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3~34

나단비 | 2024.02.16 12:07:19 댓글: 0 조회: 9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594
33
호텔 발표회





다이애나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넌 이 하얀색 오건디46) 드레스를 입어야 해, 앤.”
둘은 동쪽 방에 있고, 노랑과 초록 빛깔로 황혼이 내린 창밖으로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내다보였다. 커다란 둥근 달도 ‘유령의 숲’ 위에 매달린 채 창백한 빛에서 환한 은빛으로 서서히 짙어졌다. 대기에는 졸린 새들의 지저귐, 변덕스러운 산들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같은 달콤한 여름의 속삭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앤의 방 블라인드는 올라가고 램프에 불이 밝혀졌다. 중요한 단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동쪽 방은 이제 4년 전 그날 밤, 방이 너무 텅 비어 있어 앤의 뼛속까지 찬 기운이 느껴졌던 그 방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변화가 조금씩 스며들어 이제는 한 소녀가 바라던 대로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마릴라도 체념한 듯 그런 변화를 모른 체했다.
앤이 어렸을 때 꿈꾸었던, 분홍 장미가 수놓아진 벨벳 양탄자와 분홍색 실크 커튼으로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앤의 꿈도 성장하면서 변해감에 따라 그것들을 애타게 바라지는 않게 되었다. 바닥에는 예쁜 깔개가 깔렸고, 연녹색인 모슬린 커튼은 삭막하던 높은 창문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며 변덕스러운 산들바람에 펄럭였다. 벽에는 금실과 은실로 자수한 벽걸이 천까지는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쁜사과꽃 무늬벽지를 바르고 앨런 부인이 준 그림들도 몇 점 걸려 있었다. 앤은 스테이시 선생님의 사진을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걸어두고, 그 아래의 선반에 갓 꺾은 꽃을 두어 선생님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두었다. 그날 밤에는 하얀 백합 꽃다발이 놓여 방에는 꿈과 같은 향내가 은은히 퍼졌다. 마호가니 가구는 없었지만, 책들로 가득한 하얗게 칠해진 책꽂이와 쿠션을 덧댄 버드나무 흔들의자, 흰 모슬린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화장대가 있었고, 금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아치형으로 굽은 윗부분에는 포동포동 살찐 큐피드들과 자줏빛 포도가 그려진 거울도 걸려 있었다. 전에는 손님방에 걸려 있던 거울이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하얀색 침대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앤은 화이트 샌즈 호텔에서 열리는 발표회에 가려고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호텔 손님들이 샬럿타운 병원을 후원하려고 개최한 것인데 근처 마을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발표회에 출현하기로 되어 있었다. 화이트 샌즈 침례교회 성가대의 버서 샘프슨과 펄 클레이가 이중창을 부르고, 뉴브리지의 밀턴 클라크는 바이올린 독주를, 카모디의 위니 아델라 블레어는 스코틀랜드 민요를 부를 것이고 스펜서베일의 로라 스펜서와 에이번리의 앤 셜리는 시를 낭송하기로 했다.
앤이 전에도 이 말을 사용한 적이 있듯 이 일 역시도 ‘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앤은 황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앤에게 주어진 이 영광스러운 일로 매슈는 천국에라도 오른 듯 좋아했고 마릴라도 매슈 못지않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젊은 아이들이 어른과 동행하지도 않고 호텔 같은 데를 몰려다니는 것이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앤과 다이애나는 제인 앤드루스와 제인의 오빠인 빌리와 함께 좌석이 앞뒤로 두 개가 있는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이들 외에도 에이번리의 소년 소녀들이 여럿 갈 것이고 시내에서도 올 것이며 발표회가 끝나면 출연자들에게 저녁 식사를대접한다고 했다.
“정말로 어떤 드레스가 가장 나을까? 나는 파란색 꽃무늬 모슬린 옷이 이 옷보다 더 예쁜 것 같아. 이건 요즘 크게 유행하는 것도 아닌데.”
앤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하지만 이 옷은 너한테 너무 잘 어울려. 부드럽고 주름도 많고 몸에 잘 맞잖아. 모슬린은 좀 뻣뻣하고 너무 꾸며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나. 하지만 이 오건디 드레스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여.”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이 한숨을 내쉬며 다이애나의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다이애나는 옷을 잘 입는다고 인정을 받고 있어서 옷 문제만큼은 대부분 다이애나의 충고를 따랐다. 다이애나는 이 특별한 날을 위해 앤으로서는 영원히 꿈도 꾸어보지 못할 색깔인 아주 예쁜 분홍색 들장미 빛깔 드레스를 너무 예쁘게차려입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이 발표회에 출연하지 않아서 자기의 모습이 예쁜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온통 앤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에이번리의 명예가 걸린 일이므로 여왕처럼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기고 장식을 해야 했다.
“그 주름을 좀 더 당겨보자. 그래, 됐어. 자아, 허리에는 장식 띠를 매자. 자, 이제 구두를 좀 봐야 해. 머리는 두 갈래로 나누어 땋고 중간쯤에 커다란 하얀 리본으로 묶을 거야. 안 돼. 이마로 머리 한 가닥만 잡아 내리면 안 돼. 그냥 자연스럽게 놔둬. 이 모양이 너한테는 제일 잘 어울려. 앨런 부인도 네가 그렇게 가르마를 타면 성모 마리아처럼 보인다고 하잖아. 이 하얗고 조그만 장미를 네 귀 바로 뒤에 꽂을 거야. 우리 집 정원에 딱 한 송이가 있는 것을 너에게 꽂아주려고 꺾어왔어.”
“이 진주 목걸이를 하고 싶은데? 매슈 아저씨가 지난주에 내게 주려고 시내에서 사오셨거든. 내가 이 목걸이를 한 모습을 아저씨가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앤이 말했다.
다이애나가 입술을 오물거리고 검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여 잠시 생각하더니 허락을 해주었다. 그래서 앤의 가늘고 우윳빛을 띤 목에 진주 목걸이가 걸렸다.
“앤, 너한테는 우아한 맵시가 있어. 얼굴을 약간 오만하게 치켜세우면 말이야. 그게 너의 매력인 것 같아. 난 뚱뚱하기만 하잖아. 그렇게 될까 봐 항상 걱정했는데, 이제는 정말로 그렇게 돼버렸어. 이젠 포기하고 말았지만 말이야.”
다이애나가 부러운 듯 말했다.
“너는 보조개가 있잖아.”
앤이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림에 살짝 들어간 곳처럼 예쁜 보조개야. 난 보조개를 갖겠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어. 보조개를 갖고 싶다는 꿈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많은 꿈을 이루었으니까 불평을 하면 안 돼. 이제 끝났어?”
“그래, 준비는 다 끝났어.”
곧이어 마릴라가 문 앞에 나타났다. 예전보다도 머리칼이희끗희끗해졌고여윈 모습이었지만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어서 들어오셔요.오늘 밤에 시를 낭송할 우리 주인공을 좀 보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예쁘지 않나요?”
다이애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단정하고 깨끗해 보이는구나. 머리 모양은 마음에 드는구나. 하지만 흙먼지와 이슬 속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드레스를 다 망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눅눅한 밤에 너무 얇게 입은 건 아니니? 오건디처럼 다루기 힘든 천도 없다. 매슈 아저씨가 이걸 사왔을 때도 내가 그렇게 얘기했지. 하지만 요즘엔 매슈 오라버니에게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소용이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앤을 위한 물건이라면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모두 사다 나른다니까. 카모디의 점원도 그걸눈치채고 오라버니에게 물건들을 팔아치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을 정도야. ‘이 물건은 예쁘고 최신 유행이에요.’라고만 하면 매슈 오라버니는 돈을 아낌없이 내주어버리니까. 스커트가 마차 바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고 위에 겉옷도 하나 걸쳐 입어라.”
마릴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인지 불평인지 모를 묘한 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줄기 달빛이 이마에서 머리 위로 흘러내렸다.’47)라는 시구처럼 마릴라는 예뻐 보이는 앤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졌고, 발표회에 직접 가서 앤이 낭송하는 것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다이애나, 이 옷을 입기에는 날씨가 너무 축축한 거 아닐까?”
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오늘 밤은 완벽한 날씨야.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고. 저기 저 달빛 좀 봐.”
다이애나가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리며 말했다.
“내 방 창문이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있어 너무 좋아. 아침에 해가 저기 언덕 위로 나타나서 뾰족한 전나무 꼭대기 위에서 빛나는 광경을 보면 너무 황홀해.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내 영혼이 아침 햇살에 목욕을 하는 기분이라니까. 오, 다이애나, 난 이 작은 방을 정말 사랑해. 다음 달에 시내로 가야 하는데 내가 이 방 없이 어떻게 살지 걱정이야.”
앤이 다이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떠난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다이애나가 사정을 했다.
“난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 생각만 해도 너무 슬퍼지니까. 오늘 저녁은 정말 즐겁게 보내고 싶어. 앤, 너는 어떤 시를 읊을 생각이니? 떨려?”
“조금도. 사람들 앞에서 자주 낭송을 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아. <처녀의 맹세>48)를 낭송하기로 했어. 아주 슬픈 시야. 로라 스펜서는 희극적인 시를 낭송할 거라지만 나는 사람들을 웃기는 것보다는 울리는 게 더 좋아.”
“앙코르를 받으면 뭘 낭송할 거야?”
“앙코르를 받는 건 꿈도 꾸지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앤도 앙코르를 받고 싶은 은밀한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그에 대한 얘기를 매슈 아저씨에게 자랑스레 들려주는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했었다.

“빌리와 제인이 왔나 봐. 마차 소리가 들렸어, 나가자.”
빌리 앤드루스가 앤에게 앞좌석에 자기와 함께 앉아 가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빌리의 옆에 앉았다. 하지만 앤은여자아이들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 맘껏 웃고 떠들고 싶었다. 빌리와는 웃고 떠들면서 나눌 얘기가 많지 않았다. 빌리는 크고 뚱뚱한 몸에 촌스럽게 생기고 표정도 별로 없는 스무 살 청년으로 말도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앤을 몹시 흠모하고 있어서 화이트 샌즈까지 이 꼿꼿하게 앉아 있는 날씬한 소녀와 나란히 앉아 가는 일이 무척 자랑스럽고 기뻤다.
앤은 어깨너머로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예의상 가끔씩 빌리에게 한마디씩 건네기도 했지만 빌리는 빙긋이 웃거나 낄낄대고 웃을 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앤은 이 여행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모두 즐겼다.
그야말로 즐거운 밤이었다. 도로는 마차로 붐볐다. 모든 마차가 호텔로 향했고, 웃음소리와 은방울이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호텔은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불빛으로 휘감은 듯 휘황찬란했다. 발표회 준비 위원회의 부인들이 그들을 맞아주었고, 한 여자가 출연자 대기실로 데려갔다. 대기실에는 이미 교향악단 단원들이 잔뜩 모여 있어, 그들 틈에서 앤은 갑자기 수줍어지고 두려웠으며 촌뜨기가 된 기분이었다. 동쪽 방에서는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이던 드레스까지 단순하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앤의 주변에서 반짝거리고 바스락거리는 실크 드레스와 레이스 드레스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 목걸이를 몸집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부인의 다이아몬드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또 앤의 하얀 장미는 다른 사람들이 달고 있는 온실 꽃들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앤은 모자와 외투를 벗고 초라한 모습으로 한구석에 움츠려 앉았다.‘초록 지붕 집’의 하얀 방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호텔의 커다란콘서트홀무대 위로 나가게 되었을 때는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전등 불빛이 눈을 어지럽혔고, 향수 냄새와 웅성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이애나와 제인과 함께 청중석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두 사람은 저 뒤에 앉아 몹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앤의 양옆에는 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뚱뚱한 부인과 훤칠하게 크고 냉소적인 표정을 띤 채 흰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 뚱뚱한 부인은 가끔 고개를 노골적으로 돌려 안경 너머로 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앤은 온몸을 샅샅이 뜯기는 기분이어서 크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게다가 흰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옆 사람과 줄곧 속닥거렸는데, 청중들 속의 ‘촌뜨기’와 ‘시골여자아이’들이 오늘 출연하는 시골 출신 아이의 재능에 무척 기대하고 있다느니 하는 얘기를 모두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늘어놓았다. 앤은 평생 이 흰 레이스 옷을 입은 소녀를 저주할 것 같았다.
앤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마침 이 호텔에 묵고 있던 전문적인 낭송가가 낭송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검은 눈에 나긋나긋해 보이는 그 부인은 달빛으로 짠 듯 반짝이는 회색 드레스로 몸을 감쌌고, 목과 검은 머리에서도 보석이 반짝거렸다.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기막히게 낭송했다. 청중들은 그녀의 낭송에 흠뻑 빠져들었다. 앤 역시도 한동안 모든 걱정거리를 잊고 황홀감에 빠진 눈을 반짝이며 낭송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낭송이 끝나자 앤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 부인 다음 차례로 일어나 낭송을 할 수는 없어. 그럴 순 없어. 난 낭송에 재능도 없다고. 아아,‘초록 지붕 집’으로 당장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 앤의 이름이 불렸고, 앤은 겨우 일어나 휘청거리며 앞쪽으로걸어 나갔다. 이 모습을 보고 흰 레이스 옷을 입은 소녀가 깜짝 놀라 아차 말실수를 했구나 싶어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앤은 그것도 보지 못했다. 설사 봤다 하더라고 그 안에 담긴 미묘한 경이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앤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 청중석에 앉아 있던 다이애나와 제인은 서로 손을 꼭 잡고 불안한 마음을 나누었다.
앤은 무대 공포증의 희생자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낭송을 해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기는 처음이었다. 청중석을 보기만 해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끝없이 앉아 있는 여자들, 뭔가 꼬투리를 잡을 듯한 얼굴들, 또 풍요와 교양이 넘쳐흐르는 분위기 등 모든 것이 너무 낯설고, 너무 화려해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토론 클럽의 소박한 의자에 앉아 있던 친구들과 이웃들의 친숙하고 자상한 얼굴과는 너무 달랐다. 지금 이 사람들은 무자비한 비평가일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흰 레이스 옷 소녀처럼 그들도 싱글거리며 앤의 투박한 낭송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앤은 절망에 빠졌다. 한없이 부끄럽고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기댈 곳이 없었다. 무릎이 후들거렸고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굴욕적인 독배가 되더라도 무대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앤의 눈에 저 뒤 청중들 사이에 있는 길버트 블라이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이 앤에게는 오만하고 비웃는 미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과 달랐다. 길버트가 미소를 짓고 있었던 이유는 모든 것이 즐겁고 들뜬 그날 저녁의 분위기에, 또 종려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앤의 하얗고 날씬한 모습과 기품 있는 얼굴에서 풍기는 멋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길버트 옆에는 조시 파이도 나란히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분명 승리감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앤에게 조시는 보이지 않았다. 설령 눈에들어왔다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앤이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오만하게 고개를 뒤로 한 번 휙 젖히고 나자 전기 충격처럼 용기와 결의가 밀려왔다. 길버트 블라이드앞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었다. 또다시 길버트에게 비웃을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두려움과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앤이 암송을 시작했다. 청아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발표회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떨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았고, 무력감에 휩싸였던 순간에서 벗어나 그 어느 때보다 멋지게 암송을 해냈다. 암송이 끝나자 진심 어린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앤은 부끄러웠지만 암송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빨개진 얼굴로 뒤로 물러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때 분홍 실크 드레스를 입은 뚱뚱한 부인이 앤의 손을 힘껏 잡아 흔들었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난 아기처럼 울기까지 했다니까. 저것 봐요, 모두들 앙코르를 청하고 있어요. 자, 다시 무대로 나가요!”
그 부인이 흥분해 말했다.
“오, 전 못 해요. 하지만…… 안 나가면 안 되겠죠. 아니, 매슈 아저씨가 실망하실 거예요. 사람들이 제게 분명히 앙코르를 청할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앤이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럼 매슈 아저씨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지.”
분홍 드레스를 입은 뚱뚱한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앤이 빨갛게 상기된 볼에 미소를 띠고, 맑은 눈망울을 굴리며 다시 연단 앞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색다르고 재미있는 짤막한 시를 낭송했다. 청중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 이후는 그날 밤이 앤을 위한 밤이라도 된 것 같았다.
발표회가 끝나자 미국 백만장자의 부인이던 그 분홍 드레스를 입은 뚱뚱한 부인은 앤을 품에 끼고 다니며 모두에게 앤을 소개해주었다. 모두가 앤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낭송 전문가인 에번스 부인도 앤에게 다가와 얘기를 나누었고, 앤에게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졌고 선택한 시를 아름답게 ‘해석’해냈다고 말해주었다. 흰 레이스 옷을 입은 소녀조차도 심드렁하긴 했지만 앤을 칭찬해주었다. 그들은 아름답게 장식된 커다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다이애나와 제인도 앤의 동행이라서 식사를함께하도록초대받았다. 하지만 빌리는 초대에 겁을 먹고 도망쳐버린 듯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이 있는 곳에서 세여자아이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소녀는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조용히 내리비치는 하얀 달빛 속으로걸어 나왔다. 앤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어둠에 잠긴 전나무 가지 위의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밖에 나와 순수하고조용한 밤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것도 좋았다. 멀리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속삭임과 마법에 빠진 해안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거인처럼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절벽들까지 모든 것이 장엄하고 차분하며 아름답게 보였다.
“이렇게 근사한 일은 처음이야.”
집으로 돌아오며 제인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 내가 부자 미국인이어서 호텔에서 여름을 지내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가슴까지 파인 드레스를 입고 매일 축복받은 날처럼 아이스크림과 치킨 샐러드를 먹을 수 있다면 좋겠어.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거야. 앤, 네 낭송은 정말 대단하더라. 물론 처음에는 네가 시작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에번스 부인보다도 훨씬 더 잘했어.”
앤이 얼른 말했다.
“아니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제인. 바보 같다는 소리로 들린단 말이야. 에번스 부인은 전문가이고 나는 암송에 약간 재주가 있는 학생일 뿐인데, 내가 에번스 부인보다도 낭송을 잘할 수는 없어. 사람들이 내 낭송을 좋아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
“너를 칭송한 사람도 있어, 앤. 그 사람의 말에는 분명히 칭송이 담겨 있었어, 그 말투에 말이야. 부분적으로는. 제인과 내 뒤에 미국인이 앉아 있었는데, 머리와 눈이 칠흑같이 검고 무척 낭만적으로 생긴 남자였어. 조시 파이가 그러는데 그 사람이 유명한 화가래. 보스턴에 사는 조시 엄마 사촌의 남편이 그 사람과 같은 학교에 다녔대.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 제인, 너도 들었지? ‘저 아름다운 티치아노의 머리를 하고 무대 위에 서 있는 소녀가 누구지? 내가 저 소녀의 얼굴을 한번 그려보고 싶군.’ 정말이야, 앤. 그런데 티치아노의 머리라는 말이 무슨 뜻이야?”
다이애나가 물었다.
“그건 그냥 빨간 머리라는 뜻이야. 티치아노라는 사람이 빨간 머리 여자를 많이 그렸던 유명한 화거거든.”
앤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도 그 여자들이 치장한 다이아몬드 봤니? 정말 눈이 부시게 번쩍거렸어. 너희도 부자가 되고 싶지 않니?”
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앤이 힘차게 말했다.
“우린 부자야.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16년이나 살아오면서 쌓아온 것들이 있고, 여왕처럼 행복하고, 또 우리 모두 상상력을 갖고 있잖아. 저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환상적인 것들을 품고 있잖아. 아무리 백만장자에 다이아몬드를 줄로 엮어 갖고 있어도 이런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는 거기에 있던 어떤 여자와도 내 위치를 바꾸지 않을 거야. 그런 게 가능하더라도! 세상을 비웃으려고 태어난 것처럼 평생 얼굴을 찌푸리고, 그 흰 레이스 옷을 입은 아이처럼 살고 싶은 거야? 또 친절하고 상냥하기는 하지만 그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자처럼, 뚱뚱하고 키도 작아 매력이라곤 없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거야? 에번스 부인도 그랬어. 눈이 아주 슬프게 보이지 않았어? 그런 눈빛인 걸 보면 아주 불행한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난 그런 건 싫어, 제인 앤드루스!”
“난 잘 모르겠어.”
제인이 아직도 부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난 다이아몬드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해.”
그러자 앤이 공표하듯 말했다.
“글쎄, 난 나 외에 다른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설사 평생 다이아몬드로 위로받지 못하고 살아도, 나는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만족해. 매슈 아저씨가 사랑을 듬뿍 담아주신 이 진주 목걸이가 분홍 드레스를 입은 부인의 보석보다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난 알아.”




46) 아주 얇게 평직(平織)으로 짠 가볍고 비치는 면직물.
47) 엘리자베스 베렛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1)의 장편 서사시 <오로라 리(Aurora Leigh)> 제4권 103연.
48) 처녀의 맹세(The Maiden’s Vow): 스코틀랜드 시인인 캐롤라인 올리펀트(Carolina Oliphant, 1766~1845)의 시.




34
퀸스의 여학생





그 다음 3주 동안 ‘초록 지붕 집’은 앤을 퀸스 학교로 떠나보낼 준비를 하느라 무척 바빴다. 바느질거리도 많았고 해야 할 이야기도 정리하고 준비해두어야 할 일도 많았다. 앤의 옷은 충분히 마련되었고 또 모두 예쁜 것들이었다. 매슈가 신경을 많이 쓰면서 이것저것 사들이거나 해주자고 제안을 했고, 마릴라도 굳이 반대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마릴라가 옅은 녹색 천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동쪽 방으로 올라왔다.
“앤, 네 드레스를 만들 천이다. 예쁜 옷들이 많아서 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파티나 뭐 그런데 초대받았을 때 입을 드레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제인과 루비, 조시도 모두 이런 이브닝드레스를 준비했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이런 옷을 그렇게 부르지. 난 네가 다른 애들보다 처지는 건 싫거든. 지난주에 앨런 부인의 도움을 받아 시내에서 이걸 골랐다. 그리고 옷은 에밀리 길리스더러 만들어달라고 할 생각이다. 에밀리는 미적 감각도 있고 또 기술도따라갈사람이 없으니까.”
“오, 마릴라 아주머니, 이건 정말로 아름다워요.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시니…… 제가 점점 더 집을 떠나기가 힘들어요.”

녹색 드레스가 완성됐다. 에밀리의 취향이 허락하는 대로 여러 장식과 프릴과 샤링이 아주 많이 들어간 옷이었다. 앤은 매슈와 마릴라를 위해 그 옷을 입고 부엌에서 <처녀의 맹세>를 다시 한 번 암송했다. 마릴라는 앤의 밝고 활달한 얼굴과 우아한 몸짓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앤이‘초록 지붕 집’에 처음 도착했던 그날 저녁을 떠올렸다. 누르스름한 회색 면모 교직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겁에 잔뜩 질린 듯 눈에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가슴이 미어진다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마릴라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했다.
“제 낭송 때문에 우시는 거죠, 마릴라 아주머니? 요즘 전 그런 걸 긍정적 승리라고 불러요.”
의자로 폴짝 뛰어올라 몸을 구부리고 마릴라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며 앤이 말했다.
시 따위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경멸스러운 일이라는 듯 얼른 마릴라가 말했다.
“아니, 네 낭송 때문에 운 것이 아니야. 네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나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 네가 엉뚱한 짓만 저질러도 항상 어린아이로 있어주기를 바랐는데 어느새 훌쩍 커서 떠나는구나. 이제는 키도 무척 크고 너무 보기도 좋고, 또 그 드레스를 입으니까 너무너무 달라 보여. 여기 에이번리에 사는 아이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런 생각들에 쓸쓸해진 기분이 들었던 거야.”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평직 옷을 입은 마릴라의 무릎에 앉아 주름진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차분하게 마릴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전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조금도요. 쓸데없는 것을 잘라내고 가지를 조금 밖으로 뻗은 것뿐이죠. 여기에 있는 제 진짜 모습은 똑같아요. 제가 어디를 가고, 겉모습이 아무리 변해도 제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마음속으로 저는 언제까지나 아주머니의 작은 앤일 거예요.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 그리고 이 소중한‘초록 지붕 집’을 평생 언제까지나 더 깊이 사랑하는 앤이 될 거예요.”
앤이 자기의 탄력 있고 풋풋한 볼을 마릴라의 수척한 볼에 대고 비볐다. 그리고 팔을 뻗어 매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릴라는 자기도 앤처럼 자기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격이나 습관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릴라는 두 팔로 앤을 안고 가슴까지 끌어당기며 앤을 절대로 보내지 않았으면 하고바랄 뿐이었다.
매슈는 눈에 자꾸 눈물이 고여 오자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푸른 여름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을 받으며 매슈는 가분 좋게 마당을 가로질러, 미루나무들이 서 있는 대문까지 걸어가며 자랑스럽게 중얼거렸다.
“글쎄, 앤이 결코 버릇없는 아이로 자란 것 같지는 않아. 내가 가끔씩 참견을 했지만 그게 크게 잘못된 건 아니었던 셈이지. 앤은 영리하고 예쁘고 또 무엇보다 사랑스럽기도 하잖아. 앤은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이었어. 스펜서 부인이 한 실수보다 더 운이 좋았던 실수는 없었어. 그건 정말로 행운이었어.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우리가 저 아이를 필요로 해서 주님이 축복을 내려주신 거야.”
마침내 앤이 도시로 가야 할 날이 왔다. 9월의 어느 날, 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앤과 매슈는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다이애나는 울면서 작별 인사를 건넸고, 마릴라는 눈물을 꾹 참고 평소처럼 배웅해주었다. 그러나 앤이 떠난 후 눈물을 닦아낸 다이애나는 카모디의 사촌들과 함께 화이트 샌즈 해변으로 소풍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달랬다. 한편 마릴라는 쓰라린 가슴을 억누르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몰두했지만, 심장을 태우고 갉아먹는 듯한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복도 끝의 작은 동쪽 방에 생기에 넘치는 아이가 없고 보드라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쓸쓸한 생각에 마릴라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은 후 마릴라는 인간에게 그런 애달픈 마음을 갖는 것이 잘못된 짓이란 걸 깨닫고 자신이 그렇게 울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앤을 비롯해 에이번리의 다른 학생들 모두가 시간에 맞춰 겨우 도착해서 서둘러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첫째 날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새로운 학생들과 교수들을 만나고, 반을 배정받고 하느라 흥분의 도가니였다. 앤은 스테이시 선생님의 충고대로 2학년 과정을 이수할 생각이었다. 길버트 블라이드도 똑같은 과정을 선택했다. 이렇게 되면, 그리고 공부를 제대로만 해내면 1급 교사 자격증을 2년이 아닌 1년 만에 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공부는 힘들었다. 제인, 루비, 조시, 찰리, 그리고 무디 스퍼전은 그런 야심에 휘둘리지 않고 2급 교사 과정을 이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앤은 50명의 학생과 한 교실에 있었지만 갈색 머리칼의 훤칠한 남학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더구나 앤이 비관적으로 생각한 까닭에, 그 남학생은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앤은 둘이 같은 반이라는 게 내심 기뻤다. 그들의 오랜경쟁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그런 경쟁심마저 없었다면 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 길버트마저 없었으면 나도 편하지만은 않았을 거야. 길버트는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데. 벌써부터 메달을 따겠다고 결심하고 있을 거야. 턱이 참 잘생겼네! 전에는 전혀 몰랐었는데. 제인과 루비도 1급 교사 과정에서 함께 공부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앞으로 친구를 사귀면 낯선 다락방에 갇힌 고양이 같은 기분은 아닐 거야. 어떤여자아이가 내 친구가 될지도 궁금하고. 이런 추측을 해보는 것도 참 재미있어. 물론 다이애나에게 약속했듯이, 퀸스에서 사귄 친구를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다이애나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 그래도 두 번째로 친한 친구는 많이 사귈 수 있어. 아, 저 갈색 눈에 진홍색 블라우스를 입은 애의 표정이 마음에 드는데. 활달해 보여. 또 창밖을 내다보는 저 금발 아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얼굴이 하얗고 머리칼도 예뻐서, 꿈을 좀 알 것처럼 보이잖아. 저 두 애랑 친해지고 싶어. 서로 허리를 팔로 감고 걷고, 서로 별명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알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나도 저 애들을 모르고 저 애들도 나를 몰라. 어쩌면 저 애들은 나를 특별히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아, 정말 외롭구나!’
그날황혼녘에 앤은 하숙집 방에 혼자 있었다. 그 때문인지 더더욱 외로움이 밀려왔다. 앤은 에이번리의 친구들과 함께 하숙할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그들을 돌봐줄 친척이 시내에 있었다.조제핀배리가 앤을 데리고 있고 싶어 했지만,‘너도밤나무 저택’은 학교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긴 불가능했다. 그래서조제핀배리가 적절한 하숙집을 물색해주었고 앤에게 딱 좋은 집이라고 매슈와 마릴라를 안심시켜주었다.
“이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인은 원래 신분이 높은 집 사람이었고, 남편은 영국 장교였어요. 하숙생을 들일 때도 아주 신중하게 선택해서 그 집에 있으면서 앤이 못된 사람을 만날 일은 없어요. 식사도 괜찮고, 학교에서도 가깝고, 조용한 동네예요.”
조제핀배리가 설명했다.
이 모든 말이 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리고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앤을 사로잡고 있는 향수병의 고통으로부터 앤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했다. 앤은 좁고 작은 방을 쓸쓸하게 둘러보았다. 칙칙한 색깔의 벽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벽, 작은 철제 침대, 썰렁한 책꽂이뿐이었다. 조용하고 푸른 들판, 스위트피가 덩굴을 이루며 자라는 정원과 달빛이 떨어지는 과수원, 비탈길 아래를 흐르는 개울과 밤이면 그 너머에서 살랑거리는 가문비나무의 가지들, 별이 반짝이는 드넓은 하늘, 그리고 나무들의 틈새로 보이는 다이애나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등 즐거운 기억들이 있는 ‘초록 지붕 집’ 자기의 하얀 방을 생각하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딱딱한 포장도로가 나 있고 하늘은 여기저기로 연결된 전화선이 가로막고 있으며 낯선 사람들의 발소리와 낯선 사람들 얼굴을 비추는 수많은 불빛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앤은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곧 울음을 터뜨리고 말 거라는 것도 알았다.
‘난 울지 않을 거야. 바보 같은 짓이야. 마음도 약하고. 그런데 벌써 눈물이 세 방울이나 코로 떨어지고 있어. 또 떨어져!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참아야겠어. 하지만 재미있는 일은 모두 에이번리와 관련되어 있어. 재미있는 일을 생각해봤자 더 나빠질 것 같아. 네 방울…… 다섯 방울…… 다음 주 금요일엔 집에 갈 거야. 하지만 백 년처럼 길게 느껴져. 오, 지금쯤이면 매슈 아저씨가 집에 거의 다 오셨겠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대문에서 오솔길을 내려다보며 아저씨가 오나 살펴보시겠지. 여섯 방울, 일곱 방울, 여덟 방울…… 오, 눈물방울을 세어보아도 아무런 소용도 없어! 이제는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오잖아. 이런 우울한 기분을 돌릴 수가 없어. 기분을 좋게 하고 싶지도 않아. 차라리 슬픈 게 더 낫겠어!’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려고 하는 순간 조시 파이가 나타났다. 낯익은 얼굴을 본 기쁨에 앤은 조시와 자기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에이번리에 속한 것이라면 파이 아이들마저도 대환영이었다.
“네가 와주어서 너무 기뻐.”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너, 울고 있었지. 네가 향수병에 걸린 모양이야. 그런 면에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이 좀 있긴 하지. 난 향수병이 어떤 건지도 몰라. 답답하고 좁은 에이번리보다 도시가 훨씬 재미있잖아. 내가 거기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라니까. 앤, 울면 안 돼.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네 코와 눈이 빨개지고, 나중엔 네가 온통 빨갛게 보일 거야. 난 오늘 학교에서 너무너무 재미있었어. 프랑스어 교수님 정말 귀엽게 생겼어. 너도 그 교수님 콧수염을 보면 그냥 마음이 약해질 거야. 먹을 것 좀 있니, 앤? 난 배가 고파 죽겠어. 마릴라 아주머니라면 너한테 케이크를 싸주셨을 것 같아서 너한테 들렀는데. 그렇지 않으면 프랭크 스토클리와 함께 공원으로 밴드 연주를 들으러 갔을 거야. 프랭크는 나하고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아이야. 걔가 오늘 교실에서 너를 눈여겨봤다면서, 빨간 머리 아이가 누구냐고 내게 물었어, 그래서 네가 커스버트 씨 집에서 입양한 고아이고, 그전까지는 어떻게 살던 아인지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고 대답해줬어.”
조시가 약이라도 올리듯 말했다.
앤이 조시 파이를 말동무로 삼는 것보다 외로움과 눈물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 때쯤 제인과 루비가 찾아왔다. 둘 모두 퀸스 학교를 상징하는 자주색과 진홍색의 작은 리본을 외투에 자랑스럽게 꽂고 있었다. 조시가 언제부터 제인에게는 말도 하지 않아서 그제야 입을 꼭 다물었다.
제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오늘 아침 이후로 몇 달이 지난 것 같아. 이 시간엔 집에서 베르길리우스49) 시를 공부해야 하는데. 무섭게 생긴 늙은 교수가 내일부터 공부를 시작한다고 20행을 읽어오라고 했거든. 하지만 오늘 밤에는 공부하겠다고 차분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 앤, 눈물 자국이 있는 것 같은데. 울었다면 솔직히 말해봐. 그럼 나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루비가 오기 전까지 나도 엉엉 울고 있었거든. 다른 사람도 바보같이 울었다면 내가 그렇게 울었더라도 위안이 될 것 같아. 케이크? 조금만 줄래? 고마워. 이게 정말 에이번리 맛이야.”
루비는 책상에 퀸스 학교의 달력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앤에게 금메달에 도전해볼 건지 알고 싶어 했다.
앤은 얼굴을 붉히며 그럴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오, 그러니까 생각난다. 퀸스 학교도 드디어 에이버리 장학생을 뽑으려 한대. 오늘 들었어. 프랭크 스토클리가 말해줬어. 그 아이 삼촌이 퀸스 학교 이사 중의 한 사람이라나. 내일 발표가 있을 거래.”
조시가 말했다.
에이버리 장학금! 앤은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야망의 수평선이 마법에 걸린 듯이 멀리 옮겨지고 확대되는 것 같았다. 조시가 이 소식을 알려주기 전까지만 해도 앤의 최고의 야심은 이 일 년이 끝났을 때 쥐게 되는 일급 교사 자격증과, 아마도 금메달! 그것이 다였다. 그러나 지금 단 한 순간에 앤의 목표가 바뀌었다. 자신이 에이버리 장학금을 받아 레드먼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한 다음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졸업하는 모습이 조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그려졌다. 에이버리 장학금은 영어학 성적에 달려 있고, 그 과목이라면 앤은 자신이 있었다.

에이버리 장학금은 뉴브런즈윅의 어떤 부유한사업가의 유산으로조성되어 섬의 여러 중고등학교에 그 자격에 맞게 배분되었다. 퀸스 학교에는 그 장학금이 할당되기가 쉽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마침내 이 학교에도 배분하기로 결정되어 올 연말에 영어학과 영문학에서 최고 성적을 얻은 졸업생이 그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레이먼드 대학에 다니는 4년 동안 한 해에 2백 50달러씩을 받게 된다. 당연히 앤은 그날 밤 흥분된 마음을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
“열심히 공부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거라면 꼭 받고 말 거야.”
앤은 결심했다. 내가 문학사 학위를 받으면 매슈 아저씨가 얼마나 자랑스러우실까! 아, 야망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나한테 이렇게 커다란 포부가 생겨서 정말 기뻐. 야망이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거야. 하나의 야망을 성취하면 곧바로 또 다른 야망이 더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는 게 흥미로운 것 같아.”



49) 고대 로마의 시인(B. C.70~B. C.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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