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국제열차살인사건 2-3

3학년2반 | 2022.02.05 07:39:12 댓글: 0 조회: 432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679
┌────────────────────────────┐
│ 7.위조전문가 │
└────────────────────────────┘

같은 날 밤 서울.
몹시 추운 밤이었다. 너무 춥기 때문에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10시 조금 지났을 때 서대문 B아파트 단지 안으로 은색의
중형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차는 202동 앞에 멈춰서더니
이윽고 차 안에서 사치스런 차림의 40대 여인이 내렸다. 안경을
낀 그 여인은 아파트 건물 입구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는데
한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그녀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 5분도 채 못돼 8층의 한
창문에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오리털 파카 차림의 사나이는
202동 805호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파카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골목에서 나왔다. 그의 한쪽 손에는
두꺼운 종이박스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곧장 절름발이 여인이 사라진 입구 쪽으로 걸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805호 앞에 이른 그는 입고 있던 파카를 벗었다. 파카
안에는 아파트 경비원의 복장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파카
주머니 속에서 경비원 모자를 꺼낸 쓴 다음 차임벨을 눌렀다.
여러 번 누른 뒤에야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잔뜩 경계심을 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경비실에서 왔습니다.
경비실에서 무슨 일로 왔나요? 볼 일이 있으면 내일 아침에
오세요.
소포 가져왔습니다.
그는 안에서 구멍을 통해 자신을 잘 볼 수 있게 문구멍 앞에
똑바로 섰다.
잠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 밖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다 열린 것이 아니고 안에는
쇠고리가 걸려 있었다.
소포가 왔기에 가져왔습니다. 아까 낮에 왔습니다.
어디서 그런 게 왔지?
여인은 틈으로 소포를 확인하고 나서 쇠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추동림은 여인을 밀어붙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놀란
여인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목에 와닿는 칼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
동림은 안으로 문을 잠갔다.
그녀는 살기를 느끼고 몸을 떨어댔다. 동림은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말했다.
나는 막판에 몰려 있는 사람이야. 지금 기분같아서는 아무나
죽일 수 있어. 그러니까 내 뜻을 거역하지 마.
잘 알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돈은 저쪽에
있습니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금고를 가리켰다.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야.
안방은 작업실 같았다. 긴 책상이 벽에 붙어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얼굴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들과 각종 증명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복사기며, 환등기, 타자기 같은 것들도 한켠에
놓여 있었다.
당신은 위조전문가지?
뚫어질 듯 들여다보며 묻는 말에 그녀는 뒷걸음질쳤다.
움직이지 말고 그 의자에 앉아.
그는 쥐고 있는 칼로 둥근 탁자 앞에 놓여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는 주춤거리며 의자와 다가와 앉았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놔.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빨리 대답해. 난 바쁘다. 당신은 위조전문가지?
네, 그래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얼굴을 잘 봐. 기억이 날 거야. 요즘 갑자기 유명해진
얼굴이지만 유명해지기 전에 당신은 사진을 통해 이미 내 얼굴을
봤을 거야. 잘 보라구.
그는 경비원 모자를 벗어던졌다.
그녀의 두 눈이 안경 너머에서 갑자기 커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해요.
당신은 명동에 있는 광명 사진관에서 내 명함판 사진을
찾아갔어. 어떤 사람의 지시를 받고 찾아갔었지. 나는 그 사진을
가져다가 뭘했는지 그걸 알고 싶어.
여권을 만들었어요.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걸 내놔. 보고 싶으니까.
금고 속에 있어요.
그녀는 구석 쪽에 놓여 있는 검은 색의 소형 금고를 가리켰다.
열어.
그녀가 금고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을 때 동림은 의자에
걸어놓은 그녀의 핸드백을 집어들어 안에 있는 것들을 탁자 위에
쏟아놓았다.
당신 이름이 뭐지?
김문자입니다.
그녀는 금고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동림은 탁자 위에서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집어들었다. 그
면허증 소유자의 이름은 박지순(朴芝順)이었고, 거기에는
절름발이 여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박지순, 그럼 이 면허증도 가짜란 말인가? 경찰에 한 번
알아볼까?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가 면허증을 들고 있는 것을 창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동림은 이번에는 주민등록증을 집어들었다. 면허증에 기재되어
있는 인적사항과 주민등록증에 실려 있는 내용이 일치했다. 그는
두개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겁에 질려 서있는 여인의 뒤로 금고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내놔.
박지순은 다시 몸을 돌려 금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이윽고 그녀는 탁자 위에 여권을 내놓았다. 동림은 그것을
집어들고 펴보았다. 그것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조여권이었다. 거기에는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그의
인적사항이 사실대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걸 가지고 내일 당장에라도 출국할 수 있단 말이지?
네, 그래요. 전문가가 봐도 모를 거예요. 일본과 미국 쪽
비자 도장도 찍어놨어요.
그녀는 겁에 질려 있던 태도를 바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녀는 강파른 얼굴이었는데 한쪽 뺨이 화상을 입었는지 꽤
일그러져 있었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꼬리가 긴 두 눈은 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동림의 위조여권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자 여인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 여권 가지고는 출국할 수 없을 거예요.
왜?
당신이 수배 인물이라는 거 신문 보고 알았어요. 당신은 그
얼굴에 본명을 사용해 가지고는 절대 공항을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알려줘서 고맙군.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나머지 내
사진들은 어디 있지?
박지순은 구석 쪽에 세워져 있는 철제 박스를 열더니 그
안에서 조그만 봉투를 꺼내가지고 왔다. 동림은 그것을 받아서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보았다. 그의 명함판 사진들이 정확히
17장 들어 있었다.
모두 스무장이었는데...... 두 장은 어디 갔지?
한 장은 잘못해서 버렸고 또 한 장은 보관용으로 따로
두었어요.
그것도 가져와.
그녀는 다시 금고로 가서 두터운 파일을 가져왔다.
이게 뭐지?
보시면 알 거예요.
이상하게도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위조여권을 복사한 것으로 각 인물들은 가나다순으로
철해져 있었고 각 복사물마다에는 해당 인물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동림은 파일의 뒷부분에서 자신의 복사물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거기서 빼냈다. 그녀의 말대로 그 복사물에는 그의 명함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이게 당신이 지금까지 위조해 준 인물들인가?
그녀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끄덕였다.
마지막 인물의 번호는 468번이었다.
많이도 해줬군.
중복되는 사람도 더러 있어요. 가명을 여러 개 사용하는
사람은 그만큼 여권도 여러 개 사용하고 있어요.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그녀는 열심히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신문을 통해 알고 있는 그는 마약조직에 관계하고
있는데다 살인범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경찰에
쫓기고 있는 살인범이 막판에 몰린 나머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녀는 그 점을 제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위기를
넘겨보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뭣하려고 이렇게 모아뒀지?
필요할 때 사용하려구요. 저는 여자인데다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언제나 약점을 잡힌 채 살아가고
있어요. 가장 큰 약점은 그들에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에요.
만일 그들이 저를 협박하면 저는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저도 저를 방어하는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여권을 모두 복사해 두고 사진도 한 장씩 보관해
둔 거예요. 그들이 저를 협박하면 저도 그들을 협박할 수 있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그들의 약점을 잡아놓은 거예요.
아주 영리하군.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동림은 그녀를 한참 동안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겁이
나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알고 싶은 게 있어. 당신은 마약조직 트라이어드와 관계가
있나?
그런 건 몰라요. 저는 단지 주문을 받고 불법적으로
위조증명을 만들어 주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 걸 의뢰하는 측도
대부분 범죄단체나 범죄자들 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해요.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나는 당신한테 내 위조여권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자가
구인지 그자를 알고 싶어서 왔어.
박지순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을 모르시나요?
몰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전화로 목소리는 여러 번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어.
저는 같은 조직에서 일하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요.
그런 조직하고는 난 상관 없는 사람이야. 그놈에게 잘못
걸려들어 이렇게 쫓기는 신세가 된 거야. 그놈은 나를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나와 우리 가족을 말살하려 하고 있어.
나는 하는 수없이 놈의 헤로인을 내 관리하에 두었지. 나와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내가 그걸 가지고 있는 한 놈은
나를 죽일 수 없을 거야. 내가 놈에게 잡히기 전에 내가 먼저
놈을 찾아야겠어. 그놈 여권도 여기서 만들었겠지?
네, 그래요.
어떤 거야?
그녀는 파일을 뒤적이더니 세 장의 복사물을 빼냈다. 거기에는
이름이 제각기 다르게 나와 있었고 얼굴 사진도 약간씩 다르게
나와 있었다.
첫번째 이름은 이장문(李長文)이었다. 살찐 얼굴에 머리는
대머리였고 코밑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안경은 테가 가는
금테안경이었다. 두 눈은 가늘게 물결치고 있어서 웃고 있는
인상이었다.
두번째 이름은 장도문(張道文)이었다. 대머리 대신 머리에는
가지런히 빗질이 된 가발이 얹혀져 있었다.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그것만 보아서는 가발인지 모를 정도였다. 가발 때문에
이장문보다 훨씬 젊은 마흔 안팍으로 보였다. 코밑 수염도 달고
있지 않았고, 눈에는 네모진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세번째는 박상기(朴相基)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장도문의 얼굴에다 코밑 수염을 조그맣게 달고 안경을 무테로
바꾼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도 장도문과 박상기의 얼굴은
사뭇 서로 달라 보였다. 이장문과도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얼굴에 약간의 수정만 가해도 그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데에 동림은 적잖게 놀랐다.
그는 세 장의 사진을 놓고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세 명은 모두
돼지처럼 살찐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경을 끼고 있는
점이 일치했다. 가늘게 물결치는 눈으로 하여 세 명 다 웃고
있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뚜렷한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오른쪽 이마에 나있는 흉터였다.
이 사람 본명은 뭐지? 이 중에 어떤 게 본명이야?
그는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물었다.
아마 셋 중에 어떤 것도 본명은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은
본명을 드러낼 사람이 아니예요.
그럼 본명은 뭐야?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동림은 그녀를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모른다고 하지 마. 그런 식으로 나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자를 만나려면 어떻게 하지? 연락처가 어디야?
죄송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연락처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아요.
그래서 그쪽에서 연락이 오기 전에는 이쪽에서 연락을 취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만나려고 해봤자 만날 방법이 없어요.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아주 철저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사람이에요.
그럼 물건 같은 것은 어떻게 전하지?
운반책을 통해서 서로 전해주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운반책을 만나보면 알 수 있겠군?
운반책도 그 사람하고는 전화로만 연락이 가능한가 봐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그자를 찾아야 해. 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 돼. 당신이 좀 협조해 줄 수 없을까?
그가 갑자기 강요가 아닌 타협조로 나오자 그녀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재빨리 그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리겠어요. 저도 사실 오래 전부터
이짓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그 사람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갖은 협박으로 일을 부탁해 오고 있어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적극
협조해 줄 수 있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을
믿기에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었다.
고맙군. 그것이 빈 말이 아니기를 바라겠소.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존대어를 썼다. 그러자 그녀는 한 수
더 떴다.
두고 보시면 빈 말이 아니란 것 아실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는 비로소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파일에서 미스터 Y의 위조여권 복사물 세 장을 모두
뽑아냈다.
이것도 내가 가져가겠소.
가져가시는 건 좋지만 한 부씩 더 복사해서 여기에도 비치해
두면 좋지 않을까요?
동림은 생각해 보고 나서 그것을 그녀에게 도로 내주었다.
빨리 복사하시오.
감사합니다.
그녀는 복사기가 놓여 있는 쪽으로 종종 걸음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그녀는 처음 것을 동림에게 주고 새로 복사한 것들을
파일에 철했다.
당신은 매우 철저하군.
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잖아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동림은 호주머니에서 자신의 여권용 사진을 한 장 꺼내서
주었다.
이 사람이 누구죠?
나를 찍은 것인데 자세히 보기 전엔 알아보기 힘들 거요.
철저히 변장해서 찍었기 때문에.......
그렇군요. 아주 훌륭해요. 이 정도의 변장이라면 여간해서는
알아볼 수 없을 거에요.
그것은 나이 든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찍기 위해
그는 머리에 잿빛의 가발을 썼고 안경도 벗었다. 안경을 벗은
대신 노리끼리한 빛이 나는 콘택트렌즈를 눈에 끼었다. 그리고
콧잔등에는 가발에서 잘라낸 잿빛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정교하게 붙여놓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입 언저리는
이상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것은 입술과 잇몸 사이에 껌 같은
것을 잔뜩 끼워서 그렇게 부풀린 것이다.
그걸로 여권을 하나 만들어주시오. 오늘 밤중으로 만들어
주시오.
오늘 밤중으로 말인가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오늘 밤중으로 만들어야 해요. 인적사항은 여기에
있소.
그는 카드를 한장 꺼내주었다. 거기에는 위조여권에 필요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인적사항이었다.
오늘 밤중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적어도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해요. 더구나 급히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게
있어요. 내일 전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아주 급한 거예요.
급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주시오.
그래야 당신은 안전할 거요.
그때 고양이가 한 마리 소리없이 방안으로 들어와 탁자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꼬리를 치켜들며 야옹 하고 울었다.
생김새와 소리로 보아 늙고 병든 고양이 같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고양이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아, 나 좀 도와다오.
지금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란다. 나를
헤치려고 하고 있어. 제발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저놈의 얼굴을
할퀴란 말이야. 그러나 고양이는 약한 목소리로 야옹 할
뿐이었다.
그녀가 고양이를 안으려 하자 동림은 재빨리 먼저 손을 뻗어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그의 오른 손에는 재크나이프의 날이
튀어나왔다.
아, 안돼요!
그녀가 놀라 소리쳤다.
떠들지 마!
그는 고양이를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안 돼요! 살려줘요!
조용히 해! 도망칠 생각하지 마! 나한테는 네 주민등록증과
자동차 면허증이 있어. 만일 도망치면 그것들을 경찰에 넘겨
줄거야. 네가 위조전문가라는 사실과 함께.
그는 욕실 문을 쾅 닫았다.
박지순은 고양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갑자기 뚝 그치는 것을
들었다.
조금 후 문이 열리고 동림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보라는 듯
문을 열어둔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욕실 안으로 들어간 여인은 욕조 속을 들여다보고는 그만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욕조 속에는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는 목이 잘린 채 욕조 속에 내던져져 있었다. 욕조
바닥에는 검붉은 피가 흥건히 괴어 있었다.
고양이는 숨이 채 끊어지지 않았는지 그때까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박지순은 몸을 무섭게 떨어대면서 변기 위에 얼굴을 숙이고 위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쓴 물이 나올때까지 토한
다음 얼굴을 씻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그 고양이는 그녀가 자식처럼 사랑해온 놈이었다. 그것을 칼로
목을 잘라 죽이다니! 그녀는 분노와 공포로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새삼 추동림 이라는 자가 무시무시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잔인한 자라면 사람 목도 단숨에 잘라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들여다 본 다음 욕실을 나와 안방으로 비틀비틀 들어갔다.
봤지?
동림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는 탁자 앞에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양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사람을 많이 죽여본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 경험을 되살리게 하지 마. 다시 한 번
부탁한다. 오늘 밤 중으로 내 여권을 만들어 줘.
그녀는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해드리겠어요.
그녀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가 작업을 하기
시작하자 그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것을 지켜보다가 뒤로
물러나 팔짱을 낀 채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오늘 밤중에 찾아올 사람은 없나?
없습니다.
그녀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에는?
그 사람이 올 겁니다.
그 젊은 남자 말인가?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난 매일 당신 집에 출입하는 사람을 체크했지. 당신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만나는지도 알아봤어. 매일 오는 그
남자가 내일 아침에도 오는가?
네, 올 겁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지?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해주고 있어요.
운반책이기도 하고 정부이기도 하고 그러겠지.
그녀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책상 위로 고개를 숙였다.
만일 그가 나타나면 그를 따돌려.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란 말이야. 문을 열어주지 마.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안정된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그는 더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감탄하는 눈길로 구경하기도
하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면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작업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곁에서 보기에도 매우 힘들고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구입했는지 몰라도 진짜 여권을 앞에 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중년 사나이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거기서 먼저 그 사진을 떼어내는 작업을 했다. 접착
부분이 상하지 않게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뗴어냈다.
그런 다음에는 그사진이 붙었던 자리를 말끔히 다듬었다. 거기에
약품을 칠하고 그곳을 칼끝으로 긁어대자 흔적이 말끔히 가셨다.
다음에는 타이핑된 글자를 지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글자
위에 묽은 약품을 칠하자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것을 구경하면서 동림은 내심 적잖게 감탄했다.
당신은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지?
그녀의 대답을 꼭 듣고 싶어서 물은 것은 아니었는데 거기에
대해 그녀는 즉시 대답해 주었다.
남편한테 배웠어요. 그이는 지지리도 못난 사람이었어요.
저한테 남겨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것이
미안했던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저한테 이런 기술을
가르쳐줬어요.
동림은 문득 충무에 있는 아내한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전화통은 탁자 위에 있었다.
전화를 좀 쓰겠소.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내가 아닌 장모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장모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긴장되고 흥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접니다.
아이구, 이 사람아! 지금 어디 있는가?
그의 장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이구, 이 사람아!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어떤 놈들이
밤중에 들이닥쳐 가지고 인하를 납치해 갔다네!
네, 뭐라구요?
장모는 계속 흐느끼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아들의 울음소리뿐 이었다. 수화기를 움켜쥔 채 떨고
있는 그를 박지순이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인하 엄마 좀 바꿔주십시오.
한참 후 그는 억눌린 소리로 말했다.
남화는 부산집에 가 있네. 그놈들이 그쪽으로 전화를
걸겠다고 했나봐. 난 무슨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경찰에 자수해서
사정을 털어놓게. 그래야만 우리 인하를 찾을 수 있다네.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납치를 해간단 말인가. 천벌을 받을
놈들! 그 어린 것이 엄마를 찾을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했나요?
신고하고 말고. 자네만 협조해 준다면 아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고 그랬어.
경찰이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의 얼굴은 침통하고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폭발할 것만
같은 그의 표정에 박지순은 숨을 죽였다.
그의 침묵은 깨뜨리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이윽고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는데, 눈빛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은 그녀를 스쳐지나가 허공에서 초점을 잃은 채
엇갈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내 아들을 납치해 갔어. 내 아들을.......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방안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그녀 곁을 스쳐지나 창가로 다가서더니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찬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그는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놈들이 내 아들을 납치해 갔어...... 내 아들은 어디에 있지.
어디에.......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 아들을
빼앗긴 사내한테 남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의 뒷모습은
북받치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고양이처럼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목을 움츠리고 계속 그를 관찰했다.
그들이 그럴 줄은 몰랐어...... 내 아들을 납치할 줄은 정말
몰랐어.......
중얼거리는 그의 뒷모습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악마예요.
그녀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런 말을 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내 아들은 어디 있지...... 어디 가서 내 아들을 찾지......
내 아들이 울고 있어...... 우는 소리가 들려.
그는 여전히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그가 돌아섰을 때 그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충혈된 눈빛을 하고 있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가 그녀 앞에 다가와 섰을 때 그의 몸은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어대면서 겁에 질려 일어서는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어깨가 부서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지만 입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놈들이 내 아들을 납치해 갔어. 어떡 하면 좋지?
그는 악을 쓰든가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가 떨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몸이 떨려왔다.
빨리 아들을 찾도록 하세요.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빨리 찾지?
그녀는 그 목소리에서 자식을 찾는 아비의 비통한 절규를 듣는
듯했다. 고양이의 목을 잘라버리는 잔인성과 자식을 잃고
절규하는 아비의 비통한 눈물 사이에서 그녀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는 혼란을 느껴야 했다. 이 사람은 어느 쪽일까? 이
사람한테는 이중성이 있는 것일까? 극과 극이 공존하는 인물은
드물지만 있을 수 있다.
제가 도와 드리겠어요. 힘이 될지 모르지만 도와드리겠어요.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생명이 없는
물건을 쳐다보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어떻게 나를 도와주겠다는 거지?
아이를 납치한 자들에 대해 제가 알아볼 수 있는 한 최대한
알아 보겠어요. 특히 염사장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 보겠어요.
염사장이 누구지?
세 가지 위조여권을 주문했던 그 사람을 우리는 염사장이라고
불러요. 당신의 여권도 주문했던 그 사람 말이에요. 하지만
염가라는 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당신은 염사장이라는 자를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했어. 그런데 이 자가 그 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그는 세 장의 복사지에 붙어 있는 명함판 사진들을 가리켜
보였다.
그쪽 연락책이 염사장 것이니 특별히 잘 만들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염사장인 줄 알았어요.
나를 도와주고 싶다는 거 진정으로 하는 말인가?
네, 정말이에요.
그는 그녀에게서 물러나 조금 떨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그가 침착해 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음이
똑똑히 보였다.
나는 당신한테 부탁하고 싶지 않아. 그 대신 강제로 요구
하고 싶어. 당신은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거야. 내가
당신의 신상에 관한 것과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마. 당신이 내 지시에 따르지 않을 때 나는 당신의 정체를
경찰에 알려줄 거야. 야비한 짓이지만 나로서는 그 방법 밖에
없어. 나는 내 아들을 찾아야 해.
알겠어요. 당신의 지시에 따르겠어요.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당신한테 연락을 드리겠어요.
나한테 연락할 수는 없어. 내가 이쪽으로 수시로
연락하겠어.
그는 숨을 몰아 쉰 다음 갑자기 수화기를 집어들고 부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을 돌리기가 무섭게 신호가
떨어지면서 여보세요! 하는 여자 목소리가 절박한 느낌으로
들려왔다. 그것은 그의 아내의 목소리 였다.
응, 나야.
큰일 났어요! 인하가 납치됐어요!
이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모님한테서 이야기 들었어.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들한테서는 아무 연락 없어?
그 사람들은 당신만 찾고 있어요. 그 물건을 빨리 돌려주지
않으면 인하를 죽이겠대요.
다시 전화하겠어. 이 전화는 오래 쓸 수가 없어.
여보세요!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가만히 몸을 떨었다. 장거리
시외전화일 경우 경찰이 도청하고 있다면 전화번호를 추적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빨리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전화가 끊어지고 난 후 조금 지나자 전화벨이 울렸다.
노경감이 수화기를 재빨리 집어들었다.
서울 서대문 지역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정확한 것은 전화를
너무 빨리 끊었기 때문에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알았어. 계속 지켜.
경감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과거에는 장거리 시외전화일 경우 교환을 거치기 때문에
전화를 거는 쪽의 전화번호는 시외전화 신청과 동시에 교환에게
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이 자동통화권이
되는 바람에 장거리 자동통화의 경우 거는 쪽의 전화번호는
자동으로 체크되어 컴퓨터에 수록되어 있지만 수천수만 건의
기록에서 범인이 이용한 전화번호를 집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송신처의 전화번호는 기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빗발치는 수천수만 회선에서 추동림의
집으로 걸려오는 선을 전화국 직원의 도움으로 잡는 일이다.
그럴려면 걸어오는 자가 전화기를 오래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추동림은 눈치를 채고 통화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했던
것이다.
경찰은 충무에 있는 남화의 친정집으로 걸려왔던 전화도
잡는데 실패했었다. 그때에도 서울 서대문 지역에서 걸려왔다는
것만 알아낼 수있었다.
경감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서울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추동림이 충무로 전화를 건 시간은 11시 27분이었다.
두번째로 부산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11시 45분이었어.
두 번 다 서대문 지역에서 걸었어. 그 시간대에 충무와 부산으로
전화를 건 번호를 찾아봐. 11시 27분부터 45분 사이에 충무와
부산 두곳으로 전화를 건 서대문 지역의 전화번호를 찾으란
말이야. 비슷한 시간대에 충무와 부산 두곳으로 시외전화를 건
곳은 그렇게 흔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한곳밖에 없을지도 몰라.
즉시 알아보도록.
경감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추동림이 한곳에서 서로 다른
지역으로 시외전화를 건 것이 결정적인 미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감은 지금 추동림의 아파트에 남화와 함께 있었다.
그 집의 전화선에는 도청용 전화기가 따로 설치되었고
녹음장치까지 부착되어 있었다.
경감이 녹음 테이프를 틀어 남화와 추동림의 통화 내용을 다시
듣고 있는 동안 남화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경감은 녹음기를
끄고 나서 걱정스런 눈길을 남화에게 던졌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한 채 울고만 있었다. 저러다가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녀가 비통해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 인하는 살아 있을까요?
그녀가 흐느끼다 말고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살아 있을 겁니다.
경감은 다음에 추동림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조전문가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동림이
말했다.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요. 가능한 한 빨리 말이요.
여인이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충무와 부산 두곳에다 전화를 했는데, 경찰이 도청을
하고 있다면 전화번호를 추적할 수있어요. 얼마나 빨리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작업을
일단 중지하고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거요. 다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말고 필요한 것만 챙기시오.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15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집과 전화번호는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지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이 온다 해도 제
이름은 알 수 없을 거예요.
다행이군.
그 정도 신경을 쓰지 않고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여기 말고 다른 은신처가 있나요?
네, 있어요.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에요.
그녀는 가방에다 필요한 것들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거기에도 전화가 있나요?
네, 있어요.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시오.
그녀는 망설이다가 그에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면서
의혹에 찬 눈길을 던졌다. 그가 정말 그녀를 믿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시험삼아 그래본 것인지 그녀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메모지에 적힌 주소와 전화번호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것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최소한 그것이 가짜로
적어준 게 아니냐고 물어봄직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처음과는 달리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난 먼저 가겠소. 당신은 빨리 다른데로 옮기시오.
그가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여권은 가져가지 않으실 건가요?
당신 곁에 붙어 앉아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밤새에 완성해
두면 내가 은신처로 전화를 하겠소.
동림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그를 그녀가 불러
세웠다.
잠깐! 당신은 저를 믿나요? 제가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떡하실 거죠?
나는 당신을 믿어요.
뭘 보고 믿는 거죠?
당신은 영리한 여자니까, 경찰에 쫓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겠지.
그는 나가려다 말고 휙 돌아서서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당신은 두 가지 방법을 다 생각하고 있을거야. 한 가지는 내
입을 막기 위해 나를 영원히 잠재우는 방법이지. 다른 한가지는
나한테 적극 협조하는 거야. 나를 잠재울 생각은 하지 마.
그는 신을 신은 채 방안으로 도로 들어와 위조여권 복사
파일을 통째로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이걸 모두 내가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그녀가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나한테 반항하지 마! 이건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당신이 내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경찰에 고스란히 넘겨줄 거야. 당신
신분증하고 말이야.그러나 당신이 내 말을 잘 들어주면 이건
틀림없이 돌려주겠어. 당신은 사람을 시켜 나를 없애고 싶겠지.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나는 당신 신분증과 이걸 상세한
설명을 붙여 내가 잘 아는 사람한테 맡겨놓을 거야. 그 사람은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이걸 무조건 경찰에 우송할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끝장이야. 당신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지.
빨리 떠나란 말이야!
그는 홱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서있다가 급히 그를 쫓아갔다.
잠깐만요!
그는 현관을 열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까 써준 거 다 틀린 거에요.
동림은 잠자코 메모지를 꺼내놓았다.
그녀는 조금 전에 써놓았던 것을 지우고 그 밑에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새로 적어주었다.
고맙소.
그는 더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살을 에이는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추운 밤에 내 어린 아들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이미 죽은게
아닐까.
어린 자식을 생각하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울음소리가 삭풍을 타고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그는 가로수를 끌어안았다. 가로수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동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극도로 감정을 억제하는 바람에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정신없이 걷다가 공중전화를 발견하고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산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어린 아들이 어떻게 납치되었는지 그 경위를 자세히 알고
싶었고, 남화는 처음부터 울먹이는 소리로 그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자루 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바닷물 속에
쳐넣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는 더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끝까지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헤로인을 즉시 돌려주세요. 그것만 돌려주면 인하를
풀어주겠다고 했어요. 그 전에 경찰에 자수하세요. 경찰은 모든
준비를 해놓고 있어요.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면 인하를 찾을 수
있고 그놈들도 잡을 수가 있을 거예요.
알았어. 그 문제는 생각해 보고 나서 결정하겠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어요. 당신은 인하가 납치됐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녀는 잔뜩 원망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해. 일단 그자한테 전화를 걸어보겠어. 난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러고 싶지도 않아. 오로지 인하 생각만
하고 있어. 인하만 찾을 수 있다면 난 행복하게 죽을 수 있어.
전 이제 당신하고 더이상 통화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전
인하를 찾지 못하면 죽을 거예요. 무슨 염치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녀의 말소리는 사라졌다.
이 봐! 이거 봐! 인하야!
그가 다급하게 부르자 아내의 목소리 대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화씨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인하를 찾다가
정신을 잃곤 합니다. 너무 충격이 큰데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으니 몸이 지탱해 낼 도리가 없죠. 이대로 가다가는 목숨까지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
부탁합니다. 그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켜 주십시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 남편인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에 동림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사가 늦었소. 난 홍콩 마약밀수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부서의 책임자요. 노인배 경감이라고 하지요.
동림은 마침내 벼랑 앞에 와 서있는 느낌이었다.
경찰하고는 할 말이 없습니다.
동림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상대방이 소리를 질렀다.
어리석은 소리 말아요!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아이를 찾을 수
없어요!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어! 제일 급한
일은 아이를 찾는 일이란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조그마한 소리로 응답했다.
알고 있다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려는 거요? 만사
제쳐놓고 우리 둘이서 만납시다. 만나서 상의합시다. 당신
혼자서는 인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도와주면 아이를
빨리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좌우간 빨리 좀 만납시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이를 찾을 때까지 당신을 체포하지 않겠소. 만나서
이야기나 좀 합시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건 안 됩니다. 경찰을 만나기 전에
범인들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도 찾을 수 없고 당신도 죽게 돼요. 그 조직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조직이란 걸 당신은 모르나요? 그렇게
하지말고 우리가 옆에서 지원해 줄 테니까 안전하게 그들을
만나도록 해요. 경찰의 협조를 구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경찰은 여러가지를 동시에 노리고 있겠지요. 저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범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만일
경찰이 개입되면 아이를 영영 못찾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빨리 만나야 해! 한시가 급해! 아이가
죽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나?
듣고 있습니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당신은 놈들과 어떻게 접촉하겠다는 거지?
그들과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그걸 나한테 말해줄 수 없을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작자 같으니!
경감은 분노에 차서 쏘아붙였다.
미안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경감한테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십시오.
경감은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나서 그에게 다시 자수하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곳이 어디쯤인지 그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길을 건너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번 장거리 전화는
꽤 길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게 될지 궁금했다.
골목에 몸을 숨기고 서있은 지 5분쯤 지났을 때 승용차 한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그가 조금 전에 빠져나온 공중전화 부스
앞에 멈춰섰다. 차에서 세 명의 사나이들이 내렸다. 그들은
공중전화 부스를 덮쳤다. 부스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도 그들 중의 한 명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그 주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경찰
페트롤카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와 멎었다. 페트롤카 안에서도
사복차림의 두 사나이가 뛰어내렸다.
허탕이야! 내뺐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동림이 서있는 골목 안에까지
들려왔다.
동림은 골목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한참 꾸부꾸불 걸어가자
이윽고 큰 길이 나왔다.
길가에 서서 떨고 있은 지 20분쯤 지나서야 빈 택시가 굴러와
멎었다.
택시를 타고 20분쯤 달려가다가 그는 차에서 내렸다. 건너편에
공중전화 부스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길을 건너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신호는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신호가 떨어지면서
잠에 취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터 Y를 대주시오.
그는 감정을 억제하며 말했다.
뭐라구요?
풀릴대로 풀린 느슨한 목소리로 여인이 물어왔다.
미스터 Y를 대라고 했소.
여보세요. 한밤중에 남의 잠을 깨어놨으면 미안하게
생각해야지 딱딱거리긴 왜 딱딱거려요.
미안합니다.
미스터 Y를 대라구요? 당신은 누구시죠?
난 황금의 초생달이라고 합니다.
아, 황금의 초생달......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야겠어요.
그 분은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아요. 당신한테서 전화가 오면
자기 있는 데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제가 전화번호를 알려준 지 10분 내로 그쪽으로
전화를 걸지 않으면 통화가 불가능해요. 10분 내로 걸어주세요.
동림은 볼펜을 꺼내 손바닥에다 그녀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적었다.
미스터 Y는 철두철미하게 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전화번호를 추적해서 조금 전에 전화를 받은 여인을
족친다해도 그녀는 미스터 Y가 있는 곳을 모를 것이다. 두번째
전화번호를 추적해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분이
경과해서 미스터 Y는 도망쳐버리고 없을 것이다.
동림은 다시 동전을 집어넣고 두번째 전화번호의 다이얼을
눌렀다.
한참 신호가 간 뒤 신호가 떨어지면서 잠에 취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동림이 기억하고 있는 가는
목소리였다.
미스터 Y.......
동림은 숨을 죽이고 상대방을 불렀다.
상대방도 숨을 죽인 듯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암호를 말해 봐.
가는 목소리의 사나이가 말했다.
황금의 초생달.......
황금의 초생달......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지.
가래 끓는 소리가 귀를 후비고 들어왔다.
내 아들은 어디 있지?
아, 인하 말이군. 인하는 내 곁에 잘 있어.
느리고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동림은 치가 떨려왔다.
내 아들한테 전화를 바꿔줘. 살아 있는지 목소리를 듣고
싶으니까 전화를 바꿔줘.
그거야 어렵지 않지. 당신 아들은 감기에 걸려서 열이 많아.
지금 자고 있는데 깨워줄까?
빨리 바꿔!
동림은 낮으면서 격렬하게 소리쳤다.
이 자식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내가 싫으면
바꿔주지 않는 거야, 알았어? 전화를 바꿔주고 안 바꿔주고는
전적으로 내 맘에 달려 있어. 아들을 바꿔달라고 공손히 말해봐.
공손히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바꿔줄 수 없어.
동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내 아들을 좀
바꿔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란 말이야. 기다려.
유들거리는 목소리가 전화에서 사라지더니 조금 후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기침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의 아들의 목소리였다.
인하야! 인하야!
그는 수화기를 움켜쥔 채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어린 아이는 약하디 약한 목소리로 힘없이 아빠만 부르다가
심한 기침에 그만 입이 막혀버린다.
인하야! 인하야!
동림은 울부짖었다.
흡사 모기소리 같은 어린 아들의 목소리와 기침소리에 그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애끓는 목소리로 인하를 불렀을 때 어린 아들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울음을 떠뜨렸다.
인하야...... 인하야.......
쉰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그는 견디지 못하고 그만
전화통에 얼굴을 부벼댔다.
흐흐흐...... 황금의 초생달...... 기분이 어때? 견딜만
하나?
미스터 Y의 목소리가 벌레처럼 스물스물 귓속으로
기어들어왔다. 동림은 울음을 삼키면서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스터 Y, 언젠가 너를 만나는 날이 올 거다. 그때가 오면
나는 네놈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야 말 테다! 아니,
죽여버리는 건 너무 단순해. 네가 고통스럽게 여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두 눈을 도려내고 코도 도려내고 손발도 모두 잘라
버리겠어. 이빨도 모두 빼버리겠어. 벌레처럼 목숨만 부지할
수있게 해주겠어. 앞으로 나는 네놈을 추적하는데 내 모든
시간을 바칠 거다. 반드시 내 손으로 네놈을 잡고야 말 테다!
더러운 놈! 비열한 놈!
흐흐흐...... 최후의 발악을 하는군. 조금 지나면 미치겠지.
미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지. 아들이 보고 싶지 않은가?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영원히 아들은 만날 수 없을 걸. 어린
아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어. 없애버릴 필요가 있으면
없애는 게 우리의 방침이야. 추동림,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지
않은가?
보고 싶다. 제발 내 아들을 돌려줘!
그것은 울부짖음이었다.
너는 내가 헤로인을 돌려달라고 그렇게 애걸했을 때 돌려주지
않고 코웃음만 쳤어. 그때 내가 당한 고통에 비하면 지금 네놈이
맛보고 있는 고통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야. 모든 건 네가
저지른 일이야. 네가 일을 확대시켰단 말이야. 헤로인은 어디
있지?
내가 보관하고 있다.
물건에 손대지 않았나?
하나도 손대지 않았어. 그대로 있어. 지금이라도 당장 갖다
줄 테니까 내 아들을 돌려줘.
흐흐흐...... 아주 급하게 됐군. 급할 거 없어. 하나도 급할
거 없단 말이야. 네놈이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야.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런 즐거움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상대방이 여유있게 나오는데 반해 동림은 조금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비참하게 전화통에 매달렸다.
그러지 말고 내 아들을 돌려줘. 지금 당장 물건을 돌려줄
테니까 내 아들을 보내줘. 부탁이야.
그는 갑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애걸했다.
물건하고 아들하고 바꾸겠다는 거지?
그래. 이제 나한테는 헤로인 같은 건 필요없어.
그럴테지. 헤로인보다는 자식이 더 귀중하겠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를 찾아다녀 보시지. 나를 찾아내 화풀이를 하고
자식을 찾아가 보시지 그래.
내 아들을 돌려줘.
동림은 떨면서 되풀이해서 말했다.
만일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려줘. 불쌍한 아이는 왜 데려갔어. 아이만 돌려준다면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
죽으라면 죽겠어. 제발 내 아이를 보내줘. 부탁이야. 내 아이를
보내줘.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가 애걸조로 나올수록
미스터 Y는 더욱 느긋하게 코웃음만 쳤다.
이제야 똥줄이 타는 모양이구나. 이제 정신을 차렸나?
싸움이라는 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는 거야. 알겠나? 너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우리 조직을 상대로 그따위 짓을
하다니 정말 당치도 않은 놈이야. 아들을 찾고 싶으면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들 얼굴은 영영 볼 수 없을
거다.
시키는 대로 할테니까 아들을 돌려보내. 제발 보내줘.
틀림없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 틀림없이 약속은 지키겠어.
당신도 자식을 기르는 부모라면.......
나한테는 자식 같은 건 없어. 아들을 빨리 찾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먼저 아들을 풀어줄 수는 없어. 이건 애초부터
더러운 싸움이니까 계속 더럽게 나갈 수밖에 없어.
동림이 몇 번 더 애걸했지만 상대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러운 놈,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말해 봐.
동림은 증오에 사무쳐 말했다.
잘 들어. 헤로인을 가지고 너는 유럽으로 가야 해. 유럽까지
그걸 운반해 줘야겠어.
뭐라구?
동림은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물건을 유럽까지 운반해 달란 말이야.
그건 안 돼! 그럴 수가 없어. 도대체 그럼 내 아들은 언제
돌려 보내겠다는 거야?
그 일을 끝내면 즉시 아들을 돌려보낸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아들을 보고 싶지 않나?
상대방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제발...... 그러지 마. 헤로인만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
헤로인을 내가 가져간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즉시
돌려줄 테니까.......
시끄러, 이 자식아!
상대방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동림은 입을 다물었다.
여러 말할 필요없어. 유럽까지 물건을 운반해 주겠어
못해주겠어?
그것만은 제발...... 고려해 주시오.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닥쳐! 너는 영원히 네 아들을 볼 수 없을 거다!
그 말과 함께 찰칵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동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다이얼을 눌렀다.
미스터 Y는 벨이 다섯 번 울리고 나서야 마지 못한 듯 전화를
받았다.
개 같은 놈! 물건을 가지고 유럽에 가주마!
바보 같은 놈, 진작 그럴 것이지. 지금 이 전화는 서울서
거는 거겠지?
그래 서울이야. 먼저 부탁할 게 있어. 내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 줘. 그대로 방치해두면 죽을지도 몰라. 의사한테 보여서
치료를 받게해 줘.
그야말로 뜨거운 부정이군.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네 아들은
따뜻한 방에서 잘 보호 받고 있을테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나는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어서 외국에 나갈 수 없는
몸이야. 출국하기 전에 공항에서 체포되고 말 거야.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거야.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나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그 점은 염려하지 마.
유럽의 어디로 가는 거지?
그건 나중에 알려주겠다. 3시 정각에 물건을 가지고 M극장
앞에서 기다려라. 누군가가 너를 데리러 갈 테니까 잠자코 그
사람을 따라가.
그 사람의 암호는?
그 사람은 화가야. 팔리지 않는 화가.......
그 사람한테 물건을 넘겨주어도 되나?
괜찮아. 화가가 하자는 대로 하면 돼. 일단 우리가 물건을
인수해서 재포장해야 한다. 그대로는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재포장한 다음 출국하는 너에게 다시 넘겨줄 거야. 화가의 입을
열게해서 내 소재를 알아낼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화가는 내가
있는 곳을 모르니까. 그리고 이 전화번호로는 두 번 다시 나와
통화할 수 없어. 하지만 574의 778×번은 살아 있어. 그쪽으로
연락하면 나하고 연락이 닿을 수 있어. 너는 지금 경찰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출국할 때까지 은신처가 필요할 거야. 그래서 나는
너한테 은신처까지 제공해 주려고 해.
그런 건 필요없어.
그렇지 않아. 필요해. 그리고 경찰에 연락해서 협조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런 짓을 한 게 드러나면 네 아들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어
알았어. 경찰에 협조를 구할 생각은 없어.
그때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그대로 전화통 앞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동전을 집어넣고 부산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노경감이었다.
내 아내를 바꿔주십시오.
당신 부인은 조금 전에야 깨어났어요. 그러지 말고 나하고
이야기 합시다.
내 아내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내 아내를 바꿔주십시오.
조금 후에 남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녀는 흐느껴
우느라고 제대로 거의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고 계시는 거에요? 인하를 어쩌시려는 거예요? 인하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그 놈하고 조금 전에 통화했어.
어떻게 됐어요? 뭐라고 그래요?
물건을 지금 즉시 돌려주겠다고 했어. 물건을 즉시
돌려줄테니까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어. 그런데 그 놈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야.
왜요?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동림은 얼어붙은 손을 움켜
쥐었다.
그놈은 악마야. 그놈은 나한테 다른 일을 시켰어. 물건을
돌려받는데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덧붙여 다른 일을 또 시켰어.
그 일을 완수하기 전에는 아이를 돌려줄 수 없다는 거야.
그게 무슨 일인데요?
말할 수 없어.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말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하루이틀에 금방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그 일을 끝낼 때까지 인하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고통스럽지만 며칠만 참고 기다려. 놈은
그때까지 인하를 잘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 놈은 악마야. 그놈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인하를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어. 놈은 정말로 그럴 수
있는 놈이야. 제일 좋은 방법은 놈의 말을 듣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
그건 안 됩니다.
경감의 거친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
│ 8.출국 │
└────────────────────────────┘

경찰 페트롤카 한 대와 자가용 승용차 두 대가 서대문구에
자리잡고 있는 B아파트 202동 앞에 나타난 것은 1월 15일 새벽
2시 30분이었다. 경찰은 뒤늦게나마 충무와 부산에 20분
간격으로 전화를 걸었던 서울의 발신처를 알아내 지금 그곳을
덮치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805호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먼저 805호 앞에 도착한 김만주 형사가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차임벨을 눌러댔다.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그는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아들었다.
한참 동안 벨을 눌러댔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원달 형사가 참다 못해 주먹으로 철문을 쾅쾅 두드려댔지만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관리실에 비치된 입주된 카드에는 주인 이름이 이동화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38세의 남자였다. 그러나 반장과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그 집에는 다리를 약간 저는 40대의 여인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녀에 대해 모르고 있다. 아마
보험회사에 다니나봐요. 라고 별로 확실치도 않은 투로 말한
사람은 반장직을 맡고 있는 중년 여인이었다.
그 여자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나요?
한 일년 가까이 됐을 거예요.
805호와 대문을 마주 보고 있는 집주인의 대답이었다. 일년
가까이 이웃에 살고 있었지만 전혀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805호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그것은 805호 쪽에서 사람 사귀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옆집 여인은 자못
불쾌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열쇠 전문점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을 두드려 깨워 온 것은
4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자물쇠를 보더니 그것은
미제 특수 자물쇠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열 수 없다고 하면서
돌아가버렸다.
옥상에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 베란다로 침투해
보겠습니다.
깐깐하게 생긴 젊은 형사 최원달이 그렇게 말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있기만 했다. 그것은 무섭도록 추운 새벽녘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의견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최형사는 옥상으로 올라가 짐 운반용 곤돌라를 타고 8층으로
내려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곤돌라는
이리저리 흔들렸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이윽고 8층에 이르자 최형사는 805호 베란다의 철제난간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그는 베란다를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려고 해보았지만 모든
창문들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이 모두 잠겼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는 워키토키로 상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어. 제일 작은 창문을 하나 깨고
들어가라구.
알겠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으로 창문을 하나 후려갈겼다.
그는 한 손에 권총을 뽑아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창문을
벗겨내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까지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집안에는 괴괴한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창틀을 넘어들어가 먼저 방 안의 불을 켰다. 거실로 나가
거기에도 불을 켠 다음 대문을 열었다. 밖에서 오래 떨고 있던
형사들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몰려 들어왔다.
안방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급히 빠져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화장실을 들여다보던 젊은 형사 한 사람이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처럼 허리를 굽혔다.
욕실을 들여다 본 형사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걸음질 쳤다.
고양이 목을 잘라놓다니......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한 게
분명합니다.
최형사가 치를 떨면서 말했다.
김만주 형사는 목이 잘린 채 죽어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려 피를 찍어보았다. 채 응고되지 않은 피가 손가락 끝에
도장처럼 찍혔다.
이 고양이는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어.
그는 욕실을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떻게 됐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부산에 가있는 노경감이었다.
텅비었습니다. 도망친 지 얼마 안된 것 같습니다. 전화를
걸고 나서 급히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이 집에는 중년여인이
1년 전부터 혼자 살아왔답니다. 추동림과 함께 도망친 것
같습니다.
추동림과 그 여인과의 관계를 알아봐.
그렇지 않아도 추동림의 흔적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욕실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
글쎄요. 아주 참혹하게 죽였는데...... 우리가 올 줄 알고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아무튼 샅샅이 조사해 봐. 그
집에 뭔가 있을 거야.
책상 위에는 제동용 펜이며 칼, 자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김형사는 방바닥에 널려 있는 종이 조작들을 모두 모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게 했다.
이걸 보십시오. 쓰레기통 속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최형사가 종이조각을 몇 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몇 가지는
컬러사진을 가위질한 것이었고 다른 몇 가지는 여권을 손으로
잡아찢은 것들이었다.
최형사가 쓰레기통을 가져와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책상
위에 쏟아놓았다.
사진 조각들을 맞춰보니 그것은 여권용 명함판 사진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중년의 남자 얼굴이었다. 찢어진 여권도 모두
맞춰보았다.
이건 만들다 만 여권인데요.
최형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들다 만 여권이 아니라 고치다 만 여권 같은데. 이걸
보라구. 이 줄에 있던 영문 표기는 모두 지워졌어. 그리고
새글자를 찍어나가다가 잘못되어 버린 것 같아.
김형사는 맨 위칸과 세번째 칸을 짚어보았다.
이걸 보라고. 이 글자는 유난히 까맣고 또렷한데 반해 여기
글자는 좀 희미하잖아? 희미한 글자는 처음 타이핑한 것이고
또렷한 글자는 나중에 고쳐찍은 게 분명해. 이건 뭘 의미하지?
위조여권을 만들다가 잘못돼서 버린 게 아닐까요?
바로 그거야. 이 집 주인은 위조전문가일지도 몰라. 추동림이
위조전문가와 접촉했다는 사실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위조연권으로 한국을 빠져나가려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어.
김형사는 다시 부산에 있는 경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 여주인은 여권위조의 전문가 같습니다. 위조하다 만
여권이 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밖에 위조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추동림이 위조
전문가와 접촉한 것으로 보아 해외로 빠져 나가려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건 아이가 납치당하기
전에 계획했던 일이겠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그는 해외로
도망치는 것보다 아이를 찾는 일이 더 급하게 됐어. 아이를 찾기
전에는 그렇게 쉽게 한국을 떠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요?
물론이지. 그 가능성에 대비해야지. 그 여자를 빨리 찾아낼
수 있겠어?
다행히 그 여자의 자가용 넘버가 경비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차를 빨리 수배해.
알겠습니다.
여자의 몽타즈도 작성해서 뿌리도록 하지. 한쪽 다리를
전다면 쉽게 눈에 뜨일 거야.
네, 밖에 나돌아 다닌다면 쉽게 뜨일 겁니다. 이곳 주인
이름으로 나와 있는 이동화라는 인물도 수배해 보겠습니다.
경감은 추동림이 자수하여 아이를 찾는데 협조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뭐니뭐니 해도 아이를 찾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 급해. 다른
건 그 다음의 일이야.
아이를 빨리 구해내지 않으면 안 돼.
김형사는 경감이 아이들을 무척이나 귀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순진한 아이를 인질로 납치하는
자를 그 누구보다도 증오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추동림의 세 살짜리 아들 추인하에 대해서는 이미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다. 아이의 사진이 찍힌 전단만 해도 수만
장이나 뿌려져 있었다.
동림은 새벽 3시 5분전에 M극장 앞으로 나갔다.
꽁꽁 얼어붙은 새벽 거리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얼어붙어버려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동림은 극장 앞 가로등 밑에 어깨를 웅크린 채 서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 동안 흘린 눈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머리 속이 멍해져 오곤 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3시 정각이 되었을 때 한 대의 자가용 승용차가 그가 서있는
곳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차는 빨간 차였는데 잠시 후 다시
극장 앞에 나타나 속력을 줄이더니 동림이 서있는 곳 앞에
멈춰섰다. 그 앞에서 차의 뒷문이 열렸다. 차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동림은 차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뒷좌석에는 한
명의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암호는?
하고 낯선 사나이가 말했다.
난 황금의 초생달이오. 당신은?
난 팔리지 않는 화가야. 물건은 가져왔나?
사나이가 손을 내밀었다. 차가 움직였다. 운전대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동림은 헤로인이 들어 있는 가방을 사나이에게
내주었다.
내 아들을 만나게 해주시오. 잠시만이라도.......
그는 애걸조로 말했다.
난 그런 건 몰라.
사나이는 장발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나이는 장발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술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정말 화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안경을 벗고 이걸 끼고 있어. 벗으라고 할 때까지는 절대
벗어서는 안 돼.
사나이는 검은 색의 안경 하나를 동림에게 꺼내주었다. 그것은
물안경처럼 옆에 막혀 있었는데, 그것을 끼자 앞이 캄캄한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림은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20분쯤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주위의 소음이 사라지면서 차가
멈춰섰다.
사나이가 먼저 내려 동림의 팔을 잡아주었다. 동림은 사나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그는 의자 위에 앉혀졌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한 동안
계속되더니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안경을 벗어도 좋아요.
매끄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림은 안경을 벗었다. 눈부신 불빛이 얼굴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뜰 수가 없어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자, 눈을 떠요.
어둠 속에서 여자가 말했다.
그가 눈을 뜨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그대로 있어요!
연이어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의 불빛이 눈을
찔렀다.
불빛이 약해지자 카메라 옆에 서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옆구리에 손을 걸치고 있었는데 30대 초반의 날카롭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에는 목까지 올라오는 흰 털셔츠를 입고
있었고 밑에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맞은편 벽 아래 책상 옆에는 팔리지 않는 화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이리 와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곳은 밖의 소음이 전혀 들려오지 않고 창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하실인 것 같았다. 바닥에는 회색의 카핏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흰 회칠이 되어 있었다. 40여평쯤 되는 넓은 공간은 가죽
소파며 최신 스타일의 등, 서양화 같은 것들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동림이 다가가자 화가가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동림은 의자 위에 앉으면서 상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마흔 안팎의 비쩍 마른 사내였다. 여자처럼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두 눈은 생기가 없이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검정
가죽점퍼가 그의 빈약한 상체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는 연방
하품을 해대며 흡사 물건을 만지듯 동림의 얼굴을 손으로
건드리며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이제부터 얼굴을 뜯어고쳐야 하니까 그대로 가만 있어.
얼굴을 고친 다음에 다시 사진을 찍어야 해. 여권 사진을
말이야.
화가가 턱짓을 보내자 여자가 다가와 그의 목둘레에 흰
보자기를 둘렀다.
머리에 물을 뿌려.
화가의 지시에 여자는 동림의 머리에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머리에 적당히 물기가 스며들자 화가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
스포츠형으로 바싹 잘라버려.
여자는 가위를 집어들더니 거침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동림은 앞으로 굴러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여자는 머리깎는 솜씨가 아주 능숙했다. 10분도 되기 전에
그의 머리는 운동선수처럼 짧아졌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털어낸
다음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뒤로 물러선다.
화가는 동림을 가까이 오게 하더니 얼굴에 무엇을 바르기
시작했다. 병 속에서 올리브유 같은 미끈거리는 액체를
손바닥에도 쏟아부은 다음 마사지하듯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문질러댔다.
동림은 화가가 하는 대로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것이
아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자코 그렇게
내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끝나자 화가는 그의 눈썹에다 보드라운 털을 하나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핀세트로 털을 하나 집어 그 끝에다 특수
접착제를 바른 다음 그것을 눈썹에다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일이 끝나자 화가는 손을 털고 나서 동림에게 거울을
주었다.
됐으니까 한 번 보라구.
동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은 것처럼 구리빛으로 변해 있었고,
눈썹은 유난히 짙어보였다. 거기에다 머리까지 짧았기 때문에
운동선수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눈에
익어왔던 자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의 모습이란 약간만 손질해도 그렇게 달라 보이지. 당신
부인 정도라면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사진으로만
당신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경찰관들 같은
사람들은 당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거야. 입을 손질하면 더
완벽하겠지만 그 정도로 됐어. 눈썹을 살리기 위해 안경을 쓰지
않는 게 좋겠어.
눈썹이 떨어지지는 않나요?
뜨거운 물에 녹이기 전에는 잘 떨어지지 않을 거야. 여분으로
이걸 줄 테니까 휴대하고 다녀. 이건 털이고 이건 접착제야.
여인은 그를 위자 위에 앉혀놓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거침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들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동림이 질문을 던지면
마지못해 응하기는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그들이 미스터 Y와 한 패인지, 아니면 그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별개의 조직인지조차도 동림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찍은 게 여권용인가요?
그래요.
처음 찍은 건 뭡니까?
그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찍힌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그건 두번째 찍은 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 보기
위해 찍은 거예요. 그리고 보관용이기도 하고요.
그걸 보관해서 뭐 할 겁니까?
그건 당신이 알 필요없어. 더이상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
화가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인이 전화를 받아 화가에게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화가는 매우 공손히 전화를 받았다.
네, 이제 막 끝났습니다...... 아닙니다...... 협조를 잘
했습니다...... 이 정도면 완벽합니다...... 실수란 있을 수
없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네, 알고
있습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화가는 수화기를 동림에게 넘겨주었다.
동림이 수화기를 귀에 대자 미스터 Y의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터 Y이다. 협조해 줘서 고맙다.
동림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너는 오늘중으로 출국해야 한다. 혹시 내일로 연기될지
모르지만,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한다. 자세한 것은 자중에
알려주겠다.
떠나기 전에 내 아들을 만나게 해줘요. 잠시만이라도
보게해줘요.
그건 안 돼. 네 아들은 잘 보호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란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일을 끝낼 때까지는 보여줄 수 없어. 그리고 너는 출국할
때까지 그곳에 숨어 있어. 밖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거기에 숨어 있으란 말이야. 거기에는 필요한 게 모두 갖춰져
있으니까 불편하지 않을 거야. 필요하다면 거기에 있는 여자를
안아도 좋아.
나는 내 아들을 안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
그는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해!
상대방은 명령조로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화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디 가는 거야?
동림은 철문을 열었다.
화가가 뛰어와 그의 뒷목덜미를 낚아챘다.
가서는 안 돼! 그대로 여기에 있으라는 명령이야!
화가는 동림을 벽에다 밀어붙이더니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권총이 들려 있었다. 총구는 동림의 가슴을 향해
열려 있었다. 동림은 그 구멍이 유난히 크다고 생각했다.
저쪽 방으로 들어가.
화가가 구석 쪽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철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동림은 화가를 쏘아보다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 철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바로 뒤에 화가가 서
있었다.
문을 열어.
하고 화가가 말했다.
동림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팔꿈치로 뒤에 서있는 자를
내질렀다.
기습을 당한 화가는 들고 있던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가
그것을 집으려고 허리를 구부리기 전에 동림의 오른손이 마치
칼로 후려치듯 그의 목을 후려쳤다.
아악!
화가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꺾었다. 그것을 보고 여자가
출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동림은 권총을 집어들고 그녀를
겨누었다.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여자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버렸다.
동림은 괴로와서 몸부림치고 있는 화가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통은 꽤 오래
갈 것 같았다. 그는 그 고통의 정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화가의 두 눈이 공포에 젖어 있었다. 동림은 그의
가슴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내 아들은 어디 있지?
모,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여자도 곁에서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아까 전화를 걸어온 놈, 그놈이 내 아들을 납치했어. 그 놈은
지금 어디 있지?
모릅니다. 전화로만 연락이 되기 때문에 우리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동림은 방아쇠를 당겼다. 밀폐된 공간에서 터진 소리였기
때문에 총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이 크게 실내를 뒤흔들었다.
화가는 자신의 생명에 이상이 없는 것을 알고는 꿇어앉아 빌기
시작했다. 여자도 두 손을 비비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그 놈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동림은 총구를 화가의 이마에 갖다댔다.
살려주십시오. 정말 모릅니다. 알면 제가 왜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화가는 동림의 구두에다 입이라도 맞출듯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동림은 여자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살려주세요! 저, 전 아무 것도 몰라요! 살려주세요!
동림은 한참 동안 그들을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그놈한테 전해 줘. 난 예정대로 출국할 거라고. 내가
연락하겠다고 전해 줘.
그는 더이상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자 또 하나의 철문이 있었다. 그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문을 열자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시멘트로 발라진 넓은
주차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그가 타고 왔던
승용차와 또 한대의 승용차가 주차해 있었다.
출구 쪽에는 철제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걸어가 출구 옆에 부착되어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셔터가 자동으로 위로 올라갔다.
비탈진 경사면을 빠져나오자 그 앞은 차가 두 대 정도 비켜
다닐 수 있는 골목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곳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정문 쪽으로 다가가 거기에 있는 조그마한 동판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삼진상사(三進商社)라는 상호의
간판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넓은 차도가 나왔다. 역시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맞은편 차도 위를 굴러가던 택시가 그를
발견하고는 홱 커브를 틀어 그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일부러 비틀거리며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나이 들어보이는 운전사가 백미러로 그를 쳐다보았다.
동림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밖으로 내다보았다.
내 친구놈하고 술 한 잔 하다가 싸웠지요. 그 자식이 기분
나쁘게 굴어서 여기다 내려달라고 했더니 날 여기다 떨어뜨리고
가버렸어요. 그런데 난 여기가 어디 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여기가 대전인가 아니면 부산인가요?
동림은 일부러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여긴 서울역 뒤편입니다. 서부역이 저쪽에 있지요.
운전사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래요. 그렇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청계천 쪽으로
갑시다.
그는 운동선수처럼 짧은 머리에 짙은 눈썹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동안 계속 운전사의 눈치를 살폈지만
상대방은 그가 수배중인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거의 다니는 차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탄 택시는
신호를 무시한 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목적지까지 달려갔다.
그는 청계천 5가에서 택시를 내려 한 정거장 쯤 걸어가다가
길게 이어진 상가 건물 안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상가 건물의 위쪽은 소형 아파트로 채워져 있었다. 건물이
워낙 낡은데다 소형으로 값싸게 지은 것들이라 슬럼화되어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간 그는 우중충한 복도를 걸어가다가 309호라고
표시되어 있는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본
다음 열쇠를 꽂아 문을 열었다.
그곳은 그가 은신처로 얻어놓은 아파트였다. 그곳을 얻기 위해
그는 석 달치 방세를 미리 선불해야만 했었다.
집 안에는 차가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구 하나 없는 실내
바닥에는 먼지와 쓰레기가 그대로 널려 있었다.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파카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과거 월남에 있을 때
많이 다루어본 45구경이었다. 그것은 성능은 좋지만 너무 크고
무거운 것이 흠이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주방 쪽으로 갔다. 주방의 싱크대 위에는
찬장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찬장과 천장 사이에는 주먹이 하나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는 그 사이에다 권총을
깊숙이 밀어넣었다. 언젠가 그것을 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집 안은 불기 하나 없이 추웠다. 그 아파트에는 연탄 보일러
시설이 되어 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쫓기는 신세에 따뜻한 방에서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납치된 어린 아들 생각이 또한 그의 마음을 더욱 혹독하게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 밤에 철없는 어린 자식은 못난 부모 탓에
어딘가에 납치되어 울고 있는데 애비 된 내가 어떻게 따뜻한
방에 편히 누워 잠들 수 있는가! 나는 내 아이보다 더 춥게 더
고통스럽게 이 밤을 지새야 한다.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냉기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방안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닭털 침낭이 놓여 있었다.
그는 갑자기 극심한 배고픔과 피로를 느꼈다.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옷을 입은 채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자크를
목에까지 올리고 누워 있자 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지나자 다시 냉기가 스며들어 그의 몸을 서서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견딜 수 없었지만 맞부딪치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드러눕자 곧 곯아 떨어질줄 알았지만 머리 속은 더욱
맑아지기만 했다. 그는 눈을 감고 무덥기 짝이 없었던 월남의
밤들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숨막힐듯 무덥고 지옥 같았던 그
절망적인 밤들에 비하면 오늘 밤의 이런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날 밤은 비가 몹시 내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구덩이 속에서 똥오줌에 뒤범벅되고 절을대로 절은
나머지 완전한 오물이 되어 있었다.
그곳으로 끌려온 지도 열흘이 훨씬 지난 것 같았다. 그때까지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문을 받았고, 타우타이는 고문으로
죽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타우타이는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고문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고문 방법을 개발해서 그것을 그에게 실험하곤 했다.
그날 밤도 동림은 새로운 고문에 초죽음이 된 채 막사에서
끌려나왔다. 경비원은 그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자 목에다
밧줄을 걸어 구덩이 쪽으로 개처럼 끌고갔다. 다른 때 같으면
수갑을 채우는데 그때만은 웬 일인지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아마 그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수갑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수갑 채우는 것을
깜박 잊었거나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의 눈에는 그가 거의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된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고문 상태가
계속된다면 자신은 앞으로 이삼 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자신이 선택한 보다 나은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고문당하다가 그 끝에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한낱 개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구덩이에 이르자 경비원은 뚜껑을 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을 보고 동림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마치 그때까지 힘을 비축해 두었기나 한
듯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것이나 집어들었다. 경비원이
뚜껑을 들어올리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동림은 있는 힘을 다해 몽둥이로 상대방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경비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비틀거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얻어맞았기 때문에 경비원은 미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동림은 두 손으로 몸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다시 한 번 경비원의 이마를 힘껏 내리쳤다. 머리통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경비원은 무릎을 꿇으면서 무너져내렸다.
동림은 즉사한 경비원의 몸에서 거둘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하늘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자신의 몸에 걸려 있는 걸레조각을 걷어낸 다음 경비원의 검정
옷을 벗겨내 입었다. 모자와 신발도 그의 것으로 만들었다.
대검을 옆구리 꽂고 소련제 AK소총을 집어들었다. 구덩이를 향해
선물이다! 라고 소리친 다음 시체를 그 속으로 밀어넣었다.
상당히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비가 워낙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려 줘! 꺼내 줘!
구덩이 속에서 미군들이 아우성쳤다. 그들과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혼자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미군 포로들을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걸을 수 있는 자만 올라와!
이상하게도 그는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꺼져가는
등잔불이 꺼지기 직전 갑자기 맹렬히 타오르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세 명이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한 명은 대위였고 다른 두
명은 졸병이었다. 졸병 가운데 한 명은 그가 쏘기를 거절했던
흑인 병사였다.
한 명이 더 있어.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가 없어. 그대로 내
버려 둘 수 밖에 없어.
대위가 속삭이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총을 이리 줘. 내가 앞장 서겠다.
그는 끝까지 장교로서 지휘권을 행사하려 들고 있었다. 그에게
무기를 준다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동림은 그에게 소총을 내주었다.
자, 당신들은 가고 싶은 대로 가시오.
당신은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 건가?
같이 가지 않을 거요. 난 남아서 할 일이 좀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나를 고문한 놈을 죽이는 일이야. 그놈을 그대로 살려두고 갈
수는 없어.
어리석은 소리! 그러다가 잡히면 우리까지 위험해!
하고 대위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들 가시오.
동림은 몸을 돌려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오라! 오지 않으면 쏜다!
대위가 뒤에서 낮은 소리로 안타깝게 외쳤다. 그러나 동림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내처 걸어갔다.
쏘면 안 돼요!
흑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타우타이를 죽인다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자를
그대로 살려둔 채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자는
그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자를
죽인다는 것은 그 자신의 생의 시작일 수도 있고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타우타이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플레이보이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실려 있는 나체의 여인상을 감상하면서 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 짓에 너무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막사 안에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동림이 등 뒤로
가까이 다가서자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구야?
타우타이는 베트콩 복장의 동림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동림이 대검을 목에 들이대자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고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때 뒤에서 영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맡겨!
어느 새 흑인 병사가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벽에 세워져
있는 총을 집어들더니 그것으로 타우타이를 겨누었다.
안 돼! 이놈은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해!
동림은 한 손을 들어 흑인을 막았다. 그는 배창우를 생각했다.
칼에 마구 찔려 참혹하게 죽어가던 그의 모습이 타우타이의 얼굴
위로 겹쳐 어른거렸다.
살려줘! 나를 죽이면 넌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없어! 나를
살려주면 책임지고 너를 여기서 무사히 빼내주겠어! 살려줘!
월남인은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동림은 아무 말없이 대검으로 상대방의 목을 힘껏 찔렀다.
아악!
월남인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대검을 잡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검이 목 깊숙이 들어가고 난 뒤였다.
동림은 대검을 잡아 뽑았다. 타우타이의 목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동림은 기둥에 걸려 있는 날이 넓적한 칼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정글을 헤쳐나갈 때 사용하는 칼이었다.
대검은 찌르는데 유리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베고 헤치는데
좋은 칼이었다.
타우타이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동림은 가까이 다가가 칼로 그의 목을 내려쳤다. 목은 단칼에
잘려 나가지 않았다. 타우타이는 반쯤 목이 잘린 채 옆으로
쓰러졌다. 동림은 다시 한 번 그의 목을 내려쳤다.
마침내 월남인의 머리가 몸뚱이로부터 완전히 잘려나갔다.
머리와 몸뚱인가 별개의 것이 되어 따로 놀았다.
그는 미칫 듯 울부짖으며 머리통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흑인 병사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발 진정해! 제발 그러지 마!
동림은 몸부림치다가 무릎을 구부리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몸을 떨어대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흑인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동림은 눈물을 거두고
일어났다. 그는 비틀거리며 책상 앞으로 다가가보았다.
책상 위에는 타우타이가 보다 만 플레이보이지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그것을 쳐들자 컬러사진 한 장이 보였다. 그것은
배창우의 애인인 남지의 사진이었다.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가죽 주머니와 배창우의 인식표도 놓여 있었다. 그가 어머니와
남지에게 써놓은 유서도 휴지처럼 구겨진 채 내던져져 있었다.
그것들은 타우타이가 동림을 고문하다가 그로부터 빼앗아둔
것이었다.
동림은 먼저 비닐주머니 속에 사진과 유서를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은 다시 가죽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나서 인식표와
함께 목에 걸었다.
놈들이 온다! 세 명이야!
밖을 감시하고 있던 흑인이 겁에 질려 말했다.
그들은 너무 가깝게 와있었기 때문에 그들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지?
할 수 없어. 총으로 놈들을 위협해. 쏘면 안 돼. 총소리가
나면 안 되니까 쏘지는 마.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어왔다.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막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온 것이 분명했다. 한
명은 월맹군 장교였고 나머지 두 명은 베트콩이었다. 월맹군
장교는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동림은 정글용 칼을 한 손에 든 채 방 가운데 서서 안으로
들어선 그들을 맞았다. 그들을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반쯤 얼이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넌 웬 놈이지? 처음 보는 놈인데.......
베트콩 한 명이 경계 태세를 취하며 말했다.
꼼짝 마! 모두 손들어!
그들의 뒤에서 흑인이 소리쳤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흑인
병사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는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월맹군 장교만은 손은 쳐드는 척하다가 갑자기 권총을
뽑아들었다.
동림은 재빨리 칼을 휘둘렀다. 칼은 바람을 일으키며 상대방의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가슴 쪽으로 흘렀다. 칼날이 부딪친
부위가 쩍 갈라지면서 검붉은 피가 분출했다. 장교는 천천히
주저앉다가 뒤로 쿵하고 나가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베트콩 두
명은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라!
동림이 소리치자 그들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동림은 그들의 뒤로 돌아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차례로
그들의 목을 쳤다. 첫번째 칼질에는 목이 반쯤 잘려나갔고
마지막 칼질에는 목이 잘려나갔다.
흑인은 놀란 눈으로 그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림은 여전히 한 손에 칼을 든 채 막사를 나왔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나오는 게 아니라 마치 얼이 빠진 모습으로
천천히 걸아나왔다. 뒤따르던 흑인병사는 재빨리 몸을 수그리고
뛰면서 그에게 빨리 가자고 손짓했지만 그는 조금도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같은 속도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것은 마치
생사를 초월한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죽음 따위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그런
태도였다. 흑인은 안달이 나서 계속 그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미군 대위는 떨고 있었다. 그는 흑인 병사와
동림에게 자기를 오래 기다리게 한데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흑인으로부터 총을 낚아챘다.
이윽고 그들은 형식적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세 명의 미군은 재빨리 정글속으로
뛰어갔으나 동림은 여전히 느리게 걸어갔다.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던 미군들은 안달이 나있었다. 흑인이
막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머리가 돈 게 분명해. 우리끼리 갈 수밖에 없어.
대위가 단정을 내렸다. 흑인은 동림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빨리 좀 움직일 수 없어?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야. 놈들이 곧 쫓아올 거란 말이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들 가시오. 난 내 갈 데로
갈테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돼. 도대체 혼자서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
대위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고, 흑인이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는 흑인을 뿌리쳤다.
내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란 말이야! 빨리 꺼져!
그는 정글용 칼을 쳐들고 미군들을 위협했다.
미친 게 분명해! 더이상 시간 낭비하지 마!
대위는 뒷걸음질치며 소리치다가 앞장서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백인 병사와 흑인 병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위 뒤를
따라갔다. 그래도 흑인은 맨 뒤에 처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만 그들 뒤돌아보곤 했다.
동림은 미군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모진 목숨에 저주를 퍼부으면서 어서 빨리 죽음의
사신이 자기를 데려가 주기를 바랬다. 그는 지금 같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밤새 걸었다. 그리고 날이 샐 때쯤에는 더이상 걸을 수
없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나무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나 걸었다.
비로소 그는 배고픔을 느꼈다. 먹이를 찾아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이기 시작했고, 행동도 민첩해졌다.
그는 강렬한 식욕을 느끼면서 뱀을 생채로 잡아먹었다. 열매도
보이는 대로 따먹었다. 극한상황에 대비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혹독한 훈련을 통해 채득한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일단 배를 채우고 나자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가슴을 가득 채워왔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 몸이 생에 대한 애착으로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맹수처럼 주위를 경계하면서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몸 전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느새 살인무기로 변해 있었다.
저녁나절 그는 1개 분대로 보이는 베트콩 몇 명을 만났다.
그들을 먼저 발견한 그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주위를 경계하지 않은 채 계속 지껄이면서 지나갔다.
문득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앞뒤에서 긴 대나무를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람의 머리가 하나 대롱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묶어
그 사이에다 대나무를 끼워서 들고 가고 있었는데, 가만보니
그것은 미군 대위의 머리였다. 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된 듯
대위의 머리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난 후 동림은 그들이 지나온 길을
더듬어 가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예민한 감각은 피비린내를 포착할 수가
있었다. 그는 냄새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가보았다.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은 백인 병사의 시체였다. 그는 목이 반쯤
잘린 채 죽어 있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머리없는 시체가
또 하나 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대위의 시체였다. 흑인의 시체를
찾아보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토미!
그는 낮게 불러보았다. 몇 번 불러대자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흑인 병사가 수풀 속에
몸을 처박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림이 머리에 손을
대자 그는 무섭게 몸을 떨어대는 것이었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넌 정말 불사조야.
한참 후 흑인이 꺼낸 첫마디였다. 그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난 잘 걸을 수가 없었어. 다리를 다쳐 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두 사람은 먼저 가버렸지. 나는 뒤에 처져서 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뒤에 처졌기 때문에 나는 살게된 거야. 그렇지
않고 그들과 함께 갔다면 나도 죽었을 거야. 내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 적들이 그들을 죽이고 있었어. 놈들은 식사를
하면서 그들을 죽이고 있었어. 나는 숨어서 놈들이 그들을
죽이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어. 그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나한테는 무기가 없었어.
너는 참 운이 좋은 놈이야.
동림은 흑인의 등을 두드려준 다음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심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먼저 가. 나는 함께 행동할 수 없어.
흑인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동림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우람한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대로 가는 거야. 가다가 죽으면 묻어주겠어.
고마와.
흑인은 감동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아파트에는 전화가 없었다.
슬리핑백 속에서 새우처럼 웅크린 채 밤을 지샌 그는 날이
새기를 기다려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가게 문들은 그때까지도 모두 닫혀 있었다. 그는 가게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복도를 조금 걸어가다가 공중전화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아직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그는 숫자를
하나하나 확인해 가면서 위조전문가의 새 은신처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두 번 울리고 나서 신호가 떨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나 추동림이요. 그건 어떻게 됐지? 하고 물었다.
거의 다 됐어요. 밤 잠 안 자고 만들었어요.
그녀는 원망어린 투로 말했다.
몇 시 까지 완성할 수 있소?
앞으로 한두 시간 후면 완벽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럼 12시 정각에 그걸 가지고 나와요. 덕수궁 분수대 앞
벤치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왜 대답하지 않는 거지? 나올 수 없다는 거요?
나가겠어요.
그녀는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이번에는 미스터 Y한테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전화번호인 574-778×번으로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자가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가 암호를
말하자 그녀는 새 전화번호를 하나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새
전화번호로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황금의 초생달, 너는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거지?
미스터 Y는 노해 있었다.
나는 거기서 기다릴 수가 없었어.
동림은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며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어. 나돌아다니지 말고 거기에 숨어
있으라고. 그런데 너는 화가를 때려 눕히고 권총까지 뺏어
달어났어. 너는 아무래도 위험한 놈이야. 어디서 그런 솜씨를
익혔지? 화가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는 거야.
화가가 나를 권총으로 위협하기에 뿌리쳤을 뿐이야.
아무래도 넌 위험한 놈이야. 넌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가
보지?
내 아들을 보고 싶어. 부탁이야. 보여줘.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말하기조차 힘들었다.
살아 있는 아들을 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앞으로 다시
한 번 내 명령을 어기면 난 너를 포기하겠어. 물론 너는 그
댓가로 죽은 아들을 안게 되겠지.
너는 사람이 아니야.
흐흐흐...... 네가 어떻게 보든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아. 네가
물건을 무사히 운반해 주기만을 나는 바라고 있어. 다시
말하지만 오늘 너는 출국해야 해. 오후 5시 정각에 W호텔 11층
28호실을 찾아가. 거기에 가면 너의 출국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언제나처럼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동림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돌아섰다.
날이 새자 경찰은 세 방향으로 수사를 전개했다.
하나는 서대문 B아파트 202동 805호에 거주했던 그 정체불명의
여인, 아무래도 위조전문가로 보이는 그 여인을 수배해서
찾아내는 일이었다. 즉시 그 여인의 몽타즈가 작성되고, 그
몽타즈에는 그녀의 특징으로 그녀가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으면 한쪽 얼굴이 화상을 입어 꽤 일그러져 있는 점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 하나는 B아파트 202동 805호의 주인으로 되어 있는
이동화라는 인물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동화라는 인물이 그
아파트의 소유주로서 그 절름발이 여인에게 그 아파트를
세내주었는지, 아니면 그 여인이 이동화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
아파트에 입주한 것인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 이동화가 가공
인물이 아니라면 경찰은 당연히 그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세번째 방향은 그 절름발이 여인이 몰고 다닌다는 서울 마
541×번인 은색 중형차 M카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박지순은 자가용을 몰고 나가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차를 몰고 나가도 위험이 없을까. 과연 경찰이
내 차를 수배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면 서울 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아예 차를 몰고 나가지 않는 게
좋다.
그녀가 지금 들어 있는 그 집은 2층 양옥이었다. 중산층
정도가 살기에 적당한 평범한 일반 주택이었다. 그 집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앉은뱅이 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그 집에 살게하고 그들에게 겨우 끼니를 이을 수 있을
정도의 생활비만 대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미워하고
있었다. 특히 앉은뱅이 딸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 앉은뱅이 딸은 지금 스물 한 살로 그녀가 그렇게 주저 앉은
것은 일곱인가 여덟 살 때였다. 그 바람에 그녀는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언제나 방 안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절름발이 여인은
짝도 지어줄 수 없고 평생 그녀의 가슴에 못이나 박아줄 그 병신
딸이 얼른 죽기나 했으면 하고 바랬지만 딸은 끈질기게 살아
남아 계속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방문을 잠근 다음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늙은 어머니가 냉정한 그녀를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갔다 오겠어요.
그녀는 노모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나서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
10분이었다.
그녀는 다리 저는 것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 유난히 긴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화장을 짙게 했고, 거기다
색깔이 조금 들어 있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것으로 얼굴의
화상을 어느 정도 감출 수가 있었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눈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차들은 느릿느릿 굴러갔다.
그녀가 탄 택시는 12시 5분 전에 덕수궁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표를 구입한 다음 서둘러 궁 안으로 들어갔다.
궁 안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흰 눈에 덮여 있었고, 거기에는 도심의 소음과 완전히
구별되는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흰 눈을 밟으며 서둘러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그녀가 분수대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손목시계는
정확히 12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수대 연못은 얼어붙어
있었고, 분수도 뿜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분수대 연못가에 놓여 있는 벤치에는 단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남자였고, 머리에 캡을 눌러쓰고 있었다. 캡과
어깨 위에는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지만 그 사나이는 그런
것에는 신경이 안 쓰이는지 미동도 안하고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앉아 얼어죽은 것처럼.
박지순은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사나이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사나이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검은 남자였다. 그녀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앉으시오. 하고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그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난 밤에
보았던 추동림의 모습이 그 검은 얼굴 속에 감춰져 있음을
그녀는 비로소 발견할 수가 있었다.
동림은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옆자리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그의 친절에 당황하면서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몰라 봤어요. 정말 몰라 보겠어요.
그녀는 그의 눈썹이 유난히 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어요.
그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백 속에서 잠자코 봉투를 꺼내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 속에서 위조여권을 꺼내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여권의
표지는 빨간 바탕에 태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건 일본 여권이 아닌가?
네, 그래요. 그쪽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일본 여권으로
만들었어요.
그는 여권을 펴서 거기에 붙어 있는 그의 변장 모습을 찍은
사진과 인적사항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이쓰키 고로(五木五郞)였고 나이는
65세, 주소는 도쿄 신주쿠로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나갈 때는 다른 여권을 사용해야 할 거예요. 그
사람이 당신 여권을 급히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오늘중으로
출국할 수 있게 말이에요. 사진도 이미 받았어요. 그러고 보니까
지금의 당신 모습을 찍은 사진이군요.
그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었소. 하지만 그자를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자는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요. 내가 당신과
접촉했다는 거 이야기했나요?
아뇨. 저는 약속을 지켜요.
어떠한 경우에도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돼요.
그는 위조여권에 붙어 있는 이쓰키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쟃빛 머리에 역시 같은 색의 콧수염을
달고 있는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다른 여권은 그 사람들이 전해줄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있다가 그들을 만날 거요.
그는 허리를 굽혀 눈을 한 주먹 집어들고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손이 시릴 때까지 그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손을
폈다. 그것은 조그만 얼음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꺼내 그에게 권했다. 그가 잠자코 그것을 받아
들자 그녀도 담배 한 대를 뽑아 물었다. 그가 성냥을 꺼내
그녀에게 불을 붙여주고 나서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당겼다.
그들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거기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웠다.
저는 이제 가도 되나요?
한참 후 그가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 좋아요. 이걸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담배를 눈 위에다 던졌다.
일이 잘 되기를 빌겠어요. 그리고 아이를 빨리 찾을 수
있기를 빌겠어요. 저한테 부탁하실 일이 또 없나요?
그녀는 그를 들여다보듯이 하고 물었다.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아봐주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에게 별로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다.
알겠어요. 알아볼 수 있는 한 알아보겠어요.
그리고 경찰을 조심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조심하고 있어요.
그녀는 일어섰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참 걸어가다가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일찌기 그렇게 외로와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그가 그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만 돌아다보다가 궁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 20분쯤 지나 그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나무가지에는 어느 새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는 함박눈을 맞으며 궁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하늘은 온통 함박눈으로 가득 차있었다. 하늘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가득 차있는 듯이 보였다.
담 옆에는 공중전화가 있었다. 시내와 장거리에 동시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였다. 그는 미치도록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는 문을 밀어붙이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벨이 울리기 무섭게 신호가 떨어지면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그는 숨을 죽였다.
어떻게 됐어요!
남화도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인하 소식 있어?
그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없어요. 아무 소식도 없어요. 지금 어디 계세요?
인하는 무사히 돌아오게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남화는 마침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고 계시는 거에요? 왜 경찰에 협조를 구하지 않는
거예요?
아, 내 행동을 이해해줘. 나도 경찰에 협조를 구하고싶어.
그렇게 해서 인하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내가 왜 경찰의 협조를
구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인하를 구할 수 없어.
내가 만일 약속을 어기고 경찰에 협조를 구하면 그놈은 인하를
죽이고 말 거야. 놈은 그러겠다고 말했어. 그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야.
그는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이상 말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추동림씨, 당신은 지금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로 노경감이 뛰어들었다. 그의 쉰 듯한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당신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이오. 당신이 그들과 직접
상대해서 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막지 않겠소. 하지만
그런 경우 결과는 항상 비극으로 끝나요. 그놈들은 간악한
놈들이기 때문에 당신을 이용할대로 이용해 먹고 나서 결국은
죽일 거요. 물론 아이도 돌려주지 않을 거요. 당신은 그들과
모종의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집어치워요. 그러다가는 당신은 정말 당신
자신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자식까지도 잃고 말아요. 제발
경찰에 협력해 줘요. 우리가 서로 협조하면 틀림없이 인하를
찾을 수 있어요! 그들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
동림은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상대 쪽에서는 이쪽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어떻게든
통화시간을 길게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동림은 아내와 노경감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경찰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들을 도저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아들을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경찰의 수사력에 의지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경찰이 설령 범인을
체포했다 해도 그때는 이미 내 아들은 죽어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의 흐느끼던 소리가 빗물처럼 그의
가슴을 적셔주고 있었다. 그는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서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아들이 그를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가 마치 눈을 타고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5시.
그는 W호텔 1128호실의 차임벨을 눌렀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한 사나이가 밖을 내다보았다.
암호를 말해 보시오.
황금의 초생달.......
사나이는 쇠고리를 벗겨내고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명이 다
남자들이었다. 그들 중 어느 쪽도 미스터 Y는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모리 속에는 사진으로 익혀둔 미스터 Y의 인상이 또렷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 안에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한 명은 서른 댓 살쯤 되어 보였는데 삼각형의 얼굴에 흡사
통나무 밑둥처럼 굵고 튼튼한 목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자르고 있었고, 두 눈은 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보였다.
또 한 명은 역시 같은 또래이면서도 가냘픈 몸을 가지고
있었다. 두 눈은 매섭고 사나운 빛을 띠고 있었다. 얼굴빛이
납빛을 띠고 있는 것이 마약 중독자 같은 인상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선 동림을 잠자코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더니 안으로부터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팔리지
않는 화가였다. 그는 목에 기브스를 대고 있었다.
동림은 화가가 다가와 그를 노려보는 데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상대방을 쳐다보기만 했다.
개새끼!
화가는 동림을 금방이라도 때릴 듯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의 얼굴에는 동림을 두려워하는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떨고 있다가 끝내 동림을 때리지 못하고
주먹을 내렸다.
권총을 내놔.
동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삼각형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더듬었다.
없는데요.
삼각형이 화가를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권총을 내놔! 어디다 숨겨놨지?
화가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씩씩거렸다.
버렸어요.
동림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어디다 버렸어?
강에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화가는 분을 이기지 못해 한참 동안 부들부들 떨면서 동림을
노려보고 있다가 뒤로 물러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동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동림은 그쪽으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화가는 분을 삭이려는 듯 말없이 담배 한 대를 모두 태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죽이고 싶지만 참는다. 이걸 받아.
동림은 화가가 탁자 위에 내놓는 것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위조여권이었다. 그는 그것을 펴들고 들여다보았다.
김명기(金命基)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주소는 부산
Y동으로 되어 있었고, 나이는 44세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난
밤에 찍었던 사진, 그러니까 검은 얼굴에 머리를 짧게 깎고
눈썹을 짙게 붙인 모습을 찍은 컬러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여권
속에는 출입국 신고서도 끼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김명기의
직업이 명진상사(明進商社)대표로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김명기가 되는 거야.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모두 외워두도록 해.
왜 하필이면 이 사람을......?
동림의 얼굴에 비로소 긴장한 빛이 나타나자 화가는 당황해
하면서 발뺌을 했다.
아무려면 어때. 난 몰라.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김명기는 남화의 차에 치어죽은 사람이었다. 위조여권과
출입국신고서에 적힌 인적사항도 그의 인적사항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내 아내의 차에 치어죽은 사람의 신분을 도용했을까.
그것은 죽은 김명기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협박일까. 동림은 미스터 Y의 악랄함에 다시 한 번 전율했다.
김명기라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가짜이긴 다 마찬가지인데 이름 같은 것에 신경쓸 필요는 없지
않아?
화가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나서 탁자 위에다 무엇인가 또
꺼내놓았다. 그것은 비행기표였다.
오늘밤 8시 35분에 출발하는 거야. 에어 프랑스편으로 도쿄를
거쳐서 파리로 가는 거야.
비행기표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끝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굴러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인하를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아직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시간 여유는 있다.
그러나 그는 위조여권과 비행기표를 잠자코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화가와 다른 두 사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떠나기 전에 내 아들을 잠깐만이라도 만나볼 수는 없을까요?
세 명은 약속이나 한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우리한테 그런 말하지 마. 우리는 거기에 대해선는 아무
권한이 없어. 그런 건 사장님한테 직접 부탁해.
동림은 그들이 그렇게 대답해 올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건은?
물건은 여기에 있어.
화가는 탁자 밑에서 슈트케이스를 꺼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밤색의 여행 가방이었다.
이건 휴대용이니까 비행기 안에도 들고 들어갈 수 있어. 이걸
잠시라도 몸에서 뗴어놓아서는 안 돼. 만일 가방을 보자고하면
자연스럽게 열어 보여. 이렇게 말이야.
화가는 슈트케이스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두터운 성경책이 한 권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검은 가죽 케이스 속에 들어 있었다.
이건 영어로 되어 있는 성경책이야. 누가 보아도 알아볼 수
있게 영어로 된 성경책을 넣어두었어. 혹시나 해서 이 케이스를
열어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이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지
않나해서 말이야. 하지만 보다시피 이 케이스 속에는 책만 들어
있어. 펼쳐보아도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어. 이건 감시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넣어둔 거야. 성경책은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신앙심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거든. 신앙심이 깊고
인격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디서나 의심을 품지 않아.
그러니까 이걸 언제나 잘 볼 수 있게 맨 위쪽에 올려놔.
동림은 성격책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그는 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에 손이 닿는 순간 왠지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건은 어디에 있지?
이 속에 있어.
화가는 가방의 내벽을 두드려보았다.
물건은 내벽과 외벽 사이의 공간 속에 들어 있어. 이런
수법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지.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새롭고 특이한 수법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수법이 안전할 수가 있어. 대개 검사란 사람을
보고 하기 마련이야. 인상이 별로 좋지 않고 낌새가 수상하면
정밀 검사를 하지. 하지만 당신처럼 인상이 좋고 거기다
성경책까지 가지고 있으면 보나마나 그냥 통과시킬 거야.
화가는 만 원짜리 지폐 뭉치를 하나 꺼내놓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말쑥하게 차려입도록 해.
일류 멋장이 차림을 하란 말이야.
마지막으로 그는 달러 뭉치를 동림에게 주었다.
5천 달러야. 이걸 비용으로 써. 3천 달러밖에 가지고 나갈 수
없으니까 나머지 2천은 어디다 숨겨가지고 나가도록 해. 외국
여행은 처음인가?
처음은 아니야.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럽에도 가봤나?
동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됐군. 자세한 사항은 그때그때 전달될 거야. 이
두사람이 너를 보호해 주고 감시할 거야. 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돼. 이 사람들은 살인전문가야. 너
하나쯤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야. 이쪽은 박이고 이쪽은
홍이야.
삼각형의 얼굴을 가진 박가가 먼저 동림을 향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가날픈 몸매의 홍가는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한 번
던지기만 했다.
자, 그럼 출국 준비를 해야겠지. 그 여권은 복수여권이니까
언제라도 자유롭게 출입국할 수 있어. 이 시간부터 이 가방은
당신 손에 넘어가는 거야. 잘 간수하도록 해.
화가는 슈트케이스를 동림 쪽으로 밀었다.
동림은 지체하지 않고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7시까지 공항으로 나와서 출국 수속을 마치도록 해. 7시
30분에 국제선 출국 대합실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해.
염사장도 가는 거요?
사장님은 가지 않아.
내 아들을 만나볼 수가 없다면 목소리라도 한 번 들을 수
있게 해줘. 부탁이야.
화가는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안 돼. 있다가 공항에서는 가능할 지 몰라. 공항에서
통화할 수 있게 이야기해 볼 테니까 지금은 그대로 가봐.
동림은 호텔 방을 나섰다. 그의 뒤를 박과 홍이 따라왔다.
그들은 검은 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고, 박은 머리에 캡을,
홍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코트 속에 오른손을
깊숙이 찌르고 있는 것이 그 안에 무기라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헤로인이 들어 있는 슈트케이스라 그런지 크기에 비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호텔을 나오는 그는 될수록 가방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백화점 쪽으로 걸어갔다.
노경감은 부산의 추경림의 집에만 죽치고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비행기편으로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부산에 있는
동안 추동림과 납치범들은 계획대로 착착 움직이고 있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숨가쁜
긴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산의 추동림의
집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그가 거칠게 수사본부로 들어서자 마형사가 위조전문가로
보이는 절름발이 여인이 타고다녔다는 승용차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M카 서울 마 541×번에 대한 등록사항을 조사했는데 1984년
1월 25일에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차주는 그 여자의
이름이 아닌 이동화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B아파트 202동
805호 소유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 여자의 이름을 알아내야 해!
경감은 불안과 분노가 엇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동화라는 인물을 찾아내면 풀릴 줄 알았는데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량등록소에 등록되어 있는 인적사항에
따라 주민등록지에 가봤더니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사망년도가
1984년 1월 20일로 되어 있는 걸 보니까 그 차를 구입하기
직전에 사망한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이 차를 구입했다는 말인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어 차를 구입하고 아파트를 샀겠지요.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같은 시기였습니다. 죽은 이동화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 나이는 41세였고, 부인과 자식이 둘 있습니다.
그는 택시 운전사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인과 자식들은 현재 단칸 셋방에 살고 있는데,
부인은 남편의 이름으로 아파트와 자가용 승용차가 구입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가 택시 운전기사로 착실한 남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 절름발이 여인을 찾아내야 해!
경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박문호 형사가 뛰어들어왔다.
그 여자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숨가쁜 목소리에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 차가 지난 1년 동안에 한번쯤 교통위반에 걸려 딱지를
떼었을지도 모른다고 보고 교통과에 가서 위반 차량들을 조사해
봤습니다.
교통위반으로 처벌받은 차량들은 하나 빠짐없이 컴퓨터에
수록되기 때문에 어떤 차량의 전과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고 박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서울 마 541X번은 84년 7월 16일 주차 위반에 걸렸고, 10월
29일에 차선 위반으로 적발되어 벌금을 물었습니다. 당시의
운전자는 두 번 다 박지순 이라는 여자였습니다.
박지순의 운전면허 번호는 2-5398×번이었다.
경감은 박형사가 시경 교통과에서 뽑아온 박지순의 사진이
첨부된 인적사항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그녀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그리고 본적 등이 나와 있었다.
이 사진을 확대해서 빨리 수배전단을 만들어. 박형사와
마형사는 두 사람 더 데리고 이 여자 주소지에 빨리 가봐.
그리고 최형사와 우형사는 본적지에 내려가봐.
경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7시 5분 전, 김포공항 국제선 터미널 앞에 녹색 택시가 멎더니
세 남자가 내렸다. 택시에서 맨 나중에 내린 사나이는 손에 들고
있던 회색 중절모로 짧은 머리를 덮었다.
그의 오른 손에는 밤색의 슈트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왼쪽 어깨에는 누런 색의 남자용 숄더백이 걸려 있었다.
그는 아주 말쑥한 차림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모든것이 새로
갓 사입은 듯 어쩐지 몸에 잘 맞지가 않고 어색해 보였다.
그는 안에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 위에는 베이지 색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에 메고 있는 넥타이는 자주색 바탕에
흰 줄이 그어진 것이었다. 안경은 끼고 있지 않았다.
밝은 불빛 속으로 들어서자 중절모 밑으로 유난히 짙은 두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뒤를 두사나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조그만 트렁크를 들고 있었다. 그는 통나무 밑둥처럼
굵고 튼튼한 목을 가지고 있었다.
국제선 터미널 빌딩 안으로 들어선 회색 중절모의 사나이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홀 안을 휘둘러보다가 이윽고 에어 프랑스
간판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에어 프랑스 카운터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맨뒤에 다가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의 뒤로 두
사나이가 붙어섰다.
이윽고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여권과 비행기표를 제시하고
탑승권을 받았다. 그 다음 짐부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뒤따르던 사나이가 그에게 트렁크를 건네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서 같기도 하고 보디가드 같기도 한 그런
모습이었다.
동림은 트렁크를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제복의 사나이가
트렁크에 짐표를 달고 나서 같은 번호표를 그의 비행기표
뒷면에다 붙여주었다.
이건 기내에 들고 들어가도 됩니까?
동림은 돌아서다 말고 슈트케이스를 제복에게 들어보였다.
네, 괜찮습니다.
박과 홍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동림은 그곳을 떠나 3층으로 올라갔다.
2층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3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세 사나이는 한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동림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를 감시하던 사나이들은 그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동림은 슈트케이스를 테이블 밑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런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은 그런 태도였다. 박과 홍은
불안한 눈으로 동림을 쳐다보았다. 동림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7시 30분이 막 지났을 때 목에 기브스를 한 팔리지 않는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곧장 동림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동림은 그때까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았다.
아주 그럴 듯해요. 아주 근사해.
화가는 마치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듯 동림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내 아들과 통화할 수 있게 해주시오. 약속대로.......
동림은 숨을 죽인 채 말했다.
내 아들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출국할 수 없어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화가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쪽지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7시 50분에 여기로 전화를 걸어봐요. 통화가 가능할 것이요.
박과 홍이 자리를 떴다. 그들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화가가 말했다.
저 두 사람이 당신을 파리까지 보호하고 갈 거요.
보호가 아니고 감시겠지.
파리에 도착하는 대로 여기로 전화를 걸어 암호명 검은
장미를 찾아요. 만일 통화가 안 되면 다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요.
화가는 메모쪽지 하나를 또 내놓았다.
검은 장미가 당신한테 지시를 내릴 테니까 당신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돼.
물건은 누구한테 전하지요?
검은 장미가 시키는 대로 해. 그것을 어디서 누구한테
전할것인가는 나중에 알려줄 거야.
내 아들은 언제 돌려주는 거지?
당신이 물건을 무사히 전해 주는 것과 동시에 집에 돌려
보내겠어.
어떻게 그걸 믿을 수가 있지?
이제 와서 못믿겠다는 건가?
동림은 상대방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다가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내가 당신들한테 연락을 취하려면?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전화번호로 연락하면 돼. 574-778×번
말이야.
동림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7시 45분
이었다. 화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해봐요. 모든 건 당신 자신한테 달렸으니까.
동림은 그 손을 잡지 않고 그 대신 허리를 굽혀 슈트케이스를
집어들었다.
20시 35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 A505기를 탑승할 손님들은
지금 출국장으로 들어가 수속을 밟아달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오고 있었다.
커피숍을 내려온 동림은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는 구석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한 중년 여인이 빈 칸으로 막 들어가려는
것을 밀쳐내고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뚱뚱한 여인은 눈을
부라리며 아니,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소리쳤다. 그녀와 동행인 듯한 중년 남자가
동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동림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다이얼을 눌러댔다.
중년 여인까지 가세해서 소매를 잡아끄는 바람에 동림은
밖으로 끌려나올 뻔했다. 박과 홍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전화를 걸지 못하고 끌려나왔을 것이다. 박이 중년 남자의 팔을
주먹으로 치면서 반말로 이거 놓지 못해?! 하고 위협하자 그들은
주춤했다.
이 사람을 건드리지 말아요. 아주 귀하신 분이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이번에는 홍이 여인의 팔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시끄럽게 굴지 마.
그들의 얼굴에서 살기를 느낀 중년 부부는 겁먹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인하야!
동림은 억눌린 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아빠......아빠......아빠.......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말듯 들려왔다. 그것은 거의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그에게는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다만 아빠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하야, 조금만 기다려줘! 며칠만 기다리면 아빠가 널 데리러
갈거야!
아빠......아빠......아빠.......
아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인하야!
됐지? 네 아들은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것은 미스터 Y의 목소리 였다.
그 애는 죽어가고 있어. 만일 내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넌 아들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을 거야.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는 동림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박과 홍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동림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나서 힘없이 출국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그는 슈트케이스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화가가 출국장 입구에 서있다가 그에게 역시 걱증스럽고
두려워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동림은 화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귀에다 이렇게 속삭였다.
만일 내 아들이 죽던가 약속을 어기면 그놈도 죽을 거라고
전해 주시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라고.......
화가는 움찔하고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에 기브스를 대고 있었기 때문에 턱만 조금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동림은 출국장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에 들어서면 일단 외부와
단절된다.
그의 앞에는 엑스레이 검사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만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면 이번 여행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대는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박과 홍이 동시에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방은 여기에 올려 놓으십시오.
제복의 사나이가 동림이 들고 있는 슈트케이스를 가리켰다.
동림은 검사대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이 검사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모두 꺼내 플래스틱 바구니에 담았다. 보안관은 바구니
속에 담겨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다가 지갑을 집어들었다.
이거 얼마죠?
지갑 속에 들어 있는 달러를 들여다보며 보안관이 물었다.
3천 달러입니다.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지갑을 도로 바구니 속에
던져넣었다.
다른 보안관이 전자 감응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몽둥이 같은
것으로 그의 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리고 아무 반응이 없자
됐습니다. 하면서 그를 통과시켰다.
그는 검사대를 지나 먼저 바구니에 있는 물건들을 챙긴 다음
엑스레이 검사대 쪽으로 조심스럽게 가보았다.
그의 슈트케이스는 엑스레이 투시기 밑을 지나 반대편 검사대
위에 굴러와 있었다. 보안요원들 중 거기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이상 없는 물건으로 판정이 난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돌아섰다. 그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그 앞에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출국심사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은 다른 쪽 출국심사대로 가고 박이
동림의 뒤로 바싹 붙어섰다.
동림은 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로 들어서서 심사대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제복의 사나이 앞에 똑바로 섰다.
제복은 유리 칸막이 저쪽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눈으로 동림을 바라보았다. 동림은 여권과 출입국
신고서, 그리고 탑승권 등을 창구 안으로 디밀었다.
제복은 그것을 살피고 나서 컴퓨터 단말기의 키를 두드렸다.
이윽고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동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동림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몸이 안 좋으신가 보죠?
하고 제복이 물었다.
아, 네.......
동림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래가지고 여행하시겠습니까?
쉬고 싶지만 중요한 일이라서 가야 합니다.
무슨 일로 가십니까?
무역상담 관계로 갑니다.
제복은 여권에다 스탬프를 쾅하고 찍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수고하십시오.
동림은 심사대를 통과해 보세구역으로 들어섰다.
홍은 이미 보세구역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 후 박도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보세구역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있거나 면세점을 기웃거리거나 하고 있었다.
20시 35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 A505기의 탑승구는 2번
게이트였다.
동림은 2번 게이트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빛 사이로 굵은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의 내쉬고 입으로 얼른
담배를 가져갔다. 박과 홍은 그의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개처럼 그를 지키고 있었다.
굵은 눈송이들은 끊임없이 창문에 날아와 부딪치고 있었다.
동림은 문득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그는 옆에 놓아둔 슈트케이스를 눈여겨
살피고 나서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려 박과 홍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림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서글픈 미소였다. 그의 미소에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동림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에어 프랑스 A505기의 거대한 동체가 눈을 뒤집어쓴 채
서있었다. 동체 위에 쌓여 있는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겁에 질린
눈으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20시 35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 A505기에 탑승하실
손님께서는 2번 게이트로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외국 말로 바뀌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2번 게이트 앞으로 슬슬 다가서기 시작했다. 박과
홍도 일어서서 그의 곁을 스쳐갔다. 동림이 움직이지 않자
그들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동림에게 빨리 일어서라고
눈짓을 보냈다. 동림은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2번 게이트 쪽으로 다가서자 박과 홍이 자연스럽게 그의
뒤쪽에 가서 붙었다. 동림은 탑승권을 제시하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동체에 연결되어 있는 로딩브릿지를 지나 출입문 앞에
이르자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다.
그는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자리는 뒤쪽 창가에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홍이 앉았고
박은 바로 앞자리를 차지했다. 홍이 슈트케이스를 선반에 올려
놓지 말고 밑에다 내려놓으라고 말했기 때문에 동림은 그것을
벽에다 기대놓았다.
여기서부터는 한국이 아니야.
하고 홍이 말했다.
동림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빛들이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터미널 빌딩에는 대낮처럼 불이 밝혀져 있었다.
굵은 눈송이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씌워진 운명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생각에
그는 전율했다.
비행기는 정시보다 5분쯤 늦게 출발했다. 몸이 뒤로
기울이지면서 비행기가 대지로부터 떠올랐을 때 그는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그의 표정은 창백하다 못해 납빛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아래로 불빛들이 명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어둠 속으로 급격히 침몰해 가고 있었고, 이윽고 그의
시야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들어왔다. 그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어린 아들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는 어린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려는 듯 한 손을 들어 창문을
쓰다듬었다.
뭐하는 거지?
마약 중독자처럼 생긴 홍이 물었다.
저 밖에 내 아들이 있어.
그는 정색하고 말했다.
<2권 끝,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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