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29~30

나단비 | 2024.04.12 07:15:38 댓글: 0 조회: 4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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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페니 아이들이 더욱 사나워졌다. 저녁 식사 전에는 적어도 제니와 둘이서만 있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꼴이었다. 조지 앤드루는 다이의 손을 움켜잡고 달아날 사이도 없이 흙탕물 웅덩이를 뛰어넘게 했다. 젬이랑 월터도 다이를 놀리기는 했다. 켄 포드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이런 남자아이들은 생전 처음 본다.

커트는 씹던 껌을 꺼내 다이에게 주었다. 다이가 거절하자 몹시 화를 냈다.

“네 입에 살아 있는 쥐를 처넣어버리겠어. 넌 이제 죽었어, 죽었다고. 너희 오빠는 겁쟁이지?”

커트가 소리쳤다.

“월터는 겁쟁이가 아니야.”

다이가 말했다. 무서워서 속이 울렁거렸지만 월터를 욕하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녀석은 시 나부랭이를 쓰잖아. 우리 집에 시 같은 걸 쓰는 놈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 물에 빠뜨려버릴 거야. 고양이 새끼처럼 말이야.”

“맞아, 새끼 고양이! 헛간에 들고양이 새끼가 잔뜩 있어. 가서 몰아내자.”

제니가 말했다.

다이는 이런 남자아이들과 고양이를 잡으러 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런 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 집에는 새끼 고양이가 아주 많아. 열한 마리나 있다고.”

다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믿어! 그럴 리 없어! 고양이 새끼가 열한 마리나 있는 집이 어디 있어. 고양이가 새끼를 열한 마리나 낳을 리는 없다고.”

제니가 소리쳤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다섯 마리를 낳았고, 또 다른 고양이가 여섯 마리를 낳았어. 난 헛간에 안 갈 거야. 작년 겨울에 에이미 테일러네 헛간 지붕에서 떨어졌어. 건초 더미 위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난 아마 죽었을 거라고”

“나도 헛간 지붕에서 떨어졌어. 커트가 날 잡지 못했으면.”

제니는 기분이 나빠져서 말했다. 자기 말고는 아무도 헛간 지붕에서 떨어질 권리가 없었다. 그런데 다이가 그런 모험을 하다니!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떨어질 뻔했었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다이가 말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다이와 제니 사이는 끝나버렸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날 밤은 이 집에서 지내야만 했다. 모두들 밤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페니 식구들은 아무도 일찍 자는 사람이 없었다. 10시 30분이 되자 제니는 다이를 침대 두 개가 놓인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침대 하나에서는 애너벨과 거트가 들어가 잘 준비를 했다. 다이는 다른 침대를 바라보았다. 베개가 몹시 더러워 보였다. 이불도 빨아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벽지, 그 유명한 ‘앵무새 그림’ 벽지는 얼룩이 져서 앵무새가 앵무새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침대 옆 탁자 위에는 돌 주전자와 더러운 물이 반쯤 담긴 찌그러진 양철 세숫대야가 놓여 있었다. 다이는 거기에 얼굴을 씻을 마음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평생 처음 다이는 얼굴도 씻지 않고 잠을 자야 할 모양이었다. 그래도 리나 큰엄마가 가져다준 잠옷만큼은 깨끗했다.

다이가 기도를 하고 일어나자 제니가 비웃었다.

“세상에나, 넌 참 구식이구나. 기도를 다 하다니, 너무 웃기고 너무 거룩하다. 요즘도 기도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도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기나 하니? 뭐라고 기도했어?”

“내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어.”

다이는 수잔의 말을 그대로 흉내 냈다.

“내겐 영혼이 없는데.”

제니가 조롱했다.

“넌 영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있어.”

다이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니가 다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니의 눈에 서렸던 마법은 이미 깨져버렸고, 다시는 다이가 그 마법에 무릎을 꿇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 이제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아이가 아니구나, 다이애너 블라이드.”
제니가 속았다는 듯이 슬프게 말했다.

그 말에 다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조지 앤드루와 커트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조지 앤드루는 탈을 쓰고 있었다. 코가 엄청나게 큰 끔찍한 꼴이었다. 다이는 비명을 질렀다.

“문에 깔린 돼지처럼 소리 좀 지르지 마! 너 우리에게 굿 나이트 키스를 해줘야지.”
조지 앤드루가 명령했다.

“안 그러면 널 저 벽장에다 가둬버릴 거야. 저기 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커트가 위협했다.
조지 앤드루가 다이에게로 와서, 다이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탈이 너무 무서워 몸이 오므라들 지경이었다. 탈 뒤에 있는 것은 조지 앤드루라는 것을 알고 조지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저 끔찍한 탈이 자기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그 끔찍한 코가 얼굴에 와 닿는 순간 다이가 의자에 걸려 뒤로 나자빠져버린 것이다. 넘어지면서 애너벨의 날카로운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순간 몹시 어지러워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죽었어, 죽어버렸어.”
커트가 코를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조지 앤드루, 저 애가 정말로 죽었는지 한번 핥아봐.”
애너벨이 말했다.

“저 아이가 일부러 죽은 척하는 건지도 몰라. 저 애 몸 위에 벌레를 올려놓아 보자. 내가 여기 캔에 몇 마리 넣어놨거든. 꾀병을 부리는 거라면 벌레가 저 아이를 다시 살려낼 거야.

커트가 말했다
다이는 이 말을 다 들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날 가만두고 모두들 가버릴 거야. 그렇지만 정말로 내 위에 벌레를 올리면 어쩌지…….)

“핀으로 찔러보자. 피가 나오면 죽지 않은 거야.”

커트가 말했다.

(핀이야 참을 수 있지만 벌레는 아니지.)

“저 애는 죽은 게 아니야. 죽었을 리가 없어. 너희들이 너무 겁을 줘서 발작을 일으킨 거야. 다시 깨어나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워서 큰아버지가 우리를 엄청 혼낼 거야. 저 애를 데려오지 말 걸 그랬어. 바보 겁쟁이 같으니라고.”

“저 애가 깨어나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조지 앤드루가 제안했다.

(오, 제발 그래 주기만 한다면!)

“그럴 수 없어. 그렇게 멀리는 못 가.”

제니가 말했다.

“지름길로 가면 금방 갈 수 있어. 우리가 모두 팔을 하나씩 붙들고 가면 된다고. 커트랑 나랑 애너벨이랑.”
페니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해내지 못했으리라. 또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진짜로 실행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자기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뭐든 실행에 옮기는 아이들이었고, 집 안의 가장에게 혼찌검이 나는 일만큼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아빠는 어느 선까지는 개의치 않고 잠을 잘 것이다.

“저 애를 데리고 가는 중에 정신을 차리면 그냥 내버려두고 냅다 도망쳐버리면 돼.”

조지 앤드루가 말했다.

다이가 정신을 차릴까 봐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네 아이들이 자기 몸을 들어 올리자 다이는 너무도 고마워서 몸이 다 떨렸다. 아이들은 발소리를 죽여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 밖으로 나왔다. 뒤뜰을 지나 기다란 클로버 들판을 넘어 숲을 지나고 언덕을 내려갔다. 아이들은 쉬려고 두 번이나 다이를 내려놓아야 했다. 이제 아이들은 다이가 죽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고,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다이를 얼른 제 집으로 데려다 놓기만 원할 뿐이었다.

제니 페니는 평생 기도를 해본 일이라고는 없었지만 지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만일 다이 블라이드를 집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잠잘 때가 되자 다이가 몹시 집에 가고 싶어 했다고 해버리면 만사 다 해결이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기들은 절대로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묘책을 짜내는 동안 다이는 용감하게 눈을 한 떠보았다. 잠들어 있는 세상은 다이에게 아주 낯설어 보였다. 울창한 전나무도 어둑하고 서먹서먹했으며 별은 비웃듯이 다이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저렇게 큰 하늘은 싫어.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집에 돌아갈 수 있어. 만일 저 아이들이 내가 죽은 게 아니란 걸 알아버리면 나를 여기에 버려둔 채 가버릴 테고, 이렇게 어두운데 나 혼자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페니네 아이들은 다이를 ‘잉글사이드’의 베란다에 내던지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다이는 감히 금방 되살아나려고 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용기를 내 눈을 떴다. 정말 집이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반가웠다. 오늘 다이는 너무, 너무나 못된 짓을 저질렀지만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이는 일어나 앉았고 슈림프가 살그머니 계단을 올라와 가르랑거리며 몸을 비벼댔다. 다이는 슈림프를 꼭 안았다.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빠가 집에 없으니 수잔이 문을 모두 잠가버렸을 것이다. 이 시간에 감히 수잔을 깨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6월이라도 밤엔 좀 춥긴 하지만 그물침대에서 슈림프를 껴안고 자면 된다. 그리고 문은 잠겼지만 저 문 뒤에는 수잔이랑 오빠랑 낸 그리고 집이 있다.
어두워진 세상은 정말로 이상했다! 나 말고는 모두 잠들어 있을까? 층계 옆 덤불에 핀 커다란 흰 장미는 밤에 보니까 작은 사람 얼굴처럼 보였고, 박하 향기는 다정한 친구 같았다. 과수원에서 반딧불이 반짝였다. 결국 다이도 하룻밤 ‘문밖에서 나와 잤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검은 그림자 둘이 대문으로 들어와 보도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길버트는 뒤꼍으로 돌아가 부엌 창문을 억지로 열어보려고 했고, 층계로 올라선 앤은 고양이를 안고 앉아 있는 조그만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엄마, 아, 엄마.”

다이는 엄마의 품에 안겼다.

“다이! 이게 어찌 된 일이니?”

“엄마, 내가 나빴어요. 죄송해요. 엄마 말이 맞아요. 할머니는 너무 무서웠어요. 하지만 난 엄마가 내일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로브리지에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단다. 내일 파커 부인이 수술을 받아야 한대. 파커 선생님이 와달라고 하셔. 그래서 저녁 기차를 타고 와서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거란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해봐.”

길버트가 현관문을 열어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다이는 훌쩍거리며 오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길버트는 아주 조용하게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잉글사이드’의 안전에 관한 문제라면 수잔의 귀는 박쥐가 찍찍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다. 수잔이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절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놀라 비명을 지르고 변명이 이어졌지만 앤이 조용히 괜찮다고 했다.

“아무도 수잔을 비난하지 않아요. 다이가 아주 못되게 굴었지만 다이도 그걸 깨달았으니 이미 벌은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잠을 깨워서 미안해요, 수잔. 얼른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워요. 의사 선생이 수잔 발목을 좀 봐야겠네요.”

“난 잘 수가 없었어요, 사모님. 저 아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잠을 잘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내 발목이고 뭐고 사모님이랑 선생님에게 차는 한 잔 드려야죠.”
“엄마, 아빠가 언제 엄마에게 심하게 군 적이 있어요?”
다이가 하얀 베개에 머리를 누이며 물었다.

“심하게 굴다니! 내게? 그런 건 왜 묻는 거니, 다이?”

“페니 아이들이 아빠가 그랬대. 아빠가 엄마를 때렸대.”

“아가야, 너도 이제는 페니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다 알지 않니? 그러니까 그 애들이 한 말로 걱정할 필요 없단다. 어떤 곳이나 좀 나쁜 마음을 먹고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야. 페니 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말들처럼. 그런 것에는 마음 쓸 필요가 없단다.”

“아침이 되면 날 야단칠 거예요, 엄마?”

“아니야. 난 네가 이미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해. 이제 자거라, 우리 예쁜 아가.”

‘엄마는 아주 현명해.’

다이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픈 발목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편안하게 다리를 뻗고 누운 수잔은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내일 아침에 내가 참빗을 찾아내서 그 제니 페니를 만나면 절대로 잊지 못할 만큼 혼찌검을 내줄 거야.”

하지만 제니 페니는 혼찌검을 면했다. 그 뒤로 제니는 글렌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페니 아이들과 함께 모브레이 내로우즈 학교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거짓말들이 들려왔다. 그중에는 다이 블라이드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다이는 글렌 세인트 메리의 ‘커다란 집’에 살고 있는데 늘 제니네 집에 와서 자고 갔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다이가 기절해 제니가 한밤중에 업어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란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잉글사이드’ 사람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자기 손에 감사의 입맞춤을 했고, 의사 선생은 그 유명한 회색 천으로 지붕을 덮은 멋진 마차로 자기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고 했다.

“미스 페니, 내 사랑하는 자식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대가로 뭐든 해주고 싶으니 뭐 부탁할 일이 있으면 말만 하세요. 내 심장에서 나온 피로도 미스 페니의 은혜를 갚는 데 충분치 않을 거예요. 내게 해준 일을 생각한다면 아프리카 적도에라도 가겠어요.”

의사 선생이 그렇게 맹세까지 하더라고 했다.





30






도비 존슨이 부두 끄트머리에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노래 부르듯 지껄여댔다.

“난 네가 모르는 일을 알고 있어. 넌 모르는 일이라고. 넌 모르는 일이야.”

이번에는 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차례였다. 몇 해 뒤에 회고될 ‘잉글사이드’의 추억담에 낸이 이야기 하나를 더 보탤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낸은 이 일을 죽는 날까지도 부끄럽게 기억할 것이다.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있어서.

낸은 도비가 그렇게 간당간당하게 부두 끄트머리를 오락가락하는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마음이 끌렸다. 저러다가 틀림없이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버릴 거야. 하지만 도비는 바다에 빠지지 않았다. 도비는 언제나 운이 좋은 아이였다.

도비의 말과 행동은 전혀 일치되지 않았지만, 우스갯말 하나도 사실이 아니면 뱉지 않는 ‘잉글사이드’에서 자란 낸은 너무나 순진하고, 아무나 쉬이 믿어버리는 아이라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낸은 도비에게 환상 같은 걸 갖고 있었다. 나이가 열한 살인 도비는 샬럿타운에 사는 아이고, 이제 여덟 살인 낸보다 아는 것도 더 많았다. 도비는 샬럿타운에서 사는 사람만이 뭔가를 제대로 안다고 했다. 글렌 세인트 메리 같은 시골에 틀어박혀 살아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나.

도비는 방학 동안 글렌 마을에 사는 엘라 아주머니네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나이는 달라도 도비와 낸은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낸이 도비를 몹시 숭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낸의 눈에는 도비가 거의 어른으로 보였고, 누구나 최고의 것을 보거나,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숭배의 마음을 바치지 않을 수 없는 법. 도비는 자기를 숭배하는 이 겸손하고 조그만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낸 블라이드는 해될 게 없어요. 좀 무른 애거든요.”

도비는 엘라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신중한 ‘잉글사이드’ 사람들도 도비에게서 석연치 않은 점은 찾지 못했다. 앤은 도비의 어머니가 에이번리의 파이네 사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만 그것이 낸을 도비와 놀지 못하게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잔은 처음부터 도비의 엷은 황금빛 속눈썹과 구즈베리 같은 초록색 눈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쩔 것인가? 도비는 너무나 예의 바르고 옷도 잘 입고 다녔으며 여자다웠고 수다스럽지도 않았다. 수잔은 자기의 의심을 증명할 길이 없어 잠자코만 있었다. 개학하면 도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번에는 참빗 같은 것은 필요 없을 것이다. 낸과 도비는 틈만 나면 같이 붙어 다녔고 배가 한두 척 날개를 접고 있는 부두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에는 낸이 ‘무지개 골짜기’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잉글사이드’의 다른 아이들은 도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싫어했다. 도비는 못된 장난질로 월터를 놀렸고 그러면 다이가 몹시 화를 내며 ‘항의’했다. 도비는 그런 못된 장난을 참 좋아하는 아이 같았다. 그래서 아마 낸을 제외하고는 글렌의 다른 여자아이들이 도비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발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줘.”

낸이 간청했다.

그러나 도비는 심술궂게 눈을 찡긋할 뿐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낸은 너무 어리다고만 했다. 낸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제발 말을 해줘, 도비.”

“안 돼. 말할 수 없어. 케이트 아주머니가 내게만 말해준 비밀이란 말이야. 그리고 그 아주머니는 죽었어. 이제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야.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해주면 넌 다른 사람에게 말해버릴 거야. 너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아니, 안 해. 어떻게 말해.”

낸이 외쳤다.

“사람들이 ‘잉글사이드’에는 비밀이 없다고 하던걸. 수잔 아줌마가 금세 그걸 너한테서 알아내 버릴 거라고.”

“안 그럴 거야. 난 수잔 아줌마가 모르는 비밀을 많이 갖고 있어. 네가 그 비밀을 나한테 말해주면 나도 그게 뭔지 이야기해줄게.”

“쳇, 난 너처럼 꼬마 아이의 비밀 따위에는 관심 없어.”
도비는 말했다.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다니! 낸은 자기의 작은 비밀들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했다. 낸의 비밀 중에는 테일러 씨네 건초 헛간 뒤쪽에 있는 가문비나무 숲에서 활짝 꽃을 피운 산벚나무를 발견한 것도 있었다. 습지에 핀 연꽃잎 위에 아주 작은 하얀 요정이 누워 있는 꿈을 꾼 것도, 백조가 은사슬로 배를 묶어 항구로 끌고 들어오는 공상을 한 것도, 낡은 매컬리스터 씨네 집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숙녀에 얽힌 이야기를 짓고 있는 것도 모두 낸의 비밀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마법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낸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도비에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도비가 알고 있다는 비밀은 도대체 뭘까? 그 궁금증이 모기처럼 낸을 못살게 했다.

다음 날 또다시 도비는 그 비밀 이야기를 들먹였다.
“내가 다시 생각을 해봤는데, 낸, 이건 너에 관한 이야기니까 네가 반드시 알아야만 될 것 같아. 물론 케이트 아주머니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본인에게야 괜찮지 않겠어? 있잖아, 네 도자기 사슴을 주면 그 비밀을 이야기해줄게.”

“안 돼. 너에게 그걸 줄 수 없어. 수잔 아줌마가 내 생일 선물로 준 거란 말이야. 내가 그걸 너에게 줘버리면 아줌마가 몹시 섭섭해할 거야.”

“좋아. 자기한테 중요한 일을 아는 것보다 도자기 사슴이 더 좋다면 하는 수 없지, 뭐. 나는 괜찮아. 나도 내 비밀을 간직하고 싶으니까. 난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일을 나만 알고 있으면 기분이 무지 좋더라.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거든.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앉아 너를 바라보면서 ‘낸 블라이드, 나만 알고 있는 너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면…….’ 하고 생각할 거야. 무척 재미있겠다.”

“나에 관한 그 비밀은 좋은 일이니?”

낸이 물었다.

“오, 아주 낭만적인 거지. 이야기책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거라고나 할까. 하지만 상관 마. 넌 관심 없다고 하고, 난 나만 알고 있을 거니까.”

이쯤 되자 낸은 궁금해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도비가 알고 있는 비밀을 알지 못하면 살 가치도 없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러자 낸에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도비, 도자기 사슴은 줄 수 없지만 대신 빨간색 양산을 줄게, 그 비밀을 말해줘.”

도비의 구즈베리 초록빛 눈이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그 양산이 무척이나 탐났던 터였다.

“네 엄마가 지난주에 시내에서 사다 준 그 새 붉은 양산 말이니?” 도비도 협상을 시작했다.

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다 가빠왔다. 정말로 도비가 비밀을 이야기해줄까?

“엄마가 허락할까?”

도비가 다그쳤다.

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자기가 어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도비도 낸이 자신 없어 하는 것을 알아챘다.

“네가 그 양산을 여기로 가져오면 말해줄 거야. 양산을 가져오지 않으면 비밀을 말해줄 수 없어.”

도비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내일 가져올게.”

낸은 급히 약속했다. 도비가 자기에 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그것만이 문제였다.

“글쎄, 그럼 한번 생각해 지.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결국은 그 말을 너에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니까. 너는 너무 어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말이야.”
도비가 다시 회의적으로 말했다.

“나는 어제보다 나이를 먹었어, 도비. 심술부리지 마, 응.”
낸은 간절하게 부탁했다.

“내가 아는 것을 말하든 말든 그것은 내 마음이야. 넌 앤에게 말을 해버릴걸. 네 엄마 말이야.”
도비는 윽박지르듯 말했다.

“네가 말 안 해줘도 우리 엄마 이름은 나도 알아. 내가 ‘잉글사이드’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낸이 좀 위엄을 갖추어 말했다. 비밀을 알게 되건 그렇지 못하건 그래도 모든 일에는 한계란 게 있는 법이다.
“너 맹세할 수 있어?”

“맹세라고?”

“앵무새처럼 내 말만 따라하지 말고. 내 말뜻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할 수 있느냐고.”

“엄숙하게 약속해.”

“그것보다 더 엄숙해야 해.”

낸은 어찌해야 그보다 더 엄숙하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해 보였다.

“두 손을 모아 쥐고 하늘을 봐, 가슴에 십자를 그으면서 죽을 수도 있다고 해.”

도비가 말했다.

낸을 그 의식을 치렀다.

“내일 그 양산을 갖고 나와. 내일 보자고. 너희 엄마는 결혼하기 전에 무슨 일을 했지?”
도비가 물었다.

“학교 선생님이었어. 아주 잘 가르쳤지.”
낸이 말했다.

“응, 난 그냥 그게 좀 궁금했어. 우리 엄마는 네 아빠가 네 엄마와 결혼한 건 실수라고 생각한대. 네 엄마가 어느 집안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리 엄마 말로는 네 아빠가 결혼했을지도 모를 다른 아가씨들도 있었대. 나 이제 간다. 오 르부아르.”

낸은 그 말이 ‘내일까지’란 뜻인 걸 알았다. 프랑스 말을 할 줄 아는 친구를 둔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낸은 도비가 집으로 가버리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부두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낸은 원래 이렇게 부둣가에 앉아서 고기잡이배들이 들고나는 것을 바라보고 배들이 항구를 떠나 저 먼 요정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했다. 젬처럼 낸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고 싶었다. 저 푸른 항구를 미끄러져 나가 그림자로 덮인 모래톱을 지나고 밤이면 빙글빙글 도는 빛을 내보내는 등대가 서 있는 곶도 지나리라. 포 윈즈 등대는 신비의 나라 전초지 같은 곳이었다. 저 희끄무레한 푸른 바다 너머로 황금빛 아침 바다에는 마법에 싸인 섬이 있으리라. 낸은 군데군데 무너진 부두에 쪼그리고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저 먼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고는 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는 온통 도비의 비밀 생각뿐이었다. 도비가 정말로 그 비밀을 내게 말해줄까? 그게 도대체 뭘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아빠가 결혼할 뻔했다는 아가씨들 얘기는 다 뭐야? 낸은 그 아가씨들에 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그중 하나가 우리 엄마가 될 수도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끔찍했다. 우리 엄마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내 엄마가 된단 말인가?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비 존슨이 내게 비밀을 알려주겠대요. 그런데 엄마, 그게 뭔지는 엄마에게도 가르쳐줄 수 없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괜찮죠?”
그날 밤 엄마가 잘 자라며 입을 맞추어 주었을 때 낸은 오늘 일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럼 괜찮고말고.”
앤이 아주 유쾌하게 대답했다.

다음 날 낸은 약속한 양산을 들고 부두로 나갔다. 이건 내 양산이니까 괜찮아, 하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건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거라고. 이런 변명으로 불편한 마음을 달래며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양산을 남에게 줘버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하니 아파왔다. 하지만 도비의 비밀을 알고 싶다는 유혹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자, 여기 양산 가져왔어, 도비. 이제 비밀을 가르쳐줘.”
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도비는 당황스러웠다.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올 생각은 없었다. 설마 낸 블라이드의 엄마가 이 빨간 양산을 남에게 줘도 좋다고 허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비는 입을 오므렸다.

“역시 그런 빨간색은 내 피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너무 요란해. 그러니 비밀을 말해주지 않겠어.”

낸도 나름대로 배짱이 있는 아이라서 도비에게 맹목적으로 무릎을 꿇고 들어갈 수만은 없었다. 부당한 취급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몹시 화가 났다.

“약속은 약속이야, 도비 존슨! 네가 양산을 주면 비밀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잖아? 자, 양산은 여기 있어.”

“오, 그래, 좋아.”

도비는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듯 말했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돌풍도 멎었다. 부둣가 말뚝 언저리에서 철썩거리던 바닷물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낸은 달콤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드디어 도비가 알고 있는 비밀을 듣게 될 순간이 왔다.

“너도 항구 어귀에 사는 지미 토머스네 식구들 알지? 여섯 발가락 지미 토머스.”

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토머스네 식구들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알고 있다고’ 여겼다. 여섯 발가락 지미는 이따금 ‘잉글사이드’에 생선을 팔러 왔는데 수잔은 여섯 발가락 지미한테는 싱싱한 생선을 살 수 없다고 불평하고는 했다. 어쨌거나 낸은 지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는 벗어졌고 고불고불한 흰 머리가 얼굴 양옆으로 덥수룩하니 내려왔으며 코도 매부리코였다. 그런데 그 토머스네와 이 문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 캐시 토머스도 알지?”
도비가 말을 계속했다.

낸은 캐시 토머스도 본 적이 있었다. 한번은 여섯 발가락 지미가 생선 마차에 캐시를 태우고 왔었다. 캐시는 나이가 자기 정도 되었고 붉은 색깔 곱슬머리에 대담해 보이는 녹색과 잿빛이 섞인 눈을 갖고 있었다. 그때 캐시는 낸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도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건 너와 관련 있는 이야기야. 네가 바로 그 캐시 토머스이고 캐시는 바로 낸 블라이드라고.”

낸은 도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비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내가 뭐 누구라고?”
“이건 너무나 뻔한 얘기야.”

도비는 낸이 안됐다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차피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면 그럴듯하게 해주어야 했다.

“너와 캐시는 같은 날 밤에 태어났거든. 토머스네가 여기 글렌 마을에 살 때였지. 간호사가 다이의 쌍둥이를 토머스네 집으로 데려가 요람에 눕히고 너를 네 엄마한테로 데려온 거야. 그 간호사도 다이까지 데려갈 용기는 없었지. 그렇지 않으면 데려갔을 텐데. 그 간호사는 네 엄마를 미워했거든. 그렇게 복수해준 거라고. 그러니까 넌 캐시 토머스로 저 항구 어귀에서 살아야 하는 거고, 그 가여운 캐시는 그 못된 계모한테 얻어맞으면서 사는 대신 ‘잉글사이드’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캐시가 가여운 적이 많았지.”

낸은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거짓말에 속아본 일이 없는 낸은 도비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도, 더욱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도비가 그런 이야기를 꾸며낼 리 없었다. 낸은 도비를 고통과 환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케이트 아주머니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는데?”
낸이 바짝 마른 입술로 물었다.

도비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 간호사가 죽어가면서 사실을 고백했단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 거지. 케이트 아주머니는 이 이야기를 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나는 글렌에 와서 캐시를, 그러니까 낸을 자세히 살펴보았어. 캐시는 너희 엄마와 똑같은 빨간 머리고 눈빛도 아주 똑같아. 네 눈은 갈색이고 머리도 갈색이잖아. 그래서 네가 다이랑 다르게 생긴 거야. 쌍둥이는 원래 똑같아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캐시는 귀도 네 아빠 귀랑 똑같이 생겼어. 모양도 아주 예쁘고 귀가 머리에 딱 달라붙어 있잖아.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생각엔 이건 공평치 못해. 너는 편안하게 살면서 인형처럼 예쁨을 받는데 그 가여운 캐시는, 아니 낸은 누더기 옷을 입고 먹을 것조차 제대로 못 먹잖아. 그리고 여섯 발가락 지미 아저씨는 취해서 집에 돌아올 때마다 캐시를 때린대! 어머나, 너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낸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이제 보니 모든 일이 아주 분명했다. 사람들은 항상 왜 자기와 다이가 조금도 닮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다니 너 미워, 도비 존슨.”

도비는 그 살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너한테 좋은 이야기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안 그래? 그리고 네가 억지로 말하게 만들었잖아. 너 어디 가?”
발걸음을 옮기는 낸의 눈앞이 하얗게 흔들거렸다.

“집에, 엄마에게 말하러.”
낸이 비참한 기분으로 말했다.

“안 돼, 너 안 그럴 거지? 너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잖아!”
도비가 외쳤다.
낸이 도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약속을 했다. 그리고 엄마는 약속을 깨서는 안 되는 거라고 했다.

“나도 집에 가야겠어.”
도비가 말했다. 낸의 표정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비는 양산을 홱 잡아채더니 통통한 맨살을 드러낸 종아리로 낡은 부두 위를 통통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뒤에는 가슴이 찢어질 대로 찢어진 어린아이가 폐허로 변한 조그만 자기 우주 안에서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도비는 개의치 않았다. 낸은 그리 무른 아이가 아니었다. 낸 같은 아이는 놀려준다고 해도 사실 그리 재미도 없었다. 낸은 집에 가자마자 제 엄마에게 다 말해버릴 것이고,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난 일요일에 집으로 가버리면 그만이라고.’
도비는 생각했다.

낸은 그렇게 부둣가에 얼마를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멍하니, 무너진 가슴으로, 절망에 빠진 채. 자기가 엄마의 아이가 아니라니! 여섯 발가락 지미의 딸이란다. 낸은 그런 표시를 내진 않았지만 여섯 발가락 지미를 무척 무서워했다. 단지 그 발가락이 여섯 개라는 이유만으로. 자기는 ‘잉글사이드’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받을 이유도 없다.

“오…….” 
낸은 조그맣게 처량 맞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런 사실을 알면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받던 모든 사랑은 캐시 토머스에게 갈 것이다.

낸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이젠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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