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19~20

나단비 | 2024.04.18 10:53:44 댓글: 0 조회: 55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946
19
놈들은 여길 지나지 못해






2월의 어느 춥고 음산한 날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거트루드 올리버는 떨려오는 몸을 움츠리고 릴라의 방으로 들어가 릴라 옆으로 파고들었다.
“릴라, 나 무서워. 아이처럼 무서워. 이상한 꿈을 꿨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어떤 꿈이었는데요?”
릴라가 물었다.
“지난번처럼 내가 베란다 계단에 서 있었어. 등대에서 댄스파티가 있었던 날 밤에 꾸었던 꿈에서처럼. 동쪽 하늘에서 시꺼멓고 커다란 구름이 천둥번개와 함께 몰려왔어.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나를 휘감아버렸다고. 난 너무 추워서 몸이 오돌오돌 떨려왔어. 바로 이어서 폭풍우가 몰아닥쳤어. 무시무시한 폭풍우였어. 눈이 멀도록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는 귀가 먹을 만큼 연이어 울려댔지. 난 너무 공포에 질려서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고 했어. 그 순간 프랑스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계단으로 뛰어올라왔어. 그의 군복은 가슴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금방 쓰러질 것 같았어. 창백하고 여윈 얼굴에 눈만 불타오르듯 반짝였어. 그 병사는 ‘놈들은 여길 지나지 못해!’라는 말을 중얼거렸어. 소리는 작았지만 열정이 느껴지는 말투였지. 미친 듯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서 그 병사의 나직하지만 격렬한 목소리가 내 귀에 뚜렷이 들렸어. 거기서 눈을 번쩍 떴어. 릴라, 난 무서웠어. 올봄에 우리 모두가 기대하던 대공세는 없을 거야. 아니, 오히려 프랑스가 공격을 받을 거야. 틀림없어. 독일군이 어딘가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이 ‘놈들은 여길 지나지 못해!’라고 했다면서요.”
릴라는 진지하게 물었다. 릴라는 블라이드 의사처럼 거트루드 올리버의 꿈을 비웃지 않았다.
“그 꿈이 앞날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내 절망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릴라, 그 꿈에서 느꼈던 공포만은 너무나 생생해. 머지않아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한 날이 올 거야.”
블라이드 의사는 그날 아침 식탁에서도 꿈 이야기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 뒤로 두 번 다시 미스 올리버의 꿈을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그날 바로 독일군이 베르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잉글사이드’ 사람들은 아름다운 봄을 맞았어도 몇 주일 동안이나 걱정으로 몸살을 앓으며 지냈다. 필사적으로 사수하고자 하는 프랑스 방어선에 독일군이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는 절망스러운 나날이 빨리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만일 독일군이 베르됭을 점령한다면 프랑스군의 사기는 완전히 꺾이고 말 거예요.”
미스 올리버는 침통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요.”
수잔은 바로 그날 너무 걱정되어 점심도 먹을 수 없었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
“우선 첫째로 미스 올리버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꿈을 꾸었잖아요. 미스 올리버는 프랑스군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미리 꿈으로 꾼 거예요. ‘놈들은 여기를 지나지 못해!’라고 말예요. 내가 장담해요.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미스 올리버의 꿈이 생각나 난 온몸이 오싹했어요. 꼭 성경 시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는 사람들이 그런 꿈을 자주 꾸었잖아요.”
“저도 알아요, 저도 알아요. 저도 제 꿈을 믿으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어요. 그런데 나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흔들리고 말아요. 그러면 제 자신에게 그 꿈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잠재의식적인 기억이라고 말해요.”
미스 올리버는 중얼거리며 초조하게 서성댔다.
“나는 어떻게 기억이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야 나는 미스 올리버나 우리 의사 선생님처럼 배운 게 없지만, 배운 사람이 그런 간단한 것도 믿을 수 없다면 차라리 배우지 않는 편이 낫겠네요. 어쨌거나 난 베르됭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요. 그 흉악한 독일군 놈들이 그 도시를 손에 넣어버린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조프르가 그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라고 했거든요.”
수잔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패배할 때마다 듣는 위로의 말이로군요. 제겐 이제 그 말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요.”
거트루드 올리버가 대꾸했다.

“역사에 이렇게 끔찍한 전쟁이 있었을까요?”
4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메러디스 씨가 말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에요. 이 전쟁에 비하면 호메로스가 쓴 전쟁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트로이 전쟁이 베르됭 요새에서 벌어졌다면 신문에서 다룰 기사는 한 줄밖에 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초자연적인 힘 따위는 믿지 않지만요.”
블라이드 의사가 거트루드 올리버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이 전쟁의 운명은 베르됭이 어떻게 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수잔이나 조프르가 말하듯 군사상의 중요성은 그리 없지요. 그러나 그 일에 사람들이 거는 이상이나 기대로 보자면 결코 무시할 수 없지요. 만일 독일군이 베르됭을 점령해버리면 이 전쟁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둘 겁니다. 하지만 독일군이 패하면 전세는 우리 쪽으로 기울 거예요.”
“독일군은 질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한 이상은 정복할 수 없거든요. 프랑스는 훌륭한 나라입니다. 난 프랑스가 싸우는 것을 보면 악의 야만적인 검은 힘에 단호히 맞설 문명의 순결한 힘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온 세상 사람들도 모두 그런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모두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한두 개 요새의 주인이 바뀌었다거나 피로 물든 땅 얼마를 빼앗았느냐 빼앗겼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메러디스 목사가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당한 고통에 보상이 주어질까요? 우리가 치른 희생을 다 보상하기 충분할 만큼 커다란 축복을 받을까요? 온 세상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 것은 경이로운 새 시대를 열려는 몸부림일까요? 아니면 그저 헛된 ‘수백만 개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개미들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26) 메러디스 씨, 우리는 개밋둑과 개밋둑에 사는 개미 절반을 쓸어버리는 재앙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개미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할까요?”
미스 올리버가 물었다.
“미스 올리버는 무한한 힘은 무한히 위대한 것만큼이나 무한히 작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있군요. 우리는 그 어느 쪽도 아니지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 있듯 너무 사소한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한히 작은 개미조차도 거대한 마스토돈27)만큼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려는 고통을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이제 막 태어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몸부림치며 시작될 것입니다. 난 이 전쟁의 결과가 새 천국이라거나 새로운 세상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느님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요. 미스 올리버, 하지만 결국에는 주님이 의도하신 바가 완성될 것입니다.”
메러디스 씨는 검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부엌에서 수잔이 감탄해 중얼거렸다.
“참으로 건전하고 정통적인 사고방식이야, 암.”
수잔은 가끔씩 미스 올리버가 목사와 토론하다 지는 것을 보면 통쾌했다. 물론 미스 올리버를 좋아하기야 하지만 목사님에게 이교도적인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을 볼 때면 미스 올리버에게 그런 일이 적절치 않음을 깨우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5월에 월터에게서 공로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적은 편지가 왔다. 월터의 편지에는 어떤 일을 해서 훈장을 받게 되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월터가 얼마나 용맹스러운 행동을 했는지 글렌 사람들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다른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리 메러디스는 이렇게 적어 보냈다.

이 전쟁이 아니라 다른 전쟁이었다면 월터는 빅토리아십자훈장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는 날마다 용맹스러운 병사가 나오므로 빅토리아십자훈장을 너무 자주 주게 될까 봐 주지 못한 겁니다.

“빅토리아십자훈장을 주었어야 옳아요.”
수잔은 몹시 분노했다. 월터에게 이 훈장을 주지 않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헤이그 장군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정녕 총사령관으로서 적합한 사람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릴라는 너무나 기뻤다. 그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월터였다. 그런 월터에게 레드먼드에서 누군가가 흰 깃털을 보냈다. 양쪽 전선 사이 무인지대에 부상당해 홀로 버려진 전우를 구하려고 사지로 뛰어든 사람이 월터였다. 릴라는 월터의 희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월터는 얼마나 아름다운 눈을 가졌는지 모른다. 릴라는 자신이 그런 영웅의 동생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더구나 월터는 그런 일이 자랑삼아 편지에 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월터의 편지에는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정다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오래전 어두움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시절 함께 나누고 기뻐하던 이야기들이었다.
월터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잉글사이드’ 정원에 핀 수선화가 생각난다. 이 편지가 닿을 때쯤이면 수선화가 피어나겠지? 아름다운 장밋빛 하늘 아래 꽃들이 아름답게 흔들릴 거야.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밝은 황금빛으로 피어나지 않았니, 릴라? 난 그 수선화도 피로 붉게 물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전장에 피어난 양귀비꽃처럼. 그리고 그곳엔 지금 봄의 속삭임이 ‘무지개 골짜기’의 제비꽃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을 것 같구나.
오늘 밤엔 초승달이 떴다. 저 전쟁터 위로도 은빛의 아름다운 달이 걸려 있어. 너도 단풍나무 골짜기 위로 떠오른 달을 보고 있니?
짧은 시 하나를 동봉할게, 릴라. 이것은 어느 날 밤 참호 지하실 안에서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쓴 거야. 내가 썼다기보다 저절로 떠오른 거지. 시를 쓰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어. 무엇인가가 내 몸을 빌려 대신 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단다. 전에도 한두 번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지만, 이런 일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니고 특히 이번에는 그 느낌이 무척이나 강렬했어. 그래서 난 그 시를 <런던 스펙터>지로 보냈어. 그 잡지사에서 인쇄한 시를 내게 보내주어 오늘 받았단다. 너도 좋아할 거야. 여기 와서 내가 처음 쓴 시야.

시는 짧았지만 통렬했다. 발표된 지 단 한 달 만에 이 시는 월터의 이름을 싣고 온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대도시 일간신문이며 작은 마을의 주간지에 이르기까지 실리지 않은 곳이 없어 이 시가 읽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원한 비평란이며 신문의 개인 광고란, 적십자의 호소문 그리고 정부의 지원병 모집광고 등에 이르기까지 월터의 시가 쓰였다. 이 시를 읽고 어머니와 자매들은 울었고 젊은이들의 피는 들끓었으며 인류 전체가 감동받았다. 무시무시한 세계대전 때문에 괴로움, 희망, 유감, 목적을 담은 이 짧은 세 줄의 시는 불멸의 시가 되었다. 캐나다의 한 젊은이가 플랑드르의 참호 속에서 위대한 전쟁 시를 썼다. 월터 블라이드 병사가 쓴 <피리 부는 사나이>는 발표되자마자 이미 고전이 되어 있었다.
릴라는 그 괴로웠던 한 주일 동안의 일과 함께 이 시도 일기 첫머리에 적어두었다.

너무나 힘들었던 한 주였다. 고통은 끝났고, 모든 것이 실수로 빚어진 일이었음이 밝혀졌더라도 한번 입은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고 자국을 남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의미 있는 한 주였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일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얼마나 훌륭하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절대로 올리버 선생님 흉내도 내지 못할 것이다.
1주일 전에 샬럿타운의 그랜트 씨 어머니가 올리버 선생님한테 편지를 보내왔다. 로버트 그랜트 육군 소령이 전사했다는 전보를 바로 며칠 전에 받았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 가여운 거트루드! 그 말을 듣는 순간 올리버 선생님은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정신을 가다듬고 학교로 돌아갔다. 울지도 않았다. 난 올리버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올리버 선생님의 얼굴과 눈이란!
“나는 내 일로 돌아가야 해. 지금은 그것이 내 의무니까.”

올리버 선생님은 말했다.
나는 도저히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수잔 아줌마가 드디어 이곳에도 봄이 왔다는 말을 했을 때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올리버 선생님은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드러내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때 올리버 선생님은 “정말 올해도 봄이 올까요?” 하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허탈하니 웃었다. 그 괴로워 보이는 웃음을 차마 마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웃는 웃음이라고나 할까. 내 생각엔 그랬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 버릇 좀 봐요. 이 거트루드 올리버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고 해서 다른 해처럼 봄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니. 다른 사람 만 명이 고통을 받거나 말거나 봄은 반드시 찾아올 텐데요. 제가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보니…… 아,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돌아가겠죠?”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렇게 자신을 나무라선 안 돼요. 너무 심한 충격을 받고 세상이 변해버렸다고 생각될 때면 모든 일이 전처럼 되어나갈 리 없다는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해요. 우리 모두 그래요.”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뜨개질을 하면서 월터 오빠가 붙인 별명대로 ‘흉조와 비탄의 까마귀’ 소리로 우울한 말들만 해대던 소피아 아줌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미스 올리버는 나은 편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요. 남편을 잃은 사람도 있잖아요. 그것은 참기 힘든 충격이지요. 또 아들을 잃은 사람도 있어요. 미스 올리버는 남편을 잃은 것도, 아들을 잃은 것도 아니잖아요.”
“남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제 남편이 될 사람을 잃었어요. 전 아들을 잃은 건 아니지만 제가 앞으로 낳을 수도 있었던 아들과 딸을 잃었지요. 이제 제가 제 자식을 낳을 일은 없을 거라고요.”
올리버 선생님은 더욱 비통하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하다니 전혀 숙녀답지 못해요.”
소피아 아줌마가 몹시 놀랐다는 어조로 말했다.
올리버 선생님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크게 웃어 소피아 아줌마는 저 가여운 거트루드 올리버가 너무 괴로워 미쳐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방을 뛰쳐나가 엄마에게 미스 올리버가 충격으로 이상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전 제 인생의 두 동반자를 잃었어요. 그런데 제게 그 일이 별일 아니라고요? 제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 불쌍한 남자는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겠네요.”
올리버 선생님이 한탄했다.
나는 올리버 선생님이 밤새 방을 서성이는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은 매일 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였다. 한번은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작지만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나도 선생님의 고통이 느껴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생님을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날 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날은 밝았다. 그리고 성경 구절처럼 아침이 되니 기쁨이 찾아들었다. 정확히 아침은 아니었고 오후에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화벨이 울렸고 내가 받았다. 샬럿타운 그랜트 부인의 전화였다. 부인이 전한 소식은 모두 실수였다는 것이다. 로버트 그랜트 씨는 죽지 않았다. 팔에 약간 상처를 입었을 뿐, 지금은 아무런 위험 없이 안전하게 병원에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착오가 일어났는지는 아직 모른다. 로버트 그랜트라는 사람이 또 하나 있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무지개 골짜기’로 날아갔다. 난 정말로 날 듯이 달렸다. 발이 땅에 닿은 기억이 없다. 옛날에 우리가 모여 놀던 가문비나무 숲 빈터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올리버 선생님을 만났다. 단숨에 방금 들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곧 내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너무 기쁘고 흥분해 있어서 잠시 멈추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올리버 선생님은 무엇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황금빛 양치류 속으로 푹 고꾸라져 버렸다. 그때 충분히 놀랐으니 나도 좀 더 분별력이 생겼으리라. 적어도 이런 점에 있어서는. 내가 올리버 선생님을 죽인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어머니도 젊어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올리버 선생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몇 년은 지난 것 같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난 전에 누가 기절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고 집에 가봐야 누구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오늘 다이 언니와 낸 언니가 레드먼드에서 돌아오기로 되어 있어, 모두들 역으로 마중 나갔다. 하지만 나도 이론적으로는 기절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이제 실제로도 안다. 다행히도 개울이 가까이에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미친 듯이 애를 쓰고 나서야 올리버 선생님이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가 전해준 소식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도 감히 그 일을 다시 언급할 수 없었다.
올리버 선생님을 부축해 단풍나무 숲을 지나 선생님 방으로 데려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로버트가…… 살아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올리버 선생님의 몸을 찢고 나오는 듯했다. 그러고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나는 누가 그렇게 우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주 내내 참고 울지 못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올리버 선생님은 그날 밤 내내 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올리버 선생님은 무슨 환상이라도 본 얼굴이어서 우리 모두는 기쁘다 못해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다이 언니와 낸 언니는 이삼 주 정도 집에서 쉬다가 킹스포트 훈련소로 가서 다시 적십자 봉사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언니들이 부럽다. 아빠는 나도 여기서 짐스를 돌보고 적십자 소녀단 일을 하면서 언니들 못지않게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언니들 하는 일처럼 로맨틱한 일은 아니다.
쿠트가 함락되었다. 차라리 함락되고 나니 불안이 덜하다. 너무 오랫동안 그 일로 마음을 졸이며 지냈다. 그 때문에 완전히 우울한 하루를 보냈지만 그 일은 잊고 기운을 내기로 했다. 소피아 아줌마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우울한 얼굴로 영국군이 여기저기서 다 지고 있다고 신음했다.
“영국군은 지더라도 아주 멋있게 진다고. 무언가를 뺏겨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을 때를 노리잖아. 어쨌거나 나의 왕과 국가는 내가 지금 뒤뜰에 심을 감자를 자르길 원해. 그러니 가서 칼을 가져와서 나를 도와달라고, 소피아 크로퍼드. 일을 하다 보면 생각을 돌리고 자기가 어쩌지도 못할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수잔 아줌마가 꾸짖듯 말했다.
아줌마는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다. 아줌마가 그 딱한 소피아 아줌마를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것을 보면 참으로 통쾌하다.
베르됭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난 올리버 선생님이 꾼 꿈이 프랑스의 승리를 예견하는 꿈이었다고 믿는다.
‘놈들은 여길 지날 수 없어!’


26. 알프레드 테니슨 경(Lord Alfred Tennyson, 1809~1892)의 시 <광활함(Vastness)>의 일부.
27. 고생대에 살았던 절멸한 코끼리의 총칭.



20
노먼 더글러스의 독설






블라이드 의사가 물었다.
“내 사랑 앤, 어디를 그렇게 헤매 다니는 거지?”
결혼한 지 24년이나 지났건만 아무도 없을 때면 블라이드 의사는 아직도 가끔씩 아내를 그렇게 불렀다. 앤은 베란다 계단에 앉아 온갖 꽃들이 만발해 봄 신부처럼 아름답게 변한 세상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게 보이는 과수원 저쪽에는 거뭇거뭇한 어린 전나무들과 하얀 산벚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울새들은 벚꽃나무 사이를 날며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저녁때라 단풍나무 숲 위로는 초저녁별이 물결을 이루었다.
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꿈을 꾸며 참기 어려운 현실에서 잠시 피할 수 있었어, 길버트. 우리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무지개 골짜기에서 놀고 있더군. 지금은 집이 너무 조용해. 하지만 옛날처럼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고, 신이 나서 노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상상하고 있었어. 젬이 부는 휘파람 소리도, 월터가 부르는 요들송도, 쌍둥이의 웃음소리도 들려왔어. 그축복된 몇 분 동안은 서부전선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잊고 상상이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달콤한 행복감을 맛보았어.”
블라이드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은 일을 하면서 서부전선을 잊을 수 있다 해도 그마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블라이드 의사의 모습도 2년 전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은 숱 많은 고수머리에 흰머리가 꽤 많이 섞여 있었다. 블라이드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사랑하는 아내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언제나 웃음이 넘쳐흐르던 눈에 지금은 마른 눈물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수잔이 손에 괭이를 들고 머리에는 자기의 두 번째로 좋은 보닛을 쓰고 다가왔다.
“제가 비행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부부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
수잔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합법적이라고 생각해요.”
블라이드 의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엔 결혼 같은 엄숙한 일을 천박하게 비행기 안에서 해서야 되겠나 싶지만 요즘엔 세상이 예전과 달라졌으니까요. 기도회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았으니 난 부엌 뜰에 나가서 풀이나 뽑아야겠어요. 풀을 뽑으면서도 트렌티노 전투가 어찌 되어 갈지 걱정하겠지요. 오스트리아가 벌이는 작태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사모님.”
수잔은 마땅치 않다는 듯 말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도 오전 내내 잼을 만들면서 마음은 온통 전쟁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어요. 하지만 막상 신문이 오니까 겁이 나서 못 보겠더군요. 자, 이제 나도 기도회에 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블라이드 부인도 서글픈 듯 말했다.
꼭 글로 쓰이지는 않았어도 모든 마을이 자기 마을만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세대에서 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결혼식에서나 축제에서도 이야기되고 겨울철 난롯가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되풀이해서 전해진다.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에도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그날 밤 감리교회 합동 기도회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중에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었다.
합동 기도회를 열자는 생각은 아널드 씨의 머리에서 나왔다. 겨울 내내 샬럿타운에서 훈련을 받던 그 지역 부대는 곧 해외로 떠날 예정이었다. 포 윈즈 항구 젊은이들, 글렌 마을, 항구 건넛마을, 항구 어귀, 글렌 윗마을 젊은이들이 모두 마지막 휴가를 보내려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아널드 씨는 이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기 전에 합동 기도회를 여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참으로 그럴듯한 생각을 해냈다. 메러디스 목사님도 그 의견에 동의했고, 기도회는 감리교회에서 열기로 했다. 글렌 마을의 기도회는 그리 출석률이 좋지 않은 편인데 이날 밤만은 감리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왔다. 심지어는 미스 코넬리아도 왔다. 미스 코넬리아가 감리교회 안에 발을 디딘 것은 그날이 평생 처음이었고, 이는 세계대전이 나지 않았으면 없을 일이었다.
“예전에는 감리교인을 무척 싫어했지만 이제는 싫어하지 않아요. 카이저니 힌덴부르크28)니 하는 사람들이 설치고 다니는 세상에서 감리교인을 미워하는 것은 분별력이 없는 짓이에요.”

남편이 놀라움을 표시하자 미스 코넬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미스 코넬리아는 감리교회에 갔다. 노먼 더글러스와 그의 아내도 왔다.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이 건물에서 자기가 얼마나 잘난 인물인지 과시라도 하려는 듯 거들먹거리며 맨 앞좌석을 향해 통로를 걸어갔다. 그는 전쟁과 관련된 모임이라면 거의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메러디스 목사는 프라이어 씨도 참석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했고, 프라이어 씨도 그 부탁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가장 좋은 검은색 정장에 하얀색 넥타이를 매고 고수머리는 단정하게 갈라 빗었다. 수잔은 속으로 ‘천해 보이는 그 동그란 붉은 얼굴로 오늘은 더 신앙심 있는 체하고 있구만.’ 하고 생각했다.
“그 남자가 그런 모습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뭔가 일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어요, 사모님. 그 일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는지는 몰랐지만, 그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목적이 있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나중에 수잔은 말했다.
기도회는 평소대로 시작되었고,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먼저 메러디스 씨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감동적이고 열정적인 말로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어서 아널드 씨가 미스 코넬리아마저 취향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조금도 나무랄 데 없다고 감탄해 마지않은 연설을 했다.
이윽고 아널드 씨가 프라이어 씨에게 기도를 이끌어달라고 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전부터 아널드 씨를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스 코넬리아가 감리교회목사라면 좀 몰인정하다 싶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 판단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병사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프라이어 씨에게 기도를 이끌어달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아널드 목사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한 일이었다. 메러디스 목사에게 칭송을 받았으니 그에 보답하려고 장로교회 장로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몇몇 사람들은 프라이어 씨가 무뚝뚝하게 거절하리라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스캔들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프라이어 씨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프라이어 씨는 사람들로 꽉 들어찬 교회 구석구석까지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기도를 이어갔다. 충격에 빠진 채 멍해 있던 청중들은 자기들이 반전주의자인 프라이어 씨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프라이어 씨는 적어도 자기의 신념을 밝힐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니면 나중에 사람들이 수군거린 것처럼 그가 교회는 안전한 곳이라서 마음 놓고 한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곳이라면 몰매를 맞을 얘기라도 교회 안에서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자행되는 살육현장으로 현혹되어간 젊은이들이 어서 눈을 떠 그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고 회개하도록 간구하는 기도였다. 살인과 군국주의의 길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여기 모인 군복 입은 젊은이들도 구원받게 해달란 기도도 잊지 않았다.
프라이어 씨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에서는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져도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태어날 때부터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의 기도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너무 놀라 마비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적어도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신성한 교회든 뭐든 개의치 않았다.
노먼 더글러스는 수잔이 가끔씩 말하듯 순전한 ‘이교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열광적인 애국자 이교도였기 때문에 프라이어 씨가 하고 있는 말이 무슨 얘긴지 파악하자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노먼 더글러스는 갑자기 광포해졌다. 괴상한 고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인들 앞으로 돌아서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 그만, 그만. 그 추해빠진 기도를 그만두라고!”
교회 안에 모인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올라갔다. 군복 차림의 한 젊은이가 조그맣게 환호성을 올렸다. 메러디스 씨가 나무라듯 손을 들었으나 노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먼은 말리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단숨에 앞자리로 껑충 뛰어나가 구레나룻 난 보름달의 목을 움켜잡았다. 프라이어 씨는 그만두라는 명령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노먼이 기다란 붉은 수염이 뻣뻣하게 곤두설 정도로 분노해 달려드는 데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프라이어 씨의 목을 움켜쥔 노먼은 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흔들어대면서 무서운 독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이 뻔뻔한 짐승 같은 놈!” 하고 외치면서 흔들고, “구제할 방법도 없이 더러운 놈!” 하며 흔들고, “돼지 머리에, 해충 같은 놈.” 하며 또 흔들고, “썩어빠진 놈!” 하고 흔들고, “기생충 같은 놈!” 하고 흔들고, “독일군 놈처럼 흉악하고 못된 놈!” 하고 흔들고, “비열한 뱀 같은 놈!” 하며 흔들었다.
노먼은 한순간 말이 막혔다. 모두들 노먼이 교회고 뭐고 상관치 않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계속해서 퍼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노먼은 아내와 눈이 마주쳤고 성경책을 꽝 치면서 주춤했다. “이 위선자야!” 하고 외치며 마지막으로 한 번 흔들어준 다음 구레나룻 난 보름달을 던져버렸다. 이 운 나쁜 반전론자는 성가대실 문까지 날아가 버렸다. 조금 전까지 붉었던 프라이어 씨의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다. 하지만 프라이어 씨는 정신을 차리자 외쳤다.
“내가 당신에게 이 일의 죄를 묻고 말 것이오.”
“해, 마음대로 하라고.”
노먼이 다시 한 번 달려들면서 외쳤다. 하지만 프라이어 씨는 저 사나운 군국주의자의 손아귀에 다시 걸려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자리를 떠버렸다. 노먼은 무례하고 의기양양하게 설교단 쪽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말아요, 목사님. 목사님이 할 수는 없잖아요. 성직자 옷을 입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으니 누가 대신 나서야지요. 내가 그놈을 집어던져서 목사님도 속이 후련했을 거요. 그놈이 불평하고 떠들어대고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선동하고 반역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지요. 누군가 나서서 그놈을 처치해야 했어요. 나는 바로 이 일에 쓰이려고 태어났어요. 드디어 나도 교회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이제 60년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어요. 이제 기도회를 계속하시지요, 목사님. 이제 더는 반전주의자가 나서 기도회를 훼방놓지 못할 겁니다.”
노먼 더글러스가 큰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경건해야 할 기도회 분위기는 망쳐버렸다. 두 목사 모두 그것을 알았고,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어서 기도회를 조용히 끝내고 흥분해 있는 사람들을 보내는 일이었다. 메러디스 목사는 군복을 입고 앉아 있는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충고 몇 마디를 해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프라이어 씨네 집 창문은 다시 한 번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널드 목사는 앞뒤가 맞지도 않는 축도를 올렸다. 목사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그의 기억에서 거구의 노먼 더글러스가 그 뚱뚱하고 거만한 구레나룻 난 보름달을 맹견이 커다란 강아지를 물고 흔들듯 흔들어대던 광경을 당장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런 모습이 모두의 머릿속에도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날 합동 기도회는 잘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통적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던 기도회는 고스란히 잊히고 만 데 비해 이 기도회는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았다.
수잔은 집에 오자 말했다.
“사모님, 나는 이제 결코 노먼 더글러스를 이교도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엘런 더글러스가 잘난 체하는 여자가 아니라 해도 오늘 밤엔 틀림없이 우쭐했을 거예요.”
“노먼 더글러스는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을 하고 말았어요. 모임이 끝날 때까지는 뭐라고 하든 프라이어 씨를 내버려둬야만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프라이어 씨 교회 목사와 임원회에서 벌주도록 해야 했어요. 그것이 가장 적절한 절차예요. 노먼의 행위는 몹시 형편없고 남이 듣기에도 언짢은 일이며 언어도단이에요. 하지만 정말이지…….”
블라이드 의사가 말을 하고는 머리를 젖힌 채 껄껄 웃으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앤 아가씨, 참으로 가슴이 후련해졌어.”


28. 힌덴부르크(1847~1934), 독일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제8군사령관으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대(對)러시아 전선에서 공을 세웠다. 군 총사령관(1916~1919), 독일제국 총리 대행(1917~1918), 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192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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