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33~34

나단비 | 2024.04.12 19:30:12 댓글: 0 조회: 4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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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는 찾는 사람이 있어 나가서 앤은 홀로 자기 방 창가에 앉아 감미로운 밤 분위기와 달빛 아래 신비롭게 변한 아름다운 세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달빛을 받은 방은 언제나 뭔가 좀 서먹하다. 친숙한 느낌도 인간적인 냄새도 나지 않고 낯설기만 한 것이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느낌만 난다. 이상한 기운에 둘러싸여 방주인마저 침입자처럼 느껴진다.

앤은 바쁜 하루를 보낸 탓에 좀 피곤했고, 주위는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잉글사이드’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수잔이 부엌에서 빵 반죽 두들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뿐 집 안 전체가 고요했다.
그러나 열어놓은 창문으로 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앤은 그 소리들을 모두 사랑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타고 항구에서 날아왔고, 마을에서 누군가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그 노랫소리에 먼 옛날에 들은 노랫가락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바다 위로는 은색 달빛 길이 뻗었으나 ‘잉글사이드’는 그림자에 휩싸였다. 나무들은 으스스한 옛 이야기를 속삭였고 ‘무지개 골짜기’에서는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여름은 참으로 행복했다고 생각하던 앤은 언젠가 글렌 윗마을에 사는 하일랜드 키티 아주머니가 “같은 여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지요.” 하던 말이 생각나 가슴에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맞다. 같은 여름은 없다. 또 다른 여름이 올 것이다. 아이들은 좀 더 자랄 것이고 릴라도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 품안에 남는 아이도 없겠지 싶은 생각에 앤은 서글퍼졌다.
젬은 벌써 열두 살이 되었고, ‘입학시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젬은 ‘꿈의 집’의 갓난아기였는데…… 월터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다.
그날 아침 앤은 낸이 다이를 놀려대는 말을 들었다. 학교의 어떤 ‘남자아이’를 들먹이자 다이는 뺨을 붉히며 빨간 머리를 휙 쳐들었다. 그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기쁨과 고통, 희망과 두려움, 그리고 변화. 끊임없는 변화! 그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옛 것은 가게 내버려두고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되어가는 대로 맡겨두어야 한다. 봄은 아름답지만 여름에게 길을 내주어야 하고 여름은 또 가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앤은 갑자기 피터 커크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월터의 질문이 생각났다. 몇 년 동안이나 그 일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잊지는 않았다. 거기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잊지 못할 일이었다. 그 어스름한 달밤에 앤은 그 일을 떠올렸다.
앤의 식구가 ‘잉글사이드’에 살기 시작한 첫해 11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1주일 동안이나 꼭 봄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커크 집안은 모브레이 내로우즈에서 살았는데, 교회는 글렌 교회에 다니고 의사도 길버트를 찾았다. 그래서 길버트와 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앤이 기억하기로 그날은 기분 좋게 따뜻하고 평화로운 날이었다. 차분하게 갈색과 보랏빛의 11월 풍경이 펼쳐졌고, 언덕이며 경사진 길 여기저기에 햇빛이 구름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커크 저택 오솔길’은 바닷가 바로 옆으로 나 있어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뒤쪽 음침한 전나무를 지나 불어왔다. 커크 저택은 무척 크고 부유한 집처럼 보였지만 앤은 그 박공창이 있는 L자형 집을 볼 때마다 심술 사나워 보이는 길쭉하고 마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집에 닿자 앤은 꽃 한 송이 없는 잔디밭에 무리 지어 서 있는 여자들에게 인사했다. 모두들 장례식을 불쾌한 일로만은 여기지 않는 선량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손수건을 가져오는 걸 잊어버렸어요. 눈물이 나오면 어쩌죠?”
브라이언 블레이크 부인이 가엾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 필요가 있을까요? 피터 커크는 언니 친척도 아니고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브라이언 블레이크 부인의 시누이인 카밀라 블레이크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카밀라는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례식에서는 우는 것이 ‘예의’잖아요. 이웃이 하늘나라로 불려갔을 때는 감정을 좀 보여야 하는 거라고요.”
블레이크 부인이 정색하고 말했다.
“피터를 좋아하는 사람만 울어야 한다면 이 장례식에서 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커티스 로드 부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것이 사실인데 왜 사실대로 말을 못 해요. 그 사람은 사악한 사기꾼이었어요.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해도 나는 알아요. 저 쪽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죠? 설마, 설마 클라라 윌슨은 아니겠죠?”
“그 사람이 맞아요.”
브라이언 부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피터의 첫 아내가 죽었을 때 클라라는 피터에게 당신 장례식이 아니면 다시는 이 집에 발걸음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약속을 지킨 셈이네요. 클라라는 피터의 첫 번째 부인 언니예요.”
카밀라 블레이크가 앤에게 설명했다.
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일어 클라라 윌슨을 바라보았다. 그 부인은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빛바랜 황옥 같은 눈으로 곧장 앞만 바라보고 지나갔다. 몸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랐고 얼굴에는 무척 비극적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부인이나 쓰고 다닐 법한 깃털과 플라스틱 구슬 장식이 달리고 코까지 내려오는 베일이 달린 이상한 보닛 아래로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클라라 윌슨은 누구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다란 검은색 호박단 드레스 자락을 스치며 잔디밭을 지나 베란다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에 제드 클린턴이 장례식용 얼굴을 하고 서 있군요. 이제 모두들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라고 재촉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자기가 맡은 장례식을 차질 없이 착착 진행하는 것을 커다란 자랑으로 여겨요. 위니 클로가 설교도 끝나기 전에 기절한 일을 두고 아직도 용서를 못 하고 있잖아요. 설교가 끝난 다음에 쓰러졌더라면 그렇게 유감을 품지 않았을 거예요. 이번 장례식에서는 누가 쓰러질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올리비아는 기절하거나 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카밀라가 비꼬았다.
“제드 클린턴은 로브리지의 장의사잖아요? 왜 글렌 사람에게 장례식을 맡기지 않았을까요?”
리즈 부인이 물었다.
“누구요? 카터 플래그요? 세상에나, 피터와 카터 플래그는 평생토록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던 앙숙지간이었는걸요. 카터가 에이미 윌슨을 좋아했잖아요.”
“에이미를 좋아했던 사람이야 한둘이 아니었지요. 아주 예뻤으니까요. 구릿빛 도는 빨간 머리에 눈은 꼭 검은 잉크 같았어요. 그래도 클라라가 더 예쁘다는 사람도 있긴 했죠. 클라라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드디어 목사님이 왔군요. 로브리지의 오웬 목사님도 같이 왔어요. 하긴 올리비아의 사촌이니 당연히 와야죠. 저 목사님은 다 좋은데 기도할 때 ‘오.’ 소리를 너무 자주 해요. 제드가 난리를 피우기 전에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고요.”
카밀라가 말했다.
앤은 의자로 가서 앉기 전에 피터 커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앤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얼굴이 너무 잔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맨 처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도 눈 밑으로 살이 처진 눈은 차갑게 쏘아보는 듯했고 앙다문 얇은 입술은 인정머리라고는 없어 보였다. 신앙심이 깊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올려도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앤은 누군가 그 사람을 두고 “언제나 잘난 척만 한다니까요.” 하고 말하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존경받고 우러름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처럼 죽어서도 오만했다. 움직임 없는 가슴 위에 포개놓은 기다란 손가락을 보았을 때 앤은 몸이 다 떨려왔다. 그 가슴속에 붙들려 있을 여자의 마음을 생각해보며 앤은 자기 맞은편에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올리비아 커크 쪽을 흘끗 보았다. 올리비아는 키가 크고 흰 살결에 파란 눈이 무척이나 커다란 아름다운 여자였다. “보기 흉한 여자는 딱 질색이야.” 피터 커크는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올리비아의 얼굴은 차분하고 표정이 없어 보였다. 눈물을 흘린 흔적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랜덤 집안사람이었다. 랜덤 집안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올리비아는 상복을 완벽하게 갖추어 입고 이 세상에서 가장 상심한 미망인의 모습으로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관을 빙 둘러 잔뜩 올려놓은 꽃들에서 나온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져 있었다. 피터 커크로서는 그런 꽃이 있는지도 몰랐을 꽃들이다. 피터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도 화환을 보내왔고, 교회, 보수연합, 학교운영 위원회, 치즈 위원회에서도 각각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지내는 피터의 하나뿐인 아들한테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지만 커크 집안사람들이 흰 장미를 한데 모아 큰 닻 모양으로 만든 화환을 보내왔다. 화환 가운데는 ‘마침내 항구로’라고 빨간 장미로 글자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것도 있었다. 칼라 백합으로 만든 화환이었다. 그것을 본 카밀라 블레이크의 얼굴이 우습다는 듯 비틀렸다. 앤은 카밀라에게서 피터가 두 번째 신부를 맞고 얼마 안 되어 커크 저택에 갔을 때, 피터가 새 신부가 가지고 온 칼라 백합꽃 화분을 창밖으로 내던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잡초 같은 것으로 자기 집을 지저분하게 만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올리비아는 겉으로는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고, 그 후로는 커크 저택에서 칼라 백합꽃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설마 올리비아가? 그러나 커크 부인의 차분한 눈을 바라본 앤은 그런 의심을 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화원에서 골라주는 꽃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으니까.
성가대는 ‘깊은 바다와 같은 죽음이 우리를 천국의 땅에서 갈라놓는다.’라고 노래했다. 카밀라와 눈이 마주친 앤은 둘 다 피터 커크가 그 천국의 땅에 맞는 사람인지 어떤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밀라가 “후광이 둘러져 있고 하프를 들고 있는 피터 커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앤의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오웬 목사가 성경 구절을 읽고 역시 ‘오.’ 소리를 연발하면서 상심한 많은 가슴들이 위로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글렌의 목사가 추모의 말을 했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속으로 아무리 죽은 사람을 좋게 말해야 한다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터 커크가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였고, 다정한 남편에 친절한 이웃이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모두에게 언어의 오용으로 느껴졌다. 카밀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눈물을 닦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스티븐 맥도널드는 한두 번 헛기침을 했다. 브라이언 부인은 그 말에 울어야 해서 누군가에게서 손수건을 빌린 듯 얼굴에 대고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차분한 파란 눈에는 의연하게도 눈물 한 방울 없었다.
제드 클린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찬송가를 하나 더 부르고, ‘유해’를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절차를 마치면 이제 그의 성공적인 장례식 목록에 하나를 더 보탤 수 있게 된다.
갑자기 방 한구석에서 가벼운 웅성거림이 일더니 클라라 윌슨이 미로 같은 의자 사이를 지나 관 옆 탁자로 걸어 나왔다. 거기까지 오자 클라라는 몸을 돌려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섰다. 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보닛이 약간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그 틈으로 검은 곱슬머리 한 가닥이 빠져나와 어깨로 늘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클라라 윌슨이 바보 같아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길고 흙빛인 얼굴이 붉어졌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비극적인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비통함에 사로잡힌 여인이었다. 불치의 병으로 몸이 삭아가듯 비통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여러분이 들은 이야기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여러분이 여기에 죽은 이에게 명복을 빌어주러 왔는지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난 지금 피터 커크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나는 위선자가 아니니까요. 난 피터가 살아 있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은 지금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 누구도 그의 면전에서는 진실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다 이야기할 겁니다. 여기서, 이 장례식 자리에서 말하겠어요.
좋은 남편이라고요? 이 남자는 내 동생 에이미와 결혼했어요. 내 예쁜 동생 에이미와 말이에요. 우리 에이미가 얼마나 다정하고 예쁜 사람이었는지는 모두 알 거예요. 그런데 이 남자는 에이미에게 불행을 안겨주었어요. 에이미를 고문하고 조롱했어요. 이 사람은 그 짓을 즐겼어요. 이 사람은 교회에 나가고 기도도 아주 길게 했지요. 빚 같은 것도 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사람은 폭군에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인간이었어요. 이 집에서 기르는 개조차도 이 사람 발소리가 나면 도망칠 정도였다고요.”
클라라 윌슨이 말을 계속했다.
“나는 에이미에게 이 남자와 결혼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하지만 나는 에이미를 도와 결혼식에 입을 웨딩드레스를 만들었죠. 차라리 에이미의 수의를 만드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가엾게도 에이미는 이 남자에게 빠져 있었어요. 하지만 이 남자의 아내가 된 지 단 일주일 만에 이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버렸어요. 이 사람의 어머니도 노예처럼 살았어요. 이 사람은 자기 아내도 그렇게 살기를 원했죠. 이 남자가 에이미에게 자기 집에서는 말대꾸하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에이미는 말대꾸할 배짱도 없었어요. 너무 상처를 받아 그럴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난 그 불쌍한 것이 어떤 일을 겪고 살았는지 알아요.
이 남자는 에이미가 하는 일이라면 전부 반대했어요. 정원 가꾸는 일도 못 하게 했다고요. 고양이 한 마리 키우지 못하게 했어요. 내가 고양이를 한 마리 주었는데 그걸 물에 빠뜨려 죽게 만들었다더군요. 돈도 단 1센트라도 다 보고하고 써야 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누구 에이미가 좋은 옷 입은 걸 본 사람이 있어요? 비가 올 것 같은 날 제일 좋은 모자를 쓰면 그것 갖고도 트집을 잡았어요. 하지만 그 가여운 것은 비를 맞는다고 해서 망칠 만한 변변한 모자 하나 없었다고요.
에이미도 예쁜 옷을 좋아했죠. 이 사람은 늘 에이미를 무시하는 말을 했어요. 평생 웃지도 않았죠. 여기 누구 이 사람이 웃는 거 본 사람 있어요? 그래요, 이 사람은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었죠.
오, 그래요. 이 사람은 언제나 미친 짓을 하면서도 조용하게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떠올리고는 했어요. 첫 아기가 죽어서 태어났을 때에도 이 남자는 에이미에게 죽은 놈밖에 못 낳는다면 당신도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미소 지으며 말했으니까요. 그리고 10년 뒤 에이미는 정말로 세상을 떴어요. 난 에이미가 이 남자를 떠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기뻤어요. 난 그때 당신 장례식 때까지는 이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말했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도 내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나는 내 약속을 지켰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왔고 진실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진실이에요. 모두 알 겁니다. ‘당신도 알죠?’”
클라라 윌슨은 격렬한 태도로 스티븐 맥도널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도 알고 있어요.’”
이번에는 그 긴 손가락으로 카밀라 블레이크를 가리켰다.
“‘당신도 알아요.’”
올리비아 커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당신도 알아요.’”
가여운 목사는 그 손가락이 자기 몸을 찌르는 듯 느꼈다.
“나는 피터 커크의 결혼식에서는 울었지만 장례식에서는 비웃어줄 거라고 말했어요. 난 지금 그렇게 해줄 거예요.”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해온 데 대한 복수였다. 클라라는 드디어 원한을 푼 것이다. 클라라 윌슨은 성난 몸짓으로 관 위로 몸을 구부렸다. 죽은 사람의 차갑고 조용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클라라의 온몸은 승리감과 만족감으로 떨렸다. 사람들은 모두 복수의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클라라 윌슨의 성난 얼굴이 갑자기 변했다. 일그러졌다.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구겨졌다. 클라라는 울고 있었다.
클라라는 몸을 돌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방을 나가려는데 올리비아 커크가 앞을 막아서며 붙들었다. 잠깐 두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방 안은 완전히 침묵에 휩싸였다.
“고마워요, 클라라 윌슨.”
올리비아 커크가 말했다. 그 얼굴은 여느 때처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릴 길 없었으나 조용하고 매끄러운 목소리에는 앤을 부르르 떨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앤의 눈앞에 별안간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구멍이 뚫린 듯했다. 클라라 윌슨은 살아 있을 때에도 죽은 뒤에도 피터 커크를 증오했지만, 그 증오도 올리비아 커크의 것보다 하찮은 것임을 그 순간 앤은 느꼈다.
클라라는 울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장례식을 망쳐버려 몹시 화나 있는 제드 곁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목사는 마지막 찬송가로 <주 예수 너에게 있으니 편히 쉬라>를 부르자고 할 예정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고는 마지막 기도를 올리자고 하고 말았다. 제드도 언제나처럼 고인과 친지와 친구에게 유해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라는 안내를 하지 않았다. 얼른 관 뚜껑을 닫아버리고 가능하면 빨리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일 것 같았다.
앤은 베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쐬니 살 것 같았다. 숨 막힐 듯 꽃향기 가득했던 방에서 두 여자의 비통함이 고문처럼 힘겹게 느껴졌다.
오후가 되면서 날이 춥고 음산해졌다. 그제야 입이 열린 사람들이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서로 생각들을 나누고 있었다. 저 멀리 시든 목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클라라 윌슨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굉장했지요?”
넬슨 크레이그가 멍하니 물었다.
“충격적이었어! 충격적!”
벡스터 장로가 말했다.
“왜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 했을까요?”
헨리 리즈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우리 모두 클라라의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카밀라가 되받았다.
“그건 아니에요. 온당치 못해요.”
샌디 맥도걸이 말했다. 자기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았다.
“온당해야 해요. 장례식이란 온당해야 해요.”
“세상에나, 정말이지 우스운 세상이군요.”
어거스터스 팔머가 말했다.
“나는 피터와 에이미가 서로 만나던 때를 기억해요. 그해 겨울에 나도 지금 내 아내와 교제하고 있었거든요. 그 무렵 클라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였어요. 게다가 클라라가 만든 버찌 파이는 맛이 기막혔다오.”
제임스 포터 노인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말했다.
“클라라는 원래가 말을 좀 신랄하게 했어. 클라라가 들어올 때 뭔 일이 일어날 거라고 나도 짐작했지.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지는 꿈에도 몰랐어. 그리고 또 올리비아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야. 여자란 참 속을 알 수 없다니까요.”
보이스 워런이 말했다.
“우린 죽을 때까지 이 이야기를 할 거예요. 이런 일이라도 없다면 역사란 게 별게 아니잖아요.”
카밀라가 말했다.
사기가 꺾여버린 제드는 사람들을 모아 얼른 관을 들고 나갔다. 길을 따라 장례마차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는데 헛간에서 비탄에 잠긴 개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피터 커크를 위해 슬퍼해줄 생물체도 하나쯤은 있었던 모양이다.
앤이 길버트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스티븐 맥도널드가 다가왔다. 스티븐은 글렌 윗마을 사람으로, 키가 크고 머리는 꼭 로마 황제처럼 생겼다. 앤은 언제나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아요. 11월이면 언제나 고향이 그리워요. 블라이드 부인도 그런 느낌이 드는 때가 있나요?”
그가 말했다.
“네. 한 해가 잃어버린 봄을 슬프게 돌아보는 때예요.”
“봄이오, 봄! 블라이드 부인, 나는 늙어가고 있어요. 내게는 계절도 다 변해버린 것만 같아요. 겨울도 예전 겨울이 아니에요. 여름도 그렇고, 봄도 그래요. 이제는 봄도 없는 것 같거든요. 내가 잘 알던 사람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릴 때는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어요. 가여운 클라라 윌슨,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너무 가슴이 아프더군요. 증오감이란…….”
“그래요. 오래전에는 클라라도 피터를 좋아했어요. 굉장히 좋아했죠. 그 무렵 클라라는 모브레이 내로우즈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어요.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크림처럼 하얀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죠. 에이미는 걸핏하면 웃음을 터트리던 아주 명랑한 아가씨였어요. 그런데 피터는 클라라를 버리고 에이미랑 결혼했어요. 사람들이 서로 맺어지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하기도 해요, 블라이드 부인.”

바람이 불어와 커크 저택 뒤로 서 있는 전나무들이 몸을 비틀며 음산한 소리를 냈고, 저 멀리 롬바르디 포플러가 잿빛 하늘을 찌를 듯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언덕 위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모두들 거센 눈바람이 불어닥치기 전에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그렇게 불행한 사람을 두고 나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앤은 클라라 윌슨에게 고맙다고 말하던 올리비아의 눈빛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앤은 창가에서 일어났다. 벌써 12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클라라 윌슨은 죽었고 피터보다 훨씬 나이가 적었던 올리비아 커크는 연안 지방으로 가서 재혼했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도 희미해지니 얼마나 다행이야. 몇 해 동안이나 원한을 품고 산다는 것은 끔찍해. 하지만 피터 커크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을 월터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어. 아이들에게 들려줄 얘기가 못 돼.’
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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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는 베란다 계단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해진 작고 통통한 다리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하지만 지금 릴라는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저 귀염둥이 꼬마 아가씨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 잊어버린 것이다. 어른에게야 별일 아닌 것도 아이에게는 너무나 끔찍스러운 비극으로 여겨질 수 있는 법이다.
 릴라는 수잔이 ‘금과 은 케이크’를 구워줄 테니 저녁때 교회에 가져다주라고 한 일로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었다. 고아원 기부금 모금 행사에 쓸 것이었다.
릴라가 케이크를 들고 마을을 지나 글렌 세인트 메리 장로교회에 갈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합리적인 대답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이들이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빠져 있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릴라는 어떤 연유로 케이크를 들고 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릴라가 다섯 살 때 보았던 일 때문일 것이다. 틸리 페이크 할머니가 케이크를 들고 큰길을 걸어가는데 마을의 조무래기 남자아이들이 그 할머니를 졸졸 따라가며 놀려댔다. 틸리 할머니는 항구 어귀에 사는데 아주 더럽고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틸리 페이크 할머니는
케이크를 몰래 훔쳐 먹어
배탈이 났대요.”

남자아이들은 그렇게 합창을 해댔다.
릴라는 그 틸리 페이크 할머니와 같은 취급을 당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일 이후로 릴라의 머릿속에는 케이크를 들고 다니면 ‘숙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런 까닭에 지금 릴라는 이렇듯 걱정에 싸여 계단에 앉아 있었고, 앞니가 하나 빠진 그 귀여운 작은 입가에 언제나 떠돌던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선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는 다 안다는 표정 대신에, 황금빛 장미와 자기 단둘만 아는 비밀을 갖고 있다는 표정 대신에, 릴라는 지금 영원히 짓밟힌 운명을 가진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다른 때는 생글생글 귀엽기만 하고 웃으면 그 커다란 갈색 눈이 거의 감겨버리던 눈마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젠가 키티 매컬리스터 아줌마는 “요정이 네 눈을 만졌단다.” 하고 말했다. 아빠는 릴라가 애교심을 타고나서 태어난 지 30분 만에 파커 선생님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고 맹세했다. 릴라는 혀 짧은 소리를 해서 지금도 입으로보다는 눈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자라면서 틀림없이 나아질 것이다. 릴라는 자라기도 무척 빨리 자랐다. 작년에는 아빠가 장미꽃에 대고 릴라의 키를 쟀고 올해는 협죽도 꽃으로 쟀다. 이제 곧 접시꽃으로 잴 것이고, 학교도 갈 것이다. 수잔에게 그 끔찍한 통보를 받기 전까지 릴라는 아주 행복하고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릴라는 분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잔 아줌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바.”
혀 짧은 소리로 발음이 분명치는 않았지만 다정하고 아름다운 푸른 하늘은 릴라의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날 아침, 엄마와 아빠는 샬럿타운에 갔고 언니 오빠들은 모두 학교에 가서 ‘잉글사이드’에는 릴라와 수잔밖에 없었다. 다른 날 같았으면 릴라는 집이 조용해도 즐거웠을 것이다. 릴라는 쓸쓸한 적이 없었다. 이 층계에 앉아 있는 것도 즐거웠고, ‘무지개 골짜기’에 있는 자기만의 이끼 낀 녹색 바위에 앉아 있는 것도 즐거웠다.
예쁜 아기고양이 한두 마리를 친구 삼아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공상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잔디밭 한구석은 즐거운 나비들의 세상이 되고, 뜰에는 양귀비꽃이 흔들거리며, 하늘에는 커다란 뭉게구름 하나가 두둥실 떠 있었다. 커다란 호박벌이 금련화 위를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인동덩굴이 노랑 손가락을 뻗어 릴라의 적갈색 고수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불어오는 바람, 저 바람은 어디로 불어가는 것일까? 다시 돌아온 콕 로빈은 베란다 난간을 돌아다니며 왜 릴라가 자기랑 놀려고 들지 않는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고아들을 위해 여는 모금회 때문에 케이크를 들고 마을을 지나 교회로 가야만 한다는 무서운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릴라도 로브리지에 있는 고아원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릴라도 그 아이들이 아주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고아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엾은 고아를 도와주려는 일일지라도 사람들이 다 보는데 케이크를 들고 가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비가 오면 안 가도 될지 몰라.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릴라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손가락이 시작되는 마디마다 보조개처럼 살이 움푹 들어가 있는 것도 몹시 귀여웠다.
“하느님, 비가 많이많이 오게 해주세요. 주룩주룩 오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릴라는 이 고통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또 한 가지 생각났다.
“수잔 아줌마의 케이크를 태워주세요. 바싹 타게 해주세요.”
그러나 슬프게도 점심때가 되자 근사하게 설탕 옷을 입힌 먹음직스러운 케이크가 부엌 탁자 위에 멋진 모습으로 놓였다. 그것은 릴라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금과 은 케이크’, 그 이름만 들어도 너무 멋지다. 그러나 릴라는 다시는 그 케이크를 한 입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항구 건너편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들려오는 우르릉거리는 소리는 천둥소리가 아닌가? 어쩌면 하느님이 릴라의 기도를 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곧 지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배가 아파도 되지 않을까? 안 돼. 릴라는 몸을 떨었다. 그것은 당장 피마자기름을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차라리 지진이 낫다!
등받이에 잘난 척하는 흰 오리 그림이 수놓인 자기 의자에 앉은 릴라가 오늘 아주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두들 너무해! 엄마가 집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엄마라면 나한테 걱정이 있는 걸 금방 알아차렸을 거야. 아빠 사진이 <엔터프라이즈> 신문에 실렸던 그 무서웠던 날에도 엄마는 릴라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챘다. 잠자리에 누워 슬프게 울고 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다정하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릴라가 신문에 사진이 실리는 건 살인자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엄마는 곧 릴라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었다. 엄마는 자기 딸이 틸리 페이크 할머니처럼 케이크를 들고 글렌 마을을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까?
수잔이 장미 꽃봉오리가 그려진 릴라의 예쁜 파란색 접시에 밥을 주었지만 릴라는 점심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 접시는 지난번 릴라 생일에 레이철 린드 할머니가 보내준 것으로 보통 때는 일요일에만 쓰고 있었다. 파란 접시에 장미 꽃봉오리가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런 부끄러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기는 해도 수잔이 디저트로 만들어준 과일 퍼프는 참 맛있었다.
“아줌마, 낸이랑 다이 언니가 학교에 다녀온 다음에 케이크를 가져다주면 안 돼?”
릴라는 사정도 해보았다.
“다이는 학교 끝나면 제시 리즈네 집에 가서 놀 테고, 낸은 다리에 가시가 걸렸어.”
아무것도 모르는 수잔은 릴라를 놀리는 소리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너무 늦거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3시까지 케이크를 모두 잘라서 차려놓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왜 가기 싫다는 거야? 우리 토실이 아가씨? 우편물 가지러 가는 건 좋아하잖아.”
릴라는 좀 오통통한 편이지만 누가 토실이라고 부르는 건 싫었다.
“내 기분이 나빠지는 건 싫단 말이야.”
릴라는 화가 나서 설명했다.
수잔이 웃었다. 릴라가 무슨 말만 하면 식구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릴라는 자기는 진짜로 이야기를 하는데 왜 모두들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웃지 않았다. 릴라가 아빠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웃지 않았다.
“모금회는 다정한 엄마 아빠가 없는 가엾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모으는 거야.”
수잔이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에게 말하듯 설명했다.
“나도 고아 다음으로 불쌍해. 엄마 아빠가 하나씩밖에 없잖아.”
릴라가 말했다.
수잔은 또 웃었다. 아무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엄마가 거기서 일하는 분들과 케이크를 주기로 약속하셨어. 꼭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내가 가져갈 시간이 없으니까 네가 파란 옷으로 갈아입고 어서 갔다 와.”
“내 인형이 병났어. 침대에 눕혀주고 같이 있어줘야 해. 아마 암모니아 병일 거야.”
릴라는 필사적이었다.
“그 인형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30분이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
수잔의 대답은 무정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없었다. 하느님도 도와주지 않았다. 비가 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릴라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더 이상 대꾸도 하지 못하고 2층으로 올라가 새 주름 장식이 달린 오건디 옷으로 갈아입고 데이지 꽃을 단 모자를 썼다. 옷을 멋있게 입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틸리 페이크 할머니처럼 생각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얼굴은 깨끗한 것 같지만 귀 뒤도 깨끗한지 봐줘.”
릴라는 아주 위엄 있게 수잔에게 말했다.
릴라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다고 수잔에게 야단맞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수잔은 릴라의 귀를 살펴보고 케이크 담은 바구니를 건네주며 만나는 고양이마다 말 걸지 말고 얼른 다녀오라는 주의만 주었다.
릴라는 고그와 매고그에게 얼굴을 찌푸려 보이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 모습을 수잔은 사랑스러운 듯 지켜보았다.
“우리 아가가 혼자 심부름을 갈 만큼 커버렸다니.”
수잔은 자랑스러움과 슬픔이 뒤섞인 마음으로 중얼거리고는 되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아이에게 자기가 어떤 괴로움을 주고 있는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릴라는 언젠가 교회에서 잠들어버려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일 말고는 이번처럼 부끄럽게 여긴 일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마을에 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마을에 가면 재밌는 일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름다운 퀼트 이불이 가득 널린 카터 플래그 부인의 매혹적인 빨랫줄조차 릴라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다. 어거스터스 팔머 씨가 안뜰에 새로 갖다놓은 무쇠를 녹여 만든 사슴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옆을 지날 때마다 릴라는 ‘잉글사이드’의 잔디밭에도 저런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쇠 사슴이 다 뭐란 말인가? 뜨거운 햇빛이 강물처럼 길에 넘쳐 ‘모두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자아이 둘이 뭐라고 소곤거리며 지나갔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릴라는 두 아이가 한 말을 상상해보았다. 마차를 몰고 가던 남자가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저 애는 ‘잉글사이드’ 아이지? 참 예쁘게도 생겼다.” 하며 감탄했다. 그러나 릴라는 남자의 눈이 바구니를 꿰뚫어 케이크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애니 드류가 아빠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지나갔을 때도 틀림없이 자기를 비웃은 것이라고 믿었다. 애니 드류는 열 살인데 릴라의 눈에는 다 큰 여자아이로 보였다.
그러고는 러셀네 집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 그 아이들 곁도 지나야 했다. 아이들의 눈이 모조리 릴라에게로 쏠렸다. 릴라는 그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짓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릴라가 너무도 필사적인 마음으로 얼굴을 꼿꼿이 들고 지나가서 아이들은 릴라가 잘난 척한다고 생각해 이 건방진 아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자고 의견을 모았다. 저 새끼고양이 같은 얼굴을 가진 아이에게 쓴맛을 보여주자! ‘잉글사이드’ 딸들은 모두 큰 집에 살고 있다고 잘난 척이나 한다고!
밀리 플래그는 릴라 뒤에서 릴라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발을 질질 끌어 마구 먼지를 일으켰다.
“저 바구니는 어디로 가는 걸까?”
유들유들한 드류가 소리쳤다.
“코에 뭐가 묻었는데, 얼굴이 꼭 잼 같다.”
빌 팔머가 비웃었다.
“넌 말도 못 하냐?”
세라 워런이 말했다.
“어이, 꼬마!”

비니 벤틀리가 외쳤다.
“한쪽으로 얌전히 걸어가지 않으면 풍뎅이를 먹여준다.”
뚱뚱한 샘 플래그가 당근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봐, 쟤 얼굴이 새빨개졌어.”
에이미 테일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교회에 케이크 가져가는 거지? 수잔 베이커의 케이크는 덜 구워졌을 거야.”
찰리 워런이 놀렸다.
자존심 강한 릴라는 울지 않았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잉글사이드’의 케이크를 비웃다니…….
“너희들 병에 걸려도 우리 아빠한테 약을 주지 말라고 할 거야.”
릴라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다음 순간 릴라는 너무 놀라고 당황했다. 항구길 모퉁이를 돌아오는 게 설마 케네스 포드는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어머, 그러네!
이럴 수가! 월터 오빠의 단짝 친구인 케네스를 릴라는 그 조그만 가슴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훌륭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네스는 릴라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초콜릿 오리를 준 적은 있지만. 그리고 어느 잊을 수 없는 날, 켄은 ‘무지개 골짜기’의 이끼 낀 바위에 릴라와 나란히 앉아 ‘숲 속 작은 집의 곰 세 마리’ 이야기를 들려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릴라는 케네스를 멀리서 숭배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지금 케이크를 들고 있는 모습을 이 멋진 사람에게 들킨 것이다!
“야, 토실이 아가씨! 오늘 날씨가 무척 덥지? 오늘 밤에 그 케이크 한 조각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케네스도 이것이 케이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다!
릴라가 마을을 지나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마음을 놓은 순간 정말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저쪽에서 주일 학교 선생님, 미스 에이미 파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은 꽤 거리가 있었지만 릴라는 그 옷으로 분명히 알아보았다. 연둣빛 오건디 옷감에 조그만 흰 꽃송이가 흩어져 있고 주름 장식이 많은 드레스였다. 릴라는 그 옷을 ‘벚꽃 드레스’라고 불렀다. 지난 일요일 주일 학교에 에이미 선생님이 그 옷을 입고 왔을 때 릴라는 이렇게 예쁜 옷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에이미 선생님은 언제나 예쁜 옷만 입고 다녔다. 레이스며 주름 장식이 많고, 비단이 사각거리는 드레스도 입었다.
릴라는 에이미 선생님을 숭배했다. 선생님은 무척 아름답고 우아하며, 피부도 아주 하얗다. 슬퍼 보이는 갈색 눈에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결혼하려던 남자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어떤 여자아이가 알려주었다. 릴라는 에이미 선생님 반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스 플로리 플래그의 반이 되었더라면 싫었을 것이다. 미스 플로리 플래그는 못생겼다. 릴라는 못생긴 선생님은 참을 수 없었다.
주일 학교가 아닌 데서 만나도 에이미 선생님은 생긋 웃으며 릴라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그러면 릴라는 너무나 행복했다. 길에서 만났을 때 에이미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해도 릴라는 가슴이 뛰었다. 반 전체가 에이미 선생님의 비눗방울 파티에 초대받아 딸기 주스로 빨갛게 물들인 비눗방울을 만들며 놀 때 릴라는 너무나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에이미 선생님에게 케이크 들고 있는 모습을 들키게 되다니!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수모를 견딜 마음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음 주일 학교 발표회 때 에이미 선생님이 연극을 하겠다고 했는데 릴라는 요정 역을 맡고 싶었다. 요정은 주황색 옷을 입고 끝이 뾰족한 녹색 모자를 쓴다. 하지만 에이미 선생님에게 케이크 들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간 요정 역도 맡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에이미 선생님에게 케이크를 보여선 안 된다! 릴라는 개울에 놓인 조그만 다리 위에 서 있었고 그 개울은 상당히 깊어서 물이 굽이쳐 흘렀다. 릴라는 얼른 바구니에서 케이크를 꺼내 갯버들이 가지를 뻗치고 있는 어두운 수면 아래로 집어던져 버렸다. 케이크는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물속으로 풍덩 떨어져 물거품을 피워 올리고는 금방 가라앉았다. 릴라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며 에이미 선생님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고 있는 저 커다란 갈색 종이꾸러미는 뭐지?
에이미 선생님이 조그만 오렌지빛 깃털이 달린 녹색 모자 아래로 릴라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어주었다.
“어머나, 선생님, 예뻐요. 예뻐요.”
릴라는 감탄했다.
에이미 선생님이 다시 방긋 웃었다. 비록 상처로 상심한 가슴을 안고 살더라도 이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의 말을 듣는 건 기분이 좋았다. 미스 에이미는 자기 심장이 다 찢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새 모자 말이니, 릴라? 예쁜 깃털이지?”
그리고 그녀는 릴라의 바구니를 흘끗 보았다.

“너도 교회에 케이크를 가져다주고 오는 길인 모양이구나.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오는 길이라 섭섭하다. 나도 지금 케이크를 가져가는 길이거든. 이렇게 크고 녹아버릴 것 같은 초콜릿 케이크란다.”
그 말에 릴라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말은 나오지도 않아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에이미 선생님이 케이크를 들고 간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수잔의 그 군침 도는 금과 은 케이크를 시냇물에 던져버렸다. 릴라는 선생님과 함께 케이크를 들고 교회까지 걸어갈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에이미 선생님이 가버린 뒤 릴라는 무서운 비밀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 식사 때까지 ‘무지개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저녁 식사 때도 릴라는 아주 얌전했지만 그 누구도 릴라가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수잔이 케이크를 누구에게 주었느냐고 물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런 난처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다른 아이들은 ‘무지개 골짜기’로 놀러 갔지만, 릴라는 혼자 계단에 앉았다. 해는 지고 바람이 불면서 ‘잉글사이드’의 뒤편 하늘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하나하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릴라는 온 글렌 마을에 꽃이 피듯 불이 밝혀지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그것도 재미가 없었다. 이처럼 비참한 기분은 이제까지 살면서 생전 처음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변이 점점 더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면서 릴라의 기분은 점점 더 비참해졌다. 아주 맛있는 메이플 시럽 케이크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수잔이 선선한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족들에게 주려고 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맛있는 케이크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시했다.

비참한 마음을 안은 채 릴라는 층계를 올라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전에는 아주 예쁘다고 생각되었던 새 분홍색 꽃무늬 이불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물속에 던져버린 케이크의 유령에게 시달렸다. 엄마는 케이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케이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엄마를 어떻게 생각할까? 가장 예쁜 케이크였을 텐데! 그날 저녁의 바람 소리는 참 쓸쓸하게도 들렸다. 바람 소리가 릴라를 나무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바보! 바보! 바보!
자꾸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왜 자지 않는 거지, 릴라?”
수잔이 메이플 시럽 케이크를 들고 와서는 물었다.
“아줌마, 나는 나에게 지쳐버렸어.”
수잔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저녁 식사 때도 좀 지쳐 보였다.
‘이를 어쩐다. 선생님은 집에 안 계시는데. 의사 가족은 일찍 죽고, 구둣가게 아내는 맨발로 걷는다는데.’
수잔은 생각했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말했다.
“열이 있는지 보자, 릴라.”
“그게 아냐…… 그게 아니라니까, 아줌마. 내가…… 나…… 나쁜 짓을 해버렸어……. 아줌마, 악마가 그런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악마가 아니야…… 아줌마, 내가 했어. 나는…… 내가 케이크를 물에 던져버렸어.”
“뭐라고! 무슨, 무슨 짓을 했다고? 왜 그런 짓을 했지?”
수잔은 입이 딱 벌어졌다.
“무슨 짓을 했다고?”
그렇게 말한 것은 시내에서 돌아온 엄마였다. 사모님에게 이 일을 넘겨줄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수잔은 얼른 물러갔다.
릴라는 울면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릴라, 케이크를 교회에 가져가는 것이 어째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거니?”
“틸리 페이크 할머니처럼 될까 봐서요, 엄마……. 나는 엄마를 부끄럽게 만들었어요. 아, 엄마, 용서해주면 앞으로는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엄마가 케이크를 보내려 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어요.”
“그것은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릴라. 케이크는 충분하고도 남았을 거야. 언제나 그랬거든. 아무도 우리가 케이크를 보내지 못한 것을 알지도 못했을 거야. 이 일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기로 하자. 하지만 앞으로 잊어서는 안 돼, 베르타 마릴라 블라이드. 수잔 아줌마도 엄마도 너에게 절대로 부끄러운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사는 것이 다시 즐거워졌다. 문 앞에 서 있던 아빠가 다가와 “우리 강아지, 잘 자거라.” 하고 말했고 수잔이 살그머니 들어와 내일 점심에는 치킨 파이를 주겠다고 했다.

“그레이비를 듬뿍 적셔줘, 아줌마.”
“듬뿍 적셔주고말고.”
“그리고 아침에 갈색 달걀을 먹어도 돼, 아줌마? 나는 별로 착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갈색 달걀을 두 개 줄게. 자, 이 메이플 시럽 케이크를 먹고 자거라. 릴라.”
릴라는 메이플 시럽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살그머니 나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어떤 심부름이라도 늘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아이가 되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에이미 선생님과 가엾은 고아들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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