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희 - 천사의 반란 1.2

3학년2반 | 2022.02.01 08:16:01 댓글: 0 조회: 920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182
천사의 반란
-한대희 장편추리소설

차 례
1. 프롤로그
2. 신혼 첫날밤에 생긴일
3. 비극의 서막
4. 빨간 립스틱
5. 국회의원 성기용
6. 변신
7. 고급사교클럽-왕궁
8. 플랑크톤의 비밀
9. 프랑스의 걸인들
10. 암호, 풀리다
11. 납 치
12. 호랑이 굴속으로
13. 속초에서 인천까지
14. 왕궁의 참변
15. 음모의 종말
16. 에필로그


1.프롤로그
우이동 유원지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사내는 천천히 공터를 가로질러 걸었다.
산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사내는 새삼 옷깃을 여몄다.
늦은 봄 날 씨에도 불구하고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밤 공기는 서늘한 느낌을
안겨주기에 족했다. 그러나 그 촉감은
언제나 마주해도 좋을 훈제된
생선요리처럼 신선한 감각으로 그의
가슴에 전달되어 왔다.
더욱이 잠시 후 이루어질 비밀스런
만남을 떠올리자, 입가에는 미소마저
피어올랐다.
후.
사내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폐 깊숙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전신을 감싸는 야릇한 쾌감을
느끼며 산장으로 오르는 비탈길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벌써 여러 번 들락거려 제법 낯이 익은
좁은 골목 양켠으로 아베크족들을
유인하는 각종 휴게실과 유원지 특유의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있었다.
사내는 깃발처럼 빼곡히 들어 서 있는
간판들을 건성으로 훑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가 찾아가는 하얀산장은 우이동 산장
골목에서도 제법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힐끗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던 사내는
조금씩 걸음을 빨리했다. 약속 시간도
임박했지만 무엇보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조급증이 문득
치밀면서 느긋하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면 은밀하게 이루어질 밀회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탓일까?
사내는 몰래 자신을 뒤쫓는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그림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사내의 뒤를 쫓았다.
사내가 하얀산장의 담장을 꺾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림자 사내는
재빨리 가까운 공중전화부스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집어든
사내는 서둘러 다이얼 버튼을 연속적으로
두드렸다. 한참만에 신호가 떨어지자
그림자는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합이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화기 저쪽에서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빠르게 스쳐가고, 이어 탁하고
쉰 듯한 굵은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미스터 Q다."
"백합입니다. 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차질은 없나?"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버그
설치도 끝났습니다."
"수고가 많다. 상황이 끝나면 다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중전화부스를 빠져나온 그림자 사내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하얀 산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앞서 들어간 사내를
뒤따라 빨려들 듯 하얀 산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남철희 박사가 하얀산장의 정문을
들어서자 수부를 지키던 종업원이 급히
일어서며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듯 종업원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남 박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하얀산장의 본채로 이르는 큰길을 따라
걸어가던 종업원이 주차장을 벗어나자
화단을 가로지르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화단 양켠으로 목련이 함초롬히 피어
있었고, 활짝 만개한 목련의 싱그러움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오솔길은 그렇게 길게 나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소리,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와
어울려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남 박사는 도원경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풍류를 유난히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밀회 장소를 유독
이곳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그였다. 흥취에
젖은 남 박사는 천천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저만치 보이는 별채 앞에서 종업원이 남
박사를 기다렸다.
"여깁니다."
종업원이 10호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별채 현관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수고했네."
팁을 건네주자 종업원이 반색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 종업원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함박
머금고 급히 돌아섰다. 종업원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남 박사는 10호실의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방문을 밀고 방으로 들어서자 성귀희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일찍 오셨구려, 성 여사."
성 여사는 수줍은 듯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남 박사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자태는 남 박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만큼 고혹적이었다. 그녀는
짐짓 샐쭉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마치 원망과도 같은 그리움의
표현이 다분히 함축되어 있었고 남 박사의
가슴에 참을 길 없는 정염을
불러일으켰다.
남 박사는 와락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나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한편 그 시각에 별채 10호실과 인접한
별채 11호실에는 도무지 생긴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암호명 백합으로 불리는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도어 체어록을
잠그고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방 안을
한바퀴 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양복
상의를 벗어붙인 사내는 우선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태운
사내는 꽁초를 재털이에 비벼 끄고서야
천천히 준비해온 FM라디오를 집어들었다.
여유 있던 사내의 행동이 라디오를 잡는
순간 민첩해졌다. 볼륨을 켜자 라디오에서
잡음이 새어나왔다. 백합은 재빨리
라디오의 주파수를 102.9메가헤르츠에
맞추었다. 순간 FM라디오에서 남녀의 거친
호흡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백합은
빙긋 미소를 흘리며 라디오를 고정시키고
한켠으로 멀찍이 물러서서 라디오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흐흥. 버그가 꽤 쓸 만한데!'
버그(bug)는 미 CIA가 개발한
스파이들을 위한 도청전자장비이다.
손목시계, 넥타이핀, 만년필 등 어디에나
장치할 수 있는 초지향성 마이크로.
크기는 어른 손톱 만하나 성능은 세계
최고로서 백합이 별채 10호실에 미리
장치해 둔 도청 장치였다. 그러고 보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거친 호흡 소리는
별채 10호실의 남 박사와 성 여사가
일으키는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놀랍게도
버그는 굳게 포옹한 남녀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미세한 숨결마저도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었다.
'미친년놈들 같으니, 더럽게 한가한
짓거리들이나 하고 있군.'
별안간 하체가 묵직해지고 자신의
가슴이 더워지는 듯하자 백합은 별채
10호실을 향하여 불평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감질만 나게 하는 호흡 소리가
울리는 리디오를 끌어 당겨서 볼륨을 잔뜩
키웠다. 순간 두 남녀의 거친 호흡이 방을
온통 메울 듯 마치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이윽고 남 박사의 품에서 빠져나온 성
여사는 머리 매무새를 다시 고쳤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남 박사를
올려다보았다.
"시장하시죠? 우선 식사부터 하세요."
그녀는 윗목에 차려진 요리상을 잡아
끌었다. 순간 남 박사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니야, 난 그보다 더 급해요."
와락 성 여사를 잡아당긴 남 박사는
다시 한번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랫목에 펼쳐진
이부자리에 그녀를 쓰러뜨리고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아이참, 성급하시긴..."
그녀는 눈을 살짝 흘기며 성급하게
보채는 남 박사를 나무라면서도 싫지는
8않은 듯 짐짓 몸짓으로 옷을 벗기는 남
박사의 손길을 거들었다.
그들의 만남은 늘상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의 첫만남은 남철희 박사의 강연회에
성귀희 여사가 우연히 참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남박사의 강연에 매료된 성 여사는
개인적으로 남 박사를 방문하여 강연
내용에 관한 학문적인 토론과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그때를 빌미로 두 사람은
빈번한 접촉을 하기에 이르렀다.
학문 토론에서 시작된 만남이 인생
상담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사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것이
불륜인 줄 자각하면서도 남 박사는 주체할
길 없는 강렬한 흡인력으로 성 여사에게
매료되어갔다. 그것은 성 여사도
매한가지였다. 숙명. 그들에게, 두 사람의
인연과 만남은 그렇게 귀납되어졌고
그들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토록 늦게
만나게 된 인연을 한탄하면서도 현실의
벽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불륜은 시작되었다.
비록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만남이지만
그들은 뜨겁게 서로의 욕구를 불태우며
새로운 이성에 대한 탐닉에 열중했다.
엄연한 불장난을 저지르면서도 그들은
새로 생성된 이성 관계에 환희를 느꼈고,
그것은 그들의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기폭제였으며, 그들의 삶에 있어 비밀스레
간직한 기쁨 중의 하나였다.
어느틈에 알몸이 된 그들은 격정의
순간을 향해 치달았다.
"아..."
성 여사가 탄성을 발하며 남 박사의
등을 휘어감은 팔에 힘을 가해 옥죄었다.
남 박사는 격렬하게 성 여사를 향해 파고
들었고 그녀의 손톱이 날을 세워 남
박사의 어깨를 파고드는 순간, 남 박사는
온 몸이 폭발하는 듯한 격정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환희의 절정을 헤매는 듯한 그녀의
안색이 별안간 창백해지더니 기성을
발하며 숨을 끅끅 몰아세웠다.
너무나 엉뚱하고 돌연한 사태에 당황한
남 박사는 급히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이봐요. 성 여사 무슨 일이오? 왜
그러는거요?"
"가 가슴이..."
"서 성 여사! 정신 차려요. 성 여사..."
그러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안간힘을
쓰며 가슴을 쥐어뜯던 그녀의 팔이 축
늘어지면서 그녀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한 남
박사는 넋이 나가버린 듯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복상사()라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복하사()라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다. 남 박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돌연한 사황에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쩐다? 이대로 달아나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경찰을
불렀다가는...안 돼! 그렇게 되면 나는
끝장이다. 안락한 가정이 파멸되는 건
물론 사회적 지위와 체면은 또 어떻게
되나? 안돼! 그럴 순 없어!'
남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 박사는
그렇게 다짐을 했다. 달아나자, 그러나
그나마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파렴치한 행위 같아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일을... 도대체 이 일을 어떡하나...
남 박사가 뚜렷한 수습책을 세울 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따르르릉...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이 남 박사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말았다.
'누굴까? 누가 이 시간에,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어쩐다지?
이걸 받아야 하나?'
끊임없이 울어대는 전화벨이, 혼이
반쯤은 나가버린 남 박사의 의식을 더욱
혼돈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래
전화를 받자, 전화를 안 받는다면
상대방에게 더욱 의심을 살지 모를
테니까.
그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 여보세요."
"남철희 박사님이십니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사내의 싸늘한
목소리에 기겁을 한 남 박사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한 그였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대는 데는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누, 누구요, 댁은?"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박사님. 저는
박사님을 잘 알고 있고 박사님을 돕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사내의 음성은 냉정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점이 남 박사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요? 댁은 뉘시요?"
"박사님, 진정하십시오. 저는 박사님의
바로 옆방인 별채 11호실에 투숙해 있는
사람입니다. 우선 양해해주십시오. 저는
좀전에 박사님이 그 방으로 들어가시는 걸
목격했고 밖에서 박사님을 뵈려고
서성대다가 호기심 때문에 방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뭐요?"
"하하...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으으음..."
남 박사는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길게
토해 내었다. 이제 끝장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면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박사님,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박사님이 여기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박사님을 아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자, 지금부터 그
방에서 박사님의 흔적을 지우십시오.
Q박사님의 손길이 닿은 곳은 빠짐없이
손수건으로 지문을 닦아내십시오. 그리고
박사님의 소지품을 빠뜨리지 말고 챙겨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세요. 이 산장의
종업원은 제가 주물러서 입을
막아놓겠습니다."
"고, 고맙소. 근데 댁은 뉘십니까?"
"전 백합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정도만 기억해두십시오. 훗날 기회가
닿는다면 박사님께 인사를 드릴 날도 있을
겁니다. 자, 빨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아, 알겠소."
전화를 끊고 남 박사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실낱 같은 희망이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불러 일으켰고 그는 사내가
시키는 대로 작업을 서둘렀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그리 많은 시간은
소요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벌거벗은 그녀의 알몸
위로 그녀의 옷가지들을 가만히 덮어
그녀의 치부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깊은
죄의식을 느끼며 그녀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린 그녀의 사체를
묵묵히 내려다 보던 남 박사는 이윽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조용히 별채를 빠져
나갔다.


2. 신혼 첫날밤에 생긴일
향수를 전신에 조금만 바릅니다. 그러나
유방처럼 남성이 키스하는 장소에는
바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혀에 쓴 맛을 주게 됩니다. 암내가 나면
그곳에 향수를 뿌리도록 합시다.
신부의 누드에는 오늘 밤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아름답고 귀여운 팬티를
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그 위에는 앞이
열리는 네글리제를 입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팬티는 여행중에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신랑 몰래 새것으로 갈아
입어야 하며 디자인이나 무늬가 다른 것을
준비하는 것도 신랑에 대한 마음가짐이라
것입니다.
네글리제는 지나치게 투명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고상하게 보입니다."
윤정님()은 들고 있던 책장을
와락 덮어버렸다.
신혼의 지혜라는 커다란 활자가 그녀의
시야로 성큼 빨려들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녀는 신혼의 지혜를 탁자 위에
동댕이치고 말았다.
신혼 초야를 치러보지 못한 여성은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정님은 신혼 초야의
공포와 불안 때문에 유난을 떨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하소연하거나 아무
허리띠나 붙들고 앉아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여서 더욱 그랬다.
결국 두 달 전에 동네 서점에서 구입한
신혼의 지혜를 통하여 그녀는 신혼 초야의
불안을 약간은 해소할 수 있었다.
책자를 통독한 후 신혼의 에티켓을
깡그리 외우다시피 하며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그녀였다.
정님은 화장대의 거울 속에 자신의
전신을 비추어 보았다.
네글리제 속에는 정님이 25년을 고이
간직해온 탄력 있는 몸매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자태를 풍기며 숨어 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입가로 흘리던 정님은
이내 침대 모퉁이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작 그녀의 네글리제를
열어주어야 할 신랑은 여태 객실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띠띠... 뛰...
손목시계 알람은 벌써 밤 열한 시를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핏 입가로 스치는 짜증을
한숨으로 토해내며 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창 밖에 펼쳐진 제주도 중문단지의
하야비치호텔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풍광은
짙게 내겨깔린 어둠에 차단당한 채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는 새까만 암흑만이
혓바닥을 넘실거리며 창가를 더듬고 있는
듯했다.
문득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왈칵 치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에 정님은
커튼으로 창 밖의 어둠을 가리고 말았다.
그리고 커튼 구석구석을 잘 여민 후에야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것은 정말 눈꼽만치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그녀가 몇 번씩 읽어서 달달 외워버릴
정도가 된 신혼의 지혜 속에도 이런
상황에서 신부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드바이스는 전혀 없었다.
정님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도무지 울어댈 줄을 모르는 수화기를
들어올려 보았지만 딱히 전화를 걸어 볼
만한 곳도 없었고 또 무책임한 신랑을
수배하자면 어디로 전화를 넣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도통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딱한 일을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인가. 막연한 상념이 그녀의 조바심을
꾸욱 누르고 말았다. 정님은 결국 침대
위에 몸을 길게 눕히고 말았다.
'남자는 정말 알 수 없는 동물이야.
신혼 첫날밤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담.
아무리 친구가 좋기로서니...'
그러니까 그녀의 신랑 우춘구()가
잠깐 친구를 만난다며 객실을 빠져 나간
것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서울에서 예약해두었던 하야비치호텔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5012호실에
여장을 푼 것이 오후 다섯 시. 온통
야자수로 장식된 그릴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식탁에 앉아
캄보밴드의 은은한 생음악을 감상하며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것이
여섯시경, 그리고 호텔 뒤쪽에 면해 있는
해변을 잠시 거닐다가 곧장 객실로 돌아온
그들이었다.
"오늘 정말 힘들었지? 그만 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는 게 어떨까?"
엉뚱하게 그런 제안을 먼저 했던 것은
신랑이었다.
객실로 돌아온 후 함께 목욕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겨대는 신랑을 간신히
달래놓고 욕실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샤워를 틀어놓고 정성껏 몸을
닦아내던 그녀는 어렴풋하게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신랑의
난처한 듯 군지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신랑은 욕실을 노크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어머, 이 시간에요?"
"잠깐이면 될 거야. 급한 일이라구
친구가 여기까지 찾아왔어."
신랑은 그렇게 허둥지둥 방을 빠져
나갔다.
어떻게 하면 첫날밤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만 골똘하던 그녀는
허둥대는 신랑의 말투에서 풍겼던 이상한
낌새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샤워를 마친 후 미리 준비해온
산뜻한 네글리제를 걸친 그녀는 가벼운
화장으로 얼굴을 마무리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녀가 해도 너무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아홉 시 뉴스센터가 끝난 후인 열
시경이었다.
초조하게 안달하면서 주말의 명화를
보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텔레비전을
기웃거리던 그녀는 결국 옷을 갈아입고
호텔 내부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경우에요? 난 춘구 씨가
이렇게 매너가 없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평생을 함께 보내겠어요? 난
내일 첫 비행기로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벼르고 별렀다. 신랑만 찾아내면
한바탕 쏘아붙인 후 폭탄 선언을
퍼부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일까?
그릴에도, 바에도, 커피숍에서도, 하다
못해 나이트 클럽에서도 신랑은커녕 그
친구라는 작자까지 그들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정님은 다급한 마음에 폭탄 선언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각 업소의
웨이터들을 붙들고 남편의 인상 착의를
대며 언제 들렀는가 탐문에 나섰다.
그러나 웨이터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에는 그런 사람들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호텔 내부에서
신랑의 흔적이 사라진 걸 보면 신랑과
친구는 호텔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중문관광단지라고 하지만 호텔 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면 허허벌판이다.
아무리 다급한 그녀였지만 이런 야밤에,
깊은 어둠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허허벌판을 헤매고 다닐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시 객실로 돌아온 그녀는 한동안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어디 계세요 춘구 씨, 제발...'
불쑥 불쑥 치미는 불길한 예감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이제라도 돌아만 와준다면
폭탄 선언이 아니라 열렬한 키스를 퍼부을
심정마저 되어 있는 그녀였다.
그리고 또 한 시간이 흘러도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정님은 애꿎은 전화통만 쏘아보면서 방
안을 거닐었다.
혹시나, 당장이라도 신랑이 들어올까
싶어 네글리제 차림으로 서성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당당한 몸매가 지금은 비곗덩이처럼
비참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라 앉히려고 별의별 공상을 다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불안정한 쪽으로 기울어갔다.
남자란 동물은 원래 그래. 여자들
입장은 눈꼽만치도 생각치 않는다니까.
이건 시도 때도 없어, 모두 자기들 편리한
대로 갖다 붙이고 이유를 둘러대는 거야.
흐흥, 아무튼 돼먹지 못한 짐승이야.
늑대, 너구리, 멍청이들.
언젠가 일찍 시집을 갔던 친구 하나가
퍼부어대는 제 남편의 험담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술을 한 잔
마시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수
있잖아. 오죽 급한 일이면 친구라는
사람이 사흘이라는 신혼 여행 기간을 참지
못하고 이곳까지 뒤쫓아왔을까?'
정님은 남편을 이해한다기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문자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글픔은
횬막변했다가 불안은 이내 분노로
변해갔다.
그녀의 감정이 격정을 향해 치달리려고
할 즈음 딩동.
객실의 부저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 그녀의 격정은 숨가쁘게 환희로
교차했고, 그녀는 쏜살같이 현관으로 뛰쳐
나갔다.
"춘구 씨?"
그러나, 찰칵하고 객실 도어가 열렸을
때 우악스럽게 밀치고 들어선 것은 정님의
남편 우춘구가 아니라 네 사람의 낯선
사내였다.
"누, 누구세요? 당신들은..."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우악스런 손아귀가 그녀의 입을 봉해
버렸다. 그리고 문이 육중하게 닫히면서
객실 내부는 바깥 세계와 차단되고
말았다.
순간 정님은 그렇게 느꼈다.
사내의 손을 빠져나와 호텔 복도로
달아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정님은
사력을 다해 사내의 손을 물어 뜯으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정님의 연약한
힘으로는 사내들의 억센 완력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쌍년이 어딜 대들어?"
그녀는 오히려 개처럼 질질 끌려가 침대
위에 팽개쳐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내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따귀를 서너 차례 맞고나자 그녀의
얼굴을 피투성이가 되었고 정님은 더이상
반항할 기력마저 잃고 말았다. 너무 겁에
질려 울음마저 미처 나오지 않았다.
"사, 사려주세요, 제발..."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입술로 간신히
애원을 했다.
"살고 싶으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굴어! 알겠어?"
사내는 그제서야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정님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님의 네글리제가 거칠게 찢겨나갔다.
순간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랐다.
"아, 안돼요. 돈을 드릴게요. 달라는
대로 뭐든지 다 드릴게요. 제발, 예?"
"이런 개 같은 년이! 아직 주둥일
나불거려?"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함께 사내의
주먹이 다시 날아 들었다. 그러나
사내들의 의도를 눈치챈 정님은 발악하듯
B몸부림을 쳐댔다. 뜻밖에도 저항이
완강하다는 듯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의
눈심지가 꿈틀 솟아 올랐다.
"안되겠어! 둘이서 이 년을 꼼짝
못하도록 붙들어!"
그리고 사내는 서둘러 바지를 벗어
내렸다.
정님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항을 했다.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녀의 몸은
사슬에 조이듯 사내들의 억센 힘에 얽매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베개 때문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고 사내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양팔이 자율를 잃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치부를 가리고
있던 헝겊조각마저 찢겨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거의
퓰탔하고 말았다.
여덟 개의 흉측한 눈동자가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자신의 나신을 내려다
본다고 생가하자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그녀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순간, 하체를 관통하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몸 속으로 밀려들어오면서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악!"
그녀는 다시 혼절을 거듭하고 말았다.
'아, 이건 아냐! 이래선 안 돼 제발,
제발 꿈이었으면...'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정님은 벅찬
행복감에 들떠 있었다.
마치 솜털 같은 양떼구름이 기창 밖으로
눈부시게 펼쳐지자 정님은 가벼운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어머나, 저 구름들 좀 봐요. 춘구 씨,
구름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지 정말
몰랐어요."
끝없이 펼쳐진 구름계곡의 장관이 마치
자신들 앞에 펼쳐진 미래인 양 정님은
감탄을 연발했고 춘구는 은근히 부추기며
정님의 감동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정님은 들뜬 마음을 도무지 억제할 수
없었다. 사실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대한 감격보다는 하나의 가정을 꾸미기
위해 치러야 했던 그 지긋지긋하고
수선스러웠던 격식을 다 마쳤다는 안도감,
그리고 공항 로비까지 따라 나섰던
극성스런 떨거지들마저 떨쳐 버리고
드디어 단둘의 허니문으로 접어들었다는
포근함이 그녀를 그렇게 들뜨게 했는지도
몰랐다.
기창 밖으로 펼쳐진 웅장한 구름 계곡의
장관은 한폭의 서사시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정님의 시야로 달려
들었고, 그 정경은 그녀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킬 듯했다.
그때 춘구의 넓적한 손이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꼬옥 감싸왔다.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면서 그녀의 상념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이 사람의 여자가 된다.
오늘로서 25년간이나 고이 간직해왔던
순결을 이 사람에게 바치고 완전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모든 고통을 참아가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일심 동체가 되어 백년
해로를 하며 희로애락을 함께 할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다짐을 했다.
춘구는 환한 웃음을 한입 가득 물고
그녀를 그윽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을 꼬옥
감싸쥐었다.
'행복합니다. 이 기쁨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오로지
당신에게 감사 드립니다.'
정님은 미처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을 수줍은 미소로 얼핏 흘려주었다.
그는 움켜쥔 그녀의 손에 가만히 힘을
보태어 알았다는 시늉을 지어보였다.
정님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웃음에
답해 주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티끌만한 가식도 없는
행복이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년이 몸매 하나는 그저 그만인데?
일품이야."
"그 자식이 여자는 제대로 골랐어! 사내
여럿 잡아먹을 년이야."
"그나저나 이대로 죽여버리긴
아까운걸."
까마득한 의식 저쪽에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짧은 찰나의
본능적인 경각심이 그녀의 무의식
한가운데로 파고들며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 죽어선 안 돼, 살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막연한
목적도 없이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였다.
세번째의 사내를 거쳐 지금은 네번째의
사내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와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정님은 살아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잠깐만에
지나가버린 듯 이제는 아무런 감각조차
없었고 사내의 단조로운 반복 운동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 아픔을 새기며 기억될
뿐이었다.
이윽고 세차게 거친 숨을 몰아쉬던
네번째 사내마저 그녀의 배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끝났다는 일말의
안도와 함께 그녀의 의식은 또 다시 끝을
모르는 깊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정님의 어렴풋한 의식이 다시 깨어난
것은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전달되어
오는 으스스한 한기 때문이었다.
반쯤 젖혀진 커튼 사이로 어렴풋한
여명이 빠져들어와 실내를 헤집고 있었다.
제발 꿈이었으면, 어젯밤의 그 악몽이
제발 꿈이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것은 현실로서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두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나왔다. 도무지
형언할 길 없는 분노가 그녀의 가슴을
북받치게 하고 있어 그 눈물을 제어할
능력을 그녀는 가지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온몸이 기진할 듯한 탈진을 느끼면서
정님은 차츰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자각이 그녀의 이성을
일깨우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는 마음을 추스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악!"
순간 그녀는 온몸을 찔린 듯한 아픔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이 온몸을 울리면서 도무지 움직일 수
조차 없을 듯했다.
정님은 고통을 억누르며 거울에 비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거울에 비쳐진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는 하혈로 인한
핏자국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고 침대
시트 역시 핏자국으로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
나동그라져 있는 그녀 혼자뿐이었고,
남편은 물론 어젯밤의 그 사내들도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문득 실내가 황당그레하게 넓은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녀는 헤아릴 길이 없는
고독함에 휩사여 몸을 떨었다. 메말라
버린것만 같던 눈물이 또다시 주르르
쏟아졌다.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하면서 그녀를 지금껏
지탱시켜준 이성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객실 도어를 요란하게
"두들겼다. 순간 섬광처럼 치미는 한가닥
기대를 안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뼈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어닥치면서 그녀는 침대 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님은 사력을 다하여 몸을
일으켰다. 구원을 청해야 한다. 사람
살려요. 가느다란 의식의 한쪽 끝을
부여잡고 그녀는 감각이 없는 하체를 끌며
객실 도어를 향해 바닥을 기었다.
객실 도어를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요란스러워졌다.
사력을 다해 기어간 정님이 도어 손잡이
쪽으로 팔을 뻗는 순간, 별안간 문이
열리고 육중한 힘이 밀어닥치며 그녀를
넘어뜨렸다.
아,
실낱처럼 이어져 있던 정님의 가느다란
의식은 다시금 깊은 심연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흡사 나선형 우주선이나 돔을
연상시키는 제주도의 명물
하야비치호텔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정확하게 새벽 세 시경이었다.
호텔의 9층 복도에서 서른을 갓 넘은
듯한 젊은 사내가 홀 중앙으로 투신
자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증언했다.
9층 복도에서 호텔의 중앙 로비인 1층의
코스모포리탄 홀로 뛰어내린 청년은
두개골이 파열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신혼 부부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의
특성 그대로 깊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홀의 구석에서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몇 쌍의 남녀들은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은근한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던 그들의 눈 앞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떨어져 피를 튀기며
죽어갔으니 혼이 반쯤은 달아날 수밖에.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다.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던 사내의
다리가 쭉 뻗으며 동작이 멎는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호텔은
아수라장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고 달려왔던 사람들도 그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고개를 돌리거나 입을
막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난생 처음 당하는 봉변에 당황하긴
호텔측도 매한가지였다. 야간 당직인
Q지배인이 뛰어나와 우왕좌왕하는
종업원들을 지휘하여 손님들을 객실로
들여보내고 장내를 정리한 후에야 미처
경찰에 연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였다.
제주도 경찰국의 육중우() 형사가
현장에 당도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다
되어서였다.
단잠을 자다 말고 호출당한 육 형사는
손수 승용차의 핸들을 잡고 5.16도로를
달려오면서 연신 불평을 털어놓았다. 어떤
시러베 자식이 이 시간에 죽어 자빠져서
남의 잠을 깨우고 지랄이야, 그가 터뜨린
불만의 요지는 대충 그 정도였다.
게다가 그까짓 투신 자살 소동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도경찰국으로 지원을
요청한 서귀포 경찰서의 담당자들에 대한
짜증도 불만 속에 함께 묻어 있었다.
하긴, 제주도의 최고급 특급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이다보니 그들이 수선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었다.
멀리 성산일출봉 쪽에서 어렴풋이
여명이 밀려올 즈음에야 그는 호텔에 닿을
수 있었다.
육중한 거구를 휘두르며 현장에 도착한
육중우형사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현장의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초조하게 지원을 기다렸던
서귀포팀은 역시라는 감탄을 연발했다.
육중우형사는 변사체의 정황을 채취하고
사진을 찍은 후 대기하고 있는 앰블런스에
사체를 실어 보내고 현장의 목격자들을
불러 당시의 정황을 듣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변사체의 신원은 쉽게 밝혀졌다.
이름은 우춘구, 당 34세, 프론트에서
주민등록증과 숙박카드를 대조하여 5012호
투숙객임을 확인한 순간 그는 한달음에
5층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 요란을 떤
끝에 방문은 열렸고 참혹한 모습의
윤정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육중우 형사는 대뜸 사태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잠시 아연해하던
그는 신속하게 다음 행동으로 옮겼다.
벌거벗은 채 의식을 잃은 윤정님의
몸에, 눈에 뜨이는 옷가지들을 대충
걸치게 하고 즉각 병원으로 후송을 시킨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방 안을
훑어 보았다. 방 안의 풍경은 한마디로
살풍경하고 난잡했다. 그녀의 나이트
가운은 갈갈이 찢겨져 있었고 침대자락
여기저기에 묻은 핏자국은 그냥 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방 안의 정경은 어젯밤의
격전을 적나라하개 드러내 놓고 있었다.
윤정님이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형광등 불빛에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온통
하얀색으로 둘러싸인 병실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묵묵히 병상을 지키는 뚱뚱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셨습니까?"
사내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점퍼
R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보였다.
아마 경찰임을 확인시킬 요량인가
보았다. 순간 그녀는 왈칵 치미는 설움을
억제하느라 돌아눕고 말았다.
제발 꿈이길 바랐는데, 그 모든 게
악몽이길 간절히 빌었는데, 그녀는 너무나
부끄럽고 아득한 현실 앞에 몸을 오두마니
웅크린 채 떨었다.
"부인, 말씀을 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인이라니,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담은 형사가 마치 딴
세계에서 온 사람인 듯한 착각마저 느끼는
그녀였다.
병실에는 잠시 침묵만이 흘렀다.
육중우 형사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그녀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없을 듯했다. 더 이상 그녀의
병상을 지킨다는 것은 무리였다. 온통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녀를
도와주는 길은 조용히 혼자의 시간을
가지게 하는 일 뿐일 듯 싶었다.
그러나 육중우 형사는 다시금 주춤 몸을
돌렸다. 어쩐다? 지금 이 말을 전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결국은
알아야 할 일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마음을 다잡고
어렵게 입을 뗐다.
"부인, 경황이 없으실줄 압니다만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되시는 우춘구 씨의 죽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육 형사는 문득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도무지 꼼짝 않을 것
객그녀가 어느 틈에 벌떡 일어나 잡아
먹을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이가 죽다뇨?"
"모르고 계셨습니까?"
"말씀해 주세요. 그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고정하십시오. 부인..."
"믿을 수 없어요! 그이가 죽다니, 왜
갑자기...?"
그녀는 거의 발광하듯 악을 써댔다.
그리고 육 형사의 소매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제 정신이 아닌 듯 그녀의
눈자위는 이미 풀어지고 있었고 입에는
거품이 물려 있었다.
육 형사가 말을 잘못 꺼낸 걸 깨달았을
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럴리가 없어요. 그이는 죽지 않아요.
그이는 살아 있어요?"
육 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인, 우춘구 씨는 어제 새벽 세시경,
9층 복도에서 뛰어내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풀어지던 그녀의 눈동자가 주춤
한곳으로 모아지는 듯했다.
"아!"
짤막한 외마디 신음을 내밴으며 그녀는
또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윤정님은 그로부터 열흘 이상을 더
병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육중우 형사는 그녀로부터의 진술
청취를 아예 포기하고 그녀의 쾌유만을
비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난처한 그의
입장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육
형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서 급거 날아온
정님의 모친 역시 딸이 겪은 엄청난
불행을 마치 당신 자신이 겪은 양 통곡과
혼절을 거듭하며 마구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가족들의 그런 무분별이 환자에게
엄청나게 해롭다는 의사의 경고가
떨어지면서 모친의 발작은 가까스로
진정되었지만 육 형사로선 크나큰 홍역을
치른 셈이었다.
열흘 가량이 경과하자 윤정님의 증세는
당장이라도 퇴원을 할 수 있을 만큼
몰라보게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정신병 초기 증세까지 번졌던
그녀의 병세가 놀라울 정도의 빠른 회복을
보이자 담당 의사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남들 같으면 벌써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어야 할 엄청난 시련을 꿋꿋이
이겨낸 걸로 보아 그녀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듯하다는 느낌마저 피력했다.
그러나 윤정님은 몰라보게 말수가
적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혹시 벙어리가
되지나 않을까, 그녀의 모친이 지레 겁을
먹을 만큼 그녀는 입을 벌리기 싫어했다.
어쩌면 집단 폭행을 당했던 첫날밤의
끔찍한 기억이 강렬한 두려움으로 변하여
그녀의 의식 체계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딸 아이의 그런 모습이 애처로워 모친은
그녀의 입을 열어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살을 했다는구나 우서방이, 어이구
미련퉁이 같으니, 사내가 불알을 찼으면
그 값은 해야지, 자기 여편네가 그 꼴이
됐으면 어떻게든 위로를 해줄 생각은 않고
죄없는 지 목숨을 왜 끊어, 끊길."
모친은 육 형사로부터 전해들은
수사결과를 넋두리처럼 늘어 놓았다.
육 형사는 우춘구의 죽음을 자살로
처리하여 수사를 종결시킨 모양이었다.
즉 새신랑 우춘구가 친구를 만나러
외출한 사이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침입하여 혼자 객실에 남아 있는 신부를
집단으로 윤간하였다. 그 후에 객실로
돌아왔던 신랑 우춘구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 충격을 받았고 심적인 갈등을
일으켜 번민끝에 투신자살이라는 코스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육중우 형사의 추리는 대충 이런
정도였고 수사보고서의 결론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어떡하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니 기운을 내.
아, 용케 액땜한 걸로 치면 되잖니 응?
미친 개한테 한 번 물린 셈치고
잊어버리자, 정님아."
""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게야. 차라리 이런 일이 일찍
벌어졌던 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렴.
태평양에 배 한척 지나갔다고 어디
흔적이라도 남니? 어차피 불가항력이었던
걸.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일이잖니. 더 이상 마음에 두지말어 응?
정님아."
모친이 온갖 표현력을 다 구사하며
그녀를 구슬렀지만 정님은 꿈쩍도 하지
안았다. 그저 멍하니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먼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심하게 흘러가는 흰구름에 정신을
뺏기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의 유해를 안고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정님에게 시련은 계속되었다.
제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오명이
꼬리표처럼 그녀를 따라 다녔던 것이다.
특히 시집 식구들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냉대하는가 하면 시집쪽의 먼 피붙이들은
대놓고 욕을 하기도 했다. 시집 쪽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장례식장에 따라나선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면박을 퍼부어댔다.
"흥, 제 남편 잡아먹은 년이 낯짝도
두껍지,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저 흉물스런 것 좀 봐, 꼴에 우는
시늉이라도 하면 점수라도 더 줄 줄
알았나 보지?"
그러나 정님은 꾹꾹 참았다. 그 모든
험담도 결국 그녀가 감수해야 할 업보라는
생각이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차가운 냉대 속에서 장례식을 마친 후
시집 식구들 틈바구니에서 떨어져 나온
정님은 그들이 신방으로 마련해 두었던
압구정동의 전세 아파트로 돌아왔다.
모친이 친정으로 돌아가자고 아무리
구슬러 보아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드넓은 서울 땅 어디에도 그녀의 육신을
편히 눕힐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라고
그녀는 자각하고 있었다.
야멸찬 질타를 퍼붓든, 위로와 노정을
베풀든 간에 지금의 그녀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모든 시선들이 다 귀찮았다.
나는 이미 우씨 집안 사람이야.
비록 시댁에서 날 내치고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신만은 당당하게 해야
돼. 그녀는 그렇게라도 처신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납득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자기 위안이 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압구정동의 아파트에 칩거한
그녀의 생활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철저히 외부와의 단절을 고집한 그녀의
애원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고립무원 속에 덩그마니
남아 있었다.
한끼라도 거르지 않고 제때 먹을 건
찾아 먹는지 궁금하고 딸의 처지가
안쓰러워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오는
친정어머니의 전화만이 유일하게 열려있는
외부와의 통로였다. 그러나 그 전화마저
짜증스러워하는 그녀의 히스테리로 인해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폐쇄적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그녀는 날로 여위어만 갔다.
이따금씩 가뭄에 콩나듯이 생각날
적마다 간간이 끼니를 이어가는 데도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그녀 스스로
생가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참으로 끈질긴 목숨이다. 그녀가 그런
자각을 시작한 것은 압구정동의 아파트에
칩거한 지 한 달쯤 되던 날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밤이면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신혼초야의 그 끔찍했던 상황들은
그녀의 뇌리 속에 활동사진처럼 박힌 채
도무지 지워질 줄 몰랐고 끊임없이 새롭게
상영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헛소리와
비명을 마구 질러대었고 악몽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곤 했다.
차라리 죽어 버리자.
제주도의 도립병원에서부터 부슬비를
맞으며 치렀던 남편의 장례식 날,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죽음이라는
낱말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고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박한 소망을 한 번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죽어버리겠다고
모질게 마음을 먹어 보았지만 그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진게 목숨이라지 않는가. 그런데
무작정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런 무의미한
죽음이 과연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회의가 끊임없이 그녀를 일깨웠다. 그리고
막상 죽음을 결행한다면,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라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영원히 면할
수 없게 된다는 자각이 늘상 실행
일보직전의 그녀를 번번히 붙들어 세우곤
했던 것이다. 또한 한 발 먼저 저 세상에
가 있는 남편 우춘구도 그녀의 죽음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그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 그이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
날 밤 침입한 괴한들의 대화를 엿듣고 난
후부터 정님은 남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 그것은 너무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음모 아래 빚어진 엄청난
사건이었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방관할 수는 없다. 남편에게 씌워진
자살이라는 멍에를 벗겨주자, 남편은 어떤
험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살을 시도할
만큼 어리석거나 나약한 남자는 결코
아니다.
차츰 그녀는 남편에게 씌워졌던 그
굴레를 벗겨주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듯한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신념을 지니게 되면서 그녀의
생활은 조금씩 생기를 띠었고 활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 그동안 걱정만 끼쳐서 미안해."
짧은 시간 동안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던
떠올리며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모친은 마치 딸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온 양 펄쩍 뛰며 반색을 했다.
"그래, 드디어 마음을 잡았구나. 정말
잘 생각했다. 정님아, 당장이라도 네
얼굴을 보고 싶다. 네가 이리로 올래?
아니면 내가 그리로 찾아가련?"
"아니야 엄마, 좀 더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 마음이 정리되면 내가
찾아갈게."
"그래. 그래라, 네 목소리가 밝으니까
내가 살맛이 난다."
아쉽긴 했지만 모친은 그 정도로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날밤.
정님은 한 달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이따금씩 아파트 단지내의 슈퍼마켓에만
걸음을 했던 그녀가 단지 밖으로 외출한
것은 아파트에 틀어박힌 후로는
처음이었다.
백화점의 휘황한 네온사인과 카페
골목의 아기자기한 초롱등은 그녀의 눈을
크게 자극했다. 화려하고 밝고 활력에 찬
거리의 풍경들은 아름답고 신선한 충격이
되어 그녀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예전에는 일상적으로 보아 넘겼던
거리의 풍물들이 오늘따라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고, 휘황한 네온사인은 그녀의
허전한 가슴을 채워주기라도 할 듯 밝게
빛났다.
그녀는 압구정동의 밤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약동하는 거리의 활력들을
그녀는 생명알을 줍듯 하나하나 가슴 속에
챙겼다.
그래, 외출하길 정말 잘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진상을 밝혀야 해. 나는 왜 저
사람들처럼 활짝 웃으며 밝고 활기있게
살아갈 수 없게 되었는지, 남편은 왜,
무엇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그 모든 사실들을 만천하에
밝혀야만 떳떳하게 저 사람들 틈에 끼어들
수 있는 거야.
문득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휘황한
네온사인이 그녀의 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겨울 나그네>
그녀는 옥호를 입 속으로 가볍게 뇌어
보았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자신의 처지와
일맥상통하는 뉘앙스를 그 상호는 풍기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어차피 이 추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다가 여한없이 떠나야 하지
않는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끌려들어가듯 겨울 나그네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로 한 걸음 들어서자 온화한
분위기가 성큼 그녀를 맞아들였다.
삭막한 분위기의 상호와는 달리 실내는
아늑한 분위기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우아하고 웅장한 실내장식은 모처럼
그녀에게 안혼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스탠드 한쪽에 자리를 잡은 정님은
하이볼을 한잔 시켜놓고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부터 어쩐다?
정님은 앞으로 그녀가 해 나가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첫번째 할 일은 남편 우춘구의 죽음에
대한 사인을 재규명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그 사건을 맡아 처리했던 제주도경의
뚱뚱한 형사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제주도경의
육중우형사에게 보낼 편지의 머릿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윤정님은 제주도경
강력계의 육중우 형사 앞으로 두툼한
봉투의 등기속달을 발송했다.
그 내용물 속에는 그녀가 당했던 참담한
심정과 소감들, 그녀에게 베풀어준 육
형사의 온정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남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는 그녀의
확신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그 편지를 쓰느라 그녀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했다. 편지지의 공간을 채워
나가는 하나하나의 글씨들에는 그 동안
당했던 그녀의 고통이 한껏 배어 있었다.
그녀는 육 형사가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재수사에 착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육 형사의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들뜬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녀의 그런 기다림은 아랑곳없이 육
형사로부터 답장이 날아온것은 거의
보름이 다 되어서였다.
윤정님 씨.
일찍 답신을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한
양해부터 구해야 할 것 같군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각종 사건서류들과
씨름을 하다보니 마음과는 달리 답신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무엇보다 윤정님 씨가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나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되찾으신
듯한 느낌을 받아 우선 기쁜 마음부터
앞서는군요.
윤정님 씨.
저는 누구보다 윤정님 씨의 입장을
이해하고 윤정님 씨의 편에서 윤정님
씨에게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춘구 씨
사건에 대한 윤정님 씨의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윤정님 씨는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남다른 견해나 시각이 물론
있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저의 입장에서 사건을 살펴볼 때 윤정님
씨께서 주장하신 우춘구 씨의 타살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나 물증은 거의
발견할 수 없으므로 우춘구 씨의 자살은
타당성 있는 결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드리는 바입니다.
아무쪼록 악몽과 같은 과거는 훌훌 떨쳐
버리시고 새로운 삶을 알차게 꾸려
나가시길 간절히 빕니다. 두서없는 난필
줄입니다 총총.
- 제주도에서 -
육중우 드림

윤정님은 편지를 와락 구겨서
Q던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내가
바랐던 건 이게 아닌데. 윤정님은 새롭게
엄습하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투박한 체취가 물씬 풍기는
육중우형사의 답신은 윤정님에게 그야말로
절망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실낱같은
희망, 가느다란 가능성마저 묵살당하고
짓밟힌 그녀는 참담한 심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3. 비극의 서막
우이동의 하얀산장에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한 시경상황실은
현장부근을 순찰중인 패트롤카를 호출하는
한편, 경찰서인 북부경찰서 상황실로
긴급무전을 때렸다.
재수없게도 사건현장과 가장 인접한
곳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던 죄로 현장보존
책임을 떠맡았던 북부경찰서 외근계 5호
패트롤의 김준복 순경은 현장을 목격한 후
재수 없다는 느낌을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우선 사건현장인 하얀산장의 독특한
풍치도 그의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벌거벗은 여자의 변사체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북부경찰서 외근계 소속으로 5호
패트롤카를 담당하고 있는 그에게 오늘
아침에 할당된 임무는 우이동 파출소에서
신병을 확보중인 잡범들을 본서로
이송하는 일이었다.
늘상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제처럼
공휴일이 겹치는 날은 유원지를 관할하는
우이동 파출소의 특성 그대로 파출소
보호실은 취객을 비롯한 잡범들로
넘쳐나게 마련이었고 일손을 거들기 위해
가끔씩 잡범 이송은 그의 몫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경우는 달랐다.
그가 잡범들을 싣고 본서로 막 출발하려는
찰라, 상활실로부터 그에게 새로운 지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부랴부랴 잡범들을 택시에 옮겨 태워
본서로 실어보내고 하얀산장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비교적 원상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우선 사건현장
자체가 사람의 내왕이나 발길이 잦지 않는
한적한 산장의 별채라는 지역적 이유도
있었지만 외부에 흉한 소문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유흥업소의 특성이 잘 맞아
떨어진 듯했다.
사건현장인 별채 10호실은 살인사건의
현장치곤 무척 정갈한 편이었다.
윗목에 차려진 요리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아랫목에
펼쳐진 이부자리 위에는 여인의 벌거벗은
알몸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중년부인의
농염한 채취가 물씬 풍기는 변사체를
살펴보면서 김 순경은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을 함께 느꼈다.
이런 장면을 자주 접해보지 못했고
여자에 대해선 문외한인 그가 언뜻
보기에도 단정한 이목구비와 깨끗한
용모를 지닌 여인은 평범한 여느 아낙과는
다른 청결미랄까,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듯했다. 쯧, 이렇게 정숙해 보이는 여자가
어쩌다가 이렇게... 가늘게 한숨을 내쉬던
그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과연 정숙한
현모양처형의 여인이 이런 은밀한
장소에서 부정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금방 고개를 쳐들며 그의
사고()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부질없는 잡념을 떨치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녀의 가정이 어떻게 파괴될 것인지 하는
문제는 그에게는 소관밖의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가 당장 해야할 일은
본서에서 강력계 수사팀이 도착할 때까지
완벽하게 현장을 확보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30여 분이 경과했을까? 본서에서
조한창 형사반장팀이 들이닥치는가 했더니
뒤이어 시경 강력계의 손삼수반장과
도덕록형사가 현장에 도착했고 얼마후에는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일간지의
사진기자 몇명이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들어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법석을
떨었다.
어쨌든 어수선하고 요란스런
분위기에서도 현장검증은 착착
진행되었다.
현장상황을 카메라에 빠짐없이 챙긴 후
응정밀검색에 들어갔다. 지문
채취를 하기 위해 백분가루를 뿌리는 팀과
머리털 한올이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진공청소기로 방바닥을 훑는 팀, 변사체의
상황을 체크하는 검사팀이 서로
엇갈리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나갔다.
한켠에 서서 우두커니 지켜보던
김순경은 같은 경찰이면서도 그들의
민첩한 행동에 내심 감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나 좀 봅시다."
문득 그를 부르는 손삼수반장의 손짓을
보고 김순경은 급히 손반장을 따라 별실을
나왔다.
"맨 처음에 출동하셨다죠?"
"네."
"그때 현장보존 상태는 어떻던가요?"
"깨끗했습니다. 손댄 흔적도 별로 없는
듯했구요."
"사건을 신고한 사람은 누굽니까?"
"바로 저 사람입니다."
김순경은 주변에 둘러서 있던
종업원중에서 그중 나이가 들어보이는
청년을 가리켰다. 청년이 쭈뼛거리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넨가? 신고한 사람이?"
"네."
청년은 괜스레 면구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다.
"이름은?"
손반장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들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제 이름 말입니까?"
"그래."
청년은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도
그것은 직업상 몸에 밴 버릇인 듯했다.
"이길남입니다."
"여기서 하는 일은?"
"수부를 맡고 있습죠."
"수부라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게
뭐하는 일인가?"
"손님 접대를 맡습니다요. 주로 손님을
방으로 안내하는 일이죠."
"그럼 10호실 손님도 자네가 받았나?"
"그렇습니다."
"그 손님이 온 시간은?"
"어젯밤 여덟시쯤 됐을 겁니다.
여자분이 먼저 와서 음식을 시켜놓고 한참
후에 남자손님이 오셨으니까 그때가
여덟시 반에서 아홉시, 아마 그쯤 될
"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따로따로
이곳에 도착했다 이 말이지?"
"네."
"그럼 남자가 돌아간 시각은?"
"네."
"그 남자는 몇 시쯤 돌아갔느냐구?"
허튼소리는 일체 말라는 듯 손반장이
눈알을 부라리자 길남은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돌아가는걸 못 봤습니다."
"뭐야?"
손반장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정말입니다. 저 혼자 바빠서
자리를 잘 지키지도 못했지만 여기는 정문
쪽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들락거릴 수
있습니다. 또 여기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눈을 달가워하지 않는
서요. 저희들도 일부러 못본척 할
때 많습니다. 하지만 어제 그 손님은 정말
이상했어요. 밤사이에 저희들을 한번도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아침에는
일부러 상을 치우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이 방을 찾아왔다가 사람이 죽은 걸
발견했지 뭡니까요. 어이구 얼마나
놀랬는지..."
길남은 자신을 믿어달라는 듯 손발을
휘저으며 묻지도 않은 말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남자 여기 자주 왔었나?"
"가끔..."
"몇 달에 한 번 정도로..."
"그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 없어?
말해."
"어이구 이런데 출입하는 사람이 어디
자기 신분 밝히고 다닙니까요?"
길남은 어림도 없다는 듯 두 손을 훼훼
내저었다.
"음..."
손반장은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이런 식의 심문이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자네 길남이라고 했던가?"
"네?"
길남은 다시 귀를 쫑긋 새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겠지?"
"그야 물론입죠."
"나중에 자네가 필요하면 다시 부를
테니 그때 좀 도와 주게."
"알겠습니다."
손반장은 더이상의 심문은 생략한 채
산장의 종업원들을 선선히 풀어주고
말았다.
우이동 파출소에 산장의 전라()여인
변사체 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처음엔 수사본부장으로 관할서의
수사과장이 지목되고 전담 수사반에는
북부경찰서의 강력반이 결정되면서
손삼수와 도덕록형사는 이번 사건에서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사체 여인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사태는 급변하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성귀희, 36세, 주소는
성북구 돈암동 1297번지, 가족사항으로는
부군 유재택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었다.
신원확인 과정에서 수사반을 바짝
긴장시킨 것은 성귀희여사의 남편 유재택
씨가 요즘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홍해강철그룹의 계열회사인 홍해무역의
대표라는 직함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성귀희 여사의 친정쪽 가계가 밝혀지면서
수사반은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성귀희여사의 부친
성기용 씨는 정계의 거물 정치인으로
삼척동자도 알만한 그 가족구성 또한
그러했다. 대대로 명문가족으로 불려지고
받들어지는 집안으로 선조 중에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가 있는가 하면 오늘에
이르러선 정치 경제 및 사회 각분야에 그
집안의 후손이 자리잡거나 그 가족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국민적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집안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수사본부장은 대뜸
관할 경찰서장으로 격상되었고
수사지휘권은 시경 강력계에서도 수완가로
알려진 손삼수반장에게 할당되었다.
손삼수는 무거운 책임감을 함께 느꼈다.
애초에는 치정에 얽힌 살인 정도로
가볍게 치부했던 사건이 모종의 정치적
흑막이 연류되거나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건으로 확대해석이 되자
손삼수로선 허리띠를 다시 한번 조여매고
사건해결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개수사로 결정되었던 애초의 방침도
재수정되어 비밀수사로 방향이 전환되었고
철저한 보안을 위한 각종 조치가 즉각
시행되었다.
수사회의에 수사본부장이 잘 참석하지
않는 관례를 깨뜨리고 수사본부장인
관할서장이 직접 수사회의를 주재하며
각별한 당부를 하는 것도 빠드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어 그에게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그는
사건의 신속한 해결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였다.
그런 여러 가지 압력 요인은 손삼수를
긴장 속으로 몰아 넣기에 족했다. 이번
사건처럼 여러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 사건을 맡은 일은 처음이었다.
따라서 그에겐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가슴
한자락에서 뜨거운 투지가 함께 샘솟고
있었다.
변사체의 부검도 신속히 이루어졌다.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부검은 관내
K대학병원의 법의학과장인 문창주 박사가
직접 집도를 맡았다.
손삼수는 부검영장을 소지한 송휘영
검사와 함께 부검현장에 배석하는 열성을
보였다.
발가벗은 채 수술대 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여체는 36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혈액의
침하현상으로 그렇잖아도 희디 흰피부가
뽀애게 비쳐졌고 눈부신 무영등 불빛에
반사되어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비쳤다.
사체특유의 냉랭한 아름다움이랄까
독특한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문박사는
냉정한 손놀림으로 집도를 시작했다.
문박사가 신체의 외부적 특징을
구술하고 조수인 듯한 사내는 받아적는
가운데 외양검사는 일단락 되었다. 우선
사체의 외양에서는 사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메스를 대기전에 문박사는
참빗으로 사체의 음모를 정성껏 빗겼다.
그리고 참빗에 묻어나오는 몇 가닥의
음모를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 작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혹시나 변사체의
음모에 남아있을지 모를 남자의 음모를
가려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사체에 본격적으로 메스가 가해지면서
속이 울렁거려 견딜수 없게 된 손삼수는
수술실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피비린내의 역겨움도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신체의 아름다움이
메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현상이 그의
마음을 못내 아프게 했다.
손삼수가 수술실 복도를 서성거리며
초조하게 담배연기를 빨아대는 동안에도
부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근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부검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문박사가 직접 집도한
부검인데도 불구하고 부검결과는 손삼수를
지극히 실망시키고 말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인을 찾아낼 수
없다니요?"
"이런 경우가 가끔은 있습니다. 이
부인의 경우는 뇌출혈이 아닐까 싶어서
뇌혈관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동맥류를
발견할 수 없었고 뇌출혈 소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질식에 의한 액사도 아니고
외부의 충격이나 약물 중독의 흔적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죽었다는 겁니까?"
"글쎄, 그게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부검을 통해서는 사인이 될 만한 병변이나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있다면
급사()의 일반적 소견과
인두부()의 수종()과 울혈이
심해져 있다는 소견뿐이에요."
"결국 죽은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이거로군요?"
"그래요. 죽은 부인은 건강체질인
듯하고 지병도 없는 듯해요. 어쨌든
부인의 가족이나 생활환경을 통해서
사망원인을 다시 찾아보아야겠어요."
너무나 엉뚱한 부검결과에 손삼수는
낙심을 하고 말았다. 단지 소득이 있다면
정확한 사망 시각이 밝혀진 정도였다.
성귀희여사가 사망한 시각은 어젯밤
아홉시에서 열시 사이. 즉 1989년 4월
23일 밤 아홉시경, 사인은 알아낼 수가
없었고, 혈액형 AB형의 사내와 정사를
마친 후 곧장 사망했다는 결론만 얻어낼
수 있었다.
성여사의 질에서 채취한 정액에서
AB형의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과
성여사의 음모에서 수집한 두세 가닥의
다른 음모에서도 역시 AB형의 혈액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가
싱크대에 먼저 올라가는 세상이라지만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귀희 그 애 같은
새침데기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깔 줄은
정말 몰랐네."
성귀희여사와 가장 절친했다는
길화정여인은 한마디로 펄쩍 뛰었다.
혹시나 한가닥의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한 기대를 걸고
있던 손삼수반장은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배심감 느껴요. 너무했어 그 애두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였을까?
허긴 내가 둔재지. 그 애가 그렇게
남자교재 하는걸 눈치조차 못채고
있었으니."
길화정여인은 오히려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이틀건너 하루씩 거의 매일
얼굴을 맛댈 정도로 허물이 없는
사이였으면서도 그녀의 남자관계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인간적인 비애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이런 식이다. 손삼수 역시
비애를 느꼈다. 수사는 자칫 초기
단계에서부터 미궁으로 빠져들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더럭 치밀었다.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손삼수는 난감해지는
마음을 힘겹게 추스렸다. 그는 어제 저녁
수사본부로 그를 찾아왔던 방문객을 문득
떠올렸다.
성귀희여사의 부친이자 6선 관록의
국회의원 성기용의원 보좌관이란 길다란
직책이 붙은 명함을 내민 사내는
수사진척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사내는 비교적 말수가 적은편이었다.
그러나 묵직하면서도 조용히 툭툭
뱉어내는 어투와 날카로눈 눈매는
시종일관 손삼수를 압도했다. 사내는
말했다. 어른께서는 이 사건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신다는 걸.
그리고 딸의 불행에 정치적 음모나 흑막이
개입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는
점을, 또한 신속하고 조용한 사태해결을
희망한다는 사족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내가 물러간 후 어깨가 짓눌린 듯한
무거운 압박감에선 벗어났으나 그것은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손삼수는 여전히
무거운 가슴을 안은 채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우선 성기용의원이 요망한다는 신속하고
조용한 사태해결은 도무지 요원할 듯
싶었다.
첫째 성귀희여사의 사인 자체가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고 성귀희여사의
6생활자체도 베일에 철저하게 가려 있었다.
주변에서 말하는 성귀희여사는 불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숙하고 깔끔한
여자였다. 그녀야말로 남편을 하늘같이
섬기고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온통
헌신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진술했다.
"어머머, 흉칙해라, 남자 전화요? 그런
거 없어요. 우리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데요?"
이름이 춘자라는 성귀희여사댁의 가정부
역시 가당치도 않다는 듯 펄쩍 뛰었다.
손삼수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절로
배어나왔다.
그녀는 정말 철저하게 완벽한 철옹성
같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놓았고 외부의
어떤 사람도 그녀의 내면세계에는
한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미모에다 지적이며 현모양처형의 완전한
여자. 그리고 가계()의 혈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사회사업가. 여성사회단체의
중견간부직을 맡아 육영사업등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며 뚜럿한 업적을 남긴 여인.
한마디로 그녀는 팔방미인이면서 어디에도
외간남자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어간 현장에는 남자의
체취가 엄연히 남아있었지 않은가. 그것도
뚜렷한 불륜의 흔적이.
수사본부의 숙직실 소파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상념에 잠겨있던 그의 시야에
도덕록형사가 불쑥 들어왔다. 도형사는
수확도 없는 방증수집을 하느라
성귀희여사와 친분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있었다 암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도형사의 기색을 힐끔
살펴보고 여전히 허탕만 치고 다녔다는 걸
지레짐작하면서 그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아, 도형사. 혹시 김석기로부터 연락
없었나?"
"네, 김기자님 요즘 바쁜 모양이죠?"
"음, 무슨 특집기산가 뭔가 기획팀장을
맡았다는 소리는 얼핏 들었는데 그후론
도통 연락이 없어."
그러고 보니 김석기의 얼굴을 못본 게
달포는 훨씬 넘은 듯했다. 김석기는
아주일보의 사회부기자로 그와는 막역한
지기였다.
"제가 전화를 한 번 넣어볼까요?"
도형사가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냥 둬."
서둘러 담배 한대를 붙여물며 손삼수는
씁쓰레한 미소를 흘렸다. 오죽 급했으면
그 친구 생각이 났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처량한 느낌이 들어 도형사를
제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석기의 명쾌한
사건해석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김석기는 지금까지 그가 부닥쳤던 여러
가지 사건에서 독특한 시각으로 사건을
관찰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참 반장님!"
문득 생각이 난 듯 도형사가 그를 빤히
"공항에 안 나가십니까?"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손삼수는
탄성을 발하며 서둘러 숙직실을
뛰쳐나갔다. 도형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남철희박사는 의자에 앉은 채 입을 크게
벌렸다. 반사경으로 구강()의 상태를
살펴보던 홍성국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가라 앉았구먼."
"정확한 병명이 뭔가?"
"급성 편도선염이야. 혹시 단세포성
안지나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쪽은 아니야. 이제 더 이상 치료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럼 다 나은건가?"
"그래, 하지만 오늘까지는 주사를
맞아야 돼."
"나 원, 내가 주치의를 잘못 골랐군. 난
하루 이틀이면 거뜬해질 줄 알았더니
일주일이 넘도록 사람을 붙들고 늘어져서
골탕을 먹여대니."
"이 사람아!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안정이나 취하도록 해. 될 수 있는 대로
술도 삼가고, 과로는 절대 금물이야!
자칫하면 심장판막증이나 중이염 같은
합병증이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어이쿠, 갈수록 태산일세. 이젠
협박까지?"
"다 자넬 위해서야. 주사실로 가세."
홍박사는 재빠르게 긁어내던 처방전을
수간호원에게 건네 주었다.
"나중에 보세."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홍박사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아참, 언제 골프 한 번 안 치려나?"
"옛끼 이사람아.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몸조리나 하라며?"
"하하... 부킹하면 연락함세."
간호원을 따라 주사실로 들어서며
남박사는 씁스레한 미소를 흘렸다.
사흘전의 우이동 사건이후 오늘 이
시간까지 그는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마다 가위에 눌렸는가하면
가슴은 바늘에라도 찔린 듯 아려왔다.
"자리에 누우세요. 박사님, 소매
걷으시구요."
퍼뜩 정신을 차린 남박사는 간호원이
가리키는 간이 침대에 몸을 눕히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따금한 감촉과 함께 주사바늘이 팔뚝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페니실린액이 혈관을
통하여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가 후끈 더위지는 듯한 현기증에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것은 매우 불쾌한
감각이었다.
한참만에 어지럼증이 가셔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처방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한걸음 나서자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눈 속으로 따갑게 파고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계단을 내려온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누굴까?
사건 당일밤에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정신을 추스릴 틈도 없었으나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곰곰 생각해보니 백합이란
별명을 가진 사내의 정체가 못내 궁금한
그였다.
자진해서 뒤처리를 맡겠다던 사내. 그가
왜 자신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가 장담했던 만큼 뒤처리는 완벽하게
이루어진 듯했다.
다음날 출근하는 길로 곧장 자료실로
들어가 배달 되어온 조간신문을 모두 뒤져
보았으나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한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석간신문 역시 매한가지였고 다음 날도
그랬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야 그는
사회면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이동 산장에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여자의 신원이 돈암동
oo번지의 성귀자(35 가명) 여인임을
밝혀내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부검결과
일반적인 급사의 소견외에 뚜렷한 사인을
밝혀내지 못해 수사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은 산장 종업원의 진술을 통해
성여인이 40대중반의 사내와 투숙했음을
밝혀내고 함께 툭숙했던 사내를 찾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으나 종업원이
말하는 사내의 인상착의가 뚜렷하지 못해
더욱 애로를 겪는 등 수사는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신문기사는 대충 이런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사내의 뒤처리는 완벽한
모양이다. 그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자락에서는 도무지 풀릴 길이 없는
의문이 뭉클쿵클 피어나고 있었다.
백합이라니, 그런 별명의 사내를 그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왠지 백합이라는
별명이 풍기는 뉘앙스가 그는 싫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어쩐지
범죄의 냄새가 피어나는 듯하여 더욱
싫었다. 더욱이 자신은 그를 까맣게
모르는데 그쪽에선 자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사태는
벌어졌고 모든 것은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 당시에 그를 직접 만나서 사태를
해결하거나 아예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것은 은근히 마음에 걸렸으나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지금이라도 자수를 해 버릴까? 그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때가 늦은 듯했다.
비록 성여사의 돌연한 죽음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의는 아니였다
하더라도 뺑소니를 쳤다는 비굴함이 그의
양심에 이미 큰 생채기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 역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방조라는 올가미를 씌워올 것은
자명한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기왕 벌어진 일이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견딜 때까지 견뎌보는 거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이동 파출소앞에 세워 둔 지프의
운전석에 뛰어오른 손삼수는 급히 시동을
걸었다. 도형사가 옆자리에 뛰어오른 후
지프는 급하게 달려 나갔다.
오늘은 무역상담차 미주지역을
출장중이던 성귀희여사의 남편
유재택사장이 아내의 부음을 접하고
일정을 단축하여 급거 귀국하는 날이다.
손삼수는 공항에서 그와 도킹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 두었다.
그들이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에
당도했을 대 전광판을 통하여 노스웨스트
961편의 도착을 알리는 빨간불이
깜박거리며 작동하고 있었다.
손삼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객기가 지금 막 공항램프에 도착했다면
시간여유는 넉넉한 편이었다.
내국인 전용 입국케이트 양쪽에는 벌써
마중나온 출영객들로 인해 발 디딜틈 없이
인파로 빽빽이 메워져 있었다. 인파에
떠밀려 출영객들의 꽁무니에 선 손삼수는
느긋한 마음으로 입국자의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한두 사람의 여객들이 화물을 가득 실은
캐리(carry)카를 밀며 인파가 늘어 선
통로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도형사, 유사장 사진 준비해 왔나?"
"여기 있습니다."
도형사가 명함판 사진을 한 장
건네주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유재택사장은 한마디로 호인풍의
미남자였다.
"이건 정말 뜻밖인데?"
손삼수는 사진을 뚫어져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러세요?"
"대단한 미남잔데 이 남자?"
"원 반장님도. 잘생긴 사람 처음
보셨습니까?"
"이렇게 잘 생기고 돈많은 남편을 둔
여자가 바람을 피우다니 이상하잖은가?"
"하하... 그럼 그 상대는 훨씬 더 잘
생긴 남자인 모양이죠."
"그렇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손삼수는 그 말뜻을 곰곰 되씹어
보았다. 유재택사장보다 더욱 잘 생기고
멋진 남자. 성귀희여사 같은 완벽
주의자가 빠져들 수 있는 남자. 어쩌면
상대는 상류층의 대단한 인텔리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손삼수는 강하게
품었다.
"홍해무역쪽은 어때?"
"그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던데요."
0 "외견상 말이지?"
"외견상만이 아니라 꽤 실속있는 회사
같던데요. 거 왜 모기업인 홍해철강이 몇
년전에 자기 덩치보다 더 큰 회사를 흡수
합병해서 재계에 화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힘있는 기업에 무슨
문제가 있을리 없겠죠."
손삼수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때
도형사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반장님, 저기!"
"아!"
과연 사진 속의 훤칠하게 잘생긴 인물이
통로를 지나 이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수트케이스 하나만 든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그 뒤켠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커다란
여행가방을 들고 뒤따라 나왔다.
도형사가 잽싸게 그의 걸음을 가로막고
나섰다.
"유재택사장님이시죠?"
"그렇소만."
도형사는 재빠르게 신분증을 비쳐
보였다.
"미리 전화연락 드렸습니다만 시경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반장님이십니다."
도형사가 손반장을 소개하자 유사장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선선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별말씀을. 귀국하시는 데까지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은 시간은 뺏지
않겠습니다."
"자, 가십시다."
그들은 나란히 공항청사를 빠져나왔다.
"어떻습니까. 저희들의 대화내용을
아랫사람들이 듣는 게 거북하실 텐데
저희들 차를 타시는게."
"좋습니다."
도형사가 지프의 운전대를 맡고
뒷자리에 유사장과 손반장이 나란히
않았다. 그리고 유사장의 밴츠 승용차는
천천히 지프를 뒤따랐다.
"먼저 약속한 대로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만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죠?"
"말씀 하십시오."
손반장은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도형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지프를
몰았다. 유사장의 입에서 한마디의
진술이라도 더 끌어내려면 최대한의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외람된 질문 같습니다. 두 분의 부부
사이는 어땠습니까?"
유사장은 불쾌한 듯 손반장을 힐끔
보고는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문제의 발단이 우리 부부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레짐작하시는
모양인데 그러건 없습니다. 우리
부부사이에는 적어도..."
"오해는 마십시오. 부인을
사랑하셨습니까?"
"네."
"부인도 그랬다고 확신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유사장의 목소리는 침통하게 가라앉고
0있었다.
"부인께선 많은 사회활동을 하고
계셨는데요. 한 번도 이상하다거나 달리
생각해 본적은 없으십니까?"
"우리는 서로를 믿고 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부부라면
더이상 부부라는 굴레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손반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사장은
침통한 낯빛을 지은 채 묵묵히 차창
밖으로 스치는 거리의 정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혹시 부인께 지병같은 건 없었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사장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부인의 죽음에
급사의 소견은 나와 있는데 뚜렷한 이유를
밝힐 수 없으니 말예요."
유사장이 주춤 눈빛을 모았다.
"혹시 그런 것도 병이라고 친다면..."
"그럼?"
"집사람은 페니실린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특이체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치의의 소견서를 늘상 지니고
다녔었는데요."
"예?"
손반장의 입에서 경악과도 같은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형사! 차를 K대학병원으로 돌려!"
잠시후 손삼수와 도형사는 K대학 병원
문창주 법의학박사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손삼수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문박사는 부검서류를 다시 꺼내어
재검토를 시작했다. 탁자의 한쪽에는
유사장의 집에서 찾아낸 "이사람은
페니실린에 과민성 체질이니 페니실린은
절대 투여하지 말라"는 경고성의 주치의
소견서가 놓여있었다.
문박사는 이윽고 서류를 덮고 손박사을
향하여 돌아 앉았다.
"맞습니다. 부인의 사인에서 페니실린
쇼크상태와 유사한 소견이 나타납니다.
부인의 사인은 페니실린 쇼크사로 보아도
틀림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인과 관계를 했던 남자가 아마
페니실린 주사를 맞은 채 부인과 관계를
했던 모양입니다. 즉 부인이 직접
페니실린을 투여받지 않았어도 남자의
몸속에 흡수되었던 페니실린이 부인과
동침시에 정액을 통하여 부인의 질내에
그것이 그 부인에게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을
겁니다."
손삼수와 도형사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성귀희여사의 사인은 밝혀졌으나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놀란 듯
그들의 입은 도무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연구실로 돌아온 남철희박사는
나른해지는 몸을 소파에 묻었다. 당장
일손이 집힐 것 같지도 않아 소파의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형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바로 그때.
따르르르...
일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며 상념에
그를 일깨웠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남박사님이십니까?"
수화기에서 울려 나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만..."
"미스터 백이니다. 절 기억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뉘신지?"
남박사는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느라 양미간을 오무렸다.
"하하... 벌써 잊으셨습니까?
백합이라는 별명을 말입니다."
"아, 백선생!"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등을 활처럼 휘며 수화기에 바짝
달라붙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 한 번
만납시다."
"하하... 절 만나봐야 즐거운 일도
없으실 텐데요."
"아니오. 당신을 만나고 싶소. 지금
당장."
그는 다급하게 수화기에 속삭였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박사님, 때가
되면 박사님께서 원치 않으시더라도
나타날 겁니다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여, 여보시오..."
다급한 남박사와는 달리 사내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한껏 배어 있었다.
"하하... 박사님 심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실 땐
말씀드렸습니다만 전 박사님
편이라는건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그 정도만 알고
계십시오."
"답답해서 그럽니다. 제발..."
"그러실 줄 알고 전화 드린 겁니다.
경찰 수사의 진척상황도 알려 드릴겸
해서요."
"아..."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배어나왔다.
"성여사의 사인이 밝혀졌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성여사는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했습니다."
"그, 그럴 리가..."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이것은 급거 귀국한 성여사의 남편
유사장으로부터 확인된 사실입니다.
성여사는 원래 페니실린에 과민한
특이체질이었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오. 금시초문이오. 성여사로부터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남박사님께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당치도 않은
얘기요. 그날 성여사는 페니실린주사를
맞은 사실이 없으니까."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이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남편을 통해서 이
사람은 페니실린에 과민성 체질이니 절대
페니실린을 투여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긴
퓨소견서도 나왔고 부검을 집도했던
문창주박사도 페니실린 쇼크사라는
소견에 동조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남박사님께선 최근에 병원에 다닌 일이
없습니까?"
"그야... 있소만..."
"무슨 병으로 치료를 받으셨습니까?"
"편도선염이라고 하더군요."
"주사도 맞았겠죠?"
"그, 그래요."
"그게 무슨 주삽니까?"
"페 페니실린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남박사님! 박사님 몸
속에 흡수되었던 페니실린이 성여사와
동침시에 정액을 통하여 성여사의 질내에
사정되어 성여사에게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겁니다."
"그럴 수가! 그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설이요! 터무니없는 소리를..."
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너무나 뜻밖의
결론에 흥분을 참을 길이 없는 듯
수화기를 움겨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백합은 차분하게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믿으셔야 합니다, 박사님. 페니실린에
과민한 특이체질 중에는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일으키는 사례가 왕왕 있다고
하니까요."
얼이 빠져버린 듯 그는 수화기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쨌든 박사님은 안전지대에 계십니다.
그 점을 확인시켜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럼 차후에 다시
연락드리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수화기 저쪽에서
백합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남박사는 한참만에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철희박사의 연구소가 빤히 바라보이는
길건너편에 세워둔 승용차안에서 백합은
카폰을 내려놓으며 힐끔 연구소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냉소를 잔뜩 머금은
채 연구소를 올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엑셀러레이터의 페달을 밟았다.


4. 빨간 립스틱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김석기는
우선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매우 낯익은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섣불리 인사를
건넬 수는 없었다. 누굴까? 분명 안면은
있는데... 그러나 도통 기억이 떠올라
주지를 않았다.
아주일보사() 사회부 기자인
김석기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매우 폭넓게 시회 활동을 하는 편이었고
따라서 발도 넓은 편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대인관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 속에
새겨둘 수 없는 형편이긴 했다.
그의 수첩과 호주머니 그리고
책상서랍속에 명함들이 속절없이 쌓여도
속수무책의 처지이긴 했지만 오늘처럼
기억이 꽉 막히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까? 기억이 날듯날듯
하면서도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둔한 머리를 새삼
한탄했다.
바로 그때,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로 빨려들었다. 순간
김석기는 막 출발하려는 버스의 난간을
붙들고 황급히 버스의 승강구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그는 이해할 수없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여자를 뒤따라 버스에
탔을까? 스스로 자문자답을 해 보아도
분명한 해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여자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무언가
한마디 말이라도 나누어 봐야겠다는
절박한 본능이 그에게 우발적인 행동을
일으키게 했는지도 몰랐다.
버스 안은 승객들로 빽빽히 들어차
있었고 그녀는 통로 중간에 서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김석기는 한켠에 선 채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았다. 순간 그는 와락 느껴지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다. 그것은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니힐한 분위기, 바로 그것이었다. 타인의
범접을 꺼리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을 듯한 허무의 체취를 그녀를 가슴
가득 품고 있는 듯했다.
버스가 서너 정거장이나 지나쳤을까?
고층아파트가 밀접한 강남의 번화한
구역에서 그녀는 버스를 내렸고 김석기도
덩달아 따라 내렸다. 그는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고 싶었으나 도무지 구실이 없어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으로 묵묵히
그녀의 뒤만 따라 걸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병신같은 짓을
할까? 자문자답을 해보아도 숫기가 벌떡
샘솟지 않는데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남자를 주눅 들게 하는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어쨋든 말은 붙여 봐야겠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만난 일이 있는지 궁금증은
풀어봐야겠다. 그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걸음을 빨리 했을 때였다.
그녀가 주택가의 한산한 골목길을 꺾어
돌았고 뒤이어 김석기가 골목으로 뛰어
드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터트렸고
김석기 역시 경악의 외침을 내지르고
말았다.
불과 5,6미터쯤 되었을까?
차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갈만한 좁은
골목에서 육중한 승용차가 그들을 덮칠 듯
괴물처럼 달려오고 있질 않은가.
"위험해!"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그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은 골목 옆에
위치한 선술집의 유리문을 깨트리며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어?"
술을 먹다말고 날벼락을 당한 주정꾼
두엇이 뒤늦게 골목 밖으로 후닥닥
뛰쳐나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으나
문제의 뺑소니차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석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깨어진
유리파편에 의해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없이 우선 나동그라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것 보시오. 빨리 병원부터 가
봐야겠수다!"
난감해서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술꾼의
충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안달하는 술집여주인에게 명함 한 장을
남겨 놓은 후 그녀를 들쳐업고 병원을
찾아 뛰어나갔다.
2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김석기와
윤정님은 압구정동의 조용한 레스토랑에
마주앉아 있었다.
잔잔하게 실내를 메우고 있는 음악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그들은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정님의 약간 부은 눈자위에는 아직도
울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병원에서
서럽게 울어대는 정님의 참담한 심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는
연민의 정으로 그녀의 서러움에 동참해
주었다. 그녀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실컷 울고 난
지금의 그녀는 모든걸 초월한 듯한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먼저 입을
"죄송합니다.처음 뵙는 분 앞에서 너무
추태를 보인것 같아서요...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는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 어떻게
됐을런지."
"모든건 사필귀정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별일이야 없었겠지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윤정님
씨."
순간 정님은 석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절 알고 계세요?"
"네."
"?"
"제 직업이 신문기잡니다. 윤정님 씨가
제주도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저도
현장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윤정님 씨를 만나 직접 취재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었죠."
""
정님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제서야 눈
앞에 마주 앉은 사내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을 듯했다. 그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오해는 마십시오. 그때는 다른 사건의
취재를 위해 제주도에서 체류하고 있던
중에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했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취재를 해보려고
노력했던 거구요. 그러나 지금은 윤정님
씨를 결코 취재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절 어떻게 보시든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선생님을 탓하지는 않아요."
"그때의 아픈 상처를 많이 회복하신
듯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
"그런데 또 오늘과 같은 일을
당하셨으니...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냥 한때의 불운이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정님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의 그녀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김선생님께선 오늘 벌어진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김석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야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어난 사건은 계획적으로 꾸며진
음모였어요. 바로 제 남편을 죽인자들이
절 협박하기 위해서 꾸민 음모, 바로
그거예요."
너무나 엉뚱한 소리에 김석기는 눈을
꿈벅거렸다. 순간 그녀의 정신이 올바른지
더럭 의심이 날 지경이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이건
사실이에요. 엄연한."
"가만, 그렇다면 윤정님 씨의 남편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겁니까?"
"네."
"아니, 경찰 발표로는 자살로
밝혀졌다던데..."
"타살이었습니다."
"그런 증거라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어떻게요?"
"그동안 제게 끊임없이 협박을 해온
자들이 있었어요. 바로 오늘처럼."
말을 맺고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고, 반면 김석기는
허둥거리며 엽차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잠깐만요. 혹시... 그 동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
"제게 자세한 말씀을 좀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취재를 요청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단지 사태의 전말을 알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제가 정님 씨에게 힘이 되어 드리고
싶어 섭니다."
"말씀드리죠. 정식으로 취재를 하신대도
좋고 제 푸념이나 하소연이라 생각하셔도
좋아요. 지금의 저는 더이상 꺼릴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석기는 한모금의 엽차로 목을 축였다.
몸 속에서 잔잔하게 피어나온 흥분이
전신으로 번지면서 그를 긴장 속으로 몰아
넣었고 그의 목을 바싹 태우는 듯했다.
다시금 엽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인
그는 기대에 가득한 시선으로 정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육중우형사의 답장을 받은 다음 날,
윤정님은 급거 제주도로 날아갔다.
육형사가 내린 수사결론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그녀였다. 무엇보다
선입견으로 수사에 의한 육형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했는지 그녀는 조목조목
따지고 싶었다.
정님은 제주도 경찰국이 마주보이는
건물에 위치한 커피숍 비바리에서 전화로
육형사를 불러내었다. 육형사는 어지간히
놀란 듯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그는 이마에 송글송글 배오나온 땀을
연신 손으로 훔치며 그 큰 눈을
껌벅거렸다.
"제 편지를 못 받아 보셨습니까?"
"봤어요."
"그럼?"
"저는 그 결론에 절대 동의할 수
없어요."
육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윤정님 씨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마치 윤정님을 설득하려는 듯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다 끝난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이 아닙니다. 잘못된 부분을 옳게
바로 잡자는 뜻일 뿐이에요."
"제가 수사를 잘못했다고 질책하시는
모양인데 제 수사결론이 잘못되었다는
w반증이나 물증이라도 있습니까?"
"육형사님께선 그이가 자살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물론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검결과나 당시의 정황을 유추해 보건대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심증적인
상황이나 여건은 충분했다고 인정됩니다."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아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군요. 제가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그이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집단폭행을 충격 때문에
춘구 씨가 자살을 결심했다고 하셨지만 전
바로 그 점을 납득할 없는 거예요. 우선
그날밤 그이가 호텔 객실로 돌아왔다는
기억이 제겐 없어요. 그이는 방을 나갈때
객실룸 키를 방에 두고 나갔기 때문에
그이 혼자서는 방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형편이에요. 제가 문을 따주지 않는 이상
말예요. 또 설옥 제가 피해를 당한 현장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게 자살할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쇼크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저에 대한
사랑이 식거나 멀어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야할
이유는 안된다고 봐요. 그렇게 생각치
않으세요?"
정님은 육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탁자 아래로 눈길을 내리깐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 육형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윤정님 씨의 반론에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이번
사건의 진실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윤정님 씨가 절 비난하신다 하더라도 제
입장만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굳이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은 윤정님 씨나 저나 또 그 누구라도
극명하게 밝힐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만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윤정님은 천천히, 그러나 똑바로
육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선
형언할 길이 없는 안타까운 체념이 함께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육형사에 대한 분노와 질책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아무리 항의하고 떼를 쓴다
하더라도 육형사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커피숍의 문을 밀고 한걸음 나서는 순간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그녀의 동공을
파고 들었다. 그녀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뒤따라 나서던
육형사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괜찮아요."
육형사의 손길을 뿌리친 정님은 급히
걸음을 옮겼다. 당장 가야 할 행선지나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이러한 결과를 뻔히
예견했으면서도 육형사를 찾아 온
스스로에 대한 반감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성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마침 손님을 기다리는 빈 택시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빨려들듯 택시에
올랐고 택시는 힘차게 달려나갔다.
"어디로 모실까요!"
"중문단지!"
그녀의 입에선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어쩐다? 꿈에 보일까 두려웠던 그
악몽의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릴까? 아니야, 지금의 내 처지에 뭐가
더이상 두려울까. 그곳이 악마의
소굴이라하더라도 하등 꺼릴 게 없어.
그녀는 마음을 바짝 다잡았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정님은
하야비치호텔의 뒤쪽에 면해 있는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두어달 전, 남편과 함께
이 백사장을 거닐 때, 그때는 행복의
단꿈에 젖어 있었는데, 문득 과거와
현재의 엄청나게 변한 처지를 떠올리자
착잡한 심경이 그녀의 가슴을 온통 적시는
듯했다.
그녀는 호텔 커피숍으로 발길을 돌렸다.
호텔은 여전히 번창했고 번잡했다. 두어
달 전의 끔찍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아무도 가지지 않은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정님은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고 마음을 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온 정님은 며칠간 방
안에 틀어박힌 채 탄원서 작성에
열중했다. 그녀는 탄원서에서 남편
우춘구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며 그
사건은 엄연한 계획적 타살이었음을
구구절절이 주지시켰다. 그리고 경찰의
수사결과에 대한 반론을 조목조목
예시하며 남편의 사인을 재규명해 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탄원서를 정부종합민원실을
비롯하여 내무부장관, 치안본부공보실,
그리고 여.야 각당의 국회의원
원내총무실, 제주도청 민원봉사실,
제주도경 민원봉사실, 서귀포경찰서 등
관계요로의 관공서로 빠짐없이 발성했다.
탄원서를 발송한 후 정님은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정부의 어느
부서든 이번 만큼은 그녀의 하소연을
이해하고 그녀의 편이 되어 남편의 죽음을
재조명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모처럼 화려한
옷치장으로 맵시를 내어 보고 머리모양도
새롭게 다듬어 보았다.
아직 친구들을 찾아다닐 용기는 생기지
않았지만 혼자서 인파에 뒤섞여 도심을
쏘다니는 것도 그녀가 남몰래 느끼는
새로이 터득한 재미 중의 하나였다.
탄원서를 발송했던 반응이 나타난 것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와서
혼자서 영화 두 편을 보고 이곳 저곳
쏘다니며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집에
뭬틸것은 저녁 일곱 시경이었다.
전신에 묻어 있는 피로를 털어버리기
위해 막 샤워를 시작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전화벨 소리를
묵살해 버리려던 그녀는 마지못해 욕실을
빠져나왔다. 타월로 몸에 몬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거실로 나온 그녀는 흥겨운
기분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이 개같은 년!"
"어머..."
"너 요즘 도대체 무슨 짓하고 다니는
거야?"
수화기 저쪽에서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어댔다.
정님은 너무 놀랍고 어이가 없어서 입이
1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것 보세요, 전화를 잘못 거신
모양인데... 이게 무슨 실례예요?"
"실례? 야! 너, 윤정님이 맞지?"
"네?"
순간 정님은 등줄기를 스치는 차가운
기류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인생이 불쌍해서 죽을 목숨을
살려줬더니, 뭐라구? 수사를 다시 해
달라고 탄원서를 써? 이 썅년아, 그게 네
마음대로 호락호락 이루어질 것 같아?"
"다, 당신은..."
"흐흐... 이제 우리가 누군지 알겠어?
다시 한번 기회를 줄테니까 귀를 씻고
똑똑히 잘 들어 앞으로는 죽은 듯이
집구석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게 좋아,
만약 한 번만 더 수틀린 짓을 하면 그땐
정말 네 남편 우춘구 옆으로 보내 버릴
테니까, 알았나?"
""
"우리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야.
네가 우리를 우습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흐흐... 너 하나 처치하는 건 식은죽
먹기보다 쉽다는 걸 보여주지, 흐흐..."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얼이 온통
빠져버린 듯 정님은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만에야 정님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
정님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것도 그녀가 탄원한
진정내용에 대한 첫번째 반응이 협박으로
되돌아 오다니, 그녀는 마치 커다란
절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에 가슴마저
답답해졌다.
이제 어떡한다? 그녀의 진로는
첫걸음부터 커다란 벽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은
자신이 탄원서를 띄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도 불과 사흘만에. 그녀는
탄원서를 발송한 대상을 곰곰이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탄원서를 발송한 곳이야말로
그녀가 최종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던 국가 중요기관들이 아닌가. 혹시
그 중에 놈들의 프락치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육중우형사가? 그러나 그녀는 육형사에
대한 신뢰성마저 저버릴 수는 없을성
싶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녀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정체불명의 적은 베일 속에 숨어
있는데 자신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더욱이 자신을 협박하는 무리들이
남편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확인시켜주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그녀가 얻은 소득 중의
하나였다.
다음날부터 정님은 더욱 부지런히
뛰었다. 탄원서를 발송한 창구로 직접
찾아 다니며 작금의 그녀가 당하고 있는
협박의 내용을 추가하여 그녀가 작성한
탄원서의 신뢰회복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시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의
탄원서에 대한 관공서의 책임있는 답변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몇
번씩 확인해보아도 사실여부를
확인중이라느니 진정내용의 진실성을
심사중이라거나 하부기관으로 처리를
명했다는 정도의 답변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확실할 반응이 나타난 것은 다시 며칠이
지난 후였다.
외출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따고 한걸음
들어서던 순간 그녀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집을 나서기 전에 깨끗이 닦고
정돈해 두었던 집안 내부가 온통
들쑤셔놓아 뒤죽박죽이 되어 있지를
않는가. 게다가 화장대 거울에 빨간
립스틱으로 흉측한 글 씨가 휘갈겨져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마치 목덜미에 시퍼런 칼날이 와 닿은
듯한 섬뜩한 느낌에 정님은 오금이 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앞으로 무너졌다.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오고 오그라들면서 도무지 주체할
길없는 슬픔이 격랑처럼 그녀에게 퍼부어
졌던 것이다.
정님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난 김석기
역시 한동안 할말을 잃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진한
아픔으로 전달되어와 그는 위로의 말도
찾기 어려운 듯 했다.
"그랬었군요. 이제야 좀 이해가
됩니다만..."
석기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
"이대로 포기를 하실 건가요?"
"아뇨."
"그럼? 이번과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전 더이상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정님은 결연한 어조로 말을 뱉어
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도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힘을
내세요. 윤정님 씨. 이 세상은 윤정님 씨
혼자만을 고립무원 속에 남겨둘 만큼
각박하진 않을 테니까요. 저도
윳동윱 제 능력껏,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거리낌없이 도와드리죠."
"고맙습니다."
정님은 모처럼 피어오른 미소를 한입
가득 물고선 석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5. 국회의원 성기용
따르르르...
자명종 소리에 얼핏 잠을 깬 김석기는
손을 뻗어 탁상시계의 알람을 눌러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해 앞으로 엎어진 채 수마() 속으로
곤하게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눈자위를 간지럽히는
햇살에 정신이 돌아온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창 밖은 벌써 환하게 밝아 있었다. 급히
몸을 일으키던 그는 뒷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젯밤의 취기가
여지껏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자리끼를 찾아든 그는
냉수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통해 찬기운이 온몸으로 흘러내려가자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듯했다.
가만, 내가 어떻게 내 방까지
찾아왔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정말 어지간히도
마셔댔어. 그러니까 압구정동의
레스토랑에서 윤정님을 만난 후
그녀로부터 파란만장항 사연을 듣고 함께
가슴아파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리고 1차 2차하면서 세 군데의 카페를
전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쉽게도
거기서부터 필름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아도 더 이상의 기억은
떠올라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가 어떻게 하숙방까지
찾아들 수 있었을까? 술에 곯아떨어져서
혹시 윤정님한테 실수나 저리른 건
아닐까?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걱정이 생겨났다.
어제따라 술발이 잘 받았던 게 사고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미녀가 따라주는 술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는가. 천하의 악당들을 안주삼아 그녀가
마시지 못하는 술까지 넙죽넙죽 받아 마신
게 탈이라면 탈이었다.
제기랄, 여기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제는 내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군. 별수 없지. 초면에 술주정을 했대도
이미 엎지러진 물인걸...
그는 몹지 뻐근한 뒷골을 손으로 누르며
머리를 저었다. 부시시 몸을 일으킨 그는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며 방문을 열었다.
우선 오늘 아침 신문을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일 듯 싶었다. 그의 하루는 늘상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 씨, 일어나셨수?"
조간신문을 집어들고 방문을 닫으려던
그는 하숙집 안주인인 여천댁의 목소리에
놀라 다시 방문을 열었다.
"아, 예, 일어났습니다. 아주머니."
"어이구, 어제는 웬 술을 그리 자셨수?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여천댁이 활짝 웃는 얼굴로 핀잔을 주는
시늉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여천댁이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바싹
얼굴을 디밀었다.
"어제 그 아가씨 정말 참합디다. 김 씨
애인이우?"
"예?"
뜻밖의 소리에 김석기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에이그 능청스럽긴. 어젯밤에 김 씨를
여기까지 데려온 처녀 말이우."
"아, 예."
그러고 보니 윤정님이 그를 집까지
데려와 이부자리를 봐주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이렇게 누추하게
살아가는 꼴을 보였다니. 볼래 나쁜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부끄러움이 더럭
치밀었던 것이다.
"김 씨, 그렇게 참한 색시는 처음
봤어요. 좋은 사람 있을 때 빨리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하숙집 밥 먹을 참이우?"
"아, 아닙니다 아주머니."
그는 황황히 손을 저으며 급히 방문을
닫았다. 한번 열렸다하면 봇물처럼 터지는
여천댁의 수다는 일분일초라도 빨리
잘라버려야 했다.
그녀가 이 방까지 들어왔다니 갑자기
가슴이 더워지는 듯한 느낌에 그는 급히
신문을 펼쳐들었다.
"망국병 비상! 지역과 계층 안가리고
전국으로 번지다!"
커다란 활자가 그의 눈으로 성큼 빨려
들었다. 순간 지난 보름 동안 전국을
무대로 뛰어 다녔던 피로와 노고가
D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히로뽕, 대마초 등을 사용하는 마약류
사범이, 하루가 다르게 크게 늘어나면서
농민과 가정주부 청소년 층에까지 크게
확산되고 있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지난달 15일, 고위층 인사의
자제가 히로뽕을 상용한 혐의로 검찰에
입건됨으로써 마약류 사범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웠는가 하면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전과 7범이 연쇄점과 가정집등에
침입,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렸고
부산은행 송도지점 앞길에서 히로뽕 환각
상태의 20대 청년이 흉기를 들고 출근길의
여직원을 인질삼아 난동을 부린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중략
이같이 마약류 사범이 급증세를 보이게
된 것은 한때 일본 마약시장의 45%까지
잠식했던 국내의 히로뽕이 대만 등
동남아의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저급품에
밀려나면서부터, 일본 밀반출이
어려워지고 일본 시장에서 15%의 점유율을
보이자 수출물량을 전량 내수로 돌렸기
때문.
더욱이 마약에 때묻지 않은 지역으로
알려졌던 제주도에서도 지난해부터
마약류사범이 적발되기 시작하여
관계당국을 긴장시키고 있으며 특히
적발된 마약사범 중에는 농민도 끼어있어
큰 우려를 갖게 하고 있다.
검찰은 제주지역이 국제적 관광지인 점
등으로 미뤄 마약사범이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이 커 강력한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그러나 히로뽕 조직은 자금책 연락책
제조책 운반책 밀매책 등으로 연결돼
있으나 철저한 점조직으로 돼 있어
일망타진이 어려운 실정이다.
검찰은 제주도에 마약을 공급한
운반책으로 짐작되는 용의자를 비밀리에
추적중이었으나 지난 달 25일 문제의
인물이 인천의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뒤를 쫓던 검찰을 허탈케 한 바
있다.
검찰은 문제의 용의자를 살해한 조직을
뒤쫓고 있으나 수사는 미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고
나라를 망치는 마약류 사범의 급속한
확산을 막기 위한 전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마약사범퇴치 운동에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이다. <특별취재반>"
김석기는 신문을 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발 이 기사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이 땅에서 마약을 퇴치하고
몰아내는 운동에 기폭제가 되었으면, 그는
간절하게 빌었다.
일본에 밀반출되던 루트가 거의 차단돼
국내로 밀매망이 뻗치면서 마약은 급격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물량
공급이 대량으로 늘어나면서 가격이
하락하자 일부 지역의 술집에서는 매상을
많이 올리기 위해 히로뽕을 술에 타서
판매한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양산
김해 일원에서는 농사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고 정력제로서 부부관계가 좋아진다고
꾀어 4-5차례 공짜로 주어 중독자로 만든
후 돈을 받고 파는 등 순박한 농촌마저
마약으로 오염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외에도 마약의 부작용으로 빚어진
각종 폭력사태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을
수조차 없었다.
고위층 인사의 자제가 히로뽕
중독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어
더듬어 본 전국적인 마약실태에 김석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김석기를 비롯한 특별취재반은 사명감마저
느끼며 밤잠을 설치고 뛰어다녔을
정도였다.
검찰의 마약사범전담반과 합동으로
뛰어다닌 지난 보름 동안 김석기는 모처럼
신문기자로서의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천재일우의 기회로
포착해 내었던 지난 밀매조직의 하부선이
조직에 발각되어 제거당하면서 추적의
선이 끊어져 버린 사실은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놈들이 우리가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중의
하나였다. 검찰의 전담요원 역시 그런
의문을 품은 듯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리어 김석기의 취재반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던가. 김석기는 펄쩍
뛰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영원한
의문으로써 남아 있게 되었다.
검찰과 함께 펼쳤던 합동취재는
그야말로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상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던
듯했다. 누굴까?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은 엄염한 사실이 되었다.
찾아내고 말겠다.
석기는 내심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
합동취재는 이미 수포로 돌아갔지만
인천해안에 떠오른 변사체 사건만큼은
개인적으로 파헤쳐 보아야겠다고 그는
마음먹고 있었다.
따르르르릉.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굴까 이
시간에? 그는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마침 집에 있었군."
상대는 손삼수였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오랜만이야."
"인사 한 번 빨리 하는구먼."
"나원 이친구. 또 뭔가 일이 잘
안풀리는가 보군. 아침부터 시비를 걸어
오는 걸 보니."
"하하... 어쨌든 축하해. 한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결국 별하나
건졌더구먼."
"특종은 무슨... 사회 캠페인
특집기사에 불과한걸..."
"그나저나 왜 그렇게 얼굴 구경하기가
힘들어? 오늘은 얼굴 한 번 보자. 어때?"
"글쎄. 그 못생긴 얼굴 보고 싶은 마음
별로 없는데?"
"예끼!"
"하하... 틈 나는 대로 전화할게."
그러나 틈을 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경과해야 했다. 김석기와 손삼수가 얼굴을
마주 본 것은 결국 저녁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시경 옆골목에 위치한 할머니
순대국밥집 골방에 마주앉은 그들은
소주병을 기울이며 모처럼의 회포를
풀었다.
손삼수로부터 우이동 산장의 전라()
여인 변사체 발견사건을 전해들은
김석기는 대번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 친구야! 그런 건수가 있으면 왜
진작 연락을 하지 않았어?"
"자네한테 도통 연락이 닿아야지.
게다가 수사방침이 비공개로 결정되었으니
연락해봤자 별 수 있겠나?"
"거, 참..."
김석기는 새삼 입맛을 다셨다. 무엇보다
그를 자극한 것은 변사체로 발견된
성귀희여인이 거물 정치인 성기용 씨의
G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모종의 정치적
흑막이 있지나 않을까? 대뜸 발동된 그의
호기심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연거푸 세 잔째의 술잔을
비워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술발이 잘
받을 모양이었다. 아니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그의 주변에선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천해안에서 떠오른
마약밀매용의자는 음모와 협박. 게다가
이번에는 우이동 산장의 전라여인 변사체
사건이라니. 김석기는 네 번째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내는 지금 막 방으로 들어서는 그를
분노가 그득한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유재택은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공손히 목례를 올렸다.
그리고 사내의 앞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팽팽한 공기가 실내를 그득 메웠다.
사내는 질책이 담긴 표정을 좀처럼 풀 줄
몰랐고 유재택은 목묵부담으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질식할 듯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유재택이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장인어른."
그 말에 대꾸도 없이 성기용은 그의
앞에 놓였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지그시
유재택을 쏘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여전히 비난의 표정이
남아 있었다.
유재택은 울컥 치미는 울화를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이 노인네가
윱천왜 이렇게 투정을 부릴까? 물론
착잡한 심경을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금지옥엽이던 외동딸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동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위와
틈이 벌어질지도 모를 현실에 대한 우려가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고 동시에 그를
분노케 했을 터였다.
사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짐짓
처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륜의 행각을 벌였던 아내에 대한
불만과 울화를 그는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 점이 성기용의 심기를 더욱
불편케하고 분노를 폭발케 했다.
물론 고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장인과 등을 돌림으로써 필연코 그에게
돌아올 타격을 그는 윈치 않았다. 아직은
그의 기업에 대한 방패막이로서 싫든 좋든
성기용은 절실히 필요한 인물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들의 밀월은 원만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성기용은 홍해강철그룹의 후견인이나
진배없었고 홍해강철그룹이 급성장을
거듭한 비화의 뒷언저리에는 성기용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수년전 철강업계에서 선두그룹의
하나였던 고려제강을 흡수합병하여 재계를
발칵 뒤집었고,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킨
사건으로 비유되면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성기용이 그들의 뒤를 돌봐줌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 후로 홍해강철그룹은 급성장을
거듭하며 사세를 널리 뻗쳤고 그룹의 주력
업종이었던 철강부문을 연간 총 매출액의
40%로 낮출 수 있을 만큼 업종 진출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가내공업 수준이던 자그마한 철공소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처럼 재벌의 골격을 갖춘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창업주인
부친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정략결혼을 성사시킨
유재택사장의 2세 경영시대가 열리면서
비로서 결실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성기용은 그의 막후에서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큼직한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방패막이로서 조력자의
역할을 담당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서 성기용의
정치인 생활에 필요한 자금 파이프 노릇을
하는 것은 그의 차지였다.
이렇듯 공생공존의 관계를 지금 와서
깨뜨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요즘처럼 국민들의 여론이 기업에
일방적으로 불리할 때는 처신이 더욱
조심스러운 법이다. 또한 양가문의 이해에
일방적으로 얽힌 정략결혼이었다 하더라도
유재택의 성귀희에 대한 사랑은 진실했고
끔찍하였다.
비록 비참한 결말로 끝을 맺어 씻을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주었지만 가정은
가정이고 사업은 또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장인과의 위상정립을 새로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장인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터였다.
그는 즉각 달려왔다. 그러나 장인은
여전히 감정의 앙금을 떨치지 못한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던 성기용이
그의 앞에 잔을 밀고 묵묵히 술을 따랐다.
화해의 제스처다. 유재택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공손히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술잔을 건넸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서야 성기용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딸자식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질책을
한다면 나로선 할 말이 없네."
""
"허나 모든 일에는 상대성이 있는
법이야. 마누라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고
밖으로 내 돌린 자네의 불찰이나 자네가
무책임하게 일으킨 불미스런 여자관계
따위들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요인중의
하나라는 걸 자네도 부정은 못할 걸세."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누구의 잘잘못인지
시시콜콜 따질 생각은 없네. 다만 자네가
일방적으로 서운하게 생각한다면 나도
불만이 없지않다는 뜻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자네가 재가를 하고 싶다면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네.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오늘 자네를 부른건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야."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장인어른께 잘못한 점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꾸중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아이들 교육문제만 신경을 써주면
나로서는 더이상 바랄 게 없네."
"장인어른! 그동안 저도 많은 심적
느꼈고 나름대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저를 너무 몰염치하다거나
야박한 놈으로 몰아 붙이진 마십시오."
유재택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자 성기용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구먼. 자
술이나 한 잔 더 하지."
술이 한 순배 더 돈 후 유재택은 기회를
보아 준비해 온 두툼한 봉투를 꺼내
놓았다.
"뭔가?"
성기용의 눈빛이 그렇게 물었다.
"이번에 미국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음. 한미 의원친선협의회 미국측
간사로부터 초청을 받았네."
"여비로 보태 쓰시라고 준비해
왔습니다. 혹시 부족하시다면
미국지사에서 도울 수 있도록 별도로
수배해 놓겠습니다."
"됐네. 그럼 이 돈은 자네 성의로
생각하고 받아둠세."
성기용은 거리낌없이 봉투을 집어
넣었다. 그의 입가에 흐르는 흐뭇한
미소를 보며 유재택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화해는 끝났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어깨가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그는
느꼈다.
봉투 속에는 결코 여비로 볼 수 없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평소 정기적으로
불입했던 비밀자금의 거의 두배에 가까운
거액이었다.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흡족해할
성기용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유재택은 회사로 돌아왔다.
사장실 소파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자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긴장감이
이완되면서 묵직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오늘처럼 장인과의 대결이 힘든 적은
없었다. 그는 장인과의 대좌를 늘상
대결한다는 느낌으로 임해왔다.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질테지. 그는 씁쓰레한 미소를
씹으며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나른한 피로에 쫓겨 잠시 눈을 붙일
참이었다.
인터폰이 그의 잠을 쫓고 말았다.
"왜 그래?"
그의 입에서 절로 짜증이 터져나왔다.
, "사장님, 손님이오셨습니다. 시경
강력계 손삼수 반장님이라시는데요."
이런 무례한 친구를 봤나. 여기가
어디라고 제 집 안방드나들듯 선약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온담. 불쑥 치미는 불쾌함을
꾹 누르고 그는 차갑게 말했다.
"안으로 모셔!"
잠시 후 앞자리에 마주앉은 손삼수를
유재택은 고자세로 내려다보았다.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만 마침 계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바쁜 시간을 뺏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제멋대로군. 무식한 놈 같으니.'
유재택은 차가운 눈빛을 느끼지 못한 듯
손삼수는 어눌한 어조로 먼저 예의를
차리는 시늉을 했다.
"용건이 뭔가요?"
"사장님께 양해를 구할 일도 있고 부탁
말씀을 들릴 일도 있고 해서요."
"말씀하십시오."
그는 불청객을 빨리 쫓아내고 싶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손삼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수사는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못한 점
우선 사고드립니다."
유재택은 가당치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부인의 죽음에 대한 원인은
밝혀졌습니다만 그 이외에는 조금도
진전이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였으며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에서
고의성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조차
말입니다. 이러다간 자칫 수사가 미궁에
빠진 채 수사본부가 해체되지 않을가
염려스러운 지경입니다."
"그래서 날보고 어쩌라는 거요?"
"사장님 심중에 혹시 짐작 가시는
부분이 없으십니까? 부인과의 상대로 격에
맞을 만한 인물이라거나 사장님께서
의혹을 가진 부분이 있다면 솔직히 들려
주십시오."
"이것봐요 손반장!"
유재택은 기어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집사람이 죽은 건 현실이오. 나에겐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사실이오. 나는 그 악몽을 더 이상은
되살리고 싶지 않소. 내 기분 아시겠소,
손반장? 범인을 잡건말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죽었던 집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 끔찍한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오. 나는 그 사건이
빨리 가라앉기만을 바랍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회사나 나의 사생활이나 내
이름 석자가 신문 지상에 까발려지는 건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제발 더이상 이
문제로 날 귀찮게 하지 말아 주시오."
망연자실한 듯 우두커니 유재택을
바라보던 손삼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한
범인에 대한 원한도 없으십니까? 범인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범인을 잡는 건 당신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니잖소!"
유재택은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자기 부인의 죽음을 놓고 마치 남의
일처럼 초연할 수 있다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사건해결보다는 사건이 조용하게
가라앉기만을 바란다구? 흥, 돈많은
사람들의 인정머리란 게 고작 그 정돈가?
그렇다고 내가 수사를 포기할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난 그렇게 사회정의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순 없어.
오후 한나절을 내낸 침울한 기색으로
수사반을 지키고 있던 손삼수가 저녁
무렵에 나타나 김석기를 할머니
순대국밥집으로 끌고가 술이 한 순배 돈
연후에 털어놓은 울분은 울분의요지는
대충 이랬다.
"내 말이 틀렸나? 한 이불 속에서 몸을
섞고 살던 부부가 과연 이래도 되는 거야?
세상이 꼭 이렇게 삭막해져야만 되겠어?"
손삼수는 자못 분개한 듯 계속 울분을
토로했다. 이것은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아 대단히 보기 어려운 광경중의
하나였다.
"그래,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 아니겠어?"
그는 우선 흥분한 손삼수를 진정기키기
위해 위로의 말부터 꺼냈다.
"말세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의 수준이 그 정도니까
오늘날처럼 가치관의 혼돈이 온통
사회문제로 비화되는게 당연한 이치지."
"옳은 말이야. 자 그 문제는 천천히
대처하기로 하고 이제 화제를 바꾸는 게
읍"
김석기는 손삼수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드는 틈을 타서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
"좋아, 술이나 마시자구."
두 사람은 건배를 했다.
한편, 손삼수가 김석기를 붙들고
유재택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고 있는
시각에 그곳에서 불과 서너블록 떨어진
요정의 밀실에선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그게 사실이야?"
성기용의원은 경악에 찬 눈으로 두 눈만
멀둥거리고 서 있는 안희갑감보좌관을
쏘아보았다.
"네, 분명한 사실입니다."
"소스가 어디야?"
성기용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듯
다시금 확인을 했다.
"평소에 제가 줄을 대고 있던 K일보
기자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강태산의원께서 K일보 사회부장에게
따님이신 성귀희여사의 의문사를 캐어들어
가면 대어가 걸려들거라면서 기사를
확대하도록 은근히 종용하더라는 겁니다.
K일보뿐만이 아닙니다. S일보와 P신문에도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 친구 믿을 만한가?"
"그 기자 말씀입니까?"
"그래."
"제 심복이나 다름없는 친굽니다."
"으음... 강태산이 그 놈이 등 뒤에서
날 칼로 찌르겠다 이 뜻이로군."
성기용은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강태산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위인이다. 한때는 그에게 가장
강력히 도전했던 라이벌 정객이 아닌가?
그러한 위인이 지금 도전을 해 오고 있다.
성기용은 일말의 위기감을 느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놈이 무슨 낌새를 챈건 아닐까?"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닌 모양입니다.
어쨌든 의원님을 물고 늘어져서 끌어
내리는데는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여
칼날을 세운 듯합니다. 하지만 눈치로
보아 사건의 전모에 대한 윤곽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듯합니다."
"어쨌든 방심할 수는 없는 친구야."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 할 듯 싶습니다."
"알겠네. 당장 손을 쓰도록 해,
경찰쪽은 내가 틀어막을 테니까, 자넨
언론을 맡아서 뛰어! 그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는 건 곤란해. 이 정도선에서 막아,
알겠나?"
"네."
"그럼 즉시 뛰어."
"알겠습니다."
안희갑보좌관이 물러간 후 성기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형 둑이 터지는 것도 바늘 만한
구멍에서부터 비롯된다. 하물며 지금은
시기가 좋지않다. 자칫 불똥이 그에게
튀기 시작한다면 뜻밖에 큰 타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성기용은 다시금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 잠시후 이 요정의 회식에 참석한
계보원들에게 주의환기를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 되새겨 넣고
있었다.


6. 변 신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가자 윤정님은
찔끔 눈물을 지릴 뻔했다.
십수년간 정성껏 길러온 머리칼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생머리에 반했다면서 남편
우춘구는 그녀의 긴 머리를 유난히
좋아했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유독 생머리를
고집하면서 애지중지했다. 수년전부터
짧은 헤어 스타일이 복고풍을 밀어내고
최신 패션으로 세계적 열풍을 일으켰지만
지금까지 긴머리만을 고수하였다.
거리에서 긴머리 소녀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건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웨딩드레스를 입는데 긴머리는
거추장스럽다고 미용사가 간곡히
설득했지만 그녀는 머리 자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끼던 머리를 그녀는 결국
자르고 말았다.
그것은 김석기를 만나면서 그녀가
일으킨 첫번째 변화였다.
우선 긴머리가 남들의 시선을 끈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괴한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에서 한시바삐
달아나고픈 절실한 심경이 먼저였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생애의 강렬한 욕구가 그녀의 마음을
기어이 움직였던 것이다.
김석기는 그녀의 변화하는 마음의
허전한 구석을 튼튼히 메워주었다. '힘을
내세요 윤정님 씨. 윤정님 씨 혼자
고립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제가
도와 드리죠 기꺼이.'
그녀는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음 속에 담고 있던 계획을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김석기와 헤어진 다음날 밤 그녀는 밤이
으슥하기를 기다렸다가 압구정동의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일차적으로 숙소를
옮기는 것이 급선무일 듯 싶었다.
경비실에는 몸이 아파 시골로 정양하러
간다며 연막을 쳤다.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아파트 관리를 잘
부탁한다며 돈봉투까지 꺼내 놓았다.
간편한 옷가지 몇개와 신변용품, 그리고
남편이 쓰던 물건만을 챙겨 넣은 트렁크를
들고 경비원의 융숭한 배웅을 받으며
그녀는 짧은 기간이나마 정이 들었던
아파트단지를 떠났다.
그리고 번거롭긴하나 용의주도하게
잠적하기 위해 택시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서울 시내를 헤맨 끝에 그날
밤 늦게서야 그녀는 비밀리에 마련해 둔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동 사거리에서 신장쪽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우측의 숲 속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는 외딴 아파트단지였다.
그녀가 상처받은 마음을 정리하고
새출발하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일 듯 싶은
곳이었다. 우선 주변경관이 화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많지 않고
도심에서 제법 떨어진 조용한 아파트가
그녀는 마음에 쏙 들었다.
적들에게 그녀가 압구정동을 완전히
떠났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몸만
빠져나오고 보니 생활집기나 가구들은
새로 장만해야 했다.
그녀는 돈에 대한 여유는 제법 있는
편이었다. 결혼을 할때 시댁과 친정에서
받아 둔 지참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공인회계사로서 수입이 좋았던 듯 남편의
통장에도 꽤 많은 돈이 저축되어 있었다.
새로 옮긴 아파트에서 새출발의
첫날밤을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면서
그녀는 앞으로의 플랜을 차근차근 점검해
보았다. 완벽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녀는 적이 안도하면서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새삼 불태우며
결의를 가다듬었다.
흥, 미련한 놈들, 두고 보아라. 내가
이렇게까지 표독스럽게 덤벼들 줄은 상상
못했을게다. 여자의 가슴에 못을 박고
한을 심은 네 놈들의 눈에서 반드시
피눈물을 뽑아내고 말테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가까운 잠실의
한강쇼핑센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밤사이
짜둔 목록에 쓰여진 물품들을 구입하고
쇼핑하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녀는 철저한 변신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준비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선
돈 많은 부잣집 아들과의 결혼에서 실패한
돈많은 이혼녀로 행세할 요량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집기며
비품들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녀는 섬세한 안목으로 쇼핑을 끝내고
오후에는 미용실에서 과감하게 머리를
자르고 말았다.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 나가는 듯한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나오면서 마음이
아려왔다.
"어머나, 머릿결이 정말 고와요. 힘들게
길러서 왜 자르려고 하세요?"
미용사의 호들갑스런 위로에 그녀는
씁쓰레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커트를 끝낸 미용사는 이번엔 앞머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정성껏 가다듬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 됐습니다. 손님 정말 예쁘게
나왔죠?"
미용사의 자화자찬에 눈을 뜬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마조마한
불안감으로 안달하던 조바심이 대번에
씻겨지면서 그녀는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거울 속에서 지금까지의 그녀가 아닌
새롭게 태어난 윤정님이 활짝 웃고
있었다. 놀랍게도 긴 생머리의 윤정님은
짧은 핀컬퍼머의 생판다른 윤정님으로
변모해 있었다.
게다가 미리 준배해 두었던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착용하자 자기가 보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엉뚱한 여인이 거울 속에
앉아 있었다.
"정말 잘 나왔죠?"
"그래요. 수고하셨어요."
미용사에게 공치사와 함께 두둑한
팁까지 얹어주고 미용실을 나온 그녀는
흡족한 마음과 함께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듯 했다. 이제 서울거리를 마음껏
활보해도 그녀를 알아 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녀는 새로운
자신감에 가슴마저 뿌듯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 구입한 비품들의
정리정돈을 끝내고 약간은 한가해지자
미처 모친에게 연락을 못했다는 자각이
얼핏 떠 올랐다. 그녀는 친정으로 전화를
넣었다. 마침 모친이 전화를 받았다.
"나야 엄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화기
저쪽에서 모친의 숨가뿐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 거기 어디냐? 정님아? 정님아, 몸은
괜찮니? 응?"
그녀는 말투에 한껏 어리광을 섞어
말했다 모친을 안심시키는 데는 이 방법이
제일이었다.
"이것아 어딜가면 간다고 얘기를
해야지. 난 또 십 년 감수하는 줄
"
"아이참 엄만, 내가 어린애유?"
"어린애가 아닌데 이렇게 엄마 가슴을
태우니?"
"미안해요 엄마."
"어젯밤부터 계속 전화를 받지 않길래
혹시 또 무슨일이 생긴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줄이나 아니? 아침에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정양하러 시골에
갔대지 뭐냐. 제발 엄마 속좀 그만
썩여라. 이러다 나까지 제명에 못
살겠다."
"에게게, 내가 할 소릴. 엄마 등쌀에
내가 못견딜 판인걸?"
"어휴, 이 철없는 것아. 너 정말 몸은
괜찮니? 정말 별일 없는거니?"
"그래요 엄마. 나 밥도 잘 먹고 잠
잘자고 있어."
"도대체 거긴 어디냐?"
"시골이랬잖아."
"시골 어디냐니까?"
"제발 내 걱정말우 엄마. 나 혼자서
조용한 시간 가지려구 이리 내려온 거야.
그런데 엄마한테 여기 위치 알려주면
헛수고 되게? 내 마음만 정리되면 금방
올라갈게 엄마. 그러니 당분간 신경
끊으시고 조용히 기다려요 응?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우."
"에이구, 그놈의 마음 정리하는데 웬
시간이 그리 걸리누."
"그럼 전화 끊어. 엄마."
그녀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기왕
숨어지낼 바엔 철저히 숨어야한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자칫 입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억지로 꾹 눌렀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보니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실수란
사소한데서부터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렇게 몇 달만 더 지나면 그녀는 세인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갈 것이다.
그녀가 노리는 게 바로 그 점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끝에 마음을 정한 그녀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상대는 남편의
직장동료였던 합동공인회계 사무실의
유용치()였다. 그는 남편의
대학동창으로서 회사내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며 그녀도 여러번 만나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편의 과거
행적을 잘 알고 있는 인물중의
하나였으므로 그녀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소홀히 대할 수
중요한 사람이었다.
한참만에 유용치가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유선생님. 저
윤정님이에요."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그나저나 왜
이제야 연락 주십니까?"
그의 말투에는 형언할 길 없는 반가움이
한껏 배어 있었다. 그녀는 사고 후 남편의
직장에 대한 처리가 너무 늦었음을
자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뵙고 싶어요. 유선생님."
"그럽시다.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춘구가 쓰던 사물도
돌려드려야 하구요."
"아...!"
그것은 정님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남편의 흔적을
챙기는데만 급급했지 회사에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회사에
남아 있는 남편의 흔적, 어쩌면 남편의
죽음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떠오르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유선생님, 한가한 시간을 말씀해
주세요."
"전 아무때라도 좋습니다. 시간과
장소만 알려주시면 쏜살같이
달려가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시원시원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윤정님은
소공동의 황실 그릴에서 유용치와 마주
앉았다. 그곳에 예전에 남편과의 은밀한
즐기던 장소라 쉽게 머리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변모한 그녀의 모습에 눈이 부신
듯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상상밖인데요?"
"뭐가요?"
"솔직히 말해서 전 유정님 씨를 만나면
무슨말로 먼저 위로를 할까.하고 고민을
했거든요."
"기대밖의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원, 천만에요.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난 듯한 건강한 모습을 뵈니까 기분은
좋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그동안 어려움이 많으셨겠죠?"
그는 새삼스럽게 위로의 말을 꺼냈다.
그녀는 담담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뭘 드시겠습니까?"
그는 웨이터를 불러서 저녁식사를
주문하며 장기전으로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것도 그녀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처음에 사고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럴 친구가 아닌데
꽤 엉뚱한 구석도 있었구나 하고 말이죠."
순간, 정님은 눈빛을 발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유선생님 말씀중에 엉뚱하다는 건
그이의 자실에 관한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유선생님이 보시는 그이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는 스카치로 잠시 목을 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춘구 그 친구는 천성적으로 유하고
남을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지만 틀림없는
낙천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저도 동감이에요."
""
관심이 동하는 듯 이번엔 유용치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차츰 그녀가
자기를 찾아온 저의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제가 유선생님을 뵙고자한 건
유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어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
힘자라는 데까지 벗겨보고 싶어요. 전
남편의 죽음은 타살임을 확신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원인을 규명하는 데는 저
혼자의 힘으로는 너무나 벅차요."
""
"우선 남편의 과거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습니다. 유선생님께서 알고 계시는
부분만 말씀해 주셔도 제겐 큰 도움이
될겁니다. 그리고 남편이 이 회사에
들어와서 했던 업무에 관해서 세밀한
자료를 구했으면 해요. 남편이 어떤
회사의 어떤 일을 했는지? 혹시 내밀한
거래 관계는 없었는지, 모든 부분들을
말예요?"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저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니까요."
그는 역시 선선히 승낙을 했다.
잠실대교를 건너온 택시는 송파대로를
향해 곧장 달렸다.
네온사인이 현란한 롯데월드를 지나치자
큰길 양쪽으로 나뉜 석촌호수가 나타났고
택시는 우측의 서쪽호수를 끼며 급커브를
틀었다.
문득 호수장 모텔이라는 네온사인의
불빛이 눈에 크게 들어오자 김석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됐습니다. 여기 내려주세요."
요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린 석기는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허, 서울시내에도 이런 곳이 다
있었다니.
그의 입에서 경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북적대는 인파와
석촌호수를 끼고 길 한쪽으로 끝없이
늘어서 있는 각종 아크릴 간판과
네온사인이 휘황한 불야성의 거리였다.
한눈에 서울의 어느 곳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독특한 야경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이 초행길이었다. 다만 오래
전에 이 부근을 몇 번 지나간 일만
떠올리고 막연하게나마 주택가 정도로
짐작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간
셈이었다. 어쨌든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서울의 놀라운 거리에 감탄을 거듭하고
그는 이윽고 그의 목표물을 찾아내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
고급레스토랑 다링 포인트.
그가 찾아낸 약속장소는 호수장모텔과
골목 하나를 끼고 마주 서 있는 건물의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윤정님 씨는 왜 하필 이런 유흥가에
약속 장소를 정했을까?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 그는 천천히
도로를 가로질러 건넜다. 그러나 다링
포인트의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그의
의혹은 지워지는 듯했다.
붉은 장미무늬가 박힌 카페트를 밟고
내려가는 지하통로 옆에 설치된 웅장한
폭포는 첫눈에 그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서구풍으로 설계된 고급스런
실내장식과 넓은 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가 안온한 느낌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다링 포인트는
환락가처럼 현란한 바깥 세계와는
분위기가 백팔십도 바뀐 별천지처럼
느껴졌다.
그는 좌석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자리에서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얼핏 살펴보니
꽤 미인이었다. 세상 참 불공평하군. 어떤
놈은 복이 많아서 저런 미인과 데이트하는
호강도 누리는데, 그는 슬그머니
터져나오는 푸념을 억누르며 그 좌석을
지나쳤다.
바로 그때.
"김선생님!"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그를 부른
바로 문제의 그 아가 씨가 아닌가.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시늉을 했다.
"저예요. 김선생님."
여전히 눈을 깜박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던 석기는 안경을 벗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색이 환해졌다. 그녀가
바로 윤정님이 아닌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으니..."
급히 앞자리에 당겨 앉으며 석기는
새삼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뜯어 보았다.
"김선생님까지 못 알아보실 줄은
몰랐는데요."
"이렇게 변했는데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힌트라도 주셨으면
몰라도."
Q "저 어때요? 더 못해졌죠?"
그녀는 겸연쩍게 웃었다. 석기는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원 천만에요. 전 웬 선녀가 하강을
하셨나 했습니다."
"어머나, 김선생님도 짖궂으시긴..."
"어, 정말입니다. 전 거짓말하면
두드러기 돋는 체질이라서요."
석기의 우스꽝스런 몸짓에 그녀는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김석기
역시 시원하게 웃었다. 웨이터가 다가오는
바람에 그들은 웃음을 그쳤다. 진토닉과
키스 오브 파이어를 한 잔씩 시켜놓고
그들은 천천히 분위기를 즐겼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흘러나온 여가수의
노래소리가 홀을 잔잔하게 메웠다. 이윽고
윤정님을 찬찬히 뜯어보던 김석기가 먼저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댁에 여러 번
전화를 넣었는데 통 받지를 않던데요?"
"그 집을 나왔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럼 이사를
하신건가요?"
"아뇨."
""
"당분간 숨어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해서 거처만 옮긴 거예요."
"언제 옮겼습니까?"
"사흘 됐어요."
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걱정을 했었는데."
"별 말씀을, 그나저나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는 잔 속에 반쯤 남아있는 진토닉을
한꺼번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웨이터를 불러 진토닉 한잔을 더 청했다.
윤정님은 시켜놓은 키스 오브
파이어에는 손도 대지 않다. 세모골의
자그마한 술잔에 진한 빨간빛의 액체가
가득 담긴 이름에 어울리는 예쁜
술이었다. 술잔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윤정님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선생님을 뵙자고 청한건 긴히
상의드릴 말씀이 있어서예요."
김석기는 긴장한 낯빛으로 정색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혹시 새로운
나왔습니까?"
정님은 잠자코 핸드백에서 메모지
한장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홍재오리혹해택천히내강비
만송사철자불금요유금취의망
메모지에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않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김석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낙서처럼 휘갈겨댄 악필도
그랬지만 두서없는 글자의 나열들이 마치
암호문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메모지의 내용을 해독할 방법이 없어
그는 윤정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짓을
했다.
"도대체 이건 뭡니까?"
그제서야 정님은 앞뒤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제 오후에 남편의
직장동료였던 유용치를 만나 도움을
청했던 일이며 유용치가 챙겨놓은 남편의
사물을 인계받은 사실들을.
"그렇다면 이 쪽지는 남편의 사물
속에서 발견된 겁니까?"
"네."
"음..."
석기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렇다면 암호문처럼 작성된 이 메모는
이번 사건의 중요한 단서로서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몸 속에서
잔잔하게 요동치는 흥분을 억누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어떤
의문에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가만, 윤정님 씨는 남편의 죽음이
남편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뜻밖에도 그녀는 단호하게 심경을
피력했다. 김석기는 내심 허탈한 기분이
되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러셨을테죠. 또한 가능성도
가장 높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님 씨는 큰
실수를 하신 겁니다."
"네?"
정님은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업무와
연관되어 살해되었다면 그 직장에는
분명히 남편의 적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런데 정님 씨가 자신을
노출시키고 이쪽의 의도를 드러냈다면
적의 입장에선 어떤 행동을
취하겠습니까? 증거자체를 소각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또 다른 행동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죠."
순간 정님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며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석기는 그녀의 기분을 전환시킬 필요를
느껴 급히 말을 바꾸었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이쪽에서
냉정하게 대처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제 말뜻을 아시겠죠?"
"...네."
정님은 어렵게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조급전보다는 한결 풀어진
듯 보였다.
"유용치라고 했나요?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남편과
평소에 가장 가까운 동료였구요?"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 사람에게 새로 옮긴 집
연락처를 알려주셨나요?"
"아뇨."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셔야 합니다."
"남편의 과거를 알기 위해선 아직 그
사람의 협조가 필요할 텐데요?"
"그렇군요."
김석기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짓눌러 왔다. 그
틈을 뚫고 피아노 연주곡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이윽고 김석기가 머리를 들었다.
"제가 그 사람을 상대하면 어떨까요?
그게 거북하시다면 두 분이 만나는 자리에
제게 합석하는 형태도 괜찮을 듯합니다."
정님은 잠시 생각에 잠겨드는 눈치였다.
"그래야만 혹시 이쪽이 적들에게
노출되더라도 윤정님 씨가 표적이 되는
일만은 면할 수 있을 겁니다. 표적이
된다면 당연히 신문기자인 저한테 화살이
쏠릴 테죠."
생각에 잠겨있던 정님은 한참만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김선생님까지
희생되는 일이 생기다면... 전 그런 일은
원치 않아요."
"하하...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아무려면 제가 그리 쉽게 당하겠습니까?
O전 저를 보호해 줄 든든한 백 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님 씨와는 입장이
달라요."
정님의 염려를 그는 한마디로 묵살하고
말았다. 마지못한 듯 정님은 간신히
머리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표했다.
석기는 빙긋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고 정님
역시 활짝 웃으며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분위기를 환하게 바꾸었다.
석기는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랑스런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윤정님을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녀를 만나는 날이면
가슴이 설레는 자신을 느꼈다. 그건 왠지
자신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이런 걸
연정이라고 부르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정확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한
감각이었다. 그 감정은 오늘따라 더 했다.
놀라울 정도로 변모한 모습을 보이며
나타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애틋한
연민과 함께 뭉클한 정을 가슴 가득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해 이
여인을 보호해 주어야겠다는 각오를
남몰래 가슴에 새긴 석기였다.
석기의 그런 느낌이 전달된 듯 정님
역시 다소곳한 표정으로 석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모지를 다시 한번 뒤적여보던 석기는
끝내 모르겠다는 듯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이 쪽지는 아무래도 남편이 필요에
의해 작성해 두었던 암호문 같은데 정님
>씨 생각엔 어떻습니까?"
"저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님은 쉽게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다면 이 암호는 남편의 죽음을 캘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겁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 암호문 한부를 복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제가 반드시 풀어보겠습니다."
"그 쪽지를 가지세요. 집에 사본이 한
부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근데 신혼 첫날밤에
남편을 객실 밖으로 유인해 낸 친구, 그
전화를 걸었다는 친구가 누군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정님은 주춤 눈빛을 모았다. 지금까지
그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전 아직..."
그녀가 말을 더듬거리자 석기는 방긋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쉽게 알아 내실 수는 없을 겁니다.
놈들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일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한 가지만 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
"남편의 사물을 제가 한번 확인할 수
없을까요?"
"그래요. 내일 가지고 나오도록
할게요."
"아닙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습니다.
댁에 가서요."
순간 정님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 보여드리죠."
"고맙습니다."
김석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 안돼요. 이러심 안돼요.
제발..."
윤정님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급한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몸짓은 그다지 강한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석기는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은 팔을
더욱 옥죄었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몸매가
바짝 밀착되면서 여인 특유의 싱그러운
체취가 그의 전신을 자극해 왔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는 다급하게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봉곳 솟은 가슴을 움켜쥐자 뭉클한
감촉이 그의 전신을 짜릿하게 휘감아왔다.
"아..."
그녀는 기성을 발하며 서서히 함몰되어
갔다. 다음 순간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술을 그의 입이
봉해버렸다. 그리고 기나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김석기는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인 채 축 늘어져
있던 그녀의 팔이 그의 어깨를 휘감으며
그를 받아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러나 서투른 손짓으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녀는 몸짓으로 그의 동작을
거들어 주었다. 허겁지겁 세 번째의
단추를 풀고 가슴을 열자 봉곳 솟은
가슴과 하얀 살결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후끈 달아오른
그는 이번엔 급하게 그녀의 치마를
끌어내렸다. 몇 번인가의 헛손질 끝에
지퍼를 열고 치마를 벗긴 그는 유일하게
그녀를 지키고 있던 자그마한 팬티마저
벗겨내려 버렸다.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둔덕과 볼륨있는
몸매가 한눈에 드러나자 그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터질 듯 팽창하는 사내를 주체
못해 그는 와락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으로 깊숙히 미끄러져
들어갈 찰나였다.
따르르르...
귀청을 때리는 자명종 소리에 김석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명종 시계의 알람을 죽이고
실내를 둘러본 그는 이내 허탈감에
젖어들고 말았다.
그를 황홀경 속으로 몰아 넣었던 모든
것은 바로 꿈이었다. 또한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윤정님의 침대가 아니라
자신의 하숙방 이부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조금 전에 꿈 속에서 벌였던
정사의 여운이 후줄근한 진땀이 되어
찌꺼기처럼 그의 전신에 남은 채 불쾌한
감각만을 잔뜩 안겨 주었다.
그는 미처 치르지 못한 정사에 대한
아쉬움이 남은 듯 원망스런 눈길로
자명종 시계를 쏘아 보았다. 조금만 늦게,
단 5분만이라도 더 늦게 울릴 일이지,
하는 안타까움으로 그의 가슴 속엔
자명종에 대한 원망이 새록새록 피어
올랐다.
제기랄, 이게 무슨 주책이야.
이번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주책없는 자신에 대한 반감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어젯밤,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끝까지
억제했던 김석기였다.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생겨난 그녀에
대한 친근감이 정()으로 변화하고
이제는 연정으로 변모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그였다. 깊은 밤에, 그것도 여인의
농염한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아파트에 두 사람만이 호젓하게 앉아
있다는 것이 끊임없이 그를 충동하고
유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갑자기
야수로 돌변한다한들 조금도 꺼리길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자만심마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성과 지성을
총동원하여 본능과 충동을 억누르고
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인격을 믿고 집으로까지 초대한
그녀의 호의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고
그녀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남길지도 모를
행동을 스스로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만이
그녀를 아끼고 보호하는 길인 듯 싶었다.
그러나 이 무슨 추태인가. 비록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빚어진 일이긴 하나
이야말로 어기없는 간음이 아니겠는가.
정신적인 간음을 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스스로 자책을 했다. 이제부터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녀에게 이런 꼴을
들킨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는
간신히 자신을 추스렸다.
담배 한 개비를 뽑아물고 불을 붙인
그는 담배연기를 가슴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연기가 목구멍을 깔깔하게 간지럽히자
새롭게 정신이 들면서 그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씻어내어 주는 듯했다.
그는 이번에는 어젯밤 그녀의 집에서
가져온 메모쪽지를 집어 들었다.
어제 새벽녁에야 하숙방에 돌아온 후 한
시간동안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 보았으나,
끝내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 암호문과도
같은 이상한 부호였다.
그것은 윤정님의 남편 우춘구의 사물
속에서 김석기가 우연히 발견한 우춘구의
기록이었다.
K.
O.
S.
P.
H.
마치 고대 이집트 문자를 방불케하는
이상한 문구의 부호와 같은 글자들은
우춘구가 보관하고 있던 조세편람이라는
두툼한 책자의 뒷장에 낙서처럼 휘갈겨져
있었다.
글자를 확인한 윤정님은 우춘구의
필적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글자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그녀는 도무지
모르는 눈치였다.
조세편람이라면 공인회계사가 약방의
감초처럼 늘상 곁에 두어야 하는 필수품
중의 하나이다. 우춘구가 그렇게 귀중한
서책에 기록해둔 글이라면 그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 얼핏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의문스런 부호들을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그 뜻은 도통 풀어낼 길이 없었다.
혹시 고대의 갑골문자나 상형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는 백과사전을
들쳐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실망하고
사전을 덮어버렸다. 문제의 부호는 그가
내심 점찍었던 고대의 글자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장난스런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춘구가 장난삼아 끄적거린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더럭
치밀면서 회의가 불쑥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모양의
그림들 앞에 K, O, S, P, H 등의 글자들은
틀림없는 영문 이니셜로 뒤쪽의 그림
내지는 글자를 수식하고 있음이 분명한
듯했다.
언젠가는 이 글자의 비밀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때는 우춘구의 죽음에 얽힌
베일도 걷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기대를 다짐하면서 그는 메모지를
수첩 갈피 속에 소중히 끼워넣었다.
그리고 그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문득 오늘 오후에 윤정님과 만나기로 한
약속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오전 중에 신문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회의와 데스크와의 회합, 그리고
자질구레한 자신의 업무를 대충 마무리한
김석기는 점심을 함께 하자는 데스크의
언질도 뿌리친 채 열두 시가 되기 무섭게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소공동의 황실그릴이었다.
김석기가 헐레벌떡 달려 왔을 때
윤정님과 유용치라는 사내가 먼저
도착하여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가 좀 늦었죠?"
김석기가 겸연쩍게 자리에 다가가자
윤정님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저희들도 방금 왔어요. 참 인사하시죠.
조금전에 말씀드렸던 김석기
기자님이에요. 이쪽은..."
' "유용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내는 활달한 성격인 듯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한 후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정님씨로부터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많이
도와주십시오."
김석기가 먼저 분위기를 잡아나가자
사내는 대뜸 맞장구를 쳐 왔다.
"물론입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려야죠."
유용치의 시원하면서도 신선한 성격으로
인해 분위기는 대번에 풀어졌다. 딱딱한
대좌가 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던
김석기의 염려가 한결 누그러들면서
사내에 대한 그의 경계심도 가라앉는
"외람됩니다만 제가 먼저 몇 가지
묻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사내는 여전히 시원시원했다.
"우춘구씨가 근무했던 직장의 특성에
대해서 우선 알고 싶습니다."
"저희 합동회계법인에 대해서
말인가요?"
"네."
잠시 생각을 굴리는 눈치를 보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들 합동회계법인은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회사규모가 상당히
크겠군요."
"하하... 오해는 마십시오. 법인이라도
주식회사가 아니라 합명회사이자
무한 책임회사이고 공인회계라는 특수한
업종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 제조업체처럼
덩치나 규모를 따지긴 어렵죠. 저희
회사의 자산이라면 사람들뿐이니까요."
"네에... 그렇다면 직원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약 180명 가량 되죠."
"그 분들이 모두 공인회계사들인가요?"
"공인회계사는 100명 정도예요.
나머지는 관리직원들이구요."
"정말 대단한 규모로군요.
공인회계사라는 전문 직업인을
100명씩이나 거느리자면 일감도 엄청나게
많아야겠군요."
"물론이죠."
"그럼 우춘구씨의 회사내의 위치는
어떠했습니까? 직장 동료들과의 교우관계
같은 것두요."
사내는 거기서 주춤 눈빛을 모았다.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희들 회사의
분위기는 여느 회사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서로 맡은 업무가 제각각이고
모두들 혼자서 처리하기에 벅찬
서류더미에 쌓여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려서 옆방의 친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일 년 열두
달이 흘러도 동료 직원들끼리 회식 한번
하는 경우도 드문 편이니까요.
전문직이라는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고나 할까요? 사실
사무실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습니다.
서로 농담 같은 것도 건네는 일이 드물
정돕니다. 솔직히 저도 이번 사건이
생기고 윤정님씨의 부탁을 받고 우춘구 그
친구가 하던 파일을 들쳐서 목록을
정리하기 전에는 그 친구가 어떤 일에
매달려 있는지도 전혀 몰랐으니까요."
"우춘구씨가 하던 일은 어떤 일인가요?"
"목록을 윤정님씨에게 들렸으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회사의 일반적인
업무들입니다. 한가지 특성이 있다면 저희
합동회계법인은 국내 기업들의 외국부문
즉 해외기업부문을 전문적으로
취급합니다. 이 분야에서 저희 법인의
노하우는 독보적이죠. 자세한 업무 내용은
말씀드려도 쉽게 이해하시기 힘들
겁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유선생의
월급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순간 유용치의 안색이 붉어지면서 그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꼭...말씀 드려야 합니까?"
"네, 큰 지장이 없으시다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박봉에 시달리는 편입니다.
일반 회사 과장월급에도 못 비치죠."
"설마..."
김석기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공인회계사라면 일반인이 알기에는
전문직종에다 상당히 고급스런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편입니다.
공인회계사시험에서 어렵게 1차 2차를
통과해야 스태프의 자격이 주어지고.
그리고 다시 2년을 근무한 후에야 3차
시험을 치르는 자격이 부여되고 거기서
합격해야 정식 공인회계사가 됩니다.
그래서 받는 월급 초봉이 30만원
정도예요. 이 정도라면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그럼 우리 그이의 월급은 어느
정도였나요?"
"우춘구씨의 직급은 상당히 높은
편이죠. 스태프에서부터 매니저, 주니어
매니저를 거쳐 시니어 매니저가 되었지만
월급은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그럴 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얼핏 우춘구의 저금통장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무려 억대의 거금이
예금된 남편의 통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문득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기색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처럼
말문이 터진 유용치는 지금까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불평들을 시원하게 털어놓고
있었고 김석기는 연신 감탄을 거듭하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에 열중한
그들은 그 누구도 구석자리에서 그들을
노려보는 무서운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과연 유용치는 그이 장담만큼이나
재빠르게 사건의 중심으로 뛰어든 듯했다.
그와 헤어진 지 이틀 후 김석기는
유용치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윤정님의 노출을 막기 위해 유용치의
창구는 김석기로 못을
박아두었기때문이었다.
"김석기기자 계십니까?"
"유형이요? 접니다. 김석기입니다."
"아, 김기자님. 우춘구씨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니 뜻밖에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유용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한껏 들떠
있는 듯했다.
"그게 뭡니까?"
김석기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살해되기 몇 달 전부터 우춘구 그
친구의 인천출장이 유독 잦았습니다.
우춘구의 죽음은 인천출입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인천? 인천 어딥니까?"
김석기는 문득 긴장하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제가 지금 당장 인천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자세한 건 다녀와서
말씀드리죠. 기대하셔도 됩겁니다.
하하..."
김석기가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김석기는
깊은 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제는 인천이다. 인천이 또 등장하고
있다. 그는 쫓던 인천의 사건과 유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꺼림칙한 것
만큼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인천방면이
이번 사건의 주요무대의 하나임은 분명한
듯하다.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면 유용치에게 조심하라는 주의를
미처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그에게 엄청난 후회를
안겨주었다.


7. 고급사교클럽 - 왕궁
남대문을 아래로 굽어보며 우뚝
솟아있는 상공회의소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손삼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부터 그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도무지 자신감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손삼수가 방문하려는 상공회의소 빌딩의
2층 중회의실에서는 고도정보화사회를
추진하는 정보협의회, 약칭 고정협이
주관하는 제 5차 정기총회가 지금 막
개최되고 있었다.
손삼수가 그의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고정협에 관심을 두게 된 단 한가지
이유는 성귀희여사가 고정협의
협의위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성귀희여사가 고정협이 주관한 각종
심포지엄과 논문발표회, DB산업육성
방안에 관한 워크숍 등의 학술행사와
강연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성귀희여사의 사진앨범에서 그
모든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랭카드가 나부끼는 행사장에서 국내
유수의 석학들과 어깨를 맞대고 자랑스레
찍은 사진들은 성여사의 지성적 추구에
대한 욕구와 지적 사치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왕성한
사회활동욕구와 평소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손삼수는 다시금 확인을 했다.
그러나 성여사의 과거행적에 접근하는
일만은 정말 용이하지 않았다.
우선 고도정보화 사회를 추진한다는
고정협만해도 그랬다. 정보협의회
위원명단을 입수하여 위원들의 면면을
훑어본 그는 한 마디로 기가 딱 질리고
말았다.
고정협의 추진하는 사업들이 선국으로
막 발돋음하려는 우리 경제, 그리고
국가의 미래와 명운을 걸고 여러 가지
정책을 연구하고 홍보한다는 대승적
차원의 취지에도 문외한인 그로선 혀를
내두를 일이지만 무엇보다 전직 장,
차관을 비롯하여 현직 장관의 이름이
보이는가 하면, 학계 관계 재계 정계
예술계 사회단체 등에서 회장 사장 박사
변호사 판사 소장 단장 교수 국장들의
직함등을 지닌, 사회각분야의 거물급
저명인사들을 총망라한 듯한 구성원의
면면에는 솔직히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와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감을 부추기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복장 상태를
점검하고 넥타이를 매만지면서 상공회의소
빌딩을 향햐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 전에 결혼식을 올릴 때 넥타이를
매어보고 그 후로 넥타이를 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지라 목을 꽉 졸라맨 넥타이가
그를 더욱 거북스럽게 만드는 듯했다.
이 정도 고역은 어쩔 수 없지. 그는
억지로 자위하면서 빌딩 로비의 넓은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행사장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곳곳에 서
있어서 회의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된 지 꽤 오래된 듯 행사장
입구의 접수대에선 파장의 분위기가
엿보였다.
한가하게 손장난을 치고 있던 직원
두엇이 뒤늦게 손삼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삼수는 가벼운
목례로 그들을 제지하고 조용히 회의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회의장을 가득
메운 위원들의 열기가 후끈하게 얼굴로
달려오는 듯했다.
그는 다행히 비어있는 맨 뒤쪽의 좌석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총회의 목차와 기념강연의 연설문,
위원들의 명단들이 적힌 안내 팜플렛을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연단 위에서는 한국과학 연구소 남철희
박사의 기념강연이 한창 열을 뿜고
있었다.
"이와같이 컴퓨터, 반도체 등의
정보산업은, 80년대 이후 이미 급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높은 성장이
기대된다는 것입니다. 정보산업, 교육 및
연구 등 지식 산업 부문을 광의의
정보부문이라고 구분한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의 정보부문 고용자는, 83년 현재
17%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이는 미국의
1970년 41%, 1978년 서독이 32%, 1975년
일본의 30%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도 선진국의 발전유형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가정할때,
정보부문이야말로 앞으로 가장 빠른
고용의 성장이 기대되는 부문일 것입니다.
즉 농업, 제조업 등의 분야에서
생력화()가 되면서 여기서 방출되는
인력이 정보 부문으로 흡수되는
발전패턴이 예상되는 것입니다...(중략)
어쨌든 정보화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급속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 추세이며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같은 정보화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이를 우리
산업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컴퓨터의 원리 등을 전혀 교육 받지 못한
기성세대는 정보화를 마치 미래의
가상적인 픽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와같은 정보화의
인식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종의
보,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손삼수는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연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남철희 박사의 강연내용이 그의 귀에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연에 귀를
기울여 본댔자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도 거의 없었으므로 그의 관심은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는
일 뿐이었다.
맨 뒷줄에 앉아 있다보니 보이는건
참석자들의 뒤통수와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는 그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희끗희끗한 뒷머리와 뒷모습만
보아도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체취와
분위기가 은연중에 풍기는터라 그들과
얼굴을 딱 맞닥뜨린다한들 쉽사리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이
참석자들 중에 앉아 있을지도 모를,
성귀희여사와 불륜의 정을 통한 사내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손삼수는 덩달아 박수를 쳤다.
긴 강연을 마친 남철희박사가 좌중을
향하여 목례를 올리고 있었다.
남철희박사가 연단을 내려올 때까지
박수는 끝없이 이어졌다.
잠시후 사회자가 12층 연회장에 마련된
리셉션에 참석해 주길 요망하는 공지
사항을 알리면서 총회는 폐막되었다.
12층으로 장소를 옮기기 위하여 모두들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났다. 그리고
소란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물밀듯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손삼수는 팜플렛을 뒤적이는 등 딴전을
피우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퇴장하는
회의참석자들을 곁눈질로 슬쩍 슬쩍
살피는게 고작이었다.
잠시후, 참석자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
나가버린 회의장에 그는 혼자서 허전하게
앉아 있었다.
애초부터 크게 기대했던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성여사의 상대 남자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리셉션 장소까지 쫓아갈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어차피 오늘 당장
상대를 밝힐 수 없는 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행색으로 연회장을
서성거리고 싶은 생각은 정말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자. 그는 애써 자신을
추수리며 몸을 일으켜 천천히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남철희박사는 리셉션 장소에서 단연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의 강연 내용에 감명을 받은 회원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감상을 피력했고
남박사는 기꺼이 그들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칵테일 잔을 받쳐들고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서 남박사는 내심 흐믓했다.
한가지 서운한 게 있다면 이 자리에서
그의 자랑스런 모습을 지켜보아 주어야 할
성귀희여사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가 사람들 사이를 두어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메모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무심코 메모지를 펼쳐
릿그의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남박사님.
남박사님의 훌륭하신 강연을 정말
감명깊게 잘 들었습니다. 내일밤에
박사님을 초대하여 박사님의 고견을
경청하고 싶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시기
바라며 내일 오전중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스터 백으로부터"
백합이다. 그 놈이 이 자리에 끼여
있다니, 그는 등줄기를 스치는 으시시한
한기를 느끼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사회 저명인사들의 모임인 이
자리에서 누가 유력인사의 탈을 쓰고 있는
백합인지 그로선 짐작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래, 정식으로 나를 초대하겠다고?
내일이면 네놈의 상판대기를 구경할 수
있겠구나. 좋다, 암좋고말고. 그는 마음의
동요를 내색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며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다음 날 저녁 무렵, 남철희 박사는
테헤란로에 위치한 왕궁클럽을
찾아들었다. 병원장인 친구 홍성국 박사와
함께였다.
"남박사님, 왕궁클럽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회원전용의 고급
사교클럽입니다. 예약에서부터 모든
경비는 제가 책임질 테니 부담없이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참, 남들의 눈도 있고 하니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분만 함께 모시고
오십시오. 두 분이 술을 들고 계시면 제가
자연스럽게 그 좌석에 합석하겠습니다."
백합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바쁘다는
친구 홍박사를 억지로 끄집어낸
남박사였다.
고급 사교클럽이라는 백합의 자랑과는
달리 왕궁이 들어있는 건물은 웅장하기만
했지 외관상 볼품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왕궁내부로 몇 발짝 들어서면서
그는 백합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최고급 자재들을 동원한 실내장식하며
이탈리아 대리석과 크리스탈 상들리에로
장식된 입구에서부터 입장객들이 압도당할
만큼 실내는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시내에서 웬만한 고급 술집들을 두루
섭렵했다는 홍박사마저 혀를 내둘렀다.
입구에서 회원증 제시를 요구하는
종업원에게 남박가 이름을 대었더니,
종업원의 태도가 대번에 돌변했다. 그리고
깍듯이 잠시만 기다려줄 것을 청하더니
인터폰을 들어 안으로 그의 도착을 알리는
눈치였다. 이어 우아한 한복차림의 여인이
급히 나와 반색을 하며 그들을 반겼다.
"남철희 박사님이신가요?"
"그렇소만..."
"백사장님으로부터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 마담 송이에요."
백합이 여기서는 백사장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남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따라오시지요."
송마담이 앞장을 서고 그들은 뒤를
따랐다. 30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어쩐지 천한 느낌도 들지않을 뿐 아니라
제법 분위기마저 있는 송마담을
뒤따르면서 남박사는 한결 흥겨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오늘밤은 좋은일이
있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로와 같은 복도를 지나자 화려한 홀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송마담은 그
홀로 지나쳤다.
"아니, 여기말고 또 있습니까?"
송마담음 볼우물에 살짝 웃음이 고였다.
"네, 두 분은 오늘밤
특별회원이십니다."
"특별회원?"
"저쪽 홀은 일반회원전용 홀이에요. 두
분처럼 귀한 손님을 저런 누추한 곳에서
모실 수가 있나요?"
제법 마음에 들던 홀이었는데
누추하다니? 남박사의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살피며 의미있는 웃음을 던지고
송마담은 계속 안으로 걸었다. 그리고
다시 문을 두어 개나 지났을까?
"바로 여기예요."
송마담이 가리키는 홀로 들어서던
남박사와 윤박사는 그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넓은 홀의 한가운데에 실내풀이
널찍하게 자리잡은 기묘한 분위기가
대번에 그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경악케한 것은 풀과 그 주변에서
뒹구는 20여 명의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이 아닌가.
그녀들은 하나같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미모를 지닌 듯했고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을 정도로 팽팽하고
맑은 우유빛 피부들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도원경이 있었다니.
언젠가 독일을 여행했을 때 그곳의
남녀혼탕 사우나에서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본 기억이 얼핏 났지만 그건 도무지
여기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을 듯했다.
송마담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문득
그들의 상념을 일깨웠다.
"자, 마음에 드시는 파트너를 고르세요.
남박사님, 홍박사님두요."
남박사가 머뭇거리자 송마담이 다시
재촉했다. 남박사는 마지못해 풀 속에서
인어처럼 헤엄을 치는 한 아가씨를
지명했고 홍박사는 다른 아가씨를 골랐다.
"서유미, 주미애 두 사람 나와요."
송마담의 지시에 호명받은 두 아가씨는
물기를 채 닦지 않은 채 그들 앞에
마주섰다.
윤기 흐르는 그녀들의 몸매에 눈이 부신
듯 남박사와 홍박사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후 그들은 호젓한 밀실로
안내되었다. 남박사의 파트너 서유미와
홍박사의 파트너 주미애는 여전히 벗은 몸
그대로였다.
"춥지 않나? 가운이라도 하나씩 걸치지
그래?"
남박사가 안쓰러운 듯 입을 떼었으나
송마담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아가씨들은 원칙적으로 옷을 걸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박사님이
원하신다면 특별히 가운 정도는 걸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날밤 놀라운 향연을 벌이면서
남박사는 엄청난 폭주를 거듭하였다.
백합이 그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박사가 거의 고주망태가 되어 있을
때였다.
연구실 창 밖으로 울창하게 뻗어있는
포플러를 바라보며 남철희박사는 상념
속으로 젖어 들었다.
오늘따라 좀체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은 채 이미
식어버린 커피잔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의 마음 한자락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는 것은 바로 어젯밤의 술자리였다.
왕궁클럽의 파격적인 분위기는 그로선
좀처럼 엄두를 낼 수 없는 뜨거운
향연이자 기묘한 경험이었다. 어젯밤의
여흥은 오늘 이 시간까지 말끔히 씻어낼
수 없을 정도였고 잔잔한 여운이 여지껏
온몸을 맴돌고 있었다.
한가지 꺼림칙한 게 있다면 백합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그 백합이 나타난 것은 술자리가 거의
파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송마담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등장했을 때 그는 어지간히 취해 있었고
취중에서도 그에 대한 놀라움을
금치못했던 기억만큼은 새록새록
살아남았다.
기껏 시중의 건달 정도로 치부했던
백합이 어마어마한 클럽의 사장이었다니,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젯밤에 그가
백합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는 도무지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백합이 등장한 그 다음 순간부터 그의
필름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오늘
아침 그의 집 안방 침대 위에서였다.
인사불성 된 채 낯선 세단에 실려온
그가 집에 당도했을 때는 새벽 네 시가
거의 임박했었다고 아내가 귀띔해 주었다.
그렇다면 백합과 합석을 한 후 한두
시간은 족히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얘긴데
혹시 주책없이 헛소리나 내깔리지
않았을까?
더럭 걱정이 치밀면서 마음 한구석이
은근히 켕기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망발이라도 내뱉었다면 이야말로
큰일이다.
더구나 친구인 홍성국 박사가 함께
동석했던 술자리가 아닌가.
무엇보다 떨떠름한 것은 취중에 성귀희
여사와의 불륜을 스스로 떠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하... 실수? 그럴 만한 일도
없었지만 우리 사이에 뭘 그런걸 따지구
그래? 그나저나 어젯밤은 굉장한
밤이었어. 고 젊은 것들 말이야 지금도
삼삼하게 눈에 밝혀 환장하겠어. 이봐
그런 자리 언제 또 만들어 줄 거야?
...아, 백사장인가 하는 그 친구가
자네한테는 꿈벅 죽더구만. 하하...
친구따라 강남간다잖아. 이럴때 친구 덕
좀 보자구."
아침에 홍박사에게 전화를 넣어 슬쩍
떠보았더니 그는 장황하게 공치사를 늘어
놓았다.
다행히 눈에 띌 만한 실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적이 안도했다.
더욱이 그의 필름에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백합이 그의 앞에서 꿈벅 죽는
시늉을 했다니 그것도 과히 나쁜 기분은
아닐 듯했다.
그러나 생면부지인 그 작자가 왜 그렇게
흉물을 떨며 그를 후하게 대우했는지 그
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무리 곰곰 되씹어 보아도
그와 백합이란 사내는 일면식도 없었으며
그와 연결될 만한 선도 달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 작자가 오랜 지기라도 되는
양 후원자로 자처하고 나선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미심쩍은 그였다.
뚜.
인터폰 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급히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박사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누구?"
"백사장님이시라는데요?"
화들짝 놀란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안으로 모셔요."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작자가 내 연구실까지 찾아오다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낼 셈이로구나.
그래, 만나보자. 못 만날 이유도 없지.
도리어 내가 바라던 참이다. 그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마음을 추스렸다.
잠시 후, 여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백합이 연구실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허허... 갑자기 찾아와서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백합은 말과는 달리 조금도 염려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떡 벌어진 풍채를 흔들거리며 마치
십년지기라도 만나는 양 허풍을 떠는 그의
모습은 무척 세련되고 자연스러웠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침 부근을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만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백합의 말이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남박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엔 폐가 많았습니다. 워낙
고주망태가 되어 있어서... 무슨 실수나
하지 않았는지..."
남박사도 인사치레의 말을 던졌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무래도 제가
대접이 소홀했던 것 같아 마음이
켕깁니다."
백합은 예의를 차리는데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듯했다. 그의 화술로 미루어
짐작컨데 그의 말투에서 적의는 묻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여직원이 차를 날라 오는 바람에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남박사는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
주면서 백합의 면면을 슬쩍 훑어보았다.
백합은 회관상으로 당당한 풍채와 함께
사내다운 시원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또 그의 외모 어디에서도 백합이라는
별명이 풍기는 의미심장하고 야릇한
분위기나 채취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점잖은 신사일
따름이었다. 남박사는 자신이 짐작이
기우이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내.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내가 아직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적이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은 남박사님께 몇가지 자문도
구하고 부탁말씀도 드리겸해서
염치불고하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여직원의 모습이 사라지자 백합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남박사는
긴장감을 애써 감추며 찻잔에 손을
뻗었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자질구레한 말을 생략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남박사는 심호흡을 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 "박사님께선 우리 전자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재편성될지 짐작 하시겠죠?"
남박사는 흠칫 놀라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바로 그 문제였구나.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내색을 않고 백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백합의 입가로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얼핏 스쳤다.
"지난 연말에 정부 모 부처에서
박사님께서 몸담고 계신 연구소에 몇 가지
용역을 넘긴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의 말소리가 절로 떨렸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정확한 처방을 내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넘어온 용역일
겁니다.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나라의
산업 재편성에 관한 구도를 설정하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맞습니까?"
남박사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딱딱하게 낯빛을 굳힌 채
백합을 똑바로 쏘아 보았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박사님, 저 역시 우리 국익에 반하는
행위는 원치않는 사람입니다. 박사님을
해롭게 할 뜻도 전혀 없구요.
우선 제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남박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심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정부부처의 용역이라면 극비중에서도
철저한 보안을 요하는 극비사항이 아닌가.
그런대 백합은 용케 그 사실을 캐내어
추궁을 해오고 있었다.
가슴이 얼어붙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그는 제대로 입을 열 수 조차 없을
듯했다.
사실 지난 20년동안 줄기찬 도전과
불굴의 응전으로 편안할 날이 없던
전자업계는 최근에 들어서도 숨찬 변혁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부의 각종시책은 업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나 진배 없었다. 정부의 시책에
재빨리 편승하지 못한 기업은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고, 정부시책에 재빨리
부응하는 기업만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기업이 지닌 숙명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전화교환기부문 하나를
살펴보더라도 전화교환기 도입계획이
확정되고 사설교환기 부문에 외국과
합작한 P전자가 뛰어들게 됨으로써
T전자와 H정밀의 20년 독점아성이 거의
무너질뻔 했는가 하면 T전자와 H정밀의
반격이 주효해서 최근에는 정부의
전화계획 자체를 혼선을 빚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전자 교환기의 도입은
시기상조라며 이를 반대하던 체신부가
돌연 방침을 바꾸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전화수요에 대처키 위해서는 전화교환기
제작을 2원화 내지 3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바람에 한바탕 혼선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재계는 재벌 지배체제로 틀이
잡혀가면서 전자 폴리에스터 필름자동차
중화학공업 디젤 기관차의 생산독점권 등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이전 투구의 싸움을
벌이는 중인데 정부시책에 관한 정보가
어느 한 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그
싸움의 승패는 불을 보듯 빤해지지
않겠는가.
백합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는 순간 남박사의 등허리에는 진땀이
촉촉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백합은 여유있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바싹 앞으로 당겼다. 그의 입가에는
유들유들한 웃음이 맴돌았다.
"박사님께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바로 박사님께서 맡고계시는
용역이 어느쪽으로 결론이 나는지 귀띔만
살짝해주실 수 없겠는지요?"
"당신은 내가 연구결과를 쉽사리 털어
놓을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는 쌍심지를 돋우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백합은 더욱 유들유들한
미소로 그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박사님의 명예에 금이 가게
하거나 박사님의 인격을 훼손할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저는 단지 우리가 공생공존하는 길이
없을까 그 방법을 모색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박사님도 살아나고 우리도 살
수 있는 방법, 제 표현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 점은 깊이 사과 드립니다."
백합은 어디까지나 정중한 말투와
태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못 정중한 한마디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남박사의
폐부를 꿰뜰고 있었다.
남박사는 자신이 크나큰 함정에 빠져
들게 되었음을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모든 게 계획적이다. 이 작자는 바로
그걸 노리고 나에게 접근해온 것이다.
어쩌면 성귀희여사의 돌연한 죽음도 이
자들의 흉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음모를 어떻게 발견해낼 것인가,
남박사는 때가 너무 늦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떻습니까? 박사님."
백합이 은근히 재촉했다.
등줄기에서부터 번지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남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말씀하셔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내가 맡은 연구결과는 결론에
도달하자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
"알겠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선선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백합을 배웅한 남박사는
길게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백합이 눈 앞에서 사라진 순간,
나른하게 피로가 일거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큰일났군. 이 일을 어쩐다?
일단 지연작전으로 시간을 벌어두었으나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는지 그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다.
유용치의 전화를 받은 후 김석기는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의
새로운 전화를 기다렸다. 그 때문에 그는
될 수 있는한 외출을 삼가고 자리를 굳게
지켰다. 웬만한 외근은 옆자리의
석기자에게 모두 떠 넘겨버리고 전화통
주변만 맴돌았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가 기다리는 전화는 도통 걸려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어지간히 지친
그는 저녁 무렵에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전화를 기다린다는 건
시간낭비임을 비로소 깨달앗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따르르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주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야, 마침 자리에 있었군."
뜻밖에도 전화를 걸어온 건 손삼수였다.
"어때? 지금 시간 좀 낼 수 있나?"
"글쎄..."
"혹시 자네가 반가워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는데 싫다면 혼자 가야겠군."
"무슨 일이야?"
"인천 해안에서 변사체가 또 한구
떠올랐어."
"뭐! 인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김석기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나?"
"알았어. 지금 당장 달려갈게."
전화를 끊고 뛰어나가면서 김석기는
속으로 내내 빌었다. 제발 그의 조바심이
기우로 끝나기를.
그러나 그의 염려는 현실로서 눈 앞에
벌어지고 말았다. 현장은 울창한 송림이
넓게 펼쳐진 외딴 바닷가였다.
도무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듯한
한적한 지역이었다. 변사체는 갯벌이
끝나는 지점에 가미니로 덮여 있었다.
현지경찰의 안내로 현장에 도착한
김석기는 손삼수에 앞서 현장으로
달려갔고 가마니를 들쳐 보는 순간 그이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8. 플랑크톤의 비밀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 5012호실은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낯익은 정물들이 한눈에 들어오자
윤정님은 가슴 한 구석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누구에게랄 것없이 울컷 치미는
분노와 함께 애잔한 슬픔이 마음을 축축히
적셔왔다.
혹시 감상적인 충동에 마음이
여려질까보아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5012호실을 선택하고 말았다.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서린 곳이었지만 사건의 현장에서 사건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고 싶은
그녀의 염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래전에 신혼여행의 아름다운 추억이
서렸던 방에서 다시 묵고 싶다고 그녀가
둘러대자 프런트맨은 마침 비어 있다며
선선히 그 방을 내어 주었다.
가벼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정리를
마친 후 정님은 커튼을 열어 젖혔다.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겁게 가슴을 누르던 압박감이
일거에 씻겨지면서 마음이 일순
가벼워졌다.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로 한걸음 나서자
싱그러운 바다내음을 실은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닷바람을 폐부 깊숙히 들이 마시고
오염된 도시의 공기를 뽑아내기라도 할 듯
가쁘게 숨을 토해 내었다.
여러 번 반복하여 심호흡을 하고나자
온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베란다의 야외용 의자에
걸터앉은 정님은 끝없이 멀리 펼쳐진
수평선에 눈을 돌렸다.
일찍이 남편 우춘구와 함께 바로 이
자리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들
가정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려보고
싶어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런 소박한
꿈마저 이루어보지 못한 채 그녀는 변을
당했고 남편마저 잃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또 혼자서 수평선을
바라보자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울적해졌다. 처연한 마음과 함께 복수심이
고개를 쳐들며 다시금 그녀를 충동질했다.
가늘게 한숨을 내어 쉰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수평선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우선 누구와 접촉해야 쉽사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해 보아도
그건 쉽지 않은 문제일 듯했다.
하야비치호텔에 종사하는 수백 명의
종사원 중에서 그녀에게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접근하는 타이밍도 문제였다.
호텔측으로선 대외비의 일종인 기밀을
쉽사리 털어놓을 리는 없을 터이므로 단
한 번의 시도에서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가슴을 졸이며 고심을 거듭하던 정님은
이윽고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접촉할 대상으로 호텔의 중간
간부층에서 고르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비밀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최소한 과장의 지위정도는 돼야 가능할
듯했고 젊은 사람만이 자신의 처지에
동정을 보낼 듯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데는
밤시간이 더 적합할 듯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업무가 한가해질
뿐아니라 밤이라는 분위가가 사람들에게는
긴장감을 풀어주고 아무래도 느슨하게
헛점을 노출시키지 않겠는가.
일단 마음이 결정되자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객실에서 1층 로비로 내려 온 정님은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양식 그릴에서
호텔 특유의 풀코스요리를 시켜놓고 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맛을 음미하였다.
그녀로선 모처럼 포만감을 느낀 식사였다.
그리고 커피숍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소화도 시킬 겸 호텔 정원에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어둠이 뉘엿뉘엿 내려앉을 즈음 객실로
올라온 정님은 욕탕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했다.
온몸을 정성껏 닦고 가운을 걸친 후
룸으로 나오자 그제서야 그녀가 예정한
시각에 겨우 임박해 있었다.
그녀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전혀 큰일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네 프런트 데스크입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깔끔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객실담당 과장님 부탁합니다."
그녀 역시 깔끔한 목소리로 책임자를
.불러 내었다. 잠시후 정중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객실담당 매니저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전 5012호실에 투숙한 사람인데요.
과장님을 뵙고 상의를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그러시다면 이쪽으로 내려 오시죠."
"잠깐만요.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라
과장님을 조용히 만나뵙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과장님께서 제 방으로 찾아와
주실 수는 없을까요?"
뚱밖의 당돌한 제안인 듯 수화기
저쪽에서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내 당황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은 객실을 방문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손님이 방문을 요청하는데두요?"
"네, 그게 저희들 규칙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내려가죠.
과장님과 둘이서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요?"
"그럼 제 사무실에서 뵙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쪽이 조용할 듯
싶습니다만."
정님은 선선히 승낙을 했다.
정님이 다시 옷을 갖춰입고 내려간 것은
오 분쯤 지나서였다. 과연 객실담당
과장의 사무실은 2층의 후미진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과장은 목소리만큼이나 깔끔하게 생긴
30대 후반의 사내였다. 한눈에 선량해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보며 정님은 우선
안도를 했다.
"양성득이라고 합니다. 우선 좀
앉으시죠."
양성득()과장은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정님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과장은 눈이 부신 듯한 눈빛으로
정님을 바라보았다. 야밤에,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내를 객실로 불러 올리려는
여자치고는 그다지 행실이 나쁜 여자로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그는 여성 투숙객으로부터 은근한
추파를 받은 경험이 왕왕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단호히 거절한 그였지만
내심으로 오늘도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무슨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
힘이 닿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정님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장님은 이 호텔에 얼마나
게셨습니까?"
"서울에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내려온
지는 반 년쯤 됐습니다만."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과장님께서도 두 달 전에 바로 이
호텔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겠군요."
순간 양성득과장의 눈이 둥그래졌다.
"두 달 전이라면... 혹시... 사람이
추락사했던 그..."
"네 바로 그 사건입니다."
정님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제서야
짐작이 가는 듯 그는 놀란 눈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생각이 납니다. 아주머니께서
바로 그때..."
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할 말을 잊은 듯 놀란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 안에 침묵만이
무겁게 내리 깔렸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만에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왜 과장님을 뵙고 싶어했는지
궁금하시겠죠?"
양과장이 재촉의 눈빛을 보내왔다.
"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선 제가 처한
입장부터 들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고
정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의 사고를 당한 후 저는 한동안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그러니까 그이와 저는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몰라요. 우리가 왜 그런
끔짝한 변을 당했어야 했는지, 어쨌든
저는 우리에게 가해진 음모의 진상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었어요.
그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이의 한을
풀어주는 길이 될 것도 같구요. 그래서 이
호텔을 다시 찾아오게 된 거예요."
정님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실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그가 침묵을
깨뜨렸다.
"알겠습니다. 부인의 뜻이 어떠신지.
그런데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사건이 나던 날을 전후하여 이 호텔에
묵었던 투숙객 명단을 구했으면 해요."
"명단을?"
"네, 사건의 실마리를 잡는데는 그
당시의 투숙객 명부가 꼭 필요합니다."
"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 사건의 관련자가 당시 이 호텔에
함께 투숙했을 거라고 전 확신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 사건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이 호텔 주변에는
마땅한 민가나 숙소가 없으니까요. 우리
그이가 추락한 시각이 새벽 세 시였어요.
그 시간에 외부에서 누가 들었왔다면 쉽게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그러나 경찰
수사기록이나 그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으니까요."
양과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깊은 생각 속에
잠겨 들었다. 그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포착한 정님은 바싹
달라붙었다.
"부탁드립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알고 있어요. 경찰에 정식으로
부탁할까 생각해 봤지만 전 그렇게
번거롭게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과장님께 부탁드리는 거예요.
명단만 뽑아주신다면 과장님이나
호텔측에는 절대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님은 핸드백을 열어 준비해온
읖꺼내 가만히 밀어놓았다.
한눈에 두툼한 돈의 부피가 짐작되는
봉투였다. 양과장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
앉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건 도로
넣어두십시오."
"제 성의로 알아주시고..."
"알겠습니다. 부탁은 들어드릴테니 이건
도로 넣어 두십시오."
양과장은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저희 호텔에서 그런 사고를 당하셨으니
저희들한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되어서 승낙하는 겁니다. 단 비밀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네 약속할게요."
"제가 내일 오전까지는 뽑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룸으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님은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객실로 올라온 정님은 일단
목적을 성취했다는 안도를 느끼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룸서비스를 통하여 샌드위치 한 조각과
우유 한 병으로 아침을 때운 정님은
외출도 삼간 채 실내를 서성거렸다.
그녀는 양과장으로부터 명단을 입수하기
전까지는 계속 객실을 지키고 있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자니 오늘따라 시간이 무척
더딘 듯했다.
열시쯤이나 되었을까? 그녀가 시간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윤정님씨!"
뜻밖에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김석기였다.
"어머나 김선생님 아니세요? 여기
전화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예?"
"저 지금 호텔 로비에 와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서 급히 날아왔습니다."
"어머, 김선생님께서요?"
"네, 급히 만나야겠습니다. 만나서
말씀드리죠. 제가 객실로
올라가겠습니다."
정님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별안간 무슨
일일까? 김선생이 서울에서 이곳까지
부랴부랴 날아오다니. 불길한 예감이 더럭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허둥대고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것도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일이다. 정님은 문득 치미는
불안감에 몸을 웅크렸다.
윤정님은 호텔 객실로 들어서는
김석기의 표정에서 얼핏 초조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석기는 환한 웃음으로 안도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우선 마음이
놓입니다."
첫 인사치고는 과장된 제스처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진실로 그녀의
안위를 염려하는 그의 성의가 엿보이는
듯하여 그녀는 가슴 한구석에서 감동이
뭉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좀 앉으세요. 먼길 오시느라
피고하시죠?"
그녀는 짐짓 애교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그의 성의에 그녀가 보답할 것은 그외에는
달리 없을 듯했다. 아니, 지금 그녀의
입장으로선 그의 가슴에 매달려 짐짓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석기를 응접소파로 안내하고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음료수들을 꺼내어
탁자 위에 늘어놓은 후에야 그녀는 맞은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렇게 갑자기
제주도까지 날아오신 걸 보니..."
대답대신 김석기는 탁자위에 놓인
캔맥주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꼭지를
따내고는 단숨에 캔에 든 맥주를 거의
비워버렸다. 그는 며칠을 술에 굶주린
사람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님의
눈빛에 문득 불안이 감돌았다.
예사스럽지 않은 느낌, 바로 그랬다.
그녀는 허겁지겁 캔을 비워내는 그의
모습에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그의
고통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이윽고 가슴이 타는 갈증을 메운 듯 빈
탁자 위에 내려놓은 김석기는
이번에는 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 눈길을 쫓았다.
한참만에야 그는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방이 신혼여행때 묵었던 그
방입니까?"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망이 매우 좋은 방이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도 용기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선생님."
"네."
"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어떤
말씀을 하셔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말씀하세요."
흐릿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던 그는 결국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이번엔 담배를 붙여 물었다.
정님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선생님께서 급히 제주도로 오신 건
다른 볼일 때문인가요?"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절 만나러 오신거죠?"
김석기는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녀가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그는
묵묵히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날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산화하는 담배연기를
쫓던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
"유용치 씨가 살해되었습니다."
"예?"
순간 그녀는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건현장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손삼수는 현장 책임자이자 관할서인
인천경찰서 차홍락 형사반장으로부터
사건개요를 대충 전해들었다.
죽은 사내의 이름은 유용치.
순간 김석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하여 확인해
보았지만 죽은 사람은 틀림없는
유용치였다.
이럴 수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과 충격을 느끼며 김석기는 손삼수를
잡아 끌었다. 두 눈으로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친구가 갑자기 왜 이래? 아는
사람이야?"
"날 좀 도와줘. 부탁이야."
"잘 아는 사이냐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적 확인하는게 더 급해!"
투덜거리는 손삼수를 잡아 끌다시피하여
현장으로 달려간 김석기는 갯벌에
누워있는 유용치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틀림없는 유용치다.
울컷 치밀어 오르는 비위를 간신히
억누르며 현장을 빠져나온 김석기는
영문을 몰라하는 손삼수마저 뿌리친 채
무작정 거리로 뛰쳐 나왔다.
대담한 놈들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조직에 홀로 대항하고 있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윤정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금
등줄기로 차가운 한기가 스쳐지나갔다.
얼핏 정신을 차린 그는 급히 공중
전화부스로 뛰어들었다.
"저는 지금 외출중이오니 용건을 말씀해
주시면 돌아오는대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뚜 소리가 들리면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윤정님의 전화에선 자동응답기가 그를
상대해 주었다. 그는 낙심하여 수화기를
내리고 말았다. 아무리 초조하고
다급하다지만 자동응답기를 상대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문사로 돌아와 전화를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참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동응답기가 그를 상대해주었다.
도대체 어디로 싸돌아 다니는거야?
이렇게 밤이 깊도록. 은근히 불만을 품는
자신을 느끼면서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안달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외출에 간섭하고 나설 처지는 더욱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혹시 그녀마저 놈들의 수중에
떨어진게 아닐까하는 우려가 그에게 다시
전화통을 끌어당기게 만들고 있었다.
다이얼 버튼을 누르던 그는 문득 손길을
멈추었다. 지난번에 무심코 그녀가
내뱉었던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몇 군데를 조회한 끝에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그는
급히 제주도로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프런트를 통하여 그녀가
하야비치호텔 5012호실에 투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안전하다. 그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서둘러 제주도행을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를 예약하고
출장신청서 용지를 집어들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얼핏 뚜렸하게 초점이
모아졌다. 윤정님은 근심스런 눈길로
자신을 굽어보는 김석기의 시선과
맞닥뜨리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있지 않은가.
그러나 경황중에 몸을 일으키다보니
손을 뻗어 만류하려는 김석기의 품에
안기는 현상이 되고 말았다.
잚은 순간, 움찔 굳었던 김석기는 이내
부드럽게 그녀를 얼싸안았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얼떨떨하기는
정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빠져나오느라 허둥대면서 김석기를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웬일인지
그의 품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또한
그녀로선 감당하기가 힘에 겨운 사건이
연속되는 현실과 나약하고 무기력한
처지를 떠올리자 왈칵 설움이 치밀었다.
정님은 가늘게 울음을 삼켰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정님
씨를 지켜드릴 겁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정님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더욱 힘껏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녀는 서러움에 몸부림을 쳤고 그는
그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동치던 그녀의 어깨가 차츰 잦아들면서
격동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평정을
회복하는 걸 느낀 그는 그녀를 가만히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함께 옆자리에 누운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김석기는 그녀를 안고 있던 한손을 풀어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뺨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느낀 듯
새삼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고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기나긴 입맞춤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애타게 서로를 갈구했다. 그것은 운명을
함게 하고픈 동질의식이 유발한 절실한
행위였고,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김석기의 손이 그녀의 슬립 속으로 파고
들었다. 주츰 그의 손길을 제지하려던
그녀의 몸짓도 잠깐, 이내 그의 손을
풀어주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슬립을 풀어헤치고 봉곳 솟은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이 이번엔 급히
아래쪽으로 뻗어 나갔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은밀한 둔덕을
쓰다듬는 순간,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겨내었다.
눈부시게 하얀 그녀의 살결이 온통
드러나자 그는 깊은 신음을 토해 내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고통이자 신비이며
환희의 순간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몸 위로 쓰러져
갔고 격동의 시간이 흘렀다.
"미안하오..."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의 잔잔한
여운을 즐기면서 김석기는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아니에요. 죄스런 마음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어느새 놀라울 만큼의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김석기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방긋 웃음을 지으며 다시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잠시후.
그들은 호텔 뒤쪽에 면해있는 해변을
거닐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달려온
겁니다. 정님 씨의 일거일동이 놈들에게
체크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정님 씨와 접선하던 유용치를
먼저 제거해 버린 걸겁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유용치 씨는 이번
사건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에요.그런
사람을 꼭 죽였어야만 했을까요?"
"아마 그들의 정보가 누설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느꼈을 테죠. 바로 정님 씨 남편에
대한 비밀같은 것 말입니다."
""
"어쨋든 지금부터는 조심하는데 더욱
맛기해야 할 것 같아요."
"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우선 이 호텔에서 나갑시다.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손을 뻗쳤을지도
모르니까요."
정님은 새삼 놀라운 듯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녁 무렵 객실담당
양과장으로부터 숙박명부를 입수한 정님은
김석기의 손을 잡고 신혼부부 행세를 하며
하야비치호텔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유용치의 부검소견서를 읽어내려가던
손삼수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몰라 뜬구름이라도 잡는 것처럼
렇렷그는 유용치의 부검결과에
막연하나마 희망을 걸고 있었다.
힝대수사 00호, 1989년 0월 0일
시경강력계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회신함.
<질의 1>
유용치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회답>
전신몰입성익사()임,
강물, 바닷물, 풀장등과 같이 물이 많은
곳에 전신이 몰입되어 야기되는 익사로
가장 흔한 형태의 하나임.
<질의 2>
의 흔적은 있는지?
<회답>
본의 아니게 물에 들어가게 될때
반사적으로 주위에 있는 물체를 잡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으로 또 이렇게 강한
힘을 손에 주고 긴장한 가운데
사망하게되면 시체경직 때문에 그 물체가
사후 계속 손에 쥐어진 채 있게 된다.
흔한것으로 강가의 나무가지.뿌리.잡초
등이 있으나 본건의 경우 시체의 손아귀에
아무런 이물질도 없었음.
<질의 3>
를 판정하기 위한
플랑크톤검사의 결과는?
<회답>
물 속의 플랑크톤 분포는 과
중간층간에는 별로 차이가 없으나
과는 많은 차가 나며 의 경우
종류 및 그 수에 있어서 약 3배가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임.
귀하께서 현장에서 채취하여 체출한
플랑크톤과 시체의 표면에서 체취한
플랑크톤이 동일한 종류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체표면에서
다량의 플랑크톤이 검출된 점으로 미루어
시체는 까지 가라 앉았던 점으로
사료됨. 또한 플랑크톤의 종류가
해양플랑크톤 중에서도 연안 플랑크톤에
속하며 표면 100m에서 서식하는 상층성
플랑크톤으로 구분되는 접으로 미루어
현장의 수심은 100m 이내로 짐작됨.
그러나 위() 및 십이지장 이하에서
을 하던 중 검출된 플랑크톤은
하층성 플랑크톤으로서 수심 500m이하에서
서식하는 플랑크톤으로 밝혀짐.
이러한 이상한 현상을 현재로선 정확히
발힐 수 없음을 통보함.
손삼수는 부검소견서를 덮고 말았다.
이건뭔가 이상하다. 십이지장 속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의 서식지가 500m
이하라면 유용치는 깊은 바다 속에서
익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사체의
표면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은
100m 이하에서 서식하는 종류가 아닌가.
게다가 유용치의 익사체가 떠오른 지역도
비교적 수심이 앝은 해안이다.
그래, 여기에 뭔가가 있다.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손삼수는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하여 그가
품고있는 의문점을 풀어볼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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