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4-태항산록-우정

더좋은래일 | 2024.05.01 15:33:48 댓글: 0 조회: 68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5663


소설


우정


갈라진지가 벌써 20년이 넘은 옛친구 황길성이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달 그믐께 우리 성에 시찰을 오는 길에 우리 집에 들리겠다는 사연이였습니다. 우리는 온 식구가 다 희색이 만면해졌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와 나는 이만저만한 사이가 아니였으니까요. 그와 나는 8년 항일전쟁의 어려운 나날에 처음부터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 나이에도 어울리지 않게 흥분해가지고 마치 무슨 잔치라도 차리는것처럼 서둘러대였습니다. 집안식구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습지요. 그런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급기야 월말에 이르러서 글쎄 내 이 무등호의가 물거품으로 돼버릴줄을. 호사다마란 정말 헛말이 아니였습니다. 일이 그쯤 되다보니 내 속이 어째 상하지 않으며 또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1937년 시월, 황길성이와 나는 함락을 목전에 둔 상해에서 절강성 가흥을 거쳐 남경까지 철퇴를 했습니다. 한데 그 남경에서도 우리는 한달남짓을 겨우 머무르고는 또다시 쫓겨서 양자강을 끼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들달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무호, 안경, 구강 등지를 거쳐서 마침내 한구에까지 다닫게 됐습니다.

도중에 사람들로 들붐비는 무호거리에서 우리는 전화에 집을 잃은 수많은 피난민들의 비참한 정경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로숙과 걸식, 그들은 비 그을 외지간이 없었습니다. 배 채울 밥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중에서도 특히 한집안 세식구가 우리 눈에 띄였습니다. 두눈이 먼 백발이 로파와 그의 며느리인상싶은 스물예닐곱살 가량의 시골녀자 그리고 그 녀자의 서너살짜리 아들아이-뼈와 가죽만 남은 아들아이.

우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습니다. 황길성이의 눈에서는 금시로 눈물이 쏟아질상싶었습니다. 우리는 발이 붙어서 차마 그자리를 뜰수가 없었습니다.

지쳐서 눈을 감고 입을 헤벌리고 엄마의 무릎에 축 늘어진 어린아이는 창자를 줄이다 못해서 인젠 울음을 울 기맥조차도 없는 모양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얼굴에 애티가 있는 그 아이의 엄마는 거기 그렇게 꼼짝 않고 앉아서 굶주린 빛이 어린 눈으로-유난히도 맑은 눈으로-우리를 말끄러미 쳐다보고있는것이였습니다. 그들 한집안 세식구중에서 바깥세상과 서로 통하는것이라면 오직 그 한쌍의 눈이 있을뿐이였습니다.

황길성이는 부지런히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멀지 않은 골목어구에 내걸린 문짝만한 <<당(当)>>자가 눈에 띄였습니다. 그것은 전당포의 간판이였습니다. 황길성이는 제가 입은 연회색 스피링을 일변 벗으며 일변 그리로 달려갔습니다. 미구에 그가 다시 전당포에서 부지런히 나오는데 벗어들고 들어갔던 스피링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급한 걸음으로 돌아온 황길성이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푸리고 손아귀에 쥐고 온 5원짜리 지전 한장을 오래동안 씻은적이 없는 그 젊은 녀자의 손아귀에 살며시 밀어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간청하듯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아주머니, 이걸루 애기한테 무얼 좀 사다 먹여주십시오.>>

젊디젊은 나이에 벌써 인생의 고초를 겪을대로 겪은 그 녀자의 얼굴에 순간 야릇한 표정이 그려졌습니다. 놀라움이랄가 아니면 감격이랄가. 그 유난히 맑은 두눈이 순식간에 흐려지는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를 가장 뜨겁게 맞아주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듬해 봄, 우리는 호남성 상담에서 배편으로 장사까지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탄 그 너벅선은 발동선에 끌려서 소상강을 오르내리는 련락선으로서 선객을 한 100여명씩은 태울수 있는것이였습니다. 배안에 식당까지 있어서 갑판우에다 식탁들을 벌려놓고 차도 팔고 또 음식들도 팔았습니다.

선객들중에 장사아치 같아보이는 나이 지긋한 뚱뚱보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거느린 마누라는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어찌나도 여위였던지 보기가 애처로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여섯살 가량 된 아들아이만은 생김생김이 여간만 귀엽지 않았습니다. 새까만 눈에 긴 속눈섭, 앵두 같은 입술과 희다 못해서 거의 투명해보이는 살갗... 그 아이는 앞가슴에 빨간 꽃무늬가 찍힌 새공 하나를 안고있었습니다. 그들 일가가 거느린 크고작은 상자짝들이 여간만 많지를 않아서 주인인 뚱뚱보는 그 재물들을 보살피기에 분주했습니다. 처자식은 물론이고 저 자신마저 돌볼 사이가 없는상싶었습니다.

황길성이와 나는 배전란간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소상강의 수려한 강색을 바라보며 한동안 담담한 향수에 잠겼습니다. 그럴즈음에 불시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우리를 놀래웠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는것입니다. 급히 알아본즉 그 뚱뚱보장사아치의 아들아이가 가지고 놀던 공이 갑판에 떨어져서 톡톡 튀다가 때구루루 굴어 란간밑으로 빠져서 강물에 떨어졌다는것입니다. 그런걸 어린아이는 공을 잡으려는 한 생각만으로 덤비다가 희뜩하는통에 몸의 균형을 잃고 저까지 따라서 강물에 떨여졌던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습니다.

배안은 금시로 왁작해졌습니다. 배군들이 입에다 손나팔을 해대고 배를 세우라고 목청껏 고함들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앞서서 달리는 발동선에서는 기계소리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위기일발의 시각에 내옆에 섰던 황길성이가 잽싸게 웃옷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달리는 배에서 번개같이 물속으로 첨벙 뛰여들었습니다. 발동선의 추진기가 일으킨 물결이 넘실거리는 속에서 제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어린 생명은 가엾게도 목숨이 경각을 달렸습니다. 황길성이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고 헤여갔습니다...

경겁한 나머지 얼빠진 사람같이 돼버린 말라꽹이엄마의 품속에서 흐주루하게 젖은 아이가

<<엄마!>>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둘러섰던 사람들은 후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습니다. 어린아이를 구원하는 수선이 끝난 뒤에 황길성이가 따로 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세수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있을 때 그 아이의 아버지 뚱뚱보가 쫓아왔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겠느냐고 하면서 황길성이에게 여러번 허리를 굽실거렸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지갑에서 10원짜리 지전 한장을 꺼내더니(당시 닭알 한알에 1전 5리 내지 2전이였음) 낯 간지러운듯이 얼굴을 붉히며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저, 약소하지만 이걸...>>

황길성이는 얼른 한손으로 그것을 밀막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짓입니까. 이러지 말구... 어서 도루 넣어두십시오.>>

하지만 그 장사아치량반은 황길성이가 말하는 뜻을 제대루 리해하지 못했습니다. 제나름으로 해석을 하는 모양이였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음 먹고 10원짜리 한장을 더 꺼내서 덧얹으며 의논조로 묻는것이였습니다.

<<이러면 어떨가요?>>

황길성이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웃으면서 구원받은 어린아이를 한번 돌아본 뒤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공까지 건졌더면 더욱 좋았을걸 그러지 못해서 안됐으니 내가 선사하는 셈 잡구 그 돈에서 공 하나를 사서 아들애기한테 주십시오.>>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1941년 정이월, 환남사변 즉 신사군 피습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황길성이와 나는 통칭 <<락판>>이라고 불리우는 팔로군락양판사처에 머무르고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다른 1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황하를 건너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황길성이가 <<신화일보>> 옥색신문지에 실린 주은래동지의 <<천고기원(千古奇冤), 강남일엽(江南一叶), 동실조과(同室操戈), 상전하급(相煎何急)?>>을 읽은것은 바로 거기서였습니다. 다같이 항일을 하는 마당에서 어찌 우군부대에다 그런 독수를 뻗칠수 있겠느냐고 비분강개하는 그 글을 읽고 황길성이는 격동된 나머지에 그만 어린아이같이 엉엉 소리를 내서 울었습니다. 하루밤을 꼬박 새우며 이리저리 돌아눕기만 하다가 급기야 그는 이튿날아침 일어나는 길로 꼿꼿이 판사처 책임동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예정했던 계획을 변경해서 신사군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단호한 어조로 표시했습니다.

황길성이와 나는 죽마고우인만큼 철들며부터 피차의 성질을 손금보듯이 꿰드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는 한걸음 더 심입해서 그의 애국충정이 백열화한것을 보게 됐습니다. 계급감정이 승화해서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사랑도 다 바치리라>>는 경지에 다달은것을 보게 됐습니다. 나는 그 같은 훌륭한 친구와 생사고락을 같이하게 된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황길성이는 마침내 <<락판>>책임동지의 간곡한 권유와 설복에 고패를 빼서 원래 작정대로 팔로군으로 가게 됐습니다.

춘분전후에 <<락판>>과 조선의용대안의 중공지하당조직 사이에 비밀히 련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10여명 사람은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가장하고 그들의 대오에 끼여서 북상을 하게 됐습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도 제한을 받고 또 감시를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보다는 퍽 나았습니다. 어쟀든지 그들은 국제부대였으니까요.

5.1절 전야에 우리 10여병 동지들은 조선전우들을 따라 마침내 태항산의 땅을 밟게 됐습니다. 그 얼마나 그리던 태항산입니까.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는 태항산.

우리가 태항산근거지에 들어온지 두달도 채 아니돼서 맑은 하늘의 벼락 같은 놀라온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히틀러가 독쏘전쟁을 발동했다는것입니다. 황길성이는 지글지글 속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독쏘전쟁 제일선에 자기가 가서 참전 못하는것이 안타까와서였습니다. 쏘련인민에 대한 무한한 동정과 파시스트강도들에 대한 비길데 없는 증오가 얼굴에 현연히 나타났습니다. 그는 국내외의 정치정세와 전국에 대해서 놀랄만큼 민감해졌습니다. 마치 무슨 세계혁명과 운명을 같이하는 정치레이다이기라도 한것 같았습니다. 그 전쟁의 불길이 끊임없이 타번지는 8년항전의 나날에 그는 거의 고향이야기나 부모형제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얼굴에 어찌 웃음이 절로 떠오르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1942년 봄, 황길성이와 나는 태항산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침략군의 발광적인 <<토벌>>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일제히 일떠나서 맞받아싸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넙적다리에 관통총상을 입고 옴짝달싹을 못하게 됐습니다. 단 부저가락 같은 적의 6.8밀리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것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어 아품을 참았습니다. 적의 포위망이 자꾸만 줄어둘어서 아가리가 거의 맞달라붙게 된 위급한 시각에 황길성이가 어떡허다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비발치는 총탄속을 나는듯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른 나를 잡아일으켜서 둘쳐업었습니다.

<<난 내버려두구... 너나 어서 빠져나가!>>

나는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하나 죽는것두 원통한데... 너까지?>>

그러나 황길성이는 화증난 목소리로 한마디

<<미친 소리 말아!>>

꾸짖고는 그대로 나를 업은채 논틀밭틀로 마구 내닫는것이였습니다.

황길성이의 용감성과 완강성으로 해서 마침내 우리는 둘이 다 아짜아짜하게 위험을 모면하고 사경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그통에 황길성이도 한 절반 부상병이 됐습니다. 팔목은 삐였지, 얼굴은 갉혔지... 해도 그는 겨우 이틀을 머무르고 또다시 전투부대로 돌아갔습니다. 떠나기전에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보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안심하구 치료나 잘해. 내 다음번에 올 때는 적의 치중대를 쳐서... 과일통졸임을 갖구 올테니.>>

하지만 그후 반달이 지나서도 황길성이는 적의 과일통졸임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도리여 반대로 그는 자기의 소중한것 하나를-눈알 하나를-잃었습니다. 그가 적과 맞총질을 하는중에 기관총탄에 맞아서 뛰여난 바위돌쪼각 하나가 쌩하고 날아와서 그의 왼쪽눈에 들어박힌것입니다. 의시와 간호원들의 긴장한 응급처치도 효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쌀알만한 돌쪼각이 뾰족한 끝이 면바로 동공에 들어박혔던것입니다.

나는 무어라고 안위를 했으면 좋을지 도무지 할 말이 생각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였습니다! 고향의 부모네와 동기들이 이걸 알았으면 오죽 가슴 아파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꿎은 운명은 우리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황길성이의 처지와는 반대로 내 다리의 총상은 하루가 다르게 아물어서 거의다 나았습니다. 단지 걸음을 겉으려면 아직도 다리를 저는것이 흠일뿐입니다.

나는 작대기 하나를 얻어짚고 절뚝거리며 황길성이를 보러 갔습니다. 황길성이가 들어있는 병동은 마을 아래쪽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병동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그저 보통농가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살며시 떠밀어 열었습니다. 어둑한 방안에는 널문짝을 괴여서 만든 침대명색 셋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에는 어지러운 이부자리만 있고 사람이 없는걸 보니 아마도 바깥출입을 할수 있는 환자인가보았습니다. 중간침대의 죽은듯이 가만히 누워있는 환자는 문을 여닫는 소리만 나고 인기척은 없으니까 베개에서 고개를 조금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알아보자 그는 부지런히 일어나앉으며 반가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 발루 걸어온거야? 요!>>

본즉 그의 얼굴에 한 절반 붕대로 감겨있었습니다. 해도 그의 성한 한쪽 눈은 유난히 밝에 빛났습니다.

황길성이는 얼른 나를 끌어당겨 제앞에 앉히고 우스개소리라도 하듯이 거뜬한 어조로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우린 둘이 다 영광스러운 부상을 했단 말이야, 안 그래?>>

나는 마음이 무거워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째, 기분이라두 좋잖은가?>>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니, 아무렇지두 않아.>>

나는 이렇게 얼버무렸습니다.

황길성이는 안심하듯 내 손을 잡아당기며 경사스레 말하는것이였습니다.

<<하늘이 굽어살폈어. 우린 얼마든지 총을 들구 싸울수 있단 말이야. 내게다 오른쪽눈을 남겨줬으니... 이제 그래 고맙잖고 뭐야. 그러찮았다면 내 이 꼴이 뭐가 될번했어. 넨장!>>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꼭 쥐였을뿐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무슨말을 한단 말입니까?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추억속에 잠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손꼽아 기다리던 옛친구 황길성이가 드디여 우리 집에를 왔습니다. 그가 우리 온 집안 식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는 전이나 마찬가지로 검은색안경을 썼는데 몸이 나서 20여년전에 비하면 몰라보리만큼 비대혀졌었습니다. 머리도 그리 세지 않았고 또 이도 두대밖에 안 빠졌다는것이였습니다. 얼굴은 보기 좋게 불카하고 허리도 꼿꼿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정정했습니다.

그전 같으면 반갑다고 서로 얼싸안고 등을 두드리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피차간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렇게는 안했습니다. 해도 서로 만나는 분위기는 여간만 열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아들에게 박래품 록음기를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차를 내오고 또 담배를 권한 뒤에 안해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제야 황길성이는 방안을 한바퀴 휘 둘러 보고나서 묻는것이였습니다.

<<어째 텔레비죤두 없어?>>

<<여긴 아직.>>

하고 나는 없는 리유를 설명했습니다.

<<보급이 잘 안돼서... 라지오는 어느 집에나 다 있지만... 텔레비죤은 100집에 한두대가 고작이야. 형편이 이런데 하필 그런 면에서 앞장을 설거야 뭐 있어? 한 이삼년 지나서 다시 보지.>>

황길성이는 한동안 덤덤히 앉아있다가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래 대체 아이가 모두 몇이야?>>

<<이제들 보잖았어? 사내녀석 하나에 계집애년 하나...두 남매.>>

<<그래 결혼들은 했는가?>>

<<아니, 아직 다 미혼이야.>>

<<아들아인 그래 뭘 하는가?>>

<<로동자야-자동차공장.>>

<<음. 그럼 딸아인?>>

<<영화관에서 표를 팔아.>>

<<다들 대학공부는 안하구.>>

<<응.>>

황길성이는 또다시 덤덤히 앉아있는데 보아한즉 말할 거리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공백을 내가 메웠습니다.

<<임자네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듣자니 손자를 봤다던데?>>

<<하하, 그래. 난 벌써 할애비노릇을 해. 손자놈은 돌이 갓 지났는데 발육이 여간만 좋잖아. 그리구 마누라는 지난해 정년퇴직을 해서 백분의 75를 받는데... 요즘은 손자놈하구 씨름을 하느라구 분주히 보내지.>>

황길성이는 기분이 좋아서 차를 한모금 마시고 또 려과연 한대를 피워문 다음 내리엮는것이였습니다.

<<맏이녀석은 외과의사구 자부는 소아과의사, 그리구 둘째녀석은 물리연구소 연구생인데 그 녀석의 안해감두 역시 같은 연구생이야. 막내는 계집아인데 요것이 또 똑똑하기가 웬만한 사내 볼 쥐여지를만하지. 지금 신문과에 재학중인데 장래 신문기자야 떼놓은 대상이지... 하하하!>>

잇달아서 그는 흥미진진하게 자기 집 박래품 천연색텔레비죤, 아들들의 경편오토바이, 전기랭장고, 세탁기 그리고 신강인가 서장인가의 특산이라는 모전방장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의 상이년금이 몇프로가 올랐다는것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다수굿하고 앉아서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어쩐지 머리가 띵한게 기분이 좀 별났습니다.

<<...지난날 전생시기 임자나 내나 다 얼마나 고생들 했나. 이루 다 말할수 없는 곤난을 겪었지. 그렇다면 인제 늘그막에 좀 편안한 날을 보내는것두 의당한 일이겠지... 안 그런가? 아이들이 부모의 덕택으루 출세를 좀 한다더라두 뭐 왈가왈부할거야 없겠지... 안 그런가?>>

황길성이는 고개를 젖히고 천정에다 길게 연기를 뿜고나서 다시 말을 잇는것이였습니다.

<<인간이란 환갑이 지나서야 비로소 삶의 도리를 깨닫게 되는 모양이야. 제아무리 진리라구 해두 권력이 뒤받쳐주잖으면 그건 차표없이 차를 타겠다는거나 마찬가지야-목적지에 가닿을수 없어. 그래서 난 아직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안해. 벼슬아치과잉이라구? 그럼 본보기루 70대 80대 로장들더러 먼저 내놓으라지. 우리 60대는 좀 천천히 나중에 내놔두 돼...>>

나는 어쩐지 가슴속에 야릇한 애수가 스며드는것을 느꼈습니다. 황길성이가 락양에서 <<신화일보>>를 펼쳐들고 통곡하던 정경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40년전 오대주 사대양의 소란하고도 보람차던 세계가 어떻게 자그마한 보금자리로, 안락한 소가정으로 줄어들었단 말인가? 그 진리를 탐구하던 용기는 어데로 사라지고 소시민의 용속한 기풍이 판을 친단 말인가? 나는 걷잡을수 없는 사색의 심연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황길성이의 말소리는 어느 아득히 멀고 높은데서 울려오는것만 같았습니다.

홀지에 딸년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쳐 깨여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본즉 그것들 오누이가 신바람이 나서 앞서거니뒤서거니 술에다 안주에다 제가끔 받쳐들고 들어오는중이였습니다. 뒤미처 안사람도 여러가지 별찬을 푸짐하게 날라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손님더러 변변찮은거지만 어서 많이 드시라고 지성으로 권하는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자그마한 환영연회가 내 머리속에서는 흡사 크리스트의 <<최후의 만찬>>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열렬하면서도 또 몹시 암담한 연회였습니다.

밤이 이슥해서 나는 집안식구들과 함께 손님을 바래느라고 일각대문밖에 나섰습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황길성이가 탄 승용차의 명멸하는 미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태까지 어떻게 그와 술잔을 나누고 또 어떻게 그와 담소를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괴이쩍으면서도 고통스러운 하나의 생각만이 내 머리속을 자꾸만 자꾸만 맴돌아치는것이였습니다-벌써 오랜 옛날에, 1945년에, 나는 공산당원 황길성이를 태항산에다 묻어버렸다. 항일의 봉화 타오르는 태항산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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