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희 - 천사의 반란 3

3학년2반 | 2022.02.01 08:19:33 댓글: 0 조회: 47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183
9. 프랑스의 걸인들
코아 에이전트는 퇴계로의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한극장 옆 골목을 꺾어 들면서
윤정님은 다시 한 번 약도가 그려진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김석기가 그려준 약도에는 골목의
상황이 비교적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정님은 약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골목이 거의 끝날
즈음에서야 코아 에이전트라는 옥호가
담긴 자그마한 네모꼴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정님은 우두커니 서서 초라하게 서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코아 에이전트라는
옥호도 그렇지만 형편없이 낡은 건물의
외관을 살피자니 김석기가 말한대로
성실하고 유능한 흥신소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정님은 마지못해 걸음을
떼었다. 기왕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김석기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가자니 이번에 제법 번듯하게 옥호가
쓰여진 문이 정면으로 나 있었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한걸음
들어서자 정돈되어 있는 아늑한 분위기가
그녀를 반겼다.
실내는 보기 보다는 꽤 넓은 편이었고
십여 명의 직원들이 일에 몰두하고 있어
분위기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비로서 안심이 됐다.
김석기가 굳이 이곳을 천거한 이유를
알만 했고 업무에 바쁜 듯 낯선 손님에게
서먹서먹한 시선이나 관심 따위를 주지
않는 직원들의 배려에 또한 신뢰심이
생겼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소장님을 뵙고 싶은데요."
"혹시... 윤정님 씨 아닌신가요?"
"그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석기로부터 이미 연락이 닿았던 듯
그녀는 곧장 소장실로 안내되었다.
소장실은 사무실 한쪽의 공간을 차지하여
.상담실로도 이용되는 듯했다.
"차준복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차준복소장이 명함 한 장을 내어
밀었다. 정님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차소장은 한눈에 깔끔하고 예의바른
40대 초반의 사내로 비쳐졌다.
말쑥한 외모도 마음에 들었지만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어딘지 믿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선생이 추천한 사람이 아닌가.
정님은 잔잔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김석기 씨로부터 대충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김기자와는 오래전부터
교분을 맺고 있는 절친한 사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로부터 윤정님 씨가 안고
있는 고민을 반드시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목하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허허..."
그는 너털웃음으로 서먹한 분위기를
일시에 씻어 버렸다.
그녀 역시 김석기로부터 차소장에 대한
인적사항을 대충 챙겨듣고 있었다.
차준복은 전직 경찰로 경찰 재직시에는
민완형사로 이름을 날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오직() 사건에 말려들어 한
번 인정을 잘못 베푼 것이 화근이 되어
옷을 벗어야 했고, 그의 처지를 동정한
전직 동료들의 도움으로 코아 에이전트를
설립, 제2의 인생을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차소장이 눈빛을 발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님은 핸드백을 열고 두툼한 봉투를
꺼내 놓았다.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의
객실담당 양성득과장으로부터 건제받은
투숙객 명부였다.
컴퓨터 감열용지에 깨알같이
프린트되어있는 명단을 들여다보던
차소장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지난 4월16일을 전후하여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했던 숙박객
명부예요."
"그런데요?"
"그 명단에 올라있는 인물들의
신상파악을 부탁합니다. 그게 제가
의뢰하고 싶은 일이에요."
"아니?"
차소장의 눈이 둥그래졌다.
"이게 모두 몇 사람입니까?"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오륙백
명쯤 되지 않을까요?"
"그럼 이 사람들을 몽땅 뒷조사한다는
말입니까?"
"네, 한 사람도 빠짐없이요."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
차소장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았다.
아마 지금껏 의뢰받은 사건중에서 이렇게
엄청난 프로젝트는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잠시 눈길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왜요? 너무 어려운가요?"
정님은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그를 쏘아
보았다.
"그런건 아닙니다만 작업이 너무
방대해서요. 이 정도 조사를 하려면
비용이 꽤 들어갈 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비용 문제라면 염려마세요. 얼마가
들든 조사만 해주세요. 자, 여기 착수금을
우선 드리겠습니다."
정님은 수표 한 장을 꺼내어 소장 앞에
밀어 놓았다. 잠시 눈어림으로 수표의
동그라미 숫자를 세어보던 그는 다시금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차소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결의를 나타내었다.
"단 그 분들의 사생활이나 인격이 침범
당하지 않도록 비밀리에 진행해주셔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직업이나 나이,
현주소 등을 정확히 분류해 주세요. 그
아마 허위기재된 사람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런 것도 잘 체크해주시구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연락은 어디로 드리면 될까요?"
"제 쪽에서 수시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정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김석기 씨
쪽으로 연락 주세요."
""
"조사방법은 소장님 편한대로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시간은 빠를수록
좋겠어요."
"최선을 다해보죠. 그래도 일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시간은 좁 걸릴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님은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김석기의 생활은
활력이 넘쳐 흘렀다.
혼자 애태우던 윤정님과의 사랑을
확인하자 무엇보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함께 희열을 느꼈으며 일에 대한 투지가
더욱 샘솟았다.
그의 주변 환경이 새삼스레 달라질 일도
없건만 그의 눈에는 모든 사물들이 새롭고
신선한 느낌으로 비쳐졌다.
늘상 싱글거리는 그의 표정에서 혹연한
변화가 느껴지는 듯 직장 동료들까지
은근한 시샘과 함께 입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김석기 씨,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보지? 혼자 단물 빨지 말고 같이 나눠
먹자구. 좀 털어놔봐! 어때!"
"김선생님, 요즘 사랑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꼭 연애를 처음하는 숫총각처럼
들뜨신 것 같은데요?"
누가 뭐라든 김석기로선 알 바가
아니다. 그의 귀에는 어떤 야유나 질시도
도대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윤정님과의 비밀을 가슴깊이 꼭꼭 묻어둘
뿐이었다.
지난번 제주도에선 하야비치호텔을
부랴부랴 빠져나온 그들은 곧장
성산일출봉관광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김석기가 제주시에서 타고 내려왔던
렌터카가 마침 요긴하게 쓰였다. 남들의
눈을 피하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신혼부부로 가장하여 일출봉호텔에
투숙한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호텔방에서만 숨어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뜨겁게 서로를 나누어
가졌다. 지금까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갈증을 뒤늦게 깨달은 듯 그들은 애타게
서로를 갈구했고 뜨겁게 상대를 찾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미래와 원한과
복수에 대한 갈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하룻밤을 꼬박
새운 그들은 일출봉의 해돋이 구경을 위해
호텔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일출봉의 교묘한 웅자와
해돋이의 장관을 목격한 그들은 대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윤정님은 자못 감탄한 듯 탄성을
연발했다.
기회를 보던 김석기는 정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
결혼에의 열망을 정식으로
노출시켰던 것이다.
정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고 낯빛만
붉혔다. 그리고 지금 형편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석기는 그 말을 긍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해결해야 할 남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 후에는 고려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들의 제주도에서의 일정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장미빛 인생.
지금 김석기의 심경이야말로 바로
그랬다. 즐거운 마음으로 윤정님의 포로가
되어 버린 그의 주위는 온통 무지개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김석기의 눈에 이상스런 장면이
문득 비쳤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하숙방 책상에
넣어 두었던 자료를 가지러 잠시 하숙집에
들른 그의 눈에 대문간에서 연신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 하숙집
안주인 여천댁의 잔뜩 부은 입이 얼핏
뜨였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주머니?"
"글쎄 어떤 시러베 잡것들이 남의
대문이 자기들 광고판이나 벽보판쯤 되는
줄 아나 봐. 그저 대문에 빤하게 비어
있는 날이 없다니께."
그리고보니 그녀는 대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입으로는 연신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도
손놀림은 재빠르게 대문에다 물걸레질을
해대고 있었다.
"누가 그런 짓을 합니까?"
김석기는 위로 겸 지나가는 말을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여천댁은 상대를 만났다는
듯 일손마저 놓고 하소연을 늘어 놓았다.
"그러게 말이유 김 씨, 잡상인들이
스티커를 붙이는 건 그렇다 쳐요. 그건
뜯어내면 되니까. 이러니 속에서
천불이나지 않겠수. 이것 좀 봐요.
이것, 김 씨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
거유."
과연 대문 한쪽 귀퉁이에 이상한 모양의
기호가 몇개 그려져 있었다. 여천댁은
한심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바로 김 씨가 다니는 신문사의
신문배달부가 그려 놓은 거유."
"예? 신문 배달부가 왜 이런 것을..."
김석기가 뻥한 얼굴로 여천댁을 바라
보았다.
"아따, 왜는 왜겠어? 신문 배달소년이
바뀌면 이런게 생긴다니까. 생각해 봐요
김 씨,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집들이 쭉
늘어서 있으니까 자기 구독자를 찾아
내는게 쉽지는 않을 거유. 아 그렇다고
남의 집 대문에 이렇게 보기흉한 표시를
꼭 해야 하는건지 원..."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 주의를
주겠습니다."
"원, 김 씨가 미안할 것 뭐 있수.
아서요. 그렇게 따진다면 주의줄 사람이
한두 사람이라야지. 아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때도 그런 홍역을 치렀잖수.
각당의 선거운동원들이 별의별 표시를
다하고 다닙디다. 우리집이 자기들
표밭이라고 생각하는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들 마시느라구
쯧쯧..."
여천댁의 푸념을 귓전으로 흘리며
신문배달소년이 그려놓은 기호를 빤히
들여다 보던 김석기의 입에서 문득
심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렇다!
우춘구가 그려놓은 암호문도 바로
이런식의 기호일것이다. 신문배달소년이
그려놓은 기호야말로 우춘구의 메모지에
담긴 기호와 흡사하지 않은가. 그는 급히
수첩에서 우춘구의 메모를 꺼내어 대문에
그려진 기호와 대조해 보았다.
틀림없다. 바로 이거다. 김석기는
잔잔하게 온몸으로 버지는 흥분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그리고 그는 냅다 뛰었다. 언젠가
신문사 자료실에서 본 기억이 있는 옛날의
그 자료를 찾아내는 일이 우선
급선무였다.
김석기의 돌연한 행동에 얼이 빠져버린
듯 여천댁은 뻥한 눈길로 급히 달려가는
김석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따르르르릉.
현관 손잡이를 막 비틀던 윤정님은
전화벨소리에 멈칫 몸을 돌렸다.
묵살해버릴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받기로 마음을 고쳤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김선생 뿐이질 않는가.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렸다.
"여보세요! 정님 씨?"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들자 김석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저예요."
"마침 계셨군요."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어요."
"어이쿠,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요
꼼짝말고 거기 계십시오. 제가 금방
달려가겠습니다."
"예?"
"암호 말입니다, 암호. 둘 중에
한가지는 풀었습니다. 그 뜻을 알 수 있게
됐다구요!"
"어머,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우연히 그 뜻을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신문사 자료실입니다. 지금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어요."
그러나 정님의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전화는 성급하게 끊어졌다.
그리고 30분이 지났을까? 현관의
버저가 울림과 동시에 김석기가 현관문을
열고 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윤정님은 외출복차림 그대로 실내를
서성대던 초조함을 애써 감추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들였다. 그는
옆구리에 두툼한 책 한 권을 신주단지처럼
소중하게 끼고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이 책은 우리 신문사
자료실에서 빌려온 책인데 암호의
역사라는 프랑스 원서예요. 그 책 속에
바로 우춘구 씨가 썼던 부호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김석기는 책장을
두드리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여기 접어둔 부분입니다. 이
부호들이 우춘구 씨가 그려둔 보호와 같지
않습니까?"
"근데, 어떻게 그리 쉽게 이걸
찾아내셨어요?"
"하하... 우연한 일로 이 책에 착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바로 이 부호들입니다. 이 부호들을 누가
만들어낸 줄 아십니까?"
""
"이건 프랑스 걸인들이 고안해낸
부호였습니다."
"예?"
"프랑스 거지들이 동료거지들을 위하여
밥을 빌어 먹은 집 대문에다 부호로
표시를 해두곤 했다는 겁니다. 일종의
안내문역할을 하는 거겠죠."
"세상에..."
정님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제가 우춘구 씨의 부호와 프랑스
걸인들의 부호를 풀어서 대조해
보았습니다. 이 표를 한 번 보세요."
김석기는 자신이 풀이해낸 부호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우춘구 씨의 부호 / 프랑스 걸인이
고안한 부호(생략)
그러나 뚫어져라 메모지를 들여다보던
정님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듯미간을
모았다.
"전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그이가 왜 이렇게 이상한 부호를 기록해
두었는지."
"전혀 마음에 짚이는게 없으십니까?"
김석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똑바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두 개의 부호가 닮은꼴이란 건
인정하시겠죠?"
"네."
"단지 우춘구 씨의 부호앞에는
영문표기가 하나씩 더 붙어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 부호의 해석에 대한
범위는 좁혀질 수 있을 겁니다. 즉 우춘구
씨가 앞에 기록해 놓은 영문표기는 우춘구
씨만이 알고 있는 어떤 인물이나 단체의
영문이니셜이 아닐까요?"
정님은 주춤 눈빛을 모았다. 그리고
부호를 해석한 메모지에 눈길을 주었다.
그렇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정님은
언뜻 뇌리를 스치는 예감에 전율을
느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이가
그런 무호한 짓을 할리가. 정님은
방정맞은 자신의 상상을 무너뜨리려는 듯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유용치 씨가 건네준 자료 말입니다.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던 김석기가 불쑥
내뱉는 말에 정님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이 사람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상상을 하고 있는거야. 정님은 문뜩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낭패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재촉하는 듯한
김석기의 눈길에 이끌리듯 정님은 몸을
일으켰다.
정님이 안방옷장 깊숙히 숨겨두었던
자료철을 꺼내어 건네자 김석기는 급히
자료를 뒤적여 유용치가 넘겨준
서류뭉치들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남편
우춘구가 생전에 취급했던 공인회계에
얽힌 업무사항을 낱낱이 수록한 자료였다.
어쩌면 유용치가 이 서류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귀중한 서류였다.
김석기는 맨 앞장에 적힌 목록만을
빼내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어깨너머로 살펴본 목록에는 회사
이름들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김석기의 표정이 문득 밝아졌다.
그리고 목록과 부호가 적힌 메모지를
대조해보던 그는 이번엔 목록에 적힌
회사명을 체크해 나갔다.
작업이 끝난 듯 잠시 고개를 들고
생각에 골몰하던 그가 이번엔 목록과
부호를 펼쳐놓고 새로운 도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작업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따금씩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드는 눈치였다.
그 틈을 타서 정님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아직 그에게 아무것도 대접한게
없다는데 문득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녀는 주방옆에 마련해둔 간이식
룸바에서 칵테일 두 잔을 만들었다. 원래
술이라곤 입에도 못대던 그녀였지만 신혼
첫날밤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술을 택했고 이제 한 잔의
술은 그녀의 생활에서 떼어낼 수 없는
도피처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마실 것을 만들어 자리로
돌아오자 그의 작업은 거의 끝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내미는 칵테일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우춘구의 부호/ 유용치의
자료/해석(생략)
잔을 내려놓은 후에도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칵테일잔만
천천히 기울일 뿐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기 어려워한다는 걸
그녀는 그의 표정에서 이미 읽고 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그녀에게 도표를
건네주었다.
묵묵히 도표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윽고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말문을 잃은
그녀의 무표정에는 긍정과 부정의 그늘이
함께 얼룩져있었다. 그녀는 마땅히 두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한 듯 시선을 멀리
허공으로 던졌다.
"우춘구 씨의 재산상태에 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김석기가 불쑥 내뱉은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런 엉뚱한 말이
어딨느냐는 무언의 항의가 그녀의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똑바로 쏘아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치기가 두려워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못이긴 척 외면하는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순간적으로 붉어지는 장면을
김석기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의 마음 한구석 역시 아련한
아픔이 함께 적셔오는 듯했다.
그녀는 잠자코 핸드백을 열어 통장
하나를 꺼내 놓았다. 통장에는 우춘구라는
이름 석자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무심코 통장을 들쳐보던 그는 문득
손길을 멈추고 말았다.
가만, 이게 도대체 얼만가? 통장의
잔고에 기록된 동그라미를 세어보던 그는
기가 질린 듯 손을 내리고 말았다.
2억 5천만원.
통장에 기록된 액수도 액수거니와
그로선 도무지 실감이 가지않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그의 몸은 한껏
굳어지는 듯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짓눌렀다.
그들은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양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만에 김석기가 침묵을 깨뜨렸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이 틀릴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우춘구 씨의 행적이
조금은 드러난 것 같습니다."
""
"될 수 있는 한 우춘구 씨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어쨌든 눈 앞에 나타나 있는 현상을
토대로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괜찮겠습니까?"
""
정님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기색을 살피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첫째는 우춘구 씨가 자신의 업무인
회계를 처리하면서 자신에게 공인회계를
위탁한 기업체의 내부에 깊숙히
들어가다보니 해당기업의 엄청난 비리
사실이나 약점을 잡게 되었고 처리과정에
'해당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수수료를
입막음조로 받아내었을 가능성입니다. 제
생각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짐작되고 또한 그런 가설아래에서야
우춘구 씨가 보복살해를 당했다는 추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
"두 번째로 그럼 상대는 과연 누구인
하는 문젭니다. 도표로 짐작컨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은 역시 P.&
B.코리아와 홍해강철입니다."
""
"다국적 기업인 P.& B.코리아는 베일에
싸인 기업으로 매스컴의 추적을 받고 있고
홍해강철 역시, 정치인의 결탁으로
급성장을 이룩하여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기업입니다, 아마도 뒤를
캐다보면 가장 구린데가 많은 기업중의
하나일 겁니다."
"됐어요! 그만 하세요!"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듯 그녀는
목소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뜻밖의 반응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말에 무리가 있었다면 용서
하십시오."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그녀는
칵테일잔을 거칠게 들이켰다.
"...정님 씨."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들으서야 합니다. 남편을 살해한
범인을 밝혀내야 하지 않습니까?"
"...모르겠어요. 이제와서 후회가 돼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아름다운 추억이나마 영원히
간직했을 텐데...정말 후회스러워요."
"마음을 약하게 가지시면 안됩니다."
"아니예요. 전... 정말이예요. 더이상
이 사건을 쫓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그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녀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방향을 잃은 듯 헤매고
미미하게 떨려오는 손끝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절박한 위기를 느낀 그는 그녀의 두
손을 꽉 움켜 쥐었다.
"힘을 내요. 정님 씨, 정님 씨가
괴로워해야 할 일은 절대 아닙니다.
우춘구 씨의 행적이 어떠했든 그건
과거지사입니다. 그리고 그건 이유야
어떠하든 원인이 발생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고 놈들은 잔인하게 보복을 했습니다.
그 놈들은 우춘구 씨만 살해한 게 아니라
한 가정을 파괴했고 정님 씨에게는 씻을
길 없는 큰 상처를 안겨주지 않았습니까?
정님 씨가 놈들을 쫓는 것은 남편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정님 씨 자신의 결백을
찾기 위한 몸부림인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정남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
속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참고 참았던
설움이 터져 나오면서 그녀의 어깨는
물결치듯 떨리고 있었다.
김석기는 그녀를 안으면서 등을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손삼수는 무심한 눈길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그가 몸을 실은 형사기동대
R마이크로 버스는 어느새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도로가 교차하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국립과학수사 연구소가 소재한
신월동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그는 초조함 속에서
마음을 졸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했다.
플랑크톤 연구를 위해 도서관에
파묻히기도 했고 아예 관련서적들을
집에까지 들고 와 밤을 세워가며
독파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하는 것도 오늘로써 벌써 세번째였다.
담당 법의학 과장인 최상주박사는 그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선 손삼수가 품고 있던
의문에 최상주박사 역시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의문만 느낀다고
유용치의 입수장소(), 즉 익사한
현장은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최박사의 지도를 통하여 플랑크톤에
관한한 절반은 전문가가 되어버린
그였으나 의문점은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최박사와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익사한 현장을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역에 산채한 플랑크톤의 분포도를
조사한 뒤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너무 엄청남 방식이긴 했으나 손삼수는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동원가능한 모든 인력을 착출하여 급거
출장을 보내 동해안과 남해안 서해안 등
적국 각지역의 플랑크톤을 샘플로 골고루
채취한 것이다.
동해, 속초, 묵호, 주문진, 울진, 남해,
여천, 서산, 인천 등 지역별로 표기된
샘플은 모두 한꺼번에 모아져 과수소로
보내어졌다.
완벽하진 않았으나 이 정도라면 우리
나라 해역의 플랑크톤 분포도가 대략은
작성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의학 과장실로 들어서자 최상주박사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들였다.
좋은 징조다. 그렇게 직감하여 그도
따라 웃었다.
"결과가 나왔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 이게 다 그동안 손반장님이
쏟은 노력 덕분이오. 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최박사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현미경을
손으로 가리켰다.
"왼쪽의 플랑크톤은 유용치의
십이장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이고 오른쪽이
손반장이 채취한 샘플 중의 하납니다."
현미경에 가만히 눈을 대어보던
손삼수는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해냈다. 잔잔한 감동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현미경의 유리표면에 부착된
두 개의 플랑크톤 샘플은 육안으로
살펴보아도 너무나 똑같은 동일한
종류였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고맙습니다 박사님. 덕분에 시야가
탁트였습니다."
"하하... 그거야 손반장의 집념이 올린
개가가 아니겠소?"
"원 별말씀을..."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처음엔 나도
자신이 없었어요. 손반장 고집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 갔던 거지만... 사실
플랑크톤이란 게 워낙 종류가 많고 다양한
미생물중의 하나에요. 또 분류 방법도 좀
많습니까? 수질이나 수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고 살고 있는 물의 깊이에
따라 다르고 크기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부유하는 방법에 따라 또 달라요. 게다가
이렇게 딱 들어맞는 샘플을 채취해 왔으니
이거야말로 손반장의 공로가 아니고
뭐겠소?"
"그런데 이 샘플은 어디서 채취된
건가요?"
손삼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빙긋
웃음을 머금으며 최박사가 빈병을 하나
맙눼 그 병에는 속초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레테르가 붙어 있었다.
"아니? 그럼... 유용치가 익사한 장소가
속초 앞바다란 말입니까?"
손삼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10. 암호, 풀리다
해운대 비치사이드호텔의 로비라운지
크리스탈 가든은 언제나처럼 화려한
분위기가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홀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무대 위에선
지금 막 등장한 여가수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육감적인 몸매를 흔들어대며
정렬적으로 노래를 뽑아내었다.
가만, 저건 어디서 온 년인가?
무대 뒤쪽의 구석진 좌석에서 칵테일
잔을 기울이던 백합은 흐느적대는 그녀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연노랑색의 짧은 스커트는 그녀의 터질
듯 팽만한 둔부를 감추기에는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현란한 율동이
시작되면서 스커트 속에 숨어 있던 노랑색
팬티가 이따금씩 스커트 밖으로
삐져나오곤 했다.
국산은 아닌가 본데?
백합은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입가로
흘렸다.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그녀의 약간은
가무잡잡한 피부빛깔로 미루어 그
언저리의 태생인 듯 싶었다. 어쩌면
베트남계열인지도 모르지. 백합은 손을
들어 매니저를 불렀다.
키가 껑충한 크리스탈 가든의 매니저가
다가와 허리를 꺾었다. 백합이 다시 한 번
손짓을 하자, 그는 귀를 바싹 갖다
대었다.
"저년 어디서 왔어?"
백합의 손가락 끝이 무대 위의 여가수를
"아, 오키노 말입니까?"
"오키노? 저 여자는 일본인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일본계 필리핀입니다."
"그랬구먼."
백합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의
짐작이 맞았던 것이다.
더이상 분부가 없는 듯하여 허리를
세우는 매니저를 백합이 다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양복포킷에서 지갑을
꺼내어 매니저의 손에 두툼한 지폐를 쥐어
주었다.
"오늘밤에 내 방으로 들여보내!"
자르듯 말을 뱉고 백합은 무대 위의
여가수에게 눈을 돌렸다. 멍하니 서 있던
매니저는 한참만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백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합은 해운대
비치사이드호텔에서 특상급으로 꼽는
손님일 뿐 아니라 그의 비위를 거슬렀다간
어떤 봉변을 당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합은 비치사이트호텔의 오랜
고객이었다. 또 그는 하룻밤 숙박에
백만원을 홋가하는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에
늘상 투숙했다.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은 외국의 국가
원수급이나 재계의 거물급 인사가 아니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처지라 일 년
내내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한
비치사이드호텔의 최고급 특실이었다.
그런 방을 단골로 사용하는 고객의
비위를 거스렸다간 어떤 사태가 생길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힘없는 매니저로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속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콧대높은 외국의 여가수를
구워 삶아야 한다는 건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다.
그는 서둘러 호텔의 야간 당직
총지배인을 찾아 나섰다. 백합의 시선은
여전히 무대 위의 여가수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팝송 메들리를 정열적으로
뽑아내고 있었다. 음악에 문외한인
백합으로선 그녀의 가창 실력을 가늠할
수도 없고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한 낯선
노래들이었지만, 남태평양의 낭만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크리스탈 가든의
독특한 체취에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무엇보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늘씬하게 빠진 몸매는 그를 더욱 흡족케
했다.
노란색의 짧은 미니스커트 아래로 곧게
뻗은 하체의 선율은 그녀가 열창하는
생음악의 선율과는 색다른 매력이 있을 성
싶었다.
오늘은 모처럼 이국적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겠군.
생각만해도 가슴이 뿌듯하게 차 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늘
낮에 느꼈던 불쾌한 감정이 깡그리
씻겨지고 없었다.
"총본부에서 오시는 분이니까 깍듯이
모시도록 해!"
Q의 지령을 받고 서울을 떠나올 때도
백합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가 이 비밀조직에 몸을 담은 지 벌써
십 년,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겨우 그는 조직의 상층부
인사와 대면할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의 지휘계통은 국내 책임을
맡고 있는 Q의 휘하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터이지만
Q만 하더라도 그에게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십 년간 Q를 모시고 있었고
그의 지령을 따르고 있었으면서도 Q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Q의 이름이 무엇이며 Q가 누구인지.
아니 그것은 그가 절대 알아선 안되고
d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철칙과도 같은
불문률 중의 하나였다.
또한 조직을 배신했을 때는 무자비하고
철저한 보복을 당한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였다. 조직에 가입한 이래
Q의 지령에 죽고 살아야 하는 규율만이
숙명처럼 그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다만 Q의 휘하에서 그는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고 그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에게 오늘에야 새로운 지령이
내려온 것이다. 그에게는 바로
서광이었다. 하늘 같은 Q가 겁을 내는
조직의 상층부와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
어쩌면 그에게는 새로운 출세가 보장되고,
지금의 조직체계를 새롭게 재편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에 그는 들떠 있었던
것이다.
<블루버드>
그들은 조직의 통칭을 그렇게 불렀다.
조직원은 그들이 소속된 국가를
초월하여 조직의 이익에만 멸사봉공하여야
하며 조직원은 죽음으로써만 조직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엄격한 규율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본부가 어디에 있고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조직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합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각 나라마다 지부가 있으며 또
전세계를 5등분으로 나누어 각 지부를
관할하는 구역이 있고 그 위에 총본부가
존재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백합이 오늘 만나는 사람은
다섯 명 구역장 중의 한 사람인 아시아
태평양담당 구역장이었다.
암호명 천사라고 불리는 아시아
태평양담당 구역장이 면당상대로 백합을
지적했던 것이다.
Q의 지령을 받고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한
백합은 지시대로 김해공항의 스낵코너에서
가슴에 꽃을 달고 호리우치라는 일본인
여행객을 기다렸다.
호리우치는 바로 천사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부푼 마음을
추스리며 천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천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천사는 커녕
그를 아는 척하거나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조차 없었다.
참을성 있게 자리를 지키던 백합은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오늘의 접선은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울화통을
터뜨릴 대상조차 찾아내지 못한 백합은
내친 김에 호리우치가 타고 온다는 JAL
002편의 탑승객 명부를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탑승객
명부에선 호리우치라는 이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일본항공의 안내창구에서 다시금 확인해
보았으나 역시 허탕이었다.
오늘따라 JAL 002편에 탑승한 일본인
여행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30여 명의 일본인 승객들은
후쿠오카에서 출발하여 동경에서 갈아 탄
셀뉘백합이 내심 점찍을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Q의 지시가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조직에서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걸까?
백합이 씁쓰레한 마음을 달래며 호텔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메모지 한 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약속 장소를
변경한다. 뒷면에 기록된 지시사항을
따르라! 천사로부터."
메모를 읽어 내려가던 백합은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천사의 지시는
랩탑(Lap Top)컴퓨터를 통한
면담요청이었다.
백합은 프론트에서 천사가 맡겨놓은
랩탑을 찾아들고 객실로 돌아왔다. 랩탑은
007백에 딱 들어맞는 소형컴퓨터였다.
객실문을 잠근 백합은 호텔의
메인컴퓨터와 연결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다행히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은 텔렉스
팩시밀리는 물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장치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설치를 마친 백합은 천사가 지시한 전자
사서함의 코드를 두드렸다.
잠시 후 모니터에 천사의 메시지가
나타나면서 그들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사다.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제기랄. 이따위 만남이 기쁘다니,
이래가지고서야 상대방이 남잔지 여잔지,
아니면 어떤 꼴을 하고 있는 작잔지
도무지 알아볼 재간이 없지 않나. 백합은
내심 툴툴거리며 키보드를 눌렀다.
그리고 그의 불쾌한 기색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왜 약속을 변경시켰습니까? 나는
조직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나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미안하다. 우리를 감시하는 눈이 있어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 양해바란다."
"무슨 소립니까? 천사가 감시를 받나뇨?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우리 조직에서
변고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비밀이 새어나간 겁니까?"
"내가 당신을 호출한 것은 바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다. 지휘부에서는
당신을 중용하기로 결심을 했다."
순간 백합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니터를 확인한 후
터져나오는 기쁨을 억제하며 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거야말로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희망 사항이 안닌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는 새삼 결의를 다졌다.
"내가 파견했던 요원 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그것은
한국내 조직의 붕괴를 의미한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누굽니까? 살해당한 우리 조직의
요원이?"
"그건 말할 수 없다!"
백합은 주춤 숨을 몰아 쉬었다. 이것은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배신자를 색출해내는 일이다."
"하지만 전 국내조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자네를 호출한
것이다. 자네가 제일 먼저 할 일은 Q를
제거하는 일이다."
"예?"
백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 그건 하극상 아닙니까?"
"Q는 이미 조직관리능력을 상실한
듯하다."
"Q가 배신자라는 뜻입니까?"
"그건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기 위해 Q를 처단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네가 앉는 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백합은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Q의 정확한
신원을 알려주십시오."
"그건 당신 스스로가 알아내어야 한다!"
"예?"
백합의 손길이 문득 멎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듯 모니터를 빤히 바라
보았다. 모니터에서 천사의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찍혀 나왔다.
"그것은 당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다.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자리를 지킬 능력과 자격이 없다."
한참만에 백합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좆윱"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암호명을 내리겠다. 당신의 암호명은
'불새!', 약자로 F라고 부른다."
"고맙습니다."
"F의 건승을 빌겠다! 천사."
그리고 교신은 끊어졌다.
화상이 사라져버린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백합은 문득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손삼수가 외출에서 돌아오자
도덕록형사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았다.
"반장님!"
도형사가 부리나케 그의 책상으로
건너왔다.
"과장님이 찾으시던데요?"
"날?"
' "네."
손삼수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러졌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수사과장이 계장을
제쳐두고 말단 수사반장을 호출한다는 건
예전에 없었던 일이 아닌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수사상황에 대한 불호령을 어찌 감당할까.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사실 성귀희여사 살해사건과 유용치
살해사건은 스스로가 생각해 보아도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꼴이
아닌가. 이래가지고서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에 대해 그가 직무를
태만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금도 비록 수포로 돌아갔으나
성귀희여사의 사생활이나 의문점에 대한
탐문을 마치고, 합동회계법인사무소에
들러 유용치와 가까왔던 동료
공인회계사들로부터 한 마디의 단서라도
캘 수 있을까 하고 방증수집에 열을
올리고 돌아온 참이었다.
결과는 물론 허탕이었다.
그로서도 이런 사건은 처음이었다.
수사형사 생활이 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그가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인 사건은
처음인 듯했다.
성귀희여사의 해괴한 죽음과 공인회계사
유용치의 의문의 죽음은 그에겐 조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성귀희여사의 죽음도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또하나 의문의 죽음이
등장했으니 그로선 골머리를 싸매지 않을
수 없는 터였다.
물론 두 사람의 죽음은 별개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두 건의 죽음은
신통하게도 합심하여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는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는
도형사의 간절한 눈빛도 눈빛이지만 기왕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 게 좋을 법하다는
생각에 그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수사과장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뜻밖에도 수사과장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아, 손반장. 요즘 고생이 많다지? 자
앉어."
뜻밖의 환대에 손삼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우람한 풍채에 어울리게 멋진
웃음을 흘리는 수사과장을 올려다보았다.
"자, 앉으라니까."
어쨌든 불호령은 면했다 싶은 반가움이
와락 치밀어 그는 절에 간 색시처럼
과장이 권하는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내가 자넬 찾은 건 다름이 아니고
성귀희여사건 말이야."
결국 그 문제로구나. 손삼수는
고분고분한 눈빛을 지으며 수사과장의
입모양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 사건이 어떻게 되고 있나?
지금."
"면목이 없습니다만 수사는 아직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해결될 전망은 없나?"
"해결해낼 자신은 있습니다."
"어허, 수사가 자신만으로 되는겐가?
%현재 상황이 어떤가 이 말일세."
"현재로선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결국 미궁으로 빠지기 쉽겠다 이런
얘기로군."
과장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손삼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꾹 억누르고 과장의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과장은 결론을 유도하는 그의
뜻을 거스르거나 반박할 때는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게 바로 과장의 통솔 방식이어서 그를
정면으로 거스를 뜻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말이야. 그 사건은 이
정도에서 덮어 버리는 게 어때?"
"예?"
너무도 엉뚱한 제의에 그는 과장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방금 자네입으로 그랬잖아. 사건해결이
쉽지 않다구. 괜히 쓸데없는 사건에
수사력과 신경을 쓰지 말구 다른 데로
돌리는 게 어떨까? 이건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과장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딘가
겸연면쩍은 듯 그를 위로하는 어투로 말을
돌렸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듯한 그의 표정을
읽으며 과장은 다시 한 번 반복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은 내 입장에서
할 말이 아닌 줄 잘 아네만, 내 골머리가
아파서 그래, 골머리가."
"아니, 누가 과장님을..."
"자네 며칠 전에 홍해무역의 유사장을
찾아갔다면서."
"그렇습니다."
"어떤 채널로 그런 진정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네만 상부로부터 나한테 불호령이
떨어졌지 뭔가.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엉뚱한 짓거리 말고 수사 똑바로 하라구."
"면목없습니다.
"사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
쪽도 뭐 그리 유쾌한 일이라고 수사가
질질 늘어지는 걸 좋아하겠나? 집안의
창피라도 큰 창피가 아닌가. 그런 사건이
자꾸 여론에 떠오르고 입방아를 찧어대는
건 본인들로서는 죽을 맛일 테지."
""
"게다가 성귀희여사는 간통 현장에서
사망했고 또 사망원인이 페니실린
게 밝혀졌다며?"
"네"
"그렇다면 뚜렷한 살의나 범의가
있었다고 볼 순 없는 문제
아니겠나.어쩌면 친고죄형태의 범죄로도
볼 수 있는 게야. 단지 간통한 정부를
찾아 내지 못했다는 정도인데
피해당사자가 사회적 체면을 고려해서
극구 문제를 덮어줄 것을 요청하니
어쩌겠나?
"그건 안 됩니다!"
버럭 대답을 하고서도 순간적으로 너무
소리가 컸다 싶어 손삼수는 스스로 움찔
놀랐다. 아니나다를까 과장의 안색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안되다니? 뭐가 안된다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 말뜻은
그것은 사회정의에 반하다는 뜻으로..."
그가 말꼬리를 채 있기도 전에 과장의
불호령이 먼저 떨어졌다.
"이 사람아! 그렇게 사회정의를 앞세울
양이면 벌써 며칠 째야? 두 달이 지났어,
두 달이! 그러고도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자네 자신이 창피하지도 않은가?"
"면목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수사력을 언제까지나 그
사건에 매달아 둘 수만은 없어.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그 따위
사건 하나에 매달리고 있어? 오늘
내일까지 해결해낼 수 없을 경우엔
성귀희여사사건 수사본부는 해체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과장실을 물러나와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손삼수의 낯빛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얄궂은 심사를 눈치챈 도형사는
말을 붙여볼 엄두도 못낸 채 멀찍이서
서류뭉치를 들고 부산을 떠는 척하면서
몰래 그의 기색을 훔쳐보기에만 급급했다.
손삼수의 굳어버린 낯빛은 도무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로선 아내의 죽음을 제대로
규명해보려는 노력도 않은 채
덮어버리기에만 급급한 홍해무역의
유재택사장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과장의
우격다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여기저기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과장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부하에 대한 방파제역할은
커녕 직무유기를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부아를 더욱 돋우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텐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아야 하는 경찰조직의 속성에서 이탈할
수는 또한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또
울화가 치밀어 그는 혼자서 속을 끓일 수
밖에 없었다.
김석기가 수사반으로 들어선 것은 그가
울분을 채 삭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마치
땡감을 씹은 사람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김석기가
농담을 던졌으나 그는 짐짓 외면하고
말았다.
어리둥절한 김석기가 뭔가 핀잔을
주려는데 급히 다가온 도형사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직하게
뻔속삭였다.
"지금 반장님 기분은 엉망입니다.
수사과장실에 불려가서 한바탕 당한
모양이에요."
"그래요?"
김석기는 영문도 모른 채 도형사가
손짓으로 귀띔하는 과장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반장님 모시고 나가서 기분 전환 좀
시켜주십시오.
도형사의 간청이 아니더라도 그는
손삼수에게 볼 일이 있는 참이었다.
그는 짐짓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삼수를 흘겨보았다.
"이봐, 동대문에서 뺨맞고 종로에서
눈흘기면 어떡해?"
손삼수는 마지못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나가자구. 내가 오늘은 중요한
정보제공을 할테니까 어쩌면 유용치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지도 몰라."
단서를 제공하겠다는 김석기의 유혹에도
마음이 동했지만 더 이상 사무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억누를 수만도 없을
듯해서 손삼수는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뒷골목의 할머니국밥집
골방구석에 마주앉기 무섭게 김석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죽을 상이
되어 있어?"
""
도무지 입을 열 기분이 아닌 듯
손삼수는 침묵만 지켰다.
"이봐!"
"그보다 자네 정보라는 게 뭐야?"
마침내 터진 그의 말문이 너무
엉뚱하다는 듯 김석기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먼저 물었잖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일세.
자네하곤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니, 이 친구가... 그렇다면 나도 말
못해!"
이번에 손삼수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성귀희여사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덮어버리라는군."
"과장이?"
"음."
"그래서? 자네도 그대로 따를
생각이야?"
"어쩌겠나? 상황이 상황인걸. 일반
관례로 봐서도 한 달내에 해결해내지 못할
경우엔 수사본부가 해체되지 않나. 과장이
그 문제로 압력을 많이 받는 모양이니
어쩌겠나."
"도무지 자네답지 않은 소리로군."
손삼수는 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망했는데? 자네한테."
"내 입장이 되어 봐. 자네도 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수사본부는 해체해야 돼.
그렇다고 내가 그 사건을 아주 포기한 건
아니야."
"그럼?"
"수사본부는 해체하더라도 내가 아니면
도형사 혼자 전담시켜서라도 그
사건만큼은 붙들고 늘어질 생각일세."
"모처럼 듣기좋은 소리 한 번 하는군."
"그나저나 뭔가? 자네 정보란 게?"
"아참 그랬지."
김석기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취재수첩 갈피에 끼워두었던 도표가
그려진 메모지를 꺼내어 손삼수에게 내어
밀었다.
도표에는 이상한 부호와 부호를 풀이한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로
우춘구의 메모지에서 발견된 암호문을
풀이한 도표였다.
손삼수의 시선이 문득 홍해강철그룹이란
낱말에서 우뚝 멎었다.
그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는가 싶더니만
금세 영문을 모르는 듯한 얼굴로 김석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감각을 지닌 여자였다.
아니 차라리 관능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는 표현이 옳을는지도 몰랐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콧소리를 뿜으며 즉각 반응을 보였고
부드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정염의
소유자였다.
백합이 손을 뻗을 때마다 그녀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에게 덤벼들었다.
대단한 여자다.
평소 절륜의 정력을 지닌 사내라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눈 앞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새삼 탄복하는
기색이 여실히 어려 있었다.
그러니까 크리스탈 가든의 매니저가
그의 지시대로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에
그녀를 들여넣어준 것은 자정이 막 넘을
무렵이었다.
매니저는 그녀를 설득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는 공치사를 빠뜨리지 않았고 그는
두툼한 팁을 매니저에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거창한 스위트룸에 혼자
투숙하고 있는 사내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새삼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가 권하는 칵테일잔을
서슴없이 들이켰다.
술잔을 마주 기울이며 백합은 그녀의
외모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선명한 눈망울과 오똑한 코.
자그마하면서도 붉은 입술 속에서 간간이
엿보이는 가지런한 치열, 그리고 갸름한
얼굴 양켠의 오목한 보조개는 사내를
뇌쇄시킬 만큼의 매력을 한껏 담고 있는
듯했다.
뜻밖에도 가까이서 본 그녀는 도무지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난 미인이었다.
긴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이국적이면서도 이지적인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에 백합은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그것은 평소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여자라면 노리개 정도의 존재로만
취급하며 지금껏 독신을 고집해온 자신이
아닌가.
냉혹하고 비정한 그의 성품은 상대가
여자라 하더라도 가차없었다.
그런 백합이 가슴이 떨리다니.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일면을 스스로
발견한 듯하여 더욱 놀라웠다.
이 여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순간 그는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그러나
그런 내심은 깊숙이 묻은 채 그는 표정을
숨겼다.
"우리 나라에는 언제 왔습니까?"
"한 달쯤 됐어요."
"이 호텔 크리스탈 가든의 무대에 선
건?"
"오늘로 일주일째에요."
그녀는 술잔을 입에 대며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흠, 이 부산 바닥에서 썩고 있기엔
아까운 솜씨던데?"
그녀는 칭찬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냈다. 순간 보조개가
옴폭 패이며 그의 마음을 왈칵
잡아끌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탯억눌렀다.
"서울의 무대에 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소?"
"여기가 어때서요? 전 장소가 어디든
제가 설 수 있는 무대만 있다면
만족해요."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노래를 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십 년쯤..."
아직 서른은 되어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10대 시절부터 노래를 했다는
걸까? 어림잡아 계산을 하던 백합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활동무대는 주로 어딥니까?"
"동경과 마닐라, 홍콩, 제 마음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죠."
"인기도 꽤 얻었겠군요."
"별루예요. 워낙 한 군데 붙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변변한 레퍼터리도
없어요. 절 밀어줄 스폰서도 없었지만
인기를 얻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도
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어쩌면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체념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정말 인기따위는
달관해버린지도 몰랐다.
"오키노 씨!"
"예?"
시선을 천정에 던지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마주보았다.
"내가 당신의 스폰서가 되어주면
어떻겠소?"
"?"
그녀는 선뜻 이해가 가지않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의 부와
풍요를 누리게 해주겠소.
인기까지도 말이오. 나는 내가
마음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물론."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텐데요?"
"그 따위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오.
그딴 건 알 필요도 없소. 문제는 내가
당신이 좋아졌다는 사실이오."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합
역시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끌어
당겼다. 그녀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 솔직하신 분이군요."
"나는 여러 번 말하는 건 싫어하는
사람이오. 예스, 노 두 마디 중 하나만을
듣고 싶은 거죠."
"좋아요. 선생님을 믿기로 하겠어요."
"고맙소. 우리의 뜻깊은 만남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그들은 단숨에 술잔을 비워 냈다.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기쁨을 나타내었고
그는 와락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녀 역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술을 더듬던 백합은 한 입
가득 물고있던 술을 그녀의 입 속으로
흘려넣었다.
"아이 참..."
그녀는 도리질하며 눈을 흘겼지만
싫지는 않은 듯 더욱 그의 품 속으로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은 채 양탄자 위를 함께
뒹굴었다.
백합은 그녀의 허리춤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속살을 더듬었다. 매끈한 살결이
손길에 닿는 감촉과 함께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더욱 손을 뻗어 그녀의 봉긋 솟은
가슴을 움켜쥔 백합은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다음 순간 백합은 성급하게 그녀의 옷을
벗겨내었다.
한 겹, 두 겹, 그녀의 꺼풀이 벗겨질
때마다 백합은 탄성을 발했다. 마지막
남은 헝겊조각을 벗겨낸 순간 백합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나신은 백합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의 극치였다. 백합은 그렇게
느꼈다.
참을 길없는 욕망을 느끼며 백합은
서둘러 몸에 걸친 가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황소처럼 거칠게 그녀의 몸을
내리눌렀다.
그의 사내가 그녀의 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움찔 굳어 있던 그녀는
이내 기성을 발하며 적극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환희의 나락으로 접어들기가 몇 번일까?
도무지 지칠줄 모르던 그녀의 정염도 창
밖으로 희미하게 먼동이 터올 즈음에야
한풀 꺾이는 듯했다.
포만감을 느낀 그녀가 몸을 바로 누울
즈음, 백합은 노곤한 탈진을 느끼며 깊은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핏 정신이 돌아온 것은 창
밖이 훤히 밝아올 무렵이었다.
옆자리에는 벌거벗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그녀가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백합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쾌한 아침이다. 백합은 그렇게
느꼈다.
어젯밤 천사와의 접선으로 그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약속되었다. 단 한가지
사족처럼 붙어 있는 단서만 해결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단서란 것도 사실
그로선 해결못할 일도 아니다. 지금껏
그에게 불가능이란 말은 없었지 않는가.
게다가 지금 그의 침대 위에서 천사처럼
잠들어있는 일본계 필리핀 여가수
오키노는 마치 하늘이 내려준 선녀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 이러니 어찌 상쾌한 아침이
되지 않겠는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알몸 위에
가운을 걸쳤다.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세면을 마친 그는 어젯밤에 먹다
남은 양주병을 들고 바다쪽으로 면한
테라스로 나갔다.
탁 트인 드넓은 아침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술맛은 일품이었다.
짜릿한 액체가 목젖을 타고 넘어가면서
그는 더욱 흥겨운 기분이 되었다. 천하를
한 손에 얻은 기분이 어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른 후 백합은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길게 몸을 뉘였다.
싱그러운 바다내음과 상쾌한 바닷바람이
전신을 휘감아오자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했다.
자, 이제 무엇부터 시작한다?
천천히 술잔으로 입술을 축이면서 그는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우선 오키노를 서울로 끌어올리는 일이
급선무다.
오키노 본인의 의향을 직접 들어
보아야겠지만 우선 왕궁클럽에 데려다
놓을까?
아니야, 그건 안될 말이다.
백합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혼자서 독차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왕궁클럽은 이목이 많을 뿐만
아니라 번거롭기 짝이 없다.
게다가 오키노처럼 아까운 여자를 그런
곳에서 때를 묻힐 필요는 없다.
그래, 일단 서울의 내 숙소 부근에
거처를 정해놓고 장래 거취문제를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본격적인 가수로 데뷔하기에는 나이로
보나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신분으로 보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가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럴 듯한 유흥업소를 하나
차려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는지도
모르겠다.
오키노의 진로를 대충 결정한 백합은
이번에는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았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문제는 천사의
지시대로 Q를 제거하는 일이다.
Q를 제거한다!
그에게는 엄청난 행운이기도 하지만
기실 호락호락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우선 Q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만
하더라도 난제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Q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은 천사의
처사가 야속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한다는 데는 더이상
반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합은 담배를 찾아 불을 붙여물고 길게
연기를 뿜어 내었다.
지금껏 Q와 그의 연결고리는 단 한 개의
전화번호뿐이었다.
545-789X.
Q가 그에게 전화를 통하여 지시를
내리든가 아니면 그가 전화를 하여 Q를
불러내는 게 그들의 유일한 접선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전화연락을
중개하는 정체불명의 여인이 끼어 있다.
어쩌면 그 전화번호는 Q의 저택이나
사무실이 아닌 중개인 역할을 하는 장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가 Q를 호출했을
때 단 한 번에 그와 접선이 된적은 한
번도 없었던 듯했다.
용의주도한 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화를 받던 여자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Q에게 전혀 눈치를 채이지 않고 그의
신원을 파악하자면 이쪽에서도 그만큼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백합은 담배연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때 인기척이 들려오면서 백합의
상념이 깨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백합이 탄성을
발했다.
그의 눈 앞에서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생긋 웃고 있지 않는가.
싱그러운 바닷바람과 아침햇살에
반사되어 생동감 넘치는 그녀의 몸매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다시금 불끈 치솟는 자신의 사내를
느끼며 백합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뭔가?"
손삼수가 메모지를 흔들며 반문을 했다.
,그의 표정에서 궁금증이 가득 묻어
나왔다.
김석기는 빙긋 미소를 흘리며 메모의
내력을 천천히 설명해 나갔다.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에서 빚어졌던
우춘구와 윤정님의 비극적 사건, 그리고
윤정님과의 우연한 해후, 또 연속적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는 윤정님을 보호하게 된
계기며 유용치의 만남, 그리고 유용치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의 절망감.
김석기는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든 손삼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윤정님이 집단폭행을 당하고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협박을 당하는 대목에서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함게 울분을
토로했다.
김석기의 이야기가 끝을 맺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골방에 마주앉은
그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쪽으로
밀쳐놓은 해장국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
버렸고 상 위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담긴
재떨이와 빈 담배갑만이 잔해처럼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이건 마치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군."
한참만에 손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셈이지."
김석기도 맞장구를 쳤다.
"이 무심한 친구야. 그런 이야기를 왜
진작 해주지 않았어?"
"미안해. 하지만 그럴 틈이 있었어야지,
자네도 좀 바빴어?"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다행이야. 이제 나머지는 경찰에 맡겨."
"무슨 소리야?"
"놈들이 그렇게 대담하게 설쳐대는 걸로
봐선 아마 대단한 범죄조직 중의 하나가
틀림없어. 그런데 공권력도 없는 나약한
두 사람이 그런 범죄조직을 상대로
싸운다는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내 생각은 달라!"
"?"
"경찰처럼 공개적으로 그 놈들을
쫓다가는 도리어 큰 코 다치기 십상일걸?
아니면 놈들은 아예 영원히 지하로 잠적해
버릴지도 몰라. 그런 면에선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우리쪽이 더 안전해."
"그건 무모한 짓이라니까!"
"어쨌든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줘. 부탁이야. 그리고 자네 힘이
필요할 때는 내가 직접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으음..."
손삼수는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 내었다.
김석기를 믿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어쩐지 이번 만큼은 위태로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메모지를 보고 느껴지는
게 없나?"
손삼수의 기색을 눈치 챈 김석기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손삼수는 다시
메모지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메모지 한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여기 홍해강철그룹 속에는 홍해무역도
포함되는 건가?"
"물론."
"어쩐지 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순간 김석기와 손삼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우춘구 씨의 투신은 윤정님 씨가
집단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인해 빚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제주경찰은
수사결론을 내렸어. 그러나 당사자인
윤정님 씨는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해.
남편이 자살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내 생각에도 그래. 우춘구는 자신의
형편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많은 유산을 남겼어. 그것도
도무지 정상적인 수입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금액이야. 그것은 우춘구
씨가 생전에 음성적인 수입원이 있었거나,
흑막에 얽힌 부정한 돈을 움켜 쥐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우춘구 씨는 놈들에 의해
감쪽같이 제거당한 셈이지. 여기 있는
우춘구의 메모가 바로 흑막의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몰라. 만약 나의
추리가 성립된다면 이 메모는 훌륭한
단서가 되는거구. 홍해강철과 P.&
B코리아, 이 두 회사 중의 하나이거나
아니면 두 회사 모두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
묵묵히 듣고 있던 손삼수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홍해무역도 마찬가지야. 유재택사장은
성귀희여사의 죽음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냉담하게 대처하고 있어. 도리어
.경찰수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압력을 넣고
있지 않나. 내가 분개하는 건 바로 그
점이야!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서 몸을
섞고 살던 자기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가 이말이야."
"그쪽도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군."
"그래, 이 메모지가 어쩌면 오비이락이
되거나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성귀희여사의 죽음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구린 냄새가 나."
"그런 뜻에서 유용치 사건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손삼수가 문득 무릎을 쳤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치 못했어.
나는 지금까지 성귀희사건과 유용치사건을
별개의 사건으로 분류해 왔어. 그래서
지금껏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 메모지가 단서로서의
진실성만 확보된다면 이 두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될 수 있을
거야. 틀림없어."
"그런데 놈들이 유용치를 왜 살해해야
했을까?"
"우춘구의 죽음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유용치가 윤정님 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우춘구의 과거 행적을
캐던 중에 아마도 어떤 냄새를 맡았다면?
놈들은 당연히 유용치마저 제거하지 않을
수없었을 테지."
"그렇군."
"이제 뭔가 조금씩 감이 잡히는 것
같아."
"아참, 또 한가지 자네한테 부탁할 게
있어."
"?"
손삼수는 눈빛을 발하며 김석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기억 속에는
과장과의 불쾌했던 면담은 까맣게 지위진
듯했다.
김석기는 약간은 흥분한 듯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손삼수에게 또 한장의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홍재오리혹해택천히내강비
만송사철자불금요유금취의망
"이건 또 뭔가?"
메모지를 들여다보던 손삼수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그것도 우춘구의 유품에서 찾아낸
메모야."
"뭐야?"
"그걸 풀어보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도무지 알아볼 재간이 있어야지."
"나, 원, 우춘군지 뭔지 이 친구,
암호를 어지간히도 좋아하는군."
어이가 없는 듯 손삼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춘구는 평소에 비밀이 많았던
사람같아. 그래서 남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호나 암호문을 즐겨 사용했을
테지."
"알았어. 프랑스 거지들의 암호를
도용해서 쓸 정도라면 이것도 그다지
어렵거나 난해한 암호문은 아닐 거야.
어떤 방식인가만 밝혀내면 금방 원문을
조립해낼 수 있지. 암호해독반에 넘기면
금방 밝혀져. 그럼 해답이 나오는 대로
자네한테 연락할게."
손삼수와 헤어진 김석기는 곧장
신문사로 돌아왔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어선지 편집국
내부는 파장을 맞은 장터처럼 한산했다.
각 부서마다 한두 사람 정도의 인원만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제각각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회부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 털썩 주저 앉으며 그는 외부의
연락사항이 없는가 하여 고무판 옆에
끼워둔 메모지에 먼저 눈길을 던졌다.
15시30분, 알파에서 전화옴.
빠르게 휘갈겨 쓴 악필로 보아 아마도
석광현기자가 남긴 메모인 듯했다.
알파가 전화를 하다니, 그는 천천히
전화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다이얼의
버튼을 또박또박 눌렀다.
알파라면 윤정님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만 내밀하게 약정해둔 호칭이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어의 첫 글자인 알파와 유난히
의미를 부여한 김석기는 그가 첫 번째로
마음을 둔 첫 여자인 윤정님에게 그런
별칭을 붙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못본지도 벌써
이틀은 된 듯했다. 그러나 신호음이
한참을 울리도록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
기척은 없었다. 다시 신호음이 서너번 더
울린 후에야 그는 마지못해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외출을 한 걸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설마 별 일이야
있을라구. 그는 문득 치미는 조바심을
간신히 억눌렀다.
내가 이거 무슨 방정맞은 생각이람.
그는 세차게 내저으며 잡념을 떨치려는
듯 책상 서랍을 열고 원고뭉치를 꺼내어
책상가득 펼쳐 놓았다.
오전중에 쓰다가 접어둔 사회질서회복에
대한 캠페인 성의 특집기사였다.
나날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차량과
혼탁한 교통질서의 서울의 거리는 극심한
교통지옥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출퇴근시간 러시아워때의 교통혼잡은
참혹한 전쟁이나 진배 없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보다는 걸어가는
게 차라리 빠를 정도였고 과부땡빚을
내서라도 승용차를 마련해야겠다는
국민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보다못한 그는 교통질서 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데스크에 진언하여
질서확립 캠페인 추진의 승낙을 받아내어
기사집필에 막 착수할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볼펜을 집어 들었으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듯 원고지는
한줄도 메워지지 않았다.
윤정님의 그늘진 얼굴만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볼펜을 집어던진 그는 다시 전화통을
잡아 당겼다.그러나 신호가 가는데도
상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산란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말았다.
회사를 빠져나온 그는 신문사 뒷골목에
붙어있는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우선 저녁이나 때우자.
조금도 급할 것이 없는 기사였다. 그는
일단 저녁을 먹으면서 천천히 머리속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국밥 한그릇을 시켜놓고 막
수저를 들려는 찰나였다.
삐...
별안간 열구리에서 삐삐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급히 허리춤을 열고 무선수신기를
들쳐보니 손삼수의 전화번호가 디지틀에서
깜빡이고 있지를 않은가.
손삼수다! 암호해독이 끝난 모양이다.
그는 전광석처럼 식당의 카운터 앞에
붙어있는 전화통으로 내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삼수의 호탕한 웃음이
우선 귓전를 때렸다.
"이봐! 풀었어! 드디어 풀었다구!"
홍재오리혹해택천히내강비
만송사철자불금요유금취의망
"이것좀 봐, 알고보니 간단한
암호문이지 뭐야. 일명
전치식()이라는건데 ,
이렇게 세로로 읽으면 우춘구의 암호문이
되지, 그러나 1,2,3,4,5, 이렇게 가로로
이게 바로 이 암호문의
해답이야. 어때?"
손삼수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함박
머금은 채 암호문을 풀이해 주었다.
김석기는 긴장한 얼굴을 풀지않은 채
암호문에 담기 행간의 의미를 풀이하는 데
열중하였다.


11. 납 치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염려의 말과는 달리 서류봉투를 건네는
차준복소장의 표정에선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윤정님은 다소곳이 서류봉투를 받아
들었다.
"수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봉투를 열어서 확인을 해 보십시오.
미심쩍은 데가 있으면 저희들이 다시
조사를 해야 하니까요."
차소장은 공치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빙긋 웃음을 머금을 뿐, 재차 서류 확인을
권했다. 그는 평판만큼이나 확실하고
빈틈이라곤 없는 사람인 듯했다.
망설이던 정님은 재촉에 떠밀리듯
봉투를 열었다.
바깥 사무실의 직원들조차 모두 퇴근한
듯 코아 에이전트 소장실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정님이 서류를 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적막을 흔들어댈 뿐이었다.
차소장은 창 밖으로 어둠에 싸여있는
밤거리에 시선을 던진 채 움직일 줄
몰랐고 정님은 명단을 확인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의 흘렀다.
명단을 쫓던 정님의 시선이 이따금씩
움찔 멎었다간 이내 다음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녀가 우선 확인한 것은 투숙객들의
직업란이었다.
혹시 남편의 업무와 연관성이 있거나
남편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자가 있지나
않을까? 정님이 관심을 둔 것은 바로 그런
쪽이었다.
이윽고 정님은 서류를 덮었다. 그제서야
차소장은 시선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비점은 없습니까?"
"잘된 것 같아요... 그런데 소재 파악
불능자가 여섯 명이나 되는군요."
"네. 그 점에 대해선 여기 명부를 따로
작성해 두었습니다. 9056호
이기태 손명호, 9057호 박노철 박정국,
9058호 사명두 안판호, 세군데 방에
나란히 투숙한 이 사람들은 투숙객 명부에
기록된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모두
허위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저희들
나름대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혹시
'인적사항이 비슷한 사람을 골라내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역시 허사로
돌아갔어요. 그 사람들은 모두 가명을
기재 했거나 아니면
불성실 기록자들이죠."
"여섯사람이 나란히 투숙했다는 게
어쩐지..."
"바로 그 점에 의문을 느끼고 저희들이
하야비치호텔에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
"그 사람들이 투숙했던 9057호실 앞에서
우춘구 씨가 추락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순간 정님은 숨을 삼켰다. 등줄기로부터
솟아오른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우춘구 씨의
죽음이 타살이 확실하다면 아마도 그 방에
투숙했던 놈들의 소행으로 보여집니다.
자기들 방 앞에서 사람을 추락시킨다는 건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만 우춘구
씨가 소리를 질러 발악하거나 반항할
경우의 위험을 감안한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
"그런 사실들이 어째서 수사초기에
체크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앞서는군요."
"어쨌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차소장의 말을 자르듯 막고 정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실체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자극했고, 어쩌면 차소장의
다음 말이 더욱 그녀를 충격으로 몰아
세우지나 않을까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총총걸음으로 코아 에이전트를 빠져나온
정님은 그길로 길동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의 도어록을
이중삼중으로 걸고서야 안정이 되는
자신을 느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채 그녀는 한동안
맞은편의 거실 벽만을 응시하였다.
별로 치장을 하지 않은 벽지만이 하얗게
남아있는 벽면이 오늘따라 더욱 스산하고
휑뎅그렁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저 벽에 그림이라도 하나 갖다
걸어야 할까 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의 사실 확인에 가슴이
팔딱거리고 흥분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못나빠진 자신에 대한 한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정신차려 이년아! 그렇게 나약해 빠져서
그 끔찍한 놈들과 어떻게 싸울 생각이냐!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부시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다시 서류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투숙객 명부를 빼내어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투숙객 명부에서 의문점이 가는 사람을
빼내는 일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의 일차적인 용의자 선정기준은
우춘구의 메모에서 나타난 P.B코리아와
홍해그룹과의 관련자, 그리고 남편
우춘구의 직업과 동일한 직업을 가진
공인회계사였다.
그러나 그녀가 심사숙고하여 한참만에야
뽑아낸 인물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짹새롭게 별표를 만들어 그들의
명단과 인적사항을 기록하였다.
7014호/ 김두태(40)|홍해무역사장
출장중, 출장이유 알 수 없음. 비서실장
사건 다음날 상경
7036호/ 성기용(58) 국회의원 휴가차
제주도 하야비치호텔 투숙 사건 다음날
상경 묘령이여인-성기용의 내연의 처로
보임(30대) 성명불상, 성기용과 함께 투숙
사건후 3일간 계속 묵음
7037호/김종욱(39) 성기용 의원 사건 다음
날 함께 상경 안희갑(41) 보좌관
무엇보다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김두태라는 인물과 성기용의원이었다.
김두태는 홍해무역 유재택사장의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에 있는 바쁜 몸이다.
그가 무슨 일때문에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해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대기업의 비서실장이라면
사장의 분신과 다름없는 직책이다.
비록 유재택사장이 해외출장중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한가한 제주도 출장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다.
사장이 유고상태라면 비서실장은 더욱
자리를 지켜서 사장공석의 업무를 메워야
함은 자명하다. 그러한 위치의 그가
제주도까지 출장을 왔다면 사장의 지시에
의한 출장이거나 뚜렷한 목적이 있을
터이다.
과연 그 목적이 무엇일까?
정님은 그 점에 의문을 느끼고 그의
이름앞에 의문부호를 붙였다.
다음은 정치인 성기용이다.
그가 유재택사장과 장인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가 내연의 처와 보좌관을
거느리고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한
것은 그의 딸, 그러니까 유재택사장의
부인인 성귀희여사가 우이동의 어느
산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직후이다.
가정적으로 엄청난 변을 당한 사람이
제주도에서 한가하게 휴가를 즐겼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물론 정치인이므로 가정소사에는 대범한
구석도 있을 터이고 울화를 삭이기 위해
휴가를 떠났다는 변명도 세움직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게 그녀의 솔직한
D감정이었다.
성귀희여사의 죽음은 그녀가 서울로
올라와 마음을 정리한 후 묵은 신문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신문기사의
구절에서 읽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나처럼 불행한 여자가 또
있었구나 하는 연민의 정을 느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하나의
의문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딸의 죽음에 초연한 아버지.
그러한 부정()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그녀는 성기용의
이름 앞에도 의문부호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두 사람은 하야비치호텔의 7층에
투숙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사건직후 호텔을 떠나 바로 상경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일치를 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호텔에서의 만남이
없었을까? 그들은 얼굴을 맞대면 서로 알
만한 처지가 아닌가.
혹시 그들은 모종의 밀회를 나누기 위해
같은 호텔에 투숙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과연
그들중의 한사람이, 혹은 두 사람 모두가
우춘구 살해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었다.
정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강한 심증을
느꼈다.
아직 뚜렷한 혐의점은 발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중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9056호, 9057호, 9058호에 투숙했던 행동
요원들이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는
가설만은 훌륭히 성립될 듯 싶었다.
과연 누구일까?
정님은 문득 외로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옆에 누군가라도 있었으면 속시원히
가슴을 터놓고 싶은 심정이 그녀에게
추위를 느끼게 했다.
팔짱을 낀 채 가슴을 안고 거실을
서성이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김석기의 신문사로 전화를 넣어
보았으나 부재중이라는 답변이 그녀의
가슴을 더욱 허전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하숙집으로 전화를 넣어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허탕이었다.
당장은 김석기를 수배하는 일이 수월치
않은 듯하여 정님은 스웨터를 걸쳐입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혼자 방 안에서 오두마니 외로움을 타고
있는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온사인이 휘황한 천호동의 환락가를
배회해 보았으나 허전한 마음은 도무지
메워질 줄 몰랐다.
잠시 바람을 쐬면 풀어질 듯 하던
가슴은 더욱 더 오므라지는 듯만 했다.
자신도 모르게 택시를 세운 정님은
빨려들 듯 택시 좌석으로 뛰어들었다.
"압구정동으로 가주세요."
딱히 압구정동으로 가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불현듯 우춘구와의 짧은 추억이
서려있던 압구정동의 아파트가 그녀의
의식세계를 온통 지배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아파트를 둘러보면
마음이 가라 앉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그녀의 마음은 무작정 압구정동으로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옛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얼굴에 생기가 돌고 가슴은
설레는 듯했다.
압구정 아파트 압구에서 내린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낯익은 상가건물과 가로수들이 그녀를
반기듯 눈 앞에 펼쳐져 있있다.
오랜만이야. 정말 반갑구나.
그녀는 마치 졸고 있는 듯 서 있는
가로등에도 정겨운 눈빛을 보이며
천천히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러나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그녀는 현관입구의 경비원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 경비원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목을 빼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제지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도를
했다.
그러나 현관문을 따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의 달콤한
환각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실은 물론 안방과 건넌방까지 집안은
온통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에는 붉은색
립스틱으로 흉측한 글자가 써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마라!"
뚫어져라 경고문을 바라보던 정님은
화장품 한 병을 집어들어 발악하듯 거울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거울이 깨어지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무엇보다 그녀에게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주는 청량제 만큼이나 시원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 길로 아파트를 뛰쳐나온 그녀는
한걸음에 길동의 보금자리로 달려오고
말았다.
그리고 기나긴 밤을 악몽 속에서
뒤척이며 잠을 설친 그녀는 아침이 되자
서둘러 집을 빠져 나왔다.
우선 코아 에이전트를 들른 정님은
차준복소장에게 새로운 일감을 맡겼다.
바로 김두태와 성기용의 뒷조사를
부탁하는 일이었다.
회색빛의 야트막한 5층 건물을 흘깃
올려다보던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려
도로변에 면해있는 공중전화부스 안으로
빨려들듯 스며들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생각을 가다듬은
그는 동전을 집어넣고 또박또박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가 떨어지더니 이내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여보세요?"
"미스터 백입니다. Q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선생님은 출장 중이십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외국으로 나가셨기 때문에 정확한
일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전화드리죠."
수화기를 내리며 백합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외국 출장중이라니, 그로선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다시 한 번 건물을 올려다 본 백합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회색 건물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빌딩의 1층에는 커피숍이
자리잡고 있었다.
커피숍의 문을 밀고 들어선 백합은 우선
전망 좋은 창가의 구석진 자리를
골라잡았다.
맞은 편 빌딩의 현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됐어, 이 정도면. 백합은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엽차를 날라 온
아가씨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과연 그의 짐작대로 창가의 좌석은 앞
건물의 들고 나는 출입자들을
감시하는데는 안성맞춤의 자리였다.
레지가 이내 커피를 날라왔다.
퇴근시간이 임박한 듯 다방 안은
들락날락하는 손님들로 제법 흥청대는
분위기였다.
흘깃 살펴본 손목시계는 다섯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백합은 느긋한
기분으로 좌석등받이에 몸을 묻고 뜨거운
커피를 홀짝 거렸다.
지금껏 그가 알아낸 바로는 그 사무실의
퇴근시간은 여섯시였다.
그 사무실이란 다름 아닌 그와 Q의
전화를 연결시켜 주던 전화번호의
소재지였다.
그 주소를 알아내는데도 그는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전화번호의 소재지와 가입주를 알려주길
꺼리는 전화국 직원을 구워삶느라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결국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슬쩍 건넨 돈봉투에 전화국
직원은 항복하고 말았다.
어느쪽이 효력을 보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알아낸 주소가
강남구 청담동 홍강빌딩 501호, 전화
가입주는 강성열이었다. 그로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장답사겸 둘러본 문제의
주소지에는 엉뚱하게 정치문제 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외판원으로 가장하여 사무실 안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러나 거창한 간판과는 달리 제법 넓은
사무실 안에는 20대 후반쯤은 되었을 성
싶은 여자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떼를 쓰는 척 하면서
대충 분위기를 훑어 보았다.
20여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무실은
벽면으로 가득 늘어선 책장 속에 각종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는 폼이 제법
연구실의 분위기는 풍기고 있었다.
문에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창가에는
제법 큼직한 집무책상이 자리잡고 있었고
한쪽 켠으로 올망졸망한 캐비닛과
철책상이 서너 개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사무실의 중앙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응접소파였다.
제법 무게있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듯
응접소파세트는 가죽으로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었다.
일단 사무실을 물러나온 그는 이번엔
주변을 통한 탐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사결과가 조금씩 나타나면서
그는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그 사무실의 주인은 정치인
성기용으로 밝혀진 것이다.
정치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은 비록
형식적이었지만 그곳은 그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는 계보들이 들락거리며 사랑방
구실을 하는 사설 사무실격이었던 것이다.
며칠간의 탐문을 마친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우선
상대가 녹녹한 인물이 아니란점이 마음에
걸렸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그에게 돌아올 후환이 자꾸만 그의
마음 한구석을 찔렀다.
미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가 결국 마음을 다잡아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은 천사의 재촉을 받고서였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양복상의 포킷에
감쪽같이 들어있는 메모에 그의 눈은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서둘러야 합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누가 감히 그의
몸에 접근하여 이런 메모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되씹어 보고
머리를 굴려보아도 깜쪽같이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작자는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어쨌든 천사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린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섬뜩함을
함께 느꼈다.
더 이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계획해 두었던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다방 안은 여전히 혼잡스러웠다.
가끔씩 시계를 들여다보는 등 손님을
기다리는 시늉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건너편 회색건물의 현관에 박혀
있었다.
시계바늘은 여섯시 오분을 막 지나고
있었으나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퇴근이 늦어질 모양이군' 그는 마음을
추스리며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녀의 이름은 정지숙(), 당
28세, 충남 홍성 출신으로 정치문제
연구소에는 5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또 여자로선 드물게 K대 법학과를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가
어떻게 이따위 건달패들의 모임 같은
사무실에서 썩고 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사실 그로선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오늘밤 그녀를 납치하여 그녀의
입에서 Q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가 하숙하고 있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덮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는 이내 단념을 하고
말았다.
자칫 남들의 눈에 뜨일 서투른 수작을
할 수는 없다. 퇴근길에 완전무결하게
증발을 시켜야만 한다. 그는 그렇게
계획을 고쳐 잡았다.
여섯시 15분.
짜증스럽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회색건물의
현관에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백합은 서둘러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푸른색 체크무늬의 투피스로 정장을 한
정지숙의 뒷모습이 저만치에 보였다.
"잠깐만요. 정지숙 씨 맞죠?"
한달음에 그녀를 따라잡은 백합은 짐짓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세웠다.
"누구세요?"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첨졍맘
"홍해강철 회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미스터 조라고 합니다."
"네, 그러세요?"
그녀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경계심이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길이 어긋날 뻔했군요.
십년감수했습니다."
그는 더욱 너스레를 떨며 환하게
웃었다.
"저희 회장님께서 성기용의원님께
전해드리라는 중요한 서류봉투가
있습니다. 그걸 오늘 중으로 인수해
가셨으면 합니다만."
"무슨 서류예요?"
"죄송합니다만 봉투가 봉해져 있어서
저는 속을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두툼한 걸로 봐서는 수표같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 좀 가 주십시오."
"어쩌나... 의원님도 안계신데..."
"미스 정이나 의원님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은 늦었는데 내일 인수하러
갈게요."
"크, 큰일 날 말씀마십시오. 우리
회장님 불같은 성질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시면 제 목이 남아나지 못합니다."
그는 짐짓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저기
세단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정, 그러시다면..."
그녀는 마지못한 듯 따라 나섰다.
그는 펄쩍 뛰며 허리를 굽히고 급히
앞장을 섰다.
그녀는 건물옆 큰 길가에 주차해 있는
아오디500의 늘씬한 자태에 감탄의 눈빛을
발했다.
그리고 백합이 문을 열어주자
스스럼없이 차에 올랐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엄청난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도산대로를 지나 영동대교
인터체인지에서 유턴을 하여 방향을 바꾼
세단은 곧장 올림픽 대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새단은 무서운 속도로 미사리를
향하여 질주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달콤한 환상에 젖어있던
지숙은 그제서야 이상한 듯 백합을
"이건 회사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잠자코 있어!"
백합의 입에서 음산하리만큼 싸늘한
대답이 흘러 나오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다, 당신은 누구예요?"
"잠자코 있으라니까!"
"아, 안 돼요. 나 여기 내려줘요."
"흐흐... 내릴 테면 내려보시지!"
그녀가 허둥지둥 도어 핸들을
잡아챘으나 도어록은 굳게 잠긴 듯 끄떡도
않았다.
"부탁이에요. 절 제발 여기서 내려
주세요."
"이 쌍년이 자꾸 떠들 거야?"
백합의 커다란 주먹이 날아와 그녀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그녀는 실성한 듯 그
주먹을 잡으며 허우적거렸다.
순간, 그의 손에 쥐어있던 손수건이
그녀의 얼굴을 덮으며 강한 향기가 그녀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의 사지는 금세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느낌 때문에 얼핏
눈을 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기겁하듯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발가벗겨진 채 침대 위에
나뒹그라져 있지 않는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의 양팔과 두
다리는 끈으로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좀전의 그 사내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치심에 몸을 웅크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 악마."
"흐흐... 뭐라고 앙탈을 부려도 좋아.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해 둬. 지금
이 순간부터 너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내
손에 있다는 걸 말이야."
"도대체 누구예요. 당신은?"
"흐흐... 내 목소리를 듣고도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나?"
"다, 당신은? 바로..."
"하하... 이제야 알아보시는군."
, 그녀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백합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나는 여러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간단하게 대답해. Q는 누구냐?"
"당신은 그를 배신할 셈인가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조직은 배신자에게 어떤 처벌을 하는지
당신 자신이 잘 아실 텐데요?"
"이 년이 아직 입이 살았군!"
백합의 주먹이 날아 오자 동시에 지숙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눈빛을
표독스럽게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앙다문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한줄기
배어나왔다.
완강한 저항이 뜻밖이라는 듯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백합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조직에선 Q를 제거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나는 조직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거짓말!"
그녀가 울부짖듯 외쳤다.
"믿고 안믿고는 너의 자유다."
"이 위선자!"
"어쨌든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다.
정지숙, 너는 결국 불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자에게 가혹한 처사를 저지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네가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미리 일러두지만 이 집은
사방 몇킬로 안에는 인적이라곤 없는 외딴
독립가옥이다. 네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분간의 여유를 주마. 그 동안에 네가
마음을 돌린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처를 베풀어 주겠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밖에서 방문을 거는 쇳소리가 유난히
그녀의 귀청을 크게 울렸다.
지숙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탄스러워
울음마저 메말라 버린 듯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끈에 묶인 팔목과 발목이 저려오기
시작하면서 사내에 의해 발가벗겨졌다는
수치심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대로 무참하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조금씩 그녀를
압박해왔다.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도무지 없는
듯했다.
절망감 속에서 허우적거릴수록 가슴은
팔닥팔딱 뛰었고 당장 질식이라도 할
것처럼 숨이 차오르곤 했다.
이윽고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사내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억제하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백합은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여유를 보였다.
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가느다란 목덜미에서부터 뻗어내린
가냘픈 어깨의 선, 그리고 봉곳 솟은
앞가슴이며 그의 손길이 마치 애무라도
하듯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파르르 몸을
떨던 지숙은 수치심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더듬어 나갔고 가슴과 복부를 거쳐
미끈하게 뻗은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서
손놀림이 멎었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어때? 마음을 돌리기로 결심했나?"
지숙을 내려다보며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며 외면을 했다.
"좋아,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이
말씀이로군."
말을 맺기 무섭게 그의 손놀림이 바쁘게
이어졌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무성한
수풀사이를 헤집기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그만! 그만! 그만 하세요!"
"어때? 마음을 바꿨어?"
"말할게요. 뭐든지 다..."
그녀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오면서
말문이 막혔다.
서러움이 가득찬 흐느낌이 계속되자
그는 그녀의 잔등을 어루만지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녀의 울음은 한참만에야
잦아들었다.
"Q는 누군가? 성기용이야?"
그의 어조는 나직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녀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아니에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를 모면하겠다고 거짓말 하는
건 용서못해!"
"정말이에요..."
"그럼 Q는 누구야?"
"저도 누군지는 몰라요."
"이 년이 정말!"
그의 목소리가 별안간 높아졌다.
"믿어주세요. 전 정말 몰라요"
"Q에게 늘상 연락을 전했으면서 Q를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제가 직접 Q의 얼굴을 본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럼 어떻게 연락을 전했어?"
"제가 맡은 일은 전화가 오면 그 사실을
또 다른 전화번호에 통보하는 걸로 끝이
났어요. 그 뿐이에요."
"그 전화번호를 대."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번호를 불렀고
백합은 받아적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듯
우두커니 전화번호가 메모된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사태가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너무나
용의주도한 Q의 행적에 다시금 전율이
솟는 듯 그는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이윽고 그는 다시 그녀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럼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하겠다. 당신은 우리의 조직원이오?"
"...예."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언제 가입했소?"
"5년쯤 됐어요."
"그러니까 정치문제연구소에 입사하기
직전이었겠군."
"...네, 그래요."
"그 사무실에 취직한 이유는?"
"조직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뜻밖의 대답인 듯 그는 멍하니 지숙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재원이라고
느껴졌던 그녀가 할 일없는 연구소
따위에서 썩고 있는 이유에 수긍이 가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성기용의원도 우리
조직원이오?"
"그건 저도 몰라요."
"그가 Q가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소?"
"그것도 전 몰라요."
"그럼 당신은 도대체 뭘 안다는 거요?"
백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지지않고 대꾸를 했다.
"조직의 생리에 대해서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전 제가 접촉하고 맡았던
일 외에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으음..."
그녀의 항변은 기실 옳은 말이었다.
그는 가늘게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조직의 철저한 생리에 몸서리가 쳐지는 듯
잠시 말문을 닫고 말았다.
"그럼 당신을 조직에 가입시킨 사람은?"
"학교 다닐 때 함께 서클활동하던
대학선배였어요."
"그 친구 이름은?"
"강성열이라고해요."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용의 정치문제연구소 전화번호가
왜 그 사람의 이름으로 가입이 되었는지
떡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치문제연구소라는
사무실도 어쩌면 강성열이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딨소?"
"몰라요."
"그럴 리가 있어? 당신을 조직에
가입시킨 사람인데 모르다니."
"정말이에요.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그를 만나보지 못했어요."
"풍문도 못 듣고?"
"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그 사람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져버렸다는
말이오?"
"저도 그 분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했었어요. 하지만 만나볼 수는 없었어요.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럼 당신이 버림받은 셈이로군."
"...네."
그녀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강성열이라는 그 친구가 Q일
가능성은 없겠소?"
"그건 저도 몰라요."
"전화 통화는 했을 거 아니오. Q와
말이오."
"제가 통보를 할때 그 상대는 거의
여자였어요. 가끔씩 남자가 받을 때도
있긴 했으나 그 사람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백합은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Q는 과연 누구인가!
성기용의 개인사무실을 연락사무소로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성기용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그는 정말 조직과 무관할 수 있을까?
백합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성기용이 Q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득 천사의 냉혹한 지령이 얼핏 그의
뇌리를 스쳤다.
'내가 파견했던 요원 한사람이
살해당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그것은
한국내 조직의 붕괴를 의미한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그렇다. Q를 제거해야 하는 직접적인
동기는 Q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고의든 우연이든 Q는 조직의
상층부요원을 제거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가 파견했다는 조직의
요원은 또 누구일까?
백합은 주춤 눈빛을 모았다.
그가 최근에 Q의 지시에 의해 살해한
사람은 세 사람이다.
첫번째는 바로 성기용의 딸, 그러니까
홍해무역 유재택사장의 부인인
성귀희여사.
두 번째는 합동회계법인의 공인회계사인
우춘구. 세 번째는 우춘구의 직장동료인
유용치였다.
그럼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천사가
파견한 요원임이 분명한데 그는 과연
누구일까?
백합의 상념은 더욱더 오리무중
속으로만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세 사람 중에서 누가 Q와 끈을 맺고
있었던 사람일까?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
세 사람 중에선 그의 심중에 꼽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Q의 수하에 나를 제외한
또다른 킬러조직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를 뻬돌리고 그가 모종의 음모를
획책했던 것이 아닐까?
백합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나의 조직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터에 그가 다른 꿍꿍이를 가질 리는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골이 지끈지끈
쑤셔왔다. 백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침상옆 서랍을 열어 주사약과
쳄꺼내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백합은
아랑곳 없이 약병에 바늘을 꽂아 주사기
속에 약을 그득하게 채워넣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내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잖아요. 사, 살려줘요 제발."
그녀는 파랗게 질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 조용히 해."
"살려줘요."
"널 죽이지는 않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 약은..."
"널 살려는 주겠지만 돌려 보낼 수는
없다. 내 말뜻을 알겠지?"
"그 약은..."
"그래 마약이다. 네가 살아나는 방법은
길밖에 없어."
"이 악마!"
지숙이 발악하듯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주사바늘이 팔뚝을 파고
들어가는 순간 크게 치떴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힘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12. 호랑이 굴 속으로
먼동이 뿌옇게 터올 새벽 무렵의 회현동
골목길을 그녀는 총총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싸늘한 초가을의 새벽공기가 차디찬
감촉으로 피부에 와닿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몄다.
머리에 둘러쓴 머플러 사이로
앞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자 그녀는 몸을
더욱 옹송거렸다.
그녀는 허름한 행색의 그녀였으나
머플러 사이로 드러난 반듯한 이목구비가
한때는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짐작케했다.
세파에 시달린 듯 햇볕에 그을은
화장기없는 검은 피부와 다듬지 않은
얼굴, 정리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머리카락, 작업복차림의 허름한
행색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절반은 가리고
있었다.
큰 길가로 나서면서 그녀의 걸음은 다소
느려졌다. 얼핏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 여유는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도시의 새벽길을
호젓하게 걷는 기분은 언제나 신선한
느낌으로 가슴을 헤쳐온다.
그녀는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남몰래 즐기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 남산으로부터 뚜렷하게 솟아오른
여명이 그녀를 더욱 감상에 젖게 했다.
회현동을 빠져나와 퇴계로를 꺾어돌자
커다란 빌딩이 그녀의 시야를 가로 막고
나섰다.
옥상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홍해강철이란 입간판이 그 위용을 빛내며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빌딩이었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밀고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밤을 꼬박 새운 초췌한 몰골로 수위실을
빠져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던 수위 장씨가
아는 체를 했다.
"아이구 황여사, 오늘도 일등으로
나오시는구먼."
"안녕하세요."
그녀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벌써 일 주일째 들어온 황여사란 호칭이
아직도 몸에 배지 않아 서먹서먹하게 대충
얼버무리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녀는 바로 윤정님의 변장한
모습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대성용역이라는
청소대행업체의 고용인으로서
홍해강철빌딩의 청소를 맡고 있는 10여 명
청소부 중의 한 명이었다.
대성용역의 인사기록카드에 그녀의
이름은 황정실, 주소는 중구 회현동 2가
967번지, 결혼한 지 1년만에
중동건설현장의 노무자로 나갔던 남편이
공사현장에서 실족하여 사망한 후 어린
외아들 하나를 키우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든 억척 또순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홍해강철빌딩의 청소부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오늘로서 일 주일째였다.
그러나 이곳에 취직하기 위해 벌인 준비
작업에는 보름 이상이나 소요되었다.
우선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대역을
고르는 일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다.
가명으로 입사 서류를 위조할 수는
있었으나 탄로날 경우를 대비할 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실존인물 황정실은 천호동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는 과부로 그녀와 약간은
안면이 있는 터였다. 그녀에게 대가를
치른 후 그녀의 동의를 얻는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다음에는 홍해강철빌딩과 가까운 회현동
골목어귀에 월셋방을 얻어 빌린
주민등록대장을 옮겼다.
그외에도 그녀가 준비해야 할 일은 무척
많았다.
청계천의 의류상가를 뒤져 될 수 있으면
촌티가 나는 허름한 옷가지들을 여러 벌
구입했는가 하면 어렵게 방송국의
분장사를 만나 몇 가지 분장술을 터득해야
했다.
희디흰 그녀의 피부를 거무튀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지금은
스스로가 보아도 놀랄 만큼 그녀는
분장술에 일가견을 보이고 있었다.
애초에는 곧바로 비서실로 침투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그녀는 이내 단념을 하고
말았다.
그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홍해강철의
비서실에는 특이하게도 많은 미녀들이
고용되어 있었고 그녀들의 업무는 주로
외국 바이어접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바이어의 통역으로서 입국한
출국할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바이어의 편의를 돌봐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관광가이드에서부터 잠자리 수발까지
육탄공세를 퍼부어야 하는 역할도
고역이겠지만 무엇보다 활동영역이
좁아들고 부자유스러울 듯해서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청소부로 첫 출근한 날, 그녀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혹시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거나
그녀의 정체가 탄로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시종 그녀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둘째날부터 그녀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모두
동정의 눈빛으로 그녀를 대해주었다.
젊은 새댁의 처지가 너무 딱하고
안쓰럽다는 거였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부지런히 일을
했다.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사둘 필요도
있었지만 손에 익지 않은 서투른 일을
빨리 익히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해야
했다.
탈의실에서 회사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물통과 물걸레를 집어들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맡은 구역은 5층의 홍해무역과
6층의 임원실이었다.
5층 복도의 걸레질을 마친 그녀는
이번엔 사무실로 들어섰다. 인적이라곤
없는 넓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니 왠지
으시시하고 스산한 느낌에 가슴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그런 상념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휴지통의 쓰레기를 한 곳에 모으면서
그녀는 버려진 휴지 조각들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 단서가 될만한 문서가 눈에 띄지나
않을까 하는 일념에서였다.
걸레로 사무실바닥을 훔치면서도 그녀의
눈은 책상 위의 서류뭉치나 집기
나부랑이들을 살폈다.
소득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체념이
이따금 일었으나 그녀는 집요하게 주변을
살폈다.
5층 청소를 마치는 데 한 시간은 족히
?
6층으로 장소를 옮기니 이 곳은 한결
수월했다.
야간당직 경비원이 복도에 놓인
책상에서 졸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반색을
했다.
"어서 오시우."
"안녕하세요, 김씨."
그녀 역시 눈웃음으로 답해주고
부지런히 걸레질을 시작했다.
6층은 복도청소만 하면 그만이었다. 각
임원실은 카핏이 깔려 있어 휴지통을
비우는 일만으로 할 일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화장실청소뿐이었다.
남자화장실 청소를 할 때면 늘상 그녀는
야릇한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여자로 태어나 평생 남자화장실을
<구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뜻
밖에도 남자화장실을 무상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서먹서먹했던 그
일이 이제는 이력이 붙어 대담하게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남자들이 용무를 보고 있을 때는
야릇한 쾌감마저 느껴지는 그녀였다.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그녀가
남자화장실을 출입할 때 남자들이
용무를 보고 있기를 은근히 기대까지
하게끔 되었다.
쾌감뿐만이 아니라 직원들이 주고받는
농담이나 대화를 엿들으면서 혹시나 한
토막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 때문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7층으로 올라가자
막 출근한 듯한 7층 담당
조성자여인이 로비에 걸터않은 채 담배 한
모금을 빨아대고 있었다.
조여인은 담배 한대를 다 피워야 일을
시작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일찍두 왔네 새댁."
"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해요. 언니."
대여섯 살 연상이라 그녀는 스스럼없이
언니라고 불러주었다.
"거긴 다 끝났어?"
"네."
"어쩜 부지런도 해라. 그나저나
미안해서 어쩌지? 새댁한테 늘상 신세만
지구."
"별말씀을 다 하세요."
"염치가 없어서 그렇지."
"손을 놀리고 있으면 뭐해요?"
그녀가 먼저 물걸레질을 시작했다.
황급히 담배를 비벼끈 조여인이 걸레를
뺏었다.
"자, 걸레 이리주구 물통에 물이나 퍼다
줘."
두 여인이 수선을 떨며 부지런을 피우자
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청소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그제서야 출근 시간이 된 듯 하나씩
둘씩 직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댁 덕분에 금방 끝났네."
"재가 크게 도운 것도 없는데요 뭐."
"아침 식사했어?"
"아뇨."
"그럼 됐어, 뒷골목 해장국집으루 가.
내가 살게."
조여인은 호탕하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아침의 대청소를 마치면 그녀들은
하루의 반은 거의 마친 셈이었다.
낮에는 화장실 청소만 간간이 하면
그만이었다.
여자화장실은 별 문제지만 남자화장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하루에도 대여섯 번은
들락거려야할 만큼 남자화장실은 문제가
많았다.
"어이그 팔자도 더럽게 타고나서
허구헌날 이게 무슨 꼴이람. 한때는 꿈도
많은 청춘이었는데 어쩜 내신세가 이렇게
오그락 바가지가 되었는지. 사내 잘못만나
이 꼬라지가 되어 있지만 어쨌든 사내는
문제가 많은 동물이야. 안그래 새댁?"
조여사는 해장국집의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팔자탈령을 걸쭉하게 늘어
놓았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동감을 표해주었다.
"하여튼 사내놈들은 문제가 많아.
총하나 쏘는 것도 재대로 쏘질 못하고
바닥에다 오줌을 질질 흘려놓으니 말야.
특히 7층 사내들은 더해. 어제도 잠시
딴데 정신을 팔았다가 작업 반장한테
혼쭐이 났지 뭐야.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글쎄 화장실 바닥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지
뭐야. 빌어먹을 놈들!"
조여사의 익살스런 몸짓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여사와 그녀는 비교적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나이 차이도 적당히 있었지만
언니 언니하며 따르는 그녀의 애교가
남자처럼 호쾌한 조여사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날 오후였다.
여느때처럼 무심코 6층의 남자화장실을
들어갔던 그녀는 흠칫 굳고 말았다.
구석자리에서 볼 일을 마치고 돌아서며
바지의 자크를 올리는 사내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너무나 익었던 것이다.
바로 그 놈이다!
그녀의 숨이 멈출 듯한 충격을 느끼며
우두커니 서서 사내를 지켜보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얼굴.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 두고두고 징이 박힌 증오의
대상이었다.
툭 불거져 나온 눈두덩과 광대뼈,
그리고 요심 사납게 생긴 두터운 입술,
남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삐죽한 키.
신혼 첫날밤 그녀를 덮친 첫번째 사내로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흠칫 외면을 했다.
저 놈이 무슨 일로 이 빌딩에
나타났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저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님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사내를 곁눈질했다.
다행히도 사내는 이 운명적인 만남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사내는 수도물로
입 속까지 헹구고는 여유있게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양동이와 걸레를 양손에 든 채
그를 따라나섰다.
사내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하단
버튼을 눌렀고 이내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그녀는 사내를 뒤따라 냉큼
승강기에 오른 뒤 등을 돌렸다. 1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금세 하강을
시작했다. 끔찍한 사내와 단둘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이는
듯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기 무섭게 그녀는
로비로 빠져나왔다.
이제 어떡한다? 그러나 그녀가 더이상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사내가 곧장 현관으로 빠져나가질
않는가.
어쩐다? 유니폼을 사복으로 갈아입을
여유조차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곧 마음을 정하고
양동이와 걸레를 휴지통 옆에 세워 놓고선
곧장 현관으로 따라나섰다.
저만치서 승용차에 오르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바심하던 그녀는 마침 다가오는 빈
택시를 가로막듯 손을 내밀어 세웠다.
"저 앞차를 따라가 주세요."
택시 뒷자석으로 뛰어오르며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쏘아 부쳤다.
"아니, 그렇게 차에 뛰어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해요 아저씨, 급해서 그래요."
그녀는 조바심하며 멀어져가는 승용차의
뒤꽁무니만 살펴보았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십년
감수했잖습니까? 내리세요. 여태까지
점심도 못먹었어요."
순간 얼굴이 파래저던 그녀는 문득
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운전기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급해요 아저씨! 저 놈을 꼭 잡아야
돼요! 저 놈은 살인자예요!"
살인자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드는 듯
운전기사는 그녀와 멀어져가는 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님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마음을 잡은 듯 급히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문을 닫으세요!"
정님이 급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무섭게 택시는 총알처럼 달려나갔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잖구!"
입으로는 투털거리면서도 택시는 차들
*차이로 미끄러지며 곡예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5분여를 달렸을까? 다행히도
신호대기에 걸려 서 있는 앞차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저 차예요!"
"바로 그렇지, 제깐놈이 가봐야
어디까지 갈라구."
운전기사는 자못 자랑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내내
조바심하던 정님의 안색도 역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놓치면 안돼요. 아저씨!"
"그럼요. 안심 탁 놓으십시오. 이래봬도
운전솜 씨 하나는 세계적입니다.
그건 자타가 공인하니까요. 제깐 놈이
이 서울 바닥에서 달아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에 갇힌 손오공 찾기지 별 수
있습니까?"
운전기사는 모처럼 활극에 신바람이 난
듯 마구 떠벌려 댔다.
"그나저나 저 놈이 진짜 살인범입니까?"
"네, 저 놈 외에도 패거리들이 있어요.
전 그 놈들 소굴을 알아 내려는 거예요."
정님도 운전기사의 신바람에 적당히
보조를 맞추어주었다.
"알겠습니다. 저한테 맡겨주십쇼."
그때 신호가 터지면서 차들이 다시
달려나갔다.
앞차와 택시 사이에는 세 대의 차가
끼어 있었다. 운전기사가 몇 번 용을 써서
금방 두 대를 떨구어버렸다.
"저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따라가셔야
해요."
"염려 탁 놓으십쇼!"
그러나 정님은 쉽사리 조바심이
놓아지지 않았다.
과연 그녀의 염려와는 달리 택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앞차를 쫓았다. 바싹
뒤를 따라가다 한 대 두 대씩 사이에 끼워
주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자유자재였다.
앞차의 꽁무니를 바싹 따라 잡았을 때
정님은 앞차의 넘버를 재빨리 외웠다.
앰버서더 호텔을 지나친 승용차는
장충단공원을 끼고 돌아 남산 순환도로의
언덕길을 기어올랐다.
"저 놈이 영동으로 빠질 모양인데요?"
과연 운전기사의 예측대로 승용차는
제3한강교를 지나 강남대로를 질주한 끝에
테헤란로에서 좌회전을 하더니 얼마나
달렸을까? 커다란 빌딩을 끼고 우회전을
하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됐어요. 여기 세워주세요."
정님은 골목입구에서 택시를 세웠다.
멀찍이서 승용차가 멎고 사내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여자 혼자서 괜찮아요?"
"염려마세요. 이젠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자칫 놈들이 눈치채면 큰 일
벌어지니까 그냥 돌아가세요."
운전기사는 모처럼 기대했던 활극의
끝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차를 돌렸다.
택시가 멀리 사라지는걸 확인하고서야
정님은 천천히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사내가 타고온 베이지색 소나타가 골목
끝에 서 있었다.
정님은 마치 흉물스러운걸 보듯 차를
비켜 걸으며 방금 사내가 사라진 건물을
승바라 보았다.
얼핏보면 호화로운 저택을 연상케 하는
집이었다.
그러나 왕궁이라는 옥호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치장된 현관의 입간판으로
보아 그 내부는 그럴 듯한 요정이 아닐까
싶었다.
얼핏 살펴보니 현관에서 정문으로
이르는 정원도 예사롭지 않게 치장되어
있었고 널찍한 주차장하며 모든
시설물들은 화려와 극치의 미를 뽑내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얼른 왕궁을
지나쳤다.
그리고 왕궁을 옆으로 낀 골목을 돌아
다시 대로변으로 나왔다.
됐다. 이제 일말의 단서라도 잡았으니
이쪽으로 케어보면 무언가는 나올 것이다.
정님은 우선 눈앞에 보이는
귀빈다방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켰다.
무엇보다 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일 듯 싶었다.
천천히 커피 한잔을 비운 정님은
공중전화를 찾아 회사로 전화를 넣었다.
"너 지금 어디 있니?"
조성자여인을 호출하기 무섭게 수화기
저쪽에서 그녀의 호들갑스런 수다가 귀를
찔러왔다.
"말두 말어 얘! 너땜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어. 너 양동이와 걸레를 현관
로비에 떡하니 팽개치고 사라졌다며,
작업조장이 너 찾느라고 난리야."
"미안해 언니."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나 지금 병원에 있어, 언니."
불쑥 뇌까려 놓고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럼없이
거짓을 늘어 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수화기 저쪽에서 놀라는 소리가
수선스레 들려왔다.
"갑자기 복통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어."
"어이구 이것아! 그럼 날 먼저 부를
일이지 거기 어디야? 내가 당장
쫓아갈게."
"이제 괜찮아요."
"글쎄 거기가 어디냐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오실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언니, 병원에서 당분간
해야 한대요."
"뭐 뭐야? 너 남모르는 큰 병을 앓고
있었던 거 아니니?"
"...네."
"어이그 이 등신! 그럼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일를
한다고, 지금 회사로 들어오련?"
"지금 너무 피곤해요."
"그래 그래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어라.
응?"
"미안해요 언니, 당분간 일하러
못나갈지도 몰라요."
"그래,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
사람나고 일났지 일나고 사람 났니?"
조여사는 한 마디로 화끈하게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 작업 조장한테는 내가 그렇게
일러두마, 염려말어."
"고마워요 언니."
"내가 집으로 찾아갈게. 몸조리나
잘해."
"아녜요. 오늘 밤차로 시골로 갈까
해요. 아무래도 푹쉬자면..."
"어이그... 남들 신세는 지고 싶지 않다
그런 심보로구먼. 독살맞을 년 같으니,
그래, 어쨌든 조리나 잘해."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언니."
조여사의 혀차는 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여사의 푸근한 정이 가슴에 와닿아
느낀 뭉클한 감정을 삭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꾸밈없는 진실로
대하는 조여사를 속였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다방을 빠져나온 정님은 택시를 타고
길동의 아파트로 향했다.
이것으로 회현동 셋방과는 안녕이다.
그녀는 또다시 묘한 감정을 가슴에
새겨두었다.
근 한 달만에 다시 길동의 보금자기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다.
지난 한 달간 그녀는 과거와의 차단을
위해 철저하게 황정실 여인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본가의 모친은 물론 김석기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주변의 모든
지인들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과거의 일부를
원상회복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오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택시가 잠실을 지나 둔촌동의 낯익은
아파트단지를 지날 때 그녀는 더욱 그런
감동을 느꼈고 자그마한 행복을 맛보는
듯했다.
아파트단지 앞에서 택시를 내려
총총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님 씨?"
귀익은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정님은 화들짝 놀랐다.
"어머, 김선생님!"
김석기 역시 놀라운 눈길로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와락 마주
잡았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I 그녀의 허름한 행색을 아래 위로
훑어보던 김석기는 그녀의 유니폼에 붙은
홍해강철의 마크를 보는 순간, 문득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동안 그녀의 행적을
다소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님 씨가 실종되어서 무척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은 없고... 틈만 나면 여기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김석기를 빤히 지켜보았다. 김석기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그 간의 고뇌와
우수가 잔뜩 서려있는 듯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집으로 들어가세요. 자세한 건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그들은 나란히 몸을 돌려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정님은 정성껏 몸을 닦았다.
집으로 돌아와 김석기에게 차 한 잔만을
대접한 후 응접실에 혼자 앉혀두고는
욕실로 뛰어든 그녀는 거의 한시간 가까이
샤워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동안 청소부 황여사로 변장하느라
목욕을 변변히 못한 탓에 때가 한정없이
밀려나왔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까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일시에 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목적했던 일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그녀에게 더없는 상쾌함을
안겨주었다. 욕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일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만에 욕조를 빠져 나왔다.
거실에 김석기 혼자서 그녀를
기다린다는데 생각이 미치기는 했지만
긴장이 풀어지면서 강한 허기를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몸을 대충 닦은 다음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김석기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요.
이제 곧 끝나요."
안방 화장대 앞에 걸터앉은 그녀는
부지런히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얼굴을
매만졌다.
한참만에 그녀의 얼굴은 예전처럼 그
활력과 아름다움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장대 거울 속으로 김석기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거울 속에서 그녀의 손놀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생긋 웃어주었다.
순간 김석기가 등 뒤에서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를 포옹했다.
그리고 와락 그녀의 몸을 돌려 그녀를
얼싸안았다.
거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제지할 틈도 없었다.
움찔 몸을 굳혔던 그녀는 순순히 그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 그의 혀가 그녀의 입속을 가득 채운 채
몸부림을 치더니 강한 흡인력으로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이번엔 그의 입안에 그녀의 혀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손을 돌려 그녀의 가운을 뒤로
젖혔다. 목과 어깨의 가냘픈 곡선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가운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전신이 훤히 드러났다.
그녀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것이다.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눈이 부실 만큼 희고 고왔다.
등줄기에서부터 엉덩이로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이 눈을 찌르는 순간 그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더이상 견딜 수 없는 듯 그녀를 번쩍
횬그는 급히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급하게 엉킨 그들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잔을 기울였다.
조금전의 열정과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하고 결혼합시다."
불쑥 내뱉은 김석기의 말에 정님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얼핏 웃음이 삐어져 나올 듯하던 그녀의
얼굴은 이내 공허한 느낌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암흑에 짓눌린 창 밖으로
"이건 나의 진심이오."
그는 무안함을 달래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됐어요?"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어왔다.
"나도 모르겠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 아마도 그건 지금까지 혼자
마음 속에서 품어왔던 막연한 바람이 불쑥
튀어 나온지도 몰라요.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더이상 정님 씨가 위험한
곡예를 계속 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건 절더러 더이상 사건추적을 말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그러나
정님은 한 마디로 잘랐다.
"그럴 순 없어요!"
그녀의 너무나 완강한 어투에 그는
허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님 씨의 그 뜻을 모르는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게 간섭할 생각은 마세요."
"할 수 없군요..."
그는 체념의 눈빛으로 정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으로 볼
때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막연하게 품어왔던
일반적인 범죄가 아니라 막강한
배후세력을 가진 조직범죄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어요. 우리가 더 이상
째위험합니다.
그런데도 정님 씨는 홀홀단신으로
무모하게 적진으로 뛰어들고 있어요."
"제가 적진으로 뛰어든 건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오후에 만났을 때 입었던
유니폼의 마크, 그건 홍해강철의 로고
아닙니까?"
"그럼 홍해강철이 적진이라는 단정을
어떻게 내릴 수 있나요?"
"단정을 내리는건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사실 여부는 좀 더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가능성은 높습니다.
경찰에서도 홍해강철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습니다."
"어머, 경찰에서요?"
"네."
"경찰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우춘구 씨의 암호문을 풀어 냈거든요."
"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석기는 그제서야 수첩에서 암호를
풀이한 메모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메모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과도 같은 신념이 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암호문을 보면 홍해강철이 모종의
비리나 비위사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춘구 씨는 홍해강철의
비밀을 너무 깊이 알아버렸고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제거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찰도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님 씨가 직접 그 속으로
뛰어들다니, 이건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입니다."
""
"근 두 달 동안 정님 씨를 만날 수 없어
전 혼자서 몸을 달아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경찰에 실종계를 낼까
생각하다가 며칠만 더 참기로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지요."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님 씨가 홍해강철에 침투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정님 씨를
어떻게 홍해강철을 지목하셨습니까?"
"뚜렷한 확신은 없었어요. 단지 그날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했던 손님
중에 홍해강철그룹의 임직원이 몇 사람
끼어 있었어요. 그래서 확인이나 해
볼까하고."
"그래서 알아낸 거라도 있습니까?"
잠시 생각했던 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석기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벌이려는 계획에
대해 자문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젖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그의 관심과 바람이
그녀에게 부담이 됐는지도 몰랐다.
갑작스런 그의 결혼신청은 그녀에게
너무나 뜻밖의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계획을 밝힐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고 도리어 방해를 하거나
적극 만류나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이
그녀의 생각마저 바꾸어 놓고 있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아뇨, 고작 청소부로 침입해 봤댔자
빼내올 정보도 없고 그 일도 한계에
부딪친 듯 해서 그만둘 참이었어요.
그래서 이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정말 생각 잘하셨습니다."
그는 모처럼 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회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을 얻어
지냈어요."
천연덕스런 정님의 말에 그는 오히려
질린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사건추적은 계속 하시겠다는
봇"
"물론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포기하라고
종용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은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걸요."
"약속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
"제 결혼신청 말입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이 사건을 해결할 후로 미룰 수는
없을까요?"
"알겠습니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윱"
"고마워요."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며칠 푹 쉬면서 생각해 봐야겠어요."
불쑥 말을 뱉어놓고 그녀는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늘어놓는 스스로에 대해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듯 체념의 빛을
보이면서도 약간은 안심을 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 주십시오."
"네."
정님은 다시 한번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내심에서 김석기는 동반자
내지는 후원자의 위치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김석기에게 며칠 푹 쉬겠다던 정님은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 무섭게 부지런을
떨며 외출차비를 차렸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공을 들여 얼굴을
다듬었다.
지금 그녀가 만들어 내려는 얼굴은 20대
초반의 발랄한 처녀의 얼굴이었다.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에는 조금은 야한
듯 싶은 화장을 했다. 그리고 준비
해놓은 도수없는 금테안경을 쓰자 거울
속에는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가 원했던 얼굴은 20대 초반의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얼굴 만지기가 끝난 후 그녀는 옷장에서
화려하면서 스포티한 멋을 풍기는
투피스를 꺼내어 갈아 입었다.
금혜수.
그녀는 생소한 자신의 이름을 되뇌어
새기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장안평으로 가주세요."
오늘 당장 그녀가 해야할 일은 장안평
중고자동차매매센터에서 그럴 듯한
승용차를 한대 구입하는 일과 방배동
근처의 반듯한 맨션아파트 한 채를 빌려
새로운 숙소를 장만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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