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25~26

나단비 | 2024.04.11 18:40:33 댓글: 2 조회: 97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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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과 다이는 8월 마지막 주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오늘 밤이 되기 전에 뭐든지 다 알 수 있게 되나요, 엄마?”
다이가 첫날 아침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제 때는 9월 초이고, 앤과 수잔은 두 아이가 아침마다 학교로 향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학교에 다니는 일을 무슨 모험이나 되는 양 여기는 천진난만한 어여쁜 두 꼬마 소녀가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이나 흐뭇하고 즐거웠다. 가방에는 선생님께 드릴 사과 한 개를 늘 넣어갔고, 분홍색과 파란색 주름 장식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둘은 쌍둥이라고는 하지만 조금도 닮지 않아서 옷도 똑같이 입히지 않았다. 머리가 빨간색인 다이는 분홍 옷을 입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잉글사이드’ 쌍둥이 중 더 예쁜 쪽인 낸은 분홍색이 아주 잘 어울렸다. 눈과 머리는 갈색이고 살결도 아름다워 일곱 살인데도 자기가 예쁘다는 걸 스스로도 의식하고 있었다. 낸에게는 일종의 스타 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낸은 자랑스럽게 머리를 쳐들고, 턱도 거만하게 들어 올리고 다녀서 좀 건방진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저 애는 제 엄마의 버릇이나 몸짓을 그대로 흉내 낼 거예요. 벌써부터 제 엄마의 거만하고 우아한 척하는 폼이 아주 비슷하잖아요.”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말했다.
쌍둥이의 성격은 겉모습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다이는 생김새가 엄마를 닮았지만 성격이나 성향은 아빠를 더 많이 닮았다. 아빠의 현실적인 경향이나 분명하고 옳은 상식을 따르는 성품 그리고 빛나는 유머감각이 엿보였다. 반면에 낸은 엄마의 상상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이미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흥미롭게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예를 들면 낸은 여름부터 하느님과 협상을 벌이면서 무척 신나게 지냈다. ‘하느님이 나에게 어떠어떠한 일을 해주면 나도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 하는 식의 거래였다.
‘잉글사이드’ 아이들은 모두 ‘나는 이제 꿈나라로 갑니다.’로 시작하는 아기 기도문으로 인생을 시작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말을 아무것이나 선택해 자기만의 기도문을 만들어 잠자리 기도를 올렸다.
무엇이 낸에게 착한 행동을 하고 하느님을 잘 믿기로 약속하면 하느님이 자기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생각을 하게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주일 학교의 젊고 예쁜 여선생이 이 일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도 이런저런 일을 들어주시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자주 했으니까.
이런 생각을 거꾸로 뒤집어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면 하느님도 내가 원하는 일을 들어줄 거라는 결론을 내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낸이 지난봄에 하느님과 처음으로 한 ‘거래’가 이전의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멋지게 성공해서 낸은 여름 내내 이 거래를 계속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다이도 몰랐다. 낸은 자기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기만 하면 아무 곳에서나 기도를 했다. 다이는 그런 낸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비난했다.
“하느님을 여러 가지 다른 일들과 뒤범벅으로 만들어선 안 돼. 너는 하느님을 너무 흔한 것으로 만들고 있어.”
이 말을 들은 앤이 다이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다이.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셔.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면서 힘과 용기를 주시는 친구 같은 분이야. 낸이 자기가 원한다면 언제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란다.”
하지만 자기 딸이 가진 신앙의 참된 모습을 앤이 알았다면 아마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5월의 어느 날 밤, 낸은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느님, 다음 주 에이미 테일러네 파티에서 내 이가 나오게 해주신다면 수잔이 피마자기름을 줄 때마다 조금도 소란 피우지 않고 먹겠어요.”
바로 그 다음 날 아주 오랫동안 낸의 귀여운 입에 보기 흉한 구멍을 만들고 있던 틈새에서 이가 쏙 나오더니 파티 날이 되기 전까지 다 자랐다. 이보다 더 확실한 징조가 어디 있겠는가? 낸은 자기가 한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고, 수잔은 그 이후로 피마자기름을 줄 때마다 순하게 받아먹는 낸에게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낸은 전혀 얼굴을 찌푸리거나 저항하지 않고 받아먹긴 했지만 석 달 동안만 그렇게 하겠다는 등의 시간을 정해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언제나 자기 소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때 단추 모으기가 마치 홍역 퍼지듯이 글렌의 어린 여자아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어서 낸은 끈에 끼우는 특별한 단추를 주시면 수잔이 이 빠진 접시에 밥을 주어도 화내지 않겠다고 기도했더니 다음 날 그 단추가 나타났다. 수잔이 다락방에 둔 헌옷에 달려 있는 걸 찾아내 주었다. 아름다운 빨간 단추에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도 박혀 있었다. 그저 낸이 그것이 다이아몬드라고 믿은 것이겠지만. 그 아름다운 단추로 낸은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그날 밤 다이가 이 빠진 접시는 싫다고 말했을 때 낸은 마치 천사나 된 듯 이렇게 말했다.
“그 접시를 내게 줘, 아줌마. 난 언제나 이 접시가 좋더라.”
그 말을 하면서 낸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착한 아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낸은 주일 학교 소풍을 가는 날에도 아주 좋은 날씨를 얻었다. 그 전날 밤에 모두들 내일 비가 올 것 같다고 했다. 낸은 하느님이 날씨를 좋게만 해준다면 아침마다 누가 이를 닦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이를 잘 닦겠다고 약속했다. 손톱을 아주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겠다는 조건을 걸고는 잃어버렸던 반지를 찾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갖고 싶어 했던 월터의 날아다니는 천사 그림을 월터에게 건네받은 이후로는 불평하지 않고 고기에 붙은 기름도 다 먹었다.
그러나 다 낡아서 더덕더덕 기운 장난감 곰을 다시 한 번 어린 새 곰으로 만들어주면 자기 서랍장을 언제나 단정하게 정리해놓겠다고 기도했을 때에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낸은 아침마다 애타게 기적을 기다리며 하느님이 빨리 자기 기도를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곰은 다시 어린 새 곰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낸은 장난감 곰을 어려지게 만드는 건 포기했다. 곰이 늙긴 했어도 좋은 곰이었고 옷장 서랍을 깨끗이 정돈한다는 것도 너무 귀찮은 일일 테니까. 얼마 안 있어 아빠가 낸에게 새 장난감 곰을 사다주었을 때 낸은 장난감 곰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조그만 양심에 여러 가지가 걸리긴 했지만, 옷장 서랍 정리하는 일로 힘들일 필요는 없다고 결정하고 말았다.
낸의 신앙심이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는 도자기 고양이의 없어졌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눈이 좀 비뚤어져 사팔뜨기 눈이 되어 있긴 했지만. 수잔이 청소하다가 눈을 발견해 풀로 다시 붙여놓은 것이지만 낸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약속한 대로 손과 발을 땅에 짚고 헛간 둘레를 열네 번 성실하게 돌았다.
손과 발을 땅에 짚고 헛간 둘레를 열네 번이나 도는 일이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인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실 낸은 그 일이 무척 하기 싫었다. ‘무지개 골짜기’에서 놀 때면 언제나 오빠들은 자기와 다이에게 동물이 되라고 했는데 그것도 무척 싫었다. 하지만 낸의 어린 마음에 분명치는 않지만 하기 싫고 괴로운 일을 하면 기쁨을 주기도 빼앗기도 하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낸은 이번 여름 몇 가지 아주 이상한 묘기를 생각해내 “세상에, 저 아이들은 저런 생각을 도대체 어디서 해내는 걸까.” 하고 수잔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사모님, 왜 낸이 매일 마루를 걷지 않고 거실을 두 번씩 도는 걸까요?”
“마루를 걷지 않고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수잔?”
“가구 위를 하나하나 뛰어넘어서요. 난로 위까지도요. 어제는 난로 위에서 미끄러져 석탄 통으로 머리부터 처박았어요. 사모님, 낸에게 벌레 약이 필요한 걸까요?”
‘잉글사이드’ 연대기에서 그해는 항상 아빠가 거의 폐렴에 걸릴 뻔했던 해 그리고 엄마는 폐렴에 걸렸던 해로 기억되었다. 어느 날 밤 앤은 심한 감기에 걸렸지만 아주 예쁜 새 드레스를 입고 젬이 준 진주 목걸이를 걸고서 길버트와 함께 샬럿타운 파티에 갔다. 앤은 아주 멋있어 보였고 엄마를 보러온 아이들은 예쁜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예쁜 페티코트야. 나도 크면 그런 호박단 페티코트를 입을 수 있지, 엄마?”
낸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아가씨들이 페티코트 같은 건 입지 않을걸.”
아빠가 말했다.
“아, 내 말 취소야, 앤. 그리고 당신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워. 그 장식용 금속은 그리 탐탁지 않지만. 더 이상은 나를 반하게 만들려 하지 마. 오늘 밤에 할 수 있는 찬사는 모조리 써버렸으니까. 오늘 의학 잡지에서 읽은 말 생각 안 나? ‘인간이란 세심하게 균형이 잡힌 유기화학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는 당신도 겸손해지겠지. 장식용 금속이라니, 정말! 게다가 호박단 페티코트. 우리는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 위대한 폰 벰부르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 불쾌한 폰 벰부르그 얘기는 내 앞에서 하지 마. 아주 악성적인 만성 소화불량증에라도 걸린 사람일 거야. 그 사람이 바로 그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던가,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그 후 이삼일 뒤 앤은 매우 심각한 지경의 원자 결합이 되었고, 그 때문에 길버트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잔은 애가 타고 지친 모습으로 집 안을 분주히 오락가락했고, 능숙한 간호사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오갔으며, ‘잉글사이드’는 온통 형용하기 어려운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였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얼마나 위중한지 알리지 않아서 젬조차도 지금 엄마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아이들도 모두 두렵고 슬픈 모습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단풍나무 숲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무지개 골짜기’에서 벌어지던 놀이도 멈추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가장 나쁜 일은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와도 엄마가 마중 나오지 않았고 밤이면 엄마가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와 잘 자라며 입을 맞추어주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며 이해해주던 엄마도 없었고, 같이 농담을 나누며 웃어주던 엄마도 없었다. 엄마처럼 웃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엄마가 아픈 것은 집을 떠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빴다. 엄마가 잠시 집을 떠났을 때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을 수나 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어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고 그저 아이들을 밀어내기만 했다.
낸은 학교에서 에이미 테일러에게 들은 이야기로 얼굴이 창백해져서 돌아왔다.
“아줌마, 엄마가, 엄마가 죽어가는 거야?”
“아니야, 절대로. 누가 그런 말을 하던?”
수잔은 단번에 아주 날카롭게 대답했다. 낸에게 우유를 따라주는 수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에이미. 에이미가 그랬어. 오, 아줌마, 에이미가 엄마는 아주 예쁜 시체가 될 거라고 말했어.”
“에이미가 한 말에 신경 쓸 것 없어, 낸. 테일러 집안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혀를 함부로 놀리잖니. 네 엄마가 아픈 건 사실이지만 이겨낼 거야. 내 말을 믿어. 너도 아빠가 엄마 곁에 늘 같이 계시는 걸 알잖니.”
“하느님은 엄마를 죽게 하시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아줌마?”
월터가 입술에 핏기 하나 없이 얼마나 진지하게 바라보며 묻는지 수잔은 아이들을 위로하려는 거짓말도 하기 어려웠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욱 두려웠다. 수잔 역시도 심하게 겁을 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오후 간호사가 머리를 흔드는 걸 보았고 의사 선생님은 저녁을 먹으래도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전능하신 신께서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모를 리 없어.”
수잔이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면서 중얼거리다 접시를 세 개나 깨뜨렸다. 하지만 수잔의 정직하고 단순한 삶에 처음으로 의심이 생겼다.
낸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거렸다. 아빠는 서재 책상에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소리를 낸은 들었다.
“고비가 뭐야?”
낸이 다이에게 물었다.
“나비가 알을 까고 나오는 걸 말하는 걸 거야. 젬 오빠에게 한번 물어보자.”

다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젬은 알고 있었다. 젬은 두 아이에게 고비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나서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월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월터는 ‘무지개 골짜기’의 ‘하얀 숙녀’ 자작나무 아래 엎드려 있었다. 수잔은 셜리와 릴라를 침대로 데려갔다. 낸은 혼자 밖으로 나와 계단에 앉아 있었다. 등 뒤로 집안에는 전에 없던 고요가 엄습해 있었다. 아래 글렌 마을은 저녁 해로 붉게 물들었으나, 기다란 붉은 길에는 먼지가 뽀얗고 항구 들판 풀들은 가뭄으로 하얗게 타들어갔다. 벌써 몇 주일이나 비가 오지 않아 뜰의 꽃들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엄마는 꽃을 참 좋아하는데.
낸은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과 거래를 해야 할 때였다. 만일 엄마를 건강하게 해주신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게 좋을까? 뭔가 대단한 것이어야 했다. 하느님의 응답에 어울릴 만한 것. 낸은 언젠가 학교에서 디키 드류가 스탠리 리즈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냈다.
“너 밤에 묘지를 지나갈 수 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낸은 몸을 떨었다. 감히 어떤 사람이 밤에 묘지에 갈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런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낸이 묘지에 이런 끔찍한 공포심을 품고 있는지는 ‘잉글사이드’의 누구도 몰랐다. 에이미 테일러는 전에 묘지는 죽은 사람으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늘 죽은 채로 있지 않아.”
에이미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말을 아주 음침하게 했다. 낸은 훤한 대낮이라도 묘지 옆을 지나갈 용기는 없었다.

저 멀리 안개에 휩싸인 황금빛 언덕에 서 있는 나무들은 하늘에 닿을 듯했다. 낸은 종종 자기가 저 언덕까지 갈 수 있다면 하늘을 만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로 그 반대편에 살고 계실 것이다. 저 언덕에 가면 하느님이 자기의 기도 소리를 더 잘 들어주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낸은 그 언덕까지 갈 수가 없었다. 여기 ‘잉글사이드’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낸은 햇볕에 그을린 작은 두 손을 꼭 붙들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사랑하는 하느님, 엄마를 낫게 해주신다면 밤에 묘지를 지나겠어요. 오, 사랑하는 하느님, 제발,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다시는 하느님께 부탁 같은 걸 해서 하느님을 귀찮게 하지 않겠어요.”
낸은 속삭였다.




26






유령이 나올 것 같은 한밤중에 ‘잉글사이드’에 찾아온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아이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들어버렸지만 자면서도 죽음의 그림자가 처음 다가왔을 때처럼 조용하고 재빠르게 거두어지는 것을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비가 내려 사방이 어둑했지만 모두의 눈은 생기로 반짝였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수잔에게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 고비는 지나갔고 엄마는 살아난 것이다.
토요일이었고, 학교는 쉬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비가 오면 더 밖으로 나가 소란을 피우며 뛰어놀고 싶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저렇게 퍼붓는 빗속으로 뛰어들기는 좀 그랬다. 모두들 안에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행복해본 적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거의 잠을 자지 못했던 아빠는 손님방 침대에 몸을 던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기 전에 먼저 에이번리의 ‘초록 지붕 집’에 전화를 걸어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덜덜 떨고 있는 두 숙녀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요즘 들어 디저트 같은 것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수잔이 점심에는 맛있는 오렌지셔플을 만들어주었고, 저녁에는 잼 롤리폴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버터스코치 쿠키도 두 판이나 구워주었다. 콕 로빈은 노래를 부르며 집 안 구석구석을 날아다녔고, 의자들마저 춤을 추고 있는 듯 보였다. 뜰의 꽃은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들었고, 메마른 대지도 조용히 비를 환영했다. 낸 역시도 한껏 행복감을 느꼈지만 하느님과 한 거래로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낸은 약속을 취소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좀 더 용기를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약속을 미루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에이미 테일러가 좋아하는 표현을 빌면,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수잔은 이 아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피마자기름을 먹였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낸은 그 거래 이후로 수잔이 전보다 더 자주 피마자기름을 준다고 생각했지만 군소리 없이 받아먹었다. 피마자기름을 어두컴컴한 밤에 묘지를 걷는 일에 비할 수나 있겠는가! 낸은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었다.
엄마는 너무나 창백하고 야위었고 아직 몸이 약해서 잠깐밖에는 볼 수 없었다. ‘엄마는 왜 빨리 낫지를 않는 것일까,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일까.’ 낸은 생각했다.
“엄마에게 시간을 드려야만 해.”
수잔은 말했다.
어떻게 사람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인지 낸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낸은 왜 엄마가 좀 더 빨리 건강해지지 않는지 알았다. 낸은 조그만 진주 같은 이를 악물었다. 내일은 또다시 토요일이고 내일 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다음 날 오전에는 내내 비가 와서 낸은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에도 비가 온다면 누구라도, 하느님조차도 자기가 묘지를 돌아다닐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점심 무렵이 되자 비는 그쳤지만 항구에서 안개가 올라와 글렌 마을을 뒤덮고 ‘잉글사이드’를 온통 으스스한 마법의 기운으로 에워쌌다. 그 덕에 낸은 아직 희망을 가졌다. 안개가 끼어도 묘지를 갈 수 없는 거였다. 그런데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꿈같은 안개를 거두어가 버렸다.
“오늘 밤엔 달이 뜨지 않을 것 같아.”
수잔이 말했다.
“오, 아줌마, 아줌마가 달을 만들면 안 돼?”
낸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묘지를 지나려면 달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어머나, 낸, 달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난 그저 오늘 밤엔 구름이 끼어 달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이었는데. 그나저나 달이 뜨건 말건 네게 무슨 상관이지?”
그건 낸이 설명해줄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수잔은 그 어느 때보다 걱정이었다. 이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다. 이번 주 내내 아이의 행동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먹는 것도 예전보다 절반도 먹지 않았다. 이 아이가 엄마 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사모님은 잘 회복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지만 낸은 자기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엄마가 당장 다시 아파버리게 되리라 믿었다. 해 질 녘이 되자 구름이 사라지고 달이 떴다. 그런데 어쩌면 저리도 달이 괴기스러운지. 어쩌면 저렇게 크고 피처럼 붉은 달일까. 이런 달을 낸은 본 적이 없었다. 무서웠다. 차라리 어두운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쌍둥이는 8시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낸은 다이가 잠들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이는 잠에 빠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곧 잠이 들기에는 그날 너무 슬프고 환멸스러운 일을 겪었다. 오늘 학교가 끝난 후에 단짝 엘시 팔머가 다른 아이와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다이는 자신의 인생도 끝나버렸다고 믿었다.
낸은 9시가 되어서야 겨우 침대에서 빠져나와 옷을 입었으나 단추를 채우는 손가락이 어찌나 떨리던지 옷을 제대로 입기도 힘들 정도였다. 옷을 다 입은 후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와 곁문으로 집을 빠져 나왔다. 수잔은 가엾은 의사 선생 말고는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고 여기며 부엌에서 빵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 밤 길버트는 항구 어귀에 사는 한 아이가 압정을 삼켜버려 급히 불려나갔다.
낸은 밖으로 나와 ‘무지개 골짜기’로 내려갔다. 이 지름길로 해서 언덕의 목장으로 올라가야 했다. 낸은 ‘잉글사이드’ 쌍둥이가 큰길을 어슬렁거리며 마을을 지나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간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당할 걸 잘 알고 있었다.
9월 말의 밤은 또 얼마나 추운지! 낸은 추울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재킷도 입고 나오지 않았다. 밤이 되니 ‘무지개 골짜기’도 낮과는 다르게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달은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었고 붉은색으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번에는 음산한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낸은 달그림자를 보면 언제나 좀 무서웠다. 저 개울가 컴컴한 구석 가랑잎 속으로 보이는 것은 다리일까?
낸은 고개를 쳐들고 턱을 쑥 내밀며 용감하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아. 그냥 배 속이 좀 이상할 뿐이야. 나는 용감한 여장부라고.”
여장부라는 유쾌한 생각으로 언덕을 절반가량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 괴상한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었다. 구름이 달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 ‘새’가 생각났다.

언젠가 에이미 테일러가 해준 얘기인데 ‘커다란 검은 새’가 밤에 느닷없이 덤벼들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끔찍한 얘기였다. 지금 낸을 덮친 것이 그 끔찍한 새의 그림자일까? 하지만 엄마는 세상에 그런 새는 없다고 했다.
“난 엄마가 내게 거짓말했다고 믿지 않아. 엄마는 거짓말 같은 걸 하지 않으니까.”
낸은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울타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걸었다. 이 울타리를 넘으면 큰길이고, 그 큰길을 건너면 묘지였다.
낸은 멈춰 서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구름이 달을 가리면서 주변이 낯설고 어둑한, 미지의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오, 세상은 너무나도 커.’ 낸은 담벼락에 기대어 몸을 웅크리며 떨었다. 아, 지금 당장 ‘잉글사이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하느님이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셔.’ 일곱 살배기 어린것은 중얼거리며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낸은 담을 오르긴 했지만 굴러떨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옷이 찢어져 버렸다. 발을 딛고 몸을 일으켜 세우다 날카로운 나무 가시가 신발을 뚫고 들어와 발을 다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발을 절룩거리며 묘지 문까지 갔다.
묘지는 저 동쪽 끝 전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었다. 한쪽에는 감리교 교회가 서 있고, 다른 쪽에는 장로교 목사관이 있었다. 지금은 목사가 없어서 목사관은 정적에 휩싸인 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달이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밀면서 묘지에 온갖 그림자들이 넘실거렸다. 그림자들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춤을 추었으며 그림자 속으로 한 발이라도 들어가면 곧 덮쳐버릴 것 같았다. 누군가 내버린 신문지가 마녀 할멈이 춤을 추듯 길을 따라 바람에 날아왔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으스스해 보일 수가 없었다. 밤바람이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전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묘지 정문 옆에 서 있던 버드나무의 긴 이파리 하나가 느닷없이 낸의 뺨을 스쳤다. 낸은 도깨비가 손을 내밀어 자기 볼을 쓰다듬었다고 느꼈다. 그 한순간 낸의 심장은 멎어버렸다. 하지만 문고리에 손을 댔다.
저 묘지가 그 기다란 팔을 뻗어 나를 끌고 들어가 버리면 어쩌지!
낸은 몸을 돌렸다. 이제 거래고 뭐고 이 밤중에 묘지를 절대로 지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바로 옆에서 더없이 으스스한 소리가 들렸다. 길가를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어 먹던 벤 베이커 부인의 늙은 암소가 가문비나무 숲에서 불쑥 나타난 것뿐이었지만 낸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쫓겨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마을을 지나 ‘잉글사이드’로 가는 길로 올라갔다. 정신없이 뛰다가 대문 밖 릴라가 ‘진흙탕 못’이라 부르는 진창에 빠져버리긴 했지만 집에 당도했다. 창문마다 부드러운 불빛이 반짝이는 내 집에 왔다. 흙탕물이 흘러내리고 피가 흐르는 발로 수잔의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수잔이 아연실색해서 말했다.
“아줌마, 난 절대로 묘지를 지날 수 없었어…….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낸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처음에 수잔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온몸을 떨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낸을 안아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옷을 벗기고 잠옷을 갈아입혀 침대로 데려갔다. 그런 다음 먹을 것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지금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빈속으로 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낸은 수잔이 가져다준 음식과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이렇게 따뜻하고 불이 환하게 밝혀진 편안한 방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드는 것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그러나 낸은 수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이것은 하느님과 내 비밀인걸, 아줌마.”
사모님이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만 하면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리라고 생각하며 수잔도 잠자리에 들었다. ‘이 아이들은 이제 내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어.’ 수잔은 무력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엄마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낸은 이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자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하느님도 약속을 지킬 리 없었다. 그다음 1주일 내내 낸에게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그 어떤 일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다락방에서 수잔이 물레를 잣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전에는 그걸 볼 때마다 언제나 환상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건만. 이제 낸은 도저히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낸은 켄 포드가 귀를 잡아뜯어버리긴 했지만 오랫동안 갖고 놀아 정이 든 곰 인형보다 더 아끼는 톱밥 채운 개를 셜리에게 주어버렸다. 셜리는 늘 이 개를 탐냈다.
낸은 전부터 좀 오래 묵은 것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말라치 선장이 멀리 서인도에서 가져다준 조개로 만든 집을 릴라에게 주었다. 하느님이 그걸로 만족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에이미 테일러에게는 에이미가 언제나 갖고 싶어 하던 아기고양이를 주어버렸다. 하지만 이 고양이는 어느새 집으로 돌아와 에이미에게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고, 낸은 하느님이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묘지를 지나는 것 말고는 무슨 일을 해도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여운 낸은 그 일만은 자기가 도저히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겁쟁이고 비겁한 사람이다. 젬이 언젠가 거래를 해놓고 약속을 지키려 들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앤은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도 좋을 만큼 회복되었다. 이제 곧 다시 집안일을 보살피고, 책을 읽고, 편안히 누워 쉬기도 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고, 난롯가에 앉아 상상에도 빠지고, 정원을 가꾸고, 친구들도 만나고, 재미난 소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한해의 목걸이에 꿰인 보석처럼 빛나는 날들을 맞으며 삶의 화려한 장관의 일부가 될 것이다.
앤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수잔이 만든 양다리 고기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다시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앤은 방을 둘러보며 정다운 자기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이 방에 새 커튼을 쳐야겠어. 연둣빛과 연한 노란색의 중간색이 좋겠어. 그리고 저 수건을 넣어두는 새 선반은 아무래도 욕실에 두어야 해. 그리고 앤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공기 중에는 마법의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단풍나무 가지 너머로 언뜻 항구의 푸른빛이 보였다. 잔디 위로 늘어져 흔들거리는 버드나무 위로는 황금빛 햇살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광활한 하늘 정원 아래로 가을을 품은 풍요로운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대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와 부드러운 빛과 기다란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콕 로빈은 전나무 꼭대기에 한껏 몸을 젖힌 채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며 웃고 있었다. ‘잉글사이드’에 웃음소리가 돌아온 것이다. 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은 세심하게 균형 잡힌 유기화학물질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낸이 살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며 코가 온통 붉었다.
“엄마, 이야기할 게 있어요. 이제 더 이상은 못 기다려요. 엄마, 난 하느님을 속였어요.”
앤은 매달려오는 아이의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다시 한 번 마음이 흐뭇했다. 아이는 별일도 아니지만 제 딴엔 쓰라린 문제가 있어 도움과 위안을 구하러 왔으리라.
앤은 낸이 흐느끼며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진지한 얼굴을 하려고 애썼다. 앤은 나중에야 길버트와 함께 한바탕 웃어버릴 일이라도 필요한 순간에는 항상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앤은 지금 낸의 걱정이 낸에게는 현실이며 무서운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 또한 이 조그만 딸이 가진 하느님에 관한 생각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가, 넌 하느님을 단단히 오해했구나. 하느님은 거래 같은 걸 하지 않는단다. 하느님은 그저 베풀어주실 뿐이야.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대가를 바라시지 않고 그저 줄 뿐이란다. 네가 아빠에게 뭘 부탁하거나 네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할 때 아빠가 거래하자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하느님은 엄마 아빠보다도 더 친절한 분이란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도 잘 알고 계셔.”
“그럼 하느님은, 하느님은 엄마를 죽게 하지 않겠네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도 그렇죠, 엄마?”
“그렇고말고, 낸.”
“엄마, 내가 하느님을 잘못 오해했다고는 해도, 그래도 내가 거래를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약속한 거니까요. 아빠는 항상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난 평생 부끄러운 짓을 한 사람이 되는 거죠?”
“엄마가 다 나으면 너와 함께 밤에 묘지로 가서 묘지 정문에 있어줄게. 그럼 네가 묘지를 돌아도 하나도 무섭지 않을 거야. 그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거고. 그리고 이제 다시는 하느님과 거래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면 안 된다, 알겠니?”
“이제 안 그럴게요.”
낸은 약속했다. 하지만 곤란한 점이 여러 가지 있긴 해도 그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일을 단념해야 한다는 데 대해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눈에는 빛이 되돌아왔고 목소리에도 예전의 활기가 되살아났다.
“가서 얼굴을 씻고 엄마에게 뽀뽀해드릴게요. 그리고 금붕어꽃을 모두 따다 드릴게요. 엄마가 누워만 있어서 너무 싫었어요.”
“오, 수잔, 너무나 멋진 세상이에요! 너무나 아름답고, 재밌고, 멋진 세상이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수잔?”
수잔이 저녁을 들고 들어오자, 앤이 말했다.
“나도 세상이 아주 살 만하다고 생각해요.”
방금 식품 창고에 죽 늘어놓고 온 아름다운 파이를 떠올리며 수잔이 동의했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4/12 00:25:34

낸두 엄마못지않게 엉뚱하고 당돌하네요.수잔보고 달을 만들어내라니.어케 7살짜리 어
린애가 하느님의 기도응답을 받겟다고 담벼락에서 굴러떨어져 무릎이 까지고 발이 다
치면서 묘지에까지 갓는지 그용기가 대단하네요.앤의 건강이 회복되여서 넘나 다행이
예요.애들한테 엄마가 얼마나 위중한 존재인데.

나단비 (♡.62.♡.158) - 2024/04/12 06:35:37

아이들에겐 엄마가 온 세상이죠. 애틋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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