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소설 - 여고괴담

3학년2반 | 2022.02.07 08:03:31 댓글: 0 조회: 739 추천: 0
분류엽기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965
(저자 약력)

* 김덕문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리빙센스', '월간오픈', '행복만들기'등 유명 여성지 기자를 거쳐 출판사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출판기획 및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프롤로그)

어두운 밤이었다. 하나 둘 교실의 불이 꺼지기 시작하자 학교는 더욱 음산한 정적에
파묻혀가기 시작했다.
낮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빗줄기는 저녁이 되면서 더욱 굵어지더니 한밤이 되면서는
폭우로 변했다.
쏴아! 쏴아!
게다가 바람은 세차게 불어와 유리창문을 두드리고 고목가지들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교실과 운동장 구석구석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지키고 있는 가로등 불빛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잔뜩 웅크린 모양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이 우루루 교실 밖으로 나왔다. 새학기가 시작된 지
1주일여 가 지난 때라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하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우중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넘쳐 있었다. 이내 학교는 어둠과 폭풍우에 푹 잠겨버렸다.
모두 떠나버린 학교 교정은 적막하다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 가운데 고막을
찢어놓듯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익. 끼익. 끼이익. 쿵!
경비원 김씨가 교문을 닫는 소리였다. 오래된 철문은 빗방울과 부딪히며 더욱
힘겨운 굉음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의 신음소리처럼 멀리
퍼져나갔다. 경비실 지붕에 걸린 보안등 불빛이 바람에 흩날리자 빗줄기의 굵은 봄이
드러났다.
경비원 김씨는 학생들의 꼬리가 사라지자 정문을 닫은 다음 얼른 경비실로
들어왔다. 그새 머리며 어깨죽지는 빗물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는 옷자락에 묻은
빗방울을 털었다. 그런 다음 낡은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 앉아 다시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김씨가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가요무대' 시간이었다. 어느새
<섬마을 선생님>은 끝나 버렸고, 오랜만에 이수미의 '여고시절'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날 여고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변치 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 흘러
김씨가 여자고등학교의 경비로 근무하기 시작한 이후 부쩍 좋아하는 노래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자기로 모르게 그만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야간 근무라는 게 원래 학생들이 귀가한 이후에는 잠으로 떼우는 것인지라
그로서는 근무하는 흉내만 내면 되는, 별로 부담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김씨가 무언가에 놀라듯 갑자기 움찔 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김씨는 반쯤 충혈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가며
좌우를 살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컹! 컹! 멀리서 개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깜빡 졸았음을
알았다. 손등으로 입가에 흐른 침을 닦은 김씨는 책상 서랍에 숨겨둔 2홉들이
소주병을 꺼냈다. 입으로 뚜껑을 딴 그는 병나발을 불어 한모금을 제꼈다. 그런 다음
다시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이내 잠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씨가 근무하는 여고는 시내 한 복판에 있었다. 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학교이다. 낡고 오래된 건물과 건물보다 더 높이 솟은 나무들이 그걸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넓은 운동장은 어둠 속에 유난히 휑하게 드러나 있었다. 철봉이며 그네, 골대 등은
빗방울을 머금어 차갑게 반짝거렸다. 한차례 쏟아진 비로 인해 운동장 여기저기선
물웅덩이가 깊이 패엿다. 그 위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맨발로 그 물웅덩이를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철퍽,
철퍽.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간신히 덮는 교복치마를 입어서인지 하얀 맨발이
유난히 선명했다.
발걸음은 교실로 향했다. 띄엄띄엄 설치된 보안등만이 칠흙같은 교정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의 차디찬 시선이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본관 1층의 교무실을
뚫어지게 응시하여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박기숙 선생은 넓다란 교무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도 초저녁부터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퇴근도 하지 않은 채 옛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느라 시간가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내려온 옆자리의 선생이 물었지만 그녀는 건성으로만
대답을 했다.
"먼저 퇴근 하세요."
그런 다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빗줄기는 점점 세차게 내렸고, 불빛도
모두 꺼졌다. 그런 가운데도 그녀는 홀로 남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얼굴에는 초조하고 두려운 기색이 완연했다.
박기숙 선생은 수화기를 들었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천천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따르릉, 따르릉.
두 번 신호가 울리더니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여전히 자동응답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허은영입니다. 저는 지금 외출중이로니 전하실 말씀이 있거나 용무가
있으시면 삐 소리가 울린 후 메시지를 남겨.
응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기숙 선생은 짜증스러운 듯 신경질을 내며 또다시
수화기를 내려 놓고 말았다. 탁! 몇 시간째 계속 전화를 걸고 있지만 음성메모만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박기숙은 다시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교무수첩을 찬찬히 훑어보며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학생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어느 한 페이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는 기분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 한 걸음 뒤로 의자와 함께
밀려났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어느 한 아이의 사진을 본 박기숙 선생은 혼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과 공포가 짙게 배어 있었다. 8 년전에 졸업한 졸업생들이 기증한
것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왼편이 교장실이고, 오른편이 교무실이었다.
현관 오른쪽 벽면에는 '우리 학교의 역사' 라는 패찰 아래 학교 조감도와, 연혁 등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개교 당시부터의 사진들과 역대 졸업생들의 교복, 배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때앵, 때앵, 때앵.
마침 시계는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소리도 없이 교복이 전시된 곳으로 향하더니 가만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춘추복, 하복, 등복이 목이 없는 마네킨에 입혀진 채 전시돼
있었다. 검정 톤의 치마와 조끼 아래 하얀색의 블라우스가 유난히 튀었다.
순간 플래시 불빛이 비쳤다. 그러자 전시장 유리에 흰 반팔 여름교복을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 모습은 눈 깜작할 새에 사라지고 말았다.
프레시를 들고 현관으로 나온 사람은 그날 밤 숙직을 서고 있는 체육선생이었다.
그는 현관 가운데에 서서 이리저리 불빛을 비춰 보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는 반대편 복도 쪽을 돌아다 보았다. 교무실의 앞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박기숙은 그때까지도 마치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눈동자만이 살아서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직
눈동자만이 살아서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색 표지의
교무수첩이었다.
수첩에는 숫자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기며 그녀는 '1989'라는
연도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자 어딘가에 꽂혀 있는 날카로운 조각도가
그녀의 뇌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저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는
기분이 들었다. 미처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핏빛으로 붉게 물든 하얀
교복을 입은 소녀가 천천히 환영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귀청을 찢어놓는 듯한 강렬한
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따당, 따당, 따당.
찰랑, 찰랑, 찰랑.
그것은 굿장면이었다. 두 팔을 흔들며 무당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두려움이 점점 밀물처럼 몰려왔다. 몸서리를 치며 수첩을 바라보던 박기숙 선생은
빨간펜을 짚어가며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려나갔다. 1990, 1991, 1992,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 짓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허억!
거친 외마디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박기숙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교무실 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서 있던 체육선생이 그녀보다 더 크게 놀란 듯 문을
두드린 손을 어정쩡하게 거두었다.
"아, 박선생님!"
박기숙 선생은 체육선생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후유! 하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체육선생은 오히려
머쓱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박선생님, 아직도 퇴근 안 했습니까?"
"예, 뭣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곧 갈 거예요."
박기숙의 목소리는 지극히 냉랭했다.
"학기 초라서 할 일이 많으신가 봐요.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아니, 됐어요."
박기숙 선생은 상대방의 호의를 냉정하게 무시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박기숙 선생의 차가운 어투에 질려버린 듯 체육선생은 불쾌한 얼굴로 돌아서
버렸다. 교무실에서 나온 체육선생은 긴 복도를 따라 다시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복도는 보안등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삐거덕. 삐거덕. 오래된
마룻바닥의 마찰음이 걸음을 옮길 때마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운데 통로를 따라 3층까지 올라갔던 체육선생은 천천히 복도 끝으로 향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플래시를 비추며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 끝이 암흑에 잠겼다.
체육선생은 머리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다시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창문 너머 건물 밖에서 빛나고 있던 보안등 전구가 터져 버린 게 보였다. 잠시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우연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체육선생은 박기숙의 일로 재수가 옴 붙었다고 생각했다. 안경을 쓴 고집스런
박기숙의 생김새만 보아도 정이 뚝 떨어지는 그였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돌아서려는데
이번에는 바람이 세차게 밀려오더니 그의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보니 창문 하나가 한 자쯤 열려 있었다. 그는 팔을 뻗어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창문은 낡고 비에 젖어서인지 쉽게 닫히지가 않았다. 몇 번 힘을 준
후에야 간신히 닫을 수 있었다.
체육선생이 교무실 문을 닫고 나간 다음 박기숙은 다시 교무수첩을 바라보며 옛
기럭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가 싶더니 시체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서 눈앞에서 신명나는 굿판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식은 땀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와 얼굴이며 등줄기로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땀을 닦아내면서 두려움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그런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5,5,5?"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박기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도서실로
향했다.
도서실은 본관 1층 끝에 있었다. 박기숙은 도서실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자물쇠를 푼 다음 문을 확 열어 제꼈다. 그것은 두려움을 이기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입술이 바싹말랐다.
벽을 더듬어 간신히 스위치를 찾았다. 박기숙은 허둥지둥 서고 한쪽 구석에 꽂혀
있는 학교 보관용 졸업앨범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뭔가 짐작이 가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졸업앨범을
뒤적이면서도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박기숙은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의 박기숙은 1993 년도 졸업앨범을 찾아서 펼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3학년 3반을 찾았다. 졸업생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 나가던
박기숙은 어느 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뒤로 한발짝 물러서며 소스라쳤다.
박기숙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 틈에 머리핀마저 떨어져나가
버렸다. 흐트러진 머리 때문에 누가보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박기숙 선생은 다시 1996 년도 졸업앨범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쯤 넋이 빠진 채
졸업생들의 얼굴을 뒤지다 다시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역시 3 학년 3반이었다.
이번에는 숨마저 쉴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놀랐다. 아니 숨이 막혀 나오지를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기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서실에는 음기가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홱 돌린 박기숙의
눈에 희미한 누군가의 실루엣이 잡혔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서 한 소녀가 자신을
노려보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박기숙은 도서실 한켠 책상 위의 전화기로 달려갔 . 그리고는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교무실에서 걸었던 바로 그 전화번호였다.
따르릉, 따르릉,
수화기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박기숙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보세요?"
이번에는 상대방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박기숙은 다급하게 외쳤다,
"은영이니? 진주가, 진주가 여기 있어."
박기숙은 정신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대뜸 말했다. 전화를 받는 은영의 황당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런 가운데도 박기숙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래, 걘 틀림없이 죽었어. 하지만 분명히 여기
있어.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거야."
뚜우, 뚜우,
전화가 갑자기 끊어졌다. 상대방이 너무 놀란 나머지 정지버튼을 눌러버린 것
같았다.
"은영아, 은영아! 여보세요!"
박기숙은 전화 수화기에다 대고 되돌아올 수 없는 고함을 질렀다. 이내 수화기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마룻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싸늘한 느낌을 감지한 박기숙은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금테 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에선 금방이라도 눈동자가 튀어나와 데구르르 구를 듯 휘둥그래졌다.
그녀의 안경 유리알에 하얀 반팔 교복을 입은 소녀가 언뜻 비치는가 싶었다. 박기숙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힘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진주."
하지만 그녀는 뒷말을 잇지도 못한 채 목을 감싸쥐었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졸업앨범 두 권이 마룻바닥으로 떨어지며 쿵 소리를 질렀다.
쓰러지면서도 박기숙은 목을 옥죄는 올가미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물리력으로도 풀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박기숙은 자신의 손목을 보고는 눈동자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마치
자살을 하기 위해 예리한 칼로 동맥을 자른 듯 자신의 손목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손목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기숙은 완전히 까무러치고 말았다. 허연 백태만 보였다. 그러면서도 박기숙은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기숙은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 버려 바닥에 길게
늘어뜨려졌다. 손목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졸업앨범으로 스며들어 사진들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한편, 창문을 닫은 체육선생은 다시 계단 쪽으로 향하려다 멈춰 섰다. 어느 한
교실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나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교실문을 플래시로 이리 저리 비춰 보았다. 짐작대로 교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체육선생은 조심스럽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문턱을 넘자 문 위에 매달린
3학년 3반 팻말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3학년 3반 교실 뒷편 창문이 열려 있고, 하얀 커튼이 비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체육선생은 그곳을 향해 다가가다 터억, 하고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책걸상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가운데 유독 한 걸상만 옆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책상에 걸려 넘어진 체육선생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동시에 플래시가
꺼지면서 교실에는 괴기스런 공포가 흐르고 있었다.
씨팔, 오늘따라 왜 이렇지.
궁시렁대며 일어나면서 체육선생은 플래시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스위치는 올려진
채였지만 켜지지는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불이 켜지지 앉자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어둠을 더듬어 열려진 창문가로 다가갔다.
역시 창문은 아까처럼 잘 닫히지 않았다.
이사장은 뭐하는 건지 몰라. 이렇게 오래된 학교는 팔아버리고 변두리에다가 번듯한
건물 지어서 옮기지 않고,
체육선생은 속으로 욕을 하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창문은 닫히질 않았다.
그런데 체육선생이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교실 천정에서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빗물이 새는지, 그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책상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똑, 똑, 똑, .
간신히 창문을 닫은 체육선생은 교실을 한바퀴 휘둘러 보았다. 그의 눈에는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교실문을 닫고는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체육선생이 나가자마자 텅빈 교실의 창문은 어느 새 다시 열려 있었다. 하얀
커튼도 음산하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체육선생이 밀어넣은 걸상도 다시 튀어나와
있었고, 그 위로 여전히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번개가 치면서 책상을 밝게 비쳤다. 그 불빛 때문에 책상에 새겨진
이니셜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JJ'였다.
자정을 훨씬 넘기면서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번개도 치기 시작했다. 파란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유리창살은 텅빈교실을 갖가지 기하학적인 모형으로 갈라놓았다. 어느
유리창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농도가 짙어지더니
나중에는 새빨간 피로 변했다.
1장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게 개어 있었다. 밤새
쏟아진 빗줄기에 흥건히 젖어있던 교실이며 교정의 고목들도 떠오르는 햇살에 몸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화로움이 교정 가득 묻어 있었다. 투명한 창문을 통해 티 한
점 없는 햇살이 스며들어 교실 또한 밝게 비추고 있었다.
교실은 깨끗했다. 가지런히 닫혀 있는 커튼과 분필가루 한 점 없는 깨끗한 칠판,
칠판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는 교훈과 급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책걸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좌우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몇몇 책상
위에는 어제 밤에 보다가 덮어두고 간 참고서들이 놓여 있었다. 걸상에는 예쁜 꽃이며
나비, 미키마우스, 강아지 등이 다양하게 새겨진 방석들이 얹혀져 있었다. 때로는
베개로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쓴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교실 뒷편에는 개인 사물함과 청소 도구들이 벽을 따라 질서있게 늘어서 있었다. 그
위로 '환경미화는 마음의 거울이다' 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고, 금주의 주번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주번의 이름은 임지오와 윤재이었다. 만일 그 벽에
'사당오락'이라는 섬뜩한 구호만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비온 다음날은 으레 그렇듯이 하늘이 싱싱했다.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는 교정 어느
곳에선가 이름 모르는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경비원 김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교문을 활짝 열어놓고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후후 입으로 불어가며 먹는 아침의 라면 맛은 언제나 일품이었다. 냄비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그릇째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그때 여학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김씨는 내다보면 하마터면 체할 뻔했다.
"안녕하세요?"
경비실 앞에는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지오가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언제 보아도
밝은 얼굴이었다. 경비원 김씨는 마치 딸을 대하듯 인자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짜아식, 인사성 하난. 끄윽!"
그는 길고 진한 트림을 했다. 그러나 지오는 어느새 추운 듯 몸을 약간 움츠리면서
교실로 향하는 언덕길을 통통 튀며 달려가고 있었다.
교실로 난 언덕을 거의 다 올라간 지오는 갑자기 멈춰섰다. 저마치서 재이가 화단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재이는 지오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채 연신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오의
그림자가 옅은 어둠을 형성하자 그제서야 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지오를 본 재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아침부터 청승맞게 여기서 뭐하고 있니?"
지오가 먼저 말했다.
"응,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뭐?"
지오는 처음에 재이의 그 소리를 똑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지오는 하루라도
'FM대행진'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지오는 얼른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참, 뭐라구?"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재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3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이 되긴 했지만 학기 초라 아직 그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날?"
재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그런 재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지오는 반문을 했다.
"아니, 왜?"
"?"
재이는 가만히 있었다. 지오는 즉각 대답을 하지 않는 태도가 답답했다. 그런
재이가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너무 말수가 적은 아이라 털털한 성격의 지오와는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왜 여기서 날 기다렸냐구?"
"우리 둘이 주번이잖아."
그 말에 지오는 재이의 아래위를 한번 쭈욱 훑어보았다. 그런 다음 손가락 끝으로
밉지 않게 재이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윤재이, 너 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고 그래, 응."
사실 지오는 자신이 주번인 것도 모른 체 등교했다. 비가 맑게 갠 하늘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날따라 일찍 학교로 오는 길이었다. 여전히 재이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지오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나, 아직 안 늦었지? 어쩐지 오늘은 일찍 오고 싶더라니. 자그마치 15분이나 일찍
왔으니까."
"그래, 넌 늦은 게 아니야. 내가 너무 일찍 학교에 온 것 뿐이야."
지오는 다시 한번 재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3 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고,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긴 했어도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친구였다.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잖아. 일찍 왔으면 교실에 들어가서
기다리든가 하지 왜 추운 데서 사람을 기다리고 그래, 미안하게."
얄미운 듯 재이를 바라보며 지오가 말했다.
"빈 교실에 혼자 들어가는 게 좀 무서워서 너랑 같이 들어가고 싶었어, 미안해."
"미안하긴 또 뭐가 미안해?"
지오는 어이가 없어 핀잔을 주었다. 그 말에 재이는 도리어 미안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널 미안하게 했잖아. 정말 미안해."
마치 주눅이 든 것 같은 재이를 빤히 바라보던 지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오는 다시 이어폰을 뀌에다 꽂고 성큼 앞서서 교실로 향했다. 몇 발자국 그렇게
걸어가던 지오는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앉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재이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닌가.
지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재이에게로 되돌아갔다.
"너, 이렇게 좋은 아침부터 자꾸 청승 떨래. 마지막 여고시절 좀 우아하게 마무리
하려고 그랬더니 초장부터 왜 이 모양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오는 우울한 얼굴로 서 있는 재이의 손을 덥썩 잡았다.
왠지 새 가슴에 못을 박지는 않았나하는 미안함이 드는 것이었다. 손을 잡힌 재이는
감짝 놀라며 지오를 바라 보았다.
"여기 서서 교문 귀신이라도 되려고 그러니? 함께 교실로 들어가자며?"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이를 일으켜 세운 지오는 손목을 잡고 교실로
향했다. 걸음을 내딛으며 둘은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떠뜨렸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모두 마셔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 아침 공기 하난 끝내주게 좋다, 그치?"
지오의 탄성에 재이는 엷은 미소로 응답했다. 그러면서 재이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지오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지오는 부술듯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교실로 들어섰다. 입학 후 처음으로 자신이
1등으로 등교한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지오는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
지오 뒤로 재이가 얼굴을 빼꼼이 내밀었다.
교실 안에는 언제 등교했는지이미 정숙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자습을 하고 있었다.
정숙은 지오가 거침없이 문을 꽝하고 열자 짜증스러운 얼굴로 쳐다 보았다. 잠시
지오를 노려보던 정숙은 시선을 거둬 다시 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오는 그런 정숙의 얼굴에서 남을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이기적이고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읽어냈다. 지오는 모범생이라면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오는 두 팔과 양 어깨를 위로 치켜올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재이 또한 뜻밖의 광경에 쭈뼛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다가갔다.
지오의 책상에는 이니셜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JJ. 지오는 제일 먼저 자신의
책상에 묻어 있는 붉은 액체를 발견했다. 물감이나 잉크는 아니었다. 녹물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기분이 상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나지막이 내뱉은 지오는 그것을 오른손 집게 손가락으로 찍어 보았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며 누구더러 들으라는 듯이 내뱉었다.
"뭐야, 이거?"
어젯밤에 하교할 때 분명히 깨끗이 치워놓은 책상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묻어있다면
당연히 맨 처음 등교한 정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오는 정숙이더러 들으라는
듯 이 번에는 짐짓 큰 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침부터 누가 남의 책상에서 햄버거를 먹구 그래. 먹었으면 흘리지나 말 것이지."
지오는 정숙의 뒤통수를 째려 보았다. 그럼에도 정숙이 돌아보지도 않자 지오는
관두자는 식으로 시선을 거두고는 끙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상대할 대상이 못
된다는 투였다. 다시 혼잣말로 내뱉었다.
"그래, 아무리 내가 공부를 못한다손 치더라도 내 책상이 밥상이냐? 책상이지."
지오는 궁시렁대며 양동이와 대걸레를 들고는 밖으로 휑하니 나가 버렸다. 재이는
주전자를 들고 그런 지오의 뒤를 부리나케 쫓았다.
지오와 재이가 나간 뒤 정숙은 보고 있던 수학 참고서를 덮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뒤로 제껴 힘껏 기지개를 펴며 천정을 바라보았다. 정숙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얼굴에는 알듯 모를듯 한이 서려 있었고, 눈빛은 소름 돋을 정도로
섬뜩했다.
정숙은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잘못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얼굴을 붉히긴 싫었던 것이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면 잘 알겠네."
수돗가로 향하는 지오의 뒤를 따르며 재이가 말했다.
"잘은 몰라. 그냥 귀신 붙은 애라는 것 밖에는."
" 귀신?"
지오에게서 튀어 나온 뜻밖의 말에 재이는 적잖이 놀랐다. 지오는 그런 재이의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피식 웃음으로 넘겼다.
"거 왜 있잖아, 성적 귀신이라고. 근데 붙어도 하필 만년 2등 귀신이 붙었지 뭐니.
쯔즛 안 됐어."
"친했니?"
재이의 말에 지오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더니 손사래를 저었다.
"관상을 봐라. 걔가 나 같은 애 하고 친하게 지낼 애 같든?"
돌아보는 지오에게 재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손걸레 안 갖고 내려왔다."
재이는 뒤돌아 다시 허둥지둥 교실로 향했다. 그런 재이에게 지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지오의 호통에 다시 놀란 재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거나 주고 가, 이 바보야. 여기까지 갖고 내려와서 도로 가지고 올라가냐?
지오는 재이의 손에 들려있던 주전자를 얼른 빼앗아가지고 내려가며 외첬다.
"손걸레 가지고 빨리 내려 와."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려가는 지오를 보며 재이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공부는 몰라도 성격 하나는 그야말로 끝내주는 애라는 생각에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삭막한 고3 교실에서 그나마 걱정없고 명랑한 친구를 알게 된 게
다행이다 싶었다.
수돗가는 교실 뒷편에 있었다. 수돗가 너머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고,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며 철쭉이 피고,
여름이면 매미가 울며, 가을에는 도토리가 익어 톡톡 떨어지곤 하는 게 학교의
자랑이라면 자랑이었다. 겨울에 어쩌다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학교는 동화의 나라처럼
아름다웠다. 더러는 점심시간이나 청소시간에 날라리들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기엔
안성맞춤이기도 한 동산이었다.
지오는 수돗가에 양동이와 대걸레, 주전자를 내려 놓았다. 그런 다음 수도꼭지를
틀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산비탈에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오는 좀더 가까이서 확인해보기 위해 천천히 산비탈 쪽으로
다가갔다.
동산 쪽으로 다가간 지오는 너무도 놀라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돌부처가 되고 말았다.
어느새 얼굴은 흑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섰다. 갔던 길을 되돌아나오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산비탈의 고목에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박기숙 선생이었다.
박기숙의 시체가 흉칙한 몰골로 축 늘러진 채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양쪽 팔목을
끊어져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굳어 손가락 끝과 흰옷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뭐해?"
겁에 질려 되돌아서는 지오의 팔을 재이가 붙잡았다. 지오는 재빨리 재이를 덥썩
안으며 눈을 가려주었다.
재이는 그런 지오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지오의 손을
떼내려 했다. 그러나 워낙 강한 지오의 손힘에 재이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곧이어 수돗가 근처에서 양동이와 주전자 등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우당당탕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여학생들의 메조 소프라노 톤의
비명 소리가 합창처럼 교정 전체를 뒤흔들었다. 다른 학년, 다른 반 주번들 몇 명이
수돗가로 오다 시체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눈은 비록 가려져 있었지만 재이는 비명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오의 손이 스르르 풀리자 재이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이의 눈에도 바람에 흔들거리는 박기숙의 시체가 보였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했다. 표독스런 박기숙의 얼굴이 마귀할멈처럼 일그러져 있어 더욱 흉물스러웠다.
박기숙 선생은 지오와 재이의 담임 선생이기도 했다.
그때 교실 3층 창문에선 학생 한 명이 달라 붙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싸늘한 표정의 정숙이었다. 정숙은 한참동안이나 미동도 않은 채 굳은 얼굴로
박기숙의 시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2장

학교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여학생들 특유의 수다 떠는
소리마저 교실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다 굳게 닫혀 있었고,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커튼이 굳게 드리워져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에는 낙서장 같은
하얀 종이 몇 장만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교정 한켠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낡은 창고 같은 건물에선 음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침묵하기는 교무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들은 수업에 들어가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 선생님들의 경우엔 더러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50여 명 남짓한 선생님들은 모두가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어떤 선생님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가락 틈새로 실눈을 뜨고 다른 선생님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도
했다. 숨쉬는 소리조차도 벅찬, 무거운 침묵이 교무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각 교실마다엔 이동금지 지시가 내려졌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습을 하고
있으라는 거였다. 미처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은 뜻밖의 공포의 분위기에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교실의 앞줄에 앉은 몇몇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습하는 분위기만 의무적으로 지키려는 듯 요령을
부렸다. 작은 손거울을 꺼내 머리 스타일을 매만지거나, 유승준이며 에초티, 안재욱
같은 연예인 사진을 꺼내 놓고 끼리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씨팔, 단체로 변비라도 걸렸나. 아침부터 학교 분위기가 왜 이래."
"그러게 말야. 늙은 여우가 생리라도 다시 시작했나?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네."
그렇거나 말거나 교실 뒤편에선 날라리로 소문이 난 학생들 몇몇이 모여서 어색한
침묵을 꺠려는 듯 떠들고 있었다.
'늙은 여우'란 바로 그들의 담임인 박기숙 선생의 별명이기도 했다.
"생리 아니라 임신을 했다고 해도 그렇지. 씨팔 이거, 뭐 새로 나온 고3 길들이기야
뭐야?"
"그러게 말이야. 수업을 안 할려면 미리미리 연락을 주든가 하지 이게 뭐야.
비상연락망은 짜서 찜 쪄먹을라고 그러나. 바쁜 애들 죄다 학교에 불러 놓고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근데, 네가 바쁘긴 뭐가 바쁘니?"
그 말에 다른 친구가 톡 쏘아 부치며 까르르 웃는 바람에 아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날라리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하던 짓거리를 계속했다
저편 구석에는 다른 두 명의 학생이 심각하게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지오는 도대체 어디 간 거니?"
"아까 '미친 개'가 주번 애들 불러서 갔잖아."
한 아이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는 건너편 자리에 있는 반장인
소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영아, 지오는 아까 그렇게 불려가서 아직도 안 돌어온 거니?"
소영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자 수다쟁이들은 다시 자기네끼리
울타리를 쳤다.
"주번이라 간 거야? 아니면 지오라서 간 거야?"
그러자 다른 한 명이 재이의 빈 자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쟤도 갔잖아. 쟤도 오늘 주번 맞지? 근데 쟤 이름이 뭐더라."
"윤재이 아냐?"
"맞아, 그런 것 같애. 소영아, 맞지?"
그들은 동시에 소영이에게 물어 보았다. 소영은 그래? 라며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소영이에게도 시원한 대답을 못 들은 그들은 다시 앞쪽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한마디 더 했다.
"야, 근데 우리의 모범생 정숙이 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

그 시간 정숙은 체육관에 불려와 있었다. 눈을 내리 깐 채 부동자세로 서 있던
정숙은 뭔가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말씀 끝나셨으면 교실로 돌아가도 되나요?"
아이들 일곱 명을 일렬로 쪼르륵 세워 놓고, 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오광구 선생은 담배연기를 잘못 맡은 바람에 눈이 매운 듯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당돌하게 대드는 정숙을 노려 보았다. 인상이 금세 붉으락 푸르락 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이 새끼가! 임마, 누가 안 보내준데?"
오광구의 매서운 눈과 마주친 정숙은 무어라 더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미친 개에게 물리면 물린 사람만 손해라는 생각에서였다.
오광구는 앞에 서 있는 학생들을 하나씩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선생님에 대한 제자된 도리야.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너희들이
입을 잘못 놀려서 운명을 달리 하신 분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그건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정숙의 옆에는 지오와 재이, 그리고 다른 반 주번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오광구는 담배의 필커가 타들어갈 때까지 악착같이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꽁초를
버릴 곳을 찾지 못한 듯 잠시 두리번 거리다가 바닥에 던지고는 그냥 발로 비벼 껐다.
오광구는 겁을 주려는 듯 뒷짐을 진 채 아이들 앞을 왔다갔다 했다. 그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끼여있는 큼지막한 반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말이야, 당부해 둘 게 한가지 더 있어. 괜한 입을 놀려 학습분위기를 망쳐선
절대 안 돼. 내 말 알아 들어? 이건 순전히 다 너희들을 위해서야. 어쨌든 이렇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우리가 합의 하에 금언서약을 한 거니까, 만약 비밀이 새
나가면공동으로 책임질 각오를 단단히 하라구, 알았어?"
오광구는 선생님들 중에서 가장 독종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에게 한번 물리면
약도 없다고 해서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 '미친 개'였다. 그런 그가 박기숙 선생의
의무의 자살을 입막음하려는 총대를 맸으므로 그 말은 단순한 다짐내용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협박에 가까웠다. 본 것을 못 본 것으로 하라는 거였다.
"네!"
학생들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 그들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그 때까지 말문조차 트이지 않는 중이었다.
오광구는 대답을 들은 다음 정숙과 재이를 지나 지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당구 큐대를 잘라서 만든 묵직한 지휘봉으로 지오의 봉긋한 앞가슴을 콕콕
찍어누르며 재차 물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어?"
"네."
지오는 짧게 대답했다.
"잘해, 2학년 때처럼 엉뚱한데 정신 팔려서 헤롱거리지 말고."
"네."
지오는 속으로 재수 옴 붙은 속내였다. 3학년이 되면서 '미친 개'에게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또 물린 기분이었다.
"특히 3 학년 3반은 명심해야 돼. 만약, 3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돌면 그건 모두
네 책임이야, 알았어?"
"네."
이번에는 지오의 톤이 조금 높아졌다. 그때 재이는 오광구에게 특히 찝힌 지오를
힐끔 쳐다보다 선생과 시선이 마주칠 뻔하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숙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교무실로 돌아온 체육선생은 입을 앙다문 채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러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수학선생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형사들은 갔어요? 뭐 물어봐요?"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어젯밤에 볼 땐 어땠냐, 뭐 그런 거였어요."
체육선생은 마지막으로 박기숙 선생을 본 증인의 입장에서 형사들에게 조사를 받고
되돌아오는 참이었다. 그래서인지 체육선생은 되도록 말을 아끼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 자리에 앉아있던 영어선생이 턱을 낮추고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진짜 자살하신 거래요?"
"형사도 일단은 그렇게 보더라구요."
선생들 또한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고 있었다. 박기숙 선생의 죽음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이었지만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을 더욱 두려워했다.
게다가, 쉬쉬 하며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몇 년마다 일정한 주기로
연이어 터지는 자살사건에 커다란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다시 수학선생이 체육선생에게 물었다. 단지 어제 밤에 숙직을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육선생은 뉴스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뭐라고 하세요?"
"뭐. 그냥 조용히 처리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시죠."
"당연하시지. 이런 소문은 퍼져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죠, 뭐."
영어선생이 끼어 들었다. 수학선생이 또 체육선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호기심
많기로는 선생님들도 학생들 못지 않은 것 같았다.
"박선생님, 가족들은 가만히 있어요?"
"예.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가 봐요. 부검도 하지 못하게 한데요."
"근데, 도대체 이유가 뭐래요. 박기숙 선생님이 자살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자살 동기야 뭐 여러가지로 보는 것 같던데, 아무튼 좀더 조사해 봐야 되나 봐요."
영어선생이 물었고, 체육선생이 조심스럽게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했다.
"죽을려고 맘 먹으면 이유야 없겠어요? 하지만 왜 하필 학교에서 그러셨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예요, 참."
수학선생이 말을 마치자마자 교감 선생님이 막 교무실 앞문으로 들어섰다. 선생님은
하던 말을 그치고 후다닥 자세를 바로 잡으며 앉았다.
교감 선생님은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서는 자리에 채 앉지도 못하고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었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담배연기를 내뱉는 그의 손목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던 선생님들은 깊은
침묵으로 동병상련의 심정을 나누고 있었다.
흐음, 흐음.
헛기침으로 침묵을 깨고 교감 선생님이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순간 드르륵 하고
교무실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이번 학기에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해온 허은영 선생이었다. 허은영 선생은 모든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당황하며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했다.
교감 선생님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새에 허은영 선생은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머쓱한 표정이었다.
교무실을 감싸고 있는 무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교감 선생님이 다시 헛기침을
내뱉었다. 목을 가다듬은 교감 선생님이 말문을 열었다.
"아마 늦어도 종례시간 전까진 교장 선생님께서 3학년 3반 담임을 새로 정하실
겁니다."
3학년 3반 담임이라는 소리를 들은 허은영 선생은 박기숙 선생의 자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책상 위에 어느샌가 하얀 국화꽃이 한 다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전교적인 조치로써 특별한 지시사항도 내리실 겁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일이 학교 밖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선생님들께서 입조심을 해 주시고, 학생들도 더욱 철저하게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기숙의 책상을 보고 있던 허은영 선생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의 두려움과 비밀이 엄습해왔기 때문이었다.

자살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다행히 목격자가
많지 않아서 학교측에서는 수습하기가 한결 쉽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게 필요했다. 그 한 방편으로
선생들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3학년 3반 영어수업 시간이었다. 정년 퇴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영어선생은
특유의 엉터리 발음으로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여기서 쓰인 precipitous는 그대로 직역을 하면 곤란해. 이런 경우엔 가파르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돼. 우리가 미국 문화를 알아야 된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
때문이야."
그러자 반장인 소영이가 '선생님' 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영어선생은 약간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말해 봐."
"선생님 이 경우엔 무모하다거나 뜻밖이란 뜻으로 해석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누가 그래?"
영어선생의 음성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저희 과외 선생님이 그랬는데요."
"아냐, 그 양반이 뭔가 잘못 안 거야.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
그러자 소영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터져 나왔다.
"저희 과외 선생님은 미국 사람인데요."
소영의 말에 영어선생은 일부러 고개를 칠판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래? 그것 참 이상하네. 내가 나중에 다시 한번 정확하게 확인해 볼께. 일단은
이렇게 외워 둬. 자, 다시 예문을 보자."
영어 선생은 당황하면서도 교단 경력 30 년의 경험으로 능구렁이처럼 피해 갔다.
다시 문제집을 펴들고는 미처 틈도 주지 않고 재빠르게 예문을 읽어내려갔다.
아이들이 듣기에는 찬란한 일본식 발음이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건너는 법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들은 특히 상황변화에 민감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학교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에 대해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선생들이 숨기고
싶어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더욱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게 그들만의 세계였다.
그건 수업시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때로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가며 나누는
대화가 더욱 스릴있고 짜릿하기도 했다.
확실한 거야?
영어 선생의 시선을 피해가며 교실 뒷자리에선 소곤소곤 얘기꽃이 피어올랐다.
얘는,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응.
웃음보를 가리며 농담처럼 대꾸하는 말에 한 아이가 정색을 했다.
이번엔 진짜 확실한 정보라니까.
진짜 자살했대?
목을 맸다고 다 자살이냐? 내가 보기엔 아니야. 그 늙은 여우랑 원수진 애가 어디
한둘이니?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짝꿍끼리 떠드는 가운데도 정숙은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숙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숙이 펼쳐놓은 책은
영어문제집이 아니었다. 수학책이었다. 영어수업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정숙은
자신의 취약과목인 수학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숙 역시 온종일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 것이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남들이 보이게 정숙의 모습은 더욱 차갑게 보였다.
지오는 빈 노트에다가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미술적
재능만큼은 타고 난 아이였다. 지오는 하얀 노트 위에 연필로 무언가를 스케치하고
있었다. 지오가 그리는 그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살한 박기숙의 초상화로
변해갔다.
그런 지오와 그림을 번갈아보던 소영은 슬며시 영어책 밑에 숨겨 놓았던 영문소설을
위로 올려 놓고 읽어내려갔다.
재이는 수업시간 내내 지오를 훔쳐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지오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사실 재이는 이전부터 지오를 흠모하고 있었다. 3학년 들어서 같은
반이 되자 속으로는 굉장히 좋아하는 재이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엄청난 비밀에 대한 두려움도 지오에 대한 애정으로 변한 터였다.

허은영 선생은 수업이 빈 시간을 이용하여 뒤편 산비탈로 갔다. 그곳은 박기숙
선생이 목을 맨 장소였다.
핏빛 얼룩이 남아 있는 나무의 껍질을 조그마한 나무벌레가 갉아먹고 있는 게
보였다. 은영은 박기숙 선생이 왜 하필 이곳에서 목을 매달았는지 그 이유를 캐고
싶었다. 그리고 간밤의 짧은 통화의 의미를 나름대로 추리해보고 있었다.
진주가 여기 있어.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
은영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박기숙의 그 목소리는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은영은 손에 쥐고 있던 열쇠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 열쇠 고리 끝에는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건 은영이 여고시절부터 간직해오고 있는, 사연이 묻어있는
물건이었다.
가만히 방울을 흔들어 보았다. 몽롱하게 울리는 맑은 방울소리와 맞물려 9년 전의
일들이 펼쳐졌다.
"정말 나에게 주는 거야? 아주 오래된 거라면서."
그건 앳된 은영이의 목소리였다. 은영은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마워, 진주야. 눈을 갑고 이 소리를 들으면 영혼이 맑아진다고 그랬지?"
은영의 눈에는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진주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은영은
눈을 감고 방울을 귀에 대고 흔들어 보았다. 방울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면서
은영의 얼굴에 엷게 미소가 퍼졌다.
은영은 알 수 없는 괴이함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어, 라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간밤에 박기숙이 전화를 걸어 하고자
했던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귓전에 맴돌았다.
한참 동안 굳은 표정으로 나무를 올려다 보고 있던 은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가
산비탈을 내려오려고 고개를 돌리자 정면으로 3 학년 3반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가에 서 있는 한 여학생이 보였다.
지오였다. 쉬는 시간 내내 그 자리에 서서 박기숙이 목을 맨 나무와 그 아래에 서
있는 허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 듯 지오는 은영과 시선이 마주쳐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은영은 그런 지오를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아이들은 서둘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지오는 한동안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 오광구 선생이 지오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3학년 3반의 다음
시간은 오광구 선생이 담당하고 있는 윤리시간이었다. 오광구는 지오의 시선이 고목을
향해 있음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이 새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예민해진 오광구는 지오를 보자마자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네?"
지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광구임을 확인한 지오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
했다.
"아뇨 그냥."
지오가 얼버무리자 오광구는 머리를 쾅 쥐어박았다.
"이 자식이! 수업벨 울리는 소리 못 들었어?"
"네."
지오는 후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 지오를 바라보는 오과구의 눈이 발카롭게
번뜩였다.
오광구는 지오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고목나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과 밑에서 보고 있던 은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은영은 먼저 가볍게 목례를 했다. 하지만 오광구는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고는
계산을 올라가 버렸다.
오광구가 문이 부서져라 거칠게 닫고는 교실로 들어섰다. 아이들은 얼른 자세를
곧추 세웠다. 반장인 소영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광구는 출석부를 교탁 위로 거칠게 내려놓으며 제지를 했다.
"됐어, 관둬. 너희들한테 인사를 받아먹자고 이 짓 하는 거 아냐."
반장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자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윤리는 한 시간만 암기하면 돼. 내 시험 전에 요점만 간단히 찍어줄 테니까 지금
이 시간에는 영어나 수학공부를 해. 알아 들었어?"
오광구의 살벌한 말투에 아이들은 모두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윤리 책을
덮고 영어나 수학 문제집 등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오광구는 아이들을 감시하듯 교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영이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이고 영어 참고서를 보고 있던 소영이 힐끔 그를 쳐다 보았다. 오광구의
오른 손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소영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그는 소영의 목덜미를
안마하듯 주무르며 물었다.
"아빠, 요즘도 술 많이 드시니?"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짜식, 쌀쌀맞기는."
오광구는 약간 머쓱해진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소영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 넣더니 아프지 않게 꼬집고는 지나갔다.
변태새끼!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어느 한 아이가 오광구에게는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비웃음을 던졌다. 그들은 오광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몰래 뭔가를 주고 받고
있었다. 낙서가 적힌 쪽지였다. 한창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서면 수다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아이들은 오광구 몰래 속닥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남편이 바람이 났었대.
내가 남편이면 바람이 아니라 그런 여자와는 아즈녁에 이혼했겠다.
그래서 자기도 연하의 남자랑 연애를 했대.
꼴에?
돈으로 엄청 쳐발랐다나 봐. 사업자금까지 대주고, 근데 그 남자가 외국으로
튀었다는 거야.
얘가 왜 이렇게 유치하냐. 너 3류 주간지 기사 쓰냐? 내가 알기로는 꼴에 주식에
손을 댔었는데, 쫄딱 거덜났다지 뭐니. 그래서 남편한테 이혼소송 당했다더라.
수다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는 새 점점 새로운 얘깃거리들이 만들어졌다.
어쨌든 그건 자살일 경우고, 타살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어?
자기가 뭐 스컬린줄 아나. X파일 찍게.
너 들었어? 아침에 정숙이가 있었다는 얘기?
맞아, 맞아. 나도 그 얘기 들었어. 걔는 주번도 아니었잖아.
근데도 주번보다 일찍 학교에 왔다잖아. 정숙이하고 늙은 여우하고 학년
시작하자마자 한판 붙기도 했잖아.
순간 수다를 떨던 두 학생의 머리가 서로 꽝, 하고 부딪혔다. 둘이 동시에 돌아보니
오광구 선생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픈 머리를 감싸며 둘을 찍 소리도 못하고 책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여기가 무슨 여관방 침대야? 소근소근 속삭이고 있게. 공부하기 싫으면 일찌감치
자퇴하고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든지, 아니면 집에서 얌전히 살림이나 배워! 알아
들어?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아는 거야, 뭐야?"
아이들은 오광구의 으름장에 주눅이 들어 책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쥐 죽은 듯 앉아
있었다.

교무실로 돌아온 은영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새학기에 발령받은 학교가
하필 자신의 모교였다. 때문에 은영은 아직 졸업생인지, 학생인지, 교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자 은영은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은 자신의 학창시절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해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뒷동산의 진달래도 이미 지고 철쭉이 막 시들 무렵이었다.
아이들은 교복차림이었다. 하루는 박기숙 선생이 갑자기 아이들을 복도로 모이도록
했다. 불시에 복장겁사와 소지품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복도 창문에 기대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렸다.
은영의 차례가 되었다. 박기숙은 은영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은영이야 뭐 문제가 있겠어."
박기숙은 은영에게는 별 다른 검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했다.
다시 몇몇 여학생이 검사를 맡은 뒤에 진주가 박기숙의 앞에 섰다. 그러자 박기숙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진주의 교복 칼라를 엄지와 검지로 휘어 잡았다.
희미한 땟자국이 보였다. 금테 안경알 너머로 박기숙의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여학생이 교복이 이게 뭐야? 손 앞으로 내."
박기숙은 폭이 넓은 대자로 진주가 내민 손등을 세차게 내리쳤다. 한 대, 두 대, 세
대, 어느 순간 대자가 찌억 하고 부러지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동시에
진주의 손등에서 피가 쭈루룩 흘러나왔다. 대자가 부러지면서 살이 베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박기숙은 사과나 미안한 표정은커녕 재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주의 손등에서는 점점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어떻게 네 차례만 되면 꼭 이렇게 재수가 없니?"
박기숙은 표독스럽게 한 마디 더 던지더니 이번에는 코를 끙끙거리며 진주의 볼록한
가슴께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가만, 이게 무슨 냄새야? 이거 향내 아냐? 골고루도 한다."
어쩐 일인지 박기숙은 유독 진주를 미워했다. 그 날도 나직히, 그러나 혼잣말은 아닌
게 분명한 첨언을 던져 더욱 자존심을 건드렸다.
"누가 무당 딸 아니랄까봐. 티 내는 것도 아니고."
그 말에 끝내 진주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우는 거였다. 어깨죽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참고 참았던 설움과 미움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은영은 교실 가운데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이 내밀어 진주를 바라보았다.
"허선생님!"
은영은 누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박기숙의 책상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꽃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온종일,
아니 어제 밤 전화를 받고 난 이후부터 예감이 이상했다.
또다시 "허선생님, 커피 드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은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코 앞으로 불쑥 내미는 커피잔을 보고 그제서야 은영은 고개를 들었다. 체육선생이
씨익 웃으며 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영은 가벼운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자 체육선생은 기분이 좋은지 은영의 책상에 반쯤 걸커 않았다. 다리가 공중에
붕 뜬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세요?"
"네?"
은영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마치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남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시길래."
"그게 절 부르는 소리였어요?"
은영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허씨 성을 가진 분은 한 분 밖에 없을 걸요."
체육선생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네에, 죄송해요. 선생님이란 호칭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이해가 갑니다, 하하하."
은영도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꽃을 바라 보았다. 체육선생은 그런 은영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고3 때 담임이셨다고 그랬죠? 누구보다도 상심이 크시겠어요."
체육선생은 은영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다정스럽게 말했다.
"전 어제 밤에 뭔가를 확인하신다길래 중요한 걸 찾으시나보다 하고만 생각했어요."
체육선생의 그 말에 은영은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말꼬리를 잡았다.
"뭘 확인하시는 것 같았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뚫어지게 교무수첩을 보시고 있던 것 같던데."
교무수첩이라.
체육선생의 말에 은영은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귓전에 박기숙 선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걘 틀림없이 그때 죽었어. 근데 여기 있어. 계속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3장

정숙은 수업이 끝나자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늘 그렇게 정숙은 혼자였다. 가까이
지내려는 친구도 없었고, 가깝게 지내는 단짝도 없었다.
정숙은 계단을 반쯤 내려가 창밖을 바라다 보았다. 박기숙이 목을 맨 그 나무를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정숙은 그날 누가 지나가건 말건 개의치 않고 온종일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은 정숙의 머리를 흐트려 놓은
채 휘익 지나갔다.
교실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소란의 한가운데 지오가
있었다.
"싫다니까."
지오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랑 하기 싫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이는 소영이었다. 소영은 지오에게 귀신 점을 쳐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다.
"너랑 하기 싫은 게 아니고, 이젠 그딴 거는 안 할 거라구. 우리가 무슨 초등학교
애들이야, 그런 걸 하게. 하려면 너 혼자 해. 난 이미 다 까먹었으니까."
그러자 소영은 더욱 달착지근하게 지오에게 매달리며 아양을 떨었다.
"주문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잘 안 돼거든. 너랑 하면 귀신이 온대며? 그러지
말고 딱 한번만 하자, 응? 두 번 다시 이런 부탁 안 할게."
소영은 집요하게 지오에게 매달렸다. 지오는 거듭 싫다고 거절했다. 나중에는
사납게 소영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소영은 여유있게 미소로 되받으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다는 듯 지오는 머리칼을 움켜쥐며 졌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마지 못해 소영과 마주 앉았다.
지오는 소영이 앞에 하얀 종이를 펼쳐 놓았다. 그 다음 연필을 들고 소영과 함께
움켜 쥐었다. 지오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처녀귀신 곰베귀신 아기귀신 아줌마귀신 총각귀신."
아이들이 하나 둘 두 사람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모두가 진지한 표정이었다.
"오셨으면 동그라미를 그려 주세요."
지오가 주문을 외우자 둘이 움켜쥐고 있던 연필이 신기하게도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연필은 저절로 조금씩 움직이더니 흰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것을 본
아이들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소영이는 그 모습에 저으기 신이 났다.
"제 친구가 처녀면 동그라미를, 처녀가 아니면 가위표를 그려 주세요."
소영은 살짝 실눈을 뜨고 주문을 외우는 지오를 힐끗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연필 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연필은 흔들흔들 움직였다. 꿀꺽. 그 광경을 보며 침을 삼키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알 논다."
갑자기 분필 지우개가 날라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오의 머리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화들짝 놀란 아이들이 뒤로 한두 걸음씩 물러섰다. 지오의 얼굴에는 분필가루가
하얗게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소영도 눈이 동그래지며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오광구 선생이 교탁 앞에 서 있었다.
"너희 둘 이리 나와!"
소영이와 지오가 겁을 집어먹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들릴 듯 말 듯한
비아냥이 터져 나왔다.
쟨 또 왜 남의 반에 와서 지랄이야. 담임 없다고 깔보는 거야, 뭐야.
오광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 보았다. 그런데 오광구는 두꺼운 출석부를 들더니
지오의 머리만 탁탁 내려쳤다. 그 바람에 지오의 검은 머리에 하얀 분필가루가
흩날렸다. 하지만 오광구는 소영이는 본 체 만 체 했다. 소영이는 분필가루를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광구는 여전히 지오만
노려보았다.
"이게 고3 되면 정신 좀 차릴려나 했더니."
이번에는 막대기로 지오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다.
"너, 또 그짓이냐? 그게 그렇게 적성에 맞으면 아예 자퇴하고 길거리에 나앉지,
학교는 뭣하러 나오냐, 응?"
"."
지오는 입술을 꼭 다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가 점수 좀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소영이 변명을 하고 나섰지만 오광구는 못 들은 체 했다. 소영이를 한번 힐끗 보는
척 하더니 다시 지오에게 쏘아 붙였다.
"야, 임지오. 네가 무당이야, 뭐야? 아니면 도사라도 돼? 도사면 네 점수관리나
잘해. 반 평균점수나 까먹는 주제에. 들어 가!"
소영이는 홱 돌아서 자리로 먼저 들어가 앉았다. 그 뒤를 지오가 분필가루를 뒤집어
쓴 채 축 처진 모습으로 따라갔다. 그런 지오의 모습을 보고 몇몇이 키득키득 웃었다.
"누구야?"
오광구의 화난 음성에 반 전체가 다시 조용해졌다. 살얼음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다.
"지금 웃는 새끼가 누구냐구?"
오광구는 존대나 경어 같은 말은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숫제
쌍스러운 말투였다. 아이들은 오광구의 그런 기세에 기가 질린 듯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좋아, 그렇다면 지금 즉시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간다. 실시!"
자기더러 뭐 출신 아니랄까 봐.
학생들은 작게 쫑알거리며 주섬주섬 책상 위로 올라갔다.
"이 새끼들이 영 정신 못 차리는구만. 손 들어, 이 새끼들아!"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막대기를 왼손
바닥에 탁탁 치며 오광구가 책상 사이로 왔다 갔다 했다. 마치 지휘관이 사열하는
듯한 자세였다.
"담임한테 첫인상을 좋게 심어줄 생각은 안 하고, 이 자식들이."
오광구가 혼잣말을 내뱉는 그 말에 아이들은 모두들 자기 짝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휘둥그래 떴다.
담임?
모두의 얼굴에는 절망적인 표정이 역력했다. 늙은 여우를 물리쳤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미친 개한테 물릴 상황이 되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학생들이 태반이 넘었다. 완전히 날 샜구만. 그런 뜻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지오였다. 악연도 그런 악연이 없었다. 2학년 1년 동안
미친 개한테 물린 세월만 해도 억울한데, 또다시 1년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더군다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자 아름다운 청춘시절을
저당잡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오광구는 유난히 이지오를 미워했다. 지오는 공부는 비록 맨 뒤에서 헤매고 있지만,
성격이 털털하고 밝아 반 아이들에게는 인기있는 애였다. 장난이나 놀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그건 그 아이들 또래의 욕구의 발산쯤으로 보아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광구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지오에게 체벌을 가하고 구박을
주었다.
오광구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유는 너희들이 알 것 없고, 박선생님이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셔서 앞으로
학교를 못 나오시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이 반의 담임을 맡기로 결정됐어.
알아들어?"
오광구의 말에 모든 아이들이 인생에 회의가 든 듯 고개를 가로젓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한순간의 악몽이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들의 그런 표정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광구는 책상 사이를 오가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반의 담임을 맡았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하는 거야."
아이들이 또 무슨 말을 더 하려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하나는 너희들이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좀더 높아진다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너희들의 1 년은 나에게 완벽하게 차압당했다는 사실이다. 여고시절 마지막 해인
데다가, 학기 초라고 뭐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뭔가 모르게 들떠 있는 것
같은데."
휴.
그때 뒷편에선 누군가의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오광구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쉰
주인공을 찾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계속 연설을 이어갔다.
"지금 이 시간부터 그 따위 싸구려 감상은 쓰레기통에다 다 집어넣도록 해. 그건
고3 한테는 분수에 맞지 않는 정서적인 사치야, 사치!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 들어?
분수에 맞게 살자, 이게 내 신존데, 이건 앞으로 우리 반의 새로운 급훈이다. 알겠어?"
지오는 오광구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3
학년이 되면서 간신히 풀려난다 싶었는데 차라리 자퇴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순간적으로 했다. 소영이도 어이가 없는 듯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편
재이는 지오의 앞날이 걱정된다는 듯 지오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숙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없이 굳은 얼굴로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오광구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너희들은 좋게 말하면 서로 경쟁자지만, 정확하게 다시 얘기하면 서로가 적이야,
적. 전쟁으로 치면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어.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언제나 내부의 적이다. 내부의 적을 이길 수 있어야 실전에서도
이길 수 있는 법이야."
오광구는 어느새 교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출석부에 묻은 분필가루를 탁탁 털고는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아이들을 쭈욱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전체 모의고사를 예정보다 앞당겨서 내일 보기로 했으니까 알아서들
준비해."
그 말에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틈을 주지 않고 오광구가 막대기로
교탁을 내리쳤다.
탁!
아이들이 삽시간에 다시 조용해졌다.
"시험 보는 게 고3에게 뭐 그리 새로운 일이라고 떠들어. 떠들긴. 평소의 기본기를
측정해서 입시지도 방향을 잡기 위한 거니까, 부담은 전혀 갖지 말고 기본실력으로
보면 돼. 기본 실력에 자신이 없으면 알아서들 하고. 이상 오늘 종례 끝! 지금부터
청소 시작해."
그 말을 마치고 오광구는 교실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이들은 팔만 내릴 뿐 대부분
책상 위에 꿇어 앉아서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한숨소리와
욕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린 담임 복도 존나 없나봐.
우린 그나마 나은 거야. 지오 쟨 이제 끝났다고 봐야 해. 2 년 연속 미친 개 반이
됐으니.
지오는 그때까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재이는 더욱 걱정스런 얼굴로 지오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고개를 제껴 교실 천정을 바라보던 지오는 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순간
지오는 천장에 누군가의 얼굴 같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지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암담하기는 정숙도 마찬가지였다. 오광구 선생과는 지오 못지 않게 악연이 엮여져
있었던 것이다. 정숙은 싸늘한 시선으로 허공을 한참 노려 보았다.

다음날이었다 교탁 위에 두툼한 시험지 뭉치가 던져졌다. 마지막 영어시험
시간이었다.
감독 선생은 빠른 손놀림으로 문제지를 갈라 맨 앞줄 책상 위로 올려 놓았다.
스르르르. 시험지가 빠른 속도로 교실 맨 뒤에까지 나누어졌다.
아이들은 숨이 막히는 듯 긴장에 휩싸였다. 특히 정숙은 누구보다도 더 부담을
느꼈다. 만년 2등. 자신에게 따라 붙는 꼬리표를 3학년이 되어서는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험이 치러지는 바람에 적잖은 부담이 되었다.
자신을 가리켜 남을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이기적인 아이라고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심하게는 인간성을 상길한 애라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하지만 정숙으로서는 억울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자신으로서는 공부를 통해
남들보다 우월해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전교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다. 소영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정숙은 그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다.
그런데 가장 취약 과목이 바로 영어였다. 영어만 뺀다면 1등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번 영어에서 점수를 다 까먹고 마는 것이었다. 누구처럼 과외라도 받으면
성적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집 형편이 그렇지 못하였다.
이번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시리 더욱 안 풀리는 거였다. 얼굴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슬쩍 소영을 쳐다 보았다. 소영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며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따르르릉. 끝났음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렸다. 평소보다 더욱 긴장해서인지 정숙은
마지막 두 문제를 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감독 선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맨 뒷줄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일어나서 답안지를 걷기
시작했다. 정숙은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모의고사가 끝나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기진맥진해서 책상 위로 쓰러지둣 엎드렸다.
그런데 몇몇이 지오의 곁으로 몰려 들었다. 지오에게 점을 쳐 보려는 심산이었다.
성적은 비록 뒤에서 몇번째였지만 점수를 척척 알아맞히는 지오의 점치는 솜씨는
이미 전교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오는 그런 아이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나, 지금 건드리면 이 길로 곧장 자퇴할지 몰라. 그러니 나 건드리지 마. 점수를 다
팔자려니 하고 그냥들 살아, 알았어? 건드리지 마, 나 폐업했어. 진짜야."
지오가 워낙 완강하게 거부하자 그들은 슬그머니 물러섰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는 아이도 있었다. 볼일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험이랍시고 긴장했던 순간을 떨쳐버리고, 수다도 떨고
담배 한 대라도 지지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에 모인 날라리들은 얼굴 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귀걸이를 한 모습을
이리저리 거울에 비쳐보는 아이도 있었다. 한 아이는 귀걸이에 이어서 코걸이를 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수다를 떨었다.
씨팔, 맨날 시험이나 봤음 좋겠다.
뭐?
의외의 말에 한 아이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처럼 시험보는 날은 일찍 보내줄 거 아야?
미친 년. 시험 안 본다고 네가 늦게 가냐? 수업만 끝나면 야자도 하지 않고 제일
먼저 토끼는 년이.
그래도 시험 끝내고 가는 거랑은 다르지. 어쨌든 마음은 편하잖아.
능숙하게 코걸이까지 한 아이가 쩔쩔 매는 친구의 그것을 빼앗아 끼어주려 했다.
안 들어가냐?
씨팔, 막혔나봐.
그러자 친구의 코에 코걸이를 대신 끼워주었다. 상대방은 아픈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 아퍼.
아프긴 뭐가 아퍼, 이 년아. 들어가는 것 보니깐 막히진 않았네!
아, 아, 하지마. 됐어, 됐어. 그만 해.
알았어, 쌍년아. 뺄려고 그러는 거야. 대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지랄하면 콧구멍
찢어지는 수가 있어.
그때 재이가 화장실로 들어섰다. 콧구멍을 잡고 서로 씨름하는 두 친구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킥 웃었다. 그러다가 재빠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 태연하게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야, 너 구경 났어?"
재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중의 한 아이가 숫제 시비를 걸었다.
"어쭈, 이 년이. 너, 말 다 씹었어?"
"내가 뭘?"
겁을 잔뜩 먹은 재이가 뒤로 주춤했다. 날라리가 막 주먹을 집어들려는 찰나 지오가
변기칸에서 밖으로 나왔다. 지오는 거울 앞의 날라리들을 본 체 만 체 지나쳐
세면대로 향했다.
"야, 점쟁아, 너 의상에 신경 좀 써라. 학생이 단정해야지, 그게 뭐니? 너는
집에서도 교복 입고 자냐?"
평소 아니꼬운 게 있었는지 이번에는 지오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나 지오는 못 들은
척 했다. 대충 손을 씻은 다음 교복 치마의 구김을 털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아이가 팔을 잡았다.
"이 년은 밥 먹은 게 다 젖통으로 가나봐."
크게 한판 붙자는 심산이었다. 학기 초라 서로 기선을 잡으려는 팽팽한 긴장감이
없는 것도 아닌 터였다.
"치워, 이 년아."
지오는 그런 날라리의 팔을 확 걷어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있는 재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안 들어가니? 같이 가자."
날라리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재이를 잡아 끌고 지오는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런 지오를 보며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어이없는 미소를 교환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야, 찢어졌다."
"뭐가?"
"네 코에서 피가 흘러?"
날라리들이 법석을 떠는 사이 지오는 재이와 함께 이미 교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험을 다 치른 교실은 어수선했다.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까봐 초조해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끼리끼리 둘러앉아 정답을 맞춰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또 벌써부터
다음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는 아이들과 도대체 시험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잠을 자거나 책상에 걸터 앉아 놓 궁리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는 아이들
중 각양각색이었다.
지오는 자리에 앉아 천정의 얼룩자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보이다가도 안
보이기도 했지만, 지오는 얼룩이 묻었음을 확신했다. 자신의 책상 위에 새겨져 있는
이니셜과 얼룩을 바라보는 지오의 머리 속으로는 수많은 의문과 궁금증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오는 한참만에 잡념들을 떨어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다음 지오는 반 아이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소영의 주위에 몰려
들어 시험문제의 정답을 묻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소영은 그런 친구들에게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옆을 보니 정숙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책상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시험을 망친 것이었다. 그때 정숙에게 약간 푼수끼가 있는
수다쟁이 상희가 다가가서는 말을 건넸다.
"하여튼 소영이 쟨 정말 대단해. 오늘 시험도 무지 잘 봤나봐."
"."
정숙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상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2학년 때 소영이네 집에 담임을 비롯해 단체로 놀러가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잘
사는지 담임이 보고는 입을 못 다무는 것 있지."
상희는 손동작까지 섞어가며 신나게 떠들었다.
"그 후로 담임이 한 일주일 동안은 소영이를 찾았을 걸. 뭐 얻어먹을 게 없나
해서지. 기집애, 이쁘긴 또 왜 저렇게 이뻐. 야,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정말
왕짜증이야, 진짜.
"너, 제발 좀 조용히 해. 부탁이야."
정숙은 조금 피곤해보이는 표정으로 상희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의 허리를
잘랐다. 그러나 눈치 없는 상희는 다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왜? 너, 어디 아프니? 그러게 내가 뭐랬어, 공부가 뭐라고 그렇게 죽어라 낮이고
밤이고 해대니 몸이 안 아플 리가 있니. 너 공부도 좋지만 몸매며 얼굴 관리도 좀
해라, 얘. 좋은 대학 가면 뭐 하니? 한창 꽃다운 나이에 바싹 골아가지고."
상희는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마구 떠들었다. 끝내 정숙이가 와락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조용히 좀 하라구!"
그 바람에 교실 커튼이 흔들렸다. 정숙의 고함 소리에 반 아이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정숙을 주목했다. 누구보다 상희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숙은 이내 책상 위에 엎어져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길게 이어졌다.
그런 정숙의 등으로 아이들의 따가운 비아냥이 꽂혔다.
만년 2등께서 오늘 시험 망쳤나 보구만.
시험을 망치면 망쳤지 왜 신성한 교실에서 고함을 지르고 지랄이야.
귀신은 뭐 하냐, 저런 애 좀 추려주지 않고.
귀신이 그럴 시간 있으면 너부터 추려가겠다.
아이들은 정숙의 흉을 보면서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때 교무실에 갔다 온
반장 소영이가 교탁 앞에 섰다.
"오늘 자율학습은 물론 종례도 없어."
와아!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신이 난 아이들이 후다닥 가방을 싸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지오는 미술실로 향했다. 그림을 그려서 대학에 가는 게 지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림, 아무나 그리니?'라는 주위의 말에 드러내 놓고 매달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지오는 가끔씩 미술실에 혼자 남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미술실은 본관 건물
구석진 곳에 있었으므로 조용히 사색에 잠기기에도 그만이었다.

미술실로 들어선 지오는 캔버스를 찾아 펼쳐 놓고 그 위에 스케치북을 얹었다. 교실
천정의 얼룩을 형상화한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오는 그걸 캔버스에 옮기려고
했다. 분명 낯설지 않은 누군가의 얼굴 같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창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AF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재이가 와서 서 있는 게 아닌가.
지오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캔버스를 뒤집었다. 그리고는
재이를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뭐야?"
지오가 짜증을 부렸다. 학기 초여서 아직 그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재이는 금세 미안한 기색이 되었다. 지오는 시무룩해진 재이의
얼굴을 보면서 도리어 미안함을 느꼈다.
"여긴 웬일이야? 집에 안 갔어?"
그러면서 지오가 살짝 웃어보이지 재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감추어 두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재이의 손에는 캔커피가 들려져 있었다. 지오는 캔커피와 재이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아까, 화장실에서는 정말 고마웠어. 그땐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해서."
"거참, 기집애 같은 말만 골라서 하는구만. 어쨌든 고맙다. 잘 마실께."
지오는 그런 재이를 빤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의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앉아."
재이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미대 갈 거야?"
분위기가 좋아지자 재이가 물었다.
"아니. 그냥 그리는 거야. 미대는 뭐 아무나 가니? 재능이 있어야 가지."
지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구 하나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영수도 못하는 애가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는 투였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난 재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대. 그러니까 그림 그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그랬어.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여기 미술실에 와서
시간을 죽이는 거야."
선머슴 같이 털털한 성격인 지오의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좔좔 흘러나왔다.
"하긴 뭐 틀리는 얘기도 하니야. 내가 봐도 영 엉망이거든. 난 그냥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야."
재이가 좀더 바짝 다가 앉았다.
"한번 봐도 되니?"
"?"
"지오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싫어, 쪽팔려서 싫어."
"그렇긴 해. 자기 그림을 아무 한테나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지."
재이는 금세 뾰루퉁해졌다. 그런 재이를 본 지오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실망하는
재이의 표정을 봐선 보여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기집애가 사람 맘 약해지게 자꾸 왜 그러니? 알았어, 알았다구. 보여주면 될 거
아냐."
지오는 뒤집어 놓았던 캔버스를 다시 제대로 놓았다. 활짝 웃으며 반쯤 의자에서
일어난 재이는 그림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도로 물러나 앉았다.
"거봐, 보지 말라니깐."
지오의 캔버스에는 죽은 박기숙 선생의 얼굴이 섬뜩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놀라는 바람에 더욱 커진 눈을 천천히 굴리면서도 재이는 여전히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재이의 놀란 얼굴을 곁눈질로 보면서 지오는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래 네 눈 크다. 눈 큰 거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눈 좀 닫아라."
지오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그림을 그려?"
"응, 응, 그건 말이야."
지오는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다 애쓰다 쑥쓰러운 듯 어투를 과장되게 바꾸었다
"에, 그러니까. 학교라는 데가 말이야, 선생 한테나 학생들 한테나 멍청하고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고든. 마치 처참하게 죽은 시체를 봤을 때처럼 말이야.
내 말 이해가 가니?"
"글쎄."
재이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늙은 여우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는지도 몰라. 영감을
얻은 거지 뭐. 현실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야."
"멋져."
짝! 재이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번에는 지오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뭐가?"
"너, 아주 멋있어. 마치 예술가 같애."
그러나 지오는 재이의 말을 듣고는 기뻐하기는커녕 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술가는 무슨 예술가니? 내 주제에.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는데."
"아니, 그렇지 않아. 터치가 좀 서툴기는 하지만, 이 그림엔 빛을 일관되게 관리할
줄 아는 능력이 보여. 못 그린 그림은 빛을 관리하지 못하거든. 필요에 따라 빛을
끌어들여서 오히려 그림의 생명력을 죽이지. 하지만 너의 이 그림엔 빛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어. 그건 다시 말해서 좋은 눈을 갖고 있다는 증거야. 좋은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이 훌륭한 화가가 되는 법이거든."
지오는 재이의 설명보다는 설명하는 재이의 모습에 오히려 더 빠져 들었다. 간만에
들어보는 기분 좋은 소리이기도 했다.
"너, 그림 공부 좀 했구나?"
"응? 응, 옛날에 아주 조금."
"언제? 중학교 때?"
"아니, 아주 오래 전에. 하지만 요새는 그림 안 그려. 재능이 없대, 누구처럼."
재이는 자세한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감추고 싶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지오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한가지 제안을 했다.
"윤재이, 너, 나 그림 좀 가르쳐주지 않을래?"
"!"
"가르쳐 주다 심심하면 너도 그리고."
"."
재이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이 되었다. 지오가 계속 물고 늘어졌다.
"싫어?"
"아니."
그러면서도 재이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기회다 싶어서 지오는 더욱 다그쳤다.
"가르쳐줄 거야, 말 거야?"
"좋아."
잠시 침묵하던 재이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좋아. 별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뭐 가르쳐줄 수도 있지.
대신 나를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모셔야 해, 알았지?"
"어째 그러는 말투가 오광구 같다? 내가 또 오광구 하고는 상극인데, 너 설마
오광구 조카는 아니겠지?"
키익. 더는 참지 못한 재이가 웃음을 터뜨리자 지오도 따라서 배꼽을 잡았다.

4장

박기숙 선생의 자살 사건 이후 학교에는 더욱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누구라도
잘못 걸리는 날엔 호된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단짝과
떠드는 것조차도 조심을 했다.
그건 선생님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저마다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다. 서로가
입조심을 했다. 그러다보니 관계도 자연히 서먹서먹해졌다. 한가한 시간에 선생들끼리
모이는 것도 피했다. 교감 선생이나 교장 선생에게 괜한 트집을 잡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수업이 없을 때면 남자 선생님들은 신문을 보며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부류가 많았고, 여선생들은 뜨개질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기어이 교무실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미술담당 선생과 '미친 개'
오광구가 말다툼을 벌인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남의 반 학생을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다뤄도 됩니까? 그것도 여학생을."
미술선생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오광구는 눈깔을 일부러 치켜 뜨면서 아이의
흉내를 내었다.
"그렇게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런 걸 갖고 뭘 그러세요?"
흉내를 그치고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온 오광구는 짧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걸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야. 최선생이 잘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이런 년들
그냥 두면 아예 선생 머리 꼭대기에서 논다구."
어느 졸업생이 지었는지도 몰라도 그러고 보면 오광구한테 '미친 개'만큼 잘
어울리는 별명도 없었다. 재단 이사자의 조카라도 되는지 학교에서 완전히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그였다. 한마디로 위아래도 없고, 교육자적 자질조차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윤리담당 선생이라니, 모순 덩어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이었다.
두 선생이 다투는 자리 옆에는 신입생인 듯한 앳돼 보이는 여학생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은 자기 앞에 서서 서로 핏대를 올리는 미술선생과 오광구를
얼굴을 반쁨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몰래 올려다 보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놀아도 제 머리 꼭대기에서 놀 테니까, 앞으로 우리반 애들은
상관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애들한테 이 년 저 년 하지 좀 마세요. 애들도 인격이
있는 겁니다, 알겠어요?"
미술선생은 연상인 오광구에게 차마 대들지는 못하고 겨우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젊은 사람이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만. 선배교사가 얘기를 하면 경청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젠장. 이러니까 다 싸가지가 바라지지."
오광구 또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이려는 듯 막대기를 잡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한발짝만 더 진행되면 육박적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술선생이 오광구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는 꿇어앉아있던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무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교무실은 두 패로 나누어진 분위기였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는 미술선생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나이 든 교사들과 킥킥거리며 자기 책상에 코를 박는 젊은
교사들. 음악선생은 그 와중에도 무심한 표정으로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 학기 들어 모교에 새로 부임해 온 은영은 그런 교사들과 한 공간 안에서
숨쉬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자신의 고교 은사이기도
했다. 은영은 소란이 가라앉자 슬며시 교무실에서 빠져나와 도서실로 향했다.
도서실 한켠에 자리 잡은 은영은 자신이 졸업한 해의 앨범을 찾아 들춰 보았다. 한
장 한 장 넘기자 즐거운 기억들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은영은 학창시절의 추억을 더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장까지 다 보고 난 은영은 앨범을 덮었다. 그런 다음 다시 제 자리에 꽂아
놓았다.
그러다 그 옆에 나란히 꽂혀있는 역대 졸업앨범들을 보게 되었다. 매년 졸업앨범이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는데, 유독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1993년도와 1996년도 앨범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서무과에 여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갖다 놓을게요."
은영이 돌아보니 영문 소설책 몇 권을 안고 있는 소영이가 서 있었다. 아마
오랫동안 지켜본 모양이었다. 은영은 소영의 왼편 가슴에 달려 있는 명찰을 보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영문 소설책을 주목했다.
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우리 학교 출신이라면서요?"
은영은 먼저 고개부터 끄덕끄덕 했다.
"어떻게 알았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하고, 이쁘고, 그래서 모르는 선생님이 없었다고
그러시던데요?"
"그래?"
은영은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드러내놓진 않았지만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이긴
했다.
"글쎄, 난 공부도 별로였고, 별로 예쁘지도 않았어. 지금 보니까 나보다 이쁜 애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은데?"
"근데 왜 하필 선생님이 되셨어요?"
"."
은영으로서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재빨리 표정을 읽은 소영은 들고
있는 책을 책장에다 꽂았다. 그리고는 새로운 책을 고르는 척 했다.
"하긴, 요령껏 하면 선생님만큼 괜찮은 직업도 없죠. 근데, 저 그냥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맹랑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소영의 당돌한 말투에 은영은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하렴."
"선생님들이 절 보면서 선배님 학교 다닐 때 같다고 그랬어요. 근데 제가 좀더
이쁘대요. 공부도 더 잘하고."
점점 가관이었다. 그러나 그런 소영이가 밉지는 않았다. 은영의 낮은 웃음이 그걸
뜻했다.
"그래? 이쁜 건 확실한데, 공부도 잘해?"
"네. 선배님은 신촌에 있는 여대 나오셨죠? 근데 전 서울대 갈 거예요."
"무슨 과로 갈 건대?"
"아무 과면 어때요? 다 같은 서울댄대."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정도로 당돌했다.
"그럼, 뭘 공부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그러자 소영은 책 한 권을 뽑아들며 대답했다.
"꼭 공부하고 싶은 것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전 그냥 서울대만
들어가면 그때부터 공부는 일체 하지 않을 거예요. 분식집 같은 거 해도 서울대
나오면 장사가 더 잘 된대요. 먹고 사는 걱정만 안 하면 되죠, 뭐."
"그래, 분식집을 하덜도 조이스를 읽는 건 나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던지고 은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영의 말에 소영은 자신이 들고 있던
영문판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책을 힐끔 쳐다보았다.
도서실에서 나온 은영은 휑한 복도를 걸어갔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한참 후 은영은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더니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은영의
머리 위에는 3학년 3반 팻말이 달려 있었다. 바로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1년을
보낸 교실 앞이었다.
은영은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아이들 모두 다 하교해버린 교실에
한 여학생이 우두커니 앉아 뚫어져라 칠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꼴깍! 은영은 자신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도 그때 그대로였다. 약간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구겨진 교복의 옷매무새도 그대로였다. 아마도 그때 이후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그대로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은영은 조용히 다가갔다. 아이는 은영이 뒤에 와 서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초점도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은영은 그 아이의 얼굴을 확인해 보는 게 두렵게 느껴졌다. 한동안 숨죽이며
뒷모습만 바라 보았다. 은영은 소리나지 않게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
다음에야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누, 누구니?"
그제서야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숙이였다. 정숙은 처음엔 은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은영은 정숙임을 확인하고는 허탈감을 느꼈다.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제서야 은영은 자신이 정숙에게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무어라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어느새 정숙은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은영은 가만히 서서 그런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아니 정숙이
닫고 나가는 문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칠판과 교탁, 그리고 가지런히 정돈된 책걸상들.
마치 여고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시 후 은영은 어느 한 책상을 발견하였다. 10년은 훨씬 넘은 듯한 낡은
책상이었지만 영문 이니셜만큼은 선명했다. JJ.
은영은 그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영문 이니셜을 만져 보았다.
얼마동안 시간이 정지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먼지를 쓸어내듯 책상을 향해
휙 바람이 불어오더니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영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세요?"
교실 안으로 들어서던 지오가 놀란 얼굴로 물어다.
"나? 나, 선생님인데."
선생님이란 표현이 아직도 쑥쓰러운 듯 은영이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세요?"
그때서야 지오는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 새로 오신. 그런데 제 책상에 앉아서 뭐하세요?"
"응? 아, 이게 네 책상이니?"
"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선가 음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지오가 먼저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는 사물함으로 다가가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은영은 지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았다.
"저희 반에는 웬일이세요?"
물건을 꺼내 가방에 넣은 지오가 물었다. 은영은 아무 대답이라도 하지 않을 수 도
없었다.
"나도 고3 때 이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거든. 그래서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한번
와본 거야. 그런데 별로 변한 게 없네."
그러면서도 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여전히 책상 위의 이니셜을 만지고
있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지오가 은영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그거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지오는 자신이 책상에 칼질을 했다는 오해같은 건 받기 싫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딱
부러지게 얘기를 했다.
"알아. 이건 학교 다닐 때 내가 새긴 거야."
그 말에 지오는 깜짝 놀랐다.
"그게 선생님 책상이었어요?"
"아, 아니, 내 친구 거였어. 진주라고."
그러자 지오는 별 싱거운 여자 다 보겠다는 듯이 은영을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그리고는 인사를 꾸벅 한 다음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시 텅 빈 교실에 홀로 남은 은영은 허공을 바라 보았다. 아스라한,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멋있지? 진주야, 이건 죽을 때까지 네 책상이 되는 거야.
은영은 진주의 책상에 이니셜을 새겨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끝을 타고
방울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딸랑딸랑딸랑.
은영의 눈동자에 힘이 모아졌다. 자신이 환청을 듣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들려오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은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방울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방울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은영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와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그때 멀리에서 방울을 흔들며 걸어가는 여학생이 보였다.
뒷모습이 진주와 꼭 닮았다. 은영은 눈을 휘둥그래 뜨며 굳은 얼굴로 여학생을
응시했다.
여학생은 복도 끝 계단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순간 여학생은 누군가가 자신의
등뒤에 있음을 눈치챘는지 그대로 멈춰섰다. 방울소리도 따라서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여학생의 모습을 본 은영은 더욱 놀랐다. 지오였다. 지오는
딱딱하게 굳은 채 복도에 서 있는 은영에게 다시 한번 목례를 하고는 그대로 내려가
버렸다. 멍한 얼굴로 지오가 사라진 긴 복도를 바라보는 은영은 한참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교무실로 돌아온 은영은 전화기를 들었다. 은영이 전화를 건 곳은 집이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 아마, 아빠 서재에 찾아보면 있을 거야. 내 고등학교 때 들고 다니던
가방도 일부러 보관하시는데 뭐. 아무튼 버리진 않았을 거야."
갑작스레 10여 년 전 일기장을 찾는 은영의 전화를 받은 엄마는 무슨 일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 일기장 뒤에 주소록이 있어서 그래. 가족을 좀 만나 볼려구.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어쨌든 중요한 거니까, 잘 찾아 봐. 끝나는 대로 곧장 가지러 갈께.
끊어요, 엄마."
전화를 끊은 은영은 얼굴 한 쪽이 따가와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옆을 돌아보니
오광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시리 정이 가지 않는
선생이었다.
"옛날 애인이라도 찾나?"
은영은 처음부터 전화 통화하는 것을 다 엿들은 모양이었다. 소영은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싫건 좋건 한 교정에서 부대껴야 할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아뇨, 고등학교 때 친구예요."
"그런데, 졸업하고 한번도 연락이 없었나 보지?"
"네."
은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1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친구야. 졸업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 지금껏 서로 연락도 안 하고.
하긴 먹고 살기가 바쁘다 보면 다 그런 거지."
오광구의 말에 은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그 앤 죽었어요, 학교에서."
"아, 그 9년 전에 학교에서 자살했다는 애?"
오광구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은영에게로 좀더 다가와 앉았다.
"그 애가 허선생 친구였어? 맞아, 맞아. 허선생이 박선생님 반이었다고 그랬지.
근데, 지금 와서 그 애 가족은 왜 찾아?"
"그냥, 궁금해서요."
은영은 싫은 김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오광구는 콧털을 뽑으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럼, 창고로 가 보면 되겠네."
"^5,5,5?"
은영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오광구는 비아냥거렸다.
"거기에 그 애 귀신이 산다니까, 가서 직접 만나보면 되겠구만. 애들이 거기서 귀신
나오는 거 봤다며 몇 명 기절하고 그랬지, 아마."

창고는 학교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사용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오래전 한 학생이 자살을 한 뒤로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이 나 학생들이며 선생들이 근처에 얼씬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버려진 건물이 되어버렸다. 못 쓰는 책걸상이며 도구들을
넣어두는 용도로만 쓰였다.
그 창고 앞에 은영이 서 있었다. 어둑어둑해서인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오광구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전을 울렸다.
걔가 미술실에서 죽었다며? 창고 자리가 옛날 미술실이었잖아. 젠장, 그 일 때문에
재수가 옴 붙어서 그런 건지, 포크레인 기사들 병 나고, 다치고. 난리도 아니었다구.
그래서 이제껏 못 허물고 그냥 둔 거 아냐. 죽을래면 학교 밖으로 나가서 죽지, 왜
신성한 학교에서 죽고 지랄이야.
은영은 창고를 바라보고 서 있으려니 두려움과 슬픔이 엉켜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진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영이가 서 있는 곳은 그녀가 학교에 다닐 때는 미술실이었다. 그 안에 노란
고무줄로 머리를 뒤로 묶은 여학생이 있었다. 진주였다.
진주는 어두운 미술실 안에서 공포에 떨며 바깥을 향해 문을 쾅, 쾅 마구 두드렸다.
두려움에 떨리는 처절한 울음과 부서질 듯한 문소리가 텅 빈 교정으로 무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네 엄마가 구해줄 거야, 무당이니까.
아이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자 은영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젖어갔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창고에서는 옛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나고 있었다.
미술실 문을 잠그는 아이들의 손들, 미술실에 갇힌 진주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탈출하려는 몸부림.
그때 그 자리에는 은영도 함께 있었다. 은영이 두렵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자
친구들이 우르르 다가와 무슨 말인가를 했다. 잠시 망설이던 은영은 드디어 결심이 선
듯 친구들을 따라 미술실을 등지고 말았다.
옛 기억이 떠오르자 숨이 찬 듯 은영은 여전히 창고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누군가 그런 은영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5장

학교 스피커에서는 쿵쿵 힙합 리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벤치나 계단 등 양지 바른 곳에 나와 따스한 봄볕을 쬐고 있었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은 빙 둘러서서 치마 길이를 줄이려고 허릿단을 몇 번씩
접으면서 맵시를 살피기도 했다. 빨리 졸업을 해서, 아니 수능이 끝나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한껏 청춘을 발산해보고 싶은 심정이리라. 양말 깃도 펴서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멋내기에 열중했다.
공중전화 부스엔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삐삐 음성메시지를 확인하는지,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지 열심히 통화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한껏 뽐을 내며 깜찍하고 세련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다른 한쪽에선 날라리로 소문이 난 애들이 몇 명 모여서 최신 유행의 가위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춤을 교정해주기도 하면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실에선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이미 오전 쉬는 시간에 밥을 끝장 낸 터였다.
대신 점심시간은 다른 일에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편지를 쓰거나, 낙서를
하거나, 더러는 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심지어는 침을 흘리면서.
그 외에도 꾸벅꾸벅 졸면서도 책을 놓지 않는 아이와, 과자를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점심시간의 교실은 왁자지껄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떠드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이마를 감싸쥐고 책과 씨름하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정숙이었다. 그런 정숙을 힐끔 바라보면서 속닥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반 바꿔달래고 그랬다가 안 되니까 협박 비스무리하게 한 거지 뭐. 소영이 엄마한테
봉투 받는 거 봤다고. 그때 쫙! 그랬다는 거 아냐.
한 아이가 실감나게 따귀 때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난 이해해. 소영이랑 같은 반만 안 됐어도 최소한 반에서 1등은 했을 거 아냐.
그건 네가 그때 분위기를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살벌했다고.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싸가지가 없다는 둥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기집애라는 둥. 휴! 만약에
그때 선생이 손에 뭐라도 쥐고 있었으면 가만있지 않을 분위기였다니까.
그래서?
수다는 점점 흥미를 더해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날 전교에서 제일 먼저 나왔을 거래잖아.
야! 그렇다고 어떻게 여자애 혼자서 그 노친네를 나무에다 매다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분노 같은 극한적인 감정이 쌓이면, 그게 어느 순간에 엄청난 물리적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는 거야.
넌 하여튼 쓸데없이 이상한 쪽은 많이 알아. 그 머리를 공부하는 데 썼으면 전교
1등은 문제 없을 텐데.
끝없이 이어지는가 싶던 수다가 어느 순간 뚝 그쳤다. 수다를 떨던 아이들이
정숙이가 다가와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숙은 차갑게 그들을 노려 보았다. 정숙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휙
돌아서 교실을 뛰쳐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아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다른 한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뒤로 넘어졌다.
내일 아침에는 네가 나무에 걸려 있겠는데? 피를 뚝뚝 흘리며 조심해라, 얘.
소영이는 일찌감치 매점에 자리를 잡고 놀고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데다가 성격마저 좋아 따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시간에도 소영은 상희와 함께
간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먹고 있었다.
"발팔 귀신?"
소영이 뜻밖의 말에 과자를 먹다 말고 상희를 올려다 보았다.
"그래, 창고에 산다는 반팔 귀신 말이야."
"근데, 귀신이 왜 늙은 여우만 데려갔다든? 미친 개나 좀 잡아가지 않구."
소영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상희가 첨언을 했다.
"그 반팔 귀신이 늙은 여우 땜에 졸업도 못하고 학교에서 죽은 애래."
그러자 소영은 상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상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넌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주워 들었니?"
"나? 누구긴 누구야, 지오지."
"걘 또 도대체 누구한테 그딴 얘길 들은 거야."
"귀신한테 들은 게 아닐까?"
상희가 반쯤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소영은 그런 상희를 보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때 매점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소영이와 상희가 돌아보니 미술담당 최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매점 판매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점심 먹고 또 뭘 그렇게 먹고 있니?"
그러자 한 아이가 최선생의 말을 받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 선생님."
최선생은 총각인 데다가 예술가적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꽤 높았다. 아이들은 마치 애인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최선생에게 몰려들었다.
"살 찌는 건 걱정 안 돼?"
"선생님이 저 책임지실 거잖아요."
농담 소리에 다른 아이들이 배꼽을 쥐고 웃었다. 최선생은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뭐어? 이거 큰일났네. 난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는데."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요?"
다시 한번 아이들이 깔깔 웃어댔다. 그 모습을 본 최선생은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음료수와 과자 한 봉지를 산 그는 매점에서 서둘러 나가고
말았다. 상희가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다시 말했다,
"순진한 게 귀엽지, 그치?"
"난 저런 타입은 싫어. 약간 호모같지 않니?"
"야, 정숙이 왔다, 정숙이."
갑자기 상희가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렸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뚝 그치고 정숙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숙도 그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굳은 얼굴로 곧장 판매대 앞으로
다가갔다.
"야, 너 1학년 때 정숙이랑 같은 반이었다며?"
소영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 했다.
"친했다던데? 근데 지금은 왜 말도 잘 안 하니?"
여전히 소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서는
정숙을 보았다.
과자를 사 들고 밖으로 나가면서 정숙도 소영을 슬쩍 쳐다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것을 상희는 느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순간 소영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였다. 얼른 핸드폰을
꺼낸 소영은 뚜껑을 열었다.
"일찍도 한다. 삐삐 친 지가 언젠데 뭐라구? 싫어. 그런 건 남자인 네가
해야지, 왜 내가 하냐? 몰라."
핸드폰ㅇ로 통화를 하는 소영을 바라보던 정숙은 싸늘한 눈길을 던지고는 그냥
매점을 나가 버렸다.
지오는 점심을 먹자마자 미술실로 갔다. 3학년으로 진급한 이후 지오는 자신만의
아지트로 그곳을 이용하고 있었다. 울적할 때나 속상할 때 그곳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두 개의 캔버스가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게 보였다. 지오는
두리번 거렸다. 재이를 찾는 중이었다. 그러나 재이는 미술실에 없었다. 지오는 혼자
이젤 앞에 앉았다.
연필을 집어들고 그림을 그리려다 지오는 문득 재이 자리에 놓인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그것에 신경이 쓰였다.
볼까,말까.
지오는 자밋 망설였다. 그래, 보지 말자 하고 결심을 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그 다이어리에 신경이 쓰였다. 결국 지오는 연필을 놓고 재이의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다이어리를 펼치자 맨 첫장에 뉴키즈 언더 블록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뭐 이런
애들 사진을 다 붙여 놨어. 지오는 속으로 말하며 피식 웃었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주로 순정만화의 주인공의 듯한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있다. 그림들은 다음 페이지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지오는 눈에 팍 띄는 그림을 한 점 발견했다. 꽤정밀한 소묘엿다. 자신을
그린 그림이었다.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뻐서 엷은
웃음마저나왔다.
기집애, 좋으면 좋다고 말로 할 것이지.
지오는 계속 다이어리를 넘겼다. 일기 같은 글이 쓰여진 페이지는 한 군데도
없었다. 학교 전경이나 나무, 벤치 같은 풍경 스케치나 만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눈
인물들만 가득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맨 뒷부분에 이르러서야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 있는 페이지가 나왔다. 월 스케줄을
기록하는 난이었다. 3월 첫째 주, 그러니까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날에만 빨간
사인펜으로 두 문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줄 띄어서 그 밑에 짧은 한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무슨 내용일까. 지오는 궁금해서 다이어리를 눈앞으로 가져 왔다.
그때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오는 얼른 다이어리를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 놓았다.
돌아보니 재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두 개의 컵을 들고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재이는 지오에게 한 잔을 건넸다.
자판기용 종이컵이었다. 지오는 컵을 받아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맛이
이상했다. 커피려니 하고 벌컥 마셨는데 아니었다.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리며
재이에게 말했다.
"뭐야, 이거?"
재이는 지오가 그리고 있던 그림에 시선을 박으며 짧게 대답했다.
"코코아."
"코코아? 내가 무슨 초등학생이니?"
"커피는 몸에 안 좋아."
"네꺼도 코코아니?"
"아니, 이건 커피야."
어이가 없었다.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지오는 샐쭉 토라졌다.
"넌 왜 커피 먹냐?"
"나 말이야? 난 커피 마셔도 돼."
그 말에 더욱 약이 오른 지오가 쏘아 붙였다.
"왜?"
"난 네 선생님이잖아. 그리고 너보단 좀 조숙하구."
말로는 재이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재이는 지오와 친하게 지내면서부터 의외로
밝은 면을 많이 드러내 보였다. 지오가 입을 삐죽 내밀며 한 마디 던졌다.
"뉴키즈 언더 블록 사진을 붙이고 다니는 것 보니까 네가 늙긴 늙은 것 같다.
걔들이 언제적 애들인데 아직도 그런 사진을 붙이고 다니냐, 촌스럽게."
이거라도 마시자라는 심정으로 코코아를 홀짝이며 지오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재이는 자신의 다이어리를 바라보았다. 지오가 고개를 숙이고 우스운지
킥킥 거렸다. 재이는 밉지 않은 표정으로 지오를 째려 보았다.

오후 마지막 시간은 수학시간이었다. 소영이 앞으로 불려 나가 문제를 풀었다.
수학선생은 창가에 서서 그 모습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이 문제를 다
풀고 분필을 내려놓자 수학선생이 앞으로 나섰다.
"자, 이제 이해가 되냐?"
아이들은 조용했다. 멀뚱멀뚱 수학선생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쭈욱 훑어본 수학선생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 되겠다. 야, 소영아. 아예 네가 설명까지 해줘라."
수학선생은 친절하게도 분필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귀찮다는 듯 소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서 문제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수학선생은 예의 창가에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면서 그렇지,
그렇지를 연발했다. 아이들은 소영의 설명을 듣기보다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
있는 수학선생을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당연히 비아냥이 터져 나왔다.
쟤, 근데 저 문제를 풀 줄 알긴 아는 거야.
턱짓으로 수학선생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알긴 뭘 알아? 제가 모르니까 맨날 소영이만 시키는 거지. 작년에도 언니들이
얼마나 저 선생을 무시했는데. 실력이 깡통이래.
시킬 거면 정숙이도 좀 시켜주고 그러지. 딴 건 몰라도 수학은 정숙이가 더 잘할
텐데.
그러면서 그 아이는 정숙이를 쳐다 보았다. 정숙은 '수학 정석'을 펴놓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앞에 나가서 자신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설명을 하고 있는
소영이를 잠깐 쳐다 보고는 다시 책을 파고 들었다.
따르르릉.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은 힘껏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광구가 화가 난 얼굴을 한 채 캔버스를 옆구리에 끼고 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삐걱삐걱. 복도는 오광구의 발걸음에 맞춰 아픈 신음을 토해 냈다.
구십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오광구의 몸무게로 인해 낡고 오래된 마룻바닥은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앞문을 콰당 열고 갑자기 담임이 들어서자 3학년 3반 아이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임지오, 나와!"
오광구는 캔버스를 거칠게 교탁 위에 내려놓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쟤, 또 무슨 일이니?
완전히 미친 개의 밥이구만, 밥.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지오가 긴장된 모습으로 앞으로 나갔다.
"이 새끼, 너 제정신이야?"
오광구가 캔버스를 들어보였다. 그곳에는 죽은 박기숙 선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어머, 하며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교감 선생님이 미술실에서 이걸 발견하고 심장마비 걸릴 뻔 했대, 이 새끼야. 너,
도대체 이유가 뭐야? 도대체 이따위 그림을 그린 저의가 뭐냐구?"
오광구의 손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금방이라도 지오의 따귀로 날아들 것만 같았다.
지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대답 안 해? 너, 일부러 나 엿먹이려고 작정한 거지?"
"아, 아닌데요."
지오가 겁먹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 새끼야!"
분을 못 이긴 오광구가 기어이 지오의 따귀를 힘껏 후려갈겼다. 지오는 저만큼 나가
벌렁 쓰러졌다. 으악! 하는 지오의 비명소리에 교실은 삽시간에 살얼음판이 되어
버렸다.
이어 오광구는 캔버스를 교탁에 내리꽂아 버팀목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그림을 손으로 갈갈이 찢으며 날뛰었다. 그새 지오는 다시 일어나
못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싸가지 없는 새끼. 너, 정신병자지? 또라이지? 대체 너희 집은 뭐하는 집구석이야?
뭐하는 집구석이길래 애새끼 가정교육을 이 지랄로 시킨 거야?"
오광구는 출석부로 지오의 머리를 툭툭 치며 무지막지하게 욕설을 쏟아부었다.
"얼른 꺼져, 꺼지라구 이 새끼야!"
오광구는 주먹을 펴 들고 한번 더 때리려는 듯한 자세였다. 지오는 어금니를 꽉
물고는 부서진 캔버스를 주워 들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담임이 들고 있던
캔버스지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캔버스를 쥐고 있던 오광구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는 눈알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선 지오를 내려다 보았다. 선생과 제자
사이의팽팽한 눈싸움이 이어졌다.
오광구는 지오의 그런 태도가 자신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끝내
그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캔버스지로 지오의 얼굴을 후려치더니 얼굴에 부벼대다가는
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렸다.
아이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오광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치 쌍스러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발 아래로 내팽개친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다시 한번 잡아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얼굴을 반쯤 덮어버린 지오의 표정을 정확히는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언뜻 드러난 지오의 얼굴에는 검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처참한
육탄전을 벌인 직후의 모습 같았다.
지오는 천천히 허리를 구부려 오광구가 내버린 캔버스지를 주워 들었다. 그러자
오광구는 출석부며 칠판 지우개, 분필 등을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오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휘어잡고는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오광구는 아예 이성을 접은 상태였다. 아이들마저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지오가 담임을 확 밀쳤다. 그리고는 교실을 뛰쳐 나가 버렸다.
씨팔, 진짜 너무 한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내뱉었지만 오광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학생들은
일제히 얼굴을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숙은 그러는 가운데도 책에다 시선을 박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고, 소영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재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교실을 나온 지오는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내달렸다. 감각만으로 계단을 쏜살같이
달려내려가 건물 뒷편으로 갔다. 거기에는 지오가 자주 기대 서서 노래도 부르곤 하는
고목나무가 서 있었다.
지오는 고목나무에 기대어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소매깃이 흥건히 젖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만에 큰 한숨을 내쉬면서 지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지오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지오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누구에게든 눈물을
보이긴 싫었다. 악착같이 버텨 졸업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는 학교나
선생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3층 창가에선 그런 지오를 지켜보는 아이가 있었다. 재이였다. 재이는 지오를
지켜보다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오의 등을 잡았다.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둬."
소영이었다.
"."
재이는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러나 악의가 없음을 알고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때 두 사람에게도 정숙이가 다가왔다.
"너, 지금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소영이가 정숙을 한번 쳐다보고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정숙은 그런 소영을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쌀쌀맞게 덧붙였다.
"담임이 너 말고 딴 애 부르는 거 봤어?"
소영을 경멸하듯 한번 더 노려본 정숙은 재이의 앞을 지나갔다.
"야, 그게 무슨 뜻이야?"
소영의 화난 목소리에 정숙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비아냥거리는
투로 한 마디 더 던졌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 가지고 왜 그래?"
"알긴 뭘 안다는 거야?"
소영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머리 끄덩이를 잡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당황한 재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얘들아, 왜 이래?"

교무실로 가는 소영이는 적잖이 긴장을 했다.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자신의 잘못은 없다 하더라도 오광구의 광기를 익히 아는 소영으로서는 반장으로서
책임을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영이도 오광구가 싫었다. 특히 있는
집 자식이라고 자신에게 잘해주는 체 하는 그 간사함이란. 그런데 뜻밖에도 오광구는
교무실로 들어서는 소영이를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오전에 아버님하고 통화했다."
"."
처음에 소영은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광구가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이 달 말에 3학년 선생님들 전부에게 식사 대접을 하시겠다더라. 부담되실 테니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그렇게."
오광구의 그 말에는 뿌듯함이 가득 베어 있었다. 소영이반 담임이라는.
"그건 그렇고 내일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는데 별 문제 없겠지?"
1등이냐는 질문이었다. 그건 확신할 수는 없어도 잘 친 것만은 분명했다.
"예."
소영은 짧게 대답했다. 별 일 없다면 가급적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만, 그래도 고3 올라와서 처음 보는 시험이라서
그런지 관심이 많으시더라."
"말씀 끝나셨으면 전 이만."
소영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오광구가 옷자락을 잡는 바람에
소영은 깜짝 놀랐다.
"뭐가 이렇게 급해."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 자라도 더 봐야죠."
스스로 생각해도 재치있는 대답을 했다.
"짜아식."
동시에 오광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영의 목덜미를 잡고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넌 애들하고는 안 그러면서 왜 선생님 앞에선 이렇게 목석같이 구냐? 임마, 여자는
좀 나긋나긋해야 하는 거야. 알겠어?"
"안녕히 계세요."
소영은 인사를 하고는 얼른 교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런 오광구를 은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학생에게 그런 언행을 일삼다니.
은영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을 나서는 소영을 따라갔다. 그리고는 불러
세웠다.
"소영아!"
소영은 멈춰서더니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허은영 선생임을 알고는 조금
풀렸다.
"소영아, 너희 반 애가 그렸다는 그림 말이야, 지금 어딨니?"
뜻밖의 말에 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그냥, 그 그림 좀 볼 수 있을까 해서."
"갖다 버렸을 텐데요. 미친 개가 갈기갈기 물어 뜯어서."
"미친 개?"
은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영은 자신이 말을 실수했음을 알았다.
"죄송해요. 저희 담임 선생님 별명이예요."
"변태가 아니고?"
은영의 반문에 이번에는 소영이 킥 웃었다. 은영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림 그린 애는 누구니?"
"임지오라구요."
"임, 지, 오?"
소영을 돌려보낸 은영은 학교 구석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갔다. 다행히 태우지는
않은 상태였다. 바닥에서 기다란 막대기를 하다 주운 은영은 한쪽 손으로 코를 막도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적거린 후에 드디어 쓰레기더미 속에서 걸레처럼
구겨져서 버려진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오는 고목나무 바로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담임에게 맞은 목덜미가
얼얼했다. 뻐근한 게 통증이 오래 갈 것 같았다. 재이가 그런 지오의 얼굴을 안쓰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럴 필요 없어. 미술실 출입금지야 나한테나 해당되는 거지, 넌 아니잖아."
그림 사건으로 인해 지오에게 미술실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지자 재이가 걱정하는데
대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싫어. 나도 안 갈래. 네가 없었으면 어차피 미술실 근처에도 안 갔을 텐데,
뭘."
지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구름이 석양을
두 조각으로 가르는 게 눈에 가득 들어왔다. 3학년이 되면 잘해 보려고 했는데.
"내 팔자에 그림은 무슨 그림이냐."
지오는 혼잣말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턴 그림 안 그릴 거야?"
"그림 그릴 곳도 없잖아."
체념하는 듯한 말투였다. 실망스러운 듯 지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공기의 냄새를 음미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 군데 있기는 한데."
재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지오가 반짝 눈을 떴다. 다시 재이의 말이
이어졌다.
"선생님들도 거기까진 안 찾아올 거야. 그치?"
지오는 재빨리 재이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바로 창고를 가리키는 거였다. 하여튼
잔머리 하나는 잘 굴러가는 아이였다. 지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지오를 본
재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런데 지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이는 불안한 눈으로 지오를 올려다
보았다.
"왜 그래?"
"가보자."
지오는 금방이라도 그리고 갈 듯한 자세였다. 재이가 기겁을 하며 지오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 농담이야. 그냥 답답해서 해본 말이야. 거기서 무슨 그림을 그려?"
"왜? 그리면 안 돼?"
지오는 자꾸 마음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재이는 계속 말렸다. 말려도 안 되자 겁을
주기도 했다.
"난장판일 텐데. 거미줄도 많고. 쥐도 있을지 몰라."
"일단 가서 보고 오자니까."
"미쳤어? 거긴 낮에도 귀신이 나온다고."
사실이 그랬다. 건물이 워낙 낡기도 했지만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버려진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럼,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가서 귀신 있나 알아보고 올 테니까. 알았지?"
"지오야."
재이가 말렸지만 지오는 손길을 확 뿌리치고는 달려갔다. 재이는 뒷모습만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창고는 생각보다 더 낡았다. 채워놓은 자물쇠마저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귀신 나오는
곳이라고 소문이 나 있어 누구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몇 년 동안 내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오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 보았다. 기척이라곤 없었다.
고물딱지가 되어버린 낡은 책사과 걸상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자. 그 외에 못 쓰게 된
난로며, 운동기구들이 천정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목조로 된 단층건물은 안에서 보니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았자.
빽빽이 들어찬 책걸상 더미 한켠으론 두어 평 남짓한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조그맣고 빨간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잠시 피어올랐다가
다시 사그라들곤 했다.
지오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눌렀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누굴까?
정말로 귀신이 살고 있는 걸까? 마침내 지오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갔다.
"너도 한 대 줄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소영이었다. 혼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오는 어이가 없어서 소영이를 째려 보았다.
"담배는 또 누구한테 배웠냐?"
공부 잘하고 이쁜 소영이가 끽연을 한다는 사실에, 그것도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창고에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 지오로서는 놀랍기만 했다.
"독학했어. 내가 누구한테 배우는 거 봤니?"
소영이가 코웃음을 쳤다. 피식 따라 웃으며 지오는 창고안을 휘익 둘러보았다.
"겁도 없네. 귀신 나온다고 선생들도 무서워서 안 오는 곳에 앉아서."
"차라리 귀신이 났지. 너 몰랐어?"
"뭘?"
지오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귀신이잖아."
지오는 멀뚱멀뚱 소영을 쳐다 보며 말했다.
"그럼 이곳이 선생들이 가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는 그 집이냐?"
소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집 좀 빌려줘야겠다. 그림 좀 그리게. 나보고는 미술실 출입금지란다."
"그렇게 맞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정신을 차렸으니까 이리로 온 거 아냐?"
지오가 혀를 낼름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잘 아는 미대 교수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여기서 담배 피다 불이라도 내서 진짜 귀신 되지 말고, 화장실에 가서 피워라."
소영의 호이에 지오는 동문서답을 했다.
"그 인간 죽이고 싶지?"
지오에게 다가 앉으며 소영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시간 있으면 네가 대신 좀 죽여주라."
"정말? 그건 그렇고 대신 임대료 내야 돼. 내가 먼저 도장 찍어놓은 장소니까.
그러면 비밀 유지해 줄께."
"임대료?"
그 말에 지오가 눈을 치켜 떴다.
"가진 건 돈밖에 없으면서 또 무슨 돈타령이야?"
"돈 말고 그림으로 주면 되잖아."
두 사람은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다. 으시시한 창고 안에서 두 사람은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어느새 창고는 더 어두워졌다. 지오의 발 밑에 뒤틀려서 불거져나온 마룻바닥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마룻판 밑에는 무언가가 끼여있었다. 그것은 피가
묻어있는 졸업앨범이었지만, 지오는 자세히 들추어 보지는 않았다.

은영은 쓰레기장에서 찾은 그림을 들고 미술실로 갔다. 마침 미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영은 자리에 앉은 다음 구김자국이 심하게 나 있는 그림을 손으로 펴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두려웠다. 무의식중에 마치 버릇처럼 한 손에 들린 방울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점점 손에 힘을 주었다.
드르륵.
미술실 문이 열리더니 미술선생이 들어왔다. 은영은 벌떡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선생님도 안 계신데."
미술선생은 인사는 받지 않고 은영이 보던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은영을 힐끗 보더니 윗도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뭣좀 여쭤볼 게 있어서 왔다가, 문이 열려 있길래 그냥 들어왔어요. 죄송해요."
은영의 거듭된 사과에 미술선생은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아요, 앉으세요. 뭐 나쁜 짓하다 걸린 학생 같으시네요."
"네?"
은영이 더욱 무안해졌다. 미술선생이 은영이 들고 있던 그림을 보며 말했다.
"그림이 완전 걸레가 됐네. 근데 이건 왜 가져오셨어요?"
"그냥 좀 궁금해서요. 어떻게 그렸나 하고. 교무실로 가지고 가서 볼 수도 없고."
"교무실이 불편하시죠?"
미술선생의 말에 은영은 가만히 있었다.
"예. 솔직히 아직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꼭 그래서만은 아닐 거예요. 저도 몇 년 됐지만 아직도 불편할 때가 많아요."
말을 마친 미술선생은 책장에서 졸업앨범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은영이 의아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술선생은 모른 체 하고 한쪽에 쌓아둔 캔버스들
중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캔버스마다엔 학생들의 얼굴이 그러져 있었다. 미술선생은 그 중 하나를 집어
이젤에 올렸다. 미완성의 학생 얼굴이었다. 미술선생은 은영의 존재를 잊은 듯 붓을
집어들고 그림을 그리려 했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영을 의식했다.
"학생들 얼굴만 그리시나봐요?"
은영이 묻자 미술선생은 수줍어했다.
"전 아이들 얼굴이 좋더라구요. 근데, 괜히 재학중인 애들 얼굴을 그렸다가는 뒷말이
나올까봐 졸업앨범을 보고 그려요."
은영은 미술선생이 펼쳐놓은 앨범을 슬쩍 훑어보았다.
"가만히 앨범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다양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을 내가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애들은 모두 나를 정확하게 기억할 첸데,
혹시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졸업시킨 아이는 없을까. 있다면 그 애는 날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제가 좀 우습죠?"
은영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
"참, 뭐 물어볼 게 있다고 그러지 않았나요?"
미술선생이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말했다.
"네 저 딴 게 아니고, 이 그리."
순간 미술실 문이 열리고 지오가 나타났다. 은영도 깜짝 놀라며 얼른 그림을 뒤로
숨겼다. 지오도 의외라는 듯 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미술선생한테 꾸벅
인사를 했다.
"응, 그래, 왔어. 가져가라."
"네."
지오는 힘없이 웃으며 미술실 한쪽에 있는 자신의 미술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지오를 은영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틈새를 미술선생이 파고 들었다.
"뭐라 그러셨죠?"
당황한 은영이 엉뚱한 대답을 했다.
"네? 네, 저도 고등학교 때 미술반이었거든요."
그러자 미술선생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셨어요? 허선생도 그림을 그리셨구나."
"아뇨, 전 석고잡업을 했어요."
"석고잡업이요?"
"네, 그냥 취미로 친구 얼굴을 석고상으로 만들곤 했지요."
"모델 서 준 친구한텐 아주 훌륭한 선물이 되었겠네요."
'네, 그랬겠죠."
그러나 은영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미술도구를 챙기며 은영과 미술선생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지오는 눈치를 살피다 짐을 들고 일어났다. 그런 다음 인사를
하고 나서려 했다.
그때 미술선생이 불러세웠다. 미술선생이 자신의 책상서랍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끝이 뾰족한 붓을 꺼내 지오에게 내밀었다.
"이건 선생님이 주는 선물이야."
지오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미안해. 나도 교감 선생님이 왔다 가신 줄 몰랐어. 빨리 받아. 앞으로도 열심히
그림 그리라고 주는 거야."
그제서야 지오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지오는 두 손으로 붓을 건네 받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은영이 그런 지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미술선생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미술반에선 저 아이가 제일 열심이었는데, 미술공부를 꼭 미대 가기
위해서만 해야 되나."
6장

종례시간을 앞둔 교실은 떠들썩했다. 그런 소란 속에 지오는 재이의 손을 잡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은 '그림사건' 이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시샘이라도 하듯 몇몇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어머, 쟤들 좀봐. 서로 좋아 죽겠나봐.
그러게 말이야, 정말.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광구가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오광구는 수다를 떠는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대뜸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시간 남으면 한 자라도 더 볼 생각은 안 하고.
이 새끼들이, 빨리 자리로 안 돌아가!"
오광구의 야단에 아이들은 서둘로 교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복도 한 구석에 있던
지오와 재이를 발견한 오광구는 보다 톤이 높게 고함을 질렀다.
"임지오, 너 정말 정신 못 차릴래. 왜 남 공부하는 거까지 방해하고 그래. 공부하기
싫으면 너 혼자 가방 싸서 집으로 돌아가!"
숫제 학교 그만 다니라고 하는 말이었다. 지오는 굳은 얼굴로 교실로 들어갔다. 그
뒤에다 대고 오광구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차라리 자퇴를 해라, 자퇴를. 그게 서로 돕는 거다 쯧쯧."
재이는 오광구를 힐끗 본 다음 지오의 뒤를 따랐다.
교실로 들어서는 오광구의 손에는 모의고사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교탁 앞에 선
그는 먼저 성적표를 다시 한번 쭈욱 훑어 보았다. 아이들은 긴장된 얼굴로 오광구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소영."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소영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꼿꼿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교 1등."
소영은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도로 앉았다. 오광구 또한 싱글벙글하며 웃고
있었다.
"뭐해, 박수 안 치고."
아이들이 그제서야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무관심한 투로 오광구가 정숙의 이름을
불렀다.
"김정숙."
정숙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한 기대가 무너졌으므로 더욱
딱딱한 표정이었다.
"넌, 반 성적으론 2등인데, 전교 등수가 25등이야."
애정 하나 없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아이들의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숙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생각보다 성적이 낮게 나왔던 것이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길래 이 모양이야. 공부하는 시간만 많으면 뭐해, 집중을
해야지. 부모님도 자식놈한테 전혀 신경을 안 쓰고 말이야. 고3 딸내미를 맡겨 놓고
학교에 전화 한번 안 하니, 머리가 안 쫓아가서 방법을 못 찾겠거든 소영이 하는 것
좀 보고 요령껏 좀 배워."
오광구의 노골적인 비아냥에 정숙은 힘없이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성적이 떨어진
것보다는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 학부모 중에서 유일하게 인사치레를 하지
않음을 욕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치마를 움켜잡은 정숙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서 성적표를 쭈욱 넘기다 마지막 장을 보는 오광구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더욱
가득했다. 놀라는 듯한 목소리로 오광구가 말했다.
"임지오, 넌 더 떨어질 등수가 없구만. 넌, 애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반 평균은
혼자서 있는 대로 다 까먹는 애가 이상한 짓이나 해서 딴 사람 공부하는 거나
방해하고 말이야. 넌 진짜 신중하게 잘 생각해 봐. 검정고시가 맞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야. 반장!"
오광구는 더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갑자기 반장을 불렀다.
"네!"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례 끝나면 번호대로 나눠줘. 이상."
"차렷!"
그러나 소영이가 인사를 하려는 찰나 오광구는 인사를 받기 싫다는 듯 말을
끊어버렸다.
"됐어, 이 새끼들아. 전교 1등이 있는 반이 반 평균은 꼴찌니 이게 말이 되냐?
모의고사 반 평균이 1등으로 올라갈 때까진 인사하지 마, 알아들었어?"
말을 마치자마자 오광구는 문을 거칠게 닫고는 교실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소영이가 앞으로 나가기도 전에 다투어 우루루 성적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숙은 그 틈에 앉아 눈을 감았다.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런
정숙을 보고는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높이 솟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학교 건물은 더욱
적막해 보였다. 하나 둘씩 보안등에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교무실은 조용했다. 대부분 퇴근하고 야간자율학습 감독선생님들만 몇몇 남아
있었다.
은영은 일부러 교무실에 남았다. 은영은 오래 전부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옆자리의 오광구가 다가와 털석 의자에 앉았다. 할까말까 망설이다 은영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저 혹시, 박기숙 선생님 교무수첩 갖고 계세요?"
"왜?"
오광구는 숫제 반말이었다. 안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러나 은영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싶었다.
"아뇨, 그냥 뭘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 아마 김선생님이 알 걸. 내일 한번 물어보지."
"네."
은영은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한 마디 던졌다.
"선생님은 퇴근 안 하세요?
그러자 오광구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예, 전 오늘 숙직입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여선생들도 같이 숙직을 하면 좋을 텐데. 밤에 심심하지도 않고."
그 말에 은영은 저으기 당황했다. 노골적인 희롱이었다. 오광구의 지저분한 시선을
피하며 은영은 서둘러 교무실을 빠져 나왔다. 그 뒤에 대고 무어라 궁시렁거리는
오광구의 소리가 들렸다.

창고는 그새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몇 사람이 놀기에 알맞도록 제법 넓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지오가 창고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땀을 연신 훔치며 지오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침 재이가 밝게 미소 지으며 들어섰다.
"어때, 이만하면 근사하지 않아?"
지오가 자랑스레 말했다. 재이는 여기저기 훑어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오가
재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리 와봐."
지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보니 낡은 이젤과 석고상들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었다. 먼지 구덩이에서 지오가 이젤을 하나 끄집어냈다.
"봐, 내가 청소하다 찾아냈어. 낡고 지저분하긴 하지만 쓸만 하더라구."
재이는 이젤을 건네 받고는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이젤에서 손을
떼며 울상이 되었다. 지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왜?"
"먼지가 너무 많아. 이거 봐."
이젤을 한번 쓰윽 닦고 내미는 재이의 손이 어느새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오는 킥 웃으며 재이의 손을 잡고는 걸레로 쓱쓱 문질렀다.
"어떤 때 보면 약간 공주병 기질도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재이가 창고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지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넌 여기가 무섭지 않니? 귀신이 나온다고 그러잖아."
"무섭긴. 난 오히려 여기 오니까 맘이 훨씬 편해지는데.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것처럼."
지오는 행복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그렇게 좋아?"
"왜? 넌 싫어?"
"아니, 난 네가 좋으면 다 좋아."
할 수 없다는 듯 재이도 맞장구를 쳤다. 두사람은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딛고 선
마룻바닥이 발을 디딜 때마다 삐꺽 삐꺽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오는 마룻바닥의 끝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나무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불거져나온 마룻바닥 사이로 하얀 덩어리가 보이는 듯했다.
"저 안에 뭐가 있나?"
지오가 호기심을 보이자 겁을 집어 먹은 재이가 말리고 나섰다.
"지오야. 그냥 놔 두자."
재이의 무서워하는 모습이 재미있는 듯 지오가 피식 웃었다.
"기집애는 기집애구나. 알았어."
지오와 재이는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그런데 방금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정말이지 무언가가 있었다. 마룻판 아래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오래된
졸업앨범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청소를 하고 있던 창고 밖에는 은영이 서 있었다. 곧장 퇴근하려다
창고를 한번 둘러보기 위해 왔던 것이다.
은영이 보기에 창고는 그저 오래된 건물일 뿐이었다. 침침한 보안등 불빛이 음침한
창고 건물을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한참 동안 묵묵히 창고를 바라보던 은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아이들에게 있어 자율학습이란, 특히 밤에 교실에 남아 하는 자습은 솔직히 자율이
아니라 타율인 경우가 많다.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다.
명문대에 진학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공부 그 하나에 인생을 건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아이들은 마지 못해 공부를 하는 척 하지만 감독의 눈을 피해 졸거나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볼 때가 많았다. 개중에는 과감하게 잠을 자는 아이도 있었다.
라디오를 듣거나 수다를 떠는 건 기본이었다.
갑자기 닫혀 있던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갑자기 고개를
처박고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몰린 곳에는 뜻밖에도 오광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운 얼굴로 책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광구는 자신의 반 아이들의 자습태도를 꼼꼼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난히 친근한 웃음을 흘리며 소영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소영이의 공부를 돕는 척 얼굴을 바싹 가까이 들이밀고 책과 노트를 살폈다.
"소영인 글씨도 아주 예쁘구나."
하지만 소영이는 오광구의 옆 얼굴을 무슨 벌레라도 보듯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오강구는 소영의 코 앞에서 씨익 웃어보였다.
소영은 오광구의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가벼운 술냄새도
느낄 수 있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걸친 모양이었다.
오광구는 소영의 체취를 맡듯이 가볍게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러다 아주 만족스런
얼굴로 몸을 제꼈다. 그런 다음에는 소영의 등을 슬슬 매만지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열심히 해."
소영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주목. 이제 정확히 250일 남은 거 알지? 그러니 정신들 바짝 차리고 공부해야 해.
앞으로 남은 250일 동안 친구는 깨끗이 잊어버려. 알았어? 괜히 친구 좋다고 히히덕
거리며 몰려다니다가는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어? 그럼 계속
공부를 하도록."
그는 자신의 갑작스런 출현이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듯 했다. 정숙은 책을 펴고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지만 열심히 책을 보는 표정
같지는 않았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책장을 넘겨도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정숙은 등 뒤에 서 있는 오광구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선생님이 숙직이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고."
오광구는 연설을 끝내고 문을 닫고 나갔다. 뒤쪽 자리에서 누군가가 문쪽을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너만 잘하면 아무 문제 없어, 이 변태야.
10시 30분. 드디어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루루 교실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주차장에는 유독 눈에 띄는 고급 승용차가 있었다. 최고급 S320 벤츠였다. 그
앞에는 서른이 갓 넘었을까 싶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소영이 나오는 게 보이자
손을 들어 활짝 웃었다. 소영은 재빨리 승용차에 올라탔다. 혼자서 걸어나오던 정숙은
잠시 멈춰 서서 그런 소영을 굳은 얼굴로 바라 보았다.
어둠 가운데 빛나던 교실의 불들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운동장도 텅 비었고,
보안등만이 구석진 곳에서 외롭게 눈을 뜨고 있었다. 육중한 교문도 굳게 닫혀버렸다.
경비실에는 희미한 백열등이 빛나고 있었는데, 신문을 보고 있는 경비 아저씨는
놀랍게도 신문을 든 채 자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근무자세였지만 정신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오광구는 숙직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11시가 훨씬 지나자 밖으로 나왔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져 있는 교정을 플래시를 들고 이리저리 비추며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교무실을 살펴보고, 현관에도 불을 비추어 보았다.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타고 올라 교실을 하나 하나 살피며 지나갔다. 여느 때처럼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자율학습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오광구는 3층까지 다 둘러본 다음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 다다랐다. 그때 어디선가
쇳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끼익.
기분 나쁜 소리였다. 오광구는 소리나는 쪽으로 플래시를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러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그는 의아해하며 옥상문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철문이 바람에 여닫히며 연이어 끼익, 끼익 음침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광구는 어둠 속에서 철문의 손잡이를 확인해 보앆다. 그런 다음 철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걸렸는지 철문이 완전히 닫히지를 않았다. 다시 한번 닫으려
애를 써 보았지만 여전히 철문은 닫히지 않았다.
썅, 별 게 다 속을 썩이는구만.
오광구가 약간 겁에 질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몇 번을 시도하다 문
닫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고물은 할 수 없다니까.
오광구는 침을 탁 뱉고는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렸다.
그 바람에 오광구는 계단에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벌떡 일어나 계단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광구는 몸을 추스려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발목이
삐었는지 통증이 엄습해왔다. 오광구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계단 난간을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에이, 씨팔.
난간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 오광구는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저 앞 복도 중간에 여닫이문이 가로놓여 있었다. 기역자로 꺾어지는 곳이었다. 순간,
고요하던 복도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몰아치더니 여닫이문이 열렸다. 동시에 반
팻말이 심하게 흔들리다 마침내 고정대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거짓말처럼 아래에 서
있던 오광구의 머리를 강타했다.
오광구의 머리에선 삽시간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막으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복도 저편 끝 어둠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어둠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오광구는 뒤로 나자빠지며 기겁을 했다.
"거, 거기 누구야?"
오광구는 플래시를 켰다. 하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에 몇 번 두들겨댄 후
다시 켜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플래시를 두드리다 오광구는 인기척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
오광구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듯한 쪽을 쳐다 보았다. 다시 복도 저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복도를 가로 질러 스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먼젓번보다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하얀 옷이 나타났다 사라진 곳에
시선을 박은 채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뒷걸을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히히히히힝.
동시에 오광구는 자신의 목덜미가 서늘함을 느꼈다. 하얗고 날카로운 손가락이
할키고 지나갔던 것이다. 오광구의 비명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누, 누구야?"
겁에 질린 오광구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감싸쥔 채 오광구는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시 복도 저편에서 하얀 반팔교복을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오광구를
향해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광구는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의 필사적이었다.
두려움에 질려 달아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았다. 3학년 3반 팻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을 열고 교실로 뛰어들었다.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오광구는 교실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 헐떡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천히 숨을 고른 다음 교실을 둘러보았다. 뒤쪽 유리창이 열려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광구는 다친 다리를 끌며 천천히 열려진 창문으로 다가갔다. 다친 발목이 아파서
책상을 짚어가며 간신히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 앞에 다가선 오광구는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고여 있는
검붉은 액체를 보았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손에도 묻어 있었다. 그는 붉은 피임을
알고는 소스라치며 놀라 돌아섰다.
돌아선 오광구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더듬거리기만 했다. 입술이 채 떨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너, 넌."
순간, 커튼이 바람에 날리며 오광구의 얼굴을 휘감았다. 숨이 콱 막혔다. 커튼에
쌓여 얼굴이며 몸이 감겨 발버둥치는 오광구에게로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천천히
다가섰다.
오광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하얀 커튼에 붉은 피가 확, 하고 튀겼다. 그
속에서 오광구의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오광구의 목덜미에는 또 깊은 상처가 났다.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날이었다. 연이어
피가 콸콸콸 흘렀다.
다시 한번 오광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오광구의 신체의 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광구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팽팽하게 감겨있던 커튼이 일순간 풀리더니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커튼
끝에서는 계속 핏방울이 맺혔다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귀가 잘려나간 채
눈을 부릅 뜨고 미동도 하지 않는 오광구가 보였다.
누군가의 책상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7장

아침부터 교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숙직을 선 오광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수학선생이 긴장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집에도 연락이 없었다는데요."
"이 사람도 참 어디 간 거야? 무책임하게."
3학년 주임선생이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며 신경질을 냈다. 영어선생이 끼어
들었다.
"어디 근처 여관방에서 자고 있는 거 아닐까요? 숙직실이 불이 약해서 많이
춥더라구요. 저도 저번에 숙직한 날, 그 방에서 자고 한 일주일간은 허리가 아파서
죽을 뻔 했었어요.
"허리야 그것 땜에 그런 거 아니겠지. 이번에 또 막내 가졌다며?"
수학선생이 웃으면서 눈을 흘겼다.
"막내를 허리로 만드나."
"허리를 써야 막내를 만들지."
그 말에 다른 선생들이 일제히 웃었다. 그러나 주임선생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없었다.
"이거 참, 야단났네. 그렇다고 근처 여관방을 다 뒤질 수도 없고."
"아침에 사우나 가신 거 아닐까요? 거기서 잠들어 버리면 귀신이 업어가도
모르잖아요."
"이거 또 진짜 귀신이 업어 간 거 아냐."
수학선생의 말에 영어선생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주책스런 영어선생의 말에
교사들은 일제히 썰렁한 표정이 되었다. 주임선생도 영어선생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긁적이는 영어선생의 옆구리를 수학선생이 쿡 찔렀다.
교무실은 오광구 선생이 보이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소란이 일어났다. 있을만한
데를 다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봐도 지난 밤 이후 본 사람이
없었다.
조례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들 중에는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한편 교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수선했다. 덜 깬 잠을 쫓아버리려는 듯 기지개를
켜는 아이도 있었고, 지난 밤 텔레비전 '한밤의 TV연예'에 나왔던 유승준의 얘기를
하며 춤을 추는 아이도 있었다. 몇몇은 새벽에 전해지는 메이저리거 박찬호의 승리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지오는 멀뚱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자국이 더 진해진 것 같이
느껴졌다. 지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지오를 소영이 지켜보고 있었다. 소영은 지오의 시선을 따라 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마침 화학선생이 3학년 3반 교실로 들어섰다. 옆구리에는 출석부가
끼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학선생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시간표를 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첫시간은 영어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화학선생이 눈을 흘겼다.
"이런 망아지 같은 놈들 하곤."
화학선생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만사가 귀찮은 표정을 짓는가 하면
애들이 떠들어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칠판만 보며 혼자 떠들다 벨이 울리면
나가버리는 그런 타입의 선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역시 귀찮은 일을 떠
맡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화학선생은 교탁에 서서 아이들이 정리정돈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화하선생을 만만하게 생각해서인지 떠듬떠듬 움직였다. 한참만에 주섬주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생님, 반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한 아이의 농담에 나머지는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시끄러, 이놈아. 자, 오늘은 너희 담임 선생님이 급한 볼일이 있으셔셔 대신 내가
조례를 맡았으니까, 내 말 끝날 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
그러나 화학선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아이들의 질문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데요?"
"저희 담임 선생님은 안 나오셨어요?"
"나도 모르겠다, 이놈들아. 일이 생겨서 못 나왔다는 거 밖에는."
화학선생은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고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 이정숙."
그런데 대답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쭈욱 둘러보았다. 창가에 빈
자리가 하나 보였다.
"이정숙!"
화학선생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빈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가 정숙이 자리냐?"
"네."
정숙의 짝이 대신 대답했다.
"안 온 거야? 지금 자리에 없는 거야?"
"아직 안 왔는데요."
그러나 화학선생은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출석부에 체크를 하고는 계속 출석을 불러
나갔다.
웬일이야, 정숙이가 지각을 다 하고.
그러게, 참 오래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생기는구만.
화학선생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수다를 떠는 아이를 빤히 보았다.
"그래, 얼굴 보니 오래 되긴 오래 된 거 같다."
아이들이 동시에 배꼽을 잡았다. 다시 그는 출석을 불러 나갔다. 출석 체크를 끝낸
그는 별다른 훈시도 없이 교실을 빠져 나가버렸다. 화학선생에게 찍힌 아이가
기지개를 펴듯 두 팔을 벌리며 한 마디 더 했다.
아우! 오늘은 변태 없는 세상에 살겠구나.
잠시 휴식시간이 흐른 뒤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영어시간이었다. 선생은 특유의
발음을 뽐내듯 책을 읽어 나갔다. 언제나 그렇듯 나름대로 감정과 엑센트에 신경을
쓰며 문장의 묘미를 살리려고 했지만 듣는 아이들에게는 고문과 같았다. 선생 못지
않게 아이들도 늘 하듯 자기 스타일대러 수업시간을 때우는 것에 만족했다.
뒷자리에선 수다쟁이들이 역시 나름대로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진짜라니까, 어제 숙직이었잖아.
에이, 집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갔나 보지.
집에 연락해도 모른대. 지금 미친 개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니깐. 진짜야,
이건 며느리도 몰라.
지오는 그런 소리들을 한쪽 귀로 들으면서 천정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분명히 지난
번보다 훨씬 얼룩이 진해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선명한 핏빛을 띠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선 수다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늙은 여우에 이어서 미친 개가 당한 거라니깐. 틀림없어.
넌 도대체 어디서 그딴 소리를 듣는 거냐? 귀신같이.
그러자 한 아이가 친구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더니 쉰 소리로 말했다.
넌, 내가 아직도 네 친구로 보이니?
꺅!
둘은 동시에 책상을 안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영어선생도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아이들은 책상 위로 포복을 하며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정신을 차린 영어선생이
버럭 화를 냈다.
"일어나!"
두 아이가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책상 들고 복도로 나가. 빨리!"
책상을 들고 복도로 쫓겨나간 수다쟁이들은 익숙하게, 늘하던 것처럼 벽쪽으로
책상을 붙였다. 그리고는 뒷문으로 내던져지는 걸상을 집어 벽을 보고 앉았다. 그래도
웃음을 참지 못한 한 아이가 친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너 때문이야.
그때 영어선생이 문밖으로 나왔다. 두 아이는 재빠르게 책상에 바로 앉았다.
영어선생은 두 사람을 잔뜩 노려보다가 교실문을 쾅 닫고는 도로 들어가 버렸다.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펴자, 한 아이가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다른 아이가 하지
마, 하며 돌아보는데 친구가 복도 끝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정숙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락을 먹기보다는 다른 일에 열중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운동장 한 구석에선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체육선생이 보였다. 그는
아이드에게 최신 유행춤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체육선생의 눈에 멀리 혼자서 걸어가는 은영이 보였다. 그는 춤을 배우다 말고
고개를 돌려 은영이를 바라 보았다. 이내 아이들은 체육선생을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체육선생은 멋적어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 춤을 배우는 척 했지만 마음은
이미 딴 데 가 있었다.
뒤뜰 고목나무 근처엔 날라리들이 모여 작당질을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나무
밑둥의 구멍을 보며 말했다.
봐, 여기 구멍이 있잖아.
그게 뭐 어째서.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원래 나무가 오래 돼서 귀신이 들러붙으면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데. 바로 이런
구멍 같은 게 피를 부르는 부적 같은 거라니까.
그러자 옆에서 다른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원한을 가진 사람이 죽으면 자기 징표에 머물렀다가 그 원한은 풀 때까진
영원히 죽지 않는대.
그럼, 네가 죽으면.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얘 죽일 때까진 영원히 죽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겠네.
아이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런 다음에는 다 함께 까르르 웃었다.
한 아이가 확인이라도 하듯 고목나무 구멍에 귀를 대 보았다. 그곳에서는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지오는 점심시간에 창고로 갔다. 벨이 울리자마자 재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불거져나온 마룻판과 그 밑에 뭔가 흰 물체
같은 게 다시 보였다.
그 너머에는 재이가 스케치북을 보고 있었다. 지오 거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소영의 초상화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재이는 굳은 얼굴로 지오의 스케치북을 뚫어져라 보느라 누가 다가가는 것도
몰랐다.
"뭘 훔쳐 봐!"
재이는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게 중심을 잃어버려 뒤로 넘어졌다.
지오가 급히 붙잡으려 했지만 자신도 이미 중심을 잃어버린 뒤였다. 두 사람은 마주
안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지오가 먼저 재빠르게 일어나 재이를 일으켜 앉혔다.
"괜찮아? 놀래긴 뭘 그렇게 놀래? 도둑놈처럼."
지오의 말에 재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내려와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재이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지오는 괜스레 더 미안했다.
"다쳤니? 어디 아퍼?"
지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이의 손을 무심결에 보았다. 그 손은 힘줄이 돋을
정도로 뭔가를 꼭 움켜잡고 있었다. 소영이가 그려진 도화지를 손톱을 세워 움켜쥐는
바람에 뜯겨져 있었던 것이다.
재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져주 지오는 표정을 살폈다. 재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지오는 안심이 되어 활짝 웃었다.
"진짜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그러나 재이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사라지고 울상이 되었다.
"어떡하지?"
재이는 처참하게 찢긴 소영의 초상화를 들어보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채무관계 때문에 그리는 그림인데 뭐."
"?"
재이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난리를 치는구만."
재이와 지오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소영이가 어느새 왔는지 담배를 피워 물고
서 있었다. 소영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희 둘이 진짜 연애하는구나. 그래 지저분한 남자랑 연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 뭐. 괜찮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연애한다는 말에 재이는 소영을 째려보았다. 지오는 일어나며 찢어진 도화지를
가방에 쑤셔 너헜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겉으로 보기엔 안 그런 애가 생각하는 게 왜 그
모양이니?"
지오가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아니면 됐지,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그러고 보니 더 수상하네. 알았어,
알았다구. 비슷한 애들끼리 잘들 해봐라."
소영은 토라졌는지 담배를 발로 밟아 끄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친 년!"
지오는 소영의 등을 쳐다보며 쏘아 붙였다. 그런 다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재이가 뒤에 와서 지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 공연히 나 땜에. 기분 상했지?"
"아냐."
"화 났어?"
재이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에 재이가 말했다.
"아니."
"화난 거 같은데?"
"재이야."
지오가 돌아서며 말했다.
"?"
지오에게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재이는 가만히 있었다.
"미친 개 말야."
"."
재이는 눈만 껌뻑거렸다. 지오는 이참에 궁금한 걸 다 쏟아버리고 싶었다. 적어도
재이에게만은.
"어제 밤에 죽은 거 아닐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해?"
재이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늙은 여우가 죽은 날처럼 왠지 기분이 이상해. 마치
내가 미친 개를 직접 죽이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야."
"."
"내가 정말 귀신이라도 들려서 미친 개를 죽인 거 아닐까?"
지오는 자기도 모르게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누가 죽였든, 널 그렇게 못 살게 굴던 미친 개가 정말로 죽었다면 잘된 거 아냐?"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냐. 난 심각하다구. 진짜루 내 몸에 귀신이라도 들어와
있는 거면 난 어떻게 해야 돼?"
그 말에 재이가 진지한 눈으로 지오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지오는 두려운 눈으로
재이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재이가 킥 하고 웃고 말았다.
"지오야, 너 너무 심각한 거 알지?"
재이의 말에 지오는 괜히 얘기를 꺼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기만 했다.
"걱정도 팔자다. 미친 개가 쉽게 죽을 인간이니? 핑계 대고 어딘가에 가서 신나게
놀고 있겠지, 뭐. 어떻게 네가 딴 사람도 아니고, 미친 개 걱정을 다 하니?"
생긋 웃으며 재이는 이젤 앞에 앉으며 등을 돌려버렸다. 지오는 씁슬히 웃으며
재이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날라리들로 소문난 아이들에게 이끌려 체육선생이
뒤뜰 고목나무께로 갔다.
"네들이 날 완전히 호구로 아는구만."
"선생님, 정말이에요. 이상한 소리가 난다니까요."
날라리들이 고목나무 아래의 구멍에서 나는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체육선생을 끌고
온 것이었다.
"벌레가 나무 갉아먹는 소린가 보지."
체육선생은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그렇게 요란해요?"
"확인이라도 해달라구요."
아이들은 체육선생에게 매달리며 떼를 썼다. 그런 일을 한 두 번 당한 게 아니었던
체육선생은 빠져나갈 핑계거리를 찾았다.
"어떻게?"
"저기 구멍이 있잖아요."
아이들의 말대로 나무 밑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럼 너희들 손이 나보다 작으니까 너희가 넣어 봐."
체육선생이 어느 한 아이의 손을 잡으려 하자 일제히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참 나, 불 줘봐."
할 수 없다는 듯 체육선생이 라이터나 성냥을 찾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능청을
떨었다.
"어머, 선생님도. 저희들이 불이 어딨어요."
"그럼 할 수 없지. 알아서들 해라."
체육선생이 자리를 뜨려 하자 한 아이가 재빨리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빨랑 드려, 이 년아."
그러자 친구는 마지 못해 작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며 불평을 했다.
"쌍년, 지꺼 주지."
체육선생은 웃으면서 라이터를 받아 불을 켰다. 그리고는 구멍으로 가지고 갔다.
정말로 구멍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궁금증이 생긴 체육선생이
땅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안을 들여다보려는 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날라리들이 체육선생을 놀래키기 위해 장난을 친 것이었다. 체육선생이 화들짝
놀라는 척 하며 벌떡 일어서자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나 안 해, 임마. 너희들이 해!"
체육선생이 토라지자 아이들이 "선생니^6,3^임" 하며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체육선생은 다시 라이터를 켜서 안을 비추어 보았다.
"뭐가 있긴 있는데."
체육선생도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구멍 속을 들여다보던 체육선생이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찡그렸다.
역겨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대신 나서며 구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멍 속에선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속에는 애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거 봐, 임마. 내가 뭐랬어. 벌레가 나무 갉아먹는 걸 갖고."
체육선생이 돌아가자 아이들은 다시 한번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구멍 속에는 벌레들이 기어다는 것 말고도 다른 무엇이 있었다.
아악!
아이들은 비명을 토하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 순간 그들은 3층 창가에 서서
고목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정숙이를 보았다. 입술을 꽉 깨문 정숙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때 수업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8장

은영은 교무실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이 자신의 부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며 도리질을 쳐보아도 그것은 더욱 악착같이 은영을 물고 늘어졌다. 기억하기도
싫은 사건들이 현실처럼 되살아났다.
박기숙 선생이 반장인 은영을 앞에 앉혀 놓고 반협박조로 무어라고 마구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은영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박기숙은 나중에는 얼르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은영에게 매달렸다.
박기숙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이건 은영이 너를 위한 거야.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평생을 후회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친구도 가려서 사귀어야지. 너한테 어울리는 애가 아냐.
멍한 표정으로 지난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은영이 앞에 뭔가가 내밀어졌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떠 보니 교무수첩이었다.
어디서 났는지 체육선생은 교무수첩을 은영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수줍음과 애정이
듬뿍 담긴 얼굴이었다.
"이걸 찾으셨다면서요?"
"네."
은영이 오랜만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교무수첩을 보고 기쁜 표정을 짓자
체육선생이 어린애처럼 따라서 웃었다.
"그런데 그건 뭐하시게요? 봐봤자, 괜히 기분만 울적하실 텐데."
체육선생은 은영의 표정 변화에 주목했다. 은영이 갑자기 우울해지자 재빨리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뭐 다른 건 필요하신 게 없나요?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저랑?"
"괜찮아요. 그리고 이거 고마워요."
내심으로 뭔가를 잔뜩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은영의 말에 체육선생이 머쓱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표정에는 실망스러움이 역력했다.
체육선생이 돌아서자 은영은 3 학년 3반이라고 쓰여져 있는 교무수첩의 표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교무수첩을 펼쳤다. 교무수첩 첫 페이지에는 박기숙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은영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특별히 이상한 내용은 없었다. 다만
아이들 사진이 페이지마다 붙어있는 게 특이했다.
한참을 넘겨보던 은영은 불현 듯 뭔가 떠오른 듯 사진 속의 아이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한 페이지에 시선을 멈추었다.
그건 지오의 사진이 붙어 있는 페이지였다. 은영은 사진을 확인한 다음 가슴을
누르며 박기숙이 메모해 놓은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특별한 사항은 없었다. 비고 한 구석에 조그마한 글씨로 '대학 진학능력,
의지 모두 없음'이라고만 쓰여져 있는 게 유난히 도드라져 보일 뿐이었다.
지오의 사진을 한참 보다, 은영은 다시 교무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듯 지나간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기 시작했다.
메모란에 박기숙이 죽은 날 밤 남겨놓았던 숫자가 있었다. 연도를 기록한 것이었다.
빨간 싸인펜으로 몇몇 연도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은영은 그것을 본 후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서서히 은영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수첩을 덮은 은영은 빠른 걸음으로 도서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졸업앨범을
뒤적이는 은영의 얼굴은 긴장 때문인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은영은 도서실에서
없어진 졸업앨범이 하필 1993 년과 1996 년 것임을 확인하곤 더욱 하얗게 질렸다.
은영은 혼란스러움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감고 다시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옆을 노려보았다.
언제 왔는지 소영이가 옆에 서 있었다. 소영은 두려운 듯한 은영의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안해진 은영은 식은 땀을 닦으며 표정을 풀고 억지로 웃었다.
"어 소영이구나, 미안해."
소영은 멍하니 은영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은영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
"여기 없는 앨범, 서무과에 여분이 있다고 했나?"
은영은 금방 생각이 난 듯 소영에게 물었다.
"없대요."
소영이 짧게 대답했다.
"?"
은영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소영이 설명을 했다.
"그 해 졸업앨범 여분이 몇 개 있었는데, 최근에 없어졌대요. 바보들같이.
서무과에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거 보셨어요?"
"."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이 없는 소영의 말에 은영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 혹시 따로 다니세요? 왜 맨날 혼자만 다니세요?"
"왜, 혼자 다니면 이상해 보여?"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끼리 놀잖아요. 애들은 애들끼리 놀고."
"그런 넌?"
"저는 제가 선택한 거예요. 애들이랑 있다 보면 귀찮을 때가 더 많거든요. 말도
잘 안 통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 친해지고 싶은 애가 있으면, 언제든 친구로 만들 수
있어요. 선생님들이 방해만 안 하면."
소영은 뒷말을 하면서 뭔가가 떠오르는 듯 눈 주위가 어른거려졌다. 그러더니 얼른
말을 멈추었다.
그 흔들림을 은영은 놓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소영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영을 보곤 피식 웃었다.
"참, 그림은 찾으셨어요?"
"응?"
은영은 깜짝 놀랐다. 그림을 사진으로 잘못 알아들은 때문이었다. 속내라도 들킨
심정이었다.
"지오가 그린 그림 보고 싶다고 그러셨잖아요."
친절하게도 소영이가 해결해 주었다.
"응. 봤어. 상태가 좀 안 좋긴 했지만. 근데, 지오를 잘 아니?"
"아뇨, 그냥 짝일 뿐이에요. 왜요?"
소영은 쌀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게 학창시절의 자신과 가장 다른 면이었다.
"걔에 대해서 궁금한 게 좀 있어서."
"걔 별 거 없어요. 귀신 점 잘 치는 거 말곤."
"귀신 점?"
은영은 소영이 무심코 내뱉은 말을 놓치지 않았다. 소영이 은영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만 까딱 했다.
"애들 관심 좀 끌어볼려고 그러는 거죠, 뭐. 궁금하시면 창고로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걘 지금쯤 거기서 그림 그리고 있을 거예요."
"!"
소영의 말에 은영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기 서 있기만 했다. 창고,
창고 은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학시간이었다. 소영이 교실 앞으로 나가서 칠판 위에다 문제를 풀고 있었다.
수학선생은 팔짱을 끼고 창가에 앉아서 소영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다른 책을 읽거나, 하오의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잠을 청하고
있다.
정숙은 꼿꼿이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정숙의 짝은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정숙의
표정을 살폈다. 정숙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숙은
유독 소영이한테만 문제풀이를 시키고 편애하는 수학선생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때 그 선생은 전교에서 수학만큼은 정숙이가 1 등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매번 수업시간마다 소영이만 불러내고 있었다.
어쨌든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판서하는 소리와 설명하는 소리만 단조롭게 교실 안을
울리고 있다. 그때 교실 안의 단조로움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부욱 북! 누군가 책을
찢는 소리였다.
아이들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정숙이 무표정한
얼굴로 '수학의 정석'을 찢고 있었다. 정숙의 짝은 옆에서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수학선생의 얼굴엔 분노와 적개심이 불같이 타올랐다.
"이리 나와, 이거 미친 년 아냐!"
그러나 정숙은 수학선생은 쳐다보지도 않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정숙이 미처 나갈 새도 없이 수학선생이 달려와 정숙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수학선생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했다.
아이들은 너무도 황당한 광경에 숨도 못 쉬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뺨을
맞고 넘어진 정숙의 코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나가, 이 년아. 빨리 꺼지라구. 빨리 못 나가."
수학선생은 쓰러진 정숙에게 발길질을 하려다 간신히 참았다. 바닥에 넘어져 있던
정숙은 흐르는 피도 닦지 않은 채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는 뒷문을
열었다.
정숙은 문을 열고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영을
한동안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이들은 그런 정숙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 모두들 눈과
입을 가렸다. 정숙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교실에 남아이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경악스런 장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영 또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멍하니 정숙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은 엉망진창이 된 채 끝나 버렸다. 수학선생이 책을 싸들고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곧 수업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소영은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혼자서 몰래 교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지트, 창고로 갔다.
창고 구석에 자리를 잡은 소영은 속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곤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소영은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지워지지 않는
정숙의 마지막 시선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섬뜩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정숙의 눈매는 좀체로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담배꽁초가 타들어가려고 했다. 소영은 담배꽁초를 집어던지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창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미처 비벼끄지 못한 담배꽁초가 마음에
걸렸다. 소영은 몸을 돌려 담배꽁초를 줍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담배꽁초를 집은 소영은 바닥에 비벼 끄려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불거져 나온
마룻바닥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는 듯했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소영은 한쪽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마룻바닥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희미한 물체가 흙먼지에 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이번엔 마룻바닥 끝의 빈틈에 꽂혀있는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소영은 조심스레 다가가 앨범을 꺼냈다. 먼지를 털어내자 숫자가 드러났다. 소영은
연도를 확인해 보았다. 1993 년과 1996 년 졸업앨범이었다.
그런데 앨범 옆구리에 검붉은 액체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소영은
앨범을 펼쳐, 그 액체가 묻어있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놀랍게도 3 학년 3반이었다. 그
페이지만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때 소영의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개의 앨범을 나란히 놓고 좌우로
살피던 소영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거기에는 정숙이 서 있었다.
"놀래라."
그렇지 않아도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참이었다. 그제서야 소영은 안심을
했다.
"."
정숙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
정숙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젠 미행까지 하니? 관 두자. 난 너한테 특별히 나쁜 감정 없어. 너한테 일부러
피해주려고 그런 적도 없고. 우린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이야."
할 말을 한 소영은 앨범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나가려 했다. 그런데 정숙이 소영의
어깨를 확 잡아 돌려세웠다. 소영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정숙을 노려보았다. 팽팽한
긴장이 교차되었다.
"왜 이래?"
소영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야자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하자."
"왜?"
"."
정숙은 대답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영이 의아해서 도로물었다.
"지금 얘기하면 안 돼?"
"왜, 오늘도 언니가 모시러 오기로 했나 보지?"
"언니라니?"
그렇게 말하는 소영의 얼굴이 일순간에 확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정숙이 그 얼굴레 대고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엄마였나? 미안해. 너무 젊어서 언닌 줄 알았어."
소영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꾹 누르고는 다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정숙이
더욱 세차게 소영의 어깨를 잡아서 돌려세웠다.
소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정숙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노려보았다.
"미친 년. 그런 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공부나 더 해."
정숙도 만만한 애가 아니었다. 차갑게 노려보며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니네 엄만 아직도 정신병원에 그대로 있니?"
짝!
소영은 끝내 참지 못하고 정숙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정숙의 얼굴이 반쁨
돌아갔다.
"비열한 년. 인간이 불쌍해서 참을려고 했더니. 이런다고 날 누를 수 있을 거 같애?
웃기지 마. 넌 절대 날 이길 수 없어. 너랑 나랑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니? 병신 같은 년. 쪽 팔리는 줄이나 알아라."
말을 마친 소영은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정숙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숙은 점점 더 자신을 옥죄어 오는 외로움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9장

다시 밤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야간자율학습이 진행되었다. 더러는 갖가지 핑계를
대거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학교에 남아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3 학년 3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담임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더러 연락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업시간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터라 교실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공부에 집중하려 해도 뭔가가 불안하고,
마음이 떠난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오는 교실을 빠져 나와 창고에 가 앉아 있었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자꾸만
천정의 얼룩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더러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시 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확인해볼 수 없었다. 귀신들린
아이라는 얘기가 놀림 반, 비아냥 반임을 지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오는
교실에 남아 있는 것 그 자체가 싫었다.
창고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지저분하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했지만
지오는 그곳이 좋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창고에 숨어 들어서 시간을 때우거나 그림을
그리곤 했다. 어떨 때는 콧노래가 절로 나오기도 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곳, 그
누구도 찾아와 귀찮게 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 놓고 실컷 그림을
그릴 수가 있어서 좋았다.
지오는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붓을 들었지만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머리 속에선 자꾸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우우우우우.
때로 그것은 바람소리에 묻어서 들려오기도 했다. 불을 켤 수 없었기 떄문에
분위기는 더욱 으스스했다. 깨진 환기창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그런 지오를 오래 전부터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재이였다.
지오의 뒤를 따라왔다가 시무룩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멀찍이 서서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뚫어져라 하얀 도화지를 바라보던 지오가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오는 열정적으로 스케치북의 하얀 면을 매워 나갔다. 재이는 그런 지오를
놀람 반 두려움 반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은영은 다른 선생님들이 퇴근을 했는데도 귀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무렵부터
체육관에 앉아 있었다. 은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은영은 불길한 눈으로 체육관의 높은 천정을 올려보았다. 그 얼굴 위로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려왔다.
무대는 불이 꺼진 미술실이었다. 때문에 그곳은 암흑처럼 어두웠다. 은영의 눈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진주가 어두운 미술실 안에 갇혀 있는 게 보였다.
진주는 공포에 떨며 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 소리 사이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엄마가 구해줄 거야. 무당이잖아.
얘들아, 이러지 마.
공포에 떠는 진주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부서질 듯한 문소리가 강하게 울려왔다.
그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은영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그 위로 자신의 음성이 전파를 타고 흐르듯 들려왔다.
네 엄마가 무당이었다는 말은 내가 퍼뜨린 게 아니야. 나도 담임한테 들은 거였어.
은영의 머리 속에는 진주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미술실 문을 잠그는 손들. 전원
스위치를 내리는 손.
환상 속에서 여고생 은영은 그 손들과 웃어대는 여학생들을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은영과 여학생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미술실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처절해져 갔다. 마치
깊은 산속에서 덫에 걸려 울부짖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아이들은 진주를 무당 딸이라고 놀리면서 연신 비웃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서
진주가 당하는 것을 보고 은영의 얼굴은 잔뜩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여고생들은 그런 은영에게 다가가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은영도 그들과 함께 미술실을 등진 채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텅 빈 체육관에 앉아 있던 은영은 갑자기 창고로 변한 미술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괴로운 듯 소리를 질렀다.
"난 아이들이 우릴 보면서 수근대는 게 너무 싫었어. 너랑 연애한다는 말이 너무
창피해서 싫었던 거야. 그래서 날 그런 장난에 끌어들였을 때, 그냥 가만히 있었떤
거야. 하지만 난 별일 없을 거라 믿었어.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믿어줘,
진주야."
끝내 은영은 얼굴을 감싸쥐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은영의 목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진주는 학창시절 은영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였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함께 하는 그런 친구. 등하교도 함께 하고, 숙제도
함께 하고, 놀 때도 같이 놀고, 도시락도 함께 나누어 먹고,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단짝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짝이 되어서 3 학년이 될 때까지 줄곧 같은 반이 된
아이는 진주 밖에 없었다.
그런 어느날 창가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은영은 창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 고목나무 밑에서 아이들이 진주를 둘러싸고 뭐라 놀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의 손에는 방울이 쥐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방울을 흔들며 진주를
놀리고 있었다.
이거 흔들면 점괘가 나온다며?
은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어깨를 눌러 도로 앉히는 사람이
있었다. 담임인 박기숙 선생이었다. 박기숙 선생 또한 이상하게 진주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은영은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은 공부를 하는 척
했지만 땅바닥에 엎드려 우는 진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박기숙 선생님이 내가 널 계속 만나면 널 퇴학시켜버리겠다고 그랬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날 위한 핑계였어. 그러나 솔직히 난 무서웠어. 그리고 우리가
연애한다는 소문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은영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체육관 천정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은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체육관 창문 밖에서는 오래 전부터 누군가의
시선이, 그런 은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정숙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옥상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는 여학생이 있었다. 정숙이 거기에 있었다. 정숙은
눈물을 훔쳐내고, 또 훔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계속 흘러내렸다.
정숙은 다시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정숙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정숙은 난간에 서서 가만히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학교를 넋나간 얼굴로 바라보는 정숙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소영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 옥상에 있는 정숙이를 훔쳐보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도저히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다. 딱히 무어라 위로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소영은 가만히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일부러라도 밝은 얼굴을 하고
싶었다. 소영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때 화장실 변기칸에서 한 여학생이 나왔다. 그 아이는 거울 앞에 서서 멋을
부리고 있는 소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나가 버렸다.
여학생이 나가서 소영은 화장실 문을 잠가버렸다. 휴!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교무실에는 딱 한 명의 선생님만 남아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퇴근한 듯
했다. 그러나 은영의 자리엔 책도 펼쳐져 있었고, 가방도 놓여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재빨리 송수화기를 든 사람은
숙직인 미술선생이었다.
"네, 교무실입니다."
"허은영 선생님 좀 부탁드립니다."
"허은영 선생님요? 지금 안 계신데요."
"퇴근하셨나요?"
"아뇨, 아직 퇴근은 안 하신 거 같은데요. 가방은 있거든요. 들어오시면 누구라고
말씀 전해드릴까요?"
교무실로 전화를 건 사람은 소영이었다. 소영은 화장실에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소영은 잠시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였다.
"친구한테 전화왔었다고 전해주세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께요."
허은영 선생이 자리에 없음을 확인한 소영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창문을 넘어왔다. 고목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정숙이 어느새 내려왔는지 우두커니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편 창고에서는 귀가 잘려나간 흉측한 오광구의 얼굴이 점점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오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사실 스케치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지오는 열정적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오의 얼굴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마치 접신이라도 하듯, 신들린 얼굴로
지오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체육관에서 나온 은영이 창고로 가서 창문 사이로 그림을 그리는 지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은영은 지오가 혹 진주는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조각도에 꽂힌 채 죽어있는 어떤 여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영은 눈에 질끈 감았다.
석고상을 꼭 쥐고 있는 피묻은 하얀 손.
다시 눈을 떴다. 깊고도 오래된 회한이 은영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은영은 다시 창고 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거짓말처럼 진주가 등을 보이고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 속의 인물은 학생 은영이었다.
은영은 탁자 위에 흰 천으로 덮인 피사체을 자랑스레 쓰다듬으며 모델처럼 지오
앞에 서 있었다.
진주에게 무어라고 말을 한 은영이 천을 걷어내자 완성된 진주의 두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두상은 뒷면만 보여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예술품엔 영혼이 깃든대.
창고 밖에 서 있는 은영은 자신이 진주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훔친 은영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낡은 창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은영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오에게 물어보고 꼭 확인할 게 있어서였다. 지오는
은영을 보자 그리고 있던 그림을 뒤로 숨겼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이젤에 얹혀
있었다. 지오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손동작만 취했던 것이다.
은영은 지오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쪽 귀가 잘려 나간 채
피투성이가 된 죽은 오광구 선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그림을 가운데 두고 지오와 은영은 마주 섰다. 의혹에 찬 눈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밤 늦은 시간에 폐쇄된 창고에 홀로 앉아 있는 지오와 퇴근도 않고
그곳을 찾은 은영.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잊은 듯했다.
지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된 표정이었다.
"전 진주가 아니에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 애가 아니라구요."
지오도 얘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학교에서 자살한 선배언니가 바로 허은영 선생의
친구였다는. 지오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넌 도대체 누구니?"
"전 지오라니까요. 선생님의 친구 진주가 아니라 지오라구요."
은영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방울은 도대체 뭐야? 어디서 난 거야?"
"그건 친구가 준 거예요."
"그러자 은영이 소리쳤다.
"진주는 죽었어. 진주는 바로 이 자리에서 9 년 전에 죽었다구! 내 눈으로 봤어.
근데 어떻게 걔가 너한테 방울을 줄 수 있다는 거야!"
그러자 지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재이한테 받은 거예요. 윤재이요."
"!"
그제서야 은영은 어렴풋이 짚이는 데가 있었다. 은영은 창고를 나와 교사를 향해
마구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혼란과 당혹감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은영이 나가자 지오는 탁자에 놓여 있는 방울을 보았다. 그리고는 뒷족, 불거져나온
마루바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흘린 듯 지오는 그것을 뜯기 시작했다.
지오는 손으로 미친 듯이 마룻바닥을 뜯기 시작했다. 손톱이 갈라지고 살갗이
벗겨졌다. 그러나 지오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드디어 마룻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석고상이었다.
지오는 그것을 빼내 흙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진주의 그림자가 탁자에 부딪혔다. 그 바람에 진주의 두상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진주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진주의 몸에 무딪친 나무 선반이 흔들거렸다.
진주는 두상을 가슴 가득 안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두상을 웅크리듯
감싸 안으며 무너져내리는 석고상들을 몸으로 막아냈다.
동시에 선반에 놓여 있던 조각도가 빛을 발하며 떨어져 내렸다. 조각도는 진주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지오가 엉금엉금 일어나 진주에게로 다가갔다. 지오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는 진주가
아니라 재였다. 재이는 눈을 감았다.
지오는 다시 한 번 마룻바닥에서 꺼낸 석고상을 확인해 보았다. 분명히 웃고 있는
재이의 얼굴이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상이었다. 굳은 피가 잔뜩 엉켜 있는 조각상
밑에는 한 줄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랑하는 진주에게. 은영이 1989 년)

지오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멍한 얼굴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지오는 조각상을
빼낸 마룻바닥에서 빠져나와 있는 뭔가를 또 발견했다.
지오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사람의 손이었다. 큰직한 보석 반지를 낀
오광구의 손. 지오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지오는 구석으로 몸을 숨기며 웅크리고 앉았다. 옴몸이 덜덜덜 떨렸다. 지오의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오는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놓여 있는 재이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지오는 미술선생이 준 붓을 콱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며 두려움을
이겨내려 애를 썼다.
지오는 일어나 책상에 놓여있던 재이의 다이어리를 보기 시작했다. 월 스케줄을
기록하는 난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3월 첫째주,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날 기록된
두 문장은 이랬다.

(그녀가 다시 담임이 되었다.)
(그 애가 선생님으로 돌아왔다.)

1주가 지난 날, 기록된 문장도 읽어내려갔다.

(그 애는 날 버리고 가지 않았다.)

순간 지오의 머리 속에 섬과처럼 재이의 모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교문에서의 첫
만남. 화장실에서의 만남. 미술실에서 그림을 얘기하던 모습.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지오는 교사 쪽을 휙 둘아보았다.

창고에서 나와 현관으로 들어가려던 은영도 비명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건물
뒷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은영은 불길한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현관문 손잡이를 놓고 뒤로 돌아섰다. 건물을 돌아 뛰어나오던 은영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박기숙이 목맨 나무에 똑같은 모습으로 정숙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발견한 여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무서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삽시간에 아이들이 창문에 매달리거나 교실 밖으로 나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미술선생이 달려왔다. 어떤 아이는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고, 현기증을
일으킨 듯 친구에게 부축을 받는 아이도 있었다.
웅성거리는 아이들 뒤에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소영이도 보였다. 은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차갑게 식은 정숙을 부둥켜 안았다. 아이들이 몰려와 주위를 에워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은영은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이들 사이에서 재이를 발견했다. 재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때 미술선생이 차를 몰고 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은영은 정숙이를 차에 싣고
다시 재이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재이는 보이지 않았다.
미술선생이 자동차 문을 닫으면서 소리쳤다.
"아이들을 정리해서 귀가 시키세요. 주임 선생님에게 전화도 하시구요."
"네."
미술선생의 차가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갈 때까지 아이들은 멍하니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갑작스런 사태에 너도 나도 울음을 터트렸다.
소영 또한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초점 잃은 눈으로 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엇다.
그런 가운데도 은영은 재이를 찾았다. 그러나 재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은영은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특히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울고
있는 한 아이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얘들아, 진정해. 오늘은 안 되겠다. 다들 가방 싸서 집으로 돌아가, 어서!"
겁을 집어 먹은 아이들은 짝을 지어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두 하교해버린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정숙의 자리만 책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 잃은 채, 노트, 방석, 가방 책장이 바람에 쓸쓸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정숙의 책을 누군가 다가가서 덮었다. 재이였다. 재이는 슬픈 얼굴로 정숙의
물건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담아서 교실을 빠져 나갔다.
10장

허탈한 모습으로 교무실에 주저앉아 있던 은영은 또 다시 어디선가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도서실 쪽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도서실에는 소영이가 홀로 있었다. 소영은 졸업앨범 두 권이
놓여 있는 책상 위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은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자 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은영을
보는 소영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먹이는 소영의 어깨를 은영은 뜨겁게 감싸 안았다.
"1 학년 땐 정말 친했어요.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애였죠. 그런데
시험이 끝날 때마다 선생님들이 우리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걘 날 멀리했고, 난 걔한테 다가가지 않았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내 잘못이에요. 내가 걜 죽게 했어요."
북받친 설움을 한 번에 토해내듯 소영은 뜨겁게 울었다. 소영이를 끌어안은 은영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아니야, 너 때문만은 아니야."
은영은 소영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소영을 돌려보내고 은영은 혼자 도서실에 앉아 있었다. 그제서야 은영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앨범에 신경이 갔다. 은영은 앨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두려운 눈으로
펼쳐보기 시작했다.
은영은 피가 묻은 3 학년 3반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사진 하나 하나를 천천히
훑어보다, 어느 한 아이의 사진을 보고는 시선을 멈추었다.
잠시 후 은영은 천천히 일어나 다른 앨범을 급하게 펼쳤다. 역시 3 학년 3반을
뒤적이며 얼굴을 하나 하나 확인했다.
은영은 한 사진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어둠
한가운데서 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아직도 기억하나 보지?"
은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 나는 곳을 찾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재이가 위압적으로 은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은영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진주가 아냐. 재이도 아니구."
"넌 은영이가 아냐."
"난 예전에도 은영이었고, 지금도 은영이야."
"다 이상 넌 예전의 은영이가 될 수 없어. 넌 이제 늙은 여우가 돼 갈 거야."
재이의 싸늘한 목소리에 은영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 난 지금도 진주 친구 은영이야!"
" 이젠 소용없어."
재이의 음성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때 은영은 재이의 손에 들려있는
날카로운 조각도를 보았다. 재이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영은 뒤로 주춤추춤
물러섰다.
"이러지마, 제발."
은영이 뒤로 물러서며 울부짖었다.
"너만 없으면 난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야."
'안 돼,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재이는 냉혹한 웃음을 지으며 점점 은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어.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천천히 은영에게로 다가가는 재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순간, 멀리서
어렴풋하게 재이를 부르는 지오의 목소릭 들렸다.
"윤재이!"
창고에서 재이를 찾아 보이지 않자 지오는 불이 켜진 도서실을 보고는 현관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지오는 잠겨 있는 현관문을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그래도 열리지
않자 손등으로 창문을 쳤다,
쨍그렁!
유리창이 깨졌다. 지오는 손을 안으로 집어 넣어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리고는 문을
부술듯이 열고 들어와 도서실로 달려갔다.
지오가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재이에게 뭔가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선이
흐트러진 것이다. 지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재이의 시선이 잠깐 분산되는 순간,
은영은 재빨리 재이를 밀치고 뛰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재이가 들고 있던 조각도로 은영의 어깨를 긁어버렸다.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를 감싸뷔고 은영은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은영은 비명을 지르면서 2층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계단밑에서 재이가 따라서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복도를 달려가는 은영은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은영이 간신히 어깨를 감싸쥐고
복도를 달려가는데, 복도 끝에서 재이가 나타났다.
은영은 다시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3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숨이 너무 차올랐다. 중간 평지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은영을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은영은 목소리를 찾아 이곳 저곳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한달음에 도서실로 뛰어간 지오는 제일 먼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연도가
다른 두 개의 앨범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오는 똑똑히 보았다. 같은 반 같은 자리에
똑같이 위치한 재이의 사진. 이름과 머리모양만 다를 뿐이었다.
졸업앨범을 보던 지오는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았다. 순간, 어디선가 은영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지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눈을 번쩍 떴다.

"안 돼, 재이야!"
은영이 얼굴을 감싸쥐고 쓰러졌다. 계단 중간에 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는 피묻은
교복을 입고 있는 진주가 있었던 것이다.
은영은 옆에 있는 화분을 들어 거울 속의 재이를 향해 집어던졌다. 거울이 단번에
박살이 났다. 은영은 다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한참을 내달린 은영은 어느 순간 복도 중앙에 멈춰섰다. 은영은 복도
좌우를 살펴 보았다. 재이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갑자기 은영의 뒤에서 유리창이 부서져 내렸다. 은영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복도 중간중간의 유리창이 차례대로 깨지면서, 은영을
덮치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유리창에 은영은 여기저기 긁히고 찔렸다.
그럼에도 은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피해 아무 교실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은영이 들어간 교실의 팻말이 세차게 흔들리다 툭! 하고 떨어져 버렸다. 팻말에는
'3-3'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은영은 교실문 고리를 움켜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다 은영은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들어 보았다. 'JJ'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책상 위에 피 묻은 반팔 교복을
입은 진주가 앉아 있었다.
은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몸부림을 쳤다.
"이러지마. 진주야."
"넌 여기로 돌아오면 안 되는 거였어. 차라리 돌아오지 말지."
진주의 음성은 냉랭했다. 싸늘한 표정에는 냉소가 넘쳤다.
"이러지마.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사람을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 죽여서도 안 돼.
귀신이 되어서 계속 학교를 다닌다고 너한테 뭐가 얻어지니!"
"처음엔 졸업앨범을 갖고 싶었어.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나한텐 날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어."
말을 마친 진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은영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제 날 사랑해주는 친구를 만났는데, 여기서 관둘 순 없어."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학교를 다닐 순 없어! 넌 사람이 아냐!"
"여기 있는 책상처럼 그저 난 교실 한 구석을 채우기만 하면 돼.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어. 네가 졸업하고 9 년간 아무도 날 문제삼지 않았어.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거야.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그냥 빈 책상을 채워 주고, 머리
수를 맞춰주기만 하면 되니까."
"널 이해해.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돼.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
"넌 날 이해 못해. 이제 선생님이 됐으니까 더더욱 이해할 수 없겠지."
"그렇지 않아. 난 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앞으로도 널 절대 잊지 않을 거구."
"."
진주의 표정이 약간 움찔했다.
"이제 예전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제발 돌아가 줘."
"아니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렇지 앉아, 진주야. 내가 잘할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
'너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섬뜩한 시선으로 은영을 바라보는 진주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앞쪽 문에 지오가
달려와 서 있었던 것이다.
진주의 눈에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다. 지오가 교실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이러지 마, 진주야. 그만해. 제발."
'."
"네가 진주든 재이든 난 상관 없어. 또 귀신이든 사람이든 나한텐 상관없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되는 건 싫어."
"지오야,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우린 옛날로 돌아갈 수 있어."
"이렇게는 옛날로 절대 돌아갈 수 없어."
지오는 진주 아니 재이에게 말하며 겁에 질린 은영을 감싸 안았다.
"걱정하지마, 지오야."
역시 차가운 음성이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나 때문에 네가 선생님들을 다치게 하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널 만나기까지 난 너무 오래 기다렸어. 여기서 널 포기할 수 없어."
그러면서 진주, 아니 재이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지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건드리지 마!"
지오는 독기 어린 눈으로 진주를 바라보았다. 진주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오는 주머니에서 조각도를 꺼내 진주에게 견주었다.
널부러져 있던 은영이 당황한 시선으로 지오를 바라보았다.
"소용없어 지오야."
진주의 말에 지오는 자기 목에 조각도를 들이댔다. 그걸 본 진주가 멈칫 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겠어.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지오와 진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진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지오가 조각도를 쥔 속에 힘을 주었다. 조각도가 지오의 목을 파고 들면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지마 지오야."
진주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오를 달랬다.
"난 널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다치게 함녀서 계속
학교를 다닐 순 없어."
지오는 진주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천천히 은영에게 다가갔다. 그런 다음 은영을
부둥켜안았다. 독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진주를 바라보는 지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우린 널 욕하지 않을 거야. 돌아가. 제발."
드디어 진주가 울음을 삼키더디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흐느꼈다.
"난 학교애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어."
"미안해. 진주야."
이번에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은영이 말했다.
"은영이가 졸업하고, 난 그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갈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그냥
기다렸지. 고개를 파묻고 앉아 있는 나에게 손을 건네줄 친구를 기다렸어. 그리고
그런 친구를 이제야 만났어."
"나도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정말이야. 하지만 이건 아니야."
지오가 그렇게 말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널 욕하지 않을 거야, 진주야. 내가 여기 이 학교에 선생님으로 있는 한
에전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가줘. 부탁이야.
제발. 여긴 우리한테 맡기고 제발, 돌아가줘 진주야."
지오와 은영이 번갈아가며 부탁을 하자 진주는 드디어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친그항 함께 했던 좋은 기억을
안고 이 곳을 떠나고 싶었어. 그래야만 학교를 떠날 수 있을 거 같았어. 그게
전부야. 그래, 이렇게 계속 학교를 다닐 순 없겠지. 난 사람이 아니니까."
"우린 좋은 기억이 더 많잖아. 너랑 함께 했던 기억을 잊지 않을 거야."
"미안해 진주야, 우린 절대 널 잊지 않을게."
은영과 지오가 번갈아가며 말했다.
"날 잊지 말아줘."
진주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눈물을 쏟으며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은영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 틈엔가 진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은영과 지오가 두리번거렸지만 교실
어디에도, 복도에도 진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창고에 있던 진주의 조각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서히
갈라지면서, 그 틈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한참 후 진주는 온데간데 없고, 진주의 책상
위로 피가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다른 책상 위로도 피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에서도 천정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칠판에도, 유리창애도 그리고 게시판에도 교실 모든 곳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흘러내린 피가 바닥까지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피의 흐름이 멈추더니 밤의 기운에 짓눌려있던 아침 기운이
서서히 밀려오면서, 피로 물든 교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새벽이 밝아오는 복도를 한 아이가 혼자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교실
앞에 다다른 그 아이는 복도에 떨어진 3 학년 3반의 팻말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교실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간밤에 피로 물들었던 교실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흐트러진 책상과 걸상이 일부 보였고, 한쪽 구석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은영과 그 은영의 무릎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지오가 보였다.
문 여는 소리에 은영이 먼저 힘겹게 눈을 떴다. 문 앞에는 앳된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은영은 소녀에게 구원을 요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은영을 보기만 했다.
은영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소녀는 냉정하게 문을 닫아버리고는 도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문을 닫고 나간 소녀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다 멈춰선
소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서는 순간, 그 소녀는 정숙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싸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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