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2-3

3학년2반 | 2022.02.04 07:42:30 댓글: 0 조회: 437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499

6. 죽음의 그림자

민원장은 문을 밀고 들어서는 두 사내를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간호원으로부터 형사들이 찾아왔다는
귀뜸을 받기는 했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태도가 너무 거칠어보였기
때문이었다.
"K서 수사과에서 왔습니다."
두 사내 가운데 눈에 띄게 잘생긴
젊은이가 민원장의 코앞에 신분증을
디밀어보였다. 민원장은 거기서 "형사"라는
붉은 글자를 얼핏 볼 수가 있었다.
"아, 네, 좀 앉으시죠."
형사가 환자가 아닌 수사관의 입장으로
병원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시원한 것좀 가져와."
간호원에게 마실 것을 부탁한 다음 그는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조그만 두눈에
뭉툭코를 가진 저돌적인 인상의 사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투사형의 인상을 가진 그 형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거리낌없이 담배를 꺼내더니
거기에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민원장이 운영하는 병원은
금연을 실시한 지 꽤 오래 된 병원이었다.
담배를 꼭 피워야할 사람은 따로 흡연구역
안에서만 담배를 피우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장실 안에서의 흡연이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필시
여기저기 붙어 있는 금연 표어를 봤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형사는 다른 데도
아닌 원장실에서 버젓이 담배를 꺼내
피우고 있었다. 원장이 참다못해 담배를
꺼달라고 막 말하려고 했을 때 미남 형사가
말을 걸어왔다.
"바쁘신데 일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기
여기서는......."
"다름이 아니고 뭐좀 알아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배창기 씨라고 아시죠?"
"배창기요? 아, 네, 알고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원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떤 사이입니까?"
"치,친구입니다."
방안은 금방 담배연기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절친한 사이신가 보죠?"
간호원이 마실 것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뭉툭코가
답답했는지 피우던 담배를 비벼끄고 나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주스잔을 집어들고
창가로 다가가 기대섰다.
"배창기 씨 아들이 여기서
죽어나갔지요?"
마형사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욱
작게 뜨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민원장은
더욱 당황했다. 염려하던 일이 기어코
터지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그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이미 알고와서 묻는데야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저기...... 급성폐렴이었습니다."
"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민원장은 간호원을 불러 죽은 배동재의
진료카드를 가져오게 했다. 마형사는
영어로만 적혀 있는 내용을 한참
들여다보았지만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AIDS>라는 영문 표기를 찾아
보았지만 그런 것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동재군의 사망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뭉툭코가 두번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민원장은 그에게 담배를 꺼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그대신
"급성폐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하고 똑같은 말을
뚱보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낯빛을
흐렸다. 그가 내뿜는 담배연기가 곧장
민원장쪽으로 날아왔다. 민원장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으로 담배연기를 휘저었다.
"정말입니까? 다른 원인은 없습니까?"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다른 원인은 없습니다. 이 카드를
보시면 알겠지만......."
"영어로 써놔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의사들은 왜 영어로만 쓰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우리말 쓰기가 그렇게도
싫은가요?"
원장은 얼굴을 붉히면서 숨을 들이켰다.
"영어로 써야만 권위가 서는 모양이죠?"
미남 형사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
아이는 에이즈 환자가 틀림없었다고
보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로
물어오는 바람에 민원장은 안절부절
못했다.
"에이즈 환자라구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누, 누가 그러던가요?"
"원장님,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에이즈 환자를
찾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여기에
온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묻는 말에
숨김없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숨기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밝혀지게
그들이 배창기의 집을 찾아간 것은 어제
저녁 때였다.
집안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알고보니 창기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창기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그가 틀어박혀 있는
방안에서는 그의 잦은 기침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배미화는 비탄에
빠져 있는 오빠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연달아 잃었으니 과연 그가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형사들한테는 그런 것은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형사들의
관심을 끈 것은 창기의 아들이 무슨
원인으로 갑자기 죽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급성폐렴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형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배미화한테서 동재를 진찰했던 병원에
대해서 얻어들을 수가 있었다. 그 병원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본 결과 그 병원
원장이 배창기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 그
병원에 동재를 입원시켰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바로 그 병원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이미 병원문을 닫을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하룻밤이 지난 뒤
오늘 아침에야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뭔가 잘못 오해하신 것 같은데......
에이즈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
아이는 분명 급성폐렴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없는 표정이었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도 친구가 부탁을 하면
당연히 들어주겠습니다.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진찰을 받은 사람은 그
죽은 아이뿐만이 아니었죠? 그 아이의
부모들도 여기서 정밀검사를 받았죠?
그렇죠? 그 부모들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진단되었나요? 그 사람들 카드를 좀
볼까요?"
뚱보 형사는 미남을 돌아보았다.
"남형사, 그 사람들 카드는 이중으로
되어 있을 거야. 하나는 일반카드와 함께
섞여 있을 테고 다른 하나는 따로 보관되어
있는 카드는 이 방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뒤져보라구."
깜짝 놀라며 당황해 하는 원장의 코앞에
수색영장이 디밀어졌다.
"원장님이 협조 안하실 경우에 대비해서
이런 걸 준비해 왔죠."
확신에 찬 뚱보 형사의 말에 원장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미남 형사는 어느
새 캐비닛 속을 뒤지고 있었다. 그는
캐비닛 속의 서류들을 거칠게 다루고
있었다.
"빼먹지 말고 샅샅이 뒤져!"
뚱보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민원장은 소변이 마려웠다. 뚱보는 세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여기는 금연구역입니다."
뚱보는 원장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담배를
비벼껐다.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도
냉정하게 법대로 처리합니다. 에이즈
환자를 발견하고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숨겨준 의사에 대해서 어떤 제재조치가
따르는지 알고 계시죠?"
마형사는 새 담배를 꺼냈다가 그것을 손
안에 넣고 부러뜨린 다음 쓰레기통 속에다
버렸다.
남형사는 난폭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칠게 캐비닛 속의 서류들을 끌어내놓고
뒤적이고 있었다. 한번 밖에다
흐트러뜨려놓은 것들은 처음대로 도로
캐비닛 속에 넣어두지도 두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바람에 원장실은
마형사도 가세했기 때문에 실내는 더욱
어질러졌다. 형사들은 일부러 거칠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원장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당혹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서성거리고
있던 원장은 남형사의 손이 캐비닛을 떠나
금고쪽으로 옮겨가자 마침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거기엔 손대지 마세요! 사실대로
이야기할 테니까 중지해 주세요!"
형사들은 손을 털고 원장을 돌아보았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당국에 고발조치할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형사가 그 침묵을
깨고 힐난하듯 말했다.
아닙니까?"
겁낼 게 뭐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원장은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알겠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신다면
당국에 고발조치하는 건 그만두겠습니다.
그게 걱정이 되신다면 그만두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린 살인범을
잡는 게 목적이지 그런덴 관심이
없으니까요."
남형사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민원장은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마침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에이즈 환자였습니다.
에이즈균을 지니고 있었지만 환자로 판명된
것은 얼마 전이었습니다. 면역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에 급성폐렴에 걸려 죽은
겁니다."
"배창기 씨의 부탁을 받고 그 사실을
은폐한 겁니까?"
"네, 그 친구는 돈이 많기 때문에
에이즈를 다른 사람한테 전염시키지 않고
그것을 잘 관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창기 씨도 에이즈 환자죠?"
민원장은 아래를 내려다본 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몹시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사들은 잡아먹을 듯이 민원장을
노려보았다.
물었다.
"배사장이 에이즈에 걸린 게
언제부터였습니까?"
민원장은 생각해 보는 듯 하다가
금고문을 열고 진료차트를 하나 꺼냈다.
그것은 배창기의 진료차트였다. 원장은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말했다.
"그 친구가 에이즈에 걸린 것을 확인
것은 작년 8월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그 친구는 몸이
약해서 잔병치레를 잘합니다. 그때마다
여기 와서 진찰을 받곤하는데 그날도
사소한 것 때문에 여길 찾아왔다가 에이즈
보균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그 친구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는 에이즈에 걸릴 까닭이
그는 여자 관계가 깨끗한 편이었습니다.
그마한 재력이면 어디서나 손쉽게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데도 그는 특히 여자를
선택하는 눈이 까다롭고 가리는 편이어서
아무한테나 손을 뻗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이즈균이란게 육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닌
바에야 그것을 철저히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일단 입을 열자 그는 거침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사들의 반응을 살피듯 잠시
말을 그쳤을 때 그들은 숨을 죽인 모습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나중에 가서 그 친구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인정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강제로
수용되기 때문이었죠."
"죽은 부인은 어땠었나요? 유밀라 씨도
에이즈에 걸렸을 텐데요?"
"네, 그 여자도 에이즈 보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그는 금고 안에서 유밀라의 진료차트를
꺼냈다.
"왜 몰랐죠?"
"배사장이 끝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 여자한테 말해 주지 않은
겁니다. 배사장은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이 확실해지자 자기 부인도 거기에
걸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부인한테 에이즈를 전염시켰는지
그 어느 경우도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부인한테도 에이즈 검사를 받아보게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배사장은 그 부인을 여기에
데리고와서 에이즈 검사를 시켰나요?"
"네, 하지만 본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검사했습니다. 건강진단을 하는 것처럼
위장해서 에이즈 검사를 했는데
양성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에이즈균
보균자로 나타난 거죠. 배사장은 그 사실을
본인한테 절대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저는 할 수 없이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배사장의 반응은
어땠었나요?"
"그 친구는 좀처럼 밖으로 반응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기막히고
절망적이었겠지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에이즈에 걸린 게 확인됐으니까요."
"그러니까 배사장과 유밀라 씨가
에이즈에 걸린 게 확인되고 나서 그 아이를
검진했나요?"
"네, 부모가 에이즈에 걸렸으니까 십중
팔구 그 아이도 걸렸을 거라고 생각되어
검진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양성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실을 부모 모두 알고 있었나요?"
"부인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배사장이
자기만 알고 있게 해달라고 해서
부인한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배사장 식구들은 그 뒤에 그렇게 방치된
겁니까?"
당황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방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계속 그들을 관찰해
왔는데...... 당장은 환자로서의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배사장 부인은
피살됐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고...... 결국 1년만에 증상이 나타나서
죽은 사람은 배사장 아들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사장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으니까 오래 살지는
못하겠죠?"
남형사가 물었다. 그는 심각한 내용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네,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지요.
그에게 쏟아지는 수모
또 ꠑ ꠓ&그가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민원장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담배 한 대 주시겠습니까?"
민원장이 마형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속이 타는 것 같은 눈으로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마형사는 그에게 담배를 한 대
꺼내 주고 불까지 붙여준 다음 자신도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민원장은 기침을
하면서도 담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피웠다.
"에이즈 때문에 결국 배사장 집안은
쑥밭이 돼버렸군요."
마형사의 말에 민원장은 동감이라는 듯
크게 끄덕였다.
"네, 그런 셈이지요."
"배사장도 자신의 죽음이 시간 문제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요. 곧 죽게될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살려고 노력은 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발버둥쳤지요. 재력도 있고
하니까 외국에 가서 알아보기도 하고 외국
의사를 초청해서 보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었지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니까요."
"배사장 집에는 배사장 여동생인 배미화
씨와 노모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검사해보지 않았습니다."
"왜 검사해보지 않았죠?"
사람들까지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에이즈에 걸린 것이
판명되더라도 자기는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검사하지
않고 불분명한 상태로 놔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배미화 씨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 모르지요."
"그 아가씨를 알고 계십니까?"
"네, 물론 친구 동생이니까요. 명랑한
아가씨죠."
침묵이 흘렀다. 이번의 침묵은 좀 오래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깨고 남형사가
물었다.
"그럼 결국 배사장과 그 가족들이
현재로서는 배사장 자신과 여기 계시는
민원장님뿐이군요? 저희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네, 그런 셈이지요."
"간호원들은 모릅니까?"
"모릅니다. 제가 말해주지 않는 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외에
배사장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있습니다. 아주
특이한 케이스인데......."
"누굽니까? 그 사람이 누굽니까?"
형사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거의 동시에
물었다. 민원장은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배사장한테는 안됐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치코라는 일본
아가씨이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금고 안에서 또
한개의 진료차트를 꺼내들었다.
"이게 그 일본 아가씨의 진료차트입니다.
작년 9월17일에 여기서 검사를 받았는데
에이즈로 판명됐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였는데......정말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가씨 죽었습니까?"
"아뇨, 죽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배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고 했는데 어떤
사이입니까? 한국에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도쿄에 살고 있는 여대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사장이 아마 일본에
드나들면서 사귄 아가씨인가 본데 둘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봐서 애인 사이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민원장은 자신이 너무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말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만두기에는 형사들의 물음이 더욱
집요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치코라는 아가씨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와서 에이즈검사를 받게 됐나요?"
마인이 차트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미치코는 유밀라보다 먼저 에이즈검사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유밀라의
차트에는 첫 검사 기일이 9월29일로 나와
있었다.
"배사장이 자기한테 에이즈를 전염시킨
자기 부인쪽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 일본에 갈 때마다 만나던
미치코를 전염원으로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미치코를
한국으로 초청해서 검사를 시켰던 겁니다.
물론 본인은 모르게 종합건강진단을 하는
것처럼 속여 검사를 했는데 생각했던 대로
양성반응이 나왔습니다."
민원장은 조십스럽게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몹시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한은 모두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배사장은 그 아가씨를 몹시
증오했겠군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그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아가씨를 동정하는 것
되는 것일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지요."
"그 아가씨한테 그 사실을 알렸나요?"
"그때 당시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배사장이 절대 말하지 못하게 해서 입을
다물었죠. 그 아가씨는 결국 그 사실도
모른 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배사장이
입을 다물고 있고, 물어보기도 뭣하고 해서
그뒤 소식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를 그후에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 참, 배사장이 그
아가씨한테 편지로 그 사실을 알려줬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밖에는 그
아가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유밀라 씨가 에이즈검사를 받은 걸로 되어
있는데......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이 차트에 적혀 있는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배사장한테 에이즈균을 옮긴
여자는 누구입니까? 만일 여자들이
옮겼다면 미치코와 유밀라 씨 가운데 누가
진범이라고 생각합니까? 엄밀히 따져서
미치코만 의심할 수도 없는거 아닙니까?"
"네, 그건 그렇죠."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가에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배사장은 누가 진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누구라고 단정을
왜냐하면 에이즈의 감염경로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미치코일 수도 있고 유밀라
씨일 수도 있지만...... 누구라고 단정은
내릴 수 없고...... 그밖의 다른 경로를
통해서 전염됐을 수도 있지요. 다른 경로를
통해서 전염됐다면 역으로 배사장이
여자들한테 병을 옮긴 셈이 되겠지요."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 부인한테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형사가 말을 맺고 몸을 일으켰다.
"실례 많았습니다. 협조해 줘서
감사합니다."
처음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형사들은
민원장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고 문을
나섰다.
당분간 비밀로 해둡시다. 특히 배사장한테
말입니다."
마형사 뒤를 따라나가다 말고 남형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형사들이 사라지자 원장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식은땀을 닦고 나서 즉시
배사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배사장이
식음을 전폐한 채 방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은 미화를 통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미화가 전화를 받았다.
"오빠 오늘 아침 출근하셨어요. 갑자기
나와서 샤워를 하고 나더니 미음을 한 그릇
먹고 나서 출근하셨어요."
"다행이군."
민원장은 창기의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한동안 울린 뒤에야 창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야. 집에 전화 걸었었지."
기침소리에 이어 창기의 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음, 웬일이야?"
"그냥 걸었어. 어때? 괜찮나?"
"괜찮아. 아침에 미음을 좀 먹었어."
"몸은 좀 어때?"
"더 심해진 것 같아."
쿨럭쿨럭 하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약속 없으면 나하고 식사하지."
"좋아. 그렇게 하지."
창기는 선뜻 응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그래. 그게 좋겠어."
창기가 경영하는 호텔에는 고급 식당이
여러개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식사할
때는 그곳 식당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
점심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민원장은
병원을 나와 차를 몰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창기는 더욱 쇠잔하고 병약해 보였다.
그리고 더욱 작아 보였다. 민원장이
사장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인기척에 금방 깨어 일어났다. 민원장은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죽은
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창기는 그 사진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거기에 놓아둘 모양이었다.
그 사진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는 또
미치코의 사진이었다. 유밀라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아내의 사진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대신 일본인 애인의 사진만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죽은 아내보다도 미치코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미치코는 그에게
에이즈를 전염시킨 여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녀가 그에게 그 병을 전염시킨
장본인이라면 그녀의 사진이 어떻게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겠는가.
미치코가 아니라면 유밀라가 그것을
퍼뜨린 장본인이 아닐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비밀이다. 창기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다.
창기의 시선이 민원장의 시선을 따라
향했다.
"이 아가씨는 잘 있나?"
민원장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창기는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잘 있지 못해."
그가 저고리를 걸쳐 입었다.
"증세가 나타났나?"
"음, 그런 것 같아.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있어."
그는 아주 조용히 움직였다. 가끔씩
터져나오는 잔기침이 그의 조용한 움직임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민원장은 그녀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창기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 아가씨는 천사야. 천사 같은 여자가
없을 줄 알았는데 있더라구. 그 아가씨가
처음에는 내가 그 아가씨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줄 알았는데 알아보니까 그게
아니었어. 그 아가씨가 오히려 나 때문에
그 병에 걸린거야. 내가 미치코한테
전염시킨 거야. 나는 아주 나쁜 놈이야.
그런데도 미치코는 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어. 나를 그전처럼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건강을 누구보다도 걱정해
주고 있어. 그런 여자는 아마 없을 거야.
자기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지만 나를
그대로 두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찢어 질 것 같다는 거야. 나도 미치코와
함께 죽고 싶어."
마지막 말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소리였지만 유난히도 뚜렷이 들려왔다.
그는 창가에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가 미치코한테 그걸 전염시켰다는
걸 어떻게 그렇게 단정 할 수가 있지?"
민원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미치코는 깨끗한
아가씨였어."
"어떻게 그걸 알 수가 있지?"
"미치코의 진심을 나는 알고 있어."
창기는 갑자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민원장이 따라나섰다.
그들은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여러 종류의 식당들 가운데서 그들은
일식당으로 들어갔다.
사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종업원들은 잔뜩
긴장했지만 정작 사장 일행은 비싼 것을
젖혀두고 모듬 국수류를 주문했다.
접촉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지만
민원장쪽에서는 오히려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에이즈 환자라고 해서
그를 기피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전보다 더 허물없이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민원장의 태도에서
창기는 진정한 우정을 느끼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아니라면 누가
자네한테 그걸 전염시켰지?"
민원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묻고 나서
그는 후회했다. 괜한 것을 물어서 친구의
가슴을 아프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관계한 여자는 두
사람밖에 없었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 아니야?"
떨어뜨린 채 국수가락을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다. 민원장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런 오해 아닐까? 그렇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잖아."
"난 단정을 내릴 수 있어."
창기가 너무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민원장은 말문이 막혔다. 창기의
충혈된 두눈이 안경 너머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야. 나에겐 이제 한 가지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게 무슨 일이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야."
민원장은 움직임을 멈추고 상대방을
있는 두꺼운 안경이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려보였다. 민원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가 한다는 것이
위선적으로 생각되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막상 준비하려니까 할 일이 너무도
많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일을
벌여놓았기 때문에 정리하려면 한참
걸리겠어."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 호텔만해도 그래.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 없애버릴 수도 없고......
물려줄 자식도 없고...... 결국......."
그가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고 민원장이
말했다.
"미화가 잘 해내겠지 뭐. 벅차긴
하겠지만 워낙 똑똑하니까."
그 말은 결국 미화한테 재산을 물려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글쎄."
창기는 또 말끝을 흐렸다.
"막상 부딪치면 잘 해낼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자네를
중역으로 맞아들이고 싶어."
뜻밖의 제의에 민원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난 호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호텔뿐만 아니고 다른 것에도 신경을 좀
써줘야겠어. 어려운 건 하나도 없으니까
금방 익히게 될 거야. 정상적으로 월급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테니까 말이야."
민원장은 사실 병원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의 부탁을 차마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마.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자네한테 혹시 형사들이 오지 않았나?"
민원장은 무엇인가 탐색하려는 듯 창기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사람이 죽은 뒤 사건수사를 위해 온
적은 있지."
"그때 자네한테 에이즈 이야기하지
않았나?"
"아니, 전혀......."
"동재가 죽은 후 그들이 오지 않았나?"
왔었나?"
민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두 사람이 왔었어.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것 같았어. 동재가 죽은
이유가 에이즈 때문이 아니냐고 추궁하기에
부인할 수가 없었어. 만일 부인하면 모든
것을 들춰내서 고발조처하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해버렸어."
"괜찮아. 이미 각오하고 있었어."
창기는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들은 자네와 자네 부인, 그리고
동재가 모두 에이즈에 걸린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거기에 관한 진료차트를
찾아내려고 하기에 자진해서 내주었어.
망신당하느니 자진해서 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보여주었어."
"괜찮아. 어차피 알려질 거라고
생각했었어. 신경쓰지 마."
"어쩌다가 미치코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어."
"그래?"
그건 좀 의외라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가서
머물렀다.
"혹시 저 친구들 아니야? 저쪽 구석에서
식사하고 있는 남자들 말이야."
민원장은 창기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아침에 병원에서 만났던
형사 두 명이 구석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낯이 익은 사람들이야."
뚱보 형사는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남
형사는 이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하고 있는 앞모습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한손을
들어보이며 아는 체를 했다. 민원장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저 사람들...... 만난 적 있어?"
"음...... 만난 적 있어. 내 방에까지
왔었어."
"자네 만나려고 온 모양인데......."
"관심없어."
창기는 국수가락에는 손도 대지 않고
국물만 조금 마셨다.
그들은 먹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 에이즈에 대해 물어볼 거야."
민원장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창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뭐. 이제 와서
부인해도 소용없는 일이니까. 나를
수용하지 않을까?"
민원장을 쳐다보는 창기의 두눈에
곤혹스러워 하는 빛이 나타났다.
"아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이야기해 두겠어."
"난 저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만나는 거 질색이야."
창기는 얼굴을 찌푸리며 흔들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잖아. 수사에
협조해야 되고 말이야."
"협조할 것도 없어."
물었다.
"자넨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나?"
창기의 얼굴이 천천히 쳐들려졌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민원장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혹시 짐작도 가지 않느냐
말이야."
창기는 다시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형사들이 일어서는데......."
그들은 형사들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일어서면서 동시에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원장 일행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그들은 잠자코 식당 밖으로 나갔다.
여자 종업원이 다가와 창기에게 쪽지를
전했다.
"방금 나간 분들이 이걸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뭐야?"
민원장은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창기는
메모쪽지를 펴보았다.
"동재는 정말 안됐습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바쁘시겠지만 한번
만나뵈었으면 합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인."
창기는 메모지를 손바닥 안에
구겨쥐었다.
"끈질긴 사람들이야."하고 민원장이
말했다.
창기는 얼른 일어서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무적거리며 앉아 있었다.
"정말 만나기 싫어. 똑같은 말의 반복일
창기는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피할 수는 없잖아. 잠깐
만나보는 게 좋을 거야."
"어디 멀리 도망가서 숨어버리고 싶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데 가서 말이야. 이제
동재도 없고 하니까 그럴까봐."
그렇게 말하면서 창기는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일어서면서 민원장은 창기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들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창기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악수를 청할듯 말듯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 왔습니다."
남형사가 고개를 숙이자 창기는 그에게
목례를 보냈다.
"동재는 정말 안됐습니다."
뚱보 형사가 창기를 향해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남형사가 민원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아, 네, 제가 먼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마형사를 데리고 기둥 뒤로 갔다.
"배사장을 수용시킬 겁니까?"
"글쎄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작은 눈이 무표정하게 민원장을
응시했다.
"수용시키지는 마십시오. 그는 얼마 못
삽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정리할 일이
벌여 놓은 일들이 많습니다. 유일한
상속자가 죽는 바람에 상속 문제로 고민인
모양입니다."
"여동생이 있지 않습니까?"
"여동생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가 수용되면 아무것도 정리
못하게 됩니다. 얼마 못 살 테니까 세상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자유롭게 있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는 수사경찰이지
보건당국하고는 상관이 없으니까 억지로
수용시킬 생각도 없습니다."
민원장이 가고 나자 창기는 형사들을
자기 집무실로 안내했다.
처음 와보는 것도 아닌데도 그들은
드넓고 호화로운 집무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소파에 가서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비서 아가씨가 차를 가져올 때까지 그들
세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창기는 두 형사 가운데 특히 뚱보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너무 못생긴데다
비정하고 무례해 보였다.
"뒤늦게야 동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여운 아이였는데......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잘생긴 젊은 형사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창기는 잠자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안됐습니다만 우리는 수사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배상장께서도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이상하게도 형사들의 말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동재는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나요?"
"병에 걸렸지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에이즈라는 병을 아십니까?"
"네, 말은 많이 들었지요. 동재가
에이즈에 걸렸었나요?"
창기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민원장한테서 이야기를 모두
들었습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이야기를
돌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형사들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네, 그건 사실입니다. 민원장한테서
대강 이야기 들었습니다. 우리와 만났다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약속을
어겼나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죠.
우리는 배사장한테서 직접 사실대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모든 게 사실입니다. 민원장이 한 말은
제가 한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에이즈에 걸렸고...... 그 가운데
현재 저 혼자만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곧 세상을 떠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서랍을 뽑아내더니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책상 위에다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아가씨는 누굽니까?"
가리켜 보였다.
"미치코라는 일본 아가씨입니다."
창기는 감추려드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그 아가씨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사진을 책상 위에다 놔두신 걸 보니까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가 본데......."
창기는 책상 위를 정리하다 말고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가까운 사이입니다. 일본에
출장갓다가 알게 된 아가씨인데 어쩌다
보니까 서로 정이 들어서 관계가 깊어지게
됐습니다."
"그 아가씨도 에이즈에 걸렸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요즘은 서로 연락만
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까?"
남형사가 사진 액자를 집어들고
들여다보며 물었다. 창기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배사장한테 에이즈를
퍼뜨렸습니까, 아니면 배사장이 그
아가씨한테 전염시켰습니까? 범인이
누굽니까?"
뚱보가 뭉툭한 코를 어루만지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창기는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처음에는 그 아가씨를
오해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럼 배사장이 그걸 미치코한테
옮겼다는 겁니까?"
"네, 그런 셈이지요."
침통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 있다가
남형사는 사진을 마형사한테 보여주었다.
"미인이죠?"
"음......."
마형사는 약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미치코는 배사장을 몹시 원망하고
있겠군요?"
남형사가 액자를 책상 위에 도로
올려놓으며 물었다.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가씨는 그럴 여자가 아닙니다. 그전보다
더욱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배사장이 자기한테 그걸 전염시킨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까?"
"네, 알면서도 저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대가라니요?"
배사장의 눈에 분노의 빛이 서리는 것을
남형사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아가씨도
아닌 일본 아가씨가 배사장을 그렇게
사랑할 리가 있습니까. 그만한 보상을
해주니까 값을 치르는 거겠지요. 그런
아가씨와 관계를 유지하려면 웬만한 재력이
없고는 힘들걸요. 돈이 많이 들테니까
말입니다."
창기는 분노에 찬 눈으로 남형사를
쏘아보다가 격렬하게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침하는 모습을 형사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 아가씨를 돈으로 산 게
창기는 기침이 끝나자 벌겋게 충혈된
얼굴을 쳐들고 말했다.
"그래요? 우리가 오해했었나요."
"그 아가씨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그
아가씨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아주 순수한
사이입니다."
"국경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군요."
뚱보 형사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창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든 좋습니다. 두 분이 어떤
관계이든 우리가 알 바는 아니죠. 우리는
살인범을 잡는 게 목적이니까요."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까
범인을 못 잡는 거겠지요."
창기가 분풀이라도 하듯이 쏘아붙였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요.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미치코가 아니라면
배사장한테 에이즈를 옮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이제 와서 알고 싶지도
않고요."
"일가족 모두가 에이즈에 걸렸다면
누군가가 한 사람 그걸 퍼뜨린 사람이 있을
거 아닙니까? 동재는 아닐 거고...... 두
분 가운데 한 사람일 텐데 돌아가신 부인은
어떻습니까?"
창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깨끗해요."
돌진이나 하려는 듯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렇다면 결국 가족들에게 그걸
전염시킨 사람은 배사장 당신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뚱보가 작은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째려보면서 물었다. 창기는 손으로 창문을
문질렀다.
"그래요. 제가 가족들에게 모두
퍼뜨렸습니다. 죽일 놈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지금까지 혼자 살아 있습니다.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어떻게 죽어야할지 알
수가 없어요."
형사들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남형사가 재빨리 나섰다.
"배사장이 그걸 퍼뜨렸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가 있지요?"
남자라고는 나밖에 몰랐던 여자였고......
나는 여자 관계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형사들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는 듯
놀라운 표정들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것도 없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여자 관계가 문란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외국 여자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미치코처럼 깨끗한 여자들은
아니었지요. 제가 돈이 좀 있다는 것을
알면 여자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몸을
제공해 왔습니다. 어디를 가든 저는 손만
뻗으면 여자들을 만질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여자들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가족들은 나한테서 전염되었을 거고......
저는 천벌을 받은 겁니다. 내 가족들
말고도 나한테 전염된 여자들은 부지기수일
겁니다."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것을
알고서도 여자들과 관계했습니까?"
"아뇨. 그 사실을 알고난 뒤에는 여자를
멀리했습니다."
그는 창 밖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그의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배사장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마형사가 뭉툭코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저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은걸요. 상해된 유밀라 씨가
보일지 궁금하군요."
그 말에 창기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배사장보다도 유밀라 씨쪽에 더 문제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죽은 아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삼가주십시오. 이미 죽은 사람을
모욕하지는 마십시오."
"모욕하는 게 아닙니다."
남형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배사장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눈에는 물기가 번져 있엇다.
"배사장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한테 모욕이 되든
어떻든 그런 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싶을 뿐입니다. 그래야만 범인을 잡을 수가
있으니까요."
창기가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를 형사들은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들의 눈에는 동정이
빛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얼른 보기에는 냉혈한
같았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런 냉정함은
수사관들한테는 필요한 것이었다.
"배사장, 당신은 모든 것을 혼자서
덮어쓰려고 하고 있지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배창기가 두손을 흔들었다.
"당신들이 어떤 조사를 했던 난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신들이 깊이
알지는 못할겁니다."
"잠깐 들어보세요.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에이즈를 퍼뜨린 사람이 배사장쪽보다는
유밀라 씨쪽일 가능성이 더 크단 말입니다.
매우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유밀라 씨는
배사장과 결혼하기 전부터 남자 관계가 좀
복잡했습니다. 이건 괜히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딨습니까?
그런 말 듣고 싶지 ㅏㅇ니까 나가주십시오!
여기서 나가주세요!"
배사장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격하게
소리쳤기 때문에 형사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혀사는 엉거주춤 서 있었고 마형사는
담배를 꼬나문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라고는 나밖에 몰랐습니다! 내 아내는
순수한 여자였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요."하고 뚱보가
냉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창기는 충혈된
눈으로 뚱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뚱보는
상관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았다.
"유밀라 씨는 결코 깨끗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너무 심한 말이었지만 상대방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는 그런 잔인한 말도
필요한 것이었다.
형사들이 기대했던 대로 창기의 반응은
격하게 나왔다. 그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면서 뚱보에게 달려들 듯하다가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뚱보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창기는
얼굴을 두손에 묻은 채 떨고만 있었다.
"당신은...... 당신 아내가 에이즈를
당신한테, 그리고 아이한테 퍼뜨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소이 차츰 밑으로
내려왔다. 안경에 가려진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 계속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뚱보 형사는 배창기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뚱보
앞에 이른 창기는 두손을 뻗어 형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온힘을 쥐어짜서
틀어쥔 듯 뚱보는 숨쉬기가 거북 할 정도로
목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내 아내를 모욕하지 마! 내 아내는
아니었다구?!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거야?! 형사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근거를 대봐! 왜 내 아내가 깨끗한
여자가 아닌지 근거를 대보란 말이야!"
잔뜩 부릅떠진 충혈된 두눈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형사들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이 사람은
정말 자기 아내가 정숙한 여자였다고 믿고
있었을까? 정말 아내의 불륜의 행각을
모르고 있었을까? 찰스 모겐도와
동거생활까지 한 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형사들은 유밀라가 결혼 전에 미국인과
한때 동거생활까지 했으며 바로 그
미국인이야말로 에이즈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그와 관계를 가진 한국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너무
잔인한 것 같아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실내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불규칙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창기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형사의 멱살을 움켜쥐엇던 손을 풀고 나서
한동안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내장을 긁어내는 것 같은 기침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형사들은 그의
기침하는 모습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흥분해서 미안합니다......."
창기는 가까스로 기침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
"...... 흥분할 일도 아닌데......
환자이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죽는 게 시간 문제라는 걸
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내도 아이도
모두 죽었는데 저 혼자 살아서 뭣
합니까...... 저도 따라가야지요.......
죽는다는 게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과거 일은 들춰서 뭣
합니까...... 저는 이제부터 떠날 준비를
해야합니다......."
형사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운
그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앞둔 그가 수사에
말해 주었으면 하고 기다렸지만 그의
입에서는 끝내 그런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마형사가 말했다.
"저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요."
남형사가 목을 움츠려보였다.
"에이즈에 전염된 것 같아
꺼림칙합니다."
"난 죽음에 전염된 기분이야."
그들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그들뿐이었다.
"배사장 말은 정말일까요?"
"글쎄, 그 속을 누가 알 수 있어야지."
올려다보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을 안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짓말도 종류 나름이지."
"제가 보기에는 배사장은 아내의 과거와
결혼 후의 불륜까지도 알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걸 알면서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의
말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입장이죠."
다른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이미 죽은 아내를 욕되게 할 생각은
없다는 건가?"
"죽은 아내를 욕되게 하는 건 결국
자신을 욕되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한동안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호텔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는 것은
장사가 잘 된다는 말이다.
"만일 말이야, 그가 아내의 과거를
알았고....... 그에게 그 몹쓸 병을 옮겨준
사람이 아내임을 알았을 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자네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아이까지 병에 걸린 걸 알았을 때
말이야? 아내를 용서해줄 수 있겠어?"
"아뇨. 아내를 죽이고 싶을 겁니다."
남형사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7. 토막시체

초인종 소리에 두 사람은 긴장해서
문쪽을 바라보았다.
"온 거 같습니다."
허상무의 말에 서문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상무는 현관쪽으로 걸어가 출입문
가운데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본
다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조그맣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내가
소리없이 집안으로 들어 섰다.
서문구는 일어서서 그 조그만 사내를
맞았다. 허상무의 소개에 따라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다.
서문구의 말에 허상무의 이종
사촌형이라는 그 사내는 웃기만 했다.
그의 시선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얼굴은
까맣게 찌들어 있었고, 실없이 웃을 때마다
앞니 두 개가 빠져 있는 것이 보이곤 했다.
고수머리가 절반쯤 잿빛으로 변해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는 꽤 들어보였지만
대강의 나이를 어림하기가 좀 어려운
생김새 였다. 시선이 엇갈리는 두 개의
조그만 눈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연장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검은
색의 낡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는 서문구가
권하는 소파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가
걸치고 있는 사파리는 때에 절어 있었고,
몸에 비해 흡사 반코트처럼 커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물었다. 벽시계는 밤 11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네 시간......."
사팔뜨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네, 네 시간......."
사내는 끄덕이면서 아이처럼 손가락 네
개를 세워보였다.
"형님, 소주 한잔 해야지요?"
허상무의 말에 사팔뜨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 안 마시고는 못해."
사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허상무는 준비해놓은 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두 홉들이 소주병 다섯 개와
탕수육 따위가 탁자 가득히 놓여졌다.
사팔뜨기 사내는 싱글거리며 한 손으로는
술잔을, 다른 손으로는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술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그 사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소주잔을 들고 있는 사내의 손은 몸에
비해 유난히도 우악스럽게 커보였다.
사내는 권하는 대로 술잔을 비웠다. 다른
사람한테 잔을 권하는 법도 없이 혼자서
넙죽넙죽 잔을 비웠다. 그리고 중국 요리를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이런 일 해보셨나요?"
서문구가 초조해 하며 묻자 사내는 히히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반만 줬습니다. 나머지는 일을
끝낸 다음 주려구요."하고 허상무가
말했다. 사팔뜨기가 다시 끄덕였다.
"일 마무리를 잘해 주면 5백을 더
주겠소."
서문구의 말에 무슨 말인지를 몰라 눈을
깜박거리던 사내는 허상무가 다시
되풀이해서 말해 주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대부분 표시하곤
했다.
"저기 저거면 되겠습니까?"
서문구는 욕실 앞에 놓여 있는
비닐포대를 가리켜보였다. 사내는 그것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또 끄덕였다. 포대
있었다.
술을 마실수록 사내의 얼굴은 하얘지는
것 같았다. 금방 소주 세 병을 거의 혼자
비운 것을 보고 허상무가 제지했다.
"형님, 나머지는 일 끝낸 다음에 마시는
게 어때요?"
사내는 웃으며 끄덕이더니 일어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거나 말거나 그는
거침없이 옷을 벗어부쳤다.
이윽고 팬티 바람이 되자 그는 그들에게
씨익 하고 한번 웃어보인 다음 연장가방을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을
보고 서문구와 허상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왜 옷은 벗었지? 샤워하려고 저러나?"
욕실문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 욕실 안에서 쿵쿵 하는 소리,
쓱쓱 써는 소리, 탁탁 치는 소리, 쏴아
하는 소리, 헛기침하는 소리, 퉤 하고
침뱉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조금 크게 날 때마다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라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욕실 문이
조금 열리면서 "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문틈으로 손이
불쑥 나와 흔들리고 있었다.
허상무는 서문구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얼른 술병을 들고 욕실로 다가갔다.
그리고 멈칫하고 물러섰다. 문틈 사이로
피투성이였다. 그 손이 소주병을 받으려고
손가락을 벌리고 있었다.
"형님, 꼭 술마셔야 합니까?"
허상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빠, 빨리."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상무는 그
손에 소주병을 건네준 다음 얼른 문을
닫았다. 그러자 문이 다시 열렸다.
"아, 안주 좀......."
더듬거리는 소리에 서문구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 안에서 안주까지 먹겠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일을
하는 거야 안하는 거야?"
어쩔줄 모르는 서문구를 허상무가 간곡히
말렸다.
다르니까 그렇게 알고 모른체하십시오. 그
대신 일은 틀림없이 잘할 겁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서문구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자리에
도로 주저앉는 것을 보고 허상무는 탕수육
그릇을 집어들었다.
안주그릇을 받기 위해 문틈이 더 넓게
벌어졌다. 허상무는 욕실 안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 채 그릇을 디밀었다.
피투성이 손이 다시 뻗어나와 그것을 덥석
잡더니 안으로 잽싸게 사라졌다.
조금 있자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소리였다.

사팔뜨기 사내가 밖으로 나온 것은
어둠이 걷힐 때쯤이었다. 샤워 소리가
닦으면서 나왔다. 그때까지 소파에 앉아
자는둥 마는둥하고 있던 사내들이 벌떡
일어섰다.
"다 됐습니까?"
사팔뜨기는 씨익 웃으면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조심스럽게 욕실쪽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지만 두 구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비닐 꾸러미가 몇개 욕조 속에
쌓여 있었다. 꾸러미는 목 부분이 모두
묶여 있었다. 비닐부대는 투명하지는
않았지만 희뿌연 빛이었기 때문에 유심히
들여다보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식별할
수는 있었다.
"엌!"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상무도 서문구를 놀라게 한 맨 위쪽에
놓인 비닐포대를 내려다 보았다. 가만 보니
목이 잘린 여자의 머리통이 머리카락이
뒤엉킨 채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필이면 두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까지
드러나 있었다. 그는 얼굴을 홱 돌린 다음
침을 칵 뱉고 밖으로 물러나왔다.
부엌쪽에서 서문구가 억억 하고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팔뜨기를 힐끗 보니
그는 남아 있는 소주를 마시면서 실실 웃고
있었다. 허상무는 부엌쪽으로 가보았다.
서문구는 씽크대 위에 얼굴을 숙인 채 위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내고
있었다. 허상무는 서문구의 등을
"지독한데요."
서문구는 물로 입 속을 헹군 다음 머리를
흔들었다.
"내 생전 그런 건 처음이야...... 괜히
봤어...... 꿈에 나타날 텐데...... 괜히
봤어......."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 허상무는 그가 놀라도 단단히
놀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배낭에 집어넣겠습니다. 보지 말고
그대로 계십시오."
"그래. 그렇게 해줘."
거실로 돌아온 허상무는 사팔뜨기에게
배낭을 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약속대로 5백만 원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서문구가 5백만 원짜리
다시 들어가 배낭에다 비닐 꾸러미를 담기
시작했다.
토막을 낸 시체를 담은 비닐포대는 모두
여섯 개였고 배낭은 세 개였다. 그리고
배낭 속에는 한 개의 꾸러미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배낭을 모두 꾸렸을 때
비닐 꾸러미 세 개는 욕조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밤새에 구름은
걷히고 동쪽 하늘이 밝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곧 해가 떠오를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서둘러 등산 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모자도 배낭도 모두 새 것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각자 배낭
한개씩을 등에 지고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이렇게 일찍 등산 가십니까?"
겸해서 물었다. 다리를 저는 서문구가
배낭을 지고 등산 차림으로 나서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경비원은
조금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와 낯선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아, 네, 시원한 계곡에 좀
다녀오려구요."
서문구는 서둘러 자동차쪽으로 걸어갔다.
중년의 경비원은 세 사내가 배낭을 차
트렁크에 실은 다음 서둘러 떠날 때까지
잠자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등산
차림이 하나같이 새 것인 것으로 보아
모두가 처음 등산길에 나서는 것 같았다.
두 사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아침 일찍 세 남자가
등산 차림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경비원의
가운데 유난히 작아보이는 사내는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서문구의 고급 승용차에는 운전사가 딸려
있었다. 서문구는 다리를 저는 탓으로
운전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운전사 대신 건장한 사내가 차를
몰았다. 경비원은 그들이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크게 하품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보니 그 차가 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운전자는 아파트 건물 입구에다
바싹 차를 갖다댔다. 이어서 세 사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트렁크쪽으로 돌아가더니 웬일인지 배낭을
도로 꺼내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경비원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올라갈 것이지 배낭은 왜 도로 지고
올라가지? 차를 출입구에 바싹 갖다
붙여놓은 것을 보면 곧 다시 나와 차를 탈
모양이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군.
경비원은 그 차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섰다.
집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먼저 배낭
안에 들어 있는 것들부터 모두 꺼내놓았다.
그 배낭들 역시 아까 지고 나갔던 것들과
똑같은 새 것이었는데 그 안에서 꺼내놓은
것들은 의외로 헌 신문 뭉치였다. 세 개의
배낭 안에서 꺼내놓은 신문 뭉치가 수북이
쌓였다. 사팔뜨기 사내가 빈 배낭들을 들고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두
사람은 거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10분쯤 지나 경비원은 세 사내가 다시
그가 차 옆으로 다가서자 트렁크를 열던
서문구가 깜짝 놀라 그것을 도로 쾅 하고
닫았다.
"배낭을 가지고 타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한 다음 그가 먼저 배낭을 들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좌석에다 배낭을 실었다.
경비원은 그들이 탄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서문구가 트렁크 문을 급히
닫는 순간 얼른 보았던 배낭들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트렁크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배낭이 틀림없었다.

서울을 벗어난 차는 계속 북쪽으로
이윽고 강변에 접어들었을 때는 눈부신
햇빛이 강물 위로 막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멀리 댐이 보였을 때 서문구가 갑자기
차를 세우게 했다.
"저 검문소는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어.
저쪽으로 가지 않는 게 좋겠어."
허상무는 차를 오른쪽 샛길로
몰아넣었다. 차가 한 대 통과할 수 있는
비포장 도로가 산기슭을 따라 꼬불꼬불 나
있었다. 인적이 전혀 없는 외진 길이었고,
조금 돌아 들어가자 산에 가려 큰 길
쪽으로부터는 보이지도 않는 숲길이
나타났다. 길이 갑자기 좁아졌기 때문에
차는 거기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차를 겨우 돌릴만한
빈터가 있었다.
어떨까요?"하고 허상무라는 자가 물었다.
사팔뜨기 사내는 잠들어 있었다.
처음 계획은 토막시체를 강물에다
던져넣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밤이라면
몰라도 환한 아침에 여섯 개나 되는 배낭을
강물 속으로 던져넣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차도로는
끊임없이 차들이 오가고 있었고 강기슭에는
숨어서 일을 벌일만한 곳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계획 자체를 포기하고
아무데나 적당한 곳을 빨리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전에 답사라도
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과거에 몇 번 지나친 일이 있어
그것을 믿고 무작정 달려온 게 잘못이었다.
서문구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버리기에는 안성맞춤인 듯 싶었다.
"여기가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허상무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버려서는
안 되고 파묻어야 할 거 아니야?"
"저걸 다 파묻으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연장도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시간을 끌다가 사람들 눈에라도
띄면 오히려 위험해집니다. 나뭇잎으로
적당히 덮어둘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겠는데요. 발견되더라도 누가
갖다버렸는지 알게 뭡니까?"
서문구는 한동안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형님한테 맡기고 우리는 차도에 나가
형님이 잘 알아서 처리해줄 겁니다."
서문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허상무는 차 안에 잠들어 있는 사팔뜨기를
흔들어 깨웠다.
"형님, 좀 일어나세요!"
사팔뜨기 사내는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그는 허상무의 설명, 하품을
하면서 듣고 나더니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여섯 개의 배낭이 차에서 내려졌다.
모양이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한 회사의 제품들이었다.
"수고스럽지만 잘 부탁합니다. 발견되지
않게 깊이 좀 숨겨주십시오."
먼저 그들은 사내를 도와 숲속에다 우선
배낭들을 갖다놓았다. 그리고 차를 몰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팔뜨기 사내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에 몹시 피곤한지
거듭 하품만 하면서 한동안 땅바닥에 앉아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바지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았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거의 30분쯤
지나서였다. 그는 적당한 곳을 물색하기
위해 숲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잡목과 잡초가 빽빽이 들어차서
헤쳐나가기가 힘이 들었다. 숲속은 몹시
무더웠고 그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발견되건 말건 그런 것은 그에게
조금치도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만두고 지고
있던 배낭 한 개를 잡목 사이에다
가지러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중년의 남자 한 사람이 숲길에 나타난
것은 사팔뜨기가 나뭇가지를 꺽어 배낭
무더기를 덮고 있을 때였다. 우두둑 하고
나뭇가지 꺽는 소리에 그 사내는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는 지게를 지고
있었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에 겉늙어버린
듯한 사내였다. 그는 나무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산 하나 너머에는 여섯 가구가
모여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는데 모두가
너무 가난해서 땔감을 직접 산에서
채취하고 있었다. 산간의 외딴 마을이라
연탄을 배달해 주는 곳도 없었다.
사내는 긴장해서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하다가 그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보았다. 언제 와봐도 적막만이
수 없는 곳인데 나뭇가지 꺽어지는 소리가
계속 나고 있으니 사내가 긴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숲을 헤쳐가던 사내는
멈칫하면서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바로 눈
앞에서 한 남자가 나뭇가지를 꺽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덮고 있었다. 사내는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 사팔뜨기가 몸을 돌렸다. 그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가만히 내려놓고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뒤통수로
분명히 인기척이 느껴졌고, 고개를 돌린
순간 사람의 모습 같은 것이 얼핏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꼭 사람인지는 아직 알 수가
지게를 진 사내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러나 조심한다는 것이 썩은 나무를 밟는
바람에 그것이 부러지는 소리가 꽤나 크게
났다.
"누, 누구야?!"
사팔뜨기는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서면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때 수 미터
앞에서 한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낯선 사람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엇다. 낯선 사내가 지게 막대기를 앞으로
쳐드는 것을 보고 사팔뜨기는 냅다
돌멩이를 던졌다. 큼직한 돌멩이가 사내의
어깨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사내의
입에서 "어이쿠!"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사내는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바로 한 다음
나왔다.
"이놈!"
몸을 돌려 도망치는 사팔뜨기의 머리
위로 막대기가 떨어졌다.
사팔뜨기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가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갔다. 낯선 사내는 끝까지
뒤쫓지는 않았다. 얼마쯤 따라가다가
상대방이 혼쭐이 나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멈춰서버렸다.
이윽고 사팔뜨기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게꾼은 발길을 돌려
아까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돌멩이에 맞은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견딜만 했기 때문에
내처 걸어갔다.
마침내 지게꾼 사내는 나뭇가지가 수북이
덮여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미처
사이로 배낭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는 빈
지게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어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들어낼수록 배낭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사내는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다시 나뭇가지를 들어냈다.
놀랍게도 배낭은 모두 여섯 개나 되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사내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한 개를
집어들어 보았다. 묵직한 것이 꽤나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게 뭘까?

한편 사팔뜨기 사내는 몇 번씩이나
쓰러지면서 가까스로 숲속을 빠져나와
차도쪽으로 달려갔다. 달리면서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 중간이 터져 피가 흐르고
느껴지지 않았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팔뜨기 사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엔진 걸어놓고 있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서문구가
날카롭게 말했다. 허상무는 재빨리
운전석으로 뛰어들어 차에 엔진을 걸었다.
서문구도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형님, 왜 그래요?"
허상무가 운전대를 잡은 채 밖을
내다보고 물었다.
"크, 큰일 났어!"
차에 부딪칠 듯 다가서면서 사팔뜨기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이마를 적시고 있는 것을
보고 사내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 무슨 일이에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사내는
무턱대고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데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몽둥이로 때렸어...... 빠, 빨리
도망가! 쫓아오고 있어!"
사내는 빨리 가자고 손을 앞으로 흔들어
보였다.
"누가 때렸다는 겁니까? 누구한테
맞았어요?"
서문구가 화가 나서 물었다. 차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어떤 놈들이 몽둥이로......."
사팔뜨기는 여전히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서문구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지도 않았다. 따라오는 차량도 없었다.
"몇 놈이나 돼요?"
"몰라. 아이구, 죽겠다."
사팔뜨기 사내는 머리 상처를 누르면서
상체를 잔뜩 뒤로 젖혔다.
"그놈들한테 들켰어요?"
서문구는 머리 끝까지 치미는 화를
누르면서 가까스로 물었다.
"나뭇가지로 덮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어.......
다 덮지도 못했어....... 아이구,
머리야......."
차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그 새끼들을
조져버릴까요?"
허상무가 떠보는 소리로 물었다.
몰라도......."
서문구는 화를 못 이겨 어금니를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는 사팔뜨기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도대체 어떤 놈들이에요?! 뭐 하는
놈들이 거기에 나타났어요?!"하고 물었다.
그러나 사팔뜨기는 거기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형님, 대답해 보세요!"
허상무가 옆구리를 치자 그제서야 사내는
상체를 움직였다.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사팔뜨기는 마치 파리를 쫓듯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빨리 병원에
"미치고 환장하겠네!"
서문구가 안전부절 못하는 것을 보고
허상무가 다시 사팔뜨기의 옆구리를
찔렀다.
"혹시 그 새끼들...... 군인 아니에요?"
"그, 그래...... 그런 것 같았어......."
사팔뜨기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 허상무는
자신의 직감력을 더 확인하고 싶었다.
"산악 훈련하는 군인들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유격대원들 같은데...... 총
같은 거 들고 있지 않았어요?"
"그, 그래. 맞아...... 그걸로 내 머리를
때렸어....... 아이구 죽겠다...... 병원에
가려면 아직 멀었어?"
"정말 재수 좋습니다. 유격대원들한테
잡혔으면 뼈도 못 추렸을 텐데 정말 용케
서문구는 도무지 사팔뜨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정말이라면 용케
도망쳐나왔다고 볼 수 있었다.
"유격대원들한테 들켰다면
큰일인데...... 어떡 하지?"
"알게 뭡니까. 배낭만 가지고는 찾아낼
수 없으니까 안심하십시오. 제가 걱정하는
건 그 친구들이 차를 타고 쫓아오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 친구들은 끈질긴 데가
있으니까 끝까지 추격해 올지도 모릅니다.
아무 차나 세워서 집어타고 따라올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문구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 보았다. 그들이 탄
넘나들면서 앞선 차들을 추월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격해 오는 차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지게꾼은 여섯 개의 배낭 가운데 급한
대로 우선 한 개만을 집어 들고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숲속으로 깊숙이
달음질쳐 들어갔다. 숨이 턱에 닿아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됐을 때쯤에야 그는
배낭을 내려놓고 그것을 풀어헤쳐 보았다.
배낭 안에서 제일 먼저 불거져 나온 것은
비닐이었다. 그는 배낭의 양쪽 모서리를
발로 밟은 다음 비닐을 가만히 잡아뽑았다.
비닐부대와 함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빠져나왔다. 부대 안에는 시뻘건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썩은
살펴보던 사내는 그만 "으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가 놀랄만도 한 것이 부대 안에는 사람의
잘린 손과 발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겁에 질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뒤로
허겁지겁 물러난 그는 자신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앉은 서문구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아대는 허상무를 조금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격대원들이
추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에게 차의 속력을 줄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만 뒤를 살펴보곤 했지만
유격대원들이 추격해 오는 것 같지는
지금 워낙 허상무가 차를 빨리 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바짝 따라 붙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조금만 속력을
늦추어도 그들은 급방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커브길이 저만치 보였다. 그들이 탄
승용차는 버스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시외버스 같았는데 그들의 눈에는 그
버스가 너무나 느리게 달리는 것 같았다.
허상무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차는
중앙선을 넘어 왼쪽 차선으로 들어섰다.
그는 커브를 돌기 전에 버스를 추월하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버스를 스쳐갔다. 그리고 막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앞에서
시커먼 트럭이 불쑥 나타났다. 허상무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운전석이 뭉개져
나가면서 차는 버스 앞으로 미끄러져
들었다. 뒤이어 이번에는 버스가 승용차의
옆구리를 밀어붙였다.
승용차는 마치 양철을 우그러뜨려놓은
것처럼 납작하게 짓이겨진 채 길가의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면서 수 미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차들이 급정거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주위를 울렸다.
사람들이 차에서 뛰어내려 강쪽을
내려다보았을 때 승용차의 앞부분은 물
속에 반쯤 처박혀 있었다. 그것은
자동차라고 할 수 없었다. 폐차장에서
압축기로 압축되어 재생을 기다리는
고철덩어리 같았다.
채 한동안 그것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고
차 안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죽었는지
살려달라는 아우성도 들리지 않았고 조그만
움직임 같은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깨진
차창 밖으로 손이 하나 흐물거리며
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살아 있어!"
누군가가 외쳤고,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우르르 밑으로 달려 내려갔다.
사람들은 우선 앞부분이 물에 처박혀
있는 차체를 밖으로 끌어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끙끙거리며 당기자 차체는
조금씩 끌려나왔다.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숫제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뒤엉켜
정도였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밖으로 손을 내민 사람은 뒷자리에
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앞의자
등받이에 밀려 뒷자리에 쳐박혀 있었는데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빨리
손을 쓰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역시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만큼 참혹한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꺼내기 위해 문을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나 문이라는 문은
모두가 우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열리지가 않았다. 깨진 차창을 통해
꺼내려고 해도 차체가 납작하게 우그러져
있어 도무지 사람이 빠져나올 공간이
없었다.
은 전화를 끊었다.
근우는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
"절단기가 있어야겠어."
누군가가 말했지만 거기에 절단기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용접기로 잘라내야 해요."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용접기는 화재
위험이 있어요. 휘발유가 흘러나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담뱃불 꺼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사람들에게 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구경만 하지 말고 연장 가진 거
있으면 가져들 와요! 긴 쇠꼬챙이나
쇠파이프 같은 거 있으면 가져와요! 밧줄도
있으면 가져와요!"
그제서야 구경꾼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2차선 상하행 차선은
모두 막혀 있었다. 하행 차선에서 승용차와
충돌한 트럭은 차도를 가로막은 채
앞부분을 산기슭에 처박고 있었고,
추월하려던 승용차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버스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뒤에서 추돌한 또다른 승용차와 함께
상행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버스를 뒤에서
받은 또다른 승용차는 앞이 우그러지고
전면 유리가 산산조각 났지만 그 차에 혼자
타고 있던 중년 남자는 이마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구! 커브를
도는데 갑자기 앞에 이 차가 나타나지
않아! 피할 새도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구! 당신도 알잖아?! 당신은 분명히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뿌우옇게 먼지를
뒤집어쓴 트럭 운전수가 버스 운전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 그래,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이 치가 내 차를 추월할려고 왼쪽 차선으로
뛰어들었다구."
"세상에 커브길에서 중앙선을
넘어들어오는 놈이 어딨어! 죽을려고
환장했지."
"지금 그런 거 따지게 됐어요?! 자, 빨리
빨리 합시다!"
쇠파이프를 두 개나 들고온 젊은이가
소리쳤다. 밧줄을 가져온 사람은 우그러진
문짝에다 그것을 붙들어매고 있었다.
"그건 저쪽 뒤에다 묶으세요! 이쪽에서
잡아당기면 끌려오지 않게 그쪽에서 몇
몇 사람이 뒤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몇
사람이 문짝에 붙들어맨 밧줄을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벌어진 틈
사이에다 쇠파이프를 끼우고 그것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섬뜩하게 주위를 울렸다. 조금씩
조금씩 벌어지던 문짝이 이윽고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나갔다. 그 바람에
줄을 잡아당기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뒤로
나뒹굴었다. 문은 열렸지만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샌드위치처럼 의자와 의자 사이에
끼어 있어서 좀처럼 쉽게 빠져나오지가
않았다. 그래서 쇠파이프를 끼워
비틀어대자 틈새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손과 옷에 피가 묻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부상자에게 달려들어
커지는 것 같더니 마지막으로 다리가
빠져나올 때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차에서 처음 끌어내어진 사람은 차도
위로 옮겨졌다. 앞자리에 앉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철판과 함께 완전히
납작하게 찌그러져 버렸기 때문에
끌어내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맥을 짚어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 기를 써가며
서둘러 꺼낼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버렸고, 그래서 그들
두 명은 결국 그대로 방치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차도 위로 옮겨진 부상자 역시 그대로
거기에 방치되어 있었다.
길바닥 위에 눕혀진 그는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받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썼지만 막상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
이르러서는 뒤꽁무니들을 빼고 있었다.
시내라면 몰라도 먼 거리를 피투성이
부상자를 싣고 간다는 것이 여러 가지
사정도 있고 해서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사고차와 충돌한 트럭이나
버스 운전사가 먼저 사고 경위야 어떻든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마땅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차 역시 움직일 수가 없는 처지였다.
트럭은 산기슭에 처박혀 있었고 버스는
금방이라도 강쪽으로 굴러떨어질 듯이
앞바퀴 두 개가 허공에 걸려 있었다. 버스
운전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버스 위로
올라가 차를 뒤로 빼보려고 했지만 뒷바퀴
두 개는 헛돌기만 할 뿐이었다.
보다시피 움직일 수가 없어요. 누가 좀 이
사람을 병원까지 싣고 갈 수 없습니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여기서 죽고 맙니다."
버스 운전사가 분노에 차서 큰 소리로
말했지만 누구 한 사람 선뜻 나서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때 멀리서 경찰 순찰차의
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사이렌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조금 후 경광등을 번쩍이며 도착한
순찰차에서 두 명의 경찰관이 내렸다.
"여기다 부상자를 이렇게 버려두면 어떡
합니까?"
경찰관 한 명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책망하고 나서 강쪽을 내려다보았다.
"차 안에 사람이 또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있는데 끌어낼 수가 없어요.
모두 죽었어요."
버스 운전사가 말했다.
"죽은 게 확실해요?"
"맥을 짚어봤는데 뛰지를 않던데요."
"빨리 실어. 내려가보고 올 테니까."
다른 경찰관한테 지시하고 나서 그
경찰관은 강쪽으로 내려갔다.
허우대가 큰 그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교통사고 현장을 하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얼굴빛 하나 찡그리지
않고 우그러진 차 안을 들여다본 그는 피에
젖어 있는 팔 하나를 집어들고 맥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의 팔을
또 집어들고 손목에 손을 갖다댔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뒤로 물러서서
모자를 벗어 땀을 닦은 다음 강물에다 손을
씻었다.
순찰차는 부상자를 싣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차도에 서서 젊은 순경이 물었다.
"죽었어."
허우대가 큰 경장이 아래쪽에서 말했다.
그는 사고차의 번호를 수첩에다 적은 다음
차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무전기로
상황실을 불렀다.

젊은 순경은 한 초라한 사내가 차도
중간에 서서 두손을 흔들어 대는 것을 보고
천천히 차를 세웠다. 경장은 사고현장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남고 혼자서 부상자를
싣고 가던 중이었다.
그는 사이렌을 끄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 저...... 산 속에...... 사, 사람
시체가 있습니다."
초라한 사내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순경은 그 사내가 가리키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일이란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사내의 말이 아무 의미도 없는
헛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지금 바쁘니가 가볼 수가 없어요!"
그는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손발이 잘려나갔어요! 배낭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봤어요!"
사내가 따라오면서 말했다. 순경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고 조금 관심 있는
눈초리를 사내에게 보냈다.
"배낭이 여러 개 있어요! 여섯 개나
사내는 사뭇 울상이 되어 말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뒷자리에 실려 있는
부상자쪽으로 옮겨갔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에요?"
순경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사내는 부상자의 모습과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구요?"
순경이 역정을 내면서 물었다. 그제서야
사내는 순경을 쳐다보면서
"바로 이 사람입니다!"하고 소리쳤다.
순경은 어리둥절했다. 혹시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비키세요!"
순경은 눈을 흘기면서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고 했다.
"바로 이 사람이 그 배낭들을 숨기고
있었다구요! 숨기다가 나한테 들켜서
도망갔다구요! 틀림없이 이 사람이 맞아요!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젊은 순경은 사내의 말을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됐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교통사고예요. 시체가 있는 정확한
위치가 어디예요?"
"바로 저기 저 골짜기입니다. 샛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됩니다."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지금 우선 병원에 가야하니까
저기 샛길 있는 데서 기다리고 있어요.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네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내는 비로소 좀 씩씩하게 대답했다.
사내의 성은 백가였다. 그가 나무 그늘에
앉아 졸고 있을 때 가까이서 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차도쪽을
바라보았다. 두 대의 순찰차가 막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아무 표시도 없는
일반 승용차가 또 한 대 멈춰섰다. 세 대의
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백씨는
긴장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곧장 그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정복
경찰관이 세 명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아까 보았던 그 젊은 순경이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젊은 순경이 사내를 턱으로 가리켰다.
사복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에 시체가 있어요?"
배가 좀 나온 중년 사복이 사내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이리 쭉 들어가면 있습니다."
백씨는 손으로 안쪽을 가리켜보였다.
"가봅시다. 어떻게 해서 시체를 발견하게
됐어요?"
배가 나온 사복이 물었다.
젊은 순경은 차로 돌아가고 네 명의
경찰관들은 사내 뒤를 따라왔다.
"글쎄, 지게를 지고 땔감을 좀 주울까
해서 왔는데......."
있는 사내는 그 상황에서도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말을 골라서 이야기했다.
"여기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거든요. 1년 가야 한두 번 사람을 볼까
말까한데...... 인기척이 나서 가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꺾어서 자꾸만
덮더라구요. 그래서 숨어서 보다가 그
사람한테 들켰지요. 쪼그만
남자였는데...... 그 사람이 돌멩이를
집어던지면서 나를 죽이려고 하기에 나도
지게 작대기로 달려들었지요."
그는 일어났던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한
다음 경찰 순찰차에 실려가던 부상자가
바로 그 사내였다는 말도 덧붙여 했다.
"틀림없어요?"
"네, 틀림없습니다. 그자를 잡아야
합니다."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나중에 가서 다시
한번 확인해 줘야겠소."
배가 나온 사복이 말했다.
이윽고 지게꾼은 꺾어진 나뭇가지가
수북이 덮여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여깁니다."
그는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배낭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경찰관들은 재빨리
나무를 치웠다.
"모두 다섯 개인데요."
안경을 낀 사복이 말했다.
"한 개는 저쪽에 있습니다."
"가서 찾아와요."
지게꾼은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잔뜩 겁에 질려 경찰관들을
둘러보았다. 안경을 낀 사복이 함께 가자고
나서자 그제서야 지게꾼은 배낭을 버렸던
곳으로 걸어갔다.
배가 나온 사복은 정복 경찰관 두 명이
각각 배낭 한 개씩을 들어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비닐부대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 가만히
들여다보던 정복들은 이내 넌더리를 치면서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사람 머리통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정복 한 명은 몸을 돌려 쭈그리고
앉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사복은 담배를 꼬나문 채 비닐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나머지 배낭
안에 들어 있는 것들도 꺼내라고 지시했다.
있는 것을 땅바닥에다 뽑아냈다.
다섯 개의 배낭 안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가 사람의 몸뚱이를 토막낸
것들이었다. 지게꾼과 안경 낀 사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찾느라고 애먹었습니다."
안경은 들고온 비닐부대와 그것을 담았던
빈 배낭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져놓았다.
"이건 너무 지독한데......."
배가 나온 사복이 중얼거리면서 침을
뱉았다. 토막시체는 비닐부대 속에 들어
있어서 악취를 풍기지는 않았다.
"머리통이 두 개인 것으로 보아 두 사람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요. 한
명은 남자이고 다른 한 명은 여자입니다.
보십시오."
구두 끝으로 건드리면서 안경이 말했다.
피에 젖어 있는 두 개의 사람 머리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해
보였다. 그러나 사복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엽기적인
살인사건 현장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아닌 두 사람의 토막시체가
발견되기는 처음이었다.
"잘 확인해봐."
"틀림없습니다. 발이 네 개...... 손이
네 개...... 머리가 두 개...... 두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배가 나온 사복이 지게꾼을 돌아보았다.
"그 사람 외에 또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나요?"
들어오는 샛길 입구에 차가 한 대 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안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남자
같았습니다. 그 뒤에 보니까 그 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가용 승용차였나요?"
"네, 승용차였습니다."
"색깔은? 그리고 어느 회사 차였어요?"
"색깔은 검은 색이었는데...... 어느
회사 차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망치다가 사고를 일으킨
모양인데요."하고 안경이 말했다.
배가 나온 사내는 끄덕였다. 차를 타고
도망치던 범인들 가운데 두 명은 사고로
즉사하고 한 명만 겨우 목숨을 건진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한
불확실한 것 같았다.
"자, 배낭에 도로 모두 담으라고. 그리고
자네들은 여기서 지키고 있어. 이 주위에다
줄을 쳐놓으라고. 앰뷸런스를 보낼 테니까
그때까지 여기를 지키고 있으란 말이야?"
정복 순경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토막시체를 도로 배낭에 담기 시작했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치고는 좀
지독한데요."
숲을 빠져나오면서 안경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범인들이 사고를
당해서......."
아직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려다가 안경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는 두눈과
코 그리고 입뿐이었다. 팔과 어깨 그리고
다리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사내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던 의사가 형사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청진기를 거두면서
말했다.
"위기는 넘긴 것 같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중상이기 때문에 몇 달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겠습니다."
"이야기좀 할 수 있을까요? 좀 급해서
그러는데......."
"의식은 깨어났지만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게 하지는
마십시오."
"물론이죠."
의사가 나가고 나자 형사들은 환자에게
그 환자는 경찰의 부탁으로 일반
중환자실이 아닌 특실에 혼자 들어 있었다.
병실은 경찰에 의해 엄중히 감시되고
있었다.
"신원을 파악할만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게 나왔습니다."
병실을 지키고 있던 형사가 꺼내보인
것은 거액의 자기앞수표였다.
"자그만치 2천5백만 원이나 됩니다.
병원측에서 입원 보증금이 있어야 한다기에
할 수 없이 백만 원은 병원측에 줬습니다.
여기 영수증 있습니다."
배가 나온 사복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허락도 없이 누가
그 돈을 쓰라고 했어? 이 사람 정말
형편없어."
그는 젊은 형사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수표를 검사해 보았다.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가 자그마치
스물네 장이나 되었다.
"이 수표를 추적해봐."
그는 안경에게 수표를 건네주고 나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당신 이름이 뭐야?"
환자는 두눈을 멀뚱히 뜨고 있었다.
초점이 엇갈리는 것이 사팔뜨기였다.
"당신 동행들은 모두 죽었어. 당신 혼자
살아난 거야. 알고 있어?"
사내는 두눈을 꿈벅거렸다.
"당신은 재수가 좋았어. 당신 이름
말해봐. 주소도 말해봐. 집에 연락해야 할
거 아니야."
답답하기만 했다.
"말할 수 있으면서 그러고 있지 마. 당신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당신들
도망치다가 사고난 거 다 알고 있어.
당신을 살인범으로 체포한다. 내 말 들려?"
형사는 환자의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사내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찡그렸다.
환자는 의식이 분명히 깨어 있었다. 그는
형사의 질문을 충분히 알아듣고 있었고
입을 열어 거기에 대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못 알아듣는 척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난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천운이라고
옮겨타게 된 것부터가 하늘이 내려준
운명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운전석 옆인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뒷좌석에는 서문구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서문구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차를
세우게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샛길에서
경운기가 한 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차량 통행이 잠시 멈추었고, 그 틈을
이용해서 서문구가 차에서 내려 앞쪽으로
오더니 사팔뜨기 사내를 뒷좌석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탔던
것이다. 서문구가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지금 생각하니 그는 그때 죽을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백씨 데리고 와."
밖으로 나가더니 즉시 백씨를 데리고 왔다.
사복이 환자에게 백씨를 가리켜 보였다.
"산에서 이 사람 봤지? 토막시체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야. 당신이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한 사람이야. 당신은 지게
작대기에 머리를 얻어맞았다면서? 이래도
모른체할 거야?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해서 다 통하는 게 아니야."
사팔뜨기는 백씨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시체가 도착했습니다."
정복 순경이 안으로 들어와 배불뚝이에게
보고했다.
그들이 영안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앰뷸런스에서 막 두 구의 시체가 내려지고
있었다. 형사들은 시체에 덮여 있는 시트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상해 있었다.
"얼굴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피를 깨끗이
닦아내."
배불뚝이는 얼굴을 돌려 침을 뱉고 나서
"묵사발이 됐어"하고 중얼거렸다.
"두 사람 다 묵사발이 됐어."
사팔뜨기가 누워 있는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이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당신
신원을 알아내는 건 간단해. 지문만
조회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어."
"난 아무것도...... 모, 모릅니다.......
시, 시킨 대로 했어요...... 정말
몰라요......."
사팔뜨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는
뒤덮고 있는 붕대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당신들이 죽인 사람들은 누구야? 두
사람을 죽였던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심부름만 했습니다.
아이구, 머리야......."
"엄살 떨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해! 무슨
심부름을 했다는 거야?"
"배, 배낭을 갖다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지 못하게......."
"배낭 안에는 뭘 담았지?"
"모, 모릅니다. 보여주지 않아서......
보지 말라고 해서...... 그냥 갖다버리기만
했습니다...... 전 정말 심부름만
"거짓말하지 마! 은행에 알아보면 그
수표를 누가 끊었는지 다 알 수 있어. 배낭
속에 뭣이 들었는지 몰랐다구? 그 안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들어 있었어."
사팔뜨기 사내는 눈을 감아버렸다.
"여자하고 남자...... 두 사람이야.
토막을 내서 여섯 개의 배낭 속에 나누어
담았어."
배불뚝이는 두손으로 환자의 양쪽 어깨를
힘주어 눌렀다.
"그래도 모르겠어? 잡아뗀다고 그대로
무사통과할 줄 알아?"
사내는 고통을 못 이겨 신음을 토했다.
"좋아, 다른 건 다 몰라도 당신 자신의
이름은 알고 있겠지. 이름하고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말해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어. 이 자식 지문을 찍어.
순순히 불 놈이 아니야.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없어."
형사 한 명이 병원에서 백지와 인주를
빌려와 양쪽 엄지 손가락의 지문을 찍을
때까지도 환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사고 차 속에 이런 게 들어
있었습니다."
밖으로 막 나가려던 형사들은 안으로
들어선 젊은 형사가 내미는 낡은 가방을
바라보았다. 가방 안에는 각종 연장들이
들어 있었다.
"시체를 토막내는데 사용한 연장들
같습니다."
"그렇군. 어느 좌석에 있었지?"
배가 나온 형사는 가방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 환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눈 떠봐. 이거 당신 거 아니야?"
사내는 사팔뜨기 눈으로 형사가
쳐들어보이는 가방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도로 눈을 감았다.
"아니라고? 좋아!"
배가 나온 형사가 장갑을 끼는 것을 보고
안경 낀 형사가 재빨리 면장갑 낀 손으로
대신 가방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는 조그만 주머니가 하나 달려
있었다. 지퍼를 열자 안에서 면장갑, 동전,
라이터, 지갑 같은 것들이 나왔다. 지갑을
하고 빛났다. 그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 상사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주민등록증이었다. 그것을 받아서 들여다본
형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것으로 환자의 눈을 찔렀다.
"임마, 눈 떠봐! 너 정말 잘 걸렸다!
이래도 잡아뗄 거야?"
사팔뜨기 사내는 자신의 사진이 붙어
있는 주민등록증을 올려다보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체를 토막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미친놈이든가
잔인무도한 전문가가 아니고는 할 수가
없어. 넌 어느 쪽이냐? 넌 전문가 쪽이냐?
내가 볼 때 넌 미친 것 같지 않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가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짐승 같은 신음을
토하면서 몸을 뒤틀고 팔다리를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거품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육갑하는군."
배불뚝이 형사는 냉소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나서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가 모두 토막낸 거지? 그 대가로
2천5백만 원을 받은 거지? 김봉채! 미친
척하지 말고 말해봐!"
그러나 사팔뜨기 사내의 발작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심상치가 않은데요."
형사의 연락을 받고 간호원과 의사가
달려왔다.
"이거 왜 이러죠? 눈까지
뒤집고......이러다 죽는 거 아닙니까?"
의사는 간호원에게 주사를 놓으라고
지시한 다음
"간질인 것 같은데요."하고 중얼거렸다.
"잘 지켜. 자해할지도 모르니까."
배불뚝이와 안경은 고개를 흔들면서
병실을 나왔다.
"토막시체들 말이야. 지문을 모두 찍어서
신원을 조회하라구."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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