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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기]대화방으로부터 홈페이지까지

네로 | 2002.01.17 10:23:17 댓글: 0 조회: 935 추천: 0
분류일반 https://life.moyiza.kr/mywriting/1560471
망망한 인터넷의 바다,수많은 홈페이지들이 반짝이는 별처럼 널려있어서 지역과 국가를 뛰여넘어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여있다.하지만 아직도 조선족이 만든 사이트를 발견하기란 모래속에서 바늘찾기처럼 어렵기만 하다.

더우기 내가 인터넷을 처음 배울때에는 더욱 찾기가 힘들었는데 천문학적인 사이트가 등록되여있는 인터넷 검색엔진인 야후에서 찾아봐도 종적이 묘연했다. 조선족이라고 검색하면 가물에 콩나듯 나오는 사이트도 조선족여자와 한국남자의 혼인을 주선해주는 결혼정보사이트가 아니면 연변특산을 파는 한국무역회사의 사이트가 전부였으니...

어디에 있기는 하련만 찾을 길이 없었다.하지만 때가 되면 나타나는 법,연변창구라고 불리는 연변전신국의 사이트를 드디여 찾게 되였고 대화방에 들어가니 많은 고향사람들을 만날수가 있게 되였다.그때의 감동을 두고두고 잊을수가 없으리라.

대화방에는 수많은 정보가 오고가고 따라서 감춰진 조선족인터넷사이트를 하나둘씩 알수가 있게 되였다.나는 잊을세라 수첩을 꺼내서 메모했고 그중에서 괜찮다 싶은곳은 게시물 하나하나까지 깡그리 훑어보았다. 그때 대화방은 나에게 멀리 떨어진 고향과 이어진 뉴대였다. 요즘 연길에서 맥주 한병값이 얼마인지도, 연변축구팀이 이번시합에는 몇등을 했는지도 대화방만 가면 손쉽게 알수 있었다.그리고 대화방에서 친한 사람들과 메일도 주고받으면서 나는 대화방이 가져다주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갔다.않좋은 말로 한다면 채팅중독이 돼버린것이다.

지금은 훨씬 빨라졌지만 그때는 연변창구대화방의 속도가 느리기 그지없었다.한마디씩 쓰고는 글이 모니터에 나타나기를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려야 했다.그나마 조선족끼리 만날수 있다는게 너무 고마웠고 행복했으나 불행하게도 대화방서비스가 안될때도 푸술했다. 짧게는 몇시간,길게는 며칠내지 그이상으로 대화방에 들어갈수가 없었다.

벼르고 별러서 피씨방에 갔는데 대화방에 들어갈수 없으면 너무나도 안타깝고 답답했다. 다른것은 하고싶지도 않았거니와 할줄도 몰랐으니까.그런데 누군가 연변창구말고 굉장히 빠르고 안정적인 조선족대화방이 있다고 귀띰해줬다.

그곳은 바로 조선족유학생( http://www.koreanchinese.com)이라는 사이트를였다. 조선족유학생방에는 일명 조선족방이라고 불리는 대화방이 있었는데 들어가보니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하고있었다.한참 지켜보니 모두 한국에 유학온 학생인듯싶었다.인사수작을 건네니까 모두들 반갑게 맞아주는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끝에 나는 슬그머니 소외되고말았다.

조선족방에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가 터세가 심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웬만해서 곁에 붙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달리 가볼만한데도 없는지라 이야기를 제대로 붙여보지도 못하면서 괜히 자주 들락거렸고 한달 두달이 지나고 몇개월이 지나자 나도 어엿한 멤버로 자리잡았고 아는사람들도 차츰 많아져갔다.나중에야 알았지만 조선족방에는 유학생뿐만 아니라 조선족과 중국에 관심이 많은 한국분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인터넷음악방송을 하는 서울의 고목님,멀리 미국에서 한약방을 차리고있다는 만수님,그리고 천진에서 회사다니는 중학교동창인 소은이,항주에서 회사다니는 완즈동생,부산에 있는 괴짜소녀 싸이코,모두가 다른 환경과 지역에서 살고있지만 조선족대화방이라는곳에 저녁마다 모여서 나이와 직업,국적따위를 뛰여넘어 재미있게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갈수록 우정이 두터워져서 나중에는 스스로 자신을 조선족방 식구라고 이르게 되였다.

그무렵에 나는 염색공장에서 일하고있었는데 일손을 놓기 바쁘게 피씨방으로 뛰여가서 서투른 솜씨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힘든 일과가 가져다주는 피로를 말끔하게 잊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홈페이지란 전문가들이 만드는것인줄로만 알았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대화방식구중에서 하나둘씩 만드는 사람이 생겨나자 나도 자연히 보고듣고 따라하게 되였으며 급기야 1999년 9월 2일(역사적인 날!)에 무우의 홈페이지도 소박하게나마 문을 열게 되였다.

아는 사람도 이젠 저으기 많아진지라 하낫둘씩 서로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열심히 꾸려나가라고 격려하기도 하고 안부인사도 자주 남기곤 했으니 과히 적적하지 않았다. 사이버공간이라는 허무하기조차 한 곳이지만 처음으로 갖게 된 집이였기에 날마다 열심히 꾸미고 어떻게 하면 더 색다른 내용을 올릴가 고민하였으니 내 일생에 그토록 한가지 일에 몰두해본적이 별로 없었던것 같다.어떤때는 하루에 20여명의 방문자가 다녀간것을 보고 너무도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허둥지둥 이곳저곳 다니면서 홈페이지를 만드는 소스를 구하고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니 뜻이 있는자에게는 길이 있다고 내 솜씨도 일취월장하여 드디여 남을 조금씩 가르쳐줄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무렵 자그마한 사변이 생겼는데 대화방의 완즈가 조선족방식구들의 앨범을 만든다는것이였다.

막역한 사이였지만 국경선으로,산과 물로 가로막혀져있어서 얼굴한번 보지 못하고 지내왔던터라 서로의 얼굴이 궁금하기만 한지라 이 아이디어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였다. 서로의 얼굴을 스캔한 파일을 메일로 속속들이 완즈한테 배달되였고 육속 완즈의 홈페이지에 공개되였다.

그전까지는 홈페이지같은데 얼굴을 공개하는 풍속이 없었는지라 가끔 친한 사이끼리 스캔한 사진을 메일로 교환하는 정도였다. 더구나 한 홈페이지에 수십명의 친구들의 사진을 싣는다는것은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홈페이지가 차츰 많아지자 친한 사람의 홈페이지를 소개하는 풍속도 생기기 시작하여서 얼마안가 서로지간의 홈페이지가 얼기설기 얽혀서 대화방식구들의 네트워크가 탄생하였다. 대화방식구라는 끈끈한 뉴대가 맺어주었기에 홈페이지들은 점점 많아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되여갔다.

모이자( http://www.moyiza.org)라는 조선족인터넷동아리 사이트에서도 대화방을 운영하고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있었다. 모이자는 북경에 있는 네로와 천진에 있는 피터(우추도리),이밖에 몇명의 조선족 인터넷매니아가 만들었는데 조선족 네티즌의 인터넷과 홈페이지교욱을 목적으로 한 거의 유일한 사이트였다.

모이자에서는 홈페이지공간을 장만하기 어려운 조선족네티즌에게 홈페이지공간도 제공해줌과 동시에 홈페이지제작도 도와주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나도 모이자의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얼마후에 홈페이지공간도 받아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모이자에는 여러가지 글을 실을수 있도록 게시판을 분류해놓았는데 그중 한게시판의 이름은 떠돌이게시판이였다. 집을 떠나 외지에서 헤매는 모든 조선족들이 떠돌이 게시판에 자기들의 이야기를 싣고 친구로 사귀기를 바라면서 만들어놓은 게시판이였다.

나도 집을 떠나 정처없이 헤매는 사람인지라 그 게시판에 애착이 갔다.집을 떠나 답답한 이야기,고생한 이야기같은것을 가끔 올리기도 했는데 반응이 과히 폭발적이였다.글을 읽은 조회수가 수십에서 나중에는 200히트까지 치솟았다.

대화방에 들어가도 나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아는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자 "지나가던 중이 잘 뛴다고 하니 장삼벗어쥐고 달린다"는식으로 짬만 나면 모이자게시판에 무우이야기를 올리게 되였고 나중에는 떠돌이게시판이 아예 무우의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하루 느닷없이 대중과학잡지사의 이메일을 받았다. 웹써핑을 하다가 "무우이야기"를 보게 되였는데 소재가 괜찮은것 같으니 발표할 의향이 없냐는 내용이였다.

처음에는 누가 장난친줄로 알았는데 곧 대화방에서 만나자는 두번째 이메일이 도착하였다.대화방에서 나는 대중과학잡지사의 편집이라는분을 만나게 되였고 생각끝에 발표하기로 결심하였다. 발표는 그야말로 신선놀음이였다. 나는 투고할 필요도 없이 글을 써서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올리기만 하였고 대중과학 잡지사에서는 쓸만하다싶은것을 마우스로 카피해서 잡지에 싣기만 하면 되였다.

원고를 부치는 수고스러움도 없고 우표한장 붙일 필요도 따라서 없었다.잡지사에서도 원고를 실시간으로 받아볼수가 있고 글을 다시 타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었으니 아마 편리했으리라.인터넷이라는 물건이 신통하기는 신통한 물건이다.하하하

다만 내가 쓴 글은 조선족친구뿐만 아니라 한국친구들도 읽으라고 쓴 글이여서 중국말,한국말에다가 연변사투리까지 뒤섞인데다가 대화방용어들로 뒤죽박죽이 되다보니 교정하느라고 진땀을 뺏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아이러니컬하게 나는 잡지에 글을 퍼그나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내눈으로 볼수가 없었다.도처로 자리를 옮겨다니며 일했으니 나에게는 잡지를 부칠만한 주소가 없는 까닭이였다.

잡지사의 편집선생님이 집에다가 부쳐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극구 만류했다.아들이 한국에서 지내는 꼴을 알게 되면 어머니가 혹시 더 마음아파하시지 않을가 걱정돼서였다.때문에 나의 사진도 잡지에 싣지 않았다. 하지만 종이로는 불을 감쌀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몇달안가 이사실은 탄로나고야 말았다. 친척분이 우연하게 대중과학잡지를 보고 내가 쓴 글임을 알아보았던것이다.

내가 우려하던 바와는 달리 어머니는 퍼그나 대견스러워했고 나에게 전화로 이야기했다.<편지랑 자주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된다.니가 쓴 글을 보니 편지를 보는것보다 낫구나,엄마는 니가 보고싶을때마다 글을 열번이고 스므번이고 읽는다.그럼 너를 보는것 같아서 위안이 되는구나.>

휴..여기까지 쓰고나니 돋보기를 쓰고 아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아들은 무사히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마십시오. 다만 찾아뵐수 없는 몸이라서 안타까울따름입니다.>

오늘까지 어머님을 못뵌지가 6년째다 .아직도 얼마만큼한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자신있게 돌아가서 어머니를 만나뵈올수 있겠는지? 아직은 너무 초라하고 해놓은것이 없는터라 돌아갈 결심이 서지 않는다. 집떠나기도 어렵더니 돌아가기는 더욱 어렵구나!


ps:아...수개나 삭제가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욤.신속히 조치하도록 하게습니다.     20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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