拉普拉斯的魔女 36~40 (완결)

단차 | 2023.12.03 05:47:03 댓글: 2 조회: 21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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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겐토는 말없이 회랑을 지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자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작년 1월쯤이었나, 텔레비전을 보는데 미즈키 요시로가 출연했더라고.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나타난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어. 가까운 시일 내에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자세한 건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고 주인공 모델이 된 인물이 직접 메가폰을 잡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즉각 당신 얘기라고 확신했어. 동시에 미즈키와 당신 사이의 더러운 관계가 아직껏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바로 그때 이 복수 계획을 짜게 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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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겐토는 말없이 회랑을 지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자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작년 1월쯤이었나, 텔레비전을 보는데 미즈키 요시로가 출연했더라고.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나타난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어. 가까운 시일 내에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자세한 건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고 주인공 모델이 된 인물이 직접 메가폰을 잡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즉각 당신 얘기라고 확신했어. 동시에 미즈키와 당신 사이의 더러운 관계가 아직껏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바로 그때 이 복수 계획을 짜게 됐어. 언젠가는 반드시 단죄할 생각이었지만 당신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해서는 어떻게도 해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즈키에게 접근하면 분명 기회가 있을 것 같았어.” 그렇게 말하고 겐토는 양팔을 펼쳤다. “자아,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그 사람은 좀 풀어주시지?”

  “네 말을 덥석 믿어버릴 만큼 난 어수룩하지 않아.”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말했다. “이 여자를 풀어주자마자 어딘가에서 가스가 발생하게 만들어뒀을 수도 있거든.”

  겐토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처음에는 당신을 황화수소로 보내버릴 생각이었어.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의 로케지인 이 폐허에서. 쓰레기 인간이 죽을 자리로는 쓰레기 영화의 무대가 그야말로 잘 어울리니까.”

  “흥, 내가 만든 영화 따위는 안 본다고 하지 않았나?”

  “안 봤어. 하지만 쓰레기 영화라는 건 알아. 이 폐허가 무대라는 건 어딘가 화장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팸플릿을 보고 알았어. 그때 이곳에서 보내버리자고 결심했지. 하지만 몇 차례 사전 답사를 해보는 사이에 황화수소 중독사보다 좀 더 멋진 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오늘 이 시각에 당신을 이 자리에 세워놓기만 하면 그게 가능한 거야. 그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지.”

  “오호, 어떤 죽음일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아무튼 황화수소는 아니야. 그러니 안심하시고 그 여자는 풀어줘.”

  “그렇다면 여자는 풀어주겠지만, 그 전에 잠깐 얘기나 할까? 말해봐, 넌 언제 알았던 거야?”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목소리 톤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때 집 안에 황화수소를 발생시킨 사람이 나라는 거.”

  흠칫 놀라서 치사토는 아마카스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제 가족을 죽인 것인가.

  “그야 뻔하지. 처음부터 다 알았어.” 겐토는 태연히 대답했다. “병원에 달려온 당신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말했어. 멋지네, 이런 스토리도 좋지, 드라마가 되겠다…….”

  “내가 그랬었나?”

 
 “그러고는 전화를 걸었어. 상대는 미즈키 요시로였지. 당신이 어떤 소리를 지껄였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 우선 이렇게 말했어. 미즈키 씨, 내 얘기 들어봐. 아들놈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식물인간 상태야.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해. 아마 의식도 없을 거야. 그냥 숨만 붙어 있어. 어때, 이것도 재미있잖아? 가족이 모두 사망한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고. 이건 정말 기막힌 스토리가 될 거야……. 그러더니 당신 말투가 약간 바뀌었어.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지. 이봐, 미즈키 씨, 이제 와서 꽁무니 뺄 거야? 진짜 스토리라면 좋겠다, 박력 있는 실화라면 좋겠다고 말한 건 당신이야. 괜찮아, 걱정 말라고. 그보다 나스노 그 친구는 제대로 움직여줬지? 나 대신 돌아다니면서 알리바이는 잘 만들어뒀느냐고.” 겐토는 줄줄 외우듯이 말한 뒤, 후우 긴 숨을 토해냈다. “어때,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끄덕끄덕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맞아, 내가 미즈키에게 그런 전화를 했었어. 그렇군, 그때 의식이 있었던 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까?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어. 식물인간 상태에서 단순히 악몽을 꾸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어. 이윽고 뇌의 기능이 회복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지만 당신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척했던 거야.”

  “흥, 그런 거였어?”

  “아들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을 보고 솔직히 당신은 초조했겠지. 어떤 말을 하고 나설지 몰라 꽤 두려웠을 거야. 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당연히 마음이 놓였겠지. 그래서 그런 블로그를 개설했을 거고. 거짓말로 가득 찬 블로그를.”

  “그래도 그 블로그 글에는 지금도 감동의 찬사가 밀려들고 있어.”

  “허접하기는. 그딴 것에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러자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혀를 끌끌 찼다.

  “도통 뭘 모르는구나. 넌 아무것도 몰라.”

  “뭘 모른다는 거지?”

  “내가 왜 너희를 한꺼번에 죽이려고 했을까. 한마디로, 너희에게 실망했기 때문이야.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인물의 가족으로서는 완전 실패작이었단 말이야.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실수였고, 태어난 자식들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어. 특히 기막힌 건 모에였지. 나이도 어린 게 임신까지 하고. 그때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실패작은 새로 만들어야지. 나에게 어울릴 만한 가족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면 이혼을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 넌 뭘 모른다는 거야. 천재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이 세상에 그따위 실패작을 남겨둘 거 같아? 어떻게든 완벽한 작품으로 마무리해야지. 살아 있는 너희에게 그건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서 일단 말소해버린 뒤에 새롭게 과거의 기억을 수정하기로 했어. 그 블로그를 봤다면 너도 알겠지? 그 글 속에서 너희는 이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훌륭한 가족이야. 저 어리석은 모에조차 영민하고 지혜로운 딸로 새로 태어났어. 머지않아 그게 논픽션 소설로 발표될 거야. 이어서 영화로도 만들 생각이지. 물론 감독은 내가 맡을 거고. 그때야 비로소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가족이 완성되는 거야.”

  겐토는 고개를 저으며 “완전히 미쳤군”이라고 말했다. 치사토도 동감이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치사토 쪽을 보며 말했다.

  “미즈키 요시로는 내 계획을 듣고 대단하다고 평가해줬어. 딸의 자살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사내가 자신의 반평생을 영화로 만든다. 이건 프로듀싱만 잘하면 흥행 대박,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새로운 대표작이 될 거라고 했어. 하긴 그 계획을 내가 정말 실행할지 말지, 그는 반신반의였던 모양이야. 알리바이 만들기를 도와줬으면서도 막상 그 일이 현실이 되니까 그 즉시 나스노와 함께 슬슬 빠지려고 하더라고. 자기는 아무 관계도 없다,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꽁무니를 빼는 거야. 크게 실망했지. 단순히 돈 때문에 일을 거들어준 나스노는 그렇다 쳐도, 미즈키는 좀 당당한 면을 보여줘야 할 거 아니냔 말이야. 하긴 경찰이 무사히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을 알고는 손바닥 뒤집듯이 「완벽한 가족」을 어떻게 진행할 거냐고 재촉하고 나서긴 했지. 그래, 그게 영화 제목이야, 「완벽한 가족」. 어때, 겐토, 나쁘지 않잖아?”

  겐토는 팔을 허공에 대고 후려쳤다. “진실을 왜곡한 주제에 완벽이라고? 어이가 없네.”

  “흥, 진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다면 좀 물어보겠는데, 진실이란 게 뭐지? 그걸 누가 판정하는 건데? 결국은 기록된 것만이 진실이야. 기록되어서 사람들이 인식해주었을 때, 그게 바로 진실이야. 이 폐허를 봐. 이 건물에는 어떤 진실이 있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 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는 거야. 인터넷을 봐. 타인의 험담과 하소연만 가득하지? 공격의 창끝을 겨눌 곳을 찾아내면 앞다투어 비난을 퍼붓고 있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그러면서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마냥 불평만 늘어놓는 인간들이 어떤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진실이라는 단어로는 알아듣기 힘들다면 역사라고 말을 바꿔도 좋아.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해. 너희도 마찬가지였어. 이 세상에 없어도 무방한 인간들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행복한 줄 알아. 내 영화에 등장인물이라는 형태로 영원히 남겨지게 됐잖아. 게다가 훌륭한 인간으로.”

  다시 우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보다 가깝게 들렸다. 빗발도 거세진 것 같았다.

  겐토가 고개를 내저으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연설은 그만두시지. 지겨우니까.”

  “좋아, 그렇다면 이제 슬슬 정리해볼까.”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코트 안쪽에서 뭔가 검은 물체를 꺼냈다. 그것이 권총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치사토는 작은 비명을 올렸다.

  “그런 걸 준비하셨어?” 겐토의 목소리에 겁에 질린 듯한 느낌은 없었다.

  “영화감독이란 게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거든. 이걸 받아 온 게 벌써 10여 년 전 일인가. 그때는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나를 그 총으로 죽이고, 그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든 각색할 수 있어. 아버지의 마지막 영화 로케지에서 아들이 자살. 어때, 뭔가 의미심장하잖아?

  「완벽한 가족」의 스토리에 극적인 에피소드가 더해지는 거야.” 말을 내뱉고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드디어 치사토의 팔을 놓아주었다.

  “뛰어!” 그 즉시 겐토가 소리쳤다. “빨리 달아나. 여기 있으면 안 돼!”

  치사토는 현관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그 직후, 바깥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동시에 후두두둑 뭔가 흩뿌려지는 요란한 소리가 덮쳤다. 우박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잠깐 시간이 걸렸다.

  이어서 땅울림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현관문 틈새로 들이치는 바람이 차갑다고 느낀 직후에 치사토의 몸은 뒤로 날려 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청난 바람이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틈새로 상황을 살펴보았다. 깨어진 유리가 휘날렸다. 겐토와 아마카스 사이세이도 그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리라.

  이건 대체 뭔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실내에서도 이렇다면 바깥은 어떤 상황일까.

  그때였다. 단 한순간의 무음 상태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온몸을 꿰뚫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건물이 뒤흔들렸다. 치사토는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꾸로 뒤집힌 하얀 차가 벽을 뚫고 뛰어든 것이다.

  무너진 벽으로 폭풍이 덮쳐들었다. 치사토의 몸은 반대쪽 벽까지 날려 가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우르르르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치사토가 내동댕이쳐진 벽도 기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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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굉음, 폭음, 파열음, 그 밖에 온갖 소리와 거센 진동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마도카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니트 모자를 쓴 머리를 두 팔로 부여잡고 양 무릎을 깊이 꺾은 자세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목덜미에 차가운 비가 떨어지는 것을 의식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마음이 침착해졌다. 귀를 기울여봤지만 약간 강한 정도의 바람 소리와 바닥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마도카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는 아오에가 아직 머리를 감싼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

  “교수님,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아오에가 천천히 팔을 내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두 사람이 도망쳐 온 곳은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네모난 웅덩이였다. 예전에 정화 시설로 쓰인 듯한 곳의 한 귀퉁이다.

  마도카는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건물을 보고 헉 숨을 삼켰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건물이 아니라 거대한 잔해 더미였다. 지붕은 날아갔고 벽은 반절쯤만 남았다. 잔해 더미 속에 아오에의 흰색 크라운 차가 보였다.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실패했는가.

  차를 들이박은 정도로는 부족했던 걸까.

  하지만 잔해 더미의 일부가 움찔움찔 들춰지고 그 아래에서 호리호리한 윗몸이 드러났을 때, 마도카의 입에서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단정한 얼굴은 1년 전 그대로 전혀 변한 데가 없었다.

  마도카는 급히 달려가 잔해 더미를 밀쳐냈다. 겐토가 그제야 마도카를 알아보고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너, 어떻게 여기에?”

  “내내 찾아다녔거든.” 마도카는 대답했다. “겐토 군을.”

  겐토가 몸을 일으켰지만 제대로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괜찮아?”

  “별거 아냐. 그보다 마도카, 혹시 아마카스 사이세이를 뒤쫓아 왔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정확하게는 미즈키 치사토를 뒤쫓아 온 것이지만, 그걸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진다.

  “내가 뭘 노리는지 알고 있었구나.”

  “응. 그래서 못 하게 하려고 왔어.”

  겐토는 겸연쩍은 표정을 보이더니 거꾸로 뒤집힌 차로 시선을 던졌다.

  “저건 네가 한 거?”

  응, 하고 마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란운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았어. 하지만 겐토 군이 그걸 이용할 줄은 몰랐지. 근데 이 폐허가 붕괴 직전인 것을 깨닫고 그제야 네가 뭘 노리는지 이해했어. 그래서 기상을 자세히 점검해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어. 모든 조건이 다운버스트가 덮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다운버스트. 적란운에서 냉기를 동반한 강한 하강기류가 지면에 부딪쳐 엄청난 강풍으로 주위를 덮치는 현상이다.

  “게다가 풍속이 60미터가 넘는 강력한 다운버스트였어. 이런 폐허는 한주먹감도 안 되겠지. 일단 붕괴가 시작되면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져. 실내에 있던 사람이 살아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 잔해 더미와 함께 날려 가거나 아니면 잔해 더미에 깔려버릴 거야. 그걸 막으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어. 건물 붕괴가 시작되기 전에 일부를 무너뜨리는 거. 거기로 바람이 들어가면 내측의 압력이 높아지니까. 어차피 건물은 무너지겠지만 힘이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에 붕괴되는 양상도 달라진다고 예측했어. 성공할지 어떨지는 나도 자신이 없었지만, 생각나는 게 그 방법뿐이었어. 강풍에 날려 간 차가 건물을 정확히 들이박을 만한 포인트를 급하게 계산해냈어.”

 
 “그 결과, 건물 지붕이 날아가면서 무너진 잔해가 반 이하로 줄었구나.” 겐토가 피식 웃었다. “다운버스트, 제법 정확히 예측해냈는데?”

  “생각 안 나? 우리 둘이 수없이 얘기했었잖아.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에 대해.”

  “그래, 맞아. 난류는 정말 어려워.”

  “동감이야. 그래도 내가 예측에 성공했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을 때, “마도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오에가 허리를 숙이고 아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잔해 더미 밑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쪽으로 달려갔더니, 위를 보는 자세로 누운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보였다. 하반신이 잔해 더미에 깔려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는 걸 보면 목숨은 건진 모양이다.

  “아직 살아 있었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겐토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마도카는 두 팔을 펼쳐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비켜.”

  “아니, 이런 일에 손을 더럽혀서는 안 돼.”

  겐토는 서글픈 듯 눈꼬리를 내려뜨렸다. “오늘까지 이것만을 위해 살아왔어.”

  “알아. 그러니까 안 돼. 오늘부터는 이것 이외의 것을 위해 살아가야 해. 내 결심을 바꾸게 하는 건 무리야. 겐토는 라플라스의 악마니까 잘 알지?”

  겐토는 미간을 좁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눈을 떴다.

  “저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르겠어. 아마 누군가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저자는 살인마야.”

  “알아. 하지만 이 세상에는 다양한 제재 방법이 있어.”

  겐토는 다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한 손을 점퍼 주머니에 찌르고 한 걸음 앞으로 쓱 나섰다.

  “안 돼, 겐토 군.”

  “알았어, 손은 대지 않을 거야.”

 
 겐토는 아마카스 사이세이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굽어보았다.

  “당신에게 식물인간 상태였던 때의 내 심정을 가르쳐주고 싶었어. 마치 산 채로 매장당한 것처럼 절망적이었거든. 팔다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런데도 살아 있는 거야. 아예 죽여주기를 기도했던 적도 있어. 당신도 그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주고 싶었어. 산 채로 매장해버리는 거. 이곳에서, 나와 함께. 구조의 손길 따위는 없어. 둘이서 오로지 어서 죽기만을 기도하는 거야. 둘 중 누가 먼저 죽을지, 그걸 마음껏 즐겨볼 생각이었어.” 그는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보이스레코더였다. “아까 당신이 지껄인 말은 모두 녹음했어. 계획대로 성공했다면 이게 내 유서 대신 남겨졌겠지. 하지만 이제는 부적 삼아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닐게. 당신 같은 인간이 쓰레기 영화를 만들어내는 걸 막기 위한 부적으로.”

  보이스레코더를 챙겨 넣으면서 겐토는 “아, 또 한 가지”라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중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줄게.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아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아니야. 이 세상은 몇몇 천재들이나 당신 같은 미친 인간들로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야. 얼핏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야.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겐토는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걸음을 옮겼다. 마도카 쪽은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붙잡지 않아?” 아오에가 물었다.

  마도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용없어요.”

  겐토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멀어져갔다. 그 발걸음에서는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미래를 똑똑히 내다보고 뭔가 분명한 방침을 세운 것이다.

 
 마도카의 시야 끝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잔해 더미 틈새에서 먼지투성이가 되어 버둥거리는 것은 미즈키 치사토였다. 그녀도 무사한 모양이었다.

  마도카는 그쪽으로 뛰어가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돌연 낯선 여자의 부름에 치사토는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땅바닥을 네 발로 기면서 미처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길게 피가 흘렀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짧은 상처지만 꽤 깊이 파인 듯했다. 스스로도 느꼈는지 팔을 들어 상처를 더듬어보고는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다. 손에 묻은 피를 보고는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걱정할 거 없어요. 그런 흉터를 성형하는 데는 천만 엔쯤이면 충분할 테니까.” 마도카는 말했다. “그 정도 비용은 별것도 아니잖아요? 겐토 덕분에 억만장자가 됐으니까.”

  치사토는 뭔가 대꾸하려는 듯 마도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도카는 여자의 말 따위를 기다려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다. 누구에게 연락할까. 10초쯤 생각하다가 기리미야 레이의 번호를 선택해 살짝 터치했다.

 

 
  38

     

     

     

     

  신고를 받고 달려간 곳은 아자부주반의 상점가에 자리한 고급 액세서리 점포였다. 빌딩 1층이고, 가게 앞 도로는 일방통행이었다.

  “그 이인조, 처음부터 복면을 쓰고 나타났어요?” 반지며 목걸이 등이 진열된 쇼케이스 안을 들여다보며 나카오카는 여점원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확실하게는 모르겠어요. 나는 전표를 확인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거든요. 어이, 하고 누가 말을 걸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눈앞에 칼이 있었어요.” 젊은 여점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했죠?”

  “검은 부대 자루를 내밀면서 거기에 돈을 넣으라고 했어요. 돈 있는 거, 전부 다 넣으라고.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 자루에 넣은 돈이 얼마나 됩니까?”

  여점원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럴 만도 하다. 얼마가 됐든 도난 액수는 나중에 계산해보면 밝혀질 것이다.

  “그자들 옷차림, 생각나요?”

  “검은색 옷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회색이었나? 죄송해요, 잘 기억이 안 나요.”

  “체격은 어땠습니까? 마른 편인지 뚱뚱한 편인지, 그리고 키는?”

  여점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보통 몸집이었던 거 같은데. 키는 형사님하고 비슷한 정도였나……. 아니, 잘 모르겠어요.”

  “목소리에 뭔가 특징은 없었어요?”

  “글쎄요…….”

  “내국인 발음이었습니까? 아, 혹시 사투리 같은 건 없었어요?”

  “나는 말소리 같은 건 듣지도 못했는데, 어쩌면 사투리를 쓴 것 같기도 하고…….”

  요컨대 범인의 특징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라고 나카오카는 깨끗이 단념했다. 어중간한 단서를 대주는 바람에 도리어 수사가 공연히 멀리 돌아가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사이에 또 한 명은 뭘 하고 있었지요?”

  “나는 제대로 못 봤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나카오카는 곁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점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당신한테 권총을 겨누고 있었습니까?”

  네, 라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자가 뭔가 말을 했어요?”

  “꼼짝 마, 라고 했어요. 그 말 한 마디뿐이었어요.”

  “그때 가게 안에 손님은?”

  “없었어요. 폐점 시각이라서 이제 슬슬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느닷없이 들이닥쳤거든요.”

  “그자들이 가게에 들어서는 장면을 봤습니까?”

  “아뇨, 상품을 정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내가 쳐다봤을 때는 이미 가게 안에 들어와 있었어요.”

  “그때 이미 복면을 쓴 상태였어요?”

  네, 라고 대답하더니 여점원은 조금 자신이 없는지, 아마도, 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새파랗게 질려 있는데 그들에게서 쓸 만한 단서를 기대한다는 게 무리한 얘기다. 역시나 범인의 특징에 대해 질문해봤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현장검증을 끝내고 일단 경찰서로 돌아왔다. 수집한 자료를 읽어보더니 형사과장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폐점 직전에 들이닥쳐 현금만 빼앗고 도주. 이인조에 한 명은 나이프, 다른 한 명은 권총. 이거, 지난주에 니혼바시에서 일어난 사건하고 완전히 똑같잖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점포를 노린 것도 공통점이에요. 아마 방범이 허술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계장 나리타가 말했다.

  “도주 차량에 관한 목격 정보도 그쪽 사건 때와 비슷합니다. 동일범으로 봐도 틀림없겠는데요?” 1계 수사원이 말했다.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지만 이건 뭐,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 그쪽 경찰서와 연대해서 수사하게 될 것 같아. 좋아, 그러면 수사 방침은…….”

  형사과장에게서 대략적인 지시가 내려온 뒤, 회의는 끝이 났다. 나카오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스마트폰을 터치했다. 메일이며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메일은 별다른 게 없었지만 인터넷 기사 하나를 보고는 흠칫했다. ‘영화감독 아마카스 씨, 다운버스트 피해’라고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자세한 내용을 확인했다.

     

  S현에서 발생한 다운버스트로 보이는 돌풍의 피해 상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붕괴된 폐허에서 발견된 부상자 중 한 명이 영화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 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카스 씨는 하반신이 잔해 더미에 깔린 채 신음하다가 구조되었다. 다리와 허리 등에 골절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구조된 또 한 사람은 작년 말에 사망한 영화 프로듀서 미즈키 요시로 씨의 부인 치사토 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치사토 씨는 얼굴에 경상을 입었다. 문제의 폐허는 아마카스 씨가 감독한 영화 「폐허의 종」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결국 소재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이런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다니. 게다가 미즈키 치사토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왜 그 두 사람이 그런 폐허에 간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누군가 어깨를 짚었다. 돌아보니 나리타 계장이었다.

  “유난히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잖아. 무슨 일이야?”

  이거요, 라고 나카오카는 기사를 보여주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나리타의 표정이 금세 흐려졌다. 스마트폰을 나카오카에게 돌려주면서 물었다. “이런 거 읽어서 뭘 어쩌려고?”

 
 “이상하잖아요.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미즈키 치사토, 둘이 그런 곳에 가서 뭘 하고 있었죠?”

  나리타는 맥이 빠진다는 듯이 입이 일그러졌다. “알 게 뭐야.”

  “그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지시가 내려온 직후에 두 사람이 만났어요. 뭔가 너무 척척 맞아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봐, 하고 나리타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잊어버리라니까. 어차피 우린 졸병이야. 게다가 보병이란 말이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한참 위에 계신 존재들이야. 보병은 그냥 아무 생각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 딴생각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나카오카가 입을 꾹 다물자 나리타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내일부터 또 열심히 뛰어보자”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나카오카는 스마트폰의 기사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치사토는 얼굴에 어떤 부상을 입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니네, 하며 스마트폰 화면에서 기사를 지워버렸다.

 


 39

     

     

     

     

  자동 개찰기를 건너기도 전에 이소베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업복 차림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유병 바닥을 나란히 놓은 것처럼 두툼한 안경을 쓴 그의 얼굴 표정이 환했다.

  “교수님, 먼 길에 고생하셨지요? 오래간만입니다.” 개찰기를 건너간 아오에에게 싱글벙글하며 다가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군요.” 아오에는 말했다.

  “그야 좋고말고요. 드디어 문제가 해결되었으니까요. 이제 마음 편히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교수님께는 이래저래 폐만 끼치고, 참말로 죄송합니다.”

  “이소베 씨가 사과할 일도 아닌데요, 뭘.”

  아니요, 아니요, 라고 이소베는 걸어가면서 손을 내저었다.

  “우리 지역 경찰과 소방대가 현장을 좀 더 상세히 조사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완전히 근무 태만이었지요. 그래서 그 친구들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를.”

  “예에, 그렇습니까.”

  지난번처럼 이소베가 운전하는 차로 아카쿠마 온천가로 향했다. 차 안에서 바깥 경치를 내다보니 시내의 눈은 거의 다 녹은 모양이었다.

  이소베가 아오에 쪽에 연락해 온 것은 그저께였다. “아이구, 이것 참, 어쩐대요?”라는 게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첫마디였다.

  이소베의 말에 의하면, 아카쿠마 온천에서의 일은 사고가 아니라 악질적인 장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현경 본부 쪽에 익명의 편지가 날아왔는데 황화수소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것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가스 발생 순서와 사용한 약제 및 용기, 그리고 그런 것을 처분한 장소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수사원이 현장을 조사해본바, 분명 해당 물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몹쓸 놈이 다 있습니까. 우리 온천가 사람들이 지금 펄펄 뛰고 있어요. 이번 겨울의 매상을 보상하게 하라고 씩씩거리고 있습니다. 하긴 아직 그놈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라이트밴을 운전하면서 이소베가 말했다.

  “편지를 보낸 그자가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짓을 했다고 밝혔다면서요?”

  “글쎄 그렇답니다. 처음에는 흥미 본위로다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가스를 만들어봤다. 그랬더니 중독 피해자가 나왔다. 이걸 어쩌나 하고 초조했다. 근데 사고라는 걸로 일이 처리됐다. 그러니 정말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지 어떤지 애매해졌다. 그래서 온천지 몇 군데를 돌면서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윽고 도마테 온천에서도 똑같은 사고가 났다. 그제야 첫 번째 사고도 자신 때문이라는 걸 확신하고 더럭 겁이 났다. 계속 침묵할 생각이었지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양쪽 현경에 참회의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예에, 대충 그런 얘기인 모양이에요.”

  “즉 범인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건가요?”

  “그렇다니까요.” 이소베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건 말이죠, 철저하게 검거해야 합니다. 모방범이라고 하던가요? 똑같은 짓을 하려는 놈들이 자꾸 기어 나올 거라고요. 경찰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체포해주면 좋겠어요.”

  그렇지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아오에의 속마음은 시들해져 있었다. 그런 범인 따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베의 전화를 받기 이틀 전에 기리미야 레이가 아오에를 찾아왔다. 그녀는 온천지에서의 중독 사고를 어떻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는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정체불명의 인간에 의한 장난 같은 짓이었던 것으로 처리한다—.

  경찰청을 중심으로 짜낸 시나리오는 그런 것이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기대에 크게 어긋난 조치라는 건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기리미야 레이는 무표정한 가운데서도 죄송하다는 뜻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최대한 온건하게 끝내기 위해서는 그런 모양새가 가장 무난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리고 저희 수리학 연구소 측에서도 그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교수님께서도 부디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역할은 제가 자원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번 일로 교수님께 큰 폐를 끼쳤는데, 그런 저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공무원들이 혹시라도 명령하듯이 다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양쪽 온천지에서 아오에에게 의견을 청해 올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부디 진실은 가슴속에만 담아두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악질적인 장난이었다는 것으로 처리하면 온천지 쪽은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그렇게 매듭을 짓는 것으로, 어떠신지요.”

  담담히 말하는 기리미야 레이에게 절대로 안 된다고 자기주장을 고수할 생각은 없었다. 잘 알겠다고 말한 다음에 아오에는 물었다. 아마카스 부자는 어떻게 되느냐, 라고.

  그건 잘 모르겠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해당 부서에서 겐토 군의 행방을 추적 중입니다. 하지만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거예요. 어쨌든 상대는 라플라스의 악마니까요. 인간이 어떤 수를 쓰고 나올지, 뻔히 다 보이겠죠.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인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처리에 대해서도 해당 부서에서는 난감해하는 눈치예요. 이제 새삼스럽게 8년 전의 사건을 검증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부상이 회복되면 그 길로 방면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건 불합리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그자가 앞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자에게 살아갈 의미 따위, 과연 있기나 할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차는 아카쿠마 온천가의 주민 회관에 도착했다. 네모반듯해서 살풍경한 건물이지만 어쩐지 반가웠다.

  이소베가 방대한 양의 파일을 꺼내 왔다. 위험 지역으로 지정한 지점의 황화수소 농도를 측정한 기록이다. 그것을 보고 아오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건의 배경을 알지 못하는 범용한 사람들은 이토록 성실하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온 것이다. 이것이 의미 없는 일일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의미 없는 노력이란 이 세상에 없다. 이것 또한 원자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어떻습니까?” 채점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 같은 눈빛으로 이소베가 물었다.

  “아주 좋은데요.” 데이터를 정사精査한 다음에 아오에는 말했다. “이 정도라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 사고는 악질적인 장난 때문이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려도 무방합니다. 출입금지는 해제합니다.”

  이소베의 얼굴이 다시금 환해졌다.

  “교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진짜로 마음이 턱 놓입니다. 경찰도 소방대도 해제에 동의해주었고, 이제는 전문가의 의견을 여쭙는 일만 남았던 참이니까요. 내일 최종 회의 때 교수님의 허락을 받았다고 보고하겠습니다. 다들 한시름 덜었다고 반색할 겁니다. 야아, 잘됐네요. 참말로 다행입니다.”

  “사건 이후로 역시 관광객이 줄었습니까?”

  “그야 뭐, 평소의 30퍼센트 정도였지요, 이번 겨울은. 하지만 이제 악질적인 장난이었다는 게 언론에 속속 보도될 거고, 앞으로 차근차근 만회해나갈 생각입니다.” 파일을 정리하면서 대답하는 이소베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여관은 지난번과 같은 곳에 묵었다. 한없이 선량한 얼굴의 여주인이 상냥하게 맞아주었다. 그녀도 사정을 알고 있는지 “교수님께서 이상한 일에 휘말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라고 위로해주었다.

  대욕탕에서 피곤한 몸을 달랜 뒤, 로비로 갔다. 텔레비전 앞의 테이블을 보고 마도카가 생각났다. 어떤 사내아이가 물을 흘렸는데도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을 살짝 옮겨뒀을 뿐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스마트폰이 물에 젖는 일은 없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물의 흐름을 예측하는 일쯤은 마도카에게는 별것도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곁에 놓인 석간신문을 펼쳤다. 무심코 사회면에 시선을 떨구었다가 흠칫했다.

  그 기사의 작은 제목은 ‘영화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 씨 자살’이라는 것이었다.




 
  40

     

     

     

     

  이게 좋을까, 라면서 마도카가 집어 든 것은 은빛 볼펜이었다. 심지를 꺼냈다 넣었다 한 뒤에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다케오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

  물론이죠, 라고 마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5천 엔짜리 비싼 볼펜은 아까워서 도저히 못 쓸 것 같다.”

  “그러니까 좋은 거예요. 아까워서 못 쓰고 오래오래 책상 서랍에 넣어둘 거잖아요. 그래서 이걸 볼 때마다 떠올리겠죠. 아, 내 생일에 마도카가 사준 선물이구나 하고. 음, 좋아, 이게 첫 번째 후보.”

  마도카는 볼펜 견본을 제자리에 넣고 다시 쇼케이스 안을 살펴보았다. 볼펜 외에도 만년필과 페이퍼나이프, 문진 같은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제 곧 오후 8시가 된다. 수리학 연구소를 나온 게 오후 5시였다. 오늘은 더 이상 외출은 없겠다고 생각한 참에 마도카가 갑작스럽게 밖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아버지 생일이 며칠 뒤라는 게 생각나 선물을 사러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내일 낮에 가도 되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변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기리미야 레이도 불만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늘 하던 대로 담담히 운전을 해줬을 터였다.

  가게 몇 군데를 돌아봤지만 눈에 차는 물건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15분쯤 전에 이곳에 들어왔다. 폐점이 8시라는데도 마도카는 서두르는 기미가 없었다. 문 닫겠다고 손님을 쫓아내는 가게라면 다시는 오지 않을 심산인 것이리라.

  이런 때 다케오는 주로 가게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가달라고 마도카가 졸랐다. 선물할 물건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도 없는 자신이 적절한 충고를 해줄 리 없다고 거절했지만 마도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고급스럽고 차분한 분위기의 귀금속점이다. 마도카가 둘러보는 곳은 고급 사무용품 코너였다. 가장 값비싼 상품은 안쪽에 진열되어 있다.

  그 두 남자가 가게에 들어온 것은 오후 8시를 조금 지난 참이었다. 어쩌다 입구 쪽에 시선을 던진 다케오는 그들을 본 순간, 뭔가 불온한 것을 감지했다. 둘 다 고개를 푹 숙이고 검은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니트 모자를 당겨 얼굴을 덮어버렸을 때,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니트 모자가 아니라 바라클라바였다.

  “조용히 해. 떠들면 죽인다.” 남자 하나가 가까이에 있던 여점원에게 나이프를 들이댔다.

  또 다른 한 명은 가게 안을 둘러보며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고 말했다. 그는 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다케오, 마도카, 기리미야 레이 외에 남녀 두 명의 점원뿐이었다. 남자 점원은 다케오 일행 옆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이프를 든 남자가 여점원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이동했다. 현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권총을 든 남자는 위협하듯이 다케오 일행을 노려보았다.

  마도카가 다케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스프레이 좀 주세요.”

  “안 돼.” 작은 소리로 대답한 것은 기리미야 레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리미야의 표정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마도카는 무시했다. “스프레이, 빨리요.”

  다케오는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호신용 소형 최루 스프레이는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총을 든 남자에게 들키지 않게 스프레이를 마도카에게 슬쩍 건넸다. 받아 들면서 마도카는 남자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프를 든 남자가 부대 자루를 던지며 여점원에게 현금을 넣으라고 했다. 지폐 다발이 여러 개가 들어갔다. 천만 엔은 족히 넘을 것 같다.

  마도카는 가게 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해 스프레이를 발사했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총을 든 남자가 “거기, 뭐야!”라고 으르댔다. “섣부른 짓을 하면 쏜다!”

  쏠 테면 쏴보시지, 라고 다케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자가 손에 든 것이 모델 총이라는 건 이미 눈치챘다. 아마 마도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최루 스프레이는 근거리에서 상대의 얼굴을 향해 분사한다. 현재, 침입자들과의 거리는 10여 미터 정도. 마도카가 뿌린 최루액은 이제 가게 안의 어디쯤을 떠돌고 있을 거라고 다케오는 추측했다.

  나이프를 든 남자가 현금 자루를 낚아챘다. 가자, 라는 듯이 총을 든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두 남자가 입구로 향하고 자동 도어가 열렸다.

  그 순간, 침입자들 중 한 명이 크으윽 하는 묘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둘이 똑같이 몸을 웅크리며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크흐흐흑 하는 괴로운 호흡 소리도 들렸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른 채 멍하니 서 있는 남자 점원에게 기리미야 레이가 물었다. “이 가게, 뒷문은 어디죠?” 무슨 질문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그에게 기리미야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뒷문이 어디에요? 뒤쪽에도 출입구가 있죠?”

  “아, 예, 있습니다. 저쪽이에요.”

  남자 직원이 가리킨 쪽으로 기리미야 레이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케오도 마도카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어휴, 짜증 나. 모처럼 쇼핑하러 나왔는데 완전 망쳤어.” 차 뒷좌석에 앉은 마도카가 말했다.

  “잘 들어, 저 가게는 다시는 못 갈 줄 알아. 틀림없이 질문 공세가 펼쳐질 테니까.” 기리미야 레이가 씁쓸한 얼굴로 말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선가 들리는 경찰차의 사이렌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아빠 선물은 그냥 감사 인사로 때울까? 하긴 해마다 그랬잖아. 좋아, 올해도 똑같이 하기로 결정!”

  깨끗이 단념하는 마도카의 말을 듣고, 다케오는 역시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활 패턴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이제 마도카는 예전의 명랑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리하게 태연한 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카스 사이세이가 자살한 게 지난주의 일이었다. 병원 입원실에서 젖은 수건을 목에 둘둘 감고 질식사했다고 한다. 너무도 기묘한 방식의 죽음이라서 타살을 의심했지만, 아마카스 스스로 한 일이라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한다. 어지간히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자살 방법이라고 인터넷에 해설이 실려 있었다.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슬럼프에 빠져 영화 작업이 부진했던 것을 괴로워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많은 모양이지만, 애초에 그에 관한 뉴스는 화젯거리에 오르지도 못했다. 요즘에는 자살 따위, 그리 대단한 사건도 아닌 것이다.

  그의 자살에 대해 마도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겐토 얘기도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 참, 이거 돌려줄게요.” 마도카가 최루 스프레이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뭘, 인사받을 일도 아닌데…….”

 
 “하지만 덕분에 누군가를 멋지게 도와줬잖아요. 좋아, 포상으로 질문할 권리를 줄게요. 나에 대해 뭐든 물어봐요.”

  “질문?” 다케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그런 상을 받아봤자 난감하기만 하다.

  “단 딱 한 가지만.”

  “흠, 그렇다면 딱 한 가지만 질문하도록 하지. 실은 계속 궁금한 게 있었어.”

  “뭔데요?”

  “그게 그러니까 결국 마도카에게는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궁금하더라고.”

  “보이다니, 뭐가요?”

  그러니까, 라고 말하고 다케오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 세상의 미래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마도카는 침묵하고 있었다. 마음에 걸려서 다케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마도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요, 모르는 게 더 행복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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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2 (♡.88.♡.15) - 2023/12/04 15:09:10

단차님 올리신 소설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글과 함께 추측해보고, 흐름에 따라 생각을 맡겨보는 재미가 쏠쏠했네요.^^^-^^^
장~장편을 올리심에 수고 많으셨고 감사합니다.^^^꾸뻑^^^

단차 (♡.234.♡.111) - 2023/12/04 15:11:22

잘 읽어주셨다니 올린 보람이 있네요 ㅋㅋ 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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