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2 격정시대 하-43

더좋은래일 | 2023.11.03 16:48:39 댓글: 2 조회: 266 추천: 3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4426


43

남경에서 돌아온 리춘근이 애인리 42호에 와 김혜숙에게<<지신밟기행동>>의 전말을 이야기하는데 자연 전보경과 송일엽도 동석을 하게 되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김혜숙이

<<아무튼 무사들 해 다행입니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리춘근이

<<천만다행으루 방대좌가 거느린 부대에 걸렸기에망정이지... 그러찮았더면 일이 상당히 시끄럽게 될번했습니다.>> 하고 말하니 전보경이 옆에 앉았다가 상쾌히 여기는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미스터 서가 워낙 인복이 있다니까요.>> 하고 좋아하였다.

<<그런데 지도부의 의향을 알아보니까... 둘을 다 이번 새 학기에 여느 청년들이랑 함께 중앙군교에 입교를 시킬 작정인갑디다. 그렇게 되면 인제 상해루는 다시 못 오게 될텐데...>>

리춘근이 말을 하는 중간에 송일엽이 옆에서

<<본인이 그걸 원한답니까?>> 하고 물었다. 리춘근이 괴이쩍어 송일엽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원하고 안하구가 왜 있겠습니까? 조직의 결정인데.>> 하고 말하니 송일엽은 다시 말이 없이 입술만 자그시 깨물었다.

<<섭섭은 하지마는 어떻거겠습니까 할수 없지요. 전면을 보구 또 장래를 봐야지요.>>

리츤근의 말끝에 김혜숙이

<<그럼 옷이랑 이부지리랑은 다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이 랑...>> 하고 말하니 리춘근이

<<그래서 미세스 전께서 수고를 좀 해주십시사구 말씀하려던 참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입을 다물고있던 송일엽이 불쑥

<<내가 갖다주구 오겠습니다.>> 하고 자원해나섰다. 김혜숙이

<<네가 거긴 무엇하러 간단 말이냐?>> 하고 불긴하다는 뜻을 보이니 송일엽은 대번에 발끈 성을 내며

<<왜 난 못 가오? 언니가 도맡아놓구 다녀야 하는데요, 거기는?>> 하고 되받았다. 리춘근과 전보경이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혜숙이 송일엽의 얼굴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보다가 푹 누그러진 말소리로

<<아무려나, 그럼 네가 갖다주구 오너라.>> 하고 양보를 하였다. 김혜숙은 이때야 비로소 송일엽과 선장이의 사이가 심상찮다는것을 깨달은것이였다.

리춘근과 전보경도 야릇한것을 감득하고 송일엽의 썰물처럼 피기를 거두었다가 밀물처럼 다시 피기가 돌기 시작하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송일엽은 자기 방에 올라와 문을 닫아걸고 침대우에 길게 누워 불붙일것을 잊어버린 권연 한가치를 두손가락사이에 끼워든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였다.

송일엽은 방년 십팔구세 때부터 댄서로 일하면서 이날이때까지 오륙년 동안에 좋든싫든 관계를 맺은 남자가 열손가락을 거의 다 꼽을만하였다. 그러나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을 준 남자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여섯번째인가 일곱번째에 만난, 동생벌밖에 안되는 애숭이-서선장이였다. 송일엽의 첫사랑은 기괴하게도 몸을 버릴대로 다 버린 뒤에 비로소 찾아들었었다. 그러나 첫시작부터 이것은 열매를 맺지 못할 허황한 꿈이라는것을 그녀는 잘 알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를 그르쳐준다는 가책까지 느꼈었다. 가책을 느끼면서도 상사말처럼 날치는 마음을 도저히 제어할수 없는것이 그녀의 고뇌였었다. 그러던차에 갑자기 선장이와 갈라질것을 생각하니 속이 얼얼해나는게 사람이 곧 미쳐날것만 같았다. 그녀의 리성은 리춘근의 말을 옳게 받아들였다. 언니의 말도 그리지 않다는것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세찬 감정의 분류는 억제의 뚝을 끊고 걷잡을수없이 내뻗기만 하는것이였다.

부랴부랴 이부자리를 뜯어서 고쳐 꾸민다 옷들을 빨아서 풀먹여 다린다... 서너 녀자가 한 이틀 부산을 피운 끝에 준비가 다되여 래일 밤차로 더난다는 날 다저녁때다. 송일엽이 급작스레 마음이 변했는지 아래층에 내려오자 대바람으로

<<언니가 가세요, 난 안 가겠어요.>> 하고 말하여 김혜숙은

<<갑자기 또 왜 변덕이냐? 그렇게 가겠다구 머리악을 쓰던 아이가.>> 하고 나무라는 구기로 말하였다.

<<차일시피일시... 모르세요? 지난밤에 여러가지루 생각해본 끝에 안 가기루 했어요. 그 대신에...>>

<< 그 대신에 무어?>>

<<아니 고만두세요. 내가 따루 편지를 써서... 옷갈피에 끼워놓을테요.>>

김혜숙이 타이르는 어투로

<<이 애 너 정말 어쩌자구 그러니 지각없이?>> 하고 말하니 송일엽은 대번에 빨끈 성을 내면서

<<언니가 무얼 안다구 그러시오!>>

한마디 쏘아붙이고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복도로 뛰여나왔다. 걷잡을수없이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뛰여올라와 경대앞에 섰다. 경대보를 벗겨내고 경대를 들여다보며 서서 울었다. 두뺨으로 흘러내리는 두줄기의 눈물이 투명한 구슬같이 아래턱에 맺혔다가 방울져 덜어지며 또닥또닥 신코를 적시였다. 무더운 날씨도 소나기가 한줄금 쏟아지고나면 한결 시원해지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실컷 울고나니 송일엽의 마음도 한결 개운해졌다.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화장대의 서랍을 열었다. 깨끗이 빨아다린 손수건에다 연지를 짙게 바른 입술로 꼭 입을 맞추어 새빨간 입술모양을 찍은 뒤에 그 수건에다 선장이하고 둘이서 서로 머리빗겨주기를 하던 손때먹은 빗을 쌌다. 그리고 나를 잊어버리고 열심히 공부하시고 또 내내 건강하시라는 사연의 짧은 편지 한장을 썼다. 다 써놓고 새삼스레 설음이 북받쳐 또 한바탕 울었다. 끝이 없는 녀자의 설음이였다.


남경 화로강 이연선림 후원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져 왁자지껄 하였다. 그러나 선장이는 한바탕 뛰여들어볼 자신이 없어서 그저서서 구경만 하였다. 배군 양씨동이와 오쎌로 마점산이 단연 세여서 우승은 그 둘이 다 확률이 높았다.

<<두 곰새끼 힘자랑하는 꼴 보구 섰지 말구 우린 고만 들어가자구.>>

<<아니 조금만 더 보구.>>

<<힘하구 지능은 반비례하는 법이라니.>>

<<어떻게?...>>

<<힘이 센 눔일수록 대가리는 깡통이거든.>>

<<임자처럼 그렇게 그늘의 밀짚 같아야만 골속에 위대한 사상이 들었겠구먼.>>

<<하필 나를 말밥에 얹을게 무어람.>>

<<임자가 먼저 말을 냈으니까 말이지.>>

<<이봐 위대한 사상가, 성냥 한개비만 좀 빌자구.>>

<<사람 툭툭 치지 않으면 말 못하나?>>

<<어, 지렁이두 밟으면 꿈틀한다?>>

<<그런 소릴 듣구두 가만있어? 한대 콱 쥐여박지 못하구.>>

<<그럴 힘이 어디 있어야지? 아하하하하!...>>

<<위대한 사상은 두었다 무었하나? 그 사상으루 한번 냅다 갈기지.>>

씨름판을 뒤전으로 종작없이 지껄여대는 소리를 선장이는 웃으며 듣고 섰는중에 <<대추씨>>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키가 작달막한 경상도친구 하나가 와서

<<이봐 서씨, 윤대성동무가 찾으니 얼른 좀 가보라구.>> 하고 전갈하였다.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인지 나두 몰라. 가보면 알것 아니야.>>

<<반실이, 심부름 하나두 똑똑히 못하구!>>

<<뭐야?>> 하고 <<대추씨>>가 붙들려고 손을 내미는데 선장이가 날쌔게 몸을 빼치여 달아나니 <<대추씨>>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서 달아나는 선장이 등뒤에다 던졌다.

뜰아래채 윤대성의 방에는 하늘색치파오(旗袍)를 입은 김혜숙이 앉아있었다.

<<아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하고 선장이가 일변 놀라며 일변 반색하니 김혜숙은 웃으면서

<<세간붙이를 다 팽개치구 그렇게 달아나는 법두 있어요?>> 하고 웃음의 소리 한마디를 하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객실루 갑시다.>>

빈 객실에는 역시 빈 침대우에 선장이의 트렁크며 유포로 싼 이불보퉁이며가 놓여있었다. 먼저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아 선장이가 맞은편 침대에 와 앉기를 기다리며 김혜숙이 새판으로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여기서 지내는게 어떠세요?>>

<<왁작왁작해 좋습니다. 사는것 같습니다.>>

<<처음이라 아무래도 좀 생소하지요?>>

<<아니 하나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고 흔연히 웃고 김혜숙은 다시

<<미스터 장의 물건들은 워낙 가져올것두 별루 없는 모양입디다만 그보다두 싸이드카를 훔쳐타구 나간게 발각이 나구 또 싸이드카를 철로길에 버리구 뛴것까지 다 드러나 지명수배를 받는 까닭에 아무것두 꺼내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윤대성씨의 말을 들으니 조직에서 다 해결해주기루 했다니까 아무튼 잘됐습니다.>> 하고 근심이 하나가 덜리는듯 입가에 ㅣ소를 지었다.

오후 반나절을 선장이는 김혜숙과 막수호에 나가 뽀트놀이를 하는것으로 보내였다. 상해를 갓 왔을 때 김혜숙을 따라 거리구경을 다니던 일을 생각하니 어쩐지 선장이는 격세지감 같은것을 느꼈다. 불과 1년이 남짓한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경난을 하였는가!

노를 저어 호심으로 들어가다가 선장이는 숙자아주머니하고 강에 나가 뽀트놀이하던 일이 피뜩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기를 띠웠다.

<<왜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나두 같이 좀 좋아해봅시다.>>

김혜숙이 이물쪽으로 등을 두고 앉아 마주보며 이렇게 물어서 선장이는

<<아니 아무것두 아닙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까닭없이 괜히 싱글벙글한단 말이예요?>>

<<아니 그저... 저 전에 서울 있을 때...>>

<<서울 있을 때... 뭐요?>>

<<우리 숙자아주머니... 내가 언제 얘기했지요? 숙자아주머니하구 한강에 나가 뽀트놀이 하던 일이 생각났에요.>>

<<무슨 재미나는 일이 있었던가요?>>

<<재미나는 일이라기보다... 우스운 꼴을 봤에요.>>

<<무슨 우스운 꼴?...>>

<<남자하구 녀자하구 둘이서 물에 뛰여들어 정사하는걸 봤지 뭡니까.>>

<<어 저런... 정사하는걸?...>>

<<녜. 긴 띠루 허리를 마주 동이구 같이 뛰여들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남자만 가라앉구 녀자는 떠서... 녀자는 살았지 뭡니까. 녀자는 기생이에요. 젊은... 그리구 남자는 거덜이 난 오입쟁이구.>>

<<호호, 죽기가 싫으니까 띠를 끌렀던게지요 저만 살겠다구.>>

<<아마 그렇겠지요. 애초부터 억지정사였던갑디다.>>

<<억지정사!>>

두 사람은 구속없는 웃음소리 내여 웃었다. 웃음이 가라앉은 뒤에 김혜숙이 문득 생각나서

<<오 참, 짐속에 일엽이 편지가 들었을겝니다. 옷갈피에 끼워넣은것 같던데요.>> 하고 말하는데 선장이는 자격지심으로 얼굴이 화끈하였다. 김혜숙은 선장이의 얼굴이 벌개지는것을 보고도 못 본체 고개를 돌리여 여름의 막수호의 아름다운 경색을 바라보았다.

귀로에 중화문안에서 무장한 경찰이 압송하는 트럭 한대와 마주쳤다. 압송되는 10여명 사람은 개개 다 피골이 상접한, 몸에 걸친것이 람루한 마약중독자들이였다. 살아서 쓸데없는 인간들이 게다가 도적질까지 자꾸 하여 사회질서만 문란하게 한다고 우화대로 죽이러 가는 길이였다. 남경서는 가끔 이런 청소작업을 하는데 청소를 당하는것은 신통하게 모두 좀도적아편쟁이들이였다. 국민당정부의 관료들중에도 아편중독자가 적지 않건만 그런것들은 털끝도 못 건드린다고 남경백성들은 비웃었다.

<<있는 놈은 고스란히 놔두구 없는 놈만 내다 죽이는게 옳습니까?>> 하고 선장이가 분개해 말하니 김혜숙은

<<이 세상에 불합리한 일이... 어디 그뿐인가요?>> 하고 되묻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밤에 하관정거장까지 선장이가 배웅을 나가가지고 대합실밖에 가서 김혜숙과 낮에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을에 미스 전까지 남경을 오구나면... 애인리집이 좀 적적해지겠습니다.>>

<<그러잖아두 이모가 이불을 시치면서 자꾸 뇌던걸요... 다 가구나면 적적해 어떻게 살겠느냐구.>>

<<세상은 고르지 못합니다... 이연선림은 너무 왁작왁작해 걱정인데.>>

<<사느라면 또 무슨 변화가 있겠지요.>>

자동차 한대가 헤드라이트로 역사를 대낮같이 비추며 달려오는 바람에 두 사람은 눈이 부시여 잠시들 고개를 외였다.

<<난 학교엘 들어가 한번 가볼수도 없구... 방학이란게 없다잖아요, 일반학교와 달라서.>>

<<3년두 잠간이예요... 두구보세요.>>

<<오쎌로두 이번에 같이 들어가게 됐습니다.>>

<<우리의 군사인재가 속속 배출하겠네요.>>

말하고 김혜숙이 상글상글하였다.

<<반해량대위가 랍치당할번한 이야기 들으셨지요?>>

<<들었어요.>>

<<미스 전이 몹시 놀랐겠습니다.>>

<<말 안했어요. 괜히 놀래울것 무어 있어요.>>

<<그렇지요, 맞습니다.>>

<<인제 차 떠날 시간이 됐나봐요.>> 하고 김혜숙이 현관등불빛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고만 들어가시지요.>>

선장이가 홈에서 움직이는 렬차를 따라걸으며 열어놓은 차창으로 김혜숙과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종시 송일엽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말은 목에 걸려 못하고말았다.

8월달에 접어들면서 이연선림의 식구가 부쩍 늘어 수용능력을 초과하여 넘쳐나는 부분은 부득이 호가화원초대소에 갈라들여야 하였다. 상해, 광주, 북평, 무한, 남경 등지에 각 대학에 재학중인 조선학생들이 여름방학을 계기로 학업들을 중단하고 조직의 지령에 따라 남경으로 집결을 한것이다. 지도부에서 국민당정부와 수차 교섭한 결과 중앙륙군군관학교에다 조선학생만으로 편성된 독립중대 하나를 내오기를 하였던것이다.

화로강패까지 합하여 백수십명 청년을 이연선림 후원 우거진 나무그늘에 집합시켜놓고 지도부성원인 김청산이 면려하는 의미의 연설을 하였다. 김청산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서 한때는 반일테로조직인 의렬단의 주요한 지도성원으로 활약한바 있었다(이렬단은 그후 발전적인 해소를 하였다).

<<우리 조국강토에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것이 우리의 목적이구 또 사명입니다.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장투쟁입니다. 상대방이 말루 해서 듣지 않을 때는 두드리는수 밖에 없습니다. 두드리자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선 힘부터 길러야 하겠습니다. 대학에서 학업을 닦는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장투쟁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것이 현단계에서는 더 중요합니다. 전쟁의 과학을 모르면 발톱까지 무장한 강대한 적과 맞설수 없습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창립 당시부터 우리 조선청년을하구는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군사인재를 육성해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연설을 들으며 선장이는 김청산이 소문에 듣던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사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병원의 원장이나 학교의 교장이라면 꼭 알맞을 인품이였다. 김청산은 권총과 폭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테로조직을 령도한 사람이다. 일본제국주의가 그 목에다 현상그을 건 사람이다. 그렇다면 남달리 표한한 점이 엿보여야 할터인데 전연 그렇지를 않았다. 점잖고 온화스럽고 더 나아가서는 인자해보이기까지 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이 고향이라는데 경상도사투리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군복을 입은 방효삼대좌도 그렇고 사복차림을 한 김청산도 그렇고 다 수수한 보통사람인것이 도리여 선장이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 연설도 미리 준비해온 연설문을 들여다보며 <<하였습니다>>, <<되였습니다>>조로 내리읽는것이 아니라 그저 생각나는대로 간단명료하게 서술하는것이였다. 웅변적으로 억양을 붙여 선동도 하지 않고 또 어려운 술어를 써서 정치색채를 짙게 하지도 않았다.

<<...우리 민족의 미래는 량어깨에 짊어졌다는 자각하에 조국광복에 필요한 군사과학을 열심히 배우구 익히기를 바랍니다.>>

연설이 끝나니 백수십명 젊은 청중이 일시에 박수를 쳤다. 선장이는 남에게 뒤지지 않고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 박수소리도 무슨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도 아니고 또 무슨 오래도록 그칠줄 모르는 박수소리도 아니였다. 자발적인 보통박수소리였다.

화로강에 식구가 갑자기 늘어나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하고 엄벙덤벙하는중에 선장이가 새 친구 하나를 사귀였다. 사귀려고 사귄것이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되여서 그럭저럭 사귀였다. 광주 중산대학에서 올라온 친구로 고향은 경산북도 달성, 이름은 리태성. 키가 구척같이 큰 심상찮은 괴물이였다. 리태성은 통성명도 하기전에 먼저 선장이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그 말인즉

<<로형, 그 만년필 좀 봅시다.>>

선장이는 무슨 영문을 몰라 두말없이 만년필을 선뜻 뽑아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내 만년필이 신기해 한번 구경하자는건가? 그럴리 없는데... 그저 보통만년필인데...)

(빌어서 무얼 좀 쓰겠다는 말인가?)

(혹시 내것하구 똑같은 만년필을 잃어버리구... 수상해서 수탐을 하는거나 아닌가?...)

별생각을 다하였다.

리태성(그의 이름은 나중에 알았지 이때는 통성명 안해 아직 몰랐었다)은 선장이의 만녀필을 건네받더니 곧 저쪽에 있는 공용책상앞으로 가가지고 걸상이 없으니까 선채로-방아깨비처럼 긴 허리를 구푸리고-두팔꿈치로 책상을 짚고 남의 만년필을 제멧대로-임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분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즉 뜯어보기 시작한것이다. 선장이는 기구멍이 막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였다.

(저놈이 미치잖았나?)

의심하며 그 하는양을 지켜만 보았다.

리태성은 손에다 지저분하게 잉크칠을 해가며 선장이의 만년필을 속속들이 다 뜯어서 완전 분해를 해놓고 무엇을 연구하는 모양으로 고개를 이리 기울였다 저리 기울였다 하였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들여다보더니 실망한듯 단념한듯 각을 뜯어놓은 만년필을 도로 들이맞추기 시작하였다. 도로 다 들이맞춘 다음 제 손톱에다 대고 몇번 그어보더니 아주 만족한 모양으로 잉크가 가득 묻은 손을 바지에 썩썩 문질렀다. 그리고 선장이에게 만년필을 돌려주러 왔다. 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내 이제 다 검사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소, 이 만년필.>>

선장이는 공연이 한번 뜯기운 만년필을 도로 받아 꽂으며 속으로

(별난 놈 다 보겠다. 남의 멀쩡한 만년필을 갖다가 뜯어보구 <<아무 이상 없소>>는 다 뭐야!)

욕을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괴물 리태성은 만년필에 대하여 특이한 흥취를 가지고있는 작자였다. 무릇 그 눈에 띄는 범위안의 만년필이기만 하면 누구의것이나를 막론하고 한번 갖다 분해를 해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아무리 새로 산 고급만년필이라도- 파커나 워터맨이라도-그에게 한번 내맡겨서 속시원히 뜯어보게 하지 않고는 다들 배겨내지를 못하였다. 노끈으루 매서 밤낮 목에다 걸고 다니기나 하면 모를가. 자는 동안에 임자에게서 무단히 갖다가 실컷 뜯어보고 도로 맞추어가지고 이튿날 돌려주는게 그의 습성이였으니까. 그리고 또 거기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감정이 하나씩 붙은 법이였으니까.

<<아무 이상 없소.>>

또는

<<병집이 있는걸 내가 고쳐놓았으니까 이젠 잘 써질게요.>>

그런 까닭에 그의 손이나 옷자락에는 항시 잉크자국이 가실날이 없었다. 하여 그것들은 그의 <<명승고적>>이 되다싶이 하였다.

화로강에서는 8월 29일-나라가 망한 날에 점심 한끼씩을 굶어서 주린 창자로 망국의 아픔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튿날 백수십명의 씩씩한 젊은이들이 줄을 지어 목적하는 학교로 향하였다. 이때 중국에서 군관학교나 경찰학교 같은 특수한 성질의 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는 교복, 교모라는것이 없었다. 그래서 줄을 지어가는 이들의 옷차림도 각양각색으로 그 대부분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길렀었으나 개중에는 따과에 헝겊신을 신고 중절모를 쓴축들도 있었다. 함경도, 평안도로부터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조선팔도의 사투리가 다 들리는가 하면 추운 고장 북간도와 머나먼 태평양건너 미국에서 온치들도 있었다. 년령도 20년 전후에서 이십칠팔세까지 다같지 않았고 또 생김생김이나 차림차림이 다 다른만큼 성질도 제각각이였다. 그러나 선장이가 보는바에 한가지 공통점은 다들 긍지심과 자부심이 대단히 강한것이였다. 다들 <<내>> 없으면 조선독립은 바라지도 말라는식의 과대망상에 걸려있는것 같았다. 바꾸어말하면 개개 다 개인영웅주의에 도취되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날창 꽂은 총을 든 위병들과 칼을 찬 위병장이 지켜섰는 철문을 통해 넓은 교정에를 들어서니 대기하고있던 리발병들이 손에손에 바리칸을 들고 대들었다. 머리칼소탕작전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백수십명 개인영웅주의용사들을 일률적으로 중대가리를 만들어놓았다. 있던 머리가 갑자기 없어지고보니 조금전까지 각기 특색이 있던 얼굴들이 갑자기 판에 박아낸듯 똑같아져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하기가 어려웠다. 선득선득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는 웃음 웃는중에 서로 마주보고 볼기짝을 두드리며 파안대소하는축들도 있었다. 머리깎는 수선이 끝난 뒤에 잇달아 군복들을 갈아입는데 선장이에게 차례진 군복하고 군모는 얼추 몸에 맞았으나 군화만은 배같이 큰것이 차례져 웃음거리가 되였다. 군복 왼쪽 가슴에 한문자로 쓴 이름표들을 붙인 연후에야 비로소 선장이의 이름이 배 선(船)자 긴 장(长)가 선장인것을 알고

<<그 이름이 참 멋이 있구먼.>>

<<아호 아니요?>>

<<아호가 별호지 뭐야.>>

<<자는 아니구?>>

<<이 무식쟁이!>>

<<해군학교를 갈 사람이 잘못 왔구먼.>>

<<아무튼 이름 하나는 멋이 있소, 누가 지었는지.>>

씩둑꺽둑 지껄여대기까지 하였다.

각반을 치고 혁대를 띠고 나서니 서투르기는 해도 확실히 거뜬은 하였다. 그러나 또 달것이 있었다. 배울 학(学)자를 찍은 령장과 난 생(生)자를 찍은 령장을 깃에다 갈라달고 또 하나 이름표우에다 다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교장 장개석의 초상을 돋을 새김한 휘장(배지)이였다. 이 특급상장(원수에 해당)각하의 시각까지 잠시도 학생들의 몸에서 떨어져서는 아니되는 무슨 혹이나 사마귀 같은것이였다.

9월 1일에 장교장의 훈유를 듣고나면 그때부터 6개월 동안의 예비과가 정식으로 시작되는데 학원들의 말에 따르면 예비과에서는 일요일에도 외출이 허가되지 않으므로 실상은 허울 좋은 징역살이나 다름이 없다는것이였다. 신입생들에게 학교의 이런 속내를 이야기해들리는 학원이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종족들인가. 학원이란 전에 이 학교를 졸업한자가 재입하거나 또는 부대를 거느린 경험이 있는 장교가 재입한 경우에 주는 칭호로서 일반학생들이 급료 12원씩을 지급받는데 비하여 그들은 8원이 더 많은 20원씩을 지급받는 특수계급이였다. 깃에다 다는 령장도 <<학생>> 두 글자가 아니고 <<학원>> 두 글자였다. 선장이와 동시에 입교를 한 청년들중에도 그 20원짜리 학원이 여럿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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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좋은래일 (♡.144.♡.140) - 2023/11/03 16:51:11

글을 올리면서 보니까 별로 요 몇편부터.. 한어로된 문장을 조선말로 번역한 느낌이 나는것 같네요.

로즈박 (♡.39.♡.172) - 2023/11/03 20:39:11

황포군관학교가 상해에만 잇엇는줄로 알앗는데 남경에도 잇엇네요..오늘 처음 알앗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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