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서울의 만가 2

3학년2반 | 2022.01.31 07:42:49 댓글: 0 조회: 87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059
10.
김 교수 수사본부에서 최초의 수사 회의가 열리고 있을 그 시간에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는 포항에서 올라온 마지막 고속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굴러들어오고 있었다.
밤 열 시가 지난 시각 이었다.
이윽고 버스가 멎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김종화는 맨 마지막에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그는 짐 칸에서 배낭을 찾아 어깨에 둘러메고 택시 정류장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중키에 약간 마른 듯이 보이는 중년이었다.
얼굴에는 검은 테의 안경이 무거운 듯 걸려 있었다.
등에 배낭을 지고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행에서 돌아오는 품이 역력했다.
그는 지금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동료 학자들과 울릉도에 곤충채집을 갔었다.
그는 유명한 곤충학자로서 S대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그는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내는 그 점을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했지만 그의 가정은 단란하고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깨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아내로부터 외동딸인 장미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나흘 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태풍 때문에 배가 뜨지 않는 바람에 돌아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느 사람 같으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을 것이겠지만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여관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바람이 잦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딸이 실종되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걸 때면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몰래 전화를 걸곤 했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차가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그는 거기에 냉정하게 대처할 줄을 알았다.
물론 그라고 감정이 없을 리 없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딸의 실종이 거의 확실해지자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조금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울릉도에서 태풍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태풍이 멎고 배가 다니게 되자, 그는 일행과 헤어져 혼자 울릉도를 떠났다.
사람들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갑자기 집에 볼일이 생겨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떠나왔던 것이다.
공중 전화 부스 앞에 이르자 그는 배낭을 내려놓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에 드러난 그의 옆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그는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처제가 그의 전화를 받았다.
처제가 놀란 목소리로 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야, 이제 막 도착했어."
"이제 오시면 어떡해요?"
아내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장미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식 없어요."
"알았어, 지금 곧 갈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스를 나서는 그의 움직임은 사랑하는 딸을 잃은 사람답지 않게 몹시도 조용해 보였다.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는 빈 택시들이 많았다.
그가 집에 도착한 것은 열한 시가 지나서였다.
아내와 처제가 밖에까지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굳은 표정들이었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를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서가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안겨 들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피하면서 아내를 밀어냈다.
"좀 씻어야겠어."
그는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장미의 방은 깨끗이 정돈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 보았다.
그의 시선이 딸의 사진 앞에 머물렀다.
귀여운 딸은 그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다.
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우두커니 딸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그는 방을 나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아내가 차려 주는 밥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몇 술 뜨다가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이야기 해봐. 어떻게 해서 장미가 그렇게 됐는지 이야기 좀 해보란 말이야."
그는 밥상을 물리고 아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양미화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울먹이며 이야기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난 김 교수는 몸을 일으켰다.
점퍼로 바꾸어 입고 밖으로 나가는 그를 아내가 붙들었다.
"아니, 이 시간에 어디 가실려구요?"
"경찰서에 가봐야겠어."
"요 아래 파출소에 수사본부가 설치됐어요."
처제가 따라 나서며 말했다.
수사본부라는 말에 그는 멈칫했다.
"처젠 들어가 있어."
그는 처제를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혼자 수사본부를 찾아갔다.
수사본부 안에는 수사요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막 수사회의를 끝내고 난 참이었다.
"실례합니다."
문을 밀고 들어선 중년 사내에게 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수사본부를 맡고 계시는 분을 좀 만나고 싶습니다만……."
그는 형사들을 둘러보며 점잖게 말했다.
"네, 제가 책임자입니다만……."
여우는 의자에 앉아 상체를 잔뜩 뒤로 젖힌 채 피로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상체를 앞으로 하면서 방금 막 들어선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우는 첫눈에도 상대방이 심상치 않은 사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저…… 김장미의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사나이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형사들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러십니까!"
여우는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울릉도에서 발이 묶여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 오셨군요."
"네, 오늘 아침에야 겨우 바람이 자는 바람에 조금 전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앉으시죠."
여우는 김 교수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우가 먼저 그에게 명함을 건네 주자 김 교수는 자기는 명함을 가진 게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받았다.
김 교수는 수사본부까지 설치되고 수사요원들이 밤 늦도록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자못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 애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실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아직 찾아내지를 못했습니다."
"찾아낼 가망은 있습니까?"
"그럼요, 가망이야 있죠. 영등포 일대에서 실종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여우는 말끝을 흐리며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피우지 않습니다."
종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까지의 경위를 좀 들어 볼 수 없을까요?"
"네, 좋습니다."
여봉우는 지금까지의 수사 경위를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친절한 설명이었다.
그는 비밀을 지켜 줄 것을 약속받은 다음 개인 택시 운전사 유기태가 피살된 것까지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장미 양의 실종사건과 이 살인사건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건은 의외로 살인사건으로까지 비약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이 사건은 매우 심각합니다."
"그래서 수사본부까지 설치됐군요."
김 교수는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여우는 긴장한 얼굴로 곤충학자를 바라보았다.
학자답게 깨끗한 인상이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선량한 빛을 띠고 있었고, 얼굴은 세파에 시달리지 않은 고결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수사의 진전 상황을 앞으로 저한테 숨기지 말고 좀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 교수가 갑자기 입을 다무는 바람에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한참 동안 흘렀다.
여우는 그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기분이었다.
한참 만에 김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신매매 조직에 끌려갔다면 그 애는 이미 버린 몸이겠군요."
"그런 것보다는 장미 양을 찾는 게 급선무 아닙니까?"
"찾아봐야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분노의 빛이 얼굴에 서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여우는 얼핏 볼 수 있었다.
"저한테도 자료를 좀 주시겠습니까? 몽타주 같은 것 말입니다."
"아, 네. 드리죠."
여우는 서랍을 열고 몽타주를 몇 장 꺼내 김 교수에게 주었다.
"이 여자가 우리 애를 유괴했단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김 교수는 한참 동안 뚫어지게 몽타주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것을 곱게 접어 안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장미 양의 아버지가 밖으로 사라지자 형사들은 그에 대한 인물평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그가 딸을 유괴당한 사람 같지 않게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학자라 그런지 너무 사람이 침착하고 조용한데요."
여봉우는 손을 흔들었다.
"난 일찍이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은 처음 봤어."
"아니, 그 사람이 분노에 차 있었다구요?"
"응,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감정도 비추지 않고 있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의 몸 전체가 불덩이로 싸여 있는 것 같았어. 장미를 유괴한 범인에 대한 분노 말이야. 그 눈빛이 증오에 차 있었어. 얼핏 스쳐 갔지만 말이야. 그런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 주먹을 부르쥐고 울부짖는 사람보다는 속으로 그렇게 분노를 삭이는 사람이 정말 무서운 거야. 난 그 사람이 무슨 짓인가 할 것 같아 겁이 나는데."
"얌전한 대학교수가 화를 내본들 뭐하겠습니까?"
제일 나이 많은 형사의 말이었다.
김종화는 어두운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거기서 집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 갔다.
하늘에는 별빛 하나 없이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차도를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었다.
그는 방향도 없이 그저 막연히 걸어가기만 했다.
걷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가 한 시간쯤 걸었을 때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대로 내처 걸어갔다.
잠시 후 마침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똑같은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는 옷 속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옷은 비로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에서도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밤에도 어디선가 울고 있을 딸만을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역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귀여운 딸을 생각하면 방 안에 누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딸을 잃은 채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경찰에 모든 것을 의뢰하고 싶지는 않았다.
경찰이 꼭 장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다.
어느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순경이 뛰어나와 그를 불렀다.
"여보! 여보!"
그러나 그는 모른 체하고 그대로 걸어갔다.
"여보! 거시 서요! 여보시오!"
순경은 뛰어와 그의 팔을 낚아챘다.
"이리 오세요. 좀 봅시다."
"왜 그럽니까?"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불빛에 드러난 그의 눈을 보고 순경은 멈칫했다.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그는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그렇다고 물러서면 경찰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그를 붙들고 파출소 쪽으로 끌었다.
"잠깐 와봐요."
종화는 순경의 팔을 뿌리친 다음 파출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 안에 있던 순경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방범 대원들도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 술 많이 했구만."
몸집이 큰 순경이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 신분증 좀 봅시다!"
그는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증명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에 놔두고 나왔습니다."
"집에 놔두고 왔다구요?"
그들은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집이 어디요?"
그는 집 주소를 말했다.
"직업이 뭐요?"
"대학에 나가고 있습니다."
"대학에? 어느 대학에요?"
"S대입니다."
"그럼 S대 교수란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S대 교수가 밤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비를 맞으며 돌아다닌단 말이오? 애들처럼?"
그는 할 말이 없었다.
S대 교수라고 비 맞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결코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의 실소를 보고 순경들은 약이 오른 것 같았다.
그는 오래 걸었기 때문에 다리가 아팠다.
그래서 긴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봐요, 누가 거기 앉으라고 그랬어요?"
그는 그대로 앉은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꾸도 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자 순경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기들끼리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당신 이름이 뭐죠?"
"김종화라고 합니다."
"대학에서 뭘 가르쳐요?"
"곤충학입니다."
"그럼 뭐, 나비 같은 거 그런 것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당신 술 취했지?"
"아뇨, 술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방범 대원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입가에 코를 대고 흥흥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술 냄새는 나지 않는데요."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창 밖에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빗물이 창문에 떨어지고 있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전화 있어요?"
"네, 있습니다."
"몇 번이에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순경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말할 수 없다는 거요?"
"당신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걸 테니까 말입니다. 집사람이 놀라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 봤나."
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정말 대학교수요?"
그는 그 질문을 던진 순경을 한번 힐끗 돌아본 다음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학교로 전화를 걸어 봐."
11.
교수와 소녀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까요?"
순경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은 다음 그 중 한 명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마 S대로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 전화를 걸던 순경은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전화를 안 받는데요."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 리가 있나."
"주민등록증을 휴대하지 않으면 즉결에 넘어간다는 거, 알아요 몰라요?"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해. 호주머니에 있는 것 전부 꺼내 봐요."
김종화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 놓았다.
방범 대원이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몸을 만지자 그는 격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 대지 말아요!"
"이 양반이…… 가만 있어!"
방범 대원은 눈을 부라리며 다시 그의 몸에 손을 갖다 댔다.
이윽고 그의 안주머니에서 접혀 있는 종이 몇 장이 나왔고, 순경이 받아서 펴보았다.
"아니 이건…… 몽타주 아냐?"
그들은 서랍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그것과 대조해 보았다.
그것들은 똑같은 몽타주였다.
그들은 더욱 의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어떻게 해서 이런 걸 가지고 있지?"
"얻었습니다."
"어디서?"
"수사본부에서요."
"수사본부? 당신이 수사본부하고 무슨 관계지?"
그는 대답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 봐요. 이것 정말 수사본부에서 얻은 거요?"
"네, 그렇다니까요."
"이 사람 아무래도 수상해. 잘 감시해."
김 교수의 주머니에서 몽타주가 나오는 바람에 파출소 안에는 돌연 긴장이 감돌았다.
그들은 비에 흠씬 젖어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들어온 이 사나이가 혹시 그 사건에 관계가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수사본부죠? 여기 K동 파출소인데요,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떤 중년 남잔데 유괴범 몽타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은 김종화라고 하고 S대 교수라고 합니다. 혹시 그런 사람 아십니까? 거기서 몽타주를 얻었다고 하는데. …… 네? 아, 이리 오시겠다구요? …… 네네, 아 여기는 K동 파출소입니다. …… 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걸고 난 순경은 의기양양해서 종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대답을 믿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를 그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십 분쯤 지나 여봉우가 지 형사와 함께 파출소에 나타났다.
"아니, 김 교수님이 웬일이십니까?"
여우는 놀란 표정으로 김 교수와 순경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그 파출소 안에 있던 순경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럼 정말 S대 교수님이신가요?"
"사람을 볼 줄 알아야지."
여봉우는 순경들을 나무랐다.
"이분은 바로 실종된 김장미 양의 부친 되는 분이야."
"아아, 그래요."
그는 잠시 비에 흠씬 젖은 채 앉아 있는 김 교수를 바라보다가,
"가시죠, 집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김종화는 잠자코 일어나 앞장서서 밖으로 나왔다.
"차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여우가 뒤따라 나오며 말을 붙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가겠습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그러나 김 교수는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자네 먼저 가봐."
여우는 지 형사에게 차를 맡기고는 우산을 들고 김 교수 뒤를 쫓아갔다.
그는 김 교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를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비 오는 밤중에 그를 혼자 가게 내버려둘 수도 없어 그는 좀 떨어져서 계속 따라갔다.
김종화는 한참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우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십시오."
"아, 나도 괜찮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여우도 우산을 접어 버렸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밤길을 걸었다.
"지금까지의 수사 기록을 전부 좀 볼 수 없을까요?"
"그건 함부로 보여 드리는 게 아니지만 특별히 부탁하시는 거니까 내일 전부 복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제 부탁도 하나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비 맞지 말고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여우는 지나가는 빈 택시를 세웠다.
그들은 함께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여우는 약속대로 김종화에게 그 동안의 수사 기록을 모두 복사하여 건네 주었다.
종화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 중요한 부분에 붉은 줄을 그어 가면서 꼼꼼히 읽어 나갔다.
그렇게 몇 번이고 읽은 다음 그 나름대로 하나의 윤곽을 머리 속에 그려 넣었다.
그는 몽타주를 별로 믿지 않았다.
그것으로 그 유괴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잘 만든 몽타주라 해도 실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그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사진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몽타주는 너무 막연하다.
더구나 그 혼자서 그것을 가지고 악귀(그는 그 유괴범을 악귀라고 생각했다.)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실로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악귀한테 장미가 유괴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택시 운전사 유기태 씨가 살해됨으로써 이제 동희 양 혼자 남게 되었다.
김 교수는 동희를 찾아갔다.
먼저 전화를 걸고 나서 갔기 때문에 동희와 그녀의 어머니는 밖에까지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희는 가끔 집에 놀러 오곤 했기 때문에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어머니는 처음이었다.
그가 동희를 찾아간 것은 장미가 유괴될 때의 상황을 동희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동희의 어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을 사양하고 그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동희를 데리고 동네 뒤에 있는 야산으로 올라 갔다.
동희네는 시 변두리에 조성된 신흥 주택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 주위에는 나지막한 야산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김 교수와 동희는 야산의 맨 위로 올라갔다.
산에는 녹음이 짙게 우거져 있었다.
그들은 햇빛을 피해 아카시아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바람 한 점 없었기 때문에 날씨는 무더웠다.
장미 이야기를 꺼내자 동희는 눈물부터 흘렸다.
자기가 함께 따라 갔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김 교수는 동희의 어깨를 가만히 껴안아 주면서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난 그걸 따지려고 온 게 아니야. 난 그때의 일을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네가 유일한 목격자이니까 말이야."
그는 택시 운전사 유기태 씨가 살해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린 여학생에게 그런 말을 해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무지개빛 꿈을 깨뜨려 주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가 이 세상을 사악한 것으로만 본다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동희는 눈물을 닦고 나서 그날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장미 아빠한테 이야기해 주었다.
벌써 수차례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게 한 말이었지만 장미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녀는 전혀 새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 교수는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중간중간에 질문을 던졌고, 수첩에다 열심히 메모했다.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묻기도 했고, 동희가 전혀 생각지도 않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곤 해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묻는 것하고는 사뭇 다르게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마치 그림을 그리되 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정교하게 그리는 화가처럼 유괴 당시의 상황을 언어로 사실화시키려고 기를 썼다.
두 시간 넘게 그렇게 동희를 붙들고 집요하게 이것저것 캐물은 다음, 그는 그녀를 데리고 딸이 유괴되었던 장소에까지 가보았다.
그는 딸이 마지막으로 동희와 함께 들렀던 학교 앞 제과점에도 들어가 보았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 여자를 보면 알아볼 수 있겠니?"
"네, 알아볼 수 있어요."
동희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 여자를 빨리 찾아야겠구나."
"어디 가서 찾죠?"
"글쎄 말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혹시 말이다, 우연히 길에서 그 여자를 보게 되면 절대 아는 체 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동희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악마다. 무서운 여자니까 아는 체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럼 모른 체하고 보내나요?"
동희가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경찰에 신고하든가 해. 그리고 우리 집으로 바로 연락해."
그는 땀을 몹시 흘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 등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동희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장미가 다니던 K여중 앞으로 갔다.
정문을 통해서 보이는 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방학중이라 학생들은 학교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서성거렸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에 그는 은행을 찾아가 행동에 필요한 충분한 돈을 찾았다.
그러고 나서 택시를 타고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달리는 동안 그의 마음 속에는 딸을 자신의 손으로 찾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어느새 돌처럼 굳어 있었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택시를 내린 그는 H은행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H은행 영등포 지점 앞에 이른 그는 거기서부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뙤약볕 아래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연방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눈이 몹시 쓰렸다.
땀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면서 그는 로터리를 오가는 차량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은 거리에 오가는 차량들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사라져 버린 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미는 그의 외동딸이었다.
그의 아내는 장미를 낳고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자궁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고 자궁을 들어 냈기 때문에 더 이상 임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외동딸에 대한 그들 부부의 애정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특히 그는 아내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딸에게 진한 애정을 쏟아 왔던 것이다.
그런 딸이 유괴당했으니 그로서는 모든 희망을 일시에 상실해 버린 것 같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갈 길을 잃은 미아처럼 한 시간이 넘도록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실 그는 딸을 자신의 손으로 찾고야 말겠다는 결심만 서 있었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난 며칠 사이에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았다.
늙지 않은 것이 있다면 두 눈뿐인 것 같았다.
두 눈은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본래의 그의 두 눈은 언제나 부드럽고 선량한 빛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두 눈에는 그러한 빛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을 거부하는 듯한 증오에 찬 눈만이 번득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낡은 여관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얼른 보기에도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골목이었다.
사창가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골목 안쪽에 화장을 짙게 한 젊은 여자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그곳이 적선지대라는 것쯤은 짐작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벌떼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들이 양쪽에서 그의 팔짱을 끼고 잡아 끌었다.
"아저씨, 놀다 가세요."
"아저씨, 참 멋지게 생겼다."
"싸게 해드릴게, 저 따라가요."
창녀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하면서 그를 끌고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모두가 어려 보이는 얼굴들뿐이었다.
"이러지 마."
그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창녀들은 그를 더욱 억세게 끌어당겼다.
"아저씨 괜히 그러시네. 멋지게 해드릴게 가요."
"이러지 말라니까."
"어머나, 이 아저씨 왜 이렇게 빼실까."
"정말 이러지 말라니까!"
그는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런 것에는 이미 익숙해 있는 듯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그는 창녀들로부터 풀려날 수가 있었다.
그가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를 고수하자 그녀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그를 놓아 주었다.
그는 그녀들을 조금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천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직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의 딸도 사창가에서 그녀들처럼 손님을 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창녀들에게 시달리며 사창가를 돌아다닌다는 것이 끔찍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그 모든 고역을 참고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찾았다.
그러나 날이 저물 때까지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끝내 장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땀에 후줄근히 젖은 모습으로 사창가를 나온 그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 소식 없어?"
"없어요. 지금 어디 계시는 거예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는 아내에게 오늘 밤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 왜요?"
아내는 놀라서 물었다.
그리고 울먹이는 소리로 제발 집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내일 다시 전화 걸게."
그는 무뚝뚝하게 말한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미가 없는 집에 그는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장미가 없는 집에 들어가 어떻게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지금 장미가 겪고 있을 고통을 함께 겪고 싶었다.
그는 사창가의 여관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 때 같으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몹시 낡고 불결해 보이는 여인숙을 찾아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열기가 확 끼쳐 왔다.
그는 곧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곳에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지금 장미가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장미만 찾을 수 있다면 무슨 고생인들 못 하겠는가.
그는 방으로 들어가 드러누웠다.
창문 하나 없는 답답한 방이었다.
옆방과는 판자로 가려져 있어서 조그만 소리까지도 뚜렷이 들려 오고 있었다.
양쪽 방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모두 달랐다.
한쪽 방에서는 취객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유행가를 부르고 있었다.
노랫소리 사이사이로 여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아니,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무슨 사람이 이래? 나 참, 기가 막혀서……."
"너는 허는 것 지겹지도 않냐? 이것아, 하루 종일 허고도 또 허고 싶냐? 에라이, 잡것아!"
"이 양반이, 왜 사람을 툭툭 치고 야단이야!"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었나…… 남북이…… 가로막혀…… 남북이 가로막혀……."
"시끄럽다구요!"
"앗따, 그년! 귀청 떨어지겄네."
다른 방에서는 어린 여자의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아마 창녀인 듯한데 남자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듯싶었다.
어린 창녀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데 반해 남자는 무자비하게 그녀를 찍어대고 있는 듯했다.
창녀는 고통을 호소하다 못해 울고 있었고, 판자벽은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김 교수는 벌떡 일어섰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지금 저처럼 어느 무자비한 남자한테 참혹하게 짓밟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판자벽을 긁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온몸을 마구 떨었다.
얼마 후 무릎을 천천히 꺾으면서 그는 벽에다 뺨을 비벼댔다.
12.
소녀의 눈물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김 교수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문을 열자 포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고개를 디밀었다.
웃고 있던 얼굴이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충혈된 그의 눈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웃으며 말을 건다.
"아가씨 필요하지 않으세요?"
은근한 목소리였다.
김 교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적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그녀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물러가려고 했다.
김 교수는 문을 닫으려다 말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들어오시죠."
그의 얼굴에서 적대감이 사라졌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가씨 불러 줄까요?"
"네, 하나 불러 주십시오."
그는 자신이 볼품 없는 초라한 남자로 보일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세계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어린애 불러 줄까요?"
"몇 살짜리인데요?"
"열다섯 살밖에 안 됐어요. 온 지 이틀밖에 안 됐어요. 어린애가 좋잖아요. 나이 든 이들은 어린애가 싱싱하고 좋지요. 늙은 것들은……."
"좀 봅시다."
"그 대신 좀 비싸요."
"얼맙니까?"
"긴 밤은 오만 원…… 잠깐 재미만 보실려면 삼 만 원……."
포주는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쉴새없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파악이 안 되는지 계속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오만 원을 내놓았다.
포주가 나가고 나자 김 교수는 앉아서 차분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리석게도 그는 자신이 부른 어린 창녀가 장미이기를 바랐다.
문이 열리고 창녀가 들어왔다.
삐쩍 마른 나이 어린 소녀였다.
포주는 열다섯 살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더 어린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말라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소녀다운 귀여움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공포의 빛만 가득했다.
머리는 단발머리였다.
중학교 1학년쯤 됐을까.
방 안으로 들어선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가 가엾게 떨리고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
그가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는 바르르 떨었다.
"무서워하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소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 교수는 장미이기를 바랐던 자신의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담배 하나 사다 줄래?"
그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소녀 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소녀는 지폐를 집어 들더니 처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담배…… ?"
"아, 아무거나 사다 줘."
겁에 질린 소녀는 움직임이 몹시 조심스럽고 불안해 보였다.
나갔다 들어온 그녀는 그 앞에 거스름돈 오백 원과 함께 담배 한 갑을 내놓았다.
그는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는 못 피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몇 모금 빨아대자 가슴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소녀는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이쪽에서 말을 걸거나 손을 대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 있을 것 같았다.
"편히 앉아. 무서워할 것 하나도 없어. 몇 살이지?"
그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린 채 앉아 있었다.
"집은 어디니? 부모님이 계신 집 말이야?"
소녀는 맞잡고 있던 두 손을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런 데 왔니?"
그는 소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녀는 벙어리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말을 해봐. 그러고 있지 말고 말 좀 해봐."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갑자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그녀는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가서 손을 대자 그녀는 와들와들 떨어댔다.
"무서워하지 마. 난 그런 거 하려고 온 사람이 아니니까 무서워 하지 마."
그녀는 남자에 대해 병적일 정도로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굴었으면 저 지경이 됐을까 하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이런 애를 창녀로 팔아먹고 이용하는 자들 모두를 죽이고 싶다.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다.
그는 살기로 얼굴이 뒤틀렸다.
법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코웃음이 나왔다.
그는 처음으로 법이라는 것을 생각했고 그것을 비웃었다.
"자, 울지 말고 이 사진을 좀 봐."
그는 소녀가 놀라지 않게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소녀는 연방 눈물을 닦아 내며 사진에 시선을 던졌다.
김 교수는 그녀가 자세히 볼 수 있게 장미의 사진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이 애 본 적 없니?"
소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세히 봐. 본 적이 있을 거야."
소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아. 그럼 이 여자 본 적 있니?"
그는 두 장의 몽타주를 꺼내 보였다.
소녀는 여전히 머리를 흔들었다.
김 교수는 한숨을 내쉬며 사진과 몽타주를 도로 주머니 속에 간직했다.
그리고 두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장미의 사진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것을 소녀의 코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나는 이 애를 찾으러 왔어. 이 애는 내 딸이야."
그 말에 소녀도 비로소 멈칫하는 것 같았다.
반응이 있자 그는 소녀 옆으로 가까이 다가앉았다.
"어디 가면 내 딸을 찾을 수 있겠니?"
소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누구한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를 수밖에 없으리라.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데 들어왔니?"
그녀의 머리가 다시 밑으로 떨어졌다.
"잡혀 왔어요."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잡혀 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떤 남자가……."
소녀는 더 이상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캐물었지만 한 번 다물어진 입은 좀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니?"
그 말에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계시니?"
그녀는 울면서 끄덕였다.
"서울에 계시니?"
그녀는 계속 끄덕였다.
"어떻게 해서 이런 데 끌려 왔는지 말해 봐. 난 너를 여기서 빼내 주고 싶단 말이야. 네가 말만 잘하면 집에 보내 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게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도와 주겠니?"
그녀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나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학교 갔다 오다가 길에서 돈을 주웠는데…… 그걸로 빵을 사먹었는데…… 어떤 어른이 따라와서 자기 돈이라고 내놓으라고 했어요……. 없다고 하니까 도둑년이라고 하면서 뺨을 때리고 파출소로 끌고 가려고 해서…… 그래서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파출소에는 안 가기로 하고 여기에 끌려와서…… 처음에는 다른 집에 있다가 이 집으로 온 건 며칠 안 됐어요……."
말하는 것으로 봐서 똑똑한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겁에 질린 탓도 있지만 총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 아이에 비해서 장미는 얼마나 총명한 아이인가.
그는 장미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빠져 나가면 될 거 아니야? 네가 잡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아?"
"안 그래요. 아줌마 말이 저를 백만 원에 샀대요. 그러니까 빚을 갚아야 한대요. 빚을 갚기 전에는 나갈 수가 없어요."
"집에 연락해서 돈을 가져오게 하면 될 거 아니야?"
"안 돼요. 집에는 연락하지 못하게 해요."
"백만 원을 갚아야 나갈 수 있고, 집에는 연락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어?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너를 여기다 붙잡아 두려고 그러는 거구나? 갖은 이유를 다 붙여서 말이야."
"네, 그런가 봐요."
어린 창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 같은 시대에, 인권이 최대로 보장되어야 할 이 시대에 이와 같은 인육 시장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인간의 사악함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온갖 세상사에 눈을 감은 채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해 온 자신이 왠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장미가 유괴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이런 데 눈 하나 돌리지 않았을 게 아닌가.
"앞으로 어떡할래?"
"모르겠어요."
그는 소녀가 얼마 가지 못해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몸으로 무지막지한 남자들의 배설을 과연 얼마나 받아 낼 수 있겠는가.
"도망치면 될 것 아니야?"
소녀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거야? 몰래 빠져 나가면 될 거 아니야?"
"다 지키고 있어요. 남자들이 다 지키고 있어요. 한 번 도망치다가 붙잡혀서 혼났어요."
"어떻게 혼났니?"
소녀는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입을 쭈빗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김 교수는 소녀를 가만히 껴안아 주었다.
겁에 질려 그때까지 그를 경계하던 소녀는 그의 가슴에 와락 안겨 울음을 삼켰다.
김 교수는 소녀가 보여 주는 상처를 보았다.
겨드랑 밑에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여기를 담뱃불로 막 지졌어요. 죽는 줄 알았어요. 한 번만 더 그러면 손톱을 뽑는대요. 어떤 애는 귀를 찢었어요."
소녀는 공포에 질려 울음을 삼켰다.
"너 학생이니?"
"네, 중학교에 다녀요."
소녀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나이는 열네 살.
그러니까 열네 살짜리 창녀인 셈이었다.
이런 아이를 붙잡아다가 창녀로 이용해 먹는 인간들은 과연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악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도 삶의 목적일 수 있을까.
소녀의 아버지는 동사무소에 나가고 있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소녀는 맏딸로 그 밑에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벌어 오는 박봉으로 네 식구는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란하고 행복한 집안이었다.
소녀의 말로 비추어 보건대 그런 것 같았다.
소녀의 아버지 이름은 김창수라고 했다.
소녀의 이름은 김수미였다.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까 그대로 여기서 자거라. 날이 새는 대로 너를 여기서 빼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 여기서 나가면 안 돼. 알았지?"
소녀는 눈물을 거두고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도 너만한 딸이 있다. 중학생인데 너보다 두 살이 많은 열여섯 살이지. 그런데 방학이 시작되던 날 갑자기 실종됐어. 어떤 여자를 따라서 이 부근에 끌려온 것까지는 알아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종적을 찾을 수가 없어."
소녀와 함께 자리에 누웠을 때 김 교수는 방 안의 불을 끄고 나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창문 하나 없었기 때문에 좁은 방 안은 몹시 무더웠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못 피우는 담배를 피우면서 중얼거리듯 계속 이야기했다.
"내 딸애 이름은 장미란다. 김장미라고 부르지. 나한테는 그 애 하나뿐이야. 그 애는 내 사랑이었고 희망이었지. 그 아이가 없는 가정은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그 애를 구해 내지 못하면 나는 아빠 된 도리를 못 하는 거지. 그 애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전적으로 내 탓이야. 나한테 책임이 있어. 장미가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어. 나는 그 애한테 큰 죄를 지었어. 그 애를 보호해야 할 아빠로서 그 의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겁고 끈끈한 액체가 눈꼬리를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장미는 곧잘 자기 방에서 자다가 베개를 들고 그의 곁으로 달려오곤 했다.
방으로 뛰어들어와서는 언제나 엄마가 아닌 아빠 곁으로 파고드는 것이어서 제 엄마한테 곧잘 꾸중을 듣고는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딸애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장미를 사랑하자 아내는 질투심 비슷한 감정까지 보일 정도였다.
장미와 함께 잘 때면 그는 곧잘 딸애의 손을 잡아 주곤 했다.
장미는 아빠의 손을 잡고서야 잠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 딸애가 인육시장에 끌려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자들의 배설물을 받아 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분노로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비통한 감정에 그는 숨쉬기조차 불편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김 교수는 사창가를 가만히 빠져 나왔다.
수미한테는 다른 데 가지 말고 방 안에 있으라고 일러 놓고 그는 큰길로 나와 공중 전화를 찾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힘으로는 수미를 빼내 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수사본부에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다행히 여봉우 반장은 수사본부에 있었다.
김 교수가 지난 밤에 사창가에서 지낸 것을 알고 여우는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다.
김 교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김수미 양을 구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기다리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여우는 두말하지 않고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사실 그것은 경찰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여우는 지 형사를 데리고 삼십 분도 못 돼 나타났다.
약속 장소에서 그들을 만난 김 교수는 그들을 자신이 투숙했던 여인숙으로 데리고 갔다.
여우는 먼저 수미 양이 들어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소녀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다가 그들을 보자 주춤주춤 일어섰다.
"네가 김수미니?"
여우가 물었다.
소녀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나와.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이리 나와."
김 교수가 안심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소리를 듣고 포주가 뛰어나왔다.
그녀는 낯선 남자들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당신이 주인인가?"
여우의 날카로운 물음에 그녀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 아주머니가 너를 손님 방에 집어넣었니?"
지 형사가 수미를 돌아보고 물었다.
수미는 서럽게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포주군. 우린 경찰이야."
여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녀는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더러운 년! 어린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여우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이방 저방에서 여자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포주의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가 파자마 바람으로 뛰어나와 여우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이 여자 남편인가?"
"네, 그렇습니다. 경찰이라고 사람을 이렇게 개 패듯이 때릴 수가 있습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 형사의 손이 올라갔다.
어떻게나 세게 때렸던지 사내는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개만도 못한 것들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사람이면 어떻게 어린애를 잡아다가 이런 짓을 시킬 수가 있어!"
지 형사는 쓰러져 있는 사내를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사내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두 손으로 그의 발을 막았다.
"이 소녀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야. 집에서 부모들이 얼마나 기다리겠어? 당신들 따라와! 사람이 될 때까지 당신 같은 인간들은 고통이 무엇인가 배워야 해."
김 교수가 보니 형사들은 형식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형사들은 포주 내외를 일단 수사본부로 연행한 뒤 김수미 양을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김 교수는 그들을 따라 수미 양 집에 가보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나타나자 소녀의 어머니는 몸부림치며 울다가 까무라쳤다.
딸을 찾아 직장에도 나가지 않은 채 그날도 거리를 헤매다가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소녀의 아버지는 새까맣게 탄 얼굴로 딸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그들의 울음 속에는 기쁨과 분노, 비통한 감정 같은 것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김 교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여 형사가 수미 양을 구해 낸 경위를 이야기해 주자 소녀의 부모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그에게 절을 했다.
김 교수의 이름과 주소를 물으며 어떻게든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그들을 만류하고 김 교수는 그 집을 나왔다.
수미 양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멀리까지 따라 나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지금 바로 따님을 병원에 입원시켜 검진을 받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김 교수는 이렇게 수미 양의 아버지에게 이른 다음 형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수사본부로 돌아왔다.
수사본부로 돌아오는 동안 세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제각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 교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학문적인 성취감보다도 훨씬 가슴 뿌듯한 느낌이었다.
여우는 연행해 온 포주 부부를 수사에 이용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들을 구속시켜 단순히 검찰에 송치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포주 부부 중 남자는 이름이 박치수라고 했다.
여자 쪽 이름은 이애자였다.
신원 조회 결과 남자는 폭력, 사기, 인신 매매, 매음, 마약 등에 관련되어 전과가 무려 일곱 번이나 되는 인물이었다.
여자 쪽 역시 미성년자 약취 유인 및 인신 매매 등 전과가 세 번이나 있었다.
"그 남편에 그 여편네군."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여우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억울하다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던 박치수는 여우가 보여 주는 신원 조회서를 보고는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당신 같은 인간들은 이 사회의 쓰레기야. 이 사회에 있어 봐야 해만 끼치니까 함께 살아갈 필요가 없어. 죽어 주든가 아니면 이 사회에 영원히 발을 못 붙이게 격리시킬 수밖에 없어. 자살하지 않겠어? 그럼 도와 줄 테니까 사양하지 말고 말해."
여우는 박치수의 머리를 주먹으로 쿡쿡 쥐어박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자살하기는 싫은 모양이군. 더러운 자식! 당신한테도 열여덟 살 먹은 딸이 있던데 그 애를 사창가에서 몸을 팔게 하면 어때? 그렇게 하기는 싫은가? 남의 귀여운 딸들은 망쳐 먹으면서 자기 딸만은 그렇게 하기 싫단 말이지?"
박치수와 이애자는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여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용서해 줄 수 없지. 자살하기 싫다면 가장 무거운 형을 받도록 조서를 꾸밀 수밖에 없지. 나는 당신 같은 인간들이 사회생활하는 게 정말 싫어. 당신 같은 족속들은 구더기만도 못하단 말이야! 차라리 구더기가 낫지. 암, 구더기가 낫고말고! 훨씬 낫지."
"저희는 사실 죄가 없습니다. 그 학생을 데리고 온 건 우리가 아닙니다. 저희는 다만 돈을 주고 산 것뿐입니다."
"닥쳐!"
여우는 박치수의 따귀를 철썩 하고 갈겼다.
13.
애꾸눈 포주 부부는 밀폐된 방 속에서 땀에 절어 허덕이고 있었다.
경찰은 그들에게 정보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좋아. 마음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 문을 두드려."
여우는 밖에서 방문을 잠그고 볼일을 보러 나갔다.
그것은 인내심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포주 부부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을 열면 적어도 인신 매매 조직에 대해 실낱 같은 정보만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방 속에 갇힌 포주 부부는 물 한 잔 얻어 마실 수가 없었다.
경찰은 그들에게 물 한 잔 주는 것까지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화장실에 가는 것뿐이었다.
그들 부부는 마침내 경찰에 정보를 제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남자가 경찰과 타협하겠다는 데 반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나선 것은 여자 쪽이었다.
여자 쪽이 오히려 고집스럽고 강경한 편이었다.
"만일 그러다가 보복당하면 어쩔려고 그래요? 장사 문 닫는 건 그만두고 당신 정말 큰일나요. 옥수네 죽을 뻔하다 살아난 거 모르세요? 입 잘못 놀렸다가 다리 병신 됐잖아요. 그렇게 되고 싶잖으면 잠자코 있어요. 좀 참으면 될 걸 가지고 그걸 못 참아서 그 야단이에요."
"이거 봐, 또 콩밥 먹을 수야 없잖아. 이번에 들어가면 정말 오래 있다가 나올 거란 말이야! 우리 두 사람 들어가면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어? 이번엔 걸려도 단단히 걸렸어. 경찰의 요구를 들어주면 처벌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어."
"당신이란 사람 참 한심하군요. 콩밥 먹는 게 싫어서 병신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평생 병신으로 지내고 싶으세요? 잘 되면 병신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당신 죽고 싶으세요?"
"누가 죽고 싶다고 했어? 살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지."
남자는 볼멘 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요, 감옥에 들어가면 죽지는 않아요. 병신도 되지 않구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보를 팔았다는 걸 비밀로 해야지. 경찰이 비밀로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여자는 남편의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꼬집었다.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죽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경찰에 붙잡혀 간 거 다 봤어요. 뭐 하나라도 새기만 하면 우리가 불었다는 거 다 알 텐데 경찰만 믿고 있으란 말이에요? 이이가 정말 오래 살고 싶지 않아서 환장했나 봐. 애꾸 이야기가 있잖아요. 앞으로는 아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대요."
"애꾸가 그랬어?"
"그래요. 자기는 들은 대로 전해 준 것뿐이니까 조심하라고 그랬어요."
"애꾸는 나를 괄시 못 해."
"애꾸가 문제가 아니에요. 애꾸가 무슨 힘이 있나요? 그 사람은 심부름꾼에 불과해요."
"그래도 그렇지 않아. 그놈도 한가락 한다고. 많이 커졌어. 처음에는 쫄따구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하여간 오래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요.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작살나니까요."
"그것 참 미치고 환장하겠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치겠네. 고 쪼꼬만 계집애 때문에……."
"고 계집애 때문에 그랬나요? 그 이상한 남자 때문에 그런 거죠. 어쩐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경찰을 데리고 올 줄 누가 알았어. 그 개 같은 놈, 만나기만 해봐라!"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여우는 녹음된 것을 틀어 보았다.
그것은 방 안에서 포주 부부가 주고받은 말을 그들 몰래 녹음한 것이었다.
녹음된 내용 중에서 ‘애꾸’라는 말이 귀에 들어와 박혔다.
그 외에는 도움이 될 만한 말이 없었다.
여우는 지 형사를 데리고 사창가로 나갔다.
이미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수사요원들에게 ‘애꾸’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린 다음 자신은 이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늙은 창녀를 찾아갔다.
순이는 일전에 포섭해 놓은 정보원이었다.
사창가에서 청춘을 보낸 그녀는 아무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마치 벌레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처음 그녀를 만나 정보를 제공해 주면 사창가에서 빼내 주겠다고 제의했을 때에도 그녀는 별로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녀를 찾아간 것은 아무래도 사창가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젊은 애들보다는 사창가 내막을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 사람은 왜 찾으세요?"
여우가 애꾸에 대해서 물었을 때 한참 만에 그녀가 보인 반응이었다.
여우는 애꾸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를 좀 만나야겠어.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저도 몰라요."
"그러지 말고 말해 줘요. 말해 주면 여기서 빼내 주겠어. 이 생활이 지겹지도 않아?"
순이는 담배를 한 대 청해 피웠다.
"여기서 나간다 해도 갈 데도 없어요. 나 같은 거 누가 받아 주겠어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희망을 가져야지 그러면 되나."
"희망이오? 흥! 아저씨, 웃기시네. 나 같은 게 희망은 무슨 희망이에요."
여우는 그녀의 과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정보를 얻어 내려면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서른한 살이라고 했다.
그녀가 사창가에 팔려 온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그러니까 햇수로 십사 년째 창녀생활을 해오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헌 걸레로 표현했다.
그녀의 학력은 중학교 졸업 정도였다.
가난한 시골 출신인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고향을 찾아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그녀는 급기야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는 지금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뚱이는 가장 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나마 어디서도 그녀의 몸을 사겠다는 데가 없었다.
손님들은 그녀의 얼굴만 보고서도 도망쳐 버리곤 했다.
그러니 젊고 예쁜 애들이 받는 화대의 절반도 못 되는 헐값에 손님들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손님이 있으면 다행이었지만, 손님 하나 받지 못하고 공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니 방값이다, 식사대다 하는 명목 등으로 빚만 쌓여 가고 있을 뿐이었다.
포주도 그런 그녀를 두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여간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해. 밖으로 나가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어. 내가 일자리를 구해 줄 테니까 내 말대로 해요."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 난 그녀는 천천히 그의 눈에 시선을 맞추더니,
"그 말씀 정말이세요? 정말 저를 여기서 빼내 주고 취직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정말이야. 난 경찰관이야, 왜 거짓말을 하겠어? 물론 조건부이지. 나한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주면 그렇게 하겠다 이 말이야."
그녀의 표정에 비로소 신뢰의 빛이 나타나고 있었다.
"자세한 건 잘 몰라요."
"물론 모르겠지. 그러니까 아는 대로만 말해 달라는 거야. 자,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받아요."
여 형사는 오만 원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잠자코 그것을 받았다.
"애꾸는 이 일대를 관리하고 있어요."
여자를 두고 매음업을 하고 있는 포주들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애꾸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일대에서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포주들은 회비 명목으로 애꾸에게 돈을 내고 그의 보호하에 들어간다.
그쪽이 오히려 말썽이 없고 편하기 때문에 모두가 군말 없이 회비를 내고 있다.
"그 자가 그럼 우두머리란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말 들으니까 뒤에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데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악질인가?"
"그야말로 악질이에요."
"그 자라면 이 일대에 들고 나는 여자들을 잘 알고 있겠군? 몇 명이 새로 들어왔고 몇 명이 밖으로 빠져 나갔고 하는 것 말이야."
"환히 알고 있어요. 여자가 새로 들어오면 신고식을 해야 하고 돈도 또 바쳐야 해요."
"신고식이란 건 또 뭐야?"
"신고식이란 건 애꾸가 먼저 데리고 자는 걸 말해요. 요즘은 그 똘마니들까지도 신고식을 받고 있어요."
"여기 새로 들어오는 아가씨들은 모두 신고식을 거쳐야 하나?"
"그렇지는 않지요. 못생긴 애들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반반한 애들만 골라서 신고식을 받고 있어요."
"어디 가면 애꾸를 만날 수 있을까?"
"글쎄요, 요즘은 잘 보이지가 않아요."
"돈 받으러 오지 않나?"
"돈은 똘마니들이 받아 가고 있어요. 그 자식은 모든 게 다 공짜예요. 그 새끼들 등쌀에 장사 못 하겠다고 야단들이에요."
"그 자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 그 자가 잘 가는 집이 있을 거 아니야?"
그녀는 종이를 꺼내 사창가 일대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그곳에 가보라고 말했다.
"이 집에 잘 가나?"
"그런다고 들었어요. 시설이 제일 잘 돼 있는 집이에요. 깨끗하고요."
"고마워. 빼내 줄 테니까 기다려."
"빨리 좀 부탁해요."
그녀는 호소하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우는 수사요원들과 은밀히 접촉했다.
행여 형사들이 사창가를 뒤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사창가를 벗어난 식당에서 수사요원 여덟 명은 냉면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머지 수사요원 두 명은 수사본부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저녁 여덟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누가 김 교수를 본 사람 있어요?"
여 반장의 물음에 형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장미 아버지 김종화가 지난 밤을 사창가에서 보냈다는 것은 그가 몸소 딸을 찾아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여 반장이었다.
김 교수가 딸 찾는 일을 수사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행동이 이미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수사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딸을 찾겠다는데 경찰이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떻게 딸을 찾고 있는지 여우는 몹시 궁금했다.
"애꾸에 대해서는…… 그 자의 이름이 최동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명인 것 같지만 그 이름으로 오랫동안 행세해 왔답니다. 나이는 서른 여섯이고 이 일대에서만 잔뼈가 굵은 놈이라고 합니다."
한 형사가 보고를 마치자 늙은 형사가 수첩을 꺼내 들고 보고를 시작했다.
"저는 Y경찰서 수사과에 찾아가 수소문했습니다. 여기 사창가를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별로 신통한 것은 얻지 못했습니다. 애꾸는 수년 전 폭력행위로 수배가 됐는데 아직까지 붙잡지를 못했답니다. 놈은 몸이 번개처럼 빠르고 도처에 정보망이 있어서 좀처럼 붙잡히지가 않는답니다. 그리고 혼자 다니는 게 아니고 항상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붙잡기가 힘들답니다. 요즘에는 사창가에도 잘 나타나지 않고 행방을 모른답니다."
"그 자에 대한 신원은?"
"담당 형사도 그것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기 때문에 기록이 없답니다."
막연한 말들뿐이었다.
여 반장은 냉면 그릇을 밀어 놓으며 아직 입을 열지 않은 다른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놈은 오른쪽 눈에 언제나 하얀 안대를 하고 다닌답니다. 그래서 애꾸라는 별명으로 통한답니다."
가장 어려 보이는 형사가 말했다.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애꾸라고 하겠지."
여우의 대답에 모두가 웃었다.
젊은 형사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그놈은 자기 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 오년 동안 헤매다니고 있답니다."
여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럼 애꾸가 된 지 오년이 됐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오년 전에 그놈은 다른 조직과 싸우다가 눈을 다쳤답니다. 그 조직은 와해됐지만 그때 그놈의 눈을 잃게 한 자는 도망친 모양입니다. 그 자 이름은 노태식이고 별명이 도끼랍니다. 도끼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답니다. 그런데 도끼는 현재 서울에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아마 애꾸한테 걸리면 둘 중의 하나는 죽을 거라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군."
나이 든 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나?"
"어떤 놈한테 술 사주고 얻은 정보입니다. 사창가에서 먹고 자고 하는 놈인데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놈입니다."
"그 정보가 확실하다면 애꾸눈 귀에 들어가게 허위 정보를 하나 퍼뜨리지. 아주 그럴 듯하게 말이야."
"무슨 정보 말입니까?"
"도끼가 현재 어디 자주 나간다는 식으로 말이야. 봉쇄하기 좋은 술집 같은 곳을 하나 정해서 거기에 도끼가 자주 나온다는 정보를 흘리는 거야. 어떻게든 애꾸 귀에 들어가게 말이야. 놈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니까 금방 귀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듣자마자 그 술집으로 달려갈 거야."
"그때 우리가 대기하고 있다가 놈을 체포하자 이 말씀이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만일 그놈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고, 우리는 조그만 가능성에도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어. 어때, 할 수 있겠어?"
"그거야 어렵지 않죠."
젊은 형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애꾸가 자주 간다는 창녀집을 알아냈어."
여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교수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그런 모습이 일하는 데는 좋았다.
깨끗한 모습으로 사창가에 가서 수소문하고 다니다가는 금방 경계의 대상이 되어 아무것도 얻어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창가에 기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장 더럽고 야비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단결이 잘 되어 있었다.
단지 배설을 위해 찾아드는 손님들에 대해서는 아무 경계도 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찾아든 것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극도의 조심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가 수상한 것 같으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다.
그러니 김 교수로서는 조심해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이라면 데리고 가서 윽박질러서라도 정보를 캐내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강제성을 띤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돈으로 정보를 살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틀째 밤에도 그는 사창가로 숨어들었다.
이번에는 좀더 많은 돈을 준비했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일수록 아무리 단결력이 강하다 해도 돈에는 약하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돈에 기밀을 팔 수 있는 배신자가 그에게는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을지 그는 막연하기만 했다.
결국 사창가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그는 어느 창녀에게 이끌려 어떤 우중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못 이기는 체하고 끌려들어간 것이다.
그는 일부러 소주까지 한잔 걸쳤기 때문에 사창가에 출입하는 사람치고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였다.
역시 그를 손님으로 맞은 창녀는 나이가 어려 보였다.
그는 화대보다 두 배쯤 많은 돈을 준 다음 술을 시켰다.
어린 창녀는 군말 없이 뛰어나가 맥주와 안줏거리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이제 창녀를 구할 생각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리고 불쌍한 창녀들은 그야말로 어물전 생선처럼 널려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해본다는 것은 그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사랑하는 딸을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잠시도 다른 사람한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골방에 갇혀 고통을 겪고 있을 딸을 생각하면 그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손님이 할 일은 하지 않고 술만 마시자 어린 창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한잔 주세요."
그는 그녀의 나이 따위는 이제 물어 보지 않기로 했다.
감상 따위는 갖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굳게 다짐하면서 그녀에게 맥주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주인 좀 불러 줄래?"
"우리 주인이요?"
"응, 그래. 주인 말이야."
"주인은 왜요? 저 싫다고 내보낼려구요?"
"아아니, 그게 아니고 술 한잔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할 말도 있고 말이야."
"잠깐만 기다리세요."
화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은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었다.
잠시 후 주인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방 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그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불렀어요?"
얼굴이 누렇게 뜬 사십대 여인이었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턱이 뾰족했다.
"들어오시죠. 한잔 하게 들어오세요."
14.
몽타주의 여인 김종화가 웃으며 말하자 포주는 뒤로 물러섰다.
"저 술 못 해요."
"한 잔만 하세요."
"술 못 한다니까요."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듯 돌아서려는 것을 종화는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잠깐 들어오세요. 긴히 여쭐 말도 있고 하니까 들어오세요."
"무슨 이야기예요?"
문 앞에 서서 듣겠다는 그녀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느라고 종화는 애를 먹어야 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싶었지만 한번 부딪쳐 보기로 했다.
그가 바쁜데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하자 포주는 답답하다는 듯 빨리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그를 재촉했다.
종화는 어린 창녀를 내보내고 나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돈 벌고 싶은 생각 없습니까?"
아닌 밤에 홍두깨 같은 소리에 포주는 이 손님이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이없어 하면서 그대로 대꾸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큰돈 벌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목돈 벌고 싶은 생각 없느냐 이겁니다."
"지금 전 바빠요. 돈 벌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녀는 손님이 주정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님이 호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 꼬깃꼬깃 접은 것을 꺼내 놓았다.
"이건 백만 원짜리 수표입니다. 한번 보세요."
코앞에 들이미는 종이 조각을 들여다본 포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걸 어쩌겠다는 거예요?"
그녀는 손님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선량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손님은 수표를 방바닥에 놓은 채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께서 돈 벌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걸 드릴 수도 있다 이겁니다."
이 주정뱅이, 아니면 약간 머리가 돈 것 같은 사람한테서 어쩌면 백만 원짜리 수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귀중품 도난 사건은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그녀는 긴장했다.
"돈 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녀는 손님이 내놓은 몽타주를 들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종화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를 찾는다 이 말씀이죠?"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여자를 만날 수 있게만 해주면 이 수표를 드리겠소. 아니면 이 소녀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시오."
종화는 장미의 사진을 꺼내 놓았다.
"어머나, 참 예쁘게 생겼네. 나이 어린 애를 좋아하시나 보죠?"
여인이 능청을 떨었다.
종화는 분노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 애는 내 딸이오. 나는 딸을 찾고 있습니다. 그 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오."
"어머, 그래요."
여인은 목소리를 죽이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손님의 얼굴을 살폈다.
비로소 손님이 왜 사창가에 들어왔는지 그 이유를 안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사실을 알게 된 포주는 입을 떼기가 두려운 모양이었다.
종화는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부탁합니다. 이 애는 지금 중학교 3학년이고 내 외동딸입니다. 이 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면 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애를 찾아다닐 생각입니다."
그것은 낮으나 단호한 결의가 깃든 말이었다.
딸을 찾아 나선 부정의 눈물겨운 호소가 가슴에 와닿았는지 그녀는 한동안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몽타주의 여인을 가리켰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요?"
"그 여자는 우리 딸애를 유괴해 간 사람입니다."
종화는 여자한테 장미가 어떻게 유괴되었는지 그 내용을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소상히 이야기했다.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오로지 딸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여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아마 찾기 힘들 거예요. 일단 그렇게 해서 팔려 간 애들은 찾기 힘들어요. 웬만하면 도와 드리고 싶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이 여자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 여자를 알고 있지요?"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김종화는 그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러지 말고 도와 주십시오. 공짜로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닙니다. 이 여자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어디에 가야 이 여자를 만날 수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가르쳐 주면 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누구를 고자질한다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그녀는 더 이상 몽타주의 여인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여자를 한 사람 알고 있기는 한데 이렇게 생기지가 않았어요. 손님 말씀을 듣고 보니 비슷한 점이 많기는 한데 생긴 게 틀려요. 이렇게 생기지가 않았어요."
그녀는 몽타주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이건 사진이 아니고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것입니다. 따라서 실물과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그 여자는 어디에 가면 만날 수가 있을까요?"
위협을 가한다 해서 그녀가 입을 열 리는 만무했다.
돈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말씀드리기가 참 곤란하네요. 그 여자나 나나 같은 처지인데 만일 내가 귀띔했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어떡하겠어요? 아마 큰일날 거예요. 난 여기서 살아 남지 못할 거예요. 돈백 받고 그런 위험한 짓을 어떻게 해요?"
그녀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오십만 원 더 드리죠."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백은 주셔야죠."
"좋습니다, 이백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우리 딸애를 유괴해 간 여자가 틀림없어야 합니다. 틀림없다는 게 입증될 때 돈을 드리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입증하죠?"
"목격자가 있습니다. 목격자를 데리고 와서 확인시키겠습니다."
"대놓고 확인시키겠다는 거예요? 그건 안 돼요. 그러다가는 큰일 나요. 누구 죽는 꼴 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놓고 확인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확인시킬 생각입니다. 아주머니한테는 절대 피해가 가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몹시 망설이는 표정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내일 오후 두 시경에 전화를 한번 주세요."
"꼭 좀 부탁합니다! 전화 번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종화는 포주가 불러 주는 전화 번호를 수첩에다 적었다.
"선금으로 백만 원을 먼저 주세요."
방바닥에 놓여 있는 수표를 힐끗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만일 그 여자가 아닐 경우에는 어떡하죠?"
"그때는 돌려드리겠어요. 돈 떼먹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좋습니다."
종화는 백만 원짜리 수표를 포주에게 건넸다.
그 집은 삼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건물 외벽에는 아무런 간판도 붙어 있지 않았다.
형사들은 따로따로 손님으로 가장하고 그 건물에 들어가 방을 하나씩 차지했다.
건물 안에는 조그만 방들이 무수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각 방마다 창녀들이 한 명씩 들어 있었다.
여우도 방을 하나 차지한 채 드러누워 있었다.
좁은 방 안은 그야말로 찌는 듯이 무더웠다.
그런 방 안에서 창녀와 함께 밤을 지샌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애꾸가 언제쯤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야 하룻밤 기다리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언제 나타날지 전혀 감도 못 잡은 채 그 자를 기다려야 하니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여우는 창녀에게는 손도 대지 않는다.
물론 화대는 지불했다.
김종화는 다음 날 약속대로 오후 두 시경에 어젯밤 그 포주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저녁에 만나요. 아홉 시에 신촌 로터리에 있는 은성 카바레로 나오세요. 마포 쪽에 있으니까 물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옆에 보면 능금이라는 다방이 있어요. 거기서 아홉 시 정각에 만나기로 해요."
그가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종화는 장미의 친구인 마동희 집에 전화를 걸었다.
동희 어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자기가 직접 딸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종화가 그럴 필요 없이 동희만 데리고 갔다가 무사히 돌려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자기가 동행하겠다고 우겼다.
종화는 생각 끝에 아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양미화는 자기도 그곳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좋아, 당신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함께 나가지. 하지만 흥분한 나머지 그 여자를 그 자리에서 붙잡고 늘어진다거나 하는 따위의 짓을 해서는 절대 안 돼. 그러다가는 잡아 놓은 고기를 놓치는 꼴이 되고 말아.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해야 해. 내가 시키지 않은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돼. 약속하면 함께 가도 좋아."
"약속하겠어요."
그녀는 장미가 유괴된 이후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잠도 설치고 식사에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말라 있었다.
종화는 턱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말끔하게 밀어내고 몸단장을 깨끗이 했다.
화려한 색상의 남방을 입자 나이보다는 댓 살쯤 젊어 보였다.
아내에게도 한껏 모양을 내게 했다.
집을 나선 것은 일곱 시 반경이었다.
그는 차를 몰고 동희네 집으로 향했다.
"만일 그 여자가 장미를 유괴한 여자라면 어떡하실 거예요?"
운전석 옆 자리에 앉은 양미화가 낮은 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숨죽인 목소리였다.
"글쎄, 모르겠어. 생각해 보지 않았어."
종화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경찰에 넘겨서 자백시켜야 하지 않아요?"
거기에 대해서 종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씀 안 하세요?"
한참 후에 그녀가 따지듯 물었다.
종화는 아내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 여자를 자백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아. 문제는 장미가 이미 그 여자 손에서 떠나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야. 그 여자는 아이를 유괴해다 팔아먹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그 여자가 과연 장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걸 알고 있을까? 그 여자가 장미 있는 곳을 알고 있을지 그게 의문이야. 만일 모르고 있으면……."
그는 한숨을 내쉰 다음 차의 속력을 줄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장미를 찾기가 어려워질지도 몰라. 찾아내더라도 아주 오래 걸리겠지. 그 여자를 경찰에 넘길 생각은 없어. 경찰에 넘겨 봐야 내가 기대한 만큼 그 여자를 처벌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는 안 돼. 그 여자는 내 손으로 처리할 거야."
너무 조용하게 가라앉은 남편의 목소리에 미화는 두려운 빛을 보였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얼굴에서 온화한 빛을 잃지 않았던 남편이었다.
그리고 선량하기 짝이 없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의 얼굴에서는 그런 빛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 창백함만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당신이 어떻게 그 여자를 처리한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종화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내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물음에는 결코 대답하지 않겠다는 그런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생각 하지도 마세요. 그 여자가 정말 장미를 유괴한 여자라면 즉시 경찰에 넘겨야 해요. 어떻든 경찰에 모든 걸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경찰은 지금……."
종화는 갑자기 라디오 스위치를 틀었다.
볼륨을 크게 하자 양미화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동희 모녀는 집 앞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종화는 차에서 내려 그들을 차에 태운 다음 문을 닫아 주고 다시 운전석에 들어갔다.
동희 어머니와 양미화는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동희 어머니가 위로의 말을 늘어놓는 동안 양미화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들이 약속 장소에 이른 것은 여덟 시 삼십 분경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이른 시각이었다.
그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종화는 여자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저는 동희와 함께 행동하겠습니다. 두 분은 일행이 아닌 것처럼 행동해 주십시오. 서로 아는 체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따가 그 여자가 오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두 분이 따라오는 건 좋지만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해서 따라오셔야 합니다."
종화는 주로 동희의 어머니만 쳐다본 채 말했다.
이야기를 끝내자 그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하나 꺼내 동희에게 건네 주었다.
"얼굴을 혹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걸 끼고 있어. 도수 없는 안경이니까 끼고 있어도 괜찮을 거야. 이걸 끼면 얼굴이 달라 보일 거야."
그것은 학생들이 흔히 끼는 검은 플라스틱 테의 안경이었다.
동희가 그것을 코에 걸자 얼굴이 아주 달라 보였다.
두 중년 부인은 구석자리에 앉고 종화와 동희는 입구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포주는 아홉 시 십 분에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동희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이 학생이 그 여자 얼굴을 기억하고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돈은 준비해 오셨죠?"
"네, 준비해 왔습니다. 그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카바레에서 춤추고 있어요. 위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어요. 요 옆의 은성 카바레예요. 이렇게 해요,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좀 있다가 들어오세요. 우리 일행은 그 여자까지 합해 세 명이에요. 그 여자는 빨간 티셔츠를 입었어요. 아저씨는 저하고 절대 아는 체해서는 안 돼요. 만일 그 여자가 아저씨가 찾는 여자라면 아저씨하고 저하고는 어떻게 서로 연락하죠?"
그것은 나머지 돈을 어떻게 전해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뭡니까?"
"오지애라고 해요."
"오지애……."
김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갑자기 빠른 어조로 말했다.
"만일 그 여자가 내가 찾는 여자가 맞다면…… 내가 그 여자한테 가서 춤을 청하겠습니다. "
어머, 그건 안 돼요!
" 여자가 놀라서 말했다. "
왜 안 되는 겁니까?
" "
그러다가 눈치라도 채면 어떡해요.
" "
눈치채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하겠습니다.
카바레에서는 모르는 남자가 춤을 청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지 않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 "
정말 자신 있으세요?
" 여자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
걱정 말라니까요.
" 종화가 워낙 자신 있게 나오자 그녀는 못 이기는 체하고 물러앉았다. "
그런데 만일 오지애가 아저씨 딸을 데리고 간 여자라면…… 그 여자를 어떡하실려고 그러세요?
" "
내 딸을 돌려달라고 할 참입니다.
" "
만일 그 여자 손을 떠나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면 어떡하실 거예요?
" "
어떻게든 찾아내야죠.
" "
실례지만 아저씨는 뭐 하시는 분이세요?
" "
난…… 시계점을 하고 있습니다.
R백화점 안에서…….
" "
돈은 어떻게 전해 주실 거예요?
" "
틀림이 없다면 이 학생편으로 돈을 보내 주겠소.
" "
그 여자가 보고 있는 데서 돈을 주겠다는 거예요?
" "
아뇨, 이 학생을 화장실로 보낼 테니까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나도록 해요.
" "
네, 그게 좋겠군요.
" 여자는 비로소 안심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
잘 하셔야 해요.
그리고 끝나면 없던 일로 하는 거예요?
" 종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밖으로 사라졌다. 종화가 동희를 데리고 일어서자 저편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들도 따라 일어섰다. 동희는 카바레 입구에서 가슴이 떡 벌어진 기도한테 제지당했다. "
미성년자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 "
난 이 애 보호자요.
" 종화는 기도의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 주었다. "
춤추러 온 게 아니라 이 애 엄마를 찾으러 온 거요.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아 찾으러 온 거요.
춤 같은 건 추지 않을 거요.
" 기도는 그들이 들어갈 수 있게 입구를 터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열기와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금방 얼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동희야, 너를 이런 데까지 데리고 와서 미안하다.
" 귀에다 대고 속삭이자 동희는 도리질을 했다. "
아니에요, 장미만 찾을 수 있으면 전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
" "
고맙다.
" 그는 동희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 분위기에 눈이 익자 곧 포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어떤 여자와 둘이 앉아 있었다. 함께 앉아 있는 여자의 옷은 흰색이었다. 종화는 그들 쪽으로 다가가 삼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오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는 양미화와 동희의 어머니가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웨이터가 자리를 잡아 주자 그녀들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종화가 맥주를 시켜 첫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 한 명이 플로어에서 나와 포주 일행의 자리 쪽으로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15. 빨간 티셔츠 종화는 긴장해서 그 빨간 티셔츠의 여인을 주시했다. 이윽고 자리에 앉은 그녀는 맥주를 한 잔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뭐라고 떠들어댔다. 그러자 다른 두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키득거리고 웃어댔다. 종화는 슬그머니 동희를 돌아보았다. 묻지는 않고 그냥 돌아보기만 했는데 동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저 여자가 틀림없어요! 틀림없는 저 아줌마예요!
" 다급하게 속삭이는 소리였지만 종화한테는 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는 당황해서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렸다. "
목소리가 너무 크다.
자세히 봐, 그 여자가 틀림없는지 자세히 보란 말이야.
" "
틀림없어요.
그 여자가 틀림없어요.
저 여자가 아기를 업고 장미하고 함께 택시를 타고 갔어요.
틀림없는 그 여자예요.
" 세 명의 여인들은 뭐가 그렇게도 우스운지 연방 웃어대고 있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양미화와 동희의 어머니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밴드가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명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왈츠 곡이었다. 플로어는 금방 사람들로 가득 찼다. 종화는 백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동희의 손에 쥐어 주었다. "
넌 지금 화장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이걸 전해 줘.
그리고 엄마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장미 엄마는 가지 말고 그대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
" 동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포주도 슬그머니 일어서고 있었다. 동희가 소변을 보고 나오니 포주가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마침 그들뿐이었다. 포주는 홱 돌아서서 동희를 쏘아보았다. 사나운 눈초리에 동희는 주춤하고 물러섰다. "
돈 가져왔어?
" 그녀는 다짜고짜 그것부터 물었다. 그리고 동희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없이 수표를 내밀자 거칠게 그것을 낚아채서는 액수가 맞는지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지 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나서 출입문 쪽을 한 번 살핀 다음, "
그 여자가 맞니? 빨간 옷 입은 여자가 맞니?
" 하고 물었다. 동희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종화는 오지애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정중히 목례를 보내고 나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
실례합니다.
함께 추시지 않겠습니까?
" 오지애는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때 포주가 자리로 돌아왔다. 오지애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종화를 향해 그것을 후우 하고 내뿜었다. 그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빨리 나가라 얘.
서 있는 사람 체면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겠니? 빨리 나가 봐.
" 그러자 포주도 덩달아 그녀를 부추겼다. "
폼 잡지 말고 빨리 나가 봐.
신사 스타일 구겨지기 전에 빨리 나가 줘.
" "
웃기지 마, 나가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나가! 난 술이나 마실래.
" 그녀는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맥주 거품이 잔 밖으로 흘러 넘쳐 테이블 시트를 적셨다. 음악은 블루스 곡으로 바뀌고 있었다. "
그럼 내가 나간다.
" 흰 옷 입은 여인이 대신 일어섰다. "
저하고 추실래요?
" "
네, 그러죠.
" 종화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 여인과 함께 플로어로 나갔다. 그녀는 니그로처럼 입술이 두껍고 몸에 군살이 많았다. 기본 동작도 제대로 익히지 않는 상태에서 마구 몸을 밀착시키고 비벼대기만 하는 것이어서 종화를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를 리드해 나갔다. "
아저씨는 뭘 하세요?
" 그녀가 술 냄새를 풍기며 물었다. "
장사하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분 같지 않은데요? 무슨 장사 하세요?"
"집 장사 합니다."
"어머, 그러세요? 그럼 돈 잘 버시겠네요?"
여인의 물컹한 살집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같이 느껴졌다.
"아주머니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우리야 뭐 먹고 놀지요. 벌어 놓은 것 까먹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화장품 냄새가 역겨웠지만 종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부드럽고 점잖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호감을 준 것 같았다.
"다른 친구분들도 마찬가지인가요?"
"네, 셋 다 과부예요. 끼리끼리 모여서 즐기러 온 거예요. 즐기러 온 게 뭐 나쁜 건가요?"
"아아뇨! 즐긴다는 건 좋은 일이죠. 누구나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는 거죠. 나도 즐기러 온 겁니다."
"제 친구한테 마음이 있나 보죠? 빨간 옷 입은 애 말이에요."
"마음에 있다기보다 빨간 옷을 입고 있으니까 두드러지게 눈에 뜨인 모양이죠."
"저는 어때요?"
"정말 매력적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듣기 좋은데요?"
어느새 플로어로 나왔는지 빨간 셔츠가 젊은 남자의 품에 안겨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과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빨간 셔츠의 여인이 흰 옷 입은 여인을 향해 말했다.
"흥, 재미가 좋군."
그러자 흰 옷 입은 여인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누구보고 하는 말이야, 너무 진하게 굴지 말라고! 아니꼬워 못 보겠어."
빨간 셔츠는 아주 능숙하게 스텝을 밟아 나가는 것 같았다.
몸매도 늘씬해 보였다.
종화는 아내 쪽을 얼른 쳐다보았다.
양미화는 혼자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종화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종화는 아내가 걱정스러웠다.
그 자리에 졸도해 버릴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극도로 몸이 허약해진 데다 신경 쇠약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쓰러질 것만 같이 보였다.
종화는 아내를 기다리게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아내가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아내는 쉬이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아저씨는 혼자 오셨어요?"
"젊은 애하고 함께 왔는데 날 내버려두고 가버렸어요."
"왜요?"
"우린 여기 오기 전에 좀 다퉜거든요."
"애인이세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심심해서 데리고 다니는 애이지요."
"아저씨, 바람둥이군요?"
여인이 눈을 흘겼다.
"즐긴다는 게 나쁩니까?"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곡이 바뀌면서 템포가 빨라졌다.
종화는 여인의 허리에서 손을 풀었다.
"디스코는 출 줄 모릅니다."
두 사람은 제각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종화는 플로어 쪽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빨간 셔츠는 유난히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번쩍이는 불빛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웃고 있는 모습은 마치 악귀 같았다.
양미화 역시 빨간 셔츠를 주시하고 있었다.
종화는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흰 옷은 혼자 앉아서 종화 쪽에다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포주는 이미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흰 옷이 종화에게 자기 자리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종화는 술잔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우리 한잔 해요."
자리에 앉자 흰 옷이 맥주를 권하며 말했다.
"한잔 합시다."
종화도 여인의 잔에 술을 부었다.
"아저씨는 너무 점잖으신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아저씨는 젊은 애들을 좋아하나 봐."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같이 늙은 여자는 싫죠?"
"원, 무슨 말씀을……."
빨간 셔츠는 여간해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엉뚱한 여자를 상대하고 있자니 종화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상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빨간 셔츠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걸려들어오지 않았다.
빨간 셔츠는 물론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도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먹고 논다는 것 외에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음악이 그치자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빨간 셔츠도 자리로 돌아왔다.
플로어에 반라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음악에 맞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두 여인은 종화를 앞에 놓고 귀엣말을 나누었다.
종화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귀를 세워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치 뭐 한대?"
빨간 셔츠가 흰 옷의 귀에다 대고 물었다.
"집 장사 한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아무려면 어때, 그것만 달렸으면 됐지 뭐."
"내가 양보해 줬으니까 잘해 봐."
"넌 젊은 애 좋아하다가 제 명대로 못 살 거다. 몸 생각해서 적당히 해."
"할 수 없지 뭐. 내 눈에는 젊은 애만 보이는데 어떡하니?"
"오늘 밤 시끄럽겠구나."
"내일 만나서 감상을 말해 줄게. 이번 애는 아주 근사해. 서른 살이라는데 온통 근육질이야. 자, 나 먼저 간다. 잘해 봐."
빨간 셔츠가 일어섰다.
그녀는 종화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자리를 떴다.
종화는 당황했다.
노골적으로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아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애 젊은 애 물어 가지고 재미 보러 가는 거예요."
여인이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빨간 셔츠의 모습이 출입구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다시 한 번 바라본 다음 일어섰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종화는 화장실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화장실로 통하는 좁은 복도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아내가 허둥지둥 나타났다.
그는 담배를 집어 던지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자리를 뜰 수가 없어. 방금 나간 빨간 티셔츠 입은 여자가 바로 그 여자야. 빨리 따라가 봐!"
"그 여자가 우리 장미를 유괴해 간 게 분명해요?"
"그렇다니까! 빨리 가봐, 놓치면 안 돼!"
종화는 아내의 어깨를 밀었다.
뚱뚱한 남자가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그들을 밀어붙이듯이 하면서 지나쳐 갔다.
양미화는 굳은 표정으로 종화를 바라보다가 잠자코 돌아섰다.
종화는 그녀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나도 집에다 전화를 걸어 놓을 테니까!"
양미화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출입구 쪽으로 사라졌다.
종화는 그 자리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아내에게 못할 짓을 시켰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자신은 이미 얼굴이 팔려 있어서 빨간 셔츠를 미행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대신 그의 아내는 아직 얼굴이 팔려 있지 않았다.
아내나 그가 겪는 것쯤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장미가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가 자리에 돌아와 앉기가 무섭게 흰 옷 입은 여인이 그의 소매를 잡아 끌면서 다시 한 번 춤을 추자고 말했다.
종화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면서 양해를 구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나가 봐야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정말 재수 옴 붙었어!"
하면서 홱 돌아앉았다.
"미안합니다."
종화는 중얼거리면서 일어섰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오니 빨간 셔츠도 아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아내가 제대로 미행을 해낼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걱정이 되어 그는 한동안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서성거리다가 로터리 쪽으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로터리 일대는 밤의 열기로 충만해 있었다.
네온사인의 휘황한 불빛, 로터리를 중심으로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무수한 차량들, 보도에 넘쳐흐르는 사람들의 물결…….
그 속에서 그는 장미의 얼굴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딸의 얼굴이 거기에 있을 리 없었다.
장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무슨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 얼마나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을까? 종화는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차량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길을 건너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는 스탠드 앞에 앉아 스카치를 얼음에 타달라고 주문했다.
바로 옆에 전화기가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끌어당겨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처제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한테서 전화 오지 않았니?"
"안 왔어요. 형부하고 함께 계시지 않나요?"
"헤어졌어. 언니한테서 전화가 올 거야. 전화가 오면 이쪽으로 전화하라고 일러 줘. 여긴 신촌 로터리에 있는 여로라는 카페인데 전화번호는……."
전화 번호를 일러 주고 나서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실내에는 낙엽이 떨어지는 것 같은 피아노 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잔을 입으로 가져 가서 혀끝으로 액체를 건드렸다.
씁쓰름한 맛이 혀끝을 통해 입 안으로 번져 왔다.
"손을 왜 그렇게 떠세요?"
여자 바텐터가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그는 잔에서 얼른 손을 떼어 밑으로 내려놓았다.
그가 두 잔째 주문해서 반쯤 마셨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바텐더가전화를 받아 김종화를 찾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아내였다.
그녀는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오세요! 지금 가까운 곳에 있어요!"
"그 여자 놓치지 않았어?"
"놓치지 않았어요. 지금 그 여자 어떤 젊은 남자하고 호텔에 들어 갔어요. 빨리 오세요!"
종화는 위치를 물어 본 다음 급히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오 분쯤 달리다가 육교 밑에서 차를 내렸다.
B호텔은 맞은편에 있었다.
양미화는 호텔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맞은편 육교 밑에 동상처럼 서 있었다.
종화는 평상시 걸음걸이대로 육교를 건너가 아내를 만났다.
"그 여자 호텔에 투숙한 게 틀림없어?"
"네, 틀림없어요. 프런트까지 따라가서 숙박비를 내고 방 열쇠까지 받아 가는 걸 분명히 봤어요."
"몇 호실인지 알아?"
"네, 알아냈어요."
여자가 커피숍에 앉아 있는 동안 동행한 젊은 남자가 프런트에 가서 수속을 밟았다고 했다.
그때 양미화도 프런트에 다가가 방을 하나 얻는 척하면서 젊은 남자가 프런트 계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엿들었다는 것이다.
"815호실이에요. 프런트 계원이 데스크에 올려놓은 열쇠에 분명히 815호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만일을 생각해서 방을 하나 얻어 놨어요. 908호실이에요."
"누구 이름으로 얻었어?"
"가명으로 얻었어요."
걱정했던 아내가 생각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솜씨를 발휘한 것을 알고 종화는 내심 적잖게 감탄했다.
"자, 그럼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싫어요! 제가 있어서 방해되는 건 없잖아요."
아내는 절대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난 당신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장미만 찾을 수 있다면 몸이 가루가 된들 어때요."
종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호텔은 신축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제법 큰 호텔이었다.
높이는 20층이 넘었고 객실 수가 삼백 개 가까이 되었다.
종화는 아내를 데리고 908호실로 들어갔다.
방 안은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잠자리가 좋은들 잠이 편히 올 리 있겠는가.
흘러가는 불빛들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그를 뒤에서 껴안으면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종화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목석처럼 서 있었다.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 왔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16.
유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908호실은 깊은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종화 부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은 지가 한 시간이 넘었다.
양미화는 남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흘러든 달빛에 남편의 얼굴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그 얼굴에서 그녀는 살기 같은 것을 느끼고는 가만히 떨었다.
남편에게서 그런 것을 느끼기는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언제 다시 태어나도 학자가 될 사람 이었다.
그런 그이에게 무슨 시련이란 말인가!
"어떡하실 거예요?"
그녀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그러나 종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오지애를 따라 B호텔까지 오긴 했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남자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 버린 오지애한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학자인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경찰에 빨리 연락해서 체포하게 하는 게 어때요? 이러다가 놓치면 어떡할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미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내의 목소리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 뚜렷이 느껴졌다.
종화는 어둠 속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냉방이 잘 되는 방이었지만 그는 너무 초조한 나머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찰에 넘기는 건 싫어. 그년이 끝까지 부인할 경우 경찰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년이 묵비권을 행사하면 경찰이라 해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이말이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백을 받아 내야 하는데 경찰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있어. 그년 입을 찢어서라도 입을 열게 할 거야. 그렇게 하고야 말겠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런 여자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악질 중의 악질이니까 말이야."
"경찰에서 그 여자 입을 열게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긴. 하는 수 없이 증거를 보강해서 검찰에 송치할 거고 검찰에서는 공소를 제기하겠지. 그러면 재판이 열릴 거고 그럭저럭하다 보면 두서너 달 걸리겠지. 그 동안 장미는 어떻게 되지? 재판한다고 해서 장미가 돌아와 주나?"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판한다고 해서 장미가 돌아와 주냐는 한마디에 양미화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종화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방 안을 왔다갔다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마치 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더없이 불안해 보였다.
그는 안 피우던 담배까지 피워댔다.
방 안은 금방 담배연기로 가득 찼다.
어둠 속에서 빨간 담뱃불이 왔다갔다했다.
마치 반딧불처럼.
아무도 담배연기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무슨 수가 없을까? 그년을 이 방으로 데려오든가 아니면 우리가 그 방으로 들어가든가 말이야. 그것도 당장 말이야. 내일까지 기다려서는 안 돼. 한시가 급하단 말이야. 내일까지 기다린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야. 그년이 언제 방에서 나갈지 알 수 없단 말이야. 당신 말처럼 이미 나갔는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방 앞에 서서 기다릴 수도 없고 말이야."
"지금 그 방으로 가보죠. 거짓말을 해서라도 문을 열게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종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안 돼. 그 여자 혼자 있다면 몰라도 젊은 남자와 함께 있단 말이야. 그 남자가 가만 있지 않을 거란 말이야."
"그럼 어떡하죠?"
"글쎄……."
그들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종화였다.
"여자를 유인해 내는 수밖에 없어. 남자를 떼어 놓고 혼자 나오게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잘 될지 안 될지 그건 잘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수밖에 다른 수가 없을 것 같아."
"어떤 수인데요?"
"곧 알게 될 거야.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
종화는 들고 온 조그만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레저용 밤색 가방이었다.
"불을 켜봐. 커튼도 치고."
양미화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불을 켠 다음 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종화는 가방 속에서 흰 가제와 조그만 약병 같은 것을 꺼냈다.
병 속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병을 들고 설명했다.
"이건 마취제야. 이걸 가제에 적셔 가지고 코에다 갖다 대면 정신을 잃게 돼. 내가 신호를 보내면 이걸로 그 여자 코를 막으란 말이야."
"그 여자가 가만 있을까요?"
양미화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종화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가방 속에서 가는 철사를 꺼냈다.
가방 속에서는 칼도 나왔다.
그 밖에 포장용 테이프, 고무장갑 같은 것들도 나왔다.
남편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들을 보고 양미화는 내심 적잖게 놀랐다.
남편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녀는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오지애는 그 시간에 815호실의 욕실에 있었다.
물론 젊은 남자와 함께였다.
처음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애무 같은 것도 벌일 사이 없이 곧바로 뒤엉켜 관계를 맺었다.
온몸이 운동으로 단련되어 근육질로 덮인 젊은 남자는 보기보다는 의외로 빨리 일을 끝냈다.
그녀가 미처 달아오르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 불만 당겨 놓은 채 혼자 후닥닥 일을 끝내고 내려가 버렸다.
화가 난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바보 같으니, 그렇게 빨리 끝내면 어떡해요?"
건장한 남자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면서 두 번째에는 좀 오래 갈 거라고 하면서 자기를 다시 흥분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그는 체육관에 나가 보디 빌딩으로 육체미를 가꾸는 것이 취미인, 일정한 직업도 없는 건달이었다.
몸이 우람하기 때문에 그것을 밑천으로 남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구전이나 뜯어 먹는 해결사가 직업이라면 직업이겠지만, 그것도 혹 가다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심심풀이밖에 되지 않았다.
밤에 카바레에 나가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유부녀를 낚는 것도 그의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일단 관계를 맺고 나면 대부분의 여인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이쪽에서 요구하지도 않는데 자진해서 적잖은 돈을 내놓곤 하는 것이었다.
그 벌이가 꽤 괜찮아서 그는 아예 그 일에 전념하기로 했는데, 요즈음은 유부녀들도 약아서 생각대로 그렇게 쉽게 걸려 들지를 않았다.
오지애는 그 젊은이가 제비족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바레 출입이 잦은 그녀는 한 번 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제비족인지 아닌지를 알았다.
여느 유부녀처럼 가정이 파괴된다거나 하는 위험이 전혀 없는 그녀는 제비족에게 걸려 봐야 조금도 겁날 것이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상대가 제비족인 줄 알면서도 그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녀는 제비족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하면서 그의 몸을 구석구석 씻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총각이 노리는 먹이가 아니라구요. 나는 과부고 돈도 없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곱게 먹고 즐길 생각만 해요. 그렇다고 그렇게 깍쟁이는 아니야. 돌아갈 때 빈손으로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이 과부를 잘 좀 위로해 줘요. 알았죠?"
장난스레 남자의 그것을 쥐어 흔들자 제비족은 킬킬거리고 웃었다.
"알았어요. 아줌마가 걸려든 게 아니라 내가 아줌마한테 걸려들었는데?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한 술 더 뜨네요."
"뭐라고!"
"아야!"
그들은 물 속에서 함께 뒹굴었다.
욕실은 그녀가 토하는 교성으로 가득 찼다.
이미 두 번째 준비를 갖춘 젊은이는 처음과는 달리 뒤에서 여인을 점령해 들어갔다.
오지애는 악마 같은 신음을 토하면서 허리를 뒤틀고 두 손으로 벽을 긁었다.
젊은이는 손을 밑으로 해서 그녀의 늘어진 젖가슴을 받쳐들었다.
위에서는 차가운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젊은이는 이번에는 아주 오래 관계를 끌었다.
그녀가 먼저 지칠 정도로 오래 그것을 되풀이했다.
마침내 남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그녀의 몸 속에 쏟아 넣었을 때 최초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가 온 모양인데요."
젊은이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지만 전화를 받기에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전화벨은 계속 울려댔다.
"웬 전화지?"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숨을 가다듬었다.
"받을까요?"
"내버려둬. 잘못 걸려 온 전화일 거야."
전화벨은 몇 번 더 울려대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울려댔다.
"한번 받아 봐요."
오지애는 벌거벗은 몸을 소파에 비스듬히 뉘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대만족이었다.
그녀는 흡족했다.
한잠 자고 나서 다시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 바꿔 달라는데요."
젊은이가 전화통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냈다.
"나를? 누구래?"
"남자인데요, 오지애 여사 바꿔 달라는데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보세요."
하고 상대방을 불렀다.
"재미 보시는데 미안합니다. 오지애 여사이시죠?"
그것은 정중하면서도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그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경찰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거침없는 그 한마디에 그녀는 완전히 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일인가요?"
"잘 들어요. 지금 그 방은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엘리베이터 쪽과 비상구 쪽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능청을 떨어 보았다.
"시간이 없으니까 내 말 잘 들어요. 지금 그런 말 할 시간 없어요. 내 입으로 굳이 당신의 범법 행위를 말하고 싶지 않단 말이오. 당신은 유괴범인데다 살인사건에까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 경찰이 기를 쓰고 당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당신 이름까지 이미 알아냈단 말입니다. 내 말 알아듣겠습니까?"
오지애는 할 말을 잊고 젊은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부지런히 옷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빠져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경찰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요. 경찰이라고 다 당신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아요. 나는 당신을 돕고 싶어요. 왜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어요."
"좀 도와 주세요! 도와만 주시면 충분히 보답해 드리겠어요! 저한테 그만한 돈은 있어요."
그녀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내 말대로만 해요. 우선 그 방에서 빨리 빠져 나와야 해요."
"포위됐다면서요?"
"내가 잠시 경찰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테니까 빨리 그 방을 나와요. 정확히 십 분 후에 그 방을 나와요. 그 방을 나와서 비상 계단을 통해 9층으로 올라와요. 한 층만 올라오면 돼요. 절대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되고 비상계단을 이용하도록 해요. 그리고 908호실로 들어가요. 문을 열어 놓을 테니까. 그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도록 해요. 누가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해도 절대 문을 열어 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남자와 함께 행동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함께 있는 남자를 돌려보내요. 빨리 행동해요! 908호로 가요!"
그녀가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젊은이는 이미 옷을 다 입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물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난 먼저 가봐야겠는데요."
젊은이는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탓할 여유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맘대로 해요. 빨리 나가요!"
그녀가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젊은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갔다.
그녀는 급한 대로 우선 옷부터 입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것저것 곰곰이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단지 지금 자신이 경찰의 포위망 속에 있다는 것, 그래서 빨리 피하지 않으면 체포될 것이라는 생각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누구일까?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이다.
정말 경찰일까? 내 이름과 범죄 행위 등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경찰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왜 나를 도와 주려고 하는 것일까? 뭔가 대가를 바라고 그러는 게 아닐까? 나를 구해만 준다면 대가쯤이야 얼마라도 좋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인 그녀는 이미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본 다음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복도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무 조용하다는 그 사실이 오히려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분명히 형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는 걸음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형사들은 원래 교활하기 때문에 눈에 띄게 감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빠져 나온 그녀는 허둥지둥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이윽고 9층으로 올라오자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무엇에 이끌리는 것처럼 복도를 걸어가다가 마침내 908호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듣던 대로 908호실 출입문은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열려 있었다.
그녀는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은 캄캄했다.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지기에는 자신이 너무 위기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앞으로 내몰아갔다.
그녀는 오른손을 뻗어 가만히 문을 밀었다.
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안쪽으로 열렸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방 안의 동정을 살폈다.
방 안은 너무도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때 복도 저쪽 끝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자 두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바람에 놀란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방 안으로 얼른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문은 닫히면서 저절로 찰칵 하고 잠겼다.
그녀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방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가 놓여 있는 곳은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 있어서 벽에 가려 입구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욕실 앞을 지나 방 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리고 침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흑 하고 놀라면서 멈춰 섰다.
침대 위에는 웬 여인이 몸을 사리고 앉아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두 눈에 증오가 서려 있었다.
오지애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주춤하고 물러섰다.
"누, 누구예요?"
오지애는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여인도 떨고 있었다.
무서워서 떨고 있는 게 아니라 증오에 사무쳐 떨고 있었다.
오지애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 908호실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일어서면서 차갑게 응수했다.
"맞아요, 908호실이에요. 오지애 씨,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누구예요?"
그녀는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차차 설명할 테니까 자리에 앉아요."
"당신 누구예요?"
그녀는 뒷걸음질을 하면서 출입구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면서 웬 남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남자였다.
남자의 안색은 창백했다.
적의에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곧장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앉으십시오, 오지애 씨."
남자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오지애는 비로소 그 남자가 아까 카바레에서 자기한테 춤을 청하던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당신은……."
"네, 아까 카바레에서 보았죠."
"경찰이 아니군요?"
그녀는 출입구 쪽을 주시하며 물었다.
여차하면 방에서 빠져 나가려고 틈을 노렸지만 남자는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네, 경찰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경찰을 부를 수 있어요. 만일 당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예요? 뭣하는 사람들인데 사람을 이렇게 유인해서 가둬 놓고 이 야단이에요? 비켜요! 비키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그녀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가로막고 있는 남자를 밀치면서 계속 비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남자 역시 그녀 못지않게 완강하게 그녀를 막아 서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해요. 내 허락 없이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어요. 정 이렇게 말을 듣지 않고 시끄럽게 굴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어. 전화만 걸면 경찰은 달려오도록 되어 있어."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에 오지애는 그만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가 카바레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예요? 누군데 사람을 이렇게 붙잡아 놓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양미화가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이년, 이 더러운 년! 내 딸 내놔! 내 딸 내놓으란 말이야!"
17.
살인자의 손 종화는 오지애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몸부림치는 아내를 떼어내느라고 애를 먹어야 했다.
악에 받친 양미화는 오지애의 머리칼을 단단히 움켜잡고 앞뒤로 마구 흔들어대며 내 딸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있었고, 오지애는 양미화의 손에서 풀려 나려고 기를 당신이 유괴한 김장미의 부모요.
그 애는 하나뿐인 우리 자식이오.
그 애를 찾게만 해주면 당신을 경찰에 넘기지 않겠소.
약속하는데 장미를 돌려주기만 하면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소.
당신도 자식이 있다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어떻다는 거 잘 알 거요.
우리는 그 애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 애가 죽으면 우리도 죽을 거요.
자, 장미는 지금 어디 있죠?
" "
기가 막혀서! 당신들은 자식을 잃으니까 제정신이 아닌가 본데, 제발 제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똑똑히 보세요! 당신들은 착각하고 있어요.
오해하고 있단 말예요! 도꿀당신이 유괴한 김장미의 부모요.
그 애는 하나뿐인 우리 자식이오.
그 애를 찾게만 해주면 당신을 경찰에 넘기지 않겠소.
약속하는데 장미를 돌려주기만 하면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소.
당신도 자식이 있다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어떻다는 거 잘 알 거요.
우리는 그 애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 애가 죽으면 우리도 죽을 거요.
자, 장미는 지금 어디 있죠?
" "
기가 막혀서! 당신들은 자식을 잃으니까 제정신이 아닌가 본데, 제발 제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똑똑히 보세요! 당신들은 착각하고 있어요.
오해하고 있단 말예요! 도대체 장미가 누구예요? 그리고 유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당신들 딸을 유괴해요? 생사람 잡지 말고 비키세요!
" "
제발 딴소리 하지 말아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해서 먹혀 들어갈 줄 알아요? 여기서 빨리 빠져 나가려면 장미를 넘겨 줘요.
쓸데없는 시간 허비하지 말고 순순히 말을 들어요.
참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 "
정말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
생사람 잡아 놓고 사람 찾아내라니,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네.
" "
시간을 절약합시다.
당신하고 말씨름 벌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장미는 지금 어디 있어요?
" 종화는 장미의 사진을 꺼내 오지애의 코앞에 디밀었다. "
이 애가 바로 내 딸이오.
당신이 지난 7월 20일 K여중 앞에서 유괴했던 내 딸이란 말이오.
당신은 갓난아기를 업은 시골 아낙네로 분장해 가지고 집을 찾는 척하면서 내 딸아이를 유괴했어요.
어린 소녀의 아름다운 마음을 역이용해서 팔아먹은 간악한 여자란 말이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지나간 일이니까 묻지 않겠소.
내 딸아이만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해준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소.
당신이 개인 택시 운전사를 살해했다는 것도 이미 우리는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오.
우리는 딸만 찾으면 되요.
아까 내가 경찰이라고 하면서 당신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당신은 나한테 도와 달라고 애원했어요.
도와만 주면 충분히 보답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건 당신이 장미를 유괴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요? 인정했기 때문에 당신은 이 방까지 도망 온 게 아닌가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부인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요?
" 오지애는 말문이 막혔다. 부인한다는 것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두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
정 부인하면 경찰에 넘길 테야! 넌 어린 학생을 유괴하고 사람까지 죽인 살인범이야!
" 양미화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오지애는 경찰에 넘기겠다는 말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그녀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돌연 온몸으로 종화에게 부딪쳐 왔다. 워낙 세차게 그리고 갑작스레 부닥쳐 오는 바람에 종화의 몸이 휘청했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그를 밀어붙이고 오지애는 문 쪽으로 돌진했다. "
붙잡아!
" 종화가 소리치자 어리둥절해 있던 양미화가 오지애를 뒤쫓았다. 오지애는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양미화의 손이 뒤에서 낚아챘다. 양미화는 그녀의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졌다. "
이거 놔!
" 오지애는 손을 뒤로 돌려 양미화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러나 허리춤을 움켜잡은 양미화의 두 손은 더욱 억세어지기만 했다. 하지만 억센 면에서는 오지애 쪽이 더 나았다. 그녀는 양미화를 질질 끌어당기면서 밖으로 거의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종화의 손길이 뻗어 왔다. 종화는 뒤에서 그녀의 목을 휘어 감았다. 오지애는 고개를 숙여 이빨로 그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종화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안은 채 뒤로 몸을 굴렸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뚱이가 방 안에 나뒹굴었다. 양미화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녀는 보조 자물쇠까지 잠근 다음 쇠줄걸이를 걸었다. "
빨리 약 가져와!
" 종화는 오지애의 배 위에 올라앉아 소리쳤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흉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까지 표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무서운 힘으로 오지애의 목을 죄어대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오지애의 얼굴 위에 질퍽하게 젖은 거즈가 놓였다. 오지애는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그녀한테는 구원을 청하는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사람 살리라고 계속 소리를 질러대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렇게 되면 경찰이 달려올 것이고, 그녀는 결국 체포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번에 경찰에 체포되면 끝장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탈출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발버둥치던 그녀의 팔다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갔다. 약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종화는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오지애가 물어뜯은 오른쪽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통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기분이 언짢아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피를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흘린 피라 해도 그는 그것을 보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상처가 깊어요.
" 피를 닦아 내면서 미화가 말했다. "
괜찮아.
나가서 소독약이나 사다 줘.
" 아내가 약을 사러 밖으로 나가자 그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오지애를 내려다보았다. 오지애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빨간 티셔츠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었다. 찢긴 옷 사이로 그녀의 젖가슴이 보였다. 젖가슴은 의외로 크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그는 광대뼈가 튀어나온 강파른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침대 밑에서 가방을 끌어냈다. 먼저 그는 철사로 오지애의 발목부터 묶었다. 발목을 함께 단단히 묶은 다음 두 손목도 배 위에 올려놓고 철사로 휘어 감았다. 그러고 나서 손목과 발목을 연결시켜 철사를 죄었다. 오지애의 몸뚱이는 마치 새우처럼 앞으로 오그라졌다. 그는 발과 손이 맞닿을 때까지 줄을 바싹 조였다. 그 일을 마쳤을 때 아내가 돌아왔다. 그녀는 오지애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려 상처에 머큐로크롬을 바른 다음 붕대로 그곳을 싸맸다. "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 "
두 시간 후면 깨어날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 그는 포장용 테이프로 오지애의 입을 봉했다. "
됐어.
화장실로 운반해.
" 그들은 오지애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욕조 속에 짐짝처럼 부려 놓았다. 욕조 속에는 물이 들어 있지 않았다. 오지애의 몸뚱이는 새우처럼 오그라진 채 욕조 속에 처박혔다. 애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틀자 전기 스탠드에 불이 들어왔다. 은은한 불빛에 방 안의 모습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전화벨이 계속 요란스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거슴츠레 뜬 채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전화통을 더듬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접니다, 짱굽니다.
" 짱구는 그가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 중의 한 명으로,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놈은 정보를 물어 오는 데 있어서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
무슨 일이야?
" 애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
저기, 큰 뉴스가 있습니다.
" 짱구는 꽤 흥분해 있었다. "
뭔데 그래?
" "
도끼에 관한 겁니다.
" "
뭐라고!
" 애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옆에 발가벗은 채 모로 누워 잠 들어 있는 여자의 몸뚱이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
도끼가 잘 나가는 술집을 알아냈습니다.
" "
어디야?
" 애꾸는 몸에 걸려 있는 시트를 걷어 냈다. 그 역시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오른쪽 눈이 초점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과는 달리 왼쪽 눈은 불빛을 받아 무섭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가 오른쪽 눈을 잃은 것은 오 년 전이었다. 눈을 잃은 뒤 지난 오 년 동안 그는 자기 눈을 앗아간 자를 찾아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지만 지금까지 만날 수가 없었다. 두어 번 만날 기회가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놓치곤 했었다. 그 자의 이름은 노태식이라고 하는데, 도끼를 잘 휘두른다고 해서 도끼라는 별명으로 통하고 있었다. 오 년 전 애꾸는 노태식이 휘두르는 도끼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었다. 비껴서 맞았기에 망정이기 정통으로 맞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
놈은 지금 부산에 있습니다.
부산 S동에 있는 황금종이라는 술집에 자주 나타난답니다.
" "
정말이야?
" "
믿을 만한 정보입니다.
" "
날 새는 대로 부산에 내려간다.
열 명을 차출해.
완전 무장하고 말이야.
" 양미화는 부지런히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오지애가 얼른 깨어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얼른 깨어나지 않고 두 시간쯤 지나서야 눈을 떴다. "
그년이 깨어났어요.
"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던 종화는 화장실로 들어가 보았다. 오지애는 욕조 속에 처박힌 채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공포로 변했다. 그녀는 팔다리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철사가 살 속을 파고드는 바람에 고통 스럽기만 했다. 그렇지만 입이 봉해 있는 바람에 고통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허리가 부러질 듯 아파왔다. 종화는 아내를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아내한테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지애는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두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을 보고 가만히 몸을 떨었다. 종화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김을 뿜으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샤워기 쪽으로 돌렸다. 샤워기를 들고 뜨거운 물을 오지애의 얼굴에다 겨누자 그녀는 기겁을 하며 얼굴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도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종화는 물줄기를 돌렸다. "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얼굴은 뜨거운 물에 익을 거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욕조 속에 물이 가득 찰 거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네 자신이 잘 알겠지.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하지만 내 딸을 찾기 위해 참겠어.
바른대로 말해.
내 딸을 유괴한 게 사실이지?
"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뜨거운 물이 고이기 사작하자 그녀는 괴로운 듯 몸을 틀었다. 종화는 뜨거운 물을 다시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녀는 미친 듯 머리를 흔들었다. "
내 딸을 유괴했지? 인정하면 고개를 끄덕거려!
" 아무리 얼굴을 피하려고 해도 뜨거운 물은 계속 따라왔다. 그녀의 얼굴은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게 된 그녀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유괴해다가 팔아먹었지?
" 실내는 허연 김이 뿌옇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지애는 밑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촉을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고 격렬하게 몸부림쳤지만 모두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
대답해! 유괴해다가 팔아먹었지?
" 오지애는 벌겋게 부풀어오른 얼굴을 끄덕였다. 종화는 그녀의 입을 봉했던 테이프를 뜯어냈다. "
소리지르지 마.
소리질러도 여기서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지만 조용히 하는 게 좋아.
시끄럽게 굴면 다시 입을 봉할 테다.
" "
뜨거워 죽겠어요! 제발!
" 그녀는 울부짖으며 몸을 들썩거렸다. "
그럴 수는 없어.
뜨거운 물이 싫으면 묻는 대로 빨리 대답해.
내 딸은 지금 어디 있나? 있는 곳을 말해 봐!
" "
모, 몰라요.
알 수 없어요.
돈 받고 넘기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요.
정말 어디 있는지 몰라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 그녀는 뜨거운 물에서 나오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사랑하는 딸이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이 그를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 "
그 애를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봐! 가장 빨리 말이야!
" "
너무 뜨거워요! 뜨거워서 말 못 하겠어요!
" 뜨거운 물은 이제 그녀의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
좋아, 여유를 주지.
하지만 거짓말 하면 용서 없어!
" 종화는 뜨거운 물을 잠그는 대신 차가운 물을 틀었다. "
나를 풀어 주세요.
그러면 빨리 찾을 수 있어요.
그 방법이 제일 빨라요.
" "
그건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나를 그렇게 어리석게 보지 마.
자, 장미를 빨리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물은 식어 가고 있었지만 그 대신 그녀의 몸뚱이는 점점 물 속으로 잠겨 가고 있었다. "
정말 전 그 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요.
이건 정말이에요.
" "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란 말이야!
" 그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오지애의 머리를 눌렀다. 머리가 물 속에 잠기는 바람에 그녀는 얼떨결에 물을 마시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
빨리 찾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일단 제 손에서 떠나면…… 전 그 애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전 공급만 하고 있어요.
" "
여자 애들을 데려다가 팔아먹기만 하고 그 다음은 모른다 이 말이지? 그러면 장미를 누구한테 팔아먹었지? 그리고 얼마 받고 팔았어?
" 7월 29일 아침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양미화는 창문을 통해 멀리 여명의 빛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얼른 돌아섰다. 남편이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은 갔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있었다. 그 동안 두어 번 문을 두드렸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만 말했다. 그녀는 기다리다 지쳐 소파에 앉아 깜박 졸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막 깨어났던 것이다. 화장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그녀는 문을 밀어 보았다. 문이 가만히 열렸다. 종화는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미화를 보고도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었다. "
어떻게 됐어요?
" 미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서 욕조 안을 들여다 보았다. 욕조에서는 뜨거운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욕조 속의 여인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얼굴은 물 속에 잠겨 있었고 뜨거운 물에 익을 대로 익어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두 눈은 물 속에서 부릅떠진 채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
죽어 버렸어.
" 종화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미화는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잠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
당신 말대로 경찰에 넘기는 건데…… 잘못했어.
" 종화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미화는 남편이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
경찰에 신고해.
" "
안 돼요!
" 미화는 남편을 욕실에서 끌어내려고 했다. 종화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
지금도 저주스러워.
다시 한 번 죽이고 싶어.
죽일 수 있으면 말이야.
" 미화는 전율하면서 뒤에서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흐느껴 울었다. "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가만 계세요.
" 그들은 욕실을 나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동안 입을 꼭 다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움직인 것은 방 안의 어둠이 완전히 가셨을 때였다. 그들은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종화가 먼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몸을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아내 이상의 상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어떡하지?
" 아내라고 특별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경찰에 알릴 수는 없어요.
" 미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내의 그 같은 태도에 종화는 내심 놀랐다. 그녀에게 그런 단호한 데가 있는 줄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다. "
저런 년은 죽어도 싸요.
살려 둘 가치가 없는 년이에요.
정말 잘 죽였어요.
" 종화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남자 손치고는 희고 가냘픈 손이었다. 지금까지 책만 뒤적거리던 손이었다. 그런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의 손. 그는 소름이 쫙 끼쳐 왔다. "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은 바로 구속될 거예요.
그러면 누가 장미를 찾죠? 저 혼자서 장미를 찾으라는 거예요?
"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
아무튼 나는 살인자야.
아무리 죽어도 좋을 여자라고는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야.
나는 사람을 죽인 거야.
이 손으로 말이야.
" 그는 두 손을 쳐들어 보였다. "
그러지 마세요! 당신이 그러면 저는 어떡하라는 거예요! 당신은 악마를 제거한 거예요.
저건 인간이 아니에요, 악마예요!
" 종화는 다가가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는 울지는 않았다. "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장미를 찾고 나서 하세요.
" "
알았어.
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 "
저 여자가 자백했어요?
" "
결정적인 것은 듣지 못했어.
장미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저 여자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
저 여자는 어린애들을 유괴해다가 팔아 넘기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그 다음은 그 애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
일단 넘겨진 애들은 여러 사람 손을 거쳐서 전국에 흩어지나 봐.
그러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찾을 수 있을 거야.
팔린 과정을 추적해 가면 결국에는 찾을 수 있을 거야.
" "
저 여자가 장미를 누구한테 팔아 넘겼는지 알아내셨어요?
" "
음, 그건 알아냈어.
아무래도 장미를 찾는 데는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아.
" 종화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문득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시체를 흔적도 없이 치워 버리고 싶었다. 18. 범인들 여우가 B호텔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은 것은 그날 오후 두 시경이었다. B호텔은 S서 관할이 아닌 Y서 관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가 늦은 것이었다. 여우는 자신이 맡고 있는 사건 수사에 필요한 만큼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을 비롯 각종 사건들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다. 특히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Y서가 살인사건 신고를 접수한 것은 그날 낮 열두 시 오 분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 분 뒤에 시경 상황실과 치안본부 상황실에 보고 되었다. 그런데 여우가 몸담고 있는 수사본부에서는 그보다 두 시간 가량 늦어서야 그 사건을 알게 된 것이다. 각 경찰서와 경찰서, 그리고 시경과 치안본부 등은 컴퓨터 터미널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전국에서 일어난 사건 발생 상황을 그때그때 즉시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시경이나 치안본부에 접수된 사건 신고는 즉시 컴퓨터에 입력되기 때문에 컴퓨터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는 전국 경찰서에서는 거의 동시에 사건 발생과 그 개요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날따라 수사본부를 지키고 있는 순경은 게으름을 피웠다. 여우는 그에게 삼십 분마다 상황실에 가서 사건 발생을 체크하라고 일렀었다. 그런데 그는 열한 시경에 상황실에 들렀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는 나른한 기분에 젖어 책상 앞에 비스듬히 앉아 졸음을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상황실에 다시 가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거의 두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상황실에 가보니 상황판에 살인사건 발생이 나와 있었다. 컴퓨터 터미널을 지키고 있는 여 순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 시간 사이에 일어난 각종 사건 개요가 타이핑되어 있는 종이를 뜯어 그에게 내주었다. 본부로 돌아온 그는 무전으로 여봉우 반장을 불렀다. 그때 여우는 사창가에 잠복중이었다. 보고를 받은 여우는 연락이 늦은 데 대해 부하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지 형사를 데리고 곧장 B호텔로 달려갔다. B호텔 908호실은 Y서 수사과 형사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미 그들은 현장수사를 거의 끝내 가고 있었다. 여우는 아는 형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시체가 들어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형사들이 막 시체를 욕조 속에서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제지하고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
얼굴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주 잔인 무도하게 살해됐어요.
" 누군가가 그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
세상에 이럴 수가! 얼굴이 엉망인데요.
" 시체를 별로 접해 보지 못한 지 형사의 말이었다. "
화상을 입었군.
" "
얼굴이 익어 버렸어요.
뜨거운 물로 익힌 모양이에요.
" Y서 형사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체의 얼굴은 벌겋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흉칙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손발은 철사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묶인 손발을 앞에서 서로 맞닿게 하여 단단히 죄어 놓았기 때문에 시체의 몸뚱이는 흡사 새우처럼 구부러진 채 욕조 속에 처박혀 있었다. "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빼냈습니다.
" 천장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여우는 구역질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방으로 나와 Y서의 형사계장을 만났다. Y서의 형사계장은 오십대의, 머리가 벗겨지고 몸집이 뚱뚱한 사나이였다. 그는 자기의 관할 구역에 뛰어든 불청객을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맞았다. 그러나 다른 서의 수사관이라 하더라도 필요에 따라서는 관할 밖에서 발생한 사건을 수사할 수 있는 것이고 관할서에서는 거기에 협조해야 함이 규칙이었다. 마지못해 그는 사건 개요와 감식 결과를 여우에게 말해 주었다. "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사망 원인은 질식이야.
물 속에 처박아 질식사시킨 모양이야.
얼굴에 화상도 심하지만 그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아니야.
수법은 잔인하지만 손발을 묶은 것으로 봐서 아마추어의 솜씨 같아.
사망 시간은 오늘 새벽 네 시 전후.
오전 열한 시경에 프런트에서 체크를 하려고 이 방으로 전화를 걸쓴歐湮말이야.
" "
범인은 혼자인가요, 아니면 그 이상인가요?
" "
아직 그것도 알 수 없어.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형사 한 명이 전화를 받아 대화를 나눈 다음 전화를 끊고 계장을 바라보았다. "
숙박 카드에 적힌 건 모두 가짜랍니다.
이름도 주소도 주민등록 번호도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답니다.
" 계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우에게 908호의 숙박 카드를 내보였다. "
이게 모두 가짜라는 거야.
" 여우는 계장이 내미는 숙박 카드를 받아 들고 꼼꼼이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글씨는 조그맣고 예쁜 것이 얼른 보기에도 여자윱歐湮말이야."
"범인은 혼자인가요, 아니면 그 이상인가요?"
"아직 그것도 알 수 없어."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형사 한 명이 전화를 받아 대화를 나눈 다음 전화를 끊고 계장을 바라보았다.
"숙박 카드에 적힌 건 모두 가짜랍니다. 이름도 주소도 주민등록 번호도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답니다."
계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우에게 908호의 숙박 카드를 내보였다.
"이게 모두 가짜라는 거야."
여우는 계장이 내미는 숙박 카드를 받아 들고 꼼꼼이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글씨는 조그맣고 예쁜 것이 얼른 보기에도 여자의 글씨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김숙자였다.
이름을 비롯해서 주소와 주민등록 번호, 연락 전화 번호, 직업 등이 모두 가짜로 밝혀졌다니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여우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한동안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건 죽은 여자가 작성한 건가요?"
"아닌 모양이야. 이걸 작성한 사람 역시 여자이긴 한데 다른 여자인 모양이야. 숙박 카드를 작성할 때 지켜본 프런트 계원이 한 말인데 그 여자는 사십대 여인으로 상당한 미인이었다는 거야. 그리고 옷차림이 전혀 다르다는 거야."
"그럼 피살자는 그 여자와 함께 투숙한 건가요?"
"그야 알 수 없지."
"저는 지금 범인으로 지목된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유괴범이자 살인범으로 수배된 여인입니다."
"우리와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것은 방해가 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뜻의 말이었다.
"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만……."
엘리베이터 속에서 여우는 지 형사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물었다.
지 형사는 조그만 두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고문을 당한 것 같던데요. 지독한 고문을……."
"그거말고 말이야."
지 형사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우는 앞장서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로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비는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피살자는 중년 여인이야. 그리고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어. 빨간 티셔츠 말이야. 그런데 개인 택시 운전사 유기태와 여관에 투숙했던 그 여인도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이건 종업원이 증언한 거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욕실에 죽어 있는 여인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거미란 말입니까?"
"그것만 가지고는 뭐라고 말할 수 없어.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저기도 빨간 티셔츠가 있는데요."
지 형사는 라운지 저쪽 창가에 외국인과 앉아 있는 빨간 티셔츠의 여인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여우는 프런트 쪽으로 다가갔다.
어젯밤 908호실 투숙객을 받았던 프런트 계원은 비번인데도 귀가하지 못하고 호텔에 남아 있었다.
경찰이 수사를 위해 그를 붙잡아 두었기 때문이다.
여우 일행은 그를 데리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 젊은 프런트 계원은 똑같은 진술을 또 되풀이해야 한다는 사실에 진력이 난 듯 하품부터 했다.
커피숍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908호실에는 시체가 누워 있는데 여기는 이렇게 손님들로 흥청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여우는 기묘한 배반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호텔측으로서는 자기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을 것이다.
장사에 지장이 있으니까 말이다.
"귀찮고 피곤하겠지만 자세히 좀 이야기를 해줘야겠소."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프런트 맨은 다분히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시 좀 말해 줘야겠소. 나는 소속이 다르니까 처음부터 자세히 좀 말해 줘요. 어젯밤 그 여자가 여기 나타나서 방을 얻은 게 언제였지요?"
"밤 열한 시 가까워서였습니다."
"혼자였나?"
"네, 혼자 와서 방을 얻었습니다."
"908호실 숙박 카드는 그 여자가 직접 작성한 건가요?"
"네, 제가 보는 데서 직접 적었습니다."
"거기에 적은 것은 모두 가짜로 드러났어요. 카드를 작성할 때 주민등록증은 확인하지 않나요?"
"규칙은 확인하도록 되어 있지만 보통 내국인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여자에 대한 인상 착의를 좀 말해 주시오."
"사십대 부인이었는데 부인치고는 아주 미인이었습니다. 퍼머 머리에 눈이 크고 검었습니다. 옷차림은 검정 바지에 밤색 체크 무늬 남방 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 보니까 어떤 남자하고 함께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우는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어떻게 생긴 남자였나요?"
"뒷모습만 봤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키는 중키였고 안경을 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밤색 가방이었는데 여행 다닐 때 흔히 들고 다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옷차림은?"
"좀 야한 색깔의 남방을 입고 있었습니다. 울긋불긋한 남방에다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나갔나요?"
"나간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방에 들어가 보니까 열쇠를 방에 두고 나갔더군요. 아마 몰래 빠져 나간 것 같았습니다."
"죽은 여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주시오."
"그 여자는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옷차림으로 봐서 815호실에 투숙했던 남자와 동행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815호실에 투숙했던 남자는 누구인가요?"
"어떤 젊은 남자였는데…… 열한 시경에 여기 와서는 815호실을 얻었습니다. 908호실을 얻은 여자와 거의 같은 시간에 여기서 체크인했습니다. 그 젊은 남자는 호텔비를 지불하고 커피숍으로 가더니 조금 있다가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와 함께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그 여자는 빨간 티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여자가 그 여자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젊은 남자라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나요?"
"제비족같이 옷차림이 미끈했습니다. 아래위 흰색 싱글 양복에다 안에는 노란 남방을 입고 있었습니다. 몸이 건장하고 미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 시경에 혼자서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급히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봤는데 그 다음에는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815호실 숙박 카드를 좀 봅시다."
"경찰에서 이미 가져갔는데요."
그것은 Y서 형사들이 이미 815호실에 투숙했던 사람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숙박 카드에 적혀 있는 것도 모두 가짜라고 하던데요."
하고 프런트 맨이 덧붙여 말했다.
여우는 프런트 맨을 돌려보내고 식은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 형사를 쳐다보았다.
"815호실에 젊은 놈팽이와 투숙했던 여인이 908호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어. 이건 가정이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야."
"피살자가 젊은 남자와 함께 815호실에 투숙했던 여자라면 어떻게 해서 908호실까지 갔는가 하는 게 문제겠는데요?"
"그래, 그 점이 문제야. 자, 이제부터 가볼 데가 있어."
호텔을 나온 그들은 택시를 타고 장미네 집으로 달려갔다.
장미네 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친척들인 것 같은데 거의가 여자들이었다.
김종화는 집에 없었고 양미화가 형사들을 맞아들였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그녀는 그들을 남편의 서재로 안내했다.
김종화의 서재 벽은 온통 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곤충학자의 서재가 먼지만 쌓이게 됐다고 생각하자 여봉우는 마음이 아려 왔다.
학자는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도와 주어야 한다.
아니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 고통을 견뎌 내고 다시 이 서재에 앉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김 교수님은 어디 가셨는가요?"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을 앞에 두고 양미화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자기 딸 소식을 묻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여우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눈과 눈 사이에 난 검은 점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바짝 말라붙은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지 형사가 그에게 심각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을 묵살하고 그는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어젯밤에는 어디서 묵으셨나요?"
"어디서 묵다니요?"
"어젯밤 전화를 걸었는데 안 계시더군요. 김 교수님도 외출중 이시구요. 두 분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셨나요?"
"전 그이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울릉도에서 돌아오신 뒤로는 내내 밖으로만 돌아다니고 계시니까요."
그녀의 두 눈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여우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부인께서는 어젯밤 어디서 무엇을 하셨나요?"
"전…… 전 장미 찾아 돌아다녔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밤중에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 니셨다는 건지 말씀해 보십시오."
"영등포 사창가를 돌아다녔어요. 혹시 장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
여우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세 식구가 찍은 사진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배 위에서 찍은 것으로 장미 양은 부모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부인, 어젯밤 혹시 B호텔에 가시지 않았나요? 김 교수님과 함께 말입니다."
"B호텔에요? 아, 아뇨. 가지 않았어요."
그녀는 떨고 있었다.
"어젯밤 B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중년 여인이 잔인 하게 살해되었는데……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는 여자…… 그러니까 장미 양을 유괴했던 바로 그 여자 같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양미화는 중얼거리면서 형사들의 시선을 피했다.
여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 여자를 살해했는가 하는 것보다 그 여자가 죽어 버리는 바람에 장미 양을 찾는 일이 더욱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우는 양미화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듯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실내에는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 여자는 죽어 마땅해요."
한참 만에 양미화가 침묵을 깼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여자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여우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양미화가 성난 눈길을 그에게 던져 왔다.
"그럼 그런 여자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 여자를 죽일 수 있는 건 법뿐입니다."
"만일 법이 그 여자를 죽이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법이 그 여자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도 그 여자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어요!"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자식을 잃은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시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거예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어요. 모든 게 끝났어요. 사람이 마지막까지 갔을 때 뭐가 남는지 아세요? 발악과 절망이에요. 그런 상태에서는 무서운 게 없어요. 무슨 짓이라도 우리는 할 수 있어요!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난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마침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여우는 곤혹스런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지 형사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일어섰다.
지 형사도 따라 일어섰다.
여우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사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양미화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여우는 액자를 지 형사에게 건네 주었다.
지 형사는 그것을 들고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그 뒤를 여우가 조용히 따라 나갔다.
양미화는 그대로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형사들은 다시 택시를 타고 B호텔로 향했다.
아까 만났던 그 프런트 맨은 그때까지도 호텔에 대기하고 있었다.
여우는 가지고 온 사진을 보이며 말했다.
"혹시 어젯밤 908호실 얻은 사람이 이 가운데 있는지 봐주시오."
프런트 맨은 양미화를 가리켜 보였다.
여우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 해서는 안 됩니다. 사진을 봤다는 이야기도 해서는 절대 안 돼요."
"알겠습니다. 절대 안 하겠습니다."
여우는 당황해서 지 형사를 쳐다보았다.
지 형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라운지로 가서 주스를 한 잔씩 시켜 마셨다.
"자, 이거 어떡하지?"
"체포해야지 않습니까?"
"그게 급한 일일까?"
그 말에 지 형사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는데…… 이걸 어떡하지?"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여우는 갑자기 허탈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김종화 교수는 경찰 수사보다 한 발 앞서 가고 있었다.
수사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그 정도에까지 가 있다니 확실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거미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그녀를 미행했을 것이다.
그들 부부는 908호실에 투숙했고 거미는 젊은 놈팡이와 함께 815호실에 투숙했다.
김 교수는 거미를 908호실로 유인했을 것이다.
815호실에서 살해하여 908호실로 시체를 운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그는 그 젊은 놈팡이를 쫓아 버리고 거미를 908호실로 유인해 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합세하여 거미를 묶은 다음 장미 양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거미를 욕조 속에 처박아 놓고 고문을 가했을 것이다.
고문 끝에 거미가 죽었는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김 교수는 거미한테서 무엇인가 알아냈을 것이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지금 장미 양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미 피를 본 손이다.
또 다른 살인이 있기 전에 그를 제지해야 한다.
19.
아기 B호텔 908호실에서 살해된 여인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그날, 그러니까 7월 29일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과거 같으면 지문만 가지고 신원을 밝히려면 지문 감식반원 수백 명이 동원되어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일일이 지문을 대조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아주 달라져 불과 두서너 시간이면 그 방대한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것은 현대 과학기술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덕분이었다.
경찰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수천만 개의 지문을 컴퓨터에 입력시켜 놓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필요한 지문을 찾아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피살자의 이름은 오지애였다.
나이는 42세.
본적과 현주소, 그리고 가족관계도 밝혀졌다.
가족관계에서는 한병수라는 자가 남편으로 되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자식이 하나 있긴 했지만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딸이었는데 이 년 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오지애의 기록에 전과는 없었다.
오지애의 남편 한병수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형사들은 앉은 채로 그들을 맞는 사내가 오지애의 남편임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그가 두 다리를 못 쓰는 앉은뱅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숨을 죽였다.
"부인 이름이 오지애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부인은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어젯밤에 나가서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서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들려 오고 있었다.
Y서의 형사들은 거기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여봉우는 달랐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의 몸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고 옷은 땀과 오줌에 절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건드리자 냉큼 입을 벌려 그것을 빨려고 했다.
몹시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아기는 까맣게 탄 데다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안타까울 정도로 가냘프게 울고 있었다.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이 있었다.
그대로 두면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아기는 누구의 아기입니까?"
여우의 물음에 사내는 쭈뼛거리다가 대답했다.
"우리 아기입니다."
"부인께서 낳았다는 겁니까? 부인께서는 마흔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우가 선수를 치자 불구의 사내는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집사람이 낳은 것은 아니고…… 집사람이 데려다가 기르는 앱니다. 집사람은 자식이 없으니까 아기를 몹시 기르고 싶어하지요. 집사람은 아기를 무척 귀여워합니다."
"아기를 귀여워하는 게 아니라 이건 학대요. 이 아기는 죽어 가고 있어요."
여우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우유병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우유가 반쯤 남아 있었다.
젖꼭지를 입에 갖다 대자 아기는 정신 없이 그것을 빨다가 도로 입을 빼내고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여우는 우유 방울을 입 속에 떨어뜨려 보았다.
시큼한 맛이 나는 것이 이미 부패해 있었다.
여우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것은 상했소. 빨리 우유를 타서 아기한테 먹이시오."
다른 형사들은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Y서 형사들이 볼 때 그 집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집이었다.
따라서 집 안을 뒤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해자를 체포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우의 입장과 견해는 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거미의 죽음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누구의 손에 의해 살해 당했는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수사도 하지 않았다.
거미 같은 존재의 죽음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극단적인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피살자가 누구이든 공정한 수사를 벌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그런 상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거미의 죽음을 수사하기보다는 하루빨리 김장미 양을 찾고 싶었다.
그 집의 골방에서 그는 가난한 시골 아낙네에게나 어울릴 성싶은 낡고 더러운 옷가지를 찾아냈다.
다른 형사들의 눈에는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여우의 눈에는 그것은 아주 중요한 물증으로 보였다.
다른 서의 형사들이 모두 빠져 나간 뒤에도 여우는 그 집에 남아 있었다.
피살자의 남편 한병수는 아내의 주검을 확인하기 위해 형사들을 따라갔다.
여우는 거기에 지 형사를 딸려 보냈다.
피살자의 집 안에는 이제 여우와 아기만 남아 있었다.
아기는 새로 타준 우유 한 병을 순식간에 먹고 나더니 이내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계집아이였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야릇한 기분에 젖어 아기의 자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가져 보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두 시간쯤 지나 한병수가 지 형사의 등에 업혀 돌아왔다.
마루 위에 내려놓자마자 그는 주먹으로 바닥을 때리면서 목놓아 울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몇 군데 특징을 찾아냈습니다. 아내가 틀림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지 형사가 무슨 큰 비밀이나 되는 듯 여우의 귀에다 대고 속삭거렸다.
"이제 저 사람이 큰일입니다.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있어야지요."
"저 사람도 큰일이지만 아기가 더 큰일이야."
한병수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해서 우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서, 그리고 앞으로 혼자 살아갈 일이 무서워서 우는 것이었다.
사내가 하도 서럽게 울고 있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한동안 그의 우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 사내의 울음이 약해지자 여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 해서 안됐지만 좀 대답해 줘야겠습니다. 죽은 부인은 아기를 기르고 싶어서 기른 게 아니었지요?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모릅니다, 몰라요!"
사내는 핏발 선 눈으로 여우를 쏘아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부인하지 마십시오. 부인은 이미 죽었습니다. 부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집 안에만 처박혀 있는 놈이 어떻게 압니까?"
한병수는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치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부인은 초라한 시골 아낙네 차림으로 매일 아기를 업고 밖에 나갔지요?"
한병수는 멈칫하더니 허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그러지는 않았지만 며칠에 한 번씩 그런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나가긴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런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나가 밖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아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집 사람은 나한테 그런 이야기는 조금도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집 지키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만 하는 식모에 불과했으니까요. 내가 오히려 묻고 싶군요. 그 사람이 밖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말입니다."
"이야기해 드리죠. 오지애 씨는 가난한 시골 여자 차림으로 아기까지 업고 나가서 남들이 볼 때 마치 시골에서 갓 올라와 길을 잃은 여자처럼 행동했지요.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여우는 가만히 불구의 사내를 응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동정을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그것도 어린 여학생들한테서 말입니다. 어린 여학생들한테 접근해서 주소를 찾아야 하는데 시골에서 갓 올라와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으니 좀 가르쳐 달라는 식으로 매달리 사실 우리는 당신 부인이 유괴해다 팔아먹은 한 여학생을 찾고 있는 중이오."
"그럴 리가 없어요!"
"믿고 싶지 않을 거요. 하지만 증인이 다 있어요. 하긴 당신이 믿건 안 믿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여우는 일어섰다.
격하게 달아올랐던 사내의 얼굴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여우는 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기는 그때까지도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저 아기를 어떻게 할 거요?"
여우는 턱으로 아기를 가리켰다.
사내의 눈길이 힘없이 아기 쪽으로 흘렀다.
그는 아기를 쳐다보기만 할 사실 우리는 당신 부인이 유괴해다 팔아먹은 한 여학생을 찾고 있는 중이오.
" "
그럴 리가 없어요!
" "
믿고 싶지 않을 거요.
하지만 증인이 다 있어요.
하긴 당신이 믿건 안 믿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 여우는 일어섰다. 격하게 달아올랐던 사내의 얼굴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여우는 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기는 그때까지도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
저 아기를 어떻게 할 거요?
" 여우는 턱으로 아기를 가리켰다. 사내의 눈길이 힘없이 아기 쪽으로 흘렀다. 그는 아기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말해 봐요, 어떻게 할 것인지.
당신이 기를 자신이 있으면 놔두고 가고, 그럴 수 없다면 우리가 데려가겠소.
어떻게 할 거요?
" 그제서야 사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
난 기를 자신 없습니다.
내 자식도 아닌데 내가 왜 기릅니까.
내 몸 하나도 다루기 어려운데 나 혼자서 어떻게 저 애를 기릅니까.
난 자신 없습니다.
제발 데려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다 버리겠습니다.
" "
잘 생각했소.
" 여우는 지 형사에게 끄덕해 보였다. 지 형사는 머뭇거리다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노총각인 지 형사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아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이 애를 어떡하실 겁니까?
"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마침내 지 형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밖에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건물 입구에 서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이상했던지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며 지나쳐 갔다. "
어떡하면 좋지? 자네가 당분간 좀 데려다 기를 수 없겠나?
" "
제가요? 아이구,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집에서는 장가 안 간다고 야단인데, 느닷없이 아기를 데리고 들어가 보십시오.
아마 야단 날 겁니다.
" 지 형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우리 집에 데려다 놓을 수밖에.
" "
반장님 댁에 말씀입니까? 댁에도 식구가 많지 않습니까.
" "
몸이 좋아질 때까지 좀 돌보다가 적당한 데 있으면 보내지 뭐.
우리 집에는 딸이 없단 말이야.
" 그때 아기가 눈을 떴다. 아기는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뒤틀며 울기 시작했다. 여우가 아기의 손을 잡아 흔들어 주며 어르자 신통하게도 아기는 울음을 딱 그쳤다. 아기의 까만 두 눈이 신기한 듯 여우를 올려다보았다. 흐뭇한 표정으로 아기를 내려다보는 여우의 얼굴에는 보호자 같은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
사모님께서 아무 말씀 안 하실까요?
" "
그러니까 수고스럽지만 자네가 좀 가줘야겠어.
아무 말 말고 아기만 내려놓고 나오란 말이야.
사정은 내가 나중에 가서 말할 테니까.
" "
사모님이 깜짝 놀라시겠는데요.
" "
자, 가봐.
" 여우는 굴러오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지 형사는 아기를 안고 힘겹게 택시에 올랐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여우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 뿌듯한 평화로움을 느꼈다. 부산 S동 일대는 환락가로 그 중에서도 나이트 클럽 ‘황금종’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는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금종은 그 일대에서 가장 호화로운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때문에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고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백여 미터쯤 떨어진 뒷골목에는 ‘세림’이라는 모텔이 자리잡고 있었다. 7월 30일 오후. 그 모텔의 한 방에는 열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가 한 가락씩 할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그들은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는 등산용 손도끼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일전을 앞두고 서울에서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그런 것말고도 그들은 품속에 칼 같은 흉기를 품고 있었다. 모두가 벽을 등지고 둘러앉아 있는데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자는 아랫목에 펴져 있는 요 위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잔을 권할 때마다 둘러앉은 젊은이들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곤 했다. 마치 그것은 절대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신하의 모습 그대로였다. "
도끼는 오늘 밤 죽는다.
오늘 밤 안 죽으면 내일 밤 죽는다.
도끼는 죽는다.
반드시 죽여야 해.
도끼한테 칼로 대항해서는 안 돼.
도끼에는 도끼로 대항해야 한다.
" 그는 자기 말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젊은이들은 숨을 죽인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
놈을 죽여야 한다는 데 대해 이의 없겠지?
" "
없습니다!
" 모두가 입을 모아 대답한다. 단 한 명,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자만이 입을 다물고 있다. 애꾸의 시선이 자연 그 자의 얼굴에 가서 멎었다. 그의 별명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조직에서 가장 지혜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자였고,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어 있었다. "
소크라테스, 넌 왜 아무 말 않지?
" "
네, 저기…… 거기에 대해서는…….
" 소크라테스는 난처한 듯 우물쭈물했다. 그는 서른이 조금 넘었는데도 머리가 거의 빠져 마치 거기가 빈터처럼 훤했다. 그리고 볼은 홀쭉했고 눈이 작아 마치 모사꾼 같은 인상이었다. "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해 봐.
" 애꾸가 외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
죽이는 것만은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 소크라테스는 어쩔 줄 몰라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
왜? 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거야?
" "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닙니다.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당연히 죽어야겠지만…… 우리가 놈을 죽이면 아무래도 경찰이 가만 있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되면 일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사람을 죽이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목숨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거하고 그거라도 없는 거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경찰은 살인에 대해서만은 철저하게 수사를 벌입니다.
그럴 바에야 놈을 죽이지 않더라도 죽음 이상으로 더 참혹하게 만드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 상태로 만들면 됩니다.
" "
그렇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지?
" "
팔다리를 잘라 버리고 장님을 만들어 버리면 두고두고 고통을 맛보며 살아갈 겁니다.
" "
음,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 애꾸는 끄덕이며 외눈을 깜박거렸다. "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보복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 "
음, 그게 좋겠어.
그럼 그렇게 해.
죽이지는 말고 병신을 만들어 버리란 말이야.
팔다리를 못 쓰게 만들고 눈도 못 쓰게 만들어 버려.
죽여서는 안 돼.
목숨만 겨우 붙어 있게 만들어 놔.
" 애꾸의 시선이 유난히 뒤통수가 튀어나온 자한테 가서 멎었다. "
그건 그렇고…… 야, 짱구!
" 짱구라 불린 청년은 두려운 빛으로 애꾸를 바라보았다. "
네가 물고 온 정보는 정확한 거겠지? 난 급해서 확인도 하지 않고 내려왔는데 말이야.
" "
네, 믿을 만한 겁니다.
" 짱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믿을 만하다구? 야, 이 자식아! 그 따위 말이 어딨어? 그런 정보는 아주 정확해야 해.
정확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한단 말이야! 우리가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단 말이야! 도끼가 함정을 팠는지도 모르잖아!
" "
저, 정확한 정보입니다.
" "
도대체 어디서 난 정보야?
" "
명태한테서 얻은 정보입니다.
" "
명태가 누구야?
" 외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
명태라고 있습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 "
그놈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들었다는 거야?
" "
도끼 측근한테서 직접 들었습니다.
도끼 측근에 고향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한테서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선배는 도끼한테 심하게 얻어맞고 앙심을 품고 있던 차에 우리한테 정보를 흘려 준 거라고 합니다.
" 애꾸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
그 선배라는 놈을 직접 만나 봤나?
" "
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 "
명태의 말만 듣고 나한테 보고한 건가?
" "
그, 그렇습니다.
" "
서울에 전화 걸어! 전화 걸어서 명태를 찾아내라고 해.
그놈을 조져서라도 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라고 해.
빨리 해!
" 우람한 체격을 지닌 자가 전화통 앞으로 다가앉아 서울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여덟 명의 형사들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서쪽 하늘이 노을로 붉게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먼저 내려와서 현장을 답사한 두 명의 형사들이 그들을 현장으로 안내했다. 그러니까 수사진 모두가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수사본부를 부산으로 임시로 옮겼다고 볼 수가 있었다. 답사를 끝낸 그들은 개별적으로 임시본부로 모여들었는데, 임시 본부를 차린 곳은 봉고차 안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서울서부터 몰고 내려왔는데 그 겉면에는 ‘S전자 이동 서비스 센터’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냉방이 시원치 않아 차 안은 무더웠다. 더구나 여덟 명의 사내들이 뿜어대는 담배연기와 체온으로 하여 차 안은 갈수록 더욱 더워지는 것 같았다. "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요.
우리는 우선 수적으로 열세일 수도 있고, 또 놈들처럼 발악적일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놈들은 목숨을 걸고 대항할 텐데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각자 한번 생각해 봐요.
난 부상자가 생길까 봐 걱정이오.
저쪽에 부상자가 생기는 건 상관 없는데 우리 쪽에 부상자가 생기면 곤란하단 말이야.
" 여우의 말이었다. 좀처럼 땀을 흘리지 않는 그도 얼굴에 땀이 번져 있었다. "
지원 병력을 부르죠.
" 젊은 형사가 의견을 말했다. "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열세이더라도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만둔 거야.
이곳 형사들은 우선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떼를 지어 황금종에 나타나면 금방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란 말이야.
그들이 조심성 없이 냄새를 피우고 돌아다니면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 거야.
그래서 부르지 않기로 한 거야.
" "
놈들은 다급하면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보는데요.
" 이것은 나이가 제일 많은 형사의 말이었다.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것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었던 것이다. "
그렇다고 손님들을 못 들어가게 할 수도 없고…… 그럼 어떡 하지?
" 여우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수사관들을 둘러보았다. 늙은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만일 인질사건으로 확대되면 기자들이 몰려들 거고…… 그렇게 되면 사건은 의외의 방향으로 확대될지도 모릅니다.
전국적인 관심사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 "
곤란한 정도가 아니지.
그렇게 돼서는 안 되지.
" 문제점만 제기되었지 거기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
놈들은 흉기를 가졌지만 우리는 흉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 "
우리가 흉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놈들을 당할 수는 없어요.
놈들은 사정없이 흉기를 휘두를 텐데…….
" "
안 되면 이걸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 그렇게 말하면서 여우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20. 납치 날이 어두웠다. 여름철이라 이미 여덟 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애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신경질을 냈다. "
서울에서는 도대체 왜 전화가 없어? 이 새끼들, 정말 화끈한 맛을 봐야 알겠어?
"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명이 전화통 앞으로 달려가 서울로 장거리 전화를 부탁한다. 애꾸는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고를 받는다. "
아직 명태를 만나지 못했답니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답니다.
지금 총동원해서 찾고 있답니다.
" 애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명태라는 새끼 어디로 내뺀 거 아니야?
" 애꾸의 외눈이 짱구를 노려본다. 짱구는 움찔 놀라 그의 시선을 피했다. "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그럴 애가 아닙니다.
" 애꾸는 손가락으로 짱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네가 책임지는 거야.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넌 죽을 줄 알아.
알았어?
" "
네, 알았습니다.
" 짱구는 사색이 되어 머리를 조아린다. 애꾸는 손도끼를 하나 집어 들더니 커버를 벗겨 내고 그것으로 갑자기 방바닥을 콱 찍었다. 장판 바닥이 파이면서 시멘트가 드러났다. "
도끼를 보면 무조건 이렇게 찍어! 우물쭈물할 필요 없어!
"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했다. "
서울에서 소식 오는 거 봐서 행동하는 게 어떨까요? 신중을 기하는 게 아무래도…….
" 그의 말을 애꾸의 다음 말이 막았다. "
필요 없어! 우물쭈물하다가 그 새끼를 놓칠지도 모르니까 오늘부터 대기해.
각자 제 위치를 잘 지켜.
놓치면 안 돼.
자, 출동해!
" 먼저 두 명이 품속에 도끼를 품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다시 두 명이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열 명이 밖으로 조용히 빠져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애꾸를 포함해서 네 명이 남아 있었다. 애꾸는 가방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는데 이십 분쯤 지나자 웬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
어때?
" 여자는 엉덩이를 내밀어 보이며 물었다. 목소리는 영락없는 남자였다. "
감쪽같은데요.
전혀 몰라보겠는데요.
" 부하들이 감탄하자 애꾸는 빨간색의 점퍼를 열어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브래지어까지 걸려 있었다. "
한두 번 해서 이렇게 되는 줄 알어? 열두 번이나 연습했어, 이 새끼들아.
" "
철두철미하십니다.
" "
하려면 철저히 하고 안 하려면 아예 그만두는 거야.
" 립스틱을 빨갛게 칠한 입술을 여자처럼 오므리면서 말하는 바람에 모두가 웃는다. 그는 퍼머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것도 노랗게 물들인 가발이었다. 빨간 점퍼 밑에는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는 핸드백까지 걸어 놓고 있었다. "
문제는 이 안대야.
" "
하지만 여자로 알 텐데요, 뭐.
" "
하지만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이 위에다 안경을 끼는 거야.
" 그는 안대 위에다 검은 테의 안경을 끼었다. 그렇게 꾸미고 보니 정말 그럴 듯해 보였다. "
그럴 듯한데요.
" "
귀신이라도 날 못 알아보겠지?
" 애꾸는 허옇게 분칠한 얼굴을 쳐들고 웃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도끼를 가슴에 품고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세 명도 각자 흉기를 간직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일단 모텔 밖으로 나오자 애꾸는 우람하게 생긴 부하의 팔짱을 끼었다. 그의 키는 부하보다 훨씬 작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들은 연인 관계 같았다. 남자가 우산을 펴들었다. 날이 저물면서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새끼야, 뻣뻣이 걸어가지 말고 정답게 내 어깨를 감싸란 말이야.
그게 안 꼴려서 못 하겠어?
" 팔꿈치로 우람한 부하의 옆구리를 내지르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
아, 아닙니다.
그럼 껴안겠습니다.
" 그는 애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른 두 명은 삼 미터쯤 떨어져 뒤따라왔다. 그들은 잠시도 애꾸 한테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나이트 클럽 황금종 입구에는 애꾸의 부하 두 명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애꾸는 그들을 흘겨본 다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종은 이 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 층은 식당이었다. 황금종이 있는 건물로부터 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S전자 이동 서비스 센터라고 소속을 밝힌 봉고차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
눈에 안대를 한 여자가 남자 한 명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꼭 끌어안고 들어가는 걸 보니까 애인 사이인 것 같은데요.
" 망원경으로 황금종 입구를 감시하고 있던 형사가 말했다. 돌아앉아 있는 여우는 그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너무 피로했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다. 망원경을 들고 황금종 입구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그는 형사가 아닌 나이 어린 청년이었다. 청년이야말로 유일하게 애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눈에 안대를 한 여자가 황금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것은 보고할 거리가 못 되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와 동행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던들 가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와 동행한 그 건장한 남자는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야, 명태! 잘 보고 있어야 해.
" 여우가 눈을 감은 채 주의를 주자 비쩍 마른 청년은, "
네, 잘 보고 있습니다.
현재 모두 해서 열두 명 나타났습니다.
두 명은 여전히 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 하고 말했다. "
열두 명 모두 애꾸의 부하란 말이지?
" "
그렇습니다.
제가 모두 아는 얼굴들입니다.
" "
열네 명이 내려왔다면 아직 두 명이 안 나타났군.
" "
애꾸하고 또 한 명이 안 나타났습니다.
조금 기다리면 나타날 겁니다.
애꾸는 조심성이 많은 놈입니다.
" "
만일 놈이 부하들만 들여보내 놓고 자신은 끝내 안 나타나면 어떡하지?
" 그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우는 권총을 꺼내 탄환을 하나씩 재어 넣었다. 제발 그것을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지만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었다. 명태는 애꾸 밑에 있다가 생각을 고쳐 먹고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그들 세계의 말에 따른다면 배신자였다. 지금 형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는 사실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배신 행위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배신자에 대한 형벌은 가혹했다. 그는 어떻게든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는 명자라고 하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보다 네 살이 더 많은 창녀였다. 그러니까 사창가에서 알게 된 여자였다. 얼굴은 변변치 못했지만 그녀의 마음씨만은 천사 같았다. 밑바닥 똘마니로 궂은 심부름이나 하는 명태에게 그녀는 친구 이상으로 다정하게 굴었다. 철따라 양말이며 옷가지를 사주기도 하고 틈틈이 용돈도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그런 사이에 명태는 그녀의 신앙에 감화되어 갔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오누이 관계는 어느새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되어 있었고, 그는 사창가에서 명자를 구해 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명자를 구해 내어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시골 외딴 곳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겠다고 그는 그 나름대로 생각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명자를 사창가에서 빼내려면 큰돈이 필요했다. 명자가 지고 있는 빚은 자그마치 이백 오십만 원이나 되었다. 그것은 명자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포주가 어거지로 떠다 안긴 빚이었지만 그것을 갚지 못하는 한 명자는 한발짝도 사창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명태는 잘 알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 문제로 명태는 고뇌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쩍 마른 그는 그 때문에 더욱 말라만 갔다. 그렇게 보내기를 일 년 남짓. 그런데 며칠 전 명자를 구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안면이 있는 형사가 일거리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은 애꾸를 체포하는 데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명태가 펄쩍 뛰자 형사는 애꾸의 귀에 들어가게끔 거짓 정보를 흘려 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명태는 생각 끝에 그 제의를 수락하기로 하고 그 대신 명자를 사창가에서 꺼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도 경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버텼다. 형사는 명태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사실 경찰이 손만 쓴다면 창녀 한 명쯤 사창가에서 꺼내 주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명자는 곧 풀려 났고,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시골로 먼저 피신했다. 명태는 일이 끝나는 대로 뒤따라가 그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열 시가 지났다. 그러나 애꾸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부하 들은 그대로 황금종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형사 다섯 명은 황금종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수시로 삼 층으로 올라가 무전기로 임시본부와 연락을 취했다. 삼 층은 여관 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경찰은 여관에다 방 하나를 얻어 놓고 있었다. 형사는 무전기를 들고 그 방으로 들어가 임시본부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열 시 사십 분에 여우는 다시 무전 연락을 했다. "
자리는 거의 다 찼습니다.
그러나 그 자로 보이는 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오늘 꼭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단 말이야.
" "
명태를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을까요?
" "
그게 좋겠지만 안 돼.
그가 위험해.
" "
도대체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여자 한 명뿐입니다.
" "
더 기다려 봐, 아직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 열한 시가 지났다. 열한 시 삼십 분에 여우는 차에서 나와 황금종 안으로 들어갔다. 지 형사가 그와 동행했다. 실내는 넓었다. 그 많은 자리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미니 스커트 차림의 아가씨들이 테이블 사이를 돌며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음악에 맞춰 플로어에서는 많은 남녀들이 몸을 흔덧발을 벗어 던지며 그는 소리쳤다. "
도대체 도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어! 허탕치는 거 아니야?
" 방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제일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짱구라는 자였다. "
짱구, 너 이 새끼! 왜 대답이 없어? 도끼는 왜 안 오는 거야?
" "
안 올 리가 없을 텐데요.
" "
안 왔지 않아! 명태 잡았는지 알아봐!
" 한 명이 또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그 동안 애꾸는 욕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얼굴을 씻었다. "
아직 명태를 못 찾았답니다.
" 서울로 전화를 걸었던 자가 열린 욕실 문 사이로 고개를 디밀고 말했다. "
도대체 도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어! 허탕치는 거 아니야?
" 방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제일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짱구라는 자였다. "
짱구, 너 이 새끼! 왜 대답이 없어? 도끼는 왜 안 오는 거야?
" "
안 올 리가 없을 텐데요.
" "
안 왔지 않아! 명태 잡았는지 알아봐!
" 한 명이 또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그 동안 애꾸는 욕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얼굴을 씻었다. "
아직 명태를 못 찾았답니다.
" 서울로 전화를 걸었던 자가 열린 욕실 문 사이로 고개를 디밀고 말했다. "
그 새끼 내뺀 게 틀림없어.
" 욕실을 나온 그는 씨근거리며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태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요.
" 이렇게 말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애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정을 내렸다. "
허탕치는 셈치고 한 번 더 기다려 보는 거야.
" 같은 시간에 경찰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여우는 봉고차를 황금종 입구 가까운 곳에 바싹 갖다 대게 했다. 거기서는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도 출입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제처럼 먼저 애꾸의 부하들이 나타났다. 아홉 시가 지나자 열두 명이 모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두 명은 바깥에 대기했다. "
오늘도 그 여자가 오는데요.
" 출입구를 감시하던 명태가 말했다. "
그 여자라니?
" "
눈에 안대를 댄 여자 말입니다.
" 여우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키가 건장했다. 그는 꾸부정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앞으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 모습은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그들이 출입구 앞에 거의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그 바람에 우산이 뒤로 휙 젖혀졌다. "
어? 저건 그놈 아니야!
" 명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그놈이라니, 누구 말이야?
" 그때 두 사람은 이미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방금 눈에 안대한 여자하고 함께 들어간 놈 말입니다.
그놈도 애꾸 부하입니다.
장다리라고 애꾸 보디가드입니다.
" "
그래?
" 여우와 명태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혔다. 연이틀 계속 같은 곳에 나타나는,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꼭 붙어다니고 있는 건장한 사내. "
바로 그 여자야!
" 여우는 명태의 어깨를 탁 쳤다. "
네, 그러고 보니까…….
" 명태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리고 있을 때 여우는 이미 워키토키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
눈에 안대를 하고 안경을 끼고…… 빨간 점퍼를 입은 여자가 바로 애꾸다! 여장을 한 게 틀림없어! 모두 준비하고 있어, 곧 가겠다! 신호가 있을 때까지는 덮치지 마!
" 삼 층 여관 방에서 무전을 수신한 형사는 즉시 나이트 클럽으로 달려갔다. 여우는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의 그 자리에 그 남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거나 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줄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열 시 반이 지났다. 그러나 여우는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애꾸가 혼자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같은 때에 덮치다가는 그와 그의 부하들에게 무기를 꺼낼 기회를 주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잃는 사람도 나올 수가 있다. 그는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들에게 무기를 꺼낼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열한 시가 가까웠을 때 애꾸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의 보디가드도 일어서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여우는 신호를 보냈다. 애꾸와 그의 보디가드는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화장실은 남녀 구분이 되어 있었다. 형사들은 일제히 화장실 쪽으로 접근했다. 애꾸는 여자 화장실 안으로 사라지고 장다리는 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두 명의 형사가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우는 두 명의 부하를 데리고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두 명에게는 출입구를 지키게 했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던 두 명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녀들은 ‘어머나, 여긴 여자 화장실 인데요’ 하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여우가 그녀들을 제지했다. 그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형사들의 표정이 너무 살벌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놀라서 서둘러 화장실을 나갔다. 여우는 그 중의 한 명을 붙잡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
경찰입니다.
방금 눈에 안대를 한 여자 어디로 들어갔나요?
" "
가운데 칸이오.
" 화장실에는 칸막이 된 독실이 세 개 있었다. 형사들은 가운데 칸으로 다가섰다. 문 양 옆으로 한 명씩 붙어서고 건장한 형사가 가운데에 지켜섰다. 건장한 형사는 가죽장갑을 꺼내 끼었다. 근육질의 어깨가 간지럽다는 듯 꿈틀거렸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조금 후에 문이 열렸다. 애꾸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사람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를 비켜가려고 했다. 그때 손이 뻗어와 그의 머리칼을 잡아챘다. 가발이 홱 벗겨져 나가자 애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품속에서 도끼를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형사의 무쇠 같은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단 일격에 그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구둣발이 그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애꾸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옆칸에서 일을 보고 나오던 여자가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형사가 제지했다. "
소리지르지 말고 조용히 나가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 건장한 형사는 애꾸를 깔고 앉아 두어 번 더 얼굴을 갈겼다. 엄청난 힘으로 갈겼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금방 으깨져 버렸다. 그는 이미 저항할 힘을 잃고 있었다. "
수갑을 채워!
" 여우의 명령에 형사는 애꾸의 팔을 등뒤로 비틀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애꾸는 그때까지도 도대체 누구한테 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피로 뒤범벅된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형사들은 그가 소리치지 못하게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준비해 가지고 온 큰 자루를 덮어씌었다. 워낙 자루가 컸기 때문에 애꾸의 몸은 완전히 그 속으로 들어갔다. 형사들은 자루를 단단히 묶은 다음 그것을 들고 화장실을 나왔다. 모든 것은 불과 오 분도 안 걸린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만큼 전격적으로 해치웠다고 볼 수 있었다. 대형 자루를 들고 나가자 웨이터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이 접근하기 전에 형사들이 일 대 일로 그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형사들이 신분을 밝히면서 모른 체하라고 하자 그들은 잠자코 물러났던 것이다. 한편 남자 화장실에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건장한 사내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에는 굵은 하수도 파이프가 기둥처럼 서 있었는데 그 건장한 사내는 그것을 끌어안은 상태에서 수갑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형사들은 애꾸의 보디가드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곳을 조용히 빠져 나갔던 것이다. 봉고차는 정확히 팔 분 후에 출발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애꾸의 부하들은 그때까지도 클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이상을 발견한 것은 그들 중 한 명이 화장실에 들렀다가 장다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서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봉고차가 떠나고 나서 십 분이나 지난 뒤였다. 그들은 우르르 밖으로 달려나갔지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애꾸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21. 이상한 사람들 오른쪽으로는 시커먼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홍수로 강물은 많이 불어 있었다. 낮에 보면 누런 흙탕물이겠지만 어두운 밤이라 강물은 검게 보였다.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강물을 따라 달리다가 왼쪽 산허리로 뚫린 소로로 접어들었다. 소로의 입구에는 ‘해바라기 농장’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서 있었다. 그것은 나무 사이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차 안에는 운전사까지 포함해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다.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차 안에는 일본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후 차는 다시 왼쪽으로 커브를 돌아 울창한 숲속 길을 오 분쯤 달리가다 이윽고 철제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문 옆 기둥에도 ‘해바라기 농장’이라는 간판이 역시 초라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철봉을 세워서 만든 문이었기 때문에 안쪽으로 뻗어 있는 콘크리트 포장길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무섭게 생긴 셰퍼드 두 마리가 달려와 문 저쪽에서 사납게 짖어 대기 시작했다. 허락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 자는 가차없이 물어 뜯어 죽일 것 같은 그런 기세였다. 대문 안쪽에 경비실이 있었다. 대문 양쪽으로는 철조망이 뻗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중으로 된 철조망으로 외부의 침투에 대비한 듯 매우 견고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아주 넓은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듯이 보였다.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경비실에서 사람이 나와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살핀 후 대문을 열었다. 차는 숲속으로 나 있는 포장도로를 다시 달려갔다. 차가 달리는 거리로 보아 농장은 매우 넓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는 계속 꼬불꼬불 이어지다가 이윽고 드넓은 공지로 들어섰다. 공지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고 그 저쪽 끝에는 이 층 양옥이 한 채 서 있었다. 포장길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 양옥 앞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그 집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그 주위는 앞면을 빼고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집 앞 잔디밭에 서 있는 두 개의 전등이 주위에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승용차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면서 속력을 줄이다가 집 앞에 이르러 이윽고 멈춰 섰다. 운전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자가 급히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뒷문을 열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세 명의 남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려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자기들끼리 일본말로 뭐라고 쑤군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곳에 그런 집이 있다는 사실에 좀 놀라는 눈치들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뛰어왔다. 그는 차를 타고 온 세 명의 사내들에게 굽신거리며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은 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는 젊은 여자가 그들을 안내했다. 젊다기보다는 앳되게 생긴, 채 스물이 될까말까한 나이 어린 여자였다. 그녀는 어깨와 허벅지가 드러나는 아주 짧은 란제리만 입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란제리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몽실몽실한 젖가슴과 그늘진 음부가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방문객들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에 부끄러워한다거나 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면서 그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값 비싸 보이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일본 말을 지껄이는 세 명의 사내들은 크고 푹신한 가죽 소파에 가서 앉았다. 실내는 냉방이 잘 되어 있어 조금도 덥지 않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머리 위 천장에서는 샹들리에의 휘황한 불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그들이 온 것을 환영하는 듯 일본 유행가 가락이 흐르고 있었다. 이 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거구의 한 사내가 나타났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였는데 고급 실크로 만든 코발트색의 가운을 입고 있었다. 레슬러처럼 비대한 몸집의 그 사내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계단을 내려왔는데, 그가 무겁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단에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방문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테 안경을 낀 거구의 사내는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빼면서 방문객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 그는 일본말로 말했고, 방문객들 역시 일본말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세 명의 방문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 한 명은 중년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삼십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중년의 일본인은 비쩍 마른 데다 얼굴빛이 검었다. 그리고 브라운 빛깔이 도는 안경에 가려진 두 눈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엇갈리고 있었다. 심한 사시였다. 그는 푸른 와이셔츠 위에 체크 무늬의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두 명의 젊은이들은 똑같이 점퍼 차림이었다. 그리고 머리는 퍼머를 했는지 하나같이 곱슬곱슬했다. "
이런 산골로 오기에 우리는 꼭 납치되는 줄 알았습니다.
" 사팔뜨기가 한마디 하자 레슬러처럼 생긴 사내는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웃는 얼굴이 되자 완전히 감겼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콧수염 끝을 비비면서 말했다. "
오시느라고 불편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이래봬도 여기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좋은 술에다 싱싱한 미녀까지 있으니까요.
"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또 껄껄거리고 웃었다. "
여기에 이런 훌륭한 집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궁전 같은데요.
" 이야기는 주로 레슬러처럼 생긴 사내와 일본인 사팔뜨기 사이에 오갔고, 다른 두 명은 조용히 경청하고만 있었다. "
자, 그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 주인은 손님들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이미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호화판 술상이었다. 조금 있자 문이 열리면서 란제리 차림의 어린 아가씨들이 사뿐히 들어왔다. 모두 네 명으로 하나같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들의 그 미소는 기계적으로 지어낸 것 같았다. "
야, 이거 대단한 미인들인데요.
" 사팔뜨기가 입을 벌리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아가씨들은 모두가 미인들이었다. 몸매도 아름다웠고 피부는 눈처럼 희고 싱싱했다. "
횟감으로는 그만이지요.
" 주인 사내가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말하자 일본인은 끄덕였다. "
정말 그렇겠는데요.
여기에 이런 미인들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 "
잘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 여자들은 마치 꿈 속을 걷는 것처럼 움직였다. 하나같이 몽롱한 상태 속에 빠져 있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녀들은 각자 흩어져 남자들 사이에 짝을 지어 끼여 앉았다. 그 중 제일 돋보이는 아가씨는 스스럼없이 콧수염의 품에 가서 안겼다. "
흐흐흐…… 언제 봐도 요건 귀엽단 말이야.
" 사내는 그녀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사팔뜨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팔뜨기는 자기 곁에 앉아 있는 아가씨보다는 콧수염의 품에 안겨 있는 아가씨의 미모에 더 홀린 것 같았다. "
요놈 이름은 장미라고 하는데…… 내가 제일 귀여워하는 놈이지요.
요놈 때문에 내가 요새 회춘을 하고 있다니까요.
껄껄껄…….
" 콧수염은 갑자기 란제리의 어깨끈을 벗겨 냈다. 란제리가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콧수염은 그녀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장미는 얼굴을 뒤로 젖히며 소리없이 웃었다. "
이걸 보십시오.
이렇게 멋진 젖가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게 열여섯 살짜리 젖가슴입니다.
열여섯 살짜리 가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풍만하고 단단하고 탄력이 있는 젖가슴은 정말 보기 드물죠.
일어서 봐!
" 장미는 기계적으로 일어섰다.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저항하는 기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 같았다. 란제리가 발등으로 떨어지면서 그녀의 나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녀는 남자들 앞에 서서 콧수염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흑인 노예들이 팔려 가기 전에 백인들 앞에 자기 몸을 상품으로 내놓고 전시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었다. 거구의 사내는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
이 엉덩이를 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크고 육감적이면서도 균형미가 있지 않습니까.
이 다리는 얼마나 늘씬합니까.
너희들도 그러고 있지 말고 옷을 모두 벗어!
" 나머지 세 아가씨들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제히 란제리를 벗었다. "
장미야, 넌 여기 있지 말고 저 손님한테 가서 술을 따라 드려라.
귀한 손님이니까 시중을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양귀비 너는 이쪽으로 와.
" 아가씨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를 바꿔 앉았다. 장미가 옆에 다가앉자 사팔뜨기는 비로소 흡족한 표정이었다. 두 명의 젊은이들은 어느새 벌거벗은 아가씨들의 몸을 희롱하고 있었다. "
길을 잘 들여 놨군요.
약을 먹였나요?
" 사팔뜨기가 장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
네, 약을 안 먹일 수가 없지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럴 수가 없으니까요.
약을 먹이면 우선 부끄러움 같은 것이 없어지니까 다루기가 쉽지요.
" "
중독이 되겠군요?
" "
할 수 없죠.
" "
오 사장의 솜씨는 정말 보통이 아닙니다.
우리도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 일본인은 레슬러처럼 생긴 사내를 오 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장미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아 일부러 빨리 취하고 싶다는 듯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장미가 젓가락으로 집어 주는 안주를 받아 먹었다. 취기가 돌자 남자들도 하나, 둘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이 옷을 벗게끔 아가씨들이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하나만은 벗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팬티만 걸친 채 술을 마셨다. 아가씨들이 그것을 벗기려 들면 개중에는 몸을 피하려 들었고, 그러면 아가씨들은 깔깔거리고 웃어대는 것이었다. "
이런 미인들은 어떻게 모았습니까?
" "
다 모으는 수가 있지요.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피나는 투쟁이 없이는 이런 미인들을 얻을 수가 없는 거지요.
" 오 사장은 그녀들을 모으는 데 있어 몹시 힘이 들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들의 값을 올릴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어떻습니까, 최상품 아닙니까?
" 상대방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 사장은 마치 물건을 놓고 흥정하듯 물었다. 일본인 사팔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물건은 좋은데 너무 어리군요.
열여섯이라면 이제 겨우…….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 사장이 손을 흔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
어린것들을 원하지 않았나요?
" "
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습니다.
" "
나이만 어리다 뿐이지 몸은 다 컸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모두 다 몸 하나만은 기막히게 빠지지 않았습니까.
세계 어디에 내놔도 이런 애들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 "
한국 아가씨들이 몸 좋고 아름답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 "
그리고 이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지 늙어 가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앞으로 십 년 정도는 최고의 값으로 거래할 수가 있을 겁니다.
" 그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도 여자들은 그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남자들 품에 안겨 있었다. "
어리다는 것은 좋으면 좋았지 흠 될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모두가 어린것을 원하는데 왜 야마다 상께서는…….
" 야마다라고 불린 일본인은 손을 내저었다. "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너무 어려서 이 애들이 견뎌 낼지 그게 염려스러워서 한 말입니다.
" "
원, 별 걱정도 다 하시는군요.
여자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견뎌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견뎌 낼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건가요?
" 취흥이 도도해지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가씨들은 돌아가면서 차례로 노래를 불렀는데 하나같이 일본 노래를 불렀다. 언제 그렇게들 배웠는지 멋들어지게 일본 유행가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장미도 남 못지않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남자의 품에 안겨서. 그녀들에 이어 이번에는 남자들이 역시 일본 노래를 불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 갔고, 장단 맞춰 두드려 대는 젓가락소리도 한층 시끄러워졌다. 노랫소리가 시들해질 때쯤해서 오 사장은 아가씨들을 내보냈다. 그녀들을 내보내면서, "
손님들 조금 있다 목욕하실 거니까 준비들 하고 있어.
" 하고 말했다. 여자들이 나가자 그들은 자세를 고쳐앉고 본격적으로 상담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상담이라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 오 사장이 사팔뜨기에게 물었다. "
우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얼마든지 수입하겠습니다.
저 정도라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 사팔뜨기의 말에 오 사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
그렇게 얼마든지 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아주 귀한 거라서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습니다.
저 애들 정도라면 정말 최상품으로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 "
제가 말하는 것은 열 번에 걸쳐서 하는 일을 단 한 번에 해치우자 이겁니다.
그렇게 하면 위험 부담도 적을 거고, 경비도 적게 들고 여러 면에서 이익이 아닙니까.
서로가 이익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오 사장께서는 생각이 다른가 보지요?
" "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생각은 마찬가지인데 물건 확보하기가 어려워서 그러는 겁니다.
품질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다면야 얼마든지 공급이 가능하지만 최상품을 고르자니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 "
우리는 최상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오야붕도 그것을 누차에 걸쳐 강조하셨고, 또 사실 최상품이 아니면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확보된 최상품은 몇 개나 됩니까?
" "
열여섯 개입니다.
" "
그것밖에 안 됩니까?
" 일본인은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것도 최대로 확보한 겁니다.
열여섯 명이면 한 번에 수송이 가능할 겁니다.
" "
나는 한 오십 명쯤 바라고 왔는데…….
" 일본인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오 사장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
야마다 상, 성미도 급하시군요.
첫 거래에 그렇게 많은 인원을 보낼 수가 있습니까.
그쪽에서 성의만 보여 주신다면 나도 열심히 모아 보겠습니다.
사실 그전에는 고작해야 한두 명이었고, 그래서 대량 수출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었지요.
이제 길이 트였으니까 본격적으로 나서 보지요.
아가씨 장사야말로 불경기도 타지 않고 정말 좋은 거 아닙니까.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모두 금덩이지요.
사실 금보다도 낫지요.
계속 돈을 벌어들이니까요.
정말 오야붕께서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십니다.
" "
아이디어는 좋은데…… 결과가 좋게 나와야지요.
" "
결과야 뭐 뻔한 거 아닙니까.
" "
자, 그건 그렇고 하나에 얼마씩 받으실 생각입니까?
" "
얼마 내놓으실 생각입니까?
" "
그거야 받을 사람이 먼저 값을 말해야지요.
" "
에또…… 보자…….
" 오 사장은 가운 주머니에서 조그만 계산기를 꺼내더니 손가락으로 숫자판을 콕콕 눌러댔다. 일본인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냉소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거구의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입맛을 다시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이것저것 경비가 꽤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운반비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하나당 오백만 엔은 받아야겠는데요.
" "
오백이라고요?
" 어림도 없는 수작 말라는 듯 일본인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쏘아 보았다. 오 사장은 바위처럼 버티고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것도 최소한으로 부른 겁니다.
위험 부담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은 거지요.
" "
그건 터무니없는 값인데요? 오백만 엔짜리는 일본에도 없어요.
" "
도대체 일본에서 저렇게 싱싱한 아이들을 구할 수가 있나요? 저 애들은 황금알을 낳을 애들입니다.
오백만 엔이 비싸다니, 너무 인색하군요.
" 오 사장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
우리 오야붕은 백에서 백오십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 "
그 돈으로는 운반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 오 사장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일본인은 최대한으로 값을 깎으려고 했지만 오 사장이라는 자는 오백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단호하게 나왔다. 일본인이 여자들의 매력에 홀딱 반한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결국 그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들을 사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그쪽이지 이쪽이 아니었다. 흥정은 여간해서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양쪽이 부르는 가격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일본인은 최후 수단으로 그 자리에서 도쿄로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보스한테 사실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기 위해서였다. 보스는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물건은 최상품입니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상품입니다.
그런데 오백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고 고수하고 있습니다.
" 물건이 좋다는 말을 그는 몇 번이고 했다. 놓치기 싫다는 말까지 덧붙여 말했다. "
그렇다면 사백을 제시해.
그래도 안 들으면 사백오십 까지 제시해.
그것도 싫다면 그만두는 거야.
알았지?
" "
네, 알겠습니다.
" 전화를 걸고 난 일본인은 사백을 제시했다. 오 사장은 생각해 보고 나서 사백오십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
좋습니다, 사백오십으로 합시다!
" 그들은 건배했다. 비로소 오 사장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미소를 거두었다. "
그런데 이번에 보낼 아이들은 열다섯 명입니다.
" "
아까는 열여섯 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일본인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
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팔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내가 아끼는 아이이기 때문에…….
" "
어떤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일본인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
아까 야마다 상 옆에서 시중들던 아이입니다.
" "
그 장미라는 아이 말입니까?
" "
네, 그렇습니다.
" 오 사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인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 22. 팔려가는 여자들 사팔뜨기 일본인이 정색하고 말하자 오 사장이라는 자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
그건 마치 남의 물건을 통째로 가지겠다고 떼를 쓰는 것 같군요.
껄껄껄껄…….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
" 일본인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붉어졌다. 오 사장을 쏘아보는 그의 두 눈은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
공짜로 가지겠다는 게 아닙니다.
거래할 물량에서 왜 하필 그것만 빼돌리느냐 그 말입니다.
" "
그건 제 자유 아닐까요? 물건 임자가 팔기 싫다면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오 사장은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수록 물건의 주가가 오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
그걸 빼놓으면 난 흥미가 없습니다.
이건 기계로 찍어 내는 물건하고 다르잖아요.
기계로 찍어 내는 물건이면 제품이 모두 똑같으니까 하나쯤 빼낸다고 해서 흠될 게 없죠.
하지만 그 아가씨들은 모두가 각자 개성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 장미라는 아가씨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는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그 아가씨의 들러리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애들이고요.
그런데 그 아가씨를 빼놓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 "
그러고 보니까 야마다 상께서는 그 아가씨한테 단단히 반하신 모양이군요.
" "
내가 반한 게 아니라…… 그 애를 우리 오야붕한테 바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우리 오야붕을 즐겁게 해주면 앞으로 그만큼 돌아오는 혜택이 있을 겁니다.
그 애를 빼겠다는 말은 취소 하십시오.
" 그러나 오 사장은 여전히 능글거리며 고개를 흔든다. "
말씀 안 하셔도 웬만하면 제가 드리지요.
하지만 그 애만은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다.
" "
왜 안 된다는 겁니까?
" 일본인의 관자놀이께가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젊은 일본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빛을 보이고 있었다. 오 사장은 턱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
우리는 이야기를 더 해야겠으니까 젊은 친구들은 나가서 목욕이나 하시지.
아가씨들이 서비스를 잘 해줄 거요.
" 그가 벽에 붙은 부저를 누르자 문이 열리고 아까의 아가씨 한 명이 들어왔다. "
이분들 욕실로 안내해.
서비스 잘 해드려야 해!
" 오 사장의 지시에 아가씨는 살짝 무릎을 굽혀 보인 다음 젊은 일본인들을 욕실로 안내했다. 이제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상담을 계속했다. "
그 아가씨만 빼놓는 이유가 뭡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 야마다는 따지듯 물었다. 오 사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다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
특별한 이유라면…… 그 애를 놓고 싶지가 않아서 그러는 겁니다.
그 애는 제가 제일 아끼는 애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너무 정이 들어서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돈을 아무리 줘도 그 애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 이번에는 일본인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
오 사장님한테 그런 감상적인 면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놀랐는데요!
" "
나이 들어 주책이지 뭡니까.
" "
그런 애매 모호한 말씀은 그만두시고 우리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나는 그 애를 꼭 데려가야겠습니다.
그 애를 안 주겠다면 언제까지고 여기 늘어붙어 있겠습니다.
" "
그건 곤란합니다.
정말…….
" "
그러시지 말고…… 얼마면 되겠습니까? 그 애는 특별히 더 받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얼마면 되겠습니까?
" "
그 애는 돈으로 따질 애가 아니에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는 애이지요.
" 그 말에 일본인은 한참 동안 소리내어 웃었다. "
오 사장님은 갈수록 어마어마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그러지 말고 받을 금액만 확실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너무 그렇게 거창하게 나오시지 말고.
" 침묵이 흘렀다. 오 사장은 괴롭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본인은 그 야비한 한국인이 본색을 드러내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오 사장이 입을 열었다. "
그 애한테는 다른 애들보다 몇 배의 경비가 들었습니다.
" "
그랬을 테지요.
" "
정 그 애가 욕심나시면…… 두 장은 내놓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헐값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 "
두 장이라니요?
" 일본인은 놀라서 안경을 벗었다가 도로 끼었다. "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렇게 놀라시니까 오히려 제 쪽에서 놀랄 것 같은데요.
" "
아니, 두 장이라면 이천만 엔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
그렇습니다.
이억 엔을 불러도 주기가 아까운 애입니다.
그런 애는 만에 하나 있을까말까한 애이니까요.
그 애는 집안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대학교수로 우리 나라 곤충학계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지요.
" 일본인은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오 사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
이천이라면 다른 애들보다 네 배 이상을 더 받겠다는 건데…….
"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을 받아 오 사장이 말했다. "
네, 그렇습니다.
그 애는 네 배 이상의 가치가 있지요.
" "
지금까지 우리는 여자 하나를 사는 데 그만한 거금을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터무니없는 값인데요?
" "
천만에! 경제 규모가 우리보다 수십 배나 크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천이라야 우리 돈으로 겨우 일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억이면 서울에서 쓸 만한 집 한 채 값도 못 됩니다.
그래 그 애가 집 한 채 값도 못 된단 말씀입니까?
" 야마다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쳐 갔다. "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지금까지 거래에서 그만한 거액을 지불한 적이 없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놀란 거지요.
" "
그만한 돈을 지불한 적이 없었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요.
장미 같은 애라면 하룻밤에 그만한 돈을 뽑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여자를 제대로 볼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애한테 하룻밤 화대로 이천 정도 지불하는 거 별로 아깝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 "
그래도 그건 너무 과한데요.
" 일본인은 고개를 흔들다가, "
한 장 정도면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 하고 말했다. 그 말에 한국인은 코웃음쳤다. "
이천에서 한 푼도 깎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애의 값을 놓고 흥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팔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 그는 마음껏 배짱을 내밀고 있었다.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이었다. 일본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일본의 보스한테 알아봐야겠다고 하면서 다시 도쿄로 전화를 걸었다. 보스는 아까보다 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구미가 동하는 기색을 보였다. "
네가 판단할 때는 어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 "
네, 제가 볼 때는 정말 보기 드문 애입니다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또 어떨지 몰라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 "
네가 책임지고 결정해.
그런 애라면 이천 정도 지불할 용의는 있어.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경우에 한하는 거야.
만일 데려와서 내가 보고 특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네가 책임져야 해.
네가 보상을 하든가 해야 한단 말이야.
난 여기서 그 애를 보지도 않고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단 그렇게 특별한 애라면 이천 정도는 내놓을 수 있다 그 말이야.
알겠나?
" "
네, 알겠습니다.
" "
그럼 잘 알아서 해.
" 야마다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사팔뜨기 눈이 더욱 기묘하게 엇갈리는 것 같았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
오 사장님의 장사 수완에는 정말 당해 내지 못하겠습니다.
"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오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 애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애가 과연 또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그런 애는 없을 겁니다.
정말 야마다 상의 안목과 과단성은 놀랍습니다.
"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추켜세웠다. "
오야붕은 이천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단, 모든 책임은 저보고 지라고 했습니다.
만일 오야붕이 직접 보고 물건이 좋지 않다고 말하면 저는 이천을 변상해야 합니다.
" "
원, 별 걱정을…….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걱정할 게 따로 있지 그런 걱정을 다 하십니까? 오야붕 앞에 데려가 보십시오.
아마 밤잠을 못 잘 겁니다.
"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 우스운지 그는 또 껄껄거리고 웃었다. "
그럼 계산해 보시지요.
" "
그럴까요.
" 오 사장은 주머니에서 다시 계산기를 꺼내 들더니 숫자판을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다. "
에또, 열다섯 명에 사백오십이면 육천칠백오십만 엔…… 거기다 이천을 더하면 합계가 팔천칠백오십만 엔이군요.
" "
지불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선금으로 우선 사천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물건을 인수하는 것과 동시에 지불하겠습니다.
" "
좋습니다.
" 오 사장은 그 같은 조건을 선선히 수락했다. 야마다가 수표책을 꺼냈다. "
한 장에다 써드릴까요?
" "
아니오, 네 장에다 나누어 써주십시오.
천씩 말입니다.
" 야마다가 수표에다 액수를 적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 사장은 은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
장미라는 애를 오야붕한테만 진상할 겁니까?
" "
글쎄요.
" 일본인은 한국인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쓰기를 계속했다. "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닌데 객지에서 마음에 드는 애를 품고 객고를 푸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맛 아닙니까.
" "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나중에 오야붕한테 맞아 죽더라도 그 애하고 하룻밤 자야겠습니다.
"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네 장의 수표를 오 사장에게 건네 주었다. "
생각 잘 하셨습니다.
" 거구의 사나이는 수표를 한장 한장 자세히 살피고 나서 그것을 접어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
한국에서 배가 출발할 때 우리 애들 두 명을 동승시키겠습니다.
" 물건이 제대로 선적되는지 처음부터 지켜보겠다는 거였다. "
그거야 맘대로 하십시오.
" 오 사장은 문제될 거 없다는 듯 쾌히 말했다. "
그런데 장미만은 제가 따로 데려갈 수 없을까요?
" "
어떻게 말입니까?
" 오 사장이 정색하고 물었다. "
비행기로 말입니다.
" 오 사장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가로 저었다. "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선 여권이 없거든요.
그리고 그 애는 수배 인물입니다.
" "
어떻게 위조 여권을 사용해서라도 안 될까요?
" "
그건 주문 외의 말씀인데요.
" "
알고 있습니다.
작은 배에 태워서 가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겁니다.
" "
끔찍이도 아끼시는군요, 아직 정을 나누지도 않았으면서…….
그 심정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설혹 위조 여권을 마련한다 해도 공항에서 걸리고 맙니다.
수배 대상이기 때문에 공항에는 그 애 사진이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
" "
그렇다면 안 되겠군요.
" 야마다는 시무룩해서 말했다. "
구체적인 운송 계획은 내일 말하기로 하고 이제 목욕이나 하시지요.
" "
그럴까요.
" 야마다는 장미의 안내를 받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벽과 천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전등이 켜져 있었다. 계단 위로는 은은한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자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뿌옇게 흐린 문이라 안이 보이지가 않았다. 장미는 맨몸에 란제리만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꿈 속을 걷듯 걸어가 문을 밀었다. 문 저쪽은 욕탕이었다. 웬만한 실내 풀장 정도로 넓은 욕탕이었다. 바닥에는 회색의 고급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한쪽 벽에는 다섯 개의 문이 달려 있었다. 그 중 한 개의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 안쪽은 침실로 꾸며져 있었다. 침실에 놓여 있는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고 탁자 위에 켜져 있는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은 야마다를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다른 방에서는 여자의 교성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먼저 자리를 떴던 젊은 일본인들이 이미 아가씨들과 일을 벌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욕탕은 냉탕과 온탕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다른 쪽 벽면의 중간쯤에는 대형 텔리비전 수상기가 유리관 속에 설치되어 있었고, 화면에는 포르노 여배우의 신음소리가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녀들의 신음소리와 뒤섞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나이트 클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공 모양의 대형 점멸등이 번쩍거리는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불빛 때문에 욕탕 안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유난히 검게 빛나는 피부를 가진 흑인이 뒤에서 백인 여자를 힘차게 공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첨벙하는 소리에 야마다가 고개를 돌리니 장미가 냉탕 속에 뛰어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벌거벗은 몸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그녀의 헤엄치는 모습은 능숙하고 멋있게 보였다. 저쪽 끝까지 헤엄쳐 간 그녀는 야마다를 향해 손짓을 보냈다. 그는 헤엄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의 깊이는 가슴 높이 정도였다. 그는 물을 헤치며 장미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장미에게 손을 뻗치려고 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물을 끼얹으며 온탕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뿌리는 웃음소리가 욕탕 안에 가득했다. "
요시! 요것 어디 보자!
" 야마다도 냉탕을 나와 온탕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너무 말라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며칠 굶은 늑대처럼 이를 드러내며 장미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장미는 재빠르게 몸을 피하면서 그에게 또 물을 끼얹었다. 야마다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콜록거렸다. "
햐아, 요것 봐라!
" 손을 잡는 순간 그녀는 잽싸게 그를 뿌리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마다는 콜록거리면서 그녀를 뒤쫓았다. 장미는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탕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기를 쓰고 그녀를 따라갔다. 벌거벗은 남녀가 탕 주위를 맴돌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했다. 야마다는 처음에는 옷을 벗은 채 뛴다는 것이 어쩐지 몸에 익숙지 않아 쭈뼛거리기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싶자 차츰 대담하게 팔을 흔들고 괴성을 지르며 장미를 뒤쫓았다. 장미의 뛰는 모습은 싱그러워 보였다.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탄력 있게 뛰는 모습은 경쾌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야마다는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에 차츰 넋을 잃어 갔다. 넋을 뺀 채 달리다가 커브에서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져 왼쪽 이마를 그만 탕의 돌출 부위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이마를 어루만지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몹시 아픈 느낌과 함께 약이 올랐다. 장미는 탕 저쪽에서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
잡아 봐요, 잡으면 저를 드릴게요.
" 한국을 자주 드나든 그는 어느 정도 한국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
못 잡을 줄 알아?
" 그는 벌떡 일어나 다시 그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장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야마다의 뛰는 모습은 영양 실조에 걸린 노쇠한 말 같았다. 그러나 약이 잔뜩 올라 기를 쓰고 뛰었기 때문에 그녀와의 간격이 좁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장미는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오래 뛰는 데는 자신이 없었다. 일본인의 우악스런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는 순간 그녀는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잠수했다. 야마다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야마다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훔치면서 수면을 노려보았다. 조금 후 저쪽 끝에 장미의 얼굴이 올라왔다. 그녀는 웃으며 그를 쳐다보다 말고 표정이 굳어졌다. "
드라큐라 같아요, 무서워요!
"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번쩍거리는 조명등 아래 피를 흘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야마다의 모습은 확실히 드라큐라 같은 데가 있었다. 더구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뒤틀리는 시선이 더욱 그의 모습을 무섭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
이리 와.
" 그가 말했다. 그러나 장미는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
이리 오라니까!
" 야마다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럴수록 장미는 공포 어린 모습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약 기운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로소 모든 것이 사실대로 비쳐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강제로 주사를 맞고 나면 한참 동안은 몽롱한 상태 속에서 이성을 잃은 채 행동하게 된다. 수치심도 자존심도 자신이 왜 그런 곳에 끌려 와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그저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황홀한 느낌일 뿐이다. 그러나 약 기운이 떨어진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웬 낯선 남자가 흉칙한 몰골로 물 속에 서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야마다는 물을 헤치며 그녀 쪽으로 돌진했다. 장미는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
잡기만 해봐라! 가만 두지 않을 거다!
" 야마다는 이제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탕 주위를 두 바퀴 돌았다. 장미는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헐떡거리고 있었다. 장미는 계단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문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야마다는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손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들려 있었다. 도망치면 그것으로 내리치기라도 할 것 같은 험악한 표정이었다. "
도망치면 때릴 거야!
" 장미는 떨면서 그의 손아귀 속에 끌려들어갔다. 그녀는 흡사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떨어대고 있었다. "
넌 내 거야.
내가 일억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야!
" 그는 장미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다 자기의 얼굴을 비벼댔다. 그 바람에 그녀의 얼굴에도 피가 묻었다. 그녀는 손발을 버둥거리면서 그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고 기를 썼다. "
이거 왜 이래? 가만 있어!
" 야마다는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겁을 준 다음 침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 위에 동댕이쳤다. 장미는 발딱 일어나 문으로 돌진했다. 일본인은 문을 가로막고 서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걸어 잠궜다. 장미는 바들바들 떨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녀가 너무 심하게 떨어 대고 있었기 때문에 야마다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그녀의 따귀를 냅다 후려갈겼다. 23. 눈에는 눈 김종화는 이제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거기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이라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탈출의 몸부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오직 사랑하는 딸을 찾으려는 일념에 몰입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을 죽였을 때 그는 처음 조금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 같은 당황감은 이내 사라지고 곧 그는 침착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와 함께 그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아주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내 행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을 내리는 것을 나는 허용치 않는다. 판단도 내가 내리고 행동도 내가 한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 두고 있었다. 그전에는, 그러니까 장미가 유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종류의 인간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장미가 유괴된 후부터는 그러한 생각은 바뀌었다. 존중될 수 없는 삶을 영위해 가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그와 무관한 입장이라면 그는 길거리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 정도로 그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의 증오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사랑하는 딸을 유괴했고, 그 때문에 그는 가정도 학문도 버리고 오로지 딸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존중될 수 없는 삶을 영위하는 자들을 쓰레기 정도로 여기고 있었고, 그들은 말살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딸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을 주저 없이 제거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살인 이후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공격적이 되어 있었다. 아내를 통해 경찰이 자신을 살인 용의자로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공격 템포를 늦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경찰보다 한 걸음 앞서서 달려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바라고 싶은 것은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는 것을 좀 늦추어 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여봉우와는 네 번 만에야 가까스로 통화할 수 있었다. 그가 굳이 여봉우를 찾은 것은 그라면 어느 정도 이야기가 통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의외로 차가웠다. "
지금 바로 저를 만나셔야겠습니다.
지금 계신 데가 어딥니까? 이쪽으로 오시기 어려우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
만날 수 없습니다.
나는 딸을 찾아야 합니다.
" "
김 교수께서는 딸 찾는 일을 당장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미는 우리가 찾아드리겠습니다.
" "
나는 경찰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습니다.
" "
김 교수, 당신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당장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은 지금 수배 대상에 올라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딸을 찾을 때까지 결코 중지하지 않을 겁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 "
뭡니까?
" "
나에 대한 수배를 딸애를 찾을 때까지 좀 늦춰 주십시오.
" "
그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제2의 살인을 방지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을 듣고 당장 중지하십시오.
그리고 경찰에 협조해 주십시오.
김 교수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그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 "
난 그만둘 수 없습니다.
나보고 그만두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같습니다.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내 딸을 찾고 있는 겁니다.
내 딸을 유괴해다 팔아먹은 인간 쓰레기들을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 종화는 전화를 끊었다. 공중 전화 부스를 나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점심부터 굶은 것을 알았다. 그는 먹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배가 고파야만 그제서야 먹을 것을 찾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가고 있었다. 허기진 몸을 그는 딸을 찾겠다는 집념과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그는 골목에 주차해 놓은 차 속으로 들어가 피곤한 몸을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차 속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손을 뻗어 오른쪽 조수석에 놓인 가방 속을 더듬어 보았다. 먹다 남은 빵 조각이 손에 잡혔다. 딱딱하게 굳어진 식빵 조각을 그는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장미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견뎌 낼 수 있는 건강이 필요했다. 그리고 건강하려면 배를 채워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먹는 것 자체를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골목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린 지 이미 다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앞으로 또 얼마 동안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열어 놓은 차창을 통해 비가 그친 뒤의 습기찬 무더위가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더위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한 시가 되었을 때 모퉁이 다방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나왔다. 여자였다. 종화는 상체를 바로 하면서 망원경을 통해 앞을 쏘아 보았다. 바로 그 여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동차 키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엔진이 걸리고 이어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려 왔다. 불은 그대로 끈 채 놔두었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이 보다 확실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청바지 위에 노란 셔츠만을 걸친 아주 간편한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손지갑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그날의 판매 수입금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유명한 포주였다. 물 들인 붉은 머리와 특히 튀어나온 광대뼈가 멀리서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위에서 흘러내리는 불빛이 광대뼈 밑에 그늘을 드리우자 그녀의 인상이 더욱 광포해 보였다. 그녀는 악질 포주로, 돈을 벌어 다방까지 차린 여자였다. 그녀는 사창가에서 칠칠이 아줌마로 통하고 있었다. 딸 하나 있는 것이 학교에도 보내지 못할 정도로 바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녀는 독살스러운 점으로, 그리고 돈을 많이 번 점으로 사창가에서 유명해져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악착스럽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데에는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이 병신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유괴되어 온 나이 어린 소녀들을 싼 값에 사들여서는 무자비하게 그녀들을 혹사시키곤 했다. 그녀는 어린 소녀들이 남자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다. 짓밟히는 정도가 잔인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 큰 희열을 맛보는 것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그녀는 예쁘고 똑똑한 소녀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죽은 오지애의 자백에 따르면 칠칠이 아줌마는 장미를 십만 원에 인수하여 다른 곳으로 넘겼다고 한다. 넘길 때 그녀는 삼십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이 종화가 오지애한테서 자백받은 전부였다. 칠칠이 아줌마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언제나 그 시간에 다방에서 그날의 판매 수입금을 챙겨 들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곤 했다. 그녀가 경영하는 다방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걸어서 불과 십 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골목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그 골목은 차가 한 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종화는 차에서 가만히 빠져 나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플래시를 켜들고 무엇을 찾는 척했다. 조금 후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발짝소리로 보아 그녀는 몹시 느리게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옆에 나타났다. 그녀는 웬 남자가 트렁크에 상체를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칠칠이 아줌마!
" 그녀가 멈칫하면서 채 뒤돌아보기도 전에 그녀는 뒤통수에 격심한 충격을 느꼈다. 종화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고 다시 몽둥이를 쳐들었다. 그것으로 뒤통수를 두 번째 치려는데 그녀가 무릎을 꺾으며 길바닥 위에 나동그라졌다. 너무도 갑작스런 공격에 그녀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종화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뒤통수를 내리친 것은 발악적으로 대들까 봐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나 죽이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죽으면 안 된다. 그녀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한 남자가 비틀비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비틀거리는 것이 몹시 취한 것 같았다. 남자는 가로등 앞으로 다가서더니 거기에다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종화는 칠칠이 아줌마를 안아 들었다. 여자치고는 몸집이 크고 무거웠지만 그는 별로 힘들지 않게 그녀를 들어올렸다. 그로서는 위험하고 모험스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놀라운 힘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인을 트렁크 속에 처박았다. 몸이 바로 누워 있는 상태에서는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체를 먼저 내려놓은 다음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꺾고 나서 하체를 밀어 넣었다. 트렁크를 닫고 열쇠로 잠그고 나자 술에 취한 남자가 비틀비틀 다가왔다. 종화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가 그 남자가 지나가고 난 뒤 도로 밖으로 나와 여인이 쓰러졌던 자리를 플래시로 비춰 보았다. 이윽고 그는 여인이 떨어뜨렸던 손지갑을 주워 들면서 자신이 강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이 두툼한 것으로 보아 돈이 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골목 밖으로 천천히 차를 몰아 나갔다. 차도로 들어서서 밝은 데로 나가자 비로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왼손이 피에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뒤통수가 터진 모양이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가리기 위해 장갑을 꺼내 끼었다. 차도는 차량 통행이 적어 한산했다. 그는 계속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고 있었다. 속도계의 바늘이 110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었다. 삼십 분 후에는 벌써 남쪽으로 뻗은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십 분쯤 더 달리다가 그는 국도를 벗어나 숲속으로 차를 집어 넣었다.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계속 올라가면 그의 선산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야산을 끼고 돌아가면 국도 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야산 뒤쪽에 창고처럼 생긴 큰 가건물이 한 채 있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날려갈 것 같은 낡고 볼품 없는 블록 건물이었다. 천장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뚫려 하늘의 별이 다 보였고 벽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원래 누군가가 양계장으로 지어 닭을 기르던 곳이었는데 닭값이 계속 폭락하는 바람에 더 이상 닭을 기를 수가 없게 되자 그대로 버려 둔 것이었다. 차를 바로 양계장 앞에까지 바싹 들이댄 다음 그는 트렁크에서 여자를 끌어냈다. 그녀의 입에서는 가늘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의 입에서 몇 마디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몇 마디의 말이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얻어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녀를 소중히 다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질질 끌고 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는 플래시를 그녀의 얼굴 가까이 들이대고 비쳤다. "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 아이고…… 아이고.
" 그녀는 계속 신음하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옆으로 돌려진 채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피에 엉겨붙어 있었다. "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나 살려 줘 …… 나 살려 줘…… 아이고…… 아이고…….
" "
개 같은 년…… 정신 차려!
" 그는 주먹으로 그녀의 턱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는 플래시로 주위를 비춰 보았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플라스틱 물통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곳에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었다. 그는 썩은 물을 한 통 가득 담아 가지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것을 그녀의 얼굴에다 들이부었다. 악취가 풍기는 썩은 물은 그녀의 얼굴과 상체를 질퍽하게 적셔 놓았다. 그녀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 냈다. "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 그녀 쪽에서는 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노리끼한 두 눈은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
나는 강도가 아니야.
내 딸을 찾고 싶을 뿐이야.
" 그녀의 움직임이 천천히 멈췄다. "
딸을 유괴당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건지 넌 모르겠지.
여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이야.
아무리 몸부림치고 소리쳐 봐야 소용 없어.
" 그는 차 속에 놓아 둔 가방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방을 가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와 보니 여자는 저만치 기어가 있었다. 살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방에서 가는 철사를 꺼내 먼저 그녀의 발목을 묶었다. 철사는 결코 늘어나는 법이 없이 단단히 죄어들기 때문에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살 속을 파고든다. 발목을 묶고 나서 다음에는 팔을 뒤로 꺾어 손목을 묶었다. 마지막으로 기어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발목을 기둥에다 연결시켜 놓았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도움 없이는 결코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종화는 다시 그녀의 얼굴에 플래시를 갖다 댔다. "
묻는 대로 빨리, 그리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넌 살 수 있어.
이 애를 알고 있지?
" 그는 그녀의 눈앞에 장미의 사진을 비쳐 보였다. 그 사진을 본 순간 그녀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
몰라요, 모르겠어요.
" "
이 애는 내 외동딸이야.
지난 7월 20일 오지애한테 유괴되어 너한테 팔린 애야.
이름은 김장미…… 기억나지?
" 여자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
몰라요, 그런 애는 몰라요.
처음 보는 애예요.
" "
거짓말 마! 너하고 입씨름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시간도 없어! 오지애가 죽은 거 알고 있겠지? 내가 오지애를 죽였어.
내 딸애를 유괴해 갔기 때문에 죽인 거야.
오지애한테서 죽기 전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 그 말에 그녀는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쉽게 자백하려 들지는 않았다. "
하늘에 맹세코 전 정말 몰라요.
전 그런 애를 산 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 "
개 같은 년! 하늘에 맹세한다고? 너 같은 게 어떻게 하늘 운운할 수 있지?
" 그는 분노에 떨며 칼을 뽑아 들었다. 끝이 날카로운 칼이었다. 불빛을 받아 그것은 번쩍번쩍 빛을 뿜었다. 칼을 가까이 들이대자 그녀는 그것을 피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날카로운 칼끝은 계속 그녀의 왼쪽 눈을 노리며 따라가다가 갑자기 앞으로 쑥 나아갔다. "
아악!
" 여자는 얼굴을 뒤로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종화는 왼쪽 눈에 박힌 칼을 천천히 뽑아 냈다. 이미 왼쪽 눈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아이구, 눈이야! 아이구, 내 눈이야!
"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쪽 눈알도 후벼 버릴 거야.
내 딸애가 받고 있을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말해! 장님이 되고 싶지 않으면 빨리 말하란 말이야!
" 그는 다시 칼끝을 그녀의 눈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겨누었다. "
일 분 여유를 주겠다.
내 딸애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오른쪽 눈도 찔러 버릴 거야.
" 그는 정말 그쪽 눈도 찔러 버릴 생각이었다. 그는 그녀의 살아 있는 눈을 썩은 동태 눈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왼쪽 눈에서 흘러넘치는 피로 그녀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상대방 남자에 대한 확신이 섰다. 그것은 그가 일 분 후에는 틀림없이 그녀의 오른쪽 눈마저 찌를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
말하겠어요! 제발 찌르지 말아요!
" 그것은 호소라기보다는 비참한 울부짖음이었다. "
바른대로 말하면 찌르지 않겠어.
거짓말로 자백할 생각은 하지 마.
만일 거짓말하면 돌아와서 오른쪽 눈까지 파버릴 거야.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확인될 때까지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그러니까 거짓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 내 딸은 어디 있지?
" "
오, 오 사장이라는 사람이 사갔어요.
" 그녀는 헐떡이며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
오 사장이라고? 어디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지?
" "
그건 몰라요.
어디 살고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 부하들이 장미를 데려갔어요.
" "
얼마 받고 팔았지?
" "
삼십만 원 받았어요.
" 그는 칼 쥔 손을 들었다. 칼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그럼 지금 오 사장이라는 사람이 내 딸애를 데리고 있나?
" "
지금도 데리고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 부하들이 와서 데리고 갔으니까요.
" "
그게 언제였지?
" "
바로 그날 밤이었어요.
오지애가 그 애를 데리고 온 바로 그날 밤에 그들이 와서 데리고 갔어요.
" "
오 사장이라는 사람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봐.
" "
전 그 사람이 어디 살고 있는지 몰라요.
" "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 "
그날 밤 문어하고 오랑우탄이 장미를 데리고 갔어요.
그 사람은 알고 있을 거예요.
" "
문어하고 오랑우탄이라고? 별명인가?
" "
네…….
" "
그 자들의 본명은 뭐지?
" "
본명은 모르겠어요.
정말 몰라요.
" 그녀의 피에 젖지 않는 한쪽 눈이 애처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
어디에 가면 그놈들을 만날 수 있지?
" "
H호텔 나이트 클럽에 자주 나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 "
오 사장이라는 자는 어떤 자야?
" "
여자 장사하고 마약 장사를 한다고 들었어요.
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 "
그 자가 우두머리인가?
" "
그 사람 부하들이 모두 잡고 있어요.
그 사람들 말을 듣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어요.
" "
지금까지 한 말은 모두 정말이겠지?
" 그는 플래시를 껐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
네, 정말이에요.
하나도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살려 주세요!
" "
살려 달라고?
"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이대로 두고 가시면 전 죽을 거예요.
제발 살려 주세요!
" "
넌 죽지 않을 거야.
" 그는 다시 플래시를 켰다. 그리고 갑자기 칼을 들어 그녀의 오른쪽 눈을 마저 찔렀다. "
으악!
그녀가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그는 플래시를 껐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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