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1-3

3학년2반 | 2022.02.04 07:48:53 댓글: 0 조회: 57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503
┌────────────────────────────┐
│ 8.고독한 殺人者 │
└────────────────────────────┘

택시가 정류장을 벗어나 차도로 접어들어 굴러가기 시작 했을
때 동림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뒤에 봉고차가
보였다. 회색 빛깔의 그 봉고차를 조금 전 광장에서 얼핏 본
듯했다. 남대문을 지나갈 때 그는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봉고는 뒤로 멀리 처지고 그 사이에 승용차가 끼어 들어와
있었다. 차도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뒤따르는 차들이
뚜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승용차가 속력을 내어 앞질러 가고
뒤에는 택시가 나타났다. 택시 뒤에 저만치 봉고차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중앙청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을지쪽으로 커브를 돌자 동림이 말했다. 이미 을지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청 쪽으로 가려면 소공동
쪽으로 돌아가 다시 방향을 잡아야 했다. 중년의 운전사는 뒤를
한번 힐끗 돌아본 다음 잠자코 차선을 바꿔 소공동 쪽으로
택시를 몰았다.
왜 그래요?
매독환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동림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매독환자는 비로소 눈치를 챘는지 뒤쪽을
쏘아보더니 몸을 바로했다.
속력을 더 낼 수 없어요?
매독환자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길이 미끄러워서 안 됩니다.
운전사는 그의 말을 한 마디로 묵살하고 같은 속도로 차를
몰아갔다.
제 방향을 잡기 위해 택시가 쓸데없이 한 바퀴 도는 동안
동림은 미행 차가 시청 앞 광장까지는 같은 방향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소공동 쪽으로 접어들어 지나왔던 차도로 다시
나올때까지 방향이 같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뒤따라오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동림은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미행 차는 모두 세 대였다. 앞서 지나쳐갔던 승용차도
다시 보였고 봉고차와 택시도 시야에 들어왔다.
미행자 측으로서는 밤이 깊어 차도에 차량 통행이 뜸해진 것이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음에 걸리는
꺼림칙한 미행이었다. 사실 그들은 미행이 탄로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놈들이 눈치챌 것 같은데 어떡 하죠?
봉고차 안에서 김만주가 무전기로 물었다.
할 수 없지 뭐. 그대로 미행하는 거야.
마반장은 가장 난처할 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처음으로 원망스럽게 생각했다. 문득 이 밤이 불행한 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상대방이 미행을 눈치채면
더이상의 미행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럴 경우에는 마지막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 마지막
수단을 지시받기 위해 마반장은 무전으로 노경감을 불렀다. 이럴
때 코보가 곁에 있어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면서.
지금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미행을 눈치챌 것
같습니다. 아니,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이 이미 누치챘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할까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광화문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 어쩌다가!
코보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할까요?
마반장은 코보의 지시를 재촉했다. 황금의 초생달이 탄 택시는
중앙 청 앞에서 U턴하고 있었다. 이제 아무리 해도 미행을
누치채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연락할 테니까 놓치지 말고 미행을 계속 해!
빨리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알았어!
노경감의 코가 씰룩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대섭은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려 중앙청을 가로막고 있는 광화문을
바라보았다. 광화문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
속에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경감이 홍콩 경시청 수사관들에게 현재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자 그들의 표정은 금방 일그러졌다.
놈들이 미행을 눈치챘다면 더이상의 미행은 무의미합니다.
노경감은 재촉하는 눈길로 주평하를 바라보았다. 체포 여부는
그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 한국 경찰은 어디까지나 홍콩측에
협조하는 입장인 만큼 그쪽의 의사를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안 된다고 하면 굳이 문제의 인물들을 검거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의 미행이 무의미하다면 놈들을 체포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놈들을 붙잡아 배낭이나 철저히 조사해
보죠.
주평하가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경감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전기의 발신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마반장이 나오자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체포해!
코보는 무전기를 내려놓고 다시 주평하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 있는 브로커도 체포해야 하지 않습니까?
동시에 그들 모두를 체포하자는 의견이었다. 실업가처럼 생긴
홍콩 수사관은 거기에 대해 즉각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행 팀의 연락을 받고 나서 체포해도 늦지 않을 텐데요.
그쪽에서 체포했다는 연락이 오면 브로커를 체포하도록 하죠.
노경감은 주평하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세 대의 차는 계속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로 나타나 있었다.
안 되겠어. 내립시다!
매독환자가 뒤를 돌아보면서 동림에게 말했다. 그들이 탄
택시는 서대문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앞질러 가서 가로 막아!
마반장이 최형사에게 소리쳤을 때 택시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택시 안에서 두 사람이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만일 헤어지게 되면 나중에 K호텔에서 만납시다! 그 배낭은
나한테 줘요!
골목으로 뛰어들면서 매독환자가 동림이 지고 있는 배낭을
움켜잡았다. 동림은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안 돼요! 배낭을 운반하는 것은 내 책임이야! 어떠한
경우에도 배낭을 끝까지 사수하라는 지시를 나는 받았어!
동림은 꼬불꼬불 이어진 좁은 골목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러나 매독환자가 배낭을 움켜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뛸 수가 없었다. 그는 당황하고 초조해졌다.
이거 놓으란 말이야!
안 돼! 배낭을 나한테 줘!
매독환자는 악착스럽게 달라붙고 있었다. 동림은 그때까지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몸을 홱 돌리는 것과 동시에
주먹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갈겼다. 갑자기 공격을 받은
매독환자는 그의 주먹에 상당한 힘이 들어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꽤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거기서 지체하며 다투다가는 두
사람 다 위험에 빠질 것이 틀림없다는 자각이 그들의 표정에
똑같이 나타나 있었다. 그와 함께 그들은 이럴 경우에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상대방을 재빨리 때려눕힐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듯했다. 야비한 자일수록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돌변하는 시간이 빠르다. 동림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번득이는 칼날을 보았다. 어느 새 상대는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매독환자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자 그는 어쩔 바를
몰랐다.
배낭을 내놔!
그가 손을 뻗어왔다. 그러나 동림은 그럴수록 배낭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칼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매독환자가 맹렬한 기세로 그를 덮쳐왔다. 날카로운 칼끝이 왼쪽
가슴께를 파고드는 아픔을 느끼면서 동림은 뒤로 쓰러졌다. 그의
뒤에는 담벽이 있었다. 그는 한쪽 어깨를 담벽에 기대면서
쓰러지려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어깨에서 배낭이 벗겨져
나갔다. 동림은 비로소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칼날이
튀어나오는 소리가 철컥하고 났다. 매독환자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서 배낭을 들쳐메고 있었다. 동림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 같은 것은
잊고 있었다. 그런 것을 느끼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몸을 날려
배낭을 움켜잡았다. 매독환자가 몸을 돌렸다. 칼 끝이 바람을
일으키며 얼굴 위를 스쳐가는 순간 동림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웅크렸다가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칼끝이 상대방의 목을
건드렸다. 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칼끝이 가볍게
밀려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얼른 도로 칼 든 손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저항력을 잃고 비틀거리는 매독환자를 보면서
거칠게 배낭을 낚아챘다.
그 다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어둠과 불빛이 교차하는 미로의 사이사이를 정신없이 더듬고
있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그 미로는 정글 속의
미로였다. 그는 맹수처럼 그 미로를 헤쳐 나갔다. 그때의 그는
해운대 바닷가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할 일 없는 선량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적에게 쫓기고 있는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사나운 맹수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배낭을 지고 더구나 상처 입은 몸으로 달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쫓는 자들은 다섯 명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뒤쫓는 발짝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골목을 벗어나면 더욱 위험해진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미 그들이 대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문득 아내와 아들 생각이 났다. 제발 나를 좀
도와다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는 높은 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보통 때 같으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높은
담이었지만 그 자신도 놀랄 정도의 초인적인 힘으로 그는 그
담을 타고 넘어갔다.
미행에 나섰던 형사들은 모두 7명이었다. 상대는 두 명이었기
때문에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뛰어든 골목은 두
갈래로 갈라지지만 결국은 맞은편 차도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형사들은 그 일대의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이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마반장은 봉고차와
승용차를 골목 맞은 편에 있는 차도 쪽으로 돌렸다. 봉고차와
승용차는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놈들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적어도 5분 이상의 여유는 있다고 판단했다. 두 대의 차는 2분
만에 맞은편 차도로 들어섰다. 차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두 패로
갈라져 골목을 지켰다.
맞은편에서는 마반장과 최형사가 황금의 초생달과 가죽점퍼를
쫓았다. 길이 몹시 미끄러웠기 때문에 그들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꽤나 허둥댔다.
조금 후 그들은 가죽점퍼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 손으로 목을 움켜잡고 있었는데, 그 손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목에서는 그르렁그르렁하고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마반장은 가죽점퍼를 최형사에게 맡기고
혼자서 황금의 초생달을 쫓아갔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골목의 중간쯤에서 그는 김형사와 박형사를 만났다.
이쪽으로 오지 않았나?!
보지 못했는데요.
그는 그 골목을 돌아나와 왼쪽 골목으로 뛰어들려고 했는데
거기에는 이미 유형사와 이형사가 와 있었다.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맥빠진 모습으로 흩어졌다.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야! 그대로 지키고 있어!
마반장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씨근거리고 있다가 가죽점퍼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가죽점퍼는 죽어가고 있었다. 최형사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인가 들어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고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놓쳤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어.
마반장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놈이 골목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가죽점퍼의
손에 칼이 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서로 칼부림을 한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가죽점퍼가 스스로 자기 목을 찔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놈들이 도주하다 말고 목숨을 걸고 서로 칼을
휘둘렀다면 그만큼 도주 시간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놈이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숨이 끊어졌는데요!
최형사가 가죽점퍼의 맥을 짚오보고 나서 말했다. 매독환자는
얼어붙은 땅바닥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위의 땅바닥을 흥건히 적셔놓고 있었다. 조금 후 그것은
그대로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다.
마반장은 침을 뱉고 나서 무전기를 꺼냈다. 그리고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무전기에다 대고 소리쳤다.
앰뷸런스를 보내주십시오.! 한 명이 칼에 찔려 죽었읍니다.
그리고 지원병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놈이빠져나가기 전에 이
일대를 포위해야 합니다! 빨리 포위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치를 가르켜준 다음 그는 무전기를 거두었다.
제3의 브로커는 2538호실에 들어가 아로라에게 약속대로 5천
달러를 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이별의 섹스를 즐기고 있는데
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그에게서는 아직 위법사항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경감은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그 방에 억류되었다. 브로커는 거세게 항의했지만
장계명이 홍콩 수사관 신분증을 내보이자 이내 잠잠해졌다.
지원차 달려온 형사 두 명이 홍콩팀과 함께 그 방을 지켰다.
노경감은 그들에게 브로커를 맡긴 다음 미행팀이 기다리고 있는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그는 너무도 화가 나있었기 때문에
서두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사건현장 일대가 완전히
봉쇄된 뒤에야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의 초생달이 연기처럼 사라진 곳을 중심으로 그 일대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칼에 찔려죽은 가죽점퍼의 시체는 앰뷸런스에 실려 있었다.
경감이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코보는 앰뷸런스 안으로 들어가 시트를 젖히고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시체는 보기에 끔찍할 정도로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목을 찔린 게 치명적인 것 같습니다.
마반장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코보는 화난 표정으로
시트를 덮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반장이
재빨리 거기에다 라이터 불을 붙여주었다.
놈은 왜 이 사람을 죽였을까?
물건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요? 물건을 서로 차지하려고
말입니다.
배낭은 찾지 못했나?
찾지 못했습니다. 황금의 초생달이 가지고간 게 분명합니다.
코보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피우던 담배를 차바닥에 버린
다음 그것을 구두 끝으로 밟았다.
그놈이 빠져나가지 못한 게 분명하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거 아니야?
모두 잠들어 있을 텐데 정초부터 집수색을 한다는 게 너무
실례되는 것 같아서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렸다가.......
날이 샐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지금 당장 수색해!
노경감은 노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차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지난 시간에 느닷없이 시민들의 집을 방문하여 집안을
수색한다는 것은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시민들의 항의를 면할 수 없는
월간행위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경찰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
가리고 저런 것 가리고 있을 처지가 못되었다.
상대는 살인범이었다. 마약 사범인지는 아직 증거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칼로 사람을
살해한 살인범인 것만은 틀림없다. 흉악한 살인범을 체포하기
위해 집집을 뒤지는데 대해 시민들은 불평을 늘어 놓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 노경감의
생각이었다.
곧 4명이 한 조가 되어 우선 골목에 면한 집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개짖는 소리가 시끄럽게 골목 안을 울리면서
집집에 불이 켜졌다.
그 집에는 젊은 부인과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 큰 집안에 단
두 사람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동림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더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된 그기 마지막 수단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뛰어들었던 집 안에 만일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집 안에는 개도 한마리 없었다. 그것 역시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담을 뛰어넘어 정원에 굴러 떨어졌을 때 그는 그곳에
그대로 웅크리고 있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날이 새려면 아직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상처 입은 몸으로 아무래도 밤새도록 추위를
견뎌낼 것 같지가 않았다. 칼에 찔린 가슴의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가지 못해 자신이 의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이유
말고도 만일 자신을 미행해 온 자들이 경찰이라면 십중팔구는
이집 저집을 방문하여 수색을 벌일 텐데 그럴 경우 정원에
웅크리고 있다가는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 뻔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다음 행동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추적자들이 경찰일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약을
탈취하려는 자들이라면 저토록 요란스러운 추적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골목에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발짝소리가 더
불어나고 있는 것 같았고, 호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
것은 경찰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는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현관은 잠겨 있었다. 그 집은
석조로 된 이층 양옥집이었다. 집 뒤로 돌아가자 조그마한 문이
있었다. 그 문 역시 잠겨 있었다. 문틈으로 칼 끝을 밀어 넣고
자물쇠가 걸린 부분을 더듬어 그것을 밀어넣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몇번 시도한 끝에 간신히 그것이 밀려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손잡이를 비틀자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집안은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다음 라이터불을 켰다가 도로 얼른 꺼버렸다.
그곳은 주방이었다. 그는 거실 쪽으로 더듬어 나갔다. 어둠에
눈이 익자 실내가 어슴프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벽난로가
보였고, 난로 안에는 채 사그라지지 않은 불꽃이 남아 있었다.
그 불꽃때문에 실내가 좀 더 잘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동안 귀를 기울이며 거실 한가운데 가만히 서있었다.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풀리면서 그는 멍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그는 어둠 속에 멀거니 서있었다.
그것은 조그맣게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같았다.
피아노 소리였는데 밤의 속삭임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방 안에서 연기처럼
스며나오고 있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그때까지 자지 않고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몸은 긴장으로
다시 굳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그의 얼어붙은 가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배낭을 내려놓은 다음 벽난로 가에 넣여 있는 소파에
가만히 몸을 묻었다. 그것은 상체가 완전히 파묻히는 품위 있는
가죽소파였다. 느낌만으로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파
하나만 보더라도 부유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벽난로의 따뜻함이 그를 부드럽게 애부하기 시작했다.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면서 그는 몽롱한 의식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그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방 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밀리는 것을 느끼면서 잠들면 안
된다고 수없이 타일렀지만 그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깜짝 놀라 눈을 뜬 것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서였다. 깊은
정적을 단번에 휘저어 놓으면서 그것은 굉장히 크게 실내를
울렸다.
넓은 거실 가운데에 응접세트가 놓여 있었는데 전화벨 소리는
거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동림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카피트를 더듬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들고 소파에서
물러났다. 그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벽난로 가에 몸을 숨겼을
때 방문이 열렸다. 방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거실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구석구석을 밝힐 만큼 밝은 불빛은
아니었다.
방 안에서 잠옷을 걸친 여인이 나왔다. 그녀의 손이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았다. 응접세트 옆에 놓여 있는
스탠드에 불이 들어왔다. 실내가 더욱 밝아졌다.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등장으로 거실에는 갑자기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응접세트 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머...... 어디서 전화거시는 거예요?......
뉴욕이요?...... 아직도 거기 계세요?......
선 채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던 그녀는 천천히 소파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동림의 눈에는 그녀의 옆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아름답고 교양있는 목소리로 그녀는 전화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럼 언제 오시는 거예요?......빨리 오세요......보고
싶어요......준이는 자고 있어요......아뇨. 음악 듣고
있었어요......잠이 오지 않아요......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아, 그렇군요......거긴 아직 새해가 안
됐겠네요......여긴 지금 새벽 1시 35분이에요......네? 잘
안들려요......알아서 사오세요......그런 건 집에도 많은데요
뭐......아이 그런 생각 마시고 몸이나 조심하세요......참,
숙자가 나갔어요......그 애는 오래 있을 애가
아니었어요......둘이만 있으니까 무서워요......네,
알았어요......그렇잖아도 부탁해
놨어요......몸조심하세요......사랑해요......보고
싶어요.......
여인은 달콤하고 정감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실내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동림은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벽난로는 그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의 모습은 눈에 띌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돌리다가
멈칫했다. 낯선 배낭이 한개 거실 가운데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어붙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것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실을 휘둘러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못박히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어머! 하는 낮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미처 소리도 못
지른 채 그 자리에 서서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조용히!
동림은 앞으로 나서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댔다. 여인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보고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조용히 해! 떠들면 안 돼!
동림은 다시 한번 주의를 주면서 그녀 쪽으로 서너 걸음
접근했다. 그의 왼쪽 가슴은 피에 젖어 있었고, 그것이 그의
몰골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잇었고, 두 눈은 안경 너머에서 이상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방 안으로 뛰어들면서 그녀는
문을 닫았다. 너무 급하게 문을 닫는 바람에 그녀의 잠옷 자락이
문 사이에 끼었다. 뒤쫓아간 동림은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안에서는 여인이 두 손으로 문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필사적이었다. 문 사이에 옷이
끼이는 바람에 문은 잠기지 않았고, 그것이 동림한테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남자 쪽이 힘이 더
우세했다. 문이 열리면서 여인의 옷자락이 북 소리를 내면서
찢어졌다.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칼을 디밀자 그녀는 문에서
손을 놓았다. 자고 있던 아이가 놀라 깨어 울기 시작했다.
찢어진 옷이 여인의 허리에 걸려 있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그것은 더 밑으로 흘러내려 엉덩이깨에 걸렸다. 잠옷 안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눈처럼 흰 살결에 그는 잠깐 동안
눈이 부셨다. 풍만한 젖가슴이 눈 앞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
그가 갑자기 칼을 들이대며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흘러내린
옷을 미처 주워올리지 못한 채 침대 쪽으로 밀려갔다. 그 바람에
엉덩이에 걸려 있던 옷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복부
아래의 그늘진 음부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이 숨을 데가 바로
저기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 들어가 숨으면 제 아무리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경찰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마침내 침대 위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젖가슴을 다른 한손으로는 음부를
가렸다. 동림이 칼 끝으로 가슴을 가린 손을 밀어 내자 그녀의
손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은 공포에 얼어붙어 유난히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칼 끝이 젖꼭지를 건드렸다. 그녀는
더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칼 끝이 젖꼭지를 건드릴 때마다
흑흑하고 숨을 들이키면서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나이는 아직 서른이 안 된 듯 아주 젊어 보였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렇게 큰 저택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시키는 대로 조용히 해주면 해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않고 떠들면 이걸 잘라버릴 거야. 알았어?
여인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림은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 또래의 어린
남자 아이로 몹시 연약해 보였다. 아이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낯선 침입자를 쳐다보며 울고 있었다.
울지 마. 울면 안 돼.
동림이 위협조로 말하자 아이는 울음을 그치면서 제 엄마의
품에 가서 안겼다.
울지 않게 아이를 달래요.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게 잘
말해 줘요.
여인은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입을
삐쭉거리고 있는 아이를 꼭 끌어안더니 동림이 시킨 대로 달래기
시작했다. 나체로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고혹적일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거기에는 어떻게든 자식을
보호하려는 모성의 본능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속삭이는
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저 아저씨는 좋은 아저씨야. 엄마하고 잘
아는 사람이니까 무서워하지 마.
비로소 아이의 얼굴에서 두려운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는
크고 맑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그
표정 속에는 어린 아이 특유의 호기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아이는 답답한 듯 엄마의 품에서 빠져나와 낯선 침입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동림이 칼을 거두고 미소를 보내자 아이의
미소가 떠올랐다. 여인은 불안한 눈길로 침입자와 어린
아들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교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의 생명을 보호하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들어.
동림은 여인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자식에 대한 모성의
보호본능이란 것이 극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복숨까지도 서슴없이
던질 수 있을 정도로 맹목적이란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리 와봐. 네 이름이 뭐지?
아이를 손짓해 부르자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를 나한테 보내요.
그는 여인에게만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어쩔줄 모르며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결심한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자, 아저씨한테 가봐. 아저씨가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대.
무서워하지 말고 가봐. 좋은 아저씨야.
아이는 쭈삣거리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동림은 벽쪽에 한개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아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아이가 다가왔다. 동림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름이 뭐지?
준이.......
아이가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말했다.
준이 몇 살이지?
아이는 손가락 세개를 펴보였다.
아, 세 살...... 우리 인하하고 동갑이구나.
그렇게 말해놓고 그는 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당황해서 시선을 거두는 것이 보였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
싶었지만 이미 뱉어낸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내친 김에
그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나한테도 준이와 동갑나기인 아들이 하나 있지요.
늦게 아들을 보셨군요. 외아들인가요?
여인의 또렷한 목소리에 동림은 적잖게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무서움에 떨고 있던 그녀가 어느 새 침착을 되찾고
말을 걸어오기까지 한 것이다. 여인의 그러한 변화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가 빈틈을 노리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려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칼에 찔린 왼쪽 가슴과 어께부위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피를 많이 흘리셨군요. 치료를 빨리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다시 빈 틈을 노리는 말을 하고 있다고 동림은
생각했다.
누가 나를 치료해 주겠오. 난 지금 병원에 갈수 없어요.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개짖는 소리도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여인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제가 치료해 드릴까요? 소독 정도는 제가 해드릴 수가
있어요. 붕대도 있어요.
그녀는 시트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깨는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다.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퉁명스럽게
난 당신의 치료를 받아야 할 입장이 아니오. 하고 말했다.
아이는 그때까지 그 앞에 서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아이를 안아올려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여인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구나. 아빠 이름이 뭐지?
아이는 힘을 얻은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했다.
김중우예요.
엄마 이름은?
홍......일란......이에요.
아이는 엄마의 이름을 말할 때는 얼른 생각이 안 나는지 좀
더듬거렸다.
똑똑하구나.
동림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잘 알아서 행동
하시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아이한테만은 손을 대지 마세요.
난 강도가 아니오.
알고 있어요.
어떻게 알았지요.
상처를 입고 더이상 도망칠 수가 없어 숨어드신 거 아니예요?
경찰에 쫓기고 있는 분이란 걸 알았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난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된 거요. 담배를 피워도 되겠오?
네, 피우세요.
그는 긴장감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아이를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이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림은 문득 그때까지 자신이 구두를 신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민망한 표정으로 얼른 구두를 벗었다.
날이 새면 난 나갈 거요. 그때까지 좀 실례합시다.
홍일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은 자리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여인이 그를 쳐다보았다. 동림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다시 칼을 꺼냈다.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내가 여기에 있다는 말하지 말아요.
그의 말은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여인은
몸을 떨며 다시 끄덕였다. 초인종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잠옷 있으면 내놓으시오. 빨리!
여인은 장롱 속에서 남자용 가운을 꺼냈다.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입은 것인 듯 고급 원단으로 만든 짙은 자주색
가운이었다.
나가봐요! 의심받지 않게 행동해야 해요.
동림은 가운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여인은 급히 옷을 입고 나서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걱정스러운
듯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울듯한 표정으로 엄마의 스커트
자락을 움켜잡았다.
데리고 나가면 안되나요? 약속은 지키겠어요.
안 돼! 아이는 나한테 맡겨요! 아이가 울지 않게 달래놓고
나가요!
그 동안에도 초인종 소리는 계속 집 안을 울려대고 있었다.
여인이 아이를 달래는 동안 동림은 재빨리 옷을 벗고 가운을
걸쳤다. 벗어놓은 옷과 구두, 그리고 배낭 같은 것들은 침대
밑으로 쑤셔넣었다. 안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그는 욕실에
들어가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고 머리에 빗질을 했다. 아이는
용케 울지 않고 동림의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욕실에서 나온 그는 아이가 안심할 수 있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준이 참 착하구나.
아저씨, 여기서 잘 거야?
응, 준이하고 잘거야. 아저씨라고 하지 말고 아빠라고 불러.
알았지?
아이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이의
다음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빠 아니야.
거실로 나간 홍일란은 벽에 걸려 있는 인터폰에다 대고
방문자의 신원을 물었다.
대문은 자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안에서 스위치만 누르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스위치를 눌렀다.
잠시 후 마당을 가로질러오는 발짝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오더니 현관 문을 거칠게 두드려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집안을 울렸다.
홍일란은 안방 쪽을 쳐다보았다.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
사람이 방 안에서 아이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녀는 오직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눈에 비치 그는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정말로
아이에게 해를 가할 인물로 보였다.
그에게는 흉포한 빛이 없으면서도 어딘가 무서운 일면이 있어
보였다. 바로 그 점에 그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집안을 울렸다. 그녀는
마침내 현관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이 그녀에게 거수경례를 보냈다. 그는
눈을 허옇게 뒤집어 쓰고 있었고, 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그의 뒤로 몇 사람의 얼굴이 더 보였다. 그들은 거칠게 현관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 찬 바람도 들어왔다.
살인범이 이 부근에서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있습니다! 협조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 일 없었습니까?
사복 차림의 형사가 앞으로 나가면서 물었다.
아뇨. 아무 일 없는데요.
집안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저기...... 그이하고.......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동림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자다가
일어난 듯 가운차림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안경은 끼고 있지
않았다.
여보, 무슨 일이야?
그는 조금 떨어져서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 주인 되십니까?
형사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형사가 용건을 이야기하자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런 일이라면 협조해 드려야지요. 추운데 수고
많으십니다. 얼마든지 조사하십시오. 혹시 몰래 들어와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보, 이분들한테 따끈한 커피나 한잔씩
대접해 드리지.
아,아닙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좀
살펴보겠습니다!
여보, 난로에 불이나 좀 피우지.
홍일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동림을 쳐다보았지만 그것은
경찰이 눈치채기에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동림은 아이가 엉뚱한 말을 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입을 열지 않고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경찰이 여기저기를 들여다보는 동안 홍일란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동림은 아이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아 그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가 워낙 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경찰은 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예의바른 언행에 더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대충 집안을 둘러본 다음 이내
철수했다.
자, 이제 엄마한테 가도 좋아.
동림은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
가서 안겼다.
잘 해줘서 고마와요.
그는 진정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아이의 엄마도
그를 위해 잘 참아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인은 아까보다 더욱 겁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문제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 놓고
있었다. 동림은 그쪽으로 다가가 그녀가 놀라지 않게 소파에
가만히 앉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런 다음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기를 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아빠행세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궁지에 몰리니까
자연 그렇게 되더군요.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동림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커피 한잔 타드릴까요?
그가 멍하니 쳐다보자 그녀는 일어서서 아기를 소파에
앉혀놓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동림은 문득 벽난로 위에 놓여 있는 사진 액자에 눈이 갔다.
그는 가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끼었다.
그것은 초로의 신사가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컬러 사진으로
백발이 섞인 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에는 중후하고 세련된
멋이 깃들어 있었다. 나이로 보아서는 홍일란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 같았다. 왼쪽 가슴께가 욱신거려왔다. 그는 상처를
누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데 여인이 찻잔을 날라왔다. 쟁반 위에는
두개의 잔이 놓여 있었다.
위스키를 한 방울 탔어요.
다른 한잔은 자기 앞에 놓는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거기에다 약을 타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마시고
싶었다.
안심하고 드세요.
그녀가 눈치를 채고 말했다. 그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위스키를 탄 커피가 입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 그는 가슴
속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축축히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아기가 잠들었어요.
그녀는 일일이 그의 허락을 받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끄덕이자 그녀는 아이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동림은 그녀가 만일 방안에서 문을 닫아걸면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일지 않았다. 웬지 그는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러대도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놀라운
변화였고, 그는 왜 자신이 갑자기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걱정과는 달리 문은 닫히지도 않았고, 여인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부인은 쇼팽을 좋아하나 보군요.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실에는 쇼팽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 소리는 방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이윽고
호의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네, 좋아해요. 저 곡을 좋아하세요?
집 사람이 자주 듣는 곡이지요.
문득 아내와 아들을 영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가이
들었고,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은 참담한 모습으로 다시
일그러졌다.
정말로 사람을 죽였나요?
여인이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동림은
벽난로애서 벌겋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러자 어쩌면 그 매독환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독환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다음에 대해서는 그는 정신없이 도망만
쳤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나도 칼을
빼들었는데......아마 내 칼에 목을 찔린 것 같아요. 나는
그대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죽으면 안 되는데.......
그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죽으면 어떡 하죠?
그것은 그녀가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었으면 큰 일이지요. 정말 큰 일이지요.
그는 중얼거리다 말고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손으로 칼에 찔린
가슴을 눌렀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인이 결심한 듯 일어서며 말했다.
상처가 깊은가 봐요.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괜찮아요.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약품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옷을 벗으라고 말했을
때 동림은 갑자기 기가 꺽인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고통때문에 팔을 움직이기가 좀 불편했지만 그녀의 도움으로
그는 웃도리를 모두 벗을 수가 있었다. 낯선 여인 앞에 그것도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자신이 위협을 가한 여인 앞에
벌거벗은 상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그는 쑥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여인이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그녀의
움직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상처는 그다지 깊은 것 같지 않았다. 피를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상처는 가슴 위 어깨 가까이에 나있었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만 더 아래를 찔렸다면 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피는 멎어 있었다. 그녀는 상처에 머큐롬을 바른 다음 가제로
거기를 덮고 나서 그것이 떨어지지 않게 거기에다 반창고를
붙였다. 묵묵히, 그리고 정성들여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동림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자, 됐어요. 아침에 병원에 빨리 가면 될 거예요.
마치 잘 아는 사람한테 말하듯 그녀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고맙소.
그는 생각과는 달리 볼멘 소리로 말하고 나서 옷을 입었다.
그녀가 그의 옷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부인은 왜 나한테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거죠?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인은 그에게 적의에 찬 눈길을 던졌다. 그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호의가 아니예요.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치료를 해준 것
뿐이예요.
내가 부인한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데요.
이미 해를 입고 있어요.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건 별개
문제예요.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당돌하게 말했다.
그가 볼 때 그녀는 매우 침착하게 사태에 대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질로 붙잡혀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는데도
불구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에게 코피를
대접하고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등 친절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ㅟ협을 둔화시키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그가 처음 집 안에 들어섰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더욱 북돋기라도 하려는 듯
여인은 술까지 내놓았다. 동림은 그녀에게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따라주는 술잔을 집어들었다.
그녀가 내놓은 술은 향내가 짙은 나폴레옹 코냑이었다. 동림은
혀 끝으로 액체를 건드리면서 향내를 깊이 들이마셨다.
향내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주인 역시 똑같은 술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마시지 않고 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 앉아 있다가 날이 새는 대로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자시오.
괜찮아요.
그녀는 그럴 수는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동림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누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그는 처음 구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회에 나가나요?
카톨릭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자신만 믿고 있나요?
그렇지도 않아요.
그는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날이 샌다해도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거예요. 경찰이
그렇게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거예요.
알고 있어요.
자수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녀가 드디어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집에 가야해요. 집에 가지 않으면 안 돼요.
그는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고는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날이 새면 그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지극히 심각하고 유동적인 상황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는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그녀가 또 권하는 것을 거절했다.
더이상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벽난로
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조금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다가 한참만에야 아빠예요. 라고 말했다.
아빠라니요? 부친이라는 말인가요?
그 물음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이내
냉담하게 변했다.
아이 아빠예요.
아, 준이 아빠군요.
그는 끄덕이다가
두 분이 나이 차이가 많은가 보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거기에 대해 그녀는 더이상 대꾸하려들지 않았다. 떳떳이
내놓을만한 관계가 못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생아를
낳아 기르고 있는 처지였다.
나도 내 아내하고는 나이 차이가 많지요.
그 말에 호기심을 느꼈던지 그녀는 즉시 반을을 보여왔다.
몇 살 차이인가요?
열세 살 차이입니다.
부인은 지금 몇 살인가요?
스물 여덟입니다. 이제 새해가 됐으니 스물 아홉이군요.
부인을 몹시 사랑하시나 보지요?
그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른거리는 불빛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보였다.
지금 이 집에는 당신하고 아이 둘뿐인가요?
네, 가정부가 있었는데 나갔어요.
준이 아빠는 어디 계시는가요?
그는 벽난로 위의 사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외국에 나가셨어요.
세 식구가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크군요.
네, 너무 커요.
나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바다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서.......
그러면 댁이 서울이 아니겠군요. 인천에 댁이 있나요?
아뇨.
그는 부산 해운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홍일란은 침착을 되찾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침입자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경찰에 쫓기고 있는
사람치고는 인품이 선량해 보였고 그녀에게 가능한한 예의를
갖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잔인무도한 흉악범은
아닌 것 같았다. 흉악범이라면 그녀를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어요?
물어보십시오.
사정을 알고 싶어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쫓기게
되셨는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아주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건에 휩쓸렸다고 말이요. 나는 약점을 잡혔고......그래서
협박을 받았지요. 우리 가정은 그 바람에 풍지박산이 됐고
아내는 유산까지 했어요. 정말 이건 내가 바랐던 게 아니예요.
내가 바랐던 건 이렇게 큰 집을 갖는 것도 아니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어요. 난 직업도 없어요. 아내가 벌이를 하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아이나 보곤 했어요. 나는 그 생활이
즐거웠어요.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그 행복을
오래오래 지키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그는 입을 꼭 다물고 사그라지는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인이 쇠꼬챙이로 불 속을 헤집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 위에다 나무토막을 올려놓았다.
음울하게 잠겨 있던 사나이의 얼굴이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은
것처럼 빨갛게 피어올랐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그것은 불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부인은 지금 나한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녀가 가톨릭 신자로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파에 깊숙이 상체를 묻고 나서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쓰레기처럼
길바닥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절망적인 기분이 오히려 그를 편안하고 달콤한 피로감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잠들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까풀은 자꾸만 무겁게 내리덮이곤 했다. 그는
가끔씩 눈을 뜨고 충혈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다시 눈을 감고는 했다. 잠든사이에 여인이 경찰에
연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돼도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점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윽고 그의 머리가 옆으로 조금 기울어지고 그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홍일란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것은 상대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모르는데서 오는 혼란이었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해서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고 지금은
어처구니없게도 잠들어 있는 낯선 사내는 여전히 그녀에게는
두렵고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비애에 찬 표정과 고독해 보이는 잠든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웬지 섣부른 행동을 하기가 주저스러웠다. 일찌기 그녀는
그렇게 비극적인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표정 속에서 그녀는
조그마한 악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그녀는 짙은 그늘 속에 가려진 선량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행동을 취하기가 그녀는 심히
망설여졌다. 길을 잃고 헤매던 한 마리의 상처입은 양이 나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경찰을 부른단 말인가.
그녀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선 채로 그를 한참 동안 내려다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비극적인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당신은 잠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감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호해줄 자신이 없어요. 살인범을 숨겨준다는 것은
위법이에요. 당신도 그것은 알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왜 하필
우리 집에 들어왔나요.
그녀는 마침내 전화기 앞에서 멈춰 섰다. 자꾸만 사내 쪽으로
시선이 갔지만 그는 소파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다이얼을 누른 다음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바다가 보이는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집이나 지키면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중년의 이 사나이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을까.
꿈속에서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도 집에
가고 싶어했으니까 아마 집에서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있는 꿈을
꾸고 있겠지.
홍일란은 평소에도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갈등은
자신이 유부남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계는 이제 사생아라는 존재의 성장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상대는 아버지뻘 나이나 되는 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재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부자였다. 무역, 건축, 운송,
레저 등에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다. 그와의
관계는 그녀가 그의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의
2호로서 집 안에 들어앉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그의
애첩으로서 그녀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향유할 수가
있었다. 지금의 집도 그가 사준 것이었고, 그녀는 그녀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녀의 미래 역시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그녀가 품어왔던 꿈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을 손에 쥔 듯한 지금 그녀는 가슴이 텅빈 것
같은 공허로움을 느끼고 있었고 심한 회의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진정한 꿈과 희망이 이것이 아니었음을 확연히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매력도 느낄 수가 없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회의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귀여운 아들은 호적에 올리지도 못한 채
사생아로 자라고 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숨어지내야만 하는 2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나는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하루에도 몇번씩 들곤 했다.
그런데 그녀를 보다 괴롭힌 것은 신앙에 위배되는 생활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간음하지 말라--그 십계명의 하나를 그녀는
분명히 범하고 있었고,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성당에 나가
기도로 참회하곤 했다. 참회가 절실할수록 고통 또한 커갔다.
참회한다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상처입은 양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회의와 갈등 속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공포때문에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대방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생각을 달리 먹게 되었다. 살인범이라면 악의
덩어리일줄 알았는데 그에게서는 악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해볼수록 어떻게 이런 사람이 사람을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말은 진실인 것 같았다.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꺼내놓은 모든 말들에는 웬지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그에 대한
공포는 차츰 연민의 정으로 바뀌어갔고, 그녀는 이 낯선
침입자야말로 평소에 겪고 있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나에게 내려보낸
시련이자 시험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자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신의 뜻에 거역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는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신의 뜻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을 찾은 듯 싶었다.
노경감은 새벽 4시까지 현장에 남아서 수사진을 지휘했다.
수색이 거의 끝난 것은 4시경이었는데 결과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괜히 헛수고했군. 놈은 이미 날아버렸는데 말이야.
코보의 불평에 마반장은 어쩔줄 몰라 하면서 좀처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놈은 분명히 이 안에 있습니다. 놈은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없지 않나. 이 안에 있다면 지금쯤 체포되어야 하지
않나.
네, 그렇긴 합니다만.......놈은 틀림없이 이 안에
있습니다.
이 안에 있다면 연기처럼 사라졌을 리가 없지 않나.
노경감은 딱하다는 듯이 부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마반장
못지 않게 황금의 초생달을 놓친데 대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지만 신년 연휴에 쉬지도 못한 채 밤새 추위에 떨며
고생하는 부하들이 측은하게 생각되어 속으로 감정을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철수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렇다면 결국 지금까지의 수색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놈을 보고도 못 알아봤을 수도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아침 10시까지 기다렸다가 철수하도록 해.
10시까지 수색을 계속하겠습니다. 10시가 지나면 모두
철수하겠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브로커를 심문하러 가야겠어.
H호텔로 돌아간 노경감은 호텔 방에서 제3의 브로커와
아로라을 분리 심문했다.
아로라는 조직의 일원이 아닌,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돈을
받고 배낭을 운반했을 분인 좀 바보 같은 데가 있는 아가씨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렇다하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코보는 그녀에게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녀를 오래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만
협조라는 명분하에 그녀의 자발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한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아 주었다. 나중에는 훌쩍훌쩍 울기까지 하면서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했다.
그녀는 헤로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은 듣지도 못했고 배낭 속에는 하얀 분말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제 더이상 취조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브로커를 심문하는 데는 그녀의 증언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를
계속 붙잡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의 브로커는 한국 경찰이 명확한 증거물도 없이 단지 홍콩
경시청의 정보제공만으로 심증을 굳힌 채 자신의 자백을
받아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여유있게
시치미를 떼고 나왔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헤로인이라니요?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여주십시오. 구경이나 좀 하게
말입니다.
그는 교활하게 눈웃음까지 치며 수사관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경찰은 가죽점퍼의 사나이가 황금의 초생달의 손에 살해
되었으며, 황금의 초생달은 배낭을 가지고 도주했다는 등의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 그대신 브로커의 자백을 빨리 받아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제3의 브로커,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어. 황금의 초생달도
가죽점퍼를 입은 그 팽이라는 자도 모두 체포됐어. 그들은
쓸데없이 고집부리지 않고 모든 걸 순순히 자백했는데 당신은 왜
시치미를 떼는 거지?
브로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이 뭘 자백했다는 거지요? 뭘 자백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그는 중국말로만 말했고, 그것을 중간에서 장계명이 통역해
주었다.
당신은 아로라를 이용해서 헤로인 2킬로를 한국에 들여왔어.
배낭 속에 넣어 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그것은 황금의
초생달에게 넘겨졌어. 황금의 초생달은 당신한테서 열쇠를 받아
서울역에 있는 물품보관함 23번에서 그 청색 배낭을 찾아가지고
가다가 우리한테 체포된 거야. 배낭 속에 헤로인이 들어
있었어.
배낭 속에 헤로인이 들어 있었다구요? 그건 정말로 상상도
못한 일인데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배낭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 배낭 속에는 틀림없이 도자기가 들어
있었는데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브로커는 점잖게 그러면서도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궁지에 몰린 노경감은 얼굴이 붉어졌다. 배낭을 보자는데는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코 앞에 들이댈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으련만 그럴 수가 없으니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조금 기다려요. 지금 감식반에서 조사중이니까 조사가 끝나는
대로 보여주겠어.
한국 경찰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는 브로커는 여유있게
담배까지 피우면서 침묵을 지켰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헤로인이
들어 있다는 청색 배낭을 보고난 후에 대답하겠다는 투였다.
기다리다 못해 홍콩 경시청의 주평하가 노경감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은 그 배낭을 손에 넣지 못했어. 헤로인을 찾아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어.
아무 증거도 없이 외국인을 이렇게 체포할 수 있는 겁니까?
당장 내보내 주십시오! 나가겠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것을 장계명이 제지했다.
어딜 가는 거야. 아직 나가는 것은 일러. 그렇게 쉽게 여길
빠져나갈 수는 없어. 우리는 네놈을 따라 홍콩에서 여기까지
쫓아왔어. 까불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뒷덜미를 낚아채자 브로커는 쓰러질듯 비틀거리다가 의자에
도로 앉았다.
팽은 살해됐어. 황금의 초생달이 칼로 찔러 죽였어.
그러나 브로커는 그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배낭은 황금의 초생달이 가지고 달아났어. 하고
노경감이 말했다.
브로커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
마음대로 지껄여라. 그래봐야 헛수고일 뿐이라고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이래도 믿지 않을 텐가?
코보는 비닐봉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브로커에게 던졌다.
그것은 브로커의 가슴에 부딪쳤다가 밑으로 떨어졌다.
꺼내봐. 꺼내보란 말이야.
홍콩인 형사가 소리쳤다.
브로커는 비닐봉지를 벗겨냈다. 그것은 팽의 가죽점퍼였다.
점퍼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어붙어 있던 피가 실내의
따뜻한 온도에 녹으면서 비린내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브로커의 표정이 금방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자기
옷에 피가 묻을까봐 그것을 카피트 바닥에다 던졌다.
그게 누구 옷이란 건 말 안해도 알겠지?
장계명이 물었다. 브로커는 경직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시체를 보고 싶다면 보여줄 수도 있어. 칼에 목이 찔려
즉사했어.
브로커의 얼굴 위로 짧은 경련이 스쳐 지나갔다.
헤로인을 놓고 무자비하게 살륙전까지 벌인 거야. 그렇지
않은가?
브로커는 대꾸하지 않고 한동안 말없이 피에 젖은 점퍼를
내려다보다가
시체를 좀 보여줄 수 없읍니까? 하고 물었다.
형사들은 브로커를 경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팽의 시신은 부검대 위에서 부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트를 젖히자 그의 앙상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벌려진 입 속에는 피가 가득
엉겨붙어 있었다.
브로커는 손을 뻗어 팽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의 얼굴빛은
창백했지만 감상적인 표정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새벽이 되면서 눈은 그쳤지만 기온이 급강하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불고 있어서 몹시 추웠다. 윙윙대는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사나이들은 병원을 나와 봉고차에 올랐다.
봉고는 병원을 나와 10분쯤 굴러가다가 길 한켠에 가만히
멈춰섰다.
1985년 1월 1일 새벽, 한파가 몰아치는 서울 거리에 주차해
있는 봉고차 안에서는 한 사내를 놓고 심문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배낭 속에 헤로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제 부인하지
않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도자기만.......
닥쳐! 우리가 바보인 줄 아나? 그렇다면 왜 암호를 사용했고,
왜 그렇게 은밀하게 그 배낭을 전해 줬지? 그리고 왜
살인사건까지 일어났지?
차안에는 촉수 약한 전등만이 하나 켜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은 어둠침침한 그늘 속에 묻혀 있었다. 브로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경감은 담배에 불을 당겼다.
아로라한테는 빨간 배낭을 대신 사주고 그 청색 배낭은
물품보관함 속에 보관했어. 그리고 팽이 그 앞에서 떠나지 않고
그것을 지켰지. 그만큼 그 배낭은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었어.
잠시도 그 배낭으로부터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았어. 왜? 싯가
1천만 달러어치의 헤로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지. 내 말이
틀리나?
그런 건 없습니다. 그 배낭 속에는 귀중한 도자기만 들어
있었습니다. 도자기를 운반한 것이지 헤로인을 운반한 건
아닙니다. 그 도자기는 중국 청조 때의 도자기로 아주 값나가는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도자기를 밀반출했다 이거지?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흘러나온 겁니다. 일본에 갖다팔
생각이었읍니다. 일본에서는 비싼 값에 거래가 되기
때문에.......
주평하가 코웃음쳤다.
아주 그럴 듯하군. 청조 때의 도자기라면 보물임에는
틀림없겠지. 그런 보물을 홍콩에서 꺼내오면 분명히 위법이지.
하지만 그건 홍콩법에 저촉되는 것이지 한국법에 저촉되는 건
아니지. 따라서 당신은 지금 한국에 있기 때문에 도자기를
밀반출한 게 사실이라 해도 여기서 처벌받을 리가 없지. 아주
그럴 듯해.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 도자기는 보물이 아니거든. 그건 위장에
불과해. 헤로인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란 말이야.
위장이 아닙니다. 전문가한테 감정을 시켜보면 내말이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다하고.......
코보는 담배를 꼬나문 채 브로커를 째려보았다.
......당신은 한국에 있는 조직과 연락을 취했어. 그래서
황금의 초생달이 나타나서 당신과 접선한 거야. 황금의 초생달은
누구이고, 어떻게 하면 그 자를 만날 수가 있지? 그자는 팽을
살해한 살인범이야.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살인범이란 말이야.
그가 누구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리고 연락처도 모릅니다.
내쪽에서 연락해서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쪽에서
연락이 오기 전에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 마!
정말입니다.
황금의 초생달이 체포될 때까지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돼.
그럴 순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나를 억류하는 겁니까?
브로커는 제법 큰 소리로 항의했다.
첫째는 헤로인을 한국에 들여왔고...... 둘째는 살인사건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야.
그래요? 그렇다면 증거를 대십시오!
조금 기다려. 얼마든지 증거를 댈 테니까.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난 외국인입니다! 증거도 없이 외국인을
이렇게 붙잡아 둘 수 있습니까?
황금의 초생달은 곧 체포될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그때 가서 당신을 정식으로 구속할 테니까. 지금은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게 아니고 당신의 동의하에 당신을 조사하고 있는
거야.
난 동의한 적 없습니다!
봉고차는 10분쯤 달려가다가 다시 길 한켠에 세워졌다. 그리고
똑같은 질문이 브로커에게 던져졌다. 그러나 그는 계속 모른다는
대답으로만 일관했다. 경찰은 난처했다. 그에게서 자백을 듣는
것을 포기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1985년 1월 1일. 완전히 밝았다. 유난히도 추운 새해
아침이었다.
1월 1일부터 모든 공공기관과 개인 기업체, 금융기관 등은
일제히 휴무에 들어간다. 그러한 휴무는 3일까지 계속된다.
전국이 사실상 3일 동안의 휴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휴면은 커녕 더욱 바빠지는 기관이 있다. 바로
경찰이다. 그들은 일반 국민들이 휴면을 즐기고 있을 때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 비상사태에 들어가 밤잠을 설치며
불침번을 서야 한다. 만일 그들마저 휴면에 들어가면 국가의
신경 중추는 마비되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그들이 불침번을
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연한 일이라 해도 그때문에 추위에 떨며 제때
식사조차 못해 공복을 느껴야 하는 입장이란 사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볼 때 꽤나 괴로운 것이다.
황금의 초생달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살인범이자 헤로인 2kg을
소지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약 사범을 체포하기 위해 밤새 경계를
서온 노인배 경감 휘하의 수사요원들이야말로 1월 1일 아침
그같은 괴로움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었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은 것이 그들 모두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위망을 지키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개인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장국 생각이 간절했지만 각자
제자리에서 추위와 맞서 싸워야 했다.
포위망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갈 때 경찰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찰은 검문검색을 실시하는 한편 간밤에 했던 것보다 더
철저하게 집집을 수색했다. 이번에는 결코 실수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모두가 수색에 임했기 때문에 만일 범인이 틀림없이
포위망 안에 있다면 그가 체포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대문에 문패가 달려 있지 않은 그 고급 석조 2층집 차고 문이
스르르 열린 것은 8시 30분 경이었다. 그 집은 아직까지 두번째
수색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차 뒤에서는 차고 문이 자동으로 다시 스르르 닫혔다.
운전대에는 털모자를 쓴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비싼 외제 스키복 차림이었다. 차 지붕 위에는 스키가 실려
있었다. 차안의 뒷 좌석에는 중년 남자와 어린 아이가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 역시 털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비싼 외제
스키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안경은 끼고 있지 않았고
아들처럼 보이는 그 어린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연휴를 맞아 일가가 스키장에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차는 코발트색의 최고급 S살롱이었다. 차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요. 굳은 표정을 풀고 경찰을 보면 웃어요.
아이가 내 품에 있다는 거......그리고 내가 칼을 가지고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
뒷좌석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여인은 아무
대꾸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린 아이는 사나이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잠든
것은 그로서는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골목을 1백 미터쯤 빠져나가자 경찰 바리케이드가 저만치
보였다.
바리케이드 저쪽은 차도였다. 바리케이드 양쪽에서는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들이 총을 든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사복 차림의 사나이들도 있었다.
두 대의 차가 바리케이드 앞에 정차해 있었다. S살롱은 두번째
차의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가만히 보니 경찰은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신원은 물론
차의 트렁크까지 조사하고 있었다.
맨 앞에 있던 차가 바리케이드를 통과하여 차도로 빠져나가자
뒤에 있던 두 대의 차들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추동림은 침착해지려고 내심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표정은 굳어지고 가슴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인질로 아이를 붙잡고 앉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여인에
대한 위협일 뿐 실제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질 경우 아이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여인이 지금이라도 차
밖으로 뛰쳐나가 경찰을 부르면 그는 순순히 두 손들고 나갈
참이었다. 어떤 면에서 차라리 그는 그렇게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는 그렇게 되기를 분명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여인에게 더이상 위협적인 말을 삼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서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나는 경찰의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인이 차밖으로 뛰쳐나가 경찰을
불렀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여인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뒤돌아보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없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두 눈은 갈등과
번민에 차있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아이는 해치지 않겠어. 지금이 바로 찬스요. 찬스를
잃으면 안 돼요. 자, 밖으로 뛰어나가요!
그의 눈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심중을 꿰뚫어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경찰관이 다가와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경찰관은 차를
빼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앞에 있던 차는 이미 바리케이드를
지나 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홍일란은 바리케이드 앞으로 차를 바싹 들이댄 다음 시동을
걸어둔 채 브레이크를 걸었다.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이 차옆으로 다가서며 거수경례를
보냈다. 동림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홍일란은 차창을
내렸다.
실례합니다.
경찰관은 허리를 굽히고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차 안에는 단란해 보이는 일가족이 앉아 있었다.
고급주택가에서 나타난 고급차, 그리고 그 속에 앉아 있는
부유해 보이는 일가족의 모습은 경찰관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살벌하게 굳어 있던 경찰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전투복 차림의 젊은 경찰관은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동림을 향해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추운데 수고 많습니다.
동림은 주민등록증을 꺼내주면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자기의
표정이 일그러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방한테는 그렇게
보이지가 않은 것 같았다.
젊은 순경은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는 사진과 차 속에 앉아
있는 사나이의 얼굴이 일치하는가를 확인한 다음 그것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댁이 부산입니까? 주소지가 부산으로 되어 있군요?
그것은 예기치 못한 지적이었다.
순경은 지나가는 말로 별 생각없이 슬쩍 물어본 것이었지만,
지적을 당한 동림은 몹시 당황했다. 그가 미처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홍일란이 대신 나서서 말했다.
부산에 살다가 이사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아,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실례합니다만 트렁크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잠그지 않았으니까 보세요.
홍일란이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그녀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태도에 동림 쪽이 오히려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전투복 차림의 순경이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자 젊은
박문호 형사가 다가와 트렁크 속을 들여다보았다.
트렁크 속에는 스키 장비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값비싸 보이는 외제품들뿐이었다. 박형사는 불쾌감을
누르며 그것들을 뒤적거려보았다.
전부 외제 일색이군.
팔자 좋은 사람들인데요.
전투복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스키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했으면 좋겠다.
박형사는 트렁크 문을 쾅하고 닫았다. 깊은 속까지 들쳐볼
마음이 일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그들은
연휴를 즐기기 위해 스키장을 찾아가는 행복한 일가족으로서
조사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외제 일색의 스키
장비는 박형사의 기분만 불쾌하게 만들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때 마반장은 차 속에서 노경감과 무전교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S살롱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전투복이 마지막으로 홍일란에게 물었다.
127의 8번지예요.
홍은 바쁘다는 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댁은 지금 비어 있나요?
아뇨. 가정부가 지키고 있어요.
됐습니다.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아 참 선생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김...... 동...... 민.......
그녀가 또박또박 끊어서 대답했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키장에 가시나보죠?
총각 순경은 미모의 젊은 부인을 눈부신 듯 쳐다보았다.
네.......
젊은 부인은 차갑게 대답했다.
어느 스키장에 가십니까?
용평에 가요. 이제 가도 되나요?
네, 잘 놀다 오십시오.
순경은 차렷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동림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철제 바리케이드가 한쪽으로 치워졌고, S살롱은 천천히
바리케이드를 통과해 차도로 들어섰다.
마반장은 바로 앞을 지나가는 S살롱 안의 사나이를 쳐다보면서
차 밖으로 나왔다. S살롱은 이미 차들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방금 그 사람 이름 뭐라고 했어요?
박형사가 전투복에게 물었다.
김동민이라고 했습니다.
박형사는 수첩에다 이름 석 자를 적어넣었다.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성인 남자들의 이름과 주소는
빠짐없이 적어놓으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주소는?
127의 8이라고 했읍니다.
그때 마반장이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다가왔다.
방금 그 사람들 부부야?
네, 스키장에 간답니다.
박형사가 대답했다.
부부치고는 나이 차이가 많은것 같던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어느 스키장에 간다고 했어?
용평이라고 했습니다.
거긴 지금 갈 수 없어! 폭설로 영동고속도로는
교통두절이야!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와 보이는 두 눈이 더욱 날카로와지는 것
같았다.
주소와 이름은?
네, 여기 있습니다.
박형사는 수첩에 적은 것을 펴보였다.
가정부가 지금 집을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빨리 가서 확인해 봐!
박형사가 전투복 차림의 순경 두 명을 데리고 골목 안으로
급히 뛰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반장은 도로
승용차안으로 뛰어들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차도로 급히 차를 몰아나가자 직진해 오던 차들이
급정거하면서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려댔다. 가까스로 충돌을
면한 차의 운전사가 차창 문을 열고 그에게 야, 이
개새끼야!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모른 체하고 그대로 차를 몰아
달려갔다.
1월 1일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군.
조수석의 김만주 형사가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면서
투덜거렸지만 마반장은 그런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지붕 위에 스키를 실은 코발트 색의 S살롱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그 차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끝내 그 S살롱은 보이지 않았다.
현장으로 돌아오니 박형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정부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그런데 가보니까 문이 모두 잠겨 있었읍니다. 담을 넘어
들어가 보았지만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읍니다.
이웃집에 물어보았더니 여자 혼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까 통과시킬 때 트렁크는 자세히 조사했나?
스키장비만 잔뜩 들어 있기에 대강 훑어보기만 했습니다.
마반장은 잡아먹을 듯이 박형사를 노려보다가 무전기를
집어들고 본부를 불렀다.
상황보고를 받은 노경감은 땅이 꺼지는 것 같은 한숨을
토했다. 마반장은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아무래도 그 차를 수배하는게
좋을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노경감은 아무 대꾸없이 무전기를 껐다.
마반장은 창백한 표정으로 차에서 나와 박형사와 함께 127의
8번지 쪽으로 향했다. 127의 8번지에 세워져 있는 그 석조 2층집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대문 안 정원에는 경찰관 두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네는 지금 이 동네 반장을 찾아서 이 집으로 데려와.
마반장은 박형사에게 지시를 내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코발트색의 S살롱은 인적이 드문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림은 잠든 아기를 내려놓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고맙소.
그 말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민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동림은 무슨 말인가 할듯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차에서 내려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 때까지도 홍일란은
꼼짝하지 않고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동림은 스키 장비를 헤치고 맨 밑에서 파란 색깔의 큼직한
색을 꺼냈다. 그 안에는 배낭이 들어 있었다. 그 색을 들고
운전석 쪽으로 다가섰다. 여인은 운전석의 창문을 밑으로
내렸다.
이 색은 내가 좀 빌어야겠오. 하고 동림은 말했다.
그녀는 역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여러 가지로 신세 많이 졌소.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끄덕해 보인 다음 돌아섰다.
몸조심하세요. 먼저 병원에 들르세요.
뒤에서 그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대로 걸어갔다.
골목을 벗어나기 전에 그는 스키 모자를 벗어 색 속에 집어
넣고 안경을 꺼내 끼었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우선 택시부터
집어탔다.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종로로 가자고 말했다.
얼마 후 종로 2가에서 내린 그는 지하도로 내려갔다.
1월 1일인데다 아침이기 때문에 지하도에는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고 있었다. 지하상가도 문을 닫고 있었다.
지하도 한쪽 벽에 물품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색을
그 속에 밀어넣었다. 아무래도 그곳이 가장 안전한 장소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을 잡아당겨 몇번이나 잠긴 것을 확인한
다음 그곳을 떠났다.
지하도에서 나와 병원을 찾았지만 문을 열고 있는 병원이
없었다. 한참만에야 문을 열고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산부인과
의원이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반장은 40대 중반의 뚱뚱한 부인이었다. 그녀가
파악하고 있는 127의 8번지의 주인은 홍일란이라는 아직 채
서른도 안 된 젊은 여인이었다. 반장은 홍일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는데......가끔씩 나이 많은
남자분이 들르곤 하는 걸 보니까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젊은 여자가 하는 일 없이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이렇게 큰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이 우선 정상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돈도 많은 과부도 아닌 것 같았고......제가 보기에는
그 나이 많은 남자가 돈이 많은 것 같아요. 남자가 돈을
대주기에 이런 호화 주택에서 젊은 여자가 살고 있지요.
집안은 잠겨 있었다. 문을 따고 들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 허락도 없이 침입하기도 뭣하고 해서 경찰은
집 주위만 맴돌면서 샅샅이 뒤졌다.
반장님,이거 보십시오!
쓰레기통을 뒤지던 박형사가 소리쳤다.
그는 옷을 쳐들어 보이고 있었다. 마반장이 다가가보니 옷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피묻은 옷은 세개나 되었는데 모두
남자의 옷이었다. 세개 모두 웃옷들로 그중 하나는 베이지색의
오리털 파커였다.
이건 황금의 초생달이 입고 있던 게 분명해!
마반장이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두개는 회색의
털셔츠와 내의였다. 세개 모두 왼쪽 가슴 부위에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놈은 상처를 입었어! 뒷자리에 앉아 있던 놈이 바로
그놈이었어!
마반장은 창백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며 서있는 박형사에게
옷을 흔들어댔다.
이렇게 된 이상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경찰은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반장은 거실에 올라서자 마자 소파에 놓여 있는 등산모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황금의 초생달이 쓰고 있던 것과 비슷한
짙은 녹색의 등산모였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만 술병과 술잔들이 널려
있었고,플래스틱 쓰레기통 안에는 상처를 치료한 것으로 보이는
피묻은 휴지며 가아제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틀림없어. 황금의 초생달은 이 집에 숨어 있었어.
마반장은 노경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가지 드러난 사실을
보고한 다음 그는
......황금의 초생달은 아까 그 차를 타고 빠져나간 게 틀림
없습니다! 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또 놓쳤단 말이야?
코보의 고함치는 소리에 귀 속이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마반장은 전화에다 대고 머리를 숙였다.
그럼 그 여자하고 아이는 인질이란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자가 뒷자리에 앉아 아이를 안고
있었고 운전은 그 여자가 했습니다.
여자는 자기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해.
감식반을 보낼 테니까 집안에 있는 지문을 모두 채취해.
마반장은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홍일란은 한밤중에 자기 집에 뛰어들었던 그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차 속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꼭 무슨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그 사나이는 그녀에게
너무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갔다. 그는 그녀에게 공포만
심어주고 간 것이 아니었다. 연민과 쫓기는 자의 고독 같은 것이
거기에는 있었다. 나는 아주 잘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웬지 바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도 동네에는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을 것이고, 그녀는 그같은 경계망을
다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 싫었다. 경찰도 그녀가
스키장에 가지 않고 혼자 돌아온 것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30분쯤 지나 그녀는 골목을 나왔다.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었기 때문에 드라이브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차를
몰아갔다. 다른 날에 비해 차도에는 통행하는 차량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언제나 차도가 이렇게 한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종로통을 가로질러 을지로 쪽으로
향했다.
로터리를 돌아 을지로에 접어든 다음 시청 쪽을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을 때 길가에 주차해 있던 경찰 퍼트롤카가
움직이는 것이 백미러를 통해 보였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교차로의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브레이크를 가만히
밟았다. 노란색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정지선은 눈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횡단보도 앞 적당한 위치에 차를 세웠다.
그때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얼른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경찰 퍼트롤카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오다가는 그녀의 차를 들이받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퍼트롤카는
그녀의 차 뒤에 부딪칠 듯 달려와 급정거했다. 뒤이어 마이크
소리가 들여왔다.
S살롱, 오른쪽에 차를 갖다대요!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뒤로 돌려 경찰차를
쳐다보기만 했다.
빨리 차를 오른쪽에 붙여요!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경찰관이 손짓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횡단보도를 건너 보도 쪽에다
차를 갖다댔다. 퍼트롤카는 그녀의 차 앞으로 굴러와 멎었다.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퍼트롤카에서 정복 차림의 경찰관 두 명이 내렸다. 그들의
허리에는 권총이 무겁게 걸려 있었다. 그들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차창 옆으로 다가섰다. 그들을 차 속을 들여다보고
안에 여자와 어린아이만 있는 것을 알고는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홍일란은 차창을 내리고 경찰관을 올려다보았다. 경찰관이
그녀에게 거수경례를 보냈다.
차 주인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함께 탔던 남자분은 어디 갔습니까?
그제서야 그녀는 그들이 교통위반을 단속하기 위해 그녀를
쫓아온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제3의 브로커로부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자백도
받아내지 못한데다 황금의 초생달마저 놓쳤다는 보고를 받은
노경감은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바보 같은 자식들 같으니라구!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다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가 홍일란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마반장을 비롯한 수사진은
수색을 끝내고 거실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경감의 큼직한 딸기코가 씰룩거리는 걸 보고 형사들은 코보가
분통을 터뜨릴 것에 대비해서 긴장한 표정들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홍일란의
승용차를 검문했던 사람을 찾았다. 홍일란과 그녀의 남편으로
위장한 사나이를 직접 검문했던 전투복 차림의 순경이 주눅이든
얼굴로 코보 앞에 불려와 차렷 자세를 취했다. 박형사도
엉거주춤 다가와 섰다.
자네가 직접 그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나?
코보는 박형사의 수첩에 적혀 있는 것을 자신의 수첩에다
옮겨적다 말고 전투복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네, 제가 몇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전투복은 상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남자의 주민등록증을 조사했었나?
네,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 상에는 주소가
부산으로 되어 있었읍니다.
부산? 부산 어디?
부산 어딘지는 자세히 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주민등록증을 검사했다면서 그런 것도 보지 않았나? 도대체
어떻게 검문한 거야? 검문을 한 거야 안 한 거야?
코보는 전투복을 쏘아보다가 마반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반장은 변명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한심한 작자들뿐이군.
경감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전투복을 쳐다보았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주민등록증에는 주소지가 부산으로 되어
있는데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그렇게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좀 이상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전투복은 모욕감으로 얼굴이 붉어진 채 더듬거렸다.
뭐라고 대답했어?
여자가 대신 대답했는데...... 부산에서 살다가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주민등록증을 고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고.......
경감은 마반장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홍일란이라는 여자가 이 집에 이사온 게 언제였지?
이곳 반장 말로는 2년쯤 된다고 했습니다. 하고 마대섭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2년 동안이나 주민등록증을 고치지 않았다는 건가? 말이
이상하지 않아? 김동민이라는 이름은 확실하나?
경감은 이제 하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여자가 이름을 말해 주었습니다.
여자 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여자 이름 같은 건 필요없어.
그 차에 탔던 남자 이름 말이야!
코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질렀다. 전투복은 더욱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네, 김동민입니다. 그 남자 이름을 물었는데 여자가 대신
대답했습니다.
이거 봐!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남자의 주민등록증에 이름이
뭐라고 적혀 있었느냐 그 말이야!
코보는 탁자를 두드려댔다.
그, 그건 잘 모르겠읍니다.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전투복은 더듬거리며 설명하기를 그 남자의 주민등록증을
받아서 들여다보긴 봤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형식적으로 그것을 보고 나서
들려준 것 같았다.
내가 이름하고 주소는 확인하라고 했잖아?
마반장이 창백한 얼굴로 전투복을 흘겨보았다.
네, 그래서 나중에 이름을 물어본 겁니다. 하고 전투복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물어보지 말고 주민등록증을 다시 확인했어야 했어! 자넨 큰
실수를 한 거야!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내 눈앞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마!
전투복은 경감에게 거수경례를 붙인 다음 슬슬 뒷걸음질치다가
밖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경감의 시선이 이번에는 박형사에게
머물렀다.
트렁크를 샅샅이 조사해 보았나?
박형사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더듬거렸다.
자세히 조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스키 장비로 가득
차있기에.......
대강 훑어봤단 말이지?
네...... 큰 실수였습니다.
멍텅구리 같으니! 그 속에 헤로인 2킬로그램이 들어 있었어!
이 멍청아!
경감은 안타까운 나머지 박형사의 허리춤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박형사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경감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모든 게 제 불찰이었습니다.
마반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코보는 녹색 등산모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것을 홱 집어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이건 보통 실수가 아니야! 범인이 눈앞을 버젓이
통과하는데도 그대로 멍청히들 쳐다보기만 한 거야! 세상에 이런
멍청이들이 어딨어! 난 내 부하들이 이렇게 멍청한 줄 처음
알았어. 멍청한 것들!
그때 우경식 형사가 뛰어들어왔다.
무전 연락이 왔습니다! 그 차를 잡았답니다.
그는 대머리가 시려워 머리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남자는 없고 여자하고 어린 아이만 차 속에 있답니다.
그럴 테지.
코보는 조소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이리로 데려오라고 해!
코보는 거실 한 구석에 팽개쳐져 있는 옷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남자용 등산바지였다.
황금의 초생달이 벗어놓고 간 바지 같습니다. 하고 마반장이
말했다.
철저히 변장하고 도망쳤군.
┌────────────────────────────┐
│ 9.몽타지 │
└────────────────────────────┘

비록 떳떳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
그녀에게서는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신문은 처음부터 아주 정중하게 시작되었다.
노경감이 직접 그녀에 대한 신문을 맡았는데, 신문은 그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에게는 어린아이가 딸려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수사본부로 연행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경감은
그녀를 부인이라고 불렀다.
부인은 경찰이 살인범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네, 알았어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말소리는 또렷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밤중에......경찰이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 알았어요.
살인범을 찾는다고 했어요.
그놈은 사람을 칼로 찔러죽인 살인범입니다. 그런 살인범을
집안에 숨겨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범인은닉죄로 형사처벌을 받게 됩니다.
저는 살인범을 숨겨준 적 없어요.
경감의 코가 씰룩거렸다. 그는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경찰이 여기에 왔을 때 왜 신고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부인께서는 신고하기는 커녕 오히려 살인범의 부인처럼
행동하셨고, 그래서 경찰은 아무 의심없이 물러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자가 버젓이 남편으로 행세하는데도 부인은 가만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 그자와 부인은 틀림없는 부부
같았습니다.
처음 홍일란의 집을 방문했던 최원달 형사가 옆에서 경감의
말을 거들었다.
그는 그때 속은 것이 몹시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홍일란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이를 해치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그자가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
말씀이군요?
여인은 끄덕였다.
그자가 어떻게 협박했나요?
칼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으면 정말로 아이를 칼로 찔러 죽였을 거예요.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경감은 최형사를 돌아보았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는 누가 데리고 있었나?
그자가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자가 아이를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는 부인의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코보는 코를 매만지며 다시 홍일란을
쳐다보았다.
범인은 부인의 차를 타고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직접 그 차를 운전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스키복 차림이었고
차에 싣고 있는 것도 스키 장비였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일가족이 스키장에 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위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차려 입는 바람에 우리 경찰은 빤히 보고도 범인을
보내주고 말았습니다. 아주 멍청한 짓이었지요.
코보는 여인의 표정의 변화를 읽으려는 듯 말을 끊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실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경감을 마주 바라보았다. 경감은 모래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경찰이 범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시킬 때
부인의 기분은 어땠습니까?
조마조마했어요.
그녀는 혀로 재빨리 그녀의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경감은
문득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안 들었습니까?
아뇨. 경찰이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했어요.
그 말씀은......그러니까 경찰이 알아볼까봐 겁이 났다는
겁니까, 아니면 경찰이 빨리 알아보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는 뜻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경찰이 알아볼까봐 겁이 났어요.
그녀의 대답에 경감은 은근히 화가 났다.
그렇다면 부인께서는 범인을 태운 차가 무사히 통과하기를
바랐다는 말입니까?
네, 그랬어요.
그녀의 또렷한 대답에 경감을 비롯한 수사관들은 놀란
표정들을 지었고, 이윽고 그 표정들은 어이없어 하는 기색으로
변했다.
왜, 왜 그랬지요?
코보의 코가 다시 씰룩거렸다.
아이가 다칠까봐 그랬어요. 만일 경찰이 그 사람을 알아보고
체포하려 들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 애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부인은 오로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 범인한테
협조하셨군요?
네, 그랬어요. 그 사람도 경찰도 저한테는 모두가
위험인물이었어요. 그 사람을 체포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하지 않았어요. 오직 우리 애가 다치지 않기만을
바랐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던 거예요. 어쩔 수
없었어요.
경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행위가 매우 괘씸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자식을 지키려고 그랬다는 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여자의 모성애야 말로 모든 것에 우선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데에는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자가 시켜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부인의 자발적인
협조없이는 그렇게 완벽한 위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점은 인정하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코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담배에 불을 당겼다.
부인은 이제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범인한테 협조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대신 우리 경찰에
협조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숨김없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협조하겠어요.
그녀가 다시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뭡니까?
이름은 모르겠어요.
경찰이 그자의 이름을 물었을 때 부인이 대신해서 그 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김동민이라고 말입니다.
네, 그건 제가 꾸며내서 아무렇게나 말한 거예요. 그 사람이
머뭇거리기에 제가 얼결에 그렇게 지어서 말한거예요.
경감은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김동민이라는 이름이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어서 말한 이름이라면 황금의 초생달을 찾는 것은 이제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그런 이름을 지어서 경찰을 속인 그녀를
탓할 게 못되었다. 잘못은 어디까지나 검문을 소홀이 한 경찰
쪽에 있었다.
김동민이라는 이름이 가짜라니 정말 실망이 큽니다. 이제
그자를 찾는 게 어렵게 됐군요. 그건 그렇고 그자를 어디다
내려줬습니까?
S대 부속병원 뒤쪽 골목에서 내렸어요.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요? 그리고 헤어지면서 뭐라고
말하던가요?
어디로 가는지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았어요. 단지 고맙다고만
말했어요.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면서 사라졌어요.
코보는 낮게 신음하면서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정말 그자는 부인한테 신세를 많이졌군요. 부인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밑으로 시선을 깔았다.
부인이 볼 때 그 자는 어땠습니까? 난폭했나요
아니면......?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난폭하지 않았어요. 살인범 같지 않게 예의바르고
선량해 보였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였을까 하고
의심이 날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어요.
부인을 폭행하지 않았나요? 때리거나 혹은 성적으로 폭행하지
않았나요?
아뇨. 전혀 그런 것은 없었어요. 처음에 칼을 꺼내보이기만
했어요. 그 사람은 몹시 우울해 보였어요.
부인은 그자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군요. 하지만 그자는
겉보기와는 달리 사람을 칼로 찔러죽인 흉악범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자는 마약범입니다. 사람을 죽인 것도
마약때문이지요.
그녀는 밑으로 깔았던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빛이 갑자기 검어지는 것 같았다.
그자는 헤로인 2킬로그램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헤로인은
아편으로 만든 마약입니다. 2킬로면 싯가 1천만 달러......우리
돈으로 무려 9억 원이나 됩니다.
그녀의 눈이 더욱 검어지면서 동시에 커졌다.
그자가 헤로인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아뇨.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 정도의 헤로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자가 그
방면에서 거물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만일 시중에
흘러나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을 폐사시키게 될 겁니다.
살인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양의 헤로인을 회수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자를 빨리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자는 많은 시민들한테 해독을 끼치는 무서운 인물입니다.
예의바르고 선량해 보인다는 것은 그자의 정체를 모르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쳐갔다. 그 침입자에 대해
품었던 연민의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자가 청색 배낭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셨나요?
네, 봤어요.
그 배낭은 어디 있나요?
그 사람이 가지고 갔어요. 파란색 색 속에 넣어가지고
갔어요.
파란색 색이라구요?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배낭을 감추려고 색 속에다 넣었군. 하고 중얼거렸다.
황금의 초생달--놈이야말로 민첩하고 교활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담대함까지 갖추고 있는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경감은 피묻은 파커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놈이 상처를 입었던가요?
네, 왼쪽 가슴 위에 상처가 있었어요. 칼에 찔린 상처
같았어요.
상처가 깊던가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할
정도는 됐어요.
그녀는 자기가 급한 대로 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감이 벌써 눈치를 채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부인께서 그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 않으셨나요?
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았어요. 소독약을 발라주고
가제로 상처를 막아주었어요.
부인께서는 그자하고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었나요?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었군요. 그렇게 오래 함께
있었다면 그자한테서 적지 않은 것을 알아내셨으리라고 생각
하는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자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것
하나라도 아쉬운 형편입니다. 그자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
그리고 그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요.
홍일란은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쪽으로 가서 난로 안에다 나무토막을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는 자신이 중대한 과실을 저질렀음을 비로서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사관들의 따가운 눈총에 그녀는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벽난로 안에서 불길이 일자 그녀는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다 말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밤을 새운
수사관들에게 따끈한 커피라도 한잔씩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범인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살인범이자 헤로인 2킬로 그램을
소지한 마약범을 도와야 할 하등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예의바르고
선량해 보이는 그 가면에 속은 것이 그녀는 억울했다. 그런
자에게 연민을 느끼다니! 그녀는 수치심에 수사관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수사관들의 표정은 그녀가 날라온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해서 금방 풀어졌다.
그녀는 경찰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범인과 함께
지냈던 아홉 시간 동안의 일들을 생각해낼 수 있는 한 모두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서 낱낱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자기는 강도가 아니라고 했어요. 정말
강도는 아니었어요. 저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커피를 대접했어요. 커피에다
위스키를 조금 타서 줬더니 그 사람은 몹시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우리는 꼬냑을 마셨어요. 술을 마시면서부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해줬어요.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았고 막연한 것들만 이야기했어요. 아,
이런 말을 한 게 기억이 나요. 우리 준이를 안아주면서 자기
아들하고 나이가 같다고 했어요. 아들 이름은 인하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외아들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밖에
구체적인 것으로는 나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자기
부인하고 나이 차이가 열세 살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부인 나이는 새해가 됐으니까 스물 아홉 살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열세 살 차이니까 그 사람 나이는 마흔 두 살이겠지요.
그 사람은 본의 아니게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가고 싶어했어요. 그 사람 집은 바다가 보이는 조그만
아파트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인천에 집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자기는 직업이 없다고 했어요. 자기
아내가 생활비를 벌어오고 자기는 집에서 집이나 지키면서
아이를 돌본다고 했어요. 하지만 자기는 그 생활이 더없이
행복했다고 했어요. 자기는 큰 집도 바라지 않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단지 집에서 아들과 함께 노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었고, 그런 생활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는
거예요. 자기는 그렇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건에 휩쓸렸다고 했어요. 자기가 무슨
약점을 잡혔고, 그래서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고
했어요. 그 바람에 자기 집은 풍지박산이 됐고 자기 아내는
유산까지 했다고 했어요. 그때 저는 쇼팽의 야상곡을 틀어 놓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곡이 쇼팽곡이라는 것을 알아맞히면서
자기 아내가 즐겨 듣는 곡이라고 했어요. 그는 처음에는 자기가
사람을 죽인 것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상대방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도 칼을 빼들었는데......잘못 되어
자기 칼에 상대방 목이 찔린 것 같다고 했어요. 자기는 그대로
도망쳤기 때문에 상대방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른다고
했어요. 저는 그 사람한테 우리 집을 빠져나가는 대로 병원에 꼭
들르라고 했어요.
홍일란의 진술은 30분쯤 더 계속 되었다.
경감은 그녀의 진술 가운데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수첩에다 적었다.
1. 범인한테는 인하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살짜리 아들이 있다.
외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2. 범인의 나이는 42세이며 부인의 나이는 29세이다.
3. 범인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4. 범인의 부인은 쇼크를 받고 유산한 적이 있다.
5. 범인은 무직이며 그의 부인이 생활비를 벌어온다.
6. 범인은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을 가능성이
크다.
놈의 집은 부산에 있어.
경감은 수첩을 덮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범인이 검문 경찰관에게 제시한 주민등록증에는 주소가
부산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범인은 홍일란에게 자기는
바다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고 했다. 범인의 말은
주민등록증상의 주소지가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범인의 주소지가 부산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도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산은 서울 다음 가는 4백만의
인구가 들끓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범인이 그곳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사범위를 좁힐
수 있는 근거라고 하면 그가 바다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연히 흘린 이 한 마디가 그의 주소지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부산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마반장이 몸을 일으키며 당장이라도 떠날 듯이 말했다. 경감은
고개를 흔들어 그를 제지했다.
지금 당장 내려간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3일까지는 모든 게 휴무이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단 말이야. 내려가더라도 몽타지 정도는 가지고 가야하지
않겠어?
마반장은 도로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놈의 지문을 확보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요.
마반장은 실내에서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감식반원들을 바라보면서 아쉬운 듯 말했다.
놈이 다 지워버렸다고 하지 않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하고 경감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홍일란의 말에 의하면 범인은 자신의 손이 닿았던 모든 부위를
수건으로 철저하게 닦아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지문을 찾아내기 위해 감식반원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코보는 거기에 거의 기대를 걸지 않았다.
병원을 뒤져서 놈이 치료를 받은 병원을 찾아내도록 해. 문을
연 병원이 별로 없을 테니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마반장은 시내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범인이 홍일란의
차에서 내렸던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선 이곳을 중심으로 부근의 병원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안 돼. 파출소별로
관할구역을 점검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반장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코보는 방 안에
들어가 있는 홍일란을 다시 거실로 불러냈다.
부인은 지나칠 정도로 범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아무리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 해도 말입니다. 범인이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덕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네, 그렇게 생각해요.
홍일란이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리며 나직한 소리로 대답했다.
경감은 범인이 홍일란과 내연의 관계에 있는 김중우의
스키복으로 갈아입고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간 것을 생각하자
다시 화가 치밀었다.
부인을 형사입건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신 범인의 몽타지를 만드는데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부인은 범인과 아홉 시간 동안이나 함께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범인의 모습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범인의
정확한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협조해 주십시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협조해 드리겠어요.
그녀가 비로소 적극적인 태도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경감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황금의 초생달에게 살해된 가죽점퍼 사나이의 신원이
밝혀졌다. 이름은 팽사휘(膨思輝), 나이는 30세였고 홍콩 국적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코보가 본부로 돌아갔을 때 홍콩 경시청 수사관들은
그때까지도 제3의 브로커에게 늘어붙어 있었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늘어붙어 있는 그들을 보고 코보는 내심 적잖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성을 바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3의 브로커로부터 여전히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것
같았다.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노경감은 그들을 마주 대하기가 민망했다. 그들이
홍콩으로부터 물어다준 헤로인 2kg을 인계받자마자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그들을 대할 면목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국 경찰에 수사를 전적으로 의뢰했던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는 빛이 역력했다.
노경감은 난처했다. 제3의 브로커는 체포되었고 팽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헤로인 2kg은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다.
헤로인 2kg은 정말 있는 것일까? 한국 경찰은 아직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황금의 초생달이 가지고 간 청색 배낭 속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홍콩 경찰도 헤로인을 직접 두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다.
단지 2kg의 헤로인이 홍콩으로부터 한국으로 운반된다는
정보만을 입수하고 제3의 브로커를 따라 한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청색 배낭 속에 틀림없이 헤로인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한국 경찰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3의 브로커는 경감을 보자 자기를 억류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증거도 없이 외국인을 장시간 억류할 수 있느냐,
즉시 풀어주지 않으면 외교채널을 통해 항의하겠다, 그렇게 되면
외교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사실 그의 항의는 정당한 것이었다.
한국 경찰은 그를 억류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로인이 발견되지 않은 이상 외국인인 그를 즉시 풀어줘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그의 항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를 억류시켜놓은 상태에서 빨리 헤로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궁지에 몰린 노경감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풀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당신이 기다려주면 그동안에
우리는 헤로인을 찾아낼 거요. 헤로인을 찾아낸 다음 당신을
정식으로 구속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요.
길길이 날뛰는 브로커를 독방에 감금시키고 나서 경감은 홍콩
수사관들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한국에까지 오셨는데 협조해 드린다는 는 게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부장님께는 제가 따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만 정말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서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하니까...... 일단 돌아가 계시면 좋은 결과가 생기는
대로 연락을 드릴 테니까 그렇게 아시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경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업가 타입의 주평하가 딱
잘라 말했다. 코보는 민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대로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헤로인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계시겠다면 막지 않겠습니다만 그게 딱 언제까지라고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실 테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헤로인을 찾아야 합니다. 언제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글쎄, 그게 확실치가 않아서......지금 총력을 기울여서
황금의 초생달을 쫓고 있습니다만.......
코보는 마치 상관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홍콩에서 온 수사관은 그의 그 같은 기분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국 경찰만 믿고 있겠습니다. 한국 경찰이 헤로인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홍콩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코보는 그 문제를 놓고 더이상 그들과 왈가왈부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기분만 상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에 동림은 K호텔 513호실에 누워 있었다.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 위에
누운 채 구멍가게에서 사온 빵을 씹고 있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기운이 빠지고 어지러웠다. 집에서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차마 그 간단한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이 두렵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더이상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렇다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에게 더이상의 충격을 준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었다. 그녀는 지금 태아를 유산하고 집에 누워 있는 몸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 모든 것을 아내에게만은 절대 비밀로 한 채 혼자서 끝까지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자신의
도리일 것 같았다.
몸조리는 잘하고 있을까. 몸에 이상은 없을까. 혼자서 그런
일을 당하다니! 그는 자신의 문제보다도 아내의 일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드러누운 채 빵 한개를 먹고 나자 목이 메어 더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신 다음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교환을 불렀다.
513호실입니다. 혹시 이 방에 전화 온 거 없었나요?
여러 번 전화가 걸려 왔었어요.
전화 교환 아가씨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남자였나요?
네, 남자분이었어요.
잘 알겠습니다.
미스터 Y가 시킨 대로 그는 배낭을 찾아다가 안전한 곳에
보관해 놓았다. 미스터 Y는 호텔 방에다 갖다 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보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다른 곳에다 숨겨 놓았던 것이다.
미스터 Y도 상황설명을 듣고 나면 그 점을 이해해 줄 것이다.
문제는 내가 매독환자를 죽였다는데 있다. 일부러 살해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아뭏든 그는 내 칼에 찔려 죽은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미스터 Y와 매독환자가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면 나는
그 조직의 일원을 살해한 셈이 된다. 조직은 나를 어떻게
처리하려 들까. 나를 그대로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전화벨 소리에 그의 생각은 거기서 그쳤다. 그는 깜짝 놀란
눈으로 전화통을 내려다보았다. 전화벨 소리는 유난히 크게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벨이 네번 울린 뒤에야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상대방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동림은 여전히
침묵으로 응했다.
여보세요! 미스터 Y.......
황금의 초생달.......
동림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무사하군.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배낭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야. 깊은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겠어. 내가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줄 테니까 10분 이내에 그쪽으로 전화를
걸어줘.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말이야.
상대방은 지금 걸고 있는 것이 교환전화이기 때문에 도청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림 역시 그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스터 Y는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준 다음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방을 나와 아래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 있는 두개의 공중전화중 한개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개방되어 있어서 은밀한 전화를 걸기에는 적당치가 않았다.
호텔로부터 조금 떨어진 길가에 두개의 공중전화 부스가
나란히 서있는 것이 보였다. 두개의 부스는 비어 있었다. 그는
시내와 시외 장거리 통화를 함께 걸 수 있는 부스 안으로 들어가
미리 백 원짜리 동전을 여러 개 집어넣었다.
미스터 Y가 알려준 전화번호에다 전화를 걸기 무섭게 신호가
떨어지면서 미스터 Y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암호를
교환한 다음 대화를 시작했다.
이 전화번호를 추적할 생각은 하지 마. 내가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봐야 헛수고야.
미스터 Y는 동림에게 주의부터 주었다.
배낭은 지금 호텔방에 있겠지?
동림은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호텔 방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시간이 걸렸지? 늦어도 새벽 1시쯤에는
호텔 방에 돌아와 있어야 했어. 그런데 열 시간이나 지나서야
돌아왔어. 왜 그렇게 늦었지? 그 동안 어디서 무슨 짓을 했지?
미행을 따돌리느라고 늦었습니다.
뭐라고? 미행이 있었다고?
놀라는 것으로 보아 미스터 Y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 미행이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차를 타고 쫓아왔습니다.
뒤쫓아 오는 차가 두 대다 됐습니다.
어떤 놈들이었어?
경찰 같았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알았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당신이 혹시 경찰에 신고한 거 아니야?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그럼 왜 매독환자한테서는 연락이 없지? 매독환자는 배낭을
지키고 당신을 감시하는 게 임무야. 그는 호텔 방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나한테 전화하기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 당신 방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어. 매독환자가 거기서 배낭을 지키고 있다면
내 전화를 받아야 했어. 그는 지금 어디 있지? 브로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모두 연락이 두절됐단 말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 경찰에 체포됐던가 아니면....... 지난 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봐!
네, 말씀대로 매독환자는 지금 호텔 방에 없습니다. 그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동림은 이미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매독환자는 당신 곁을 떠나서는
안 되도록 되어 있어! 당신의 그의 행방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야?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쫓기다 못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는데......거기서 그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포위를 당한
것 같아서 저는 엉겁결에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습니다.
매독환자는 앞서 뛰어갔기 때문에 제가 남의 집으로 피신한 것을
몰랐을 겁니다. 그 뒤로는 매독환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집에서 아침에 될 때까지 숨어 있다가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매독환자는 경찰에 체포됐다는 건가?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면
경찰에 체포된 게 분명합니다.
경찰이 바싹 뒤쫓아 왔었나?
네, 우리가 눈치를 채고 도주하기 시작하자 자기들도 정체를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추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브로커도 체포된 게 분명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신음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림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만 체포되지 않고 용케 빠져나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이상하다면 이상해. 남의 집에서 날이 샐 때까지 숨어
있었다고 했는데......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빈 집은 아니었을
테고......그렇다고 밖에 숨어 있었다면 얼어 죽었을 텐데
말이야.
네, 그 집에는 나이 많은 늙은 부부만 있었는데 그나마 남자
쪽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한
사람을 협박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안심하고
그 집에 숨어 있다가 나왔습니다.
미행자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스터 Y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림은 상대방이 먼저 침묵을 깰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미스터 Y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배낭은 분명히 호텔 방에 있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배낭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네, 가지고 나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눈에 띌 것 같아서
그냥 방 안에 놔두고 나왔습니다. 경찰이 지금쯤 혈안이 돼서
배낭을 찾고 있을 것 같아서 가지고 나오기가 두려웠습니다.
안심해도 될 겁니다. 배낭은 침대 밑에 쑤셔넣어 두었습니다.
동림은 자기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거짓말에 스스로도 자못
놀랐다.
음, 그렇다면 안심이야. 하지만 그 호텔에 더이상 있는다는
건 위험해. 지금 당장 거기서 나와.
알겠습니다. 나와서 어디로 가죠?
강남 쪽으로 가. 테헤란로에 가면 상해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방을 하나 잡고 점심을 먹고 있어. 웬만한
택시 운전사들은 다 알고 있는 곳이야. B생명보험 바로 뒤편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찾기 쉬워. 보이에게 당신 이름을 김명기라고
말해 둬. 내가 그쪽으로 전화를 걸지 사람을 보낼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거기 가서 김명기라는 이름으로 식사를
하고 있으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연휴인데 식당 문을 열었을까요?
열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난 지금 상해가 내려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서 전화하고 있는 거야.
잘 알겠습니다.
나한테서 연락이 갈 때까지 그 집에 있어야 해. 그리고 배낭
말인데......이제부터는 그걸 보이게 해서 가지고 다니면 안 돼.
시내에 경찰이 좍 깔려 있을 텐데 배낭을 그대로 가지고
가다가는 금방 걸리고 말아.
그러지 않아도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배낭을
버리고 도자기만 가방에 넣어가지고 갈 생각입니다.
뭐라고?
미스터 Y가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동림은 바보처럼 물었다.
안 돼! 몇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배낭을 버리면 절대 안
돼! 그 도자기는 그 배낭 속에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해! 다른
곳에 넣으면 절대 안 된단 말이야! 절대 안 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경찰이 눈독을 들이고 있을 그 낡아빠진 배낭을 버리면 왜 안
되는지 그는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그 배낭을 버려서는 절대 안 돼.
절대 안 된단 말이야. 그 배낭 속에 그 도자기는 들어 있어야
해. 알아들었지?
네, 알았습니다.
그리고 배낭이 눈에 띄지 않게 큰 가방 같은 것을 하나 사서
그 안에다 배낭을 집어넣도록 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 옷차림도 바꿀 필요가 있을거야. 경찰한테 미행을
당했다면 경찰이 당신 옷차림을 알고 있을 거란 말이야. 그리고
당신이 숨어 있었다는 그집 노파가 이미 당신 모습을 경찰에
신고했을 거란 말이야. 그렇다면 경찰이 당신 모습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을 것은 당연하지 않아?
그, 그렇지요. 변장할 수 있는 한 변장하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연락하겠어. 테헤란로에 있는 상해라는
중국 식당이야.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동림은 부스에서 나왔다.
호텔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아직 스키복차림 그대로였다.
서둘러 호텔 방으로 들어간 그는 스키복을 벗어던지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상처의 고통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양복 위에 코트를 걸친 다음 스키복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래 위 한벌을 뭉치자 부피가
제법 컸다.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몰려들어왔다. 아래는 차도였다. 문을
닫았다. 가방과 옷꾸러미를 들고 방을 나섰다.
투숙객들이 떠난 방의 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고, 이방
저방에서는 진공소제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동림은 청소부들을 피해 빈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513호실로부터 멀리 떨이진 방이었다. 아직 청소를 하지 않은
방으로 침대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옷장 문을 열고
스키복 꾸러미를 풀어 그 안에다 던졌다.
청소부에게 들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청소부들은 모두
방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무사히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아래 층으로 내려가 프론트에 열쇠를 내놓고 체크아웃한 다음
밖으로 나와 택시를 집어탔다.
종로 쪼긍로 차가 달리는 동안 그는 배낭에 대해 생각했다. 왜
아이스크림은 그 낡아빠진 배낭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걸까. 귀중히 다루어야 할 것은 도자기가 아닌가. 도자기를
운반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다른 곳에
옮겨담아 가지고 간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미스터 Y가 하는 말투로 보아 그는 도자기 못지 않게
배낭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도자기보다 그
더러운 배낭이 더 귀중한 게 아닐까. 그 배낭이 그렇게 귀중한
것일까. 그렇게 귀중하게 취급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택시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건널목 앞에 멈춰섰다.
운전사가 라디오 스위치를 틀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오가 막
지나고 있었다.
경찰은 서울 일원에 비상망을 펴고 살인범을 쫓고 있습니다.
범인은 중키에 안경을 끼었고 스키복 차림이라고 합니다.......
운전사가 갑자기 채널을 돌리는 바람에 뉴스가 들어가고 대신
음악이 흘러나왔다.
정초부터 살인사건이야.
운전사가 투덜거렸다. 동림은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뉴스 좀 들어봅시다.
별로 들을 거 없을 텐데요.
달갑잖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중년의 개인택시 운전사는 뉴스
쪽으로 다시 채널을 돌렸다.
......홍콩 경시청으로부터 싯가 1천만 달러에 달하는 헤로인
2kg이 김포공항을 통해 유입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경찰은 마약
거래를 둘러싼 국제 마약조직간의 암투가 빚은 살인사건으로
보고 전 수사력을 동원, 살인범을 쫓는 한편 대량의 헤로인이
시중에 유출될 것에 대비, 헤로인 수색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살인사건 뉴스에 이어 화재사건 보도가 나왔다. 차가
움직였다. 동림은 상체를 뒤로 했다. 운전사가 채널을 돌렸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연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차량의
통행도 평소보다는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추위에 웅크린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었구나! 동림은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미스터 Y가 한사코 배낭을 사수하라고 강조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배낭 속에는 헤로인 같은
것은 없었다. 도자기만 한개 덩그라니 들어 있었을 뿐이다. 혹시
배낭 속 어딘가에 그것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자신이
배낭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을 인정했다.
종로 2가에서 택시를 내린 그는 지하도로 내려갔다. 될수록
한가한 모습으로 걸어가면서 주위를 눈여겨 보았지만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지하도에는 사람들의 통행이 뜸했다. 물품보관함 앞으로
다가섰다. 열쇠를 꺼내 구멍 속에 집어넣고 돌린 다음 문을
열었다. 파란색 색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색을 꺼낼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만일 홍일란이 경찰 신문에 사실대로
진술했다면 경찰은 지금쯤 파란색의 색을 찾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보관함에서 색을 꺼내 종로통을 걸어가면 몇 걸음 못가서
경찰의 검문에 걸려들 것이다. 동림은 색을 도로 박스 속에
밀어넣은 다음 백원짜리 동전 세개를 집어넣고 문을 다시
잠갔다.
신정연휴라 백화점은 물론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있다가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가 방을 하나 구했다. 그리고 보이에게
무조건 만 원짜리 몇장을 쥐어주면서 큼직한 트렁크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보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큼직한 것이면 되니까 아무거나 하나 구해다 줘. 자네가 쓰던
헌 것이라도 괜찮아. 그 돈이면 새 것을 하나 살 수 있을 거야.
좀 구해 줘. 상가가 모두 문을 닫아서 구할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무 거라도 하나 갖다줘.
헌 것이 하나 있기는 한데 아마 못쓰실 거예요.
상관없어. 물건을 좀 사놓은 게 있는데 담을 데가 없어서
그러는 거야.
잠시 후 보이는 정말 낡아빠진 트렁크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
정도면 색을 충분히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빈 트렁크를 들고 여관을 나와 지하도로 내려갔다.
될수록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면서
물품보관함 앞으로 접근했다.
박스에서 색을 꺼내 재빨리 트렁크 속에 집어넣었다.
여관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걸어 잠갔다. 트렁크를 열고 색을
꺼냈다. 색 속에서 파란색의 배낭을 꺼냈다. 홍일란의 집에서
잠깐 들여다 보았지만 배낭 속에는 도자기와 그것이 깨지지 않게
채워넣은 헌 신문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배낭 속에서 모두
꺼내놓았다.
한낮인데도 방 안은 어둠침침했다. 불을 켠 다음 먼저
도자기를 불빛에 한참 동안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런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겨보기도
하면서 거기서 헤로인을 찾으려고 해보았다. 혹시 헤로인으로
만들어진 도자기가 아닐까. 헤로인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을까.
그는 도자기를 내려놓고 빈 배낭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배낭에
달려 있는 주머니는 모두 비어 있었다. 배낭을 여기저기
움켜쥐어 보던 그의 두 손이 한곳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그곳은 등에 부담을 덜 가게하기 위해 두툼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처리된 부분이 또 한군데 있었다. 어깨에 거는
멜빵 부분이었다. 그 부분도 안에 스폰지 같은 것을 넣었는지
두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멜빵을 만지작거리다가 배낭을 들어보았다. 빈
배낭치고는 어쩐지 무거운 느낌이었다. 2킬로그램의 헤로인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무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용무늬가 그려진
칼을 꺼냈다. 칼날을 펴서 그 끝으로 멜빵의 실밥을 따기
시작했다. 여러 겹으로 튼튼하게 박아진 실밥을 조금 뜯어낸
다음 꺼풀을 헤집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스폰지가 아닌 얇은 비닐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비닐을
잡아당기자 쉽게 빠져나왔다. 그것은 비닐 봉지로 그 안에는
놀랍게도 하얀 분말이 들어 있었다. 봉지의 크기는 가로 4센티
세로 5센티 정도 되어보였다. 방금 헤집은 자리에는 똑같은
크기의 봉지가 또 하나 들어 있었다. 멜빵은 일정한 크기로 칸을
나눠 틀질이 되어 있었는데 한 칸에 두개의 봉지가 나온 것이다.
그는 봉지를 집어들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분말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바로 이거였어.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과거에 헤로인을 복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첫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다른 쪽의 멜빵도 따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쪽에서도
똑같은 크기의 헤로인 봉지들이 나왔다. 이번에는 등판에 칼을
갖다댔다. 등판도 같은 크기로 칸을 나눠 틀질이 되어 있었다.
맨 아래 부분의 중간쯤을 헤치자 역시 거기서도 헤로인 봉지들이
나왔다.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잠시 동안 입을 벌린 채
여섯 개의 헤로인 봉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결심한 듯 칼을 쥐고 등판 부위의 천을 빠른
솜씨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등판 부위의 천이 뜯겨나감에 따라
헤로인 봉지들이 쏟아져나왔다. 멜빵을 뜯을 때는 봉지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칼질을 했다.
이윽고 그는 걸레처럼 헤쳐진 배낭을 구석 쪽으로 던져버리고
나서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봉지들을 긁어모았다. 그러다가 그는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 벽에 무릎을 세운 채 기대앉았다.
헤로인 봉지들은 방 가운데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 막막한 눈길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것이 마치 하얀 파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운대 백사장에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
같은 착각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는 초점없는 눈길을 멍하니
허공에 던졌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바닷가를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아들의 모습이
가물가물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던
담배 끝이 길다랗게 구부러지다가 밑으로 소리없이
굴러떨어졌다. 그는 눈을 떠 손가락 사이로 헤로인 봉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아무리 헤로인이라고는 하지만 1천만
달러어치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1천만 달러라면 한국
돈으로 90억 원이다. 90억...... 90억....... 그는 머리를
가로젓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머리 속이 어지러워 왔다. 담배를
끼고 있는 손가락이 뜨거워 왔다. 그제서야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에서 올 때 가지고 온 여행가방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옷가지를 꺼냈다. 그 안에다 헤로인 봉지들을 집어넣었다. 봉지
하나는 입고 있는 양복 안주머니 속에 간직했다. 봉지들을 모두
집어넣고 나서 그 위를 옷으로 덮고 자크를 잠갔다. 가방이 터질
듯 팽팽했다.
넝마처럼 된 배낭은 도로 색 속에 집어넣었다.
방의 뒤쪽에 조그마한 창이 하나 있었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 창에는 때가 까맣게 끼어 있었고 창틀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고리를 빼고 문을 열려고 했지만 덜컹거리기만 할
뿐 잘 열리지가 않았다. 그는 창문 한 짝을 아예 뽑아냈다.
차가운 공기가 몰려 들어왔다. 창문 앞은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창문과 벽 사이의 넓이는 불과 50센티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 좁은 공간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어두워지다가 바닥에
이르러서는 숫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두운 공간 속으로
색을 던져버렸다. 색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조금 들려왔다.
색은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본래대로 창틀에
끼워넣고 고리로 단단히 잠갔다.
신정연휴 3일 동안은 신문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라디오·텔리비젼 방송국은 평일이나 다름없이 정규 프로그램
방송을 내보낸다.
각 방송국들은 홍콩으로부터 밀반입된 다량의 헤로인을 둘러싼
살인사건과 헤로인의 행방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뉴스캐스터들은 그 사건을 홍콩 마약밀수 살인사건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건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뉴스를 타고 흘러나오자 당황한
사람은 사건을 직접 지휘하고 있는 노인배 경감이었다. 그는
수사의 필요상 사건내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부하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었는데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방송국 기자들에게
흘러나갔던 것이다.
알고보니 그의 부하들이 흘린 것이 아니고 그의 직속 상관인
과장이 그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자들에게
발표해버린 것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코보는 과장에게
분통을 터뜨렸지만 과장은 천연덕스럽게 공개수사를 벌여 시민의
협조를 구하지 않으면 범인을 제때에 빨리 체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코보는 상관을 한동안
멀거니 쳐다보다가 아무 말없이 그곳을 빠져나와 버렸지만
어차피 그렇게 된 이상 이제 수사는 공개적으로 진행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행가방은 일단 물품보관함 속에 간직해 두었다. 물품을
보관할 곳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게 생각될 수가 없었다.
그는 큼직한 트렁크를 들고 인사동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1시가 훨씬 지나고 있었다. 지금쯤
미스터 Y는 중국집으로 전화를 걸어 그를 찾고 있을 것이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기고 했다. 누군가를 그쪽으로 보냈을지도
모른다.
트렁크 속에는 도자기가 들어 있었다. 빈자리는 헌 신문지로
채워놓았다.
골동품과 민속공예품 같은 것들을 팔고 있는 인사동 골목의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고 있었다. 개중에 문을 열고 있는
가게들이 한두 개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있는 가게로 들어가 도자기를 꺼내놓고 얼마쯤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늙은 가게 주인은 그것을 한번
쳐들어보더니 웃으면서 도로 내려놓았다.
도로 가져가세요.
어리둥절해 있는 그를 보고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홍콩에서 가져온 모양인데......싸구려 도자기이니까
어디가서 내놓지 마세요. 공짜로 가져가라고 해도 안 가져갈
겁니다.
수치심까지 느끼면서 가게를 나온 그는 다른 가게로 가보았다.
그 가게에서도 마찬가지 반응이 나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군데 더 들른 다음 도자기를 쓰레기통
속에다 던져버렸다. 도자기는 시멘트통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헌 신문지만 들어 있는 트렁크는 쓰레기통
옆에다 세워놓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홍일란은 완성된 몽타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여러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완성된 것이지만 주로 그녀의 진술을
많이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범인과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완성된 몽타지는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것은 실제 인물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수정을 가할 수는 없었다. 바로 거기에
몽타지 작성의 한계가 있었다.
몽타지 작성에 협조하기 위해 그녀는 머리 눈 코 입과 턱 부분
등 네 가지로 특징지어진 수백 장의 인물사진을 보아야 했었다.
몽타지의 작성자는 그 중에서 각 부분별로 가장 가까운 모습을
찾게 해 그것을 토대로 몽타지를 작성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몽타지에 대해서는 가필 정정이 가해졌고, 그런
반복작업은 수십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그런 작업 끝에 완성된
몽타지가 지금 눈 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그녀는 몽타지 작성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이상 수정을 가해봐야 실제 인물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몽타지 작성자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됐어요. 비슷해요.
그녀는 몹시 피로했고 귀찮은 생각까지 들었다.
비슷한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똑같아야 합니다.
몽타지 작성자는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그녀를
주시했다.
똑같아요.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몽타지 작성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완벽한 몽타지를 작성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또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범인의 얼굴이
사실적이기보다 추상적이라는데 있었다.
그 얼굴은 윤곽이 구체적으로 뚜렷이 떠오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아련한 느낌으로 가물가물
사라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뚜렷한 특징을 찾아보려고
해보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막연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택시가 중국 음식점 상해 앞을 지나갈 때 동림은 운전사에게
속도를 좀 줄여달라고 말했다.
택시는 그 앞에 이르러 천천히 굴러갔다. 동림은 간판에 있는
전화번호를 눈여겨 봐두었다.
백 미터쯤 더 가서 그는 택시에서 내렸다. 수첩에다 상해의
전화번호를 적어넣었다.
조금 후 그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상해로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가 전화를 받는다.
실례합니다. 뭐 좀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김명기라는 사람
찾는 전화 걸려오지 않았습니까?
김명기씨 되시는가요?
네, 그렇습니다.
잠깐 기다려보세요. 아까부터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전화 바꿔드리겠어요.
동림은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잠시 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명기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은 누구시죠?
미스터 Y가 보내서 온 사람입니다. 당신을 만나 배낭을
인수해 오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당신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
참입니다. 물건을 가지고 빨리 이쪽으로 오십시오.
난 지금 갈 수 없어요.
뭐라구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갈 수 없단 말이요. 경찰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갈
수가 없어요.
그 말에 상대방은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배낭은 어디 있지요?
내가 가지고 있어요.
지금 있는 데를 말해 주시오.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난 지금 길가에서 공중전화를 걸고 있어요. 통화가 끝나면
도망쳐야 해요.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시오.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빨리 알려줘요!
동림은 상대방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상대방은 그에게 얼결에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주었다.
574에 778×......미스터 Y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연락을 줘요.
상대방은 세번 되풀이해서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동림은 전화번호를 수첩에다 적은 다음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그로서는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헤로인은 현재 그의 수중에 있었다. 2킬로그램의 헤로인은
돈으로 따질 때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강력한 무기일 수도 있었다. 위협을 당하고 쫓기기만 하고 있던
그는 이제 거기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었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상대방에게
역공세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그때 쯤에는 미스터 Y도 헤로인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올 것이다. 조직이 총동원되어 헤로인을 찾아나설 것이다.
목숨을 건 도망과 추적이 한 쪽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동림은 미스터 Y의 지시에 따르기보다는 헤로인을
무기로 그와 맞서는 것이 유리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놈에게 끌려다니다가는 한이 없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그의
가정은 풍지박산될 것이고, 그는 결국 피가 말라 죽을 것이다.
그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고 그는 길을 걸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미스터 Y를 만나 그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익히는 것이 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쪽은
이쪽의 얼굴은 물론 신상명세까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는 지금쯤 매독환자가 살해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자가 누구인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나를 협박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건수가 또 하나 생긴
셈이다. 나의 아내는 사람을 치어죽였고 나는 사람을 칼로
찔러죽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미스터
Y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그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완성한 몽타지를 급한 대로 복사기에 넣어 복사시키면서
노경감은 자신이 직접 부산으로 내려가 수사를 지휘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직접 내려가보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부하에게
비행기편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3시에 출발하는 표는 이미 매진되었고 4시 비행기라면 자리가
몇개 남아 있답니다.
자리 두개를 확보해 놔.
그는 수사요원을 열 명쯤 데리고 갈 생각이었지만 모두
비행기편을 이용하기에는 교통비가 너무 많이 들 것이므로 아홉
명은 차편으로 미리 출발시켰다.
2시 10분경 황금의 초생달로 추정되는 인물을 치료해준 병원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병원은 뜻밖에도 산부인과
의원이었다. 산부인과 의원이었기 때문에 찾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경감은 그 산부인과 의원에 직접 들러 원장으로부터 상처를
치료받고 떠난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길로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여형사 조미혜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추동림도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시간을 벌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을 이용해서
부산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어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스터 Y는 지금 눈이 빠지게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의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할 것으로 동림은 보고 있었다.
비행기편으로 부산에 내려가겠다고 생각했을 때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짐 검사 때 헤로인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열차나 버스편이라면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비행기의 경우 모든 짐은 검사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는 그점을 우려했지만 요즈음은 검사방식이 달라졌다는데에
다소 안심을 하면서 한번 부딪쳐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과거에는 일일이 짐을 뒤져보았지만 요즈음은 그렇지가 않고
엑스레이 투시기가 설치되어 있는 검사대 위에 짐을 올려
놓는다. 짐이 검사대를 통과하는 동안 이상이 있으면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서 경보음이 울린다. 그러면 보안요원이 즉시 그
짐을 점검한다. 검사대를 지키는 보안요원이 신경을 쓰는 것은
짐 속에 무기가 숨겨져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따라서 마약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약이 검사대 위를 통과할 때
과연 경보음이 울릴까?
3시 조금 지나 그는 국내선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대합실은 연휴를 맞아 여행이 나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창구로 가서 4시에 출발하는 부산행 비행기표 한 장을
구입 했다.
여행가방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안전을 위해 부치기로 했다.
검사대 앞에는 검사를 기다리는 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맨 뒤에 가방을 놓고 멀찌기 뒷걸음질쳤다. 검사대는 아직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가방 뒤에도 다른 짐들이 계속
놓이고 있었다.
3시 2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검사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들이 앞으로 이동했다. 짐 주인들이 자기 짐을 앞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동림은 멀리서 자기 가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가방 뒤에 큼직한 트렁크를 세워놓고 있던 노신사가
가방 임자를 찾는 듯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가방을 먼저 앞으로 당겨놓고 자기 트렁크를 그뒤에다
갖다놓았다. 동림은 그 노신사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
노신사는 고맙게도 검사대 앞에까지 동림의 가방을 날라주었다.
그는 결코 새치기하는 법이 없이 끝까지 차례를 지켜나갔다.
검사대 앞에 이르러 그는 다시 한번 주인을 찾는 듯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보안요원에게
가방 주인이 자리를 비운 것 같다고 말했다. 보안요원은 잠자코
가방을 검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제서야 동림은 움직였다.
가방이 앞으로 이동했다.
가방에는 아직 짐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검사가 끝난 짐에
한해 짐표를 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경보음이 울리면 동림은 앞으로 나서지 않고 숨어버릴
생각이었다. 가방에 짐표가 붙어 있지 않으니 보안요원은 그것이
누구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헤로인 2kg은 주인을
잃은 채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다. 동림은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검사대를 무사히 통과한 가방에 손을 가져갔다.
보안요원이 가방에다 검사필 딱지를 붙였다. 항공사 직원이
검사를 마친 가방 손잡이에다 번호가 매겨진 짐표를 붙였다.
같은 번호의 짐표가 동림의 항공권 뒷면에도 붙여졌다.
짐을 부치고 난 그는 2층으로 올라가 여행신고서를 작성한
다음 신고서와 함께 항공권과 주민등록증을 꺼내들고 보안관의
검열을 받았다. 보안관이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보고 나서 그의
얼굴에 힐끗 시선을 던졌을 때 그는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보안관은 그를 더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보안관은
여행신고서에 스탬프를 쾅 찍은 다음 그것을 자기 앞으로
내려놓고 항공권과 주민등록증은 동림에게 돌려주었다. 동림은
그것들을 받아 챙기면서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몸 수색을 받은 다음 홀을 가로질러 보딩브리지로
들어섰다.
비행기 안에는 이미 승객들이 대부분 앉아 있었다. 그의
자리는 뒤쪽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비좁은 통로를 걸어갔다.
같은 비행기 안에는 노경감과 조미혜가 먼저 들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자리는 중간쯤에 있었다. 노경감은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는 승객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수사관으로서의 오랜 생활 끝에 습관화되다시피한 거의 본능적인
관찰이었다. 그의 시야에 추동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에게는
동림이 검은 점들이 박힌 회색의 낡은 코트를 입은 후줄그레한
중년 사나이로밖에 보이지 안핬다. 코트는 헐렁해서 몸에 맞지
않아 보였다. 검은 테의 안경은 무겁게 느껴졌다. 저렇게 생긴
사람의 직업은 정말 알아 맞히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경감은
새로 안으로 들어선 여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는 몽타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 범인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몽타지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A300기는 정시보다 5분 늦은 시각에 공항을 이륙했다.
(상권 끝, 중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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