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2-2

3학년2반 | 2022.02.03 08:02:23 댓글: 0 조회: 88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396


4. 추적

그 집은 골목의 맨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단층 양옥이었다. 오래 된 듯 꽤
낡아보였지만 대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문패에 적혀 있는 이름과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요?"
잠시 후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전화에서 듣던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화국을 통해 이 주소를 알아내기까지
그는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제대로 풀려나간다고 생각하자
그는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세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문을 잘 열어주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그는 준비해둔 대답이 있었다.
"뭐좀 조사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대문 틈으로 보이는 여인은 50대 중반의
깡마른 여인이었다.
"어, 어디서 오셨는데요?"
"경찰에서 왔습니다. D경찰서 수사과
박형사입니다."
그녀는 문틈을 통해 방문객을 살폈다.
"어떻게 경찰이라는 걸 믿을 수 있죠?
신분증 가지고 계세요?"
김영대는 잠자코 형사 신분증을 문틈으로
밀어넣었다.
그 신분증에는 "형사"라는 붉은 글자가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여인은 거기에 적혀
날카로운 눈매로 거기에 붙어 있는 사진과
방문객의 얼굴이 같은지를 문틈으로 확인한
다음 마침내 대문을 열어주었다.
"실례합니다."
깔끔한 복장의 젊은 사내는 우산을 접고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하숙을 많이 치나보죠?"
조그만 방들이 연이어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가짜 형사가 물었다.
"학교 앞이니까 하숙생들이 좀 있어요."
"방학중에도 학생들이 남아 있습니까?"
"지금은 모두 고향에 내려가고 없어요."
그 집에서 가까운 곳에는 유명한 Y여대가
있었다. 가짜 형사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주인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혼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장사하고 있어요."
그녀는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방문객은 굳이 무슨 장사를 하고
있는냐고는 묻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의심이 가는 학생들이 이
집에 하숙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실태를 알아보려고 온 겁니다. 이 집에
하숙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행동이
수상하거나 한 사람은 없었나요?"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학생들 사이에 불온한 사상이 퍼져
있고...... 그 배후에 간첩들이 주동하고
있다는 거 아주머니도 잘 알지요?"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자 그녀는
잔뜩 움츠러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학생들뿐이에요."
"이 아주머니, 아무것도 모르는군.
간첩이 겉으로 보기에 악하게 보이는줄
아시우. 더없이 착하게 보인다구요. 방좀
조사합시다. 학생방에 안내해요."
갑자기 그는 거칠게 나오고 있었다.
"모두 집에 내려가고 없는데......."
"짐은 있을 거 아니오."
그녀는 잔뜩 주눅이 들어 방 하나를
열어주었다.
그 방은 여대생 두 명이 쓰던 방이었다.
창가에 책상이 두개 나란히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대학교재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여학생들 방답게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진 방이었다.
방안으로 들어간 그는 먼저 책상서랍을
훑어보고는 아무데나 내던져 버렸다. 그런
그의 거친 행동을 주인 여자는 떨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 말고 일반인도 하숙쳤지요?"
"일반인은 없고...... 모두
학생들뿐이에요."
"거짓말 말아요!"
그는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책을 내던졌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다 알고 왔는데 거짓말하면 안 돼요.
간첩을 숨겨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신세 조진다구."
가짜 형사는 이제 반말조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간첩을 숨겨주다니요. 우리
"알아요, 알아. 장교라면 진급에 영향이
있어요. 양방희 방은 어디야?"
"네?!"
"양방희 말이야! 양방희 몰라?!"
그가 주먹으로 책을 쾅 치는 바람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다 알고 왔으니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아요. 양방희 어디 갔어?"
"어, 어기 갔는지 몰라요."
"양방희 방이 어디야?"
"그, 그 아가씨는 얼마 전에 나가고
없는데요."
"양방희는 간첩이야! 알았어? 간첩을
숨겨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아이구 숨겨주다니요. 숨겨주지
않았어요. 하숙을 하겠다기에 받아주었을
양방희가 간첩이라는 말에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가짜 형사는 그때부터 양방희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해 들어 갔다. 주인 여자는
겁에 질려 묻는 대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양방희가 그 집에 하숙방을 얻어든 것은
4개월쯤 전이었다. 그녀는 노처녀로
대학생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달리 뚜렷이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혼자서 비싼 독방을 사용했고,
거기다 개인 전화까지 가설하고 씀씀이가
헤프고 사치스러운 것이 돈이 많은 것
같았다. 일 주일에 두서너 번씩은 외박하고
들어오곤 했는데 그런저런 것들을 살펴볼
때 요정 같은 데 나가는 것 같았지만
없었다. 하숙집 여주인은 그녀가 씀씀이가
헤픈데다 특히 자신한테 친숙하게 굴고
비싼 선물까지 자주 주곤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양방희는
넉살좋게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그녀
역시 양방희를 친딸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양방희는 다른 학숙생들처럼 외출할때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거나 하지도 않고 열쇠를
아예 주인여자한테 맡겨두고 다녔다.
그만큼 그녀를 믿고 따르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양방희를 친딸처럼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양방희는 주인여자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결혼을 생각하고 사귀는 남자가 한 사람
있기는 한데 점점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남자는 지금
결혼하자고 집요하게 요구 해오고 있다.
혹시 김영대라는 남자한테서 전화가 올지
모르니까 내가 없으면 어머니가 대신
받아달라. 너무 친절하게 받지 말고 좀
쌀쌀하게 받아달라.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거들랑 어머니라고 대답해달라. 난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가 있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도
엄마가 계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사람한테 거짓말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녀의 말대로 김영대라는 남자한테서
그녀를 찾는 전화가 몇번 걸려왔었고
그때마다 하숙집 여주인은 시킨 대로
쌀쌀맞게 전화를 받곤 했다. 그녀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김영대라고
밝히곤 했다. 그 김영대라는 사람한테서는
요 며칠 사이에 부쩍 전화가 걸려오곤
했는데 그때는 이미 양방희는 하숙집을
나가고 없었다.
"왜 갑자기 집을 나갔지?"
가짜 형사는 계속 반말로 물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그녀는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말로는...... 그 남자 때문이라고
하면서 서둘러 나갔어요. 그 남자가
하숙집을 알아내가지고 찾아오려고
한다면서...... 무서워 죽겠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그게 언제였지?"
"그러니까......."
그녀는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조그만
들여다보고 나서 지난 7월20일에 집을
나갔다고 말했다. 7월20일이면 그가
양방희를 따라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완전히
허탕을 친 날이었다.
"그렇게 빨리 서둘러 나갈줄은 몰랐어요.
김영대라는 남자가 이젠 무서워졌다고
하면서 나가겠다는데 붙잡을 수가
있어야지요."
"망할 년, 경찰이 올줄 알고 도망친
거야. 제년이 가면 어딜 가겠어. 기어코
붙잡고 말 거야. 난 3년 동안 그년을
체포하려고 쫓아다녔어. 몇 년이 걸려도
기어코 체포하고 말 거야."
"저, 저기...... 그 아가씨가 정말
간첩인가요?"
"그래.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간첩과
그래서 그렇게 돈을 물쓰듯이 하면서
당신한테 친절하게 군 거야. 당신을
포섭하려고 말이야. 당신 혹시 그년한테
포섭당한 거 아니야?"
가짜 형사가 눈을 부라리자 그녀는
사색이 되어 손을 흔들었다.
"아이구,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전 아니에요."
"조사해 보면 알겠지. 데리고 가서
족치면 바른대로 말하겠지."
연행하겠다는 말에 그녀는 어쩔줄을
모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마당으로 나왔다.
"양방희를 잡는데 당신이 협조해 주면
봐줄 수도 있어."
그는 우산을 펴들었다. 너무 오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도로 해두고 떠날
생각이었다. 하숙집 여주인은 완전히 그의
손아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대문 앞까지
따라나왔다. 자기는 정말 양방희가
구인지도 모르고 하숙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의 죄라면 그것밖에 없으니 잘좀
봐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그에게
늘어붙었다. 김영대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어디를 가면
양방희를 만날 수가 있지? 그 여자
연락처가 어디야? 전화번호 같은 거
없어요?"
"아이구, 제가 알면 왜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그 나쁜 년 빨리 잡을 수 있게
"아무튼 그 여자를 잡을 수 있게
아주머니가 좀 협조해 줘야겠어요. 그
여자에 관한 거라면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잘 생각해 놨다가 알려줘요. 그 여자가
두고간 물건 같은 거라도 좋아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알려줘요. 당신이
성의를 보여야만 나도 봐줄 수 있는
거아니요."
그는 갑자기 부드럽게 말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따가 전화하겠소. 아줌마 이름이
뭐지?"
"허정미라고 해요."
"허정미 부인, 잘 알아서 해요. 나말고
다른 사람한테 걸렸으면 지금쯤 지하실에
끌려가서......."
어디 갔다오는지 크렁크를 들고 나타나
허부인을 보고 반갑게 "아줌마"하면서
뛰어오는 바람에 그는 말을 중단하고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허정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악몽을 꾸고난
기분이었다. 간첩이라는 말 한 마디는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그 말이 자신과 상관없는 말일
때는 강건너 불보듯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었는데 일단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자 완전히 공포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간첩이나 간첩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일단 체포되기만 하면 크게 고생을 당하고
결국 인생을 망친다는 말을 그녀는
수없이 들어왔었다. 그 화는 한 사람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집안까지 망하게
한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결백하다 해도 일단
걸려들면 빠져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점염병보다도 무서운
것이어서 일단 간첩 운운하는 소문이라도
나면 이웃과의 관계도 끊긴 채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그래서 함부로 남한테 말을
꺼내는 것도 겁이 난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다가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손님하고
나갔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던
그녀는 결국 아까 찾아왔던 잘 생기긴
말대로 그에게 적극 협조하는 것만이
자신이 화를 면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방희란 년이 자신에게 유난히도 친절히
굴고 돈 씀씀이도 헤프고 비싼 선물을
거침없이 주곤 했던 것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급살맞을 년 같으니! 하필 사람이
없어서 나 같은 걸 구워삶으려고 했단
말이야. 오라질 년 같으니! 양방희에 대한
호감은 어느새 증오심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형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양방희란 년은
것이다.
한 가지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있기는 있었다. 그것은 그녀한테 빌린
돈이었다. 백만 원이나 되는 그 돈은 7월
말에 갚기로 하고 지난달에 빌렸던 것인데
아직 갚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 생각하니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처지라면 앞으로
돈을 받으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 간첩의
돈인데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포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챙길
수 있는 이익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너무 놀란 탓인지
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 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 같았다. 도움을 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거 큰일났다고
문득 빌린 것을 이야기해 줄까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그런
것을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저 방희예요."
여자 목소리에 그녀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라도 한
듯 때 맞춰 전화를 걸어온 사실에 허부인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아줌마, 저예요. 저 방희예요."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양방희가 다시 한번 자기 이름을 댔다.
"아, 방희. 난 또 누구라구?"
"안녕하셨어요?"
목소리가 유난히 밝고 쾌활하게 들렸다.
ꠑ ꠑ屎括曠錤榴?일부러 그녀가 수다를 떨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야 뭐 별일 없지."
"전번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놀라셨을 거예요. 죄송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죄송하긴. 사정이 있어서 그런걸 뭐."
허부인은 차츰 침착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참, 아줌마. 저한테 누가 찾아오지
않았나요? 그 김영대라는 남자 찾아오지
않았나요?"
"아아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나요?"
"전화? 아, 전화는 아가씨가 나가면서
떼가지 않았어. 그런데 무슨 전화가
걸려오겠수."
"어머, 내 정신좀 봐. 전화 떼간 것도
모르고......."
"제 정신이 아니구먼."
"요새 좀 그래요."
"가까운 데 있으면 놀러와요. 그리고
이사간 데 전화번호도 좀 알려주고."
"시간이 나면 놀러가겠어요. 전화는 아직
놓지를 못했어요. 전화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릴께요. 아줌마, 그건 그렇고......
제가 좀 어려워서 그러거든요. 저번에
가져가신 거 약속대로 좀 돌려 주시면
고맙겠어요."
"아, 그거...... 그렇찮아도 생각하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없을까?"
"아줌마, 제가 지금 돈이 몹시
없겠어요? 나머지는 좀 있다가 주셔도
돼요."
허부인은 순간적으로 돈을 갚으려면
그녀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경찰에 그
사실을 알려주면 경찰은 틀림없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서 그녀늘 덮칠 것이다.
그러면 빚은 갚지 않아도 될 것이고 어쩌면
보상금까지 타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여간첩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경찰의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아이구,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한꺼번에 모두 줘야할 텐데......."
그녀는 능청을 떨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급한 대로 우선
함정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양방희는
우선 절반만이라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해요. 지금 좀 모자라지만
나머지는 이웃에서 빌려서 채울 수 있을
거야. 그럼 어디서 몇 시에 만나지? 난
점심때가 지나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은행에 입금시켜
주시면 돼요."
허부인은 한 대 단단히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줌마 댁 근처에...... 대학교 앞에
K은행 있잖아요. 수고스럽지만 거기다
입금시켜 주시면 돼요. 그래도 괜찮겠죠?"
"괜찮고말고. 하지만 난 그보다는 아가씨
있어서 그걸 전해 주려고 했는데......."
그녀가 얼버무리자 방희는 기쁨에 넘치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머나, 선물까지 사놓으셨어요? 그러실
필요없는데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어쩌죠?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나갈 시간이
없거든요. 어디 며칠 다녀와야 해요.
아줌마, 며칠 후에 댁에 찾아가서 뵐께요.
그래도 되죠?"
"바쁘다면서 하는 수 없지 뭐. 그럼 며칠
후에 와요."
"고마워요, 아줌마. 은행 구좌번호
알려드릴 테니까 적으시겠어요?"
허부인은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와서
양방희가 불러주는 은행 구좌번호를 받아
적었다.
주시면 돼요. 그럼 부탁하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양방희가 전화를 끊자 허부인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여우 같은 년, 순순히 만나줄
리가 없지. 50만 원을 입금시켜 달라구?
흥, 간첩한테 뭐 하러 돈을 갚아. 내가
그렇게 바보인줄 알아. 그녀는 구좌번호를
적어놓은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다가 혹시나 해서 버리지
않았다.

김영대는 냉면 한 그릇을 먹고 나서
식당을 나와 길을 건너갔다.
공중전화박스는 비어 있었다. 그는 박스
안으로 들어가 허정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부인은 금방
ꠑ ꠑ像恍??받았다.
"박형사요. 수사에 도움이 될만한 거
찾아냈어?"
그는 반말로 거침없이 물었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방이 위압감을 느끼고 주눅이
들기 때문이었다.
"정말 죄송해서 어쩌지요. 아무리
찾아봐도 도움이 될만한 게 없는데
어쩌지요."
"뭐가 어째?"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소리를 꽥 질렀다.
"아줌마 정말 이러기야? 여자라고
봐줬더니 이렇게 나오기야? 안 되겠어.
지하실로 끌고가서 작살을 내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기
안 되겠지요?"
"도움? 말해봐."
그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고, 잔뜩 겁에
질린 그녀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아가씨한테서 아까 마침
전화가 왔었는데......."
"뭐라구?"
김영대는 귀가 번쩍 뜨였다.
"언제 왔었어?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아까 다녀가시고 나서 한 시간쯤 지나서
왔었는데 별말은 하지않고......."
"바보 같으니! 경찰이 찾아왔었다고
알려줬지?"
"아아뇨, 그런 말은 비추지도 않았어요."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만나보고 싶다고 했더니
했어요. 나중에 집에 한번 놀러오겠다고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어요."
"바보 같으니! 어떻게든 유인해 내서
만날 것이지...... 빌어먹을!"
"저기...... 은행 구좌번호 같은 것도
도움이 될까요?"
"누굴 놀리는 거야? 그런 건 알아서
뭐해!"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서 그는 멈칫했다.
"구좌번호라니...... 그 아가씨 구좌번호
말이야?"
"네, K은행 구좌번호예요."
"어떻게 그걸 알지? 우선 번호부터
말해봐."
그는 그녀가 불러주는 K은행 구좌번호를
재빨리 손바닥에다 적었다. 그리고 어떻게
"제가 돈을 좀 빌린 게 있는데 그
구좌번호에다 입금시켜달라고 했어요. 직접
만나서 전해 주고 싶다고 했더니 바빠서
나올 수 없다면서 구좌번호를 알려줬어요."
"얼마를 빌렸는데?"
"지난달에 백만 원 빌렸는데 우선 50만
원만 갚기로 했어요."
김영대는 그녀한테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양방희가 구좌를 개설한 은행은 강남에
있었다. 김영대는 K은행 S지점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점 안은 한산해 보였다. 영대는 재빨리
카운터에 있는 직원들을 살폈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먹이 찾는
재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먹이의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고객용 소파에
앉아 주간지를 뒤적이는 체하면서 그는
재빨리 여행원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
아가씨를 점찍은 다음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혼기를 놓친 듯 나이 들어보이고
카운터 앞에 앉아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서
제일 미모가 처지는 편이었다. 그런
아가씨가 유혹에 약하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새 통장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그녀는 백만 원 다발을 묶으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련되어 보이는 미남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보통으로......."
그녀는 신청용지를 내밀었다.
"여기다 적어주세요."
그녀는 미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쪽을 더듬고
있었다.
"목걸이가 예쁘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비스듬히 기대서서 신청용지에다
필요사항들을 적어넣었다. 그녀는 매끄럽게
생긴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신청용지와
함께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한 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그 목걸이 어디서 산 겁니까?"
"선물받은 거예요."
"애인한테서요?"
"아아뇨, 형부가 외국에 가서 사오신
거예요."
"아, 그러니까 근사하군요."
그 목걸이는 조금도 근사해 보이지가
않았다.
"H호텔에 계세요?"
신청용지에 적힌 직업란을 보면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면서 소리없이 웃었다.
"네, 한번 놀러오세요."
"거기 가끔 친구들하고 놀러가요. 지하에
있는 맥주홀 분위기가 아주 좋던데요."
"네, 괜찮지요. 한번 오세요. 제가 멋진
데로 안내할 테니까요."
마침내 미끼에 걸려들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경리담당 이사"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그는 상체를 그녀쪽으로 기울인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일 저녁때 놀러오세요. 디너쇼가
있으니까 놀러오세요. 맨 앞자리에서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드리지요."
"어머나, 홀리오 이글레시아스
디너쇼......"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너무 컸다고
생각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는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였다.
그가 한국에 와서 H호텔에서 디너쇼를
연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고객이 한
사람, 그것도 멋지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그 디너쇼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난밤의 꿈자리가 역시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조금 후 김영대는 새 통장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해야죠. 내일 나올 수 있어요,
미스 박?"
그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 달려 있는
명찰을 눈여겨보았다. 그녀는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가보고 싶었어요."
"그럼 내일 6시30분에 H호텔 커피숍에서
그녀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띤 채 다른
행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대는 출입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생각난 듯 돌아서서 그녀쪽으로
되돌아왔다.
"참, 뭐 하나 알아볼 게 있는데......."
"네, 뭔가요?"
그녀는 발딱 일어나서 그를 쳐다보았다.
"다름이 아니고 이 구좌번호 고객의
주소좀 알 수 없을까 해서요."
그녀는 그가 내미는 메모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그 지점의
저축예금 구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호텔에서 통장을 하나 주웠어요. 통장은
마침 가져오지 않았는데...... 주소를
적어가지고 왔지요."
그녀는 조금 미심쩍은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그에게 너무 마음이 쏠려 있었다.
사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원이
외부에 고객의 인적사항을 유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 정도
금지사항을 어기는 것쯤이야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객의 예금을 몰래
빼돌리는 것이 아닌 바에야 가벼운
마음으로 살짝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저축예금 카드가 비치되어 있는
곳으로 침착하게 걸어갔다.
5분도 못 돼 김영대는 그녀로부터
밖으로 나서자마자 그의 머리 속에서는 그
여행원의 모습이 깨끗이 지워졌다.
그녀는 퇴근 후 잔뜩 흥분해서 H호텔
커피숍으로 달려갈 것이다. 거기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앉아 몸살이 날 때까지
뭉기적거리다가 마침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경리담당 이사실에 전화를 걸어보겠지.
경리담당 이사실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있다고 가정할 경우
명함에 적힌 대로 김상수 이사를 찾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 없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준 김상수라는 이름의 명함은
웃돈을 주고 급히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조금 전의 새 통장도 김상수라는
가명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름뿐만
은행에서 나온 그는 거기서 가까운 같은
은행의 다른 지점을 찾아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예금했던 돈을 천 원만 남겨두고 모두
인출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양방희의 주소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는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정우희라는 이름과
함께 그녀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양방희는 가명이고 정우희라는
이름이 본명일 가능성이 많았다.
양방희라는 이름은 그를 유인해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잠깐 사용했던 가명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주소를 찾아가기 전에 그는 우선 전화로
확인하고 싶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잔 시킨 다음 여자 종업원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전화를 좀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정우희를 찾아서 그 여자가 직접 전화를
받으면 무조건 전화를 끊어요.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아서 지금 없다고 하면 언제
들어오는지 자세히 물어봐줘요. 그쪽에서
누구냐고 물으면 후배라고 말해요. 지금
집에 있다고하면 바꿔달라고 한 다음
전화를 끊어버려요."
여종업원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가 팁을 쥐어주자 표정이
밝아지면서 그의 말을 한번 듣고 나서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것을 받은
사람은 굵은 목소리의 남자였다.
"여보세요, 거기 정우희 씨 댁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우희 씨 계세요?"
"지금 안 계십니다. 어디십니까?"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언제 들어오시는가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십니까?"
"후배되는 사람이에요."
"후배 누구라고 할까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리고 김영대한테 가서 통화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어디냐고 남자가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그녀는 말끝에다 그렇게 덧붙였다.

그칠 듯하던 비가 저녁이 되자 더욱
저녁 7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여느때 같으면 아직도 해가 남아 있어 밝을
때이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거리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흰색의 승용차 한
대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정차해 있다가
슬그머니 단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것은 렌터카였지만 그런 차임을 알려주는
표시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아파트 단지는
한강변에 길게 자리잡고 있는 매우 큰
단지였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가장 비싼
아파트로 소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렌터카는 단지 안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마침내 315동 앞에서 가만히
멈춰섰다. 김영대는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본 다음 렌터카를 다른 차들 사이로
주차장에는 일찍 귀가한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출구는 두개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종이를 꺼내 펴보았다.
거기에는 315동의 도면이 대충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 오기 전에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러 거기에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대충 그려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가 아파트를 하나 구입할
의사가 있는 것처럼 말하자 부동산업소의
주인은 그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정우희는 315동 1510호에 살고 있었다.
1510호라면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각동에는 동의 중간 위치에 경비실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경비원이 앉아
김영대는 편하게 자세를 취한 다음
오른쪽 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젊은 여자들만 자세히 관찰했다.
날이 저물자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방희의
모습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양방희와
정우희가 동일 인물일 것이라는 추정만으로
장시간 차속에 버티고 앉아 있다는 것은
여간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완전히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는
고통스러움이 가중될수록 그는 더욱
증오심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그는 차 밖으로
나와 건물 모퉁이를 돌아갔다. 방광은 터질
보면서도 그는 그 사이에 양방희가
나타날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다시 차로 돌아온 그는 옆에 놓아둔
조그만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철사줄, 펜치, 칼, 테이프,
플래쉬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칼만
꺼낸 다음 가방을 도로 닫았다. 칼은
가죽집 속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안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경비원의 눈을
그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주차해 있는 차들을 훑어보면서
지나쳐갔다. 한번 갔다가 되돌아오면서
봤지만 양방희의 차는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차는 코발트색이었는데 주차장에는
그런 차가 4대나 주차해 있었다. 그는 그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운전석 앞에
자신의 사진을 하나 세워놓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 사진은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서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소녀 때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여고 2학년 때의 사진이라고
했다. 그녀는 제복을 입고 다니던 그
시절이 제일 추억에 남는다고 말했었다.
그 사진이 놓여 있는 차를 발견하지 못한
김영대는 다시 차로 돌아와 감시를
계속했다. 그러나 오래 있지 못하고 도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산을 펴들고 얼굴을
가렸다. 비가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경비원도 경비에 별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침 부부로 보이는 젊은 한 쌍이 차에서
김영대는 그들과 일행인 듯 그 뒤로 바싹
다가서서 따라갔다.
마침내 출입구로 들어섰지만 경비원이
그를 부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출입구 안에서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젊은
한쌍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자 그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쪽으로 다가갔다.
그 아파트 건물은 15층까지 있었다. 그는
15층까지 올라가지 않고 1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15층에 이른 그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철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1510호는 1509호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1510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肄?
겁니다. 당신은 인간이었으니까요.
너무 ꠑ ꠓy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마치 비어
있는 집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한번 꺽어져
올라가자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문을 밀고
옥상으로 나가보았다.
옥상에는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옥상의
한쪽에는 가건물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합판으로 대강
짜맞춘 것이었다. 출입문은 열리지 않게
벽돌로 괴어져 있었다. 그는 벽돌을
밀어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페인트통과 페인팅용기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파트 건물을 새로
도색하면서 인부들이 거기에다 그렇게
놓아둔 것 같았다. 그는 들고온 가방을
거기에다 놓아두고 옥상에서 내려가 계단에
1510호의 출입문이 반쯤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부터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1509호는 계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그러고 있는 것이 발각된다 해도
크게 죄될 것은 없었기 때문에 불안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쁜 쪽은 그가
아니라 그녀쪽이었다.
9시가 지났을 때 그는 엉덩이가 아파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옥상으로 나가 소변을 갈기고 나서 담배를
한 대 피운 다음 다시 계단으로 돌아와
앉았다. 배고픔이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개 같은 년,
그녀를 만났을 때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부산 해운대구 G동에 자리잡고 있는
A아파트 단지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서 걸어다니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곳이었다.
신참 형사 강인재는 허덕거리며 비탈길을
올라갔다. 비바람이 몹시 불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우산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옷이
모두 비에 젖어들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계속 걸어올라갔다. 택시를 타고 다닐
형편도 못 됐기 때문에 그는 버스를
이용하거나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했다.
그 비탈길은 벌써 여러 번 올라가는
길이었다. 10동 건물 앞에 이른 그는 5층을
올라갔다. 아파트는 5층까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5층까지 올라간 그는 515호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몇번 누른
뒤에야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김영대의 부인인 하종미라고 강형사는
생각했다.
"실례합니다. 강형사입니다. 또
왔습니다."
또 왔다는 말을 할 때 그는 조금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젊은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강형사는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 또 왔습니다."
경계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좀
부드러워지는 것 같더니 문이 더 열렸다.
"들어오세요. 차 한잔 들고 가세요."
"아, 괜찮습니다."
사양하면서도 그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안으로 먼저 뛰어들어가는
하종미의 모습이 너무나 자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당황해 하면서도 물러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깨와 허벅지가 드러나는
잠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속살이 훤히 비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녀가 안에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음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조그마한 거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가 않고 어지러울 정도로 어질러져
깔끔하지가 못하고 되는 대로 어질러놓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강형사는 소파에 앉아 맞은편 장식장
위에 켜져 있는 텔리비젼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연속극 같은 것이 방영되고
있었다.
조금 후 하종미가 찻잔을 받쳐들고
나타났는데 차림은 여전히 아까 그대로
허벅지와 어깨가 드러난 잠옷 바람이었다.
"감사합니다."
강형사는 두손으로 찻잔을 받았다.
하종미는 텔리비전의 볼륨을 조금 줄이기
위해 장식장쪽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그
바람에 둔부가 둥그렇게 솟아 보였다.
강형사는 그 탐스러운 엉덩이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얼른 시선을 딴곳으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허벅지가 드러난 잠옷 바람이었는데
다리를 포개고 앉는 바람에 엉덩이까지
거의 드러났다. 그렇게 앉아서 그녀는
찻잔을 집어들었다.
"밤 늦게까지 수고하시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했다.
"아, 네......"
그는 너무 눈이 부셔서 그녀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참, 부군한테서는 아직까지 전화도
없나요?"
"그저께 한번 걸려온 후로는 연락이
없어요. 그이는 전화 같은거 잘하지
않아요. 그이는 이제 완전히 혐의를
벗었나요?"
"그런데 왜 그렇게 찾으시는 거죠?"]
그녀가 다리를 흔들면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여진 잠옷의 가슴께가 더 밑으로
내려간 것 같았고, 그래서 그녀의 허연
젖가슴 사이의 깊은 골이 더욱 깊어
보였다. 젊은 형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김영대 씨가 왜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가 그것을 알아보려고 그럽니다.
김영대 씨를 함정에 빠뜨린 사람이
구인지 알아내려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내기만 하면......"
강형사는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쓸데없이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되자 얼른
입을 다물어버렸다.
"술 한잔 하시겠어요? 좋은 위스키가
"아이구, 밤도 깊었는데 가봐야죠."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잠깐 앉아계세요. 너무
수고하시는데......대접할 것은 없고 술
한잔 하고 가세요."
그녀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불안해 하실 거 없어요. 마음 푹
놓으세요. 올 사람도 없으니까요."
김영대라도 불쑥 나타나면 어떡 하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시간은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비바람치는
소리가 마치 고양이들이 뒤엉켜 지르는
울음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참 무슨 술 마시겠어요? 위스키도 있고
그녀가 주방쪽으로 가다 말고 돌아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 아무 거나 좋습니다."
그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가슴이 떨려오고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는 그 자리에 뭉기적거리고
있었다. 젊은 여인이 연출해내는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은 강한 욕구를 그는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를
못하고 뭉기적거리고 있는 사이에 그녀가
술상을 차려가지고 돌아왔다. 술상에는
양주 한 병과 맥주병 한개 그리고 마른
안주가 조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탁자 위로 옮겨놓았다.
그녀가 잔에다 위스키를 따르면서
말했다. 상체를 구부리는 바람에 그녀의
젖가슴이 거의 다 들여다보였다.
"별로 못합니다."
그는 더듬거렸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난 그는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면서
캑캑거렸다. 그런 그를 여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았다.
"부인은 예쁘세요?"
"아, 아직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어머, 그럼 총각이세요?"
"그, 그런 셈이지요."
"저한테도 술 한잔 따라주세요. 저는
맥주를 좋아해요."
그녀가 빈잔을 내밀었다. 그는 얼른
맥주병을 집어들고 그녀쪽으로 팔을
엉덩이를 쳐들어야 했다. 그것을 보고
하종미가
"아이, 그러지 말고 가까이 와서 술
따르세요. 남자가 왜 그렇게 내외를
하세요."
하면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는 당황해서 그녀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쪽에서도 다가앉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부딪쳤다.
"이 잠바도 좀 벗으세요. 어머, 벗어서
말려야겠어요."
그녀는 자진해서 그의 옷을 벗겨주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팽팽한 젖가슴이 자주
그의 몸에 부딪쳐왔고 그때마다 그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자, 우리 건배해요!"
그녀가 맥주잔을 쳐들었고 그들은 뒤늦게
잔을 부딪치면서 건배했다.
"강형사님은 몇 살이세요?"
"스물일곱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머나, 그것밖에 안 됐어요? 저보다도
적네요."
"몇 살이십니까?"
"두 살 더 많아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는 예뻤는데......지금은 살림
사느라고 형편없어요. 여자는 역시 남편을
잘 만나야 해요. 남편 잘 만나면 팔자
늘어지는 거구 잘못 만나면 나처럼
찌그러지는 거구......"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아름다우신데요 뭐."
"그 말 정말이에요?"
그녀가 상체를 그쪽으로 기대면서 얼굴을
갸우뚱하게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정말입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그녀는 몸을 뒤틀면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이걸 어쩌지. 그런 말을 듣고
가만 있을 수야 없지. 뭘 원하세요? 지금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 말씀해 보세요.
아무거나 좋아요."
그녀의 자세가 이제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은 불그스레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눈은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강형사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김영대 씨 있는 곳을 가르쳐주십시오.
서울 어디에 있는지......"
하종미는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완전히 실망했다는
표정이었다.
"김영대 씨를 급히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젊은 여인은 그를 흘겨보다가
"아이, 그런 거 말고 말이에요!"하고
소리쳤다.
"급히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되풀이하는
말이었지만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은 풀려 있었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그 옆으로 바짝 달라붙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다 술잔을
갖다댔다.
"술좀 드세요. 기분좋게 한번
마셔보세요. 이거 마시면 가르쳐
드릴께요."
그는 입을 벌리고 그녀가 부어주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하고
있었다.
"급히 만나지 않으면......난
가야해요......"
"알았어요. 한 잔 더 드세요."
그녀는 그의 팔에다 젖가슴을
밀착시키면서 새로 위스키를 가득 채운
잔을 그의 입에다 갖다댔다.
술 한 잔에 내가 왜 이럴까. 그는
썼지만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이러다가 만일 김영대라도 돌아오면
큰일인데...... 그는 손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려고
해보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 왜 이러세요. 술이 약하시구나."
하종미는 그의 팔을 꼭 끌어안으면서
그를 자기쪽으로 당겨보았다. 강형사의
상체가 그녀의 품에 힘없이 안겨왔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짖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젊은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그를 소파에 눕힌 다음 안방으로 가보았다.
방안에서는 그녀의 어린 딸이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하종미는 방문을 닫고 거실로
다시 나왔다.
천장의 불을 끈 다음 스탠드의 불만 하나
켜놓았다. 오늘밤 이 순진하게 생긴 젊은
남자를 데리고 한번 신나게 놀아볼 생각을
하니 그녀는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히로뽕 두어 방울에 젊은 형사는
완전히 녹아 떨어져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알게 뭐야. 히로뽕을 너무 많이
술에 탄 것 같았다. 잔뜩 흥분만 시킬
셈이었는데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뻗어버렸으니 일은 좀 곤란하게 되었다.
하지만 차츰 깨어나겠지.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먼저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혼자서 열정적으로 키스를 해보았지만
상대방이 송장처럼 반응이 없으니 신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옷을 벗겨내기 위해 몸을 밀고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웃옷을
모두 벗겨낸 다음 그녀는 허리띠를 풀었다.
바지를 뽑아내자 자주색의 삼각 팬티가
나왔다. 요새는 남자들도 속옷에 제법
신경을 쓴다. 그녀는 부풀어 있는 그곳을
정신없이 쏘아보다가 양말을 벗겨냈다. 단
한 가지라도 몸에 남겨두고 싶지가 않았다.
이봐, 이래 가지고 무슨 형사질을 한다는
거야, 응? 그녀는 낄낄거리면서 부풀어오른
팬티 위를 어루만지다가 그것을 가만히
끌어내렸다.
"어머나! 잔뜩 성이 나셨네."
그녀는 기쁨에 넘쳐 소리질렀다. 역시
히로뽕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짙은 음모 속에서
솟구쳐나온 그것은 그 주위와 함께 멋진
"정말 멋져!"
그녀는 그의 발에 걸려 있는 팬티를 마저
뽑아내 던져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걸려 있는 잠옷도 벗어던졌다. 마지막으로
팬티도 벗어버리자 해방감으로 가슴이
충만해져 왔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밖에는 창문을 때리는
비바람소리가 요란스러웠지만 안에서는
축제의 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수치심도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강한 욕구와
기쁨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히로뽕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미 중독
상태에 빠져들어 있었다.
이윽고 소파쪽으로 다가선 그녀는 무릎을
구부렸다.
"형사 나리, 오신 것을 환영해요.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셨는데, 극진히
모시겠어요."
그의 귀에다 속삭인 다음 귓볼을 꼭
깨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다.
그녀는 잔에 맥주를 가득 따른 다음
남자의 배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술잔을
높이 쳐들면서 "부라보!"하고 외쳤다.
승리감이 가슴 뿌듯이 전해져 왔다.
김영대한테 억눌려 지내만 왔던 그녀로서는
모처럼 남자한테 군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김영대는 걸핏하면 그녀를 때리곤 했다.
무자비할 정도로 난폭하게 주먹을 휘두르곤
생각까지 했었지만 시간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그의 매질에 적응이 되어
요즈음에는 그것을 견딜만 했고, 히로뽕에
마취된 상태에서 매를 맞을 때는 야릇한
쾌감까지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의식의 저
안쪽에서는 언제나 남자에 대한 복수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복수심은 김영대
몰래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이었고,
그럴 때면 그녀는 그 외간 남자한테
난폭하게 굴곤 했다. 마치 남편한테서 받은
폭력을 그에게 되돌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맥주가 잔에 조금 남아 있자 그녀는
갑자기 그것을 청년의 얼굴에다 확
끼얹었다. 젊은 형사의 얼굴 근육이 조금
씰룩거리다가 다시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갈겼다. 세게 몇 차례 갈기자 그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야, 임마, 깨어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널 깔아뭉개고 있는 걸 봐야할 거
아니야. 남자들은 다 죽어야해."
그녀는 그의 복부를 살찐 엉덩이로
비벼댔다. 그녀가 힘을 가할때마다 배가
쑥쑥 들어가면서 입에서는 더 큰
신음소리가 윽윽하고 흘러나오곤 했다.

자정이 지난 지 오래였다. 김영대는
그때까지도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온몸이 쑤시고 특히
엉덩이뼈가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지만 독이
오른 그는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있었다.
기분 같아서는 그녀를 보는 즉시 그
만일 그녀가 나타날 경우 순식간에
그녀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계획은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만일 안에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까지 자지않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열쇠로 문을 따지 않고 초인종을 누른다면
계획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한다면 그
시간을 연장시킬 필요가 있다. 열쇠로 문을
따는 시간은 불과 수초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에 그녀를 어떻게 해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뒤늦게야 그것을 깨달은 그는 계단을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열쇠 구멍 안으로
성냥개비를 잘게 부러뜨려 집어넣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와 손목시계를 불빛에
비춰보았다. 1시20분이 지나고 있었다.
2시까지 기다렸다가 그래도 안 나타나면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소변을
보기 위해 막 일어서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영대는 벌떡
일어나 두어 계단 밑으로 내려가 난간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젊은 여자 한 명이 막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알고 있는
양방희가 틀림없었다.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그는 계단을 되짚어올라갔다.
그녀가 1510호 앞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핸드백 안에서 열쇠를 꺼내
일으켰다. 처음에는 발소리를 죽여
고양이처럼 내려가려고 했었는데 그보다는
재빨리 내려가는 것이 낫겠다싶어 안경을
꺼내쓰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열쇠 구멍에다 열쇠를 맞춰넣느라고
꾸물대고 있던 그녀가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꽤 취한
모습이었다.
"아무리해도 열쇠가 들어가지 않을걸."
"어머!"
비로소 상대방을 알아본 그녀가
초인종쪽으로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영대의 손이 그녀의 목을
벽에다 밀어 붙였다. 다른 한 손에는
재크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조용히 해! 소리지르면 죽여버릴 거야!"
부릅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올라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거야."
그는 뒤에서 그녀의 목을 휘어감고
그녀를 앞으로 밀었다. 그녀의 손에서
우산과 핸드백이 떨어졌다. 그는 우산은
버려두고 핸드백만을 집어들어 자신의
어깨에다 걸었다.
그가 뒤에서 워낙 우악스럽게 목을
휘어감고 밀어대는 바람에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의 목은 마치 활처럼 휘어졌다.
옥상으로 나가 철문을 닫고서야 그는 목을
감고 있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여기서는 소리질러봐야 들리지도 않아.
반항하면 아래로 던져 버릴 거야."
주먹이 옆구리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무릎을 꺽었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사내의 위협 앞에
그녀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경련하듯
떨어대기만 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복종해. 그러면 살
수 있으니까!"
"네,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녀는 두손을 비벼댔다.
"저 안으로 들어가!"
그는 이번에는 겨드랑이 밑에다 그녀의
목을 처박고 개처럼 그녀를 끌고 갔다.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를 안쪽으로
밀어버린 다음 문을 닫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나가 떨어지면서 무엇엔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그는 준비해둔 플래쉬를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주위에
페인트통이 몇 개 나뒹굴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 가서 부딪친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이 부신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대로 누워 있어!"
그는 가까이 다가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스커트 자락이 말려올라간
바람에 허벅지는 물론 팬티까지 드러나
있었다. 팬티는 연분홍빛이었다. 그는
구둣발로 그녀의 음부를 눌렀다.
"이 쌍년아, 양방희라구? 본명 말해봐!
다 알고 있으니까 바른대로 말해봐!"
구둣발로 힘을 가하자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정......우희예요. 용서해 주세요.
하겠어요."
"뭐, 용서해 달라구? 넌 날 죽이려고
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가
구두 뒤축으로 음부를 비벼대자 울음 대신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해! 내가 경찰에서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구둣발로 거기를 찍어대자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 넘어가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는 여자의 핸드백을 열어
내용물들을 바닥에다 쏟았다. 동전지갑,
화장품, 거울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지갑을 집어들어 열어보았다. 돈을
넣어두는 곳에는 두툼한 만원짜리 지폐와
모두 백만원짜리였다. 그는 돈과 수표를
모두 빼내 자신의 주머니 속에 찔러넣은
다음 이번에는 지갑 속에서 신분증을
꺼내보았다. 주민등록증과 함께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현금카드 같은
것들이 나왔다. 모두 정우희라는 이름으로
발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름이
본명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그는 준비해온
녹음기를 꺼내 그녀의 입 가까이로
가져갔다.
"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나한테
접근했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말이야.
너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사형대에 앉을
뻔했어. 네 덕분에 말이야. 왜 그랬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적 없어요. 무슨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그는 아예 그녀의 배 위에 걸터앉았다.
"오해라고?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지?
이름도 가짜로 대고......대구까지 나를
데리고 갔어. 한우섬유회사의 양사장
딸이라는 것도 모두 거짓말이었어. 너
때문에 나는 그 호텔에서 하루종일
기다렸어. 결국 내가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골탕먹이고 나서 넌 사라져버린
거야. 하지만 내 손을 벗어날 수는 없어.
내가 어떤 놈인데 너 같은 년한테 당해. 내
손에 걸린 년치고 지금까지 작살나지 않은
년이 없었어."
그는 녹음기를 머리맡에 있는 페인트통
그녀의 눈꺼풀을 건드렸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쳤다. 그러나 눈이
찔릴까봐 얼굴을 흔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예쁜 눈을 애꾸로 만들어줄까?"
날카로운 칼 끝에 찔린 눈꺼풀에서 피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당신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한 것뿐이에요. 그것이
죄라면 달게 받겠어요. 하지만 제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적은 없어요. 그건
오해예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 정말
억울해요!"
"이 망할 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계속 거짓말하기야?!"
그는 이번에는 칼 끝으로 눈 밑을
널려 있는 신문지를 집어서 그녀의 입 속에
쑤셔넣었다.
"사실대로 말하겠으면 고개를 끄덕여."
그녀가 입 속에 틀어박힌 신문지 뭉치를
손으로 빼내려고 하자 그는 그 손을 발로
짓밟았다.
"내 허락없이 그걸 빼내지 마. 자,
사실대로 말해. 네가 아무리 거짓말해 봐야
결국 불게 돼. 결국 불게될 걸 빨리 말하면
고통도 당하지 않고 좋을 거 아니야"
그가 날카로운 칼 끝으로 눈을 겨눌
때마다 그녀는 두눈을 질끈 감으면서
온몸을 떨어댔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것이 호흡이 곤란한 모양이었다.
"난 너한테 해를 끼친 일이 없었어.
원한을 살만한 짓은 한 적이 없어. 오히려
그런데 왜 나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 왜
나를 함정에 빠뜨려서 사형수를 만들려고
했지? 너를 경찰에 넘길 수도 있어. 하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알아야겠어. 경찰에
넘기는 일은 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결정하겠어. 네가 솔직히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면 봐 줄 수도 있어. 하지만 계속
거짓말을 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경찰에 넘겨질 거야. 자, 말해봐. 왜 나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어?"
정우희는 공포에 떨면서도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보면서 영대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 안하겠다는 거지?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난 여자한테
고통을 가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가스불을 최대로 높은 다음
주저없이 그녀의 눈썹에다 갖다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면서 온몸을
뒤틀어댔다. 그러나 입이 막혀 비명소리는
윽윽하는 괴성으로 변해 조금 흘러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육중한 몸 아래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한쪽 눈썹이 순식간에 타버렸다. 조화를
잃은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푸들푸들
경련이 일고 있었다.
"흐흐......한쪽 눈썹이 없어지니까 더
예쁜데 그래.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이쪽 눈썹까지 태워버릴 거야. 빨리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고문이란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어.
네가 유밀라를 죽였지?"
그녀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그를
올려다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흥, 부인하겠지. 네가 그 여자를
죽였던가 아니면 넌 죽인 놈과 한 패이던가
그러겠지. 그러니까 나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함정에 빠뜨린 거야. 유춘지의 편지도
네가 보낸 거지? 그렇지?!"
그녀가 다시 머리를 가로저었고, 그는
즉시 가스라이터 불을 그녀의 눈에다
갖다댔다. 그녀가 고통을 못 이겨
발버둥치자 그는 가방 속에서 철사줄을
꺼내 그녀의 두손과 발을 묶었다. 눈썹이
모두 타버린 그녀는 이제 완전히 다른
변형시키는데 재미를 붙인 그는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고는 페인트통 하나를
곁에다 옮겨다놓고 나서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페인트 붓도 여러 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캐묻지도 않고 장난치듯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얼굴을 화장시켜주지.
예쁘게 말이야. 머리털까지 하얗게
칠해놓으면 아주 예쁠 거야."
그녀가 버둥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어댔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린 다음 성기를 꺼내
통 속에다 오줌을 갈겼다.
"기막힌 화장품이
되겠는데......흐흐......"
그는 붓으로 오줌과 페인트를 잘 섞은
그것을 그녀의 얼굴 위로 가져갔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기겁을 하면서 얼굴을
돌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가차없이 붓으로 그녀의 얼굴을 철벅철벅
칠해 나갔다. 숱이 많은 머리칼에도
페인트를 칠해 버렸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입이 틀어막혀
있어 울음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과 코만 빼놓고 이제 모두 하얀
색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무슨 괴물의 모습
같았다.
"야, 멋지구나. 미스코리아에 나가면
당선되겠는데......"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항복을 뜻하는 신호였다.
생각이지."
그는 그녀의 입 속에 틀어막혀 있던
신문지 뭉치를 꺼내주었다. 종이뭉치가
빠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는
격렬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페인트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괴물 같은 모습으로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진작 손을 들 것이지......뻗대다가 이
모양 요꼴이 된 거 아니야. 자백하기 전에
내 말을 잘 들어. 여기서 당장 위기를
벗어날 생각으로 거짓말하면 안 돼.
거짓말하면 금방 들통이 나니까 아예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나는 금방 알 수가
있어. 기회는 딱 한번밖에 없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그것으로 넌
끝장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그녀느 흐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만일 거짓말을 해서 여기서
풀려난다 해도 난 너를 끝까지 추적할
거야. 네가 어디를 가든 나를 피할 수는
없어. 그리고 난 너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
네가 유밀라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말이야.
경찰이 전수사력을 동원해서 너를 쫓으면
네가 체포되는 건 시간문제야. 내가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경찰은 내 말을 믿을
거란 말이야. 자 말해 보시지."
흰 페인트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떨고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한
않았기 때문에......무슨 일인지 내용은 알
수가 없었어요......저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그러니까 부분적으로
시킨 대로 했을 뿐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것은 알지 못했어요......당신이
살인범으로 체포된 것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죽은 사람이 유밀라라는
여자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리고 그때서야 제가 무슨 일에
관계되었는지 알게 됐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어요......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너는 범인이 아니고......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약간 도와주었을 뿐이다
이 말이냐?"
"네......, 전 뭣도 모르고 했을
유인했고......"
"흥, 다른 사람한테 모두
뒤집어씌우는구나. 넌 책임이 없다
이거냐?"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에요...... 사실이
그래요......그렇다고 제가 책임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저한테도 책임은
있어요......특히 당신한테는
미안하구요......죄송해요......"
"여우 같은 년......네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그럼 너한테 그런 짓을 시킨
사람은 누구냐?"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망설였다. 영대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그것을 그녀의 입 위로 가져갔다.
"마, 말하겠어요.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경찰에는 고발하지 않는거죠?"
"난 원래 경찰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사실대로 말해 주기만 하면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실대로 말하면......바로 절
풀어주시는 거죠?"
"그야 물론이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가르쳐주면......그
사람한테 복수하실 거예요?"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넌 그
사람이 누구인가만 말해주면 돼."
그녀는 다시 머뭇거렸다.
"그 사람한테 복수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그 사람은 해쳐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그래도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또
머뭇거렸다. 화가 치민 영대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손으로 집더니 그것을
사정없이 그녀의 입 속에다 쑤셔넣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떼굴떼굴 굴렀다.
"말하기 싫으면 관둬라, 이년아! 그 사람
대신 네가 당하면 될거 아니냐? 난 아쉬운
거 하나도 없다."
"마, 말하겠어요! 잠깐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으깨진 담배꽁초를 뱉아내면서
이상한 발음으로 말했다.
혀끝과 입속을 불에 덴 바람에 제대로
발음이 되어나오지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람 이름은 서문구라고
해요......아주 무서운 사람이에요......."
"겁주는 거냐? 나보다도 더 무서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벌어진 입 사이로
거칠게 숨만 내쉬었다.
"그 사람하고는 어떤 사이냐?"
"애, 애인 사이예요."
"몇 살 쯤 된 놈이야?"
"마흔 살이에요.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계속 겁주는구나. 어디 가야 그놈을
만날 수 있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
흰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 무표정하게
그를 올려다본다. 흰 페인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질린 얼굴이 묘하게도
그를 자꾸만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발작적으로 라이터불을 켜서 그녀의 옷에다
갖다댔다. 값비싼 원피스는 금방 동그랗게
냈다.
"서문구 그놈을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어?
말해봐. 말하지 않으면 옷을 모두 태워버릴
거야."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라이터불을
그녀의 옷에다 갖다댔고 느때마다 그녀는
팔딱팔딱 뛰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원피스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고 구멍
사이로는 불에 덴 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리지르지 마. 소리지르면 다시 입
속을 틀어막을 거야. 서문구는 어디 있어?"
"부, 부산에 내려가 있어요."
"부산에는 왜 내려갔어? 부산 어디에
있어?"
"사건이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 가
있겠다고 했어요."
"있는 곳은 말하지 않았어요."
"이년이!"
그는 그녀의 입 속에다 다시 신문 뭉치를
쑤셔넣었다. 그리고 라이터불을 가슴에다
갖다댔다. 이번에는 한곳을 집중적으로
태웠다. 가스불은 옷에 이어 브래지어를
뚫고 들어가더니 젖가슴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을 뒤틀어대면서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움직임이
느슨해지면서 조용해졌다.
"이년이 기절했군."
그는 밖으로 나가 손수건에다 빗물을
적셔가지고 와서는 그녀의 얼굴에다 물을
짜냈다. 몇번 그렇게 해도 그녀가 걔어나지
않자 그는 은근히 겁이 났다. 혹시 숨이
끊어지지 않았나 해서 맥을 짚어보았는데
그는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페인트통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녀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고문을 당하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술술 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는 독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마지막
단계에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비밀을 고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영대는 좀
난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나올수록 그는 가슴 속에서 보다 잔인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어떻게
해서든 기어코 그녀의 입을 열게 하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다졌다.

5. 연쇄살인

서문구가 정우희의 자가용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것은
새벽 1시20분경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지
않고 비디오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정우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동거녀인 정우희는 요즘 들어 빗길로
새어나가고 있는 기미가 역력해지고
있었다. 당분간 싸돌아다니는 것도
삼가라고 했는데 듣지 않고 매일 밤을 계속
늦게 들어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터에 그녀마저
그렇게 빗길로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나머지 그녀가
없게 되었다. 워낙 느긋하게 안정된 성격이
아닌데다 바람기마저 심해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이해하려 해도 그 정도가
점점 눈에 띄게 심해지는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은 사건마저 얽혀 있어 근신하지
않으면 안 될 때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밤
그녀가 돌아오는 대로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우희를 때릴 때에는 납작한 가죽
허리띠를 사용하곤 했다. 그 전에 그는
허리띠를 물 속에 담가두곤 했다. 단단하던
것이 물에 젖으면 보드랍고 유연해진다.
들어붙으면서 뼛속까지 고통이 스며든다.
정우희의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멈추는 것을 보고 그는 욕조 속에
넣어두었던 가죽 허리띠를 꺼내놓았다.
집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차에서 내린
정우희가 우산을 받쳐쓴 채 아파트
출입구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커튼을 친 다음 거실의 불을 켜고 나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우희는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몰래 집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언제나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집안으로
스며들어오곤 한다.
텔리비전 화면에서는 면도날이 번쩍이고
여인이 샤워를 하고 있었다. 뿌연 유리를
통해 여인의 나신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면도칼을 들고 있는 손에는 가죽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범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바리 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욕실 안 금발의 여인은
따뜻한 물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애무하면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면서 그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범인의 모습이 그녀의 뒤에 나타났다.
소리없이 접근한 범인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면도날을 그녀의 목에다
함께 수채 구멍 속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두눈을 부릅뜬 여인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세번째 여인의 피살
장면이었다.
문구는 리모컨으로 볼륨을 줄이고
현관쪽에 귀를 기울였다. 들어올 때가
됐는데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40대의 조그마한 사내였다. 거기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고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끼고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그한테는 보스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현관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가서
출입문을 노려 보았지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마 경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실내를 왔다갔다 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20분쯤 지났을
때까지도 그녀는 들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인터폰을 집어들고 경비원을 불렀다.
"1510호입니다. 우리 집사람 혹시 거기
있습니까?"
"벌써 올라가셨는데요."
경비원이 졸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구는 인터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집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다른 집에 들렀다는 말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의자에 걸쳐 놓은 가죽
허리띠를 움켜쥐고 소파를 후려갈겼다.
10분이 더 지났을 때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혹시 술에 취해 문
앞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현관으로 나가 철문을 열어보았다.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비상등만이
을씨년스럽게 켜져 있을 뿐이었다.
밖을 휘둘러보던 그의 눈에 우산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밖으로
나가 그것을 집어들어 보았다. 분명히
정우희의 우산이었다. 그는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철문에 열쇠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기척이 나자 겁이 나서 우산도 던져버린 채
재빨리 도망친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그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희, 어딨어?! 빨리 들어오지 못해!"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계단 아래와
위쪽을 살피면서 불러보았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그는 현관으로 들어가
지팡이를 들고 나왔다. 먼저 계단을 통해
한 층 아래로 내려가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도로 올라왔다. 우선
문을 잠그고 나서 본격적으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쇠구멍에다
열쇠를 꽂았다. 열쇠 끝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어 그것이 잘 들어가지가 않았다.
몇 번 신경질적으로 열쇠로 구멍을
쑤셔보다가 그는 문 잠그는 것을 포기한 채
보았다.
옥상으로 나가는 출입문 앞에 여자의
하이힐 한 짝이 나뒹굴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어 보았다.
그것은 눈에 익은 연분홍 구두였다. 비로소
그는 정우희한테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이힐까지 벗어던진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년이 자살하려고
옥상에 나간 게 아닐까? 그렇다면
큰일이다. 빨리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년이 자살할 리 없다.
그는 문 손잡이를 잡아틀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그는 그 어둠 속을
노려보다가 옥상으로 조심스럽게
수가 없었다. 옷은 금방 비에 젖어버렸다.
모퉁이를 돌자 어둠 속에서 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쪽으로 상체를 숙인
채 다가가보았다. 빛은 가건물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람에 가건물이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듯 흔들리고 있었고
그때마다 나무 틈 사이로 불빛이 흔들려
보이곤 했다.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귀에 익은 소리였다. 그는 문을
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멈칫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몇 번이라도 기절시켜 줄 테니까 말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아!"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그의
동거녀인 정우희였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남자였다. 플래쉬의 불빛이
여자쪽으로만 향하고 있어서 남자의 모습을
잘 볼 수가 없었지만 목소리로 보아 처음
보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서문구는 어디 있어? 옷을 모두 태울
때까지는 말하겠지? 그때는 넌 화상을 입어
죽을걸."
어둠 속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이 밑에 깔려 있는 여자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발버둥치면서 소리쳤다.
"말하겠어요! 제발 그만하세요!"
영대는 라이터불을 껐다. 그리고
기다렸다.
가건물 주위에는 각목이며 합판 조각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조그만 사내는
각목을 하나 집어들었다.
정우희가 헐떡이며 말했다.
"어느 아파트?!"
"요 아래...... 1510호에 있어요."
"그런데 아까는 왜 부산에 갔다고
거짓말을 했어?!"
시퍼런 불꽃이 치솟더니 그녀의 코쪽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그는
플래쉬를 페인트통 위에 올려놓은 다음
한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더 이상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서문구는 지팡이를
세워놓은 다음 각목을 두손으로
움켜잡았다. 단번에 해치우지 않으면
자신이 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페인트를 쏟아부을 거야. 페인트를 마시고
싶으면 마음대로 소리질러. 서문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놈은 직업이
뭐야? 뭐하는 놈이야?"
바람에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인기척을 느끼고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보았다. 누군가가 바로
뒤에까지 다가와 서 있었는데 머리 위로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것이
얼핏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행동을
취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가
겨우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웅크린 것뿐이었다.
각목은 위에서 떨어져내렸다. 머리에
부딪친 각목이 오히려 튕겨나갔다. 조그만
사내가 두번째 공격을 시도하려고 각목을
동강이 나 있었다.
영대는 머리를 흔들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지만 페인트통 위에 놓여 있는
플래쉬의 불빛이 아래쪽만 비치고 있어서
얼굴 모습들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었다.
가건물이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듯
흔들거렸다.
영대는 그때까지도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몽둥이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 다음에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방어의 본능도 일지 않았고, 다만
계속 후들거리고 있었고 시야는 흔들리고
있었다. 상대방이 부러진 각목을 버리고
지팡이를 집어드는 것이 보였다. 지팡이의
손잡이 아래 부분이 빠지면서 대신
쇠꼬챙이가 나왔다. 그것을 보고 영대는
비로소 의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아두었던 잭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시야가 더 심하게 흔들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몸을 지탱하면서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굽혔다.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대방도
두손으로 쇠꼬챙이를 움켜쥔 채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잭나이프와 쇠꼬챙이는 우선 그
영대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는 어느 것 하나 딱부러지게
해놓은 게 없었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을 거야. 반드시 무엇인가를
이룩해 놓을 거야. 두고보라구. 나라고
항상 이러고 있으란 법이 어딨어. 난
앞으로 좋은 일도 할 거야. 내 딸애를
데리고 어린이 공원에 놀러도 갈 거야.
그는 더 이상 생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첫번째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쇠꼬챙이를
잭나이프로 막으려다가 그는 오히려 손등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싸우기가 싫었고
상대방이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그것은 악에 받쳐 질러대는 소리였다.
문구는 상대방이 엄청난 힘을 가진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머리를 맞았으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벌써
뻗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뻗기는
커녕 머리를 한두 번 흔들어대고나더니
반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상대는 상처를 입었고
손에 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상처입은
맹수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전에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빨리 찌르라니까요!
정우희가 다시 울부짖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영대의 발 밑에 있었다.
영대는 흔들리는 시야를 붙잡으려고 기를
쓰면서 짧은 잭나이프로 긴 쇠꼬챙이를
막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정우희가 소리를 지르지만
않았어도 그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구는 상대가 정우희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를 인질로 삼을 생각인
것 같았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상대가 허리를 굽히기 전에 앞으로
내달으면서 쇠꼬챙이로 상대의 옆구리를
찔렀다. 상대는 움찔하고 놀라면서
가려져 있어 얼굴 표정 같은 것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두 눈빛이 빛나고 있는 것이
몹시 분노한 것 같았다. 상처 입은 맹수의
괴성 같은 외침이 터져나오는 순간 문구는
다시 쇠꼬챙이로 상대방을 찔렀다.
이번에는 위쪽을 향해 찔렀는데 정확하게
그것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손에
전해져 왔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사내가
두손으로 목을 움켜잡으며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틈을 두지 않고 문구는 다시 한번
힘껏 쇠꼬챙이로 상대방을 찔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깊이 살 속을 파고든
것 같았다. 사내는 두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오다가
그리고 괴로운 듯 몇번 몸을 뒤틀더니
천장을 향해 돌아누우면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저좀 빨리 풀어줘요!"
정우희가 몸부림치며 소리질렀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떡 하려고
그래?"
문구는 위협적으로 말하고 나서 플래쉬를
집어들었다. 그는 여자를 풀어주기 전에
먼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비춰보았다. 사내의 목과 가슴에서는
검붉은 피가 샘처럼 솟아나오고 있었다.
사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찬희야...... 찬희야......."
영대는 마직막 숨을 몰아쉬면서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보다도
모습만이 눈앞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견딜 수
없게 슬펐다.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과 함께 지금까지
세상을 헛살았다는 허무감이 엄습해 왔다.
아, 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건만.......
"......찬희야...... 찬......."
입술이 가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이어서 마지막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문구는 사내가
들이마신 숨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숨을 거둔 것이다. 천장을
향해 떠져 있는 두눈을 내려다보다가 그는
"이것 좀 빨리 풀어줘요!"
여자가 드러누운 채 몸부림쳤다. 그는
여자를 노려보다가 손에 감긴 철사줄을
풀어주었다. 두손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그의 도움없이 허겁지겁 발목에 감긴 줄을
풀어냈다. 그런 다음 남자를 바라보았다.
플래쉬가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남자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아까는 목숨을 건 싸움에
신경을 쓰느라고, 그리고 사내의 죽어가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마치 그녀의 모습을
쳐다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멈칫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흰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귀신의 모습이라 해도 그렇게 참혹하고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한동안 그녀의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에 와락 안겨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껴안으면서도 자기의
얼굴과 옷에 묻어나는 페인트에 더 신경이
쓰였다.
"자, 일어나!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사람이 죽었단 말이야!"
"그놈은 죽어도 싸요! 백번 죽어도 좋을
놈이에요!"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쳤다.
"일어나라니까!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얼른 씻어내야 해! 우선 빗물에
씻어내라구."
밖으로 나온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칠흑 같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들었다. 빗물이 얼굴을 후려갈겼고
그녀는 두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문질러댔다. 불에 덴 데가 쓰리고
아려왔지만 그보다는 머리와 얼굴에 덮어쓴
페인트를 닦아내는 것이 다급했다. 비를
흠뻑 맞고 나자 그제서야 온몸에 통증을
느끼면서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남자 역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도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저 사람 누구야?"
서문구가 떨면서 물었다.
"그 사람...... 김영대예요. 정말
죽었어요?"
그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죽었어. 네가 찌르라고 했잖아?"
"하지만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남자는 그녀에게 저주스런 눈길을
보냈다.
"그놈은 백번 죽어도 싸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른 말하기야. 너도
죽여버릴까?"
"아, 아니에요! 괜히 해본 소리예요.
잘못했어요."
그녀는 얼른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홱 뿌리쳤다.
"넌 언제라도 나를 배신할 여자야. 너를
볼 때마다 휘발유통을 안고 사는 것 같아."
"아이, 그건 오해예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시키는 일은 무슨 일이든
했잖아요. 그래서 이런 사고가 생긴 것
아니에요?"
"알았어, 알았어."
세찬 비바람이 그들의 대화를 잠시
중단시켰다.
"김영대 그놈은 어떻게 만났지? 그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었지?"
"모르겠어요. 집에 도착해서 막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목에다 칼을
들이댔어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어요.
그대로 옥상으로 끌려온 거예요. 제가
그놈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녀는 영대한테 어떻게 당했는가를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문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가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피에 젖은 참혹한 시체를 보자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거세게 머리를 흔드는 것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문구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거 봤지? 문제는 지금부터야.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야."
시체를 처리하려면 날이 새기 전에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시간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 죽이지 않아도 됐잖아요."
그녀가 두손으로 거의 얼굴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플래쉬 불빛 속에 드러난
시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죽게 돼 있었어. 그리고 만일 내가
당했으면 너까지도 죽게 돼 있었어.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야.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것이나 생각해."
"전 모르겠어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그녀는 시체 처리에 관계하기 싫다는 듯
다시 머리를 내저었다.
"모른다고 하지 마. 우리는 함께
협조하지 않으면 안 돼."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그녀를 그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했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사람을 살해한
살인범이었고, 그녀는 해석여하에 따라서는
공범이랄 수도 있었고 유일한 목격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만일 그녀가 시체 처리에
그렇지 않고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유일한
목격자로서 그에게는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일 경찰 수사에 걸려든다면
그녀는 유일한 목격자로서 결정적인 증언을
하게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경찰 수사에 앞서
그녀가 먼저 경찰에 자진 신고할 수도
있다. 그쪽이 그녀한테는 결과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쪽에서 우려될만한 말을
꺼냈다.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되나요?"
그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살인범으로 체포될
거고, 넌 재판에서 목격자로서 증언을 하게
되기를 바라냐?"
"자수해서 정당방위였다고 이야기하면
정상참작이 될 거 아니에요?"
그녀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그는
울화가 치밀었다.
"너 날 배신하겠다는 거냐?"
"누가 배신하겠다고 했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나쁜 년! 내가 누구 때문에 이놈을 죽인
줄 알아?! 너를 살리기 위해 이놈과
싸우다가 이렇게 된 거야! 어떻게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어?! 네가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하는 건 나를
배신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어. 넌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입장이야. 그래서는 안
그러나 그녀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탓인데
그래요?! 난 당신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뭐예요?!
당신 때문에 위험에 처해졌는데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날 구해 주겠어요?! 당신이 날
구해 준 건 아주 당연한 거예요! 당신은
나한테 큰소리칠 자격이 없어요! 나를
위험에 빠뜨려놓고 무슨 할말이 있다는
거예요!"
악에 받쳐 대드는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그는 생각을 고쳐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앞에 두고 입씨름을
벌인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고 위험한
짓이었다.
죽어 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고
집으로 들어가자고. 집에 들어가서 처리
문제를 상의하자고."
그녀도 집에 들어가자는 데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옥상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벽시계가 새벽
2시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 남짓 지나면 날이 샌다는 사실이
사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름철이라
5시면 날이 샌다. 시체를 처리하려면 이제
두 시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5시면
벌써 사람들이 나다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먼저 욕실로 뛰어들더니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샤워부터 했다. 사내는
여자가 목욕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샴푸로 수없이 머리를 씻어내고
있었다. 시체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페인트를 씻어내는 데만 정신이 온통 팔려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더욱 초조해졌다.
시체를 옥상에 그대로 방치해 두면
어떻게 될까. 경찰은 금방 피살자의 신원을
밝혀낼 것이다. 그리고 이 아파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입주자들을 샅샅이 조사할
것이다. 그 수사망에서 과연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들 한쌍은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경찰의 주목을 받게될
것이다.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되지 않도록
깊이 묻어버리거나 신원을 밝힐 수 없도록
그것을 토막내어 따로따로 버리면 된다.
그러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가벼우면 몰라도 거구의 시체를 둘러메고
아래로 내려가 경비원의 눈을 피해 차에
싣는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도와주면 시체를
아래층까지 운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비원의 눈을 피해 어떻게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욕실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와 얼굴은 허연 거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금방 끝낼 것 같지 않았다.
같았다.
그에게는 수족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들이 있었다. 그들을 동원하면 시체를
운반하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동원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일로 부하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게 싫었던 것이다. 어떤
신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닌
불법적인 이익을 위해 모인 조직의 경우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배신행위가
이루어진다. 그는 부하들에게 약점을 잡혀
결국에 가서는 배신까지 당하는 것이
싫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그는 욕실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덮어쓴 흰 페인트는
거의 씻겨졌지만 눈썹이 모두 타버린
얼굴은 낯설고 이상해 보였다.
"제발 좀 내버려둬요. 이걸 씻어내야
하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조금 있으면 날이
샌단 말이야. 날이 새면 시체를 치울 수도
없어."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치우겠다는 거예요?"
조그만 남자가 그 큰 몸뚱이를 도대체
어떻게 운반하려고 그러느냐고 그녀의 눈은
묻고 있었다.
그는 아직 시체의 처리방법에 대해 어떤
결정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있었다. 거기에는 그녀를 그 일에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녀를 끌어들이는 일이
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치우겠느냐고? 그럼 그대로
놔두겠다는 거야? 시체가 옥상에서
발견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이 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샅샅이 조사당할 거고,
그럼 우리는 금방 정체가 밝혀지고 말
거야. 경찰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우리를
범인으로 체포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저걸 치워야해. 아래층으로
운반해서 차에 싣기만 하면 돼. 네가
도와주면 차에 싣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엘리베이터까지만 운반하면 돼.
데까지만 들고 가면 돼."
"저보고 시체를 들라는 거예요?"
그녀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할 수 없잖아. 잠깐이면 돼."
"전 못해요! 싫어요! 전 그런 짓 못해요!
싫어요!"
그녀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그는 욕실로 뛰어들어가 그녀의 팔을
움켜 잡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시체를
만지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나라고 그게
좋아서 만지는 줄 알아? 서로를 위해서
그러는 거란 말이야! 그걸 치우지 않으면
우린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거야! 빨리
나와!"
그녀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러는
그녀가 남자보다 더 힘이 세어보였다.
"무사하지 못해도 좋아요! 전 그런 짓
못하니까 하고 싶으면 당신 혼자 하세요!"
일찍이 그녀가 그렇게 완강히 자기
주장을 펴고 나온 적은 없었다.
"정말 이럴 거야?"
그는 뛰쳐나가더니 가죽 허리띠를 들고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가
욕실로 뛰어들기 전에 안으로부터 문이
쾅하고 닫혔다. 그는 다급히 손잡이를 잡아
비틀었지만 문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이 문 열지 못해?"
"열 수 없어요!"
그녀는 안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주먹으로 더욱 세게 문을
두드리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주먹을
내렸다. 문 두드려대는 소리가 다른 집에
들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당신이 죽였으면 당신이 갖다버릴
것이지 왜 나까지 끌어들이려고 그래요? 난
절대 시체를 만지지 않을 거니까 당신
혼자서 하세요! 그리고 우리 사이는 이제
끝장이에요!"
남자는 여자가 이제 더 이상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자쪽에서는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기
때문에 그럴만도 했다. 남자의 위협쯤은
죽은 영대한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알았으니까 문을 열어.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문좀 열어."
"나도 이젠 악만 남았어요. 나도 내 갈
길로 갈 거예요. 이젠 그런 짓
지긋지긋해요. 나도 남들처럼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살고 싶어요."
그것은 하나의 인간 선언이자 그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사내는 문 앞에서 분노로 몸을
떨었다.
"문 열지 않으면 부술 거야. 빨리 열어."
"난 더 이상 더러운 짓하고 싶지 않아요.
난 내 갈 길로 갈 거예요. 이젠 우리
관계도 끝났어요. 더 이상 상관하지
말아요. 그동안 나는 인생을 낭비했어요.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 거예요."
맘대로 안 돼. 넌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살아 있는 한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흥, 엿장수 맘대로 될 줄 알아요?"
"너하고 입씨름할 시간 없어. 이 문 빨리
열어."
"열 수 없어요."
그는 어딘가에 열쇠 꾸러미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 꾸러미에는 집안의
열쇠가 모두 달려 있었다. 그는 장식장으로
급히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열쇠 꾸러미는
두번째 서랍 맨 안쪽에 있었다. 거기서
욕실 열쇠를 골라내 욕실문 앞으로
다가서서 자물쇠 구멍에다 그것을 꽂았다.
정우희는 자물쇠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자 안쪽에서 문이 열리지 않게 온몸으로

겪어야 한다는 말일까.

문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조그만 남자라 해도 여자 힘으로 그를 당할
수는 없었다. 서문구가 밖에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앞으로 달려들면서 어깨로
힘껏 문을 밀어젖히자 그녀는 보기좋게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문구는 욕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가죽
허리띠로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녀는 살을 후벼드는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질렸다.
"더 이상 더러운 짓하고 싶지 않다고? 네
갈 길로 가고 싶다고? 그래 어디 맘대로
가봐라!"
벌거벗은 몸뚱이 위로 가죽 허리띠가
떨어져 감기는 소리가 철썩철썩 들려왔다.
물에 젖은 몸뚱이에 가죽 허리띠가
감기는 감촉이 감칠맛 나도록 짜릿한
때마다 거기에는 물감을 칠한 듯 피멍이
길게 뻗치곤 했고 그런 것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어지러운 모양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두팔로 매질을
막아내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갑자기
날아오는 허리띠를 두손으로 움켜잡고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왜 때려?! 네가 뭔데 사람을 때려?! 이
개새끼야! 왜 사람을 때려?! 내가 네
종년인 줄 알아? 해볼테면 해봐!
지금까지는 하자는 대로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안 돼!"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긴 그녀는 꽤 강해져
있었고 남자의 무자비한 매질 때문에 악에
받쳐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허리띠를
맞잡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개새끼! 날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야!
경찰에 전화 한 통화만 걸면 넌 끝장이야!
이제부터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어도 시원찮은데 이걸로 나를
때려?! 미친 새끼!"
그녀는 이제 완전히 공세로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 기세에 눌려 어쩔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그가
아니었다.
"니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내가 경찰에
체포되면 넌 온전할 줄 아냐? 내가 걸고
넘어지면 너도 꼼짝없이 당해. 목격자는
아무도 없어. 너하고 내가 합작해서 그놈을
죽였다고 하면 경찰은 그대로 믿을 수밖에
알아? 내가 20년 받으면 넌 적어도 10년
이상은 받아. 난 죽을 때까지 네년을 끌고
갈 거야. 내 손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맘대로 해! 니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어! 난 경찰에 사실대로 이야기할
거야! 모든 걸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할
거야! 경찰이 누구 말을 들을지 두고봐.
니가 아무리 꾸며댄다 해도 사실은
밝혀지게 마련이야. 너한테 끌려들어가거나
사실대로 이야기하거나 경찰에 체포되기는
마찬가지야. 그럴 바에는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게 나아. 그게 속죄하는 길도
되고. 네놈한테는 이제 절대 안 가! 우리는
끝났어!"
그들은 다시 가죽 허리띠를 잡아당기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그녀는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나가지 않으면 소리지를 거야! 사람
살리세요!"
그녀가 정말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는
몹시 당황했다. 잡아당기던 것을 갑자기
뒤쪽으로 확 밀어버리가 그녀는 뒤로 쉽게
나자빠졌다. 일어나려는 그녀의 얼굴을
가죽 허리띠로 정면에서 후려
갈기자"악!"소리치면서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주저앉는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리띠로 그녀의 목을 휘어감았다.
목을 조이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뒤에 바싹 달라붙어 목을
조여나갔다.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무릎으로 그녀의 허리를
몸뚱이가 활처럼 휘어졌다. 그녀의 두손이
다급하게 뒤쪽으로 뻗어와 그의 팔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살기가 오른
그의 팔은 강철같이 단단했다.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풍선처럼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조금이라도 목을
조여드는 압박감을 덜어보려고 그것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거기에는 손가락 하나
파고들 틈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를 죽여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에 차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녀를
없애는데 실패하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의
연민도 두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녀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놓치지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그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우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에게
협조하는 체라도 했어야 했다.
이윽고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욕조
속으로 처박히면서 그녀의 생각은 끝이
났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조금이라도 더 숨을 쉬려고
발악적으로 몸부림칠 뿐이었다.
샤워기에서는 계속 물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그녀를
내리눌렀다. 자신도 물 속에 잠겨 머리만
쳐든 채 그녀를 타고 눌렀다. 그에게는 2분
정도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여자의 저항이 점점 약해진다고
느껴졌을 때 그의 손에서도 힘이 빠지고
없었다.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그녀의
머리쪽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왔다.
그와 함께 격렬한 몸부림이 갑자기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물 속에
엎어져 있었다.
그녀가 다시 움직이면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더 기다려보았다. 2분 정도 더
기다려보았지만 욕조의 물 속에 처박혀
있는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던 거품도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감겨 있던 허리띠를
풀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엎어져
있는 그녀를 바로 눕혔다. 쏟아져내리는
샤워 물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잘 보이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물 속에서 눈을 빤히 뜨고
있었다. 두눈은 튀어나와 있었고 입은
멍하니 벌어져 있었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욕조 밖으로 나온 그는 변기
위에 엎드려 토하기 시작했다. 위 속에서는
쓰디쓴 물과 함께 적은 양의 음식물
찌꺼기밖에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찔러넣어 찌꺼기를 모두
토해낸 다음 물로 입 속을 헹궈냈다.
비틀거리며 욕실을 빠져나온 그는 거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자신이 두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달리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급한 대로 그렇게 처리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출입문은 밖에서 잠겨지지가 않았다.
자물쇠 구멍에 열쇠가 들어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을 잠그는 것을 포기한
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가건물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몹시 싫었지만
그런 것 저런 것 따지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
플래쉬로 시체가 누워 있는 쪽을
비춰보았다.
있었다. 벌써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는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마침내
시체의 양쪽 발목을 하나씩 움켜잡고
끌어당겨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둘러멘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발목을 잠시 놓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문쪽으로 끌어당겨
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시체가
조금씩 끌려오기 시작했다. 한 층만 아래로
내려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뒤로 몸을 버티면서 시체를 끌어당겼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얼굴을
후려갈겼다. 시체는 조금씩 조금씩
끌려왔다. 서문구는 몇번씩이나 엉덩방아를
출입구쪽으로 끌어당겼다.
캄캄한 어둠과 비바람 속에서 기를 쓰며
시체를 끌고가는 모습은 바로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기분에는 1m의 거리를
끌고가는데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옥상을 벗어났을 때 날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한 층만 내려가면
된다. 그러나 그 한 층이 그에게는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도중에 누가 밖으로
나오다가 그 장면을 발견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그는 더욱
초조해졌다.
계단으로 끌고 내려갈 때는 옥상에서처럼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집과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의
출입문을 응시하다가 1510호의 출입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빨리 시체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문을 급히 닫은 다음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맞은편 집 문도 열리지
않고 있었다. 주위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아져 있었다.
시체를 현관에 그대로 둔 채 거실로
들어간 그는 젖은 옷을 모두 벗은 다음
거실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해야할 일을 생각해 보니
너무나 엄청나서 현기증이 일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일어난 그는 현관으로 허둥지둥 가보았다.
김영대의 시체는 아까 놓아둔 그대로
열어보았다. 한때 그와 동거했던 여자의
시신도 욕조의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두
구의 시체로 해서 집안은 가득 차버린
느낌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을 갖다버려야 한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아파트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현관에 놓여 있는 남자 시체를 일단
집안으로 끌어서 올려 놓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거실이 가득 차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무겁고 큰 시체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 시체를 옥상에서 끌고
내려왔으니 그가 한동안 혼이 빠져서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체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놓았으니
하나도 아닌 두개나 되는 시체들을 어떻게
아파트 밖으로 끌어내 버린단 말인가. 사람
눈을 피해서 그것들을 차에데 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처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혼자서 어떻게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무더운 여름철이라 시체는 금방 부패할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썩는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는 넋이 완전히
빠져버린 모습으로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체의 손 하나 발 하나가
끔찍스럽게도 커 보였다. 더 이상 집안에
있기가 싫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김영대의 시체를 욕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남자의 시체는 욕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욕실문을 잠갔다.
6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처럼 자물쇠
구멍에 열쇠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을 잠그지도 않은 채 외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물쇠 구멍에다 열쇠를
쑤셔넣느라고 고심하고 있는데 맞은편 집
문이 열리면서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중년의 사내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 아침 운동을 하려고 나온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네......."
서문구는 당황해서 인사를 받았다.
"비가 좀 그친 모양이이지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마주치면서 눈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인사말을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문이 안 잠깁니까? 고장이 났나
보지요?"
그는 허리를 굽히고 구멍에 걸려 있는
열쇠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얼른 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서문구는 더욱
당황했다.
"안에 뭐가 박힌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잠깐 기다리세요."
사내가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구는 어쩔줄을 몰라했다. 중년의
사내는 잠시 후 플래쉬와 송곳을 가지고
나왔다.
송곳으로 그 속을 쑤셔대더니 이윽고
나무조각 부스러기를 뽑아냈다.
"이것 보십시오. 누가 성냥개비를
분질러넣은 것 같은데요. 아마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그랬을 겁니다."
서문구는 그 사내가 건네주는 나무
부스러기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웃집 사내는 자기 일처럼 정성을 들여
구멍을 후벼 남은 부스러기들을 남김없이
빼낸 다음 열쇠를 구멍 속에다 집어넣고
그것을 돌려보았다. 쇠붙이가 부드럽게
부딪치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물쇠가 잘 잠기는지 알아보려는 듯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서문구는 바짝 긴장했다.
사내가 물러서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집으로 들어온 서문구는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는 그쳐 있었고 저만치 조금 전의 그
사내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사내는
자꾸만 고개를 돌려 뒤쪽을 올려다보곤
하면서 걸어갔는데 그의 그런 모습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서문구는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그자가 눈치챈 거
아닌가 싶어 여간 걱정되는게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리
한쪽을 저는 그는 운전할 줄을 몰랐다.
인사했다. 경비원들한테 팁을 후하게 주기
때문에 그는 그만큼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정우희가 몰던 차에
가서 머물렀다. 그것이 그의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이제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갖다버리든가 중고차
시장에 내다 팔든가 해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운전할 줄을 몰랐다. 그의
전속 운전사는 8시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차도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테헤란로로 갑시다."
차가 달리는 동안 그는 다시 시체를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그 방법의 단점은
너무 끔찍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다면 그것을 이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젊은 형사는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가 빠개지는 듯이
아팠고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낯설어보였다.
그는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 옆에는
나체의 여인이 누워 있었는데 한쪽 다리가
그의 복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거실의 바닥 위에서 그대로 뒤엉킨 채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여인은 천장을 향해
팔다리를 벌린 채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이
여간 천박스러워 보이지가 않았다. 비로소
강형사는 지난밤 자신이 김영대의 집에
났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옷까지 모두
벗게 되었고 거기다 어떻게 되어 그녀와
나체로 뒤엉켜 잠을 자게 되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체로 뒤엉켰으니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두 사람의 몸과 그
주위에는 결렬했던 정사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하종미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깨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전화벨은 한참 동안 울려대다가 받는
사람이 없자 도로 잠잠해졌다. 그때 그는
조그만 인기척을 느끼고는 안방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어린 소녀가 문에
반쯤 몸을 가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종미의 딸인 다섯 살짜리 찬희였다.
바라보고 있었다. 두눈이 유난히 까맣게
빛나고 있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젊은 형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소녀는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소녀의 시선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소녀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있었다.
"쉬! 저리 가!"
그는 손을 흔들어 그녀를 쫓으면서
바닥에 내던져져 있는 자신의 팬티를
집어들었다. 소녀는 여전히 문가에 붙어서
있었다.
"저리 가라니까!"
그가 조금 큰 소리로 말하자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울려고 했다.
"아, 좋아. 좋아. 가지 않아도 좋아."
울려고 하던 소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봐. 조그만 것이......."
그는 중얼거리면서 서둘러 팬티를
입었다. 그때 하종미가 눈을 떴다. 그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러다가 찬희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쳐 일어났다.
"어머머머...... 저애 봐. 너 안에
들어가지 못해?!"
그녀는 방석으로 몸을 가리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소녀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그 자리에서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요것이 들어가라는데!"
하종미는 잽싸게 뛰어가더니 소녀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녀는 방문을 쾅하고 닫았고, 그러자
안에서는 소녀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강형사가 허리띠를 조이면서 말했다.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가야죠. 어제 어떻게 된 거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두눈에 곤혹스런
빛이 나타났다. 그녀는 옷도 입지 않은 채
재빨리 다가와 그 앞에서 무릎을 구부렸다.
그리고 그의 허리띠를 풀면서 충혈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가시려구요?"
"가야죠."
그녀는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불룩한
부분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젊은 형사는
뒤로 물러섰다.
"이러지 말아요. 난 가야 해요."
"한번만 더......."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눈은 어느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그녀를 밀어냈다.
"없었던 걸로 합시다."
"있었던 걸 어떻게 없었던 걸로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뾰로통해서 쏘아붙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요?"
"보면 몰라요. 당신은 어젯밤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제가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저도 나중에는
좋았어요. 당신이 좋아졌어요."
"거짓말 말아요.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아니에요. 당신은 책임지셔야
해요."
"당신이 나를 강간했어! 당신이 말이야!"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여자가 남자를
강간했다구요?!"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떼굴떼굴 구르며 웃어댔다.
그녀의 웃음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온 그는
우선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서 서울로
전화부터 걸었다.
"아, 강형사 어떻게 됐어?"
연락도 없는 걸 보니까 부산에 내려오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거기서 뭘 했어? 염불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밤 벌거벗은 몸으로 하종미의
집에서 그녀와 뒤엉켜 잤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남형사 대신 마반장이 전화에 나왔다.
그는 남형사처럼 그를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는 다소곳이 듣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김영대가 지금 자기
나름대로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지금까지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긴 생긴 것 같군."
기다려볼까요. 아니면......."
"김영대를 찾기 전에는 수사본부에
나타나지도 마."
마형사의 말은 묵직하면서도 단호하게
들려왔다. 올라오라고 할 줄 알았던
강형사는 당황했다.
"아, 알겠습니다."
"지원이 필요하면 조형사를 만나봐."
마형사는 차갑게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강형사는 조형사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비바람은 많이 수그러져 있었지만 비는
여전히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장마권에서
쉽게 벗어날 것 같지 않은 날씨였다.
시체 같은 것을 녹여버릴 수 있는 약품
생각하면서 서문구는 다방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약품이 없는 이상
시체를 치울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 끔찍한 방법은
아무래도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방법을 취하려면 사람을 사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집안에 불을 질러 시체를
태워버릴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건을 더욱
확대시킬 뿐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만두기로 했다. 만일 시체가 타기도 전에
불길이 잡힌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아무튼 가장 좋은 방법은 시체를 감쪽같이
집에서 빼내어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아무튼 일단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상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제가 이렇게 확대된 것은
순전히 그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문제가 이렇게 확대된 이상 자작나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무슨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방 카운터에서 잔돈으로 백원짜리
동전을 한 주먹 받아들고 나온 그는 길가에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세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신호가
떨어지면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서문구는 전화번호를 확인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자작나무와 통화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상대방은 숨을 깊이 내쉬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지요?"
"난 은행입니다."
"아, 은행나무...... 이야기하시오. 내가
자작나무요."
문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신한테도 영향을 미칠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행나무, 당신은 우리 사이의
거래관계가 이미 끝났다는 걸 모르나요?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제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다는 걸
그 목소리는 왠지 비현실적으로
들려왔다. 상대방은 마치 아무 의미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작나무, 거래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일이 깨끗이 마무리되었다면 또
몰라도 그렇게 되지 않고 심각한 방향으로
문제가 확대되고 말았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전화를 건 겁니다. 당신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당신을 도와줄 수없어요. 그런
전화라면 끊겠소."
"잠깐!"
서문구는 소리질렀다.
"김영대가 죽었어요!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바람에 여자도 한 명
죽었어요! 두 사람이 죽었단 말이오! 만일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모른 체할
겁니까?"
"난 당신한테 사람을 죽여달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어요! 모든
게 당신 때문이란 말입니다!"
서문구는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가 흥분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
반해 상대방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기만
했다.
"은행,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대처해야
해요. 흥분해 봐야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흥분 안하게 됐어요?! 김영대가
말입니다. 바로 우리 집에까지 찾아왔어요.
내 일을 도와준 아가씨를 옥상으로
납치해서 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 고문을
가하고 있었어요.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 아가씨는 아마 김영대의 손에 살해됐을
겁니다. 내가 나타나자 그놈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몸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맞붙어 싸우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김영대는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난 살기 위해 정당방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여자도 죽었다고 하지 않았소!"
상대방이 비로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김영대한테서 구해주자 그년은 경찰에
시체를 처리하자고 했지만 듣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어요. 그년은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 같아 영원히 입을 막지 않을 수
없었어요. 모든 게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었어요. 지금 우리 집에는 시체가 두
구나 있어요. 옥상에 있던 김영대의 시체도
집에다 옮겨다 놨어요. 나 혼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걸었는데 당신까지 모르겠다고 하면
난 마지막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그 마지막이라는 게 뭐지?"
"나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당신도 죽어야 해요.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는 겁니다. 나 혼자만
손해를 볼 수 없다 이겁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내 아파트에서
시체를 치우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아요."
"당신한테는 부하들이 있을 텐데 굳이
나한테 그런 걸 부탁할 필요는 없잖아."
"부하들이라고 아무 일이나 하는 줄
압니까. 시킬 일이 따로 있지 시체를
치우는 일을 어떻게 시킵니까. 그런 일을
시켜도 좋을 만큼 믿을 만한 놈은 한 명도
없어요. 오죽해야 당신한테 이런 전화를
걸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자작나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은행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부하들한테 시키더라도 맨 입으로는 안
됩니다. 요즘은 의리 하나만으로 통하던
시대하고는 다릅니다. 돈이 없으면 되는
되는 세상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직접 가든가 사람을
보내서 도와준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우리의 계약관계는
이미 계산이 끝났고, 그 다음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당신이 알아서 해결 해야
해요.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책임이
없어요. 책임소재에 대해서 명확히 한계를
그어야지 당신 말대로 내가 또 나선다면 내
책임은 한계가 모호해져요. 하지만 당신이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니까 모른 체할 수는
없고...... 그 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경비의 일부를 내도록 하겠소."
서문구는 얼른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그가 차선책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것이다.
"당신이 움직이기가 어렵다면 그렇게라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경비를 좀
보태주신다면 그 돈으로 사람을 사서
시체를 처리하겠습니다."
"얼마를 보태주면 되겠소?"
"하나당 2천씩...... 4천 정도면 될
겁니다."
"나는 일부만 보태주겠다고 했어요. 절반
정도로 합시다. 그 이상은 안 돼요."
"금액 가지고 그러지 맙시다. 지금 그런
액수가 문제입니까. 어떻게든 그것을
무사히 치우는 게 급한 일 아닙니까."
"간단히 끝냅시다. 2천이 필요하다면
보내줄 수 있어요. 필요없다면
그만두겠소."
"구두쇠 같으니......."
서문구는 중얼거리고 나서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은행의 구좌번호를
알려주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온 그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청계천으로 향했다.
시체를 처리하려면 여러 가지 연장들이
필요하다. 그 필요한 연장들을 그는 구입할
생각이었다. 청계천에는 그와 같은
연장들을 파는 가게들만이 따로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청계천에서 내린 그는 골목 안쪽에
늘어서 있는 공구점들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 가게 앞에 멈춰서자 제일 먼저
쇠톱을 집어 들었다.

죽은 서창배의 부인이 경영하는 약국은
있었다. 남편을 잃은 여자답지 않게 그녀는
후덕스러워 보이는 인상에 조금 뚱뚱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그 위에다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제주도에서 휴가를 끝내고 어젯밤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경비원 말이 형사가
여러 번 다녀갔다고 했다. 뺑소니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남편 때문에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심심찮게 형사들의 방문을 받았었다.
그래서 휴가를 끝내고 첫 출근한 날 아침에
형사 두 명이 불쑥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도
별로 놀라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남으로 해서 남편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역시 괴로운
일이었다.
조형사는 지난번에 약국을 한번 방문한
김영대를 만나는데 실패하고 조형사와
합류한 강형사는 기운이 빠진 시무룩한
표정으로 약사에게 목례를 보냈다. 계속
손님들이 찾아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 보다못한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부근에 있는 찻집에 가서 기다려주면 곧
가겠다고 말했다. 형사들은 약국을 나와
그녀가 알려준 찻집으로 갔다. 20분쯤
기다리고 있자 그녀가 가운을 벗은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장사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조형사의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종업원한테 잠깐
맡겨뒀으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무슨 말을 들어도 우물쭈물하지
성격이었다. 그래서 형사들은 별 부담없이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있었다.
"자. 이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조형사가 황개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 혹시 아는 사람 아닙니까?
자세히 한번 봐주십시오."
변수자는 사진을 집어들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나더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는 사람인데요."
"바로 이 사람이 서교수님의
주민등록증을 도용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녀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생긴 것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나쁜 사람이군요."하고 말했다.
"그 사람...... 지금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해서 죽었나요?"
그녀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묻는 것을
보고 조형사는 조금 신이 났다.
"불에 타 죽었습니다. 차 속에서
타죽었죠. 신문에도 크게 났는데 못
보셨습니까?"
"봤어요. 바로 그 사람이 이
사람이군요?"
그녀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그분의
주민등록증을 도용하게 됐을까요?"
"그게 바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안됐습니다만...... 사고 당시 서교수님의
소지품 가운데서 주민등록증을 발견하지
못하셨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까?"
"그럼요. 그건 정말이에요. 그땐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챙겨보지 못했지요.
그러니까 사고 당시가 아니고 나중에 며칠
지나서 챙겨보니가 주민등록증이 빠져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어요. 2년이 지나서 그게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정말 몰랐지요."
"그때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사고 당시의 일을 회상하기
싫은지 얼굴빛이 흐려졌다.
주십시오. 말씀하시다 보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사분들은 참 잔인한 데가 있군요.
남의 상처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고
싶은 것만 알아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달려드니 말이에요. 하지만 여기까지
오셨는데 말씀드려야지요. 얼른 말씀드리고
저도 가게에 가봐야 하니까요. 그분이
돌아가신 건 2년 전인 86년 8월
10일이었어요. 지금처럼 여름이었어요.
그분은 그날 오후 6시경에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시면서 외출하셨어요. 술 마실
일이 있으면 택시를 타고 나가셨어요.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말씀을 안하셨기
부부는 서로가 관대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어요. 그분은 특히 예술을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결혼을 했다고
해서 아내한테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어요."
"이해가 갑니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는 서로 약속한 게
있어요. 아무리 부부라 해도 사생활이 있게
마련이니까 그걸 서로 존중해 주면서
쓸데없는 간섭 같은 것은 없도록 하자는
그런 약속이었어요. 우리는 그 약속을 잘
지켜나갔고, 그래서 그런지 여느
부부들하고는 확연히 다른 생활을
영위했어요. 그분은 자신의 예술혼이나
자신이 가꾸어놓은 예술적인 분위기를
훼손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어요.
그녀는 목이 타는지 냉수를 시켜 마신
다음 말을 계속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늘어놨네요.
그러니까 86년 8월10일 저녁 6시경에
약속이 있다고 하시면서 시내로 나가신
분이 자정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를
않았어요. 아무리 사생활을 간섭 안하기로
했지만 무관심할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그분은 술을 좀 과음하시는 편이기 때문에
그분의 귀가 시간이 늦을 때면 걱정이 되곤
했어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앓이를 많이 한
건 사실이에요. 자정이 지나서 들어오실
때에는 항상 만취상태로 돌아오시곤 했기
때문에 그날 밤도 전 자지 않고 그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날이 샐
연락도 없었어요. 그래서 단단히 취해서
집에 못 들어오시고 어디 딴데서 주무시고
계신 모양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침
9시경 경찰에서 연락이 왔어요. 차에 치여
죽은 사람이 있는데 와서 확인해 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무조건 싫다고
했죠. 겁이 나서 움직일 수가 있어야죠.
경찰관 말이 죽은 사람의 양복 안쪽에
서창배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서
전화번호부를 보고 서창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한테 무조건 차례대로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라 했어요. 죽은 사람 몸에
신분증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옷 색깔, 나이
정도, 그밖의 것들을 구체적으로
물어봤더니 그분 차림새와 인상하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시동생을 급히
오라고 해서 함께 갔어요. 먼저 경찰서로
가서 담당 경찰관을 만났어요. 그 경찰관은
우리를 가까운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요.
가는 차 속에서 경찰관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 줬어요. 그가 신고를 받은
것은 새벽 4시경이라고 했어요."
그녀의 두눈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 밖에 한번 시건을 주구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신고를 해온 사람은 택시 운전사였대요.
덤프트럭이 길을 건너는 사람을 치고
그대로 도망가는 걸 보고 그 택시 운전사가
쫓아갔대요. 그런데 어떻게나 무섭게
도망가던지 잡을 수가 없었다나 봐요. 마침
신호까지 바뀌는 바람에 다른 차들 때문에
말았대요. 차 번호판도 흙투성이라 잘
알아볼 수 없었다나봐요. 그 운전사가
사고장소로 돌아와서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을 병원에다 실어다놓고 경찰에다
전화로 신고를 했대요. 그래서 경찰이
병원에 가보니까 수술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결국 환자는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고 했어요. 그제서야
연고자를 찾으려고 고심하다가 양복 안쪽,
그것도 속주머니 뚜껑 안쪽에 얼른 눈에
띄지 않게 박혀 있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전화를 걸게 됐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마침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젊은 형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병원 영안실에 들어가 시동생이 먼저
시신을 보고나더니 저한테 그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옷가지 같은 거하고
소지품들을 보니까 그분이 틀림없었어요.
그래도 저는 미심쩍어 시신을 직접 확인해
봤어요. 얼굴은...... 알아볼 수없게 변해
있었어요. 얼굴만 봐가지고는 그분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만이
아는 그분의 신체상의 특징 같은 것을
찾아봤어요. 왼쪽 가슴 아래 붉은 반점하고
맹장염 수술자국, 턱밑의 흉터 자국 등이
그분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어요. 정말...... 허무했어요.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하고 그것이 없다는
것하고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나게 큰 것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어요. 경찰은 도망친
덤프트럭을 찾으려고 수사를 계속했지만
일...... 이제 와서 찾은들 뭐하겠어요.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나요.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문득문득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분의 소지품을 나중에
챙겨보니까 지갑이 보이지 않았어요. 지갑
속에는 각종 증명하고 신용카드, 그리고
현찰이 들어 있었을 텐데 그게 몽땅 없어진
거예요."
서교수는 신용카드를 몇개 소지하고
다녔는데 그게 없어지는 바람에 변부인은
그후 카드회사에서 날아온 청구액을
메우느라고 수백만 원을 날려야 했었다.
지갑을 훔쳐간 사람이 수백만 원어치를
사고, 먹고, 마셔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갑을 훔쳐간 사람으로 경찰의 조사를
경찰에 맨 처음 신고전화를 했던
운전사였다. 그는 펄펄 뛰었지만 경찰은
그를 가혹하게 다루었고 결국 서교수의
카드 사용처 점포에 데리고가 일일이
대질심문한 끝에야 혐의를 벗을 수가
있었다. 그 운전사는 모른체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괜히
자신이 나서서 설치는 바람에 막심한
피해만 입게 되었다고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했다.
"앞으로는 옆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모른체하고 지나갈 겁니다. 경찰에는 절대
신고하지 않을 거라구요."
경찰에서 풀려날 때 그는 화가 나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경찰은 서교수의 도난당한 카드를
토대로 절도범의 인상 착의를 대충
정리해볼 수가 있었다. 그는 30대의 잘생긴
남자로 그에 대해서는 맨 처음 사고를
목격했던 그 택시운전사가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잘생긴 남자는 사고 당시 그
운전사가 몰던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이었기 때문이었다. 변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덤프트럭이 사람을 치고 도망가니까 그
사람이 내려달라고 하더래요. 자기는 다친
사람한테 가볼 테니까 빨리 덤프트럭을
쫓아가서 붙잡으라고 명령조로 말하더래요.
말하는 폼이 수사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아주 당당하더래요. 그런데 나중에
덤프트럭을 놓치고 돌아와보니까 사람은
길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는데
그러니까 운전사가 없는 틈에 그분의
호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빼내 갖고 도망친
거겠죠. 아주 악랄한 사람이에요."
"그 운전사의 연락처를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집 전화번호하고 회사
전화번호도 알고 있어요. 지금도 아마 택시
운전하고 있을 거예요. 그동안 그
운전사분하고 저희 집하고는 쭉 관계를
유지해 왔어요. 우리는 그분한테 큰 신세를
졌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유일한
목격자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망친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그분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
왔던 거지요."

심종배는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한 달간
누워 있다가 일반 환자실로 옮긴 지
것이나 말하는 것이 여간 불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무사고 운전경력이 20년이
넘는 모범 운전사였지만 술취한 자가
중앙선을 넘어 차를 몰고 달려드는데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취객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심종배는 척추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목숨만은 부지할
수가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고
차는 차적도 없는 폐차 처분된 지 오래 된
차였고, 죽은 자 역시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문조회
결과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결국 심씨는
보상 한 푼 못 받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병원비만 떠안게 되었다.
형사들이 병실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의
부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앞으로는 운전도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하소연
했다. 그녀는 병신이 된 남편보다는 앞으로
닥쳐올 암담한 생활에 더욱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중년의 심씨는 누운 채로 형사가
건네주는 사진을 받아들고 들여다보더니
자기를 조금 일으켜 달라고 말했다. 상체를
부축해서 일으켜주자 그는 황개의 사진을
한동안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이놈입니다. 서교수의 지갑을
훔쳐간 놈이 틀림없습니다."
"서교수가 덤프트럭에 치였을 때 이
사람도 봤겠군요?"
"그야 물론이죠. 제 차에 타고
있었으니까요."
기침을 하면서 뒤로 쓰러졌다.
"황개가 어쩌면 그 덤프트럭을
찾아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병실을 나왔을 때 강형사가 조형사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말을 듣고 조형사는
멈칫했다.
"음, 그럴 수도 있었겠는데. 저 운전사는
시력이 아주 좋지 않아 보여. 그래서
흙투성이 번호판에 적혀 있는 차번호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만일 황개가 눈이
좋았다면 그는 그 번호를 알아볼 수 있었을
거야. 그래! 황개는 그 덤프트럭을
찾아냈을거고......, 그 운전사를 만나
흥정을 벌였을지도 몰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니까 말이야. 시시하게 경찰에
넘기거나 할 놈이 아니야. 뭔가 쇼부를
조형사는 자신의 상상력에 도취된 듯
말했다. 그의 상상력은 사실과 아주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개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떡하죠?"
강형사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조형사도
갑자기 맥빠진 표정이 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죽어버렸으니 이제 와서
사실을 알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어.
제기랄......."
"아무튼 서교수의 주민증이 어떻게 해서
황개의 손에 들어가게 됐는지 그 경위는
밝혀냈으니까 다행 아닙니까. 본부에
보고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병원 1층에 설치되어 있는

같은 날 서울 오후 2시.
두 사내가 충무로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서문구였고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내는 허우대가 크고 인상이 사나워
보였다. 그는 서문구가 가장 아끼고 믿는
심복이었다. 그러나 그 심복도 지금은 별로
믿음성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까부터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 사이에 허상무로
통하고 있는 허우대가 큰 사내는 보스가
용건을 이야기해 주기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보스가 그를 따로 불러내어 이렇게
점심까지 함께 먹는 것을 보면 분명히 무슨
큰 일거리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냉면이
반쯤 없어졌을 때 마침내 서문구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주 중요한 일거리가 있어.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거리야."
뜸을 들이며 허상무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보였다. 그는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식당은 거의 비어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시체 처리해 봤어?"
"네?"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체 처리해 봤느냐구."
"사람 시체말입니까?"
"그래."
허상무는 머리를 흔들었다. 서문구의
"그럼 안되겠는데......."
그들은 더 이상 냉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개새끼는 많이 잡아봤습니다만......
사람은......."
두 사람의 눈이 번득였다.
"개는 어떻게 잡지?"
"전 뭐...... 돌로 때려잡지요. 돌로
대가리를 두어 번 갈기면 끽 소리 못하고
뻗어버리니까요. 해마다 여름이면 서너
마리씩 때려잡습니다. 개고기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개 하나 끌고 계곡에
가서 때려잡아 먹으면 그것처럼 좋은
게......."
"알았어, 알아. 난 개고기를 안 먹어."
나서 더욱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산 사람이면 또 몰라도 이미 죽은
시체야. 갖다버리기만 하면 돼."
"버리는 거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보스의 눈치를 보면서 허상무라는 자가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 집에 있어.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끌어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통째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
사람들이 항상 들락거리고 경비원 눈도
있고 해서 말이야."
"그럼 어떡 하죠?"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탐색하려는 듯 서로를 쏘아보고
"운반하기 쉽게 만드는 수밖에 없어.
조그맣게 여러 개로 말이야."
"토막을 내면 되겠군요."
그 말이 끝나자 그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담배만 연거푸 두
대나 피우고 나서야 서문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막을 내면 되겠지. 그런데 누가 그걸
해주느냐가 문제야. 할 수 있겠어?"
그는 눈을 치뜨고 부하를 노려보았다.
"못할 거야 없지만......
아무래도......."
"개고기하고는 달라. 강요하지는 않겠어.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분명히 말해.
시간이 없어. 지금까지의 일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강요하지는 않겠어.
그리고...... 시체는 하나가 아니고
둘이야. 둘이란 말이야."
그는 강조해서 말했다.
"네?! 두 개나 된다구요!"
경악하는 표정을 보고 보스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잘못
선정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허상무가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하고
물어왔다.
서문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외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건 알 필요 없잖아."
그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허상무는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자야?"
"그래요?"
"젊고 아름다운 여자야."
그가 무겁게 중얼거리고 나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 다 그 아름다운
여자의 주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젊고 아름답더라도...... 일단 죽으면
똑같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서문구는 상대방을 찬찬히 살피면서
"허상무가 정말 할 수 있겠어?"하고
물었다. 그리고 허상무가 조금 전과는 달리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다그치듯 말을
이었다.
"필요한 연장은 모두 준비해 놨어. 가서
처리하기만 하면 돼. 일단 손을 대면
물러나거나 해서는 안 돼."
"그야 그렇지요. 끝까지 해야지요."
허상무라는 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 있는 표정이기는 커녕
오히려 아까보다 더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직 분명히 대답하지 않았어. 할 수
있겠어, 못하겠어? 분명히 말해봐."
허상무는 서문구의 시선을 피해 식탁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성냥개비를 집어들고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전 시체가 하나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개이기 때문에 안되겠다가
이거야?"
"그게 아니고...... 시체가 두개나 되기
때문에 혼자서는 좀 벅차니까 옆에서
처리하기에는 너무 벅찰 것 같습니다."
서문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일에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참가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비밀이
탄로될 가능성은 그만큼 많아진단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을만한
사람을 참가시켜야지요. 그 일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지?"
"회장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
허상무는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채 이야기를 듣고난
서문구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처리할 수
있겠군. 문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게
ꠑ ꠑ嗔求?거야."
"입을 함부로 놀릴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저하고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이종 사촌형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정말 믿어도 될까?"
"네, 정말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좋아. 그럼 그 사람을 쓰기로 하지."
"그런데 말입니다."
허상무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두손을
비벼댔다.
"돈이 필요하다는 건가?"
서문구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매우 어렵게 사는 사람이라
돈을 좀 쥐어주면 일도 잘 처리해
주고...... 입막음도 될 것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일을 부탁하는데 맨입으로 할 생각은
없었어. 얼마면 되겠어?"
상대가 미처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서문구가 다시 말했다.
"한 구당 5백씩...... 천이면 되겠어?"
"천만 원 말입니까?"
"그래."
"아이구, 그렇게나 많이 주십니까?"
그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그 앞에는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열 장이 놓여졌다.
"받아둬."
"감사합니다."
허상무는 두손으로 수표를 집어들었다.
"이제부터 계획을 짜보자구. 일단 계획을
짜면 그대로 어김없이 실행해야 해.
조금이라도 어기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니까 말이야."
서문구는 수첩과 볼펜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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