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11~12

나단비 | 2024.04.04 17:49:01 댓글: 0 조회: 5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674
11
레슬리 무어 이야기






한기가 도는 어느 10월 오후, 미스 코넬리아가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말했다.
“그래요, 2주 전에 여덟 번째 아기가 태어났어요. 여자아이예요. 프레드는 남자 아기가 아니라고 심통을 부리더군요. 자기는 남자아이를 원했다나.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남자 아기가 태어났더라면 아마 여자 아기가 아니라며 소리를 질러 댔을 거라고요. 그 집에는 딸이 넷에 아들이 셋이나 되는데 이번에 낳은 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뭐, 괜히 트집 잡자고 하는 소리죠.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어쨌거나 아기에게 그 작은 옷을 입혀놓으니 정말 예쁘더라고요. 그 까만 눈하며 작은 손이 어찌나 앙증맞던지.”
“저도 꼭 가서 봐야겠어요. 저도 아기를 좋아하거든요.”
아기들이란 말로는 표현 못 할 만큼 사랑스럽고 신성하다고 생각하며 앤은 미소 지었다.
“나도 아기들이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 정말이에요! 글렌에 사는 내 사촌 플로라는 아이를 열하나나 낳았으니, 뭐 그 신세가 노예나 다름없죠! 남편은 3년 전에 자살했어요. 사내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뭣 때문에 자살을 했어요?”
충격을 받은 앤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글쎄 우물에 뛰어들었어요. 잘됐지, 뭐. 앓던 이가 빠진 거라고요! 그 사람은 태생부터 폭군이었어요. 아무튼 그 우물은 못 쓰게 됐죠. 가엾은 플로라는 다시는 그 우물을 사용할 엄두도 못 냈어요. 그래서 우물을 새로 파야 했는데 그 비용이 어마어마했고 물도 좋지 않았어요. 물에 빠져 죽으려면 그야말로 바다에 가면 물이 지천인걸, 안 그래요? 난 그런 남자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어요. 내가 기억하기로 포 윈즈에서 자살한 사람은 두 명뿐이에요. 다른 한 사람은 레슬리 무어의 아버지인 프랭크 웨스트죠. 참, 그런데 레슬리는 아직 여기에 들르지 않았지요?”
“아니요. 하지만 요전 밤에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기는 했어요.”
앤이 잔뜩 귀를 곤두세우고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어요. 난 부인이 레슬리와 친해졌으면 하고 바랐거든요. 그래, 레슬리는 어떻던가요?”
“정말 아름답던데요.”
“아, 물론이죠. 포 윈즈에서 레슬리의 미모를 따를 사람은 없어요. 레슬리의 머리카락 봤어요? 머리를 풀면 발목까지 와요. 그런데 내가 묻는 건 레슬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였어요.”

“무어 부인도 원한다면 전 그 부인을 아주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앤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레슬리가 그러질 않았군요. 앤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고 대했죠. 가엾은 레슬리! 레슬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안다면 그게 놀랄 일도 아니에요. 정말 비극이에요, 비극.”
미스 코넬리아가 단호하게 반복해서 말했다.
“레슬리 무어 부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 말해주셨으면 해요. 무어 부인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요.”
“어이구, 포 윈즈에는 가엾은 레슬리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젠 전혀 비밀도 아니라고요. 하지만 레슬리 본인 말고는 누구도 그 속을 알지 못해요. 레슬리가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질 않아요. 내가 그나마 레슬리와 제일 가깝게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나한테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안 해요. 딕 무어를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음, 그렇다면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줄게요. 그러면 아마 레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레슬리 아버지는 프랭크 웨스트라고 내가 말했지요? 프랭크는 영리하지만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사내들이란 게 다 그렇죠, 뭐. 그 사람 머리는 좋아서 대학교까지 갔지요. 2년쯤 공부를 했는데 그만 건강이 나빠졌어요. 웨스트 집안사람 중에는 원래 폐결핵이 많아요. 그래서 프랭크는 집으로 돌아와 농장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항구 위쪽 마을에 살던 로즈 엘리엇과 결혼했죠. 로즈는 포 윈즈에서 소문난 미인이었어요. 레슬리는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았죠. 하지만 레슬리가 로즈보다 열 배는 더 정신력도 강하고 씩씩해요. 훨씬 더 예쁘기도 하고요. 앤도 알겠지만 난 항상 우리 여자들이 서로서로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남자들 손아귀에서 견딜 만큼 견뎌왔어요. 그건 하느님도 아시지요. 난 우리 여자끼리 때리고 할퀴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난 다른 여자를 깎아내리지 않아요.
하지만 로즈 엘리엇만큼은 참을 수가 없어요. 그 여자는 애초부터 응석받이였어요. 아, 정말이에요. 로즈는 그저 게으르고 이기적인데다 징징거리기만 했죠. 프랭크는 농사일에 서툴고 그래서 둘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정말 가여웠지요! 감자로 연명하다시피 했어요. 아, 내 말을 믿어요. 아이는 둘을 두었죠. 바로 레슬리와 동생 케네스예요. 레슬리는 엄마에게서는 미모를, 그리고 아버지에게서는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죠. 레슬리에게는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것 말고도 좋은 점이 많았어요.
할머니인 웨스트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있었고. 그분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거든요. 레슬리가 아이 적에는 그 누구보다도 밝고 상냥하고 명랑한 아이였어요. 모두들 그 아이를 좋아했죠.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딸이었고 또 레슬리도 아버지를 끔찍이 좋아했어요. 레슬리가 쓰던 표현처럼 둘은 좋은 ‘동무’였죠. 레슬리는 아버지의 잘못 같은 건 하나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자 티를 냈었죠.
레슬리가 열두 살 때 첫 번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레슬리는 동생인 케네스를 아주 많이 아꼈어요. 케네스는 레슬리보다 네 살이 어렸는데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그런데 케네스가 죽은 거예요. 건초 더미를 잔뜩 싣고 헛간으로 들어가던 마차에서 떨어져 그만 그 바퀴에 치여 목숨을 잃은 거죠. 앤, 그런데 말이죠, 레슬리가 그 장면을 봤어요. 다락방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구요. 레슬리는 한 차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를 일꾼이 들었대요. 그 사람은 그런 소리를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그 후로 내내 그 비명 소리가 귓속에서 윙윙거리고 멈추지를 않았대요.
가브리엘 천사의 나팔 소리가 들릴 때나 그 소리가 사라질 것 같다고 했죠. 하지만 레슬리는 두 번 다시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지 않았어요. 다락에서 건초 더미 위로 뛰어내리고 거기서 다시 바닥으로 뛰어내려 피가 줄줄 흐르는 그 작은 몸뚱이를 부여안았죠. 사람들이 그 아이를 케네스 시신에서 억지로 떨어뜨려 놔야 했다더군요. 나를 부르러 왔었어요. 더 이상 말을 잇기가 어렵네요.”
미스 코넬리아가 따뜻한 갈색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고 잠시 비통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바느질만 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그걸로 다 끝이었어요. 항구 너머 묘지에 케네스를 묻고 얼마 후 레슬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했죠. 다시는 케네스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어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레슬리 입에서 케네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마음에서 여전히 그 오래된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나 봐요. 그래도 어릴 때고 또 아이들에겐 시간이 약이잖아요? 시간이 지난 후 레슬리는 다시 웃기 시작했어요. 웃으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지금은 그렇게 웃지를 않죠.”
“그날 저녁 그렇게 예쁘게 웃는 걸 봤어요. 정말 아름답더군요.”
“케네스가 죽은 후 프랭크 웨스트도 점점 사람이 변해갔어요. 원래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건이 그에겐 충격이었죠. 레슬리를 제일 예뻐하긴 했어도 케네스도 무척 사랑했는데, 그 아들을 잃고는 시무룩하니 우울해졌어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또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죠. 그러더니 레슬리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느 날 갑자기 거실에서 스스로 목을 맸어요. 거실 가운데 천장에 달린 등 다는 갈고리에 말이에요. 참 사내다운 짓 아니에요? 그날이 그 사람 결혼기념일이었어요. 참 날짜도 기가 막히게 골랐죠. 가엾은 레슬리가 그걸 봤어요. 그날 아침 꽃병에 꽃을 꽂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얼굴이 석탄처럼 검게 변한 채 천장에 목매달아 죽어 있는 걸 발견했지요. 너무도 끔찍한 장면이었죠.”

“어머나, 세상에 끔찍하기도 해라! 불쌍하기도 하지, 가엾은 아이!”
앤은 떨면서 말했다.
“아버지 장례식 때는 케네스가 죽었을 때만큼 그렇게 울지 않았어요. 로즈는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혼자서 두 몫을 다했지만 레슬리는 조용히 엄마를 진정시키더군요. 나도 그렇고 모두들 로즈에게 질려버렸지만 레슬리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어요. 레슬리는 엄마를 사랑했죠. 가족이라면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라 자기 가족이 하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다고 여겼지요. 아무튼 케네스 옆에 프랭크를 묻고 로즈는 그 앞에 커다란 비석을 세웠어요. 그 사람보다 더 큰 거였어요. 아, 내 말을 믿어요! 그 비용을 로즈가 감당이나 할 수 있었게요. 농장을 저당잡혀야 했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레슬리 할머니 웨스트 부인이 돌아가시면서 레슬리에게 돈을 약간 남겨주었어요. 레슬리가 퀸스 학교에서 1년간 공부할 수 있는 정도는 됐죠. 레슬리는 교사가 돼서 스스로 레드먼드 대학에 갈 학비를 벌기로 결심했어요. 바로 레슬리 아버지가 꿈꿔온거였죠.
프랭크 웨스트는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레슬리가 이루길 바랐어요. 레슬리에겐 야망이 있었고 또 그만큼 머리도 좋았어요. 결국 퀸스에 가서 2년에 마칠 공부를 1년 만에 수석으로 끝냈어요.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글렌 학교에 일자리를 얻었죠. 레슬리는 행복했고 희망도 있어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그때 당시 레슬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 사내들은 참 빌어먹을 인간들이라니깐!”
미스 코넬리아는 신경질적으로 실을 똑 끓었다. 마치 네로 황제가 일격에 사람의 목을 쳐내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해 여름 딕 무어가 레슬리의 인생에 들이닥쳤죠. 그 사람 아버지 애브너 무어는 글렌 마을에서 가게를 했어요. 하지만 딕 무어는 어머니한테 바다로 나가고 싶어 하는 방랑벽을 물려받았어요. 그래서 여름이면 바다로 나갔고 겨울엔 아버지의 상점에서 일했죠. 딕 무어는 덩치가 크고 잘생기긴 했지만 영혼은 추악했어요. 무엇인가를 원하면 그걸 손에 넣을 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일단 자기 것으로 만들면 곧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어요. 사내들이란 게 다 그렇죠, 뭐. 아, 날씨가 좋을 땐 날씨 때문에 으르렁거리지도 않았고,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갈 땐 성질도 부리지 않고 사근사근하게 굴었죠. 하지만 그 인간은 술을 좋아했고 나쁜 소문도 돌았어요.
어촌 마을에 여자가 있다는 추잡한 이야기도 들렸고. 말하자면, 그 남자는 레슬리의 발 닦는 일에도 가당치 않은 사람이었다고요. 게다가 감리교도였어요! 하지만 딕 무어는 맨 처음 레슬리의 미모에 반했고, 그다음으로는 레슬리가 자기에게 냉담하게 대하니까 열을 올린 거예요. 딕 무어는 레슬리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했고 결국엔 자기 뜻대로 했죠!”

“어떻게요?”
“악독한 방법으로요! 나는 절대로 로즈 웨스트를 용서하지 못해요. 애브너 무어는 웨스트 농장을 저당잡아 놓은 상태였고 이자가 몇 년째 밀려 있었죠. 딕 무어는 웨스트 부인에게 찾아가 레슬리와 결혼하게 해주지 않으면 아버지한테 말해서 저당잡힌 농장을 당장 처분해 버리겠다고 을렀어요.
로즈는 하얗게 질려 난리를 피웠죠. 레슬리를 붙들고 울며불며 집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했어요. 자기가 새색시로 들어온 집을 떠나게 되면 자기 가슴이 찢어질 거라면서요. 나도 로즈가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된 걸 비난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문제로 자식을 희생시키는 건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레슬리가 포기해야 했죠. 엄마를 지극히 사랑해서 엄마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했을 거예요.
레슬리는 딕 무어와 결혼했어요. 당시에는 왜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얼마 되지 않아 난 로즈 웨스트가 그 문제로 어떻게 레슬리를 들볶았는지 알게 됐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확신했어요. 왜냐하면 난 레슬리가 딕 무어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문제에서 레슬리가 갑자기 태도를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거든요.
또 하나, 딕 무어가 잘생기고 박력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레슬리가 반할 만한 남자는 아니었거든요. 아무튼 성대한 결혼식은 없었지만 로즈는 나에게 둘의 결혼식에 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가긴 했는데 후회되더군요. 내가 아버지와 동생 장례식 때 레슬리의 얼굴을 봤잖아요. 그런데 레슬리 결혼식에서 본 레슬리의 얼굴이 마치 자기 장례식에 와 있는 사람 얼굴이었어요. 그런데 로즈는 무슨 좋은 일이라고 입이 헤벌어지게 웃고 있더라구요. 아, 정말이에요!
레슬리와 딕은 웨스트네 집에서 살았어요. 로즈는 사랑하는 딸과 떨어져 살 수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겨울이 지났고 로즈는 그 이듬 해 봄에 폐렴에 걸려 죽었어요. 1년 더 일찍 죽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 일로 레슬리의 가슴은 한 번 더 찢어졌죠.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은 사랑을 받고, 정작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은 그만한 애정을 받지 못하니 너무 비극이에요.
딕은 조용한 결혼 생활에 진저리를 쳤어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그러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더군요. 노바스코샤에 사는 친척을 찾아갔어요. 애브너 무어가 노바스코샤 출신이거든요. 거기서 사촌인 조지 무어가 아바나로 항해를 떠나는데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레슬리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배 이름은 ‘네 자매’ 호이고 9주 정도 항해를 할 거라고 했다대요. 레슬리에겐 오히려 잘됐지요. 하지만 레슬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결혼한 날부터 지금까지 똑같아요. 차갑고 도도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고 대해요. 나는 빼고요. 나한테까지 거리를 두진 않았어요. 아, 정말이에요! 그런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가능한 가까이서 레슬리 곁을 지켜왔지요.”

“그렇지 않아도 레슬리는 미스 코넬리아가 자기에겐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더군요.”
앤이 말했다.
“그래요?” 
기쁘게 탄성을 지르며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참 고맙군요. 가끔은 레슬리가 정말 내가 곁에 가까이 있어주길 원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런 내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앤이 레슬리의 마음을 열도록 한 게 틀림없어요. 아니면 앤에게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다고요. 가엾게도, 상처가 너무 많은 사람이에요. 난 딕 무어를 볼 적마다 칼로 쓱 베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스 코넬리아는 다시 눈물을 훔쳐냈고 잔인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는 상상으로 그나마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레슬리는 홀로 남았죠. 딕이 떠나기 전에 곡식 씨앗을 뿌렸고, 그 후에는 애브너 노인이 농장을 돌봤지요. 그런데 여름이 지나갔는데도 네 자매 호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노바스코샤에 있는 무어네 사람들이 알아봤는데 그 배는 싣고 온 화물을 아바나에서 내린 후 다시 짐을 싣고는 고향으로 떠났대요. 그 사람들이 알아낸 것은 그게 다였어요.
사람들은 딕 무어가 죽은 것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몇 년 동안 타지에 나가 소식이 끊겼던 남자들이 여기 항구에 다시 나타나는 일도 간혹 있었으니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에요.

레슬리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죠. 정말 어쩌면 그렇게도 일이 안 풀렸던지! 그다음 해 짐 선장이 아바나로 갔어요. 그때는 짐 선장이 항해를 그만두기 전이었는데, 자기가 나서서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짐 선장은 언제나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해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죠, 뭐. 그래서 네 자매 호에 탔던 선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선원들이 머무는 하숙집이나 선원들 드나드는 곳은 다 수소문했어요. 난 짐 선장이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해요. 잠자는 개는 그냥 자게 내버려둬야 했다고요!
아무튼 어느 외딴 곳에서 어떤 남자를 찾았는데 딱 보니 딕 무어였대요. 수염은 자랐지만 말이에요. 수염을 깎아놓고 보니 역시 딕 무어더래요. 그런데 몸은 딕 무어가 맞았지만 정신은 아니었죠. 영혼이 없었어요. 아, 전에도 영혼이란 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말이에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 하숙집 사람들 말로는 한 해 전 어느 날 아침에 보니 그 사람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그 집 문 앞에 쓰러져 있었대요. 머리는 맞아서 거의 문드러졌고요. 아마도 술에 취해서 벌어진 소동으로 그렇게 된 것 같았다고 했어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그 사람을 집에 들여놓으면서도 살아나리란 생각은 안 했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살아났어요. 그런데 정신 상태는 아이나 마찬가지였죠. 자기가 누구인지도 기억 못 하고 지적인 능력이나 사고 능력은 다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대요. 자기 이름이 뭔지도 말을 못 했고 말이라고는 그저 간단한 몇 마디밖엔 못 했다니까요.
‘딕에게’로 시작해서 ‘레슬리’라고 서명이 된 편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주소도 봉투도 없었대요. 그 하숙집에서 죽 딕을 데리고 있었어요. 몇 가지 허드렛일을 배워서 살고 있는데 짐 선장이 그를 찾아낸 거예요. 그래서 집으로 데려왔죠. 난 언제나 괜한 일을 한 거라고 했어요. 물론 짐 선장으로서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만 말이에요. 짐 선장은 딕이 집으
그 사람은 그냥 어린애예요. 가끔씩 다루기 힘들게 굴기도 하지만 거의 멍청하니 헤헤거리기나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잘 살펴야 해요. 안 그러면 어디로 가버릴지 모르거든요. 그게 레슬리가 11년 동안 짊어져야 했던 짐이에요. 그것도 혼자서 말이에요. 애브너 무어 노인은 딕이 집으로 돌아온 후 곧 죽었어요. 거의 파산한 상태로요.
일을 다 정리해보니 레슬리와 딕에게 남은 것은 웨스트 농장뿐이었어요. 레슬리는 농장을 존 워드에서 빌려주었고 그 임대료가 수입의 전부였죠. 여름엔 가끔 하숙을 치기도 해요. 하지만 대부분 방문객들은 호텔과 여름 별장이 있는 항구 저쪽을 더 좋아하죠. 레슬리 집은 수영할 수 있는 바닷가에서 너무 멀거든요.
11년 동안이나 레슬리는 딕을 돌보며 그 사람 곁을 지켰어요. 그런 정신박약자에게 발목이 묶여버린 거예요. 레슬리가 꿈꿔온 소망이나 꿈은 다 뒤로하고요! 앤도 그게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예쁘고 똑똑한 데다 정신력도 자존심도 강한 레슬리 같은 여자가 말이에요. 그건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가엾은 사람, 아, 너무나 안됐어요.”
앤은 말하면서 자기가 가진 행복에 마음이 다 아팠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도 가련한 지경에 있는데 자기만 이렇게 행복해도 된단 말인가?
“바닷가에서 레슬리가 어떻게 대하던가요?”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그리고 앤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앤은 레슬리가 뻣뻣하고 차갑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난 앤이 레슬리의 마음을 녹여 열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너무도 놀라운 일이에요. 레슬리는 앤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 같아요. 앤이 레슬리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기뻐요. 이 집에 젊은 부부가 온다는 소릴 듣고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레슬리에게 친구가 생기길 바랐거든요. 특히나 앤은 요셉을 아는 종족이니 레슬리의 친구가 되어줄 거예요. 그렇죠, 앤?”
“그러고 싶어요. 레슬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앤은 진심이었다.
“아뇨, 반드시 레슬리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해요. 레슬리가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스 코넬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레슬리가 뻣뻣하게 굴어도 마음 쓰지 말아요. 레슬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억해요.
내 생각이지만 딕 무어 같은 인간은 아마 죽지도 않을 거예요. 그 남자가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나 살이 쪘는지 봐야 돼요. 그전엔 그렇게 뚱뚱하진 않았는데.
그저 레슬리의 친구가 되어줘요. 할 수 있어요. 앤은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에요. 앤이라면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레슬리가 자기 집에 오는 걸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아도 신경 쓰지 말아요. 어떤 여자들은 딕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면서 그 사람을 피하고 싫어해요. 레슬리도 그걸 알아요. 그저 레슬리가 가능하면 여기 자주 올 수 있게 해줘요.
레슬리는 어디든 멀리는 못 가요. 딕을 오랫동안 혼자 두고 다닐 수가 없어서요. 혼자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거든요. 아마 집을 홀라당 태워버릴지도 몰라요. 밤이 되어 딕이 잠들면 그때가 레슬리의 유일한 자유 시간이에요. 딕은 항상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자죠. 그래서 앤이 바닷가에서 레슬리와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레슬리는 바다로 자주 나가거든요.”
“레슬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할게요.”
앤은 말했다.
앤은 레슬리가 거위를 몰고 언덕에서 내려오던 모습을 보자마자 끌렸지만 미스 코넬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관심이 그전보다 천 배는 더 커졌다. 레슬리의 아름다움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앤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앤은 레슬리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앤의 친구는 모두 앤처럼 건강하고 정상적이며 활기찬 여자들로, 그네들의 처녀 적 꿈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근심이 있다고 해봐야 그저 모두들 겪는 일상적인 것이었고 부모님을 여의는 슬픔 정도였다. 하지만 레슬리 무어는 그들과는 다른 비극에다 여자로서의 삶에 끔찍한 좌절을 겪은 사람이었다. 앤은 반드시 그 외로운 사람의 영혼으로 파고들어 감옥 문에 묶인 잔인한 족쇄가 아닌 풍요로운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아직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해요, 앤. 레슬리가 교회에 거의 가지 않는다거나 감리교도이거나 불신자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레슬리는 딕을 데리고 교회에 갈 수 없을 뿐이에요. 딕은 예전에도 교회를 다니는 수고는 하지 않았지만요. 그런 건 마음에 두지 말고 레슬리도 마음으로는 아주 신실한 장로교도라는 걸 기억해요, 앤.”




12
레슬리의 방문






쌀쌀한 10월의 어느 날 저녁 레슬리가 꿈의 집을 방문했다. 항구에는 달빛 젖은 안개가 걸렸고, 바다 쪽 협곡에도 안개가 은빛 리본처럼 구불구불 감겨 있었다. 길버트가 문을 열어주자 레슬리의 얼굴에 순간 후회하는 빛이 나타났으나 앤이 길버트를 제치고 재빨리 뛰어나와 레슬리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우리 집에 와줘서 정말 기뻐요. 아까 오후에 퍼지 캔디를 많이 만들어서 먹는 걸 거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던 차였거든요. 저기 벽난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먹자고요. 짐 선장님도 오실 거예요. 오늘은 선장님이 오시는 날이거든요.”
앤이 명랑하게 말했다.
“아니요. 짐 선장님은 우리 집에 계세요.”
레슬리가 말하고 약간 방어조로 덧붙였다.
“난 선장님이 가라고 해서 온 거예요.”
“그럼 짐 선장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난롯가로 안락의자를 잡아당기며 앤이 말했다.
“아, 내가 오고 싶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외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레슬리가 변명했다.
“무어 씨를 집에 두고 외출하는 게 당연히 힘들겠죠.”
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딕 무어 이야기를 모르는 척 회피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앤의 생각은 맞았다.
레슬리에게서 뭔가에 속박되어 있는 것 같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레슬리는 앤이 자기 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터였고, 이런저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자 안도했다.
레슬리는 모자와 겉옷을 벗어 집주인에게 주고 매고그 옆에 있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처녀처럼 조신하게 자리를 잡았다. 레슬리의 옷차림새는 검소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목깃에 자기가 좋아하는 주홍 제라늄 색깔로 포인트를 준 옷이었다. 따뜻한 불빛 속에 레슬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용광로에 녹아내린 황금처럼 반짝였고 레슬리의 푸른 바다 같은 눈빛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 더욱 매혹적이었다. 그 순간, 그 작은 꿈의 집에서 레슬리는 다시 처녀가 되었다.
쓰라린 과거를 잊은 처녀. 그 작은 집에 살아 숨 쉬는 풍성한 사랑의 분위기가 온통 레슬리를 둘러쌌다. 레슬리는 자기 나이 또래의 행복하고 건강한 젊은 부부가 보여주는 마법 같은 우정에 둘러싸여 그동안 자신을 가두었던 벽을 무너뜨렸다.
미스 코넬리아와 짐 선장은 레슬리의 이런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앤은 지금 이 사람이 지난번 바닷가에서 만난 차갑고 냉담하기만 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영혼이 굶주렸던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이 생기 넘치는 사람이. 양쪽 창문 사이에 놓인 책장을 보는 레슬리의 눈은 또 얼마나 빛이 나던지!
“우린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하지만 거기 있는 책은 모두 우리 친구예요. 우린 수년 동안에 걸쳐 여기저기서 책을 모았죠. 우린 책을 먼저 읽어보고 사요. 요셉을 아는 종족에 속하는 책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사려고요.”
앤이 말했다.
레슬리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지난 세월 그 작은 집에 메아리쳤던 모든 환희와 닮은 듯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내게도 아버지가 보던 책이 좀 있어요. 많이는 아니고. 그 책들을 너무 여러 번 읽어서 거의 외워버렸어요. 책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요. 글렌에 순회도서관이 있지만 파커 씨 밑에서 일하는 도서 선정 위원회는 어떤 책이 요셉의 종족이 보는 책인지도 모른 채 책을 마구 고르는 것 같아요. 아마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겠죠. 내 마음에 드는 책은 거의 찾을 수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말아요.”
레슬리는 말했다.
“여기에 레슬리가 찾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앤이 말했다.
“무슨 책이든지 빌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빌려 가세요.”
“내 앞에 풍성한 성찬을 차려놓았군요.”

레슬리가 즐겁게 말했다. 시계가 10시를 알리자 레슬리는 일어서기 싫다는 듯 주춤주춤 일어섰다.
“가봐야 해요. 이렇게 늦은 줄 몰랐어요. 한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고 짐 선장님이 그러던데 나도 두 시간이나 있었네요. 아,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레슬리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주 오세요.”
앤과 길버트가 말했다.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을 배경으로 둘이 함께 일어섰다. 레슬리는 그들을 보았다. 둘은 언제나 레슬리가 그리워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워할 젊고 희망에 찬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레슬리의 얼굴과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처녀는 사라졌고 앤의 초대에 차갑게 응대하며 애처로울 정도로 황급히 도망가던 슬픔에 젖은 기만당한 여자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앤은 레슬리가 싸늘하고 안개 자욱한 밤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지켜봤다. 그리고 천천히 벽난로 불빛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사람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아, 길버트? 난 레슬리의 머리카락에 반해버렸어. 미스 코넬리아가 그러는데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닿는대. 루비 길리스의 머리카락도 아름다웠었지. 하지만 레슬리의 머리카락은 살아 있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다 살아 있는 황금 실 같아.”
“정말 아름다운 여자야.”
길버트도 동의했다. 너무 진정으로 들려 앤은 순간 길버트가 조금은 덜 열정적으로 말했으면 하고 바랐다.
“길버트, 내 머리카락도 레슬리 머리 같기를 원해?”

앤이 동경하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난 당신 머리가 다른 색이라면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야.”
길버트가 말하고는 한두 가지 납득이 갈 만한 이유까지 들었다.
“당신 머리가 금발이나 다른 색깔이었다면 당신은 앤이 아니었을 거야. 당신에겐 오직…….”
“빨간 머리가 어울린다고.”
울적한 만족감에 앤이 말했다.
“그래, 빨간 머리, 그 우윳빛 살결에 잿빛이 섞인 초록빛으로 빛나는 눈에 따뜻함을 더해주는 빨간 머리 말이야. 황금빛은 나의 여왕, 내 마음, 삶, 이 집의 여왕인 앤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
“그렇다면 레슬리의 금발을 칭찬해도 좋아.”
앤은 아량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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