 놓고 있었다. 발신처를 추적해서 범인을 잡으려면 될수록 통화 시간이 길어야 하기 때문에 전화를 받게 될 사람들한테도 그 점을 유의해 달라고 부탁해 둔 터였다. 전화국으로부터 발신처의 위치를 통보 받는다 해도 경찰이 그곳까지 출동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야 수 분 이상이 걸린다. 그 점을 고려해서 경찰은 시내에 산재해 있는 모든 파출소는 물론 요소요소에기동 타격대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들은 연락을 받는 즉시 발신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경찰은 그 밖에도 중요한 인물 한 명을 W그룹 명예회장실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김종화였다. 그를 대기시킨 것은 만일 장미 양이 다시 전화를 걸어 올 경우 그가 직접 나서서 딸을 설득시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종화가 경찰의 안내를 받아 김복자의 방에 들어서자 김복자는 아주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한 사람은 가해자의 아버지이고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의 만남은 아주 미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사전에 김복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주고 이해해 줄 것을 당부했었다. 거기에는 물론 김종화 앞에서 적대감을 보이는 등 노골적으로 감정을 노출시키는 짓을 삼가 달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종화를 보는 순간 김복자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였다. 종화가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홱 돌아앉으며 이렇게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
죄송할 것 없어요! 도대체 어떻게 애를 교육시켰길래 그 모양이에요? 그게 어디 소녀라고 할 수 있어요! 악마지!
" 그 말을 들은 김종화의 안색이 굳어졌다. "
너무 심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악마라니요, 누구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 김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쏘아붙였다. "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우리 애를 납치해다 놓고 오천만 달러를 내라고 하는데 그게 악마지 어디 사람이 할 짓이야? 당신 딸이 앞장서서 내 아들을 유혹했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맞서는 거예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 "
내 딸도 피해자입니다.
내 딸은 일 년 전에 납치됐습니다!
" 종화의 얼굴 위로 경련이 스쳐 갔다. "
당신 딸이 납치됐건 어쨌건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에요! 내 아들이 당신 딸을 납치했나요? 당신 딸이 내 아들을 납치했지.
안 그래요?
" "
듣다 보니까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 언제 들어왔는지 초라한 형색의 바짝 마른 사내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아니, 당신은 누구예요?
"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사내 쪽으로 향했다. "
난 지난 일 년 동안 김장미 양 납치사건을 수사해 온 사람입니다.
장미 양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닙니다!
" "
그래요?
" 김복자는 눈을 한 번 굴리더니 몸을 일으키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
당신 같은 사람은 필요 없으니까 썩 나가요! 나가란 말이에요!
" "
나갈 수 없습니다.
" "
뭣들 하고 있어! 끌어내!
" 남자 비서들이 달려들어 끌어내려 하자 여봉우는 사납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
난 공무 집행중이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 비서들이 주춤하자 이번에는 경찰 간부가 나섰다. 그는 턱짓으로 여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나가 있어요.
" "
나갈 수 없습니다.
" "
나가라면 나가 있어!
" 바로 그때 비서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여비서가 전화를 받더니 곧 명예회장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
마야라는 아가씨한테서 전화 왔습니다.
5번 전화입니다.
" 일순 실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김복자는 떨리는 손으로 5번 버튼을 누른 다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전화 바꿨습니다.
" "
안녕하세요? 저번에 전화 걸었던 마야예요.
" 생글생글 웃는 목소리에 김복자는 파들파들 떨었다. 경찰 간부 한 명과 김종화도 거의 동시에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경찰 간부가 고개를 끄덕하자 형사 한 명이 즉시 전화국으로 비상 전화를 걸었다. "
비둘기 떴다!
" "
알았습니다.
" 전화국에 대기중인 형사가 대답했다. 비둘기 떴다는 말은 범인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음을 알려 주는 암호였다. 그 암호를 듣자마자 전화국은 발신처를 추적하도록 되어 있었다. "
내 아들은 잘 있나요?
" 김복자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될수록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경찰로부터 절대 흥분하지 말고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이야기하라고 단단히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아드님은 잘 있어요.
밥도 잘 먹고 있고 잠도 잘 자고 있어요.
쥐들이 극성을 부려서 걱정이긴 하지만요.
" "
저기……아가씨, 돈을 마련해 줄 테니까 내 아들을 돌려줘요.
부탁이에요.
돈을 어떻게 줄까요? 수표로 줄까요? 아니면 현찰로……?
" "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전화를 걸었어요.
현찰로 주세요.
그렇다고 1달러짜리로 주면 안 돼요.
고액권으로 준비해 주세요.
운반하기 쉽게 말이에요.
계산하기 쉽고 운반하기 쉽게 백 달러짜리로만 준비해 주세요.
" "
그, 그건 어려워요.
백 달러짜리가 구하기 힘들다는 건 아가씨도 잘 알 거예요.
" "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튼 백 달러짜리여야 해요.
그것을 007가방에 백만 달러씩 넣어 주세요.
가방 하나에 백만 달러씩을 넣으면 50개를 채워야 오천만 달러가 될 거예요.
부탁해요.
그리고 나한테 연락할 일이 있으면 회사 앞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에다 빨간 리본을 여러 개 달아 주세요.
그러면 내가 즉시 연락하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 "
잠깐!
"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종화가 소리쳤다. "
장미야, 나 아빠다! 나 아빠야! 너 지금 어디 있니?
" 종화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
누구세요? 난 장미가 아니에요.
" "
장미야, 나 아빠다! 네가 어디 있는지만 말해 다오, 지금 당장 찾아갈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도움을 청해라!
" "
흥, 웃기시는 아저씨네요.
난 장미가 아니란 말이에요!
" "
넌 장미가 틀림없어! 난 네 목소리를 알고 있어! 장미야, 지난 일 년 동안 어디 있었니? 엄마는 너 때문에 아파서 누워 있다.
엄마는 네가 보고 싶어서 밤낮 울고 있어!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집으로 돌아와라.
네가 집으로 와주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
학교에도 다시 다닐 수 있고…….
" 경찰 간부가 종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
그만하세요.
전화 끊어졌어요.
" 종화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멍하니 주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눈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
장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 경찰 간부가 물었다. 종화는 완강히 머리를 저었다. "
그 애가 틀림없습니다!
" "
그럼 왜 부인을 하죠?
" "
협박을 받고 있든가 그 동안 세뇌당했든가 그 때문이겠죠.
" 여우가 대신 말했다. 경찰 기동 타격대가 출동한 것은 통화가 시작되고 나서 이 분쯤 지나서였다. 전화국에서 그때쯤에야 발신처의 위치를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전화국에 대기중이던 형사는 발신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잠복하고 있는 기동 타격대에 무전으로 위치를 알렸고, 연락을 받은 타격대원 네 명은 즉시 차의 비상등을 켜고 달려갔다. 통화 시간은 삼 분 이십오 초였다. 경찰 타격대가 발신처에 도착한 시간은 통화가 끝난 지 이 분쯤 지나서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발신처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삼 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빨리 도착한다 해도 오 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전광 석화처럼 움직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타격대가 발신처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잠복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신처는 명동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다방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두 명은 입구를 지키고 다른 두 명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다방은 일 층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손님들은 다방 안에 따로 설치되어 있는 공중 전화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공중 전화는 부스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부스 안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들어 있었다. 그는 몇 번 전화를 걸다가 통화중인지 도로 밖으로 나왔다. 경찰은 그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한 명이 부스 안으로 들어가 본부로 전화를 거는 동안 다른 한 명은 그 청년을 붙들고 있었다. "
당신 언제부터 전화 걸었어요?
" "
방금이오.
" "
어디다 전화 걸었어요?
" "
친구 집에 전화 걸려고 했는데 통화중이라 걸지 못했습니다.
" 부스 안에서는 타격대원이 쩔쩔매고 있었다. "
젊은 여자야, 남자가 아니고 젊은 여자란 말이야! 스물도 안 된 아가씨야!
" "
네, 알았습니다.
" 밖으로 나온 그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
당신이 전화 걸기 전에 누가 전화 걸고 있었지요?
" "
어떤 아가씨가 걸고 있었습니다.
" "
그 아가씨 어디 있어요?
" "
저쪽으로 나가는 것 같던데요.
" 청년은 비상구 쪽을 가리켰다. 그들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비상구는 뒷골목으로 통해 있었다. 뒷골목에는 오가는 행인들만 있었다. 김 과장은 굳은 표정으로 듣고 나서 수화기를 내렸다. "
어떻게 됐습니까?
" 김동기 회장이 물었다. "
한 발 늦었답니다.
뒷문으로 빠져 달아났답니다.
" "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 빼빼 마른 비서실장이 말했다. 수사진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쯤 지나서였다. 그 가운데는 여봉우는 물론 김종화도 끼여 있었다. 먼저 여우가 장미의 사진을 보이자 경찰에 처음 범인으로 오인되었던 청년이 그녀가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대학생이었는데 그가 그녀를 그렇게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워낙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
만일 걸프렌드가 없었다면 따라가서 데이트를 신청했을 겁니다.
"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외에도 장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그 다방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었다. 그들 역시 그녀가 워낙 예뻤기 때문에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자기보다 아름다운 여성에 대해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감정을 품게 마련이고, 그러자니 자연 상대방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
그 아가씨는 누구하고 있었나요?
" "
혼자 있었어요.
혼자 야쿠르트를 시켜 마셨어요.
" 장미에게 야쿠르트를 갖다 주었던 종업원이 말했다. "
여기에 얼마나 있었나요?
" "
잠깐 있었어요.
야쿠르트를 마시고 나서 찻값을 치른 다음 저쪽으로 전화를 걸러 갔어요.
전화를 걸고 나서 저쪽 비상구로 해서 사라졌어요.
" "
그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습니까?
" "
아뇨, 처음 보는 아가씨였어요.
" "
옷차림은 어땠습니까?
" "
부잣집 딸같이 차려 입고 있었어요.
아래위로 하얀 투피스를 입고 있었고 책을 가지고 있는 게 대학생 같았어요.
머리는 조금 긴 편이었는데 퍼머도 하지 않은 생머리였어요.
" 수사진이 물러간 뒤에 마지막으로 그곳에 남은 사람은 김종화였다. 그는 부모가 아니면 물을 수 없는 질문들, 이를테면 장미의 안색이 어떻더냐, 그녀와 무슨 말을 나누었느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소지품들은 무엇이었느냐, 그녀는 행복해 보이더냐 아니면 불행해 보이더냐, 그녀는 몇 살쯤 되어 보이더냐, 화장을 했는가 안 했는가, 반지를 끼고 있더냐, 귀고리도 하고 있던가, 웃는 것을 보았는가, 키는 얼마나 크던가, 어느 자리에 앉아 있었는가,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방 종업원들은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그가 팁까지 주면서 하도 진지하게 물어 왔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면 그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눈물을 글썽이며 경청하는 것이었다. 백 달러짜리로만 오천만 달러를 오십 개의 007가방에 담아서 준비해 놓을 것, 한 개의 가방 속에 담을 액수는 백만 달러, 기한은 8월 10일까지……. 경찰은 범인들의 이와 같은 요구 조건을 놓고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한동안 멀거니들 앉아 있기만 했다. "
이거 괜히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 수사본부장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잠자코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기 의견을 말하기에는 아직 모두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가방 오십 개를 어떻게 운반하겠다는 거지? 그걸 들고 한국을빠져 나가겠다는 건가?
" "
무슨 방법이 있겠죠.
" 하고 여우가 대꾸했다. "
백 달러짜리로만 모은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 "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 하고 김 과장이 말했다. "
문제는 피해자측이 달러를 모으게 내버려두느냐 하는 거야.
자그마치 오천만 달러나 되는데 말이야.
오천만 달러를, 그것도 백 달러짜리로만 긁어 모으게 되면 달러 시장에 큰 파동이 일어날 거고…… 그것이 유출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국가 경제에도 적지 않은 손해를 끼칠 거란 말이야.
그것이 위법 행위인 것은 그만두고라도 말이야.
" "
하지만 김복자 씨는 아주 필사적이던데요.
그 여자는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천만 달러 아니라 일억 달러라도 내던지겠던데요.
위법이고 국가 경제고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이미 달러를 모으라고 전 계열 회사에 엄명을 내렸답니다.
" "
그렇다면 범인들과 직접 협상하겠다는 건가?
" "
아들을 구하겠다는데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 "
그건 그래.
하지만 놈들이 돈을 가지고 가게 할 수는 없어.
피해자측이 달러를 긁어 모으는 행위는 묵과할 수 있어.
그러나 그 돈을 범인들에게 넘겨주게 할 수는 없어.
범인들과 협상하는 건 좋아.
하지만 우리가 놈들을 체포할 수 있게 우리와 긴밀한 협의를 가지면서 놈들과 협상하도록 해야 해.
" 본부장의 말은 변태수보다도 오천만 달러라는 거액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사실 본부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오천만 달러라는 거액이 범인들 손에 넘어가 해외로 유출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본부장의 말은 주위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
알겠습니다.
김복자 씨를 설득시켜 우리 몰래 독자적으로 범인들과 협상을 벌이는 짓은 못 하도록 하겠습니다.
" "
그 여자는 우리 말을 잘 듣지 않을 거야.
듣지 않으면 위법으로 집어 넣겠다고 해.
" 여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수사관의 위협이 김복자 같은 여인에게 먹혀 들어갈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수사본부를 나온 그는 김종화를 만나러 갔다. 그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장미의 어머니 양미화는 여우를 보고서도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여우가 인사를 했지만 그저 멀거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몸은 몰라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실성한 나머지 폐인처럼 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되는 바람에 집안 살림은 그녀의 동생인 양은화가 와서 대신 돌봐 주고 있었다. 은화는 그 때문에 다니던 학교도 휴학하고 있었다. "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어요.
저 상태로 오래 가면 재기하기 힘들다는데…….
" 방으로 사라지는 아내를 쳐다보며 종화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
장미가 돌아오면 나아지지 않을까요?
" 여우는 그녀보다도 종화가 더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
글쎄요.
저 사람이 장미를 알아볼지 모르겠습니다.
" 종화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여우에게 커피를 권했다. "
아무튼 따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까 다행입니다.
" 여우의 말에 종화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
장미는 완전히 다른 애 같았어요.
일 년 전의 그 애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일 년 만에 그렇게 변할 수도 있을까요?
" 종화는 충혈된 눈으로 여우를 쳐다보았다. "
제 생각에는 장미 양이 세뇌를 받은 것 같습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춘기 소녀라면 일 년 동안의 세뇌 교육을 통해 전혀 딴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 "
저도 그 애가 세뇌를 받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 년 만에 들어 보는 아버지 목소리에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장미가 아니라고 그렇게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 "
세뇌란 아주 무서운 거죠.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 "
그 애가 제정신이라면 한 번쯤 집으로 전화를 걸 수도 있을 겁니다.
" "
녹음된 걸 들어 보니까 전혀 협박을 받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협박을 받고 그런 전화를 걸었다면 조금이라도 겁에 질린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이 아주 명랑한 목소리였습니다.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장미 양이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 "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
" 종화의 물음에 여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
저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입니다.
내 딸의 입에서 오천만 달러라는 말이 어떻게 술술 흘러 나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 "
가능한 일입니다.
놈들은 변태수 씨를 납치했을 정도니까요.
" "
내 딸은 피해자에서 이제 가해자로 변한 셈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 종화의 하소연에 여우는 할 말을 잃고 담배만 빨아댔다. 18. 염 사장 말쑥한 차림의 젊은이 두 명이 명동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길가에 앉아 있던 여인네들이 말을 걸어 왔다. "
달러 있어요.
달러 있으면 파세요.
좋게 쳐드릴 테니까 파세요.
" 그녀들은 암달러상들이었다. 젊은이들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다가 두 평도 못 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전화기만 한 대 달랑 놓여 있는 아무 간판도 없는 가게였다. 밖에서 그들을 끌어들인 뚱뚱한 오십 대 여인이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말을 걸었다. "
달러 필요하세요?
" "
네, 좀 많이 필요한데…….
" 안경 낀 젊은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얼마나 필요하세요?
" "
얼마든지 좋습니다.
있는 대로 모두 사겠습니다.
" 키가 큰 젊은이가 말했다. 암달러상은 의심쩍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보나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들 같았다. "
그래도 액수를 말씀하셔야죠.
" "
얼마든지 좋다니까요.
그 대신 백 달러짜리여야 합니다.
" 그 말에 여인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
그건 어려운데요.
백 달러짜리는 우리도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어요.
그보다 좀 작은 액수는 안 되겠어요?
" "
안 됩니다.
백 달러짜리로만 구해야 합니다.
" "
백 달러짜리는 없어요.
요새는 왜 그렇게 백 달러짜리만 찾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며칠 전에도 어떤 사람이 와서는 백 달러짜리로만 싹 쓸어 갔어요.
그때 싹 쓸어 갔기 때문에 백 달러짜리는 없어요.
" "
다른 데 가면 없을까요?
" "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혹시 한두 장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이 구할 수는 없을 거예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다른 데 알아볼 테니까요.
"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보더니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
없어요.
거기서도 백 달러짜리를 구하려고 야단인 모양이에요.
왜 이렇게 갑자기 백 달러짜리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사실 백 달러짜리는 휴대하기에는 간편할지 모르지만 쓰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은데…….
" 젊은이들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 중 안경 낀 젊은이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
며칠 전에 백 달러짜리를 쓸어 갔다는 사람은 누굽니까? 얼마나 쓸어 갔나요?
" "
그건 비밀이에요.
그런 걸 말씀드릴 수 있나요.
우리는 고객에 대한 비밀만은 철저히 지켜요.
" "
뭣하면 그 사람한테 웃돈을 주고라도 백 달러짜리를 되샀으면 해서 그러는 겁니다.
" 암달러상의 조그만 눈이 교활하게 반짝거렸다. "
글쎄,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가능하다 해도 아마 웃돈을 많이 줘야 할 거예요.
" "
웃돈을 많이 주고서라도 사겠습니다.
그 사람한테 연락이 가능합니까?
" "
연락은 할 수 있어요.
"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더니 명함 뭉치 속에서 한 장을 꺼냈다. "
여기 있어요.
" 그녀는 젊은이들에게 명함을 보여 줄 듯하다가 도로 서랍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
이걸 보여 드릴 수는 없어요.
물주는 따로 있고 이건 물주 심부름으로 백 달러짜리를 사간 사람의 연락처예요.
물주는 염 사장이라는 사람인데 아마 숨은 알부자인 모양이에요.
하여간 이 골목에서 며칠 동안 백 달러짜리만 싹 쓸어 갔으니까요.
지금까지 이 장사했지만 백 달러짜리로만 그렇게 많이 사간 사람은 처음이에요.
한번 연락을 해보겠어요.
" "
지금 좀 연락해 보시겠습니까?
" "
그렇게 급하세요?
" "
네, 좀 급해서 그럽니다.
" "
잠깐 기다려 보세요.
"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박 부장이라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
지금 자리에 없대요.
연락처를 가르쳐 주시면 내가 연락을 드리지요.
" 하고 말했다. 안경 낀 젊은이는 머뭇거리다가 명함을 한 장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꼭 연락 바랍니다.
그 대신 비밀은 지키셔야 합니다.
" "
아이고,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 그녀는 젊은이들이 나가고 난 뒤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명함에는 W그룹 비서실이라는 근무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W그룹 비서실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가 한 명 들어섰다. 초라한 행색에 바짝 마른 남자였다. 달러 몇 푼 팔러 왔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디미는 것을 보니 경찰관이었다. 암달러 골목에 출입하는 경찰관이라면 낯이 익을 법도 한데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
조금 전 그 사람들 여기에 뭣하러 왔습니까?
" 그녀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
달러를 구하러 왔어요.
" "
얼마나 교환했나요?
" "
하나도 교환하지 못했어요.
백 달러짜리만 찾아서 교환해 주지 못했어요.
" 그녀는 남자의 눈매를 보고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백 달러짜리는 없나요?
" "
없어요.
" "
그 젊은 사람들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던가요?
" "
백 달러짜리라면 얼마든지 좋다고 했어요.
"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명함에 머물렀다. 그녀는 아차 했지만 이미 형사의 손이 그것을 집어 들고 있었다. "
이거 그 사람들이 놓고 간 건가요?
" 그녀는 굳이 부인한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네, 백 달러짜리가 들어오는 대로 연락해 달라고 하면서 놓고 갔어요.
" "
W그룹 비서실 이명수라…….
" 형사는 중얼거리더니 명함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나서 밖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의 암달러 시장에 급파되었던 비서실 직원들로부터 들어온 보고 내용들은 한결같았다. '백 달러짜리는 현재 품귀 상태임. 단시일 내에 구하기는 불가능함.' 비서실장은 그들을 모두 집합시켜 놓고 직접 보고를 들어 보았지만 답변은 역시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이 백 달러짜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회사 업무와는 다른, 암달러 시장에서 불법적으로 달러를 구하는 일에 동원되었다는 데 대해 몹시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비서실장은 말썽이 일어날까 봐 그들을 달래야만 했다. "
기분이 언짢겠지만 사정이 사정인 만큼 이해들을 해요.
회사 방침은 범인들과 비밀리에 협상을 통해서라도 부회장님을 구하려는 것이니까 그렇게들 알고 협조를 해요.
제일 급한 것은 부회장님을 구하는 거예요.
따라서 회사 방침은 현재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못 돼요.
그걸 이해한다면 여러분들은 기분이 언짢더라도 협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처음부터 내가 말했지만 이건 외부에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둬요.
이게 만일 밖으로 새나가 신문에라도 보도되는 날에는 우리 그룹은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될 거요.
그건 그렇고 달러를 구하지 못해 정말 큰일났어요.
백 달러짜리가 그렇게 품귀 현상을 빚는 이유는 뭐예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 "
명동에서는 품귀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한꺼번에 싹 쓸어 갔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
부산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을 두고 어떤 사람이 백 달러짜리라면 무조건 사갔다고 합니다.
" 부산에 파견되었던 직원이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똑같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
어떤 사람이 그런 짓을 했지? 그 사람도 우리만큼 고액권이 필요했던 모양이지?
" 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염 사장이라는 사람이 쓸어 갔는데……상당한 거부라고 들었습니다.
" "
염 사장이라고?
"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알부자들은 많다. 아마 사채업자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
저도 고액권을 쓸어 간 사람이 염 사장이라고 들었습니다.
" 부산에 파견되었던 직원이 말했다. 뒤를 이어 대구에 다녀온 직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전, 인천, 의정부 등지에 다녀온 직원들도 염 사장이라는 거부가 백 달러짜리를 모두 쓸어 갔다는 말을 암달러상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그럴 줄 알고 한 발 앞서서 미리 백 달러짜리를 싹 쓸어 갔다는 말처럼 들렸다. 비서실장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
그렇다면 그 염 사장이라는 사람이 전국에 걸쳐 암시장에서 고액권을 모두 거두어 갔다는 건가?
" 직원들은 잠자코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
그 염 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
" "
그렇지 않아도 부탁을 해놨습니다.
" 이명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
그 사람한테서 고액권을 살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암달러상이 한번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웃돈을 얹어 주면 살 수도 있을 것 같이 말했습니다.
저한테 연락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 "
한번 추진해 봐.
암달러 시장에 등장한 큰손일지도 모르니까.
달러 몇 푼 가지고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런 큰손과 상대해서 한목에 거래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그 사람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해 봐.
빨리!
" 비서실장은 이명수 외에 세 명을 더 지목했다. 이명수와 함께 내일까지 염 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아 오라고. 비서실장은 먼저 김동기 회장에게 보고했고, 조금 후 그들은 함께 명예회장실로 들어가 김복자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전국 암달러 시장에 백 달러짜리가 동이 났다고 보고하자 그녀는 펄쩍 뛰었다. "
그런 걸 보고라고 해! 내가 지금 그런 보고를 받게 됐어?
" "
누님두 참, 없는 걸 어떻게 구하라는 겁니까?
" 김동기가 참다못해 대꾸하자 복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아니, 너 지금 누구 죽는 꼴 보려고 그 따위 소리 하는 거니? 네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앞장서서 구해야 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네 자식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다.
다 필요 없어! 형제간도 필요 없고 회사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어! 꼴 보기 싫으니까 모두 나가! 나가란 말이야!
" 그녀가 워낙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그들은 어쩔 줄 모르며 서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말 한마디 잘못하는 바람에 호되게 당한 김 회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분을 안으로 삭이고만 있었다. "
만일 그걸 구하지 못하면 각오해! 두 사람 다 사표 낼 각오해! 이건 농담이 아니야!
" 김복자는 책상을 두드리더니 부저를 눌렀다. 여비서가 놀라서 뛰어들어오자 그녀는 사표 용지 두 장을 가져 오라고 소리쳤다. 조금 후 여비서가 용지 두 장을 가져 오자 김복자는 두 사람한테 그것을 던졌다. "
사표 써! 날짜는 쓰지 말고 사인하고 이름만 써! 만일 달러를 구하지 못하면 사표는 즉시 수리될 거야.
" 김 회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김복자를 쳐다보았고, 비서실장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
누님,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그렇지만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 그래도 친동기간이기 때문에 김동기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뭐가 너무해! 내가 괜히 그러는 줄 알아? 이건 장난이 아니야.
내 아들은 지금 죽어 가고 있어! 너희들은 편하게 앉아 있지만 내 아들은 납치되어 죽어 가고 있단 말이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W그룹을 모두 처분해서라도 내 아들을 구할 생각이야.
이까짓 거 난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 빨리 사표 쓰라는 데 뭣들 하는 거야?
" 비서실장이 먼저 떨리는 손으로 백지 사표 용지에다 자기 이름을 쓰고 사인했다. 김동기 회장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볼펜을 집어 들었다. "
전국 암시장에 알아본 결과…….
" 비서실장이 두 손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김동기는 사표를 써놓고 나서 밖으로 홱 나가 버렸다. 김복자는 동생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전국 암시장에 알아 본 결과…….
" 비서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답답하게도 두 손을 비벼대면서 다음 말을 얼른 잇지 못하고 있었다. "
암시장이 어쨌다는 거야?
" "
전국 암시장에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염 사장이라는 사람이 지난 며칠 사이에 백 달러짜리 고액권을 전부 쓸어 갔다고 합니다
" "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야?
" "
그, 그게 아니고……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한테서 고액권을 되사는 방법을 모색중입니다.
그럴려면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웃돈을 얹어 주어야 하는데……큰회장님 의견은 어떠신지…….
"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복자는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려댔다. "
돈이 얼마가 들든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야! 알았어?
" "
네네, 알았습니다.
" "
웃돈을 주든 뭘 주든 빨리 달러를 구하란 말이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하란 말이야!
" 비서실장은 머리를 조아렸다. "
그놈이 고액권을 얼마나 가지고 있대?
" "
확실한 것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국 암시장에서 고액권만 거둬들였다고 하니까 거액을 확보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모양입니다.
" "
그놈을 찾아내서 흥정을 해봐.
실장이 직접 만나 보란 말이야! 경찰이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
" "
알았습니다.
" 밖으로 나온 비서실장은 회장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까지 김동기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방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서실장이 나타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분통을 터뜨렸다. "
내 더러워서 못 해먹겠어.
도대체 사람을 뭘로 알고 그러는 거야? 최 실장, 회장이 백지 사표 쓰는 데 봤어? 아무리 형제간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야!
" "
진정하십시오.
누님께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실 겁니다.
오로지 부회장님을 구하시려는 일념에서…….
" "
아니, 최 실장! 누가 그걸 모른대? 누가 그 애를 구하지 않겠다는 거야? 불가능한 걸 해내라니까 이거 사람 미칠 노릇 아니냔 말이야! 무슨 일을 해도 이치에 맞춰 해야지, 이건 숫제 폭군이야 폭군! 정말 더러워 못 해먹겠어.
내 누님이니까 그대로 두고 봤지 다른 사람이라면 창 밖으로 집어 던졌을 거야.
어휴, 이거 억장이 무너져서 어디 살겠어?
" 와이셔츠 바람의 그는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의 등판은 땀에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
고정하십시오.
누님께서 진심으로 그런 건 아니실 겁니다.
하도 사태가 절박하니까 그러시는 거지…….
" "
최 실장도 죽은 듯이 있지만 말고 할 말은 해요! 그렇게 한마디도 안 하면 어떻게 해요? 실장이라는 자리가 그런 말 하기에는 좋은 자리 아니야!
" "
제가 어떻게…….
" 최 실장은 김동기의 시선을 슬슬 피하면서 머리를 긁었다. "
무슨 말을 했어요?
" "
염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했더니 웃돈은 얼마가 돼도 좋으니까 그 사람과 접촉해서 일을 성사시키라고 하셨습니다.
" "
미쳤군! 회사를 거덜내고 싶어서 환장했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 "
무모한 짓인 줄 압니다만 큰회장님 분부가 그러하니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 비서실장은 명예회장을 큰회장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회장 앞에 명예 자를 붙여서 부르기가 발음상 어색해서 그런 것이지만 큰회장님이라는 호칭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봉우는 자리에서 제일 말단에 속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보다는 윗자리에 있는 간부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W그룹은 비서실 직원들을 동원해서 고액권 달러를 구하려고 혈안입니다.
" "
어느 정도인가요?
" 과장이 물었다. "
서울 시내 암달러 시장을 훑고 있습니다.
지방에서도 W그룹 직원들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 "
얼마나 구입했나요?
" "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달러 시장에 고액권이 동이 났답니다.
백 달러짜리는 눈을 씻고 볼래야 볼 수가 없습니다.
" "
그건 왜 그렇지?
" 정복의 어깨 위에 무궁화를 여러 개 달고 있는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
얼마 전에 어떤 자가 백 달러짜리 고액권만 모두 쓸어 갔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사람을 동원해서 있는 대로 모두 교환해 간 모양입니다.
" "
그 자의 신분은?
" "
염 사장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 "
왜 백 달러짜리만 쓸어 갔을까?
"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 자에 대해 알아봐요.
암달러 시장에 출입하는 요원들을 동원해서 알아봐요.
그 자가 확보한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 어깨에 무궁화를 여러 개 단 수사본부장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과장을 쳐다보았다. "
김복자 씨는 뭐라고 그래요? 협조하겠다고 그래요?
" 김 과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
여간 상대하기가 어려운 여자가 아닙니다.
숫제 경찰은 믿지를 않습니다.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겠다는 식입니다.
경찰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수사를 하는 거고…… 자기는 자기대로 아들을 찾겠다는 식입니다.
돈이 많다 보니까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충고를 하고 협조를 구하면 오히려 귀찮아하고 방해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불쾌한 여자입니다.
" 수사본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변태수라는 사람은 오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
" 모두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본다. 그것은 질문이 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설사 변태수가 똥오줌을 못 가리는 바보라 해도 그의 목숨을 돈으로 따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본부장은 피식 웃었다. "
하도 답답해서 물어 본 말이야.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따질 수만 있다면야 일은 간단하지.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구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하든 그게 비록 불법적인 짓이라 해도 우리는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두고 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 여자가 직원들을 동원해서 달러를 구한다면 우리는 막을 수가 없어요.
막지 말고 조사만 하고 있어요.
빈틈없이 조사만 하고 범인들과 거래를 할 때 기습해서 놈들을 잡도록 해요.
액수가 크니까 그걸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을 거야.
" 19. 이상한 거래 비서실 직원 이명수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젊은이었다. 그리고 출세욕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출세를 위해 결혼을 뒤로 미룰 정도로 회사일에 열성적이었다. 비서실장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그는 동료 직원 한 명과 함께 명동 암달러 시장을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전날 만났던 암달러상을 다시 만나 보았다.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날보다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명수는 백 달러짜리 고액권을 전국 암시장에서 거두어들인 염 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월이 엄마라고 하는 그 암달러상도 염 사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액권을 쓸어 가는 사람이 염 사장이라는 말만 들었지 그를 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염 사장을 대신해서 고액권 달러를 쓸어 간 사람은 박 부장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도 그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기는 했지만 암달러 골목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명함을 주는데 받아 보니 무슨 상사의 박모 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그 명함을 명수에게 보여 주었다. 명함에는 국제통상 박태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날 오후 두 시 조금 지나 이명수는 월이 엄마의 소개로 박태식을 만날 수가 있었다. 박태식은 단둘이서만 만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명수는 동료 직원을 떼어 놓고 혼자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약속 장소는 어느 호텔 방이었다. 은밀한 접촉이기 때문에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호텔 방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장소를 정한 쪽은 상대방이었고, 명수는 아무래도 만나 달라고 애걸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방 앞에 이르러 초인종을 누르자 조용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말쑥한 차림의 중년 사나이가 그를 맞았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탁자 앞에 앉았다. 상대방이 월이 엄마가 보여 주었던 것과 동일한 명함을 내밀었기 때문에 명수도 회사 명함을 꺼내 주었다. "
W그룹 비서실에 계시는군요.
좋은 데 계시는군요.
" 박태식은 아주 점잖게 말했다. "
좋기는요.
" 명수는 겸손하게 대응했다. "
W그룹이라면 부회장이 납치된 회사 아닙니까?
" 잘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 같았다. "
네, 그렇습니다.
신문에 난 그대로입니다.
" "
어떻게 됐습니까, 부회장이란 사람 풀려 났습니까?
" "
아직 그러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일 때문에 고액권 달러가 필요합니다.
" 명수는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빨리 결말이 날 것 같아 현재의 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박 부장은 동정이 간다는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빨리 서둘러야겠군요.
일본 과격 단체의 소행이라면 자기들이 말한 대로 실천할 겁니다.
놈들은 죽인다면 죽이는 놈들이니까요.
8월 10일까지라면 며칠 안 남았는데요?
" "
네, 그래서 서두르고 있습니다만…… 고액권이 모두 동이 나서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 "
사람을 납치해서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다니 정말 악랄한 놈들이군요.
더구나 고액권 달러로만 요구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적은 액수도 아니고 자그마치 오천만 달러나 말입니다.
난 도무지 그놈들의 속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 그가 정색을 하고 자기 일처럼 흥분해서 말하는 바람에 명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
전국 암시장을 모두 뒤져 보았지만 고액권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염 사장이라는 분이 모든 고액권을 쓸어 갔다는 말을 듣고 급한 김에 연락드린 겁니다.
" "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는데…… 그럼 지금 이 과장은 회사를 대표해서 나를 만나러 온 겁니까?
" "
네, 물론이지요.
회사에서 적극 알아보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나선 겁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고액권을 확보하라고 합니다.
염 사장께서 엄청난 액수의 고액권을 확보하고 계시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 "
정말입니다.
" 박 부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염 사장이라고 하는 분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분입니까?
" "
모릅니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전제 조건으로 하는 말인데 그분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이야기가 되니까요.
" 상대방이 엄숙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명수는 이야기가 깨질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
아, 네.
알겠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것이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데 무슨 일로 고액권만 그렇게 많이 확보하셨나요?
" "
모릅니다.
난 중간에서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 "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우리는 지금 당장 오천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백 달러짜리 고액권으로 말입니다.
좀 도와 주십시오.
" 이명수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가 싫어 정면으로 밀고 나갔다. "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 박 부장이라는 사람은 양담배를 꺼내더니 금빛이 나는 라이터로 불을 켰다. 던힐이라는 외국 상표 마크가 살짝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차림은 모두 외제 일색인 것 같았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기를 기다려 명수는 입을 열었다. "
염 사장이 확보하고 있는 오천만 달러를 우리한테 넘길 수 없을까요? 고액권 그대로 말입니다.
" 상대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갈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
어려울걸요.
내 돈이 아니니까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애써 모은 고액권을 그렇게 순순히 내놓겠습니까? 더구나 한두 푼도 아니고 오천만이나 되는 거액인데 말입니다.
" "
그러니까 원가로 넘겨달라는 게 아니고 웃돈을 붙여서 넘겨달라는 겁니다.
회사측은 어느 정도의 웃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명수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오천만 달러라면 한국 돈으로 사백억이나 된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수백억이 왔다갔다하는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일이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고, 숫자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웃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염 사장을 움직이려면 약간 정도의 웃돈 가지고는 안 될 겁니다.
" "
그럼 어느 정도면 되겠습니까?
" 박태식은 명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
글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꽤 많이 달라고 할 겁니다.
내가 한번 알아볼까요?
" "
네, 부탁합니다.
꼭 좀 부탁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 "
지금 전화를 걸어 보죠.
" 박 부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그는 유창한 일본말로 통화를 시작했다. 명수는 일본말을 모르기 때문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통화를 하는 모습으로 보건대 염 사장이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가 전화를 끊고 명수를 쳐다보았다. "
방금 염 사장과 통화를 했어요.
" "
아, 그랬습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 "
자기도 필요해서 모았는데…… 이쪽 사정이 그렇게 딱하다면 한 번 고려해 볼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책임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 그 말은 이명수 같은 하위직 직원하고는 그런 큰 거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명수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
그렇다면 비서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제가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 "
비서실장이 지금 자리에 있으면 이리 오라고 해요.
" 명수는 즉시 회사로 전화를 걸어 비서실장을 찾았다. 비서실장은 마침 자리에 있었다. 명수의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즉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일단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비서실장은 명수를 밖으로 내보냈다. 명수는 아래층 커피숍으로 내려가 상담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
오천만 달러를 백 달러짜리 고액권으로만 구할 수 있을까요?
" 최 실장은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에 대해 박태식은 고자세로 대답했다. "
글쎄, 그거야 조건이 맞으면 가능하겠지요.
염 사장 쪽은 고액권을 그만큼 확보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까요.
" "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고액권을 확보할 수 있었나요?
" 박 부장이 눈알을 굴렸다. "
지금 이 자리는 그런 걸 알자고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 "
네, 그렇긴 합니다만…… 워낙 엄청난 돈이라서…….
" 그 말에 박 부장은 코웃음을 쳤다. "
그만한 돈을 모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하루 아침에 모은 것도 아니고 장장 수년간에 걸쳐서 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액권으로만 모으자니 애로가 많았지요.
더구나 합법적인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나는 중간에서 심부름만 했는데 염 사장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백 달러짜리만 모았습니다.
그러자니 시세보다 훨씬 웃돈을 내고 구입할 수밖에 없었지요.
꼭 화폐 수집하는 사람처럼 웃돈을 많이 주어 가면서 모았으니까요.
" "
그 염 사장이라는 분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요?
" "
그분은 자신의 신분을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고 저한테 당부하셨습니다.
합법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십니다.
" 최 실장은 더 이상 물어 봐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어느 선이면 그 고액권을 인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필요한 건 오천만 달러입니다.
" "
전액 백 달러짜리 현찰로 말입니까?
" "
네, 범인들이 그렇게 요구하니까요.
아주 까다로운 놈들입니다.
" "
염 사장 쪽에서는 흥정은 필요 없다고 합니다.
" "
그게 무슨 말인가요?
" "
선은 그쪽에서 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정한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 "
그분은 어느 선을 말씀하셨습니까?
" "
달러당 천 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 최 실장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그리고 입을 딱 벌렸다. "
그럼 한국 돈으로 오백억을 달라는 겁니까?
" "
네, 그렇죠.
" 현 환율로 따진다면 오천만 달러는 사백억 원이다. 그런데 오백억을 요구하고 있다. 백억이나 붙여 먹겠다는 것이다. 염 사장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날도둑임이 틀림없다. 이쪽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붙여 먹겠다는 것이다. 나쁜 놈 같으니! 최 실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머리만 설레설레 흔들어댔다. "
그 선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W그룹측의 사정이 딱하다는 걸 알고 그 정도의 선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흥정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답니다.
" 박 부장이 한술 더 떴다.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너무 차이가 나는군요.
우리도 어느 정도의 웃돈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 "
염 사장은 지나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주 기본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 "
나도 최고 결정권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선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군요.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조정하는 게 어떨까요?
" 박 부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
염 사장은 한 푼이라도 깎으려 들면 거래를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 비서실장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먼저 김 회장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 있자 큰회장인 김복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백억이나 붙여 먹겠다는 거야? 그런 날도둑놈이 어딨어! 십억 주겠다고 해!
" "
절대 한 푼도 깎을 수 없다고…….
" "
십억 얹어 주겠다고 하란 말이야!
"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최 실장은 변변히 말도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박태식은 코웃음을 쳤다. "
이야기가 안 되겠군요.
그만둡시다!
" 그가 일어서는 것을 최 실장이 황급히 붙들었다. 그리고 회사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십억을 말했더니 그만두겠답니다.
" "
그럼 십사억쯤 말해 봐! 그러지 말고 그 사람 나 좀 바꿔 줘.
" 성질이 불 같은 김복자는 자신이 직접 흥정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비서실장은 수화기를 박 부장에게 넘기면서 작은 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
명예회장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납치된 변 부회장의 모친이십니다.
직접 이야기해 보고 싶으시답니다.
" 박태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자 김복자는 이쪽이 듣거나 말거나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
염 사장이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요구하는 건 너무 무리 아니에요? 무리 정도가 아니라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예요.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건데, 아무리 이쪽 사정이 딱하다고 그렇게 터무니없이 붙여 먹을 수가 있어요? 그러지 말고 그 사람한테 잘 이야기해서 한 십사억 선에서 끊어 보기로 해요.
" "
염 사장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웃돈 붙여 먹을려고 모아 놓은 돈도 아니고요.
그쪽에서 급하다고 하면서 사정을 해오기에, 그렇다면 고려해 볼 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 선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 선을 놓고 흥정이나 하자는 게 아닙니다.
싫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십사억이란 말은 꺼내지도 마십시오.
" 다급한 김복자는 이십억을 제시해 보았다. 그러나 상대쪽 대답은 단 한 푼도 깎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김복자는 정 그렇다면 염 사장이라는 사람과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 편이 훨씬 빨리 결판이 나겠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박태식은 염 사장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줄 수 없으니 그에게 전화를 걸게 하겠다고 말했다. 김복자는 자신의 직통 전화 번호를 일러 준 다음 염 사장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 전화는 경찰이 도청할 수 없는 그녀만이 은밀히 사용하는 전화였다. 염 사장이라는 사람한테서 마침내 김복자한테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전화를 받은 김복자는 체통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진 채 그에게 매달렸다. 염 사장은 잠자코 그녀의 하소연을 듣고 나더니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그런데 내 의사는 박 부장을 통해서 잘 전달되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난 이 문제를 놓고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난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 "
하지만 백억이나 웃돈을 붙인다는 것은 너무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 "
백억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 "
여, 여보세요!
"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다급해진 그녀는 호텔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박 부장이라는 사람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나 마침내 그 이상한 거래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결실이라고 하지만 일방적인 요구를 한 푼도 깎지 못한 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염 사장측은 교환 일자를 8월 9일로 못박았다. W그룹측은 그 전에 끝내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준비 관계로 8월 9일에야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는 나중에 알려 주겠다고 했다. 8월 9일이면 범인들이 정한 시한 하루 전이다. 이쪽의 사정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상대 쪽의 결정에 따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염 사장측은 오백억을 현찰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오백억을 현찰로 받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부피가 엄청나기 때문에 운반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염 사장측은 특별한 주문을 했다. 액면가 일억 원짜리 자기앞 수표 오백 장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쪽에서도 주문을 했다. 007가방 오십 개에 백만 달러씩 채워 달라는 주문이었다. 염 사장측이 흔쾌히 들어준 주문은 그것뿐이었다. 여봉우는 월이 엄마를 다그친 끝에 W그룹측이 염 사장과 접촉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명수를 퇴근길에 붙잡아 추궁했지만 이명수는 좀처럼 입을 열려고 들지 않았다. 여우는 사정조로 이야기했다. "
이것 봐요, 방해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도와 주려고 그러는 거니까 염려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봐요.
이건 단지 변 부회장의 목숨만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들이 범인들의 요구대로 돈을 지불했다고 칩시다.
변 부회장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요? 만일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면 그 돈은 어떻게 되는 거죠?
"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던 이명수의 표정에 잠깐 혼란이 이는 것 같아 보였다.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범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 "
증거는 없지만 지금까지 국화와 칼이라는 단체는 인질을 살려서 돌려보낸 적이 없어요.
일본 경찰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만일 변태수가 죽어서 돌아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봤나요?
" 이명수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
그렇게 되면 이 과장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걸요.
" 출세욕에 불타는 젊은이한테는 그 말은 매우 위협적인 말이었다. 여우는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이 싸움에서 손해를 봐서는 안 돼요.
이기지 않으면 안 돼요.
돈도 잃고 사람도 잃으면 그런 웃음거리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은 물론 세계가 이 사건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어요.
오늘 석간 봤지요?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 여우는 석간 신문에 난 기사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그것은 인질범이 W그룹측에 오천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8월 10일까지 지시에 응하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할 것이라는 범인측 협박도 곁들여져 있었다. W그룹에서는 그것을 극비에 부쳤는데도 어떻게 기자들이 알아 냈는지 결국 오늘 석간 신문에 발표되고 말았던 것이다. "
만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으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요.
오천만 달러…… 그건 세계 인질사상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만일 이 과장께서 나한테 협조해 주면 우리는 양쪽, 혹은 둘 중 어느 한쪽은 구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과장은 회사에 큰 공을 세우는 겁니다.
" 이명수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죠.
여긴 회사 근방이라 안 좋은데요.
" 여우는 이명수를 따라 찻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명동 쪽으로 나갔다. 명동에 도착한 이명수는 여우를 데리고 어느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단골인 듯 여자 종업원이 반갑게 그를 맞으면서 그들을 이 층 후미진 방으로 안내했다. "
사실은 제가 염 사장측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 맥주를 한 컵씩 마시고 났을 때 마침내 이명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래서 최 실장과 박태식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지요.
그리고 저는 물러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이 돌아갔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알아낸 것은 일이 원만히 타결됐다는 것 정도입니다.
" "
원만히 타결됐다는 것은…… 오천만 달러를 고액권으로 교환해 주기로 합의를 봤다는 건가요?
" "
네, 그렇죠.
" 여우는 한동안 멀거니 이명수를 쳐다보았다. 20. 접선 마침내 기다리던 8월 9일이 되었다. W측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염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낮 열두 시가 지나도 그쪽으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비서실장의 성화에 못 이겨 이명수가 국제통상의 박태식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그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박 부장이 외국에 출장을 갔는데 어쩌면 오늘쯤 돌아올 거라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W측은 초조해지기만 했다. 괜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오천만 달러를 백 달러짜리 고액권만으로 바꿔 주겠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결국은 기다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8월 9일은 금요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토요일로 범인측에 돈을 지불해야 할 마지막 날이었다. 그런데 범인측으로부터도 웬일인지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돈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질과 교환하자는 연락이 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왠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W측으로서는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W측 간부들은 무엇보다도 김복자의 추궁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죽어 나는 것은 특히 그녀의 남동생인 김동기 회장과 최 비서실장이었다. 김 회장은 누님의 성화에 어쩔 줄을 몰라했고 비서실장은 일이 틀어질 경우 틀림없이 목이 잘릴 것이라는 생각에 파랗게 질린 표정이 되어 우왕 좌왕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회사에서 밤샘할 각오를 하고 이제나저제나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복자 역시 자기 방(한쪽은 사무실이고 다른 한쪽은 잠을 잘 수 있게 침실로 꾸며져 있다.) 침대에 누워 고함을 질러대다가 끙끙 앓다가 다시 소리를 질러대곤 하는 것이었다. "
병신 같은 것들! 월급만 받아 처먹을 줄 알았지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머저리 같은 것들! 모두 나가, 꼴도 보지 싫으니까 썩 나가란 말이야! 돈 구해 오기 전에는 들어오지 마! 우리 태수가 죽으면 나도 죽어, 나도 죽는단 말이야!
" 그녀는 침대 시트를 쥐어뜯으며 흐느껴 울었다. 8월 9일도 마침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본관 건물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모두 퇴근하고, 바깥 거리에는 어둠과 함께 어느새 불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명수는 십오 분마다 국제통상으로 전화를 걸어대고 있었다. 그는 특별 지시에 따라 퇴근하지 않고 비서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회사일에 충실한 비서실 직원 몇 명이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원화와 달러를 교환하는 현장에 투입될 사람들이었다. 이쪽에서 받아야 할 액수는 자그마치 백만 달러씩이 들어 있는 007가방 오십 개분이었다. 그것을 받아 확인하려면 한두 사람 정도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비서실에는 형사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W측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기 때문에 여섯 명이나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지만 W측 사람들은 될수록 그들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W측은 경찰 몰래 달러를 구해 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들을 따돌릴 생각이었고, 반면 경찰은 W측이 그들 몰래 어떤 일을 꾸미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비서실에 대기하고 있는 형사들 가운데에 여봉우는 끼여 있지 않았다. 그 시간 여봉우는 어느 여관방에 누워 있었다. 장시간 기다리기에는 여관방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었는데도 약속한 전화는 걸려 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명수의 전화였다. 그는 이명수와 은밀히 약속한 바 있었다. 정식 경로를 밟아 가지고는 W측의 계획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를 구워 삶았던 것이다. W측이 경찰 몰래 독자적으로 범인들과 협상을 벌일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비상 수단으로 아무도 몰래 이명수에게 접근하여 그를 회유하고 협박한 끝에 마침내 그로부터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던 것이다. 이명수로서는 그것은 아주 힘든 결정이었음이 분명했다. 그가 경찰과 결탁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그의 목이 날아갈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W측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봉우는 그 점을 그에게 주지시켰던 것이고, 이명수는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여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는데도 그한테서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대로 누워 있기가 심히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이쪽에서 그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지금 여우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놓고 빠져 나왔기 때문에 그가 여관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명수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명수와의 약속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이명수로부터 연락이 와서 어떤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도 상부에는 알리지 않고 혼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명수도 그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8월 9일 자정이 지나고 마침내 10일이 되었다. 자정이 막 지났을 때 비서실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 전화에는 경찰의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
네, W입니다.
" 비서실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졸고 있던 형사들도 모두 깨어났고, 침대에 누워 있던 김복자도 뛰쳐 일어나 달려나왔다. 형사 한 명이 도청용 리시버를 귀에 갖다 댔고, 통화 내용을 담을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전화 받으신 분은 누구시죠?
"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난 여기 비서실장입니다.
" 비서실장이 뻣뻣이 굳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
아, 그러세요.
전 마야예요.
" 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말했다. "
아, 마야 아가씨!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다렸습니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회사 앞 은행나무 가지에다 빨간 리본을 여러 개 달아 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킨 대로 달아 놓았는데…….
" "
네, 그랬어요.
그런데 빨간 리본이 너무 자주 내걸렸어요.
그리고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경찰이 달려오더군요.
그래서 마음대로 전화를 걸 수가 없었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경찰이 달려오기 전에 통화를 빨리 끝내야겠어요.
김복자 씨 좀 바꿔 주세요.
" 아주 당당한 말투였다. "
네네, 기다리십시오.
" 비서실장은 행여 그녀가 전화를 끊을까 봐 허둥지둥 큰회장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김복자는 떨면서 전화를 받았다. "
여, 여보세요! 나 김복자예요!
" "
안녕하셨어요?
" 생글생글 웃는 목소리에 김복자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말소리만은 공손하게 나왔다. "
아이구, 아가씨! 얼마나 전화를 기다렸다구요.
그래, 우리 아들은 잘 있나요?
" "
잘 있어요.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
우리 아들 목소리 한번 들어 보게 해줘요.
" "
지금 여기 없어요.
난 지금 공중 전화로 걸고 있는 거예요.
할머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 "
아이고, 알다마다요! 아가씨한테 돈 주기로 약속한 날이지요.
" "
돈은 준비됐나요?
" "
네, 약속대로 모두 준비해 놨어요.
" 그녀는 얼결에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밖에 달리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백 달러짜리로 모두 준비했나요?
" "
네, 그래요.
시킨 대로 가방 오십 개에 담아 놨지요.
아가씨도 약속대로 우리 아들을 돌려보내는 거지요?
" "
물론이에요.
" "
돈하고 맞바꾸는 거지요?
" "
그건 안 돼요.
왜 안 되는지 아세요?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예요.
돈을 받고 나서 다섯 시간 안에 당신 아들을 풀어 주겠어요.
우리는 약속은 지켜요.
돈을 받고 나서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을까 봐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 "
그, 그럼 어떻게 돈을 전해 주지요?
" "
날이 새면 방법을 알려 드리겠어요.
경찰에 절대 알려서는 안 돼요.
경찰에 알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당신 아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요.
알겠어요?
" "
네, 알고말고요.
아가씨, 우리 아들 목소리 한번 들어 볼 수 없을까요?
" "
오늘중으로 볼 텐데 뭘 그래요?
" 전화가 끊어지자 김복자는 수화기를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모두 들었지? 난 돈을 준비해 놨다고 했어! 이제 어쩔 테야? 빨리 가서 달러를 가져 오란 말이야!
" 김 회장과 비서실장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것을 보고 김복자는 울부짖었다. "
오늘을 넘기면 내 아들이 죽는단 말이야! 내 아들이 죽어! 으흐흐흐…….
" 김복자의 비밀 전화 회선이 울린 것은 한 시경이었다.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던 그녀는 누운 채로 전화를 받았다. 국제통상의 박태식이 걸어 온 전화였다. 박 부장의 첫마디는 혹시 전화가 도청당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김복자는 도청당할 염려는 조금도 없다고 대답했다. "
늦어서 미안합니다.
" "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도대체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 "
이제야 준비가 끝났습니다.
비서실장을 바꿔 주십시오.
실무 관계를 이야기해야 하니까 빨리 좀…….
" 상대방은 꽤 서두르고 있었다. 김복자는 비서실장을 급히 들어오게 했다. "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우리는 벌써부터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 비서실장은 수화기를 들자마자 힐난하듯 말했다.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출장을 급히 좀 다녀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수표는 모두 준비됐습니까?
" "
오백 장 준비해 놨습니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 "
우리도 준비해 놨습니다.
오십 개의 가방에 모두 채워 놨습니다.
" "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 "
우리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 "
빨리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중으로 그 돈을 넘겨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 "
날이 새기 전에 교환합시다.
이 전화가 도청당할지도 모르니까 안심할 수 없어요.
" "
이 전화는 안심해도 돼요.
" "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요.
카폰을 이용할 테니까 카폰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줘요.
" 비서실장이 김복자에게 귀엣말로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실장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차에 설치되어 있는 카폰의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
두 시에 그 차 안에 들어가 대기하십시오.
앞으로는 카폰을 통해서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만일 경찰이 따라붙으면 거래는 중단되는 겁니다.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 "
염 사장도 나오는 겁니까?
"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비서실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통화 내용을 김복자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
저 방에 있는 형사들이 문젠데요.
" 김동기가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비서실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여섯 명이나 돼서 따돌리기가 어렵겠어요.
" 김복자가 동생을 흘겨보면서 쏘아붙였다. "
어렵다고 하지 말고 따돌리도록 해봐! 저 사람들 때문에 일을 망치면 큰일이란 말이야!
" 비서실장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 "
어떻게?
" 김 회장이 물었다. "
그들을 유인해서 엘리베이터 속에 한 시간쯤 가두어 두는 겁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게 한 다음 엘리베이터를 중간쯤에 세워 두면 됩니다.
" "
여섯 명이 모두 한꺼번에 엘리베이터에 탄다는 보장이 없잖아?
" "
그러니까 유인해야죠.
우리 직원 두어 명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면 의심하지 않고 따라붙을 겁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그들의 차 타이어에 펑크를 내는 겁니다.
" "
그렇게 하면 공무 집행 방해가 될 텐데?
" 김 회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증거가 없잖습니까.
설혹 공무 집행 방해로 입건된다 해도 문제될 게 있습니까?
" "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해! 지금 사람 구하는 게 문제지 공무 집행 방해 따위가 문제야?
" 김복자가 한마디 하자 김동기는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 났다. "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둘이서 가봐.
직접 달러를 확인하란 말이야.
" 비서실장은 구내 전화로 관리부장을 불러 올렸다. 회사에 비상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관리부장 역시 회사에 남아 있었다. 비서실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엘리베이터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한 대의 엘리베이터만 작동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에 모두 타면 그것마저 작동을 중지시키겠습니다.
" "
내가 연락을 취할 테니까 그때 작동을 중지시켜요.
" "
알겠습니다.
" "
그 무전기를 나한테 줘.
" 비서실장은 관리부장이 들고 있는 무전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사항을 더 지시했다. 두 시 십오 분 전에 김동기 회장과 비서실장이 비서실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비서실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이 허둥지둥 따라 나왔을 때는 엘리베이터 문이 이미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거기에는 네 대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방금 두 사람이 타고 간 엘리베이터만이 작동하고 있을 뿐 나머지 세 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섯 명의 형사들 곁에는 비서실 직원 몇 명도 서 있었다. "
어떻게 된 일이야?
" 형사들이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들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비서실 직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만 흔들었다. 그들은 이십 층에 있었기 때문에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간다는 것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형사들은 비서실 직원들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들을 노려보면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김 회장과 비서실장이 타고 내려갔던 엘리베이터가 이윽고 이십 층에서 멎었다. 먼저 두 명의 비서실 직원이, 그 뒤를 따라 형사 다섯 명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형사 한 명이 밖에 남은 것은 갑자기 다른 비서실 직원들이 사무실로 되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아래층에서는 비서실장이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숫자판에 깜박깜박 불이 들어오면서 15라는 숫자가 보이자 그는 무전기에다 대고, "
정지시켜!
" 하고 소리쳤다. 13이라는 숫자판에서 불은 더 이상 깜박거리지 않고 그대로 정지했다. "
3호를 작동시켜!
" 비서실장이 소리치자 3호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에 불이 들어왔다. 잠시 후 3호 엘리베이터가 위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명수는 틈을 내어 여봉우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해보았지만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3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형사 한 명이 끈질기게 그들을 따라붙었다. 그 젊은 형사는 그의 동료들이 2호 엘리베이터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명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
이 과장, 이 차를 타!
" 비서실장이 자신의 차 속에서 소리쳤다. "
자네가 운전해!
" 비서실장은 운전석 옆 자리로 비켜 앉았고, 이명수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뒷자리에는 김 회장이 타고 있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미니 버스와 승용차에 나누어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젊은 형사는 자기 동료들을 찾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차에 올라탔다. "
자, 빨리 여길 빠져 나가!
" "
어디로 갈까요?
" "
아무 데나 가! 우선 경찰을 따돌려야 하니까 가다가 눈에 안 띄는 데 주차시켜!
" 두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두 대의 승용차와 한 대의 미니 버스가 W그룹 본관 앞을 빠져 나오자 자기 차에 탔던 형사가 차에서 뛰어나와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
자기 차는 펑크가 나서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 비서실장은 자신의 계획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 흡족한 듯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오 분쯤 질주하다가 이명수는 차를 오른쪽으로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른 두 대의 차도 골목으로 따라 들어와 멈춰 섰다. "
지금쯤 당한 것을 알고 펄쩍펄쩍 뛰고 있을 겁니다.
" 비서실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을 때 카폰의 벨이 부드럽게 울렸다. "
제가 받겠습니다.
" 비서실장이 먼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국제통상의 박 부장입니다.
경찰은 따돌렸습니까?
" "
안심해도 됩니다.
우리는 지금 밖에 나와 대기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 "
잘 됐군요.
지금 여의도 63빌딩 앞으로 오십시오.
" 이쪽에서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
63빌딩 앞으로 간다!
" 비서실장은 워키토키로 다른 차들에게 알렸다. "
곧 비상망이 펴질지도 모르니까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
" 차가 골목을 빠져 나와 달리기 시작했을 때 김 회장이 말했다. 모두가 너무 다급하고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고 있는 것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차게 퍼붓는 것을 보고서야 모두가 약간은 놀란 듯이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거리는 다니는 차들이 띄엄띄엄 눈에 띌 뿐 휑하니 비어 있었고, 그 비어 있는 거리 위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마치 도시의 묵은 때를 씻어 내기 위해 물을 퍼붓고 있는 것 같았다. 세 대의 차는 마포를 지나 긴 다리 위를 건너갔다. 이윽고 그들이 63빌딩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주차해 있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시한 대로 그곳에 차를 주차시켰다. 차의 모든 불을 끄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동안 삼십 분이 지났다. "
에이, 빌어먹을! 이거 무슨 고생이람!
" 김 회장이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상체를 뒤틀며 투덜거릴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비서실장이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63빌딩 앞입니까?
" 상대방은 모든 것을 생략한 채 간단히 물었다. "
네, 여기서 기다린 지 삼십 분이나 됐습니다.
" "
거기서 강변을 따라 잠실 쪽으로 가시오.
잠실대교 부근 고수부지에서 기다리시오.
" "
이번에는 너무 오래…….
" 비서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
이건 마치 스파이가 접선하는 것 같잖아!
" 김 회장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명수는 차를 곧 출발시켰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그들이 매우 위험한 거래를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사태를 되돌려 놓기에는 그 자신이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21. 교환 얼마 후 세 대의 차는 강변도로를 벗어나 잠실대교 가까운 고수부지로 내려갔다. 이명수는 자동차의 쌍 라이트까지 켜고 멀리까지 비춰 보았다. 원을 그리면서 비춰 보았는데 불빛이 미치는 범위 내에는 물론 백여 미터 떨어진 다리 밑에도 차량이나 사람의 모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
불을 꺼.
" 비서실장의 지시에 세 대의 차는 모두 불을 껐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비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
빌어먹을, 이게 무슨 짓이람! 꼭 귀신에 홀린 것 같잖아.
" 김 회장이 불안과 분노에 뒤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명수는 여봉우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런 기회는 와주지 않았다.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다시 카폰의 벨이 울렸다. 비서실장이 냉큼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박입니다.
도착했습니까?
" 국제통상의 박 부장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
네,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 "
지금 곧 가겠습니다.
다리 밑에서 불빛이 세 번 깜박이면 그쪽으로 오십시오.
" "
염 사장이라는 사람도 오는 겁니까?
" "
물론 갑니다.
" 통화를 끝낸 지 십 분쯤 지났을 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변도로로부터 고수부지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불빛으로 보아 차량은 모두 네 대인 것 같았다. 그것들은 다리 밑으로 들어가더니 일제히 불을 껐다. W측 사람들은 불안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래가 비밀리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그들이 참가한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 그들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
만일의 경우 폭력이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
" 비서실장이 부하 직원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살인적인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폭력 조직이라면야 그런 무기들을 거부감 없이 준비해 놓을 수 있겠지만 대회사의 직원들이 그런 것들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몽둥이 정도를 준비해 놓은 것이 전부였다. 김동기 회장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007가방을 꽉 움켜잡았다. 그 가방 안에는 액면 일억 원짜리 자기앞 수표 오백 장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오백억 원이라는 거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는 셈이었다. 오백억 원이 가방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
별일 없을까?
" 그가 참다못해 비서실장을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
별일 없을 겁니다.
상대방은 이번 거래에서 가만히 앉아 백억을 거머쥐는 거니까 우리보다도 오히려 신중을 기해서 처신할 겁니다.
어떻게든 무사히 거래가 끝나게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왔을 겁니다.
" 바로 그때 어둠을 뚫고 불빛이 세 번 깜박였다. 그와 함께 카폰의 벨이 울렸다. "
불빛 봤습니까?
"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오는 박 부장의 물음에 비서실장은, "
네, 봤습니다.
" 하고 대답했다. "
지금 오십시오.
다리 밑으로!
" "
알겠습니다.
지금 갑니다.
" 비서실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 회장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라 상대방의 표정은 보이지가 않았다. "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출발할까요?
" "
출발해.
" 김 회장이 긴장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비서실장은 워키토키로 다른 차에 그 명령을 전달했다. "
스몰 라이트만 켠 채 이동해.
" 이명수는 차에 엔진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엔진이 걸리지 않고 차가 제자리에서 흔들리기만 했다. "
왜 그래?
" "
엔진이 걸리지 않습니다.
" "
왜 하필 이럴 때 고장이지?
" 다른 차들은 그 차가 움직이지 않자 엔진만 걸어 놓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
안 되겠어.
" 김 회장이 먼저 차에서 내리자 비서실장도 따라 내렸다. 그들은 미니 버스로 옮겨 탔다. 이명수는 재빨리 카폰의 수화기를 들어 여봉우가 기다리고 있는 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차가 고장났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여 형사에게 전화를 걸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자다 깬 여관 종업원은 투덜거리면서 여봉우가 묵고 있는 방으로 전화를 돌려 주었다. 여봉우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 그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
잠실대교 밑에서 지금 곧 거래가 이루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 "
알았어요.
" 이명수는 그 한마디만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앞서 간 차들을 뒤따라갔다. 먼저 미니 버스가 다리 밑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승용차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명수는 상대편 차량과 W측 차량 사이에다 차를 댔다. 상대측은 세 대의 승용차와 한 대의 트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트럭 위에는 컨테이너 같은 대형 철제 적재함이 실려 있었는데 그 적재함 옆에는 식품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먼저 이명수가 차에서 내려섰다. 상대 쪽에서도 한 사람이 내려서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
이명수 씨!
"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의 불빛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이명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쪽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상대쪽은 어둠 속에 가려 있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
이쪽으로 와보세요!
" 박태식의 목소리임을 확인한 이명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건장해 보였다. 그는 더럭 겁이 났지만 내친김에 그대로 다가갔다. "
어서 오시오.
다시 만나서 반갑소.
" 박태식이 플래시를 거두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명수는 그 손을 잡아 흔들었다. "
준비됐습니까?
" "
준비됐어요.
트럭에 싣고 왔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 "
확인해 봐야죠.
염 사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 "
이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보다 먼저 돈을 확인해 보시오.
적재함 속에 들어 있으니까 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
거기서는 불빛도 가릴 수 있고 비바람도 피할 수 있으니까 안전해요.
" 주위에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한테서 왠지 살기 같은 것이 느껴져 이명수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장승처럼 서 있었는데 모두해서 열 명이 훨씬 넘는 것 같았다. 이명수는 비서실장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비서실장과 김 회장은 자신들이 직접 달러를 확인하겠다고 나섰다. 워낙 거액이라 부하 직원들한테만 맡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실장과 김 회장을 제외한 비서실 직원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그 중에는 힘깨나 쓰는 경호원들도 있었다. 경호원 두 명만 밖에 대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적재함에 타라고 비서실장이 말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움직였다. 이명수가 맨 앞장을 섰다. 그들 앞에서 적재함 문이 열렸다. 그 안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타라고 박 부장이 재촉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불을 켜달라고 말했지만 박 부장은 밖에 불이 새나가면 좋지 않으니 문을 닫고 나서 불을 켜겠다고 말했다. 대등한 입장에서의 거래여야 하는데도 주도권은 처음부터 염 사장 쪽에 있었다. 박 부장이 요구하는 대로 W측 사람들은 한 사람씩 어두운 적재함 안으로 들어갔다. 김 회장이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적재함에 오르자 뒤에서 철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적재함에 갇힌 W측 사람들은 한동안 숨을 죽인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모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움직거리기 시작했을 때 불이 들어왔다. 천장에 붙어 있는 전구에 들어온 불이었는데 처음에는 너무 빛이 약해 주위를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불빛은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밝아진 다음에는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겨우 상대방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침침한 불빛 아래 비로소 실내의 상황이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안쪽에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양쪽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뚱뚱했는데 차림이 흰색 일색이었다. 입고 있는 양복도 흰색이었고 머리에 쓰고 있는 챙이 둥근 맥고모자 같은 것도 흰색이었다. 코밑에는 수염이 붙어 있었고, 눈에는 짙은 선글라스가 가려져 있어서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첫눈에도 그가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오만하게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에서는 담배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수십 개의 007가방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오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난 염 사장이라고 합니다.
김 회장 되시죠?
" 가시가 걸린 듯 껄끄럽고 쉬어 빠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염 사장이라는 자가 김동기 회장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는 김 회장의 얼굴을 알고 있는 듯했다. "
자, 앉으시죠.
빨리 의자 갖다 드려.
" 염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내가 말없이 딱딱한 철제 의자를 들어다 염 사장과 마주보는 자리에다 내려놓았다. 김 회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의자 위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
보다시피 이렇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쪽은 준비가 됐습니까?
" 염 사장이 앞에 놓여 있는 가방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
준비됐습니다.
" 김 회장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
자, 그럼 먼저 확인해 보십시오.
가방은 열려 있습니다.
" 염 사장은 거드름을 피우며 손을 벌려 보였다. "
확인해 봐.
" 비서실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서실 직원들은 가방 앞으로 다가 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불이 너무 어두운데 더 이상은 안 됩니까?
" "
안 돼요.
" 염 사장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비서실 직원들은 일제히 플래시를 꺼내 들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두 명이 양손에 플래시를 하나씩 켜들고 각기 가방 두 개씩을 비춰 주기로 하고 네 명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남은 한 사람은 점검이 끝난 가방을 최 실장과 김 회장에게 최종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대기했다. 오천만 달러나 되는 것을 일일이 헤아려 본다는 것은 거기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백 달러짜리인지, 그리고 가방마다 백 묶음짜리가 백 개씩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 가방을 열어 본 직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현찰 1백만 달러가 눈앞에 펼쳐지니 그럴 만도 했다. 지폐는 모두 새것이었다. 덩어리를 먼저 세어 보고 나서 모두 1백달러짜리가 맞는지 한 다발씩 훑어 나갔다. 확인이 끝난 가방은 김 회장 무릎 위로 옮겨졌다. 김 회장과 비서실장은 숨을 죽인 채 문제점을 찾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보았지만 이상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게 옳은 말이었다. "
모두 새것인데요.
" 실장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지만 김 회장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
어떻게 이렇게 고액권만을 모을 수가 있었습니까?
" 그렇게 물어 올 줄 알았다는 듯 염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댔다. "
말도 마십시오.
이렇게 모으는 데 십 년이 걸렸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고액권만을 일시에 끌어 모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데 십 년이 걸렸다는 게 옳은 말이겠군.
" "
그게 무슨 말이죠?
" 김 회장이 물었다. 염 사장은 담배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
무슨 말인지 얼른 납득이 안 가시겠죠.
이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도 이를테면 그런 별의별 일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죠.
돈을 놓고 돈을 먹는, 일종의 지하 경제의 멤버라고 할 수 있죠.
우리 회원들은 공동으로 출자해서 고액권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고액권을 모았다가 거기에 웃돈을 붙여 매각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액권을 정상적으로 은행에 예금해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언제라도 꺼내 쓸 수 있도록 개인 금고에다 넣어 두고 있죠.
시대가 고액권을 요구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 필요성이 높을 것으로 알고 우리는 거기에 대비한 겁니다.
개인 금고에 넣어 두고 있으니까 이자는 붙지 않죠.
하지만 이자 이상의 웃돈을 만질 수가 있으니까 이 장사야말로 돈 놓고 돈 먹는 장사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개인이 이렇게 달러를 보유할 수 없다는 거 아실 겁니다.
이런 장사를 하기에는 한국은 너무 시장이 좁아 일본 쪽에 거래를 많이 하고 있죠.
이번의 이 거래는 한국에서는 정말 특수한 거래죠.
액수가 많기 때문에 일본 쪽에서도 자금을 꽤 동원했습니다.
" 그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한테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을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고액권을 소액권보다 더 많이 웃돈을 붙여 팔아먹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고액권이 귀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암달러 시장에서도 보통 통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량으로, 그것도 조직적으로 거래하는 조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국제적인 규모로 움직이고 있는 조직인 것 같았다. "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백억이나 붙여 먹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사정이 다급해서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야…….
" 김 회장의 볼멘소리를 염 사장이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되지요.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마련해 주었고, 그리고 그만큼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니까요.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 김 회장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가방 속의 달러를 훑어보았다. "
참, 변 부회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나요?
" 염 사장은 계속 말을 걸어 오고 있었다. 이명수는 달러를 헤아리다 말고 염 사장 쪽을 쳐다보았다. 색안경에 가려진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안경을 벗을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달러를 사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야 뭣 하러 이걸 비싸게 사겠습니까.
" 비서실장이 발끈해서 말하자 염 사장은 흥 하고 코웃음쳤다. "
그러니까 변 부회장이 오천만 달러짜리 인생이란 말이군요? 꽤 비싼데요.
" "
국화와 칼에 대해 아십니까?
" 이명수가 참다못해 끼여 들었다. 염 사장은 멈칫했다가 다시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알다마다요.
그 조직은 틀림없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어요.
약속한 건 반드시 지켜요.
누구를 죽인다고 하면 반드시 죽이고 말아요.
빈말은 있을 수 없어요.
그들은 자기들 요구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약속대로 변 부회장을 죽일 겁니다.
변 부회장을 구하고 싶으면 그들 요구대로 들어주는 게 좋을 겁니다.
" 김 회장은 마지막 가방의 뚜껑을 거칠게 닫았다. "
이상 없습니까?
" 염 사장이 물었다. "
그럼 준비해 온 것을 이리 주시죠.
" 김 회장이 고개를 끄덕하자 최 실장이 007가방을 염 사장 쪽으로 밀었다. 그쪽의 사내 한 명이 그것을 들어 염 사장에게 넘겼다. 염 사장은 그것을 받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더니 헤아려 보지도 않고 그것을 도로 닫았다. "
가방째 가져 가도 됩니까?
" 김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확인하지 않아도 됩니까?
" 비서실장이 물었다. 염 사장은 미소를 지었다. "
맞겠죠, 뭐.
" 염 사장은 손을 털고 일어섰다. "
자, 더 이상 할 일은 없겠죠?
" "
없습니다.
" 김 회장도 몸을 일으켰다. 염 사장 쪽 사람들이 염 사장이 먼저 빠져 나가게 하기 위해 W측 사람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들이 갑자기 거칠게 나왔기 때문에 W측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십 개의 가방을 미니 버스에 옮겨 싣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상대 쪽 차량들은 하나 둘씩 빠져 나갔고, 나중에는 트럭 한 대만 남았다. 가방을 모두 옮겨 실었을 때까지도 트럭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명수가 다가가 운전석을 플래시로 비춰 보니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재함 안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트럭을 내버리고 간 모양인데요.
"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끝냈을 때 갑자기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왔다. 불빛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그들 앞으로 급정거했다. 헤드라이트를 켜놓은 채 승용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여봉우였다. 그는 플래시를 켜들고 사람들과 차 안을 비춰 보더니 김 회장 앞으로 다가섰다. "
드디어 달러를 구하셨나 보군요?
" 김 회장은 놀라움과 분노가 뒤얽힌 눈으로 여 형사를 노려보았다. "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죠?
" "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들은 어디 갔죠? 염 사장이라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
이미 내뺐나요? 그 자를 잡아야 하는 건데…….
" 여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비춰 보다가 미니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김 회장과 비서실장, 그리고 이명수도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여봉우는 차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가방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훑어보고 나서, "
모두 오십 개군요.
이 안에 달러가 들어 있나요?
" 하고 물었다. 그리고 누가 제지할 틈도 주지 않고 가방 한 개를 재빨리 열어젖혔다. 그는 한동안 숨을 죽인 채 가방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달러 뭉치들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손을 대기가 두렵다는 듯 꼼짝하지 않고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이윽고 뭉치 하나를 집어 들고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나자 그는 뭉치 수를 세어 보았다. "
에또, 가만 있자.
그러면 이게 1백만 달러란 말인가요?
"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던 그의 입에서 휘파람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다른 가방 속을 확인해 보고 나서야 그는 확증을 잡은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모두 오천만 달러군요.
이걸로 인질을 구하겠다 이겁니까?
" "
그렇소!
" 김 회장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기가 막히군요.
" "
기가 막히지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 비서실장이 말했다. 여 형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22. 위조 지폐 형사 여봉우는 잠실대교 밑에 버려진 트럭의 차주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았다. 그 트럭 위에 실려 있는 철제 적재함 옆에는 ‘M식품회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통과에 알아본 결과 그 트럭은 무적 차량으로 밝혀졌다. 차량 번호판은 위조된 것이었고 M식품회사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기 때문에 그는 드러난 사실들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니까 염 사장이란 자는 오백억 원을 챙겨 가지고 완벽하게 종적을 감춰 버린 셈이었다. 염 사장이란 자가 오백억 원을 챙겨 가지고 갔다는 것은 이명수를 통해서 얻어들은 정보였다. 여우는 마지막으로 박태식이 근무하고 있다는 국제통상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찾아가기 전에 먼저 이명수가 가르쳐 준 국제통상의 전화 번호 대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몇 번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국을 통해 그 전화 번호의 주소지를 알아낸 다음 그곳을 찾아간 것은 아침 열 시경이었다. 광화문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낡은 건물의 오 층으로 올라가니 한 사무실의 방문 위에 국제통상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어 문을 열려고 해보았지만 그것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관리인의 입회하에 문을 강제로 따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 안에는 낡은 철제 책상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런 장식도, 사무용품이며 서류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옮겨 가버린 듯한 텅 빈 공허함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
일 주일쯤 전에 월세를 많이 내겠다고 해서 보증금도 안 받고 사무실을 빌려 주었습니다.
무역회사라고 하더군요.
아가씨 한 명과 사장이라는 사람 외에 다른 직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부산에서 짐을 옮겨 올 거라고 하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 국제통상이 유령 회사라는 것은 더 이상 물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오천만 달러는 그야말로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그것은 워낙 부피가 크기 때문에 차에서 일일이 들어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차에 실어 둔 채 W그룹 본사 빌딩 지하창고에 보관해 두기로 했던 것이다. 오십 개의 007가방이 실려 있는 미니 버스 주위에는 다른 차들로 차단벽을 만들고 창고 문에는 묵직한 자물통을 채워 두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네 명의 경비원들을 세워 놓았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W그룹의 일반 사원들은 주말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명예회장을 비롯한 최고 간부들은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봉우는 자신이 두 눈으로 확인한 오천만 달러를 일단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한 개인이 그렇게 엄청난 외화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국내법에 위배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변 부회장을 찾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 문제는 우선 덮어 두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부에도 그 건을 보고하지 않았다. 간밤에 비서실을 지키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낭패를 보았던 경찰 수사진은 무엇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간파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가려내지 못한 채 우왕 좌왕하고 있었다. 수사본부장이 직접 나와 간밤에 일어난 일을 추궁했지만 W측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결국 경찰은 수사요원만 더 증원했을 뿐 그 어떤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 정오가 지났을 때까지도 범인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비서실의 전화벨이 울린 것은 오후 한 시가 막 되었을 때였다. 여직원이 전화를 먼저 받았다가 창백한 표정으로 명예회장실로 전화를 돌렸다. 김복자는 다급하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 그것은 마야의 목소리였다. 김복자는 어쩔 줄을 모르며 전화를 받았다. "
아이구 아가씨, 목이 빠지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우.
돈은 다 준비됐으니까 우리 이제 약속대로 교환합시다.
몇 시에 어디로 갈까요?
" "
그 돈을 다 준비하셨나요?
" "
그럼요! 요구한 대로 틀림없이 준비해 놨어요.
말도 말아요, 그걸 준비하느라고 우리 비서실 직원들이 총동원돼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고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지요.
우리 아들은 잘 있나요?
" "
그럼요! 잘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할머니…….
" 마야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김복자는 긴장해서 숨을 멈췄다. "
네?
" "
김복자 할머니, 당신은 정말 약아빠진 불여우 같은 할망구예요.
" 김복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끼었다. "
아니, 그……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내가 아가씨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해요.
" "
기분을 상하게 한 정도가 아니야, 이 불여우야!
" 김복자의 뺨에 푸들푸들 경련이 일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록 진심은 아니더라도 오로지 칭송 일변도의 말만 들어오던 그녀로서는 마야의 그런 욕설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참아 내느라고 그녀의 얼굴은 잔뜩 뒤틀리고 있었고, 손끝까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껏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
마야 아가씨,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해 줘요.
그리고 아가씨 기분을 상하게 한 게 뭔지 말해 봐요.
오해 없게 기분을 풀어 드릴 게 말해 봐요.
" "
싫어! 이 할망구야!
" 김복자는 이를 악물면서 숨을 깊이 들이켰다. "
아가씨, 화를 풀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화를 풀어요.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줘요.
" 김복자는 무조건 빌었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면 이로울 게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뭘 잘못했는지나 알고 그러는 거예요?
" "
하여간 잘못했어요.
용서해 줘요.
" "
이봐욧! 그렇게 얼버무리지 말아요! 가짜 돈을 가지고 아들을 빼내 갈 생각은 하지 말아요!
" "
아니, 가짜 돈이라니요?
" "
누가 모를 줄 알아, 이 불여우야? 난 보지 않아도 다 알아.
당신이 준비해 놓은 오천만 달러가 모두 가짜라는 거 다 알고 있단 말이야! 난 천리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 알 수 있단 말이야!
" "
아니, 그럴 리가! 마야 아가씨, 그건 오해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가 준비해 놓은 달러는 모두 진짜 백 달러짜리예요! 틀림없어요! 그걸 구하느라고 얼마나 비싸게 웃돈을 얹어 줬다구요.
" "
웃기네! 이 할망구야, 그건 모두 가짜야! 당신은 지금 가짜 돈을 신주 모시듯 모셔 놓고 있는 거야.
한번 확인해 봐!
" "
그건 오해라니까요! 그럴 리가 없어요.
" 갑자기 까르르 하고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
그건 모두 가짜야! 한번 확인해 보라니까! 당신 아들은 이제 찾기 글렀어!
" "
이것 봐요! 마야 아가씨!
" 김복자가 외쳐댔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김복자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동안 경찰은 녹음된 통화 내용을 크게 틀어 놓고 들어 보았다. "
달러는 어디 있습니까?
" 수사 책임자인 김 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모두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앉아 있자 과장이 다시 말했다. "
마야의 말이 정말인지 확인해 봅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달러를 계속 숨겨 놓고 있을 셈입니까?
" 과장은 부하 형사 한 명에게 달러를 식별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그 형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 회장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듯 김복자 쪽을 쳐다보자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
가방 한 개 가져 와 봐.
" 이명수를 포함한 비서실 직원 세 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창고로 내려갔다. 이명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봉우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는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멀뚱멀뚱 서서 소용돌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수사본부가 차려져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비서실 옆에 붙어 있는 조그만 방으로 회사측에서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내준 것이었다. 지 형사는 여우와 시선이 마주치자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귀에 대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어떻게 됐어?
" "
틀렸습니다.
" 마야가 전화를 걸어 온 발신지를 찾는 데 또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통화가 시작되자마자 경찰 기동 타격대는 재빨리 발신지로 출동했지만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마야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위치가 어디지?
" "
바로 여깁니다.
" 지 형사는 세밀하게 그려진 서울시 지도의 한 점을 가리켰다. 거기에다 그는 빨간색 볼펜으로 삼각형으로 표시를 했다. "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중 전화에서 걸었습니다.
" "
무슨 아파트지?
" "
B아파트입니다.
" 여우는 마야가 그 동안 전화를 걸어 온 지점들을 노려보았다. 네 곳의 발신지는 서울 전역에 퍼져 있는 게 아니고 한 곳에 가까이 몰려 있었다. 처음 두 곳은 S동이었고 다음 두 곳은 이웃해 있는 K동이었다. 발신지 네 곳은 두 동 사이에 걸쳐 있었다. 여우는 두 동 사이에 조그만 원을 그렸다. "
여기를 집중적으로 수색해 보지.
" "
알겠습니다.
" "
여기는 장미 양이 다니던 학교가 있지 않나?
" "
그렇습니다.
" 여우는 과장에게 인원 동원을 요청하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007가방 주위에 몰려 서 있었다. 가방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빳빳한 백 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몇 사람이 달러를 한 장씩 뽑아 들고 앞뒤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식별해 낼 수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그때 감식반 소속의 수사관 두 명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감식반원이 책상 앞에 다가 앉더니 가져 온 조그만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가방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
모두 백 달러짜리입니까?
" 누구에게랄 것 없이 그가 물었고, 과장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감식반원은 봉투 안에서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
이건 진짜입니다.
" 이윽고 그는 가방 안에서 현미경처럼 생긴 것을 꺼내 놓았다. 그런 다음 007가방에서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빼내 책상 위에 놓고 현미경 같은 것을 그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가 현미경 같은 것을 통해 지폐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주위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과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감식반원은 들여다보던 지폐를 빼내고 다른 백 달러짜리 지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다섯 장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과장을 쳐다보았다. "
어때?
" "
모두 위조입니다.
" 그의 한마디는 폭탄보다도 위력이 있었다. 한 순간에 사람들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고 김 회장과 비서실장의 입에서는 신음소리와 함께, "
그럴 리가…….
" 하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여봉우는 김복자의 얼굴이 마치 석고 같다고 생각했다. 그 석고 같은 얼굴이 옆으로 흔들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뒤로 사라졌다. 그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일으켜 안았을 때 보니 김복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 허연 거품을 뿜고 있었다. "
돈……돈……돈…….
"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오다가 사라졌다. "
빨리 병원으로! 앰뷸런스를 불러! 빨리 업고 내려가!
" 김동기와 비서실장이 번갈아 소리치자 그때까지 넋을 뺀 채 서 있던 젊은 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세 보이는 젊은이가 김복자를 업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 와중에도 여우는 과장에게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과장은 삼십 명쯤 동원해 보라고 말하면서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 역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지 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
오백억이 멋지게 사라져 버렸어.
아주 멋지게 말이야.
" 여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은행에 연락해서 그 수표 모두 지불 정지시켜! 빨리!
" 김동기 회장이 주먹을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여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이미 오후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
은행 마감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 연락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 "
그래도 혹시 안 찾아갔을 수도 있잖습니까.
" "
그들은 일부러 토요일을 택했어.
교묘한 놈들이야.
" 그때 은행에 전화를 걸었던 비서실 직원이 김 회장에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이미 찾아갔답니다.
" 앰뷸런스를 보내고 나서 비서실장은 수사관들을 지하창고로 안내했다. 감식반원은 지하창고 안에 주차해 있는 미니 버스에 올라가 플래시 불빛 아래에서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달러를 검사했다. 가방 하나에서 두 장씩만 뽑아 내 검사했는데 결과는 모두 위조 지폐로 밝혀졌다. "
기가 막힌 일이군.
이건 세계적인 토픽 뉴스감이야.
" 과장이 중얼거리자 비서실장은 사색이 되어 말했다. "
극비로 해주십시오.
기자들이 알면 큰일이니까요.
" 그 말에 과장은 발끈했다. "
당신들은 우리한테 협조했나요? 오히려 우리를 빼돌려 놓고 범인들과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지요.
사람도 찾지 못하고 돈만 잃고 말이에요.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구요.
그 돈이 어디 한두 푼입니까? 내 돈은 아니지만 정말 어리석은 행동에 화가 납니다.
" "
죄송합니다.
" 비서실장은 머리를 숙였다. "
이런 대규모 위조 지폐 사건은 처음입니다.
" 비서실장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일 층 로비로 올라오자 비서실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왔다. "
명예회장님께서 조금 전에 운명하셨답니다.
" 비서실장은 고개를 흔들다가 로비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명수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
이봐, 이 과장…….
" 이명수가 몸을 돌렸다.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잠겨 있었다. "
끝난 줄 알아.
" "
알고 있습니다.
" 이명수의 두 눈에 물기가 번졌다. 23. 광란의 춤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W측에서는 오백억 원을 날린 사실을 안간힘을 다해 숨기려고 했지만, 이미 수사관들까지 알게 된 마당에 비밀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예회장인 김복자까지 죽는 바람에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 걷잡을 수 없게 밖으로 퍼져 나갔다.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몰려와 한바탕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회사측에서 아무리 부인을 해도 그들은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그들의 취재 결과는 다음 날 아침에 나타났다. 각 조간 신문에는 오백억 원의 증발과 김복자의 죽음이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다루어져 있었다. ‘네다바이 당한 오백억 원…… 사상 최고액…… 명예회장 김복자 씨 쇼크로 사망…….’ 각 신문들은 대개 이와 같은 제목을 달고 그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었다. 50,000,000,000원……그 천문학적인 액수에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고, 김복자 회장이 쇼크로 죽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백억 원을 챙겨서 달아난 자가 바로 다름 아닌 변태수를 납치한 국화와 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국화와 칼이 신문사와 경찰에 알려 옴으로써 밝혀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납치해 간 변태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오천만 달러를 요구했던 것인데, 그것을 한화로 바꾸어, 그것도 요구액보다 백억이 더 많은 오백억을 폭력 한 번 쓰지 않고 교묘하게 쓸어 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묘함에 치를 떠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W측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비웃었다. 장안은 온통 그 화제뿐이었다. W측은 부도가 나 회사가 망하기나 한 것처럼 휘청거렸고, 실제로 각 계열 회사의 매상액은 눈에 띄게 격감했다. 그러나저러나 남은 것은 변태수 문제였다. 국화와 칼은 오백억을 가져 갔으면 약속대로 변태수를 돌려보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쪽에서는 변태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도 못 찾고 거액만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웃음이 일었다. 수사팀 본부장은 상부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 오백억이 범인들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동안 수사진은 도대체 뭘 했느냐는 질책에 본부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 즉시 본부장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고, 신임 본부장은 수사진을 더 보강하고, 경찰의 명예를 걸고 범인들을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여봉우는 지 형사와 한조가 되어 이틀째 B아파트의 S동과 K동 사이를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해서 삼십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드넓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색을 계속했다. 오전 열한 시경 여봉우와 지 형사는 K여자 중고등학교 앞을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그 학교가 바로 일 년 전 장미 양이 다니던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유괴되던 당시 장미는 K여중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장미가 그대로 학교에 다녔다면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방학중인데도 학교 운동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나와 있었다. 아마 오늘은 임시 등교일인 것 같았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흩어져 휴지를 줍거나 잡초를 뽑는 등 청소를 하고 있었다. "
바로 여기가 장미가 다니던 학교 아닙니까?
" "
음, 그래.
" 여우는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장미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여우는 아무 대꾸 없이 멍하니 학생들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저 학생들한테 부탁해 보면 어떨까요?
" "
뭘 말이야?
" "
장미 찾는 것 말입니다.
" "
어떻게 그런 일을 부탁할 수가 있어?
" 여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닌 것 같았다. "
아, 저기……강 선생이 보이는데요.
작년에 장미 담임선생 말입니다.
강 선생한테 부탁해 보면 어쩌면 들어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여우는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강 선생이 그들을 알아보고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강 선생은 그들이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장미를 찾고 있다는 데 대해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신문을 보고 장미 소식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장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뭔가 잘못된 것일 겁니다.
" 강 선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연민과 분노가 교차된 표정으로 말했다. "
우리도 강 선생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정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군요.
" 여봉우는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강 선생은 눈을 빛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
얼마든지 협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미 친구들은 지금 모두 고등학생입니다.
저는 여전히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협조를 구하면 가능할 겁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고등학교 교사들을 만나 보고 오겠습니다.
" 십 분쯤 지나 여봉우는 K여자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대표하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교감이었고 또 한 사람은 교무주임이었다. 그들은 장미 양을 찾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학생들을 집합시켜 놓았으니까 장미 양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한마디 안내 말씀을 해주십시오.
" 학교측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이쪽에서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여봉우는 난생 처음으로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떼려니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진땀을 빼야 했다. "
……여러분들, 김장미 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까?
" "
네, 잘 알아요!
" 학생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여학생들의 일부는 장미의 동기생들이었고, 나머지는 선후배 사이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장미가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그들은 모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의 친구인 김장미 양을 찾아다닌 경찰관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곁으로 장미 양을 돌려보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마찬가지 생각일 겁니다.
장미 양 자신도 여러분들 곁으로 돌아오고 싶어할 겁니다.
장미 양은…….
" 그의 시야에 문득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저만치 떨어진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장미 양의 아버지 김종화였다. 여 형사는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
……장미 양은 이 일대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역이 넓어서 우리 경찰 인력만으로는 찾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부탁하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한테 담당 구역을 맡겨 줄 테니까 2인 1조가 되어 장미 양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기에 장미 양을 찾는 포스터가 있으니까 한 장씩 나누어 갖기 바랍니다.
전지역을 삼십 개의 구역으로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각 구역에는 경찰관 한 명과 학생 두 명으로 하고 로터리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 연락처를 두겠습니다.
모든 연락은 그쪽으로 하면 됩니다.
장미 양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연락해 주기 바랍니다…….
"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 나간 뒤 여봉우는 김종화가 서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종화는 그때까지 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초라해 보였고, 얼마쯤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 동안 너무 고통을 겪고 시달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종화의 손은 뜨겁고 축축한 느낌이었다. 그의 몸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열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
장미가 이 근처에 있는 게 분명합니까?
" 그렇게 묻는 종화의 두 눈은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
아직 모르겠습니다.
전화의 발신지가 이 부근이기 때문에 이 일대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직은 뭐라고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군요.
" 여 형사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보기가 괴로웠다. 그들은 학교에서 나와 얼마쯤 걸어가다가 로터리 부근에 있는 파출소로 들어갔다. 그곳은 임시 본부로 지정된 곳이었다. 그곳에 대기하고 있으면 장미에 대한 모든 보고를 접할 수가 있겠지만 여우는 여학생들한테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김종화의 존재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여우는 그가 나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는 한번 의자에 주저앉더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침묵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든 석고상 같았다. 그 모습에서 여우는 그가 장미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괴롭기만 했다. 여학생들에게 오후 내내 수색에 참가해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서 오후 두 시까지만 수색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점심도 굶은 채 돌아가지 않고 수색을 계속했다. 학생들 가운데 제일 열성인 사람은 장미의 절친한 친구인 마동희였다. 지난 해 여름 장미가 유괴되던 날 현장에 함께 있었던 그녀는 지난 일 년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웃으면 볼우물이 생기던 귀여운 얼굴은 사라지고 그 대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하고 신중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말수도 적어지고 학교 성적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 같은 변화는 장미가 유괴된 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다. 해가 떨어지자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수색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거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동희만은 돌아가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짝도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어느 큰 아파트 단지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거리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에는 어느새 불이 들어와 있었다. 동희가 길가에 서 있는 벚나무에 힘없이 기대 서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저쪽에서 굴러 와 멎더니 안에서 젊은 여자 한 사람이 내렸다. 그녀는 아래위 흰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자연스러운 생머리 타입이었는데, 얼른 보기에도 세련된 모습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녀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오십 미터쯤 됐는데 그녀가 돌아서서 아파트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순간 동희의 두 눈이 빛났다. 선글라스 여인의 걸어가는 뒷모습은 동희가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눈에 많이 익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동희는 앞뒤 생각 없이 달음질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쫓아가면서, "
장미야!
" 하고 불렀다. 아파트 안으로 막 사라지려던 여인이 주춤하더니 뒤를 돌아다 보았다. "
장미야!
" 동희는 손을 흔들며 숨이 턱에 차서 뛰어갔다. 그러나 상대방 여인은 얼굴을 홱 돌리더니 안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여봉우 일행이 B아파트 105동 앞에 도착한 것은 동희가 장미를 발견하고 나서 이십 분쯤 지나서였다. B아파트는 십오 층 높이의 고층이었다. 각동마다 경비실이 없기 때문에 입주자에 대한 신상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여우는 눈물을 글썽이는 동희를 붙잡고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
선글라스를 써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뒷모습이랑 얼굴 윤곽이 장미가 틀림없었어요.
" "
혹시 나가는 것 보지 못했나?
" "
보지 못했어요.
계속 출입구를 보고 있었는데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어요.
아직 안에 있을 거예요.
" 경찰은 105동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러고 나서 탐문 수사를 벌였는데 1509호에 문제의 여인이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반장을 맡고 있는 여인의 말에 따르면 그 젊은 여인이 언제부터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일 주일 전쯤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일 주일 전쯤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전에는 그 아파트가 두어 달 정도 비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입주자 신고서도 작성하지 않았고, 주민등록 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정체 불명의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가끔씩 잘 차려 입은 남자들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고 그녀는 수상쩍다는 듯 말끝을 맺었다. 경찰의 일부는 1509호의 출입문을 지키고 또 다른 일부는 옥상으로 올라가 앞 베란다를 통해 아파트로 침투할 준비를 갖추었다. 베란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1509호의 전화 번호는 반장도 모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전화가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전화국에 1509호의 전화 번호를 문의하는 동안 여우는 반장을 앞세우고 1509호 앞으로 접근했다. 경찰의 부탁을 받아 반장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여러 번 누르고 나자 비로소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
누구세요?
" 그것은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치고는 무척 앳된 목소리라고 여우는 생각했다. "
안녕하세요? 여기 반장인데요.
인사 좀 하려고 왔습니다.
" 반장 여인이 상냥하게 말하자마자 안에서 날카로운 반응이 튀어 나왔다. "
웃기지 말아요! 경찰이 밖에 있다는 거 알아요.
만일 경찰이 안에 들어오면 뛰어내려 죽을 거야!
"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여우가 나섰다. "
장미, 그러지 말고 문을 열어요.
이젠 모든 게 끝났으니까 안심하고 문을 열어.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어.
경찰이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문을 열어요.
" "
거짓말하지 말아요! 들어오기만 하면 뛰어내릴 거야! 난 뛰어내릴 준비가 다 되어 있어!
" 그녀의 말은 정말이었다. 앞 베란다 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거기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미가 베란다에 서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있었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자 그녀는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마치 미인 선발대회에 나온 아가씨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구경꾼들 가운데서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미는 브래지어를 먼저 벗어 던졌다.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어 흔들었다.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오다가 갑자기 뚝 멎었다. 그녀가 갑자기 난간에 한쪽 다리를 걸쳐 놓았기 때문이다. 옥상 쪽에서는 특공요원 두 명이 줄을 타고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우는 워키토키로 급히 지시를 내렸다. "
움직이지 마라! 내려가면 안 돼!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 내려가면 안 돼!
" 집 안에 불을 환히 켜놓았기 때문에 베란다에 서 있는 육체는 역광을 받아 흡사 쇼걸이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하던 그녀가 갑자기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한참 지난 후 다시 나타난 그녀는 시뻘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것 같기도 하고 붉은 페인트를 칠한 것 같기도 했다. 얼굴까지 시뻘겋게 칠해 놓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디스코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란의 춤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히히히…… 히히히…… 난 악마다…… 난 악마야…… 히히히…….
"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 여우는 중얼거리면서 옆에 서 있는 종화를 돌아보았다. 그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전화 번호를 알아냈습니다.
" 지 형사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그들은 1509호 옆집으로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통에 매달렸다. 이번에는 김종화가 장미를 설득시켜 보기로 하고 1509호에다 전화를 걸었다. 한참 벨이 울린 뒤에야 신호가 떨어졌다. 요란스러운 음악소리가 먼저 들려 왔다. "
장미야! 나 아빠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나 옆집에 있으니까 금방 갈 수 있어.
넌 나올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안으로 들어가마.
물론 경찰은 데리고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 종화는 울면서 말했다. 잠시 아무 반응도 없더니 장미가 말했다. "
아빠라고? 좋아.
아빠만 들어와.
만일 경찰을 데리고 들어오면 난 떨어져 죽어 버릴 거야.
" "
절대 그러지는 않을 거야.
혼자 들어갈 테니까 문을 열어 줘.
" 종화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여우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조심하십시오.
장미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종화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1509호 앞으로 다가선 종화는 문을 당겨 보았다.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멈칫하더니 서 버렸다. 장미는 거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칼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피를 그녀는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 같았다. "
문을 잠궈요!
"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종화는 출입문을 잠그고 거실로 올라섰다. 장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섬뜩하도록 무서운 웃음이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올라가 다리를 벌리며 누웠다. "
아빠, 이리 올라와요.
올라와서 나를 사랑해 줘요.
아빠도 옷을 벗어요.
빨리 올라와요.
" 종화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그의 몸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면서 두 손으로 장미의 가는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밑에 깔린 장미는 바둥거리면서 칼끝을 종화의 옆구리에다 갖다댔다. 종화는 옆구리로 깊숙이 통증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지만 장미의 목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옆구리로 들어오는 통증은 다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시간 후 경찰 특공요원들이 베란다를 통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집 안으로 들어선 여우는 김종화와 장미의 시체를 확인한 후 또 한 사람의 낯선 시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이건 변태수 아니야?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체를 많이 보아
온 그도 이번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피비린내를
피해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상체를 웅크리면서 토하기 시작했다.
추천 (0) 선물 (0명)
IP: ♡.99.♡.87
23,53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2-08
0
470
3학년2반
2022-02-07
0
401
3학년2반
2022-02-07
0
547
3학년2반
2022-02-07
0
739
3학년2반
2022-02-07
0
738
3학년2반
2022-02-07
0
633
3학년2반
2022-02-06
0
577
3학년2반
2022-02-06
0
581
3학년2반
2022-02-06
0
688
3학년2반
2022-02-06
0
884
3학년2반
2022-02-06
0
481
3학년2반
2022-02-05
0
492
3학년2반
2022-02-05
0
558
3학년2반
2022-02-05
0
432
3학년2반
2022-02-05
0
497
3학년2반
2022-02-05
0
527
3학년2반
2022-02-04
0
571
3학년2반
2022-02-04
0
557
3학년2반
2022-02-04
0
832
3학년2반
2022-02-04
0
758
3학년2반
2022-02-04
0
439
3학년2반
2022-02-03
0
887
3학년2반
2022-02-03
0
956
3학년2반
2022-02-03
0
1166
3학년2반
2022-02-03
0
1148
3학년2반
2022-02-03
0
1798
3학년2반
2022-02-01
0
650
3학년2반
2022-02-01
0
719
3학년2반
2022-02-01
0
661
3학년2반
2022-02-01
0
471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