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39~41 (6권 끝)

나단비 | 2024.04.13 19:33:01 댓글: 0 조회: 4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851
39






성질 고약한 노파가 꾸짖는 소리 같은 차디찬 동풍이 ‘잉글사이드’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늦은 10월의 춥고 으스스한 날, 하는 일마다 꼬이고 잘못되어 속이 상한 것이 그 옛날 에이번리 시절에 ‘요나의 날’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날 같았다.
수잔이 이불장을 열어 보니 나방들이 로마의 휴일을 즐기고 있었고, 길버트가 남자아이들을 위해 데려온 강아지는 식탁 다리를 갉아 에나멜 칠을 다 벗겨놓았다. 거기다 낸의 새끼 고양이들까지 거들어 가장 보기 좋았던 양치류 화분을 다 망쳐놓았다.
 젬과 버티 셰익스피어는 오후 내내 다락방에서 양철 양동이를 북 삼아 두드리며 어찌나 소란을 피우는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앤도 채색 유리 램프 갓을 깨뜨리며 이 소동에 한몫했는데 와장창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에 기분이 다 후련했다! 릴라는 귀가 아프고, 셜리는 목에 이상한 발진이 생겨서 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길버트는 흘끗 보기만 하고 별것 아니라고 건성으로 말할 뿐이었다. 물론 자기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겠지! 셜리가 뭐 자기 아들밖에 더 되나. 지난주 어느 날 저녁에는 트렌트 씨 부부를 초대해놓고 그 부부가 올 때까지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 일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앤과 수잔은 그날 유난히 바빠서 저녁 식사를 있는 대로 그냥 먹고 치우자고 했다. 트렌트 부인은 샬럿타운에서 가장 손님 접대를 잘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말이다. 월터 양말은 어디 있는 거지? 발가락은 파랗고 발은 검은색인 양말.
“월터, 한 번만이라도 물건을 제자리에 놓아둘 수 없니? 낸, ‘일곱 바다’가 어디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질문 좀 그만하면 안 되겠니? 그래, 소크라테스는 독살당했어. 독살할 수밖에 없었나 보지.”
월터와 낸이 눈이 휘둥그레져 엄마를 바라보았다. 둘 다 전에는 엄마가 이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월터의 표정이 앤을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다이, 피아노 의자에 다리를 감아 꼬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아직도 엄마 말을 못 알아들었니? 셜리, 넌 새 잡지를 그새 잼으로 끈적거리게 해놨구나! 천장 램프 갓이 어디 갔는지 누가 좀 알려줄래?”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었다. 수잔이 걸고리에서 떼어내 씻으려고 들고 나갔다. 앤은 아이들의 슬픈 눈을 피하려고 얼른 2층으로 올라갔다. 자기 방으로 가자 앤은 초조하게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도대체 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앤이 저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요즘 앤은 모든 일에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초조했다. 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길버트의 별스럽지 않은 버릇도 모두 신경을 거슬렸다. 끝도 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단조로운 의무들이 그렇게 지겨울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식구들의 이런저런 요구를 들어주고 다니는 일에도 진력이 났다. 전에는 자기 집과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 모두 기쁘기만 했건만 지금은 그런 일이 도통 신나지 않았다. 족쇄를 찬 채 누군가를 따라잡으려고 조바심하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앤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을 길버트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길버트는 밤낮없이 바빠서 자기 일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날 점심을 먹으면서도 한 말이라고는 “겨자 좀 건네줘.”가 다였다.
‘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의자나 탁자밖에 없어.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습관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거야.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 어젯밤에는 내가 새 옷을 입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 나를 앤 아가씨라고 부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해. 결혼 생활이란 것이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이겠지. 나뿐 아니라 모든 여자들이 이런 과정을 겪을 거야. 길버트는 이제 나를 그저 당연히 옆에 있는 사람으로만 여겨. 이제 길버트에게는 자기 일만이 중요하다고. 내 손수건은 어디 있더라.’
앤은 손수건을 찾아들고 앉아 실컷 자기 자신을 고문했다. 길버트는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키스할 때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한다. 좋은 시절은 다 가버렸다. 둘이서 같이 웃음을 터트리던 추억들이 이제는 비극으로 변해버렸다. 그런 일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기나 했던가? 몬티 터너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아내에게 키스를 한다고 했다. 키스하는 날을 잊지 않으려고 수첩에 적어두기까지 한단다. ‘그런 키스를 바라는 아내가 있을까?’ 커티스 에임스는 아내가 새 모자를 쓰자 아내를 몰라봤다고 했다. 클랜시 데어 부인은 “나는 우리 남편에게 별 관심이 없지만 곁에 없으면 그립더군요.” 하고 말했다. ‘길버트도 내가 곁에 없으면 보고 싶겠지. 우리에게도 드디어 그런 시기가 와버린 것인가?’ 네트 엘리엇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뒤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렇게 내 마음을 꼭 알아야겠다면 말을 하지. 나는 결혼 생활이 싫어졌어.”

‘우리도 결혼한 지 어느새 15년이나 지났네!’
그렇다. 아마도 사내들은 다 그럴 것이고, 미스 코넬리아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결혼하고 시간이 흐르면 남편의 마음을 붙들어두기가 어렵다. ‘하지만 내 남편이 붙들어야 내 곁에 있어준다면, 나도 붙들고 싶은 마음 따윈 없어.’ 하지만 시어도어 클로 부인 같은 사람도 있었다. 클로 부인은 부인회 모임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내 남편은 신혼 시절과 다름없이 나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 부인도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저 체면을 지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다 그 부인은 자기 나이보다 나이도 훨씬 더 들어 보였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인지도 몰라.’
앤은 처음으로 나이가 짐스럽게 느껴졌다. 거울로 다가가서 자기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꼬리 주변으로 주름이 약간씩 잡혀 있었지만 밝은 빛 아래서가 아니면 잘 보이지 않았다. 턱 선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얼굴빛은 전부터도 창백한 편이었다. 머리칼도 흰머리 같은 것도 없이 풍성하게 물결 쳤다. 그러나 진심으로 빨간 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코 모양은 여전히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만했다. 앤은 이 예쁜 코를 의지 삼고 살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길버트는 이 코도 그저 당연하게만 여기고 있다. 비뚤어졌거나 들창코거나 상관없는 것이다. 앤에게 코가 ‘있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데어 부인처럼 코가 없어진다면 알아차릴까.
‘자, 이제 릴라와 셜리를 돌봐주러 가야겠어. 적어도 그 아이들에게는 아직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왜 아이들에게 그렇게 화를 냈을까? 아이들이 우리 엄마가 이상해져간다고 흉봤을 거야.’
앤은 쓸쓸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비는 계속해서 오고 바람도 불어댔다. 다락방의 시끄러운 환상곡은 그쳤으나 거실에서 여전히 외로운 귀뚜라미 한 마리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통에 앤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정오에 앤에게 편지 두 통이 왔다. 한 통은 마릴라에게서 온 것이었다. 앤은 편지를 접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마릴라의 흔들리는 필체에서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한 통은 앤이 겨우 안면 정도만 있는 샬럿타운의 배럿 파울러 부인이 보내온 것이었다. 파울러 부인의 편지에는 이번 주 화요일 저녁 7시 만찬회에 블라이드 부부를 초대한다고 쓰여 있었다. 두 분의 옛 친구인 위니펙의 앤드루 도슨 부인, 옛 이름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만나게 될 것이란다.
앤은 편지를 내려놓았다. 옛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중에는 불쾌한 기억도 있었다. 레드먼드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길버트와 약혼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던 아가씨다. 전에 앤이 끔찍이도 질투했던 사람. 그렇다, 20년이나 지난 지금, 앤은 그런 사실을 인정했다. 앤은 크리스틴을 질투했고 미워했다. 앤은 오랫동안 크리스틴을 잊고 살았지만 그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상아처럼 피부가 하얀 아가씨로 눈은 진한 푸른색이고 소담스러운 머리카락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이었다. 미인이고 기품도 있었다. 그러나 코가 길었다. 분명 기다란 코를 가졌다. 몇 해 전 크리스틴이 결혼을 무척 ‘잘’해 서부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길버트가 얼른 저녁을 먹고 가려고 들어왔다. 지금 글렌 윗마을에는 홍역이 유행하고 있었다. 앤은 말없이 파울러 부인의 편지를 내보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라고? 옛날 기억도 나고 꼭 가서 보고 싶군. 크리스틴도 힘들게 살았어. 4년 전 남편을 잃었거든.”
길버트는 지난 몇 주일 동안 들어보지 못한 생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앤은 모르는 일이었다. 길버트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왜 앤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음 주 화요일은 결혼기념일인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날은 보통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고 둘이서만 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좋아, 나도 생각나게 해주지 않을 테니까 원한다면 자기의 크리스틴을 만나러 가라고. 언젠가 레드먼드에서 클레어 할릿이 앤에게 어두운 얼굴로 “길버트와 크리스틴 간에는 네가 모르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어.” 하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저 웃고 말았다. 클레어는 좀 악의가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앤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길버트의 옛날 지갑에서 작은 크리스틴의 사진을 발견했던 일이 생각나 기분이 아득해졌다. 길버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잖아도 옛날 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사소한 일이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인 경우도 있지 않은가? 이 일이 그런 일이 아닐까? 길버트가 크리스틴을 사랑했던 건 아닐까? 자기 자신, 앤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은 사람으로.
앤은 웃으려고 애쓰며 생각했다.
‘내가 질투를 하다니.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옛날 레드먼드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뭐 어쨌다고. 결혼한 지 15년이나 지난 바쁜 남자가 때도, 계절도, 해도, 달도 잊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앤은 파울러 부인에게 초대에 응하겠다는 답장을 썼다. 그러고는 화요일이 오기 전 사흘 동안 앤은 글렌 윗마을 누군가가 5시 30분 이후에 아기를 낳기만 간절히 바랐다.





40






아기는 너무 일찍 나왔다. 길버트는 월요일 밤 9시에 불려나갔다. 앤은 울면서 혼자 잠들었다가 새벽 3시에 다시 잠이 깼다. 평상시라면 새벽에 잠이 깨는 것도 좋았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정적에 휩싸인 밤의 아름다움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감미로웠으니까. 곁에 누운 길버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고, 복도 저편에는 아이들이 잠들어 있다는 생각, 또 아름다운 하루가 다가온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지금은! 앤은 새벽이 맑고 푸른 보석처럼 동쪽 하늘에서 동터올 무렵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길버트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길버트는 침대 위로 몸을 풀썩 던지면서 “쌍둥이야.”라고 한 마디 하더니 금방 잠들어버렸다. 쌍둥이라고! 그래, 결혼 15주년 아침에 고작 한다는 소리가 ‘쌍둥이야.’라니. 길버트는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란 것도 잊어버린 것이다.
11시 무렵이 되자 길버트는 아래층으로 내려왔지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여전히 기억을 못 하는 것이 분명했다.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평생 처음이고, 선물이 없는 날도 평생 처음이었다. 좋다. 그럼 나도 선물을 주지 않으리라. 앤은 몇 주 전부터 선물을 준비했다. 손잡이 부분이 은으로 된 주머니칼로 한쪽에는 날짜를 새겼고 다른 쪽에는 길버트 이름 이니셜을 새겼다. 물론 이 칼로 사랑이 잘려버리는 일이 없도록 길버트는 1센트를 내고 이 칼을 사야 한다. 그러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길버트가 잊고 있다면 자기도 잊어주리라.
길버트는 온종일 멍한 모습이었다.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우울한 얼굴로 서재 안을 서성이기만 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다 크리스틴에게 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죽 마음 한구석에서는 크리스틴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앤도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질투하는 마음이 어디 합리적인 것이던가. 고상한 척해보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런 기분에는 인생철학이고 고상함이고 다 소용없다.
두 사람은 5시 기차를 타고 시내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도 안에 들어가서 엄마 드레스 갈아입는 거 구경해도 돼요?”
릴라가 물었다.
“마음대로…….”
앤이 무심코 말하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내 말투에 왜 이렇게 가시가 돋쳐 있지 하고 후회하는 마음에 다시 고쳐 말했다.
“그래, 얼른 들어와, 아가야.”
릴라는 엄마가 드레스 입는 걸 지켜보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렇지만 그날은 릴라 눈에도 옷을 갈아입는 엄마의 모습이 신나 보이지 않았다.
앤은 어떤 옷을 입고 갈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곧 길버트가 관심 있게 보아주지도 않을 텐데 어떤 옷을 입건 무슨 상관이야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거울도 이제 앤의 친구가 아니었다. 얼굴빛이 핼쑥하고 지쳐 보이는 것이 그 누구도 환영해주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크리스틴 앞에서 촌스럽고 감각 없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크리스틴이 날 안됐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새로 맞춘 장미 꽃봉오리 무늬가 있는 안감 위에 초록 사과 색깔의 그물 원단 드레스를 입을까? 아니면 클루니 레이스 장식이 달린 이튼 재킷에 크림빛 실크 드레스를 입을까? 앤은 두 벌을 다 입어보고 초록색 그물 원단 쪽 옷을 입기로 결정했다. 머리 모양도 몇 가지 스타일을 해보고 새로 유행하는 머리를 앞쪽으로 올리는 스타일을 하기로 했다.
“엄마, 엄마 너무 예뻐.”
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의 말을 했다. 어린아이와 바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레베카 듀도 언젠가 내가 ‘비교적 아름답다’고 했건만 길버트는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지가 언제야. 길버트에게 예쁘다는 찬사를 들어본 기억이 너무 까마득했다.
길버트도 옷을 갈아입으려고 앤 곁을 지나갔지만 앤이 입고 있는 옷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간 앤은 너무 약이 올라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거칠게 옷을 벗어 침대 위에 내던졌다. 좋아, 그 낡은 검정 드레스를 입겠어. 포 윈즈 내에서는 그 옷도 세련되었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길버트는 좋아하지 않는 옷이었다. 목걸이는 어떤 것을 걸어야 할까? 젬이 준 진주 목걸이를 몇 년 동안이나 애용했지만 이제 그것마저 망가져버린 지 오래였다. 변변한 목걸이 하나가 없구나. 오래전 레드먼드 시절에 길버트가 주었던 분홍색 에나멜 하트 목걸이가 든 상자를 꺼냈다. 근래 그 목걸이를 걸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분홍색은 빨간 머리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오늘 밤엔 이걸 걸고 나가자. 길버트가 알아볼까? 자, 이제 준비는 되었다. 그런데 길버트는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건가.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틀림없이 공들여 수염을 깎고 있기 때문일 거야. 앤은 세차게 문을 두들겼다.
“길버트, 빨리 하지 않으면 기차 놓쳐.”
“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잖아. 뭐 잘못 먹었어?”
길버트가 나오며 말했다.
그래, 사람을 놀리고 싶으면 놀리라지. 앤은 연미복을 입은 길버트를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멋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어쨌거나 요즘 유행하는 남자들 옷은 참 바보스럽다. 우아한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남자들 옷은 참 근사했다. 흰색 비단 더블릿에 붉은색 벨벳 외투를 입고 주름이 잡힌 레이스 칼라! 그렇게 우아한 옷을 입고 있어도 유약한 느낌은 없었다. 그 시대 남자는 다시 볼 수 없으리만치 훌륭하고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자, 서둘러야 한다면서. 어서 가자고.”
길버트가 무심하게 말했다. 길버트는 이제 언제나 이렇게 무성의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앤이 가구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맞다, 앤은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젬이 마차로 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교회 저녁 식사에 다른 때처럼 감자 요리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러 온 미스 코넬리아가 수잔과 함께 서서 둘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배웅해주었다.
“앤은 아직도 창창하네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맞아요.”

수잔도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사모님이 요 몇 주 동안 뭔가 마음에 안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도 여전히 보기는 좋아요. 의사 선생님이야 변함없이 언제나 멋지구요.”
“이상적인 한 쌍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 이상적인 한 쌍은 시내로 가는 내내 대화다운 대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물론 길버트는 옛날 연인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자기 아내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앤이 재채기를 했다. 앤은 코감기나 걸리지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앤드루 도슨 부인, 처녀 적 이름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보는 앞에서 재채기나 해댄다면 얼마나 볼썽사납겠는가! 입술에도 물집이 잡혔다. 몸살이라도 날 모양이었다. 줄리엣도 재채기를 할까? 그 멋있는 포샤가 동상에 걸렸다고 생각해봐! 트로이의 헬렌이 딸꾹질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티눈이 생긴 클레오파트라는!
배럿 파울러 씨네 집으로 들어선 앤은 현관에 깔린 곰 머리 깔개에 그만 발이 걸려버렸다. 그 통에 응접실 문을 거의 넘어질 듯 통과해 파울러 부인이 자랑하는 응접실 가구와 장식품을 요란하게 비틀비틀 지나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머리를 위로 하고 똑바로 앉기는 했다. 앤은 당황해서 크리스틴을 찾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길버트 블라이드의 아내가 꼭 술주정뱅이 같은 꼴로 들어서는 모습을 크리스틴이 다 보고 있었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길버트는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어느새 파울러 의사며 처음으로 만난 머레이 의사와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뉴브런즈윅에서 온 머레이 의사는 열대성 질병에 관한 유명한 논문을 써 의학계에 선풍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광을 비치며 크리스틴이 들어서자 그 논문도 금세 잊혀버렸다. 길버트는 누구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빛을 빛내며 일어섰다.
크리스틴은 곰 머리에 걸리거나 하지 않고 감회에 젖은 듯 잠시 문 앞에 멈추어 섰다. 크리스틴은 원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길버트에게 자기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가장자리가 금색으로 둘러진 자주색 벨벳 드레스에 긴 소매가 우아하게 펄럭이고 뒤쪽으로는 황금빛 레이스에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생긴 장식이 늘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검은 머리에는 황금색 리본을 둘렀고 목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반짝였다. 앤은 즉시 자기가 멋없고 촌스럽고 유행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이 촌스러운 에나멜 하트 목걸이나 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후회막급이었다.
크리스틴은 옛날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좀 지나치게 윤기가 나고 너무 꾸민 것 같은 느낌이 나면서 살도 많이 쪄 보였다. 코도 예전과 변함없이 길고, 턱도 중년 부인답게 살이 쪄 보였다. 문가에 그렇게 서 있을 때 보니 발도 상당히 컸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튀어 보이려는 저 태도는 팔리지 않아 쌓아놓은 물건 같은 꼴이었다. 뺨은 여전히 상아처럼 매끄럽고 크고 짙은 파란 눈은 레드먼드에서 꽤 매력적이라고 여겨지던 그때와 다름없이 빛났지만 이마에 평행선으로 주름살이 생겨 있었다. 그렇다. 앤드루 도슨 부인은 아주 미인임이 분명하고, 앤드루 도슨의 무덤에 마음을 모조리 묻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크리스틴은 방으로 들어선 순간 온 방 안을 점령해버렸다. 앤은 자기 존재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듯 느꼈다. 그러나 앤은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크리스틴에게 볼품없는 중년 여자로 보여서는 안 된다. 온 힘을 다해 전투에 돌입하리라. 앤의 잿빛 눈은 녹색으로 빛났고, 둥근 볼에는 희미하지만 혈색이 돌았다.
‘내게는 멋진 코가 있다.’
머레이 의사는 여태 앤에게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 순간 블라이드가 매력적인 아내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 곁에 서 있는 도도해 보이는 도슨 부인은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나, 길버트 블라이드, 여전히 멋지시네요. 옛날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니 정말 기뻐요.”
크리스틴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장난스럽게!
‘아직도 우아한 척 느릿한 말투는 여전하군. 난 저 말투를 들으면 속이 다 울렁거려.’
“크리스틴이야말로 시간을 멈추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군요.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는 비법이라도 있나요?”
길버트가 말했다.
크리스틴이 웃었다.
‘아휴, 저 금속성 웃음소리!’
“길버트는 예전부터 듣기 좋은 말을 너무 잘해요.”
크리스틴이 기교적으로 방 안의 모든 사람을 돌아보면서 덧붙였다. “블라이드 선생님은 선생님이 어제 같다고 말한 그 시절에 제가 연모하던 분이죠. 그리고 앤 셜리! 풍문으로 듣던 것처럼 그렇게 늙지는 않았군요.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알아보지야 못하겠지만 말예요. 머리 색깔은 전보다 좀 더 짙어진 것 같네요. 그렇죠? 이렇게 다시 만나니 너무 좋네요. 부인은 요통으로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거든요.”
“요통이라뇨?”
“아, 아니었어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보네요. 누가 블라이드 부인이 아주 심한 허리 통증을 앓고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파울러 부인이 사과했다.
“그건 로브리지의 파커 선생님 부인이죠. 전 요통 같은 건 앓아본 적이 없어요.”
앤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건 아주 몹쓸 병이거든요. 우리 숙모도 그 병으로 아주 힘들게 지내고 있어 내가 잘 알죠.”
크리스틴이 어딘지 약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꼭 앤을 자기 숙모뻘로 여긴다는 말투였다. 앤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꼼짝 못 하게 대꾸해줄 수 있는 말을 찾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멋지게 되받아쳐줄 말은 새벽 3시에나 떠오를까 지금으로서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일곱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크리스틴이 눈으로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섯만이 살아남았죠.”
앤은 여전히 조이스를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장난스러운 눈짓을 해보이며 말했다.

“대단한 가족이네요.”
크리스틴이 말했다.
가족이 많은 것이 무슨 불명예스럽고 바보스러운 일이나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크리스틴은 하나도 없다면서요.”
앤이 말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난 엄마 노릇이나 하면서 살 타입은 못 되거든요. 이 세상이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나까지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할까요? 난 여자가 할 수 있는 값진 일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뿐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좀 딱딱했다.
그런 다음 모두들 식당으로 갔다. 길버트는 크리스틴을, 머레이 의사는 파울러 부인을, 그리고 작은 키와 둥글둥글한 외모에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는 말도 걸지 않는 사람인 파울러 의사는 앤을 에스코트했다.
앤은 방이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파울러 부인이 향이라도 피웠는지 이상한 냄새까지 나 속이 울렁거렸다. 음식은 훌륭했지만 앤은 식욕이 나질 않아 먹는 시늉만 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으려니 자기가 꼭 체셔 고양이15)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앤은 끊임없이 길버트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 크리스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크리스틴은 치아도 아름다웠다. 너무 지나치리만큼 아름다웠다. 이야기하면서 곁들이는 손놀림도 아주 극적이었다. 손이 참 아름답기도 했다. 너무 크기는 했지만.
크리스틴은 길버트에게 생활의 율동적인 속도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지? 자기도 그 의미를 알기나 하면서 하는 말인가? 그런 다음 화제는 예수의 수난극으로 바뀌었다.
“오버라머가우에 가본 적 있어요?”
크리스틴이 앤에게 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가본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왜 묻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질문도 크리스틴이 물으면 어째서 이렇게 무례하게 들리지?
“하긴 늘 가족한테 매여 있어야 할 테니. 내가 지난달 킹스포트에 갔을 때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요? 앤의 친구예요. 그 못생긴 목사와 결혼한 친구요, 이름이 뭐였더라?”
크리스틴이 말했다.
“조너스 블레이크예요. 필리파 고든이 그 사람과 결혼했죠. 하지만 난 그 사람이 못생겼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요.”
앤이 대답했다.
“그래요? 다들 취향이 다르니까요. 어쨌거나 그 불쌍한 필리파를 만났어요.”
그 ‘불쌍한’이라는 말이 참 극적으로도 들렸다.
“왜 불쌍해요? 필리파랑 조너스는 무척 행복한걸요.”
앤이 물었다.
“행복하다니요! 그 사람들이 사는 곳을 보고는 그런 말 못 할걸요. 화젯거리라고는 돼지가 뜰로 들어와 소란이 일었다는 따위가 전부인 아주 작고 형편없는 어촌에 산다고요. 조너스라는 남자는 킹스포트에 훌륭한 교회를 두고서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어부들에게 가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했다나요. 나는 그런 광신자는 싫더라고요. 내가 ‘그런 교통도 불편하고 외진 곳에서 어떻게 살아요?’ 하고 물었더니 필리파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요?”
크리스틴은 감정을 가득 담아 반지를 몇 개나 낀 손을 펼쳐 보였다.
“내가 글렌 세인트 메리에게 하는 말이랑 같겠죠. 세상에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요.”
앤이 말했다.
“앤이 그런 곳에 만족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크리스틴은 미소 지었다.
‘으이그, 저 입속에 가득한 이 좀 봐, 무서워라.’
“더 폭넓은 생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정말 없어요? 내가 기억하기로 앤은 야심가였는데요? 레드먼드에 있을 때는 글도 좀 쓰고 그러지 않았나요? 물론 좀 환상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종류이기는 했지만…….”
“요정 나라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긴 썼죠. 아직도 그런 나라를 믿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많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요정 나라 소식을 듣고 싶어 해요.”
“아직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군요.”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지금은 살아 있는 ‘사도전(使徒傳)’을 쓰고 있죠.”
앤이 젬과 젬의 친구들을 생각하고 말했다.

크리스틴은 그 말뜻을 알 수 없어 눈만 크게 떴다. 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앤은 레드먼드에 있을 때부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곧잘 했다. 앤도 겉모습이야 놀라울 정도로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혼과 동시에 사고를 멈추어버린 아줌마 가운데 하나지 별 수 있겠어. 가여운 길버트! 앤은 레드먼드에 오기 전부터 이미 길버트를 붙들어놓았다. 길버트에게는 앤으로부터 달아날 기회가 조금도 없었다.
“지금도 필로피나16)놀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쌍둥이 아몬드를 쪼개면서 머레이 의사가 물었다. 크리스틴이 길버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리 둘이 필로피나를 했던 것 기억나요?”
크리스틴이 물었다.
‘둘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교환한 거 맞지?’
“내가 잊었다고 생각해요?”
길버트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그거 기억해요?”를 연발하며 추억의 홍수 속으로 뛰어들었고, 앤은 옆 선반 위에 걸린 물고기와 오렌지 그림만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앤은 길버트와 크리스틴이 그토록 많은 추억을 지니고 있으리라곤생각도 못 했다.
“우리 같이 암 섬으로 소풍 갔던 일 기억해요? 우리가 흑인들 교회에 갔던 저녁 일 기억해요? 가장무도회에 갔던 날 밤 기억나요? 크리스틴은 검은 벨벳 드레스에 레이스 베일을 하고 부채를 든 스페인 귀부인이 되었었지요.”

길버트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듯했지만 자신의 결혼기념일은 잊은 것이다!
모두 응접실로 돌아오자 크리스틴은 창문을 통해 거무스름한 미루나무 위로 희미한 은빛으로 빛나는 동녘 하늘을 내다보았다.
“길버트, 정원을 좀 걷지 않을래요? 다시 한 번 9월에 뜨는 달의 의미를 배우고 싶어요.”
‘9월에 뜨는 달에는 무슨 의미가 있고, 다른 달에 뜨는 달에는 아무런 뜻도 없나? 그리고 다시 한 번이라니, 크리스틴이 그것을 전에도 배웠단 말이야, 길버트랑?’
둘은 밖으로 나갔다. 앤은 자기가 보기 좋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앤은 뜰이 잘 내다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둘을 엿보려고 그 자리를 골랐다고는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크리스틴과 길버트가 오솔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야기는 주로 크리스틴이 하는 것 같았다. 길버트는 가슴이 벅차 이야기도 못 하는 거겠지. 길버트는 저 달빛 아래서 내가 전혀 모르는 추억으로 미소 짓고 있다. 앤은 길버트와 둘이 에이번리의 달빛 흐르는 뜰을 거닐었던 밤을 생각했다. 길버트는 그 모든 것을 잊었단 말인가?
크리스틴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얼굴을 들어 올리고 저 하얗고 아름다운 목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달이 떠오르는데 저렇게 오래 걸리나?
다른 손님들이 모두 모이자 두 사람도 거실로 들어왔다. 모두들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음악을 들었다. 크리스틴은 노래도 불렀다. 원래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크리스틴은 노래를 썩 잘 불렀다. 길버트를 바라보며 <기억 저편의 추억>을 노래했다. 길버트는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앉아 거의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길버트는 지금 기억 저편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크리스틴과 결혼했더라면 자기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려보고 있을까?
‘전에는 길버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았건만……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악악 소리를 질러버릴 것 같아. 다행히도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앤이 돌아갈 준비를 끝내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크리스틴은 길버트와 함께 현관에 서 있었다. 크리스틴이 손을 내밀어 길버트의 어깨에서 나뭇잎을 하나 집어 올렸다. 그 몸짓이 마치 애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길버트?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요. 너무 과로하지 마세요.”
앤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길버트는 피곤해 보였다. 곧 쓰러질 듯 지쳐 보였다. 그런데 자기는 크리스틴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 그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순간의 모욕감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도 길버트를 너무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길버트만 원망했다고.’
크리스틴이 앤에게 몸을 돌렸다.
“다시 만나서 정말로 반가웠어요, 앤. 꼭 옛날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네, 그러게요.”
앤이 말했다.
“길버트에게도 말했지만 길버트가 좀 피곤해 보이네요. 잘 좀 돌봐주어야겠어요. 앤도 알겠지만, 옛날에는 내가 앤의 남편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졌지요. 길버트는 정말로 멋진 연인이었어요. 하지만 내가 길버트를 뺏은 것은 아니니 날 용서해주어야 해요.”
앤은 또다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길버트도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앤은 레드먼드 시절부터 크리스틴도 모르지 않는 ‘여왕 같은 위엄’을 갖추어 대꾸해주고 파울러 의사의 마차에 올라타 역으로 향했다.
“어머, 무슨 그런 말을!”
크리스틴은 그 아름다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얼굴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있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15.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언제나 벙긋벙긋 웃는 고양이.
16. 씨가 둘 있는 과일을 두 사람이 나누어 먹고 다음에 만났을 때 먼저 ‘필로피나(Philopena)’라고 말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놀이.





41






길버트가 기차에 오르도록 앤의 손을 잡아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건성으로 물었다.
“오늘 밤 재미있었어?”
“그럼, 아주 좋은 시간이었지.”
앤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토머스 칼라일의 아내 제인 웰시 칼라일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 들어 있는 ‘고통 속에 저녁을 보냈네.’ 하는 심정이었다.
“머리는 왜 그런 식으로 했지?”
길버트가 여전히 무심히 물었다.
“새로 유행하는 스타일이야.”
“글쎄,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머리 모양이 이상한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아.”
“내 머리 색깔이 빨간색이라 무척 미안해.”
앤이 차갑게 대꾸했다.
길버트는 자칫 감정을 건드릴 이야기는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앤은 언제나 머리에는 좀 예민하게 굴었다. 어쨌거나 길버트도 너무 피곤해서 더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다. 길버트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앤의 눈에 길버트의 귀 위로 흰 머리가 언뜻 보였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도사렸다. 둘은 글렌 역에서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말없이 걸었다. 공기 중에는 가문비나무와 양치류에서 나는 향내가 가득 퍼져 있고, 이슬에 젖은 목장 위로는 달빛이 퍼져 있었다. 슬퍼 보이는 버려진 빈집을 지났다. 전에는 저 집도 불빛이 춤추었을 테지만 이제는 창문도 다 깨져버린 모양새가 ‘꼭 내 인생 같다.’고 앤은 생각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잔디밭을 걷는 두 사람 곁을 파드득거리며 날아가는 흰 나방의 희미한 모습이 빛바랜 사랑의 유령 같다고 앤은 슬프게 생각했다. 그러다 앤은 하마터면 크로케 후프에 발이 걸려 한 무더기의 협죽도17)속으로 곤두박질칠 뻔했다. 아이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 이런 데 두지? 내일 아이들을 단단히 일러두어야겠어! 길버트는 “어이구!” 하면서 한 손으로 앤을 붙잡았을 뿐이다. 크리스틴이 발을 헛디뎠더라도 길버트가 이렇듯 무심하게 반응했을까? 크리스틴과 둘이 달이 뜨니 지니 한 이야기는 다 뭘까?
두 사람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길버트는 서재로 들어가 버려서 앤은 말없이 방으로 올라갔다. 조용하고 차디찬 달빛이 방바닥에 깔려 있었다. 앤은 열린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밤이 자기 밤이라도 된다는 듯 카터 플래그네 개는 온 힘을 다해 길게 짖어댔다. 롬바르디 미루나무 잎사귀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 밤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서로 소곤대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은 너와 친구가 아니라는 듯 심술궂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앤은 피곤하고 춥고 공허했다. 인생의 황금기는 이제 마른 낙엽으로 변해버렸다. 더 이상은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멀기만 하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아래쪽에서는 바닷물이 기슭과 밀회를 나누고 있었다. 노먼 더글러스가 숲을 이루고 있던 자기 집 가문비나무들을 모조리 잘라버려서 앤의 다정한 ‘꿈의 집’이 보였다. 그 집에서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둘만 있으면 되었다. 함께 꿈꾸고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그저 행복했다! 길버트는 앤을 볼 때만 짓는 달콤한 미소로 앤을 바라보았고, ‘사랑해.’라는 말도 날마다 새로운 표현으로 했다. 둘은 슬픔과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이제 길버트는 앤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다. 남자란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앤은 길버트만은 예외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변해버린 삶에 어떻게 적응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게 하지 않으리라. 아무도. 그 누구에게서도 동정받는 것은 싫다.’
앤은 생각했다.
무슨 소리지?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한 번에 세 발짝씩, 길버트가 오래전 ‘꿈의 집’에서 하던 장난인데. 하지만 길버트는 벌써 오랫동안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길버트일 리 없다. 길버트다!
길버트가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조그만 꾸러미를 탁자 위에 던져놓고, 앤의 허리를 잡고 정신 나간 아이처럼 온 방 안을 빙글빙글 돌고 돌며 춤을 추었다. 그러다 숨이 찬 듯 은빛의 달빛 웅덩이에서 멈추었다.
“내가 옳았어, 앤. 천만다행으로 내가 옳았어! 개로우 부인이 괜찮을 거래. 전문의가 그렇게 말했어.”
“개로우 부인? 길버트, 머리가 돌기라도 한 거야?”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어? 분명 말했을 텐데. 아닌가? 너무 힘든 문제라서 꺼내놓기도 힘들었어. 지난 2주일 동안 그 일로 죽도록 걱정했어. 자나 깨나 그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개로우 부인은 로브리지에 사는데 파커의 환자야. 파커가 내게 의논을 해왔지. 나는 파커와 다른 진단을 내렸어. 우리는 싸우기까지 했지. 하지만 난 내가 옳다고 확신했어. 그 부인에게 희망이 있다고 고집했지. 그래서 몬트리올로 보낸 거야. 파커는 그 부인이 절대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어. 개로우 씨는 나를 당장 쏘아죽일 것처럼 굴었어. 개로우 부인이 떠난 뒤에 나도 걱정이 되었어. 내가 실수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사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을 고통만 당하게 한 것은 아닐까 몹시 걱정되었지. 그런데 진찰실에 가봤더니 편지가 와 있더군. 내가 옳았어. 그 부인은 수술을 받았고 회생할 가망성이 아주 높다고 해. 앤 아가씨, 난 달에라도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아. 20년은 젊어진 것 같다고.”
앤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웃어버렸다.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웃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 너무 좋았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린 거야?”
앤이 길버트를 윽박질렀다. 길버트는 앤의 허리를 놓아주고 탁자에 두었던 작은 상자를 집었다.
“난 잊지 않았어. 2주 전에 토론토로 이것을 주문했다고. 그런데 오늘 밤에야 도착한 거지. 오늘 아침 당신에게 줄 선물이 없으니 민망해서 말을 못 했지. 난 당신도 잊고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 아니, 잊고 있기를 바랐지. 그런데 아까 진찰실에 가보니 파커의 편지와 함께 이 선물이 놓여 있었어. 마음에 드는지 열어봐.”

그것은 조그만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다이아몬드가 달빛을 받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반짝였다.
“길버트, 난 그것도 모르고…….”
“한번 걸어봐. 오늘 아침에 도착했더라면 좋았을걸. 그 낡아빠진 에나멜 하트 대신 이걸 걸고 갔더라면 좋았잖아. 그래도 그 분홍색 하트가 하얀 당신 목의 오목한 부분에 앙증맞게 박혀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어. 그런데 왜 그 녹색 드레스를 입지 않았어, 앤? 난 그 드레스가 좋던데. 그 드레스를 입으면 레드먼드에서 입었던 그 장미 꽃봉오리 드레스가 생각나거든.”
‘길버트도 그 드레스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때 아름답다고 했던 레드먼드의 드레스를 기억하고 있었어.’
앤은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날고 있는 것이다. 길버트가 앤을 안았다. 앤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꼭 달빛 같았다.
“나 사랑해, 길버트? 내가 당신에게 습관 같은 존재는 아니야? 당신은 오랫동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내 사랑, 난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걸. 난 당신 없이는 못살아. 당신이 있어야 힘이 난다고. 성경에 당신에게 꼭 어울리는 구절이 있었지. ‘그 여인은 살아 있는 동안에 남편에게 선한 일만 행하고 악은 행치 않았다.’”18)
바로 아까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암울하고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졌던 삶이 다시 황금빛과 장밋빛을 띤 화려한 무지개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마루로 떨어졌으나 잠시 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자신감있고, 평화롭고, 더 기쁜 일이 많다. 웃을 일도 마음이 따뜻해질 일도 많다. 굳건한 사랑 때문에 안전한 느낌 말이다.
“오,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길버트.”
“우린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될 거야. 두 번째 신혼여행을 가게 될 거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 런던에서 대규모 의학학회 모임이 있거든. 거기 가자고. 이번 기회에 유럽 대륙도 좀 돌아보고. 우리에게는 휴가가 필요해. 다시 연인으로 돌아가는 거야. 다시 한 번 신혼여행을 떠나는 거야.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살았잖아. (길버트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당신은 너무 과로해서 지쳐 있어. 변화가 필요해. (당신도 그래, 길버트. 내가 정말 나빴어. 당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의사의 아내는 약도 얻어먹지 못한다는 말은 나한테 해당되지 않아. 둘 다 좀 쉬고 기력을 완전히 되찾아 돌아오자고. 그리고 우리의 유머감각도 되찾아야지. 자, 이제 목걸이를 걸어봐. 그리고 어서 자자. 난 지금 졸려 죽을 지경이야. 쌍둥이 일이며 개로우 부인의 걱정 때문에 몇 주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아까 크리스틴과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고 뜰에 그렇게 오래 있었어?”
앤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공작새처럼 거울 앞을 오가며 물었다. 길버트는 하품을 했다.
“글쎄, 모르겠어. 크리스틴이 재잘재잘 이야기가 많더군. 크리스틴에게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어. 벼룩은 제 키보다 2백 배나 높이 뛰어오를 수 있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어, 앤?”
‘둘이 겨우 벼룩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그렇게 질투로 고통스러웠단 말이야.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지?’
“어쩌다가 벼룩 이야기 같은 걸 시작했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도베르만 핀셔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나.”
“도베르만 핀셔? 도베르만 핀셔가 뭐야?”
“개인데, 새로운 종이래. 크리스틴은 개 전문가인가 봐. 난 개로우 부인 때문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크리스틴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듣지는 못했어. 이따금씩 열등의식이니 억압이니 하는 새로운 심리학 용어도 들리고. 예술 이야기, 취미, 정치, 그리고 개구리 이야기도 했어.”
“개구리라고!”
“위니펙의 연구가가 하는 무슨 실험이라고 해. 크리스틴이 원래부터 별로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제 보니 그전보다 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들더라고. 그리고 심술궂은 면도 있더군. 적어도 전에는 심술궂진 않았는데 말이야.”
“무슨 말을 했기에 심술궂다는 거야?”
앤은 순진한 척 물었다.
“눈치채지 못했어? 그래, 당신은 몰랐을 거야. 당신은 전혀 그런 종류와는 거리가 머니까. 그 웃는 모습도 좀 신경을 건드리더군. 게다가 살도 쪘고. 당신은 뚱뚱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앤 아가씨.”
“어머나, 그래도 크리스틴이 뚱뚱한 편은 아니야. 굉장한 미인이기도 하고.”
앤은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얼굴이 좀 삭았더라. 당신이랑 같은 나이인데 당신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였어.”
“그런데도 크리스틴에게 영원한 젊음이니 어쩌니 했단 말이야?”
길버트는 찔린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래도 말은 예의를 차려 해줘야 하잖아. 문명사회에서 위선이 없을 수는 없다고. 그래도 크리스틴이 아주 형편없이 나쁜 사람은 아니야. ‘요셉을 아는 종족’은 못 된다고 해도. 진실성을 잃어버린 것이 크리스틴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이건 뭐야?”
“당신에게 주는 우리 결혼기념일 선물. 난 1센트를 받아야겠어.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늘 밤에도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나는 크리스틴에게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길버트는 정말 놀란 듯했다. 앤이 누구에게 질투를 느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왜? 앤 아가씨에게도 질투심이 있는지 몰랐는걸.”
“그렇지 않아! 전에도 당신이 루비 길리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알고 질투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던 일이 있는걸.”
“내가 루비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난 잊어버렸어. 가여운 루비! 그렇다면 로이 가드너와의 일은? 앤이 나를 나무랄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로이 가드너? 얼마 전에 필리파가 로이를 보았다는 편지를 보내왔어. 로이 가드너는 완전히 뚱보가 되어버렸대, 길버트. 머레이 의사는 의학계의 저명한 인사지만 마른 꼬챙이 같고 파울러 의사는 도넛 같아. 그 사람들 옆에 있으면 당신이 얼마나 돋보이는지 알아? 당신은 너무 멋져.”
“오, 고마워, 고마워. 아내란 모름지기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해줘야지. 칭찬을 받았으니 나도 답례를 해야지. 당신도 오늘 밤 정말로 보기 좋았어. 그 드레스는 별로였지만 눈이 생기가 돌면서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아, 좋다. 당신과 함께 있는 침대만큼 편안한 것은 없지. 또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군. 옛날 주일 학교에서 배운 구절들이 잊히지도 않고 생각나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19),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잘 자.”
길버트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잠에 빠져버렸다. 너무나 지쳐버린 내 사랑 길버트! 어린아이가 태어날지도 모르지만 오늘 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길버트를 자게 내버려두리라. 전화벨이 울려대도 내버려두리라.
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기에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조용히 방 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정리하기도 하고 머리를 땋기도 하는 앤의 모습에 사랑이 넘쳐흘렀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복도를 가로질러 남자아이들 방으로 갔다. 월터와 젬은 자기들 침대에 들어가 있고 셜리도 아기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장난꾸러기 새끼고양이 시절도 다 지나버렸고 그야말로 이 가족의 습관처럼 되어 있는 슈림프는 셜리의 발 아래 웅크리고 잠들었다. 젬은 책을 읽다 잠이 들었는지 침대에 《짐 선장의 인생록》이 펼쳐져 있었다. 잠들어 있는 젬의 몸이 무척이나 커 보였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젬도 어른이 되어버릴 것이다. 젬은 너무나도 건장하고 믿음직한 소년이었다. 월터는 멋진 비밀이라도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잠들어 있었다. 창살 사이로 비쳐 들어온 달이 월터의 베개 위 벽에 걸린 십자가의 그림자를 던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앤은 이 일을 떠올리며 그 뚜렷하던 십자가 그림자가 불길한 쿠르셀레트의 전조는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프랑스 어딘가에 있는 십자가를 세운 무덤. 그러나 오늘 밤에는 그것도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셜리의 목에 난 발진은 깨끗이 사라졌다. 길버트 말이 맞았다. 길버트 말은 언제나 맞았다.
낸과 다이와 릴라는 그 옆방에 있었다. 다이는 그 앙증맞은 붉은 고수머리에 감싸인 뺨 밑에 햇볕에 그을린 조그만 손을 깔고 잠들어 있었다. 낸의 길고도 긴 부채 같은 속눈썹이 뺨에 닿을 것만 같았다. 파란 실핏줄이 보이는 눈꺼풀 속의 눈은 아빠를 닮아 갈색이다. 릴라는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앤이 릴라를 옆으로 뉘어주었지만 릴라는 눈도 뜨지 않았다.
아이들 모두 곧 자라버릴 것이다. 앞으로 몇 년만 있으면 청년이 되고 숙녀가 될 것이다. 야망과 기대를 품고 달콤하고 허무맹랑한 꿈을 꾸기도 하면서, 작은 배처럼 안전한 항구를 떠나 미지의 땅을 향해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평생 해야 할 자기 일을 찾아 떠나갈 것이고 여자아이들은 안개 같은 베일을 쓰고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잉글사이드’의 층계를 내려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앞으로 몇 해는 모두 내 것이다. 내가 사랑해주고 이끌어주어야 할 내 아이들이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불러주었던 노래를 불러주어야 할 내 아이고 길버트의 아이다. 앤은 아이들 방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 창가로 갔다. 모든 의심과 질투와 분노는 달과 함께 사라졌다. 앤은 지금 자신감 있고 즐겁고 행복했다.
“블라이드! 내 기분은 블라이드야.20)길버트가 회복되어간다는 말을 퍼시피크에게 들었던 그날 아침처럼 가슴 벅찬 기분이야.”
앤은 자기의 유치한 말장난에 웃음을 터트렸다.
창문 아래에는 아름다운 밤의 정원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었다. 달빛에 싸인 먼 언덕은 한 편의 시 같았다. 몇 달 후면 앤은 멀리 안개 낀 스코틀랜드 언덕에서 달빛을 보게 될 것이다. 멜로즈, 황폐한 케닐워스, 셰익스피어가 잠든 에이번 교회의 달빛도 보게 될 것이다. 아마 콜로세움의 달빛도, 아크로폴리스의 달빛도 보게 될 것이다. 무너진 제국으로 흐르는 서글픈 강가의 달빛을 볼 것이다.
추운 밤이었다. 곧 더 춥고 더 매서운 가을밤이 찾아올 것이고, 얼마 안 있어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릴 것이다. 겨울의 차가운 눈이, 거친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일을 걱정하랴? 축복이넘치는 방에서는 난롯불이 마술을 부릴 텐데.
며칠 전에도 길버트가 난로에 땔 사과나무 장작을 구해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사과나무 장작이 앞으로 다가올 잿빛 날들을 밝혀줄 것이다. 맑고 밝게 사랑이 타오르는데 진눈깨비가 날리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들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그리고 저 너머에선 봄이 손짓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길에는 소박한 삶의 갖가지 아름다움이 흩뿌려져 있다.
앤은 창문을 떠났다. 머리를 두 가닥으로 길게 땋고 흰 잠옷을 입은 모습은 ‘초록 지붕 집’ 시절의 앤, 레드먼드 시절의 앤, ‘꿈의 집’의 앤 그대로였다. 앤의 온몸과 마음이 빛나고 있었다. 열린 방문으로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좀처럼 코를 골지 않는 길버트가 지금은 분명 코를 골고 있었다. 앤은 생긋 웃었다. 크리스틴이 아이가 많다고 비웃던 말이 생각났다.
“가엾게 아이도 없는 크리스틴!”
앤도 조롱의 화살을 날려주었다.
“가족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앤은 벅찬 가슴으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17. 협죽도과의 상록 활엽 관목.
18. 잠언 31편 12절: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19. 시편 제4편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20. 자기 이름 블라이드(Blythe)와 ‘즐거운’, ‘쾌활한’, ‘기쁜’이라는 뜻의 블라이드(blithe)가 발음이 같아서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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