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미로의 저쪽 6 끝

3학년2반 | 2022.02.07 07:06:38 댓글: 0 조회: 76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963

다음날 오월이 이사왔다. 용달차에 간단한 짐들을 싣고 왔다. 짐꾼 하나가 그녀의 짐들을 아파트로 날랐다. 대학생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장형사는 커튼 사이로 301호 창문을 주시했다. 동과 동 사이가 불과 1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망원경을 눈에 대면 아파트의 내부 구조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와 보였다.
사나이는 집안에서도 눈에 안대를 대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애꾸눈이 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저 놈은 애꾸가 틀림없어, 하고 장형사는 눈에 망원경을 댄 채 중얼거렸다.
놈은 팬티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뒤에서 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오후 2시 조금 지나 오월은 시루떡을 담은 접시를 소반에 받쳐들고 아파트를 나왔다.
301호와 302호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는 301호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경계의 빛을 띤 여자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미안합니다. 302호에서 왔습니다."
오월은 상대방이 잘 볼 수 있게 문의 중간에 섰다. 상대방이 구멍을 통해 내다보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섰다.
"미안합니다. 새로 이사왔어요. 앞으로 잘 좀 부탁하겠어요."
여자는 자다가 나왔는지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이 게슴츠레했다. 벌어진 잠옷 사이로 젖무덤이 보였다. 그녀는 오월이 내미는 소반을 받아들고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잘 먹겠어요. 잠깐 들어와서 커피나 한 잔 하시지."
"아이,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그녀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월은 마지못하는 척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보다시피 지저분해요."
그녀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기는 댁이 처음이에요."
"어머, 그래요? 영광입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상냥하게 대꾸했다. 조금도 건방진 티를 내지 않은 겸손한 태도였다. 그것이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었는지 그녀는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커피를 끓였다.
얼른 보기에도 막 돼먹은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부자리가 그대로 펴져 있고 옷이며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는데도 치우려 하지 않고 커피물이 끓는 동안 담배만 피워댔다.
오월은 주인이 권하는 대로 이부자리 위에 앉아 상대가 눈치채지 않게 재빨리 방안을 살폈다. 애꾸가 외출하는 것을 보고 나서 방문했으니까 그 사나이가 집안에 있을 리 없었다.
"보다시피 난 아무 살림도 없어요. 그냥 임시로 사는 거예요."
여자는 커피를 타면서 말했다.
"아이는?"
"없어요. 아이가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럼 두 분이 사시나요?"
"남자하고 여자...... 단 둘이지. 우린 편리한 대로 살아요. 그쪽은?"
여자는 턱으로 오월을 가리켰다.
"저는 혼자 있어요."
"그럼 아직은 미혼?"
반말 비슷하게 묻는다.
"아뇨, 아빠는 배를 타고 있어요. 아직 애기는 없어요."
"아, 그러니까 선원이란 말이지?"
"네, 떠난 지 1년이 다 돼 가요."
"어디 갔어요?"
"라스팔마스에 가 있어요."
여자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오래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아이가 없지. 자, 들어요."
오월은 각설탕을 하나 집어넣은 다음 커피를 저었다.
"내 커피 솜씨는 알아줘요. 어때요?"
"맛있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커피맛이 좋았다.
"이름이 뭐예요?"
여자가 갑자기 물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거리낌없이 묻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쪽을 만만하게 봤던가.
"정수자라고 해요."
"어머, 같은 정씨네. 정나라 정?"
"네, 정나라 정이에요."
"난 미희라고 해요. 몇 살이세요?"
"스물여섯이에요."
"나보다 세 살 아래군."
그녀는 언니처럼 말했다.
"잘 부탁하겠어요."
미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살면 적적하지 않아?"
"적적해요. 밤에 잠이 안 와 뜬 눈으로 새울 때가 많아요."
"남자 생각이 나겠지."
그녀는 멸시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상대가 워낙 박색이어서 그녀의 미모는 돋보였다. 그것을 그녀는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깔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선생님은 뭘 하세요?"
"우리 그이? 사업하고 있어."
오월은 거기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남편은 언제 돌아와?"
"몇 달 더 있어야 해요."
정미희가 휘파람을 불었다.
"나 같으면 못 참겠다. 떼돈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그래도 할 수 없잖아요."
"하긴......."
너 같은 박색이 별수 있느냐 하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것처럼 괴로운 게 없는 것 같아요."
"기다릴 필요가 뭐 있어. 없을 때 재미 좀 보지. 요샌 옛날하고 다르다고. 남편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유부녀들이 얼마나 바람들 피운다고 카바레에 가봐. 거의가 그런 유부녀들이야. 적당히 바람을 피우는 건 괜찮아요."
"저 같은 게 어떻게 바람을 피우겠어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까 쑥맥이군. 아래가 중요하지 위가 중요한가. 불끄고 자리에 누우면 보이는 건 어둠뿐이라구."
그녀는 담배 연기를 멋들어지게 허공에다 내뿜는다.
오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세상에 남편같이 좋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미희는 웃는다.
"다른 남자 맛을 못 봤으니까 그렇지. 남편보다 기막히게 좋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난 한 남자만 보고 못 살아. 그래서 항상 임시로 살고 있지. 그게 속 편해. 살다가 싫어지면 언제라도 부담 없이 헤어질 수 있고 말이야."
"그럼 결혼한 사이가 아닌가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촌스럽게 물었다. 미희는 자랑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결혼은 왜 해? 골치 아프게. 남편 돈 많이 벌어?"
"그저 그래요. 월급으로 적금을 붓고 있는데 돌아오실 때쯤에는 조그만 아파트라도 하나 살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아파트는 뭐예요? 세로 든 건가?"
"네, 전세로 든 거예요."
"은행 금리가 너무 싸서 은행에 넣어두면 손해야. 사채놀이하는 게 훨씬 낫지. 난 5천 가지고 사채놀이 했는데 지금은 억대가 넘었어. 사채놀이 잘하면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구."
오월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억대 가지고 돈놀이하면 편히 앉아서 살아도 되겠네요."
"그러니까 이러고 있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언니는 참 좋겠네요. 난 언제 그렇게 돈을 모으지."
"어렵지 않다구. 사람들은 그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데 사실 머리만 잘 쓰면 돈 버는 것처럼 쉬운 게 없다구. 돈이란 가만 두면 곰팡이가 슬게 돼. 그러니까 자꾸만 굴려야 된다구. 단 하루라도 가만 두면 안 돼. 돈이란 굴리면 굴릴수록 불어나는 특징이 있거든. 바보 같은 사람들은 돈을 쓰지 않고 꽉 움켜쥐고 있으면 되는 줄 아는데 그건 사실은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돈 가치는 자꾸만 떨어지고 있는데 움켜쥐고 있으면 돈은 저절로 줄어드는 셈이 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그녀는 바보처럼 물었다.
"움켜쥐고 있지 말고 자꾸만 굴려야 된다니까."
"어떻게 굴려요?"
"높은 이자 받고 빌려주는 거야. 그 이자를 모아서 다시 또 빌려주는 거야. 이자의 이자가 또 새끼를 치고...... 계속 그렇게 나가면 얼마 안 가서 큰 돈을 모을 수 있다고. 1억 정도는 잠깐이야."
"그렇군요."
오월은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미희는 한층 더 신이 나서 지껄였다. 마치 이 쑥맥 같은 여자를 홀려놓겠다는 듯이.
"현대는 돈이 돈을 만드는 시대야. 모든 게 돈놀이 아냐. 돈을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구. 은행을 보라구. 사실 한마디로 말해 은행이란 돈놀이 하는 데 아냐. 은행처럼 돈 잘 버는 데가 어디 있어. 아무리 불황이라 해도 은행만은 끄덕 없거든. 오히려 불황 때는 돈을 더 잘 벌지."
오월은 감탄하는 눈길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알아야 면장이라도 하지."
오월은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은행 이자는 싸지만 그 대신 안전하지 않아요?"
"흥, 그러니까 사채를 줄 때는 아무한테나 줘서는 안 되지. 사람을 보고 믿을 만하면 줘야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사람을 의심하는 것만 배웠나 보지? 믿는 것도 배워 봐."
갑자기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 그녀는 다리를 쭉 뻗고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오월은 얼굴을 붉혔다.
"의심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러데요.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전 사실 남을 너무 잘 믿어 탈이에요."
"호오, 그래? 춤출 줄 알아?"
"몰라요."
"가르쳐 줄까?"
"아이, 싫어요."
그녀는 병신처럼 어깨를 웅크렸다.
"배워두면 좋을 텐데. 며칠 스텝만 배운 다음 나하고 같이 카바레에 가서 실습하면 돼. 기분 전환에는 최고야. 고독 같은 건 느낄 틈이 없다구."
"저 같은 게 춤은 배워서 뭘 하겠어요."
"그렇지 않대두."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오월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앉아 있어요."
미희는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나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굵은 남자 목소리였다.
오월은 벽 쪽으로 붙어서서 가만히 떨었다.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했지만 떨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미희는 문을 열었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왜 돌아오셨어요?"
"지갑을 안 가지고 갔어. 누가 왔어?"
그는 현관에 놓인 낯선 신발을 보고 날카롭게 물었다.
"네, 손님이 왔어요."
"누구?"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건너 집에 새로 이사온 여자예요. 인사 왔기에 차 한잔 나누는 중이에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안 되겠는지 안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이웃집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허리를 굽히면서 몹시 수줍어했다. 미희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애꾸눈은 오월을 날카롭게 쏘아본 다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치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다는 듯이.
"실례했습니다."
오월은 급히 방을 나왔다.
"왜 가려구. 또 놀러 와요."
집으로 돌아온 오월은 한참 동안 뛰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301호의 사나이는 분명히 그녀가 찾고 있는 범인들 중의 하나가 틀림 없었다. 아무리 한쪽 눈에 안대를 대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 자를 충분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 자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아니야, 알아보지 못했어. 알아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나를 죽였을 거야. 이렇게 변했는데 나를 알아볼 리가 없지. 그녀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끓어 오르는 증오감을 주체할 수가 없어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방안을 서성거렸다. 네놈도 이 손으로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죽이고말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나에게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면 물어뜯으련만...... 그녀는 맹수처럼 씩씩거리면서 방안을 돌아다녔다.
한편 301호에서는 애꾸눈의 사나이가 꼬치꼬치 따져 묻고 있었다.
"너, 내 말 왜 안 듣니? 외부 사람은 절대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고 했지 않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아이, 화내지 마세요. 제가 아무나 집안에 들여놓겠어요. 새로 이사왔다고 떡을 가져왔길래 들어오게 한 거지요. 당신 떡 좋아하시지 않아요. 화내지 말고 떡이나 드세요."
애꾸는 여자를 쏘아보다가 그녀가 내미는 떡을 입으로 받아 씹기 시작했다.
"뭐하는 여자야?"
"쑥맥이에요. 남편이 선원인데 라스팔마스에 가 있대요. 아기도 없이 남편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나 봐요. 내가 교육을 좀 시켜야겠어요."
"무슨 교육?"
"사람되는 교육이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킥킥거리다가 302호 여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남자는 처음에는 별로 흥미 없다는 표정이다가 나중에는 귀를 세우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못생겼으면 똑똑하기나 해야 할 텐데 이건 숫제 쑥맥이라니까요."
"그래도 몸은 늘씬하던데."
사내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머, 언제 그렇게 자세히 봤어요. 정말 재빠르시네요."
"그런 점에서 빠르지, 흐흐......."
그는 떡 한 덩이를 다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잘 봤어요. 몸은 쏙 빠졌어요. 얼굴만 괜찮으면 일류겠던데 워낙 못생겨서......."
"얼굴이 무슨 상관이야. 몸이 좋아야지. 결국은 몸이야. 얼굴은 오래 지나다 보면 식상해. 하지만 몸은 반대거든."
"나한테 식상했다는 거예요."
여자가 정색하고 물었다.
"아직은......."
"식상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물론, 너도 나한테 식상하면 그렇다고 말해."
방안에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홧김에 아까 그 여자 돈이나 우려먹을까."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남자가 맞장구쳤다.
"그거 좋지."
그 바람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집 한 채 값이면 돈이 꽤 될 텐데."
"잘해 봐."
애꾸가 나가고 나자 정미희는 302호에 가보고 싶어졌다. 상대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녀는 잠옷 바람으로 이웃집을 방문했다. 집안을 휘둘러본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집도 텅 비었네. 우리 집처럼......."
"살림이 없어요. 아직 덜 가져오긴 했지만."
오월은 불안한 감정을 숨긴 채 말했다.
"혼자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요?"
"이젠 버릇이 돼서 괜찮아요."
"이건 아기 양말 아니야?"
그녀는 반쯤 짜다 만 털양말을 집어들었다.
"심심해서 그냥 짜보는 거예요."
"그래도 아기 낳을 준비는 다 하고 있네. 아기 가졌어요? 가졌을 리가 없지."
그 말에 오월은 얼굴을 붉혔다.
"우리 그이 어때?"
느닷없는 질문에 오월은 당황했다.
"자세히 못 봤어요."
"무섭지 않았어?"
"아니오."
"눈을 가리고 있어서 무서웠을 거야."
"아뇨, 무섭지 않았어요. 그런데 눈은 왜 그래요?"
"다쳤어."
"많이 다쳤나 보지요?"
"완전히 멀었어."
"어머, 그래요? 어쩌다 그랬어요?"
"누구하고 싸웠나봐."
"어머나, 저를 어째요!"
오월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미희라는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어쩌긴, 할 수 없는 거지 뭐.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뭐."
"그래도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겠어요! 눈이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 그이가 그 말 들으면 감동하겠는데, 영화 구경 안 갈래?"
갑작스런 제의에 오월은 망설였다. 이건 단순한 제의일까, 아니면 나를 유인하려는 것일까.
"무슨 영화 보려구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그렇지 않아도 그 영화 보고 싶었는데."
"가자구.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오월은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다.
한 시간 후 그들은 극장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나 밖으로 나오니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다.
"내가 저녁 살께."
미희는 오월을 데리고 냉면집으로 갔다.
"그 여배우하고 언니하고 비슷하게 생겼어요."
"어머, 그래?"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에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 말 벌써 세번째 들었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여자는 무언가 한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섹스에 주린 한이지. 몸 전체에서 그런 게 풍기지 않아. 그러다가 젊고 힘센 남자가 나타나니까 휘발유처럼 타오른 거지. 그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이 뭔지 알아?"
"글쎄요. 제일 마지막 장면......!"
"아니야."
그녀는 앞으로 상체를 굽히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식탁에서 그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 얼마나 실감나게 해. 식탁 위에 널려 있던 빵들을 쓸어 버리고 밀가루에 범벅이 된 채 씩씩거리는 장면이 정말 일품이었어."
오월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얼굴을 확 붉혔다. 상대는 신이 나서 계속 지껄였다.
"급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남자보다 여자가 더 밝히더라고. 처음에는 반항했지만 일단 불이 붙으니까 여자가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식탁 위에서 몸부림치던 장면, 그 숨소리, 신음소리, 생각만 해도 아찔해."
오월은 냉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냉면 가락을 휘저었다.
"섹스란 말이야, 안방 침대 위에서 마음 턱 놓고 하는 건 재미가 없어. 그런 건 아주 평범한 거야. 아무나 다 하고 있거든. 그런 거 말고 평범하지 않게 해야 스릴이 있고 근사한 거야. 상식 이하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해야 기가 막힌 거라고. 일테면 차 속에서, 산에서, 또는 술집 같은 데서...... 그리고 상대가 특별할수록 좋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는 상대와 관계를 가질 때 기가 막힌 스릴이 있는 거지. 안 그래?"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내가 교육을 좀 시켜야겠어. 난 말이야, 그것만은 사양하지 않아. 절대 사양하지 않아."
"뭘 말이에요?"
"그것도 몰라? 섹스 말이야.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고 말아. 짧은 인생. 그런 재미라도 보고 살아야지. 거기에는 도덕이고 상식이고 다 필요 없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처음으로 오월이 반발하고 나왔다.
미희는 약간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거야?"
"저는 잘 모르지만...... 인간답게 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짐승이나 다름없지 않아요."
"말 잘했어. 인간은 옷 벗고 누우면 짐승이야. 짐승보다 더하면 했지 못하지는 않아. 그게 바로 인간다운 모습이야. 인간답다는 게 뭔데 그래? 이불 속에서 점잖게 구는 게 인간인 줄 알아? 흥, 그쪽 정말 속 좀 차려야겠어."
"전 잘 모르겠어요."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대화를 중단하고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 미희는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오월은 잠자코 따라갔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이번에는 나이트 클럽에 가자고 했다. 오월은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얻어먹기만 하고 미안해요."
"아니야, 지금 집에 들어가서 뭘 하려고 그래? 같이 들어가자고. 술값은 나한테 얼마든지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같이 가."
그녀는 오월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마 후 그들은 어느 호텔 지하에 자리잡은 나이트 클럽으로 들어갔다. 요란한 밴드 소리와 번쩍이는 불빛을 보고 오월은 이런 곳에는 생전 처음 와 보는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미희는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이런 덴 처음이에요."
오월의 말에 미희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원, 세상에, 이런 데도 아직 안 와 보다니 너무했다. 자, 한 잔 받아."
"저 술 못 해요."
"많이 권하지 않을 테니까 한 잔만 받아요."
강권하는 바람에 오월은 못 이기는 체하고 술을 받아 조금씩 마셨다.
미희는 자신이 마치 술꾼임을 과시하기라도 하려는 듯 단숨에 술잔을 비우곤 했다.
오월은 스테이지 쪽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여가수가 부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플로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미희는 어깨를 들썩이며 오월에게 함께 나가 춤추자고 했다. 오월은 당황해하면서 춤출 줄 모른다고 사양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남자였다.
"이제 오시는 거예요?"
미희가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월은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섬뜩했다. 바로 애꾸눈의 사나이가 거기에 서서 웃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놀란 오월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런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미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가 의외로 상냥하게 말했다.
"또 만나는군요."
오월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미희가 그의 팔짱을 끼었다.
"일 잘 됐어요?"
"음......."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 웃고 있었다. 애꾸눈은 줄곧 오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무서워 오월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지만 그는 거머리처럼 그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한 잔 드시죠."
그가 점잖게 말하면서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아이, 전 술 못해요."
오월은 도리질을 했지만 사내는 강압적으로 잔에 술을 따랐다. 미희도 옆에서 사내를 부추겼다. 오월은 바짝 말라붙은 입속을 맥주로 축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일어서서 나갈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아 기다려 볼 것인가. 이 자는 나를 알아보고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고 이러는 것일까.
두 사람이 일어섰다. 플로어로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오월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문득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없는 줄 알면서 백 속을 뒤졌다. 필요한 그것이 없었다. 사내를 여기서 만날 줄 알았으면 가져올 걸 그랬다. 어떡할까.
저것들은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까. 저 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게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야 저렇게 여유있게 애인하고 춤을 출 수야 없겠지. 그들 한 쌍은 돋보였다. 그런데 저것들은 왜 나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일까. 나를 우려먹으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들이 왔다. 밴드는 블루스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손을 내밀었다.
"추시죠."
"전 춤 못 춰요."
오월은 당황해서 말했다.
미희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빼지 말고 함께 추라구. 따라 하기만 하면 돼."
"정말 못 춘다구요."
오월은 애걸조로 사양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아끌고 떠밀었다. 오월은 하는 수 없이 애꾸에게 손목을 잡혀 플로어로 끌려나가다시피 했다.
사내는 그녀를 능숙하게 이끌었고 그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따라갔다.
"출 줄 알면서 뭘 그래요."
사내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옛날에 조금 배우다 말았어요. 너무 오래 돼서 다 잊어먹었어요."
그녀는 일부러 사내의 발등을 밟았다.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죄송해요. 저...... 들어가겠어요."
그러나 사내는 그녀를 놔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박색인 여자야 아무렇게나 다뤄도 괜찮다는 듯, 그리고 당장이라도 꺾어 버릴 수 있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난폭하게 끌어안고 이상한 수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체가 밀착돼 오면서 뻣뻣한 것이 부딪쳐 오자 그녀는 몸을 사렸다. 자극을 느끼기에 앞서 그녀는 전율했다. 허리를 감은 손이 밑으로 내려가더니 엉덩이를 건드렸다. 그는 넓적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면서 자기 쪽으로 그것을 밀었다.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귓가를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했다.
"아이, 이러시면 안 돼요. 부인이 보고 있어요."
오월은 할딱이며 말했다. 그녀는 그 자와 이렇게 빨리 부딪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어때. 저 여자는 내 마누라가 아니라고."
"그럼 어떤 관계예요?"
"그냥 동거하고 있는 사이야."
"앞으로 결혼할 사이 아니에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외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첫눈에 당신을 봤을 때 아주 근사했어."
"전 너무 못나서 자신이 없어요. 저 같은 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 몸은 일품이야. 혼자 산다면서!"
사내는 그녀의 머리를 바싹 끌어당겼다. 오월은 일부러 허리를 비틀면서 가늘게 신음했다.
"네, 혼자 있어요."
"남편은 뭐해요?"
"선원이에요. 바다에 나간 지 1년이 넘어요."
"매우 외롭겠군. 특히 밤에 말이야."
그녀는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밤에는 거의 잠을 못 자요. 혼자 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 운명이라고 여기고 참고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앞으로 위로해 줄까?"
다리 사이로 무릎이 들어왔다.
"저 여자가 있잖아요?"
"당신이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월은 불타는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에 당신 아파트로 갈게."
오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블루스곡이 끝났다. 그들은 자리로 돌아왔다.
"춤 잘 추면서 뭘 그래."
미희가 오월을 보고 놀려댔다.
오월은 잠깐 앉아 있다가 화장실에 가는 체하고 일어섰다. 그녀는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가 나이트 클럽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 로비로 나오자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박스 안으로 들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나...... 아가다예요."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어디 계십니까?"
민기가 긴장해서 물었다.
"부탁이 있어요. 새로 얻은 아파트에 좀 급히 다녀와야겠어요. 나 지금 P호텔 나이트 클럽에 있어요. 커피숍 카운터에 열쇠를 맡겨둘 테니까 여기 와서 열쇠 찾아가세요. M아파트에 가서 내 여행용 가방을 가져와요. 까만 가죽 가방이에요. 열어보면 안 돼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다른 건 가지고 나올 거 없습니까?"
"가방만 가지고 나오면 돼요."
"그 나이트 클럽에 누가 있습니까?"
"민기 씨가 오면 안 돼요. 승우 씨를 보내세요. 10시 반에 커피숍으로 보내세요."
"10시 반, 알았습니다."
오월은 전화 박스에서 나와 커피숍으로 갔다. 계산을 치르면서 잔돈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아파트 열쇠를 내밀었다.
"이거 누가 찾으러 오면 좀 전해 주시겠어요?"
여자 종업원은 쾌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정확히 35분 후 민기와 승우는 P호텔 앞에 도착했다. 민기가 택시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승우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승우는 열쇠를 흔들며 뛰어나왔다.
20분 후 그들은 M아파트에서 택시를 내렸다. 그들이 아파트로 뛰어 들어가려고 하자 재수 없게 경비원이 그들을 가로 막았다.
"어디 가는 거요?"
"아, 심부름 왔습니다."
"몇 호에 가는 거요?"
"1동 302호에 갑니다."
"지금 아무도 없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쇠를 가져왔습니다."
"그 열쇠는 어디서 났죠?"
"우리 누님이 갔다 오라고 준 겁니다. 가방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해서......."
민기는 열쇠를 흔들며 말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그럼 누님 되나요?"
"네, 제 친누나예요."
"아, 그래요? 그럼 들어가 보세요."
그들은 토끼처럼 달려들어갔다.
10시 30분. 오월은 또 화장실에 가는 체하고 나이트 클럽에서 나왔다. 그 동안 그녀는 애꾸눈과 또 한 차례 춤을 추고 났기 때문에 긴장으로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민기와 승우가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월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녀는 민기를 향해 낮게 나무랐다.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제 걱정은 하지 말아요."
민기는 가방을 내놓았다.
오월은 가방을 열고 빨간 손지갑을 꺼냈다.
"그게 뭐죠?"
민기와 승우는 거의 동시에 물었다. 거기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는 가방을 도로 민기에게 내주었다.
"이거 가지고 빨리 돌아가세요. 나는 볼 일이 있으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그들은 멀거니 쳐다보았다.
"저는 들어가도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승우가 말했다.
"안 돼요! 돌아가세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 커피숍을 나갔다.
그들은 그녀가 사라지자 약속이나 한 듯 일어섰다.
"넌 돌아가. 내가 들어가 볼게."
승우의 말에 민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들어가겠어."
승우는 펄쩍 뛰었다.
"넌 안 돼! 그 자가 널 알아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들은 나이트 클럽 앞에서 그 문제를 놓고 다투었지만 결국 민기의 고집이 승우를 물리쳤다. 승우가 먼저 안에 들어갔다 나와 상황을 보고했다.
"저쪽 앞에 앉아 있으니까 날 따라와."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기둥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정을 모르는 웨이터가 좋은 자리로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그 자리를 고수했다.
플로어 쪽을 더듬던 민기의 시선이 이윽고 한 곳에 못박혔다. 애꾸눈의 사나이가 마침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바로 저 자야."
"어떤 여자하고 춤추고 있는데."
오월은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기까지의 거리는 15미터쯤 되어 보였다.
10분쯤 지나 애꾸눈의 사나이와 여인이 오월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을 보고 두 청년은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자가 오부인을 못 알아보고 있는 모양이야."
"재빨리 접근했는데 탈이 없을까."
승우의 걱정하는 말에 민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그건 뭐였지?"
"뭐 말이야?"
"빨간 손지갑 말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두 사람 다 빨간 손지갑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아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입 밖에 꺼내는 것을 꺼려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거 봐."
애꾸눈의 사내가 오부인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가까워졌나."
"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승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애꾸와 오부인은 다정한 연인들처럼 춤을 추며 돌아갔다.
"저럴 수가 없어."
승우가 흥분해서 말하는 반면 민기는 말 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어쩌려고 저럴까? 불안해서 못 보고 있겠는데......."
"갈 데까지 갔어."
"그게 무슨 말이야?"
"기다려 봐."
민기는 맥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승우도 따라 마셨다.
자리에 돌아온 오월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더 이상 못 추겠어요."
"덥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땀을 흘리지."
미희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실내는 냉방이 되어 있어서 그다지 덥지 않았다.
디스코같이 온 몸을 흔들어대는 춤이라면 몰라도 템포가 느린 블루스를 추면서 땀을 흘렸다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좀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열이 좀 있어요."
미희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맥주를 마시니까 자꾸만 소변이 마려워."
그녀가 사라지자 애꾸는 손을 뻗어 오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외눈을 번득이며,
"오늘 밤 알았지?"
하고 말했다.
오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손이 탁자 밑으로 내려왔다.
"미치겠는데."
"저도 미치겠어요. 하지만 참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녀의 허벅지를 슬슬 만지다가 점점 손을 계곡의 깊숙한 부분으로 가져왔다.
오월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허리를 비비 틀었다.
"이러지 마세요."
그녀는 다리를 오므렸다.
미희의 모습이 보이자 사내는 그제서야 손을 거두었다.
오월은 두 개의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두 분만 드세요. 전 더 이상 못 마시겠어요."
그녀는 취한 듯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것을 보고 두 사람은 의미있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미희는 오월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오늘 밤 우리 함께 자지 않겠어?"
"아, 맘대로 해요. 난 외롭단 말이에요. 날 더 이상 외롭게 만들지 말아요."
그녀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그래, 외롭게 만들지 않을게. 셋이 함께 자는 거야. 셋이 함께 즐기는 거야. 오늘 밤 둘이 만나기로 한 거 다 알고 있어."
오월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러나 눈은 계속 감고 있었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 난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 오늘 밤 셋이 함께 자는 거야! 알았지?"
잔뜩 취기어린 말에 오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미희는 만족한 표정을 일어섰다.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춤추기 위해 애꾸의 팔짱을 끼고 플로어로 향했다.
오월은 눈을 떴다.
"흥,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라구? 그렇지. 그건 당신한테 해당되는 말이야.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상당히 취했으나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움직임이 대담해졌을 뿐이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춤추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다음에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빨간 손지갑을 꺼냈다. 그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채 탁자 위에 태연히 올려놓았다. 손끝 하나 떨지 않으면서 지퍼를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침착한 태도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를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타고난 살인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손지갑 속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냈다. 사진 필름통만한 작은 병이었는데 안에는 무색 투명한 액체가 반쯤 들어 있었다. 그녀는 뚜껑을 열었다. 손으로 가리지도 않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대담하게 병 속에 든 액체를 자신의 술잔 안에 조금 흘려 넣었다.
"볼 테면 봐라! 어쩔 테냐?!"
그녀는 바로 이런 심정이었다.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 다음 그것을 애꾸눈의 자리에 밀어놓았다.
대신 애꾸의 술잔을 가져왔다. 젊은 여자 하나가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앉아 있었다. 청순해 보이는 것이 대학생 같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술잔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아마 두 명은 플로어로 춤추러 나간 것 같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오월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곧 시선을 돌려 버렸다.
오월은 두 잔을 거푸 마셨다. 그리고 나서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눈을 스르르 감았다. 머리가 갑자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떠도 마찬가지였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오자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미희가 어깨를 툭툭 쳤다.
"벌써 이러면 어떡해. 한 잔 더해."
"가만 있어요. 어지러워서 그래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애꾸를 바라보았다.
디스코를 한 판 추고 나서 더운지 그는 오른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었고 왼손으로는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손수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나서 마침내 그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월의 눈이 절로 떠졌다. 상대가 숨도 쉬지 않고 맥주를 마시는 동안 그녀의 눈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어, 시원하다!"
단숨에 맥주를 들이키고 섬뜩한 미소를 던져왔다. 오월은 백을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애꾸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자에게 알려야 된다. 그래야만 복수가 되는 거다. 오월은 숨을 들이키고 나서 말했다.
"오월이란 여자를 알지? 내가 바로 오월이야. 내가 오월이란 말이야. 이 살인자!"
그녀는 낮게 부르짖으면서 사내의 곁을 지나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애꾸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면서 무릎을 꺾었다.
"우우우우......."
외마디 신음 소리를 지르면서 그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 바닥을 손톱으로 긁어대면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때 맞춰 실내에는 광란에 가까운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사람 살려요!"
미희가 악을 쓰면서 자리에서 튀어나왔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우하니 일어섰다. 그래도 곡은 연주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악을 쓰는 소리가 났다. 비로소 음악이 멎고 실내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잠시 후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어!"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나 애꾸눈의 사내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격렬한 고통으로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무섭게 경련했다. 천장을 향해 벌렁 드러눕더니 눈을 부릅뜨고 거품을 내뿜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입이 굳어 한마디도 나오지가 않았다.
"아까 그 여자가 술잔에 약을 타는 걸 봤어요."
사람들 틈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흥분해서 말했다.
"방금 나간 여자를 잡아요!"
미희는 발을 구르며 소리치다가 무릎을 굽히고 죽어가는 사내를 끌어 안았다.
"왜 그래요? 어디가 아파요? 말 좀 해 보세요?"
경련이 서서히 멎으면서 사내의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을 게 아니라 병원으로 빨리 데려가요!"
구경꾼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미희는 벌떡 일어섰다.
"구경만 하지 말고 누가 좀 도와주세요!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러나 선뜻 나서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련이 완전히 멎었을 때에야 웨이터가 저고리를 벗고 허리를 굽혔다.
"아무 데나 가까운 병원으로 가 주세요!"
구경꾼들 중에는 놀랍게도 장형사의 얼굴이 있었다. 조민기의 얼굴도, 신승우의 얼굴도 보였다. 그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혹은 놀란 눈으로 죽은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애꾸눈의 사내는 웨이터의 등에 업혀 밖으로 나갔다. 정미희는 그 뒤를 정신없이 따라 나가다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고 물었다. 한 명은 기도를 보는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웨이터였다.
"그년 잡았어요?"
"못 잡았습니다. 택시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매우 냉담하게 말했다.
"살인자를 놓치다니 뭐예요?"
그녀는 울분을 토했지만 그들은 슬슬 피해 버렸다.
"차가 있어야 따라가죠. 택시를 잡았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어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애꾸눈의 사나이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시체를 안으로 들여놓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시체는 길가에 눕혀졌다.
미희는 울지도 않았다. 슬퍼하기보다는 이 곤경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는 것 같았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급기야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미희는 처마 밑으로 피했다. 구경꾼들도 비를 피해 흩어졌다. 길바닥에 눕혀진 시체만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경찰이 나타난 것은 20분쯤 지나서였다. 경찰 앰블런스가 시체를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미희는 경찰 패트롤카를 타고 아파트로 향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죠?"
사복의 사나이가 차 속에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정수자라고 해요. 하지만 그 이름은 가짜 같아요. 아까 그이가 쓰러져 있을 때 그이한테다 대고 자기가 오월이라고 했어요."
"오월이라고?"
형사가 긴장해서 되물었다.
"네, 분명히 자기가 오월이라고 했어요."
그녀는 담배를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그 여자가 술잔에 약을 타는 걸 봤나요?"
"보진 못했어요. 봤으면 제가 가만 있었겠어요. 어떤 여자 손님이 그걸 봤다고 했어요."
"어떤 여자?"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그 클럽에 온 손님 같았어요."
차가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형사들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마침내 아파트에 이르자 그녀는 앞장서서 3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예요. 여기가 그년 집이고 여기는 제 집이에요."
그녀는 턱으로 302호를, 오른손으로는 301호를 가리켰다.
형사 하나가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경비원이 뒤늦게 뛰어 올라왔다.
"이 집 주인 오지 않았나요?"
"오지 않았습니다."
"비상 열쇠 있죠?"
"네, 있습니다."
"문 좀 열어 주시오."
잠시 후 그들은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내부는 살림살이도 없는 텅빈 집이나 다름없었다. 이부자리와 자취 도구가 좀 있을 뿐으로 얼른 보기에도 임시로 빌려쓴 집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주인의 신원을 밝힐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희로부터 범인과 알게 된 경위, 그리고 나이트클럽에 가게 된 과정을 소상히 듣고 난 형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 여자는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살인한 겁니다. 여기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범인은 이것으로 두번째 살인을 한 겁니다."
"아니, 그럼......."
미희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네, 이미 수배 대상에 올라 있는 인물입니다. 그 여자는 복수를 위해 날뛰고 있습니다."
"복수라고요?!"
갈수록 놀라운 사실만 드러나고 있었다.
"네, 그 여자는 복수한 겁니다. 우리는 그 여자의 신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건 당신과 동거한 피살자의 신원입니다."
"왜, 왜 복수를 했나요?"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그러나 경찰은 자세한 것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는 피살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십시오."
조민기와 신승우는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벙어리가 된 듯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사람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흠뻑 젖었다. 가로등 밑에서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계속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지만 눈만은 이상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걷다가 승우가 먼저 길가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비가 오고 있는 탓인지 마차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중년 여인이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자 여인이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홀깃홀깃 쳐다보았다.
한 병을 비우고 났을 때 민기가 일어섰다. 그는 여인에게 공중전화가 근방에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래로 좀 내려가면 약국에 공중전화가 있다고 말했다.
"전화를 걸고 오겠어."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약국이 있었고, 공중전화는 그 안에 있었다.
여약사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물에 빠진 새앙쥐 같은 몰골로 들어서는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동전을 집어넣고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오부인의 아파트에 거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한참 기다렸다가 전화를 끊고 다시 다이얼을 돌려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있으면서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겠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체포된 게 아닐까.
그는 초조한 걸음걸이로 포장마차로 돌아왔다.
"전화를 안 받아."
승우는 아무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는 많이 취해 있었다.
그 시간에 오월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녀 역시 비오는 밤거리를 혼자 헤매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비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미친 여자 같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니, 빗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차량도 행인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지나치는 행인이라고는 거의가 술에 취한 사내들뿐이었다.
그녀는 보도 위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차도로 들어섰다. 그곳은 건널목도 아니었다. 양쪽에서 차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차가 거의 동시에 급정거했다. 하나는 택시였고 다른 하나는 유조트럭이었다.
"야이, 쌍년아!"
욕설과 함께 택시에서 운전사가 뛰어내렸다.
"조지라고! 그런 년은 조져야 해."
유조 트럭 운전사는 다시 차를 출발시키면서 택시 운전사에게 말했다.
"야!"
택시 운전사는 뛰어오더니 오월의 팔을 낚아챘다. 난폭하게 여자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워 놓고 그는 일갈했다.
"야!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
오월은 아무 감정 없는 눈길을 던졌다.
"이년이 미쳤나!"
그는 오월의 따귀를 한 차례 세게 올려붙였다.
오월은 비틀거리다가 바로 섰다.
"얼굴이 예쁜 것이 그랬으면 밉기나 덜하지. 쌍년, 따라와. 너 같은 건 경찰에 넘겨야 해."
운전사는 그녀를 차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는 그녀를 운전석 옆자리에 앉혔다.
운전사는 차를 몰면서 계속 욕설을 해댔다. 그러나 오월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잘못 했다고 용서를 빌거나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도대체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이 운전사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야, 너 귀머거리야?"
그러나 그녀는 표정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차를 파출소 앞에 세우고 그녀를 끌어내렸다.
"이년을 처벌해 주십시오. 함부로 차도를 횡단하지 않아요. 하마터면 깔려죽을 뻔했어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파출소 안에는 두 명의 순경이 있었다. 한 명은 전화를 걸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책상 앞에 앉아서 무엇을 쓰고 있다가 운전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주 젊은 순경이었다.
"알았으니 가보시오."
순경은 운전사가 사라지자 오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몰골이 안됐는지 그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오월은 긴 나무의자에 말없이 앉았다.
"왜 비를 맞고 다녀요?"
"......."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
"차도를 함부로 횡단하다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
전화를 걸고 있던 순경이 전화를 끊고 책상에 앉아 있는 순경을 향해 말했다.
"오월이란 여자가 또 사람을 죽였어. 이번에는 독살한 모양이야. 나이트 클럽에서 해치운 모양이야. 지금부터 비상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뭐야?"
"보행 위반이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순경이 대답했다.
"보행 위반? 술 취한 것 같은데?"
순경은 여자 앞으로 다가서며 손으로 턱을 치켜올렸다.
"당신 술 마셨지요?"
여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여자가 밤 늦게 술 마시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해? 그러다가 사고가 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때 여자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순경들은 어리둥절했다.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인데......."
"보내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순경이 말했다. 여자는 아주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갈수록 격렬하게 흐느꼈다.
"곤란한데. 이봐요. 그만 울고 내 말 들어요. 숙직실에 가서 한숨 자고 가든가 집에 가든가 해요. 보행 위반은 처벌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여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갈 수 있겠어요?"
순경이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없이 비오는 거리로 걸어나갔다.
길가에서 오줌을 누고 있던 주정뱅이 두 명이 그녀를 따라왔다.
"여, 이거 동지를 만났군 그래. 이거 얼마 만인가?"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오월은 육교 위로 올라갔다.
사내들은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왔다.
"히프가 그만인데. 아주 육감적이야."
뚱보의 말에 빼빼가 낄낄거렸다. 확실히 육교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엉덩이는 바지를 찢을 듯이 팽팽했다.
"근사한 엉덩이야."
"응, 멋있어. 아주 예술적이야."
"임마, 여자 엉덩이 보고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놈이 어딨어."
그 말에 빼빼는 히히거렸다.
"예술적이니까 예술적이라고 그러지. 나는 예술적인 걸 존경해. 나는 저 예술적인 히프를 존경해."
"나는 저런 걸 보면 미쳐 버릴 것 같애. 어떡하지?"
"미쳐라 미쳐."
"그래, 미쳐야지"
그들도 육교 위로 올라갔다.
오월은 다리의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뚱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예술적인 히프를 가지신 분이 뭐가 부족해서 자살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살은 죄악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비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사내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에그!"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가는 게 좋겠어."
빼빼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은 자살하게 내버려두는 거야. 우리는 살아야지. 자, 가자구."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집적거리지 않고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녀는 문득 생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그것은 아주 신선하면서도 강한 충격으로 그녀를 사로잡았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녀는 급히 육교를 내려왔다. 택시를 잡았다. 아파트에 돌아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타월로 몸을 두르고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민기가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벗겼다. 민기는 얼굴이 핼쑥해져서 들어왔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민기의 눈은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길에 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반면 오월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조용해서 마치 죽은 호수 같았다.
"용서해요."
마침내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민기는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용서하세요."
"어떻게 그걸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나는 부인을 단죄할 수 없어요. 나도 공범이니까."
그는 부르르 떨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경찰에 나를 넘기세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아요."
그는 오월을 와락 끌어안았다. 오월도 피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에서 타월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오랫동안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현관에 서서 움직이려고 들지 않고 그렇게 한참 동안 포옹하고 있었다.
"머리가 모두 젖었군요."
한참 후 민기는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거기도 젖었는데요."
오월도 민기의 머리칼을 만졌다.
"승우하고 함께 비를 맞으면서 한참 걸었지요."
"나도 그랬어요."
"감기 들겠어요."
그는 오월을 안아들었다.
오월은 민기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이트 클럽에 있었어요?"
"네, 그 자가 죽어가는 걸 봤어요."
"어떻게 죽던가요?"
"몹시 괴로워하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어요. 만족해요?"
민기는 그녀를 눕힌 다음 재빨리 옷을 벗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몸을 헤치고 들어갔다. 깊이 들어감에 따라 그녀의 호흡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12 미로(迷路)의 끝
나이트 클럽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청산에 의한 독살로 밝혀졌다. 수사본부는 어수선했다.
아침 10시쯤 되자 서울서 비행기 편으로 내려온 수사팀까지 설쳐대는 바람에 그곳은 흡사 장터를 방불케 했다.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 가운데 피살자와 동거해 온 정미희와 장순애라는 여대생이 가장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월의 사진을 보더니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는 아니에요. 이렇게 잘 생기지 않았어요."
정미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범인은 자기 이름이 오월이라고 했다면서요?"
형사 하나가 물었다.
"네, 분명히 오월이라고 했어요. 오월이란 말을 여러 번 했어요. 내가 바로 오월이라고 하면서 살인자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가만 있었나요?"
"왜요, 벌떡 일어났다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어요."
"그 여자는?"
"문 쪽으로 걸어갔어요."
"뛰어갔나요?"
"아뇨, 보통 걸음으로 걸어갔어요."
"왜 붙잡지 않았죠?"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그럴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그 여자는 내뺐어요."
형사는 여대생 장순애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가 맥주잔 속에 무엇인가 탈 때 그게 뭐라고 생각했나요?"
그녀는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마치 스크린을 쳐다보는 것처럼......."
"그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면서요?"
"네,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그 여자는 놀라거나 하지 않았어요. 아주 침착하게 행동했어요. 시선이 마주쳤을 때 저를 보고 웃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당황한 쪽은 오히려 제 쪽이었어요."
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게 약이라고 생각지 못했을까?"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무심코 쳐다봤을 뿐이에요.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수고스럽지만 몽타주를 만드는 데 협조해 줘야겠어요."
"학교에 가야 하는데요."
여대생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형사가 정미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장완수 형사였다.
"피살자와 만난 게 언제였나요?"
"한 달쯤 됐어요."
"어떻게?"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다가다 만났어요."
장형사는 책상을 두드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 봐요."
"한 달 전에 '로댕의 집'이라는 스낵바에서 소개받았어요."
"누구한테 소개받았죠?"
"사장한테서 소개받았어요."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그녀가 혹시 일당이 아닌가 해서 그쪽으로 질문을 유도해 가는데 생각과는 달리 일당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첫 결혼에 실패하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닥치는 대로 이 남자 저 남자 섭렵하고 있었다. 신원 조회 결과 사기 전과가 있었다. 남의 곗돈 5천만원을 떼어먹고 달아난 일이었다.
"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었나요?"
"아뇨, 좀 살다가 헤어질 생각이었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도대체 그 사람 이름이 뭐죠?"
"전복기예요."
"그 이름은 가짜요. 알고 있었나요?"
"몰랐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요?"
"별로 없어요."
"무슨 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걸 알려고 했는데 알 수가 없었어요. 돈은 항상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책상 위에 피스톨 한 자루와 여권이 놓여졌다.
"이건 그 사람의 가방 속에서 발견된 거요. 이걸 본 적이 없나요?"
"없어요. 제가 가방을 봤을 때는 그런 게 없었는데요."
"그럼 그 뒤에 넣어둔 모양이군."
형사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편한 대로 앉아서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수사반장이 중간에 앉아서 회의를 이끌었다.
"오월의 얼굴이 다른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장형사는 숨을 죽이고 반응을 기다렸다. 제발 사실이 밝혀지지 말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금방 깨어지고 말았다.
"제 생각에는 성형 수술을 한 것 같은데요. 아니면 변장을 했든가."
창가에 서 있던 형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자, 여기 저기서 거기에 동조하고 나왔다.
"변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완벽한 변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변장에 능한 사람도 아닌데......."
"맞습니다. 수술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여자가 자기 얼굴을 일부러 추하게 만드는 수술을 할 수 있을까?"
반장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 여자는 특별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해. 복수를 위해 자기를 내던졌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결국 결론은 그녀가 성형 수술을 했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번에 피살된 자에 대한 신원 조사는 장형사가 이미 마무리지어 놓고 있었다. 그는 그 결과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한다는 것이 싫었지만 발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세 가지는 그 자가 죽기 전에 제가 몰래 아파트에 들어가 꺼내 온 겁니다. 이 사진을 조회시킨 결과 피살자는 밀수 전과 4범인 한상필로 밝혀졌습니다. 두번째는 이 여권입니다. 여권에 적힌 이름은 서정수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은 한상필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알아본 결과 서정수라는 인물은 6개월 전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살해된 것 같습니다. 한은 그가 죽자 여권을 빼내 서의 사진을 떼어 내고 거기다가 자기 사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서는 모 무역회사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알아보니 그 회사는 유령회사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서 역시 건
실한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피스톨을 조사해 봤습니다. 콜트 45구경인데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총 넘버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군 쪽에 알아봤더니 한 달 전에 분실된 것이었습니다. 원소유자는 장교였는데 아마 사병이 훔쳐서 암시장에 흘려 보낸 것 같습니다."
보고를 끝내고 그는 '로댕의 집'을 급습했다.
'로댕의 집' 사장인 손대식은 오후 4시쯤에야 가게에 나타났다. 장형사는 그를 부근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밀수 전과 2범 손대식, 왜 연행된 줄 아시오?"
손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오월이라는 여자를 알지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왜 연행됐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여자의 남편을 죽인 자들을 찾고 있어요. 모두 네 명이었는데 이제 두 명만 남았지."
손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신은 알고 있을 테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한상필이 어젯밤 죽었어요. 독살당했어요. 오월이한테......."
순간 손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같았다.
"이건 극비 사항이기 때문에 신문에는 보도가 안 됐어요."
장형사는 한상필의 죽은 얼굴을 찍은 사진을 꺼내 놓았다.
"협조해요. 나머지 두 명은 어디 있지?"
손은 한동안 불안한 기색을 보이다가 마침내 배신의 기미를 드러냈다.
"모두 서울로 간다고 갔습니다."
"두 명의 이름은?"
"이준구와 엄창근입니다."
"서울 어디에 있나?"
그러나 여기서 그는 답변을 거부했다.
장형사는 그를 데리고 여관을 나와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아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서울 가는 거야. 잔말 말고 타."
장형사는 싫다는 상대를 버스에 억지로 태웠다. 손은 울상이 되어 버스에 올랐다.
"이건 막차야. 서울까지는 다섯 시간 반 걸리지. 그 동안 당신은 잘 판단해서 두 명이 있는 곳을 나한테 말해 줘요."
버스가 출발하자 장형사는 등받이를 뒤로 잔뜩 젖히고 상체를 편안하게 눕혔다.
서울, 같은 날 오후 7시.
그들은 아파트 거실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두 명 다 얼굴에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위스키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아파트 거실치고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살림살이 같은 것은 없었고, 독신 남녀가 잠시 머물기 위해 빌린 아파트 같은 인상이 짙었다. 그래도 장식장 위에는 14인지 컬러 텔레비전 한 대가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한 여가수가 유난히도 몸을 흔들어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거기에는 거의 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연락이 없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전화도 안 받아."
대머리에 매부리코를 가진 사나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거구여서 긴 소파 하나가 거의 꽉 차 보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음울한 눈빛으로 대머리를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전화를 걸기로 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 사고난 게 틀림없어."
대머리는 시거에 불을 붙였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섞지 않은 채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플레이보이 자식한테서도 연락이 없단 말이야. 부산에 한 번 다녀올까?"
대머리가 거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술맛이 쓰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안 됩니다."
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떡하는 게 좋겠어?"
"더 좀 기다렸다가 알아보고 나서...... 그래도 연락이 안 되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대머리는 끄덕였다.
거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어디 거는 거야?"
"족제비한테......."
"세 번이나 걸었는데 받지를 않아."
거미는 못 들은 체하고 다이얼을 계속 돌렸다. 마지막 번호를 돌리고 나자 신호 가는 소리가 다르르 하고 들려왔다. 한참 그렇게 다르르 다르르 하다가 찰칵 하고 신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미는 대머리에게 눈짓을 보낸 다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대머리는 그것을 낚아채듯이 받아들고,
"여보세요!"
하고 소리쳤다.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여, 여보세요!"
대머리는 쥐어짜는 소리를 냈다.
"말씀하세요."
차디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부산이지요?"
"그런데요."
"전복기 씨 계십니까?"
"안 계시는데요."
"어디 갔습니까?"
"모르겠어요."
"언제쯤 들어옵니까?"
"모르겠어요."
여자는 매우 쌀쌀맞게 대답하고 있었다. 대머리는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물었다.
"지금 매우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빨리 좀 연락을 취할 수 없을까요?"
"없어요. 그저께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오고 있어요. 저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그쪽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시면 나중에 연락해 드리겠어요."
대머리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사람 오는 대로 빨리 전화를 부탁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몇 번으로 전화를 걸라고 하죠?"
"그렇게 말하면 알 겁니다."
대머리는 수화기를 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이쪽 전화번호를 굳이 알려고 하는 게 이상해.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아."
"혹시 경찰에 체포된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이상해. 이렇게 연락이 없을 수 없어. 내일 첫 비행기로 내려가봐."
"알겠습니다."
"플레이보이한테 먼저 찾아가봐. 그 놈한테도 연락이 없는 게 무슨 사고가 난 게 틀림없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자기가 불리해지면 배신하기 마련이니까 조심해서 알아봐."
"기미가 이상하면 없애 버리죠. 뭐."
그는 감정 없는 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믿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거미 같은 사내는 아무 대꾸 없이 일어섰다.
"지금 가는 거야?"
"내일 첫 비행기로 가려면 준비해야죠."
거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사라졌다.
장형사는 손대식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손은 어둠이 내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가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장형사는 느낄 수 있었다. 세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그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침묵이야말로 상대방에게 불안을 심어주고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손은 무슨 말인가 할 듯하면서 자꾸만 상체를 움직였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했다.
"커피나 한 잔 하지."
장형사는 앞장서서 내렸다. 그 뒤를 손은 엉거주춤 따라왔다. 그들은 화장실에 가서 나란히 소변을 본 다음 매점으로 갔다.
"생각해 봤나?"
장은 손에게 커피를 권하면서 물었다.
손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몹시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장형사는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이 사건은 결말이 나기 마련이야. 두 사람이 죽을 가능성은 매우 커. 오월이란 여자가 그들을 쫓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그 여자를 우습게 보면 안 돼. 벌써 두 명이나 죽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 여자는 틀림없이 그들을 죽이고 말 거야. 그것을 막는 길은 경찰이 그들의 신병을 먼저 확보하는 길이야."
"왜 그 여자를 체포하지 않습니까?"
장은 손을 매점에서 데리고 나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체포하지 않는 게 아니야. 잡히지가 않아서 우리도 고민하고 있어.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비상이 걸려 있는 실정이야."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겠죠. 경찰에 붙잡혀도 살인 강도로 사형받을 거 아닙니까?"
장은 빈 종이컵을 우그러뜨렸다. 그리고 날카롭게 손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들이 어떻게 죽기를 바라나?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거야? 정 그렇다면 지금 돌아가도 좋아. 붙잡지 않을 테니까. 가라고."
"제가 만일 돌아간다면 다음에 만날 때는 제 손에 수갑을 채우시겠지요."
"그거야 법에 따라서 처리할 뿐이지. 당신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한들 말짱 헛것이라는 거야. 당신은 무엇으로도 그들을 구제할 수 없어.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어. 남은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그들과 운명을 함께 안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 걸 알아둬요. 이 기회를 잃으면 당신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거야."
"협박치고는 무서운 협박이군요."
손은 담배꽁초를 구두 끝으로 밟았다.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당신은 영리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
그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한 시간쯤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장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마침내 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 갈 길로 가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얼마든지 가능하지. 운명이 다한 자들에게 연연할 필요가 뭐 있어? 당신 갈 길로 가는 거야. 경찰이 방해하지는 않을 거야."
"잘 아시겠지만 이 세계는 보복이 철저합니다. 제가 배신한 걸 알면 그들은 틀림없이 보복하고야 말 겁니다. 이 손가락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른 겁니다."
그는 왼손을 펴 보였다.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이건 경고의 뜻입니다. 만일 또 한 번 배신하면 그때는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그는 전율했다.
장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그들이 자유로울 때 가능한 일이야. 그들은 지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그래도 만일의 경우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체포될 때까지 얼마 동안 숨어 있으면 되지 않아."
손은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버스가 서울에 닿을 때까지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시각은 밤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났을 때까지도 손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장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를 데리고 여관을 찾아들었다.
"오늘 밤은 어차피 함께 자야 할 운명인가 보군."
자리에 눕자마자 장형사는 곧장 곯아떨어졌다.
손은 곤하게 자고 있는 형사의 얼굴을 신기한 듯 내려다보다가 불을 끄고 그 곁에 가만히 누웠다.
이튿날 장은 8시 좀 지나서 눈을 떴다. 방안이 텅빈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보니 있어야 할 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려니 예상했었던 일이라 그는 별로 놀라지 않고 일어나 앉았다.
머리맡에 메모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수첩에서 찢어낸 종이었다. 거기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빙그레 웃었다. 승리의 미소였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광복동 입구에서 택시를 내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비닐 우산을 하나 사들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는 베이지색 반팔 사파리 차림이었다.
잠시 후 그는 어느 2층 다방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앞으로의 일을 곰곰 생각했다.
깡마른 얼굴에 얼굴색이 누르스름하고 세모진 눈을 가진 그는 움직임이 너무도 조용한 데다 언제나 음울한 인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미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20분쯤 지나 그는 다방 전화로 '로댕의 집'을 불렀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배사장 있습니까?"
손대식은 배사장으로 통하고 있었다.
"어디신가요?"
"친굽니다."
"지금 안 계신데요."
"어디 가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모를 리가 있나?"
"정말 몰라요."
"언제쯤 돌아오나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말씀을 안 하시고 나가셨으니까요."
"언제 나갔나요?"
"어제 오후에 나가셨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거요?"
"네, 그래요. 어떤 사람이 와서 데리고 갔어요."
"어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댁은 누구세요?"
"친구라고 했지 않아."
"친구 누구시라고 할까요?"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방을 나왔다.
장형사는 전화국을 나왔다.
관할 전화국에 가서 전화번호를 보이면서 주소를 알아야겠다고 하자 직원은 그의 신분을 확인한 다음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에 그는 시경찰국에 가서 두 시간 가량 보냈다. 이준구와 엄창근의 이름을 컴퓨터에 넣어 조회시켰더니 한 시간만에 그 결과가 나왔다.
이준구는 사기 및 밀수 전과가 있었고 엄창근은 전과가 없었다. 이는 복역 기간이 8년이나 되었다.
드러난 것이 이 정도라면 숨겨진 범죄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엄은 전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그만큼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형사는 그들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뽑았다. 다음에 그들에 대한 자료를 더 모으려고 과거 이준구를 체포했던 형사를 만나보았다. 늙은 형사는 몹시 바빴기 때문에 복도를 걸어가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자가 또 걸렸나? 대단한 악질이야.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흑풍이라는 밀수 조직의 행동대장 격이지. 1년 전부터 수배중인데 아직까지 검거되지 않고 있어. 그 자를 왜 찾나? 무슨 일에 걸렸지?"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장형사는 신원 조회에서 드러난 주소로 찾아가 보았다.
먼저 이준구의 주소를 찾아갔는데 예상대로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엄창근의 주소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 대한 자료란 것이 오래 전의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화국에서 알아낸 주소지를 찾아갔다. 손이 남겨두고 간 전화번호의 주인은 조애리(趙愛利)라는 여자였다.
한참만에 찾아낸 주소는 명동에 자리잡은 '에뜨랑제'라는 이름의 의상실이었다.
이거 곤란하겠는데. 여자 옷 전문의 의상실을 남자가 기웃거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쇼윈도 앞에 잠시 서서 값비싸 보이는 옷들을 구경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내부를 슬쩍슬쩍 살폈는데 안에서는 몇몇 여자들이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며 담소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요란스럽게 치장들을 한 30 안팎의 젊은 여자들이었다.
한 여자가 쇼윈도를 구경하고 있는 그를 보고 뭐라고 말하자, 다른 여자들이 일제히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장형사는 그들에게 미소를 던진 다음 그곳을 떠났다.
넓은 길을 사이에 두고 '에뜨랑제' 맞은편에는 제화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제화점 사이에 좁은 골목이 하나 나 있는 것이 띄었다. 낮인데도 그곳은 빛이 차단되어 어두워 보였다. 그 골목 입구를 절반 가량 막고 있는 것은 구두닦이들이었다.
장형사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구두통 위에 왼발을 올려놓는다. 거기에는 두 명의 청년이 버티고 앉아 있었고 서너 명의 조무래기 소년들이 돌아다니며 구두를 물어오고 있었다. 구두를 다 닦을 때까지 장은 맞은편 의상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이 구두통을 두드리자 그는 발을 내린 다음 천원짜리 한 장을 내주었다. 청년이 거스름돈을 주는 것을 그는 손을 저어 막았다.
"필요 없어. 여기 터줏대감이 누구야?"
느닷없는 질문에 그들은 경계심을 보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죠?"
험상궂게 생긴 청년이 껌을 짝짝 씹으며 물었다.
"묻는 말에 대답해. 터줏대감이 누구야?"
상대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지 청년은 험상궂은 표정을 풀었다.
"우리, 그런 거 없습니다."
"자네 날 따라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무슨 일로 그럽니까?"
"따라와 보면 알아."
"경찰인가요?"
장은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골목을 나와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갔다. 구두닦이 청년은 불안한 기색으로 따라왔다.
"거기서 구두 닦은 지 몇 년이나 됐지?"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묻는 말에 대답해."
위압적인 말에 청년은 잔뜩 위축되었다.
"5년, 아니 6년 됐습니다."
"그 동안 돈 많이 벌었지?"
"아, 아뇨. 돈 번 건 없습니다. 그저 굶지 않고 사는 정도지요."
"자네가 왕초지?"
"왕초는 무슨......."
청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 차를 들면서 내 말 잘 들어. 맞은편에 있는 의상실 '에뜨랑제' 말인데...... 그 가게 차린 지 얼마나 됐지?"
청년은 화제가 갑자기 바뀌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손으로 코를 훔치고 나서,
"한 1년 됐습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다.
"사장은 누구야?"
"여잡니다."
"이름 알고 있어?"
"조사장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청년은 장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유부녀이겠지?"
"세컨드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래? 기둥서방은 누구야?"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거기 출입하는 남자들 기억하겠나?"
"글쎄요. 여자 의상실인데 남자들이 출입할라구요."
"아니야, 틀림없이 출입하고 있어. 이런 사람 보지 못했나?"
장은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의 사진을 꺼내 놓았다. 청년은 그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나더니 고개를 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이번에는 면도날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순간 청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 본 것 같습니다."
"언제 보았나?"
청년은 머리를 짜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얼마 전에 구두 닦으러 왔습니다. 구두를 벗어놓고 의상실로 가져오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틀림없겠지?"
"틀림없습니다."
장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줘야겠어. 난 살인 사건을 맡고 있는 김형사라고 해."
그는 일부러 가명을 대주었다.
청년은 잔뜩 긴장하는 얼굴이 되었다.
"만일 자네가 협조해 준다면 나도 자네한테 응분의 보상을 해주겠어. 여러 가지로 말이야. 공짜로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청년은 좀 생각해 보는 눈치이더니 이윽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뭔데요?"
"저 의상실을 감시해 달라는 거야. 의상실에 이 두 사람이 출입하는지 안 하는지 봐달라는 거야. 그들이 나타나면 정확한 시간을 적어둬."
그는 두 장의 사진을 건네주며 당부했다.
"이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데요?"
"살인범들이야."
청년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알겠습니다. 협조해 드리죠."
"이건 극비야.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알겠습니다."
"자네 혼자 감시할 수 없을 테고, 자네가 거느리고 있는 애들을 동원해야 할 텐데 그런 경우에라도 입 조심하도록 단단히 당부하지 않으면 안 돼."
"감시만 하면 됩니까?"
"그들 중 누구라도 나타나면 나한테 즉시 알려줘."
"어디로 연락하면 됩니까?"
"조금 있다 연락처를 알려주지. 잘 좀 부탁해. 할 수 있겠지?"
"염려 마십시오."
다방을 나온 장형사는 가까운 여관에 방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구두닦이 청년에게 그곳을 알려주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방안에 드러누워 버렸다. 누적된 피로로 그는 금방 잠이 들었다.
플레이보이는 조심스럽게 출구를 빠져나왔다.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휘둘러본 다음 역 광장을 가로 질러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꼭 따라오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곤 했다.
다방 앞에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로 바로 간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마담 겸 애인인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그는 작은 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머, 지금 어디 계세요?"
"가까운 데 있어."
"어디 갔다오셨어요?"
"음, 어디 좀 갔다왔어. 나 찾는 전화 없었어?"
"왜요, 아침부터 있었어요. 조금 전에도 왔어요."
"누구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아주 기분 나쁜 목소리예요. 누구냐고 하니까 그냥 친구라고만 했어요."
"서울서는?"
"서울서는 오지 않았어요?"
"누가 묻거든 나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해. 전화 왔다는 말 절대 하지마."
"무슨 일 있어요."
"그럴 일이 있어. 당분간 가게에 못 나갈 것 같아. 짐 좀 꾸려 가지고 나와. 돈도 좀 가지고 나오구. 5백만원쯤 필요해."
"집에 갔다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얼마나 걸리겠어?"
그는 성이 난 듯 물었다.
"넉넉 잡고 두 시간쯤 걸릴 거예요."
"두 시간 동안 그럼 난 뭘 하란 말이야?"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나서 잠시 생각해 보더니,
"집에 가서 짐을 챙기고 있어. 다시 전화할 테니."
하고 말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생각에 잠긴 그는 잠시 후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해운대로 갑시다."
너무 긴장하고 불안한 데다 오랜 시간을 차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는 몹시 피곤했다. 피곤을 풀기 위해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해운대에서 택시를 내린 그는 S호텔 안으로 들어가 방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애인은 그가 시킨 대로 집에 도착하여 짐을 챙기고 있었다.
"여기 해운대 S호텔이야."
"곧 갈게 기다리세요.
"8층 5호실에 있어. 피곤해서 목욕 좀 하고 쉬어야겠어."
"네, 쉬고 계세요."
"그리고 한 장으로 채워. 아무래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어."
"네, 알았어요."
"역시 너밖에 없어."
그는 전화를 끊고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세면 도구를 가방 속에 챙겨넣었다. 어지러워진 방안이 문득 생경하게 보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사랑을 불태웠던 방이었다. 그것이 이제 끝장나려 하고 있다. 남자는 당분간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직감은 그것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이 방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와 나와의 관계는 이제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로 남겠지. 그런데 이걸 어쩌지?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만 임신이 되고 말았다. 그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그가 허락만 해준다면, 그리하여 장래가 보장되기만 한다면 그녀는 아기를 낳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는 않다.
그에게 사실을 말하는 거다. 자기의 씨를 밴 것을 알면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기 떼지 말고 몸조심하고 기다리고 있어. 돌아와서 결혼식을 올릴 테니까. 아아, 그가 이렇게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틀림없이 그럴 거야. 나보고 기다리라고 할 거야. 난 그가 없으면 못 살아. 그런데 참 그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나 보지. 무슨 일일까.
짐을 꾸려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 걸 보면 어디 가서 피해 있을 모양이다. 왜 그럴까. 무슨 일일까. 그러고 보니까 몹시 불안한 목소리였어.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어.
그녀는 청바지에 점퍼를 걸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머리에 빗질을 했다. 준비를 끝내자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왔다. 신을 신고 나서 문을 밀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는 한 남자와 부딪쳤다. 한 사내가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문앞에 서 있었다.
사내의 입가에 흐르는 희미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는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사내의 장갑 낀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소리는 입 속으로 도로 삼켜졌다. 그녀는 현관으로 밀려 들어갔다.
거미 같은 사내는 한 손으로 그녀의 가는 목을 벽에다 밀어붙이는 한편 다른 한 손으로는 아파트 출입문을 잠갔다. 그녀는 숨이 막혀 버둥거리면서 그의 손을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조용히!"
거미 같은 사내는 칼을 뽑아들고 그것을 여자의 목에다 갖다 댔다.
"안으로 들어가."
그녀는 시키는 대로 집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사내가 목을 풀어주었지만 칼이 무서워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금방이라도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상대가 강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요구하는 대로 모든 걸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반듯이 누워."
"돈, 돈은 저기 있어요!"
그녀는 숨 넘어가는 소리로 말하면서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핸드백을 가리켰다.
"누우라니까!"
그는 주먹으로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녀는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이불을 펴고 옷을 벗어. 그리고 반듯이 누워."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먼저 이불을 편 다음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더운 계절이라 겉옷을 벗으면 바로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는다.
"살려 주세요!"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해!"
그는 구둣발로 그녀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녀가 다시 쓰러지자 순식간에 칼로 브래지어를 잘라냈다. 다음에는 팬티마저 찢어발겼다.
"근사한 년이구나!"
그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저...... 저...... 임신했어요! 임신 3개월이에요!"
그녀는 누운 채 두 손을 비비며 애걸했다.
음산한 사내는 거기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를 올라탔다. 의자에 앉듯 그녀의 몸 위에 걸터앉아 칼을 코앞에 들이댔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 네 기둥서방은 어디 있지?"
그 말에 그녀는 경련을 일으켰다.
"모, 모릅니다. 어, 어제 어떤 사람하고 나갔는데 아직......."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끝이 뺨을 찔렀다. 가볍게 찌른 것이었지만 금방 피가 나왔다. 그는 칼에 피를 묻혀 그녀에게 보여줬다. 피를 보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얼굴만은 다치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얼굴만은 제발......."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얼굴을 걸레 조각처럼 만들어놓겠다. 어디 있어?"
그녀는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강도가 아니다. 그를 찾아내 죽이려는 모양이다.
"정말 몰라요! 전화 연락도 없었어요!"
그의 칼이 다시 뺨을 찔렀다.
"저 가방 들고 어디 가려고 했지?"
그는 손을 뻗어 가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방 속에 든 것을 방바닥에 쏟아놓았다.
가방 속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모두 남자용 물건들이었다.
"이걸 가지고 어디로 가려고 했지? 시장에 내다 팔 생각이었나?"
그녀는 모른다고 잡아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확신을 가지고 달려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너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입을 다물 만큼 애인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난 시간 끄는 것을 제일 싫어해. 놈은 어디 있지?"
"말하겠어요. 칼을 치워 주세요."
그러나 그는 칼을 치우지 않았다. 칼끝이 다시 살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해, 해운대에 있어요!"
그것은 숨가쁜 외침이엇다.
"해운대 어디?"
"S호텔에 있어요."
"거짓말하면 안 돼. 사실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어."
"거짓말 아니에요!"
"호텔 어디에 있어?"
그녀는 차마 방 번호만은 가르쳐 줄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빨리 말해!"
사내의 얼굴이 살기로 굳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마침내,
"8층 5호실에 있어요."
하고 말했다.
"그에게 가려고 했지?"
"네, 짐을 챙겨들고 오라고 했어요."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말해 봐."
"당분간 다른 데 가 있겠다고 했어요. 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누가 묻거든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라고 했어요."
"호텔방에서 뭘 하고 있지?"
"피곤해서 쉬고 있겠다고 했어요."
"누구랑 함께 있지?"
"혼자 있을 거예요."
"지금 그에게 전화를 걸어봐. 거기에 정말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그냥 전화 걸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적당히 구실을 붙이란 말이야. 일이 생겨서 조금 늦겠다고 말해. 침착하게 말하는 거야. 눈치 못 채게 침착하게."
그는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 다 S호텔 전화번호를 몰랐기 때문에 그가 114에 전화를 걸어 번호를 알아냈다. 그는 그녀에게 수화기를 내주면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면 죽을 줄 알아."
하고 위협했다.
그녀는 다이얼을 돌렸다.
"S호텔 이죠? 8층 5호실 좀 부탁합니다."
사내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다음 칼을 목에 들이댔다.
"여보세요."
그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야? 아직도 집에 있어?"
그가 벌컥 화를 냈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죄송해요. 저 조금 늦겠어요."
"왜? 무슨 일이야?"
"일이 생겨서 그래요. 잠깐이면 돼요."
"무슨 일?"
"가서 말씀드릴게요."
"말해 봐. 무슨 일이야?"
"가서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빌어먹을......."
그가 투덜거리더니 다시 물어왔다.
"목소리가 왜 그래? 마치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죄송해요."
"빨리 오도록 해."
그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내를 돌아보았다.
"잘했어. 다시 자리에 누워."
사내는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드러눕자 그는 그녀의 배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그는 허벅지에다 칼을 찌르려 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리를 벌렸다.
거미 같은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강간하기 시작했다. 거미처럼.
플레이보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너무 지나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베란다 쪽을 쳐다보았다. 창문에는 비가 세차게 뿌려치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한 번 걸었다가 전화를 받지 않자 도로 끊었다. 두번째 걸었을 때에도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아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 거라고 편리하게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혼자 목욕할 생각으로 옷을 벗었다. 그녀가 오면 함께 목욕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스탠드의 전기불을 켰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문을 한 뼘 정도 열어둔 채 욕조 속으로 들어가 샤워를 틀었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는 곧장 프런트로 다가갔다.
"방을 하나 주시오. 8층 5호 정도면 좋겠는데."
"805호에는 손님이 있습니다."
프런트맨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806호는?"
"그 방은 트윈입니다."
"괜찮아요."
그는 요금을 지불하고 열쇠를 받아들었다.
잠시 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거미처럼 소리도 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805호실 앞에 잠시 서 있다가 6호실 문앞으로 다가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미는 방안의 불을 켜지 않았다. 얇은 고무 장갑을 낀 다음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어둠이 완전히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그는 일어서서 창문을 열었다. 비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베란다로 나갔다. 그 호텔에는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와 베란다 사이는 막혀 있었지만 난간을 딛고 올라가면 옆 베란다로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가 있었다. 이 호텔을 이용해 본 적이 있는 그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비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그는 난간을 붙잡고 옆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방안은 비어 있었다. 욕실 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쇠난간은 빗물에 젖어 몹시 미끄러웠다. 실족하면 8층에서 곧장 땅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할 것이다.
그는 심호흡을 한 다음 베란다와 베란다 사이를 막아놓은 벽돌벽을 단단히 쥐고 난간 위로 올라갔다. 먼저 오른발을 조심스럽게 옮겨놓았다. 다음에는 왼발을. 몸은 이제 완전히 5호실 베란다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난간에 가만히 내려섰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베란다와 방을 구분해 놓은 대형 유리문에 접근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나서 스탠드 불을 껐다.
욕실에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미 같은 사나이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욕실로 접근했다. 열린 문 사이로 욕조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의 옆모습이 보였다. 플레이 보이였다. 그는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흥얼거리고 있었다.
거미 같은 사나이는 벽에 바싹 붙어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구둣발 끝으로 문을 조금씩조금씩 밀었다. 문이 거의 열리는 것도 모른 채 플레이보이는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눈까지 지그시 감고 있는 것이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거미는 욕실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움직였다. 이제 그는 플레이보이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욕조 속의 사내는 반수면 상태 속에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거미는 칼날을 가만히 목에다 갖다 댔다. 비로소 플레이보이가 눈을 번쩍 떴다.
"누, 누구야?"
일어서려는 것을 거미는 주먹으로 후려쳤다.
"조용히 해!"
플레이보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턱을 치켜올렸다. 목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더 움직이면 목이 잘릴 테니까!"
"여자는...... 여자는 어디 있어?"
"죽었어. 여자를 죽이고 이리 온 거야."
"거미, 살려줘! 살려줘! 왜 이러는 거야?"
"살려줄 테니까 바른 대로 말해 봐. 족제비는 어떻게 했지?"
"죽었어. 오월이한테 죽었어. 독살당했어."
"신문에도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형사한테 들었어."
"어떤 형사? 이름이 뭐야?"
"몰라, 이름은 몰라."
"그 놈한테 협조하기로 했나?"
"아, 아니야!"
칼날이 목을 좀더 깊이 파고들었다. 욕조 속의 물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은 색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른 대로 말하는 게 좋아. 넌 어제 형사와 함께 가게를 나갔어. 어디를 함께 갔었지?"
플레이보이는 자기 목이 잘리고 있다는 것을 알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거미 같은 사나이가 얼마나 잔혹한 놈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형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어. 서울까지 함께 다녀왔어."
"전화번호도 알려줬겠지?"
"할 수 없었어. 거미, 내 말 잘 들어. 자수하는 게 좋아.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내가 형사를 소개해 줄 테니까. 한 번 만나봐."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면서 그는 기회를 노렸다. 여기서 사는 길은 상대와 맞서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이 놈의 칼만 없다면.......
"오월은 어디 있지?"
"몰라. 그건 몰라."
그는 왼손으로 거미의 칼 든 오른 손목을 잡아 치켜올렸다. 목에서 칼이 떨어져 나갔다. 얼결에 오른손으로는 칼날을 움켜잡았다. 덩치는 그가 훨씬 컸다. 거기에 비해 거미는 키만 컸을 뿐 호리호리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살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보이는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의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그리고 칼날을 움켜쥔 오른손에도 힘을 더 가했다. 칼날이 손바닥을 파고드는지 무서운 통증이 전해져 왔지만 그는 그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손 하나쯤 없어져도 좋다는 각오로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이제 그는 일어서 있었다. 그때 칼이 뚝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거의 동시에 오른쪽 옆구리에 예리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한 번 옆구리에 깊숙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천천히 욕조 속으로 가라앉았다.
거미는 옆구리에 박아놓은 재크나이프를 잡아뺐다.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예비로 가지고 있던 칼을 아주 적절할 때 효과적으로 써먹은 것이다. 옆구리 정도로는 단숨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칼날이 불빛을 받아 번쩍했다. 벌거벗은 사내는 심장에 칼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그의 얼굴이 물 속에 잠길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거미는 세면대 앞으로 돌아섰다.
그는 잠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피묻은 장갑을 씻었다. 장갑을 그대로 낀 채 피묻은 옷을 벗었다. 소지품을 모두 꺼낸 다음 욕실을 나왔다. 침대 위에 널려 있는 플레이보이의 옷을 입어 보았다. 조금 헐렁했지만 그런 대로 입고 다닐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갈색 양복이었다.
잠시 후 그는 베란다를 통해 6호실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어두운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전화기 앞으로 다가서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서울로 장거리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교환이 나오자 그는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호텔 교환전화를 이용하면 기록에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6호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프런트에 열쇠를 맡기고 호텔을 나왔다. 서둘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지막 비행기도 떠난 지 이미 오래일 것이다.
그는 근처의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서울로 다이얼을 돌렸다. 재수없게도 면도날은 집에 없었다.
"빨리 좀 찾아보십시오."
"어디 가셨는지 알아야죠."
면도날의 애인이 쌀쌀하게 말했다. 그녀는 거미를 싫어하고 있었다.
'에뜨랑제' 의상실의 여주인 조애리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거미 같은 사내는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어도 불쾌하고 기분 나쁘다. 그는 그런 자를 왜 가까이 하는지 모르겠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면도날이 들어섰다. 그는 이마에 맺힌 빗방울을 손으로 닦아내면서 근엄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화 왔었는데요."
"어디서?"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 거미라는 사람한테서 왔었어요."
그녀는 멸시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흰 원피스 차림의 우아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뒤로 싸매 틀어올렸고, 그래서 귀고리가 유난히 돋보였다. 얼굴은 30대 중반의 건강미를 띠고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정감이 없었다.
"뭐라고 그래?"
대머리 사내가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그는 티셔츠 위에 체크 무늬 저고리를 걸쳐 입고 있었다.
"안 계시다고 하니까 그냥 끊었어요. 급히 연락할 일이 있나 봐요."
"다시 전화하겠다고 안 그래?"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면도날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거미로부터 두 번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가 걸려올지 몰라."
면도날은 애인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밤 10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구두닦이 청년이 턱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나오고 있습니다. 맞지요?"
"으음, 틀림없는 그 자야. 고맙군."
그는 구두닦이의 어깨를 툭 쳤다.
청년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아저씨, 오늘 비가 와서 완전히 공치는 날인데도 밤 늦게까지 이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알았어. 자네가 수고한 거 다 알고 있어. 자, 다음에 보자구."
그는 골목을 벗어나 미행을 시작했다.
면도날과 조애리는 얼마쯤 걸어가다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장완수 형사는 적이 당황했다. 밤이 늦은데다 비까지 오고 있어서 택시 잡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손님을 태우고 가는 택시를 강제로 세웠다. 신분을 밝히고 수사상 긴요한 일로 그러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자, 남녀 손님은 말은 안했지만 좋지 않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저 차를 따라갑시다. 눈치채면 안 되니까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시오."
젊은 운전사는 어깨를 한 번 흔들더니 주차장을 막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한 회색 외제차를 노리고 시동을 걸었다.
빗줄기가 세차게 앞면 유리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빗물을 훑어내고 있었지만 너무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비는 다음날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밤차로 서울로 올라온 거미는 제일 먼저 역 광장에서 면도날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두 번 신호가 울린 다음 신호가 떨어지면서 면도날의 목쉰 소리가 들려왔다.
"별일 없습니까?"
거미는 긴장해서 물었다.
"별 일 없어. 어떻게 됐어?"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족제비는 오월의 손에 죽었습니다."
"뭐가 어째? 아니, 확실해?"
"확실합니다. 플레이보이의 말입니다. 그 놈도 죽었습니다."
"그 놈도 오월의 손에 죽었단 말이야?"
"아닙니다. 오월이 죽일 리야 없지요. 그 놈은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럼 누가 죽였어? 네가 죽였나?"
"네, 없애 버렸습니다. 놈이 배신했습니다. 경찰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놈이 경찰하고 서울까지 왔었다니까 아마 지금쯤은......."
거미는 말끝을 흐렸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이보이가 알고 있는 것은 전화번호밖에 없었어. 의상실 전화번호만 알고 있었어."
"전화번호만 가지면 주소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형사라면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럼 형사들이 이미 의상실을 찾아냈단 말이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면 큰일인데......."
면도날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위험합니다."
"아니야, 경찰이 알았으면 난 이미 체포되었어야 옳아. 그런데 난 온전하거든. 경찰이 감시하고 있으면 냄새가 날 텐데 전혀 그런 냄새가 없어. 아주 조용하단 말이야."
"그래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빨리 이쪽으로 와."
"밖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거긴......."
"그래, 조심하는 건 좋아. 한 시간 후에 S교 밑에서 만나."
면도날은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가 방문을 가만히 열어보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전화기는 방안에도 있었다. 그것은 거실에 있는 전화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자고 있다가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부러 거실로 나와 수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녀가 엿들을까봐 그랬던 것이다.
그가 급히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자마자 조애리는 눈을 떴다. 그녀는 벌써부터 잠에서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차가 급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그가 거실로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마자 수화기를 집어들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것이다. 통화 내용은 너무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환청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환청은 아니었다.
그녀가 전화를 도청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그녀는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만나서 살림을 차린 지는 1년쯤 되었다. 그는 돈이 많았다.
의상실도 그가 차려준 것이었다. 무역업으로 그렇게 돈을 버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혹이 짙어갔지만 정확한 직업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접촉하는 사람들 거의가 인상이 좋지 않았다.
궁금하다 못해 한 번은 정색을 하고 너무 숨기는 게 많다고 따지고 든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주먹을 휘둘렀다.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이었다. 믿고 의지하면서 주는 대로 받아 먹기만 하면 될 것이지 웬 잔말이 많으냐고 기절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달래듯이 하는 말이, 국가적으로 기밀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거미 같은 사나이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장마로 물이 많이 불어 다리 밑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닐 우산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옷은 금방 젖어 버렸다. 면도날의 차가 물을 튀기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을 쳐들어 보였다. 차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급정거했다. 그는 운전석 옆으로 올라탔다.
면도날은 다리 건너로 차를 몰아갔다. 우회전해서 조금 달리다가 강변 도로 옆에 차를 세웠다. 그는 라디오 뉴스를 껐다.
"부산 S호텔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방금 뉴스에 나왔어. 거기서 플레이보이를 해치웠나?"
거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에서도 여자가 하나 죽었더군."
"플레이보이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그 자식 애인을 찾아 갔었죠."
면도날은 시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침착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오월이 하나 때문에 우리 꼴이 말이 아니야. 족제비까지 죽다니 도대체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아무리 숨어도 그년은 찾아올 겁니다."
거미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족제비는 어떻게 죽었어?"
"독살당했답니다. 경찰에서 공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눈 뜨고 독살당했단 말이야? 어떻게 된 노릇이야?"
면도날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거미 같은 사나이는 침착했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있어야죠."
"그년이 우리까지 찾아낼까?"
"저는 그러리라고 봅니다."
"어떻게?"
"그건 모릅니다.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거미는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있습니다. 한쪽은 그년한테서, 다른 한쪽은 경찰한테서."
담뱃재가 무릎 위로 굴러떨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면도날은 불안하고 초조한 눈길을 거미에게 던졌다.
"만일 경찰이 '에뜨랑제'를 찾아냈다면 우리 아파트까지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야."
"이미 알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왜 나를 체포하지 않는 거지?"
"뜸을 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저까지 함께 잡기 위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미행은 없었어."
"그래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간혹 가다 강변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만이 있을 뿐 주위는 아직 새벽의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플레이보이 그 놈이 결국 우리를 배신했군."
"그 놈을 믿은 게 잘못이었습니다."
"어떡하지?"
"일단 장소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다니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헤어지자는 거야?"
면도날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당분간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돼! 우리는 함께 있어야 돼. 서로 떨어져 있으면 힘이 분산되어 약해져. 이럴 때일수록 분산되지 말고 힘을 합쳐 단결해야 해. 족제비도 혼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거야. 우리랑 함께 행동했으면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거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만일 당하게 되면 둘이 함께 당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거야. 혼자 살고 싶나?"
면도날은 무서운 눈으로 거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거미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혼자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여차하면 외국으로 튀면 돼."
"보스는 이걸 알고 있습니까?"
"아직 보고하지 않았어.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해. 해결이 어려울 때 보스한테 보고하고 도움을 청해야 해. 보스한테 도움을 청하면 외국에 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저는 아직 죽음의 키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그를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어. 그것도 수년 전이야. 그를 만나기는 어려워."
"그는 어디 있습니까?"
"몰라."
면도날은 딱 잘라 말했다.
"그것보다도 빨리 장소를 옮기는 게 급해. 오랫동안 숨어 있을 곳으로 말이야. 어디가 좋을까?"
"서울을 벗어난다는 건 위험합니다. 사람이 많은 곳이 숨어 있기에 좋습니다."
"아파트보다도 허름한 주택이 좋을 거야. 변두리에 있는 주택 말이야. 빨리 하나 구해 봐."
"형수님은 어떻게 할 겁니까?"
"함께 데려가야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임신했단 말이야."
그는 무섭게 말하고 시선을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월은 커피숍 창가에 앉아 미친 듯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비와 함께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한 시간 전부터 산더미 같은 파도와 방파제를 넘어 허옇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져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가 사나운데도 불구하고 주말이라 그런지, 아니면 파도를 구경하기 위해서인지 그 커피숍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녀는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미아처럼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두번째 살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자 갑자기 추적의 끈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두 명을 찾을 길이 현재로서는 막연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한 상태로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머지 두 명에 대한 추적을 포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두번째 커피를 주문하고, 수분 후 주문을 받은 레지가 커피를 가져왔을 때, 탁자 위에 커피잔과 함께 편지 봉투 하나가 놓여졌다.
"이거 뭐죠?"
오월이 의아해서 묻자 레지는 눈웃음치면서 대답했다.
"어떤 손님이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어떤 손님이오?"
"저기 저쪽에 있는......."
레지는 뒤를 돌아다보며 턱짓을 하다가 멈칫했다.
"어머, 방금 있었는데......."
"남자예요, 여자예요?"
오월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남자였어요."
"잘못 전한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맞아요. 댁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요."
오월이 뛰어나가려고 하자 레지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냥 나가면 어떡해요?"
오월은 급히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바람 속으로 저만큼 택시 한 대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의 머리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커피숍 앞에 주차해 놓은 차에 뛰어올랐다.
10분 가까이 택시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바닷가로 차를 몰고 갔다. 편지를 보지 않고 그대로 내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차는 어느새 바닷가에 닿았다.
그녀는 엔진을 끈 다음 주머니 속에 구겨넣었던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찢어내고 편지를 꺼내 폈다. 볼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하릴없는 사내의 우스운 짓거리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읽기 시작했다.
오월 씨에게.
정체 불명의 편지를 받고 꽤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정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정상 내 신분을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땐가는 밝혀지리라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겁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고개를 쳐들고 호흡을 가다듬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 다음 그녀는 다시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오월 씨, 나는 당신의 비밀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납니다.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두 대학생 조민기와 신승우 군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복수의 화신이 되어 당신의 육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남편을 잃고 뱃속의 아기마저 지우고, 그리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상실한 순간부터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복수에만 전념해 왔습니다. 복수 - 거기에 당신은 당신의 삶의 최후를 걸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복수극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당신의 행위에 끝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 편지도 그런 의미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 네 명은 지옥에나 보내야 할 짐승들입니다. 그들에게 감히 인간이라는 말을 어떻게 붙이겠습니까. 그들은 우리 인간 사회에 해독만 끼치는, 그래서 한푼의 존재 가치도 인정할 수 없는 악마들입니다.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그들을 제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신의 복수극이 수포로 돌아가 당신의 원한을 풀 수가 없을 것이기에 그냥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두 악한을 제거했습니다. 여자의 솜씨치고는 매우 대담하고 잔인하게 그들을 해치웠습니다. 그 솜씨에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 두 명의 목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그 두 명의 소재를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보다 한 발 앞서 그들에게 와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요구하신다면 그들의 소재를 알려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매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이제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당신을 없애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을 없애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경계하면서 덫을 놓으려 들 겁니다. 그 덫에 걸려들면 당신은 끝장입니다. 당신은 너무 복수에 집착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그만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실수는 곧 당신의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만일 당신이 남은 두 악한의 소재를 알고 싶다면 즉시 서울로 올라가십시오. 내일 정오에 P호텔 커피숍에 앉아
계십시오.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거기에 앉아 계시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황한 나머지 이것이 혹시 함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건 함정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남아 있는 두 명 중의 한 명이고,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소상히 알고 있다면 함정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아파트를 찾아가거나 노상에서 당신을 없애 버리고 말 것이지 함정 따위를 만들어 시간을 끌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복수극이 성공리에 완수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Z로부터
오월은 편지를 놓고 심히 망설였다. 그것을 민기와 승우에게 보일까말까 생각 끝에 결국 보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에게 보인다 해도 제3의 결론에 도달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중팔구 함정이니 가면 안 된다고 만류하고 나올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Z는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이렇게 속속들이 나의 행동을 알고 있을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녀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한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심하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깊이 생각에 잠겨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방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까이 한 사람은 조민기와 신승우뿐이었다. 그들 외에 누가 또 내 뒤를 밟을 수 있단 말인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다! 그들의 짓일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 짓일까! 아니야.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럼 누구란 말인가? 경찰? 경찰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경찰이라면 나를 발견 즉시 체포했을 것이다. 범인들일까? 그들도 아니다. 그들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인가? 그들은 나를 발견 즉시 죽이려 들 것이다. 편지 따위를 보내서 나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편지는 누가 썼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안타까운 나머지 눈물이 다 나오려고 했다.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그 정체 불명의 Z는 커피숍에까지 나를 따라온 것이 분명하다.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
그녀는 그날 밤 한숨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이튿날 이른 새벽에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 닿은 것은 11시 20분.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P호텔에 도착하니 12시 정각이었다. 그녀는 2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곧장 올라갔다.
커피숍은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빈 자리를 찾아 앉아 혹시 아는 얼굴이 없는가 하고 실내를 찬찬히 살폈지만 그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커피를 시킨 다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 5분이었다.
"그때 카운터 쪽에서 마이크로,
"유동림 씨 전ㅎ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섬칫하고 놀랐다. 그것은 죽은 남편의 이름이지 않은가.
"유동림 씨 전화입니다."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그쪽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오월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내 이름은 지명수배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의 이름을 대신 부른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카운터 쪽으로 급히 다가갔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고 상대방을 부르자, 남자의 냉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월 씨 되십니까?"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누구신가요?"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알 필요 없어요. 당신이 찾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서울에서 살고 있어요. 만나고 싶지 않나요?"
"도대체 누구신지?"
"알 필요 없다니까요. 당신 편이란 것만 알아두시오. 그리고 당신처럼 나 역시 그들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시오. 놈들은 K구 D동 132번지에 살고 있소. 오늘 갑자기 그쪽으로 이사했어요. 낡은 양옥집인데 검정색 철문에다 내가 X표를 해놓았으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수화기를 든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부인이 알아서 하겠지요. 놈들은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거미 같은 놈은 아주 무서운 놈이니까 잘못하다간 부인이 당할지도 몰라요."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그렇게 말했다.
"뭐 필요한 거 없나요?"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나하고 연락을 바라거든 현재의 그 장소에 같은 시간에 나와 있으면 돼요. 정오에 말이오. 성공하기를 빌겠소."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녀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내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커피숍에 한동안 망연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K구 D동을 가리켰다.
내가 지금 함정 속으로 빠져드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택시는 어느새 D동에 닿았다. 운전사가 갈림길에 이르러 어느쪽으로 갈 거냐고 묻자 그녀는 택시에서 내렸다.
잠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서 있다가 그녀는 복덕방으로 가서 132번지가 어디쯤이냐고 물었다. 복덕방 노인은 한참 더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15분쯤 걷고 나서 다시 복덕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와 다시 20분쯤 헤매다가 세번째 복덕방에 가서 정확한 주소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알려준 대로 큰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 집집의 대문을 유심히 살피면서 걸어갔다. 일반 서민 주택 단지라 집들이 하나같이 초라했다. 100미터쯤 걸어갔을 때 그녀의 시야에 가시처럼 들어와 박히는 것이 있었다. X표시였다. 그것은 백묵으로 대문 아래쪽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띄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대문을 훑어보았다. 문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 앞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 골목에 있는 집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대문에 X표시가 되어 있는 집은 그 한 집뿐이었다.
오월은 그 골목을 벗어나 과일집으로 들어갔다. 참외를 하나 깎아 먹고 나서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걸어갔다. 그 집 앞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걸어왔다. 그 집을 5미터쯤 남겨 놓았을 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의 남자가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쳐 걸었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눈앞이 어지러워 왔다.
두 사나이가 그녀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져 왔다. 순간적이었지만 그녀는 두 명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틀림없는 면도날과 거미였다. 마침내 찾아냈다는 생각도 잠깐이었다. 그들과 시선이 부딪쳤다. 그녀는 시선을 떨어트리면서 그들 곁을 지나쳐 갔다.
그들은 골목에 주차해 놓은 낡은 승용차에 올랐다. 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골목을 벗어나기 전에 차와 만날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이 자기를 알아보았다면 자동차로 뒤에서 자기를 밀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모골이 송연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과 공포를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그녀는 느릿느릿 걸어갔다. 차가 바싹 뒤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클랙슨 소리가 났다. 그녀는 한쪽으로 비켜 섰다. 차가 그녀 옆을 통과했다. 거미 같은 사내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대머리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서 기쁨이 솟구쳤다. 그녀는 정보를 알려준 그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감사했다.
낡은 베이지색 자가용은 빗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들을 미행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단계에서 미행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집 앞을 지나치는데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골목 끝에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섰다. 주변의 지리를 눈여겨봐 두었다. 골목은 끝에서 왼쪽으로 직각으로 꺾여져 있었고 중간에도 그런 작은 골목이 하나 더 있었다. 도로 골목으로 나왔다. 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상대는 건장한 사내 두 명이다. 더구나 잔뜩 경계하고 있는 상태다. 섣불리 손을 뻗었다가는 이쪽이 해를 입거나 놓치기 십상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여간 빠른 시간 내에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말이다.
그녀는 다시 과일집으로 들어가 사과를 하나 깎아 먹었다. 과일집을 나와 건너편에 있는 2층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 안에는 손님이 서너 명밖에 없었다. 그녀는 창가에 자리잡고 앉아 비오는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거의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뒤 다방을 나왔다. 배가 고팠다. 그 옆에 있는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장면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그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집을 나왔다. 그녀는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고 신문을 보고 있던 노인이 그녀를 맞았다.
"조그만 집 하나 없을까요?"
"사실 건가요?"
"아니에요. 세로 얻을까 하는데요. 저 골목이면 좋겠는데요."
그녀는 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골목을 손으로 가리켰다.
노인은 서너 집을 내놓았다. 도면을 탁자 위에 펴놓고 집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해 나갔다.
두 집은 단층집으로 범인들의 집과 거의 인접해 있었다.
그녀는 설명을 듣고 나서 싫다고 말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해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보다는 2층집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범인들이 있는 곳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2층이기 때문에 감시하기가 좋을 것 같았다. 값이 비싼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지금 비어 있는데 딱 잘라 석 장을 받아 달라고 했지요. 식구가 많은가요?"
오월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단 그 집을 가보기로 하고 복덕방을 나왔다.
그 집은 범인들의 집을 지나 2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도 마당도 컸다. 노인이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안내했다.
"주인이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게 돼서 집을 내놨어요. 팔 것은 아니고 세로만 놓겠대요. 이런 집이 3천만원이면 싸지요. 아파트 같으면 두 배 이상을 받을 겁니다. 방이 모두 다섯 개죠."
노인이 돌아보았다. 뒤따라 들어온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2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오월은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 창가에 서서 20미터 전방을 바라보았다. 범인들의 집이 옆면이긴 하지만 한눈에 들어왔다.
"2층에서 보면 전망이 조오치요. 지대가 높으니까 저 아래까지 훤히 보이지요."
"이 집을 얻겠어요."
그녀는 노인을 보지 않고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노인은 희색이 만면해서 말했다.
그들은 그 집을 나와 복덕방으로 돌아왔다.
"언제 입주하실 건가요?"
"내일 하겠어요."
"식구가 많은가요?"
"네, 보름쯤 있다 모두 이사올 거예요. 그 동안 제가 집 정리도 하고 손볼 거 손 보고......."
"아, 예......."
"돈은 내일 아침 모두 드리겠어요."
"네, 그럭하십시오. 주인 동생 되는 사람이 서울에 살고 있으니까 그 사람하고 계약하면 됩니다. 동생한테 모든 걸 위임했으니까요."
다음날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하고 그녀는 복덕방을 나왔다. 거기서 그녀의 집까지는 꽤 멀어 한 시간 거리였다. 그녀는 불현 듯 집에 가보고 싶었다. 집을 떠난 지 반 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잘 계실까? 잘 계실 리 없겠지. 이 불효 막심한 딸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과 한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겠지.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겨 울고 싶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다. 모든 일 집어치우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방향도 정하지 않고 걸어갔다. 어머니를 보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잠깐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추한 얼굴을 어머니 앞에 어떻게 내보인단 말인가....... 그것은 어머니를 더욱 괴롭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를 공중전화 앞에 붙들어 세웠다.
그녀는 박스 안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이윽고 신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보세요."
하는 여자의 병약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 어머니 목소리, 그녀는 숨을 흑하고 들이켰다.
"여보세요."
이쪽에서 응답이 없자 다시 부른다. 그녀는 목이 메었다. 수화기를 바꿔 들면서,
"엄마!"
하고 불렀다.
"여, 여보세요!"
갑자기 터지면서 당황하는 목소리.
"엄마! 저예요! 월이에요!"
"뭐라구? 월이라구?"
"네, 저예요."
모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격한 감정에 빠진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다 되어 전화가 자동으로 끊어졌다. 그녀는 동전을 집어넣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비로소 모녀는 울음을 그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거, 거기 어디냐?"
그녀의 어머니가 먼저 울음을 삼키고 물었다.
"서울이에요. 엄마,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넌 어떠니? 몸은 성하니?"
"네, 괜찮아요. 엄마, 용서해 주세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너 있는 데로 가마."
"안 돼요, 엄마. 만날 수 없어요!"
그녀는 완강히 거부했다.
"왜 만날 수 없다는 거야? 이 에미가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 보고 싶다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냐?"
모녀는 그 문제를 놓고 한참 다투다가 결국 오월이 물러섰다. 경찰이 혹시 집에 잠복하고 있을 것 같아서 염려했지만 어머니 혼자 있다는 말에 그녀는 다소 안심하고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밖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만나는 것이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나는 장소를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W백화점 지하 상가 분수대로 정했다. 시각은 8시, 어둠이 내리는 시각이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 30분.
그녀의 집에는 전화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 모녀의 통화 내용은 고스란히 경찰에 탐지되어 있었다. 수사본부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다.
7시 정각에 이미 그들 모녀가 만날 장소는 수십 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사복 차림의 수사관들은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일반 손님으로 가장한 채 요소요소를 지켰다. 출구는 모두 봉쇄되고 먹이가 굴러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오월의 본래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눈이 빠지게 익혀두고 있었지만 전적으로 거기에만 의지할 수 없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얼굴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바꾸었다는 사실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변모된 얼굴에 대한 몽타주가 작성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믿을 게 못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의심이 가는 젊은 여자들은 모두 연행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에 따라 지하 상가의 관리실이 임시로 여자들을 수용할 장소로 선정되었다.
장완수 형사는 분수대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몹시 당황하고 있엇다. 오월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길은 현재로서는 막혀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 막을 순 없을까?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네 곳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느 곳으로 들어올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빌어먹을, 집으로 전화를 걸 게 뭐람. 그는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버리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분수대 옆에는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각종 차를 팔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려고 했을 때 낯익은 얼굴이 저쪽에서 나타났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월의 어머니가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잠복해 있는 수사관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긴장된 움직임만을 보였을 뿐이었다.
오월의 어머니 유미순은 희끄무레한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유난히 까맣게 탔고 머리는 반백이 다 되어 있었다. 너무 고통이 컸는지 조그맣게 오그라든 모습이었다.
수사관들에 의해 포위된 줄도 모른 채 그녀는 딸을 만나고 싶은 욕심에 분수대 앞에 오도카니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장형사는 그녀와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좀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등을 돌리고 앉았다.
시간은 더디 흐르고 있었다. 분수대 주위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거기서 오월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장형사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수사요원들이 긴가민가 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재빨리 그녀를 낚아채 갈 생각이었다. 만일 그녀가 다른 수사요원들에게 걸려 관리실 쪽으로 연행되면 그때는 끝장이다. 젊은 형사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되기도 처음이지요?"
장형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한 잔 들지."
"고맙습니다."
젊은 형사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 여자가 나타날까요?"
"나타나겠지."
"헌데 얼굴을 알아야죠. 수술을 했으면 못 알아볼 거 아닙니까. 괜히 헛수고 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문제긴 문제야."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연행할 수도 없고......."
"잘 되겠지."
장형사의 시선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속에 학생 차림의 여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오월이다! 장형사는 숨을 들이켰다. 8시 5분 전이었다.
그녀는 가슴에 책 몇 권을 안고 있었다. 거기다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는 책버러지 여대생 같았다. 청바지에 점퍼를 걸친 수수한 차림이었다.
장형사는 몸을 일으켰다.
오월은 밑으로 내려오는 동안 어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어머니의 모습뿐이었다.
마침내 밑으로 내려선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이내 다른 곳을 더듬고 있었다. 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 어머니...... 저예요......."
그녀는 입 속에 감도는 말을 삼키면서 어머니 곁을 지나 분수대의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아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려는데 누가 맞은편에서 다가와 앉았다.
"신분증 좀 봅시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장형사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뚫어지게 장형사를 쏘아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알아보고 맞은편에 다가와 앉은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이쪽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백속에 손을 집어넣고 주민등록증을 찾는 체하다가,
"어머, 어쩌지요. 안 가져왔는데......."
하고 말했다.
"여기 왜 왔지요?"
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마치 형식적으로 묻는 것 같은 인상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못생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쇼핑하러 왔어요."
"누굴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아아뇨."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주소하고 이름을 대봐요."
그녀는 이름과 주소를 엉터리로 대주었고 그는 그것을 수첩에다 착실히 받아 적었다.
"됐어요. 가봐요."
"수고하세요."
"아, 잠깐!"
그는 일어나려는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여긴 얼씬거리지도 말아요!"
다른 곳을 쳐다보며 재빨리 한 말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이 마치 다른 사람한테 던진 말처럼 여겨졌다.
그녀가 일어섰을 때 그는 이미 저쪽으로 가버린 뒤였다. 혼란을 느낀 그녀는 잠시 어머니를 바라본 뒤 출구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어머니의 야윈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월은 눈물을 삼켰다. 용서해 달라는 말을 무수히 되뇌이면서 그녀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번개 같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녀는 멈칫 섰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나를 도피시킨 것이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왜, 왜 그랬을까?"
장형사는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월의 어머니는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장형사를 제외한 다른 수사관들은 오월이 나타나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돌아갔으면 했다.
그러나 유미순이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으니 먼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시 반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그녀는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앉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마침내 두 시간이 지났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 자리를 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사관들의 눈에도 비애가 서렸다.
"나쁜 여자야. 어머니를 저렇게 비통하게 만들다니 말이야."
어느 수사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장형사는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며칠이 지났다.
오월은 그 큰 집에서 혼자 지냈다. 그녀는 2층 창가에 붙어서서 범인들의 집을 관찰했지만 단지 그뿐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범인들은 여전히 집안에 칩거하고 있었다. 물론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가끔 외출했다가도 이내 돌아오곤 했다.
지루한 장마도 그치고 아침부터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닷새째 되던 날 그녀는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낮 12시에 P호텔로 갔다. 그 정체불명의 사람과 통화하기 위해서였다.
커피숍에 앉아 있자 아니나다를까 그전처럼,
"유동림 씨 전화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오월 씨죠?"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어쩐 일입니까? 일은 잘 돼 가고 있습니까?"
"아뇨, 그렇지가 못해요.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알겠습니다. 가장 문제되는 게 뭡니까?"
"그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도와달라는 겁니까?"
"네......."
그녀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좀 기다리십시오. 집에 전화가 있습니까?"
"네, 있어요."
그녀가 전화번호를 일러주자 그는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장형사는 조애리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류 의상실을 몇 군데 돌자 그녀에 대한 자료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신원 조회를 했다. 그러고 나서 조사 결과를 그는 수첩에다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조애리 - 29세. Y여대 응용미술과 졸업. 카톨릭 신자. 24세에 결혼했으나 1년만에 이혼. 아들이 하나 있으나 전 남편이 양육하고 있음. 이성 관계가 복잡. 성격은 선량하나 허영심이 많은 편. 현재 동거 중인 남자에 대해 불만이 많음. 남자로부터 구타당하여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음. 친정 쪽은 가난한 편.
그날 오후 4시쯤 두 명의 전화국 직원이 범인들의 집 부근에 나타났다. 그들은 전주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 작업을 하고 내려왔다.
장형사는 거기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어느 조그만 건물의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낡은 책상 위에는 전화기가 두 대 놓여 있었다. 작업을 마친 전화국 직원들이 그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와 잘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얼마를 사례했다.
조애리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우연히 도청한 그 무시무시한 통화 내용 때문에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고 입맛도 떨어져서 며칠 사이에 그녀는 무섭게 말라 있었다. 통화 내용 중 오월이란 이름이 몇 번 나왔었는데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야 그 이름의 정체를 알아냈던 것이다.
그 이름에 얽힌 사건은 이미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된 바 있었고 지금도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오월이란 이름이 과연 그 오월이란 말인가. 통화 내용으로 볼 때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오월의 남편을 죽인 범인들이란 말인가. 그래서 오월이 복수를 노리고 있는 대상이란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증스러운 자들이다. 나는 어쩌다가 그런 남자를 알게 되었을까.
그녀는 배를 쓰다듬었다. 그의 아기가 뱃속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임신 5개월. 배가 제법 불룩하다. 그는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지지리도 남자 복도 없는 여자가 되었을까. 사실이라면 아기를 하루 빨리 떼어야 한다. 경찰에 알리지 않아도 될까. 아니야. 그런 악한들이라면 알려야 해. 잘못하다가는 나까지 해칠지 몰라.
그녀는 망설이다가 하여간 상의를 해볼 필요성을 느끼고 범죄 신고 전화번호를 돌렸다.
"여보세요."
"네, 경찰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친절히 응대해 온다. 그녀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저기, 상의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는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저기, 전화로는 좀 곤란하고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로부터 50분 후 그녀는 시내의 어느 다방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약속 시간보다도 5분 늦은 시각이었다. 그녀와 전화로 약속한 상대는 탁자 위에 금빛의 라이터를 놓아두겠다고 했다. 그녀 자신의 모습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다방 안에 들어가서라도 마음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아직 단단히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방 입구에 키큰 사내 한 사람이 담배를 꼬나물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사내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출입문을 밀었다. 그때 그 사내의 손이 그녀의 팔에 닿았다.
"잠깐! 아까 신고한 분이시죠?"
아주 정확하게 물어오는 바람에 그녀는 부인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입니다."
상대는 신분증을 얼른 보인 다음 도로 집어넣었다.
"저쪽 조용한 데로 가시죠. 여긴 너무 시끄러운데요."
그녀는 아무 소리 못 하고 그를 따라갔다.
장형사는 조애리를 데리고 2백 미터쯤 떨어진 다른 다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별로 없는 조용한 다방이었다.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어요?"
그녀는 그것부터 물었다.
"척 보면 알 수 있죠. 그게 직업인 걸요. 이름은 조애리...... Y여대 응용미술과 졸업...... 한 번 이혼한 적이 있고...... 며칠 전에는 의상실 '에뜨랑제'의 문을 닫았죠. 더 말할까요?"
그녀는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이럴 수가 있을까.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형사가 차를 권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알겠습니까? 당신은 벌써부터 주목받고 있었어요. 함께 있는 그 두 남자도......."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장형사는 멋지게 차려입은 미녀를 찬찬히 감상하면서 조여 들어갔다.
그녀는 분홍빛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디자인이 아주 세련된 것이었다.
"자, 상의할 일이란 뭐죠? 시원하게 털어놓으십시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담배를 한 대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담배를 꺼내 준 다음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을 가늘게 떨면서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는 함께 살고 있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몰라요. 알았으면 이렇게 함께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당신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니까요."
"성당에 안 나간 지 오래 돼요."
"왜 안 나가십니까?"
"그런 것도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니오,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요. 듣고 싶은 건 당신이 상의하고 싶다는 그 내용입니다."
그녀는 공포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한동안 그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이었어요. 우연히 그 사람이 전화받는 걸 도청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무서운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아주 끔찍한 말이었어요. 지금 함께 기거하고 있는 거미같은 사람이 밖에서 걸어온 전화였는데, 아주 조심해야 되겠다면서 족제비가 오월의 손에 죽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플레이보이는 배신했기 때문에 자기가 처치했다고 했어요."
그녀의 말은 얼마쯤 더 계속되었고, 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윽고 대강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그들이 말한 오월은 바로 그 남편을 잃고 복수하러 나선 그 여인인가요?"
하고 물었다.
"남편만 잃은 게 아니지요. 뱃속의 아기도 잃었고, 자신은 네 명의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했고, 결국 가정과 인생까지 잃었지요. 그들이 말하는 오월이란 이름은 바로 그 여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범인들인가요?"
"그렇습니다. 네 명 중 두 명은 죽고 이제 그들만 남아 있는 셈이지요."
그녀는 눈에 띄게 경련했다.
"그, 그럼...... 전, 전 어떡해야 하나요? 저도 처벌받나요?"
"범인을 알고도 숨겨주면 처벌받게 되지요. 그런 걸 떠나서 당신이 그들을 도와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도와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그래서 경찰에 연락했던 거예요. 제가 무서워하는 건 그들의 보복이에요."
"그런 건 없을 겁니다. 협조하십시오. 협조하시면 안전하게 조처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겁니다."
"어떻게 협조해야 하나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마가 그치고 며칠 동안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더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저녁이 되어서도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장완수는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려놓은 채 졸고 있다가 전화벨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장은 "네"하고 응답했다.
"갈매기......."
"수평선......."
"오늘 밤 실행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일을 끝내면 연락 주십시오."
장은 전화를 끊었다가 다이얼을 돌렸다.
때르릉 때르릉.
오월은 창가에 서 있다가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부인인가요?"
"네."
"Z입니다. 오늘 밤 기회가 만들어질 겁니다. 전화 연락을 받는 즉시 행동 개시하십시오. 대문은 열려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놈들은 잠들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매정할 정도로 재빨리 전화가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 사내가 들어온 것은 밤 10시쯤이었다. 그들은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과 진수성찬의 밥상이었다.
"웬 상이 이렇게 걸지?"
면도날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제 생일이에요."
빨간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그날 밤 따라 요염해 보였다.
"그랬어? 이거 유감인데. 우린 저녁을 먹고 왔단 말이야."
"그래도 조금만 드세요. 성의니까 드세요. 맥주도 시원하게 재놨어요."
"안 먹으면 원망 사겠는데."
면도날은 싫다는 거미를 붙들어 앉혔다.
여느 때 같으면 쌀쌀하게 굴던 조애리가 그날 밤만은 거미에게 애교있게 굴었다. 면도날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추파까지 던지기도 했다. 거미는 처음 몇 잔은 그녀가 따라 주는 대로 마셨지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지 더는 마시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식사에도 손도 대지 않았다.
자정이 지났을 때 맥주 다섯 병이 모두 비워졌다. 면도날의 눈꺼풀은 이미 무겁게 내려와 있었다.
"아, 졸려."
그가 하품하는 것을 보고 애리는 얼른 안방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자리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웠다.
거미도 졸리운지 하품을 했다. 그러나 면도날처럼 기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애리는 냉큼 말했다.
"제가 자리를 펴드릴게요."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건너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폈다. 거미는 요 위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엉덩이가 눈앞에서 흔들흔들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고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벌어진 옷 사이로 눈처럼 흰 젖가슴이 출렁이고 있었다.
"자, 누우세요. 옷을 벗겨 드릴게요."
거미는 드러누웠다. 애리는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끌어내렸다. 털투성이의 하체가 드러났다. 삼각 팬티를 뚫을 듯이 남근이 치솟아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이, 이러지 마세요."
그녀는 몸을 실으면서 웃었다.
"왜 오늘 밤 나를 유혹하는 거지?"
"어머머, 오해하지 마세요."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남근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그 손을 치우는 대신 그곳을 움켜쥐었다.
"생각 있으면 옷을 벗어. 까무러치게 해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몸을 비틀어댔다.
그는 드레스 자락을 걷어올리고 팬티 속으로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거대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벗어."
"잠깐 기다리세요. 잠들었는지 보고 오겠어요."
그녀는 거미의 품에서 빠져나와 안방으로 돌아왔다. 면도날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차 한 잔 분의 물을 끓였다. 거기다 꿀과 함께 수면제를 탔다. 그것을 들고 건넌방으로 가자 거미는 불을 끄고 누워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이미 벌거벗고 있었다.
"아직 자지 않고 있어요? 기다리세요. 자, 이거 드세요. 꿀이에요. 술 취했을 때는 꿀이 제일이래요. 취해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거미는 일어나 앉아 그녀가 내미는 찻잔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비바람이 무섭게 창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녀는 거실로 나와 기다렸다. 무서운 밤이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거의 30분 가까이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이어서 건넌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그녀는 움직였다. 잠든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불을 켰다. 강한 불빛에 거미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나 다시 요란스럽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채 네 활개를 펴고 잠든 그의 모습은 끔찍할 정도로 징그러웠다.
그녀는 재빨리 드레스를 벗고 바지를 입었다. 점퍼를 걸친 다음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갈매기......."
"수평선......."
"다 잠들었어요."
"수고했습니다. 빨리 그곳을 나와요. 되도록 멀리 떠나요. 대문 열어 놓는 것을 잊지 말고."
애리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숙이고 허둥지둥 걸어갔다.
때르릉.
기다리고 있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오월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이름을 말해 봐요."
"오월이에요."
"Z가 마지막으로 전화 거는 겁니다. 지금 그 집으로 가보시오. 대문은 열려 있을 겁니다. 성공하기를 빌겠소."
"잠깐! 당신은 누구시죠?"
찰칵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다가 서둘러 출발했다.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플래스틱통을 들고 골목으로 나왔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혔다. 그것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걸어갔다.
잠시 후, 마침내 그 집 앞에 도착했다. 숨을 몰아쉰 후 철문을 밀어보았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주저하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 동안 문을 등지고 서 있다가 마당을 가로 질러 걸어갔다. 집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밀었다. 그것 역시 소리도 없이 열렸다.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구석에 서 있다가 신을 신은 채 거실로 올라섰다. 가까운 쪽의 방문을 먼저 열었다. 코고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플래시로 방안을 비춰 보았다. 거미처럼 생긴 사나이가 벌거벗은 채 요 위에 누워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불을 끄고 플래스틱통의 마개를 뽑았다. 그녀는 잔인할 정도로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통 속의 액체를 거미의 몸 위에 조금씩조금씩 부었다. 휘발유 냄새가 물씬 코를 찔렀다. 질펀하게 젖을 때까지 붓고 나서 그 방을 나와 안방 쪽으로 옮겼다.
면도날 역시 요란스럽게 코를 골며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거미와는 달리 옷을 입은 채 자고 있었다. 플래시를 비춰든 채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그녀는 그의 몸 위에 휘발유를 쏟아부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면도날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빈 통을 방안에 버린 채 뒷걸음질로 방을 나온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들었다. 몸을 부르르 떤 다음 성냥을 그었다. 두 번 세 번 성냥을 그었지만 젖어서 잘 켜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가스 레인지가 있었다. 가스불을 켰다. 구석에 종이 쇼핑백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찢어 불을 붙였다. 종이
에 붙은 불을 들고 부엌을 나와 안방으로 다가섰다. 다시 한 번 부르르 떤 다음 방안으로 불을 던졌다. 불이 미처 밑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확 하고 불이 붙었다. 그녀는 방문을 쾅 하고 닫았다.
"아악!"
안에서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다시 부엌으로 뛰어들어 종이에 불을 붙였다.
거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상한 냄새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안방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꿈이겠거니 생각하는데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났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웬 불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불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불이 날아왔다. 동시에 확 하고 화염이 일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상대방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한데 뒤엉켜 뒹굴었다. 그때 안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불기둥 같은 것이 뛰쳐나오더니 거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거미의 몸에도 불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벌거벗고 있었는데다 재빨리 뛰쳐나왔기 때문에 금방 불을 끌 수 있었다. 그가 불을 끄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사이에 오월은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거미가 그녀를 뒤에서 덮쳤다.
그들은 땅바닥에 뒤엉켜 뒹굴었다. 거미는 뒤에서 그녀의 목을 휘어감고 힘껏 조였다.
"넌 누구지?"
"오월이다!"
충천하는 화염이 그들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야! 넌 오월의 얼굴이 아니야!"
"난 얼굴을 수술했어! 복수하기 위해!"
"이젠 네가 죽을 차례야!"
그는 그녀의 목에다 칼을 들이댔다.
"꼼짝 마!"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이다! 손 들어!"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다. 장완수 형사였다.
"그 여자를 풀어줘!"
그는 외쳤다.
비바람이 치고 있었지만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집채는 이미 불길에 싸여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여자를 풀어줘!"
장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비에 젖은 머리칼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거미는 오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뒷걸음질을 쳤다.
"개소리 마라! 권총을 버리지 않으면 이 여자 목을 잘라 버릴 테다! 빨리 권총을 이쪽으로 던져! 빨리!"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장은 권총을 내렸다.
"안 돼요! 그대로 쏘세요!"
오월은 울부짖었다. 그러나 장은 듣지 않고 권총을 던졌다. 거미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2미터쯤 앞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으려고 앞으로 움직였다. 마침내 권총 있는 데까지 닿았다. 그는 권총을 발로 밟았다.
그때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월은 그 순간을 이용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붙였다. 장형사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거미는 비틀하다가 권총을 집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장형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거미는 미처 권총을 집을 새도 없이 덮쳐오는 장을 향해 칼 든 손을 내뻗었다.
장은 멈칫했다. 날카로운 칼끝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온 힘으로 거미를 덮쳐 눌렀다. 오른손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찌르면서 왼손으로는 목을 눌렀다. 밑에 깔린 거미는 칼로 장의 옆구리를 깊이 찔렀다. 장은 부르르 떨다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거미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리고 멈칫하고 물러섰다. 어느새 권총을 집어든 오월이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2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거미는 웃었다.
"흐흐흐...... 넌 권총을 쏠 줄 몰라. 그건 아무나 쏘는 게 아니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거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복부를 움켜쥐고 그녀 쪽으로 비틀비틀 다가왔다. 그녀는 상대방의 가슴을 향해 두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거미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는 거미의 얼굴을 노리고 세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거미는 한바퀴 빙글 돌더니 튕기듯 뒤로 나가떨어졌다.
오월은 뛰어가 장형사를 끌어안았다.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왜 이랬지...... 아마 당신을 사랑했나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얼굴을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멀리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뻗어 권총을 더듬어 집어들었다. 그것을 자신의 복부에 갖다 대면서 미친 듯 장의 입술을 빨았다.
그리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것은 천둥 소리, 집채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에 삼켜서 별로 크게 들리지 않았다.
- 끝 -
추천 (0) 선물 (0명)
IP: ♡.221.♡.34
23,566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3학년2반
2022-02-16
0
559
3학년2반
2022-02-16
0
913
3학년2반
2022-02-15
0
912
3학년2반
2022-02-15
0
711
3학년2반
2022-02-15
0
485
3학년2반
2022-02-15
0
961
3학년2반
2022-02-15
0
332
3학년2반
2022-02-14
0
352
3학년2반
2022-02-14
0
387
3학년2반
2022-02-14
0
488
3학년2반
2022-02-14
0
343
3학년2반
2022-02-14
0
389
3학년2반
2022-02-13
0
336
3학년2반
2022-02-13
0
424
3학년2반
2022-02-13
0
343
3학년2반
2022-02-13
0
346
3학년2반
2022-02-13
0
419
3학년2반
2022-02-12
0
382
3학년2반
2022-02-12
0
457
3학년2반
2022-02-12
0
375
3학년2반
2022-02-12
0
376
3학년2반
2022-02-12
0
573
3학년2반
2022-02-10
0
494
3학년2반
2022-02-10
0
595
3학년2반
2022-02-10
0
396
3학년2반
2022-02-10
0
437
3학년2반
2022-02-09
0
783
3학년2반
2022-02-09
0
538
3학년2반
2022-02-09
0
311
3학년2반
2022-02-09
0
437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