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2-4 끝

3학년2반 | 2022.02.04 07:44:04 댓글: 0 조회: 76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500


8. 위조 전문가

수사본부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싸여 있었다.
그전처럼 소란스러움도 없었고, 열을 내어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점심식사 후의 나른함과 그 때문에
밀려드는 졸음, 숨막히는 무더위, 풀릴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사건의 매듭이
실내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잇었던
것이다.

마형사는 숫제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걸치고 얼굴을 신문지로 덮은 채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잠속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반수면 상태
있었다.
"증거가 없어...... 증거......."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형사들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저러다가 돌아버리는 거 아니야."
"직업은 못 속인다니까."

형사들은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나서
다시 킬킬거렸다.
그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김영대를 만나기
위해 자신 있게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허탕을 치고 느닷없이 김영대의 부인하고
불륜관계를 맺고 올라온 강형사였다. 그는
김영대의 부인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속으로 은근히 불안한 한편으로 자신의
편치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범인이 먼지 붙잡히고
피살자는 오리무중이야."
석간신문을 보고난 염형사가 그것을 책상
위에 내던지면서 뱉은 말이었다.
석간신문 사회면에는 엽기적인 살인사건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사회면 거의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실려 있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다른 서의 관할구역에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건너 불보듯
단순한 흥미를 가지고 그 신문기사를
보았을 뿐이었다.

"토막사건은 가끔씩 있지만, 두 명을
한꺼번에 그것도 남녀 두명을 한꺼번에
걸. 남형사 어때?"
"네, 아마 그럴 겁니다."
남형사는 막 눈을 감으려다 말고
대답했다.
강형사는 손을 뻗어 신문을 집어들었다.
이미 그 살인사건 기사를 읽어보았지만,
다시 한번 보기 위해 사회면에 시선을
박았다.
피살자들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신원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살인자들은
심지어 손가락의 지문까지 모두 도려내어
하수구에다 버렸던 것이다.
살인자들중 살아남은 한 명은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주기만 해도
피살자들의 신원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는
혼자 살아남은 김봉채...... 그는 좀
괴이한 사내였다. 주민등록증상의 나이는
42세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늙어보였다.
주민등록증상의 주소는 10여년 전의 것으로
산비탈의 움막이었는데 지금은 철거되어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주소는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정한
주소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가족도 없다고 했다.

경찰은 그가 시체를 토막낸 장본인이라
생각하고 그 솜씨가 탁월한데 주목했다.
토막내어진 시체를 검사한 결과 그것은
그런 일을 많이 해본 전문가의 솜씨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경찰은 그를 도살자라고
있었다. 경찰이 도살자의 사진을 공개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운전석에서 죽은 사내의 이름은
한명기였다. 그는 두 개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허종달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은 가짜였다. 그는 폭력과
사기 전과가 다섯 번이나 되는 사내였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죽은 조그만 사내
역시 주민등록증을 두 개나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개가 모두 진짜였다. 사진은
물론 동일 인물이었고 그밖의 사항은 모두
달랐다. 하나는 서문구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임노태라고 되어
있었다. 서문구쪽은 전과 하나 없이
많았다. 임노태쪽은 위조와 사기 전과가
8건이나 되었다. 경찰은 임노태를 그의
본명으로 보았다. 수소문한 결과 그는 위조
전문가로 그 방면에서는 대가로 꼽히고
있는 인물이었다.

"위조 전문가가 왜 살인을 했을까?
그것도 토막 살인을?"
강형사는 기사를 읽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피살자들의 얼굴 역시 신원을 알 수 없게
짓이겨져 있었다.
그 위조 전문가의 본명은 임노태일
가능성이 많았다. 전과가 8범이나 되자
그는 새로운 신분으로 태어날 필요성을
느끼고 서문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그 주민증 자체는 위조된 게 아니고 진짜일
것이다. 그것을 발급받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두 개의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는 두 곳의
주소지 가운데서 임노태쪽 주소에는 현재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서문구쪽
주소지는 어느 아파트였는데 그곳은 비어
있었다. 경비원과 이웃 주민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바로 그곳에서 서문구, 즉
임노태가 살고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경찰은 보다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경비원을 시체가 보관되어 있는 병원에까지
데리고 가 그에게 두 구의 시체를 보였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팔뜨기
사내도 보였다. 다행히도 그 경비원은

그 경비원의 말에 의하면 임노태는
1510호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단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어제 아침 낯선 남자 두
명과 함께 아파트에서 나와 차에다 배낭을
싣고 갔다고 했다. 여자는 물론 보이지
않았고 세 사람 모두 등산복 차림이라 산에
가는줄로만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떠났다가 도로 돌아와 배낭을 진 채
집에 들어가더니 얼마쯤 있다가 다시
배낭을 지고 나와 차를 타고 사라졌다고
했다.

경찰은 1510호에서 많은 증거물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
그곳에서 두 명의 남녀를 토막살해했음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피살자들의 신원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전화 받으라구."

선배 형사의 말에 강형사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여자야. 목소리가 매력적인데 그래."
선배 형사가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강형사는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네, 강인재입니다."
"안녕하세요?"
끈적끈적함이 느껴지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속삭이듯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강형사는 약간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머나, 벌써 잊으셨어요! 정말
섭섭해요. 저 하종미예요! 그래도
모르세요?"
강형사는 멍하니 있었다.
"부산이란 말이에요!"

"아, 네네...... 알고 말구요. 난 또
누구시라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벌써
목소리까지 잊다니...... 전 잊지 않고
있단 말이에요."
그녀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그러나
다분히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잊은 게 아니라 갑자기 전화가
와서......."
당황한 그는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전화를
건네준 선배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선배
형사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 걸어서 놀라셨어요?"
"아, 아니요."
"괜히 전화 걸었나 보죠?"
이런 빌어먹을.
"아, 아닙니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걸었어요."
가슴을 기름으로 적시는 것 같은
끈적끈적한 목소리에 그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안합니다.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제가 전화를 걸겠습니다."
"전화 꼭 걸어주시는 거죠?"
"네네, 그럼요. 참, 아빠는 아직 소식
없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끈적끈적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네, 뭡니까?"

"혹시 신문에 난 토막 살인사건
읽어보셨어요?"
강형사는 어리둥절했다.
"네, 읽었습니다."
"저도 읽었어요. 여기 신문에도 났어요.
혹시 강형사님이 그 사건 맡지
않으셨어요?"
"아닙니다. 우리하고는 관할이

"그럼 그 토막시체 못 보셨겠군요?"
"네, 보지 못했습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토막시체 가운데 남자 말이에요.
신문기사를 보니까 지문하고 얼굴을 모두
못 알아보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신원이
밝혀지지가 않았다면서요?"
"네, 그런 모양입니다. 그 사건에 관심이
있으신가 보죠?"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그런데 죽은 사람 가운데 남자쪽
말이에요. 신문에 난 걸 보니까 왼쪽
발등에 흉터가 있다고 했는데......우리
그이도 발등에 큰 흉터가 있거든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전화
걸었어요."
번개처럼 스쳐가는 예감에 강형사는 바짝
긴장했다.
"김영대 씨 발등에 말입니까?"
"네, 그래요. 아주 큰 흉터예요."
"흉터가 어떻게 생겼나요?"

"글쎄요. 전복처럼 생겼다고나
할까...... 아무튼 발등을 거의 덮고
있어요. 그리고 붉은 색깔을 띠고 있어요.
어릴 때 끓는 물이 발등에 쏟아지는 바람에
그렇게 됐대요."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한번
알아봐주세요. 그리고 집으로 연락해
주세요."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다시
말했다.
"두 시간 후에 연락드릴 테니까 댁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살인사건 기사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하종미의 말대로 흉터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선배 형사가 뒤에다 대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라고만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
피살체와 살인자들의 시체는 처음에는
춘천에 있는 병원에 보관되어 있다가
사건의 무대가 서울로 밝혀짐에 따라
지금은 서울의 경찰병원으로 옮겨와
이미 부검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보관실에 냉동상태로 안치되어
있었다.
강형사는 소정의 절차를 밟은 다음에야
피살체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남자 토막시체는 토막난 것들을 맞추어
놓았기때문에 그런대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형사는 그런 것을 본다는 것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과 함께 어쩌면 자신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눈을 부릅뜨고 시체를 덮고
있는 시트를 걷어냈다.
머리쪽에서부터 시트를 걷어내던 그는
목이 잘린 부위가 보이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것을
시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트를 걷어내릴수록 시체는 더욱 참혹해
보였다. 너무 끔찍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돌렸다가는 다시 그것을 내려다보곤 했다.
마침내 발에 덮여 있는 시트를 걷어냈을
때 그의 두눈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도전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맞은편쪽으로 돌아간
다음 왼쪽 발등을 한동안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두 다리는 무릎 아래 정강이 상부에서
잘려나가 있었는데 하종미의 말대로 왼쪽
발등에는 불그스레하게 생긴 흉터가
있었다.
잔뜩 흥분해서 밖으로 나온 그는 부산의
하종미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종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보셨어요?"
"네, 봤습니다. 왼쪽 발등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것하고 비슷해요?"
그녀가 숨가쁘게 물었다.
"글쎄요, 크고 불그스레한 것이 아주
흉측했습니다."
"그렇다면 비슷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려나왔다.
"그이가 맞는가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막 울음소리로
바뀌려하고 있었다.
"아직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흉터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발등에 그런 흉터가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래야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특징이 또 하나 있어요."
"네, 무슨 특징입니까? 그런 것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오른쪽 젖꼭지 밑에 까만 점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아래 거기에 알 같은
게 박혀 있어요."

"거기라니요?"
"아이, 거기 말이에요."
"페니스 말입니까?"
"네......."
그녀가 킥 하고 웃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르지만 만져보면 알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밖에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까?"
"그것말고는 별로 없어요."

"그 정도면 됐습니다. 다시 확인해보고
나서 전화드리겠습니다. 외출하지 말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강형사는 다시 발길을 돌려 시체
보관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강형사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수사본부의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김영대의 소재를 알아냈습니다. 지금
시체 보관실에 누어 있습니다."
흐트러져 있던 실내 분위기가 그 한
마디에 갑자기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토막 살인사건의 피살자가 바로
김영대로 밝혀졌습니다.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마형사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마형사는 책상 위에 웅크리고 있다가
무겁게 눈을 치켜뜨고 강형사를
쏘아보았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하고
남형사가 물었다.
"김영대는 피살됐습니다. 이번에
토막살해된 두 남녀 중 남자쪽은 김영대가
틀림없습니다. 그, 그러니까......."
강형사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을
더듬는 것을 보고 형사들이 웃었다.
어떻게 됐다는 거야?"
그들은 신출내기 형사의 흥분해 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기만 할 뿐
그의 말을 곧장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김영대의 시체를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까 그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토막사건의 피살자가
김영대 같다는 거였습니다."
"그 여자 말만 믿고 그게 김영대라고
단정했단 말이야?"
"아, 아닙니다. 그 여자가 여러 가지
특징들을 말해 줬습니다."

"그 특징이란 게 도대체 뭐야?"
"왼쪽 발등에 불에 덴 흉터가 크게 남아
있고...... 오른쪽 젖꼭지 밑에 까만 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확인해 봤더니 틀림없이 그 자리에 그런 게
있었습니다. 그 여자한테 비행기 타고 즉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말없이 웅크리고만 있던
마형사가 천천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팔짱을 끼면서 강형사를
쏘아보았다.
실내는 금방 무거운 긴장감과 침묵으로
덮였다. 사내들의 얼굴에서도 이미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피살자의 페니스를 직접 만져봤어?"
마형사가 처음으로 무뚝뚝하게 물었다.
킥 하는 웃음소리가 구석쪽에서 들리다가
말았다.
"네, 직접 만져봤습니다. 틀림없이 콩알
"그게 뭔지 알아?"

남형사가 웃지도 않고 물었다. 강형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이야, 여자를 녹여주기 위해
일부러 수술해서 집어넣는거야. 저절로
생긴 게 아니고 일부러 집어넣은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돌출된 그것이 여자를
자극해대는 거지. 여자가 거기에 맛들이면
환장한다구. 제비족 같은 건달들이 그런
수술을 한다구. 강형사도 한번 해봐. 아마
여자들이 안 떨어질 걸."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라구!"
마형사가 남형사쪽을 흘기면서 말하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킥킥거리던
"강형사 말이 사실이라면 빨리 가서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범인이 스스로 함정을 판 것
같은데......."
"기다려. 일차 확인은 강형사가 했으니까
여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 신문
이리 가져와봐."
마형사의 한 마디에 부풀어오르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강형사가 신문을 갖다주자 마형사는 토막
살인사건 기사에 눈을 박았다. 그것을
빠짐없이 자세히 읽고 나서 그는 그것을
오려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조형사와 염형사는 강형사하고 시체실에
다녀와. 여자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가서 확인하란 말이야."
그는 점퍼를 집어들고 남형사한테 턱짓을
보냈다.
"따라와."
"어디 가십니까?"
마형사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더니 낡은 차에 올랐다.
"위조 전문가의 집에 가는 거야."
차를 출발시키면서 비로소 그가 말했다.
"토막 살인사건 현장 말입니까?"
"그래, 아파트 말이야."
차가 덜컹거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강형사 말을 믿으십니까?"
남형사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자넨 믿지 않나?"
"글쎄요, 아직은...... 그 여자의 확인이
끝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ꠑ ꠑ?
남형사는 팔짱을 끼고 앞을 노려보았다.
"강형사가 숨통을 터줬어. 위조 전문가가
왜 김영대를 살해했을까? 이제부터 그 점을
밝혀내야 할 거야."
마형사는 차를 몰고가면서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 사고로 죽은 위조 전문가의 아파트는
태풍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후의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마형사 일행이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실에는 관할서의 형사 네 명이 앉아
있었다.
"야아, 고반장,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인데......."
마형사는 관할서의 형사반장과 반갑게
마형사처럼 뚱뚱했고,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처지였다. 고반장은 마형사가 갑자기
나타나자 꽤나 놀라는 기색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놀러왔지. 냄새가 많이 나는군. 저
안에서 칼질을 했나?"
마형사가 욕실쪽을 톡으로 가리키자
고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웬일이야?"
고반장은 마형사가 불쑥 나타난 것이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마형사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고 나서 자신도 한 대
피워물었다.
"아무래도 토막사건은 우리가 맡아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뜨고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피살자 신원 밝혀냈나?"
"여자쪽은 그런대로 심증이 가는데
남자쪽은 모르겠어."
"남자쪽은 우리가 찾고 있던 인물이야.
김영대라는 놈인데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얼마 전에 무혐의로
풀려났지. 그 부인의 확인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거의 확실한 것 같아."
그는 피살자의 신원을 알게 된 경위를
고반장에게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고반장은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더니
"틀림없군. 알아보나마나야."하고
말했다.
"우리가 골치아프게 됐어."
놓이는데......."
고반장이 즐거워하면서 두손을
마주비벼대자 그의 부하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죽은 여자는 누구야?"
"여기서 위조 전문가하고 동거생활하던
여자 같아. 경비원 말로는 그저께 밤에
새벽 2시쯤에 여자가 들어가는 것을 봤는데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는 거야. 여자가
몰고다니는 차는 그대로 주차장에 있어.
이리 와서 보라구."
고반장은 창가로 다가서더니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로 저 차야.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있는
파란색 차야."
그들은 도로 거실로 들어왔다.
"신원은 밝혀졌나?"

"음, 양방희라는 이름으로 차가 등록되어
있었어. 동사무소에는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고 관리실에는 정우희라는
이름으로 올려져 있었어. 조사해 보니까
사기전과가 두 건 있더군. 바로 이
여자야."
고반장은 주머니에서 사진 뭉치를
꺼냈다.
"다행히 이게 집안에 있었어. 한번
보라구. 볼만하다구."
마형사는 그것을 받아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볼만하지?"
"음, 볼만한데......."
마형사는 고반장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사진의 주인공은 빼어난 미모를 지닌
젊은 여성이었다. 미모와 함께 육체미도
뛰어나 있었다. 그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요염한 포즈를 취한 채 나체로 찍은
사진들이 몇 장 있었다.
"야, 근사한데요."
남형사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이 여기서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어. 경비원과 주민들이 증언해
주었으니까 틀림없어."

고반장은 남녀가 함께 찍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사진 속의 두 남녀는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술집 같은 데서 찍은 것인 듯
그들의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술병들이
놓여 있었고 남자는 취기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이자가 바로 위조 전문가인
임노태인가?"
마형사는 안경을 끼고 몸집이 작아보이는
사진 속의 그 사내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그래, 일명 서문구이지. 여기 관리실과
동사무소에는 서문구라고 등록되어 있었어.
하지만 위조 세계에서는 임노태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야."
"양방희와 정우희중 어느 쪽이 이 여자의
본명인가?"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우희가
본명일 가능성이 많아. 자동차 등록은
전과기록이 없었어. 사기 전과기록은
정우희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었어.
그러니까 정우희쪽이 본명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확실하지는 않아."
"양방희라면 김영대가 여러 차례 들먹인
여자가 아닙니까?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우린 그 말을 믿지
않았죠."
"그래,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고리가 풀리나?"
고반장이 물었다.
"글쎄, 어느 정도...... 처음에는
김영대라는 자를 용의자로 검거했었지.
그자는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어.
양방희라는 여자가 그것을 증명할 수
없었어. 우리는 그 여자가 가공 인물인줄
알았지. 나중에 김영대는 풀려났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양방희를 찾으러다닌 것
같아."
"그렇다면 결국 김영대는 양방희를
찾아냈고, 그녀의 집에서 살해됐다는
결론이 나오는군."하고 고반장이 말했다.
마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김영대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자신을 살인범으로
만들기 위한 함정에 자신이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양방희가 그 함정
속으로 자신을 이끌어들인 장본인이라
생각하고 그 여자를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자를 찾을 수가
몰라도...... 그리고 김영대가 아무렇게나
둘러댄 가공 인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애써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형사가 손짓을 해가며 말했다.
"풀려난 김영대는 복수하기 위해
양방희를 찾아다녔겠군."
고반장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렇죠. 제 생각에는 미친 듯
찾아다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형사가 손을 들어 남형사의 다음 말을
가로막았다.

"그 성격으로 봐서 양방희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그런데 오히려 그녀의 집에서
당했어. 뿐만 아니라 양방희까지 피살됐단
분명한데 왜 양방희까지 잔인하게
죽였을까?"
"김영대가 먼저 양방희를 죽이자 임노태
일당이 김영대를 죽인게 아닐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지."
"옥사에 한번 올라가 보라구. 참고될만한
게 있을 거야. 거기서 한바탕 결투가
있었던 것 같아."
고반장이 앞장서서 나가면서 말했다.

"페인트공이 옥상에다 창고 같은
가건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동안 비가
와서 일을 못했대. 그저께 아침에 날이
갰기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봤더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는 거야. 경비원이 처음 들려준
이야기야. 나중에 페인트공도 만나봤어."
옥상은 오후의 뙤약볕 속에서 열기를
받아 후끈거리고 있었다.
"페인트공은 다행히 현장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두었어. 뭘 좀 아는
친구였어."
옥상의 가건물 주위에는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고반장은 잠겨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첫눈에도 거기에는 격렬한 싸움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온통 흰 페인트칠과 함께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페인트통, 플래쉬,
철사줄, 반창고, 부러진 각목, 화장품,
거울, 라이터 따위가 제멋대로 널려
있었다.
"보다시피 이건 여자와 남자가 싸운
결사적으로 싸운 흔적이란 말이야. 시체를
부검한 결과 남자는 흉기에 가슴을 찔린 게
결정적인 사인이었어. 여자는 질식사였고.
토막을 낸 것은 죽은 뒤의 일이었고,
그전에 그들은 다른 요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단 말이야."
고반장은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이건 여기에 떨어져 있던 것인데 검사를
하려고 가져갔었지. 지문이 나왔기 때문에
지금 알아보고 있어. 이 나이프에는 혈흔이
없어. 그러니까 이건 피살자가 들고 있었던
거라고 봐야겠지. 김영대라는 자가
잭나이프를 들고 있었으면서도 흉기에 찔려
죽은 걸 보면 피살자와 살인범은 여기서
그리고 여기 화장품하고 손거울이 있는
걸로 봐서 여자도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는 한 주먹이나 되는 머리칼을
집어들었다.
"이건 여자 머리칼이야. 죽은 여자의
것하고 일치해. 이런 게 여기 이렇게 빠져
있는 걸 보면 여자가 여기서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게 분명해. 그런데 여자는
여기서 죽지 않았단 말이야. 목이 졸린
흔적이 있고 폐 속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아 목이 졸린 채 물 속에 처박힌
것 같아. 집안의 욕조가 아니고는 이
주위에서는 물 속에 처박혀 죽을 만한 곳이
없어. 자, 그리고 이걸 보라구."
고반장은 밖으로 나가면서 출입구 바닥을
거기에는 페인트와 핏자국이 바깥쪽으로
쓸려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건 무거운 것을 끌고 나간 흔적이야."
"바깥에는 흔적이 없는데?"
"그럴 수밖에 그날밤 비가 억수로
쏟아졌거든. 비에 모두 씻겨 나갔어. 비에
씻기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쪽으로 와보라구."
고반장은 옥상을 벗어나 계단쪽으로
다가갔다.
"여길 보라구. 핏자국하고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지 않아? 닦아버려서 얼른 눈에
띄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보인다구. 급해서
대강 닦아버린 거야."
옥상에서 아파트로 내려가는 께단 초입을
찬찬히 살펴보니 고반장의 말대로 과연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계단을 한번 꺽어내려가자 1509호와
1510호가 나왔다. 두 집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그앞에는 공간이 있었다. 마형사는
1510호 앞을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무 자국도 없는데?"
"집 앞은 깨끗이 닦아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래서 루미놀을
뿌려놓았지. 그랬더니 저 위에서부터 집
앞까지 뚜렷이 반응이 나타났어."

"더 아래는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나?"
"나타나지 않았어. 이 집 앞에서
그쳤어."
고반장은 출입문을 열었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꽤 어둠침침했다.
"현관은 숫제 핏자국 투성이야."
현관의 전등을 켜자 현관 바닥에
핏자국과 페인트 자국이 뒤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닦지도 않았어."
루미놀은 혈흔을 찾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다. 범인이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아무리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낸다
해도 거기에 1만배의 희석 혈액이 남아
있을 경우 루미놀 용액을 뿌리면 강한
형광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마치 여름밤
보게 되는 반딧불처럼.
고반장은 마형사 일행을 뒤편에 있는
다용도실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피살된 두 사람의 옷이야. 토막을 내기
전에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여기에다
갖다놓은 것 같아."
남형사가 그 옷가지들을 들쳐보았다.
남자 옷과 여자 옷이 뒤엉켜 있었는데
거기에는 내의도 섞여 있었다.
"여자 옷은 숫제 페인트로 떡이 되어
있는데요. 그리고 이걸 보십시오."
그는 여자 옷을 쳐들어 보였다. 그것은
원피스였는데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건 담뱃불로 뚫은 것 같은데요."
"담뱃불로 지진 것 같아. 여자 시체를
검사해 봤더니 여기저기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남아 있더라구. 그러니까 옷을 입고
있는 여자를 옷 위로 담뱃불로 지진 거야."
"고문을 가했군."하고 마형사는
중얼거렸다.
"여자는 살해당하기 전에 아주 혹독하게
당한 것 같아."

"도대체 왜 비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옥상까지 올라갔을까?"
마형사의 의문에 고반장은 다시 옥상에
올라가보자고 말했다. 그들은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빠진 여자 머리카락, 화장품,
거울...... 철사줄, 반창고, 부러진 각목,
라이터...... 이런 것들로 봐서 여자는
여기서 심한 고문을 당했던 것 같아. 1차로
여기서 고문을 받은 다음 아파트로 내려가
욕조 속에 처박혀 살해된 것 같아."

살해됐다치고...... 그럼 여자는 누구한테
살해됐지? 양방희를 찾아낸 김영대는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을 거야. 그가 양방희를
옥상으로 끌고가 고문을 가했을 가능성이
커. 임노태가 고문을 가했다면 집안에서
하지, 굳이 비가 쏟아지는 옥상까지 끌고
가 그 짓을 했을 리가 없지."
"그건 그렇습니다."
남형사가 마형사의 말에 동의했다.
"그 다음에 김영대는 왜 그 여자를 끌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욕조 속에 처박아
살해됐을까? 그렇다면 왜 굳이 옥상에서
해치우지 아파트까지 끌고 갔을까?"
"의문은 또 있습니다. 만일 아파트에서
양방희를 살해했다면 그 다음에 김영대는
왜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흉기에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서 아주 큽니다. 여기에 있는 핏자국은
양방희가 흘린 피가 아닙니다. 그 여자는
피를 흘리지 않고 질식사했을 뿐입니다.
그렇죠?"
남형사가 고반장을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핏자국은 김영대의 것으로 밝혀졌어.
검사 결과 김영대의 혈액형과 일치해.
그리고 김영대가 그 여자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 살해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왜냐하면 그때 집안에는 임노태가 자지
않고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는 고반장을
마형사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반장은
경비원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제 내 담당이 아니니까 이야기해
주지. 그날밤 양방희는 자정이 지나 새벽
2시 가까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는
거야. 경비원이 직접 목격했다니까
틀림없는 사실일 거야. 그런데 한참
지나서...... 그러니까 양방희가 차를
주차시켜놓고 나서 아파트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 한참 지나고 나서 경비실로
연락이 왔다는 거야."

인터폰을 통해 경비실로 연락을 취한
사람은 임노태였다. 그의 말인즉슨 자기의
동거녀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는데 아직까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이었다.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그리고 여자가 차를
주차시켜놓고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반 시간 넘어 지나도록
집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야.
주차장에서 1510호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탈
경우 5분도 걸리지 않아. 슬슬
걸어올라온다 해도 10분이면 충분해.
경비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가
본 대로 그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틀림없이 봤다고 말했다는 거야."
"그렇다면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집에까지 오는 도중에 실종된 거군요?"하고
남형사가 물었다.
"그렇지 수분 사이에 실종된 거지.
경비원 말로는 남자로부터 한번 인터폰으로
그 뒤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다가
도중에 납치되어 옥상으로 끌려왔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여기서 고문을
받았겠지."
고반장의 말에 이어 마형사가 입을 열어
자기 의견을 말했다.
"여자가 들어오지 않으니까 임노태는
궁금해서 밖에 나가봤을거야.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왔던 게 아닐까? 집에서
옥상까지는 바로 한 층 상간이니까 어렵지
않게 올라올 수 있지. 뭐라고 할까. 어떤
예감이란 게 있었던가, 아니면 옥상쪽으로
양방희가 끌려간 흔적 같은 것, 이를테면
신발이 벗겨졌다던가 그밖의 소지품 같은
게 떨어져 있는 걸 보고 옥상으로 올라왔던
"그렇지. 그 가능성이 커. 아마 그랬을
거야. 그래, 바로 그거야."
고반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말했다. 마형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옥사으로 올라온 임노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을 거야. 양방희가 고문을
당하고 있는 걸 목격했을 거야. 고문을
가하고 있던 김영대도 임노태를
발견했고......, 그래서 여기서 생사를 건
결투가 벌어졌을 거야. 그 결투에서
김영대가 죽고 임노태는 양방희를 구해내서
집으로 데리고 갔겠지. 그리고 시체를
숨기기 위해 그것도 집안으로 끌어들였을
거고......."
"거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럼
양방희는 누가 죽였습니까?"하고 남형사가
물었다.
"김영대가 죽었으니까 임노태밖에 더
있겠어?"하고 고반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임노태가 양방희를 죽였다는
건가?"
마형사가 물었다.
"그밖에 다른 사람이 없잖아."
"왜 구해놓고 나서 여자를 죽였지?
더구나 동거하는 여자를 말이야? 이해가 안
되지 않아?"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서 여자를 토막까지 내서 버린 거겠지.
그렇지 않으면야......."
마형사가 급히 밖으로 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어디 가는 거야?"
그들은 옥상을 벗어나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임노태는 차가 없나?"
"차가 있긴 하지만 다리를 절기 때문에
직접 운전은 안하고 운전기사가 대신
운전을 했대. 그저께 아침에 그 차를 타고
나갔다가 사고가 난 건데 경비원 말로는
운전사 대신 건장한 사내가 운전하고
나갔다는 거야. 사고로 죽은 두 명중 한
명이 분명해."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양방희의 코발트색 차는 며칠 동안
닦지를 않았기 때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차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남형사가 가는 철사를 구해오더니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문이 열렸다.
"야아, 기술 좋은데.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
고반장이 웃으며 남형사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정도는 보통입니다."
그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자동차 열쇠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김영대가 여자한테 홀려 타고다닌 차도
파란색 차라고 했어."
마형사는 조수석으로 올라갔다.
"자, 그럼 우리는 철수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바장이 손을 쳐들어보였다. 마형사는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조그만 액자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교복 차림의 여고생 모습이었다.
"예쁜데요. 양방희의 여고때 사진인 것
같은데요."
마형사도 그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늘인 여학생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제복과 흰 칼라가 맑은 미소와 함께
투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쁘죠?"
"음, 예쁜데...... "
"이런 소녀가 꿈을 상실한 채 범죄에
얽혀들어 참혹한 죽음을 당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차에다 그 당시의 사진을 붙이고 다닌
걸 봐서는 그때의 무지개꿈이
마형사는 중얼거리면서 액자 속에서
사진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왼쪽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거기에는 학교 배지가 붙어 있었다.
"어느 여학교인지 알겠어?"
"그걸 봐가지고는 모르겠는데요."
"한번 알아봐. 서울 시내에 있는
여학교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여학교때 이름이 진짜 이름이야.
그때 가명을 사용했을 리는 없었을 거
아니야?"
"그렇군요, 역시......."
"위조 전문가하고 동거생활까지 하고
있었다면...... 위조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임노태에 관해서
샅샅이 조사해 봐야겠어. 샅샅이 조사해
그 관계가 드러나면 양방희가 왜 김영대를
유혹했는지 그 이유는 드러날 거야."
"알겠습니다."
남형사는 차에 장치되어 있는 카세트
녹음기의 플레이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배경음악이 전혀 없는 여자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음의 맑은 목소리로 귀를
기울이고 싶을 만큼 뛰어난 노랫소리였다.
"누가 부르는 거지?"
"양방희가 아닐까요?"
그것은 최신 유행가였다. 그것이 끝나자
이번에는 이탈리아 가곡이 흘러나왔다.
그것 역시 같은 목소리가 부르고 있었다.
"아, 보통이 아닌데......."
"대단한데요."
그들은 멍하니 넋이 빠진 모습으로
세번째 노래는 아주 옛날에 유행하던
유행가였다. 그것을 그녀는 청승맞게
불러대고 있었다.
"양방희가 자기 노래를 녹음한 것
같은데요.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던
모양이죠?"
"글쎄, 누군지는 모르지만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양방희가 틀림없습니다."
남형사는 테이프를 꺼내 그것을 뒤집어
꼽았다. 버튼을 누르자 이번에는 노랫소리
대신 이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남형사는 스톱버튼을 눌렀다. 그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성희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올라가면서 내는 신음과 대화였다.
ꠑ ꠑ? "이게 뭐지?"
남형사보다는 마형사가 더 놀라서
물었다.
"그거 하는 소리 아닙니까. 남자
목소리는 김영대 같은데요."
"다시 들어봐."
남형사가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 후유...... 됐어요. ......이제
그만해요."
"......."
"됐다니까요."
"난 아직 멀었어...... 난 이제
시작이야......."
"정말 지독해요...... 좀 쉬었다가
해요...... 한동안 섹스 생각은
안나겠어요."
이것도 벗어버려......."
"누가 보면 어떡 해요......."
"보면 보라지 뭐......."
"아, ......잠깐 ......준비도 안 됐는데
그러는 법이 어딨어요."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숫제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형사가 스톱버튼을 눌렀다.
"열이 나서 못 듣겠어."
마형사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김영대의 목소리 같지
않습니까?"
"그놈이야."
"이로써 양방희가 김영대를 유혹해서
돌아다녔다는 게 사실로 나타난 셈인데요."
"끝까지 들어보죠. 이런 걸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합니까."
김영대는 더욱 힘차게 양방희를
밀어부치고 있었고,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들이 차 안에서 지랄들을 쳤던
모양인데요. 카 섹스치고는 정말 너무
진한데요."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남형사가 말했다. 그는 차문을
모두 닫은 다음 볼륨을 더 높였다.
숨가쁜 신음소리 사이로 그들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넌 거미 같은 여자야...... 아주 이상한
여자야...... 왜 나를 유혹했지?......
말해봐...... 왜 나를 유혹했어?......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난
이걸로 여자를 죽일 수도 있어......."
"죽여보세요...... 제발
죽여주세요....... 죽고 싶어요......."
"그래? 좋아! 죽어보라구!"
살과 살이 난폭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마형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봐, 난 아직 총각이야.
쇼크사하겠어."
마형사가 스위치를 끄려고 하는 것을
남형사가 다급하게 막았다.
"곧 끝납니다. 들어보십시오. 앞으로
. 나보다
먼저 그 생각을 한 사람
결혼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남형사가 능청을 떨자 마형사는 다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어.
도대체 이건 짐승만도 못하잖아."
"원, 반장님도...... 이보다 더 인간적인
게 어딨습니까?"
갑자기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일을 치르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있자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옷이 엉망이 됐어. 어디 가서 샤워좀
했으면 좋겠어."
"당신같이 멋진 남자는 처음이에요."
여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우리
"부인이 있잖아요."
"이혼하지 뭐, 까짓거......."
"우린 함께 살면 안 돼요. 너무 궁합이
잘 맞아서 아마 말라죽을 거예요. 결혼하지
않고 이렇게 가끔씩 만나서 하는 게
스릴있고 좋잖아요."
"흥, 그 말도 그럴 듯하군.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이제 밝힐 때도 됐잖아?"
여자의 웃음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콧소리가 약간 섞인 웃음소리였다.
"밝힐 것도 없지만...... 밝혀서 뭘
하게요?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면 흥미가
없어지지 않아요? 전 이 상태가 좋은데요.
서로 모르는 체 지내는 이런 상태
말이에요."
"다른 남자들과도 그러나?"
"참, 묘한 여자군."
"우리 밖으로 나가서 좀 걸어요."
"비가 오고 있잖아."
"비좀 맞으면 어때요. 아이, 왜 그렇게
로맨틱한 데가 없어요?"
"로맨틱? 흥......."
대화가 사라지면서 침묵이 찾아왔다.
녹음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남형사는
테이프를 꺼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김영대가 양방희라는 여자한테 유혹당해
이러저리 끌려다녔다는 게 정말인가 보죠?"
"어휴, 더워"
마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레
뭉치처럼 된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차 속에 한동안 앉아 있었기
있었다.
"아파트로 들어가자구."
그들은 아파트 건물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 여자는 왜 그런 걸 녹음 해
뒀을까?"
"그러니까 그 여자가 보통이 아니죠."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여자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즐기기
위해 그걸 녹음해둔 걸 겁니다. 소리만
듣고도 얼마나 흥분이 됩니까. 자신이
흥분해서 내지르는 신음소리와 괴성이 듣고
싶었던 겁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한테
도취되어 있는 여자였는지도 모르죠.
자기자신의 나체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던
말해서 그런 여자는 색골이죠."
"그런 여자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는데......."
그들은 1510호 안으로 들어갔다.
"전 그런 여자한테 한번 걸려봤으면
좋겠습니다."
마형사는 벌써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샅샅이 뒤져.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샅샅이 뒤지라구."
집안은 이미 관할서의 수사관들이 한번
훑고 지나간 뒤였다.
하지만 그들은 들춰낸 것들을 모두
그대로 집안에 놔둔 채 철수했다. 수사
대상이 그들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이었다.
집안에 널려 있는 것들을 대충 훑어본
다음 그들은 은밀한 곳을 찾아 촉각을
찾아 재빠르면서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바퀴벌레들 같았다.
임노태가 작업실로 사용한 방은 흐트러진
것 하나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큼직한 책상 위에는 온갖 제도용
사무기기들이 언제라도 사용될 수 있게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형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위조 작업을 한 모양이죠?"
뒤늦게 들어온 남형사가 책상 위를
살피면서 물었다.
"음, 그런 것 같아."
그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모두가 위조
작업에 필요한 것들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충대충 훑어간 손들 때문에 흐트러지고
서로 뒤엉켜 있었다. 관할서의 수사관들은
관해서는 대충 형식적으로 훑기만한 것
같았다.
"여기가 문제의 방인 것 같아."
마형사는 책상 앞에 앉아 두손으로 턱을
괴었다. 남형사는 담배를 피워물고
건성으로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었다.
"별다른 건 없는데요."
그 말에 마형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앞으로 튀어나온 이마가 더욱 앞으로
밀려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뭉툭코가
실룩거렸다. 점 같은 두눈은 더욱 작아지는
것 같았다.
"임노태 일당은 단지 김영대하고만
관계가 있었을까? 그게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다른 목적을 위해 김영대를 잠시
이용했을 뿐이었어. 임노태의 배후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임노태는 알고 있었을
거란 말이야. 그 증거물이 이 방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 같은데......
이봐, 담배 한 대 줘."
"그런 증거물은 없는 것 같은데요."
남형사가 상사에게 담배를 꺼내주면서
말했다.
"숨길만 한 데라고는 책상밖에는
없는데...... 여기는 이상이 없는데요."
그는 책상을 두드려보았다.
마형사는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튀어나온 배에 책상이 걸려 그것이
들썩했다. 큼직하고 묵직해 보이는 책상이
그 정도에 들썩하고 올라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는 담배를 비벼끄고
책상을 아래위로 살핀 다음 장방형의
넓은 판을 위로 올려보았다. 그것은 힘들지
않게 위로 들썩 올라갔다. 그것은 아래위가
붙어 있지 않고 조립식으로 되어 있는
책상이었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조립식 책상
같았다.
두 사람은 장방형 판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보았다. 기둥 역할을 하는 양쪽
널판지 위에는 손가락 굵기의 쇠붙이들이
여러 개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것들이 덮개
밑의 홈 속으로 들어가 덮개가 옆으로
밀려나지 않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양쪽 널판지와
그것을 중간 부분에서 H자형으로 연결시켜
주는 더 큰 널판지의 위쪽 단면을 세밀히
통나무가 아닌 합판을 중간에 공간을 두고
양쪽에서 붙인 것이었다. H자형 단면은
나무로 메워져 있었다. 중간의 단면과
오른쪽의 단면은 하나의 나무로 메워져
있었는데 왼쪽의 단면은 네 토막의 나무로
메워져 있었다. 그 네 토막의 나무에 각기
하나씩 모두 해서 네 개의 쇠붙이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런데 오른쪽의
단면에는 두 개의 쇠붙이만 튀어나와
있었다. 마형사는 오른쪽의 쇠붙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그것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왼쪽의 쇠붙이 하나를
당겨보았다. 그러자 쇠붙이가 박혀 있는
나무토막 자체가 빠져나왔다. 다른 세 개도
모두 헐겁게 빠져 나왔다.
"이 속에 뭔가 들어 있는데요!
나무토막이 빠져나온 자리를 들여다본
남형사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으음, 그렇다니까......."
마형사는 홈 속을 들여다보고 나서
주먹으로 남형사의 어깨를 쳤다.
나무토막이 빠져나온 자리에는 칸이 져
있는 네 개의 홈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각각의 홈 속에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그들은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잡아뽑아
보았다. 뽑아나온 것은 일정한 크기의
자루였다. 그리고 자루 속에는 무엇인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자루의 길이는 책상
높이쯤 되어 보였는데 그것이 접혀지지
않게 안에는 얇은 플래스틱 판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나서 우선 하나씩 차례대로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첫번째 자루 속에서 나온 것은
달러화였다. 달러는 모두 백 달러짜리였다.
백 달러짜리 묶음으로만 스무 개나
되었다. 그것이 두 묶음씩 세워져서 그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홈의 폭이
여느 책상에 비해 유난히 넓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게 한화로 치면 얼마지?"
"20만 달러니까...... 1억 5천만 원
정도는 되는데요."
마형사는 입이 딱 벌어졌다.
남형사가 두번째 자루를 풀었다. 묶여
있는 매듭을 풀고 나서 그것을 거꾸로
쳐들고 흔들자 안에서 일본 지폐가
쏟아져나왔다.
"아니, 이건 엔화 아니야?"
"모두 만 엔짜리인데요."
두번ㅉ 자루에서 나온 만 엔짜리 묶음
역시 스무 개나 되었다.
"한 묶음이 백만 엔...... 5대 1로만
계산해도 우리 돈으로 5백만 원...... 모두
해서 1억 원인데요."
남형사가 재빨리 계산하는 것을 들으면서
마형사는 잠시 멍하니 돈다발들을
내려다보았다.
남형사가 세번째 자루를 풀었다.
거기에서도 엔화가 쏟아져나왔다. 모두
스무 다발이었다.
"기가 막히군."
"달러까지 합하면 모두 3억 5천만 원이나
되는데요. 먹어치울까요?"
"그럴까?"
그들은 심각한 눈빛으로 서로를
네번째 자루를 집어들었다.
"이건 좀 달라보이는데요. 돈이 들은 것
같지 않은데요."
남형사가 자루를 만지면서 뜸을 들이자
마형사가 재촉했다.
"빨리 꺼내봐!"
남형사가 자루를 거꾸로 쳐들자 안에서
이상한 것들이 굴러떨어졌다. 수첩, 여권
뭉치, 사진, 그밖에 납짝한 플래스틱통
같은 것들이었다. 남형사는 플래스틱통
뚜껑을 열었고 마형사는 여권 뭉치를
풀어헤쳤다.
"이것 보십시오!"
남형사가 번쩍거리는 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것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보석들이었다.
다발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여권 뭉치는 두
개였다.
"그건 여권 아닙니까?"
"위조 여권들 같아."
그것은 모두 해서 열네 개나 되었다.
그는 또 한 개의 묶음을 풀었다. 그것은
모두 여섯 개였는데 하나같이 사진이 붙어
있지 않았다. 사진 자리에는 사진을 떼어낸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건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은
것들이야."
그는 사진이 붙어 있지 않은 여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나서 처음 열네 개의
여권을 펴보았다.
거기에는 모두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그
여권들은 거의가 한번 이상은 사용된
모두가 한두군데에 흠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 흠이란 것들은 이를테면 이름이
지워졌거나 나이, 키, 사인, 주소 같은
것들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본래는 진짜 여권들이었을
거야. 그런데 사진을 바꿔치기하고
인적사항을 한두 군데 교묘하게 고쳐넣어서
다른 여권으로 만들어버린 거야. 진짜
여권들은 훔치거나 했겠지. 이것들은 거의
마무리가 됐는데 아직 한두 군데 완성을
못해서 그대로 모아둔 것 같아. 그리고
사진을 떼어낸 것들은 아직 작업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들이야."
"교묘하게 지웠군요."
남형사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말했다.
"특수한 약품을 썼을 거야. 떼어낸
자들은 증거가 되는 것들을 잘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버릇이 있어. 나중에 대비해서.
자기가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서 또는
협박용으로 말이야."
열네 개의 사진들 가운데 그들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이거 보십시오. 모두 기막힌
것들뿐입니다. 이건 다이아몬드입니다."
남형사는 플래스틱통 안에서 엄지손가락
굵기의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그것은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천만 원짜리는 되겠는데요. 전 장가갈
때 우리 마누라한테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못해 줬습니다. 마누라는 다이아 반지 하나
갖는 게 소원인데......"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곤 했지만 마형사는
그저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보석류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또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에 비해 남형사는
보석들을 하나씩 집어들어 보이면서
이름들을 들먹이는 것이 그런 것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은 것 같았고 관심 또한
대단한 것 같았다.
"모두 수억대는 될 것 같은데요.
완성품들이 많은 것이 장물 같은데요."
"위조뿐만 아니라 장물아비역도 한
모양이지."
마형사는 비닐봉지 속에서 명함판 컬러
사진들을 꺼냈다. 같은 것들이 세 장씩
모두 아홉 장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 뒷면에는 이름과 주소, 나이
"이건 새로 의뢰해온 사람들의 사진
같은데......."
"여기 또 있습니다."
남형사는 또 다른 비닐봉지 속에서
사진들을 꺼냈다. 그것은 몇 십장이나 되는
사진들로 하나같이 뒷면에 뜯긴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이건 훔친 여권에서 뜯어낸 사진들
같은데요."
그들은 거의 완성되어 있는 열네 개의
여권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따로 떼어내어
보관해둔 사진들의 뒷면에 적혀 있는
이름들과 대조해 보았다. 그 결과 아홉
개의 이름이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름들은 서로 일치했지만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들과 따로 떼어낸
보여주고 있었다. 나머지 다섯 개의
이름들은 사진 뒷면의 떼어낸 자국이 너무
커서 그것들이 지워진 바람에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거 한 건 해주는데 수백만 원은
받았을걸요."
남형사의 질껄이는 소리를 귓가로
흘리면서 마형사는 수첩을 집어들었다.
"더구나 이 친구는 이렇게 해서 번 돈을
함부로 흥청망청 써버리지 않고 이렇게
보석을 사모은다거나 외화로
바꿔놓는다거나 했기 때문에 꽤 재산을
모았겠는데요. 외화를 이렇게 모아둔 걸
보면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릴 생각이었던
모양이죠?"
수첩이라고 보기에는 좀 크고 두꺼운
것이었다. 겉면이 검정 가죽으로 입혀져
있어서 묵직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형사는 겉장을 넘겼다.
"그건 뭐죠?"
남형사가 가까이 얼굴을 디밀었다.
그것은 두꺼운 카드를 모아둔 것으로 한
장씩 끼울 수도 있고 빼낼 수도 있게 되어
있는 파일이었다. 각 장에는 본명과 가명,
연락처, 발급일자, 금액 따위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바로 이거야!"
마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위조 여권을 발급해준 사람들의
리스트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해
"무서운 놈이군요."
"뒤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거야.
이건 협박 자료가 되거든."
마형사는 카드를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카드에는 일련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기록이 되어 있는 카드는 100장이 넘었다.
"장사가 꽤나 잘 된 모양인데요. 이렇게
숫자가 많은 걸 보니......."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니까 고객이 많이
몰렸겠지. 이런 걸 하려면 혼자서는 안 될
거야. 조직이 있어야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가 있을 거야."
붙어 있는 사진 가운데는 여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이자들은 한국에서 살 수 없는
수배자들...... 그리고 어떻게든 외국으로
빠져나가 살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이
대부분일 거야."
"모두 잡아들여야겠는데요."
"이미 빠져나갔을걸."
거의 마지막 부분의 카드를 넘기고 있던
마형사의 손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누구지?"
그는 카드에 적혀 있는 내용을
들여다보며 신음하듯 물었다. 남형사의
두눈이 등잔만하게 커졌다.
"아아니,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어."
마형사는 카드를 뽑아냈다.
그 카드에는 배창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형사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본명은 분명히
배창기였다. 전화번호와 주소도 일치했고
직업란에는 호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장으로 되어 있었다. 가명은
최태석이었다. 그것은 최태석이라는
이름으로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발급일자는 6월10일로
되어 있었다.
"이제 가닥이 풀리는 것 같은데......."
그들은 배창기를 용의자로 점찍었었다.
과거 외국인과 동거생활까지 한 사실을
숨긴 채 배창기와 그 아들한테 에이즈를
전염시킨 유밀라야말로 배창기의
없었다. 그야말로 죽여도 시원찮을
저주스런 여자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녀를 살해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알리바이가 문제였다.
유밀라가 피살당할 그 시간에 배창기는
일본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경찰이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이것으로 그의 알리바이는 깨어진 것
아닙니까?"
"공항에 가서 확인해 보면 확실한 것을
알 수 있겠지."
"위조 여권을 사용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었는데요."
남형사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배사장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것
마형사는 카드를 넘겼다.
"아니, 이건 또 누구야?"
마형사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드에
적혀 있는 이름을 들여다본 남형사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 얼어붙은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유밀라의 이름이었다.
피살된 유밀라의 이름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남형사가 흥분을 누르면서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마형사 역시 흥분된 모습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배사장은 이해가 되는데
그 여자 이름이 여기에 적혀 있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들은 숨을 죽이고 카드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녀는 서정자(徐貞子)라는 이름으로
위조 여권을 만들어 가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의 발급일자는 배창기보다
며칠 늦은 6월14일이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공항으로
가자구!"
그들은 파일을 끝까지 훑어보고 나서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부부가 함께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는
것은 함께 무엇인가 공모했다는
것인데......."
공항쪽으로 차를 몰아대면서 마형사가
중얼거렸다.
"그 공모 과정에서 유밀라가 살해당한 게
아닐까요?"
"글쎄......."
황혼이 깔린 차도를 노려보면서 마형사는
엑셀러레이터를 더 힘주어 밟았다.
"그 여자는 죽기 전에 위조 여권을
가지고 무슨 짓을 했을까요?"
"우리는 바보 같은 놈들이야. 모두
멍청한 놈들만 모였단 말이야."
저돌적으로 튀어나온 마형사의 이마를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남형사는 몸을
사렸다.
"너무 과속인데요. 속도를 좀
줄이십시오."
마인은 브레이크를 가만히 밟으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9. 위조 여권

이윽고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곧장
출입국을 관리하고 있는 사무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책임자가 마인과 악수를
나누고 나서 그가 내놓은 두 사람의 명단을
받아들였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책임자는 그것을 들고 컴퓨터 단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직원쪽으로 걸어갔다.
형사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10분도 못 돼 그들 앞에는 프린트기를
통해 빠져나온 길다란 기록지가 놓여졌다.
거기에는 최태석과 서정자의 최근 출입국
최태석은 지난 4월12일에 출국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그리고
귀국 일자는 7월16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4일 후인 7월19일 밤 10시25분 JAL편으로
다시 일본에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후로는 아직 귀국한 기록이 없었다.
서정자의 마지막 출국 일자는
5월9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18일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18일 이후 그녀가
출국한 기록은 없었다.
그들은 배창기와 유밀라의 출입국 기록도
찾아보았다. 컴퓨터 단말기는 즉시 두
사람의 출입국 기록을 토해냈다.
배창기가 본명으로 일본에 간 것은 지난
7월15일이었다. 그리고 역시 본명으로
유밀라는 그보다 훨씬 전인 지난
3월25일에 본명으로 출국한 것으로 나타나
있었는데 목적지는 프랑스였다. 그리고 한
달 후인 4월27일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는 출입국한 사실이
없었다.
그곳을 나온 형사들은 공항 대합실로
나가 구석진 곳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지?"
마형사가 기록지들을 무릎 위에 펴놓고
물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은데요. 진짜
최태석은 여기 기록대로 지난 4월12일에
출국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외국에서
여권을 분실당했습니다. 그 여권이
그것으로 배창기의 위조 여권을 만들어준
겁니다. 배창기는 7월15일에 본명으로
발급받은 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갑니다. 그리고 7월16일 이번에는 위조
여권, 그러니까 최태석의 여권을 가지고
귀국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다가
유밀라와 황개를 차례로 살해한 다음 19일
밤에 최태석의 여권을 가지고 도로
출국합니다. 시간상 두 사람을 살해하고
출국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밤 10시25분에
출국했으니까 저녁 6시30분경에 두번째로
황개를 해치우고 나서도 무려 4시간 가까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유있게
마무리를 짓고 나서 떠난 겁니다."
"그리고 도쿄에 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누이동생으로부터 아내의 피살 소식을 듣고
21일에야 본명으로 슬픔에 잠겨 귀국했다
이 말인가?"
"그렇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천연덕스럽게 귀국해서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아주 그럴듯해.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군. 그렇게 하면 정말 감쪽같이
속겠는걸."
"진짜 여권과 위조 여권을 아주 적절히
사용해서 알리바이를 조작해낸 거죠."
"정말 그렇겠는데."
마형사는 흥분한 모습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기는 금연구역입니다."
"아, 그래."
그는 담배를 구겨버리고 나서 다시
기록지를 들여다보았다.
프랑스로 갔어. 그리고 한달 후에
귀국했는데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지?"
"제가 보기에는 그 여행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요. 단순히 유럽
일대를 한 달간 여행하고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우선 몇 달 전의 일
아닙니까?"
"그래. 좋아. 그건 그렇다하고......
서정자의 출입국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반장님 생각을 말씀해 보십시오."
마형사는 기록지를 둘둘 말면서 몸을
일으켰다.
"만일 유밀라가 5월9일 이전에 위조
여권을 입수했다면 5월9일에 출국해서
18일에 귀국한 것은 유밀라 자신이 그렇게
한 거야. 하지만 임노태의 파일을 보면
만들어준 것으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5월9일에서 18일까지의 여행은 진짜 서정자
자신이 여행한 거야. 그러니까 서정자는
5월18일 이후에 여권을 분실했던가
했겠지."
"그 이후 서정자의 출국 사실은
없는데요."
그들은 밖으로 나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유밀라는 어떤 목적으로 임노태한테서 위조
여권을 입수했는데 한번도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그것을 써먹을 필요가 없어졌다.
또는 나중에 그것을 써먹기 위해 보관하고
있었는데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살해되고
말았다. 이런 게 아닐까?"
"부부가 똑같이 위조 여권을 만들어
가졌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데요."
"그 위조 여권을 찾아야 해. 아마 어딘가
숨겨뒀을 거야."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로가긴. 로미오와 쥴리엣으로
가지."
"수색하실 겁니까? 수색하려면 영장이
있어야 할 텐데요."
"일단 가서 이야기를 해보고 순순히
자백하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 대책을 세워도 될 거야."
일단 강변 도로로 접어들자 그가
운전하는 낡은 차는 다른 차들을 앞질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람인데......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는 게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데요."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남형사는 강물 위로 스러져가는 낙조를
바라보고 있다가 사뭇 동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저는 배사장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쓸데없는 감상은 집어치우라구."
"감상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순결한줄 알았던 아내가 결혼
전에 외국인과 동거생활을 하는 등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뿐이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한테도 에이즈를 퍼뜨렸습니다. 그걸
저주스러울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저라도
아내를 죽이고 싶었을 겁니다. 결국 자식도
에이즈에 걸려 죽었고 남편 자신도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저주스런
아내만 살려두고 자기 혼자 죽을 남편은
없을 겁니다. 죽을 바에는 저주스런 아내도
데려갈 겁니다."
"황개는 덤으로 죽은 건가?"
"누이동생과 아내를 차례로 농락한
녀석이었으니까 그 역시 처리되어야 할
인물이었겠죠."
"아무리 그렇다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어."
호텔 로미오와 쥴리엣에 도착한 그들은
사장실로 직행했다.
배창기는 자리에 없었다.
"아침에 잠깐 들르셨다가 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비서가 앞에 두손을 모은 채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 간다고 하면서 나갔나요?"
"목적지는 말씀 안하셨습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나가셨습니다."
"커피ㅅ에서 기다릴 테니까 오는 대로
연락바랍니다."
커피숍은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주인이야 어떻게 되든 장사는 잘
되는군."
그들은 출입구 가까운 쪽에 있는 빈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또 커피 마실 겁니까?"
남형사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할 수 없잖아."
그들은 똑같이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고 돌아서 가려는 웨이터를 남형사가
불러세웠다.
"웨이터, 혹시 이 호텔 사장님 오늘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알았어요."
웨이터가 돌아가자 마형사는 실내를
둘러보다가
"올 때마다 멋진 호텔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하고 말했다.
"이름도 특이하고요."
"배사장이 세상을 떠나면 이 호텔은 누구
차지가 되지?"
"그야 뭐......."
마치 새로운 사실에 직면한 듯 두 사람의
남형사쪽이었다.
"...... 당연히 배미화가 사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너무한데. 20대 처녀가 이런 멋진
호텔의 사장이라니 그건 너무한데."
"ㅇ날에는 어린애가 왕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엉터리가 어딨어.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요모양 요꼴이 됐지."
"배미화가 사장이 된다...... 그
아가씨가 이 호텔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
말이지......."
마형사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가 커피를 날라오자 그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 커피를 마셨다. 자기 생각을
"배미화쪽에 의심이 가십니까? 그쪽은
지금까지 안전권 안에 있었는데요."
"글쎄...... 그보다는 배사장이 과연
혼자서 두 사람을 모두 해치웠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친단 말이야."
"공범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음, 그래. 공범이 있었을 것 같아.
7월19일 상황을 생각해 보자구. 그날
배미화는 12시경에 황개를 만나 점심을
먹고 나서 M호텔에 들어갔어. 그리고 2시
반쯤에 호텔을 나와 그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갔어. 여기까지는 미화 자신의
진술이었어. 한편 미화와 헤어진 황개는
S호텔로 가서 스카이라운지에서 유밀라를
만나 호텔 방으로 갔어. 그는 연달아 두
여자와 관계를 가진거야. 그것도 시누와
기가막힌 일이지."
"그야말로 짐승 같은 놈이죠."
"놈은 유밀라와 정사를 가진 후 저녁
6시30분경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자기
차에 탔다가 불에 타죽었어. 그런데
유밀라도 검시 결과 비슷한 시각에 죽은
것으로 나타났어. 황개가 타죽은 6시30분
전후해서 유밀라 역시 독살당했는데
황개보다 먼저 죽었는지 나중에 죽었는지는
분명치가 않아. 범인이 공범없이 혼자라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어. 첫째
유밀라가 황개보다 먼저 살해당했을
경우야. 그 경우 범인은 먼저 방에서
유밀라를 살해한 후 황개를 뒤따라
주차장에 내려가 계속해서 그를 살해했다고
볼 수 있지."
살해할 때 방안에는 황개도 있었을 거
아닙니까? 황개를 밖으로 유인해서
스카이라운지나 커피숍 같은 데서 기다리게
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서 유밀라를
살해했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 그건 좀 어려운 방법이겠지. 나는
그보다도 두번째 경우가 더 마음에 들어.
유밀라가 황개보다 나중에 살해당했을
가능성 말이야. 범인은 황개를 먼저
태워죽인 후 혼란을 틈타 1924호실로
들어가 유밀라를 살해하는 거야. 30분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렇다면 배창기가
황개를 태워죽인 후 방으로 들어가
유밀라까지 살해했다는 말인데...... 그게
글쎄 가능할까?"
"가능하죠. 그럴 이유도 충분하지
농락한 놈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겁니다. 그리고 1924호실로 들어갔습니다.
바람난 아내를, 에이즈까지 퍼뜨려 남편과
자식까지 죽게 만든 아내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 겁니다. 그가
유밀라한테 강제로 독약을 먹게 했는지,
그녀가 자진해서 그것을 먹었는지......
아니면 그녀 몰래 독약을 술에 타서
먹게했는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두
사람을 죽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형사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말이야,
수사본부에 와서 증언한 보험회사 직원들
말이 생각나나?"
"네, 생각납니다. 여자가 발가벗고
했죠."
"나중에 여자 한 명이 또 있는 것을
봤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런 말을 했었죠."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나? 난 그
여자가 유밀라를 죽이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황개를 태워죽인 자도 여자
차림이었습니다. 배사장이 여자로 위장을
했다면 그 차림으로 1924호실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보험회사 직원들이
그 방에서 보았다는 또 한 명의 다른
여자란 바로 여장 차림의 배사장이
아니었을까요?"
"글쎄, 그렇게 듣고 보니까 또
그럴듯하군. 혹시 황개가 유밀라를 죽인 게
아닐까?"
"그 경우도 또 한 명의 여자를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또 한 명의 다른 여자라...... 그것 참
지랄 같은데......."
"그 여자가 배미화라면 이야기가 되죠."
"어떻게?"
남형사는 마형사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묻는다고 생각했다.
"그날 M호텔에서 황개와 헤어진 배미화는
그의 뒤를 미행해서 그가 유밀라와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유밀라를 죽이려고
일을 꾸몄는지도 모르죠. 청산가리로
독살된 것을 보면 계획적으로 살인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형사의 조그만 두눈이 반짝거렸다.
"그렇죠. 공동의 피해자인 그들에게는
유밀라와 황개야말로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상의 끝에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리다가
그날을 택했을 겁니다. 그리고 각자 한
명씩을 맡아서 해치우기로 하고 한 명은
1924호실로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대기한 겁니다. 만일
배사장이 여장을 했다면 그가 방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고 배미화가 대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쪽도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배미화 혹은 배창기가
나타나자 유밀라와 황개는 혼비백산했을
겁니다. 그때 거기서 어떤 상황이
당황해서 밖으로 도망쳐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황개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고, 그 사이에 방에서는 살인극이
벌어진 겁니다. 배미화와 배창기의
합작품...... 어떻습니까? 오누이 사이이기
때문에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합작품 아닙니까?"
"그야말로 멋지게 맞아떨어지는군. 아주
멋져."
마형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 시간이 지났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야. 가만 있어, 배사장 집에 전화를
걸어봐야겠어. 자네가 걸어봐. 배미화가
전화 받으면 조금도 의심하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 돼."
"염려 마십시오."
남형사는 커피숍을 나가 로비 한쪽에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기쪽으로
걸어갔다.
배미화는 집에 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은
그녀는 조금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별일 없었습니까?"
"아, 네, 별일 없었어요. 무, 무슨
일이죠? 범인은 잡았나요?"
"아직 못 잡았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경찰이란...... 정말 한심스럽군요.
잠을 못 자겠어요. 죽은 사람들이 원통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뭐예요? 도대체 지금까지 뭣들 하고
계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 한 마디에 남형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기는 형사가 된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다가 가만히
말했다.
"곧 잡힐 겁니다. 아무리 놈이
신출귀몰하다 해도 우리 손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10년쯤 지나서 잡을 건가요? 그렇다면
저도 잡겠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한번 잡아보시죠.
배사장 댁에 계십니까?"
"안 계세요."
"호텔에도 안 계시는데...... 어디
가셨을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잘 알겠습니다. 혹시 들어오시거나
전해주십시오. 로미오와 쥴리엣 호텔에
있습니다. 사장실이나 커피숍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범인을 체포하는 날
찾아뵙겠습니다."
남형사는 잔뜩 성이 나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망할 놈의 기집애! 어디 두고보자."
그가 성이 나서 씩씩거리는 것을 보고
마형사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래?"
"글쎄, 그 기집애가......."
남형사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배미화한테 당한 모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마형사는 소리내어
웃었다. 너무 큰 소리로 웃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들쪽을 쳐다보았다.
옳게 했어. 틀린 말은 아니라구."
"눈앞에 있었다면 따귀라도 갈겼을
겁니다. 망할 놈의 기집애......."
남형사는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배사장은 집에 없대?"
"없답니다."
"지난 7월19일...... 사건이 나던 날
오후 배미화는 M호텔에서 황개와 정사를
가진 후 3시10분경에 집으로 돌아왔었다고
증언했어. 그녀의 알리바이는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입증이 되었어. 그녀의
어머니 채씨는 딸이 그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고 증언했어.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지? 그녀의 알리바이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
곧이 곧대로 믿으시면 어떡하십니까?
채씨는 배미화의 어머니입니다. 딸을
위해서 무슨 거짓말인들 못하겠습니까?"
"하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배미화는 일단 3시10분경에 집으로 돌아가
알리바이를 만들어놓은 다음 채씨 몰래
다시 집을 나와 S호텔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계획대로 살인극을 벌이는 겁니다.
그 여자가 3시10분 이후에 쭉 집에
머물렀다는 것을 누가 증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증언할 수있는 사람은 채씨밖에
없는데 그 여자는 거짓증언할 수도 있고,
또 몸이 아파 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딸이 밖에 나간 것을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대꾸하는 마형사를 보고 남형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배미화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시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아가씨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히 생각해 왔지 않습니까?"
"글쎄, 조사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아.
오누이가 범인이라...... 그럴 듯하긴
한데......."
마형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배사장 방으로 가자구. 더 이상
기다려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야."
"영장도 없이 뒤질 겁니까?"
그들은 엘리베이터쪽으로 걸어갔다.
배사장 방으로 밀로 들어가려고 하자
여비서가 그들을 막았다.
"지금 안 계시는데요."
"상관없어요. 방을 수색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방해하지 말아요."
마형사가 위압적으로 말하자 여비서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도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대신 그녀는 당황해서
호텔 간부직원들을 불러들였다.
간부직원들이 배사장 방에 도착했을 때
방안은 이미 많이 어질러져 있었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총지배인이라는 사람이 항의하고 나서자
남형사가 그 앞에 형사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수색영장을 보여주십시오."
말이오. 시간을 다투는 일인데 그런 거
챙길 겨를이 없어요. 정 필요하다면 나중에
갖다주겠소."
서랍을 뽑아 책상 위에다 뒤집어엎는
것을 보고 총지배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형사들의
위압적인 태도 앞에 더 이상 항의하고
나서는 것을 삼갔다.
"본부에 연락해서 두 명 더 오라고 해."
마형사의 지시에 남형사는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서랍을 모두 뒤지고 나자 그들은
책장쪽으로 이동했다. 책장 안에는
소설류와 교양 관계의 서적들, 그리고 호텔
경영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책장은
두 개였는데 다른쪽 책장에는 두꺼운
치밀하게 하나하나씩 더듬어 나갔다. 책 한
권을 보더라도 대충 만져보고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겉표지의 안팎을 꼼꼼이
살피고 나서 다음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들이 찾는 물건이 분명히 방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은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방안은 냉방장치가 잘 되어 있는데도
그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 때 형사 두 명이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섰다.
조형사와 염형사였다.
수사관 네 명이 팔을 걷어붙이고
달라붙는 바람에 방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방 한쪽 구석에는 중형의 금고가 하나
했지만 번호를 몰라 열 수가 없었다.
비서도 그 번호는 모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배사장뿐이라고
했다.
책장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모두
수색하고 난 그들은 책장까지 한쪽으로
들어냈다. 장식장도 들어내고 바닥에 깔려
있는 카핏도 걷어내 보았다. 그러나 위조
여권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비서는
난장판이 된 방안을 울상이 되어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사장님은 어디 가셨지?!"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침에 나가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는 사장을
원망했다.
수사관들은 벽까지도 뜯어냈다. 벽을
이상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뜯어내고 안을
살폈다.
그들의 수색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호텔
직원들은 그 철저함에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총지배인이 참다못해 안타까운
표정으로 도대체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지만
수사관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떤
수사관은 텔리비전 수상기의 뒷면까지
열어보았다. 또 한 명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여기저기를 두드려보면서
책상을 뜯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워낙
비싸게 맞춘 책상임을 알고는 그것을
뜯어내는 짓만은 삼갔다.
아무리 뒤져도 찾는 것이 나오지 않자
마침내 수사관들의 입에서는 한숨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마형사가 땀을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일손을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마형사의 시선이 구석에 놓여 있는
금고쪽으로 이동했다. 그가 사나운
눈초리로 금고를 노려보자 그의 부하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사람을 불러.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장거리를 뛰어온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마형사가 말했다.
"저 안에 있는 게 틀림없어."
남형사가 재빨리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금고털이 전문을 한 명 빨리 수배해서
데리고 와줘. 시간이 없어. 빨리!"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그는 여비서를
돌아보았다.
"커피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금고털이 전문가 두 명이 들어선 것은 한
시간 남짓 지나서였다.
한 명은 50대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보조역인 듯 싶은 젊은이였다. 그들은
구속중에 끌려나온 듯 수갑을 나란히 차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저 금고를 빨리 좀 열어주시오."
마형사가 턱으로 금고를 가리키자 대머리
사내는 눈을 깜박거리며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내려다보았다. 그 수갑은 그의
보조의 손에도 걸려 있었다. 마형사가
눈짓을 하자 그들을 데리고 온 형사가
수갑을 풀어주었다.
"얼마나 걸리겠소?"
대머리는 금고 앞으로 다가가 마치
얼굴을 만지듯 그것을 쓰다듬어 보더니
걸리겠는데요."하고 말했다.
"30분 이내로 열어줘요."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그런데
저기......."
사내가 머리를 긁적거리는 것을 보고
남형사가 그의 어깨를 툭쳤다.
"알았어요. 참작해줄 테니까 빨리 열기나
하라구."
대머리는 고개를 꾸벅하고 나서 입고
있는 점퍼를 벗었다. 안에 걸치고 있는
티셔츠는 땀과 때에 절어 있었다. 이윽고
그가 금고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자
보조가 조그만 가방을 들고 그 옆으로 바싹
붙어앉았다. 보조는 장발에 비쩍 마른
몸매였다.
대머리가 손을 내밀자 보조가 가방
얹어주었다. 마치 수술중의 의사에게
간호원이 도구를 내주는 것처럼.
대머리는 청진기 같은 것을 귀에다 끼운
다음 그 끝을 금고 다이얼 옆에다
고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이얼을 좌우로
반복해서 돌리면서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온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몇번씩이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그의 대머리에는 금방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10분쯤 지나자 그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물러앉았다.
"담배"
그가 손을 내밀자 자발이 재빨리 그의
입에 담배 한 개비를 꽂아 주고 나서
불까지 붙여주었다. 형사들은 미소를
"힘들겠는데요."
대머리는 중얼거리고 나서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망치."
대머리가 오른손을 내밀자 보조가 조그만
망치를 꺼내주었다. 대머리는 피우던
담배를 보조에게 넘겨주고 나서 망치로
금고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장인이 마지막 마무리를 하기
위해 두드려대는 것처럼 정교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반사되어오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망치를 내려놓고 청진기를
걷어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급한 걸음으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형사들은 실소했다.
화장실 안에서 변을 쏟아내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형사들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약속이나 한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수속이 꽤나 복잡하군."
"수술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선생님은......."
장발이 말 끝을 흐리면서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이라고? 그럼 자네가 제자란
말이야? 도둑질을 가르치는 사람도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나?"
남형사가 비아냥거리자 장발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보고
마형사가
"스승은 스승이지. 그렇지 않아?"하고
말했다.
나왔다.
"설사가 갑자기 나와서요. 죄송합니다."
그는 젖은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대면서
다시 금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진지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마치 도를 닦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옆에 다가와 있는 보조도 물리쳤다. 그가
워낙 진지한 자세로 임했기 때문에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두손을 허벅지에다 문질러대던 그는 다시
금고문에다 청진기를 갖다댄 다음
오른손으로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반복해서 돌리는 동안
모든 움직임이 정지하는 듯했다. 그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두
다이얼의 움직임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마침내 그의 오른손이 다이얼에서
떨어져나왔다.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그의 손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청진기를 걷어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는 금고문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것을 왼손으로 가만히 틀자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그것이 돌아가면서
비상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는
표정들을 지었다.
"비상벨을 막는 장치가 있을
텐데......."
대머리는 금고 뒤쪽과 밑부분을
더듬어보았지만 그 장치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고 벨은 계속 울려대기만 했다. 2분이
지나서야 그것은 자동으로 꺼졌다.
합니다."
대머리는 뒤로 물러나면서 보조한테
눈짓을 던졌다. 마지막 작업을 제자한테
맡김으로써 극적인 장면을 즐기고
자랑하려는 것 같았다.
장발은 대머리처럼 진지한 자세로 금고
앞에 무릎을 꿇더니 손잡이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문이 소리없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다시 비상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금고 속은 3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급하게 뒤진 듯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맨 윗단에는 서류
파일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그런대로 가진런히 놓여 있었다.
2단에는 지폐가 쌓여 있었다. 손때가
묻지 않은 새 지폐다발이 흐트러져
"외국 지폐가 있을 법도 한데 하나도
없어. 모두 빼내간 모양이야."
마형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벨소리가 뚝
그쳤다. 대머리가 손에 무엇인가 들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바로 이겁니다. 원격조정 장치입니다.
이걸로 비상벨을 작동시킬 수가 있죠."
그는 책상 위에 쏟아놓은 물건들 속에서
그것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가 웃으면서
원격장치 버튼을 올렸다 내렸다 하자
벨소리가 울렸다 꺼졌다 했다.
"당신은 천재요. 그런 머리를 앞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쓰도록 해요."
"네,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는......."
남형사와 대머리의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마형사는 맨 아랫단을
거기에는 보석함과 가죽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가지런히 놓여 있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듯 구석쪽에 처박혀
있었다.
꽃과 새 그림이 정교하게 채색되어 있는
목제 보석함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가죽 케이스를 꺼내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배창기 개인의 각종
증명서즐, 이를테면 주민등록증,
자동차운전면허증, 신용카드, 골프회원권,
VIP카드 같은 것들과 함께 여권이 들어
있었다. 마형사는 여권을 집어들어
펴보았다.
그것은 진짜 배창기의 여권이었다.
"그건 없지 않습니까?"
위조 여권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얼굴로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갑자기 수화기를 집어들고 공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마형사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그를
잠깐 기다리게 했다. 잠시 후 관리소
직원의 말소리가 그의 귀를 후벼파듯
들려왔다.
"그 사람...... 최태석 씨는 조금 전
8시45분발 JAL기편으로 출국했습니다.
목적지는 도쿄입니다."
"틀림없나요? 여권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상대방이 여권 번호를 불러대는 것을
듣고나서 마형사는 수화기를 철컥
내려놓았다.
"배사장은 떠났어. 위조
여권으로......."
"뭐라구요?"
남형사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형사는 벽에 걸려 있는
전자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계바늘이
오후 9시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0분 전에 이미 떠났어. 도쿄로......
우리가 한 발 늦었어. 빌어먹을."



10. 두개의 얼굴

오후 9시25분. 서울발 도쿄행 JAL
219편기 안.
보잉 747기는 그 거대한 기체를 마치
고공 속에 떠받쳐놓은 것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이 조용히 비행하고 있었다.
서울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40분이
지났기 때문에 승객들은 긴장을 풀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일행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하는 등 조금은 산만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배창기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출발
때부터 기침을 참으려고 애를 쓰면서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들은
서로 손을 꼭잡고 있었다.
통로를 굴러오던 카트가 창기가 앉아
있는 열 옆에서 멎었다. 카트 위에는
음식이 담긴 플래스틱 용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저녁 식사를 내밀자
미치코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창기가
눈을 떴다. 그는 물을 한 잔 달라고
말했다. 미치코는 주스를 요구했다.
스튜어디는 물 한 잔과 주스 한 잔을
내려놓고 나서 다음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창기는 연한 잿빛이 나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실내에는 시원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계속 땀을 흘리고 있었고 미치코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것을 닦아주고
차림이었다. 그 때문인지 얼굴이 유난히도
희어 보였다.
그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은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창으로 빗방울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창에 부딪친 빗방울은 산산이
흩어지면서 비산하고 있었다. 김포를
출발할 때만 해도 맑은 날씨였는데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돌려 미치코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만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가방을 들고 가만히 사라져. 아는 체하지
말고 사라지란 말이야."
일본 아가씨는 공포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해. 그렇게 하는 좋아.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 필요가 없잖아."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울음을 삼켰다. 눈물이 볼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쿄에 도착하면...... 어쩌면
수사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없으면 다행이지만......."
그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호주머니
속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빨간색의 캡슐과 함께 하얀 알약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캡슐 두 개와 알약 한 개를
꺼내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
속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플래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물을 한모금 마셨다.
약이 물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몸 속으로
한번 물을 마셨다. 그것은 기침을 멎게
하고 열을 내리게 하고 폐 속에 들어차기
시작한 가래를 제거시켜주는 역할 등을
하는 약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친구인 민원장이 지어준 것이었다.
그는 계속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민원장은 수시로 약을 바꾸어가며
조제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약을 지어주긴
했지만 그의 죽음을 시간 문제로 보고
있었다.
창기가 세번째로 물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어올렸을 때 그의 손에서 잔이
굴러떨어졌다. 그는 잔을 들고 있던 손을
펴면서 갑자기 자신의 목을 움켜잡았다.
입이 벌어지면서 눈이 커지고 있었다.
"아니, 왜 그래요?"
그는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면서 두손으로
가슴과 배를 쥐어뜯었다. 입에서는
신음소리와 함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황한 미치코는
뛰쳐 일어나 앞쪽에 서 있는
스튜어디스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의사! 의사를 불러줘요!"하고 소리쳤다.
스튜어디스가 달려왔을 때 창기는 배를
움켜잡은 채 통로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내장을 뜯어내는 것 같은
고통에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화장실쪽으로 가서 물을 실컷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이게 바로 에이즈
환자의 말로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말로치고는 너무 갑작스럽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승객들이 놀란 모습으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사를 찾는
스튜어디스의 다급한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누군가가
약에다 극약을 넣은 게 틀림없어. 민원장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그의 생각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미치코가 쓰러질
듯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릎을
꺾었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추한 모습을 남에게
그런데.......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몸을 한 바퀴 돌렸다가 뒤로
벌렁 쓰러졌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치코......."
그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도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들이 이를 드러낸 채 깔깔대며 웃는
것 같더니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데 뒤엉키는 것 같더니 마치
안개처럼 형체도 없이 그의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그는 자신에게는 마지막이 될
지상의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알고 있는 비밀마저도 마셔버린 것 같았다.
그 위에 상체를 구부리고 있던 의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자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모두 쫓아보냈다.
그리고 시체를 일단 뒤쪽으로 옮긴 다음
시트로 덮어 두었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비행하고 있으니
승객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아나운스먼트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례지만...... 사망한 승객분하고
동행되십니까?"
자리에 앉아 있는 미치코 곁으로 다가온
승무원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아뇨."
"동행 같다고 하던데요?"
주위에 앉아 있는 승객들 말을 이미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승무원은 그렇게 물었다.
"비행기 안에서 알았을 뿐이에요."
냉랭한 어조에 승무원은 더 이상 말을
붙여보지 못하고 물러섰다.
JAL 219편기는 예정대로 비행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인 10시45분에 정확히
나리타 공항에 착륙했다.
미치코는 선반에서 창기의 가방을
끌어내렸다. 그것은 소가죽으로 만든
여행가방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그것을
그녀에게 선물로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을 든 채 승객들 속에 섞여
비행기 밖으로 나갔다.
승객들이 앞문을 통해 내리는 동안
그들과 엇갈려 수사관들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네 명이었다.
비행기 밑에는 이미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앰뷸런스에서 흰 가운 차림의
남자들이 내리더니 비를 피해 비행기
밑으로 들어갔다.
먼저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 일본인
수사관들은 죽은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승무원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로 그자 아니야?"
상급자인 듯한 사내가 담배를 뽑아
물면서 물었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넘긴 매끄럽게 생긴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오늘밤 또 늦겠어."
"타살 같은데요."
뒷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몰려들어왔다.
사람들이 다니는 로딩브리지를 피해 몰래
시체를 끌어내기 위해 뒷문쪽에 계단이
갖다 붙여지고 그쪽으로 사람들이
올라왔다. 흰 가운 차림의 사내들이
올라오더니 시트에 덮인 시체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것을 들것에 실어 밖으로 운반해
나갔다.

마형사는 일본쪽으로부터의 전화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웬일인지 전화가
오지 않고 있었다.
여권을 휴대하고 일본으로 도망친 것을
확인한 그는 즉시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
비행기가 일본에 도착하는 대로 일본
경찰이 배창기를 체포할 수있도록 손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 배창기는 살인사건
용의자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위조
여권을 휴대한 것만으로도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일본 경찰로부터 범인을
인도받을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 배창기의 신병을
확보해두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경찰
상부는 마침내 일본 경찰에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자정이 지나자 마형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상호 연락을 취하기로
걸었다.
"신호가 갑니다. 물어보십시오."
그는 전화기를 계장 앞에다 같다놓았다.
수사본부 안에서 구계장은 일본 말을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성질도 급하군."
계장은 졸고 있다 말고 수화기를 귀에다
갖다댔다.
계장은 일본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생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그는
유난스레 몸을 움직여가며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시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탁하신 건은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탁하신 인물이 비행기 안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네에?"
"정말 유감입니다. 출발한 지 40분쯤
지나서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갑자기 배를
움켜쥐면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의사가
있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손을
쓰지 못한 모양입니다.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해 있었습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유감이군요. 사망 원인은
밝혀졌습니까?"
"독살 같습니다. 곧 결과가 나오겠지만
그렇게 보시는 것이......."
보내겠습니다. 사체도 인수할 겸......."
"수고가 많으십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정말 유감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구계장은 핏발선 눈으로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배창기는 비행기 안에서 독살당했어!"
"아니, 뭐라구요?"
경악하는 부하들을 계속 쏘아보면서
계장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구계장이 허둥지둥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수사관들은 한동안 얼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거센 비바람에 창문이
유난히도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헛다리만 짚고 있었군요."
남형사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사장이 살해될 줄이야 누가 알았나."
출신의 조형사는 말없이 눈말 굴리고
있었다.
"배사장까지 죽인 걸 보면 범인은 막판에
몰린 것 같은데요."
남형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는
마형사의눈치를 살피고 나서 말을 이었다.
"유밀라를 독살시킨 자가 결국 배사장도
독살시킨 겁니다. 황개는 제외시켜
놓더라도 말입니다."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마형사의 조그만
두눈이 더욱 작아지면서 그 간격도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더니 두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배미화한테 전화를 걸어."하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떤 결심이 서린 것을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를 보냈지만 배미화의 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받지 않는데요. 깊이 잠이 든
모양인데요."
그들이 알기로는 배미화의 집에는 이제
배미화와 그녀의 어머니 이렇게 두
모녀만이 남아 있다. 마형사는 이마를 짚고
있던 두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힘없는 목소리로
"가서 배미화를 데리고와."하고 말했다.
"체포할까요?"
"체포?"
그는 멈칫해서 남형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끄덕였다.
네 명의 형사가 즉시 출동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배창기의 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창기가 죽었으니 이제 그 저택은 미화의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한참 동안
초인종을 누럴댔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마치 빈 집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미친
듯이 무섭게 짖어대는 개소리만 아니라면
빈 집으로 생각될 정도로 그 집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개가 없었는데."
그 집에서 개를 본 적이 없었음을
생각하면서 남형사가 중얼거렸다. 집은
큰데 실제 살고 있는 사람이 적으니까 개를
담을 올려다보았다. 담은 꽤나 높아보였다.
조형사를 엎드리게 한 다음 그는 담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바로 담 밑에서 시커먼 개 한 마리가
그가 내려오기만 하면 물어 뜯을 듯이 눈에
불을 켜고 무섭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
기세가 하도 사나웠기 때문에 남형사는
감히 담 밑으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 방 갈겨버려!"
밑에서 염형사가 말했다. 남형사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주민들이 놀라 깰까봐
신경이 쓰였지만 개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개를
겨누는 대신 총구를 공중으로 향한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어둠과 적막을
남형사 자신도 하마터면 담 위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총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시커먼 개의 모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남형사는 담 밑으로 뛰어내린 다음
대문부터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 앞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보았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현관문도 창문도 모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중에 그래도 남형사가 제일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집 뒤로 돌아가더니
부엌으로 통하는 창문 하나를 거침없이 깬
다음 그곳을 통해 먼저 안으로
켜지면서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집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없었다.
집안을 샅샅이 돌아다녀보았지만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집안은 많이 어질러져
있었고 급하게 떠난 듯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남형사는 흥분해서
마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배미화는 물론
그녀의 어머니도 보이지 않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개 한 마리뿐입니다. 급하게
떠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당장 수배해야겠습니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도쿄행 첫 비행기를
탔다. 8시15분에 출발하는 KAL기였다.
국내를 처음 벗어나보는 남형사는 퍽
愿募?것의 의미와 생활에
? ꠑ ꠓU흥분해 있었다.
배창기의 시신을 인수해 오기 위해 그의
회사쪽에 연락을 취해 간부사원과 함께
동행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일단 그들이 먼저 출발했다. 다음 회사쪽
사람들은 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갖춘 다음
오후 비행기로나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나리타 공항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일본 경찰 관계자들이 나와 있었다.
마형사 일행과는 달리 일본측 사나이들은
하나같이 매끈한 차림새였다.
"청산염에 의한 독살로 밝혀졌습니다."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요시다라고 하는 코밑 수염의
사나이가 설명했다. 그에게서는 향수
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풍겨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바깥 풍경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피살자는 살인사건 수배자라고 하셨죠?"
"네, 그렇긴 합니다만...."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넘긴 사내가 한국
말로 서투르게 통역을 해주었다. 그는
한국에서 얼마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수배자가 살해됐다면...... 문제가
복잡해지겠군요?"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형사는 심사가 사나워져 있었다. 그는
시종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 피살자와 동행한 사람은
없었습니까?"하고 남형사가 물었다. 그의
말을 제비족처럼 생긴 형사가 통역해
"그렇지 않아도 그쪽을 조사해
봤는데...... 젊은 여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일본 아가씨인데...... 본인은
한사코 부인을 하고 있어서 심증은 가지만
단정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일본 아가씨라면...... 혹시 미치코라는
여대생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그 아가씨를 아십니까?"
요시다가 놀란 표정으로 마형사를
돌아보았다.
"그 아가씨가 피살자의 연인이라는
거......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깊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연인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아하, 그래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일본 아가씨가 한국 남자와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그 아가씨를 만나보고 싶은데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신병은 이미
확보되어 있는 상태니까요."
병원에 도착한 그들은 곧장 시체
안치실로 향했다.
배창기의 시신은 냉동상태로 철제 박스
속에 들어가 있었다.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발가락에 달려 있는 꼬리표에는
"崔太錫 韓國人"이라고 적혀 있었다. 위조
여권에 적혀 있는 이름을 그대로 적어둔
것이다.
배창기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보였다. 안경도 끼어 있지 않은
천장을 향해 초점없이 열려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해 보였다.
마형사는 한동안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자코 손을 뻗어 그 눈을
감겨주었다.
"이 사람...... 직업은 뭡니까?"
요시다가 물었다.
"호텔업 외에 서너 가지 사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인가요?"
"네, 대단한 부자이지요."
"아무리 부자라도 죽었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리를 옮겨 검시의의 방으로
들어갔다. 검시의는 생각보다는 아주
젊어보였다. 그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나서
"위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검사해
봤더니 청산염이 검출됐습니다. 치사량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산염은 이
속에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약봉지를 꺼내더니 그것을 그릇
속에다 놓고 엎었다.
흰색과 빨간색의 알약 몇 개가 그릇
속으로 떨어져나왔다. 젊은 검시의는
빨간색의 알약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캡슐이었다. 그는 그것을 두 조각으로
분리해냈다. 캡슐 속에는 하얀 분말이 들어
있었다.
"이건 진통제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청산염이 섞여 있었습니다. 모두 섞여
있는 게 아니고 일부에 섞여 있었습니다."
"혹시 진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첨가한
통역을 통해 마형사의 말을 알아들은
검시의는 멸시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통의 효과를 높이려면 헤로인 같은
마약을 쓰지 이런 독약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건 진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첨가한 게
아니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첨가한
겁니다."
"민원장이 지어준 약입니다."
약봉지를 들여다보면서 남형사가 재빨리
말했다.
"민원장은 아니야. 배창기의 약봉지에
자연스럽게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야.
배미화나...... 미치코 같은......."
마형사는 요시다쪽을 쳐다보았다.
"미치코양을 좀 만나볼 수 없을까요?"
한국인 형사들은 일본인 형사들을 따라
병원을 나왔다.
미치코는 경찰서에 임시로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한쪽에 간이 침대가 있는데더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요시다가 불러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데요."
남형사의 중얼거리는 말에 마형사는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때 요시다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상체가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몸뚱이 전체가 바닥으로
몸뚱이는 바닥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버렸다.
"미치코!"
요시다가 놀라 소리지르면서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여자의 두눈이
초점없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옆으로 힘없이 기울어지는 머리를 손으로
받치면서 요시다는 머리를 흔들었다.
"죽었어! 도대체 죽는 것도 모르고 뭣들
하고 있었어?!"
그는 시체를 내려놓으면서 부하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마형사는 미치코의 백옥 같은 피부에
넋을 잃고 있다가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있었고, 그 곁에는 쓰다만 것 같은 편지가
한 장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캡슐은
배창기가 복용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요시다가 편지를 읽어보더니 그것을
부하에게 넘기면서 턱으로 마형사 일행을
가리켰다. 한국 말을 할 줄 아는 형사가
더듬거리는 한국 말로 편지내용을 번역해서
읽기 시작했다.
"말썽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분 곁으로 갑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분도 저도 에이즈 환자였으니까요......
그분은 저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가셨습니다만, 저한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써주십시오...... 그분은 죽음을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분을...... 살해했는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저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분은 한국을 떠나
스위스에 가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죽음을 기다리면서 마지막
사랑을 그곳에서 불사르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악마의
손길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악마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니까요...... 국경을 초월해서 한
남자를 순수하게 사랑했던
마형사와 남형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멀거니 서 있었다. 주위가
시끄러워졌을 때에야 그들은 한켠으로
물러서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남자가 약을 먹고 죽은 것을 보고 아마
아무도 몰래 봉지에서 약을 몇 개
빼내가지고 있다가 독살당한 것이
확실해지자 자신도 음독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되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유서를 보더라도
말입니다."
요시다의 말이었다. 한국인 형사들은
얼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마형사는 배창기에 대한 미치코의
사랑이 죽음을 초월할 만큼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걸 보십시오."
요시다가 누런 가죽 가방을 열어보였다.
"미치코양이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
죽은 남자가 남긴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게 무사히 통과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가방 안에는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달러와 엔화였다.
"미국 돈은 50만 달러, 일본 돈은 5천
만엔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값진 게
들어 있습니다."
요시다는 안쪽에 붙어 있는 주머니
속에서 검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남형사가 그것을 받아 조여져 있는 줄을
풀어보았다. 그 안에는 값비싼 보석류들이
"배사장 사무실에 있는 그 금고에서 꺼낸
것들 같은데요.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려고 단단히 준비한 것 같은데요."
"도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가지고
나왔지?"
마형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보고
요시다가 다시 말했다.
"미치코양의 유서대로 따르자면 이건
모두 불쌍한 사람들 몫이겠는데요"
마형사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서울쪽에 가
있었다. 그는 요시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서울의 수사본부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도쿄에서 걸려온 전화는 마치 이웃집에서
걸려온 전화처럼 선명하면서도 가깝게
졸음이 싹 가셨다.
"어떻게 됐어? 배미화 소식 있어?"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계속
수배중입니다."
"수배를 강화하라고 해! 빨리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공항과 항만은 체크해
봤나?"
"네, 아직 빠져나간 흔적은 없습니다."
"계속 감시해. 그리고 음모
말인데......."
조형사는 처음에는 마형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알아 듣지를 못했다.
나중에야 그가 말하는 음모가 사투구니에
밀집해 있는 털이라는 것을 알고는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왜 뒤늦게야
극것을 들먹이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음모를 가지고 혈액형을 알아낼 수
있는지 연구소에 알아보라구.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걸 지금까지 빠뜨렸어."
"음모를 가지고 어떻게 혈액형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어려울걸요."
"지레 짐작하지 말고 알아보란 말이야!
요즘엔 하루가 다르게 과학수사 분야가
발전하고 있다는 거 몰라?"
"네, 알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음모를 가지고 혈액형 분석이
가능하다면 유밀라의 피살현장에서
채취했던 음모의 혈액형을 알아보라구!
빨리 말이야!"
"1924호실에서 수거했던 음모 말입니까?"
"그래. 그게 아니면 또 뭐가 있겠어."
"알겠습니다. 배창기는 어떻게
"독살된 게 분명해. 진통제 캡슐 속에
청산염이 섞여 있었어. 누군가가 섞은
거야."
마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형사는
소처럼 두눈을 계속 깜박거렸다. 그의
두뇌회전으로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형사는
미치코가 어떻고, 거액의 외화와 보석이
주인을 잃고 결국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됐다는 등 계속 흥분해서
이야기했지만 거기에 대한 조형사의 반응은
덤덤하기만 했다.
"민원장을 만나봐. 어떻게 해서 그 약에
청산염이 들어갔는지 알아보란 말이야."
"민원장이 범인입니까?"
"누가 범인이라고 했어? 만나서 이야기를
마형사가 버럭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조형사는 움찔 놀라 눈을 더욱 자주
깜박거렸다.
"즉시 만나보겠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배미화가 결국 범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두 죽고 그 아가씨 혼자
살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결국 범인은 맨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있는 셈 아닙니까?"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올줄 알았는데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 그러고 보니까 혼자 살아
남았네."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어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한참 후 본래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 그렇긴 해. 행방을 감춘 것도
하지만 걸리는 게 있단 말이야."
"그게 뭡니까?"
"배창기하고는 오누이 사이가 아닌가
말이야. 여동생이 오빠를 독살할 수가
있어? 이유야 어떻든 말이야. 그 점이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가 않아."
"그렇군요. 하지만 인간관계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알았어. 알았어. 하여간 그 아가씨를
빨리 찾아내. 그리고 함께 행방을 감춘 그
어머니도 수배해. 음모건도 빨리 알아봐.
1924호실에서 발견된 여자 음모는 피살자의
것이 아니었어. 그 음모의 혈액형을 알 수
있으면 그게 누구 것인지도 알 수가 있을
거야."
"배미화와 유밀라는 똑같은 B형
아닙니까?"
"하지만 그 음모가 피살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인됐잖아. 배미화의
음모를 구할 수만 있다면 비교가 가능한데
말이야. 진작 비교해 봤어야
했는데......."
"배미화의 음모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행방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구할 수 있다는 거야?"
"집에 가보면 침실 같은 데 하나쯤
떨어져 있을 거 아닙니까? 틀림없이 있을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지금 빨리 가봐!"
마형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져
있었다.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그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집을 지키고 있는 키가 껑충하게
크고 시커먼 개는 그들을 보자 더 이상
짖지 않고 슬슬 피했다. 놈은 몹시 굶주린
듯했다. 쓰레기통이라도 뒤져 먹을 것을
찾을 수 있게 대문을 열어놓자 놈은 마당을
한 바퀴 돈 다음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나중에 주인이 오더라도 굶어죽은 놈을
보는 것보다야 낫겠지."
염형사가 말했다.
집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안방과 욕실,
그리고 침대가 놓여 있는 방안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았다.
집안은 한동안 청소가 안 되어 있었는지
많이 어질러져 있었고, 생각했던 것보다도
음모를 발견할 때마다 염형사는 그것으로
코 끝을 간지럽히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이건 야릇한 냄새가 나는데. 젊은 여자
것이 분명해."
흐뭇한 표정을 짓다가도 그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이렇게 투덜거렸다.
"제기랄, 아무리 형사라고 하지만 이
나이에 XX털이나 찾고 앉았고 참
한심하군."
"얼마나 좋은 일을 하십니까. 사무실에
앉아 펜대 굴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뭐가 어째?!"
그가 눈을 부라리자 조형사는
킬킬거리면서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수집한 음모는 수십 개나 되었다.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자못 놀랐다.
그들은 채집한 음모들을 네 개의 조그만
플래스틱 용기에 나누어 담았다. 그렇게
분류해서 담은 것은 그 집안 사람들이 각기
기거하던 방에서 채취한 음모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배미화의
침실, 배창기 부부가 쓰던 침실, 배미화의
노모가 사용하던 안방, 그리고 욕실 등으로
그것들은 분류되어 있었다.
"배미화의 방에서 채취한 것이 제일
많은데."
용기 안을 들여다보며 염형사가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가 음모까지 이렇게 세세히 조사할
줄은 범인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배미화 것은 유난히 시커멓고 굵지?
염형사가 건네주는 털을 조형사는
마지못해 만져보았다. 그것은 확실히
여자의 음모치고는 좀 굵은 것 같았다.
그러나 총각인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배창기 부부가 쓰던 침실에서 채취한
음모는 남녀의 것이 뚜렷이 구별되었다.
"굴고 길고...... 느낌이 거친 것......
이건 배사장 것이 틀림없어. 야, 이건
그야말로 토끼털처럼 부드러운데. 이건
짧고 보드랍고 끝이 꾸부러졌잖아. 이건
유밀라 것이 틀림없어. 같은 여자라도
배미화 것하고는 얼마나 차이가 나. 이건
정말 기막힐 정도로 보드라운데. 한번
만져보라구."
그것은 정말 배미화의 것하고는 비교가
웃으면서 가장 적은 수의 음모가 들어 있는
용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늙은 여자 것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 보라구. 누렇게 퇴색되어
있고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늙으면
다 이렇게 되는 거야. 자, 이걸 이제부터
연구소에 보내 분석을 해야겠지. 전에 호텔
방에서 채취한 것하고 일치하는 게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우린 망하는 거야."
그곳을 나온 그들은 곧장
과학수사연구소로 향했다.
과학수사연구소에서 법의학 분야의 한
파트를 맡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젊은
여자였다. 그는 과장직을 맡고 있었고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30대 중반의
미녀였다.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는
형사들은 주눅이 들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급해서 말입니다.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워낙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요."
"괜찮아요. 절차 같은 건 저도 싫어해요.
빨리 검사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털에서 혈액형을 밝혀내는 건 가능해요.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최박사는 의외로 까다롭게 굴지 않고
선선히 응해 주었다.
조형사와 염형사는 얌전히 앉아서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렇게 간단하게 되는 걸 가지고
지금까지 빠뜨려왔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연구실과 분리된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열 명쯤 되는 직원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한곳에 오래 붙어 있지 않고
야단스럽게 바람을 일으키며 하루종일
돌아다니기만하는 형사들한테는 기침소리
하나 없는 적막감이 마치 질식할 것 같은
물 속처럼 느껴졌다. 좀이 쑤시기
시작하는지 몸을 들썩거리던 조형사가
마침내 일어서더니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쳐다보다가 염형사도 몸을
일으켰다.
"답답해서 혼났어요. 난 단 한 시간도 못
견디겠어요."
"다 습관 나름이야. 저 사람들은
그들은 건물 밖으로 나와 처마 밑에 서서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하게 비도 오는군."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는 가는 비를
바라보면서 염형사가 중얼거렸다.
조형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빗속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쪽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달려왔다.
"배미화 어머니가 4시20분에 출발하는
도쿄행 JAL기를 예약했답니다."
"채씨 말이야? 채 뭐더라?"
"채말녀입니다."
"빨리 가봐야겠군."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서 공항까지는 한
시간 이상이 걸릴 텐데......앞으로
"어떡하지? 왜, 채말녀 혼자야? 배미화는
없대?"
"탑승자 명단에 배미화는 없답니다.
따로따로 빠져나갈 모양입니다."
"잘들 노는군. 비행기 출발을 좀
늦춰달라고 부탁해 보지. 도대체 이제야
그걸 알려주면 어떡하라는 거야? 이렇게
서로 협조가 안 되니 정말 큰일이야."
"채씨가 늦게야 탑승수속을 했답니다.
만원이라 자리가 없었는데 마침 자리가
하나 비어서 탑승수속을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KAL기 같으면 몰라도 외국 비행기는
출발연기 요청을 안 들어 줄 겁니다."
"공항에는 지금 몇 명이 나가 있지?"
"두 명이 나가 있습니다. 보세구역으로
빠져나가면 복잡해지니까 체포하려면 그
"그 여자야 체포 대상이 아니잖아.
출국을 저지시키고 잠시 잡아두는 건
몰라도......."
"그럼 그렇게라도 해야겠는데요."
조형사는 다시 공중전화쪽으로 달려갔다.

오후 4시20분 서울발 도쿄행 JAL 315편
탑승객들은 이미 하나 둘씩 출국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출국장 저편은
보세구역이다.
조형사로부터 채말녀를 체포하라는
연락을 받은 강인재는 동료 형사 한 명과
함께 출국장을 지키고 있었다.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검사대는 여러
곳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검사대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검사대를 지키고 있는
한 편에 서서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여자들의 얼굴은 대부분 가까이 접근해서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화장을 짙게 하고 옷차림이 생각 밖으로
엉뚱하다거나 거기다 안경과 모자
같은거라도 착용하고 나면 가까운
거리에서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출국장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5분쯤 지났을 때 중간에 있는 검색대의
직원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을 향해 손을
쳐들어보였다. 그것은 당사자가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형사들은 그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명 서 있엇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가
얼굴을 덮다시피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색깔이 들어 있는 잠자리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연분홍 투피스 정장에 굽이 높은
하이힐이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그런 안경 끼고 있으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잖아요. 안경 벗어 보세요"
검색대의 직원이 말했다. 그녀는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유난히도
많은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은 늘고 메마른
얼굴이었다.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급조된
차림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채말녀 씨 맞아요?"
검색대의 사나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녀는 불안한 기색으로 양옆에 다가와
있는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이분들을 따라가세요."
"왜, 왜요?!"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양쪽에 서
있던 형사들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니, 왜 이러세요?! 이거 놓으세요!
왜들 이러는 거예요?!"
"경찰입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쪽으로 잠시 갑시다."
"이거 놓으세요! 난 비행기 타야해요!
비행기가 곧 출발하는데 어딜 가자는
거예요?"
그녀는 거세게 항의하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형사들이 그녀를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데리고 갔다.
"채말녀 씨, 비행기를 타고 싶으면 묻는
대로 빨리 대답하십시오."
앉지 않으려는 그녀를 의자에 눌러앉힌
다음 강형사는 두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 곁에 서 있던
우형사가 그녀의 안경을 벗긴 다음
머리칼을 잡아당기자 그녀가 놀라서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가발은
이미 벗겨진 뒤였다. 가발 밑으로 드러난
머리는 잿빛이었다. 메마른 얼굴 위로
경련이 스쳐가면서 움푹 들어간 두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나이 많은 여자한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배미화 씨는 어디 있습니까? 어디서
"몰라요. 만나기로 한 적 없어요."
"거짓말 말아요. 댁의 따님은 살인범으로
지금 수배중이에요.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빨리 자수시켜요."
"아니, 내 딸이 살인범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 그 애가 누구를 죽였다는
거예요?"
"자자, 그런 건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없고 따님이 지금 어디 있는지
그것부터 말해봐요. 어디 숨어 있어요?"
"모른다니까요."
"살인범을 숨겨주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거 몰라요? 모녀가 짜고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해외로 도주하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이제 다 들통이 났으니까 순순히
자백해요."
유분수지 아무리 경찰이라도 함부로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그녀는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한편 김포 공항에서 강형사와 우형사가
채말녀를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도쿄에서는 마형사가 조형사로부터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고 있었다.
"...... 공항에 있는 강형사한테
채말녀를 체포하라고 일러놨습니다."
"배미화는?"
"배미화는 탑승객 명단에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제 생각에는 배미화 먼저 다른
비행기편으로 빠져나갔던가 아니면 다음
있습니다."
마형사는 머리가 지근거려왔다. 빨리
생각을 정리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면서 입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윽고 그는 시계를
보고 나서 결정적인 지시를 내렸다.
"채씨를 풀어주라고 해!"
"네? 국외로 한번 빠져나가면
다시는......."
"기다렸다가 여기서 붙잡아도 늦지는
않아! 그 여자보다도 배미화를 체포해야
해. 탑승객 명단에 배미화가 없다면
틀림없이 도쿄에서 모녀가 접선할 가능성이
많아. 접선하도록 내버려뒀다가 접선할 때
두 명을 한꺼번에 체포하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마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다시 조형사의 연락을 받은 강형사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의 지시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고 난 그는 채말녀를 노려보았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15분 전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거의 발작을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
"내 말 잘 들어요. 석방시켜 줄 테니까
딸을 만나거든 잘 타일러 자수시켜요.
외국에서 평생 도피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가발을 뒤집어쓰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지원 인력까지 늘려 주면서 명령만
내리면 즉각 범인을 체포해서 넘겨주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그렇게 친절히 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자기가
맡고 있는 사건 수사를 위해 한국측의
협조를 요청했고, 마형사는 그 협조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요시다가 쫓고 있는
일본인은 한국으로 도망가 있다고 했다.
결국 서로 주고받는 거래를 한 셈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나리타 공항에 나와
있었다. 공항건물 내에 있는 경찰 전용의
사무실에서 마형사와 남형사는 조여져오는
압박감을 견딜 수 없어 계속 줄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서울쪽에도 그곳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교신은 가능하게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녀가 접선하지 않으면 어떡 하죠?"
남형사가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마형사는 거기에 대꾸하는 대신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길다란 종이 위에 다시 눈을 박았다.
그것은 채말녀가 타고 있는 JAL 315편기의
탑승객 명단이었다.
컴퓨터 단말기에서 뽑아낸 그 명단은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다. 탑승객 수는
모두 209명이었고 그 가운데 채말녀의 영문
이름이 분명히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배미화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다음 비행기
승객 명단좀 살펴봐."
"다음 비행기가 어디 한둘입니까?
해도......."
"몇 대가 됐건 하라면 해!"
"알겠습니다. 배미화가 수배된 걸 알고
있을 텐데 본명으로 비행기를 타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 내ㅂ는
남형사를 흘겨보다가 마형사는 다시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무심코 그것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한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두눈이 신경질적으로 깜박거려졌다.
그는 손으로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그것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분명히"SU JUNG
JA"라고 찍힌 이름이 있었다. 배미화라는
이름만 찾다보니까 그것을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형사, 이 이름 한 번 읽어봐!"
갑자기 그의 긴장된 목소리에 남형사는
들여다보았다.
"서...... 정...... 자......."
"누군지 알아?"
마형사의 조그만 눈이 더욱 작아졌다.
"글쎄요. 아아...... 알고말고요!
유밀라의 위조 여권 이름 아닙니까?"
"그래! 바로 그 이름이야!"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배미화가
유밀라의 위조 여권을 가지고 출국했다는
겁니까?"
"글쎄......."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요?"
마형사는 멍하니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요시다가 그들을
부르면서 수화기를 흔들어보였다. 마형사는
받아들었다.
"검사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조형사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처럼
말했다.
"검사 결과 1924호실에서 채취한 제3의
여인의 음모는 B형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음모는 배미화의 방에서 채취한
음모와 같았습니다. 아! 아닙니다! 잘못
말했습니다! 배미화의 음모와 달랐습니다!"
"뭐야?! 다시 분명히 말해봐!"
"배미화의 방에서 채취한 음모와
달랐습니다!"
"그럼 같은 게 없었단 말이야?!"
마형사는 거기가 일본인 줄도 모르고
소리쳤다.
침실에서 발견한 음모하고 제3의 여인의
음모하고 같은 것이었습니다!"
"뭐가 어째!"
"다시 말씀드려 유밀라의 음모하고 제3의
여인의 음모하고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형사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조형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해봐!"
"네, 죽은 유밀라의 방에서 채취한
유밀라의 음모하고 제3의 여인의 음모하고
같은 것이었단 말씀입니다!"
"이거 보라구. 이 바보 같은 친구야.
죽은 유밀라의 시체에서 채취한 음모와
제3의 여인의 음모가 서로 달랐다는 것은
"네,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유밀라의 침실에서 채취한 음모와 죽은
유밀라의 시체에서 채취한 음모를 서로
비교한 결과 그것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같은 것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달랐습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배미화의
방에서 채취한 음모가 피살체의 음모와
같은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배미화와 피살체의 음모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뭐, 뭐라고?!"
마형사는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중얼거리면서 온몽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버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형사가
귀에는 웅웅거리는 잡음으로밖에 들리지가
않았다. 그때 요시다가 다가와 문제의
비행기가 도착했다고 일러주었다. 마형사는
조형사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린 다음
전화를 끊었다.
"체포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습니다."
마형사는 서정자의 영문 이름자 밑에
줄을 그은 다음 그것을 요시다에게
보여주었다.
"무슨 전화였습니까?"
창백하게 굳어 있는 마형사의 표정을
살피면서 남형사가 물었다.
"기다려보라구. 어쩌면 귀신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입국 검사장을 빠져나오는 대로
해치우는 게 좋겠어."
올라가 세관검사장쪽으로 들어섰다.
입국 심사를 마친 사람들이
세관검사장쪽으로 하나둘씩 빠져나오고
있었다.
세관검사장에서는 여러 대의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먼저 빠져나온 승객들은 자기 짐을 찾기
위해 컨베이어벨트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15분쯤 지났을 때 요시다의 워키토키에서
신호음이 들려왔다. 요시다는 거기에다
귀를 기울이고 나서 마형사를 돌아보았다.
"지금 5번 심사대에 채말녀가 와
있답니다."
옆에 서 있던 통역관이 그 말을
마형사에게 전해 주었고 마형사는 즉시
남형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에 잡아채라고! 서정자하고 동시에
덮쳐야 해.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려!"
남형사는 일본 형사 네 명과 함께 중앙에
있는 5번 심사대쪽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5분쯤 지나자 요시다의 워키토키가 다시
신호음을 발했다. 요시다는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3번 심사대에 서정자가 나타났답니다."
마형사는 땀으로 끈적거리는 손을
쥐었다폈다 했다. 요시다와 두 명의 그의
부하가 마형사를 따랐다.
마형사는 3번 심사대가 보이는 곳에
이르자 일본 형사들 뒤로 몸을 숨겼다.
검은 옷차림의 여인인 심사대를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머리에는 밀짚모 같은
있었다. 마형사는 첫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짜 여권을 지닌 배미화는 중앙에 있는
컨베이어벨트쪽으로 다가갔다. 주위를
휘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맞은편에 서
있는 채말녀 앞에서 잠시 머물다가
컨베이어벨트 위의 짐쪽으로 옮겨갔다.
잠시 후 그녀는 옆에 있는 포터를 끌어다가
놓았다. 채말녀도 포터를 옆에다 세워놓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이미 트렁크가 두 개나
실려 있었다. 이윽고 트렁크 하나를 더
올린 다음 그녀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물러나
세관검사대쪽으로 포터를 밀고 갔다.
검사대쪽은 어느 곳이나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을 이루고 있었다. 채말녀는 배미화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줄이 제일 긴
5분쯤 지나 배미화도 포터를 밀고
세관검사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포터
위에도 트렁크가 세 개나 실려 있었다.
그녀는 채말녀가 서 있는 줄의 옆줄에 가서
멈춰섰다. 그녀들은 검사대쪽을 향해
나란히 서 있었지만 서로 외면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형사는 남형사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배미화의 뒤로
접근했다. 그는 갑자기 목이 간지러워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심히 망설여졌다. 망설이다가 그는
잔기침을 두어 번 한 다음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유밀라 씨!"
목에 가시 같은 것이 걸린 듯 그는 조금
불러보았다. 순간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도로 얼른 앞을
바라보았다.
"유밀라 씨! 배미화라고 불러줄까요?"
마형사는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옆에서는 채말녀가 남형사의 손을
뿌리치며 항의하고 있었다.
"정말 귀신을 잡으셨군요!"
남형사가 채말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으며 마형사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배미화의 어머니가 아니고
유밀라의 어머니일 거야."
마형사는 차갑게 웃으며 유밀라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배미화 행세를 한다는 건
무의미할걸. 자,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놨어요."
마형사가 유밀라의 팔을 움켜잡으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사람들을 밀치며
세관검사대쪽으로 돌진했다. 휴대품을
검사하고 있던 세관원이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그녀는 검사대를 빠져나갔다.
그 다음은 대합실이었다. 대합실은
자동문 저쪽에 있었따. 문앞에 서 있던
일본인 형사 두 명이 요시다의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유밀라를 덮쳤다.
"놔! 이거 놓으라고!"
미친 듯 몸부림치는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면서 마형사는 일본 형사로부터
수갑을 받아들었다.
"숙녀 대접을 해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그녀의 몸부림이 갑자기 수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떨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글라스 안쪽에서는 타는
듯한 두눈이 계속 마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KAL측에서는 마형사 일행에게 특별히
자리를 내주었다. 타고 보니 귀빈석이었다.
남형사는 자리를 둘러보면서 마치 소년처럼
즐거워했다. 그는 채말녀와 함께 자리를
잡았고 그 뒤쪽에 마형사와 유밀라가 마치
연인들처럼 나란히 앉았다.
유밀라는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끊임없이 냉소가 감돌고
있었고, 두눈은 초점없이 먼 곳을 향하고
휩싸여 있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형사는 유밀라의 한쪽 손목에서 수갑을
풀어냈다. 그러자 그녀는 통증을 느낀 듯
자꾸만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말 안하깁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속시원히 털어놓지 그래요. 말 안한다고
해서 당신이 고상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깨끗이 패배를 자인하고 털어놓아 봐요.
한번쯤 좋은 일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더니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어떻게...... 어떻게 알았죠?"하고
물었다.
비행기는 고도를 잡고 수평으로 날아가고
이번에는 마형사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웃기만 하면서 얼른 입을
열지 않자 그녀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돌아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눈은 더 이상 타오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을 살해할 것 같지 않은
아름답고 투명한 눈이었다.
마침내 마형사가 입을 열었다.
"서정자의 여권은 유밀라 당신의 위조
여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승객 명단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을
때에도 나는 설마했지요. 죽은 사람이
살아서 그것을 이용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지. 그런데 당신이 도쿄로
오는 동안 서울의 수사팀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던 거요. 좀 지저분한
음모와 피살자의 음모를 비교한 결과
그것들은 일치하지 않았소. 피살자의
음모는 오히려 배미화의 침실에서 채취한
음모와 일치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피살자가 유밀라가 아니고 배미화라는 것을
알았고......결국 지금까지 배미화로
행세해온 당신의 연극에 철저히 속아서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거요."
그 말을 하고 나서 마형사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허허허 하고 헛웃음을 웃엇다.
"당신은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바꿔치기한 것은 물론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내보내고 장례식에 당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의 참석까지 피하는 등
치밀하게 위장했지만...... 음모에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던 거요. 우리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요. 기막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네, 기막힌 솜씨예요. 그건 인정해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배미화를
해치웠지요? 당신도 기막힌 솜씨를
발휘했던데?"
"흥, 기막힌 솜씨라고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군요."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 나서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얼굴빛이
어두워지면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갑자기 배미화가 황개와 함께 있는
호텔 방에 들이닥쳤어요. 황개는 놀라서
도망치고 방안에는 나와 그 여자만
남았어요. 그 여자는 나한테 온갖 저주를
퍼붓다가 홧김에 청산염이 든 맥주를
위해 타 놓았던 것인데......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난 차라리 잘 됐다 싶었죠.
조금 있으니까 여장을 한 배창기 씨가 겁에
질려 들어와서는 황개를 태워죽였다고
했어요. 그는 배미화의 시체를 보더니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어요. 나는 황개가
죽였다고 거짓말했어요. 거기서 우리는
서로 협상했어요. 배미화한테 내 옷을
입히고 내가 죽은 걸로 했지요. 그리고
나는 그의 여동생이 되기로 한 거죠.
도청당할 것을 생각해서 전화할 때마다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생각까지도
그의 동생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는 이미 약점이 잡혔기 때문에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배사장과
계획한 게 아니었나요?"
유밀라는 웃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배창기 씨와 나는 오래 전부터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어요. 우리 부부
사이에는 갈수록 높은 벽이 쌓이고
있었는데 어떻게 살인 계획을 세울 수
있겠어요? 더구나 그 사람이 자기 여동생을
제거하는 계획을 어떻게 세울 수가
있겠어요? 아무리 이복동생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은 이복남매간이었나요?"
마형사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도 모르셨나요?"
"몰랐습니다."
마형사는 머리를 가로젓고 나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나타난 것은 우연이었나요, 아니면 계획된
것이었나요?"
"어떻게 그게 우연일 수 있겠어요?
그것은 계획적인 것이었어요. 두 오누이는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웠던 거예요. 나와
황개를 없애려고 말이에요. 계획을 세운
다음 기회를 노리다가 그날 동시에 기습을
한 거지요. 한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서
황개를 해치우고 다른 한 사람은 방안에서
나를 없애려고 했어요. 하지만 황개를
없애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를 없애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어요. 오히려 나한테 당하고
말았지요."
그 말끝에 그녀는 묘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배사장이 황개를 불태워죽인 건
승부수였지요. 일본에 가 있는 것으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놓고 그를 해치웠으니
놀라운 솜씨지요. 그건 그렇다하고 배미화
씨가 혼자서 당신을 없애려고 방안에
들어왔다는 건 얼른 이해가 안 되는데
혼자서 어떻게 당신을 해치울 수가 있지요?
정말 그 여자가 당신을 없애려고 했나요?
그렇다면 두 여자가 방안에서 격투를
벌였을 텐데 현장에는 그런 흔적이
없었거든요. 그때의 상황을 좀 이야기해
주겠소?"
"칼을 들고 달려들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나를 죽일 마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 여자가
들이 닥치자 황개는 놀라서
도망가버렸어요. 그 자리에서 무슨
황개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그리고 나한테 갖은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어요. 시누이 약혼자와 놀아났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어요."
그녀는 조금 소리까지 내어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서는 자신을 조소하는 빛이
뚜렷이 느껴지고 있었다.
"배미화는 미쳐서 길길이 날뛰었고, 나는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지요. 그 여자가
어느 정도 미쳐서 날뛰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갈 거예요. 그
여자는 그러면서 오빠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빠가 나타나면 힘을
합해 나를 없앨 계획이었겠지요. 그런데
배미화는 오빠가 지하 주차장에서 황개를
처치하고 나서 1924호실로 들어오기 전에
있는 맥주를 말이에요. 그 바람에 나를
죽이려다 되레 자기가 죽고 말았지요."
"당신은 배미화 씨가 그걸 마시고 죽게
내버려뒀군요? 마시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내버려뒀군요?"
"글쎄요,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을걸요.
그 여자는 내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에
그걸 마셨으니까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맥주를 정신없이 마시고
있었어요. 그리고 조금 있자 배를
움켜쥐면서 쓰러지더군요."
"배미화가 틀림없이 맥주를 마실줄 알고
그 여자가 보는 데다 그걸 두지 않았나요?"
"글쎄요."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맴돌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 당신은 배미화한테
권하면서 말이야. 그렇죠?"
"글쎄요."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묘한
여운을 띤 반응을 보였다. 그것을 보고
마형사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건 나중에 조사해 보면 알겠지. 그건
그렇고 배사장이 방안에 들어와서 당신을
죽이려고 했나요?"
"아뇨. 죽이고 싶었겠지만 기회를
놓쳤으니 어떻게 죽일 수가 있었겠어요.
배미화나 배창기 씨나 내가 1924호실에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겠어요? 사전에
계획을 짜가지고 나와 황개를 미행했던 게
틀림없어요."
갑자기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내다보았지만 유밀라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미화가 갑자기 쓰러져 죽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호텔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그때 배창기 씨가 나타난 거예요. 문을
거칠게 두드리기에 누구냐고 했더니 죽은
아이 이름을 댔어요. 목소리를 들으니까
틀림없는 배창기 씨였어요. 이미 알고
왔는데 문을 안 열어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열어줬어요. 그때는 죽을
각오를 했어요. 각오를 하니까 오히려
침착해지더군요. 안으로 들어온 배창기
씨는......."
그녀는 자기 남편을 굳이 배창기 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 여장 차림을 하고 있었어요. 그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어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에 사실대로 이야기 했죠 뭐.
황개를 죽이려고 맥주에 청산염을
타두었는데 정작 죽어야 할 사람은
도망쳐보리고 배미화가 모르고
마셔버렸다고요. 그러자 그 사람은
말했어요. 자기가 황개를 지하 주차장에서
태워죽였다고요. 내가 믿지를 않자 바깥을
가리키면서 내다보라고 했어요. 바깥을
내다보니까 과연 지하 주차장 출입구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 사람은 황개와 함께
나까지 싸잡아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미화를 잃었다고 하면서 가슴을
치며 원통해 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여자 재산까지 차지하게 되지
않았느냐고요. 사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그 아가씨 재산은 막대했어요. 백억 가까이
되는 재산이었어요. 그것이 몽땅 당신한테
가게 됐으니 슬퍼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내 뺨을 때리더군요."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쳤다. 그가
가소롭다는 웃음이었다.
"그 경황에서도 배짱이 대단했군요."
마형사가 부추기자 그녀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가 제법
들뜬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배창기 씨가 나를 때리긴 했지만......
그때부터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죠. 우리는 법적인 부부 관계이면서도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지요. 나는 그를
설득하고 위협했어요. 황개를 죽인 사실
때문에 그는 내 위협에 꼼짝없이
굴복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했던 거예요. 그의 협조가 없었다면
내가 배미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을 거예요. 두 오누이가 나를
제거하려고 오래 전부터 기초를 닦아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역이용함으로써 어렵지
않게 배미화 역할을 할 수가 있었어요."
"김영대를 함정에 빠뜨린 것은 배사장
남매의 짓이었나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랬을
거예요. 직접 하지 않았다면 아마 사람을
사서 했을 거예요."
스튜어디스가 카트를 밀고 왔다. 카트
그녀가 주는 물수건을 받아 하나는 유밀라
앞에 놓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용했다.
"배창기 씨가 당신을 왜 죽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네, 알고 있어요. 그가 모두 이야기해
줬거든요."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우선 내가 황개와 놀아난 것만으로도
죽이고 싶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내
과거를...... 외국인과의 동거생활을
들먹거렸어요. 과거를 들먹거리다니
치사하지 뭐예요. 요즘 세상에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다른 스튜어디스가 또 카트를 밀고 왔다.
이번 카트 위에는 플래스틱 도시락이 잔뜩
쌓여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도시락을 내려
맥주를 청했다. 그러나 유밀라는 선뜩
그것을 받더니 뚜껑을 열고 서슴없이 먹기
시작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 이런 음식 좀처럼
먹겠어요? 미리 많이 먹어둬야죠"마형사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맥주를 천천히
잔에 따랐다.
"에이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이야기했어요. 내가 맨 처음 에이즈에
걸렸고, 나 때문에 가족이 모두 에이즈에
걸렸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억지예요!"
그녀는 마형사만 들을 수 있게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그러나 격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에이즈를 퍼뜨렸는지 그걸 어떻게
자기가 나보다 깨끗했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어요?! 외국인과의 관계를
따진다면 나뿐만 아니고 배미화도 그런
경력이 있어요. 그리고 두 오누이 관계는
보통 남매 관계가 아니었어요. 과거에,
그러니까 배창기 씨가 결혼하기
전이었겠죠. 그 두 사람은 이복남매 관계
이상의 관계......그러니까 불륜관계를
가졌었나봐요. 그런 과거 때문에 배창기
씨는 몹시 괴로워했고, 배미화는 그걸
꼬투리삼아 오빠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어요. 그런 오빠와 내가 결혼했으니
배미화가 질투를 느끼고 나를 증오할만도
했죠.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배미화도
외국인과 관계를 가졌어요. 그리고 배창기
씨하고도 관계를 맺었어요. 그럼 도대체
옮겨받았지요? 나 혼자서 그것을 옮겼다고
주장할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 속에
집어넣고 씹어댔다.
마형사는 심한 혼란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당신은 병원에 가서 자신의 에이즈 감염
여부를 확인해 봤나요?"
"아뇨. 배창기 씨는 건강진단을 한단고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몰래 에이즈
검사를 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에이즈에 걸린 걸 알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 그 뒤에 혼자 병원에 가서 확인 해보지
않았어요. 무섭기도 하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죠. 죽게 되면 죽는 거죠 뭐.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마형사는 맥주로 입 속을 축였다.
"황개하고는 어떻게 해서 관계를 갖게
됐나요?"
"그 사람이 나를 협박했어요. 내가
외국인과 동거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걸 미끼로 나를 협박하면서 접근했어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한테
알리겠다고 나를 협박했어요. 그자는
악마였어요. 남편한테 알려질까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요구에 응했지요.
그러다보니까 점점 깊이 말려들게
되었지요. 그놈은 내 몸뿐만 아니라 돈도
많이 울궈갔어요. 잘 타죽었지요."
"위조 여권은 어떻게 해서 만든 거지요?"
"배창기 씨가 만들어놓았던 거예요. 왜
나를 외국으로 몰래 데리고 나가 외국에서
없애버리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러면
국내에서는 영원한 실종으로 처리되겠죠."
"왜, 왜 그를 죽였소?"
"그래야 뒤끝이 깨끄하잖아요."
그녀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어떻게 약에다 청산가리를
집어넣었지요?"
그때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오해예요! 난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
"방금 죽였다고 하잖았소?!"
"그건 잘못 말한 거예요."
"뭐라구요?!"
마형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도로
흔들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상체가
마형사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그에게
상체를 안기듯하면서
"이 비행기...... 추락해 버렸으면
좋겠어요."하고 중얼거린다.

교도소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줄 알았던
유밀라는 2년쯤 지나 석방되었다. 배미화의
죽음에 대해서는 과실치사죄가 적용되었고,
그밖에 위조 여권에 대해서도 유죄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배창기를 독살한
부분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처리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정식으로 로미오와
쥴리엣 호텔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
파티석상에 불청객으로 참석한 마형사와
남형사는 불타는 여인의 그 화려한 미소를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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