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3~4

나단비 | 2024.03.24 21:22:38 댓글: 0 조회: 7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342
3
작별 인사





찰리 슬론과 길버트 블라이드, 앤 셜리는 다음 날 아침 에이번리를 떠나기로 되었다. 다이애나가 앤을 마차로 기차역까지 태워다주기로 했다. 앤은 내일 아침은 화창한 날씨이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이 짧지만 즐거웠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간밤에 동풍이 ‘초록 지붕 집’을 둘러싸고 구슬프게 불어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앤은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잠을 깼다. 회색 구름이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언덕과 바다도 안개 속에 잠겨, 온 세상이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아침이었다. 그 스산한 새벽녘에 앤은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열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앤은 참아도 참아도 계속해서 눈에 고이는 눈물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니. 방학이나 되어야 찾아올 수 있을 뿐 이제 영원히 집을 떠나야 한다.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방학 동안에만 돌아와 지내는 것은 여기에 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초록 지붕 집’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했고 아늑했는데……. 하얀 동쪽 방은 소녀의 꿈에 바쳐진 신성한 방이었고, 창가의 ‘눈꽃 여왕’, 분지의 시냇물, ‘드리아드의 샘’, ‘유령의 숲’, ‘연인의 오솔길’ 등 모두가 지난날의 추억이 깃든 너무나 정겨운 곳들이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날 아침‘초록 지붕 집’에서의 아침 식사는 다소 서글펐다. 데이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자기 죽 그릇 앞에 앉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식욕이 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아침을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사람은 도라뿐이었다. 미쳐버린 연인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문을 나가는데도 ‘계속해서 빵과 버터를 자르고’ 앉아 있을 만큼 아무도 그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었던 불멸의 여인 샬로트8)처럼 도라도 주변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축복받은 생명체였다. 비록 여덟 살 어린 나이지만 이 아이의 평정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물론 도라도 앤이 떠나게 되어 슬펐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스트 위에 얹힌 계란에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될 순 없었다. 데이비가 못 먹자 도라가 대신 데이비 것도 먹어주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정확하게 다이애나가 마차를 몰고 나타났다. 비옷 위로 다이애나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 빛났다. 어쨌건 작별 인사는 해야 했다. 린드 부인도 비좁은 자기 방에서 나와 앤을 포옹하며 건강에 주의하고 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하라고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무뚝뚝한 표정의 마릴라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앤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며 안정되자마자 연락하라는 말만 건넸다. 언뜻 보아선 집을 떠나야 하는 이 순간을 앤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눈여겨보았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도라는 입을 꾹 다문 채 앤에게 입을 맞추고는 눈을 질끈 감아 장식으로 눈물 두 방울을짜내었다. 하지만 모두들 식탁에서 일어난 후에도 집 뒤 베란다 계단에서 계속 울고 있던 데이비는 작별 인사를 끝내 거부했다. 그러다가 앤이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나서는 계단으로뛰어올라가 벽장 속에 숨어버리고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듯 희미하게 들리는 데이비의 울음소리가 앤이‘초록 지붕 집’을 떠나면서 들었던 마지막 소리였다.

브라이트 리버 역까지 가는 내내 비는 세차게 내렸다. 카모디에서 출발하는 지선 열차는 항구까지 바로 연결되지 않아서 브라이트 리버 역까지 가야만 했다. 다이애나와 앤이 역에 도착했을 때 길버트와 찰리는 이미 역 플랫폼에 도착해 있었고, 기차는 막기적 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앤은 겨우 차표를 끊고 가방을 짐칸에 실은 뒤 다이애나와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 급하게 기차에 올랐다. 다이애나와 에이번리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앤은 자기가 향수병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름이 가버렸다고,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다고 온 세상이 슬퍼하는 것처럼 끔찍스럽게 퍼붓는 저 비라도 제발 좀 멈추어주었으면 했다. 앤은 길버트가 옆에 있어도 위안을 받을 수 없었다. 거기다 바로 옆에는 찰리 슬론이 있었다. 슬론 집안 기질은 날씨가 좋아야 그나마 견딜 만했다. 이런 궂은 날씨에는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배가 샬럿타운 항구를 빠져나오자 상황은 호전되었다. 비는 물러났고 구름이 갈라진 틈을 비집고 황금빛 햇살이 비쳐 회색빛 바다를구릿빛로 물들였으며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붉은 해변을 둘러싼 안개도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날씨는 화창하게 갤 것이고, 찰리 슬론이 갑자기뱃멀미가 난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앤과 길버트만 갑판 위에 남았다.
‘슬론 사람들은 배만 타면 바로뱃멀미를 하니 잘됐어. 찰리 슬론이 옆에서 감상에 젖은 척 바라보고 있었으면, 난 아마 내 정든 고향과 마지막 작별 인사도 할 수 없었을 거야.’
무정하지만 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섬에서 멀어지고 있다.”
길버트가 전혀 감상적이지 않게 말했다.

“그래, 내가 마치 바이런의 차일드 해럴드9)가 된 것 같아.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꼭 ‘내 고향 바닷가’는 아니었으니.”
앤이 힘주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정확히는 노바스코샤가 내 고향이겠지. 하지만 ‘내 고향 바닷가’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땅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고향은 프린스에드워드 섬이야. 내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믿어지지 않아여기 오기 전 11년은 정말 악몽 같았지. 배를 타고 이 바다를 건너온 지 벌써 7년이 지났네. 스펜서 부인이 나를 호프타운에서 데려온 그날 밤, 난 볼품이라고는 없는 다해진면모 교직 옷을 입고 빛바랜 세일러 모자를 쓴 채 갑판과 선실을 누비고 다녔어.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까. 참 멋진 저녁이었어. 저 붉은 해변이 햇살을 받아 어찌나 빛났던지. 그 해협을 이제 다시 건너다니. 오, 길버트. 레드먼드와 킹스포트를 정말 사랑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근데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아.”
“너의 이상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니, 앤?”
“저 거대한 파도 속에 모두 잠겨버렸나 봐. 진한 외로움과 향수병이란 파도 속으로 말이야. 지난 3년 동안 레드먼드에 갈 수 있기를 그렇게 소망했는데, 그리고 이제 정말로 가고 있는데, 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다니! 그럼 안 되지! 난 활기차게 마음을 다시 다잡아야 해. 한 번만 울고 나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을 것 같아.그러곤오늘 밤하숙집에 들어갈 때까진 참을 거야. 거기서 또 울겠지. 그다음엔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데이비가 이젠 벽장에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이들을 실은 기차가 킹스포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였다. 흰색과파란색불빛을 발하는 역은 사람들로 붐볐다. 앤은 잠깐 동안 정신이 나가버린 듯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프리실라 그랜트가 손목을 잡자 반가운 마음에 그런 기분을 털어낼 수 있었다. 프리실라는 이곳에 토요일에 먼저 왔다.
“너 왔구나, 앤! 토요일 밤에 내가 여기 도착했을 때만큼이나 너도 피곤할 거야.”
“정말 피곤해, 프리실라. 말도 꺼내지 마. 피곤하고 모든 것이 낯설고, 거기다 내 모습이 너무 촌스럽지 않니? 내가 열 살짜리 애처럼 느껴져. 제발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이 불쌍한 친구를 어디 정신 차릴 만한 곳으로 좀 데려가 줘.”
“그래, 지금 당장 우리 하숙집으로 데려가 줄게. 밖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
“프리실라, 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내겐 축복이야. 네가 없었다면 난 내 짐 꾸러미 위에 앉아서쓰디쓴눈물을 삼켜야 했을 거라고. 술렁이는 낯선 이방인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지!”
“저기, 길버트 블라이드 아니니, 앤? 올해 완전히 어른이 다 됐네! 내가 카모디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땐 아직 소년 같더니만. 물론 찰리 슬론도 마찬가지였지. 찰리는 별로 변한 게 없네, 물론 그럴 수도 없겠지만! 찰리는 태어날 때도 바로 저 모습이었을 것 같아. 여든이 되어도 지금 모습 그대로겠지. 자, 이쪽이야. 20분만 가면 집에 가게 돼.”
“집! 끔찍한 하숙집에 가게 된다는 말이지? 음울한 뒤뜰로 향해 있는 문간방은 더 끔찍하겠지.”
앤은 신음소리를 냈다.
“꼭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아, 앤. 여기 우리가 탈 마차야. 어서 타자. 짐은 아저씨가 넣어주실 테니. 아, 그래. 하숙집, 우리가 살게 될 하숙집은 정말 괜찮은 곳이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너의 그 우울한 기분이 장밋빛으로 바뀌면 너도 내 말을 인정하게 될 거야. 하숙집은 세인트 존 거리에 있는 회색의 석조 건물인데 웅장하고 고풍스러워. 레드먼드 대학하고도 가깝고. 옛날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세인트 존 거리가 구시가지가 되어버린 바람에 옛날 좋았던 시절은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되었지. 집들이 너무 커서 따로 하숙생을 두어야 방을 다 채울 수 있단다. 우리 집 주인도 바로 그 점을 자랑하고 싶어 하지. 다들 좋은 분들이야, 앤. 하숙집 주인들 말이야.”
“몇 사람이나 되는데?”
“둘. 해나 하비와 에이다 하비. 쉰 살 정도 된 쌍둥이 자매야.”
“난 도대체 쌍둥이를 피할 수가 없어. 어디를 가나 쌍둥이를 만난다니까.”
앤이 웃었다.
“오, 지금 그 두 사람은 전혀 쌍둥이라고 볼 수없어. 서른 살이 되면서부터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렸대. 해나 하비는 늙었지만 너무 지나치게 우아해지지 않았고, 에이다 하비는 서른에서 멈추어버렸지만 별로 우아해지지 못했다고 해. 난 해나 하비가 과연 웃을 줄이나 아는 사람인지 모르겠어. 지금까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거든. 하지만 에이다 하비는 온종일 웃고 있어. 근데 그게 더 안 좋은 것 같더라.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야. 하숙생을 매해 두 사람씩 들인단다. 해나 하비의 ‘절약 정신’으로는 집에 빈방을 두어 낭비하는 건 참을 수가 없는 일이래. 꼭 하숙생을 들이지 않아도 먹고살기야 지장이 없지만 낭비하지 않으려고 하숙생을 두는 거래. 지난 토요일부터 해나 하비가 그 이야기를 일곱 번이나 한 거 알아. 우리 방으로 말하면, 문간방은 맞아. 내 방은 뒷마당 쪽이고, 네 방은 앞쪽인데, 세인트 존 거리의 묘지가 보여. 묘지가 바로 길 건너편에 있거든.”
“무시무시하다. 내 방도 차라리 뒷마당을 바라본다면 더 나을 것 같아.”
앤은 몸을 떨었다.
“오,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내 얘기를 더 들어봐. 세인트 존 거리는 정말 정다운 곳이라고. 묘지도 아주 오래된 곳이라 묘지라기보다는 킹스포트의 명소 중 하나가 돼 있어. 어제 그곳에 가보았는데 무척 흥미로웠어. 묘지 주위로 높은 돌담과 아름드리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고, 무덤들 사이로도 나무들이 아주 많아. 무덤들도 묘비에 새겨진 글도 모두 다 재미있고 그렇게 특이할 수가 없어. 너도 꼭 거기 가보아야 해, 앤. 물론 지금은 그곳에 묻히는 사람도 없어. 몇 년 전에 크림 전쟁10)에 참전한 노바스코샤의 병사들을 기리려고 아름다운 비석이 하나 세워지긴 했지만. 정문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는데, 그 비석엔 네가 좋아하는 ‘상상의 여지’가 남아 있단다. 여기, 네 트렁크.남자아이들이 저녁인사 하러오겠지. 앤, 찰리 슬론과 악수를 해야만 할까? 찰리의 손은 언제나 차갑고 만지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가끔씩만 들르라고 해야겠어. 해나 하비는 아주 근엄하게 ‘젊은 남자의 방문’은 일주일에 두 번, 적절한 시간에만 허용한다고 했거든. 에이다 하비는 남학생들이 자기가 만든 아름다운 쿠션 위에 앉지 않도록 해달라고 웃으면서 부탁하더라. 난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지. 하지만 바닥이라면 모를까 어디 앉을 곳이 있을지 모르겠어. 쿠션이 놓여 있지 않은 곳이 없거든. 피아노 위에다가도 네모난 모양의 쿠션을 장식으로 올려놓았다니까.”
이쯤에서 앤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실라는 일부러 쾌활하게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아 앤의 기분을북돋워주었다. 덕분에 향수병도 잠시 사라졌고, 드디어 앤이 혼자 작은 방에 남겨졌을 때도 향수병이 돌아와 위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앤은 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래로 펼쳐진 거리는 어둑하고 조용했다. 거리 맞은편 기념비에 세워진 커다랗고 거뭇한 사자 석상 머리 바로 뒤 나무 위에서 달빛이 빛났다. 바로 그날 아침‘초록 지붕 집’을 떠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단 하루 동안의 여정으로 생긴 변화가 너무 커다랗게 느껴졌다.
‘바로 저 달이 지금초록 지붕 집도 내려다보고 있겠지. 하지만 이제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럼 향수병만 더 깊어질 뿐이야. 엉엉 울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우는 것도 좀 더 편안한 계절까지 당분간 미뤄두겠어. 그리고 지금은 조용하게, 이성적으로 잠자리에 들 테야.’
앤은 혼자 생각했다.
8.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의 시 <베르테르의 슬픔(Sorrows of Werther)>에서 인용. 이 시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큰 성공을 거두자 새커리가 쓴 풍자시이다.
9. 바이런의 자전적인 기행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에서의 차일드 해럴드
10. 1853년 제정 러시아가 흑해로 진출하려고 터키, 영국, 프랑스, 사르디니아 연합군과 벌인 전쟁으로 1856년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4
4월의 아가씨





역사가 오래된 도시인 킹스포트는 초기 식민지 시대로 돌아간 듯 옛날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멋진 중년 여성이 젊었을 때 쓰던 장신구로 치장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기저기 현대의 물결이 싹트고 있었지만, 이 도시를 지탱하는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곳곳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유산이 가득하고 거리거리마다 과거의 많은 전설 속 로맨스들로 빛났다.
한때 이곳은 황야의 끝자락에 위치한 변경의 기차역일 뿐이었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공격해오는 인디언 때문에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이 땅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여 한때는 영국의 지배하에, 또 한때는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전쟁의 상흔이 깊게 남은 곳이었다.
킹스포트 공원에는 온통 관광객이써놓은 낙서로 뒤덮인 원형 포탑이 있고, 시내를 좀 벗어나서 언덕 위로는 다 무너진 프랑스군 요새가 자리 잡고 있으며, 광장에는 그 옛날의 대포 몇 문도 놓여 있었다. 물론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나설 법한 다른 역사적인 장소들도 많았다. 하지만 길 양쪽으로 조용하고 오래된 집들이 늘어선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올드 세인트 존 묘지보다 더 특별하고 재미있는 곳도 없었다.
묘지 바로 뒤편으로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적인 거리가 펼쳐졌다. 킹스포트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조상이 묻힌 이 묘지에 커다란 애착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기묘하게 생긴 묘비가 기우뚱하니 서 있거나 아니면 무덤을 보호하려는 듯 다른 비석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잠들어 있는 이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다. 묘비에 대단한 예술이나 기술이 깃들어 있진 않았다.
대부분은 이 고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과회색빛돌을 대충 깎은 것이고 장식이 들어간 비석은 몇 되지 않았다. 어떤 무덤의 묘비는 해골과 뼈 모양으로 된 십자가로 장식되었고, 여기에 케루빔11)머리를 덧붙여 장식한 묘비도 있었다.
많은 묘비가 기울어졌고 또 망가진 것도 있었다. 어떤 묘비의 글은 오랜 세월에 부식되어 완전히 읽을 수 없게 되었고, 어떤 묘비는 힘들여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묘지는 무덤들로 꽉 찼고 무덤들 사이사이에는 우거진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들이 가득했다. 나무 그늘 아래 잠든 조상들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와 바람의 낮은노랫소리를 자장가 삼아 영원히 편안하게 잠들어 바로 뒤에서 들리는 번잡스러운 교통 소음에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오후 앤은 올드 세인트 존 묘지를 처음으로 찾았다. 오전에는 레드먼드에 가서 등록을 마쳤고, 그 이후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앤과 프리실라는 기쁜 마음으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어디 속해야 할지 몰라 서성대는 이방인 같은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두세 명씩무리 지은여자 신입생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띄엄띄엄 서 있었다.한창때를 만난 남자 신입생들은 현관 앞 커다란 계단에 한 무리로 뭉쳐 앞으로앙숙 관계가 될 2학년에게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를 내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온 힘을 다해 환호성을 질러댔다. 몇몇 2학년 학생들은 계단 위에 서서 이런 ‘멋모르는 새끼 호랑이들’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길버트와 찰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찰리 슬론의 얼굴을 보고 기뻐할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어. 찰리의 왕방울 눈이 보이면 반가워서 미친 듯이 환호성이라도 올릴 것 같아. 적어도 낯익은 눈이니까.”
교정을걸어 나오며 프리실라가 말했다.
“오, 내가 거기 서 있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내가 등록할 차례를 기다릴 때 말이야. 내가 거대한 양동이에 담긴 아주 작은 물 한 방울처럼,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어.나 자신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만도 기분이 나쁜데, 내가 하찮은 존재 외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 영혼 속에 각인시키는 건 더 참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만 내가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고. 내 모습이 맨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하찮은 존재라서 2학년 학생들이 나를 밟고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난 나를 위해 울어주고, 노래를 불러주는 이도 없이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가야 할 거야.”
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년까지만 기다려 봐. 그럼 우리도 2학년처럼 학교에 따분해 하는 세련된 학생으로 변모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자기가 하찮은 존재라고 느끼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나처럼 말도 안 되게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보단 나을것 같다. 난 내 거대한 몸이 레드먼드를 온통 다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어. 내 키가 다른 애들보다 5센티미터는 더 커서 2학년도 별로 두렵지 않았어. 근데 나를 코끼리로 생각하면 어쩌나, 아니면 감자만 먹고 키만 너무 자라버린 섬사람이란 얘기나 듣지 않을까 너무 두려웠어.”
프리실라가 다독였다.
“문제는 거대한 레드먼드가 작은 퀸스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순순히 인정하지못하는 데서오는 것 같아.”
발가벗겨진 영혼을 덮어줄 정겨운 옛 생각의 단편들을 이끌어내며 앤이 말했다.
“퀸스를 떠날 때의 우린 그곳 사람들에게 익숙했고 또 우리만의 보금자리도 있었지. 아마 무의식적으로 퀸스에서의 생활 그대로를 레드먼드에서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나 봐. 그런데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땅이 발밑에서 꺼져버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잖아. 린드 부인이나 엘리샤 라이트 부인이 지금의 내 마음 상태를 알 수 없다는 게 다행이야. 영원히 그럴 일은 없겠지? 만약 그분들이 내 마음을 알았더라면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면서 의기양양해했을 거야.그러곤끝이 시작되는 거라고 확신하겠지. 단지 시작이 끝나가는 것뿐인데 말이야.”
“맞아, 이제 좀 너답다.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사람들과도 친해질 거야. 그러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거라고. 그런데 앤, 오늘 아침 내내 여학생 휴게실 문밖에 혼자 서 있던 여학생 너도 봤니? 갈색 눈에 삐죽이 입을 다물고 있던 예쁘게 생긴 아이.”
“그래, 봤어. 특히 눈에 띄던데. 나처럼 아는 사람도 없이 외로워 보였어. 나야 프리실라 너라도 있지만, 그 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그 아인 이 세상에 자기 혼자뿐이라고 느끼는 것 같더라. 내가 그 애를 볼 때마다 그 앤 우리에게 다가오려는 것 같았어. 그런데 절대 그러질 못했지. 너무 부끄러웠나 봐. 다가왔더라면 좋았을걸. 방금 말한 것처럼 내가 코끼리처럼 느껴지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먼저 그 아이에게 다가갔을 거야. 그런데 온통 남학생들로 북적대는 긴 복도를 쿵쿵거리며 못 지나가겠더라고. 그 아인 내가 오늘 본 신입생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였어. 하지만 레드먼드에서의 첫날엔 아무리 예뻐도 소용없고, 또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도 자기 기만적인 행위인 것 같아.”
프리실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점심을 먹은 다음 올드 세인트 존에 갈 거야.기분 전환을 위해 묘지가 좋은 곳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무가 있는 곳 중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잖아. 난 나무가 있어야 해. 난 그 오래된 비석 위에 앉아서 눈을 감고 내가 에이번리 숲 속에 있다고 상상할 거야.”
앤이 말했다.
하지만 앤은 그 말대로 눈을 감은 채 공상에만 잠겨 있을 수 없었다. 올드 세인트 존에는 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두 사람은 거대한 영국의 사자상이 받치고 있는 단순하고 육중한 석조 아치를 지나 정문으로 들어갔다.

잉커먼의 검은 딸기 덤불조차 시뻘겋게 물들었으니,
그 후로는 이 거칠고 조용한 언덕도 사람들 입에 회자되리.12)

묘지를 바라보며 시구를 읊조리는 앤은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어느새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푸르른 풀밭에 섰다. 바람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무덤들 사이로 난 기다란 길을 거닐며 비문을 읽었다. 지금보다 더 여유로웠을 그 옛날에 새겨진 것들이고, 길이도 상당히 길었다.
“‘여기 앨버트크로퍼드씨가 잠들다.’”
앤이 낡은 잿빛 묘비의 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오랫동안 킹스포트의 병기창지기로 봉직했으며, 1763년 휴전이 될 때까지 군에 복무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했다. 용감한 군인이었으며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버지였다. 1792년 10월 29일 84세로 숨을 거두다.’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는 비문이야. 이 사람의 삶에는 모험이 가득했을 것 같아. 이 사람의 인간적인 면도 너무 멋져.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런 말을 해줬는지 모르겠어.”
“여기 다른 비문도 있어, 들어봐. ‘알렉산더 로스를 추모하며. 1840년 9월 22일 사망. 나이 43세. 이 묘비는 27년간 한 친구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준 데 대한 감사로 세워졌다. 난 그를 내 친구로 여기며 그의 전적인 믿음과 헌신을 찬미하는 바이다.’”
프리실라가 읽었다.
“너무 멋진 비문이야.”
생각에 잠긴 듯 앤이 대꾸했다.
“이보다 더 멋진 비문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모두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일하지. 자기 일에 충실했다고 비문에 새겨질 수 있다면 다른 어떤 말도 필요치않을 거야. 여기 작고 슬퍼 보이는 회색 비석이 있다, 프리실라. ‘사랑스러운 아기를 기억하며’라고 돼 있어. 여기 다른 묘비에는 ‘다른 곳에 묻힌 사람을 추모하며 세워지다’라고 쓰여 있어. 그 사람은 어디에 묻혔을까? 정말이지, 요즘 묘지는 옛날 것에 비하면 아무 멋도 없어. 프리실라 네 말이 맞아. 나 여기 자주 올래. 벌써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어. 그런데 우리만 여기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이 길 저 끝에 누가 서 있어.”
“그래, 맞아. 오늘 아침 레드먼드에서 본 바로 그 여학생 같아. 내가 지금 저 애를 5분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벌써 여섯 번이나 이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가 여섯 번 모두 돌아갔어. 너무 부끄러웠거나 아니면 뭔가가 너무 부담스러운가 봐. 우리 가서 저 아이를 한번 만나보자. 레드먼드보단 여기가 서로 친해지기 더 좋은 장소일 거야.”
두 사람은 기다란 묘지 사이로 난 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따라 그 낯선 여학생에게로 다가갔다. 그 애는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비석 위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을 홀릴 듯 눈이 다 부셨다. 갈색 머리는 비단 옷처럼 윤기가 흘렀고 동그란 볼에서는 부드럽고 탐스러운 광채가 났다. 끝이 묘하게 뾰족한 짙은 눈썹 밑으로 커다란 갈색 눈이 부드럽게 빛났으며 삐죽이 다문 입술은 장밋빛처럼 붉었다. 맵시 좋게 입은 갈색 정장 밑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작은 구두가 살짝 보였다. 흐릿한 분홍색 밀짚모자는 금갈색의 양귀비꽃으로 장식되었는데, 모자의 ‘장인’ 솜씨인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져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불현듯 프리실라의 가슴속으로 자기 모자가 고향의 시골 마을 모자장수 솜씨 티가 역력할 거라는 생각이 파고들었고 앤도 지금 입고 있는, 자기 손으로 만들고 린드 부인이 고쳐준 블라우스가 저 여학생의 세련된 옷보다 너무 촌스럽고 집에서 만든 티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순간 둘은 돌아서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그 갈색눈의 여학생은 두 사람이 자기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아이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더니 명랑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부끄러움이나 부담스러운 마음 따윈 조금도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아니, 알고 싶어 죽겠어. 오늘 아침 두 사람을 레드먼드에서 봤거든. 레드먼드는 정말 이상하지 않아? 난 잠깐 동안 집에 그냥 있다 시집이나 갈 걸 하는 생각까지 했어.”
여학생이 말했다.
뜻하지 않은 말에 앤과 프리실라는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갈색 눈의 여학생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야. 그럴 수만 있다면. 자, 우리 모두 여기 비석 위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해보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우리 모두 친해질 것 같지 않니? 오늘 아침 레드먼드에서 두 사람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난 바로 두 사람에게 다가가 둘 모두 꼭 안고 싶었다고.”
“왜 안 그랬어?”
프리실라가 물었다.
“왜냐하면, 정말 그래야 할지 결심이 서질 않았거든. 난 어떤 일이나 혼자 결정을 못 내려. 이렇게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항상 고생이지. 무엇을 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와 버리거든. 정말 끔찍해. 하지만 내가 그렇게 태어났으니 스스로를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래서 두 사람에게 다가가 이야기하길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우린 네가 너무 수줍음을 많이 타서 그런 줄 알았어.”
앤이 말했다.
“아니, 아니야. 필리파 고든이 가진 약점과 장점 중에 부끄러움이란 건 없어. 줄여서 필이라고 해. 그냥 필이라고 불러줘. 너희들 이름은?”
“여기는 프리실라 그랜트.”
앤이 프리실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앤 셜리.”
프리실라가 앤을 가리켰다.
“우리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왔어.”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난 노바스코샤 볼링브로크에서 왔어.”
필리파가 말했다.
“볼링브로크! 거긴 내가 태어난 곳이야!”
앤이 외쳤다.
“정말이니? 와, 그럼 너도 파랑코?13)”
“아니, 그렇진 않아. 댄 오코넬이 ‘사람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말이 되는 건 아니다.’14)라고 하지 않았니? 난 뼛속까지 프린스에드워드섬 사람이야.”
앤이 말했다.
“어쨌든 네가 노바스코샤에서 태어났다니 기뻐. 우리가 이웃 비슷한 게 되는 거잖아,그렇지? 그럼 됐어. 내가 너에게 비밀 이야기를 해도 낯선 사람한테 이야기하는 게 아냐. 난 말을 해야 되거든. 비밀을 간직하곤 못살아. 노력해봤는데 소용없었어. 이게 바로 내 최대 약점이지. 아까 말했듯이 우유부단한 성격이랑. 여기 묘지에 오려고 모자를 고르는 데 30분이나 걸렸다면 믿어지니? 처음엔 깃털 달린 갈색 모자를 쓰고 싶었어. 그런데 그 모자를 쓰자마자 챙이 넓은 분홍색 모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 그런데 모자를 핀으로 고정시키고 나니까 갈색 모자가 더 좋은 거야. 그래서 모자들을 침대 위에 죽 늘어놓고 눈을 감은 다음 모자 핀을 던져 하날 골랐지. 핀이 꽂힌 모자가 분홍색 모자였어. 그래서 이 모자를 쓴 거야. 잘 어울려? 어때, 내 모습이?”
심각한 목소리로 순진하게 묻는 필리파의 모습에 프리실라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앤은 돌연히 필리파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오늘 아침 너를 봤을 때 너야말로 레드먼드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이라고 생각했어.”
필리파의 삐뚤어진 입술이 매혹적인 비정형의 웃음으로 번졌고 그 속으로 하얗고 조그만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필리파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맞는다고 해줘야 해. 난 심지어 내 외모까지도 판단을 못 내린다니까.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비참할 만큼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 게다가 우리 끔찍한 고모할머니는 구슬프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 이렇게 말했어. ‘네가 아기 때는 정말 예뻤는데 커가면서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참 이상해.’ 난 우리 고모들을 좋아하지만 우리 고모할머니만은 미워. 괜찮다면, 제발 가끔씩 내가 예쁘다고 말해줘. 난 내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 훨씬 편안한 기분이 되거든. 원한다면 나도 너희 둘에게 그렇게 말해줄게. 난 잘할 수 있어. 내 깨끗한 양심을 걸고.”
“고마워, 하지만 프리실라와 나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확신해서 다른 확인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고.”
앤이 웃었다.
“오, 날 비웃는군. 나를 가증스러우리만치 허영심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야, 난 그렇지 않아. 내 안에 허영심이라고는 없어. 다른 여자가 칭찬받을 만큼 예쁘면 난 마음껏 칭찬해줄 수 있다고. 두 사람을 알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지난 토요일에 여기 처음 와서 향수병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거든. 향수병은 정말 끔찍해, 그렇지 않니? 볼링브로크에선 나도 꽤 인기 있는 사람이었는데, 여기 킹스포트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내 영혼 깊은 곳까지 우울해지는 순간이 오기도 했어. 두 사람은 어디 살아?”
“세인트 존 가 38번지.”
“어머, 잘됐네. 난 월리스 가에 살아. 난 우리 하숙집이 맘에 안 들어. 낡고 외로운 곳이거든. 거기다 내 방은 무서운 뒷마당으로 창이 나 있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곳이야. 그리고 고양이도 그래. 킹스포트의 모든 고양이들이 그리로 모이진 않겠지만 밤마다 거리 고양이들 절반은 거기로 모이나 봐. 따뜻하고 기분 좋은 벽난로 앞 깔개 위에 누워 졸고 있는 고양이들은 너무 귀엽지만, 한밤중 뒷마당에 있는 고양이는 완전히 다른 동물 같아. 첫날밤 난 밤새 울었어. 고양이들도 같이 울더군. 다음 날 아침 내 코를 봤어야 해. 정말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가 그렇게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면 어떻게 레드먼드에 올 결심을 다 했을까 정말 궁금하네.”
프리실라가 농담조로 말했다.
“이런, 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가라고 했어.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가길 정말로 바라셨어. 왜인지는 나도 몰라. 내가 학사 학위를 얻으려고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터무니없는 일 아니야? 그렇지만 나도 할 수는 있어, 나도 머리는 좋은 편이니까.”
“세상에!”
프리실라가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냈다.
“사실이야, 하지만 그 머리를 이용하는 일이 힘들겠지. 학사들은 모두 많이 배웠고, 위엄 있고, 현명하고, 근엄한 존재들이니까.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난 정말 레드먼드에 오고 싶지 않았어. 단지 아버지 말씀에 따르려고 온 것뿐이야. 우리 아버진 정말 괴짜거든. 게다가 집에 눌러 있으면 결혼해야 했을걸. 그건 우리 어머니 생각이야. 우리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를 무척 바라셔. 우리 어머니는 결정해놓은 일이 참 많기도 하단다. 하지만 난 몇 년 동안은 정말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결혼이란 안식처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즐겁게 지내고 싶어. 내가 학사가 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 고리타분한 유부녀가 되는 일은 더 바보짓 같아. 난 이제 겨우 열여덟인데 말이야! 그래서 결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레드먼드에 가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고. 또 누구랑 결혼해야 할지도 결정할 수 없었고.”
“남자가 많이 있었나 봐?”
앤이 웃었다.
“무더기로 있었지. 남자들은 나를소름 끼치도록 좋아해. 정말이야. 나도 두 명 정도는 심각하게 생각해봤어. 나머지는 너무 어리거나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난 정말 부자랑 결혼해야 돼.”
“왜 그래야 하는데?”
“앤, 내가 가난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못 하고, 또 낭비도 엄청나게 심하거든. 그러니 내 남편은 돈이 아주 많아야 돼.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해서 두 사람으로 줄어들긴 했는데, 그래도 힘들었어. 단 두 명 중에 고르는 일도 200명 중에 고르는 일만큼 쉽지가 않더라고. 둘 중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내가 거절한 나머지 한 사람 때문에 평생 후회하며 살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두 사람 중 정말 사랑한 사람은 없었어?”
앤은 다소 주저하듯 물었다. 낯선 사람에게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커다란 신비를 담은 일을 묻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 세상에. 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 사랑은 나답지 않은 일이야. 그리고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에 빠진다는 건 완전한 노예로 전락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해. 남자가 내게 상처를 주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일이라고. 난 두렵고 싫어. 알렉과 알론조는 둘 다 너무 다정하고,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어서 누가 더 좋은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어. 그게 문제였지. 알렉은 정말 최고로 잘생긴 남자야. 난 잘생기지 않은 사람과는 결혼 못 해. 또 그 사람은 성격도 좋아. 사랑스러운 곱슬머리 흑발을 가진 정말 너무나 완벽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완벽한 남자는 원하지 않아. 어디흠잡을데가 있어야 말이지.”
“그럼 왜 알론조랑은 결혼하지 않은 거야?”
프리실라가 진지하게 물었다.

“알론조 같은 남자와 결혼한다고 상상해봐! 내가 그 결혼을 참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알론조의 코는 정말 근사해. 잘생겼다고 믿을 수 있는 집안의 코를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내 코를 믿을 수 없어. 지금까진 다행스럽게도 내 코가 고든 집안의 코 모양이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번 집안의 코로 변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돼. 그래서 여전히 고든 집안의 코인지 매일 아침 일어나서 열심히 살핀다고. 엄마는 번 집안사람이니까 코도 번 집안의 코야. 그래서 내 코는 더 두고 봐야 해. 난 예쁜 코가 좋아. 앤, 네 코는 정말 너무 예쁘다. 알론조의 코는 균형이 잡혀 있어. 그렇다고는 해도 알론조는 아니야! 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모자 고르듯 그렇게 할 수도 없잖아.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놓고 눈을 감고 모자 핀을 던져서 하나를골라낼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하면 쉽기야 하겠지만.”
필리파는 그런 자기 처지가 몹시 슬프다는 듯 말했다.
“네가 멀리 떠난다고 하니 알렉과 알론조가 뭐라고 하던?”
프리실라는 궁금했다.
“그 둘은 여전히희망을 품고있어. 그 둘에게 내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거든. 둘 모두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했어. 그 두 사람은 나를 숭배하니까. 그동안 나는 즐거운 시간을 좀 가질 작정이야. 레드먼드에서도 나를 숭배하는 남자를 많이 만들 거라고. 나는 남자 친구가 많아야 행복해. 그런데 신입생들 모두 너무 평범하게 생긴 남자뿐이야. 그런 생각 안 들어? 그런데 신입생 중에서 정말 멋진 남자를 한 명 보긴 했어. 둘이 오기 전에 가버렸지만. 같이 있던 친구가 그 사람을 길버트라고 부르더군. 길버트의 친구는 눈이 엄청튀어나왔던걸. 벌써 가려고? 좀 더 있자.”

“이제 가야 해. 시간이 늦었어, 할 일도 좀 있고.”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둘이 날 보러 와줄 거지, 응?”
필리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앤과 프리실라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 나도 너희를 보러 가게 해줘. 너희와 친구가 되고 싶어. 둘 모두 너무 좋은 사람 같아. 내가 경솔하게 행동해서 성가시게 군 건 아니지?”
“아, 아니야.”
필리파의 어깨동무에 대한 답으로 앤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너희들은 하느님이 필리파 고든을 결점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그대로 나를 받아들여야 할 거야. 그래도 난 너희가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이 묘지는 정말 멋진 곳이지? 나도 여기 묻히고 싶어. 여기 전엔 못 본 무덤이 하나 있네.철제울타리가 세워진 저 무덤. 오! 여기 좀 봐. 섀넌 호와 체서피크 호 간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사한 해군사관학교 생도의 무덤이라고 돌에 새겨져 있어. 정말 놀라워!”
철제울타리 옆에 서서 잠시 황폐해진 무덤을 바라보던 앤의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그다음으로는 앤의 시야에서 오래된 무덤과 나뭇가지가 아치를 이룬 나무와 그림자 진 풀밭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거의 1세기 전의 킹스포트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영국 국기를 게양한 군함이 안개를 뚫고 위세 당당하게 나타났다. 그 배 뒤로 또 한 척의 배가 따라 들어왔다. 성조기로 온몸을 덮은 용감한 로렌스가 영웅적인 모습으로 조용히 후미 갑판에 누워 있었다. 시곗바늘이 시간의 책장을 거꾸로 넘긴 그곳에 섀넌 호가 체서피크 호를 포획해 의기양양하게 들어오고 있었다.15)
“앤, 돌아와, 앤 셜리, 돌아와.”
필리파가 웃으며 앤의 팔을 잡아당겼다.
“넌 지금 100년 전 세상에 가 있어. 그만 현실로 돌아와.”
앤은 한숨을 내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앤의 두 눈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난 정말 옛날이야기들이 너무 좋아. 영국이 그 전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오히려 전투에 패배했어도 용감하게 싸웠던 병사들 때문에옛이야기들이 더 멋진 것 같아. 이 무덤은 그런 이야기들을 가까이 또 아주 생생하게 불러와. 저 가여운 해군사관학교 생도는 고작 열여덟 살이었어. 그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 입은 치명상으로 사망’했다고 묘비에 적혀 있어. 군인이라면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었을 거야.”
앤은 집으로 가기 전 머리에 꽂았던 자주색팬지 꽃송이를 빼내 해전으로 사라진 그 젊은이의 무덤 위에 올려주었다.
“우리의 새 친구를 어떻게 생각해?”
필리파가 두 사람 곁을 떠나자 프리실라가 물었다.
“좋은 아이 같아. 엉뚱한 말을 많이 하긴 하지만 굉장히 사랑스러운 면이 있어. 자기 입으로 말한 것처럼 그 애가 하는 말들과는 다르게 어리석지 않은 아이일지도 모르지.입 맞추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또 절대로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아이야.”
“나도 좋아. 루비 길리스만큼이나 남자 얘기를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루비가 남자 이야기를 하면 항상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나는데 필리파의 말엔 그냥 기분 좋게 웃어주고 싶더라. 왜 그런 거지?”
“차이가 있지. 루비는남자아이들을 너무 의식해. 항상 사랑이나 연애 생각만 하잖아. 게다가 자기는 남자를 많이 사귀어보았다고 은근히 뻐기고. 다른 사람보다 배는 더 많은 남자를 사귀었다고 자랑이 심하잖아. 하지만 필리파는 남자 이야기를 마치 여자 친구 얘기하듯 해. 남자들을 정말 좋은 친구처럼 보고 있다고.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으면 행복하다는 것도 자기가 인기가 있고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는 거지. 심지어 알렉과 알론조도 필리파에겐 그저 평생 함께 놀아줄놀이 친구일 뿐인 것 같아. 이젠 두 사람의 이름을 떼놓고 필리파를 생각하진 못하겠네. 필을 만나게 돼서 기뻐. 그리고 올드 세인트 존에 가본 것도 기쁘고. 오늘 오후에 킹스포트 땅에 내 조그만 영혼의 뿌리를 내린 것 같아. 정말 그랬기를. 뿌리가 옮겨 심어진 것 같은 기분은 싫으니까.”
앤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11. 하느님을 섬기며 옥좌를 떠받치는 천사. (창세기 3:2)
12. 오웬 메러디스(Owen Meredith, 본명은 에드워드 벌워 리튼 Edward Bulwer Lytton, 1831〜1891, 영국의 시인이며 정치가)의 《루실》 제6편 7장.
13. 노바스코샤 사람을 칭하는 별명.
14. 대니얼 오코넬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하지만 이 말은 대니얼 오코넬이 한 말이 아니고 웰링턴(Duke of Wellington)이 자기의 아일랜드 뿌리를 부정하려고 한 말이다.
15. 1813년 6월 1일, 영국의 섀넌 호와 미국의 체서피크 호 간에 전투가 벌어져, 체서피크 호의 로렌스 함장이 치명상을 입는다. 로렌스는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 싸우고 죽더라도 배를 포기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지만 6월 4일 전사하고, 체서피크 호는 섀넌 호에 포획되어 노바스코샤 할리팍스(킹스포트의 배경이 된 도시)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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