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22

더좋은래일 | 2023.10.24 11:15:50 댓글: 1 조회: 214 추천: 4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1436


22

여느때 같으면 오후 서너시나 되여야 돌아올 선장이가 한시도 채 못되여 싸갖고 갔던 도시락도 먹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오니 숙자아주머니가 의아스레

<<무슨 일이야?>> 하고 다우치듯이 물었다.

<<오후에 수업이 없어서요.>>

<<왜?>>

<<교장선생을 들그서내느라구 학교가 란장판이 돼버린걸요.>>

<<아니 그게 웬 소리냐... 교장선생을 들그서내다니?>>

<<동대문 쓰레기처리장에 실어다버렸어요.>>

<<무엇을?>>

<<사람을요.>>

<<사람을? 어떤 사람을?>>

<<아, 교장선생밖에 더 있어요.>>

<<저런! 누가 그따위짓을 했다니?>>

<<누구는 누구겠어요, 학생들이지... 상급생들.>>

<<저런 녀석들 좀 봐!>>

숙자아주머니가 괴탄을 하는데 어멈이 뒤에 와 섰다가

<<그래서 벤또두 그대루 갖구 오셨구먼요. 이리 주세요, 지가 벤또점심을 따루 차려드릴게.>> 하고 선장이가 꺼내주는 도시락을 받아들고 어멈은 부지런히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래 너두 그런 일에 한데 섭쓸렸냐?>>

<<그럼 어떡해요... 나 혼자만 외톨루 비여질수는 없잖아요.>>

<<저런 녀석 좀 보아. 설혹 그렇더라두... 앞장은 서지 말아야지.>>

<<나 같은거야 이제 겨우 1학년생인데... 그럴나위나 있에요?>>

숙자아주머니가 더 할 말이 없이 시무룩해 앉았는것을 보고 선장이는 슬그머니 일어나 저의 방으로 건너왔다. 우선 책가방에서 책부터 꺼내여 책꽂이에 꽂은 다음 교모를 벗어걸고 또 <<1>>자 금장이 달린 상의를 벗어서 벽에 거는중에 어멈이 점심상을 차려들고 들어왔다. 어멈이 상머리에 앉아 상글상글 웃으며 선장이를 보고

<<교장선생을 쓰레기처리장에 내다버렸다구요?>> 하고 물어서 선장이는 한번 흘낏 큰 방편을 바라본 뒤 흔동하듯이

<<쉬, 아주머니!>> 하고 숟가락 든 손을 내흔들었다. 어멈이 알아차리고 목소리를 줄이여 귀속말하듯이

<<그건 왜요?>> 하고 물어서 선장이도

<<교장이란게 아주 덜돼먹었지 뭐야. 왜놈들앞에서 쪽을 못쓰는 비겁쟁이란 말이야.>>

이렇게 소곤소곤 말하고 히쭉 웃었다.

<<그럼 잘코사니구먼요.>>

<<누가 아니래요.>>

선장이가 상을 내보내고 물러나앉아 야시에서 사온 일본잡지를 펼쳐들고 들여다보는중에 숙자아주머니가 열어놓은 방문으로 내다보며

<<선장이 밥 다 먹었거든 나와라. 나하고 좀 나갔다 오자.>> 하고 말을 해 선장이는 얼른 잡지를 놓고 일어나 벗어걸었던 교복상의와 교모를 떼여내려 부지런히 입고 쓰고 하였다.

<<오늘은 좀 한가한데 우리 한강에 나가 시원하게 바람이나 좀 쐬자. 집구석에만 처박혀있으려니까 사람이 갑갑해 못 견디겠다.>>

전차정류소를 향하고 걸어가며 숙자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을 하여 비로소 선장이는 이날의 행선지를 알고 좋아서

<<그럼 뽀트놀이두 해요 우리... 녜.>> 하고 조르니 숙자아주머니는 히죽이 웃으며

<<가서 보자.>>하고 반허락하였다. 선장이가 그동안에 새 생활에 익숙해져 숙자아주머니와도 스스럼없는 다정한 사이가 되였었다.

삼각지를 지나고 룡산역전을 지나서 한강교종점에 와 전차를 내렸다. 한강교를 걸어서 건느는데 선장이가 보니 적토색뼁끼칠을 한 살틀기둥마다 일본글로

<<잠간만 참으라.>>

이렇게 쓴 패찰 하나씩 붙어있었다. 선장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뜻을 알 재간이 없어서 숙자아주머니에게

<<저 잠간만 참으란게 무슨뜻입니까?>> 하고 물어보니 숙자아주머니는 빙글거리며

<<자살하는 사람이 물에 뛰여들지 못하게 하는 부적이다.>>하고 웃음의 소리를 하였다.

<<저걸 붙이면 뛰여들 사람이 안 뛰여드나요?>>

<<그렇단다.>>

선장이가 장난으로

<<그럼 내가 한번 시험해보까.>> 하고 철란간을 붙잡고 아래를 굽어보니 숙자아주머니는 대번에

<<너 미쳤니!>>하고 선장이의 꽁무니를 잡아당겼다. 선장이가 뒤돌아보고 상글상글 웃으며

<<뛰여들지 못한다면서요?>> 하고 빈정거리자 숙자아주머니는

<<그런게 아니야.>>하고 비로소 잡아당기던 꽁무니를 놓아주었다.

<<뭐가 그런거 아닙니까?>>

<<저 패찰들은 경찰에서 써붙인건데... 심리학적으루 볼 때... 자살을 하려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저걸 보면 죽으려던걸 뉘우치게 된대. 실지 그렇게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여럿이라니 신통하잖니.>>

<<자살은 왜 합니까?>>

<<그야 먹구 살수 없어서 죽는 사람두 있을게구 세상이 귀찮아서 죽는 사람두 있을게구... 원인이야 많겠지.>>

<<세상은 복잡하구먼요.>>

<<세상이야 복잡하든말든 너는 공부나 잘해. 그런것 다 아랑곳할것 없어.>>

선장이는 입을 다물고 숙자아주머니의 뒤만 따라갔다. 강바람이 시원하였다.

작은 뽀트의 세는 한시간에 30전이였다. 둘씩 셋씩 혹은 넷씩... 남자끼리 탄 뽀트, 녀자끼리 탄 뽀트, 남녀가 어울려 탄 뽀트... 맑은 강물우에는 널린것이 뽀트였다. 선장이는 오래간만에 배를 타보게 되여 마음이 한껏 좋았으나 막상 노질을 하려니까 노가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 숙자아주머니가 의외로운듯이

<<고양이가 밤눈을 못 보잖니? 네가 노질을 못하다니!>> 하고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런 가래노는 처음인걸요. 우리가 저은건 모두 서서 젓는 그냥 노였에요.>>

선장이가 얼굴이 지지벌개가지고 일변 발명을 하며 일변 노하고 씨름을 하는 동안에 뽀트는 흐름을 따라 제멧대로 떠내려가며 이물이 아래로 갔다 고물이 아래로 갔다 하였다. 선장이가 다른 뽀트의 노젓는 모양을 곁눈질해 배워가며 한동안 애를 쓰다가 저의 령감적으로 가래노 젓는 기교를 터득하였다. 허연 배때기를 물우에 드러내고 떠내려가는 죽은 고기 같던 뽀트가 갑자기 살아서 제법 물살을 헤가르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소문난 배사공의 아들이 다르긴 달랐다.

<<아주머니, 이젠 됐지요?>>

선장이가 신이 나서 노를 저으며 기가 좀 우뚝해져가지고 이렇게 물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오냐 됐다 됐어. 조정부에 들어갔으면 우승은 맡아놓구 하겠다.>> 하고 웃었다.

<<우리 학교엔 조정부가 없는걸요, 시시하게.>>

박숙자는 말이 없이 강색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혼당시에 연갑수와 둘이서 배놀이하던 때의 정경이 머리속에 떠오른것이다. 그때는 이 세상이 황금빛으로 아롱진것 같았었다. 부러운것이 없었다. 신진변호사 연갑수는 그녀의 숭배의 대상이였다. 자랑거리였다. 살아서 움직이는 우상이였다. 그러던것이 지금은? 박숙자는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못이겨 풀기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철도교를 지나가는 려객렬차가 갑자기 고동을 울리는 바람에 박숙자가 놀라서 현실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고

<<힘들잖니? 천천히 저어.>>

인자스레 선장이를 념려해주었다.

<<념려 마세요, 요까짓 무어 힘들게 있어요. 씨동이형님하구 나하군 그전에...>>하고 말을 하다말고 선장이가

<<양씨동이 아시지요, 아주머니?>> 하고 물으니 숙자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양씨동이? 잘 모르겠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선장이가 흥이 빠져서

<<모르면 고만두세요.>>하고 말뒤를 거두니 숙자아주머니는

<<왜 그 무슨 동인가 하는 사람이 어떻게 됐니?>> 하고 다우쳐물었다

<<아니 아무것두 아니예요.>>

<<싱거운 녀석.>>

잠시 버성긴 끝에 선장이가 벌써부터 한번 물어보려고 벼르던 말을 물어보았다.

<<아주머니, 공산당이란게 대체 뭐 하는겁니까?>>

여적 갓난애취급을 해온 선장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여나오는데 놀라 숙자아주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 그런 말 뉘게서 들었니?>>

<<뉘게서 듣기는요. 학교에서 상급생들은 휴식시간에 저희들끼리 지껄이는 소릴 들었지요. 듣구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물어보는거 아니예요.>>

<<넌 아예 그런데는 참섭을 할 생각두 말아. 아저씨가 아시면 큰일난다.>>

<<왜요?>>

<<왜요는 무슨 왜요! 공산당이란 불한당이야. 경찰에서 알기만하면 낙자없이 때여가.>>

선장이가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그래요?>> 하고 고개를 비트니 숙자아주머니는 흔동하듯이

<<그런 말은 다시 입밖에 내지두 말아. 나까지 야단맞는다 괜히.>>

말하고 다시 뒤를 좀 풀어서

<<그저 어른들 하라는대루만 해. 알았지?>> 하고 달래였다. 선장이가

<<그렇지만...>>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할즈음에 하류쪽에서 불시에

<<사람이 빠졌다!>>

<<저런 저런...>>

<<구명뽀트... 구명뽀트를 불러라!>>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장이는 들었다보았다하고 배머리를 급히 돌려 사고난 현장으로 부리나케 저어갔다. 그러나 중도에서 엔진소리를 들으며 쏜살로 좇아온 구명뽀트에게 쉽사리 따라잡히고 추월을 당하였다. 구명뽀트가 전속으로 헤가르며 지나가는통에 일어난 물결이 선장이의 젓는 뽀트를 나무잎처럼 뒤흔들었다. 선장이가 현장에 당도하였을 때 구명뽀트에는 방금 물속에서 건져낸듯싶은 호졸곤한 젊은 녀자 하나가 죽을상을 하고 둥그러져있었다. 그 몰골이 흡사 물에서 건져낸 닭과 같아서 볼품이 없었다. 우- 모여든 여러척의 뽀트들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남녀 한쌍이 같이 뛰여들었는데 남자는 물속깊이 가라앉은 모양으로 아직 찾지를 못했다는것이다.

<<물이 뽀트우에서 때개비루 허리를 마주 동이구 함께 뛰여드는걸 내 눈으로 봤는데.>>

<<그럼 자살 아니야?>>

<<둘이 같이 죽으려구 뛰여들었었군, 멀쩡한 미친것들 같으니.>>

<<그런데 기집은 어떻게 가라앉지 않구 떠서 고함을 질렀을가?>>

<<그야 뻔하지. 갑자기 맘이 변해 죽기가 싫으니까... 동여맨 띠를 풀어버리구... 저 혼자 허위적거렸겠지.>>

<<사내는 죽으라구 내버려두구?>>

<<물이 막 코구멍으루 쏟아져들어오는 판인데 어느 하가에 그런것까지 다 생각해.>>

<<내외간인가?>>

<<저 기집 옷차림을 좀 보구 말해, 그게 어디 려염집녀편넨가.>>

<<딴은.>>

<<기생나부랭이가 틀림없군.>>

<<그럼 놈팽이는... 거덜이 난 오입쟁이겠군그래.>>

<<망할 녀석, 보나마나 애비, 할애비 모아놓은 천량을 다 불어먹구 면목이 없으니까 저승길을 택한게지.>>

<<저 기집의 상통을 좀 보우, 눈에 무에 씌지 않았으면 저런거한테 반해서 죽자살자했을가.>>

아닌게아니라 선장이가 건너다본즉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 녀자는 화려한 옷차림에 비해 인물은 별로 보잘것이 없었다. 뽀트놀이를하다가 이외의 구경거리가 생기는 바람에 말 죽은데 까마귀 모이듯한 사람들이 씩둑꺽둑 지걸이는 동안, 물속에 자맥질해 들어갔던 수영복차림의 구명인원이 불쑥 물우에 솟아오르더니 쏜살로 헤여와 구명뽀트의 배전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가쁜숨을 돌려가며 배우에 동료에게 소리를 쳤다.

<<그물, 그물, 그물 준비!>>

그물로 강바닥을 후리질해보려는 심산임을 선장이는 선뜻 짐작하였다.

이튿날 각 신문의 3면들은 경쟁적으로 이 사건을 요란하게 다루었다. 그 표제들을 볼라 치면-

정사미수

녀자는 살고 남자는 죽고

장안갑부의 불초자

보람없는 가산을 탕진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

돈에 울고 사람에 속고

어리석은 남자 뻔뻔스러운 녀자

박숙자는 다 읽은 신문들을 도로 접어 한옆에 밀어놓고 황홀한 명상에 잠기였다.

(나를 사랑하는 나머지 정사를 하자는 순정의 미남자가 있다면 그 얼마나 보람찬 인생이랴.)

그러다가 다시 박숙자는

(내가 만일 연갑수하고 정사를 하자면 그 사람은 물에 뛰여들기가 바쁘게 띠를 풀어버리고 저 혼자 배에 기여오를거야.)

생각하니 한심스러워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학교에 후임 교장이 아직 취임하지 않아 어딘가 모르게 좀 어수선한 공기가 설레는중에 어디서 누가 발기를 했는지 <<재경(在京)원산학생동창회>> 라는 명칭의 모임을 가지게 되였다. 선장이도 숙자아주머니의 허락을 맡고 회비 50전을 내고 일요일 오전 9시까지 창경원앞으로 모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선장이가 전차에서 내려본즉 거기에는 벌써 10여명의 남학생과 서너명의 녀학생이 따로따로 모여서서 서성거리고있었다. 전차가 와닿을적마다 서너 사람씩 너덧 사람씩 륙속 내려놓는데 모두 모인 뒤에 보니 녀학생이 여라문에 남학생이 스무나문... 한개 소대가 착실하였다. 남녀전문학교 학생은 모두해서 대여섯밖에 안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가 크고작은 중학생들이였다. 미리 약속이 있었던 모양으로 악기를 휴대한 학생이 칠팔명 잘되는데 그중에서도 자주치마에 흰적삼을 입고 바이올린케스를 든 한선희의 초초한 자태가 특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선장이가 공연히 게면쩍은 생각이 들어 우물쭈물 앞으로 나서서 교모를 쓴채 고개를 한번 끄덕하였더니 선희는 대번에 알아보고

<<어머, 이게 누구야? 선장이 아니라구!>> 하고 반가와하며 교복차림의 선장이를 아래우로 한번 훑어보더니

<<아주 몰라보게 됐구나.>> 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선장이가 여러 사람의 눈에 많이 제몸에 와 실리는것 같아서 겨우 한마디

<<은희는요?>> 하고 물으니 선희는

<<응 원중에 다녀. 자전거통학을 한다구 편지 왔어.>> 하고 알려주었다. 이때 사각모를 쓴 허위대 큰 전문학교 학생 하나가 가까이 와가지고 선장이의 얼굴을 면구스럽게 들여다보더니

<<네가 언젠가 떼를 써서 자동차를 탔다는 그아이가 아니냐?>> 하고 빙글거렸다. 선장이는 들어갈 쥐구멍이 없어서 성화가 났다. 그 전문학교 학생은 선장이의 그런 눈치를 모르는것처럼

<<우리 아버지한테 다 들었다. 그 자동차부를 경영하는게 바루 우리 아버지다.>>하고 친절스레 주까지 달았다.

사람이 다 오기를 기다려서 단체권으로 입장을 해가지고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박물관을 대충 한바퀴 돌아본 뒤 늪에서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 널직널직이 자리들을 잡고 둘러앉았다. 쌀 한말을 사는데 1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거슬러주던 세월이라 여기저기 신문지들을 펴고 무더기무더기 노아놓은 실과, 사이다, 과자붙이가 푸짐하였다.

발기인 겸 주최자인 원산 반도병원집 아들-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헛기침을 더우번 하고 일어서서 동향친구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런 모임을 마련한것이니 서러 낯들을 익히고 사귀고 또 유쾌하게 한때를 같이 즐기자고 개회사 비슷이 인사말을한 다음에 또 두어 사람이 일어나 무어라고 몇마디씩 해도 좋고 안해도 좋고 말들을 한 뒤에 곧 여흥으로 넘어갔다.

요술을 부리는 사람에, 재주를 넘는 사람에, 날짐승, 길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사람에, 변사의 입내를 내는 사람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중에 유흥기분은 차차로 짙어갔다. 휘문고보 3학년생 하나와 중앙고보 3학년생 하나가 만돌린합주를 하는데 그 곡목을 <<오우버 더 웨이브>>즉 <<파도를 넘어서>> 라고 하였다. 그 멋거리진 선률에 선장이는 넋을 놓았다. 오보에독주를 한것은 양정고보 학생이고 하모니카로 <<토이기행진곡>>을 놀랄만큼 잘 분것은 선장이네 학교의 락제꾸러기 상급생이였다(원산서는 아는 사람들은 다 그를 전당포집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선장이를 황홀한 나머지에 콱 죽어버리고싶도록 만든것은 한선희의 바이올린독주-<<찌고이네르바이젠>>이였다. 그때까지 선장이는 그런 곡이 지구상에 있는줄도 몰랐었고 또 바이올린이라는 하찮은 깽깽이가 그렇게까지 사람을 매혹하게 하는줄도 몰랐었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아서 잘 아는 녀학생-동급생의 누이가 그런 놀라운 음악의 녀신인줄은 더욱 몰랐었다. 선장이는 열네살을 먹도록 전연알지 못하고 살아온 또 하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것 같았다. 그윽하면서도 현란한 고전음악의 세계에 눈을 뜬것이다.

새드위치로 점심들을 먹고난 뒤에 끼리끼리 흩어져 놀 때 선장이는 선희와 함께 남국의 정취가 풍기는듯한 소철그늘에 와 퍼더앉아 두석달 못 본 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혼잡한 서울거리가 딴세상같이 물 맑고 공기 맑고 또 해빛까지 맑은 청경원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아까 그 연주한게 무슨 곡이랬지요?>>

<<찌고이네르바이젠.>>

<<`찌고이네르바이젠`... 그게 무슨 뜻이요?>>

<<집시의 노래란 뜻이다. 독일말이야.>>

<<집시? 포장마차를 타구 떠돌아다니는?>>

<<응.>>

<<그럼 그 곡을 지은 사람두 집시요?>>

<<아니, 사라사테라는 스페인 출생의 프랑스 작곡가야.>>

<<사라사테.>>

영원히 그 이름을 머리속에 새겨두려고 선장이가 조용히 입속으로 한번 받아외고나서

<<그래 그 사람이 지금 살아있소?>> 하고 물으니 선희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아니, 금세기초에... 한 20년저에 죽었어.>> 하고 말해주었다. 선장이가 새삼스레 감개가 그지없는듯

<<그러데 그 곡이 어쩌면 그렇게두 내 이 가슴깊이 스며드우?>> 하고 선희를 쳐다보니 선희는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그렇게까지?...>> 하고는 뒤말을 잇지 못하였다. <<찌고이네르바이젠>>의 격정적인 선률에 놀라 동면에서 깨여난것 같은 선장이와 첫 우뢰 같은 선률로 그 눈을 띄워준 선희가 이때 처음 서로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선장이는 불현듯 언젠가 아웃에 사는 배군 하나가 잔교에 매인 고기배우에 퍼더앉아 그물을 손질하며 혼자서 <<한 오백년>>을 부르는것을 듣고

(아, 나는 조선사람이다. 갈데없는 조선사람이다!) 하고 새삼스레 가슴이 벅차오르던 일이 회상되였다. 한편 선희는 여직 철부지, 코흘리개, 배군의 아들로만 여겨왔던 선장이가 자신의 연주앞에 고상한 정서를 남김없이 드러낸것을 보고 적이 놀라고 또 감동되였다. 그리고 선장이의 인물을 다시 살펴보다가 그 인물이 저의 사랑하는 동생 은희도 무색할만큼 잘난것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노는것을 느꼈다.

<<그래 숙자아주머니가 너를 귀여워하니?>>

한동안 지나서 선희가 상글거리며 멀머리를 돌렸다. 선장이는 대답 대신에 하얀 이발을 드러내며 한번 싱긋 웃었다.

<<그 집 내외지간은?>>

<<동대문과 남대문.>>

<<그 지경 따루따루냐?>>

선장이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번 까댁하였다.

<<숙자언니가 정말 불쌍하구나. 그래서 네게다가 정을 붙이구 살아볼가 하나보다.>>

선장이가 다른 말을 꺼내였다.

<<우리 김영하선생한테 한번 가보잖을라우.>>

<<거긴... 집두 모르면서...>>

<<집은 내가 아우. 나 벌써 두번이나 갔다왔는데... 관훈동 69번지... 아주 찾기 쉽소.>>

<<아무려나. 그럼 이따 모임이 끝나거든 우리 한번 가보자.>>

<<OK.>>

선희가 의외로운듯이

<<네가 영어를 해?>>

말하고 다시 생각해보고 깔깔 웃었다.

<<선희씨!>>

소리를 앞세우고 사각모를 쓴 의전학생이 잔디밭우를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까이 와 주저앉는결로 선장이를 가리키며 선희에게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 네 우리 동생의 소학교동창이예요. 한동네 살았어요.>>

<<오 그렇구먼요. 그런데 선희씨.>>

<<녜?>>

<<리전(리화전문)에는 클라이슬러의 레코드들이 다 갖추어져있겠지요?>>

<<글쎄요... 어느 정도는 갖추어졌겠지요. 자세힌 몰라요.>>

<<리화전문 음악과... 얼마나 랑만적입니까... 하하하!>>

선장이가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것을 선희가 눈결에 보고 얼른 손을 내밀어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그대루 앉았어.>>

선장이가 하릴없이 도로 주저앉으며 의전학생의 눈치를 한번 흘끗 보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저 작자가 나를 곧 눈에 가시로 여기겠지. 에라 모르겠다, 죽은체하고 한옆에 그대로 좀 앉아있어보자.)

옵써버처럼 옆에 앉았는 선장이가 거치장거려 반도병원집 아들은 말을 하는데 몹시 불편을 느끼는 모양이였다. 그래서 수작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그저 시들한 소리만 하였다.

<<정희씨는 우리 중학교때... 선배였지요.>>

<<그렇습니까, 그러세요.>>

<<수재였지요.>>

<<무슨...>>

<<아니요, 다들 사상가라고 불렀는걸요.>>

선희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반도병원집 아들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할즈음 약방집 아들 곽복덕이가 저쪽 늪가에 서서

<<선장아, 어서 이거 좀 와바라.>>하고 소리치며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같잖게 영어로

<<컴 히어, 컴 히어.>> 하고 재촉을 하였다. 선장이의 엉뎅이가 또다시 들먹이는것을 선희가 얼른 다시 붙들어 앉혔다. 그리고는

<<이리 와요!>> 하고 손짓하여 곽복덕까지 마저 불러다가 제옆에 앉혔다. 선희가 청의동자를 둘씩이나 거느리고 앉는 바람에 반도병원집 아들은 맥살이 나 몇마디 더 지껄인 뒤에 어물어물 퇴진을 하고말았다. 사각모짜리가 꺼져버려 속이 후련한김에 선장이가

<<리화학교 교장이 미국녀자지요? 루씨학교 교장처럼.>>하고 물으니 선희는

<<응.>> 하고 고개를 까댁하였다. 선장이가 다시

<<이름이 뭐라더라... 아편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이름이던데... >>하고 눈을 깜작깜작하니 선희는 우스워서 치마우로 무릎을 탁 치고

<<아편은 무슨 아편이야!>>

<<모르핀은 아니구?>> 하고 선장이의 이마를 손가락끝으로 한번 콕 찔렀다.

<<그럼 뭐요?>>

<<아펜젤러... 똑똑히 알아둬... 아펜젤러.>>

곽복덕이가 옆에서 듣다가

<<아펜젤러.>>하고 한번 받아뇌더니

<<그 이름 참 페롭다.>>하고 웃었다. 선장이가 웃음의 소리로

<<그 교장을 들그서낼 생각들 안하우?>> 하고 물으니 선희는

<<교장두 녀자구 학생들두 다 녀자구... 우린 너희들처럼 그런 우악사러운짓 할줄 모른다.>>하고 웃었다. 선장이가 곽복덕이를 돌아보고

<<오 참, 이따 헤여질 때 우리 김영하선생을 보러 가는데... 너두 같이 가잖겠니?>> 하고 물으니 곽복덕이는 두말없이 좋다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이 안국동정점에서 전차를 내려 관훈동 하숙에를 찾아가니 김영하선생은 마침 수원으로 출장을 가서 부재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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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01.♡.155) - 2023/10/24 21:52:19

어마나.. 옛날에도 저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잇엇다니 침 놀랍네요..ㅠㅠ
매일마다 올려주신 덕분에 항상 잘 보고잇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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