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2-3

3학년2반 | 2022.03.02 06:59:33 댓글: 0 조회: 39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239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5 장 무당산(武當山)의 검은 구름


며칠이 지나고, 사월 초파일의 아침이 밝았다.

장삼봉은 다음날이 자기의 백세대수(百歲大壽)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비록 유대암이 불구의 몸이 되었고, 장취산이 실종되어
옥의 티라 느꼈지만 이날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가
폐관하여 몰두해 오던 태극공(太極功)도 완성 단계에 이르러 있
었다. 앞으로 태극공을 바탕으로 하여 무당은 소림에 못지않는
빛을 무림에 길이 남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여, 이날 아
침 폐관을 종식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장삼봉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닌, 십 년 동
안 못내 그리워해 오던 장취산이었다. 장삼봉은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순간, 장취산이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오열을 했다.

"사부님!"

그는 너무나 격동한 나머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것까지
잊었다.

송원교 등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스승님, 크게 기뻐해 주십시오. 오사제가 돌아왔습니다."

백 세 고령의 거인 장삼봉! 팔십 년 동안 무도를 닦아온 그는
삼라만상을 보는 마음이 거울처럼 공명(空明)했다. 그러나 뜻하
지 않게 장취산을 대하게 되자 끓어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어
노안(老眼)에 이슬이 맺혔다.

잠시 후.

장삼봉은 제자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말쑥하게 갈아 입었다. 장취산은 이 뜻깊은 날을 맞아 스승님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지가 있는 일은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그
저 빙화도의 신기한 경물을 위주로 들려주었다. 장삼봉은 그가
이미 아내를 맞아했다는 말에 더욱 기뻐했다.

"그럼 네 아내는 어디에 있느냐? 어서 불러오너라."

장취산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허락도 없이 아내를 맞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장삼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너는 빙화도에서 십 년 동안이나 머물렀는데 무슨 수로 나한테
알렸겠느냐? 용서를 빌 필요가 없으니 어서 일어나거라. 장삼봉
의 제자가 그렇게 소견이 좁아서야 쓰겠느냐?"

장취산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의 아내는 출신 내력이 바르지 못합니다. 그녀는
.....천응교 은교주의 딸입니다."

장삼봉은 다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색시의 인품이 그릇되지 않다면
그걸로써 충분하지 않느냐? 설령 인품이 좋지 않다 해도 이곳에
서 생활하다 보면 자연히 우리한테 감화될 것이 아니겠느냐? 천
응교면 어떻느냐? 취산아, 사람은 무엇보다 도량이 좁아선 아니
되느니라. 그리고 명문 정파로 자처하며 다른 문파의 사람을 과
소 평가하는 것도 금물이다. 정(正)과 사(邪)는 본디 애매한 것
으로서 정파의 제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가짐이 옳지 못하면 사도
(邪徒)라 할수 있고, 사파의 인물 중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정인군자가 아니겠느냐?"

장취산은 뛸 듯이 기뻐했다. 십 년 동안 혼자서 감당해 온 마음
의 부담이 스승님의 이 몇 마디로 인해 안개처럼 걷혔다.

장삼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장인 어른이 되시는 은 교주는 나하고 오래 전에 교분을
맺은 바가 있다. 나는 그의 뛰어난 무공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당당한 기남아(奇男兒)임에 분명하다. 비록 성품이 다소 편
파적이며 일을 행함에 있어 편법을 많이 쓰지만, 비겁한 소인배
는 절대 아니다. 우린 얼마든지 그를 친구로 맞아들일 수가 있
다."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종자 하나가 들어와 아뢰었다.

"천응교 은 교주께서 사람을 시켜 장오사숙께 예물을 보내왔습
니다."

"장인 어른이 혼수감을 보내온 모양이구나. 취산아, 어서 가서
손님을 영접하도록 해라."

장취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스승님."

객청에 두 노인이 숙연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인의 차
림새를 하고 있었다. 장취산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일제히 앞으
로 몇 걸음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문안 올리옵니다. 소인들은 은무복(殷無福)과 은무록(殷無綠)
이라 합니다."

장취산은 읍을 하여답례했다.

"어서들 일어나시오."

그는 내심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이상하군. 집에서 부리는 하인배라면 이
름이 평안(平安)이라든가 길복(吉福), 경희(慶喜) 같은 상스러운
것이 대부분인데, 어째서 무복과 무록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두 사람을 살펴보니 모두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나 있었다. 특히
무록은 얼굴이 헐었고, 두 사람 모두 추하게 생겼다. 그들의 나
이는 오십 줄로 보였다.

장취산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빙장, 빙모님도 편안하시죠? 그렇지 않아도 며칠 후에 아내와
함께 두 어르신네를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먼저 이렇게 사람을
보내 주시니 그저 황공할 따름이외다. 두 분은 먼길을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을 텐데 어서 자리에 편히 앉으시오."

은무복과 은무록은 감히 자리에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공손
하게 예단을 올렸다.

"이것은 저희 집 나리께서 보내신 조그마한 예물이니 받아주십
시오."

장취산은 거절할 수 없었다.

"고맙소."

예단을 받아 살펴본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십여 장 이나 되
는 금색 바탕의 예단에 모두 이백 가지가 넘는 예품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첫 번째로 나열된 것은 한 쌍의 벽옥사자(碧玉獅子)이고, 두 번
째는 한 쌍의 비취봉황(翡翠鳳凰)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주보(珠
寶)에 특품 자색 늑대털로 만든 붓 백 자루, 당조(唐朝)때 공품
(貢品)으로 쓰였던 먹(墨) 이십 개, 최고급 쌍지 백 뭉치, 벼루
여덟 개도 적혀 있었다.

천응교주는 이 새로 맞은 사위가 서법(書法)에 능통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최상품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구입해 보내온 것이
다. 그 외에도 옷과 일상용품이 골고루 적혀 있었다.

은무복이 곧 밖으로 나가 잠시 후 건장한 인부 이십 명을 데리
고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틀가락으로 무거운 짐을 옮겨와 차례
로 객청에 차곡차곡 내려 놓았다.

장취산은 웬지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산 속에서 청빈하게 생활해 왔는데 이런 진
귀한 물건들을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하지만 빙장 어른의 후사
이니 사양할 수도 없고.....'

그는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예물을 받았다.

"아내는 긴 여로에 지쳐 지금 누워 있으니 두 분은 이곳에서 며
칠 간 머물며 그녀를 천천히 만나보도록 하시오."

은무복이 그의 말을 받았다.

"저희 어르신네께서는 아가씨의 안부를 하루속히 듣고 싶어하시
기 때문에 소인들은 곧 돌아가야 합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아
가씨를 잠깐만 뵙고 떠나겠습니다."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방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간단하게 치장을 하고 나서 무복과 무록을 만나
부모님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간단한
주반(酒飯)을 대접했다.

은무록과 은무복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작별을 고했다.

장취산은 내심 생각했다.

'빙장, 빙모께서 이렇게 후한 예물을 보내 주셨으니 이 두 사람
에게 거기에 알맞는 후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곳에 있
는 은자를 다 모아도 성의 표시와는 거리가 멀으니.....'

그는 성격이 활달하여 별로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
다.

"빙장, 빙모님께서 가난한 사위를 얻어 두 분께도 변변한 사의
를 표하지 못하니 이 점 널리 양해해 주시오."

은무복이 진지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무당오협을 이렇게 가까이 뵈온 것만
으로도 천금을 시사받은 것보다 더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장취산은 이들의 언동에서 예사 하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직접 중문(中門)까지 전송해 주었다.

은무복은 황송해 하며 몸을 깊숙이 숙였다.

"소인들을 여기서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아가씨께서 하루속히
집으로 오셔서 어르신네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으면 합니다. 본
교의 모든 사람들이 장야(張爺)의 늠름한 모습을 뵙기를 학수고
대하고 있을 겁니다."

장취산은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말수가 적은 은무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한 가지 작은 일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소인들이 이곳까지 오는
도중 양양 각산에서 우연히 표객 세 사람을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장야에 관하여 거론하는 것을 들었습
니다."

"음, 그들이 뭐라고 합디까?"

"그 중 한 사람이, 무당칠협은 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바가
있지만 용문표국의 일은 절대 덮어둘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
은 개봉부(開封府)로 가서 신창진팔방(神愴震八方) 담(譚) 노영
웅을 모셔내 장야께 죄를 문책하겠다고 했습니다."

장취산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 않았
다.

은무록은 갑자기 품 속에서 작은 깃발 세 개를 꺼내 두 손으로
장취산에게 건네주었다.

"소인 형제들은 그 세 사람이 감히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려는 것을 알고, 그 화살을 천응교에게 돌리게끔 조
치를 해놓았습니다."

장취산은 세 개의 깃발을 확인하자 흠칫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첫 번째 깃발에는 포효하는 맹호가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호거
표국을 상징하는 표기였고, 두 번째 깃발에는 구름을 뚫고 비상
하는 백학의 모습이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진양표국
의 깃발이며, 운중백학은 총표두인 운학을 상징한 것이다. 세 번
째 깃발에는 아홉 마리의 금빛 제비가 수놓아져 있으며, 연운표
국의 머리글자 연(燕)자와 총표두 궁구가의 이름에서 따온 아홉
구(九)자가 합쳐져 있는 깃발이었다.

장취산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들의 깃발을 어떻게 갖고 왔소?"

"그들이 감히 장야께 무례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저희 형제가 약간 손을 봐주고 표국의 깃발을 갖고 온 것입니
다."

장취산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궁구가 등 세 사람은 비록 무림의
최고봉 고수는 아니지만, 제각기 절예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빙장 어른이 거느리고 있는 하
인이 그들을 제압하고 표국의 상징인 표기까지 갖고 온 것은 쉽
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이들이 미혼약, 독약 따위의 비겁한 수단을 전개한 것이
아닌가 해서 장취산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이 깃발을 수중에 넣게 된 경위를 얘기해 주겠소?"

은무복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당시 우리 형제 셋은 그들에게 정식으로 도전하여 양양 남문
밖에서 무예를 겨루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만약 그들이 패하며
스스로 한 쪽 팔을자르고 표기를 남긴 채 다시는 호북성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았습니다."

장취산은 들을수록 이들이 예사 하인배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시간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표기를 내놓
고 각자 자기의 왼쪽팔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평생 호북성 안으
로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습니다."

장취산은 내심 섬뜩함을 느꼈다.

'이 천응교의 인물들은 과연 수단이 악랄하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은무록은 그것을 보자 얼른 입을 열었다.

"소인들의 처사가 너무 가벼웠다고 생각되신다면 당장 그들을
쫓아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장취산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그 정도면 상당히 무거운 벌을 내린 셈이오."

은무복이 그의 말을 받았다.

"소인들은 이번에 장야께 예물을 보내는 큰 경사를 맞아 인명을
죽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잘 했소. 조금 전에 형제가 셋이라고 한 것 같은데, 또 한 분
은 어찌 오지 않았소?"

"막내인 은무수(殷無壽)는 행여나 신창 담노인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야를 찾아와 귀찮게 굴까 봐 개봉부로 달려갔습니다. 소
인이 막내를 대신해 장야께 큰절을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은무복은 무릎을 꿇고 넙죽 큰절을 올렸다.

장취산은 읍으로 답례했다.

"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는 내심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신창진팔방 담서래(譚瑞來)는
이미 사십 년 전에 위명을 떨친 노영웅이었다. 은무수가 자기로
인하여 그를 찾아갔으니 쌍방 어느 쪽이 손상을 입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신창진팔방 담 노영웅은 협명을 떨쳐온 정인군자이니, 두 분은
속히 개봉부로 달려가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일을 선처해 주었
으면 고맙겠소."

은무록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 일에 대해선 아무 염려 마십시오. 그 담 영감태기는 감히
저희 막내에게 무력을 행사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겁니다. 막내가
그더러 얌전히 있으라고 한 마디만 전하면 그는 절대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겁니다."

장취산은 반신반의했다.

"그게 사실이오?"

은무록은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담 영감태기는 이십 년 전에 이미 막내에게 패한 적이 있습
니다. 그리고 우린 그의 큰 약점을 쥐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십
시오."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의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장취산은 깃발 세개를 손에 쥔 채 잠시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있
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무기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까
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공연히 이
사형의 위명이 손상될까 봐 신중을 기한 것이다.

그는 곧 천천히 자기의 침실로 돌아왔다. 은소소는 예단을 보고
나서 부모님의 두터운 정에 감격했다. 그리고 무기의 생사 안위
가 생각나자 마음이 한없이 초조했다.

그녀는 남편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온 것을 보자 얼른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장취산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무복 형제들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소?"

은소소는 남편과 혼례를 올린 지 십 년이 되었지만 그가 천응교
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 집안에 대해 줄곧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장취산도 그녀의 집안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지금 남편의 물음을 받자 비로소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
었다.

"그 세 사람은 이십 년 전만 해도 서남(西南) 일대를 휩쓸고 다
니는 대도(大盜)였대요. 하루는 많은 무림 고수들에게 협공을 당
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됐는데, 저의 아버님이 우연히 그곳을 지
나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남자다운 기백을 가상히
여겨 나서서 도와주었대요. 세 사람은 원래 성이 같지 않았어요.
물론 친형제도 아니었죠. 한데 저의 아버님의 구명지은에 보답하
기 위해 평생을 하인으로서 받들겠다면서 예전의 성과 이름을 버
리고 은무복, 은무록, 은무수로 개명한 거예요. 저는 어렸을 적
부터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아버님의 말에 따르면 무
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도 그들 세 사람과 비
교하면 무공이 뒤떨어진다고 하셨어요."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이어 그들 세 사람이 표기를 빼앗아 온 경위를 얘기해 주었다.

은소소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들은 당신에 대한 호의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당
신에게 누를 끼치는 결과가 됐군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명문
정파와 완전히 달라요. 이.....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
르겠군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말을 이었다.

"무기만 찾으면 우리 다시 빙화도로 돌아가요."

이때 밖에서 은이정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오사형! 어서 나와서 스승님의 백 회 수연을 축하하는 글을 몇
줄 써주셔야겠어요!"

그는 낭랑하게 웃고 나서 다시 소리쳤다.

"형수님, 제가 오사형을 데려간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오사형
이 철필은구(鐵筆銀鉤)이니 낸들 어떻게 합니까?"

이날 오후, 사형제 여섯 명은 화공도인(火工道人)과 도동들을
이끌고 자소궁을 말끔히 청소하고, 대청 곳곳에 장취산이 쓴 수
련(壽聯)을 붙었다. 모처럼 무당산 자소궁이 화기애애한 축하 분
위기에 싸였다. 송원교 등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분주하
게 움직였다.

다음날 아침.

송원교 등은 말끔하게 차려입고 유대암을 부축해 함께 스승님께
배수(拜壽)를 하러 가려는데, 도동 하나가 뛰어들어와 명첩을 내
밀었다. 송원교가 명첩을 받았다. 그러나 장송계의 눈이 빨라 그
명첩에 적힌 글을 먼저 읽었다.

----- 곤륜 후학(後學) 하태충(河太沖)과 문하제자가 장진인의
만수무강을 공축합니다. -----

장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곤륜 장문인께서 스승님의 수연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오셨다.
그가 언제 중원으로 들어왔는지....."

막성곡이 얼른 물었다.

"하부인께선 오시지 않았습니까?"

하태충의 부인 반숙연은 원래 그의 동문 사저(師姐)로서 무공이
곤륜 장문인에 못지 않다고 했다.

장송계는 고개를 내둘렀다.

"명첩에는 하부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네."

송원교가 심각하게 말했다.

"우리로선 굉장한 귀빈이니 스승님께 알려 친히 영접토록 해야
겠다."

그는 즉시 이 사실을 장삼봉에게 알렸다.

장삼봉은 다소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철금선생이 좀처럼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늙은이의 생일을 알고 찾아왔을까?"

그는 곧 제자 여섯을 이끌고 영접을 했다.

철금선생 하태충은 생각보다 늙지 않았다. 그는 황색 장삼을 입
고 있었으며 청수한 용모와 더불어 고상한 분위기가 풍겨, 과연
명문 정파의 일대종사(一代宗師)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의 뒤에는 여덟 명의 남녀 제자가 따르고 있었는데 서화자와 위
사랑의 모습도 보였다. 하태충은 장삼봉에게 공손히 축하 인사를
올렸고, 장삼봉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공수로서 답례했다. 송원
교 등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자 하태충도 무릎을 꿇은 채 답
례했다.

장삼봉은 하태충을 대청으로 안내해 차를 대접했다. 이때 도동
이 다시 명첩을 들고 들어와 송원교에게 전해 주었다.

이번에 온 사람들은 공동오로였다.

당금 무림에서 소림과 무당의 명성이 가장 두드러졌고 그 다음
이 곤륜 아미이며, 공동은 그보다 한 차원이 낮았다. 그러나 장
삼봉은 매우 겸허하여 친히 그들을 맞이하게로 했다.

"공동오로가 왔으니 하형은 잠시 앉아 계십시오. 그들을 이리
모셔오겠소."

하태충은 내심 투덜거렸다.

'공동오로 정도면 제자를 시켜 영접해도 될 텐데.....'

잠시 후 공동오로가 제자들을 이끌고 모습을 나타냈다. 이어 신
권문, 해사파, 거경방, 무산방 등등 많은 문파방회의 수뇌 인물
들이 수연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장삼봉은 이렇게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칠십
회, 팔십 회, 구십 회 생일을 맞았을 때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백 회 생일을 맞
아 이렇게 많은 무림 귀빈들이 운집하게 될 줄이야 그 역시 뜻밖
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몰려오는 축하객으로 인해 이젠 손님에
게 권할 의자조차 없었다.

송원교는 사람을 시켜 적당한 바위돌을 주위와 대청에 즐비하게
늘어놓게 했다. 각파의 장문인과 각 방의 방주는 의자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문인, 제자들은 바위에 앉는 도리밖에 없었다. 찻
잔도 부족해 결국 밥그릇으로 대신하는 촌극까지 벌여야 했다.

한참 분주한 가운데 장송계가 갑자기 장취산을 조용한 곳으로
불렀다.

"오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지 못했나?"

장취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글쎄요..... 저들은 마치 사전에 뭔가 약속을 하고 이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서로 회심의 미소를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맞았어. 그들은 진심으로 스승님께 축하를 드리기 위해 온 것
이 아닐세."

"그럼 그 명목을 빌려 용문표국의 일을.....!"

"용문표국에 관한 일이라면 철금선생 하태충까지 동원할 리가
없네."

"음... 그렇다면 금모사왕 사손 때문에 온 것이겠군요!"

장송계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소를 날렸다.

"그들은 우리 무당파를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는 거야. 그들이
제아무리 많은 인원수를 앞세워 밀어부친다 해도 무당제자가 어
찌 친구를 배신할 리가 있겠는가? 오제, 그 사손이 설령 잔악무
도한 대도라 할지라도 자네의 의형인 이상 절대 저들에게 그의
행적을 노출시켜선 아니 되네."

장취산의 표정은 무거웠다.

"사사형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되죠?"

장송계는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선 상황에 따라 신중을 기하는 도리밖에 없네. 우리
형제 일곱이 힘을 합치면 제아무리 큰 풍파가 몰아닥친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네."

유대암은 비록 불구가 되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무당칠협으로 자
처했다.

한편, 대청안에서 손님을접대하고 있는 송원교, 유연주, 은이
정 세 사람도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때 도동이 다시 들어와 보고했다.

"아미파의 제자 정현사태(靜玄師太)가 동문 다섯 분과 함께 사
조의 수연을 경축하기 위해 당도해 있습니다."

송원교와 유연주는 일제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은이정을 쳐다
보았다. 곧이어 막성곡이 팔, 구 명의 손님을 안내해 들어왔고,
장취산, 장송계도 내당에서 걸어나와 아미파이 제자가 왔다는 소
식을 듣고, 역시 은이정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은이정은 얼굴이
붉어지면 매우 어색해 했다.

장취산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자, 우리 함께 귀빈을 맞으러 가세."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갔다.

정현사태는 나이가 사십 줄이며, 비록 여자지만 보통 나자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클 정도로 몸집이 우람했다. 그녀의 뒤에는
다섯 명의 사매와 사제가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설흔 살 가
량의 깡마른 남자며, 둘은 여승으로서 그 중 하나는 장취산이 배
에서 본 적이 있는 정허사태였다. 나머지 둘은 모두 스무 살 정
도의 낭자인데, 한 사람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있고,
한 사람은 피부가 백설 같으며 용모와 몸집이 빼어난 데다가 시
종 고개를 숙인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은이정과 혼약을 정한 기효부(紀曉夫) 낭자였다. 장취산이 앞으
로 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여섯 명을 안으로 안내했다. 은이정
은 매우 쑥스러워하며 기효부에게 감히 눈길도 주지 못했다. 일
행이 복도 아래 이르자 그는 맨 뒤로 쳐져 비로소 슬며시 기효부
를 쳐다보았다. 마침 기효부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에게 눈
길을 주는 바람에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장송계는 줄곧 상황 분석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미파의 제자들
이 당도한 것을 알고 다소 마음이 놓였다.

'기 낭자는 육사제와 혼약을 한 사이이니, 나중에 상황이 악화
돼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아미파는 우리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
이다.'

각처에서 손님이 계속 몰려드는 가운데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자소궁 쪽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 군호들에게 주연을 베
풀 수가 없었다. 무당의 여섯 제자는 군호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했다. 그런데 군호들은 식사를 하면서 계속 대청 밖을 힐끔힐끔
쳐다 보았다.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송원교는 이미 모든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각 문파, 각 방
회의 수뇌 인물들은 자신의 신분을 고려해 무기를 지니지 않았지
만, 문하제자들은 대부분 허리가 불룩한 것이 무기를 숨기고 있
는 게 분명했다. 단지 아미, 곤륜, 공동 삼파의 제자만이 전부
빈손일 뿐이었다.

송원교 등은 내심 분노를 금치 못했다.

'스승님께 축수를 하러 온 자들이 무기를 몸에 숨기고 있다
니.....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와 인연을 맺은 고수들을 초
청하는 건데.....'

사실, 송원교 등은 스승님의 수연을 조용히 마친 후 영웅첩을
띄워 무창(武昌) 황학루(黃鶴樓)에서 영웅대연(英雄大宴)을 개최
할 계획이었다. 그 자리를 빌어 장취산이 친구를 배신할 수 없는
고충을 털어놓으면, 의(義)를 중요시하는 무림인들이라 더 이상
장취산을 몰아부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령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가 있다 해도 그 자리엔 무당과 교분이 두터운 고수
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므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
다. 한데, 군호들은 그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스승님
의 백 회 수연을 명분삼아 느닷없이 몰려들었으니.....

장송계가 나직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해 한판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
을 겁니다."

무당칠협 중에 장송계의 계략이 가장 뛰어났다. 매번 어려운 일
에 봉착되면 그가 절묘한 수를 생각해 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유연주가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사제마저 속수무책이라면 오늘 무당산에 일대 혈전이 물가피
한 모양이군."

만약 일 대 일의 상황이라면 지금 이곳을 찾아온 군호중에 아무
도 무당육협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이십 대 일, 심지어 삼,사십 대 일이 아닌가! 장송계는 유연주의
소매를 잡아 끌어 뒷청으로 들어갔다.

장송계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사형, 아무래도 오늘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유연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무엇보다도 삼제를 보호하는 게 중요하
네. 그 일은 자네가 맡게. 그리고 오사매의 몸도 불편하니 오제
더러 그녀를 보살피라고 하게. 적을 상대하는 일은 우리 넷이 맡
겠네."

장송계는 그의 의견을 반대하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끝을 흐리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었다.

"한 가지 비상수단이 있는데 다소 위험 부담이 따를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위험 부담을 안는 게 대수겠나? 무슨 묘책
인지 어서 말해 보게."

"우리가 각자 상대를 한 사람씩 골라 단 일초식에 제압하는 겁
니다. 물론 고수를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상대방의 기를 꺾
어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끔 기선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초에 제압하지 못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덤
벼들 텐데..... 그것도 고수를 단 일초에....."

"그래서 호조절호수를 사용하자는 겁니다!"

유연주는 이 말을 듣자 전신에 한 차례경련이 일었다.

"뭣이? 호조절연수!? 오늘은 스승님의 수연을 축하하는 뜻깊은
날인데 어떻게 그런 악랄한 살수를....."

무당파에는 한 가지 무서운 금나수법이 있었다.

호조수(虎爪手)!

유연주는 스승님으로부터 이 호조수를 전수받은 후 그것을 바탕
으로 하여 스스로 열 두 가지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냈다. 장삼
봉은 제자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앞서 우선 자질, 품행, 성격,
오성(悟性) 등을 분석하여 거기에 알맞는 지도를 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들은 모두 대기(大器)로 성장할 수 있었고, 비단 스승
님의 무학을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니 유연주가 호조수로 새로운
초식을 변화시킨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삼봉은 그가 새로운 초식을 펼쳐 보인 후에 단지 고개
만 끄덕일 뿐 아무런 평도 하지 않았다. 유연주는 스승님의 태도
에서 필시 이 초식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심혈을 기
울였다. 몇 달 후에 그는 다시 스승님께 초식을 펼쳐 보였다.

장삼봉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었다.

"연주야, 이 열 두 초식의 호조수는 내가 가르친 것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다. 하지만 초식마다 상대의 요안혈(腰眼穴)을 노리
고 있어 누구를 막론하고 이 초식에 당하게 되며 음호(陰戶)가
손상되어 대가 끊이게 될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정대광명한 무
학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느냐? 구태여 남의 대를 끊이게 하는 이
런 초식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겠느냐?"

유연주는 스승님의 훈계를 듣자 비록 엄동설한이었지만 등줄기
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
서를 빌었다.

며칠 뒤에 장삼봉은 일곱 명의 제자를 모두 가까이 불러 이 일
에 관해 얘기해 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연주가 만들어 낸 이 열 두 가지 초식을 명실공히 절학(絶學)
임에는 분명하다. 만약 내 한마디로 인해 영원히 폐기된다면 아
까운 일이니 모두들 연주에게 배우도록 해라. 단지 생사 위기가
아닌 이상 절대 경솔하게 사용하지 말아라. 그런 의미에서 "호
조" 두 글자 아래 절호(絶戶)라는 두 글자를 더 붙일 테니 이 무
공이 상대방의 대를 끊게 하는 멸문절호(滅門絶戶)의 살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느니라."

당시 일곱 제자는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겠다고 대답했으며 유연
주로부터 그 호조절호수를 전수받았다. 물론 그들은 스승님의 분
부에 따라 여지껏 그 살수를 한 번도 전개한 적이 없었다. 한데
오늘 긴박한 상황을 맞아 장송계가 제의를 하니 유연주가 선뜻
승락을 하지 못하고 망설여지게 된 것이다.

장송계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 호조절호수를 전개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원히 생육을
못하게 할 우려가 있으니 우린 화상이나 도인, 아니면 칠, 팔십
세 된 노인을 상대로 택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유연주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자네의 생각은 빈틈이 없군. 화상과 도인이라면 생육을
하지 못하게 되도 상관이 없겠지."

두 사람은 결정을 내리고 나서 곧 이 계획을 송원교 등에게 알
렸다.

그들은 제각기 상대를 한 명씩 정했다. 장송계가 짤막한 외침으
로 신호하면 동시에 호조절호수를 전개해 상대방을 제압하기로
약속했다. 유연주가 선택한 상대는 공동오로중에 나이가 제일 많
은 관능(關能)이고 장취산이 선택한 상대는 곤륜파의 서화자였
다.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자 화공도인들은 뒷치닥거리를 하느라고
분주했다.

이때 장송계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 선배님, 그리고 여러 친구들, 오늘 저희 스승님의 백 회
수연을 맞아 이렇게 불원천리 찾아와 축하해 주신데 대하여 뭐라
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준비가 소홀해 여러분들
을 융숭히 대접하지 못한 점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차후에 무창
황학루에서 여러분들을 다시 모시고 오늘의 불찰을 보충할까 합
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의 오사제인 장취산은 중원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 십 년 동안 겪은 일을 아직 스
승님께도 소상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오늘은 스승님
의 뜻 깊은 날이니 만큼 무림의 은원에 관해선 언급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모처럼 무당을 찾아주신 여러분들이니
저희들이 모시고 사채를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장송계는 우선 말로서 군호들의 행동을 묶어둘 생각이었다.

주위는 금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군호들은 아미파
를 제외하고 모두 금모사왕의 행방을 추궁할 목적으로 이곳에 모
인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일전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러나 막상 장송계의 조리정연한 발언에 선수를 빼앗기자 서로 마
주 보며 누가 먼저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침묵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곤륜파의 서화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장사협,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린 이곳에 온 목적을 확실히
밝히지 않을 수가 없구료.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장진인의 수연
을 축하하기 위함이지만, 아울러 사손의 행방을 묻는 것도 우리
에겐 중요한 일이외다!"

막성곡은 여지껏 참고 있다가 그의 말에 대뜸 냉소를 날렸다.

"흥! 역시 그랬었군! 어쩐지....."

서화자는 이내 눈을 부라렸다.

"뭐가 어쨌다는 건가?"

막성곡은 즉시 쏘아부쳤다.

"여러분들이 수연을 축하하려 오면서 암암이레 무기를 숨기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처음부터 서로
작당하여 혈풍(血風)을 일으키기 위해 온 것이로군!"

서화자는 그 자리에서 허리띠를 풀며 싸늘하게 외쳤다.

"막칠협 똑똑히 보게! 그 나이에 벌써부터 생사람을 잡으려 하
다니..... 우리가 무기를 숨기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단
말인가?"

막성곡은 냉소를 날렸다.

"흥! 그렇군요! 과연 무기를 숨기지 않았군요!"

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의 곁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그의 출수는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챙!

금속성이 들리며 두 자루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막성곡이
튕겨낸 지풍이 두 사람의 허리춤을 절단시켰으며 그 즉시 옷 속
에 숨겨둔 무기가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급변했다. 자연히 분위
기가 긴장되고 서화자는 발악을 하듯 소리쳤다.

"그래! 만약 장오협이 사손의 행방을 솔직히 실토하지 않는다면
일장 혈전도 불가피할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장송계는 공격 신호를 보내려 했다. 한데
난데없이 문 밖에서 불호(佛號)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이 소리는 멀리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가
까이서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고막이 진동
되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삼봉이 잔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이제 보니 소림의 공문선사가 오셨군. 어서 영접해라!"

문 밖에서 그 웅후한 내력이 담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소림사 주지 공문이 사제 공지, 공성과 함께 문하제자들을 이
끌고 장진인의 천추장락(千秋長樂)을 공축하려 왔소이다."

소림의 사대신승(四大神僧) 중에 공견대사는 이미 죽였고, 나머
지 삼승이 전부 무당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장송계의 놀라움은 컸다. 그는 공격 신호를 미처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소림의 절정고수가 무당에 나타난 이상 설령 자기네들의
호조절호수로 곤륜, 공동 등의 고수를 제압해도 대국(大局)에 도
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곤륜파의 장문인 하태충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소림신승의 청명(淸名)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는데, 오늘 이렇
게 만나뵙게 되어 실로 광영이로소이다."

문 밖에서 이내 회음(回音)이 들려왔다.

"곤륜 장문인 하선생이구료.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장진
인, 빈승들이 늦게 당도한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

장삼봉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오늘 세 분 신승의 축하까지 받게 되니 백 년 동안 헛되게 살
아온 것이 새삼 부끄러워지는구료."

이들 몇 사람은 수십 장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내력으로써 문답을
하여,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미파의 정현
사태, 정허사태, 공동오로 등은 공력이 미치지 못해 감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놀라
고 감탄할 뿐이었다.

장삼봉은 곧 제자들을 이끌고 마중나갔다. 소림사의 삼신승이
아홉 명의 승인을 이끌고 천천히 자소궁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
다. 공문대사는 백미가 눈을 가려 마치 장미나한(長眉羅漢) 같았
다. 공성대사는 몸집이 우람하고 용모 또한 위맹스러웠다. 한편,
공지대사는 입술이 아래로 축 쳐져 고상(苦相)이었다.

송원교는 내심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풍수지리와 관상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상례로 보아 공지대사 같은 고상은 단명이라 하는데, 장수를
누리고 있을 뿐아니라 무림의 존경을 받는 종사(宗師)이니 관상
학도 역시 한계가 있는 모양이군.'

장삼봉과 공문대사 등은 모두 무림의 대종사였다. 그러나 서로
직접 대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이로 논한다면 장삼봉은
그들보다 삼, 사십 년 연상이었다. 그는 소림 출신으로서 만약
스승인 각원대사의 배분으로 배열한다면, 공문보다 두 배분이 높
았다. 하지만 장삼봉은 소림에서 수계(受戒)하여 승적에 오른 일
도 없으며, 정식으로 소림 승려에게 무학을 배운 적도 없기 때문
에 서로 평배로서 상견례를 올렸다. 자연히 송원교 등은 한 배분
아래가 되었다.

장삼봉은 공문 등을 대 Ц아로 안내했다. 공문 등은 하태충, 정
현사태, 공동오로 등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군호들의 수가
워낙 많아 인사를 나누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문 등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공문이 넌지
시 입을 열었다.

"장진인, 빈승 등은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모두 장진인의
후배로소이다. 오늘 이렇게 뜻깊은 날을 맞아 다른 얘기를 거론
하지 않는 게 예의인지 알면서도, 빈승은 소림의 장문인으로서
장진인께 허심탄회하게 몇 마디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넓은 아량
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장삼봉은 성품이 호상(豪爽)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반문했다.

"세 분 고승은 혹시 나의 다섯째 제자 장취산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까?"

장취산은 스승님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공문대사도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장오협에게 두 가지 일을 묻고자 합니다. 첫째,
장오협이 우리 소림의 용문표국 일흔 한 명의 목숨과 문중제자
육인을 살해한 행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묻고 싶소이다. 둘
째, 빈승의 사형이신 공격내사는 평생을 자비와 덕으로 일관해
오며 누구와도 다툼이 없으셨는데 금모사왕 사손에게 죽음을 당
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장오협이 사손의 행방을 알고 있다 하
니 솔직히 밝혀주길 바라는 바입니다."

장삼봉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장취산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문대사, 용문표국과 소림 승인의 죽음은 후배와 무관합니다.
나 장취산은 스승님의 엄한 가르침을 받아 비록 우둔하지만 여지
껏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흔 일곱 명의 목숨
을 앗아간 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지만 밝힐수가 없습니다. 이
상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두 번째로 공견대사께서 원
적(圓寂)하신 것에 대해 후배도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통을
금치 못했습니다. 다만 그 금모사왕 사손은 후배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
니다. 그러나 우리 무림인의 의(義)를 중요시하는 만큼 나 장취
산은 목이 잘라져 피를 뿌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의형의 행방
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은사님과 동문들은 이번일과 무관하니 모든 것을저에게만
문책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녕 나 장취산으로 하여금 불의
(不義)를 저지르게끔 궁지로 몰아넣겠다면 죽음을 불사하겠습니
다."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장취산의 얼굴은 정기(正氣)
로 충만돼 있었다.

공문은 나직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그는 장취산의 언동에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기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지 몰랐다.

바로 이때였다. 장취산의 귓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
었다.

"아버님!"

그 외침소리는 지극히 미약했지만 분명 대청 앞쪽 창 밖에서 들
려온 것 같았다. 장취산의 전신에 한 차례의 경련이 일었다. 그
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어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무기야, 네가 돌아왔느냐?"

그는 곧장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산파와 신권문의 제자 중에 몇몇이 대청 입구에 서 있었는데,
장취산이 도망가려는 줄 알고 일제히 소리쳤다.

"달아날 생각 말아라!"

그들은 잽싸게 장취산에게 금나수법을 전개했다. 장취산은 아들
의 안위가 급해 그들 몇몇을 좌우로 밀어붙이며 대청 밖으로 뛰
쳐나갔다. 그러나 대청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리 높여 외쳤다.

"무기야! 무기야!"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청 안에 있던 십여 명이 그의 뒤를 쫓아왔으나 그가 달아날
것 같지 않아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한쪽에서 감
시만 했다.

장취산은 다시 목을 놓아 소리쳤다.

"무기야! 무기야!"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은소소는 이때 몸이 어느 정도 완쾌되어 후당에 있었는데, 남편
의 외침소리를 듣자 황급히 달려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무기가 돌아왔나요?"

"분명히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달려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
는구료."

은소소는 크게 실망하며 울적하게 말했다.

"그 애 생각에 집착하다 보니 잘못 들은 모양이예요."

장취산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
렸다.

"분명히 들었는데....."

그는 행여나 아내로 인해 일이 더욱 복잡해질까 봐 넌지시 등을
밀었다.

"당신은 후당에 가 있도록 하시오."

그는 다시 대청 안으로 돌아와 공문에게 몸을 숙였다.

"후배는 아들 생각에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으니 용서해 주십
시오."

공지대사가 그의 말을 받았다.

"천지만물의 이치는 같은 것! 장오협이 자식 생각으로 인해 가
슴 아파한다면 그 사손에게 살해된 많은 사람들의 부모 형제의
마음도 헤아려 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그의 몸집은 깡말랐지만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아 듣는 이의 고막
을 진동시켰다.

공문대사가 직접 장삼봉에게 물었다.

"장진인, 오늘의 일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좋을지 가르침을 주시
겠습니까?"

장삼봉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의 제자는 비록 두드러진 게 없지만 감히 스승을 기만하거나
세 분 고승 앞에서 거짓말을 입 밖에 내진 못할 것이오. 용문표
국의 인명과 귀파 제자의 죽음은 그의 소행이 아닌 것 같소. 그
리고 사손의 행방에 대해선 결코 언급을 하지 않을 모양이외다."

공지대사가 냉소를 날렸다.

"장오협이 본문 제자를 살해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자가 있는
데, 그럼 무당파의 제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소림파의 승인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의 손짓에 따라 즉시 세 명의 중년 승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
다. 그들은 모두 오른쪽 눈을 잃었으니 바로 십 년 전 서호변에
서 은소소에게 은침 세례를 받았던 원광, 원음, 원업이었다. 장
취산은 이들이 공문대사를 따라온 것을 벌써 보았으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장취산은 괴로왔다. 당시 서호변에서 살수를 전개한 것은 자기
가 아니지만 그 흉수는 이미 자기의 아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내의 행위를 감싸주자니 영락없이 자기가 누명을 뒤집어쓸 것
이고, 사실을 털어놓자니 아내에게 화가 미칠 게 명약관화한 사
실이다.

원자 배분 삼 승려 중에 원업의 성질이 예전부터 가장 거칠었는
데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즉시 장취산에게 삿대질을 하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장취산, 네가 임안 서호변에서 독침으로 본문 제자를 죽이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이제 와서 부인 할 작정이냐?
우리 세 사람의 눈은 바로 네가 전개한 독침에 이 모양이 됐는데
도 잡아뗄 생각이란 말이냐?"

장취산은 최선을 다해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무당파에서 사용하는 암기는 비록 종류가 적지 않지만 모
두가 강표 혹은 수리전(袖裡箭) 같은 모양이 큰 것이오. 그리고
우리 사형제들이 여지껏 강호에서 활동하며 금침을 알기로 사용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더군다나 독을 묻힌 금침은 아예 상상
조차 할 수 없소!"

무당칠협의 광명정대함을 모르는 강호인은 없었다. 그러므로 장
취산이 독침으로 누구를 기습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
이었다.

원업은 울화가 치밀어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래도 억지 변명을 하겠다는 거냐? 그날 분명히 네가 독침을
전개하는 것을 보았는데, 만약 네가 아니라면 그게 누구란 말이
냐?"

장취산은 원업보다 입심이 좋았다.

"귀하의 제자가 독침을 맞은 일을 갖고 무당 제자더러 가해자를
밝히라고 억지를 쓰니, 세상에 이런 법도도 있단 말이오?"

원업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갈수록 말이 뒤죽박죽
되었다. 본디 소림파가 정정당당하게 따져야 할 일을 갖고 나중
에는 억지를 부리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장송계가 끼어들었다.

"원업대사, 도대체 몇 명의 소림제자가 누구에게 암습을 당했는
지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본인의 사형인 유대암이 소림
파 금강지력에 중상을 입은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외다. 그렇지
않아도 그 금강지력으로 본인의 삼사형을 암습한 자가 누구인
묻고 싶었는데 마침 잘 오셨소이다."

원업은 어이가 없는지 입이 딱 벌어졌다.

"나는 아니오!"

장송계는 코웃음을 쳤다.

"원업대사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 그 정도의 실
력을 아직 쌓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말끝은 멈칫하더니 다시 이었다.

"만약 본인의 삼사형이 온전한 몸으로 귀파의 고수와 겨루어 금
강지력에 당했다면,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설령 목숨을 잃었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삼사형은 이미 중상을 입어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귀파의 제자
는 금강지력으로서 사지를 절단시켜가며 도룡도의 행방을 추궁했
소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음성을 높였다.

"소림파의 무학이 천하 으뜸이니 일찍이 무림지존으로 군림했을
텐데, 왜 구태여 그 도룡도까지 욕심을 부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
소이다. 게다가 본인의 삼사형은 그 도룡도를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인데, 귀파의 제자가 그런 잔인한 수단을 전개했으니 너무 지
나쳤다고 생각되지 않소이까? 십 년 전만 해도 유대암이란 이름
석자는 그런대로 강호에 알려져 있었으며 평생을 협의도의 본분
을 살려 무림을 위해 이바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구의
몸이 되어 십 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세
분 신승께서 어떻게 답변을 하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유대암의 부상과 용문표국의 멸문지화로 인해 그 동안 소림과
무당은 설권을 숱하게 벌였었다. 그러나 장취산의 실종으로 인해
차츰 흐지부지되었는데, 오늘 원업이 기세등등하게 나오자 장송
계도 지난일을 끄집어 낸 것이다.

공문대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 일에 대하여 전에도 언급했듯이 본문의 제자를 일일이 불러
문책했지만, 어느 누구도 유삼협을 가해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
네."

장송계는 품안에서 그 금강지가 찍힌 금덩어리를 꺼내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영웅들은 똑똑히 보십시오. 나의 삼사형을 가해한 자는
바로 이 금덩어리에 금강지력을 남긴 소림제자입니다. 소림의 금
강지력을 제외하고 어느 문파의 무학으로 이런 금덩어리에 손자
국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원업 등이 장취산을 흉수로 몰아붙이는 것은 일방적인 증언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송계는 확고한 물증을 제시했으니 군호들에
게 주는 호소력이 훨씬 강했다.

공문의 눈가에 보이지 않게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아미타불..... 본문에서 금강지력을 연성한 자는 빈승 사형제
셋을 제외하고는 세 분의 선배 장노뿐인데, 그 분들은 소림에서
두문불출한 지 이미 삼,사십 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유삼협을 가
해할 수 있단 말인가?"

막성곡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대사께선 저의 오사형의 말을 믿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변명으
로 단정지으셨는데, 대사께서 하신 말씀이 일방적인 변명이 아니
라고 어떻게 증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공문대사는 역시 수양이 깊었다. 막성곡의 언동이 다소 불경하
다고 느껴졌지만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막칠협이 노승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가 없네."

막성곡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후배가 어찌 감히 대사의 말을 믿지 않겠습니까? 단지 세상사
가 천변만화하여 왕왕 허허실실을 종잡을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귀파는 문중제자가 저의 오사형에게 살상당했
다고 생각하고, 우린 삼사형이 소림 고수에게 가해되었다고 믿고
있으니 어쩌면 쌍방이 모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곡절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후배의 의견으론 좀더 오랜 시간을 갖고 이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소림과 무당의 화기
(和氣)가 손상되지 않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
약 경솔하게 단정을 지었다가 나중에 진상이 밝혀진다면 후회해
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막칠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가 싸늘하게 외쳤다.

"그럼 공견사형의 혈해지원(血海之怨)은 어떻게 할 건가? 장오
협, 용문표국의 일은 일단 덮어두기로 하겠지만 그 잔악무도한
사손의 행방만은 어떠한 경우에도 밝혀야 할 걸세!"

유연주는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분위기가 다시 긴장되자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도룡도가 사손의 수중에 없다 해도 대사께선 이런 강
압적인 방법으로 그의 행방을 추궁하시겠습니까?"

그는 단 두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도 상당한 의미가 내포돼 있
었다. 다시 말해, 공지가 도룡도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
로 지적한 것이다.

공지대사는 발끈하여 냅다 탁자를 내리쳤다.

퍽! 우지끈!

탁자의 다리가 일제히 부러지면서 산산조각났다. 실로 대단한
장력이었다. 곧이어 그의 노기에 찬 음성이 대청안을 진동시켰
다.

"진인의 무학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얘기
를 오래 전부터 전해 듣고 흠모해 왔소이다. 과연 그 말이 사실
인지 오늘 천하의 영웅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빈승이 한 수 가르
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내뱉어지자 대청 안에 모인 군호들은
웅성거렸다. 장삼봉은 칠십 년 전에 이미 강호에 명성을 떨쳤었
다. 왕년에 그와 무학을 겨루었던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무학이 어느 정도인지, 일곱 제자를 제외하고는 아
는 자가 없었다. 단지 전설에 가까운 여러 가지 소문이 강호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군호들은 자연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장삼봉이 공지의
도전을 받아줄지, 모두들 기대에 찬 눈으로 장삼봉을 주시했다.
그러나 장삼봉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흘릴 뿐 이렇다 할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공지대사는 그의 여유있는 모습에 기가 꺾였는지 얼른 다음 말
을 이었다.

"장진인의 무학이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소림 삼승은 장진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군호들은 이 말에 내심 혀를 내찼다.

'그럼 그렇지! 공지 혼자서 장삼봉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계란으
로 바위를 깨는 격이지.....'

어쨌든 소림 삼승이 장삼봉과 자웅을 겨루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유연주가 나왔다.

"오늘은 스승님의 백 세 수연인데 어찌 하객과 무학을 겨룰 수
있겠습니까.....?"

"무당이 감히 소림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그러나 유연주가 이은 다음 말에 군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하지만 소림의 도전을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무당 칠 제
자가 무림 십 이 고승의 절학을 직접 가르침 받겠습니다."

군호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공문, 공성, 공지 삼신승이 제자 아홉 명을 이끌고 왔으니 모두
열 두 명이었다. 그 반면 유연주는 무당칠제라 했지만 유대암이
이미 불구가 됐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여섯 명에 불과했
다. 그렇다면 여섯 명이 열 두 소림 고수를 상대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군호들의 생각으로는 무당육협 쪽에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러나 유연주는 그 나름대로 깊이 생각한 연후에 내린 결정이었
다. 그는 소림 삼신승의 공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정녕 장진인께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다면, 우리 사형제 셋이
무당육협 중에 셋과 겨루어 승부를 판가름 짓겠소!"

장송계가 얼른 나섰다.

"기어이 대사께서 우리와 싸움을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 들이겠
습니다. 그대신 우리 무당칠제자 중에 소림제자에게 독수를 당해
병상에 누워 있는 삼사형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은 어느 누구도
뒷전으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여섯 판을 겨루어 승부
를 결정짓도록 합시다."

막성곡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무당 육제자가 소림의 여섯 고승을 상대하여 여섯
판 중에 네 판을 이기는 쪽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무
당이 패하면 오사형께서 금모사왕의 행방을 소림 장문인께 밝힐
것이며, 만약 소림이 양보를 하게 될 경우에는 수고스럽지만 삼
신승께서 축하를 핑계삼아 평지풍파를 일으키려는 친구들을 이끌
고 함께 하산해 주시길 바랍니다."

장송계가 제의한 대전 방법은 당연히 무당 쪽에 유리했다. 대사
형과 이사형의 무공은 승과 비슷할 것이고 나머지 소림승은 세
판을 패할 게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지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 방법은 적합하지 않소. 그러나 어째서 적합하지 않은지는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이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공문대사가 송원교를 향해 입
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소림 육승이 무당육협을 상대해서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어떻겠소?"

송원교는 잽싸게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무당육협이 아니라 무당칠협입니다."

공지는 이 말에 흠칫 놀랐다.

"그럼 영사 장진인께서도 출장하시겠다는 뜻이오?"

송원교는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사의 그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스승님과 겨룰 수 있는 사람
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삼사제는 비록 중상
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지만 본문의 생사영욕(生死榮
辱)이 달린 이 일전에 수수방관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직접 출전하지 못할 망정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울
겁니다.

공문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무당에는 장삼봉과 일곱 제자 외에 다른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무당칠협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문파
의 고수를 끌어들이진 않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소림칠승이 무당칠협의 가르침을 받겠소!"

유연주, 장송계 등은 송원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장삼봉이 창안해 낸 무공 중에 진무태극칠성진(眞武太極七星陣)
이란 절학이 있었다. 무당파는 진무대제(眞武大帝)를 공봉(供奉)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삼봉은 진무대제 신상(神像)앞에 있는 구사이장(龜
蛇二將)을 보고 두 갈래의 물줄기가 모이는 곳에 사산(蛇山)과
구산(龜山)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뱀(蛇)은 듬직하여 정
(靜)을 상징하니 즉, 태극(太極)의 음양과 일맥상통되었다.

장삼봉은 그 길로 밤을 세워 한양(漢陽)으로 달려가 사산과 구
산을 유심히 살폈다. 보름 가량 살핀 결과, 사산의 끝없이 이어
진 굴곡지세(屈曲之勢)와 구산의 은중지형(隱重之形)을 참작하여
한 가지 절묘한 무공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한 가지 난관에 봉
착되었다. 사산과 구산의 천변만화한 기상과 산세에 바탕을 두어
무공을 만들어 내니 삼라만상이 집대성되어 한 사람의 힘으로선
도저히 그 무학을 동시에 펼칠 재간이 없었다.

장삼봉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양자강과 한수가 굽어보이는 절
벽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음불식불면(不飮不食不眠)하며 꼬
박 삼주야를 심사했지만 여전히 이 난제에 대한 열쇠를 얻지 못
했다. 나흘째 되는 날, 동녘 하늘에 먼동이 터오자 금빛 찬란한
햇살이 수면에 반사되어 무수한 금파(金波)를 형성했다. 순간 장
삼봉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일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즉시 무당산으로 돌아가 일곱 제자를 가까이 불러 각자에
게 한 가지씩의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이 일곱 가지 무공을 개
별적으로 펼쳐도 그 나름대로의 오묘함이 있지만 만약 두 사람이
상부상조하여 공수 겸비한 상태에서 시전하면 그 위력이 배로 증
가된다. 세 사람이 동시에 펼칠 시에는 두 사람이 협력하는 것보
다 위력이 다시 배가된다. 넷이서 연수하면 여덟 고수의 위력과
맞먹고 다섯이면 열 여섯에 상당하며, 여섯일 경우에는 서른 두
명의 몫을 해낼 수 있었다. 자연히 일곱 명이 동시에 시전하게
되면 육십 사 명의 당세 일류 고수가 동시에 출수하는 것과 마찬
가지였다.

무당칠협은 강호 출도 이래 제아무리 무서운 강자를 만나도 둘
내지 셋이 연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정도로서 충분히 강적
을 퇴치시킬 수 있었으므로이 진무태극칠성진을 한 번도 정식으
로 펼친 적이 없었다.

지금 송원교는 상황을 판단하여 소림 삼신승을 꺾기 위해선 부
득이 이 무당의 진산지학(鎭山之學)인 진무태극칠성진을 선보이
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공문대사가 승락을 하자 곧 포권의 예를 취했다.

"여러분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가서 삼사제로 하여금 일시
로 한 사람을 내세우게 하여 무당칠제자의 수를 보충 하고자 합
니다."

이어 유연주 등에게 눈짓을 보내고 일제히 장삼봉에 인사를 올
리고 나서 내당으로 들어갔다.

사형제들만의 자리를 갖게 되자 막성곡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사형, 오늘 진무태극칠성진을 펼쳐야 하는데 누구를 내세워
삼사형을 대신케 할 생각입니까?"

송원교는 사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일은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지어야 하니, 각자 손바닥에다
이름을 적어 동시에 펼쳐 보이는 게 어떻겠는가?"

막성곡은 즉시 붓을 갖고 와 대사형께 건네주었다. 송원교는 손
바닥에다 이름 하나를 적고 나서 주먹을 쥐며 붓을 유연주에게
돌렸다. 이렇게 하여 각자 이름을 적고 나서 동시에 손을 폈다.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 세 사람은 모두 <오사매>라고 적었다.
장취산은 <내자>라는 두 글자를 썼다. 결국 동일 인물이었다. 한
데, 은이정은 주먹을 꼭 쥔 채 얼굴만 붉히고 있을 뿐 좀처럼 손
을 펴려 하지 않았다.

막성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이상한데요. 갑자기 손아귀에 보물 단지를 숨겨 놓았습니
까?"

그는 억지로 은이정의 주먹을 폈다. 그곳에 <기 낭자>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장취산은 심히 감격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육제!"

장취산 등은 은이정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은소소가
병상에서 갓 일어났기 때문에 치열한 싸움을 하기에는 아직 무리
라고 생각돼 자기와 혼약이 있는 기효부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막성곡이 짖 돎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육사형을 놀려 주
려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장취산이 눈짓으로 그의 장난기를 제
지했다.

송원교는 장취산에게 말했다.

"오제! 가서 제수씨를 모셔오게."

장취산은 침실로 달려가 대청에서 벌어진 상황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은소소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
었다. 그녀는 내당으로 나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용문표국의 사람들과 소림승을 죽인것은 저예요. 당시 당
신은 저와 남남이었으니 이 일로 인해 무당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나서서 모든 것을 밝히고 천응교를 찾아가라고 할
께요."

장송계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제수씨,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당과 천응교를 따로 논할 순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들이 본문을 찾아온 것은 용문표국의 일보
다도 사손의 행방을 찾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손을
찾는 것은 복수보다는 도룡도를 빼앗는 일에 더 중점을 두고 있
습니다."

막성곡이 그의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도룡도입니다."

장취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왕년에 공견대사는 나의 의형에게 도룡도 속에 천하무적의 무
학이 숨겨져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소.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공문, 공지, 공성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오."

은소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그렇다면 모든 것을 대사형께 맡기겠어요. 단지 소매의
무예가 얕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진무태극칠성진의 오묘함을
깨우칠 수 있을지....."

"사실 우리 사형제 여섯이 힘을 합쳐도 소림칠승을 상대하여 이
길 수 있소. 하지만 제수씨가 삼제를 대신해 우리와 보조를 맞춘
다면 삼제는 심적인 위안을 갖게 될 것이요."

"좋아요. 그럼 제가 가서 삼사형께 직접 가르침을 받겠어요."

이들 일곱 명은 곧 유대암의 침실로 몰려갔다. 장취산은 문중으
로 돌아온 후 유대암과 여러 번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은소소는 와병 중이었으므로 이제서야 첫대면을 하는 것이다.

유대암은 그녀의 용모가 빼어나고 태도가 다소곳하여 호감을 느
꼈다. 이어 송원교로부터 자기 대신 은소소를 내세워 진무태극칠
성진을 펼쳐 소림칠승을 상대할 것이란 얘기를 전해 듣자 내심
처량함을 느꼈다. 그러나 병상에 누운지 십 년이 되어 자신의 감
정을 억제할 줄 알았다.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사매를 만나면 선물할 게 마땅치않아 고민이
었는데 마침 잘 됐소. 이 자리에서 진무태극칠성진의 방위(方位)
를 밟는 보법(步法)을 선물로 대신 하겠소."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고마와요, 유삼가(兪三歌)."

유대암으로선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고마
와요, 유삼가>라는 일곱 글자를 듣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장취산은 흠칫했다.

"삼사형, 어디가 불편합니까?"

유대암은 대답은 않고 계속 은소소를 응시했다. 차츰 그의 눈동
자에 이상한 광채가 띠었다. 그것은 고통과 원한의 빛깔이었다.
장취산은 얼른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뜻밖에 그녀 역
시 안색이 크게 변한 채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송원
교, 유연주 등은 유대암과 은소소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
를 스쳐갔다.일순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각자의 심
장이 뛰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유대암의 숨소리가 갈수
록 거칠어지더니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사매, 가까이 오시오. 좀더 자세히 보고 싶소."

은소소는 몸이 바르르 떨리며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남
편의 손을 꼭 쥐었다.

다시 숨막히는 침묵이 흐른 후에 유대암이 장탄식을 토했다.

"가까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소. 그날 난 얼굴을 보지 못했으
니..... 오사매, 이 몇 마디를 직접 말해 주시겠소? <첫째 도총
표두가 직접 호송을 맡아야 해요. 둘째, 임안부에서 호북 양양부
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해 열흘 이내에 무사히 넘겨
줘야 해요. 만약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길시엔 총표두의 생명은 물
론이거니와 용문표국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유대암이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는 동안 주위에 있는 사람들
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유삼가, 저의 음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날 용문표국에서 도대금에게 유삼가를 호송해 달라고 청탁한
장본인이 바로 소매예요."

유대암은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호의는 정말 고마왔소."

은소소는 비장한 각오를 하듯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나중에 용문표국의 불찰로 유삼가가 이렇게 되자 소매가 그들
을 멸문시킨 거예요."

여기에서 유대암의 표정과 음성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
했다.

"나를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이오?"

은소소는 안색이 암울하게 변해 고개를 떨구었다.

"유삼가,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겠어요. 그
전에 밝혀 둘 것이 있어요. 남편에게 숨겨 왔어요. 행여나.....
행여나 그가 알면 저를..... 저를 저버릴까 봐 두려웠어요."

유대암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됐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난 이미 이렇게 불구가
되었는데 지난 일을 들추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제 모두
들 나가 주시오. 무당육협이 소림고승을 상대해도 충분한 승산이
있을 것이니 될 것입니다."

유대암은 천성이 강인하고 자존심이 남달리 강해 부상을 당한
이래 여지껏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비관하는 연약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해서도 일언반구조차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입에서 비통에 찬 말이
내뱉어지자 사형제들은 모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특히
은이정은 심성이 약해 흐느끼며 눈물을 뿌렸다.

은소소는 모든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았다.

"유삼가도 사실은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을 거예요. 단
지 저의 남편과의 의리를 생각해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겠죠.
맞아요. 그날 전당강 선창 속에 숨어 문수침(蚊鬚針)으로 유삼가
를 상하게 한 것이 바로 소매였어요.....!"

장취산의 얼굴에 서릿발이 깔리며 대뜸 소리쳤다.

"소소! 그게 정말이오? 왜.....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소?"

은소소의 양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의 삼사형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 바로 당신의 아내인
데, 제가 어찌 감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었겠어요."

그녀는 다시 유대암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삼가, 나중에 칠성정(七星釘)으로 유삼가를 상하게 하고 도
룡도를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저의 친오빠인 은야왕(殷野王)이
에요. 우리 천응교는 무당파와 아무런 원한도 없기 때문에, 도룡
도를 이미 수중에 넣었고 또한 유삼가의 군자다움에 탄복해 비로
소 용문표국을 시켜 유삼가를 문중으로 호송해 주도록 조치한 거
예요. 그 후 무당산 아래서 생긴 풍파는 실로 예측치 못했던 거
예요."

장취산은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의 눈에선 짙은 분노의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

그는 은소소에게 삿대질을 하며 당장 목을 조일 듯한 기세였으
나, 너무나 격동된 나머지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순간,

"앗!"

유대암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일성이 터지며 몸이 붕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침상에 떨어지는 동시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은소소는 역시 강인한 여자였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검을 뽑
아 검자루를 돌려 장취산에게 건네주었다.

"여보! 십 년 동안 당신은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주셨어요. 당
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하늘에 한없이 감사를 드렸어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단지 당신 손에 죽어 무당칠협의 의리를
보존케 하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이에요."

장취산은 검을 받아 즉시 그녀의 가슴을 겨냥해 찌르려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십 년간 정을 붙이
고 살아온 부부가 아닌가! 일순간, 그의 뇌리에 은소소와 행복했
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달콤했던 밀어와
부드럽던 눈길, 그리고 뜨거웠던 순간들.....

검을 움켜쥔 장취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홀연 -------

그는 상처투성이의 야수가 포효하듯 소리치며 밖으로 뛰쳐나갔
다. 은소소와 송원교 등은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황급히
뒤쫓아나갔다.

장취산은 곧장 대청으로 달려가 장삼봉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제자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제
자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장삼봉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이 스승이 책임지고일을 해결해 주
겠다."

장취산은 큰절을 세 번 올렸다.

"스승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자에게 어린 자식이 있는
데 사악한 자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마장(魔掌)에서 구해
주어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가더니,
공문대사, 철금선생, 하태충, 공동오로 등을 향해 낭랑한 음성으
로 외쳤다.

"모든 죄과는 본인 장취산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니, 대장부로서
여러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책임을 지겠소이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장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그었다. 그 즉시
선혈이 뿌려지며 숨이 끊어졌다. 장취산은 이미 죽을 각오가 되
어 있기 때문에 스승님과 사형제들이 행여나 제지할까 봐 번개처
럼 출수를 한 것이다. 장삼봉과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 네 사람
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토하며 달려들었다. 순간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칠, 팔 명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들은 모두
장취산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장삼봉의 장력에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한 발 늦고 말았다.

바로 이때 창 밖에서 어린애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버지!"

두 번째 외침은 미약했다. 누구에 의해 입이 틀어막혀진 게 분
명했다.

장삼봉은 한 줄기 연기처럼 창 밖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몽고
병사 차림의 사나이가 팔,구 세 가량의 사내애를 안고 있었다.
사내애는 입이 틀어막힌 채 몸부림쳤다. 장삼봉은 제자의 참사를
지켜보았으므로 칼로 에리는 듯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근 백 년
동안 쌓아올린 수양으로 결코 심기가 흩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들어가라!"

사나이는 발끝으로 살짝 지면을 찍으며 어린애를 안은 채 지붕
위로 몸을 날리려했다. 그 순간 어깨에 내리눌리는 힘을 느끼며
발이 땅에 뿌리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장삼봉이
소리없이 그에게 다가와 왼손으로 살짝 어깨를 누른 것이다. 사
나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삼봉이 내력을 뻗어내면 영락없이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순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애는 바로 장취산의 아들 장무기였다. 무기는 사나이에 의
해 입이 틀어막혔지만 창 밖에서 부친이 자결하는 광경을 보자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며 끝내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은소소는 남편이 자기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큰 슬픔에 이어 큰 기쁨을 얻게 된 셈
이다.

"애야, 의부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겠지?"

장무기는 의연하게 말했다.

"나를 때려 죽인다 해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장삼봉이 명령투로 말했다.

"어린애를 그녀에게 돌려줘라!"

사나이는 전신이 제압당해 고분고분 무기를 은소소에게 돌려주
었다.

무기는 어머니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저들이 왜 아버지를 죽게 했어?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
이 누구야?"

은소소도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
음으로 몰아넣었다."

무기는 좌우를 노려보았다. 그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모든 사
람은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가슴이 철렁하는 한기를 느꼈다.

은소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기야, 나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겠느냐?"

"엄마, 말해 보세요."

"너는 서둘러 복수할 생각 말아라. 천천히 기다렸다가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자 모두 등골이 오싹해졌
다.

무기의 울음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엄마! 난 복수하지 않을래요! 아버지만 살아나면 돼요!"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단다."

그녀는 아랫 입술을 깨물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애야, 너의 아버지가 죽었으니 우린 어쩔 수 없이 의부의 행방
을 이들에게 밝혀야겠다."

그녀의 돌변한 태도는 실로 뜻밖이었다.

무기는 도리질을 하며 소리쳤다.

"싫어! 말하면 안 돼요!"

은소소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공문대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공문대사, 난 당신에게만 말해 줄 테니 이리 귀를 가까이 대세
요."

이 또한 뜻밖인지라모두들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공문은 조용히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조금만 일찍 생각을 바꾸었다면 장
오협은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오."

그는 은소소에게 다가가 귀를 갖다 댔다.

은소소는 그의 귀에 대고 입술만 계속 움직일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뭐라고 했소?"

은소소는 나직하게 말했다.

"금모사왕이 숨어 있는 곳은 바로....."

그 다음 말을 흐릿하여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공문은 다시 반문했다.

"뭐라고 했소?"

은소소는 힘주어 말했다.

"바로 그곳이니 소림파만 알고 스스로 그곳을 찾아가세요."

공문은 다급해졌다.

"난 자세히 듣지 못했소!"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소소의 음성이 차갑게 변했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그곳에 가면 자연히 금모사왕을 만
날 수 있을 거예요."

이어 그녀는 무기를 안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애야, 네가 성장한 다음에 여자의 속임수를 경계해야 한다. 아
름다운 여자일수록 속임수에 능하다는 걸 명심해라."

그녀는 무기의 귀에 입을 바싹 붙이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난 화상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를 속인 거야. 이..... 엄마가
얼마나 사람을 잘 속이는지 이젠 알았겠지?"

그녀는 태연하게 웃으며 갑자기 비스듬히 쓰러졌다. 그녀의 가
슴에 한 자루의 비수가 꽂혀 있었다. 무기를 껴안는 순간 이미
암암리에 비수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그녀는 무기의 몸
으로 은폐했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무기는 어머니 몸에 엎어지면서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그러나 은소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무기는 엄청난 슬픔
으로 인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무섭게 공문대사를 노
려보며 물었다.

"당신이 나의 어머님을 죽였나요? 무엇 때문에 나의 어머님을
죽였죠?!"

공문대사는 이런 참변을 목격하자 비록 당세에서 첫손 꼽는 무
학종파의 장문인이지만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무기가
자기를 겨냥해 다그치자 절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둘
렀다.

"아니야, 내가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다."

무기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거렸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
다.

"난 울지 않을 거야! 절대 울지 않아! 저 나쁜 사람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을 거야!"

공문대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장진인, 이런 변고는..... 음..... 실로 뜻밖입니다. 장오협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 지난 일은 일체 거론하
지 않기로 하고 우린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장삼봉은 답례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멀리 전송을 하지 않겠소."

소림 승려들은 일제히 일어나 떠나려 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은이정의 성난 고함이 터졌다.

"당신네들은..... 나의 오사형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고 이대
로....."

그는 다음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사실 오사형의 자결은 삼사형에 대한 죄책감이 주원인이었지,
소림과는 상관이 없었다.

은이정은 그대로 장취산의 시신 위에 쓰러져 대성통곡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들은 일제히
장삼봉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 이번 일로 인해 매듭이 더욱 커졌다. 무당파는 절대 이것
으로서 은원을 종결짓지 않을 것이니 후환이 무궁할 것이다.----

송원교만이 눈물을 글썽이며 손님들을 관문 밖까지 전송해 주었
다. 손님이 떠나는 즉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때 대
청 안은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아미파의 제자들이 맨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 기효부는 은
이정이 슬퍼 우는 것을 보자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까이 다
가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육가(六哥), 저는 이만 가겠어요. 부디..... 몸 보존하세요."

은이정은 흐느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아미파도..... 역시..... 나의 오사형을 곤경으로 몰아놓기 위
해 온 것이오?"

기효부가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예요. 스승님께서는 단지 사손의 행방을 여쭈어보라고 하
셨을 뿐이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다시 떨리
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을 때 입술 아래에 이빨자국이 뚜렷이 패
어 있었다.

"육가, 저는,.... 죄스러울 뿐이예요. 모든 것을 너그럽게 이해
해 주세요. 저는..... 내세(來世)에나 육가를....."

그녀는 걱정으로 인해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은이정은 그녀가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소 당황했다.

"이것은 낭자와 상관없는 일이니 우린 낭자를 원망하지 않을 것
이오."

기효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녀는 더 이상 은이정과 얘기할 용기가 없는지 무기에게 고개
를 돌렸다.

"얘야, 우린..... 모두 너를 잘 보살펴 줄 거야."

그녀는 목에 걸려 있는 금목걸이를 뜯어 무기의 목에 걸어 주려
고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을 너에게....."

무기는 목을 뒤로 젖히며 소리쳤다.

"싫어요!"

기효부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그녀는 목걸이를 손에 들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눈에 그렁하던 눈물이 끝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현사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사매, 어린애와 여러 소리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 어
서 떠나자."

무기는 한참 동안 울음을 억제하고 있었다. 정현사태등이 대청
을 나서자 그는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숨이 막혀오며 쿵 하고 그 자라에 쓰러졌다.

유연주가 얼른 그를 안아 일으켰다. 너무나 엄청난 슬픔을 견뎌
내지 못하고 까무라친 것이라 생각했다.

"얘야, 이젠 실컷 울어라."

그는 무기의 가슴을 주무르며 곧 깨어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도 무기의 몸이 차갑고 단지 코로 미약하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유연주는 계속하여 공력을 이용해 안마를 했으나 깨어날 줄 몰랐
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무기마저 곧 숨
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장삼봉이 황급히 그의 등 뒤에 있는 영대혈(靈坮穴)에 손을 붙
이고 한 갈래의 웅후한 내력을 주입시켰다. 장삼봉의 공력으로
제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력을 주입시키
면 호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력을 체내에 주입시키자 무
기의 창백한 안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이내 푸르죽죽하게
바뀌어갔다. 게다가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장삼봉은 흠칫 놀라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얼음장이었다. 다
시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등심을 만져보니 불길처럼 뜨거웠
다. 그리고 그 주위는 뼈를 에일 듯한 한기에 싸여 있었다. 장삼
봉의 안색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변했다.

"원교, 이 애를 안고 온 몽고 병사가 어디에 있는지 어서 찾아
와라!"

송원교는 즉시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연주는 그 몽
고인과 장력 대결을 하여 부상을 입은 바가 있으므로 대사형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삼봉은 무기의 옷을 찢었다. 야들야들한 그의 등에 벽녹색의
장인(掌印)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그 부위가 불길처럼 뜨거웠
던 것이다. 무기가 이러한 부상을 입고도 버틴 것은 실로 상상하
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송원교와 유연주가 대청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삼봉이 몽고인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장취산은
이미 목숨을 끊었고, 곧 이어 은소소마저 부군을 따라 자결하는
바람에 모두 비통에 잠겨 그 몽고인을 주의하는 자가 없었다. 그
사이에 몽고인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두 사람도 무기의 등에 찍혀 있는 이상한 손자국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장삼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십 년 전에 백손도인(百損道人)이 죽은 후로부터 이 악랄무
비한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이 영원히 실전(失傳)된 줄 알았는
데, 아직도 이 무학을 지닌 사람이 있을 줄이야....."

송원교는 이 말에 크게 놀랐다.

"이 애가 당한 것이 현명패천장이란 말입니까?"

그는 칠제자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 현명패천장이란 이름을 들
어본 기억이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
다.

장삼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무기를 안은 체, 주름진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장취산
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취산아, 취산아! 너는 이 못난 스승을 믿고 죽음으로써 부탁을
했는데도 난 너의 독생자를 지켜주지 못하니 백 세를 살아온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당이 천하에 명성을 떨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차라리 너를 따라 죽고 싶구나!"

주위에 있는 제자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스승님
은 하늘이 무너져도 태연자약할 수양의 소유자인데, 이렇게 침통
한 말을 할 줄이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은이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이 애를..... 정말..... 살릴 수 없습니까?"

장삼봉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무기를 안고 대청 안을 잠시
배회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나의 스승이신 각원대사가 소생하여,
구양진경의 전부를 다시 나에게 전수해 주는 것뿐이다."

제자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스승님의 이 말은 무기의 상세를 도
저히 치료할 수 없다는 뜻과 상통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에 유연주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날 제자는 그 자와 장력을 직접 겨루어 부상을 입었
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쾌되어 공력을 운용하는데 아무런 지장
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당칠협이란 이름이 강호에 크게 알려진 덕분이다. 현
명패천장으로 장력 대결을 벌려 만약 상대방의 내력이 더 강하면
반탄지력에 의해 현명패천장을 전개한 자가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된다. 앞으로 그 자를 만나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유연주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는 내심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이제 보니 그 자는 나를 높이 평가해 행여나 자기보다 내공이
강할까 봐 진력으로그 현명패천장을 전개하지 않았군. 그렇지
않았다면 난 벌써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필시 전력을 기하겠군."

송원교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언뜻 보기에, 그 자는 나이가 오십 세 사략이며 콧
날이 높고 눈이 움푹 패인 것으로 미루어 서역(西域) 사람 같았
습니다."

막성곡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자는 무기를 잡아간 후에 왜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장송계가 했다.

"그 자는 무기에게 금모사왕의 행방을 추궁하다가 뜻이 이루어
지지 않자, 현명패천장을 전개해 고통을 주어 오사제 부부를 위
협할 생각으로 이것에 나타난 것이 분명하네."

막성곡은 발끈했다.

"감히 무당산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려 하다니, 그놈은 정말 간
도 크군요!"

"무당산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 것이 어디 그 자뿐이었는가? 그
자는 무기를 인질로 잡고 있었으니 더욱 자신만만했던 것뿐이
네."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모두들 속수무책이었다. 분위기가
갈수록 무거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기가 갑자기 눈을 뜨며 소리쳤다.

"아버지 아파요. 아파 죽겠어요!"

그는 장삼봉을 꼭 껴안으며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유연주가 힘주어 말했다.

"무기야, 너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너라도 이를 악물
고 살아서 무공을 배워 복수를 해야 한다."

"싫어요! 복수하지 않을래요 아버지와 어머니만 살아나면 돼요.
그 나쁜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요!"

장삼봉은 어린애의 이 말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우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하
늘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이어 장취산의 시신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음성이 격양되었다.

"취산아, 취산아! 이 불쌍한 놈.....!"

그는 무기를 나고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연거푸 튕겨
열 여덟 군데 혈도를 찍었다. 혈도가 찍힌 무기는 더 이상 떨지
않고 얼굴에 푸르죽죽한 기운이 더욱 짙어갔다. 그 기운이 거무
스름하게 변하면 더 이상 구제할 길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는 장삼봉인지라, 무기의 옷을 완전히 벗기고 자신도 도포
를 풀어 가슴을 그의 등에 붙였다. 무기의 한독을 풀려고 같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장삼봉은 구양신공을
연마하는 방법과 구결을 무기에게전수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세월은 빨랐다.

붐이 가고 가을이 오고.....

꽃이 피고 다시 지니.....

무기가 구양진경을 연마한지도 어느덧 이 년이 지났다.

이제 단전에 인온자기가 어느 정도 모이게 되었으니, 체내의 한
독이 경략백맥(經略百脈) 속에 응결되어 제거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얼굴의 녹기(綠氣)가 심해져 갔다. 아울러,
한독이 발작할 때마다 무기가 겪어야 할 고통은 날이 갈수록 격
심해졌다.

그간 이 년 동안 장삼봉은 무기의 내공 연마를 돕는데 진력을
쏟아왔고, 송원교 등은 영단묘약을 찾아 천하 방방곡곡을 헤맸
다. 백 년 이상 된 야산인삼(野山人蔘) 등 진귀한 영물을 수없이
먹었지만, 결과는 바다 속에 돌을 던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
기가 하루 하루 빼빼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모두들 안타깝기만
했다. 장취산이 남긴 유일한 혈육을 도저히 보존시필 자신이 없
었다. 무당파가 무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바람
에, 유대암을 암습한 원수와 무기에게 현명패천장을 전개한 원흉
을 찾는 일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동안 천응교의 교주 은천정(殷天正)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
람을 보내 외손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매년 적지 않은 선물
을 보내왔다. 하지만 무당의 제자들은 유대암과 장취산의 변고가
모두 천응교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천응사자를 쫓아버리고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은 막성곡이 천응사자를 호되게 두들겨 팬 일도 있
어 그 후로 은천정도 더 이상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이날은 중추가절이었다.

무당제자들은 장삼봉을 모시고 모처럼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무
기가 갑자기 발병하여 얼굴의 녹기가 짙게 일며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그러나 무기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사람들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은이정이 얼른 그를 침실로 데려가 이불을 덮
어 주고 화로불을 피워 주었다.

장삼봉은 한참 동안 심각하게 생각을 굴리다가 모종을 결정을
내린 듯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무기를 데리고 숭산 소림에 갔다 와야겠다."

중인은 스승님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소림의 장문인 공
문대사를 찾아가 구양신공의 부족한 점을 가르침 받아 무기의 목
숨을 살리려는 것이다.

이 년 전 무당과 소림은 이미 거북한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장
삼봉이 일대종사의 신분으로서 백여 세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소림을 찾아가 도움을 청 한다는 것은 체면에 크게 손상되는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는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장취산
과의 정의를 생각해 허명(虛名) 따위를 저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아미파에도 구양진경의 일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장문인 멸절사태(滅絶師太)의 성품이 괴팍하여, 장삼봉이
은이정을 시켜 여러 차례 서찰을 보냈지만 멸절사태는 서찰을 뜯
어보지도 않은 채 다시 되돌려보내곤 했다.

물론, 송원교가 무기를 소림으로 데려가면 무당의 체면이 한결
유지되겠지만, 공문대사가 거절할 것은 불 구경하듯 뻔한 사실이
었다.

모두는 장삼봉의 결정에 모두 기분이 울적해져 술을 몇 잔 나눈
뒤 곧 상을 치웠다.

다음날 아침 장삼봉은 무기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다섯 제자는 원래 수행할 생각이었지만 장삼봉이 거절했다.

"우리가 떼지어 몰려가면 소림의 의심을 살 우려가 있으니 나
혼자서 무기를 데려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제각기 나귀를 타고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소림과
무당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다. 호북의 무당산에서 화남 숭산
까지 불과 며칠의 여정이었다. 장삼봉과 무기는 노하구에서 한수
를 건너 남양에 당도해 다시 북쪽으로 여주(如州)를 지나 서쪽으
로 방향을 꺾자 숭산에 당도할 수 있었다. 소실산에 오른 두 사
람은 나무에 나귀를 묶어두고 걸어서 올라갔다. 장삼봉으로선 어
릴 적 추억이 어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팔십 년 전, 사부이신 각원대사가 철통 속에 곽양과 자기를 담
고 하산한 것이 눈앞에 선한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격세지감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삼봉은 무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산 위
로 올랐다. 오봉(五峰)도 여전한데, 각원대사와 곽양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석정에 당도하니 소림사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이
때 승려 둘이 담소를 하면서 걸어오기에 장삼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지만 무당의 장삼봉이 방장대사를 뵈러 왔다고 전해
주게."

두 승인은 장삼봉이란 세 글자를 듣자 깜짝 놀라며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몸집이 유난히 장대하고 흰 수염에
비해 안색이 불그스름한 것 이외에 빼어난 데가 없다고 느껴졌
다. 게다가 열 살이 갓 넘은 깡마른 어린애를 데리고 있어 한 승
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 무당산의 장...장진인입니까?"

장삼봉은 담담하게 웃었다.

"틀림없는 진품이라네."

다른 한 승려가 그의 장난기 섞인 듯한 말투에 더욱 의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농담하는 게 아닙니까?"

장삼봉은 이번엔 껄껄 웃었다.

"장삼봉이 뭐가 대수롭다고 공연히 그의 행세를 하려고 하겠는
가?"

두 승려는 반신반의하며 달려가 보고를 했다.

한참 후에 사문(寺門)이 활짝 여리며 공문대사가 동문사제인공
지, 공성을 대동한 채 걸어나왔다. 세 사람 뒤에는 십 여 명의
황색 승포를 입은 노화상들이 따르고 있었다.

장삼봉은 그들이 달마원의 장노들로서 어쩌면 배분이 공문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내에서 무학을 참수하
며 바깥일을 관여하지 않는데, 아마 무당 장문인이 찾아왔다는
전갈에 비로소 장문인을 보러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장삼봉은 얼른 앞으로 나서 공수의 예를 취했다.

"방장대사와 여러 대사들의 참수를 방해하게 되어 실로 송구스
럽소이다."

공문대사 등도 일제히 합장으로서 답례하고 나서 공문이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서 이렇게 먼길을 오신 것은 실로 뜻밖입니다.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소이다."

"우선 자리에 앉읍시다."

장삼봉이 정자 안에 앉자 승인이 향차를 대접했다.

장삼봉은 내심 불쾌했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한 문파의 종사임에 분명한데,
배분으로 논해도 노희들의 선배이거늘 사내로 안내하지 않고 산
중턱에 앉게 하다니..... 보통 손님이 찾아와도 이렇게 예의가
허수룩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삼봉은 천성이 호탕하여 불쾌한 생각을 곧 지워 버렸
다.

공문대사가 그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서 본문을 찾아주셨으니 사내로 모셔야 당연하겠지만
장진인께서 소시 적에 임의로 소림을 떠났기 때문에..... 잘 아
시다시피, 본사를 저버린 반도는 영원히 사내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엄한 문규가 있으니 이 점 널리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장삼봉은 껄껄 웃어 젖혔다.

"그랬었구료. 빈도는 비록 소시 적에 소림에서 각원대사를 모시
며 청소와 차를 끓이는 잡일을 해 왔지만 제도(制度)를 한 바도
없고, 스승을 모신 적도 없으니 소림제자라 할 수 없지 않겠소?"

공지가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장진인은 엄연히 소림에서 무공을 훔쳐 배우지 않았습
니까?"

장삼봉은 화가 치밀었으나 한편으론 일리가 있는 말이라 느껴졌
다.

'무당의 무학은 내가 스스로 창안한 것이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각원대사가 구양진경을 전수해 주었고 곽여협이 한 쌍
의 소림철나한을 주었기 때문에, 그 바탕이 소림에서 비롯되었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는 곧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있었다.

"빈도가 오늘 찾아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오."

공문과 공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 십중팔구는 장취산의 일로 찾
아온 모양인데.....'

공문이 심각하게 말했다.

"상세한 말을 듣고 싶소이다."

장삼봉은 차분하게 입을 떼었다.

"방금 공지대사가 언급했듯이 빈도의 무공은 소림에 뿌리를 두
고 있소이다. 빈도가 소시 적에 각원대사의 은혜를 입어 구양진
경을 전수받게 되었으니 말이오. 그 경서에 수록된 무학의 정수
는 방대하고 오묘하여 당시 빈도의 어린 나이로선깨우치지 못한
게 태반이었소. 그 후 각원대사가 황산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그
경전을 읊었는데, 다행하게도 세 사람이 곁에서 들을 수가 있었
소. 한 분은 아미파의 시조이신 곽여협이고, 한 분은 귀파의 무
색선사였으며, 나머지 한 명이 바로 빈도였소. 빈도는 나이가 어
리고 자질도 가장 뒤떨어질 뿐 아니라 무학의 기초가 없었으므로
세 사람 중에 얻은 것이 가장 적었다고 할 수 있소."

공지가 다시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꼭 그렇다고만 생각되지 않소이다. 장진인께서는 몇 년 동안
각원을 곁에서 모셨는데, 그가 어찌 암암리에 전수해 주지 않을
리가 있겠소이까? 오늘날 무당이 강호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각원의 공이외다."

각원은 공지보다 세 배분이 높아 엄격하게 따지면 태사숙조(太
師宿祖)가 된다. 그러나 각원은 소림의 반도로 낙인찍혀 문중에
서 제명되었기 때문에 공지의 말투가 불손할 수 이었던 것이다.

장삼봉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빈도는 선사의 은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소."

소림사승 중에 공견이 가장 자비로왔는데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
을 떠났다. 공문은 심계가 깊어 희로애락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
았다. 공성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워 심지어 흐리
멍텅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공지는 도량이 가장 좁았다.
그는 장삼봉이 소림에서 무공을 훔쳐가 무당파를 창건한 것이라
고 늘 생각해 왔으며, 이번에도 장삼봉이 장취산의 일로 복수하
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 단정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림은 은소
소가 죽기 직전에 꾸며낸 이화강동지계(移禍江東之計)로 인해 그
동안 편할 날이 없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무림인들이 찾아와 소
란을 피웠다. 그들은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기도 하고, 통사정을
하기도 하며 끈질기게 사손의 행방을 캐물었다. 공문대사는 사손
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맹세까지 했지만, 무당산에서
수백 명이 은소소가 직접 공문에게 귓속말로 일러주는 것을 보았
기 때문에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자연히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고, 찾아온 무림인들도 많이 사상당했지만, 소림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역시 무당에서
뿌린 화근이 아니겠는가! 사내의 승려들은 이 년 동안 시달려 오
다가 오늘 장삼봉이 직접 찾아오자 수모를 줌으로써 보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공지가 다시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서는 소시적에 소림에서 무공을 훔쳐 배웠다고 시인했
는데, 그 사실을 온 강호에 알릴 용의가 있습니까?"

장삼봉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천하의 무학은 본디 뿌리가 하나이며, 천 백 년간 서로 단점을
보안해 보다 높은 경지를 추구해 온 것이 다를 뿐이라 생각하오.
그러나 소림이 수백 년 동안 무림을 이끌어 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외다. 빈도가 오늘 이곳을 찾아온 것도 귀파의 무학
을 흠모하여 여러 대사께 가르침을 받고자 함이오."

공문 등은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는 말을 도전의 뜻으로 듣고 일
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장삼봉의 무학이 고심막측하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당금 무림에 그의 적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
런데도 그가 단신 홀몸으로 소림을 찾아와 도전을 하는 이상 틀
림없이 믿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순간, 삼승은 섣불리
대답할 수 침묵을 지켰다.

공성이 분연히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우리와 정면 대결을 벌이려 왔구료. 나 공성은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을 것이오. 장진인의 무학이 제아무리 천하무적
이라 해도 소림사의 천 명을 헤아리는 제자를 모조리 죽이지는
못할 것이오!"

그는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소림제자가 한꺼번에 덤빌 수 있다
는 포석을 깔아놓았다.

장삼봉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 대사는 오해하지 마시오. 빈도가 방금 말한 것은 진짜 가
르침을 받겠다는 뜻이외다. 빈도는 비록 구양진경을 배웠지만 결
함이 많은데다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소. 소림고승들
은 필시 빈도보다 수위(修爲)가 깊은 터이니, 가르침을 주신다면
그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소림사 쪽에서 볼때 그의
말과 행동은 실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문파를 창건한 지 팔
십여 년이 자났고 무림에서 무학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그를
따라갈 자가 없는데, 오늘 소림에 나타나 가르침을 받길 원하니
어찌 뜻밖이 아닐 수 있겠는가!

공문은 얼른 답례를 했다.

"장진인..... 우리들 같은 무학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것은 당
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장삼봉은 상대방이 눈꼽만치도 의혹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무기가 어떻게 하여 현명패천장에 당했으며, 그 동
안 체내의 한독을 치료해 온 경위, 또한 장취산의 유일한 혈육이
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려야 된다는 자신의 각오를 진지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현재로선 구양진경을 완전히 익혀야만 무
기를 살릴 수 있다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구양진경을 전부 소림
파에 알려줄 것이니 소림도 역시 아는 부분을 제시해 쌍방이 서
로 연구하여 결함을 보완하자고 간청했다.

공문대사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입을 열
었다.

"본문은 천 백 년 이래 일흔 두 가지의 절예를 십이 성(成)까지
연성한인물이 전혀 없었소. 그만큼 역대 조사들께서 남기신 무
학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십분지 일을 연성하기도 쉬운 일이 아
니외다. 물론 장진인께서 한 가지 신공(神功)을 제시해 본문과
교환하자는 뜻은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본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필요한 사족(蛇足)에 불과하오."

여기에서 말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게다가 무당의 무학은 그 근본이 소림이거늘, 오늘 서로 무학
을 교환했다는 게 강호에 전해지면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림
과 무당의 무학을 동격으로 생각할 게 아니겠습니까? 소승은 소
림의 장문으로서 그런 유언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장삼봉은 내심 탄식을 했다.

'무당 제일 문파의 장문인이며 명색이 사대신승 중에 한 사람인
데, 어찌 흉금이 이다지도 좁은지.....'

그는 부탁을 드리는 약자 입장이므로 상대방을 나무랄 수 없었
다.

"세 분은 당세의 신승으로서 누구보다도 자비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줄 알고 있소. 이 어린 것의 생명이 조석지간에 있으니 부
처님의 구세구인(救世救人)의 가르침을 생각해서라도 빈도의 소
청을 들어주셨으며 고맙겠소."

그러나 장삼봉이 제아무리 혀가 닳도록 간청을 해도 삼승은 적
당한 구실을 내걸어 정중히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공문대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분부를 받들지 못하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어 한쪽에 서 있는 승인에게 명했다.

"가서 상등 공양을 준비하여 이곳에서 장진인을 대접하도록 일
러라!"

승인은 즉시 대답하고 물러갔다.

장삼봉의 표정은 암울했다.

"정녕 그렇다면 빈도가 공연히 대사들의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
고 실례를 범한 것 같소. 성찬은 감히 받을 수 없으니 이만 작별
을 고할까 하오."

그는 공수의 예를 취하고 나서 무기의 손을 잡고 표연히 떠나갔
다.


----- 제 2 권 5 장 끝 -----


추천 (0) 선물 (0명)
IP: ♡.221.♡.68
23,564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3-12
0
530
3학년2반
2022-03-12
0
501
3학년2반
2022-03-11
0
747
3학년2반
2022-03-11
0
525
3학년2반
2022-03-11
0
555
3학년2반
2022-03-11
0
805
3학년2반
2022-03-11
0
935
3학년2반
2022-03-10
0
611
3학년2반
2022-03-10
0
693
3학년2반
2022-03-10
0
509
3학년2반
2022-03-10
0
673
3학년2반
2022-03-10
0
543
3학년2반
2022-03-09
0
595
3학년2반
2022-03-09
0
590
3학년2반
2022-03-09
0
755
3학년2반
2022-03-09
0
882
3학년2반
2022-03-09
1
1198
3학년2반
2022-03-08
0
594
3학년2반
2022-03-08
0
521
3학년2반
2022-03-08
0
413
3학년2반
2022-03-08
0
386
3학년2반
2022-03-08
0
887
3학년2반
2022-03-07
0
1041
3학년2반
2022-03-07
0
634
3학년2반
2022-03-07
0
382
3학년2반
2022-03-07
0
498
3학년2반
2022-03-07
0
423
3학년2반
2022-03-06
0
382
3학년2반
2022-03-06
0
413
3학년2반
2022-03-06
0
690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