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1-1

3학년2반 | 2022.02.03 07:52:02 댓글: 0 조회: 1797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392
불타는 여인 (상)

-김 성종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프롤로그
1. 下午의 정사
2. 첫번째 殺人
3. 사랑과 배신
4. 두번째 殺人
5. 용의자
6. 알리바이
7. 유밀라
8. 異國의 연인들
9. 美國人
10. 女人의 과거
11. 제3의 女人


프롤로그

1988년 7월 어느 비오는 날 오후.
다른 때 같으면 그녀를 녹초로 만들었을
그가 오늘은 영 힘이 없어 보인다. 그저
한번 형식적으로 배 위에 올라와 몇 번
아래위로 오르내리더니 10분도 못돼
물거품처럼 꺼져 버린다. 정신이 딴데가
있었던가 아니면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배미화(裵美花)는 미칠 것 같았다. 지금
막 달아오르려고 하는데 밑으로
내려가버리면 어떡하느냐 말이다. 그녀는
지금 배란기였다. 그래서 남자의 손길만
스쳐도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그가 잠재워주지 않으면
그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밖으로
뛰쳐나가 아무 남자나 붙잡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애걸할 것만 같았다.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기에는 얼마나 좋은 날인가.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그들은 지금 최고급으로
꾸며진 방안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아무도 방해할 사람이 없고 시간은
넉넉하다. 1인당 2만 원짜리 점심 뷔페를
먹고 나서 바로 자리를 옮겨 가볍게 한잔
하고 난 다음 곧장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 놓고 나서
여유있게 섹스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그야말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늘어질 때까지 그것을 하리라고 잔뜩
기대를 걸고 방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막상
벌여놓고 보니 그게 아니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황개(黃介)는 대단한 정력가이다. 이제
나이가 서른댓 정도밖에 안 됐으니 정력이
한창일 법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만한 남자를 찾기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숱한 남자들을 상대해
보았지만 황개만큼 절륜한 힘을 가진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비실비실하고 그것을 즐길 줄을
몰랐다. 첫번째에는 괜찮다 싶어도 회를
거듭함에 따라 시들시들해져 버린다. 그
못난 얼간이들은 그래도 동굴 속에
진입했었다는 사실을 놓고 제법
큰소리치려고 든다. 기둥서방처럼 말이다.
그들에 비하면 황개는 정말 사나이 중의
사나이이다. 그의 그것은 거대할뿐만
아니라 무를 함부로 빚어놓은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왜소하고 지성적으로 생겼는데 반해 그의
야성미에 그녀는 넋을 잃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이트칼라들의
지성미에는 진력이 나 있었다.
"왜 그래요? 기분이 안 나세요?"
그녀는 몸을 돌려 남자의 옆에다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왼손으로 머리를 받쳐
높게한 다음 곁눈질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남자는 넋 빠진 듯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담배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담배 그만 피우세요. 재 떨어지겠어요."
그녀는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내 침대
머리 위에 놓아둔 재떨이에다 비벼껐다.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아, 아니......."
두 사람 다 벌거벗은데다 시트조차 덮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흥분시키기 위해
밀어붙이면서 한손으로 그의 성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가을쯤에는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결혼은 결혼이고 이미 약혼한
사이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와 몸을 섞는
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 미치겠단 말이야. 어떻게 좀 해줄 수
없어요?"
그녀는 안타까운 나머지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남자의 성기는 아무리
애무해도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볼품없이 꺼져 있는 그것을 미화는
보고 싶지 않은 듯 자신의 허벅지로
덮었다.
"오늘은 안 되겠어. 기분이 안 나."
황개는 꺼져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여름 타는 것 아니야? 뱀탕
먹으러 갈래요? 난 옆에서 구경만 할께요."
"뱀탕?"
남자는 실소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숨을 푸욱 내쉰다.
"아이, 신경질 나. 이게 뭐야."
미화는 퉁기듯 일어나더니 침대가에
걸터앉아 담배를 뽑아문다.
"남자가 계속 빌빌하면 난 함께 못살 것
같아."
그녀는 뜨거운 입김과 함께 담배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밥은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그거
안하고는 난 못살 것 같아."
"넌 색골이야. 지독한 색골이야. 그래서
살이 안 찌는 거야. 나나 되니까 너를
상대하지 아마 다른 남자들은 하룻밤 자고
"그러니까 당신을 택한 거 아니에요?
자기 없으면 난 못살아."
그녀는 조금 마른 편이었기 때문에 벗은
몸매는 아주 늘씬해 보였다.
그녀가 그를 결혼 상대자로 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절륜한 정력 때문이었다.
그의 탁월한 섹스의 힘 앞에는 그의
단점들도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여 결혼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집안에서는, 특히
그녀의 오빠는 황개를 몹시 싫어한 나머지
그와 결혼하기만 하면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까지 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황개와 약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물론
오빠한테만은 알리지 않고 친지 몇 명만을
초대한 약혼식이었지만.......
여자쪽의 결혼 사유가 그런 반면
그녀의 재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녀이긴
하지만 성격이 너무 독선적이고
괴팍하리만큼 변덕스러워 인간 자체만을
놓고 볼 때는 결코 좋은 신부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한테는 그런
단점들을 커버해 주고도 남을 만한 충분한
재력이 있었다.
요즘 남자들 가운데에는 여자의 생김새야
어떻든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여자쪽의 돈이 탐나서 결혼하는 탐욕스럽고
짐승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남자들한테는 사랑이니 뭐니 하는 말 같은
것은 한낱 입에 발린 달콤한 말장난일
뿐이다. 그들은 누구를 사랑한다는 감정
같은 것이 결코 가슴 속에서 솟아날 수
없는 인간의 탈을 쓴 야수 같은 부류들일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미화의 재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수십억에서 백억은 넘을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황개는 그 확실한
액수만큼은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배미화의 아버지는 요식업으로 기반을
다져 큰돈을 번 사람이었다. 그는
요식업소를 곳곳에 차려 돈을 긁어모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제과점 체인을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식품업에도 손을 대
그야말로 짧은 기간 내에 운좋게도 사업을
크게 확장해 나갈 수가 있었다. 학교라고는
일제시대에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식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요리하는 법을 배워 얼마
후에는 요리사가 될 수 있었고, 사람이
밑천으로 결국 독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렇게 번 돈을 그는 놀리지 않고
땅에다 투자했다. 그는 전국에 걸쳐 땅을
사들였는데 그 가운데 서울 강남쪽에다
사둔 땅이 개발붐을 타고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그를 일약 거부의 대열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암으로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은
천억대를 상회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었는데 그 말이 헛소문이 아닌 것이
강남에만도 시가 백억대가 넘는 그의 소유
건물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강남에다 거대한 호텔을 짓다가 64세에 그
많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슬하에는 자식이 둘 있었다. 위로 아들
하나에 그 아래가 딸인 미화였다.
알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재산을 정리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사후 재산 상속문제를
둘러싸고 추잡한 잡음이 일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딸에 대한
부정(父情)이 남달리 뜨거웠던 그는
외아들한테만 재산을 모두 물려주지 않고
딸한테도 섭섭지 않게 얼마의 재산을
떼주었다. 특히 미화한테는 결혼을
시켜주지 못하고 떠나는데 대한 한스러움과
애틋한 감정이 남아 있어 아들 못지 않게
꽤 많은 재산을 남겨주었다고 하는데 당시
소문만 그렇게 무성하게 나돌았을 뿐
정확한 재산액은 알려지지 않았다.
방안은 두 사람이 피워대는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담배꽁초를 비벼끄고 나서
미화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볼멘 소리로 말하고 나서 의자에
걸쳐놓았던 빨간색 티셔츠를 집어들며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맨몸 위에다 뒤집어
씌었다.
"벌써 가려구?"
황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재미도 없는데 여기서 답답하게
뭘해요."
아슬아슬하게 음부만을 가리는 팬티를
끼고 나서 그녀는 검정 바지를 입었다.
"나도 가야지."
남자도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여자와 만날 약속이 있었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형식적으로 배미화와 관계를 맺고 나서
그녀가 빨리 돌아가주기만을 기다리고
생각대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옷을 입고 난 미화는 경대 앞에
서서 머리를 빗었다.
옷을 모두 입고 난 남자가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그는 푸른색
남방 위에 체크무늬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고 아래에는 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 멋진 차림은 미화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여자들이 모두 한번씩 돌아볼
정도로 그는 잘생긴 용모에다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방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때까지
황개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미화가
남자의 팔에서 어깨를 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여자 때문에 큰일이야."
"그 여자라니?"
황개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번득였다.
"올케 말이에요."
"밀라씨 말인가?"
순간 미화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어떻게 이름을 알죠?"
갑작스런 물음에 황개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미화가 말해 줬잖아."
"제가요? 그런 적 없을 텐데......."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보고
황개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지. 아무려면
어때. 뭐가 큰일이라는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일본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와 콜걸로 보이는
아가씨가 들어왔다. 미화는 바퀴벌레라도
본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가정부가 도통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아요. 걸핏하면 외박이고, 무슨 여자가
그런 여자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분에 못 이겨 아랫 입술을
깨문다. 황개의 얼굴 표정은 어느새 굳어져
있었다.
"아기는 빽빽 울어대지, 미치겠어요.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오빠한테 말해서
내쫓아 버려야지 그대로 둘 수는 없어요."
"오빠는 모르고 있나?"
살고 있다구요. 며칠 전에도 일본에
갔었잖아요."
문이 열리고 일본인과 콜걸이 먼저
내렸다. 남은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오빠가 알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우리
집안 생각해서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이번에
다 불어버릴 거야. 그런 여자는 결혼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야."
지하 주차장의 시멘트 바닥 위를
걸어가는 하이힐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주위를 울리고 있었다. 이윽고 배미화는
빨간색의 자기 차안으로 들어가 엔진을
걸었다.
"오늘 유감이 많아요. 숙녀를 이런
식으로 보낼 수가 있어요?"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차는 앞으로
퉁겨나갔다.
황개는 그녀의 차가 주차장 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자기 차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두번째로 만나기로 약속한 여인은
S호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차 안으로 들어간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차의 시동을 걸었다.


1. 下午의 情事

"죽여버릴 거야."
밀라(謐羅)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나서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누가 듣지 않았나 해서 살펴보았지만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는 적지 않은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한동안 얼빠진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를 죽이고
싶다,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죽여야 한다
라고 끊임없이 생각해 왔던 터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입 밖으로
벽에 붙어 있는 동그란 전자시계가 오후
2시 56분을 가리키고 있다. 약속시간에서
벌써 56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자는 항상
늦게 나타난다. 강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약자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이다. 아무튼 좋다. 오늘은 그자의
숨을 기필코 끊어놓고야 말리라.
그동안 여러 차례 그의 목숨을
노려왔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결행 직전에 언제나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어떻든
오늘은 결행해 내고야 말 생각이었던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그 안에서 조그만
동전지갑을 꺼냈다. 지갑의 지퍼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몇개의 동전과
함께 녹색의 조그만 플래스틱 갑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피부연고제 용기인데
지금은 다른 것 즉, 극약인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이 3cm쯤 되는
원형의 플래스틱 갑을 꺼내 귀에다 대고
가만히 흔들어보았다. 안에는 세개의
캡슐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거리고
났다. 극약은 세개 가운데 한개의 캡슐
속에 들어 있었고, 나머지 두개는 빈
것이었다.
빈 캡슐 두개를 극약이 들어 있는 캡슐과
함께 넣어둔 것은 플래스틱 갑이 하나만
넣어두기에는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뭘 하고 있어?"
굵고 게걸스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건장하게 생긴 사내가 뒤로부터 나타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건강미가 넘치는
사내였다.
"그거 뭐야?"
그는 강자답게 언제나 반말로 지껄인다.
그러나 수모를 느끼면서도 밀라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당황해서 동전지갑과 녹색
플래스틱 갑을 한꺼번에 싸잡아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뭐냐니까? 어디 봐."
그녀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 사내는
손을 내민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무좀약이에요."
그녀는 재빨리 웨이터를 불렀다.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웨이터가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미모에 눈이 부신 모양이었다. 사내가
맥주를, 그녀는 커피를 주문했다. 사내는
언제나 맥주를 즐겨 마신다.
"그거 가져왔어?"
굵고 게걸스러운 목소리가 협박조로
변한다. 멋모르는 계집아이들이라면 그
목소리와 잘생긴 얼굴, 건장한 체격에
야성미를 느낄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내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된 그녀는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타는 듯한 눈초리에 황개는 조금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꼬나물었다. 밀라는
고개를 홱 돌려 창문쪽을 응시했다. 대형
창문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이 마치
자신이 흘리는 눈물처럼 생각된다. 이 개
같은 놈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밖에는 비바람이 몹시 치고
있었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웨이터가 맥주와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그 손이 너무 희고
예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맞은편 대형
빌딩과 이쪽 S호텔 사이의 공간이 갑자기
어두워진 듯이 느껴진다. 진한 잿빛의 공간
사이로 비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거 가져왔느냐 말이야?"
혐오스러운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 핸드백을 열었다.
그리고 천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 사내 앞에 조용히 놓았다.
황개는 거침없이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흔들며
"얼마야?"라고 물었다.
커피잔을 가만히 집어드는 밀라의 손끝이
혐오감과 증오심으로 바르르 떨린다.
"보면 알 거 아니에요."
외면한 채 차갑게 내뱉는 그녀의 말에
사내는 어깨를 들썩하며 미소를 짓는다.
"왜 신경질이야?"
한마디 하고 나서 그는 우선 맥주를 잔에
따라 목을 축였다.
밀라는 넘어가지 않는 블랙커피를 억지로
끝장이야. 너 같은 거머리는 이 사회에
필요가 없어.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인다.
내가 살기 위해.......
사내의 긴 손가락이 봉투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냈다. 그것은 자기앞수표였다.
그는 거기에 찍힌 10,000,000원이라는
액수를 확인한 다음 그것을 다시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고마워."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에요. 약속을 지키세요."
그녀의 아름다운 두눈이 갑자기
투명해진다. 그녀는 흰 바탕에 푸른 물감을
거칠게 뿌려놓은 것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 지키지."
사내는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꼭 지켜야 해요. 전화 걸지 않는다는
것, 만나지 않는다는 것...... 약속대로
지켜야 해요. 지키지 않으면......."
"아, 알았어."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다음 말을
제지했다.
그동안 사내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혀 왔었다. 그녀의 약점을 움켜쥔 그는
그녀가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녀의 육체와 돈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고, 약점이 잡힌 그녀는
그의 그런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마지막 거레임을
다짐받았지만 그는 번번이 그 약속을
깨뜨렸고, 결국 그녀는 오늘까지 그의
너무도 많이 속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마지막 약속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로부터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을
받아내는 길은 단 하나--그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지."
그가 빙글거리며 일어설 채비를 했다.
그는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일을 여자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싫어요! 혼자 가세요! 난 좀 있다가
가겠어요."
밀라는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사내가 혼자 가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사내는
그녀가 계획한 대로 따라와주었다. 그녀는
사내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예상하고 있었다.
"서비스해 주겠다는데 왜 이래?"
"서비스 필요없어요."
"빡빡하게 나오지 말고 따라와. 따라오지
않으면 끌고갈 거야."
그가 일어서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는
충분히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끌고갈 수 있는 위인이었다.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밀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차
한잔을 마셔도 남자쪽에서 결코 사는 법이
없기 때문에 계산은 언제나 그녀쪽에서
치러야 했다. 그녀가 카운터쪽으로
다가가자 가까이에 서 있던 예쁘게 생긴
웨이터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S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 때마다 보게
되는 웨이터였다. 나이는 스물댓 정도
됐을까 한데 섬세하고 깨끗하게 생긴
인상에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호감이 갔다.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여자들의 모성애를 발동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충분한 그런 청년이었다.
황개는 그녀를 언제나 S호텔로 불러내곤
했다. S호텔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있으면서도 시설면에서는 최신의 특급
수준이었기 때문에 밀회 장소로는 그만한
데가 없을 것 같아 그들은 그곳을 자주
이용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웨이터의
시선을 받고 보니 그동안 그곳
종업원들에게 얼굴이 많이 팔렸다는 점이
그녀는 그 점 때문에 이번에 또다시 결행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결심은 그녀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확고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
출입구쪽으로 돌아서 그는 그녀를 향해
웨이터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밀라는
고개를 까딱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또
오십시오라는 말이 이상한 여운을 남기면서
그녀의 옷자락을 끄는 것 같았다. 전에는
그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의미있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까.
스카이라운지는 25층에 있었다. 황개와
밀라는 25층에서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내가 호주머니에서
방을 잡아두었다는 표시였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가 이미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아무데서나 흥분을 잘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야말로
즉물적인 사내였다. 그녀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러지 말아요! 난 그냥 가겠어요!"
"부인께서 왜 이러실까? 그러니까 더
예쁜데 그래. 내 허락없이는 한 발짝도 갈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나를 귀찮게하지
마."
1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
저쪽에 중년의 외국인 남녀가 서 있었다.
황개는 밀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밖으로
뜨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창피하게 뭐예요! 이거 놔요!"
그녀가 앙탈했지만 사내는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힘은 대단해서
그녀가 힘으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드러운 고급 카피트가
깔린 복도 위를 걸어가는 동안 사내의
우람한 팔은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싹
조여들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1924호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 열어."
그가 열쇠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뒤에서 두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흑하고
꽂았다. 뒤에 서 있는 사내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문이 열리자 그는
하체로 그녀의 엉덩이를 밀고 들어갔다.
그녀는 사내가 마치 미쳐버린 말 같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사각의
방안을 채우고 있던 적막감이 마치 두꺼운
벽처럼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
적막감에 익숙해지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사내의
두손이 그것을 깨뜨렸다. 한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다른 한 손이 아랫배를 주무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그는 그녀를
창가로 밀고갔다.
문득 그녀는 머리로 창을 들이받고
느꼈다. 사내의 손길이 흡사 거머리처럼
참을 수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자극이 심해져 올수록 차츰
엷어져 갔다.
사내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런 방법에
견뎌나가기란 실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그런 방법에 지금까지 길들여져 온 그녀의
악마적인 감성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사내는 매우 난폭하게 그녀를 다루었다.
아래로부터 자동차의 소음이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고, 이어서
두 개의 젖무덤이 흔들리는 것을 그녀는
마치 남의 것을 바라보듯 내려다보았다.
있는 꼭지는 검은 빛을 띠고 있었고 아주
굵어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아들이 빨아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상체를 굽혔기
때문에 원피스는 아래로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사내가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밑에서부터 걷어올렸다. 위에서
흘러내린 원피스와 아래로부터 걷어올려진
원피스가 마침내 그녀의 허리에 둘둘 말려
걸쳐져 있었다. 머리칼이 밑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너는 나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걸."
사내가 그녀의 팬티를 밑으로 끌어내리며
말했다.
"잊을 수 있어요."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천만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만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는 안 될 걸. 난 미화하고 결혼할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 되면 날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게 되지."
밀라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사내가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상대방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시누이 되는 아가씨였다.
황개와 배미화는 연인 사이로 주위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미화는 밀라와
황개의 불륜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만일......."
그가 뒤에서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는 머리를 창에 부딪쳤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네가 뭔데 안
그는 힘차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내를 계속
증오하고 싶었지만 그런 감정은 차츰
희미하게 엷어져 가고 있었고, 그 자리를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빠른 속도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는 관계를 하면서도 계속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너 같은 색골이 창기같이 말라 비틀어진
쬐그만 놈하고 어떻게 살지? 상대가 안 될
텐데 말이야. 넌 내가 아니라도 어차피
다른 놈의 서비스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여자야. 외국놈한테 길이 잘
들여졌으니 오죽하겠어. 넌 나를
미워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나한테 감사해야
해. 나같이 이렇게 서비스를 잘 해 주는
궁합이 맞아. 찰떡궁합이란 말이야."
그녀의 대리석같이 희고 둥근 큰
엉덩이가 더욱 높이 부풀어올랐다. 옷이
걸려 있는 허리가 더욱 가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엉덩이에는 풍요로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아름다움을 탐닉하기보다는 그것을
피괴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는 점점 높은 색조를 띠면서
규칙적으로 몸놀림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수치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오로지 황홀한 쾌감 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어느새 땀이 번지고
있었다. 허리를 중심으로 번들거리던 땀이
마치 기름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내가 그녀의
엉덩이에다 부지런히 기름을 발라대는 것
같았다.
사내의 두 손이 그녀의 허리쪽으로
움직이다가 밑으로 흘러 두 개의 젖무덤을
받쳐든다. 두 개의 젖가슴도 땀에 젖어
미끈거리고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그녀의 몸속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황홀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쬐그만 놈하고 어떻게 살지? 말해봐.
어떻게 사느냐 말이야?"
남자는 자신의 정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가 대단한 정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온몸에 심한 경련을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사내가 말했다.
"일어나. 아직 멀었어."
밀라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대형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마치 얼굴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칼도 땀에 젖어 있었다.
"일어나라니까!"
사내가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더니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밀어붙였다. 그는 아직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언제나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유지되는
것 같았다.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좀 쉬었다 해요."
밀라는 상체를 굽히는 대신 몸을 바로
감촉이 얼굴과 가슴, 복부에 와닿았다.
그것은 새로운 자극이었다. 뒤에서 그가
두팔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밀어버릴까?"
그가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빗속을 헤치며
달리는 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창문은 아주 두꺼워 보였다. 그러나 그가
뒤에서 힘껏 밀어버리면 깨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거머리처럼 창문에 달라붙으면서
"밀어보세요, 힘껏......."하고
중얼거렸다.
사내는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다가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있어. 저기 맞은편을
보라구."
그가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그녀는 맞은편에 있는 대형 빌딩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슨 보험회사
빌딩으로 최근에 완공된 것인데 현대적인
감각을 최대한 살린 아주 멋진 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바로 마주보이는 층의 창가에 몇
사람이 붙어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뭐하는 거야? 빨리 이리 오지 않고!"
황개가 뒤에서 소리질렀지만 그녀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나체를 정면으로
느끼고 있었다. 창문에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면 차마 그렇게 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흐르는 빗물이 엷은 커튼처럼 막을
이루면서 그녀의 몸에 변화를 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느 전위예술가의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몸놀림 같기도 했다.
그녀는 두 손을 높이 쳐든 채 가슴과
복부로만 창문을 비벼댔다. 그녀의
엉덩이가 퍼지기도 하고 오므라지기도
하면서 좌우로 밀려다니는 것이 마치
흘러내리는 빗물을 배경으로 움직이는
환상의 스크린 같았다. 황개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제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창문에 눌려
납작해졌다. 볼테면 봐라, 얼마든지.
움직였다.
"아, 목 말라...... 맥주 한 병
줘......."
그녀가 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대담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장면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내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냉장고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음료수와 몇 가지
술병들이 들어 있었다. 맥주병들은 작은
것들뿐이었다. 그는 안에서 두 개의
맥주병을 꺼내들었다. 그의 목도 말라
있었다. 마개를 딴 다음 창가로 가서 한
개를 건네주고 다른 한 개는 자신이 마시기
위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저 사람들 봐. 잔뜩 모였잖아. 미쳤어,
"그래, 난 미쳤어. 당신도 이리 와요.
와서 나하고 함께 쇼를 해요."
그러나 사내는 가지 않았다.
"겁쟁이! 바보 같으니!"
그녀는 병을 입으로 가져가서 나발을
불었다. 맥주는 그녀의 작은 입 속을
채우고 나서 밖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술을
부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내린 술이
거품을 일으키면서 목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가슴을 적셨다. 가슴을 적신 술은 복부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맥주 거품에 덮인
젖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어깨를
움츠렸다. 자기 가슴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듯 몇번 그렇게 움켜쥐고 흔들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 남자를 바라본다. 사내는 탁자
올려다본다. 그녀는 빈 병을 바닥에다
던졌다. 흘러내리던 맥주 거품은 그녀의
하복부 아래 음부 위에 몰려 있었다.
그녀는 사내를 쏘아보다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맥주병을 집어들어 사내의
머리 위에다 부었다.
"왜 이래? 이게 미쳤어!"
황개는 기겁을 하며 일어섰다. 그의
머리와 얼굴은 맥주 거품으로 허옇게 덮여
우스꽝스러웠다.
"꺼져! 빨리 꺼지란 말이야!"
그녀가 다시 술병을 쳐들자 그는 재빨리
욕실로 뛰어갔다.
"미쳤군!"
그가 욕실에서 얼굴만 내민 채 말했다.
"그래, 미쳤어. 어쩔테야?"
멈칫하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까불지 말고 이리 와. 이리 와서 좀
씻어줘."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몸을 씻어달라고 요구한다. 몸을
씻어주고 나면 발톱과 손톱까지 깎아달라고
주문한다. 거절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끝까지
들어주기는 하지만 그 수치심과 굴욕감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남편한테도
해주지 않는 서비스를 황개한테는 해주는
것이다. 그는 귀부인이 굴욕적인 태도로
자신에게 절대복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몹시 즐긴다. 그녀가 복종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미라도 보이면 그는
폭군으로 돌변해 그녀를 구타한다.
"들어와."
그가 욕조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까딱해
보인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맥주병이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맥주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녀는
사내를 죽이려면 그 전에 증오심을 잔뜩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섹스의 황홀감
때문에 사그라져버린 증오심을 빨리
되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오늘 왜 그러는 거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그가
물었다.
"마지막 축제니까요."
그녀는 무표정하게 뇌까렸다.
"마지막 축제라고? 흥, 잘해봐. 그거
이리 주고 몸이나 씻어줘."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주는 대신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맥주를 입
안에 가득 머금었다가 갑자기 사내의
얼굴에다 대고 푸우하고 뿜었다.
피할 새도 없이 맥주를 얼굴 가득히
뒤집어쓴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이 쌍년이 미쳤나?!"
"그래! 미쳤다! 이 개 같은 놈아!"
"뭐가 어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사내는 주먹으로
그녀의 턱을 갈기고 나서 연이어 무릎으로
복부를 내질렀다. 걸레처럼 구겨지는
그녀를 이번에는 발로 짓밟아대며
소리쳤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빌라는 거야?"
밀라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손으로 사내의 가슴을 밀면서 그의
얼굴에다 퉤하고 침을 뱉었다.
"빌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야."
"이 씨팔년이 뒈지려고 환장했나!"
그는 단단한 이마로 번개같이 그녀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그녀는 코를 싸쥐면서
벌렁 나가떨어졌다. 뒤통수를 벽에다 세게
부딪쳤기 때문에 한동안 멍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
같아 손을 대보니 검붉은 피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콧잔등이 부어 있었고, 코에서 흘러나온
피로 코와 입 주위가 지저분했다. 고개를
떨어졌다. 그녀는 손으로 그것을 닦았다.
코 밑에 괴어 있는 피를 손에다 잔뜩 바른
다음 그 손을 황개의 얼굴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 얼굴에다 피를
처발랐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던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검붉은 피가
처발라진 그의 얼굴은 흡사 드라큐라처럼
흉칙스러워 보였다. 그는 그 흉칙스러운
얼굴을 돌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잠자코 여자의 두 팔을 움켜잡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 다음 그녀를
욕실 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뚱이는 옷장에 세차게
부딪쳤다. 머리가 먼저 바닥에 부딪치고
나서 몸뚱이가 옷장에 부딪쳤기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뒈져버려, 쌍년아!"
그녀 앞에서 욕실 문이 쾅하고 닫혔다.
"개새끼...... 넌 죽어야 해......."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냉장고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자신이 마치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문을 붙들고 일어선 그녀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작은
맥주병이 두 개 남아 있었다. 황개는
맥주를 즐겨 마신다.
그때부터 그녀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맥주병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마개를 땄다. 그런 다음
아까 백 속에 쓸어넣었던 녹색의 플래스틱
갑을 백 속에서 꺼냈다. 그녀는 욕실쪽에
머뭇거리가나 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아주 침착하게 캡슐을 하나 꺼내
두쪽으로 분리해냈다. 첫번째 것은 속이
비어 있는 캡슐이었다. 그것을 바닥에 버린
다음 또 하나를 집어들었다. 두번째 것도
빈 것이었다. 세번째 것을 세워서
조심스럽게 분리해내자 아래쪽 캡슐에
백색의 분말이 넘칠 듯 들어 있었다.
그것은 치사량을 훨씬 넘는 양이었다.
그것으로 그녀는 황개를 열번이고 죽이고
싶었다. 맥주 두 병에다 모두 극약을
넣으려다 말고 그녀는 한 병에만 그것을
모두 털어넣었다. 극약을 넣은 병은
뚜껑으로 도로 봉해 놓았다. 황개가 샤워를
하고 나서 틀림없이 맥주를 찾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서 있었다.
그들은 다음에 나타날 보다 놀라운 장면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극약을 타지 않은 맥주를 반쯤
들이켜고 나서 맥주병을 탁자에서 멀리
떨어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다
내려놓았다.
방안은 몹시 어질러져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황개가 극약을 탄 맥주를 마시고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방을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방을 빠져나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를 집어들고
천천히 입기 시작했다. 옷을 입는 동안
그때까지 갈가리 해체되었던 몸뚱이가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와 조립되는 것
옷을 입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몰골이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피는
더 이상 흐르고 있지 않았지만 부어오른
콧잔등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휴지로 핏자국을 닦아내면서 다시
한번 살의를 굳힌다. 빗으로 머리칼을
빗는데 두 줄기 분노의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린다. 감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흘러내린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은 다행히 외국
출장중이기 때문에 얼굴의 상처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남편은
외국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창기도 여동생 미화가 신랑감으로 황개를
선택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개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는 여동생이
적이 실망하고 있었다.
빗질을 끝낸 그녀는 창가로 다가섰다.
맞은편 빌딩의 창가에 몰려서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
같았다.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고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그녀의 두
눈이 허공에 머물렀다. 하늘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바람이 소용돌이치는
하늘로 자신의 몸뚱이가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면서 그녀는 황개한테
시달린 지난 1년 동안의 고통을 잊으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2. 첫번째 殺人

S호텔 지하 주차장은 어둠침침했다.
에어컨 시설은 물론 통풍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몹시 후덥지근했다. 넓은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지만
군데군데 빈 자리가 더러 있었다.
황개의 최신형 고급차는 맨 구석쪽에
세워져 있었다. 그는 차를 몹시 아꼈다.
그의 차는 2천만 원대가 훨씬 넘는 고급
차로 구입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검은색의 그 차는 항상 번쩍번쩍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요즘은 장마 때문에 차를
닦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물론 그가
직접 차를 닦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한 달이
뻔질나게 차를 갈아치우곤 했다. 새 모델이
나오면 구 모델에 금방 싫증을 느끼고
최고의 새 모델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적당한 방법이 할부로
차를 구입하는 방법이었다. 차를 조금
굴리다가 싫증이 나면 중고차 시장에 내다
판다. 빨리 내놓을수록 많은 값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돈으로 새 모델을 할부로
구입하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그는 항상 새
차를 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급 차는
과시욕과 사치벽을 충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후덥지근한 주차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 서둘러 차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올라가 앉았다. 그의 얼굴은
낭패감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될대로 되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을 닫고 엔진을 걸었을
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푹 꺼진 느낌이 들면서 앞에 무엇인가
걸렸는지 나가지가 않는다.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꺼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가 바싹
옆으로 다가붙으면서 접근해 왔다. 그
소형차는 후진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곧장 다가들고 있었다. 차가 세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도
스치듯 바싹 다가붙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개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곁을
스치면서 운전석의 여인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순간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수세미 같은 머리에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쌍년!"
투덜거리면서 황개는 다시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나 차는 더욱
밑으로 꺼지면서 앞바퀴에 무엇이 걸린 듯
나가지가 않는다. 그러고보니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펑크가
난 것 같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옆에 차가 바싹 붙어서 있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여자가 운전해 들어온
차는 황개의 차와는 엇갈리게 서 있었다.
황개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뒤로 뺀 다음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차를 이렇게 바싹 붙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갈 수가 없잖아. 자리도 넓은데 왜
빨리 빼요!"
그러나 상대방은 차를 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엔진을 꺼버린다.
"이봐! 안 들려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황개는 고함을
질렀다. 그때 뒤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의 차 뒷문 창이
박살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여자가
운전석에 앉은 채 망치로 차창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저런 미친년! 야, 이 미친년아! 무슨
짓하는 거야?"
황개는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반대편 문도 벽에 막혀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다. 그는 어떤 미친년이 발작을 일으킨
몸을 웅크렸다. 그때 뚫린 구멍을 통해
큼직한 플래스틱 통이 안으로 던져졌다.
황개는 가솔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는 위기를 느꼈다.
그 여자가 차를 바싹 갖다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운전석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옆차에 쿵하고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마련되지 않았다. 겨우 주먹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생겼을
뿐이었다.
여자는 황개의 욕석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움직임이 결코
서두르는 빛이 없이 매우 침착해 보였다.
황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뻥 뚫린 뒷문
유리창을 통해 날아든 빨간 담뱃불이었다.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악! 사람 살려!"
황개는 몸부림치면서 발로 문을 박찼다.
그때 여자는 자기 차의 운전석 옆자리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 문이 옆차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단말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처절하게 지하실을 울렸다. 차 안의 사내는
시뻘건 연옥 속에서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오다가 멈추는
것이 보였다. 차 안에서 남자 두 명이
놀라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베이지색
소형차에서 빠져나온 여인은 마치 도움을
청하듯 헐떡거리며 그들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너무 놀라고 숨이 차서 말을 꺼낼
했다. 남자들은 앞뒤 가릴 새도 없이
차속의 남자를 구하기 위해 사고차쪽으로
달려갔다. 그 틈을 이용해 선글라스의
여인은 호텔 로비로 통하는 비상구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그녀는 체크 무늬
바지에다 헐렁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점퍼는 푸른색이었다.
사고차쪽으로 달려간 남자들은 우선 그
옆에 바싹 세워져 있는 소형차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열기와 연기 때문에
그 차에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용감하게 거기에 다가섰다. 두
사람이 차를 끌어내려고 밀어보았지만
그것은 조금 움직이는 듯하다가 말았다.
차 속의 울부짖음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고, 격렬히 몸부림치던 모습도 많이
그을린 두 개의 팔이 삐져나오더니 허공을
더듬는 것이 보였다. 시뻘겋던 불길이
시커먼 연기와 뒤엉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야 해!"
한 남자가 다급하게 말하자 다른 남자가
차 문을 당겨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그는 상체를 디밀어
기어를 중립에 놓은 다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이 함께 차를 밀어보았다.
소형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어느새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그러나 맹렬히 뿜어대는 시커먼
연기와 불길 때문에 모두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삼가고 안전한 위치에 서서
구경들만 하고 있었다.
접근하지 못한 채 불길에 싸여 있는 차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와요! 이제 나올 수
있으니까 밀고 나와요!"
그때 펑하면서 불길이 솟았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지금까지의 불길보다 더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연료탱크가 터졌어!"
소형차를 끌어냈던 두 사람도 황급히
몸을 피했다.
"저거 봐! 사람이 나오고 있어!"
그들은 놀란 눈으로 사고차를
바라보았다. 운전석 문이 열려 있었고
거기서 불길에 싸인 시커먼 것이 차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몸부림치지도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쓰러진 채 꿈틀거리던 그것이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구경꾼들
가운데 특히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이제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일어선 괴물은 몸에 불이 붙은 채
구경꾼들쪽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여자들이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 소리에 괴물은 멈칫하는
것 같더니 더 이상 걸어오지 못하고 술취한
나무토막처럼 쿵하고 쓰러졌다.
지하실에는 이제 연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호텔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얼굴에 가스마스크를 쓴 채
소화기를 들고와서 괴물을 향해 소화액을
분사하자 비로소 불길이 잡혔다.
그때까지도 괴물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물의 몸에서는 이제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연기로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에 모두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차장 출입구가 굴뚝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것을 보고 특히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사람이 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의 차가 어떻게 됐는지
더러는 호텔측에 거칠게 항의하기도 하고
일부는 소방차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해대기도 했다.
비까지 내기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
주위는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고 호텔 경비원들과
경찰은 구경꾼들을 몰아내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순식간에
커지더니 이윽고 빨간색의 소방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경찰
퍼트롤카들도 도착하고 있었다.

비상등을 깜박이며 낡아빠진 승용차 한
교통경찰관이 막아섰다. 그가 붉은
신호봉을 흔들며 돌아가라고 하자 차 안에
있던 젊은이가 신분증을 내보였다. 그것을
보고 교통경찰관은 거수경례를 한 다음 그
차를 통과시켰다.
"굉장한데요."
호텔 주위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남달호(南達浩)형사가 말했다. 비가
거세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않고 우산을 받쳐든 채 몰려 서
있었다. 무수히 퍼져 있는 우산들을 보고
마인(馬仁)은 그것이 꼭 물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호텔 정문 앞 빈
터에다 차를 박았다.
"요즘은 왜 호텔에서 이렇게 자주 말썽이
생기지?"
"글쎄 말입니다."
그들은 삼엄한 경기바 퍼져 있는 호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 주차장 출입구는
연기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출입구를 통해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서있다가 S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번쩍거리는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바닥과 벽을 치장한 로비가
그들을 맞았다. 로비의 사치스러움에 비해
형사들의 모습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S호텔은 그들의 관내에 있는 특급
호텔이었다. 직속 상관인 구계장이 S호텔에
빨리 가보라고 전화를 걸어온 것은 30분
전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이 불에
타죽은 모양이야. 빨리 가봐. 20분 후에
거기서 만나. 계장의 지시를 받고 난
주지 않는 상관과 조직의 횡포에 그는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랄 수도 없는 것이다.
수사 인원에 비해 사건이 너무 폭주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그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을 내려갔을
때 시체 주위에는 몇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안개가 걷히듯 연기가 걷히고 있었고
환풍장치를 모두 가동시켰는지 바람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침을 해대고 있었고 소방대원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차에다 대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지하실 바닥은 온통 물에 젖어
있었다.
"물 그만 뿌려요! 불 다 꺼졌는데
쓸데없이 왜 물을 자꾸 뿌려!"
구계장이 소방대원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다가가
계장에게 목례를 보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좀 오지
않구......."
"차가 밀려서......."
"이걸 좀 보라구. 이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좀 보라구. 완전히 불고기야."
계장이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불고기는 불고기인데 까맣게 타서 먹을
수가 없겠군요."
마형사의 말에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너무 지나친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병원에 빨리 데려갔으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남형사가 볼멘 소리로 말하자 계장이
호텔 경비원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경비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왕 죽을 바에는 현장에서 죽는 게
낫지. 시체가 병원에 가 있는 것보다는
현장에 남아 있는 게 우리한테는 일하기가
좋으니까. 냄새가 지독하군."
계장은 손수건으로 코를 싸쥐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불에 익다못해 까맣게 타버린 살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머리에는
타버리고 없었다. 타고남은 찌꺼기 같은
것들이 알몸에 눌러붙어 있을 뿐이었다.
너무 까맣게 타버린 바람에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굴은 까맣게 탄데다 짓뭉개져 있었다.
까맣게 타서 오그라붙어 있는 성기를
보고서야 죽은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마형사는 알 수 있었다.
"저 친구들이 최초의 목격자들이니까
이야기를 잘 좀 들어봐."
마형사는 계장이 가리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서른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마형사는 최초의 목격자라는 그들에게
바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대신 불에 완전히
슬금슬금 다가갔다.
차 안에서는 아직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무 완전히 타버렸기
때문에 참혹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남형사가 최초의 목격자들을 상대로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마형사는 차 주위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면서 돌았다. 벽쪽에
붙어 있는 쪽은 너무 바싹 붙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네개의 문 가운데 운전석쪽의
문만이 열려 있었는데 그 문은 무엇에
부딪쳤는지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앞창도
깨져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차 안에 있던 사람이 탈출하기 위해
깨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쪽으로 탈출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앞쪽으로 가서 차 밑을 살피던 그의 눈에
그것은 보통 벽돌보다 크기와 두께가 두
배 정도 더 되는 것이었는데 양쪽 앞바퀴
앞에 괴어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들어 보았다. 그것은 장식용으로
쓰이는 벽돌 같았다.
"뭐 발견했어?"
계장이 다가와 물었다.
"이런 게 앞바퀴 밑에 괴어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겠지."
계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마형사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가 비탈길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 반듯한데다 주차시키면서 이런 걸
괴어놨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호텔 주차장에서 말입니다."
마형사는 경비원을 불렀다.
경비원은 몹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마형사는 그에게 벽돌을 보였다.
"이거...... 이 주차장에 있는 겁니까?"
"못 보던 건데요."
"여기다 차를 주차시키면서 바퀴 앞에다
이런 걸 괴어놓은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경비원은 고개를 흔들면서 실소했다.
"그런 사람은 본 적 없습니다. 여기는
편편한데 그런 걸 괴어놓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마형사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서 차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뒷부분이 왼쪽으로
꽤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앞바퀴
타이어는 불에 타지 않고 온전했다. 불에
타지 않은 부분은 타이어뿐이었다. 그는
차 밑을 살펴보니 뒷바퀴 하나가 바람이
빠져 푹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차
꽁무니와 벽 사이에 사람 하나가 겨우
끼어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뚱보
형사는 낑낑거리며 엎드려서 기어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바람이 빠진 바퀴에는
속이 비어 있는 원통형의 파이프 같은 것이
하나 박혀 있었다. 바퀴 속의 공기는 직경
5밀리 정도 굵기의 그 파이프를 통해서
모두 빠진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중얼거리면서 기어나온 마형사는
계장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한번 보십시오. 고의적으로 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계장은 연기에 그을린 차의 검정이 옷에
살펴보았다.
"저건 망치로 두드려 박은 것
같은데......."
비로소 계장도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았다. 마형사는 손을 털면서 최초의
목격자들한테 다가갔다.
처음 사고 현장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총각들로 아가씨들과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S호텔에 왔다가
뜻하지 않게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남형사가 대신
전해 주려는 것을 마형사가 막았다.
그는 한 사람 건너서 듣는 것보다는
목격자들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그것이
보다 정확하기 때문이었다. 목격자들로서는
아니었다. 상대방이 귀찮아하든 말든 그는
정확한 증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가 그러니까 6시 30분경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데 보니까
시뻘건 불길이 펑하면서......."
증권회사에 다니는 두 젊은이는 다행히
귀찮아하는 기색없이 아주 성실하게 증언해
주었다. 그들은 그들이 끌어낸 소형
승용차쪽으로 다가가 열심히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불에 탄 차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차가 없었다면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차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중립에 놓고 차를 끌어냈죠."
"그 다음에 저 사람을 끌어냈나요?"
시체를 향해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고
있었다. 어느새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증권회사 사원들은 죄책감이라도
느끼는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왜 끌어낼 수가 없었나요?"
"완전히 불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에 더욱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연료탱크가 폭발해서
불이 붙은 게 아니군요?"
"네, 그렇습니다. 한참 타고 있는데
도중에 펑하고 폭발했으니까요."
엄격히 말해서 그들은 최초의 목격자가
아니었다. 그들보다 먼저 사건현장을
의해 드러났다.
"그 여자는 어느 쪽에서 뛰어왔나요?"
"사고차쪽에서 달려왔습니다. 처음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하고 동행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생각하니까 혹시 이 차의
주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 정복차림의 경찰관 한 명이 다가와
계장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밖에서 차주들이 야단들입니다. 차를 왜
못 끌어내게 하느냐고 항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지하 주차장에 있던 차들은
수사진의 요청에 의해 모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계장이 마형사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그때까지 통로에 세워져 있던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를 마형사는 사고차 옆에다
3m쯤 간격을 두고 밀어다 놓았다. 처음
주차해 있었을 때처럼 차머리를 벽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나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놀란 얼굴로
숨이 턱에 차서 사고차를 가리키기만
했습니다."
"그 뒤에 그 여자를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보이지 않기에
신고하러 간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인상착의를 묻는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서로 엇갈렸다. 한쪽이 20대
아가씨라고 말한 반면 다른 한쪽은
한쪽은 파란 옷 다른 쪽은 노란 옷이라고
증언했다. 한가지 일치한 것은 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하 주차장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증권회사 사원들로부터 대강 들을 것을
듣고난 마형사는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차의 왼쪽
뒷문짝은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사고차의
운전석 문과 부딪쳐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소형차의 옆구리에 막혀 문이
열리지 않자 사고차의 운전자는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운전석 문을 발로 박찬 것
같았다. 살려고 불길 속에서 미친 듯
울부짖으며 문짝을 발로 마구 차는 소리가
운전석 바닥에 무엇인가 떨어져 있었다.
집어 들어보니 꽤 큼직한 쇠망치였다. 차
안에는 그 망치 외에는 이렇다 하게 주의를
기울일만한 물건이 없었다. 석간신문 한
부와 껌을 쌌던 포장지가 구겨진 채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 차는 꽤 낡아 있었다. 오랫 동안
닦지를 않았는지 안팎이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앞에 있는 재떨이를 당겨보았다.
안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들어 있었다. 맨
위에 있는 꽁초를 집어내보았다. 필터 부분
주위에는 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고 필터 끝에는 그때까지도 습기가
남아 있었다. 선명한 립스틱 자국과 함께
습기가 채 마르지 않고 남아 있는 꽁초는
여덟 개나 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여자들이
지근지근 씹어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꽁초를 헤집고 그 밑에서 구겨진
종이조각을 집어내 펴보았다. 그것은 껌
포장지로 그 안에는 씹다만 껌이 들어
있었고, 포장지에는 "아카시아"라는 상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껌은 씹지 않은 채
말랑말랑했다.
"뭐 발견한 거 있어?"
계장이 다가와 물었다.
마인은 담배꽁초와 껌을 보여주었다.
"아직 습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 여자 차가 틀림없어. 만일 차를
가지러 나타나지 않으면 수배하는 게
좋겠어."
"지독한 골초인 모양입니다. 이것도
마형사는 망치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자가
이런 건 왜 가지고 있었을까요?"
마형사는 사고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쪽에 달려 있는 뒷문 유리창이 박살나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가 문 주위의 시멘트
바닥을 살펴보았다. 그 주위에는 유리
파편이 몇 개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뒷문을 열어보았다. 차 바닥과 뒷좌석이
있던 자리에 유리 파편이 수북히 널려
있었다.
"이 유리창은 밖에서 깬 겁니다. 파편이
모두 안에 깔려 있습니다."
계장이 차 안을 살피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군. 그럼 이 망치로
깼다는 건가?"
"만일 여자 혼자서 깼다면 주먹으로는 깰
수가 없었을 겁니다. 망치 같은 것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 남의 차 창문을 깼지?"
"글쎄요. 거기에 사건의 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사고입니까, 타살입니까? 방화 살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자들은 어느새 그들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계장은 마형사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증거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로 30대의 젊은 여인을 수배하려고
합니다."
"그 증거들이란 뭡니까?"
계장이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마형사는
마지못해 기자들에게 그 증거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들이 사람을
태워죽였을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고로 차 안에 불이 붙었다면 밖으로 급히
뚜어나와 목숨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차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먼저 사고차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피살자가 없는 사이에
앞바퀴에는 보통 벽돌의 두 배쯤 되는
장식용 벽돌을 괴어놓았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댄다 해도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차가 불에
타고 있을 당시 증권회사에 다니는 두 명의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다른 차 한 대가
사고차 옆에 거의 밀착되다시피 세워져
있었다. 피살자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옆에 밀착되어 있는 차 때문에 문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범인은
사고차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놓은 다음
피살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초조하게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얼마 후 피살자가
나타났다. 그는 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된
것도 모른 채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승용차를 사고차 옆에다 바싹 갖다댄다.
그리고 망치로 사고차의 뒷창문을 사정없이
깬다.
"방화 살인을 하려면 불을 질러야 하는데
어떻게 불을 질렀을까요?"
기자 한 사람이 물었다.
"글쎄, 그 점을 알 수가 없는데...... 이
망치로 창문을 깬 게 확실하다면 연료를
넣기 위해 그러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확실한 거야 아직 알 수 없지요."
사람을 차 안에 가둬놓고 깨진 창문을
통해 연료를 주입시킨 다음 태워죽인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살해 방법이다. 지금까지
살인 사건을 많이 다뤄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든지 가능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가솔린통을 던져놓고 나서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타버릴걸요. 살인 방법으로는
아주 기막힌 것 같은데요."
남형사가 한 마디 했다.
"사고차의 연료탱크가 나중에 터졌다는
것은 다른 원인에 의해 먼저 차에 불이
붙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차의 주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군요?"
기자들이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를
에워쌌다. 그 차를 향해 다시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고 기자들은 그 차의 번호를
적기에 바빴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차의 주인이 자진해서 차를 가지러
것이라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차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그 차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차의 주인이 30대의 젊은 여자란
말입니까?"
기자들이 일제히 계장과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마형사가 가만있자 계장은 그
차의 운전대 옆에 부착되어 있는 재떨이를
통째로 빼내 기자들에게 보였다.
"꽁초에 립스틱이 묻어 있는 거 봐요.
색깔이 선명한 거나 습기가 남아 있는 걸로
봐서 피운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아요.
여자는 이 차 안에 앉아 피살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줄담배를 피워댔을
겁니다. 남자를 잔인하게 태워죽인 걸로
생각되는군요. 젊은 기자 양반들 여자
사귀는 건 좋은데 조심들해요. 여자가 한번
앙심을 품으면 불고기되기 십상이니까요."
"그런 여자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웃음 소리가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즐거운 웃음 소리는 아니었다.
기자들이 물러가자 그동안 열기에 싸여
있던 사건 현장의 분위기도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마형사는 그야말로 철저하달 정도로
까맣게 타버린 시체와 고급승용차를 다시
살펴보면서 사람을 철저하게 태워죽이는
것이야말로 증거를 없애는 데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거듭 생각하고 있었다. 시체가
너무 타버렸기 때문에 감식반원들은 지문
채취도 불가능하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타버린 것 같았다. 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동전과 열쇠 정도였다.
마형사는 사고차의 운전대에 꽂혀 있는
열쇠를 뽑아내 보았다. 열쇠고리에는 여러
개의 열쇠가 걸려 있었다.
"두 차의 차적을 즉시 조회해 봐. 난
돌아가 봐야겠어."
계장이 자기 차에 오르며 말했다.
계장이 떠나자 마형사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 있는 경찰 퍼트롤카의 순찰대원에게
두 차의 차적을 조회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순찰대원은 사고차와 베이지색 소형
승용차의 차번호를 수첩에다 적은 다음
순찰차로 돌아가 무선전화로 본부를
불렀다.
모든 것들이 다 타버렸지만 그래도
번호판만은 뚜렷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차적을 조회하는 것으로 이미 수사는
시작되고 있는 셈이었다.
퍼트롤카의 순찰대원은 5분도 못 돼
마형사 앞에 조회 결과를 적은 메모지를
들고 왔다. 마형사는 메모지를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들여다보았다.

1. 서울1라 509X=차주 황개.
주민등록번호 541021-106552X.
서울 강남구 S동 126 P아파트 212동
1205호. 88년 6월 16일 등록.
2. 서울1다 854X=차주 김동우.
주민등록번호 470825-102486X.
서울 영등포구 Y동 179의 8번지. 85년
5월 8일 등록.
"김동우 씨 차는 도난 차량입니다. 이틀
전에 신고가 들어왔답니다."
순찰대원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쪽으로 쏠렸다.
"제기랄......."
남형사가 맥빠진다는 듯 투덜거렸다.
"사고차는 한 달밖에 안 된 새 차인
모양입니다."
순찰대원이 말했다.
"양쪽 주소지에 빨리 가봐. 난 여기서 이
차를 지킬 테니까."
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 사랑과 배신

벽시계는 7월 19일 자정도 지난 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비스듬히 앉아 두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몸은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다.
비디오와 연결된 텔리비젼 화면에서는
벌거벗은 두 백인 남녀가 열심히 성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안의 문을
걸어잠그고 포르노 필름을 감상하는 것을
큰 취미로 삼고 있었다. 그런 취미는
수년째 계속돼 오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더니 마침내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자위행위에 도취된 그녀는 허리를 뒤틀면서
신음 소리를 토했다. 다른 한손이 소파를
도로 오므렸다. 그녀의 입에서 더 높은
신음소리가 흐러나왔다. 소파를 쥐어뜯던
손이 이번에는 돌처럼 단단히 뭉쳐진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늘어지면서 두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몸과 얼굴에는
땀이 기름처럼 번져 있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던 복부도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그것을 껐다. 이제
그것을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피로감이 덮쳐왔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담배를 피워문 채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서 방으로 나온 그녀는 문득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0시 30분이 지나고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화기를 집어들고
도쿄에 가 있는 오빠한테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오빠 배창기는 외국에 나가더라도
꼭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전화번호와
객실번호 같은 것을 집에다 알려주는
자상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긴자거리에서 가까운 임페리얼호텔
1315호실에 투숙하고 있었다.
임페리얼호텔은 객실수가 1,140개나 되는
아주 큰 호텔이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가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미화는 오빠가 방에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막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신호가 떨어지면서
"모시모시......."
그것은 귀에 익은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의외의 목소리에
당황한 미화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상대방은
계속 "모시모시......"하고 이쪽을
불러댄다.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금방
전화를 끊을 것 같다. 전화가 혹시 다른
방으로 연결되었는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거기 혹시 1315호실
아닌가요?"
한국말로 물었다. 다른 나라 말은 할 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도 일본말로 뭐라고 대꾸해
왔는데 미화로서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매우 아름다운 젊은 여자라는 것, 그리고
구니들이 들으면 섭섭해 할 게다."

여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질투의 불꽃이 이글거리다가 스러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다시 일본말로 뭐라고
지껄인다. 미화는 한국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영어단어를 서투르게
늘어놓아 보았다.
"헬로...... 아이 앰 인 서울...... 위
아 브라더...... 아이 앰 시스터......
마이 브라더...... 아이......
아이......."
나중에는 뒤죽박죽 되어버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행히 상대방은 알아들었는지
전화를 끊지 않고 반가운 기색으로
"오우케이!"하고 말했다.
전화는 끊어지지 않은 채 한동안 정적만
흘렀는데 수화기를 통해 여자가 속삭이는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후 마침내 잠에서 덜 깬 듯한
남자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화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 얌전한 오빠가 일본
여자와 함께 잠을 자다니! 그것은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가슴에 휘몰아치는 뜨거운 감정을 누르면서
"오빠 저예요."하고 가만히 말했다.
"아, 난 또 누구라고...... 웬
일이야...... 이렇게 밤늦게...... 지금이
몇 시야...... 12시가 넘었잖아...... 별일
없니?"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냘프다.
"별일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무슨 별일? 무슨 일 생겼니?"
"그보다도 오빠, 그 여자 누구예요? 일본
아가씨예요?"
"아, 업무 관계로 잠시 좀 들렀을
뿐이야."
멋적어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미화는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오빠, 지금이 몇 시인데 업무
운운하시는 거예요? 침대에서 하는 업무도
다 있나요?"
"이, 이봐. 지금 어디서 전화거는 거야?"
"왜요? 겁나세요? 옆에 언니 있으니까
바꿔드릴까요?"
"안 돼! 바꾸지 마!"
그가 놀라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차갑게 미소지었다.
예쁘던데요.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언니한테 전화 넘길 거예요. 일본
아가씨예요?"
"그, 그래.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모른 체해."
"이름이 뭐예요?"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래?"
"제가 오빠 애인 이름 좀 알면 안
되나요? 가르쳐줘요.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요.
이름이 예쁠 것 같아요. 뭐예요?"
"그냥 미치코라고 불러."
"미치코...... 예쁜 이름이네요.
대학생이에요? 아니면 오피스걸이에요?
아니면......?"
"그만 좀 해둬. 나중에 가서 이야기해
줄께."
그럴수록 그녀는 호기심이 동해 견딜
수가 없다.
"대강만 이야기해 줘요. 그 여자 예뻐요?
몇 살이에요?"
"나이 같은 건 나도 몰라. 예쁘지도
않아."
"언니보다 예뻐요?"
"예쁘지 않다니까!"
오빠가 역정을 냈지만 그녀는 차갑게
웃기만 한다. 그가 부인할수록 그녀는
미치코라는 여자가 틀림없이 기막히게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에 대한 그의
취향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아름답고 깨끗한 존재로 인식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아름답지 않고 지저분한
여자한테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돌아오실 때 미치코 한번 데리고
와봐요. 제가 친구 되어줄께요."
그 말에 배창기는 펄쩍 뛰었다.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할 이야기
없으면 전화 끊자."
"할 이야기 많아요. 오빠, 언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언니는 낮이나 밤이나 바쁘신
몸이라 집에도 있지 않아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운을 떼어놓고 그녀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사람 지금 집에
없다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감도는 것을 보고
그녀도 긴장했다.
"오빠도 참 한심해요.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좀 가져보세요. 오빠가
그렇게 무관심하니까 언니도 그렇게
나가지요."
그녀는 우호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그렇게 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집에 있어 없어?"
"언니 얼굴 보기 참 힘들어요.
벌써......."
그녀는 차마 입을 열기 난처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언제 나갔는데 아직도 안 들어오고
있어? 숨기지 말고 말해봐."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화내지 마세요. 어제 나가서는 아직 안
들어오고 있어요."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던지 창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 오랫 동안 침묵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화연락도 없어요. 오빠가 걱정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도 외박한 적이 있니?"
"오빠가 외국에 나가 있을 때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왜 그런 걸 지금까지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지?"
창기의 목소리는 비참할 정도로 작게
들렸다.
이야기해요. 괜찮아지려니 했는데......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정말 큰 일이에요. 오빠가 언니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든지 아니면......."
그녀는 마지막에 오빠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정확히 집에서 나간 게 언제였어?"
"그러니까...... 자정이 지났으니까
어제...... 19일...... 12시경이었어요.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어디 간다고 했어?"
"그건 모르겠어요. 어디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나갔으니까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었지만 길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전화 연락도 없었단 말이지?"
"네, 아무 연락도 없었어요."
"차는 몰고 나갔니?"
"그야 물론이죠."
"혹시 짐 같은 거 싸들고 나가지
않았니?"
"아뇨. 핸드백만 하나 달랑 들고
나갔어요. 하지만 모르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차 뒤에다 몰래 짐을 실었는지도."
"잘 알았다. 이제 됐어. 그만 전화
끊자."
"오빠!"
그녀는 오빠가 전화를 끊을까봐 다급하게
그를 부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탐스러운
젖가슴이 흔들렸다. 그녀는 무선전화기의
수화기를 든 채 서서 말했다.
"모레쯤 가게 될 거야."
"이런 말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잘 말해줬어.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조에서 그녀는
결연한 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빠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상심하긴...... 동재는 잘있니?"
"네 잘있어요. 엄마가 없어도 잘 놀아요.
우유도 잘 먹고 별로 울지도 않아요."
동재는 창기와 밀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이제 두 살박이였다. 창기는 늦게
결혼해서 얻은 그 외아들을 끔찍히도
귀여워했다.
"경찰에 신고했니?"
오빠의 엉뚱한 물음에 미화는
"신고라니요?"
"지금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
연락도 없다면 좀 이상하지 않아? 동재가
걱정돼서 전화라도 걸었을 텐데 말이야.
경찰에 신고해야 되지 않을까?"
"아이, 오빠두....... 아직 하룻밤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뭘 그래요."
"세상이 하도 험학해서 말이야."
그 말에 그녀는 발끈했다.
"경찰에 실종신고라도 내라는 건가요?
아니, 바람이 나서 나간 여자를 찾아달라고
경찰에 신고하라는 건가요? 그건 우습지
않아요?"
"바람이 나서 나갔는지 아니면 다른 일로
나갔는지 확실히 모르잖아. 사람 일을
그렇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단정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어머, 이제 보니까 오빠는 제가 일부러
악의적으로 그런 말을 한 줄 아세요? 전
참대못해 오빠를 생각해서 말씀드린
건데......."
그녀는 화가 치밀었고 그리고 슬퍼졌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그런 말해준 건 좋아.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야. 내 말은 집안 식구가 한 사람
안 들어오니까 걱정이 돼서 그런 거야.
걱정부터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니."
"그럼 제가 걱정도 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저도 걱정 많이 했어요. 걱정했기
때문에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던 거예요.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걱정되는 사람은
순진해요. 아무것도 몰라요! 언니는 밖에서
재미보면서 싸돌아다니고 있는데 오빠는
도대체 뭐예요? 오빠가 불쌍해요! 경찰에
신고하는 건 오빠가 알아서 하세요! 전
그런 거 못해요! 사정을 알면 경찰이 웃을
거예요. 전화 끊어요!"
그녀는 수화기를 탁 내려놓고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전화통을 바라보았다. 전화통에
선뜻 손이 가지지가 않는다.
벨이 한참 울리고 난 뒤에야 그녀는
마지못하는 척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배미화 씨 댁입니까?"
그것은 처음 듣는 거친 남자의
"누구신가요?"
그녀는 잔뜩 경계하면서 물었다.
"실례지만 배미화 씨 되십니까?"
저돌적인 목소리가 물었다.
"네, 그런데 누구신가요?"
"경찰입니다."
경찰이라는 말에 그녀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는 경찰하고는
단 한번도 이야기해 본 기억이 없었다.
거칠고 저돌적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밤중에 이렇게 전화를 걸어 미안합니다.
K경찰서 형사계 마인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황개 씨를 잘 아시죠? 약혼한
사이라고 그러던데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로......?"
"실례지만 황개 씨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헤어졌습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거니까
사실대로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왜 그런 걸 말해야 되나요?"
그녀는 혀가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물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럽니다. 빨리
좀 말씀해 주십시오."
"황개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요?"
"그건 차차 말씀드릴 테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언제였습니까?"
"어제 오후였어요."
"헤어진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혹시
S호텔이 아니었나요?"
"아뇨, M호텔에서 헤어졌어요."
그녀는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1시
45분.
"M호텔이라구요?"
"네, 그래요."
"언제 헤어졌습니까?"
"그러니까 어제 오후 2시 좀 지나서였을
거예요."
"황개 씨와 헤어져서 어디로 갔습니까?"
"바로 집으로 왔는데요."
"M호텔에서는 방에까지 들어갔었나요?"
"네,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몇 호실이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누구 이름으로 방을 얻었었나요?"
"아마 황개 씨 이름으로 얻었을 거예요."
"수고스럽지만 지금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거예요?"
"에 또, 그럴 게 아니라 우리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외출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댁 주소하고 위치를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이 회오리바람 속에 걷잡을 수 없이
휩싸여버린 것만 같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주소와 위치를 대강 말해 주고 나서 한동안
얼빠진 모습으로 침대 끝에 앉아 있다가
그녀는 생각난 듯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문득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도망친단
말인가? 경찰이 온다고 하니까 도망치다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는가.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인 서울 1다
854X호의 운전자가 혹시 나타날까봐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그곳을 떠난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이미 그 차가
도난 차량임이 밝혀진 마당에 그 차를 훔친
사람이 사건 현장에 나타날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혹시나 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인 줄을 알면서도 그는 그
시간까지 기다려보았던 것이다. 예상대로
기다렸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뜨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기다림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런 어리석음은
수사관들이 다반사로 겪어야하는 일이었다.
결론은 이렇게 내려볼 수가 있었다.
범인으로 생각되는 어떤 여인이 범행에
사용하기 위해 서울 1다 854X호 자가용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황개가 나타나
서울1라 509X호 승용차에 오르자 훔친 차로
출입문을 막아놓고 나서 망치로 차창을 깬
다음 그 안에다 가연성 물질을 쏟아붓고
불을 질렀다. 황개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타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결론으로 놓고볼 때 범인의
행동은 그야말로 대담무쌍하기 이를데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원한에 사무친
복수의 냄새 같은 것이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태워죽일 수
있다는 것은 사무친 원한을 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범인이 여자라고 볼 때
그와 같은 대담무쌍한 범행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남자라고 해도 결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원한에
발휘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파리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고 한없이 가냘퍼 보이기만 해서
남자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연약한 여자가 일단 원한을 품으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잔인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그는 무수히
보아왔던 것이다.
한때 남자의 성기를 면도칼로 자르는
것이 유행인 때가 있었다. 배신당한 아픔이
원한으로 바뀌면서 증오심에 불타오른
여자들이 마지막 잠자리에서 남자의 상징을
사정없이 면도칼로 잘라버리곤 했던
것이다. 면도칼을 휘두르는 여자들이
늘어나자 남자들 사이에서는 바람을 피울
때 사타구니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처자까지 딸린 몸이 바람을 피우다가
원한에 사무친 여자가 휘두른 면도칼에
그만 그 귀중한 상징을 잘렸다고 하자,
여자를 고소해 보았자 기껏 상해죄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 받을 뿐이다. 그러나
남자로서는 죽음의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그것이 없어진 그
시간부터 사랑하는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정든 집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집에
들어가 어떻게 부인한테 "여보, 나
어찌어찌하다가 그것을 잘렸어. 용서해
줘요."하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번 사건의 범인은 성기 정도만
자른 게 아니고 상대방을 아예 깡그리
태워죽인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원한과
증오가 얼마나 사무친 것이었는가를 말해
시뻘건 화염이 그녀의 저주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는 듯했다.
사건현장에 잠복해 있는 동안 도난당한
베이지색 소형 승용차의 차주가 형사들의
안내를 받고 나타나 자기 차임을
확인했었다.
차주 김동우는 중년의 사내로 어느
빌딩의 지하에서 이용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아침 일찍
자가용 승용차를 몰고 직장에 도착, 지하
2층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다음
저녁 늦게까지 일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차는 하루종일 주차장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언제 도난당했는지 정확한 시간을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볼 일이 있어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려고 주차장에
즉시 도난신고를 냈다는 것이었다.
형사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의
알리바이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찌그러지고 불에 그을린 자신의 차를 보고
어디 가서 보상을 받아야 하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차는 보험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마형사가 수사본부로 돌아가니 낯선 젊은
여인이 한 명 겁에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바지 위에 체크무늬의 남방을
받쳐입은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참담한
모습이었지만 얼른 보기에도 미녀형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다.
"황개의 동거녀입니다."
그녀를 연행해 온 형사가 마형사에게
불에 타죽은 사내한테 동거녀가 있다는
것은 형사대가 그의 집에 가보고서야
알아낸 사실이었다.
불탄 차의 번호판을 근거로 차주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낸 형사대는 서둘러 그
주소지를 찾아갔었는데 피살자의 주소지로
되어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는 젊은 여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알고보니
황개의 동거녀였다.
황석희(黃錫姬)가 황개와 동거생활을 한
지는 2년쯤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기는 없었다.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하고 맺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서로가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되는 사이로 오빠 동생하며 지내왔던
터였다. 또한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너무도 잘 알아 결혼 상대자로서는
형편없는 상대라는 것을 각자가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황개가 경영하는 장사도 되지
않는 술집에 마담격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그와 동거생활을 하게된 것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황개의 아파트에
그녀가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들고
들어감으로써 시작된 동거생활은 예상했던
대로 무절제와 부도덕한 생활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섹스에 탐닉했고, 그런 끝이면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기도 하고
그에게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알고 있는 그녀는 처음에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몰랐지만 자신이
황개와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써 그런 감정을 애써
눌러왔다.
황개는 그녀 앞에서 배미화에 대한
자랑을 스스럼없이 지껄여댔는데 그런 말
가운데에는 일단 미화와 결혼식만 올리고
나면 자신은 돈방석에 앉게 된다는 따위의
말도 들어 있었다. 사실 황개가 미화와
어떻게든 결혼식을 올리려고 기를 쓰는
이유는 순전히 돈이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의 말이
부질없는 소리로 들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배미화와 약혼식을 올리는 등 그 허황된
소리가 점점 현실로 나타나자 그녀는
되어가는 꼴을 지켜보게까지 되었다.
질투가 솟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결혼식만 올리고 나면 너한테도
한몫 떼어주겠다는 황개의 달콤한 말에
그만 감정을 거두고 이제는 그 몫을 은근히
기다리는 형편이기도 했다.
경찰은 황석희를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인물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피살자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피살자는 차량번호를 통해 일단 황개로
밝혀졌지만 그 이름은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워낙
지독하게 타버렸기 때문에 모습도
없어져버렸고 신원을 증명할만한 것도 모두
타버리고 없는 피살자를 놓고 단지 사고
황개일 것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런 수사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의 동거 여인에게 시체를 보여서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녀가 혹시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범인을 여자로 보고 있는
경찰은 자연 그녀에게 수사의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정이나 원한에
얽힌 살인사건이라면 피살자의 동거
여인이야말로 가장 먼저 의심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번째 조건은 첫번째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야 수사가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황개의 동거녀이지 다른
피살자의 시체를 본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토하기부터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두번 다시 시체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지를 않아 수사관들을 꽤나
애먹였다. 겨우 달래고 을러대고 해서
그녀를 다시 시체 앞에 데리고 간
수사관들은 그러나 별 신통한 답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고 했다. 황개의 팔뚝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데 까맣게 타버렸으니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황개의
신체상 특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문신
정도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치열의 특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시체를 확인시키는데 실패한 수사진은
수거한 피살자의 소지품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었던 동전 몇 개와 열쇠
꾸러미뿐이었다. 그때까지 굳은 표정으로
있던 그녀는 열쇠 꾸러미를 집어들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고리에는 자동차 열쇠 외에도 다른 두어
개의 열쇠가 더 걸려 있었다. 그녀는 오래
울지는 않았다. 이내 눈물을 지우고 난
그녀는 열쇠 하나를 가리키며 "이건 우리
아파트 열쇠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백 속에서 자기가 지니고 다니는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중에서 하나를
가리키면서 "보세요. 이것하고
같잖아요."라고 말했다. 형사들이 두
열쇠를 비교해 보니 두 개는 서로
일치했다. 그녀는 피살자의 열쇠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이건 자동차 엔진키예요...... 이건
자동차 문하고 트렁크 열쇠고...... 이건
책상 서랍 열쇠예요...... 이건 아마
사무실 열쇠일 거예요...... 이건 잘
모르겠어요."
"그건 자동차 연료탱크 열쇠입니다."
수사관이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표정이 점점
냉정하게 변하고 있었다. 열쇠 하나로
피살자가 황개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일렀지만 피살자의 유품에서 그의 열쇠
꾸러미가 발견된 이상 일단 피살자를
황개라고 보는 것은 별로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황개는 컴퓨터를 통한 신원조회 결과
건이나 있었다. 그리고 현재
강간상해범으로 수배중인 인물이었다.
강간상해사건은 1년 전 밤길에 나이어린
여고생을 차에 태워주고 가다가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가 환각제를 먹인 다음
밤새도록 욕을 보인 사건이었다.
"문제가가 결국 불고기 파티로 끝장을
보았군."
그가 불에 타죽은 것과 그의 파렴치한
전과를 빗대어서 형사 한 명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황석희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수사진의
생각은 그녀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함으로써 단지 생각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황개가 경영하는 술집에 마담으로
나가는 그녀는 그날 따라 몸이 불편해서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며 그녀가
데리고 있는 호스티스 아가씨들이 문병차
집에 들르는 바람에 그녀는 그들과 오후
3시경부터 밤 9시가 넘도록까지 화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었다.
증권회사 직원들이 S호텔 지하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발견한 것은 저녁 6시
30분경이었다.
마지막까지 황석희의 집에 남아 화투를
쳤다는 그녀의 친구 두 명을 만나본
형사들은 그녀의 알리바이에 이상이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로써 그녀의
혐의점은 벗겨졌지만 경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증권회사
직원들에게 그녀를 보여주었다.
그녀를 본 그 젊은이들은 고개를
문제의 여인과는 스타일부터가 다르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그 젊은이들이
그 여인의 모습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황석희를
보였으니 명쾌한 대답이 나올리 만무했다.
황석희는 그로써 경찰의 집요한 추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풀려나지는 않았다. 경찰로서는
그녀가 피살자를 확인하고, 피살자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어내고, 피살자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매우
쓸만한 인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풀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수사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수사본부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눌러앉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그 누님은 미국에 이민가서 사는
지 오래 됐어요."
"최근에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었나요?"
"누님을 만난 지 몇 년 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누나한테서는 편지도 오지 않는다고
했다. 황개가 워낙 못되게 굴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걸핏하면 돈을 보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자연 소식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개는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누나한테 더 이상 돈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나한테 안부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거나 하지도 않았다.
"황개 그 사람 직업은 뭡니까?"
"글쎄요. 정확한 직업은 저도 잘
몰라요."
황석희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술집을 경영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만 장사가 안 되니까 거의
방치해 두다시피 했어요. 제가 거의
꾸려가다시피 했어요. 그럭저럭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이었어요. 돈이 좀 모이면
오빠가 모두 가져가버리곤 했어요."
그 술집은 영등포 역전 부근에 있었다.
"함께 살았으면서 정확한 직업도
몰라요?"
형사는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 그 사람 사무실 열쇠라고 하지
않았나요? 무슨 사무실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쓰지 않는
사무실 문을 잠그는데 써야겠다고 하면서
가져간 적이 있어요. 그래서 새로 사무실을
낸 건 알았지만 무슨 사무실인지는 모르고
있었어요. 한번도 가보지 않았고, 사기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무슨 사무실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물어본다고 해서
가르쳐줄 사람도 아니었고요."
황개가 자진해서 신나게 지껄여댄 것은
약혼녀 배미화와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웬일인지 거기에 이야기가 미치면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신이 나서
지껄여대곤 했기 때문에 석희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것이 남자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결혼하면
밤마다 시달릴 일이 걱정이라는 등 그는
것이다.
그는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서 돌아온
날이면 약혼녀의 전화번호를 일러주면서
석희한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자기가 직접 걸어도 되는 것을
그녀한테 부탁한 것은 그녀한테 자랑도
할겸 그녀를 괴롭히려는 묘한 심리에서
그랬던 것 같았다고 석희는 증언했다.
"오빠는 저를 학대했어요.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깊어질수록 학대가 심해져
갔어요. 나중에는 저보고 집에서 나가라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라고
해사 제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가면
따라나와 저를 도로 붙들곤 했어요."
석희는 황개와의 부끄러웠던 관계를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인간을 싫어했어요. 그의 생활방식이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생각 같은 것을
싫어했어요. 양심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기 때문에 저는 그게 혐오스러웠어요.
하지만 여자란 참 이상해요. 그래서 여자를
보고 요물이라고 하는가 보죠. 그를
싫어하면서도 그와 관계를 하고 나면 그런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싫어하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을 저는 이해할
수가 있어요. 확실히 저는 오빠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단계를
지나 사랑했어요."
굳어 있던 그녀의 두눈이 풀리면서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햇다.
오빠한테 더욱 매달렸는지도 몰라요. 저는
육체의 노예였고 오빠의 노예였어요.
증오와 사랑이 교차되는 생활이 어떤 건지
아세요? 오빠한테 육체적으로
학대받으면서도 저는 그를 사랑했어요."
"약혼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나요?"
"네, 알고 있어요. 오빠의 부탁을 받고
그 여자한테 여러 번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어요. 그 여자한테
전화를 걸게 한 것도 저를 학대하고 싶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 여자한테 전화를 걸
때마다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어요. 그
여자한테 울부짖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참았어요. 오빠와
결합할 상대였기 때문에 언나라고 상냥하게
부르면서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달래곤
"오빠를 죽인 사람은 여자입니다. 오빠의
약혼녀는 이번 사건에 관계가 없을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아나요. 하지만
모르죠. 배미화는 오빠와 제일 가까웠던
여자였으니까 혹시 모르죠."
"두 사람 사이는 어땠습니까?"
"여자쪽에서 오빠를 몹시 좋아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오빠는 결코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오빠 입으로 여러 번
그런 말을 하는 걸 저는 들었으니까요.
오빠가 그 여자를 가까이한 이유는 순전히
돈 때문이었어요. 오빠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그 여자와 결혼해서 한몫 잡으면
이혼한 후 다시 저한테 돌아오겠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 개망나니 같은
여자를 데리고 어떻게 한평생을 사느냐고
같았어요."
"범인은 오빠를 몹시 증오했던 것
같아요. 원한에 사무쳐 그런 범행을 저지른
것 같아요. 약혼녀가 오빠를 좋아했다니
범인일리는 없고...... 그럼 누가 오빠를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코가 뭉툭한 형사는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조그만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녀가 머리를 흔들자 다시
물었다.
"배미화 씨의 전화번호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벽시계가 7월 20일 새벽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가 잠에 깊이 빠져
있을 시간이었지만 수사본부 안은 긴장에
밖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거센 비바람에 창문이 계속
덜컹거리고 있었다. 창문 위로는 마치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출입문이 열리더니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명은 형사들이었다. 한 명은
젊은 여자였다. 세 명 다 비에 젖어
있었다.
황석희를 통해 이미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마형사는 형사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여자를 보는 순간
첫눈에 그녀가 황개의 약혼녀인 배미화임을
알 수가 있었다. 겁에 질린 듯한 표정과
함께 불타는 듯한 두눈이 가장 특징있게
그녀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있었다. 마형사가 그의 죽음을
이야기해주자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하다가
황석희의 말을 듣고는 와들와들 떨어대면서
울기 시작했다. 황석희는 아주 냉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전화통화는 여러 번 했지만 직접
만나기는 처음이군요. 제가 황석희예요.
오빠는 죽었으니까 마음 단단히 가져요.
어떻게 죽은지 알아요? 자동차 속에서
까맣게 타죽었어요. 시체를 확인하려면 몇
번 토해야 할 거예요.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안 돼요."
황석희는 이미 냉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미화를
노려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범인이 여자래요. 여자가 태워죽인
누가 죽였겠어요."
미화는 눈물을 훔치면서 상대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흥, 슬프기도 하겠지. 여기서 분명히
밝혀두는데 우리는 오누이 관계가
아니었어. 우리는 애인 관계였어.
동거생활을 해왔으니까 실질적인
부부였다고 할 수도 있어. 이제 알겠어?"
황석희는 대뜸 반말로 나갔다.
마형사는 황석희의 입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형사들은 두 여자의 대면과 그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두 마리의 싸움닭이 앞으로
어떻게 싸움을 전개해 나갈지 궁금해 하는
것처럼.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미화가 숨죽인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황개 씨하고 나하고는 실질적인
부부였단 말이야! 넌 그것도 모르고 그
남자하고 약혼까지 했지. 그걸 보고 나는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생각했지."
"이 나쁜 년!"
그때까지 짓눌려 있던 배미화의 감정이
폭발했다. 그녀는 앞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집어들더니 석희쪽으로 냅다 던졌다.
석희가 잽싸게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그것은 뒤로 날아가 콘크리트벽에 요란스런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무슨 짓들이야? 여기가 어딘줄 알고?"
더 이상 무엇을 집어 던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동안 거친 말싸움만은
계속되었다.
"이년이 이상하니까 이년을 조사해
보세요! 네가 황개 씨를 죽였지?"
"이제 보니까 살인범은 바로 너야!
우리가 결혼하게 되니까 질투가 나서 그
사람을 죽였지?"
그녀들은 증오에 차서 서로 상대방을
공격했다. 경찰은 그녀들이 한동안
말싸움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봇물터지듯 쏟아지는 말싸움 가운데 수사에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까해서였다.
그러나 삿대질까지 해대며 쏟아내는 말들
속에는 귀가 번쩍 뜨이는 새로운 내용 같은
것은 없었다. 석희와 싸울 때의 배미화의
불길 그것이었다.
석희를 다른 방으로 따로 떼어놓고 나자
비로소 실내는 조용해졌다.
마형사는 배미화가 감정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어제 황개 씨를 만난 게 언제였나요?
그리고 정확히 몇 시에 헤어졌나요?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의 일을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진술한 내용이라고 해서 한번으로
질문을 끝내지는 않는다. 한 가지 내용에
대해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많게는 수십
차례까지 반복해서 질문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사실을 알아두려는 것이다. 더구나
시간 같은 것은 처음 대답과 마지막 대답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커피숍에서 만나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나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식당에서는 뷔페를 먹었어요."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해져 있었다.
황개한테 속았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그렇게
냉정하게 만들어준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황개와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녀는 방 호수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그 방 호수를 알고 있었다. 아까 배미화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그녀와 통화했을 때
그녀가 어제 오후 M호텔에 황개와 함께
투숙했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즉시 호텔로
형사 두 명이 달려가 그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가 투숙한 시간은 어제 오후
1시경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숙박요금은
체크아웃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투숙한
1510호실에 들어가보니 방안은 텅 비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방열쇠가 놓여
있었다. 열쇠를 방안에 그대로 놔둔 채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호텔측으로서는 숙박요금을 미리
받아두었기 때문에 문제삼을 것이 없었다.
방안의 침대는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난잡한
모습이었다.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이야기해야 하나요?"
"이야기할만한 사항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침대 위에서
섹스 행위를 그런 식으로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녀의 말에 마형사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그 기계적인 행동을 끝내고
황개와 함께 호텔 방을 나선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그녀가 시계를 본
것은 집에 도착해서 권투시합을 보기 위해
텔리비전 앞에 앉았을 때였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텔리비전 앞에 앉아 시계를
보았는데 그때의 시간이 3시 10분경.
그 권투시합은 서울에서 개최된 쥬니어
미들급 세계 타이틀전이었다. 형사들도
일손을 놓고 그 시간에 텔리비전을
보았었다. 경기는 3시 정각에 시작됐었다.
그녀는 권투경기를 유난히 좋아한다고
했다.
걸려요."
"그러면 방에서 나가 함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 그 사람과
헤어져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5분에서 10분 정도 걸렸을 거예요.
우리는 별로 서두르지 않았으니까요."
"10분 정도 걸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2시
30분에 호텔 방을 나와 2시 40분에 지하
주차장을 출발, 그리고 3시 10분경에 집에
도착했다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황개
씨하고는 지하 주차장에서 헤어졌다고
했죠?"
"네, 제가 먼저 떠났어요."
마형사는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조그만
눈으로 배미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마치 한
마리의 맹수가 먹이를 앞에 놓고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를 궁리하는 것 같은
저돌성이 온몸에 팽배해 있는 것 같았다.
미화는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그녀는 마치 바위를
상대하고 앉아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담배 피우시겠습니까?"
뚱보 형사가 물었다.
"한 대 주세요."
그녀는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뚱보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드는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뚱보는 저돌적인
인상과는 달리 아주 친절하게 담뱃불까지
붙여주었다.
"배미화 씨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녀는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황개 씨를 사랑하셨나요?"
그 물음에 그녀는 다시 눈물이 솟았다.
눈물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계속 그녀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차갑게 내뱉고 나서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뚱보 형사와 그 주위에 있는 형사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왜 약혼을 했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지금까지 농락당해 왔고 배신당했다는
것을 조금 전에야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가 있어요. 저주해도
시원찮은 사람인데. 아까 그 여자가
동거생활하는 여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녀는 담배를 비벼끄고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배미화 씨, 아가씨는 살아 있는 황개
씨를 가장 마지막에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증인일 수도 있고......
증인이 아니라면 범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런 공격조의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홱 변했다.
"제가 범인이라고요?"
"범인은 여자입니다. 배신당한 것을 알고
복수를 노리고 있다가 황개 씨를 태워죽인
게 아닙니까?"
핼쑥한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난 깨끗하니까."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무슨 알리바이 말이에요?"
"황개 씨는 차 속으로 불에 타죽었어요.
M호텔이 아닌 S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타죽긴 했지만, 장소를 바꾸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죠. 당신이 2시
40분경에 M호텔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나요?"
"네, 있어요."
그녀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마형사는 기대에 차서 물었다.
"황개 씨요."
뚱보의 조그만 두눈이 그녀를
얼굴에 노여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황개는 죽었잖아!"
곁에 서 있던 남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화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주 냉담하게 응했다.
"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제가
주차장을 떠나는 걸 본 사람은 황개 씨
뿐이었어요."
"그러니까 아가씨는 결국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다는 거군요?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 죽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들 식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그녀가 비꼬는 투로 대꾸했다.
"유일한 증인을 죽였으니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는 ㄱ 당연하겠지."
올려놓으며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털어냈다.
"맘대로 생각하세요. 난 그 사람 죽은
거하고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아가씨와 황개는 M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헤어진 게 아니라 M호텔을
나와 S호텔로 갔어. 다시 방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바 같은 데서 시간을
보냈는지 그건 지금 알 수 없지만,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아무튼 어디선가
시간을 보낸 후 6시 30분경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황개를 살해했어.
그렇지 않아?"
"흥, 그야말로 웃기는 이야기이군요."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야!"
"이렇게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어.
M호텔에서 황개와 헤어진 후 아가씨는
황개를 미행했어. 그리고 그가 S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간통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를 살해한 거야. 그전부터 살해계획을
세웠을 테지."
"상상은 자유니까 맘대로 생각하세요."
그녀는 갈수록 도도해지고 있었다.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더욱 세부적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배미화는 알리바이가
없었지만 자신에 대한 수사진의 끈질긴
심문에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의 답변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자신의 빨간색 승용차를 직접 몰고
나갔다고 증언했다. 수사관들이 그녀를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증권회사 직원
두 명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창너머로
관찰했다.
"저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요."
지친 모습의 그들은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을 더 이상 붙들어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들에게
그동안 협조해 준 데 대해 감사하며 가도
좋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그들의 증언에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범인으로 생각되는 여인에 대한
목격자로서의 그들의 증언이란 것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너무 불확실했기 때문에
거기에 기대를 건다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그들은 잠깐 스쳐가면서 그녀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나이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일치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20대
아가씨라고 한 반면 또 한 사람은 40대
부인 같았다고 주장했다. 옷도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엇갈려 진술했다. 그들의
증언이라는 것이 이런 식이니 수사진이
거기에 기대를 걸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증권회사 직원들의 흐리멍텅한 증언과는
상관없이 수사진은 알리바이가 없는
배미화를 범인으로 끌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그녀를 단지 용의자로
생각할 수 있을 뿐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만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의 자백에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그녀는
완강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어제 오후 3시 10분경에 집에
도착해서 권투중계를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들이 모두
애매하단 말이오. 우리가 아가씨를
데릴러갔을 때 집에는 아가씨 말고
어린애와 노모가 있었어요. 두 살짜리
어린애의 말을 믿을 수도 없고, 결국
노모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노모는 한참
주무시고 계신데다 몸도 편찮아 아가씨가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왔어요. 아가씨가 어제 집에 도착했을
때 노모께서 아가씨를 분명히 보셨나요?"
"네, 집에 도착해서 안방 문을 열고
어머님이 누워 계신 것을 보고 곧장 제
방으로 들어갔어요. 정 의심이 나신다면
"그렇게 큰 집에 가정부도 없나요?"
"없어요. 있었는데 얼마 전에 나갔어요.
지금 구하고 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가정부 없이 생활하고 있어요."
"가정부가 나간 것은 언제였나요?"
"한 달쯤 됐어요."
"왜 나갔나요?"
"제가 좀 까다롭게 굴었더니 나갔어요.
질이 좀 좋지 않은 애였어요. 남자들한테서
전화도 많이 걸려오고......."

새벽 5시가 지났을 때 경찰의가 검정색
왕진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그가 고무줄로
미화의 왼쪽 팔을 묶으려고 하자 그녀는
펄쩍 뛰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가만 있어요. 혈액 검사를 해야
마형사가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는
저항을 포기하고 의사한테 팔을 맡겼다.
"혈액형이 뭐죠?"
의사가 주사기로 그녀의 혈관을 찔렀을
때 마형사가 물었다.
"B형이에요."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주사바늘이 피부를 뚫고 혈관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B형입니다."
잠시 후 검사를 끝낸 의사가 말했다.
마형사는 기분이 언짢아지면서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황개의 불탄 차
옆에 바짝 들이대져 있던 그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 운전석 앞에 서 있는 재떨이
속에는 빨간 립스틱이 묻은 담배꽁초가
여자가 피운 것으로 생각되는 그
담배꽁초의 필터 부분에는 마형사가 처음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습기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형사는 그것들을
수집하여 재빨리 검사기관에 보냈었는데
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그 담배꽁초에 남아
있는 타액을 검사한 결과 그것을 피운
사람의 혈액형이 AB형이라고 통보해 왔던
것이다. 타액에서 사람의 혈액형을 추출해
내는 것은 수사의 기초단계에서 흔히
이용되어온 것으로 지금은 거의 일반화되어
있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방법이었다.
베이지색의 그 소형 도난 차량 속에
여인이 범인이 틀림없다면 그녀와 혈액형이
틀린 배미화는 결코 용의자일 수가 없다.
마형사는 그녀에 대한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기보다는 피살자의 애인이자
약혼녀였던 그녀를 통해 피살자에 대한
것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들의 관계와
주변에 대해서도 자세히 캐보면 무엇인가
단서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에 앞서서 먼저
끝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배미화한테
피살자의 시체를 확인시키는 일이었다.
"피살자는 불에 너무 타버려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피살자를
황개 씨로 보는 것은 피살자가 황개 씨의
사건에는 의외의 변수가 작용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피살자의 시신을 확인해서 황개
씨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형사의 말에 배미화는 무겁게 머리를
흔들었다.
"좋을 것도 없어요. 그 사람하고는
끝났으니까요."
그녀는 배신자에 대해 이미 마음이
돌아섰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시신을 확인하기 전에 황개의 신체상
특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와 깊은 육체관계를 빈번히 나누었다면
그의 신체상 특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황석희로부터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던 마형사는
"왼쪽 팔뚝에 문신이 새겨져 있어요."
그것은 이미 황석희한테도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떤 문신이었나요?"
"해골 문신이었어요."
"문신은 소용없게 됐어요. 피부가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문신 같은 것은 남아
있지도 않아요. 남아 있는 것은
치열인데...... 그 사람의 치열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몰라요. 입 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거기 말고 또 한군데
특징을 알고 있어요. 발바닥 중간에 불에
덴 것 같은 흉터가 있어요."
"어느 쪽 발바닥인가요?"
"왼쪽이에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피살자의 양쪽
발, 특히 발바닥 부분은 피부 가운데서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튼튼한
가죽구두에 보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불길이 세었던지 가죽구두도 많이
그을려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타지는
않고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수사관들 중에는 아무도 그 구두를 벗겨본
사람이 없었다. 워낙 불에 탄 시체의
모습이 참혹했기 때문에 거기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구두가 남아 있는 이상
발바닥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마형사는 배미화를 자신의 차에 대워
향했다. 남형사도 함께 동행했다.
"웬놈의 비가 이렇게...... 꼭 노아의
홍수 같군."
아스팔트 길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마형사가 투덜거렸다. 차도는 물에 잠겨
숫제 보이지도 않았다. 낮은 지대인데다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침수현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안 되겠는데요. 바닥이 물에
잠기겠어요."
남형사가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맞은편에서 오던 차들도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돌아서 갈 수밖에 없겠는데요."
남형사의 말에 마형사는 잠자코 차를
후진시켰다.
그는 차를 왼쪽으로 돌렸다.
뒷자리에 남형사와 함께 앉아 있는
배미화는 아무 말이 없다. 남형사가
마형사를 대신해서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던졌다.
"황개 씨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무직이었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직업이 없었어요."
그녀는 비가 퍼붓고 있는 어둠 속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왔다구요?"
남형사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아무런 직업도 없었단 말인가요?"
"네, 영화사를 세울 생각이었어요. 그것
착각했었는지도 모르죠. 유명한 영화감독을
소개시켜주기에 함께 저녁식사까지
했는데...... 이제 생각하니까 모든 게
연극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전과 가운데 사기전과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나요?"
"알았어요. 폭력전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다음 말을 하기가 수치스러운지
입을 다물었다.
어둠이 걷히면서 물에 잠긴 도시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뭡니까?"
"전과 같은 건 대수로운 게 아니잖아요."
"하긴 그렇죠. 전과 같은 거야 아무것도
아니죠."
사랑하게 되면 전과 같은 거야 참고사항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생각되겠지.
"그때는 전과기록 같은 것이 오히려
남자의 매력으로 생각될 정도였어요.
전과도 없는 깨끗한 화이트칼라는 계집애
같았어요."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 생각해 버리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 같은
노처녀의 말에 마형사는 기분이 언짢았다.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을 알게 됐습니까?
그 사람과 약혼하게 된 경위도 말씀해
주십시오."
미화가 황개와 약혼한 때는 지난
봄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3월
중순경이었다. 집안에서는 황개와 약혼하는
어른들이라고 해야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전부였는데 그중에서 약혼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은 그녀의 오빠인 배창기였다.
오빠가 반대하고 나서자 심약한 그녀의
어머니도 마지못해 아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마음이 약한 그녀의 어머니는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오빠였다. 그는 아버지가 없는
미화한테는 보호자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어머니처럼 심약하고 선하기만한 그는
미화를 끔찍이도 아끼고 생각해 주었는데
황개와의 약혼에 이르러서는 한사코 자신의
의견을 굽히려고 들지를 않았다.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들어주는 오빠가 그때만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오빠가 그렇게 고집을 피운
약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황개가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동생의 결혼 상대자라고 하니
자기나름대로 그 인물에 대해 조사를
해보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또 그만한 조사쯤 해볼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다. 그는 황개가
사기와 폭력으로 복역한 사실이 있음을
알아내고 그 사실을 들어 황개가 질이 좋지
않으니 결혼할 생각은 버리라고 그녀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황개한테
깊이 빠져 있는 그녀의 귀에 그런 사실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런 것이 도대체 두
사람 사이의 애정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자 주장이었던 것이다.
"사기와 폭력 전과 이외에 또 하나 있는
남형사가 미화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고
끼어들었다.
"또 있나요?"
그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형사를 쳐다보았다.
남형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전석의
마형사가
"이 사람, 쓸데없는 말하지 마."하고
제동을 걸었다.
그것이 미화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앉으면서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말씀해 주세요.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아야겠어요."
약혼했나요?"
남형사의 빈정거림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말씀해 주지 않으면 저도 입을
다물겠어요."
"그렇다면 말씀해 드리죠. 황개 씨는
강간사건으로 지금 수배중인 인물입니다.
1년 전쯤 나이어린 여고생을 차에 태우고
가다가 차 속에서 강제로 욕을 보였지요.
환각제를 먹이고 나서 말입니다. 그
여고생은 지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답니다."
마형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형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잔인한 이야기를 해주다니 괘씸한 놈이라고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말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남형사는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 사건을 아셨다면 아마 그 사람하고
약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안
그랬을까요?"
그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오빠는 왜 그 사실을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지? 왜 다른 것은 이야기해 주면서
그것은 말해 주지 않았지?"
그녀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내 생각에는 오빠가 그걸 몰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알았다면 당연히
미화씨한테 말해 주었겠지요.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강간사건 피해자는 5개월인가
지나서야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지요."
남형사한테는 상대방의 기분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해버리는
잔인한 면이 있었다. 마형사는 바로 그
점을 싫어했고 그래서 더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해주곤 했지만 그는 그때뿐
돌아서면 또 다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긴 그 점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기는 있었다.
이를테면 마형사가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남형사가 재빨리
그의 의중을 간파하고 방정맞게 대뜸 말을
꺼낼 때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미화씨가 그 사람하고
보았다.
약혼식을 올렸을 그 시기쯤해서 피해자가
강간사건을 신고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개인적인 조사를 통해
황개 씨의 전과사실을 알게 된 오빠께서는
그 강간사건을 모르고 있었던 게
당연하겠지요. 오빠가 조사할 때쯤만해도
경찰 컴퓨터에는 황개 씨가 강간사건으로
수배중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
겁니다. 오빠께서 그것을 아셨다면 당연히
말씀드렸겠지요."
"그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었죠?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인간과 장래를
약속했다니...... 나 같은바보는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녀는 분노와 혐오감이 엇갈리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다가 이내
수치스러움을 털어버리고 이렇게 물었다.
"그 밖에는 경찰 기록에 나타난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기록에 나타난 것 말고도 신고되지 않은
건수가 수두룩할 겁니다. 그런 인물을
우리는 지능적인 상습범이라고 부르지요.
기분이 상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배미화씨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사기당해서 약혼까지
했으니까요."
멋대로 단정을 내리는 젊은 형사의 말에
그녀는 굴욕감과 함께 심한 저항감을 느낀
것 같았지만 너무 정확하게 정곡을 찔렀기
때문인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떻게 그를 알게 됐습니까?"
남형사가 짓궂게 물고 늘어졌다.
"그런 것까지 꼭 이야기해야 하나요?"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숨김없이 이야기해 줘요."
"알겠어요. 그를 알게 된 건
스키장에서였어요."
그녀가 황개를 처음 알게된 것은 용평
스키장에서였다.
1년 반쯤 전, 그러니까 작년 1월
중순경에 그녀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용평
스키장에 스키를 타러 갔었는데 황개는
그때 그녀가 투숙하게 된 콘도의 바로 옆
콘도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콘도의
베란다와 베란다를 구분해 주는 것이 단지
몇 가닥 철책뿐이었기 때문에 베란다에
나와보면 옆 콘도의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곤 했는데 그
모습이 하도 멋져서 금방 노처녀들의
남자쪽에 여자가 함께 있었다면 처녀들이
눈독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도 남자들뿐이었다. 모두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 한 명 있다는 것이 또한
아가씨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
아가씨들인지라 베란다를 통해 금방 추파가
건너가고 그쪽에서도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이
건너왔다. 일은 처음부터 잘 되어가는 성
싶었다.
분위기 또한 낯선 남녀들이 금방 친해질
수 있게끔 환상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지 않아
삭막하기만하던 스키장에 함박눈이 펑펑
찾아 몰려든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풍선처럼
들뜨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한국 남자가 외국인보다 훨씬 멋지다는
사실을 미화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레고리라고 불린 그 외국인은 금발의
미국인이었는데 황개보다 키도 작고 꽤나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황개라는 남자는 키도 크고 용모도
빼어나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그의 스키 실력이었다.
그는 스키 선수 뺨칠 정도로 스키를 잘
탔고 그래서 많은 남자들 가운데서도 단연
뛰어나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그녀한테는 자연 그 남자가 우러러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부드럽고 점잖아
보였다. 눈에 그을린 구리빛 얼굴과 웃을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레고리와 영어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 그는 영어도 아주
잘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그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재미교포라고
했다.
배미화 일행은 하나같이 스키장에 오면서
멋진 남자나 사귀어 기막힌 연애나 했으면
하고 바랐었다. 노처녀들인데다 끼가
상당히 있는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한 갈망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눈 속에 파묻혀 낯선 남자와
미치도록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떠날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고
차갑게 돌아서서 떠나온다. 그녀들은
설국에서의 로맨스를 제법 구체적으로
첫눈에 황개한테 반해버린 미화는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는
처음에는 그녀에게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친절하고 점잖은 것이
몸에 밴 듯 누구한테나 그렇게 대하는
것이었고 세 여자의 동태를 관망하는
듯했다.
양쪽의 콘도 이용자들은 처음에는 제법
격식을 갖추어 상대쪽을 서로 초대하는 등
소란을 피우더니 나중에는 그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쪽저쪽을
오가게까지 되었다.
여자 셋 가운데 미화는 인물이 제일
뛰어난 편이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한테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될 수 없는
중산층 가정의 딸들이었지만 그녀만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몸이었다. 묵고
있는 콘도도 그녀 것이었고, 그녀들이
타고온 승용차도 그녀의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스키 장비를 빌려쓰고 있었지만
그녀만은 최고급 스키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그녀의 재력이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에 불과했다.
세 아가씨들을 관망하는 듯하던 황개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미화를
점찍었고, 그녀한테 스키를 가르쳐주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데리고 하루종일 눈밭에서
뒹굴었다. 일단 미화한테 마음을 정하자
그는 다른 아가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루이틀 지나는 사이 두 사람
사이는 눈에 띄게 밀착되어갔다. 그들은
끌어안고 다님으로써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오랜 연인 사이인 듯 행동했다.
그들의 노골적인 애정 행위에 미화의
친구들은 질투심을 보이면서 해도
너무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미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진 그들은 그런 불평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화는
오히려 친구들한테 잘 봐 달라느니 협조를
부탁한다느니 하는 등 뻔뻔스럽게
나오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화의 친구들은 황개라는 인물을
중간에 놓고 경쟁을 벌인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못생긴
미국인을 상대로 영어 나부랭이나
지껄여대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미화가 황개와 첫번째 성관계를 가진
날이었다. 황개쪽에서 보면 처음 이틀간은
탐색기간이었고 그 다음날 목표를
정하자마자 하룻만에 그녀를 해치웠다고 볼
수 있었다.
용평 스키장에서는 단둘이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많았다. 처음 그들은
친구들 눈을 피해 호텔 방을 이용했는데
일단 한번 관계를 맺고 나자 콘도는 제쳐둔
채 아예 호텔 방을 얻어놓고 하루에도
몇번씩 들락거리곤 했다.
호텔 방안에서는 두 사람은 숫제
발가벗고 지냈고, 방안에서 지내는 시간을
그들은 눈의 축제라고 불렀다. 미화는
완전히 황개한테 빠져 있었다.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져봤지만 황개만큼
그녀를 만족시켜준 남자는 일찍이 없었다.
단순한 관계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횟수를
한번 더 추가했다는 기록면에서의 의미나
있을 뿐 기쁨과는 사뭇 거리가 먼
관계였었다. 그러나 황개와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몸을
섞음으로써 비로소 성에 눈을 뜬 것 같은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다. 눈의 축제가
끝나고 어둠이 찾아오면 그들은
나이트클럽을 찾아가 온몸이 늘어지도록
춤을 추었다. 황개는 스키 못지 않게
춤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여자를 녹일 수 있는 무기는 모두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미화가 콘도를 찾아드는 것은 자정도
훨씬 지난 새벽녘일 때가 많았다. 화가 난
친구들은 아예 밖에서 자고 들어올 것이지
것이었지만 그녀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보다못한 친구들은 하나의 제의를 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들은 병신이 될 것
같아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그레고리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것이었다.
"초라하게 서울로 바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레고리를 보디가드로 데리고 설악산에나
가야겠어. 이렇게 된 건 모두 네 탓이야.
네가 독식했기 때문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손해배상을 받아내야겠어.
설악산까지의 차비 호텔비 식비 술값 등등
모두해서 기십만 원은 주셔야겠어. 더 이상
못봐주겠으니 우리가 간뒤에 질탕하게
놀아봐. 하지만 몸 생각하라구."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기 때문에 미화는
친구들에게 기십만 원을 내주었고,
설악산을 향해 떠났다.
그들이 요란스럽게 떠나고 난 뒤 미화는
황개와 함께 그곳에서 닷새를 더 보내다가
돌아왔다. 축제기간이 끝나면 안면을
바꾸고 싹 돌아서겠다던 처음의 생각은
눈녹듯이 사라져버리고 그들은 서울에
돌아와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황개의 깊은 꿍꿍이
속이야 알 수 없었지만 미화는 연인의
감정으로서 그를 만났던 것이고, 그러다가
1년쯤 지나 마침내 그와 약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병원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병원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체
안치실쪽은 더욱 어두워보였고 비까지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시체실 앞에 도착해서 내릴 때 보니
미화의 얼굴빛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냉기가 감돌고 있는 복도에는 겨우 앞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침침한 불빛만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경비원이 복도의
중간에 있는 철문을 열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음향이 음산한 분위기를 더욱
괴기스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실내가 갑자기 대낮같이
밝아졌다. 사람들은 눈이 부셔 한동안
문앞에서 눈을 깜박거리며 서 있었다.
미화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한사코 시신을 확인하기를 거부하는 그녀를
돌아갔다.
실내는 복도보다 더 추웠다. 시체를 냉동
상태에서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실내온도를
영하로 유지시켜놓은 것 같았다.
불에 탄 시신은 아직 철제함 속에
들어가지 않고 비닐 커버에 덮인 구석쪽에
놓여 있었다. 경비원이 시신을 실내
중앙으로 밀고 왔다.
마형사는 미화를 가까이 오게한 다음
시신의 머리쪽에서부터 커버를 들춰보였다.
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둥근 덩어리를 본
순간 미화는 얼굴을 홱 돌리면서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두번 다시 보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녀가 토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지 말고 똑똑히 봐요. 확인해야
"싫어요."
싫다는 그녀를 가까스로 달래 시신을
보여주었지만 그녀는 단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 같은 것은 비치지도
않았다. 남형사가 시신의 왼쪽 발에 신겨
있는 구두를 벗기기 시작했다. 두꺼운
가죽이 불에 그을려 오그라든 것으로 보아
불길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알만 했다.
두꺼운 가죽에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발은 손상을 입지 않고 고스란히 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양말을 벗긴 다음 발바닥을
보자 중간 부분에 불에 덴 것 같은 흉터가
나 있는 거이 뚜렷이 보였다.
"네, 틀림없어요."
그녀는 갑자기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피살자의 신원이 명백히 밝혀진 이상
죽은 사람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가
강화되어야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히 여자들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수사관들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살자가
생전에 난잡할 정도로 여자 관계가
복잡했고 거기에다 범인이 여자로 추정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피살자가 죽기 전까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자들 가운데 경찰수사에
걸려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 첫번째
제2의 여인이 배미화였다.
마형사는 제3의 여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황개 씨의 다른 여자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까?"
배미화의 집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마형사가 물었다.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준 다음 수사본부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다.
"동거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황개의 시신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그녀는 여전히 얼어붙은 표정을 짓고
마형사는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오른쪽으로 차를 꺾었다.
그는 아무래도 그녀한테서 완전히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혈액형과 다른
혈액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피살자와 가장 가까운 약혼녀였다. 만일
범인으로 추정되는 제3의 여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배미화는 더욱 의심스러운 인물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아가씨가 범인이라면
동기는 무엇일까? 남자의 배신에 복수한
것일까? 복수치고는 그 방법이 치밀하고
특이하다. 그리고 너무 잔인하다. 마형사는
아무래도 그녀를 빨리 풀어주고 싶지가
않았다.
배미화의 집은 단순히 집이라기보다는
정도로 집이 컸다. 집 주위는 성벽같이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그 담안에는
수백 평쯤 되어보이는 정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안에서 개들이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소리가 주위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넋을 잃고 정원을
바라보던 마형사와 남형사를 향해 미화가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아, 잠깐!"
문을 닫으려는 그녀를 마형사가
제지했다.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실 수 없을까요?"
그녀는 비극적일 정도로 못생긴 형사와
미남 형사를 난처한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남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마형사가
막았다.
"아니야. 난 배미화 씨가 끓여주는
커피를 한잔 꼭 마시고 싶어."
"그것도 수사에 속하는가요?"
"아 아뇨, 보시다시피 춥고 배가
고프군요. 알아볼 것도 있고 말입니다."
뚱보 형사는 손을 들어 비바람치는
하늘을 가리켰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말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쪽으로 걸어가자 그
앞에 몸집이 작은 한 노파가 몸을 웅크린
채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비쩍 마른 그녀는 병색이 완연해
보였고, 계속 콜록거리고 있었다.
계세요. 별일 아니니까 들어가세요."
미화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쌀쌀맞게
말했지만 노파는 가지 않고 거실로
따라온다.
"어디서 밤새고 들어오는 거니? 이분들은
어디서 오신 분들이니?"
노파는 유순해 보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낯선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엄마는 아실 필요 없으니까 들어가
계세요. 이분들은 커피 한잔씩 하고
돌아가실 거예요."
노파는 귀가 잘 안 들리는지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고 미화는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올케는 아직도 안 들어왔다."
미화가 노파의 등을 떠다밀었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살림하는
여자가 집을 나가서 아무 소식도
없다니...... 요새 젊은 여자들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미화는 노파를 방안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형사들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거실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해
보였다.
"자, 앉으세요. 커피 끓여올 테니까 앉아
계세요."
미화가 주방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형사들은 온몸이 푹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굉장한데요. 싸구려는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데요."
맞은편 장식장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면서 남형사가 말했다.
"모두가 외제품들입니다."
남형사는 바닥의 커피트를 손으로
쓰다듬어보기까지 했다.
"우리 같은 놈은 죽을 때까지 한번
이렇게 해놓고 살 수 없겠죠."
남형사의 푸념과는 달리 마형사는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잘
꾸며놓고 살고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배미화는 조금 후에 커피를 끓여가지고
왔는데 향내가 진하게 나는 커피였다.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집에는 생각보다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족으로는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 내외 그리고 어린
조카가 전부였다. 남형사는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모두 적었다.
집의 크기로 보아 가정부는 물론
경비원과 운전수도 있을 법한데 그런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가정부는
한 달 전에 나갔고, 운전수는 그보다 더
전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오빠 내외하고 제가 모두 운전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집에 있는 운전수는
내보냈어요. 오빠 회사에는 물론 운전수가
있어요."
"아버님은 안 계십니까?"
"그럼 생활비는 누가 법니까?"
단순한 물음에 그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생활비 같은 것을 생각지도 않느다는,
가소로워하는 웃음이었다.
"오빠가 벌고 있어요."
"오빠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사업하고 있어요."
"무슨 사업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 가지 하나봐요."
그녀는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녀가 하는 말로 봐서는 별로 대단찮은
사업을 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 알고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로미오와
쥴리엣"호텔이라는 말이 나오자 형사들은
깜짝 놀랐다.
"강남에 있는 호텔 말입니까?"
이름값 톡톡히 받았어요."
형사들은 잠시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호텔 "로미오와 쥴리엣"은 그 이름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마형사와
남형사도 가끔씩 거기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거나 차를 마실 때가 있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그 호텔은 규모가 클
뿐만아니라 시설도 아주 훌륭한 편이었다.
바로 그 호텔 주인이 배미화의 오빠라고
하니 형사들로서는 놀라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배미화의 아버지는 그 호텔을
짓다말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에 그녀의
오빠가 중단된 공사를 재개해서 호텔을
완공해냈다고 했다.
형사들도 그 호텔의 원래 주인이 강남의
떠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
굴러다니는 소문에 민감한 형사들인지라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께서는 혹시 암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나요?"
남형사가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네,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형사는 그만한 알부자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이라면 이만큼 호화롭게
꾸며놓고 살아도 별로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배미화의 오빠 배창기는 호텔업 말고도
빌딩업, 식품업, 제과업 등에서도 큰
이윤을 보고 있었고 요즘에는 건설업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신흥재벌이시군요. 부럽습니다.
실례지만 오빠는 연세가 올해 몇이십니까?"
자기의 나이와 비교해 보고 싶은지
남형사가 물었다.
"아직 마흔 안 됐어요."
"젊으시군요. 젊은 나이에 그렇게 크게
사업을 하시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다 아버지를 잘 둔 덕택이죠 뭐."
"그래도 말입니다. 오빠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인사라도 나눌 수 있으면
영광이겠습니다."
마형사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남형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집에 계시지 않아요."
"어디 출장가셨나요?"
"네, 지금 도쿄에 계셔요."
"아, 그렇습니까."
마인이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며칠 됐어요. 나가신 지 일 주일쯤
됐어요. 지금 도쿄 임페리얼 호텔에 묵고
계셔요. 내일이나 모레쯤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은 명암이 뚜렷하게
교차되고 있는 흑백사진으로 얼굴만을 크게
찍은 것이었다. 그것은 연약한 얼굴에
안경만이 두드러져 보이는 마흔 안팎의
남자 모습이었다. 남자다운 패기와 강인한
의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여자보다도 더 가냘퍼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분이 배창기 씨입니까?"
마형사는 턱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네, 우리 오빠예요. 저 사진은 우리
그녀는 맞은편 장식장 안에 놓여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배창기나 미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뚱뚱한 노인이 장식장 안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리는 반백이었지만 건강미가
넘치는 모습이었고 금테 안경너머로
눈웃음치는 모습은 매우 온화하고 인자해
보였다.
마인은 그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말고 갑자기 몸을 돌려 미화를 바라보았다.
"참, 아까 우리가 여기 들어왔을 때
어머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던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올케 되시는 분을 몹시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던데...... 집안에 무슨 일이
"그럴 일이 있어요."
미화는 창피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집안 일로 이를테면 고부간 또는 올케와
시누이 사이의 불화 때문에 집을 나갔다면
경찰이 굳이 따지고 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미화의 다음 말이
형사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올케 때문에 정말 골치예요."
그렇게 말하고 난 그녀는 갑자기
억하면서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화장실쪽으로 달려갔다. 형사들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화장실 안에서 억억 하면서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신한 거 아닙니까?"
"아닐 거야. 황개의 시체를 생각하고
그동안 참았던 게 터진 걸거야."
화장실 안에 들어간 배미화는 위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깡그리 토해냈다. 마형사의
말대로 문득 황개의 참혹한 시체를 생각한
순간 구토가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시체
안치실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런대로
구토를 참을 수가 있었는데 막상 집에
돌아와 생각나는 순간 그동안 참았던 것이
일시에 터져나왔던 것이다.
"올케 때문에 골치 썩이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앉기가 무섭게
남형사가 물었다. 미화는 플레이보이처럼
생긴 그 젊은 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올케가 어제 나가서 아직 들어오지 않고
"정확히 어제 몇 시쯤에 집을
나갔습니까?"
"제가 외출준비하고 있을 때 나갔으니까
오전 11시 조금 전이었을 거예요."
"그때 나가서 지금까지 안 들어왔다는
겁니까?"
"네, 전화연락도 없어요."
형사들은 서로 시선을 한번 주고받고
나서 다시 미화를 바라보았다.
"올케라면 바로 오빠 되시는 배창기 씨의
부인을 말하시는 겁니까? 유밀라 씨
말입니까?"
"네, 저한테는 오빠가 한 사람뿐이에요."
"올케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저보다 한 살 적은 스물일곱이에요."
"오빠하고는 나이 차이가 많군요?"
"유밀라 씨의 사진이 있으면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미화는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그만
액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그것은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컬러
사진이었다. 마형사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분이 올케 되시는 분입니까?"
"네, 이애는 조카이고...... 그리고 우리
오빠예요. 조카 돌 때 사진사가 와서 찍은
거예요."
두 부부는 다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마형사의 눈에는 어쩐지 조화가 깨뜨려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자쪽이
너무 뛰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자쪽이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사내라하더라도.
"어디 간다고 하면서 나갔나요?"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전에도 외박한 적이 있습니까?"
"네, 몇번 있어요."
"오빠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이 사실을 알고 외국에 가셨나요?"
"아아뇨. 오빠는 그보다 훨씬 전에
외국에 나가셨어요. 지난 7월 15일에
출국하셨기 때문에 모르고 계셨는데 제가
지난밤에 국제전화로 말해줬어요. 가능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다못해
할 수 없이 알려줬어요. 아무래도 숨겨주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잘 하셨습니다. 오빠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녀는 화가 나는지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아무리 화가 나도 올케한테 절대
화를 내지 않아요. 올케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그걸 말해 주니까 오빠는
화는 내지 않고 오히려 걱정만 했어요.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제가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왜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나요?"
"오빠가 너무 바보 같아서 그랬어요.
다른 남자들 같으면 그런 전화받고 펄펄
뛰었을 거예요. 자기 아내가 집에도 안
들어오고 외박하고 있는데 걱정만 하면서
오빠가 불쌍해요. 오빠는 결혼을 잘못한 것
같아요. 나 같으면 이혼하겠어요."
그녀의 단호한 어조에 형사들은 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화씨는 올케를 미워하시는 것
같군요?"
"마음에 안 들어요.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오빠가 걱정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자기 아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교통사고를 당해서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고 그밖에 다른 사고로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그녀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이유라면 제가 왜 흥분하겠어요?
엄연히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자가 바람이
나서 돌아다니니까 그렇지요."
"그럼 유밀라 씨가 지금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것은 사고 때문이 아니고 바람을
피우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나요?"
그 물음에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을 피우고 있기 때문에 집에 안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합니까?"
마형사가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미화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형사들의 따가운 시선에 견디다 못해
그녀는 마침내
"그럴 가능성이 커요."하고 얼버무렸다.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사실과는 엄청난
남형사가 따지듯이 묻자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알아요. 하지만 아무 근거없이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리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나 형사들이 그것을 그대로 모른체할
리 만무했다.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이라면...... 그
근거란 게 뭡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한 말을 전부
부인하기라도 하는 듯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얼버무리지 말고 말씀해
모르니까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제가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말씀드렸나봐요. 근거 같은 것은
없어요."
형사들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기분내키는 대로 멋대로 말을 바꾸는
그녀의 태도에 불신과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랬다 저랬다
하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근거가 있어서 한 말입니까,
아니면 괜히 해본 말입니까?"
"괜히 해본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어머님 좀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몇 마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럽니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기다리세요."
안방으로 먼저 들어간 미화는 잠시 후에
방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 엄마는 심장이 약하세요. 그러니까
아직은 황개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나중에 자연히 알게되면 할 수 없지만
일부러 말해서 충격을 줄 필요는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방안에는 한여름인데도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한쪽 이부자리 위에는
어린아이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 퍼져
앉아 있었다. 아이의 이마를 짚어보고 있던
그녀는 형사들이 들어서자 아이를 들어
품에 안으면서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경찰에서 오신 분들이니까 묻는 대로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경찰이 무슨 일로 오셨지? 우리가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채씨는 사뭇 놀라서 물었다.
"아이, 엄마두,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뭐좀 알아볼게 있어서 그러니까
묻는 대로 대답만 하세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 배미화 씨는 좀
나가주시겠습니까?"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그녀가 볼멘 소리로 물었다.
남형사가 분명한 어조로 말하자 그녀는
거침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손자입니까?"
형사들이 아이를 들여다보며 묻자 채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게 생겼군요. 이름이 뭡니까?"
"동재라고 해요."
남형사가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았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조그만 손이었다.
"몇 살이지?"
아이는 힘없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몹시 병약해 보이는 아이로
눈의 초점이 흐려 있었고, 코에서는 콧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가 기침을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도 아주 약해
ꠑ ꠑ罹맙눼?
"아직 어려서 말도 잘못해요."
"많이 아픈가 보지요?"
"감긴가 봐요. 제 애비를 닮아서 애가
몸이 약해요. 늘상 병치레를 해요."
"병원에는 가보셨습니까?"
"아이구, 그럼요."
마형사가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가 몹시 뜨거웠다.
"열이 많군요. 해열제라도
먹여야겠는데요."
"조금 전에 먹였으니까 좀 있으면
가라앉을 거예요."
"아기 엄마는 아기가 아픈 걸 알고
나갔습니까?"
"그럼요. 어제 잠깐 나갔다 오겠다 하고
나가더니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ꠑ ꠑ廈?세상에 시어머니한테 아픈 아기를
맡기고 나간 년이 하룻밤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다니...... 원 세상에 이런
일이1......."
유순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는 것 같더니 이어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나도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약을 먹고
있어요."
그녀는 약봉지를 집어서 알약을 몇개
꺼내더니 그것을 입속에 집어넣고 나서
물을 마셨다.
"동재 엄마는 외출 외박이 잦은
모양이지요?"
"우리 애가 알면 난리가 날 거예요."
유밀라는 남편이 집을 비우기가 무섭게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남편이 외국에
출장이라도 가면 제세상을 만난 듯 더러
외박까지 한다고 채씨는 분을 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 남편이 알면 행여 가정이 깨질까봐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이젠 안 되겠어요.
우리 애가 돌아오면 죄다 이야기해서
단단히 혼을 내든지 둘이 갈라서게 하든지
해야겠어요. 더 이상 가만뒀다가는 집안
꼴이 말이 안 되겠고...... 우리 애 신세만
망칠 것 같고....... 아무튼 이번 기회에
끝장을 내야겠어요."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것 같았다.
남의 가정 문제야 형사들이 알 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화제를 돌렸다.
돌아왔습니까?"
그녀가 다시 기침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멎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기침이 멎은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늙으니까 기억해 내기가 힘들어요."
"그러실테죠."
"어제 점심 때 전에 나갔으니가......
아마 11시쯤에 나갔을 거예요. 그리고
오후에 들어왔지요."
"오후 몇 시쯤이었습니까? 저녁
때였나요?"
"아니오. 그보다 훨씬 전이었지요. 아마
서너 시 됐을 때 돌아왔을 거예요."
"직접 문을 열어주셨습니까? 따님은
하던데요?"
그녀의 얼굴 위로 당황하는 빛이
스쳐가는 것을 형사들은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채씨는 천천히 괘를 흔들었다.
"내가 열어주지 않았어요. 그애가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까 문을 따고 들어왔을
거예요. 나중에 안방 문을 열어보기에
그애인 줄 알았지요."
기대감이 스러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형사는 다시 물었다.
"따님은 그 후에 다시 외출하지
않았습니까?"
"나가지 않았어요. 쭉 집에 있었고......
저녁까지 제 손으로 지어 먹었는 걸요.
들어오자마자 저기 거실에 앉아서 테레비를
봤지요."
ꠑ ? "어머님도 테레비를 보셨습니까?"
"아 아니오. 난 쭉 자리에 누워
있었어요. 가끔씩 내다보긴 했지만
텔레비는 보지 않았어요."
형사들의 어깨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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