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35~36

나단비 | 2024.04.12 19:34:45 댓글: 0 조회: 4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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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사이드 아이들은 언제나 함께 놀고, 함께 다니고, 모든 모험을 함께 나눴다. 하지만 각자 자기만의 꿈과 환상의 세계도 갖고 있었다. 특히 낸은 자기가 듣고 보고 읽은 것으로 이야기 꾸미기를 좋아해 가족들도 모르게 혼자 만들어낸 낭만적인 모험의 세계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마법에 걸린 골짜기에 사는 춤추는 아기 도깨비며 꼬마 요정, 자작나무 요정 같은 이야기를 지었다. 대문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는 낸과 단둘이만 아는 비밀을 지녔고, ‘무지개 골짜기’ 위쪽 끄트머리에 있는 오래된 베일리네 빈집은 유령이 사는 탑이 되었다.
몇 주 동안은 바닷가 외로운 성에 갇혀 사는 공주님이 되고, 또 몇 달 동안은 인도나 아니면 ‘저 멀고 먼 나라’ 어느 문둥병 환자 마을의 간호사가 되기도 했다. ‘저 멀고 먼 나라’라는 말은 언제나 낸에게 마법의 말이었다. 바람 부는 언덕으로 흐르는 희미한 음악소리 같은.
그러다 낸은 자기의 작은 세상 속에서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낸은 교회에 온 사람들이 보기 좋았다. 모두 좋은 옷을 입고 있어 평상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 꼭 기적 같았다.
조용하고 점잖은 얼굴로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잉글사이드’ 신도석에 앉은 저 얌전한 갈색 눈의 꼬마 아가씨가 자기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저 놀라기만 했을까? 아마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에 상냥하기 그지없는 아네트 밀리슨은 낸 블라이드의 이야기에 자기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알았다면 놀라 나자빠졌을 것이다. 아이를 납치해 산 채로 삶아 영원히 늙지 않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낸은 그 이야기를 얼마나 생생하게 상상했던지 우연히 아네트 밀리슨과 마주쳤을 때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황금빛 미나리아재비 꽃이 속살거리는 길에서 만났는데 아네트가 상냥하게 인사를 해왔지만 낸은 마주 인사를 할 수도 없었다.
그 일로 아네트는 낸 블라이드를 버르장머리를 좀 가르쳐야 할 아주 거만하고 건방진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얼굴빛이 창백한 로드 팔머 부인은 자기가 누군가를 독살하고 후회하다 죽어가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엄숙한 얼굴 표정을 하고 다니는 고돈 매컬리스터 장로는 자기가 마녀의 저주에 걸린 채로 태어나 평생 웃지 못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거뭇하게 턱수염을 기른 프레이저 팔머 씨는 비난받을 일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낸 블라이드가 자기를 보면서 ‘저 아저씨는 뭔가 사악하고 용서받지 못한 짓을 저지른 게 분명해. 마음에 뭔가 끔찍한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야.’ 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아치볼드 파이프는 낸 블라이드가 자기가 말을 걸면 대답하려고 시를 짓느라 정신없는 줄 전혀 몰랐다.
낸의 상상 속에서 아치볼드 파이프는 시로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치볼드는 아이를 몹시 두려워해서 낸에게 말을 건 일이 한 번도 없건만 낸은 아치볼드를 만날 때마다 죽을힘을 다해 재빨리 운을 맞춘 시를 지어내는 일을 즐겼다.

“나는 잘 있답니다, 파이프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랑 아주머니 모두 잘 지내시나요?”
아니면,
“네, 오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하군요!
건초를 만들기에 딱 좋은 날이에요.”

낸 블라이드가 모톤 커크 부인 집의 문턱에는 빨간 발자국이 있으니 절대로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커크 부인이 안다면 뭐라고 말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집에 초대받을 일도 없겠지만. 커크 부인의 시누이인 참하고 친절하지만 시집을 못 간 엘리자베스 커크는 자기가 시집을 가지 못한 이유가 결혼식 도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쓰러져 죽어버렸기 때문인 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낸은 사람들에 관해 상상하고 다니는 일이 무척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에게 빠져버린 다음부터는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공상이 어쩌다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느냐고? 낸 자신도 어떻게 일이 그리 되었는지 대답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모든 일은 ‘쓸쓸한 집’에서 시작되었다. 낸에게는 그 집이 쓸쓸한 집으로 다가왔다. 낸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으로도 이야기 지어내기를 좋아했고 그근방에서 이야기로 만들 만한 집은 베일리의 빈집 외에는 그 ‘쓸쓸한 집’뿐이었다. 사실 낸은 그 집을 본 적도 없었다. 그냥 그 집이 로브리지로 가는 샛길에 있는 울창하고 어두운 가문비나무 숲 뒤편에 있고, 아주 옛날부터 빈집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수잔은 그 집이 태곳적부터 빈집이었다고 말했다. 낸은 태곳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퍽 매력적인 말로 들려 ‘쓸쓸한 집’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낸은 단짝인 도러 클로네 집에 가려고 지름길로 질러갈 때 ‘쓸쓸한 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오면 언제나 미친 듯이 뛰어서 지나갔다. 그 길은 나무가 아치처럼 지붕을 이루어 어두컴컴했다. 마차 바큇자국 사이로는 풀이 빽빽이 났고, 가문비나무 아래에는 양치류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다 무너져 버린 대문 곁에는 노인의 비틀린 팔 같은 긴 가지를 가진 잿빛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낸은 언제 그것이 팔을 더 멀리 뻗어 자기를 잡아채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해 달아나는 일은 너무나 스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토머싱 페어가 그 ‘쓸쓸한 집’, 수잔의 낭만적이지 못한 말로는 옛날 매컬리스터 노인의 집에서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거기 살면 외로울 거예요. 너무 외딴 곳이잖아요.”
엄마가 말했다.
“그 여자는 그래도 상관하지 않을걸요. 원래부터 어디 나다니지를 않잖아요. 교회에도 안 나가는걸요. 몇 년 동안이나 외출 한 번 해본 적이 없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래도 밤이 되면 정원을 거닐기는 한다대요. 세상에나, 그 여자가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게 예쁘고 바람기도 많던 아가씨였는데요. 한창때는 남자깨나 울리고 다니더니 지금 그 여자 꼴 좀 보세요. 이것은 경고라고요. 내 장담하지요.”

수잔이 말했다.
수잔은 누구에게 경고가 되는 일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토머싱 페어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그 이상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낸은 오래도록 새로운 공상거리를 찾지 못한 터라 즉시 ‘쓸쓸한 집’의 토머싱 페어를 새로운 소재로 삼았다. 낸은 토머싱 페어 이야기를 날마다, 그리고 밤마다 조금씩 더 풍성하게 키워나갔다. 특히나 밤에는 어떤 일이라도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기가 쉽다. 이야기는 이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꽃을 피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멋진 공상이 되었다. 그전의 무엇도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에 관한 공상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렇게 넋을 놓게 하고, 그렇게 진짜 같았던 것은 없었다.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는 커다란 벨벳 같은 검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 눈은 뭔가에 사로잡힌 듯 공허하고, 상심한 마음 때문에 원망으로 가득했다. 사악한 눈, 그렇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악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 숙녀는 자기가 지은 죄를 속죄하려고 세상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다.
혹시 그 숙녀는 공주가 아닐까? 하지만 프린스에드워드 섬에는 공주가 없다. 하지만 그 숙녀는 꼭 공주처럼 키도 크고 날씬하며 초연해 보이면서도 차가운 아름다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는 두 가닥으로 굵게 땋아 어깨를 지나 발까지 닿아 있으리라. 상아처럼 희고 단아한 얼굴, 엄마가 갖고 있는 ‘은 활을 든 아르테미스’와 같은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상 같은 코, 밤마다 뜰을 거닐 때면 흔들리는 희고 아름다운 손. 그 숙녀는 사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고 검은 벨벳 스커트 자락을 끌고 잔디밭을 걸으며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져 나갈지 모두들 눈치챘을 것이다. 황금 허리띠를 매고, 귀에는 진주 귀걸이를 달고, 연인이 자기를 찾아내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그늘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연인이 나타나면 과거의 사악함과 무정함을 참회하고 그 아름다운 손을 연인에게 내밀어 결국 그 도도한 머리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둘은 분수 곁에 앉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분수도 있어야 한다. 이제 다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고 연인을 따라간다. 언덕 너머 저 멀리로, 가장 먼 보랏빛 안개 어린 꼭대기 저편으로.
엄마가 자기 전에 읽어준 시에 나오는 이야기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그 시집은 아빠가 아주 오래전에 엄마에게 선물한 테니슨의 책이다. 연인은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에게 이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아름다운 보석을 준다.
‘쓸쓸한 집’은 물론 훌륭한 가구가 갖추어져 있고 비밀의 방과 계단도 있으며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는 자줏빛 벨벳 천장이 있는 진주 침대에서 잠을 잔다. 그레이하운드 개 암수 한 쌍의 호위를 받고, 다른 수행원들도 많다. 그녀는 언제나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하프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기울인다. 기울인다. 하지만 그녀가 사악했을 때는 그 음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연인이 와 그녀를 용서하고 나서야 그 음악소리가 들렸다.
물론 매우 바보 같은 소리다. 하지만 공상이란 것은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원래가 그렇게 어리석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다. 이제 열 살인 낸은 자기의 공상을 말로 표현하지도 않고 그 속에서 살았다. 사악한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에 관한 공상은 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생활 못지않게 현실감을 얻게 되었고, 낸을 사로잡아 버렸다. 낸은 2년 동안이나 그 공상 속에서 살았다. 낸은 말이 되거나 말거나 그 이야기를 사실로 믿어버렸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지는 않았다. 엄마에게조차도. 그것은 낸의 특별한 보물이었고, 자기만의 비밀이었으며, 그것 없이는 상상의 생활을 지속해갈 수 없었다. 낸은 ‘무지개 골짜기’로 가서 놀기보다도 혼자서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 공상을 하며 놀기를 더 좋아했다.
앤은 낸의 이런 경향을 눈치채고 좀 걱정이 되었다. 낸의 공상이 너무 심해져 간다는 생각이었다. 길버트는 낸을 에이번리로 보내보자고 했다. 하지만 낸은 처음으로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집을 떠나기 싫다고 가엾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자기는 그 이상하고도 슬퍼 보이는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에게서 멀리 떨어질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는 정말로 외출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집 밖으로 나올지도 모르는데 낸이 어디 가 있으면 그 숙녀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 숙녀를 얼핏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숙녀가 걸은 길이라면 영원히 낭만적인 길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 날은 보통 날과는 다를 것이다. 달력에다 그날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으리라. 낸은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숙녀를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낸은 자기가 상상한 것들이 그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낸은 토머싱 페어가 젊고 아름답고 사악하며 사람을 홀릴 듯 매력적이라는 데는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낸은 수잔도 그렇게 말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토머싱 페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한 낸은 그녀를 영원히 계속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낸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수잔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오후에 잠깐 옛날 매컬리스터네 집에 다녀와 주지 않겠니? 그 집에 사는 토머싱 페어에게 전해주어야 할 물건이 있어. 어젯밤에 아빠가 시내에서 가져왔단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낸은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제 그 ‘쓸쓸한 집’을 보게 된다. 그 아름답고 사악한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를 보게 된다. 실제로 그녀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만져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하운드 개니 분수니 하는 것들이 상상일 뿐이라는 것은 낸도 알지만 현실도 상상만큼이나 멋질 것이다.
낸은 오전 내내 시계만 보았다. 시간이 왜 그리도 늦게만 가는지. 시간이 느리기는 하지만 그 숙녀를 만날 시간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불길하게 천둥이 내리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낸은 실망이 너무 커서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하느님은 오늘 같은 날에 비가 오게 하면 어떡해.”
낸은 반항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나기는 곧 지나갔고 다시 반짝하고 해가 나왔다. 낸은 너무나 흥분이 되어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엄마, 나 노란색 드레스 입어도 돼요?”
“이웃집 좀 다녀오는데 그렇게 차려입어야 하겠니?”
이웃집이라니! 하지만 엄마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엄마, 제발요.”
“좋아,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앤이 말했다. 그 노란 옷은 곧 작아질 테니까 낸이 입고 싶은 만큼 실컷 입게 놔두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소중한 소포를 들고 집을 나오는 낸의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무지개 골짜기’를 빠져나와 지름길을 통해 언덕을 지나고 드디어 샛길로 나왔다. 아직 금련화 이파리에는 커다란 진주처럼 생긴 굵은 빗방울이 남아 있었다. 공기는 무척이나 신선했다. 개울가에 피어난 하얀 클로버 무리 위로는 벌이 윙윙거렸고 번쩍번쩍 물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날씬한 파랑 잠자리들이었다. 수잔은 저 호리호리한 잠자리를 ‘악마의 바늘’이라고 불렀다. 언덕 목초지에서는 데이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낸을 보며 손을 흔들고, 몸도 흔들고, 웃어주었다. 시원한 금방울 은방울 소리로 웃어주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다정했다. 이제 곧 사악한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숙녀는 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런데 그녀를 만나는 일이 과연 안전할까? 지난주에 월터 오빠랑 같이 읽었던 이야기에서처럼 단 몇 분만 앉아 있었는데 몇백 년이 흘러버리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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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은 ‘쓸쓸한 집’으로 가는 오솔길로 들어서자 야릇하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죽은 단풍나무 가지가 움직인 것 같은데.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단풍나무를 벗어났다. 이봐요, 마녀 할머니, 나를 붙잡을 수는 없어요! 마차 바큇자국이 깊게 팬 오솔길은 진흙투성이였지만 낸의 기대감을 망치지는 못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쓸쓸한 집’이다. 저 어둑하고 울창한 나무숲, 나무들 사이에 있다. 드디어 그 집을 보게 된 것이다. 낸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낸은 그것이 자기 꿈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은 몰랐다. 꿈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노인에게나 모두 비극이다.
낸은 어린 가문비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오솔길 끝까지 다 왔다. 낸은 눈을 감아버렸다. 감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 끔찍한 공포감이 낸을 사로잡았고 곧 몸을 돌려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숙녀는 사악하다.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혹시 마녀는 아닐까? 그 사악한 숙녀가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여태까지 하지 못했지?
낸은 결연히 눈을 떴다. 그러나 곧 눈이 휘둥그레지고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이것이 ‘쓸쓸한 집’이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음산하고 위엄 있는 망루며 탑이 솟아 있는 저택, 이것이!
그 집은 크긴 컸다. 옛날에는 흰색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색이 바래 초라한 회색이었다. 전에는 녹색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덧문들도 부서져 너덜거렸다. 현관문으로 이르는 계단도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베란다의 유리문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베란다의 소용돌이 모양 장식도 깨져 있었다. 한마디로 그 집은 너무 오래 살아서 낡아빠지고 쓸모없어진 옛날 집에 지나지 않았다!
낸은 실망하여 주변을 바라보았다. 분수도 없고 정원도 없었다. 정말이지 정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 앞의 공터는 다 무너져가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무릎 높이까지 올라오는 잡초들만 잔뜩 자라 서로 얽혀 있었다.
말라빠진 돼지 한 마리가 울타리 너머에서 땅을 파고 있는 게 보였다. 보도 가운데를 따라서는 우엉이 자랐다. 하지만 한구석에는 예쁜 참나리 꽃들이 피었고, 무너져가는 층계 옆으로 금잔화 꽃들도 피어 있었다.
낸은 터벅터벅 금잔화 화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쓸쓸한 집’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는 아직 있다. 틀림없이 그것만은 진짜일 것이다. 진짜가 틀림없지 않은가? 얼마 전에 수잔이 그 부인을 뭐라고 했더라?
“어이구머니나, 깜짝 놀랐잖니!”
어디서 발음이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친밀감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낸은 금잔화 화단 옆에서 별안간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그럴 리가 없어. 낸은 그 사람이 토머싱 페어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건 너무해!
‘어떻게 된 일이야. 너무, 너무 늙었잖아.’
낸은 실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토머싱 페어, 이 사람이 토머싱 페어일까, 이제 낸은 그 사람이 토머싱 페어라는 걸 알았다. 그 숙녀는 할머니였구나. 그리고 뚱뚱해! 그 할머니는 수잔이 언제나 뚱뚱한 부인을 빗대어 말할 때 쓰는 표현처럼 깃털 침대 가운데를 끈으로 질끈 동여매 놓은 것 같았다. 신발도 신지 않았고, 색깔이 너무 바래서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녹색 드레스를 입었으며, 숱도 별로 없는 흰 머리에 낡아빠진 남자용 털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꼭 O자처럼 둥글고 주름투성이였으며 코는 주먹코였다. 옅은 파란색 눈꼬리로는 우습게 생긴 주름이 크게 잡혀 있었다.
‘오, 나의 숙녀…… 나의 매력적이고 사악한 신비한 눈을 가진 숙녀, 당신은 어디 있나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당신은 분명히 있었잖아요!’
“너는 어느 집 착한 딸이냐?”
토머싱 페어가 물었다.
낸은 의젓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썼다.
“저는, 저는 낸 브라이스입니다. 이것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토머싱은 기쁜 듯이 소포에 달려들었다.
“아이구, 내 안경이 왔구나. 일요일에 저 달력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는데. 넌 그럼 블라이드네 딸이냐? 머리카락이 참 예쁘구나! 난 언제나 블라이드 가의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었지. 네 엄마가 아이들을 과학적으로 키운다는 말을 들었거든. 너도 좋아하니?”
“좋아해요? 무엇을요?”
‘오, 나의 매력적이고 사악한 숙녀여, 당신은 일요일에 달력을 보는 사람아 아닌데, 우리 엄마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이라니, 과학적으로 너희를 키우는 것 말이야.”
“네. 저도 좋아해요.”
낸은 웃으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그래, 네 엄마는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야. 자기 생각이라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 내가 리비 테일러의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네 엄마를 봤을 때 네 엄마는 새색시였고 굉장히 행복해 보였단다. 네 엄마가 방에 들어오면 모두들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들을 했지. 네 엄마는 유행도 새로 만들어냈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그런 것을 입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가거라. 나는 누구든 만나면 기쁘단다. 가끔씩 참 쓸쓸한 기분이 들어. 전화를 놓을 돈도 없고, 나한테는 꽃이 친구란다. 이렇게 훌륭한 금잔화를 본 적이 있니? 그리고 고양이도 한 마리 있지.”
낸은 저 멀리 달아나버리고 싶었지만 집으로 들어가자는 청을 거절해서 이 할머니의 마음을 언짢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토머싱 할머니는 치마 아래로 페티코트를 다 보이며 무너져가는 계단을 앞서 올라가서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과 거실을 겸해서 쓰는 방이었다. 방은 깨끗했고 잘 가꾸어진 화분들이 놓여 있어 밝은 분위기였다. 공기 중에는 막 구워낸 향긋한 빵 냄새가 감돌았다.
토머싱은 천 조각을 화려하게 이어 붙여 만든 쿠션이 놓인 흔들의자를 낸 앞으로 밀어주며 친절하게 말했다.
“여기에 앉으렴. 저 칼라 백합꽃을 치워줄게. 내 아래 틀니를 끼우고 올 테니 기다려라. 틀니를 빼놓아서 내 모습이 이상하지? 틀니를 끼우면 좀 아파서. 자, 이제 발음도 더 분명해졌지?”
얼룩고양이가 온갖 묘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에게로 왔다. 오, 사라져버린 그레이하운드의 꿈이여!
“이 고양이는 쥐를 아주 잘 잡아. 이 집은 사방천지가 쥐였어. 그래도 비바람은 막을 수 있고, 또 친척들과 얼굴 찌푸리며 살기도 신물이 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도 없었지. 내가 뭐 자기들 발톱에 낀 때라도 되는 듯 이래라저래라 명령이나 하고. 짐의 아내가 최악이었어. 어느 날 밤에는 내가 달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고 불평을 하더라니까. 내가 그랬더라도 그것이 뭐 어째서? 달을 째려보면 달이 찌그러지기라도 해? 그래서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들볶이면서 살지 않을 거라고 쏘아주고 이 집으로 와서 나 혼자 사는 거란다.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여기서 살 작정이야. 그래, 뭘 좀 먹을래? 양파 샌드위치는 어떠냐?”
“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양파 샌드위치가 최고야. 나도 하나 먹었다. 내 ‘붉은 플란넬 천과 거위 기름이라니! 테레빈유는 더 기가 막히고!’
“샌드위치는 생각이 없다면, 정말로 생각이 없어? 그렇다면 과자 상자에 뭐가 있는지 어디 좀 보자.”
과자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수탉이랑 오리 모양의 과자는 너무나 맛있어 입 안에서 살살 녹아버릴 정도였다. 토머싱 할머니는 동그란 눈으로 낸이 과자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이제 나를 좋아해줄 수 있겠니? 나는 꼬마 여자아이들이 나를 좋아해주면 무척 기분이 좋더라.”
“좋아해볼게요.” 
앤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낸은 토머싱 페어를 미워하고 있었다. 누군들 자기 환상을 깨버린 사람이 밉지 않겠는가.
“내게도 손자들이 있어. 서부에 살지.”
‘손자들!’
“내 손자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마. 예쁘지, 안 그러니? 저 위에 있는 그림은 가여운 우리 집 양반이란다. 죽은 지가 20년도 더 지났지.”
토머싱 할머니가 가여운 우리 집 양반이라고 한 그림은 ‘크레용’으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 대머리를 곱슬거리는 흰 머리칼이 둘러싸고 있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오, 버림받은 연인이여!’
“서른 살에 머리가 벗어졌지만 좋은 남편이었지. 처녀 때는 나도 남자가 많았어. 지금은 늙어버렸지만 젊었을 때는 아주 멋지게 살았단다. 일요일 밤의 연인들이란! 서로들 내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고 나는 여왕처럼 거만하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녔지. 우리 집 양반도 그런 남자들 중 하나였지만 난 그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좀 더 박력 있게 나오는 사람이 좋았거든. 난 앤드루 메트카프라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 그 남자와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까지 하였단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불행해질 거라는 것을 알았지. 너도 달아나 본 적이 있니? 그건 불행한 일이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말은 절대로 믿지 마라.”

토머싱 할머니는 추억에 젖어 말했다.
“전, 전 안 그래요. 정말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결국에는 우리 집 양반과 결혼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그 사람 인내심도 바닥이 났는지 24시간 동안 시간을 줄 테니 자기를 택하든지 떠나든지 결정하라고 하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얼른 결혼해서 안정되게 살기를 바라셨어. 내가 청혼을 거절했다고 짐 휴이트가 물에 빠져 죽어버리자, 우리 아버지는 노심초사하게 되었던 거야. 우리는 그렇게 결혼을 했고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나니까 아주 행복하더라. 우리 집 양반은 내가 생각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자기와 잘 맞는다고 했지. 그 양반은 여자는 생각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여자가 생각을 많이 하면 비쩍 말라버리거나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했단다. 그 사람은 구운 콩도 맞지 않았지. 구운 콩만 먹으면 체했고, 허리 신경통도 잘 일으켰지만 내가 향유치료법으로 치료해주었지. 시내에 그 분야 전문 의사가 있었고, 그 사람이 남편을 완전히 낫게 해줄 수 있다고 했지만 남편은 전문가의 손에 한번 잡히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말했어. 우리 남편이 돼지 밥을 주던 모습은 참 보기 좋았는데. 그 사람은 돼지를 참 좋아했어. 난 베이컨을 먹을 때마다 그 사람 생각이 나. 우리 집 양반 그림 반대편에 있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 사진이지. 가끔씩 난 여왕을 보면서 ‘당신 몸에서 그 레이스와 보석을 다 떼어내면 나보다 더 나을 것도 없어요.’ 하고 말한단다.”
낸이 일어서자 페어 부인은 낸에게 박하사탕 한 봉지와 구두 모양의 분홍색 유리 꽃병과 구즈베리 젤리 한 병을 쥐어주었다.
“그건 네 엄마에게 드리렴. 나는 언제나 구즈베리 젤리를 갖고 있으면 운이 좋더라. 언제 ‘잉글사이드’에 한번 들르마. 그 도자기 개 인형을 보고 싶거든. 수잔베이커에게 지난봄 보내준 순무 요리를 잘 먹었다고 전해줘라.”
‘순무 요리라고!’
“저번 제이컵 워렌의 장례식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일찍 가버렸더구나. 난 장례식에 가면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오지. 한 달 동안이나 장례식이 하나도 없었어. 장례식이 없으면 너무 심심해. 로브리지에서는 언제나 훌륭한 장례식이 열렸는데. 이건 공평하지가 않아. 나중에 또 나를 보러 와다오. 올 거지? 넌 뭔가 다른 구석이 있는 아이 같구나. 성경에 보면 ‘사랑이 은과 금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던. 난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토머싱 페어는 낸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다정하고 보기 좋은 미소였다. 그 속에 옛날 아름다웠던 토머싱의 모습이 엿보였다. 낸은 가까스로 마주 웃어주었다. 눈이 따갑고 아팠다. 울음이 터져 나오기 전에 얼른 집을 나와야 했다.
“정말 착하고 행동거지도 바른 꼬마야. 제 엄마처럼 말을 잘하는 재주는 없지만 그거야 나쁜 점도 아니지. 요즘 아이들은 건방진 말만 하면서 제가 똑똑한 줄 아니까. 저 애가 와주어서 마음이 젊어진 것 같아.”
토머싱은 창문 밖으로 낸의 뒷모습을 좇으며 중얼거렸다.
토머싱 페어는 한숨을 쉬며 금잔화를 자르고 우엉을 마저 파내려고 밖으로 나갔다.
‘몸이 잘 움직여줘서 다행이야.’
토머싱은 생각했다.
낸은 꿈을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잉글사이드’로 돌아왔다. 데이지가 가득 핀 골짜기도 낸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개울도 노래하며 낸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낸은 집으로 돌아가 아무도 모르게 숨어버리고 싶었다. 길에서 만난 소녀 둘이 낸 옆을 쿡쿡거리며 지나갔다. 저 아이들도 나를 비웃는 것인가? 이 일을 알면 모두들 나를 비웃을 것이다. 바보 같은 낸 블라이드는 허무맹랑한 신비한 여왕에 관한 공상의 로맨스를 엮다가 그 가여운 우리 집 양반의 미망인과 박하사탕만 얻었대요.
‘박하사탕이라니!’
낸은 울지 않을 것이다. 열 살이나 먹은 큰 아이는 울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낸은 몹시도 우울했다. 뭔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라져버렸다. 비밀스럽게 간직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낸은 다시는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잉글사이드’에 도착해보니 맛있는 과자 냄새가 가득했지만 수잔에게 과자를 얻으려고 부엌으로 가지도 않았다. 저녁 식사 때도 낸은 식욕이 거의 없어 보였다. 수잔의 눈에 피마자기름이라고 씌어 있는 것이 보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앤은 낸이 매컬리스터 집에 다녀온 후부터 시무룩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낸은 동이 트자마자 시작해 어두워질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아이였다. 뜨거운 날 너무 많이 걸은 것이 아이에게는 무리였을까?
“우리 딸, 뭐 고민이라고 있는 거야?”
앤이 해 질 무렵 새 수건을 가져다 두려고 쌍둥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낸은 창가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무지개 골짜기’로 나가 적도 정글의 호랑이를 쫓고 있었다.
낸은 자기가 한 어리석은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다.
“아, 엄마, 왜 이렇게 사는 것이 다 실망스러울까요?”

“다는 아니지. 오늘 뭐가 그렇게 실망스러웠는지 얘기해보겠니?”
“아, 엄마, 토머싱 페어는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그 숙녀는 경멸스러웠어요.”
“하지만 왜? 네가 그 숙녀가 경멸스럽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이니?”
앤이 당황스러워 물었다.
낸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앤은 언제나의 그 심각한 표정으로 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속으로는 비명처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버리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앤은 어린 시절 ‘초록 지붕 집’에서의 일을 기억했다. 앤은 ‘유령의 숲’과 두 소녀가 공상으로 만들어낸 일로 두려움에 떨었던 일을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앤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도 잘 알았다.
“공상이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그렇게 가슴 아프게 생각할 건 없단다.”
“나도 어쩔 수 없어요. 난 다시는 상상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요.”
낸은 절망해서 말했다.
“우리 사랑스러운 바보, 바보, 그런 말은 하지 마. 상상력이란 것은 정말 좋은 거야.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단다. 넌 네 공상을 조금 많이 심각하게 받아들인 거야. 상상이란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지. 나도 그것의 기쁨을 잘 알아. 하지만 현실과 공상을 착각해서는 안 돼. 공상이란 단지 힘든 일을 겪을 때 너만의 아름다운 세상으로 잠시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해. 그러면 상상의 세계는 너에게 무척 놀라운 힘이 되어줄거야. 엄마도 마법의 힘으로 한두 번 항해했다가 돌아오면 힘든 일들을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었거든.”
이 현명한 위로의 말을 듣고 낸은 다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신비한 눈을 가진 사악하고도 아름다운 숙녀는 비록 ‘쓸쓸한 집’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집도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렌지빛 금잔화가 피어 있고, 붙임성 좋은 얼룩고양이도 있고, 제라늄이 있고, ‘우리 집 양반’ 그림도 있다. 정말 재밌는 곳이다. 나중에 토머싱 페어를 만나러 가서 그 맛있는 비스킷을 좀 더 얻어먹어야겠다.
낸은 이제 토머싱 할머니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참 좋은 엄마야.’
낸은 그 편안한 엄마의 품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보랏빛과 잿빛 섞인 저녁 어스름이 언덕 위로 뿌려졌고, 여름날 밤의 어두운 장막이 내려졌다. 벨벳처럼 검은 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큰 사과나무 위로 별 하나가 나타났다. 미스 코넬리아가 와서 엄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낸은 행복했다. 엄마가 방에 예쁜 미나리아재비 같은 노란색 벽지를 발라준다고 했고, 다이와 함께 쓰도록 삼나무로 만든 새 장롱도 사준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삼나무 장롱이 아닐 것이다. 암호를 대야만 열리는 마법 보물 장롱일 것이다.
눈의 마녀, 차갑고 아름다운 흰 눈의 마녀가 그 암호를 소곤소곤 속삭여줄지도 모른다. 비탄에 잠긴 잿빛 바람이 알려줄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그 암호를 모두 알아내어 장롱을 열어보면 진주며 루비며 다이아몬드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많다는 건 너무 멋진 말이다!

아, 마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마법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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