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21~22

나단비 | 2024.04.05 20:49:41 댓글: 0 조회: 7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899
21
장벽이 허물어지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며 갑자기 레슬리가 말했다.
“앤, 여기 다시 이렇게 앉아서 같이 일하고, 이야기하고, 또 그냥 조용히 앉아 있기도 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아요.”
둘은 집 뜰을 지나 흐르는 개울 둑 파란 잔디에 앉아 있었다. 시냇물은 낮은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흐르고 자작나무가 둘 위로 얼룩덜룩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산책로를 따라 장미꽃은 활짝 피었다. 해는 짧아졌고 대기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음악소리로 가득했다.
앤의 집 뒤편 전나무 숲에서도 노랫소리는 들려왔고, 모래톱에서도 또 다른 음악소리가, 그리고 멀리 하얀 꼬마 숙녀가 잠들어 있는 교회 종소리도 들려왔다. 슬픈 생각을 몰고 오긴 해도 앤은 그 종소리를 사랑했다.
앤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레슬리를 쳐다봤다. 바느질거리도 내려놓고 이야기하는 레슬리의 태도는 평소처럼 뭔가에 속박된 느낌이 없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앤이 몹시 아팠던 그 끔찍한 날 밤에 말이죠.”

레슬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다시는 같이 이야기하고 산책하고 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날 밤에 난 앤과의 우정 그리고 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어요. 또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짐승 같았는지도.”
“레슬리! 레슬리! 난 누구라도 내 친구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사실이에요. 난 그렇게 끔찍한 짐승이 맞아요. 앤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앤, 내가 이 말을 하면 아마 날 경멸할지도 모르지만 난 꼭 이 말을 해야 해요. 앤, 지난 겨우내 그리고 봄 동안 난 앤을 미워했어요.”
“알고 있었어요.”
앤이 차분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요. 레슬리 눈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그런데도 날 좋아하고 내 친구가 되어줬군요.”
“그저 가끔씩 그런 모습이 보였어요, 레슬리. 보통 때는 레슬리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하지만 그 꺼림칙한 느낌은 언제나 남아 있었죠. 내 가슴속에서 나를 망쳐가면서 말이에요. 그걸 억제할 수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 감정이 치고 올라와 날 사로잡은 때도 있었어요. 난 질투가 나서 앤을 미워했어요. 아, 죽을 정도로 질투한 때도 있었어요. 작고 아름다운 집이 있고 사랑, 행복 거기다 멋진 꿈까지 난 아무리 원해도 결코 가져본 적이 없고, 또 가질 수도 없는 것들을 앤은 모두 가졌잖아요. 난 절대로 가질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말이에요.
그게 날 아프게 했어요. 내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만 있었어도 난 앤을 질투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희망이, 내겐 희망이 없었고 그게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반항적이 됐고 또 그 때문에 상처받기도 했죠. 그래서 때때로 앤을 미워했어요. 아, 정말 너무도 부끄러워요. 너무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난 그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죠.
그날 밤, 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날, 난 내가 그런 사악한 마음을 품어서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앤, 난 앤을 무척 사랑해요.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딕의 늙은 개를 빼놓고는 난 그 무엇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사랑할 것이 없다는 건 참 비참한 일이에요. 삶이 너무 공허해요. 공허함보다 더 끔찍한 건 없어요.
난 앤을 무척 사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끔찍한 질투가 그 사랑을 망쳐놨어요.”
레슬리는 격정적인 감정에 덜덜 떨고 말도 거의 조리가 서지 않았다.
“그만 해요, 레슬리. 제발 하지 말아요. 난 이해해요.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앤이 애원했다.
“아니요, 난 해야 돼요. 꼭 그래야 해요. 앤이 생명을 되찾았을 때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맹세했어요. 내가 얼마나 비열했는지 말하지 않고서는 앤과 우정을 나눌 수도 없고 앤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레슬리.”

“아, 그렇다면 정말 기뻐요, 앤. 하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난 지금 모든 걸 고백하고 싶어요. 내가 앤을 처음 본 때 기억 못 하죠? 내가 알기로는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날 저녁이 아니에요.”
여전히 일에 찌든 갈색 손을 떨면서 레슬리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맞아요. 길버트와 내가 이 집에 도착한 날이었죠. 레슬리는 거위를 몰아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어요. 잊을 수가 없죠. 레슬리는 너무 아름다웠으니까요. 그 후 몇 주 동안 대체 그 아름다운 사람이 누군지 무척 궁금했어요.”
“앤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미 누군지 알았었어요. 새로 오신 의사 선생님과 그 부인이 미스 러셀의 작은 집으로 이사와 살 거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난 그 순간부터 앤을 미워했어요.”
“그래요. 난 레슬리 눈에서 적개심을 읽었어요. 하지만 믿을 수 없었죠. 내가 잘못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앤은 참 행복해 보였거든요. 아, 이젠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짐승 같은 사람인지 알았죠? 난 그저 앤이 행복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복이 내게서 뭘 빼앗아가는 것도 아닌데 앤을 미워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앤을 만나러 가지 않은 거예요. 그래야 한다는 걸, 포 윈즈의 관습상 그러는 게 예의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내 집 창문으로 앤을 지켜보고는 했지요.
저녁이면 남편과 뜰을 산책하거나 남편을 마중하러 미루나무 길을 뛰어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 모습에도 난 상처를 받았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보고 싶기도 했어요.
내가 그렇게 비참하지만 않다면, 난 앤을 좋아할 것 같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내 나이 또래의 친구를 가져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친구요. 그 바닷가에서의 밤 기억하죠? 앤은 내가 자기를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했었죠. 하지만 앤이야말로 내가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니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어요, 레슬리. 어떤 날은 가까이 다가오고 그다음 날은 날 다시 밀어내고 그런 거요.”
“그날 저녁때는 너무나 불행한 기분에 빠져 있었어요. 정말 힘든 날이었거든요. 보통 때는 딕이 온순하게 굴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은데 그날은 유독 딕을 다루기가 힘들었어요.
가끔씩 그런 날이 있어요. 그날 그렇게 너무 힘든 하루를 보내고 딕이 잠들자마자 바닷가로 도망갔어요. 거기가 내 유일한 피난처거든요. 거기 앉아 불쌍한 내 아버지가 삶을 마감한 것처럼 언젠간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아, 내 마음은 온통 어두운 생각으로 가득 찼었어요! 그런데 그때 바닷길을 따라 앤이 신이 난 아이처럼 춤을 추며 다가왔죠. 그 이후로도 그랬지만, 그때는 어느 때보다 정말 앤이 미웠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앤과 친해지고 싶었죠. 미워하는 마음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엇갈렸어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하니 너무도 부끄러워서 난 엉엉 울어버렸어요.
앤네 집에 올 때도 언제나 그랬어요. 어떤 때는 앤네 집에서 앤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되어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리기도 했거든요.
앤과 앤 집의 모든 것들이 내게 상처로 다가올 때가 있었어요. 나는 가질 수 없는 작고 예쁜 것들을 앤은 많이 가졌잖아요.
정말 말도 안 되죠. 특히 앤 집에 있는 도자기 개 인형을 보면 왠지 심술이 났어요. 고그와 매고그를 잡아 그 멋진 까만 코를 서로 부딪쳐 깨뜨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아, 웃는군요, 앤. 하지만 나한테는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었어요. 앤이랑 길버트 의사를 보고 또 책이랑 꽃 그리고 앤네 살림살이들, 앤과 길버트 의사가 나누는 농담, 서로 바라보며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사랑, 앤이 의식하지 못할 때조차 흘러넘치는 사랑…… 그리고 난 혼자 집으로 가야 했죠.
내가 집에 가면…… 아, 앤, 난 내가 천성적으로 남을 시기하고 질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난 어렸을 때도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나만이 갖지 못한 것들이 많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그것 때문에 친구들을 싫어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 추악하게 변해버린 것 같아요.”
“레슬리, 제발 자신을 그렇게 비난하지 말아요. 레슬리는 추악하지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레슬리를 조금 뒤틀리게 한 것뿐이에요. 그래서 원래 가진 아름답고 품위 있는 성품이 좀 거칠어진 것뿐이라고요. 이제 그런 심정을 모두 털어놓으면 나쁜 생각을 모두 없앨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레슬리가 이런 말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하지만 더 이상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요.”
“그래요, 안 할게요. 하지만 난 그저 앤이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기를 바랄게요. 봄이 오면 이루고 싶은 앤의 꿈들을 내게 말했을 때가 최악이었어요. 앤, 난 결코 그때 내가 한 행동을 용서할 수 없어요. 난 눈물로 참회했죠. 그리고 그 아기 옷을 만들 땐 좋은 생각만 했어요. 하지만 내가 어떤 옷을 만들 건 간에 결국 그 옷은 수의가 될 거라는 걸 아마도 내가 알고 있었나 봐요.”
“자, 레슬리, 그건 너무 모질고 음울해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치워버려요. 레슬리가 그 작은 아기 옷을 만들어줬을 때 난 정말 기뻤어요. 조이스에게 입혀 보낸 레슬리가 만들어준 그 옷을 난 레슬리의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앤, 앤, 그거 알아요? 난 이제부터 언제나 앤을 사랑할 거예요. 다시는 앤에게 그런 무서운 생각 따윈 품지 않을 거예요. 어찌 되었든 이렇게 다 털어놓고 나니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진 느낌이에요. 참 이상하죠. 정말 너무도 생생하고 쓰라렸거든요. 어두운 방문을 열고 그 안에 있다고 믿었던 끔찍한 괴물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빛이 그 괴물에 비춰지자 그게 실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그림자일 뿐이었다는 게 드러난 것 같아요. 빛이 들어오면 사라지는 그림자. 다시는 그 그림자가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요. 우린 이제 진짜 친구예요, 레슬리. 난 정말 기뻐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앤이 아기를 잃었을 때 나는 정말 애통했어요. 내 손을 끊어서 그 아기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정말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앤의 슬픔 때문에 우리는 더 가까워졌어요. 앤의 완벽한 행복은 이젠 더 이상 장벽이 아니에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앤의 행복이 더 이상은 완벽하지 않은 게 기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저 그 사건 이후 우리 사이를 갈라놓던 깊은 골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해하고말고요, 레슬리. 이제 우리 지난 일은 떠나보내고 불쾌했던 감정도 다 잊어버려요. 모든 것이 달라질 거예요. 이제 우린 둘 다 요셉의 종족이에요. 레슬리는 잘해왔어요. 지금까지 아주 잘해왔다고요. 앞으로 레슬리의 삶에도 분명 아름답고 멋진 일이 있을 거라고 난 믿어요.”
레슬리는 도리질 쳤다.
“아니요. 희망은 없어요. 딕은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 아, 앤, 그러면 더 나빠질 뿐이에요. 지금보다 더요. 이건 앤처럼 행복한 신부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내가 어떻게 딕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말해줬나요?”
레슬리는 무겁게 말했다.
“네.” 
“다행이군요. 난 그 일도 앤이 알고 있었으면 했어요. 그걸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앤, 난 열두 살 이후로는 삶이 그저 고통스럽기만 했어요. 그전까지 어린 시절은 참 즐겁고 행복했지만요. 우리 가족은 가난했지만 행복했어요. 아버지는 정말 굉장한 분이었어요. 똑똑하고 정답고 이해심도 많은 분이었죠. 내 기억에 아버지랑 난 친구처럼 지냈어요. 그리고 엄마도 참 다정한 분이었죠. 엄마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난 엄마를 닮았지만 엄마만큼 아름답지는 않아요.”
“미스 코넬리아는 레슬리가 훨씬 아름답다고 하던데요.”
“잘못 아는 거예요. 아니면 편견을 갖고 보든가요. 엄마는 고된 노동으로 몸이 쪼그라들고 굽었으니 아마 몸매는 내가 엄마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얼굴은 아니에요. 엄마의 얼굴은 꼭 천사 같았어요. 난 예배를 드릴 때도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어요. 아버지랑 케네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숭배했죠.”
앤은 레슬리의 지금 이야기와는 좀 다른 미스 코넬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레슬리가 핏줄에 관한 사랑 때문에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일까? 어찌 되었건 로즈 웨스트가 딸을 딕 무어와 결혼시킨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케네스는 내 동생이죠. 아, 내가 얼마나 그 아이를 사랑했는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그 아이는 너무도 잔혹하게 죽었어요. 이 이야기도 알아요?”
레슬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네.”
“앤, 난 마차 바퀴가 그 아이를 치고 지나갔을 때 케네스의 조그만 얼굴을 봤어요. 떨어졌을 때 등이 먼저 땅에 닿았거든요. 앤, 앤, 지금도 그 얼굴이 보여요. 그 얼굴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 순간이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오, 하느님!”
“레슬리,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그 이야기 알아요. 그러니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공연히 레슬리의 영혼이 패여 아프기만 할 거예요.”
잠깐 안간힘을 쓰고 난 후, 레슬리는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다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기분까지 우울해져 갔어요. 나중에는 정신까지도 이상해졌어요. 그것도 다 들었어요?”
“네.”

“그 후 난 오로지 엄마만을 위해 살았어요. 그래도 나에겐 야망이 있었죠. 가르치는 일을 해서 대학에 갈 학비를 벌려고 했어요. 정상에 오르려고 했죠.
아, 이것도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소용없는 일이에요.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거예요. 난 사랑하는 엄마의 가슴이 무너지는 걸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평생을 노예처럼 일만 하셨는데 그나마 집에서 쫓겨날 지경에 이르다니. 물론 둘이 먹고살 정도의 돈은 내가 벌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집을 떠나기 싫어했어요. 엄마가 새색시가 되어 들어온 집인데…… 엄마는 정말 아버지를 사랑했고 모든 추억이 다 그 집에 있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해를 내가 행복하게 해드렸다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진 않아요. 내가 처음 딕과 결혼했을 때는 딕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별 관심은 없었지만 학교 친구에게 느끼는 친한 감정은 갖고 있었죠. 그 사람이 술을 마신다는 건 알았지만 어촌 마을에 사귀던 여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요. 들었다면 아무리 엄마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일 이후 난 딕을 미워하게 됐어요. 하지만 엄마는 그 일을 모르셨고 얼마 후 돌아가셨지요.
난 혼자가 됐어요. 겨우 열일곱 살이었는데 혼자가 된 거예요. 딕은 네 자매 호를 타고 가버렸어요. 난 그 사람이 집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죠. 그 사람은 천성적으로 바다를 좋아해 항상 바다를 그리워했어요. 나에게는 다른 희망도 없었죠. 그런데 앤도 알겠지만 짐 선장님이 딕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렇게 된 이야기예요. 앤, 이젠 날 알겠어요? 내 최악의 것들은 전부 털어놓았어요. 이제 모든 장벽은 무너졌어요. 지금도 나랑 친구로 지내고 싶은가요, 앤?”

앤이 자작나무 위를 쳐다봤다. 하얀 종이 각등 같은 반달이 노을 진 바다를 흘러가고 있었다. 앤의 얼굴은 아주 다정했다.
“난 레슬리의 친구이고, 레슬리는 내 친구예요. 언제까지나. 이런 친구는 처음이죠. 내게는 좋은 친구들이 많아요. 하지만 레슬리에게는 그 친구들이 갖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어요. 레슬리의 그 풍부한 감성을 나에게도 나누어주어요. 나도 말괄량이 같았던 처녀 시절보다는 지금이 레슬리에게 줄 것이 더 많을 거예요. 우리 둘 다 여자이고, 친구예요. 영원히.”
앤이 말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회색 눈과 푸른 눈 가득히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22
레슬리가 하숙생을 들이기로 하다






길버트는 여름까지는 수잔이 집에 머물며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앤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다.
“우리 집에서 둘만의 달콤한 삶을 살고 싶어, 길버트.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런 기분이 좀 깨질 것 같아. 수잔은 좋은 사람이지만 우리 식구가 아니잖아. 이젠 조금씩 일을 해도 괜찮을 거야.”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지. 구두장이 아내는 맨발로 다니고, 의사 아내는 젊어서 죽는다는 말이 있어. 내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 늦봄까지는 수잔을 집에 두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해. 쏙 들어간 뺨도 원상복구시키고 말이야.”
길버트가 말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사모님.”
수잔이 갑자기 들어오며 말했다.
“부엌일은 걱정하지 말고 푹 쉬시기나 하세요. 수잔이 책임져요. 주인이 직접 짖으려면 뭣 때문에 개를 키우겠어요. 이제 매일 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줄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프지도 않은 여자가 침실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고,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남자만큼이나 나쁜 짓이라고 미스 코넬리아가 그랬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앤이 웃었다.
“아, 코넬리아!”
수잔의 말투는 그야말로 경멸조였다.
“코넬리아 브라이언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다니요. 난 사모님이 그 정도로 분별력 없는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아무리 노처녀라고는 해도 미스 코넬리아가 왜 그렇게 남자들을 깎아내리고 다녀야 하는지 난 이해할 수 없어요. 나도 노처녀지만 내가 남자들을 욕하고 다닌다는 소리 못 들었지요? 난 남자가 좋아요. 할 수만 있었다면 결혼도 했을 거예요. 내게 결혼하자고 한 남자가 없었다는 게 참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미인은 아니지만 결혼한 여자들만큼은 생겼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난 한 번도 연인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대체 이유가 뭘까요?”
“아마 미리 결정된 운명이겠죠.”
세상일에 통달이나 한 듯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수잔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했어요. 그 말이 상당히 위안이 되네요. 주님이 그렇게 정하신 거라면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의심스러운 마음이 슬며시 기어드는 때도 있죠. 아무래도 악마가 조종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고요. 그렇다면 내가 포기할 수 없죠. 하지만 아직도 결혼할 기회는 있을 거예요. 우리 고모가 늘 읊조리던 시구를 생각할 때가 잦아요.

들어봐요.

‘너무나도 못난 거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못난 거위에게도 머지않아 진실한 짝이 나타나리니.’

여자는 땅에 묻힐 때까지 결혼할지 안 할지 모르는 거예요. 자, 그러면 난 이제 체리 파이를 만들어야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걸 좋아하시더군요. 난 음식을 음미할 줄 아는 남자를 위해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그날 오후 미스 코넬리아가 들렀는데 좀 흥분해 있었다.
“난 세상이나 악마 같은 건 개의치 않는데 혈육까지는 그러질 못하겠어요. 앤은 언제 보아도 참 침착하군요. 이 냄새는 체리 파이예요? 그러면 차 한 잔 줘요. 올여름엔 체리 파이를 전혀 맛보지 못했어요. 글렌에 사는 길먼네 악동 녀석들이 내 체리를 몽땅 훔쳐가 버렸거든요.”
“이런, 코넬리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엄마도 없는 불쌍한 길먼네 아이들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버지가 그다지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 아이들까지 도둑으로 몰아붙이면 안 되잖아. 체리를 물고 간 건 울새일 거라고. 올해는 특히나 울새가 극성이더구먼.”
거실 한쪽 구석에서 해양 소설을 읽던 짐 선장이 항의하듯 끼어들었다.
“울새요! 하! 다리 둘 달린 울새라구요. 정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말했다.
“음, 포 윈즈에 사는 울새는 대부분 다리가 둘이지.”
짐 선장이 심각하게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가 잠시 짐 선장을 노려봤다. 그러더니 다시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오랫동안 마구 웃어댔다.
“그래요, 드디어 날 공격할 거리를 찾아냈군요! 짐 보이드, 좋아요. 인정하죠. 저 좋아하는 모습 좀 봐요, 앤. 꼭 체셔 고양이10)처럼 싱글거리네요. 울새 다리라, 그 햇볕에 그을려 시꺼멓고 기다란 다리가, 맨발에다 너덜너덜한 바지를 입고 있던 그 다리가 울새 다리였군요. 내가 지난주 새벽녘에 우리 체리 나무 위에서 본 다리요. 그렇다면 내가 길먼네 아이들에게 용서를 빌어야겠어요. 내가 쫓아가 보니 어느새 사라졌더군요. 어쩌면 그렇게 빨리 사라졌나 싶었는데 짐 선장님이 날 일깨워주시네. 이제 보니 날아간 거였어요.”
짐 선장은 껄껄 웃더니, 더 있다가 저녁 식사도 하고 체리 파이도 좀 들고 가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가버렸다.
“레슬리에게 하숙 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러 가던 길이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을 시작했다.
“2년 전에 우리 집에서 잠시 하숙을 했던 토론토에 사는 달리 부인에게 편지가 왔는데 여름 동안 자기 친구를 좀 머물게 해달라고 하는군요. 오언 포드라는 신문 기자래요. 이 집을 지었던 선생의 손자예요. 존 셀윈의 첫째 딸이 포드라는 이름을 가진 온타리오 남자하고 결혼했는데 그 아들이죠. 자기 외조부모가 살던 옛집을 보고 싶어 한대요. 봄에 장티푸스에 걸렸었는데 완전히 낫지 않았다나 봐요. 그래서 의사가 바닷가에 가서 지내다 오라고 했대요. 호텔은 싫고 그저 조용한 집에서 지냈으면 한다는군요. 난 8월엔 어딜 다녀와야 해요. 킹스포트에서 열리는 W.F.M.S 회의에 대표로 나가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을 받을 수가 없어요. 레슬리도 그 사람을 받아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른 곳은 없어요. 레슬리가 안 받아주면 뭐 항구 저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레슬리네 갔다가 다시 들러서 체리 파이 좀 들고 가세요. 레슬리랑 딕도 원하면 같이 오라 하고요. 킹스포트에 가신다고요? 좋으시겠어요. 가시면 재밌게 지내다 오시고 거기 사는 제 친구 조너스 블레이크 부인에게 편지도 좀 전해주세요.”
앤이 말했다.
“토머스 홀트 부인에게 같이 가자고 했어요. 홀트 부인도 잠시 휴식을 가질 때가 됐거든요. 아, 정말이에요! 여태까지 죽어라 일만 했다고요. 톰 홀트가 코바늘 뜨개질은 잘해도 가족을 먹여 살리는 재주는 영 없어요. 무슨 일이든 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질못해요. 그런데 낚시질 갈 땐 언제나 일찍 일어나더군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죠, 뭐.”
미스 코넬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앤은 미소 지었다. 앤은 미스 코넬리아가 포 윈즈 남자들을 평할 땐 그 말의 상당 부분을 에누리해서 들어야 한다는 걸 이제 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노예나 희생양으로 삼는 전혀 가망 없는 난봉꾼에 쓸모없는 건달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이 사람, 톰 홀트만 해도 자상한 남편이자 사랑받는 아버지 그리고 훌륭한 이웃으로 앤은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좀 게으른 경향이 없지 않아 있고, 농장 일보다는 고기잡이를 더 좋아하며, 뜨개질이나 자수 같은 일을 좋아하는 좀 별난 취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남에게 해가 되는 일도 아니고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도 미스 코넬리아를 빼놓고는 아무도 없었다.
톰의 아내는 바깥 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력적인 활동가’였다. 그리고 그 가족은 농장 수입으로 안락한 생활을 했다. 엄마의 원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건장한 아들과 딸들도 그런대로 자기 몫을 잘하며 잘들 산다. 글렌에서 홀트 집안보다 더 행복한 가정은 없었다.
미스 코넬리아는 레슬리의 집에 올라갔다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레슬리가 그 사람을 받겠대요. 아주 잘됐다고 하던걸요. 이번 가을에 지붕을 새로 이으려면 돈이 필요한데 어떻게 돈을 마련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하면서요. 존 셀윈의 손자가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짐 선장이 더 관심을 가질 거예요.
레슬리가 체리 파이를 먹으러 오고 싶지만 칠면조를 찾으러 가야 해서 올 수가 없다네요. 칠면조들이 길을 잃고 사라졌대요. 하지만 파이를 남겨두면 나중에 칠면조를 다 찾고 나서 고양이처럼 날쌔게 달려와 가져가겠대요. 레슬리가 웃으며 농담을 하고 내가 그 이야기를 앤에게 전하니 내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네요. 요즘 레슬리가 많이 변했어요. 요샌 아주 잘 웃고 농담도 잘해요. 듣자니 여기 자주 온다고 하더군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매일 와요. 아니면 제가 찾아가죠. 레슬리가 없다면 뭘 하며 지내야 할지 모를 정도예요. 특히나 지금처럼 길버트가 바쁠 때는 더 그렇죠. 새벽 시간같이 아주 늦은 시간이 아니면 집에 거의 없어요. 정말 뼛골이 빠질 정도로 열심히 일만 한다니까요. 요즘은 항구 저편 사람들도 길버트를 많이 찾아요.”

앤이 말했다.
“자기네 의사에게 만족하는 게 나을 텐데. 하긴 뭐 그 의사가 감리교도이니 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지만 말이에요. 블라이드 의사가 앨론비 부인을 살리고 난 후 사람들은 블라이드 선생님을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의사라 생각하는가 봐요.
데이비드 의사가 질투 좀 하겠어요. 남자들이 원래 좀 그렇잖아요. 그분은 블라이드 의사가 새로 유행하는 시술을 너무 신봉한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나 같으면 이렇게 말해주겠어요. ‘바로 그 새로운 시술이 로다 앨론비를 살린걸요. 만약에 선생님이 엘론비 부인을 치료했더라면 그 부인은 아마 죽었을 거고, 묘비에 하느님이 너무 사랑해서 데려갔다는 글을 새겼겠죠.’ 아, 이렇게 속에 있는 말을 직접 데이비드 의사에게 해주고 싶어요!
데이비드 의사는 아주 오랫동안 글렌을 쥐락펴락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죠. 의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블라이드 선생님이 딕 무어의 목에 난 종기를 좀 봐줬으면 해요. 이젠 레슬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대체 종기 같은 건 왜 나는지 몰라요. 그거 없어도 문제라면 이미 넘치게 많은데.”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있잖아요, 딕이 나를 무척 좋아해요. 꼭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내가 아는 척이라도 해주면 아이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앤이 말했다.
“그러는 걸 보면 소름 끼치지 않아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도리어 딕 무어가 좋아지던데요. 그 가여운 사람은 어딘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어요.”
“그 인간이 심술이라도 부리는 날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날걸요. 아, 정말이에요. 하지만 앤, 앤이 딕을 개의치 않는다니 난 참 기뻐요. 그러면 레슬리에게 더없이 좋죠. 하숙생이 오면 레슬리가 할 일이 더 많아질 거예요. 그 사람이 점잖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앤은 아마 좋아할 것 같네요. 작가래요.”
“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상해요. 작가 둘이 만나면 서로 꼭 마음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말이에요. 두 대장장이가 만난 경우에는 둘이서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강하게 서로 이끌릴 거라는 생각을 안 하잖아요.”
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앤은 오언 포드가 온다는 소식에 즐거워하며 그가 오기를 고대했다. 그 사람이 젊고 성격도 좋다면 포 윈즈에 즐거운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 될 테니 말이다. 요셉을 아는 종족에게는 앤의 작은 집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10.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히죽히죽 웃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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