拉普拉斯的魔女 30~35

단차 | 2023.12.03 05:38:27 댓글: 0 조회: 20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4212
 30

     

     

     

     

  가느다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하늘이 어둡다. 아오에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며, 마도카와 겐토라면 이 지겨운 비가 걷히는 시각도 정확히 예측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에, 라고 대답하자 살그머니 문이 열리고 오쿠니시 데쓰코가 들어왔다. “손님께서는 가신 모양이군요.”

  “응, 미안하지만 저것 좀 정리해줄래?” 아오에는 테이블 위의 찻잔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오쿠니시 데쓰코는 쟁반에 두 개의 찻잔을 얹었다. “나카오카 씨라고 했던가요, 그 형사분?”

  “맞아. 그런데 왜?”

  “아뇨, 가시면서 옆방에도 들르셨거든요. 저한테 약간 묘한 질문을 하셨어요.” 오쿠니시 데쓰코는 찻잔을 얹은 쟁반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어떤 질문을?”

  “최근에 아오에 교수님이 뭔가 달라진 듯한 기색은 없었느냐, 누군가 찾아오지 않았느냐, 라고 묻던데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딱히 달라지신 건 없는 것 같다고 했어요. 혹시 제가 잘못 대답했나요?”

  “아니, 아니야, 잘했어. 그랬더니 나카오카 형사는 뭐래?”

  “뭔가 불만스러운 눈치였어요. 그럴 리가 없다는 듯한.”

  “그래?”

  만일, 이라면서 오쿠니시 데쓰코는 진지한 시선을 던져 왔다.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받더라도 저는 이번과 똑같은 대답을 할 생각이에요. 그러면 되겠지요? 아니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까요? 교수님이 요즘 계속 안에 틀어박혀 계시고, 뭔가 고민거리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라고.”

  아오에는 흠칫 놀라서 오랜 세월 함께해온 조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라고 아오에는 대답했다. “그건 안 되지. 그게 그러니까, 오늘 했던 그대로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오쿠니시 데쓰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아, 오쿠니시, 잠깐만.” 뒤돌아보는 그녀에게 아오에는 말했다. “고마워.”

  조교는 아주 조금의 미소를 보이고 방을 나갔다.

  아오에는 의자에 앉아, 절전 모드였던 노트북을 재가동했다.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나카오카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꼭 만나뵙고 싶다, 라는 나카오카의 전화가 온 것은 어제저녁이었다. 아오에는 승낙했다. 나카오카가 진실을 어디까지 파헤쳤는지,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시간 전, 교수실에 찾아온 형사가 한 말은 온천지 사건에서 손을 뗀다는 것이었다. 상사에게서 그런 지시를 받았지만, 아마도 외부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 금지, 나 스스로도 최대한 빨리 잊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고요.” 답답함을 토로하듯이 나카오카는 말투가 빨라졌다.

  그걸 납득하고 받아들였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천만에요”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교수님을 찾아왔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저보다 더 이번 사건에 근접하신 분이잖아요. 교수님의 지적이 없었다면 저도 애초에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내게 압력을 가한 자들이 교수님도 그냥 둘 리가 없다, 반드시 뭔가 액션을 취할 것이다, 라고 짐작했죠. 어떠세요, 제 생각이 틀리진 않았지요?” 나카오카는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역시 대단한 형사라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실제로 액션이 있었던 것이다. 나카오카의 방문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아마도 일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오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아무런 압력도 없었다고 말했다.

  “정말입니까? 어디서도 입단속을 강요하지 않았단 말씀이에요?”

  정말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아오에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재미있게 됐군요.” 왜 그런지 나카오카가 눈빛을 번득였다. “교수님, 여기서 한번 승부를 걸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카오카의 제안은,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아오에 쪽에서 직접 발표해보자, 라는 것이었다. 온천지 두 곳에서 일어난 불가해한 황화수소 중독 사고, 수수께끼 같은 여학생과의 만남, 두 피해자의 공통점과 아마카스 사이세이, 나아가 겐토에 대한 것까지 발표해버리면 분명 세상이 한바탕 떠들썩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윽고 어떤 형태로든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나카오카는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정보가 있다고 말했다.

  “그 블로그, 기억하시지요?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블로그,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아마카스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어떤 부분이 거짓이냐고 물었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이라고 나카오카는 대답했다.

  “황화수소로 딸과 아내를 잃었고 아들 겐토가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가족 간의 관계는 그 블로그 글에 적힌 내용과는 전혀 달랐어요. 아이들은 아버지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나카오카는 아마카스 모에의 동급생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그 블로그 글에 나온 미담 따위가 생겨날 여지는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나카오카는 샅샅이 조사했다. 아마카스는 이상하다고 할 만큼 완벽주의자였고, 가족에게도 똑같이 완벽하기를 강요하는 습성이 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싫어하게 된 것도 그것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라고 나카오카는 추측하고 있었다.

  “어떠세요, 교수님. 이만큼 기삿거리가 갖춰졌는데 언론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뭐하면 제가 아는 신문기자를 소개해드리죠.” 나카오카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아오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진상을 알고 싶지 않아요? 온천지에서 일어난 일이 사고가 아니라 인위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을 명백히 밝히는 게 교수님의 의무라고 말씀하셨었지요. 지금 이대로 넘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추궁하듯이 말하는 나카오카를 향해 아오에는 계속 거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나카오카도 의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교수님,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누군가 접촉을 시도했고, 그래서 뭔가 해명을 들은 거 아니에요?”

  그런 일은 없었다고 아오에는 대답했다. 온천지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상황을 지켜보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연구의 일환이고 형사사건이 될 만한 일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부디 이쯤에서 그만 끝내주시지요, 라고 결국에는 강제로 매듭을 지어버렸다.

  나카오카는 쏘아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쿠니시 데쓰코가 내온 차에는 마지막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됐지만 아오에로서는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 이건 한 나라의, 아니, 인류 전체의 장래가 좌우될 수도 있는 문제다. 아마카스 겐토와 우하라 마도카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세계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경솔하게 공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건 자체는 이제 곧 막을 내릴 것이다. 어떤 모양새로든 수습이 될 터였다.

  나카오카에게 압력을 가한 윗선은 아마도 경찰청일 것이다. 수리학 연구소는 경찰청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하라 젠타로의 이야기를 듣고 담당자들이 경시청에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완벽주의자—.

  조금 전 들은 나카오카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지면서 퍼즐이 완성된 것 같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의 전모가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하라 젠타로가 보여준 영상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그것은 수컷 마우스가 신생아 마우스를 공격하는 영상이었다.

  “이 수컷 마우스는 교미 미경험으로, 당연히 이 신생아 마우스는 친자식은 아닙니다. 이 수컷 마우스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교미 미경험의 수컷은 신생아 마우스에 대해 예외 없이 이런 공격 행동을 보입니다. 그 원인은 신생아 마우스가 발하는 페로몬에 있어요. 그 페로몬에 의해 수컷 마우스의 서비鋤鼻 신경 회로라는 부분이 활성화되면서 공격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미를 경험했고 임신한 암컷 마우스와 동거한 경험을 가진 수컷 마우스의 경우에는 페로몬을 감지하는 기관에서 정보 전달이 억제되기 때문에 이런 공격 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끼를 보호하고 몸을 핥아주는 등, 양육 행동을 하지요. 실제로 이 교미 미경험의 수컷 마우스도 페로몬을 감지하는 기관을 절제해주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하라가 보여준 것은 조금 전의 수컷 마우스가 신생아 마우스에게 몸을 비벼대는 영상이었다.

  “교미 미경험의 수컷 마우스가 신생아 마우스를 공격하는 것은 그 모친인 암컷 마우스와의 교미 기회를 좀 더 빨리 얻어보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식에게 수유하는 동안에는 암컷 마우스의 발정이 억제되기 때문이에요. 한편 아버지가 된 마우스는 제 새끼를 자칫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격 행동이 억제됩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손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지요.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하라는 아오에에게 옅은 웃음을 건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아뇨, 나도 어쩐지 짐작이 갑니다. 아마카스 부자의 얘기지요?”

  우하라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이 친자식을 죽인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 물어보면, 사랑스럽기 때문에, 라는 게 일반적인 답변이겠지요.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근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뇌예요.” 우하라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양육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모든 포유류에 공통된 습성입니다. 그 목적은 자신의 유전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남기려는 것이지요. 그 점은 마우스든 인간이든 똑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마우스처럼 신생아에게 공격 행동 따위는 취하지 않고, 페로몬 같은 단순 구조에 행동이 지배되는 일도 없어요. 하지만 마우스가 그렇듯이 인간의 양육 행동, 남성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부성 행동이라는 것을 봐도 결국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것이에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편의상,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프로그램이 고장 나거나 애초에 결락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양육 행동, 부성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인가요?”

  우하라는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카스 겐토 군의 뇌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방향으로 접근했습니다. 그의 정보처리 능력이 초인적이라는 건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특필해야 할 점이 있었어요. 보통 사람은 인간의 아기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 아기 펭귄 등을 보면 본능적으로 귀엽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수많은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그런 때에 뇌의 어느 부분이 자극을 받는지 밝혀냈습니다. 그것을 부성 패턴이라고 합니다. 연약한 것을 지켜주려고 할 때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겐토 군의 경우, 그게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게 황화수소 중독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검사해봤더니 그게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라는 게 밝혀진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성 결락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유전적이라는 것도 밝혀냈으니까 아마카스 사이세이도 똑같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죠.”

  나아가 우하라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잔학한 흉악범들은 많든 적든 그런 종류의 결락증을 뇌에 품고 있다, 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환경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아요. 결국 그런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동기 따위,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 라는 이유만으로 지인을 살해한 자도 있었잖아요.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왜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유는 있었겠지요. 그로서는 그거면 충분한 거예요. 가족이라서 죽이지 않는다, 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메커니즘이 그의 뇌에서는 애초에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것이지요.”

  아오에로서는 충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뇌에 입력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결락된 인간의 심리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교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뭔가 질문이 있습니까?” 우하라가 물었다.

  “온천지 사건은 어떻게 될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수리학 연구소와 연결된 정부기관의 톱에게는 이미 정보가 전달되었어요. 그들이 뭔가 조치를 취할 겁니다. 어쨌든 겐토 군은 국가의 재산이니까요.”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라고 우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제가 어떻게도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애초에 살인 사건으로 성립이 될지 말지, 그것도 명확하지 않으니까요.”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어떻게 되죠? 8년 전에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인데.”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사태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단계로 돌입해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라고 우하라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교수님도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요. 이건 교수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 연구실로 돌아가 일에 전념해주세요.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든 것을 가슴속에만 담아두셔야 합니다. 남들에게 이야기해봤자 좋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뿐이지요.”

  애초에 아오에도 이 일을 입 밖에 낼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우하라의 말대로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터였다.

  “한 가지만 더 질문해도 될까요?” 아오에는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마도카를 라플라스의 마녀로 만든 것에 대해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우하라는 한동안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언젠가 마도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빠, 이 세상은 물리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라고.”

  아오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무슨 뜻일까요?”

  “나도 그렇게 물어봤어요, 무슨 뜻이냐고. 마도카에 의하면, 인간을 하나의 원자로 보면 이 세계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 일례로, 축제 날의 인파 얘기를 해줬습니다.”

  “축제 날?”

  “축제 날이면 노점이 좌우로 줄줄이 늘어선 좁은 통로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요. 하지만 서로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야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피해주기 때문이겠지요.”

  “그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일까요? 앞쪽에만 신경을 쓰다가는 축제를 즐기기도 어렵잖아요.”

  아오에는 축제 날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윽고 깨달았다.

  “그런 곳에는 인파의 흐름이 생기지요? 저쪽으로 가는 사람과 이쪽으로 오는 사람의 흐름. 그걸 따라가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우하라는 말했다.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생기죠. 왜 그런가. 우선 무질서한 상태를 상상해볼까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피하기에 급급해 걸음을 떼기도 힘들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걸어가기가 아주 수월해져요. 즉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 뒤에 따라붙는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굳이 피해가며 걷지 않아도 돼요. 모두가 그렇게 하다 보면 행렬이 만들어집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힘이 들겠지만, 그 사람도 누군가의 뒤에 따라붙는 방법을 선택하면 부담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피하는 게 아니라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피해가게 하려면 행렬을 굵직하게 만드는 게 효과적이에요.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양측의 사람 수가 비슷하면 결과적으로 길을 좌우로 양분하는 인파의 흐름이 생겨납니다.”

  아오에는 그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우하라의 설명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예에, 정말 그렇군요.”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런 현상을 의식하면서 걸어가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의식중에 자신에게 가장 편한 방법,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뿐이지요. 이건 단순히 축제 날의 행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사랑이라는 것도 유전적인 프로그래밍의 산물입니다. 개개인은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집합체로서 바라볼 경우에는 그 행동을 물리법칙에 적용해 예측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라는 얘기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마도카와 겐토의 눈에는 단순한 물리 현상뿐만 아니라 현대사회가 어디로 나아갈지, 그리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희미하게나마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예측할 뿐이지요. 최근에 마도카가 크게 변했습니다. 명랑한 모습은 부쩍 줄어들고 염세적이 됐어요.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그 아이의 눈에 보이는 것이 그리 바람직한 미래상이 아닌 것이겠지요.”

  우하라는 혼잣말처럼 내 딸아이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했다고 중얼거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카스 사이세이를 비난할 자격이 없어요. 내 딸아이에게서 꿈을 가진 인생을 빼앗았다는 점에서는 그 죄가 똑같이 막중하다고 해야겠지요.”

  우하라 박사의 그 말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새겨보면서 아오에는 마도카를 생각했다. 몇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 아이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카스 겐토를 찾아내기는 했을까.

 
 어디에 있건 부디 무사하기를 빌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공원에서의 일이 눈꺼풀 안에 되살아났다. 그 기적을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불현듯 착신음이 들렸다. 서랍에 넣어둔 채 잊고 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착신 표시를 보고 흠칫 놀랐다. 마도카, 라고 찍혀 있었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응, 나 아오에 교수야.”

  “물어볼 게 있는데요.” 우하라 마도카가 뜬금없이 말했다. “차, 있어요?”

 

 31

     

     

     

     

  조금 전부터 내리던 비가 간간이 기세를 올렸다. 마도카는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기상 정보를 체크했다. 실제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색깔을 확인하고 가로수의 흔들림으로 풍향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어휴, 날씨 진짜 이상하네. 곳에 따라 이상한 구름이 발생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한 구름?”

  “네, 까다로운 구름. 어쩌면 흉조일지도.”

  다케오는 어떤 구름이냐고 묻지 않았다. 질문을 최대한 삼가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챙겨 넣고 마도카는 미즈키 저택 쪽을 지켜보았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지만 치사토가 언제 나올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오늘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가.

  “마도카.” 다케오가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뒤쪽에서 흰색 크라운 차가 오고 있어.”

  돌아보니 흰색 세단이 달려와 마도카 일행의 왜건 뒤에서 멈췄다.

  시계를 보았다. 전화하고 아직 한 시간도 안 되었다. 정말 급하게 달려와준 모양이다.

  마도카는 슬라이드도어를 열고 왜건 밖으로 나왔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쪽 차로 달려가 운전석의 아오에를 확인하고는 조수석 쪽 문을 열고 잽싸게 올라탔다.

  “죄송해요, 무리한 부탁을 해서.” 옷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마도카는 인사를 건넸다.

  “응, 솔직히 깜짝 놀랐지.” 아오에가 말했다. “느닷없이 차를 빌려 달라질 않나, 사정은 나중에 얘기하겠다고 몰아붙이질 않나.”

  “시간이 없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감사드립니다.”

  앞의 왜건에서 다케오가 내려서 이쪽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

  “저분이 운전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교수님은 저 앞의 왜건 차를 타고 집에 가시면 돼요.”

  “아, 잠깐. 아직 무슨 일인지 얘기를 안 했잖아.”

  “다음에요. 다음에 꼭 설명해드릴 테니까 오늘은 그냥 가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지금 들어야겠어. 아니면 차는 못 빌려줘.” 아오에는 두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었다.

  마도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 치사토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밖에서는 다케오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서 있었다.

  “오케이, 알았어요. 얘기할게요. 얘기할 테니까 우선 운전석부터 비워주세요.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행해야 하거든요. 근데 교수님은 미행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미행? 누구를?”

  “글쎄 그것도 다 얘기한다니까요.”

  “운전석 비워주자마자 나만 떼어놓고 달아나는 거 아니야?”

  “그런 짓은 안 해요.”

  “아니, 믿을 수가 없어.” 아오에는 안전벨트를 풀고 등받이를 바짝 뒤로 젖힌 뒤 비좁은 공간을 뚫고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진짜로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아오에가 무사히 뒷좌석에 자리를 잡자 다케오가 운전석에 올랐다.

  “교수님,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다케오가 좌석 위치를 조정하는 모습을 곁눈으로 지켜보며 마도카는 물었다.

  “대략적인 건 우하라 박사에게서 들었어. 너와 아마카스 겐토의 특수 능력에 관한 얘기도.”

  “그 밖에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뭔가 얘기했어요?”

  “우하라 박사는 한 가지 추리를 하고 있었어. 정말 엄청난 얘기야. 두 군데 온천지에서 일어난 일이 아마카스 겐토에 의한 복수극이고, 그 시초는 8년 전에 일어난 황화수소 중독 사건, 그리고 사건의 주모자는 아마카스 사이세이. 그래서 겐토가 결국에는 부친을 노릴 거라는 얘기야.”

  마도카는 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천재적인 뇌 과학자라니까. 거기까지 꿰뚫어 보다니, 우리 아빠지만 진짜 감탄할 수밖에 없네요. 그럼 겐토 군의 기억상실이 연기라는 것도 눈치챈 거예요?”

  “겐토가 자신의 나이만은 대답했던 것을 계속 미심쩍게 생각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확신하게 됐다고 하시더라.”

  “그랬구나.” 마도카는 아버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역시 대단하셔”라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겐토도 그때 나이를 대답해버린 건 중대한 실수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얘기였어. 아비라는 사람이 제 가족을 몰살시키려고 하다니. 우하라 박사에게서 부성 결락증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그런 주장은 믿지 못했을 게야.”

  “부성 결락증? 그게 뭐예요?”

  “너는 몰랐어? 아마카스 부자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난 뇌의 결함이라던데.”

  “무슨 얘기죠?”

  “그러니까 이를테면 마우스의 경우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아오에는 부루퉁해져서 마도카를 쏘아보았다. “잠깐, 왜 나만 대답하고 있지?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 너잖아.”

  “하지만 교수님이 어디까지 아시는지 먼저 알아야 나도 설명을 해드릴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 대략적인 건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마도카, 라고 다케오가 말했다. “여자가 나왔어!”

  흠칫해서 앞쪽을 보았다. 미즈키 저택의 카포트에서 빨간 마세라티가 나오는 참이었다.

  다케오가 시동을 걸었다. 마도카는 뒤를 돌아보며 양손을 맞댔다.

  “교수님, 미안해요. 지금 미행을 시작해야 돼요. 어서 내려주세요.”

  “뭐야? 난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

  “다음에 말할게요. 꼭 설명해드린다니까요. 제발.”

  “안 돼.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마도카, 라고 옆에서 다케오가 채근했다. “지금 즉시 출발하지 않으면 놓쳐.”

  딱 2초 동안 고민하다가 마도카는 “출발해요”라고 지시했다. 다케오가 액셀을 밟았다.

     

  빨간 마세라티는 주행 차선의 다섯 대 앞을 달렸다. 속도는 그리 내지 않고 있었다. 안전 운전을 하려는 것이리라. 어설프게 이런 데서 교통경찰 오토바이에 걸리기라도 하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저택을 나선 뒤, 일반 도로를 잠깐 달리다가 곧바로 고속도로를 탔다. 그로부터 약 30분이 지났다. 치사토의 행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뒷좌석의 아오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미즈키 치사토를 미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그도 납득한 것 같아서 그만 차에서 내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려줄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함께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마도카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오에는 부성 결락증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그건 마도카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겐토에게는 분명 잔혹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축제 날, 노점에 나온 병아리를 보고 구워 먹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짓이지, 라고 마도카가 말했더니 닭은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왜 병아리는 안 되느냐고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또 언젠가는 대학병원에 입원한 난치병 꼬마에 대해, 태어났을 때 이미 몇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게 판명되었다면 좀 더 일찌감치 안락사를 시키는 게 나았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단 몇 년이라도 그야말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마도카의 말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어중간하게 살려두면 자기들도 힘들 텐데, 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겐토에게 그런 피를 물려준 것이 바로 부친 아마카스 사이세이인 모양이다. 그 두 사람이 이제 곧 대치하게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안 된다. 어떻든 일이 평화롭게 끝날 리는 없다.

  마도카로서는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죽는 건 상관없었다. 죗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겐토다. 오랜 세월의 원한을 풀고 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세라티를 눈으로 좇고 있는데 뒤에서 아오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마도카, 혹시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가족을 해치게 된 동기에 관해 겐토가 뭔가 얘기한 적이 있었니?”

  “단순한 이기심이라고 했어요.” 앞을 향한 채 마도카는 대답했다. “머리가 돌아버린 인간이 저지른 이기적인 범죄였대요.”

  “구체적인 얘기는?”

  마도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못 들었어요.”

  “그렇군.”

  “왜요?” 마도카는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교수님은 뭔가 아세요?”

  “내가 알았다기보다 이 사건을 여태까지 수사해온 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나카오카 형사라고, 내가 전에 얘기했었지? 그 형사가 아마카스 사이세이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해줬어. 젊은 시절부터 아마카스는 완벽주의자였다, 스스로도 항상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했고,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도 자신의 이상을 강요했다, 라는 거야.”

  “역시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래서 교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아마카스가 가족을 해친 이유는 그들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예?”

  “아내도 딸도 아들도, 자신이 꿈꿔온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어. 완벽하지를 않았지. 그래서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즉 죽이기로 했다. 어때, 그런 거 아닐까?”

  “그게 뭐예요?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집을 나가면 되잖아요. 부인과 이혼하고 아이들과도 헤어져서 살면 되죠. 그리고 새로 이상에 맞는 가족을 만들면 될 거 아니에요. 아, 혹시 위자료가 아까웠다던가?”

  “그건 아니겠지. 아마 돈이 걸린 문제는 아닐 거야. 아마카스로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단순히 헤어지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었겠지.”

 
 설마, 라고 중얼거렸을 뿐 마도카는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오에의 주장은 겐토가 말했던 ‘머리가 돌아버린 인간이 저지른 이기적인 범죄’라는 표현에 딱 맞는 것이었다.

  “마도카.” 다케오가 급하게 말했다. “마세라티에 움직임이 있어.”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세라티가 왼쪽 깜빡이를 깜빡거리고 있었다. 휴게소로 들어갈 모양이다.

  다케오도 똑같이 깜빡이를 켜고 휴게소 진입로로 차를 몰았다. 의심을 사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간 끝에 마세라티에서 20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주차했다.

  치사토가 차 밖으로 나왔다. 한 차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가는 건가?” 다케오가 말했다.

  “아, 그런 모양이네요. 우리도 다녀오기로 하죠.” 마도카는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세찬 비는 가랑비로 바뀌었다.

  예상대로 치사토는 화장실에 갔다. 마도카도 들어가 우선 볼일부터 봤다. 개인 칸에서 나오자 치사토가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거울을 마주하고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긴박감이 엿보였다. 뭔가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새삼 바라보며 예쁜 여자라고 생각했다. 겐토는 어떻게 이 여자를 한편으로 만들었을까. 치밀한 사전 조사와 주도면밀한 준비 끝에 접근했겠지만, 마지막에는 남녀 관계를 맺었을 게 틀림없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자마자 가슴속에 꺼끌꺼끌한 불쾌감이 스쳤다. 질투심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마도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치사토의 뒤를 따라 화장실을 나와 차로 돌아왔다. 다케오와 아오에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마세라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치사토는 차에 탄 뒤에도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문득 주위가 음울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둠이 쓰윽 덮쳐든 듯한 감각이었다. 마도카는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숨을 헉 삼켰다.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온몸에 오싹할 만큼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얼굴 생김새는 기품 있고 단정하지만 그 눈빛에 온화함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 라고 마도카는 확신했다. 겐토는 전혀 달갑지 않겠지만 얼굴 생김새에 공통점이 아주 많았다.

  생각했던 대로 검은 코트의 남자는 마세라티 차로 다가갔다. 안을 굽어보더니 이윽고 조수석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만났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마도카 바로 옆에서 툭툭 치는 소리가 났다. 왼쪽을 돌아보니 양복을 입은 마른 남자가 차 옆에 서 있었다.

  마도카는 파워윈도를 내렸다. “왜요?”

  “우하라 마도카 씨?”

  “네, 그런데요?” 경계심이 들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가.

  “안심해요. 수상한 사람 아니니까. 경찰청 형사국에서 나왔어요.”

  “경찰청?”

  “즉시 차에서 내려요.”

 
 “왜요?”

  “마도카 씨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부탁 좀 합시다.” 남자가 슬쩍 머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우리 일행 역시 미행을 당한 모양이다. 왜건에는 발신기만 부착된 게 아니라 따로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마도카는 잽싸게 머리를 굴리며 마세라티 쪽을 흘끗 살펴보았다. 치사토와 아마카스가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속이 바작바작 탔다.

  “저기 빨간 차라면 걱정할 거 없어. 우리 팀 동료가 추적할 거야. 마도카 씨는 나와 함께 여기 남으면 돼. 이제 곧 지원 차량이 도착할 예정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허리를 숙여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다케오 씨지요?”

  예에, 라고 다케오가 대답했다.

  “다케오 씨는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도쿄로 돌아가세요. 뒷일은 우리가 인수할 겁니다.”

  결정을 내려달라는 듯이 다케오가 마도카를 보았다. 남자의 말을 통해 마도카는 미행 차량이 한 대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대 모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하라는 대로 하죠. 일단은.”

  알았어, 라고 다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카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세라티 쪽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지만 곧바로 쓴웃음을 지으며 신분증을 꺼내 마도카에게 내보였다.

  “이제 믿을 거야?”

  마도카는 대꾸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팀 차는 어디 있죠?”

  “저쪽에 주차해뒀어.” 남자가 손끝으로 가리켰다. “감색 RV 차 옆의 검은 세단.”

  차를 발견하자마자 마도카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쫓아왔다. “뭘 하려고?”

 
 그 질문에도 마도카는 대꾸하지 않았다. 총총걸음으로 검은 세단을 향해 다가갔다.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차를 출발시킬 기미가 없는 것은 마세라티가 아직 움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파워윈도가 천천히 내려갔다. 마도카는 핸들 옆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전자식 키가 제 위치에 꽂혀 있었다.

  “무슨 일이지?” 운전석의 남자가 마도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뭐?”

  “신분증, 빨리요.”

  뒤따라온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얼른 보여줘”라고 말했다.

  운전석의 남자가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마도카는 그것을 받아 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됐지?” 남자가 운전석에서 손을 내밀었다.

  “왜 경시청이 아니고 경찰청 쪽에서 나왔어요?”

  “그건 마도카 씨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말을 하다가 남자는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지며 엇 하는 소리를 흘렸다.

  마도카는 뒤를 돌아보았다. 빨간 마세라티가 천천히 출발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어서 신분증 돌려줘.”

  “알았어요.” 마도카는 신분증을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 쪽으로 홱 던졌다. 남자가 불끈 화가 난 기색으로 조수석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도카는 핸들 옆으로 손을 내밀어 잽싸게 키를 뽑아냈다.

  앗 하는 소리를 올린 사람이 운전석의 남자인지 아니면 옆에 서 있던 남자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마도카는 이미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오에의 크라운 차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하지만 거의 다 도착한 참에 남자에게 어깨를 잡혔다. 억센 힘으로 잡아채는 바람에 마도카는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했다.

  “놔요!”

 
 “안 돼, 키를 줘!”

  마도카는 키를 움켜쥔 채 등을 웅크리고 앉아버렸다. 남자가 위에서 덮치며 마도카의 손에서 억지로 키를 빼앗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덮쳐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허리를 부여잡고 있다.

  바로 옆에 다케오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남자를 내동댕이친 모양이었다.

  또 한 명,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마도카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 손이 마도카에게 닿기 전에 다케오는 남자를 붙잡아 두 팔을 뒤로 꺾었다.

  “여기는 내가 맡을게!” 다케오가 소리쳤다. “운전은 교수님한테 부탁해. 얼른!”

  “알았어요.”

  마도카는 다시 몸을 날려 크라운 차로 갔다. 아오에가 차 밖에 나와 있었다.

  “운전해요, 빨리!” 조수석으로 뛰어들면서 외쳤다.

  아오에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급히 출발하면서 핸들을 크게 꺾었다. 마도카는 안전벨트를 매면서 다케오 쪽을 보았다. 그는 두 남자와 몸 씨름을 하고 있었지만 아오에의 차가 무사히 출발하는 것을 보고 슬슬 힘을 빼는 것 같았다.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지만 역시 보디가드이기도 했어—.

  마도카는 퍼뜩 그런 생각을 했다.



 32

     

     

     

     

  핸들을 움켜쥔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손뿐만이 아니라 양 무릎까지 파들파들 떨린다. 옆에서 싸한 기운이 휘감겨 오는 것만 같다. 치사토는 태어나 지금까지 이토록 큰 공포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이 결코 들어와서는 안 될 영역에 끌려들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로 얘기했던 대로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조금 전 휴게소에 나타났다. 가랑비의 옅은 안개 속에 검은 코트 차림으로 다가오는 아마카스는 불길한 세계의 사자使者 같았다.

 
 치사토는 그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무라의 얼굴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왜 여태까지 알지 못했을까. 두 사람은 분명 부자간이라고 그제야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두 번째 표적이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것을 알고 치사토는 그의 블로그 글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겐토라는 아들이 등장했다. 글에는 그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회복 중이라는 장면까지 나왔었다. 그렇다면 그 뒤로 순조롭게 회복했다는 얘기인가. 그리고 이제는 제 부친을 살해하려고 한다는 것인가.

  아마카스는 차 안을 들여다보더니 조수석 문을 열고 옆에 앉으면서 “혼자로군”이라고 말했다.

  “네. 그런데 왜요?”

  “아니, 동행이 있을 줄 알았거든. 흥, 그렇군. 목적지에서 기다릴 심산인 거야.”

  “누가요?”

  치사토가 묻자 그는 큭큭 목을 울리는 것처럼 웃었다.

  “시치미 뗄 거 없어. 전부 다 알고 있어. 그래서 나도 댁의 급한 호출에 순순히 이런 묘한 곳까지 찾아온 거야. 통화할 때 내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치사토는 침만 꿀꺽 삼켰다. 그러자 아마카스가 “그 녀석은 잘 지내나?”라고 물었다. “내 아들 녀석 말이야.”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두 사람은 부자간인 것이다. 게다가 아마카스는 지금 가는 곳에서 아들이 잠복 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치사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마카스는 다시 기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야 당연히 쌩쌩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짓은 못 할 테니까. 멀쩡한 성인 남자 셋을 연달아 죽이려 들다니.”

  치사토는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아마카스도 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세상에 이런 부자간이 또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아주 재미있군. 그 녀석이 어떻게 당신을 꼬드겼을까. 보통은 아무리 유산에 욕심이 나더라도 웬만해서는 살인에 가담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나는요, 라고 치사토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살인에 가담한 적 없어요.”

  “아, 그러셔?”

  “나는 남편과 아카쿠마 온천에 간 것뿐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황화수소 사고를 당했다고?”

  “그래요, 내가 대체 뭘 어쨌다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반론을 내밀었다.

  아마카스는 잠시 침묵한 뒤 “뭐, 좋아”라고 말했다.

  “남편이 사망한 건도 그렇고, 도마테 온천에서 나스노가 죽은 건도 불행한 사고일 뿐 사건성은 없다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모양이더군. 대체 어떤 방법으로 해치웠는지 실은 나도 짐작이 가질 않아. 하지만 양쪽 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거, 그건 내가 알지. 누구 짓인지도. 그 뒤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녀석 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말이야. 어떤 식이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더니만 당신이 전화를 했더라고. 아, 이거구나, 딱 감이 왔지. 녀석이 당신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거야. 당신이 거기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녀석이 뭔가 마술을 구사해서 두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야. 그렇잖아?”

  치사토는 대답이 궁했다. 반론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자 아마카스가 “갑시다”라고 말했다. “출발하자고. 녀석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입을 꾹 다문 채 치사토는 차를 출발시켰다. 문득 깨닫고 보니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줄곧 멈추지 않는 상태로 운전을 하고 있다.

  아마카스는 이따금 헛기침을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기만 했지만 치사토는 그래도 기무라가, 아니, 아마카스 겐토가 지시한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 인터체인지가 다가왔다. 치사토는 깜빡이를 켰다. 그러자 아마카스가 “여기였어?”라고 중얼거렸다. 뒤를 이어 흥 코웃음을 쳤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33

     

     

     

     

  아오에는 이것이 과연 현실인가, 의심하면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대학 연구실에 있었던 몸이다. 그런데 지금은 고속도로 위에서 빨간 마세라티를 추적하고 있다. 조금 전에는 휴게소에서 액션 영화 같은 격투극까지 목격했다. 이 일에 휘말리기 전까지 자신과는 전혀 인연이 없던 세계다. 하지만 지금, 그 세계의 한복판에 떨어져 있다. 꿈이 아니라는 건 물론 잘 알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앞쪽에서 달리던 빨간 차가 깜빡이를 켰다.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나가려는 것이다. 아오에는 바짝 긴장했다.

 “이상한 곳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네.” 조수석에서 마도카가 혼자 중얼거렸다. “왜 하필 이런 곳이지?”

  아오에도 알 도리가 없는 일이라서 “그러게 말이야”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세라티의 뒤를 이어 인터체인지를 나왔다. 지금까지는 다른 차량을 몇 대쯤 사이에 끼고 미행했지만 이제부터는 그것도 어려울 것 같다. 들키지 않으려면 상당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일반 도로로 나서자 예상대로 교통량이 부쩍 줄어들었다. 첫 번째 신호에서 마세라티 바로 뒤에 붙고 말았다.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미즈키 치사토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쪽 차를 의식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미행을 눈치채지는 않은 것 같았다.

  파란불이 켜지고 마세라티가 출발했다. 아오에도 액셀을 밟았다.

  그다음 사거리에서 마세라티가 왼편으로 꺾어 들었다. 똑같이 좌회전을 하면서 이건 별로 안 좋은데, 라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폭이 좁은 도로는 아무래도 근처 산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외줄기 길이라 따라가기는 쉽지만 거꾸로 말하면 상대에게 들킬 위험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아오에는 속도를 약간 늦췄다. 좀 더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빗발이 강해졌다. 와이퍼의 리듬을 빠르게 높이고 앞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길이 구불구불해서 이따금 빨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옆에서 스마트폰을 터치하던 마도카가 “앗, 이건가?”라고 혼잣말을 흘렸다.

  “왜, 뭔가 찾아냈니?”

  “어째서 여기로 왔는지, 이것저것 검색해봤어요. 겐토 군이 이쪽을 선택한 거라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랬더니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예전에 이 지역에서 영화 촬영을 했다는 내용이 떴어요.”

  “오호, 영화 로케지였어?”

  “「폐허의 종」이라는 영화예요. 아마카스 감독이 찍은 마지막 작품이라는데요?”

  “그 제목이라면 나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어. 흠, 그 영화 얘기였군.”

 
 그때였다. 앞쪽에 갈림길이 나타나면서 마세라티는 명백히 샛길로 보이는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섰다. 아오에는 다시금 속도를 늦춰 그 길 입구로 다가갔다. 거기에 입간판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막다른 길>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어. 여기서 더 쫓아가면 상대 쪽에서 금세 눈치챌 거야.”

  마도카는 잠시 생각하더니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상관없으니까 계속 가요.”

  “상관없기는? 반대편으로 나가는 길이 없는 곳이야.”

  “그러니까 가야죠. 여기가 목적지라는 얘기잖아요. 종점이라고요. 겐토 군이 거기 있을 거예요. 그를 만나기만 하면 이제 저 사람들한테 들켜도 상관없어요.”

  자신만만한 그 말투에 아오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뗐다.

 

 
 34

     

     

     

     

  폭은 좁지만 포장도로인 데다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주위는 온통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제대로 손질해주던 시절에는 이 길로 접어들면서부터 벌써 방문객들은 가슴이 뛰었을지도 모른다.

  치사토는 바로 얼마 전에 이곳을 알았다. 기무라의 안내로 다녀갔던 것이다. 여기가 마지막 장소, 라고 그는 말했었다.

  이윽고 앞쪽으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이고 지붕이고 온통 회색빛으로 보이지만, 까마득한 옛날에는 아마 선명한 흰색이었을 것이다. 아르데코풍의 창문들이 줄줄이 달렸으나 그 유리 대부분이 깨지거나 없어진 것을 치사토는 알고 있다.

  건축된 것은 거의 100년 전이라고 들었다. 독일 군인의 별장이었는데 소유주는 오래전에 사망했고, 그 뒤에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용도가 바뀌다가 결국 버려졌다는 얘기였다. 폐허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건물이라고 했다.

  이윽고 도로가 로프로 가로막혔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로프를 풀어버리면 못 들어갈 것도 없지만 그 뒤쪽은 건물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억지로 들어갔다가는 금속 조각에 타이어가 펑크가 날 우려가 있었다. 치사토는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조수석의 아마카스에게 말한 뒤, 뒷좌석의 코트와 우산을 들고 치사토는 차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차가웠다. 서둘러 코트를 걸치고 우산을 펼쳤다. 여전히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카스도 차에서 내렸다. 건물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아, 반갑네”라고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10여 년 전이야. 거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 아마카스는 피식 웃으며 치사토를 보았다. “하긴 그렇지. 여든 살 할머니가 아흔이 되어봤자 별반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농담이라고 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치사토는 웃을 마음 따위는 없었다. 가시죠, 라고 말하고 걸음을 뗐다.

  발밑을 조심해가며 건물로 다가갔다. 멀리서 보면 멋스러운 서양식 건물 같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직도 서 있다는 게 이상할 만큼 썩어버린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벽에 무수히 금이 가서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정면 현관은 차를 댈 수 있는 지붕 역할도 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콘크리트 부지 곳곳에 금이 가고 거기에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유리는 깨지고 얼룩진 철골만 남은 현관문은 반쯤 열린 상태로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치사토는 그 틈새로 슬쩍 몸을 들이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예전에는 홀로 쓰였던 공간으로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가 구석에 흩어져 있었다. 천장은 높직하게 위까지 뚫렸고, 오른편에는 2층 회랑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었다.

  치사토는 시계를 보았다. 거의 예정대로의 시각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이제 곧 그가 나올 거예요.”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흘끗 노려보았다. “당신은?”

  “밖에서 기다릴게요.” 치사토는 현관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마카스가 오른손을 홱 잡아챘다.

  “그건 안 되지. 내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곤란해.” 치사토의 팔목을 움켜쥔 채 아마카스는 2층 회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겐토, 어서 나와! 서로 얼굴 보면서 얘기하는 게 좋잖아? 아니면 이대로 황화수소를 내뿜을 생각인가? 아니, 그랬다가는 이 여자도 무사하지 못해. 어때, 그래도 괜찮겠냐? 복수를 위해서는 관계없는 사람까지 죽어 나자빠지는 것도 감수할 거야?”

  나지막하지만 배 속에서 밀어 올린 그 목소리는 어슴푸레한 공간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호응하듯이 멀리서 우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위에서 나무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 정면 회랑에 쓰윽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기무라, 아니, 아마카스 겐토였다.

  큭큭큭 하고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목을 울렸다. 그 눈빛이 번뜩였다.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35

     

     

     

     

  빨간 마세라티 옆에 차를 세우고 마도카는 아오에와 함께 길 안쪽으로 걸어갔다. 치사토와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행선지는 이미 파악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폐허가 된 모양이다.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폐허의 종」이라는 영화의 로케지로 사용했다는 건물일 터였다.

  비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바람에 꽤 세진 것 같았다. 마도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의 천둥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같은데?” 걸음을 옮기면서 아오에가 말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저 건물 말이야.” 그는 앞쪽의 폐허를 턱으로 가리켰다. “벽에 온통 금이 갔잖아. 그래서 레고 같다고 생각했어.”

  “레고?”

  “장난감 블록 말이야. 조립해서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내지. 좀 부끄럽지만, 그게 내 취미야. 유명한 성이나 교량을 만들고 있어. 유감스럽게도 다 만든 뒤에는 사진만 찍고 곧바로 해체해야 돼. 그대로 놓아두면 거치적거린다고 해서.”

  그의 말에 마도카의 머릿속에서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녀는 발을 멈췄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 미안”이라고 아오에가 사과했다. “내가 엉뚱한 얘기를 했구나. 너무 긴장해서 그걸 풀어보려고 나도 모르게…….”

  “알아냈어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마도카는 외쳤다.

  “뭐?”

  “겐토 군이 노리는 게 뭔지 알아냈다고요.”

  “무슨 소리야?”

 
 하지만 설명해줄 여유는 없었다. 마도카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형, 구름 상태, 건물 배치 등등. 그런 정보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까지 1분쯤 걸렸다.

  “다시 차로 돌아가요!” 발길을 돌려 마도카는 뛰었다.

  “뭐야, 어떻게 하려고?” 아오에가 뒤따라오면서 물었다.

  “됐으니까 빨리요, 시간이 없어요.”

  차에 타기 전에 출입금지 팻말이 걸린 로프를 풀어버렸다.

  “시동 걸어요. 그대로 직진하면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 조수석에 앉았다.

  “이 길로? 바닥이 온통 잔해투성이야!”

  “그래도 못 가는 건 아니잖아요. 차가 망가지면 배상할게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오에는 차를 출발시켰다. 잔해 더미가 걸릴 때마다 차체가 출렁 뛰었다. 아오에는 핸들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건물로 바짝 다가간 참에 “스톱!”이라고 마도카는 말했다. 아오에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5미터 정도만. 좀 더, 좀 더. 네, 여기예요. 엔진 끄고 밖으로 나가요.”

  차와 건물의 거리는 약 15미터였다. 머릿속에서 계산해보고 이 정도면 된다고 확인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일단 겐토의 계획을 어그러지게 하는 건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만 남았다. 마도카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돌연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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