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5~6

나단비 | 2024.04.13 19:35:18 댓글: 0 조회: 4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854
5
메리 밴스의 출현






페이스가 수정처럼 맑은 공기와 푸른 언덕에 환호하며 외쳤다.
“오늘은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날이야.”
페이스는 지금 헤저키어 폴록의 묘석 위에서 너무나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온몸으로 춤추고 있었다. 한 발로 묘석 위를 폴짝폴짝 뛰면서 다른 쪽 팔다리를 허공에 내젓고 있는 모습을 때마침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두 노처녀가 보고는 둘 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아이가 바로 우리 목사님 딸이에요.”
노처녀 하나가 신음하듯 속삭였다.
“홀아비가 키우는 아이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다른 노처녀도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은 토요일 오전이었고, 메러디스 아이들은 모두 함께 이슬 젖은 세상으로 나섰다. 휴일이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블라이드네 낸이나 다이조차도 토요일 아침에는 집안일을 도왔지만, 목사관 딸들은 마음만 내킨다면 상쾌한 이른 아침부터 이슬을 밟으며 쏘다녀도 뭐랄 사람이 없었다. 페이스는 이런 생활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우나는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 줄 아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요리도 할 줄 알고 바느질이며 뜨개질도 할 줄 알지만 우나는 그런 일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제리가 숲 속 탐험을 해보자고 해 모두들 어슬렁어슬렁 전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는 도중에 이슬 젖은 풀숲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귀여운 개미들을 관찰하고 있던 칼도 만나 함께 갔다. 전나무 숲을 지나자 흰 유령 같은 민들레가 잔뜩 피어 있는 테일러 씨네 목장이 나왔다. 목장 한구석에는 곧 쓰러질 것 같은 낡은 헛간이 있었다. 테일러 씨가 쓰고 남은 건초를 보관하는 헛간이었고,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 않았다. 메러디스 아이들은 줄줄이 헛간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동안 아래층을 서성거렸다.
“저게 뭘까?”
우나가 속삭였다.
아이들은 모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위층 건초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 무슨 소리가 났다.
“뭔가 있어.”
페이스가 소곤거렸다.
“내가 올라가서 보고 올게.”
제리가 결연히 말했다.
“가지 마.”

우나가 제리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아니야, 가보겠어.”
“그럼 우리도 같이 가.”
페이스가 말했다.
네 명의 아이들 모두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올라갔다. 제리와 페이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우나는 무서워서 얼굴이 다 창백해졌다. 칼은 지붕에서 박쥐가 나오지나 않을까 기대했다. 칼은 밝은 대낮에 박쥐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사다리를 다 올라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이들은 놀라 잠시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건초 더미에 한 소녀가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웅크리고 있었다. 소녀는 메러디스 아이들을 보자 비틀비틀 일어섰다. 뒤의 거미줄투성이 창문으로 비쳐드는 밝은 햇빛 아래 소녀의 몰골이 드러났다. 햇볕에 그을린 마른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기다란 노란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몹시 이상했다. 눈이 하얀색이었다. 소녀는 그 흰 눈으로 목사관 아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공격적으로 쏘아보는 것도 같고, 동정을 바라는 눈빛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창백해서 파란 눈이 거의 하얀색으로 보인 데다 눈동자를 둘러싼 가는 검은 테두리에 대비되어 더욱 희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았고, 머리에도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격자무늬 옷도 색이 바랬고 넝마처럼 너덜너덜한 데다 몸보다 너무 짧고 꼭 끼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시들시들한 작은 얼굴만 보아서는 몇 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키로 미루어보건데 열두 살쯤은 되어 보였다.

“너는 누구냐?”
제리가 물었다.
소녀는 도망칠 곳이라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지만 곧 절망으로 몸을 떨며 포기해버렸다.
“나는 메리 밴스야.”
그 소녀가 대답했다.
“어디서 왔는데?”
제리가 계속 물었다.
메리는 대답 대신 무너지듯 건초 더미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페이스가 얼른 곁으로 다가앉아 떨고 있는 떠돌이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이 아이를 귀찮게 하지 마.”
페이스가 제리에게 말하고는 다시 떠돌이 아이를 안아주었다.
“자, 울지 말고 왜 그러는지만 얘기해줘. 우리는 친구야.”
“난 너무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어. 목요일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저기 시냇물을 조금 마셨을 뿐이야.”
목사관 아이들은 너무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페이스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자, 얼른 목사관으로 가자.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우선은 이 아이를 먹여야 해.”

메리가 몸을 움츠렸다.
“아, 안 돼. 너희 엄마 아빠가 뭐라고 할 거야. 나를 쫓아내 버릴 거라고.”
“우리는 엄마가 없어. 아빠는 네가 있거나 없거나 신경도 쓰지 않을 거고. 마사 이모할머니도 마찬가지야. 자, 어서 가자.”
페이스가 서두르자고 발을 굴렀다. 이 이상하게 생긴 아이를 바로 자기 집 코앞에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메리도 따라나섰다. 메리는 너무 약해서 사다리를 내려올 힘도 없었다. 아이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래로 내려와 들판을 지나고 목사관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사 이모할머니는 토요일 요리를 하느라 바빠서 메리가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했다.
페이스와 우나는 식품 창고를 뒤져 먹을 만한 것을 가져왔다. 디토 조금과 빵, 버터, 우유, 그리고 파이인지 뭔지 모를 것이었다. 메리 밴스는 지금 맛이 있고 없고를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음식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댔다. 목사관 아이들은 메리 주변으로 빙 둘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리는 메리가 예쁜 입과 매우 예쁘고 하얀 치아를 가졌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페이스는 저 넝마 같은 겉옷 안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우나는 메리가 오직 가엾은 마음뿐이었고 칼은 재미있는 듯 바라보았다. 모두 이 아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자, 이제 묘지로 나가서 네가 누구인지 다 이야기해줘.”
메리가 먹고 싶은 만큼 먹은 것을 보고 페이스가 말했다.

메리도 이제 그럴 마음이 생겼다. 음식 덕분에 천성적인 쾌활함을 되찾았고, 묶였던 혀도 풀렸으니까.
“내가 얘기하면 너희들 아빠한테나,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폴록의 묘석에 앉아 메리가 다짐했다. 목사관 아이들은 메리 맞은편에 일렬로 죽 늘어앉았다. 이제 감칠맛 나는 비밀 이야기와 모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려 한다.
“그래,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그래, 맹세해.”
“그럼 좋아. 난 도망쳤어. 난 항구 건넛마을의 와일리 부인네 집에 살았거든. 너희들 와일리 부인 알아?”
“아니.”
“그래, 그 부인 같은 사람은 알고 싶지도 않을 거야. 아주 악랄한 여자거든. 난 그 여자가 정말 싫어! 날 죽어라 일만 시키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거든. 거기다 매일같이 날 두들겨 팼어. 여기 좀 보라고.”
메리가 너덜너덜한 소매를 걷어 올리고 뼈밖에 남지 않은 맨살을 보여주었다. 온통 시퍼렇게 멍든 자국에 상처투성이였다. 목사관 아이들은 몸을 떨었다. 페이스는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고 우나의 파란 눈에는 동정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수요일 밤에도 몽둥이로 맞았어. 소가 우유 통을 걷어찬 것이 내 탓이래. 그 못돼 먹은 빌어먹을 소가 우유 통을 걷어찰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메리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메리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들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전율을 느꼈다. 자기들은 그렇게 점잖지 못한 말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을 들으니 짜릿짜릿했다. 그것도 여자아이가. 분명 이 메리 밴스라는 아이는 재미있는 피조물이었다.
“잘 도망쳐 나왔어.”
페이스가 말했다.
“아니, 난 그 여자가 날 두들겨 패서 도망친 게 아니야. 나한테는 맞는 것도 하루 일과 중 하나인걸. 맞는 건 이골이 났다고. 난 일주일 전부터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어. 와일리 부인이 자기 농장을 팔아버리고 로브리지로 이사 가기로 했거든. 날 샬럿타운에 사는 사촌한테 줘버릴 거랬어. 나도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고. 그 사촌이라는 여자는 와일리 부인보다도 훨씬 더 악랄해. 지난여름에 와일리 부인이 날 한 달 동안 그 사촌에게 빌려주는 바람에 거기 가서 살았는데 악마와는 살아도 그 여자랑은 못 살겠더라고.”
두 번째로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우나는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난 와일리 부인을 골탕 먹여주겠다고 결심했어. 난 봄에 존 크로퍼드 부인네 감자를 심어주고 받은 70센트를 갖고 있었거든. 와일리 부인은 그걸 몰라. 마침 그때 와일리 부인은 사촌 집에 가서 집을 비웠으니까. 몰래 여기 글렌까지 와서 기차표를 사고 샬럿타운으로 가서 일자리를 찾을 생각이었어. 난 힘이 아주 좋아. 내 몸에는 게으른 뼈 따위는 단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목요일 아침에 와일리 부인이 일어나기 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왔지. 글렌 마을까지 10킬로미터나 걸어왔어. 그런데 기차역에 도착해 보니 내 돈이 없는 거야. 돈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어. 어쨌건 돈은 없어져 버렸어.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더라고. 와일리 부인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가는 뼈도 못 추릴 만큼 얻어맞을 것이고. 그래서 그 낡은 헛간에 숨어들어가 있었던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제리가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돌아가서 매를 맞아야 한다면 맞아줄까 생각해. 이젠 배도 꽉 찼겠다, 견딜 수 있을 것 같거든.”
하지만 아무리 강한 척해보려 해도 메리의 눈에 서린 두려움은 숨길 수 없었다. 갑자기 우나가 앉아 있던 묘석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메리 곁으로 가더니 메리의 팔을 잡았다.
“돌아가면 안 돼. 우리 집에 같이 있어.”
“하지만 와일리 부인이 나를 찾아낼 거야. 벌써 나를 찾아다니고 있을걸. 그래도 붙잡히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도 되겠지, 뭐. 너희 식구들만 좋다고 하면 말이야. 정말이지 그 집을 뛰쳐나오다니 굉장히 바보짓이었어. 와일리 부인은 끝까지 날 찾아낼 거야.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살았어.”
메리가 말했다.
메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나는 4년 동안이나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어.”
메리가 덤비듯이 말했다.

“와일리 부인 집에서 4년이나 살았다고?”
“그래, 내가 여덟 살 때 호프타운 고아원에서 나를 데려왔단다.”
“그곳은 블라이드 부인이 살았던 곳이랑 같은 데야.”
페이스가 외쳤다.
“고아원에서는 2년 살았어. 내가 여섯 살에 고아원에 넣어졌으니까. 우리 엄마는 목을 매 자살했고 우리 아빠는 스스로 목을 찔렀지.”
“너무 끔찍해! 왜 그랬는데?”
제리가 말했다.
“술 때문이었지.”
메리는 간단히 대답했다.
“친척도 없었니?”
“어디 있기는 있을 텐데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 내 이름은 여섯 명의 친척 이름을 따서 메리 마사 루실러 무어 볼 밴스야. 다 외울 수 있겠니? 우리 할아버지는 아주 부자였어. 아마 너희 할아버지보다 훨씬 부자였을 거야. 하지만 우리 아빠가 그 재산을 다 술로 마셔 깨끗이 없애버렸고, 엄마도 거기에 한몫했대. 아빠도 엄마도 걸핏하면 나를 때리기만 했어. 정말이지 나는 너무 맞기만 하고 살아서 나중에는 매 맞는 것이 좋다는 착각까지 들더라고.”
메리가 머리를 획 젖혔다. 너무 맞고만 살았다고 하니까 목사관 아이들이 자기에게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메리는 남의 동정이나 받는 건 싫었다. 부러워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쾌활한 척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리의 이상한 눈에서 굶주림 때문에 멍함이 사라지고 빛이 났다. 이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병을 앓았어. 나처럼 병을 많이 앓고도 살아남은 애는 흔치 않을걸. 난 성홍열, 홍역, 볼거리, 백일해, 폐렴을 다 걸려봤단다.”
메리가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중에서 죽을 만큼 심한 것은 없었어?”
우나가 물었다.
“나도 잘 몰라.”
메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물론 없었겠지. 안 그랬으면 지금 죽었을 테니까.”
제리가 코웃음 쳤다.
“그래, 내가 정확하게 죽은 적은 없지. 하지만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적은 있어.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믿고 나를 내다 묻으려고 했는데 내가 벌떡 일어나 버렸대.”
메리가 말했다.
“거의 죽은 기분이 어땠어?”
제리가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아무 기분도 안 들었어. 난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폐렴에 걸렸을 때였는데 와일리 부인은 의사도 부르지 않았대. 일이나 하는 여자아이에게 쓸 돈은 없다면서. 크리스티나 매컬리스터 할머니가 나를 정성껏 간호해서 살려냈대. 하지만 가끔은 그때 죽어서 다 끝나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그럼 훨씬 나았을 거라고.”
“천국에 갔더라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페이스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천국 말고 갈 곳이 또 있단 말이니?”
메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지옥이 있지. 몰라?”
우나가 목소리를 낮추고 메리를 안으며 말했다.
“지옥? 그게 뭔데?”
“왜 있잖아, 악마가 사는 곳. 너도 악마 얘기는 들어봤지, 너도 아까 악마 얘기를 했잖아.”
제리가 말했다.
“아, 그래. 하지만 난 악마가 어디 사는지는 몰랐어. 악마는 우리들 주변을 맴돌고 다니는지 알았거든. 와일리 씨가 살아 있을 때는 가끔 지옥 이야기를 하긴 했어. 사람들에게 언제나 지옥으로나 가라고 소리쳤거든. 난 지옥이 와일리 씨가 살던 뉴브런즈윅 너머 어딘가 있나 보다 했어.”
“지옥은 끔찍한 곳이야. 나쁜 사람이 죽으면 불 속으로 떨어져서 영원히 불에 타는 곳이지.”
페이스가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 자연적으로 따르는 극적인 쾌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어?”

메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 다그쳤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메이워터에 살 때 주일 학교에서 이삭 크로더스 씨도 그런 말을 했어. 그 아저씨는 교회 장로님이고 교회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 모르는 것이 없어. 하지만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착하게 굴었으면 천국에 갈 테니까. 그렇지만 나쁜 짓을 했다면 넌 아마 지옥에 가야 할 거야.”
“난 아니야. 내가 아무리 나쁜 짓을 했더라도 난 절대로 불 속에서 타고 또 타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난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 내가 전에 모르고 뜨거운 부지깽이를 손으로 집어든 적이 있거든. 그런데 착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교회랑 주일 학교에 다녀야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하고, 매일 밤마다 기도도 올려야 하고, 선교일도 해야 해.”
우나가 말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이제 더는 없어?”
메리가 물었다.
“하느님께 네가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해야 해.”
“하지만 난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그나저나 죄가 뭔데?”
메리가 물었다.
“메리, 너도 분명 죄를 지은 적이 있어. 모두가 죄를 짓는다고. 넌 거짓말을 한 적 없니?”
“아주 많이 했지.”

메리가 말했다.
“그것은 엄청난 죄야.”
우나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가 때때로 거짓말 좀 했다고 지옥에 가야 한다는 거야? 왜 그래야 하지? 내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와일리 아저씨가 나를 뼈도 못 추리게 두들겨 팼을 텐데. 난 거짓말을 한 덕에 죽도록 두들겨 맞을 일을 면할 수 있었어, 이건 정말이야.”
메리가 우겼다.
우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우나는 잔인한 매질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런 일을 당해야 한다면 자기도 거짓말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나는 메리의 작고 굳은살이 박인 손을 꼭 쥐어주었다.
“넌 옷이 그거 하나밖에 없니?”
밝은 천성 탓에 불쾌한 주제에 관해 오래 버티지를 못하는 페이스가 물었다.
“난 일부러 낡은 옷을 입은 거야. 와일리 부인이 내게 옷을 사주긴 했지만 그 부인에게 신세를 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니까. 난 정직한 사람이야. 도망칠 생각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었어. 난 어른이 되면 파란색 실크 드레스를 입을 거야. 너희들 옷도 별로 멋지지는 않구나. 난 목사님 자식들은 모두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메리가 얼굴까지 붉히며 외쳤다.

메리도 성질이 만만치 않고 어떤 문제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하지만 메리에게는 뭔가 저항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그 매력이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날 오후 메리는 목사관 아이들을 따라 ‘무지개 골짜기’로 가서 블라이드 아이들을 만났다. 소개할 때는 그냥 항구 너머에 사는 친구인데 목사관을 방문했다고만 했다. 블라이드 아이들은 전혀 의심 없이 메리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런 이유는 아마 이제 메리 모습도 꽤 봐줄 만하게 변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점심을 먹은 후에 마사 이모할머니는 혼자 중얼거리고, 메러디스 목사는 반은 무의식 상태에서 일요일에 할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 틈을 타서 페이스가 메리에게 자기 옷을 입혀주었다. 겉옷뿐 아니라 다른 옷가지들도 몇 가지 입혔다. 머리도 단정하게 다시 땋고 보니 몰라보게 예뻐져 같이 놀 친구로 손색이 없었다. 메리는 재미있는 게임도 몇 가지나 알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알았다.
그러나 낸과 다이는 메리의 말씨만큼은 고개를 좀 갸웃했다. 엄마야 괜찮을지 몰라도 까다로운 수잔이 뭐라고 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목사관에 놀러 온 손님이니까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잘 시간이 되자 메리를 재울 방이 문제였다.
“메리를 손님방에 재울 수는 없어, 너도 알잖아.”
페이스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우나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아!”
메리가 기분이 상했다는 듯 말했다.
“어머! 그런 뜻이 아니야. 지금 손님방은 엉망이라서 그래. 쥐가 새털 이불을 갉아 구멍을 내놓고 그 속에 들어가 살아. 지난주에 샬럿타운에서 피셔 목사님이 오셔서 마사 이모할머니가 손님방에서 주무시도록 했거든. 그때까지도 우리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는데 피셔 목사님이 알아낸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침대를 양보하고 서재에 있는 긴 의자에서 주무실 수밖에 없었단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시간이 없어서 그 손님방 침대 이불을 아직 수선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거기선 아무도 잘 수 없어. 네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안 돼. 그리고 우리 방은 너무 작고, 침대도 작아서 함께 잘 수 없어.”
페이스가 변명했다.
“이불만 빌려주면 난 아까 그 헛간으로 돌아가서 자도 돼. 어젯밤에는 좀 춥긴 했지만 지금까지 더 나쁜 곳에서도 잤는걸, 뭐.”
메리가 모든 일을 다 초월이나 한 듯 말했다.
“오, 안 돼,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내게 생각이 있어, 페이스 언니. 다락방에 낡은 매트리스가 놓인 작은 접는 침대 있잖아. 지난번 목사님이 두고 가신 그 침대. 그 침대에 손님방 이불을 펴고 거기서 메리더러 자라고 하자. 다락방에서 자도 괜찮겠지, 메리? 우리 방 바로 위야.”
우나가 말했다.
“나는 아무 데서나 자도 괜찮아. 한 번도 잠자리다운 잠자리에서 자본 적도 없는걸, 뭐. 와일리 부인 집에서는 부엌 위 다락방에서 잤어. 여름철에 비가 오면 지붕이 새는 곳이었지. 겨울철이면 눈이 몰아쳐 들어오고. 침대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방바닥에다 볏짚을 깔고 잤어. 나는 잠자리 같고 불평 같은 것은 안 해.”
목사관 다락방은 천장이 낮고 긴 방으로 어두컴컴했으며 방 한끝에는 박공창이 나 있었다. 이 방에 메리의 침대가 만들어졌다. 침대에는 아름다운 수가 놓인 이불과 침대 시트를 깔았다. 옛날에 세실리아 메러디스가 손님방 이불로 쓰려고 만들어 아끼던 것으로 마사 이모할머니가 함부로 세탁을 해댔지만 용케도 견뎠다. 모두들 밤 인사를 마치자 목사관은 조용해졌다. 우나가 막 잠들려는데 바로 위에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벌떡 일어났다.
“페이스 언니, 들어봐. 메리가 울고 있어.”
우나가 속삭였으나 페이스는 이미 깊이 잠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우나는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하얀 잠옷을 입은 채로 복도를 지나 다락방 층계를 올라갔다. 다락방은 마루가 삐걱거려서 누가 들어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우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달빛으로 환한 방은 조용했고 접는 침대는 가운데가 혹처럼 올라와 있었다.
“메리!” 
우나가 속삭였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우나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이불을 당겼다.
“메리, 너 울고 있었지. 네 울음소리가 다 들렸어. 외로워서 그러니?”
메리가 갑자기 이불 밖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게 해줘, 추워.”
작은 다락방 창문은 열려 있어서 북쪽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에 몸을 떨며 우나가 말했다.
메리가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주자 우나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외롭지 않을 거야. 첫날밤부터 널 여기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닌데 그랬어.”
“난 외로워서 그런 게 아니야.”
메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왜 울고 있었는데?”
“응, 그냥 여기 혼자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났어. 와일리 부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도망친 대가로 또 두들겨 맞을 일도 생각나고, 그리고, 그리고, 거짓말을 했으니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도. 모두 걱정됐어.”
“오, 메리, 하느님은 네가 거짓말했다고 널 지옥에 보내지 않아. 넌 그것이 나쁜 일인지 몰랐잖아. 하느님은 절대 그런 일을 안 해. 하느님은 너무나 다정하고 좋은 분이거든. 물론 넌 이제 거짓말이 나쁜 건지 알았으니까 다시는 거짓말하면 안 돼.”
우나는 걱정이 되어 말했다.
“이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되고,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야? 넌 몰라. 넌 하나도 모른다고. 넌 집도 있고, 다정한 아빠도 있잖아. 아빠가 집에 있는 때도 별로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건 너희를 때리지는 않잖아. 배도 고프지 않고. 이모할머니가 요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긴 하지만. 난 오늘처럼 배부르게 뭘 먹어본 기억이 없어. 고아원에서 지냈던 2년을 빼놓고는 난 언제나 매만 맞고 살았어. 고아원에서는 매를 맞지는 않았지. 원장 할머니가 무서운 얼굴을 하긴 했지만. 세상에 와일리 부인같이 무서운 사람은 없어! 진짜야! 거기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메리가 흐느끼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가 돌아가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우리 함께 하느님께 와일리 부인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너도 기도문을 알지. 그렇지, 메리?”
“오, 그럼. 나도 잠자리에 들기 전마다 매일 밤 그걸 외우는걸. 하지만 난 특별히 뭔가를 부탁한 적은 없어. 이 세상 아무도 나를 위해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는데 하느님이라고 그러겠어. 하느님은 내 일보다는 네 일이나 신경 써주겠지. 넌 목사님 딸이니까.”
메리가 무심히 말했다
“아니야, 메리. 하느님은 네 일에도 무척 신경을 쓰고 계셔. 내가 잘 알아. 네가 누구 딸이건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냥 하느님께 부탁해. 나도 그럴게.”
우나가 말했다.
“좋아. 뭐 소용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로울 일도 없겠지. 하지만 네가 나만큼 와일리 부인을 잘 안다면 너도 하느님이 그 부인 일에는 간섭하려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어쨌거나 이제 그 일로 울고불고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는 어젯밤에 잤던 쥐가 돌아다니는 헛간보다는 백 배나 더 좋은 곳이야. 저기 포 윈즈의 불빛 좀 봐. 예쁘지 않니?”
메리가 말했다.
“포 윈즈의 불빛이 보이는 창문은 이 창문 하나뿐이야. 난 여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참 좋아.”
우나가 말했다.
“너도 그러니? 나도야. 와일리 부인 집의 부엌 다락방에서도 저 불빛이 보였어.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 었지. 매를 맞아서 온몸이 아플 때도 저 불빛을 보면서 아픈 것을 잊어버렸어. 나는 배들이 항구에서 멀리멀리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 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배를 타고 모든 것에서 떨어져 멀리멀리 떠나고만 싶었지. 겨울밤에는 항구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았어. 그럼 정말 외로웠단다. 그런데 우나야, 난 그저 하찮은 낯선 아이일 뿐인데 왜 너희 식구들은 모두 나한테 친절하게 해주는 거야?”
“그냥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 성경에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쓰여 있어.”
“정말 그러니?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그런 건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던데. 전에 나한테 친절하게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우나야, 저 벽의 그림자 예쁘지 않니? 꼭 새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우나야, 난 너희들 모두도 좋고, 그 블라이드 남자아이들과 다이도 좋아. 하지만 낸은 별로야. 낸은 너무 잘난 체하거든.”
“오, 아니야, 메리. 낸은 조금도 잘난 체하지 않아. 조금도.”
우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야. 낸처럼 머리를 쳐들고 다니는 애들은 모두 잘난 체하는 거야. 난 그런 애를 좋아하지 않아.”
“우리는 모두 낸을 좋아하는걸.”
“너는 그 애가 나보다 좋은 모양이지? 정말 그래?”
메리는 질투가 나서 말했다.
“어머나, 메리. 난 낸을 몇 주 전부터 알았고 넌 이제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잖아.”
우나가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넌 낸을 나보다 더 좋아한다는 말이지? 좋아! 그 애가 좋다면 좋아해.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메리는 더욱 화가 나서 말했다.
메리는 벽 쪽으로 몸을 획 돌려버렸다.
“오, 메리. 그렇게 말하지 마. 난 너를 아주 좋아해. 네가 그러면 난 속상해.”
우나가 메리의 고집스러운 등을 안으며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이제 우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방 메리가 몸을 꿈틀거리며 우나를 덥석 안았다.
“쉬, 내가 한 말 갖고 울지 마.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난 악마처럼 못됐어. 나 같은 애는 산 채로 껍데기를 벗겨버려야 해.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해도 돼. 나는 매를 맞아도 싸다고. 이제 그만 울어. 네가 당장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잠옷 바람으로 저 바다로 가서 풍덩 빠져버릴 거야.”
이 끔찍한 위협에 우나는 얼른 울음을 삼켰다. 눈물은 메리가 손님방 베개에 달린 레이스 프릴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용서한 아이와 용서받은 아이는 서로를 꼭 안아주어 평화를 회복했다. 둘은 같이 벽에 비친 그림자와 달빛 받은 덩굴 식물 잎사귀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아래층 서재에서는 존 메러디스 목사가 내일 설교 시간에 전할 말을 생각하느라 흥분된 얼굴과 빛나는 눈으로 마루를 거닐고 있었다. 그는 자기 집 지붕 아래 무관심 속에 버려진 가여운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은 몰랐다. 그 작고 연약한 몸으로는 커다랗고 무정한 세상과 맞서 싸우기가 너무 무서워 떨고 있는 아이가 바로 자기 집에 있는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6
메리가 목사관에 머물다






다음 날 목사관 아이들은 메리 밴스를 교회에 데려갔다.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항구 건넛마을에서는 교회에 안 다녔니?”
우나가 물었다.
“당연히 다녔지. 와일리 부인은 힘들게 교회 같은 데 다니느라 애쓰지 않았지만 난 갈 수만 있으면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어. 잠시라도 앉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기꺼이 갔거든. 하지만 이렇게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는 교회에 갈 수 없어.”
그 문제는 페이스가 자기 옷 중 두 번째로 좋은 옷을 빌려주기로 해서 해결되었다.
“색깔이 좀 바래고 단추도 두 개나 떨어졌지만, 내 생각에는 이 옷이면 될 것 같아.”
“단추는 내가 당장 달게.”
메리가 말했다.

“일요일에는 안 돼.”
우나가 놀라 말했다.
“안 되긴. 좋은 날에 좋은 일을 하면 더욱 좋은 거지. 바늘과 실을 가져와.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달 테니까.”
메리는 페이스가 학교 갈 때 신는 구두와 옛날에 세실리아 메러디스가 썼던 헌 검정 벨벳 모자로 완벽하게 복장을 갖춘 다음 교회에 갔다. 교회에서는 행동도 조심스럽게 했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일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목사관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저 초라한 소녀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했다. 겉보기에는 설교도 아주 예의 바르게 들었고 찬송가도 열심히 따라 불렀다. 찬송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우렁차면서도 낭랑했으며 음절도 틀리지 않았다.
“주의 보혈로 제비꽃을 깨끗하게 하시네.”6)
메리는 즐겁게 노래 불렀다.
목사님 가족석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지미 밀그레이브 부인이 갑자기 몸을 획 돌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메리를 훑어보았다. 메리가 밀그레이브 부인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메리는 그저 순전히 장난기가 발동해 한 행동이었지만 우나는 몸을 떨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 버렸어. 그 부인은 왜 나를 그렇게 노려봐? 예의가 없는 거라고. 혀를 내밀어주길 잘했지. 혀를 더 길게 내밀어줄 걸 그랬어. 그런데 교회에서 항구 너머에 사는 로브 매컬리스터를 봤는데 와일리 부인에게 일러바치지 않을까?”
교회에서 돌아온 뒤 메리가 말했다.
하지만 와일리 부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며칠이 지나자아이들은 그 부인 일은 잊어버렸다. 메리는 목사관에 자리를 잡은 듯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는 것만은 싫다고 했다.
페이스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재촉하자, 메리는 말했다.
“싫어. 난 학교는 이미 종쳤어. 와일리 부인네 집에 온 뒤로 4년이나 학교에 다녔다고. 난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다 배웠어. 숙제를 해오지 않는다고 날 달달 볶는 학교는 이젠 지긋지긋해. 난 숙제할 시간 같은 것도 없었는데 말이야.”
“우리 선생님은 널 달달 볶지 않을 거야. 아주 좋은 분이시거든.”
페이스가 말했다.
“어쨌든 난 가지 않을 거야. 난 읽고 쓸 줄도 알고 분수 문제도 풀 줄 알아. 그거면 됐어. 너희들이나 다녀와. 난 집에 있을게. 내가 뭘 훔쳐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난 아주 정직한 사람이니까.”
메리는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간 동안 목사관을 청소했다. 단 며칠 만에 목사관은 완전히 딴 집처럼 바뀌었다. 바닥을 깨끗이 쓸고 가구는 먼지 하나 없이 닦았으며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놓였다. 메리는 쥐가 갉아먹은 손님방 이불도 기웠고, 떨어진 단추도 다 달아놓았으며, 구멍이 난 옷은 단정하게 헝겊을 대어 기워놨다.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서재까지 침입해 들어가 메러디스 씨더러 청소하는 동안 나가 있어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 곳만은 마사 이모할머니가 기어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반은 귀가 먹고 눈도 멀었지만 부엌만큼은 자기 손에서 내놓으려 들지 않았다. 메리가 아무리 간계와 술책을 써 봐도 어림없었다.
“마사 할머니가 내게 요리만 하게 해준다면 너희들에게 음식다운 음식을 해먹일 수 있을 텐데. 더 이상은 ‘디토’니 덩어리진 죽이니 푸르뎅뎅한 우유는 먹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도대체 마사 할머니는 크림으로 뭘 하는 거야?”
메리는 화가 나서 목사관 아이들에게 말했다.
“고양이에게 주는 거야. 저 고양이는 할머니 거거든.”
페이스가 말했다.
“저 할망구도 고양이에게나 줘버렸으면 좋겠다. 고양이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거야. 고양이는 악마라고.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하여간에 마사 할머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좋은 음식을 못 쓰게 만드는 걸 보면 정말 화가 치밀어.”
메리가 쓰디쓰게 내뱉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언제나 ‘무지개 골짜기’로 갔다. 메리는 묘지에서 노는 것은 싫다고 했다. 귀신이 무서워서라고 했다.
“귀신 같은 건 없어.”
젬 블라이드가 말했다.
“정말 없을까?”
“넌 귀신 본 적 있어?”
“백 번도 더 봤어.”
메리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어떻게 생겼는데?”

칼이 물었다.
“무시무시하게 생겼지. 흰 옷을 입고 손이랑 머리는 뼈밖에 없어.”
메리가 말했다.
“귀신을 만나서 어떻게 했어?”
우나가 물었다.
“막 도망쳤지.”
메리가 말한 다음 월터의 눈을 보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메리는 월터가 좀 어렵고 무서웠다. 목사관 여자아이들에게 월터의 눈을 보면 몸이 오싹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난 월터의 눈만 보면 내가 한 거짓말이 생각나.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니까.”
메리는 말했다.
메리는 젬을 제일 좋아했다. 젬이 메리를 ‘잉글사이드’의 지붕 밑 방으로 데려가 짐 보이드 선장이 자기에게 물려준 신기한 골동품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칼도 풍뎅이와 개미로 메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메리가 여자아이들보다는 남자아이들과 더 잘 지낸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메리는 낸 블라이드를 만난 두 번째 날에 낸과 심하게 다퉜다.
“너희 엄마는 마녀야. 빨간 머리 여자는 다 마녀라고.”
메리가 낸에게 아주 조소 섞인 어조로 외쳤다. 그리고 페이스와도 수탉 문제로 다퉜다. 메리가 수탉의 꼬리가 너무 짧다고 말한 것이다. 페이스는 화가 나서 하느님이 수탉 꼬리가 어느 정도여야 되는지 정도는 잘 알아서 만들었을 거라고 반격했다. 둘은 이 문제로 하루 동안이나 말하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메리는 우나의 머리카락도 없고 눈도 하나밖에 없는 인형은 너그럽게 대했다. 그렇지만 우나의 다른 보물인 천사가 아기를 들고 천국으로 가는 그림을 보여주자 그 천사가 꼭 귀신 같다고 말했다. 우나는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가 울음을 터트렸지만 메리가 얼른 쫓아와 잘못했다고 사과하며 우나를 안아주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메리와 길게 싸움을 벌이지는 못했다. 삐치기를 좀 잘하는 편이고 자기 엄마를 모욕하면 절대로 용서하려고 들지 않는 낸도 마찬가지였다.
메리는 재미있는 아이였다. 으스스한 귀신 이야기를 참 잘했다. 메리가 온 후로 ‘무지개 골짜기’에서의 놀이는 더욱더 재미있어졌다. 메리는 구금 부는 법도 배워 제리보다 더 잘 불게 되었다.
“난 내가 하려고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어.”
메리는 기회만 있으면 자랑했다. 베일리네 빈집 정원에 자라는 쇠뜨기의 두꺼운 이파리를 뜯어 주머니 만드는 방법도 알려주었고, 묘지 돌담 구석에 난 시큼한 풀을 입에 넣고 빨면 맛있는 단물이 나온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메리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벽에 갖가지 현란한 그림자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모두들 송진을 따러 나가면 누구보다도 큰 송진을 따서는 자랑했다. 가끔씩은 아이들이 메리를 미워하는 때도 있었고, 좋아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메리와 놀면 언제고 재미있었다. 아이들은 메리가 대장 노릇을 하려 들어도 순하게 따랐고, 메리가 온 지 2주 정도가 지나서는 아주 옛날부터 같이 놀던 친구처럼 느끼게 되었다.
“와일리 부인이 왜 나를 잡으러 오지 않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메리가 말했다.
“널 잊어버린 모양이지. 그럼 넌 여기 살아도 되잖아.”
우나가 말했다.
“이 집은 마사 할머니와 나까지 살기에는 너무 좁아. 먹을 것이 충분한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난 매일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어떤 기분일까 상상했어. 그렇긴 해도 난 요리에 좀 까다로워. 또 와일리 부인이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고. 나를 죽도록 때려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을 거야. 낮에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지만 밤에 저 다락방에 누워 있으면 그 생각을 하고 또 하게 돼. 이렇게 걱정만 하면서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서 와서 날 잡아가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한 번 죽도록 얻어맞고 마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상상으로 얻어맞는 것보다 나을지도 몰라. 난 그 집에서 도망친 뒤로 내내 얻어맞을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매 맞아본 일 있니?”
“물론 없지. 우리 아버지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야.”
페이스는 맹렬히 부정했다.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몰라. 너희들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고. 블라이드 아이들도 맞아본 일이 없겠지?”
메리의 말에는 한숨과 자랑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없을 거야. 뭐, 잘못을 저질렀을 땐 볼기야 맞아봤겠지.”

“볼기짝을 맞는 일이야 맞는 것도 아니지. 내가 우리 부모에게 볼기짝을 얻어맞았다면 난 그걸 쓰다듬어주었다고 말할 거야.”
메리가 경멸적으로 말했다
“정말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나도 내 몫만큼만 얻어맞는다면 상관없어. 제기랄, 난 너무 많이 얻어맞았다고.”
“메리, 그런 말은 안 돼. 넌 그런 나쁜 말은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우나가 책망했다.
“웃기지 마. 난 더 심한 말도 많이 할 수 있어. 겨우 ‘제기랄’이란 말로 그렇게 야단 떨 것 없다고. 그리고 내가 여기 온 후로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메리가 대꾸했다.
“그럼 네가 직접 유령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뭐야?”
페이스가 물었다.
메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달라.”
메리는 덤빌 듯 응수했다.
“난 너희들이 내 말을 정말로 믿지 않을 걸 다 알고 있었고, 정말이라고 생각하길 바라지도 않았어. 그리고 항구 건너편 묘지를 지나다가 정말로 이상한 것을 본 일도 있어. 그것이 유령이었는지 아니면 샌디 크로퍼드씨네 늙은 흰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이상하고 기분 나쁘게 생겼더라고. 난 그걸 보고 죽어라고 도망쳤어.”

6. 죄(vice)와 제비꽃(violet)을 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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