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새벽 백병전에선 수색나갓던 19명중에서 그와 오른쪽 다리가 날아간 신참이등병 한명만이 살아남앗다. 산적두목같은 외모지만 속마음은 비단 결이던 털보 박중사. 왼손잡이로 백발백중의 사격솜씨가 일품이던 짝뼈 길 하사. 총알이 폭우처럼 쏟아지는데 혼자 50미터를 포복으로 기여가 베트 콩벙커에 수류탄을 까넣엇던 독종 최상병 등 혈육같던 부하들은 아침해가 떠올랏을때는 팔다리가 날아가거나 아예 형체를 구별할수없는 핏덩어리로 변해잇엇다.
이주명 소위는 허벅지에 총탄한방을 맞고 피를흘리며 부하들을향해 달려 가다 빗맞은 총알이 철모를 때리는바람에 기절하고말앗다. 아침에 정신이 들고나서야 그는 부하들의 시체더미에 깔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졋다는걸 알게됏다. 그로선 남은인생을 무조건 감사하고 미안해하면서 살아야할 이 유가 충분햇다.
월남에서 귀환한뒤 전쟁영웅 대접을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햇지만 이주 명은 가슴한구석에 죄책감을 숨겨두고 살앗다. 베트콩을 잡는다는 이유로 멀쩡한 마을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든적도 잇엇다.
물론 명령에 따른것이엿다. 만일 다시 그당시로 돌아간다면. 이주명은 여 러번 그런질문을 해봣다. 대답은 언제나 똑같앗다. 군복을 입고잇는이상 다른선택을 하지는 못햇을거라고.
최과장은 간략하게 용건을 말한뒤 입을다물엇다. 자신의 상관이 말많은 정 보요원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걸 알고잇기 때문이다.
"해동일보가 어디까지 접근한것 같은가."
"확실치 않습니다. 기사로만봐선 기본팩트정도만 파악한것 같습니다. 하지 만 일단 사건이 보도된이상 뒤처리가 복잡할것 같습니다."
"언론담당 요원들을 풀어서 기사가 나가게된 배경을 체크하게. 그리고 우리 쪽의 조사는 어디까지 가잇지?"
"정변호사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합니다. 이번사건과 관련된것으로 보이는 살인청부조직 두군데를 추적하고 잇습니다. 머지않아 꼬리가 잡힐것으로 보입니다. X도 감시하고 잇지만 미동도 없습니다. 너무조용해서 오히려 이 상할 지경입니다."
이주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말을이엇다.
"8시에 회의를 할테니까 사건개요하고 지금까지 확인된 부분을 정리해 보 고하게. 민감한 사안이니까 우리쪽 요원들 보안에도 각별히 신경을쓰고."
이주명은 전화를 끊으며 국정원장에게 상황을 알려야할때가 됏다는 생각 을햇다. 그는 가운을 걸치고 아내의잠을 깨우지 않기위해 발걸음소리를 죽이며 서재로갓다. 창밖으로 여명이 터오고잇엇다. 그새벽빛을 타고 운 명의 수레바퀴가 천천히 굴러오는것만 같앗다.
군에잇을때는 세상을 잘몰랏다. 그러나 대령으로 예편하고 국정원에 몸을 담고난뒤 천하를 호령하던 상관들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는걸 수없이 목 격햇다.
지난대선때 전임원장은 야당총재엿던 지금의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정치공작을 총지휘햇다. 하지만 그는 정권이 바뀌자마자 쫓겨낫고 오래지 않아 직권남용.수뢰 등의 혐의로 구속됏다. 이주명은 그런판에 몸을담게 된걸 후회햇다. 평생을 군인으로 명예롭게 살고싶던 꿈은 깨진지 오래엿다. 그가속한 세계는 음지엿다. 그곳에서 진실과 정의는 언제나 승리란 자들만 이 누리는 특권이엿다.
'이제나의 차례가 온건가?'
그는혼자 중얼거렷다. 어느편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할것이다. 운명을걸고.
오전10시. 이주명은 대한민국에서 보안이 가장 철벽같은 방에 들어섯다. 널찍한 책상위에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침실로 직접 연결되는 두대의 녹색 전화기가 잇엇다.
그옆에놓인 대통령 비서실장. 한미연합사령관. 합참의장. 기무사 사령관 등에게 이어지는 핫라인 전화기들은 그방주인이 가진 권력의 무게를 상징 하는것 같앗다.
구경도 국정원장은 입을 굳게다문채 꼼짝하지않고 보고를 들엇다. 그의 얼굴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엇다. 눈빛도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웟다. 그럴 수록 부하들은 그를 어려워햇다.
"X가 관련됏을 가능성이 높단말이지?살인사건에.."
한동안의 정적을깨고 구원장이 되물엇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변호사의 실종에 X가 개입한게 거의 분명합 니다. 정변호사는 X의 비자금 관리를 해왓던것으로 보입니다. 둘사이에 서 갈등이 생겻고 정변호사는 살해됏을 가능성이 큽니다."
구원장의 고구마처럼 뾰족하게 튀여나온 대머리와 매부리코가 이날따라 번들거리는것 같앗다.
"이차장은 X가 비자금을 얼마나 조성햇다고 보시오?"
"정확하진 않지만 천억원은 될것으로 보고잇습니다."
구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지고 서성엿다. 이주명의 훤칠한 키때문에 맹꽁이배를 한 작달막한 구원장은 더욱 볼품없어 보엿다. 하지 만 그는 국정원이 중앙정보부이던 시절에 공채로 입사해 수없이많은 정 보전을 치러낸 백전노장이엿다.
"X가 정신이 나갓구먼. 그래 이차장. 어떻게 햇으면 좋겟소."
구원장이 물엇다. 이주명은 대답하지 않앗다. 답변을 듣기위해 질문한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잇기 때문이다. 구원장은 스스로에게 묻고잇는 것이 엿다.
"좀두고봅시다. 이차장. 당신이나나나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받은 사람 들이란걸 잊으면 안되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역시 정보기관이 정권에 봉사해선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잇소. 그러다가 조직도 망가뜨리고 자 기도망친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나많이 봐왓소. 하지만 이건 단순히 대 통령에게 누를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나라전체가 발칵 뒤집 힐수잇소."
구원장이 조용히 말햇다.
"시간을갖고 추이를 지켜봅시다. 당신이나나나 다 옷벗을 각오를하고 말이오."
이주명은 옷을벗는다는 말의의미가 무엇일지를 곱씹으며 천천히 고개 를 끄덕엿다.
"언론은 어떻게 될것같소?"
"해동일보가 먼저 치고나갓으니 신문.방송들 사이에서 속보경쟁이 벌어 질겁니다. 그과정에서 뭐가 터질지 알수없습니다. 해동일보에서 어디까 지 취재가 돼잇는지 확인중입니다."
"정에요원들을 뽑아서 이사건에 매달립시다. 우리가 개입하고 잇다는걸 야당이나 언론이알면 심각한 문제가 될수도 잇으니까 절대보안에 유의 하시오."
구원장은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앗다. '진실'과 '현실'중에서 구원장이 어느편에 서려는것인지 이주명은 알수가없엇다. 어쩌면 자기는 원장의 반대쪽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엇다. 그래서 몹시 두려웟다.
((그럼 사람죽이는 훈련이라도 받은놈들의 소행이라는거야?))
해동일보 편집국은 흥분으로 들떠잇엇다. 오랜만의 짜릿한 특종이엿다. 석간신문이 오히려 해동일보보다 더많은 지면을 할애햇다. 언론사에는 베스트 서비스의 친구들만 잇는건 아닌듯햇다. 방송사의 저녁뉴스도 마 찬가지엿다. 별다른 뉴스거리가 없다는것도 영향을 미쳣을것이다.
아침나절 화장실을 가다 마주친 변태룡 부국장은 민기를 아는체도 안햇 다. 하지만 오후에 다시만낫을때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어젯밤에 고 생햇다고 격려까지햇다. 처음엔 어리둥절햇다. 하지만 금방 속셈을 눈 치챗다. 나중에라도 자기가 기사나가는걸 반대햇다는 사실이 알려져 곤 란해질까봐 미리 선수를 치는게 분명햇다.
그날저녁 경찰기자들은 대부분 회사에 들어오지 않앗다. 실종된 정변호 사와 가족들. 그리고 베스트 서비스의 변호사들을 찾아 어딘가 헤매고 잇을게 뻔햇다.
"김선배. 이놈의 직업은 정말 골때려요."
밤11시가 넘어 다음날 뭘 취재해야 할지를놓고 골치를 앓고잇는데 경찰 기자 팀장인 노형대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문을 열엇다.
"김형. 나이거말야 사건현장에 가보는게 얼마만인줄 모르겟어. 요즘은 대 학생들 데모도 안하고 살인사건도 뜸해서 영 취재하는 재미가없어."
천씨의 별명은 쌕쌕이다. 왜소하고 얌전한 천씨는 취재현장에 갈때면 어 지간히 담이큰 젊은 경찰기자들조차도 천천히 가자고 통사정할 정도로 총알같이 차를몰앗다.
사건현장을 수십년간 쫓아다닌 그는 웬만한 기자들은 저리가라할 정도로 상황파악이 빨랏다. 현장에가면 신참 기자들에게 뭘 취재해야할지 슬쩍 일러줄 정도엿다.
신문사 배차실에 들어온지 30년이 넘엇고 술이 거나해지면 은퇴한 옛날 기자들과 함께 이리역 폭발사고나 대연각 호텔화재현장을 뛰여다니던 시절의 무용담을 신이나서 떠들어댓다.
민기와 후배들은 제보받은 현장주변을 한시간이 넘도록 샅샅이 뒤졋다. 이른새벽녘이라 오가는 차들도 거의없어 꼼꼼히 살펴봣지만 단서가 될 만한건 없엇다. 승용차바퀴에 여러번 깔려 우그러진 금테안경테 하나를 찾은게 전부엿다.
"김선배.허탕같은데요. 그제보가 사실이라고 해도 벌써 2주일이 넘엇고 비도몇번 왓엇잖아요. 스키드마크도 없고 핏자국이라도 남아잇으면 국 립과학수사연구소에 혈흔분석이라도 해달라겟지만."
송인기의 말에 민기는 힘이빠졋다. 제보는 구체적이엿지만 별도리가 없 엇다. 후배들과 막 철수준비를 할때엿다. 100미터쯤 떨어진 도로윗쪽 풀숲에서 왓다갓다하던 운전기사 천금수씨가 큰소리로 불럿다.
"김형!김형! 이리와봐."
천씨는 멀리서 뭔가를 흔들어댓다. 기자들은 일제히 천씨를향해 달려 갓다. 그가 서잇는곳은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언덕꼭대기인데 왼편으로 완만하게 휘여지는 커브길이엿다. 거기에선 양쪽방향에서 오는 차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왓다. 도로에서 강물까지의 높이는 20~30미터 정 도고 30도정도의 경사엿다.
"아니. 여기 가드레일이 구겨져잇잖아. 그래서 사고가 낫엇던것 같아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넥타이가 떨어져잇더라고."
민기는 초년병 기자시절 룸살롱주인 납치살인극을 취재햇던 기억이 떠 올랏다. 우연의 일치인가. 그때도 청평이엿다. 납치범들이 룸살롱주인 을 살해한뒤 승용차를 통째로 강물에 밀어넣엇던 것이다.
"너희들 여기서부터 저아래로 내려가면서 뭔가 흔적이 남아잇는지 찾아 봐. 자동차바퀴 흔적같은거 말이야. 미끄러지지않게 조심하고."
후배들은 잠깐동안 멍청히 잇더니 비로소 감이 잡힌다는듯 후닥닥 경사 진 풀숲으로 내려갓다. 3~4분이나 지낫을까.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나왓 다.
"김선배 여기뭔가 잇어요. 내려와 보세요."
분명히 승용차 바퀴자국이엿다. 몇차례 내린비로 거의 흔적이 지워지긴 햇지만 주변의 나지막한 관목들이 일정하게 열을지어 꺾여잇는걸로 봐 서 차가 그위로 지나간게 분명해보엿다. 민기는 거세게 흐르는 시퍼런 물살을 뚫어지게 쳐다봣다.
"김형 뭐야. 뭘 찾은거야?"
천씨가 바짝 다가섯다. 민기는 천씨의 어깨에 팔을두르며 고개를 끄덕엿 다.
"그런것 같네요. 역시 우리쌕쌕이 형님은 기자로 특채해야 한다니까."
기자들은 겸연쩍어하는 천씨를 가운데두고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렷다.
오후4시. 강물속에서 정변호사의 시체가 인양됏다. 잠수부들은 안전벨트 를 칼로 끊어낸뒤 단단히 묶여잇던 정변호사를 건져냇다.
경찰은 인양한 시체를 현장에서 200~300미터쯤 떨어진 모래톱에 올려 놓앗다. 감식반원들은 정변호사의 입속에서 부러진 이빨조각들을 끄집 어냇다. 해동일보 사진기자 한명이 시체근처에 접근하기위해 경찰과 옥 신각신하는 모습이 보엿다. 민기는 언덕위에서서 물살빠른 강물속으로 부지런히 풍덩거리며 자맥질하는 잠수부들을 지켜봣다.
"도대체 어떻게 정변호사가 여기 수장돼잇는걸 알앗어?"
김반장이 다가와 물엇다.
"정말 잔인하더구먼. 머리통을 부숴놧으면 됏지. 그것도 모자라 얼마나 두드려팻는지 온몸이 성한데가 없더라고. 그런데 정말 어떻게 알앗어?"
그래도 민기는 대꾸하지 않앗다. 그는혼자 수수께끼를 풀고잇엇다.
"형님. 난 이해할수 없는게 잇어요."
김반장이 민기를 바라봣다.
"베스트 서비스의 경비원들이 죽은게 새벽두세시 쯤이죠. 한데 정변호 사도 같은날 비슷한 시간에 살해됏단 말입니다."
민기가 강물을 노려보며 말햇다.
"정변호사가 그날 죽엇는지. 다른날 죽엇는지 어떻게알아. 시체부검을 해봐도 너무오래돼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것 같은데."
김반장이 코웃음을 쳣다.
"그게아니라 베스트 서비스에 강도가 침입햇던날 새벽에 정변호사가 여기서 몇명에게 끌려가는걸 목격한 사람이 잇단말입니다."
김반장의 눈이 휘둥그레졋다.
"뭐라고? 그게정말이야? 아니 그런게 잇으면 우리한테 얘길해줘야지."
"제보전화엿어요. 그래서 여기서 정변호사가 살해된걸 알게된거고. 제보자는 곧바로 전화를 끊엇는데 이 사건과는 관련없는 단순목격자 가 분명한것 같더라고요."
김반장은 다잡은 고기라도 놓친듯 입맛을 쩝쩝다셧다.
"그렇다면 결국 같은시간에 세명이 살해된겁니다. 경비원 두명은 테레 란로에 잇는 로펌빌딩 안이엿고 정변호사는 여기 청평에서.."
골똘히 생각하던 김반장이 신음소리를 냇다.
"그렇지. 경비원 두명을 죽인 범인은 한놈일수 잇으니까 같은수법을 사용한게 이해가가지. 그런데 여기서 정변호사를 죽인범인은 분명히 다른놈인데 어떻게 살해수법이 똑같으냐 이거아냐."
민기가 고개를 끄덕엿다.
"누군가 여러명에게 동시에 살인청부를 시켯다고 칩시다. 그래도 이 해가 안가잖아요. 형님도 알다시피 살인수법은 지문처럼 제각각 다른 데 이렇게 정수리의 똑같은 부위를 자로잰듯이 찍어서 죽이는게 가능 한걸까?"
"그럼 김기자 얘기는뭐야. 사람죽이는걸 훈련이라도 받은놈들의 소행 이라는거야?"
김반장은 민기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엇다.
"불가능해. 내가아는한 우리나라에 그런애들은 없어. 아마 외국에도 없을거야. 살인청부업자라는게 다 도쿠다이로 뛰는거지 젠장.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자객조직도 아니고."
민기도 인정할수밖에 없엇다. 사회의 밑바닥도 취재해봣고 조직폭력 배들 계보도 꿰고잇지만 집단적으로 살인을 훈련하는 조직을 만드는 건 불가능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