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1-2

3학년2반 | 2022.02.03 07:54:26 댓글: 0 조회: 1150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393

4. 두번째 살인

같은 날 오전.
온다던 태풍은 밤새 비만 뿌린 채 세력이
약화되어 동해안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바람은 많이 잤지만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괴물 같은
도시의 거미줄 같은 도로 위로는 바퀴벌레
같은 차들이 무수히 기어나와 괴성을
지르며 밑도끝도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흡사 점령군처럼 어느날 갑자기
도시를 점령해버린 것 같았고, 지축을
흔드는 굉음에 함몰되어버린 도시는 더욱
괴기스런 모습으로 침묵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제 오후 H생명보험회사 직원들을
침묵의 커튼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보험회사 직원들은 혹시 오늘도 그 기막힌
장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개중에는
망원경까지 새로 준비해서 아침부터 호텔
창문쪽을 흘깃거렸지만 오전 내내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S호텔 1924호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그쪽에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 호텔의 프론트데스크 직원이었다. 1일
투숙객의 경우 대개 다음날 아침나절에
방을 비워주게 마련이다. 규정상으로는
12시에 방을 떠나도록 되어 있지만 그
시간까지 남아 있는 손님은 거의 없다.
늦어도 11시경까지는 대부분
철수한다. 11시가 지나서까지 머무적거리고
있는 손님이라면 체크아웃 시간도 모르는
촌놈이든가 아니면 하루 더 묵으려고 한
손님일 가능성이 많다. 촌놈일 경우에는
12시까지 방을 비워달라고 요구해야 하고
하루 더 묵으려는 손님이라면 분명히
확인으 받아야 한다. 그런데 1924호실은
이미 새로 투숙할 사람이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에 하루 더 묵으려 해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새로 투숙할 손님은 미국인
중년 사나이로 그는 이미 호텔에 와서
5일간의 투숙 절차를 밟아놓고 방이
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런트계 직원이 처음 1924호실에다
죄송하지만 방을 좀 빨리 비워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않았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한동안
공허하게 전화벨만 울려댈 뿐이었다.
프론트계의 여직원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1924호실 투숙객은 외출했거나
체크아웃한 기록이 없었다. 열쇠가 없는
것으로 보아 투숙객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방안에서 아직 자고 있든가 아니면
방에서 나와 호텔 내의 다른 곳, 이를테면
커피숍 같은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직 방을 비우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여직원은 능숙한 영어로 미국인에게
말했다. 코밑수염을 기른 뚱뚱한 미국인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걸리는 시간까지 합해 그녀는 1시간 정도
기다리면 충분할 거라고 대답했다.
미국인은 고개를 젓고 나서 트렁크를
프론트에 맡긴 다음 라운지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20분쯤 지나 프론트계의 여직원은
1924호실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전화를 안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12시까지 시간을 채울 모양이지."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1924호실 투숙자의
숙박카드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서창배(徐昌培)--어제 오후에 그 방에
투숙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때 갑자기
단체 손님이 몰려왔기 때문에 그녀는
바빠졌다. 단체 손님들은 일본인
"1924호실 어떻게 됐어?"
일본인 관광객들을 모두 올려보내고 나서
프런트계 당직 지배인이 물었다.
"아직 확인을 못했어요. 두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를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여직원 미스 박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머나, 12시가 지났잖아."
"빨리 전화해 봐."
퉁명스러운 지시에 그녀는 뽀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1924호실에다 세번째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전화 안 받아?"
"네, 반응이 없어요."
"들어가보라구 해."
이번에는 19층 담당 룸메이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프런트 미스 박이에요. 24호실 전화를
안 받으니까 확인 좀 해 주세요. 안에 손님
있으면 빨리 비워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청소 좀 부탁합니다. 외국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1924호 출입문에는 취침중임을 알리는
DND카드(Do not disturb)가 걸려 있었다.
19층 청소를 맡고 있는 중년의 여인은
진공청소기를 문옆에 세워두고 차임벨을
눌렀다. 몇번 눌러도 응답이 없자 제복
주머니에서 마스터키를 꺼내 자물쇠
구멍에다 꽂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문을 조금만 열었다.
그리고 방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재빨리
창쪽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방안은 꽤
어두웠다. 문쪽에서 침대가 놓여 있는 쪽은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계시는가요?"
무거운 정적에 그녀는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두번 그렇게
부른 다음 그래도 대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황해 하다가
조심스럽게 창쪽으로 다가가 우선 커튼부터
젖혔다. 그런 다음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자용 핸드백을 집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것은 그냥 놓아둔 것이 아니었다.
내용물을 뽑아낸 다음 그대로 내던져버린
것 같았다. 핸드백 안의 내용물로 보이는
옆에는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한 주먹 정도 버려져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흰색의 하이힐도
보였는데 하나는 침대 옆에, 다른 하나는
욕실 앞에 뒹굴어 있었다. 1인용 소파
하나와 전기 스탠드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소형 맥주병들이 방바닥에 뒹굴어
있는 것도 보였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방안의 모습은
그곳에서 격렬한 싸움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얼른 보기에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룸메이드의 시선이 욕실 문앞에 뒹굴어
있는 하이힐에 머물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두번 두드려본 다음 아무 응답이
눈에 푸른 색의 비닐 커튼이 보였다.
그것은 욕조를 가리는 커튼이었는데 욕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퍼져 있었다.
"여보세요."
룸메이드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커튼 저쪽에
어쩐지 사람이 숨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욕실 안은 어두웠다. 그녀는 먼저 불을
켰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물러서지 않고 손을 뻗어
가만히 커튼을 젖혀보았다.
욕조 안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물 위로는 여자의 머리칼이 마치
속에 가라앉아 있는 여자의 머리칼이었다.
욕조 속의 물은 목욕을 하고 난 뒤에
남겨놓은 것인지 조금 더러워보였다. 물
속의 여인은 흰바탕에 푸른 물감을 거칠게
뿌려놓은 것 같은 원피스를 입은 채 누워
있었다. 두눈은 천장을 향해 잔뜩 부릅떠져
있었고 입도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보고 난
룸메이드는 뒷걸음질로 나오면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복도로 뛰어나온 그녀는
계속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집어삼키면서
동료 직원이 일하고 있는 곳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직업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호텔
내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가능한
한 투숙객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따갑도록 들어왔던 터였다.
룸메이드로부터 연락을 받은 지배인은
벨맨 두 명을 데리고 19층으로 올라왔다.
24호실로 들어선 그는 욕조 속에 들어
있는 여인의 시체를 확인하고 나서
여기저기다 급히 전화를 걸었다. 일단
상사의 지시부터 먼저 받기 위해 경찰에
연락하는 것은 뒤로 미루었다.
1924호실은 금방 호텔 직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가 호텔 간부들로
그런 사건에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는 듯
아주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살인사건이 외부에 알려질까봐
제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차피 알려지긴
하겠지만 일단 시신이 처리되고 나서
나중에 천천히 알려질수록 호텔측에는

"빌어먹을...... 웬 놈의 비가
이렇게......."
뚱뚱보 마형사는 투덜거리면서 찌그러진
차를 고급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는
사이에다 처박았다. 옆에서 엔진을 걸고
있던 젊은 여자가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본
듯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 옆에는
허여멀쑥하게 생긴 백인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여자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는지 셔츠
위로 젖꼭지가 도드라져 보인다. 귀 밑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귀고리가 꽤
무거워보인다.
"썅년...... 인상을 쓰긴......."
내렸다. 여자가 인상을 쓰면 남자가 인상을
쓰는 것보다도 훨씬 기분이 상한다. 더구나
방금 그런 여자는 그가 경멸해마지 않는
종류의 여자이다.
요즘은 거리에 유난히 외국인들이
많아졌고 그와 함께 외국 남자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한국 아가씨들도 부쩍
눈에 뜨인다. 데이트 정도가 아니다. 외국
남자들과 동거하는 한국 아가씨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국에 혼자
와 있는 외국 남자들치고 한국 아가씨들을
데리고 살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한국에 있는 동안 아주 손쉽게
아름다운 한국 아가씨들을 꿰차고 마치
왕처럼 대접을 받으며 밀월을 즐기고 있다.
한국 농촌의 총각들은 아가씨가 없어서
한국 남자로서, 그리고 노총각으로서 그는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는 것을 느낀다.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혈질인 그는 쉽게 흥분한다.
뚱보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호텔
출입구쪽으로 뛰어갔다. 호텔 출입구
앞에서 비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몇번
털어낸 다음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운 것은 외국인과 동거생활을 하거나
데이트를 즐기는 한국 아가씨들이 그
사실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뻔뻔스러울
정도로 교만하게 군다. 마치 자신이 외국
여인이나 된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하여
한국 여인들의 의식이 그처럼 변해
있다. 그는 형사이기 때문에 그런 증상을
남보다 실감있게 접하고 있다.
뚱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으로
올라갔다.
과거에는 미국 군인과 데이트하는
아가씨들을 천대시하여 양공주니 양갈보니
하고 불렀다. 그런 아가씨들의 얼굴에는
모욕감과 수치심을 견뎌내려는 안간힘이
그대로 드러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운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간혹
그런 신분의 여인이 아닌 일반 여염집
처녀가 외국인 남자와 데이트를 할 경우
주위의 눈을 의식해서 몹시 조심스럽고
민망해 하면서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바로
그런 데서 한국 여인의 수줍음과 미덕 같은
것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남자와 손잡고 걷는 것은 보통이고 허리를
서로 끌어안고 백주 대로를 활보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외국인과
함께 여관문을 나서면서도 얼굴빛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우리나라
아가씨들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고
당황해서 생각할 때가 많다.
동거하던 외국인이 훌쩍 떠나버리면
그녀는 처녀 행세를 하면서 한국 청년과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뚱보는 그런
아가씨와 결혼하게 될까봐 겁이 난다. 사실
그런 아가씨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19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뚱보는
24호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땀과 비에
젖은 남방셔츠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풍겨나고 있었다.
24호실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안에서는 이미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길이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보았다. 시체는 아직
물이 채워진 욕조 속에 가라앉은 상태로
있었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두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것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무엇인가를 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리카락이었다. 떠 있는
머리카락이 많은 것으로 보아 거기서
목욕한 사람은 머리가 많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죽어 있는 여자의 머리칼과
비교해 머리카락이 짧은 것이 남자의 것인
듯했다. 그는 그것들을 감식반원에게
넘겼다.
"피살자 신원은 모르겠어요. 밝힐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보다 먼저 달려온 남형사가 말했다.
"저 여자...... 이 방에 투숙했던 여자가
아닌가?"
"방을 얻은 사람은 남자입니다."
남형사가 그에게 숙박카드를 한 장
내밀었다
"이 방에 투숙했던 사람입니다."
마인은 그 카드를 받아들고 거기에 적혀
있는 인적사항을 눈여겨보았다.
·이름 : 서창배
·주소 : 부산 남구 N동 152번지 S아파트
505동 901호
·주민등록번호 : 481021-106431X
·전화번호 : 625-776X(부산)
ꠑ ꠑ?
직업란은 비어 있었고, 투숙일시는 바로
전날인 19일 오후 2시 55분으로 되어
있었다.
"전화 걸어봤나?"
"아뇨. 아직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걸어봐."
"알겠습니다."
남형사는 방안에 있는 전화로 부산에다
전화를 걸었다.
욕조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를 듣고
마형사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보았다. 물이
빠지면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는 바람에
죽은 여자의 모습이 마치 귀신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러나 머리칼을
걷어내고 보니 의외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젖은 옷 위로 드러난 몸매도 뛰어나
보였다.
"육감적인데......."
시체를 밖으로 들어내기 위해 시체의
다리를 붙잡으면서 형사 한 명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벗겨봐."
뒤늦게 나타난 형사계장이 고개를
디밀면서 말했다. 그의 뒤에는 왕진가방을
든 늙은 의사가 서 있었다.
"발가벗길까요?"
"모두 벗겨."
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체를
가리고 있는 옷가지들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주 거칠게 시체를 다루는 것을
보고,
"꼭 강간범들 같군."하고 구계장이
뚱보는 그들이 벗겨놓은 옷가지를 하나씩
집어들고 물기를 쥐어짰다.
"야, 근사한데!"
완전히 발가벗겨진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남자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뚱보는
코발트색의 삼각팬티를 돌돌 말았다가 꽉
움켜쥐었다. 그때 남형사가 그의 귀에다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사람 없답니다. 가짜 전화번호인
것 같습니다."
마형사는 팬티를 던져놓고 욕실에서
나왔다.
"처녀 같지는 않은데. 젖꼭지를 보라구.
남자 관계가 많았던 여자야."
욕실쪽에서 형사계장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뚱보는 땀에 젖은 남방셔츠를
보릿자루처럼 한쪽에 얌전히 서 있는 호텔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카드...... 본인이 직접 적은
건가요?"
그는 1924호실 숙박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당직 지배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가짜로 적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 적고 나면
외국인의 경우 패스포드를 확인하고
내국인의 경우에는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기
때문에 가짜로 적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주민등록증이 가짜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죠?"
주민등록증이 가짠지 진짜인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서창배라는 사람...... 얼굴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어요?"
호텔 직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잠자코 서
있었다.
"프론트에 있으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텐데?"
프론트계의 당직 지배인은 앞으로 두손을
모았다.
"작은 호텔이라면 몰라도 여긴 워낙 큰
호텔이라 손님들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기가
힘듭니다. 객실만 해도 500개가 넘기
때문에......."
"죽은 여자에 대해서는 목격자가
없나요?"
뚱보는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빨고
나서 본서 컴푸터실로 전화를 걸었다.
"이름 서창배...... 주민등록번호
481021-106431X 지금 바로 알아봐줘요."
그는 용건을 말학 나서 수화기를 든 채
기다렸다. 1분도 못 돼 컴퓨터실의
여순경은 결과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숙박카드에 적힌 인적사항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욕실에서 계장이 나왔다. 그는 50대
초반의 깡마른 사나이로 머리는 벌써
반백이었다.
"피살자 신원은 밝힐 수 있겠어?"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범인은......?"
마형사는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었다.
있고...... 물 속에 머리를 처박아
질식사시킨 것 같아."
검시의의 말을 듣고 형사계장이 옮기는
말이었다. 부검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마형사는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S호텔 정말 야단났어. 어제는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이 타죽더니 오늘은
방안에서 여자 시체가 발견됐어. 밖에
알려지면 손님 발길 끊기겠어."
계장의 말에 지배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입니다. 밖에 새나가지 않게 비밀로
해주십시오. 밖에 알려지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거야 우리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지.
기자들이 냄새 맡고 달려드는 데야 어쩔
계장이 마형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시의의 말이...... 어제 오후에
여자가 죽었다는 거야."
"네?"
"정확한 건 더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어제 황개가 타죽은 비슷한 시간에 여자도
죽은 것 같다는 거야."
"연쇄 사건이군요!"하고 남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마형사는 고개를
흔들다가 계장을 쳐다보았다.
"남형사를 지금 곧 부산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피살자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난 계장은 남형사에게 한
사람을 더 붙여주었다. 그리고 출장에 보태
쓰라고 하면서 10만 원을 꺼내주었다.
남형사는 다른 형사 한 명과 함께
공항으로 달려갔다.
뚱보는 피살자의 시체가 실려나간 뒤에도
1924호실에 남아 있었다.
1924호실은 피살체만 없다 뿐이지 처음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어질러져 있는
피살자의 유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재떨이 안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꽁초는 모두 양담배로
던힐과 말보로 두 종류였다. 말보로에는
하나같이 붉은 루즈가 묻어 있었다. 던힐
꽁초는 다섯 개, 말보로는 그보다 많은
여덟 개나 되었다. 그것들은 피살자와
남긴 것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뚱보는
자신의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그는 비극적일 정도로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도 못생겼기 때문에
그는 혐오스러운 나머지 자신의 얼굴을
결코 거울에 비춰보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못생긴 것도 운명이겠거니 하고
체념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이마 밑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눈은 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두 개의 작은 점이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너무 작아 눈동자가 보이지
않으니 마치 가면을 쓴 듯 얼굴에 표정이
뭉툭한 코는 못생긴 딸기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겼고 입은 흑인처럼 크고
두꺼웠다. 어느 구석을 봐도 지성적이거나
현대적인 세련미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튼튼하게 생긴 턱뼈는 그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무지막지한 사내로
오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마흔 살 가까이 됐는데도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지금까지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그는 자신이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여자들은 무슨
흉물이나 본 듯 기겁을 하면서 두번 다시
보려고 하지를 않았다.
무진 애를 썼었다.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산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여러 여자들을
소개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번번이 퇴짜를
맞곤 했었다. 손으로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퇴짜를 맞다보니 나중에는 결혼에
대해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고 그 같은
체념상태가 오래 계속되다보니 혼자 산다는
것의 자유스러움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요즈음에는 아예 결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널려 있는 피살자의
유품들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범인이
핸드백 안에 있는 것들을 탁자 위에다
쏟아부은 것 같았다. 그리고 피살자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될만한 것들과
값진 것들을 모두 골라내어 가져가버린 것
표면에 "라일락"이라는 상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은박지로 된 포장재가
두 개 들어 있었다. 포장 하나를 뜯어보자
안에서 미끈거리는 점액질의 엷은
고무제품이 나왔다. 콘돔이었다. 그는 혹시
범인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해서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쓰레기통까지
뒤져보았지만 사용된 흔적이 있는 콘돔은
발견되지 않았다. 죽은 여자는 성교에
대비해서 남자에게 줄 콘돔까지 준비했는데
그것을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죽은
것일까?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갖지 않았든가
아니면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채 관계를
가졌든가 둘 중의 하나이겠지. 그 콘돔에서
마치 불륜의 비릿한 정액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수건, 빗, 거울, 담배, 성냥, 초콜릿,
동전지갑, 플래스틱 갑 따위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물건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였고, 그런 것으로 보아
피살된 여자는 여유 있는 집안의 출신인 것
같았다. 꼭 있어야 할 것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지갑이었다. 그
안에는 돈도 들어 있을 것이고 그녀의
신분증이며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같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부산에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서울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 형사 두 명은 공항 검물을
빠져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남구
N동에 있는 S아파트로 향했다. S아파트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남달호는 중키에 깨끗하게 생긴 인상의
젊은이였다. 섬세하게 생긴 탓으로 형사
같은 거친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그는 잘해내고 있었다.
나이는 갓 서른이었고 지난해에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고 있었다.
그와 동행인 형사 역시 그와 같은
동갑내기인데 그는 거한이었다. 아직
미혼인 그는 학창시절을 유도선수로
보냈다고 했다. 유도선수 출신답게 그의
목은 통나무처럼 굵어보였다. 그의 이름은
조갑수(趙甲洙)라 했다.
S아파트 단지는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파제 위로 파도가 허옇게 덮치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택시를 내렸을 때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901호에 가기 전에 먼저 505동을
지키는 경비실에 들렀다. 아니 경비원이
그들을 불렀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남형사가 신분증을 보이자 경비원은 금방
공손해지면서 그들을 비좁은 경비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901호에 혹시 서창배라는 사람 살고
있습니까?"
조형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서창배 씨요?"
경비원은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런 사람 사로 있습니까?"
"서창배 씨를 찾는 겁니까, 아니면 그
가족들을 찾는 겁니까?"
그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서창배 씨를 찾는다니까요."
남형사가 보다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중년의 경비원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 죽었는데요. 모르고
찾아오셨습니까?"
젊은 형사들은 흡사 모욕이라도 당한 듯
안색이 변하면서 한동안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르고 찾아오셨나 보군요."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삼스럽게
형사들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 사람...... 언제 죽었습니까?"
남형사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죽은 지 한...... 2년 가까이 될
겁니다."
"교통사고로 죽었지요. 뺑소니차에 치여
죽었는데 아직까지 그 뺑소니차 운전사를
잡지 못했나봐요. 죽은 사람만 억울하게
됐지요. 유가족은 위자료 한푼 받지도
못하고......."
경비원은 말끝을 흐리면서 재떨이에서
담배꽁초를 집어들었다. 남형사가 재빨리
그에게 새 담배를 권했다.
"서창배 씨 직업은 뭐였습니까?"
"대학교수였습니다."
"어느 대학교수였나요?"
"아마 K대학 교수였을 겁니다."
경비원은 서창배에 대해서 그 이상은
모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교수가 생전에
어떤 분야를 전공했는지 그런 구체적인
점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조갑수가 물었다.
"네, 살고 있습니다. 아주머니가 저기
상가건물 안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보시면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집에 가봐야 아이들밖에 없을 겁니다."
경비실을 나선 수사관들은 경비원이
가리켜준 상가건물쪽으로 걸어갔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각기
우산을 하나씩 펴들고 있었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2년 전에
죽은 사람이 살아서 S호텔에 투숙했을 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거지?"
남형사의 물음에 조형사는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인이 죽은 사람 주민등록증을
사용했겠지. 사진을 바꿔치기하면 얼마든지
거센 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지려고 했다. 그들은 몸을
웅크리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범인은 서교수의 죽음과도 관계가 있는
놈이 아닐까? 그러니까 2년 전에 자동차로
서교수를 치어 죽이고 뺑소니친 놈이
이번에 또 호텔에서 여자를 죽인 게
아닐까? 서교수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해
가지고 말이야."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조형사는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상가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죽은 서교수의
부인이 경영하는 약국은 건물 입구 한쪽에

살인범은 죽은 여인의 신원을 감추려고
자기 딴에는 애를 써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완벽하게 해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마인의 눈에는 여기저기서
허점이 발견되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서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외제 담배로 길이가 긴 던힐이었다.
그는 뚜껑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담배를
헤아려 보았다. 모두 15개비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5개비를 피운 셈이었다.
재떨이는 비어 있었다. 감식반에서 재떨이
안에 들어있던 꽁초를 하나 남김없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탁자 위에는 던힐 외에 구겨진 담뱃갑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을 펴보니 말보로
뚱보는 성냥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디자인이 세련된 성냥으로 어떤 카페에서
만든 것이었다. 카페 이름은 "비련"이었다.
카페 이름치고는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살된 여인이 그 카페에 자주
출입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성냥의 한쪽 면에는 비련의 위치를
보여주는 간단한 약도와 함께 전화번호가
명기 되어 있었다. 비련은 강남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회색의 엷은 가죽으로
된 백으로 프랑스제였다. 그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백 안쪽에는 조그만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그 주머니에 부착되어 있는 지퍼는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마저
그것은 보기보다는 꽤 깊이까지 들어가는
주머니였다. 그 주머니 역시 비어 있었다.
그 안을 쓸어보던 그의 손끝에 무엇인가
스치는 감촉이 있었다. 그는 되짚어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손끝에 걸리는 것을
집어냈다. 그것은 조그맣게 접은
종이조각이었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종이조각 같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펴보았다. 그것은 우체국 소인이
찍힌 특수우편물 수령증이었다. 그 위에는
"속달"이라는 붉은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우편물을 속달로 보내고 나서
받은 영수증 같았다. 영수증에는
접수번호와 함께 우편물의 중량도 적혀
있었다.
뚱보는 그 수령증을 백 속에 넣지 않고
방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튼
범인을 쉽게 잡을 수 있을까? 부산에
내려간 후배 형사들이 범인을 잡아오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서창배의 숙박카드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가 틀린 것부터가 범인 체포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한동안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자리에 누워 지내고 싶다. 밥도 먹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고 이도 닦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누워 있고 싶다. 산다는 것이
벌써부터 힘들고 벅차게 느껴진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

맞은편 H생명보험회사 건물 창가에 몇
사람이 붙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쪽과
거의 같은 층의 직선거리에 있는 창인데 몇
사람이 자꾸만 이쪽을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는 것 같다. 살인사건 소식이
벌써 저기까지 알려줬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이쪽을 보고 그러는 게 아니겠지.
그는 몸을 돌려 방안을 어슬렁거리다가
욕실 앞에 처음 그대로 놓여 있는 하이힐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흰색의 하이힐이었다.
바닥에 붙어 있는 상표를 보니 E회사의
제품이었다. 그것을 도로 제자리에 놓고
돌아서서 다시 어슬렁거리다가 탁자 밑에서
무엇인가 조그만 것을 탁자 밑에서
무엇인가 조그만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노란색의 플래스틱
조각 같은 것이었는데 가만 보니 가루약
빈 껍데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다가 그는 갑자기 허리를 굽혀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다른 쪽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의깊게
구석구석을 더듬어 나갔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쓰러져
있는 1인용 소파를 한쪽으로 밀었다. 그
소파에 가려져 있던 카피트 바닥 위에 몇
개의 캡슐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모두 두쪽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처음 발견한 것까지 합쳐 반쪽의
빈 껍데기들은 모두해서 여섯 개였다.
그러니까 캡슐은 세개였던 셈이었다.
그것들이 발견되었던 곳에 혹시 가루약이
흘러 있지 않을까 해서 세밀히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캡슐째 입 속에 던져넣고 나서 물 한
모금과 함께 꿀꺽 삼키면 된다. 그 자체는
뱃속에서 녹아 없어진다. 그런데 지금 이
경우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일부러 그런 짓을 했으니 뭔가
사연이 있었을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에서 녹색의 조그만
플래스틱 갑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연고제
같은 것을 넣어둔 용기 같았다. 그 뚜껑
위에는 "김재문 피부비뇨기과"라는 글귀가
전화번호와 함께 금박으로 입혀져 있었다.
죽은 여자는 피부병을 앓고 있었을까?
무좀이나 습진이었겠지. 아니면
성병이었을까? 아까 욕실에서 보았던
그녀의 나신은 눈부실 정도로 희었었다.
피부병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거기다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보려고 킁킁거렸다. 습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붙은 용기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 안에다 캡슐 조각을
보관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중에
감식반에다 넘겨 검사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호텔 내에서
탐문수사를 벌이던 형사가 걸어온
전화였다.
"스카이라운지에서 근무하는 웨이터가
피살자를 기억하고 있어."
뚱보는 방을 나와 25층에 자리잡고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갔다. 구석 자리에 안경을
낀 형사와 웨이터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뚱보는 안경을 낀 형사 옆에
두 살 정도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웨이터는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청년이었다. 그 앞에는
피살자를 찍은 컬러사진이 한 장 놓여
있었다. 그것은 경찰이 급히 수사에
사용하기 위해 찍은 즉석 컬러사진이었다.
"사진을 보였더니 금방 알아보더군."
염태준이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며
말했다.
웨이터는 왼쪽 가슴 위에 안기홍이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 여자가 죽었다는 거 알고 있어?"
뚱보가 컬러사진을 가리키며 묻자
안기홍은 창백한 얼굴로 끄덕였다.
"호텔에서 여자가 죽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가 죽은 줄은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이 여자를 분명히 기억하나?"
"네, 분명히 그 여자입니다. 옷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의
표정이 아주 다르다. 어쩌다 간혹
스카이라운지에 나타난 건장한 남자와 함꼐
사라지곤 했던 미모의 여인을 목격했던
웨이터로서는 죽은 여인의 얼굴이 낯설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옷을 보고 그녀를
알아보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진에 나온 피살자의 두눈은 감겨 있었다.
누군가가 감겨준 것 같았다.
"그 여자가 틀림없는지 자세히 봐요."
"그 여자가 틀림없습니다. 어제 오후
3시쯤에 여기서 어떤 남자와 만났습니다.
안기홍은 그들이 주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여자가 커피를, 남자는 맥주를
마셨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리고 계산은
여자가 했다고 말했다.
"언제나 여자가 계산을 했습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언제나 계산을 했다고?"
언제나라는 말에 뚱보는 바짝 긴장했다.
"네, 언제나 여자쪽에서 계산을 했고,
남자가 계산하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매우 주의깊게 관찰했군. 왜 그렇게 그
사람들을 관찰했지?"
그 질문에 안기홍은 꽤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워낙 예쁘다보니까 눈에 띄어 관심 있게
봤을 뿐입니다."
그는 그 여자를 한 달에 두어 번꼴로
스카이라운지에서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목격해 왔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어제 만났던 남자를 만났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주 귀중한 증언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잠깐 만난 다음 함께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정식 부부는 아닌
것 같았고...... 어쩐지 떳떳치 못한
사이인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어떻게 생겼지?"
"키가 크고 건장하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미남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색깔이 들어 있는 안경을 끼고
"옷은 뭘 입고 있었지?"
"체크무늬 저고리에 안에는 푸른 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밤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매고 있지 않았습니다."
"특징 같은 거 있으면 말해 봐요. 눈에
띄는 특징 말이야."
형사들의 요구에 웨이터는 한참 생각해
보고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특징 같은 것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범인입니까?"
형사들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뚱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보면 알 수 있겠어?"
웨이터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 사람에 대해 몽타주를
만들어야겠는데 자네가 좀 협조해
주어야겠어. 현재로서는 자네가 그 사람을
제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그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가 어디지?"
"저쪽 창가입니다."
마침 그 테이블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자는 이쪽에 앉아 있었고 여자는
저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안기홍은 테이블의 양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뚱보는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탁자
위를 훑어본 다음 그 밑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들어봤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어땠어?
부드러웠나?"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딱딱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무슨 봉투를 꺼내주는 것 같았습니다.
편지봉투 같았는데......."
"그게 무슨 봉투였지?"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돈
봉투 같았습니다. 남자가 봉투 속에서
무언가 꺼내보는 것 같았는데......
수표처럼 보였습니다. 그걸 보고 남자는
만족하는 표정이었고 여자는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무튼 정상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건 현장으로 돌아왔다. 방안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가 복도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수화기를 집어들자 부산에 내려간 남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창배 씨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
확인됐습니다. 뺑소니차에 치여 죽었는데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뭐야? 아니, 그게 정말이야?"
뚱보는 놀라서 물었다.
"조금 전에 서창배 씨의 부인을 만나
확인했습니다. 부인은 여기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서창배 씨의 직업은 뭐였지?"
"대학교수였답니다. 부산에 있는 K대학
"확인해 봤나?"
"네, 학교에도 알아보고 시경 교통과에도
알아봤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도
사실이었고 사망 전까지 K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우연한 사고였나 아니면 살인이었나?"
"그건 아직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서교수의 부인은 남편이 뺑소니차에 치여
죽은 것을 우연한 사고사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거기에 대해 자세히 좀 알아봐. 그리고
서교수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가지고 와.
사진도 물론 가져오고."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여기서
자야겠습니다. 거기서는 진전이 좀
있습니까?"
남형사 일행이 숙소로 정한 모텔의
전화번호를 적고 나서 뚱보는 전화를
끊었다. 사건이 갑자기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치정에
얽힌 단순 살인사건 정도로 보고 곧 사건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 것
같았다. 범인은 2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도용해 지금까지 행세해 왔다. 왜
그랬을까? 그가 어제 이 호텔 프론트에서
제시했다는 주민등록증은 죽은 서창배
교수의 것이 아니었을까? 거기에다 사진만
바꿔치기하면 얼마든지 이용이 가능하다.
범인은 그것을 어떻게 입수했을까?
서교수가 죽기 전에 입수했을까 아니면
죽은 후에 입수한 것일까?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범인은 서교수의 죽음과 관계가
아닐까?
뚱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생각난 듯 주머니 속에서 종이조각을
꺼냈다. 그것은 피살자의 유품 가운데 섞여
있던 특수 우편물 수령증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나서 먼저 114에 전화를 걸어
N우체국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 수령증에는
우편물 접수날짜와 함께 N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잠시 후 그는 N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속달 담당직원에게 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신분을 밝힌 다음 사정
이야기했다. 상대가 수사관임을 알자
우체국 직원은 아주 친절하게 응해 주었다.
"수령증에 보면 접수번호와 접수날짜가
주시겠습니까?"
"접수번호는 428번이고 접수날짜는 88년
6월 25일입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뚱보가 알고 싶은 것은 속달 우편물을
보낸 사람과 그것을 받은 사람 양쪽의
이름이었다. 그는 볼펜을 집어들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이윽고 우체국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발신자의 이름은
유춘지, 주소는 서울 서대문구 Y동
135번지입니다."
뚱보는 우체국 직원이 불러주는 것을
재빨리 적었다.
"수신자의 이름은 김영대, 주소는 부산시
515호입니다."
"우편물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수령증에 보면
중량이 나와 있는데 얼마로 나와
있습니까?"
"55g으로 나와 있습니다."
뚱보가 수령증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55g의 우편물에 대한 속달 요금은
1,030원이었다.
"그렇다면 편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편지의 무게는 50g 내외이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뚱보는 갑자기 풍선을 타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범인이
아무리 완전범죄를 노린다 해도 어딘가에
수령증이야말로 범인이 모르고 지나친
결정적인 단서가 아닐까. 발신자의
유춘지는 피살자일 가능성이 크다.
피살자의 신원이 밝혀지면 사건은 거의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인은 주먹코를 한번 문지르고 나서
부산에 내려가 있는 남형사 일행이 묵고
있는 모텔에다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어느새
다급해져 있었다. 남형사와 조형사는 마침
숙소에 있었다. 별명이 풀레이보이인
남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서창배 씨의 부인한테 서교수의
주민등록증에 관해 물어봤나?"
"아, 그걸 빼먹었군요. 지금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가서 알아봐! 그런 걸 빼먹으면
되나? 서교수가 사망했을 당시 소지품
가운데 주민등록증이 있었는지 알아봐.
그리고 그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받아적어. 해운대구 G동
212번지 A아파트 10동 515호......
김영대...... 지금 바로 찾아가서
김영대라는 사람을 만나봐."
뚱보는 그 사람을 찾아보아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남형사는
자못 흥분하는 기색이었다.
"알겠습니다. 당장 가보겠습니다."
"냄새가 나면 신병을 확보해서
추궁해봐."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유춘지가
25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 편지야."
"찾아보겠습니다."
전화를 걸고 난 그는 호텔 구내에 남아
있는 염형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급히 함께
가봐야 할 데가 생겼으니 아래층 로비에서
만나자고 말한 다음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프론트데스크로
다가갔다. 당직 지배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지난 1월 것부터 조사해
봤는데...... 2월에 처음 투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월부터 지금까지 열다섯
번 투숙했습니다."
뚱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파일을
열었다. 로비에 내려와 있던 염형사가
가까이 다가와 곁에서 그것을
파일 안에는 서창배가 지난 2월부터
S호텔에 투숙했음을 입증하는 숙박카드가
열다섯 장이나 들어 있었다. 그와 함께
컴퓨터를 통해 투숙일자를 날짜별로 분류한
서류도 철해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알아봐
달라고 당직 지배인한테 부탁했던 것인데
예상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6개월 동안에 한
호텔에 열다섯 번이나 투숙했다면 호텔
직원에게도 웬만큼 얼굴이 팔렸을만도 한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서창배라는 이름으로 투숙했던
사나이의 얼굴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
호텔 직원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기억하고 있다고 해야 고작해서 키가 크고
잘생긴 것 같다는 정도였다.
있는 사람은 스카이라운지에 근무하고 있는
웨이터 안기홍이었다.
"왜 그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직원이
그렇게도 없을까?"
염형사와 함께 호텔을 나와 유춘지의
집을 찾아나서면서 뚱보가 물었다. 그의
찌그러진 차는 엔진이 걸릴 때까지
쿠르륵쿠르륵 하고 잔뜩 쉬어빠진 소리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지. 가짜 주민증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놈이 자기 얼굴을 쉽게
기억시키려고 하겠어. 가능하면 호텔
직원들하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겠지. 같은 아파트동에 살면서도 몇년이
지나도록 옆집에 사는 사람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잖아."
ꠑ ꠑ?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것도 같군.
그렇다면 안군이 기억하고 있는 정도가
믿을만할까?"
엔진이 걸리자 그는 급히 차를 주차장
밖으로 몰아갔다.
"내가 가만 보니까 그 친구 눈이 굉장히
나쁜 것 같더라구. 웨이터니까 안경을 안
끼고 있는 모양이야."하고 염형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쪽도 기대할 수없다는
건가?"
"두고 봐야지.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지?"
"아, 내가 말 안했던가."
뚱보는 염형사한테 특수우편물 수령증을
꺼내보였다.
"이게 뭐야?"
"그래?"
"우체국에 알아봤어."
"우체국에 알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
발신자의 이름이 뭐야?"
"유춘지...... 서대문구 Y동에 살고
있어. 수신자는 부산에 살고 있어.
남형사한테 연락했어. 웬 놈의 비가
이렇게......."
뚱보는 차량의 홍수 속으로 거칠게 차를
몰아나갔다. 이미 여기저기가 긁히고
찌그러졌기 때문에 차를 신주 모시듯
몰고가지 않아도 되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가는 사람들이 뚱보를 향해 눈을
흘겨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댔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에 젖을대로 젖어버린
함몰되어가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날이 빨리 저물고 있었다.
이윽고 Y동에 들어선 그들은 먼저 그
구역을 맡고 있는 파출소에 들렀다.
파출소 안에는 소장과 순경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신분을 밝히자 젊은 순경이
소장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중년의 소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어나 그들을
탐색하듯이 쳐다보았다.
"135번지면 어디쯤 됩니까?"
뚱보의 물음에 젊은 순경이 벽에 붙어
있는 관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135번지에 무슨 사고가 났습니까?"
깐깐하게 생긴 소장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자기 관내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자신도 좀 알아야겠다는 태도였다.
"아닙니다. 사람을 좀 찾으려고
그럽니다."
"여기가 135번지입니다."
젊은 순경이 지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개인주택입니까?"
"네, 주택입니다. 여기서 나가서
오른쪽으로 한 200m쯤 걸어가다보면
담배가게가 하나 나올 겁니다. 그 가게를
끼고 왼쪽으로 쭉 가시면......."
순경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소장이
"135번지면 슈퍼마켓하는 최사장집
아니야?"하고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관내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 대한
신상카드가 비치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형사들은 거기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다음에 찾아간 곳은
동사무소였다. 동사무소에는 이미
퇴근시간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당직
근무자만이 앉아 있었다. 용건을
이야기하자 동사무소 직원은 즉시
135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주민등록표를
꺼내주었다.
Y동 135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해서 8명이었다. 세대주의 이름은
최상수(崔相洙)였고 부인은
이명애(李明愛)였다. 그 사이에 자식이 넷
있었고, 그 외에 최상수의 노모와 그의
처제가 동거인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
없었다.
"괜히 헛다리 짚은 거 아니야?"
염형사의 말에 뚱보는 화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어.
등록이 안 돼 있는 동거인은 많다구."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염형사의 빈정거리는 말에 뚱보는
헛기침만 했다.
최상수의 집은 동사무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의 집은 네거리 코너에
있는 3층 건물로 1층과 지하층은
슈퍼마켓으로 이용하고 있었고, 2층은
다방으로 임대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3층에다 살림집을 차려두고 있었다.
최상수는 외출중이었다. 그의 부인과
ꠑ ꠑ처제가 형사들을 맞았는데 그녀들은 혹시
동거인 가운데 유춘지라는 젊은 여인이
있지 않느냐는 형사들의 맥빠진 질문에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대답했다.
"슈퍼마켓 종업원들 가운데 그런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없을까요?"
"종업원이라야 네 명인데...... 유씨
성을 가진 애는 없어요."
"그렇다면 혹시 말없이 행방을 감춘
여자는 없습니까?"
이명애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뚱보는 마지막으로 피살자의 사진을
꺼내보였다.
"이런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모든 게 가짜투성이군."
"부산쪽도 아마 가짜일걸."
뚱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꽤나 심사가
사나워져 있었다. 그전 같았으면 밖으로
화를 터뜨렸겠지만 수사 생활에 이력이
붙다보니 자신도 놀랄 정도로 참을성이
많아졌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한동안 차 안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빗방울이 자동차의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자꾸만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마형사는 의자를 뒤로 젖힌 다음 상체를
눕히면서 눈을 감았다. 염형사도 그가 한
것처럼 똑같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나서
두눈을 감는다.
마형사는 계속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사가 끝나기 전에는 잠시도 거기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제 S호텔에서는 두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두번째 사건은 오늘 드러났지만
피살자가 죽은 것은 어제 오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어제 같은 호텔
안에서 살해된 것이다. 검시의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살해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남자는 지하 주차장에서 불고기가 되어
죽었고 여자는 방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누가 먼저 죽은 것일까?
남자쪽 신원은 밝혀졌다. 그 두 죽음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서로 독립된
사건이라기보다는 서로 연관성이 있는
사건들이 아닐까? 두 사건 모두 같은
호텔에서 발생했고, 발생한 시간도
비슷하지 않은가. 두 사건의 연관성을
찾아내면 고리가 풀릴지도 모른다. 만일
전혀 관계가 없다면 골치 아프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니까. 빌어먹을.


5. 용의자

해운대구 G동에 있는 A아파트 단지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단지가 워낙 커서
나지막한 산 하나가 온통 아파트 건물들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 소시민들을 상대로
지은 것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20평 내외의
조그마한 아파트들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뻗어 있는 차도를 택시를
타고 오르면서 보니 바다는 숫제
검은빛이었고, ㅈ빛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은 유난히도 선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금방 흐려지더니 아파트 단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수평선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빗발이 갑자기 굵어지고 있었다.
뒤로 거대한 배가 지나가고 있었다.
A아파트 10동 앞에서 택시를 내린
형사들은 515호를 찾아 5층까지 이어져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아파트는 모두 5층
높이로 지어져 있었고, 지은 지 오래 된 듯
꽤 낡아 보였다. 각 동을 지키는 경비실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앞장서서 올라간 남형사가 먼저 515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누구세요?"하는 물음과 함께 이쪽의
응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낯선 사람들을 보고 젊은 여인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속이 비치는 잠옷
바람이었고, 욕실에서 금방 나온 듯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색을 하고
뛰어나왔다가 낯선 사람들을 보고 그만
실망한 것 같았다.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의 풀어헤쳐진
가슴쪽으로 쏠렸다. 그녀는 당황해서
가슴을 여미며
"잠깐 기다리세요."하고는 안쪽으로 도로
뛰어들어갔다.
젊은 형사들은 그녀의 농염한 자태에
잠시 얼이 빠진 듯 서 있다가 그녀가
사라지자 멋적은 미소를 나누었다.
"근사한데......."
플레이보이로 통하는 남형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자 거한은 두 눈을
껌벅거렸다.
잠시 후 블라우스를 위에 걸친 여주인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김영대 씨
댁입니까?"
"네, 그런데요."
"지금 계십니까?"
"안 계시는데요. 어디서 오셨는가요?"
그들을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 약간
두려운 빛이 나타났다.
"경찰입니다."
남형사가 신분증을 꺼내보이자 그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그녀의 뒤에는 어린 소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가요?"
"아, 좀 만나볼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실례지만 김영대 씨하고는 어떤
사이십니까?"
ꠑ ꠑ? "남편이에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부군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서울 가셨는데요."
"언제 가셨습니까?"
남형사의 질문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어, 어제 가셨는데요."
"언제 오신다고 했습니까?"
"글ㅆ요. 오늘 내려오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면서 형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안에 좀 들어갈까요?"
조형사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밀고 들어가자
그녀는 당황해서 옆으로 비켜섰다.
조금은 들뜬 듯한 분위기를 지닌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열댓 평쯤 되어보이는 작은
아파트 공간은 그녀의 게으른 성품을
말해주는 듯 꽤나 어질러져 있었다. 이렇다
하게 값이 나가는 가구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집안
분위기였다. 열린 방문 사이로 흐트러진
침대가 보였고, 그 침대가 놓여 있는
벽면에는 온통 여자의 나체 사진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여주인이 다급하게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그들은 더 이상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좁은 거실에 놓여 있는 낡은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급히
어질러져 있는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빨아대면서 제 엄마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여주인이 차를 대접하려는 것을 형사들은
사양했다. 그 대신 그녀를 자리에 앉게 한
다음 그녀의 이름부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하종미(河宗美)라고 했다.
"부군께서는 무슨 일로 서울에
올라가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빗어넘겼다.
"오늘 틀림없이 내려오신다고 그랬나요?"
"오늘쯤 내려오신다고 하면서
올라갔으니까...... 아마 오실 거예요."
"김영대 씨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종미는 얼른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투로
"사업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무슨 사업입니까?"
그녀는 또 머뭇거렸다.
"아직 하지는 않고...... 앞으로 할
거예요."
형사들은 서로 한번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현재는 뚜렷이 하는 일이
없습니까?"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남형사는 다그쳐
물었다.
"앞으로 하려고 하는 사업이란 건
뭡니까?"
"레스토랑이에요."
"식당 말입니까?"
"네, 한식당이 아니고 카페식
"어디다 개업할 겁니까?"
"서울에다 할 거예요."
"개업일자는 언제입니까?"
"다음달 중순경이에요."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셨나요?"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유춘지 씨하고는 어떤 사이십니까?"
남형사는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갑자기 정곡을 찌름으로써
상대방에게 미처 거짓말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빗나갔다.
"유춘지 씨가 누군가요?"
"유춘지 씨를 모르십니까?"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은 몰라요."
"유춘지 씨는 댁을 잘 안다고 하던데요."
"저를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전 그런 사람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댁의 부군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보지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얼굴에 경계와 의혹의 빛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집안을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 집안을 뒤져볼 수 있는
수색영장이 없었다. 미처 그것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가요? 그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별것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좀 살펴보겠습니다."
그녀의 입에서는 집안을 살펴보아도
좋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미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녀가 안
된다고 완강히 버티었다면 그들도 하는 수
없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차를 밟아나갔을
터이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그녀의 무응답을 자기들
편리할대로 해석하고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사실 절차 같은 것은 시간을
다투는 수사 실무자들한테는 수사를
지연시키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일
경우가 많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인권문제를 들고 나오겠지만 말이다.
수사관들이 노리는 것은 오로지 하나, 수단
체포하는 일이다.
살펴보겠다는 말의 유연성도 실제로는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안은 눈깜짝할 사이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형사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져대고
있었고, 그들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쓰레기를 뒤지는 것처럼 물건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집착력을 보이며 집요하게 뒤져대고
있었다. 집 주인에게 무엇을 찾는다는
구체적인 말도 없었다.
조형사는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겨울 옷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트렁크를 뒤집어 엎었다. 쏟아져나온
옷들을 뒤적여보다가 하나식 집어들고
않은 것이 확인되면 그것을 구석쪽으로
내던졌다.
그 아파트에는 조그만 방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안방이었고 그보다 작은
다른 하나는 장난감 같은 것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 방인 것 같았다.
남형사는 침대가 놓여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얼어붙은 듯 서 있기만
하던 하종미가 재빨리 들어오더니 얼굴을
붉히며 흐트러진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형사는 잠시 벽면에 붙어 있는 여인의
나체 사진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아주
근사하군요."라고 중얼거렸다.
하종미는 더 이상 배겨내기가 힘들었던지
홱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쳐다보았다.
벽면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여인의 나체
사진들을 주고 외국 잡지 같은 데서 오려낸
것들로 하나같이 팔등신 미녀들의 풍만한
육체를 컬러로 찍은 것들이었다. 음부 같은
곳이 고스란히 매력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플레이보이지 같은 잡지에서
주로 골라낸 것 같았다. 하종미가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남자쪽에서
섹스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그랬을 것
같았다.
남형사는 몸을 돌려 화장대 앞에 섰다.
화장대 위에는 여러 가지 화장품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머리빗에는 긴 머리카락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고, 재떨이 안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는
포도주 색깔의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
꽁초는 미제 켄트였다. 그는 화장대 서랍을
차례로 열어보았다. 서랍 속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다른 서랍
속도 마찬가지였다. 서랍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쏟아놓고 손으로 휘저어보고 나서
왼쪽 맨아래 칸에 있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겉봉이 뜯긴 편지들이 수북히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들고 겉봉에 씌어 있는 수신자의
이름들을 확인해 보았다. 수신자의 이름은
하나같이 하종미로 되어 있었다. 발신자
가운데 혹시 유춘지라는 이름이 없을까
해서 찾아보았지만 그런 이름은 보이지가
않았다. 하종미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그가 물었다.
모아둡니까?"
그녀는 고개를 내젓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모두 없애버려요."
남형사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수색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 시간
남짓 집안을 뒤져보았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주방은 물론
욕실까지도 찾아보았지만 유춘지가
김영대한테 보낸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남형사는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어둠이 배어들고
있었다. 베란다로 불어닥친 비바람이
창문에 부딪치는 바람에 창문 위로는 계속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고
창문에 시든 안개꽃이 비쳐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병 속에 들어 있었다.
화병은 안방 구석에 있는 받침대 같은 것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받침대는
받침대치고는 꽤 높아보였고 꽃무늬가 있는
비닐 커버에 덮여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그쪽으로 다가가 비닐
커버를 들어올려보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조그만 소형
금고였다. 그는 꽃병을 드러낸 다음 거칠게
커버를 걷어냈다. 그것은 아주 오래 된
것인 듯 녹이 많이 슬어 있었고, 칠도
군데군데 많이 벗겨져 있었다. 손잡이를
잡아 비틀어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남형사는 손에 묻은 먼지와 녹을 털어내고
나서 하종미를 돌아보았다.
하종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 열 줄 몰라요."
"김영대 씨가 잠가놨나요?"
"그랬을 거예요."
"금고 안에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고장나서
사용하지도 않아요."
남형사는 그 금고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형사가 주방쪽에서 다가와 허탕을
쳤다는 듯 머리를 흔들다가 금고에 시선이
머물었다.
"오래 된 금고인데 열리지가 않아.
김씨가 잠가놨나봐."
바로 그때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형사들은 긴장해서 서로 쳐다보았다.
현관으로 나가려는 것을 조형사가 막았다.
"김영대 씨가 돌아왔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왔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서 문을 열어주세요."
"아니야. 아주머니를 내보내면 안 돼."
조형사의 말을 남형사가 막았다.
차임벨이 계속 울렸다. 어린 소녀가
하종미의 손을 현관쪽으로 잡아끌었다.
"아빠야, 아빠... 아빠 왔어."
남형사는 하종미를 화장실로 밀어넣었다.
"아주머니는 거기서 꼼짝하지 말고
계십시오.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문 열 줄 아니? 가서 문 열어줄 수
있어?"
끄덕였다.
"그럼 네가 문을 좀 열어줄래? 아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것을 보고
남형사는 화장실로, 조형사는 주방쪽으로
몸을 숨겼다.
소녀가 문을 열어주기 전에 남형사는
화장실에서 뛰어나와 현관에 있는 자신의
구두와 조형사의 구두를 들고 재빨리
화장실로 도로 들어갔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건장하게 생긴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007가방을
내려놓더니 소녀를 번쩍 안아올린다.
"아이구, 우리 찬희가 문을 다
소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화장실쪽을
가리켰다. 사내는 거실로 올라서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막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을 때 그 안에서 낯선 남자
한 명이 튀어나왔다.
"실례합니다. 김영대 씨죠?"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내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안고
있는 소녀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품속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것을
보고 하종미가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면 죽일
거야!"
김영대는 뒷걸음질을 쳤고 남형사는 두
손을 들어 상대방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당신은 포위됐어! 그 칼을 내려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그는 등에 와닿는 단단한 물체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칼을 버려! 버리지 않으면 사살할
테다!"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김영대는 등을 찌르고 있는 것이 총구임을
알았다.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그의 손에서 칼이 굴러떨어졌다.
남형사가 재빨리 그것을 발로 찼다.
이어서 그는 김영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김영대의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이
스쳐갔다.
"왜 이러는 거예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영대는 가만 있는데 하종미가 울면서
남형사에게 매달렸다. 소녀도 덩달아
울면서 영대의 다리를 껴안는다.
"조용히 해!"
영대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종미는
울음을 그치고 딸을 남편한테서
떼어놓았다.
영대는 성난 눈으로 자기 집에 침입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은 누구야? 무슨 일로 이러는
거야?"
"경찰이야."
조형사가 권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이러는 거요?"
"당신이 칼을 휘두르니까 그런 거지.
처음부터 점잖게 나왔으면 이러지 않아."
남형사가 말했다.
"강도가 우리 집에 침입한 줄 알았어요.
그래서 얼떨결에......."
"당신은 강도에 대비해서 항상 품속에
칼을 품고 다니나요?"
그 물음에 영대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남형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집어들어 보았다. 대검보다는 조금
작으면서도 끝이 날카롭게 생긴 칼이었다.
남형사는 제대로 찾아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당신 지금 서울서 오는 건가요?"
"대구에서 오는 길입니다. 경찰이면
경찰이지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이 야단입니까? 수갑은 왜 채우는 겁니까?
이거 풀어줘요!"
"닥쳐!"
툭 쳤다. 남형사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 금고 안에는 뭐가 있어요?"
비로소 영대의 눈에 난장판이 되어 있는
집안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짓말 마! 저 안에 약이 들어 있다는
거 다 알고 왔으니까 빨리 열어봐."
조형사가 소리를 질렀다.
"약이라니요?"
"히로뽕 말이야."
그 말에 영대는 펄쩍 뛰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습니까? 어떤
놈이 그런 엉터리 정보를 주던가요?"
남형사가 잡아끌자 영대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따라왔다. 그리고 금고 앞에
웅크리고 앉아 다이얼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불편하다고 하면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지만 형사들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김영대는 한참 동안 꾸물거리다가 마침내
금고문을 열었다. 남형사는 그를 물러나게
하고 대신 금고 앞에 앉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꺼냈다. 금고
안에는 별로 많은 물건들이 들어 있지
않았다. 형사들은 그것들을 내려놓고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그것들은 땅문서, 구식 손목시계, 돋보기
안경, 손때가 묻은 담배쌈지, 담뱃대,
고문서, 편지뭉치 같은 것들이었다. 금고
생각 밖이었다.
"히로뽕이 있으면 찾아보십시오."
김영대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고 안에는 없는 것 같군요."
남형사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히로뽕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편지뭉치를 풀어헤쳤다.
"이 물건들은 모두 옛날 것들
같은데......왜 금고 안에 넣어두었지?"
조형사가 고문서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품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해 온 것들이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겁니다. 금고도 아버지가 물려준 겁니다."
"별로 값이 나가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것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김영대의 표정이 갑자기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두 눈은
남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형사의 손에는 몇 통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들은 그가 편지뭉치에서
골라낸 것들이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히로뽕이
아니었어요. 바로 이거였어요. 이
편지들......."
남형사는 김영대의 코앞에다 편지들을
흔들어 보였다.
"유춘지가 누구지요?"
김영대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형사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영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모릅니다."
김영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남형사는 편지봉투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영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고 나서
하종미한테도 보여주었다.
"보다시피 이 편지들은 김영대 당신한테
온 것들이야. 여기에는 분명히 발신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유춘지라고......
아마 여자이겠지. 그리고 이 편지들은 모두
뜯겨져 있어요. 당신이 이 편지들을 보고
나서 금고 안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래도 유춘지가 누구인
모르겠어요?"
"모릅니다."
영대는 머리를 흔들었고 하종미는 창백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모른다고 하면 말이 되나!"
조형사가 버럭 소리지르자 어린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남형사는 아이를
달래면서 하종미한테 아이를 데리고 옆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영대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기 남편과 형사들이 주고받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두어야겠다는 듯이.
"당신 말대로라면 모르는 여자가
당신한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남형사는 픽하고 웃었다.
"당신은 매우 희극적인 데가 있군요.
부인께서도 유춘지라는 이름을
모르십니까?"
"좋아요.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한테서 온
편지들을 왜 금고 속에 보관해 놨지요?"
"그건 저기......."
영대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냥 버리기가 싫어서 보관해둔
겁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건 그렇고......
무슨 내용의 편지들입니까?"
"이상한 내용입니다."
영대는 불만스럽게 말하고 나서 답답한
듯 수갑찬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남형사는 접수날짜가 6월 25일인 서울
N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일곱 통의 편지 가운데 그것은
가장 최근에 보낸 편지였다.
조형사가 궁금한 듯 고개를 디밀었다.

영대씨.
오늘도 당신을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씁니다. 뱃속의 아기가 몹시 보채는군요.
세상에 나와 밝은 햇빛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가 봐요. 그리고 엄마 아빠가
구인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
곰곰 생각해 보니 당신한테 몸과 마음을
빼앗긴 이후 지금까지 저의 인생은 오로지
당신을 향한 일념과 희생으로 얼룩져
왔습니다. 당신은 저와 같은 생각이
아니겠지만 저는 자나깨나 오로지 당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년 전 여름 피서지에서 당신을
처음 만나 당신한테 강제로 몸을 빼앗겼을
싶었고 당신이 죽이고 싶도록
저주스러웠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신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어 오는 동안 어느새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
봅니다. 육체를 정복당한 여자는 결국
정신마저 정복당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나봅니다. 저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완전히 당신한테 강탈당한 끝에
결국 당신의 손끝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지난번 당신한테 얻어맞은 데가
욱신거리고 아픕니다. 제 몸은 당신의
무자비한 손찌검으로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당신한테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당신이 좋다고 매달리는 내
하지만 당신이 좋은 걸 어찌합니까. 아니,
제가 눈이 어두워 남편과 자식까지
저버렸다는 표현이 옳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저는
그동안 적지 않은 돈을 당신의 장사
밑천으로 대주었습니다. 모두 계산해 보니
3억 가까운 큰돈이었습니다. 집안에 있는
돈은 물론 곗돈, 친정 식구들 돈, 친구들
돈까지 끌어다가 당신한테 갖다
바쳤습니다. 그런 제 정성도 모르고 당신은
항상 못마땅한 표정으로 돈을 받곤
했습니다.
이제 저는 가정에서 쫓겨나고 빚쟁이가
되어 쫓기는 신세입니다. 그리고 뱃속에는
당신의 아기가 자라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기를 떼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 수
기를 생각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신이 지금까지
저한테 추구해 왔던 것은 오로지 육체와
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그 밖의
것은 저한테 요구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당신은 저한테서 단물을 모두
빨아먹고 나자, 저라는 여자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떼라고
요구하고 있고 결국은 저와 헤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여자와 계속 만난다는 것이 더없이 괴로운
일이겠지요. 당신은 이제 단물도 나오지
않는 저 같은 여자보다는 돈과 미모를 갖춘
새로운 여자를 찾는 일이 더 필요하겠지요.
악마 같은 사람! 당신은 악마예요! 그러나
저한테는 사랑스러운 악마예요. 제가 모든
이다지도 어리석을까요? 당신이 악마인
줄을 알면서도 당신을 원하고 있다니 세상
천지에 저 같이 어리석은 여자가 또
있을까요? 여자는 모순 덩어리라고 하지만
저 같은 모순 덩어리가 과연 또 있을까요?
당신이 저를 버리면 저는 죽습니다. 아기와
함께 죽습니다. 당신이 모두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저는 이제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저를 버린다면 저는
마지막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떠나는 것입니다.
먼 나라로 함께 떠나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혼자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데리고 떠날 겁니다.
영대씨,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꾸려요. 저는 당신하고 함께라면 얼마든지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가 있어요. 그럴려면
당신은 지금 부인과 이혼하셔야 해요.
당신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어요. 아마
이것이 마지막 편지가 될 거예요.
1988년 6월 25일 당신의 춘지 올림

"갑시다."
편지를 봉투 속에 접어넣으며 남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가보면 알아."
조형사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김영대의 한쪽 손목에 걸려 있는 수갑을
풀어 자신의 손목에다 채웠다. 그러자
하종미가 두 사람의 손목이 연결된 수갑을
붙잡고 늘어졌다. 형사들은 간신히 그녀를
떼어놓고 영대를 데리고 어둠이 깔린
밖으로 나섰다.


6. 알리바이

"망할 놈의 비가......."
차창을 때리는 빗물을 흘겨보면서 마인이
중얼거렸다.
"담배 좀 그만 피울 수 없어?"
뒷자리에 늘어져 있던 염형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인은 차창을 연 다음
밖으로 담배꽁초를 내던졌다.
"담배꽁초 좀 재떨이에다 버릴 수 없어?"
마형사는 뭉툭코를 손으로 문지르며
출구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서울역에 나와 있었다. 밤차로
남형사 일행이 용의자를 데리고 온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 그들을 마중나온 것이다.
김영대는 S호텔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거의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 보고를 받았을 때
수사본부는 흥분에 싸여 일손을 놓았고
계장은 술판까지 벌여주었었다.
모든 비는 서울역 광장 위로만 쏟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광장의 아스팔트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가 꽤나 요란스러웠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광장을 밝히고
있던 불빛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해장국이나 하나씩 먹고 올 걸 그랬군."
염형사가 길게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5분 남았어."
"보나마나 연착할 거야."
그들은 출구가 마주보이는 위치에다 차를
주차시켜놓고 있었다. 마인은 형사수첩을
꺼내 수사일지를 들여다보았다.
1. 1988년 7월 20일 오후 2시 살인사건
신고받고 S호텔 1924호실로 출동. 피살자는
20대 여인.
2. 1924호실 투숙객 이름은 서창배.
주소는 부산 남구 N동 152번지 S아파트
505동 901호. 전화번호는 625-776X.
남형사가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서창배라는
인물은 없는 것으로 밝혀짐.
3. 같은 날 오후 남형사와 조형사 비행기
편으로 부산행.
4. 피살자의 유품 중에서 특수우편물
수령증 발견. 접수ㅂ428. 접수날짜 88년
6월 25일. 무게 55g. 발신자 유춘지.
수신자 김영대. 발신자의 주소 서울
서대문구 Y동 135번지. 수신자의 주소 부산
해운대구 G동 212번지 A아파트 10동 515호.
7월 19일 3시경 피살자로 보이는 여자와
30대 초의 남자가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 그 두 사람은
전에도 스카이라운지에서 수차례
만났었다고 함.
6. 부산으로 내려간 수사팀으로부터
서창배에 대한 조사 보고. 2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당시의 사고차량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음. 서는 당시 부산
K대 서양화과 교수.
7. 부산의 남형사에게 김영대의 집주소
가르쳐주다. 김영대의 신병 확보하라고
지시.
8. S호텔 프론트데스크에서 용의자가
서창배라는 이름으로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S호텔에 투숙해 왔음을 확인.
찾아갔으나 허탕. 그곳에 살고 있지 않음.
10. 안기홍에게 피살자의 사체 보이다.
그의 진술 토대로 용의자의 몽타주 작성.
11. 남형사로부터 김영대의 신병
확보했다는 보고. 그의 집에서 유춘지의
편지도 발견. 김영대를 서울로 연행해
오라고 지시.

"열차가 도착한 모양이야."
염형사의 말에 마인은 고개를 쳐들었다.
출구를 통해 사람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출구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광장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 남형사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염형사가 고개를 길게 빼고 차창 밖을
내다본다.
"저기 오는군."
마인의 시야에 세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온
뒤에야 남형사 일행은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거구의 조형사가 그 낯선 얼굴의 사나이와
함께 우산을 받쳐쓰고 있었고 남형사는
그들 뒤에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조형사와 낯선 사내 사이가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뚱보는 낯선 사나이의 모습이
수미터 앞에까지 다가왔을 때 직감적으로
그가 바로 범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비슷한데...... 저자가 틀림없어."
염형사도 같은 생각인지 몽타주를
마인한테 내밀며 말했다. 뚱보는 몽타주를
받아 그것을 힐끗 내려다본 다음 남형사
일행을 향해 클랙슨을 울렸다. 조형사가
그들을 발견하고 우산을 쳐들고 흔들었다.
몽타주는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해서
전문가가 밤새워 작성해 낸 것이었다. 그
몽타주와 지금 다가오고 있는 낯선
사나이의 모습이 과연 비슷해 보였다.
몽타주에는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건장한
체격인 점도 일치하고 있었다.
염형사가 뒷자리의 문을 열어주자
조형사가 김영대를 먼저 차에 오르게 하고
뒤따라 차 안으로 들어왔다. 남형사는
앞자리에 올라탔다.
ꠑ ꠑ? "수고했어."
뚱보는 고개를 끄덕한 다음 엔진키를
돌렸다.
"자백했나?"
차가 빗속을 질주하기 시작했을 때
뚱보가 앞을 응시하며 물었다.
"아뇨, 잡아떼는데요."
남형사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용의자는 납덩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봐, 미남. 무슨 생각하고 있어?"
염형사가 용의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물었다. 그가 용의자를 미남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김영대는 그때부터 미남으로
통하게 되었다.
"미남, 무슨 생각하고 있어?"
염형사가 다시 물었다.
미남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지금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야. 내가 왜 그 여자를 죽였을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만일
사형선고를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등등
말이야."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미남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염형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잘해
보자구."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앉아 있는 김영대는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나 그들은 S호텔 앞을
거기서 가까운 모퉁이에 있었다. 뚱보는
맨마지막에 차에서 내렸다. 비가 더욱 세게
퍼붓고 있었다.
수사본부에서는 계장을 비롯해서
수사요원들이 흥분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행을 맞아들였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카메라의 플래쉬가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터지는 바람에 김영대는 적이
놀라는 것 같았다. 그를 연행해온
수사관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형사는 용의자를 수사본부로 데리고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는
벌떼같이 달려드는 기자들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구계장에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아직
"상관없어. 거의 확실하잖아."
범인임이 거의 확실하지 않느냐는 말에
뚱보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계장은 수사 계통에서 잔뼈가
굵었으면서도 어떤 문제를 매듭짓는데
있어서 성급하게 서두르는 면이 있었다. 그
때문에 적잖게 실수를 저질러왔으면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범인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할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뚱보는
잠자코 구석쪽으로 가서 유춘지가
김영대한테 보냈던 편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조형사는 김영대를 의자에 앉힌 다음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는 수갑을 풀어
김영대의 다른 손목에다 채웠다. 그러자
"이것을 들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를
찌르려고 했습니다."
수사관들이 김영대를 에워쌌다. 계장은
그를 마주보고 앉더니 칼을 집어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김영대는 수사관들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된 듯 핼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계장이 갑자기 칼로 책상을 두드렸다.
김영대는 깜짝 놀라 계장을 쳐다본다.
"너 이걸로 몇 사람이나 죽였어?!"
"아,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마! 넌 살인할 관상이야!"
"이걸 보십시오."
뚱보가 편지 한 장을 계장의 어깨 너머로
넘겨주었다. 그것은 유춘지가 지난 6월
25일에 김영대에게 써서 보낸 편지였다.
그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난 계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일어났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래도 할 말이
있나?"
김영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계장을
쳐다보기만 했다.
"다른 편지는 어때?"
계장이 마형사를 돌아보면서 활기차게
물었다.
"모두 일곱 통인데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소지품 모두 꺼내봐."
"꺼내놨습니다."
남형사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것들을
책상 위에다 쏟았다. 그 가운데서
이렇다하게 특별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지갑 속에는 만원권 새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림잡아 1백만 원도 넘을 것
같았다.
"이 돈 어디서 났지?"
"빌린 돈입니다."
"누구한테서 빌렸어?"
"친구한테서 빌렸습니다."
"친구 이름 대봐. 전화번호하고......."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뭐? 말할 수 없다구?"
계장은 어이없다는 듯 용의자를
노려보았다. 용의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계장을 마주 쳐다본다. 계장은 지갑 속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앞뒤로 살펴보고 나서
"당신 이거 가짜지?"하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계장은 지갑 속을 샅샅이 뒤져보고 나서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다른 주민등록증은 없는데? 서창배의
주민등록증 말이야."
"아마 버렸겠지요."
계장은 김영대를 노려보았다.
"이봐. 서창배 주민등록증 어따 ㄷ어?"
그것은 아주 중요한 증거물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뭘 말입니까?"
용의자가 볼멘 소리로 되물었다.
"능청떨지 마!"
계장은 금방이라도 때릴 듯이 주먹을
쥐었다가 놓으면서 김영대의 주민등록증을
뚱보에게 넘겼다.
"빨리 신원조회해 봐. 전과가 있을
거야."
마형사는 본서의 컴퓨터실로 즉시 전화를
있다.
"이름 김영대...... 생년월일 1953년 9월
14일......."
이름과 생년월일만 대면 그에 대한
신원조회 결과가 즉시 모니터에 나타난다.
뚱보는 과학문명의 신속정확함에
감사하면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김영대...... 전과 3범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강간 1, 사기 2."
뚱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계장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전과 3범임이 확인되자 계장은 더없이
만족하는 표정이 되었다.
"화려한 놈이구나."
김영대는 계장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할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 근무하는 웨이터
안기홍이 S호텔 살인사건 현장인
1924호실로 호출된 것은 아침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방안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땀과 비에 젖어
초라해 보였지만 그들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고 열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방안의
분위기에 위압감을 느끼고 주춤거리고 있는
안기홍에게 누군가가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하고 말했다.
웨이터 안은 창가로 다가가 형사가
가리키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당신도 이쪽으로 와서 앉아."
몸을 움직였다. 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안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자리에
보기 좋은 체격을 내려 놓는 사내를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얼굴이 잘 보이도록
그의 자리는 창쪽을 향해 놓여져 있었고,
안은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안의 두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김영대도 차갑게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안이었다. 그는
시선을 둘 데가 마땅치 않은지 당황한
얼굴로 도움을 청하듯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이봐, 미남......."
염형사가 담배를 꼬나문 채 한쪽 눈을
"이 사람 본 적 있나?"
염형사는 턱으로 웨이터 안을 가리켰다.
김영대는 안에게 사나운 눈길을 한번
던지고 나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본 적 없습니다."
염형사는 똑같은 질문을 안에게
던져보았다. 안은 김영대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 적 있습니다."
기어들어가는 그 목소리에 김영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 앉아 있어."
조형사가 뒤에서 김영대의 어깨를
내려쳤다. 용의자는 도로 주저앉으면서
안을 노려보았다.
"야, 임마. 어디서 나를 봤다는 거야?"
김영대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이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보고 마형사가
나섰다.
"겁낼 것 없어. 이 사람은 지금
발버둥치고 있는 거니까 하나도 신경쓸 것
없어요."
증인을 용의자와 맞대면시킨다는 것은
증인의 입장에서 보면 좋지 않은 일이다.
나중에 불리한 증언 때문에 상대방한테
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형사들은 그 점을 묵살하고
있었다. 그런 것 저런 것 따지기에 앞서
범인을 빨리 체포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방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러나 아무도 연기를 밖으로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안을 바라보는 뚱보의 두눈이 더욱
작아지는 것 같았다. 안은 용의자를 외면한
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저께 봤습니다."
"웃기지 마, 이 새끼야!"
김영대가 일어나려는 것을 조형사가 다시
제지했다. 마형사는 용의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다시 한번 그랬다가는 얻어터질 줄
알아. 끽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멱살을 움켜잡은 힘이 대단했던지
김영대는 안을 흘기면서 쿨럭거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해봐. 몇월 며칠 몇시에
어디서 이 사람을 봤는지 말해봐."
"7월 19일 오후 3시경에 이 호텔
안은 결심을 했는지 조금 전과는 달리
또렷이 증언했다.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김영대는 어쩔줄 모르며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때 혼자 있었나, 아니면 누구와 함께
있었나?"
"어떤 여자하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혹시 이 여자가 아니었나?"
안 앞에 여자의 죽은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몇 장 놓였다. 그것은 이미
안에서 보인 것들이었다. 안은 그것들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꺄! 거짓말하지 마!"
김영대가 탁자를 걷어차는 바람에 안은
용의자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너무 세게
때렸던지 김영대는 의자와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는데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앉아!"
뚱보가 위압적으로 소리치자 김영대는
안을 흘기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형사가 코피를 닦으라고 휴지를 갖다주자
그는 수갑찬 두손으로 거칠게 코를 훔쳤다.
뚱보 형사는 안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대신 그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 해 봐야 소용없어. 다 드러난
사실을 부인해 봐야 당신만 고통스러울
뿐이야."
그는 피살자의 사진을 한 장 들어
김영대의 코앞에 바싹 들이댔다.
"당신이 그저께 이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이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거 본 사람이 있어."
그는 턱으로 안을 가리켰다.
"여기 이 친구는 스카이라운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웨이터야. 거짓말할 리가
없어."
"그런데 옷차림은 다릅니다."하고 안이
말했다.
"옷이야 얼마든지 바꿔입을 수 있지.
살인범이 똑같은 옷을 입고다닐 리야
없지."
"내가 살인범이라고요? 내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잔말 말고 이리 와봐."
마형사는 용의자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은 피살체가 발견됐을 때의
있다면 시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욕조의 물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것
정도였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용의자는 욕실을 둘러보고 나서 휴지로
코를 닦았다.
"욕실 아닙니까."
"누가 그걸 물었어?"
남형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여기서 유춘지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봐. 어떻게 죽였는지 말해봐."
용의자는 대답대신 불안한 표정으로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대화가 통할
수 없다고 느꼈던지 그는 무겁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에는 형사들의 모습이
마치 피가 통하지 않는 벽처럼 보였다.
신발까지 감추고 그녀?
절망적인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난 그런 여자 알지도 못하고...... 죽인
적도 없습니다.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춘지는 이 욕조 속에 누워 있었어.
욕조 안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었고
말이야. 그 여자를 물 속에 처박아
질식사시킨 거야. 꼭 이렇게 설명해
주어야만 사실대로 불 건가? 당신 건망증이
아주 심한 모양이군."
뚱보가 용의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건망증 같은 거 없습니다."
김영대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럼 7월 19일 낮 12시부터 20일
낮 12시까지 어디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군. 그 시간에 어디 있었지?
알리바이를 대봐."
지었다. 마형사는 욕조바닥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하나 떼어냈다.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여러 개 말라붙어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용의자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뚱보는 쿡하고 웃었다.
"함께 돌아다닌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어떤 여자하고 돌아다녔습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야?"
"양방희라고 합니다."
"연락처를 말해 봐. 집이나 직장
전화번호 같은 거 말이야."
"그, 그런 건 모릅니다."
"어디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네......."
그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하느님이 증명해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염형사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뚱보는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용의자의 머리칼에다
대보았다.
"틀림없군. 이거 당신 머리카락 아니야?"
"아, 아닙니다!"
용의자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형사들의 눈초리는
냉정하기만 했다. 그들은 용의자를 다시
방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 여자하고 여기서 재미 좀 봤나?"
남형사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면서
흐트러진 침대를 가리켰다.
"여기서 한바탕 굉장했던 것
같은데...... 안 그랬나? 그런 다음에
여자를 죽였지? 그러니까 마지막 축제의
밤을 보낸 다음에 말이야. 안 그래?"
"그렇지 않습니다."
김영대는 울상이 되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유춘지의 진짜 이름이 뭐야?"
마형사가 용의자를 째려보면서 물었다.
그는 이제 건장한 사내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놈은 죽을
때까지 범행을 부인할 것이다.
"모릅니다. 정말 그런 여자는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편지를 그렇게 받아보고서도 모른다는
거야?!"
"그 그건......."
"거짓말 마! 당신은 이제부터 유치장에
들어가 있어야 해. 우리가 조사를 끝낼
때까지 말이야. 유치장에 가서 잘 생각해
그길로 김영대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쇠창살 안에 갇힌 그는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무더운 방안에 앉아 연방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한숨만 내쉬었다.

"S호텔 여인살인사건 범인체포."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나서 네 명의
형사들은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밖에서 사들고온 석간신문을 펴들자 사회면
중간쯤에 길게 뻗어 있는 제호가 첫눈에
들어왔다. 그 사건에 대한 첫 보도가 나온
것은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서였다. 그리고
석간신문에는 벌써 범인체포 기사가 나온
것이다.
"빠르군."
염형사에게 신문을 넘겼다.
사회면 톱기사는 다리에서 강물로 추락한
버스 사고에 관한 것이었다. 열다섯 명이
숨지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형
사고였다. 운전사는 살아 있었는데 20년
무사고 운전사라 했다.
"20년 아니라 30년 무사고라 해도 운전
잘한다고 자랑할 건 하나도 없어.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거니까."
뚱보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남형사와 조형사가 염형사로부터 넘겨받은
신문을 염소처럼 머리를 맞대고
들여다본다. 남형사는 부지런히 껌을
씹어대고 있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방정맞아 보인다.
"그 껌 좀 그만 씹을 수 없어?"
플레이보이는 뚱보와 염형사를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 입놀림을 멈춘다.
"만일 범인이 아니면 어떡 하죠?"
거한 조형사가 두눈을 꿈벅거리며
물었다.
"계장이 책임지겠지. 자기가 자신있게
나발불었으니까."
염형사가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구계장은 참을성이 없어서 탈이라는 것을
그의 부하 직원들은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공명심이 남달리 강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루쯤 기다렸다 발표해도 늦지 않는데
이건 너무했어. 발표는 늦으면 늦을수록
좋은 건데 말이야."
마형사의 불평에 플레이보이가 신경쓸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않습니까. 이제 꿰맞추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정황은 맞아떨어지고 있어. 정황으로
봐서는 김영대가 범인이야.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야. 놈이 자백을
하면 꿰맞추기가 쉽겠지만 그렇지 않고
버티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피살자의
정확한 신원도 못 밝혀낸 상태에서 진범을
잡았다는 건 좀 우습지 않아? 유춘지의
신원부터 알아내야 해."
레지가 커피를 가져오자 염형사가 그녀의
탐욕스러운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커피를 내려놓고 난 레지는 그 곁에 바싹
붙어앉으며 "바캉스 안 떠나세요?"하고
물었다.

나른한 기분에 잠겨있던 염형사는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수사본부입니다."
"거기...... S호텔 여인살인사건
수사본부입니까?"
잔뜩 흥분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렇습니다."
"저기...... 다름이 아니고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혹시 참고가 될지 몰라
전화했는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염형사는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생각나서 전화를
건 겁니다. 지금 정확히 그 방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일 오후 3시경에
젊은 여자가 나체로 서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까
사건 발생 시간이 서로 비슷하고 위치도
서로 비슷한 것 같기에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디서 어떻게 목격했다는 겁니까?"
"S호텔 맞은편 빌딩에서 목격했습니다."
"맞은편 빌딩이라면?"
"H생명빌딩입니다."
"그렇죠. 거기에 H생명빌딩이 있죠.
전화를 걸어줘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좀 들어봅시다. 여기 수사본부도
부근에 있으니까 수고스럽지만 이쪽으로 좀
와주시겠습니까?"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세 명의 젊은이가
수사본부에 나타났다. 외모가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중
안경을 낀 청년이 한 시간 전에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던 장본인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들은 H생명보험회사 직원들이었다.
"자,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요.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 같은데......."
마형사가 젊은이들에게 담배 한대씩을
권했고, 남형사는 거기에다 재빨리 불을
붙여주었다.
"그러니까 7월 19일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저희 빌딩과 차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곳에 S호텔이
있는데...... 똑바로, 아니, 1층 정도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맞은편에
호텔이 있기 때문에 방안에서 투숙객들이
나체로 움직이는 모습은 가끔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서서 몸을 비비꼬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봤습니다. 우리는 망원경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호텔
방안을 구경하기 위해 그전부터 망원경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창문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는 한참 동안 그렇게 창에
붙어서 서 있었습니다."
"굉장히 몸매가 좋은 육감적인
여자였습니다."하고 다른 젊은이가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 그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나요?"
"안쪽에 남자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이긴 했습니다만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비가 오고 있어서 방안이 좀
어두웠기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여자는 창가에 서서 맥주 같은 것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 10분쯤 그러고 있다가 창가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창가에
다시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한
사람이 아닌 두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형사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두 명이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모두
"남자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여자들은
탁자 주위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일어나서 커튼을 치는 바람에 그때부터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두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은 벌거벗고
창가에 서 있었던 여자였나요?"
"얼굴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어 확실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 두 명 중
한 명은 그 여자였을 겁니다.
헤어스타일하고 얼굴 윤곽 같은 것이
비슷했으니까요."
"헤어스타일하고 얼굴 윤곽, 그리고
옷차림을 자세히 좀 말해봐요."
"헤어스타일은 자연스럽게 물결치는
옷차림은 흰 바탕에 푸른색 무늬 같은 게
있는 원피스 차림이었습니다."
"또 한 여자는 어떻게 생겼나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보지 못해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헤어스타일도 비슷해 보였고 얼굴 윤곽도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옷차림은?"
"검정 옷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니야. 빨간 옷 같았어."
그 부분에서 그들의 증언은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여자가 창가에 벌거벗고 있을 때......
그 뒤에 남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을
봤다고 했는데...... 남자는 어떤
"남자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다른 한 명이 끼어들었다. 그 청년은
보다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위에는 팔없는 런닝셔츠만 입고
있었고...... 아래는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고 있을 때 남자가 그런
모습으로 얼핏 스쳐가는 것을 봤습니다."
"남자의 모습은 어땠었나요?"
"허위대가 큰 남자였습니다. 그 뒤로는
그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형사들은 현장 답사를 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남형사와 조형사가
보험회사 직원들을 따라 H생명보험회사
빌딩안으로 들어갔고, 그가 창가로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남형사가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드는 것이 보였다.
마형사도 손을 흔드어주었다. 조금 있자
전화벨이 울렸다. 남형사가 걸어온
전화였다.
"그 방이 맞답니다. 거기서 여자가
벌거벗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형사는 창가에 서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알았어. 더 자세히 물어보고 이쪽으로
건너와."
마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가에 서서
한동안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자가 또 한 명 있었다면 범인은 두
명이란 말인가. 이상한데. 피살자와 관계를
가졌던 남자가 여자로 변장할 수도 있을
ꠑ 섟痼甄? 여자로 변장하고 나서 그 여자를
죽였단 말인가.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가 않다. 범인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조차도.



7. 유밀라

같은 날 오후 3시 조금 지나, 생각에
잠겨 담배만 빨아대던 마형사는 결심한 듯
배미화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배미화는
마침 집에 있었다. 수사본부라고 하자
그녀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유밀라 씨 소식은 있습니까?"
"아뇨. 아직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더
기다려보다가 그래도 소식이 없으면 경찰에
신고하려던 참이었어요. 이렇게 아무
연락도 없는 걸 보면 좀 이상한 생각도
드는군요."
"이상하군요. 그건 그렇고 유밀라
씨한테도 차가 있습니까?"
"그럼 지난 19일 유밀라 씨는 자기 차를
몰고 나갔나요?"
"네, 그랬어요."
"어떤 차입니까? 차 번호하고 차종,
그리고 색깔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색깔은 녹색이고...... 번호는 서울 2다
543X번일 거예요. 차종은 H사에서 나온
쟈가에요."
"지금 수사본부로 좀 나와주시겠습니까?"
"내가 꼭 나가야 되나요?"
그녀가 불만스러운 듯이 물었다.
"네, 직접 확인할 일이 좀 있습니다.
지금 바로 좀 나와주십시오."
"바로는 안 되고...... 한 시간 반쯤
걸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마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자코 밖으로 나온 그는 거기서 가까운
S호텔쪽으로 걸어갔다.
S호텔 주차장은 밖에 말고도 지하
4층까지가 모두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지하 1층부터 살펴보면서
걸어갔다.
황개가 차 속에 갇혀 타죽은 곳은 지하
3층 주차장이었다. 각층의 주차장마다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녹색 차가
눈에 뜨일 때마다 그는 긴장해서
다가가보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차는
아니었다. 사고 현장이었던 3층 주차장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그곳 역시 차들로
메워지다시피 되어 있었다. 4층 끝까지
2다 543X 녹색 쟈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비로 올라온 그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대형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저께 나갔다는 여인이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고, 아무런 연락도 없다.
더구나 그녀는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유부녀인데다 자식까지 있는 몸이다.
유밀라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그는 1924호실에서 시체로
발견된 여인이 유밀라일 가능성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확인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육감이
사실로 확인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커피......."
"냉커피로 할까요?"
"아니, 뜨거운 커피로......."
여자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배미화는 5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수사본부에 나타났다. 형사계실은 분주했기
때문에 마형사와 남형사는 그녀를 데리고
별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남형사가 질문을 던졌다.
"S호텔 여인살인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신문에서 봤어요. 호텔 욕실 안에서
여자가 죽은 거 말인가요?"
"네, 그 사건 말입니다. 그 신문기사
보고 뭐 느끼신 점 없었나요?"
일이니까요. 헌데 그건 왜 묻죠?"
그녀가 두려운 빛을 보이며 물었다.
"확인해 봐야겠지만...
... 그 사건의 피해자가 유밀라 씨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네, 뭐라구요?"
그녀의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형사들은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S호텔 욕실에서 죽은 여자하고 유밀라
씨하고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댁에서 봤던 유밀라 씨 사진
모습하고 죽은 여자 모습이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공포에 떨면서 머리를
흔들어댔다.
"원피스를 입고 나갔어요."
"색깔은?"
"흰 바탕에 푸른 색깔이 들어 있는
옷이었어요."
형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는 것을 보고
미화는 몸을 움츠렸다.
"신발은 어떤 걸 신고 나갔나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남형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큼직한 비닐백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가 그것을 뒤집어 엎자 안에서 여자용
핸드백과 구두가 책상 위로 굴러떨어졌다.
"잘 보십시오. 유밀라 씨 것들이
아닌지......."
미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제품의 흰색 하이힐. 그것은 틀림없는
올케의 물건들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까?"
"네, 맞아요.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남형사가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올케가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도 유밀라 씨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사체를 확인시키기 전에는 단정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여자의 사체를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배미화는 펄쩍 뛰었다.
"또 시체를 보라는 거예요? 싫어요!
싫어요!"
일으켰다. 형사들도 따라 일어섰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확인시킬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오빠되시는 분은 일본에
있다고 하니 안 되고 결국 미화씨밖에 없지
않습니까? 충격이 크시겠지만 다시 한번
부탁합니다."
미화는 가늘게 떨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밀라가 살해된 것은 7월 19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사체는 경찰병원 시체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수사본부에서 출발할 때만해도 떨면서
병원에 도착했을 때쯤 해서는 많이 감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사체를 본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떨지도
않았다. 핏기 하나 없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사체를 내려다보다가 형사가
누구냐고 묻자 잠자코 돌아서서 시체실을
나왔다.
"유밀라 씨가 맞습니까?"
남형사가 따라나오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빗속으로 그대로 걸어나갔다.
남형사가 재빨리 뛰어가 그녀에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저쪽으로 가서 커피나 한잔 합시다."
남형사가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을
가리키자 그녀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안됐습니다."
말도 하려들지 않았다.
"범인이 이미 잡힌 거 알고 계십니까?"
그녀는 멈칫 섰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몰랐어요."
"석간신문에 났는데 못 보셨나 보군요."
건물 앞에 도착한 그들은 건물 입구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판매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남형사가 커피를 한 잔
뽑아 미화에게 먼저 주었다. 시체실 건물
앞에서 마형사가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달아서 못 마시겠어요. 블랙으로
한 잔 더 뽑아주세요."
그녀가 변화를 보이며 말했다.
"블랙으로 마시는 줄 몰랐습니다."
남형사는 동전을 집어넣은 다음
"혹시 김영대라는 사람 아십니까? 30대
남자인데......."
"몰라요."
"그 사람이 유밀라 씨를 살해한
범인입니다. 아,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으니까 정확한 법률 용어로
말씀드린다면 용의자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범인은 범인입니다."
그는 커피잔을 판매기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였죠?"
"목 졸라 죽였습니다. 아니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미화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컵이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는 모두 엎질러지고 종이컵은 땅바닥에
같았다. 남형사는 잠자코 다시 커피를 한
잔 뽑아주었다.
"미안합니다."
커피잔을 다시 받아드는 그녀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김영대라는 사람은 한국 사람인가요?"
그녀는 그렇게 물어놓고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국인이죠. 한국인 아닌 줄
알았습니까?"
남형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아, 아니에요. 오빠한테 연락해
주어야겠어요."
거기서 가까운 곳에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녀가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는 것을 보고
남형사도 주머니에서 동전을 모두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국제전화를 걸려면 동전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그는 미화를 따라 공중전화기쪽으로
걸어갔다.
미화는 남형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먼저
백 속에서 수첩을 꺼내 거기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보면서 도쿄의 임페리얼
호텔에다 전화를 걸었다. 먼저 교환
아가씨가 전화를 받았고 그녀에게
1315호실을 알려주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신호가 떨어진 것은 벨이 한참
동안 울리고 난 뒤였다.
"모시모시......."
"미치코?"
"예스 예스......."
돈다.
"아이 앰 미스터 배...... 영거
시스터...... 아이 앰 미스 배......."
미화는 되는 대로 더듬거렸다. 미치코
역시 서투른 영어로 뭐라고 말했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듣는
사람의 가슴을 녹이는 것 같은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조금 후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화는 첫 마디를 뭐라고 꺼내야 할지를
몰라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여보세요."
"오빠, 저예요. 문제가 생겼어요."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전화 거는 거니? 무슨 일이니?"
금방이라도 수화기를 내려놓을 것만 같아
"오빠, 올케 언니가 죽었어요!"
그녀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왜 울음이 나오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동전을
계속 집어넣었다.
창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은 것 같아
미화는 조금 더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 제 말 들으시는 거예요?"
"듣고 있어.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지?"
가냘픈 목소리이면서도 놀랍도록
침착하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올케 언니가 죽었단 말이에요!"
"왜? 왜 죽었어? 이유가 뭐야?"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녀는 끝내 울부짖고 말았다. 격하게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오고 있었다.
"울지 말고 말해봐...... 왜
죽었어?...... 이유가 뭐야......?"
그때까지도 마형사는 시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머리 속은
살인사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 살인사건에
대한 생각으로.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S호텔
여인살해사건"과 "S호텔 지하 주차장
방화살인사건"이 서로 연관성이 없는가
하는 점이었다.
S호텔 여인살해사건의 피해자인 유밀라가
살해된 것은 7월 19일이었다. 그리고
형사들이 간편하게 일명 "불고기
방화살인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같은 날
비슷한 시간대였다. 이튿날 그러니까 7월
20일 밤 유밀라를 살해한 범인으로
김영대가 부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김영대가 두 사건의 동일범인일까?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고기 사건의
범인은 남자가 아닌 여자일 가능성이 크다.
두 사건의 범인이 다르다면 그것들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관성이 없다는 쪽보다는 있다는 쪽으로
더 생각이 기울어진다.
그 이유는 피살자들이 모두 배미화와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유밀라는 그녀의 올케였고 황개는 그녀의
약혼자였다.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사이를
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의 주검을 확인한
여인을 마형사는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남형사가 그 곁으로 다가가
뭐라고 말한다. 아마 위로의 말을 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더니 거칠게 어깨를 흔들어댄다.
어디다 전화를 걸었을까.
마형사의 발 앞에는 담배꽁초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거기에다 라이터불을 붙였다. 가슴 속이
답답해지니까 자꾸 담배만 피우게 된다.
한 사람과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그렇게 죽어갈 수 있을까?
사람 다 살해당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삼각관계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아니,
김영대까지 합치면 사각관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유밀라 -- 김영대 -- 황개 -- 배미화.
이 네 사람이 비밀스런, 결국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원무를 추었던 게
아닐까. 네 사람 가운데 두 남녀는 죽었고
또 다른 두 남녀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네 사람은
지금까지 어떤 원무를 추었을까?
두 사건은 범인은 다를지 몰라도 분명히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연관성이
없고서야 어떻게 배미화와 가까운 인물들이
같은 시간대에 그렇게 살해될 수 있단
마형사의 생각은 어느새 두 사건이
연관성이 있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 연관성을 찾아내야 한다. 거기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마형사는 비를 맞으며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벤치쪽으로 걸어갔다.
배미화와 남형사는 비에 젖은 벤치 위에
앉아 있었다.
"자, 그만 진정하고 돌아갑시다. 자,
일어나세요."
남형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하자 그녀는 거세게 어깨를 흔들었다.
두손으로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마형사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미화 씨, 김영대하고는 어떤 관계죠?"
그녀를 대신해서 남형사가 말했다.
마형사의 두 눈이 더욱 옆으로 벌어지는 것
같았다.
"모른다고 하겠지. 그렇게 쉽게 자백할
리야 없겠지.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여.
유밀라 -- 김영대 -- 황개 -- 배미화......
이 네 사람 가운데 김영대와 배미화만
살아남았어. 배미화 씨, 그만 울고 얼굴
들어봐요."
배미화가 천천히 얼굴에서 두 손을
떼었다. 그녀의 깡마른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쳐들어 마형사를
올려다보았다.
"배미화 씨,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당신과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살해되었는가 하는 점이오.
아니었어요. 한 사람은 올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약혼자였으니까 말이오.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는 그대로 마형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 숨기지 말고 말해 봐요. 왜 그 두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 말해 봐요."
배미화는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녀는 발작적으로 다시 머리를 흔들며
저항하듯 말했다. 마형사도 물러서지 않고
본래의 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당신을 집에 보낼 수 없단
말이오! 자, 갑시다. 수사본부에 가서
그녀는 핏발선 눈으로 마형사를
쏘아보다가 남형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남형사의 표정이 냉랭한 것을
보고는 잠자코 몸을 일으켰다.
"올케를 저기에 저대로 둘 수는 없어요.
장례를 치러야 해요."
그녀가 차에 타기 전에 말했다.
"그 문제는 일단 수사본부에 가서
상의합시다. 미화씨 혼자서는 안 될 테고
오빠가 일단 귀국해야 장례 문제를 결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필요하다면 우리가 직접
오빠와 통화해 보겠습니다."
마형사가 운전하는 차가 병원을
빠져나왔을 때 남형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화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아주 다른
화장하는 모습을 본 마형사는 그녀의
표변한 모습에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오빠는 언제 귀국한다고 하셨나요?"
미화와 함께 뒷자리에 앉은 남형사가
물었다.
"미처 그런 말은 못 들었어요. 제가 우는
바람에...... 도중에 전화를 끊고
말았어요."
"오빠는 올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왜 죽었느냐고 이유만 자꾸 물었어요.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아내가 죽었는데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마형사가 정면을 응시한 채 혼잣말처럼
"곧 귀국하실 거예요. 오빠가
걱정이에요. 조카도 걱정이구요. 올케가
호텔 방에서 남자한테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면 다시 한번 충격을 받으실 거예요.
정말 창피하고 망신스러운 일이에요.
어떻게 했길래 외간 남자한테 호텔방에서
목을 졸려 죽어요.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얼굴에 분을 두드리며 지껄여대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두 분 오누이가 다 아내와 약혼자한테서
배신을 당한 셈이군요. 그리고 배신한
쪽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말입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좀 묘하지 않습니까?"
얼굴을 두드리던 손이 멈춰졌다. 안색이
자신이 한 말이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미화는 콤팩트를 백 속에 집어넣은
다음 꼿꼿한 자세로 앞을 노려보고 있다.
"김영대라는 사람 정말 모르십니까?"
건널목 앞에서 차를 세우며 마형사가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
배미화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강한 거부감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마형사는 S호텔 여인살해사건과
불고기사건을 일련선상에서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자의 범인은
이미 체포되었으니까 기소 유지에 필요한
증거만 확보하면 된다.
불고기사건의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그 윤곽이 드러날
범인 체포에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영대를 다시 만나 조사해 보면 4각의
관계가 그 베일을 벗을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유춘지라는 가명으로 살해된
여인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확보에 애를 먹고 있었지만 일단
피살자가 유밀라로 밝혀진 이상에는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소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거리는
더없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한여름의 더위는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나면 무더위에 이 거대한 도시는 숨이 막힐
것이다. 그전에 일을 끝내고 남쪽 바닷가로
휴가라도 다녀와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뒤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유밀라의 차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호텔 건물 뒤편쪽을 둘러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쪽에는 유료 주차장도 있었고 길가에
차를 세워둘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어디에도 녹색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일대에는 대형 빌딩들이 들어차 있기
때문에 지하 주차장이 상당수 있다. 그
주차장들을 모두 점검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하다.
염형사와 조형사는 S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파출소쪽으로
걸어갔다.
수사본부가 차려져 있는 그 파출소는
로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모퉁이에
안으로 들어가자 마형사 일행이 막
도착해 있었다. 염형사는 창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배미화를 보고는
"또 왔어요?"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됐어?"
마형사가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염을 쳐다보았다.
"찾지 못했어. 그 근방을 대충
훑어봤는데 그런 차는 없어."
"수배하지."
"멀리 있지는 않을 거야. 그 근방에 지하
주차장이 많으니까. 어디에 처박혀 있을
거야. 인원이 좀 필요해. 오늘중으로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찌푸리면서 들어섰다. 그는 한쪽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배미화를 힐끗
쳐다보더니
"저 여자 누구야?"하고 물었다. 그는
수사본부에 붙어 있지 않고 계속
나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배미화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죽은 황개 씨의 약혼녀입니다."
남형사의 말에 그는 몸을 홱 돌려 미화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왜 황개를 태워죽였지?"하고 물었다.
배미화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계장을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왜 죽였느냐 말이야?"
"분명히 말하지만...... 전 죽이지
않았어요. 죽이지 않았다는데 왜 자꾸들
역정을 내며 소리지르듯 말하는 바람에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한테 쏠렸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적반하장이라고 어디다 대고 소리지르는
거야? 이 아가씨 아주 못돼 먹었군. 죽이지
않았으면 어디 알리바일ㄹ 대봐!"
"알리바이는 이미 댔어요?"
미화는 내뱉듯이 말하고 나서 담배를
꼬나문다. 거기에다 라이터불을 켜주면서
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바이가 뭔줄이나 알아요?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어. 적수를 만난 것 같은데
어디 한번 해봅시다. 그동안 알리바이나
완벽하게 만들어놔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계장은 손뼉을 쳐
모두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조금 전과는
아주 딴판인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미난 일이 많았나본데 어디 보고해
봐요."
반장인 마형사가 수첩을 펴놓고 보고하기
시작했다.
보고를 듣는 동안 계장은 성냥개비로
한쪽 귓속을 후벼대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아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형사는 계장을 쳐다보지
않고 보고를 계속해 나갔다.
"...... 두 사건은 물론 동일범의 소행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한 집안의 오누이가
이를테면 비슷한 시간대에 배우자를 잃은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한가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흠, 골치 아프게 됐군. 어쩌다가 우리
관내서만 강력사건이 계속 터지는 거지?
다른 데서 좀 일어나지 않고 왜 우리
관내에서만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거냐
말이야?"
그것이 부하들의 책임이기라도 하는 듯
그는 그들을 흘겨보았다.
"S호텔 여인살해사건의 경우 이제
피살자의 신원이 밝혀졌기 때문에 김영대를
기소하기가 한결 쉬워졌습니다."
"그 김영대라는 자식을 족쳐봐. 두
사건이 관련이 있다면 그 놈도 관련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 틀림없이 연관성이
있을 거야. 김영대와 황개의 관계를
알아봐.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말이야. 혹시 교도소 동기인지 모르잖아?"
그러고 보니 김영대와 황개가 외모도
서로 비슷한 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몸이 건장했다. 얼굴 생김새도
여자들이 좋아할 미남형이었다. 마형사는
수첩에 끼어 있는 황개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김영대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계장이 한참 동안 큰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마형사는 생각에 잠겨 그의 말을
거의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영대와 황개는 교도소 동기가
아닙니다."
남형사의 말소리에 마형사는 고개를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큰 흐름에서
문제를 봐야 한단 말이야. 큰 흐름에서
보면 사건의 맥락이 보여. 틀림없이 두
사람은 연관이 있는 사이였어. 그걸
찾아내면 사건은 자연스럽게 풀리는 거야."
"알겠습니다. 연관성을 찾아보겠습니다."
남형사가 공손히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수긍하는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가 않았다.
"유밀라의 차를 수배했습니다. 피살되던
날 자기 차를 몰고 외출했다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S호텔 지하
주차장에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에도
없습니다. 그 일대 주차장을 모두 수색해볼
생각입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형사가 계장의 일방적으로 길어질 것
미간을 찌푸렸다.

경찰서 유치장.
마형사가 유치장 안으로 들어서자
김영대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두 손으로
쇠창살을 움켜잡으면서 성난 눈으로
마형사를 쏘아보았다.
"저 친구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어."
마형사가 턱으로 김영대를 가리키자 당직
순경이 열쇠 뭉치를 들고 김영대가 들어
있는 방 앞으로 다가갔다.
쇠창살로 막혀 있는 방들은 넓은 홀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쇠창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울안에 갇혀 있는 동물들처럼
보였다.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밝은 태양 아래 대지 위에서
자유스럽게 뛰어놀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 권리를 빼앗고 쇠창살 안에
사람들을 이렇게 가둬두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마 마주 쳐다볼 수가 없어 마형사는
고개를 돌렸다.
"석방하는 겁니까?"
목덜미를 누르는 소리에 마형사는
돌아섰다. 김영대가 두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거기에 서 있었다. 마형사는 사납게
그를 흘겨 보고 나서 출구를 빠져나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김영대가 거북살스럽게 따라오는 소리가
때문에 수갑 찬 두손으로 바지가
흘러내려가지 않게 그것을 움켜잡고
따라오고 있었다. 발에는 구두 대신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내 마음은 당신을 석방하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게 당신한테 불리하게 되어
있단 말이야."
"그럼 나를 검찰에 송치할 겁니까?"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마형사는 지하
복도를 걸어갔다.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취조실이 나란히
있었다. 그는 그중의 한 방으로 김영대를
데리고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취조를 하려고 든다고
보았던지 김영대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낡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갓을 씌운 전등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취조실은
창문 하나없이 밀폐되어 있었다.
"미남, 유춘지의 신원이 밝혀진 거 알고
있어?"
마형사는 김영대한테 담배를 권하면서
물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그런 여자 알지도
못합니다."
미남은 수갑 찬 손으로 담배를 받아들고
마형사가 켜주는 라이터불에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맛있게 빨았다.
"유춘지는 배창기라는 사람의
부인이었어. 진짜 이름은 유밀라......
이래도 모르겠다고 잡아뗄 거야?"
빛났다. 그의 그런 모습은 마치 투사가
돌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유부녀를 농락한 다음 그 여자를
협박해서 돈을 우려냈어. 그 여자가 돈
많은 남자의 부인이란 걸 알아가지고
계획적으로 등쳐먹은 거야. 안 그래?"
김영대는 담배를 입술 한쪽에 꽂아둔 채
지그시 마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많은 여자들을 울렸겠지.
당신 같은 상습적인 제비족은 이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해. 피를 빨아먹을 대로 모두
빨아먹고 나서 사람은 왜 죽여?"
담뱃재가 김영대 앞에 굴러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치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형사님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소설을
필요하시다면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저한테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합니다. 모두 사실이죠."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 내
이야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해!"
"모두 거짓말하고 계시는데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유밀란지
추밀란지 난 그런 이름 난생 처음
들어봅니다."
"황개가 죽은 거 알고 있어? 차 안에서
불에 타죽었어. 바로 그저께 일이야."
"황개라고요?"
김영대는 씨익 웃었다. 마형사는 바짝
긴장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황개 말이야.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죽었어. 차 속에다 가둬놓고
태워죽인 거야. 여자가 범인인 것 같아.
그런데 당신 왜 웃지?"
"이름이 괴상해서 웃었습니다."
마형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도로
풀었다.
"교도소 동기라는 거 다 알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도무지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유밀라의 유품 중에는 자동차 열쇠가
없었어. 그 여자의 차를 어디다
주차시켰어? 그리고 열쇠는 어디다
버렸어?"
김영대는 필터만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모릅니다."
침묵과 긴장이 흘렀다. 마형사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 교활하고 질긴
놈의 입을 열게 하려면 꽤나 애를 먹을 것
같다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사기 전과만
해도 두 건이나 있는 놈이니 그 교활함이야
비할 데가 없을 것이다. 턱주가리를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마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춘지, 그러니까 유밀라가 당신한테
보낸 편지가 당신 집 금고에서 일곱 통이나
발견됐어. 그 사실도 부인할 텐가?"
"그건 인정합니다."
"그 편지 내용을 보면 당신에 대한
원망과 회환으로 가득 차 있어. 2년 전
당신한테 강간당했고, 그때부터 당신의
노리개가 되어왔고, 그동안 3억이나
당신한테 빼앗겼다는 거야. 그뿐이 아니야.
신세가 되어 쫓기고 있다고 했어. 그리고
그 여자는 당신의 애까지 배고 있었어.
당신이 자기를 버리면 뱃속의 아기와 자신,
그리고 당신까지 함께 죽이겠다고 했어.
편지 내용들은 거의 비슷했어. 결국 당신은
그 여자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고
골칫거리로 등장한데다 당신을 죽이겠다고
하자 그게 두려워 먼저 선수를 친 거야.
그렇지 않나?"
"흐흐흐...... 배꼽이 다 웃습니다요.
흐흐흐......."
"뭐가 어째?"
마형사는 참지 못하고 상대방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네놈은 강간 전문가야! 그리고 사기
전문이고! 잡아뗀다고해서 무사히 넘어갈
숨이 막히는 바람에 김영대의 얼굴이
고무풍선처럼 붉게 부풀어 올랐다.
마형사는 그를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뒤로
힘껏 밀어버렸다. 김영대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몸을 일으켜 의자 위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이랬다.
"죄가 있으면 고소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래, 고소할 거야. 기다려!"
상대방은 냉정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형사는 화가 났다.
그런데 문득 유춘지의 편지 내용 가운데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이 생각났다.
그것은 김영대 때문에 가정이 파탄되었고
자기가 빚에 몰려 쫓기고 있다는
배미화의 말을 들으면 유밀라는 살해되던
날 아침까지만 해도 집에 있었고 11시에는
자신의 자가용을 몰고 외출했다고 했다.
가정이 파탄되었다면서 시집 식구들과 한
집안에서 살고 있었을까? 그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편지에다 거짓말을 쓴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김영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 자기가
얼마나 김영대를 위해 희생해 왔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마형사가 의문에 싸여 있는데 김영대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 편지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보내온 겁니다. 유춘지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모르는 여자가 당신한테
왜 그런 편지를 보내겠어?"
"이제 생각하니까 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런 것 같습니다."
"웃기지 마! 그렇다면 왜 그 편지들을
금고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편지였기 때문에
없애지 않고 모아두기로 한 겁니다.
집사람이 보면 오해할까봐 그 여자한테서
오는 편지는 경비실에 따로 보관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편지들을 경비실에서
받아 읽어보고 나서 집사람이 모르게
금고에다 넣어두었던 겁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하고 그렇다면
지난 19일 오후 3시경 S호텔
어떻게 변명하겠어? 유춘지는 모른다고
하고 유밀라도 모른단 말이야? 이름을
모르고 만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
여자 사진을 보여주지."
마형사는 유미라의 사진을 꺼내 영대의
코앞에 디밀었다.
"이래도 이 여자를 모르겠다는 거야?"
"모릅니다. 이런 여자는 본 적도
없습니다."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웨이터가
당신이 그 여자와 만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어! 목격자가 있단 말이야!"
마형사는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그러나 김영대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 웨이터는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
자식 만나기만 하면 모가지를 분질러
거짓말을 하다니!"
영대는 이를 갈면서 분해서 어쩔줄을
모른다. 그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의
말이 정말인 것도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형사는 그의 말을 끝까지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적반하장이라고 당신이 성낼 게 어딨어.
그 웨이터가 거짓말했다고 했는데...... 그
친구가 거짓말할 이유가 뭐야? 당신하고는
모르는 사이인데 왜 당신한테 불리한
증언을 하겠어?"
"그거야 경찰이 윽박질렀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겠죠."
"우리가 윽박질렀다고? 이젠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군. 우리는 아주
공정하게 증언을 들었어. 윽박지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식 눈깔이 삐었던가
아니면 누구하고 짜고 그렇게 증언했을
겁니다."
"그랬다면야 말이 되지. 그래, 그건 말이
돼. 하지만 그 친구 눈은 내가 보기에 절대
삐지 않았어. 그리고 누구하고 짜고
위증했다고 보는 건 너무 억지 생각이야.
당신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안 그래?"
김영대는 고개를 숙이더니 수갑 찬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통하지가 않아 말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서창배 교수의 주민등록증은 어떻게
해서 입수했어?"
"서창배가 누굽니까?"
후려쳤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시멘트 바닥 위를
왔다갔다 했다. 밀폐된 공간은
후텁지근했다. 구석진 곳 천장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당신은 서창배 교수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사람으로 행세했어.
알겠어? S호텔에도 그 사람 이름으로
투숙했단 말이야!"
"꿈 같은 일입니다."
"서창배 교수는 2년 전 뺑소니차에 치여
죽었어. 당신이 치어 죽이고 뺑소니친 거
아니야?"
"네, 그렇습니다. 서창배도 유춘진가
유밀라도 제가 죽였습니다. 제가 모두
죽였으니까 조서 꾸며서 검찰에
마형사는 김영대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완전범죄란 없는 거야! 난 네놈을
교수대로 보내고 말 거야!"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게
속편하겠습니다."
"망할 자식......."
마형사는 김영대를 흘겨보고 나서 혼자
취조실 밖으로 나왔다. 화가 나서 철문을
힘껏 닫는 바람에 그것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쾅하고 지하실을 울렸다.
유춘지와 유밀라는 동일인물인가
동일인물이 아닌가?
S호텔에서 피살된 여인이 유밀라인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녀의
백에서 발견된 특수우편물 수령증을
인물이었다. 유밀라와 유춘지가 만일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왜 유밀라의 백 속에
그 수령증이 들어 있었을까? 간단히
생각해서 유밀라가 유춘지의 부탁을 받고
대신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면 유밀라가 가명을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녀는
김영대한테 편지를 보내면서 가명을
사용했을까?
유춘지가 김영대한테 보낸 일곱 통의
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만일 유춘지와 유밀라가 동일인물이라면
유밀라는 김영대한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김영대 때문에 가정이 파탄되었고
빚쟁이한테 쫓기고 있다는 내용이
오전까지만해도 엄연히 자기 집에 있었음이
배미화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가정이
파탄되고 빚쟁이한테 쫓기고 있다는 여자가
과연 자기 집에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시집 식구들과 함께 말이다.
유춘지와 유밀라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유춘지의 편지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유춘지와 유밀라가 동일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빨리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마형사는 우뚝 멈춰섰다. 바로
그거다! 그거라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는
재빨리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수사본부에 도착해 보니 유밀라의
차를 찾으러 나갔던 형사들이 돌아와
ꠑ ꠑ湛羚駭?
"어떻게 됐어?"
"허탕쳤습니다."하고 남형사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배미화를 데리고 집에 좀 다녀와야겠어.
함께 가자구. 그리고 참, 유춘지의 편지도
가져가자구."
"김영대한테 보낸 편지 말입니까?"
"그래."
마형사는 보호실쪽으로 가보았다.
배미화는 무릎을 세운 채 그 위에다
얼굴을 쳐박고 있었다. 기다리기에 지쳐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깜짝 놀라 얼굴을 쳐들었다.
"갑시다."
마형사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나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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