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7~8

나단비 | 2024.04.03 19:23:59 댓글: 0 조회: 6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510
7
존 선생의 신부






저녁 식사 후 모두가 벽난로 주변에 앉았을 때 앤이 물었다.
“짐 선장님, 이 집에 산 첫 번째 신부는 누구였어요?”
“제가 이 집에 얽힌 사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얼핏 어떤 여자분 이야기도 들었고, 그분인가요? 짐 선장님이 그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다고 누가 그러던데요.”
길버트가 물었다.
“맞습니다. 내가 알아요. 아마 이제 포 윈즈에서 그 선생의 신부가 이 섬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을 겁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도 이제 30년이 되어가는군요.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죠.”
“이야기해주세요. 이 집에서 살았던 여자분들의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앤이 간청했다.
“음, 그러니까 모두 세 명이에요. 엘리자베스 러셀, 네드 러셀 부인, 그리고 그 선생의 신부요. 엘리자베스 러셀은 아주 착하고 영리한 사람이었고 네드 러셀 부인도 아주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여기 살던 선생의 신부와는 달랐죠.
그 선생 이름은 존 셀윈이었습니다. 영국 본토에서 글렌 학교 선생으로 왔죠.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어요. 그 당시 프린스에드워드 섬 학교로 오는 선생들은 대개가 게으름뱅이에다 잔꾀나 부리고 술이나 퍼마시는 인간들이었죠. 그나마 맨정신일 때 읽기, 쓰기, 셈을 가르쳤지 술에 취했을 땐 아이들이나 쥐어박았어요.
하지만 존 셀윈은 그런 선생들과는 아주 많이 달랐어요. 잘생긴데다 마음도 좋은 사람이었지요.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나랑 잘 어울렸어요. 그 사람이 나보다 열 살이 많기는 했지만 우리는 같이 책도 보고, 산책도 하면서 이야기를 아주 많이 나눴어요. 그 사람은 시란 시는 죄다 꿰고 있어 저녁에 바닷가에 나가 내게 시를 읊어주고는 했어요. 아버지는 그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나무라거나 하진 않았어요. 내게서 바다로 나가겠다는 생각을 없애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흠, 하지만 아버지 생각대로만 되진 않았어요.
우리 어머니 집안사람들이 바다로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었거든요. 내가 그런 기질을 물려받았어요. 하지만 난 존이 시를 읽고 암송하는 것을 듣는 게 좋았어요.
그게 거의 60년 전 일인데, 아직도 존에게 들은 시구를 외울 수 있어요. 자그마치 60년이나 지났는데도!”
짐 선장은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불꽃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젠가 봄날 저녁이었는데 모래 언덕에서 존을 만났지요. 좀 들떠 있더군요. 오늘 밤 블라이드 선생이 부인을 데려왔을 때 모습처럼 말입니다. 선생을 봤을 때 존 생각이 났어요. 존은 고향에 약혼녀가 있는데 자기를 만나러 올 거라고 하더군요. 저야 그 말에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요. 아무래도 그땐 내가 어렸고 이기심이 앞섰죠. 약혼녀가 오면 전처럼 나랑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존에게 그런 내색을 하진 않았어요.
존은 그 약혼녀 얘기를 해줬어요. 이름은 퍼시스 리인데 나이 든 삼촌만 아니었다면 존과 함께 왔을 거라고 하더군요. 퍼시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렸을 적부터 퍼시스를 길러준 삼촌인데 병석에 누워 있어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삼촌이 세상을 떠나 존 셀윈과 결혼하려고 오는 길이라고요.
그 당시에 여자가 그런 여행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땐 증기선도 없었는데, 안 그랬겠어요. ‘언제 오는데요?’ 하고 물었죠. ‘6월 20일에 로열 윌리엄 호를 탄다니까 여긴 7월 중순이면 도착하게 될 거야.’ 하고 대답하더군요. ‘목수 존슨 씨에게 말해서 우리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해야겠어. 퍼시스의 편지를 오늘 받았어. 난 편지를 뜯기 전에 이미 좋은 소식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았지. 며칠 전에 퍼시스를 봤거든.’ 난 그 사람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자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도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자기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저주를 받았대요. 그렇게 말했어요, 블라이드 부인. 능력 아니면 저주. 그중 어떤 것인지는 자기도 모른대요. 자기 고조할머니도 그런 능력을 가졌는데 사람들이 마녀로 몰아서 불에 태워 죽였대요. 무슨 주문 같은 것에 걸리면 최면 상태에 빠진다나 뭐 그런 말을 했어요. 이따금씩 그런 상태에 빠진다고 하더군요. 그런 게 있습니까, 선생?”
“최면 상태에 빠져서 뭔가를 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죠. 그건 의학보다는 심리학적인 문제일 것 같은데요. 그 존 셀윈이라는 사람의 상태는 어땠는데요?”
길버트가 물었다.
“꿈같은 거였죠.”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듯 짐 선장이 말했다.
“꿈속에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고 했어요.”
짐 선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음, 나는 그저 그 사람이 말한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그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로도 일어났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때는 편안하기도 하고 또 무섭다고도 했어요. 4일 전에도 존은 벽난로 불빛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그런 상태에 빠졌대요. 영국의 낯익은 방에서 퍼시스 리가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자기에게 손을 내밀더랍니다. 그래서 퍼시스에게서 좋은 소식이 올 걸 알았대요.”
“꿈이라니…… 참나.”
데이비드 의사가 비웃었다.
“그 비슷한 거라니까요. 그때 난 존에게 그게 꿈이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더 편했거든요. 그 사람이 그런 것을 본다는 게 영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어요. 어쩐지 오싹한 기분도 들고.”
짐 선장도 인정했다.
“존은 ‘아니, 난 꿈을 꾼 게 아냐. 하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자꾸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너도 내게서 멀어질 거야.’ 하고 말했죠. 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존은 고개를 도리질 치며 이렇게 말했어요.
‘아니야, 전에도 이것 때문에 친구를 잃었어. 난 그들을 비난하지 않아. 가끔씩은 이런 일 때문에 나도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걸. 그런 능력에는 약간은 신성한 힘도 있지. 그 힘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누가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말할 수 있겠어? 우리 인간은 신에게든 악마에게든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걸 두려워하지.’
그게 마치 어제 일 같아요. 존이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말입니다. 그가 무슨 소릴 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선생?”
“그 사람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
데이비드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전 이해가 가요.”
입을 꼭 다물고 눈을 반짝이면서 예전 소녀 시절 같은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던 앤이 속삭였다. 그 모습에 짐 선장은 감탄한 듯 미소를 짓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음, 곧 글렌과 포 윈즈 사람들은 존 선생의 신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죠. 모두들 존을 좋아했기 때문에 신부가 온다는 소식에 모두 같이 기뻐했어요. 그리고 모두들 존의 새집 짓는 일에 나섰죠. 바로 이 집이에요. 존이 직접 집 지을 곳을 골랐어요. 항구가 보이고 바다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요. 신부를 위해 정원을 만들었지만, 미루나무를 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네드 러셀 부인이 심었죠. 하지만 글렌 학교 여학생들이 모두 나와서 존 선생의 신부를 위해 정원에 두 줄로 장미꽃을 심었지요. 존은 그 장미들을 보고 분홍 장미는 신부의 뺨을, 흰 장미는 이마를, 붉은 장미는 입술을 나타낸다고 했어요. 존은 언제나 시구를 외고 살았고 말도 꼭 시처럼 했죠.”
“집을 꾸미고 가구를 들이는 것도 모두 함께 했어요. 러셀 일가는 부유해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구를 아주 좋은 것으로 들였죠. 하지만 처음에는 이 집에 들인 가구들이 모두 소박했어요. 그래도 이 작은 집에는 사랑이 가득했어요.
여자들이 퀼트, 식탁보, 그리고 수건 등을 보냈고 어떤 사람은 장롱을 만들어주고 또 다른 사람은 식탁을 만들어주었답니다. 눈이 먼 마거릿 보이드 할머니까지도 향내가 나는 사구 풀로 바구니를 만들어 보내주었지요.
존 선생의 신부는 아주 오랫동안 그 바구니에 손수건을 넣어두었어요. 그렇게 모든 준비가 되었죠. 저기 커다란 벽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한 통나무까지 말입니다. 지금 이 벽난로랑 똑같은 것은 아니었어요. 장소는 같아요. 미스 엘리자베스가 15년 전에 이 집을 새로 고쳤을 때 이 벽난로를 만들어 넣었죠. 처음 것은 황소도 구워먹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커다란 구식 벽난로였어요. 그 앞에서 제가 긴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했어요. 오늘 밤처럼 말입니다.”
짐 선장은 앤과 길버트가 볼 수 없는 과거의 혼령이라도 만나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짐 선장과 함께 이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세월은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교회 앞마당 땅속이나 넘실거리는 바다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리라. 이렇게 깊어가는 밤이면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놀며 깔깔거렸고, 겨울 저녁이면 친구들이 모여들었으리라. 음악과 춤이 있고 농담이 오가기도 했으리라. 이곳에서 젊은이와 처녀 들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짐 선장에게도 이 작은 집은 그리운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집이 완성된 날은 7월 1일이었습니다. 존 선생은 날짜를 꼽기 시작했어요. 우린 존이 바닷가를 거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죠. ‘이제 곧 신부가 와서 존과 함께할 거야.’ 우린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신부는 7월 중순쯤에 도착할 계획이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어요.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당시에는 배가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늦어지는 경우가 흔했으니까요. 하지만 로열 윌리엄 호는 일주일이 지나도, 2주일, 3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어요. 모두들 슬슬 걱정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걱정은 점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전 도저히 존 셀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아시겠죠, 블라이드 부인?”
짐 선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존의 눈이 사람들이 자기 고조할머니를 태워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존은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학생들을 가르치고는 서둘러 바닷가로 나가는 생활을 계속했죠. 수많은 밤을 바닷가를 거닐며 보냈어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요. 사람들은 존이 미쳐간다고 말했어요. 모두 희망을 포기했죠. 로열 윌리엄 호는 그렇게 8주가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9월 중순이 되었지만 존 선생의 신부는 도착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죠.”
그리고 3일 동안 엄청난 태풍이 몰아쳤어요. 태풍이 잦아들기 시작한 날 저녁 저는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거기서 존을 만났는데, 커다란 바위에서 팔짱을 낀 채 바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더군요. 존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어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얼굴이 꼭 죽은 사람 같았죠. ‘존, 존!’ 내가 불렀지요. 꼭 겁먹은 아이처럼, ‘정신 차려요, 정신 좀 차려 봐요!’ 하고 소리쳤더니 그 이상하고 무서운 표정이 점점 사라지더군요. 존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는데 난 그때 그 사람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마지막 항해를 떠날 때까지도 절대 못 잊을 거예요. ‘됐어.’ 그렇게 말했어요. ‘로열 윌리엄 호가 이스트 곶으로 들어오는 걸 봤어. 새벽이면 퍼시스는 여기 올 거야. 내일 밤 난 내 신부와 함께 벽난로 앞에 앉아 있게 될 거야.’ 하고 말했어요. 그 사람이 그걸 봤다고 생각하세요?”
갑자기 짐 선장이 물었다.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위대한 사랑과 엄청난 고통이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지는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길버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전 그 사람이 봤다고 확신해요.”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헛소리야.” 
데이비드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아니었다.
짐 선장이 엄숙하게 말했다.
“로열 윌리엄 호는 그다음 날 아침 동 틀 무렵 포 윈즈 항구에 들어왔답니다. 글렌과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신부를 보려고 부두로 나왔죠. 존 선생은 밤새도록 항구에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고.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짐 선장의 눈이 반짝였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60년 전 아침, 다 부서진 배 한 척이 포 윈즈 항구로 들어오던 모습이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퍼시스 리는 배에 타고 있었나요?”

앤이 물었다.
“네, 선장의 아내와 함께였죠. 그들은 끔찍한 항해를 했다더군요. 폭풍이 하나 지나가면 그다음에 또 하나 그러면서 가져온 식량도 다 떨어졌지만 그들은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퍼시스 리가 배에서 부두로 내리자 존 셀윈이 끌어안았죠. 그러자 사람들은 환호를 멈추고 울기 시작했어요. 나도 울었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지요.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수년이 걸렸죠. 우습지만 남자아이는 우는 걸 무척이나 창피하게 여기잖아요.”
“퍼시스 리는 아름다웠나요?”
앤이 물었다.
짐 선장이 천천히 말했다.
“글쎄요. 미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난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미인인지 아닌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퍼시스는 상냥하고 매력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분명 보기도 좋았죠. 크고 맑은 갈색 눈에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윤기가 흘렀어요. 피부는 꼭 영국인다웠죠. 존과 퍼시스는 그날 저녁 무렵 일찍이 촛불을 밝히고 우리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 근방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축하해줬죠. 결혼식이 끝난 다음 다 같이 이 집으로 내려왔어요. 셀윈 부인이 불을 지피자 우리는 둘만 남겨두고 모두 그곳을 떠났죠. 존이 자신의 꿈속에서 본 것처럼 말이에요. 참 희한하죠. 정말 신기해요! 난 참 이상한 일을 많이도 봐왔어요.”
짐 선장은 마치 현자처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둘은 여기서 얼마나 살았나요?”

다시 한 번 낭만적인 기분에 마음껏 취해봤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앤이 물었다.
“15년이요. 둘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다로 나갔어요. 철부지 건달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항해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집에 가기 전에 먼저 이 집에 들러 셀윈 부인에게 항해하면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해주고는 했죠.
그 15년은 정말 행복한 세월이었어요. 둘은 행복하게 사는 재주를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왜. 부인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기분 나쁜 상태가 오래가는 법이 없었어요. 물론 둘이 한두 번 다투기도 했죠. 둘 다 혈기 왕성했으니까요.
셀윈 부인이 한 번은 그 특유의 귀여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존과 다툴 때는 정말 끔찍하지만 그래도 전 너무 행복해요. 그렇게 싸우고 또다시 화해할 수 있는 좋은 남편이 있잖아요.’ 나중에 둘은 샬럿타운으로 이사를 갔고 네드 러셀이 이 집을 사서 신부를 들였죠. 내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젊고 명랑한 부부였습니다.
미스 엘리자베스 러셀은 네드의 동생인데 한 1년 정도 지난 후 그들과 같이 살러 왔어요. 미스 엘리자베스 역시 명랑한 사람이었죠. 이 집의 사방 벽에는 웃음과 즐거움이 듬뿍 배어 있을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이 이곳에 온 세 번째 신부예요. 제일 미인이기도 하고요.”
짐 선장은 해바라기 같은 칭찬을 제비꽃처럼 우아하게 했고 앤은 그 칭찬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앤은 그날 밤 최고로 아름다웠다. 뺨에는 신부다운 장밋빛 홍조가 피었고 눈은 사랑의 빛으로 반짝였다. 퉁명스러운 데이비드 의사까지도 앤을 흡족한 눈길로 바라보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인에게 조카 손자의 빨간 머리 아내가 미인이라고 했다.
“등대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오늘 저녁 정말 즐거웠습니다.”
짐 선장이 말했다.
“자주 놀러 오셔야 해요.”
앤이 말했다.
“제가 그 초대를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일지 부인이 알아도 그렇게 말을 해줄까요?”
짐 선장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말은 곧 제 말이 진심이냐는 거죠?”
앤이 미소를 지으며 묻고는 덧붙였다.
“가슴에 성호를 긋고 맹세해요. 어릴 때 그렇게 말하고는 했죠.”
“그러면 또 오겠습니다. 아무 때나 들이닥쳐 귀찮게 굴지도 몰라요. 아, 가끔 내가 있는 곳에도 들러주세요. 내게는 성격 좋은 일등 항해사 말고는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그 고양이 녀석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만 맥컬리스터 집안사람 못지않게 내가 한 말을 금방 까먹어버려요. 그리고 항해사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요. 부인, 부인은 젊고 나는 늙었지만 우리 영혼만큼은 나이가 비슷할 거예요. 코넬리아 브라이언트 말마따나 우린 둘 다 요셉을 아는 종족에 속하니까요.”
“요셉을 아는 종족이요?”

앤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네. 코넬리아는 세상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눠요. 요셉을 아는 종족과 모르는 종족으로요. 눈으로만 얘기해도 통하고, 생각도 같고, 서로 웃으며 농담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요셉을 아는 종족에 속하죠.”
“아, 알겠어요.”
앤이 눈빛을 빛내며 탄성을 질렀다.
“제가 ‘영혼이 통하는 친구’라고 부르는 그런 거군요.”
“네, 바로 그런 거죠.”
짐 선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게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인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 오늘 밤 부인이 여기 왔을 때, ‘그래, 저 사람은 요셉을 아는 종족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참 기뻤습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친하게 지내도 마음이 허전해요. 요셉을 아는 종족은 세상의 소금 같은 존재라고 난 생각해요.”
앤과 길버트가 손님을 배웅하러 문으로 갔을 때 달이 막 떠올랐다.
포 윈즈 항구는 꿈처럼 황홀하게 달빛 마법에 휩싸이기 시작해 아무리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도 휩쓸어버리지 못할 마법의 땅으로 변했다. 집 앞 길가에 영묘한 무리의 사제들처럼 나란히 서 있는 키 큰 미루나무들의 거뭇한 모습 위로도 달빛이 내려 나무 끝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짐 선장은 미루나무를 향해 긴 팔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난 미루나무를 좋아해요. 나무 중에 공주죠. 지금은 그다지 인기 있는 나무가 아니지만. 나무가 끝부터 말라 죽어 너덜너덜해진다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봄이 되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무에 올라가서 끝을 다듬어주지 않으면 그렇게 돼버리니까요. 이 집 미루나무는 미스 엘리자베스를 위해 내가 봄마다 다듬어줘서 그렇게 너덜거리지 않았어요. 엘리자베스도 이 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했거든요. 미루나무의 위엄과 거만한 자태를 좋아했어요. 미루나무는 톰, 딕, 해리 가릴 것 없이 아무나하고 친하지 않지요. 단풍나무가 친구 같은 나무라면 미루나무는 상류계급 나무예요, 블라이드 부인.”
“정말 아름다운 밤이에요.”
마차에 오르며 데이비드 부인이 말했다.
“대부분 밤은 아름답죠. 하지만 포 윈즈 너머로 떠오른 달빛을 보다 보면 천국이라고 이보다 더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달은 나에겐 정말 좋은 친구예요, 블라이드 부인. 난 철들면서부터 달을 사랑했어요. 내가 여덟 살 땐 이런 일도 있었죠.
어느 날 저녁 정원에서 잠이 들었는데 아무도 내가 거기서 잠이 든 것을 몰랐어요. 한밤중에 혼자 잠에서 깨어났는데 너무 무서웠죠. 그림자랑 그 이상한 소리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그저 조그만 벌레처럼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고만 있었죠. 그 커다란 세상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고요. 그런데 달이 보이더군요.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안심이 되더군요. 그래서 일어나 달을 쳐다보며 사자처럼 용감하게 집으로 걸어갔죠. 여기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타고 나갔을 때도 갑판 위에서 무수히 많은 밤 달을 쳐다봤어요. 자, 이제 쓸데없는 감상은 그만 접고 집에 가라고 말 좀 해주세요.”

멋진 밤, 웃음소리가 잦아들어갔다. 앤과 길버트는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뜰 한쪽으로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이 자작나무 그림자 속에서 투명하게 잔물결을 일으켰다. 개울둑을 따라 핀 양귀비 꽃송이송이마다에도 달빛이 담겼고 존 선생의 신부가 심었을 꽃들은 신성한 지난날의 아름다움과 축복처럼 그림자 진 공기 속에 달콤함을 흩뿌렸다. 앤은 작은 꽃과 가지를 모으려 어둠 속에 잠시 멈췄다.
“난 어둠 속에서 꽃향기를 맡는 게 좋아, 그러면 꽃의 영혼을 느낄 수 있거든. 아, 길버트, 이 작은 집은 정말 내가 꿈꾸어온 모든 것을 담고 있어. 그리고 여기서 신혼을 보낸 사람이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기뻐!”




8
코넬리아 브라이언트의 방문






9월이면 포 윈즈 항구에 황금빛 안개와 자줏빛 아지랑이가 아련하게 피어올랐다. 낮에는 태양이 내리쬐고 밤이면 세상은 달빛과 별빛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폭풍우가 심술을 부리는 일도 없었고 바람이 거칠게 불지도 않았다. 앤과 길버트는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느라 바빴고 함께 바닷가를 거닐었으며 항구 근처 바다에서 배를 젓기도 했다. 포 윈즈와 글렌 마을, 양치식물이 무성한 항구 북단 주변의 외딴 숲길을 마차로 돌기도 했다. 말하자면, 둘은 세상의 연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신혼을 보냈다.
“삶이 지금 끝난다고 해도 난 우리 둘이 함께한 지난 4주 만으로도 풍성하고 가치 있는 인생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시는 우리가 보낸 지난 4주처럼 그렇게 완벽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바람, 날씨, 사람들, ‘꿈의 집’, 이 모든 것 덕분에 우린 멋진 신혼여행을 했어. 우리가 여기 온 후로 비가 내린 날도 없었잖아.”
앤이 말했다.
“그리고 한 번도 싸운 적도 없었지.”

길버트가 놀리는 소리를 했다.
“흠, ‘그거야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커질 즐거움’이잖아. 신혼을 여기서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야. 우리 추억이 머나먼 낯선 곳에 있지 않고 언제나 여기, 우리 ‘꿈의 집’에 있을 거 아냐.”
앤이 말했다.
둘만의 집에는 에이번리에서 느끼지 못했던 낭만과 모험의 정취가 서렸다. 에이번리에도 바다가 보이기는 했지만 바다가 앤의 삶에 가까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포 윈즈는 바다가 앤을 감싸 안고 끊임없이 불러댔다. 집 안 창문으로 내다보는 풍경은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었고, 언제나 무언가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들은 매일 글렌의 부두로 들어왔고 다시 석양을 뚫고 지구 반 바퀴 너머 저편 어딘가에 있을 항구를 향해 나아갔다.
아침이면 어선은 하얀 날개를 달고 바다로 나갔다가 저녁이면 배를 가득 채운 채 돌아왔다. 선원과 어부 들은 굽이진 붉은 항구 길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가볍게 활보했다. 언제나 모험이든 여행이든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포 윈즈의 풍경은 에이번리처럼 차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고 유쾌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변화의 바람이 그 위에 불어왔다. 바다는 해안가로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심지어 이런 부름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흥분감으로 몸살을 앓았다.
“언제나 바다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이젠 이해할 수 있어. 가끔씩 나도 석양 너머로 항해해가고 싶은 욕망이 일거든. 그런 욕망을 타고난다면 회피할 수 없을 게 틀림없어. 짐 선장님이 그런 욕망에 휩쓸려 바다로 나간 것도 이젠 전혀 놀랄 일이 아니야. 배가 바다를 떠다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배에 탔으면 하고, 갈매기가 모래톱 위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걸 보면 내게도 날개가 있었으면 해. 난 날아가서 쉴 곳을 찾는 비둘기가 아니라 갈매기처럼 폭풍의 심장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앤이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나랑 함께 머무를 거야, 앤 아가씨. 난 당신이 폭풍의 심장 속으로 날아가 버리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길버트가 느긋하게 말했다.
늦은 오후 둘은 붉은 사암석 현관 층계에 앉아 있었다. 땅도 바다도 하늘도 모두 고요하기만 했다. 은빛 갈매기가 하늘 높이 날고 수평선에는 부드러운 분홍빛 구름이 기다란 레이스처럼 늘어져 있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 바람과 파도 소리가 음유 시인의 노랫가락처럼 퍼졌고, 안개 자욱한 항구와 풀들이 시들어버린 목초지에서는 창백한 과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느라 밤새도록 깨어 있어야 했던 의사들은 모험을 하고 싶다는 기분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잤다면 당신도 나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준비가 되었을 텐데.”
앤이 다정하게 말했다.
“난 어젯밤 내 일을 훌륭히 해냈어, 앤. 하느님이 굽어보시는 가운데 내가 한 생명을 구했다고.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다른 때 같으면 그저 도와주었다고만 말했겠지. 하지만 앤, 내가 어젯밤 엘론비 씨 집에서 밤새도록 죽음과 사투를 벌이지 않았으면 엘론비 부인은 아마 오늘 아침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을 거야. 나는 포 윈즈에서는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시술을 했어. 병원이 아닌 곳에서 이런 시술을 한 것도 아마 내가 처음일 거야. 지난겨울 킹스포트 병원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방식이거든. 더 이상 다른 방법은 없다고 믿고 있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쓴 거지. 하지만 난 위험을 감수했고 결국엔 성공했어. 덕분에 좋은 엄마이자 아내의 생명을 구했고 그분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 세상에 보탬이 되면서 행복하게 살 거야. 오늘 아침 마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구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걸 보면서 내가 이 직업을 택한 걸 하느님께 감사드렸어. 난 열심히 싸워서 이겼어. 생각해봐, 앤. 무시무시한 파괴자에 대항해 싸워서 이겼다구. 오래전에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이야기할 때부터 꿈꿔 온 일이야. 오늘 아침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길버트가 말했다.
“이루고 싶은 꿈이 그것 한 가지뿐이었어?”
앤은 길버트의 답이 뭔지 알았지만 다시 한 번 듣고 싶어 물었다.
“당신도 알잖아, 앤 아가씨.”
웃음 진 얼굴로 앤의 눈을 바라보며 길버트가 말했다. 포 윈즈 항구 바닷가의 하얀 집 층계에 앉아 있는 이 한 쌍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길버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내가 지금 돛을 활짝 펴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있는 배를 보고 있는 거 맞아?”
앤이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미스 코넬리아 브라이언트 아니면 무어 부인이 오는 걸 거야.”

앤이 대답했다.
“난 진료실로 들어갈게, 미스 코넬리아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미스 코넬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모두 종합해보면 그 사람 이야기가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
“무어 부인일 수도 있는데?”
“체격으로 봐서는 무어 부인은 아닌 것 같아. 요전번 그 부인이 정원에서 일하는 걸 봤는데, 정확히 보기엔 좀 멀긴 했지만 무어 부인은 날씬한 편인 것 같았어. 우리랑 제일 가까운 이웃인데도 아직까지 한 번도 여기에 오지 않은 걸 보면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아닌가 봐.”
“린드 아주머니랑 비슷한 사람일 거라는 내 짐작이 틀린 것 같아. 안 그랬으면 궁금해서라도 벌써 여기 왔을 텐데. 저 사람은 분명 미스 코넬리아일 거야.”
앤이 말했다.
역시 미스 코넬리아였다. 미스 코넬리아는 간단한 인사든 현란한 인사든 결혼 축하 인사차 들른 게 아니었다. 팔에 상당히 커다란 일감 꾸러미를 들고 온 걸 보니 그랬다.
앤이 들어오기를 청하자 얼른 햇볕을 가리려고 챙이 넓은 모자를 벗었다. 하나로 틀어 올린 금발 머리 밑으로 9월 미풍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무줄로 모자를 꽉 묶었다. 미스 코넬리아는 모자를 핀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코넬리아의 어머니에게도 자기에게도 고무줄 하나면 충분하지 모자 핀 같은 건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미스 코넬리아는 노처녀라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그런 외모가 전혀 아니었고 표정이 참 독특한 게 앤의 마음을 끌었다. 얼굴도 흰 피부에 분홍빛으로 화색이 돌았고 눈동자는 갈색이었다. 영혼이 통하는 친구는 보자마자 당장 알아보는 법. 앤은 미스 코넬리아가 평소 좀 특이한 생각을 하고 외모에도 좀 별난 면이 있지만 자기와 통할 사람이란 것을 직감했다.
미스 코넬리아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초콜릿 무늬에 커다란 분홍색 장미꽃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는 실내복에 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들어간 앞치마를 두르고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미스 코넬리아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런 옷차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소화하지도 못할 것이다. 미스 코넬리아라면 왕자의 신부가 될 공주를 배알하러 궁전에 간다 한들 주눅 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태연한 얼굴로 대리석 바닥에 장미꽃 무늬가 수놓아진 치맛자락을 질질 끌며 걸어 들어가 왕자가 되었건 농부가 되었건 그저 단순히 남자를 손에 넣은 건 그리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조용히 공주의 미몽을 일깨워줬을 것이다.
“일감을 가지고 왔어요, 블라이드 부인. 급한 일이라 낭비할 시간이 없거든요.”
예쁜 옷감을 펼쳐놓으며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앤은 미스 코넬리아의 널찍한 무릎에 펼쳐진 하얀 옷감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조그만 가장자리 주름이랑 단이 달린 아주 예쁜 아기 옷이었다. 미스 코넬리아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놀라울 정도로 능란한 솜씨로 자수를 놓았다.
“이건 글렌에 사는 프레드 프록터 부인에게 줄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을 이었다.
“좀 있으면 여덟 번째 아이를 낳을 텐데,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지 뭐예요. 일곱 아이들 모두가 프록터 부인이 첫아이 때 마련한 옷을 입고 자랐어요. 둘째부터는 아이 옷을 만들 시간도 힘도 마음도 없었거든요. 이 여자는 순교자 같은 생활을 해요, 블라이드 부인. 아, 정말이에요. 프레드 프록터랑 결혼했을 때부터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프레드 프록터는 고약하지만 매력 있는 남자였는데, 결혼을 하더니 매력은 죄다 도망가고 고약한 성미만 남았죠. 그 사람은 술만 마시고 가족은 돌보질 않아요. 사네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이웃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프록터 부인이 아이들 옷을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혔겠어요?”
나중에 앤이 들어보니 프록터네 아이들이 옷을 단정하게 입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이웃은 미스 코넬리아뿐이었다.
“여덟 번째 아이를 낳는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게 마지막이고 난 이걸 오늘 끝내고 싶어요.”
“정말 예쁘네요. 저도 바느질거리를 가져올 테니 같이 바느질을 해요. 어쩌면 이렇게 바느질을 잘하세요, 미스 코넬리아?”
앤이 말했다.
“맞아요. 내가 바느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죠. 당연한 일이죠! 세상에, 내 아이가 백 명은 되었다 해도 내가 바느질을 이보다 많이 했을라구요. 아, 내 말을 믿어요! 여덟 번째 아기에게 입힐 옷에 이렇게 손으로 자수를 하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난 바보라니까. 하지만 블라이드 부인, 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나는 걸 비난할 건 아니라고 봐요. 그리고 난 그 아이가 정말 예쁜 옷을 하나쯤은 입을 수 있기를 바라죠. 아기가 불쌍해 보이길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법석을 좀 떨면서 옷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어떤 아기든 그 옷을 아주 좋아할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를 무척 좋아하게 될 거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으며 앤이 말했다.
“왜 내가 부인을 찾아오지 않았을까 궁금했죠?”
미스 코넬리아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부인도 알겠지만, 지금은 추수 기간이에요. 난 바빴어요. 일할 사람도 여럿 고용했는데 다들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어찌나 먹어대기만 하는지.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어제도 오려고 했는데 로데릭 맥컬리스터 부인의 장례식에 다녀와야 했어요. 처음에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가도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맥컬리스터 부인은 백 살이에요. 그리고 난 항상 맥컬리스터 부인의 장례식에는 꼭 가볼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일은 잘 끝났나요?”
진료실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걸 보며 앤이 물었다.
“뭐요? 아, 그래요. 아주 성대한 장례식이었어요. 그 부인은 아는 사람이 아주 많았지요. 마차만 해도 120대가 넘게 왔을 거예요. 재미있는 일도 한두 번 일어났죠. 거기서 조 브래드쇼 노인을 보고 기절해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신앙심도 없고 평소에 교회 문턱을 넘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노인이 목청껏 ‘예수님의 품 안에서 평안하게’를 부르며 앉아 있잖아요. 그 사람은 노래 부르는 걸 아주 좋아해요.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장례식마다 나타나는 이유죠. 딱하게도 브래드쇼 부인은 일 때문에 완전히 지쳐서 그다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조도 이따금씩 부인에게 선물이나 하나 사주리라 마음먹고 나가기도 한대요. 하지만 돌아올 때는 꼭 새로 나온 농기계를 사가지고 오는 사람이에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하다못해 감리교회에도 안 나가는 남자한테 대체 뭘 바라겠어요? 부인이랑 젊은 의사 선생님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맞은 일요일에 장로교회에 나온 걸 보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장로교도가 아닌 의사는 나한테 의사도 아니에요.”
“지난 일요일 오후에는 감리교회에 갔었는걸요?”
앤이 짓궂게 말했다.
“아, 난 블라이드 선생님이 가끔씩은 감리교회에도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감리교도 환자는 받지 못할 거 아니에요?”
“설교가 참 좋았어요. 그리고 그 감리교회 목사님 기도는 제가 들은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고요.”
앤이 대담하게 단언했다.
“아, 물론 그 양반도 기도는 할 줄 알겠죠. 난 사이먼 벤틀리 노인만큼 기도를 아름답게 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어요. 그 사람은 매일 술에 취해 있거나 아니면 그렇게 취해 있길 바라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그 양반은 취하면 취할수록 기도를 더 잘해요.”
“그 감리교회 목사님은 아주 잘생기셨던 걸요.”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봐줄 만한 정도였지만 앤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반질반질하게 생기긴 했죠.”
미스 코넬리아도 동의했다.

“아, 또 굉장히 여자 같은 면이 있어요. 여자들이 자기를 한번 보면 모두들 자기에게 홀딱 반하는 줄 착각한다니까요. 유대인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감리교회 목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러는지, 원! 부인이랑 젊은 의사 선생님이 내 충고를 받아들여 감리교도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신조는요, ‘장로교도이면 장교교도답게 굴어야 한다’예요”
“장로교도뿐만 아니라 감리교도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앤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저기 높은 곳에 계신 분 몫이죠.”
미스 코넬리아가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천국에선 어쩔지 몰라도 여기 이 땅에선 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요. 이 감리교회 목사는 결혼도 안 했어요. 지난번에 있던 목사는 결혼은 했지만 그 부인처럼 어리석고 경솔한 사람은 정말 처음 봤어요. 한번은 그 목사에게 부인이 철들 때까지 좀 기다렸다 결혼하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부인을 길들이고 싶었다나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사람이 언제 철드는지는 결정하기가 좀 어렵죠.”
앤이 웃었다.
“그 말이 맞아요. 맞고말고요.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철이 드는 사람도 있지만 여든 살이 되도 철이 안 드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아, 정말이에요! 내가 좀 전에 말한 로드릭 부인 있죠. 그 할머니는 전혀 철이 들지 않았어요. 열 살이었을 때나 백 살이 되어서나 어리석긴 마찬가지였죠.”

“그랬으니까 아마 그렇게 오래 사셨겠죠.”
앤이 넌지시 말했다.
“아마 그런가 봐요. 하지만 난 바보같이 백 년을 사느니 분별 있게 오십 년을 살고 싶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분별 있게만 산다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미스 코넬리아는 경박한 말장난으로 논쟁을 벌이는 건 싫어했다.
“로드릭 부인은 밀그레이브 출신인데 밀그레이브 집안은 분별력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었죠. 부인의 조카 에버니저 밀그레이브는 수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자기가 죽었는데 부인이 자기를 묻지 않았다면서 부인에게 광분했어요. 나 같았으면 얼른 묻어주고 말았을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너무도 결연하게 말을 해서 앤은 코넬리아가 삽을 들고 무덤을 파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는 사람 중에 좋은 남편은 없나요, 미스 코넬리아?”
“아, 물론 좋은 남편도 많죠. 저기 저쪽에요.”
열린 창문으로 항구 건너편 작은 교회 묘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아니, 살아 계신 분들 중에요?”
앤이 채근했다.
“오, 몇 명 있기는 하죠.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여기저기 특이하게 멀쩡한 남자들이 있다는 걸 나도 부인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 제대로 교육을 받았거나, 필요한 경우 어머니한테 벌을 받기도 하면서 점잖고 괜찮은 남자로 성장한 경우죠. 블라이드 부인 남편도 내가 들은 바로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알고 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마지못해 인정하고는 안경 너머로 앤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덧붙였다.
“지금 세상에 내 남편 같은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죠?”
“맞아요. 그런 남자는 없어요.”
앤이 즉시 대꾸했다.
“아, 아주 꼭 그렇게 말한 신부가 있었어요.”
미스 코넬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제니 딘도 결혼할 땐 세상에 자기 남편 같은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어요. 그런 남자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 사람 제니에게 끔찍한 인생을 안겨줬어요. 제니는 죽어가는데 그 와중에 다른 여자에게 청혼한 남자라구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하지만 블라이드 부인에겐 그런 일이 없길 바랄게요. 젊은 의사 선생님은 평판이 좋아요. 처음엔 걱정을 좀 했는데.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의사라면 데이비드 의사 하나밖에 없는 줄 알거든요. 확실히 데이비드 의사는 그렇게 재치가 있는 분은 아니에요. 목매달아 자살한 사람이 있는 집에 가서도 노끈 이야기를 하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배가 아프면 마음이 아픈 거야 다 잊어버리죠. 그분이 의사가 아니라 목사였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그분을 용서하지 않았을걸요. 사람들은 영혼의 아픔 같은 건 배가 아픈 것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우리 둘 다 장로교도이고 여기 감리교도가 없어서 하는 소린데 솔직히 우리 목사님이 어떤 분인 것 같아요? 말 좀 해봐요.”
“글쎄요, 음, 그러니까…….”
앤이 주저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도 부인 말에 동감해요. 우리가 그분을 모실 때 실수를 했어요. 그분 얼굴은 꼭 저기 무덤에 서 있는 좁고 기다란 비석 같지 않아요? ‘~에게 바친’이란 문구는 그 양반 이마에 써야 한다니까요. 그 목사님이 여기 와서 처음으로 한 설교를 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제일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설교였어요. 아, 물론 주제는 아주 훌륭했죠. 하지만 그분이 든 예화는 정말이지! ‘여러분에게 암소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과나무는 마구간에 묶어놓고 암소는 과수원에 다리를 박아 심어놓는다고 해봅시다. 사과나무에서 우유를 얼마나 얻을 수 있고 암소에게서 사과를 얼마나 딸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설교 들어본 적 있어요? 그날 그 자리에 감리교도가 없던 게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만약에 그랬으면 그걸 가지고 얼마나 야유를 해댔겠어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봐주기 힘든 건 그 목사님이 사람들 말마다 무조건 다 옳다고 하는 거예요. 그 목사님한테 ‘당신은 불한당이야.’ 하고 말해도 아마 미소를 지으며, ‘네, 그렇지요.’ 할걸요. 목사라면 좀 더 뼈대가 있어야죠. 사실 난 그 사람을 멍청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건 부인하고 나 사이에서나 하는 이야기지만요. 감리교도들이 듣고 있을 땐 난 그 목사님을 높이 떠받들어주죠. 어떤 사람들은 그 목사님 부인 옷차림이 너무 화려하다고들 하지만 난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하고 살려면 뭔가 기분 전환이 될 만한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여자가 옷차림이 어떻다느니 하고 흉보는 짓은 안 해요. 남편이 너무 고약하거나 인색하지 않아서 자기 부인이 옷차림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면 그저 다행이다 하고 그걸로 감사할 따름이죠. 난 내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요. 여자는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옷을 입는다지만 난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난 정말 평화롭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가 그럴 수 있는 건 남자들이 어찌 생각하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세요, 미스 코넬리아?”
“어머나, 세상에, 난 남자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걸요. 그냥 경멸해요. 젊은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도 계속 지금 같기만 하다면 내가 좋아하게 될 것 같군요. 하지만 부인 남편 빼놓고 이 세상에 쓸 만한 남자는 데이비드 의사 선생님과 짐 선장님뿐이지요.”
“짐 선장님은 정말 멋진 분이에요”
앤이 정겹게 동의했다.
“짐 선장님은 좋은 분이지만, 사람을 좀 짜증 나게 만드는 면도 있어요. 절대로 짐 선장님을 화나게 할 수가 없다니까요. 내가 20년 동안이나 화를 돋워보려 했지만 실패했어요. 그 양반은 여전히 차분하고 조용하죠. 그런 점이 좀 짜증 나요. 아마 짐 선장님과 결혼할 뻔했던 여자는 하루에 두 번은 성질을 내는 남자에게 시집갔을 거예요.”
“그게 누군데요?”
“오, 나도 몰라요. 그저 그렇다는 얘기지. 짐 선장님이 결혼 약속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기억나는 게 없어요. 내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분이 나이를 꽤 먹은 다음이었으니까요.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짐 선장님 나이가 올해 일흔여섯인데, 독신으로 사는 이유를 들어본 일이 전혀 없네요. 하지만 한 가지 이유는 분명해요.
짐 선장님은 평생 항해를 했어요. 5년 전에 완전히 손을 떼기 전까지요. 세상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죠. 짐 선장님과 엘리자베스 러셀은 평생 친구로 지냈지만 서로 연애 감정으로 엮인 적은 없었지요.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하지 않은 건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었어요. 젊었을 땐 아주 미인으로 소문이 났었죠. 영국 황태자와 춤을 춘 적도 있는걸요. 그분이 이 섬을 방문한 해에 엘리자베스는 샬럿타운에 있는 삼촌 집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삼촌은 정부 관리여서 황태자가 참석하는 무도회에 초대를 받았지요. 엘리자베스도 같이요. 파티에 온 수많은 여자들 중에 엘리자베스가 가장 아름다웠대요. 그래서 황태자와 춤도 추었고요. 황태자와 춤을 추지 못한 다른 아가씨들은 화를 났대요. 엘리자베스보다 자기들이 사회적 신분도 더 높은데 황태자가 자기들을 그렇게 외면해선 안 된다고요. 엘리자베스는 황태자와 춤춘 것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지요. 고약한 사람들은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지 않는 거라고 말들을 했어요. 황태자와 춤을 추어봤는데 평범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거죠.
하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에요. 딱 한 번 엘리자베스가 내게 자기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말해준 적이 있거든요. 자기가 성질이 좀 있대요. 한번 화가 나면 2층으로 올라가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 갈가리 찢어놔야 속이 풀린대요. 그러니 어떤 남자하고든 평탄하게 잘 살 자신이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난 결혼이 정말 하고 싶다면 그런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했죠. 남자만 성질 있으란 법 있나요? 안 그래요, 블라이드 부인?”
“저도 성질이 좀 있답니다.”
앤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좋은 거예요.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아요. 아, 정말이에요! 세상에, 저기 골든 글로우 핀 것 좀 봐요. 정원이 아주 예뻐요. 엘리자베스가 정말 잘 가꾸어놨어요.”
“정말이에요. 여긴 옛날 꽃들로 가득해서 참 좋아요. 정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기 뒤편 전나무 숲 너머로 땅을 좀 파서 딸기나무를 심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길버트는 너무 바빠서 이번 가을엔 그럴 시간이 없어요. 어디 아는 사람 없으세요?”
앤이 물었다.
“음, 글렌에 사는 헨리 해먼드가 그런 일을 하죠. 아마 그 사람이 한다고 할 거예요. 일보다 임금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사내들이 다 그렇죠, 뭐. 그런데 이 사람은 이해력이 너무 느려서 뭘 시키면 한 5분은 가만히 서서 생각을 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나무 그루터기를 던졌대요. 그것에 맞아서 그렇게 되었다나 봐요. 원,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그 일로 사람을 아주 버렸죠, 뭐. 아무튼 내가 소개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지난봄에 우리 집 페인트칠을 해줬는데 지금도 아주 멋져요, 안 그래요?”
5시를 알리는 시계 괘종 소리가 앤을 구했다.
“어머나, 세상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재미있을 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니까! 자, 난 이만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미스 코넬리아가 소리 질렀다.
“어머 벌써요?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앤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예의상 묻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원해서 그런 건가요?”
미스 코넬리아가 다그치듯 물었다.
“물론 정말 원해서 그런 거죠.”
“그러면 더 있죠. 부인은 요셉을 아는 종족에 속한 사람이군요.”
“우린 친구가 될 거예요.”
앤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알아본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린 친구예요. 친구는 고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친척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잖아요. 그중에 감옥에 있는 사람이나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죠. 아니, 내게 그런 친척이 많다는 것은 아니에요. 육촌 형제 내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말하자만 난 좀 외로운 영혼이에요, 블라이드 부인.”
미스 코넬리아의 목소리는 뭔가 애잔한 구석이 있었다.
“저를 앤이라고 부르시면 좋겠어요.”
앤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남편을 빼놓고는 여기 포 윈즈 사람들 모두가 저를 블라이드 부인이라고 불러요. 전 그 호칭이 낯설게 느껴진다구요. 코넬리아라는 이름은 제가 어릴 때 갖고 싶었던 이름과 비슷해요. 제가 ‘앤’이라는 이름이 싫어서 상상 속에서 저 자신을 ‘코델리아’라고 불렀거든요.”
“난 앤이란 이름이 좋아요. 우리 어머니 이름도 앤이었어요. 난 옛날 이름이 제일 멋지고 예쁘다고 생각해요. 차를 내오러 갈 거면 젊은 의사 선생님을 이리 보내요. 내가 여기 오고 나서 내내 진료실 소파에 드러누워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지러지게 웃고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미스 코넬리아에게 신기한 투시능력이라도 있나 하고 앤이 놀라 소리쳤다.
“내가 이 집 오솔길로 들어설 때 의사 선생님이 옆에 앉아 있는 걸 봤어요. 내가 남자들 수법을 알죠. 자, 이제 이 아기 옷을 다 만들었으니 여덟 번째 아기가 언제 태어나든 문제없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1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18
0
62
나단비
2024-04-18
0
70
나단비
2024-04-17
0
73
나단비
2024-04-17
0
58
나단비
2024-04-17
0
49
나단비
2024-04-17
0
62
나단비
2024-04-17
0
48
나단비
2024-04-16
0
77
나단비
2024-04-16
0
122
나단비
2024-04-16
0
75
나단비
2024-04-16
0
73
나단비
2024-04-16
0
60
나단비
2024-04-15
0
79
나단비
2024-04-15
0
59
나단비
2024-04-15
0
99
나단비
2024-04-15
0
65
나단비
2024-04-15
0
58
나단비
2024-04-14
0
73
나단비
2024-04-14
0
176
나단비
2024-04-14
0
82
나단비
2024-04-14
0
65
나단비
2024-04-14
0
54
나단비
2024-04-13
0
42
나단비
2024-04-13
0
38
나단비
2024-04-13
0
44
나단비
2024-04-13
0
47
나단비
2024-04-13
0
70
나단비
2024-04-12
0
42
나단비
2024-04-12
0
48
나단비
2024-04-12
0
50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