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4-태항산록-이런 녀자가 있었다

더좋은래일 | 2024.04.29 19:14:44 댓글: 1 조회: 133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5110


소설


이런 녀자가 있었다


1

조선의용군이 한 별동대-김영신지대가 마령관(马岭关)에서 하산하여 림성(临城), 찬황(赞皇), 고읍(高邑), 백향(柏乡) 네 고을의 중심점이 되는 압합영(鸭鸽营)부근에서 려정조(吕正操)부대의 두개 대대와 함께 적군점령하의 평한선을 넘은것은 교교한 찬 달빛이 온 누리에 가득찬 한밤중이였다. 적군이 철길 량편에 깊고 넓은 차단호를 파놓고 그리고 철길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있는 망루에서 감시를 하는 까닭에 공병역할을 하는 전사들이 재치있게 발판을 놓아주지 않으면 부대의 통과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소리소문없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그 전사들은 실로 전진하는 부대의 앞길에 가로놓인 모든 장애물을 없애주는 <<열쇠>>의 역할을 하였었다.

평원구의 좋은 점은 조밥, 옥수수밥을 먹지 않고 밀것을 먹는것이였다. 태항산속에서는 몹시 딸리는 소금도 거기서는 과히 귀하지 않은것이였다. 그 대신에 거의 날마다 같이 숙영지를 옮기는 것은 성가셔 죽을 지경이였다. 적군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적군하고 숨박곡질을 항며 사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리가 있으면 반드시 페도 있다는 말이 과시 옳았다. 태항산에서는 간이 안 든 반찬과 험한 밥을 먹는 대신에 숙영지만은 여러달씩 한군데 붙박혀 살수 있었다.

려지강이와 주운룡이가 밀짚북데기우에서 잠이 깨여 누운채 소근소근 지껄였다.

<<밥은 여기서 먹구 잠은 태항산에서 잔다면 좀 좋아.>>

<<꿩 먹구 알 먹잔 수작인가.>>

그들은 이때 심현(深县), 무강(武强) 일대를 맴돌고있었다. 분산된 적을 보면 피하였다. 참새떼처럼 모여들었다가는 흩어졌다가는 또 모여들었다. 그것이 유격전이였다.

<<난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다 띵하다니까.>>

<<그거야 차차 습관이 되면 일 없겠지.>>

<<벼룩은 태항산보다 좀 적은것 같지?>>

<<좀이 뭐야, 퍽 적지.>>

태항산에서는 세수물을 떠놓으면 대야에 금시로 새까맣게 벼룩이 뛰여들었었다.

<<겨울이 돼서 그런지두 모르지.>>

<<그것두 있겠지.>>

<<광동서는 겨울에도 모기장을 치구야 잔다며?>>

<<거기 모기장은 침대에 딸린것이지 장식품처럼.>>

이렇게 말하는 주운룡이는 광동 중산대학출신이였다.

이날 오후, 김지대장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전체 대원들에게 비상한 소식을 알리였다.

<<...일본해군항공대가 지난 8일 새벽,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함정들에 심대한 손실을 입혔답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해나서 모두 김지대장의 입만 바라보았다. 지대장 김영신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홀쪽한 얼굴에 눈까지 가늘었다. 그러나 강기와 활력이 언제나 온몸에서 넘쳐나는 사람이였다. 그는 중앙군교 10기 보병과 졸업생이였다.

<<...일본제국주의는 그예 남진을 단행했습니다. 사회주의쏘련에다가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에다 불을 걸었습니다. 레닌의 론증은 또 한번 실증됐습니다. <자본주의국가발전의 불균형법칙>은 다시한번 그 투철함을 전세계에 과시했습니다. 제국주의강도들은 서루 물어뜯느라구 다른것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전국은 우리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전변되구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 리지강이가 사기가 부쩍 올라서 주운룡이를 돌아보고

<<이러다간 나두 정말 멀잖아... 내 그 약혼녀를 만난단 소리가 나잖겠나?>> 하고 싱글벙글하였다. 주운룡이가

<<약혼녀? 언제 그런게 다 있었는가?>>

하고 의아쩍어하니 리지강이가 짐짓

<<그럼 없어?>>

하고 흰목을 썼다.

<<금시초문인걸.>>

<<금시초문? 흥, 네 그 리란영이따위는 와서 신발을 들구 따라 다닌대두 부요(不要)다... 어림없이.>>

리란영이와 주운룡이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터였다.

<<희떱기는 까치배바닥일세. 어디 사진이나 좀 보자구... 얼마나 이쁜가.>>

이제까지 옆에서 시물시물 웃으며 보고있던 진국환이가 갑자기 소리내여 웃으며 말참녜를 하였다.

<<사진 보면 꿈에 보인다... 볼 생각 말아. 수레바퀴에 치인 맹꽁이상이더라... 나 봤다.>>

<<참말이야?>>

<<내가 언제 거짓말하던가? 편지까지 다 읽어봤는데. <장연(长渊) 최참봉댁 맏손녀와 혼인을 정하였으니 그리 알아라.> 아버지가 썼더라 붓글씨루.>>

리지강이 황해도 해주사람인데 그 부친은 요부한부재지주(不在地主) 즉 시내에 사는 지주였다.

<<그게 언제야?>>

<<남경 있을 때지 언제야.>>

<<남경 있을 때? 그게 어느 옛날이야. 그럼 인젠 다 늙어 꼬부라졌겠구나.>>

<<저처가 전장귀신이 되면... 까막과부가 되겠지... 봉건가정이니까.>>

주운룡이와 진국환이가 서로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리지강이는

<<똥 본 오리처럼 잘두 지절댄다.>>

하고 진국환이의 어깨를 한번 탁 쳤다. 진국환이는 하하 웃고

<<아니다 사실은.>>

하고 실토를 하였다.

<<저처가 그때 편지를 받구 골이 나서 사진을 쪽쪽 찢어버린걸 내가 한쪼각 한쪼각 주어모아서 붙여봤다. 아주 얌전하게 생겼지 뭐야.>>

<<그럼 이제라두 늦지 않으니 얼른 편지를 띄워라. 기다리라구, 곧 간다구.>>

주운룡이가 흥감스레 말하고 깔깔 웃으니 진국환이와 리지강이도 깔깔 따라웃었다. 일본제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는 소식이 그들에게는 승리가 가까와온다는 랑보로 받아들여졌던것이다. 일제가 북진을 단행하면 쏘련이 복배수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어야 할것이기때문에 그들은 은근히 근심을 하고있었다. 그래서 <<남진>> 한마디에 안도의 숨을 쉬고 기분들이 명랑해진것이였다.


2

나달이 지나서의 일이다. 다저녁때 한개 분대가 유림(榆林)에서 네댓마장 떨어진 자그마한 주막거리에 정찰을 나와보니 마침 한대의 승용차-검은색포드가 머리를 서쪽-석가장쪽으로 두고 멎어서있었다. 이 길은 창주-석가장을 련결하는 간선도로였다.(석가장의 지명을 이때 점령군은 석문시로 고쳤었다) 국방색국민복을 입고 고깔모양의 전투모를 쓴 운전사가 주막집에 들어가 라지에타에 채울 물 한초롱을 얻어들고 막 나오는중이였다. 운전석에는 양장을 한 젊은 녀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뒤좌석에는 양복차림의 나이 지긋한, 코수염을 기른 뚱뚱이와 국민복차림의 서른나문 된 남자가 타고있었다.

(야 이게 웬 떡이냐.)

한개 분대 근 20명 무장대원이 불시에 달려드니 운전사는 초풍하여 물초롱을 떨어뜨리고 엉덩방아를 찧고 그리고 자동차안의 남녀 세 사람은 모두 실색하여 옴짝달싹을 못하였다. 코수염 기른 뚱뚱이의 손가락사이에 타고있는 권연이 알릴듯말듯 떨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남녀 네 사람을 차에서 끌어내고 또 땅바닥에서 잡아일으켜 앞세우고 곧 자리를 떴다. 뒤에 남은 몇 사람은 리지강이와 함께 자동차에 불을 질렀다. 말끔한 새 자동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는것을 보고 리지강이가

<<우등불모임이나 한번 했으면 좋겠다.>>

하고 웃으며 불 쪼이는 시늉을 하니

<<소불알은 안 구워먹구?>>

누군가가 옆에서 한마디 조롱하였다.

걸음을 통 못하는 남녀 네 사람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떠밀다싶이 하며 논틀밭틀로 숙영지에를 돌아오니 벌써 밤이 이윽하였다. 사내 셋은 한방에 몰아넣고 녀자 하나는 따로 가두고 그리고 보초에게 말을 이른 뒤 잘 차비들을 하였다.

밝는 날 아침에 먼저 사내 셋을 신문해본즉 코수염 기른 뚱뚱이는 일본의 이름난 토목건축회사 하자마구미(间组)의 석문출장소 소장이고 젊은 남자는 건축기사 그리고 나머지는 녀비서와 운전사였다.

<<어디를 가는 길인가? 아니면 어디에 갔다오는 길인가?>>

<<창주에 볼일이 있어서... 저 사람을 데리구 갔다오는 길입니다.>>

<<군(军)의 일루? ...>>

<<아닙니다 아닙니다... 군하구는 아무 상관두 없는 일입니다. 민간일입니다. 순전한 민간일입니다.>>

코수염 뚱뚱이는 군의 일이 아니라는 발명을 부옇게 하였다. 리지강이가 씩 웃고 지꿎이

<<여기 남아서 우리하구 같이 지낼 생각은 없는가? 우리 일을 맡아서 해볼 생각은 없는가?>>

하고 떠보니 코수염 뚱뚱이는 괴상야릇한 얼굴을 하고 대답을 못하였다. 건축기사는 식혜 먹은 고양이상을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운전사는 두 상전의 눈치만 보았다.

리지강이와 주운룡이는 신문을 일단 마치자 곧 녀비서를 가두어놓은 집으로 왔다, 녀자는 안날 저녁녘 경황없는중에 본 기억이 있는것 같은 두 젊은 군인(그녀의 생각대로 표현하면 두 젊은 공산비적)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것을 보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얼른 캉(炕) 한구석에 피해가 무릎을 쪼크리고 앉더니 오돌오돌 떠는데 그 덜 밉지 않은 얼굴은 백지장같이 창백하였다.

<<무서울것 없으니... 진정하구... 편히 앉으시오.>>

리지강이가 부드러운 일본말로 안심을 시키는데 녀자는 두 사람의 얼굴에 악의가 없는것을 보고 적이 마음이 가라앉는듯, 눈치는 여전히 살피면서도 앉음앉음을 편히 앉는체하고 또 떠는것도 좀 덜 떨었다. 두 사람은 캉끝에 걸터앉았다. 리지강이가 짐짓 상가럽게 말을 붙였다.

<<이름은요?>>

<<녜?..>>

녀자는 너무 긴장하여 묻는 말의 뜻을 못 알아들은게 분명하였다.

<<못 알아들으셨소? 이름이 무어냐구 물어봤는데...>>

<<아, 녜. 저... 야나가와 아끼꼬(柳川明子)라구 합니다.>>

<<야나가와 아끼꼬...>>

하고 되뇌고 리지강이는 주운룡이와 얼굴을 한번 마주보고나서 다시 물었다.

<<고향은요?>>

<<고향 말입니까? 녜 저 고향은... 인천입니다.>>

<<인천이라니... 조선 인천? ...>>

<<녜 그렇습니다.>>

<<인천이... 출생진가요?>>

<<녜.>>

리지강이와 주운룡이는 또 한번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학교는 어디를? ...>>

<<경성녀고(京城女高)예요. 경성녀고를 나왔어요.>>

서울 재동(斋洞)에 있는 경성녀고는 조선녀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다. 리지강이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조선말로

<<그럼... 조선분입니까?>>

하고 소리치듯 물으니 녀자는 잠시 얼떨떨한 눈으로 리지강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조선분들이삽니까?>>

하고 곧 무릎걸음으로 다가드는것이였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류명자 23세 하자마구미에 입사한지 인제 겨우 돐이 지났었다.

당일로 지대본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을 지었다.

일본남자 셋은 쓸데없는것이니 곧 돌려보내기로 한다. 조선녀자 하나는 포섭할 대상이 되므로 남겨두기로 한다.


3

다저녁때 무장대원 대여섯이 주막거리가 멀리 바라보이는데까지 일본사람들을 데려다주는데 갈라질 때 리지강이가 코수염 뚱뚱이더러

<<저 주막거리까지 가면 오가는 군용트럭이 있을거니까 손을 들어 세워서 타구 가시오. 다들 당신네 사람이 아니요. 어려울것 없겠지. 그리구 녀비서는 조선사람이니까 우리가 맡았다구... 당신네 령사관에 가 신고하시오.>>

하고 말을 이르는데 옆에 섰던 주운룡이가 삐라 한묶음을 그 호주머니에 밀어넣어주면서

<<야스다소장, 약소하지만 이건 전별하는 뜻으루 드리는 선물이니 그리 아시오.>>

하고 말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이튿날부터 류명자는 부단히 이동하는 항일부대를 따라 내키지 않는 전투행각을 부득이 하였다. 리지강이가 책임지고 교양을 하는데 녀자는 매번 다 고개를 다소곳하고 듣고있다가 리지강이의 말이 다 끝나면 의례 판에 박은것 같은 말로 비대발괄을 하는것이였다.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그대루 돌려보내주세요. 부모님을 만나뵙구... 말씀을 여쭙구... 다시 오겠에요. 꼭 다시 온다니까요. 녜 선생님.>>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그대루 돌려보내주세요. 부모님을 만나뵙구... 말씀을 여쭙구... 다시 오겠에요. 꼭 다시 온다니까요. 녜 선생님.>>

소귀에 경읽기였다. 땅팔노릇이였다. 귀신은 경문에 막히고 사람은 인정에 막힌다지만 류명자씨만은 아무것에도 막히는데 없었다. 약석이 무효였다. 자갈을 솥에 넣고 삶고 또 삶고 하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익지 않았다. 그 상이 장상으로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녜 선생님.>>을 되풀이하는것이였다. 똑같은 말을 끈질기게 곱씹고 하는것이였다.

성미가 느슨한편인 리지강이도 나중에는 고패를 빼였다. 할수없이 김지대장에게 사실대로 전말을 보고하였다. 김지대장은

<<참 별난 녀자 다 봤군.>>

하고 한참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들고

<<까짓거 돌려보낼가? 공연히 끌구 다니며... 귀찮게스레.>>

하고 리지강이의 의향을 물었다.

<<아무려나 좋두룩 하시지요.>>

거치른 남자들의 세계에 연연한 녀자 하나가 끼이면 오죽 좋으랴. 그렇지만 당자가 굳이 싫다니... 아쉽기는 하지만 부득이한 일이였다. 리지강이가 그길로 가서 녀자에게 오늘밤 돌려보낼테니 그리 알라고 미리 일러준즉 녀자가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며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백배사례를 하는데 리지강이는 한편 밉상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전하도록 아쉽기도 하였다.

밤, 뭇별로 장식된 밤하늘에 심현성 성가퀴의 륜곽이 뚜렷이 드러나보이는데까지 와서 리지강이가 걸음을 멈추니 류명자도 발을 멈추고 또 호송하는 대원들도 따라서 걸음들을 멈추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시오. 조기 조 성문을 향하구 꼿꼿이 걸으면 됩니다. 우린 여기서 무사히 들어갈 때까지 지켜볼테니까... 안심하구 행동하십시오. 내가 일러준대루 하십시오. 그럼 자 안녕.>>

마지막 작별의 인사로 굳은 악수를 나누는데 녀자의 손의 땀기가 리지강의 손바닥에 오래도록 남아서 가시지를 않았다.

녀자가 얼마동안 앞으로 걸어나가다가 멈칫 서서 잠시 망설이는듯... 무슨 생각을 먹었는지 홀지에 되돌아오지 않는가! 리지강이의 가슴은 높이 뛰놀았다. 걸어오던 녀자가 또 멈칫 서서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돌아서서 성문을 향하여 조심조심 걸어갔다. 리지강이는 갑자기 다리맥이 풀리는것 같았다. 어둑컴컴한 성문의 우중충한 문루에서 날카로운 수하가 날아내려왔다.

<<다레까?!>>

그러자 류명자는 리지강이에게서 배운대로 하는 대답이 어둠속에서 또렷이 들렸다.

<<팔로군에 랍치당했던 하자마구미 석문 출장소의 야나가와 아끼꼬가 돌아왔습니다.>>

문루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났다. 한참만에

<<좋다. 그럼... 두손을 들구...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라.>>

거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대답을 주었다. 그리고 또 한동안이 지나서 굳게 닫힌 성문틈으로 불빛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삐걱하고 성문이 사람 하나 겨우 들어오리만큼 열렸다. 두손을 높이 쳐든 녀자의 그림자가 성문안으로 사라지자 성문은 다시 삐걱 쾅당 육중한 소리를 내며굳게 닫혀버렸다. 성문틈으로 어른거리던 불빛도 사라졌다. 만뢰가 구적한데 밤하늘에서 별찌 하나가 지평선을 향해 줄을 그으며 내리꼰졌다.. 리지강이의 가슴은 가을뒤의 콩밭처럼 어수선산란하였다.


4

하지만 끈덕진 운명의 신은 그렇게 수월히 책장을 덮어버리지는 아니하였다.

1942년 10월, 비록 일본군의 점령하일지라도 유서깊은 옛 도읍 북평은 짤짤 끓는 볕을 받아 가을이 한창 무르녹고있었다. 이날 오후, 북해공원문전에서 인력거를 내리는 젊은 신사 하나가 있었다. 짙은 쥐빛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었는데 자주빛줄무늬비낀 넥타이가 그 청순한 얼굴에 멋스레 어울려서 사람들의 이목을 자연히 끌었다. 저도 모르게-거의 본능적으로-다시한변 쳐다보거나 지나쳤다가도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는 녀자가 한둘이 아니였다. 조직의 지령을 받고 적후의 조선청년들을 포섭할 목적으로 북평에 잠입한 리지강이의 변장한 모습이 이같이 눈에 띄는것은 그가 아직 적후공작, 지하공작에 미립이 트지 않았다는 구체적증거였다. 예로부터 <<의복이 날개>>라는 속담도있고 또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는 속담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런것들은 다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되는것이지 이런 특수한 경우에는 해당이 되는것이 아니다.

리지강이가 제멋에 겨워서 막 인력거에서 내렸을 때였다.(그는 지금 조용한 공원으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러 오는 길이였다.) 자칫 뒤미처 따라온 인력거 두채가 옆에 와 멎어서면서 곧 젊은 남녀 한쌍이 각각 내리는데 남자는 일본장교복 같은것을 입었고 그리고 녀자는 수수한 양장차림을 하였었다. 리지강이는 아랑곳없이 곧 공원문을 향하여 걸음을 떼놓다가 장교복 같은것을 입은 남자와 같이 온 녀자가 자기를 보고 흠칫 놀라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는것을 눈결에 보았다느니보다는 차라리 륙감으로 느끼였다.

(무얼가 저게? ...)

리지강이는 감히 그 화근거리로 느껴지는 녀자를 거들떠보지 못하였다. 모르는체할 밖에는-태연한체할 밖에는-다른무슨 며리가 없었다.

(일본장교놈의 정부? -무어든간에 내게야 리로울것이 없지!)

리지강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당장에 들고 빼고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천천히 걸었다. 바로 코앞에 열려있는 큰 공원문이 갑자기 까마득하게 멀어보였다. 빠져나가기 어려운 무슨 바늘구멍같이 작아보였다.

하이힐의 가벼운 또닥또닥 소리를 뒤꽁무니에 줄곧 딸리고 리지강이는 향방없이 닥치는대로 걸었다. 약속한 장소를 피하여 한겻진 곳 으슥진 곳만 찾아다녔다.

(그런데 장교놈의 발자국소리는 들리지 않는것 같으니 대체 웬 일일가? 계집만 뒤를 딸려보내고 제 놈은 청병을 하러 갔나? 그렇다면 이 계집은 보통내기는 아닐테지?...>>

갖은 불길한 생각이 다 머리속에 떠올랐다.

(이것을 어떻게 떼친다? 아마 권총을 가졌기도 쉽지.)

나중에 정 할수 없어서-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요-결심을 채택하였다.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 생겼나 상통이나 좀 보자!)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는 무슨 늙은 나무밑에서 갑자기 홱 돌아섰다. 뒤따라오던 계집이 조건반사적으로 멈칫 걸음을 멈추더니 박은듯이 서서 돌아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음순간 리지강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눈앞에 서있는것은 분명히 열달전 캄캄한 밤중에 심현성문 바로 턱밑에서 자기가 돌려보낸 녀자포로-류명자가 아닌가!

<<선생님!>>

녀자가 반가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내달아왔다.

<<제가 바루 봤에요, 바루 봤다니까요! 틀림이 없었다니까요!>>

일순간 리지강이는 질정을 못하고 망설였다.

(알은체해야 하나? 모른다고 딱 잡아떼야 하나?)

(반갑게 맞받아주어야 하나? 덤덤히 대해야 하나?)

그러나 머리가 질정을 하기전에 입에서 말이 먼저 새여나왔다.

<<아, 명자씨! -그런데 동행은요?>>

동행-일본장교-이것이 제일 문제였던것이다. 제일 걱정거리였던것이다.

눈을 들어 제빠르게 사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일본장교는 그림자도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녀자가 곧 눈치를 알아채고 웃는 얼굴로 안심을 시키였다.

<<우리 오빠예요, 사촌오빠. 헌병대의 통역으루 있에요. 그렇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제가 담보해요. 절대루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그런데 왜? ...>>

<<그런데 왜... 안 보이느냔 말씀이시죠? 차점에서 기다리라구 했에요, 선생님이 꺼리실가봐.>>

리지강이는 반신반의하면서 태도를 좀 누그러뜨렸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줄은... 정말 의외로군요.>>

<<정말이예요. 정말 꿈만 같아요.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

두 사람은 잎이 누르러가는 해묵은 회화나무밑에 마주섰었다.

<<여기 서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두... 일 없을가.>>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좀 미타해하니 녀자는 한번 싱긋 웃고

<<무슨 상관 있에요? 남들이야 련애를 하는줄 알텐데요.>>

하고 아주 례사롭게 받아넘기는것이였다.

<<왜놈들두 청춘남녀가 련애를 하는것까진 간섭을 안한다구요.>>

<<그럴가?>>

<<그러면이요. 오호호!>>

리지강이가 좀 마음을 놓고 궁금한것부터 물어보았다.

<<그런데 북평에는 어떻게?...>>

<<북평에는 어떻게 왔느냔 말씀이지요? 녜, 전근이 됐어요. 인제 너덧달 됐에요, 북평에를 온지가.>>

<<오빠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두 일 없을가?...>>

<<괜찮아요, 그걸랑 념려 마세요.>>

<<글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보다두 선생님, 이번에 저를 데리구 가주세요. 꼭 데리구 가주셔야 해요. 녜 선생님?>>

리지강이는 얼른 갈피를 잡을수 없어서 잠시 빤히 녀비서의 덜 밉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가벼운 가을바람에 녀자의 이마를 가린 까만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다가는 흩날리고 하늘거리다가는 흩날리고 하였다.

<<제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할게 하번 들어보세요. 솔직히 다 말씀을 드릴테니... 괘씸하다구 꾸중을랑 마세요.>>

리지강이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는 하였으나 들어보기로 하였다. 하긴 들어볼것 없다고 방색할 형편도 못되였다.

<<...제가 평원구에 있을 때 선생님께 부모님을 한번 만나뵙구나서 꼭 다시 오겠다구 말씀한건 다 거짓말이예요. 저는 애당초에 만나뵐 부모가 없었는걸요. 일찌기 량친을 다 여의구 백부님댁에서 자랐거든요. 지금 저뒤 차점에서 저를 기다리구있다는 오빠가 바루 그 백부님의 둘째아들이예요. 그리구 저는 전부터 벌써 약혼한 남자가 있었에요. 서울 식산은행 안국동지점에서 근무하고있었지요. 그러니 제가 다시 돌아올리 있에요? 얼렁뚱땅 넘기려는 수단이였지요. 알쭌한 거짓말이였지요. 저는 심현에서 놓여난 뒤 석가장총령사관을 거쳐서 어렵지 않게 곧 회사에 복직이 됐었에요. <하자마구미>에 말이예요. 그런데 이런 마른하늘에 생벼락이 또 어디 있겠에요. 종신을 언약하구 태산같이 믿어온 그이가 무슨 독서회사건인가 하는걸루 경찰에 검거됐다가 모진악형을 당하구 반주검이 돼서 나온지 불과 한주일두 채 못돼서 끝내 피여나지 못하구 스물여섯살 젊은 나이에 고만 저승길을 떠나구말았지 뭐예요.>>

녀자의 눈에 슬픔을 초월한 분노의 빛이 어리는것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리지강이는 자기의 위태로운 처지를 잠시 잊었다.

<<저는 제게다 이런 불행을 안겨준 원쑤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두 선생님네 그 항일부대-조선의용군에 참가를 해야겠다구 결심했에요. 그런데 알구보니 공교롭게 저의 그 오빠두 저하구 같은 생각을 갖구있지 뭐예요. 오빠두 벌써부터 항일부대를 넘어갈 마음을 먹구있었단 말이예요. 그 사정은 본인에게서 직접 들어보세요. 좋겠습니까 선생님?...>>

이리하여 리지강이는 마침내 류명자 종남매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였다. 셋 일행이 공원에 와서 가을의 경색을 즐기는것처럼 꾸미며 양지바른 잔디밭에 다리를 뻗고 앉아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의용군의 지하공작자와 일본헌병대의 통역관-이야말로 극적인첫 상봉이였다. 장소가 적들이 점령하고있는 북평이기에 더욱 극적이였다. 아슬아슬하면서도 랑만적이였다.


5

<<...저는 일본헌병대의 통역관노릇을 하면서두 아무러한 자책감을 느껴본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두 다 가지는 보통직업이겠거니만 여겨왔었습니다. 어느 회사의 직원이나 무슨 다를게 없는것으루 알아왔었습니다. 그러던중 지난 초여름의 일이였습니다. 그게 6월초였지요. 북평에 잠입해서 첩보활동을 하던 조선의용군의 지하공작원 하나가 체포됐었습니다. 이름은 서극강이라구 하는데 그게 본명인지 가명인지는 종내 모르구말았습니다. 나이는 스물대여섯 가량인데 훤칠한 키에 짙은 구레나룻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류명자의 사촌오빠 야나가와통역관 즉 류명준이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였을 때 리지강이는 저도 모르게 입속말로 부르짖었다.

<<아, 자명이!>>

서극강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하던 그 사람이 서자명이였음을 대번에 알아차린것이였다. 서자명이는 리지강이의 군관학교 동기동창이였었다.

<<아십니까 그분을?...>>

<<아니 어서 그대루 이야기하시오.>>

<<녜, 그런데 일본군대의 법이-간첩은 어떠한 간첩이든 다 일률적으로 총살형에 처하기루 돼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분두 총살을 당하게 됐었는데...>>

류명준이가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는중에 저쪽에서 누군가가

<<오이, 야나가와! 거기서 뭘 하구있는가?>>

하고 소리를 쳐서 세 사람이 일시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몸집이 똥똥한 일본헌병 하사관 한놈이 화복차림을 한 왜갈보 하나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서있었다.

<<아, 조장(曹长)님!>>

류명준이가 부지런히 뛰여일어나 몇걸음 달려가더니 장화뒤축을 기세 좋게 딱 부딪뜨리며 표준동작으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소풍하러 오셨습니까? -저 서울서 저의 사촌형이 오래간만에 찾아와서... 지금 데리구 다니며 시내구경을 시키는중입니다.>>

<<응 그래. 그럼 저 녀자는?>>

<<녜 그건 저의 사촌누이동생... <하자마구미>에 근무하고있습니다. -얘, 아끼꼬야, 어서 와서 조장님께 인사 여쭈어라!>>

얼렁뚱땅하여 일본하사관놈을 배송낸 뒤에 류명준이는 중둥무이되였던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그분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중에 조선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바루 저였습니다. 가슴팍을 겨냥한 열두개의 총구앞에서 그분은 꺼먼 천으루 눈을 싸매려는것을 거절합디다. 그리구 말뚝에 묶인채 멸시하는 웃음을 입가에 짓구 열두개의 총구를 죽 한번 둘러봅디다...>>

리지강이도 류명자도 다 이야기에 끌려들어 숨을 죽이고 귀들을 기울였다.

<<...저는 그때 처음-난생처음-가슴속에서 자책이 울컥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습니다-<오,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두눈이 왈칵 붉어지는것을 리지강이는 보았다.

(각성한 민족의 량심!)

<<...그래서 얘하구 둘이서 의논하구... 조선의용군으로 넘어갈 길을 은밀히 모색하던중이였습니다. 하루를 살아두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구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우연히 공교롭게 선생님을 만나게 된건 아무래두 하늘의 뜻인것만 같습니다.>>


11월초, 가지마다 다닥다닥 열린 고욤들이 한창 달 때, 리지강이는 류명자 종남매와 또 다른 열혈청년 둘을 데리고-모두 다섯이서-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오는데 성공하였다.

신입대원환영회에서 류명자는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였다. 주운룡이가 그녀의 입내를 천재적으로 잘 내여서 회장을 온통 웃음판을 만들어놓았기때문이다.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그대루 돌려보내주세요. 부모님을 만나뵙구... 말씀을 여쭙구... 다시 오겠에요. 꼭 다시 온다니까요. 녜 선생님.>>

추천 (1) 선물 (0명)
IP: ♡.245.♡.230
더좋은래일 (♡.245.♡.230) - 2024/04/29 19:17:06

https://life.moyiza.kr/fiction/4517236 <<<<<< 격정시대 62회-에서의 계속이라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23,561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4-05-05
0
90
더좋은래일
2024-05-05
0
60
더좋은래일
2024-05-05
0
72
더좋은래일
2024-05-04
0
80
더좋은래일
2024-05-04
0
67
더좋은래일
2024-05-04
0
74
더좋은래일
2024-05-03
0
59
더좋은래일
2024-05-03
0
79
더좋은래일
2024-05-03
0
89
더좋은래일
2024-05-02
0
70
더좋은래일
2024-05-01
1
71
더좋은래일
2024-04-30
1
80
chillax
2024-04-30
0
84
더좋은래일
2024-04-29
1
133
더좋은래일
2024-04-29
1
90
chillax
2024-04-29
0
85
chillax
2024-04-29
0
84
chillax
2024-04-29
0
67
더좋은래일
2024-04-28
1
89
더좋은래일
2024-04-27
4
145
더좋은래일
2024-04-26
4
121
더좋은래일
2024-04-25
3
149
chillax
2024-04-25
1
102
더좋은래일
2024-04-24
3
135
더좋은래일
2024-04-24
3
107
더좋은래일
2024-04-24
3
120
chillax
2024-04-24
1
80
더좋은래일
2024-04-23
3
151
chillax
2024-04-23
1
137
더좋은래일
2024-04-22
3
34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