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27~28

나단비 | 2024.04.12 06:41:59 댓글: 0 조회: 4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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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시월은 ‘잉글사이드’ 사람들 모두 무척 행복했다. 날마다 너무나도 행복해 달리고, 노래 부르고, 휘파람을 불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 앤은 더 이상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 가꿀 계획을 세우고, 다시 웃었다.

젬은 어쩌면 엄마는 저렇게 예쁘고 즐겁게 웃을 수 있을까, 엄마는 어떻게 그 많은 질문에 다 대답해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엄마, 여기서 저 저녁 해까지는 얼마나 멀어요? 엄마, 우리는 왜 저 쏟아지는 달빛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거죠? 엄마, 할로윈 날에는 정말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되살아나나요? 엄마, 원인이란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생겨요? 엄마, 호랑이보다 방울뱀에게 물려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왜냐하면 호랑이는 사람을 갈가리 찢어서 먹어버리잖아요. 엄마 ‘반침’이라는 게 뭐예요? 엄마, 미망인이란 자기 꿈을 이룬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월리 테일러가 미망인은 꿈을 이룬 사람이래요. 엄마, 작은 새는 비가 심하게 올 때 어떻게 해요? 엄마, 우리가 정말로 너무 낭만적인 가족이에요?”

이 마지막 질문은 학교에서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하는 말을 듣고 젬이 물은 것이다. 젬은 알렉 데이비스 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인은 아빠나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젬을 만나기만 하면 잊지 않고 긴 검지로 젬을 쿡 찌르며 물었다.

“제미는 학교에서 착하게 행동하나요?”

제미라니! 하긴 우리 가족이 좀 낭만적일지도 모르지. 수잔이 헛간으로 이어진 판자 길을 빨간색으로 페인트칠한 걸 보고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우린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해서 그렇게 칠해야 했어. 그건 핏자국을 나타내는 거라고.”

젬이 설명했다.

밤이 되면 나직이 걸린 붉은 달을 가로질러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일이 있는데, 젬은 이 새들을 바라보며 자기도 함께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 검은 원숭이며 표범이며 앵무새 같은 걸 잡아 돌아오거나, 또는 남미 동북 해안지방을 탐험하는 상상을 하면서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남미 동북 해안지방’이라는 말은 늘 견딜 수 없이 젬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바다의 비밀’이라는 말도 그랬다. 피톤 뱀한테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 입은 코뿔소와 격투를 벌이는 것도 젬의 백일몽에 꼭 등장하는 소재였다. 그리고 또 ‘용’이라는 말에도 굉장한 스릴을 느꼈다. 젬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침대 발치 벽에 압정으로 꽂아놓았다. 그 그림에는 갑옷으로 멋지게 무장한 기사가 앞다리를 들어 올린 살찐 백마에 올라타 용에게 창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용은 끝이 갈라진 멋진 꼬리를 치켜든 채 몸을 고리처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림 배경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숙녀가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로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숙녀가 메이벨 리즈를 꼭 닮았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글렌 학교 아홉 살배기들 사이에서는 메이벨의 사랑을 얻으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수잔까지도 그림의 숙녀와 메이벨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젬을 놀리자, 젬은 얼굴이 빨개져 화를 냈다. 그러나 용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고 거대한 말 아래 꼼짝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렇게 작은 용을 창으로 죽인다 해도 특별히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젬이 아무도 모르게 그리는 꿈에서 메이벨을 구출할 때 나오는 용이 훨씬 더 용다웠다.

지난 월요일에는 정말로 젬이 세라 팔머 아주머니네 수놈 거위로부터 메이벨을 구출했다. 어쩌면 아, 어쩌면이라는 말에선 뭔가 괜찮은 맛이 났다. 어쩌면 메이벨도 젬이 그 꽥꽥대는 뱀 같은 짐승의 목을 움켜잡아 담장 너머로 던져버렸을 때 자기가 얼마나 용감무쌍한 사람인지 다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거위는 용만큼 낭만적이지 못했다.

10월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작은 바람은 골짜기에서 속살거렸고, 큰 바람은 단풍나무 가지들을 세차게 때렸다. 바람은 또 모래 해변을 따라 울부짖었지만 바위에 이르러서는 웅크리고 앉았다. 웅크리고 앉았다가는 곧 또다시 달려들었다. 졸린 듯한 붉은 늦가을 달이 빛나는 밤은 따뜻한 잠자리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을 정도로 서늘했고, 블루베리 숲은 주황빛으로 물들었으며, 시든 양치류는 짙은 적갈색으로 변했다. 헛간 뒤꼍의 옻나무 잎이 빨갛게 타오르고, 글렌 윗마을의 메마른 밭 여기저기에 푸른 목장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잔디밭 가문비나무가 있는 구석은 금빛과 적갈색 국화가 피었다.

여기저기서 다람쥐가 즐겁게 재잘거리고, 언덕에서는 귀뚜라미가 요정들의 춤을 위해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사과를 따고 당근도 뽑았다. 이따금 신비로운 바다의 조수가 허락할 때면 남자아이들은 말라치 선장과 함께 대합조개를 캐러 갔다. 바닷물은 육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곧 자기들의 깊은 바다로 미끄러지듯 되돌아갔다. 온 글렌 마을에 낙엽 태우는 냄새가 짙게 깔리고, 헛간에는 크고 누런 호박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수잔은 올 들어 처음으로 월귤 파이를 만들었다.

‘잉글사이드’에는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큰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없을 때면 셜리와 릴라가 대신 그 웃음소리를 이을 만큼 자랐다. 올가을에는 길버트조차도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다.

‘나는 웃을 줄 아는 우리 아빠가 좋아.’

젬은 생각했다. 모브레이 내로우즈의 브론슨 의사는 절대로 웃지 않았다. 그 올빼미처럼 영리해 뵈는 표정으로 의사 사업을 번창시켰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아빠가 더 번창했으며 사람들은 아빠의 농담을 듣고 웃는 걸 무척 좋아했다.

앤은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뜰 일을 했다. 일을 하다 황혼이 진홍빛 단풍나무에 드리워지면 포도주 같은 빛깔에 도취되어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담긴 알 수 없는 슬픔을 즐겼다. 안개가 끼어 황금빛 회색으로 빛나던 어느 날 오후, 앤과 젬은 6월이 되면 장밋빛, 주황빛, 보랏빛, 황금빛으로 다시 살아날 튤립 알뿌리를 심었다.

“겨울이 곧 닥쳐올 테지만 봄 맞을 준비를 한다는 건 기쁘지 않니, 젬?”

“네, 그리고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즐거운 일이에요. 수잔 아줌마가 그랬는데 모든 걸 아름답게 하는 건 하느님뿐이지만 우리도 그 일을 조금은 도울 수 있대요.”
젬이 말했다.

“그럼, 언제든지, 젬. 하느님은 그 특권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지.”

그래도 완전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콕 로빈 때문에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울새들이 날아가 버릴 때 콕 로빈도 함께 떠나고 싶어 할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울새들이 모두 떠나버릴 때까지 그리고 눈이 내릴 때까지 그놈을 가두어두어요. 그럼 울새가 떠나고 싶은 생각을 잊어버릴 테고 봄이 올 때까지 괜찮을 겁니다.”

말라치 선장이 그렇게 충고했다.

그렇게 콕 로빈은 죄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콕 로빈은 날이 갈수록 활기를 잃어갔다. 하릴없이 집 안을 이리저리 파드득거리다가 창가에 멍하니 앉아 다른 친구들이 신비로운 부름에 응해 떠날 채비를 하는 걸 지켜봤다. 식욕도 점점 잃어 벌레도, 수잔이 주는 먹음직스러운 견과류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콕 로빈에게 집을 나서면 만나게 될 온갖 위험을 일일이 지적해주었다. 추위, 배고픔, 비정함, 폭풍우, 컴컴한 밤, 고양이. 하지만 콕 로빈은 부름을 느끼고 들을 뿐이었고, 온몸으로 그 부름에 응하려 했다.

수잔이 마지막으로 포기했다. 수잔은 며칠 동안이나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결국에는 말했다.

“보내주어요. 우리가 콕 로빈을 붙들고 있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에요.”

콕 로빈을 한 달 동안 가두어두었다가 10월 마지막 날에 풀어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콕 로빈은 기쁜 듯 날아가서 다음 날 아침 수잔의 창가로 돌아와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먹은 다음 장거리 비행을 위해 날개를 활짝 펼쳤다.

“다음 봄에 꼭 우리에게 돌아올 거야.”

앤은 흐느끼는 릴라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로도 릴라에게 위로는 되지 않았다.

“봄은 아직 멀었잖아!”

릴라는 흐느꼈다.

앤은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린 릴라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계절들이 앤에게는 너무 빨리 지나가기 시작했다. 또다시 여름이 지났고,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롬바르디 포플러는 황금빛을 띠었다. ‘잉글사이드’의 아이들도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날도 곧 오고 말리라. 그렇더라도 이 아이들은 언제까지고 앤의 아이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할 앤의 아이들, 삶을 경이와 기쁨으로 채워줄 앤의 아이들. 사랑을 주고 격려해주겠지만 조금은 꾸짖기도 해야 할 앤의 아이들. 가끔씩 아주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무지개 골짜기’에서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화형에 처해지는 빨간 인디언 역할을 하다가 조금 그을렸다고 해서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잉글사이드의 악마들’이라고 부른 건 너무한 처사였다. 젬과 월터가 버티를 풀어주는데 처음에 협상을 맺었던 것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려서 생긴 사고였는데 말이다. 젬과 월터 역시도 약간 그을렸지만 아무도 이 둘을 동정해주지는 않았다.

그해 11월은 동풍이 불어오고 안개가 끼어 참으로 우울한 나날이었다. 모래톱을 넘고, 잿빛 바다를 가로질러 감돌아 오르는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날도 있었다. 마지막 이파리를 떨어뜨린 미루나무는 몸을 떨고 서 있었다. 뜰은 그 곱던 빛깔이며 개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전히 환상적인 황금빛 정글을 이루고 있는 아스파라거스 묘상만 그대로였다. 월터는 단풍나무에 있는 자기 공부용 판자를 놔두고 집 안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비가 오고, 또 오고, 또 왔다.

“세상이 마를 날이 다시 올까?”

다이는 실망하여 탄식했다. 그러다가 1주일 동안은 또 마법처럼 봄날 같은 햇볕이 내리쬐기도 했다. 저녁이 오면 추위가 몸속으로 파고들어 엄마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수잔은 저녁 식사에 구운 감자를 내놓았다.

그런 저녁에는 커다란 난로가 중심이 되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 모두들 난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앤은 바느질을 하고 겨울철에 아이들에게 입힐 옷 디자인을 고안하기도 했다.

“낸에게 빨간 옷을 만들어줘야겠어. 낸이 빨간색 옷을 입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어느 때는 어린 아들 사무엘의 옷을 짜던 한나를 생각하기도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머니란 마찬가지다. 사랑과 봉사의 위대한 자매들이다.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 있는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아이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제각각 자기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놀았다. 공상과 아름다운 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월터는 ‘무지개 골짜기’에 사는 얼룩다람쥐가 헛간 뒤에 사는 얼룩다람쥐에게 보내는 편지를 여러 통 썼다. 월터가 그것을 읽어주었을 때 수잔은 시시하다는 듯 흥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베껴 레베카 듀에게 보내주었다.

“이게 아주 읽을 만하더군요, 미스 듀. 미스 듀는 이런 건 시시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요.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이들에게 눈먼 노파가 하는 짓은 별 수 없다고 생각해버리세요. 월터는 학교에서도 아주 영리한 아이로 평가받고 있어요. 그리고 이 작문은 시도 아니에요. 젬이 지난주에 수학 시험을 봤는데 99점을 받았다는 얘기도 해주어야겠네요. 그런데 나머지 1점이 왜 깎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요, 미스 듀. 아무래도 내 생각에 이 아이는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려고 태어난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생전에 그렇게 되는 걸 보지는 못할지라도 이 아이는 장차 캐나다의 총리가 될지도 몰라요.”

슈림프는 따뜻한 난롯불을 쬐고 있고, 검은빛과 은빛 의상을 두른 깜찍한 작은 숙녀를 떠올리게 하는 낸의 아기 고양이 푸시 윌로우는 아무의 다리에나 함부로 기어올랐다.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는데도 왜 식품 저장실은 온통 쥐의 소굴이지?”

수잔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자기들만의 작은 모험 이야기를 했고, 추운 가을 저녁을 통해 멀리 바다에서는 파도가 밀려들었다.

가끔씩 미스 코넬리아가 들렀다. 남편이 카터 플래그네 가게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 잠시 들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도 모두 귀를 기울였다. 미스 코넬리아는 언제나 아주 재미있는 가장 최근 소문을 들려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가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 무척 재미있었다.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에 관해 들은 이야기를 음미해보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었다.

“아, 여기는 참으로 아늑하군요. 앤, 정말 추운 밤이에요.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왕진 가셨나요?”

“네. 이런 날에는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요. 항구 어귀 마을에서 브루커 쇼 부인이 꼭 보잔다고 전화가 왔어요.” 

앤이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수잔은 슈림프가 물어온 커다란 생선 가시를 코넬리아가 보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난로 옆 깔개 밑으로 얼른 치웠다.

“그 여자는 나만큼이나 팔팔해요. 내가 들었는데 그 여자가 레이스 잠옷을 새로 장만했대요. 틀림없이 그 잠옷 입은 모습을 단골 의사 선생님에게 보이고 싶은 거겠죠. 레이스 잠옷 말예요!”

수잔이 신랄하게 말했다.

수잔의 말에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딸 레오나가 보스턴에서 가져다준 거죠. 레오나는 금요일 밤에 트렁크를 네 개나 들고 집에 왔어요. 9년 전에 미국으로 떠날 때의 일이 지금도 기억나요. 가방 안의 물건들이 삐죽삐죽 나온 다 망가진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갔었죠. 필 터너에게 버림받고 퍽 우울했던 때였어요. 레오나는 그런 사실을 감추려 했지만 모두 알고 있었지요. 이제 어머니 병 수발을 들러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레오나는 분명 선생님을 유혹하려 들 거예요. 내가 미리 주의를 주는 거예요, 앤. 하지만 선생님이라면 염려 없어요. 그리고 앤이야 모브레이 내로우즈의 브론슨 선생님 부인 같지도 않으니까요. 그 부인은 남편의 여자 환자들에게 굉장히 질투를 한다더군요.”

“간호사에게도요.” 

수잔도 거들었다.

“정말이지, 간호사 가운데에는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예쁜 사람도 있잖아요. 제니 아서만 해도 그래요. 지금 환자 간호할 일이 없는 사이 쉬면서 젊은 남자 둘을 놓고 누가 더 괜찮은가 저울질을 하고 있잖아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제니 아서가 예쁘기는 하지만 그 아가씨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요.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리고 얼른 결혼을 하는 게 낫다고요. 제니의 고모 유도라만 봐도 알잖아요. 실컷 즐기고 난 다음에 결혼을 하겠다고 했지만 지금 꼴이 어떻게 됐냐고요. 나이가 마흔 다섯이 되었을 텐데도 아직도 눈에 보이는 모든 남자를 다 유혹하려고 들어요. 그것도 버릇인가 봐요. 유도라의 사촌인 파니가 결혼할 때 했다는 말을 들어봤나요, 사모님? ‘너는 내가 남긴 것을 얻어가는 거야.’ 그랬대요. 그 이후로 둘이 대판 싸우고 지금까지 말도 하지 않는대요.”

수잔이 딱 잘라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12)

앤이 멍하니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맞는 말이에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앤. 스탠리 씨는 설교할 때 좀 더 분별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월리스 영을 화나게 해서 윌리스가 교회를 떠나겠다고 한다고요. 모든 사람이 다 지난주 설교가 월리스를 향해 한 설교라고들 하니까요.”

“목사님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설교 말씀을 하시면 사람들은 꼭 어떤 한 사람을 향해 한 설교라고들 여기죠. 대물림되는 모자가 누구의 머리에 꼭 맞는다고 해서 그 모자가 그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앤이 말했다.

“맞는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월리스 영을 좋아하지 않아요. 3년 전에 자기 소 몸에다 페인트칠을 해서 어떤 회사 광고를 했으니까요. 너무 지나쳤어요.”

수잔이 찬성했다.

“월리스의 형 데이비드가 드디어 결혼을 할 거래요. 결혼을 하는 것과 하녀를 두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돈이 덜 들지 오랫동안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지요. 일전에 그 사람 어머니가 죽었을 때 내게 ‘여자 없이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는 어려운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네요, 코넬리아.’ 하지 뭐예요. 나도 그 사람이 결혼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러라고 부추기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드디어 제시 킹과 결혼을 한다네요.”

“제시 킹이라고요? 그 사람은 메리 노스에게 청혼했다던데요.”

“양배추를 먹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대요. 하지만 윌리스가 메리 노스에게 청혼하긴 했는데 따귀만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있어요. 제시 킹도 좀 더 잘생긴 남자를 원하기는 하지만 월리스면 충분하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고요. 하긴 폭풍이 불면 어떤 항구라도 마다않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죠.”

“마셜 엘리엇 부인, 이 근방에 도는 소문 중에 믿을 건 절반도 되지 않아요. 내 생각으로는 제시 킹이면 데이비드 영에게는 과분한 아내가 될 거예요. 데이비드는 겉모습도 볼품이 없잖아요.”

수잔이 비난했다.

“올덴과 스텔라에게 딸이 생긴 것 아시나요?”

앤이 물었다.

“네, 알아요. 스텔라는 어머니 리제트보다 좀 더 분별력 있게 딸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글쎄, 앤, 사촌인 드류의 아기가 스텔라보다 먼저 걸음마를 했다고 리제트가 울었답니다! 그 말이 믿어져요?”

“우리들 어머니는 어리석은 종족이에요. 지금도 생각나는데, 젬은 이가 하나밖에 나지 않았는데 젬과 같은 무렵 태어난 밥 테일러는 이가 세 개나 난 것을 보니까 정말 제 심정이 흉악스러워지더군요.”

앤이 미소 지었다.

“밥 테일러는 편도선 수술을 해야 한대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왜 우린 수술을 한 번도 안 해요, 엄마?”

월터와 다이가 언짢은 얼굴로 물었다. 이 두 아이는 이렇게 동시에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그러고는 둘은 손가락을 걸고 자기들도 수술을 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끼는 거예요.”

다이가 설명도 진지하게 했다.

“엘시 테일러의 결혼식을 잊을 수 있을까요? 엘시와 가장 친한 메이지 밀리슨이 <결혼행진곡>을 치기로 했지요. 그런데 메이지는 너무 긴장해서 그만 <결혼행진곡> 대신 장송곡을 치고 말았어요. 나중에 그것이 순전히 실수였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요. 메이지 자신이 맥 무어사이드를 원했거든요. 잘생긴데다가 언변도 좋은 사람이니까요. 언제나 여자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엘시의 일생을 비참하게 했었죠. 아, 둘 다 이미 아득한 옛날에 침묵의 나라로 가버렸고, 메이지가 할리 러셀과 결혼한 지도 몇 해가 지났네요. 이제는 모두들 메이지가 거절할 줄 알고 할리가 청혼했는데 메이지가 넙죽 ‘네.’ 하고 대답해버려서 결혼하게 되었다는 걸 잊어버렸죠. 할리 자신도 잊어버리고 있으니까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죠, 뭐. 지금 할리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아내를 얻을 만큼 자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으스대며 살아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여자가 거절하기를 바라면서 왜 청혼을 했을까요? 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수잔이 말했다. 그러고는 곧 겸손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물론 그런 일을 나 같은 사람이 알 리 없지요.”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한 거죠. 자기는 싫지만 그렇게 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여긴 거죠. 저기 선생님이 돌아오시는군요.”

길버트가 들어오자 눈도 나풀나풀 같이 들어왔다. 길버트는 외투를 벗고 기쁜 듯이 난롯가에 앉았다.

“생각보다 좀 늦었어요.”

“새 잠옷이 아주 매력적이었을 테니 당연히 그랬겠죠.”

미스 코넬리아를 바라보며 앤이 짓궂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들이 하는 농담을 나 같은 거친 남자는 이해할 수 없더라고. 난 윗마을에 가서 월터 쿠퍼를 진료하고 왔다고.”

“그 사람이 그렇게 잘 견디고 있다는 게 참 이상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 사람한테는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벌써 옛날에 하늘나라로 갈 줄 알았거든요. 내가 1년 전에 앞으로 두 달 남았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서 내 명성에 누를 끼치고 있잖아요.”

길버트가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나만큼 쿠퍼 집안사람 기질을 잘 알았더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 사람 할아버지는 관도 다 짜고 무덤까지 파놓았는데 다시 살아났어요. 장의사는 그 관을 도로 물려주려 하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난 월터 쿠퍼를 이해해요. 자기 장례식 연습을 하며 즐기고 있을 거라고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마셜이 울리는 방울 소리가 들리는군요. 자, 이 배 절임은 앤에게 주는 거예요.”

모두들 미스 코넬리아를 배웅하려고 문가로 나갔다. 월터의 짙은 회색 눈이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을 쏘아보았다.

“오늘 밤 콕 로빈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월터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마 콕 로빈은 미스 코넬리아가 언제나 침묵의 나라라고 말하는 그 이상한 나라로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콕 로빈은 해가 빛나는 남쪽 땅에 있단다. 봄이 되면 돌아올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이제 다섯 달만 기다리면 돼. 너희들 모두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간이란다.”

앤이 말했다.

“수잔도 아기를 갖고 싶어? 나 어디서 아기를 구할 수 있는지 아는데. 아주 새 아기로.”

부엌에서 다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 그래. 거기가 어딘데?”

“에이미네 집에 새 아기가 생겼어. 에이미가 그랬는데 천사가 아기를 가져다주었대. 에이미는 천사들이 좀 분별력이 있어야겠다고 했어. 자기 집에는 아이들이 여덟이나 있다고.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제 수잔 아줌마가 이제 릴라도 다 커버려서 쓸쓸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이제 아기가 없으니까. 틀림없이 테일러 아줌마가 수잔 아줌마에게 아기를 하나 줄 거야.”

“아이들이 하는 생각이란! 테일러 집안에는 원래 아이가 많지. 앤드루 테일러의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전부 몇이나 되는지 곧바로 대지도 못했어. 항상 서서 손가락으로 세어보고는 대답했지. 하지만 난 남의 아기를 데려올 마음이 없단다.”

“아줌마는 노처녀라면서? 에이미 테일러가 그랬어. 정말 그래, 아줌마?”

“전능하신 하느님이 나를 그렇게 정해주셨지.”

수잔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노처녀인 것이 좋아, 아줌마?”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수잔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많은 부인들을 생각하며 덧붙였다.

“어떻게 살아도 다 좋고 나쁜 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나도 깨달았단다. 아빠한테 이 애플파이를 갖다 드려라. 내가 차를 가져갈 테니까. 가엾게도 선생님은 배가 고파서 쓰러지실 지경일 거야.”

“엄마, 우리 집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유령이 두셋 있으면 훨씬 더 멋진 집이 되지 않을까요?”

월터가 졸린 듯이 2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유령이라고?”

“네. 제리 팔머네 집에는 유령이 가득하거든요. 제리도 하나 봤대요. 하얀 옷을 입은 키가 큰 여자인데 손이 해골이더래요. 내가 그 말을 수잔 아줌마에게 해줬더니 제리가 거짓말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속이 안 좋을 거라고 했어요.”

“아줌마 말이 맞아. ‘잉글사이드’에는 언제나 행복한 사람들만 살아서 귀신 같은 것은 없단다. 이제 기도를 올리고 자거라.”

“엄마, 내가 어젯밤에 나쁜 일을 한 것 같아요. ‘오늘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대신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거든요. 그게 더 맞는다고 생각해서요. 하느님께서 기분이 상하셨을까요, 엄마?”

12. 잠언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28






콕 로빈은 ‘잉글사이드’로 돌아왔다. 신부까지 데리고. ‘무지개 골짜기’에 아지랑이 같은 봄이 녹색 물결을 이룰 무렵이었다. 울새 두 마리는 월터의 사과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콕 로빈은 전과 같이 행동했지만, 신부는 내성적인지 아니면 대담하지 못해서인지 누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수잔은 콕 로빈이 돌아온 것은 분명 기적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그날 밤 레베카 듀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잉글사이드’ 생활은 작은 드라마 같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도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겨울 내내 별다른 일 없이 지냈지만, 6월 들어서는 다이의 모험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차례가 되었다.
글렌 학교에 한 여자아이가 전학 왔다. 새로 온 여자아이는 선생님이 이름을 묻자 ‘나는 엘리자베스 여왕이에요.’, ‘나는 트로이의 헬렌이에요.’ 하는 말투로 ‘나는 제니 페니예요.’ 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나를 모른다면 그건 당신이 아주 하찮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제니를 모를 수가 있죠?’ 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아니, 적어도 다이애나 블라이드에게는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다이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이는 여덟 살인데 제니 페니는 아홉 살이었다. 그러나 제니는 처음부터 열 살이나 열한 살짜리 ‘큰 여자아이들’과 어깨를 겨뤘다. ‘큰 여자아이들’도 제니를 냉대하거나 무시하지 못했다. 제니는 결코 예쁜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겉모습은 상당히 눈길을 끄는 외모였다. 제니를 본 사람은 모두들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동그란 크림빛 얼굴을 감싼 검은 머리, 무척이나 큰 짙고 푸른 눈, 숱이 많고 길디긴 까만 속눈썹. 제니가 그 긴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면 벌레 같은 자신이 고맙게도 짓밟힘을 면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의 칭송을 받는 것보다 제니의 경멸이 차라리 나았다. 잠깐이나마 제니 페니의 가까운 친구로 선택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제니 페니가 들려주는 비밀 이야기도 굉장했다. 확실히 페니 집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니의 큰엄마인 리나는 백만장자인 삼촌이 물려준 훌륭한 금목걸이랑 석류석 목걸이를 갖고 있다고 했다. 제니 사촌은 천 달러나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졌고, 또 다른 사촌은 웅변대회에 나가 1천7백 명이나 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을 받았다고 했다. 게다가 제니에게는 표범들이 우글거리는 인도로 가서 선교 일을 하는 고모도 있었다. 글렌 학교 여자아이들은 적어도 얼마 동안은 감탄과 선망이 섞인 존경심을 갖고 제니 페니를 떠받들었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서까지 제니 페니의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어른들도 이 제니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다.

“다이가 푹 빠진 그 여자아이가 누구죠, 수잔? 난 포 윈즈에서 페니라는 성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들에 관해 뭐 좀 알아요?”

어느 날 저녁, 다이가 그 저택에 산다는 제니란 아이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은 후 앤이 물었다.

그 저택의 지붕에는 빙 둘러 하얀색 목제 레이스 장식이 있고, 내닫이창이 다섯 개에, 저택 뒤편에는 훌륭한 자작나무 숲이 있으며, 응접실에는 빨간 대리석 벽난로가 있다고 했다.

“베이스 라인에 있는 콘웨이 농장에 새로 이사 온 집이에요, 사모님. 페니 씨는 목수인데, 목수 일로는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어 농사를 지을 작정이래요. 하느님 따위는 없다고 떠들고 다닌다더군요. 내 생각엔 좀 이상한 집안이에요. 아이들도 모두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둔대요. 페니 씨는 자기 어린 시절에 너무나도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받고 살아서 자기 아이들은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제니라는 아이도 글렌 학교에 온 거래요. 모브레이 내로우즈 학교가 더 가까워서 다른 아이들은 거기 다니지만 제니는 글렌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대요. 콘웨이 농장의 절반은 이쪽 구역에 속해서 어차피 페니 씨는 양쪽 학교에 다 돈을 내야 하니까 아이들을 어느 학교에나 다 보낼 수 있는 거고요. 그렇지만 이 제니라는 아이는 그 사람 자식이 아니라 조카래요. 그 아이의 부모는 둘 다 세상을 일찍 떴다고 해요. 소문으로는 모브레이 내로우즈의 침례교회 지하실에 양을 몰아넣은 것도 조지 앤드루 페니 짓이래요. 나쁜 사람들이라는 건 아니지만 점잖지가 못해요. 집안은 엉망이고, 내가 조언을 해도 괜찮다면, 다이를 그런 원숭이 같은 족속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해야 해요, 사모님.”

“어떻게 다이가 학교에서 제니랑 놀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겠어요, 수잔. 그리고 그 아이가 정말로 나쁜 아이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고요. 하지만 그 아이가 자기 친척이나 자기 모험 이야기를 과장해서 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요. 다이도 이제 곧 ‘열’이 식을 테고 그럼 우리도 차츰 제니 페니의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되겠죠.”

그러나 제니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했다. 제니는 글렌학교의 모든 여자아이들 중에 다이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단다. 그 말에 다이는 여왕이 자기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기라도 한 듯 탄복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둘은 항상 같이 붙어 다녔다. 주말이면 서로 쪽지를 주고받고 껌을 돌려가며 씹기도 했다. 단추도 서로 바꾸고 청소도 서로 도왔으며 제니가 다이더러 학교가 끝나면 자기 집에 같이 가서 잠도 같이 자자고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엄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고, 다이는 서럽게 울었다.

“퍼시스 포드네 집에 가서는 자게 해주었잖아요.”

다이는 흐느껴 울며 하소연했다.

“그 경우와는 달라.”

앤은 좀 애매하게 대답했다. 앤은 다이를 거만한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페니 집안에 관해서 들은 말이 있어 그 집안 아이들을 ‘잉글사이드’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하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앤은 요즘 다이가 너무 제니에게 빠져 있어 큰 걱정이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예요. 제니도 퍼시스만큼이나 숙녀라고요. 제니는 가게에서 산 껌 같은 것은 절대로 씹지도 않아요. 예의범절을 모두 알고 있는 사촌언니가 있어서 제니도 모조리 배웠대요. 너희들은 예절을 모른다고 제니가 말했어요. 그리고 제니는 굉장히 신나는 모험을 했어요.”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수잔이 물었다.

“제니가요. 제니네 식구들은 부자가 아니지만 친척들은 모두 굉장히 부자에다 유명한 사람이 많대요. 제니에게는 판사인 삼촌도 있고 제니 엄마네 사촌은 세상에서 가장 큰 배의 선장이래요. 그 배가 처음으로 항해를 나설 때 제니가 그 배 이름을 지어주었대요. 우리에게는 판사인 삼촌도 표범 나라로 간 선교사 고모도 없잖아요.”

“표범 나라가 아니라 문둥병 환자의 나라란다.”

“제니가 표범이라고 말했어요. 제니네 고모니까 제니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니네 집에는 멋진 물건이 아주 많다고 해요. 나도 보고 싶단 말이에요. 제니 방은 앵무새 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고, 응접실에는 박제 올빼미가 있대요. 그리고 복도에는 융단이 깔려 있대요. 창문 블라인드는 장미로 덮여 있구요. 안에 들어가 놀 수 있는 진짜 집 같은 놀이집도 있대요. 제니 아저씨가 만들어준 거래요. 그리고 할머니도 같이 사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래요. 제니가 그러는데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살았대요. 난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살았다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 집 할머니가 거의 백 살이나 먹었다는 소리는 나도 들었지만, 제니가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살았다고 했다면 그건 허풍을 떤 거야. 그런 집에 드나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수잔이 말했다.

“그 집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걸릴 병은 다 걸려버렸다고 했어. 볼거리, 홍역 그리고 백일해, 성홍열을 일 년 만에 다 치러버렸대.”

다이가 항의했다.

“천연두도 걸렸다고 했겠지. 마법에 걸렸다고는 안 했나.”

수잔이 중얼거렸다.

다이는 흐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제니는 편도선도 잘라내 버렸대요. 하지만 그것은 전염되는 병이 아니죠? 제니의 사촌은 편도선을 잘라내다 죽었대요. 피가 펑펑 쏟아져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죽어버렸대요. 그러니까 그게 유전된다면 제니도 그렇게 될지 몰라요. 그 애는 몸이 약해요. 지난주에도 세 번이나 기절했대요. 그래도 제니는 각오가 대단해요. 그런 까닭도 있어서 제니가 날 그렇게 초대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요. 우리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 제니가 죽어서도 나를 추억할 수 있잖아요. 제발 엄마, 나를 제니네 집에 보내주면 엄마가 사준다고 약속한 장식 리본 달린 새 모자를 안 사줘도 돼요.”

그러나 엄마는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아서 다이는 눈물을 쏟으며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낸도 그런 다이를 동정해주지 않았다. 낸은 제니 페니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대체 저 아이 머릿속에 뭐가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수잔의 말대로 그 페니 집안 여자아이가 우리 다이에게 마법이라도 씌워버렸나 봐요.”

앤이 말했다.

“그나저나 다이를 그런 지체 낮은 집에 보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에요, 사모님.”

“어머나, 수잔. 다이에게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지체 높은 사람이란 생각은 심어주고 싶지 않아요. 그 누가 되었건요. 하지만 분명히 적당한 선은 그어두어야 할 것 같아요. 제니도 그렇게 무엇이든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만 아니면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 집 남자아이들은 정말로 다루기 힘들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모브레이 내로우즈 학교 선생님도 그 아이들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곤란을 겪고 있대요.”

“가족들이 너를 그렇게 못살게 구니? 난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대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난 아주 배짱이 두둑하다고. 난 내가 원하기만 하면 문밖에 나가 잠을 자도 돼. 넌 그런 일을 꿈도 꾸어보지 못했겠구나.”

엄마가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다이가 말하자, 제니는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다이는 이 신비로운 소녀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밤새 문밖으로 나가 잠을 잘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가!
“너희 집에 가지 못한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않겠지, 제니? 내가 얼마나 가고 싶어 하는지 너도 알잖아, 그치?”
“물론 난 너를 원망하지 않아. 하기야 어떤 여자아이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기도 하지. 난 이해할 수 있어. 너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우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 달밤에 집 뒤에 있는 개울로 낚시 갈 계획도 세워두었는데. 우리는 밤이면 자주 낚시를 나가거든. 나는 이만큼 기다란 송어를 낚은 일도 있어. 그리고 우리 집에는 아주 귀여운 돼지도 있고, 아주 귀여운 강아지랑 망아지도 새로 태어났어. 그렇지만 할 수 없지. 난 새디 테일러에게 같이 가자고 해야겠다. 새디 엄마랑 아빠라면 새디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해줄 거야.”

“우리 엄마와 아빠도 나한테 아주 잘해줘. 그리고 우리 아빠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다이는 충성스럽게 항의했다.

“난 엄마 아빠가 없는데 너는 있다고 지금 뻐기는 거니? 우리 아빠는 날개가 달렸고 언제나 황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지만 난 자랑하지 않잖아. 내가 그걸 자랑하는 것 봤어? 자, 다이, 난 너랑 다투기 싫어. 하지만 난 자기 엄마 아빠 자랑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해. 그건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야. 나는 숙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네가 늘 이야기하는 그 퍼시스 포드가 올여름에도 포 윈즈에 오더라도 나는 그런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거야. 그 애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우리 리나 큰엄마가 그랬거든. 그 아줌마는 죽은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그 사람이 되살아났대.”

“어머나, 그렇지 않아, 제니. 나는 그 이야기를 다 알아. 우리 엄마가 다 말해주었어. 레슬리 아줌마는…….”

“그런 사람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아, 다이. 시작종이 울렸다.”

“너 정말 새디에게 가자고 할 거야?”

다이는 속이 상해 목소리가 갈라지고 눈이 커진 채 물었다.

“글쎄, 지금 당장은 아니야.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야. 너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어보고.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며칠 후 쉬는 시간에 제니 페니가 다이에게 다가왔다.

“내가 젬에게 들었는데 너희 엄마와 아빠가 어제 어디 가셨다면서? 내일 밤까지는 돌아오시지 않겠지?”

“그래, 마릴라 할머니를 보러 에이번리에 가셨어.”

“그럼 너한테 기회가 온 거야.”

“기회라고?”

“나와 함께 밤을 새울 기회.”

“오, 제니……. 난 그럴 수 없어.”

“물론 할 수 있어. 아기처럼 굴지 마. 네 엄마 아빠는 절대로 모를 거야.”

“하지만 수잔 아줌마가 날 보내주지 않을 거야.”

“아줌마한테는 허락받을 필요도 없어. 학교가 끝나면 곧장 나와 함께 우리 집에 가는 거야. 낸이 네가 어디 갔는지 집에 이야기할 테니까 아줌마가 걱정하는 일도 없을 거고. 그리고 아줌마는 네 부모님에게 고자질하지도 않을 거야. 그랬다간 자기만 혼날 텐데 그런 고자질을 하겠어?”

다이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고민하며 서 있기만 했다. 제니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제니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다이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야. 난 우리 집에 가기에는 자기가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는 아이랑은 어울릴 수 없다고.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으면 넌 나와는 영원히 절교야.”
제니는 아주 극적으로 말했다.

그 말에 다이는 마음을 정해버렸다. 여전히 제니의 환상에 젖어 있는 다이로서는 제니와 영원히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낸은 혼자 집으로 돌아왔고, 수잔에게 다이는 제니 집에서 잘 거라고 했다.

수잔이 여느 때처럼 몸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바로 페니네 집으로 쫓아가 다이를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수잔은 그날 아침 발목을 삐어 잘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들 식사 준비도 절룩거리며 겨우 해서 베이스 라인까지 1.5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페니 집에는 전화도 없었고 젬과 월터는 그 집에 가서 다이를 데려오길 단호히 거절했다. 둘은 등대 홍합 구이 파티에 가야 한다고 했다. 페니네 집 사람들이 다이를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 수잔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와 제니는 500미터 정도 더 둘러가야 하지만 들판을 지나가기로 했다. 다이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즐거웠다. 주변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짙푸른 숲 끄트머리 움푹 들어간 곳에는 요정들이 노는 작은 고사리 숲이 있고, 바람이 살랑거리는 골짜기를 지나면서는 무릎까지 오는 미나리아재비 꽃밭을 걸었다. 어린 단풍나무들이 자라는 구불구불한 오솔길도 지나고, 무지갯빛 스카프를 두른 것 같은 개울도 지났으며, 딸기가 지천으로 널린 양지바른 목초지도 지났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다이는 황홀한 기분에 빠져 제니가 저리 떠들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다 재미있었지만 지금 여기서는 제니가 독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잘못 알고 다른 약을 마셨다고 했다. 제니는 자기가 당한 죽음의 괴로움을 훌륭하게 묘사했지만 그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설명이 아리송했다.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의사가 죽기 직전에 살려주었다나.

“하지만 그 뒤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야, 다이 블라이드. 너는 뭘 멍하니 보고 있니? 내 얘기를 하나도 듣고 있지 않구나?”

“어머나, 듣고 있었어. 넌 정말로 멋진 인생을 살았어, 제니. 하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을 좀 보라구.”

다이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풍경이라고? 무슨 풍경?”

“어머, 어쩜,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들 말이야. 저것들…….”

다이는 목장이며 숲, 저 앞에 구름에 묻힌 언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 그리고 언덕 사이로 움푹 들어가 보이는 사파이어 빛 바다를 손짓해 보였다.

제니는 흥하고 무시해버렸다.

“나무랑 소가 엄청 많은 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난 저런 것들은 백 번도 더 봤어. 이제 보니 너 엄청 이상한 애구나, 다이 블라이드. 난 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네가 정신이 좀 빠져나간 아이처럼 보여. 하지만 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사람들이 그러는데 너희 엄마도 원래 좀 그렇다고 하더라. 아, 저기가 우리 집이야.”

다이는 페니네 집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환멸의 비애를 맛보았다. 이것이 제니가 말하던 ‘저택’이란 말인가? 분명히 커다란 집이긴 했다. 내닫이창도 다섯 개가 있긴 했지만 너무나 흉한 꼴이어서 페인트칠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목제 레이스 장식’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 베란다는 군데군데 푹 꺼져 있었고, 현관문 맨 위에 난 부채꼴 채광창도 한때는 아름다운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너무 낡고 다 부서졌다. 블라인드는 뒤틀렸고, 창문에는 유리창 대신 갈색 종이가 발라져 있었으며, 집 뒤에 있다는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이라는 것도 가느다랗고 볼품이라고는 없는 늙은 나무 몇 그루를 말한 것이었다.

헛간들도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뜰에는 녹슨 고장 난 기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며, 정원은 그야말로 완전히 풀밭이었다. 다이는 평생 이런 집은 보지도 못했다. 이제야 처음으로 제니가 그동안 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인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아홉 살짜리 아이가 제니가 주장한 것처럼 그렇게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겪을 수 있었을까?

집 안이라고 해서 별로 나을 것도 없었다. 제니를 따라 들어간 응접실은 온통 곰팡이가 끼었고 먼지투성이였다. 천장은 색깔이 바랬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그 유명하다는 대리석 벽난로는 단지 대리석처럼 칠한 것일 뿐인 것을 다이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몹시 보기 흉한 일본 천을 늘어뜨리고 군데군데 ‘콧수염 컵13)’을 올려놓았다. 창문에 드리워진 싸구려 레이스 커튼도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숭숭 구멍이 나 있었다. 블라인드는 커다란 장미꽃 바구니가 그려진 파란색 종이로 된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도 여기저기 찢어지고 구겨져 있었다. 박제 올빼미가 가득하다던 응접실로 말할 것 같으면 한쪽 구석에 털이 부스스한 새 세 마리가 든 유리 상자가 있긴 했다. 그중 한 마리는 한쪽 눈이 아예 없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잉글사이드’에 익숙한 다이에게는 이 방이 그야말로 악몽에 나오는 방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니였다. 자기 이야기와 실제와의 차이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다이는 자기가 제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집 밖으로 나오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문비나무가 자리한 구석에 페니 씨가 만들어놓은 작은 놀이 집은 진짜 집처럼 보여 무척 흥미로웠고, 작은 아기 돼지랑 갓 태어난 망아지도 귀여웠다. 잡종 강아지들도 털이 북슬북슬한 것이 너무 귀엽고 활발해 명견 비어 드 비어 종처럼 보였다. 강아지들 중에는 갈색 귀가 길게 늘어지고 이마에 흰 점이 있으며 작은 분홍빛 혀에 하얀 앞발을 가진 너무나 사랑스러운 놈이 있었다. 하지만 강아지들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주기로 약속되어 있다고 하여 다이는 실망이 컸다.

“남은 강아지가 있다고 해도 너한테는 줄 수 없을걸. 우리 삼촌 말로는 ‘잉글사이드’에서는 개를 기를 수 없대. 너희 집에는 뭔가 이상한 것이 있나 봐. 우리 삼촌 말로는 개는 사람이 모르는 일도 알 수 있대.”

제니가 말했다.

“우리의 나쁜 점을 개가 알 리 없어.”

다이는 소리쳤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혹시 너희 아빠가 엄마에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니?”

“아니. 우리 아빠가 그럴 리 없지.”

“글쎄, 내가 듣기로는 네 아빠가 엄마를 때린다고 하던데. 소리를 꽥꽥 지를 때까지. 하지만 물론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지. 사람들은 참 끔찍한 거짓말을 잘도 하지 않니? 어쨌거나 난 너를 좋아해, 다이. 그리고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 거야.”

다이는 그 말에 고맙다고 해야 했지만, 왠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이는 지금 자기가 제니네 집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낯설었고 제니가 던져준 마력은 별안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제니가 물레방앗간 웅덩이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도, 천 달러나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도, 표범들 속에서 전도하고 있다는 고모도 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니가 한 이야기들이 다 그저 제니의 상상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다이는 풍선을 바늘로 찔러 터트린 것처럼 맥이 빠져버렸다. 그러나 할머니가 아직 있다. 할머니는 분명히 진짜일 것이다. 다이와 제니가 집 안으로 돌아오자 더러운 무명옷을 입은 가슴이 크고 뺨이 붉은 리나 큰엄마가 할머니 방으로 가보라고 했다. 할머니가 손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해. 그래서 손님이 오면 할머니에게로 데려간단다. 안 그러면 할머니가 굉장히 화를 내거든.”

제니가 설명했다.

“할머니에게 허리 아픈 것은 좀 어떠냐고 여쭈어보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 사람들이 할머니 허리가 아프다는 걸 기억해주지 않으면 싫어하시잖아.”

리나 큰엄마가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존 삼촌도. 존 삼촌이 어떻게 지내는지 묻지 않아도 화를 내셔.”

제니가 말했다.

“존 삼촌은 누군데?”

다이가 물었다.

“5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할머니 아들이야. 죽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았지. 사람들이 볼 때마다 존 삼촌은 좀 어떠냐고 물어서 할머니는 그 말에 너무 익숙해져 아직도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신단다.”

리나 큰엄마가 설명했다.

할머니 방문 앞에서 다이는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살았다는 할머니가 갑자기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왜 그래? 아무도 널 깨물거나 하지는 않아.”

제니가 다그쳤다.

“할머니, 네 할머니는 정말로 노아의 홍수 전부터 살았니, 제니?”

“물론 아니지. 누가 그런 소리를 해? 할머니는 이제 백 살이 될 거야. 다음 생일날까지 산다면. 자 들어가자.”

다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작고 허름한 침실 커다란 침대에 한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할머니 얼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쪼글쪼글 주름이 져 있어 꼭 늙은 원숭이 얼굴 같았다. 할머니는 붉게 테두리가 생긴 쑥 들어간 눈으로 다이를 뻔히 들여다보면서 시험하듯 물었다.

“그만 좀 봐라. 넌 누구니?”

“이 아이는 다이애나 블라이드예요, 할머니.”

제니가 좀 얌전하게 대답했다.

“어이구! 참 고상하기도 한 이름이구나! 사람들이 그러는데 네 언니가 참 거만하다면서.”

“낸은 거만하지 않아요.”

다이가 화가 나서 외쳤다. 제니가 낸을 흉보고 다닌 모양이었다.

“너도 좀 건방진 아이구나. 난 어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네 언니는 아주 건방져. 누구든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 그래. 우리 제니가 네 언니가 그러고 다닌다고 얘기를 하더구나. 잘난 척하지 말고, 나한테 말대답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할머니가 무척 화가 난 듯해서 다이는 얼른 허리는 좀 어떠냐고 물었다.

“누가 내가 허리가 아프다고 그러든? 넘겨짚기는! 내 허리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이리로 좀 다가오너라. 내 침대로 가까이 좀 와 봐.”

다이는 저 할머니한테서 천리만리 달아나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가갔다. 도대체 저 끔찍하게 생긴 할머니가 왜 나더러 가까이 와 보라고 하는 것일까?

할머니는 자기 몸을 침대가로 바짝 당기더니 발톱 같은 손으로 다이의 머리를 만졌다.

“홍당무 같은 빛깔이지만 윤기가 자르르 하구나. 그리고 예쁜 옷이야. 옷을 좀 걷어 올리고 페티코트를 보여줘 봐.”

다이는 수잔이 뜬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른 흰 페티코트를 입고 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페티코트를 보여 달라니 도대체 이 집안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난 항상 페티코트로 여자아이를 판단한다. 너는 되었어. 이제 팬티를 보여줘 봐.”

할머니가 말했다.

다이는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다이는 페티코트를 걷어 올렸다.

“어이구! 팬티에도 레이스가 달렸네! 이건 사치야. 그리고 넌 우리 존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어.”

“그분은 어떠세요?”

다이가 얼른 물었다.

“이 아이가 뻔뻔스럽게도 지금 존이 어떠냐고 묻고 있구나. 모두 알다시피 존은 죽었다. 그건 그렇고,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엄마가 순금 골무를 가지고 있다는 게 사실이냐?”

“네, 지난번 엄마 생일에 아빠가 주셨어요.”

“그렇구나. 나는 믿지 않을 뻔했지. 제니가 내게 그런 말을 했지만 제니가 한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순금 골무라니! 난 그런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어. 자, 이제 가서 저녁을 먹어라. 식사는 제시간에 해야 해. 제니, 팬티 좀 올려 입어라. 한쪽이 옷 밑으로 나왔잖니. 우리도 좀 우아하게 살아보자.”

“내 팬티, 아니 속바지는 내려오지 않았어요.”

제니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페니한테는 팬티고, 블라이드한테는 속바지다. 너한테는 그런 말이 어울리고, 언제나 그럴 거야. 내게 말대꾸는 하지 마라.”

식사 시간이 되자 페니네 가족 모두 커다란 부엌에 놓인 식탁에 둘러앉았다. 다이는 리나 큰엄마를 빼놓고는 모두들 처음 보았지만 한번 돌아보고는 왜 엄마와 수잔이 자기를 여기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단박에 알았다. 식탁보는 너덜너덜하고 온통 얼룩투성이였다. 식기는 짝이 제대로 맞는 것이 하나도 없이 여기저기서 모은 것들이었다. 페니 집안사람들은……. 다이는 자기가 무사히 ‘잉글사이드’로 돌아갈 수 있기만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제니가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벤 아저씨가 식탁 윗자리에 앉았다. 불타는 듯 붉은 턱수염을 길렀고 벗어진 머리통을 흰 머리칼이 에워싸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벤 아저씨의 동생 파커 아저씨는 홀쭉한 몸에 수염만 덥수룩한 모습이었고, 침 뱉기 적당한 장작 통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연신 침을 뱉었다.

열두 살 된 남자아이인 커트와 열세 살 조지 앤드루는 파란 물고기 같은 눈으로 다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너덜너덜한 셔츠 구멍으로 맨살이 보였다. 커트는 깨진 병에 손을 베어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피가 배어나 붕대가 빨갰다.

열한 살인 애너벨 페니와 열 살인 거트 페니는 동그란 갈색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녀들이었다. 리나 큰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두 살 먹은 터피는 아주 예쁜 곱슬머리에 장밋빛 뺨과 장난기가 가득한 검은 눈을 가진 모습이 깨끗하기만 하다면 무척이나 귀여웠을 것 같았다.

“커트, 손님이 올 줄 알았으면 손톱을 깨끗하게 씻었어야지.”

제니가 다그쳤다.

“애너벨, 입에 음식을 넣고 말하면 안 되잖아. 이 집에서 매너라는 걸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단다.”

제니는 다이에게 설명했다.

“입 닥치지 못해.”

벤 아저씨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싫어요. 큰아버지는 내 입을 다물게 못 해요.”

제니가 외쳤다.

“큰아버지한테 말대꾸하지 마라. 자, 숙녀답게 행동해야지. 커트, 미스 블라이드에게 감자 좀 건네주렴.”

리나 큰엄마가 차분하게 말했다.

“오호, 미스 블라이드라구요?”

커트가 실실거렸다.

다이도 그 한 가지만큼은 무척이나 기뻤다. 평생 처음으로 미스 블라이드라고 불렸다.

기대하지도 못했지만 음식은 무척 맛있고 풍성했다. 다이는 배가 고파서 식기들이 깨끗하기만 했다면 충분히 식사를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빠진 컵은 정말 싫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싸워대지만 않았다면. 이 집 사람들은 서로가 쉴 새 없이 싸워댔다. 조지 앤드루와 커트, 거트와 애너벨, 거트와 제니, 그리고 벤 아저씨와 리나 큰엄마조차 그랬다. 식구들은 모두 무섭게 싸워대면서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비난을 해댔다. 리나 큰엄마는 벤 아저씨에게 자기가 결혼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남자 이름을 모조리 댔고, 벤 아저씨는 벤 아저씨대로 누구라도 좋으니 자기 이외의 사람과 결혼해주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 아빠와 엄마가 저렇게 싸운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아, 당장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이는 생각했다.
“엄지손가락을 빨면 안 돼, 터피.”

다이는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 말을 해버렸다. 릴라가 엄지손가락을 빨지 않게 하려고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커트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터피를 내버려둬. 터피가 손가락을 빨고 싶다면 빨아도 된다고. ‘잉글사이드’ 애가 어디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니가 대체 뭔데 그러는 거야?”

“커트, 커트! 미스 블라이드가 널 예의도 모르는 애라고 생각할 거 아니니.”

리나 큰엄마는 다시 차분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벤 아저씨의 찻잔에 설탕을 두 숟가락 넣어주며 말했다.

“저 애는 신경 쓰지 마라. 파이 한 조각 더 먹겠니?”

다이는 파이를 더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단지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집에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벤 아저씨는 차를 마지막 방울까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 마시자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오늘 하루도 다 끝났군. 아침에 일어나 온종일 일하고 세 끼 식사를 마치면 잠자리에 드는 게 다라니. 무슨 생활이 이렇담!”

“아저씨가 즐겨하는 농담이란다.”

리나 큰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담이라고? 농담이라면 이런 게 농담이지. 오늘 플래그네 가게에서 감리교회 목사를 만났어. 내가 신은 없다고 하자 그 목사가 반박을 하더군. 그 목사에게 말했지. ‘당신은 주일에 말하지. 지금은 내가 말을 좀 하겠소.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해보라고.’ 그러자 목사는 ‘지금은 당신이 말 좀 하자면서.’ 그러잖아. 모두들 바보처럼 웃어대더군. 그 목사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느님이 없다니! 다이의 세계의 중심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이는 울고 싶었다.


13. 코밑수염이 젖지 않게 안에 수염 받침대가 있는 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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