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30

더좋은래일 | 2023.10.28 10:28:46 댓글: 2 조회: 368 추천: 3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2473


30

정실이가 첫아들의 첫돌이 지난 뒤에 친정나들이를 왔다. 친정이라야 한동네 엎어지면 코닿을데지만 일단 대가집에 맏며느리로 들어가보니 그렇게 쉽사리 달아오고 달아가고 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래서 이번 나들이도 차일피일하면서 두어달 좋이 별러가지고 온것이였다. 친정어머니가 외손자를 업고 동네집에 자랑 겸 구경을 시키러 나가는 길에 쌍년이에게 딸이 왔다고 기별해주었다. 쌍년이는 들었다보았다하고 행주치마를 벗어 빨래줄에 훌뿌려 걸고 하던 빨래는 팽개쳐두고 부리나케 쫓아왔다. 방안에 들어서는 첫밗에

<<이 애, 한진사댁 작은아씨 한번 뵙기가 헐하잖구나.>> 하고 놀림조로 인사를 하니 정실이도

<<누가 아니라니. 조롱에 갇힌 새지 뭐냐. 깃두 맘대루 칠수가 없다니까.>>하고 실없는 말로 맞인사를 하였다.

<<네 아들 이제 내 막 안아보구 오는 길이다. 에미는 저렇게 대살진데 아이는 그렇게 토실토실하니 웬 일이야. 부자집 장손이라구 인삼록용을 장복시키잖니?>>

<<미친 소리 작작 하구 어서 앉기나 해라.>>

쌍년이가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너의 아버진 어디 가셨니?>> 하고 물어서 정실이는

<<날을 어찌나 잘 받았던지... 아버진 벌써 첫새벽에 바다에 나가셨단다.>>하고 웃었다.

<<상관있니, 며칠 묵다 가려무나.>

<<안되여, 저녁전엔 돌아가야 해.>>

<<또 당일치기야? 시에미가 그렇게 까다롭냐?>>

<<아니, 시어머닌 하나두 안 까다롭다. 내가 가봐야 할 일이 있어 그러는게지.>>

쌍년이가 갑자기 누가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음성을 낮추어서

<<그 댁 살림이 기울어진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그게 진적한 소문이야?>> 하고 물으니 정실이는 미간을 약간 찌프리고 한참만에

<<그런 소문이 날만한 일이 있어.>> 하고 고개를 까댁였다. 그 걱정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쌍년이가 다시

<<애기아버지가 큰살림을 잘 거느리지 못해 그런게 아니냐?>> 하고 물으니 정실이는

<<그래여, 다루는 솜씨가 서툴러... 어디 해봤어야지... 죽어나는건 최서사야.>>하고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저걸 어쩌니.>>

<<당자가 도시 그런 일에다는 맘을 쓰구싶어하지 않는데 더 큰일이야. 자세한건 나 잘 모르지만 아무튼 살림이 줄어두 가량없이 준건만은 사실이야.>>

쌍년이가 언짢은 이야기를 더하지 않으려고 말머리를 돌렸다.

<<선희는 어떻게 됐니?>>

<<아가씬 지난달에 졸업하구...>>

<<벌써 졸업이야?>>

<<그럼 3년인데.>>

<<세월이 류수 같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구나. 더 말할것 없니... 네 아들이 벌써 돌이 지났는데.>>

<<아가씬 졸업하자 이내 리화녀학교 음악선생으루 남아있게 됐대여. 리화전문하구 리화녀교는 한통속이라나.>>

<<그럼 이젠 시집을 가야잖겠니 로쳐년데... 스물몇이야?>>

<<나하구 자치동갑이지 뭐. 그러잖아두 김영하선생이 래년에 출옥하면... 례식을 올리게 될게야.>>

<<얼마라구? 2년?>>

<<2년. 아직두 1년 반이 더 남았어.>>

<<왜들 모두 이런다니?>>

<<모르니? 다 왜놈들때문이지!>>

<<한진사댁 아가씨두 팔자는 누구만큼이나 험하구나.>>

<<누가 아니래여.>>

<<그래 너의 시어머니랑 너의 남편이랑은 그렇게 하라구 내버려두니?>>

<<내버려두잖으면 어떻거니? 당자가 죽어두 다른데는 시집을 안 간다는데야. 그러구 주요하게는 오빠가 량해를 하니까. 김영하선생을 아주 좋게 여기거든... 참다운 애국자라구.>>

이때 선장이 어머니가 외손자를 업고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방에 앉았는 딸을 보고 웃으면서

<<이 애 에미야, 어서 나와 이 녀석 좀 받아라. 외할미 장등에다 오줌 쌌다, 고현놈, 아이 차거워!>> 하고 소리쳐서 정실이는

<<저런 녀석 좀 보아.>> 하고 아들을 받으러 달려나왔다. 쌍년이가 방안에 앉은채 밖을 내다보며

<<아주머닌 그래두 복이 있으시우, 등에다 오줌받을 손자가 다 있으니.>> 하고 웃어서 두 모녀도 다같이 웃었다.

<<그 오줌싸개 이리 다우, 한번 좀 더 안아보자.>>

쌍년이가 웃으며 두팔을 벌려 앞으로 내밀었다.

이날 4월29일 천장절은 일본천황 히로히또의 탄신이므로 공휴일이였다. 선장이가 소풍을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숙자아주머니가 뒤따라들어와서

<<너 이따 저녁때 나하구 선희한테 한번 좀 가보자, 효자동에다 하숙을 정했단다. 년전에 우리 한번 들려보잖았니... 그 전도부인네 집.>> 하고 의논조로 말하여 선장이는 선뜻

<<아무려나 좋도록 하시지요.>> 하고 같이 갈 의향을 말하였다.

<<느 누이의 시누이 아니냐, 남이 아니거든.>>

<<그러게 가겠다잖습니까.>>

숙자아주머니가 또 무슨 말을 하려다말고 새삼스레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얘 좀 보아, 너 어느새 키가 그렇게 컸니?>> 하고 곧 선장이를 그러당겨 가슴에 붙이면서

<<어디 키 좀 대보자.>> 하고 꼿꼿이 서서 이마를 선장이턱에 갖다대였다. 마침 어멈이 빨아 손질한 유도복을 안고 들어오다가 이것을 보고 웃으며

<<아유, 아씨 키가 도련님 턱에두 겨우 미치시네요!>> 하고 호들갑스레 말하였다. 숙자아주머니는 이마를 선장이 턱에 댄채 오른손의 손바닥을 엎어가지고 제 정수리에 얹으면서

<<정말이야?>> 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정말 아니구요. 아씨가 지셨에요, 비교두 안되는걸요.>>

어멈의 말을 듣고 숙자아주머니는 비로소 뒤로 물러서서 선장이의 얼굴을 가늠해보며

<<너 신속에다 거름을 담아가지구 다니잖냐?>> 하고 새삼스레 웃었다. 웃다가 선장이 교복깉에 달린 <<4>>자금장이 단지가 이제 한달밖에 안되였는데 벌써 광택이 가시고 재빛으로 변한것을 보고 괴이히 여기며

<<아니 네 금장이 왜 벌써 그 모양이냐?>> 하고 물었다. 선장이가

<<갓 들어온 1학년생이나 반짝반짝한걸 달구 다니지... 상급생이 유치하게 누가 그런걸 달구 다녀요.>> 하고 웃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주제넘은 녀석들.>>하고 거짓으로 눈을 흘겼다.

<<아씨 모르세요? 벌써 2학년 때부터 새 금장을 달 때는... 꼭 초불에다 그을려가지구 다신걸요.>> 하는 어멈의 말을 듣고 숙자아주머니는

<<그러냐?>> 하고 선장이와 어멈을 번갈아보다가 선장이의 뺨을 찰싹 때리며

<<낡은게 그렇게 좋거든... 광화문통 고물상에나 가 살아아.>>하고 웃었다. 이때 광화문통에는 고물상이 즐비하였었다.

썩후에 선장이가 숙자아주머니와 함께 효자동으로 한선희를 보러 왔다. 이때는 이미 안국동종점에서 총독부앞까지 전차선로 동종점까지 갈수가 있었다. 훈훈한 봄바람이 귀밑을 가볍게 간질러서 공연히 가슴이 부풀고 마음이 들뜨는 밤이였다. 선희는 두사람의 래방을 못내 반기였다.

<<이거 내가 사돈님으 먼저 가뵈야 하는건데.>>

<<별소릴 다하네.>>

정실이가 한진사 식구가 되는 바람에 이들도 따라서 먼발치사돈이 되였었다. 선장이가 보자기에 싸들고 온 슈크림상자를 잠자코 앞에 밀어내놓으니 선희는

<<아니 이건 또 웬걸 이렇게.>> 하고 받아서 곧 보자기를 끄르고 또 뚜겅을 열어보더니

<<이런 례절이 왜 있어요?>> 하고 나무라듯 말하며 숙자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선장이는 한선희가 녀선생이 된 뒤에는 처음 보는데 그 원래의 아름다움에 일종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장중한빛이 어린것을 이내 보아내였다.

선희가 주인집에 좀 보이고 온다고 말하고 슈크림상자를 들고 안방으로 올라갔다. 한 절반 억지로 덜어놓고 다시 뜰아래방으로 내려올 때 주인마누라 전도부인과 그 딸도 따라내려와 숙자아주머니와 선장이한테 인사하고 올라갔다. 주객 세 사람이 솔밭같이 앉아 슈크림을 먹으며 한동안 웃고 지껄였다.

<<글쎄 생전 남을 선생이라구 부를줄이나 알던 사람이 갑자기 남에게서 선생님소리를 ㄷㄹㅇ니까 무에 꼭 잘못된것만 같은게 얼떨떨하지 뭐예요.>> 하고 선히가 깔깔 웃어서 숙자아주머니와 선장이도 유쾌하게 따라웃었다.

<<그래두 선생님으루 보이기에 그렇게 부르겠지.>>

<<말씀 마세요. 상급반에는 나하구 나이 엇비슷한 학생두 여럿인걸요.>>

<<그렇게 큰것들이 있어?>> 하고 숙자아주머니가 놀라는것을 선장이가 옆에서

<<우리 학급의 오월봉이는 1학년 때 벌써 아들이 둘이나 있었는걸요.>> 하고 발을 다니 선희와 숙자아주머니는 허리가 끊어지게들 웃었다.

이때 안방에서 라지오의 다이얄을 맞추는 소리가 삑삑 나더니 곧 아나운서의

<<JOAK... 여기는 도꾜방송국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희가

<<주인아저씨가 저녁마다 JOAK의 8시 뉴스를 듣는 습관이 있어요.>>하고 주를 다니 숙자아주머니는

<<좀 좋아, 술이나 먹구 노름이나 노는데 비하면.>>하고 뒤받았다.

시보에 이어 뉴스가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이야기에 정신들이 팔려 어디 개가 짖느냐 하고 귀밖으로 흘려듣다가 문득 조선인이 어찌고저찌고 폭탄사건이 어찌고저찌고 하는 소리가 귀결에 피뜩들려 숙자아주머니가

<<아니 가만... 저거 뭐라나?>> 하고 손을 내젓고 귀를 기울이는 바람에 선희와 선장이도 따라서 지껄이던것을 그치고 귀들을 기울였다. 세 사람의 눈이 차차로 동그래졌다.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것이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가 자못 엄청났기때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이란데서 조선인 윤 무어라 하는 사람이 폭탄을 던져 경축회장 주석대에 앉았던 일본군장령 여럿이 살상하였는데 그중에는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가와대장도 들어있다는것이였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니?>>

<<인호오끼찌라니까... 아마 윤-봉-길이겠지요.>>

<<나이 몇살이라구?>>

<<스물다섯살이라잖아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구나.>>

<<쉬, 가만 좀...>>

선장이가 손을 내젓고 귀를 도사렸다. 한참만에 선희가

<<저런!>>하고 낮게 소리치니 방송을 똑똑히 듣지 못한 숙자아주머니는

<<왜?>> 하고 선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10여명... 사상자가 여럿이라나봐요.>>

선장이가 그 말에

<<시라가와대장은 즉사했구... 노무라해군사령관은 눈깔 하나가 빠졌구... 시게미쯔공사는 다리 한짝이 달아났구...>> 하고 발을 달고

<<잘한다, 잘해!>> 하고 무릎을 탁 쳤다.

<<언제라나, 사건이 발생한건?...>>

<<오늘오전이라나봐요.>>

숙자아주머니와 선희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선장이는 저도 모르게 혼자서 팔을 뽐내였다.

<<쟤 좀 봐, 금세 쌈이라두 하러 나갈것 같네.>>

<<피가 끓어 참을수 없는 모양이지요. 왜 안 그러겠어요, 우리두 다 속이 후련한데.>>

숙자아주머니와 선희가 서로 지껄이는 소리를 선자이는 들을 귀가 없었다. 정신이 모두 바다건너 상해의 홍구공원이란데에 날아가있었기때문이다.

선장이는 받은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이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의사가 할빈역두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쏴눕힌것은 아무리 장쾌하다더라도 필경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여나기전의 옛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오늘낮의 일이다. 자신이 동양악기점앞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의 아름다운 선률에 귀를 기울이고있었을, 바로 그무렵에 발생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애국용사-조선의 얼-의 나이도 씨동이또래밖에 더 안되였었다. 너무나 몸가까운, 너무나 생생한 사실이였다.

(그에 대면 나는 하잘것없는 반병신이로구나!) 하는 자비심과

(그는 지금쯤 적에게 모진 악형을 당하고있을텐데... 나는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있어?) 하는 자책감에 등골에 땀이 다 내돋았다. 안절부절을 못하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앉으며 곧 껐던 불을 다시 켰다. 부지런히 책상서랍을 뒤져 언젠가 잡지에서 스크래프해두었던 황포군관학교 조선학생들의 사진을 꺼내들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였다.

(얼마나 씩씩한 모습들인가!)

(얼마나 장한 조선의 아들들인가!)

(씨동이는 어디를 갔을가!)

(김봉구는 어떻게 됐을가!)

상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갈매기떼가 되여 선장이의 머리우를 넘놀고 날아옜다. 눈뜨고 꿈꾸듯이 얼마를 그렇게 앉았다가 다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김영하선생이 잡혀가기 며칠전에 들려주던 말이 생각났다.

<<상해 프랑스조계에는 우리 나라 림시정부가 있단다. 그 청사에는 당당히 태극기까지 띄웠단다.>>

그러자 선장이의 감은 눈앞에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 펄럭이는 기발은 흡사 선장이를 오라고 손길을 치는것 같았다. 선장이의 넋은 그 부름을 따라 머나먼 바다건너로 훨훨 날아갔다. 상해로 날아갔다. 황포군관학교로 날아갔다. 씨동이가 가있을것만 같은 그 어느 미지의 세계로 날아갔다. 가면 김봉구를 꼭 만나게 될것만 같은 그 어느 생소한 세계로 날아갔다. 이럴 때 김영하선생이 있었으면 오죽 좋았으랴. 이 넓은 서울장안에 같이 일을 의논할 사람 하나가 없다니! 선장이의 가슴은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들이 다 목숨을 걸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하고있어?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량심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폭탄두 권총두 다 손에 넣을수가 없으니... 중국으루 건너가자. 림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루 가자. 가면 무슨수가 나겠지. 가자!)

선장이가 마침내 마음을 질정하였다. 그러자 감은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고 또 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잇달아 쌍년이의 얼굴, 어멈의 얼굴, 숙자아주머니의 얼굴, 한선희의 얼굴, 김영하선생의 얼굴, 그리고 매부 한정희의 얼굴... 숱한 얼굴들이 서로 겹치며 떠올랐다. 선장이는 눈 딱감고 끈덕진 미련을 뿌리쳤다. 원산도 서울도 다 떼팽개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뜩

(내가 정신이 나가잖았나? 로자두 마련하잖구 어디를 간다구 우둘렁거려?)

이런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돈!>>

신음소리 같은 소리가 입에서 새여나왔다. 선장이는 막 건느려던 외나무다리가 눈앞에서 끊어지는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제길할.>>

아침에 일어나는 길로 선장이는 지도를 펼쳐놓고 상해로 갈 로선까지 다 선정해놓았으나 로자가 없으면 그것도 다 실현이 불가능한 공중루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날 선장이가 하교를 하는 길에 어떻게 하면 돈을 구할수가 있을가 골똘히 생각하며 걷는중에 어디서 누군가가

<<서방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의례 저하고는 상관이 없는 어떤 사람을 누가 부르겠거니만 여기고 그냥 걷는데 난데없이 여위고 쌔까만 까마귀발 같은 손 하나가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놀라서 발을 멈추며 눈을 들어보니 머리가 쑥바구니 같은 열두어살 먹어보이는 거지아이다.

<<서방님 적선합쇼. 한푼만 줍쇼.>>

선장이가 갑자기 서방님으로 승격을 하는 바람에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여 동전 한잎을 꺼내주며

<<인석아, 멀쩡한 총각더러 서방님이 무어냐!>>하고 웃으며 타박하니 거지아이는 얼른 말씨를 고치여

<<고맙습니다. 도련님, 재수가 볼일듯합쇼.>>하고 허리를 굽실하였다.

(고 자식 고거 참. 남은 돈을 구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는데... 한푼 보태주진 못하구 되려 뜩어가?)

선장이가 쓴웃음을 웃었다. 연갑수법률사무소앞까지 왔을 때

<<이제 돌아와?>>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서있는것은 검소한 옷차림을 한 한선희다.

<<웬 일이요?>>

<<너 보러 왔다.>>

<<그럼 어서 들어갑시다.>>

<<아니, 들어갈게 아니라 내게루 좀 가자.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럼 내 얼른 이 책가방 좀 들여다두구 나오리다.>>

1분후에 한선희와 선장이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차정류소를 향하여 걷고있었다. 몇해전에 둘이 함께 서울을 올라올 때는 선장이 키가 선희의 어깨와 가지런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뒤쪽으로 선장이가 도리여 선희를 내려다보게 되였다. 키가 어부렁 큰 선장이와 아돼보이는 선희가 같이 가는것을 보고 련애를 하는걸로 지레짐작을 한 싱검쟁이들이 눈짓코짓해가며 획획 휘파람을 불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의 낡은 관념에 푹 젖어버린 고리삭은 인간들 눈에는 젊은 남녀가 백주에 공공연히 한데 붙어다니는것은 상풍패속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던것이다. 그 우습강스러운 꼴들을 보자 선희는 지꿎은 웃음을 웃으며

<<어서 나한테 바싹 달라붙어라.>> 하고 짐짓 선장이의 팔죽지를 잡아당기는것이였다. 그건 낡아빠진 도학선생들에 대한 시위이고 도전이고 또 멸시였다

<<오빠가 이번에 전장을 꽤 많이 처분을 한 모양이다. 대대루 물려내려온거지만 살림형세가 자꾸 기울어지니 어떻거니. 그래서 무슨 변고가 있기전에 미리미리 손을 써서 네게다두 학비를 좀 보태줄 생각이 났나보다. 이게 그 200원이다. 네거하구 내거하구 한몫 부쳐왔더라. 에제 받았다. 그리구 현금을 집에 두거나 몸에 지니는건 좋지 않으니까 이따 돌아가는 길에 우편국에 갖다 아주 저금을 하도록 해라, 아무때구 찾아 쓸수가 있으니까.>>

방안에 들어와 앉자 이렇게 말하며 선희는 곧 가방속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여 선장이앞에 밀어놓는것이였다. 선장이는 꿈이 아닌가싶었다.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또 어디있으며 이런 안성맞춤이 또 어디 있으랴. 이야말로 가물에 단비였다.

(내가 아마 운수가 대통하는가보구나.)

선장이가 겉으로는 아닌보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쾌재를 불렀다.

대문밖까지 바래면서 선희가

<<자주 놀러 와.>>하고 다정하게 인사할 때 선장이는 얼없이

<<아 틈만 있으면 아무때구 오리다.>>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이것이 생리별이 될지도 모를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아수하기 그지없었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선희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사날후에 선장이가 학교 유도부에서 합숙훈련을 한다고 핑게대고 드러내놓고 트렁크에 옷가지들을 챙겨넣는데 속내 모르는 어멈은 열심히 거들어주며

<<도련님이 우승을 하시면 아씨가 자전거를 사주신대요.>> 하고 제 일 같이 좋아하였다. 물계 모르는 어멈은 흰 띠짜리 선장이가 귀신 찜쪄먹을 색띠짜리들을 어렵지 않게 누르고 우승을 하는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선량한 어멈! 불쌍한 어멈! 사랑스러운 어멈!)

선장이는 어멈 모르게 떠나갈것을 생각하니 그 락심천만한 얼굴을 눈앞에 보는것 같아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아픈것이 마치는것을 느꼈다. 저녁상에 마주앉아 수저를 들었을 때 선장이가 문득

<<아저씨는 개성을 가셨다구요?>> 하고 물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심상하게

<<응 래일저녁때나 오실게다.>>하고 대답하였다

<<작년에 수학려행을 갔을 때 정몽주가 철퇴를 맞았다는 선죽교 돌다리에다 물을 부어보았더니 아닌게 아니라 불그스레해집디다. 거기 사람들 말이 충신의 피라나요.>>

<<충신의 피라서 아마 보통피와는 다른게지.>>

<<아주머니두! 참 아무리 충신의 피래두 돌에 묻은게 500년 동안을 어떻게 남아있어요? 노박이루 비에 씻기면서! 다 관광잭을 끌기 위한 수단이지. 그렇지만 충신을 두구두구 기린다는건 좋은 일이겠지요.>>

<<듣구보니 네 말두 근리는 하다마는.>>

<<인간이 한세상 났다가 나라일에 목숨을 바친다면 한세상 났던 보람이 있잖습니까. 리순신장군처럼, 안중근처럼 그리구 요전날 그 윤봉길처럼.>>

<<얘가 미쳤나, 갑자기 목숨을 바치느니... 보람이 있느니없느니... 어서 밥이나 먹어라. 헌소리 작작 하구!>>

선장이가 아무렇게나 제게서 가까운 묵나물에다 저갈을 대니 숙자아주머니는

<<이게 맛있다 이걸 먹어라.>>하고 닭알부침 담긴 접시를 앞에다 옮겨놓아주었다. 선장이는 맛도 모르는 밥을 머리를 수굿하고 그저 본능적으로 먹었다.

(이게 숙자아주머니와의 <<최후의 만찬>>이로구나.)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유감스럽기도 하고 얼얼하기도 하고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숙자아주머니. 애국애족이라는 관념을 통히 모르고 사는 숙자아주머니.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숙자아주머니. 본능적으로 나를 아끼는 숙자아주머니. 내 이 돌연적인 행동을 배은망덕으로밖에 더 어찌 해석하랴. 불쌍한 숙자아주머니. 연갑수의 희생양. 가엾는 숙자아주머니...)

머리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밥을 다 먹고나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니 6시가 조금 지났었다. 4학년에 올라왔다고 숙자아주머니가 진고개에 데리고 가 사준 <<세이꼬>>17석이였다.

행색이 총총한 선장이가 합숙으로 간다고 트렁크를 들고 나설때 마음의 어지러움을 가리려고 현관문밖에까지 따라나와 바래는 숙자아주머니와 어멈을 돌아보고

<<나 없다고 울지들이나 마세요.>> 하고 웃음의 소리를 던지니 숙자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념려 말아, 너 없는 동안은 내처 웃구만 살테다.>> 하고 대꾸하였다. 그리고 어멈은

<<도련님이나 가서 울지 마세요 괜히.>>

말하고 입을 막고 웃었다.

선장이가 밤 10시 40분차로 서울역을 떠났다, 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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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39.♡.172) - 2023/10/28 14:20:18

역시나 대단한 사람~~그 어린 나이에 저런 결정을 다 하다니.주말인데도 올려주셔서 잘 보고 갑니당~~

산동신사 (♡.224.♡.93) - 2023/10/29 20:28:38

잘보고 갑니다. 주말에도 볼수 있게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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