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3-3 끝

3학년2반 | 2022.02.06 07:27:11 댓글: 0 조회: 484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829
┌────────────────────────────┐
│ 5.국제열차 │
└────────────────────────────┘

사내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왜 박동주라는
인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시간은 이미
밀라노에 도착한 지 세 시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전화가 안 오는 거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무화를 노려본다. 무화는 속이 떨리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말했다.
틀림없이 올 거예요. 틀림없이 이리로 전화를 걸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다 방까지 예약해 두지 않았겠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그녀는 달래듯이 말했다.
뱅커는 몹시 초조한 기색이었다.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것이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초조해 질수록
무화로서는 그것을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는 호텔 방에 들어온 지 세 시간 가까이 지났는데도 옷을
벗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열차에서처럼 그녀를 탐하지도 않았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방안을 빙빙 돌았다.
10시가 막 지났을 때 마침내 전화벨이 울렸다. 사내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무화는 가만히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블랙 로즈입니까?
동림의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어 있었다. 뱅커가 그의 본래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무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전화 걸면 어떡 해요. 그 사람 지금 어딨어요?
그녀는 일부러 사납게 물었다. 입에 뱅커의 뜨거운 입김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그녀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 소렌토 호텔에 있습니다. 호텔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잠시도 놔주지 않아서 전화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밖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겁니다.
마침내 뱅커가 무화를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그녀한테서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이봐. 당신이 박동주인가?
그는 다짜고짜 반말로 거칠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당신한테 애인이
살아서 돌아가느냐 아니면 시체가 되어 돌어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어. 그러니까 살아 있는 애인을 보고
싶으면 내 뜻을 거역하지 마.
절대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상대방이 공손히 나오자 그는 만족했다.
잘 알겠지만 우리는 당신이 가이드 해 주고 있는 그 자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해. 그자가 우리 공금을 횡령해 갔기
때문이야. 그자를 우리가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당신이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돼. 알겠어?
네, 알았습니다.
그 자는 소렌토 호텔 몇 호실에 있지?
518호실에 있습니다.
그자가 정말 황표가 틀림없나?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그자를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자가 있는 518호실에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그자 몰래 문을 열어두고
있으란 말이야.
그, 그건 안 됩니다.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이유가 뭐야?
경계가 심해서 그건 안 됩니다. 밀라노에 와서 그 사람은 저
혼자만으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경호원을 두
명이나 고용했습니다. 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도무지
기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자들이 어떤 자들이야? 한국인들인가?
아닙니다. 두 명 다 이탈리아인들 같습니다. 권총까지
휴대하고 있는 걸 보니까 보통 인물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권총까지 휴대하고 있다고?
뱅커는 사뭇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까지
흘러나왔다. 그는 성난 눈으로 무화를 쳐다보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떡하지?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당신 책임이라는 거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그자들은 그놈을 어떻게 지키고 있나?
한 명은 방에서 지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문 밖에
서있습니다. 호텔로 오시는 건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야?
저는 지금 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역에 가는 길입니다. 오후
2시30분에 출발하는 취리히행 국제열차 표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은 두 장만 사라고 했습니다. 경호원들 표를 사지 않는
걸 보니까 밀라노를 출발하면서부터는 그들을 떼어놓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취리히까지는 4시간 남짓 걸립니다. 그 시간을
이용하시면......
침대칸을 이용할 건가?
야간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침대칸이 없습니다. 1등칸을
구입할 생각입니다.
알았어. 생각해 보고 나서 결정하지.
그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시면 제가 이따가 그쪽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없어. 내가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확인을 좀
해야겠어. 당신을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어. 그리고 황가의
얼굴도 한 번 확인하고 싶어.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박동주가 말했다.
네, 좋습니다. 그러면 12시 정각에 델라스삐가 거리에 있는
나빌리오라는 카페에 나와 계십시오.
상대방은 되풀이해서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뱅커와 무화는 호텔을 나와 인파속으로 섞여들었다.
밀라노의 거리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들끓고 있는 도가니
같았다.
무화는 밀라노 거리가 변화를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은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밀라노는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버리지는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나빌리오 운하를 따라 걸으면서 더욱 현실감있게
가슴에 와닿았다.
나빌리오 운하는 밀라노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운하를 따라 밀라노의 과거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음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건축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답게 그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구역을 유심히 살피면서 걸어갔다.
운하의 제방 위에 걸쳐져있는 아치형의 오래된 다리가 저만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저쪽으로 산크리스토포로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성당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운하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와 달리 뱅커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시종 두리번거리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미행이 없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운하의 제방을 따라 구식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밀라노 특유의 그늘진 아름다움을 지닌 안뜰도 보였고 철제
발코니도 눈에 띄었다. 선술집, 뻬르골라또(덩굴을 지붕처럼
올린 정자), 19세기 때부터 있어온 고전적인 상점 간판들,
제라늄이 진열된 테라스...... 여기저기에 옛도시의 흔적들이
너무도 뚜렷이 남아있었다.
밀라노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칼라 극장이 있어요. 거기에
갈 수는 없겠죠?
바보같은 질문인줄 알면서도 그녀는 일부러 상대방을
떠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사내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렸다.
정신이 있어 없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는 다리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운하를
내려다보면서 상체를 흔들었다.
저는 상황이 다급할수록 여유있는 행동을 하고 싶어요.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조금 있다 박동주를 만나야 해.
그리고 황가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해. 황가 놈이 취리히행
국제열차를 타면 우리도 그걸 타야 해.
혼자 가시면 안 되나요?
안 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넌 일이 끝날때까지 나하고 함께 있어야 해. 돈을 찾으면 난
너를 데리고 지중해 휴양지로 가서 한 달 가량 즐길 생각이야.
괜찮은 생각이지?
그녀는 끄덕였다.
멋져요. 멋진 생각이에요.
그가 갑자기 택시를 불러 세웠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역으로 먼저 가서 열차표를 미리
사두겠어요. 표를 못 사면 그놈을 놓치는 거야.
역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앞으로 전개 될 일이 걱정되었다.
박동주로 가장한 추동림을 뱅커가 만나는데 과연 뱅커가
추동림을 못 알아볼까.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해도 사진을 통해
추동림의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도대체 어떡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추동림씨는 왜 그런 바보같은 약속을 했을까.
설마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뱅커를 해치우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 사내가 추동림씨를 알아보게 되면 과연 그곳에서 무슨일이
벌어질까.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전율했다.
역에 도착하자 뱅커는 직접 14시 30분발 취리히행 1등석
승차권 두 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검문에 걸릴까봐 조심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역사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검문 경찰이 보이지 않아.
택시에 오르자 델라스삐가 거리로 향했다.
12시 15분 전에 델라스삐가 거리에 도착했다.
그 거리는 통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화랑과도 같은
구역이었다. 두부모 같은 네모 반듯한 대리석이 깔린 좁은
길에는 세련된 양품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술집도 있었고, 각종
문화단체, 그리고 오래 된 서점들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지구가 망할때까지 제각기 자기 자리들을 지키고 있을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자리에 가장 어울려 보였다.
특히 예술인들이 모이는 술집들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카페 나빌리오는 좁은길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화가
먼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뱅커가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실내는 비좁아 보였다. 그런데 그 비좁은 분위기가 오히려
어울려 보였다. 실내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동양인들이 들어서자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들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하던 이야기들을
계속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동양인들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12시가 되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스탠드바 안쪽에 서있던
바텐더가 수화기를 집어들더니 미스터 Y! 하고 소리쳤다. 뱅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쪽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박동주가 걸어온 전화였다.
아, 오셨군요.
왜 안 오는 거지?
가긴 가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늦겠습니다. 늦더라도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시간이 없어. 얼마나 기다려달라는 거야?
12시 30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떻게 된다는 거 알고 있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꼭 가겠습니다.
12시 30분까지야. 황가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
뱅커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험한 표정을 풀었다. 바텐더가
그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도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만 얼굴이
도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자식, 12시 30분까지 기다려달라는 거야.
자리로 돌아온 그는 투털거리면서 무화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은 커피를 시켰다.
무화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추동림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게될지 걱정이 되면서도 궁금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보도위를 오가고 있었다. 차도 위를
굴러가는 차들도 멋져보였다. 거리는 파리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12시 30분이 되었을 때 맞은 편 보도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한 명 나타났다.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곧장
길을 건너왔다. 추동림은 아니었다.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비쩍
마른 것이 기분 나쁘게 생긴 사람이었다. 조금 큰 키에 퀭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검정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화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미스터 Y씨입니까?
한국 말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무화는 고개를 돌렸다. 그
비쩍 마른 남자가 뱅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뱅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박동주입니다.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가 공손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빈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뱅커가 끄덕이면서 날카롭게 상대를 쏘아보았다.
무화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대방은
추동림이 아니었다. 아무리 교묘하게 변장한다 해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 찬찬히 뜯어보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추동림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전혀 변장하지도 않은 본래의 얼굴 모습 같았다. 무화는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어떻게 해서 이사람이 박동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한가지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뱅커가
자기를 알아볼 까봐 추동림이 자기 대역을 할 수 있는 한국인을
한 명 고용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자리에 추동림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나 박동주 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취리히행 열차표는 구입했나?
뱅커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네, 구입했습니다.
어디 봐.
무화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젊은 남자의 움직임과 표정을
살폈다. 여기서 잘못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모두가
위험해진다. 검정 가죽점퍼의 사나이가 승차권 두 장을 꺼내
놓았다.
뱅커는 그것을 살펴보고 나서 도로 돌려주었다. 그는 그들의
좌석번호를 확인 해 두는 것 같았다.
당신은 황가가 하자는 대로 열차를 타는 거야. 우리도 그놈을
따라 그 열차를 탈 거야. 우리 좌석은 15호실이야. 열차가
출발하면 당신은 한 시간마다 우리 방에 와서 그놈의 동태를
보고해. 가능하면 그놈을 취하게 만들어.
그 사람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제가 주는 것도 먹지
않습니다.
좋아.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신문을 받는 게 좋겠어.
취리히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그놈의 자백을 받아내야 하니까.
그런데 그놈은 정말 취리히까지 간다고 했나?
네, 그래서 취리히까지 표를 끊은 겁니다.
취리히까지 표를 끊었다고 해서 거기까지 간다는 보장은
없어.
그것은 맞는 말이라고 무화는 생각했다.
뱅커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 놈은 쫓기는 놈이기 때문에 수시로 마음이 변할 수가
있어. 도중에 갑자기 내려버릴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럴 때는
즉시 나에게 연락해 줘야해.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아직도 소렌토 호텔에 있나?
아닙니다. 호텔에서 나왔을 겁니다. 제가 전화를 걸었더니
사바나라는 레스토랑으로 1시까지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식당은
아주 유명한 식당이라고 합니다.
뱅커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1시 15분 전이었다.
그 레스토랑이 어디 있지?
여기서 걸어서 10분쯤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엑셀시오라는 이름의 호텔이 있습니다. 바로 그 호텔 맞은편에
그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그는 창 밖을 오른쪽으로 가리켜보였다.
그는 혼자 식당에 나올 건가?
그러지 않을 겁니다. 경호원들도 함께 올 겁니다. 밀라노를
떠날 때까지는 그림자처럼 붙어다닐 겁니다.
그 놈의 낯짝을 봐둬야겠어. 그렇다고 그 식당에 들어가
볼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지?
그는 대답을 구한다는 듯 무화를 쳐다보았다.
그 근방 잘 보이는 곳에 숨어 있다가 그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면 될 거예요. 그 근방에 그럴만한 장소가 있어요?
그녀가 박동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있을 겁니다. 그 근방에는 레스토랑과 술집들이 많이
있으니까 감시하기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당신은 먼저 가봐.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돼.
뱅커는 박동주에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박동주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추동림씨는 지금 어디 있을까 하고 무화는 생각했다.
1시 경에 뱅커와 무화는 카페를 나와 박동주가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10분쯤 걸어가자 엑셀시오라는 이름의 호텔이 보였고,
그 맞은편에 레스토랑 사바나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바나 출입구를 감시하려면 호텔이 좋겠어요.
무화의 말에 뱅커는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
안에 들어가 감시하면 사바나를 출입하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화가 먼저 호텔 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녀가 호텔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나서 뱅커는 캡을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갔다.
호텔 2층에 마침 레스토랑이 있었다. 뱅커와 무화는 그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사바나 출입구는 너무도
가깝게 빤히 내려다보였다.
그들은 조개를 곁들인 스파게티와 왕새우 요리를 시켰다.
식사를 하는 동안 뱅커의 시선은 사바나 출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화는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서두르지 않고 자기 몫의
식사를 해나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뱅커의 표정에는 초조한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1시 40분이 되었을 때 그는 남은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편 식당 출입구를 바라보면서 줄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1시 50분이 되었을 때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저놈이야! 하고 소리쳤다. 주위에서 식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자 그는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배인이 다가와
그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주의를 주자 그는 오케이, 알았다
임마! 하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사바나의 출입구 앞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서있었다. 세 명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한 남자를 에워싸듯이 하고 서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아까 카페에서 헤어졌던 박동주였다. 선글라스
양켠에 바싹 붙어서 있는 두 명은 이탈리아인들 같았다. 그들은
허위대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들이었다.
저 선글라스 낀 사람이 틀림없어요?
무화를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틀림없어.
그는 포크를 꽉 움켜잡았다. 포크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황가를 찌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황가의 오른손에는 검정색 007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는
고급스럽게 차려입고 있었다. 밤색 코트로 몸을 두르고 있었고
머리에는 회색의 중절모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들 앞에 택시가 굴러와 멎었다. 황가는 이탈리아 남자들과
함께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박동주는 맨 마지막에 앞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택시가 움직이자 뱅커는 서둘러 레스토랑을 빠져
나갔다. 무화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택시를 집어타고 역으로 향했다.
그들이 역에 도착했을 때는 광장에 서 있는 탑시계가 2시
1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들은 조심스럽게
대합실 안으로 들어섰다.
대합실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지만 황가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플랫폼 쪽으로 먼저 걸어가던 무화는 멈칫했다.
저기 있어요!
그녀는 기둥뒤에 서서 플랫폼 쪽을 가리켰다.
황가 일행은 플랫폼 쪽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후
황가와 박동주는 열차 안으로 사라지고, 이탈리아인들만 대합실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뭐라고 지껄이면서 무화 옆을
지나쳐갔다. 플랫폼에 서있는 탑 시계가 2시 2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뱅커와 무화가 막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두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황가의 경호원들은
아니었다.
패스포트 좀 보실까요?
그들은 이탈리아 경찰관들이었다. 한국인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패스포트를 꺼내주었다.
사복 경찰관들은 패스포트에 붙어있는 사진과 앞에 서있는
한국인들의 얼굴을 대조해 보고 나서 이름과 여권번호, 그리고
국적과 검문 일시를 수첩에다 적은 다음 각자에게 패스포트를
돌려 주었다.
일본에서 오셨군요. 어디 가시는 겁니까?
작딸막하게 생긴 이탈리아인이 무화에게 영어로 물었다.
취리히.......
무화는 가볍게 대꾸하면서 패스포트를 백속에 집어넣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밀라노 경찰들은 정중히 인사하고 나서 그들이 갈 수 있게
길을 비켜주었다.
뱅커는 열차에 오기 전에 무화의 팔을 움켜잡았다.
왜 취리히에 간다고 사실대로 말했지?
지금 이 플랫폼에서 떠나는 열차는 취리히행밖에 없잖아요.
괜히 거짓말했다가 의심을 사기보다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난 뭐가 잘못된 줄 알았어.
뱅커가 두 눈을 휘번덕거리면서 말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플랫폼을 걸어가다가 열차에 올랐다.
뱅커는 앞장서서 1등칸 복도를 걸어가다가 9호실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방의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안은
복도에서 들여다볼 수 없게 밀폐되어 있었다.
바로 이 방이야.
뱅커는 방문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린 다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들은 15호실로 들어갔다.
실내는 비교적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카핏이 깔려
있었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방은 4인용 방이기 때문이 1인이 사용하든 2인이 사용하든
4인분의 요금을 지불해야만 전용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뱅커가 문을 걸어잠궜을 때 무화는 갑자기 공포에 사로
잡혔다.
대결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자연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뱅커도 긴장이 되는 모양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었고, 그
얼굴에서는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밀라노발 취리히행 국제열차가 움직였다. 이탈리아에서
눈이 덮힌 험준한 알프스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가는
열차였다.
뒤로 밀려가는 밀라노 역의 플랫폼과 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무화는 문득 이것이 이번 여행의 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이런식의 여행을 해서는 안된다.
다음 여행은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된 여행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우면 나 혼자만의 고독한 여행이어야 한다. 만일 나 혼자
여행을 한다면 몽셍미쉘에 가서 그곳의 중세 건축 미술을
살펴봐야지. 카메라도 가지고 가서 사진을 많이 찍어둬야지.
뱅커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무화는 무서워서 그 시선을 받을 수가 없었다.
왜 내 눈을 피하는 거지?
그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화는 어깨를 움츠렸다.
무서워요. 그렇게 쳐다보시니까 무서워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각오하고 있어. 뭔가 잘못되면 모든 게 네 탓이니까 넌
각오하지 않으면 안 돼.
각오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그녀는 공포를 누르면서 물었다.
사내가 캡을 벗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대머리가 번들거리는
것이 더욱 포악해 보였다.
몰라서 묻는 거야?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목을 움켜잡았다.
이 목을 분질러버릴 거야. 닭 모가지 비트는 것처럼 비틀어
버릴 거야.
부화는 목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에서 무쇠 같은 강인함과
잔혹한 살기를 느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상대방이 무섭게 나오면 이쪽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를 상대하는 동안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지 마세요. 나도 할만큼 하고 있단 말이에요.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녀가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그는 조금 수그러드는 기색을
보였다.
모든게 처음부터 잘못됐어. 내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때부터 일이 잘못 꼬이기 시작했어. 아무 데도 연락이 되지
않고 왕은 죽었어. 내가 보낸 황금의 초생달은 경찰에
체포됐다고 했어.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었어.
나느 지금 네 말만 듣고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모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더이상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거예요. 저는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서비스도 해드렸어요.
여자가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요.
뱅커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만졌다.
화를 내니까 더 예쁘구나.
저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마세요.
기대를 안 걸 수가 없게 됐지. 흐흐...... 블랙 로즈, 너의
진짜 이름이 뭐지?
무화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건 비밀이라는 거 아시지
않아요?
그건 그래. 하지만 나한테 이야기하는 건 괜찮아.
싫어요. 규칙은 규칙이에요. 전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 당신의 잔인성이 싫어요.
열차는 어느새 밀라노 시내를 벗어나 산악지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잔인하다고?
네, 그래요.
그녀는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잔인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린애를 납치할 정도라면 물어보나마나 잔인할 거 아니예요.
잔인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 말에 그는 음험한 미소를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를 잔인하다고 생각했군. 그래 나는 잔인한 놈이야.
잔인하지 않으면 조직의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해. 그런것 저런것 따지다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원래 우리 조직의 일이란 비정상적인 거야. 따라서 그것을
수행하려면 상식적으로는 안 돼. 비정상적인 수법을 동원해야만
수행할 수 있어. 어린 아이 하나쯤 납치하거나 죽이는 건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그게 싫어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어린 아이를 납치하는
것만은 딱 질색이에요.
무화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게 조심스럽게 접근해갔다.
아무리 비정상적인 수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해도 어린
아이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는 건 정말 싫어요. 그건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잔인무도한 짓이에요. 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사내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윽고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용서할 수 없단 말이지?
어린애를 납치한 그 행위를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할 수 없으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를
처벌하겠다는 거야?
제가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을 처벌하겠어요. 하지만 처벌할
수 있으면 처벌하고 싶어요.
어떻게?
무화는 입을 꼭 다문 채 상대방을 응시하기만 했다.
어떻게 나를 처벌하겠다는 거지?
그녀가 얼른 입을 열지 않는 바람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그 어린애를 부모한테
돌려주세요. 그러면 용서할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는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없이
탐색하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무화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 애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이유가 뭐야?
황금의 초생달한테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어요. 그 사람
이야기를 듣고 느낀 바가 많았어요. 그 사람의 이야기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어요. 그 사랑하는 자식을 찾기 위해
유럽에까지 날아온 그 사람의 행동은 정말 눈물겨웠어요.
너처럼 감상적인 아가씨가 우리 조직에 있다는게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그가 빈정거렸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람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저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어요. 자식을 위해 부모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저는 그
사람을 통해 실감할 수가 있었어요.
그자한테 단단히 반했군.
네, 반했어요. 그 사람은 저한테 아기를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전 장담할 수 없지만 아기를 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
건방진 년, 네가 뭔데 그런 약속을 했어?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화내지 마세요. 당신이 볼 때 전 아무 것도 아닐 거에요.
당신의 눈에는 제가 단지 섹스의 노예일 뿐일 거예요. 하지만 제
속에도 뜨거운 피가 있어요. 제 몸 속에 흐르는 뜨거운 모성애가
그 어린애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는지 몰라요.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여자의 속마음이 어떤것이라는 것을.......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도대체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애를
구해 주겠다는 거야?
당신한테 호소할 생각이었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녀의 뺨에서 철썩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마. 그건 이미 지난 일이야. 지금 우리는
그따위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보다 중요한 일을 위해 이
열차에 타고 있는 거야. 어린애 하나쯤 어떻게 되든 그런 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그애를 납치하지 않았더라면 물건을
회수할 수도 없었어.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나를 괴롭히지 마.
지금은 오로지 황가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생각할 때야. 경고하는데 다시는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마.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그러나 무화는 맞아죽을 각오라도 했는지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그 문제로 당신이 괴로와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미 물건은
찾았고, 황금의 초생달은 경찰에 체포됐기 때문에 이용가치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그 어린아이는 돌려보내는게 당연하지
않아요? 데리고 있으면 더 골치만 아프잖아요.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만 주시면 돼요.
그 애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면 어떻게 할 셈이야?
황금의 초생달은 부산에 있는 자기 집 전화번호를 나한테
가르쳐줬어요. 그리로 연락하든가 아니면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도 되고 제가 직접 한국 경찰에 국제전화를 걸어서 그
아이가 있는 곳을 알려줘도 돼요.
추동림한테 반해도 단단히 반했구나.
세상에 태어나 한번쯤 좋은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 아이를
돌려보내세요. 부탁이에요. 그 아이를 돌려보내시면 전 더욱
열성적으로 당신을 돕겠어요. 헌신적으로 말이에요.
내가 거절한다면?
그때는 저도 생각을 달리해 보겠어요.
그건 무슨 뜻이지?
당신을 돕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의 얼굴에 다시 살기가 번졌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내 곁에서 떨어져서는 안 돼. 만일 떨어지려고 한다면
그 전에 먼저 죽어야 해.
그는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더니 다리에 부착되어 있는 가죽
집에서 단도를 뽑아들었다. 그것은 보기에도 섬뜩하게 생긴
칼이었다. 그는 그것을 목에다 갖다댔다.
이걸로 목을 잘라버릴 거야.
그는 가만히 말했다. 그녀는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겁에 질려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거에요. 나를 죽이면 당신한테 득이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걸요. 당신은 살인범으로 체포될 테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은 경찰에 쫓기고 있는 몸이에요. 거기다
사람까지 죽이면 경찰이 가만 있지 않을 걸요. 아마 전 유럽
경찰에 당신을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릴 걸요. 유럽은 하나의
나라나 마찬가지예요. 각국 경찰은 아주 긴밀히 서로 협조하고
있어요. 나를 죽임으로써 쓸데없는 화를 자초할만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겠죠.
그는 그녀의 목에서 슬그머니 칼을 떼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는 아주 영리하고 귀여운 계집애야.
너를 죽인다고 해서 나한테 득될 것은 없지. 부탁인데......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서 나를 도와줘.
내 부탁도 들어주세요. 그 어린 아이를 돌려보내세요.
추동림씨는 약속을 지켰잖아요. 저한테만은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래도 괜찮지 않아요? 그 아이는 지금 살아 있나요?
그럼 살아 있고 말고.
어디에 있나요?
그건...... 일이 끝나면 말해 주겠어. 황가놈을 처리하고
나서 말해 주겠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왜 이렇게 재촉하는 거지?
그가 눈을 부라리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무화가
일어나려는 것을 뱅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대로 앉아 있어.
누구야?
박동주입니다.
문 틈으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뱅커는 문을 조금 열어 밖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조금 더 열어주었다. 그리고
박동주가 안으로 들어서자 도로 문을 걸어잠갔다.
그놈은 어떻게 됐지?
9호실에 있습니다.
뭐하고 있어?
창가에 앉아 술만 마시고 있습니다.
무슨 술을 마시고 있지?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다.
혹시 우리가 미행하고 있다는 거 눈치채지 않았나요?
이번에는 무화가 물었다.
눈치채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치챘다면 그렇게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놈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했잖아?
네, 열차에 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놓이는지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열차가 멎었다. COMO라고 쓰인 입간판이 보였다. 밀라노를
출발한 지 40분이 지난 15시 10분이었다. 국경 근처의 역인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고색창연한 집들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역은 알프스로 올라가는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역이었다. 역 같지 않게 아주 조용했고, 플랫폼을 오가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함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놈한테 가도 되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술을 더 마신 뒤에 들어가시는게
좋을 겁니다. 조금 있으면 국경을 통과합니다. 국경을 넘은
다음에 시작하는 게 좋을 겁니다.
뱅커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표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좀 더 기다리기로 하지.
열차가 여기를 통과할 때 침입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박동주는 지도를 꺼내더니 한 곳을 짚어보였다.
몽블랑 터널입니다. 터널이 길어서 통과하는데 10분이나
걸린답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두 사람이 눈치오 부장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은
카르딜레였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다. 노인은
안경 너머로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눈치오 부장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고 놀랐다. 카르딜레가 자신의 손목과 그
노인의 손목에 연결되어 있는 수갑을 풀었다. 그리고 노인의
어깨를 눈치오 부장 쪽으로 밀었다.
눈치오 부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앞에서 이탈리아
노인은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프로파치, 오랜만이군.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나?
눈치오는 노인의 가냘픈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카르딜레를 돌아보았다.
뭘 좀 알아냈나?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
눈치오 부장은 프로파치를 노려보다가 그의 눈 앞에 유무화의
사진을 가까이 들이댔다.
이 아가씨 알고 있지?
모, 모릅니다.
노인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치오의 우악스런 손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망할 놈의 늙은이! 죽을 때까지 그 짓을 함 셈이야?
멱살을 바싹 움켜쥐고 비트는 바람에 노인은 숨이 막혀,
창백하던 얼굴이 시뻘개졌다.
이 아가씨한테 패스포트 만들어 준 거 다 알고 있어. 거기에
적힌 이름이 뭐야?
노인이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눈치오는 그를 뒤로 세게
밀어버렸다. 프로파치는 뒷 벽에 세게 뒤통수를 부딪치면서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일으켜 세워!
카르딜레가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눈치오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인의 안경을 집어들고 가까이
다가섰다. 그것을 노인의 얼굴에 끼워주고 나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프로파치, 그 패스포트에 적힌 이름이 뭐지?
노인은 두려움에 떨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석방시켜 준다면 말씀드리지요.
눈치오는 다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가 도로 풀었다.
더러운 늙은이, 좋아. 석방시켜줄테니까 말해 봐.
일본 여권이었는데...... 이름은 이치조 하루미라고
기억됩니다.
이치조 하루미? 틀림없나?
네, 틀림없을 겁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만 않다면.......
일행이 있었을 텐데...... 남자들 말이야.
네, 두사람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추동림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사람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들한테도 패스포트를 만들어줬나?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자 것만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간다고 했지?
로마를 빠져나가는데 새 패스포트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눈치오 부장은 프로파치를 내보내고 나서 그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손님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치조 하루미라는 이름을 명단에서 본 것 같습니다.
노경감의 말에 그들은 일제히 명단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사람들의 명단으로 전국에서
컴퓨터에 입력되어 들어온 이름들이었다.
5분쯤 지나 경감은 로마역에서 체크된 이름들 가운데서 이치조
하루미의 이름을 찾아냈다.
여기 있습니다. 테르미나 역에서 어젯밤 9시 20분경에 검문을
당했습니다. 검문자는 안느 바넥인데...... 동행은 없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마침 그때 바넥이 브리앙 차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기를 듣고 난 바넥은 브리앙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일본 여자 기억이 나요. 어디 가느냐고 하니까
피렌체엔가 간다고 했어요. 그 여자에 대해서는 브리앙 차장님이
더 눈여겨 보셨을 거예요.
그 말에 브리앙은 멋적은 표정이 되면서 얼굴을 붉혔다.
젊은 동양계 여자였는데 분홍색 코트를 입고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몰라보았나?
살레 부장이 나무라는 투로 두 부하를 쳐다보았다.
몰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변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브리앙 차장의 말을 노경감이 옆에서 거들었다.
사진만 봐가지고는 변장한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 겁니다.
밀라노행 열차에 오르는 것을 봤습니다. 하고 브리앙이
말했다.
그들은 피렌체에서 검문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그 명단 가운데서 이치조 하루미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 이름은 정작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오늘 아침
밀라노역에서 체크된 명단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경찰에 체크된
시간은 아침 6시 30분 경이었다.
6시 30분이면 어젯밤 그 여자가 테르미나 역에서 탄 열차가
도착한 시간입니다. 로마에서 밀라노까지는 9시간 걸립니다.
어젯밤 그 열차는 9시 25분에 출발했습니다.
카르딜레의 말이었다. 눈치오는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탁자를
두드렸다.
동행이 나타났어. 일본인 남자인데 이름은 가네마루
쇼케이...... 하루미와 함께 검문을 받았는데, 두 사람은 부부로
되어 있어.
살레 부장은 벽에 걸려있는 대형 유럽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밀라노에 갔다는 것은 국제열차 편으로 국경을 빠져나가려고
한 게 아닐까요? 밀라노에서 국경까지는 열차로 얼마나
걸리나요?
한 시간 남짓 걸립니다.
카르딜레가 대답했다.
밀라노에서 들어온 명단 있으면 빨리 가져오라고 해!
눈치오는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질렀다. 카르딜레가 컴퓨터실로
전화를 건 지 10분쯤 지나 여직원이 밀라노 경찰이 보내온
명단을 가지고 뛰어들어왔다.
바로 이거야!
명단을 훑어보던 눈치오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는
볼펜으로 두 사람의 이름 밑에다 선을 그었다.
바로 이것들이야!
눈치오는 이름 밑에다 다시 한 번 선을 그으면서 거듭
큰소리로 말했다.
새로 들어온 명단에도 이치조 하루미와 가네마루 쇼케이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역시 밀라노 역에서 두 번째 검문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었는데 그때의 시간은 오후 2시
23분경이었다. 그리고 행선지는 취리히로 되어 있었다.
국제열차 편으로 국경을 빠져나간 게 틀림없어!
눈치오는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14시 30분에 떠나는 취리히행 국제열차가 있습니다.
카르딜레가 열차시간표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 차에 탄 게 틀림없어!
흥분한 눈치오는 손님들에게 영어로 재빨리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가네마루 쇼케이는 누구일까 하고 노경감은 생각했다.
추동림일까 아니면 미스터 Y라는 자일까. 아니면 제3의 인물이
나타난 것일까.
다른 자들도 거기에 탔을까요?
눈치오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차를 덮치면 모두 체포할 수 있어요!
그렇게 소리치면서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이 4시니까 출발한 지 1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국경은 넘었겠군요?
노경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국경은 넘었죠.
카르딜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 앞으로 다가섰다. 노경감도
그쪽으로 다가섰다.
지금 아마 여기쯤 가 있을 겁니다.
카르딜레는 Lugano라는 지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루가노는 호수를 중심으로 발달된 작은 도시이죠. 알프스가
빚어낸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이제 더이상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일어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열차를 정지시킬 수는 없을까요?
브리앙 차장이 물었다. 눈치오는 그를 흘기면서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국내열차라면 몰라도 그건 국제열차예요.
정지시킬 수 없다면 지연이라도 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안 돼.
살레 부장이 무겁게 한 마디 했다. 그는 딱하다는 듯이 부하를
쳐다보면서
열차는 그대로 달려야 해. 하고 말했다.
열차가 정지한다든가 갑자기 느리게 움직이면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놈들이 눈치를 채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우리한테는 열차를 정지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카르딜레가 브리앙 차장에게 설명했다. 브리앙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다물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열차를 따라잡는 방법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스위스 쪽 요원들에게 부탁하는
방법입니다.
눈치오는 의견을 묻는 듯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열차 안에 스위스 쪽 경찰이 있을 텐데 부탁하면 안될까요?
살레가 눈치오를 향해 물었다. 눈치오는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한테 지금 당장 부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두 명 정도 입니다. 패스포트를 검사하기 위해
국경역에서 승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문 수사요원들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친구들한테 부탁했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범인 일당은 적어도 세 명 이상일텐데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한테 접근했다가 십중팔구는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들을 모두 체포하려면 10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눈치오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살레 부장은 공감이
간다는 듯 끄덕였다. 눈치오는 시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나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앞으로 남은 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없어요.
세 시간도 못 남았습니다. 하고 카르딜레가 말했다.
이렇게 해야겠어.
눈치오는 집게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카르딜레, 밀라노까지 갈 비행기를 수배해.
비행기표를 예약하란 말씀입니까?
일반 항공기를 이용할 시간이 없어. 경찰 비행기나 군용
비행기를 지금 즉시 준비시키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헬리콥터도 준비시켜. 비행기까지 타고 갈 거니까. 밀라노
경찰에도 헬리콥터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해. 서둘러! 시간이
없어!
눈치오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헬리콥터 편으로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겠습니다.
밀라노에 도착하면 거기서 다시 헬리콥터로 바꾸어 타고
국경으로 날아가는 겁니다.
그 열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노경감이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눈치오는 자신있게 말하고 나서 카르딜레가 통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옥상으로 올라가십시오. 5분 후에 헬리콥터가 출발합니다.
카르딜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전화기에 매달렸다.
카르딜레, 자넨 여기 남아서 필요한 조처를 해둬. 스위스
측에도 전화를 걸어 우리 헬리콥터가 국경을 넘어가니까
발포하지 말라고 일러둬. 취리히 역을 봉쇄해 달라고 해. 우리
요원 10명을 빨리 차출해서 옥상으로 올려보내. 자넨 여기를
떠나면 안 돼. 내가 수시로 연락할 테니까.
다급해지자 눈치오는 몸집에 비해 매우 잽싸게 움직였다.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 위에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위에는 대형 헬리콥터가 이미 출발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때문에 옥상에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굽히고 헬리콥터 쪽으로 뛰어가 한 사람씩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눈치오의 부하 10명이 달려와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위로 붕 떠올랐다.
로마 시가지의 모습이 눈 아래로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역사의 때에 절은 고도의 유적들은 햇빛 속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나타났고, 그 위를 달려가는 차량들의 모습이
장난감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스위스 쪽 요원들을 먼저 동원해서 열차에 오르게 하는 게
어떨까요? 만일의 경우 우리가 열차를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살레 부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프로펠러 소리때문에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한테 먼저 범인들을 잡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눈치오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살레가 끄덕이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난 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체포할 생각입니다.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난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나 대신 카르딜레를
보냈을 겁니다. 두 건의 살인 사건은 로마에서 일어났습니다. 내
관할 구역 안에서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난 직접 내 손으로
그들을 잡아야겠어요!
눈치오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기 때문에 살레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헬리콥터와 비행기까지 동원하고 자기 휘하의
요원들까지 데리고 출동한 만큼 누구보다도 발언권이 강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만일 그가 협조를 거부한다면 이렇게
기동성있게 움직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노경감은 수사의 주체가 뒤바뀌어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 말 못하고 있는데 살레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스위스 요원들을 열차에 대기시키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행동에 들어가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 말에는 눈치오도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즉시
무전기를 들고 본부를 불렀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는 카르딜레와
연결되자 그는 스위스 측에 즉시 지원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취리히 역을 봉쇄하라고 부탁해 놨습니다.
그건 마지막 보루야!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 스위스
요원들을 즉시 열차에 투입시키라고 해! 그 대신 우리와 만날
때까지 절대 행동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줘!
눈치채지 않게 신중히 행동하라고 일러줘!
알았습니다!
비행기 편은 어떻게 됐어?
대기시켜 놨습니다! 밀라노에도 연락을 해놨습니다.
헬리콥터는 어느 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활주로 위에
날아와 있었다. 헬리콥터 조종사는 관제탑과 계속 교신하면서
활주로 위에 엔진을 건 채 대기하고 있는 드하빌랜드 쌍발오터기
옆에 기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것은 정원 18석의
경비행기였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 바로 오터기로 뛰어올라갔다.
마지막 사람이 올라타자 오터기는 즉시 활주로 위를
미끄러져갔다. 비행기가 밀라노를 향해 고도를 잡았을 때 살레
부장이 주위를 둘러본 다음 생각난 듯 노경감에게 물었다.
참, 미스터 마는 어디에 갔습니까?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데?
마형사를 찾는 말이었다. 눈치오가 노경감을 힐끗 쳐다보았다.
몸이 불편한 모양입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기에 호텔에
가서 좀 쉬라고 했습니다.
너무 과로한 모양이군요.
살레는 끄덕이고 나서 마형사에 대해 더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형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무화는 화장실 쪽으로 가다가 코너에 이르러 멈칫하고 섰다.
박동주로 행세하는 그 비쩍 마른 사내가 거기에 서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지요?
무화는 다짜고짜 그것부터 물었다. 사내는 움푹 들어간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차차 알게 될 거요. 그것보다 유무화씨, 그놈이 나를
의심하지 않던가요?
아뇨,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다행이군. 아가씨, 어때요? 견딜만 한가요?
죽을 것 같아요. 견디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잖아요.
네, 그러니까 버티고 있는 거예요. 추동림씨는 어떻게
됐어요, 열차에 탔나요?
네, 탔어요.
그분한테 전해 주세요. 뱅커가 그랬는데 아이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잖아요.
아이는 어디 있답니까?
그건 나중에...... 황씨를 처리하고 나서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교활한 놈.......
비쩍 마른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는 사건의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해요.
그가 말했다. 무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알아내려고 했지만 더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더이상 알아낸다는 것은 어려워요. 그가 나를 의심하게 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요.
그래도 알아내야 해요. 그자와 접촉하고 있는 사람은 무화씨
밖에 없으니까 아가씨한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어요.
난 자신이 없어요.
몽블랑 터널이 가까와지고 있어요. 터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알아내야 해요. 보다 정확한 사실을!
당신이 누군데 강요하는 거예요?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추동림씨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들의 소식을 알아낼 것으로 믿고 있어요.
난 알아낼 수가 없어요. 그럴 수 없다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날카롭게 말하고 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번 사건에
휩쓸려 든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가는데 까지 가봐야겠다고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열차 식당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즐기면서 식사하기
바란다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저녁식사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지만 곧 해가 지기 때문에 날이 저물면 식사를 할 수가
없다. 추억의 여행이 되기위해 식탁을 마련했으니 빨리 와서
멋진 식사와 함께 알프스의 기막힌 장관을 구경하기 바란다,
아나운스먼트는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무화는 갑자기 식당에 가고 싶어졌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하더라고 차창가에 앉아 기막히게 아름다운 알프스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사치스러운
생각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얼굴에
화장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의 심리와 별로 다를바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어떻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방에 들어갔을때 사내는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 여행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리하면서도 불안한 것 같았다.
이제 겨우 4시 반이야.
그가 그렇게 말했을때 다시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그것은
취리히 도착시간이 예정보다 한 시간쯤 늦어질거라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사내는 아나운스먼트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무화의 말을 듣자 그는 펄쩍뛰었다.
한 시간이나 늦는다고? 이유가 뭐야?
철로 공사때문인 것 같아요.
그녀는 적당하게 둘러붙였다. 그러나 그는 잔뜩 의혹에 찬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상한데.......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더욱 불안한 표정이었다.
열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다가 Belinzone라고 쓰인 역앞에
멈춰섰다.
역사는 눈속에 묻혀 있는 듯 했다. 국제열차는 밀라노를
출발한 이후 계속 위로만 올라오고 있었다. 위로 올라올수록
시야는 점점 희어지기만 하다가 지금은 완전히 백색의 세계에
도달해 있었다. 깍아지른 빙벽에 붉어지기 시작한 석양빛이
부딪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극명한 아름다움이 솟구치고
있었다. 아득히 먼 산정쪽에서 뿌연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그것은 눈사태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멀리서 굉음같은 것이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 했다. 저 아래로
하이웨이가 보였고, 그길을 따라 차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
하이웨이는 열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저아래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알프스를 통과하는 하이웨이 인 것 같았다.
차들은 눈에 덮인 차도 위를 몹시 조심스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오른쪽 깍아지른 빙벽과 마주보는 곳의 산들도 모두 눈에 덮여
있었다. 산들은 하나같이 웅대해 보였다. 그 웅대함 밑에 흰
빛과 대비되는 파란 색조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알프스의 눈과 빙하가 이루어 놓은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는 태고의 신비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호수 위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대한 호숫가에는 아름다운 집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집들과 가까운 물가에는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맑은 호수에는 그 모든 것들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치고 있었다.
열차가 다시 움직였다. 열차는 이미 스위스에 들어와 있었다.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긴장해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무화가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섰다.
누구십니까?
스위스 경찰입니다.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화가 돌아보자 사내는 하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단도를 꺼내 시트 밑에 감추었다.
문을 열자 사복 차림의 사내 두 명이 서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양복 저고리의 왼쪽 가슴 위에는 스위스 국기가 그려진
배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스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패스포트좀 보여주실까요?
무화는 뱅커를 돌아보았다.
비자는 필요없으니까 안심하세요. 하지만 입국할 때 패스포트
정도는 보여주어야 해요.
뱅커는 투털거리면서 패스포트를 꺼냈다.
코밑 수염을 기른 젊은 스위스 관헌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두
사람의 여권을 들여다본다. 그 옆에 서있는 사람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이치조 하루미...... 가네마루 쇼케이.......
코밑 수염은 싱글거리면서 두 사람의 이름을 발음하고 나서
그들의 아래위를 쳐다보았다.
두 분 관계는?
우리는 결혼한 사이예요.
무화가 거리낌없이 말했다.
아, 그러십니까. 스위스에는 무슨 일로?
신혼여행 중이에요.
그렇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실례 많았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식당에는 멋진 디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거기에 가려고 하던 참이에요.
그들이 가고 나자 뱅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의혹에 찬
시선을 무화에게 던졌다.
왜 우리를 검문한 거지?
우리만 검문하는게 아니예요. 외국인은 모두 검문을 받는
거에요.
그래도 이상해. 싱글싱글 웃는 게 아주 기분 나쁜 놈이었어.
그러지 말고 우리 식당에 가서 식사나 해요. 멋진 식사가
준비되어 있대요. 식사를 하면서 알프스를 넘는다는 거 얼마나
멋져요. 자, 나가요.
안 돼!
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조금 있으면 몽블랑 터널이라고 했어. 지금 식당에 가서
어쩌자는 거야?
몽블랑 터널까지는 아직 한 시간 이상 더 가야해요. 더구나
한 시간 연착한다고 했어요. 걱정하지 말고 나가요. 식당에
나가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황가 그놈과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은 무서워서 식당 같은데
나오지 않을 거에요.
밀라노에서도 식당에 갔지 않아?
그때는 경호원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박동주씨를 빼고
경호원들이 모두 빠졌잖아요. 두고 보세요. 취리히에 도착 할
때까지 방속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을 거에요.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정 그러시다면 당신은 여기에 계세요. 저 혼자 나가서
식사하고 오겠어요. 황가는 당신 얼굴을 알고 있겠지만 제
얼굴은 모르고 있으니까 안심해도 될 거에요. 설마 식사의
자유까지 뺏지는 않으시겠지요?
안 돼! 혼자 나가면 안 돼!
그러나 그녀는 거침없이 일어서고 있었다.
식당에 가서 상황을 살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열차에서 그 사람을 처리하려면 이렇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열차 내의 분위기도 익혀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기에 갇혀 있으려니까 미쳐버릴 것 같아요. 제발
저를 막지 마세요.
기다려, 망할 !
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무화를 쏘아보고 나서 얼굴을 고치기
시작했다. 먼저 머리에 가발을 썼는데 유난히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가발이었다. 가르마를 타고 빗질을 하자 아주 단정한
모습이 되었다. 거기다 푸른 빛이 도는 검은 테의 안경을 끼자
검정 옷차림과 함께 중후한 신사의 모습이 되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를 흘기면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식당에 그 자식이 나타나서 만일 나를 알아보면 그 자리에서
해치워버릴 거야.
사람들이 많은 데서 말이에요?
상관 없어. 여기서 그 자식을 놓치면 영영 잡을 수 없어.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 사람을 해치면 당신은 체포될
텐데요.
난 체포되지 않아. 지금까지 난 체포된 적이 없어.
대단하세요.
그녀는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조용하던 복도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식당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겠어요.
무화가 걸음을 빨리 하자 사내도 처지지 않으려고 그녀 뒤를
바싹 따라갔다.
식당은 객차 두칸을 개조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주 넓었다.
그런데도 어느 새 많은 사람들로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다행히 전망이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사내는 앉아있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들을
살피느라고 메뉴판을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받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는 무턱대고 제일 비싼 것 두
개를 시켰다.
식사전에 먼저 백포도주 두 잔이 나왔다. 무화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식당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식사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해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무화는 깜짝 놀라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늘이 침침해
지더니 어느 새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굵은
눈송이들이 미친 듯 차창에 날아와 부딪치고 있었다. 호수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이던 것들은 눈보라 속에 가려 더이상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열차가 깍아지른 절벽 사이를 달릴때는
우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양쪽 절벽 위에서 거대한 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눈사태 속으로 열차가 뚫고 들어가자 차창은
온통 눈으로 막히는 듯 했고 그 바람에 승객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열차가 거침없이 절벽 사이를 벗어나자 비명은 환호성으로
바뀌었고 그 변화무쌍한 알프스의 기후와 경관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정말 멋져요. 평화롭던 알프스가 노하니까 또 다른 멋이
있어요.
무화가 그렇게 말했지만 Y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알프스의 경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사람들을 살피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았다.
열차는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사이사이로 하이웨이 위를 달려가고 있는 차들이
보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웨이터가 식사를 가져왔다. 양고기였다. 무화는 그것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지만 사내는 모래를 씹는 것 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고기를 씹었다.
칼날 같은 산봉우리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아래로
완만하게 펼쳐진 드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몇 채의 통나무
집들이 웅크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목초지대인 것
같았다. 대지도 통나무 집들도 온통 눈에 덮여 있었고, 그 위를
눈보라가 휩쓸고 있었다. 통나무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이젠 됐어. 더 못먹겠어.
사내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무화는 와인을 조금 마시고 나서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런 그녀를 그가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몹시 불안해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몽블랑 터널이야.
아직 30분이나 남았어요.
왜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하는 거지? 지금 죽치고 앉아
식사할때야? 알프스 경치가 어쩌고 하는 말이나 지껄이고 있을
때냐 말이야?
감상은 자유에요. 저는 제 시간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빌어먹을!
그는 포크를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인하는 어디에 있어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꾸는 바람에 그는 멈칫 했다.
황가를 처리하고 나서 알려주겠다고 했잖아!
지금 알고 싶어요. 알려줘요.
그는 탁자 밑으로 발을 뻗어 구두 끝으로 그녀의 발등을
눌렀다.
추동림과 무슨 약속을 했지?
무화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러지 말아요.
그녀는 발을 뽑으면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해 봐! 추동림과 무슨 약속을 했어?
아이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찾아주는 대신 뭔가 댓가가 있을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그렇게 기를 쓰고 그애를 찾을리가 없어. 넌 나와 만났을때
부터 그애에 대해서 물었어.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애에
대해 물어왔어.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속일 것도 없어요.
그럼 뭐야?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 아이에 대해 말해 주겠어.
무화의 두눈이 커졌다.
인하가 있는 곳을 말해주는 거죠?
그래. 가르쳐주겠어.
좋아요.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난 이 식당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 생각이 달라지면 당신을 배신 할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황가 쪽에 붙을 수도 있다는 말이예요.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망할 년! 하고 중얼거렸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식식거리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을 지키지. 아이를 구해주는 댓가로 추동림에게
무엇을 받아내기로 했어?
그가 3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게 자기의
전재산이라고 하면서 눈물로 호소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30만 달러라고?
그의 두 눈이 휘번득거렸다.
그래요. 당신한테는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큰
돈이에요. 저는 이 세계에서 오래 일했지만 지금까지 제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겨우 푼돈 정도였어요. 그래서 이기회에 한 몫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잘못됐나요?
사내는 입가에 냉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바로 너를 두고 한 말이구나.
30만달러를 어떻게 받기로 했지? 그는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했잖아?
그의 부인과 연락하기로 했어요. 아이의 사진과 목소리를
녹음 한것을 보내주면 즉시 30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 구좌에
넣어주기로 약속했어요.
어떻게 그 아이의 사진을 찍고 목소리를 녹음하지?
당신이 그 아이의 소재를 가르쳐주면 제가 직접 그 아이를
찾으러 갈 거예요.
한국으로 말이야?
네, 어디라도 갈 거예요. 30만달러가 들어오는데 그 정도의
고생이야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놀랍군. 넌 보통이 아니야.
사내는 감탄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 쪽으로
쏠렸다. 그는 얼른 웃음을 멈추고 와인을 들이켰다.
왜 웃는 거예요?
그 애를 찾아주겠다고? 흐흐흐흐.......
무화는 똑바로 그를 주시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애를 찾을 수는 없어. 아, 찾으려면 찾을 수야 있겠지.
그애의 시체가 필요하다면 말이야.
그녀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졌다. 포크는 접시에 부딪치면서
쨍그렁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얼굴 위로 경련이 스쳐갔다. 그녀는 사내를 쏘아보다가
그 아이가 죽었단 말인가요? 하고 물었다.
사내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시체가 필요하다면 있는 곳을 알려주지. 하지만 시체는 아무
가치가 없을 걸.
무화는 자기도 모르게 바르르 떨었다.
아까는 그 아이가 살아있다고 하잖았어요.
그건 거짓말이야. 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한 말이야. 그
아이는 이미 죽었어.
그는 그녀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이를 죽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그녀는 더이상 음식에
손대지 않았다. 알프스의 설경도 더이상 그녀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아이 하나 죽은 걸 가지고 뭘 그래.
무화는 빈정거리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30만 달러를 잃게돼서 억울해서 그러나? 그게 그렇게
억울하나?
네, 억울해요.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 황가놈에게 돈을 회수하면 30만
달러를 너한테 주지. 그놈이 횡령한 돈이 자그마치 500만
달러야. 거기에 비하면 30만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그동안
그놈이 아무리 썼다고 해도 50만도 못 썼을 거야.
정말 30만을 주실 거예요? 그건 조직의 돈인데 함부로 쓸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사내는 음흉하게 웃었다.
황가의 입을 막아놓으면 돈은 우리 거야. 그 돈을 우리가
차지 했는지 조직에서 알게 뭐야. 우리 둘이서 그걸 나누어
가지는 거야.
결국 그 돈을 찾으면 제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겠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그렇게 바보인줄 아세요? 당신은 황가를 제거하고나서
다음에 저를 없애겠지요. 여행가자고 하면서 어디 조용한데
데리고 가서 감쪽같이 해치우겠지요. 그래야 제 입을 막을 수가
있고 혼자서 돈을 독차지할 수가 있을테니까요.
그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번의 웃음소리는 억지로 지어낸 것이기
때문에 어쩐지 공허하게 들렸다.
넌 역시 영리한 계집이야. 아주 영리한 여자란 말이야.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정도는 알아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것 아니겠어요?
그렇긴 해. 하지만 네 생각은 잘못된 거야. 그건 오버
센스야. 난 생각지도 못한 걸 넌 생각 해낸거야. 나는 돈을 찾게
되면 너와 함께 행복한 세계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어. 신혼 여행
기분을 내면서 말이야. 섹스와 술과 여행...... 삼위일체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너를 제거하다니 천만의
말씀이야.
흥, 그럴 듯 하군요.
무화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사내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로 부상해 있었다. 그것은 상황이 그렇기도
했지만 그녀의 노력 때문이기도 했다.
난 거짓말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어요?
믿어줘. 믿어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 나도 이번에 한 건 하면
이 바닥에서 손을 뗄 생각이야. 유명한 휴양지에서 멋진
별장이나 하나 사놓고 거기서 주저앉아 살고 싶어.
가족은 어떻게 하고요.
난 가족이 없어. 난 혼자야. 그래서 너를 동반자로 택한
거야. 나하고 살다가 싫으면 언제라도 떠나라구. 보내줄테니까.
접시 속의 양고기는 이미 식어 있었다.
무화는 포크를 집어들고 고기 한 조각을 찍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은 확실하나요?
그래. 확실해.
어떻게 죽었나요?
그런 건 알 필요없잖아.
말해 줘요. 어떻게 죽었나요?
무화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제기랄,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지?
그는 부릅뜬 눈으로 무화의 두눈을 들여다 보았다. 무화도
물러나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런 걸 꼭 말해야 되나?
네, 알고 싶어요.
어떡 하겠다는 게 아니예요. 그냥 알고 싶어요. 말해
주세요.
그때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섰다.
그들은 대화를 중단하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박동주였다.
조금 있으면 몽블랑 터널입니다. 빨리 준비 하십시요.
Y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식사대를 치르는 것도 잊은채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무화는 계산을 치르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일단 15호실로 들어가 대책을 숙의했다.
박동주는 진지했다. 그가 너무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무화는 그의 진의에 의심이 갈 정도였다.
터널을 벗어나는데 10분 정도 걸립니다. 열차가 터널에
진입하자마자 방안으로 들어오십시요. 문을 잠궈놓지 않을테니까
안심하고 들어오십시요.
그 놈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취해서 잠들었습니다.
차창 밖은 심한 눈보라로 시야가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열차의 속도는 뚝 떨어져 있었다.
이러다가는 알프스 속에 갇히는 게 아닐까?
Y가 허리띠를 죄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겨울철 알프스는 항상 이렇습니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동주가 밖으로 나가자 사내는 다리에서 단도를 빼냈다.
그것을 무화의 뺨에다 갖다대면서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고 말했다.
따라가면 안 되나요?
안 돼! 볼만한 게 못 돼.
사내는 얇은 고무장갑을 끼고 나서 벗어놓은 코트를 팔에
걸쳤다. 고무장갑을 낀 두 손과 칼은 코트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터널이에요!
무화가 소리치면서 창밖을 가리켰다. 열차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커브를 긋고 있었다. 왼쪽 차창을 통해 저만치 눈보라
시이로 시커먼 구멍이 보였다. 사내가 그것을 본 순간 열차는
이내 어둠 속에 휩쌓였다. 어둠과 진동 소리가 잠시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방안에는 어느 새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너무 침침했다. 그 침침한 불빛에 눈이 익을때
까지 서있다가 사내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는 먼저 복도를 살펴보았다. 복도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방안보다는 어두운 것 같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터널
속을 돌파하는 진동 소리가 몹시도 시끄러웠지만 그는 복도에서
괴괴한 적막감을 느꼈다.
기다리고 있어.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무화에게 한 마디 던진
다음 그는 복도로 나왔다. 9호실은 오른쪽이었다. 터널속에서
열차의 진동이 유난히 심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걸어갔다.
마침내 9호실 앞에 이르렀다. 그때 한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몹시 뚱뚱한 백인이었다. 그는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복도가 좁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몽뚱이가 서로
맞닿았다. 뚱보가 Y를 밀어붙이면서 통과했다. Y는 화가났지만
그대로 9호실 앞을 지나쳐갔다. 복도의 끝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그 뚱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다시 9호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하마터면 9호실 문을 두드릴뻔 했다. 습관에 젖어 실수를
저지를 뻔한 것을 알고 그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가 마침내 문
손잡이를 움켜잡고 가만히 밀어보았다. 문은 아무 저항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창쪽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맞은편 소파 위에 두 발을 올려놓은 채 상체를 잔뜩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의 몸 위에는 코트가 덮여 있었고, 얼굴 위에는
중절모가 놓여 있었다. 박동주가 벌떡 일어나면서 그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들고 있던 코트를 소파 위로
던졌다. 고무장갑을 낀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생긴 단도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문고리가 찰칵하고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박동주가 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했다. Y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누워 있는 사내쪽으로
다가가 그를 내려다 보았다.
황표! 일어나!
그의 얼굴에 살기가 돋아나 있었다. 움켜쥐고 있는 칼끝이
똑바로 중절모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누워있는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 새끼, 일어나라니까!
Y는 칼끝으로 중절모를 밀어냈다. 중절모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과 함께 노쇠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잠든
얼굴이 아니었다. 까만 두 눈이 그를 뚫어지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춤하고 Y는 뒤로 물러섰다.
황표가 아니야!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고함쳤다.
노쇠한 얼굴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래, 난 황표가 아니야.
넌...... 넌 추동림 아니야?
그래. 난 추동림이다.
상체를 일으킨 추동림은 똑바로 Y를 쏘아보았다.
미스터 Y, 드디어 우리는 만나게 된 거야.
추동림은 조용히 말했다.
뭐라고?
Y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동림의 두 눈에는 조금치도 동요의 빛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꼼짝 마!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Y는 후딱 뒤를 돌아다
보았다. 박동주가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권총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빈틈이 없어 보였다.
칼을 버려라!
목소리까지도 다르게 들려왔다.
Y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린 너는 누구지?
Y는 칼을 버리면서 물었다. 박동주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추동림에게 수갑을 던졌다.
이자의 손목에 수갑을 좀 채워 주시겠습니까?
추동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갑을 들고 일어나 Y의 손목에
채웠다. 당혹과 불안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넌 누구지?
Y가 다시 물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박동주가 문을
열어주자 무화가 황표와 함께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Y는 황표와 무화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표, 네놈은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황표는 가까이 얼굴을 갖다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을 것
같았다. 황표는 상대방의 얼굴에다 침을 탁하고 뱉았다.
악마! 여기까지 와서 체포되다니 안 됐구나!
네놈이 온전할 줄 아냐?
Y는 소매자락에다 침을 닦으면서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네가 나를 없애려고 왔는데, 그럼 내가 멍청히 앉아서 널
기다릴 줄 알았냐. 바보같은 자식!
네놈보다도 이 아가씨의 공이 커. 난 이 아가씨한테 완전히
속아넘어간 거야.
Y는 자기가 속아넘어간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않는다는 듯
무화를 쳐다보았다.
넌 나를 멋지게 속여넘겼어. 넌 블랙로즈가 아니지?
이제야 정신이 드나보군요. 블랙로즈는 죽었어요.
무화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 말에 사내는 도대체 뭐가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표가 그의 머리에서 가발을 홱 벗겨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떠다밀자 그는 의자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열차의
진동 소리와 함께 어둠이 사라졌다. 그리고 창밖으로 다시
설경이 보였다. 터널을 벗어난 열차는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Y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블랙로즈가 아니라면 너는 도대체 누구지? 그리고 당신은?
Y는 턱으로 박동주를 가리키며 안간힘을 다해 물었다. 그는 단
번에 무너지기 보다는 버틸 수 있을때까지 버텨보겠다는
태도였다.
난 경찰이야. 서울에서 온 한국 경찰이야.
박동주는 신분증을 꺼내 Y의 코앞에다 갖다댔다. Y는 그것을
들여다 보고 나서 놀란 눈으로 마형사를 올려다 보았다.
마형사는 신분증을 호주머니 속에 도로 집어넣으며 추동림을
바라보았다.
추동림씨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지? 이분의 외아들은 지금
어디 있지?
모두가 Y의 입을 주목했다. 추동림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무화가 침묵을 깼다.
인하는 죽었대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동림을 쳐다보았다. 동림은 몸을
일으킬 듯하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용돌이 치는 눈보라 사이로 성당의 첨탑이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어떻게 죽었는지 그 말은 듣지 못했어요. 하고 무화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동림은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다시 Y를 바라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조용한 시선이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Y는
공포로 얼굴이 굳어졌다.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어! 아직 살아 있어!
그는 원망어린 눈으로 무화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무화도
지지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분명히 죽었다고 말했어요! 내가 다시 물었을때도
틀림없이 죽었다고 말했어요!
그건 거짓말이었어. 아이는 죽지 않았어.
이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망할 년! 네 년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는 건데.......
인하는 정말 살아있나?
마형사가 권총 끝으로 상대방의 이마를 밀어붙였다. 사내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네, 정말 사, 살아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국제전화를 걸어보면 금방 알 수 있어.
인하가 살아 있다면...... 어디서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지?
제 부하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놈 이름하고 연락처를 대봐.
이름은...... 잘 모르고 낙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락처는?
부산에 살고 있는데 주소는 모릅니다.
전화번호는 있을 거 아니야?
주거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전화 연락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연락하지?
부산 G동에 있는 유토피아 호텔 나이트클럽에 자주나가고
있기 때문에 거기로 연락하면 됩니다.
그 나이트클럽의 전화번호는 몇번이지?
623의 776×번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동림이 입을 열었다.
모두 좀 밖으로 나가주시겠습니까?
거기에는 아무도 거스릴 수 없는 위엄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무화와 마형사, 그리고 황표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한 사람씩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스터 Y는 추동림이 문을 걸어잠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동림이 문을 잠그고 나서 돌아섰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표정에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해주는 결연한 의지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Y는 두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는 반면 추동림은 나약해 보였다. Y는 수갑만
채워져 있지 않다면 한 주먹에 추동림의 골통을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림이 가방 속에서 무언가 꺼냈다. 가는 밧줄 꾸러미였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한 마디씩만 하겠다. 다리를 위자에
올리고 누워라.
조용한 말소리인데도 가슴을 싸늘케하는 냉랭함이 느껴졌다.
Y는 긴 의자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으면서 몸을 눕혔다. 동림이
밧줄로 그의 두 발목을 묶으려고 했다. 기회를 놓칠세라 Y는
구둣발로 동림의 얼굴을 힘껏 내질렀다. 그러나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동림이 먼저 재빨리 얼굴을 피했다. 구둣발은 그의
뺨을 약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공격에 실패한 Y는 두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쥐고 그것으로 동림의 머리통을 내려치면서 온몸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동림의 움직임이 그보다 빨랐다. 그는 번개처럼 의자
위로 뛰어오르면서 오른손을 칼날같이 세워 그것으로 상대방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Y는 이마를 문에 세게 부딪치면서 무릎을
꺽었다. 숨돌릴 사이없이 격렬한 고통이 그의 몸뚱이에
가해져왔다. 그렇게 빠르면서도 뼈가 부서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나약해 보이는
사나이의 주먹이 옆구리를 올려치자 거구의 사나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숨통이 터진 그는 자신이 상대방을 너무
얕잡아 봤음을 깨닫고 저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과 고통, 그리고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동림은 권총끝으로 사내의 이마를 찔렀다.
시간이 없다. 의자에 가서 누워라.
Y는 비틀비틀 일어나 의자 위에 가서 다리를 뻗고 누웠다.
동림이 밧줄로 그의 발목을 묶을때도 그는 가만히 누워있었다.
두 발목을 재빠른 솜씨로 단단히 묶은 동림은 그 줄을
수갑에다 걸어 또 묶었다. 그러고나서 줄 끝은 머리 위에 있는
철제 선반에 걸어 바싹 잡아당긴 다음 그것을 다시 수갑에다
붙들어 맸다. 이제 뱅커는 앉은 상태에서 수갑찬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있지않으면 단 되게 되었다. 그는 공포로
얼어붙은 눈으로 추동림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동림의 손에는
끝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생긴 칼이 들려 있었다. Y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평온한 눈빛에서
Y는 오히려 더 큰 공포를 느끼고 전율했다.
내 아들은 살았나, 죽었나?
날카로운 칼 끝이 눈을 스치듯이 하면서 눈 앞에서 흔들렸다.
동림은 한 손을 뻗어 창문에 커튼을 쳤다.
살아 있습니다. 잘 보호하고 있으라고 단단히 부탁하고
왔습니다.
Y는 걷잡을 수 없이 떨고 있었다.
넌 내 아내를 강간했고, 그래서 내 아내는 유산을 했어.
뱃속의 아기를 네가 죽인 셈이야.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내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우리 집안은
풍지박산되고 말았어. 더구나 네놈은 내 아들까지 납치해갔어.
차가운 바닷물 속에 내 아들을 처넣기까지 했지. 나는 지금 내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인하는 살아 있습니다. 내 부하가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낙지라는 별명을 가진 놈이 보호하고 있단 말이지?
네네, 그렇습니다. 부산으로 전화를 걸어 당장 아들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취리히에 도착하는 대로 전화를 걸겠습니다.
부산 연락처가 유토피아 호텔 나이트클럽이라고 했지?
거기 전화번호를 다시 한 번 말해봐.
742의 472×번입니다.
멋대로 주워 섬기는군. 아까 말한 전화번호하고 달라.
국번부터 틀려.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그럼 아까 그 번호를 말해 봐. 지금 말한 그 번호도 다시
한번 말해 봐.
그러나 Y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두개의 전화번호를 똑같이
대지 못했다. 동림이 가방 속에서 폭이 크고 접착력이 강한
테이프를 꺼내 그것을 잘라낸 다음 그것으로 Y의 입을 봉했다.
Y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동림이 왼손으로 사내의 왼쪽 귀를 쥐었다. 사내는
귓가에 귀를 가르는 섬뜩한 감촉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눈 앞에 흔들리는 자신의 귀를 보고는 비로소
울부짖었다.
바른대로 말해. 거짓말하면 나머지도 잘라버린다!
동림은 잘라낸 귀를 칼에다 꽂고 흔들었다. 귀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귀가 잘려나간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내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Y가 입을 열수 있게 그의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입이 자유롭다고 해서 소리지르지 마라. 소리지르면 목을
잘라버릴 테다!
Y는 동림이 자기가 말한대로 틀림없이 지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대 소리지르지 않겠습니다.
내 아들은 죽었나? 살았나?
사, 살아있습니다.
그는 부들부들 떠느라고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어디에 있어?
그, 그건 내 부하가 데려갔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에 다시 테이프가 붙여졌다.
그는 나머지 귀를 잘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동림은 사정없이 그의 나머지 귀를
잘라버렸다. 귀가 없어진 사내의 모습은 이상해 보였다.
동림은 그의 입에서 다시 테이프를 떼어냈다.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십시요!
Y는 피투성이 얼굴을 흔들면서 애걸했다.
사실대로만 말해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난 내 아들의
시체라도 찾고 싶어서 그래. 내 아들은 죽었지?
Y는 끄덕이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마. 울고 싶은 건 나야. 어떻게 그 어린 것을 죽였지?
사내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동림은 권총을 집어들고 총구를
그의 입속에 틀어박았다. 그리고 칼끝으로는 왼쪽 눈을 찔렀다.
날카로운 칼끝이 동공을 후비며 들어가자 사내는 미친듯
발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총구에 틀어박힌 입에서는
괴상한 신음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동림은 그의 입에서 총구를 빼냈다.
바른대로 빨리 말하지 않으면 다른 쪽 눈도 후벼버릴테다!
칼에 찔린 왼쪽 눈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Y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동림을 쳐다본다. 동림의
모습이 흐릿하게 흔들려보였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내 아들을 어떻게 죽였지?
제 부하가 차 뒤 트렁크에 싣고 다니다가 모르고.......
빨리! 시간이 없다!
그대로 두는 바람에...... 죽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해 봐!
동림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트렁크 속에 싣고 다니다가 며칠 후에 열어봤더니...... 죽어
있었습니다.
굶어죽었나?
동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쉴새없이 깜박거리며 무섭게 떨어대고 있었다.
얼어죽었나?
사내는 침묵으로 물음에 대답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동림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내를
쳐다보았다.
내 아들의 시체는 어디다 버렸나?
그건 낙지가 처리했기 때문에 저는 잘 모릅니다. 아이를 죽인
것도 그, 그놈입니다.
어디를 가야 그놈을 만날 수 있지?
서울 이태원에 가면 X클럽이라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클럽인데...... 거기에 가면 낙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클럽?
네, 낙지는 저녁이면 거기서 살다시피 합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 팔리지 않는 화가는 죽은 김명기의
여권을 나한테 주었어. 그 여권에다 내 사진을 붙여서 주었어.
나는 어떻게 해서 내 아내의 차에 치여죽은 사람의 여권이 네
손에 들어갔을까 하고 생각했지. 줄곧 생각한 끝에 결국 모든
비밀을 알게 됐지. 김명기는 내 아내의 차에 치이기 전에 이미
네놈의 손에 먼저 죽었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내 아내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던 거야.
사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동림의 말을 부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지켜야
했다.
모든 것은 네가 꾸민 각본이었어. 그 각본에 나와 내 아내는
순진하게 놀아났던 거야. 자,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시간이
됐어. 죄다 털어놔!
날카로운 칼 끝이 사내의 오른쪽 눈을 겨누자 사내는 그것을
피하며 숨가쁘게 말했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명기는 우리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운반책이었는데 그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습니다. 그는 조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배신하고 경찰에 붙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밤
해운대 솔밭에서 그를 해치우려고 했던 겁니다.
지난 12월 26일. 시간은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는
준비한 쇠파이프로 술에 취한 김명기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해운대 솔밭은 캄캄한 어둠 속에 쌓여
있었고, 비명 소리마저 그 어둠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듯했다.
단 한 번에 김명기는 땅바닥에 꼬꾸라져 움직이지 않았다.
뱅커는 다시 한 번 그의 머리를 쇠파이프로 후려쳤다. 그렇게
해서 그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김명기가 떨어뜨린 슈트케이스를
집어들었다. 이윽고 솔밭을 벗어나려던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확인 살해를 하기 위해 단도를 뽑아들고 쓰러져
있는 김명기한테 다가갔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김명기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내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차도로 뛰어나갔고, 그때 마침 그
주황색 G카가 달려들어 그를 치었던 것입니다.
그는 떨면서 동림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격심한 통증도 잊은 듯 했다. 칼끝이 다시
그의 눈을 건드렸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 그래서?
G카가 사라진 뒤 나는 사고현장으로 가보았습니다. 나는
G카의 번호를 이미 외워두고 있었습니다. 맥을 짚어보았더니
김명기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녹색 머플러가
떨어져 있기에 그것을 집어들고 투숙하고 있던 P호텔로
갔습니다. 호텔 방에 들어가 김명기의 슈트케이스를
열어보았더니 거기에 그의 여권이 들어있었습니다. 남의 여권은
그것을 위조해서 쓰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보관해 두었던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림은 그의 입 속에 다시 총구를
밀어넣었다. 어거지로 밀어넣는 바람에 이빨이 부러져 나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목구멍 깊숙이 그것을 밀어넣은 다음
상대방의 나머지 눈을 칼로 후볐다.
아악!
Y는 미친 듯 몸부림치면서 달말마의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목구멍 속으로 도로 밀려들어갔을 뿐이었다.
열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고 있었다.
당장 죽이는 것 보다는 이 상태로 놔 두는 게 좋겠지. 네놈은
죽는 날 까지 고통을 맛보다가 가장 비참하게 최후를 맞을 거다.
네 자신을 저주하면서.......
동림은 뒤로 물러났다. 칼도 권총도 거기에 버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밖에는 무화와 마형사, 그리고 황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마형사가 물었다. 열차의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동림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밀어젖히고 복도를 걸어갔다. 세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간 마형사는 숨을 죽이며 중얼거렸다.
들어오지 말아요!
그는 무화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 눈...... 내 눈...... 아이구...... 아이구.......
사내는 신음하면서 눈을 찾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두 눈을
후벼낸 자리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페인트를 칠해 놓은 것 같았다.
무화는 귀도 잘려나가고 눈도 없어진 사내의 참혹한 모습을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떨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지칠대로 지친 사내는 수갑찬 두 손이 머리 위로 들린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입에서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밖에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그러나 세 사람은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요! 잡히면 골치 아프니까.
마형사의 말에 무화와 황가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마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열차는 막 역을 들어서고 있었다.
플랫폼에 서있는 이정표에 Goschenen 이라는 역 이름이
보였다.
복도의 저쪽 끝에서 무화와 황가가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마형사는 급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람 어디 갔어요?
저기 가고 있어요!
무화가 역사 쪽을 가리켰다.
동림이 플랫폼을 벗어나 역사 안으로 막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모두 내려요! 열차 안에 남아 있어서 좋은 건 하나도
없으니까.
두 사람은 마형사를 따라 열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맨
마지막에 열차에서 내린 셈이었다. 마형사는 역사 안으로
들어서면서 뒤돌아 보았지만 열차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정차
시간이 다른 역에서보다 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려주는 아나운스먼트는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형사는 수사관으로서 그 이유를 이내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이 역사를 막 빠져나왔을 때 스위스 경찰 페트롤카 두 대가
사이렌을 요란스럽게 울리며 역 광장으로 들어섰다. 마형사는
재빨리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광장 한쪽으로 무화와 황가를
데리고 갔다.
두 대의 페트롤카에서 몇 사람이 뛰어내렸는데 두 명은
제복차림이었고 나머지는 사복들이었다. 제복 차림의 두 명은
제각기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들이 역사 안으로
사라지고 난 조금 후에 열차는 출발했다.
먼저 역사를 빠져나갔던 추동림은 광장 한켠에 놓여 있는 흰
벤치에 눈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그쪽으로 몰려갔다.
당신은 약속을 어겼어요. Y한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럴 수가 있어요?
마형사가 성이 나서 동림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동림은 몹시
떨어대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또는 공포에 사로잡혀 그렇게
떨어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화는 알 수 있었다.
약속대로 나는 그 놈을 죽이지 않았소.
하고 동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죽인 거나 마찬가지요. 귀도 눈도 없어졌는데 어떻게
살겠소. 뱅커는 죽어가고 있어요.
내 아들도 죽었소.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허탈한 표정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화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형사의
얼굴에서 노기가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 끝에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동림이 끄덕였다.
놈이 자백했어요. 내 아들은 얼어서...... 굶어서 죽었어요.
차 트렁크 속에 갇혀서...... 죽었어요.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섭고 추웠겠어요. 아이를 굶겨
죽이다니...... 그럴 수가 없어요...... 난 가야해요......
돌아가서 내 아들 시체라도 찾아야 해요...... 그 애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지 않으면 안 돼요...... 그때까지 나를 놔둬요.
나를 붙잡지 말아요.......
눈이 그의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긴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체포한 권한이
없어요.
마형사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빨리 가서 아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시오. 그 다음 일은
한국에 가서 처리합시다.
고맙습니다.
동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화와 황가를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형사가 재촉했다.
빨리 가봐요. 취리히에 가면 서울행 비행기가 있어요. 스위스
경찰을 조심해요. 이미 여기에도 비상망이 쳐진 것 같으니까.
아까 그 경찰들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겁니까?
하고 황가가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보는 게 정확 할 거요. Y는 이미 스위스 경찰에
발견됐을 거요.
그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할지.
동림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무화의 두 손을 잡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던 무화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고마왔어요. 무화씨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거요.
그는 중얼거리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택시가 있는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무화는 울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형사도 황가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함께 가시지 않을 건가요?
무화가 눈물을 거두고 마형사에게 물었다.
나도 취리히에 갈 거요. 하지만 그와 함께 갈 수는 없어요.
그는 어디까지나 살인범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행동할 수는
없어요.
수사관이 살인범과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이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택시 앞에 다다른 동림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늙은 기사를
쳐다보았다.
취리히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운전사는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 옆에 서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온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주시오.
동림은 세 한국인이 서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왜 돌아오는 겁니까? 우리는 더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아요.
마형사가 사나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아내는 김명기씨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명기씨를 죽인 건 Y 그놈이었습니다.
동림은 Y한테 받아낸 자백을 마형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마형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모든 게 그놈의 짓이었습니다.
아직 증거는 없지만 당신 말을 믿겠소.
놈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놈을 만나서 직접 들어보십시오.
내 아내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 어처구니 없는
시작으로 해서 사건은 지금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되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지난 일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참담한 패배감을 맛보고
있었다.
동림은 더욱 밝아진 가로등 불빛 속으로 걸어갔다.
그가 탄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서있던 무화가 그쪽으로 뛰어갔다.
선생님! 함께 가요!
동림은 무화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눈밭에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냥 갑시다.
동림의 말에 운전사는 차의 속도를 빨리 했다.
선생님!
무화의 외치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동림은 머리를 흔들면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차를 향해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가물가물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좀 세워주십시오! 미안합니다.
택시가 멈춰서기도 전에 동림은 차 문을 열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그녀가 뛰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의 품으로 뛰어드는 그녀를 껴안았다.
함께 가요! 함께 가고 싶어요!
그녀가 헐떡이며 말했다. 동림은 끄덕이고 나서 그녀를 먼저
차에 태웠다.
차가 출발하자 무화는 그의 팔짱을 꼭 끼면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대로는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동림은 힘주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형사와 황가는 두 사람이 탄 택시가 소용돌이치는 눈보라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무화가 뛰어가 그 택시에 탄 것은 하나의 극적인 장면이었다.
그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는 어떡 하죠?
갈길을 잃은 아이처럼 황가가 물었다. 마형사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고 나서 자기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한국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죽겠습니다.
황가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살아야지요. 당신이 한국에 돌아온다면
적극 환영하겠소.
만일 돌아가게 되면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게될까요?
마형사는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용돌이치는
눈송이들이 그의 앙상한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 문제는 일단 돌아가서 상의합시다. 당신이 자수한다면
마약관계 사범으로 처리되겠지만, 여기서 우리한테 협조해
준점이 고려된다면 상당히 정상참작이 될 겁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마형사는 꽁초를 던지고 나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떡 하겠소? 함께 가겠소?
먼저 가십시오. 좀 생각해 보고 나서.......
알았소.
마형사는 상대방의 손을 잡아 흔들고 나서 급히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황가는 가로등 밑에 우두커니 서서 마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멍하니 서있었다.
취리히까지 얼마나 걸리겠소?
택시가 출발하자 마형사는 중년의 운전사에게 영어로 물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잡아야 할 겁니다. 눈이 많이 오는데다
어두워졌기 때문에 속력을 낼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떠난 국제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취리히역에
도착할 수 있게 해주면 요금을 더 드리겠소.
오케이! 한 번 해봅시다.
택시는 스위스제 볼보였다. 강력한 엔지의 힘을 받자 네개의
바퀴는 쌓인 눈을 박차면서 하이웨이를 달려갔다.
마형사가 동림을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동림 쪽에서
먼저 도움을 청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서울의 수사본부와 수시로 국제전화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노경감은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 추동림이 노경감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서울의 수사본부로 국제전화를 걸어왔었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추동림이 자기가 현재 은신해 있는 곳의
전화번호까지 알려온 점이었다. 그는 밀라노에 있었다. 노경감은
반신반의하면서 밀라노의 소렌토 호텔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놀랍게도 추동림은 그곳에 있었다. 경감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것은 일종의 신사협정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마형사는 경감의 지시를 받고 살레와
눈치오 부장이 눈치채지 않게 몰래 비행기로 밀라노로 날아가
동림과 접선했던 것이다.
┌────────────────────────────┐
│ 6.아버지와 아들 │
└────────────────────────────┘

코브라는 어둠과 눈보라를 헤치며 험준한 알프스의 하늘을
날아갔다.
밀라노 경찰 소속의 헬리콥터 조종사는 기분나빠 죽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알프스의 기상은 변화무쌍하기로
유명하다. 일단 기상이 악화되면 알프스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될수록 그만두는 것이 좋다. 경험이 부족하고 겁없는 젊은
조종사들이 기상악화를 무릅쓰고 무모하게 알프스를 넘어가다가
추락하는 사고가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조종사들은 알프스의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알프스를 넘어 가는 것을 꺼려한다. 따라서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악천후에 알프스 하늘 위로 헬리콥터를 띄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주 바보 멍텅구리이든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런 날씨에 절대 알프스를
넘어가지 않는다. 더구나 날마저 어두워 시야가 엉망이다. 그는
지금 앞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경험을 쫓아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코브라는 월남전 때 위력을 발휘한 미군용 헬리콥터로
대형이기 때문에 30명 이상까지도 태울 수 있고 지프나 야포도
실을 수가 있다. 원래는 시누크 헬리콥터로 흔히들 불렀는데
밀라노 경찰은 알프스 국경 순찰용으로 그것을 몇대 구입하여
내부를 조금 고친 다음 거기에다 코브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형인데도 코브라는 바람에 종이조각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받을 때는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뒤로
물러나기까지 할 정도였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공중을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흡사 험한 바다 위를 배를 타고가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혹시 타고 있는 헬리콥터가 알프스 산 속에
추락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을 집어먹은 탓인지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종사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돼지 같은 사나이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국제 형사기구
로마지역 책임자라는 그 돼지 같은 사나이는 출발할 때부터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악천후에 헬리콥터를 출발시킨
것은 순전히 눈치오라는 이 돼지의 고집때문이었다.
고집세기로 말하면 그도 상당한 편이었다. 그러나 눈치오의
고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눈치오는 밀라노 경찰간부를
들볶고 위협했으며 악천후 운운 따위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무조건 빨리 헬리콥터를 띄워달라고 요구했고, 만일
사고가 발생하면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추락사고가 발생해 모두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너무 늦어! 좀 더 빨리 안 돼?!
눈치오가 눈을 부라리며 조종사에게 소리쳤다. 조종사는 대답
대신 그에게 무전수신용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눈치오는 그것을
귀에 걸었다.
스위스 경찰의 마르셀입니다.
잘 들리지 않는다.
크게 말해 봐요!
눈치오는 악을 썼다. 마르셀이 되풀이해서 말했다.
우린 지금 국제열차에 타고 있습니다.
계속하시오! 빌어먹을! 잘 안 들려!
저 아래로 눈보라 사이로 불빛들의 긴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차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두가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본인 한 명이 심한 상처를 입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마르셀이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자의 이름이 뭐요?
가네마루 쇼케이...... 수배자입니다!
열차의 긴 불빛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치오는
침을 삼켰다.
다른 자들은?! 이치조 하루미라는 여자는?!
지금 수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네마루를 살리시오!
응급처치를 해놨습니다.
이제 겨우 열차를 따라잡았소! 다음 역은 어디요?
10분 후에 아쓰골다우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만납시다! 열차를 봉쇄하고 내리는 사람은 신원조회를
철저히 하고 내보내십시오!
눈치오는 귀에서 이어폰을 떼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가네마루라는 자가 이미 당한 모양입니다. 열차에서 스위스
경찰이 무전연락을 해왔는데.......
사람들은 눈치오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알아들으려고
일제히 귀를 곤두세웠다. 그들은 엔진소리 때문에 가까스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노경감은 마형사를 생각했다. 그가
국제열차를 탔다면 스위스 경찰의 검문에 걸려들 것이다.
동양인들은 일단 모두 조사대상이 되고 한 곳에 억류당할지도
모른다. 그밖에는 아무도 그의 부하가 열차에 탄 것을 모르고
있다. 만일 눈치오와 살레가 마형사를 발견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생각을 하자 경감은 심히 곤혹스러웠다. 살레
부장한테는 이해를 구할 수 있겠지만 눈치오한테만은 그것은 안
통할 것 같았다.
열차의 불빛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코브라가 열차를 앞질렀다. 경감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15분이었다. 밀라노에서 헬리콥터가 뜰 수 없다는 바람에
언쟁이 벌어져 출발이 30분이나 지연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취리히에 가까이 와서야 열차를 뒤늦게 따라잡게된 것이다.
거기다 날씨가 나빠 속도마저 떨어졌고, 조종사는 일부러 멀리
우회하는 코스를 택한 것 같았다. 그런대로나마 열차가 취리히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게된 것은 스위스 철도당국이
이탈리아 경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열차 운행시간을 지연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추동림이 마침내 그자를 해치웠구나! 하고 경감은 생각했다.
그는 감동을 느끼면서 공범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아니야. 그러지 않았어. 그는 굳이 그것을
부인하려고 했다.
헬리콥터가 이렇게 늦게 열차를 따라잡게된데 대해 그는
속으로 은근히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보다 일찍 열차를
따라잡았다면 추동림은 그자를 해치우기도 전에 경찰에
체포되었을 것이다. 경찰에 체포되면 그는 이탈리아 감옥에서
형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저러나 마형사를 비롯한 그들은 아직
열차 속에 있을까. 아니면 열차에서 빠져나갔을까. 그는 그들이
열차에서 무사히 빠져나갔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그들 모두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헬리콥터는 아쓰골다우역 광장 위를 몇 번 돌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듯 밑으로 내려갔다. 바퀴가 쿵하고 땅에 닿는 순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뚱이가 짐짝처럼 동댕이처지는
것을 느꼈다.
자넨 운전솜씨가 형편없군. 예의를 지켜!
눈치오가 화를 내자 조종사는 냉담한 어조로 이렇게 대꾸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으로 아십시오.
눈치오는 조종사를 노려보다가 헬리콥터 밖으로 뛰어내렸다.
아직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역 주위에 연락을 받고
달려나온 스위스 경찰이 어느 새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5분 후에 열차가 도착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역장이 아쓰골다우 경찰서 간부에게 급히
다가와 보고했다. 지금까지 아쓰골다우역이 경찰관들에게 포위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역장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경찰간부는 자기도 무슨 일인지
자세히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이탈리아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온 사람들은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조하고 긴장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열차의 도착시간이 경감에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는 살레 부장과 눈치오 부장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납처럼 굳어 있었고,
얼굴에는 집요한 근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특히 눈치오
부장의 얼굴에는 살인범과 헤로인 2킬로그램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공명심으로 가득찬
그 얼굴을 더이상 볼 수가 없어 노경감은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어둠 저쪽에서 강렬한 불빛과 함께 열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그쪽을 쳐다보았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군요.
어느 새 살레 부장이 다가와 있었다. 경감은 그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모두가 부장님 덕분입니다.
별 말씀을.......
살레는 겸손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경감은 제발 저 열차 안에 마형사가 타고 있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다. 추동림도 저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 열차가
그의 그런 생각을 가로막았다. 열차의 앞부분이 그의 눈앞을
지나쳐갔다. 눈보라가 일었다.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호르라기 소리도 들려왔다. 고함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열차의 맨 뒤칸이 그의 눈앞에 멈춰섰다.
그는 앞쪽을 쳐다보았다. 어느 새 눈치오도 살레도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에요!
바넥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경감은 그녀 쪽으로
뛰어가 국제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9호실 앞은 사람들로 막혀 있었다. 살레가 노경감이 들어올 수
있게 사람들 사이로 길을 내주었다.
경감은 의자에 눕혀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사내는 심하게 떨어대고 있었다. 입에서는 가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귀와 두 눈이 없어졌습니다.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데다 충격으로 목숨을 건질지 의문입니다.
젊은 의사가 말했다. 그는 국제열차 내의 의료실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였다.
수술하면 눈은 되찾을 수가 있습니까?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동자를 후벼놨기 때문에 이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때 사내는 신음소리와 함께 꺼져가는 목소리로
내 눈...... 내 눈...... 빨리 병원에...... 병원에.......
하고 말했다.
빨리 입원시켜야 합니다.
의사가 수사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취리히까지 데리고 갑시다. 가는 동안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노경감이었다. 그가 살레 부장을 쳐다보자
살레는 눈치오 부장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합시다. 취리히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눈치오 부장은 의외로 순순이 동의했다. 그러자 의사가 완강히
반대했다. 지금 당장 입원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자는 흉악범이요. 명이 길면 취리히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있을 거요. 이왕 입원시키려면 취리히의 큰 병원에
입원시켜야지 소도시의 병원에 입원시켰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도 몰라요.
살레 부장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동양인들은 모두 한 곳에 집결시켰습니다.
카르딜레가 눈치오에게 보고했다.
여기서 내린 동양인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빨리 체크해야겠습니다. 승객들이 야단입니다.
눈치오는 열차 안에서 스위스 경찰을 지휘한 인물을
쳐다보았다.
그는 밤색의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캡을
눌러쓰고 있었다.
동양인은 빠짐없이 집합시켰습니까?
네, 빠짐없이.......
그는 무표정하게 두 눈을 꿈벅거렸다.
열차를 출발시켜야겠는데요.
열차 승무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캡에게 말했다.
출발시켜도 되겠지요?
동양인들을 모아놓은 방은 안전합니까? 혹시 열차가 출발한
후에 창문으로 뛰어 내리거나 하면 곤란하니까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창가에는 엄중한 감시를
붙여놨습니다. 아무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열차를 출발시키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눈치오는 노경감을 쳐다보았다.
함께 가봅시다. 이 사람은 차차 심문해도 될 테니까.
경감은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눈치오의 말 뜻은 네가
동양인들 가운데서 추동림을 집어내보라는 것이었다. 네가
그래도 그놈의 얼굴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게 아니냐. 너에게
마지막 순간의 기쁨을 주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복도를 걸어가는데 열차가 움직였다. 다음 다음역이
종착지인 취리히이다. 앞서 가던 카르딜레가 15호실 앞에서
멈춰섰다. 그 앞에는 스위스 경찰이 버티고 서있었다.
15호실 안에는 9명의 동양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창가에는
두 명의 스위스 경찰이 버티고 서있었다.
동양인들을 훑어본 경감은 아무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는 그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눈여겨 봤지만 그들
가운데 마형사도 추동림도 유무화의 얼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치오와 살레의 시선이 자기한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있습니까?
살레가 물었다. 경감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다구요?
그렇게 묻는 눈치오의 표정은 경악에 가까왔다.
없습니다.
경감은 무겁게 머리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눈치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살레는 놀란
눈으로 경감을 쳐다보기만 했다. 경감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신분증을 조사해!
눈치오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카르딜레에게
소리쳤다.
변장했을지도 몰라!
눈치오는 날카롭게 동양인들을 노려보았다. 동양인들은 겁먹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장소가 비좁았기 때문에 그들의
일부는 엉거주춤 서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중국인이 두 명
있었다. 중국인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그들의 패스포트를 검사한
뒤 그들을 먼저 내보냈다. 일본인 일곱 명을 세밀히 관찰했지만
그들중 변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스포트에 적혀 있는 이름들도 경찰이
찾고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10분쯤 지나자 방 안에는 4개국의 경찰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
살레는 허탈한 모습으로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고 눈치오는
분을 못이겨 식식대고 있었다.
가네마루만 당했어. 이자는 1월 19일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통해 로마에 들어온 한국인 이대휘란 자야. Mr. Y라고
부르던 자야.
눈치오는 두 개의 패스포트를 꺼내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9호실에 누워 있는 사내의 소지품 가운데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혼자말처럼 계속해서 말했다.
이자와 동행이던 유무화는 감쪽같이 사라졌어. 이치조
하루미라는 패스포트를 가지고 일본인 행세를 하겠지. 그 여자가
이자하고 이 열차를 탄 것이 분명히 확인됐는데 없어졌단
말이야. 어디로 갔을까? 도중에 내린 게 분명해!
그는 두 개의 패스포트로 탁자를 후려쳤다.
도망가 보라지. 끝까지 따라가 잡고 말 테야!
그는 벌떡 일어나 스위스측 사내를 노려보았다.
어느 역에서 탔습니까?
고쉬넨에서 탔습니다.
그는 죄나 지은 듯 머쓱해서 대답했다.
너무 늦었어요. 좀더 일찍 열차에 탔어야 하는 건데.......
눈치오는 더러운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고쉬넨에서 동양인들이 내리는 거 보지 못했습니까?
살레가 스위스 사내에게 물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역에 도착했을 때 열차는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고, 사람들도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그들은 9호실로 몰려갔다.
같은 한국인이니까 당신이 한국 말로 심문하시오. 우선
범인하고 이자와 함께 있던 여자가 어디서 내렸는지
물어보세요.
눈치오가 노경감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표정 속에는
말썽을 부리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멸시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의자 위에 누워 있는 사내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없어진 눈을 찾고 있었고, 물을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냉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경감은 의자에 앉아 그쪽으로 상체를
구부렸다.
난 한국 경찰이오.
한국 말소리에 사내는 멈칫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구라는거 난 다 알고 있어. 누가 당신한테 이런
짓을 했지?
추...... 추...... 동림...... 그놈이.......
사내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추동림은 어디서 내렸지?
사내는 머리를 흔들었다. 노경감은 상체를 더욱 앞으로
숙였다.
당신과 함께 있던 여자는 어디 갔지?
몰라...... 그년은...... 그놈하고 갔어...... 나를
속이고...... 나쁜 년이야...... 나쁜 년.......
그 여자 이름이 뭐지?
몰라...... 몰라.......
사내는 발작이라도 난 듯 갑자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축 늘어지면서 조용해졌다. 숨이 끊어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기절한 것이었다.
그때 열차 승무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고쉬넨에서 동양인 네 명이
내리는 걸 봤습니다. 남자 세 명하고 여자 한 명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이 방에 있던 사람들 같았습니다.
열차가 멈춰 섰다. Zug역이었다. 종착역은 다음이었다. 살레가
눈치오를 쳐다보았다. 눈치오도 살레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들의
머리 속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게 경감의 눈에 뚜렷이
보였다. 살레는 스위스 쪽 수사관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고쉬넨에서 내렸다면 자동차 편으로 취리히로 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지도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하이웨이를 가리켰다.
고쉬넨에서 취리히로 들어가는 길은 이길 뿐입니다. 이 길을
빨리 봉쇄해서 그들이 취리히에 들어가기 전에 검거했으면
합니다.
스위스 수사관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열차 승무원을
향해 물었다.
고쉬넨에 도착한 게 몇 시였죠?
6시 15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7시 40분이니까 1시간 하고도 25분이나
지났습니다. 그들이 빨리 움직였다면 이미 취리히에
도착했겠는데요.
지금 손을 써봐야 이미 늦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살레와 눈치오가 동시에 손을 흔들었다. 눈치오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눈때문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정도의 눈이라면 하이웨이는 지금 엉망일겁니다.
예정 시간보다 배 정도 늦어질 겁니다. 보십시오.
그는 차창 밖을 가리켰다. 차도 위를 차들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쯤에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연락해
두겠습니다.
스위스 수사관은 진입로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인 다음
급히 열차에서 내려 역사 쪽으로 뛰어갔다.
열차가 움직였다.
밀라노-취리히간 국제열차는 심한 눈보라와 험준한 알프스를
뚫고 넘어 마침내 종착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취리히 가까와지면서 눈보라는 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노인배 경감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악마를 내려보았다. 그는 그 사내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악마라고 보는 것 이외의 호칭을 생가할 수가
없었다.
악마가 기절했다 깨어났는지 다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비참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냉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거나 외면하고
있었다.
경감은 그에게서 마지막으로 진실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외국인 수사관들이 거기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는 외국인들의 질문에는 숫제 입을
다물어버렸다.
여기에 한국인은 나 한 사람뿐이야. 외국인들은 모두
무시해버려도 좋아. 이렇게 된 이상 같은 한국인으로서 당신은
나한테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좋을거야. 당신은 귀도 눈도
없어졌어. 지금은 아주 추운 겨울이야. 그대로 유럽땅에
버려지면 당신은 얼어죽고 말 거야. 그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되겠지.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같은 한국인인 나밖에
없어.
살려줘요.......
당신이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국에 데려가주겠어.
다 이야기했어요...... 추동림한테 다 이야기했어요.......
아이는 어떻게 됐지?
죽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졌다.
추동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
네.......
경감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눌러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와 함께 그는 추동림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단숨에 죽여버리는 것은 복수치고는 너무나
간단해서 허무감밖에 남는 게 없다.
헤로인은 어디 있지?
추동림이 그걸...... 운반했어요...... 조직의 손에 이미
넘어갔어요...... 그 다음은 모릅니다...... 알 수도
없어요...... 살려줘요...... 내 눈을 볼 수 있게 해줘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너는 눈을 가질 수 없어. 네가 보아야 하는 것은 암흑뿐이야.
죽을 때까지 말이야.
악마의 울부짖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악마는 몸부림치다가
다시 기절했다.
취리히 시가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가지는
눈에 덮여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눈보라가 아닌
포근한 모습이었다.
취리히역 플랫폼에는 스위스 경찰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관단총을 들고 서있는 그들 때문에 플랫폼은 살벌해 보였다.
공연히 헛수고를 하는군.
살레 부장이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알프스의 눈을 허옇게 뒤집어쓴 국제열차는 마침내 조용히
멈춰섰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경찰관들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그들 앞을 지나쳐갔다.
가죽코트 차림의 중년 사나이가 살레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취리히 지역 인터폴 책임자인 그는 눈치오와도 악수를
나눈 다음 살레의 소개를 받고 노경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기를 야콥이라고 소개했다.
연락을 받고 취리히로 들어오는 차도를 봉쇄했습니다만
아직까지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살레와 눈치오의 얼굴에 적이 실망하는 빛이 나타났다. 특히
눈치오는 실망하는 빛이 지나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경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들것에 실려나오는 악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형사와 추동림, 그리고 유무화가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플랫폼 주위에 포진해 있던 스위스 경찰관들이 철수지시를
받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합실 쪽에서 흩어지는 그들 사이로
아는 얼굴 하나가 얼핏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경감은 그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보았다.
여깁니다!
마형사가 스넥코너 안에서 손을 쳐들어 보였다. 경감은 그들의
계획이 그렇게 정확히 맞아떨어진데 대해 속으로 꽤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하군. 난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생각보다 마무리가 잘 됐습니다.
경감은 스탠드에 다가앉으며 심복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형사의 얼굴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어떻게 됐어?
모두 고쉬넨에서 내렸습니다. 추동림이 그자와 대면한 것은
그야말로 극적이었습니다.
추동림이 그자를 상대할 때 함께 있었나?
아닙니다.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그자의
귀와 눈이 없어졌더군요. 추동림은 그자한테서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마형사가 추동림의 어린 아들이 어떻게 죽었으며, 김명기의
죽음이 남화의 탓이 아니고 그 악마의 짓이었고, 모든 것이 그
악마가 쳐놓은 덫에 걸려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을 때 경감은
숨을 죽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고쉬넨에서 헤어졌습니다. 그가 아들의 시체를 찾을
때까지는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그대로 보냈습니다. 추동림을
차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경감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추동림을 붙잡을 것을 잘못했나요?
하고 물었다. 경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했어. 나라도 그를 붙잡지 못했을 거야.
그 사람은 정말 아들의 시체를 찾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하지. 한국까지 무사히 가야할 텐데.......
경감은 맥빠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추동림을 쫓아 그곳까지
왔지만 그를 붙잡지 못한데 대해 그는 조금도 억울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도중에 붙잡히지 않고 한국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더 강했다.
그를 맥빠지게 한 것은 결국 추동림의 아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과 사건의 발단이 어이없게도 한 음흉한 사내가 쳐놓은 덫에
걸려 시작되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마음은 분노를 넘어 참담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모두가 쓸데없이 날뛰었다는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미스터 Y라는 자의 말이 정말이라면 남화는 죄가 없으니까
풀어주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래야지.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미스터 Y의 몸뚱이가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에 막 옮겨지고 있었다. 마형사의 모습을 발견한 살레는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놀라는 표정이 이윽고 복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바뀌었다. 그 변화하는 표정을 보고 경감은
살레가 비로소 베테랑 수사관답게 놀라운 직감력으로 사태를
파악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 위로 얼핏 미소가 스쳐갔다. 그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경감은
감격했다.
Y가 죽었습니다.
하고 살레가 말했다.
경감은 역 구내를 빠져나가는 앰뷸런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탈리아 친구는 부하들을 이끌고 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추동림을 체포하겠다고 말입니다.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컨디션은 괜찮은가요?
마형사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네, 괜찮습니다.
살레는 마형사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취리히 중앙역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바넥과 브리앙 차장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모든 게 끝난 것 같으니 어디 가서 한 잔 합시다.
살레 부장이 경감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경감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우리도 공항에 가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만일 추동림이 눈치오한테 체포되면 큰 일이라는 생각에서
경감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살레는 빙그레 웃었다.
그 이탈리아 친구가 그 신출귀몰하는 한국인을 붙잡는 것을
보고 싶나요? 그 친구가 그 한국인을 체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취리히 공항 대합실 한쪽 구석에 동양인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추동림과 유무화였다. 무화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의 팔짱을 꼭 끼고 있었다. 동림은 여전히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돌아가요.
동림이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말 너무 고마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은 너무
용감하고 훌륭해요. 남자인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녀가 눈물을 훔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림은 깊은 눈길로
그녀를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요.
꼭 들어주여야 해요.
들어주고 말고. 말해 봐요.
기둥에 걸려 있는 시계가 밤 8시 2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하가 살아 있길 바랬는데...... 아무 보람도 없이 끝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비참해지시는 것 전 싫어요.
선생님은 그애의 영혼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도 힘차게 사셔야
해요. 다음에 우리가 만날때 전 선생님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어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한테
약속해 주세요. 절망하지 않고 힘차게 사시겠다고요.
약속하지, 그래...... 약속하지.
동림은 끄덕이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무화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시간에 출발하는 서울행 비행기는 없었다. 동림은 빨리
스위스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9시 15분발 도쿄행 JAL기편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 도쿄까지만 가도 서울에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도쿄에서 서울행 항공편으로 갈아탈
계획으로 이미 도쿄행 일본항공편의 탑승권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8시 30분이 됐을 때 무화와 떨어져 화장실로 갔다.
소변을 보고 있을 때 9시 15분발 JAL 235편기에 탑승할
손님들은 15번 게이트를 이용하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그는 아직 출국 대합실인 보세구역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유무화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그때까지
일반 대합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을 나와 그녀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멈칫하고 섰다. 몇
명의 거칠어 보이는 사복의 사나이들이 무화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하나가 그녀의 팔을 낚아 채자 그녀가
완강히 뿌리치는 것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경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분홍색 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띤
것 같았다.
사복의 사나이들 중 두 명이 출국장 입구 쪽으로 급히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권총을 찬 두 명의 경비 경찰관은 그들과
귓속말을 나눈 다음 이윽고 그곳에 버티고 서더니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날카롭게 주시하기 시작했다.
사나이들한테 둘러싸인 무화는 거칠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날카롭게 캐묻고 있었고, 그녀 역시 그들에게
거세게 대들고 있었다.
그 놈 어디 갔어?
눈치오가 씩씩거리며 물었다.
뭘 말이에요?
무화는 시치미를 떼고 반문했다.
시간이 없어! 추동림 그놈 말이야! 이거 그놈 가방이지?
눈치오 부장이 발로 트렁크를 걷어차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누구 것인지 몰라요. 아까부터 여기에 놓여
있었어요.
당신 이름이 유무화라는 거 다 알고 있어! 이치조
하루미...... 이 일본여권은 가짜야!
그는 그녀한테서 압수한 위조여권을 그녀의 눈 앞에
흔들어보였다.
네, 그건 가짜예요. 하지만 당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은 난
몰라요.
눈치오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거짓말 마! 그놈하고 함께 밀라노에서 국제열차를 타고 온거
다 알고 있어! 미스터 Y는 죽었어! 당신을 살인범으로
체포해야겠어!
내가 살인범이라고요? 웃기는군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군요. 난 가짜 여권을 가지고 다닌 죄밖에 없어요.
그 죄도 큰 거야! 이 여자를 데리고 가!
카르딜레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자 그녀는 사납게 그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요! 따라갈 테니까 손 대지 말아요!
동림은 그녀의 날카로운 고음을 들으며 출국장 입구로
다가섰다. 그녀를 그대로 그곳에 두고 떠나자니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출국심사대 앞으로 다가서자 사복 사나이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들의 손에는 추동림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출국심사대 앞에 다가와 있는 동양인은 너무 늙고 초라해
보였다. 그는 중절모를 눌러쓰고 있었고, 낡은 코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가 내민 패스포트는 일본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그의 이름은 이쓰키 고로였다. 그는 쿨럭거리면서
병들고 지친 듯한 충혈된 눈으로 심사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제복 차림의 심사관은 일본인치고는 지저분한 늙은이라고
생각하면서 패스포트에 출국 승인 스탬프를 쾅하고 찍었다.
그것을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사나이들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심사대를 통과하여 보세구역으로 들어선 동림은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사나이들이 유무화를 막 연행해 가고 있었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그녀와 동림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동림은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뚫고 들어와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거기에 한참 동안 못박힌
듯 서있었다. 그때문에 그녀가 고통을 받게되었다고 생각하니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도쿄행 JAL 235편기에 탑승하라는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왔다. 그는 몸을 돌려 15번 게이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눈에 덮인 유럽의 대지, 공항 활주로를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유럽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는 눈을 떴다. 삭풍이 처마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위잉하고 날카롭게 들려왔다. 밖에 나가기도 전에 한기가
목덜미를 덮여누르는 것 같아 사내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새벽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날이
새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도 그는
남들처럼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청소원이었다.
김인득(金仁得)이 부산시청 소속 청소원으로 일한 지는
4년전부터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양산 부근에서 남의 땅을
부쳐먹는 소작농 생활을 했었는데, 그 생활이라는 것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로 도무지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가솔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 부산으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배운
지식도 기술도 없는 터에 부산이라고 해서 생활이 보장될 리
없었다. 결국 시청 소속 청소원이 되었는데, 그나마 처가쪽 아는
사람을 통해 겨우 얻은 직업이었다.
그의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해대더니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간다. 그들은 블럭으로 지은 단칸 셋방에 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셋 있는데, 모두가 딸들이었다.
첫 딸을 얻은 후 아들을 볼 욕심으로 그의 아내는 또 임신을
했는데 낳고 보니 딸 쌍둥이였다. 놀란 그는 정관수술을 했고
딸들을 어떻게 키워낼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다가 딸 쌍둥이를
남에게 주기로 약속까지 했다가 취소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 딸들이 지금은 커서 큰 애가 열다섯 살, 그 아래
쌍둥이가 열네 살이었다.
인득은 아랫목에 잠들어 있는 남자 아이를 가만히 들여보았다.
그 아이는 정말 우연히 주워온 아이였다. 세 살쯤 되어보이는 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요즘 그는
딸들보다도 그 주워온 아이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아들이 없는
그는 불가능한 일인줄 알면서 아들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쓰레기 더미에서 그 어린 남자아이를 줍게
되었던 것이다.
일 주일쯤 전의 일이었다. 그 날도 꼭두 새벽에 일어나 쌓인
쓰레기를 치우려고 그가 맡고 있는 구역으로 나갔었는데, 워낙
일감이 많아 그의 아내가 그의 일을 도와주려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할 일은 청소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길에 쌓인
쓰레기를 리어카로 실어다가 넓은 곳에 쌓아두는 것이었다.
리어카에 쓰레기를 잔뜩 싣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것은 그의
혼자 힘으로는 너무 벅차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때문에 리어카에
깔려 숨지는 청소원이 적잖게 있었다.
아내의 도움으로 한 곳의 쓰레기를 옮겨다놓고 두 번째
쓰레기를 실어왔을 때 그곳에 큰 부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없던 것이 분명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 속에 좋지 못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성미급한 그의 아내는 먼저 그것을 풀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어린 아이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아이는 손발이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놀란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파출소를 향해 뛰어갔다. 그때 뒤에서 아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살았어요! 그가 멈칫해서 돌아보자 그의 아내가
달려왔다. 살았어요! 가지 말아요! 가지 말라는 것은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번 놀란 그가 되짚어 가보니
자루가 꿈틀거리지 않는가! 자루를 헤치고 입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내자 아이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내아이예요! --그의 아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날 따라 겨울치고는 포근한 날씨였다. 서울이었다면 아이는
얼어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 날씨는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때가 더 많다. 더구나 그날은 봄날같이 포근한 날씨였다.
집으로 사내아이를 데리고간 그들 부부는 정성들여 그 아이를
보살폈다. 마치 아이를 훔쳐온 것처럼 겁도 나고해서 병원에
가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집에서 극진히 간호했다.
아이는 처음 이틀 동안은 물만 조금 마시면서 죽은 듯 누워
있더니 사흘째부터 죽을 조금씩 먹으면서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바람에 그들은 애태우곤 했다. 아이는 귀여움을 받고 자란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리 말을 걸어도 입을 열지를 않았다.
벙어리나 백치 같지는 않은데,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으로 그만
입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의 아내보다도 그가 그 아이에게 더 열성적이었다. 딸애들도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는 하늘이 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그
아이를 아들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심성이 착한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고,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모로 보나 부모가 갖다버린 아이는 아니었다. 자기자식을
꽁꽁 묶어 부대 속에 넣어가지고 쓰레기터에 버리는 부모가 있을
리 없었다. 납치당해 버려진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사람은
그의 맏딸이었다. 딸애는 빨리 경찰에 신고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아내도 일이 커지기 전에 아이를
파출소에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잘못하다가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는 마음이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내가 차려온 돼지국밥을 먹으면서 그는 자꾸만 잠든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이제 잠도 잘 자고, 놀라 깨는 횟수도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볼수록 귀엽고 잘 생긴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를 떠나보내면 너무도 서운하고 허전할 것
같았다. 비록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지난 며칠 새에 정이 들대로
든 그는 감기에 걸린 듯 목이 잠겨왔다. 그의 그런 마음을
헤아린 듯 눈치를 살피던 그의 아내가
오늘은 파출소에 신고해요. 정이 깊어지기
전에요....... 하고 말했다.
알았어. 오늘은 그냥 집에 있어. 혼자 살살 할테니까.
그는 더러운 군화를 신고 낡은 방한모를 눌러쓴 다음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사라졌다.
1월 22일 오후 12시 50분 김해 국제공항. 추동림은 머뭇거리지
않고 입국심사대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일본국 패스포트를
내놓았다. 제복차림의 심사원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동림은 체포되어도 이제는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위조
여권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은 조금치도
없었다. 그러게 마음먹자 담담한 기분으로 심사원을 쳐다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심사원은 그의 패스포트에다 입국승인 스탬프를
기분좋게 쾅하고 찍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공항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잠시 거기에 서서 먼 산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피부에 와닿는 햇빛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는 너무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너무 늙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김포
국제공항에서 파리행 에어 프랑스기를 타고 한국을 떠난 것이
1월 15일이었다. 그로부터 일 주일만에 돌아왔는데, 마치 젊어서
한국을 떠나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다가 늙고 병들어서야
고국에 돌아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당장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기가 왠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야 그는 택시를 집어타고 시내로
향했다. 차가 달리는 동안 내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생각해 보았지만 광복동에 도착할 때까지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광복동에서 택시를 내린 그는 아내의 의상실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보았다.
남화 의상실 은 문이 닫혀있었다. 철제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휴업중 이라고 쓴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치 못볼 것을 보기나한듯
그 앞을 빨리 지나쳤다. 이제 그는 아들보다도 아내가 더 보고
싶었다. 아들은 이미 죽었으니 그를 만나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들에 대해서는 이제 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될수록 아들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고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아들의 시체를 빨리 찾아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일이었다. 그 일을 끝으로 그는 쉬고
싶었다.
골목을 빠져나온 그는 다시 택시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한 시간이 못돼 그는 해운대 S아파트 앞을 조금 지나쳐 택시를
내렸다. 그리고 되짚어 걸어와 S아파트 앞에 멈춰섰다.
S아파트가 바로 길 건너에 있었다. 그는 3동 508호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아내가 거실의 창가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얼른 모습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옷차림이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이 뛰고 눈 앞이 침침해져 왔다. 담배를 꺼내는 그의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눈을 닦고 다시 쳐다보았을 때
남화의 모습은 창가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헛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는 발길을 돌려 바닷가 쪽으로 나가보았다.
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빛이었고, 아들과 걸어다니던
모래밭은 따뜻한 햇볕 아래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모래밭으로 이어진 계단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은 짙은 녹색이었다. 수평선
저쪽으로 흰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륙도 뒤쪽에서 큰배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갈매기 한 마리가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가 동백섬 쪽으로 날아갔다.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 있던 그는 다시 차도 쪽으로
나와 그의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해변가에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 쪽으로 걸어갔다.
두대의 공중전화 부스는 비어 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전화통 안에다 동전을 집어넣은
다음 숫자판을 눌렀다.
벨이 울리기 무섭게 신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상대방도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그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자 마침내
여보세요.
하는 여자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히 남화의 목소리였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남화가 처음보다는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는 신기했다. 그래서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난 당신이 구속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녀가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갑자기 석방됐어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다행이야. 너무 상심하지 마.
지금 어디 계세요?
한국에 돌아왔어. 부산이야.
빨리 오세요. 보고 싶어요. 아, 안 돼요. 여기 오시면 안
돼요. 다른 데서 만나요.
인하 소식 들었어?
순간 그녀가 멈칫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참았던 감정이
흐느낌으로 변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흐느낌은 곧
억제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못 들었어요. 아직까지 소식 없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침묵하고 있자 조심스럽게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전 당신이 인하를 데려올 줄 알았어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의 중얼거림이 절망적인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미안해. 그럴 수가 없었어.
그는 차마 인하가 죽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아내가 그대로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아들을 따라 자결하고 말 것이다.
인하는...... 살아 있을까요?
살아 있을 거야. 살아 있고 말고.
그는 목이 메어 더이상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어젯밤에 인하가 살아돌아오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당신
전화가 왔어요. 빨리 만나고 싶어요. 지금 계시는 데가
어디예요?
나도 당신을 보고 싶어. 지금 당장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괴롭겠지만 참고 기다리고 있어.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기다려줘요.
그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그녀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빨리 집으로 오세요. 아까는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이제
더이상 경찰을 피하지 말아요. 언제까지나 도망다닐 수는
없잖아요. 우리 경찰이 보는 앞에서 떳떳이 만나기로 해요.
그리고 모든 것을 경찰에 맡기기로 해요. 당신은 더이상 어떻게
해볼수가 없잖아요. 빨리 집으로 오세요. 인하 문제는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당신은 인하 아빠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셨어요. 그만하면 훌륭하신 거예요. 당신은 너무
훌륭하셨어요. 당신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에요. 이제 인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는 하늘에 맡기기로 해요. 제발
돌아와 주세요.
하늘에 맡기자고? 난 하늘을 믿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녀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제발 돌아와 주세요...... 당신은 할만큼 하셨어요.......
난 바보였어. 나 같은 바보는 없어. 당신한테 알려줄 게
있어. 난 그 놈을 처치했어. 미스터 Y 그놈 말이야. 밀라노에서
취리히로 가는 국제열차 속에서 처치했어. 바로 죽이기가 아까와
병신을 만들어놨어. 지금쯤 죽었던가, 아니면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을 거야.
그만 하세요. 경찰한테서 대강 들었어요.
인하에 대해서도 들었겠군?
아뇨. 못들었어요. 인하가 어떻게 됐나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당신은 꿋꿋이 살아야 해. 난
당신이 굳세게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싶어. 잘 있어. 다시
연락할께.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도청하고 있던 형사가
부르는 소리였다. 동림은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점심식사 후의 포만감에 젖어
졸고 있던 파출소 소장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중년의 부부가 안으로 들어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청소원 복장을 하고 있었고,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의
등에는 사내아이가 업혀 있었다. 청소원이 방한모를 벗었다.
그의 얼굴은 까맣게 찌들어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젊은 순경이 교육받은 대로 정중히 물었다.
저기...... 애를 데려왔는데요.
순경과 소장의 시선이 등에 업혀 있는 사내 아이한테 쏠렸다.
여인이 사내 아이를 등에서 내려놓았다. 눈이 크고 귀엽게 생긴
아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슬금슬금 여인의
뒤쪽으로 가서 얼굴을 가린다.
며칠 전 주웠습니다. 새벽에 청소하러 나갔다가 쓰레기터에
버려져 있는 것을 주웠습니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는데.......
청소원이 흥분해 더듬거리자 소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기 계시지 말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리고 차근차근
말씀해 주십시오.
인득은 소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갈쿠리 같이 생긴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소장은 담배를 피우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청소원이 이야기를 끝내자 소장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아이는 죽었겠군요. 참 좋은 일
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청소원의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사실 소장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청소원의 부인이
끼어들었다.
집에다 데려다놨을 때도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며칠
동안 잠 한숨 제대로 못자고 간호하느라고 아주 혼났어요.
소장은 아이를 불렀다. 그러나 아이가 움직이려 하지 않자
여인이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소장 앞으로 다가왔다. 소장은
겁에 질려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네 이름이 뭐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를
않았다. 소장은 몇 번이나 물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몹시 놀란 모양이에요. 며칠 동안 말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부인의 말에 소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벙어리가 아닌가요?
벙어리 같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그런 짓했을 리는 없고 아마
어떤 나쁜 사람이 이 아이를 납치했다가 죽은 줄 알고 버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인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 순경이 종이를 한 장 들고
소장에게 급히 다가왔다.
소장님! 이거 보십시오! 이 아이하고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이를 찾는 전단이었다. 그것은 경찰에서 만들어 전국
경찰에 배포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찾는 아이의 사진과 함께
인적사항, 주소,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지난 1월 13일에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내용도 실려 있었다.
소장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겁에 질려 서있는 아이와
사진을 다시 한 번 대조해 보고 나서
너 인하 맞지? 하고 물었다. 아이가 눈을 깜박이자 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전화통 앞으로 다가서서 전단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에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자였다.
소장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자기가 어느 파출소 소장이라는
것을 먼저 밝혔다.
에또, 그 댁이 추인하군 댁이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인하군 소식 아직 모르시지요?
네, 모르고 있어요. 무슨 소식이라도......?
여자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안심하십시오. 인하군은 지금 여기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요?
네, 정말입니다. 하하,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인하가...... 정말 거기에...... 인하를...... 우리
인하를 바꿔주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1월 22일 밤 서울 이태원.
클럽×의 입구는 휘황찬란한 네온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불빛이 번쩍거리는 그 앞에는 고릴라처럼 생긴 거한이 한 명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목이 머리통보다 더 굵어보이는 그는
머리를 깨끗이 밀어버린데다 콧수염까지 기르고 망토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괴상해 보였다. 불빛에 반사된
머리통은 바가지에다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밤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외국인들과 내국인들이 계속
클럽X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고릴라 같이 생긴 사내는 그들을
형식적으로 체크하고 나서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클럽×는 미군및 외국인 전용 클럽으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회원카드가 없으면 입장이 금지되어 있지만
회원권 소지자의 동반자도 입장이 가능한데다 회원권의 남발로
실제로는 외국인보다 내국인 입장자 수가 더 많았다.
어두운 골목에서 고릴라를 지켜보던 사나이는 출입구가 잠시
한가해진 틈을 타 골목에서 나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가죽으로 만든 검정색 캡을 눌러쓰고 있었고, 눈에는 검고 굵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위에 입은 옷도 검정색의
가죽점퍼였다. 오른쪽의 검정 가죽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가 끼어 있었다. 출입구 앞으로 다가선 그는 몸을
흔들거리면서 고릴라를 쳐다보았다. 고릴라도 몸을 흔들어
대면서 낯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골 출입자들의 얼굴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캡의 사나이가 미소를 던졌다. 그리고 고릴라 앞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러자 고릴라의 넙적한 손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왜 그래요?
캡의 사나이는 고릴라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고릴라는 잠자코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회원권을 보이라는
것이었는데 그의 손에 놓인 것은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다. 고릴라는 히죽 웃으며 그것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서 안쪽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캡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홱 돌아섰다.
낙지 왔어요?
안 왔어.
고릴라는 또 히죽 웃었다.
언제 쯤 나와?
몰라. 요새는 안 보이던데...... 여기 못 오게 할 거야.
왜?
그 자식 보면 구역질이 나. 그 자식 필요해?
그래 필요해.
조심하는게 좋을걸. 에이즈에 걸리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낙지가 에이즈에 걸렸나?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아. 이런 데 반점이 많아.
고릴라는 목과 팔뚝을 가리켜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난 낙지가 필요해. 낙지를 만나고 싶어.
그놈은 외국인만 상대하는데.......
그때 빨간 코트를 입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다가왔다.
안녕.
그녀는 고릴라한테 교태스럽게 인사를 보내면서 그들 앞을
지나쳤다.
이봐!
고릴라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핸드백을 흔들면서
돌아섰다.
낙지 요새 왜 안 보여?
부산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그녀는 홱 돌아서서 엉덩이를 흔들며 안으로 사라졌다.
고릴라가 그녀의 뒤에다가 주먹을 흔들어댔다.
이 주먹이 운다 울어. 저걸 누가 남자라고 봐.
여자가 아니야?
남자야. 낙지 친구야.
캡의 사나이는 고릴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떠보았다.
낙지보다 더 예쁜 것 같은데.......
낙지보다야 예쁘지.
고릴라는 자기 손바닥을 툭툭쳤다.
낙지 말인데...... 돈을 많이 주면 한국인도 상대하겠지?
글쎄, 돈만 많이 주면야...... 낙지 잘 모르나?
몰라. 사진으로만 봤어. 소문을 듣고 만나보고 싶어서
온거야. 잘좀 부탁해.
캡은 다시 지폐를 꺼내 고릴라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번에는
만원권이 다섯 장이나 되었다.
M호텔 601호실에 묵고 있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연락해줘.
캡은 길 위쪽을 가리켰다.
실내는 시내의 여느 나이트클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엇다. 시내의 일반 나이트클럽이 제약을 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클럽X는 외국인 전용 클럽이라고 해서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퇴폐적이고 음란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어두운 조명 아래 테이블 사이를
반라의 차림으로 누비고 다니는 웨이트리스들의 움직임부터가
선정적이었다.
가죽 캡은 플로어 양쪽에 놓여 있는 그보다 약간 높은 원형의
회전무대 위에서 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여인들을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그녀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왼쪽에서 춤추고 있는 여인은 금발의 외국인이었고
오른쪽은 한국 여인 같았다. 두 여자 모두 몸매가 늘씬했고
가슴과 엉덩이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춤이라기보다 성행위 그
자체였다. 흔들리는 가슴, 비틀거리는 허리, 경련하듯 떨어대는
하복부와 풍만한 엉덩이의 율동은 성에 굶주린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테이블이 모두 만원이었기 때문에 벽쪽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가죽 캡도 벽에 붙어서서 조심스럽게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는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는 여인들에게 더이상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때로는 역겨운 듯
그녀들을 쳐다보다가 빈 자리가 나오자 그쪽으로 가서 앉았다.
같은 날 밤 10시 15분 김포 국제공항.
노인배 경감과 마형사가 세관검사대를 통과해 대합실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사 세 명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박문호와 최원달, 그리고 여형사 조미혜였다.
연락받은 대로 남화씨를 귀가시켰습니다. 그런데 인하군이
돌아왔습니다!
박문호의 말에 노경감과 마형사는 그 자리에 멈칫하고
서버렸다.
시체가 돌아왔단 말이야?
아닙니다.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애가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오늘 낮에 부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청소원이 일주일
전에.......
최원달이 인하가 돌아오게된 경위를 이야기하는 동안 노경감과
마형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이윽고 최형사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그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하늘이 도왔군. 하늘이 도왔어. 놀라운 일이야. 그 아이가
살아서 돌아오다니.......
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장서서 대합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사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올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무겁고 어두운 기분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럽까지 갔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온데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뜻밖에도 크나큰 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 추동림은 어떻게 됐어? 인하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나?
아마 모르고 있을 겁니다. 부인 말에 따르면 인하군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기 전에 그가 집으로 전화를 했답니다.
부산에 왔다고 하면서...... 부인이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고
애걸했지만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답니다.
그는 지금 아들 시체를 찾고 있을 거야. 그에게 인하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지 않으면 안 돼. 신문에 그 사실을 알렸나?
경감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발표를 유보시켜 놓았습니다.
빨리 발표해! 신문은 물론 방송에도 나오게해야 해.
추동림한테 알리지 않으면 안 돼! 그가 어떤 짓을 하기 전에
말이야! 지금 부산에 내려가는 비행기가 없지?
네, 없습니다. 지금 우리 요원 4명이 부산에 내려가
있습니다.
차로 내려갈 수밖에 없군.
노경감과 마형사는 박형사가 몰고온 승용차에 올랐다.
조미혜도 뒤따라 올랐다. 최형사는 경감이 지시한 것을 수행하기
위해 거기에 남았다.
부산으로 가!
경감의 지시에 박형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추동림이 무슨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차가 톨게이트를 지나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
조미혜가 물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시체를 찾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날거야. 시체를 유기한 사람일 거야. 그 사람을 죽일지 몰라.
그로서는 그게 마지막 복수이겠지. 그 가능성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그가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야. 복수를 끝내고
난 그는 허탈과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몰라. 다행기 그가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걸
알게되면 더이상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고
끝까지 모르게 되면 마지막이 너무 참담하게 끝날 것 같아.
경감은 창 밖으로 밤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그 사람은 아들을 너무 사랑했어. 너무 말이야. 나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야. 하고 말했다.
1월 23일 밤 서울 이태원.
밤이 되지 내리기 시작한 눈이 10시쯤에는 발목이 빠질 정도로
쌓였다.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 빨간색 승용차가 클럽X의 맞은편에
굴러와 멎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키가 늘씬한 젊은 여자가 한 명
내렸다. 그녀는 밍크코트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수세미처럼
볶아놓은 금발이 바람에 날리자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누르면서 길을 건너갔다.
클럽×의 출입구 앞에 버티고 있던 고릴라가 그녀에게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낙지, 부산에 다녀왔다고?
부산은 따뜻한데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어요.
낙지라고 불린 여자는 어깨를 추스리면서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동그랗게 생긴 검은테 안경으로 멋을 부리고 있었다.
얼굴은 허옇게 분칠이 되어 있었지만 강파르게 튀어나온
광대뼈하며 빨갛게 루즈를 칠한 큼직한 입술 같은 것이 어쩐지
여자 같지가 않고 어색해 보였다.
앞으로 여기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요?
안경 너머로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에이즈 때문에 요새 비상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너 같은
애들이 출입하면 손님이 떨어진다고 사장님이 금지시키라고
했어.
아저씨, 너무 그러지 말아요. 너무 그렇게 괄시하면 재미 안
좋아요.
나를 협박하는 거야?
고릴라가 눈을 부라리자 그녀는
아녜요. 협박하긴요.
하면서 재빨리 그의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었다.
고릴라는 몸을 흔들며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혐오스런 눈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낙지! 나 좀 봐!
하고 말했다.
왜 그래요?
그녀가 돌아나와 미간을 찌푸렸다.
돈 벌고 싶지 않아?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고릴라를 쳐다보았다.
어떤 자식이 널 찾았어. 너하고 하고 싶다고 말이야.
누군데?
나도 몰라. 처음 보는 놈인데 네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고
했어. 그런데 한국놈이야. 넌 한국놈하고는 안 하지?
한국놈은 싫어.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다음 돌아섰다.
돈 버는데 무슨 상관이야. 아주 부자인 것 같던데.......
그녀는 머뭇거렸다.
많이 달라고 해봐. 미국놈이나 한국놈이나 그건 다 똑같지
않아? 돈 많이 줄 거야.
그사람...... 안에 있나요?
그녀는 클럽 안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니야. 어제부터 M호텔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 몇
호실이라고 했더라. 아, 그래. 601호실이라고 했어.
낙지는 홱 돌아서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연락해봐. 잘 되면 인사하는 거 잊지 마!
고릴라는 그녀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클럽 안으로 들어온 낙지는 무대 쪽을 힐끔 쳐다보고 나서
같은 부류의 여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서 빈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말없이 담배만 피워대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자 그들 중에 한 여자가
무슨 고민거리 있어? 하고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낙지는 머리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그들은 분위기나 미묘한 표정 조그만 움직임 하나도 영락없는
여자였다.
이윽고 낙지는 결심한 듯 담배를 끄고 일어나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전화통은 부스 안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실내의 음악 소리가 워낙 시끄러웠기 때문에 별로
소음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M호텔 601호실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후에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낙지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어젯밤 X클럽에 와서 누구를 찾으셨나요?
그녀는 예의 바르게 공손히 물었다.
그래요. 낙지라는 아가씨를 찾았지.
제가 바로 낙진데...... 어떻게 저를 알았어요?
소음때문에 낙지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었지.
용건이 뭐예요?
하룻밤 함께 자고 싶어서.......
난 외국 남자만 상대해요.
꼭 그럴 필요없지 않아?
내가 꼭 필요해요?
그래. 꼭 필요해. 하룻밤만 자고 싶어.
그렇다면 비싸게 내지 않으면 안 돼요. 특별한
경우이니까요.
얼마?
20만 원은 줘야 해요.
20만 원이나? 너무 비싼데.......
비싸지 않아요. 싫으면 관둬요.
아니야. 좋아. 지금 바로 와줘.
알았어요.
낙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30만 원쯤 불러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랬다고 후회했다.
M호텔은 클럽X에서 걸어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낙지는 자기 차를 타고 거기까지 가서 차를
주차장에 몰아넣은 다음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M호텔은 오래 된 삼류 호텔이었다. 6층으로 올라가 1호실 앞에
이르러 보니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약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들어가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열렸어요. 들어오세요.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에 그녀는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탠드의 불빛이 흐트러진 침대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본 그녀는 손도끼를 쳐들고 자기한테 달려드는 남자를
보고 그만 으악! 하고 소리쳤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런 기습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기세는
감히 상대해 볼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뒤로
벌렁 나자빠진 낙지는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면서 검정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들려 있는 도끼를 올려다보았다. 검정 가죽캡을
쓴 남자는 그녀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도끼를 내려치면 바로
골통이 빠개질 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즉시 그녀를 해치우지
않고 그대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낙지는 상대방이 왜 자기를
죽이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그녀는
두 손을 싹싹 비벼대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구석으로 그녀를
몰아넣은 가죽캡은 뒤로 물러나 음악을 크게 틀었다. 그리고
탁자를 발로 밀어다가 그녀가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게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추동림이야. Y는 내 손에 죽었어. 네가 내 아들의 시체를
치웠다고 들었어.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린 낙지는 경악했다.
난 아니에요! 난 몰라요!
그녀의 입에서 마침내 여자의 탈을 벗은 남자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동림은 지체하지 않고 낙지의 한쪽 어깨를 도끼로
찍었다. 낙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어깨뼈가 갈라진
사이로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다음은 이쪽 어깨다. 시체를 어디다 버렸어?
쓰, 쓰레기터에다.......
낙지는 있는 힘을 다해 탁자를 밀어붙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도끼날이 그의 다른 쪽 어깨를 파고 들었다.
그의 몸뚱이는 힘없이 무너져내렸고, 어깨뼈가 갈라져 나가는
고통에 그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말해줘! 내 아들을 어디다 버렸는지 말해. 말하지 않으면 이
머리통을 부숴놓을 거야!
낙지는 희미하게 살아 있는 의식 속에서 그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부산...... 쓰레기터.......
어느 쓰레기터야?
서면 K회관 뒤.......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는 더이상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호텔을 빠져나온 동림은 소리없이 내리고 있는 눈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더이상 아들의 시체를 찾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시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으니 아들은 그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보아온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정답게 그의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을 마지막으로 보아두려는
생각으로 그는 열심히 주위를 쳐다보면서 걸어갔다.
어둠에 싸인 도시의 음산한 모습 뒤에 숨어 있는 그 따뜻한
밀어들을 엿듣고 싶어 그는 귀를 기울이며 걸어갔다. 그의 캡
위에, 어깨 위에 눈이 수북히 쌓여 갔지만 그는 그것을
털어내려고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를 걸었는지, 몇 시간을 걸었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는 자신이 청계천 6가에 와 있음을
알았다. 바로 앞에 긴 상가 건물들이 시커먼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는 아파트가 들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비상등만 켜져
있어서 복도는 너무 어두웠다. 이윽고 309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는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그곳은 유럽에 가기 전
은신처로 잠시 빌렸던 소형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냉기와 무서운
정적이었다. 그는 불을 켜는 것이 두려워 그대로 창가에
서있었다. 여기서 좀 쉬다가 아빠하고 가는 거야. 아주 멀리
말이야. 여긴 너무 지저분하고 추워. 그는 아들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 그렇지. 좋은 수가 있어. 내 정신 좀봐.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온게 아닌가. 더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주방 쪽으로 갔다. 싱크대위에
설치되어 있는 찬장과 찬장 사이로 손을 밀어넣어 보았다.
차가운 것이 손 끝에 만져졌다. 그것이 어김없이 거기에 있어준
것이 그는 기뻤다. 손바닥 안에 묵직하게 들어온 그것을 들고
다시 창가로 움직였다. 됐어. 이거면 충분해. 그는 45구경
피스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발작적으로 그는 총구를 관자놀이에 갖다댔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그때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인하야. 엄마한테
작별인사를 해야지. 네 엄마처럼 이 세상에 아름답고 좋은
사람은 없단다. 난 말이야. 사실 엄마한테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아빠였지.
그 아파트에는 전화가 없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피스톨을
장식장 선반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아래 층 상가 복도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를 한 번 사용한 기억이 났다.
그는 아래층 상가로 내려가 가게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어가다가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다행히 장거리용 자동공중전화였다.
동전을 집어넣은 다음 너무 어두워서 라이터불을 켜들고
숫자판의 숫자를 눌렀다. 그는 초조하게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신호가 떨어지면서 남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당신이죠? 당신 아니예요?
그래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인하가 돌아왔어요! 인하가...... 인하가 돌아왔어요!
아내의 숨가쁜 외침에 그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인하가 돌아왔어요! 빨리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내의
거짓말이 그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인하가 왔다고? 거짓말하지 마. 인하는 지금 나하고 함께
있단 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예요! 인하가 왔단 말이예요! 정말이예요! 여기
제 옆에 인하가 있어요!
남화는 울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인하는 죽었어.
죽지 않았어요! 인하는 지금 제 곁에 있어요! 전화를
바꿔줄테니까 인하를 불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는 목이
메어 머뭇거리다가 가만히
인하야. 하고 불러보았다. 몇 번 그렇게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다시 남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하가 말을 못해요!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나아질 거에요! 빨리 돌아오세요!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1월 24일 오후 부산 해운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면서 남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나 지금 해운대에 와있어. 바닷가로 나와.
신음처럼 말하고 나서 그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바닷가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바닷가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는 온통 푸른 빛이었다.
눈부신 햇빛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모래밭을 가로질러
파도가 밀려오는 곳까지 걸어갔다. 날씨는 봄날처럼 포근했다.
파도가 그의 구두 끝을 건드렸다가 물러갔다. 그 다음에 밀려온
파도가 그의 발목 위에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그대로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한 마리의
갈매기를 쫓기 시작했다. 가슴에 검은 점이 있는 그 갈매기는
푸른 바다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놈을 쫓아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산책로에서 모래밭으로 이어진 계단 아래에 두 사람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꿈벅거렸다.
남화가 아이의 등을 밀자 아이는 주춤거리다가 그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도 아이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이의 움직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빨간 털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이가 모래밭에 넘어졌다. 그는 멈춰서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의 아들은 몸을 일으키더니 뛰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를 보았다. 그녀는 처음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위쪽 산책로에 노경감과 마형사, 그밖에 몇
사람이 서서 동림과 그의 아들의 극적인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 기자들이 모래밭으로 뛰어내려 그들 부자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인하야!
동림은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달려오던 아이는 멈칫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인하야!
그가 두 번째 부르자 이윽고 아이가 다시 달려왔다.
아빠!
굳었던 아이의 입에서 마침내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빠!
그는 품 속으로 돌진해 오는 아들을 덥석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계속 있어요!
기자들의 외침과 셔터소리가 파도소리처럼 귀를 때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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