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1~2

나단비 | 2024.04.03 17:25:48 댓글: 0 조회: 67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485
1
초록 지붕 집 다락방에서






앤 셜리는 약간 해진 유클리드 기하학 책을 커다란 상자 속에 던져 넣고 승리에 찬 기세로 뚜껑을 꽝 닫아버렸다.
“아, 배우든 가르치든 이제 기하와는 영영 이별이야. 너무 기뻐!”
그 말투에 원한마저 묻어났다. 그러고는 상자 뚜껑에 앉아 아침 하늘을 닮은 잿빛 눈으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다이애나 라이트를 바라보았다.
이 ‘초록 지붕 집’ 다락방도 여느 다락방과 다름없이 어슴푸레하니 뭔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앤이 앉아 있는 옆으로 난 창문으로 8월 오후의 달콤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밖에는 포플러나무 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렸고, 그 너머로는 사람을 홀리듯 구불구불 숲으로 이어진 ‘연인의 오솔길’이 보였으며 장밋빛 과일을 주렁주렁 매단 사과 과수원도 보였다. 더 멀게는 거대한 산맥 줄기가 보였고, 그 위로 파란 남쪽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걸렸다. 맞은편 창문으로는 저 멀리 하얀 파도 거품을 피워 올리는 세인트로렌스 만의 짙푸른 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로 에이벡웨이트 섬이 보석처럼 떠 있었다. 에이벡웨이트! 프린스에드워드라는 재미없는 이름 덕에 오랫동안 거의 버림받다시피 했지만 훨씬 부드럽고 달콤한 이름이 아닌가!
3년 만에 다시 본 다이애나 라이트는 이제 제법 결혼한 여자 티가 났다. 하지만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홍조 띤 뺨 그리고 얼굴에 핀 보조개는 오래전 ‘비탈길 과수원집’ 정원에서 앤 셜리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던 때와 다름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이애나의 품에는 지난 2년 동안 에이번리에 ‘작은 앤 코델리아’로 알려진 까만 곱슬머리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에이번리 사람들은 다이애나가 아기를 앤이라 부르는 것은 이해했지만, 코델리아는 어디서 튀어나온 이름이냐는 반응이었다. 라이트 집안이나 배리 집안 그 어느 쪽에도 코델리아라는 이름은 없었으니까.
하몬 앤드루스 부인은 코델리아란 이름이 다이애나가 삼류 소설에서 찾아낸 이름일 거라고 하면서 프레드가 왜 분별력 없이 그런 이름을 아기에게 붙이도록 내버려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와 앤은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둘은 물론 앤 코델리아란 이름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잘 알았다.
“넌 언제나 기하라면 질색했잖아. 이제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아도 되니 정말 기쁘겠다.”
다이애나가 옛날을 회상하며 미소 지었다.
“오, 아니야, 난 언제나 가르치는 걸 좋아했어. 기하랑은 상관없이. 서머사이드에서의 지난 3년은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지. 하몬 앤드루스 부인은 결혼 생활이 가르치는 일보다 더 나을 것도 없을 테니 기대하지 말라고 하더라. 앤드루스 부인은 알고 있는 고통을 감내하는 편이 알지 못하는 모험에 뛰어드는 것보다 낫다고 보는 햄릿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거지.”

앤의 웃음소리가 옛날처럼 다락방에 울려 퍼졌다. 예전의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에 달콤함과 성숙함이 더해진 소리였다. 아래층 부엌에서 푸른 자두 잼을 만들던 마릴라는 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초록 지붕 집’에 저 사랑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질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앤이 길버트 블라이드와 결혼한다는 소식만큼 마릴라를 기쁘게 만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쁨은 언제나 슬픔의 희미한 그림자와 함께 찾아오는 법. 서머사이드에서 가르치던 3년 동안은 방학이나 주말이면 앤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고작해야 1년에 두 번이나 올 수 있을까?
“앤드루스 부인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 결혼 생활이라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거든.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만 기대해서도 안 되고.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분명 행복해, 앤. 너와 맞는 남자하고 결혼하기만 하면.”
4년간이나 결혼 생활을 해본 다이애나가 조용하지만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앤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엄청난 경험을 했다는 투로 말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언제나 좀 웃음이 나온다.
‘나도 결혼 생활을 4년 정도 하면 저렇게 되겠지. 그래도 내겐 유머감각이 있으니 그리 되지는 않을 거야.’
앤은 생각했다.
“어디서 살지 결정했니?”
엄마가 아니고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손놀림으로 앤 코델리아를 고쳐 안으며 다이애나가 물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앤의 가슴은 언제나 달콤하면서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꿈과 희망으로 벅차오르며, 유쾌하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응. 아까 너한테 와달라고 전화했을 때 말하려던 게 바로 그거야. 우리 마을에도 전화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여기처럼 한적한 시골에 그런 현대적인 기계가 들어오다니 어울리지 않게 너무 앞서 가는 것 같아.”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에 감사해야 할 일이야. 거기서 추진하지 않았다면 전화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 어떤 단체든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면 좌절해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은데 에이번리 개선회는 이겨냈어. 에이번리에 이런 단체를 만들다니 넌 정말 굉장한 일을 한 거야, 앤. 마을 개선회 일을 하면서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많았니! 그 파란색 공회당이랑, 저드슨 파커 씨네 담장에 나붙을 뻔했던 제약회사 광고 사건은 잊을 수가 없어.”
다이애나가 말했다.
“전화가 들어온 게 과연 에이번리 개선회에 감사해야 할 일인지 난 잘 모르겠어. 그래, 물론 편리하기야 하지. 전에 우리가 서로에게 촛불로 신호를 보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리해졌어. 린드 아주머니도 ‘에이번리도 발전해야 돼, 그럼.’ 하고 말씀하셨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리슨 아저씨가 아는 척하고 싶을 때 쓰는 표현인 이런 ‘현대의 이기’ 때문에 에이번리가 망가지는 것 같아 싫기도 해. 그냥 옛날처럼 살면서 아무것도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야. 하지만 그건 어리석고 감상적인 생각이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당장 내 생각을 현명하고 실용적이면서 가능한 것으로 바꿔야겠어. 전화는 말이지, 해리슨 아저씨도 인정한 것처럼 ‘엄청나게 좋은 기계’야. 통화할 때마다 대여섯 명쯤은 엿듣고 있다고 해도.”

앤이 말했다.
“그게 제일 싫어. 전화할 때마다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는 건 정말 짜증 나. 하몬 앤드루스 부인은 전화를 꼭 부엌에 달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대. 그래야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전화 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오늘 네가 전화했을 때도 파이네 시계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니? 조시나 거티가 듣고 있었던 게 틀림없지 뭐야.”
“아, 그래서 네가 ‘초록 지붕 집’에 시계를 새로 샀니?’ 하고 말했구나. 그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어. 네가 그 말을 하자마자 이상한 달칵 소리가 들렸고. 아마 파이네 집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였을 거야. 파이네는 신경 쓰지 마. 린드 아주머니 말처럼 ‘파이네는 옛날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있으리니.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는 이상은, 아멘.’ 다른 즐거운 이야기나 하자. 나 어디서 살지 결정했어.”
“와, 앤, 어디야? 여기서 가까웠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 여기서 좀 멀어. 길버트랑 포 윈즈 항구에 정착할 거야. 여기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야.”
“100킬로라고! 그건 1,000킬로미터나 마찬가지야. 난 집에서 샬럿타운 이상은 갈 수 없을 거야.”
다이애나는 한숨을 쉬었다.
“포 윈즈에 한번 와봐.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거든. 항구 위쪽에는 글렌 세인트 메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길버트의 큰할아버지인 데이비드 블라이드 의사가 50년째 그곳에서 진료를 하고 계셔. 그분은 곧 은퇴하실 거고 길버트가 그 뒤를 이을 거야. 그렇지만 블라이드 의사는 그 집에서 계속 사실 생각이기 때문에 우리 살 집은 우리가 직접 찾아야 해. 사실 아직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난 늘 내 성을 그려왔잖니. 나만의 작고 멋진 스페인 성 말이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거야?”
다이애나가 물었다.
“아무 데도 안 가. 다이애나, 제발 그렇게 끔찍한 표정 짓지 마. 너 하몬 앤드루스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그 아주머니는 결혼 케이크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사람은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는 게 현명한 거라고 거만스러운 태도로 이야기할 거야. 그러면서 제인은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고 다시 한 번 내게 상기시켜주겠지. 난 포 윈즈에 있는 내 ‘꿈의 집’에서 신혼을 보내고 싶어.”
“신부 들러리도 정말로 안 세울 거야?”
“설 사람이 없어. 너랑 필 그리고 프리실라와 제인 모두 나보다 먼저 결혼해버렸잖아. 스텔라는 밴쿠버에서 가르치고 있고. 다른 사람 중엔 ‘영혼이 통하는 친구’가 없어. 난 아무나 내 신부 들러리로 세우고 싶지 않아.”
“너 면사포는 쓸 거지?”
다이애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래. 면사포를 쓰지 않으면 신부라는 느낌도 안 들걸. 매슈 아저씨가 나를 ‘초록 지붕 집’에 데려오던 날 난 아저씨에게 내가 너무 못생겨서 외국 선교사가 아니면 아무도 나랑 결혼하길 원치 않을 거라는 얘기를 했어. 그땐 식인종이 사는 땅에서 목숨을 걸 여자를 찾아야 할 외국 선교사들이라면 외모를 따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너도 프리실라와 결혼한 선교사를 봤어야 했어. 그 사람은 우리가 예전에 꿈꾸었던 결혼 상대처럼 잘생겼고 신비로웠어. 내가 여태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정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니까. 그 사람은 프리실라의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홀딱 빠져 환호성을 질렀단다. 물론 일본엔 식인종도 없고.”
“네 웨딩드레스는 너무 환상적이야. 그 드레스를 입으면 넌 완벽한 여왕 같을 거라고. 넌 키도 크고 날씬하잖아. 어쩜 그렇게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니, 앤? 난 요새 살이 너무 많이 쪘어. 아마 좀 있으면 허리도 없어져 버릴 거야.”
한껏 흥분한 다이애나가 한숨을 지었다.
“통통하거나 호리호리하거나 몸매는 다 타고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어쨌든 내가 서머사이드에서 돌아왔을 때 앤드루스 부인에게 들은 소리를 넌 듣지 않아도 될 거야. ‘세상에, 앤, 어쩜 그렇게 깡말랐니? 여태까지 본 모습 중에 제일 심한 것 같구나.’ 이랬거든. ‘날씬하다’는 말은 참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깡말랐다’는 어감이 확 다르잖아.”
“앤드루스 아주머니는 네 혼수품 이야기도 했어. 제인은 백만장자랑 결혼했고 너는 ‘재산 한 푼 없는 가난한 젊은 의사’랑 결혼하지만 네 혼수품도 제인 것만큼이나 좋다고 인정한대.”
앤은 웃었다.
“내 드레스는 정말로 멋져. 나는 예쁜 것들이 좋아. 내가 맨 처음으로 입었던 예쁜 드레스가 생각난다. 갈색 글로리아 옷감으로 만든 거였어. 매슈 아저씨가 학교 발표회 때 입으라고 주셨지. 그전엔 그렇게 예쁜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 그날 밤 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어.”
“그날 길버트는 <라인 강변의 빙겐>을 암송했지. 길버트가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이는 아닙니다.’ 하는 구절을 읊으면서 너를 바라봤어. 하지만 넌 네가 떨어뜨린 분홍 종이 장미를 길버트가 자기 가슴 호주머니에 꽂았다고 무지하게 화를 냈잖아! 그땐 네가 길버트랑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 그것도 말하자면 미리 예정된 운명이겠지.”
둘이 다락방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앤은 웃음을 터트렸다.



2
꿈의 집






초록 지붕 집에 이보다 더 신나고 흥분되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마릴라조차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으니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집에서 누가 결혼을 한 적은 없어요. 내가 어릴 때 어느 나이 든 목사님이 그랬죠. 생명의 탄생, 결혼, 그리고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은 온전한 집이라 할 수 없다고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매슈 오라버니도 이 집에서 세상을 떴으니 죽음은 겪어봤죠. 그리고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어요. 오래전, 우리가 막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잠시 결혼한 남자 하나를 일꾼으로 고용했었는데 그 사람 아내가 이 집에서 아기를 낳았거든요. 하지만 아직까지 결혼식을 치른 적은 없어요. 앤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참 기분이 묘하네요. 14년 전 매슈 오라버니가 앤을 처음 이곳에 데려왔을 때나 마찬가지로 아직도 어린아이 같기만 한데 말이에요.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아요. 오라버니가 느닷없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를 난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착오가 생기지 않아 예정대로 남자아이를 데려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네요. 남자아이를 데려다 키웠더라면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요.”

린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릴라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행운을 가져온 실수였죠. 그렇긴 해도, 미안하지만 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어요. 내가 앤을 보러 왔던 날 저녁, 왜 앤이 난리법석을 떨어 우릴 기겁하게 했잖아요. 그러던 아이가 많이도 변했어요, 그럼.”
린드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곧 다시 명랑해졌다.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부인도 과거를 들추거나 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앤에게 이불 두 장을 줄 거예요.”
린드 아주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담배 줄무늬랑 사과 잎 무늬로요. 요즘 그 무늬가 유행한다고 앤이 그러더군요. 뭐 유행이든 아니든 간에 손님방 침대를 꾸미는데 예쁜 사과 잎 무늬 이불 이상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색깔이 바래지 않게 보관을 잘했어야 했는데, 토머스가 세상을 뜬 다음에 무명 자루에 넣어뒀더니 세상에, 색깔이 엉망으로 변했지 뭐예요. 그래도 아직 한 달은 남았으니 손질을 좀 하면 괜찮을 거예요.”
‘한 달밖에 안 남았다니!’ 생각하며 마릴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다락방에 보관해둔 깔개 여섯 장을 줄 참이에요. 사실 앤이 그걸 달라고 할 줄 몰랐어요. 그건 구식이고 다들 스킬 자수로 만든 매트를 좋아하지 그걸 원하는 사람은 없는데, 앤이 바닥에 그걸 깔고 싶다며 달라더군요. 예쁜 깔개죠. 가장 좋은 천으로 줄무늬를 넣어 짠 거죠. 몇 해 겨울 동안 참 잘 썼어요. 아, 그리고 푸른 자두 잼도 1년은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만들어줘야겠어요. 참 이상하죠. 지난 3년 동안 자두나무에 꽃이 안 피어서 잘라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바로 지난봄에 하얗게 꽃을 피우더니 자두가 그 어느 해보다 풍성하게 열렸어요.”
“아, 앤과 길버트가 결혼을 한다니 정말 잘됐지 뭐예요.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내가 열심히 기도했어요.”
린드 부인의 말은 자기 기도가 효력이 강하다고 믿는다는 말로 들렸다.
“그 킹스포트 남자를 마음에 둔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 사람은 부자고, 길버트는 사실 가난하게 시작해야 하잖아요. 그렇지만 길버트는 우리 섬사람이에요.”
“그래요, 길버트 블라이드랑 결혼하죠.”
마릴라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마릴라는 어쩌면 길버트가 어릴 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길버트를 볼 적마다 드는 생각을 말로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 마릴라가 고집스럽게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않았다면 길버트는 마릴라의 아들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래서 마릴라는 길버트가 앤과 결혼하게 된 것이 조금 이상한 방법 같긴 하지만 오래전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느꼈다. 좋은 일은 옛날에 겪은 쓰디쓴 불행에서 생기는 법 아니던가.
앤은 너무 행복한 나머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옛날 미신에 행복에 겨워하는 인간을 보기 싫어하는 신들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적어도 인간 중에는 확실히 그런 이가 있었다. 그런 종족 중 둘이 제비꽃 빛깔을 띤 저녁 앤에게 내려와 행복한 무지갯빛 거품을 터뜨리려 들었다. 앤이 젊은 의사 블라이드를 차지하게 된 것이 뭐 대단한 것을 낚았다고 여기거나, 풋내기 시절처럼 길버트가 아직도 자기에게 푹 빠져 있다고 착각한다면 앤을 일깨워주는 게 둘의 임무였다.
하지만 이 지상의 두 여인은 앤의 적이 아니었다. 아니, 이들은 앤을 너무나 사랑해서 누가 공격이라도 하려 들면 자기 자식을 보호하듯 앤을 감싸줄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언제나 일관적이지는 않은 법이다.
<데일리 엔터프라이즈>의 표현을 빌리면 처녀 때 이름이 제인 앤드루스라는 잉글스 부인과 친정어머니, 그리고 재스퍼 벨 부인이 함께 찾아왔다. 제인은 몇 년 동안이나 볶고 지지는 결혼 생활을 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면모는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린드 부인이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백만장자와 결혼했지만 제인은 행복하게 잘살았고 부자가 되었다고 이상하게 변하지도 않았다. 그 옛날 4인조 단짝 친구 시절 홍조 띤 얼굴의 제인 그대로 여전히 온화하고 상냥했으며 옛 친구 앤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앤의 혼수품도 자질구레한 것 하나하나까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들이 마치 실크와 보석으로 휘황찬란한 자기의 물건들보다 더 좋은 물건이라도 되는 듯. 제인은 그다지 똑똑하지도 못하고,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 같은 것도 할 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이 특별히 잘난 면이 없어서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분명 드물고 높이 살 만한 성품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길버트는 너와의 약속을 깨지 않았구나. 그래, 블라이드 집안사람들은 일단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지. 어디 보자, 넌 이제 스물다섯 살이지, 그렇지, 앤? 내가 어렸을 땐 스물다섯 살이면 시들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여겼는데, 넌 별로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다.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보면 다들 그래.”
앤드루스 부인이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빨간 머리가 유행이에요.”
웃으려 노력은 하면서도 앤은 좀 차갑게 대꾸했다. 살면서 기른 유머감각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지만 아직도 누가 머리카락을 탓하면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요즘엔 별 이상한 게 다 유행이라면서 다니는 사람들이 많더라. 어쨌거나 앤, 네 혼수품은 참 보기 좋고 또 네 처지에도 딱 맞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제인? 어쨌거나 넌 행복하게 살 거야. 그러길 빌어. 약혼 기간이 길면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만, 네 경우는 어쩔 수 없었지.”
“길버트는 의사 노릇을 하기엔 너무 젊어.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길버트를 신뢰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구나.”
재스퍼 벨 부인은 음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는 꼭 해야 할 말을 했으니 양심이 시키는 도리를 다 마쳤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벨 부인은 언제나 모자에는 너덜너덜한 까만 깃털을 달고 목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몇 가닥 늘어진 채 다니는 사람이었다.
이런 말들로 아름다운 혼수용품을 보고 있던 앤의 기쁨이 잠시 퇴색되었지만 내면 저 깊은 곳에 깔린 행복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길버트가 오자 부인들이 한 말은 다 잊어버렸다. 앤과 길버트는 시냇가의 자작나무 길을 따라 거닐었다.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왔을 때 묘목이었던 나무들은 이제 다 자라 황혼과 별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궁전 속에 우뚝 서 있는 훤칠한 상앗빛 기둥처럼 보였다. 앤과 길버트는 새로운 집과 함께할 새로운 삶에 꿈에 부풀어 보통 연인들이 그렇듯 다정하게 나무 그림자 속을 거닐었다.

“우리 보금자리를 찾았어, 앤.”
“아, 정말? 어디에? 마을 한복판은 아니지?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니, 마을에는 비어 있는 집이 없었어.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과 포 윈즈 곶 중간에 있는 작은 하얀 집이야. 좀 외진 바닷가에 있지만 전화를 놓으면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집 주변 풍경이 참 아름다운 곳이야. 집에서 일몰을 볼 수 있고 바로 앞에 파란 항구가 있거든. 집 가까이에 모래사장도 있어. 바닷바람이 모래 위로 불어오고, 바닷물이 모래를 적시지.”
“집은 어때, 길버트? 우리의 첫 번째 보금자리 말이야. 어떻게 생겼어?”
“아주 크진 않지만 우리가 쓰기엔 충분해. 아래층엔 벽난로가 있는 멋진 거실이 있고 주방에서는 항구가 보여. 그리고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길 내 진료실로 쓰면 될 것 같아. 60년 정도 된 집인데 포 윈즈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야. 하지만 집은 잘 손질되어 있어 쓸 만해. 한 15년 전에 지붕을 새로 이고 벽에 회칠도 하고 바닥도 다시 깔았거든. 처음부터 튼튼하게 지은 집이야. 그 집에 얽힌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 나에게 세를 준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모른대. 그런 옛날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사람은 짐 선장뿐이라나.”
“짐 선장이 누군데?”
“포 윈즈 곶의 등대지기야. 앤도 포 윈즈 곶의 등대를 보면 좋아할 거야. 회전 등대인데 그 불빛이 꼭 황혼녘 별빛 같아. 우리 집 거실이랑 현관에서도 보여.”
“우리가 살 집 주인은 누구야?”
“음, 지금은 글렌 세인트 메리 장로교회 소유야. 나는 그 집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빌린 거고. 최근까지 미스 엘리자베스 러셀이라는 아주 나이가 많은 할머니 소유였대. 지난봄에 돌아가셨는데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재산을 글렌 세인트 메리 교회에 남겼다고 해. 그분이 쓰던 가구가 여전히 그 집에 남아 있어서 내가 그걸 모두 샀어. 앤이 보면 아주 헐값에 잘 샀다고 할걸. 워낙 구식이라 관리인도 팔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대. 글렌 세인트 메리 사람들은 브로케이드 천을 덮은 가구나 거울이나 장식이 달린 찬장을 더 좋아하지. 나도 그래. 하지만 미스 러셀이 쓰던 가구도 앤이 좋아할 만큼 멋진 것들이야.”
“그래, 좋아. 지금까지 들은 얘기는 다 마음에 들어.”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길버트, 사람은 가구만 가지고 사는 게 아냐. 제일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어. 그 집 근처에 나무는 있어?”
“무지하게 많아, 나무의 요정들이 살 정도로! 집 뒤편에 넓은 전나무 숲이 있고, 집 앞길에는 미루나무가 양옆으로 서 있어. 그리고 하얀 자작나무들이 예쁜 정원을 빙 둘러서 있지. 그 집 대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정원이야. 출입구가 다른 곳에 하나 더 있어. 두 그루의 전나무 사이로 작은 문이 있거든. 한쪽 나무에 경첩이 있고 다른 쪽에는 빗장이 달려 있지.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아치를 이루고 있어.”
“아, 너무 기뻐! 난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어. 나무는 나한테 너무나 소중해. 음, 그리고 가까이에 개울이 있는지 물어보면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건가? 그거까지 바랄 수는 없겠지?”
“개울도 있어. 바로 정원 가장자리로 흐르지.”

“그렇다면 길버트, 그 집이야말로 내가 꿈에 그리던 바로 내 ‘꿈의 집’이야.”
더 이상은 바랄 수 없을 만큼 만족한 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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