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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신화서점 조선말 도서

북조선이야기-2

네로 | 2002.03.12 12:36:36 댓글: 0 조회: 1296 추천: 0
분류일반 https://life.moyiza.kr/mywriting/1560503
어느때부터인가 북조선을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다. 소학교5학년때즘이였을거라고 생각되는데 북조선에서는 중공업만 중시했으므로 철강이나 건축같은것은 발달했지만 경공업제품이 아주 부족했다. 북조선에는 귀한 재봉침이나 자전거,옷가지따위를 가져가면 아주 비싼값에 팔수 있었고 돌아올때는 마른명태나 마른낙지(북조선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라고 부른다.그래서 처음 한국에 왔을때는 오징어와 낙지를 분간하지를 못했다.)같은 건어물들을 헐값에 사오군 했다.돈이 많이 남는 장사였으므로 조선족들은 북조선장사를 많이 다녔다.

북조선을 다니려면 여권이나 비자같은것이 필요없었다. 그냥 "변방통행증"한장이면 가능했다.하지만 아무나 북조선을 다닐수 있는것은 아니였다.친척의 요청편지가 있어야만 했는데 우리집은 북조선에 마다바이(맏아바이=큰아버지)가 있는데다가 다른 친척분들도 계셨으므로 별 문제될거 없었다. 친척방문명의로 번마다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북조선으로 다녀오군 했다.어머니로부터 큰형님,둘째형님 모두 북조선으로 여러번 다녀와서 빠듯한 집안살림에 큰 보탬을 하였다.

그때는 북조선이 어려운 시기였는데(지금은 더하지만) 북조선에 계시는 친척들도 중국의 친지가 방문하는것이 큰 경제적인 보탬이 되였다.

북조선가는 물품을 준비할때에는 옴니암니 따져가면서 값이 싼걸로 왕창 구입하군 했는데 나일론 수건이나 운동복,운동화같은것들도 인기가 많았다. 사카린은 설탕대용으로 북조선에서 많이 씌였으므로 비싸게 팔수 있었는데 반입이 금지되였으므로 몰래 숨겨가곤 하였다.

그때 중국물건을 북조선에 가져가면 대개 15배정도의 가격에 팔수 있었다.15배의 이윤은 아니라 중국돈 10원어치의 물건을 북조선돈 150원좌우에 팔수 있다는 얘기다. 10원짜리 운동화 한컬레를 가져가면 200원가까이 받았는데 북조선사람들의 임금이 대부분 100원이 안되였으므로 운동화마저 상당한 사치품이라고 할수가 있겠다. 다행히 북조선에는 거의 모든 물건을 배급제로 분배하고 의료며 교육이 죄다 무료였기에 돈을 모을수 있는 사람들도 퍼그나 있었고 다소 비싸더라도 물건만 좋으면 불티나게 팔렸다.

이야기를 들으면 북조선의 경제상태는 확실히 별로 안좋았다. 집집마다 호박같은것을 심어 식량에 보탬을 하였고 키우는 돼지들도 먹이를 제대로 주지못해서 여위여서 큰형님의 말대로 한다면 <잔등이 칼날같았다.>

상점에 가면 물건은 있었으니 거개가 판매용이 아닌 <진열용>이였고 심지어 성냥을 구입하려고 해도 힘들었다고 한다.

돌아올때에는 물건을 깨끗이 처분한 돈으로 말린 해삼이며 낙지,까나리(연변에서는 일본발음으로 이리꼬라고도 부르는데 멸치비슷하게 생긴 잔고기를 말린것이다.비린내가 없어 날것으로 먹어도 고소한데 기름에 튀겨서 도시락반찬으로 많이 씌인다.)마른명태같은것을 대량으로 구입해오군 했다.

북조선의 마른명태(북어)는 특히 맛이 일품인데 한국에서 유명한 "황태"도 그맛에 비기면 천양지차였다. 질좋은 명태를 북조선의 추운 겨울날씨에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고 특수설비로 다림질한듯이 반듯하게 건조까지 시켜서 노르스름하고 바삭바삭하다. 게다가 맥주안주로는 제격이라 연변에서는 대량으로 소비하였고 북경이나 심양같은 내지로도 팔렸다.

해삼은 중국에서 4대진미에 속하는거라서 노동자들의 월급이 몇십원씩 할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근(500g)에 인민페로 200여원을 받았는지라 우리는 구경만 할뿐 먹어볼수는 없었다.

건어물들은 해관을 건널때 그 수량이 제한되여있고 특히 말린낙지같은것은 대량반입이 금지되였으므로 여간만 애가 타는것이 아니였다. 그래서 마른명태꾸러미속에 숨겨오기도 했다.

마른명태는 천여마리씩 기계로 압착하서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궤짝처럼 생겼고 한짝에 100여킬로나 나갔다. 그래서 안을 검사하기가 힘들었는데 북조선 해관에서는 쇠꼬챙이로 안을 찔러보는 방법으로 안에 낙지를 숨겼는지여부를 검사했다. 낙지는 딱딱해서 쇠꼬챙이가 들어가지 않으므로 검사에 걸릴때도 있지만 쇠꼬챙이가 들어가는 방향으로 낙지를 눕여서 숨기면 걸릴 위험을 줄일수가 있었다.

도(道)가 한자높이이면 마(魔)는 한장높이로 큰다더니 그래서 나온 말이렸다.
냄비뚜껑같이 크도 두툼한데다가 새뽀얗게 가루가 돋은 낙지는 한근에 최고 20원가까이까지 받았는데 주로 잔칫상같은데나 놓을수 있는 귀한 물건이였다.

중국인들은 건어물을 별로 즐겨먹지 않는까닭으로 귀해서 북조선 관문이 열린뒤로부터는 연변에서 전량으로 건어물수입을 북조선에 의존하게 되였다.그래서 우리들의 식탁이 윤택해졌고...

우스운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어머니가 짐을 가지고 국경사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까나리 한자루를 두만강에 빠뜨렸다. 그것을 본 마음씨 좋은 조선청년이 서슴없이 강에 뛰여들어가 까나리자루를 건져서 어머니한테 도려주었다.

백배 사례하고 집까지 무사하게 돌아왔는데 물기가 많아서 팔수 있을지 걱정하던중 우리집에 들린 도매장사군이 까나리를 쥐여보더니 물었다.

<왜 이 까나리는 습기가 이리 많습니까?>
<잡은지 얼마안돼서 채 마르지 않아 그렇소.>

고지식한 장사군은 그말을 곧이듣고야 말았고 오히려 시중가보다 더 비싸게 값을 쳐주고 물좋은?까나리를 사갔다. 덕분에 어머니의 웃음집은 며칠내내 흔들거렸고.

북조선에 한번 갔다오면 최고로 1000여원씩 벌수 있었는데 그때 궁색했던 집안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어머니는 그돈으로 대학을 다니는 형의 뒷바라지도 해주고 장가가는데도 보태군 했다.

하지만 일년에 한번밖에 출국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자주 갈수는 없었고 얼마후에는 그것조차 쉽지를 않아서 북조선장사는 막을 내리게 되였다. 그때 나는 어려서 별 보탬이 안되였지만 북조선 장사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였다. 년로한 어머님께서 수백킬로에 달하는 짐짝들을 이끌고 국경선을 넘나들면서 혹시 짐을 분실할가봐..혹시 해관에서 압수당할가봐 노심초사하시며 동분서주했을것을 생각하니 이제야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큰형수님이 북조선을 다녀온사이에 몰라보게 큰 딸애가 엄마를 몰라보고 울음을 터뜨릴때 눈물짓던 큰형수님의 모습도 아렴풋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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