拉普拉斯的魔女 14~15

단차 | 2023.12.01 10:37:54 댓글: 4 조회: 21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3540
 14

     

     

     

     

  집에 돌아오자 카레 냄새가 났다. 아오에는 서류 가방을 든 채 거실 문을 열고 말했다.

  “나 왔어.”

  중학교 2학년인 아들 소타가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아버지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에 시선을 떨군 채 옆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주방에서 아내 게이코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저녁, 바로 드실래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복도로 들어갔다. 아들에게는 무시를 당했지만 그나마 아내가 내다봐준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침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와 혼자 식탁을 마주하고 카레를 먹었다. 어제는 햄버거, 그저께는 돈가스, 그 전날은 분명 새우튀김이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아오에가의 메뉴는 아들 소타가 좋아하는 음식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찌개나 나물 반찬 같은 건 한참 동안 먹어본 적이 없다. 소타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들과 함께 먼저 저녁을 먹은 아내는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가 저런 모습이니 아들 소타에게 주의를 줄 수도 없다. 휴대전화 시절부터 그런 기미가 있긴 했지만 스마트폰은 아예 가정에서 대화를 앗아 갔다. 최근 들어 아오에는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적이 없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저 건강하게 지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 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카레라이스를 입에 떠 넣으며 학교 교수실에서 읽은 블로그 글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였다. 위키 백과사전의 ‘바깥 고리’에 <NON–SUGAR LIFE(아마카스 사이세이의 근황)>이라는 블로그가 링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클릭했더니 즉시 연결되었다. 틀림없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였다. 하지만 날짜는 벌써 6년 전 것이었다. 톱 페이지의 글 제목은 ‘잠시 동안의 이별’이었다. 슬슬 읽다 보니 상당히 심각한 분위기의 글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잠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혼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서만 생각해왔다.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하며 이 블로그 글을 줄곧 써 내려왔다. 어떤 형태로든 나와 그들의 일을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다음 단계를 생각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었으나 이제는 어차피 과거일 뿐이다. 저세상으로 떠난 유카코와 모에는 물론이고,

 
 기적적으로 회복한 겐토조차 나에게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겐토가 아니다. 지금의 겐토에게 내가 아버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인간은 과거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다. 한 걸음씩이라도 좋으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분명 새로운 뭔가가 차츰 눈에 보이리라. 확증은 없으나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어느 날인가,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내가 영화인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드디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긴 그게 언제가 될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고마워, 유카코. 고마워, 모에. 그리고 고맙다, 겐토.

  너희들 덕분에 나는 구원을 받았어. 오늘까지 살아낼 수 있었어. 내일부터도 살아가자고 생각할 수 있었어. 정말 고맙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오랜 기간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우울하고 서툰 글 따위,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의 반향이 있어서 놀랐습니다. 특히 저와 비슷한 형태로 가족을 잃은 분들이 보내주신 메시지에는 가슴이 아픈 것과 동시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게 얼마나 큰 구원이 되는지, 통감했습니다.

  출판사에 다니는 지인도 이 블로그 글을 읽고 책으로 출간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추천해주었습니다. 역시나 이 서툰 글을 그대로 내놓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충분히 다 써내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필하고 문장도 수정한 다음에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여러분도 다시 읽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앞서 썼던 대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기로 했습니다.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는 한동안 쉬게 됩니다. 다음에는 또 다른 형태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좀 더 즐거운 이야기를 쓰고 싶군요.

  그러면 여러분, 부디 건강하시기를. 안녕히 계십시오.

 
 이 글만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판명된 것은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오랜 기간의 고민 끝에 뭔가 결론을 내린 것 같다는 점뿐이다.

  뒤에 덧붙인 글에 의하면 이 블로그에 상당히 정기적으로 글을 올렸던 모양이다. 책으로 출간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정도니까 나름대로 스토리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근 것부터 읽는 건 적절하지 않다. 시간적으로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 목록을 보니 예전에 올린 글은 모두 남겨둔 것 같았다. 개설한 것은 7년 전이다. 위키 백과사전에 나온 프로필로 계산해보니, 황화수소 사고가 일어난 그다음 해였다. 처음 올린 글의 제목은 ‘빛을 찾아서’라는 것이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번 제목에 썼던 대로 드디어 빛을 발견한 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몇 달 전 우리 집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그 이후로 줄곧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 조금씩 내게 일어난 일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나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록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 절망의 순간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빛을 감지하는 시간을 되찾고 이제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글로 남기는 것을 통해 뭔가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명색이나마 ‘표현하는 자’에 속하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소중한 가족에 대한 공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쓰는 글의 내용은 결코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먹은 보람도 없이 한 남자가 줄줄이 늘어놓는 하소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글은 보고 싶지 않다는 분은 부디 지금 곧 이 블로그를 떠나주십시오. 이건 제가 따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아무래도 이 글이 이야기의 출발점인 모양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톱 페이지에 떠 있는 글로 막을 내린 것이다.

  여기까지의 문장은 경어를 사용했지만 약간 공간을 띄운 다음에 ‘여기서부터는 일인칭 소설 문체로 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양해의 말과 함께 본문으로 들어갔다.

  그 내용은 참혹한 것이었다.

     

  다섯 달 전, 나는 홋카이도 히다카 지역에 가 있었다. 아이누를 테마로 하는 영화를 구상하고 있어서 아이누 문화와 차별의 실태 등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프로듀서 미즈키 요시로 씨도 동행해서, 저녁이면 우리는 지역 명물 음식에 입맛을 다셔가며 신작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울한 현실 참여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에서 아이누를 조명하는 생생한 영화를 만들자고 우리는 의욕을 불태웠다.

  연락이 온 것은 사흘째 되던 날 아침이었다. 휴대전화에 표시된 번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받아보니 경찰 관계자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경찰에서 좋은 소식이 올 리가 없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짐작대로 암울한 목소리로 경찰관은 말했다. 그 순간 교통사고인가 하고 생각했다. 가족 누군가가 교통사고를 당한 게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뒤를 이어 경찰관이 한 말은 그게 아니었다.

  “댁에서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댁이라고 하는 걸 보면 교통사고는 아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생각한 것은 화재인가,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불이 났습니까?”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닙니다. 중독 사고예요. 황화수소인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관이 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실제로는 귀에 들어왔지만 너무도 뜻밖이라 머릿속에서 제대로 문자로 변환되지 못한 것이다.

  “뭐라고 하셨죠? 무슨 사고라고요?”

  “중독 사고입니다. 참으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가족분이 가스중독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이 시점에도 나는 아직 가스중독이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지막 대목만은 귀에 꽂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온몸의 핏기가 싹 가셨다.

  “누굽니까, 누가 죽었어요?”

  내 목소리는 떨리고 갈라졌다.

 
 “부인과 따님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흔해빠진 표현이지만,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즈키 씨에 의하면 나는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서는 내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튜어디스가 걱정이 됐는지 몇 번이나 말을 건네주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울면서 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라는 생각만 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일어난 비극은 아무래도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혼란한 상태에서도 경찰과 몇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까스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여서 모두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조깅 중이던 한 남자가 우리 집 옆에서 묘한 냄새를 감지했다. 유황 냄새였다. 남자는 즉시 근처 집의 인터폰을 눌러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말했다. 황화수소에 의한 자살이 한창 화제가 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달려온 경찰들이 우리 집에 뛰어들었고 이미 움직임이 없는 아내 유카코, 딸 모에, 아들 겐토를 발견했다. 유카코와 모에는 그 자리에서 사망이 확인되었다. 유일하게 겐토만은 생명 반응이 있어서 병원에 실려 갔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황화수소가 모에의 방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방 문에는 ‘황화수소 발생 중’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모에가 자기 방에서 자살을 꾀했고 유카코와 겐토는 거기에 휘말렸다, 라는 얘기다.

  왜? 어째서?

  내가 질문을 던진 상대는 물론 모에였다.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내 딸 모에가 왜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대체 어떤 고민을 떠안고 있었다는 것인가.

  아내 유카코에게도 나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알지 못했어? 전혀 눈치를 못 챘어? 딸이 큰 고민을 안고 있었는데? 죽고 싶어 할 만큼 괴로워했었는데? 항상 함께 지냈으면서 왜 그 위험 신호를 놓쳤어? 그러고도 당신이 엄마야?

  물론 이건 단순한 화풀이였다. 게다가 책임 회피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도 딸의 이변을 알아차렸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일 때문에 좀체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건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런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이 분노를 퍼붓지 않고서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첫 번째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런 사건이 터졌다면 그야말로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할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 터였다. 용케도 다섯 달 만에 다시 일어섰구나 하고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 자식을 둔 아오에로서도 상상이 잘 안 되었지만 아마도 악몽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글을 보니 제목이 딱 맞힌 것처럼 ‘죽음만을 생각하다’였다.

     

  경찰서 영안실에서 유카코와 모에의 유체를 대면했다. 두 사람 모두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 파자마는 눈에 익었지만 유체를 보고 그게 내 아내와 딸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황화수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당장 중지하라고 말하고 싶다. 꼭 죽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게 좋다. 황화수소로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코 거짓이다. 거짓이 아니라면 그토록 모습이 변해버릴 리 없다. 피부 색깔까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황을 설명해준 형사의 말에 의하면, 일단 변사였기 때문에 부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황화수소 중독사라는 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따님이 자살할 동기로서 뭔가 짐작하시는 게 있습니까?”

  형사가 내게 물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 이전에 머릿속이 이미 뒤죽박죽이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모에의 방에 유서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그 질문에도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형사는 좀 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이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형사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카코와 겐토는 모에의 행위에 의한 피해자라고 한다. 죄목은 살인과 살인미수. 물론 모에는 사망했기 때문에 피의자 사망으로 불기소처분이 되는 것이지만.

  형사에 의하면, 황화수소 자살의 악질적인 점은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위험성이 지극히 높다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고가 들어온 직후, 우리 집을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이내의 주민에게 피난 지시가 내려졌다. 집에 들어간 수사원들만 해도 상당히 엄중한 장비를 했었다는 얘기였다.

  아내와 딸이 죽고 아들은 의식불명. 게다가 딸은 범죄자로 취급되고 아내와 아들은 그 피해자.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더욱더 절망했다. 경찰서 화장실을 빌려 쓸 때, 세면대의 거울을 보니 나는 웃고 있었다. 힘없이 웃고 있었다. 아마도 약간 미친 상태였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몇 번이나 형사에게서 “괜찮으십니까?”라는 말을 들었다.

  경찰서를 뒤로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언제 죽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살아 있어봤자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나는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지금까지 촬영한 영화라든가 실적이라든가, 그런 건 재산도 뭣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었다. 그것을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15

     

     

     

     

  카레라이스를 다 먹고 아오에는 서재로 건너왔다. 세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이지만 집 안에서 혼자 지낼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다. 만일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면 언젠가는 이 방도 내줘야 했겠지만 그건 면했다.

  이 방에도 노트북이 있어서 그걸 켜고 <NON–SUGAR LIFE>,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글은 일주일 정도 간격으로 새로 올려졌다. 한 회의 글의 양이 꽤 많은 걸 보면 미리 초안을 잡아 몇 번씩 퇴고한 다음에 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긴박감이 넘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도 문장 자체는 침착했다.

 
 아오에는 대학 교수실에서, 형사의 설명을 들은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비탄에 젖어 경찰서를 나오는 대목까지 읽었다.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금 더 읽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다음은 집에 가서 읽기로 했다. 그 뒤로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음 글의 제목이 ‘일루의 희망, 그리고 절망’이라는 것이었다. 예상보다 더 심하게 우울해지면 집에 돌아갈 기운까지 잃을 우려가 있었다. 대학에서 집까지 꽤 거리가 멀고 게다가 전차 안은 몹시 붐빈다.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나서 아오에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유카코와 모에의 유체를 대면한 뒤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장례식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행사 따위를 해봤자 아내와 딸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이 쓸데없는 짓이었다.

  죽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어떻게 죽을까. 황화수소 자살은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형사의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건 논외였다.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높은 빌딩을 찾아보았다. 투신자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남에게 폐를 끼칠 우려가 있었다. 역시 목을 맬까 하는 생각에 집의 어디서라면 그것이 가능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래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것은 겐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두 살의 큰아들은 여전히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건진 것은 방이 3층에 있었던 덕분이다. 황화수소는 기본적으로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한다. 모에의 방은 2층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침실도 2층에 있었다. 모에는 자기 방에서 죽었지만 아내 유카코는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이변을 깨닫고 딸의 방까지 가려고 했지만 도중에 숨이 끊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겐토에 대한 응급 치료는 무려 수십 시간에 걸친 것이었다. 부디 살아나다오, 의식을 되찾아다오, 라고 진심으로 빌었다. 그러기 위해 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다. 그 아이만이 내 마음의 버팀목인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째 되던 날 밤, 드디어 겐토의 주치의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선은 상태가 안정적입니다.”

  의사의 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겐토까지 잃고 마는가, 내내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은 돌아왔습니까?”

 하지만 그 질문에 의사는 뭔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역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내가 다시 물어보자 의사는 결심한 듯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카스 씨, 아드님의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예전의 아드님은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해주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일단 만나보시면 알 겁니다.”

  “그렇다면 만나게 해주십시오. 지금 당장 만나게 해달라고요.”

  나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그로부터 몇 분 뒤, 나는 집중 치료실에 있는 아들을 만났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유카코와 모에의 유체를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 온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겐토의 몸에는 튜브가 수없이 연결되었다. 전기 코드도 있었다. 온갖 기기들과 이어진 채 그는 완전히 기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눈은 살짝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명백했다. 내가 아무리 불러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보조적으로 인공호흡기를 사용했지만 자발 호흡은 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지만 그런 말 따위, 임시방편의 위안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지금은 어쩌다 이런 상태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뭔가 개선되는 것인가.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생기는가.

  일루의 희망에 매달리던 나에게 의사는 절망적인 선고를 했다.

  평생 이대로일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문득 깨달았을 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저히 내 다리로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바닥이 젖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 눈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조금쯤 시간이 걸렸다.

     

  읽지 말걸 그랬다고 아오에는 후회했다.

  아내와 딸은 사망하고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아들은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이런 비극을 맞닥뜨린다면 나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지 몰라 그야말로 죽음만을 생각하게 될 터였다.

  그다음 글을 읽을까 말까, 아오에는 망설였다. 읽어봤자 한없이 암울해지기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블로그에 묘사된 일들이 이번에 일어난 온천지 사고나 우하라 마도카와 뭔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 또한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블로그 톱 페이지의 글에는 ‘기적적으로 회복한 겐토’라는 언급이 있었다. 이 글에서 묘사한 대로 ‘기계의 일부’인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그런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 겐토가 다시 살아난 건가.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아오에는 다음 글의 제목을 보았다. ‘결심, 그리고 한 줄기 빛’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건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라는 생각에 아오에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빈껍데기 같은 하루하루가 무심히 흘러갔다. 친구들 덕분에 아내와 딸의 화장은 마쳤지만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나는 전혀 기억에 없다. 일단 참석자들 앞에서 인사는 한 모양인데 그것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친지들이 준비해준 글을 읽었을 뿐이니 당연한 일이다.

 
 나의 일과는 겐토의 병문안을 다니는 것뿐이었다. 병문안이라고 해봐야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물을 들고 간들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무리 맛있는 과일도 겐토에게는 먹일 수 없고 아무리 예쁜 꽃도 겐토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날마다 아들을 보러 갔다. 아들을 보며 말을 건넸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겐토가 아직 어렸던 시절의 추억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모두 함께 축복해준 일, 첫 가족 여행, 유치원에서의 운동회, 753*…….(* 자녀의 성장을 축하하는 행사. 아들은 3세와 5세, 딸은 3세와 7세 되는 해의 11월 15일에 전통 옷을 차려입고 신께 참배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이야깃거리가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지만 점점 그것도 허망해졌다.

  나는 최근의 겐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학교에 어떤 친구가 있는지, 평소에 무엇을 하고 노는지, 먹을 것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나는 무지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 나는 몇 년째 가정을 돌아보지 않는 생활을 해왔다. 집안일은 모두 아내에게 떠넘기고 영화 제작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뿐인가, 그런 내 삶의 방식에 자부심마저 품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내 유카코에 대해서도 내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자문해보니 실로 미심쩍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것이 언제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나에게 이런저런 일을 상의하기도 했었다. 아이 키우기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일이 없어졌다. 상의할 일이나 고민거리가 사라진 건 아닐 것이다. 분명 집안일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힘들 때도 자기 혼자 해결책을 찾거나 다른 누군가와 상의했을 게 틀림없다.

  아내에 대해서조차 그런 상황이었으니 딸인 모에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모에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교복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딸이 다니던 학교의 교복은 장례식 때 처음으로 봤다. 동급생들이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있던 댄스부 여학생이 모에도 댄스부 동아리 활동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모에가 춤추는 모습이라고는 본 적도 없었고 댄스를 좋아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형사에게서 자살 동기에 대해 짐작하는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머리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러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가족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태를 불러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건이후, 나는 수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실은 울 자격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와 딸은 죽어버렸고 아들은 의식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건가.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가닿았다. 그것은 지금이야말로 내 가족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아내와 딸과 함께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족이었던 날들을 되찾는 것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유카코와 모에, 그리고 겐토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딸과 아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 소중한 가족이었던 그들은 과연 어떤 인생을 걸어왔을까.

  모에가 자살을 꾀한 이유에 대해서는 경찰에서도 이래저래 조사해본 모양이었다. 특히 학교 관계자에게는 상당히 깊이 캐고 드는 질문을 한 것 같았다. 중고교생이 자살했을 경우, 우선은 따돌림의 유무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측의 조사에서는 따돌림이 있었다는 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에서는 모에의 휴대전화도 조사해봤지만 역시 자살로 연결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당 형사는 모에의 유품을 돌려줄 때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로 짐작해보면 자살 동기를 조사하는 작업을 이제는 마무리할 예정인 것 같았다. 그들 역시 업무에 쫓기고 있다. 피의자 사망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진 사건에 언제까지고 매달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제부터가 출발이었다. 모에가 자살한 이유는 물론 밝혀내고 싶다. 하지만 아내 유카코에 대해서도, 그리고 겐토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여기저기 찾아다니기로 했다. 장례식 방명록에 의지해 처음부터 죄다 전화를 걸어 유카코가 누구누구와 친하게 지냈다는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을 만나러 갔다. 모에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찾아가 댄스부 연습이 끝날 때까지 정문 밖에서 기다린 적도 있다. 부원들에게서 모에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겐토가 소속했던 축구 클럽에서는 누가 가장 사이좋은 친구였는지 물어보고 다닌 끝에 골키퍼 가와카미 군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그 가와카미 군에게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나를 만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큰 민폐였을 것이다. 일단 만났다 하면 영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길어질 때는 두 시간 가까이 나와 이야기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모에는 어떤 아이였는지 알려주겠니?”

  “겐토는 어떤 녀석이었는지 얘기 좀 나눴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부탁하면 모두 흔쾌히 응해주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유를 나는 처음에는 나를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한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중년 남자가 가엾었기 때문일 거라고. 하지만 어느 날, 모에에 대해 이야기해준 동급생이 돌연 울음을 터뜨리며 친구를 잃은 슬픔을 절절히 토로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이없는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딱히 나를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내게 이야기해준 것을 어떤 도움이라는 식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유카코를, 모에를, 겐토를 떠올리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공양이었던 것이리라.

  가슴속이 뭉클해졌다.

  사랑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가족들은 모두에게서 사랑받고 소중하게 대우받았다. 특별히 우수한 것도 아니고 무슨 재능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지만,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자고 나는 결심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에서 세 사람이 생생하게 뛰노는 날이 올 때까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드디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하던 때, 겐토가 입원한 병원에서는 새로운 일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 상의하는 시간에 담당 의사가 내놓은 제안이었다.

  겐토를 가이메이 대학병원 뇌신경외과에서 치료받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얘기였다. 그 이유에 대해 의사는 이런저런 난해한 설명을 해주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겐토는 식물인간 상태지만 실제로 뇌 손상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손상된 부위가 미지의 영역이라서 현재 입원 중인 병원에서는 지금까지 다뤄본 적이 없다.

  ● 가이메이 대학병원 뇌신경외과에서는 지극히 특수한 뇌 손상 환자를 다수 치료해왔고 실제로 식물인간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회복한 사례도 많다.

  ● 특히 우하라 젠타로 박사는 뇌신경세포 재생의 제일인자로서 획기적인 치료 방법을 몇 가지나 고안해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겐토가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것은 짙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희미한 희망의 빛이었다. 바늘구멍보다 작고 미약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빛이라는 건 틀림이 없다.

  단지, 라고 담당 의사는 덧붙였다.

  “비용은 상당히 많이 들 겁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비용 같은 건 상관없었다. 다행히 유카코가 남겨준 자산이 있다. 그녀의 생명보험금도 나왔다. 여차하면 전 재산을 쏟아부을 각오는 되어 있다. 문제는 겐토가 회복될 전망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뿐이다. 그 점을 문의했더니, 알 수 없다는 대답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 제안한 것뿐입니다. 우리로서는 어떤 보증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요컨대 자신들로서는 힘에 부쳐서 하루빨리 쫓아내려는 것이라고 나는 깨달았다. 하지만 이유 같은 건 상관없다. 1퍼센트, 아니, 0.1퍼센트, 아니, 0.001퍼센트, 그게 아니라 한없이 0퍼센트에 가깝더라도 아무튼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면담 뒤, 나는 항상 하던 대로 겐토를 보러 병실로 갔다. 그는 변함없이 초점이 일정치 않은 눈을 허공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을 보며 나는 말했다.

  “겐토, 기적에 희망을 걸어보자.”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지금의 심경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라고.

 
 아오에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라고 납득했다. 이때에 블로그를 개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나저나 참 대단하다고 아오에는 감탄했다. 이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이토록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인가. 이러니저러니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력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흉내 내기도 어려울 만큼 강인하다. 절망 속에서 희미한 빛이나마 잡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 자세에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 글에 등장한 이름을 아오에는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가이메이 대학병원 뇌신경외과 우하라 젠타로 박사. 뇌신경세포 재생의 제일인자.

  우하라, 라는 게 드문 성씨인지 어떤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스즈키나 다나카, 사토 같은 흔한 성씨와는 얘기가 다르다. 이걸 우연한 일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우하라 마도카는 아버지의 직업이 의사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 인물일 게 틀림없다. 즉 마침내 우하라 마도카와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연결 고리를 찾아낸 셈이다.

  다음 블로그 글의 제목을 보았다. 그것은 ‘기도하는 나날의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읽어보니 병원을 옮기는 데 따른 이런저런 수고스러움이며 가이메이 대학병원 뇌신경외과의 과거 실적을 알아본 것, 그리고 병원을 옮긴 뒤에 겐토가 다양한 검사를 받는 상황 등이 기록되었다.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마음이 절실히 전해져 오는 내용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지나치게 기대감을 품어서는 안 된다. 기적이란 만에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다. 겐토가 현재 상태보다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목숨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가이메이 대학병원 뇌신경외과는 실적이 뛰어나고, 우하라 박사는 천재라고 불리는 분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신은 아니다. 아니, 신이라도 때로는 포기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진단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나는 결코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잃을 것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하라 젠타로 박사에게서 진단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제목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붙어 있었다.

     

  우하라 박사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단정한 얼굴 생김새에 딱히 눈빛이 강한 인상을 풍기는 일도 없고, 침묵하고 있을 때는 입술이 온화하게 닫혀 있다. 환자들이 과도한 기대를 품는 일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지극히 희귀한 사례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왔지만 유사한 케이스는 하나도 없었어요. 따라서 어떤 치료법이 유효한지, 현재로서는 어떤 확실한 말씀도 드리기가 어렵군요.”

  “예에, 역시…….” 나는 낙담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애써 억눌렀다. “이제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네요. 겐토는 평생 저 상태로 지내야겠군요.”

  그렇다, 라는 대답을 예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한시바삐 선고를 내려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기대와 낙담이 거듭되는 동안 내 감성이 모두 소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하라 박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마카스 씨, 나는 지극히 희귀한 사례라고 말씀드렸을 뿐,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치료가 되리라는 보증은 없습니다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내게 박사는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매우 난해했지만, 박사는 하나하나 쉽게 풀어가며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덕분에 아마추어인 나도 희미하게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하라 박사의 말에 따르면, 겐토의 뇌는 거의 정상이지만 어느 한 부분이 손상된 탓에 현재의 식물인간 상태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손상 부위는 현대의 뇌의학에서도 해명되지 않은 미지의 부분으로, 왜 이번 같은 증상에 빠졌는지도 수수께끼이고, 지금 겐토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황화수소 중독이 계기가 되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산소가 뇌에 공급되지 않아 일부 뇌세포가 없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손상 부위가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겐토 군이 갖고 태어난 체질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어떻든 손상 부위가 이토록 적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입니다.”

  기적이라는 말에 나는 저항감을 느꼈다. 그건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나 쓰는 말이 아닌가.

 
 “기적이라고요? 대체 뭐가 기적입니까. 의학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내 아들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식물인간 상태라는 건 여전히 똑같지 않습니까.”

  약간 험한 말투로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우하라 박사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카스 씨, 제가 언제 아드님의 의식이 없다고 말했습니까?”

  그 말의 의미를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엇,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겐토 군은 의식이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내 귀를 의심했다. 여태까지 생각조차 못해본 일이었다.

  “이전 병원에서는 그런 말을 단 한 마디도……. 이름을 불러도 뇌파에 변화가 없다고 했는데요?”

  “우리 대학에만 있는 뇌기능 해석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분자 레벨에서의 변화를 감지하는 게 가능하지요. 대단히 약한 신호지만 겐토 군은 신호를 발하고 있어요. 반쯤 잠든 듯한 상태이긴 해도 의식을 유지하는 뇌세포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박사의 말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처음으로 듣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복음福音이었다.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의식이 있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괴로울까. 그러느니 아예 의식이 없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내 의문에, 그건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고 박사는 설명했다.

  “의식이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고통을 느낄 정도인지 어떤지도 명확하지 않아요. 아무튼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이 아이를 깨어나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예에? 깨어날 수도 있어요?”

  “아직 모르겠어요.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지금까지 유사한 사례는 한 건도 없었으니까요. 우선은 손상된 부위를 복구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상태를 지켜보며 더듬더듬 찾아가는 식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어요.”

 
 “꼭 좀 부탁합니다.” 나는 머리를 숙였다. “비용이라면 얼마가 들어도 괜찮아요. 제가 어떻게든 마련합니다. 겐토를 살려주십시오.”

  “비용 문제가 아닙니다.” 우하라 박사는 말했다. “뇌신경 재생 수술은 몇 번 했었지만 성공률은 결코 높지 않아요. 게다가 앞서도 누차 말씀드렸듯이 겐토 군의 사례는 우리로서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자칫하면 악화될 우려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나는 즉석에서 답했다. 지금보다 어떻게 더 악화된다는 것인가.

  그 뒤, 수술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 또한 난해해서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으로 말하면 수술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손상 부위에 유전자 조작을 행한 암세포를 이식한다. 또 하나는, 뇌에 전극을 심어 특수한 전기 충격을 가한다. 그런 걸 해도 정말 괜찮은지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전문가인 박사님에게 일임하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건 우하라 박사만이 할 수 있는 수술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하라 방식’으로 불린다고 한다.

  박사를 만난 뒤, 겐토를 보러 갔다. 나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마도 의식이 있을 거라는 말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 목소리도 들릴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뭔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톱 페이지의 글을 먼저 읽어두기를 잘했다, 라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만일 그걸 읽지 않은 채 먼저 올린 순서대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면 ‘우하라 방식’으로 불리는 수술이 잘되느냐 마느냐로 몹시도 애를 태웠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톱 페이지의 글에 겐토가 회복되었다는 게 이미 밝혀져 있었다. 그러니 분명 이 수술이 성공한 것이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톱 페이지의 글에 이런 얘기도 있었다는 점이다.

     

  기적적으로 회복한 겐토조차 나에게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겐토가 아니다. 지금의 겐토에게 내가 아버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어떤 비유로서 쓴 것인가. 아니면 부자 관계가 무너질 만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어쨌든 계속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글에는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과 기대가 극심하게 교차하는 아마카스 자신의 정신 상태가 꼼꼼한 필치로 그려졌다. 사소한 일로 엉뚱한 화풀이를 하거나 급작스럽게 우울해지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나라면 진즉 도망쳐버렸을 것이다.

  그다음 글의 제목을 보고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토네이도……!’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왜 느닷없이 토네이도가 등장하는 건가.

  읽어보니 거기에는 뜻밖의 얘기가 있었다. 아마카스 겐토의 수술을 코앞에 두고 우하라 젠타로 박사의 부인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토네이도였다. 11월 초의 연휴에 딸과 함께 홋카이도 친정집에 돌아간 참에 돌연한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아 건물 잔해에 깔려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딸이라는 아이가 우하라 마도카인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녀도 토네이도를 겪었는가. 자신은 살아났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말인가.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사고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런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 따님이 무사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우하라 박사의 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 그 한편으로 나는 몹시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애초에는 우하라 박사도 홋카이도에 함께 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겐토의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취소했다는 것이다. 박사가 함께 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겐토의 수술은 어떻게 될지, 나는 내심 걱정이다. 수술은 중지되는 건가. 우하라 박사의 정신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물론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내 아들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벗어나느냐 마느냐가 걸린 문제이다. 아버지로서 수술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토네이도는 자연재해가 아닌가. 그저 불운했던 것으로 치고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

  글을 죽 읽다 보니 아무래도 수술은 예정대로 집도한 모양이었다. 우하라 젠타로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에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을 살려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와아, 이건 너무 멋진 거 아니야, 라고 아오에는 노트북 화면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수술 당일의 상황이 나왔다. 그렇지만 물론 수술실에서의 일은 아마카스 사이세이도 알지 못할 터라서 오로지 수술이 성공하기만을 기도하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수술은 무사히 끝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뇌신경세포가 재생되고 겐토가 눈을 떴을 때에야 비로소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아마카스 사이세이도 밝혔다.

  그리고 이 글에서부터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리얼타임으로 하루하루의 일을 기록하는 형식이 되었다. 글 속의 날짜와 블로그에 올린 날짜가 일치하는 것이다.

  겐토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아내와 아이들의 생전의 행적을 발굴해내는 작업을 계속한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에피소드를 들을 때마다 그는 놀라고 감격하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했다. 실망할 때는 대부분 자기혐오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라는 자가 그런 것도 알지 못했다니, 나 자신이 한심해진다’라는 뜻의 문장이 빈번하게 나왔다.

 
 아내 유카코는 재력가의 딸로, 부동산을 몇 군데 소유하고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남편에게 기대지 않아도 별반 문제가 없었던 듯했다. 그녀는 영화인으로서의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가 최대한 일을 잘할 수 있게 후원해주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 라고 딸과 아들에게도 타이르곤 했다고 한다.

  모에와 겐토도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삶의 방식에는 이해를 표했던 모양이었다. 특히 겐토는 아버지를 은밀히 존경했고 아버지가 만든 영화를 몇 번이고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내비쳤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참으로 무지했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언제든 대접할 수 있게 아내 유카코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며 술이 항상 떨어지지 않도록 챙겨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남편이 소지한 엄청난 수의 영상 소프트를 정리하고 그 목록을 꼬박꼬박 컴퓨터에 입력해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몸이 차가워 겨울에는 손이 곱아버리는 아버지를 위해 모에가 장갑을 떠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장갑과 한 세트로 레그워머를 만들어 그것을 댄스 연습 때 썼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겐토가 아버지의 낡은 기타를 꺼내다 아버지 영화의 삽입곡으로 쓰인 노래를 연습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노래를 아버지의 생일에 연주하고 거기에 맞춰 모에는 노래를 하는 깜짝 공연을 펼치려고 오누이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었다는 것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글에서는 깊은 회한이 가슴 아플 만큼 전해져 왔다. 자신이 가족에게서 얼마나 존경받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흐뭇한 일이겠지만, 그 가족 중 두 명이 죽고 남은 한 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도리어 고통스러울 뿐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싫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면 어쩌면 조금쯤은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고 써놓기도 했다.

  그런 내용의 글이 몇 편쯤 이어진 뒤에 ‘각성’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왔다. 어떤 예감을 가슴에 품고 아오에는 읽어보았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거기에는 겐토가 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우하라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 나는 크게 당황했다. 겐토의 용태가 악화된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우하라 박사의 목소리가 어둡지 않았다.

  “아무튼 일단 병원으로 나와주십시오.”

  우하라 박사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즉시 병원으로 갔다. 박사는 겐토의 병실에 있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내게 그렇게 말하고 우하라 박사는 곁의 모니터를 작동했다. 거기에는 뇌의 형태가 CG로 표시되었다. 겐토의 머리에는 수많은 전극이 달린 헬멧이 씌워져 있었다.

  이어서 박사는 겐토의 귓가에 대고 ‘축구’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니터 화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뇌의 일부가 붉어진 것이다.

  이어서 박사는 ‘카레라이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뇌의 다른 부분이 붉어졌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나는 물었다.

  “겐토가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구축했어요. 스포츠를 떠올릴 때와 음식을 떠올릴 때는 서로 뇌를 사용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그것을 이용한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고 박사는 겐토에게 “너는 남자야? 아니면 여자? 남자라면 축구, 여자라면 카레라이스”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축구’를 떠올릴 때의 부위가 붉어졌던 것이다.

  “겐토의 나이를 알아볼까? 겐토는 지금 열 살이지? 맞는다면 축구, 틀리다면 카레라이스.”

  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카레라이스’, 즉 ‘아니요’였다.

  “그럼 겐토는 지금 열한 살인가?”

  이것도 ‘카레라이스’였다.

  “그러면 열두 살?”

  나는 숨을 죽이고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그곳에 나타난 대답은 ‘축구’였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겐토는 열세 살이다. 하지만 사고를 당한 이래, 시간 감각을 잃은 것이라면 열두 살이냐는 질문에 대해 ‘예’라는 대답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박사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드님의 뇌는 살아 있어요. 이쪽의 목소리를 듣고 정확히 의사 표시를 하고 있죠. 단지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박사의 말에 나는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이제는 영원히 아들과 의사를 주고받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겐토 곁으로 다가가 불러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겠니? 내 목소리가 들려? 나를 알고 있다면 ‘축구’야.”

  그리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표시된 것은 ‘축구’도 아니고 ‘카레라이스’도 아니었다.

  “왜 그래? 나야, 아버지야. 나, 모르겠니?”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질문을 해봤는데,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는 대답을 못 했어요. 실은 자신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박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름도?”

  “초조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은 겐토 군이 자신의 의사를 몸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그런 날이 올까요?”

  “올 겁니다. 겐토 군의 뇌는 하루하루 변화하고 있어요. 단지 표현한다고 해도 말까지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손끝이 슬쩍 움직이는 것뿐일 수도 있겠지요. 그건 미리 각오해두는 게 좋습니다. 어떻든 뇌신경세포는 분명하게 재생되고 있어요. 이제 시간이 지나면 분명 지금보다 좋아집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손끝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막연하기만 했던 희망이 그날부터 분명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우하라 박사는 완전한 회복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다. 몇 년이든 몇십 년이든 기다릴 작정이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좋은 쪽으로 배반을 당하고 말았다.

  그다음의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겨우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필시 나쁜 전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기쁨과 함께 우하라 젠타로라는 의사의 대단한 활약상이 전해지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식물인간 상태의 겐토와 의사소통을 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축구와 카레라이스. 참 잘도 그런 아이디어를 발명해냈구나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글의 제목은 ‘생명의 깜빡임. 그리고……’라는 것이었다. 글씨를 따라가던 아오에의 마음속에도 기대감이 번졌다.

 
   

  다시 우하라 박사의 호출을 받고 병원으로 갔다. 병실에서 겐토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은 상태였다. 그의 머리에 전극이 줄줄이 달린 헬멧은 없었다.

  박사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겐토 군의 눈을 잘 보세요.”

  그러고는 겐토에게 “내 말이 들리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겐토는 두 차례 눈을 깜빡였다.

  박사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다, 라는 뜻이에요. 아니다, 라고 할 경우에는 세 번을 깜빡여요. 나와 겐토 군이 정한 신호입니다.”

  놀라서 심장이 벌렁 뛰었다.

  “자신의 의지로 눈꺼풀을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도 눈을 깜빡이기는 했지만 단순한 생리 현상이라고 생각했었다.

  “네, 움직입니다. 겐토는 마침내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냈어요. 게다가…….”

  그렇게 말하고 박사는 겐토의 얼굴 앞에서 검지를 들고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그것을 따라가듯이 검은 눈동자가 움직였다.

 
 “안구도 움직여요. 겐토 군이 사물을 보고 있는 겁니다. 명백히 완쾌를 향해 가고 있어요. 이건 놀랄 만한 일입니다. 뇌의 신경세포가 복구되면서 기능도 회복하는 것이죠. 그 속도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박사의 말이 나에게는 신의 소리로 들렸다.

  나는 겐토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겐토, 내 말 들려? 아버지야. 보이니? 아버지 얼굴, 보여?”

  겐토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나는 박사 쪽을 보며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죠?”

  “네 번을 깜빡이는 건 ‘모른다’는 신호입니다. 여전히 겐토 군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박사의 말에 적잖이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보다 겐토가 이만큼 훌쩍 회복했다는 게 참으로 기쁘지 않은가.

  그날 밤, 나는 맥주로 축배를 들었다. 그 저주받은 사건 이후로 홧술은 수없이 마셨지만, 이토록 술이 맛있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아오에는 연달아 글을 읽어나갔다. 겐토가 놀랄 만한 속도로 회복되었다는 것은 글의 제목만 훑어봐도 금세 알 수 있었다. ‘턱을 살짝 움직이다’ ‘표정인가?’ ‘유동식’ ‘손가락 끝으로 신호를’과 같은 제목이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글을 올린 날짜를 보니 몇 주일 간격으로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겐토가 원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해줄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그의 뇌를 활성화시키는 일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양호한 상태로 발전해간 것 같았다. 회복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수술을 담당한 우하라 젠타로 박사 스스로가 ‘경이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수술한 지 8개월 만에 겐토는 표정을 드러내고 유동식도 먹을 수 있었다. 목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입술은 움직였다. ‘금세라도 말을 할 것 같다’고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기록하고 있다.

  특수한 재활치료를 통해 팔다리 근육도 조금씩 움직여졌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인터페이스를 고안해 컴퓨터를 쓰게 할 수 있다. 마침내 그 방법을 마스터한 겐토와 쌍방향의 대화가 가능해졌다. 그때의 상황을 기록한 글의 제목은 ‘나는 누구?’라는 것이었다.

 
 전날 밤부터 거의 한숨도 못 잤다. 드디어 겐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질문하거나 지시했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겐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드디어 분명히 밝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높아지는 것과 함께 두려움도 있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에 겐토는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을까. 아마도 상상을 절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을 받아내는 것은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다. 내가 받아내지 않고서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겐토가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고 나에 관해서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기억이 돌아올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라고 우하라 박사는 말했다. 어떻든 뇌가 손상된 큰 부상인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기대와 각오를 가슴에 품고 병원으로 갔다.

  병실의 겐토는 침대 위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은 상태로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특수 장치가 달려 있다. 손끝을 움직이는 신경 신호를 캐치해 커서를 작동하는 구조라고 했다.

  안녕, 하고 나는 겐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내 쪽을 쳐다보며 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그의 인사다. 사건 직후의 일을 생각하면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도 꿈만 같은 일이다.

  “어떤 것이라도 괜찮아요.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세요.”

  우하라 박사의 말에 적잖이 긴장했다. 실은 겐토에게 맨 먼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나한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라고 말해보았다.

  그 물음에 대해 겐토는 좀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알아듣지 못했는가 싶어서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작스럽게 컴퓨터 커서가 움직이면서 소프트웨어 키보드를 조작했다.

  겐토가 내게 보낸 최초의 메시지는 ‘나는 누구?’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역시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겐토. 아마카스 겐토. 네 이름이야.”

  나는 준비해 온 메모지에 그의 이름을 써서 보여주었다. 그것을 지그시 쳐다본 뒤, 겐토가 컴퓨터에 쓴 것은 ‘당신

 
 를 작동하는 구조라고 했다.

  안녕, 하고 나는 겐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내 쪽을 쳐다보며 두 번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그의 인사다. 사건 직후의 일을 생각하면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도 꿈만 같은 일이다.

  “어떤 것이라도 괜찮아요.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세요.”

  우하라 박사의 말에 적잖이 긴장했다. 실은 겐토에게 맨 먼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나한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라고 말해보았다.

  그 물음에 대해 겐토는 좀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알아듣지 못했는가 싶어서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작스럽게 컴퓨터 커서가 움직이면서 소프트웨어 키보드를 조작했다.

  겐토가 내게 보낸 최초의 메시지는 ‘나는 누구?’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역시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겐토. 아마카스 겐토. 네 이름이야.”

  나는 준비해 온 메모지에 그의 이름을 써서 보여주었다. 그것을 지그시 쳐다본 뒤, 겐토가 컴퓨터에 쓴 것은 ‘당신은 누구?’였다.

  오랜만에 아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건만 나는 서글퍼졌다. 하지만 탄식할 때가 아니었다. 괴로운 것은 분명 겐토 쪽이다.

  “아버지. 너의 아버지야. 이름은 아마카스 사이세이. 영화를 만들고 있어. 영화는 알지?”

  최근 들어 겐토는 표정을 드러내게 되었지만 그때는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마네킹 같은 얼굴을 한 채 다음과 같이 썼다.

  ‘영화 알아. 당신 몰라.’

  하하하, 하고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렇구나. 어쩔 수 없네. 그러면 유카코라는 이름은? 모에라는 이름은? 알고 있어?”

  겐토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럼 학교는? 친구라든가 선생님은? 누구라도 좋아, 기억나는 이름은 없어?”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나는 물었다.

  하지만 겐토가 컴퓨터 화면에 쓴 것은 ‘우하라 선생님. 야마다 씨. 오카모토 씨’였다.

  야마다 씨는 겐토를 담당하는 간호사, 그리고 오카모토 씨는 식사 담당자였다.

  “그 밖에는? 축구 클럽에서 함께 뛰었던 가와카미 군은 어때? 골키퍼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던데? 겐토가 의식이 돌아오면 병문안을 오겠다고 했어. 이제 그 친구들도 여기 병실에 데려올까?”

  겐토가 대답을 쓰기 시작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그는 썼다.

  ‘그만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어? 무슨 말이지?”

  그에 대한 겐토의 대답은,

  ‘이런 이야기 그만하고 싶다’였다.

  가만히 보니 겐토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하라 박사가 뒤쪽에서 말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은 그 정도로 끝내도록 하지요.”

  자신의 기억에 없는 이야기를 해봤자 겐토로서는 괴롭기만 할 뿐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새삼 겐토를 보았다.

  “알았어.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러면 이제 겐토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다시 잠시 틈을 두고 나서 컴퓨터 화면에서 커서가 움직였다.

  ‘피곤하다. 쉬고 싶다.’

  흠칫했다. 이 정도의 작업도 겐토에게는 중노동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그렇겠지? 미안하다. 괜찮아, 이제 그만 쉬어.”

  그리고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어쩌면 겐토도 ‘고맙다’라고 써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커서가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겐토의 얼굴을 보니 이미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아오에는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머리를 내저었다.

  유감스럽게도 부자간의 기념할 만한 첫 접촉은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기대했던 만큼 감동적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들의 의식이 돌아오고 의사소통을 꾀하게 된 것은 큰 기쁨이겠지만, 그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가족 관계가 부활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어진 글에서도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어떻게든 겐토의 기억을 불러내려고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겐토의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겐토는 점점 더 뚜렷이 회복되고 마침내 목소리를 내거나 팔다리를 움직이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그는 과거의 일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겐토는 자신의 과거에 전혀 흥미가 없는 기색을 보였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겐토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난 자신의 능력을 높일 것인가, 라는 단 한 가지에만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겐토는 재활치료에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틈만 나면 언어 발성 훈련을 하고 있다. 컴퓨터를 다루는 일에 관해서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다. 그는 게임을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동영상을 즐긴다. 반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 그 병실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에요.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하라 박사는 내 얼굴을 보며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천연성遷延性 의식장애 환자를 몇 명이나 진료했고, 내가 한 수술로 완쾌된 사례도 적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회복된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죠. 정밀 조사를 해봤는데 뇌의 손상 부분은 거의 복구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건 지극히 소중한 사례입니다. 대학에서 예산을 따내서 다시 철저히 정밀 조사를 해볼 생각이에요. 그렇게 하면 아마카스 씨의 금전적인 부담도 줄어들 겁니다. 협력해주시겠지요? 이미 겐토 군에게는 양해를 구했습니다.”

  물론 협력하고말고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대답하면서 허망함을 느꼈다. 협력이라고?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바로 ‘협력’일 것이다.

  금전적인 부담 따위, 별것도 아니다. 애초에 겐토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그걸로 단 한 사람의 가족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비용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내가 병원에 가면 겐토는 우울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것을 말로 내뱉지는 않지만 나는 감지할 수 있다. 아마도 그에게는, 과거 얘기만 자꾸 들먹이는 ‘아버지라는 중년 남자’는 단지 짜증스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겐토의 기억이 돌아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모에가 자살을 꾀한 이유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봤지만 결국 그건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래서 겐토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곳이었다.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모에의 비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겐토에게 그런 것을 물어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오지 않는 게 좋을까?”

  마음을 굳게 먹고 물어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겐토가 대답했다.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심경을 얼굴에 드러내는 것을 애써 꾹 참았다. 지금의 겐토는 아마도 사람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터였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단 말이지. 응, 그렇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나는 말했다.

  ‘미안하다.’

  화면에 표시된 그 문장을 본 순간, 한 계절이 이제는 끝난 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끝에서 두 번째 글이다. 그다음은 톱 페이지에 떠 있던 ‘잠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마지막 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하고 아오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글에 있는 ‘기적적으로 회복한 겐토조차 나에게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겐토가 아니다. 지금의 겐토에게 내가 아버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라는 문장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자신이 아들 곁에 있어봤자 그를 위한 일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겐토는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는 방해가 될 뿐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마도 괴로운 결단이었을 게 틀림없다. 아마카스 사이세이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과의 두 번째 이별이었던 셈이다. 첫 번째는 아내와 딸과의 이별이었다. 두 번째는 아들의 마음과의 이별이다. 그것을 뛰어넘어 그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자 했다.

  그 뒤에 이 부자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블로그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그로부터 6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겐토는 과연 어디까지 회복되었을까.

 
 아니,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블로그에 기록된 일련의 일들이 최근에 일어난 황화수소 사고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점이다. 한 번 훑어본 것만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곳곳에서 눈에 띄는 키워드는 아오에로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온천지의 황화수소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 두 사람은 모두 영화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인연이 있다. 그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아내와 딸은 다름 아닌 황화수소에 의해 사망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아들은 우하라 젠타로라는 천재 의사가 살려냈다. 그리고 그 의사의 딸인 우하라 마도카는 황화수소 사고가 있었던 온천지에서 한 청년을 찾아다니고 있다…….

  아니, 아니, 라고 아오에는 머리를 내저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키워드들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배열해봐도 도저히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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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52.♡.103
지평선2 (♡.88.♡.15) - 2023/12/01 13:09:37

겐토가 기무라는 아니겠죠?!

단차 (♡.252.♡.103) - 2023/12/01 13:12:01

계속 업데이트를 할게요 ㅋㅋ

지평선2 (♡.88.♡.15) - 2023/12/01 13:13:33

이 많은걸 올리기가 무척 거창하실건데요. 넘 감사합니다.

단차 (♡.234.♡.252) - 2023/12/01 13:50:15

작가한테 미안하죠 저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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